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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초인과 초지능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2016년 3월에 서울에서 열린 이세돌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대결은 흥미로웠다. 인간계 최고수로 선발된 이세돌이 1승 4패로 밀렸다. 1, 2, 3, 5국을 알파고가 가져갔고, 이세돌은 4국을 건지는데 만족해야 했다. 4국 역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이세돌이 던진 끼움수에 알파고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 인공지능의 유일한 패착이었다. 2017년 5월에 알파고는 세계최강 커제 9단과 대결해 3전 전승을 거둔다. 열혈청년 커제는 바둑을 두다가 분을 삭이지 못한 나머지 얼굴이 붉게 상기되고 눈시울에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알파고는 불과 1년만에 바둑 분야에서 인간을 완전히 따돌리는 절정고수로 등극한다. 알파고는 은퇴하여 신계(神界)로 들어갔다고 한다.종횡으로 19줄 361개의 교차점에 돌을 놓아야 하고, 패라는 변수로 중무장한 바둑에서 인공지능이 인간을 상대하기는 버거울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었다. 하지만 불안한 징조는 이미 1997년에 감지되기 시작했다. 인공지능 딥블루가 세계 체스 챔피언 카스파로스를 물리친 것이다. 다시 20년만에 인공지능은 바둑에서도 인간의 능력을 추월한 것이다.일반적인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사람을 초인이라 부른다.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하게 될 초인과 도태하게 될 나머지 인간에 대한 스티븐 호킹의 우려가 언론에 보도됐다. 6년 전 ‘유전자 가위’ 기술이 개발돼 원하는 대로 특정 유전자 부분을 잘라 내거나 붙이는 방법이 열렸다. 이 기술은 치료가 어려운 유전적 질환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아이들의 치료에 쓰이고 있다. 호킹의 우려는 이것에 착안한 것이다. 그는 말한다.“인간은 금세기 안에 인간지능이나 공격성과 같은 본능을 바꾸는 방법을 발견할 것이다. 인간에 대한 유전공학을 금지하는 법안은 통과되겠지만, 일부 사람들은 기억력, 병에 대한 저항력, 수명 등의 특성을 개선하려는 유혹을 참지 못할 것이다.”호킹이 말하는 일부 인간들은 비상한 기억력, 질병에 대한 저항력과 면역력, 타인들과 비교 불가능한 장수 가능성 등으로 일반적인 인간과 구별된다. 그런 사람을 호킹은 ‘초인’으로 규정한다.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강력한 지배자 초인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르크스가 주장한 계급투쟁 대신 초인과 범인의 대결이 일상화할 가능성이 크다. 호킹은 이들 양자 간의 정치적 갈등과 대결, 그로 인한 파국을 경고한 것이다.하지만 나는 초인에 초지능을 보태고 싶다. 인공지능의 능력을 최대한 확장한 초지능의 등장 역시 평범한 인간들의 강력한 적대세력이 될 공산이 크다. 단순히 공부하고 연산하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고 자유의지로 결정하는 초지능! 인간의 조력자이자 충실한 종복(從僕)으로서 인공지능(로봇)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사유하고 행동하는 초지능의 출현! 일부 미래학자들은 초지능의 도래가 아무리 늦어도 2050년 무렵이라고 확언한다.초인의 조건이나, 초지능의 소유는 모두 거대자본과 결부된다. 특정한 부자들만 유전자 조작으로 초인적인 능력을 얻을 수 있다. 오직 그들만이 자기네가 원하는 초지능의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다. 따라서 20:80이나 1:99의 사회가 아니라, 0.0001 : 99.9999의 대결이 일상화될 수 있는 것이다. 200년 전인 1818년에 태어나 계급투쟁과 그것에 기초한 사회주의의 도래를 예견한 마르크스도 예상하지 못한 신세계의 문턱에 우리는 서 있다.2018년 시점에 장밋빛 전망으로 자주 다뤄지는 4차 산업혁명 논의는 섬뜩한 점도 없지 않다. 미증유의 과학기술 문명의 결과에 인류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터미네이터’와 ‘매트릭스’, ‘엘리시움’의 세계가 멀지 않다.

2018-10-19

하토야마 유키오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지난 10월 2일에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총리가 부산대에서 명예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부산대가 밝힌 명예박사 수여의 변은 이러하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한국에 대한 인식이 깊고 식민지 역사문제에 대해서도 일본이 과거를 미화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보여 온 정치 지도자다. 향후 동아시아 번영과 한일 양국의 관계발전에 힘이 돼 줄 것으로 기대한다.” 전통적으로 정치적인 가문의 일원인 그는 2009년 8월 30일 일본 총선에서 민주당의 승리를 진두지휘한다. 자민당이 60년 넘도록 독점해온 권력의 지형도를 일거에 바꾼 인물이 하토야마 유키오다. 한국에서 1998년 정권교체가 일어난 지 11년만에 일본에서도 정권이 바뀐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다이나믹 코레아!’가 선진적인 면도 있다. 2차대전 이후 생겨난 국가들 가운데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번영을 이룬 유일한 나라 대한민국!그의 민주당 정권은 이내 막을 내린다.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강도 9.0의 동일본 대지진 참사 수습에 실패하면서 정권이 자민당으로 넘어간 때문이다. 그럼에도 총리대신으로 그가 말했던 ‘탈미입아’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1868년 명치유신 이래 일본이 금과옥조로 삼았던 ‘탈아입구’를 대체하는 용어가 나왔기 때문이다. 오키나와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문제를 공식화하는 행보는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2015년 8월 12일 하토야마 유키오는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하고, 일제의 식민지배와 독립운동가들의 고문과 살해를 사죄한다. 그가 순국선열추모비에 헌화하고 무릎을 꿇은 채 사과하는 장면은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것은 1970년 12월 7일 비 내리는 바르샤바의 유태인 위령탑 앞에 무릎 꿇고 나치 독일의 범죄를 사죄하면서 폴란드 국민에게 용서를 구한 빌리 브란트의 행동을 연상케 한다.하토야마 유키오는 10월 3일 경남 합천 원폭피해자복지회관을 찾아 위령각에 참배하고 피해자들을 위로하였다. 합천은 원폭피해자가 많이 거주하는 곳으로, 한국의 히로시마로 불린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사망한 조선인 피해자들의 영령을 위로하는 위령각과 복지회관, 자료관이 들어서 있다. 무릎걸음으로 피해자들을 만난 하토야마 유키오는 진정어린 사과로 참석자들의 공감과 용서를 얻어냈다고 한다.그가 부산대에서 행한 ‘아시아 평화와 동아시아 공동체 구축’ 제하의 강연은 많은 것을 함축한다. 아시아의 평화를 실현하고, 공동체 건설은 과거의 범죄사실을 적시하고, 피해 당사자들에게 진정으로 사죄하는 것이 선결조건이다. 전범국 일본이 원폭피해자를 자처하면서 자국의 전쟁범죄를 끝내 부인하는한 아시아의 평화와 공동체 구축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히틀러의 나치가 자행한 전쟁범죄에 대한 빌리 브란트의 진정한 사죄는 훗날 ‘동방정책’의 뿌리가 되었고, 동서독 재통일의 밑거름이자 ‘유럽연합’ 출범의 신호탄이었다. 평화와 공동체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하토야마 유키오의 조용하되 깊은 울림이 있는 행보에 동의를 표하는 것이다. 아베 내각의 퇴행적인 정치행태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길을 가는 하토야마 유키오.지난 4월부터 한반도에는 미증유의 대격변이 일어나고 있다. 분단 70년의 상처와 고통을 뒤로 하고, 문명사적 대전환을 이뤄내려는 열렬한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남한과 북한, 북한과 미국, 북한과 일본의 관계가 ‘평화’와 ‘공동체’ 명의로 재편되기를 갈망한다. 그런 점에서 하토야마 유키오의 방한과 행보는 의미심장하다 할 것이다.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8-10-12

교복과 두발 자유화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얼마 전 서울교육청에서 두발 자유화와 편안한 교복 방안을 발표했다. 머리털 길이는 물론이려니와 파마와 염색도 허용하겠다는 것이 두발 자유화의 골자다. 아울러 학생들의 불평과 원성의 대상인 교복도 자라나는 학생들의 신체에 적절하고 편안하도록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 기본 방침이다. 이것을 두고 사람들이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는 형편이다. 한국에는 수많은 전문가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교육과 의료, 아파트 세 영역에는 헤아릴 수 없는 강호제현들이 가공(可恐)할 신공을 펼치며 군웅할거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강호제현이 관여하려는 분야가 점입가경 확대일로를 걷는다는 점이다. 청년실업, 노인복지, 낙태문제, 남녀혐오, 신도시와 그린벨트 해제, 국민청원을 둘러싼 찬반양론 등등. 이렇게 대단한 나라의 공복(公僕)으로 ‘감위천하선’하는 분들의 노고가 새삼 대견스러운 것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교복폐지와 두발 자유화를 주장해왔다. 교복은 제복이며,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통제와 억압의 기표(記標)다. 군대와 감옥과 학교의 차이가 있는가?! 같은 제복을 입고, 같은 시각에 같은 곳을 바라보고 전원 통제하는 일방향 감시체제의 공간이 학교와 감옥 그리고 군대다. 그런 곳에서 자유로운 영혼과 미래의 꿈과 희망을 설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강제되고 획일적인 일상이 무반성적으로 되풀이되는 전체주의적 공간! 한국 중고교교육은 대입이라는 하나의 과녁으로 수렴돼있다. 확고부동하고 유일무이한 최종목표가 설정돼 있기에 다른 것은 논의대상조차 아니다. 하지만 보라. 전체 학생의 몇 퍼센트가 이른바 명문대학에 입학하는가? 극소수의 성공적인 대입을 위해 얼마나 많은 영혼이 스러지고 메말라가고 있는가. ‘탈학교’ 행렬이 여전히 늘어가고 있는 현실은 무엇을 입증하는가?교복폐지는 거리를 누비는 숱한 이 나라 제복들 가운데 청소년을 제외하자는 것이다. 두발 자유화는 폐지되는 교복과 더불어 학생인권과 민주주의를 신장하는 계기로 작동할 것이다. 학생 개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존중하면, 스스로 성숙하고 사려깊은 판단과 행동을 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요즘 학생들은 ‘스마트폰’으로 중무장한 세대다. 그들은 지식과 정보의 총량에서 기성세대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다. 그런 청춘을 19세기의 익숙한 울타리로 몰아넣고 전근대의 표상 ‘프로크루스테스’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모두가 교육 전문가인 기성세대는 말한다. “청소년 탈선문제는 어쩔 것이며, 누가 책임질 것인가?” 그들은 개인의 자유의지와 윤리적 판단과 실천을 도무지 믿지 않는다. 논리의 밑바닥에는 ‘어리고 미숙하며 철딱서니 없는 청소년’이란 금과옥조가 자리한다. 학부모와 교사가 지도하고 선도하지 않으면 어린것들은 타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야 말 것이라는 확고부동한 믿음이 신앙처럼 굳건하게 버티고 있다.‘자유’라는 단어는 ‘나로 말미암다’는 뜻이다. 하나의 선택과 그것이 야기하는 모든 과정과 결과까지 내가 책임지겠다는 의미가 온축돼 있다. 청소년들이 어릴 적부터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훈련시키지 않은 자신들을 반성하지 않고, 그것을 억압적인 교복과 두발에 의지하는 자세는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한국의 청소년 문제는 가정교육의 부재에서 발원한다. “공부만 잘 하면 돼! 나머지는 아무것도 아니야!” 유치원부터 고3까지 15년 넘는 세월을 그렇게 가르친 학부모의 무한욕망이 만들어낸 것이 이른바 청소년 문제다. 어떤 숭고하고 아름다운 목적도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자명한 이치를 숙고했으면 좋겠다. 편안한 교복, 아니 교복폐지와 두발 자유화가 가져올 자유로운 개인과 성숙한 민주사회를 그려본다.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8-10-05

