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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내 아이가 태어났다! 조선시대 아기 탄생의 순간

장흥효의 ‘경당일기’. /선인의 일상생활, 일기(https://diary.ugyo.net/) 16~17세기를 살다갔던 안동 출신의 선비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1564~1633)는 자신의 일기에서 외손자가 태어나는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다. 시간은 1619년(광해군11) 10월 22일이었다. “이른 새벽에 집으로 돌아오니 딸이 이미 아기를 낳았다. 어제 미시(未時)에 외손자가 태어났으니, 어떤 경사가 이와 같겠는가? 큰 추위가 지극하면 반드시 따뜻한 봄날이 있다고 한 것이 진실로 빈말이 아니다.”(장흥효의 ‘경당일기’는 그가 51세 되던 1614년(광해군6)부터 62세 되던 1625년(인조3)까지 11년 6개월간의 기록이 담겨 있다.) 이날 외손자를 출산한 딸은 ‘음식디미방’의 저자로 잘 알려진 장씨부인으로 여자로서는 드물게 ‘장계향’이라는 이름이 전해진다. 그리고 태어난 외손자는 ‘홍범연의(洪範衍義)’의 공동 저자인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1619~1672)이다. 동생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과 함께 이 책을 저술했다.장흥효의 첫 번째 아내 안동권씨는 딸 하나만 낳고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녀가 오랫동안 병을 앓았기에 장흥효와 그 딸(장씨부인)은 걱정과 안타까움으로 많은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아내의 병이 심해 물고기를 먹이려고 물고기를 잡기도 했고, 병을 걱정하느라 꿈자리가 뒤숭숭한 날도 있었으며, 병을 앓는 아내를 보며 애타는 심정으로 보낸 날도 있었다. 딸이 외손자를 낳았던 그 시간은 아내의 상례를 치르던 시기였다. 한 달 전 9월 25일에 그의 아내가 오랜 병환 끝에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장흥효는 일기에서 “이 날 술시(戌時)에 아내의 병을 구해내지 못하였으니, 애통한 슬픔을 어찌하리요! 망극함을 어찌하리요! 하늘에 하소연하여도 아득하여 나의 말을 들어주지 않네. 외로운 딸과 함께 가슴치며 오래도록 곡하니, 오장(五臟)이 끊어지는 듯하다. 꿈인가! 생시인가!”라고 했다. 최은주한국국학진흥원 국학자료팀장 그리고 곧 상례 절차에 돌입했는데, 그 주관을 사위 이시명(李時明)에게 맡겼다. 그렇게 아내의 상례를 치르며 친지들의 조문을 받던 날들이었다. 이때의 일기는 대부분 누가 조문했고 부조했는지에 대한 기록들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마침 매부의 대상(大祥)이 되었기에 참석차 그곳에 다녀오느라 잠시 자리를 비웠던 날, 딸아이가 외손자를 출산한 것이었다. 장흥효가 딸의 출산을 두고 “큰 추위가 지극하면 반드시 따뜻한 봄날이 있다고 한 것이 진실로 빈말이 아니다.”라고 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아내가 죽고 상중(喪中)이던 그 시간은 그에게 그야말로 혹독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끝에서 외손자의 탄생을 맞이했으니 큰 추위가 가고 따뜻한 봄날이 온 것 같은 느낌이 당연했을 것이다. 평범한 표현이지만 그의 절절한 심정이 그대로 와 닿을 만큼 드러나 있다.자식이 귀하던 그에게 외손자의 출생은 또 다른 의미의 기쁨이었다. 그는 다음날 방문했던 조문객에게 예를 이루지 못했다고 하며, 그 이유를 빈소가 산실(産室)과 멀지 않은 곳에 있기 때문에 혹시 불결해질까 모든 일용에 행하는 예를 모두 폐했기 때문이라고 직접 기록했다. 모든 것을 제쳐두고 아이의 건강을 우선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자손이 귀했으므로 자연스레 더욱 조심하고 더욱 신경을 쏟았을 것이다. 10월 24일에는 “손자가 태어난 지 겨우 4일인데, 울음소리가 한 살 된 아이와 다름이 없다”라고 기록했다. 세심하게 지켜보는 외할아버지 장흥효의 모습과 4일된 아기의 울음소리가 교차되는 장면이다. 아기의 우렁찬 울음을 들으며 장흥효는 내심 안심하면서 동시에 그 아이가 특별할 것이라는 기대를 은연중에 담아냈다. 그리고 덧붙이길 “딸이 아기를 낳은 뒤 조금 불평한 징후가 있었는데, 점차 평상을 회복하였다.”라고 했다. 어머니의 상례 중에 출산하느라 애쓴 딸의 건강도 챙기는 모습이 인상 깊다. 최은주 한국국학진흥원책임연구위원 장흥효는 55세에 첫째 부인을 잃었다. 그리고 그녀의 일년상을 마쳤을 때 둘째 부인을 맞이했는데, 무남독녀였던 딸이 아버지의 후사가 없는 것을 걱정해 혼인을 서둘렀기 때문이었다. 일기에는 둘째부인의 임신과 출산의 기록도 담겨 있다. 1622년 9월 26일의 일기에서 “부인이 임신해 사람들이 모두 축하했었는데, 이 날 10달을 채우지 못하고 여자 아이를 낳으니 사람들이 불안하게 생각했다.”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29일의 일기에서 “아이를 낳고도 기르지 못하니 애통함을 어찌 다 표현하겠는가. 잉태하지 않는 것이 나을 뻔하였다. 그러나 화와 복이 찾아올 때는 순순히 천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듬해 윤10월 8일 둘째 부인이 다시 딸을 낳았다. 장흥효는 이날의 일기에서 “해시(亥時)에 딸이 태어났다. 아들 낳기를 바라는 마음이 극진했는데 아들을 낳지 못했으니, 속마음이 어떠하겠는가. 그래도 뒷날을 기대하며 허전한 마음을 위로할 뿐이다.”라고 했다. 장흥효는 예순을 넘겨 아들 셋을 얻었다. 그가 숨을 거둘 때 맏이 나이가 겨우 여덟 살이었다고 한다. 어린 동생들을 돌보았던 것은 딸 장씨부인이었다.조선 시대에도 아기의 탄생은 소중하고 또 특별했다. 자손이 귀하거나 산모가 건강하지 못할 때 그것은 더욱 간절했다. 인구 절벽의 시대다. 개인의 사정을 넘어 사회적으로 아기의 탄생이 더욱 귀해지는 시기이다.

