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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인권과 혁명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1948년 12월 10일 국제연합 인권위원회는 ‘세계인권선언’을 발표한다. 제2차 대전이 끝나고 자유롭고 평화로운 지구촌을 건설하기 위한 인간의 기본권을 명시한 선언이다. 영장없는 체포와 구금, 추방으로부터 자유, 사상과 양심 및 종교의 자유, 평화적인 집회와 결사(結社)의 자유 등이 인간의 기본적인 정치적 권리로 거명된다. ‘인권선언문’ 제1조는 간명하되 대단히 인상적이며 선진적이다.“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서 평등하다. 인간은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기에 서로에게 형제자매의 정신으로 행해야 한다.”어디선가 본 것같은 기시감이 들지 않는가?! 그렇다. 프랑스 삼색기(三色旗)의 영혼과 정신이 인권선언문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자유, 평등, 형제애.’ 자유는 본디 권력과 부, 명예를 가진 자들이 주장하는 덕목이며, 평등은 노동자와 농민같은 사회적 약자가 내세우는 권리다.그 양자의 대립관계를 변증법적으로 지양(止揚)한 것이 ‘형제애’다. 따라서 형제애는 자유와 평등 모두를 아우르는 지극히 보편적인 미덕이자 가치라 할 수 있다.지난 10월 21일부터 프랑스에서 ‘노란조끼’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처음에는 프랑스 정부의 유류세와 자동차세 인상에 반대하는 시위에서 촉발되었다고 한다.그러나 이면(裏面)에는 마크롱 정부의 반(反)서민 친(親)부자·기업정책에 대한 시민들의 깊은 반감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프랑스는 부자들의 전유물인 호화자동차, 귀금속, 요트에 부과된 부유세를 폐지하고, 기업의 법인세를 2022년까지 25%로 인하할 방침이다.반면에 노동자의 초과근무수당 인하, 담배와 석유제품 소비세 인상, 연금 실수령액 축소 등으로 서민의 삶에는 빨간불이 켜졌다.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면서 파리 시내 곳곳에는 최루탄과 돌멩이가 난무하고, 개선문과 박물관이 훼손되고 있다.이번 ‘노란조끼’ 시위는 국경을 넘어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등으로 확산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시위를 대하는 프랑스 시민들의 자세다. 72%의 시민이 노란조끼 시위를 지지하지만, 85%의 시민은 폭력시위에는 반대한다고 밝혔다. 90%에 이르는 절대다수의 시민은 시위대를 대하는 정부의 조치와 정책대응 방안이 위중한 사안(事案)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다고 토로했다. 그래서일까. 거리에 나붙은 구호는 각양각색이다. “마크롱 사퇴”, “자유와 평등”, “1789, 1968, 2018” 등은 물론 ‘프렉시트’(Frexit)의 구호도 있다.1789년 프랑스 대혁명과 1968년의 68혁명 정신을 2018년에 이어나감으로써 제3의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이 시위대에 혼재해 있는 것이다.드물지만 영국의 ‘브렉시트’를 따라 프랑스의 유럽연합 탈퇴를 주장하는 ‘프렉시트’ 주장까지 나오는 형편이다 보니 정치의 나라, 민주주의의 최선진국 프랑스의 면모가 약여(躍如)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1948년 ‘세계인권선언’을 기초한 인물 가운데 ‘분노하라’의 저자 슈테판 에셀이 떠오른다. 20대 프랑스 청년들이 사회적 불의와 불평등을 외면하고 일신의 안녕과 영달에 눈 먼 세태를 통렬하게 공격했던 에셀. 그가 기초한 인권선언과 위배되는 2018년 프랑스는 자발적인 ‘노란조끼’를 대량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양상이다. 정치적인 기본권은 물론이려니와 사회적인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정부에 감연히 맞장뜨는 시민들이라니! 2016∼2017년 비폭력적인 촛불혁명으로 행정권력을 교체한 우리의 위대한 시민의식을 축복하면서 ‘노란조끼’ 시위대의 요구가 조만간 관철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8-12-13

행복도와 계영배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엊그제 달력을 넘기다보니 허전하고 쓸쓸하다. 마지막장 달력에 새겨진 ‘12’가 크게 다가온다.‘어이쿠, 또 한 해가 가는구먼!’ 해마다 연말이면 예외없이 터져나오는 탄성(歎聲)이다. 그렇게 다시 세월이 가고 스스럼없이 나이의 문턱을 넘는다. 구렁이가 담 넘어가는 것을 본 일은 없지만, 시간에 편승해 퍼런 녹이 슬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백두(白頭)의 계급장을 단 것은 꽤나 오래 전 일이다. 차마 부끄러운 일이다.각설하고, 엊그제 한국인의 ‘행복도’ 조사결과가 언론에 발표됐다. 2018년에 유엔에서 내놓은‘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행복지수는 5.875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가운데 32위라 한다. 더욱이 2012~2015년 세계인의 행복도 조사에서 한국은 조사대상 157개국 가운데 96위를 기록했다. 부자 나라들과 비교해도 불행하고, 가난한 나라들과 견줘도 행복하지 못한 나라의 백성으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왜 우리는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것일까?!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근원은 어디 있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우리도 그들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유학시절에 거리나 학교에서 만나는 학생들에게 “안녕하세요” 대신에 “행복하시죠?!” 하고 묻곤 했다. 익숙한 인사를 대체하는 낯선 방식에 대부분 당황해했다. 그런 인사를 받은 적 없었다는 게다. 그렇지만 생각하는 표정의 그들을 보면서 내심 만족스러웠다. 행복을 구하고자 만리타국에 나와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현자 플라톤은 행복의 조건을 ‘부족함’에서 찾았다고 한다. 재산과 외모, 말솜씨와 체력, 명예같은 덕목에서 완전함이나 채움이 아니라, 다소 부족한 상태가 행복의 원천이라는 얘기다. 허다한 한국인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까닭은 더 많이, 더 높이, 더 멀리를 욕망하는 때문 아닐까, 생각한다. 적빈(赤貧)과 질병과 불화로 괴로운 분들도 물론 적잖을 터이지만.‘도덕경’ 44장에 이런 구절이 있다.“많이 쌓아두면 반드시 크게 잃는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서 오래갈 수 있다.”태상노군은 이런 결론의 전제를 명예와 육신, 육신과 재화 가운데 어느 것이 소중한가의 문제에서 출발한다.여러분은 건강과 명예, 돈 가운데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시는가?! 결론은 자명하다. 육신을 버려두고 탐하는 모든 것은 한낱 허상(虛像)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과욕의 희생양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오늘도 고군분투 중이다.열흘 넘게 위장의 통증에 시달리면서 문득 깨달은 것은 젊은 시절 스스로 탕진하고 소진시킨 육신의 건강이었다.불철주야 주구장창 불태운 영혼과 육신이 고갈되면서 여기저기 수리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자업자득, 자승자박, 인과응보, 사필귀정이다.이 모든 것의 원인 제공자는 나 자신이다. 원인은 필시 괴수(怪獸) 리바이어던의 크기를 능가하는 거대한 탐욕의 깊고도 너른 뿌리의 활착(活着)일 것이다.최인호 ‘상도’에는 임상옥의 ‘계영배(戒盈杯)’가 나온다. 계영배는 ‘가득참을 경계하는 술잔’이다. 자신의 욕망을 경계하고자 했던 임상옥은 그 결과 조선최고의 장사치가 된다.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삼독(三毒) 가운데 하나를 올바르게 징치하고 경계할 때 행복은 어느 결에 우리 곁에 자리하고 있을지 모른다.그러하되 ‘행복하세요!’

2018-12-06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를 보내며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나이 들면서 세상과 작별하는 사람의 면면이 눈에 밟히는 경우가 늘어난다. 젊은 시절에는 죽음이 나와는 무관한, 먼 곳에 있는 매우 추상적인 대상으로만 보였다. 그러다가 문득 가까운 사람의 부음이 홀연히 찾아들면 흠칫 놀라게 된다.그런 놀라움의 순간이 어느새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나이에 이른 것이다. 세월과 시간은 세상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그 점에서 우리는 단 하나의 평등권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베르나르도 베루톨루치가 세상을 버렸다.1941년에 출생했으니 우리 나이로 78세. 아버지의 친구이자 ‘맘마 로마’를 연출한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조감독으로 영화인생을 시작한 그는 1962년 ‘냉혹한 학살자’로 영화감독이 된다. 베르톨루치가 남긴 대표작으로 사람들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거명하곤 한다. 상당한 예설(藝褻)논란을 불러일으킨 말론 브란도와 마리아 슈나이더가 출연한 영화다.내가 베르톨루치를 떠올리는 까닭은 ‘마지막 황제’ 때문이다. 모택동 사후 10년 동안 이뤄진 중국의 개혁개방과 맞물려 세계적 관심을 집중시킨 영화 ‘마지막 황제’.영화가 개봉된 1987년에는 ‘패왕별희’의 천개가와 함께 5세대 감독이라 불리는 장예모의 ‘붉은 수수밭’이 제작된다.그는 ‘국두’ , ‘홍등’ , ‘귀주 이야기’, ‘인생’ 같은 영화로 중국 현대사의 굴곡진 가시밭길을 강렬한 영상과 서사로 선보인다. 장예모와는 다른 색깔과 향기로 베르톨루치는 우리를 20세기 초부터 시작해 부의가 생을 마감하는 1960년대 중반의 중국으로 인도한다. 1908년 3살 꼬마 부의의 황제등극, 1911년 신해혁명, 1912년 청나라 멸망과 더불어 시작된 부의의 파란만장한 인생, 그리고 중국사의 파노라마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낸 ‘마지막 황제’. 단출한 서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장인 베르톨루치의 저력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영화에서 감독이 주시하는 대목은 자립적 인간으로 성장하지 못한 ‘애어른’ 부의가 공산당 지도자의 가르침으로 어떻게 재탄생하는가이다. 중년에 이르도록 제 손으로 세수조차 하지 못하고, 혼자서 옷도 입지 못하는 허수아비 인간 부의를 자주적 인간으로 변모시키는 공산관료. 하지만 유능한 관료도 모택동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의 서슬을 피하지 못한다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베르톨루치는 담담하게 그려낸다.아마도 그런 점이 1987년 아카데미 9개 부문 수상으로 이어졌는지 모르겠다. 등소평의 ‘흑묘백묘론’에 기초한 개혁개방으로 은인자중 도광양회의 자세로 자본주의 길을 걸어온 중국의 가까운 과거를 되짚는다는 의미를 가진 영화. 무엇보다도 모택동의 개인우상화와 절대권력 확립을 위해 시작된 문화대혁명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이 호소력을 얻었던 듯하다.그러다 2003년에 베르톨루치는 68혁명을 청춘들의 육신과 욕망으로 풀어내는 ‘몽상가들’로 관객과 만난다. “상상력에게 자유를!”, “모든 억압하는 것을 억압하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던 세계사적인 대사건 68혁명. 유럽은 물론이려니와 대서양 건너 미국과 태평양 너머 일본까지 진출한 위대한 68혁명의 내재적인 의미를 청춘남녀의 육신과 사랑으로 해석하려는 60대 감독 베르톨루치의 눈물겨운 의욕과 분투가 돋보인 영화 ‘몽상가들’.대한민국에서 베르톨루치는 유명하거나 대중적인 감독이 아니다. 그가 다룬 영화의 주제가 관객들에게는 난해하거나, 무겁거나, 낯설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러하되 지난 세기 영화판의 대가(大家) 가운데 하나가 불귀의 객이 되었음은 자못 아쉬운 일이다. 그의 영면을 기원한다.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8-11-29

