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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의병의 날

김규종 경북대 교수 6월 1일은 ‘의병의 날’이다. 국가의 위기에 자발적으로 일어선 백성들의 조직을 가리켜 의병이라 한다. 누란지위(累卵之危)의 국가와 민중을 위해 궐기한 의병을 기리는 날이 의병의 날이다. 임진왜란과 구한말에 거병(擧兵)한 의병이 가장 많았다고 역사는 전한다. 의병 하면 암군(暗君) 선조가 때려죽인 김덕령과 수도 진공 작전의 총대장 이인영이 떠오른다.김덕령(1568∼1596)은 광주 출신 의병장이다.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24살의 나이에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다. 그는 호남과 영남 곳곳에서 왜군을 격파하여 공을 세우지만, 1596년 이몽학의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는다. 김훈은 ‘칼의 노래’에서 김덕령이 선조에게 국문(鞫問)을 당한 끝에 장형(杖刑) 130대를 맞고 순절한 장면을 그려낸다.용렬한 선조는 자리를 보존하고자 김덕령을 희생제물로 삼는다. 파스테르나크가 ‘지바고 의사’에서 그려낸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 암군 선조는 닮은 꼴이다. 소심함과 연약함으로 신료들을 처형하고 구속하며 용서하는 전제군주들의 양상은 어찌 그리 똑같은가?!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았다는 김덕령은 허망하게 세상과 작별한다. 광주의 충장사와 충장로가 그를 기리는 공간이며, 그가 지은 시조 ‘춘산곡(春山曲)’이 오늘까지 전한다.“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 없은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이런 서정과 춘심을 가진 장수 김덕령을 때려죽이고도 오랜 세월 옥좌에 앉아 자리보전한 암군을 찬양하는 일부 사학자들은 광대놀음의 주역이다.이인영(1867∼1909)은 색다른 교훈을 주는 인물이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궐기한 그는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으로 일어난 정미의병에 합류한다. 같은 해 11월 전국에서 모여든 13도 창의군 총대장이 된 이인영은 수도 진공 작전을 기획하다 아버지의 죽음을 맞는다. 동료와 부하들의 만류에도 그는 삼년상(三年喪)을 고집하다가 1909년 일본군에 잡혀 경성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다. 일본군의 눈에 이인영은 아주 기인한 인물로 보였다. 국가를 위해 일어난 의병 총대장이 삼년상을 위해 자리를 내놓고 돌아갔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본과 청나라에서 강조한 ‘충경(忠經)’ 대신 조선에서는 ‘효경(孝經)’만 읽게 한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충효가 본디 다르지 않지만, 충의 뿌리를 효에서 본 조선 사대부의 생각이 이인영에서 구현된 것이다.이것은 일본과 청나라가 국가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다면, 조선 지배층은 가문을 중시(重視)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자세는 뿌리 깊게 남아서 우리 사회를 어둡게 한다. 나라의 운명과 민중의 삶이 어찌 되든 나와 집안만 생각하는 자들이 적잖다.의병의 날을 맞아 가족과 가문만을 생각하는 전근대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만들었으면 한다.

2022-05-29

포항에 다녀와서

김규종 경북대 교수 살다 보면 의지와 무관하게 일이 겹치는 수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중얼거린다. 참, 재미있네. 그런 유쾌한 일이 지난주와 그 전주에 있었다. 2주 전 금요일 오후에 포항으로 승용차를 몰았다. 30년 인연을 맺어오는 졸업생을 찾아가는 길이다. 바다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에 집을 구한 그가 집을 말끔하게 수리하고 난 다음 나를 초대한 것이다.나는 가끔 내 집을 찾아오는 그와 늦은 시각까지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이번에는 내가 그의 집을 찾아간 게다. 그가 안내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와 식탁에서 예의 정담을 이어간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행복한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좋은 사람과 늦은 시각까지 격의 없이 대화하면서 마음을 나누는 일은 얼마나 우리를 평온하게 하는가?!지난주 금요일에는 다섯 사람이 포항에 간다. 집에서 10미터 떨어진 곳에 바다가 자리하고 있는 해변이다. 죽도시장에서 준비한 광어회와 멍게, 전복이 돼지고기와 더불어 차례로 상에 오르고, 선선한 바닷바람이 운치를 돋군다. 흉중에는 사심이 없고, 대화는 미리 설정한 방향 없이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오랜만의 양주가 내장을 간질이고, 바다 건너에서 반짝이는 등불이 언젠가의 은성(殷盛)한 추억을 소환한다.옥상에서 거실로 자리를 옮긴 그들이 노래를 청한다. ‘그래, 대구에서 가져온 기타와 노래책이 있었지.’ 악보대(樂譜臺)가 없어 종이상자로 대신하고, 슬로우 고고와 트로트, 왈츠, 스윙을 곁들여 가면서 예전 노래들을 하나둘 불러낸다.어떤 노래는 다 함께 부르기도 하고, 어떤 노래에는 내 경험에 기초한 작은 이야기가 덧대지기도 하고. 그렇게 시간이 시나브로 흐르고, 우리는 세월과 인생과 술로 마음을 주고받는다.하필 금요일 오후와 밤에 포항에서 사람들과 인연과 추억과 시간을 함께한 것일까, 하는 생각에 잠시 포항을 더듬는다. 열일곱 살 고교 수학여행에서 처음으로 만난 바다는 해병대 일일 입소(入所)에서였다.짠 남새가 넘치고, 가슴에 들이닥치는 바닷바람이 그렇게 상큼할 수 없었다. 얼마나 짠지 조금 먹어본 바닷물의 맛은 여전히 기억에 있다.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을 연신 되풀이하면서 우리에게 담배를 권했던 까만 얼굴의 병사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한다.일일 입소를 마친 이튿날 우리를 태우러 포항제철에서 15대의 버스를 해병대로 보내왔다. 고교 선배 한 분이 버스 한 대에 분승하여 포철을 돌면서 설명해주었던 놀라운 시간대가 핑, 하니 사라져간다. “나중에 대학 졸업하고 포철에 오면, 저기 서 있는 캐비닛 크기의 쇳덩어리를 주마. 얼만지 알아?! 삼백만 원이야.” 당시 고등학교 석 달 등록금은 6천 원이었다. 그런 추억을 안겨준 포항의 추억을 지난주에 새삼 돌이킨 것이다.세상의 인연은 의지만으로 엮이지 않는다. 내가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것처럼 누가 나에게 다가오는 게다. 그리하여 두 눈이 서로 마주치면서 인연은 시작된다. 포항의 낮은 속삭임이다.

2022-05-22

성년의 날을 맞으며!

