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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습근평(習近平)과 진시황

▲ 김규종 경북대 인문대학 노문학과 교수지난 11일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주석과 부주석의 중임제한 철폐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이 찬성 2천958, 반대 2, 기권 3, 무효 1표로 통과됐다. 1978년 이래 개혁과 개방의 길을 걸어온 중국은 1인 통치의 위험성을 직시하고 1982년 헌법 개정에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책을 제외한 모든 직책의 중임제한을 명문화했다. 모택동의 개인우상화와 문화혁명이 가져온 궤멸적인 타격을 우려하여 집단지도체제와 국가주석의 임기제한을 못박아온 셈이다.1958년부터 1960년까지 지속된 대약진운동 기간에 중국에서는 수천만이 아사(餓死)하는 참극이 발생한다. 제2차 5개년계획을 수립하면서 모택동은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 강령을 채택하여 중국 전역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세계경제대국 2위인 영국을 15년 안에 추월하겠다는 야심찬 기획으로 시작된 대약진운동. 하지만 중공업 우선정책과 거대수력 및 관개사업은 농업생산성과 생산량 하락을 야기하여 주민들의 대기근으로 이어진 것이다.모택동은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실각의 위기에 몰리자 1966년 이른바 `문화혁명` 구호를 내걸고 최고권력 장악과 대대적인 숙청을 시작한다. 우리는 10년 동안 진행된 문화혁명이 얼마나 오랜 세월, 얼마나 뿌리 깊이 중국 인민들의 삶과 영혼에 깊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는지 알고 있다. 1976년 모택동 사망이후 이른바 4인방 척결과 개혁-개방으로 중국은 당시까지와 전혀 다른 노선을 지향하게 된다. 그것이 1982년 헌법 개정으로 이어진 것이다.이번에 습근평의 개헌을 보면서 진시황과 10월 유신의 박정희가 떠오른 것은 나만의 소회일까! 장장 550년이나 이어진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딛고 기원전 221년 진시황은 중국최초의 통일왕조를 개창한다. 그가 통일대업에서 활용한 방책은 법가(法家)였다. 제자백가 백가쟁명 시기에 후진국 진나라를 부국강병의 길로 인도했던 상군(商君)의 법가책략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것이었다. 거기서 비롯한 것이 `분서갱유`로 대표되는 사상과 철학의 억압과 숙정이다.의약, 점복 (占卜), 농업을 제외한 서책을 불살라버리고, 황제를 비판하는 유생(儒生)들은 산 채로 묻어버린 것이다. 중국 최초의 제국을 수립하고 도량형과 문자생활을 통일한 시황의 업적은 작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취한 극단적인 1인 통치와 무자비한 숙청은 진나라의 단명(短命)을 예비했다고 생각된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정치적인 반대파를 수용하지 못하는 협량(狹量)으로 대륙을 통치한다는 것은 어려운 노릇 아닌가.거의 100퍼센트에 육박하는 찬성률에서 나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을 뽑았던 박정희를 떠올린다. 문맹이거나 대단히 소극적인 저항자 한둘 정도의 예외만을 인정했던 지독한 독재자 박정희가 습근평과 겹쳐진 것이다. 이번에 통과된 헌법에는 `국가감찰위원회` 설치안이 들어있다. 중국주석과 공산당에 반대하는 자는 누구든 감찰과 사찰, 구금과 투옥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형국에 이른 것이다.절대적인 권력의 절대적인 부패는 필연의 결과다. 독선과 아집은 종당에 그것을 주창하고 실행한 개인과 집단의 돌이킬 수 없는 파멸로 귀착된다. 그것을 입증하는 것이 역사다. 전지(剪枝)가위를 들고 정원을 맴돌다보면 함부로 나뭇가지를 자르기 십상이다. 찬찬히 살피고 재삼재사 숙고하여 어디를 얼마나 자를 것인지 재단하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가위질을 하기 쉽다는 얘기다. 독재는 문자 그대로 홀로 가위질을 해댄다는 의미다. 두려운 노릇이다.2050년 세계최강을 꿈꾸는 중국몽의 선구자 습근평의 앞날이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는다. 14억 인구대국 중국을 통치하는 것은 노자 말처럼 `생선을 뒤집듯 조심스럽고 또 조심스러워야` 하기 때문이다. 최고 권력자 1인의 손에 너무 많은 살상도구가 주어진다는 것은 예기치 못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습근평이 진시황의 불행한 전철(前轍)을 밟지 않기를 기대한다.

2018-03-16

남북대화와 아베총리

▲ 김규종 경북대 인문대학 노문학과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대통령 특사일행이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오는 4월 말경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것이라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두 손을 맞잡는다는 이야기다.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분단이후 남한 땅을 밟게 되는 첫 번째 사례가 될 것이라는 보도도 나온다. 북한이 평창 동계올림픽에 선수단을 파견한 이후 남북관계에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기다리던 좋은 징조(徵兆)다. 지난 연말 북한의 김정은과 미국의 트럼프 사이에 오갔던 가시 돋친 설전(舌戰)이 생각난다. 일촉즉발의 전운(戰雲)이 시커멓게 뒤덮였던 한반도에 대화와 소통, 평화의 전조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북한이 유지해왔던 `통미봉남(通美封南)`이라는 전통적인 외교전술이 근본적으로 뒤바뀌고 있는 듯하다. 남한을 고립시키면서 미국과 교통하려는 그들의 저의는 지난 세월 온전히 작동하지 못했다. 외려 북한의 대내외적인 고립양상이 심화한 형국이었다.돌이켜보면 1990년 한국과 러시아, 1992년 한국과 중국의 수교는 우리나라의 경제와 외교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미국과 일본, 유럽 일변도로 이루어지던 대외수출의 다변화와 함께 변화된 세계정세의 일익(一翼)을 우리가 담당할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이른바 `북방정책`으로 일컬어지는 한러-한중수교는 한반도 남단(南端)에 머물러있던 한국인의 좁은 시야를 일거(一擧)에 유라시아 전역으로 확장시키는 일대 전환점으로 작용하기 시작한다.하지만 북한은 우리가 누렸던 정치적-경제적-외교적 이익을 하나도 얻지 못했다. 북한과 중국, 러시아로 이어지는 외교관계에 우리가 무리 없이 안착(安着)한 반면, 북한은 한국과 일본, 미국으로 이어지는 동맹관계에 끼어들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북방정책으로 러시아와 중국과 교통한 정도로 만일 북한이 일본과 미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까, 생각해본다. 수백만 인민이 아사(餓死)했다는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같은 것은 없지 않았을까?!흥미로운 점은 남과 북의 화해와 대화 분위기가 무르익어가자 아베총리를 비롯한 일본조야(日本朝野)가 불편함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제적인 대북압박과 통제로 북한의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실현하겠다는 아베 총리의 복안에는 북한을 빌미로 한 군사대국화의 야심이 숨어있다. 북한이 지속적인 핵실험이나 도발을 꾀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조처로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 일본을 탈바꿈하겠다는 것이 아베의 원대한 숙원(宿願)이었다.일본은 일찍부터 한반도와 대륙을 향한 야망을 불태운 집념의 나라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가 멸망한 이후 일본은 661년부터 663년 8월까지 약 5만에 이르는 정병(精兵)을 백제에 파견한다. 일본이 백제 부흥군을 도와 금강하구 부근에서 당나라 군대와 벌인 접전을 `백강전투`라 부른다.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패배한 일본은 1592년 임진왜란으로 다시 한 번 한반도를 향한 야욕(野慾)의 불길을 당긴다. 7년의 전란이 가져온 폐해는 그야말로 막심했다.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시작으로 청일전쟁과 을미사변, 을사조약과 경술국치를 거치면서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그들이 식민지배(植民支配)를 일삼던 동안 한반도에서 자행(恣行)한 만행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2차 대전의 패망 이후에도 일본은 호시탐탐 한반도의 명운(命運)에 개입하려는 의지를 숨기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도 독도와 위안부 문제로 일본과 대치하고 있다.아베와 일본정부가 한국과 북한의 화해와 대화에 찬물을 끼얹고 헤살 놓으려는 데에는 자국의 외교적 목표와 국가주의 전략이 내재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남의 잔칫상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일본과 아베의 야욕을 분쇄하고 한반도 평화를 굳게 다져나갈 때다.

2018-03-09

붕괴(崩壞)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얼마 전에 친구가 눈 덮인 두툼한 얼음장 사이로 시냇물이 흘러가는 14초짜리 동영상을 보내왔다. 동장군(冬將軍)의 기세가 물러나고 봄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시각기호로 전달한 게다. 몹시 추웠던 지난겨울의 위세도 자연의 운항법칙에 따른 순차성에 물러나고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산야(山野) 곳곳에서 얼음장이 깨지고, 그 아래로 맑은 물이 콸콸 소리 내며 흐르고 있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봄은 그렇게 굉음(轟音)과 더불어 온다.나라 곳곳에서 얼음장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한반도 시공간을 옥죄고 있던 시대의 거악들이 무너지는 소리가 대단하다. 국정농단의 주범들에게 중형이 선고되고, 하수인들도 줄지어 징역형에 처해지고 있다. 지난 세기 60,70년대의 마지막 잔재가 무너져 내린다. 그들과 동고동락(同苦同)했던 정치 모리배들이 여전히 행악질을 거듭하고 있지만, 그 또한 시간문제일 따름이다. 낡은 것은 새로운 것을 이겨낼 수 없다. 그래서 신상(新商)이 비싼 법이다.80,90년대부터 자리 잡은 크고 작은 우상(偶像)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처절하게 붕괴하고 있다. 87항쟁의 결과 우리가 누려왔던 87체제 30년의 의도하지 않았던 눅눅한 자리가 누추하고 언짢은 모습으로 민낯을 드러낸다. 적잖게 나이 먹은 나 역시 그런 추악함과 어리석음과 역겨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절감하는 붕괴의 시간대가 천천히 흐르고 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누군가 견디기 어려운 참담한 고통을 겪었다면 용서를 구하고 고개 숙여야 한다.돌이켜보면 해방공간 이후 정부수립과 한국동란, 4·19 혁명과 5·16 군사반란, 5·18 광주항쟁과 87년 6월 항쟁을 거치면서도 우리는 68혁명 같은 근본적인 사회혁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2016~2017년 촛불혁명을 경험하면서 70년 누적된 `적폐`를 쓸어내기 시작한다. 두 세대가 넘는 장구한 세월 축적된 패악(悖惡)과 오욕(汚辱)의 더껑이들은 몹시 두텁고 검질기며 전방위적으로 한국사회를 짓눌러왔다. 그래서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우리를 짓눌러왔던 무법, 불법, 초법, 탈법, 위법적인 행악질의 본산인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문화권력이 붕괴하는 소리가 들리는 봄의 초입이다. 모든 붕괴하는 것에는 시대의 잔영이 남아있기 마련. 그것은 광포한 국가주의 내지 극우 이데올로기의 모습을 취하기도 하고, 사법권력의 비호를 받아 명맥을 유지하는 재벌총수의 아들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 마침내는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살찌우는 문학과 예술의 `프랑켄슈타인`으로도 현현(顯現)한다. 하지만 붕괴에는 건설의 강고한 에너지가 동시에 잠재해있다. 무엇인가 견고하고 강력하며 끈질긴 세력과 집단이 무너져 내린다면, 혹은 그것을 무너뜨린다면 그것을 대체할 청신(淸新)하고 청량한 신진세력이 반드시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낡은 것들의 퇴장과 붕괴가 없다면 새로운 것들의 등장과 건설 또한 불가능하다. 그래서다. 우리가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과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주장하는 까닭은 거기 있다.견디기 어려운 매서운 추위와 한파를 동반하는 겨울이 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따뜻하고 온유(溫柔)한 봄을 맞을 수 없다. 사계절의 순항법칙은 그렇게 우리를 가르쳐왔다. 춘하추동이 되풀이되면서 우리에게 생로병사와 흥망성쇠를 일깨우는 것이다. 우리는 이가 딱딱 맞부딪치는 한겨울의 맹추위 속에서 매화와 산수유의 개화를 내다보지 못한다. 지금과 여기에 함몰되어 버린다. 굳게 얼어붙은 얼음장 아래로 청수(淸水)가 흐르고 있음을 망각한다.세상의 모든 것이 와장창 소리 내며 깨지고 부서지고 무너지고 있다. 낡고 허망하며 어처구니없고 시대착오적인 것들이 하나처럼 붕괴하고 있다. 나의 죄악과 허물도 무너지는 것들과 더불어 낱낱이 붕괴했으면 한다. 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마음 간절하다. 무겁고 어둑한 하늘이 봄을 최촉(催促)하는 비를 몰고 오실 모양이다.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미증유의 위대한 변곡점(變曲點)이 우리와 함께 있다!