공감과 분노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문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중하게 여기는 덕목은 공감이다. 공감은 등장인물들이 처하는 대립과 갈등, 절체절명의 위기와 전락, 위대한 승리와 치명적 패배를 목도하면서 그들과 동질감을 느끼는 행위다. “너의 마음이 나의 마음과 같다!”는 것에서 공감은 시작한다. 그것이 슬픔이든 분노든, 한탄이든 자조(自嘲)든, 증오든 사랑이든 문학의 주인공과 독자가 공유하는 감정과 인식의 교류에서 공감은 생겨나고 확산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강의실에서 공감이 자취를 감췄다. 소설이나 희곡, 시를 읽지 않는 세대가 주축이 되어버린 염량세태의 당연한 풍경이다. 대학입시를 위한 ‘축약본’ 독서를 끝으로 대다수 청춘은 문학과 영원히 작별한다. 줄거리와 주인공, 작가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최소한의 독서 아닌 독서가 청춘의 영혼을 피폐시킨다. 이런 양상은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하며 드라마 결말을 궁금해 하는 대중 심리와 친연관계를 가진다. 촌각을 다투는 조급한 시대에 사건 진행과정과 인물의 복잡다난한 내면세계에 대한 천착은 사치스런 과업이 되고 만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가 어렵다는 대학생들이 등장한 까닭은 그래서일지 모르겠다. 30대 중반의 주인공 오그레가 60대 경험주의자 조르바에게 삶의 비의(秘意)를 깨쳐가는 과정이 다각도로 그려진 소설.거기 덧대진 세계열강의 하수인(下手人)이자 약소국 그리스의 운명, 그리스정교의 부패상과 작가의 풍자가 뒤섞인 거대한 섞어찌개 ‘희랍인 조르바’의 난해함을 호소하는 21세기 대한청년.복잡하지도 어렵지도 않은 현대소설의 내용마저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판국이니 ‘공감’은 언감생심이다. 등장인물의 사유와 인식, 행위가 무엇을 지향하며, 왜 그리 되었는지, 작가가 그려내려는 지향점마저 모호한데 무슨 공감이 가능하겠는가! 최소한도의 상황인식과 판단능력이 인물과 사건에 대한 공감의 기초임은 자명한 이치. 하되 상황전개와 갈등과 결말로 치달아가는 서사(敍事)가 이해되지 않는데 어떤 공감이 생겨나겠는가. 한국사회에 완전 결석한 공감과 충만한 증오를 ‘세월호 폭식사건’에서 확인한다. 유민 아빠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장기간 단식을 결행하는 광화문 한복판에서 보란 듯 자행된 ‘폭식 퍼포먼스’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야만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300명도 넘는 망자(亡者)들의 아픈 영혼과 유가족의 고통을 백주대낮에 손가락질하며 비웃고 조롱하는 인간의 탈을 쓴 백정들의 광대놀음. 거기 어디서 우리가 인간임을 확인할 수 있는 미소(微小)한 징표라도 있는가?! 광대들의 일장 탈놀음은 무지와 야만성뿐 아니라, 공감능력 부재에서 기인한다. 인간을 향한 최소한도의 예의도 법도도 갖추지 못한 무지몽매의 야만성이 타자(他者)의 처절하도록 아픈 심성을 결단코 헤아리지 않고 비웃으려는 공감의 진공상태와 만난 것이다. 그들은 하마의 썩은 사체를 앞 다투어 뜯으며 주린 배를 채우려 괴성 질러대는 하이에나와 다르지 않다.공감해야 비로소 우리는 분노할 수 있다.사태의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분노는 커진다. 그래서 수주(樹州)는 왜장(倭將)을 끌어안고 순교의 길을 떠난 논개를 추모하면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다!”고 노래했다. 분노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증오와 악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불의와 부정을 징벌하는 정의로운 행위의 예비단계다.우리는 시대와 공간에 최대치의 공감을 인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사람의 사유와 인식, 행동을 재삼재사 숙고하고 헤아리면서 공감의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야말로 무의미하고 폭력적인 분노가 아니라, 창조적이며 건설적인 분노를 잉태할 것이다. 그것의 출발은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문학과 정직하고 차분하게 대면하는 일이다.

2018-11-22

제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얼마 전 텔레비전 인문학 대담 프로그램에서 2018년 이전의 200년 동안 발생한 주요 사건을 ‘08년’ 끝자리로 살펴보니 흥미로운 일이 많았다. 우선 1818년 5월 5일 카를 마르크스가 탄생한다. 1867년 출간된 ‘자본’으로 150년 넘도록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마르크스. 영국의 메리 셸리는 1818년에 장편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출간한다.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라는 부제(副題)를 가진 소설에서 그녀는 인간이 생명의 창조주가 될 수 있는지 묻는다.100년 전으로 소급하면 1918년에 천만 넘는 전사자를 야기한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48년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원년이다. 1968년은 유럽과 미국 그리고 일본열도를 휩쓴 ‘68혁명’ 발발연도다. 1988년에 서울올림픽이 열렸고, 1998년에는 한국이 ‘국제통화기금’ 사태로 모진 고초를 겪은 해다.2008년에는 세계금융위기가 촉발된다.그리고 올해 2018년에는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이 개최되어 지구촌 마지막 냉전지대의 암운(暗雲)이 걷히기 시작한 원년이다. 실로 많은 사건이 ‘08’년 들어간 해에 일어났다.우리가 유념하지 않는 1918년 11월 11일은 제1차 대전종전 기념일이다.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사라예보를 달리던 승용차에 19살 세르비아 청년 가브릴로 프린씨프가 두 발의 총탄을 발사한다.목과 배에 중상을 입은 두 사람은 수십 분 후 절명한다. 희생자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위계승자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아내 소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하자마자 러시아와 도이칠란트, 프랑스, 영국 등이 줄줄이 참전하기에 이른다. 그것을 일컬어 1차 세계대전이라 한다. 20세기하면 우리는 이내 ‘문명’과 ‘야만’의 두 얼굴을 동시에 연상한다.제2∼3차 산업혁명으로 물질적인 풍요를 가능하게 했던 과학기술문명의 중흥기 20세기. 제1~2차 세계대전으로 미증유의 인류 도살장으로 변모한 야만의 시공간 20세기. 그 첫 번째 흑역사를 알린 사건이 1차 대전이다. 더욱이 1918년 봄에 미국에서 발생해 세계 18억 인구 가운데 6억이 감염되고 5천만을 희생시킨 에스파냐 독감은 우리의 음산한 기억을 더 어둔 색조로 채색하도록 한다.지난 11월 11일 유럽과 세계전역의 70여 개국 정상은 100년 전 그날의 역사적인 종전을 다각도로 기억하고 추념했다.적국(敵國)으로 쌍방에게 총구를 겨눴던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과 도이칠란트의 메르켈 총리가 얼굴을 맞댄 사진은 많은 것을 함축한다. ‘크나큰 상흔을 남긴 1차 대전의 교훈을 잊지 않겠다, 그런 대규모 전란이 재발해서는 안 된다, 그 중심에 유럽연합의 핵심인 프랑스와 도이칠란트가 굳게 자리를 지키겠다’는 다짐이 담겨 있는 사진이다. 마크롱은 기념식 연설에서 1차 대전의 교훈을 발판삼아 편협한 국가주의와 포퓰리즘, 타국에 폐쇄적이고 적대적인 노선을 거둬들이자고 촉구했다.그의 발언은 ‘아메리카 넘버원’을 주장하는 트럼프 대통령을 겨냥한 것이다.하지만 기념식에 불참한 트럼프는 파리외곽의 미군 전몰자 묘역을 참배한 뒤 귀국한다. 세계가 지역 블록화와 상호주의로 나가는 시점에 자국 제일주의를 내세우는 트럼프의 행동은 1995년에 시작된 세계화에 역행하는 돌출행위로 간주된다.그런데 어쩌랴! 한반도 운명의 미래가 상당정도 트럼프의 일거수일투족에 달려있음을?! 전임 오바마 정부의 무관심과 무능한 전략적 인내로 전쟁 일보직전까지 가야했던 위기의 남북관계가 변화조짐을 보이고 있음은 천행(天幸)이 아닐 수 없다.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2020년 미국 대선 정국에서 장쾌한 변곡점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1차 대전종전 100주년을 맞이하는 나의 소회다. 그것이 설령 대단한 ‘견강부회(牽强附會)’라 해도 말이다.