2023-06-19

조선시대 ‘부처님 오신 날’의 풍경

장심학의 문집 ‘강해집’중 ‘관등기’ 일부분. /한국국학진흥원 ‘기록유산의 총아, 고도서(https://book.ugyo.net)’ 4년 만이다. 그동안 코로나19 방역 제한으로 조용히 지나갔던 부처님 오신 날, 4년 만에 방역 조치가 완전히 해제되면서 마스크 없는 봉축 법요식이 전국 사찰에서 일제히 열렸다. 오색 연등으로 뒤덮인 서울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에는 신도와 시민 1만여 명이 모여 법요식을 치렀으며, 대통령도 참석해 축사를 했다. 올해는 더구나 부처님 오신 날이 토요일이라고 대체 휴일이 주어짐에 따라 사흘 연휴까지 생긴 바람에 전국이 더욱 들썩였다. 비가 예고된 궂은 날씨였지만 사찰을 찾는 신도와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나들이에 나선 차량으로 고속도로는 몸살을 앓았으며, 해외로 떠나는 여행객들로 공항은 북적였다. 오랜만에 ‘부처님 오신 날’이 축제 분위기와 함께 온 국민의 관심 속에서 지나갔다. 물론 모두가 종교적 차원의 관심은 아니었지만, 황금연휴와 함께 시작한 부처님 오신 날이라 훨씬 더 많은 이들이 봉축 법요식을 지켜보고 또 축하했다. 1841년(헌종7) 음력 4월 초파일, 포항 출신의 장심학(張心學·1804~1865)은 서울에서 화려하게 열린 관등(觀燈) 행사를 다소 놀란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그는 당시 경험했던 ‘부처님 오신 날’의 풍경을 기록해 ‘관등기(觀燈記)’를 남겼는데, 이 글은 장심학의 문집인 ‘강해문집(江海文集)’에 수록되어 있다. 장심학은 글의 첫머리에서 “임금 즉위 7년 신축(헌종7, 1841) 윤3월에 춘당대에 직접 나오셔서 인재를 선발했다. 시험에 떨어진 나는 한양을 구경하다가 마침 4월 8일을 만났으니, 풍속에서 이른바 석가(釋家)가 태어났다고 하는 날이다.”라고 기록하며 자신이 서울에서 석가탄신일을 보내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이 해 윤3월 13일 헌종은 춘당대에서 경과정시(慶科庭試)를 설행(設行)하고, 문과(文科)에서 이호형(李好亨) 등 19인을 뽑고 무과(武科)에서 나경준(羅敬俊) 등 218인을 뽑았는데 안타깝게도 장심학은 이 시험에서 낙방했다. 37세의 청년 장심학은 이왕 먼 길까지 온 차에 서울을 구경하기로 마음먹고 거리를 돌아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장심학은 이어서 “신라나 고려의 사람들은 이날에 등을 달고 술잔을 올려 빌면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구하였는데, 말세의 풍속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라고 기록했다. 숭유억불을 내세워 공식적으로는 불교를 배척한 시대였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4월 초파일에 관등 행사를 치렀고, 이 때문에 국가적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풍속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장심학은 계속해서 연등을 거는 장대를 어떻게 만드는지 연등의 모양은 얼마나 다채롭고 화려한지 그리고 연등이 무수하게 걸린 풍경은 어떤 모습인지를 아주 자세하고 또 실감나게 묘사했다. 석양 무렵 종로의 거리 양쪽에 남극과 북극이 하늘을 지탱하는 듯 서 있는 장대들과 그사이에 매달아 놓은 연등들의 풍경을 바라보며, 그는 “어떤 것은 가로로 이어 연결하니 꿰어놓은 구슬 같고, 어떤 것은 수직으로 이어서 드리우니 매달아 놓은 옥 귀걸이 같았다. 어떤 것은 둥글게 묶으니 반짝이는 구슬 모양이 되며, 어떤 것은 연등으로 글자를 만들었으니 천세태평(千歲太平), 수복(壽福) 등과 같은 모양이었다.”라고 기록했다. 이날 장심학의 눈에 비친 서울 도성은 집마다 연등으로 장식하고 창문은 비단으로 꾸민데다가 시장과 기루(妓樓)의 주렴도 화려하고 사치스럽기 이를 데 없는 풍경이었다. 그야말로 낯선 광경이었던 것이다. 가장 압권은 도성의 남녀들이 관등놀이를 한다고 모여드는 순간이었다. 장심학은 이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이날 저녁에 도성의 많은 남녀들이 남북의 산 중에 높고 트인 곳에 올라 관등놀이를 하였다. 고운 옷에 향낭을 차고서 진홍색 비취색 옷으로 물들이며 구름과 안개처럼 무리지어 늘어서서 떠들썩하게 노래를 불렀다. 연하게 저민 고기 안주와 요란스럽게 울리는 현(絃)과 관(管)의 악기소리는 또한 하나의 태평한 시절을 함께 즐기는 것이었으니, 영남 사람으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지방 출신이었던 그가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부분이다. 그 규모와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현재 우리가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여하튼 장심학은 서울의 화려한 모습과 수많은 인파에 그저 할 말을 잃고 압도되었을 것 같다. 최은주 한국국학진흥원책임연구위원 1819년(순조19) 김매순(金邁淳·1776~1840)이 저술한 ‘열양세시기(冽陽歲時記)’에도 4월 초파일에 석가의 탄신을 기념해 연등을 만들어 매다는 풍속의 기록이 있다. 민가와 관청, 시장에서는 모두가 등간(燈竿)을 세워 연등을 매다는데 등간은 십여 길(대략 18m)이나 되는 여러 개의 대나무를 엮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등간 위를 비단 깃발로 장식한 후 갈고리 달린 막대기를 가로대고 갈고리에 줄을 얹어 그 줄의 좌우끝이 땅 위에까지 내려오게 한 다음 그 줄에 연등을 매달고 밤이 되면 줄을 잡아올려 공중에 연등이 달리게 하는 것이다. 등은 마늘, 외, 꽃잎, 새, 짐승 같은 형상의 것, 또 누대(樓臺)와 같은 것들이 있어서 각양각색으로 꾸며져 그것을 단적으로 표현키는 어렵다고 했다.