김규종 경북대 교수 오늘 5월 16일은 성년의 날이다. 성년의 날은 만 19세 성인이 되는 청년들을 격려하고, 책임감을 일깨워주려는 의도로 제정된 법정 기념일이다. 성인이 됨은 가슴 벅차고 유쾌한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책무를 의식해야 한다는 점에서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이제는 자신의 언어와 행위 하나하나 신중하게 판단하고 실천해야 하는 시기다. 밥만 축내고 나이만 먹는다고 성인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니다.요즘 한국인들의 인식에 깊게 자리한 것 하나가 젊어지고 싶은 일이다. “젊어지셨네요”라거나 “젊어 보이세요!” 하고 말하면 누구나 반색한다. 나는 그런 말에 별로 반응하지 않는 사람이다. 왜냐면 사람은 나이에 맞는 얼굴과 몸가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동안(童顔)의 나이 지긋한 사람 사진이 나오면 외면한다. 나한테 중요한 것은 젊거나 어려 보이는 일이 아니라, 제 나이에 맞게 사는 일이기 때문이다.그런데도 한 살이라도 젊게 보이려는 노력은 가히 눈물겹다. 젊은이들처럼 차려입고, 신발 신고, 말투까지 흉내 내는 사람을 보면 뭔가 어색하고 낯설다. 더욱이 6∼70대가 그렇게 하는 모양을 볼라치면 왜 그러세요,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온다. 뭐, 각자들 제멋에 겨워 사는 것이 인생이니, 내가 끼어들 처지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빠른 속도로 실종되어 가는 권위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현대 한국의 가정에는 아버지가 없다. 형식적으로 존재하는 아버지는 있지만, 전통 시대의 강력한 아버지는 오래전에 실종되고 없다. 이런 형편이기에 아버지의 권위도 사라진 지 오래다. 아버지와 가부장권 그리고 아버지의 권위가 부재한 까닭에 나이 먹은 사람들의 설 자리도 당연히 없다. 그 결과 존경받는 원로와 권위 있는 원로도 없다. 따라서 한국 사회의 마지막 보루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너도나도 어려지고 젊어지고 싶은 판국에 ‘꼰대질’이라 비난받을 각오로 나서는 사람도 보기 어렵다. 몸 사리고 평안하게 노후를 보내겠다는 자들만 득시글댄다. 세상이 혼탁하고,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자들이 설레발치지만, 누구 하나 담대하게 나서지 않는다. 들어도 못 들은 척, 봐도 못 본척하는 세상이다. 이런 상황변화는 똑똑한 전화기(스마트폰)가 나온 후 급속도로 퍼져나가서 일반적인 현상이자 추세로 자리 잡았다.이런 형편에 맞는 성인의 날에 속이 편하거나, 젊은이들을 푸근하게 축복해줄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호부호형(呼父呼兄) 하지 못한 길동이가 집을 나간 것처럼 권위를 상실해버린 노인들의 흉중에 젊은이들을 위한 박수와 환호가 가당한 노릇인가?! 그래서 마음 한구석이 짠한 게다. 이 거칠고 완악하며 완강하고 무지막지한 세태의 격랑(激浪)을 저들이 어찌 헤쳐나갈 것인가, 하는 걱정이 먼저 앞서기 때문이다.하되, 젊은이들이여! 너무 겁먹거나 주눅 들지 말 일이다. 세상과 정면 대결하여 돌파할 일이다. 당당하고 자신 있게 세계와 부딪치면서 그대들의 길을 멋지게 찾아가기 바라노라!

2022-05-15

붓다를 생각한다

김규종 경북대 교수 음력 4월 8일인 어제는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올해가 2,022년이고, 불기(佛紀)로는 2,566년이기에 고타마 싯다르타는 기원전 544년에 태어난 셈이다. 도이칠란트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1949년 역사의 기원과 목표에서 ‘축의 시대’라는 개념을 창안한다. 기원전 800년부터 기원전 200년까지 유라시아에 걸출한 사상과 종교가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했다는 것이다.놀라운 발상이자 탁월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춘추전국시대 중국에서 공자를 비롯한 제자백가가 등장하고, 인도에는 우파니샤드 철학에 바탕을 둔 자이나교와 불교가 출현한다. 중앙아시아에는 배화교(拜火敎)를 창시한 조로아스터(차라투스트라)가 등장하며, 근동에서는 히브리 선지자들이 유대교의 가르침을 예비한다. 그리스에서는 탈레스와 피타고라스 같은 자연 철학자와 소크라테스를 비조(鼻祖)로 하는 아티카 철학이 나타난다.인공지능 로봇과 드론의 21세기에도 이들의 가르침은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과학기술문명의 시대에도 우리는 2,000년 선각자들의 가르침에 의지해 살아간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 가운데 하나가 사상과 종교다. 종교와 사상의 가르침과 깨달음에 의지해서 우리는 인간성과 품위, 가치와 미덕, 선과 정의를 아침저녁으로 사유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붓다’ 말씀 가운데 ‘탐진치 삼독(三毒)’이 특히 폐부를 찌른다.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세 가지가 인생을 망치는 주범이라는 게 붓다의 가르침이다. 이들 세 가지는 세 마리 새끼돼지처럼 한 묶음으로 뭉쳐 다닌다. 탐욕에 사로잡혀 욕망을 실현하지 못하면, 우리는 분노의 차원으로 이동한다. 분노를 억제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다시 어리석은 행동으로 향한다. 지극히 명약관화한 연쇄반응이자 인과(因果) 법칙이다.이 세상 누구에게나 나름의 욕망이 있다. 욕망이 없는 사람은 절정의 수도승이거나, 절반 죽은 사람 내지 광인(狂人)일 것이다. 문제는 욕망의 제어 정도에 있다. 욕망이 욕망과 충돌하면 강렬한 파찰음과 불화의 굉음이 터져 나온다. 요즘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면 폭발 직전의 거대한 시한폭탄이 째깍거리는 듯하다. 남녀와 세대, 부자와 빈자,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사이의 갈등과 알력이 최고조에 달한 느낌이다.하나의 궤도(軌道) 위를 마주 보고 달리는 두 대의 열차가 정해진 충돌 시각에 맞춰 질주하는 살풍경을 나는 오늘도 예감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의 근저에 ‘탐욕’이 자리한다. 욕망을 넘어선 탐욕, 특히 물질을 향한 욕망이 괴기스러울 정도로 거대하다.영화 ‘스파이더맨’ 연작에 등장하는 각종 괴물이 한반도 남단에 총출동해 있다는 불길한 느낌이 비단 나만의 감촉일까?! 어째서 우리는 탐욕의 열차를 멈추지 못하고 충돌을 향해 곧바로 직진하고 있는 것일까?!이 나라의 수많은 민초(民草)의 넉넉함과 선량함과 달리 탐욕을 부추기는 정치인들과 언론인, 일부 권력자들의 행악질을 통렬하게 경고하고 그들을 퇴출하지 않으면 우리 공동체에 적신호가 켜질 것은 자명하다. 부처님 오신 날에 전하고자 하는 나의 낮은 목소리다.