2018-11-15

대국굴기의 모순과 민낯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지난 11월 초하루 중국 강소성 남경대학교에서 낯선 장면이 포착된다. 100여 명의 대학생들 앞에서 연설하던 몇몇 학생이 사복차림의 건장한 사내들에게 속절없이 제압당한 것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봉변을 당한 학생들은 ‘마르크스주의 열독(閱讀) 연구회’ 소속으로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고 토론해 왔다고 한다. 사회주의 종주국을 자처하면서 강성대국의 길을 걷고 있다는 중국에서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우리는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고 싶을 뿐이고, 습근평 주석의 부름에 호응했을 뿐이다. 학교는 왜 우리를 이렇게 대하는가!”이것이 제압당한 학생의 연설일부다. 남경대학 당국은 5년 전 창립돼 철학과 부속 모임으로 활동해온 연구회의 등록갱신을 거부함으로써 연구회를 ‘미등록단체’로 만들어버린다. 그러자 연구회 학생들이 대학의 정치적 결정권을 가진 후진보 서기와 면담을 요구하는 현수막을 내걸면서 시위에 돌입한 것이다.학생들은 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물리적 폭력에 저항하지 못했다. ‘사복’들은 중국정부의 공안 소속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 문제는 남경대학은 물론 북경대학과 인민대학의 마르크스주의 학습모임도 탄압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자발적으로 연구하고 보급하는 학습모임을 억압하는 사태가 백주대낮에 일어나고 있다니?!분석가들은 이번 사태가 지난 5월 이후 독립노조 결성문제로 노사갈등이 이어져온 ‘자스사태’와 관련된 것이라 보고 있다. 중국 명문대의 마르크스주의 학습모임 소속 대학생들이 7-8월에 문제의 진원지인 광동성 혜주(惠州)에 위치한 용접기 제조업체 ‘자스’를 찾아가 노동자 시위에 동참하면서 ‘노동자 권익보호’ 등의 구호를 외쳤다고 한다. 그러자 경찰은 8월 24일 관련 학생 50여 명을 연행하고 모임을 해산시키기에 이른 것이다.지난 2018년 5월 5일은 카를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되는 날이다. 이날 습근평 주석은 “마르크스주의는 당과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사상의 무기를 제공하고 중국을 낡은 동방대국에서 인류사상 전례 없는 발전의 기적을 이루게 했다”고 마르크스 이념을 격찬한 바 있다. 나아가 중국정부는 젊은이들이 경박한 서구사상에 물드는 것을 경계하기도 했던 터였다. 이런 차원이라면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고 열독하는 모임은 적극 권장해도 부족할 판이다.등소평의 도광양회와 강택민의 화평굴기를 지나 습근평의 돌돌핍인으로 대국굴기를 지향하는 중국이 마르크스주의를 억누르는 것은 괴이한 정경이 아닐 수 없다. 사태의 핵심은 중국이 대국굴기로 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과도한 빈부격차와 지역격차 문제에 좌파 청년들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우파당국과 충돌하고 있다는 점이다. 공평한 분배, 즉 ‘균분’이야말로 중국이 자랑해온 대표적인 덕목 가운데 하나다. 그것이 심대하게 훼손되고 있는 당대중국.해안지역과 내륙지역의 빈부격차, 도시와 농촌의 격차, 공식적인 부문과 비공식적인 부문(지하경제)의 격차같은 삼중(三重)의 격차로 신음하는 중국. 극심한 환경오염과 자원고갈같은 문제도 중국의 또 다른 아킬레스건이다. 이런 점에서 중국의 열렬한 청년좌파의 목소리가 쉬이 잦아들 것 같지는 않다. 이것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룬 중국의 모순이자 민낯이다. 여기에 중국과 미국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경제전(經濟戰)이 덧붙여지고 있는 셈이다.압축-고도성장을 경험한 우리로서는 중국의 향후변화 과정이 궁금하기 짝이 없다. 우리처럼 중국도 민주주의와 경제적인 번영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지, 그것이 궁금하다.

2018-11-09

유치원 사태를 보면서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린다고 우리나라가 북새통을 떠는 시각, 쾰른에서 어학과정을 공부하던 때 겪은 일이다. 조용한 거리에 유모차 부대가 출현한다. 아이들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유치원 교사들이 경찰이 쳐놓은 줄을 따라 거리행진을 하는 것이다. 호기심 많은 내가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시위하는 까닭을 듣고 고개가 끄덕여진다. 유치원 교사봉급이 너무 작아서 봉급인상 시위를 하고 있다는 답이 돌아온 때문이다. 당시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Nordrhein-Westfalen) 주의 지배정당은 진보성향의 사회민주당이었고, 당연히 그들은 유치원을 포함한 교사와 교수의 봉급인상에 인색하지 않았다.그럼에도 주 재정이 녹록치 않아서 교사들의 요구에 응할 형편이 아니었다. 이에 유치원 교사들은 물론이고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는 학부모들이 동조시위를 벌인 것이다. 학부모들에게 왜 시위에 동참하는지 묻자 흥미로운 답이 돌아온다.“아이 돌보는 유치원 선생님 봉급이 작으면, 그들은 제2, 제3의 일자리를 찾아야 하고, 그렇게 되면 안심하고 아이를 맡길 수 있겠어요?!”그때까지 대한민국이 우주의 중심이라 알고 살아온 나는 적잖은 충격과 신선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나, 선생님 봉급 올려달라고 시위하는 학부모들이 있네!’ 거기서 나는 라인강의 기적, 철학과 음악, 대학과 정치의 나라 도이칠란트의 저력과 합리성을 대면했다.교사의 낮은 봉급이 야기할 유치원 교육의 저급한 수준과 아이의 정서적인 불안에 동조한 부모들의 유모차 시위행진은 심히 유쾌한 것이었다.얼마 안 있어 유치원 교사 처우개선 방안이 나왔고, 유치원은 정상화되었다.분단돼있던 당시 서도이칠란트의 국민총생산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20만 미군주둔을 감당했고, 전 세계에서 온 13만 외국유학생을 공짜로 교육시켰다.그들은 국적 불문하고 유치원과 초중등학교는 물론 대학과 대학원까지 무상으로 교육하고 있었다.반값등록금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대한민국에서 사립유치원 비리가 불거져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래서다. 모든 교육기관을 공적 기관으로 설립하고, 국가와 지자체가 도맡아 경영함으로써 균질적인 교육을 완전 무상으로 보장해온 도이칠란트. 그런 곳에서 교육 담당자들의 비리를 찾아내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한국유치원총연합회가 이번 사태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실망을 넘어 분노마저 느끼는 사람이 비단 나 혼자만은 아닐 터. 자신들의 도덕성이 교육 공무원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면서 징계 공무원 수치를 들이대는 걸 보면 유구무언이다.자기들이 설립한 유치원이 사유재산임을 주장하면서 폐원과 폐쇄 운운하는 양상을 볼라치면 가관(可觀)에 점입가경이다. 그러니까 돈벌이 수단으로 유치원을 세워서 경영했단 얘기 아닌가.이 나라 초중등학교와 대학교까지 마구잡이로 접수한 사학재단의 행악질이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니 새삼 무슨 말을 하겠는가?! 참람하고 다시 참람해 하늘 우러르기가 두렵다. 어디 돈 벌 곳이 없어서 교육계에 추악하고 더러우며 악랄한 촉수(觸手)를 뻗쳤단 말인가?! 교육 한답시고 어리숙한 정부와 무능하고 부패한 공무원, 돈 없고 마음 약한 학부모 등골을 빼먹어온 사학재단과 그 앞잡이들의 ‘돈 놓고 돈 먹기’는 이제 근본부터 잘라야 한다.세계경제의 한 축을 지탱하는 대한민국의 교육이 유치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속속들이 썩어 문드러진 것은 정부와 최고 권력자들의 수수방관이 근본 원인이다. 이참에 교육의 근간까지 낱낱이 들여다보고 대수술을 감행해야 하리라 믿는다.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8-11-01

사람을 죽인다는 것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생명 가진 것을 죽이는 일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기르던 화초나 수목 하나 죽어도 가슴이 서늘한 법이므로. 하물며 움직이는 생명체의 목숨을 앗아가는 행위는 대단한 결단이나 용기를 필요로 한다. 얼마 전에 어깨 위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있어서 필시 ‘모기려니’ 하고 잡아 죽였다. 아뿔싸?! 그것은 모기가 아니라, 작은 거미였다. 성마른 판단과 행위로 거미의 생목숨을 빼앗았으니 마음이 편할 리 없다.사람마다 꺼려하는 생명이 있다. 나는 쥐와 뱀이 불편하다. 파리와 모기, 바퀴벌레와 돈벌레(그리마), 지렁이와 노린재도 반갑지 않다. 하지만 지렁이나 그리마 혹은 거미 등속은 웬만해서 죽이는 법이 없다. 축축하고 규모가 큰 지렁이는 삽이나 호미로 녀석의 본향(本鄕)인 흙이나 풀 속으로 던져준다. 모기와 파리같은 골치 아픈 족속을 해결해주는 거미는 아예 죽일 생각조차 해본 적 없다. 그런 거미를 무심코 죽였으니!직접적인 살해는 아니더라도 에둘러 상대방을 죽이는 경우도 있다. 프랑스 소설가 조리스 위스망스(1848-1907)는 ‘거꾸로’(1884)에서 이렇게 쓴다.“살로메는 책임감도 감정도 없이 마치 고대 그리스 신화의 헬레네처럼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 바라보는 모든 것, 만지는 모든 것을 타락시키는 짐승이었다.”구스타프 모로가 그린 ‘살로메’ 연작을 보면서 그녀의 파괴적인 양상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소설가는 한 걸음 나아가 살로메를 ‘기괴하고 냉담한 짐승’이라고 비난한다. 고혹적이고 음란한 춤으로 의붓아비 헤롯을 기껍게 하고, 그 대가로 어미 헤로디아와 공모해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했던 살로메. 살로메는 망나니의 칼을 빌려 요한의 목을 친다. 차도살인(借刀殺人)이지만, 그것의 근저에는 살로메의 파괴적이고 냉담하며 음산한 육욕과 살인본능이 시커멓게 꿈틀거린다. 두려운 일이다.‘일리아스’에서 다루는 트로이 전쟁의 발단은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가 트로이의 파리스와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인 때문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읽노라면 무엇 때문에 저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야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헬레네 하나를 구출하기 위해서?! 유부녀의 몸으로 국제적인 애정행각을 벌인 헬레네를 구하려고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단 말인가?!문제는 그 이후에 있다. 10년 전란이 전개되는 동안 헬레네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파트로클로스와 헥토르, 아킬레우스같은 영웅들이 스러져나갈 때 그리스 최고의 미인은 어디서 무엇으로 소일하고 있었을까?! 그래서 위스망스는 헬레네를 살로메와 동렬에 올려놓고 날카로운 비난의 화살을 쏘았을 것이다. 죽음의 서약을 하고 헬레네에게 청혼했던 숱한 그리스 청년들의 열망을 냉담한 그녀는 간단히 무시해버린 게 아니었을까!지난 10월 14일 일어난 강서구 피시방 살인사건으로 한국사회가 들썩이고 있다. 잔혹범죄 용의자의 신상을 공개하라는 국민들의 빗발치는 요구에 따라 피의자 얼굴도 언론에 공개된 상태다. 심신미약을 이유로 살인자를 감형해서는 안 된다는 국민청원이 100만을 넘어섰다. 일부 언론은 한국사회에 만연한 ‘분노범죄’의 일상화를 공론화한다. 순간적으로 ‘욱’하는 마음에 생겨나는 살인자가 1년에 400명이 넘는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한때는 ‘동방의 등불’이자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불렸던 평화애호 민족의 나라 대한민국이 언제부터 잔인한 범죄가 차고 넘치는 나라로 전락한 것일까?! 돈과 권력의 화신이자 범죄의 무리가 권력과 돈을 독점하면서 생겨난 단면 아닐까, 생각한다. 생명의 소중함마저 백안시(白眼視)하는 살풍경한 세태교정을 이제라도 시작할 때다.