‘툴계녭의 언덕’, 읽으셨나요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메리 셸리(1797∼1851)가 ‘프랑켄슈타인’을 출간한 1818년 러시아에는 잊히지 않을 인물이 태어난다. 산문시와 소설, 희곡 모두에서 천품을 발휘한 이반 투르게네프(1818∼1883)가 주인공이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와 더불어 19세기 러시아 황금시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심훈의 ‘상록수’를 읽다 보면 기시감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은 투르게네프의 ‘처녀지’ 때문이다.일본의 근대를 이식받은 식민지 조선 문인들이 열광했던 작가 가운데 하나가 투르게네프라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다. 일본 지식인과 문인들 역시 투르게네프의 문학적 성과에 매료되었다고 전한다. 그런 배경에는 ‘뜬구름’의 작가이자 러시아문학 번역가였던 후타바테이 시메이(1864∼1909) 같은 인물의 열성적인 노력이 자리한다. 뛰어난 원작과 성실한 번역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문학의 융성과 발전을 추동하는 원동력이다.젊은 날 윤동주의 ‘툴계녭의 언덕’을 읽고 망연해진 적 있었다. 제목에 들어있는 어휘 ‘툴계녭’이 너무 친숙했던 때문이다. ‘저건 분명 투르게네프지!’ 그런 확신에 전신이 짜릿해지는 것이었다. 헌책방에서 구한 시집에 있던 ‘툴계녭의 언덕’. 우리는 오늘날 그것을 ‘투르게네프의 언덕’으로 읽는다. 당대의 사회적인 분위기가 살아나지 않는 듯하여 아쉬운 마음도 있지만.러시아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투르게네프의 산문시에 주목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만년의 투르게네프가 인생의 깨달음과 소회를 질박하고 깊이 있게 드러낸 걸작이기 때문이다. ‘거지’(1878)는 그 가운데 하나다. 길 가던 시인이 거지를 만난다. 새빨간 가난에 무너져버린 거지가 그에게 적선의 손을 내민다. 주머니란 주머니는 모조리 뒤져 보지만 시인에게는 돈과 시계는커녕 손수건도 없다. 거지의 손을 황망하게 잡아주는 시인. 거지는 몹시 미안해하는 시인에게 ‘그것도 적선’이라며 고마움을 전한다.동주의 ‘툴계녭의 언덕’은 전혀 다르다. 연희전문 2학년 시절에 쓴 시에서 시인은 인도적이며 낭만적인 투르게네프와 사뭇 반대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갯길을 넘다가 거지 소년 셋과 마주치는 시인. 무서운 가난에 삼켜진 아이들의 묘사가 우리를 전율케 한다. “텁수룩한 머리털, 시커먼 얼굴에 눈물 고인 충혈된 눈, 색 잃어 푸르스럼한 입술, 너들너들한 남루, 찢겨진 맨발이었다.” 시인도 이 장면에서 러시아 시인처럼 주머니를 뒤진다.식민지 조선 시인에게는 모든 것이 있었다. 두툼한 지갑도, 시계도, 손수건도. 하지만 시인은 그것을 만지작거릴 뿐 내주지 않는다. 그에게는 ‘용기’가 없다. 이야기나 해볼 요량으로 “얘들아!” 하고 부르지만 아이들은 흘끔 돌아볼 뿐 제 갈 길을 간다. 아무도 없는 언덕에는 짙은 황혼만이 밀려올 뿐이다. 왜 동주는 적선하지 않았을까?! 돈이나 시계는 몰라도 손수건은 줄 수 있지 않았을까?! 투르게네프처럼 아이들 손이라도 잡아줄 수 있지는 않았을까?!용정의 부모가 보내주는 월사금으로 공부하는 유학생이라 해도 그의 시에 내재한 영혼과 정신은 분명 적선을 요구했을 터. 일회적인 적선이 소년들을 가난에서 해방하지는 못한다 해도 인간적인 동정과 연대감 표시 정도는 해야 하지 않았을까?! ‘프랑켄슈타인’에서 셸리는 창조주의 위치로 올라서려는 인간의 욕망과 비겁함과 무대책을 그려낸다. 투르게네프는 ‘거지’에서 공감과 연대를 보여준다. 반면에 동주는 대학생의 화사하고 소심한 자아에 멈춰있다. 연민과 동정과 연대가 사라진 문학에는 예술혼과 미래가 없다.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손을 내밀어야 한다. 장자의 ‘학철지부’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갈급한 지경의 사람들과 공감하고 연대해야 한다. 그것이 도리이기 때문이다. 잠시 옛시인들을 돌이키는 가을날이다.

2018-09-28

2018년 추석을 맞으며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다시 팔월 한가위 추석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이나 친지를 찾아 나라 곳곳으로 이동하는 진풍경을 되풀이하는 시절. 들판의 벼가 고개 숙인 채 누렇게 익어가고 있지만 본격적인 수확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지난 여름 우심한 폭염의 무더위와 솔릭 태풍과 때 아닌 폭우(暴雨)로 농부들의 심사는 편치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추석명절을 기다려왔다. 그것은 분명 예정된 만남과 그것이 선사하는 즐거움과 흔쾌함 때문일 것이다.추석을 목전에 둔 시점에 남과 북의 최고 정치 지도자들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다시 머리를 맞댔다. 4월 27일, 5월 26일에 이어 9월 18일 세 번째 정상회담을 가진 것이다. 이제는 고인(故人)이 된 김대중-노무현 두 분 집권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한 차례씩 정상회담을 했지만 이렇게 1년에 세 차례 넘도록 얼굴 맞대고 중차대한 사안을 논의하기는 처음이다. 21세기 문명사적 대전환이 바야흐로 한반도에서 생겨날 조짐이 보인다.추석이 오면 나는 예외없이 서울로 길을 재촉한다. 승용차에 이런저런 농산물을 싣고 모친을 뵈러 300㎞ 여정에 오른다. 형제자매와 친척은 물론이려니와 40년 지기(知己)들을 만나는 유쾌함은 필설로 형언하기 어렵다. 얼마 전에 정년을 맞은 친구들과 회합하는 자리에서 “우리 어머니께 인사드리러 오렴!”하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친구들 부모님들은 모두 돌아가셨고, 유일하게 나의 모친만 생존하신 때문이다. “그래!” 하는 대답이 들려온다.그래서다. 내가 이번 추석을 예년보다 기대하는 까닭은 나의 가까운 벗들이 어머니를 찾아뵙고 인사드리는 일정이 잡혀있기 때문이다. 언제 세상과 작별하실지 모르는 어머니가 40년 전부터 내 ‘절친’으로 지내왔던 벗들을 만나보는 일은 적잖은 기쁨일 것이다.서울과 청도를 오가는 길에서 대면하는 허다한 미지(未知)의 군상이 보여주는 관습과 풍경은 언제나 흥미로운 관찰대상이다. 옷차림과 걸음걸이, 가족관계와 얼굴표정 하나하나 추석명절이 선사하는 환희와 생동감을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조금은 가볍고 우울한 주머니 사정이라 해도 그런 내색하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서두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은 살아있음을 재삼재사 확인하는 작업과 전혀 동일하다.다만 한 가지 저어되는 것은 아홉 마리 닭의 먹이활동이다. 싸라기와 옥수수 사료를 5대5로 배합한 마른 식사와 배추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제공하는 야채식단이 사나흘 중단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웃에게 부탁할까 생각은 하지만 명절의 번다함과 혼란스러움, 소란과 소음을 한껏 향수할 권리를 그이들에게서 빼앗는 것 같아 적이 조심스럽다. 하지만 이런 정황에도 불구하고 한가위가 주는 기쁨은 줄어들지 않는다.요즘에는 곤충들의 습격을 받은 감이 불그스레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10월 말 이후 본격적으로 출하되는 홍시 이전의 ‘홍시’가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4년 전 추석 때 녀석들을 따서 서울로 가져갔을 때 처음으로 나는 알게 되었다. 모친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홍시라는 것을! 그 후로 해마다 추석이 되면 벌레들의 선물을 김치통에 가득 담아서 가져가곤 한다. 그걸 보고 기뻐할 노모의 주름진 얼굴이 그려진다.세상이 비록 공평하지 않아도 잠시 그런 생각 접어두고 가족과 이웃과 친구들과 덕담 나누고, 풍요로울 미래를 그려보는 것은 작은 행복이다. 여전히 남과 북의 대립과 갈등을 부추기는 정당과 언론들과 투기꾼들이 있지만 언젠가 그들도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 공동체의 화합에 동참하리라 믿는다. 추석을 맞으면서 가족과 친지의 범위를 크게 넓혀보면 어떨까, 하는 기막힌 상상을 해보는 게다. 이번 한가위 보름달은 한없이 크고 밝으면 좋겠다.

