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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적폐청산과 정치보복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요즘 정치권의 현안(懸案)은 적폐청산이냐 정치보복이냐, 하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장구한 세월 쌓이고 쌓인 폐단을 이참에 말끔하게 해소하고 나아가자는 주장이 적폐청산이다. 반면에 `왜 하필 지금이냐`면서 보수(수구)정권의 패악(悖惡)이 아니라, 권력투쟁의 소산으로 접근하는 자세가 정치보복이다. 전임정권의 실정이나 부패가 아니라, 대권 상실에서 원인을 찾으면서 청산의 이름으로 반복되는 정치보복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다. 우리가 선거를 치르고 일정기간 권력을 부여하는 것은 민의를 최대한 반영해 나라와 백성의 정신적 물질적 복리를 증진하라는 명령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되, 그들의 천부인권을 최대한 보장하라는 요구인 것이다. 따라서 최고 권력자를 비롯한 권력집단은 권력을 이양한 국민의 입장과 관점에서 정치를 바라봐야 한다. 특정한 개인이나 정파 혹은 지역을 위한 패거리정치는 필연적으로 각종 해악을 양산해내기 때문이다.가까이로는 세월호 대참사, 백남기 농민 살해사건, 일본군 위안부 문제,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 블랙리스트 등을 거명할 수 있다. 조금 멀리로는 4대강 사업, 방위산업 부정비리, 자원외교 국고낭비, 언론장악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문제에는 공통점이 자리한다. 특정개인과 정파의 이익과 정치적 목적을 위해 민(民)의 생명과 재산을 경시하고, 뼈아픈 역사를 외면한 채 희희낙락 국가재산을 쌈짓돈처럼 주물럭거린 것이다.보수권력의 부정, 부패, 타락, 패거리주의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오죽하면 티케이 피케이 같은 지역붕당 별칭이 생겨났겠는가. “우리가 남이가?!” 그 말 하나로 똘똘 뭉칠 수 있는 정치 모리배들이 이 나라 민주주의를 압살한 것이 하루 이틀 일인가. 그자들은 정치적 입지강화와 음성적인 돈벌이와 대를 이은 권력 장악을 위해 최소한의 양심과 체면을 던져버린 하이에나에 다름 아니다.돌이켜보면 얼마나 많은 사건사고가 이 땅의 민초들을 압살(壓殺)해왔는가. 서해 페리호 침몰사건, 삼풍백화점 붕괴, 씨랜드 참사사건, 대구 지하철 방화 살인사건, 그리고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대참사. 무엇인가, 이것은. 수십 수백의 인명을 앗아간 대형사고가 이어지고 또 이어져도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고, 사건사고는 되풀이되고 반복됐다. 이것을 일컬어 `적폐`라고 한다. 이런 누적된 폐단을 철거하고 걷어내야 한다.얼마나 많은 생명이 4대강 사업으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는가. 죽어가는 강이 신음하듯 내뱉는 녹조라테는 어찌할 것인가. 방위산업이란 미명으로, 자원외교란 허명으로 허공중으로 사라져버린 그 많은 예산은 누구 주머니를 강탈한 것인가?!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자원외교, 방위산업이었는가?! 이런 적폐를 덜어내지 않는다면, 그것을 입안하고 실행한 자들의 부정과 부패, 타락과 패거리주의를 척결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이 나라가 전진할 수 있는가.추악하게 오염된 얼굴을 분칠하려 한국방송과 문화방송을 장악하려고 만들어낸 `방통위`와 그 하수인들의 농단은 또 어떤가. 불과 5년짜리 권력으로 무소불위의 통치권을 “조자룡 헌 칼 쓰듯” 휘둘러댄 정치꾼들과 폴리페서들의 더러운 욕망과 그것의 분출을 근절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백년대계를 설계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을 정치보복이라 읍소함으로써 피해를 최소화하고 정치생명 연장을 위해 지역주의에 매달리는 자들이야말로 적폐의 온상(溫床) 아닌가.“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아니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꺼리는 곳에 자리한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도덕경` 8장) 노자가 말한 `상선약수`의 본성이 이 나라 정치판의 오염과 타락을 말끔하게 씻어내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특정개인과 집단, 정파와 지역을 위한 살생의 정치가 아니라, 국민을 살려내는 상생과 공영의 정치가 이뤄지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보복이 아닌 진정한 청산의 마당을 열어가는 역사적인 첫걸음이기를 바란다.

2017-10-20

양과 바늘과 수레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현동 정동유(1744~1808) 선생이 1805~1806년 어간(於間)에 지은 `주영편(晝永編)`에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조선의 졸렬한 세 가지 풍속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조선에는 바늘과 양, 그리고 수레가 없어서 옹색하다”는 것이다. 소, 말, 개, 돼지, 닭과 함께 양은 육축(六畜) 가운데 하나다. 대륙에서는 일찍부터 소와 더불어 희생 제물로 널리 보급된 가축이 양이다. 현동 선생은 그런 양이 조선에 없는 것을 한탄한 것이다. 양은 조선의 자연지리적인 형편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바늘과 수레의 부재는 뜻밖이다. 불과 200여 년 전 조선에 바늘과 수레가 없었다는 사실이 이해 가능한지 궁금하다. 순조 어간에 유씨 부인이 썼다고 알려진 `조침문`에서 사태의 본질을 짐작할 수 있다. 청나라에서 가져온 바늘을 27년이나 쓰다가 문득 부러뜨린 안타까운 심사를 담은 글이 `조침문`이다.“연전에 우리 시삼촌께옵서 동지상사 낙점을 무르와 연경을 다녀오신 후에, 바늘 여러 쌈을 주시거늘, 친정과 원근일가에 보내고, 비복들도 쌈쌈이 낱낱이 나눠주고, 그 중에 너를 택하여 손에 익히고 익히어 지금까지 해포 되었더니, 슬프다. 연분이 비상하여 너희를 무수히 잃고 부러뜨렸으되, 오직 너 하나를 영구히 보전하니, 비록 무심한 물건이나 어찌 사랑스럽고 미혹치 아니하리오. 아깝고 불쌍하며, 또한 섭섭하도다.”`조침문`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세간(世間)의 필수품인 바늘 하나를 조선에서 만들지 못했다는 대목이다. 반가(班家)의 아낙 유씨는 시삼촌 덕에 바늘을 얻어 친정과 지인들에게 나눠주었다지만, 일반 백성들은 어찌 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동지섣달 설한풍을 견뎌낼 든든한 옷차림의 출발이 촘촘한 바늘땀이었을 것은 자명한 이치. 장구한 세월 조선의 민초들은 긴긴 겨울날을 어떻게 이겨냈을까, 하는 우울한 소회가 찾아든다.일찍이 연암 박지원(1737~1805) 선생은 “조선의 백성이 가난하고 굶주리는 까닭은 선비 탓”이라고 일갈했다 한다. 수레 같은 초보적인 운송수단마저 19세기 초 조선에 없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기원전 20세기 무렵 `안드로노보`인이 발명한 전쟁용 전차(戰車)가 역사기록에 등장한 것이 기원전 1274년 람세스 2세의 이집트와 철기문명의 선두주자 히타이트가 맞붙은 `카데시 전투`였다. 수레 없는 춘추전국시대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한 노릇이다.조선의 허다한 선비와 식자들이 독파했을 `논어`와 `맹자`, `도덕경`과 `장자`에서 수레를 찾는 것은 다반사(茶飯事)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들은 독서행위 자체에 함몰되었을 뿐, 경세제민에는 태무심했다. 그저 과거에 응시하여 환로(宦路)에 나아가 가문의 영광을 현창하는데 급급했을 따름이다. 개인의 영달과 집안의 광영을 위해 일로매진한 갸륵한 뜻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그 탓에 민초들이 겪어야 했을 고통은 어찌 필설로 다할 수 있겠는가?!조선에 물레방아가 최초로 설치된 해가 1792년이었다고 한다. 연암 선생이 1780년 동지사 사절에 동행했다가 안의마을 현감으로 나아간 해에 물레방아를 시설한 것이다.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에 근거하여 우주운항의 법칙을 밝힌 `프린키피아`를 출간한 연도가 1687년이었다. 그로부터 100년도 더 지난 시점에 비로소 조선의 작은 마을에 처음 설치된 물레방아. 서세동점이 아니라 해도 조선의 멸망이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오늘날이라 해서 크게 다를 바 없다. 많고 많은 전문가들은 권력자의 부름을 얻고자 동분서주 하지만 정작 그들의 쓰임새와 민초를 바라보는 시각은 물음표로 차고 넘친다. 민생과 민권과 민을 위한 후생복지를 구두선(口頭禪)으로 되뇌는 정치가는 많지만, 이용후생의 길은 아직도 요원하다. 허명과 출세에 급급한 지식인이 줄어들지 않는 한 21세기 대한민국의 앞날은 밝지 않다. 현동의 `주영편`과 연암의 `열하일기` 독서가 절실한 가을날이 깊어가고 있다.

