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반듯하게 잘린 한 뼘 땅을 걸어 나와최대한 무대 앞쪽으로 수줍은 듯 그는 뭔가를나눠 주고 있다아무도 안 죽었는지 살피는 표정으로그는 땅속에 묻어 두었던 자신의 몸을 바람처럼 꺼내조금 만지게 해 주는 것인데,어디가 아프다고 하는 걸까?희미해져 가는 그의 웃음과 눈빛 속으로내가 먼저 아파야 하는정말 먼곳땅에 묻힌 이도 이승에 다시 돌아오는 날이 있다. 제삿날이 그런 날이겠다. 위의 시에서 ‘그’는 자신이 묻혀 있던 “한 뼘 땅을 걸어 나와” “아무도 안 죽었는지 살”핀다. 제사에 모인 자신의 아이들이 잘 있는지 알고 싶어서이리라. 영정사진은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통로다. 이 사진을 통해 죽은 자는 “자신의 몸을” “조금 만지게 해 주”고, ‘나’는 사진 속 “그의 웃음과 눈빛 속으로” 빠져들며 아파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4-22
맑은 날말은 고갯길에서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싶었습니다.한 땀 한 땀 구름을 꿰며휘파람새가 지저귑니다.그곳은 자기에게 오지 않고, 자기를 떠난 행복처럼슬픈 울림이었습니다.짙은 녹음으로 우거진 산들이 고요히나아가려는 자의 앞길을 막습니다.쓸쓸해진 그는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마른 풀처럼 뻗은 갈기가 타오르고어디선가 같은 외침이 들렸습니다.말은 방금 근처에서, 따뜻한 기운을 느꼈습니다.그리고 먼 세월이 한꺼번에 흩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1936년 25세 나이로 요절한 일본의 여성 시인 사가와 치카의 시. 오직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싶”은, 지쳐버린 말. 그의 앞길을 가로막은 산들 앞에서 결국 “그는 소리 높여 울”어버리는데, 그러자 그 울음은 그의 갈기를 활활 타오르게 하고, 나아가 “어디선가 같은 외침이 들”리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그는 “따뜻한 기운을 느”끼지만, 그것은 죽음의 기운인지 모른다. “먼 세월이 한꺼번에 흩어지는 것을 보”면. 문학평론가
2024-04-21
승객 여러분 뼈를 깨끗이 씻고 탑승하기 바랍니다우리는 등을 보며 육류비빔밥을 먹을 것입니다길이 없지만 출발해야 합니다누군가 기차를 잡고 앞으로 밉니다우리는 출발합니다살러 갑니다내 머리를 잡고 꿈틀거리지 좀 마세요숨을 참으면 연해질 수 있습니다더욱 부드러워질 때까지핏물이 빠질 때까지썰기 좋은 고기가 될 때까지한 끼의 밥이 되기 위해우리는 매일 출발하고 있습니다 (하략)밥벌이를 위해 직장에 출근하는 이들로 가득 찬 통근 지하철. 시인에 따르면, 이곳은 ‘육류비빔밥’ 제작소다. 노동하며 먹고 살아야 하는 우리 평범한 이들은 자신의 삶을 직장에 바쳐 자신의 밥을 마련해야 한다. 하여 그들의 삶 자체가 밥이 되고 있다고 하겠다. 아침마다 “길이 없지만 출발”하는 지하철은, 노동자들이 “한 끼의” “육류비빔밥”이 되기 위해 “더욱 부드러워”져 “썰기 좋은 고기”로 변해가는 곳이다. 문학평론가
2024-04-18
요새 택배비 얼마나 한다고저 무거운 걸 지고 다녀거지같이누구더러 하는 소린가 했더니붐비는 사람들 사이로아버지가 온다쌀자루를 지고 낮게 온다거지라니,불붙은 종이가얼굴을 확 덮친다다 지난 일인데얼굴에 붙은 종이가떨어지지 않는다평생 상처가 되는 말이 있다. 특히 부모에 대한 모욕적인 말이 그렇다. 무거운 쌀자루를 지고 오는 시인의 아버지에게 어떤 이가 툭 내던진 ‘거지같이’라는 말. 시인에게 이 말은 “얼굴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불붙은 종이”가 되었다. 시인이 시를 쓸 때 언제나 의식하게 되는, 쌀자루보다 무거운 말. 말은 말한 이의 사람됨을 드러낸다. 무심코 던지는 말에서도, 말한 이의 속생각과 인성이 드러난다. 조심할 일이다. 문학평론가