2018-10-26

초인과 초지능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2016년 3월에 서울에서 열린 이세돌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대결은 흥미로웠다. 인간계 최고수로 선발된 이세돌이 1승 4패로 밀렸다. 1, 2, 3, 5국을 알파고가 가져갔고, 이세돌은 4국을 건지는데 만족해야 했다. 4국 역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이세돌이 던진 끼움수에 알파고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 인공지능의 유일한 패착이었다. 2017년 5월에 알파고는 세계최강 커제 9단과 대결해 3전 전승을 거둔다. 열혈청년 커제는 바둑을 두다가 분을 삭이지 못한 나머지 얼굴이 붉게 상기되고 눈시울에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알파고는 불과 1년만에 바둑 분야에서 인간을 완전히 따돌리는 절정고수로 등극한다. 알파고는 은퇴하여 신계(神界)로 들어갔다고 한다.종횡으로 19줄 361개의 교차점에 돌을 놓아야 하고, 패라는 변수로 중무장한 바둑에서 인공지능이 인간을 상대하기는 버거울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었다. 하지만 불안한 징조는 이미 1997년에 감지되기 시작했다. 인공지능 딥블루가 세계 체스 챔피언 카스파로스를 물리친 것이다. 다시 20년만에 인공지능은 바둑에서도 인간의 능력을 추월한 것이다.일반적인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사람을 초인이라 부른다.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하게 될 초인과 도태하게 될 나머지 인간에 대한 스티븐 호킹의 우려가 언론에 보도됐다. 6년 전 ‘유전자 가위’ 기술이 개발돼 원하는 대로 특정 유전자 부분을 잘라 내거나 붙이는 방법이 열렸다. 이 기술은 치료가 어려운 유전적 질환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아이들의 치료에 쓰이고 있다. 호킹의 우려는 이것에 착안한 것이다. 그는 말한다.“인간은 금세기 안에 인간지능이나 공격성과 같은 본능을 바꾸는 방법을 발견할 것이다. 인간에 대한 유전공학을 금지하는 법안은 통과되겠지만, 일부 사람들은 기억력, 병에 대한 저항력, 수명 등의 특성을 개선하려는 유혹을 참지 못할 것이다.”호킹이 말하는 일부 인간들은 비상한 기억력, 질병에 대한 저항력과 면역력, 타인들과 비교 불가능한 장수 가능성 등으로 일반적인 인간과 구별된다. 그런 사람을 호킹은 ‘초인’으로 규정한다.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강력한 지배자 초인이 등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르크스가 주장한 계급투쟁 대신 초인과 범인의 대결이 일상화할 가능성이 크다. 호킹은 이들 양자 간의 정치적 갈등과 대결, 그로 인한 파국을 경고한 것이다.하지만 나는 초인에 초지능을 보태고 싶다. 인공지능의 능력을 최대한 확장한 초지능의 등장 역시 평범한 인간들의 강력한 적대세력이 될 공산이 크다. 단순히 공부하고 연산하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고 자유의지로 결정하는 초지능! 인간의 조력자이자 충실한 종복(從僕)으로서 인공지능(로봇)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사유하고 행동하는 초지능의 출현! 일부 미래학자들은 초지능의 도래가 아무리 늦어도 2050년 무렵이라고 확언한다.초인의 조건이나, 초지능의 소유는 모두 거대자본과 결부된다. 특정한 부자들만 유전자 조작으로 초인적인 능력을 얻을 수 있다. 오직 그들만이 자기네가 원하는 초지능의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다. 따라서 20:80이나 1:99의 사회가 아니라, 0.0001 : 99.9999의 대결이 일상화될 수 있는 것이다. 200년 전인 1818년에 태어나 계급투쟁과 그것에 기초한 사회주의의 도래를 예견한 마르크스도 예상하지 못한 신세계의 문턱에 우리는 서 있다.2018년 시점에 장밋빛 전망으로 자주 다뤄지는 4차 산업혁명 논의는 섬뜩한 점도 없지 않다. 미증유의 과학기술 문명의 결과에 인류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터미네이터’와 ‘매트릭스’, ‘엘리시움’의 세계가 멀지 않다.

2018-10-19

하토야마 유키오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지난 10월 2일에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총리가 부산대에서 명예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부산대가 밝힌 명예박사 수여의 변은 이러하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한국에 대한 인식이 깊고 식민지 역사문제에 대해서도 일본이 과거를 미화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보여 온 정치 지도자다. 향후 동아시아 번영과 한일 양국의 관계발전에 힘이 돼 줄 것으로 기대한다.” 전통적으로 정치적인 가문의 일원인 그는 2009년 8월 30일 일본 총선에서 민주당의 승리를 진두지휘한다. 자민당이 60년 넘도록 독점해온 권력의 지형도를 일거에 바꾼 인물이 하토야마 유키오다. 한국에서 1998년 정권교체가 일어난 지 11년만에 일본에서도 정권이 바뀐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다이나믹 코레아!’가 선진적인 면도 있다. 2차대전 이후 생겨난 국가들 가운데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번영을 이룬 유일한 나라 대한민국!그의 민주당 정권은 이내 막을 내린다.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강도 9.0의 동일본 대지진 참사 수습에 실패하면서 정권이 자민당으로 넘어간 때문이다. 그럼에도 총리대신으로 그가 말했던 ‘탈미입아’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1868년 명치유신 이래 일본이 금과옥조로 삼았던 ‘탈아입구’를 대체하는 용어가 나왔기 때문이다. 오키나와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문제를 공식화하는 행보는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2015년 8월 12일 하토야마 유키오는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하고, 일제의 식민지배와 독립운동가들의 고문과 살해를 사죄한다. 그가 순국선열추모비에 헌화하고 무릎을 꿇은 채 사과하는 장면은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것은 1970년 12월 7일 비 내리는 바르샤바의 유태인 위령탑 앞에 무릎 꿇고 나치 독일의 범죄를 사죄하면서 폴란드 국민에게 용서를 구한 빌리 브란트의 행동을 연상케 한다.하토야마 유키오는 10월 3일 경남 합천 원폭피해자복지회관을 찾아 위령각에 참배하고 피해자들을 위로하였다. 합천은 원폭피해자가 많이 거주하는 곳으로, 한국의 히로시마로 불린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사망한 조선인 피해자들의 영령을 위로하는 위령각과 복지회관, 자료관이 들어서 있다. 무릎걸음으로 피해자들을 만난 하토야마 유키오는 진정어린 사과로 참석자들의 공감과 용서를 얻어냈다고 한다.그가 부산대에서 행한 ‘아시아 평화와 동아시아 공동체 구축’ 제하의 강연은 많은 것을 함축한다. 아시아의 평화를 실현하고, 공동체 건설은 과거의 범죄사실을 적시하고, 피해 당사자들에게 진정으로 사죄하는 것이 선결조건이다. 전범국 일본이 원폭피해자를 자처하면서 자국의 전쟁범죄를 끝내 부인하는한 아시아의 평화와 공동체 구축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히틀러의 나치가 자행한 전쟁범죄에 대한 빌리 브란트의 진정한 사죄는 훗날 ‘동방정책’의 뿌리가 되었고, 동서독 재통일의 밑거름이자 ‘유럽연합’ 출범의 신호탄이었다. 평화와 공동체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하토야마 유키오의 조용하되 깊은 울림이 있는 행보에 동의를 표하는 것이다. 아베 내각의 퇴행적인 정치행태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길을 가는 하토야마 유키오.지난 4월부터 한반도에는 미증유의 대격변이 일어나고 있다. 분단 70년의 상처와 고통을 뒤로 하고, 문명사적 대전환을 이뤄내려는 열렬한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남한과 북한, 북한과 미국, 북한과 일본의 관계가 ‘평화’와 ‘공동체’ 명의로 재편되기를 갈망한다. 그런 점에서 하토야마 유키오의 방한과 행보는 의미심장하다 할 것이다.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8-10-12