2017-10-13

추석을 맞으며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1991년 9월 21일, 추석 전날 일이다. 베를린 자유대학 유학생이었던 나는 영화출연 제의를 받는다. `모든 게 사기(Alles Luege)`라는 제목의 희극영화 단역에 나가보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주지하는 것처럼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1990년 10월 3일, 도이칠란트는 재통일된다. 그 이후에 유럽에 몰아닥친 극우 민족주의와 파쇼의 광기는 위험천만한 것이었고, 영화는 그런 분위기에서 제작됐다.희곡과 연극을 공부하던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촬영장소가 구(舊) 동도이칠란트의 국회의사당 격인 인민궁전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출연료도 적잖게 배정돼 있어서 맞춤한 아르바이트였다. 온밤 내내 비가 내리는 속에서 촬영이 진행됐다. 나와 몇몇 한국인 유학생은 중국인으로 출연했고, 중동에서 온 친구들은 쿠바의 카스트로를 모방한 멋들어진 수염을 달고 있었다.명민한 독자는 알아채셨겠지만, 사회주의 국가 가운데 경제적인 면에서 정상의 지위를 점했던 동도이칠란트의 허위와 허세를 비웃는 것이 `모든 게 사기`의 내용이었다. 한국 유학생 하나가 “아인 운트 츠반치히 운트 아인 할베스 프로젠트?!” 하는 대사를 맡았다. “21.5퍼센트?!” 하는 도이치어다. 주연배우가 자꾸만 실수하고 대사를 잊어버리는 바람에 촬영은 예정시간을 훌쩍 넘겨 아침나절이 돼서야 끝났다.영화사 측은 애초 예정된 급료만 지급하려 해서 우리는 연합시위에 돌입했다. 일을 시켰으면 시킨 만큼 추가비용을 지급하라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었다. 요구가 관철되어 추가수당을 더 지급받고 우리는 인민궁전을 빠져나왔다. 동베를린에는 아침햇살이 환하게 내리비치고 있었다. 간밤에 언제 비가 왔었느냐, 하는 새삼스런 눈길로 나를 비추던 찬란한 햇살이 지금도 기억에 삼삼하다. 그때 내겐 동행(同行)이 있었다.정치학을 공부하던 81학번 친구였는데, 그와 함께 서베를린 동물원역 부근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한형, 앞으로 좌파 운운하는 인간들 있으면 그냥 놔두지 않을 거요!” 함부로 좌우를 이야기하고, 편을 가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의미하고 허망한 것인지를 깨우친 밤샘이 나를 그렇게 인도한 것이다. 반쯤 빨개진 눈과 몽둥이로 얻어맞은 듯 욱신거리는 육신과 영혼이 나를 거칠게 몰아붙이는 우울한 추석아침이었다.추석 무렵이 되면 그날의 일을 추억한다. 민족의 명절로 일컬어지면서 한민족 대이동을 세계만방에 떨치도록 하는 추석. 하지만 내게 추석은 2차 대전의 추축국 도이칠란트가 분단을 넘어 통일로 접어든 시기로 다가온다. 하필이면 그들은 `개천절`에 다시 뭉친 게 아닌가. 우연치고는 아주 고약한 우연이라고 생각한다. 전쟁과 무관했던 나라는 여전히 분단의 고통에 시달리는데, 전쟁주역 국가는 히죽 웃고 있는.1991년 겨울 훔볼트 대학에서 있은 지도교수 강연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시상(詩想)이 떠올랐다. 약속도 미뤄놓고 `1991년 겨울 베를린`이라는 우울한 단시를 썼다. 거기서 나는 히틀러의 제3제국과 다시 시작되는 제4제국의 불길한 예감을 가감 없이 표출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동상 앞에 내던져진 시대의 야유 “우리는 아무 잘못도 없어요! (Wir haben keine Schuld!)”를 기록했다. 그리하여 무너진 역사와 시작하는 역사를 생각했다.한 세대가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 그날을 돌이키자니 가슴이 먹먹하다. 짧지 않은 시간대에 우리는 무엇을 하고 살아온 것일까. 스스로 돌아보아도 쓸쓸함과 우수와 한숨만 허옇게 색 바랜 머리털과 벗할 뿐. 한반도에 전쟁의 암운이 감돌고, 미국과 북한은 야수처럼 으르렁거리는데, 초로에 접어든 사내는 한낱 범부(凡夫)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책. 제 몸 하나 온전히 추스르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도는 부나방 같은! 하되, 달 밝은 추석명절이다!

2017-09-29

마광수와 동성동본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지난 5일 마광수 교수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저승에서나마 평안과 안식을 누리시기 바란다. 1991년 `즐거운 사라`로 이듬해 강의 현장에서 체포돼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마광수. 그에게 부여된 죄목은 `음란문서 유포죄`였다. 주지하는 것처럼 소설의 주인공 사라는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즐기는 20대 여대생이다. 그녀는 성별도 노소도 하룻밤 사랑도 가리지 않는다. 일찍이 한국문단에서 그려진 바 없는 사라의 성생활은 문란하기 짝이 없다는 판정을 받는다. 소설은 판금(販禁)됐고, 작가는 구속됐으며, 1995년 대법원 확정판결도 다르지 않다. 그리고 마광수는 연세대 교수직에서 쫓겨난다. 거기서 발원한 우심(尤甚)한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이 그를 자살로 인도했다고 전한다.세월이 흘러 2011년 마광수는 `돌아온 사라`를 출간한다. `즐거운` 사라보다 한층 담대하고 상큼하게 자유로운 섹스를 즐기는 `돌아온` 사라. 하지만 누구 하나 그런 `사라`를 눈여겨보거나 인구에 회자시키지 않는다. `사라`든 `팔라`든 `자라`든 `졸라`든 젊은 여성의 성생활에 개입하려는 검찰도 법원도 경찰도 가부장도 모권도 모조리 사라져버린 것이다. 무엇일까?! 불과 20년 만에 한국의 성풍속도가 급변한 근저에 흐르는 것은 무엇인가?!한국사회에서 전근대의 미망(迷妄)이자 시대착오적인 퇴행으로 꼽혀온 것이 `동성동본 혼인금지법`이었다. 그로 인한 자살자가 해마다 언론에 보도되곤 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녀가 동성동본이란 이유로 자살을 선택해야 했던 적막한 살풍경! 그런 엉터리 악법의 효력이 중지된 것은 1997년 7월 헌재의 `헌법불합치판정` 이후였다. 하지만 2005년 3월 31일 민법 제809조가 개정된 후에야 비로소 `동성동본 혼인금지법`의 법률적 효력은 완전 소멸된다.1991년 1995년 1997년 2005년 2011년, 이런 20년 세월에 한국사회는 국가권력의 선무당 칼춤 아래 신음했다. 즐거운 사라가 한국사회, 특히 돈과 권력을 가진 중년 남성들의 이중적인 성도덕을 질타하자 국가권력이 개입한다. 법질서와 미풍양속의 수호자를 자처한 권력은 비평과 독자의 판단 이전에 작가를 현행범으로 체포·구금한다. 국가가 정작 지켜야했던 것은 `동성동본 혼인금지법`을 폐지해 무고한 청춘남녀의 자살방지 아니었을까?!소설가 마광수가 내다본 성도덕과 풍속도의 급변을 감지하지 못한 채 `지금과 여기`에 갇혀 우물 안 개구리 식으로 일관한 검찰과 법원. 1992년 10월 강의실에서 전격적으로 체포된 마광수의 흉중에는 무엇이 자리하고 있었을까, 궁금하다. `엄근진` (엄숙, 근엄, 진지) 3자로 무장한 이 땅의 허다한 이중인격자들과 도덕가들과 권력자들을 성적(性的)으로 질타한 마광수. 그의 자살은 그래서 적잖은 불편함과 미안함을 불러일으킨다.`돌아온 사라`에서 마광수는 이렇게 쓴다.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 지독한 패러디이자 조롱과 힐난이다. 진리와 자유의 자리를 뒤바꿈으로써 한국인과 한국사회가 얼마나 부자유하고 진리와 담을 쌓고 살아가는지 폭로하는 일갈. 자유(自由)라는 한자어에는 개인에게 사유와 행동의 시작과 결과를 끝까지 추궁하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스스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궁극의 책임을 원인제공자 스스로가 감당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2017년 시점에 젊은 여성들의 성적 결정권을 시비하거나 함부로 운위하는 자들은 전원 사멸했다. 술자리 뒷담화로나 떠돌법한 소설을 준엄한 법의 잣대로 평결해 죄수로 만들어버리는 어리석은 작태. `동성동본 혼인금지법` 같은 악법은 살려둔 채 음란문서 운운했던 권력자들과 그에 기생한 자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궁극의 자유`를 주장한 마광수의 죽음을 애도하며 시대를 앞서 간 그의 명복을 재차 기원한다.

2017-09-22

블랙리스트와 예술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경북대 인문학술원의 `릴레이 인문학 강연` 프로그램의 하나로 내가 실행한 강연제목이 `블랙리스트와 예술가`다. 주지하는 것처럼 지난 박근혜 정권은 문화-예술계 인사 9천473명에게 불온한 좌파 예술가란 딱지를 붙이고 사갈시(蛇蝎視)하며 조직적으로 관리해왔다. 정권과 재벌에 순종하지 않고,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한 인사들에게 재정지원 중단이나 방송출연 금지 같은 불이익을 강제한 정권과 그 하수인들이 작성한 블랙리스트.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의 혐의(?)가 흥미롭다. 2016년 12월 26일 에스비에스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야당정치인을 지지한 사람, 광주민주화운동과 제주 4·3항쟁을 다룬 사람, 국가보안법을 비판하거나, 박정희 부녀의 정권을 풍자한 사람, 비정규직 노동자 시위를 지지하거나 `세월호` 시국선언에 참여한 사람들이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고 한다. 한 마디로 불온한 사상을 가진 진보좌파 진영 인사들을 겨냥한 것이 블랙리스트다.4·19 이후 자신의 시세계를 급변침한 김수영 시인은 “모든 문화는 근본적으로 불온하다!”고 일갈했다. 문화-예술인들의 의식 저변에는 불온한 저항과 반역의 정신이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설파한 것이다. 현실의 정치 권력자들과 재벌들, 그들에게 기생하는 언론과 문화의 권력자들과 대형교회와 사찰의 부패한 관리자들을 겨냥하는 예술가의 영혼과 정신은 부패 기득권 세력에 대한 분노와 저항으로 충만해야 한다.2013년 9월 3일부터 15일까지 국립극단은 고전 그리스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개구리`, `구름`, `새`를 3부작 형식으로 묶어서 상연했다. 그 가운데 `개구리`를 2013년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삼아 그분(노무현)과 풍운(박정희)의 이념적-역사적 대결로 각색한 박근형 연출가가 블랙리스트에 등재돼 정부의 재정지원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더욱이 `개구리`상연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문체부 예술정책국장이 승진에서 탈락했다고 한다.그분을 긍정적으로 그려내고, 풍운을 비판적으로 다룬 박근형 연출가는 언론 인터뷰에서 “현재권력을 가진 쪽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게 예술”이란 주장을 전개한다. 후임정권의 조직적인 모욕으로 죽음에 이른 노무현을 관대하게 다루고, 풍자의 날카롭고 쓴 웃음으로 당대정권을 매섭게 몰아친 연출가의 의도는 적중했다. 왜냐면 `개구리` 상연이 최고 권력자와 그 수하(手下)들의 심기를 거스름으로써 블랙리스트 작성의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2014년부터 청와대 정무수석실이 주도한 블랙리스트 작성은 2016년 인터넷상에서 `설(說)`로만 돌아다니는 형국이었다. 그러다가 2016년 12월 26일 박영수 특검팀이 김기춘-조윤선 등의 집과 집무실, 문체부 예술정책국 등 10여 곳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언론에 보도된 권력자들의 편향되고 왜곡된 사유와 인식은 놀랍다. “문화-예술계의 공공성 강화 차원에서 진보 예술인들을 말려 죽여야 한다.”`좌파`와 `진보`를 공공의 적으로 규정하고, 살기 넘치는 발언을 거리끼지 않았던 자들이 권력의 심장부에 포진하고 있었다. 새가 좌우의 두 날개로 나는 것처럼, 사람도 좌우의 두 다리로 걷는다. 한쪽 손이나 눈, 귀가 없으면 얼마나 불편한지 우리는 알고 있다. 좌우의 균형적인 발달과 대칭이 인간에게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지 삼척동자도 이해한다. 우리의 사유와 인식도 좌우가 고르게 발달해야 온전하게 작동한다.진보는 보수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꿈꾸고, 보수는 진보가 엄두내지 못할 사업도 구상한다. 좌와 우는 이항대립이 아니라, 상보적이고 협력하는 관계다. 그래야 나라의 백성이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된다. 언제까지 `좌빨`과 `수꼴` 타령을 할 것인가?! 21세기 시간과 공간이 광속으로 날아가고 급변하는 시점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냉전의 시각과 작별할 때 우리는 지구촌 일원으로 현재를 살피고 미래를 기획하게 되리라.