2023-05-29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보낸 한글편지 50통

어린이날을 시작으로 어버이날을 지나 스승의 날을 맞이했다. 이제 성년의 날을 지나 부부의 날까지 이르면 5월이 거의 끝날 것이다. 의식적이고 의례적일 수는 있지만, 당연하게 여기며 잊어버리고 살지도 모를 가족의 소중함을 되새길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기념일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가족은 혈연과 혼인 그리고 입양으로 연결된 일정한 범위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중 혼인을 통해 맺어지는 가족은 부부를 중심으로 그 범위가 크게 확장되는데, 이때 각 배우자의 직계혈족이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사이가 된다. 사랑하는 배우자의 부모님이기에 시간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가깝게 지내야하지만, 갑자기 형성된 가족인데다가 혈연도 아니기에 잘 지내기 위해서는 더욱 마음을 쏟아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식과 행위가 일치하지 못할 때 관계의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하고 불화와 갈등을 빚으며 파국으로 치닫기도 하는 것이다.내방가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거론되는 ‘쌍벽가’는 작자가 분명하고 창작 연대가 오래되었다는 점에서 일찍부터 주목받았는데, 바로 이 작품의 작자인 ‘연안이씨(延安李氏)’가 한글편지 50통을 받은 주인공이다.(최근 한국국학진흥원은 이 쌍벽가를 포함해 내방가사 347점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 태평양지역 목록으로 등재한 바 있다.) 연안이씨가 받은 이 편지들은 그녀의 시아버지인 류운(柳澐·1701~1786)이 1759년(영조35)부터 1767년(영조43)까지 작성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편지가 1759년 6월부터 이듬 해 5월 사이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1년 동안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보낸 편지가 무려 43통이나 된다. 거의 일주일마다 1통씩 보낸 격이다. 인편이 아니면 편지를 주고받기도 어려웠던 시절 시아버지 류운은 어떤 배경과 사연으로 이렇게 많은 편지를 보냈던 것일까.류운은 이 당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되어 서울 살이 중이었다. 그는 서애 류성룡의 6세손으로 안동 하회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즈음 류운의 차남 류사춘(柳師春·1741~1814)이 서울 출신 연안이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이들의 혼인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두 사람의 아들인 류이좌(柳台佐·1763~1837)의 출생 연도로 볼 때 대략 추측해 볼 수 있다. 연안이씨는 성헌(醒軒) 이지억(李之億·1699~1770)의 차녀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지억은 1751년(영조27) 문과에 급제했고, 이때에는 정3품인 도승지(都承旨)와 양주목사(楊州牧使)로 활동했다. 연안이씨가 시아버지와 한창 편지를 주고받았던 1년, 그녀는 서울 친정에 기거하며 시아버지의 관직 생활을 뒷바라지 했던 것으로 보인다.그런데 시아버지의 편지가 자상하기 이를 데 없다. 보내준 음식에 고맙다는 말은 빠뜨리지 않았고, 혹시 어디 아프고 불편한 데는 없는지 늘 궁금해 했다. 행여나 며느리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으면 이만저만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예컨대 류운은 1759년 6월 26일에 쓴 편지에서 “들으니 흉복통과 여름 감기로 날포 세게 앓는다고 하니 더위는 심하고 오죽 괴로우며, 사령(사돈 이지억을 가리킴)께서도 안 계신데 병이 그러하니 병중에 네 마음이 오죽하랴. 가 보지도 못하고 답답하며 염려가 일시도 가라앉지 않는다. 수일간 가감(加減)이 어떠한고. 사령이 내일 가신다 하니 약이나 먹고 쉬이 나으면 오죽 좋으랴.”라며 며느리의 병을 걱정했다. 그러더니 바로 다음 날의 편지에서 “네가 본디 흉복통이 있다고 하는데 얼음을 자주 먹더라고 하니 어이 병이 아니 나랴. 잠시 병이 나았으나 병이 없는 사람도 병나기 쉬운 것이니 지금부터는 부디 먹지 마라. 가 보지도 못하고 섭섭함이 끝이 없다.”라며 안도감과 걱정스런 당부를 동시에 전했다. 병이 나았다고 하니 안심이지만 얼음 때문에 병이 난 것으로 보이니 지금부터는 먹지 말라며 당부한 것이다. 최은주 한국국학진흥원책임연구위원 류운은 관직을 수행하기 위해 서울 어느 곳 누군가의 집에 임시로 기거하며 빨래와 옷 수선 및 옷 짓기 등을 며느리에게 부탁했다. 1759년 11월 28일의 편지에서 “지난번 도포는 조금 긴 듯하고 버선은 작은 듯한데, (그냥) 입고 신겠다. 옷 빨 길이 없으니 어렵지 않으면 (빨래감을) 보내고 싶으니 기별하여라.”라고 한 것이나. 1760년 5월 어느 날에 쓴 편지에서 “네가 오래지 않아 갈 것을, 관아 일의 여가가 적어 자주 못 보니 섭섭함이 끝이 있으랴. 관대 따로 짓기 어려우면 마른 후 그 관대 두고 보면서 짓게 하여라. 다른 관대 보내고 싶은 내게 맞지 않는 것이라 본떠 따를 것이 아니다. 그 관대 깃이 검어졌으니 마르고 남는 것 있거든 떼고 고치면 좋겠으니 보아라. 당직을 마치고 나온 후 다시 가면 보겠다.”라고 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어조가 참 부드럽다. 며느리가 지어준 도포의 길이와 버선의 크기가 딱 맞지는 않지만 그대로 입고 신겠단다. 빨래감도 바로 보내지 않고 혹 형편이 되는지 확인하고 기별하라고 한다. 관직의 업무가 바빠서 자주 못 보는 것도 섭섭하다고 한다.시아버지 류운이 며느리 연안이씨에게 보낸 이 편지들은 가족일수록 더욱 예의를 갖추고 서로를 진심으로 배려해야 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2023-05-15

17세기 어느 저명인사에 대한 가짜뉴스의 진실

김령의 ‘계암일록’ 중 8책, 신사년(1641) 일기 수록. /사진출처 : 한국국학진흥원 ‘선인의 일상생활, 일기(https://diary.ugyo.net)’ 21세기 온라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신속한 정보 전달과 의사소통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엄청난 편의성과 효율성을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심각한 폐해도 야기하고 있다. 책임 없는 표현의 자유가 무한하게 허용되면서 자극적이고 흥미 위주의 정보들이 끊임없이 양산되고 있기 때문이다.그 안에 가짜뉴스가 있다. 카더라식 억측 보도를 넘어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꾸민 뉴스, 현재 세계는 이 가짜뉴스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가짜뉴스의 최대 피해자는 정치인을 비롯한 유명 인사들이다. 가짜뉴스를 통해 이득을 얻는 사람들이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되어 있고 또 그물망처럼 얽히게 되면서, 가짜뉴스의 양산과 유포는 통제가 불가능하게 되었다.조선 시대에도 가짜뉴스는 존재했다. 경상도 예안의 선비 김령(金坽·1577~1641)은 일기에서 이와 관련한 일화를 기록하며 분노를 표출한 적이 있었다.1641년(인조18) 1월 8일의 일기에서 김령은 3일 전 초5일에 여강서원의 사당 참례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며 가짜뉴스 일화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날 권귀중이라는 인물의 성명을 서원 명부에서 지워 버렸는데, 그 이유는 그가 얼토당토않은 말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1538~1593)을 비난하고 배척했기 때문이었다.권귀중은 평소 떠들고 다니길 1577년 인종(仁宗)의 정비(正妃)인 인성왕후(仁聖王后)가 세상을 떠나 국상(國喪)을 치를 때 그 초기에 김성일이 소를 잡았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그 말의 출처를 따져 물을 때마다 권귀중은 ‘안동의 어떤 사람에게 들었다’라며 누구인지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었는데, 이날 여강서원 사당 참례 때 그 출처가 정유번이라는 인물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백성 전체가 상복을 입는 왕실의 초상에 사가(私家)에서 소를 잡았다는 루머를 퍼뜨렸으니 김성일의 명예가 실추된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김성일은 경상도 안동 출신으로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1568년 문과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는 경상우도초유사에 임명되어 의병장들과 함께 전투를 이끌었다. 이듬해 경상우도순찰사를 겸해 도내 각 고을에 왜군에 대한 항전을 독려하다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령은 ‘계암일록’에서 다음과 같이 일기를 이어나갔다.“이때 와서 비로소 그 말이 정유번의 혀에서 나온 것임을 알았다. 정유번은 비루하고 패려궂은 인사로 매우 형편없는 자인데, 권귀중이 그의 말을 곧이듣고 함부로 선대의 현인(賢人)을 비난한 것이다. 대개 섭섭한 감정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라 하니, 통탄스럽고 분하다. 정축년(1577) 겨울, 국상(國喪) 초기에 지역이 멀어서 미처 부음을 듣지 못한 상태에서 안동 임하의 한 일가에서 일이 있어 소를 잡았다. 그러나 부음을 듣자마자 쇠고기를 다른 곳에 두고 아주 탄탄하게 봉해서 닫아 두었다. 이 당시 학봉[김성일]은 서울에 있으면서 미처 고향으로 돌아오지도 못했을 때였다. 그때에도 와전된 말이 있어서 임하의 온 문중이 이를 변론해 바로잡았는데, 어찌 60년이 지난 뒤에 또 이것으로 학봉에게 누를 끼치려 할 줄을 알았겠는가? 권귀중은 이 땅에 용납될 수 없는 자이다. 소인을 한을 품은 독이 매우 우려스럽다.” -김령의 ‘계암일록’ 1641년 1월 8일의 일기 중에서김성일 사후 60년이 지났음에도 그에 대한 악성 루머를 퍼뜨렸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김성일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믿지 않는 자들이 있었기에 다행스럽게도 이 가짜뉴스는 결국 진실이 밝혀졌다. 최은주 한국국학진흥원책임연구위원 물리적 거리에 따라 소통의 원활성이 결정되던 시대에는 정보 수집 자체가 쉽지 않았다. 전달 과정에서 정보가 변형되거나 왜곡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대부분 의도적이라기보다 입소문으로 퍼지는 과정에서 생기는 필연적인 현상이었다.물론 앞의 사례처럼 여러 가지 이유에서 악의를 가지고 악성 루머를 만들어내는 일도 없지는 않았다. 오보나 허위 악성 루머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파급 범위와 영향력이 막강하지는 않았다.급속도로 발전된 기술력 위에서 가짜뉴스는 생산과 동시에 일파만파 퍼져나간다. 더욱이 지금은 사적 이익 추구만을 목적으로 처음부터 드러내놓고 가짜뉴스를 만들어내는 실정이다. 출처를 따져 진실을 가린다 해도 시간이 한참 걸리니 가짜뉴스에 현혹된 대중의 관심을 돌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다.넘치는 정보 속에서 사실과 거짓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팩트체크’가 수반되어야 할 만큼 정보를 걸러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기에, 무엇을 믿고 어떤 것을 의심해야 하는지 반드시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2023-04-17

