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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반려동물

▲ 김병래 수필가·시인인류가 개를 기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 말부터라 한다. 늑대 새끼를 데려다 길들인 것이 개의 시초일 거라는 추측이다. 가축으로 길러진 개는 사냥을 돕거나 침입자를 막고 썰매를 끄는 등 지역과 특성에 따라 여러 가지로 인류에게 도움을 주었다. 지금도 인명을 구조하거나 마약을 탐색하고 맹인을 인도하는 등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개들이 많다. 옛날 우리나라 시골의 개나 고양이는 소나 닭처럼 그냥 가축이었다. 곡식을 축내는 쥐를 잡으라고 고양이를 길렀고, 집을 지키고 새끼를 많이 낳아 살림에 보탬을 주는 것이 개의 역할이었다. 먹이로는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나 보릿겨 따위가 고작이었고, 어린 아이가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똥을 누면 기다렸다가 냉큼 먹어치우기도 했다.개나 고양이가 애완동물로 불린 것은 사람들의 주거환경이 도시화 되어 실내에서 함께 살면서부터였다. 마을 전체가 이웃사촌이고 한 집에 너댓 명 이상 아이들이 바글거리는 대가족 집안에서는 애완동물 따위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어른들은 일에 바쁘고 아이들은 어울려 놀기에 바빠서 주변에 얼씬거리는 개들은 걸리적거린다고 걷어차이기 일쑤였다. 핵가족과 홀로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치열한 경쟁사회가 도래하면서 삭막하고 소원해진 인간관계가 애완동물에 집착하고 의존하는 성향을 만든 것 같다. 걸핏하면 속이고 배신하는 이기적인 인간들과는 달리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언제나 반겨주고 오로지 제 편이 되어주는 동물들에게 애착이 가는 건 일견 당연한 일로 보인다.애완동물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주인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체내에 옥시토신의 분비를 활발하게 하는가 하면 심장병 발병 위험을 억제하는 효과도 있다고 한다. 반면 2009년 8월 스칸디나비안 심리학 저널에 발표된 연구에서는 애완동물이 행복감을 높이거나 우울증상을 낮춘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아무튼 인간관계의 회복에 대한 노력이나 문제의식이 없이 단지 애완동물을 통해 소외감을 해소한다는 건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애완동물을 기르는 인구가 1천만을 넘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개인적 취향을 넘어 사회 문화적 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애완동물 관련 산업도 성장일로에 있어 연간 시장의 규모도 2조원을 넘었다는 통계다. 애완동물에 드는 비용과 정성이 아이를 키우는 것에 못지않다고 하니 명실상부 가축이 아닌 가족인 셈이다. 그래서 애완동물 문제는 이제 정치적 이슈가 되기도 하고 공공장소에서의 관리 등으로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한다.애완동물이란 명칭도 반려동물로 격상이 되었다. 1983년 10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인간과 애완동물 관계를 주제로 하는 국제 심포지엄에서 그 가치성을 재인식 한다는 취지로 제안된 `companion animal`이란 명칭을 우리나라에서도 받아들인 거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불리는 것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사람이 일방적으로 선택해서 제멋대로 꾸미고 길들이는 대상을 마치 동등한 관계인 것처럼, 반려라고 하는 것은 가당찮다는 것이다. 더구나 수명이 다할 때까지 함께하는 경우는 고작 12%에 불과하고, 싫증이 나거나 사정이 여의치 않다고 내다 버리는 유기견이 하루에도 250여 마리나 된다고 하니 반려동물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을 수 없다.명칭이야 어떻든 애완동물을 병적으로 애착하고 의존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소음과 냄새에다 털을 날리고 위협을 가하기도 하는 동물로 싫어하거나 혐오하는 사람도 적지가 않아서 가족 간, 이웃 간의 불화와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그런 분쟁의 소지가 없도록 제도적 장치를 정비하는 동시에 애완동물에 대한 보다 성숙한 문화의식이 필요한 시점이다.

2017-08-11

독수리 바위의 꿈

▲ 김주영 수필가동해에서 보는 일몰은 황홀경이다. 포항 호미곶은 해맞이 장소로 유명하지만 해넘이 명소로도 손색이 없다. 해가 질 무렵 호미곶 서쪽 해안 길을 가다보면 동해바다의 낙조를 볼 수 있다. 호미곶 `상생의 손` 광장에서 호미곶길을 지나 해안가 구만길로 3km정도 가다 만나는 작은 포구, 구만 2리에 있는 구포(鉤浦)다. 사람들은 이곳을 `까꾸리개`라 부른다. 까꾸리는 갈퀴의 경상도 방언이다. 끝이 뾰족하고 ㄱ 자로 구부러진 모양도 `까꾸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동해안의 여느 포구와 달리 바닷물이 얕고 갯바위가 많다. 물이 얕아서 바위 주변으로 갈매기들이 많다. 예전에는 갯바위 언저리까지 청어 떼가 밀려와 까꾸리로 긁어 담았다하여 `까꾸리개`라 불렀다. 포구 옆에는 갈고리처럼 구부러진 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자세히 보면 바위에 앉아 바다를 굽어보는 독수리 형상이다.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매일 매일 꿈을 꾸는 바위. 해넘이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담다보면 독수리의 꿈을 보는 듯하다. 미동도 없이 웅크려 앉아 바람소리며 파도소리를 꾹꾹 눌러 자신의 몸속에 시간을 축적시키며 날아오르기 위한 때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풍화의 힘을 빌어 날개의 근육을 키우고 있는 바위의 시간이 느껴진다. 새의 꿈을 꾸는 독수리바위는 파도와 바람에 날개를 매만지고 있다. 저 바위에 앉아 바라본 해넘이는 얼마나 될까? 몇 번의 노을을 더 보내야 날아오를까?1월의 매서운 겨울바다에서 새해 소망을 담아 호미곶 일출을 보았다면 이글거리는 여름바다에서는 꿈을 담아 독수리바위의 일몰을 본다. 호미곶의 양력 8월은 일몰풍경이 절정이다. 해가 지는 방향과 각도가 독수리의 부리와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붉은 해가 독수리 입안에 잠시 머무를 때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것 같다. 순간, 독수리가 하늘로 날 것만 같고 실제로 바위가 꿈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독수리바위에서 보는 일몰은 또 다른 설렘이 있다. 포구를 중심으로, 월출과 일몰을 동시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호미바다에 달이 뜨면 멀리 배경으로 보이는 포스코쪽 하늘에는 해가 진다. 바다를 풍경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다. 해와 달이 푸른 바다위에서 떠있는 장면은 자연이 그려내는 한 폭의 일월도이다. 비록 반달이지만 경이로운 풍경이다. 물때와 보름날을 잘 맞추면 멋진 일월도를 볼 수 있기에 구름이 없는 날은 늘 이곳을 그리워한다. 어떤 날은 월출과 일몰의 시간 간격이 넓고, 바닷가 날씨가 그렇듯 어떤 날은 갑자기 구름이 끼어서 볼 수 없지만 올 8월에는 그 풍경을 꼭 보고 싶다. 호미곶의 지형적 특성으로 인하여 이곳을 호미바다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나는 이곳을 일월바다라고 부른다. 해가 독수리의 품안에 머무는 순간은 아주 잠깐이다. 바다의 생명력과 해와 달의 기운을 모두 담은 사진을 찍고 싶은데 눈으로 보는 감동을 사진으로 고스란히 표현하기가 참 어렵다. 내 솜씨의 부족함을 새삼 느낀다.카메라를 내려놓고 바람에 조각되는 독수리 날개를 보며 바위가 축적하는 시간을 호흡해본다. 어느 날 아침 이곳을 찾아오면 무한천공 어딘가로 날아가고 바위의 흔적만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구포포구의 일몰을 좋아하는 것은 독수리가 꾸는 꿈을 볼 수 있어서다. 그 꿈을 보면서 나도 접었던 꿈을 다시 꾼다. 반복되는 일상과 계획한 일들의 실패에서 마음이 허약해질 때 자연은 늘 치유의 새 힘을 준다.서해안에서 낙조를 보면서 혼잡한 마음을 내려놓고 `비움`을 배웠다면 동해의 독수리바위에서는 다시 솟아오르는 `비상`을 배운다. 꿈이든 일이든 열정만 가지고는 다 이룰 수 없다. 열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꿈을 이루기 위해 인내와 고독을 견디는 일이다. 바로 자신에게 내재된 시간의 힘이다. 삶에서 열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내심임을 비상을 준비하는 독수리에게서 배운다. 나도 언젠가 푸른 하늘을 비행하는 한 마리 독수리가 되리라.

2017-08-04

젊음의 거리

▲ 강길수 수필가밤에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드는 거리를 오가며 출퇴근 한다. 포항 `쌍용사거리`에서 구룡포 쪽으로 난 거리다. 가로 양쪽 가게는 대부분 주점들이다. 내 기억에 오래전 이 거리에는 음식점들이 많았는데 언제부턴가 하나, 둘 술집으로 바뀌어 갔다. 그러면서 젊은이들이 점점 늘어났고 자연스레 젊은이들의 거리로 되었다. 밤에 이곳을 볼일로 지나다닌 적은 있으나, 술을 마신 적은 없다. 이곳에 가끔 오는 젊은이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부분이 기성세대처럼 음주와 유흥으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음주와 유흥은 우리 민족에겐 정신유전자로 전승되어오는 것인가. 민족 고대국가라는 부여의 `영고(迎鼓)`만 보아도 음주와 유흥은 우리 겨레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게 틀림없다. 추수를 마치고 제천의식과 함께, 연일 음주와 가무로 신명나게 축제를 벌였다는 것이 영고 연구자들의 말이다. 영고는 백성이 모여 하늘에 추수를 감사드리고, 내일을 향한 희망과 결의를 다지는 신명나는 축제였을 것이다.지난 늦가을 어느 날 아침, 이른 출근길이었다. 평소에는 말끔하던 거리가 이날은 유흥업소 전단지들이 바람에 나뒹굴고 담배꽁초, 마시다 버린 음료 잔 등으로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였다. 저절로, `무슨 젊은이의 거리가 이래?`하는 속말이 나왔다. 실망감으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어젯밤에 신나는 큰 행사라도 했었나보다고 이해하며 지나갔다.며칠 뒤 아침마다 거리가 말끔했던 이유를 비로소 알았다. 건장한 두 청소원이 거리를 청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날 밤 내린 가을비로 보도블록 위에 붙어버린 홍보전단지들을 생고생하며 긁어내느라 청소시간이 길어져 나는 그들을 만났다. 평소 출근시간이 청소를 끝낸 후여서 늘 말끔한 거리를 걸었던 것이다. 실상 이 거리는 계절, 요일 등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거의 매일 밤 젊은이들이 버린 쓰레기로 지저분해지고 있었다.얼마 전 당국이 이 거리를 `상대로 젊음의 거리`로 지정하였다는 뉴스를 보았다.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지만 `정체성이 없는 음주 유흥거리로 형성된 이 거리를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문화거리로 만들기로` 하였다는 보도다.관련 구간에 `가로환경개선사업과 유해환경개선사업, 지중화사업을 추진`하기로 하였단다. 또한 시의 역점시책 `그린웨이(Green Way) 프로젝트`와 `도시재창조 프로젝트`를 연계한단다. 연계를 통해 시민들에게 `문화공간, 여가공간을 제공하는 문화와 자연 그리고 인간이 어우러진 복합체 도시로의 변모`를 꾀한다고 한다.`젊음`이란 무엇일까. 나도 젊은 시절을 지나왔지만 한마디로 꼭 집어 말하기가 쉽지 않다. 국어사전은 젊음을 `나이가 적고 혈기가 왕성한 상태`라고 설명한다. 혈기는 몸의 피와 기운 뿐 아니라 마음속의 뜨거운 기운도 포함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젊음은 싱그럽고 풋풋함 뿐 아니라 희망과 열정, 패기와 끈기 등을 통해 푸른 꿈을 꾸는 것이 아니겠는가.젊은이들이 꿈을 향해 모여 희망으로 나서야 할 `상대로 젊음의 거리`…. 이 거리가 앞으로도 소모적인 음주와 유흥, 무분별한 쓰레기 투기가 계속된다면 새로 만들어질 `문화거리`가 무색해지지 않을까. 대화와 소통의 장, 몸과 마음의 피로를 풀고 내일을 위한 희망을 재충전할 곳이 되레 활력의 소진과 후회, 절망의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늦은 감이 있지만, 당국이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문화거리`로 만들기로 한 것은 잘 된 일이다. 부디 용두사미가 되지 말고, 처음 계획대로 이루어 내면 좋겠다. 그리하여 `상대로 젊음의 거리`가 젊은이들의 음주, 유흥의 분위기도 하나로 보듬어내어 온 시민들이 꿈과 힘을 되찾는 미쁜 곳, 깨끗하고 밝은 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란다.

