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길수 수필가보도블록 위를 걸을 때는, 조심하는 버릇이 있다. 먹이 찾아 헤매는 작은 생명체를 밟지 않기 위함이다. 언제부터 생긴 버릇인지 꼭 집어 말할 수는 없다. 어린 시절 한 여름날, 산에 소 먹이러 갔다가 소나무 아래 누워 단잠이 든 적이 있다. 그 작은 생명체가 온 몸을 탐험이라도 하는지, 사타구니까지 기어들어가 다니며 간지럽히는 바람에 꿀잠을 깼다. 다행이도 물거나 쏘는 종(種)이 아니어서 툴툴 털고 일어났다.중년기에 생명과 생태계에 더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 어느 날, 인도를 걷는데 웬일인지 보도블록 위를 바지런히 돌아다니는 작은 생명이 새롭게 눈에 보였다. 그전에도 숱하게 보았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다시 말하면, 그날 비로소 관심이 가게 된 것이다. 환경 분야에 오래 일한 경험으로 비롯된 생태계에 대한 애정과 종교적 취향, 문학에 대한 미련 같은 마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 싶다. 그 작은 생명은 바로, 개미였다.산골에서 자라나며 개구쟁이 친구들과 밖에서 어울려 놀 때는, 개미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었다. 가재, 개구리, 뱀, 새, 물고기 같은 비교적 작고 자주 만나는 동물이 바깥 놀이의 주 대상이었다. 또, 잠자리, 나비, 매미, 풍뎅이, 하늘소 같은 잡기 어려운 곤충들도 장난감으로 삼은 존재들이었다.그러던 개미가 세월이 많이 흐른 어느 날, 마음에 새롭게 자리 잡았다. 어릴 때 보던 개미와 같은 것인데, 다르게 다가온 것이다. 보도블록 위를 기어다니면 언제 사람의 발에 밟혀 죽을 줄도 모르는데, 먹이 찾아 헤매는 개미가 꼭 굶주린 하이에나였다. `저렇게 바지런히 먹이 찾아다니다가 느닷없이 내 발에 밟힌다면, 저 개미의 한 생은 얼마나 슬프고 허무할까`하는 생각이 화살같이 가슴에 박혔다.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날 자연 속에서 놀이의 대상이든 아니든 동물이나 곤충들과 함께 자란 세대는 산업화, 도시화 이후의 장난감세대 어린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을 누렸다 싶다. 그 축복의 내용은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세상은 사람만 사는 게 아니라 나무, 풀, 곤충, 동물 등 식물과 동물, 인간이 어우러져 산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자라난 것이 그 첫째다. 둘째는, 사람과 사람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에도 함께 걸어가야만 할 어떤 길이 있다는 사실을 체득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생명체들에겐 일어날 수 있다는 현실을 바라보며 산 일이 그 셋째다. 끝으로, 자기 삶은 어떤 모습으로든 스스로 책임지고, 참으며 살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인간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정의한다.그렇다면, 영장답게 살아왔고, 살며, 또 살아가야한다는 말이 된다. 현대까지 물질문명사회를 이루어 오는 동안,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니까 자연생태계를 마음대로 개발하고, 취하고 쓰는 것을 당연시 해왔다 싶다. `기후변화, 온난화, 자원고갈, 자연의 보복, 지구의 악질 바이러스 인간` 같은 용어들이 등장하면서 생태계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지구촌 일반 시민들의 소비 생활은 별반 달라지지 않아 보인다.물, 화석연료, 전력, 세제(洗劑) 같은 일상 소비생활에서 나부터 소비를 줄이는 방법을 찾아 실천하는 등 친환경생활로 개인의 삶을 바꾸는 일이 요구된다. 로하스나 슬로우 시티 같은 삶을 사는 일부 사람들에서 그 본(本)을 보듯, 생명 하나하나를 소중히 다루는 `생태계사랑`이 지구촌 모든 정부들의 정책으로 채택, 수행되어야 한다는 자각이 갈수록 커진다.우선 보도블록 위를 걷는 사람들부터, 굶주린 하이에나 같이 헤매는 개미를 밟지 않도록 조심할 일이다.
2017-0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