2022-05-08

‘근로자의 날’ 유감

김규종 경북대 교수 해마다 5월 1일은 ‘노동절’이다. 이날은 세계 전역이 노동자와 노동을 생각하면서 하루 노동을 내려놓는 날이다. 그야말로 노동하는 인간들의 휴식과 노동의 의미 반추를 위해 만들어진 날이다. 그래서 이름도 ‘노동절’이다. 하지만 선진국이라 자부하는 이 나라에서는 노동절이 아니라, ‘근로자의 날’이다. 해괴한 일이다.1886년 5월 미국 시카고에서 발생한 노동자 시위와 관련하여 노동자 8명이 죽어 나간 비극적인 사건이 노동절의 발단이다. 188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서 5월 1일을 ‘노동절’로 정해 기념하기로 한다. 노동절은 133년의 역사를 가지고 오늘에 이른 게다.한국에서는 이승만이 1958년에 3월 10일을 ‘노동절’로 정했으며, 1963년에 박정희는 ‘노동절’을 근로자의 날로 바꾼다. 김영삼은 1994년에 한국노총 창립기념일인 3월 10일 대신 5월 1일로 날짜만 바꾼다. 이름은 끝까지 ‘근로자의 날’을 고수한다.근로자와 노동자는 별 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근로자는 국가나 회사를 위해 근면 성실하게 순종적으로 일하는 사람, 노동자는 주체적으로 힘써 일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래서 국가와 기업은 노동자보다 근로자를 좋아한다.21세기 2020년대를 살아가면서도 한국 정부와 관료, 기업은 여전히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이며 순치(馴致)된 인간을 욕망한다.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깨어있는 노동자들을 두려워하고 경원하는 것이다. 20세기 3공과 5공의 너덜너덜하게 낡아빠진 시대착오적인 인식과 세계관으로 인간과 세상을 재단하는 자들이 이 나라 주류사회를 구성하고 있다. 세상 어느 선진국이 ‘근로자의 날’이란 이름으로 5월 초하루일 노동절을 기념하는가?!내가 굳이 노동절이라는 이름을 주장하는 데에는 까닭이 있다. 언젠가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가 스승에게 묻는다. “정치를 하신다면 무엇을 맨 먼저 하시겠습니까?!” 공자의 대답은 뜻밖이다. “반드시 이름을 바로 하겠노라! (必也正名乎)” 놀란 자로가 되묻는다. “현실을 모르십니다. 하필이면 이름을 바로 하시겠다니요?!” 이에 공자가 준엄하게 자로를 타이른다. 이른바 공자의 6단 논법이 화려하게 전개된다.“이름이 바르지 아니하면, 말이 이치에 맞지 않고, 말이 이치에 맞지 않으면, 일을 성취할 수 없고, 일을 성취할 수 없으면, 예와 악이 흥하지 못하며, 예와 악이 흥하지 못하면, 형벌이 실정과 어긋나게 된다. 형벌이 실정과 어긋나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어진다. 고로 군자의 말에는 모호함이 없어야 한다. (名不正則言不順, 言不順則事不成, 事不成則禮樂不興, 禮樂不興則刑罰不中, 刑罰不中則民無所措手足. 君子於其言無所苟而已矣)” - 논어‘자로’ 편‘근로자의 날’과 한국 정부가 운영하는 국가기관 ‘고용노동부’의 부조화는 어찌할 터인가?! 고용노동부를 ‘고용근로부’로 바꾸든지 아니면 ‘근로자의 날’을 노동절로 바꿈이 온당하지 않겠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진보 정부의 어리석음이 우리의 발목을 잡은 노동절이 어제였다.

2022-05-01

대나무에 관하여

김규종 경북대 교수 누구나 좋아하는 꽃과 나무가 있다. 나는 이팝나무꽃과 작약꽃 그리고 배꽃을 특히 좋아한다. 이팝나무꽃의 하얗고 풍성하며 우아하고 여유로운 자태와 그윽한 향기. 작약꽃의 은은하고 새침하며 깔끔한 자태. 배꽃의 화사하고 조화로우며 미끈한 형상이 정말 멋지다. 조선 시대 선비들은 복숭아꽃과 배꽃을 천시하고 구박했는데, 그것은 꽃에도 인문적인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던 유자(儒者)들의 유난함 때문이었다.나무 가운데서는 느티나무와 단풍나무 그리고 대나무를 좋아한다. 가정집에서 느티나무를 키우는 일은 격에 어긋나는 일이어서 단풍나무를 기른다.화분에서 키우던 오죽(烏竹) 몇 그루와 산죽(山竹)을 마당에 옮겨 심었다. 단풍나무는 길이와 부피생장이 느긋한 편이다. 반면에 대나무는 감추고 있던 본성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 저런 일이?!어째서 사람들이 ‘쑥대밭’이라는 말을 쓰는지 알게 되는 참사(慘事)가 일어났다. 어디서 날아온 지 모르게 마당 일부를 점령하여 세를 키워나가는 쑥과 오른쪽 모퉁이에서 시작하여 마당 전체를 접수할 요량으로 번지는 대나무의 위세는 파죽지세(破竹之勢)였다. 쑥대밭에 가깝게 번지는 녀석들의 기세는 실로 대단했다. 그들과 대적(對敵)하면서 ‘방아쇠 손가락’ 증후군까지 경험해야 했으니, 이쯤이면 전쟁이 따로 없었다.올해도 쑥과 대나무는 푸릇푸릇하게 존재감을 발휘한다. 서책에서 조선의 선비들이 대나무 그림을 즐겨 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는 사군자인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는 춘하추동과 결부된다. 눈 속에서 피어나는 설중매, 여름의 무더위와 비바람을 견디는 난초, 서리를 이겨내고 피어나는 국화도 대단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사군자 가운데 으뜸은 역시 대나무라고 한다.곧게 자라는 강직함과 속이 빈 겸허함 그리고 백절불굴(百折不屈)의 지조와 절개를 선보이는 대나무야말로 선비의 표상으로 최고였기 때문이다.국가가 경영하는 ‘도화서’의 화원을 선발하는 과거시험인 ‘취재(取才)’에 대나무, 산수, 인물, 영모(翎毛), 화초의 다섯 가지 종목이 있었는데, 대나무가 그 가운데서 으뜸이었다고 한다. 대나무는 선비사회에서도, 화원 집단에서도 가장 사랑받은 묘사 대상이었다.조선 시대에 대나무 그림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은 탄은(灘隱) 이정(1554∼1626)이었다. 세종의 고손자 이정은 왕족 출신 화가였다. 더욱이 그는 임진왜란 당시 오른팔에 왜놈의 칼을 맞아 치명상을 입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이정은 굴하지 않고 대나무 그림을 계속 그렸다. 그가 남긴 ‘풍죽도(風竹圖)’는 그야말로 대나무 그림의 압권이다. 바람에 휘날리는 대나무의 형상화가 최고도로 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이정의 그림은 바람이 균질하게 불지 않음까지도 포착하고 있다. 아, 저런 시선과 손길을 가진 화가가 실존했구나, 하는 크나큰 즐거움이 몰려온다. 그래도 마당에서 번성하는 대나무는 근절해야 한다는 다짐을 재삼재사 확인하는 시절이다.

2022-04-24

아, 그런가?!