2017-07-28

상품화 시대

▲ 김병래 수필가·시인유명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의 수입이 일반서민들의 수백 배에 달하는 것은 상품성 때문이다. 그만큼을 주고도 돈벌이가 된다는 얘기다. 당시에는 팔리지도 않았던 고흐의 그림이 이제 와서 수백억 원을 호가하는 것도 예술적 가치보다는 상업적 가치가 더 큰 이유일 것이다. 21세기를 특징짓는 글로벌시대니 정보화시대니 하는 것도 물론 상업주의의 일환이다. 도대체 상업성이 없다면 누가 앞다투어 신소재를 만들어내고 정보의 경쟁에 박차를 가하겠는가. 한 마디로 상업주의야 말로 이 시대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동력인 것이다. 상업주의가 갖는 속성 중 우선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경쟁의 논리`다.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세계가 하나의 시장이 된 지금, 보다 나은 상품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경쟁은 그야말로 사활을 건 전략이요 투쟁이 되었다. 이제는 국가든 기업이든 개인이든 상업적 경쟁력이 없이는 살아남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그런데 이런 경쟁이란 진보와 발전이라는 긍정적 측면이 있는 반면, 과도한 경쟁으로 야기되는 부작용이 더 큰 후유증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경쟁에는 승자가 있으면 반드시 패자가 있게 마련이고, 소수의 승자들이 얻게 되는 이득보다는 대다수의 패자들이 떠안게 되는 손실과 불이익이 인류사회에 훨씬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승자 역시도 그 부하(負荷)를 떠맡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결국에는 승자든 패자든 공멸로 가는 것은 시차의 문제일 뿐이다.상업주의가 가진 속성의 또 하나는 `가치관의 전도(顚倒)나 왜곡`을 들 수 있다. 사람들은 이제 삼라만상에다 모조리 가격표를 붙여 놓고 그 값의 고하에 따라 일과 사물의 등급이나 순위를 매기고 싶어 한다. 상품으로서의 가치, 즉 경제적 가치야말로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되고 최상위의 가치개념이 되는 세상에선 사물의 고유하고 본질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게 마련이다. 산이나 들은 부동산이 되고 계절이나 기후까지도 관광 상품이 된다. 자연 생태계 역시도 생태계 그 자체의 중요성보다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먼저 따지게 된다.상업주의의 속성 중에서 `광고효과`라는 것도 빼놓을 수가 없다. 상업주의란 물론 상품의 생산을 근간으로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돈을 받고 파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상품의 판매를 위해서는 광고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광고의 효력이 아니고는 아예 어떤 상품도 제대로 가치를 가질 수가 없는 게 현실이다.그리고 기왕의 상업주의를 끊임없이 부추기고 가속화시키는 것도 바로 이 광고의 힘이다. 광고라면 먼저 각종 매스컴이나 전단, 벽보, 간판 등을 떠올리기 쉽지만 사실은 대부분의 상품 그 자체가 이미 구매욕을 자극하게끔 고안된 광고물인 셈이다. 옛날에는 편리와 기능이 위주인 상품이면 되었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는 결코 경쟁력을 가진 상품이 될 수가 없고, 소비자로 하여금 좀 더 강한 구매충동을 일으키게 하기 위한 디자인이나 포장에 오히려 더 많은 공력을 쏟아야 할 형편인 것이다.그런데 문제는 이 광고효과란 것이 단순히 상품의 판매량을 늘이는 것에만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란 데 있다. 물론 광고효과에 의한 소비촉진이 결국에는 자원의 고갈과 공해의 발생 등으로 자연환경을 황폐화시킨다는 것이 일차적인 폐해가 되겠지만 그것이 인간성까지를 파괴하여 비인간화(非人間化) 한다는 것에 더 큰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지금의 대다수의 인류는 태어나자마자 각종 광고물이 내놓는 정보의 홍수에 휩쓸리게 된다. 그 정보들은 상업적 목적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과장 되고 왜곡되거나 폭력적이고 선정적으로 될 수 있는 것이고, 그러한 정보들이 하나의 거대한 가상 현실이 되어 끊임없이 인간을 자극하고 세뇌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정보의 홍수 속에 태어난 아이들이 과연 어떤 가치관과 인격을 형성해 갈 수 있을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2017-07-21

송도에 부는 바람

▲ 김주영 수필가파도는 바다의 깊은 호흡이다. 들이쉬고 내뱉는 파도 끝에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에서 거대한 생명의 시작과 끝을 읽는다. 거칠게 포효하는 바다의 뜨거운 숨소리를 듣노라면 내 삶도 파도의 한 겹이 되는 듯하다.아홉 살 때 여름이다. 포항으로 이사를 온 첫 해, 가족들과 피서를 간 곳이 송도다. 송도는 물이 맑고 모래가 곱기로 유명하였다. 전국에서 찾아온 피서객들로 붐볐고 돗자리를 펴려면 자리다툼이 생기기도 했다. 물이 맑고 모래가 고와서일까? 조개가 참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어떤 사람들은 큰 자루 가득 조개를 잡아가기도 했다. 어린 내발목이 잠길 정도의 물에서도 조개를 잡을 수 있었다. 트위스트 춤을 추듯 모래를 비비면 조개가 잡혔다. 발가락에 닿은 조개의 느낌, 지금도 바닷물에 발을 담글 때면 모래를 비벼보기도 한다. 조개를 넣고 끓여먹었던 엄마표수제비는 추억의 한순간이 되었다.환경변화는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변화시킨다. 공장들이 들어서고 해수오염이 심각해지면서 피서객이 급감하고, 1983년 해일 이후 지속적인 모래유실로 해수욕장은 폐장되기에 이르렀다. 연기가 올라오는 공장굴뚝들 너머로 해변의 길이가 3km쯤 되었던 시작과 끝을 가늠해본다. 해일에 밀려간 것은 모래만이 아니라 그 많던 횟집과 사격장, 오락실 등이 문을 닫고 떠났다. 빈집들은 흉물스럽게 변했다.변화되어가는 모습을 사진에 담으려 몇 해 전부터 해안이며 골목길을 다니게 되었다. 흘러간 시간의 풍경들을 사진에 담는다. 내 카메라 렌즈는 더듬이가 되어 골목골목을 살핀다. 정지된 시간은 떠나간 시간과 미래 사이, 현재의 순간이다. 사라져 가는 것들의 숨결을 찾아서 사진에 담다보니 비오는 날 친구 집에서 웃고 놀았던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지나간 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남아있는 시간의 화석들은 추억을 불러오기도 한다.골목 안 빈집 앞에 놓인 낡은 의자에 잠시 앉아 쉬어간다. 카메라가 낯설었는지 줄곧 나를 따라다니던 길고양이 한 마리도 곁에 앉는다. 골목 끝으로 보이는 바다를 보며 떠오르는 생각 몇 줄을 메모지에 적는다.“좁고 길다란 문을 넘어/ 우주를 떠돌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이쪽과 저쪽을 생각하네/탯줄마냥 늘어진 전깃줄이 바람에 엉켜/ 푸른 별빛으로 흔들리는 송도동/ 수수천년/ 뜨거운 울음소리의 아이가 태어났지만 / 모든 숨구멍은 짧은 골목을/ 찰나에 지나갔네/ 빈집/ 빈 의자/ 나는 초저녁별이 뜨도록/ 잠시/ 쉬었다가네”글을 쓰다 보니 옆에 앉아 있던 고양이가 무료했는지 골목 끝으로 사라지고 그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바닷가에 형성된 마을들 대부분은 해변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이 있다. 송도 해안가 골목길을 좋아하게 된 것은 길 끝에 아스라이 바다가 보여서다. 마치 이쪽과 저쪽 두 세계를 이어주는 미로를 걷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낙후된 건물들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건물들이 생겨나고 있다. 송도해수욕장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폐허가 된 건물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풍경들이 생겨나지만 신축 건물에 가려 바다가 보이는 골목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쉽다.송도동 일대의 변화과정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인간의 이용가치 중심으로 환경이 변화되는 것을 바라본다. 동빈 운하가 개통되어 수로가 생겨나고 유람선이 다니게 되었다. 포스코 야경과 밤바다가 새로운 명소로 바뀌면서 해안가에는 찻집들이 생겨나고 있다.밀물과 썰물처럼 변화의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들을 바라본다. 송도에 다시 바람이 분다. 새로운 구조물들이 생겨나고 이용자중심으로 개발이 되겠지만 자연의 미적 가치를 중심에 두는 송도로 변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2017-07-14