2024-04-17
상극이고 웬수인 사람이 죽으니한 줌 뼈밖에 없고오 분을 동석하기 힘든 사람이 죽어도재 한 줌밖에 없고동해 파도는 질리도록 밀려오는데질리지 않고질릴 리 없고허공은 무한대의 눈발 들끓고그날 감정이 얼마나 미세한지떨어지는 눈송이 하나에도천지가 가만히 있질 않았다자연의 무한 앞에서 미움은 얼마나 작은 감정인가. 그렇게 미워한 사람도 죽음 이후에 “한 줌 뼈”, “재 한 줌”으로 남을 뿐이다. 시인 또한 미래엔 그렇게 남게 될 터, 하지만 이 무한한 허공과 “질리도록 밀려오는” 파도 앞에서 시인이 느끼는 감각은 숭고함이라기보다는 미세함이다.“무한대의 눈발” 속에서 그는, “떨어지는 눈송이 하나에도 천지가” 거대하게 진동하며 들끓는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2024-04-16
고향 마을에 들어 내가 뛰어다니던 논두렁을 바라보니 논두렁 물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사내의 몸에서 나온 소년이 논두렁을 따라 달려나갔다 뛰어가던 소년이 잠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봤다논두렁 멀리 멀어져간 소년은 돌아오지 않았고 사내는 그만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나이가 지긋이 들어 있을 ‘사내’는 “고향 마을”을 찾아 자신이 “뛰어다니던 논두렁을”‘거울’인 양 바라본다. 그러자 ‘논두렁 물’ 역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사내’의 몸에서” 고향에서 뛰놀던 소년이 분리되어 “논두렁을 따라 달려나”가는 것 아닌가. 그의 기억에 봉인되어 있었던 소년이 되살아난 것, 하지만 그렇게 분리된 소년은 ‘사내’와 다시 합쳐질 수 없다. 소년은 그에게서 영영 떠나버리고 만 것이니. 문학평론가
2024-04-15
오랜 세월 지나고 다시 오랜세월이 지나서, 대기가 당신 영혼과 내 영혼 사이에구덩이를 판다면, 오랜 세월이 지나고당신이 사랑했던 사람으로 나 홀로 남는다면,당신의 입술 바로 앞에 멈춰버린 존재로,정원을 거니는 것마저 피곤해진 가련한 사람으로 남는다면,당신은 어디에 계시려나? 대체 어디에,당신, 오 내 입맞춤의 소산이여!시의 제목이 ‘낯모르는 여인’이지만, 시의 마지막 행에 따르면 당신은 ‘입맞춤의 소산’이다. 오랜 세월의 “대기가 당신 영혼과 내 영혼 사이에/구덩이를” 파서 당신으로부터 시인이 멀리 떨어지게 된다면, 그땐 당신은 낯선 존재가 되리라고 시인은 말하려는 것 같다. 하면, 위의 시는 “당신의 입술 바로 앞에 멈춰버린 존재”가 될지 몰라 불안한 시인이 사랑이 소멸되었을 먼 미래의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라 하겠다. 문학평론가
2024-04-14
길 잃은 강아지와굽은 허릴 이끌고꼭두새벽부터 나와 서성이는 노인과풀씨를 쪼아대는 참새들이한 줄로 서 있다문득, 산모퉁이를 돌아기차 바퀴 소리가 들려오자동시에 그곳을 향해휙 고개가 돌아간다우린 때로 그리움으로 하나가 된다이젠 기차가 정차하지 않는 시골역. 버려진 역 앞에 버려진 이들이 보인다. “길 잃은 강아지”와 굽은 허리로 새벽부터 나와 서성이는 노인.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역이기에 참새들은 이제 “풀씨를 쪼아”댈 뿐이다. 하나 이들 모두 좋았던 시절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역을 지나쳐버리는 기차의 “바퀴 소리”에, 이들이 “그리움으로 하나가” 되어 소리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동시에’ ‘휙’ 돌리는 것을 보면. 문학평론가