김규종경북대 교수 세상이 작게 보이는 때가 있다! 그래, 뭐 그리 대단해서 괴로워하고 미워하며 끔찍하게 생각할 게 있냐는 생각에 너그럽고 관대해지는 때가 있다. 딱 이맘때 일이다. 지지 않았으면 하는 벚꽃이 바람에 날리고, 라일락 향기가 오가는 바람에 내년을 기약하는 이즈음 일이다. 붉은머리오목눈이 철모르고 둥지 만들어 뻐꾸기의 탁란(托卵)을 허하던 때다.거친 바람, 괘씸한 바람 불어, 가슴이 바싹 조여오면 하늘과 나무와 구름장 들여다본다. 저리 작은 목숨 지탱할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한밤 지나가는 때 있다. 사람 마음이야 언제나 항상 같지 않기에, 관대함과 여유로움이 악착같음과 치졸함 하나로 얽히는 법. 지나면 비로소 우연함과 느닷없는 너그러움 대하(大河)와 대양(大洋)으로 이해되는 바 있으니, 이런 어처구니없음은 지금도 안타깝기 그지없다.며칠 전 일이다. 멀쩡하게 달리던 뒤쪽 승용차가 한 자도 아니 되게 뒤꽁무니에 되우 붙더니 이리저리 몸 뒤척이며 괴로워하는 것이다. 편도 1차로에서 어쩌자는 것인지, 뒷거울로 보이는 행각이 실로 가관이다. 마음 같아서는 없는 길 만들어 양보하고 싶은 마음 굴뚝 같다. 하되, 좁아터진 길에서 속도 만들며 구부러진 행로 단축하면서 질주해보는 게 고작이다. 하되, 뒤차는 재촉에 재촉을 거듭한다.사정이 이럴진대 이쪽에서도 내장이 뒤틀림은 인지상정이리라. 이윽히 다가온 4차로에서 문득 참았던 분노 일시에 폭발하니 질주 본능과 과시 본능 한 데로 어울려 폭주한다. ‘그래, 따라올 수 있으면 해보라’ 하는 심사로 가속 페달을 밟는 것이다. 뒷거울에서 홀연히 지워지는 염치없는 차량을 확인하며 쾌재를 부르는 것이 비단 나만의 경험은 아닐진대, 잠시 돌이키며 ‘60 넘은 놈이 한심하군!’ 생각한다.같은 일이어도 너그러운 성정이 작동하지만, 어느 땐 악착(齷齪)같은 마음 일어남은 알 길 없는 모순이라. 깊고 너른 이성의 대양과 문득 마주하는 모순 어쩌지 못하는 일 다반사라! 그럴 즈음 확인하는 ‘아하, 내 마음의 주인이 내가 아니로군!’ 하는 사실이다. 내가 내 마음의 주인이라면, 흔들리거나 말도 아니 되게 망령(妄靈) 되는 행동 하지는 않을 것이라. 그러하되, 항시 비틀거리고 흔들리며 뒤뚱거리는 것이 이 마음 아닌가?!하여 다가오는 사유와 인식의 다발은 이것이다. ‘너의 마음은 어디 있는가?! 너의 육신은 그대의 것인가?!’ 젊은 날의 대답은 매양 그렇다, 지만, 이제 나는 안다. 나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나의 흉중(胸中)이 어디 있는지, 나의 몸뚱어리가 나의 자유의지와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는 명징한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다. 나의 몸과 마음의 실제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해지는 터다.낮과 밤이 하나였던 한 주가 스러지고 바람마저 사라진 터에 사위도 고요한 시점이라. 개도 고양이도 그 주인들도 기세가 풀려버린 시절에 새삼 묻는다.그대들의 기특한 사념과 애틋한 연련(戀戀)함은 아직도 무상하며 건강한 것인지, 지나간 꽃잎 새삼 묻는다.

2022-04-10

유튜브 예찬론

김규종 경북대 교수 새로운 옷이나 물품이 유행하기 전에 남보다 빨리 사거나 시험해보는 사람이 있다. 반대로 가장 늦게 어쩔 수 없는 얼굴로 따라오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그 중간 어디쯤에서 부유(浮遊)하며 살아간다. 물질적인 부나 정신적인 여유 또는 대담성이 완비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최후의 모히칸이 되기도 싫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중간자로 살아가는 일은 가장 평안하고 안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나도 언제부턴가 유튜브를 가까이하게 되었다. 오래전에 텔레비전을 두지 않았기로 저녁 시간을 넉넉하게 보낼 수 있다. 책을 읽거나 기타를 치며 노래하거나 상념에 잠기거나 명상하거나 하면서 말이다. 그러다 우연히 얻어걸린 유튜브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기계를 잘 알거나, 적극적으로 알고 싶은 기질도 없어서 최소한으로 유튜브를 만나면서도 기실 놀라운 바가 적잖다.나한테 유튜브는 명탐정 ‘셜록 홈스’ 연작이나 중단편 소설을 듣는 수단이다. 따로 시간을 내서 읽겠다는 강박증 없이 다른 일 하면서 귀만 열어두면 가능한 노릇 아닌가?! 일석이조(一石二鳥)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다. 한밤의 적요(寂寥)를 나직하게 깨뜨리며 들려오는 낭송자들의 정감 어린 목소리와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나의 고단한 하루를 위로해준다. 아하, 참 멋진 신세계로군! 혼잣말한다.그러다 보니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다가 돌연 알게 된 사실이 유튜브의 세력 확장이다. 정말로 많은 사람이 유튜브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던 터였다. 나만 모르고 있었군, 하는 자탄이 절로 나온다. 그들도 나처럼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혹은 신문과 작별하고 유튜브에 의지하여 많은 걸 얻고 있었다. 사람마다 취향과 필요에 따라서 접하는 내용만 다를 뿐, 매체 활용도와 충성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음이 드러난다.얼마 전 피천득 선생의 유명한 수필 ‘인연’을 들으며 감회에 젖는다. 꼬마 아사코와 처녀 아사코를 거쳐 일본인 2세의 아내가 된 주부 아사코와 세 번 만남으로써 인연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수필가. 마치 단편소설의 장면처럼 펼쳐지는 이야기를 듣다가 불쑥 묻고 싶어지는 것이다. “우리 이다음에 이런 집에서 살아요!” 하고 아사코가 속삭였을 때, 연두색이 고왔던 아사코의 우산을 보았을 때, 왜 그는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까?!더욱이 결론적으로 하는 말이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했다는 넋두리다. 그러니까 달착지근한 추억은 가슴에 간직하되, 쓰라린 작별 장면은 불요불급(不要不急)한 것이라 결론 내린 셈이다. 저런 이기주의자의 사무치는 회한과 그리움의 잠꼬대에 오랜 세월 붙들려 살았군, 하는 자책 아닌 자책이 소리 없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오래도록 강렬하게 아사코를 마음에 두었다면 어째서 말하지 못했을까?!식민지 조선의 유약한 서생 수필가가 인생의 황혼 무렵에 느닷없이 도달한 깨우침이란 게 저런 것이었나, 하는 걸 새삼 알려준 유튜브를 예찬하고 싶은 게다. 인연은 함부로 맺어서도, 함부로 걷어차도 아니 되는 것 아닌가?! ‘불수자성수연성’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리라.

