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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포항읍을 시로 승격시키고, 호리못을 만들어

최원수 선생은 1949년 1월 8일 영일군수에 임명되어 1년 3개월 동안 영일군을 이끈 후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총선(영일군 갑구)에서 당선된다. 군수와 국회의원의 임기를 합쳐 5년 3개월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공직 생활을 했는데, 그마저도 전쟁 때문에 온전한 의정 활동을 할 수 없는 여건이었다. 하지만 그가 해낸 굵직한 일을 살펴보면 진정한 지도자는 어떤 존재인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김도형(이하 김) : 당시 영일군수의 위상은 어느 정도였습니까?최승태(이하 최) : 경상북도 시장·군수 회의에 가면 큰 목소리를 낼 정도로 대단했지. 영일군이 농지가 넓고 어획량이 많았거든. 그리고 군수의 권한이 지금보다 훨씬 컸어. 경찰서장이 아버지를 깍듯이 모셨지. 경찰서 정보과의 힘이 셌는데 정보2계 담당이 거의 매일 아버지를 찾아와 동향 보고를 했어.김 : 최원수 선생이 영일군수로 재직할 때 업적이라면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요?최 : 영일군에 포항읍과 구룡포읍 2개 읍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포항읍을 시로 승격한 것은 큰 의미가 있지. 사실 당시 포항읍이 시로 승격될 만한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는지는 의문이야. 하지만 아버지가 워낙에 열정적으로 시 승격을 추진했고, 정부 인맥도 좋아서 시로 승격되었던 것 같아.포항시의 모체라 할 수 있는 영일군의 광복 당시 행정구역은 포항읍을 포함해 2읍 13면 1출장소 237정동리(町洞里)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당시까지도 경북의 1부, 22군, 11읍, 240면이 1943년 10월 행정구역과 같은 수로 나타난 것으로 볼 때 영일군의 경우도 정부 수립 때까지 읍면의 수는 변동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포항읍은 1949년 8월 14일 포항부로 승격되어 영일군에서 분리되었고 8월 15일 ‘지방자치법’ 법률 제32호에 의해 포항시로 개칭되었다. 포항시사편찬위원회, ‘포항시사’, 2010, 165∼166쪽 참조 다음의 일화는 최원수 영일군수의 안목과 추진력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영일군수로 재직할 때 포항시 승격 추진 운동을 전개하여 이일우, 박동주, 박일천 등과 시 승격 진정차 상경하니 내무부 어느 국장이 농담조로 “포항읍이 시로 승격되면 영일군수의 산하에서 이탈 행정구역이 독립되는데, 군수가 솔선하여 시 승격 운동을 하러 상경해 진정하는 예(例)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찌 최 군수는 앞장서서 진정을 하러 다닙니까” 하고 물으니 최원수 군수가 “내가 백 년 동안 영일군수로 있는 것도 아닌데 영일군의 발전보다 포항이 시가 되어 번영하는 것이 국가백년지대계를 위하여 바람직한 일”이라고 대답하였다. 포항시사편찬위원회, ‘포항시사’, 1987, 879∼880쪽김 : 최원수 선생이 영일군수로 재직할 때 기억에 남는 일이 있는지요?최 : 아버지는 도시락을 들고 출근하셨지. 특별한 연회 외에는 외식을 거의 하지 않았어. 할아버지처럼 아버지도 원칙주의자였지. 그리고 영일군 공무원들이 탄복할 정도로 글씨체가 좋았어.김 : 최원수 선생은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영일군 갑구에 출마해 당선됩니다. 그 직후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극도의 혼란 속에서 의정 활동을 하게 됩니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성과로 어떤 것이 있을까요?최 : 우선 흥해 신광에 있는 포항에서 가장 큰 저수지 용연지(龍淵池, 호리못)를 만든 것을 꼽을 수 있겠지. 당시 우리나라는 농업 기반의 경제였잖아. 사람들이 먹고살려면 농사가 잘돼야 하고 농사가 잘되려면 농업용수를 확보해야 했지. 하지만 당시 농지는 대부분 천수답이었어. 그래서 아버지는 전쟁 중에도 농림부에서 막대한 예산을 끌어와 용연지를 만든 거야. 그 덕분에 흥해의 경작 면적이 영일군 전체 경작 면적의 40% 가까이 된 걸로 기억해. 흥해 사람들이 감사의 뜻으로 공적비를 세워주었지.용연지는 1952년 8월 15일 착공해 1961년 12월 30일 준공되었다. 저수량은 657만t이며, 용수로는 2만 8천368m에 이른다. 공적비는 1990년에 세워졌으며 “흥해읍 매산리 외 52개 마을 농민들과 뜻있는 사람들이 정성을 모아 이 비를 세우다”라고 새겨져 있다.김 : 전쟁 중에 대규모의 저수지를 만드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최 : 오죽했겠어. 그 정도 공사를 하려면 불도저가 있어야 했지만 당시 포항에는 한 대도 없었어. 부산에서 불도저를 갖고 와 공사를 했지.김 : 최원수 선생의 이력을 보면 학교를 몇 군데 설립한 게 눈에 띕니다.최 : 해아중학교(현 청하중학교)와 죽장중학교, 기계중학교 세 곳을 설립했지. 아버지는 지역과 나라를 바로 세우려면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해 학교 설립에 앞장섰지. 김 : 학교를 세우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 최원수 선생은 어떻게 짧은 기간에 학교 세 곳을 세우셨는지 궁금하군요.최 : 아버지는 학교를 하루빨리 개교하는 게 중요하니까 문교부에 일단 학교 설립 인가부터 내달라고 요청했지. 그뿐 아니라 동지중·고등학교가 설립 인가를 받는 과정은 물론 학교 건물을 지을 때 미군 부대에서 자재 지원을 받는 과정에서도 아버지가 큰 도움을 주셨어. 동지교육재단의 설립자인 하태환씨가 아버지와 외사촌이라는 인연도 있었지.김 : 최원수 선생은 용연지를 조성해 경제적 기반을 다졌고, 학교를 설립해 인재 양성에 힘쓰셨군요.최 : 그렇지. 나라와 지역의 기초를 단단히 다지려면 경제와 교육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셨어.김 : 그 밖에 기억나는 일이 있는지요?최 : 6·25 전쟁이 터지고 보도연맹 사건이 있었잖아. 트럭에 실려가던 억울한 보도연맹원들을 아버지가 여럿 구해냈어. 좌익으로 찍히면 죽음을 면치 못했는데 억울한 좌익 연루자를 여러 명 살려냈지.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에 빨치산이 포항에서도 암약했는데 대표적인 곳이 죽장이야. 죽장은 산악지대와 연결되면서 민가도 있으니까 궁지에 몰린 빨치산이 식량을 거둬가기에 좋은 곳이었지. 국군과 경찰로서는 죽장이 골칫거리일 수밖에 없었어. 그때 그 유명한 경찰 김종원이 죽장을 소개(疏開)하려고 하자 아버지가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울 일이 있냐며 강력하게 반대했어. 죽장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김종원과 대판 싸웠지. 아버지는 당시 비호(飛虎)라고 불리던 김동헌을 경찰지서장으로 투입해 양민은 보호하면서 빨치산을 제압했어. 아버지가 그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더라면 죽장에 어떤 비극이 일어났을지 몰라. 죽장 사람들이 아버지가 죽장을 살렸다며 공덕비를 세워주었지.김종원(1922∼1964)은 광복 이후 육군헌병총사령부 부사령관, 경남지구 계엄사령관 등을 역임한 군인이자 경찰이다. 1951년 2월 ‘거창민간인학살사건’이 발생하자 3월 29일 국회의원 신중목이 사건의 진상을 폭로했고, 합동조사단이 구성되었다. 4월 7일 합동진상조사단이 거창군 신원면으로 가던 도중,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이 부하들을 공비로 위장 매복시켜 합동조사단에 공포를 쏘아 현장 접근을 방해하도록 지시하고 실행했음을 밝혀냈다. 김종원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대통령 특사로 석방된 뒤 군에 복직과 동시에 파면 뒤 경찰로 이직했다. 1952년 7월 전북경찰국장을 시작으로 경북경찰국장 등을 거친 뒤 경찰 총수인 치안국장 등을 역임했다. 치안국장 재직 시절에는 1956년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의 배후로 밝혀져 파면된 뒤 구속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최승태1937년 포항에서 태어나 포항초등학교와 포항중학교, 계성고등학교, 국민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다가 포항으로 돌아와 사업을 하며 부친(최원수, 건국 후 초대 영일군수, 제2대 국회의원)의 정치적 기반을 지켰다. 민주화추진협의회와 민주산악회에 참여해 김영삼 대통령 당선에 헌신했으며, 경북사격연맹 회장, 국제사격연맹 심판관, 라이온스클럽 경북 309-N 지구 총재를 맡았다.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최승태

2023-10-22

이승만 눈에 들어 영일군수에 발탁 … 이범석과 가까워

1948년 5월 10일에 제헌의원 선거가 실시된다. 이 선거는 인구 10만 명 기준의 1개 선거구에서 1명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제였다. 전국 200개 의석 가운데 경상북도가 33개 의석을 차지했으며 영일군(현재 포항시에 해당)은 갑구·을구의 선거구에서 의원 2명을 선출했다. 최원수 선생은 영일군 갑구에 출마했지만 박순석 목사에 밀려 낙선했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1949년 1월 8일 영일군수에 임명돼 1950년 4월 20일까지 1년 3개월 동안 영일군을 이끌었다. 최원수 선생이 영일군수가 되는 과정과 당시 포항의 정치, 사회 상황 등에 대해 들어보았다. 김도형(이하 김) : 최원수 선생이 영일군수가 되는 과정이 궁금하군요.최승태(이하 최) : 아버지는 광복 후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영일군지부장을 맡으면서 지역 우익의 구심이 되었지. 학력이 좋은 데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활동도 열성적으로 했으니 정부가 출범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발탁했다고 보면 될 거야. 경북 지역의 시장·군수 중에 최연소였지.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는 1946년 2월 8일 서울에서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통합, 발족한 단체다. 발족 당시의 임원은 총재 이승만, 부총재 김구, 고문 김창숙·함태영·조만식 등이다. 전국의 시·도·군까지 조직을 확대하면서 국민운동 단체로서 방대한 조직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조직이 비대해지고 이승만, 김구, 김규식, 신익희 등 여러 계열의 파쟁으로 인해 발족 직후부터 간부 진영의 개편이 되풀이되었다. 이 단체는 후일 이승만 계열의 우익 국민운동 조직으로 변화하면서 남한 단독정부를 추진하는 이승만 지지 세력이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김 : 혹시 조부께서는 장남(최원수)이 가업을 이어받길 바라지 않았습니까?최 : 할아버지는 그런 마음이 있었지. 실제로 아버지는 한의학에도 조예가 깊어서 웬만한 한의사 못지않은 수준이었어. 하지만 아버지는 조용히 한의원을 하고 있을 분이 아니었지. 할아버지가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주는 분이었다면, 아버지는 세상의 병을 고치고 싶어 하셨던 분이었어.김 : 당시 일본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 중 상당수가 좌익 활동을 했지요. 최원수 선생은 어떻게 우익 쪽에서 활동하게 되었나요?최 : 일제강점기 때부터 포항에는 좌익이 많았어. 포항을 제2의 모스크바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한 예로, 일제강점기 때 영일군 경찰서장이 좌익이었는데 경찰서장이 죽자 좌익의 주도로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지. 좌익이 워낙에 득세하니 아버지는 세상이 사회주의로 기울어져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던 것 같아.김 : 당시에 좌익이 많았던 이유가 있을까요?최 : 일제강점기부터 많은 지식인이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는데 포항도 다를 바 없었지. 광복 후에는 사회경제적으로 사회주의가 확산되기 좋은 상황이었어. 대표적인 이슈가 토지개혁이었지. 남쪽에서 추진하던 토지개혁에 문제가 없지 않았거든. 사회주의 세력이 이걸 파고들었지.김 : 혹시 포항 좌익의 거점 같은 게 있었는지요?최 : 불종거리에 있던 수복여관, 죽도시장 앞에 있던 종로여관이 좌익의 아지트였어. 나중에 좌익 검거 바람이 불 때 종로여관의 주인이 일본으로 피신했지. 그 바람에 그 집 식구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어.김 : 좌우익 간의 갈등이 심했을 텐데 혹시 기억나는 일이 있는지요?최 : 아버지가 군수가 되기 전에 우리 집이 지금 북포항우체국 근처였어. 집에서 청년단체 사람들이 모여 회의하곤 했는데, 어느 날 어른 머리만 한 큰 돌이 창문을 깨고 집 안으로 들어왔어. 아마 누가 그 돌을 맞았으면 중상을 입었을 거야. 다행히 방바닥에 돌이 떨어져 사람은 다치지 않았지. 그 자리에 있던 박일천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 돌 던진 사람을 잡아왔는데, 아버지는 아는 사람이라며 풀어주라고 했어.약운(若雲) 박일천(1915∼1998)은 1952년 5월 시의원들이 간접선거로 선출한 포항 최초의 민선 시장이다. 시장 임기는 1952년 5월 5일부터 1953년 6월 30일까지 1년 2개월이었다. 최원수 선생의 신임이 각별했던 동지로 알려져 있다. 박일천은 광복 후 포항 지역 최초의 역사지인 ‘일월향지(日月鄕誌)’(1967)의 발간을 주도했고 포항종합제철 유치 운동, 포항 4년제 대학 설립 유치 청원 등에 앞장섰다. 4년제 대학 설립 유치 청원은 후일 포스텍 설립의 밑거름이 되었다. 1982년 발족한 포항지역발전협의회의 초대 회장을 맡았으며, 1998년 작고 후에는 유족들이 유산 2억 원을 포스텍의 발전기금으로 기탁해 미담이 되었다.김 : 그 후에도 선생님 댁이 좌익의 공격을 받았습니까?최 : 아버지가 영일군수에 취임한 후 관사로 이사 갔어. 지금 포항세무서와 포은중앙도서관 중간에 있는 적산가옥이 군수 관사였지. 그 관사가 수도산에서 가까웠어. 좌익이 수도산에서 나팔을 불며 시위하면 어린 나조차 공포감에 휩싸였어. 그뿐 아니라 좌익이 관사 담벼락에 붉은색 표시를 해놓고 테러 표적으로 삼았지. 어머니는 항상 물을 팔팔 끓여놓고 혹시 모를 테러에 대비했어. 좌익 쪽에서 갑자기 공격해 들어오면 끓인 물을 퍼부으려고 말이야. 당시에 우익 활동을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지. 김 : 최원수 선생이 광복 후 가깝게 지낸 분 가운데 기억에 남는 분이 있습니까?최 : 아버지는 많은 사람과 친분이 있었는데 철기 이범석 장군과 특히 가까웠지.철기(鐵驥) 이범석(1900∼1972)은 광복군 참모장이자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을 겸임했으며 ‘국군의 아버지’로 불린다. 1915년 여운형과 중국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 교관 등을 맡았으며 1919년 10월 청산리대첩에서 제2제대(第二梯隊)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한 뒤에는 제2지대장으로 미국군과 합동작전에 참가했고 1945년에 광복군 참모장이 되었다. 1946년 6월 환국해 정부 수립 때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을 겸임했다. 1951년 12월 이기붕 등과 자유당을 창당했으며, 1952년에는 부통령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했고, 1953년 이승만의 족청계(族靑系, 조선민족청년단) 숙청으로 자유당에서 제명되었다. 1967년 1월 윤보선, 유진오, 백낙준과 함께 4자 회담을 성사시켜 통합 야당 신민당 출범에 이바지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김 : 이범석 장군과 최원수 선생 사이에 기억나는 일화가 있는지요?최 : 어린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한 이범석 장군은 중화요리를 잘 먹었지. 아버지는 이범석 장군 덕분에 중화요리를 잘 먹었고 중화요리에 대한 지식도 꽤 있었어. 아버지가 영일군수 시절에 집이나 군수 관사에서 가끔 연회를 열었는데 그때마다 동순관(同順館, 중화요리 전문점)의 화교 주방장을 불러서 중화요리를 부탁했지. 동순관 주방장이 중화요리를 잘 만들었거든.포항에서 처음 문을 연 중화요리 전문점은 화교가 운영했다. 제1호는 진가현, 강성모가 동업한 동순관으로 후일 부산각(富山閣, 진가현)과 길성관(吉星關, 강성모)으로 분가했고, 이와는 별개로 중흥관(中興關, 왕문옥)이 있었다. 부산각과 길성관, 중흥관이 포항 중화요리 전문점의 트로이카를 이룬 셈이다. 진가현과 강성모는 한국인 자매와 결혼해 동서지간이 되었다. 현재 중앙상가에 있는 길성관이 유일하게 그 맥을 잇고 있다.최승태1937년 포항에서 태어나 포항초등학교와 포항중학교, 계성고등학교, 국민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다가 포항으로 돌아와 사업을 하며 부친(최원수, 건국 후 초대 영일군수, 제2대 국회의원)의 정치적 기반을 지켰다. 민주화추진협의회와 민주산악회에 참여해 김영삼 대통령 당선에 헌신했으며, 경북사격연맹 회장, 국제사격연맹 심판관, 라이온스클럽 경북 309-N 지구 총재를 맡았다.대담·정리 : 김도형(작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최승태