2018-09-21

걸신들린 자들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걸신(乞神)’은 “몹시 굶주려 음식을 지나치게 탐하는 상태나 그런 사람”을 일컫는다. 단언컨대 2018년 9월 한국사회의 정치-경제-종교-언론 부자들은 걸신들린 자들이다. 천정부지로 오르는 아파트값을 더 올리려 눈 빨간 투기세력은 돈에 걸신들려 있다. 조물주 위에 군림하면서 임대인을 행주처럼 쥐어짜는 건물주들도 걸신들린 자들이다. 분단 70년 남북관계에 새 역사를 쓰려는 정부의 발목을 악랄하게 잡아채는 정치인들은 권력에 걸신들린 자들이다. 북한의 세습은 목청껏 욕하면서 교회권력 세습하는 종교인 무리는 돈과 권력에 걸신들린 노예다. 자영업자들의 경영난이 오로지 최저임금 인상이라 호도하는 언론재벌과 기자들은 매판자본과 지식에 걸신들린 영혼 없는 자들이다.사법권을 정치권력에 팔아넘긴 법원과 판사들은 권부의 걸신이다. 돈 주면 애 낳을 것이라는 환각과 미몽에 사로잡혀 ‘출생주도 성장정책’이라는 희대의 망언을 뇌까리는 정치인들은 여성을 출산기계로 생각하는 걸신들린 장사치 후예들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퀴어 축제를 폭력적으로 저지하는 자들은 시대착오적인 종교관에 미혹된 정신질환의 걸신이다.허구한 날 드라마로 시작해 드라마로 끝나고, ‘먹방’에서 출발해 ‘먹방’으로 끝나고, 노래와 춤으로 시작해 그걸로 끝나는 쇼 프로그램 기획하는 방송인들은 오락과 유흥에 걸신들린 자들이다.청년 일자리 창출과 이윤의 균분(均分)에는 태무심하고, 권부에 줄 대서 총수지위 세습하는 재벌 자식들은 금수저의 걸신이다.국민들의 생명과 재산보호는 안중에도 없고, 최고 권력자를 위해 복무한 장성들은 권력에 포섭된 우매한 걸신이다. 영원한 깨우침과 해탈에는 관심 없고, 세속의 권력과 육욕과 물질을 탐하는 승려 무리는 탐욕의 걸신이다. 도반들이여, 붓다가 일갈했던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은 어디로 갔는가? 말해보라!이렇게 보면 한국사회에 올바르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없는 듯하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99% 절대다수 한국인은 정직하고 성실하며 탄탄한 세계관으로 무장한 민주시민이다. 그런데도 걸신들이 대한민국을 배회하는 까닭은 무엇인가?!그들이 하나처럼 과도한 욕망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노예이기 때문이다.욕망을 넘어선 탐욕의 노예들이 이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누란지위 형국이다. 그자들이 욕망의 최종 방어선을 무참하게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상생의 마당, 대한민국 공동체가 흔들리고 있음을 뜻한다. 우리의 조국이 쩍쩍 금가는 소리가 들린다.탐욕스러운 투기세력과 건물주, 불의한 재벌과 민족도 역사의식도 없는 정치인, 믿음도 꿈도 없이 물신에 젖어버린 종교인, 권력에 몸을 판 판관과 장성, 사주의 포로가 된 미망의 언론인과 방송인. 이들은 누구인가?!스스로 잘났다는 자존심과 학벌과 혈연과 지연으로 엮어져 이 나라를 좌지우지한다는 환상에 젖은 자들이다.그들을 위한 공자의 처방이 있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말라!” (논어 ‘위령공’) 유대사상의 초석을 놓고 ‘토라’의 의미를 공자처럼 해석한 힐렐도 같은 가르침을 준다.그이들의 결론은 하나다. 그대들처럼 타인도 욕망하고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각성하라는 것이다. 우리 어린것들과 그 미래를 생각한다면 이제 그만하라. 걸신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풍요로운 영혼과 정신의 신생(新生)을 그려보라!

2018-09-14

휴대전화와 학교교육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얼마 전에 생선횟집에 들른 적이 있다. 40, 50대 중년배 서넛이 소주잔을 기울이는 저녁나절 번다한 시장통 횟집풍경은 평안하고 따사로웠다. 생선 비린내가 코를 간질이는 횟집에서 이색적인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서너 살 남짓한 어린애가 휴대전화 동영상을 들여다보고 있다. 일손 부족한 가난한 부부가 횟집을 운영하면서 아이에게 동영상을 틀어준 거였다. 아이는 장난감 만지듯 익숙한 손놀림으로 휴대전화를 놀리고 있다.‘햐, 이것 참 고약하군!’ 소리 내지는 않았지만 뭔가 아픈 소리가 내장을 거쳐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이다. “재미있니?!” 하고 물어본다. 고개 끄덕이는 아이를 보고 엄마가 조금 안쓰러운 표정이다. 저 나이에 벌써 휴대전화 동영상이라니! 앉거나 누운 채 소리와 영상에 홀린 것처럼 동영상에 몰두하는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일은 간단치 않은 노릇이었다. 세월이 더 많이 흐르면 어떤 일이 생길까, 하는 궁금증이 일어나는 시장골목 횟집정경.각설하고, 프랑스는 2018년 9월 3일부터 유치원과 초등학교, 중학교에서 휴대전화 사용을 전면 금지했다. 지난 7월 30일 프랑스 의회가 유치원과 초중등학교의 휴대전화 사용금지 법안을 통과시킨 것에 따른 조치다. 긴급 상황이나 장애학생이 아니라면 수업시간은 물론이려니와 쉬는 시간에도 휴대전화 사용이 금지된 것이다. 휴대전화를 가지고 등교할 수는 있지만, 학생은 휴대전화 전원을 끄거나, 사물함에 넣어두어야 한다.고등학생들의 경우에는 고교마다 재량에 따라 휴대전화 사용을 금지시킬 수 있다. 이런 조치를 취하게 된 배경이 자못 흥미롭다. 블랑케 교육장관에 따르면, 휴대전화 사용금지는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는데 도움을 주리라 한다. 이와 아울러 휴대전화 금지는 학생들의 교제를 증장시키고, 왕따를 줄이며, 절도와 학교폭력 감소에도 기여할 것을 목표로 한다. 하나의 돌로 여러 마리 새를 잡는 효과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주지하듯 오늘날 휴대전화는 안부 주고받는 용도를 훌쩍 뛰어넘는다. 오락은 물론이려니와 최신정보와 지식으로 넘쳐난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는 실시간으로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사고와 대면한다. 최고의 양질(良質)로 손보아진 사진이나 동영상과 함께! 사정이 이러다보니 유아와 청소년은 물론 중장년과 노년에 이르기까지 똑똑한 전화기 스마트폰은 그저 휴대전화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21세기 문명의 총아로 거듭나고 있다.하지만 세상일은 언제나 빛과 그림자, 새옹지마(塞翁之馬)로 점철돼 있다. 일출과 일몰이 이어져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내가 주목하는 휴대전화의 폐해는 온라인상에서 발생하는 다채로운 양상의 폭력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라 불리는 가상공간에서 낮밤 가리지 않고, 남녀노소 불문하고, 신상털이와 무차별적인 인신공격이 난무하는 현실이다. 어제의 연인과 친구가 오늘 나의 신상을 털고, 나를 무고(誣告)하는 무법천지 인터넷 세상.그로 인해 하루가 멀다 않고 등장하는 숱한 고소고발 사건으로 지구촌은 날마다 신음한다. 문명의 이기(利器)로 인류가 축적한 무형의 지식과 정보를 무한 공급하는 거대원천이 느닷없이 인간을 매도하고 사회적 타살로 유도하는 도살장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원초적인 책임소재 하나가 스마트폰 휴대전화다. 그런 까닭에 프랑스 교육부가 왕따와 학교폭력 감소를 휴대전화 금지목표로 설정한 것은 설득력을 가진다. 우린 어쩔 셈인가?!어린 나이부터 전자기기에 노출되는 어린것들의 생물학적 성장이 저어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과 완전 격리되어 성장하는 어린 세대의 교육이 걱정스럽다. 벼와 밀을 쌀나무, 밀나무로 알고 성장할지도 모를 횟집아이의 미래를 잠시나마 걱정해보는 아침이다. 이런 기우를 높푸른 하늘의 맑은 바람이 휩쓸고 지나가기를….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8-09-07

소득주도 성장정책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택시를 타다보면 민심의 변화를 가늠할 수 있다. 지난 4월과 5월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고, 6월에 북미정상회담까지 성사되었을 때 대통령과 민주당 지지율은 고공행진을 거듭했다. 그러나 시간과 더불어 남북문제가 뒷전으로 밀리고, 한국경제가 세간의 관심사로 대두하자 상황이 급변한다.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언론과 야당들은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을 교체하라고 이구동성으로 아우성친다. 나의 택시기사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게 능사일까?!지난 8월 26일 장 실장은 기자간담회를 열어 소득주도 성장정책의 필연성과 당위성을 주장했다. 한국경제는 소비가 성장을 견인하지 못하는 구조인데, 그 까닭은 경제성장이 소득증대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의 과실(果實)을 국민 개개인이 아니라, 재벌이 대표하는 기업들이 거둬갔다는 얘기다. 더욱이 기업들은 경제성장의 과실을 투자확대와 임금인상이 아니라, 사내유보금 형태로 유지하고 있는 것 또한 심각한 문제라 할 것이다.그와 더불어 우리나라는 고소득층과 저소득층의 불평등이 심화하여 내수확대도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다. 예컨대 2016년 기준 소득상위 10%와 하위 10% 노동자의 임금격차는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국가 가운데 세 번째에 해당한다. 1년 미만의 단기고용 노동자 비중도 2위에 기록될만큼 고용불안이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경제상황에 대한 분석이 이 정도면 그에 상응하는 대책이 나와야 한다. 그것을 장 실장은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이라 부른다. 소득주도 성장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방침이 최저임금 인상이다. 저소득층의 불안정한 고용과 미흡한 소득을 확충하는 차원에서 실행되는 바람직한 정책이 최저임금 인상인 셈이다. 보수언론과 야당들은 마치 최저임금 인상 때문에 자영업자들이 폐업하고 몰락하는 것처럼 호들갑떨면서 사태를 호도한다. 문제는 조물주 위에 있다는 건물주의 행악질과 로열티와 카드 수수료같은 것으로 갑질하는 은행과 재벌 대기업의 횡포, 정비되지 않은 각종 제도에 있다. 장 실장은 기자간담회에서 혁신성장이 일자리 창출과 가계소득 증대의 기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혁신성장이 이뤄지면 양질의 일자리가 확충되고, 그 결과 개인과 가계의 소득이 늘어난다고 한다. 따라서 소득주도 성장정책과 혁신성장은 쥐포의 양면처럼 분리 불가능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희망처럼 일자리가 늘어나고, 저소득층의 수입이 증대한다면, 내수도 살아나고 경기가 활성화됨으로써 경제도 성장하는 선순환구조가 안착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조금 여유를 가지고 인내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차분한 눈과 마음으로 상황을 지켜보는 자세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지금’과 ‘여기’에 함몰되어 4대강 사업같은 토건으로 단기적인 성장을 꾀하거나 무분별한 규제완화를 남발함으로써 ‘언 발에 물을 부은’ 전임 정권들과 달리 정해진 정책기조를 밀고 나갈 수 있도록 지켜보는 것도 미덕 아닐까. 이와 아울러 ‘상가임대차보호법’ 같은 민생법안은 놔둔 채 입으로만 민생을 외치고, 건물주 이익옹호에 앞장서는 파렴치한 야당의 행태도 문제라고 생각한다.아시아 경기대회 축구대표팀 김학범 감독이 황의조를 발탁했을 때 얼마나 많은 비난과 욕설이 난무했는가?! 그가 우즈베키스탄 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입을 다물었다. 조금만 여유롭고 관대하게 세상을 바라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 간절한 아침이다.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8-08-30