2022-04-03

‘타이타닉’을 보지 않은 남자

김규종경북대 교수 코로나19의 선물 가운데 하나는 세계의 다채로운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관객들로 만원이 되곤 했던 2020년 이전의 대형 영화관들은 장삿속에 혈안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윤이 남는 미국 할리우드 영화를 주로 수입하여 배급했다. 복합 상영관이라는 것은 말뿐이고, 실제로는 잘 팔리는 서너 개 영화 일색이었다. 그런 상황이 코로나19 이후 일변하였다.장삿속에 정신이 나가 있던 복합 상영관들이 정말로 다양한 영화를 세계 전역에서 수입하고 있다. 작년과 올해 내가 본 영화는 대개 미국 이외의 나라에서 제작된 것이다. 프랑스, 에스파냐, 핀란드, 도이칠란트, 일본, 영국, 홍콩, 중국 등등을 들 수 있다. 영화에서 다루어지는 소재 또한 폭력-속도-사랑-공상과학 일변도를 넘어서 우리의 현실과 상상력을 극대화한 경우가 많았다.205명이 들어갈 수 있는 복합 상영관에서 핀란드 영화를 보았다.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라는 긴 제목을 가진 영화. 영화 제목에서 의도적으로 빠트린 어휘가 있다. 영어로 표기된 원제에는 있지만, 수입 과정에서 일부러 뺀 것 같다. ‘눈먼’이라는 어휘가 남자 앞에 있었건만, 수입사는 한사코 그것을 거부한 것이다. 장애인 영화라는 걸 숨기고 싶었던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다발성 경화증으로 가슴 아래 육신이 마비되어 휠체어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남자 야코가 주인공이다. 더욱이 그는 경화증의 결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는 중증 장애인이다. 아침마다 그를 깨워주는 다정한 문자 메시지가 멀리서 날아온다. 그가 사는 곳에서 천 km 떨어진 곳 사는 또 다른 여성 장애인 시르파다.시르파는 혈관염으로 고통받고 있는데, 그녀의 소망은 바이오 생약 치료다. 그러나 의사의 진단은 항암치료가 필수적이며, 생약 치료는 불가하다는 것이다.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시르파. 야코는 혼자 움직일 수 없는 몸이지만, 그녀를 찾아가서 만나겠다고 마음먹는다. 다섯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야코는 충분히 시르파를 만날 수 있다.장애인 택시를 타고 정거장으로 가다가 그가 운전기사에게 라디오 소리를 높여달라고 부탁한 다음 “자유다!” 하고 외치는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다. 장애가 없는 사람이면 당연한 것으로 느끼는 이동의 자유와 권리가 야코 같은 중증 장애인에게는 사후의 낙원이자, 그림 속의 성찬일 따름이다. 자신의 차폐된 공간을 벗어나 모험을 강행하는 야코가 공중에 대고 소리치는 ‘자유’는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이던가?!오늘 우리가 누리는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자유의 이면에는 그것을 위해 스러져간 수많은 선배 투사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공기처럼 물처럼 차고 넘치는 값싼 물건인 양 당연시한다. 영화를 보면서 장애인들이 매일 겪는 장벽과 차별과 슬픔이 느껴진다. 그러니 생각해보자. 세상에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2022-03-20

파랑새를 찾아서

김규종 경북대 교수 벨기에 시인이자 극작가인 모리스 마테를링크(1862∼1949)가 쓴 ‘파랑새’가 떠오르는 시점이다.1908년 출간된 ‘파랑새’를 러시아 연출가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가 ‘모스크바 예술극장’ 무대에서 곧바로 상연한다. 외견상 ‘파랑새’는 어린이를 위한 작품 같지만, 그 내면에는 삶의 본질을 찾아가는 기나긴 여로가 자리한다.크리스마스 전날 밤 가난한 남매 치르치르와 미치르는 선물을 받지 못해 의기소침해 있다. 그때 옆집 할머니가 들어와서 앓고 있는 딸을 위해 파랑새를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아이들은 할머니가 건네준 요술 모자를 쓰고 길을 떠난다. 아이들은 ‘추억의 나라’와 ‘밤의 궁전’을 지나 ‘행복의 궁전’과 ‘미래의 나라’를 떠돌다가 돌아온다.아이들이 돌아왔다기보다 엄마가 깨우는 소리에 꿈에서 깨어났다는 말이 더 맞겠다. 아이들이 돌아다닌 세계는 꿈의 환영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옆집 할머니가 들어오자 아이들은 파랑새 대신 비둘기라도 가져가라고 말한다. 아이들의 집에서는 비둘기를 기르고 있었다.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긴다. 아이들의 비둘기 날개가 파란색으로 변하여 그들이 찾아다녔던 파랑새가 집 안에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할머니는 파랑새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고, 딸은 기력을 회복한다. 아이들이 먹이를 주려고 새장 문을 열자 파랑새는 하늘로 날아가 버린다.파랑새는 행복의 상징이다. 요즘 한국인들은 행복의 노예처럼 보인다. 누구나 삶의 가장 큰 원인을 행복에서 찾는다. 행복하지 않으면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행복 강박증에 중독된 사람들 같다.그런데 그들이 바라는 행복이 무엇이냐고 따져 물어보면 돌아오는 답변이 별로 없다.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한다.행복의 조건을 숙고하지 않은 채 행복을 추구함은 허전하고 이상하다. 왜 부자가 되려는지, 왜 결혼하려는지, 왜 대학에 들어가려는지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남들이 행복을 찾고, 부자가 되려 하고, 결혼과 진학은 누구나 하는 거니까 거기 맞춰 살아가려는 게다. 오랜 세월 독재자들의 병영국가, 군사 국가의 국민으로 살아서 그런지 우리는 전체주의와 획일주의에 익숙하며 그것에 순치(馴致)돼 있는 것도 사실이다.우리가 아침저녁으로 마주하고 보고 듣고 먹고 마시는 온갖 것을 돌이켜보면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다. 이토록 차고 넘치는 물질과 재화와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때로 격절(隔絶)된 작은 섬들을 본다. 난바다에 둥둥 떠서 서로를 목청껏 부르지만, 누구도 그 목소리에 호응하지 않는 차갑고 비정한 세상.3월 9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선이 끝났다. 홀가분하다. 북새통처럼 시끌벅적하던 사위(四圍)가 고요해지니 이제야 사람 살아가는 세상처럼 보인다. 사람 하나 바뀐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전혀 없다. 그러니 다투고 시비하던 사람들이여, 이제는 제자리로 돌아가 차분하게 일상과 대면하시라. 당신이 기다리던 진정한 파랑새는 거기 있을지 모르니까.

2022-03-13

대통령 선거 유감

김규종 경북대 교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코앞이다. 지금까지 있은 어떤 대선보다 후보들에 대한 유권자들의 호감도가 낮다는 게 중론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를 돌아보면 이런 견해가 올바르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을까, 하는 심사를 금하기 어렵다.‘87체제’ 이후의 대선만 회고해 보자. 1노 3김 경쟁체제로 치러진 1987년 대선은 문자 그대로 ‘양김’의 분열과 노태우의 어부지리로 종결됐다. 하지만 박정희·전두환의 체육관 선거를 종식했다는 점에서 기억할 만한 대선이었다. 1992년 김영삼-김대중-정주영의 3자 경쟁 구도는 흥미진진했다.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치러진 대선의 백미는 ‘우리가 남이가?!’였다. 문민정부 탄생은 그 결과물이다.1997년 이른바 ‘디제이피 연합’과 ‘아이엠에프 구제금융’으로 촉발된 위기 상황에서 대선이 치러졌다. 김대중의 승리로 한국은 아시아 최초로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룩한 나라가 되었다. (일본은 2009년에야 하토야마 유키오의 민주당 정권이 탄생한다). 2002년은 고졸 신화의 노무현이 보수우파의 거목 이회창을 이긴다. 정몽준의 단일화 약속 파기에 굴하지 않은 승리로 노무현은 한국 정치사를 새롭게 쓰게 한다.2007년 대선은 결과가 나와 있었다. 국민의 관심은 오히려 이명박과 박근혜 가운데 누가 보수의 대표선수가 되느냐에 쏠려 있었다. 2012년 대선은 노무현의 서거와 이명박의 실정이 맞물려 문재인과 박근혜의 박빙 승부가 흥미로웠다. 민노당 이정희 대표의 돌출발언으로 박 후보가 승리한다. 그리고 촛불시위로 창출된 2016년 대선 공간은 싱거운 대결로 끝나 문재인이 당선되어 오늘에 이른다.지금까지 거론된 인물들은 상당히 비중 있고 역사적인 책무를 수행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20대 후보들의 면면은 다르다. 누구도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나 호응을 받지 못한다. 그들을 둘러싼 저급한 수준의 뒷얘기가 토론회까지 잠식할 정도이고 보면 중언부언이 필요 없다. 어쩌다 저리 추락하고 말았을까?! 정치가들의 수준을 보면 그 나라 국민들의 수준, 즉 민도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행정부인 내각과 입법부인 국회의원들의 얼굴을 보면 그 나라 국민의 지적·정신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참기 어려운 분노와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숱한 정치인들과 행정관료들이 득세하는 세상 아닌가. 더욱이 어떤 후보는 투표용지 인쇄가 끝난 다음 갑자기 후보직 사퇴를 선언한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태연자약하게 유권자들을 우롱해놓고도 천연덕스러운 사람의 심사는 무엇일까?!투표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투표장에서 권리를 행사하자! 그러나 다음 선거에서는 사람 같은 사람, 배포 크고 식견도 넓고, 도덕적으로 순결하고, 능력도 있으며, 역사 인식도 투철하고, 미래기획도 튼튼하게 준비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도록 판 자체를 바꿔보자.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최소의 도리 아닐까?!