교복과 두발 자유화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얼마 전 서울교육청에서 두발 자유화와 편안한 교복 방안을 발표했다. 머리털 길이는 물론이려니와 파마와 염색도 허용하겠다는 것이 두발 자유화의 골자다. 아울러 학생들의 불평과 원성의 대상인 교복도 자라나는 학생들의 신체에 적절하고 편안하도록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 기본 방침이다. 이것을 두고 사람들이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는 형편이다. 한국에는 수많은 전문가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교육과 의료, 아파트 세 영역에는 헤아릴 수 없는 강호제현들이 가공(可恐)할 신공을 펼치며 군웅할거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강호제현이 관여하려는 분야가 점입가경 확대일로를 걷는다는 점이다. 청년실업, 노인복지, 낙태문제, 남녀혐오, 신도시와 그린벨트 해제, 국민청원을 둘러싼 찬반양론 등등. 이렇게 대단한 나라의 공복(公僕)으로 ‘감위천하선’하는 분들의 노고가 새삼 대견스러운 것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교복폐지와 두발 자유화를 주장해왔다. 교복은 제복이며,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통제와 억압의 기표(記標)다. 군대와 감옥과 학교의 차이가 있는가?! 같은 제복을 입고, 같은 시각에 같은 곳을 바라보고 전원 통제하는 일방향 감시체제의 공간이 학교와 감옥 그리고 군대다. 그런 곳에서 자유로운 영혼과 미래의 꿈과 희망을 설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강제되고 획일적인 일상이 무반성적으로 되풀이되는 전체주의적 공간! 한국 중고교교육은 대입이라는 하나의 과녁으로 수렴돼있다. 확고부동하고 유일무이한 최종목표가 설정돼 있기에 다른 것은 논의대상조차 아니다. 하지만 보라. 전체 학생의 몇 퍼센트가 이른바 명문대학에 입학하는가? 극소수의 성공적인 대입을 위해 얼마나 많은 영혼이 스러지고 메말라가고 있는가. ‘탈학교’ 행렬이 여전히 늘어가고 있는 현실은 무엇을 입증하는가?교복폐지는 거리를 누비는 숱한 이 나라 제복들 가운데 청소년을 제외하자는 것이다. 두발 자유화는 폐지되는 교복과 더불어 학생인권과 민주주의를 신장하는 계기로 작동할 것이다. 학생 개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존중하면, 스스로 성숙하고 사려깊은 판단과 행동을 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요즘 학생들은 ‘스마트폰’으로 중무장한 세대다. 그들은 지식과 정보의 총량에서 기성세대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다. 그런 청춘을 19세기의 익숙한 울타리로 몰아넣고 전근대의 표상 ‘프로크루스테스’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모두가 교육 전문가인 기성세대는 말한다. “청소년 탈선문제는 어쩔 것이며, 누가 책임질 것인가?” 그들은 개인의 자유의지와 윤리적 판단과 실천을 도무지 믿지 않는다. 논리의 밑바닥에는 ‘어리고 미숙하며 철딱서니 없는 청소년’이란 금과옥조가 자리한다. 학부모와 교사가 지도하고 선도하지 않으면 어린것들은 타락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야 말 것이라는 확고부동한 믿음이 신앙처럼 굳건하게 버티고 있다.‘자유’라는 단어는 ‘나로 말미암다’는 뜻이다. 하나의 선택과 그것이 야기하는 모든 과정과 결과까지 내가 책임지겠다는 의미가 온축돼 있다. 청소년들이 어릴 적부터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훈련시키지 않은 자신들을 반성하지 않고, 그것을 억압적인 교복과 두발에 의지하는 자세는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한국의 청소년 문제는 가정교육의 부재에서 발원한다. “공부만 잘 하면 돼! 나머지는 아무것도 아니야!” 유치원부터 고3까지 15년 넘는 세월을 그렇게 가르친 학부모의 무한욕망이 만들어낸 것이 이른바 청소년 문제다. 어떤 숭고하고 아름다운 목적도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자명한 이치를 숙고했으면 좋겠다. 편안한 교복, 아니 교복폐지와 두발 자유화가 가져올 자유로운 개인과 성숙한 민주사회를 그려본다.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8-10-05

‘툴계녭의 언덕’, 읽으셨나요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메리 셸리(1797∼1851)가 ‘프랑켄슈타인’을 출간한 1818년 러시아에는 잊히지 않을 인물이 태어난다. 산문시와 소설, 희곡 모두에서 천품을 발휘한 이반 투르게네프(1818∼1883)가 주인공이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와 더불어 19세기 러시아 황금시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심훈의 ‘상록수’를 읽다 보면 기시감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은 투르게네프의 ‘처녀지’ 때문이다.일본의 근대를 이식받은 식민지 조선 문인들이 열광했던 작가 가운데 하나가 투르게네프라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다. 일본 지식인과 문인들 역시 투르게네프의 문학적 성과에 매료되었다고 전한다. 그런 배경에는 ‘뜬구름’의 작가이자 러시아문학 번역가였던 후타바테이 시메이(1864∼1909) 같은 인물의 열성적인 노력이 자리한다. 뛰어난 원작과 성실한 번역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문학의 융성과 발전을 추동하는 원동력이다.젊은 날 윤동주의 ‘툴계녭의 언덕’을 읽고 망연해진 적 있었다. 제목에 들어있는 어휘 ‘툴계녭’이 너무 친숙했던 때문이다. ‘저건 분명 투르게네프지!’ 그런 확신에 전신이 짜릿해지는 것이었다. 헌책방에서 구한 시집에 있던 ‘툴계녭의 언덕’. 우리는 오늘날 그것을 ‘투르게네프의 언덕’으로 읽는다. 당대의 사회적인 분위기가 살아나지 않는 듯하여 아쉬운 마음도 있지만.러시아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투르게네프의 산문시에 주목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만년의 투르게네프가 인생의 깨달음과 소회를 질박하고 깊이 있게 드러낸 걸작이기 때문이다. ‘거지’(1878)는 그 가운데 하나다. 길 가던 시인이 거지를 만난다. 새빨간 가난에 무너져버린 거지가 그에게 적선의 손을 내민다. 주머니란 주머니는 모조리 뒤져 보지만 시인에게는 돈과 시계는커녕 손수건도 없다. 거지의 손을 황망하게 잡아주는 시인. 거지는 몹시 미안해하는 시인에게 ‘그것도 적선’이라며 고마움을 전한다.동주의 ‘툴계녭의 언덕’은 전혀 다르다. 연희전문 2학년 시절에 쓴 시에서 시인은 인도적이며 낭만적인 투르게네프와 사뭇 반대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고갯길을 넘다가 거지 소년 셋과 마주치는 시인. 무서운 가난에 삼켜진 아이들의 묘사가 우리를 전율케 한다. “텁수룩한 머리털, 시커먼 얼굴에 눈물 고인 충혈된 눈, 색 잃어 푸르스럼한 입술, 너들너들한 남루, 찢겨진 맨발이었다.” 시인도 이 장면에서 러시아 시인처럼 주머니를 뒤진다.식민지 조선 시인에게는 모든 것이 있었다. 두툼한 지갑도, 시계도, 손수건도. 하지만 시인은 그것을 만지작거릴 뿐 내주지 않는다. 그에게는 ‘용기’가 없다. 이야기나 해볼 요량으로 “얘들아!” 하고 부르지만 아이들은 흘끔 돌아볼 뿐 제 갈 길을 간다. 아무도 없는 언덕에는 짙은 황혼만이 밀려올 뿐이다. 왜 동주는 적선하지 않았을까?! 돈이나 시계는 몰라도 손수건은 줄 수 있지 않았을까?! 투르게네프처럼 아이들 손이라도 잡아줄 수 있지는 않았을까?!용정의 부모가 보내주는 월사금으로 공부하는 유학생이라 해도 그의 시에 내재한 영혼과 정신은 분명 적선을 요구했을 터. 일회적인 적선이 소년들을 가난에서 해방하지는 못한다 해도 인간적인 동정과 연대감 표시 정도는 해야 하지 않았을까?! ‘프랑켄슈타인’에서 셸리는 창조주의 위치로 올라서려는 인간의 욕망과 비겁함과 무대책을 그려낸다. 투르게네프는 ‘거지’에서 공감과 연대를 보여준다. 반면에 동주는 대학생의 화사하고 소심한 자아에 멈춰있다. 연민과 동정과 연대가 사라진 문학에는 예술혼과 미래가 없다.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손을 내밀어야 한다. 장자의 ‘학철지부’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갈급한 지경의 사람들과 공감하고 연대해야 한다. 그것이 도리이기 때문이다. 잠시 옛시인들을 돌이키는 가을날이다.

2018-09-28

2018년 추석을 맞으며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다시 팔월 한가위 추석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이나 친지를 찾아 나라 곳곳으로 이동하는 진풍경을 되풀이하는 시절. 들판의 벼가 고개 숙인 채 누렇게 익어가고 있지만 본격적인 수확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지난 여름 우심한 폭염의 무더위와 솔릭 태풍과 때 아닌 폭우(暴雨)로 농부들의 심사는 편치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추석명절을 기다려왔다. 그것은 분명 예정된 만남과 그것이 선사하는 즐거움과 흔쾌함 때문일 것이다.추석을 목전에 둔 시점에 남과 북의 최고 정치 지도자들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다시 머리를 맞댔다. 4월 27일, 5월 26일에 이어 9월 18일 세 번째 정상회담을 가진 것이다. 이제는 고인(故人)이 된 김대중-노무현 두 분 집권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한 차례씩 정상회담을 했지만 이렇게 1년에 세 차례 넘도록 얼굴 맞대고 중차대한 사안을 논의하기는 처음이다. 21세기 문명사적 대전환이 바야흐로 한반도에서 생겨날 조짐이 보인다.추석이 오면 나는 예외없이 서울로 길을 재촉한다. 승용차에 이런저런 농산물을 싣고 모친을 뵈러 300㎞ 여정에 오른다. 형제자매와 친척은 물론이려니와 40년 지기(知己)들을 만나는 유쾌함은 필설로 형언하기 어렵다. 얼마 전에 정년을 맞은 친구들과 회합하는 자리에서 “우리 어머니께 인사드리러 오렴!”하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친구들 부모님들은 모두 돌아가셨고, 유일하게 나의 모친만 생존하신 때문이다. “그래!” 하는 대답이 들려온다.그래서다. 내가 이번 추석을 예년보다 기대하는 까닭은 나의 가까운 벗들이 어머니를 찾아뵙고 인사드리는 일정이 잡혀있기 때문이다. 언제 세상과 작별하실지 모르는 어머니가 40년 전부터 내 ‘절친’으로 지내왔던 벗들을 만나보는 일은 적잖은 기쁨일 것이다.서울과 청도를 오가는 길에서 대면하는 허다한 미지(未知)의 군상이 보여주는 관습과 풍경은 언제나 흥미로운 관찰대상이다. 옷차림과 걸음걸이, 가족관계와 얼굴표정 하나하나 추석명절이 선사하는 환희와 생동감을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조금은 가볍고 우울한 주머니 사정이라 해도 그런 내색하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서두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은 살아있음을 재삼재사 확인하는 작업과 전혀 동일하다.다만 한 가지 저어되는 것은 아홉 마리 닭의 먹이활동이다. 싸라기와 옥수수 사료를 5대5로 배합한 마른 식사와 배추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제공하는 야채식단이 사나흘 중단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웃에게 부탁할까 생각은 하지만 명절의 번다함과 혼란스러움, 소란과 소음을 한껏 향수할 권리를 그이들에게서 빼앗는 것 같아 적이 조심스럽다. 하지만 이런 정황에도 불구하고 한가위가 주는 기쁨은 줄어들지 않는다.요즘에는 곤충들의 습격을 받은 감이 불그스레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10월 말 이후 본격적으로 출하되는 홍시 이전의 ‘홍시’가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4년 전 추석 때 녀석들을 따서 서울로 가져갔을 때 처음으로 나는 알게 되었다. 모친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홍시라는 것을! 그 후로 해마다 추석이 되면 벌레들의 선물을 김치통에 가득 담아서 가져가곤 한다. 그걸 보고 기뻐할 노모의 주름진 얼굴이 그려진다.세상이 비록 공평하지 않아도 잠시 그런 생각 접어두고 가족과 이웃과 친구들과 덕담 나누고, 풍요로울 미래를 그려보는 것은 작은 행복이다. 여전히 남과 북의 대립과 갈등을 부추기는 정당과 언론들과 투기꾼들이 있지만 언젠가 그들도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 공동체의 화합에 동참하리라 믿는다. 추석을 맞으면서 가족과 친지의 범위를 크게 넓혀보면 어떨까, 하는 기막힌 상상을 해보는 게다. 이번 한가위 보름달은 한없이 크고 밝으면 좋겠다.