2017-09-15

행복의 유예(猶豫)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언젠가 교정에서 불문과 교수 두 분과 마주쳤다. 나를 포함한 노문과 교수는 3인. 기막힌 가을날이었고, 오후에는 강의도 외부일정도 없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학교 밖으로 나가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하지만 최종순간 불문과 교수가 “나중에 가죠!” 하고 말을 비틀었다. 노불전쟁이니, 노블하게 한잔 하자더니. 마음을 바꾼 것은 갑작스런 회동이 부여하는 부담이리라 싶었다. 예정에 없는 돌발행동이 야기하는 심정적 무게랄까.“지금 아니면 안 될 겁니다!” 나의 말에도 결국 그날 행사는 무산됐다. 그 후로 그이는 “기회 닿는 대로” 혹은 “언젠가”, 내지 “조만간” 등등의 어휘를 구사하면서 무산된 기약을 허망하게 확약하곤 했다. 작년에 퇴임한 그분의 동정(動靜)을 아는 바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해졌다. 정언명령처럼 내뱉은 “지금 아니면 안 된다!”는 일갈(一喝)의 정확성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된 것이다.흔히들 “다음에!”라고 말한다. 이런 약속이나 행복의 유예는 일찍이 한국인들이 입에 달고 살아온 익숙한 것이다. 대학입시에 모든 것을 걸다시피 하는 학부모들은 수험생의 희망사항을 대학입학 이후로 유예한다. “대학 가면 해라!” 그런데, 어디 그런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그들은 취업의 덫에 걸려든다. 부모의 어휘는 자동적으로 바뀐다. “취직하면 해라!” 최소한 4~5년의 유예가 젊은이들을 옥죈다. 그렇다면 `취직`이 최종관문일까?“결혼하면 해라!”로 텍스트가 변경된다. 결혼하고 나면 다시 “집을 장만하면”으로, 집은 다시 “보다 큰 아파트 평수”로, 아파트는 다시 “미래를 위한 부의 축적”으로 전환된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지금과 여기의 행복과 약속은 어김없이 미래의 그것으로 유예되기를 반복해왔다. 이런 상황 탓인지 요즘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에게 바라는 게 별로 없는 듯하다. 미래에 현재를 저당 잡히고 살아온 자들에게 무엇을 기대한단 말인가!그런데 시간의 본질은 언제나 `현재`에 있지 않을까. 우리가 살아가는 시공간의 본원적인 층위는 지금과 여기에 기초하고 있는 게 아닌가 말이다. 지금과 여기가 결석하는, 나의 현존재가 부재하는 과거와 미래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단출하게 말하면, 어째서 미래를 위해 지금과 여기의 행복을 유예해야 한단 말인가. 행복의 완결판은 죽어서야 가능한 것이 아니냐고 한다면 과장일까?!만일 오늘 먹고 마시지 못한다면 우리 몸은 시나브로 약해지고, 그것이 중첩되면 사멸할 것이다. 행복이나 약속을 자꾸만 유예한다면 영혼도 육신도 조갈증에 시달려 쇠하고 말리라. 행복을 유예함은 현재를 미래에 저당 잡힌 채 사는 것이다. 지금 구할 수 있는 행복과 지금 실현할 수 있는 약속을 자꾸만 뒤로 미루는 것은 노예의 철학이다. 아무런 기약도 할 수 없는 막연한 미래와 기대에 의지하는 허망(虛妄)의 노예.언젠가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란 말이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이 제시한 `현재의 삶에 충실해라!`는 의미의 라틴어 구절. 혹자는 `오늘을 즐겨라`로 누군가는 `오늘을 포착하라`로 번역하는 `카르페 디엠.` 어쨌거나 그 말의 핵심은 행복이나 약속을 먼 훗날로 미루지 않는 것이다. 정말 절실하고 소중하면 그것을 미루면 안 된다. 지금과 여기가 배제된 먼 미래의 행복과 만족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그날 우리는 결국 팔공산에 가지 못했다. 가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거나 서운한 것이 아니라, 막연한 미래로 넘겨버린, 이행 불가능한 약속이 새삼 구차한 것이다. 길지 않은 인생행로에서 우연찮게 마주한 짧은 여정의 선물을 뒤로 하고 얻은 게 무엇이었을까, 생각한다. 어쩌면 그런 식으로 우리는 인생의 소중한 약속과 행복을 조금씩 갉아먹고 사는지도 모른다. 가을햇살이 찬란한 시절의 들과 산과 바다가 여러분을 손짓하는 시절이다.

2017-09-08

단역으로 살아가기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재선 대통령으로 재임(在任)했던 오바마가 퇴임할 때 사진이 인상적이다. 8년 전 젊고 팽팽하며 여유로운 모습은 온데 간 데 없고 중늙은이가 그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허옇게 센 머리터럭과 코 양쪽에서 입술 주위로 내리뻗은 굵은 주름살. 햐, 누가 저이를 8년 전의 오바마라 생각이나 하겠는가. 8년 세월이 아무리 긴 시간이라 해도 사람이 저렇게 신속하게 늙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생각을 곱씹어도 무상(無常)을 넘어 혼란스러워진다.무엇일까. 그이를 장년의 인간에서 중늙은이로 뒤바꾼 동인(動因)이 무엇이었을까. 지구촌 최고의 권력자 노릇 8년에 남은 것이라곤 노년의 돌이킬 수 없는 자취뿐이라니! 냉전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이런 문제가 제기된 적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직업은 무엇일까.”1등은 강대국 대통령. 따라서 로널드 레이건과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0년대 가장 힘든 노역(役)을 지고 있었던 셈이다. 2등은 우주비행사. 영화 `인터스텔라`나 `그래비티`를 보신 관객이라면 이내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무중력의 시공간에서 언제나 죽음과 대면하면서 고독과 싸워야 하는 사람이므로. 3등은 영화감독. 다소 뜻밖일 것이다. 하지만 한 편의 영화에 내재한 허다한 공동 조력자를 생각한다면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배우, 음악, 의상, 분장, 미술, 소도구, 대도구, 진행, 스턴트, 편집, 선외 등등 영화를 가능하게 하는 각종 요소를 생각해보시라. 20세기를 대표하는 `제7의 예술`로 자리매김한 영화의 종합적인 성격을 고려한다면 감독의 어깨에 실린 하중을 실감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런 감독이 만든 영화를 우리는 어쩌면 너무 가볍고 값싸게 소비하는지도 모른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字幕)이 끝까지 올라가고 나서야 자리를 뜨는 관객은 거의 없으니 말이다.연극과 영화를 사랑하는 내가 만든 말이 있다. “단역(端役) 없이 조연(助演) 없고, 조연 없이 주역(主役) 없다!” 결론은 단역배우가 없이는 어떤 주연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누구나 주연배우로 살아가고 싶어 한다. 그것이 개인사든 확장된 사회관계 내부에서든 우리는 버젓이 주역을 담당하고자 한다. 그저 무명(無名)으로 존재감 없이 묻히기는 싫은 것이다. 그래서일까. `킬리만자로의 표범`에서 양인자는 소리 높여 외친다.“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수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하지만 인생이란 게 무슨 흔적 따위를 남기는데 의미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아주 미미한 흔적마저도 지워버리고자 진력한 법정 스님의 예화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다. 오바마의 주름살을 보며 떠올린 것이 주역의 고단한 행장(行狀)이었던 까닭은 그것이었다. 한 사람이 이고지고 견딜 수 있는 행장의 최종무게를 과도하게 측량-책정하고 실행한 후과(後果)로 남은 주름살. 하지만 그 알량한 `오바마 케어`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묻고 싶다.후임자가 하나둘씩 폐기해가는 전임자의 정책에서 권력의 무상함과 헛심을 본다. 도로 아미타불로 전화(轉化)하는 지난 시대의 지난(至難)한 노력의 결실을 보며 오바마의 주름살은 무엇을 느끼고 있을까. 허망함일까, 거꾸로 돌아가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대한 거부감일까. 그도 아니면 무망(無望)한 시도의 종언에서 풍겨 나오는 역겨움에 대한 구토일까. 여하튼 나의 명제는 단출하다. 주역이 되려는 어떤 시도도 상처와 아픔으로 남게 된다는 것.단역의 단출함과 소소함이 선사하는 단아함과 아늑함이 새삼 따사롭게 느껴진다. 허다한 인구(人口)에 회자되는 짧고도 짧은 권력의 희롱과 농단이 야기한 기이하고 파괴적인 행각을 얼마 전 우리는 생생하게 목도하지 않았던가. 하되, 다수의 인간은 여전히 주연배우로 무대를 휘젓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한 가지만 잊지 마시라. 그대들을 위한 숱한 단역과 희미한 조연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그대들을 가능하게 했다는 자명한 사실을!