2023-10-18

사후 162년 흐른 뒤 ‘흥무왕’으로 추존된 김유신

7세기 신라엔 ‘삼한일통(삼국통일)을 이끈 스타급 인물’이 여러 명 출현한다. 백제를 멸망시켜 딸 고타소(古陁炤)과 사위 김품석의 원수를 갚은 동시에 통일의 초석을 닦은 무열왕 김춘추, 강력한 군사대국 고구려가 무릎을 꿇게 만들고, 지속적으로 내정을 간섭하던 당나라를 나라 바깥으로 내쫓은 문무왕 김법민, 통일왕조 권력의 중앙 집중화를 이뤄 문화·예술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신문왕 김정명 등.3명의 왕 모두가 삼국통일의 험로에서 큰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삼한일통 과정에서 가장 주목받아 마땅한 단 한 명의 인물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던져진다면 아마도 대다수가 “김유신”이라 답할 게 분명하다.김유신은 673년 여름에 죽는다. 당시 그의 나이 79세. 외과 수술과 항암 치료제가 없던 시절. 남성의 평균수명이 마흔 살이 되지 않던 고대였음을 감안하면 150세쯤 산 것과 다름없다.김유신의 장례식은 성대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의 조카이기도 한 문무왕은 ‘김유신의 사망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비단 1천 필과 조 2천 석을 부조로 보내고 군악의 고취수(鼓吹手) 100명을 장례식에 보냈다. 김유신의 유해는 금산원(金山原)에 묻혔고, 왕의 명령으로 그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이 무덤 앞에 세워졌으며 수묘인(守墓人)을 두어 무덤을 지키게 했다’고 한다. ◆사후(死後) 1천350년째 끊임없이 이어지는 신라의 ‘영웅 전설’김유신이 신라에서 지녔던 위상은 사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는다. 사망한 지 162년의 시간이 흐른 835년. 김유신은 마침내 그 지위가 왕으로 격상된다. 단군조선에서 고려까지의 역사를 기술한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김유신은 835년 흥무왕(興武王)으로 추존(追尊·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는 것)된다.”비단 통일신라 시대만이 아니었다. 김유신의 삶과 죽음은 이후 또 다른 왕조인 고려와 조선에까지 문헌과 구전(口傳)을 통해 전해졌다.까마득한 옛날인 1천350년 전 세상을 떠난 한 신라인의 이야기가 ‘영웅 전설’처럼 21세기인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것이다.국회도서관 자료조사관인 박찬흥의 논문 ‘김유신 관련 사료를 통해 본 시기별 인식’은 신라에선 김유신이 거의 ‘신격화’ 됐었다는 걸 알려주고 있다. 이런 대목이다.“김유신은 살아 있을 때는 물론이고 죽은 뒤에도 신라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살아 있을 때는 태종과 문무왕을 보필하여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룩한 최고의 신하로 평가받았다. 당나라는 물론이고 고구려와 일본에서도 김유신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 평가했다. 김유신은 죽은 뒤에도 태종(김춘추)을 도와 대업을 이룬 ‘좋은 신하’ 또는 ‘성스런 신하’라고 인식됐다. 또, 문무왕과 함께 ‘두 명의 성인’으로 추앙되었으며, 불교적으로 33천(우주의 중심)의 한 사람이 내려온 것이 김유신이라고 인식됐다.” ◆고려는 ‘신령스런 장수’로, 조선은 ‘신라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한 왕조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새로운 왕조가 등장하면, 이전 왕국의 영웅은 평가 절하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럼에도 김유신에 관한 평가는 고려와 조선에서도 결코 낮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높아졌다고 봐도 무방하다.심지어 고려는 김유신을 신(神)의 자리에까지 가져다 놓는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 역시 김유신을 지목해 만고충신(萬古忠臣)이라 추켜세웠다.앞서 언급한 논문 ‘김유신 관련 사료를 통해 본 시기별 인식’에서 이와 관련된 부분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고려 때 김유신은 신라에 이어 진천현 태령산의 사당에서 국가제사로 받들어졌다. 윤관은 김유신이 신령스러운 기적을 많이 일으킨 장군으로 인식했고, 이승휴는 김유신이 오묘한 병서를 얻어 무예에 뛰어났다고 말했다. 고려 말의 정추도 김유신이 기이한 능력을 가진 장수이고 큰 무공을 세웠다고 인식했다. 조선시기에서도 무열왕·문무왕과 신하 김유신의 절대적인 신임 관계로 인해 김유신이 큰 공적을 세웠다는 평가가 지속됐다. 그리고 김유신이 신라 왕조 전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 보았다. 김유신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무(武)를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됐다. 그리고 성리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김유신의 행적을 통해 그를 충신이라고 인식했다.”고려와 조선왕조의 평가만이 아니다. 일연의 ‘삼국유사’와 김부식의 ‘삼국사기’ 등 고문헌에 등장하는 김유신의 청소년 시절 일화를 읽어보면, ‘이건 일반 인간에 대한 기록이 아닌 영웅 탄생 설화에 가깝구나’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한성대학교 한국고대사연구소 학술연구원 박승범의 논문 ‘김유신의 생애와 역사적 의의-그 가계(家系)와 활동을 중심으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서술된 이야기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김유신이 태어난 이후 청년기까지의 활동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한다. ‘삼국사기-김유신 열전’에서는 15세에 화랑이 돼 그를 따르는 이른바 용화향도(龍華香徒)를 거느렸다는 것과 17세에 고구려·백제·말갈 등 외적을 평정해 삼국을 아우를 뜻을 품고 수도하다가 신선으로 여겨지는 난승(難勝)이라는 노인으로부터 비법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이듬해인 612년 거듭된 적의 침입에 웅대한 뜻을 갖고 있던 중 보검이 영험을 얻었다는 것 등의 일을 전하고 있다. 이와 달리 ‘삼국유사’에서는 18세가 되던 해에 검술을 닦아 국선(國仙)이 되었는데, 이때부터 이미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정벌할 뜻을 갖고 있던 중 고구려 첩자의 꾐에 빠져 위기에 처했으나 신라 국가제사 중 대사에 해당되는 제장인 삼산(三山)의 신령들이 도움을 주어 위기를 벗어났다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 ◆비판하는 역사학자도 있으나, 빼어나고 돌올한 인물인 것은 분명해이처럼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위업을 이룬 ‘신화적 존재’로 부각돼온 김유신이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그를 우호적 시선으로 보지는 않는다. 사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가 좋아하는 인간’이란 세상에 없다.단재 신채호(1880~1936)는 한국 ‘근현대 민족주의 사학’의 효시이자 거두라 할 수 있는 인물. 단재와 그의 견해를 따르는 역사학자들은 김유신을 매섭게 질타한다. 단재의 저서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는 김유신을 지목해 ‘교활한 음모로 적국을 혼란에 빠뜨린 음험하고 무서운 정치가’라고 비판한다. 이에 수긍하는 후학들도 적지 않다.김유신에 관한 비판적 견해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고개가 갸우뚱한다. 앞서 인용한 박승범의 논문은 기자의 의문에 이런 답을 들려주고 있다.“김유신 가문은 금관가야 왕족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될 영화를 잃어버리고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신라 사회에 편입되었다…(중략) 김유신 가문은 왕족으로서 누려야만 했던 지위와 영화를 신라의 유력한 가문이 되면서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김유신 가문은 정당한 전략은 물론이고 때로는 비열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모략을 구사하기도 했다. 이러한 김유신의 모습은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평생의 공적을 전장에서 세운 사람이 아니라, 음모로 이웃나라를 어지럽힌 인물’이라고 평가할 만큼 부정적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김유신과 그 가문이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과 의지의 산물이었다. 신라만이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에 정복당한 다른 고대국가들은 최상의 경우 그 국명만 남겼을 뿐 구성원들의 존재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따라서 김유신이 보여준 생존전략을 단순히 협잡, 또는 음험함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길고 지루했던 여름이 끝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지난 주말. 경주시 충효동을 찾았다. 봄에 이어 김유신의 묘를 다시 한 번 둘러보기 위해서였다.기나긴 세월 동안 숭배와 비난의 목소리를 모두 듣고 있지만, 걸출하고 돌올한 신라의 명장(名將)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김유신.화려하게 조성된 ‘삼국통일 주역’의 봉분은 높고 거대했고, 개국공 순충장열 흥무왕릉(開國公 純忠壯烈 興武王陵)이라 적힌 비석은 후손들의 자랑이 되기에 충분했다.궁금하다. 김유신은 자신의 이름이 1천35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도 인구에 회자될 것을 스스로도 예견했을지.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10-17

저것은 나의 물고기야, 소리치고 싶은

삶이 부끄러워질 때무엇 하나 하는 일 없이 밥이나 먹고똥이나 싸는 존재로 느껴질 때면오어사로 간다.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지만,살다 보면 그렇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노력해도 손에 잡히는 수확이 없고고운 말을 듣고도 비뚤게 되받아치곤 한다.좋은 씨를 뿌린 곳에도 가라지가 자라지 않는가. 생각해 보면 참 당연한 일이다,분명 내가 먹은 것은 밥인데나에게서 나오는 건 똥이라는 사실은.당연하지만, 슬픈 일이다.비틀비틀 흔들리며 원효교를 지나갈 때다리 아래 물가에서 누가 나를 부른다.얘, 너는 똥을 누었구나. 나는 물고기를 누었단다.물고기를 먹었으니 물고기가 나오는 게 당연하지 않니.이리 내려다보렴, 이리 내려와 보렴.여기 이 물속에 나의 물고기가 가득하지 않니. 내려다보니 못에는 팔뚝만 한 회색 잉어들이 힘껏 노닌다.그 이름 오어지(吾魚池)의 어(魚) 자가 부끄럽지 않을 만큼.나는 내 이름 석 자가 왜 이리 부끄러운지 모르겠다.누구 하나 못난 이름 타고난 이는 없을 텐데.오어지의 포동포동한 잉어들을 들여다보노라면“나의 물고기, 저것은 나의 물고기야!” 하고나도 한번 소리쳐 불러 보고 싶어진다.- 글 : 이가은(서울대 국문과 박사 수료)임주은1982년 포항에서 태어났으며 대구가톨릭대 공예과를 졸업했다. 개인전 2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아트페어에 서양화 작가로 참여했다. 현재 포항문화재단 이사, 포항청년작가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포항지부, 경북청년작가회 등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3-10-16