2024-04-11
눈이 오면 땅은 몸에 박힌 발자국을 밀어낸다./ 발자국이 향하고 있는 끝에/ 네가 있다.(중략)나는/ 나무가 되지 못하고/ 고라니가 되지 못하고/ 별도 아니어서/ 네가 있어/ 제자리에서 발만 구르며 끝을 바라볼 뿐인데그건 병든 몸을 바라보는 신비주의자의 믿음이라고/ 저 빈 하늘/ 저 차가운 하늘/ 가득새 한 마리/ 제 그림자를 움켜쥐고 날아가자/ 어둠이 눈발처럼 날리기 시작한다. 이제는 착하게만 살 뿐./ 쓸 뿐./ 살아내 써낼 뿐.‘엠페리파테오’는 성경에 나오는 헬라어로, (하나님이) 순시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시인은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영혼의 구원이라는 ‘신비주의’의 의미에서 이 단어를 쓴 듯하다. 땅 위에 쌓이는 눈이 발자국을 밀어내고, 이 “발자국이 향하고 있는 끝”에 있는 너를 시인은 “발만 구르며” 바라본다. 나무나, 별, 고라니처럼 순수한 존재여야 네게 갈 수 있는 것. 다만 그는 그런 존재가 되기 위해 “살아내 써낼 뿐”이다. 문학평론가
2024-04-09
어린이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여권, 세상이 무서워 어깨동무하고 우우 몰려다니는 노랑, 노랑은 징검다리, 바람 속에서 따뜻했다 아직 삐딱한 사춘기의 표정은 도착하지 않았다 숙성되어 채도 낮은 골드까지 가려면 시간의 긴 늪과 오솔길을 건너야 하고, 이제 봇짐 속에 놓치거나 잃어버린 골목을 점검하며 수시로 방향을 바꾸며 길을 떠나야 하리라 지금 이곳에서부터 저 쨍하게 밝은 날들이 뼈마디 욱신거리는 곳곳마다 스며들어 부드럽게 힘차게 늙어가기를갓 핀 개나리는 어깨동무 한 어린이처럼 보인다. 나이 든 시인도 개나리를 보며 어린이처럼 마음이 설렜던 것. 하나 이 개나리도 “시간의 긴 늪과 오솔길을 건너” “채도 낮은 골드”에 도달할 터, 이 ‘숙성’으로 가기 위해 “잃어버린 골목을 점검하며” “길을 떠나야” 할 테다. “쨍하게 밝은 날들이” 이 긴 여행을 위한 힘을 불어넣어주기를 시인은 기원한다. 그는 저 개나리에서 어린 날의 자신을 읽고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4-08
돌 위에 돌을 얹고 그 위에 또 돌을 얹어궁극으로 치닫는 마음마음위에 마음을 얹고 그 위에 또 마음을 얹어허공으로 치솟는 몸(중략)조그만 돌멩이를 주워마음의 맨 꼭대기에 올려놓았다.태어나기 전의 돌탑을 태어난 이후에도 기다렸다.한곳에 머물러 오래 기다렸다.돌멩이가 자랄 때까지돌탑이 될 때까지사찰에 가면 사람들이 차곡차곡 얹어놓은 돌을 볼 수 있다. 시인은 깊은 마음과 생각으로 이 돌 위에 또 하나의 돌을 얹는다. 시에 따르면, 이 돌들은 “궁극으로 치닫는 마음”인 것, 그 마음들은 허공 위로 한 층 한 층 얹히며 탑을 이루는 중이다. 비록 작은 돌탑이라고 해도 그 안에서는 어떤 위대한 ‘연대’가 맺어진다. “돌멩이가 다 자”라서 “태어나기 전의 돌탑”이 되기를 기다리며 이루어지는 “시간의 연대”가. 문학평론가
2024-04-07
내게 가장 소중한 생각들은 세상에는 낯설어, 나 그것들을 조금이라도 표현한다면 세상에 낯설게 비친다. 그러나 만일 나 그것들을 완전히 표현한다면, 그것들은 세상에 두루 통하는 것이 될 수 있을 거다.아! 나 그럴 수 있는가? 그것들은 내게도 낯설어 보인다 나 자신에게도. 나 분명히 말했다: 가장 소중한 것들이라고….개념들, 그리고 말들, 그리고 말들, 그리고 개념들을 참조하는 일련의 (괴상한) 것들.20세기 프랑스 시인 퐁주의 시. 생각을 언어로 어떻게 정확히 표현할 수 있을까. 시인은 이 문제로 골치를 썩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쓰고 있는 말들이 개념과 일치하리라 별 의심 없이 전제한다. 하지만 이 시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여 그에게 “가장 소중한 생각들”이란 “세상에는 낯설게 비”칠 터, 이 생각을 어떻게 완전히 표현할 것인가가 그의 과제다. 그 표현은 결국 괴상한 모습을 하게 될 테지만. 문학평론가