출산 권하는 나라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1921년 11월 ‘개벽’ 월간지에 현진건의 단편소설 ‘술 권하는 사회’가 실린다. 소설의 주인공인 젊은 부부는 결혼한 지 7∼8년이 되건만, 실제로 같이 지낸 세월은 1년 남짓. 아내는 동경 유학생 남편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했으나, 돌아온 그는 날마다 술타령이다. 어느 날 새벽 두 시, 고주망태가 된 남편에게 아내가 묻는다. “누가 이렇게 술을 권했는가요?” 남편 가로대 “이 사회란 것이 술을 권했다오!” 아내는 ‘사회’라는 어휘를 알지 못한다. 아내와 말이 통하지 않는 남편은 무너지는 억장을 두드리며 다시 나가버리고 아내는 서글픈 마음에 혼잣말한다.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근대화를 이룬 일제(日帝)를 배우러 유학 떠난 남편과 구시대 습속과 문화에 익숙한 아내의 소통불능에 기초한 ‘술 권하는 사회’. 식민지 조선 지식인들의 명예욕과 자리다툼으로 인한 분열에 괴로운 남편의 유일한 출구가 음주인 것을 아내는 끝내 헤아리지 못한다.두 사람이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은 대상을 바라보는 엇갈린 시선에 있다. 중학을 마친 남편이 공부하러 동경에 있던 세월 아내는 ‘공부’를 도깨비 방망이로 생각한다. 그녀의 물질적인 욕망을 일거에 해소해주는 신묘한 화수분 같은 공부. 그러하되 남편은 신문물과 사상, 변화된 세상을 공부에서 찾으려 한다. 나아가 그것을 토대로 조선의 변화와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지만, 그것은 백일몽(白日夢)이 되어버린다.‘술 권하는 사회’ 이야기를 꺼낸 것은 툭하면 불거져 나오는 저출산 문제 때문이다. 세계최저 수준으로 곤두박이질친 한국의 출산율을 걱정하는 목소리들 탓이다. 2025년이면 초고령 사회로 진입한다는데, 이렇게 출산율이 낮으면 한국사회는 어떻게 되겠는가, 장탄식 늘어놓는 언론보도가 하루가 멀다 않고 얼굴 내민다. 언론은 지금과 미래의 노인들을 부양하기 위해서라도 가임 여성들이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주장한다.그런데 생각해보자. 신생아가 미래 한국의 동량(棟梁)이 되고자 태어난다고 생각하시는가? 노인을 부양하는 산업 역군으로 아이들이 등장해야 한다고 믿으시는지? 아이에게는 나름의 인생과 미래와 꿈이 있어야 한다. 아이들은 지금과 여기의 우리를 책임져야 하는 산업 예비군이 아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이 노인세대 봉양을 위해서가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모든 삶에는 나름의 인과율과 연기(緣起)가 작동한다.지금 세상은 참 빨리 변하고 있다. 똑똑한 전화기 ‘스마트폰’이 상용(常用)화된 것은 불과 10년 전 일이다. 그 후 스마트폰은 어떻게 진화했는가? 페이스북과 트위터, 카카오톡과 텔레그램이 우리 삶 속으로 침윤한 것 또한 불과 10년 남짓하다. 하지만 그것들이 불러온 변화의 폭과 깊이는 상상하기 어렵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여성들에게 국가를 위해, 나이든 세대를 위해 출산을 강요하다시피 하고 있다. 이것은 낡아빠진 전근대의 표본이다.그 동안 저출산 극복을 위해 정부가 투여한 예산은 또 어떤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20조원, 2011년부터 2015년까지 61조원, 2016년부터 2020년까지 108조원이 책정돼 있다. 무려 100조원이 넘는 예산이 투입되었는데, 상황은 어떤가? 차라리 신혼부부나 동거하는 남녀에게 나눠주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저출산 문제는 애국심과 막대한 예산으로 해결될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소설의 주인공들과 달리 우리는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직시해야 한다.청년세대의 고질적인 일자리 부족과 해결난망인 주거문제, 평생 지속되는 경쟁만능과 승자독식, 노인들의 우울한 일상, 행복과 담쌓은 나라. 이런 문제가 선결(先決)되지 않으면 저출산 대책과 거액의 예산투입은 ‘깨진 독에 물 붓기’일 따름이다. 인간답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우리의 소박하지만 명확한 꿈이 성취되면, 단언컨대 아이들 웃음소리 가득한 한반도가 될 것이다.

2018-08-24

중화제국과 양키제국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기원전 6세기 중엽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가 동으로는 인더스, 서로는 이집트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한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인류는 싫든좋든 제국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아프로-유라시아를 거점으로 살아온 구대륙 거주자들에게 세계제국은 오랜 세월 숙명처럼 작용했다. 세계사에서 최대제국을 형성한 대원제국(1271∼1368)을 끝으로 거대 육상제국은 종언을 고한다. 이른바 ‘지리상의 발견’ 내지 ‘대항해시대’를 기점으로 유럽의 팽창이 가속화하면서 근대가 얼굴을 내민다. 수천 년 지속된 동양과 서양의 팽팽한 이항대립은 19세기 이후 유럽의 우위로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그럼에도 제국의 역사는 현재 진행형이다.1850년부터 1914년까지 대영제국은 세계 최강이었다. 1851년 제1차 만국박람회에서 제국의 위용을 과시한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 확고부동한 최강제국의 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제2차 대전 이후 대영제국은 위축되고 미국과 소련을 축으로 하는 정치지형이 만들어진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의 득세와 소련의 몰락으로 양키제국의 일극시대가 개막한다. 미국 앞에는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는 무풍시대가 도래한 듯했다.1840년 아편전쟁과 1850년 태평천국의 난 등으로 극심한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청나라는 급기야 1911년 신해혁명과 이듬해 중화민국으로 막을 내린다. 식민지 전락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중화세계는 1949년 공산당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새 역사를 만들어가는 듯했으나, 1966년부터 문화대혁명의 거대한 후퇴를 경험한다. 모택동 사후 가능해진 실용주의 노선으로 중국은 등소평의 ‘도광양회’를 거쳐, 호금도의 ‘화평굴기’를 지나, 습근평의 ‘돌돌핍인’에 이른다.중국은 2010년에 일본을 누르고 국내총생산 세계 2위로 도약한다. 2017년 기준으로 보면 미국의 국내총생산이 19조 달러, 중국은 12조 달러로 두 나라 총합은 세계 총생산의 40%에 이른다. 21세기 초반 세계최강은 미국이지만, 중국이 끈질기게 따라붙는 형세라 할 것이다. 이런 추세를 반영하는 것처럼 중국은 ‘대국굴기(大國FFFC起)’를 시위하듯 세계 전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한다. 우리는 그것을 ‘일대일로(一帶一路)’에서 극명하게 확인한다.문제는 외교나 정치를 장사나 거래로 생각하면서 ‘아메리카 넘버원’이라는 믿음으로 똘똘 뭉친 트럼프가 제국의 수장이라는 사실이다. 요즘 벌어지고 있는 중국과 미국의 경제전쟁은 21세기 세계를 누가 주도할 것인가, 하는 패권주의 냄새를 물씬 풍긴다. 유럽 제국주의, 무엇보다도 대영제국의 후예로 이름을 날린 양키제국이냐, 아니면 150년 묵은 과거의 수치를 일거에 만회하려는 전통의 중화제국이냐, 하는 건곤일척의 대회전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물구경과 불구경 다음으로 재미있다는 ‘싸움구경’이 점입가경으로 치달아가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지 않다. 문제는 거대제국들의 싸움판에서 예기치 않게 날아들 유탄이다. 지정학적인 위치로 인해 수천 년 중화세계와 국경을 맞대고 살아온 역사를 우리는 기억한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지금까지 전혀 자유롭지 못한 대미관계를 뼈아프게 통찰한다. 양키제국과 중화제국 사이에서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지는 앞으로도 우리 외교의 근간(根幹)이다.한국 외교부를 점령하고 있는 미국 최우선주의는 이참에 재삼재사 숙고해야 한다. 영국의 저술가 마틴 자크의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이라는 서책의 주장도 있지만, 제국의 구심력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살피고 판단하는 슬기로움을 가져야 할 일이다. ‘화무십일홍’ 혹은 ‘권불십년’이란 말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변화를 근저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증유의 대변혁이 진행되고 있는 21세기 초반 시점에서는 새삼 재언을 필요치 않을 것이다.

