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년 맞아 참전용사도 찾아 봬
대구공군전우회가 광복 80년을 맞아 우리나라 공군 전투력의 모태인 K-2 대구동촌비행장을 둘러보고 선배 전우들의 희생과 업적을 기리는 행사를 가졌다.
전쟁에 직접 참여했던 신문식(95) 참전용사를 통해 당시의 상황들을 전해 듣고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기도 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당시 우리 공군은 연락기 수준인 L-4, L-5, T-6 등 구형 모델의 비행기가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1950년 7월 한국공군의 전력강화를 위해 미 극동사령부가 일본 ‘이다즈케’ 기지에 있던 전투기 F-51D(무스탕) 10대를 인수하게 된다. 이것이 시발이 돼 대구동촌비행장의 역사가 시작됐다.
당시 이근석 장군은 동촌비행장에서 직접 비행기를 몰면서 전투에 참여했다. 그러던 어느날 이 장군은 적의 탱크 공격에 직접 나섰다가 불행하게도 안양 상공에서 적의 공격에 피격돼 34세의 젊은 나이로 순직하게 된다.
이후 우리 공군은 1952년 5월 황해북도 승호리 철교 폭파와 8월 평양 폭격을 성공시켜 혁혁한 전과를 올린다. 당시 유치곤 장군은 전투기 출격 203회로 최고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유치곤 장군을 기리는 기념관은 현재 대구 달성군 현풍면 유가읍 양리에 있다.
또 당시 활약하던 김영환 장군은 1951년 8월 합천 해인사에 숨어든 공비 토벌을 위해 해인사 폭격을 명령받았지만 국가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과 각종 유산의 훼손을 우려, 기관총 사격으로 적을 퇴치한다. 한국불교 조계종 종단에선 이를 기억하기 위해 해인사 입구에 그의 추모비를 세워 업적을 알리고 있다.
한편 권태정 공군장학재단 이사장과 남상석 전우회 회장, 정중규·이문길 부회장은 6·25 전쟁에 직접 참여했던 신문식 유공자를 찾아 당시 얘기를 나누며 그를 위로했다.
1930년 성주에서 태어난 신 유공자는 21살인 1951년 학도병으로 자원 입대 했다. 성주고등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가야산, 지리산 등지로 공비 토벌에 나서는 등 학도병으로도 활약했다.
1953년 1월 공군에 입대해 조종 간부가 됐으나 훈련 중 갑자기 시력이 나빠져 공군 헌병대에서 근무를 하게 된다. 이후 대구공군기지 헌병대 선임하사로 근무하다 1978년 만기 제대했다. 제대 후 사업가로 변신해 고향 노인을 위해 각종 봉사활동을 벌였고, 대구공군 6·25 참전 용사회 회장직도 맡아 후배들의 사기진작에 힘을 보탰다.
최근에는 보라매 장학기금으로 1000만원을 기탁했다. 대구공군전우회는 선배 전우들의 희생정신과 업적을 가슴에 새기면서 광복 80년의 의미를 나누었다.
/권정태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