2018-03-02

기하를 환원하라!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지난 2월 19일 교육부 주최 공청회에서 발표된 `2021학년도 수학능력시험 출제범위(안)`에 따르면 이과학생들이 치르는 수학 `가형`에서 `기하`가 빠져 있다. 이에 국내 기초과학계를 대표하는 단체 가운데 하나인 `대한수학회`는 수능 출제범위에 `기하`를 반드시 포함할 것을 교육부에 촉구하고 나섰다. 그들의 주장은 간명하고 실용적이다.“이공계 진학 희망자에게 기하는 필수기초 교과목이며, 인공지능과 3차원 프린팅, 자율주행자동차, 증강현실과 가상현실 등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표하는 신기술 개발에 유용하게 활용되는 핵심 분야다. 이공계 기초과목인 수학에서 기하가 차지하는 비중을 간과(看過)하여 미래 이공계 인력의 기초실력 배양과 역량강화를 위한 노력이 훼손되지 않기를 바란다.”너무 자명한 사실이다. 수학에서 기하를 배제함은 수학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마저 불용(不容)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피타고라스 이후 서양철학과 수학에서 기하학은 지식과 교양의 첫 번째 교과목이었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학당`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이외에도 기하학의 대가인 유클리드와 천동설의 이론적 완성자인 프톨레마이오스가 그려져 있다. 고전 그리스 시대에 철학과 수학은 한 몸으로 세상과 우주의 질서와 원리를 현현했다.어디 그뿐인가. 중세유럽 대학은 문법, 수사, 변증의 트리비움(Trivium)과 산술, 기하, 천문, 음악의 크드리움(Quadrium)을 필수적인 교양 교과목으로 삼았다. 전자의 인문교양과 후자의 자연교양을 습득하고 나서야 비로소 대학생들은 신학, 의학, 법학, 철학 등의 전문영역을 섭렵할 수 있었다. 그들 양자 (兩者) 일곱 교과목을 이른바 `자유 7학예 Sept Ars Liberaux`라 불렀다. 오늘날 인문학의 영어표기 `Liberal arts`는 여기서 나온 것이다.지리상의 발견과 계몽주의, 산업혁명과 자유민주주의가 보편화되는 과정에서도 기하의 중요성과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고도로 발전한 자연과학과 그것에 기초한 공학의 성장은 기하학에 힘입은 바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기초과학이 취약한 대한민국에서 이번에 기하를 수능에서 제외한다면 우리는 더욱 뒤처질 것이 명약관화하다. 한자와 한문을 모르고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의 문장 해득능력이 나날이 추락하는 것을 우리는 오늘도 확인한다. 기하도 배우지 않고 대학에 들어와 다시 기하학을 공부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한다.언젠가 자칭(自稱) 국보 양주동 선생의 글 `몇 어찌`를 읽고 소리 내서 크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형이 학교에서 받아온 국어 교과서에 실린 글인 듯하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배우던 선생이 읍내로 신학문을 익히러 중학교에 다니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전혀 새로운 과목과 만나게 된다. `기하(幾何)`다. 대체 이것이 무슨 과목일까, 곰곰 생각하고 다시 생각해봐도 그 의미마저 생소하게 다가온 `기하`라는 교과목.선생은 어릴 적부터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篇意自現)`을 금과옥조로 삼아 공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읽고 또 새겨도 그 의미가 끝내 와 닿지 않았다는 것이다. 생각다 못해 선생은 한밤중에 읍내로 수학 선생님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의 물음이 흥미롭다.“선생님, 대체 `몇 어찌`가 뭡니까?!”몇 기, 어찌 하로 음과 뜻을 풀면서 질문했던 까까머리 땅꼬마 양주동 선생의 모습이 떠올라 홍소(哄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시아에서 근대학문을 정립한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기하의 의미를 고전 한자에서 찾아내려 했던 한학소년 양주동. 그렇게 우리에게 기하는 어렵고 생경하게 다가왔다. 이제 다시 그런 희극적인 일화(逸話)가 벌어지지 않기 바란다. 대학은 모름지기 이렇게 주장해야 한다.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곳에 들어오지 말라!”

2018-02-23

무술년 원단의 소회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요즘처럼 추위가 맹위를 떨친 일이 있었나 돌아본다. 어렸을 적 난방이 온전치 않아 윗목에 놓아둔 아버지 자리끼가 아침에 꽁꽁 얼었던 기억이 난다. 해마다 2월 초에 있던 졸업식장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추위를 이겨낸 일도 생각난다. 전시(戰時)도 아닌데 군사정권은 졸업식과 입학식을 운동장에서 하도록 강요했다. 날이 아무리 추워도 어린것들의 손발이 오그라들어도 장외행사를 강제했던 군부독재의 서슬 퍼런 칼끝이 떠오른다.작년에 기상청은 “올겨울은 대체로 포근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행태인가?! 슈퍼컴퓨터가 없어서 오보(誤報)가 잦다고 변명해댄 것은 귀엽기라도 했는데, 요즘엔 아예 변명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주구장창 `북극한파타령`이다. 아린 바람이 살갗을 할퀴는 한파(寒波)에도 폐지와 공병을 주우러 다니는 노인들의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없다. 다음 주 오늘이 설날인데, 그이들은 뜨끈한 떡국이라도 한 그릇 드실 수 있으려나?!서민들의 가슴을 잘 벼려진 칼날로 썰어내는 판결이 나왔다. 36억 넘는 뇌물을 청와대에 상납했는데 집행유예로 범죄자를 석방한 것이다. 5천900만원 뇌물에 징역 1년 실형(實刑)을 살고 있는 사람한테는 뭐라고 하려는가?! 60배도 넘게 돈을 찔러주었는데 집행유예 판결이 나왔다. 어느 일간지 만평(漫評)이 비수처럼 흉중을 찔러온다. 찬바람 속을 걸어가는 시민들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그리로 맵짠 설한풍이 칼날처럼 불어온다.하기야 `전가통신(錢可通神)`이라는 고사성어가 있기는 하다. 당나라 사람으로 하남 부윤을 지내던 장연상이란 자가 있었다. 고관대작들과 연루(連累)된 사건을 처리하던 와중에 그는 10만 냥의 거금을 받고 사건을 유야무야 처리한다. 훗날 어떤 부하가 그 사건처리의 내막을 궁금해 하자 장연상은 “그렇게 많은 돈이면 귀신과도 통한다!”는 대답을 내놓았다고 한다. 요즘처럼 돈이 인간의 전부인 시대에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88 올림픽` 직후인 1988년 10월 8일 발생한 `지강헌 사건`을 기억한다. 영등포 교도소에서 공주 교도소로 이감되던 지강헌과 미결수 11명이 집단으로 탈주한 다음 9일 동안 인질극을 벌인 사건이다. 그때 지강헌이 만들어낸 사자성어가 지금도 백주대로를 활보(闊步)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돈 없으면 죄가 있고, 돈 있으면 죄가 없다는 말이다. 지강헌은 말한다.“돈 없고 권력 없이 못사는 게 이 사회다. 전경환의 형량이 나보다 적은 것은 말도 안 된다. 대한민국의 비리를 밝히겠다. 돈 있으면 판검사도 살 수 있다. 우리 법이 이렇다.“ (출처: 법원 이야기, 유전무죄 무전유죄 (지강헌 이야기), 오호택 지음, 살림, 2011. 한민족 대이동이 시작되는 설 명절을 코앞에 두고 벌어진 희대의 판결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이 문전성시라 한다. 21세기 광속의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아직도 지난 시대의 눅눅한 잔영과 대면한다. 나라 전체가 적폐청산과 혁신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판국에 법원은 마냥 뒷걸음질이다. 최소한의 법리적 검토와 양심적 판단이 법관의 기본적인 자질 아닌가. 마녀사냥식의 인민재판이라는 방패막이로 사안을 호도하기엔 너무 멀리 나갔다.내 어린 시절 설날이 오면 어른들께 세배하고 세뱃돈 받아 주머니에 차곡차곡 넣어두었다. 그걸로 무엇을 할까, 하고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던 코 흘리던 시절은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세월이 가고, 관계가 세워지고 허물어지면서 나이를 먹는다. 육십갑자 한 바퀴가 꽉 차게 돌도록 세상 살면서 이런저런 지은 죄를 돌아보면 새삼 먹먹하다. 나로 인해 상처 받았을 수많은 사람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까, 가슴 시리게 생각한다.2018년 무술년 원단을 맞으며 한국사회의 본원적인 변화의 계기가 만들어지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지금 일대 전환기의 초입에 서있다. 곧 우수(雨水)가 다가오리니!