순국선열 기억하며… 영덕서 호국보훈 음악회 열린다

“영덕군은 목숨을 걸고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한 의병장 신돌석의 고향인 동시에, 일제강점기 애국항일운동의 역사적 한 장면으로 기록된 3·18 영해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또한,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해낸 학도병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기억되는 장사상륙작전이 진행된 곳이기도 하다.”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숨결이 살아있는 영덕군과 오늘날 한국을 있게 한 국가 유공자에 대한 예우를 담당하는 경북남부보훈지청(지청장 김지현)이 ‘호국 벨트 조성 프로젝트’에 적극 나서고 있다. 실제로 영덕은 228명의 독립유공자가 생활하고 있고, 이는 군 단위로는 경북 최대 숫자다.김광열 영덕군수를 비롯한 공무원과 영덕군민들은 이러한 ‘호국보훈의 이미지’를 극대화시키고, 나라를 위해 기꺼이 희생한 이들의 넋을 기리고자 호국 벨트 조성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것.오는 21일엔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영덕군과 경북남부보훈지청이 공동 주최하는 호국보훈 음악회가 열린다. 이름 하여 ‘다시, 우리의 영웅들과 함께’.21일 오후 2시 장사상륙작전이 펼쳐진 장사해수욕장 전승기념공원에서 진행될 이번 음악회엔 지역민들이 준비한 식전 공연이 열리고, 영덕군 어린이 합창단도 참여한다. 최성과 박혜민, 은가은, 마야 등의 가수는 공연을 통해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될 순국선열의 숭고한 뜻을 되새기게 된다.“이날 행사엔 생존한 애국지사와 독립유공자 어르신들도 초대한다”는 것이 영덕군청의 설명이다. 음악회 사회는 아나운서 문채희가 맡는다.향후 다양한 방면에서 추진될 영덕군의 호국 벨트 조성사업과 호국보훈 음악회 ‘다시, 우리의 영웅들과 함께’에 앞서 위에 언급된 신돌석 의병장과 3·18 영해 독립만세운동, 장사상륙작전에 관해 알아보고자 한다.이는 영덕군의 긍지이자, 나아가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다시 학습한다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서른 살이 되기 전 안타깝게 순국한 신돌석… 사후 건국공로훈장 추서의병(義兵)은 ‘국가가 적으로부터 침탈당해 위기에 처했을 때 통치권자의 명령 없이 스스로 뜻을 세워 외적에 대항해 싸우는 민간인 병사’다. 의병이 된다는 건 하나뿐인 목숨을 걸어야하는 일이니 누구도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다.조선이 기울어가던 무렵부터 대한제국을 거쳐 일제강점기까지 영덕에선 적지 않은 의병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 조국을 위해 싸웠다. 그들이 보여줬던 애국정신은 오늘날까지도 선명하다. 사학자들은 영덕 출신 의병장 신돌석을 지목해 “최초의 평민 의병장으로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용기와 저항의식을 보였기에 영덕을 넘어 경상북도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말한다.1878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서 태어난 신돌석은 어릴 때부터 부당한 일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던 기개 높은 소년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나라의 운명이 위험에 처하자 신돌석은 일본과 싸울 것을 결의하고, 1906년 영릉의병진(寧陵義兵陣)을 만든다. 이후 동해안과 태백산맥을 거점으로 일본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당시 신돌석은 일본군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신장군실기’는 신돌석을 “그 모습이 장대하고 여력이 뛰어나 수십 길의 언덕을 가볍게 뛰어 넘었다”고 썼고, ‘의병대장신동유사’는 “전신주를 뽑아 일본 공병 5~6명을 무찔렀다”고 기록했다.신돌석은 영덕과 영해를 넘어 강원도 삼척에서까지 우리의 농수산물을 약탈하는 일본군에게 치명적 타격을 가해 이름을 높였다. 그랬으니 1907년 경기도 양주에서 전국 의병장들이 모였을 때 교남창의(嶠南倡義) 대장으로 추대된 것은 당연한 수순.호국과 애국의 마음으로 자신을 나라에 바친 신돌석은 서른이 되지 못한 채 젊은 나이에 순국한다. 국가는 그의 높은 충절과 의기를 기려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다.□ 김세영과 권태원이 주축이 된 1919년 3·18 영해 독립만세운동3·18 영해 독립만세운동은 8명의 순국자와 16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1919년 대표적인 독립만세운동의 하나다. ‘두산백과’는 이 운동을 비교적 상세하세 서술하고 있다. 아래 인용한다.“영덕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은 고종의 장례에 참례해 3·1운동을 직접 보고 귀향한 김세영이 구세군 참위 권태원 등 군내 인사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서 추진됐다. 권태원은 정규하·남효직·남여명·박의락 등과 뜻을 모아 영해읍 성내동의 장날인 3월 18일에 거사하기로 결의했고, 이 일대의 향반과 유지들에게도 참여 약속을 받아냈다. 당일 오후 1시. 정규하와 박의락이 영해 주재소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자 장터에 모인 3천여 명이 일제히 호응했다. 행진에 나선 시위대는 저지하는 일본 경찰에 저항했고, 영해공립보통학교와 영해면사무소, 영해우편소 등을 차례로 파괴했다. 이 만세 시위는 인접한 병곡면까지 이어져 밤이 새도록 시내를 누비며 ‘독립 만세’를 불렀다.” □ 장사상륙작전, 10대의 학도병들 나라를 위해 목숨 걸다장사상륙작전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초기 불리했던 전황을 단숨에 뒤집어엎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견인했다. 작전의 성공 뒤에는 수많은 10대 학도병들의 희생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지 3개월. 경상남·북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남한 땅이 북한군의 손에 들어갔다.한국군 수뇌부와 UN군 사령부에겐 상황을 단숨에 역전시킬 획기적 작전이 필요했다. UN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성공 확률이 낮고, 큰 희생이 예상된다”는 미국 워싱턴 정부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인천상륙작전을 추진한다.그때 한국군 총참모장이던 정일권 육군 소장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의 승패가 좌우될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위해 여러 방안이 논의되고 만들어졌다.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몇 시간 전.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장사동 해변으로 학도병 772명이 헤엄을 치거나 해변 소나무에 연결된 로프를 이용해 육지에 올라섰다. 장사상륙작전의 시작이었다.90% 이상이 총 한 번 쏴본 적 없는 어린 학생들로 구성된 그들은 당시 북한 조선인민군 최정예 부대로 평가받던 2군단과 당당히 맞서 7번 국도를 봉쇄해 조선인민군의 보급 루트를 끊었고, 소련제 기관총이 쏟아내는 수천 발의 총탄 앞에서도 두려움을 이기고 ‘200고지’를 탈환하는 전과를 거둔다. 이는 학도병들의 순정한 애국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터.이번에 호국보훈 음악회 ‘다시, 우리의 영웅들과 함께’가 열릴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은 바로 이들 수백 명 학도병의 순수한 열정과 나라사랑 정신을 받들어 만들어진 공간이다. 영덕군의 호국 벨트 조성사업과 호국보훈 음악회 개최 소식을 들은 다수의 영덕군민들은 “내세워 당당히 자랑할 수 있는 영덕의 애국정신을 알리고, 독립과 자유를 위해 희생된 순국선열의 뜻을 기리는 의미 있는 사업과 행사”라고 입을 모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10-15

CCUS 최적지 인도네시아서 탄소 저장·활용 방안 찾는다

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세 제도 시행이 본격화됐다. EU는 탄소배출량에 따라 수출 품목의 세금을 매기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시행을 위한 전환기 가동을 지난 1일부터 시작했다. 전환기 가동에 따라 2025년말까지 EU 외 제 3국에서 생산된 시멘트, 전기, 비료, 철 및 철강제품, 알루미늄, 수소 등 6개 제품군을 EU에 수출하려면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량을 산출해 EU에 분기별로 보고해야 한다. 이처럼 ‘탄소 배출량’이 무역시장 경쟁력 확보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지표로 떠오르면서 산업계는 저탄소 생산 프로세스 개발, 저탄소 친환경 제품 개발에 더욱 열을 올리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이런 세계 산업계의 흐름을 기회로 활용하고 있는 대표적인 국가다. 탄소중립과 관련된 친환경 사업에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인도네시아는 탄소중립 시대에 대응하고 있다.글 싣는 순서1. 포항 영일만의 기적, 인도네시아에 닿다2. 이차전지 날개 단 인도네시아, 포항시 기회 찾으려면3. 인도네시아와 포항 기업 간의 교류 현 주소4. K기업문화, 인도네시아에 퍼진 한국기업 저력5. 탄소중립 시대, 인도네시아에서는 어떻게 ◇ 인도네시아 탄소중립 정책인도네시아는 아세안(ASEAN) 국가 중 탄소배출량이 가장 높은 나라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와 함께 아세안 국가 중 가장 선도적으로 탄소중립에 뛰어 든 국가이다. 인도네시아는 한국보다 다소 늦은 2060년까지 단계적으로 탄소 중립을 달성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탄소중립을 위해 2025년까지 인도네시아 정부는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23%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3천686기가와트(GW)에 달하는 동남아시아 최고 신재생에너지 발전 잠재력을 실현시키기 위해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토지 확보 절차를 간소화하고, 유리한 투자 환경을 조성하는 등 규제 장벽을 혁파하는 옴니버스법을 입안했다.최근 인도네시아 정부가 많은 공을 들이고 있는 전기차 비즈니스도 탄소중립 트렌드와 맞물려있다. 인도네시아는 전기차 산업이라는 고부가가치 산업 발전을 통해 탄소중립 시대 경제성장을 도모하는 동시에 자국 탄소 배출 저감을 꾀하고 있다.◇ CCUS, 국내 철강업계 ‘탄소’ 고민 해소하나인도네시아가 탄소중립시대에 주목하고 있는 또다른 사업은 바로 ‘탄소포집 및 저장기술(Carbon Capture Utilization Storage·CCUS)’이다. 제철, 화력발전 등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를 분리, 포집해 저장하는 것이다. CCUS 기술은 탄소중립 실현의 가교가 되는 ‘브릿지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2021년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50년까지 이산화탄소 감축량의 14%를 CCUS가 차지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탄소포집 기술을 이용하면 대기중에 배출되는 탄소를 포집해 고갈 유전, 가스전 등에 수십~수백만년 저장할 수 있다. 탄소 포집, 운송, 저장 기술은 이미 어느정도 상용화돼 있고, 기술 성숙도도 높아 단기간 내에 활용할 수 있다는 점도 큰 장점이다.인도네시아는 CCUS 사업을 추진하기에 최적지로 꼽히고 있다. CCUS 사업 추진 시 탄소는 주로 폐가스전, 폐유전에 저장되는데, 인도네시아는 수많은 가스전과 유전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는 탄소 저장 공간이 풍부한 점을 활용해, CCUS를 활용한 수소·암모니아 발전 기술 개발을 발표하는 등 친환경 정책을 내세우고 있다. 실제로 미국 석유기업 엑손모빌과 인도네시아 국영 에너지 회사 페르타미나가 진행한 공동 연구에 따르면 페르타미나 소유 석유 및 가스전에 10억 톤(t)의 잠재 탄소 저장 용량이 발견됐다. 한국의 경우, 이산화탄소 저장 공간이 부족해 탄소포집기술 활용이 제한적이다.한국석유공사(KNOC) 주도로 동해가스전 저장소를 개발하고 있지만, 연간 40만 t 수준에 불과하다. 철강업계에서만 연간 탄소배출량이 1억t에 달한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역부족인 상황이다. 이에 많은 민간 기업들은 탄소포집, 저장, 활용 기술을 개발하는 한편, 말레시아, 인도네시아 등 해외 탄소 저장소를 확보하고 있다.포스코는 인도네시아를 눈여겨보고 있다. 포스코는 인도네시아 국영가스공사인 ‘페르타미나(Pertamina)’와 탄소 포집 및 저장 사업을 추진하고자 협력하고 있다. 찔레곤에 위치한 크라카타우 포스코에서 50~250㎞ 떨어진 인근 해상에 고갈중인 유전과 가스전을 활용해 탄소를 저장하는 것이 계획이다. 포스코는 2030년부터 포집한 이산화탄소를 폐유전 및 가스전에 보관하는 실증사업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SK ES도 인도네시아 페르타미나와 MOU를 체결해 CCS 분야 공동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페르타미나는 미국 엑손모빌, 프랑스 에르리퀴드, 일본 미쓰이 등과 협업해 CCUS 기술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유전, 가스전을 탄소 저장소로 활용할 경우 탄소를 가스전에 넣는 과정에서 유전과 가스전에 남아있는 석유, 가스 또한 완전히 추출해 사용할 수 있어 탄소 저장과 활용 두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포항시, 탄소 중립 시대에 생존하려면포항시도 ‘탄소중립’이라는 글로벌 화두에 주목하고 있다. 포항시는 탄소중립에 따른 산업 구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미래 먹거리 선점을 역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포항시가 집중한 5대 신성장 사업은 이차전지, 수소, 바이오, 철강신소재, 미래기술 분야다. 이 중에서도 포항시는 탄소중립 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급부상하고 있는 이차전지와 수소 분야에 역량을 결집하고 있다.이차전지 분야에서의 성과는 뚜렷했다. 포항시는 빠르게 전기차 시장의 성장을 예견하고 전기차의 심장인 이차전지 산업 유치에 총력을 다했다.전국 최초로 배터리 규제자유특구 지정에 나선 결과, 지자체 중 유일하게 3년 연속 우수 특구에 선정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차전지 종합관리센터를 건립하고 관련 산업 육성 조례를 제정하는 등 이차전지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해 2023년 상반기에만 5조 5천억원의 기업 투자 유치를 이끌어냈다.포스코케미칼, 에코프로 등 유수의 이차전지 소재 업체들을 보유하고 있는 포항시는 올해 7월 이차전지 특화단지에 지정되며 지역 산업 구조 다변화의 성공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이차전지 산업과 더불어 수소 산업도 포항시의 역점 사업 중 하나다. 수소연료전지 클러스터 예타조사를 전국에서 유일하게 최종 통과하면서 포항시는 친환경 수소경제 허브도시 비전 실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30년까지 수소 기업 70개사를 유치하는 등 수소 생산과 소비가 연결되는 수소도시로 거듭나겠다는 것이 포항시의 계획이다.핵심은 포스코의 포항제철소에 있다.포스코 포항제철소에는 이미 생산 공정에서 부생 수소가 발생하고 있다. 포스코는 지난해 이미 포항제철소에서 발생하는 부생수소 일부를 포항철강공단 내 수요기업에 공급하는 배관 공사에 착수했다. 총 172억원을 투입해 포항제철소 수소공장에서 수소저장탱크를 추가 건설하고 수소공장부터 포항철강산업단지 구간(5.4㎞)과 제철소 산소공장부터 포항철강사업단지 구간(4.3㎞)에 배관을 설치하는 사업이다. 포항제철소가 수소환원제철소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도 포항시에게 큰 기회다.포스코는 2050년까지 20조원을 투자해 포항제철소에 수소환원제철 설비를 건설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사업 추진에 따라 수소환원제철 설비 하이렉스 (HyREX) 3기, 전기로 1기, 제강공장, 수소저장설비, 원료저장설비 등이 신규 설치될 예정이다.포스코가 수소환원제철 방식으로 전환할 경우 포항, 광양 제철소에서 발생하는 포스코 자체 수소 수요만 연간 수백만t에 이르게 된다.포스코는 자체 수요를 바탕으로 2050년까지 연 700만 t의 수소를 생산하는 수소 기업이 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막대한 양의 수소 수요가 예상되는 만큼 수소 관련 인프라도 빠르게 들어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안정적인 수요가 확보되고, 수소 공급, 운송, 저장 시설들이 들어서게 되면 연관 산업체 유치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수소, 이차전지가 유망산업인만큼 많은 지자체들이 두 분야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여러 지자체와의 경쟁 속에서 이차전지 산업이 포항에서 둥지를 틀 수 있었던 것은 이차전지 산업의 가치를 알아본 선구안과 빠른 행정력 덕분이었다. 아직 초기 단계인 수소산업이 포항에서 영글 수 있도록 지자체 차원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인터뷰 포스코 인니 최부식 박사“친환경 탄소중립, 탄소포집기술 중요”인간이 오랜 기간 사용 해 온 화석연료를 대체할 에너지를 개발한다는 것은 당연히 어렵고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기후 변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데, 언제까지 기술 개발을 기다릴 수는 없다. 화석연료를 대체할 기술이 개발될 때까지 지구에게 시간을 벌 기술이 필요하다.지난 8월 31일 자카르타에 위치한 포스코 인도네시아 법인 사무실에서 최부식(51·사진) 박사를 만나 탄소중립 및 인도네시아 투자 환경에 대해 들어봤다.- 탄소중립 시대에 탄소 포집이 왜 중요한지 설명해달라.△수소환원제철이나 신재생에너지 같은 기술은 기존에 탄소를 배출하던 산업의 생산 공정을 혁신해 완전히 탄소 배출을 없애는 것인 반면, CCS/CCUS 기술은 그대로 생산 공정을 유지하되, 배출하는 탄소를 포집해 격리해 이산화탄소에서 발생하는 환경 영향을 없애는 것이다. 전자는 원천적으로 탄소 배출을 없애는 혁신적인 기술이지만 개발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CCS/CCUS 기술은 탄소 배출을 원천적으로 없애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장공간이 언젠가 고갈될 수 있는 등 제약이 있지만 단기간에 상용화가 가능하다. 국제사회에서도 CCUS의 탄소 중립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EU는 그린 택소노미에 CCUS를 포함했고, 미국의 경우 IRA 법안을 통해 CCUS기업에게 세금 공제 혜택을 부여했다. CCUS를 탄소중립 핵심 수단으로 바라보고, CCUS 관련 기업에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정부 차원에서 동해가스전 시범 사업을 추진하고 있고, 많은 기업들이 말레이시아 등 해외에 저장소를 확보하고 있는 상황이다.- 탄소포집, 활용 기술만의 장점이 있다면.△비교적 빠른 상용화가 가능하다. 이미 탄소 포집, 운송, 저장 등 주요기술은 상용화가 됐고 기술성숙도도 최고 수준이다. 고갈 유전, 가스전에 저장할 경우 수십에서 수백만년 동안 안정적인 저장을 할 수 있다는 것도 확인됐다. 고갈돼 가는 가스전이나 유전에 이산화탄소를 투입하면 잔류가스나 석유를 추출할 수도 있다. 기존에는 물을 집어넣어 추출하는 방식이었는데 따로 잔류 가스, 석유 추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이산화탄소 저장 과정에서 바로 자원을 추출할 수 있으니 경제적이다. 활용에 있어 여러 장점이 있어 포스코도 탄소포집기술을 눈여겨보고, 활용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한국은 아직 CCUS/CCS 기술 분야에 많이 주목하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탄소 포집을 할 수 있는 저장소로 주로 폐가스전, 폐유전이 사용된다. 가스나 석유가 나오는 나라들이 탄소포집관련 사업을 하기 유리하다. 철강 산업 최초 CCUS 프로젝트를 추진한 곳도 아랍에미리트 최대 철강사인 에미레이트스틸이다. 아부다비 국영 석유회사와 함께 저장소를 개발해 연간 80만t의 탄소를 저장하고 있다. 아세안 국가 중에서는 말레이시아가 각광받고 있다. 많은 한국 기업들이 말레이시아와 CCUS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에너지기업 페트로나스와 삼성, SK, GS로 구성된 한국 컨소시엄이 추진하고 있는 셰퍼드 프로젝트는 한국에서 포집한 이산화탄소를 말레이시아로 이송해 저장하는 사업이다. 현대중공업도 페트로나스와 이산화탄소 운송체 연구 개발을 하고 있고, 한국전력공사와 포스코 등도 관련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그 다음으로는 인도네시아다. 인도네시아도 산유국이기 때문에 폐가스전, 폐유전이 많다. 엑손모빌, BP 등 글로벌 석유 대기업 등이 총 15개의 CCUS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일본 정부가 CCUS 프로젝트 추진에 인도네시아를 많이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체 CCUS프로젝트 중 일본 정부 지원에 기인한 프로젝트가 40% 수준이다. 일본은 현재 2050년 연간 CCUS 저장량을 1.2~2.4억톤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를 가지고자본투자, 재무 지원부터 국가간 정책, 사업 협력 지원까지 다양한지원책을 내놓고 있다.- 포스코는 인도네시아에서 어떻게 CCUS 사업을 구상하고 있는가.△크라카타우 포스코 인근 50~250㎞ 해상에 고갈중인 유전과 가스전이 다수 포진해있다. 가스전 운영 주체인 국영 석유기업인 페르타미나가 현재 여기서 엑손모빌과 CCUS 활용을 연구하고 있다. 이런 환경을 활용해서 CCUS 허브를 건설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핵심은 운송비다. 한국에서 말레이시아에 포집한 이산화탄소를 운송하려면 해상으로 운송해야되는데, 운송비가 많이 소요된다. 크라카타우 포스코는 가스전 인근에 위치해 파이프라인을 건설해 운송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파이프라인을 활용하면 해송에 비해 획기적으로 운송비를 줄일 수 있다. 중장기적으로 탄소 저장소를 확보하고 탄소포집기술을 활용하면 거세지는 탄소 중립 변화에 안정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탄소포집기술을 활용해 만든 친환경 슬라브를 한국에 공급할 수도 있고, 한국 제철소에서 발생하는 탄소를 포집해 이송해 저장하는 방안도 활용할 수 있다. 다양한 가능성을 두고 여러 기관들과 협력해 고민하고 있는 단계다.끝/인도네시아에서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3-10-15