1919년 3월, 잊어서는 안 되는 참혹했던 시간들

삼일절은 1919년 3월 1일에 있었던 3·1 운동을 기념하는 국경일이다.해마다 삼일절로 시작하는 3월과 광복절이 있는 8월이 돌아오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되짚으며 항일독립에 헌신한 선열들을 추모한다.지나간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이러한 시간을 만들어 기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쌓이면서 그 의미가 점점 옅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해마다 돌아오기 때문에 그저 반복적인 습관처럼 잠시 생각하고 지나가는 것은 아닐까.지금 3월, 그때 그 시절 만세를 부르며 독립을 위해 힘겹게 저항했던 선조들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장석영(張錫英·1851~1926)은 1919년 2월 4일부터 11월 1일까지 기록한 ‘흑산기사(黑山記事)’에서 성주 지역의 만세 운동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3월 2일은 성주의 장날이었고, 이날을 맞이해 유생이고 상인이고 가릴 것 없이 사람들이 대거 모여 만세를 부를 것이라는 소문이 이전부터 파다했다.무성한 소문은 태풍 전 고요처럼 불안을 야기했고, 곧 일어날 만세 운동이 염려스러웠던 일본은 순검을 보내 장석영을 불러들였다.유림의 존장인 장석영이라면 만세 운동을 저지시켜 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물론 기대처럼 되지는 않았다.“3월 2일, 본 고을(성주)의 장날이다. 본 고을의 유생(儒生)과 교도(敎徒) 그리고 상인들이 이날에 크게 만세를 부를 것이라는 풍문이 심하게 돌았다. 이날 식후에 고을의 순검(巡檢) 두 사람이 와서 만나보기를 청했다. (생략) 얼마 후 공문을 가지고 왔기에 부득이 수레를 타고 가는데 고을 가까이에 이르자 만세 소리가 산악을 뒤흔들었다. (생략) 가마꾼을 재촉해 출발했는데 고을 밖으로 나가자마자 만세 소리가 또 한바탕 크게 일어났고 잠시 후 대포 소리가 크게 들리더니 상인들이 풍비박산되었다. 대개 수 천 명의 상인들이 날이 저물어도 흩어지지 않고 깜깜한 밤에도 곳곳에서 만세를 계속해서 불렀으므로, 일본인이 변괴가 있을까 염려해 발포했던 것이다. 대포에 죽은 자가 6명, 중상을 입은 자가 10여 명이라고 했다.” -장석영의 ‘흑산기사’ 1919년 3월 2일의 기록 중에서성주의 순검은 대구 경무청의 요청으로 장석영을 찾아왔다. 장석영이 공문이 없다면 응하지 않겠다고 대답하자 순검이 곧장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 공문을 가져왔다.결국 가마를 타고 성주 경찰서로 들어가는데, 읍내 근처에 다다랐을 때 큰 함성의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문이 사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경찰서에 도착한 장석영에게 경무청의 사람은 군민의 만세를 제지시켜 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했다.이에 장석영은 “내가 부르라 시킨 적도 없지만 찬성한 적도 없다. 오늘 만세를 부르는 것은 하늘의 뜻이니 사람의 힘이 아니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만세를 외치는 것이 어찌 나의 찬성을 기다린 것이겠는가.”라고 대답하며 거절했다. 덧붙여 경무청에 속했지만 당신도 한국 사람이니 비록 함께 만세를 외치지 않아도 마음이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며 되물었다.면담을 마치고 경찰서를 나섰을 때 다시 만세 소리가 진동했다.뒤이어 대포 소리가 크게 들리면서 만세를 외치던 수 천 명의 상인들이 풍비박산 나듯이 날아가고 흩어졌다. 해가 져도 흩어지지 않고 깜깜한 밤이 될 때까지 곳곳에서 만세를 계속 불렀기 때문이었다. 더 크게 확산될까 두려웠던 일본인은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을 향해 대포를 쏘았고, 이 대포에 사람들은 목숨을 잃거나 중상을 입었다.장석영은 그 모습을 침통하게 지켜봤다. 그가 만세 운동에 찬성하지 않았던 이유였다. 이날은 이렇게 지나갔다. 최은주 한국국학진흥원책임연구위원 그러나 장석영은 곧 체포되었다. ‘파리장서’와 ‘통고도내문’ 등을 쓰며 독립운동에 앞장섰기 때문이었다. 옥중 생활은 그야말로 혹독했다.순사들은 잡혀 온 조선인들을 삼엄하게 감시하며 짐승처럼 다루었다. 감시 기준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뺨을 때리고 허리를 차는 등 못 견딜 정도로 능욕을 가했다.장석영은 이러한 능욕과 수모 속에서 죽을 결심을 하고, 굶어 죽기 위해 곡기를 끊었으나 쉽게 이루지 못할 것을 깨닫고 자결을 포기한 채 옥중 생활을 견뎌냈다.장석영을 체포한 후 일본인 검사가 “국법을 위반하고 인심을 선동하는 것은 국가의 적이 아닌가”라고 심문하자, 장석영은 매섭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지금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토지를 빼앗았다고 칠 때, 빼앗긴 사람이 토지를 찾고자 하는데 빼앗은 자가 도적인가 찾고자 하는 자가 도적인가? 찾으려는 자와 빼앗은 자가 재판소로 와서 송사를 벌인다면 재판관은 누구더러 도적이라 할 것인가”라고.지금 우리가 누리는 소중한 시간들은 그 시절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선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과거에 얽매여 발전적인 미래로 나아가지 못해서는 안 되지만, 지나간 역사를 쉽게 잊어서도 안 될 것이다.