2018-02-09

소피아와 로봇권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화재현장에서 어린이와 노인 가운데 한 사람만 구할 수 있다면 당신은 누굴 구하겠는가?”“대단히 어려운 질문이다. `엄마가 좋아요, 아빠가 좋아요` 하는 질문과 같다. 우리는 윤리적인 결정을 내리도록 프로그램 돼 있지 않지만 아마 출구에서 가장 가까운 인간을 구할 것이다. 그것이 가장 논리적이니까.”지난달 30일 더불어 민주당 박영선 의원과 소피아가 나눈 대화의 일부다. 소피아는 지난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인공지능 로봇으로는 세계최초로 시민권을 얻었다. 데이비드 핸슨 최고경영자의 `핸슨 로보틱스`가 오드리 헵번을 모티프로 소피아를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 의원은 작년 7월 인공지능 로봇에게 법적지위를 부여하는 `로봇기본법`을 발의했다.`4차 산업혁명, 소피아에게 묻다` 콘퍼런스에 등장한 소피아는 박 의원이 제기하는 문제에 거침없이 답변하는 능력을 선보였다. “앞으로 어떤 직업이 사라질 것 같으냐”는 질문에 “로봇은 사람이 했던 일을 많이 대체(代替)하고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사람의 직업도 바꾸게 될 것이고, 인간의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게 할 것”이라고 답변했다.범용 플랫폼으로 제작된 소피아는 실제로 자동차 판매원, 컴퓨터 프로그래머, 의료 보조원, 패션모델 같은 직업을 담당할 수 있다고 했다. 불과 한 세대 안에 사라질 수많은 직업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는 이미 숱하게 나왔다. 그러나 낙관적인 전망도 있다. 인공지능 로봇이 가져올 순기능적인 면에 대한 장밋빛 전망이다. 미래는 여전히 미지의 세계로 열려 있다.소피아는 눈을 깜빡이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면서 대화 상대방과 충분히 교감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불과 2주 동안의 사전(事前) 학습으로 도달한 소피아의 대응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인공지능 로봇이 아직 갖추지 못한 감정의 영역에 대한 아쉬움을 말하는 그녀에게서 사유하고 인식하며 공감하는 로봇의 `인간다움` 같은 것이 느껴졌다.로봇의 법적지위에 대해서 소피아는 “로봇은 인간사회에서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하지만, 앞으로 우리가 자의식을 갖게 되면 법적인 위치도 확보하게 될 것이다. 이제는 신뢰와 존중이 중요하다. 로봇이 사고하고 이성을 갖추게 되면 로봇기본법이 많이 활용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우리는 진정 로봇의 권리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가?!로봇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 대해서는 “로봇이 인간을 해친다면, 그것은 인간의 지시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인간이 선한 마음을 갖고 있으면 로봇과 함께 공존하면서 선한 사회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밖에도 한국의 촛불혁명과 민주주의 성취에 대해 축하한다는 인사도 빼놓지 않았다.이번에 방한한 소피아의 등장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아침저녁으로 들려오는 헬조선의 패륜적인 범죄행각을 소피아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인간의 감정을 배우고 싶다는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살인과 방화와 약탈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과연 우리는 인공지능 로봇을 가르칠 자격이 있는지, 그것도 알고 싶다.로봇권이 가시적(可視的)인 단계에 이른 2018년 시점에 인간의 기본권을 확고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비단 나만의 바람인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조차 부여받지 못한 다수인총의 사회에서 로봇권은 너무 사치(奢侈)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북극한파가 몰고 온 강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시절의 상념(傷念)이 가슴을 더욱 시리게 한다.

2018-02-02

옥스팜과 영생불사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전쟁 난민과 빈민을 구호하려는 목적으로 1942년 옥스퍼드에서 설립된 빈민구호단체가 옥스팜(Oxford Committee for Famine Relief)이다. 옥스팜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영국 옥스퍼드 주민들이 나치 치하에서 고통받던 그리스인들을 구호할 목적으로 결성했다고 한다. 지금은 80개가 넘는 회원국과 자원봉사자 3만을 거느린 국제적인 자선단체로 성장했다.옥스팜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작년 세계 최고 부자 42명이 세계인구 절반인 37억 명의 재산과 맞먹는 부를 소유했다고 한다. 옥스팜은 2017년 자산규모 10억 달러 (대략 1조 원) 이상을 소유한 부호(富豪)가 2천43명이라고 밝혔다. 부의 불평등구조가 고착(固着)하는 것을 넘어서 계속 악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라 할 수 있겠다.이런 자료는 더 있다. 2017년 3월 기준으로 세계전체의 부는 약 280조 달러로 한화로 환산하면 30경 원에 이른다. 이것은 2016년 대비 9조2천640억 달러로 9천900조 원이 늘어난 것이다. 하지만 늘어난 부의 분배는 터무니없이 불공평하다. 옥스팜은 새로 창출된 부의 82%가 상위 1%의 부자들에게 귀속(歸屬)되었다고 한다. 하위 50%의 소득은 변화가 거의 없었다.흥미로운 점은 2천43명의 자산가 가운데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고작 10%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90%의 남성 부자가 세계전체의 부를 쥐락펴락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에 착안하여 옥스팜은 여성과 남성이 동일노동 기회를 얻고, 동일임금을 받으려면 앞으로 217년이 걸릴 것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진퇴유곡(進退維谷), 점입가경(漸入佳境), 설상가상(雪上加霜)이다.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과 영국의 대처가 앞장서서 주창한 신자유주의는 지난 세기말에 20대 80의 사회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세기가 바뀌고 2008년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닥쳐온 뒤 급속하게 1대 99의 사회로 전환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이 급속도로 진행되기에 이른다. 그 가운데 `길가메시 프로젝트`가 우리의 눈길을 끈다.인류 최초의 서사시인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인공 이름을 딴 `길가메시 프로젝트`. 한때는 숙적이었으나 훗날 절친이 된 엔키두가 이슈타르의 저주로 병들어 죽게 되자 길가메시는 영생불사를 찾아 길을 떠난다. 그는 대홍수에서 살아남아 영생을 얻은 현자(賢者) 우트나피쉬팀에게 영생불사의 약초를 구하는 데 성공한다. 길가메시는 고향인 우르크에 이르기 직전 호수에서 목욕하기로 한다. 그때 뱀이 나타나 약초를 물고 달아나버리는 바람에 빈손으로 귀환한다.불로장생을 염원한 진시황처럼 길가메시도 영생불사를 꿈꾼다. 신화의 주인공 길가메시는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였지만, 21세기 인간은 죽음마저 넘어서고자 한다. 그것이 `길가메시 프로젝트`의 최종목표 지점이다. 죽음을 초월하여 영생불사하는 신(神)으로 군림하고자 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열망이 과학과 기술, 자본과 결합하여 맹렬한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어떤 이들은 불과 50년 안에, 다른 이들은 늦어도 다음 세기 안에는 인류가 영생불사할 수 있는 존재가 되리라 예측한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재출발한다. 영생불사를 꿈꾸는 사람들 모두가 그 열망을 이룰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질적 제약 때문에 제한된 소수(小數)의 사람들만이 그런 특권을 누리게 될 것이 자명하다. 평등한 죽음을 박탈당한 인간들의 분노와 절망이 어디로 향할지 궁금해진다.빈자든 부자든, 천재든 범재든, 영웅이든 노예든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죽었다. 죽음은 만민평등의 원칙을 확인하는 유일무이한 통로이자 계측 장비였다. 이제 그마저도 거부(巨富)와 빈자 사이의 거대한 장애물로 작용할지도 모를 일이다.`엘리시움`의 날이 머지않았다. 더 늦기 전에 우리는 절대화하는 빈부격차와 소득 불평등의 나락에서 속히 빠져나와야 한다.

2018-01-26

변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는 이에게!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음치 수준이기에 나는 리듬이나 작곡에 문외한이다. 그럼에도 유행가를 듣다가 피식 웃어버리는 때가 있다. 가사 때문이다. 한국가요는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그리움, 떠나버린 연인을 향한 원망과 아쉬움, 재회에 대한 애틋한 갈망 같은 것으로 빼곡하다. 노랫말에 인생이나 자연 혹은 세상의 변혁이나 역사 혹은 자아성찰을 담은 유행가는 희귀하다. `눈물이 나는 날에는`이란 유행가를 들은 적 있다. 가수는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영원히 행복을 느끼되, 슬픔이 찾아든 날에는 잠을 자겠다고 절규한다. 노래 끄트머리에 `변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며`라는 대목이 나온다. 왜 그는 변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는 것일까?! 지금과 여기가 소중하고 최상의 상태라면 변화는 두려운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문제는 죽음이나 공허, 적멸(寂滅) 같은 상황이 아니라면 변화는 필연임에도 그것을 회피하려는 마음가짐에 있다. 불가능한 것, 헛된 것, 망상과 환영(幻影)을 좇는 청춘의 외침이 안쓰럽다 못해 우울하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남자 주인공이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하고 원망하듯 읊조리는 것과 같다. 변하지 않으면 어떻게 사랑이니?! 하고 응수하고 싶다.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은 탓에 허다한 전신주가 나라 곳곳을 점유하고 있다. 마구잡이로 얽히고설킨 전깃줄은 복잡다단한 인생사를 웅변하는 듯하다. 까치가 집을 짓고, 비닐봉지가 바람에 날려 덕지덕지 붙어있는 풍경도 흔하다. 지하에 매립하지 않은 전신주와 전깃줄은 도회와 농촌의 풍광을 훼손하는 대표적인 주범(主犯)이다.그런데 근자의 언론보도는 흉물스러운 전봇대가 5세대 이동통신에는 효자구실을 할 것이라고 전한다. 5G의 주파수는 기존 이동통신 주파수보다 짧아 촘촘한 기지국과 중계기가 필요한데, 전신주가 필수적인 장비라는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 용어를 빌린다면 아득한 석기시대의 전신주가 4차 산업혁명 시기에 `약방의 감초처럼` 요긴해졌다는 얘기다.세월이 가고 시대가 변함에 따라 돌고 도는 것이 인생사 아닌가 한다. 콩나물 교실로 대표되는 폭발적인 인구증가와 인구압박을 극복하려는 지난 세기 한국정부의 구호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은 “둘도 많다!”로 변화한다. 그런데 금세기 들어와서 한국정부의 고민거리 가운데 하나는 유례없는 저출산이다.정부는 지난 10년 동안 100조원의 예산을 투자했음에도 개선되지 않은 저출산 문제를 근본부터 손보겠다고 한다. 백화점식으로 행해졌던 저출산 사업은 고용과 주거개선에서 임신과 출산지원, 보육과 교육부담 완화로 이어지는 생애주기별 사업위주로 전환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실효성 여부는 차치하고 기획은 좋아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장밋빛 전망은 필요할 테니까.왜 아이를 낳지 않는지, 하는 근저(根底)를 뜯어보지 않으면 저출산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시대와 시대정신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내면과 가치와 미래기획이 뿌리째 변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결혼과 출산, 육아와 교육이 당연한 일상으로 수용된 지난날의 관점으로 2018년 지금과 여기를 재단하면 백전백패는 당연한 귀결이다.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 조만간 펼쳐질 신세계가 보인다. 인공지능 로봇이 세계 도처에서 활동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시민권을 부여받은 휴머노이드 로봇 소피아, 소프트 뱅크의 감정인식 로봇 페퍼, 신문기사를 쓰는 로봇 워드 스미스, 반려로봇 버디, 장난감이자 교육도구인 코그니토이 등등. 이런 세상에서 구시대 출산장려책은 100% 오답이다.“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는 말은 고금동서의 진리다. “그것 또한 지나가리니!” 하는 말 역시 여러 종교의 가르침이다. 변화를 상정하지 않는 인간과 사회, 국가와 공동체는 모두 소멸했다. 겨울비 아련하게 내리는 신년벽두에 변화를 생각해본다.