보도블록 위

▲ 강길수 수필가보도블록 위를 걸을 때는, 조심하는 버릇이 있다. 먹이 찾아 헤매는 작은 생명체를 밟지 않기 위함이다. 언제부터 생긴 버릇인지 꼭 집어 말할 수는 없다. 어린 시절 한 여름날, 산에 소 먹이러 갔다가 소나무 아래 누워 단잠이 든 적이 있다. 그 작은 생명체가 온 몸을 탐험이라도 하는지, 사타구니까지 기어들어가 다니며 간지럽히는 바람에 꿀잠을 깼다. 다행이도 물거나 쏘는 종(種)이 아니어서 툴툴 털고 일어났다.중년기에 생명과 생태계에 더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 어느 날, 인도를 걷는데 웬일인지 보도블록 위를 바지런히 돌아다니는 작은 생명이 새롭게 눈에 보였다. 그전에도 숱하게 보았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다시 말하면, 그날 비로소 관심이 가게 된 것이다. 환경 분야에 오래 일한 경험으로 비롯된 생태계에 대한 애정과 종교적 취향, 문학에 대한 미련 같은 마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 싶다. 그 작은 생명은 바로, 개미였다.산골에서 자라나며 개구쟁이 친구들과 밖에서 어울려 놀 때는, 개미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었다. 가재, 개구리, 뱀, 새, 물고기 같은 비교적 작고 자주 만나는 동물이 바깥 놀이의 주 대상이었다. 또, 잠자리, 나비, 매미, 풍뎅이, 하늘소 같은 잡기 어려운 곤충들도 장난감으로 삼은 존재들이었다.그러던 개미가 세월이 많이 흐른 어느 날, 마음에 새롭게 자리 잡았다. 어릴 때 보던 개미와 같은 것인데, 다르게 다가온 것이다. 보도블록 위를 기어다니면 언제 사람의 발에 밟혀 죽을 줄도 모르는데, 먹이 찾아 헤매는 개미가 꼭 굶주린 하이에나였다. `저렇게 바지런히 먹이 찾아다니다가 느닷없이 내 발에 밟힌다면, 저 개미의 한 생은 얼마나 슬프고 허무할까`하는 생각이 화살같이 가슴에 박혔다.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날 자연 속에서 놀이의 대상이든 아니든 동물이나 곤충들과 함께 자란 세대는 산업화, 도시화 이후의 장난감세대 어린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을 누렸다 싶다. 그 축복의 내용은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세상은 사람만 사는 게 아니라 나무, 풀, 곤충, 동물 등 식물과 동물, 인간이 어우러져 산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자라난 것이 그 첫째다. 둘째는, 사람과 사람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에도 함께 걸어가야만 할 어떤 길이 있다는 사실을 체득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생명체들에겐 일어날 수 있다는 현실을 바라보며 산 일이 그 셋째다. 끝으로, 자기 삶은 어떤 모습으로든 스스로 책임지고, 참으며 살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인간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정의한다.그렇다면, 영장답게 살아왔고, 살며, 또 살아가야한다는 말이 된다. 현대까지 물질문명사회를 이루어 오는 동안,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니까 자연생태계를 마음대로 개발하고, 취하고 쓰는 것을 당연시 해왔다 싶다. `기후변화, 온난화, 자원고갈, 자연의 보복, 지구의 악질 바이러스 인간` 같은 용어들이 등장하면서 생태계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지구촌 일반 시민들의 소비 생활은 별반 달라지지 않아 보인다.물, 화석연료, 전력, 세제(洗劑) 같은 일상 소비생활에서 나부터 소비를 줄이는 방법을 찾아 실천하는 등 친환경생활로 개인의 삶을 바꾸는 일이 요구된다. 로하스나 슬로우 시티 같은 삶을 사는 일부 사람들에서 그 본(本)을 보듯, 생명 하나하나를 소중히 다루는 `생태계사랑`이 지구촌 모든 정부들의 정책으로 채택, 수행되어야 한다는 자각이 갈수록 커진다.우선 보도블록 위를 걷는 사람들부터, 굶주린 하이에나 같이 헤매는 개미를 밟지 않도록 조심할 일이다.

2017-07-07

유월의 단상(斷想)

▲ 김병래 수필가·시인# 누가 역사를 예단하는가. 독재자 하나가 함부로 휘두를 수도 있는 것이 한 나라의 역사다. 김일성 일족이 장악한 한반도 북녘의 70년 역사가 바로 그 좋은 예다. 철저한 압제와 세뇌로 이천수백 만 주민을 모조리 꼭두각시로 만들어버린 기막힌 실상을 보노라면 인간의 역사란 것에 회의와 절망감을 금할 수 없다. 절대권력을 세습한 귀때기 새파란 독재자가 틀어쥐고 있는 북녘 땅의 역사는 그야말로 예측을 불허한다.# 6·25 전쟁은 김일성의 야욕이 저지른 민족 최대의 비극이다. 강대국들의 대리전쟁 운운하는 논리가 있지만 한 마디로 어불성설이다. 가령 김일성이 아닌 조만식 같은 이가 북한의 지도자였더라도 남침을 자행했을까? 전쟁의 원흉이 김일성이라는 증거로 남침을 허락해 달라고 스탈린과 모택동에게 수차례 간청을 한 기록도 있다지 않는가.# 김대중 정권의 소위 `햇볕정책`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 간의 화해무드가 조성된 시기였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는 반면, 김정일의 교활한 술수에 철저히 농락당했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김정일로서는 하등 손해 볼 게 없는 위장된 화해 제스처에 속아서 저들이 체제를 공고히 하고 핵무기를 만들 수 있도록 막대한 자금을 갖다 바친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 결과 지금 우리는 핵미사일 위협에 전전긍긍하는 꼴이 되었고.햇볕정책의 가장 큰 성과로 6·15선언을 꼽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 선언대로 이행이 된다면야 희망찬 성과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저들이 언제든지 뭐라도 트집을 잡아 폐기해 버릴 수 있는 휴지조각에 불과하다는 걸 몰라서 하는 소리다. 어차피 지킬 생각이 없을진대 막대한 이권을 챙길 수 있다면 무슨 선언인들 왜 못하겠는가? 속단할 수는 없지만 그때 만약 햇볕정책 대신 김정일의 목을 죄는데 박차를 가했더라면 오늘의 핵미사일이나 김정은 정권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만에 하나 김정은이 핵을 포기하고 개혁과 개방의 길로 나선다면 북한은 급속도로 경제와 산업이 발전할 것이다. 남북이 협력하고 공조하는 가운데 통일도 물론 조속히 추진될 것이다. 하지만 김정은이 건재하는 한 그건 한낱 헛된 꿈일 수밖에 없다. 북한 주민을 모조리 희생하는 한이 있어도 제 목숨은 부지하겠다는 것이 김정은의 궁극적인 목적이고 속셈인데, 스스로 제 무덤을 파는 짓을 할 리가 있겠는가.군부를 대표하는 아버지뻘 장성도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손으로 입을 가리고 아첨을 하는 판국에 누가 언감생심 그에 반하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겠는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인류의 역사에 절대권력의 사악한 독재자가 개과천선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남북의 통일도 북한의 개혁개방도 김정은이 없어져야 기대할 수 있는 일이라는 말이다. 한 가지 희망은 북한 인민들이 차츰 눈을 뜨기 시작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곧 김일성 일족 독재의 철옹성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권이 시작되면서 남북화해의 기대가 되살아나고 있다. 햇볕정책에 관여했거나 옹호하는 인사들이 정부 요직에 기용되고 미국과 유엔의 대북제재에 어긋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지만 화해든 협상이든 한 쪽에서만 원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우선은 북쪽 김정은의 처지와 의중을 파악하는 일인데, 절대로 핵을 포기하거나 개방을 할 수는 없는 것이 김정은의 한계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일시적으로 화해의 제스처를 취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 핵미사일의 완성과 체제의 유지를 위한 돈과 시간을 벌기 위한 속임수일 뿐이라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또다시 천추의 한을 남길 것이다.

2017-06-30

우물재 이야기

▲ 김주영 수필가한 마을의 이름은 그 마을이 흘러온 역사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지명은 하나의 명사가 아니라 그 마을의 특성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아주 긴 호흡의 생생한 문장이다.포항시 남구 동해면 도구리에는 우물재라는 곳이 있다. 마을 곳곳에 시원한 물이 솟는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는데 참 예쁘고 정감이 가는 지명이다. 동해면에는 약초밭이 많아 약전(藥田)이라 부르고, 우뚝 선 바위가 있다하여 입암(立岩)이라 불리어진 마을도 있다. 발산(發山)이라는 마을은 봄이면 산과 골짜기에 꽃이 가득 핀 모습에서 유래되었다하니 자연과 사람은 긴 세월을 더불어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본래의 의미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로 삶의 방식이 재편되고 행정구역이 통폐합되면서 지명은 그 지역의 특징을 잃었다.우물재의 빈 집터에는 잡풀이 무성하다. 담벼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있는 장롱들, 살짝 열린 문짝 사이로 길고양이가 들락거린다. 골목을 천천히 걷다보니 사용하지 않은 우물이 하나 눈에 띈다. 집집마다 상수도 시설이 놓이면서 효용성이 사라진 우물의 흔적만 남아 있다. 우물터에 나와 물을 길으며 서로의 안부도 묻고 웃음꽃을 피웠던 사람들의 추억은 어디로 갔을까? 우물가에 우두커니 선 고목은 자신의 몸에 두레박이 걸렸던 기억만을 허공에 걸어두고 늙어가고 있다.폐허가 된 우물재의 골목에서 근현대사의 아픈 시간의 흔적들이 느껴진다. 6·25 전쟁이후 인근마을에 미군주둔지가 조성되면서부터 이 마을에는 술집들이 형성되었다. 미군부대는 철수했지만 술집들은 그대로 남아 장사를 하였고 마을은 더욱 낙후되었다. 현재 유흥업소들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우물재라는 마을 이름은 본래의 의미를 잃고 사창가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황석영의 소설 중에 파월역사를 이야기한 단편소설이 있다. 주홍글씨처럼 각인된 우물재의 이름에서 파월이라는 역사의 한 문장을 본다. 베트남전쟁에 우리 젊은이들이 참가한 것도 결국 평화의 명분으로 목숨을 담보로 한 약소국의 비애였을 것이다. 전쟁, 인간성 상실과 잔흔들. 우물재의 낙후된 모습도 치유해야 할 전쟁의 상흔 같다.군부대훈련소 옆으로 해안둘레길 공사가 한창이다. 포항시에서는 우물재를 철거하고 공원으로 만드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한다. 기존의 폐허된 골목을 허물고 또다시 건물들을 지으면 현재의 모습은 변화될 것이다. 광장을 만들고 조형물들을 세울 계획이라 하니 지나온 시간 위에 또 다른 시간의 역사가 더해지겠지만 과연 건물들만 철거한다고 아픈 과거도 철거되는 것일까? 공원이 생기면 깨끗한 공간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철거보다 더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은 부끄러운 역사일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고 다시 되풀이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6·25 전쟁 뒤 미군의 주둔과 철수가 이뤄진 마을들은 우물재와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있다. 용기있게 상처를 드러내는 것은 아픈 과거를 반복하지 않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물재는 문학작품이 쓰인 배경과 역사적 아픔을 새롭게 재조명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우물재에서 바다로 나와 걸으니 먹먹하던 마음이 좀 가벼워진 듯하다. 역사와 인문학적 이야기가 담긴 치유의 산책로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우물재의 낙후된 모습은 수치스러운 과거가 아니라 약소국의 비애가 담긴 아픈 역사인 것이다.우물재의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미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문화는 건강한 삶을 만든다. 행복지수가 높을수록 삶은 윤택해질 수 있다. 폐허가 된 공간뿐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가는 모두가 치유될 수 있는 우물재의 변화를 기대해본다. 골목골목 새로운 문화가 꽃을 피우고 마을 곳곳에 예술의 영감이 살아있는 건강한 우물재가 되기를 바란다.