2018-09-21

걸신들린 자들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걸신(乞神)’은 “몹시 굶주려 음식을 지나치게 탐하는 상태나 그런 사람”을 일컫는다. 단언컨대 2018년 9월 한국사회의 정치-경제-종교-언론 부자들은 걸신들린 자들이다. 천정부지로 오르는 아파트값을 더 올리려 눈 빨간 투기세력은 돈에 걸신들려 있다. 조물주 위에 군림하면서 임대인을 행주처럼 쥐어짜는 건물주들도 걸신들린 자들이다. 분단 70년 남북관계에 새 역사를 쓰려는 정부의 발목을 악랄하게 잡아채는 정치인들은 권력에 걸신들린 자들이다. 북한의 세습은 목청껏 욕하면서 교회권력 세습하는 종교인 무리는 돈과 권력에 걸신들린 노예다. 자영업자들의 경영난이 오로지 최저임금 인상이라 호도하는 언론재벌과 기자들은 매판자본과 지식에 걸신들린 영혼 없는 자들이다.사법권을 정치권력에 팔아넘긴 법원과 판사들은 권부의 걸신이다. 돈 주면 애 낳을 것이라는 환각과 미몽에 사로잡혀 ‘출생주도 성장정책’이라는 희대의 망언을 뇌까리는 정치인들은 여성을 출산기계로 생각하는 걸신들린 장사치 후예들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퀴어 축제를 폭력적으로 저지하는 자들은 시대착오적인 종교관에 미혹된 정신질환의 걸신이다.허구한 날 드라마로 시작해 드라마로 끝나고, ‘먹방’에서 출발해 ‘먹방’으로 끝나고, 노래와 춤으로 시작해 그걸로 끝나는 쇼 프로그램 기획하는 방송인들은 오락과 유흥에 걸신들린 자들이다.청년 일자리 창출과 이윤의 균분(均分)에는 태무심하고, 권부에 줄 대서 총수지위 세습하는 재벌 자식들은 금수저의 걸신이다.국민들의 생명과 재산보호는 안중에도 없고, 최고 권력자를 위해 복무한 장성들은 권력에 포섭된 우매한 걸신이다. 영원한 깨우침과 해탈에는 관심 없고, 세속의 권력과 육욕과 물질을 탐하는 승려 무리는 탐욕의 걸신이다. 도반들이여, 붓다가 일갈했던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은 어디로 갔는가? 말해보라!이렇게 보면 한국사회에 올바르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없는 듯하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99% 절대다수 한국인은 정직하고 성실하며 탄탄한 세계관으로 무장한 민주시민이다. 그런데도 걸신들이 대한민국을 배회하는 까닭은 무엇인가?!그들이 하나처럼 과도한 욕망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노예이기 때문이다.욕망을 넘어선 탐욕의 노예들이 이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누란지위 형국이다. 그자들이 욕망의 최종 방어선을 무참하게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상생의 마당, 대한민국 공동체가 흔들리고 있음을 뜻한다. 우리의 조국이 쩍쩍 금가는 소리가 들린다.탐욕스러운 투기세력과 건물주, 불의한 재벌과 민족도 역사의식도 없는 정치인, 믿음도 꿈도 없이 물신에 젖어버린 종교인, 권력에 몸을 판 판관과 장성, 사주의 포로가 된 미망의 언론인과 방송인. 이들은 누구인가?!스스로 잘났다는 자존심과 학벌과 혈연과 지연으로 엮어져 이 나라를 좌지우지한다는 환상에 젖은 자들이다.그들을 위한 공자의 처방이 있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말라!” (논어 ‘위령공’) 유대사상의 초석을 놓고 ‘토라’의 의미를 공자처럼 해석한 힐렐도 같은 가르침을 준다.그이들의 결론은 하나다. 그대들처럼 타인도 욕망하고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각성하라는 것이다. 우리 어린것들과 그 미래를 생각한다면 이제 그만하라. 걸신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풍요로운 영혼과 정신의 신생(新生)을 그려보라!

2018-09-14

휴대전화와 학교교육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얼마 전에 생선횟집에 들른 적이 있다. 40, 50대 중년배 서넛이 소주잔을 기울이는 저녁나절 번다한 시장통 횟집풍경은 평안하고 따사로웠다. 생선 비린내가 코를 간질이는 횟집에서 이색적인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서너 살 남짓한 어린애가 휴대전화 동영상을 들여다보고 있다. 일손 부족한 가난한 부부가 횟집을 운영하면서 아이에게 동영상을 틀어준 거였다. 아이는 장난감 만지듯 익숙한 손놀림으로 휴대전화를 놀리고 있다.‘햐, 이것 참 고약하군!’ 소리 내지는 않았지만 뭔가 아픈 소리가 내장을 거쳐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이다. “재미있니?!” 하고 물어본다. 고개 끄덕이는 아이를 보고 엄마가 조금 안쓰러운 표정이다. 저 나이에 벌써 휴대전화 동영상이라니! 앉거나 누운 채 소리와 영상에 홀린 것처럼 동영상에 몰두하는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일은 간단치 않은 노릇이었다. 세월이 더 많이 흐르면 어떤 일이 생길까, 하는 궁금증이 일어나는 시장골목 횟집정경.각설하고, 프랑스는 2018년 9월 3일부터 유치원과 초등학교, 중학교에서 휴대전화 사용을 전면 금지했다. 지난 7월 30일 프랑스 의회가 유치원과 초중등학교의 휴대전화 사용금지 법안을 통과시킨 것에 따른 조치다. 긴급 상황이나 장애학생이 아니라면 수업시간은 물론이려니와 쉬는 시간에도 휴대전화 사용이 금지된 것이다. 휴대전화를 가지고 등교할 수는 있지만, 학생은 휴대전화 전원을 끄거나, 사물함에 넣어두어야 한다.고등학생들의 경우에는 고교마다 재량에 따라 휴대전화 사용을 금지시킬 수 있다. 이런 조치를 취하게 된 배경이 자못 흥미롭다. 블랑케 교육장관에 따르면, 휴대전화 사용금지는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는데 도움을 주리라 한다. 이와 아울러 휴대전화 금지는 학생들의 교제를 증장시키고, 왕따를 줄이며, 절도와 학교폭력 감소에도 기여할 것을 목표로 한다. 하나의 돌로 여러 마리 새를 잡는 효과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주지하듯 오늘날 휴대전화는 안부 주고받는 용도를 훌쩍 뛰어넘는다. 오락은 물론이려니와 최신정보와 지식으로 넘쳐난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는 실시간으로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사고와 대면한다. 최고의 양질(良質)로 손보아진 사진이나 동영상과 함께! 사정이 이러다보니 유아와 청소년은 물론 중장년과 노년에 이르기까지 똑똑한 전화기 스마트폰은 그저 휴대전화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21세기 문명의 총아로 거듭나고 있다.하지만 세상일은 언제나 빛과 그림자, 새옹지마(塞翁之馬)로 점철돼 있다. 일출과 일몰이 이어져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내가 주목하는 휴대전화의 폐해는 온라인상에서 발생하는 다채로운 양상의 폭력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라 불리는 가상공간에서 낮밤 가리지 않고, 남녀노소 불문하고, 신상털이와 무차별적인 인신공격이 난무하는 현실이다. 어제의 연인과 친구가 오늘 나의 신상을 털고, 나를 무고(誣告)하는 무법천지 인터넷 세상.그로 인해 하루가 멀다 않고 등장하는 숱한 고소고발 사건으로 지구촌은 날마다 신음한다. 문명의 이기(利器)로 인류가 축적한 무형의 지식과 정보를 무한 공급하는 거대원천이 느닷없이 인간을 매도하고 사회적 타살로 유도하는 도살장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원초적인 책임소재 하나가 스마트폰 휴대전화다. 그런 까닭에 프랑스 교육부가 왕따와 학교폭력 감소를 휴대전화 금지목표로 설정한 것은 설득력을 가진다. 우린 어쩔 셈인가?!어린 나이부터 전자기기에 노출되는 어린것들의 생물학적 성장이 저어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과 완전 격리되어 성장하는 어린 세대의 교육이 걱정스럽다. 벼와 밀을 쌀나무, 밀나무로 알고 성장할지도 모를 횟집아이의 미래를 잠시나마 걱정해보는 아침이다. 이런 기우를 높푸른 하늘의 맑은 바람이 휩쓸고 지나가기를….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8-09-07

