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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눈(目)과 SNS

▲ 김주영 수필가컴퓨터 키보드를 영문설정에 두고 한글로 `눈`을 입력하면 `SNS`가 된다. 눈과 SNS? 참 재밌는 관계이다. SNS(Social Networking Service)는 인터넷 환경과 모바일 환경을 기반에 두고 있다. 상호 관계맺음에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매개체가 된다. 흔히 컴퓨터를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을 컴맹이라 부른다. 맹(盲)도 눈과 관련된 단어가 아닌가. 나는 컴맹이 아니지만 가끔씩 SNS 이용에 둔감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한동안 만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는 경우를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어디에 있었고, 누구와 무엇을 했으며 먹은 음식의 맛은 어떠했는지 등등. 직접 말한 적이 없는데 나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일. 당혹스런 경험을 한번쯤은 해보았을 것이다.얼마 전의 일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이 그날 내가 다녀온 모임과 낮 동안 있었던 행사의 이야기로 안부를 물어왔다. 마치 점쟁이처럼 말이다. 지난 가을부터 서로 바쁘다는 이유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는데 나의 모든 근황을 알고 있었다. 그분은 내 친구와 아는 사이로 서로 페이스북 친구였고, 디지털 인맥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가 쓴 글과 사진을 실시간으로 접하며 나의 생활 대부분을 알고 있었노라 했다.각종 메신저와 인스타그램, 카카오스토리, 페이스북, 카카오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SNS로 연결된 채널을 통해 수많은 정보와 의견이 오고 간다. 개인의 사진과 신상정보를 공개하기도 하고 취미, 관심사 등으로 자신을 알리기도 한다. SNS를 기반으로 형성된 관계망은 미디어를 통한 인간관계의 확장이다. 사건(Events) 활동(Activities) 생각(Ideas) 관심(Interest) 등을 공유하게 된다.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는데도 몇몇의 정보로 개인의 삶을 유추해 볼 수도 있다. 천리안이나 관세음처럼 천 리 밖을 보고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밤하늘의 별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망원경을 만들고 우주의 별을 관측하고 직접 가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옷깃을 스치지 않아도 SNS공간에서는 수많은 인연과 마주친다. 만남과 인연의 관계망에서 타인의 개인정보는 무방비로 노출된다, 수많은 눈들이 SNS라는 공간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SNS게시물은 공개된 창이다. 그 창을 통해서 소통하는 세계는 무한하다. 직접 만나지 않지만 눈으로 보고 만난 듯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 SNS가 발달하고 더 다양해지고 복잡해진 사람사이의 관계망에서는 흔한 일이 되었다. 이런 관계 맺음은 먼 곳에 있는 사람들과의 실시간 소통의 장점도 있지만 악용되었을 때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SNS에 사진을 올릴 때 좀 더 신중해야 할 것 같다.시대 흐름에 뒤떨어지고 원시인 취급을 받더라도 SNS 이용에 둔감해지려는 이유다. 감정과 소통을 숨긴 포커페이스의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색이 짙은 안경을 쓰고 햇빛을 가려서 눈을 보호하듯 SNS 환경에서 타인의 삶도 배려하자. 보여 주는 것과 보여 지는 것. 지혜로운 생각의 눈으로 SNS 활용하자. 스마트폰이 `손에 없으면 불안한 유형에 속하는가` 하고 생각해 볼 만큼 메신저로 친구들과 실시간 소통하고 감성을 공유한다. SNS를 이용해 공간의 경계를 넘어서서 대화한다. 문자 대화의 한계는 재밌는 소재로 구성된 이모티콘을 구매해 감정표현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직접 만나서 대화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며 대화를 하고 감정을 느끼며 마음으로 소통 하는 것. 눈동자를 바라보고 말을 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 사람 마음의 창을 보고픈 것이다.눈은 마음의 창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눈을 먼저 바라본다. 그리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SNS로 만나는 수많은 눈들 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당신의 눈. 무한천공(無限天空)에 가장 빛나는 별, 마주 바라보는 눈이다.

2017-04-28

잔인한 사월

▲ 강길수 수필가사월, 꽃 진 벚꽃꼭지가 핑크빛을 띠고 가로수 가지에 많이도 매달려 있다. 못 다한 청춘의 정열이라도 불태우려는가. 열매 못 맺는 벚꽃꼭지는 가지에서 얼마간 시위하다가 땅의 중력에 의탁하고 말 것이다. 수술이 사십 개 정도나 되는데도 수정을 못했는지, 땅에 떨어진 것이 작년엔 훨씬 많아 보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도시의 땅은 온전한 땅이 아니다. 어떤 것은 보도(步道)에, 어떤 것은 차도에 떨어질 뿐이니까. 바닥에 누운 꼭지는 오가는 이의 발이나 차바퀴에 밟히고 깔리며, 핑크빛 생을 마감하고 말 것이다.처음 핑크빛 벚꽃꼭지를 밟던 때, 발바닥을 통해 전해오던 감각을 잊을 수가 없다. 명지바람이 도톰하게 뿌리고 간 벚꽃 눈을 밟을 때의 부드럽고도, 막막했던 느낌과는 사뭇 다른 무엇 말이다. 막 쌓이기 시작하는 싸락눈 밟을 때의 까칠함에다, 새봄 밝히는 전령사로 하늘가지에서 뽐내던 벚꽃의 화려함을 빼앗긴 애잔함. 세상과 영별하기 위해 보도에 내려앉은 허무함. 말 못할 사연들 간직한 채, 마지막 정열을 불태우는 장렬함까지 느껴지는 발바닥 밑 벚꽃꼭지들의 절박한 소식….시나브로 갈색으로 변해 삭아 바스러지며 빌딩머리에서 내려쏘는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는, 또 다른 모습의 소식으로 나타나리라. 온 세상은 신록으로 짙어가고 녹음방초가 봄을 노래하고 춤추는데, 떨어진 벚꽃꼭지는 이렇게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것이다.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길바닥에서 나에게 말 못할 애잔함 안겨주던 벚꽃꼭지는, 지지리도 팔자가 나쁜가 보다. 쓸모없이 나뒹굴다가 사람 손길 안 닿는 구석진 곳에서 스러지거나, 쓰레기봉투에 담겨 거대한 쓰레기처리장에 묻히거나, 혹은 소각장에서 타버릴 운명이니.가지에 남아 붙어있는 벚꽃꼭지는 씨방이 자라나 버찌가 된다. 어떤 나무는 많이 달리고, 어느 나무는 적게 달린다. 도시 가로수의 버찌는 동양계여서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없단다. 그러니 다 익은 까만 버찌가 보도에 누워 나뒹굴어도 아무도 마음을 두지 않는다. 그저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지난해 봄, 나는 일부러 까맣게 익은 버찌 몇 개를 따 맛을 본 적이 있다. 체리의 새콤한 맛을 기대했으나, 약간 떫고 무덤덤한 맛이 날 뿐이었다. 도회 가로수의 버찌도 지지리도 팔자가 나쁜 것인가. 사람의 먹을거리로는 애초에 글렀고, 보도블록과 아스팔트가 땅을 모조리 덮었으니 묻혀 새 벚나무로 태어나지도 못하며, 새의 먹이로 될 확률도 낮으니 말이다. 한줄기 명지바람이나 이따금 찾아오는 꿀벌에게 선택되어 운 좋게 수정된 버찌. 꿈 부푼 실한 열매로 커 익어도, 도회 가로수 버찌라는 이유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진 가련한 존재.그랬다. 저 벚나무들은 사람의 손에 의해 모종밭에서 나고, 자라나 도시의 도롯가에 옮겨 심어진 것이다. 봄에 한 번씩 꽃 피우면 도시사람들을 즐겁게 할 뿐, 고목되어 꽃이 적어지면 가차 없이 베어내질 숙명이다. 만일 자연 속에 있었다면, 떨어진 벚꽃꼭지나 버찌도 모두 본래의 쓰임새대로 쓰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다른 나무들의 거름이 되거나, 흙에 묻혀 싹터 새 벚나무가 될 테니 말이다. 그러니 도시는, 자연을 거스리기 위해 인간이 지은 잔인한 괴물이다.우리 사회는 어떤가. 아이 소리가 사라져 가고, 심각한 고령화 등 발등의 불이 쌓여 있음은 모두가 아는 진실 곧, 팩트다. 젊은이가 줄어드니 미래는 어두울 뿐이다. 어둠을 밝혀야 할 책임이 큰 사람들은 물론, 많은 이들이 느닷없는 장미대선에 혼을 빼앗겨 심각한 어두움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잔인한 사월이다.사람들이 도시 광장의 선동에 홀려버려, 혼미한 시간만 탕진하고 있는 또 하나의 잔인한 사월….간밤 봄비에 떨어진 보도 위의 벚꽃꼭지를 아삭아삭 밟으며, 나도 이 잔인한 사월을 속절없이 걷고 있다.