경기고보 수석 입학한 흥해 신동

경북사격연맹 회장을 지낸 최승태(崔升泰) 선생을 만나 부친 목운(木雲) 최원수(崔遠壽, 1912∼1987) 선생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최원수 선생은 건국 후 초대 영일군수와 제2대 국회의원을 지낸 분으로 남은 기록도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시피 하다. 하지만, 그의 남다른 정치 역정을 보면 우리가 이어가야 할 뜨거운 정신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최승태 선생이 빛바랜 흑백사진을 보며 부친의 기억을 되살려내는 데에는 최승태 선생과 오랜 세월 함께한 김기철 선생의 도움이 있었음을 밝혀둔다. 김도형(이하 김) : 근황은 어떠신지요?최승태(이하 최) : 나이도 있고 하니 조용히 보내지. 지인들과는 틈틈이 연락하면서 일이 있으면 바깥에 나가기도 하고.김 : 선생님 집안은 원래 흥해에 있었다고 들었습니다.최 : 맞아. 포항으로 나오기 전에 흥해에 있었지. 할아버지가 흥해에서 한의원을 하셨거든.김 : 조부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군요.최 : 할아버지 이름은 최봉래(崔鳳來)야. 독학으로 한의사 시험에 합격할 정도로 머리가 좋은 분이셨지. 지금 포항세무서 건너편에서 구생(九生)한의원이라는 큰 한의원을 하셨어. 당시 포항에서 가장 큰 한의원이었을 거야. 한의원은 입 구(口) 자의 적산가옥으로 대지만 300평이 넘었거든. 나중에 포항역 앞으로 옮겼는데 거기도 대지가 300∼400평 정도 되었어. 6·25 전쟁 때 두 군데 모두 소실되었고, 전쟁 후에 덕수동에 한옥으로 한의원을 새로 지었지. 할아버지는 포항노인회 회장을 맡으셨는데 1962년에 돌아가셨어. 작고하기 직전까지 진료를 보셨지.김 : 조부께서 남긴 일화가 있는지요?최 : 한마디로 원칙주의자였지. 꼬장꼬장하셨어. 1950년대에 이런 일화가 있어. 제3대 부통령인 함태영이 포항에 왔다가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며 어디로 오라는 연락이 왔어. 그런데 할아버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어. 나어린 함태영이 찾아와야지 내가 왜 그를 찾아가느냐고 말이야.함태영(1872∼1964)은 함경북도 무산 출신으로 3·1 운동 후에 주동 인물로 잡혀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으며 광복 후에 한국신학대학장을 지냈다. 1952년에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제3대 부통령에 당선되어 1956년까지 재임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김 : 부친 최원수 선생은 어린 시절을 흥해에서 보내셨는지요?최 : 아버지는 흥해국민학교에 입학하셨는데, 그전에 서당에 다녔어. 청하에서 기청산수목원 가는 길에 있는 서당이었는데, 그곳에서 일곱 살이 되기 전에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다 뗐다고 해. 흥해에 신동 났다는 소문이 퍼졌지.김 : 최원수 선생이 흥해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경기고보에 수석으로 입학했다고 들었습니다.최 : 맞아. 흥해에서 국내 최고 명문인 경기고보에 수석 입학을 했으니 흥해가 떠들썩했겠지.1899년 개교한 경기고등학교는 1922년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로 교명을 바꾸었고, 1938년 4월 1일 경기공립중학교로 또다시 교명을 개칭했다. 따라서 최원수 선생은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 시절에 학교를 다녔다.흥해초등학교는 1908년 4월 4일 사립 의창소학교(義昌小學校)로 인가가 나면서 개교했고, 1911년 3월 18일 흥해공립보통학교로 설립 인가가 났다. 1937년 의창공립심상소학교, 1941년 의창공립국민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1946년 흥해국민학교로 변경되었고, 1996년 현재 교명이 되었다. 1970년 흥해서부초등학교, 1998년 흥해남산초등학교가 흥해초등학교에서 분리 개교했다. 흥해초등학교는 1906년 3월 11일 개교한 연일초등학교(개교 당시 사립 광남학교)와 더불어 포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초등학교다.김 : 최원수 선생이 어릴 때부터 친분을 나눈 분은 누구십니까?최 : 코오롱그룹 창업주이자 국회의원을 지낸 이원만과 검사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한 김장섭이 있지. 두 사람은 아버지와 동향(同鄕)에 흥해국민학교 동창이어서 가깝게 지냈어. 아버지와 이원만, 김장섭 모두 일본 유학생이라는 공통점도 있고. 어머니가 칼국수 끓이는 솜씨가 좋았는데 이원만과 김장섭이 이따금 우리 집에 칼국수를 먹으러 왔지.니혼대학(日本大學)을 중퇴한 이원만(1904∼1994)은 경북 영일군의 산림을 관리하는 산림 기수보로 근무하다가 1933년 일본 오사카로 떠나 1935년에 광고용 모자를 생산하는 아사히공예주식회사를 창업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코오롱그룹의 창업주로 우리나라에 나일론을 최초로 들여와 ‘현대판 문익점’이라 불린다. 정부에 수출입국, 공업단지 조성을 건의하고 한국산업수출공단 창립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구로공단과 구미공단 조성을 이끌었다. 1960년 참의원 선거에서 경상북도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고, 제6, 7대 국회의원(민주공화당, 대구 동구)을 지냈다.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한 김장섭(1909∼1993)은 일본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후 일제강점기 때 판검사를 했으며 1954년에 서울지검 검사장을 했다. 제1공화국 말기에는 내무부와 농림부의 차관을 지냈다. 1960년 1월 제4대 총선 보궐선거(영일군 을)에서 자유당 공천으로 당선되었고 4·19 혁명 후 참의원(무소속)에 당선되었다. 이후 제6, 7대 국회의원(민주공화당, 포항시·영일군·울릉군)을 지냈다. 오천중학교와 동해중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김 : 경기고보를 졸업한 후에 일본 유학길에 오르셨지요?최 : 일본의 리쓰메이칸대학(立命館大學)에 입학했는데 졸업은 못하고 중도에 귀국했지.리쓰메이칸대학교는 1900년 일본 교토에서 설립된 사립 종합대학교다. 간사이대학(関西大學), 간사이가쿠인대학(関西學院大學),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과 함께 일본 간사이 지역의 4대 명문 사립대학으로 알려져 있다.김 : 중도 귀국한 이유는 무엇입니까?최 : 일본이 전쟁을 확대하면서 일본에 있던 조선 유학생들의 삶도 고달파졌지. 한반도는 물론 일본 열도에서도 온갖 무리한 일이 벌어졌고, 조선 유학생들은 결국 견디기 힘들게 된 거야. 단적인 예로, 식량 사정이 악화되어 단무지 하나로 밥을 먹었다고 하더군. 아버지는 어떻게든 참아보려 했지만,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귀국하셨지.김 : 귀국해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최 : 포항으로 돌아와 형산면사무소에서 몇 년 근무하셨어. 일본 유학을 해서 일어에 능통했고 ‘아사히신문(朝日新聞)’과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을 평생 구독하셨지.김 : 일제강점기 때 포항에도 일본에 유학 갔던 조선인 자녀가 꽤 있었다고 들었습니다.최 : 지금의 중앙상가 북포항우체국 앞에 나가면 하오리(羽織)를 입고 뒷굽이 높은 게다(下駄)를 신은 일본 유학생들이 많이 다니던 모습이 생생히 기억나.지역 원로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제강점기 때 동해안은 어자원이 풍부해 포항·영일에서도 수산업으로 큰돈을 번 사람이 꽤 있었다. 이들 중에 자녀들을 일본으로 유학 보낸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최승태1937년 포항에서 태어나 포항초등학교와 포항중학교, 계성고등학교, 국민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무역회사에서 근무하다가 포항으로 돌아와 사업을 하며 부친(최원수, 건국 후 초대 영일군수, 제2대 국회의원)의 정치적 기반을 지켰다. 민주화추진협의회와 민주산악회에 참여해 김영삼 대통령 당선에 헌신했으며, 경북사격연맹 회장, 국제사격연맹 심판관, 라이온스클럽 경북 309-N 지구 총재를 맡았다.