2023-03-20

1587년 어느 대구 부사의 ‘금쪽같은 내 새끼’

자식을 키운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낳으면 그냥 자랄 것 같은 아니 잘 자라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기대만큼 따라주지 않는 것이 곧 자식이다. 남보다 뛰어났으면 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크게 문제없이 자라주면 좋겠는데, 어디서 어떻게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 채 아이의 문제 행동을 맞닥뜨리게 되면 더욱 당황스럽고 속상하기만 한 게 부모의 마음이다. 몇 년 전까지 한참 유행했던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는 이렇게 어렵기만 한 육아를 도와주고자 만들어진 육아 코치 프로그램이었다. 생각보다 도움을 원하는 부모가 많았기에 사회적 반향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근래 인기리에 방영 중인 ‘금쪽같은 내 새끼’도 비슷한 프로그램이다. 이러한 TV프로가 인기가 높다는 것은 소중한 내 자식이 행복하게 성장하길 바라는 부모 마음이 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아이이기에 내가 달라져서 아이가 행복할 수 있다면 무엇을 못하겠는가. 그러나 이것도 아이가 건강하게 자랄 때라야 가능한 일이다.권문해(權文海·1534~1591)는 1587년(선조20) 8월 28일의 일기에서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당시 그는 대구부사에 재직 중이었는데, 마침 경남 안음에서 열린 감시도회(監試都會)의 시험관으로 출장 갔다가 서둘러 돌아온 길이었다. 동생이 부종(浮腫)을 앓는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동생뿐만 아니라 어린 여식까지 아픈 상태였다.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때 대구부(大邱府)에 도착하였다. 달아(達兒)가 머리 위에 종기가 나서 약을 발랐다. 딱지가 앉은 뒤에는 종기가 아래로 내려와 목에 부기가 생겨 목과 얼굴이 분간되지 않았다. 치료가 어려운 지경이 되어 어쩔 수 없이 침으로 종기를 터트려 피를 낸 뒤에야 부기가 조금 가라앉았으니 다시 살길이 보이는 듯했다.”-권문해의 ‘초간일기’ 1587년(선조20, 정해년) 8월 28일 일기 중에서권문해는 오랜 세월 동안 자식이 없어 마음고생이 적지 않았다. 30년을 함께 살았던 첫 번째 부인 현풍곽씨가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아내의 죽음에 자식 없는 서글픔까지 겹쳐 한참 동안을 슬퍼하고 또 슬퍼했다. 권문해는 이러한 심정을 고스란히 담아 ‘죽은 아내 숙인 곽씨에 대한 만사(挽亡室淑人郭氏)’를 지었고, 1582년 10월 20일의 일기에 이 글이 온전하게 기록되어 있다. 약 2년 후 함양박씨와 혼인했는데, 권문해의 나이는 51세였다. 일기에 보이는 달아는 두 번째 부인 함양박씨와 혼인한 직후 얻은 딸로 추측되며, 이 당시 겨우 2~3세였던 것으로 보인다. 늦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딸아이였다. 작은 머리에 난 종기가 목으로 내려와 목과 얼굴이 분간되지 않은 모습을 지켜보던 권문해는 어떤 마음이었을지. 치료가 어려운 게 눈에도 확연히 보이지만, 종기를 터뜨려 부기가 다소 가라앉는 모습을 보고 혹시나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는 부모의 마음이 절절하게 다가온다.이날부터 달아의 병이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권문해는 아이의 종기가 가라앉아 살 수 있다 생각하고 안심했던 것 같다. 일기에서 달아가 다시 등장한 것은 10월 7일로 20일쯤 지났을 때였다. 저녁부터 기운이 고르지 않더니 밤에는 통증이 그치지 않는다고 적었다. 짧고 간략한 기록이지만, 그 속에 울며 보채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의 안타까운 마음이 묻어나오는 느낌이다. 다음 날의 일기에서는 공무로 바깥에 나온 일과 함께 달아의 증세를 중간중간 섞어 적었다. 감기 정도의 가볍고 우연한 병증이라 생각했는데, 이날 저녁까지도 나아지지 않고 있다 들었다고 했다. 다음 날에는 달아의 병이 수그러지지 않아 아침 일찍 복귀했다고만 기록했다. 다음 날은 아예 출근하지 않고 아이를 지켜보았다. 아이의 증세가 여전한 것을 보며 혹시 관아 북쪽 담장 내에 토우(土偶)를 만들어 묻은 것이 동티난 게 아닐까 의심하고 또 걱정했다. 천연두인지 모르겠다면서도 확실하지 않다고 적고 있으니, 이것은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은연중에 드러난 것이다. 최은주 한국국학진흥원책임연구위원 달아가 아픈 것은 결국 천연두때문이었다. 10월 11일, “병든 아이에게 역신(疫神)이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해 얼굴 위에는 마치 좁쌀을 흩뿌려 놓은 듯하였고, 온몸에는 마치 물을 뿌려 놓은 듯하였다”고 기록했다. 더 이상의 일기는 없었지만, 이날 달아는 숨을 거둔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 날 권문해는 달아를 병장기를 보관하는 곳에 옮겨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였는데 그 이유를 다시 다음 날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역병으로 갑자기 죽었던 사람이 혹 깨어나는 경우도 있기에 종을 시켜 계속해서 열어보도록 하였으나 가망 없는 일이다”라고. 죽은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한 부정이 안타까울 지경이다. 달아가 아프기 시작한 7일부터 권문해는 온통 달아 생각뿐이었다. 어린 자식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일까. 권문해는 이후 며칠간 출근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588년 10월 12일의 일기에서 “이날은 달아가 역병으로 죽은 날이다. 종일 출근하지 않았다. 온 집안이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채소만 먹고 고기는 먹지 않았다”라고 기록하며 달아를 그리워했다. 이것은 1589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자식이 성장하면서 부모와 자식 간에도 소통과 공감이 쉽지 않아진다. 이 때문에 숱한 갈등에 부딪치며 부모도 자식도 속상한 날을 보낼 때가 많다. 건강하게만 자라주는 것도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누리는 것들이 사실 나에게 주어진 특별한 행복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할 것이다.