2017-04-21

당신들의 세월호

▲ 김병래 시조시인일주일에 한두 번 차를 몰고 31번 국도를 오간다. 왕복 2차선 도로라 제한 속도가 시속 60km 이하다. 하지만 그 규정을 지키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지만 가급적이면 70km는 넘지 않으려고 조심을 한다. 그런 나를 비웃는 듯 다들 잘도 추월을 해간다. 침몰한 지 삼 년 만에 흉물스런 모습으로 인양된 세월호가 우리 모두에게 묻고 있다. 그 동안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느냐고.사건 발생 후 자취를 감추었던 청해진 해운의 실세인 유병언은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침몰하는 배에 승객들을 남겨둔 채 저들만 살겠다고 빠져나온 선장과 항해사, 그리고 인명구조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은 해경의 정장 등은 유죄 선고를 받고 복역 중이다. 한편으론 무능하고 부실한 정부를 규탄하고 사건의 진상을 밝히라는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그 여파로 당시의 대통령도 다른 죄목이긴 하지만 탄핵을 당해서 지금은 구속이 된 채 수사를 받고 있다.부분적으로 미진한 데가 없지는 않겠지만 이로써 사건의 전모는 거의 드러난 셈이고 주요 책임자들도 처벌을 받았다.그랬다고 죽은 사람들이 살아 돌아올 리는 없지만 어쩌겠는가, 이쯤에서 수습을 하고 다시는 이 같은 참상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만반의 조치를 취하는 것이 남은 과제가 아니겠는가.해운사의 경우 돈보다는 인명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기본에 충실하고, 만약에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신속정확하게 대처할 수 있는 매뉴얼을 평소에 충분히 숙지하고 수시로 훈련을 할 것이며, 관계 당국은 엄정한 감시와 감독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하고, 국민안전처 역시 각종 재난이나 사고에 대비하여 철저하고도 체계적인 매뉴얼을 확립하고 유사시에 차질이 없도록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을 갖출 것 등이다.세월호가 주는 가장 큰 교훈은 그것이 기업이나 정부의 한두 사람의 과오나 실수로 빚어진 참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이고 총체적인 병폐의 일각이었다. 사회 전반에 만연된 탐욕과 이기심, 불법과 비리와 사고에 대한 불감증이 고쳐지지 않는 한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인재(人災)라는 것이다.사건의 책임자들과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에 수많은 민중이 참여하고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노란 리본을 옷깃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래서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느냐는 질문 대해서는 선뜻 내 놓을 것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어느 기자가 말했다. 노란 리본을 달고도 교통법규조차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것이 오늘 우리의 민낯이라고.세월호 참변에 대해 슬퍼하고 분노하고 규탄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신들의 세월호`에 대해서이다.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우려는 있어도 자신이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세월호 사고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우리나라 교통사고 사망자 수가 연간 5천명에 가까워 선진국의 두 배가 넘는다고 한다. 매년 세월호 같은 참사가 15건 이상 발생하는 것과 같은 수치다. 그 사망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숨이 세월호 희생자들의 목숨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물론 자신의 잘못으로 사고를 내고 사망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때문에 억울하고 무고하게 목숨을 잃은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누구라도 운전대를 잡고 교통법규를 위반하는 난폭운전을 자행하는 순간에는 `세월호`의 선장이 되는 것이다. 그로 인해 날마다 십 수 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세월호의 경우와 얼마나 다른가. 비단 운전자들뿐이겠는가. 사회 곳곳에서 온갖 비리와 불법을 일삼고 조장하거나 묵인하는 사람들 역시도 제2 제3의 세월호 사건의 가담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우리 모두가 각자의 삶이라는 세월호의 선주이자 선장이 아니겠는가.

2017-04-14

봄볕, 아름다운 날

▲ 김주영 수필가봄볕에 잠깐 졸았다.깨어보니 미래의 어느 날 아침이다. 칼로리를 정확하게 계산한 요리를 먹었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사라지고 사람들은 마음과 감성을 파악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로봇과 함께 생활을 한다. 나도 최첨단 `감성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과 생활을 한지 6년이 되었다. 오늘은 `DRY100극복프로젝트`수업을 듣는 날이다. DRY100극복프로젝트는 DRY100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이 듣는 감정생성치료수업이다.이 바이러스는 로봇에 의해 편리한 생활을 하면서 생긴 병이다. 모든 생각과 고민을 로봇이 대신해주기에 감정변화에 문제가 생겨서 세포가 죽고 체액이 마르는 것이다.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어떤 진화도 할 수 없다. 감염된 후 백일 내에 눈물을 흘리면 이 병은 완치가 된다. 이 수업은 오랜 연구 결과 끝에 만들어진 바이러스 치료 프로그램이다. 눈물이 최고의 특효약이며 유일한 치료법이다. 지난 수업에는 나를 제외한 모든 참석자가 눈물을 흘렸기에 이번 수업은 나 혼자 듣는다.오늘은 NO-1004-POEM-LEARNING 백신로봇이 강연을 한다. 세계최고의 과학자들이 49일 만에 업그레이드해 완성시켰다. 지금까지 바이러스 감염된 사람들이 모두 치료가 되었기에 더 이상 업그레이드가 필요하지 않았다. 10년 만에 새로운 버전의 백신로봇이 만들어진 셈이다. 나는 오늘 꼭 울어야 한다. 이번 강의를 듣고도 울지 못하면 나는 약으로 버티다가 열흘 후에 사라진다. 내 몸에 남아 있는 감정들이 모두 말라서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아직은 병원에서 처방해주는 약으로 버티고 있지만, 이 약도 백일이 지나면 효과가 없다. 내가 존재할 수 있는 날은 열흘밖에 없다.기계의 발전으로 생활은 편리해지고 그 편리함에 인간의 감각들이 퇴화되는 상상을 해보았다. 인공지능(AI)이 발전한다면 비현실적인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다. 과거 공상과학 영화에서 상상했던 인공지능(AI)이 우리의 현실 깊숙이 파고들고 인간과 기계와의 소통방법은 진화되어가고 경계는 무너지고 있다.인공지능은 다양한 정보통신기술(ICT)과 결합돼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내고 있다. 인공지능 인터페이스 기술 개발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사람의 마음과 감성을 파악하는 감성인공지능까지 개발을 하는 IT기업들도 늘어나고 있다. 필요에 의해서 만든 로봇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기계에 인간의 목숨마저 종속되는 막막한 시대가 오지 않을 것이라 확신을 할 수는 없다.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고가 바둑에서 이세돌 9단을 이겼다. 알파고의 승리로 인공지능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본다. 인간의 감정처럼 규칙을 찾기 힘든 `비정형 데이터`들을 분석해 차가운 인공지능이 아닌, 따뜻한 감성을 가진 인공지능을 개발을 한다고 한다. 인간의 감각과 감성(感性)같은 수많은 데이터를 분석한 인공지능로봇이 감정(感情)을 대신할 수 있을까? 감정의 변화가 심하면 문제가 되듯 느끼지 못해도 큰문제이다. 인간의 고유한 감정은 이론적 데이터분석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인공신경망을 기반으로 프로그램 스스로 데이터를 분석하고 학습하고 탐색하고 추론 능력을 갖춘 로봇이 만들어져도 감정까지 생산해 낼 수는 없다. 감정은 무엇인가? 감정은 인간의 고유한 창조의 산물이다. 감정은 외부적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보다 더 신비로운 것은 인간의 내면의 그 어딘가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좋은 눈물을 흘리고 나면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은 슬픔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을 없애주기 때문이다. 눈물은 인간이 만드는 최고의 보약이며 감정의 표현의 보석이다.울지 못해 죽어야 하는 미래의 현실에서 따뜻한 봄볕아래 다시 돌아왔다. 며칠 전부터 창밖 목련이 온 힘을 다해 꽃등을 환히 밝힌다.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답다. 그대도 이 아름다운 봄 햇살에 눈물이 나는가?

2017-04-07

하늘빗자루

▲ 강길수 수필가온 거리가 다르다. 누군가 손을 본 모양이다. 삼월 초열흘 출근길. 대로와 골목길을 한참 걸어가도 역시 전과 다르다. 어떤 손길이 이랬을까.잠시 후, `오, 그랬구나`하고 혼잣말이 나왔다. 이틀 전 아침 출근길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광장 횡단보도를 걷는데, 몸이 날아갈 듯 강한 소소리바람이 불었다. 모자를 손으로 잡으며, `웬 꽃샘바람이 폭풍 같지?`하고 투덜거렸다. 큰 건물 모서리를 지날 때는 휴지, 비닐봉지 등 쓰레기와 먼지가 함께 날아오르며 눈 속에 티가 들어가기도 했다. 다음날 아침에도 조금 약해진 꽃샘바람이 여전히 불었다.삼일 째 되는 오늘 아침. 차도는 물론 인도, 골목길, 가로수 아래 잔디밭도 깨끗이 청소가 되어 있는 게 아닌가. 기분이 좋다. 사람이 이렇게 먼지도 없이 청소하려면 많은 일꾼이 붙어도 힘들게다. 웬일인지 담배 피우며 걸어가는 이도 없다. 담배냄새가 싫어 일부러 멀찍이 떨어져 가거나 돌아가곤 했었다. 덕분에 상쾌한 출근길이다.그랬다. 먼지하나 없이 거리를 청소한 손길은 센 꽃샘바람이었다. 사람들이 무시로 거리를 더럽히니, 봄맞이에 거슬려 하늘이 직접 나섰나보다. 폭풍 같은 소소리바람을 내 뿜는 하늘빗자루를 보내 온 거리를 말끔히 쓸어갔으니 말이다.사람들은 꽃샘바람이 봄을 시샘하여 분다고 한다. 시샘은 상대를 부러워 시기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그러니 꽃샘바람이 바로 봄맞이바람이 된다. 하늘은 시샘, 거짓, 꾀 같은 것들은 외면하지만 스스로 깨끗이 하는 힘은 행사한다.출퇴근길에 두 주택가 공원 곁을 걸어서 오간다. 한 공원은 언제나 깨끗하다. 다른 한 공원은 날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사람들이 버린 꽁초, 휴지조각, 비닐봉지, 커피잔 같은 쓰레기가 이곳저곳에 버려져 볼 때마다 지저분하다. 처음에는 한 곳은 사람들이 거의 안 오고, 다른 한 곳은 많이 오기에 그런 줄로 생각했다. 여러 날이 가고 계절이 바뀌면서 진실이 눈앞에 나타났다.깨끗한 공원에는 한 노부부, 특히 할아버지가 꾸준히 공원을 돌보고 계셨다. 말없이 쓰레기를 치우고, 잡초도 뽑아내셨다. 거의 매일, 자기 집이다시피 돌보니 실상 하루에 할 일의 양은 그리 많지는 않았다. 공원에 오는 이들은 그분들 덕분에 쾌적한 공간에서 몸과 마음을 쉬고, 새 힘을 얻어간다 싶었다. 한두 사람의 묵묵한 봉사가 많은 이들을 기쁘고 행복하게 한다는 사실이 갈수록 크게 다가왔다.반면, 지저분한 공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쉬거나 놀고 또, 운동을 하면서도 공원에는 관심 없어 보였다. 아이러니하게, 봄부터 가을까지 지자체가 운영하는 청소팀이 아침에 모이는 장소이기도하다. 모임에서 그날 청소구역을 의논, 정하고 출발하는 곳이다. 그런데도 꽁초와 휴지조각 같은 것들이 이곳저곳 널브려져 있다. 큰 것만 대충 줍기 때문이다. 이 공원을 지날 때는 언제나 마음 한구석이 언짢았다.하루에 두 번씩 두 공원을 지나는 나는 그때마다 행, 불행 사이를 오가는 기분이다. 아침에는 기쁨 뒤에 슬픔, 저녁에는 슬픔 뒤에 기쁨의 순서다. 오늘 퇴근길에, 두 공원이 요즈음 우리 사회를 닮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며 공원을 쳐다보는 길은 침묵하는 다수이고, 깨끗한 공원은 사회 저변에서 노부부처럼 말없이 봉사하는 사람들이며, 지저분한 공원은 이성(理性)과 결별하고 진실을 외면한 감성의 선동과 탈판에 최면 당해버린 지도층들이다 싶었다.그러자, 침묵하는 다수가 이젠 두 공원을 강 건너 불 보듯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마음을 내려쳤다. 지저분한 공원이 깨끗한 공원으로 되도록, 침묵하는 다수가 나서야 하지 않느냐고 연이어 물어 왔다. 내 마음은 저절로 답하였다.`침묵하는 다수가 하늘빗자루가 되어 삿된 것들을 쓸어내고, 선거 때 노부부 같은 일꾼들을 꼭 뽑아야 한다`고….