2018-08-17

이사에 대하여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역마살(驛馬煞)’이란 말이 있다. 사전에서는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언제나 이리저리 떠돌아야 하는 액운”이라 풀이한다. 필시 나한테 적용되는 것이리라. 60평생 살면서 서른 번 넘게 이사했으니 말이다. 이사도 이사려니와 이곳저곳 다니기를 좋아하는 성정(性情)이고 보니 부초(浮草)처럼 떠돈 곳도 적지 않다. 그래선지 나는 역마살을 액운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것은 고전시대 혹은 농경시대 정착민의 사고일 것이다.그럼에도 같은 곳에서 오래 살아가는 사람이 부러울 때가 있다. 이른바 ‘토박이’라 불리는 사람에게서 묻어나는 느긋함과 여유로움이 좋아 보이는 것이다. 오랜 세월 한 곳에서 산다는 것은 인근 주민들과 깊은 인연을 맺고 살아감을 뜻한다. 동네 이력이나 생활상의 변천을 낱낱이 꿸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근자에 나의 정착기간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주민 생활을 접고 정착민이 되려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얼마 전 대구 신천대로를 달리다가 남루한 이사차량을 보았다. 오전 10시 무렵 이미 34∼35도를 오르내리는 도로를 2.5t짜리 포터트럭이 허름한 장롱과 약간의 세간을 싣고 달리고 있었다. 고무밧줄로 엉성하게 묶은 단출한 이삿짐을 싣고 한여름 거리를 질주하는 트럭에서 내 지난날을 본 것이다.행운유수처럼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청춘을 탕진했던 저 빛나던 20∼30대는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장렬한 7·8월 땡볕도, 한겨울 설한풍(雪寒風)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위대한 청춘은 마침내 스러졌다. 그 시절 다반사로 이사했건만, 힘들다는 생각은 없었다. 아, 다시 새로운 곳으로 가는구나. 거기서 무엇인가 빛나고 아름다운 새로운 인생과 대면할 수 있을 거야. 그런 희망이 하얀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런 동화같은 삶은 끝내 오지 않았다.20대 중반, 부모님은 서울시민을 포기하고 산본 신도시로 이주했다. 이사가는 초여름 날 가랑비가 온종일 대지를 적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 비가 왔다는 사실보다 어머니의 긴 한숨을 지금도 기억한다. 장롱 깊은 곳에서 어머니는 아버지 함자를 한자로 새긴 문패를 꺼내면서 말했다. “결국 이 문패는 걸지 못하겠구나!” 만석꾼 막내며느리로 시집와 장구한 세월 주구장창 이사만 다녀야 했던 어머니의 장탄식(長歎息)이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고향을 버리고 무작정 상경을 단행했지만, 끝끝내 그곳에서도 정착하지 못한 채 외지의 16평 아파트로 이사해야 했던 1980년대 중반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것이 연기(緣起)의 법칙인지 모르지만, 유학과 귀국 이후에도 나는 도회에서 도회를 떠돌았다. 그 어디에도 나의 고단한 육신과 영혼을 안온하게 누일 공간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그런 연유로 신천대로를 질주하던 이사 트럭에서 연민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푹푹 찌는 이런 무더위에 이사라니?!이러매 초원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목축민들의 이사는 얼마나 단출하고 홀가분한 것인가. 게르나 유르트를 거주 공간으로 삼은 사람들의 허허로움은 도회의 정착생활에 묶인 세계시민들에게는 한여름 유성(流星)처럼 부러운 것이다. 짧은 동안에 철거와 건축이 용이한 구조물을 마차로 가지고 다니면서 이동하는 헐거운 삶의 자유로움은 그야말로 너끈한 것 아닌가. 미미한 세간 실은 이사트럭을 설익은 감상(感傷)으로 바라본 내가 외려 쑥스럽다.100만이 넘는 우리 이웃들이 아직도 지하방과 옥탑방, 그리고 판잣집에서 폭염과 맹추위를 견디며 살아간다. 올해같은 가마솥더위에 고령의 노인이 세상 버리는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다. 인간다운 삶을 가능케 하는 부의 공평한 분배와 보편적 복지의 실현이 조속한 시일 안에 이루어지면 좋겠다. 한여름 땡볕의 우울한 역마살 이사가 아니라, 화사한 미래기획과 결부한 호쾌한 이사라면 얼마나 흐뭇한 일이겠는가.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8-08-10

최인훈 광장 노회찬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2018년 7월 하순, 한반도에서 두 사람이 세상과 작별한다. 최인훈과 노회찬이 그들이다. 최인훈은 1936년생, 노회찬은 1956년생으로 두 사람은 스무 살 터울이다. 소설가는 인간의 영혼과 시공간, 영원성과 불멸을 다룬다. 정치가는 인간의 물질과 현세성과 필멸을 본업으로 삼는다. 우주의 미소(微小)한 존재로 스스로를 자각하는 인간을 천착하는 소설가와 지금과 여기의 포로로 회자정리(會者定離)의 필연을 천형(天刑)처럼 안고 가야하는 정치가. 한증막을 연상시키는 폭염의 거리와 광장에서 시민들은 두 사람을 전송한다. 하나의 시대를 열었던 소설가와 다른 시대를 열고자 몸부림쳤던 정치가를 추모하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함께 하는 열린 공간과 이데올로기와 사회·정치·경제적인 평등을 추구했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대동(大同)의 마당을 열어젖히고자 했던 두 사람. 그들이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 그럼에도 그들이 남긴 자취는 언제나 우리와 더불어 잊히지 않을 것이다. “개인의 밀실과 광장이 맞뚫렸던 시절에 사람은 속은 편했다. 밀실과 광장이 갈라지던 날부터 괴로움이 비롯했다. 그 속에 목숨을 묻고 싶은 광장을 끝내 찾지 못할 때,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광장’)개인의 은밀한 공간과 대중의 광장이 맞뚫려있던 때, 사람은 누구나 안온하고 넉넉했다. 돈과 권력과 명예와 물질이 나와 당신을 구분하지 않았던 시절. 개인과 사회의 욕망이 민낯으로 대면하고 충돌하면서도 조화를 찾아나갔던 시간대. 최소한의 체면치레와 인간다움에 대한 믿음과 실천이 일상화되었던 시대. 딸깍발이와 수도승과 행운유수 하는 처사들과 논객들과 장삼이사의 지근거리(至近距離)가 당연시됐던 사멸한 과거. 어느 때부턴가 밀실은 광장과 차폐(遮蔽)돼 광장과 밀실이 유리되기 시작한다. 밀실의 개인은 광장의 대중이되, 개인의 밀실과 대중의 광장은 더 이상 교통하지 못한다. 나의 밀실과 너의 밀실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며, 상호이해와 소통 가능성은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그런 연유로 열려 있어야 할 광장은 죽어버린 밀실들의 조합으로 생명을 상실한 채 떠도는 무색무취(無色無臭)한 사멸의 거대공간으로 전화된다. 밀실에서는 부패 무능 타락 패거리주의로 무장한 개인들이 혈연과 지연과 학연과 금전으로 뒤얽혀 악취를 뿜어낸다. 그들이 만들어낸 광장은 전제(專制)와 독재와 학살을 은폐하는 강제와 억압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광장은 그리하여 밀실의 확대 재생산을 되풀이하면서 개인의 숨통을 조이고, 대중의 반역을 조준한다. 죽어버린 대중과 사라져버린 밀실이 야기하는 시공간에 저항의 손길을 보낸 이들이 최인훈과 노회찬이다.1960년대 4·19 혁명의 시공간에서 태어난 ‘광장’에서 최인훈은 집단적 폐쇄성과 강제성으로 인해 광장만이 동그마니 남은 북한체제를 거부한다. 그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해 밀실만 횡행하고 광장이 사라진 남한체제도 부정한다. 그가 창조해낸 이명준은 오도 가도 못한 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제3지대의 선택 가능성을 최인훈은 거부한 것이다. 우리는 그가 추구한 제3의 종점을 아직 알지 못한다,1970∼80년대 노동운동으로 세상과 만난 노회찬은 평생 그 길을 걷는다. ‘자본과 임노동(賃勞動)의 화합할 수 없는 대립관계’에서 불거진 노동자의 정치·경제적인 지위향상을 위해 불철주야(不撤晝夜) 분투한다. 언제나 가난했지만 그는 웃음과 촌철살인(寸鐵殺人)과 정의로움과 미래기획을 잊지 않는다. 밀실에서 스러지는 노동자 개인이 아니라, 햇살 가득한 광장의 해방된 노동대중으로 거듭 나도록 온몸으로 싸워나간 불세출(不世出)의 투사 노회찬. 이제 그들은 우리 곁에 없다. 그들은 갔지만, 우리는 아직 그이들을 보낼 수 없다. 언젠가 광장이 밀실이 되고, 밀실이 광장과 만나는 그날이 오면 그들과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고 싶다. 그날은 반드시 오리라! 그날 우리는 하나 되어 광장에서 찬란한 해방의 춤을 추리라!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8-08-03

