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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가 태어났다! 조선시대 아기 탄생의 순간

등록일 2023-06-19 20:06 게재일 2023-06-2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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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효의 ‘경당일기’.  /선인의 일상생활, 일기(https://diary.ugyo.net/)
장흥효의 ‘경당일기’. /선인의 일상생활, 일기(https://diary.ugyo.net/)

16~17세기를 살다갔던 안동 출신의 선비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1564~1633)는 자신의 일기에서 외손자가 태어나는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다. 시간은 1619년(광해군11) 10월 22일이었다. “이른 새벽에 집으로 돌아오니 딸이 이미 아기를 낳았다. 어제 미시(未時)에 외손자가 태어났으니, 어떤 경사가 이와 같겠는가? 큰 추위가 지극하면 반드시 따뜻한 봄날이 있다고 한 것이 진실로 빈말이 아니다.”(장흥효의 ‘경당일기’는 그가 51세 되던 1614년(광해군6)부터 62세 되던 1625년(인조3)까지 11년 6개월간의 기록이 담겨 있다.) 이날 외손자를 출산한 딸은 ‘음식디미방’의 저자로 잘 알려진 장씨부인으로 여자로서는 드물게 ‘장계향’이라는 이름이 전해진다. 그리고 태어난 외손자는 ‘홍범연의(洪範衍義)’의 공동 저자인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1619~1672)이다. 동생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과 함께 이 책을 저술했다.

장흥효의 첫 번째 아내 안동권씨는 딸 하나만 낳고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녀가 오랫동안 병을 앓았기에 장흥효와 그 딸(장씨부인)은 걱정과 안타까움으로 많은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아내의 병이 심해 물고기를 먹이려고 물고기를 잡기도 했고, 병을 걱정하느라 꿈자리가 뒤숭숭한 날도 있었으며, 병을 앓는 아내를 보며 애타는 심정으로 보낸 날도 있었다. 딸이 외손자를 낳았던 그 시간은 아내의 상례를 치르던 시기였다. 한 달 전 9월 25일에 그의 아내가 오랜 병환 끝에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장흥효는 일기에서 “이 날 술시(戌時)에 아내의 병을 구해내지 못하였으니, 애통한 슬픔을 어찌하리요! 망극함을 어찌하리요! 하늘에 하소연하여도 아득하여 나의 말을 들어주지 않네. 외로운 딸과 함께 가슴치며 오래도록 곡하니, 오장(五臟)이 끊어지는 듯하다. 꿈인가! 생시인가!”라고 했다.

최은주한국국학진흥원 국학자료팀장
최은주한국국학진흥원 국학자료팀장

그리고 곧 상례 절차에 돌입했는데, 그 주관을 사위 이시명(李時明)에게 맡겼다. 그렇게 아내의 상례를 치르며 친지들의 조문을 받던 날들이었다. 이때의 일기는 대부분 누가 조문했고 부조했는지에 대한 기록들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마침 매부의 대상(大祥)이 되었기에 참석차 그곳에 다녀오느라 잠시 자리를 비웠던 날, 딸아이가 외손자를 출산한 것이었다. 장흥효가 딸의 출산을 두고 “큰 추위가 지극하면 반드시 따뜻한 봄날이 있다고 한 것이 진실로 빈말이 아니다.”라고 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아내가 죽고 상중(喪中)이던 그 시간은 그에게 그야말로 혹독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끝에서 외손자의 탄생을 맞이했으니 큰 추위가 가고 따뜻한 봄날이 온 것 같은 느낌이 당연했을 것이다. 평범한 표현이지만 그의 절절한 심정이 그대로 와 닿을 만큼 드러나 있다.

자식이 귀하던 그에게 외손자의 출생은 또 다른 의미의 기쁨이었다. 그는 다음날 방문했던 조문객에게 예를 이루지 못했다고 하며, 그 이유를 빈소가 산실(産室)과 멀지 않은 곳에 있기 때문에 혹시 불결해질까 모든 일용에 행하는 예를 모두 폐했기 때문이라고 직접 기록했다. 모든 것을 제쳐두고 아이의 건강을 우선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자손이 귀했으므로 자연스레 더욱 조심하고 더욱 신경을 쏟았을 것이다. 10월 24일에는 “손자가 태어난 지 겨우 4일인데, 울음소리가 한 살 된 아이와 다름이 없다”라고 기록했다. 세심하게 지켜보는 외할아버지 장흥효의 모습과 4일된 아기의 울음소리가 교차되는 장면이다. 아기의 우렁찬 울음을 들으며 장흥효는 내심 안심하면서 동시에 그 아이가 특별할 것이라는 기대를 은연중에 담아냈다. 그리고 덧붙이길 “딸이 아기를 낳은 뒤 조금 불평한 징후가 있었는데, 점차 평상을 회복하였다.”라고 했다. 어머니의 상례 중에 출산하느라 애쓴 딸의 건강도 챙기는 모습이 인상 깊다.

최은주 한국국학진흥원책임연구위원
최은주 한국국학진흥원책임연구위원

장흥효는 55세에 첫째 부인을 잃었다. 그리고 그녀의 일년상을 마쳤을 때 둘째 부인을 맞이했는데, 무남독녀였던 딸이 아버지의 후사가 없는 것을 걱정해 혼인을 서둘렀기 때문이었다. 일기에는 둘째부인의 임신과 출산의 기록도 담겨 있다. 1622년 9월 26일의 일기에서 “부인이 임신해 사람들이 모두 축하했었는데, 이 날 10달을 채우지 못하고 여자 아이를 낳으니 사람들이 불안하게 생각했다.”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29일의 일기에서 “아이를 낳고도 기르지 못하니 애통함을 어찌 다 표현하겠는가. 잉태하지 않는 것이 나을 뻔하였다. 그러나 화와 복이 찾아올 때는 순순히 천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듬해 윤10월 8일 둘째 부인이 다시 딸을 낳았다. 장흥효는 이날의 일기에서 “해시(亥時)에 딸이 태어났다. 아들 낳기를 바라는 마음이 극진했는데 아들을 낳지 못했으니, 속마음이 어떠하겠는가. 그래도 뒷날을 기대하며 허전한 마음을 위로할 뿐이다.”라고 했다. 장흥효는 예순을 넘겨 아들 셋을 얻었다. 그가 숨을 거둘 때 맏이 나이가 겨우 여덟 살이었다고 한다. 어린 동생들을 돌보았던 것은 딸 장씨부인이었다.

조선 시대에도 아기의 탄생은 소중하고 또 특별했다. 자손이 귀하거나 산모가 건강하지 못할 때 그것은 더욱 간절했다. 인구 절벽의 시대다. 개인의 사정을 넘어 사회적으로 아기의 탄생이 더욱 귀해지는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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