2017-06-16

숲속 하얀 밥상

▲ 강길수 수필가반환지점에 도착했다. 자주 오는 등산길의 첫 번째 운동시설이 있는 곳이다. 팔 굽혀펴기와 허리 젖히기를 하러 가는데, 저쪽 소나무 밑동 앞에 전에 없던 하얀 것이 보였다. `누가 액운 막으려고 소금을 뿌렸나보다`고 가볍게 생각하고 평소처럼 운동을 했다. 마지막으로 허리 돌리기를 하려고 회전판 쪽으로 향하는데, 그 옆에도 소금 같은 흰 것이 놓여있었다.어떤 이가 두 군데나 소금을 뿌렸다 생각하니, 이런저런 의문이 들었다. 가족이 이 운동시설에서 다치기라도 했나. 자기 집 문간도 아닌 산에 소금을 뿌리다니. 산에 소금을 뿌린 것을 본 적은 없는데. 먼 이곳까지 소금을 가지고 온 정성이 지극하네. 소금 뿌리는 풍습도 양밥[禳法]에 포함될 테지…. 회전판이 가까워졌다. 미심쩍어 소금에 다가가 보았다.아니, 이럴 수가! 하얀 것은 소금이 아니라 쌀이었다. 누군가 솔가리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하얀 쌀의 성찬(盛饌)을 차려놓았다. 산새들이나 다람쥐 같이, 산에 사는 생명들이 먹으라고 자기 쌀을 가져다 소담스레 차린 숲속 밥상이다. 저절로 혼잣말이 나왔다.“그래. 이 세상은 아직 살만한 게야! 이처럼 아름다이 마음 쓰는 분이 함께 살고 있으니까!” 이어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노랫말은 헛말이 아니었어”라는 속말도 들렸다.회전판에 올라서서 잠시 하얀 밥상을 바라다보았다. 궁금증이 도졌다. 저 쌀은 어느 집 것일까. 아니면, 어느 식당이나 단체의 것일까. 귀한 쌀을 가져와 산에 사는 생명들과 나눈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혼자 사는 분일까, 여럿이 사는 분일까. 아이일까, 어른일까. 남자일까, 여자일까….아무튼, 숲속 생명들에게 하얀 밥상을 차린 이는 꽃보다 아름다운 사랑 가득한 마음을 지니고 사는 분일게다. 쌀 곧, 먹을거리는 자기 생명이 아닌가. 먹지 못하면 살 수 없는 게 생명이다. 하여, 쌀을 나눈다는 것은 자기 생명을 나누는 일이 된다. 세상에 자기 생명을 나누는 일보다 더한 사랑이 있을까. 모름지기, 나누지 않는 곳에 사랑이 자리할 리 없다.이 숲에 자기 생명을 나누며 사는 분이 함께 오간다 생각하니, 마음이 절로 즐거워졌다. 어두운 세상에서 자기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는 촛불을 만난 기분도 들었다. 자연과 교감을 나누고, 그 안의 생명들과 먹을거리를 나누며, 행동으로 사랑하는 사람. 그분은 인류애는 물론, 하늘같은 큰 사랑의 나라에 사는 백성이리라. 언젠가 그분을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반갑고 기쁠까. 그땐 마음 깊이 고마움을 전하며, 가없는 그 마음을 배우고 싶다.부디 이 숲속 생명들이 하얀 밥상 주인의 뜻에 따라, 성찬을 잘 먹고 즐겁게 살기를 바라며 산을 내려온다. 나도 모르게 요즈음 우리 사회의 우울한 자화상과, 소담스런 숲속 밥상이 대비되었다. 지난 반년 동안 이성(理性)이 마비되었던 이 땅…. 미움과 네 탓, 대립과 분열로 달구어졌던 광장의 촛불이나 태극기의 모습은, 이 밥상의 아름다운 모습에 비하면 초라하고, 부끄럽고, 추하기 짝이 없다 싶었다.능선으로 내려오다가 마지막 묘소 부근에 다다랐다. 묘소 뒤에는 언제부턴가 커다란 죽은 소나무가 뉘어져 있어, 사람들이 통나무의자 삼아 잠시 앉아 쉬곤 하는 곳이다. 누가 버린 사탕 포장지가 보여 주우러 갔다. 그런데, 통나무의자 뒤에도 똑 같은 쌀 밥상이 있는 게 아닌가. 숲속 밥상 주인은 마음이 얼마나 넉넉하기에 여러 곳에다 하얀 밥상을 정성스레 차렸단 말인가. 아마도 내가 가지 않은 먼 여러 곳에도 숲속 생명들의 밥상을 마련했을 터다.더 큰 기쁨이, 하늘로부터 내 가슴을 지나 땅까지 찌르르 흐르는 기분이다. 내 마음은 속삭였다.`맞아! 세상은 들여다보면, 살만한 거야.`

2017-06-09

개구리 소리

▲ 김병래 수필가개구리소리를 들으러 간다. 마을의 불빛과 소음을 벗어나 멀리 들판 가운데로 간다. 모내기철이라 물을 가득 실은 논배미마다 개구리소리가 요란하다. 초여름 밤 무논에서 개구리소리가 들리는 건 당연한 일인데, 그 당연한 것이 더없이 반가운 것은 부당한 일들이 너무 많은 세상 탓일까. 개구리소리를 들으러 가는데 술을 빼놓을 수 없다. 초여름 밤의 흥취를 돋우는 데는 아무래도 막걸리가 제격이다. 먹다 남은 오이나 풋고추에 된장 한술, 가다가 가게에 들러 막걸리 한 병을 사면 준비 완료다. 벗이 있어 동행을 해도 좋지만 혼자서 쓸쓸함을 벗하는 것도 못지않은 일이다.오늘은 그믐밤이라 아쉽지만, 때마침 휘영청 달이 밝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동서고금에 달을 쳐다보며 한숨짓고 하소연한 사람은 무릇 기하며, 달을 벗하여 술잔을 기울인 사람인들 얼마나 많을까. 그러니까 달은 동서와 고금을 잇는 무선 인터넷인 셈이다. 사람의 기술이 아무리 발전한들 세상 온갖 사연들이 담긴 달의 메모리용량을 어찌 따를 것인가. 그 옛날 이태백의 술벗이었던 달이야말로 마주하고 술잔을 기울이기에 더없는 벗이 아닌가.들판 적당한 곳에 신문지를 깔고 멀리 보이는 마을의 불빛을 등지고 앉는다. 어차피 그믐밤에도 이제는 옛날처럼 칠흑의 어둠이 아니지만 가급적이면 인공의 불빛을 보지 않는 게 여름밤의 운치를 덜 깨는 일이다. 인기척에 잠시 멈칫했던 개구리소리가 하나 둘 살아나서 갈수록 구성지다. 달이 없는 대신 더 총총하고 영롱한 별빛이 대형 멀티비전 같은 무논에 얼비친다.비록 풋고추 몇 개에 막걸리 한 병의 술자리지만, 나는 시방 어느 왕후장상이나 재벌의 호화찬란한 주연(酒宴)이 부럽지가 않다. 아무리 많은 돈과 기술을 동원해서 연출한 분위기라 한들 이 초여름 밤 들녘의 정취에 미칠 것인가. 나는 지금 저 하늘과 무논의 별빛, 풀냄새 흙냄새를 실어오는 훈풍과 수천수만 개구리들의 코러스에 물아일체로 어우러져서 우주적으로 한 잔 하는 것이다.실의와 방황의 젊은 날에는 개구리소리를 맞으러 다니기도 했다. 삭신이 결리고 찌뿌드드할 때 폭포수 아래로 물 맞으러 가는 것처럼, 밤새도록 들판을 쏘다니면 개구리 소리에 실컷 두들겨 맞곤 했다. 그 시절에는 개구리소리가 참으로 무성하고 우렁찼다. 온 들녘이 떠내려갈 듯 악을악을악을악을…. 악을 써대는 듯한 개구리소리에 몸과 마음을 내맡기고 있으면, 방망이질에 흠씬 두들겨 맞고 찌든 때를 게워낸 빨래처럼 마음이 한결 개운해지는 거였다.개구리소리를 한갓 단조로운 가락의 소음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때론 이 땅이 들려주는 질책의 소리였고 한편으론 더없는 위무의 소리이기도 했다.내가 나약하고 소심할 땐 꾸짖고 나무라는 소리였고 아프고 슬플 때는 다독이고 위로하는 소리였다. 그리고 때론 좌절과 자괴감과 허망과 무력감에 빠지게 하는 세상의 온갖 논리와 위세들을 무산시켜버리는 무진설법이기도 했다.초로에 접어든 지금까지 나는 매년 초여름 밤중에 들판으로 나가 개구리소리를 들으며 술잔을 기울이는 걸 연중행사로 해오고 있다. 방황과 고뇌의 젊은 날을 지나 불혹과 지천명과 이순의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개구리소리도 많이 달라졌다. 공해 때문에 그 수가 현격히 줄어들기도 했지만 개구리소리를 듣는 내 귀도 전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이 들판의 개구리소리도 나와 함께 늙어가서 수명을 다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밤공기가 서늘하게 식고 술병도 바닥이 났다. 인생을 이해하려 것이 아니라 취하려 왔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나도 오늘밤 막걸리에 취하고 하늘과 들판과 개구리소리에 취한다.

