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에서 가장 가고 싶은 곳은 단연 제주도이다. 사시사철 때마다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제주도지만, 겨울철 제주도 여행은 더욱 사랑받는다. 내륙보다 좀 더 따뜻할 뿐 아니라 눈 덮인 한라산이 보기 드문 절경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제주도에 한파가 닥치고 폭설이 내렸을 때에도 떠나는 사람들은 항공편 운항이 모두 중단되어 발을 동동 굴렀지만,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한라산의 은빛 설경을 보겠다고 모여들어 인근 도로가 마비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만큼 아름답고 그래서 꼭 보고 싶은 풍광인가 보다. 교통 때문에 접근이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제주도는 여행객들에게 가장 가고 싶은 섬이다.
경상북도 성주 한개마을 출신의 선비 한고(寒皐) 이원호(李源祜·1790~1859)도 그랬다. 조선 시대에 제주도 여행은 더더욱 쉽지 않았기에, 이원호는 자신의 동생이 제주목사로 부임할 때 선뜻 따라나섰다. 그리고 1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지내며 곳곳의 명승지를 유람했다.
이원호의 동생이 바로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1792~1871)인데, 이원조는 1841년(헌종7) 3월부터 1843년(헌종9) 4월까지 제주목사를 역임하며 그곳에서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관리로서 많은 노력을 쏟았던 인물이다. 동시에 ‘탐라지초본’ 등 제주도와 관련해 많은 저술을 남겼다.
이원호가 제주도 여행을 얼마나 고대했었는지는 동생 이원조의 기록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이원조는 형의 행장을 쓰며 그때를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신축년(1841, 헌종7) 내가 강릉에서 제주로 이동할 때 형님이 길에서 편지를 부쳐 ‘네가 풍부한 고을의 수령이 된 것이 다행이 아니라 내가 풍악산의 묵은 빚을 한라산 백록담 위에서 갚을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라고 이르며 영암의 해월루에서 만날 것을 약속했고, (해월루에서) 비 내리는 밤 같은 침상에서 함께 시를 읊었다.”
이원호가 동행을 결심하고 따라나섰지만 제주도로 가는 여정은 고달팠다. 3월 24일부터 27일까지 바람을 기다리며 해월루에 머물렀고, 29일에 목사 행렬과 함께 소안도로 이동했다. 소안도로 이동하는 이유는 바람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원호는 일기에서 “대개 큰 바다의 경우에는 순풍을 얻지 못하면 돛을 펼 수가 없지만, 소안도로 가는 길은 모두 항구라서 바람의 기운이 조금만 있어도 잘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후풍관候風館[바람을 관측하는 곳]이 소안도에 있는 것이다.”라고 기록했고, 바람을 탄 배가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에 대해서도 “다만 해안의 여러 봉우리가 잠깐 보였다 사라졌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모양이 확확 바뀔 뿐이었다.”라며 현장감 넘치게 기록했다.
그리고 윤3월 초1일 밤 3경(밤 11시~1시 사이)에 제주도로 출발하는 배에 올랐다. 흥미로운 것은 실제 배가 출발하기 전에 길일을 택해서 배를 타는 의식을 거행한 후 다시 배에서 내려 바람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소안도로 옮긴 후 이틀 동안은 바람이 불고 보슬비가 내렸기에, 그대로 머무르며 일기 기록은 또 중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윤3월 초1일 밤 3경(밤 11시~1시)에 깊이 잠들었을 때 선원이 바람을 타야 한다고 배에 오르라며 황급히 깨운 것을 시작으로 일기가 다시 이어진다. 배를 타는 순간이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갔는지는 이날 일기의 시작 부분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아래의 일기는 제주도로 가는 배를 타고 도착한 날의 기록이다. 이원호는 배 위에서 온갖 고생을 하다가 마침내 제주도에 도착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얼마나 힘들었는지가 일기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이원호가 동생을 따라 제주도에 갔던 것은 바로 한라산 백록담을 비롯한 제주도 명승지를 탐방하고 싶은 소망 때문이었다. 이렇게 어렵게 도착한 제주도였지만 이원호는 마음껏 유람을 다니지는 못했다. 그러나 시간과 형편이 허락할 때는 이름난 곳을 찾아다니며 제주도의 경치를 만끽하였다.
“대포 소리가 한 번 울리자 세 척의 배가 일시에 돛을 올렸으며, 노를 젓는 병졸 100여 명의 함성이 땅을 뒤흔들었다. 별안간 정신이 혼미하여 서로 몸을 베고 드러누웠는데, 전후좌우에서 1,000명의 병사와 10,000마리 말 소리 같은 굉음만이 들리고 세찬 파도와 치솟는 물결은 갑판의 타루(柁樓) 위까지 올라올 정도였다. 앉은 자리는 마치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듯하였으며, 둘레가 몇 아름이 되는 큰 돛대가 꺾여서 부러질 것 같았다. 선졸(船卒) 외에는 모두 바닥에 바짝 엎드려 누구도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조용했다. 모든 사람들이 구토하고 난리였는데, 나는 단지 현기증이 좀 날 뿐이었지만 앉거나 설 수는 없었다. …(중략)… 탐라의 위용은 자못 성대하였고 망양정(望洋亭)의 풍경은 웅장했지만, 모두들 감상할 여가가 없이 곧바로 의관을 벗고서 방에 시체처럼 누워있었다. 차를 마시고 오찬을 먹는 것도 모두 귀찮고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이원호의 ‘탐라일기’ 1841년(헌종7, 신축년) 윤3월 1일 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