편의점과 최저임금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무더운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1994년의 찜통더위와 열대야가 악몽처럼 재연(再演)된다. 하지만 역동적인 대한민국에는 어제처럼 숱한 사건 사고가 넘쳐난다. 지난 20일 고용노동부는 내년도 최저임금을 시간당 8천350원으로 고시했다. 2016년에 6천30원이었던 최저임금은 2017년에 6천470원, 올해 2018년에 7천530원으로 올랐고, 2019년에는 8천350원으로 상승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23일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와 중소기업중앙회는 ‘2019년 적용 최저임금안에 대한 이의제기서’를 고용부에 제출했다. 최저임금 인상액이 과다하고, 인상폭은 너무 크며, 인상속도 또한 지나치게 빠르다는 이유에서다.여기 머물지 않고 소상공인업계는 24일 ‘소상공인 생존권 운동연대’를 출범하고 연대투쟁을 시작했다고 한다. 운동연대는 소상공인연합회와 외식업중앙회같은 자영업자들과 전국택시운송사업조합연합회, 소공인총연합회 등의 결집체다. 삼성과 현대같은 내로라하는 재벌과 중소상공업자들이 한목소리로 최저임금인상안에 반대하는 형국이다. 나는 뜨악해진다. 시간당 임금이 겨우 820원 오르는 것인데 왜들 이렇게까지 반대하고 나서는 걸까?!요즘 한국사회의 대표적인 자영업 가운데 하나인 편의점을 생각해보자. 이마트와 씨유(CU), 지에스(GS)와 세븐일레븐 같은 대기업이 앞다투어 개점-경영하는 24시간 편의점. 다른 프랜차이즈와 달리 편의점은 초기 투자비용이 적고 특별한 기술이 필요치 않아서 중년 퇴직자와 청년들의 창업 수요가 크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미장원과 분식집만큼 자주 눈에 띄는 것이 편의점이다. 그리하여 2012년에는 250m 이내에는 편의점 출점(出店)을 제한하는 기준이 만들어지지만, 기업영업의 규제를 완화한다는 명분으로 2014년에 폐지된다.수많은 편의점이 영업하고 있었지만 출점제한이 풀리자 편의점은 우후죽순처럼 늘어난다. 늘어난 편의점은 재벌 기업에게 막대한 이득을 제공하지만, 편의점 주인에게는 가혹한 경쟁과 수익률 하락을 야기한다. 편의점 본사는 가맹점만 늘리면 돈이 되기 때문에 편의점 매출과 무관하게 가맹점 확대에 열을 올린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자사이윤 극대화에 있다. 반면에 편의점 주인은 낮은 수익률과 높은 임대료 등의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게다가 편의점 매출이 늘어난다 해도 수익은 편의점 주인이 아니라 가맹점을 운영하는 재벌 기업에게 돌아간다. 기업은 가맹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모든 물건을 납품하면서 일차적으로 수익을 챙긴다. 편의점을 개설하면 본사에서 제공하는 물품을 판매해야 하므로 편의점 주인은 납품원가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원가를 내리든 올리든 모든 것은 본사 소관이다.여기 덧붙여지는 것이 로열티라 불리는 가맹수수료다. 편의점 주인이 거두는 수익의 34~35%가 매달 편의점 본사의 이익으로 환수된다고 한다. 그런데 치킨 등 외식 중소 프랜차이즈들은 편의점과 달리 유통이윤만 챙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별도의 가맹수수료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이것은?! 재벌기업이 동네마다 골목마다 편의점을 열고 영세한 자영업자인 편의점 주인의 이익을 중간에서 가로채 우려먹는다는 얘기다.사정이 이런데도 보수언론과 경총같은 대기업집단은 최저임금 인상으로 편의점 수익이 악화하는 것처럼 본말을 호도(糊塗)한다. 편의점 주인과 알바생의 대결로, 을과 을의 싸움으로 몰고감으로써 최저임금의 본질을 은폐하려는 것이다. 재벌기업의 부도덕하고 비인간적이며 무차별적인 수익 빨대는 제거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사는 냄새 물씬 풍기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그려야 할 미래상이다.

2018-07-27

이름의 소중함에 대하여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며느리밑씻개’라는 이름을 가진 한해살이풀이 있다. 다른 식물이나 물체를 휘감으면서 자라는 덩굴식물이다. 한국과 일본, 중국에 분포하는데, 용정과 연길, 백두산 부근에서도 며느리밑씻개를 본적이 있다. 그때 느낀 식생(植生)의 친근한 기억은 새삼스러운 것이었다. 생활습관과 언어와 풍습은 적잖게 달라졌으되, 풀과 나무와 꽃은 옛날과 다름없다는 기쁜 확인. 하지만 풀의 이름에서 느껴지는 괴이쩍음은 이내 우울한 심사로 전환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며느리밑씻개는 날카롭고 뾰족한 가시가 빼곡하게 달린 줄기를 가진 풀이다. 앙증맞게 생긴 연홍색 꽃잎과 달리 찔리면 날카로운 통증을 유발하는 가시줄기의 며느리밑씻개. 사악한 시어미는 힘없는 며느리에게 정말 그걸로 밑을 씻으라고 했을까?!사전을 보면 북한에서는 이 풀을 ‘사광이아재비’라 부른다. ‘사광이’는 살쾡이, 즉 ‘삵’을 의미하고, ‘아재비’는 아저씨를 뜻한다. 따라서 삵처럼 매서운 풍모(風貌)와 맛을 가진 풀이라는 의미를 내포한 것이 ‘사광이아재비’다. 이것을 식민지 조선시기에 일본인들이 악의적으로 며느리밑씻개로 개명(改名)하면서 이름이 일반화됐다는 설이 있다.오늘날에도 위세를 떨치는 고부간의 갈등과 대립은 조선시대에는 더욱 우심했을 터.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을 비하하고 놀리는 의미로 며느리밑씻개라는 이름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혹자는 이 풀이 부인병 치료에 효험이 있어 며느리를 지극히 사랑한 시어머니의 남다른 배려에서 며느리밑씻개라는 이름이 유래됐다고 말한다.이름은 인간을 포함한 각종 생물과 무생물의 형식과 내용을 규정하는 기본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대상과 자아의 관계가 성립돼 유의미하게 전이되어 나감을 드러내는 징표다. 우리는 싫어하거나 무관심한 사람의 이름을 허투루 부르지 않는다. 외려 그런 사람의 이름을 왜곡하거나 부정적인 별명으로 폄하하기를 즐긴다. 어린 시절 맘에 들지 않는 친구들을 악의적인 별명으로 곯려준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언제부턴가 병원에 갈라치면 얼굴이 찌푸려지곤 한다. 간호사들이 ‘아버님’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중고등학생이던 시절에 ‘아버님’이라 불리는 일은 고문(拷問)이나 다름없었다. 정색하면서 아버님 호칭을 거부하기도 했지만, 그때뿐이다. 그이들은 고객에게 친절을 베푼다는 뜻에서 그리 부른 것 같은데, 듣는 나는 영 찜찜하다. 아이들도 이제는 장성했지만, 아직도 ‘아버님’ 호칭은 어색하고도 불편하다. 아직 며느리를 맞을 준비가 아니 된 탓이다.정치의 출발점을 물은 자로(子路)에게 중니(仲尼)는 말한다. “이름을 바로 하겠노라! 必也正名乎!” 실망하는 낯빛의 중유(仲由)에게 공자는 육단논법으로 자신의 사유를 펼쳐 보인다. “이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순탄치 못하고, 말이 순탄치 못하면 일이 이뤄지지 못하고, 일이 이뤄지지 못하면 예와 악이 발흥하지 못하며, 예와 악이 발흥하지 못하면 형벌이 올바르지 못하고, 형벌이 올바르지 못하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게 된다.” (논어·자로 편)어떤 이는 ‘명(名)’을 명분이나 명분에 맞는 말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되 나는 단출하게 ‘이름’으로 새긴다. 이름은 요긴하고 필수적인 요건이다. 나와 우리를 둘러싼 그대와 당신들 또는 그들의 관계는 대저 이름에서 유래한다. 하나의 대상에 지극한 이름을 부여하고, 그것을 온전히 부르고 소중히 간직하는 것에서 매사(每事)는 출발한다.요즘처럼 한국사회 전반에 거대한 전변(轉變)과 전환의 요구가 빗발치는 시기에 우리는 이름과 명칭 혹은 호칭에 유의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딱 그만큼의 언어로 불리는 대상과 관계설정이 종요로운 시점이다.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8-07-20

돌아온 외팔이와 21세기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옛날 영화를 보는 일은 유쾌하다. 오래된 일기장이나 편지를 보는 것과 비슷하다. 우연히 얻어걸린 색 바랜 흑백사진 같다고 할까?! 희미한 추억 한 자락 만날 단서(端緖)라도 찾게 되면 그야말로 ‘유레카’ 소리가 절로 터져 나온다. 범물동에 있는 ‘가락 스튜디오’에서 영화를 보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 전부터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찾아와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공간, 가락.얼마 전 모임에서 나는 하반기에 보고 싶은 영화를 추천해달라고 했다. 얼떨결에 맡은 영화보기모임 방장(房長)자리는 흥미롭지만 조금 부담스럽다. 한 달에 두 번 상영하는 자리에 꼬박 참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저녁 7시부터 11시까지 영화와 그것을 둘러싼 대화를 위해 시민들과 만나고 있다. 방장이 영화를 선정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회원들이 만나고 싶은 영화를 추천하는 방식이다.이런저런 영화가 거론될 때 기타리스트이자 극장장이 스치듯 말한 영화가 ‘돌아온 외팔이’다. 젊은 시절 그이는 대구의 대도극장 근처를 서성였던 모양이고, 그때를 대표하는 추억의 영화가 ‘외팔이’라 한다. 내게도 친숙한 영화지만, 실제로 그 영화를 본 적은 없다. 그래서 주저 없이 ‘외팔이’를 상영목록에 첨부했다. 헌데 ‘카카오톡’으로 극장장이 난색(難色)을 표한다. 추천한 게 아니라 한다. 필름도 구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그래서일까, 호기심이 발동한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못된 심사일까?! 어느 저녁나절에 인터넷을 떠돌다가 ‘외팔이’를 검색한다. 홀연 동영상이 얼굴 내민다. 1969년 흑백으로 제작된 102분짜리 ‘돌아온 외팔이’가 천연색 필름으로 9∼10분 내외의 여러 단편(斷片)으로 이어져 한 편의 완결된 영화를 구성한다. ‘쾌재’를 부르며 영화와 대면한다.반세기 전에 만들어진 ‘외팔이’의 주제는 강호를 떠난 절대고수가 실현하는 권선징악이다. 무협영화로 한 시대를 풍미한 왕우가 전설의 외팔이를 연기한다. 사악한 무림고수 8인이 패거리를 모아 평화롭던 강호에 살겁(殺劫)을 몰고 온다. 졸지에 사형과 사부 혹은 아버지를 잃은 군소문파의 연소(年少)한 청년들이 외팔이에게 구원을 청한다. 어쩔 것인가?!강호와 절연(絶緣)하고 아내와 함께 촌부(村夫)로 살아가기로 약조한 외팔이. 정의로운 사내 외팔이는 강호에 불어닥친 피바람을 외면하지 못한다. 어쩔 도리없이 강호로 다시 나아가는 절정고수 외팔이. 사정이 이쯤 되면 명민한 독자는 ‘셰인(Shane)’을 떠올릴지 모른다. 1953년 조지 스티븐스 감독의 영화 ‘셰인’ 말이다. 나이 어린 꼬마 조이가 영화 말미에 ‘셰인’ 하고 외치는 소리가 메아리 되어 울리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표표히 떠나가는 셰인.그런 틀을 가진, 여기저기 피가 흥건하고 숱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영화 ‘돌아온 외팔이’. 넘치는 피범벅 때문에 혹자는 ‘마카로니웨스턴’ 창시자 세르지오 레오네의 ‘무법자 연작’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레오네 감독에게는 권선징악이 아니라, 세상의 혼탁한 양상을 그대로 재연하는 편이 소중했을 터. 그 점에서 그는 동양의 무술영화와 거리를 둔다.정의를 실현하되, 그것을 강제한 현실과 작별하는 셰인과 외팔이. 그러하되 객석의 볼거리를 위해 뿌려지는 다량의 선혈과 허다한 죽음. 이런 영화를 고요한 저녁, 컴퓨터 화면으로 홀로 들여다보는 것은 축복이리라. ‘아랑곡(餓狼谷)의 혈투’(1970)를 보면서 소학교 끄트머리를 다녔던 상고머리 소년이 초로의 사내가 되어버린 세월의 반추!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주인공이 나타나면 그 시절 영화관에는 요란하게 박수소리가 울려 퍼지곤 했다. 정의는 결코 죽지 않으며, 반드시 보답을 받는다는 공식을 확인해주었던 추억의 무협영화. 그런 정의가 우리의 시공간에도 아직 살아있는지 궁금하다!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8-07-13