2017-03-31

들길을 걸으며

▲ 김병래 시조시인들길을 걷는다. 한차례 꽃샘추위가 지나가고 성큼 다가선 봄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들녘에는 미처 퇴각하지 못한 겨울의 잔병들을 몰아내며 봄의 혁명군들이 진군해 오고 있다. 적진 깊숙이 침투해서 은밀하게 게릴라전을 펼치던 냉이꽃 봄까치꽃 광대나물꽃들이 이제는 승리의 환희로 본대를 맞고 있다. 아아, 불가항력으로 봄이 진군해 와서 구악과 폐습을 무찌르고 눈부시게 찬란한 새 천지를 열고 있다. 언제나 한결같이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해마다 새롭게 거듭나는 들판은 오랜 세월 우리 삶의 터전이었고 자자손손 핏줄을 이어오게 한 젖줄이었다. 이 땅에 태어나서 이 들녘에서 생을 다 소진하고 다시 땅으로 돌아간 무수한 우리네 조상들의 살과 피와 땀과 한숨과 눈물이 뒤섞인, 그야말로 땅과 사람이 하나로 뒤엉킨 신토불이의 장(場)이었다. 언제 만나도 한결같이 반갑고 만날수록 정이 더 깊어지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들판과 같은 마음을 가졌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들길을 걷는 마음은 한가롭다. 비록 사는 일이 옹색하고 힘겨울지라도 들길을 걷는 동안은 다소간의 여유와 평안을 얻을 수가 있었다. 불가에서는 행선(行禪)이라는 말도 있지만 나에게도 오랜 세월 들길을 걷는 것이 옛 사람들이 말한 일종의 도(道)의 수행이요 공부였던 것 같다.들길을 걷고 또 걷는 것으로 고통과 좌절과 슬픔을 견디고 이겨낼 위로와 힘을 얻고, 얽히고설킨 삶의 매듭들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도 했었다.아무리 넓은 들이라도 경계가 있고 제각각 그 소유자가 있어서 사고 팔기도 하지만 그런 것으로는 결코 소유할 수 없는 무한한 것들이 들에는 있다. 논과 밭의 주인들이야 소유권의 대가로 얼마간의 곡물이나 돈을 쥘 수는 있겠지만 그 이상을 소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잠시 머물렀다 가는 인생의 주제에 자연의 일부를 소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소로운 오만이고 착각인가. 들에는 사람들이 소유권을 주장하거나 수확해 갈 수 없는 풍성한 계절이 있고 찬란한 생명의 잔치가 있다. 누구나 언제라도 동참할 수는 있으나 개인의 소유로 할 수는 없는 것들이다. 그러니 들은 날마다 들길을 걷는 사람의 몫이고, 들길을 걷는 것만으로 세상 부러울 게 없는 부자일 수가 있는 것이다.들길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길이다. 농부들도 이제는 신명이 나서 들길을 오갈 일이 없겠지만 나처럼 어슬렁대며 들길을 걷는 것도 분명 시대에 맞지 않는다. 더 빨리 앞서가고 더 많이 차지하는 것만이 이기고 살아남는 길이 되어버린 치열한 경쟁의 시대에 한가하게 들길이나 걷는 것이 무슨 경쟁력이 되겠는가. 하지만 그런 욕심과 강박증으로는 얻을 수 없는 보다 소중하고 무한한 것들이 들에는 있는 것이다.봄이 오고 있다. 아무것도 애쓰고 보태지 않아도 때가 되면 저절로 찾아오는 봄이다. 누가 욕심을 내서 싹쓸이를 하거나 쇼핑백에 채워갈 수는 없는 봄이다. 누구에게나 무상으로 주어지는 봄이지만 누구에게나 다 같은 봄은 아니다. 재물이나 권력에 골몰하는 자들의 봄과 한가로이 들길을 거니는 사람의 봄이 어찌 같을 수가 있겠는가. 대통령 탄핵이라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로 어수선해진 시국에 한가롭게 봄타령이 다 무엇이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하기 전에도 봄은 있었고 인류가 멸종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오는 것이 봄이다.뭐가 어쨌거나 이 봄 내 재산 목록 일호는 바로 봄이다. 이 봄의 햇볕과 바람과 만물이 소생하는 들녘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산이다. 누구하고 소유권을 놓고 시비를 할 필요도 없고 욕심을 내서 퍼 담을 필요도 없다. 권력의 빈자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편을 갈라 이전투구 하는 사람들에게는 부질없고 무기력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격앙되고 소란한 세상일수록 오히려 이만치 물러서서 한가롭게 들길이라도 걸어보는 여유와 방심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2017-03-24

봄과 꽃

▲ 김주영 수필가코끝을 스치는 바람이 차갑지만 상쾌하니 좋다. 봄바람이다. 기온이 많이 올랐는지 멀리 공터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매화가지는 푸른 하늘에 곱게 꽃수를 놓아 허공의 침묵을 깨우며 환하게 웃는듯하다. 한낮의 햇볕이 좋아서 좀 걷기로 했다. 겨우내 걸치고 다니던 외투가 갑자기 무겁고 칙칙하게 느껴진다. 봄옷으로 갈아입어야지 마음먹으면서도 아침 기온이 쌀쌀해서 하루만 더, 하루만 더하며 미루다 오늘도 두꺼운 겨울옷을 입고 외출을 하게 되었다.꽃샘추위에 꽃들이 피는 것을 보면서 봄이 왔음을 안다. 양지바른 곳에 피어있는 노란 꽃에 눈길이 머문다.영춘화(迎春花)다. 한자이름을 풀어보면 `봄맞이 하는 꽃`이라는 뜻을 가졌다. 언뜻 개나리와 닮았으나 꽃피는 시기가 개나리보다는 좀 이르다. 노란빛에 마음이 설렌다. 잎보다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처럼 봄이 옴을 알려주는 꽃이다. 겨울의 혹한 속에도 노란꽃을 피워낸 영춘화가 대견하다. 잎도 없는 마른가지 끝에 핀 꽃을 보면서 봄이 왔음을 새삼 느낀다. 느긋하게 봄을 느끼며 `봄`에 대하여 생각해본다.맨 처음 누가 계곡의 얼음물이 녹고, 꽃이 피고, 싹이 돋는 이맘때를 봄이라 부르기 시작했을까?봄에는 천지사방 볼 것들로 넘친다. 봄에 피는 꽃들은 다양하고 화사하다. 해마다 찾아오는 봄이지만 늘 새롭고 설렌다. 많은 것들을 보라고 `봄`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들은 적이 있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물론 그 어떤 국어사전을 뒤져도 나오지 않는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겠지만 아마 봄은 `보다`라는 동사에서 생겨났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바라보고 인식되어지면서 존재함을 느낀다. 꽃을 바라보며 봄이 왔음을 새삼 느끼는 것처럼 사물이든 사람이든 서로 바라볼 때라야 비로소 그 존재를 새롭게 알게 된다.`봄-보다` `보다-봄`이라고 쓰고 읽어보니, 오랫동안 보지 못하고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그리운 얼굴들이 꽃처럼 피어난다. 이름들을 불러본다. 자연의 시간에서는 피는 꽃을 보면서 겨울이 지나 새봄이 오는 것을 느끼지만, 인연의 시간에는 언제가 봄일까? 설레듯 서로를 바라보는, 그 첫 순간이 아닐까?어느 한 존재가 일방적으로 한 존재를 바라보는 것은 진정한 `봄(見)`이 아니다. 서로 마주보아야 봄이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눈을 마주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인연의 시작이며 제대로 된 `봄(見)`이다. 그렇다고 모든 만남이 봄(春)처럼 활짝 꽃을 피우는 것은 아니다. 봄기운처럼 따스한 눈길로 자주 보아야 마음이 활짝 열리는 것이다.따뜻한 사람들과의 만남은 늘 설렌다. 그런 설렘은 오래된 만남 일수록 더 깊고 진한 향기의 꽃이 핀다. 살아가면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처음 만났을 때는 서로 `봄(바라봄)`의 과정을 거친다. 본격적인 탐색단계인 셈이다. 하지만 그 단계를 지나고 나면 `봄`은 한층 깊어간다. 사람이 사람을 안다는 것은 수없이 많은 `봄`을 필요로 한다. 첫인상에서 그 사람을 다 알 수 없듯이 자주보고 만남으로써 서로를 알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이해하고 나아가 서로 사랑하게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인연은 인간에게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 귀한 봄의 선물이 된다.따뜻한 봄에는 꽃들이 활짝 핀다.자연의 시간이든 인연의 시간이든 살아가면서 `봄`을 잃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꽃샘추위를 이기고 저마다 가장 고결한 꽃을 피우는 봄꽃의 마음을 배우고 싶다.다시는 볼 수 없는 지난 `봄`도 있지만 내가 노력하면 다시 찾을 수 있는 `봄`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매순간 `봄`을 잃지 않는다면 세상은 분명 봄꽃이 만발할 것이다. 가장 귀한 봄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그 봄에는 가장 귀한 꽃이 핀다.