2023-10-15

신문왕의 권력독점 뒤엔 수많은 이들의 희생 있었다

무열왕 김춘추의 돌올한 외교 수완과 정치력, 무열왕의 손위 처남 김유신의 탁월한 전쟁 수행 능력과 상대를 압도하는 전략적 병법(兵法)을 앞세운 신라는 660년 황산벌전투에서 승리하며 백제를 병합했다.이어 668년에는 평양성전투에서 고구려 군대를 궤멸시키며 삼한일통(삼국통일)에 한 걸음 더 다가섰고, 문무왕 김법민의 집권 이후인 676년엔 당대 아시아 최강대국 당나라 세력을 몰아냄으로써 온전한 통일국가의 형태를 갖춘다. 그리고, 삼국이 통일된 5년 후인 681년. 문무왕은 “죽어서도 나라를 위협하는 일본 해적들을 막아내는 용이 되겠다”는 말을 남기고 붕어(崩御)한다.문무왕의 아들이자 무열왕의 손자인 신문왕 김정명은 효자였다.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수용해 일본 도적들이 출몰하는 서라벌 바닷가에 문무왕의 뼈를 묻었다. 그리고, 인근에 완성한 사찰이 지금의 경주시 문무대왕면에 자리한 감은사(感恩寺)다. ◆통일 이후 최대 과제는 권력의 중앙집중화와 왕권 공고화7세기 후반 이처럼 새롭게 재정비된 신라 통일왕조의 제1과제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지방 귀족들에게도 나눠주었던 권력을 빼앗아 중앙으로 집중시키고, 통일 왕조 군주의 권력을 최대치로 강화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다. 자신 앞에 놓인 권력과 돈을 “저는 관심 없어요. 제가 가졌던 권력이건 돈이건 모두 가져가세요”라며 쉽사리 허락할 이는 드물거나 아예 없다. 남들이 가진 권력을 자신 앞으로 집중시키기 위해서는 강제력과 희생양이 필요한 법. 신문왕 김정명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그랬기에 신문왕 집권 초기엔 한 차례 거센 피바람이 불어닥친다. 수많은 이들이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다. 특히 처가가 풍비박산(風飛雹散) 났다.우리역사문화연구소 김용만 소장의 책 ‘인물한국사’엔 이와 관련된 서술이 등장한다. 다소 끔찍하기까지 한 내용이다.“신문왕은 냉정하면서도 판단력과 실천력이 뛰어난 임금이었다. 그는 즉위한지 한 달 만에 반란 모의죄로 소판(蘇判) 김흠돌, 파진찬(波珍湌) 흥원, 대아찬(大阿湌) 진공 등을 처형했다. 놀랍게도 김흠돌은 신문왕의 장인이었다. 김흠돌은 661년 6월 김유신을 도와 고구려 공격에 참여했고, 668년엔 대당총관 자격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해 그 공으로 고위 공직인 소판에 올랐다. 흥원과 진공도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이다. 신문왕은 김흠돌을 처형한 지 8일 후에 그들을 참수한 이유를 발표했다. 김흠돌 등이 사악한 자를 끌어들이고 궁중의 내시들과 결탁해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는 것. 이어 얼마 후에는 이찬(伊湌) 군관의 목을 베었다. 신문왕은 그가 김흠돌이 반역할 것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하고, 그의 장남까지 자살해 죽게 만들었다.”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장인어른”이라 부르던 사람에게도 가차없었던 게 신문왕. 아내가 슬픔 속에서 흘릴 눈물은 ‘통일된 국가의 왕권 강화’라는 대의명분 아래 무시됐다.◆중국과 일본, 조선왕조에서도 권력 독점을 위한 희생이…그런데, 권력의 독점과 강화를 위해 친족이나 처족을 죽인 사례는 비단 신문왕 통치 시기에서만 발견되는 게 아니다.우리와 가까운 나라 일본과 중국, 신라와 고려왕조 이후 등장했던 조선에서도 그런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에 이은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 시대. 그 카리스마가 수백 년 세월을 넘어 아직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권력을 나눠달라” 요구하는 동생의 목을 잘라버린다. 같은 시대 또 다른 다이묘(大名·중세 일본의 봉건 영주) 하나는 인근 지역 다이묘에게 생포된 아버지를 어렵게 빼내 와서는 죽여버린다. “늙은이가 바보 같이 사로잡혀 내 권력 쟁취 가도에 걸림돌이 될 뻔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무시무시하다.중국 최초의 통일왕조인 진나라의 시황(始皇)은 친모가 ‘노애’라는 사내와 밀통해 낳은 동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어머니를 찾아가 “다시는 임신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며 수십 차례 배를 걷어찬다.씨가 다른 젖먹이 동생은 가죽부대에 넣어 돌바닥에 패대기쳐 죽인다. 생후 몇 개월도 되지 않은 아기를. 그 젖먹이가 커서 자신이 독점한 권력을 찬탈할 걸 미연에 방지한 것이다. 중국 고서 ‘사기(史記)’에 등장하는 이 이야기 역시 잔인하기 짝이 없다.초나라 항우와 권력을 다투던 유방은 “당신 아버지가 포로가 됐다. 항우가 그를 끓는 물에 삶으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잘 삶기면 다리 하나 얻어먹으면 되겠네”라며 외면했다.이 일이 있기 몇 해 전에는 적군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마차가 무거워 속도가 나지 않는다”며 함께 탄 아들을 발길질해 마차 아래로 떨어뜨린 사람이 유방이다. 왕이 되기 위해서 아버지와 아들 관계라는 혈족의 인연까지 잘라버린 것이다. 결국 유방은 한나라의 제1대 황제가 됐다.일본이나 중국까지 갈 것도 없다. 조선 건국 초기. 태종 이방원은 이복동생 이방석을 쇠몽둥이로 때려죽였고,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통해 집권한 세조 이유(李瑈)는 16세 어린 조카 단종 이홍위(李弘暐)의 목에 밧줄을 걸어 죽였다.조선이 기틀을 잡아가던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초반까지 왕들은 수많은 처가 사람들을 참수하고, 입에 사약을 퍼부었다. 이를 ‘살육의 역사’라 부르는 건 터무니없는 과장이 아닐 터. 모두 권력을 쟁취해 독점하고,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통일신라의 위엄과 권위를 위해 첫 아내 내치고, 새 아내 맞아신문왕이 신라의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오른 건 겨우 열여섯 살 때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병약하고 왜소했다고 알려진 그는 오래 살지도 못했다. 스물일곱에 사망했으니. 그러니, 집권 기간은 겨우 11년이다.그럼에도 신문왕은 괄목할 만한 정치·사회적 개혁을 주도한 군주로 평가받는다. 김부식이 집필한 ‘삼국사기’는 신문왕 김정명의 통치 당시 행적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신문왕은 지방 조직 정비와 지방 통치제도를 확립했으며, 전국을 9주5소경으로 나누고 행정조직을 강화했다. 청주에 서원경(西原京)을 설치하고 달구벌로 수도 이전을 계획하기도 했다. 687년 5월엔 문무 관료전을 최초로 지급했고, 689년 1월에는 귀족에게서 노동력 징발이 가능한 녹읍을 폐지해 귀족의 권한을 약화시킴으로써 왕권의 전제화를 이뤘다.”21세기인 요즘이라면 고등학교와 대학에 다니며 취직을 고민할 나이에 불과한 10~20대에 위와 같은 일을 해냈다면 신문왕은 ‘워커홀릭(Workaholic)’이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그런 그가 장인을 죽이고, 아들을 낳지 못한 아내를 궁궐 밖으로 내치고, 전처(前妻) 보란 듯이 새로운 아내를 성대한 혼인식 속에 맞아들인 냉혈한의 모습을 보인 것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앞서 언급한 ‘인물한국사’를 다시 살펴본다. 아래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전략) 신문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들의 저항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 첫째가 외척의 발호를 막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막강한 권력을 가진 김흠돌을 제거하고 배후 세력이 없는 여성을 왕비로 새로 맞이했다. 신문왕은 김씨 왕후를 쫓아낸 지 2년 후인 683년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왕후로 삼기로 하고 폐백 15수레, 쌀, 기름 등 135수레, 벼 15수레를 보냈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5월 7일 그녀를 부인으로 책봉하고, 여러 대신들을 보내 그녀를 맞이하게 했다. 수레에 탄 그녀 곁에 시종하는 관원들의 숫자가 엄청났다. 이런 성대한 결혼식은 처가가 대단한 세력가였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결혼을 최대한 이용해 왕실의 위엄을 드러내 보이려는 의도에서였다.”그랬다. 바로 ‘왕실의 위엄’, 넓게 해석하면 통일왕국 권력의 중앙집중화와 왕권의 공고화(鞏固化)를 위해 처가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이는 삼한일통을 이룬 신라의 찬란한 빛 아래 숨겨진 또 하나의 ‘어두운 그림자’ 같은 역사가 아닐까.(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3-10-10

골짜기마다 폭포마다 시심이 무늬져 있는

태백 구봉산에서 솟구친 낙동정맥이청송 주왕산을 거쳐 남하하다가동해안 쪽으로 뻗어가 솟은속이 깊은 산보경사 일주문을 지나 계곡을 따라 걸어가면억겁의 세월이 느껴지는수직의 단애(斷崖)가 나타나고그 사이로 드러나는 폭포와 소(沼)조선시대 사대부들은산의 절경에 마음을 빼앗겨계곡의 바위 곳곳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고숙종은 붓을 들어 시를 써 내려갔다. 봄잠에 날 밝는 줄 알지 못하다곳곳에 새 우는 소리 듣게 되었네밤새 비바람 소리 들려왔으니꽃들은 얼마나 지고 말았나(*)산에는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큰 울음을 토해내는 폭포가 있으니십이폭포 중 으뜸가는 연산폭포,눈을 감고 그 소리에 잠겨 있으면세속은 저 멀리 물러선다. 천 년의 시간이 서려 있는 보경사고즈넉한 뜨락에 서서내연산 능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절이 산이고 산이 절임을 깨닫는다.(*)당나라의 시인 맹호연의 「봄날 아침(春曉)」 - 글 : 김재건(서울대 국문과 박사 수료)최수정 197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포항에서 성장했다. 계명대 서양화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6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포항지부·현상회·계명회 등의 회원이며 포항에서 갤러리m을 운영하고 있다. ‘호미곶 이야기’·‘비밀이 사는 아파트’· ‘꿈꾸는 복치’ 등의 책에 그림을 그렸다.

2023-10-09

“수개월에서 수년씩, 한평생 발굴현장을 누볐죠”