2022-03-06

12평 원룸 전세

김규종 경북대 교수 아들과 전화하다가 숨이 턱 막힌다. 정말이냐, 하는 소리가 입에서 튀어 나간다. 서울에 인접한 인구 29만의 소도시 하남의 원룸 전세가 1억6천만원이라는 것이다. 얼마 전에 일자리를 얻어 그리로 이주한 아들의 말이었다. 방 하나짜리 콘크리트 구조물에 ‘억’ 소리 나는 세상이다. 이건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세상이다.건축부지에 4∼5층 규모로 올려진 닭장 같은 방을 그 가격에 빌려서 살아야 하는 이 나라 청춘들의 삶은 지극히 피폐하다. 아무리 이자율이 낮기로서니 평당 1천300만 원이 넘는 돈을 주고 전세를 살아야 하니 말이다. 이런 데도 나이 든 축은 젊은이들이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는다고 나무란다.원룸이 방음이나 방한도 엉성하고, 관리도 그래서 건강한 주거환경을 제공하는 곳은 아니지 않은가?! 남향을 주장할 형편도 아님은 자명(自明)한 이치고. 얼마간의 땅에 몇 달 뚝딱하여 건물 세우고, 거기서 나오는 이득을 몽땅 챙겨가는 자들은 누구인지 궁금하다. 돈이 돈을 벌어도 무지막지하게 긁어가는 세상!지주와 시공업자의 배만 불려주는 이런 행태는 고쳐야 한다. 하기야 몇 년 전에 지인의 딸이 마포에 있는 두 개짜리 방을 2억5천만원에 전세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기겁한 적도 있으니 금시초문은 아니다.언제부터 이런 지경으로 된 것일까?! 숱한 부동산 대책을 내놓았지만, 번번이 실패를 거듭한 정부의 무능(無能)에 분노가 치민다.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 종부세 걱정하고, 노숙자들이 재벌 상속세에 한숨 짓는 이상한 나라고 보면 그럴 만도 하다. 먹고 입고 자는, 이른바 식주의(食住依) 세 가지는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이런 조건마저 제대로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정부라면 21세기 대명천지에 얼굴 들기 민망할 것이다.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정치적으로 후진국에서 불과 60년 만에 세계 10대 경제 강국과 민주국가로 변신했다. 우리 국민 모두 이 점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런데 그런 허울의 이면에 승자독식과 경쟁만능 그리고 약육강식의 정글 투쟁이 횡행(橫行)하고 있다. 젊은이들의 등골을 훑듯이 빼먹는 나이 든 축들의 탐욕은 식을 줄 모른다.권력욕이든, 물욕이든, 명예욕이든 탐욕은 탐욕으로 잠재워지지 않는다. 갈증이 심하다 해서 바닷물을 마시면 조갈증은 더 심해질 따름이다. 사회적 공론장의 형성과 깊이 있는 논의를 거쳐 생산적인 결론을 도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성세대만을 위한 돈과 권력이 아니라, 미래세대와 그들의 어린것들을 위한 청사진도 함께 그려야 한다.논의의 출발은 ‘나와 내 아내와 내 남편’이라는 편협한 가족주의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 모두 평등하고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대전제에서 시작하여 이제는 상실된 공동체와 공동체성을 시급하게 회복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2022-02-20

모든 것이 공(空)하다고?!

김규종 경북대 교수 ‘반야심경’을 암송하다가 앞부분에서 딱 막힌다. “관자재보살이 반야심경을 깊이 행하실 때 오온(五蘊)이 모두 공함을 밝게 보시고 일체(一切)의 고액(苦厄)을 넘어섰다.” ‘반야심경’첫머리에 나오는 이 구절이 명징하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반야심경’ 260글자의 본질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오온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다섯 가지를 뜻한다.우리를 포함한 세상 만유의 존재 형식과 실체가 색이다. 색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이 수이며, 받아들인 바에 따라 생각을 일으킴이 상이다. 생각에 따라 행동함을 행이라 하고, 행동의 결과를 판단하는 것이 식이다. 예를 들어보자.강의실에 강아지가 들어온다. 나도 수강생들도 강아지를 본다. 강아지가 색이다. 강아지를 보고 모두 마음이 불편하다. 강의 도중에 왜 강아지가 들어온단 말인가. 누가 주인인가?! 그런 불편한 마음이 수다. 그리하여 나는 강아지를 쫓아내기로 마음먹고 실천에 옮긴다. 강아지를 쫓아낸 행위가 행이다. 강아지를 쫓아낸 것을 판단해보니 조금 지나쳤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식이다.여기서 색수상행식, 즉 오온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시간적 순차성에 따라 이루어졌다. 육하원칙에 충실한 과정을 모두 거친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인과율이 적용된 게다. 그런데 이 모든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 모두가 공하다는 것이 관자재보살의 깨달음이다. 그리하여 관자재보살은 세상의 온갖 고통과 괴로움을 건넜다는 것이다.그런 까닭에 더욱 이해할 수 없다. 분명히 내 눈으로 강아지를 보고 강의실 밖으로 몰아낸 다음, 그 행위를 후회한 나의 일련의 행동이 왜 공하단 말인가?!한 가지는 확실하게 다가온다. 지금까지 내가 노력해온 독서와 사유, 인식이 가져온 지식으로는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오온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붓다가 설하신 ‘반야지혜(般若智慧)’와 내가 추구해온 얕은 지식의 범주가 양립하기 불가능한 까닭이다.그런데 깨달음은 엉뚱한 서책에서 온다. ‘우주의 구조’를 읽다가 대면한 차원의 문제가 실마리를 제공한다. 우리는 3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이 조합된 4차원 세계에서 태어나 살다가 죽는다. 그런데 초끈이론은 9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이 조합한 10차원을, M-이론은 10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이 조합된 11차원 세계를 주장한다. 여기서 무릎을 친다.붓다가 말하는 전생과 사후의 여섯 세계가 확연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천상, 아수라, 인간, 축생, 아귀, 지옥의 여섯 공간이 그것이다. 그것을 심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던 내가 초끈이론의 주장과 만나니 눈앞이 환해진 것이다. 시간개념이 없는 개미는 3차원 공간이 아니라, 2차원 면을 움직이는 존재다. 개미에게 인간의 4차원 세계를 말하면, 개미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오온에서 10차원으로 전화(轉化)하는 과정을 보면서 각자 간직한 지식과 관습 혹은 지혜의 깊이와 너비가 얼마나 다를 것인지, 생각하니 새삼 가슴 서늘해진다.