2017-03-17

호프집에서의 사색

▲ 손달호 수필가나는 테니스를 끝낸 후에 가끔 Y호프집에 들린다. 이 집의 분위기는 들뜨지 아니하고 안정감이 있다. 그 가운데 정겨움도 있고 사람 사는 냄새도 난다. 자리가 다 차도 한두 사람 앉은 것처럼 수선스럽지 않다. 여기에 오는 손들은 거개가 속삭이듯 말을 건넨다. 하긴 주인부터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천성이 그런 것 같다. 어쩌면 그게 사람의 마음을 끄는 힘일지도 모른다. 호프 한두 잔에는 오이나 당근 조각이면 안주가 된다. 그런데도 번데기를 갖다 준다. 조금 있으면 새우깡도 가져온다. 달라고 하지 않는데 그냥 알아서 가지고 온다. 구태여 말을 안 해도 우리는 주인의 친절함을 안다. 왜냐하면 서비스로 말을 대신해 주기 때문이다. 손님 입장에서 보면 말로 서비스를 대신하는 것보다 낫다.호프집 주인을 보면 내가 자주 가는 음식점 생각이 난다. 음식점 중에는 입은 친절하지만 맛은 별로인 집이 있고, 무뚝뚝하고 불친절하나 맛에 승부를 거는 집도 있다. 희한하게도 그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집을 자주 찾아가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호프집과 음식점 주인의 `불친절함` 속에는 공통적으로 어떤 진국 같은 것이 숨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홀로 호프와 있어도 외롭지 않다. 자작자음하면서 사색으로 대화를 대신하면 된다. 사색은 맛의 의미를 잘 붙잡아 준다. 애주가는 술의 진미를 `속닥함`에서 느낀다고들 한다. 자작은 속닥함의 꽃이다. 사색의 경지를 소요하는 희열을 얻고자 자작을 즐긴다.봄비의 낙숫물이 통통거리는 날, 호프집에 앉아 자연의 빗소리에 귀 기울여 본다. 빗소리에서 우주의 호흡이 느껴지는 것은 우주의 그것과 나의 숨결이 서로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이나 하늘에 저녁놀이 엷게 물든 날, 홀로 호프집에 앉아 사색에 잠겨 보라. 나는 이런 행운을 쥔 적이 있다. 그간 바쁘게 사느라 깜빡 잊어졌던 폴 베를렌의 `가을의 노래`나 아폴리네르의 `미라보다리` 같은 프랑스의 명시하고 사색의 깊은 곳에서 만난 일 말이다. 베를렌의 시 속에 쇠잔해진 가을 낙엽이 전해주는 우수와 미라보의 다리를 걸으면서 아폴리네르가 떠올렸던 연인을, 나는 백년이 지난 지금, 사색 속에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저 얻은 것 같은 기분에 호프 맛이 배로 더했다.법정 스님 수상집의 표지를 열면 작가의 사색에 잠긴 사진이 보인다. 명문장이 깊은 사유의 품속에서 쑤욱 밀고 나옴을 엿볼 수 있다. 문장마다 철학이 담긴 표현들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파리의 화가 고갱의 `마포에 유채`도 타히티에서 치열한 사색 끝에 얻은 걸작이다. 사색은 개성과 색채를 융합시키고 나아가 심원한 철학까지 온전히 보여 준다. 명작은 사색의 열매다. 사색은 명작의 어머니다.사색은 망각을 걷어내어 잊혀진 기억들을 새록새록 되살아나게 해 준다. 사색에 젖어들면 긴장이 가라앉고 차분해진다. 이럴 때 자신을 조용히 관조해 볼 수 있다. 사색은 성찰과 수양을 통해 정신을 단련시킨다. 사색은 여유로움에서 돋아나므로 시작부터 편안하다. 숱한 사색의 편린들을 소중히 여기며 가슴 가득 안고 사는 사람들을 보라. 그 원질에는 어머니 마음 같은 따스함이 깔려 있다.찻집도 괜찮겠지만, 나에겐 이런 호프집이 좋다. 배경이 주제를 구현하듯, 이 집의 배경도 끊임없이 사색을 자극시켜 주기 때문이다. 고요한 사색은 내 마음에 걸린 일상의 수고로움과 소소한 불평, 쓸데없는 욕심들을 거두어 간다. 주홍색 등불이 음악 소리에 젖어있고, 사람들의 마음이 술잔으로 따뜻해진 호프집 낭만은 나의 생각을 쉬게 하지 않는다. 사색은 지나온 날을 되돌아보며 성급하게 내렸던 결론을 되새겨 보게 함으로써 삶에서 반전의 지혜를 주기도 한다.술잔 속의 거품처럼 생각이 인다. 가득 담긴 호프처럼 사색이 찬다. 누구로부터, 정해진 화제로부터 멍에를 쓰는 것보다 얼마나 열려 있는가! 대화가 아낙이라면 사색은 무한한 꿈을 가진 소녀이다.

2017-03-10

인터넷시대의 글쓰기

▲ 김병래 시조시인원시시대에는 예술의 장르가 구분되지 않았다. 관혼상제나 제천의식(祭天儀式) 등에서 분장을 하고 노래하며 춤추던 것이 모든 예술의 원형이었다. 거기서 음악과 미술, 문학, 무용, 연극 등의 장르가 갈라져 나왔다. 문학의 경우, 단순한 노랫말에서 출발하여 문자의 발명과 인쇄술의 발달을 거치면서 여러 장르로 세분화 되고 전문화 되어왔다. 시에서 희곡과 소설이 갈라져 나오고 수필과 평론이 보태져서 장르마다 전문적인 작가가 배출되는 것으로 오늘에 이르렀다.인류의 삶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인터넷 매체는 예술계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령, 인터넷이 상용화되기 전에는 시를 한 편 썼어도 발표할 지면이 한정되었고, 어렵게 발표를 했더라도 달이 바뀌고 계절이 지나서야 일부 제한된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게 고작이었다. 일반인들이 문학작품을 접할 기회도 흔치가 않았거니와 독자의 반응을 작자가 알아볼 길도 막연하였다.지금은 어떤가. 인터넷에 무슨 글이든 올리기만 하면 그 즉시 전달은 물론 독자의 반응과 상호소통까지 가능해졌다. 실시간 전달의 기능이야말로 인터넷시대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가 있다.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과 사건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문자로 표현하는 것으로 실시간 전달과 소통과 교류가 가능하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인터넷 글쓰기의 또 하나의 특징은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구별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인터넷 이전에는 비전문가가 글을 써서 발표할 기회는 거의 없었는데 비해, 지금은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무한정으로 글을 써서 발표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구태여 전문가의 자격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문학 장르의 구분이 불분명해지는 현상도 인터넷 글쓰기의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발표의 지면이 문예지나 개인이 발간하는 책인 경우와는 달리 구태여 장르의 구분을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시나 수필, 칼럼 등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얼마든지 자유롭고 유용하게 글쓰기를 할 수가 있게 되었다.원시시대의 미분화로 회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음악과 미술과 문학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퓨전(fusion)의 시대가 도래한 것도 인터넷 시대의 특징이다. 한 편의 글을 그림이나 사진, 음악과 함께 인터넷에 올리는 것이 가능해졌고, 그것이 훨씬 더 효과적인 표현 수단이 된다면 구태여 마다할 이유도 없는 일이다.기왕의 문학 장르를 무시하거나 파기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하더라도, 인터넷 시대의 글쓰기는 종래와는 전혀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것은 비단 문학이나 글쓰기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양식, 소위 `라이프스타일`의 문제이기도 한 것으로 새로운 인식과 담론과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모바일을 포함한 인터넷 글쓰기는 이제 우리 삶의 떼놓을 수 없는 일부가 되었다.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소통의 수단으로 단연 손꼽힐 뿐만 아니라, 삶의 질을 향상하는 방법으로도 더 없이 요긴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인터넷에 자신의 블로그나 카페를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것이 교양인들의 필수가 되었다. 부단히 자신과 주변을 성찰해서 새로운 의미와 감동을 찾아내어 글로 정리해보는, 글쓰기의 생활화야말로 삶을 보다 건강하고 풍성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그것이 남들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길이 된다면 더욱 좋은 일이고.

2017-03-03

사제로 살다 사제로 죽게 하소서

▲ 강길수 수필가지인 부부의 자녀 삼남매 중 외아들이, 지난 주 대구 신학교에서 사제(司祭)로 서품(敍品)됐다. 신학교에 입학한지 십년 만에 새 신부(神父)가 된 것이다.사제수품(受品) 후 며칠 전, 그 첫 미사와 축하 행사가 이곳 성당에서 있었다. 우리 부부도 참석했다. 거룩한 미사를 마치고, 축하식이 열렸다. 인사말에서 갓 사제가 된 젊은 신부는 참석한 신자들에게 이렇게 부탁하며 말을 마쳤다.“교우 여러분, 제가 사제로 한평생을 살다가 사제로 죽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 기도해 주십시오!”나는 이 말을 들을 때, 눈시울이 저절로 뜨거워졌다. 분명 영광스럽고 감사하며, 축하하고 축하받으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날인데도 말이다.우선, 외아들을 사제로 봉헌(奉獻)한 지인 부부의 지극한 믿음이, 바로 가슴에 전류처럼 찌르르 타고 흘렀다. 내가 새 사제의 아버지라면 외아들의 신학교 입학을 순순히 허락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일생을 하느님 뜻에 따르고 신자들을 양치기처럼 돌보며, 독신으로 살아내야 하는 사제의 인생길. 그 길이 얼마나 크고 진한 고난의 길, 희생의 길이 될 것인지….또한, 젊은 사제의 말이 마치 내 아이들의 일이나, 우리 가족의 일, 나의 일, 아내의 일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것은, `자녀로서, 가족으로서,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한평생, 그리고 인간으로서 한평생 제대로 살다가 죽게 해 달라`는 기도 부탁과 같이 들리기도 했다. 내가 여태 아버지의 몫, 남편의 몫, 가장의 몫, 인간으로서의 몫을 제대로 하며 살았는지 되묻게 했다.사람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자기 몫을 하도록 되어 있다. 사람의 자기 몫은 직분(職分)을 넘어서는 본질적 개념이기에 좋든, 싫든 걸어가야 할 길과 같은 것이리라. 시간이 보이지 않지만 흐르고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거부할 수 없이 한 존재로서 감당해야 하는 몫이기도 할 것이다.젊은 사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남편과 아버지의 직분을 포기하고 사제의 직분을 선택했다. 사제직과 혼인한 셈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는 일생 독신으로 성직(聖職)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 그 길은 고독과 희생으로 점철된 봉사의 길, 모든 이를 품어야 하는 고통과 사랑의 길이 되어야 하리라.세상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지속한다. 희생의 톱니로 맞물려 돌아가도록 설계되어 운행되고 있는 것이다. 너와 나는 희생이란 톱니로 서로 소통하고 하나 되어 세상공동체를 이룬다.생명은 다른 생명들의 희생 위에 존재한다는 준엄한 사실…. 오늘 새 사제가 봉헌한 거룩한 첫 미사는 생명은 다른 생명의 희생의 대가로 산다는 소름 끼치는 사랑의 진실을 다시 일깨워 주었다. 삶의 `거룩함` 안에는, 다른 존재의 죽음이 뒤따르는 `잔인함`이 숨어있다는 진리가 눈물 되어 흘러내렸다.자연의 아름다움도, 찬란함도, 화려함도 먹고 먹히는 잔인함과 거룩함이 함께 해야 가능하다는 신비 앞에 오늘 또 마주 섰다. 새 사제는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거룩한 사랑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었다.나는 마음을 다독였다. 삶은 죽음의 다른 모습이며, 죽음은 삶의 다른 모습이라고…. 그리고 기도하였다.`하느님, 새 사제가, 사제로 살다가 사제로 죽게 하소서!`