2024-04-04
사랑만 한 수고로움이 어디 있으랴평생을 그리워만 하다지쳐 끝날지도 모르는 일마음속 하늘치솟는 처마 끝눈썹 같은 낮달 하나 걸어 두고하냥 그대로 끝날지도 모르는 일미련하다수고롭구나푸른 가지 둥그렇게 감아 올리며불타는 저 향나무우리가 사랑을 확인하는 것은 사랑하는 이와 이별해 있을 때 아닐까. 사무치는 그리움이 사랑을 확인케 하는 것, 그래서 “사랑만 한 수고로움이 어디 있으랴”라는 시인의 말이 정곡을 찌르는 느낌이다. 그리움은 저 “눈썹 같은 낮달”을 “마음속 하늘”에 걸어두고 하염없이 바라보는 일이니. 이 ‘사랑-그리움’을 몸으로 드러내는 것이 향나무다. 향나무가 저렇게 “푸른 가지 둥그렇게 감아 올리며/불타는” 것을 보면. 문학평론가
2024-04-03
생각을 끄려고 음악을 틀었다수요일인 줄로 알고 목요일을 보냈다비가 온다는 걸 안 뒤에야 우산을 샀다풍경이 나보다 먼저 흐르고나는 몇걸음 뒤처져 따라갔다늦은 나이에 외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내 안의 미움을 웃음으로 번역하는 매일매일무슨 말을 하는데 자꾸만모르는 목소리가 들려요세상과는 영 입 모양이 맞지 않았다우리들 대부분은 세상과 “입 모양이 맞지 않”은 채 살지 않는가. 우리 역시 위의 시의 화자처럼 세상과 맞추기 위해 외국어 번역하듯이 “미움을 웃음으로 번역”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 아닐까. 필자 역시 “생각을 끄려고 음악을 틀”으며 세상의 흐름에 “몇걸음 뒤처져 따라”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나아가 외국어 배우듯 세상살이 요령을 배우다 “모르는 목소리가” 내면에서 들릴 때도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4-02
사랑은 시로 할 수밖에 없는 것.시의 말로 약속 잡고결국 더 시선을 건드리지.그런 음지(陰地)지. 사랑은시간의 공간이어서잔 이별마저 시로 돌아보는 거야.너는 내게 눈웃음 짓는다,나무 의자 수리하는 시인같이.그런 시는 도대체 무슨 눈길일까?퇴고할 수 없는, 그래,나를 응시하는 너 말고 이 세상에누가 더 낯선 시인가?위의 시에 따르면, 시는 사랑의 속성을 가졌다. 시는 사랑의 언어적 표현이다. 시는 사랑하는 너의 나에 대한 ‘눈웃음’ 띤 응시를 마주하면서 풀려나온다. “도대체 무슨 눈길”인지 모를 너의 눈웃음에 발동되는 사랑은, 나의 시선을 충만케 하고 “약속 잡”는 시의 말이 솟아나게 한다. 시 자체여서 퇴고할 수 없는 말을. “시간의 공간”인 사랑은 이별도 “시로 돌아보”게 만든다. 이별의 시간이 머무는 음지로서의 시. 문학평론가
2024-04-01
상처 입은 짐승은/ 동굴 깊이 숨는다일 년이 간다/ 십 년이 간다상처는 깊었지만/ 깊은 만큼 깊이 숨어/ 겨우 아문다그런데 나가는 길을 잃는다/ 나갈 수가 없다길을 잃은 상처는/ 다시 도진다깊이 숨은 만큼 깊게 도진/ 상처가/ 벽을 긁는다예술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위의 시에 따르면, 상처가 아물도록 들어간 동굴에서 나가는 길을 잃은 이들이, 상처가 도져 벽에 무엇인가를 긁는 데서 예술은 시작된다. 하여 최초의 예술은 벽화였다. 깊이, 오래 숨을수록 상처도 깊어지고 벽화 역시 깊어질 터, 그런데 예술의 주체는 상처 입은 자가 아니라 상처 자체라는 점에 주목하자. “벽을 긁는” 일은 상처가 하는 것, 즉 고통의 힘이 예술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3-31