2022-02-13

장예모(張藝謀)를 생각하며

김규종 경북대 교수 1950년에 출생한 현대 중국의 대표적인 영화감독 장예모의 ‘원 세컨드 (1초)’가 상영되고 있다. 대구에서도 상영관이 희귀하여 한 군데서만 영화를 볼 수 있다. 모택동의 문화혁명 당시 하방을 경험한 반동 집안 출신 지식인 장예모의 아픈 기억을 담은 영화다.3년에 걸친 하방을 마치고 갖은 고생 끝에 그는 모택동이 죽고 난 다음인 1978년에야 북경 영화학원의 늦깎이 대학생이 되어 영화 인생 밑그림을 그린다.1982년 대학 졸업과 함께 ‘광서영화제작공사’의 촬영기사로 입사하여 본격적으로 영화와 만난다. 1982년 5세대 감독의 선두주자 진개가(陳凱歌)의 영화 ‘황토지’의 촬영감독이 된다. 1987년에 그는 ‘오래된 우물’의 촬영감독 겸 주연배우로 이름을 알린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장예모는 1988년 ‘붉은 수수밭’으로 베를린 영화제 대상인 황금곰상을 받아 세계적인 감독으로 인정받기에 이른다.1992년 ‘귀주 이야기’, 1999년 ‘책상 서랍 속의 동화’로 베네치아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는다. 1994년에는 ‘인생’으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다. 이외에도 그가 받은 국제 영화제의 수상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그가 세계 영화제의 주인공으로 등극한 것은 현대 중국의 복잡다단한 사회·정치문제의 천착이 바탕이다. 소품을 만들되 소품 이상의 사회적 발언권을 확보할 수 있는 역량과 날카로운 시각을 소유했던 덕이다.1999년 ‘집으로 가는 길’로 대약진운동 시기의 사회상을 그려낸 장예모의 영화 세계는 2002년 ‘영웅’을 기점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한다. 천하를 통일하다 보면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대(국가)를 위해 소(개인과 가문)는 얼마든지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가 일관되게 관철되기 시작한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2008년 북경 올림픽 개막식과 폐막식을 총괄하는 총감독 자리에 오른다. ‘어용 논란’이 불거지기 시작한다.1990년대 중국 영화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려 찬탄의 대상이 되었던 장예모의 영화는 서서히 관객들에게 잊히기 시작한다. 여전히 뛰어난 색감과 활달한 무협을 바탕으로 한 ‘연인’이나 ‘천리주단기’ 혹은 ‘황후화’ 같은 영화도 속절없이 망각(忘却)되기에 이른다. 그랬던 그가 이번에 ‘원 세컨드’로 귀환했다. 단 1초를 위해 고군분투를 마다하지 않는 어떤 아비의 삶을 그려내는 따사롭고 온정이 넘치는 영화.고희를 넘긴 그에게 문화혁명은 여전히 잊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있는 듯하다. 대수롭지 않은 싸움으로 여덟 살짜리 딸과 생이별하고 오랜 수형생활을 해야 했던 사내의 고통과 딸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강렬하게 그려져 있는 ‘원 세컨드’. 그와 함께 어린 동생의 소원을 들어주려 도둑질도 마다하지 않는 누이의 살가운 혈육사랑도 애틋하게 묘사된다.‘썩어도 준치’라는 말처럼 장예모의 시선과 연출은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특히 부드럽게 춤을 추는 사막의 모래가 연출하는 기막힌 능선의 풍경을 잡아내는 렌즈는 아, 하는 찬탄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영화 인생 후반기가 환하게 열리기를 기원한다.

2022-02-06

웃음과 가면

김규종 경북대 교수 내 집의 이름은 ‘파안재(破顔齋)’다. ‘파안대소(破顔大笑)’라는 한자어에서 따온 것이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크게 웃는 웃음이 파안대소다. 실제로 이런 웃음을 언제 웃어보았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나처럼 웃기 좋아하는 사람이 이럴진대 2022년을 살아가는 한국인들 가운데 파안대소하는 분이 얼마나 될지, 가늠하기 어렵다. 웃음의 기억이 흐려져 가는 개인과 사회, 국가는 건강하지 못하다. 웃음은 건강의 징표이기 때문이다.유치원과 요양병원 가운데 웃음소리 들리는 곳이 어딘지 생각해보면 결론이 나온다. 전염성 강한 웃음은 건강하고 투명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필수 요건이다. 웃음의 걸림돌이 되는 사회악과 시대정신, 개인 혹은 집단의 세력이 강하면 웃음은 사라진다. 웃음 대신에 억압과 강제와 법과 공권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법대로 하자’는 말이 횡행하는 사회는 고장 났거나, 회복 불능의 중증질환을 앓고 있는 셈이다.법이 지배하는 사회는 언뜻 공정하고 정의로워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착시현상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상군 열전’의 주인공 상앙 혹은 공손앙 내지 상군(商君)의 최후가 그것을 웅변한다. 상앙의 변법으로 전국 7웅의 강자로 부상한 진나라가 훗날 천하를 통일하여 중국 최초의 제국을 이루지만, 불과 15년 만에 망한다. 법가로 통일할 수는 있을망정, 제국을 경영할 수는 없다는 교훈이다.법이 지배하는 세상에는 웃음이 사라지고 가면이 횡행한다. 자신의 내면세계를 감추고 본색을 드러내지 않는 인간이 득시글거리는 세상. 웃음은 눈물만큼이나 개인의 속내를 밖으로 드러내는 장치다. 그런데 웃음을 억압하는 제도적 장치가 법률적으로 보장되는 사회에서 인간은 위축되기 마련이다. 정치풍자와 웃음이 오래도록 금기시된 우리나라 같은 사회에서 웃음은 불경한 것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중세 유럽의 기독교가 강제한 엄숙주의와 경건주의가 웃음과 희극을 세상 밖으로 밀어내고 폭력적으로 억압한 일은 우연이 아니다. 기독교의 초월적 절대자 자리에 인간과 인간의 눈이 들어서면서 중세 천년은 종언을 고한다. 그와 함께 인간의 관점과 기준, 인간의 웃음과 눈물이 신과 교회를 대신한다. 근대에 이르러 인간은 교회가 강제한 가면을 벗어던지고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회귀한다. 카니발의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코로나의 세계적인 유행과 더불어 우리는 2년 넘도록 마스크의 가면을 쓰고 거리를 활보한다. 우리는 그나 그 여자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진짜 표정과 속내를 읽어낼 수 없다. 모두가 마스크의 외피 안에서 내면을 감추고 살아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인간과 인간의 격의 없는 유대 관계가 약화-붕괴하기에 이르렀다. 만족하고 행복한 사람 숫자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이해관계의 충돌, 세계관의 마찰, 세대의 불협화음, 서울과 지방의 불평등, 각종 사회적 모순의 격화가 가면 뒤로 숨는 기괴한 현상이 전개된다. 자, 가면부터 벗어보면 어떨까?!