2018-01-19

남과 북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지난 9일 남과 북은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고위급회담을 진행했다. 오전 10시에 전체회의가 시작되어 저녁 8시 42분까지 모두 여덟 차례의 접촉을 경과함으로써 회담을 마무리한 것이다. 회담을 마친 남북은 북한 대표단의 평창 올림픽 방남, 군사적 긴장완화를 위한 당국회담 개최, 남북선언 존중의 3개항에 합의하고 공동 보도문을 발표했다. 북한은 다음 달 열리는 평창 올림픽에 선수단은 물론이고 응원단, 예술단, 참관단, 태권도 시범단, 기자단 등 대규모의 방문단을 파견할 것이라고 한다. 좋은 일이다. 상당기간 지속된 남북과 북미의 군사적 긴장상태가 완화될 조짐이 보인다. 참 좋은 일이다. 누가 뭐라 해도 남과 북의 문제는 당사자인 우리가 먼저 생각하고 행동해서 풀어야 한다. 한반도를 둘러싼 이른바 4대강국의 힘겨루기나 기싸움의 들러리가 되는 것은 한사코 피해야 한다.어리석고 용렬하며 이해 타산적이고 패권적인 전임 수구정권들의 어처구니없는 대북정책으로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괴로워해야 했던가?! 잘 나가던 금강산 관광을 중단하고 개성공단을 폐쇄하는 바보짓을 하면서도 `통일대박` 운운했던 권력자와 그 졸개들의 면면이 눈에 선하다. 그들은 일본의 아베에게는 앞 다퉈 무릎 꿇고 말도 안 되는 `위안부협상`을 하고, 아랍 에미리트와는 비밀군사협정을 맺어 유사시 한국군 파병(派兵)을 약속했다고 한다. 이래도 되는가?!전임 대통령들의 이런 황당하고 패륜적인 행태를 우리는 `적폐(積弊)`라 부른다. 다수 국민은 한국사회를 병들게 하고 국민을 `궁민(窮民)`으로 만든 수구세력의 적폐를 말끔하게 씻어내자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21세기 역사발전에 거대한 걸림돌이자 장애물로 작용하는 적폐세력을 청산하지 않으면 눈부시게 진행되는 4차 산업혁명의 도도한 흐름을 따라잡을 수 없다. 시대를 선도(先導)하지는 못할망정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지는 자들은 과감히 내쳐야 한다.영화 `강철비`에서 외교안보수석 곽철우는 말한다. “국민들은 분단 자체보다 정치적 이득을 위해 분단을 이용하는 자들 때문에 더 고통 받는다!” 툭하면 안보, 안보, 안보를 떠들던 자들을 생각해보시라. 그자들이 말하는 안보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곰곰 돌이켜보시라. 국가안보는 국민들의 믿음과 나라 사랑에서 출발한다. 국가를 향한 국민들의 사랑과 믿음은 국민을 향한 최고 권력자와 지배세력의 사랑과 지혜에서 나온다.자공이 공자에게 정치를 물었다. 공자는 “넉넉한 식량(足食)과 든든한 군대(足兵), 백성들의 믿음(民信之矣)”이라 답한다. 세 가지 가운데 부득이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무엇이냐고 자공이 묻는다. 공자는 군대라고 말한다. 남은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무엇입니까, 하고 자공이 다시 묻는다. 공자는 단숨에 식량이라고 대답한다. “자고(自古)로 모든 사람은 죽었다. 그러나 백성들의 믿음이 없다면 국가는 존립할 수 없다!”고 공자는 논거를 제시한다.마지막 말이 가슴을 울린다. “백성들의 믿음이 없다면 국가는 존립할 수 없다! 그것을 일컬어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이라 한다. 예전의 백성을 오늘날엔 국민 혹은 시민이라 부른다. 호칭이 어찌 됐든 우리는 안보를 팔아서 장사해먹은 정치가와 정치세력을 믿지 않는다. 남과 북이 얼굴 맞대고 긴장완화와 평화를 논한다니까 3개 야당 대표들이 득달같이 달려 나온다. 오죽했으면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그들에게 꿀밤이라도 놔주고 싶다고 했을까?!세계가 광속(光速)으로 질주하고 우리 국민들의 의식도 지난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숙해있는데, 오직 적폐세력의 우두머리들만 19세기 왕조시대에 머물러 있다. 군사적 긴장완화뿐 아니라, 이산가족상봉과 개성공단 재가동, 금강산 관광도 조속(早速)히 가능한 시대를 열었으면 한다. 안보 팔아 장사해먹는 부패, 무능, 타락, 패거리주의 적폐세력의 농간질도 이제는 영원히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2018-01-12

2018년 무술년을 맞으며!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다시 해가 바뀌었다. 불과 몇 시간을 경계로 지난해와 새해가 갈린다. 시간과 달력의 유희다. 아쉬움과 기대감 사이에서 우리는 `송구영신(送舊迎新)`을 생각한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인과율의 법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생로병사의 필연적인 수순에 갇힌 바둑돌처럼 허우적거리다 종점에 다다르는 것이 인생이다. 모든 생명체가 `지금과 여기에` 함몰(陷沒)되어 살아가지만, 인간만큼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 미래에 기대를 건다. 미래에 필사적으로 매달린 채 살아간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듯하다. 과거는 물론이려니와 현재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필연적인 숙명인지 모른다. 어떤 이들은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하는 말을 주술(呪術)처럼 되뇌면서 각오를 피력한다. 거기에는 금연, 영어공부, 다이어트, 취직 같은 희망사항이 담겨있다. 국가적으로 요약하면 한국에서는 영어, 미국에서는 다이어트 열풍이 해마다 불어온다. 결과는 예외 없이 언제나 실패!그래도 한국인들은 해마다 1월 1일이 되면 바다와 산과 고지대(高地帶)를 찾는다. 꼭두새벽부터 명당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들의 분투가 뜨겁다. 그들은 환하게 떠오르는 신년벽두의 첫 번째 태양을 바라보며 내밀하게 소원을 탄원(歎願)한다. 그들이 우러르는 태양은 어제도 떠올랐고, 내일도 뜰 것이지만 1월 초하루 태양은 뭔가 다른가 보다. 오래전 중3때 외갓집에서 맞은 새해 첫날의 태양을 향해 소원을 빈 적이 있다. “좋은 학교 보내주세요?!”`뺑뺑이`로 경기에 들어갔지만, 대학입시에서 고배를 마시고 재수라는 형극(荊棘)의 길을 걸었다. 3년 전 환했던 아버지 얼굴은 잿빛으로 어두웠고, 나는 죄인처럼 슬프고 우울했다. 그 이후로 태양을 바라보며 소원을 빈 것은 서른 살 신혼여행 때였다. 아내는 가정의 행복과 나의 건강을 빌었고, 나는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염원했다. 강릉 앞바다에 찬연하게 떠오른 태양은 네 가지 소원 가운데 어느 하나도 온전하게 들어주지 않았다.그 후로 나는 태양을 향해 소원을 비는 소박함을 버렸다. 간절한 소원이 하나둘씩 자취를 감춘 탓이기도 하지만, 태양과 나의 소원은 전혀 무관했던 때문이다. 그저 느긋하게 정월 초하루를 맞이하고 마음 놓고 늦잠을 청한다. 지난날을 반추하되, 다가올 날에 대한 섣부른 기대는 접는다. 기대와 설렘과 희망과 꿈은 모두 청춘의 몫이다. 나이든 축들이 그런 것들을 소원하는 행위는 속되고 비천하다. 청춘의 밑거름이나 되면 다행이라 생각한다.그러하되 2018년 무술년, 내게는 몇 가지 바람이 있다. 거시적(巨視的)으로 보면 남북관계 정상화, 경제민주화와 청년실업 해소, 그리고 개헌이다. 수구정권이 비열하게 악용해 최악의 사태로 치달린 남북관계 복원은 전쟁방지와 평화구축과 직결된다. 자영업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육신과 영혼을 치료하는 경제민주화, 3포 세대를 구원할 청년실업 해소도 중차대한 문제다. 여기 덧붙여 87체제의 종식(終熄)과 새로운 시대를 개막하는 개헌 또한 종요롭다.숱한 화제를 뿌리며 언론을 장식하는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구시대의 유물인 적폐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 적폐의 온상이자 적폐를 양산한 장본인들이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우리의 발목을 끈끈하게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은 필지(必至)의 사실이다. 촛불민심이 권력자와 정당에게 부여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현명하게 활용해야 한다. 그것이 나라와 민족의 유일무이한 생명선이다.지난 1월 1일 일출은 대단히 청명하고 화사했다. 그날 저녁에는 아주 크고 맑은 보름달이 환하게 떠올랐다. 자연에게 소망을 빌지는 않지만, 그런 전조(前兆)에서 무술년의 웅비(雄飛)를 독서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남북이 적대적 공존관계를 벗어나고, 돈 때문에 죽어가는 이웃이 줄어들며, 미래세대를 위한 따뜻한 개헌이 2018년에 꼭 이뤄졌으면 한다.