불구덩이를지나온 기왓장그 불기운을 빨아올려야겠다고대웅전 기와지붕 위에서 풀들이 자란다뿌리가 들린 生은불기운을 먹고 자란다그러나,저 허공에 떠 있는풀뿌리의 힘으로부처의 이마엔 주름이 없다시인은 뜻밖의 발견을 해준다. 위의 시는 기와지붕 위에 펼쳐진 풀들이 “불기운을 먹고 자란다”는 발견을 보여준다. “불구덩이를/지나온 기왓장” 속에 보존되어 있는 불기운. 뿌리 들린 존재자들은 자신의 ‘풀뿌리’를 이 불기운에 대면서 “허공에 떠” 살아가는 것, 허공 위로 타‘오르는’ 것이 불이기 때문이리라. 이 “풀뿌리의 힘”이 부처의 이마에 주름을 없앤 걸 보면, 그 힘은 삶의 근심을 이겨내는 힘인 듯하다. 문학평론가
2024-03-27
12월 어느 날 밤 돈 때문에호텔 마담을 시인이 찾아갔다마담은 눈길도 안 주고 말했다돈이라뇨시인답지도 않은 말씀을 하시네요속인들이나 하는 말 따위를시인이 입에 올리시는 건 아니라고 봐요돈하고는 거리가 먼 게 시인이니시인은 가난하니까 그야말로대단한 존경도 받는 거죠시인은 그 말에 울컥하여빌리러 온 일도 잊어버린 채자못 점잔 빼고 있었다야마노쿠치 바쿠는 오키나와 출신의 시인. 위의 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일본시에서 진정한 구어체를 완성했다고 평가받는다고. 시인도 돈이 있어야 먹고 사는 법, 하나 그는 돈이 없다. 돈 빌리러 찾아간 지인은 돈 얘기는 꺼내지도 못하게 한다. 가난하니까 시인은 존경받는 거라고. 이 말에 시인이 울컥한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그는 다시 시인의 자세를 갖추며 점잔 빼고, 돈 빌리는 걸 잊고 만다는 것…. 문학평론가
2024-03-26
누런 애기 별들이이고 온 빛살 풀어좌판을 벌였다저 작은 것들의 치열한 발원에하늘도 황금을 녹여 엎질러 놓았나마른 들판에 발톱을 박아흙의 피를 빨아올리는혀의 흡인력압도적 군락으로뜨거운 여름을굽고 있다불갑초는, 유독 돌을 좋아해서 돌나물이라고도 불리는, 노란 꽃을 피워내는 산나물이다. 시인은 무더기로 핀 꽃들이 “누런 애기 별들”이라고 생각한다. 이 꽃무더기가 뿜어내는 노란 빛이 황홀해, “하늘도 황금을 녹여 엎질러 놓았”다고 감탄하는 시인. 한데 더 강렬한 건, “마른 들판에 발톱을 박아/흙의 피를 빨라올리”는 불갑초꽃의 ‘흡인력’이다. 여름은 이 ‘압도적 군락’의 생명력으로 더 뜨겁게 구워지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4-03-25
인간이 그림자에게2인자의 지위를 부여한 건인간이 무지하거나오만하다는 증거밤을 무서워하는인간의 지위는그림자를 붙잡을 수 없어2인자 없는 영역이몹시 불안하다인간은 그림자를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하여 중요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위의 시에 따르면 그것은 무지나 오만의 증거일 뿐이다. 통상의 생각과는 달리, 융과 같은 분석심리학자가 말한 바, 그림자야말로 인간의 배후에 있는 진실을 품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 진실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인간은 그림자에게 “2인자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 한편 그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인간은 “몹시 불안”해 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