한 분야에서 중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과의 만남은 설레는 일이다. 남시진 박사는 불국사와 천마총, 황남대총과 황룡사, 분황사, 감은사 등 고고학사의 굵직굵직한 현장마다 함께 했다. 국내 유적 발굴에서 실측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에 처음으로 측량과 실측을 담당하고 도면을 작성했다. 대한민국 발굴사의 시작을 알리는 천마총 발굴 조사원 중 유일한 경주 사람이다. 한국 고고학사의 오래된 사진 속에서 남시진 박사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불국사 복원을 위한 설계실, 천마총에서 금관을 수습하는 역사적인 순간, 분황사 발굴 조사를 위한 시삽식에도 그가 있다. 한국 고고학 최초의 실측가로 불리는 남시진 박사를 형산강이 내려다보이는 경주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한국 고고학사에 남을 굵직한 발굴에 다수 참여했다.△경주에서 이루어진 발굴은 거의 다 참여했다. 1969년 불국사 복원 정비를 위한 발굴이 그 시작이다. 65일간 발굴한 자료를 가지고 현지 사무실에서 바로 설계에 들어갔다. 현지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발굴조사부터 설계, 시공, 감독까지 체계를 갖추어서 추진한 것은 국내 문화유산 복원에서 불국사가 유일하다. 무설전과 비로전, 관음전, 대웅전 회랑, 극락전 회랑이 그때 복원됐다. 불국사 복원 공사 준공식이 열리기도 전에 바로 천마총 발굴에 투입됐다. 원래는 황남대총부터 발굴하려고 했지만, 한번도 도굴이 되지 않은 고분의 조사 경험이 없어 부담을 느낀 김정기 조사단장이 천마총부터 시작해 보자고 건의한 것이다.-어떤 계기로 발굴에 참여하게 됐나.△실업학교 건축과를 다니던 중에 ‘실습’으로 나갔다. 신문사 다니는 친척의 소개로 불국사 복원 현장을 소개 받았다. 학교 공부는 콘크리트 건축물 위주여서 목조가 새롭게 다가왔다. 유적지에서 도면을 그리는 일도 흥미로웠다. 발굴팀에서도 쓸만한 녀석이라고 여겨서 데리고 다녔다.-한국 고고학 최초의 실측가로 불린다. 일반적으로 발굴 현장은 고고학 전공자들이 많지 않은가.△실측이란 세워진 건물에서 부재 하나하나를 측정하여 도면을 그리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설계 도면을 작성해서 집을 짓지만, 실측은 반대로 지어진 건물을 도면화하는 작업이다. 절터를 조사하려면 건축학적 지식이 있어야 한다. 국내 발굴 현장의 책임조사원은 고고학자가 대부분이지만 일본에는 건축학 전공자도 많다. 7, 80년대는 실측가가 없어서 내가 각 대학에 강의도 다녔다. 지금은 다수의 고고학과에서 실측을 가르친다. -발굴 50주년을 맞은 천마총은 해방 이후 우리나라가 독자적으로 발굴한 최초의 신라 고분으로 기록된다. 반세기 전에는 무덤을 파헤치는 일에 거부감이 컸다고.△발굴을 하려면 고분 정수리에 말뚝을 박아 기준점을 정해야 한다. 사과를 네 쪽으로 자르듯이, 고분을 사 등분 해서 시차를 두고 무덤을 파는 방식이다. 말뚝을 박으러 올라간 인부들이 눈치만 살피더라. 성미 급한 내가 해머로 말뚝을 몇 차례 내리치니까 그제야 인부들이 달려들어 도왔다. 그때는 이유를 몰랐는데 시간이 흘러 당시 현장에 있던 기자와 선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다 다들 꺼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천마총 발굴이 경주 사람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한 일이었나.△신라 고분은 경주 사람들에게 신앙과 같은 곳이다. 천마총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1973년은 지독한 가뭄으로 모내기가 힘들 정도였다. 사람들은 우리가 무덤을 파서 비가 안 온다고 원망했다. 발굴터에 가건물을 짓고 숙직했는데 밤에 돌을 던지고 가는 취객도 있었다. 그러다가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천마총에서 금관을 들고나오는 순간 거짓말처럼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비가 쏟아진 것이다. 금관을 수습해 나오던 학예사가 그 자리에 상자를 두고 줄행랑을 쳤다. 나중에 들어보니 금은 전기가 잘 통하는 걸 알고 그랬다고 한다. 그날의 비는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도무지 불가해한 현상이다. 당시 발굴을 주도한 조사단 8명(김정기 조사단장, 김동현·지건길·박지명 조사원, 윤근일·최병현·남시진·소성옥 조사보조원) 가운데 나를 포함해 6명이 살아있으니 믿어주지. 혹여나 나 혼자서 그 이야기를 한다면 누가 믿어주겠나. -발굴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때라 어려움도 컸을 것 같다.△지금은 컨베이어벨트가 있지만 그때는 드럼통의 반을 잘라 만든 관으로 흙을 내려보냈다. 초보자라 항시 긴장된 상태여서 한여름에도 더운지 모르고 일했다. 특종을 위해 쌍심지를 켠 기자들과 각을 세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천마총 발굴조사는 국가적 관심 사업이라 중요사항을 일일이 청와대에 보고했다. 촬영한 필름을 통째로 고속버스에 실어 보내면 문화재관리국에서 전화로 내용을 받아적고 사진을 첨부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청와대 보고 전에 언론에 보도되는 걸 막으려 사투를 벌였다.-언론 취재 경쟁이 얼마나 뜨거웠나.△중앙의 각 신문사와 방송사의 문화부장들이 경주에 내려와 있었다. 언론사에서 헬기를 띄우면 넓은 천막을 쳐서 막았다. 발굴하고 나온 사람들의 신발에 묻은 흙을 보고 추측 기사가 나왔기 때문에 내부 작업용 신발을 따로 두었다. 취재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냐면, 기자가 인부의 집까지 따라가서 돈뭉치를 내놓으면 뭐가 나왔는지 한마디만 해달라고 집요하게 물었다더라. 그때 기자가 내놓은 돈이 15만 원이었다. 하루 일당이 700원이고, 80㎏ 쌀 한 가마니가 만 원 하던 때다. 인부가 이튿날 와서 그런 일이 있었다며 끝까지 함구했다고 전해주었다. 철저하게 관리해도 자꾸 특종이 터지니, 경주가 고향이고 친척이 언론사에 있는 나부터 의심받았다. 하루는 김정기 단장이 나를 단국대학교 발굴 현장으로 지원을 보냈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특종이 터지자, 의심에서 벗어났다. 범인을 종잡을 수 없게 되자 서로를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도대체 누가 범인이란 말인가.△당시에는 팩스나 메일이 없으니 보고하려면 유선으로 내용을 불러줬다. 우체국에 가야 시외전화를 걸 수 있던 시절이다. 경주우체국 수교환사가 모 신문사 기자 부인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특종을 잡을 욕심으로 교환사를 매수하는 언론사도 있었다고 들었다. 이후로는 어쩔 수 없이 울산과 포항우체국에 가기도 했다.-학생 신분으로 발굴지에 발을 디뎠다가 나중에는 책임조사원으로 현장을 누볐다.△불국사, 천마총에 이어 황남대총과 안압지 발굴 현장에 투입됐고 군에 입대해서도 휴가 때마다 발굴터를 찾아 용돈벌이했다. 제대한 뒤에는 본격적으로 황룡사에 매달렸다. 1978년에 ‘경주고적발굴조사단(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전신)’에 건축직 5급(지금의 9급)으로 취직했다. 감은사지를 시작으로 분황사지, 월성해자, 월정교, 춘양교, 전랑지(신라시대 궁궐터로 추정), 명활산성, 문경 조령원터, 여수 선소(거북선 조선소) 등에서 책임조사원으로 일했다. 특히 감은사지 2차 발굴조사는 남다른 보람과 긍지로 남아있다.-감은사지 발굴조사에 보람이 남다른 이유는.△감은사지는 1959년 김정기 박사가 일본에서 돌아와 1차 발굴을 한 곳이다. 정확히 20년 뒤 문무왕 호국 유적지 조성을 위한 2차 발굴조사가 이뤄진 것이다. 발굴보고서를 작성하면서 1차 기록과 상이한 3곳을 발견했다. 먼저 사리함 옆의 원형 구멍이 찰주공일 가능성을 제시했고(1차 보고서는 습기를 모아주는 구멍으로 기술), 김정기 박사와의 열띤 토론 끝에 금당지 기단 갑석 모양을 수정했으며, 석탑의 석질이 응회암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발굴을 통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면 더 뜻깊겠다.△사찰은 주로 탑과 금당이 일직선에 배치된다. 그런데 분황사에는 금당인 보광전의 입구가 서쪽으로 향하여 전탑을 바라보고 있지 않아 특이했는데, 발굴조사로 궁금증이 풀렸다. 고구려의 1탑 3금당(一塔三金當, 사찰에서 탑을 중심으로 동·서·북쪽에 법당을 배치하는 방식) 양식을 수입해 신라화한 것이다. 고구려는 탑을 가운데 두고 3금당이 탑을 바라보지만, 분황사는 탑을 남쪽에 두고 3금당이 모두 남향하고 있다. 나는 그걸 신라식 ‘品(품)’자형 가람배치라고 이름 붙였다. -오랜 시간 공들여야 하는 작업이라 고되지는 않나.△1년 내내 발굴 조사가 이어지면 12월까지 야외에서 유구 실측을 하게 된다. 눈이 가물거리고 배가 출출해지는 오후가 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조사갱 속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4홉짜리로 시작하면 대병으로 두세 병을 비워야 끝이 났다. 주머니 사정이 다들 마찬가지라 10원짜리 라면땅이 안주였다. 분황사 서편에 술을 외상으로 주던 구멍가게가 있었다.-수개월에서 수년씩 이어지는 지난한 발굴 현장에서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면 얘기해달라.△발굴 현장에 사내 결혼이 유독 많았다. 유물 발굴을 잘 하면 사람 발굴도 잘 한다고, 발굴은 사람 발굴이 제일이라고 우리끼리 농담할 정도였다. 동료들끼리 끈끈한 전우애 같은 것이 생겨서 발굴이 끝나도 인연을 이어가는 경우가 많다. 2차 감은사지 발굴조사 조사단장이던 조유전 박사가 보신탕을 좋아했는데, 발굴 조사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경주에 모여 보신탕 잔치를 벌였다. 감은사지 앞 대종천에서 은어 낚시도 많이 했다. 미끼 없이 낚싯대를 흔들어 낚은 은어를 초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평생을 몸담았던 공직에서 퇴임한 뒤에는 경주로 돌아와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을 열어 매진했다.△2000년도 본청인 대전에서 근무한 10년을 제외하면 평생을 경주에서 보냈다. 건축을 전공한 기술직이라 공무원 인생이 녹록지 않았다. 현장에 실습 나온 학생이 학예직으로 들어와 더 빨리 진급하더라.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50줄에 문화재학과에 들어가 학위를 받았다. 계림문화재연구원을 열어 문화재와 두 번째 인연을 시작하고 창림사 터와 천북 신당리 고분 등을 발굴하고 조사했다.-경주 유적발굴에 얽힌 생생한 이야기가 많아 한정된 지면이 아쉬울 뿐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평생을 몸 바쳐온 일에 자부심이 크다. 남들은 자식이 문화재 분야로 나간다면 말린다고 하지만 아들이 고고학을 한다고 했을 때 자랑스러웠다. 앞으로 남은 삶은 후배들과 시민들에게 내가 쌓아온 지식을 나눠주고 싶다. 문화재 정책에 대한 자문이나 문화재 인식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 남시진 계림문화재연구원 대표이사는1951년 경주 보문동에서 태어나서 계림초등학교까지 6킬로미터를 걸어 다녔다. 경주공고 재학중이던 1969년, 불국사 복원공사 발굴조사와 설계 작업을 시작으로 경주의 문화유산 발굴조사에 참여했다. 1978년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 입사했다. 만학도로 경주대 문화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11년에는 계림문화재연구원장으로 취임해 창림사터와 천북 신당리 고분 등을 발굴하고 조사했다. 작년 12월 원장 직을 후배에게 넘겨주고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의 생생한 지식을 신문 칼럼과 저서, 강의를 통해 나누고 있다./배은정 작가

2023-10-09

역사강사 최태성 “김유신이 삼국통일 위업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김유신은 몰락한 금관가야의 후손이라는 태생적 약점에 절망하지 않고, 언제나 미래를 직시하며 노력과 땀을 아끼지 않았기에 무열왕 김춘추와 함께 삼국통일이라는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성큼 다가선 가을을 몸과 마음으로 실감할 수 있었던 10월 7일 오전. 경상북도와 경주시가 주최하고, 경북매일신문이 주관한 강연회 ‘신라의 삼국통일-무열왕과 김유신의 시대’엔 경주시민과 경북도민, 내외빈을 포함 1천500여 명의 사람들이 찾아 발 디딜 틈 없는 성황을 이뤘다.경주 화백컨벤션센터 3층 대강당에서 열린 ‘신라의 삼국통일-무열왕과 김유신의 시대’라는 주제의 강연회에 강사로 나선 이는 공중파와 케이블방송, 유튜브 등에서 ‘큰별쌤’으로 불리며 높은 인기를 얻고 있는 최태성 씨.최태성 강사는 백제와 고구려의 병합(660년과 668년), 당나라의 축출로 이어지는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김유신과 무열왕(김춘추)에 얽힌 이야기를 1시간 10분의 시간 동안 누구나 알기 쉽고 재밌게 풀어내 참석자들의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경주시장, 경북도·경주시 의원, 신라문화원장 등도 참석강연회엔 주낙영 경주시장과 이동협 경주시의회 부의장, 경주시의회 이경희, 정원기 의원, 경북도의회 배진석, 황명강 의원, 진병길 신라문화원장 등도 자리를 함께 해 시민들과 유쾌한 만남을 가졌다.강연회가 시작되기 전 무대에 오른 주낙영 시장은 “연휴의 시작을 신라 역사와 함께 하려는 분들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다. 최태성 강사의 인기를 실감했다”는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삼국통일이 이뤄진 7세기 중후반 우리나라의 역사에 관해 짤막하지만 인상적인 ‘소강연’을 펼쳐 참석자들의 이목을 끌었다.이어 이동협 부의장은 “경주시민은 물론 국회의원들까지 이번 강연회에 참가 의사를 전해왔었다”는 말로 ‘신라의 삼국통일-무열왕과 김유신의 시대’ 강연회에 쏠린 지역민들의 관심을 알려 박수를 받았다.강연회를 주관한 경북매일의 최윤채 대표는 “너무나 짧은 시간에 참가 신청이 마감돼 참석을 원했던 분들 모두를 이 자리에 모시지 못해 송구하다”며, “내년에는 더 큰 공간에서 보다 많은 분들과 함께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살필 수 있는 자리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김유신의 고뇌와 환희를 흥미로운 강연으로 풀어낸 최태성 강사본격적인 강연에 나선 최태성 강사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통치자 구형왕(김유신의 증조부)-김무력(김유신의 조부)-김서현(김유신의 부친)-김유신’으로 이어지는 가계도를 그려, 어떤 과정을 통해 다른 나라에서 밀려온 유민(流民)에 불과했던 김유신이 신라의 핵심 정치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인지 설명했다.그 과정에서 최 강사는 특유의 유머와 재치 있는 어법으로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과 어머니 만명부인의 러브 스토리’ ‘김유신과 기생 천관의 만남과 이별’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가 무열왕 김춘추와 결혼하게 된 사연’ 등을 자연스레 이끌어내 객석의 웃음과 감탄을 불러냈다.이날 강연회엔 아버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참석한 초등학교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이를 감안한 듯 최태성 강사는 아이들 곁으로 다가가 친절하게 신라와 삼국통일의 역사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아이들의 답변을 이끌어내는 정감 있는 모습을 여러 번 보여줬다.“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뤄낸 인물로 오늘날까지 기억되고 있다”는 말로 강연을 마친 최 강사는 “여러분도 자신의 세운 목표를 향해 쉼 없이 꾸준히 달려간다면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란 말로 강연장을 찾은 어린 학생들에게 용기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강연이 시작되기 30분 전부터 참석자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함께 찍는 사진에 포즈를 취해주는 등 ‘팬 서비스’에도 충실했던 최태성 강사의 ‘신라의 삼국통일-무열왕과 김유신의 시대’ 강연회.아침 일찍부터 준비해 경주 화백컨벤션센터를 찾은 울산의 한 가족. 딸과 아들의 손을 잡은 아버지는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선물 받은 강연회였고, 아이들에게 좋은 가을 선물이 된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10-07