시간의 색깔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세상 모든 것에는 색깔이 있다. 색깔은 가시광선이 사물과 작용해 만들어내는 오묘한 현상이다. 우리는 빛과 색을 동일시(同一視)하지만 부가혼합과 감산혼합이 말해주는 것처럼 색과 빛은 다르다. 빨강 노랑 파랑의 세 가지를 합하면 검정색에 접근한다. 색은 더할수록 어두워지기 때문에 감산혼합이라 한다. 이와 달리 빛의 세 가지 근원인 빨강 녹색 파랑을 합하면 흰색에 접근하며, 이것을 일컬어 부가혼합이라 부른다.인간은 색을 감각중심에 두고 대상을 감촉하며 사유한다. 십인십색이나 오방색 내지 색맹 같은 말은 전통적인 표현이되, 색깔론 같은 악의적인 조어(造語)는 수구 적폐세력의 전유물이다. 언젠가 적폐세력의 본산이 붉은 색을 자당(自黨)의 색깔로 결정했을 때 뜨악함을 넘어서는 공포감을 느낀 적도 있다. 저토록 색의 본질에 무심하고 무식한 자들이 모여 색깔론을 내세운 것은 권력욕 아니라면 무엇으로 설명 가능할까?!길을 걷다가 더러 시간의 색깔을 본다. 어린아이의 초록 초록한 시간과 청춘남녀의 새파란 색깔과 늙은이들의 죽어버린 무채색 시간을 본다. 너무도 퇴색해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아파트 벽면 같은 노년의 우울한 색깔. 그래서일까. 늙다리들은 빨갛고 노랗고 파란 천연색 옷차림으로 중무장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노년의 색에서 탈출하고 싶은 것이다. 반면에 청년은 검정색으로 치장하면 훨씬 돋보인다. 청춘의 강력함과 약동하는 힘을 강조하는 무채색의 본성이라니!언젠가 서울에서 동대구 오는 길에 창밖의 사위가 어두워지는 색감의 무게로 켜켜이 덮여지는 현장과 만났다. 시속 300㎞의 고속열차가 선사하는 시간의 촘촘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나의 내면에 자리한 예감 때문이었을까. 이유는 모르지만 시간의 색깔이 어둠으로 서서히 채색되는 광경은 지금도 선연하다. 중환자실에서 기약을 모른 채 누워계신 부친의 안위로 인해 동요했던 자식의 심사가 문제였을까, 돌이킨다.하나둘씩 어둠이 아래로부터 차곡차곡 쌓여 눈높이까지 차오르는 광경은 실로 압도적인 것이었다. 아, 저것이 시간의 운동이며, 시간의 색깔이로구나. 그런 경이로운 장면과 대면한 이후로 나는 색깔과 시간을 명백하게 분별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시간이 색깔이고, 색깔이 시간이라는 의식이 홀연 나를 찾아든 것이다. 내가 의식하고 다가서고 소중하게 아끼는 색깔이 있고, 꺼리고 던져버리고 경원(敬遠)하는 색깔도 있다.프랑스 국기에 담긴 세 가지 색깔은 파랑, 하양, 빨강이다. 자유와 평등 그리고 형제애를 상징하는 세 가지 색깔을 국기에 담아낸 프랑스가 대표하는 근대세계의 표상은 얼마나 진지하고 아름다우며 인간적인가. 색깔에는 아주 많은 상징과 실제가 내재한다. 하늘의 푸름과 대지의 붉은색과 순백(純白)의 눈을 국기에 담은 러시아는 또 어떤가. 몽골의 국기에도 대지와 하늘의 조화와 공존이 담겨있다고 한다.요즘 청춘들은 무슨 색깔을 좋아하고 어떤 색과 거리를 두고 있는지, 모른다. 그들은 색깔 자체를 의식하지 못한 채 일상을 살아간다. 놀라운 일이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지향하는지, 특정한 목표의식과 꿈이 실종된 지 오래다. 그저 지금과 여기의 닫힌 공간과 오늘의 제한적인 시간이 그들 몫이다. 왜라는 문제에 무심하며 ‘먹방’과 게임과 유희에 탐닉한 채 색과 빛, 그리고 거기 담긴 무한성과 영원에 태무심(殆無心)하다.시간을 의식하는 지구별 유일자로서 색의 본령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군상은 두려운 존재다. 시간에 담긴 색깔을 모르고, 알려고 하지 않는 대중의 그로테스크한 담대함이 장마철 눅눅함을 가중시킨다. 하지만 언젠가 생명의 종언이 찾아오는 날, 홀연히 알게 되리니, 시간과 색깔의 일원론적인 의미를!

2018-07-06

지능지수(IQ)와 소설 읽기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얼마 전에 인터넷에 흥미로운 기사가 올라왔다. 1975년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의 지능지수가 그전에 태어난 사람들보다 낮다는 것이다. 노르웨이 라그나르프리쉬 경제연구소의 로게베르크 부소장에 따르면, 75~95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는 이전 40~75년에 태어난 세대보다 지능지수가 평균적으로 7 정도 낮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이 속한 동북아지역의 지능지수는 여타지역과 달리 지능지수가 하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우리는 도이칠란트와 이스라엘 사람의 머리가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유대인은 어릴 때부터 탈무드로 영재교육을 시킨다고 부러워하며, 세계적인 석학과 철학자들을 배출한 게르만의 명성에 익숙해진 탓이다. 그런데 지능지수 통계는 다른 결과를 보여준다. 동북아 지역의 한국과 일본, 대만이 선두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지능지수가 인간능력의 모든 것을 대변(代辯)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거기에는 일정정도 믿을만한 근거는 있다.내가 주목하는 것은 다른 데 있다. 평균적인 지능지수가 높다고 해서 걸출한 천재나 위대한 과학자가 양산되는 것은 아니다. 상위 1% 내지 0.5%가 담당하는 지적-정신적 능력과 책임성 같은 것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얘기다. 평균적인 지능지수에서 세계 최상위에 있는 한국이 자연과학과 예술, 인문학 영역에서 지금까지 도달한 수준은 그다지 내세울만한 것이 없다. 실용실안에 만족하고 안주해온 관성 때문에 우리는 세계최고를 만들어내지 못했다.한국이 주도하는 학문영역은 전무(全無)하다.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예술, 공학, 의학 어느 하나의 분야에서도 우리가 만들어내고 인도하며 쥐락펴락하는 독자적인 영역은 없는 것이다.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우리는 그저 베끼고 조금 고쳐서 개량하는 것에 익숙해왔다. 오랜 세월 중국에서 수입한 제도와 학문에 의지했고, 그 후에는 일본과 미국의 것을 모방하고 답습하는 것이 천석고황으로 자리 잡았다.요즘엔 걱정이 하나 더 늘었다. 학생들이 소설 읽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장편소설은커녕 단편소설 읽는 것도 손사래를 친다. 호흡이 긴 글에 대한 두려움과 짜증을 감추지 않는다. 영상매체에 익숙해진 세대여서 그런지 독서 삼매경(三昧境)의 청춘은 찾아보기 어렵다. 서책을 읽다가 모르는 어휘나 구문이 나오면 사전 찾아가며 온전한 뜻을 새겨야 할 터인데, 그냥 넘어가기 일쑤다. 그러니 책은 점점 더 멀어지고 이해능력은 급전직하(急轉直下)다!조지 오웰의 장편소설 ‘1984’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인간이 마주하는 세 가지 시제(時制)에서 현재가 주도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한 것이다. 빅브라더가 대중을 통치하는 수법은 현재에 기초하여 과거를 수정하고, 현재에 터를 잡아 미래를 기획한다는 얘기다. 모든 것이 지금과 여기에 달려있는 셈이다. 이런 삶의 양태가 요즘 청춘들의 생활양식이다.어제와 그제는 이미 멀어진 지난날이고, 1년 혹은 10년 뒤의 삶을 설계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여기는 젊은이들의 세태가 소설 읽기를 멀리하게 만들고 있다. 긴 호흡으로 작가의 사유와 인식, 정서와 역사의식을 추적하는 유쾌한 지적 여행을 거부하는 것이다. 지능지수 높은 우수한 머리는 내던져두고 동영상과 게임에 몰두한다. 역사에서 배우고, 미래에 기초하여 현재와 과거를 재단하려는 노력은 실종됐다.우연히 마주친 지능지수 기사는 분단 한반도의 밝은 미래를 약속하지만, 청춘의 대오각성을 촉구하기도 한다. 이 여름 ‘희랍인 조르바’같은 소설을 읽어봄은 어떨까.