2017-09-01

소설을 읽는다는 것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소설에 내재한 시공간과 인과율(因果律)을 독서하는 행위다. 서정시와 달리 소설은 신문기사처럼 육하원칙에 충실하다. 무엇을, 어떻게, 왜라는 3요소를 하나로 표현하면 인과율이 된다. 소설은 그런 세 가지 바탕 위에서 주인공들이 맞닥뜨리는 갈등과 사건과 크고 작은 전갈을 포괄하는 복잡다단한 그릇이다.작년 이맘때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풀 베개`(1906)를 읽으며 상념에 젖어든 일이 있다. `풀 베개`는 소설 같지 않은 소설이었다. 특별한 사건이나 갈등,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념이나 주장도 없다. 다만 영국을 필두로 한 유럽과 일본 혹은 중국의 미학과 문학이 소설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필시 그것은 소세키의 영국유학에 터를 두고 있을 것이었다. 1900년부터 1902년 12월까지 그는 유럽의 문학과 미학을 배우러 도영(渡英)했으니 말이다.`풀 베개`에 거명된 인물과 작품을 거명해보면 이러하다. 셸리, 도연명, 왕유, 오자키 고요와 `금색야차`, `파우스트`, `햄릿`, 노, `채근담`, `논어`, `중용`, 이백, 두보, 백거이와 `장한가`, 굴원과 `초사`, 레오나르도 다빈치, 마쓰오 바쇼, 히로세 이젠,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 `만엽집`, 이토 자쿠추, 마루야마 오코, 조지피 윌리암 터너, 살바토르 로사, 고트홀트 레싱, 조지 메러디스, `아테네의 타이몬`, 프레더릭 구달 등등.히로세 이젠의 하이쿠 “봄바람이여, 이젠의 귓가에 말방울소리”나 `만엽집`에 실려 있는 “가을이 되면 그대도 억새꽃에 맺힌 이슬처럼 덧없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습니다.” 같은 구절은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기는 것이었다. 이런 글줄과 더불어 위에 거명한 인물과 작품 혹은 저작들은 `풀 베개`를 소설 같지 않은 소설로 만드는 치명적인 요소다. 왜 소세키는 `풀 베개` 같은 소설을 썼을까, 하는 의문이 팽팽하게 찾아드는 것이었다.그것은 명치유신과 신생국가 일본의 근대화가 강요한 지식인의 서구화 내지 서구적인 것의 본령탐구로 야기된 것이 아니었을까. 일본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고육책으로 성립한 `위로부터의 개혁` 명치유신과 국가적인 근대화 노선. 그것에 충실했던 지식인 소세키의 내면적인 불화와 저항의식, 그리고 신경증과 추적망상이 끓여낸 섞어찌개가 `풀 베개`아니었을까 한다. 자각한 근대인인자 일본과 일본인의 정체성을 끝없이 질문했던 나쓰메 소세키.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소세키가 보여준 자신감이 `풀 베개`에 침윤되어 있다. “일본인에게는 일본인의 특성이 있다. 일률적인 서양모방은 문제다. 서양만이 모범이 아니며, 우리도 모범이 될 수 있다. 서양에 이기지 못하리란 법은 없다.” 이런 사유가 깔린 `풀 베개`는 서양을 따라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서양과 견주거나 대등해지겠다는 명제를 시험한 소설로도 읽힌다. 그러므로 `풀 베개`는 서양에는 없는, 지극히 일본적인 소설인 셈이다.그의 초기작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1905), `도련님`(1906) 같은 소설을 읽은 연후 빙허 현진건의 `빈처`와 `술 권하는 사회`(1921), `운수 좋은 날`(1924)과 `불`(1925)을 다시 읽었다. 단편소설이되, 식민지 조선 문학의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인 빙허의 소설에서 작가가 인식하는 근대와 근대성 내지 조선인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함이었다.식민지 조선의 작가 지망생이자 지식인 빙허의 고단한 내면풍경은 확연하지만, 그 본질을 구성하는 자아정체성은 없었다. 가난한 아내와 나의 눈물어린 교감, 분열된 조선 지식인 사회에 대한 절망과 분노, 지독한 가난과 조혼풍속에 대한 비판 같은 미덕은 약여하다. 하지만 그것들 너머에서 존재증명을 하고 싶은 식민지 조선과 조선인, 그리고 과거와 미래는 없었다. 오늘날에도 지난 세기 근대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무엇을 독서할까, 궁금해지는 아침나절이다.

2017-08-25

상사화 필 무렵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올해도 어김없이 상사화(相思花)가 피었다. 대문 근처 벚나무 아래 조붓한 공간에 두 송이 상사화가 몸을 열었다. 연분홍색으로 피어나되 몇 갈래로 꽃들이 나뉘어 피어나는 상사화. 초봄이면 상사화는 아주 당당하고 의연하게 대지를 뚫고 이파리를 지상으로 내보낸다. 언뜻 보면 난초 같지만, 녀석은 5월말 6월초면 생명을 다하고 시나브로 사라진다. 지상에 아무런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춰버리는 것이다.그러다가 여름의 절정(絶頂)이거나 혹은 가을로 접어든다는 입추(立秋) 무렵이면 보란 듯 꽃 대궁을 키워낸다. 그러니까 이파리가 무성하게 자라났다가 아무런 미련도 없이 사라진 상사화가 그로부터 두어 달 뒤에 화사한 꽃으로 환생(還生)한다는 얘기다. 언제부터 상사화가 우리 마당에 자리를 잡았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다. 필시 두어 해 전부터 적잖은 기쁨을 주었으리라 추측할 뿐. 상사화를 볼라치면 옛일이 떠오르곤 한다.학부 1학년 시절부터 유독 붙어 다녔던 남녀동기 둘이 있었다. 1학년 시절부터 손에 손을 맞잡고 교정을 활보(闊步)했던 그들은 우리들에게 상당히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연애라든가, 특히 학내사랑은 매우 낯선 대상으로 각안됐던 시기였다.그런데 아침저녁으로 손잡고 학교가 좁다하고 싸돌아다녔던 그들이었으니 외계인 비슷한 취급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았던 셈이다. 그렇게 세월이 무상하게 흐르고, 3학년 1학기 여름방학 끝날 무렵 우리는 비보(悲報)를 접한다. 그들 중 남학생이 제주도에서 스킨스쿠버 다이빙을 하다가 세상을 버렸다는 전갈을 받은 것이다. `참 별일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우리 모두는 그녀의 사후행적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정형화된 추측은 그녀가 아주 오래도록 슬픔과 체념과 절망의 나락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란 내용이었다. 그토록 다정하고 아낌없이 사랑했던 연인이 불귀(不歸)의 객이 됐다는데, 그 정도야 당연지사 아니겠는가, 하는 암묵적인 동의가 깔려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됐다. 겨울이 오기 전에 그녀는 낯선 청년 하나의 손목을 끌고 학교에 나타났다. `으응, 저건 또 뭐지?!` 낭패한 얼굴과 볼 멘 소리가 들려왔다.다혈질인 친구 몇몇은 상당히 비분강개(悲憤慷慨)하기를 여러 차례 되풀이하기도 했다.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 하는 나의 말에 단단히 역정을 내기도 했다. 인간이 어쩌면 그럴 수 있느냐, 하는 분노와 짜증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던 열혈청춘들.세월이 더 많이 흐른 다음에 그녀의 행동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아내를 몹시 사랑했던 사촌형이 상처(喪妻)를 하고 난 다음 불과 6개월이 되지 않아서 재혼의 길을 선택했을 때 상사화의 그녀가 생각난 것이다. 금슬(琴瑟)이 아주 좋았던 사촌형 내외는 크고 작은 잔치나 행사 때가 오면 그들이 경영하던 빵집을 내게 맡기고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누리곤 했다. 그들의 화사(華奢)한 표정과 웃음소리가 지금도 들려오는 듯하다.그러다 돌연 형수가 세상을 버리자 사촌형은 거기서 발원하는 거대한 상실의 늪지대를 홀로 통과하지 못했던 것이다. 연애를 하든, 결혼을 했든 남달리 깊은 사랑으로 엮인 사람들은 홀로의 시공간을 견뎌내지 못한다는 결론에 나는 도달했다. 주위를 살펴보시라! 이혼 혹은 사별(死別)을 겪은 뒤에 여전히 독신을 고집하는 사람들의 이전상황을 돌이켜보시라. 필시 그들은 그렇게 행복하지도 깊이 있는 사랑과 결혼생활을 경험하지 못했으리라.눈을 감고 거리를 걸을 때에도 광장을 떠돌 때도 저녁놀을 바라보는 시점에도 깊은 한숨을 허공중에 날릴 때에도 그나 그 여자가 옆에 있다면 그것은 상사병이다. 상사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이해하는 것은 더러 가당치도 않다. 하되, 상사화가 피어날 무렵이면 나는 예전의 그들을 떠올리며 낮은 한숨을 쉰다. `아아, 사랑이여! 그 아픈 상처여!`

2017-08-18

우는 연습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연습하면 도사가 된다(Uebung macht Meister)!”는 도이치어 속담이 있다. 누구나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은 없다는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 요즘 그걸 몸소 확인하고 속으로 웃곤 한다. 지난 5월 5일 안성에 있는 친구에게서 청계 병아리 15마리를 데려왔다. 7마리는 3월 20일생이고, 8마리는 4월 18일생이다. 그러니까 아직 5개월도 되지 않은 중병아리 수준이다. 그럼에도 아침저녁으로 어린 수탉들은 맹렬하게 우는 연습을 하고 있다.처음엔 `저것도 닭 울음소리인가?` 적잖이 의심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늠름한 수탉의 장쾌한 울림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뭔가 이리저리 삐지고 바람 빠진 헛소리가 들려왔던 탓이다. 벌써 3주 이상 녀석들은 그렇게 우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귀를 기울이면 조금씩 나아지고 있음이 약여하다. 물론 동네 인근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비하면 여전히 조족지혈(鳥足之血)이지만 말이다.그래서 알게 되었다. 모든 수탉들이 처음부터 온전하게 멋진 울음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라는 자명(自明)한 이치를. `자명하다`는 어휘에 허방다리가 있다. 당연하고 너무나 빤한 이치라고 모두가 확신하는 그 이면(裏面)에 사유할 지점이 있는 게다. 우리는 모든 수탉이 태어나면서부터 통쾌한 목소리를 자랑한다고 여긴다. 그도 그럴 것이 수탉들의 끈질기게 우는 연습과 도시생활로 점철된 한국인들의 일상은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한때 한국인들의 우상이자 반짝이는 별 중의 별로 등극한 김연아. 그녀의 종목은 피겨 스케이팅. 육상이나 수영 같은 기록경기를 좋아하는 탓이기도 하지만 나는 그녀의 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본 적이 없다. 언제 넘어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경연(競演)을 배짱 좋게 들여다볼 엄두가 도무지 생겨나지 않은 까닭이다. 그런 경기를 천연덕스레 지켜보는 인총들의 환한 얼굴에서 경외감까지 읽었다면 과장된 표현일까. 얼마나 숱한 엉덩방아를 찧었을까, 연아 선수는. 얼마나 많은 좌절과 실패를 딛고 세계 최고가 된 것일까. 경기장에 들어설 때, 혹시나 하는 두려움과 의구심은 없었던 것일까. 최고의 연기를 펼치고도 1위 자리를 내줘야 했을 때 그녀의 흉중에는 무슨 생각이 자리했을까. 종당에는 `왜 나는 오늘도 공중에서 3회전 점프를 해야만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그녀는 품어보기라도 한 것일까. 그런 생각마저 나를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었다.내 젊은 날 필요충분조건이었던 장발(長髮)과 기타를 떠올린다. 머리야 마냥 기르면 그만이지만 기타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더욱이 나처럼 악기나 기계를 다루는데 애를 먹는 인간은 재주를 타고난 사람의 몇 곱절의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도 남들 흉내는 내고 살았던 새파랗던 20대. 많은 세월이 흐르고 흘러 자문(自問)했다. `나이 들어 좋아하는 노래를 위한 적절한 반주 정도의 기타연주가 가능한가.` 아니외다, 하는 대답.안식년 1년 동안 잘 아는 분에게 기타교습을 받았다. 1주일에 1회, 2시간 남짓. 내 기억이 맞는다면 아마 한두 번 빼먹었을까. 꽤나 열심히 다니면서 주말에는 집에서 따로 연습도 하곤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기타반주로 삼아 노래하게 되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반주는 엉망이었고, 노래는 지리멸렬이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기타를 벽에 세워두었다.어린 수탉들이 꾸준히 우는 연습을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새삼 돌이키게 된다. 저들만큼 진지하고 끈질기게 연습했던가. 언젠가는 잘 우는 수탉이 될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졌던가. 오늘의 실패와 좌절에 굴하지 않고 전진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는가. 어느 날인가부터 벽에 세워져 있던 기타가 내 앞으로 옮겨졌고, 왼손 네 개의 손가락에는 굳은살이 다시 들어차기 시작했다. 결국 “연습해야 도사가 되는 법이다.”