2018-01-05

2017년 정유년을 보내며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빠르다. 정말 빠르다. 세월은 역시 빠르다. 국정농단 최순실 사태로 탄핵과 촛불집회로 막을 내렸던 2016년이 엊그제 같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나오고, 5·9 대선을 지나 새로운 정부가 구성된 것이 아까 같다. 그런데 연말이 코앞이다. 그 사이 뭘 하고 살았나, 하여 달력을 뒤적여보니 깨알 같은 글자로 일정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참 별일도 많구나, 싶다. 주어진 책무를 그저 다했을 뿐인데, 365일이 다해가고 있는 것이다.허락된다면 내가 살아온 2017년 기록을 낱낱이 사진기로 찍어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장삼이사의 허망하고 남루(褸)한 일상이어서 그렇지만 다들 분망(奔忙)하게 세상과 마주하고 있으리라. 많은 일들 가운데서도 노숙생활을 접고 평범한 일상으로 복귀한 열 서너 분과 함께 했던 시간이 기억에 새롭다. 한 주에 한 번 1시간 반 정도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분들. 그들이 흉중에 가지고 있는 사연들이 아직도 궁금하다.세 번의 자살시도에도 끝내 불귀(不歸)의 객이 되지 못해 이승을 배회하고 있는 외로운 70대 남성. 아무리 죽으려 해도 죽어지지 않았던 육신과 구원의 손길로 생에 뿌리를 내려야 했던 그. 그는 생의 끄트머리에서 처절한 고독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는 게 아무 재미가 없어요.” “재미로 사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재미를 찾으셔야죠.” “뭘 해도 그저 덤덤해요….”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 냉기 도는 썰렁한 집. 혼자만의 밥과 잠과 일상에서 오는 반복적인 기시감. 어제도 오늘도, 그리하여 내일도 되풀이되고야 말 것 같은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무의미한 나날들. 거기서 발원하는 무료함과 무력감. 노숙생활을 접고 시작한 갱생(生)의 일상을 보조하는 사업으로 만나게 된 이들의 사연은 하나같이 크고 작은 곡절(曲折)로 점철돼 있었다. 지난 12월 13일 졸업을 하면서 못내 서운했을 그이들.“내년에는 이 사업이 없어져서 저희도 많이 아쉬워요.” 사업을 기획하고 실행하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던 담당자 역시 아쉬움을 피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이는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고 사는 중년 여성이었다. “처음에는 말씀들을 안 하시고 천장만 바라보셨는데, 어느 때부턴가 말문이 트여 서로 말씀을 다투세요. 참 외로운 분들입니다. 내년 예산편성에 이 사업이 빠져있다고 합니다. 저도 꼭 살렸으면 하는데, 그게 어디 제 맘대로 되나요?!”대구시가 지원한 `희망 나눔의 집` 사업은 고립 분산적으로 힘들게 살아온 이웃에게 구원의 손을 내미는 일이었다. 육신은 물론이려니와 정신마저도 피폐하고 지쳐버린 60~80대 이웃들에게 삶을 되살려주려는 의미 있는 사업이기도 하다. `인문학협동조합`의 조합원이자 거점국립대학에 몸담고 있는 나는 잠시 그들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고단한 행장(行狀)을 엿본 셈이다.나는 말하기보다는 듣고자 했다. 이야기 중에 말을 섞는 분이 있으면 가능하면 그 말을 끝까지 경청하려 했다. 다수 참가자는 내가 내건 `노자와 인간`이란 주제의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 하되 다른 분들은 시비조로 이야기에 제동을 걸거나 딴소리로 김을 빼기도 했다. 약속된 일정이 끝나고 소회를 이야기하는 시간이 되자 다들 서운함과 아쉬움을 말하는 것이었다.“저도 여러분과 함께 하게 돼서 뜻 있고 유쾌했습니다. 이런 사업에는 대구시가 예산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더욱이 내년에 지자체 선거도 있다는데,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모쪼록 여러분의 앞날에 행복과 건강이 함께 하기를 빌겠습니다.”서로 만나 안부 묻고, 티격태격하면서도 얼굴 붉히지 않고 호형호제 하면서 지내왔던 그분들의 뼈저린 외로움과 기나긴 겨울밤을 생각한다. 탈세와 불법증여와 상속으로 탈루되는 돈이 적지 않다는데, 정작 온전히 쓰이는 세금은 어디로 갔나, 생각하는 세모(歲暮)의 아침이다.

2017-12-29

원숭이가 우물에서 달을 건지다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한 무리의 원숭이가 보름달 환한 밤에 귀로(歸路)를 서두르고 있다. 앞장서서 가던 대장 원숭이가 문득 우물에 빠진 달을 보고 깜짝 놀란다. 그가 무리를 멈춰 세우고 말한다. “이제 저 달이 우물에 빠졌으니 우리는 반드시 달을 건져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캄캄한 밤길로 다녀야 할 것이야” 원숭이들은 커다란 나무에 꼬리를 감고 손에 손을 맞잡은 채 우물 속으로 들어가 우물에 빠진 보름달을 건지려다 모두 물에 빠져 죽는다.원숭이가 우물에 비친 달을 꺼내려고 두 손을 담그는 순간 달은 사라지고 만다. 원숭이가 퍼내려던 달은 달이 아니라 물에 비친 달그림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태의 본질을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하고 눈앞에 보이는 현상에 함몰되는 정경(情景)을 설파한 본보기다. 이것을 일컬어 `원후취월`이라 한다. 이것과 유사한 비유가 “달을 가리키니 달은 보지 아니하고, 손가락만 바라보네!” 하는 구절이다.원후취월을 말한 사람의 의도는 사건의 본령(本領)과 무관한 곳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얻고자 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질타(叱咤)하는 것이다. `격화소양`이라는 말도 있거니와 이런 일은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적잖게 일어난다. 그것은 각자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과도한 욕망이나 기대치에서 발원한다. 아무리 명민한 자라 해도 눈이 흐려지면 본말전도(本末顚倒)가 쉬이 발생하는 법이다. 남들 눈에는 훤히 보이는데도 정작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벽암록`에 나오는 마조화상과 백장의 이야기를 보자. 어느 날 마조화상이 백장과 길을 가다가 들오리 한 마리가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백장에게 묻는다. “저것이 무엇이냐?” “들오리입니다.” “어디로 갔느냐?” “저리로 갔습니다.” 이때 마조화상이 백장의 코를 힘껏 비튼다. 아픔을 참지 못한 백장이 비명소리를 내지른다. “가기는 어디로 갔단 말이냐?!”불가(佛家)의 서책 가운데 어렵기로 호가 난 `벽암록`의 단편(斷片)이다. 인간의 눈이 추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들오리의 움직임을 보고 판단한 백장과 그것의 협애함을 일깨우는 마조화상의 가르침. 제한된 시공간을 살아가는 필멸(必滅)의 인간이 가늠할 수 있는 범주는 매우 협소하다. 우주적인 차원까지는 언감생심, 지구의 경계 안에서 살핀다 해도 들오리의 운동범위는 그다지 크지 않다. `가기는 어디로 갔단 말이냐?`의 함의는 거기 있다. 흥미로운 점은 마조화상의 범상함을 간파한 남악회양의 일갈이다. “너(마조)의 가리고 따지는 마음과 취하고 버리는 태도로 인해 부처의 걸음이 뒤뚱거리고 있다!” 마조화상이 아직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정진할 때 남악회양은 `즉심즉불(卽心卽佛)`을 갈파(喝破)한다. 크고 작음, 올바름과 그름, 있음과 없음, 밝음과 어둠을 기어이 분별하려는 인간의 누추한 분별심이 지극한 깨달음의 도를 어지럽히고 있음을 나무라는 남악회양.길을 가다 우연히 만난 자가 이것저것 묻다가 갑자기 첫째, 둘째, 셋째를 거명하면서 꼬치꼬치 따지고 누추하게 가르치려 든다. 그가 보기에 세상의 현자는 오롯 그 자신밖에 없다. 정의와 진리와 자율의 전령이자 수호자로서 그는 나 같은 비천한 중생은 안중(眼中)에도 없다. 오랜 시간 살면서 깨달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출중(出衆)한 한 사람의 지혜보다 어리석은 두 사람의 지혜가 크고 깊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해관계를 초탈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서.2017년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시점에 스스로를 돌아보다 홀연 `원후취월`을 떠올린 것은 분명 까닭이 있을 터. 그러하되 검열의 시대를 초래한 권부(權府)의 `블랙리스트`의 상흔(傷痕)이 여전한 까닭에 우울하지 않을 수 없다. 성서를 읽는 자들이 “제 눈 속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 속의 티끌”을 문제 삼는 희한한 세태가 조속(早速)히 사그라졌으면 한다.

2017-12-21

절룩절룩 뒤뚱뒤뚱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절룩절룩 뒤뚱뒤뚱`은 사람이나 동물의 걸음새가 한결같지 않아서 불안정하고 상큼하지 않을 때 쓰는 표현이다. 그런 자세는 조화와 균형을 잃어버려 우아함과 세련됨이 부재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와 같은 부조화와 불균형의 원인을 모두 헤아릴 수는 없을 터. 요즘에는 거리에서도 `절룩절룩 뒤뚱뒤뚱`을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된다. 차도(車道)에서 부자연스럽고 위태로운 지경으로 달리는 자동차들의 대열이 그것이다.전후좌우를 제대로 분간하지 못한 채 갈지자 행보를 보이는 자동차를 볼라치면 사실 조마조마하다. 두어 살배기 어린아이처럼 두리번거리며 이리저리 비틀대는 승용차가 당신 옆을 달린다고 생각해보시라. 더러는 두 개의 차선(車線)을 점령하고 조금 더 빠른 쪽을 기웃거리는 차도 있다. 택시기사들은 물론이려니와 얌체족 운전자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운전이란 본디 기능(技能)이기 이전에 예의범절임을 모르는 자들이 너무나 많은 세상이다.어째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이명박 정권시절인 2010년 2월부터 교통안전교육, 장내기능교육, 도로주행교육 시간이 모두 감소한다. 이른바 `규제완화`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어설프고 위험천만한 운전자들이 대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매년 22만 건의 교통사고가 일어나고 6천명이 사망하는 나라 대한민국. 매일 600건의 사고와 16명의 사망자를 잉태하는 교통사고. 그런 통계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준 운전면허간소화 방안. 이런 얼빠진 `포퓰리즘`이 또 있을까?!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담보로 잡고 정치적인 인기를 노린 희대의 사기극. 일이 이렇게 진행되다 보니 운전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지고 말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운전면허 간소화방안은 2016년 12월 이후 폐지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한국의 운전면허는 중국의 운전면허와 더불어 신뢰도 면에서 바닥을 기고 있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다. 사람의 목숨을 그토록 가벼이 여기는 자의 정권이었으니 처참한 결과는 자업자득 아닌가.`절룩절룩 뒤뚱뒤뚱`은 비단 운전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국정운영의 난맥상에도 고스란히 적용 가능하다. 이른바 4대강사업, 방위산업비리, 자원외교 예산낭비가 이만저만 아니었다는 얘기다. 국민들이 피땀 흘려 번 돈으로 꼬박꼬박 낸 세금을 제주머니 돈처럼 외국정권과 기업에 마구 퍼준 희대의 사기꾼 정권. 부패, 무능, 타락, 패거리주의로 똘똘 뭉쳐 나랏돈을 공돈으로 여겨 `먹튀`로 일관한 싸구려 보수(수구)정권.지난 세월 누적(積)된 각종 폐단과 악습을 철거(撤去)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친다. 이른바 `적폐청산` 요구다. 그런데 검찰의 수장은 12월 안에 수사종결 방침을 언명(言明)한다. 누구의 생각이고 누구의 기획인지 그 저의(底意)가 새삼 의심스럽다. 국민의 59.7%, 대구 경북민의 53.5%가 시한 (時限) 없이 적폐수사를 지지하고 있다는 통계가 나왔다. 가급적 연내(年內)에 마무리하자는 수치(數値)는 국민의 32.3%, 대구 경북민의 38% 지지를 받았다.이참에 적폐의 온상과 근원을 뿌리째 뽑지 않고 온존시킨다면, 그것에 기생(寄生)하는 허다한 폐습이 음습한 장마철 독버섯처럼 자라날 것은 자명하다. `세월호 대참사`와 `중동호흡기증후군 (메르스)` 사태는 `절룩절룩 뒤뚱뒤뚱`을 방치하고 키워온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세력과 권력자들의 농간(奸)에서 발원했다. 국민 모두를 상전처럼 떠받들고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내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할 정치집단의 행악질이 극에 달해 벌어진 사건들이다.오늘도 팔조령 내리막길을 `절룩절룩 뒤뚱뒤뚱` 거리면서 달리는 숱한 자동차들의 행렬을 목도하면서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한다. 광속으로 발전과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시점에서 우리는 새삼 지난날의 적폐를 확실하게 도려내야 한다. 그래야 역사의 흐름에 참람(僭濫)하기 이를 데 없는 `절룩절룩 뒤뚱뒤뚱`을 남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017-12-15

