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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보낸 한글편지 50통

등록일 2023-05-15 18:54 게재일 2023-05-1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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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운의 ‘한글편지’.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어린이날을 시작으로 어버이날을 지나 스승의 날을 맞이했다. 이제 성년의 날을 지나 부부의 날까지 이르면 5월이 거의 끝날 것이다. 의식적이고 의례적일 수는 있지만, 당연하게 여기며 잊어버리고 살지도 모를 가족의 소중함을 되새길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기념일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가족은 혈연과 혼인 그리고 입양으로 연결된 일정한 범위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중 혼인을 통해 맺어지는 가족은 부부를 중심으로 그 범위가 크게 확장되는데, 이때 각 배우자의 직계혈족이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사이가 된다. 사랑하는 배우자의 부모님이기에 시간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가깝게 지내야하지만, 갑자기 형성된 가족인데다가 혈연도 아니기에 잘 지내기 위해서는 더욱 마음을 쏟아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식과 행위가 일치하지 못할 때 관계의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하고 불화와 갈등을 빚으며 파국으로 치닫기도 하는 것이다.

내방가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거론되는 ‘쌍벽가’는 작자가 분명하고 창작 연대가 오래되었다는 점에서 일찍부터 주목받았는데, 바로 이 작품의 작자인 ‘연안이씨(延安李氏)’가 한글편지 50통을 받은 주인공이다.(최근 한국국학진흥원은 이 쌍벽가를 포함해 내방가사 347점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 태평양지역 목록으로 등재한 바 있다.) 연안이씨가 받은 이 편지들은 그녀의 시아버지인 류운(柳澐·1701~1786)이 1759년(영조35)부터 1767년(영조43)까지 작성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편지가 1759년 6월부터 이듬 해 5월 사이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1년 동안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보낸 편지가 무려 43통이나 된다. 거의 일주일마다 1통씩 보낸 격이다. 인편이 아니면 편지를 주고받기도 어려웠던 시절 시아버지 류운은 어떤 배경과 사연으로 이렇게 많은 편지를 보냈던 것일까.

류운은 이 당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되어 서울 살이 중이었다. 그는 서애 류성룡의 6세손으로 안동 하회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즈음 류운의 차남 류사춘(柳師春·1741~1814)이 서울 출신 연안이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이들의 혼인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두 사람의 아들인 류이좌(柳台佐·1763~1837)의 출생 연도로 볼 때 대략 추측해 볼 수 있다. 연안이씨는 성헌(醒軒) 이지억(李之億·1699~1770)의 차녀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지억은 1751년(영조27) 문과에 급제했고, 이때에는 정3품인 도승지(都承旨)와 양주목사(楊州牧使)로 활동했다. 연안이씨가 시아버지와 한창 편지를 주고받았던 1년, 그녀는 서울 친정에 기거하며 시아버지의 관직 생활을 뒷바라지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시아버지의 편지가 자상하기 이를 데 없다. 보내준 음식에 고맙다는 말은 빠뜨리지 않았고, 혹시 어디 아프고 불편한 데는 없는지 늘 궁금해 했다. 행여나 며느리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으면 이만저만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예컨대 류운은 1759년 6월 26일에 쓴 편지에서 “들으니 흉복통과 여름 감기로 날포 세게 앓는다고 하니 더위는 심하고 오죽 괴로우며, 사령(사돈 이지억을 가리킴)께서도 안 계신데 병이 그러하니 병중에 네 마음이 오죽하랴. 가 보지도 못하고 답답하며 염려가 일시도 가라앉지 않는다. 수일간 가감(加減)이 어떠한고. 사령이 내일 가신다 하니 약이나 먹고 쉬이 나으면 오죽 좋으랴.”라며 며느리의 병을 걱정했다. 그러더니 바로 다음 날의 편지에서 “네가 본디 흉복통이 있다고 하는데 얼음을 자주 먹더라고 하니 어이 병이 아니 나랴. 잠시 병이 나았으나 병이 없는 사람도 병나기 쉬운 것이니 지금부터는 부디 먹지 마라. 가 보지도 못하고 섭섭함이 끝이 없다.”라며 안도감과 걱정스런 당부를 동시에 전했다. 병이 나았다고 하니 안심이지만 얼음 때문에 병이 난 것으로 보이니 지금부터는 먹지 말라며 당부한 것이다.

최은주 한국국학진흥원책임연구위원
최은주 한국국학진흥원책임연구위원

류운은 관직을 수행하기 위해 서울 어느 곳 누군가의 집에 임시로 기거하며 빨래와 옷 수선 및 옷 짓기 등을 며느리에게 부탁했다. 1759년 11월 28일의 편지에서 “지난번 도포는 조금 긴 듯하고 버선은 작은 듯한데, (그냥) 입고 신겠다. 옷 빨 길이 없으니 어렵지 않으면 (빨래감을) 보내고 싶으니 기별하여라.”라고 한 것이나. 1760년 5월 어느 날에 쓴 편지에서 “네가 오래지 않아 갈 것을, 관아 일의 여가가 적어 자주 못 보니 섭섭함이 끝이 있으랴. 관대 따로 짓기 어려우면 마른 후 그 관대 두고 보면서 짓게 하여라. 다른 관대 보내고 싶은 내게 맞지 않는 것이라 본떠 따를 것이 아니다. 그 관대 깃이 검어졌으니 마르고 남는 것 있거든 떼고 고치면 좋겠으니 보아라. 당직을 마치고 나온 후 다시 가면 보겠다.”라고 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어조가 참 부드럽다. 며느리가 지어준 도포의 길이와 버선의 크기가 딱 맞지는 않지만 그대로 입고 신겠단다. 빨래감도 바로 보내지 않고 혹 형편이 되는지 확인하고 기별하라고 한다. 관직의 업무가 바빠서 자주 못 보는 것도 섭섭하다고 한다.

시아버지 류운이 며느리 연안이씨에게 보낸 이 편지들은 가족일수록 더욱 예의를 갖추고 서로를 진심으로 배려해야 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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