2017-08-11

시(始)는 종(終)이요, 종(終)은 시(始)다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시와 시인들은 학부 때 나를 길러줬다. 윤동주, 이육사, 서정주, 김수영 같은 시인들과 그이들을 다룬 평전(評傳)을 읽곤 했다. 생택쥐베리의 `어린 왕자` 영역본도 유쾌한 동반자였다. 몹시 암울한 시절이었기에 술과 정담(政談)이 빠질 수 없었다. 내가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를 통째로 외우는 일이었다. 시를 기억함은 시인의 영혼과 정신을 온전하게 흡수하는 일이었고, 그의 언어와 기법을 내 소유로 치환하는 일이었다. 일찍이 공자는 세상에 떠돌던 3천여 편의 시 가운데 305편을 모아 `시경`을 편찬했다.논어 `위정 편`에 “시 삼백 일언이폐지 왈 사무사(詩 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 하는 구절이 있다. `시경`에 들어있는 300편의 시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그 생각에 사특(邪慝)함이 없다! 그런 말이다. 시에 마땅히 담겨 있어야 하는 본질을 간명하게 통찰한 명구(名句)가 아닐 수 없다. 이런 깨달음에 기초하여 공자는 시를 완전하게 기억해 체화해야 한다고 믿었던 듯하다. 일컬어 `불학시 무이언 (不學詩 無以言)`이라 한다.진강과 백어 사이에 있은 대화의 핵심은 `시를 공부하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으로 요약 가능하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을 책임지는 언어의 제1과 제1장을 공자는 시에서 찾은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상대방의 사유를 이해하는 방편(方便)을 시에서 구했던 공자. 공자의 외아들 백어는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시를 공부한다. 시를 공부함은 당연히 `시경`의 시를 암송하는 것으로 귀결되었음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일이다.이런 내용은 훗날 논어를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도 시는 기억해야 제 맛이 우러난다고 가르쳤던 선생이 있었다. 고려대 국문학과에 재직했던 소설가 정한숙 교수가 그이다. `소설 기술론`을 가르쳤던 그분은 우리에게 시는 반드시 통째로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인이 운용하는 시어와 기교를 사계(四季)의 전변(轉變)과 함께 비교-성찰하면 자신의 언어와 사유가 풍성하고 깊어지리라는 것이 그분의 지론이었다.어찌 됐든 나는 시를 기억하고 암송하기를 즐겼던 학생이었다. 어렵고 깊이 있는 철학이나 사회과학에 흥미를 가지지 못했던 터라 시인들의 선물에 크게 공감했던 것이다. 지금도 한시를 포함해 대략 30여 편의 시를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윤동주 평전`을 읽다가 20대 초반 동주의 깊이 있는 성찰에 감읍(感泣)한 적이 있다.당시 연희전문이 자리했던 서강벌과 동대문 사이를 왕복하던 전차를 타고 느낀 소회(所懷)를 담은 `시는 종이요, 종은 시`라는 글이 그것이다. 시인은 특별한 일도 없이 전차의 시발역인 서강벌에서 전차를 탄다. 전차의 종점인 동대문에서 내리지 않고 앉아 있다. 그러면 이번에는 종점인 동대문이 시발역이 되고, 시발역이었던 서강벌이 종점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경험을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어낸 것이 `시는 종이요, 종은 시다`라는 구절이다.스물을 갓 넘긴 동주가 도달한 깨달음은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도덕경`의 `전후상수(前後相隨)`를 연상케 하는 구절이다. 앞과 뒤가 서로 따른다는 의미인데, 양자의 교체를 단순 명쾌하게 해명한 것이다. 앞이 뒤가 되고, 뒤가 앞이 된다는 함의(含意)다. 노자는 그런 식의 변증법적인 사유에 능통했던 인물이다. 상호 모순적인 대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연결하여 이항 대립하는 양자의 동시성과 공존을 강조한 인물이 노자 아닌가.한국시의 철학적 엷음을 한탄하는 이에게 나는 젊은 날의 동주가 통찰했던 `시는 종이요, 종은 시`라는 구절로 응대하곤 한다. 소중한 것은 어쩌면 우리 가까운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2017-08-04

영화를 본다는 것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두 주에 한번 꼴로 영화를 본다. 범물동에 있는 `가락 스튜디오`에서 두 번째, 네 번째 수요일 저녁에 시민들과 함께 영화를 본다. 벌써 몇 년째 지속해온 행사다. 영화를 보는 구성원들은 그날그날 다르지만 커다란 얼개에서 보면 잘 아는 면면이 주축이다. 처음 보는 사람이 모임에 나타나는 일도 있지만 이쪽의 친숙도와 정치적 입장의 선명성 때문인지 이내 자취를 감추곤 한다. 아직도 낯을 가리는 수줍은 시민들이 적잖다.“영화를 보는 이유가 뭡니까?” 부지불식간에 내가 던지는 질문이다. 돌아오는 대답은 대개 일정하다. 평균적인 한국인들의 범용한 일상의 일부가 된 영화보기. 그래서일까? 관객들이 도달해있는 영화 관람수준은 상당히 높다. 전혀 예기치 못한 지점을 포착하는 사람도 있고, 아주 독특한 텍스트 해석을 제기하는 이도 있다. 나는 민주와 평등을 중시한다. 누구라도 한번쯤은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기회를 반드시 제공한다.언어의 독점은 권력이나 금전 혹은 명예의 독점처럼 그 폐해가 우심하다고 나는 판단한다. 저마다 다른 입장을 가감 없이 전하고, 그런 과정에서 공감과 유대가 생겨난다고 믿는다. 그런데 누군가 자신의 견해나 관점만 주구장창 읊조린다고 생각해보라. 그것은 무한폭력의 변주와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2천500년 전 지식인 공자의 사유와 인식은 음미할 만하다.“공자는 네 가지를 하지 않으셨다. 남의 생각을 넘겨짚는 일, 무엇인가를 꼭 관철하려는 것, 고집을 부리는 것, 자신만 내세우는 것을 하지 않으셨다(子絶四. 毋意, 毋必, 毋固, 毋我).” `논어` 가운데 `자한편子罕篇)`에 나오는 구절이다. 공자처럼 위대한 사상가이자 철학자이며 교육자도 홀로 마이크 잡고 거룩한 얘기를 주절주절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이는 품이 너르고 깊었으리라.영화를 둘러싼 이야기를 나누다가 누군가 불쑥 한국정치 얘기를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화급하고 단호하게 그런 얘기의 허리를 잘라버린다. 영화감상의 흐름을 끊을 뿐 아니라, 모임의 성격마저 모호하게 하기 때문이다. 기실 영화보기 모임에 나오는 사람들의 성향은 대개 진보연하는 인사들이 주축이다. 따라서 한국정치의 현황이나 미래기획을 함께 사유하는 행위는 불필요한 과제다. 시간과 공력을 들여 사족을 달 이유가 없는 것이다.그런 이야기는 영화와 관련된 생각이나 인식을 공유하고 난 다음에 하자는 얘기다. 같은 시공간에서 영화를 보았으면 영화와 관련한 이야기가 응당 주가 돼야 한다고 믿는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사는 사람들 가운데 이렇게 특별한 경험을 공유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 까닭이다. 이런 인연으로 엮인 사람들의 소소한 생각도 의미 있다고 나는 믿는다. 누가 알겠는가? 언젠가 그런 생각의 단편(斷片)들이 우리를 평안하고 넉넉한 사유의 바다로 인도할 줄을!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고 수미일관하게 전달하는 행위는 지적(知的)인 노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생각과 언어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일은 작지 않은 축복이다. 누구나 나름의 사유나 인식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런 작업에 성공하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훈련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낯선 사람들이 영화보기 모임에 왔다가 시나브로 불참하는 까닭은.한 달에 두 번 가지는 모임이 더러 귀찮아질 때도 있다. 낯익은 얼굴과 언어와 생각에 지쳐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영화보기 모임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은 허다한 인총들의 노고를 떠올리곤 한다. 그분들의 땀과 눈물과 한숨과 경탄과 소주와 밤샘을 생각하면 영화를 본다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한 편의 영화를 보러가는지도 모른다.