가을에 물든 사찰·정자·고택으로 떠나볼까

가을이면 산사로 떠난다. 산사로 가는 길에선 왠지 청량한 향기가 나는 듯하다. 바람 소리, 물 소리, 새 소리를 벗 삼아 걷다 보면 세속의 번뇌가 시나브로 씻겨지는 듯하다. 경상남도 밀양의 작은 절인 만어사(萬魚寺)로 떠났다. 1만 마리 물고기에 관한 전설이 있는 만어사는 무려 2천년의 세월을 견딘 고찰(古刹)이다. 가을이 깊숙이 밀려온 만어사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이 가을 감성 가득한 여행지 밀양으로 떠나보자. ◇ 1만 마리의 물고기 같은 너덜이 펼친 절경경남 밀양 남쪽 삼랑진에 있는 만어산을 차로 오르다 보면 중턱쯤에 작은 절이 보인다. 만어사다. 만어사는 규모는 작지만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에 나올 정도로 오래된 절이다. 금관가야를 세운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 때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니 역사가 2천년 가깝다. 창건 이후 왕들이 불공을 올리는 장소로 이용됐고, 고려 명종 10년(1180년)에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지금의 만어사는 보물 제466호 삼층석탑과 근래에 지은 대웅전, 범종각, 삼성각이 전부인 조촐한 산중 사찰이다. 기이하게도 만어사의 가장 큰 볼거리는 사찰 앞마당을 가득 뒤덮고 있는 돌들이다. 크고 작은 돌이 쏟아져 내린 듯 널브러져 있는 곳을 흔히 ‘너덜겅 지대’라고 하는데, 전국의 너덜겅 지대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풍광이 빼어난 곳이 바로 만어사 주변이다.만어사의 너덜겅은 폭이 약 100m, 길이는 500m나 된다. 만어사는 바로 이 돌들을 1만 마리 물고기에 비유한 명칭이다. 한여름 소나기가 내린 날이면 수많은 물고기가 주둥이를 물 위로 내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너덜겅은 고기들이 변해서 된 것이라 하여 만어석(萬魚石) 또는 어산불영(魚山佛影)이라 부른다.믿을 수 없는 풍광이 펼쳐지는데 전설이 따라붙지 않을 리 없다.동해 용왕의 아들이 자신의 수명이 다한 것을 깨닫고 낙동강 건너에 있는 무척산이란 곳의 신승(神僧)을 찾아가 새로 살 곳을 마련해달라고 부탁했다. 신승은 용왕의 아들에게 ‘가다가 멈추는 곳이 바로 그곳’이라고 말해줬다. 용왕의 아들이 길을 떠나자 수많은 물고기 떼가 그의 뒤를 따랐는데, 그가 멈춘 곳이 만어사다. 만어사에 이르자 용왕의 아들은 큰 미륵돌로 변했고, 그를 따르던 물고기들은 크고 작은 돌로 변했다고 한다. 전설처럼 만어사의 돌들은 마치 물고기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이 돌들을 두드리면 맑은 종소리가 나서 만어산 경석이라고 부른다. 화강암의 성분에 따라 소리가 조금씩 다르다.경내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대웅전 옆에 있는 높이 5m의 자연석이다. ‘미륵바위’ 또는 ‘미륵불상’이라고 한다. 전설 속 동해 용왕의 아들이 변한 돌이다. 자연석 표면에 붉은색이 감도는 부분이 가사(袈裟)처럼 보인다고도 한다. 주지스님은 잉어를 닮았다거나 물고기가 입질하는 모양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고 전했다. 보존 상태가 너무나 좋아서 기나긴 세월을 견뎌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미륵바위는 병자호란이나 임진왜란, 갑오농민전쟁, 경술국치, 3·1만세운동, 6·25전쟁, 4·19혁명, 5·16 군사정변 등 역사적 격변의 시기마다 돌의 오른쪽 면에서 마치 눈물을 쏟듯 물이 흘러내렸다고 한다.신비한 이야기 때문인지 미륵바위에 기원하면 아기를 낳지 못하던 여인이 득남할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진다. 만어사의 돌도 특이하지만 사찰 마당에서 바라보는 첩첩의 산 능선이 절경이다. 마치 진경산수화처럼 산이 겹쳐 있는 운해는 밀양 8경으로 꼽힐 정도로 매력적이다. ◇ 이팝나무 ‘데칼코마니’가 매혹적인 위양지만어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신라 때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축조된 저수지가 있다. 경상남도의 문화재 자료이기도 한 위양지다. 위양지는 밀양 시내를 보호하듯이 감싸고 있는 밀양의 진산인 ‘화학산’ 아래 있는 연못이다. 저수지 주변의 수백 년 된 이팝나무가 물속에서 자라고 있는 모습은 이색적이면서 경이롭다. 아침에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저수지에 깔리면 몽환적이기까지 하다.위양지는 신라 때 축조된 저수지다. 위양지 주차장 앞 현판에는 “선량한 백성들을 위해 축조됐다”라는 설명이 쓰여 있다. 원래 논에 물을 대던 수리 저수지였지만, 인근에 거대한 가산저수지가 들어서면서 역할을 빼앗겼다. 대신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그 쓸모가 바뀐 셈이다.오랫동안 사진을 찍어온 사람들은 봄보다 가을의 풍경에 손을 들어준다. 저수지에는 겨울을 준비하는 청둥오리들이 한가롭게 물위를 떠돌며 산책을 즐기고 있고, 그 물속으로는 형형색색 옷을 갈아입은 산과 들이 그대로 담겨 있다. 호수 주위의 수백살 된 이팝나무와 느티나무는 물속에서 꿈꾸듯이 고요하다. 여기에 물에 투영된 산그림자는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보듯이 아름답다. 가을 이른 새벽마다 이 빼어난 풍경을 담으려는 사진 애호가들이 곳곳에 자리잡는 이유다. 특히 아침에 피어오르는 물안개에 젖은 저수지는 몽환적인 분위기까지 자아내 이색적이면서도 경이롭다.위양지는 사철 모두 아름답지만 봄에 특히 아름답다고 한다. 저수지 둘레의 오래된 이팝나무들이 일제히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저수지 가운데 5개의 작은 섬과 완재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다. 완재정은 안동 권씨가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재실로, 1900년에 조성된 정자다. 건축 당시 완재정은 배로 출입하도록 했지만 지금은 길을 놓아 걸어서 들어갈 수 있다. 가수 아이유가 주연으로 나온 ‘달의 연인 보보경심 려’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여행정보밀양강 지류인 남천가에 있는 금시당은 1566년 조선 명종 때 좌승지를 지낸 학자 이광진이 고향에 내려와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집이다.이광진은 ‘중종실록’‘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밀양강이 굽이치는 언덕 위에 금시당을 짓고 노년을 보냈다.금시(今時)는 지금이 옳다는 뜻. 금시당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는데 이광진의 5대손 백곡 이지운(1681~1763)이 복원했다. 백곡재는 이지운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재사(齋舍)로 금시당 동쪽 축대 위에 있다.금시당 백곡재의 자랑은 이광진이 직접 심었다는 450년 된 은행나무다.밀양 여행의 필수 코스 중 하나는 영남루다. 양쪽에 침류당과 능파당이란 건물을 거느린 웅장한 규모의 영남루는 진주 남강의 촉석루, 평양 대동강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꼽힌다. 누각은 규모부터 현판의 글씨까지 시원시원하다.영남루는 밀양강 건너편에서 보는 야경이 특히 아름답다. 조명 켜진 영남루를 바라보면서 천변을 따라 느릿느릿 걷는 것만으로도 가을밤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다.‘기회송림유원지’는 영화 ‘밀양’의 촬영지로 유명해지면서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150여 년 전 남기리 기회마을 주민들이 북천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조성한 폭 200m, 길이 1천500m의 방수림이다./밀양=최병일 여행전문기자

2023-10-05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역대급 콘텐츠로 ‘대동난장’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2023이 구)안동역사부지, 원도심, 탈춤공원과 하회마을 등에서 9일까지 다채로운 축제 콘텐츠로 관광객들을 매혹하고 있다. 올해 탈춤축제는 10개국 11개 단체 해외 공연단이 국가별 특색있는 탈문화 공연을 진행한다. 또한, 축제의 킬러 콘텐츠인 대동난장 프로그램을 통해 탈을 쓴 사람들의 참여형 축제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와 함께 지역민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 공모에 이어, 전국을 대상으로 한 버스킹 공모사업으로 MZ세대 등 젊은 층이 축제에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마련했다. 여기에 매년 관광객으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탈놀이단은 ‘꽃눈깨비’라는 명칭으로 재미있고 역동적인 춤과 동작으로 신명나는 축제의 장을 만들어가고 있다. 또한, 축제공간 확대 및 지역상권 활성화를 위해 진행되는 전통시장에서는 국내·외 공연단이 참여하는 퍼레이드와 마임, 탈춤외전, 시장가면 등을 통해 축제장을 찾은 관광객이 전통시장까지 함께 관광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축제장에서는 300여 가지에 달하는 다양한 체험과 볼거리, 먹거리, 즐길거리 부스들이 운영 중이며, 시내 곳곳에서도 문화예술공연장과 세계탈전시관, 탈춤축제 메타버스 체험관, 옛사진 전시 등 탈춤 관련 콘텐츠들을 만나 볼 수 있다. 안동/피현진기자 phj@kbmaeil.com

2023-10-05

고대 근친혼은 性적인 문제 아닌 권력 독점과 유지 수단

신라는 국가를 향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중시하는 사회였다. 신하가 왕에게 지켜야 할 신의(信義)도 화랑을 포함한 신라 귀족청년들이 교육받은 주요 덕목이다. 그건 통일 이전과 이후가 동일했다.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성(性)문화는 매우 자유로웠다고 추정된다. 오히려 1천여 년 전 신라 사람들이 21세기를 사는 지금의 우리보다 더 큰 성적 자유를 누렸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없지 않다.수원과학대 교양학부 류선무 교수의 논문 ‘신라시대의 성문화 연구’ 결론 부분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렸다.“신라시대는 모든 면에서 남녀가 동등한 위치에 오르게 된 단계였다. 남녀의 애정 윤리와 성 풍속도 남녀 동등하게 자유와 개방 정신 그것이었다. 이러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 ‘처용가(處容歌)’였다. 성적 욕구의 표현과 행위는 남녀가 서로 존중하는 풍조였다. ‘화랑세기’에서 미실은 세종전군, 사촌 오빠 사다함,진홍왕,진흥왕의 아들 동륜과 금륜,설원랑,자기 동생 미생 등과 혼인 및 사통하며 난음 행각을 펼치지만 그것이 윤리·도덕적으로 지탄을 받는 죄악이 아니었다.” ◆오늘날의 도덕적 잣대로 신라 성 풍속 해석하면 곤란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병합해 삼한일통(삼국통일)의 토대를 거의 완성한 7세기 중반 이후에도 위와 같은 성 풍속은 이어졌다.‘삼한일통의 양대 거두(巨頭)’라고 부를 수 있는 무열왕 김춘추와 태대각간 김유신. 김춘추는 친자매 둘 모두를 아내로 삼았고, 김유신은 여동생의 딸, 즉 조카를 두 번째 아내로 맞는다. 그것도 회갑을 넘긴 나이에.앞서 언급된 논문 ‘신라시대의 성문화 연구’에서도 이를 아래처럼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다.“(김유신의 동생인) 문희는 언니 보희로부터 상서로운 꿈을 사고 김춘추와 혼인해 딸 지소를 얻게 되고, 지소는 당시 외삼촌인 김유신과 혼인했다. 또한, 언니인 보희도 뒤에 김춘추의 후궁이 된다. 자매가 한 남자의 부인이 된 것이다. 삼촌과 조카딸, 고모와 친정 조카,외삼촌과 생질녀 등 친족관계 속에 중복된 혼인 관계로 짜여진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그럴 사람이야 없겠지만, 1천 년 전 이런 풍속만을 보고 “신라는 성적으로 몹시 문란한 나라”였다고 말하는 건 너무나 단순한 해석이다.동서양을 불문하고 고대 사회의 근친혼은 성적인 문제가 아닌 ‘권력의 독점과 지속적 유지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역할했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그러니, 삼국통일이라는 당대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친 김유신과 무열왕 김춘추의 희생과 피땀을 ‘성적인 문제’ 하나만으로 폄하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그래서였을 것이다. 류선무 교수의 논문 ‘신라시대의 성문화 연구’ 또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신라의 남녀는 대등한 입장에서 상대의 의사를 존중해 강제적인 성폭력이나 강간 등의 성범죄는 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왕실이나 상류사회에서는 권력과 부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족내혼(族內婚)이 일반적인 혼인의 형태였다. 어느 시대, 어떤 사회의 결혼제도나 가족의 형태, 성 풍속이 도덕적이냐 또는 야만적이냐, 문명적이냐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권리와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고 존중되는 가운데 각기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성적 에너지가 발산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현대의 기계적이고, 상업적이고, 신경쇠약적인 병든 성 문화는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다. 건전하고 건강한 성 문화의 형성은 현대인의 진정한 행복을 위한 크나 큰 숙제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 뜻을 받드는데 최선을 다한 신라의 통치자들대부분의 고대 역사는 통치자와 세칭 ‘영웅’ 중심으로 기술된다. 그러니, 신라의 보통 사람들이 효(孝)에 관해 어떻게 인식하고 실천했는지 알기는 쉽지 않다.다만, 구전되는 설화나 전설을 들어보면 왕이나 귀족이 아닌 평민들 역시 부모를 극진히 섬기는 사람을 칭송했다는 건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다.‘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라의 왕들은 대부분이 효자였다. 결국은 왕도 누군가의 아버지고, 누군가의 자식이니까 효를 인간 행위의 근본이라 믿었던 것이다. ‘논어’ 학이편(學而篇)엔 이런 문장이 쓰여 있다.“부재(父在)에 관기지(觀其志)하고, 부몰(父沒)에 관기행(觀其行)하라. 삼년(三年)을 무개어부지도(無改於不之道)라야 가위효의(可謂孝矣)니라.이를 현대식으로 풀어 쓰면 대략 이런 뜻이 될 터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땐 그의 뜻을 따르고, 돌아가신 후에는 그의 행적을 살펴라. 그런 행위가 최소 3년은 지속돼야 그게 효의 시작이다.’이젠 앞서 이야기한 신라의 자유로운 성문화와는 다른 이야기다. 통일신라의 기틀이 닦이던 7세기 중후반 나라를 다스렸던 신라 왕들은 선왕(先王)인 아버지에게 효를 다했다.문무왕 김법민은 딸과 사위의 비극적인 죽음을 겪으면서도 삼한일통의 의지를 꺾지 않았던 아버지 무열왕의 뜻을 받들어 고구려 병합과 당나라 축출이라는 삼국통일의 마지막 숙제를 해결했다.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 김정명은 “사후(死後)에도 용이 돼 일본 해적으로부터 백성들을 지키겠다”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문무왕을 바다에 장사 지냈다.또한, 조부 무열왕과 부친 문무왕이 이뤄놓은 삼국통일의 기반 위에서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운 것도 신문왕이다.이 같은 문무왕과 신문왕의 행위를 ‘관기지(觀其志)와 관기행(觀其行)’이라 부르지 않으면 어떤 걸 그리 칭할 수 있을까.‘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펴낸 ‘통일신라 시기 2-불교문화’엔 핏줄로 이어진 바로 이 3명의 왕, 무열왕·문무왕·신문왕의 주요 행적이 짤막하게 요약돼 있다. 아래 그대로 옮긴다.“대왕암은 경북 경주시 양북면 앞바다에 있는데,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으로 잘 알려져 있다. 문무왕은 아버지인 무열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물리쳐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그리고 부처의 힘을 빌어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이곳에 절을 세웠다. 절이 다 지어지기 전에 왕이 죽었으므로, 아들인 신문왕이 재위 2년(682년)에 사원을 완성해 감은사라 했다. 문무왕은 평소에 내가 죽으면 바다의 용이 돼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화장해 동해에 장사지낼 것을 유언하였는데, 그 뜻을 받들어 장사한 곳이 바로 대왕암이었다. 감은사 금당 아래 동해를 향한 배수로를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왕래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하는데, 실제 발굴조사에서 그 흔적을 발견했다.” ◆조부와 부친에 밀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신문왕이지만...신라는 물론, 이 땅에 존재했던 모든 왕조를 통틀어도 빼어나고 돌올한 업적을 남긴 임금으로 평가받는 게 신문왕의 할아버지(무열왕)와 아버지(문무왕)다. 그런 이유에선지 학계에서도 신문왕에 대한 평가는 조부와 부친에 비해 인색하다. 하지만, 통일신라 초기 신문왕이 진행했던 굵직굵직한 문화예술 프로젝트와 권력의 중앙 집중을 위한 노력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성격의 것들이 분명 아니었다.고대사 연구자 김용만의 ‘인물한국사’는 신문왕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681년 7월 1일 삼국통일의 영웅 문무왕이 세상을 떠났고, 16년간 태자 자리에 있던 정명이 왕위에 올라 신문왕이 됐다. 신문왕은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있던, 냉정하면서도 판단력과 실천력이 뛰어난 임금이었다.”그 시대 신문왕이 맡아야 했던 ‘자신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여러 고문헌에 의하면 그는 삼국통일 직후 통치 기반을 단단하게 구축하고, 귀족들의 노동력 징발권도 과감하게 회수함으로써 고대 국가의 왕이 가져야 할 권위를 강화하고, 행정구역도 정비했다고 한다.이 정도면 무열왕, 문무왕, 신문왕 3대를 지목해 “잘난 할아버지에 더 잘난 아버지, 그리고 만만찮은 손자”라고 표현하는 것도 틀린 말이 아닌 듯하다.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이용선기자

