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만이다. 그동안 코로나19 방역 제한으로 조용히 지나갔던 부처님 오신 날, 4년 만에 방역 조치가 완전히 해제되면서 마스크 없는 봉축 법요식이 전국 사찰에서 일제히 열렸다. 오색 연등으로 뒤덮인 서울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에는 신도와 시민 1만여 명이 모여 법요식을 치렀으며, 대통령도 참석해 축사를 했다. 올해는 더구나 부처님 오신 날이 토요일이라고 대체 휴일이 주어짐에 따라 사흘 연휴까지 생긴 바람에 전국이 더욱 들썩였다. 비가 예고된 궂은 날씨였지만 사찰을 찾는 신도와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나들이에 나선 차량으로 고속도로는 몸살을 앓았으며, 해외로 떠나는 여행객들로 공항은 북적였다. 오랜만에 ‘부처님 오신 날’이 축제 분위기와 함께 온 국민의 관심 속에서 지나갔다. 물론 모두가 종교적 차원의 관심은 아니었지만, 황금연휴와 함께 시작한 부처님 오신 날이라 훨씬 더 많은 이들이 봉축 법요식을 지켜보고 또 축하했다.
1841년(헌종7) 음력 4월 초파일, 포항 출신의 장심학(張心學·1804~1865)은 서울에서 화려하게 열린 관등(觀燈) 행사를 다소 놀란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그는 당시 경험했던 ‘부처님 오신 날’의 풍경을 기록해 ‘관등기(觀燈記)’를 남겼는데, 이 글은 장심학의 문집인 ‘강해문집(江海文集)’에 수록되어 있다. 장심학은 글의 첫머리에서 “임금 즉위 7년 신축(헌종7, 1841) 윤3월에 춘당대에 직접 나오셔서 인재를 선발했다. 시험에 떨어진 나는 한양을 구경하다가 마침 4월 8일을 만났으니, 풍속에서 이른바 석가(釋家)가 태어났다고 하는 날이다.”라고 기록하며 자신이 서울에서 석가탄신일을 보내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이 해 윤3월 13일 헌종은 춘당대에서 경과정시(慶科庭試)를 설행(設行)하고, 문과(文科)에서 이호형(李好亨) 등 19인을 뽑고 무과(武科)에서 나경준(羅敬俊) 등 218인을 뽑았는데 안타깝게도 장심학은 이 시험에서 낙방했다. 37세의 청년 장심학은 이왕 먼 길까지 온 차에 서울을 구경하기로 마음먹고 거리를 돌아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장심학은 이어서 “신라나 고려의 사람들은 이날에 등을 달고 술잔을 올려 빌면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구하였는데, 말세의 풍속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라고 기록했다. 숭유억불을 내세워 공식적으로는 불교를 배척한 시대였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4월 초파일에 관등 행사를 치렀고, 이 때문에 국가적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풍속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장심학은 계속해서 연등을 거는 장대를 어떻게 만드는지 연등의 모양은 얼마나 다채롭고 화려한지 그리고 연등이 무수하게 걸린 풍경은 어떤 모습인지를 아주 자세하고 또 실감나게 묘사했다. 석양 무렵 종로의 거리 양쪽에 남극과 북극이 하늘을 지탱하는 듯 서 있는 장대들과 그사이에 매달아 놓은 연등들의 풍경을 바라보며, 그는 “어떤 것은 가로로 이어 연결하니 꿰어놓은 구슬 같고, 어떤 것은 수직으로 이어서 드리우니 매달아 놓은 옥 귀걸이 같았다. 어떤 것은 둥글게 묶으니 반짝이는 구슬 모양이 되며, 어떤 것은 연등으로 글자를 만들었으니 천세태평(千歲太平), 수복(壽福) 등과 같은 모양이었다.”라고 기록했다.
이날 장심학의 눈에 비친 서울 도성은 집마다 연등으로 장식하고 창문은 비단으로 꾸민데다가 시장과 기루(妓樓)의 주렴도 화려하고 사치스럽기 이를 데 없는 풍경이었다. 그야말로 낯선 광경이었던 것이다. 가장 압권은 도성의 남녀들이 관등놀이를 한다고 모여드는 순간이었다. 장심학은 이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이날 저녁에 도성의 많은 남녀들이 남북의 산 중에 높고 트인 곳에 올라 관등놀이를 하였다. 고운 옷에 향낭을 차고서 진홍색 비취색 옷으로 물들이며 구름과 안개처럼 무리지어 늘어서서 떠들썩하게 노래를 불렀다. 연하게 저민 고기 안주와 요란스럽게 울리는 현(絃)과 관(管)의 악기소리는 또한 하나의 태평한 시절을 함께 즐기는 것이었으니, 영남 사람으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지방 출신이었던 그가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부분이다. 그 규모와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현재 우리가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여하튼 장심학은 서울의 화려한 모습과 수많은 인파에 그저 할 말을 잃고 압도되었을 것 같다.
1819년(순조19) 김매순(金邁淳·1776~1840)이 저술한 ‘열양세시기(冽陽歲時記)’에도 4월 초파일에 석가의 탄신을 기념해 연등을 만들어 매다는 풍속의 기록이 있다. 민가와 관청, 시장에서는 모두가 등간(燈竿)을 세워 연등을 매다는데 등간은 십여 길(대략 18m)이나 되는 여러 개의 대나무를 엮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등간 위를 비단 깃발로 장식한 후 갈고리 달린 막대기를 가로대고 갈고리에 줄을 얹어 그 줄의 좌우끝이 땅 위에까지 내려오게 한 다음 그 줄에 연등을 매달고 밤이 되면 줄을 잡아올려 공중에 연등이 달리게 하는 것이다. 등은 마늘, 외, 꽃잎, 새, 짐승 같은 형상의 것, 또 누대(樓臺)와 같은 것들이 있어서 각양각색으로 꾸며져 그것을 단적으로 표현키는 어렵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