소득주도 성장정책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택시를 타다보면 민심의 변화를 가늠할 수 있다. 지난 4월과 5월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고, 6월에 북미정상회담까지 성사되었을 때 대통령과 민주당 지지율은 고공행진을 거듭했다. 그러나 시간과 더불어 남북문제가 뒷전으로 밀리고, 한국경제가 세간의 관심사로 대두하자 상황이 급변한다.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언론과 야당들은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을 교체하라고 이구동성으로 아우성친다. 나의 택시기사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게 능사일까?!지난 8월 26일 장 실장은 기자간담회를 열어 소득주도 성장정책의 필연성과 당위성을 주장했다. 한국경제는 소비가 성장을 견인하지 못하는 구조인데, 그 까닭은 경제성장이 소득증대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의 과실(果實)을 국민 개개인이 아니라, 재벌이 대표하는 기업들이 거둬갔다는 얘기다. 더욱이 기업들은 경제성장의 과실을 투자확대와 임금인상이 아니라, 사내유보금 형태로 유지하고 있는 것 또한 심각한 문제라 할 것이다.그와 더불어 우리나라는 고소득층과 저소득층의 불평등이 심화하여 내수확대도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다. 예컨대 2016년 기준 소득상위 10%와 하위 10% 노동자의 임금격차는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국가 가운데 세 번째에 해당한다. 1년 미만의 단기고용 노동자 비중도 2위에 기록될만큼 고용불안이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경제상황에 대한 분석이 이 정도면 그에 상응하는 대책이 나와야 한다. 그것을 장 실장은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이라 부른다. 소득주도 성장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방침이 최저임금 인상이다. 저소득층의 불안정한 고용과 미흡한 소득을 확충하는 차원에서 실행되는 바람직한 정책이 최저임금 인상인 셈이다. 보수언론과 야당들은 마치 최저임금 인상 때문에 자영업자들이 폐업하고 몰락하는 것처럼 호들갑떨면서 사태를 호도한다. 문제는 조물주 위에 있다는 건물주의 행악질과 로열티와 카드 수수료같은 것으로 갑질하는 은행과 재벌 대기업의 횡포, 정비되지 않은 각종 제도에 있다. 장 실장은 기자간담회에서 혁신성장이 일자리 창출과 가계소득 증대의 기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혁신성장이 이뤄지면 양질의 일자리가 확충되고, 그 결과 개인과 가계의 소득이 늘어난다고 한다. 따라서 소득주도 성장정책과 혁신성장은 쥐포의 양면처럼 분리 불가능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희망처럼 일자리가 늘어나고, 저소득층의 수입이 증대한다면, 내수도 살아나고 경기가 활성화됨으로써 경제도 성장하는 선순환구조가 안착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조금 여유를 가지고 인내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차분한 눈과 마음으로 상황을 지켜보는 자세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지금’과 ‘여기’에 함몰되어 4대강 사업같은 토건으로 단기적인 성장을 꾀하거나 무분별한 규제완화를 남발함으로써 ‘언 발에 물을 부은’ 전임 정권들과 달리 정해진 정책기조를 밀고 나갈 수 있도록 지켜보는 것도 미덕 아닐까. 이와 아울러 ‘상가임대차보호법’ 같은 민생법안은 놔둔 채 입으로만 민생을 외치고, 건물주 이익옹호에 앞장서는 파렴치한 야당의 행태도 문제라고 생각한다.아시아 경기대회 축구대표팀 김학범 감독이 황의조를 발탁했을 때 얼마나 많은 비난과 욕설이 난무했는가?! 그가 우즈베키스탄 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입을 다물었다. 조금만 여유롭고 관대하게 세상을 바라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 간절한 아침이다.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8-08-30

출산 권하는 나라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1921년 11월 ‘개벽’ 월간지에 현진건의 단편소설 ‘술 권하는 사회’가 실린다. 소설의 주인공인 젊은 부부는 결혼한 지 7∼8년이 되건만, 실제로 같이 지낸 세월은 1년 남짓. 아내는 동경 유학생 남편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했으나, 돌아온 그는 날마다 술타령이다. 어느 날 새벽 두 시, 고주망태가 된 남편에게 아내가 묻는다. “누가 이렇게 술을 권했는가요?” 남편 가로대 “이 사회란 것이 술을 권했다오!” 아내는 ‘사회’라는 어휘를 알지 못한다. 아내와 말이 통하지 않는 남편은 무너지는 억장을 두드리며 다시 나가버리고 아내는 서글픈 마음에 혼잣말한다.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근대화를 이룬 일제(日帝)를 배우러 유학 떠난 남편과 구시대 습속과 문화에 익숙한 아내의 소통불능에 기초한 ‘술 권하는 사회’. 식민지 조선 지식인들의 명예욕과 자리다툼으로 인한 분열에 괴로운 남편의 유일한 출구가 음주인 것을 아내는 끝내 헤아리지 못한다.두 사람이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은 대상을 바라보는 엇갈린 시선에 있다. 중학을 마친 남편이 공부하러 동경에 있던 세월 아내는 ‘공부’를 도깨비 방망이로 생각한다. 그녀의 물질적인 욕망을 일거에 해소해주는 신묘한 화수분 같은 공부. 그러하되 남편은 신문물과 사상, 변화된 세상을 공부에서 찾으려 한다. 나아가 그것을 토대로 조선의 변화와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지만, 그것은 백일몽(白日夢)이 되어버린다.‘술 권하는 사회’ 이야기를 꺼낸 것은 툭하면 불거져 나오는 저출산 문제 때문이다. 세계최저 수준으로 곤두박이질친 한국의 출산율을 걱정하는 목소리들 탓이다. 2025년이면 초고령 사회로 진입한다는데, 이렇게 출산율이 낮으면 한국사회는 어떻게 되겠는가, 장탄식 늘어놓는 언론보도가 하루가 멀다 않고 얼굴 내민다. 언론은 지금과 미래의 노인들을 부양하기 위해서라도 가임 여성들이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주장한다.그런데 생각해보자. 신생아가 미래 한국의 동량(棟梁)이 되고자 태어난다고 생각하시는가? 노인을 부양하는 산업 역군으로 아이들이 등장해야 한다고 믿으시는지? 아이에게는 나름의 인생과 미래와 꿈이 있어야 한다. 아이들은 지금과 여기의 우리를 책임져야 하는 산업 예비군이 아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이 노인세대 봉양을 위해서가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모든 삶에는 나름의 인과율과 연기(緣起)가 작동한다.지금 세상은 참 빨리 변하고 있다. 똑똑한 전화기 ‘스마트폰’이 상용(常用)화된 것은 불과 10년 전 일이다. 그 후 스마트폰은 어떻게 진화했는가? 페이스북과 트위터, 카카오톡과 텔레그램이 우리 삶 속으로 침윤한 것 또한 불과 10년 남짓하다. 하지만 그것들이 불러온 변화의 폭과 깊이는 상상하기 어렵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여성들에게 국가를 위해, 나이든 세대를 위해 출산을 강요하다시피 하고 있다. 이것은 낡아빠진 전근대의 표본이다.그 동안 저출산 극복을 위해 정부가 투여한 예산은 또 어떤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20조원, 2011년부터 2015년까지 61조원, 2016년부터 2020년까지 108조원이 책정돼 있다. 무려 100조원이 넘는 예산이 투입되었는데, 상황은 어떤가? 차라리 신혼부부나 동거하는 남녀에게 나눠주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저출산 문제는 애국심과 막대한 예산으로 해결될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소설의 주인공들과 달리 우리는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직시해야 한다.청년세대의 고질적인 일자리 부족과 해결난망인 주거문제, 평생 지속되는 경쟁만능과 승자독식, 노인들의 우울한 일상, 행복과 담쌓은 나라. 이런 문제가 선결(先決)되지 않으면 저출산 대책과 거액의 예산투입은 ‘깨진 독에 물 붓기’일 따름이다. 인간답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우리의 소박하지만 명확한 꿈이 성취되면, 단언컨대 아이들 웃음소리 가득한 한반도가 될 것이다.

2018-08-24

중화제국과 양키제국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기원전 6세기 중엽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가 동으로는 인더스, 서로는 이집트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한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인류는 싫든좋든 제국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아프로-유라시아를 거점으로 살아온 구대륙 거주자들에게 세계제국은 오랜 세월 숙명처럼 작용했다. 세계사에서 최대제국을 형성한 대원제국(1271∼1368)을 끝으로 거대 육상제국은 종언을 고한다. 이른바 ‘지리상의 발견’ 내지 ‘대항해시대’를 기점으로 유럽의 팽창이 가속화하면서 근대가 얼굴을 내민다. 수천 년 지속된 동양과 서양의 팽팽한 이항대립은 19세기 이후 유럽의 우위로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그럼에도 제국의 역사는 현재 진행형이다.1850년부터 1914년까지 대영제국은 세계 최강이었다. 1851년 제1차 만국박람회에서 제국의 위용을 과시한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 확고부동한 최강제국의 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제2차 대전 이후 대영제국은 위축되고 미국과 소련을 축으로 하는 정치지형이 만들어진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의 득세와 소련의 몰락으로 양키제국의 일극시대가 개막한다. 미국 앞에는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는 무풍시대가 도래한 듯했다.1840년 아편전쟁과 1850년 태평천국의 난 등으로 극심한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청나라는 급기야 1911년 신해혁명과 이듬해 중화민국으로 막을 내린다. 식민지 전락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중화세계는 1949년 공산당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새 역사를 만들어가는 듯했으나, 1966년부터 문화대혁명의 거대한 후퇴를 경험한다. 모택동 사후 가능해진 실용주의 노선으로 중국은 등소평의 ‘도광양회’를 거쳐, 호금도의 ‘화평굴기’를 지나, 습근평의 ‘돌돌핍인’에 이른다.중국은 2010년에 일본을 누르고 국내총생산 세계 2위로 도약한다. 2017년 기준으로 보면 미국의 국내총생산이 19조 달러, 중국은 12조 달러로 두 나라 총합은 세계 총생산의 40%에 이른다. 21세기 초반 세계최강은 미국이지만, 중국이 끈질기게 따라붙는 형세라 할 것이다. 이런 추세를 반영하는 것처럼 중국은 ‘대국굴기(大國FFFC起)’를 시위하듯 세계 전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한다. 우리는 그것을 ‘일대일로(一帶一路)’에서 극명하게 확인한다.문제는 외교나 정치를 장사나 거래로 생각하면서 ‘아메리카 넘버원’이라는 믿음으로 똘똘 뭉친 트럼프가 제국의 수장이라는 사실이다. 요즘 벌어지고 있는 중국과 미국의 경제전쟁은 21세기 세계를 누가 주도할 것인가, 하는 패권주의 냄새를 물씬 풍긴다. 유럽 제국주의, 무엇보다도 대영제국의 후예로 이름을 날린 양키제국이냐, 아니면 150년 묵은 과거의 수치를 일거에 만회하려는 전통의 중화제국이냐, 하는 건곤일척의 대회전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물구경과 불구경 다음으로 재미있다는 ‘싸움구경’이 점입가경으로 치달아가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지 않다. 문제는 거대제국들의 싸움판에서 예기치 않게 날아들 유탄이다. 지정학적인 위치로 인해 수천 년 중화세계와 국경을 맞대고 살아온 역사를 우리는 기억한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지금까지 전혀 자유롭지 못한 대미관계를 뼈아프게 통찰한다. 양키제국과 중화제국 사이에서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지는 앞으로도 우리 외교의 근간(根幹)이다.한국 외교부를 점령하고 있는 미국 최우선주의는 이참에 재삼재사 숙고해야 한다. 영국의 저술가 마틴 자크의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이라는 서책의 주장도 있지만, 제국의 구심력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살피고 판단하는 슬기로움을 가져야 할 일이다. ‘화무십일홍’ 혹은 ‘권불십년’이란 말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변화를 근저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증유의 대변혁이 진행되고 있는 21세기 초반 시점에서는 새삼 재언을 필요치 않을 것이다.