2017-02-24

쑥떡

▲ 김주영 수필가동생은 떡을 좋아한다. 이맘때가 되면 쑥떡을 사와서 같이 먹자 한다. 떡을 먹을 때마다 “옛날에 먹던 그 맛이 아니야” 하고 습관처럼 말한다. 떡에 콩고물을 묻혀 먹으면 그 맛이 달다. 고물의 단맛과 잘 어우러지는 떡이 쑥떡이다. 쑥의 쌉쌀한 맛과 콩고물의 고소함이 어우러지면 봄향기가 입 안 가득 번지는데 예전의 `그 맛`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가 인간의 입맛까지도 변화시키는 모양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동생은 유난히 병치레가 잦았다. 어릴 적 동생과 나는 봄이 다 가도록 집안에서만 놀아야했다. 동생 돌보기는 내 몫이었기에 봄방학이 되어서 친구들과 밖에서 놀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방학 내내 우리들의 간식은 으레 쑥떡이었다. 따뜻한 아랫목에 이불을 깔고서 콩고물 듬뿍 묻힌 떡을 먹으며 가루로 범벅이 된 얼굴을 보며 깔깔 웃었던 기억들. 이월에 쑥떡을 해먹는 풍습은 영남지방이나 바닷가 지방에서 예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풍습이다. 이월 초하루에 떡을 해서 나눠먹는 것은 바람을 관장하는 신이 내려온다는 속설 때문이다. 해안지방에는 이월을 `영등할미달`, `바람달`이라고도 부른다. 음력 이월 첫째 날을 부르는 이름은 실로 다양하다. `이월 초하루, 머슴날, 농군(農軍)의 날, 바람님 오는날과 가는 날(풍신날), 바람이 불면 안 되는 날, 영동할머니 날, 영등할머니 제삿날, 이월 밥 해 먹는 날, 이월 할매 먹는 날` 등 농사와 바람에 관련된 이름이 주를 이룬다. 농사와 어업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자연의 현상이기에 자연스레 이월을 바람달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바람을 관장하는 신을 할머니로 호칭했으니 초하루에 쑥떡을 해먹는 것은 할머니에게도 좋은 떡이라고 생각한 마음이 담겼는지도 모르겠다. 단군신화에도 곰은 쑥과 마늘을 먹고 여자가 됐다하니 쑥은 분명 여자에게 좋은 음식인 것 같다. 혈액순환을 도와주고 피를 맑게 하고 자궁을 따뜻하게 하여 여자에게 좋은 효능이 있다 한다.이월에 떡을 할 때 쓰는 쑥은 말린 쑥이다. 쑥은 날씨가 더워지면 독성이 생기기에 이른 봄부터 단오까지만 채취한다. 쑥은 응달에서 자란 햇잎이 부드럽고 향도 좋다. 채취한 쑥들은 데쳐서 바람이 서늘한 곳에서 말려야 한다. 곰팡이가 피지 않게 바람이 잘 통하는 곳이 좋다. 잎이 여린 쑥은 살짝 데쳐서 냉동시켰다가 필요에 따라 음식에 넣어 먹어도 된다. 얼린 쑥은 향이나 식감이 크게 변하지 않으니 제철일 때 넉넉하게 갈무리해두면 좋다. 꽃샘추위 속에 조금씩 봄기운이 퍼지면 마른 잔디 밑이나 양지쪽 가시덤불 아래에서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것이 쑥이다. 겨우내 혹한을 이기고 초봄의 햇살 아래 막 연한 촉을 내미는 쑥. 참으로 귀한 풀이다.창에 스미는 햇살에 봄 내음이 난다. 밭에는 곧 애쑥이 올라올 것이다. 음식은 제철에 먹는 것이 더없이 좋다. 쑥은 약으로서의 효능도 뛰어나니 자연이 주는 보약이다. 해쑥을 넣어 끓인 쑥 된장국의 쌉쓰레한 맛은 겨울 동안 잃어버린 입맛도 찾아 줄 것이다. 올 봄에는 쑥을 캐서 떡을 해먹어야겠다. 가까이 살아도 이제는 어릴 적 사소한 일로 마음껏 웃던 추억들이 별로 생기지 않는 듯하다. 봄 햇살이 좀 따스해지면 동생과 쑥을 캐러 가야겠다. 등이 따뜻해지도록 쑥을 캐다보면 바구니 가득 또 새로운 추억이 담기겠지. 겨울 찬바람처럼 움츠러들었던 마음에도 자주 만나고 부대끼다보면 해쑥 같이 파릇한 정이 돋을 것만 같다. 애쑥에 쌀가루를 살짝 버무려 된장을 넣고 보글보글 된장국을 끓이고 쫀득하고 찰진 쑥떡을 내어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야겠다. 어느새 마음이 쑥밭에 나가 연한 쑥을 뜯는다.

2017-02-17

참소유

▲ 김병래 시조시인 몇 년 전에 입적하신 법정스님을 흔히들 무소유로 살다 가신 분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분처럼 `많은 것`을 가졌던 사람도 드물 거라는 생각이다. 부동산으로는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손수 지은 암자가 있었고, 자신의 명의로 등기를 하거나 주지의 자리에 앉지는 많았지만 길상사란 절을 창건하기도 하였다. 그보다 더 부러운 것은 강원도 산골의 오두막인데 집이야 작고 초라했지만 인근 일대의 임야는 그 가치를 돈으로는 따질 수 없는 재산이었다. 그 산과 계곡이 누구의 명의로 되었건 철따라 피고 지는 초목이며 온갖 벌레와 짐승들,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햇빛 달빛 별빛에다 고요와 어둠까지, 그 속에서 하나로 어우러져 사는 동안은 스님의 소유나 다름이 없었다.스님의 동산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많은 저서의 판권이나 인세가 문제가 아니라 수백만 독자와 스님을 따르고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 역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재산이었다. 법정스님이 보여주신 것은 그러므로 `무소유`가 아니라 `참소유`였다는 생각이다. 참소유란 올바른 소유요 진정한 소유라는 뜻으로 내가 만들어본 말이다.무엇을 잘 소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의 진가(眞價)를 알아야 한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처럼 알아야 소유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진가란 왜곡된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아니라 그 존재의 본질적 가치를 말한다. 산과 들을 단순히 토지나 임야의 개념으로만 따지는 것은 본질적인 가치평가가 아니다. 그것에서 일어나는 온갖 자연현상이야말로 진정한 가치인 것이다. 사람이 만들어낸 물품도 그렇다. 아무리 훌륭한 예술작품도 그것의 진가를 모르는 사람에겐 한갓 쓸모없는 물건에 불과할 뿐이다.참소유란 진정한 가치를 소유하는 것인즉 진가를 모르는 사람이 참소유에 이를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비록 그 진가를 안다고 해도 꽁꽁 숨겨두기만 해서는 온전한 소유가 아니다. 금고 속에 넣고 이중삼중 자물쇠를 채워두는 것은 보관하는 것이지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진가를 알았으면 그것을 용도에 맞게 활용하는 것이 제대로 된 소유다. 돈을 주고 사서 자기 이름으로 등기를 해 놓았다고 산과 들을 소유한 것이 아니며 금고나 은행에 쌓아만 둔 돈은 종잇장과 다를 게 없다. 참소유란 진가의 발견이자 활용이며 새로운 가치의 창출이기도 한 것이다.무엇에건 연연하거나 집착하는 것은 참소유가 아니다. 그것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유 당하는 것이며, 재물이나 권세나 명예에 집착하고 연연하는 것은 그것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가 되는 것이다.가장 완전한 소유는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물아일체가 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소유라 할 것인데, 그것은 이미 종속의 관계를 벗어난 것이니 소유라는 개념자체가 소멸되는 것이기도 하다. 우주만상은 종속이 아닌 유기적인 관계로 형성되어 있고 사람도 그 일부일진대, 사람이 무얼 소유한다는 생각 자체가 착각이요 망상에 불과한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니 무소유란 소유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새길 수도 있겠다.요즘 우리나라를 온통 뒤끓게 하는 국정농단 사건도 부당한 방법으로 필요이상의 것을 소유하려는 헛된 욕망이 빚어낸 사건에 다름 아니다. 우주만상은 내가 태어나가 전에도 있었고 죽은 후에도 영원할 것인데 잠시 맺혔다 사라지는 이슬 같은 인생이 무얼 소유하겠다고 아등바등 하는 게 얼마나 가소롭고 어리석은 노릇인가.