2017-06-02

햇살

▲ 김주영 수필가차디찬 눈밭에 노란 꽃을 피우는 얼음새꽃을 보고 있으면 해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지에 스며든 햇살이 움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것, 여린 꽃잎이 언 땅을 뚫고 나와 환하게 피어 대지를 데우며 겨우내 움츠린 봄꽃들을 모두 불러내는 듯하다. 마치 봄의 전령사인 양 얼음새꽃이 피면 햇살 퍼지듯 봄꽃들이 너도나도 앞다투어 피기 시작한다. 해를 닮은 얼음새꽃이 겨울잠을 자는 다른 봄꽃들에게 희망의 편지를 쓴 건 아닐까? 희망이 가득한 사람은 웃는 모습도 햇살을 닮았다.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둡던 마음이 덩달아 환해진다.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의 첫인상은 밝은 햇살을 보는 듯했다. 며칠 전 책장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메모 하나를 발견했다. `그녀의 웃음은 봄 햇살이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웃음. 그녀의 웃음에는 노란 꽃빛처럼 밝음이 가득하다. 2004년 이른 봄날에` 그녀의 첫인상을 적어 시집 사이에 꽂아 두었던 것이다.그녀를 처음 본 것은 구룡포행 시내버스에서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이 그녀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날은 구룡포에서 문학행사가 있어서 가는 길이었다. 빈 좌석이 많았지만 나는 그녀 곁에 앉았다. 힐끔 곁눈질로 바라본 그녀의 얼굴이 들꽃에 내려앉은 햇살같이 예뻐 보였다. 첫눈에 반했다. 왠지 말을 걸고 싶어 “구룡포 가세요?” 하고 물었다. “예?” 하고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쳐다보더니 “예~”하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 버스 안에서 자기의 행선지를 알고 있는 듯 물었으니 놀랬을 것이다.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으니 얼마나 황당하고 푼수 같아 보였을까. 그녀도 왠지 나와 같은 모임에 갈 것만 같아 대화를 이어갔다. 그녀 또한 문학행사에 가는 길이었다.문학을 매개로 한 우리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살아오면서 첫 만남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던 걸 감안하면 지금도 우리는 그날의 첫 만남을 하늘이 내린 인연이라고 말한다. 버스가 종점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아주 많은 질문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가 서로 동갑내기인 것을 알게 되었고 외모만큼이나 밝고 친절한 그녀는 “우리 앞으로 친구로 지내자”며 손을 내밀었다. 우연치고는 매우 드라마틱하지 않은가.그녀는 늘 따뜻하다. 대화를 할 때는 항상 상대방의 말을 귀 기울여 들으며 햇살처럼 환하게 웃어준다. “그래, 그래” 추임새를 넣을 때는 판소리의 고수 같이 흥에 겹다. 그녀는 `생각이 곧 마음이다` 라는 말을 자주 한다. 사소한 일에도 근심걱정이 늘어지는 나와 달리 그녀는 늘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다.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는 그녀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처럼 모든 일을 다 맡겨버려서인지 그늘이 없다. 그녀는 지혜롭고 현명하다. 가끔 내가 방향을 잃고 판단이 흐려질 때면 그녀를 만나 차를 한 잔 하게 된다. 두어 시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묵은 먼지를 털어 내듯 개운해지는 느낌이다. 그녀를 만나면 늘 긍정의 에너지를 받는다.동갑내기이면서 맏언니처럼 다독여주는 그녀의 마음에서는 맑은 시냇물 소리가 들린다. 물가에 꽃이 피는 건 자연이나 사람이나 매 한가지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오가며 예쁜 웃음꽃을 피우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풀잎과 풀잎을 오가는 따뜻한 햇살 같다. 자주 만나지 못해도 늘 먼저 안부를 물어온다. 기분이 좋아지고 힘나게 하는 말과 글. 자격지심이 심했던 내가 우울감을 극복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긍정적인 생각과 해맑은 웃음 덕분이다.인연을 귀하게 여기는 그녀처럼 나도 사람들에게 그렇게 다가가고 싶다. 내 허물로 인하여 마음을 닫거나 상처받은 이에게 웃는 얼굴로 다가가면 환하게 웃어줄까? 언 땅에 햇살이 내려 움을 틔우고 꽃이 피어나듯 환한 웃음꽃을 피울 수 있다면. 그렇게 초여름 나뭇잎에 내려앉은 햇살처럼 밝고 환한 미소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2017-05-26

사랑의 묘약

▲ 강길수 수필가향긋한 냄새가 명지바람 품에 안겨 와 후각세포를 쿡 파고든다. 도시에선 낯선 향기다. 가까운 곳에 사람이 없으니 화장품 냄새도 아니다. 대체 어디서 날까. 사월 마지막 금요일 출근길. 반 시간 정도 걸어서 운동 겸, 출퇴근을 한 지가 두 해를 바라보고 있다. 광장을 지나 학교 옆 인도를 걷기 시작할 때, 갑작스레 짙은 풀 향기가 온 몸을 감싼 것이다. 어릴 때, 친구들과 차풀이나 자귀나무 잎을 뜯어 손바닥에 몇 번 치고 나서, 코에 대고 냄새를 맡곤 하던 풀냄새 놀이가 파노라마 되어 비춰왔다. 소꼴을 베면서 맡던 농익은 풀 향기도 물안개로 밀려왔다.그랬구나! 가로수 밑에 조성한 잔디밭을 조금 전 깎은 모습이 눈에 나타났다. 잔디가 채 자라기도 전에 바지런하게도 묘 벌초하듯 깎아버린 것이다. 몸 잘린 잔디 잎들이 바람에 나뒹군다. 잡초가 함께 자라서였겠지만, 내가 보기로는 그대로 두는 편이 훨씬 나았을 성 싶다. 간간이 함께 자라 피어난 노란 씀바귀 꽃들이 연록으로 자라는 잔디들과 어우렁더우렁 보기 좋았었다. 때로는 바지런도 탈이다.웬일인지 보름 전쯤 일이 떠올랐다. 퇴근길에 횡단보도 없는 도로를 여느 사람들처럼 건너기 시작했다. 저 쪽에 차가 오기에 습관적으로 뛰었다. 네댓 걸음 뛰었을 때,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왼쪽 무릎부위에서 `뚝`하는 소리가 난 것이다. 순간, `아이쿠, 무릎 버렸구나!` 하는 속말이 가슴을 툭 쳤다. 심한 통증에 주저앉을 뻔 했으니 말이다. 고통을 참고 절뚝거리며 미련스레 집까지 걸어왔다. 괜히 뛰었다고 소용없는 후회를 했다.한의원에서 몇 차례 치료를 받았다. 두 주 이상 지났는데, 삔 무릎 부위가 그전 같지가 않다. 아직 뛰지는 못해도, 큰 고통 없이 치유되고 있어 불행 중 다행이다. 하늘에 고마운 마음이 절로 든다.무릎 삔 생각 때문인지, 깎인 잔디밭이 수액(樹液)을 흘리며 고통 받는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수수께끼들이 연달아 콕콕 마음에 박혔다. `수액은 잔디의 피가 아닌가. 생명체 잔디가 싹둑 잘려, 남은 밑 부분이나 잘려나간 잎과 줄기 모두 피 흘리며 고통 받거나 죽어가고 있다. 졸지에 몸이 두 동강 난 체 피 흘리는 잔디냄새가 무슨 조화(造化)로 이리도 향기로울까` `생나무가 베어질 때의 향기나, 군불을 땐 후 몸에 밴 나무 탄 냄새가 좋게 느껴지던 일들은 또 무슨 연유란 말인가` 하고….사람들은 식품업이나 농축산업, 어업, 공업, 조경, 원예 등 여러 곳에 풀과 나무 곧, 식물을 원재료로 쓴다. 식물로 만든 제품의 향기는 바로 아로마테라피가 아닐까.식물이 고통당하거나, 죽어가며 내는 수액 냄새가 대체 왜 향기로 느껴지는 것일까. 식물을 먹는 인간과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수액 냄새를 향기로 느끼도록 태어난 걸까. 아니면, 식물이 자기를 바칠 때는 수액 냄새를 내도록 마련된 건가.아무튼, 내가 맡아본 수액냄새는 모두가 향기로웠다. 그렇다면, 하늘은 식물의 디엔에이 설계 시에 두 가지의 향을 `사랑의 묘약`으로 처방한 것이 아닌가. 우선, 다른 생명들의 보존과 번창을 위한 사랑의 묘약이 수액의 향이고 다음으로, 식물 자신의 종족 보존과 번창을 위한 사랑의 묘약이 꽃의 향이 되니까.맞아, 사랑의 묘약! 식물이 다른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몸과 지체가 잘리거나 부서지며 흘리는 수액 곧, 피의 냄새는 바로 나를 살리는 사랑의 묘약이었던 게야. 자기 몸을 영양소로 바치며, 사랑의 묘약까지 덤으로 내어 주는 식물의 고마움을 나는 여태 제대로 모르고 살아온 것이다.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고마운 마음으로 식물을 대하고, 감사히 먹고 마시며 살아가야겠다.깎인 잔디향기가 사랑의 묘약으로, 도시의 아침을 밝힌다.

2017-05-19

자연과 기적

▲ 김병래 시조시인신앙의 유무를 막론하고 살아가면서 한 번도 기적을 바란 적이 없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이 불치의 병으로 죽어간다거나 사업에 실패하여 파산지경에 처했다거나 하는 등의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했을 때, 좌절하고 체념하기에 앞서 기적이라도 일어나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어찌 없겠는가. 어떤 일이 상식적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결과를 빚었을 때, 즉 자연의 법칙을 초월하는 일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奇蹟)`이라고 한다. 그리고 기적이라는 것에는 흔히 종교적 의미가 부여되는데, 자연의 질서에 종교적 가치로서의 `성스러움`이 개입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신앙하는 초월자(神)의 능력이 자연법칙의 일부를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신념이 바로 대부분의 종교인들이 표방하는 신앙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럴 리야 없겠지만 가상을 해서, 누가 사고로 손가락 하나를 잃었는데 열심히 기도를 했더니 그게 다시 생겨났다고 한다면 종교인은 물론 무신론자들도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고 비상한 관심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손가락 하나가 그토록 엄청난 기적의 산물이라면, 그 사람의 몸뚱이 전체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것인가. 고작 손가락 하나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기적이요 신의 역사가 아니겠는가. 나의 몸뚱이를 포함한 우주 삼라만상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새로 생겨난 손가락 하나는 대단한 기적이라는 것이 대다수 사람들의 통념이다.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는 것은 예삿일이고 호박이나 참외가 열렸다면 신비요 기적이 되는 것이다.기독교 구약성서에는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여호수아가 태양을 멈추게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기독교인들은 하늘의 태양조차도 멈추게 한 야훼신이 얼마나 위대하고 신령스러우냐고 한다.과연 그런가. 태양이 서쪽에서 뜨고 포도나무에 호박이 열리면 위대하고 신령한 기적인가. 그렇게 뒤죽박죽의 혼란과 무질서가 경외할 기적이란 것인가. 태양이 날마다 지구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은 과연 하나도 놀라울 게 없는 사소한 일인가. 태양을 향한 지구의 기울기가 조금 기울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여름에는 불볕 더위에 허덕이고 겨울에는 온 천지가 얼어붙는 혹한에 떨어야 하면서도 그렇게 말할 수가 있는가. 밤하늘에 밀가루를 뿌린 듯한 은하수가 사실은 태양과 같은 항성(恒星)들이 모여서 성운(星雲)을 이룬 것을 안다면, 천체의 그 일사불란한 운행에 우리가 어찌 무한한 경외감을 갖지 않을 수가 있는가. 그 중 단 하나라도 자리를 이탈해서 태양계로 진입해 온다면 이 지구 따위는 한낱 가랑잎처럼 타버리고 말 것이다.우주 삼라만상의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불가사의요 무궁무진한 신비에 비한다면, 인간들이 기적이네 뭐네 호들갑을 떨어대는 것들이 얼마나 하찮은 병적현상에 불과한 것인가. 손가락 하나가 아니라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다고 한들 그게 뭐 그리 난리를 칠 대수인가.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죽고 태어나는 것이 세상이고 70억 인구가 미어터지게 바글거리는 지구가 아닌가.세상이 혼란하고 인심들이 피폐해질수록 온갖 혹세무민하는 것들이 판을 치게 마련이다. 조잡하고 불순한 것들, 병적이고 지엽말단인 것들에 사로잡혀 세상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는 인생이 얼마나 많은가.산천초목 온통 신록의 광휘에 휩싸인 오월이다. 두어 달 전까지만 해도 얼어붙은 땅에 죽은 듯 앙상하던 나무들이 저토록 생기롭고 찬란한 신록을 피워 내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고 신비인가. 그 중에 사람으로 태어난 나란 존재는 또 얼마나 엄청난 기적의 산물인가. 나를 포함한 삼라만상 모두가 기적이고 신비일진대 쉽사리 좌절하거나 괴로워할 일이 과연 무엇이겠는가.