2018-08-17

이사에 대하여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역마살(驛馬煞)’이란 말이 있다. 사전에서는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언제나 이리저리 떠돌아야 하는 액운”이라 풀이한다. 필시 나한테 적용되는 것이리라. 60평생 살면서 서른 번 넘게 이사했으니 말이다. 이사도 이사려니와 이곳저곳 다니기를 좋아하는 성정(性情)이고 보니 부초(浮草)처럼 떠돈 곳도 적지 않다. 그래선지 나는 역마살을 액운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것은 고전시대 혹은 농경시대 정착민의 사고일 것이다.그럼에도 같은 곳에서 오래 살아가는 사람이 부러울 때가 있다. 이른바 ‘토박이’라 불리는 사람에게서 묻어나는 느긋함과 여유로움이 좋아 보이는 것이다. 오랜 세월 한 곳에서 산다는 것은 인근 주민들과 깊은 인연을 맺고 살아감을 뜻한다. 동네 이력이나 생활상의 변천을 낱낱이 꿸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근자에 나의 정착기간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주민 생활을 접고 정착민이 되려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얼마 전 대구 신천대로를 달리다가 남루한 이사차량을 보았다. 오전 10시 무렵 이미 34∼35도를 오르내리는 도로를 2.5t짜리 포터트럭이 허름한 장롱과 약간의 세간을 싣고 달리고 있었다. 고무밧줄로 엉성하게 묶은 단출한 이삿짐을 싣고 한여름 거리를 질주하는 트럭에서 내 지난날을 본 것이다.행운유수처럼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청춘을 탕진했던 저 빛나던 20∼30대는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장렬한 7·8월 땡볕도, 한겨울 설한풍(雪寒風)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위대한 청춘은 마침내 스러졌다. 그 시절 다반사로 이사했건만, 힘들다는 생각은 없었다. 아, 다시 새로운 곳으로 가는구나. 거기서 무엇인가 빛나고 아름다운 새로운 인생과 대면할 수 있을 거야. 그런 희망이 하얀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런 동화같은 삶은 끝내 오지 않았다.20대 중반, 부모님은 서울시민을 포기하고 산본 신도시로 이주했다. 이사가는 초여름 날 가랑비가 온종일 대지를 적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 비가 왔다는 사실보다 어머니의 긴 한숨을 지금도 기억한다. 장롱 깊은 곳에서 어머니는 아버지 함자를 한자로 새긴 문패를 꺼내면서 말했다. “결국 이 문패는 걸지 못하겠구나!” 만석꾼 막내며느리로 시집와 장구한 세월 주구장창 이사만 다녀야 했던 어머니의 장탄식(長歎息)이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고향을 버리고 무작정 상경을 단행했지만, 끝끝내 그곳에서도 정착하지 못한 채 외지의 16평 아파트로 이사해야 했던 1980년대 중반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것이 연기(緣起)의 법칙인지 모르지만, 유학과 귀국 이후에도 나는 도회에서 도회를 떠돌았다. 그 어디에도 나의 고단한 육신과 영혼을 안온하게 누일 공간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그런 연유로 신천대로를 질주하던 이사 트럭에서 연민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푹푹 찌는 이런 무더위에 이사라니?!이러매 초원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목축민들의 이사는 얼마나 단출하고 홀가분한 것인가. 게르나 유르트를 거주 공간으로 삼은 사람들의 허허로움은 도회의 정착생활에 묶인 세계시민들에게는 한여름 유성(流星)처럼 부러운 것이다. 짧은 동안에 철거와 건축이 용이한 구조물을 마차로 가지고 다니면서 이동하는 헐거운 삶의 자유로움은 그야말로 너끈한 것 아닌가. 미미한 세간 실은 이사트럭을 설익은 감상(感傷)으로 바라본 내가 외려 쑥스럽다.100만이 넘는 우리 이웃들이 아직도 지하방과 옥탑방, 그리고 판잣집에서 폭염과 맹추위를 견디며 살아간다. 올해같은 가마솥더위에 고령의 노인이 세상 버리는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다. 인간다운 삶을 가능케 하는 부의 공평한 분배와 보편적 복지의 실현이 조속한 시일 안에 이루어지면 좋겠다. 한여름 땡볕의 우울한 역마살 이사가 아니라, 화사한 미래기획과 결부한 호쾌한 이사라면 얼마나 흐뭇한 일이겠는가.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8-08-10

최인훈 광장 노회찬

▲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2018년 7월 하순, 한반도에서 두 사람이 세상과 작별한다. 최인훈과 노회찬이 그들이다. 최인훈은 1936년생, 노회찬은 1956년생으로 두 사람은 스무 살 터울이다. 소설가는 인간의 영혼과 시공간, 영원성과 불멸을 다룬다. 정치가는 인간의 물질과 현세성과 필멸을 본업으로 삼는다. 우주의 미소(微小)한 존재로 스스로를 자각하는 인간을 천착하는 소설가와 지금과 여기의 포로로 회자정리(會者定離)의 필연을 천형(天刑)처럼 안고 가야하는 정치가. 한증막을 연상시키는 폭염의 거리와 광장에서 시민들은 두 사람을 전송한다. 하나의 시대를 열었던 소설가와 다른 시대를 열고자 몸부림쳤던 정치가를 추모하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함께 하는 열린 공간과 이데올로기와 사회·정치·경제적인 평등을 추구했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대동(大同)의 마당을 열어젖히고자 했던 두 사람. 그들이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 그럼에도 그들이 남긴 자취는 언제나 우리와 더불어 잊히지 않을 것이다. “개인의 밀실과 광장이 맞뚫렸던 시절에 사람은 속은 편했다. 밀실과 광장이 갈라지던 날부터 괴로움이 비롯했다. 그 속에 목숨을 묻고 싶은 광장을 끝내 찾지 못할 때,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광장’)개인의 은밀한 공간과 대중의 광장이 맞뚫려있던 때, 사람은 누구나 안온하고 넉넉했다. 돈과 권력과 명예와 물질이 나와 당신을 구분하지 않았던 시절. 개인과 사회의 욕망이 민낯으로 대면하고 충돌하면서도 조화를 찾아나갔던 시간대. 최소한의 체면치레와 인간다움에 대한 믿음과 실천이 일상화되었던 시대. 딸깍발이와 수도승과 행운유수 하는 처사들과 논객들과 장삼이사의 지근거리(至近距離)가 당연시됐던 사멸한 과거. 어느 때부턴가 밀실은 광장과 차폐(遮蔽)돼 광장과 밀실이 유리되기 시작한다. 밀실의 개인은 광장의 대중이되, 개인의 밀실과 대중의 광장은 더 이상 교통하지 못한다. 나의 밀실과 너의 밀실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며, 상호이해와 소통 가능성은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그런 연유로 열려 있어야 할 광장은 죽어버린 밀실들의 조합으로 생명을 상실한 채 떠도는 무색무취(無色無臭)한 사멸의 거대공간으로 전화된다. 밀실에서는 부패 무능 타락 패거리주의로 무장한 개인들이 혈연과 지연과 학연과 금전으로 뒤얽혀 악취를 뿜어낸다. 그들이 만들어낸 광장은 전제(專制)와 독재와 학살을 은폐하는 강제와 억압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광장은 그리하여 밀실의 확대 재생산을 되풀이하면서 개인의 숨통을 조이고, 대중의 반역을 조준한다. 죽어버린 대중과 사라져버린 밀실이 야기하는 시공간에 저항의 손길을 보낸 이들이 최인훈과 노회찬이다.1960년대 4·19 혁명의 시공간에서 태어난 ‘광장’에서 최인훈은 집단적 폐쇄성과 강제성으로 인해 광장만이 동그마니 남은 북한체제를 거부한다. 그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해 밀실만 횡행하고 광장이 사라진 남한체제도 부정한다. 그가 창조해낸 이명준은 오도 가도 못한 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제3지대의 선택 가능성을 최인훈은 거부한 것이다. 우리는 그가 추구한 제3의 종점을 아직 알지 못한다,1970∼80년대 노동운동으로 세상과 만난 노회찬은 평생 그 길을 걷는다. ‘자본과 임노동(賃勞動)의 화합할 수 없는 대립관계’에서 불거진 노동자의 정치·경제적인 지위향상을 위해 불철주야(不撤晝夜) 분투한다. 언제나 가난했지만 그는 웃음과 촌철살인(寸鐵殺人)과 정의로움과 미래기획을 잊지 않는다. 밀실에서 스러지는 노동자 개인이 아니라, 햇살 가득한 광장의 해방된 노동대중으로 거듭 나도록 온몸으로 싸워나간 불세출(不世出)의 투사 노회찬. 이제 그들은 우리 곁에 없다. 그들은 갔지만, 우리는 아직 그이들을 보낼 수 없다. 언젠가 광장이 밀실이 되고, 밀실이 광장과 만나는 그날이 오면 그들과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고 싶다. 그날은 반드시 오리라! 그날 우리는 하나 되어 광장에서 찬란한 해방의 춤을 추리라!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8-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