2017-02-10

나무의 안부

▲ 김주영 수필가주공아파트 재개발 현수막이 걸렸다. `이주가 늦어지면 사업이 지연되므로, 이주 기간 내에 이주할 수 있도록 적극 협조` 라는, 이사를 권유하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걱정이 앞섰다. 모두가 이사를 하고 나면 나무들은 어떻게 될까? 나무들은 심어지면 그때부터 온갖 힘을 다해 살아낸다. 뿌리를 내리고 잎을 내고, 꽃을 피우며 폭풍우와 눈보라를 이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아파트가 지어지고 그곳에 터를 잡고 살아온 나무들도 모두 옮겨 심어지겠지? 몇 해 전 사무실 마당가에 서 있던 이십여 그루 향나무를 옮겨 심을 일이 있었다. 생긴 모양이나 수령으로 보아 비싼 가격에 팔릴 거라 생각했지만 몇 군데 농원주가 와서 보고는 그냥 가버렸다. 나무를 옮겨 심는데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에서였다. 비싼 값은커녕 공짜로 준다 해도 가져가지 않았다. 베어버리라는 권유도 있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마당을 사용해야하기에 비용을 부담하고 나무를 옮겨 심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향나무의 터전은 그 땅을 이용하려는 나 때문에 바뀌게 된 것이다. 나무가 터를 잡고 살아가는 곳의 시공간은 나무의 것이다. 나무 목(木) 한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팔을 벌리고 모든 것을 품고 서 있는 모양이다. 나무를 옮겨 심는 날, 나는 막걸리를 넉넉히 준비했다. 일하는 분들의 새참으로도 준비했지만 나무들의 안녕과 헤어짐을 위해 술을 붓고 싶었었다. 나무에게 강제 이주되는 상황을 잘 받아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는지도. 그렇게 나무가 내어준 자리에 터를 잡고 살았었다.개발은 나무의 터전을 바꾸기도 하지만 시공간의 풍경도 바꾸어버린다. 휑하다. 창포사거리의 풍경이 바뀌었다. 아파트 주변의 나무들이 모두 사라졌다. 울타리로 이용된 나무들과 화단에 정원수로 심어졌던 나무들이 한 그루도 남지 않고 베어졌다.옮겨 심을 시간도 충분히 있었는데 베어버리는 것만이 능사였나. 시공간의 주인은 나무의 것인가? 아파트 재개발 업자의 것인가? 이주 기간 내에 이주할 수 있도록 적극협조 하지 않았다는 이유의 형벌치곤 너무 가혹하다. 나무를 옮겨 심는 것보다 베어 버린 선택. 인간의 이기심으로 합리화된 손익계산 방법이다. 예부터 이 터에서 살았던 나무들의 시간들을 경제 논리로 계산했다니. 재개발이 시작되면 가난한 누군가는 또다시 변두리 전셋집을 전전할 것이고 딱지꾼들은 웃돈을 얹어 계산기를 두드릴 것이지만 이곳에 뿌리내리고 살아왔던 나무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건축법에는 대지의 조경에 대한 법령이 있다. 건축물을 신축하고 사용승인을 허가받는 절차에 조경에 대한 법령을 정해 놓은 것이다. 건물 사용승인 절차에 나무를 심어야 하는 조건이 있었다면 건물을 철거할 때도 나무를 옮겨야하지 않는가? 준공 후 조경에 대한 관리는 이뤄지지 않는다. 뿌리를 내리고 살아내는 것은 나무의 몫이라지만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우리가 나무에게 주는 보답치곤 너무나 잔인하다. 아파트를 짓고 자연과 친화적인 삶을 추구하기 위해 나무를 심었는데 재개발을 할 때는 누구의 이익을 생각한 것인가? 베어내어진 나무들이 다른 용도로 쓰인다고 하겠지만 옮겨 심는 것이 법으로 정해졌다면 이렇게 무참하게 베어냈었을까?나무들이 사라진 건물들이 흉물스럽다. 철거된 자리에 다시 아파트가 들어설 것이다. 베어낸 자리에 나무를 다시 심는 우리들이다. 우리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명목으로 나무를 옮겨 심고 그 나무들을 통해서 다시 위안을 받고 살아갈 것이다.그루터기만 남은 나무들의 안부를 듣는다. 도심 속 자연친화적 아파트의 광고 현수막이 곧 걸린다고.

2017-02-03

나이를 먹자

▲ 김병래시조시인 다시 해가 바뀌어서 누구도 예외 없이 한 살씩 더 나이를 먹었다. 빨리 커서 어른이 되고 싶은 아이들이야 한 살을 더 먹는 것이 좋은 일이겠지만 살아온 날보다 남은 날이 적은 사람일수록 나이를 먹는 일이 결코 달가울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싫어하고 외면을 해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세월이고 사람의 나이일진대, 기왕에 먹는 나이를 어떻게 하는 것이 제대로 잘 먹는 것인지 한번쯤은 생각을 해 볼 일이다.젖먹이 아이들은 모든 것이 자기중심적이다. 가족은 물론 이 세상 모든 것이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무엇이건 저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하고, 그게 안 되면 울고 떼를 쓴다. 그야말로 인격적으로 가장 유치(幼稚)한 단계인 것이다.한 살씩 나이가 들면서 세상 모든 것이 자기 맘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차츰 알게 되고, 자기 말고도 자기와 비슷한 남이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그때쯤 유치원에도 다니게 되면서 자기가 아닌 남과 어울려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말하자면 처음으로 사회성(社會性)을 학습하게 되는 것이다.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의 교육과정을 통해서 어느 정도 성숙한 인격체를 길러내자는 것이 우리나라 교육의 목표다. 그래서 초, 중등 교육과정은 기술이나 기능의 습득보다는 전인적인 인성함양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 교육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다.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우리의 교육현실은 이미 그런 목표를 많이 벗어나 있다. 입시위주, 학과성적과 경쟁위주의 교육에서는 결코 인성의 함양을 기대할 수가 없는 일이다. 교육이 그러한 것은, 인격이나 품성보다는 학벌이나 기능을 중시하는 사회적 요구에 부응해서다. 오늘과 같은 경쟁사회에서는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결과 무질서와 부조화, 권모술수와 부정부패가 만연한 사회가 되었다. 정의니 인격이니 품성이니 하는 말조차가 어딘가 비현실적이고 무기력한 것으로 치부되고 있는 실정이다.인간(人間)이란, 말 그대로 혼자서는 될 수가 없다. 사람(人)과 사람의 사이(間), 즉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만 `인간(人間)`이라는 개념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인간, 인간다운 인간이란 그 사람이 갖춘 사회성의 정도에 따라서 평가될 수밖에 없다. 남들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느냐,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정신연령과 인격의 정도를 재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흔히들 학벌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을 곧 훌륭한 인물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장관이나 총리의 인준을 위한 청문회 같은 데서도 거듭 확인을 했듯이, 우리 사회의 최상위 지도층 인사들 중에서도 제대로 인격을 갖춘 사람을 찾기가 쉽지가 않은 것 같다. 소위 출세와 성공으로 일컬어지는 상당한 부와 권세와 명예를 성취한 사람들 중에서도 그 인격과 정신연령에 있어서는 유치원 아이들의 수준에도 못 미치는 경우를 얼마든지 본다. 나이를 먹는 만큼 성숙해 지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치졸해지는 퇴행현상을 보이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가 않은 것이다.정신적 성숙의 과정을,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관계중심적 사고로, 개별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개인적인 것에서 사회적인 것으로, 이기적인 것에서 이타적인 것으로 이행해 가는 과정으로 본다면, 오늘 내 인격의 키는 과연 얼마이고 정신의 연령은 몇 살이나 되는지, 또 한 해가 시작되는 이 시점에서 한번쯤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2017-01-20

겨울, 이팝나무에게 말을 걸다

▲ 김주영 수필가이팝나무에 꽃이 피는 오월이면, 흥해 향교산은 마치 폭설이 내린 듯 온산이 환해진다. 파르스름한 빛을 살짝 띤 꽃숭어리를 달고 군락지를 이룬 모양새가 함박눈이 쌓인 듯하다. 꽃이름은 여름이 시작되는 `입하(立夏)에 꽃이 피기에 입하목이라 부른 것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고 `꽃이 핀 모양이 이밥(쌀밥)을 담아놓은 듯하다`하여 붙여졌다고도 한다. 입하는 양력으로 오월 초순이고 음력으로는 사월에 들어가는 24절기 중 일곱 번째 절기이다. 바람은 서늘하고 햇살은 보리 익기에 좋을 만큼 따뜻한 시기이다. 곡식들을 저장해놓은 뒤주가 바닥을 드러내는 보릿고개 무렵, 그 시기에 피는 꽃이 이팝이다. 꽃잎이 마치 이밥(쌀밥)처럼 보인다. 이팝이라는 이름에는 절망 끝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것 같다. 보리가 익을 무렵 논농사가 시작된다. 허기진 배를 달래가며 모를 심다가 아픈 허리를 펴면, 하얗게 핀 이팝꽃에 허기짐이 더해졌을 것이다. 열심히 일하면 하얀 쌀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거라는 서러운 꿈. “올해는 농사가 대풍이 들것네” 꽃을 보며 한해 농사를 점치곤 했으리라.내가 이팝나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열한 살쯤 가을이다. 삼척에서 떠나와 흥해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도 헤어졌다. 친구를 만날 수 없다는 슬픔보다 더 무서운 것은 대문 밖에 떡하니 서있는 키 큰 나무였다. 엄마는 마당이 있는 집이라 꽃이며 채소를 키울 수 있다고 좋아하셨지만 나는 마당에 나가는 것이 무서웠다. 산 아래 집이 있으니 큰 나무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아 방문을 나가는 것도 두려웠다. 야단을 맞아가며 다닌 등하교 길, 나무 근처를 오갈 때는 땅만 보고 다녔다. 그렇게 그 해 겨울방학이 될 때까지 나는 제대로 하늘을 올려다보지 못했다. 그런 내 마음을 아셨을까? 아버지는 산에 놀러가자고 하셨다. 무서워서 싫다했지만 내 손을 꼭 잡아주셨다. 산으로 향하는 길에는 계단이 있다. 이사하고 처음으로 아버지 손을 잡고 함께 계단을 올라가보았다. 마음속으로 계단을 헤아리며 따라 오르다보니 무서움을 잊을 수 있었다. 어렵게 내딛은 걸음이었지만 계단을 다 오르고 나니 우리 집 마당도 보이고 나무들도 보였다. 아버지는 나무와 친해지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쭈뼛쭈뼛 손을 내밀어 나무와 수인사를 나누던 그날, 처음으로 나무의 이름이 이팝이라는 걸 알았다. 그 후 몇 번을 더 아버지가 나를 산에 데려가 주셨고 그렇게 나는 나무와 친해질 수 있었다. 그때부터 희망의 나무였다. 친구가 없었던 나에게 친구가 되어주었고, 속상한 일로 찾아가면 등을 내어주곤 했다.겨울 이팝나무에 하얗게 함박눈꽃이 핀 것을 처음 본 것은 아버지가 산에 가신 후 영원히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해였다. 눈 구경이 힘든 이곳에 그해는 몇 번의 폭설이 내렸다. 그 후, 눈도, 꽃도 나무도 다 보기 싫어졌다. 꽃이 피는 봄날도, 눈 내리는 겨울 숲도 모두모두 잊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팝나무 아래서 얼마나 서럽게 울었던지. 그 후로 나는 이팝나무의 소식이 궁금하지 않았다.다시 찾아간 겨울 숲, 이팝나무 아래에 서니 꼬마아이가 그곳에 있다. 나무 밑동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본다.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다. 어릴 적 그때도 아버지 손을 잡고 나무에 기대어 지는 해를 본 적이 있다. 칼바람이 부는 날이었지만 손을 잡고 나무에 기대었을 때 등이 따뜻했던 기억은 잊을 수 없다. 등을 기대고 나즈막이 나무에게 말을 걸어본다. 이팝나무 삭정이처럼 떨어져 나가는 기억들. 기억들을 고봉밥처럼 담아 허기를 채우고 싶다고.