2018-06-29

예멘난민을 수용하라!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부싱가포르에서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이 개최된 지난 12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제주도 난민 수용거부’를 촉구하는 글이 올라온다. 내전을 피해 제주도에 들어온 예멘 사람들의 난민신청을 거부하라는 것이다. 이 글은 나흘만에 16만의 동의를 얻는다. 가히 폭발적이다. 그런데 국민청원에 동의하는 분들은 예멘이 어디에 있고, 어떤 나라이며, 어떤 역사적인 경로를 거쳐 난민이 발생했는지 아시는지 궁금하다. 예멘은 지금 내전 중이다. 52만㎢의 땅에 2천800만 주민이 거주하는 예멘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남쪽, 오만의 서쪽에 위치한다. 예멘 건너편은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가 있는 아프리카다. 일찍이 오스만튀르크의 지배를 받았던 예멘을 1839년부터 영국이 남북예멘으로 나누고, 남예멘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오스만제국의 1차 대전 패배로 북예멘이 1918년 독립하고, 1967년에는 남예멘이 소련의 도움을 받고 독립한다. 북예멘은 이슬람의 종교적 권위에 의지해 국가를 경영했지만, 남예멘은 소련식 사회주의 정책을 국가경영 전략으로 채택한다. 그 결과 남북예멘은 1972년과 1978년 두 차례의 내전을 겪지만, 1990년 무혈통일에 이른다. 1994년 남예멘의 연방탈퇴를 북예멘의 살레 대통령이 무력으로 진압한다. 2011년 아랍의 봄이 닥치자 남북예멘은 다시 내전에 접어들게 된다. 시아파를 중핵(中核)으로 하고 미국에 적대적인 후티 반군은 수도인 사나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수니파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집트, 요르단, 아랍에미리트, 수단, 쿠웨이트, 카타르, 모로코, 바레인과 연합군을 형성해 후티 반군과 맞서고 있다. 수니파의 총궐기에 대항해 시아파의 맹주(盟主)인 이란이 후티 반군을 암암리에 지원하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런 복잡다단한 정황(政況)으로 예멘난민이 발생한 것이다.유엔은 예멘을 세계 최대의 인도주의 위기국가로 규정했지만, 확실한 지원이나 개입이 불가능한 상태다. 난민들은 비자없이 입국할 수 있는 말레이시아로 이동했지만, 2018년부터 말레이시아도 난민수용에 난색(難色)을 표하고, 3개월만 체류허가를 해주고 있다. 체류연장이 불가능해진 549명의 예멘난민들이 말레이시아를 경유(經由)하여 제주도에 도착한다. 제주도를 떠난 일부난민을 제외하면 제주도에 남아있는 예멘난민은 486명에 이른다.제주당국은 직접적인 물적 지원보다 어선과 양식업, 요식업 일자리 같은 취업연계로 난민을 돕고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402명의 난민들이 일자리를 구했다고 한다. 좋은 일이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예멘난민들은 지구촌 곳곳을 떠돌아야 할 운명이다. 주지(周知)하는 것처럼 유럽 각국은 아랍의 봄 이후로 중동 곳곳에서 벌어진 내전으로 발생한 난민수용 문제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오늘날 중동의 바둑판같은 국경획정은 1916년 제국주의 영국과 프랑스의 사이크스-피코 협정이 시원(始原)이다. 오스만제국의 분할을 자국의 이해관계에 맞추려다보니 아프리카 지도처럼 중동지도 역시 줄자로 그은 인상을 주는 것이다. 예멘의 분할과 분단과 내전의 근저에도 제국주의 영국의 식민지배가 자리한다. 남북아메리카의 원주민을 도륙(屠戮)하고, 중동과 아프리카까지 신음하게 만든 유럽 제국주의의 본령(本領)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미군 장교가 그은 38선으로 민족분단을 아프게 경험하고 있는 우리도 제국주의의 희생양이다. 오늘날 우리는 세계 7위의 수출입 대국이자 15위 이내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지금과 여기는 국민들의 피땀어린 분투노력에 힘입은 것이지만, 세계 전역의 원조와 방책도 기억해야 한다. 도움받은 기억을 되살려 이제는 도움을 주는 성숙하고 아량있는 대한민국과 그 시민으로 우뚝 서기를 희망한다.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8-06-22

기분 좋은 날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부지난 12일 온종일 기분이 좋았다. 싱가포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기막힌 장면을 보여준 덕분이다. 북한은 유일하게 미국과 적대관계를 유지해온 나라다. 중국은 1979년 미국과 수교했으니, 내년이면 중미수교 40주년이다. 20세기 가장 ‘더러운 전쟁’이라 불린 베트남 전쟁 당사국인 베트남도 1995년 미국과 수교했다. 베트남 전쟁 종결 20년 후의 일이다. 쿠바 역시 지난 2014년, 단교 53년 만에 미국과 수교했다. 1950년 6·25 한국전쟁 발발 이후 올해까지 68년 동안 북한과 미국은 적대적인 관계였다. 특히 작년에는 전쟁까지 가나 싶을 정도로 양국관계가 악화일로(惡化一路)를 걸었다. 북한이 자위(自衛) 목적으로 핵을 개발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미국의 반감이 원인이었다. 미국은 인도와 파키스탄, 이스라엘처럼 자국의 동맹이나 우방들의 핵무기 개발은 용인하고, 적대적인 북한의 핵은 용인하려 하지 않았던 터다.더욱이 수감 중인 전직 수구 대통령들의 어리석고 무모한 대북 적대 정책으로 인해 한반도의 평화는 매우 위태로운 지경에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2016∼2017년 촛불 혁명으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평창 동계올림픽에 북한이 참여함으로써 평화의 서광이 깃들기 시작한다. 불과 몇 달 전의 풍전등화같던 상황이 봄눈 녹듯 사라지고 한반도에 평화의 기운이 감돌게 된다.서울에서 개성까지 버스로 50분 거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살아간다. 영화 ‘강철비’에 등장하는 파주의 산부인과 의사는 북한 최고 지도자 이름을 모른다. 남한 최고학부를 다닌 의사가, 그것도 접경지역 파주에서 밥 벌어먹고 살아가는 지식인이 북한에 대해서는 까막눈이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에도 파주가 나온다. 대낮에도 대남방송이 온종일 들려오는 파주.북한에도 우리와 같은 언어를 쓰는 2천500만의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우리는 잊고 산다. 나는 개성공단과 금강산, 백두산 천지를 가본 사람이다.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그곳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우리와 같은 식생과 기후, 언어와 음식이 마음을 따사롭게 해준다는 사실이다. 어떤 동질감과 친밀감이 느껴진다는 얘기다.지난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서로 악수하고 포옹하는 장면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당장이라도 철책이 철거되어 통일이라도 될 것 같은 들뜬 마음을 지울 길 없었다. 그날 이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정상회담은 21세기 지구촌의 마지막 냉전 구도를 깨뜨리는 일대 사변이다. 북한과 미국이 회담에 임하는 동안 한반도 남단에서 한미연합군사훈련을 중단하겠다는 트럼프의 선언은 단비처럼 다가온다. 손에는 무기를 들고, 입으로는 평화와 화해를 말하는 것은 모순의 극치다. 우리에게 장사치로만 소개된 트럼프의 왜곡된 이미지가 한순간에 바로잡히는 기현상(奇現象)이 벌어지고 있다.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웃음이 아니 나올 수 있는가?! 일찍이 한반도가 좋은 일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은 일은 거의 없었다. 김대중-노무현 두 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수를 자처하는 수구세력의 반북-친일-친미 일변도 외교정책은 국제사회의 조롱거리 아니던가?! 미국 외교가에서 나왔다는 ‘존경할 만한 적, 경멸할 만한 우방’은 얼마나 우울하고 불쾌한가?! 역사적인 사건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지금 현대사의 중차대한 일획(一劃)이 그어지는 시점에 살고 있다. 천운이다. 정말로 기분 좋은 날들이다.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8-06-15

소음(騷音)에 관하여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러시아 문학에서 신성불가침으로 수용되는 두 사람이 있다. 계관시인 푸쉬킨과 문학평론가 벨린스키다. 10월 혁명 이후에도 이들은 19세기의 권위를 온전하게 향수(享受)한다. 그런데 벨린스키는 별스럽게 두 가지를 싫어했다. 보드빌과 몰리에르. 양자의 공통점은 웃음과 희극이다. 니콜라이 전제(專制)와 대적(對敵)한 벨린스키였으니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경산 아파트에 살다가 청도로 이사한 이유 중 하나는 층간소음이다. 범어동에서도 층간소음으로 시달렸다.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청소기 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불쾌와 불안과 불면을 야기(惹起)했다. 몇 차례 올라가 이야기했으나 “내 집에서 내 발로 다니고, 청소하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 하는 짜증섞인 대답이 돌아왔다.경산에서는 떡을 해서 윗집을 찾아갔다. 이사왔다는 말과 함께 조용히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그러나 나의 기대는 이내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 주말이면 밤낮 가리지 않고 아이들 뛰어다니는 소리가 천장을 부술듯 울려댔다. 참다못해 올라간 내게 아이 엄마는 정색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애들이 다 그렇지, 별 걸 가지고 다 올라오시네!”한국의 어린애들이 아파트 거실에서 공을 차며 자란다는 말을 나는 듣지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두 아들의 발걸음을 단속하면서 소음을 경계했던 나는 그런 일반화를 처음 들었다. 어찌됐든 소음은 지속(持續)됐고, 나는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소리를 들어본 일이 없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 법’이라 했던가?! 나의 농촌 이주는 그렇게 촉발됐다.아침 일찍 태양이 얼굴을 내밀고, 저녁 늦게까지 석양의 그림자가 어둠과 맞서면서 농촌의 시간은 유장하게 흘러간다. 자연의 소리와 소와 닭 우는 소리 아니면 연중 사위(四圍)는 적막하다. 고요에 익숙해진 탓인지 도회지 소음은 임계점까지 온듯하다. 휴대전화로 통화내용을 행인들에게 시시콜콜 알려주는 청춘남녀부터 노년에 이르는 인간군상. 목소리라도 청아하다면 모를까, 까막까치 능가하는 째지는 소리로 주변을 소음으로 가득 채우는 무리. 여기저기 계단을 오르내리는 슬리퍼와 하이힐과 샌들의 공격적인 딸가닥 소리. 삼삼오오 짝지어 걸어가는 사람들의 박장대소와 가가대소(呵呵大笑)!6월 13일 지방선거를 앞둔 요즘엔 트럭을 동원한 도우미와 자원 봉사자들의 목청이 대기(大氣)를 찢어버린다. 듣는 사람 하나 없건만 그들은 안하무인(眼下無人)이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다. 선거 벽보 붙이고, 공보자료로 정당과 후보자의 주장을 알리면 충분하지 않은가?!베를린이나 쾰른에서 대규모 유세차량을 동원해가며 선거운동 하는 것을 본 적 없다. 국영 텔레비전을 포함한 방송과 신문 매체가 평소에 정당의 주장과 활동상황을 꼼꼼하게 점검하고 통지한다. 시민 유권자는 그런 자료를 통해 지지 후보와 정당을 결정한다.6월 12일이면 거리와 광장과 주택가를 소음과 불면으로 채운 소음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무고한 유권자들은 참아야 한다. 듣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은 숱한 말과 공약(公約)과 후보자들과 그들의 행장(行狀)을 선전하는 도우미들의 소음을 참고 또 참아야 한다. ‘적폐청산’이라는 말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시절이다. 선거철이면 넘쳐나는 소음과 공약(空約)과 트럭이야말로 적폐 아닌가. 이런 적폐 역시 우리가 청산해야 할 과제는 아닐까.

2018-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