2017-05-12

눈(目)과 SNS

▲ 김주영 수필가컴퓨터 키보드를 영문설정에 두고 한글로 `눈`을 입력하면 `SNS`가 된다. 눈과 SNS? 참 재밌는 관계이다. SNS(Social Networking Service)는 인터넷 환경과 모바일 환경을 기반에 두고 있다. 상호 관계맺음에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매개체가 된다. 흔히 컴퓨터를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을 컴맹이라 부른다. 맹(盲)도 눈과 관련된 단어가 아닌가. 나는 컴맹이 아니지만 가끔씩 SNS 이용에 둔감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한동안 만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는 경우를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어디에 있었고, 누구와 무엇을 했으며 먹은 음식의 맛은 어떠했는지 등등. 직접 말한 적이 없는데 나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일. 당혹스런 경험을 한번쯤은 해보았을 것이다.얼마 전의 일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이 그날 내가 다녀온 모임과 낮 동안 있었던 행사의 이야기로 안부를 물어왔다. 마치 점쟁이처럼 말이다. 지난 가을부터 서로 바쁘다는 이유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는데 나의 모든 근황을 알고 있었다. 그분은 내 친구와 아는 사이로 서로 페이스북 친구였고, 디지털 인맥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가 쓴 글과 사진을 실시간으로 접하며 나의 생활 대부분을 알고 있었노라 했다.각종 메신저와 인스타그램, 카카오스토리, 페이스북, 카카오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SNS로 연결된 채널을 통해 수많은 정보와 의견이 오고 간다. 개인의 사진과 신상정보를 공개하기도 하고 취미, 관심사 등으로 자신을 알리기도 한다. SNS를 기반으로 형성된 관계망은 미디어를 통한 인간관계의 확장이다. 사건(Events) 활동(Activities) 생각(Ideas) 관심(Interest) 등을 공유하게 된다.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는데도 몇몇의 정보로 개인의 삶을 유추해 볼 수도 있다. 천리안이나 관세음처럼 천 리 밖을 보고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밤하늘의 별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망원경을 만들고 우주의 별을 관측하고 직접 가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옷깃을 스치지 않아도 SNS공간에서는 수많은 인연과 마주친다. 만남과 인연의 관계망에서 타인의 개인정보는 무방비로 노출된다, 수많은 눈들이 SNS라는 공간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SNS게시물은 공개된 창이다. 그 창을 통해서 소통하는 세계는 무한하다. 직접 만나지 않지만 눈으로 보고 만난 듯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 SNS가 발달하고 더 다양해지고 복잡해진 사람사이의 관계망에서는 흔한 일이 되었다. 이런 관계 맺음은 먼 곳에 있는 사람들과의 실시간 소통의 장점도 있지만 악용되었을 때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SNS에 사진을 올릴 때 좀 더 신중해야 할 것 같다.시대 흐름에 뒤떨어지고 원시인 취급을 받더라도 SNS 이용에 둔감해지려는 이유다. 감정과 소통을 숨긴 포커페이스의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색이 짙은 안경을 쓰고 햇빛을 가려서 눈을 보호하듯 SNS 환경에서 타인의 삶도 배려하자. 보여 주는 것과 보여 지는 것. 지혜로운 생각의 눈으로 SNS 활용하자. 스마트폰이 `손에 없으면 불안한 유형에 속하는가` 하고 생각해 볼 만큼 메신저로 친구들과 실시간 소통하고 감성을 공유한다. SNS를 이용해 공간의 경계를 넘어서서 대화한다. 문자 대화의 한계는 재밌는 소재로 구성된 이모티콘을 구매해 감정표현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직접 만나서 대화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며 대화를 하고 감정을 느끼며 마음으로 소통 하는 것. 눈동자를 바라보고 말을 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 사람 마음의 창을 보고픈 것이다.눈은 마음의 창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눈을 먼저 바라본다. 그리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SNS로 만나는 수많은 눈들 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당신의 눈. 무한천공(無限天空)에 가장 빛나는 별, 마주 바라보는 눈이다.

2017-04-28

잔인한 사월

▲ 강길수 수필가사월, 꽃 진 벚꽃꼭지가 핑크빛을 띠고 가로수 가지에 많이도 매달려 있다. 못 다한 청춘의 정열이라도 불태우려는가. 열매 못 맺는 벚꽃꼭지는 가지에서 얼마간 시위하다가 땅의 중력에 의탁하고 말 것이다. 수술이 사십 개 정도나 되는데도 수정을 못했는지, 땅에 떨어진 것이 작년엔 훨씬 많아 보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도시의 땅은 온전한 땅이 아니다. 어떤 것은 보도(步道)에, 어떤 것은 차도에 떨어질 뿐이니까. 바닥에 누운 꼭지는 오가는 이의 발이나 차바퀴에 밟히고 깔리며, 핑크빛 생을 마감하고 말 것이다.처음 핑크빛 벚꽃꼭지를 밟던 때, 발바닥을 통해 전해오던 감각을 잊을 수가 없다. 명지바람이 도톰하게 뿌리고 간 벚꽃 눈을 밟을 때의 부드럽고도, 막막했던 느낌과는 사뭇 다른 무엇 말이다. 막 쌓이기 시작하는 싸락눈 밟을 때의 까칠함에다, 새봄 밝히는 전령사로 하늘가지에서 뽐내던 벚꽃의 화려함을 빼앗긴 애잔함. 세상과 영별하기 위해 보도에 내려앉은 허무함. 말 못할 사연들 간직한 채, 마지막 정열을 불태우는 장렬함까지 느껴지는 발바닥 밑 벚꽃꼭지들의 절박한 소식….시나브로 갈색으로 변해 삭아 바스러지며 빌딩머리에서 내려쏘는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는, 또 다른 모습의 소식으로 나타나리라. 온 세상은 신록으로 짙어가고 녹음방초가 봄을 노래하고 춤추는데, 떨어진 벚꽃꼭지는 이렇게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것이다.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길바닥에서 나에게 말 못할 애잔함 안겨주던 벚꽃꼭지는, 지지리도 팔자가 나쁜가 보다. 쓸모없이 나뒹굴다가 사람 손길 안 닿는 구석진 곳에서 스러지거나, 쓰레기봉투에 담겨 거대한 쓰레기처리장에 묻히거나, 혹은 소각장에서 타버릴 운명이니.가지에 남아 붙어있는 벚꽃꼭지는 씨방이 자라나 버찌가 된다. 어떤 나무는 많이 달리고, 어느 나무는 적게 달린다. 도시 가로수의 버찌는 동양계여서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없단다. 그러니 다 익은 까만 버찌가 보도에 누워 나뒹굴어도 아무도 마음을 두지 않는다. 그저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지난해 봄, 나는 일부러 까맣게 익은 버찌 몇 개를 따 맛을 본 적이 있다. 체리의 새콤한 맛을 기대했으나, 약간 떫고 무덤덤한 맛이 날 뿐이었다. 도회 가로수의 버찌도 지지리도 팔자가 나쁜 것인가. 사람의 먹을거리로는 애초에 글렀고, 보도블록과 아스팔트가 땅을 모조리 덮었으니 묻혀 새 벚나무로 태어나지도 못하며, 새의 먹이로 될 확률도 낮으니 말이다. 한줄기 명지바람이나 이따금 찾아오는 꿀벌에게 선택되어 운 좋게 수정된 버찌. 꿈 부푼 실한 열매로 커 익어도, 도회 가로수 버찌라는 이유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진 가련한 존재.그랬다. 저 벚나무들은 사람의 손에 의해 모종밭에서 나고, 자라나 도시의 도롯가에 옮겨 심어진 것이다. 봄에 한 번씩 꽃 피우면 도시사람들을 즐겁게 할 뿐, 고목되어 꽃이 적어지면 가차 없이 베어내질 숙명이다. 만일 자연 속에 있었다면, 떨어진 벚꽃꼭지나 버찌도 모두 본래의 쓰임새대로 쓰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다른 나무들의 거름이 되거나, 흙에 묻혀 싹터 새 벚나무가 될 테니 말이다. 그러니 도시는, 자연을 거스리기 위해 인간이 지은 잔인한 괴물이다.우리 사회는 어떤가. 아이 소리가 사라져 가고, 심각한 고령화 등 발등의 불이 쌓여 있음은 모두가 아는 진실 곧, 팩트다. 젊은이가 줄어드니 미래는 어두울 뿐이다. 어둠을 밝혀야 할 책임이 큰 사람들은 물론, 많은 이들이 느닷없는 장미대선에 혼을 빼앗겨 심각한 어두움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잔인한 사월이다.사람들이 도시 광장의 선동에 홀려버려, 혼미한 시간만 탕진하고 있는 또 하나의 잔인한 사월….간밤 봄비에 떨어진 보도 위의 벚꽃꼭지를 아삭아삭 밟으며, 나도 이 잔인한 사월을 속절없이 걷고 있다.