2017-01-13

시간 남기는 법

▲ 강길수 수필가칠년 전 사월 어느 날, 한 평생교육문화센터의 서실(書室) 문을 처음 들어섰었다. 나이 들어 할 수 있는 것을 찾다가, 그 중 하나로 붓글씨 쓰기 연습을 시작한 것이다. 우연히 보게 된 광고지를 보고 그리하였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 두 시간씩이 연습시간이었다.첫날은 `가로 직선 긋기 연습`을 했다. 선생님이 습자지(習字紙)에 쓴 붉은 색 체본(體本)을 본 삼아 그었다. 다음 날은 `세로 직선 긋기`를 하였다. 이어 `한 일`자와, 한글 `ㅣ`와 같은 형식의 선 긋기를 선생님이 인정할 때 까지 이었다.드디어 숫자 등 쉬운 글자부터 쓰기 연습이 시작되었다. 해서체(楷書體)다. 중학교 땐가 잠시 `습자연습`을 해 본 게 전부인 나였다.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잘도 갔다. 약 다섯 달이 흐른 후에야, 나는 체본에 날짜와 글자의 뜻과 소리를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훗날 혼자 연습 할 때,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다행히 시작한 첫날의 연습지에는, 그날 쓴 것인지, 후에 쓴 것인지는 기억에 없지만, `2009. 4. 16(木) 시작, 유네스코 포항 평생교육문화센터`라고 첫머리에 기록되어 있었다.직장 일을 할 때는 육하원칙에 따라 일을 빈틈없이 기록하고 처리한다고 평 받던 내가, 정작 자기 일에는 왜 그렇게 어눌했던지 모르겠다. `다락 루(樓)`자가 있는 것은 `2009. 9. 29`로 날짜가 쓰여 있다. 또 `잠잠할 묵(默)`자가 있는 것이 그 해 10월 15일 쓴 것이다.`이을 속(續)`자를 쓴 것이 같은 해 10월 27일의 연습지다. 글씨가 제법 늘었던지 선생님은 이 무렵부터 의례적 격려이겠지만, 내게 `잘 쓴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리고 동료들도 `명필 나오겠다`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사실 집에서 복습으로 써 본 것은 딱 한 번에 지나지 않았던 나다. 일주일에 두 번 쓰는 것으로 잘 쓴다는 소리를 들으니, 미안하기도 했으나 내심 기분도 좋았다. 보통, 한 체본에 서너 장씩 쓰고 넘어갔다. 선생님의 글자를 닮아 가는지 나로서는 잘 몰랐다.같은 무렵, 한 어린이집에서 한자를 한 학기 가르친 일이 있다. 마지막 날, 아이들에게서 받은 학모양의 편지가 정겹고 재미있었다. 고마워 기념으로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내친김에 내 붓글씨 사진도 남기기로 하고, 장롱에다 쓴 습자지들을 세로로 붙이고 사진을 찍었다. 쓴 일자별로 습자지를 찾아 펴고 붙여, 사진 찍는 작업은 시간이 꽤나 걸리는 성가신 작업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자나간 삶의 모습을 남긴다는 기쁨도 있었다. 한 사진을 찍는 순간, 이런 깨달음이 문득 들었다.`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에겐 흘러가지만, 무엇이건 하는 사람에겐 남는 법이다!` 하고.세월이 제법 흐른 지금 생각해보면, 사람의 일 중 대부분은 시간을 남기는 활동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인간 활동의 전 분야에서 기록과 제작, 창작, 보관 등 시간을 남기는 일은 유사 이래 계속되어 온다. 가정, 직장, 공공기관, 박물관, 도서관, 전시장, 공연장, 연구소 등 사람이 살고 일하며 쓰는 공간과 그 안에 있는 것들은 모두가 시간을 남기는 것들이다. 시간은 보이거나 들리지 않게 예외 없이 흐르지만, 지성(知性)으로 사는 인간은 보이지 않는 시간을 보이거나 들리는 대상물로 변화시켜 남기고 있다. 이것이 바로 역사가 아닐까. 그리고 역사는 무엇이건 하는 사람 곧, 시간 남기는 법을 실천하는 이들에 의해 이루어져 간다고 믿어진다.나는 생각했다. 사람은 시간을 남기며 살아야 하는 존재라고….

2017-01-06

겨울나무처럼

▲ 김병래시조시인 잎을 다 떨군 나무들이 겨울바람 속에 묵묵히 서 있다. 나무들에게도 어떤 느낌 같은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매서운 삭풍을 온몸으로 맞으며 앙상하게 서 있는 모습은 어딘가 쓸쓸해 보인다. 사람들도 좀 적막해져서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아야 할 것 같다. 망년회니 해맞이니 부산을 떨고 몰려다니는 것은 겨울의 분위기에 어울리지가 않는다. 한 해가 기울고 새해가 시작된다는 것은 대자연의 섭리에 따른 일월성신의 운행에서 비롯된 시간개념이다. 초목과 금수(禽獸)가 그 법칙에 따라 생육과 소멸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도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삶의 모습과 태도를 바꾸어 가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적절한 일이 될 것이다.올해는 여느 해보다 어둡고 어수선한 연말이다. 가뜩이나 불황의 늪에 빠진 경제사정으로 다들 아우성인데,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국정농단 사실이 드러나면서 백만 군중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몰려나오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우선 생각하게 되는 것은 대통령의 자질에 대해서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국가원수의 자리에는 적어도 건강하고 정상적인 식견과 품성을 가진 사람이 앉아야 하는 것인데 박근혜 대통령의 행동에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피를 나눈 형제들과는 담을 쌓고 희대의 사기꾼이라는 최태민과 그 가족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서 살아온 것도 그렇고, 막중한 국정의 운영에까지 상당 부분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인 행태를 보여서 국민들의 크나큰 실망과 분노를 샀다.다음으로는 아직도 우리나라는 대통령 측근이란 자들의 호가호위와 국정농단이 먹혀들어가는 사회라는 것이다. 정계와 재계는 물론 법조계, 학계, 문화계, 스포츠계 할 것 없이 권력의 위세에는 맥을 못 추고 한통속으로 놀아났다는 것이다. 소위 강남아줌마 하나가 국정전반을 농단할 수 있을 만큼 허술하고 부패한 것이 바로 우리 사회의 민낯이고 실상이란 점도 솔직하게 인정을 해야 할 것이다.그러나 무엇보다 특기할 만한 것은 촛불을 든 백만 군중의 평화적 준법 시위였다. 최루탄과 무력진압이 없어지고 화염병과 쇠파이프가 사라진 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성숙했다는 것이고 희망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조롱과 비하를 일삼던 외국 언론들도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이제 우리나라는 더 이상 정치적 혁명이 필요한 게 아니다. 그것은 과도기의 후진국에나 필요한 격변인 것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혁명보다는 내실과 성숙이기 때문이다. 내실을 다지고 보다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법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정국의 혼란도 법과 제도가 부실해서가 아니라 엄정하고 정의롭게 시행하지 않은 데서 야기된 것이다.아무튼 국내외적으로 산적해 있는 당면문제들은 우리를 기대와 희망으로 새해를 맞을 수 없게 한다. 갈수록 도를 더해가는 북핵의 위협과 오리무중인 경제의 불황,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조류독감까지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는데 정치꾼들은 하나같이 당리당략이나 개인의 잇속 챙기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열망도 좋고 혁신도 좋지만 그 바탕에는 가장도 냉철하고 신중한 분별력과 진정성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국정을 농단한 자들과 동조를 한 자들은 이제 엄정한 법의 심판에 맞기고 이 세밑에는 저 겨울나무들처럼 저마다 쓸쓸하고 적막해져서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아야겠다.