2023-03-06

눈앞에 닥친 재난, 속수무책이었다

19세기 대구의 선비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1825~1905)는 1856년(철종7) 6월 5일의 일기에서 눈앞에 펼쳐진 폭우의 피해를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3일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전날 세차게 내리면서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서찬규는 이때 한천바위(달성군 가창면 냉천리 위치)에 ‘寒泉’ 글씨를 새기는 일 때문에 한천 물가를 자주 오갈 때였다. 서찬규가 남긴 ‘임재일기’는 그의 나이 21세인 1845년(헌종11)부터 37세가 되던 1861년(철종12) 5월 20일까지 17년간 기록한 것이다.“비가 많이 내림. 이날 집 앞의 시냇물이 넘쳐서 물이 문 안으로 들어올 것만 같았다. 양 제방으로 막은 것이 무너지는 환난이라도 있을까 걱정이 되어 집안 식구들을 동쪽의 이웃 마을로 모두 대피시키고 또 사랑방의 서책 등 물건을 옮겼다. 그러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사촌 동생 남규 또 노비 몇 명은 남아있었다. 촛불을 들고 지켜보고 있는데, 북쪽 이웃에서 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사방에 울리고 있었다. 급히 사람을 시켜 알아보게 하니 신천(新川)이 무너져서 물이 크게 밀려와 관덕당(觀德堂) 앞까지 연달아 물에 잠겼는데, 원촌(院村)의 큰 시장 주변 그리고 비산(飛山)과 원북(院北)의 총 400여 가구가 잠겼다고 한다. 재산과 곡식, 그릇 등이 전부 떠내려 가버려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남녀노소가 서로 붙잡고 통곡하며 이리저리 재난을 피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다행히 우리 집은 마을 위쪽에 있었는데, 윗마을은 큰 피해 없이 지나갔다.”-서찬규의 ‘임재일기’1856년(철종7, 병진년) 6월 5일 일기 중에서이날 서찬규는 집 앞의 시냇물이 넘쳐 집 안으로 물이 들어올까 전전긍긍하다가 급기야 둑이 무너져 큰 피해를 입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가족들을 다른 곳으로 대피시켰다. 급하게 가족들을 피신시키는 중에도 사랑방의 서책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 했다는 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집 안의 남자들은 집에 남아서 피해를 대비했다. 촛불을 들고 상황을 지켜보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때, 이웃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서찬규는 위기를 직감하고 사람을 시켜 피해 상황을 알아보게 했다. 신천이 무너져 물이 크게 밀려와 주변 마을이 온통 물바다가 되었으며, 400여 가구가 물에 잠겼다고 했다. 곡식과 가재도구들이 물결에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통곡하는 주민들과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여보기 위해 이리저리 뒤엉켜 움직이는 주민들의 모습을 서찬규는 참담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비록 자신의 집은 마을 위쪽에 위치해 있어 큰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이 거대한 물난리는 대구의 한 고을을 하천으로 바꾸어버릴 만큼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며칠 후 서찬규는 수해를 당한 곳이 많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기록했고, 6월 13일의 일기에서는 “전답이 하천으로 변해 버린 것이 5만118두(斗) 9두락(刀落)이고, 떠내려가 버린 집이 1천360호(戶)이며, 죽은 사람은 46명이니 이것은 대구 한 고을만의 피해이다”라며 주변 마을의 구체적인 피해 상황을 기록했다. 그리고 다시 6월 30일의 일기에서 홍수로 인한 영남 지역의 피해를 기록했는데, 물에 잠긴 민가가 1만2천804가구 인명 피해는 559명이라고 했다. 최은주 한국국학진흥원책임연구위원 수해를 입기 직전 한천바위에 글씨를 새긴 서찬규는 7월 4일에 한천을 다시 찾았다. 그러나 온 사방이 물에 잠겨 바위가 있던 물가 언덕이 어디가 어딘지 구분하기 어려웠고, 글씨를 새긴 바위도 깊이 가라앉아 평평해져 버렸다. 다만, 바위에 새긴 글씨를 손으로 더듬어가며 수해 이전의 풍경을 되새길 수 있을 따름이었다. 폭우가 내린 지 한 달이나 지났을 때였는데도, 물에 잠긴 곳이 완전하게 복구되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나 많은 비가 내렸으며 그 피해가 어느 정도로 심각했는지, 서찬규의 기록조차도 사실은 그 참혹한 실상을 다 담지 못했다. 다만 구체적인 숫자로 재산과 인명 피해를 기록했기에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할 뿐이다. 하룻밤의 폭우로 559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금처럼 정확한 집계가 불가능했다고 보면, 인명피해 숫자는 부상자까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서찬규는 폭우가 지역을 훑고 지나갈 때 그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어떻게라도 피해를 줄여보기 위해 촛불을 들고 주변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들리는 소리에 신경을 집중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자신의 집은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지나갔지만, 짧은 시간 동안 긴박했던 아비규환의 현장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참담한 마음을 눌러야했다.서찬규는 일기에서 10여 차례에 걸친 지진과 때마다 닥치는 가뭄도 기록한 바 있다. 그러나 재난상황까지 이어지지는 않았기에 구체적인 피해도 적지 않았다. 그에 비해 이날의 폭우는 유례 없는 혼돈을 초래했고, 서찬규는 그 속에서 두려움과 싸우며 참혹한 풍경을 마주해야만 했다. 갑자기 닥친 자연 재해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무력한가. 혹시 있을지도 모를 재난에 대비해 오랜 시간 많은 것을 준비하지만, 그 시간과 노력을 일시에 무너뜨리는 자연 재해는 얼마나 무서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구하고 극복하고 또 잊으며 살아간다. 그 절망 속에서 다시 희망을 찾으며 그렇게 고통의 시간을 흘려보낸다.