2017-04-21

당신들의 세월호

▲ 김병래 시조시인일주일에 한두 번 차를 몰고 31번 국도를 오간다. 왕복 2차선 도로라 제한 속도가 시속 60km 이하다. 하지만 그 규정을 지키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지만 가급적이면 70km는 넘지 않으려고 조심을 한다. 그런 나를 비웃는 듯 다들 잘도 추월을 해간다. 침몰한 지 삼 년 만에 흉물스런 모습으로 인양된 세월호가 우리 모두에게 묻고 있다. 그 동안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느냐고.사건 발생 후 자취를 감추었던 청해진 해운의 실세인 유병언은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침몰하는 배에 승객들을 남겨둔 채 저들만 살겠다고 빠져나온 선장과 항해사, 그리고 인명구조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은 해경의 정장 등은 유죄 선고를 받고 복역 중이다. 한편으론 무능하고 부실한 정부를 규탄하고 사건의 진상을 밝히라는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그 여파로 당시의 대통령도 다른 죄목이긴 하지만 탄핵을 당해서 지금은 구속이 된 채 수사를 받고 있다.부분적으로 미진한 데가 없지는 않겠지만 이로써 사건의 전모는 거의 드러난 셈이고 주요 책임자들도 처벌을 받았다.그랬다고 죽은 사람들이 살아 돌아올 리는 없지만 어쩌겠는가, 이쯤에서 수습을 하고 다시는 이 같은 참상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만반의 조치를 취하는 것이 남은 과제가 아니겠는가.해운사의 경우 돈보다는 인명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기본에 충실하고, 만약에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신속정확하게 대처할 수 있는 매뉴얼을 평소에 충분히 숙지하고 수시로 훈련을 할 것이며, 관계 당국은 엄정한 감시와 감독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하고, 국민안전처 역시 각종 재난이나 사고에 대비하여 철저하고도 체계적인 매뉴얼을 확립하고 유사시에 차질이 없도록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을 갖출 것 등이다.세월호가 주는 가장 큰 교훈은 그것이 기업이나 정부의 한두 사람의 과오나 실수로 빚어진 참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이고 총체적인 병폐의 일각이었다. 사회 전반에 만연된 탐욕과 이기심, 불법과 비리와 사고에 대한 불감증이 고쳐지지 않는 한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인재(人災)라는 것이다.사건의 책임자들과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에 수많은 민중이 참여하고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노란 리본을 옷깃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래서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느냐는 질문 대해서는 선뜻 내 놓을 것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어느 기자가 말했다. 노란 리본을 달고도 교통법규조차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것이 오늘 우리의 민낯이라고.세월호 참변에 대해 슬퍼하고 분노하고 규탄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신들의 세월호`에 대해서이다.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우려는 있어도 자신이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세월호 사고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우리나라 교통사고 사망자 수가 연간 5천명에 가까워 선진국의 두 배가 넘는다고 한다. 매년 세월호 같은 참사가 15건 이상 발생하는 것과 같은 수치다. 그 사망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숨이 세월호 희생자들의 목숨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물론 자신의 잘못으로 사고를 내고 사망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때문에 억울하고 무고하게 목숨을 잃은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누구라도 운전대를 잡고 교통법규를 위반하는 난폭운전을 자행하는 순간에는 `세월호`의 선장이 되는 것이다. 그로 인해 날마다 십 수 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세월호의 경우와 얼마나 다른가. 비단 운전자들뿐이겠는가. 사회 곳곳에서 온갖 비리와 불법을 일삼고 조장하거나 묵인하는 사람들 역시도 제2 제3의 세월호 사건의 가담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우리 모두가 각자의 삶이라는 세월호의 선주이자 선장이 아니겠는가.

2017-04-14

봄볕, 아름다운 날

▲ 김주영 수필가봄볕에 잠깐 졸았다.깨어보니 미래의 어느 날 아침이다. 칼로리를 정확하게 계산한 요리를 먹었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사라지고 사람들은 마음과 감성을 파악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로봇과 함께 생활을 한다. 나도 최첨단 `감성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과 생활을 한지 6년이 되었다. 오늘은 `DRY100극복프로젝트`수업을 듣는 날이다. DRY100극복프로젝트는 DRY100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이 듣는 감정생성치료수업이다.이 바이러스는 로봇에 의해 편리한 생활을 하면서 생긴 병이다. 모든 생각과 고민을 로봇이 대신해주기에 감정변화에 문제가 생겨서 세포가 죽고 체액이 마르는 것이다.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어떤 진화도 할 수 없다. 감염된 후 백일 내에 눈물을 흘리면 이 병은 완치가 된다. 이 수업은 오랜 연구 결과 끝에 만들어진 바이러스 치료 프로그램이다. 눈물이 최고의 특효약이며 유일한 치료법이다. 지난 수업에는 나를 제외한 모든 참석자가 눈물을 흘렸기에 이번 수업은 나 혼자 듣는다.오늘은 NO-1004-POEM-LEARNING 백신로봇이 강연을 한다. 세계최고의 과학자들이 49일 만에 업그레이드해 완성시켰다. 지금까지 바이러스 감염된 사람들이 모두 치료가 되었기에 더 이상 업그레이드가 필요하지 않았다. 10년 만에 새로운 버전의 백신로봇이 만들어진 셈이다. 나는 오늘 꼭 울어야 한다. 이번 강의를 듣고도 울지 못하면 나는 약으로 버티다가 열흘 후에 사라진다. 내 몸에 남아 있는 감정들이 모두 말라서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아직은 병원에서 처방해주는 약으로 버티고 있지만, 이 약도 백일이 지나면 효과가 없다. 내가 존재할 수 있는 날은 열흘밖에 없다.기계의 발전으로 생활은 편리해지고 그 편리함에 인간의 감각들이 퇴화되는 상상을 해보았다. 인공지능(AI)이 발전한다면 비현실적인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다. 과거 공상과학 영화에서 상상했던 인공지능(AI)이 우리의 현실 깊숙이 파고들고 인간과 기계와의 소통방법은 진화되어가고 경계는 무너지고 있다.인공지능은 다양한 정보통신기술(ICT)과 결합돼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내고 있다. 인공지능 인터페이스 기술 개발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사람의 마음과 감성을 파악하는 감성인공지능까지 개발을 하는 IT기업들도 늘어나고 있다. 필요에 의해서 만든 로봇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기계에 인간의 목숨마저 종속되는 막막한 시대가 오지 않을 것이라 확신을 할 수는 없다.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고가 바둑에서 이세돌 9단을 이겼다. 알파고의 승리로 인공지능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본다. 인간의 감정처럼 규칙을 찾기 힘든 `비정형 데이터`들을 분석해 차가운 인공지능이 아닌, 따뜻한 감성을 가진 인공지능을 개발을 한다고 한다. 인간의 감각과 감성(感性)같은 수많은 데이터를 분석한 인공지능로봇이 감정(感情)을 대신할 수 있을까? 감정의 변화가 심하면 문제가 되듯 느끼지 못해도 큰문제이다. 인간의 고유한 감정은 이론적 데이터분석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인공신경망을 기반으로 프로그램 스스로 데이터를 분석하고 학습하고 탐색하고 추론 능력을 갖춘 로봇이 만들어져도 감정까지 생산해 낼 수는 없다. 감정은 무엇인가? 감정은 인간의 고유한 창조의 산물이다. 감정은 외부적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보다 더 신비로운 것은 인간의 내면의 그 어딘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좋은 눈물을 흘리고 나면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은 슬픔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을 없애주기 때문이다. 눈물은 인간이 만드는 최고의 보약이며 감정의 표현의 보석이다.울지 못해 죽어야 하는 미래의 현실에서 따뜻한 봄볕아래 다시 돌아왔다. 며칠 전부터 창밖 목련이 온 힘을 다해 꽃등을 환히 밝힌다.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답다. 그대도 이 아름다운 봄 햇살에 눈물이 나는가?

2017-04-07

하늘빗자루

▲ 강길수 수필가온 거리가 다르다. 누군가 손을 본 모양이다. 삼월 초열흘 출근길. 대로와 골목길을 한참 걸어가도 역시 전과 다르다. 어떤 손길이 이랬을까.잠시 후, `오, 그랬구나`하고 혼잣말이 나왔다. 이틀 전 아침 출근길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광장 횡단보도를 걷는데, 몸이 날아갈 듯 강한 소소리바람이 불었다. 모자를 손으로 잡으며, `웬 꽃샘바람이 폭풍 같지?`하고 투덜거렸다. 큰 건물 모서리를 지날 때는 휴지, 비닐봉지 등 쓰레기와 먼지가 함께 날아오르며 눈 속에 티가 들어가기도 했다. 다음날 아침에도 조금 약해진 꽃샘바람이 여전히 불었다.삼일 째 되는 오늘 아침. 차도는 물론 인도, 골목길, 가로수 아래 잔디밭도 깨끗이 청소가 되어 있는 게 아닌가. 기분이 좋다. 사람이 이렇게 먼지도 없이 청소하려면 많은 일꾼이 붙어도 힘들게다. 웬일인지 담배 피우며 걸어가는 이도 없다. 담배냄새가 싫어 일부러 멀찍이 떨어져 가거나 돌아가곤 했었다. 덕분에 상쾌한 출근길이다.그랬다. 먼지하나 없이 거리를 청소한 손길은 센 꽃샘바람이었다. 사람들이 무시로 거리를 더럽히니, 봄맞이에 거슬려 하늘이 직접 나섰나보다. 폭풍 같은 소소리바람을 내 뿜는 하늘빗자루를 보내 온 거리를 말끔히 쓸어갔으니 말이다.사람들은 꽃샘바람이 봄을 시샘하여 분다고 한다. 시샘은 상대를 부러워 시기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그러니 꽃샘바람이 바로 봄맞이바람이 된다. 하늘은 시샘, 거짓, 꾀 같은 것들은 외면하지만 스스로 깨끗이 하는 힘은 행사한다.출퇴근길에 두 주택가 공원 곁을 걸어서 오간다. 한 공원은 언제나 깨끗하다. 다른 한 공원은 날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사람들이 버린 꽁초, 휴지조각, 비닐봉지, 커피잔 같은 쓰레기가 이곳저곳에 버려져 볼 때마다 지저분하다. 처음에는 한 곳은 사람들이 거의 안 오고, 다른 한 곳은 많이 오기에 그런 줄로 생각했다. 여러 날이 가고 계절이 바뀌면서 진실이 눈앞에 나타났다.깨끗한 공원에는 한 노부부, 특히 할아버지가 꾸준히 공원을 돌보고 계셨다. 말없이 쓰레기를 치우고, 잡초도 뽑아내셨다. 거의 매일, 자기 집이다시피 돌보니 실상 하루에 할 일의 양은 그리 많지는 않았다. 공원에 오는 이들은 그분들 덕분에 쾌적한 공간에서 몸과 마음을 쉬고, 새 힘을 얻어간다 싶었다. 한두 사람의 묵묵한 봉사가 많은 이들을 기쁘고 행복하게 한다는 사실이 갈수록 크게 다가왔다.반면, 지저분한 공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쉬거나 놀고 또, 운동을 하면서도 공원에는 관심 없어 보였다. 아이러니하게, 봄부터 가을까지 지자체가 운영하는 청소팀이 아침에 모이는 장소이기도하다. 모임에서 그날 청소구역을 의논, 정하고 출발하는 곳이다. 그런데도 꽁초와 휴지조각 같은 것들이 이곳저곳 널브려져 있다. 큰 것만 대충 줍기 때문이다. 이 공원을 지날 때는 언제나 마음 한구석이 언짢았다.하루에 두 번씩 두 공원을 지나는 나는 그때마다 행, 불행 사이를 오가는 기분이다. 아침에는 기쁨 뒤에 슬픔, 저녁에는 슬픔 뒤에 기쁨의 순서다. 오늘 퇴근길에, 두 공원이 요즈음 우리 사회를 닮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며 공원을 쳐다보는 길은 침묵하는 다수이고, 깨끗한 공원은 사회 저변에서 노부부처럼 말없이 봉사하는 사람들이며, 지저분한 공원은 이성(理性)과 결별하고 진실을 외면한 감성의 선동과 탈판에 최면 당해버린 지도층들이다 싶었다.그러자, 침묵하는 다수가 이젠 두 공원을 강 건너 불 보듯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마음을 내려쳤다. 지저분한 공원이 깨끗한 공원으로 되도록, 침묵하는 다수가 나서야 하지 않느냐고 연이어 물어 왔다. 내 마음은 저절로 답하였다.`침묵하는 다수가 하늘빗자루가 되어 삿된 것들을 쓸어내고, 선거 때 노부부 같은 일꾼들을 꼭 뽑아야 한다`고….