2016-12-30

시간 남기는 법

▲ 강길수 수필가칠년 전 사월 어느 날, 한 평생교육문화센터의 서실(書室) 문을 처음 들어섰었다. 나이 들어 할 수 있는 것을 찾다가, 그 중 하나로 붓글씨 쓰기 연습을 시작한 것이다. 우연히 보게 된 광고지를 보고 그리하였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 두 시간씩이 연습시간이었다.첫날은 `가로 직선 긋기 연습`을 했다. 선생님이 습자지(習字紙)에 쓴 붉은색 체본(體本)을 본 삼아 그었다. 다음 날은 `세로 직선 긋기`를 하였다. 이어 `한 일`자와 한글 `ㅣ`와 같은 형식의 선 긋기를 선생님이 인정할 때까지 이었다.더디어 숫자 등 쉬운 글자부터 쓰기 연습이 시작되었다. 해서체(楷書體)다. 중학교 땐가 잠시 `습자연습`을 해 본 게 전부인 나였다.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잘도 갔다. 약 다섯 달이 흐른 후에야, 나는 체본에 날짜와 글자의 뜻과 소리를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훗날 혼자 연습할 때,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다행히 시작한 첫날의 연습지에는 그날 쓴 것인지, 후에 쓴 것인지는 기억에 없지만, `2009. 4. 16(木) 시작, 유네스코 포항 평생교육문화센터`라고 첫머리에 기록되어 있었다.직장 일을 할 때는 육하원칙에 따라 일을 빈틈없이 기록하고 처리한다고 평 받던 내가 정작 자기 일에는 왜 그렇게 어눌했던지 모르겠다. `다락 루(樓)`자가 있는 것은 `2009. 9. 29`로 날짜가 쓰여 있다. 또 `잠잠할 묵(默)` 자가 있는 것이 그 해 10월 15일 쓴 것이다. `이을 속(續)`자를 쓴 것이 같은 해 10월 27일의 연습지다. 글씨가 제법 늘었던지 선생님은 이 무렵부터 의례적 격려이겠지만, 내게 `잘 쓴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리고 동료들도 `명필 나오겠다`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사실 집에서 복습으로 써 본 것은 딱 한 번에 지나지 않았던 나다. 일주일에 두 번 쓰는 것으로 잘 쓴다는 소리를 들으니, 미안하기도 했으나 내심 기분도 좋았다. 보통, 한 체본에 서너 장씩 쓰고 넘어갔다. 선생님의 글자를 닮아 가는지 나로서는 잘 몰랐다.같은 무렵, 한 어린이집에서 한자를 한 학기 가르친 일이 있다. 마지막 날, 아이들에게서 받은 학 모양의 편지가 정겹고 재미있었다. 고마워 기념으로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내친김에 내 붓글씨 사진도 남기기로 하고, 장롱에다 쓴 습자지들을 세로로 붙이고 사진을 찍었다. 쓴 일자별로 습자지를 찾아 펴고 붙여, 사진 찍는 작업은 시간이 꽤나 걸리는 성가신 작업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지나간 삶의 모습을 남긴다는 기쁨도 있었다. 한 사진을 찍는 순간, 이런 깨달음이 문득 들었다.`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에겐 흘러가지만 무엇이건 하는 사람에겐 남는 법이다!` 하고.세월이 제법 흐른 지금 생각해보면 사람의 일 중 대부분은 시간을 남기는 활동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인간 활동의 전 분야에서 기록과 제작, 창작, 보관 등 시간 남기는 일은 유사 이래 계속되어 온다. 가정, 직장, 공공기관, 박물관, 도서관, 전시장, 공연장, 연구소 등 사람이 살고 일하며 쓰는 공간과 그 안에 있는 것들은 모두가 시간 남기는 것들이다. 시간은 보이거나 들리지 않게 예외 없이 흐르지만, 지성(知性)으로 사는 인간은 보이지 않는 시간을 보이거나 들리는 대상물로 변화시켜 남기고 있다. 이것이 바로 역사가 아닐까. 그리고 역사는 무엇이건 하는 사람 곧, 시간 남기는 법을 실천하는 이들에 의해 이루어져 간다고 믿어진다.나는 생각했다. 사람은 시간을 남기며 살아야 하는 존재라고….

2016-12-23

마음의 별을 찾아

▲ 김주영 수필가밤하늘에 별이 총총하다. 서쪽하늘에 초승달과 함께 개밥바라기는 유난히 반짝인다. 겨울 밤하늘은 맑고 청명하여 별빛은 고혹적으로 빛난다. 도심의 불빛을 벗어나면 만날 수 있는 황홀경이다. 나무들 사이를 돌아온 바람들이 산자락에 머문다. 코끝이 시리도록 심호흡을 하니 답답했던 생각들이 청아해진다. 쏟아져 내리는 별과 별빛사이를 걸으니 시가 읊조려진다. 시를 읊조리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도심의 화려한 불빛에서는 볼 수 없었던 별들을 바라본다. 별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늘 그곳에서 반짝이고 있다. 별빛들을 보고 있으니 시를 낭송하던 벗들의 눈빛이 생각난다. 꿈들로 반짝이는 별빛 같은 눈빛. 시낭송으로 마음을 나누고 정을 쌓은 인연들이다. 시는 혼자서 읽어도 좋으나 소리 내어 함께 나눠 읽으면 낭송을 통한 새로운 공감이 생긴다. 시를 소리 내어 읊으면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다. 시낭송은 시의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시에 낭송자의 감정을 실어서 전달하는 것이다. 같은 내용이라도 소리의 강약, 고저에 따라 그 감흥은 다르다.시를 읽는 행위는 쉽게 접근할 수 있다. 하지만 시낭송은 일상적이고 보편화되지 못하고 있다. 왜일까? 틀에 메인 낭송법 때문일까? 시낭송의 가장 중요한 것은 격식화된 낭송법보다 감정전달과 교감이다. 하지만 여러 시낭송문학회나 시낭송대회를 참가해보면 교감보다는 기교가 앞서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전국에서 많은 시낭송대회가 열린다. 대회를 통해서 시낭송가증이라는 것을 주기도 한다. 주최 측에서 발급하는 시낭송가증을 받기 위해 시낭송 애호가들이 참여한다. 나 또한 벗들과 함께 몇 차례 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다. 하지만 객관적인 평가가 없는 경우도 있었고 대회 참가자들도 공감하지 못하는 주관적인 진행에 씁쓸함을 느끼기도 했다.시낭송은 청각으로 전해지는 예술이다. 시낭송은 청자에게 감흥을 전달하는 것이다. 시적화자의 마음을 헤아려서 정확하게 전달해야한다. 다른 사람의 기교만 흉내 내면 호소력이 약하다. 시낭송은 낭독과 다르다. 시를 외워서 전달해야 한다. 나름대로 분석하고 자기만의 감정을 실어서 낭송을 하면 전해지는 감동은 크다. 시낭송에는 여러 가지 낭송기법이 있다. 다양한 기법을 잘 활용하고 개성을 살려야 한다.시낭송은 치유의 힘도 있다. 한 편의 시를 읊으면 감정이 더해지고 공감이 형성된다. 낭송을 통해서 심적 위안을 받기도 하고 자신감을 찾기도 한다. 나또한 시낭송을 통해서 감정의 정화를 느낄 때가 많았다. 읊조리는 시의 배경에서 응어리졌던 기억들도 만나고 황홀한 순간도 만난다. 고대 그리스의 서정시인 시모니데스는 `그림은 말 없는 시이고 시는 말하는 그림` 이라고 했다.벗들과 함께 `마음의 별을 찾아`라는 시낭송 알리기를 하고 있다. 평범한 일상에서 시낭송으로 소통하고 행복을 나누고자 시작한 일이다. 시 읊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밤하늘 수놓은 별들을 보듯 마음속에 속삭이는 별들이 보인다. 마음의 창이 열리고 무한히 펼쳐지는 별빛에서 잊어버렸던 생각과 꿈들을 찾기도 한다. 시낭송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들의 눈동자에 별이 빛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항상 웃는 모습들이다. 밝은 표정과 맑은 마음들이 얼굴에 빛난다. 일상의 단조로움에서 마음의 별을 만날 수 있는 일이 어디 흔하랴. 시를 읊조리면 마음의 별이 반짝인다. 책장에 꽂혀 있는 시집을 꺼내서 시 한편을 외워보자. 은하수의 수천 억 개의 별들보다 더 반짝이는 별들을 만들 수 있으리라.

2016-12-16

▲ 이순영수필가 푸르스름한 새벽이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다가 마당에 세워 둔 자동차에 눈길이 멎었다. 운전석의 문이 열려 있는 것 같았다. 앞치마를 두른 채 마당으로 나가 자동차를 들여다보았다. 누군가의 손을 탄 흔적이 뚜렷하다. 차안에 두었던 물건들을 죄다 뒤져 놓았다. 서랍에 있던 장갑, 서너 알 담겨있는 껌 통, 시장바구니와 메모지, 자동차등록증과 그 속에 접어서 넣어둔 영수증 몇 장 따위가 의자 위에 널려져 있었다. 자동차 털이범이 설친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내가 직접 피해를 입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물건들을 제자리에 정리하고 있으려니 몇 해 전 집을 다녀간 손이 생각난다.집이 비어있는 시간은 불과 이십 분정도 될까 말까한 순간이었다. 내가 도서관으로 간 후 잠시 집에 들른 남편은 현관문의 열쇠가 가볍게 돌아가서 이상하게 느꼈지만 거실과 주방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기에 내가 문을 잠그지 않고 나간 줄 알았다고 한다. 집안에서 서성이다가 안방 문을 열자 보석함이 서랍장 위에 올려진 것을 보고서야 현관문을 열 때의 미심쩍었던 느낌이 번쩍 떠올랐단다. 얼른 뚜껑을 열어 보았지만 이미 손이 지나간 뒤였다. 혼수품으로 장만한 보석들을 몸에 지니고 다니기가 불편하기도 하고 거추장스러워서 함에 넣어 보관하고 있던 것이다. 날렵한 검은 손이 대낮에 아파트의 문을 따고 방안에 있던 귀금속을 몽땅 털어가 버리고 말았다. 며칠 동안 검은 손이 또 올까봐 무서움이 고개를 삐죽삐죽 내밀었다.뿐만 아니다. 어느 여름날, 화분에 심어 베란다에 둔 백합이 꽃을 피우지 못하기에 햇볕과 바람이 잘 통하는 꽃밭에다 심어두고 오며가며 들여다보았다. 비가 아주 부드럽게 내린 다음날 백합을 만나러 꽃밭으로 갔다가 뻥 뚫린 작은 웅덩이를 발견했다. 그 새하얀 연꽃모양의 뿌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혼수품으로 받은 목걸이와 팔찌, 반지들이 몽땅 손을 탔을 때와는 또 다르게 가슴이 아렸다. 책과 꽃을 몰래 가져가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하지만 아찔한 현기증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텔레비전에서 손가락 두 개로 피아노를 연주하고, 발가락으로 시계를 수리하는 사람의 `발손`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의 손은 내 가슴을 뜨겁게 흔들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일로 전환시킨 그들의 손은 뼈를 깎는 듯 고통을 이겨낸 결과였다. 그들의 도전정신과 피나는 노력으로 이루어 낸 피아노연주와 시계수리 기술은 감동 그 자체였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고개를 숙여 내 손을 보았다. 열 손가락 멀쩡한 내 손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의미로 쓰였던가.세상에는 온전하지 못한 손으로 많은 사람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도 하고, 온전한 손으로 타인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기도 한다. 굼뜬 손과 재빠른 손, 따뜻한 손과 차가운 손, 어떤 손을 가진 사람이 잘 사는 사람일까.간밤 몰래 자동차에 다녀간 손의 손놀림 또한 매우 날렵하고 민첩할 것이다. 사람들이 곤히 잠을 잘 때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재빠르게 작업을 했을 터이다. 그 소행이야 배울 바가 아니지만 근본은 선한 사람 일게다. 자동차 안을 뒤지기만 하고 자동차에는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 시동이 걸리지 않게 하여 출근길에 발을 동동 구르게 할 수도 있었으련만 바람처럼 왔다갔으니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밤새 낯선 손길에 정신이 혼미했을 물건들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있던 자리에 앉혀두고 자동차문을 닫는다. 신문배달부가 던진 신문이 마당에 툭, 떨어진다. 아침밥 준비를 서둘러야겠다.

2016-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