2022-01-23

어린이 대학을 설립하자

김규종 경북대 교수 얼마 전 ‘시인의 저녁’을 방송하다가 도이칠란트의 ‘어린이 대학’에 관한 내용을 알게 되었다. 내가 유학했던 나라의 소식을 타자에게 전해 들으니 조금 쑥스러워졌다. 하지만 그 내용이 의미 있고 아름답기로 여러 사람이 공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인터넷과 휴대전화가 보편화된 세상에 특별한 비밀이나 정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알고 계신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2002년 한일 월드컵으로 우리나라가 들썩거릴 때 도이칠란트 ‘튀빙엔 대학’에서 처음으로 어린이 대학이 시작된다. 일곱 살 이상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교수들이 다채로운 주제를 가지고 강의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대학 참가자들은 시험을 치르지 않고, 따라서 성적도 없다. 학생들은 대학의 학생 식당을 이용하고, 대학 당국은 학생증까지 발급한다. 어린이 대학생들을 위한 대우가 극진한 것이다.대학 교수들이 제공하는 강의 주제 몇 가지를 소개한다. ‘왜 공룡은 사라졌을까?’, ‘사람은 왜 죽어야 하는가?’, ‘학교는 왜 그렇게 지겨운가?’, ‘어째서 우리는 웃기는 얘기를 들으면 웃는가?’, ‘왜 누구는 가난하고, 누구는 부자인가?’, ‘왜 나는 나일까?’ 이런 주제를 놓고 해당 분야의 전공 교수들이 최대한 쉬운 어휘와 본보기로 어린이들에게 강의를 베푼다는 게다. 야, 하는 감탄사가 입에서 절로 튀어나온다.2002년 이후 ‘어린이 대학’ 기획은 세계 전역으로 확산하여 이웃 나라 일본과 동유럽의 루마니아, 남미의 브라질과 오스만튀르크의 후예 터키에서도 어린이 대학 프로그램이 성행한다. 더욱이 ‘유럽 어린이 대학 네트워크’ 회원국이 무려 29개국에 달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물론 어린이들이 강의 내용을 모두 이해한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최고 교수들에게 세상의 온갖 궁금증을 묻고 대답을 듣는다는 즐거움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나의 경각심을 잡아끈 대목이 하나 더 있다. 어린이 대학 설립에 딸린 원칙 네 가지다. 첫째, 분과학문을 넘어 석학의 전문지식을 어린이 눈높이로 전달할 것. 둘째, 어린이들에게 대학을 재미있게 경험하는 기회를 줄 것. 셋째, 모든 강사는 재능기부를 원칙으로 하여 강의는 모두 무료로 운영할 것. 넷째, 신청하는 학생은 전원 수용할 것. 만세! 하는 탄성이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우리나라 어린이들의 교육 현장을 생각해보시라. 어린이 대학은 만 7세 이상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기에 우리 기준으로 보면 초등학교 1학년부터다. 한국의 초중등생들은 저 나이에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학교 수업도 모자라 각종 학원에서 속셈, 영어, 태권도, 피아노, 웅변에 이르기까지 온갖 잡다한 것들을 배우느라 진이 빠지고 있지 아니한가?! 무엇을 위해서 왜 그렇게 이런저런 학원을 전전해야 하는가?!우리는 사람 대신 인적 자원이라는 용어를 쓰는 희한한 나라다. 인간을 소모품이나 생산재가 아니라, 스스로 사유하고 인식하는 인간 본연의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면 이제라도 어린이 대학을 설립해야 하지 않을까?!

2022-01-16

꿈과 대학

김규종 경북대 교수 언제부턴가 국립대 교수들은 학생 면담이 의무가 되었다. 한 학기에 1회, 1년에 두 차례는 반드시 지도학생 면담이 필수적인 과제로 부과된 것이다. 이른바 학생 지도비라는 명목의 수당이 예전의 봉급에서 차감 지급된다. 학생들과 대면하기를 꺼리는 교수는 거의 없다. 가르침이라는 것이 학문의 전수에 그치지 않는 것이 우리 대학사회의 풍토이기 때문이다.학생들과 면담하노라면 언제나 아쉬움이 남는다. 그것은 그들의 내부에 깊이 각인된 수동성과 흐느적거림이다. 젊은 시절의 담대한 패기와 무모할 정도의 배짱과 오기, 무엇인가를 향해 달려가는 저돌적인 자세를 보여주는 학생을 대학에서 찾을 수 없다. 예전에는 완전히 멸종되지 않아서 드문드문 만날 수 있었기로, 커다란 기쁨이었건만, 이제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으니,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영리한 학생들은 그들의 향방을 요모조모 뜯어보고 난 연후에 가장 안전하고 실패할 가능성이 전무(全無)한 길을 택한다. 그러하되 그 길의 선택이 올바른 것인지를 나한테 검증받으려 한다. 그러면 나는 속이 짠하다! 학부 3년 동안 그가 들여다본 21세기 20년대 대한민국 사회의 국립대 졸업반 학생의 함축적인 선택이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저토록 범속한 소시민으로 만들어버렸을까?!꿈이 없는, 아예 처음부터 꿈이라고는 꿔본 적 없는 청춘이 나날이 늘어간다. 그들에게 꿈이 뭐야, 하고 물으면, 십중팔구는 공무원이라 답한다. 그들은 꿈이 미래에 가질 직장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앞으로 희망하는 직업이고, 내가 묻는 것은 꿈이야, 하고 말해도 그들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위대한 축복을 받아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가 찬란한 20대에 아스라한 창공으로 비상하는 꿈을 꾸지 않는 세상이 찾아온 것이다.언젠가 서른 명 남짓한 학생들과 꿈 이야기를 한 적 있다. 꿈 아닌 꿈 이야기를 참을성 있게 듣던 중 유일하게 어느 학생이 꿈을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40대가 오면 저만의 고유한 카페를 차리고 싶고요. 그 전에 제힘으로 세계일주 여행을 해보고 싶습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잘 들었지?! 내가 듣고 싶은 꿈 이야기가 바로 저거다.”꿈을 꾸는 젊은이들이 멸종단계에 이른 우리 사회는 중증의 질환을 앓고 있다. 그것은 아파트와 승용차와 안정적인 공무원 일자리를 지향하는 젊은이들의 ‘꿈’으로 집약된다. 그들이 말하는 공무원은 9급이고, 따라서 굳이 대학에 들어오지도 않아도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그러면 그들과 그들의 부모가 굳이 아들딸을 대학에 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일이 이쯤 되면 대학이 특히 국가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국립대학이 이 땅에 존립할 근거가 무엇인지 숙고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대학의 강단 역시 허다한 소시민 교수들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다. 연구비, 프로젝트, 빈곤한 화제와 얄팍한 지적-정신적 풍토가 대학의 주류문화로 떠오른 지 오래다.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우리에게 대학은 무엇인가?!

2022-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