2017-07-28

길에서 길을 찾다 길을 잃다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논어`에서 가장 기막힌 구절 하나 꼽으라면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아닐까 한다. 중니(仲尼)처럼 도에 가까이 있던 사람이 저런 객기를 부렸다는 것은 그만큼 도를 구하기가 어려웠다는 반증일 것이다. 주(周)의 법도가 다하고 천하가 100여 개의 나라로 쪼개져 할거하던 시기에 도를 구하여 예악세상을 실현하려 했던 공구(孔丘). 그러나 어느 권력자나 제후도 그를 등용해 부국강병의 길을 꾀하지 않는다. 공자의 도는 시대와 불화하여 머나먼 과거의 신기루로 받아들여졌던 탓이다. 그는 이미 35세에 제나라 경공에게 “군군 신신 부부 자자” 여덟 글자로 정사(政事)의 요체를 갈무리했던 천재 아니었던가? `군왕이 군왕답고, 신하가 신하답고, 아비가 아비다우며, 자식이 자식다워야 비로소 국가의 정사가 온전해지리라` 믿었던 총명한 청년재사 공구. 하지만 그의 도는 500년 전 사라진 서주의 예악에 기초한 번문욕례와 다름없는 누추한 것이었다.그가 인생말년에 도를 찾아 혹은 그의 도를 받아줄 군왕을 찾아 천하를 철환했던 이야기는 가히 눈물겨운 것이다. 온갖 냉대와 죽을 고비와 모욕을 견디고 길에서 길을 떠돌며 자신의 도를 갈파했던 중니. 하지만 10여 년의 세월 끝에 그를 찾은 것은 허무와 노쇠와 향수병이었다. 그가 환갑 나이에 황하를 건너려다 순화와 두명독 같은 선비가 조간자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전갈에 씁쓸해했던 장면은 가슴을 저미게 한다.“흘러가는 것이 이 사내와 같도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구나.” 도도하게 흐르는 황하를 바라보며 장탄식을 내뱉는 인간적인 공자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장면. 결코 돌아오지 못할 강물처럼 사라져버린 청춘과 경세제민의 열망이 한숨과 백발과 상념으로 허공중에 스러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중니는 길에서 길을 찾아 헤매고 다시 헤맨다. 누구 하나 불러주는 이 없어도 그이는 오늘도 내일도 그 길을 간다. 그것만이 유일한 출구인 것처럼.일찍이 푸른 소를 타고 함곡관을 지나 서역(西域)으로 사라졌다는 노자를 돌이킬 때 공자의 삶은 신산했지만 의지적인 것이었다. 세상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고, 나 역시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는 깨달음에 숨어버린 노자. 그가 내세운 덕목은 “자애로움과 검약함 그리고 천하를 위해 나서지 않음”이었다. 특히 마지막 구절은 공자와 지극한 대비를 이루면서 깊은 울림을 준다.그런 점에서 저잣거리에 숨어 살았던 모순적인 인간 장자의 소회(所懷)는 뜻밖이라 할 것이다. “지금은 온천하가 미혹되었으니 내가 향도한들 어찌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한줄 알면서도 힘쓰는 것은 또 하나의 미혹이다. 고로 포기하고 추구하지 않음만 못하다. 허나 추구하지 않으면 누가 진실로 더불어 걱정할 것인가.” “미혹된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추구하지 않는다면 무슨 다른 방도가 있겠는가” 하는 장자의 일갈.이렇듯 다르고도 같아 보이며, 같으면서도 다른 그들의 길은 오늘에도 적잖은 가르침을 준다. 죽음마저도 마다하지 않고 길에서 길을 찾아 길을 떠돌았던 실천가 공자. 그런 길이 완전히 막혀있음을 확인하고 홀연히 자취를 감춘 노자. 세상과 교유(交遊)하면서 그 세상을 비웃되, 세상의 구원과 민중의 안녕을 희구했던 장자. 춘추전국시대의 고단한 삶을 곡진하게 드러내 보였던 시대의 거인들이 보여준 행장(行狀)의 의미는 여전히 퇴색하지 않았다.노신은 “걸어가면 길이 된다!”고 썼다. 하지만 그 길이 고단하고 신산하며 더러는 출구마저 봉쇄된 지경이라면 그런 외침은 공염불이 되기 십상이다. 문제는 시간과 공간과 인과율에 의지하여 명민하게 시대의 징후와 변화의 전조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정진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하나 혹은 둘의 밝은 도가 모습을 드러낸다면, 두루 공유하고 기꺼이 나누면 될 일이다. 그런 까닭에 오늘도 우리는 길에서 길을 찾으며 길을 떠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2017-07-21

나무와 기록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얼마 전 대구 수성구에 자리한 용학도서관에서 `나무와 문학`이란 주제를 가지고 5주 연속으로 강의했다. 문학 말고도 역사와 철학이 덧대질 터여서, 나무 관련 인문학 강연이 15주 연속으로 진행되는 셈이다. `나무`라는 대상을 두고 문학, 역사, 철학의 관점으로 대중강연을 베푸는 기회는 흔치 않다. `길가메시 서사시`, `장한가`, `상리과원` 같은 작품을 중심으로 강연을 진행한 기억이 삼삼하다.나무는 인간의 의식주와 긴밀하게 결합된 질료다.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뿐 아니라, 주택의 재료로도 요긴하게 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무는 우리의 육체적-정신적인 피로와 고통을 경감해주는 고마운 대상이다. 사람이 나무에 기댄 형상을 본뜬 글자가 쉴 휴 (休), 대문 안에 한 그루 나무가 서있는 형상을 그려낸 글자가 한가로울 한(閑)이다. 나무가 서있는 넉넉하고 한가로운 집에서 나무에 기대어 쉬는 정경이 떠오른다.1281년 무렵 일연선사가 집필한 `삼국유사`에는 `신단수(神檀樹)`가 등장한다. 사람들은 대개 `신단수`를 박달나무라고 생각한다. 나무와 관련한 문화재 전문가 박상진 교수는 그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박달나무는 수백에서 수천 년을 살아가는 나무도 아니고, 높이 자람만 꾀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포용할 드넓은 품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박 교수는 `신단수`를 우리 주위에서 당산나무로 자주 쓰였던 느티나무라고 주장한다.720년에 탈고된 `일본서기`는 네 종류의 나무를 등장시키며, 나무의 용처(用處)까지 적시한다. 이자나기가 낳은 바람의 신 `스사노오(素箋鳴尊)`가 눈썹 털을 불어서 만든 녹나무, 가슴 털로 만들어낸 편백나무, 수염으로 만든 삼나무, 볼기짝 털로 만들어낸 나무가 금송(松)이라고 사서(史書)는 전한다. 녹나무와 삼나무로는 배를 만들고, 편백나무로는 궁궐을 짓고, 금송은 관재(棺材)로 사용하라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들어있다는 것이다.무령왕릉과 능산리 고분에서 금송으로 된 관재가 발견돼 고대 백제와 일본의 관계가 새삼 주목받기도 했다. 1597년 명량해전 당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활용한 전술은 `충파(衝破)`였다. 문자 그대로 적선(敵船)과 충돌해 깨뜨리는 간명하고도 대담무쌍한 전술이다. 그런 전술의 이면에는 일본의 주력 전투선 세키부네의 재질과 구조가 자리한다. 세키부네는 배 아래쪽이 좁고 미끈하여 속도전에는 능하지만, 충격과 회전에 취약성을 보인다.세키부네는 주로 삼나무와 녹나무로 만들어졌는데, 조선수군의 주력 판옥선은 소나무로 만들어졌다. 단단하고 강한 재질의 소나무로 제작되고, 바닥이 넓은 평저선(平底船)이었던 판옥선은 속도에는 취약했으나, 충돌과 충격에는 대단한 강점을 가지고 있었다. 불과 13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수군을 상대로 압승을 거둔 배경에는 울돌목의 복잡다단한 해류(海流)뿐만 아니라, 두 나라 선박과 관련한 차이가 엄존하고 있었던 셈이다.그런데 내가 주목하는 것은 명량해전의 승리가 아니라,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 구체성에 있다. 나무의 정체도 불분명한 `신단수` 기록을 1281년에 담은 `삼국유사`와 네 종류의 나무와 그 용처까지 지적한 `일본서기`의 차이에 주목하는 것이다. 어찌 본다면 이런 지점에 한국인과 일본인의 차이가 존재하는지도 모를 일이다.나노입자 크기로까지 물질을 쪼개는 시대에 우리는 살아간다. 보다 치열하고, 더욱 치밀하지 않으면 21세기 세계에서 제구실하고 살아가기가 어려운 지경이다. 범용한 일상의 사물과 관계에서 우리는 얼마나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대응하고 있는가. 온전하게 기록을 남기고 그것에 의지하여 앞날을 설계하고 있는가, 조금 생각해볼 일이다.

2017-07-14

사랑의 이름으로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해마다 가을이면 나는 학생들에게 세계문학을 읽힌다. 교양 교과목으로 여섯 가지 문학작품에 기초한 영화를 강의하는 까닭이다. 나의 방점은 어디까지나 문학에 찍힌다.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과 `덤불 속`, 나쓰메 소세키의 `풀 베개`, 셰익스피어의 `햄릿`, 위고의 `레미제라블`,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에코의 `장미의 이름`, 파스테르나크의 `지바고 의사`가 내가 선택한 문학작품 목록이다. 거명한 작품들을 모두 읽으면 대략 5천 페이지 남짓일 듯하다. 독서량이 적지 않고, 거기 내장된 작가들의 인식과 사유의 깊이와 너비가 도저하여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일본 근대문학의 문을 연 두 사람의 작품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들이 인식하고 수용한 서양의 근대와 일본 지식인의 자세다. 명치유신이 결과한 서구적인 것의 일방적인 수용에 대한 소세키의 저항과 슬픔은 의외로 골이 깊다. 그에게 2년 남짓 사사(師事)한 류노스케의 천재성은 익히 알려진 것이다. 그러하되 동일한 살인사건을 바라보는 엇갈린 시선에 대한 통찰은 21세기 관점에서도 놀랄 만큼 유효하다.희곡을 읽는다는 것은 적잖은 고역이다. 무대에 익숙하지도 않거니와 극장에 자주 가지도 않는 한국 학생들에게 희곡이라니?! 그래도 서양연극의 대명사 셰익스피어의 대표작을 찬찬히 음미하는 일은 작은 축복이라 여긴다. 자연 과학도이자 신실한 기독교도이며, 아버지를 흠모한 자식이면서 동시에 거트루드를 사모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소유자 햄릿. 그가 머뭇거리고 주저하는 굽이굽이마다 넘쳐나는 의혹과 죽음의 그림자들.프랑스 대혁명이 경과한지 한 세대에 이르는 시점의 억압받고 학대받은 인간 장발장의 내면세계를 외부사건과 대비해 그려내는 불후의 대작 `레미제라블`. 위대한 역사적 사건 발발에도 실제적인 현실변화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비극적인 모순의 희생자. 그러나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멈추지 아니하고 성장-변화하는 장발장의 면모는 감동적이다. 더욱이 소설에 탑재된 위고의 정치적 신념의 양가성(兩價性)은 흥미진진하다.세상을 살아가는 두 가지 방식을 대비함으로써 우리의 인생행로를 묻는 `그리스인 조르바`. 대지에 배를 대고 온몸으로 기는 뱀(조르바)과 정착을 모른 채 허공을 날아다니는 새(오그레)로 구현되는 민중과 지식인의 대비. 카잔차키스는 전자의 손을 들어주지만, 그 역시 후자의 고뇌와 사유를 고타마 싯다르타의 깨달음에 의지한다. 결국 인생사란 경험과 인식의 대차대조표 상에 존재하는 인과율의 결과일지도 모를 일이므로.20세기가 낳은 천재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기막힌 전제(前提)에서 출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웃음과 희극에 대해 쓰지 않았을까?!” `시학`의 주안점은 비극과 서사시의 대비와 양식의 특징, 양자의 가능성과 한계서술에 있다. 아리스토파네스라는 걸출한 희극작가가 있었음에도 `시학`의 지은이는 왜 웃음과 희극을 제외했단 말인가. 거기서 파생되는 연쇄 살인사건을 당의정 삼아 웃음의 본질을 추적하는 소설 `장미의 이름`.사회주의 10월 혁명과 그로 인한 내전시기를 살아가는 섬세한 감수성의 시인이자 의사인 지바고의 복잡다단한 인생살이를 그려낸 파스테르나크.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 앞에서 혼비백산한 인간군상과 그것에 마주해 사랑과 통찰로 시공간을 측량한 지식인 지바고. 그것을 시종일관 가능하도록 인도하는 시와 사랑의 풍요롭고 고통스러운 인과관계. 혁명기를 살아가야 했던 지바고의 신산(辛酸)할 정도로 고단한 행장(行狀)의 기록 `지바고 의사`.이 모든 것에 유일한 공통점이 있으니, 그것은 `사랑의 이름으로`다. 이들 작품에서 사랑을 제외한다면 아마도 허명과 허세와 지적 허영만 남지 않을까. 하여 말하노니, 독자 제현이여, 오늘도 치열하게, 마치 당신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사랑하시라!