2023-02-20

예나 지금이나 가장 가고 싶은 섬, 제주도

국내 여행에서 가장 가고 싶은 곳은 단연 제주도이다. 사시사철 때마다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제주도지만, 겨울철 제주도 여행은 더욱 사랑받는다. 내륙보다 좀 더 따뜻할 뿐 아니라 눈 덮인 한라산이 보기 드문 절경이기 때문이다.얼마 전 제주도에 한파가 닥치고 폭설이 내렸을 때에도 떠나는 사람들은 항공편 운항이 모두 중단되어 발을 동동 굴렀지만,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한라산의 은빛 설경을 보겠다고 모여들어 인근 도로가 마비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그만큼 아름답고 그래서 꼭 보고 싶은 풍광인가 보다. 교통 때문에 접근이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제주도는 여행객들에게 가장 가고 싶은 섬이다.경상북도 성주 한개마을 출신의 선비 한고(寒皐) 이원호(李源祜·1790~1859)도 그랬다. 조선 시대에 제주도 여행은 더더욱 쉽지 않았기에, 이원호는 자신의 동생이 제주목사로 부임할 때 선뜻 따라나섰다. 그리고 1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지내며 곳곳의 명승지를 유람했다.이원호의 동생이 바로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1792~1871)인데, 이원조는 1841년(헌종7) 3월부터 1843년(헌종9) 4월까지 제주목사를 역임하며 그곳에서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관리로서 많은 노력을 쏟았던 인물이다. 동시에 ‘탐라지초본’ 등 제주도와 관련해 많은 저술을 남겼다.이원호가 제주도 여행을 얼마나 고대했었는지는 동생 이원조의 기록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이원조는 형의 행장을 쓰며 그때를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신축년(1841, 헌종7) 내가 강릉에서 제주로 이동할 때 형님이 길에서 편지를 부쳐 ‘네가 풍부한 고을의 수령이 된 것이 다행이 아니라 내가 풍악산의 묵은 빚을 한라산 백록담 위에서 갚을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라고 이르며 영암의 해월루에서 만날 것을 약속했고, (해월루에서) 비 내리는 밤 같은 침상에서 함께 시를 읊었다.”이원호가 동행을 결심하고 따라나섰지만 제주도로 가는 여정은 고달팠다. 3월 24일부터 27일까지 바람을 기다리며 해월루에 머물렀고, 29일에 목사 행렬과 함께 소안도로 이동했다. 소안도로 이동하는 이유는 바람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원호는 일기에서 “대개 큰 바다의 경우에는 순풍을 얻지 못하면 돛을 펼 수가 없지만, 소안도로 가는 길은 모두 항구라서 바람의 기운이 조금만 있어도 잘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후풍관候風館[바람을 관측하는 곳]이 소안도에 있는 것이다.”라고 기록했고, 바람을 탄 배가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에 대해서도 “다만 해안의 여러 봉우리가 잠깐 보였다 사라졌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모양이 확확 바뀔 뿐이었다.”라며 현장감 넘치게 기록했다. 최은주 한국국학진흥원책임연구위원 그리고 윤3월 초1일 밤 3경(밤 11시~1시 사이)에 제주도로 출발하는 배에 올랐다. 흥미로운 것은 실제 배가 출발하기 전에 길일을 택해서 배를 타는 의식을 거행한 후 다시 배에서 내려 바람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소안도로 옮긴 후 이틀 동안은 바람이 불고 보슬비가 내렸기에, 그대로 머무르며 일기 기록은 또 중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윤3월 초1일 밤 3경(밤 11시~1시)에 깊이 잠들었을 때 선원이 바람을 타야 한다고 배에 오르라며 황급히 깨운 것을 시작으로 일기가 다시 이어진다. 배를 타는 순간이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갔는지는 이날 일기의 시작 부분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아래의 일기는 제주도로 가는 배를 타고 도착한 날의 기록이다. 이원호는 배 위에서 온갖 고생을 하다가 마침내 제주도에 도착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얼마나 힘들었는지가 일기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이원호가 동생을 따라 제주도에 갔던 것은 바로 한라산 백록담을 비롯한 제주도 명승지를 탐방하고 싶은 소망 때문이었다. 이렇게 어렵게 도착한 제주도였지만 이원호는 마음껏 유람을 다니지는 못했다. 그러나 시간과 형편이 허락할 때는 이름난 곳을 찾아다니며 제주도의 경치를 만끽하였다.“대포 소리가 한 번 울리자 세 척의 배가 일시에 돛을 올렸으며, 노를 젓는 병졸 100여 명의 함성이 땅을 뒤흔들었다. 별안간 정신이 혼미하여 서로 몸을 베고 드러누웠는데, 전후좌우에서 1,000명의 병사와 10,000마리 말 소리 같은 굉음만이 들리고 세찬 파도와 치솟는 물결은 갑판의 타루(柁樓) 위까지 올라올 정도였다. 앉은 자리는 마치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듯하였으며, 둘레가 몇 아름이 되는 큰 돛대가 꺾여서 부러질 것 같았다. 선졸(船卒) 외에는 모두 바닥에 바짝 엎드려 누구도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조용했다. 모든 사람들이 구토하고 난리였는데, 나는 단지 현기증이 좀 날 뿐이었지만 앉거나 설 수는 없었다. …(중략)… 탐라의 위용은 자못 성대하였고 망양정(望洋亭)의 풍경은 웅장했지만, 모두들 감상할 여가가 없이 곧바로 의관을 벗고서 방에 시체처럼 누워있었다. 차를 마시고 오찬을 먹는 것도 모두 귀찮고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이원호의 ‘탐라일기’ 1841년(헌종7, 신축년) 윤3월 1일 일기 중에서

2023-02-06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두 나라의 전쟁이 1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다. 국제유가 약세와 식량 가격 상승 등 다방면에서 직간접적인 피해가 발생하고 있으므로, 전 세계는 이 전쟁이 조속히 끝나길 고대하지만 전망은 좋지 않다. 일각에서는 두 나라 뿐만 아니라 주변국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들면서 서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칠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고 있는 상황이다. 저마다 다른 셈법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기에 당분간 평화적 협상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경상북도 예안 오천리(현재 안동 와룡면 오천리) 출신의 선비 계암(溪巖) 김령(1577~1641)은 1627년(인조5) 3월 18일의 일기에서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조선과 후금이 정묘화약(丁卯和約)을 체결한 직후였다. 아민(阿敏)이 이끄는 후금군 3만은 정묘년(1627) 1월 8일 조선 땅을 침공해 보름 만에 의주성 · 정주성 · 안주성 · 평양성까지 차례차례 점령했다. 이에 인조는 강화도로 옮겨 전쟁을 대비했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신했다. 후금은 평산까지 밀고 내려왔지만, 더이상 남쪽으로 내려오지는 못했다. 명나라와의 대치 상황 속에서 조선과 장기간 전쟁을 벌이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데다가 조선 깊숙이 내려와 싸우기에는 병력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건을 걸고 조선에 강화 의사를 표시했다. 3월 3일 조선이 이 제안을 수용하면서 정묘호란은 일단 끝났고, 후금군은 철수 길에 올랐다. 전쟁이 일어난 지 3개월 만이었다.적군 병사가 비록 물러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해주(海州)와 수안(遂安) 등 여러 곳에 머물면서 사람과 가축을 죽이고 약탈하니 절대로 돌아갈 뜻이 없는 것이다. 적군의 장수 이왕자(二王子·아민)가 진창군(晋昌君) 강인(姜絪)과 서로 헤어질 때 말을 멈추고 손을 잡으며 조정에 말을 전달하길 ‘나는 마땅히 이번 달 내로 압록강을 건널 것입니다. 그러나 몇몇 장수들은 이곳에 머무르며 반드시 모문룡(毛文龍)을 사로잡은 뒤에야 돌아갈 것입니다’고 했다고 한다. (‘계암일록’ 1627년(인조5, 정묘년) 3월 18일 일기 중에서)이 말대로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예안에 거주하던 김령이 후금군의 변방 침공 소식을 처음 접한 것은 1627년 1월 20일이었다. 마침 자신의 숙부와 조카들이 산송 때문에 감영을 방문했다가 선전관(宣傳官)이 급하게 당도해 변방의 전황을 전달하는 것을 전해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전쟁이 일어나자 비교적 거리가 먼 예안 지역도 타격과 동요를 피할 수는 없었다. 당장 다음 날부터 군사를 징발하는 문제로 마을이 소란스러웠고, 김령 개인적으로는 집안에서 추진 중이던 이장(移葬)을 중단했다.이후 김령은 전쟁의 경과와 동향을 수소문했고, 듣는 만큼 상세하게 일기에 기록했다. 어떤 날은 전쟁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해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기도 했다.더불어 영남 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과정과 성과에 대해서도 듣고 보는 대로 생생하게 기록하며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3월 18일, 정묘화약을 맺고 적군이 물러났다는 소식을 들을 때까지 김령은 전쟁의 정보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불안 속에서 전쟁이 끝나기만을 바랐지만, 전쟁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김령이 일기에서 기록한 것처럼, 아민은 자신이 이끄는 후금군은 3월 안에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빠져나갈 예정이었지만 다른 몇몇 장수들은 모문룡을 사로잡기 위해 조선에 남을 것이라고 경고했고 실제로 서북 변경 지역에서는 소규모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 4월 16일의 일기에서 김령은 용골산성 전투의 승리에 대해 기록했다. 난리 이후로 승전한 것은 처음이라며, 3월 20일에 있었던 일인데 이때에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적군이 여전히 안주의 서쪽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장차 사태가 어떻게 될 지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최은주 한국국학진흥원책임연구위원 정묘호란 이후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일어날 때까지, 조선과 후금은 충돌과 갈등을 수반한 긴장 관계를 지속했다. 김령 역시 이와 관련해 조정과 서북 변경의 동향을 드문드문 기록했다. 그러나 우려하고 또 불안해하면서도 당장 겪는 직접적인 피해가 없었기 때문에 가끔 들리는 소식을 기록할 따름이었다. 오히려 그가 걱정하고 분노했던 것은 혹독한 세금 수탈과 전쟁 및 흉년으로 인한 식량 부족이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이 겪는 극심한 고통을 직접 보면서 김령은 자주 분통을 터뜨렸다. 직접적으로 체감하는 현실이었기 때문이다.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건물 파괴, 인명 참사와 같은 직접적인 피해가 없는 곳에서는 잊으려면 또 잊는다. 한참 떨어진 곳의 전쟁이라 물리적 피해를 몸으로 겪지는 않으니 그렇게 잊고 산다. 전쟁이 초래하는 경제적 위기가 이미 우리 생활 깊숙이 침투했음에도 경제적 곤란에 따른 고통과 불편함을 되새길 뿐 참혹한 전쟁에 대해서는 그렇게 종종 잊고 있다.

