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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지

등록일 2025-08-05 19:40 게재일 2025-08-0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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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아 작가

휴가철, 짧은 여행을 다녀오자는 말에 가족들과 차를 타고 길을 나섰다. 무더운 여름 에어컨 바람에 지쳐갈 때쯤 창밖으로 복숭아밭이 펼쳐졌다. 장호원, 예전부터 복숭아로 유명하다는 말을 들어 아이들이 어릴 때 일부러 복숭아를 사기 위해 몇 번이나 들렀던 곳이다. 들판 끝에 자리한 직판장 간판이 눈에 띄었고 우리는 잠시 발길을 멈췄다. 햇볕 아래 노랗고 붉게 익은 복숭아들이 상자에 담겨 줄지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파지 복숭아’라고 적힌 상자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상자 안의 복숭아는 곳곳에 상처가 나 있었다. 비닐에 잘 덮여 있는 상품 복숭아와는 달리 크기도 제각각이었고 눌린 자국에 거뭇한 흔적도 있었다. 한눈에 봐도 상품으로는 팔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껍질 아래 단맛이 풍겨져 나왔다. 낙과처럼 땅에 떨어진 복숭아가 아니라 어쩌면 풍성하게 익어 스스로 무게를 못 이긴 열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은 볼품없었지만 어쩐지 마음이 끌렸다. “겉은 좀 그래도 속은 멀쩡해요.” 상인 아주머니의 말에 나는 파지복숭아 다섯 상자를 사서 차에 올랐다.

상자 안의 복숭아는 상처투성이였다. 표면은 부드럽기보다는 거칠고 울퉁불퉁했다. 연한 황도빛 위에 붉은 기운이 번졌지만 군데군데 멍이 들고 긁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 어떤 건 껍질이 살짝 벌어져 속살이 보이기도 했고 어떤 건 꼭지 주변이 눌려 검게 변해 있었다. 송진처럼 굳은 진물이 마른 채 매달려 있기도 했다. 손에 쥐자 복숭아 특유의 솜털이 손끝에 부드럽게 스쳤다. 눈으로는 상처가 먼저 보였지만 코끝에는 단내가 먼저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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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지 복숭아. 

숙소로 와 파지 복숭아를 조심스레 깎았다. 칼이 껍질을 따라 들어가자 표면의 상처 아래서 뜻밖에도 말갛고 단단한 속살이 드러났다. 붉은 빛이 번진 살결은 탱탱했고 칼끝에 단물이 묻어났다. 상처 난 껍질을 벗겨내자 복숭아 특유의 맑은 향이 방 안에 퍼졌다. 벌레 먹은 부분이나 검게 변한 자리를 도려내고 나니 그 안은 상처 하나 없던 것처럼 투명하고 순했다. 첫 조각을 입에 넣었을 때 깜짝 놀랐다. 달고, 시고, 향긋하고, 입 안 가득 과즙이 흘렀다. 겉모습만 보고 맛을 짐작했다면 절대 알 수 없었을 속내였다. 복숭아는 여전히 제 계절의 한복판에 있었다.

복숭아 하나를 앞에 두고 나는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문득 사람도 이 복숭아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며 누구나 겉모습에 조금씩 주름이 생기고 빛이 바래진다. 하지만 살아온 시간만큼 그 속은 단단해지고 깊어지고 향기롭게 익어간다. 언뜻 보기엔 초라해 보일지 몰라도, 시간의 바람에 겉껍질은 거칠어졌을지 몰라도, 그 껍질 아래에는 계절을 견디며 은근히 익어온 속내가 있다. 손끝으로 조심히 벗겨낼 줄 아는 이에게만 드러나는 말간 진심과 묵직한 내공이 있다. 그런 사람은 껍질 너머로도 빛을 머금는다.

언젠가 친구가 말했다. “요즘은 거울 보기가 싫어. 피부도 푸석하고 눈가에 잔주름이 너무 많아.” 그때 내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 주름 속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들었겠니. 아이 키우며 울고 웃은 날들, 남편과 싸우고 화해한 날들, 일하고 지치고 다시 일어난 날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다.

나는 파지복숭아를 먹으며 내 삶의 파지들을 떠올렸다. 실수로 넘어졌던 날들, 오해받고 상처 입었던 시간들, 몸과 마음이 지쳐 도망치고 싶었던 밤들, 그 모든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든 단맛이었음을 다시 되새김한다. 내 안에 스며든 날것의 시간들, 그것이 나를 ‘속이 꽉 찬 사람’으로 만들어 갔다.

나이 든다는 것은 상처가 하나둘 늘어나는 일일지도 모른다. 또한 그 상처를 껍질 삼아 속을 지켜내는 일이기도 하다. 내면을 지키기 위해 감당한 바람과 비, 기꺼이 받은 햇살이 내 삶을 익혀간다. 하지만 조금 시들어도 괜찮다. 조금 눌리고 찢겨도 괜찮다. 그 속이 얼마나 깊고 넉넉한지를 알기에.

복숭아를 깎으며 나는 나를 깎았다. 단단한 씨를 피해 조심스레 칼질을 하다 보니 내 안에도 단단한 무언가가 있다는 걸 느꼈다. 아프고 힘들었던 시간이 도려내지지 않는 단단함으로 남았다는 것을.

익어간다는 것, 그것은 단맛을 품는 일이다. 삶의 모든 계절을 통과한 이에게만 주어지는 특권, 파지 복숭아에 담긴 인생의 맛은 생각보다 훨씬 달콤했다.

/김경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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