2017-07-07

애틋함에 관하여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무감각에 익숙해진다는 뜻이다. 육신과 영혼이 건조해져서 밋밋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70~80대 노인들의 몸에는 65% 내외의 수분(水分)만 남는다. 신생아 몸의 수분이 90% 이상이란 걸 생각하면 대차(大差)가 난다. 아이들 볼을 살짝 꼬집었다 놓으면 이내 원상(原狀)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나이든 피부는 축 늘어질 뿐. 문제는 우리의 영혼마저 물기를 잃어버려 촉촉한 기운을 상실하기 십상이란 사실이다.지난 5월 어머니 생신잔치에 함께하지 못했다. 무상한 일상의 번다(繁多)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탓이다. 그 사이 모친은 두 번이나 불의의 낙상(傷)을 경험한다. 엉치뼈에 금이 가고, 오른팔이 부러지는 중상이었다. 멀리서 안부전화나 붙들고 있어야 했던 나. 방학이 되어서야 비로소 상경이 가능했다. 민교협 창립 30주년 기념행사와 묶어서 가까스로 한강을 건넜다. 우심한 가뭄에도 한강은 여전히 의연했고 융융(隆隆)한 흐름이었다.왼손으로 수저와 포크를 쓰는, 늙으신 어머니는 쓸쓸해 보인다.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둘째 아들로 행복한 얼굴이다. 연락이 닿지 않던 큰손자가 어느 사품엔가 바람처럼 나타난 덕에 아연(俄然) 활기가 돌았다. 아우와 나누는 소주 한 잔에도 정감이 넘치고. 4시간이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지근거리(至近距離)의 어머니와 형제들. 그 무슨 대단하고 거룩한 일을 한답시고 관계의 이완에 눈을 감는단 말인가. 때마침 서울에도 비가 내린다.하기야 태양처럼 뜨거웠던 시절, 나는 추석과 설 명절 때에도 학교에 나가곤 했다. 턱없이 부족한 공부와 자책(自責)의 강박(强迫)으로 자유롭지 못했던 시기. 그런 나날들이 속절없이 스러지고 아버지는 불귀(不歸)의 객이 되셨다. 세상 버리시기 전에 4~5차례 가족여행을 함께 하였기에 아쉬움을 조금 덜긴 했지만.지금도 기억하는 장면 하나. 온가족이 정동진 해수욕장에 갔는데, 아버지가 매우 무료(無聊)해 보였다. “회를 좀 드시겠어요?” 아버지가 반색(斑色)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아버지와 어머니, 작은애를 태우고 `등명락가사`에 들렀다가 작은 포구에 들렀다. 소주를 앞에 놓고 아버지와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인다. 이가 성치 못했으나 아버지 얼굴은 푸근했고 볼이 움푹 들어갈 정도로 회를 드신 기억이 오늘도 삼삼하다.어쩌면 그런 장면 하나로 스스로를 용서하고 사는지도 모른다. 효와 불효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하면서 말이다. 그 후로도 세월이 많이 흐른 다음에야 나는 알았다. 그분들에게 소용 닿는 것은 자식들의 크고 빛나는 명성이나 물적 풍요가 아니라는 것을. 함께 나누는 시간과 공간의 따사로움과 거기서 오가는 대화와 질박한 음식 같은 소소한 것임을. 그럼에도 그마저 순순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일은 비감(悲感)한 노릇이다.소파에서 새우처럼 등을 구부린 채 잠든 모친은 아주 작고 여렸다. 노년에 동행하는 기력의 쇠진(衰盡)과 자신감의 상실이 모친에게도 찾아오는 듯하다. `호모 데우스`에서 유발 하라리는 불멸하는 인간 혹은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그 가능성을 타진한다. 옳고 그름을 떠나버린 자연과학과 기술발전의 영역이 호모 사피엔스의 미래상을 어떻게 재단할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시공간에 우리는 있다.영원히 사는 인간은 두렵다. 그들은 올림포스 12신처럼 전지전능할 것이고, 지루해진 삶의 출구모색을 위한 자극(刺戟)을 찾아 헤맬 것이다. 최소한도의 애틋함과 아련함, 지나버린 날들의 회한(悔恨)과 쓸쓸함도 없이 지금과 여기에 탐닉(耽溺)하리라. 그리하여 인간의 육신은 탄력이 넘칠 테지만, 영혼과 정신은 아주 건조해져서 종당에는 `터미네이터`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짧은 서울 체류기간에 불쑥 찾아든 우울한 감상(感傷)이다.

2017-06-30

죽음에 대한 예의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시골에 살다보면 크고 작은 죽음과 대면하는 일이 잦다. 도회지에서는 새나 고양이, 쥐나 뱀의 사체를 마주할 일이 흔치 않다. 자연사나 농약으로 죽어가는 생명들이 더러 눈에 밟힌다. 안타까운 일은 달리던 자동차에 치여 죽는 `노상객사`다. 자연에서 낭비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까마귀와 까치 같은 청소 동물들의 한바탕 난리굿 판이 백주대로에서 벌어지기도 하니까. 며칠 전 아침나절 초목에 물을 주다가 대문 밖을 보아하니 참새가 버둥거리고 있다. 땅바닥에 모로 누운 채 날아가지 못하는 형국이다. 물 주던 손 멈추고 사발에 물 받쳐 들고 참새에게 다가간다. 태어난 지 오래지 않아 보이는 참새가 눈도 뜨지 못한 채 부리를 벌리고 가쁜 숨을 몰아쉰다. 혹시 물을 먹을까, 하여 부리에 대주었으나, 그럴 기력조차 쇠한 듯하다. 날카롭고 가느다란 발톱 달린 두 발은 이미 경직이 시작되고 있는 모양새.한참을 쭈그리고 앉았다가 녀석을 감나무 그늘 아래로 옮겨준다. 가는 길이나마 길고양이나 쥐의 양식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큼지막한 감이파리 위에 눕힌 녀석의 몸뚱어리가 더욱 작아만 보인다. `그래, 먼 길 편히 가렴!` 속으로 되뇌면서 작별을 고한다. 오후 두어 시 무렵 녀석의 형편이 궁금하여 확인해보니 영면한 뒤였다. 어찌어찌 이 땅에서 만난 미물의 최후를 동행한 나는 잠시나마 죽음을 돌이키게 되는 것이다.백남기 농민의 사인이 병사에서 `외인사(外因死)`로 정정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 이튿날인 6월 16일 `경찰개혁발족식`에서 경찰청장은 “고 백남기 농민과 유가족들께 깊은 애도와 함께 진심어린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한다. 전임정권 아래서는 그토록 `병사(病死)`를 강조하고, 최소한도의 인간적인 사과도 미루더니 권력이 무섭긴 무서운가 보다. 백남기 농민의 맏딸 백도라지씨는 기자회견을 통해 경찰청장과 경찰청을 비판하였다.살인진압 인정하라, 그것을 주동하고 가담한 경찰관 7인을 기소하라, 살인적인 시위진압과 직사살수(直射撒水)로 부친을 사망에 이르게 한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하라, 향후 시위집회에 살수차를 배치하지 않겠다는 것을 명문화하라는 등의 내용이 회견문에 포함되었다. 사건발생 1년 7개월 만에 느닷없이 원격사과를 강행한 경찰청장의 저의(底意)는 무엇이고, 그런 자세가 합당하기나 한 것인지도 동시에 묻고 있었다.자국민의 생명과 재산보호를 최우선으로 삼아야하는 정부기관이 경찰청 아닌가. 그런 곳에서 시위대를 보호하기는커녕 직사살수로 고령(高齡)의 백남기 농민을 살해한 것은 이 나라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권력의 대표기관 경찰청과 검찰청이 국민을 적으로 삼아 행동하고 권력의 노예로 전락한 부끄러운 사건이다. 대한민국 최고라는 서울대병원의 사인(死因) 판단 역시 21세기 광명천지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작태다.참새를 살려볼 요량으로 대문 밖에 나섰을 때 주변에서 요란스레 참새들이 울고 있었다. 어린 것이 뻐드러져 땅위에 구르고 있는 참변에 속수무책인 그들이었다. 그러하되 녀석들은 동료애를 발휘하여 자리를 뜨지 않고, 최후를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참, 너희들이 우리 인간들보다 낫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내가 녀석을 감나무 그늘 아래로 옮겨갈 때도 참새들은 동행하였다. 마지막 시점까지 죽음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미물들이라니?!이 나라가 민주공화국이려면, 민초들이 주인대접을 받아야 한다. 선거철에만 주인대접 할 것이 아니라, 민주정권이 들어서야 마지못해 움직이는 척하는 공권력이 아니라, 평시에도 시위 현장에서도 국민을 예로써 대하는 법도를 배워야 한다. 그것이 이른바 `우파`들이 주장하는 대한민국 `국격`을 상향시키는 가장 빠른 길은 아닐까?!