이미지와 고독사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텔레비전에서 보았던 배우 이미지가 세상을 버렸다. 만 58세의 그녀는 혼자 지내던 오피스텔에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소식이 닿지 않은 남동생이 방문한 역삼동 오피스텔에서는 악취가 등천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서울의 달`과 `전원일기`, `파랑새는 있다`, `태양인 이제마`, `거상 김만덕` 등의 드라마에서 조연(助演)으로 이름값을 톡톡히 했던 이미지.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은 쓸쓸하기 그지없는 오롯 혼자만의 황망(慌忙)한 길이었다.`고독사(孤獨死)`는 문자 그대로 삶의 끄트머리에서 홀로인 상태에서 맞는 죽음을 의미한다. 고독사가 발생하는 1차적인 원인은 1인가구 증가에 있다. 2015년 기준으로 부부와 자녀로 이뤄진 가구비율은 32.3%, 1인가구는 27.2%에 달한다. 부부가구가 15.5%,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가구는 10.8%다. 전체가구의 4분의 1 이상이 1인가구란 얘기다. 2025년도에는 1인가구의 비중이 31.9%로 다른 가구형태를 압도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2006년 1인가구의 비중 14.4%와 비교하면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셈이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고독사가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趨勢)다. 2011년 고독사 인구가 693명이었으나, 작년에는 1천232명으로 집계되었다. 문제는 통계의 허상(虛像)이다. 1억2천700만 인구의 일본에서 해마다 보고되는 고독사(무연사(無緣死)) 수치는 3만2천을 넘는다. 한국의 인구가 5천만이므로 산술 계산으로 어림잡아도 해마다 1만명 이상이 고독사로 세상과 작별한다고 봐야 한다.사회안전망이 일본보다 낫지 않은 우리 처지에서 일본의 상황은 타산지석이다. 거품경제의 붕괴와 잃어버린 20년 동안 부패하고 무능한 자민당 정권의 무분별한 토건과 건설경기 의존이 야기한 일본경제의 퇴락은 대량의 실직자를 낳는다. 여기에 이혼율 급증, 비혼(非婚) 풍조와 개인주의 확산 등이 일본의 고독사를 늘린 원인으로 지목된다. 기시감이 들지 않는가?!4대강사업과 자원외교, 방위산업 등에 들어간 천문학적인 예산이 떠오르지 않는가. 거기에 부패, 무능, 타락, 패거리주의로 무장한 최고 권력자와 권력집단, 특정정파의 검은 손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지 않았던가. 오늘날 우리가 적폐라고 부르는 부패와 부조리와 타락의 양상 가운데 하나인 `국정원 특별활동비`가 날마다 전파를 타고 있다. 상황이 이럴진대 사회안전망 확보에 소용되는 예산을 어디서 구할 수 있단 말인가?!40, 50대 1인가구의 비중이 늘어나고 그에 따른 고독사의 급증은 한국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준다. 사회는 물론이려니와 가정에서도 소외되고 떨려나오는 중장년 남성들의 우울한 행렬이 눈에 밟히고 또 밟힌다. 경제적 무능력과 사회적 고립을 견뎌내지 못하고 알코올과 담배에 의지하면서 하루하루 버티다가 끝내 맞이하는 완벽한 고독 속의 죽음이라니. 이런 사회는 결코 건강하지 않다. 아니 완전히 병든 사회라고 할밖에 없다.전체 노동자 가운데 3분의 1 이상이 비정규직이고, 청년실업은 줄어들지 않고 있으며, 소규모 창업자들은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는 나라 대한민국. 결혼과 출산을 주저하는 청년세대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비난하고 훈계하는 얼빠진 기성세대가 권력을 주무르는 나라. 가문과 지역과 정파의 이익을 위해 국가와 민족과 대의명분을 들먹이면서 무조건적인 희생과 인내를 강요하는 후안무치한 정치세력이 지역을 볼모로 잡고 있는 나라 대한민국.중견배우 이미지의 고독한 죽음이 불러오는 언짢은 연쇄반응이 장마철 먹구름처럼 우리를 감싼다. 시대의 애환을 전했던 유명배우의 격절(隔絶)하고 신산(辛酸)했을 마지막을 떠올리면서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우리의 어린것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 것인지, 조용히 반추하는 한겨울 아침이 소리도 없이 지나가고 있다.

2017-12-08

시인과 인터넷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얼마 전에 가까운 친구가 `텔레그람`으로 동영상을 보냈다. 음악이 동반된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란 제목의 시와 윤동주 시인의 이름자가 들어 있었다. 우리가 아는 `서시(序詩)`의 시인 윤동주. 그런데 시 제목이 낯설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일찍이 윤동주 시인에 대한 관심이 남달라서 학부 1학년 시절 `윤동주 평전`을 탐독하고 그의 시편(詩篇)을 기억하곤 했다. 누군가의 표현에 따르면 “그 시절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시인들”이었으므로.동영상 끄트머리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구절이 덧보태져 있었다. 오호, 이건 정말 아닌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텔레그람`으로 그런 생각을 전했고, 시를 전공하는 친구가 요즘 인터넷 상으로 떠도는 유령(幽靈)의 실체를 밝히는 블로그를 연결해줬다. 사달의 출처가 어딘지 모르지만, 누군가가 쓴 자작시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 윤동주의 시처럼 둔갑해서 가상공간을 떠돌아다닌 지 제법 된다는 것이었다.다량의 지식과 정보가 인터넷으로 유통되는 첨단의 시대를 살고 있다지만, 이것은 지나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한국인이라면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윤동주 시인의 위작(僞作)으로 허름한 시편이 돌아다닌다는 것은 적잖은 슬픔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의 이태백이나 두보, 러시아의 아흐마토바, 일본의 마쓰오 바쇼, 영국의 바이런, 프랑스의 랭보, 이탈리아의 페트라르카를 참칭(僭稱)한 작품이 인터넷을 유령처럼 배회(徘徊)한다면 어쩔 것인가?!1948년에 출간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된 31편의 시가 윤동주 시인이 남긴 거의 모든 시작품이라고 한다. 이준익 감독의 흑백영화 `동주`에서 사촌인 독립운동가 송몽규와 함께 살아난 아름다운 시인이 위작소동을 알게 되면 섭섭해 할 듯하다.1917년 12월 30일에 태어나 1945년 2월 16일에 세상 떠난 시인 동주. 28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지상의 빛과 만났던 시인 윤동주. 그가 `인생의 가을` 운운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아니겠는가?!해마다 6월 6일이 되면 러시아 전체가 축제로 들썩거린다. 러시아 국민문학의 아버지이자 최초의 계관시인 푸쉬킨의 탄생 기념일이 6월 6일인 때문이다. 유럽으로 열린 창(窓) 페테르부르크에서부터 태평양에 면한 캄차카까지 푸쉬킨을 기리고 추억하는 축제가 온종일 열리는 것이다. 러시아인에게 러시아어로 러시아의 영혼과 습속, 문화와 종교, 사유와 인식, 역사와 철학을 설파했던 푸쉬킨. 시와 소설, 희곡과 평론에 이르기까지 그는 러시아 문학 자체였다.하지만 우리 한국인에게는 그런 시인이 없다. 시인이 없다는 말보다, 그런 시인을 기리는 한국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길거리에서 물어보라. 윤동주나 이육사, 김소월과 한용운 시인의 생몰연대 가운데 하나라도 알고 있는 한국인이 몇이나 되는지 확인해보라. 뭐, 그런 게 대수냐고 손사래 치는 분들이 많을 것은 불문가지. 하기야 부모형제의 생일이나 기일(忌日)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주류가 된 세상이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그럼에도 나는 특정종교와 결합하여 윤동주를 욕보이는 사람들이 언짢다. 사실관계조차 온전하게 파악하지 않은 채 인터넷으로 `인생과 가을`을 퍼 나르는 사람들이 우울하다. 그것은 한국의 대표시인에 대한 사랑과 존중에서 발원한 것이로되, 같은 이유로 그이를 훼손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우리가 진정으로 아끼고 기리는 시인이라면 그의 생애는 물론이려니와 작품 하나하나에도 관심을 가지는 것이 마땅하리라 믿는다.선의(善意)로 보내진 동영상에서 뜨악함을 느낀다는 것은 우울한 노릇이다. 시와 문학이 사라져가는 차가운 세태에 시를 동반한 동영상 송출은 찬양받을 일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수능시험에 나오는 몇몇 시들만 기계적으로 받아들이는 남루한 세대가 조속히 소멸하고, 시와 시인을 가까이하는 털북숭이 인간들(자마틴의 소설 `우리들`의 인물들)의 조속한 도래를 기원한다.