2017-03-31

들길을 걸으며

▲ 김병래 시조시인들길을 걷는다. 한차례 꽃샘추위가 지나가고 성큼 다가선 봄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들녘에는 미처 퇴각하지 못한 겨울의 잔병들을 몰아내며 봄의 혁명군들이 진군해 오고 있다. 적진 깊숙이 침투해서 은밀하게 게릴라전을 펼치던 냉이꽃 봄까치꽃 광대나물꽃들이 이제는 승리의 환희로 본대를 맞고 있다. 아아, 불가항력으로 봄이 진군해 와서 구악과 폐습을 무찌르고 눈부시게 찬란한 새 천지를 열고 있다. 언제나 한결같이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해마다 새롭게 거듭나는 들판은 오랜 세월 우리 삶의 터전이었고 자자손손 핏줄을 이어오게 한 젖줄이었다. 이 땅에 태어나서 이 들녘에서 생을 다 소진하고 다시 땅으로 돌아간 무수한 우리네 조상들의 살과 피와 땀과 한숨과 눈물이 뒤섞인, 그야말로 땅과 사람이 하나로 뒤엉킨 신토불이의 장(場)이었다. 언제 만나도 한결같이 반갑고 만날수록 정이 더 깊어지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들판과 같은 마음을 가졌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들길을 걷는 마음은 한가롭다. 비록 사는 일이 옹색하고 힘겨울지라도 들길을 걷는 동안은 다소간의 여유와 평안을 얻을 수가 있었다. 불가에서는 행선(行禪)이라는 말도 있지만 나에게도 오랜 세월 들길을 걷는 것이 옛 사람들이 말한 일종의 도(道)의 수행이요 공부였던 것 같다.들길을 걷고 또 걷는 것으로 고통과 좌절과 슬픔을 견디고 이겨낼 위로와 힘을 얻고, 얽히고설킨 삶의 매듭들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도 했었다.아무리 넓은 들이라도 경계가 있고 제각각 그 소유자가 있어서 사고 팔기도 하지만 그런 것으로는 결코 소유할 수 없는 무한한 것들이 들에는 있다. 논과 밭의 주인들이야 소유권의 대가로 얼마간의 곡물이나 돈을 쥘 수는 있겠지만 그 이상을 소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잠시 머물렀다 가는 인생의 주제에 자연의 일부를 소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소로운 오만이고 착각인가. 들에는 사람들이 소유권을 주장하거나 수확해 갈 수 없는 풍성한 계절이 있고 찬란한 생명의 잔치가 있다. 누구나 언제라도 동참할 수는 있으나 개인의 소유로 할 수는 없는 것들이다. 그러니 들은 날마다 들길을 걷는 사람의 몫이고, 들길을 걷는 것만으로 세상 부러울 게 없는 부자일 수가 있는 것이다.들길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길이다. 농부들도 이제는 신명이 나서 들길을 오갈 일이 없겠지만 나처럼 어슬렁대며 들길을 걷는 것도 분명 시대에 맞지 않는다. 더 빨리 앞서가고 더 많이 차지하는 것만이 이기고 살아남는 길이 되어버린 치열한 경쟁의 시대에 한가하게 들길이나 걷는 것이 무슨 경쟁력이 되겠는가. 하지만 그런 욕심과 강박증으로는 얻을 수 없는 보다 소중하고 무한한 것들이 들에는 있는 것이다.봄이 오고 있다. 아무것도 애쓰고 보태지 않아도 때가 되면 저절로 찾아오는 봄이다. 누가 욕심을 내서 싹쓸이를 하거나 쇼핑백에 채워갈 수는 없는 봄이다. 누구에게나 무상으로 주어지는 봄이지만 누구에게나 다 같은 봄은 아니다. 재물이나 권력에 골몰하는 자들의 봄과 한가로이 들길을 거니는 사람의 봄이 어찌 같을 수가 있겠는가. 대통령 탄핵이라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로 어수선해진 시국에 한가롭게 봄타령이 다 무엇이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하기 전에도 봄은 있었고 인류가 멸종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오는 것이 봄이다.뭐가 어쨌거나 이 봄 내 재산 목록 일호는 바로 봄이다. 이 봄의 햇볕과 바람과 만물이 소생하는 들녘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산이다. 누구하고 소유권을 놓고 시비를 할 필요도 없고 욕심을 내서 퍼 담을 필요도 없다. 권력의 빈자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편을 갈라 이전투구 하는 사람들에게는 부질없고 무기력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격앙되고 소란한 세상일수록 오히려 이만치 물러서서 한가롭게 들길이라도 걸어보는 여유와 방심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2017-03-24

봄과 꽃

▲ 김주영 수필가코끝을 스치는 바람이 차갑지만 상쾌하니 좋다. 봄바람이다. 기온이 많이 올랐는지 멀리 공터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매화가지는 푸른 하늘에 곱게 꽃수를 놓아 허공의 침묵을 깨우며 환하게 웃는듯하다. 한낮의 햇볕이 좋아서 좀 걷기로 했다. 겨우내 걸치고 다니던 외투가 갑자기 무겁고 칙칙하게 느껴진다. 봄옷으로 갈아입어야지 마음먹으면서도 아침 기온이 쌀쌀해서 하루만 더, 하루만 더하며 미루다 오늘도 두꺼운 겨울옷을 입고 외출을 하게 되었다.꽃샘추위에 꽃들이 피는 것을 보면서 봄이 왔음을 안다. 양지바른 곳에 피어있는 노란 꽃에 눈길이 머문다.영춘화(迎春花)다. 한자이름을 풀어보면 `봄맞이 하는 꽃`이라는 뜻을 가졌다. 언뜻 개나리와 닮았으나 꽃피는 시기가 개나리보다는 좀 이르다. 노란빛에 마음이 설렌다. 잎보다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처럼 봄이 옴을 알려주는 꽃이다. 겨울의 혹한 속에도 노란꽃을 피워낸 영춘화가 대견하다. 잎도 없는 마른가지 끝에 핀 꽃을 보면서 봄이 왔음을 새삼 느낀다. 느긋하게 봄을 느끼며 `봄`에 대하여 생각해본다.맨 처음 누가 계곡의 얼음물이 녹고, 꽃이 피고, 싹이 돋는 이맘때를 봄이라 부르기 시작했을까?봄에는 천지사방 볼 것들로 넘친다. 봄에 피는 꽃들은 다양하고 화사하다. 해마다 찾아오는 봄이지만 늘 새롭고 설렌다. 많은 것들을 보라고 `봄`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들은 적이 있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물론 그 어떤 국어사전을 뒤져도 나오지 않는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겠지만 아마 봄은 `보다`라는 동사에서 생겨났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바라보고 인식되어지면서 존재함을 느낀다. 꽃을 바라보며 봄이 왔음을 새삼 느끼는 것처럼 사물이든 사람이든 서로 바라볼 때라야 비로소 그 존재를 새롭게 알게 된다.`봄-보다` `보다-봄`이라고 쓰고 읽어보니, 오랫동안 보지 못하고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그리운 얼굴들이 꽃처럼 피어난다. 이름들을 불러본다. 자연의 시간에서는 피는 꽃을 보면서 겨울이 지나 새봄이 오는 것을 느끼지만, 인연의 시간에는 언제가 봄일까? 설레듯 서로를 바라보는, 그 첫 순간이 아닐까?어느 한 존재가 일방적으로 한 존재를 바라보는 것은 진정한 `봄(見)`이 아니다. 서로 마주보아야 봄이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눈을 마주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인연의 시작이며 제대로 된 `봄(見)`이다. 그렇다고 모든 만남이 봄(春)처럼 활짝 꽃을 피우는 것은 아니다. 봄기운처럼 따스한 눈길로 자주 보아야 마음이 활짝 열리는 것이다.따뜻한 사람들과의 만남은 늘 설렌다. 그런 설렘은 오래된 만남 일수록 더 깊고 진한 향기의 꽃이 핀다. 살아가면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처음 만났을 때는 서로 `봄(바라봄)`의 과정을 거친다. 본격적인 탐색단계인 셈이다. 하지만 그 단계를 지나고 나면 `봄`은 한층 깊어간다. 사람이 사람을 안다는 것은 수없이 많은 `봄`을 필요로 한다. 첫인상에서 그 사람을 다 알 수 없듯이 자주보고 만남으로써 서로를 알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이해하고 나아가 서로 사랑하게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연은 인간에게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 귀한 봄의 선물이 된다.따뜻한 봄에는 꽃들이 활짝 핀다.자연의 시간이든 인연의 시간이든 살아가면서 `봄`을 잃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꽃샘추위를 이기고 저마다 가장 고결한 꽃을 피우는 봄꽃의 마음을 배우고 싶다.다시는 볼 수 없는 지난 `봄`도 있지만 내가 노력하면 다시 찾을 수 있는 `봄`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매순간 `봄`을 잃지 않는다면 세상은 분명 봄꽃이 만발할 것이다. 가장 귀한 봄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그 봄에는 가장 귀한 꽃이 핀다.

2017-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