2017-06-23

정당정치의 부활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지난 5월 9일 대선이후 적폐청산과 조각(組閣)으로 분주한 문재인 정부 얘기만이 아니다. 영국 보수당은 총선결과 하원의석 12석을 상실하여 메이 총리 책임론과 `하드 브렉시트` 차질이 불가피하다. 프랑스에서는 신임 대통령 마크롱이 이끄는 신생정당 `앙마르슈`가 사회당과 자유당, 국민전선 등을 압도하고 약진하고 있다. `러시아 스캔들`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트럼프의 향후행보 역시 세계의 관심사다. 21세기 들어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에서도 불확실성이 가중되는 형국이다. 1980년대 중반 소련을 필두로 한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줄지어 무너져갔다. 사회주의 장정 70년이 허무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미국의 단일패권이 확립됐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유럽연합 출범과 중국의 굴기가 세계정세에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한다. 푸틴의 러시아도 10년의 인고(忍苦) 끝에 재기를 향한 시동을 걸기 시작한다.이런 인식을 전제하고 보면 우리는 1987년 수백만 시민이 떨치고 일어나 이른바 `87체제`를 만들어냈다. `6월 항쟁`으로 명명된 봉기에서 시민들은 거리에서 광장에서 지하철에서 “독재타도, 호헌철폐, 직선쟁취”를 요구했다. 6월 10일, 6월 18일, 6월 26일 한국의 민주주의는 그야말로 변혁의 선봉에 서서 시대의 조류를 선도했다. 민주주의 역사를 새로 써내려간 6월 항쟁이었으나, 그 결과는 필설(筆舌)로 다할 수 없이 참담했다.그리고 30년, 한 세대가 흐른 지난 3월 10일 우리는 다시 승리한다. 20차례에 걸친 촛불시위로 부패, 무능, 타락, 패거리주의로 무장한 대통령과 하수인들을 권좌에서 쫓아낸 것이다. 2016~17년의 투쟁과 승리의 주역은 이번에도 시민이었다. 연인원 1천685만에 달하는 이 나라의 민초가 남녀노소 불문하고 거리에서 광장에서 대통령 탄핵과 신질서를 외쳤다. `87체제` 당시처럼 이번에도 정당은 시야에 없었다.한바탕 일장활극이 끝나서야 들이닥치는 영화의 경찰 패거리처럼 광장의 승리가 확정된 후에 정당은 슬며시 나타난다. 전리품을 챙길 시각임을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87체제` 성립을 위해 산화해간 민주영령들에게 얼굴을 들지 못하게 만들었던 정당과 정치가들의 면면이 어제처럼 또렷하다. 그때 거리를 누볐던 청춘의 아들딸들이 이번에 쟁취한 승리를 헛되이 날려 보내서는 아니 될 일이다.그것의 출발을 나는 정당정치의 부활에서 찾는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여야 정치권 인사들의 행각은 우울하기 그지없다. 소선구제와 지역정서에 기대어 혈연, 지연, 학연으로 권력을 지탱해온 자들. 토호세력의 후예로 가문과 연줄과 돈으로 권력을 장악해 개인의 영달과 가문의 영광에 헌신해왔던 자들. 그자들이 만들어낸 정치적 무관심과 염증이 청년들을 `헬조선`으로 몰고 가지 않았는가!정당은 행정부와 의회권력을 장악해 그들이 추구하는 정강과 정책을 실현하려는 집단이다. 과연 우리나라에 이런 일반성에 기초한 정당이 존재하나, 하는 의문이 든다. 부패하고 타락한 언론과 결탁하여 국민들의 정치혐오를 극대화하고, 기득권 지키기에 골몰해온 자들의 집단이 아니었는지, 묻고 싶다. 그래서다. 정당정치의 복원을 새삼 주장하는 것은. 정치와 정책과 정당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증폭시키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시민들이 차려준 잔칫상에서 흥청댈 것이 아니라, 시민을 위한 정책과 인사(人事)로 시민들의 고통과 슬픔을 치유할 책무가 정당에게 있다. 정당을 위한 시민이 아니라, 시민을 위한 정당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 젊고 유능하며 야심만만한 신진기예가 정당에 참여하여 신바람을 불러일으키도록 길을 터주어야 한다. 최소 한 세대는 유지할 정도로 세력을 키워 나라와 민족을 위한 대도(大道)의 길을 걸었으면 한다.

2017-06-16

익숙한 것과 작별하기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길들인다는 말은 `어린 왕자`에서 자주 회자된다.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 것이고, 관계를 맺는 것은 시간과 정성을 쏟는 것이며, 그것은 책임으로 귀착된다. 길들임은 책임지는 행위가 된다. 소중하고 의미 있는 대상을 향한 모든 시간적 정신적 물질적인 행위의 종착점은 책임이다. 한국 사회에서 책임의 최종 탄착지점은 언제나 가문이었다.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는 조국과 민족 역시 대수롭지 않은 존재였다.1907년 13도 연합의병 총대장 이인영의 경우가 그러하다. 국권회복을 위해 한양으로 진군하여 일군과 교전하다 패퇴하여 전열을 수습하던 그는 1908년 1월 28일 부친상을 당한다. 이인영은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허위 군사장에게 군무를 위탁하고 문경으로 향한다. 삼년상을 치르고 나서 의병에 합세하겠다고 다짐하면서.우리는 그 결과를 안다. 이인영은 1909년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그해 9월 20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한다.누란지위(卵之危)의 화급한 상황을 보고도 삼년상의 효를 다하고자 했던 이인영. 일본군은 조선의 연합의병 총대장의 그런 행위를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국가 혹은 국가주의를 위해 몸을 버린 일본의 근대 지식인들은 부지기수다. 그것은 참혹한 결과를 낳기도 했다. 대동아전쟁과 가미가제 특공대 같은 본보기가 가능하다. 여기서 내가 들여다보고자 하는 것은 가문의 논리와 국가의 논리가 야기하는 지향점의 확연한 차이다.우리에게도 예외는 있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백의종군(白衣從軍)했던 이순신은 모친의 부음을 당했으나, 끝내 예를 다하지 못한다. 암군(暗君) 선조로 인해 갖은 고초를 겪었으나 이순신은 자식의 도리보다 국가의 위기극복을 첫머리에 두었다. 1598년 11월 19일 후퇴하는 왜군을 좇아 노량해전에 임한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전선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무엇인가? 이순신과 이인영의 근본적인 차이는.가문의 이해와 국가의 이해가 충돌할 경우 `최종 선택지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효와 충이 정면충돌할 경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같다. 왕과 양반이 권력을 반분하여 성립한 조선왕조. 쇼군을 권력의 정점으로 하여 이루어진 일본. 일본은 페리 제독에게 1854년 강제로 개항당한 이후 1868년 명치유신을 단행한다. 존왕양이를 앞세워 입헌군주제로 전환하면서 근대화에 일로매진한다. 쇼군의 자리를 국왕이 대신한 형국이었다.국왕이 절대적인 권력을 집행하지 못했던 조선은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도 양반세력을 척결하지 못한다. 왕과 양반의 세력분점의 결과 가문을 중시하는 이데올로기의 하나로 효는 강화일로(强化一路)를 걸었다. 그와 같은 사정이 여일하게 드러난 사건이 이인영의 삼년상과 결부된 일이었으리라. 광복 이후 극도로 강화된 국가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보면 가문의 영광은 상당히 낯설다. 하지만 그것의 연면 부절한 뿌리는 오늘에도 빛을 발한다.4대강 수질악화를 개선하려고 정부는 얼마 전부터 수문을 개방했다. 이른바 4대강사업이 야기한 `녹조라테` 현상을 둘러싼 책임논쟁이 한창이다. 몇 푼의 돈과 자리를 위해 견강부회(牽强附會)의 논리를 펼친 학자들과 교수들의 책임을 묻는 견해가 있다. 우리의 강역과 역사는 함부로 훼손해서는 아니 된다. 유구하게 흘러온 물줄기를 바꾸고, 거기 시멘트 콘크리트를 들이부을 궁리를 하고, 그런 야만에 논리적인 근거를 댄 자들은 책임져야 한다.지식인이 길들이고 관계를 맺고 책임을 져야 하는 대상은 아내나 자식에 머물지 않는다. 개인과 가문의 영광을 위해 자연과 역사를 파괴하는 행위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언제까지 가문의 영광을 떠들고 다닐 것인가! 이젠 익숙한 것과 작별할 때다.

2017-06-09

바둑과 알파고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중학교 다닐 때가 아니었을까 한다. 바둑을 처음 접한 기억은. 흑백의 돌을 갈라 한 번씩 주고받기로 이뤄지는 반상(盤床)의 변화무쌍함을 경험한 아득함은 그 무렵이었다. 외숙의 손놀림은 경쾌했으며, 자신감 넘치는 콧소리는 흥겨웠다. 외숙에게 여섯 점으로 시작한 바둑은 치수를 좁혀 호선(互先)으로 전환하였다. 장구한 세월의 인내와 집념의 결과였다. 그 이후에도 이모부에게 무너졌던 기억이 여적 새롭다. 먹여치기와 축, 장문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을 생각하면 분통이 하늘을 찌르고 남았을 터. 하지만 하늘은 내게 무던히도 끈질긴 호기심을 부여했다. 지고 또 져도 바둑을 향한 손끝의 맵시만은 흐트러짐이 없었으니까. 세월이 흐르고 흘러 강산이 몇 차례 바뀌고 난 후에 비로소 3급 정도의 기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기고 지는 승부에 연연했다면 바둑은 오래전에 나와 작별했을 것이다.인공지능 딥 블루가 체스의 1인자 카스파로프에게 승리한 것이 20년 전인 1997년 일이었다. 그 후 인공지능은 인류최고의 체스기사와 대결하여 불패의 기록을 남겨왔다. 남은 것은 인공지능과 인간의 바둑 대결이었다. 가로 세로 19줄의 바둑판이 가지는 무궁무진한 변화 가능성과 패의 활용이라는 변수를 들어 인공지능의 `넘사벽`으로 인식돼 온 바둑. 신화는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에서 허무하게 무너졌다.1년 후 인류 최고수 커제가 알파고에게 일방적으로 무너지는 참사가 연출됐다. 이길 만큼만 남기고 적당하게 물러서고, 상대방의 무리수를 가차없이 응징하며, 두텁고 단단하게 판을 짜나가는 비상한 솜씨를 선보인 알파고. 딥 블루가 카스파로프에게 승리한 1997년에 태어난 커제 9단이 비통한 눈물로 마지막 판을 정리한 2017년 5월 27일 알파고는 산뜻하게 은퇴를 선언하고 퇴장했다.중국에서 시작하여 반도(半島)에서 잡기(雜技)로 인식된 바둑. 일본에서 `기도(棋道)`로 승화되어, 지난 세기 말부터 한국과 중국에서 화사하게 피어난 바둑. 21세기 바둑은 중국이 스포츠로 규정함에 따라 `전문기사`라는 말 대신 `선수`라는 호칭이 일반화되고, 흑백의 덤도 중국이 선도하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한때 세계최강을 자부하던 한국바둑은 대륙의 바람에 밀려 호시탐탐 중원의 재건을 꿈꾸는 지경이다.알파고와 이세돌, 알파고와 커제의 반상대결을 보면서 21세기 4차 산업혁명의 파고(波高)를 새삼 반추한다. 미래학자들이 예견하는 20~30년 후의 세계가 어찌 전개될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작년 3월 이후에도 한국은 외부의 손길과 지시를 기다리는 형국이다. 세기의 대국이 다섯 번이나 전개됐음에도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하는 해답의 모색을 외부에 의지하려는 자세를 비판한 국내 학자도 있었다.돌이켜보건대 우리는 지난 200년 이상 지속된 과학기술혁명에서 언제나 구경꾼이었다. 그들이 선방을 치고 나가면 근근이 거리를 좁히는 현상이 반복되었다. 순조(1800~1834 재위) 때 유씨 부인이 남긴 `조침문`은 무엇을 말하는가. 200년 전 조선은 바늘 하나도 온전히 만들지 못했다는 얘기 아닌가?! 하기야 연암이 안의마을에 물레방아를 조선 최초로 설치한 시기가 1792년인데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그럼에도 한 가지만 짚는다. 21세기 세계는 나와 남할 것 없이 지식과 정보의 바다에서 각자의 능력을 선뵈는 시공간이다. 과거를 묻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래를 기획하고 담대하게 설계하는 작업은 한층 값지다. 젊고 유능하며 패기만만한 인재들의 강고한 도전과 의지가 절실한 시점이다. 알파고가 우리에게 남긴 교훈이다.

2017-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