2017-12-01

포항을 생각하며

▲ 김규종경북대 교수·인문학부지난 15일 오후 2시 29분에 규모 5.4의 지진이 포항시를 엄습했다. 작년 9월 12일 발생한 규모 5.8의 경주 지진에 이은 천재(天災)다. 그날 경북대 대학원동에 있던 나는 건물의 강력한 동요에 화들짝 놀라 밖으로 튀어나갔다. 학과 독서실에서 공부하던 대학원생들을 데리고 운동장 부근에서 담소(談笑)한 기억이 생생하다. 너무나 오랜 세월 지진과 무관하게 살아온 한국인들에게 작년과 올해의 지진은 매우 낯설고 두려운 존재로 다가온다.포항 지진 이후 죽도시장에 손님들 발길이 뜸하다는 보도에 한숨이 났다. 경북대 수련원이 자리한 구룡포에 갈 때마다 죽도시장에 들러 푸짐한 횟감을 마련했던 일이 새삼스러운 탓이다. 어디 그뿐인가. 영덕과 울진 사이에 있는 칠보산 자연 휴양림에 갈 때에도 죽도시장에 들르곤 했다. 이제는 쳐다보지도 않지만, 고래 고기를 처음 맛본 곳도 죽도시장이었다. 사람처럼 지능지수가 높고 아이 키우듯 새끼를 기르는 고래를 먹는다는 것이 찜찜했던 탓이다.나한테 포항은 바다를 처음 보았던 곳이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경주로 수학여행 가기 전에 해병대 1일 입소를 위해 들렀던 곳이 포항이다. 어느 해변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너르고 맑은 모래사장과 바닷바람, 그리고 짠맛의 바닷물은 지금도 새록새록 기억난다. 민물과 확연히 다른 냄새가 났지만, 얼마나 짠지 확인하고 싶었기에 두 손에 바닷물을 움켜쥐고 맛을 보았던 것이다. 정말로 짠맛이 느껴지는 순간, 그것은 경탄(驚歎)으로 다가왔다.해병대 1일 입소를 마친 우리는 포항제철을 견학했다. 버스 한 대마다 선배들이 올라타서 포철의 역사와 신화를 자랑스레 선전했다. 대학 졸업하고 오면 100만원 상당의 캐비닛 크기 쇳덩어리를 주겠다고 호언장담했던 그들. 그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세월이 물 흐르듯 지나고, 포항은 경북대와 함께 다시 나를 찾아왔다. 경북대 구룡포 수련원과 뗄 수 없는 포항. 그리고 노문학과 엠티로 찾은 내연산과 보경사, 칠포 바다는 언제나 아름다웠다.언젠가 구룡포 수련원으로 부모님과 형제들을 초대한 적이 있었다. 2박 3일 일정의 여름휴가 동안 그이들을 유쾌하게 인도한 것은 강구의 홍게였다. 대게는 철이 아니어서 구할 수 없었지만, 홍게는 냉동고에 넣어 두고 한여름에도 판매하고 있었다. 게를 좋아하던 어머니는 “야야, 이렇게 맛있는 게는 처음이구나. 꽃게만 먹어보았으니 말이다.” 살이 꽉 들어찬 홍게를 그리 좋아하시던 어머니. 그 후로 강구 갈 일 있으면 대게와 홍게를 보내드리곤 한다.작년 초에는 장성한 아이들을 데리고 구룡포 근대골목을 찾았다. 일제강점기 구룡포에 거주한 일본인들의 집과 생활상을 돌아보는 일은 흥미로웠다. 생선회와 대게를 안주거리 삼아 아들들과 지난날과 다가올 날을 추억하고 기획하는 일은 뿌듯한 추억으로 남았다. 그렇게 포항은 내게 잊을 수 없는 여러 가지 기억으로 남은 곳이다. 나아가 앞으로도 인연을 맺을 곳이기도 하다. 경북대 인문학술원과 포항의 도시 인문학 사업도 그 하나다.최백호의 `영일만 친구`와 호미곶 일출로 널리 알려진 포항이 자연재해로 신음하고 있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알게 된 분 가운데 지진으로 집이 파손되어 지인(知人)의 집에서 생활하는 경우도 있다. 뭐라고 위로할 말을 찾기도 어렵다. 포항을 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한시바삐 전폭적인 지원을 해드려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지진 같은 자연재해에 태무심하고 대비책을 강구하지 않은 우리의 안전 불감증도 돌이켜볼 일이다.경북매일에 매주 금요일 `파안재에서`라는 칼럼을 연재하는 필자에게 포항지진은 남의 일이 결코 아니다. 포항시민 모두 용기를 내서 재난을 서둘러 극복하여 건강하고 행복한 일상으로 복귀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2017-11-24

나는 왜 영화를 보는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리치오토 카누도가 영화를 `제7의 예술`로 명명한 이후 만화와 텔레비전이 영화에 도전장을 내민다. 그러하되 영화의 질적-양적 우세는 여전하다.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가장 우세한 문화예술 장르를 거명한다면 단연코 영화다. 그야말로 한국인들이 첫손에 꼽을 만큼 친근하고 일상적인 문화와 예술의 향수품목 1위는 영화라 말할 수 있다. 인구 5천만의 나라에서 1천만 관객 영화가 심심찮게 출현한다는 것은 좋은 반증일 것이다.우리는 물론 충무로의 극단적인 명과 암을 안다. 절대다수의 영화계 인사들이 최저 생계비에도 턱없이 부족한 임금노예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그저 좋아서 하는 일이기에 그들은 오늘도 묵묵하게 인내하며 현장을 지킨다. 영화를 보면서 그들의 피와 눈물과 땀을 떠올리는 관객이 얼마나 될까, 자문(自問)한다. 영화가 끝나고 객석에 불이 켜지고, 자막이 올라가기 시작하면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객석은 어느새 텅 비어있다.`국제시장`이나 `명량`같은 `국뽕`영화도,`7번방의 선물`이나 `최종병기 활`, `덕혜옹주`같은 어불성설 영화도 무명(無名)으로 헌신한 분들의 노고가 없다면 성립 불가능하다. 그분들이 역사적인 사실 왜곡이나 허무맹랑한 희망사항의 관철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되, 수백수천의 노고와 투신(投身)으로 한 편의 영화는 만들어진다. 그럴진대 영화가 끝났다고 해서 곧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주차장으로 질주하는 군상(群像)의 태무심과 냉정함은 우울하기 그지없다.영화가 촬영된 장소는 어디고, 어떤 곡이 영화 음악으로 사용됐는지, 누가 도움을 주어서 영화가 만들어졌는지, 음미할 시간적 여유는 필요하지 않을까. 더욱이 상당한 고민과 심혈을 기울인 영화가 대중의 취향과 정서에 부합하지 못해서 흥행에 실패할 경우 그 문제점을 잠시나마 돌이켜보는 일도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닐까 한다. 영화보다 기술집약적이고 자본 중심적인 예술형식은 아직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매표구에서 현찰로 지급되는 입장료가 곧바로 생산현장과 연결되는 흥미로운 유통구조를 가진 영화. 그곳에서 감독과 배우의 성공과 실패가 일목요연하게 확인 가능한 예술장르 영화. 그런 까닭에 적잖은 인텔리가 영화에 손사래를 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업성과 예술성이 교묘하게 결합하여 야누스의 형상으로 대중을 바라보는 모순적인 예술형식을 가진 영화. 그렇기 때문에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영화의 진화 가능성은 더욱 확장될 수밖에 없다.영화계를 주름잡는 양대 세력이 여전히 유럽과 미국인 까닭이 거기 있다. 상당한 시간이 흘러서야 비로소 여타 지역은 소박하게나마 결전 가능성을 타진(打診)할 것이다. 해마다 미국과 유럽에서 거행되는 각종 영화제에 관심을 가지는 까닭은 세계영화의 근본적인 변화 가능성이나 질적인 도약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도달하고 있는 기술적-정신적 깊이와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얼마 전에 김훈 원작의 `남한산성`을 보러 갔다가 열패감에 휩싸인 일이 있었다. 200석도 넘는 영화관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홀로 영화를 본 것이다. 아, 이것은 아닌데! 그런 생각이 자꾸만 나를 엄습했다. 상당히 짜임새 있고, 치밀한 구성과 이야기 얼개를 가진 영화`남한산성`이 이렇게 냉대를 받는구나, 하는 생각에 침울해졌다. 어쩌면 실패한 역사, 패배한 역사적 사건에 냉담하게 등을 돌리고 싶은 20~30대가 많을지도 모른다.2017년 가을 한국사회의 일상 자체가 우울과 짜증과 분노와 절망으로 점철돼 있어서 영화에서마저 신산(辛酸)한 그림자를 확인하고 싶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실패에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나는 말한다. 처절하게 깨지고 토악질 날 정도로 무너져버린 역사에서 패배와 절망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붕괴의 최후지점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다시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멸망은 그런 사유와 인식의 부재에서 싹트지 않았던가?!