2023-01-16

해마다 돌아오는 연말연초, 같은 사람 다른 느낌

최은주 한국국학진흥원책임연구위원 어김없이 연말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했다. 같은 날의 연속이지만 한 해의 마감 그리고 한 해의 시작이라는 느낌 때문에 누구에게나 특별하게 다가오는 시간이다. 매일 뜨는 해이지만, 새해 첫날 뜨는 해를 보기 위해 일출 명소를 찾는 것이 그런 느낌이지 않을까.경상북도 상주의 근암리(현재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출신의 선비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1679~1759)은 24세이던 1703년(숙종 29) 12월 29일에 한 해를 돌아보며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그는 이 시절 한창 과거시험 공부 중이었다. 때마침 권상일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대승사(大乘寺)에 모여서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과거시험을 위해 집중 대비하고 있었다. 권상일은 1707년(숙종 33) 28세에 창녕에서 치른 초시에 합격했고, 1710년(숙종 36) 31세에 증광문과에 급제해 승문원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오늘이 입춘이다. 올해도 다 지나갔으니 지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느낌이 특별하다. 밤에 눈이 조금 내렸다. 이달 22일과 23일에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이 아울러 일어났다고 하니 변고가 없는 해가 없다. 앞날이 걱정이다. 적과(賊科) 무리가 군정(軍丁)에 편입되고 제주도로 귀양 갔다고 한다. 이 무리의 죄는 만 번 죽어야 마땅한데도 지금 이와같이 죽이지 않고 감형해 주니 통탄할 일이다.”- 권상일의 ‘청대일기’1703년(숙종 29) 12월 29일 일기 중에서1703년, 이 해에 권상일은 대승사에서 한 해를 마무리하고 또 새해도 맞이했다. 당시는 음력이 기준이었으니 입춘을 전후한 즈음이 연말연초에 해당했다. 그가 남긴 일기에 의거하면, 권상일은 1710년 문과에 급제할 때까지 총 8번의 시험을 치렀다.(‘청대일기’는 1702년부터 1759년까지 일부 누락된 해를 제외하고 43년간의 일기가 전해진다) 20대 시절 권상일은 수험생으로서 치열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공부하고 또 공부했으며, 백일장과 거접(그룹스터디)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실력을 검증했다. 그리고 시험이 있을 때마다 도전했다. 실패를 거듭했지만, 결국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과거시험 합격을 성취했다.절에서 연말을 보내던 수험생 권상일은 다 지나간 한 해를 돌아보며 잠시 특별한 감상에 젖었다가 며칠 전에 일어난 천재와 시변을 되새기며 앞날을 걱정하기도 했다.마지막에 강한 어조로 비판을 서슴지 않았던 것은 적과(賊科) 죄인들에게 내린 벌이 가볍다고 생각해서였다. 적과란 과거 시험장에서 남의 답안을 훔쳐 자기의 이름을 써내던 부정행위를 가리킨다. 1699년(숙종 25) 가을에 시행된 식년시(式年試) 복시(覆試)에서 감시관(監試官)과 봉미관(封彌官) 등의 방조 아래 답안지가 뒤바뀌어 응시생 송성(宋晟)·박필위(朴弼渭)·이성휘(李聖輝)·이수철(李秀哲) 등이 부정으로 합격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그해 11월에 발각되어 한참 동안 시간을 끌다가 1703년(숙종 29) 10월 12일에 이르러서야 부정 합격자들을 멀리 유배 보내고 관노로 삼도록 결정이 났다. 당시 부정행위를 도모했던 인물들이 유력 가문의 자제들이었기에 이해관계가 얽힌 정치계에서 그 논란이 한참 지속되었던 것이다. 권상일의‘청대일기’12책 중 1책(1702~1704). 사진출처 : 한국국학진흥원 ‘선인의 일상생활, 일기’ 과거시험 공부에 온갖 노력을 쏟아붓던 20대 시절 어느 해 연말, 권상일은 시험부정 행위자들의 처벌이 가볍다고 분통을 터뜨리며 ‘만 번 죽어야 마땅할 죄’라는 기록으로 이 해 마지막 일기를 마무리했다.그의 시선이 그의 마음이 그 소식에 머물고 그 소식에 분노한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연말이라는 특별한 시간을 시험 공부 때문에 집이 아닌 절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감정이 좀 더 격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해마다 돌아오는 연말연초, 언제 어디에서 어떤 상황으로 맞이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권상일도 그랬다. 이후의 일기에서 그는 어떤 연말은 평온한 마음으로 어떤 연말은 그래도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어떤 연말은 피곤한 마음으로 어떤 연말은 걱정스런 마음으로 그렇게 다르게 보냈다. 지난 해 어떤 일이 어떻게 있었는가. 내 삶은 한 해 동안 축적된 경험의 시간과 어떻게 연결되어 지속되고 있는가.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지금 우리는 어떤 마음인가.최은주 경북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으로 국학기반본부 국학자료팀장을 맡고 있다.

2023-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