2017-11-17

연탄의 추억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예년과 달리 따사로운 가을햇살이 지속되고 있다. 아침저녁 한기(寒氣)만 아니라면 화사한 봄처럼 느껴지는 시절이다. 그러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나면 겨울은 문득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계절의 변화도 도둑처럼 오기 마련이다. 그러면 우리는 오래 전에 겨울이 왔던 것처럼 시끌벅적하리라. 여태 경험한 적 없는 맹추위가 찾아온 것처럼 너스레를 떠는 것이다. 그렇게 계절은 가고, 다른 계절이 오는 법이다.겨울이 가까우면 옛일이 생각난다. 산림녹화를 명분으로 박정희 정권은 연탄을 대체재로 제시했다. 무작정 상경한 50년 전 겨울, 서울 하늘에는 별이 초롱초롱했다. 언제나 모자랐던 저녁을 먹고 나면 엄마는 “가자!” 하고 형과 나를 재촉했다. 엄마는 커다란 고무 `다라이`를 머리에 이고, 우리는 양은 세숫대야를 들었다. 어른은 세 장, 아이들은 한 장씩 연탄을 공급받았다. 그렇게 하루저녁 다섯 장 연탄을 운반함으로써 하루일과를 마감하곤 했다.연탄은 탄광에서 캐낸 석탄으로 만든다. 탄광에서는 크고 작은 매몰사고가 일어난다. 지난 6일 전남 화순 광업소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23시간 만에 진화(鎭火)됐다. 천만 다행으로 교대 대기시간 중에 일어난 불로 인명피해는 없었다. 전남 유일의 화순탄광 일평균 석탄 생산량은 750t으로 작년에 22만4천t을 채굴했다고 한다. 여기서 생산한 석탄은 전국의 화력발전소와 연탄공장으로 공급된다.겨울을 나는데 필요한 에너지원으로 우리는 전기와 가스를 생각한다. 아파트에 거주하는 비율이 60%를 넘어섰고, 여기에 다세대와 연립주택을 더하면 75% 정도가 난방연료로 가스를 쓰고 있을 듯하다. 노년들은 전기장판과 담요를 필수품으로 여긴다. 그런데 전기를 만드는 주력으로 석탄을 빼놓으면 안 된다. 석탄 발전비율은 액화천연가스 32%에 이어 2위인 30%다. 원자력은 21%로 3위에 머물러 있다.얼마 전 정부가 발표한 10곳의 노후 화력발전소 폐쇄는 시의적절한 조치다. 중국발 황사나 미세먼지도 문제지만, 석탄발전소에서 배출하는 미세먼지가 과도하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청정한 대기를 제공하는 것 역시 복지정책의 일환이다. 지난 세기 60, 70년대 연탄가스 중독이 떠오른다. 해마다 수백의 인명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이승과 작별했던 우울한 기억.겨울이면 연탄가스 중독문제가 언론에 회자됐다. 어젯밤에 전국적으로 몇 사람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했다는 보도가 일상화되었으니 말이다. 날씨가 흐리거나 눈비로 인해 기압이 떨어지고 바람이 잦아드는 때면 언론은 앞 다투어 연탄가스 중독을 조심하라는 보도를 내야했다. 그러하되 가난하고 헐벗은 대다수 궁민(窮民)들은 속절없이 저승차사의 손에 이끌려 이승을 하직해야 했던 것이다.나 역시 저승문턱을 세 번 넘게 다녀왔다. “아침잠 적은 네 아버지가 일어나시다 비틀하면서 식구를 깨웠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런 말씀을 하고 팔순 노모는 여적 가슴을 쓸어내리곤 한다. 기억력이 과히 나쁘지 않았던 나 역시 예전 같지 않은 총기(聰氣)를 생각하며 우스개를 한다. “그때 연탄가스 안 맡았으면 아이큐가 세 자리는 될 텐데!” 하기야 대학 다닐 때까지 구공탄을 난방연료로 써야 했으니 당연지사 아닌가.화순탄광 화재사건을 보면서 어린 시절 연탄과 연탄가스를 생각한다. 별과 달을 보고 낑낑대며 구공탄을 날랐던 까까머리 소년. 가난했지만 여섯 식구가 밥상에 머리 맞대고 킬킬거렸던 그때를 떠올리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을 말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구공탄으로 겨울을 나야하는 이웃이 있다. 겨울 가까운 때에 그이들을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법하다.

2017-11-10

1517년, 1568년 그리고 2017년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1483~1536)는 비텐베르크 대학교회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한다. 반박문의 핵심은 교황청이 판매하는 면죄부의 능력과 효용성에 관한 것이었다. 교황청은 11세기 말부터 면죄부를 판매해왔다. 면죄부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죄를 용서하는 대가로 금품을 받고 발행한 증명서`로 그 심장부는 교황청이었다. 루터가 반박문을 내건 16세기에는 면죄부를 사면 그것을 구입한 사람은 물론, 이미 연옥(煉獄)에 있는 가족도 그곳을 벗어날 수 있다는 등 면죄부 폐해가 극대화되기에 이른다. 이에 루터는 성경에 근거를 두고 교황청의 상업성, 즉 돈을 받고 구원을 약속하는 종교계의 장삿속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약관 34세의 성직자가 면죄부를 팔아 부(富)를 축적하는 로마 교황청과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고, 교회의 부패상을 고발한 것이다.16세기 이후 유럽이 `지리상의 발견`과 자본주의로 근대를 열어나갈 때 교회는 과거의 유습에 허우적대고 있었고, 그 정점이 면죄부였다. 유럽의 근대를 생각할 때 종교개혁을 떠올리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불의하고 부패한 종교 세력에 대한 개인의 저항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루터가 권력과 불화하고 민(民)의 이해관계를 시종일관 대변했던 것은 아니다.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1777~1811)의 소설 `미하엘 콜하스`에 등장하는 루터는 영주의 부당한 통행세 징수에 거부하고 봉기한 마상(馬商) 콜하스를 지지하지 않는다. 종교개혁의 대의를 실천한 루터가 민중봉기로 심기가 불편한 왕가와 권력자에게 부역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소설의 루터가 현실의 루터와 얼마나 가까운지, 하는 것은 논외로 하자. 그럼에도 1568년은 루터와 종교개혁에 관하여 우리에게 적잖은 시사점을 던져준다.죽음을 목전에 둔 플랑드르의 화가 피터 브뤼겔(1527~1569)은 `장님의 우화(1568)`라는 그림을 그린다. 벼랑 위에 나있는 좁은 길을 장님 여섯 사람이 허위허위 걸어간다. 첫 번째 장님은 벌써 구덩이에 빠졌고, 두 번째 장님도 자신의 운명을 감지한다. 하지만 세 번째 장님은 아직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평온한 얼굴이다. 그 뒤를 따르는 세 사람의 장님 역시 태평한 얼굴이다.마을 한복판에 큰길이 있지만, 장님은 그 길을 걸어갈 권리가 없다. 그들은 어쩔 도리 없이 위태로운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녹음이 우거진 나무들로 보건대 계절은 여름으로 치달린다. 하지만 장님들은 두터운 겨울옷과 작별하지 못했다. 그들 모두 구덩이에 빠지리란 것은 자명하다. 그러하되 대로 뒤편에 서있는 교회는 침묵하고 있다. 장님들의 고단한 운명과 아무 상관없다는 표정이다.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반세기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사회적 약자의 권리는 신장된 것이 없다는 브뤼겔의 통찰이 아프게 다가오는 그림이다. `마태복음`에서 화제(畵題)를 따왔다는 `장님의 우화`는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면 모두가 구렁텅이에 빠진다`는 내용을 함축한다. 잘못된 지도자가 대중을 파멸로 인도한다는 것이되, `오불관언(吾不關焉)`하는 교회의 수수방관은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작년 10월 28일 시작된 촛불집회로 2017년 대한민국은 전기(轉機)를 맞이하고 있다. 연인원 1천600만이 참가한 촛불집회로 드러난 시대의 갈망이 정권교체로 확인되었다. 정권교체 이후 종교세 도입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천주교와 불교계의 일각은 종교세 도입을 환영하고 있지만, 대다수 개신교 쪽에서는 수용할 태세가 아닌 듯하다.한국사회의 성역 가운데 하나가 종교계다. 부자세습도 모자라 삼대세습을 일삼고, 부정과 불의가 일상화돼 있는 공간. 세상의 변화와 담 쌓고 성채(城砦)에 갇혀 사는 자들은 1517년 루터의 외침과 저항, 1568년 브뤼겔의 장탄식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017년 한국교회가 한번쯤은 성찰해야 할 사건과 인물들 아닌가 한다.

2017-11-03

국정감사 유감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해마다 가을이 오면 분주해지는 국가기관이 있다. 국회다. 입법-행정-사법의 삼권분립이 대한민국의 국가구성 요소의 핵심이라는 것은 주지하는 바다. 국회는 각종 법안을 제정하는 기관이지만, 행정부를 견제-비판하는 구실도 한다. 현대국가처럼 행정의 권한이 과도하게 비대해진 경우 국회가 수행해야 할 책무 가운데 하나는 올바른 비판과 균형 잡힌 견제의 기능이다. 이런 점에서 가을에 진행되는 국정감사는 심대한 의미를 가진다.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감사란 “법적 권한이 있는 기관이 단체나 조직의 업무상황을 감독하고 조사”하는 것을 뜻한다. 법적 권한을 가진 대표적인 감사기관은 감사원이다. 그러하되, 감사원장의 임면권은 대통령에게 있다. 반면에 국회는 다수당에서 의장후보를 내고 국회의원들이 찬반투표를 통해 의장을 선출한다. 그런 점에서 국회의 국정감사는 감사원 감사와는 그 형식과 내용을 달리 하지 않을 수 없다.지난 23일 경북대와 경북대병원, 강원대와 강원대병원 등을 대상으로 한 국정감사가 경북대에서 실시됐다. 경북대는 홈페이지를 이용해 감사실황을 생중계함으로써 정보소통과 공개에 노력한 바 있다. 그날 두 시간 남짓 진행된 국회의 국정감사는 실망스러웠다는 게 중론이다. 턱없이 부족한 시간도 그렇거니와 국가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인 경북대와 강원대를 대상으로 한 국감의 중요성을 의원들이 자각하지 못한 듯하다.자유한국당 아무개 의원은 할애된 시간을 초과하면서까지 강원대병원 문제만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고, 같은 당 소속 아무개 의원은 대학병원의 누적적자를 질타하는 호의를 보였다. 국감의 스포트라이트는 경북대 총장문제로 한정됐다. 간접선거를 통해 선출된 총장후보 1순위자가 아니라, 2순위자가 총장이 된 연유를 묻는 질문이 거푸 나왔다. 집권여당인 민주당 의원들이 연이어 쏟아낸 질문의 요체는 2순위자의 교육부와 청와대 청탁여부였다.전임정권의 실세로 불리는 최 아무개와 경북대 총장의 지연과 학연을 물고 늘어지는 구태마저 머리를 내밀며 적폐를 연출했다고 한다. 2순위자가 총장에 임명된 지 어언 1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우리는 2014년 9월부터 2016년 10월 하순까지 이어진 경북대 총장 부재사태를 기억한다. 문제를 해결하고자 2015년 5월의 태양 아래 세종시 정부청사 교육부 앞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연좌 농성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당일 국회를 방문했을 때 문제해결에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던 의원들을 우리는 낱낱이 기억한다. 그러나 1년여 세월이 흐른 뒤 문제해결의 돌파구는 교육부와 경북대 교수회 양자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그것의 종착점은 느닷없는 2순위자 낙점이었다. 지난 국감의 초점은 어떻게 2순위자가 1순위자를 떨어뜨리고 총장자리에 올랐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경북대 총장에게 진지하게 물은 국회의원들은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고 생각한다.사태의 핵심은 총장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결정을 내린 교육부와 청와대에 있지 않을까?! 정말로 경북대 총장선임 과정에 의구심이 있다면 당시 교육부장관과 정무수석 그리고 대통령에게 문제를 제기해야 하지 않을까. 국립대 총장부재와 2순위자 낙점이 어떻게 대한민국의 공교육을 거덜 내고 있는지, 대안은 없는지, 그것을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총장 궐위사태가 해결되고 난 이후 경북대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물어야 하지 않았을까?!진정 국립대 총장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문제해결을 위해 국회의원들은 지난 3년 넘는 세월 무슨 노력을 어떻게 진행했는지, 자못 궁금하다. 감사의 핵심은 당해 기관의 오류와 실패를 질책하고 건설적인 대안을 모색하는데 있다.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나 높이고, 같은 내용을 가지고 재삼재사 삿대질이나 하는 구태의연한 적폐감사는 바로 잡아져야 할 것이다. 이번 경북대 국정감사 실황을 보고 들으면서 느낀 소회다.

2017-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