2023-10-03

횡성한우축제 최초 총감독 선임, 문화관광 도시로 디자인

“규모가 크고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것이 우수한 축제의 지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번 19회 횡성한우축제는 지역주민과 외지 방문객 모두 즐거움을 나누고 추억을 쌓아갈 수 있는 축제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지난달 27일 횡성군청에서 만난 김명기 횡성군수는 축제의 성공의 열쇠는 어떤 콘텐츠를 제공하냐에 달려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횡성’ 하면 한우축제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횡성한우축제는 지역의 대표 축제지만 이에 대한 남모를 고민도 있다. 관광객들이 한우축제만 찾는다는 것. 한우축제 이미지가 강하다보니 상대적으로 횡성의 다양한 매력을 만날 기회를 놓치고 만다는 의미다. “횡성군에는 지역을 대표하는 축제인 횡성한우축제를 비롯해 읍·면 지역에서 다양한 축제가 개최되고 있습니다. 안흥찐빵축제, 횡성더덕축제, 둔내토마토축제 등 주로 특산물을 메인 테마로 둔 축제가 발달되어 있습니다. 또 횡성호수길축제, 횡성회다지소리축제, 올해 첫 선을 보인 소(牛)맥프리미엄 페스티벌 등 지역의 문화관광자원을 근간으로 한 축제가 잘 알려져 있습니다.”이 같은 고민에도 불구하고 ‘횡성한우’를 테마로 한 횡성한우축제는 당연히 다른 지역축제들과 규모면에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올 한우축제는 ‘횡성의 인심! 한우의 자부심!’을 주제로 오는 6~10일 닷새간 열린다. 이번 축제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역대 최초로 축제 총감독을 선임해 축제를 기획했다는 점이다. 기존의 틀과 운영방식을 과감히 탈피하기 위한 방안이다.올해 한우축제가 그동안 개최해온 축제와 크게 달라진 부분은 ‘먹거리축제’를 넘어 횡성한우를 테마로 지역의 문화성, 생활성을 담아내는 데 역점을 뒀다는 점이다. 김명기 군수는 “한우축제는 지역 대표 먹거리를 메인테마로 가진 축제의 특성상 먹거리 소비가 주를 이루는 한계점도 가지고 있었다”면서 “횡성한우 관련 단체와 생산자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던 구조를 벗어나 여러 지역주민과 방문객이 어우러지고 만족할 수 있는 ‘공유의 축제’를 핵심 가치로 내세웠다”고 강조했다.올해 횡성한우축제에서 눈 여겨 볼 만한 것은 축제의 핵심공간인 ‘구이터’를 비롯해 다양한 횡성한우 부위를 코스요리로 즐길 수 있는 ‘미식파티’와 횡성한우 비선호 부위를 이용한 요리들이 펼쳐지는 ‘스트릿푸드존’이 새롭게 선보인다는 점이다.“횡성한우를 테마로 한 축제이기 때문에 먹거리 부분을 소홀히 할 수 없는데요. 올해 축제에선 단순히 방문객들이 특정 장소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방식에 그치지 않고 새롭고 신선한 공간을 구성한 점에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이 밖에도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도 준비돼 있다. 기존 대형 텐트에 여러 부스와 정보를 담아냈던 주제관은 걸어 다니면서 횡성군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볼 수 있는 ‘스트릿 에코뮤지엄’으로 전환했다. 또 횡성한우 크기의 모형에 지역 작가들이 색을 입힌 ‘카우쇼’, 횡성군 9개 읍·면을 스토리텔링한 체험존, 지역의 문화 정체성을 담아낸 주제공연, 건강, 행복, 웰빙을 테마로 잔디밭에 펼쳐질 ‘웰니스파티’, 볏짚을 이용한 미끄럼틀과 놀이터 등 다양한 공간과 프로그램이 준비 중이다.축제가 확 달라진 만큼 김명기 군수는 횡성을 문화관광의 도시로 디자인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기존 운영해온 횡성문화재단을 ‘횡성문화관광재단’으로 확대 개편하고 과거 지역 문화예술인과 단체와의 네트워크를 넘어 지역 관광 종사자까지 교류의 범위를 넓혔다.“차별화된 관광사업 발굴, 체류형 관광 인프라 확장, 다각적인 홍보·마케팅을 통해 횡성의 관광 경쟁력을 높이는데 역점을 둘 계획입니다.” 김명기 군수는 지난 1년간 다양한 성과를 거뒀지만 그중에서도 횡성의 미래 발전을 견인할 새로운 동력 기반을 마련한 것이 가장 보람있었다고 밝혔다.이모빌리티 산업생태계 조성 및 자율주행 상용화 거점도시로서 횡성의 기반을 다졌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모빌리티 연구실증단지건립에 들어갔고, 현대자동차 전기차 재제조 배터리 안전성 평가센터를 유치했다. 모빌리티 뿐만 아니라 의료헬스, 스마트 분야 대규모 산업단지도 조성할 계획이다.“먼저 관련 산업 유치를 위해 100만 평에 달하는 대규모 산업단지를 신규 조성할 예정입니다. 강원특별자치도의 바이오 헬스 벨트 구축산업에 포함될 수 있도록 건의하고, 정부의 지역 균형발전 정책 핵심 사업으로 꼽히는 ‘기회발전특구‘로 지정되어 첨단산업 분야의 기회의 땅이 될 수 있도록 선제 대응하겠습니다. 미래 모빌리티 거점특화단지와 스마트시티 조성사업을 성공 추진해 강원도형 모빌리티 특화도시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갈 계획입니다.”이 외에도 공공기관 유치를 위한 제1, 2 문화복합단지 조성, 횡성 베이스볼파크를 중심으로 KBO 야구발전센터 및 다목적 스포츠 트레이닝 센터 조성, 친환경 복합 에너지타운 조성 등이 김명기 군수가 밝힌 중점 추진 계획이다.김명기 군수는 부자 농촌을 만들기 위한 의지도 나타냈다. 경관농업단지 발전을 통한 농업 관광자원화, 농업소득 보전을 위해 추진 중인 행복농자재 지원사업도 더욱 내실을 기하겠다고 밝혔다. 또 외국인 계절 근로자 배치를 통한 농업인력 부족 해결, 농가소득 보전, 영농비 지원 등 다양한 정책을 통해 농업인들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경제활력도시 횡성이 완성되면, 인구 유입으로 군민의 경제활동이 활발해지고, 주변 상권과 경제 인프라가 구축되면서 우리 군은 수도권 부럽지 않은 도농 복합도시로 앞서 나가게 될 것입니다. 명품 한우의 도시를 넘어 모빌리티 선도 도시로서 새롭게 성장해나가는 횡성이 되도록 배전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횡성=최병일 전문기자

2023-10-03

오감만족 콘텐츠 가득 경주서 가을 즐기세요

지역 대표 명품문화 예술축제인 제50회 신라문화제가 역대급 콘텐츠로 6일 개막한다.이번 축제는 전년도 미비점은 보완하고 오감을 사로잡는 프로그램 규모는 더욱 확대해 축제의 완성도를 높였다. 특히 지난해 화백제전 수상객석(2천석) 부족으로 많은 아쉬움을 남겼던 부분은 인근에 대형 LED를 설치하고 돗자리 존(1천석)을 추가로 마련했다.먼저 6일부터 8일까지 3일간 뮤지컬, 풍물 퍼레이드, 향가·시낭송 등의 콘텐츠로 봉황대 일원에서 펼쳐진다. 이어 13일부터 15일까지 3일간 화백제전, 실크로드 페스타, 달빛난장 등의 역대급 콘텐츠로 볼거리와 즐길거리, 먹거리를 선사한다.주낙영 경주시장은 “올해는 무엇보다 방문객들이 안전하게 신라문화제를 즐길 수 있도록 경호·보조 인력을 대폭 확대했으며, 지역 특색을 담은 콘텐츠와 공간구성으로 경주에서만 볼 수 있는 차별성을 가진 축제로의 변화를 시도했다”며 “가을 정취를 만끽하는 10월에 신라문화제에 반드시 오셔서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을 가득 담아 가시길 바란다” 고 밝혔다. □ 도심경제 활성화신라문화제 대표 먹거리 야시장인 ‘달빛난장’이 13일부터 15일까지 봉황대, 중앙로, 내남사거리 잔디밭 일원에서 펼쳐진다.참여업체는 지난해 21곳에서 올해 33개로 확대했다. 이는 중심상가 및 봉황·황리단길 연합회와 전통시장·노점상 연합회 등이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지역 상인들과 꾸준히 협의 끝에 얻은 결과물이다. 메뉴는 닭꼬치, 잔치국수, 탕후루, 케밥, 족발, 생과일 쥬스, 생맥주 등 다양하다.지난해 노란색 파라솔로 꾸민 레트로 가믹존(70곳)은 올해 그 개수를 늘려 제공하며, 감성 피크닉존(60곳)과 신라라운지존(60곳)도 확대 비치해 축제를 즐기러온 방문객이 축제장에 오래 머무르며 소비할 수 있게 준비했다.또 같은 기간 전문 거리예술공연 65회, 지역예술인 버스킹 49회가 진행되는 ‘실크로드 페스타’는 중심상가와 황리단길 등 도심 곳곳에서 음악과 공연으로 축제의 장을 만든다.10대들과 MZ세대를 겨냥한 ‘화랑무도회’는 로꼬, 김하온, 릴러말즈 등 유명 힙합 래퍼들의 참여가 예정돼 있다.이는 신라문화제가 지금까지 기성세대의 잔치에 머물렀다면, 지난해부터 시도된 ‘화랑무도회’로 전 연령층이 함께 축제에 참여할 수 있는 초석을 다진 것이라 말할 수 있다.또 내남사거리 인근 금관총고분관을 잇는 잔디밭에도 감성쉼터를 조성해 황리단길 청년들을 중심상가로 유도한다. □ 월정교와 화백제전월정교는 동궁과 월지와 함께 경주에서 야경이 아름다운 곳으로 꼽힌다. 조선시대에 유실되어 없어진 것을 10여 년간의 조사 및 고증과 복원을 진행해 2018년 4월 모든 복원을 완료했다.신라문화제는 이곳 월정교에서 화백제전으로 화려한 막이 오른다.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화백제전(和白祭田)은 13일 오후 7시부터 월정교 수상 특설무대에서 개최된다.지난해 2천석 수상객석을 가득 메운 화백제전은 더 많은 관람객이 안전상의 문제로 관람할 수 없어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올해는 인근에 대형LED 500인치를 설치하고 화면 앞에 1천석의 돗자리 존을 마련했다. 또 부득이하게 현장에 참석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24일 밤 11시 포항MBC에서 화백제전 특집방송을 준비했다.공연은 숭신전, 육부전 등 실제 문중이 참여하는 신라의 태동을 여는 신라왕 추대식으로 펼쳐진다. 이어 화려한 불꽃과 드론쇼, 물 위에서 펼쳐지는 수상 퍼포먼스가 결합된 수준 높은 창작 공연을 비롯해 경주시립고취대, 경주플라잉, 무용협회 등 지역 예술인들이 대거 출연해 월정교의 밤하늘을 화려하게 빛낸다. □ 시민축제운영단 조기 출범과감히 관 주도형에서 벗어나 시민참여형 축제를 표방하고 있는 이번 신라문화제는 지난해 선보인 시민축제운영단을 조기 출범하고 그 규모를 대거 확대했다.시민축제운영단은 축제 SNS홍보단(시민서포터즈), 실크로드 페스타(시민축제학교), 친환경그린리더(화랑원화단)으로 구성됐다. 지난 3월부터 모집한 시민축제운영단은 지난해 180여명이 참여한데 반해 올해는 320여명이 참여한다.지난 7월부터는 친환경 그린 리더 ‘화랑원화단’ 중·고등학생 35명을 모집해 친환경 체험학습과 폐자재를 활용한 작품창작 및 플로깅 등의 친환경 활동을 수행했다. 시민축제학교는 13일부터 15일까지 봉황대 축제장 일원에서 시민들이 직접 기획한 양말목공예 체험, 술술 토크쇼, 주령구 놀이 등의 이색적인 프로그램을 펼친다.□ 수준 높은 예술제로 감동 선사신라문화제 중 6일부터 8일까지 진행되는 신라예술제는 (사)한국예총 경주지회에서 주관한다.뮤지컬 ‘세 그루 아래 만나다’는 같은 기간 봉황대 특설무대에서 지역의 역사적 인물인 처용, 홍도, 최준을 소재로 한층 높아진 수준의 공연을 선보인다.또 ‘다시, 경주를 노래하다’라는 주제로 미술, 사진, 문인화 등도 전시한다. 특히 사진작가협회에서는 50회를 맞아 그간 추억의 신라문화제 사진 60여점을 전시할 예정이다. 옛 경주의 거리, 신라문화제를 추억하고 싶은 분들은 반드시 관람해 보길 추천한다.육부촌 풍물퍼레이드는 뮤지컬 공연 전 식전 붐업행사로 봉황대 인근 6곳에서 풍물패 300여 명이 신명나게 축제를 알리며 봉황대 특설까지 풍물패 소리와 함께 인파를 몰고 올 예정이다./황성호기자 hsh@kbmaeil.com

2023-10-03

온 가족 함께 이층버스 타고 대구 도심 한바퀴 ‘씽씽’

대구시가 한가위를 맞아 황금연휴기간 대구시티투어를 운영키로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대구시티투어는 대구의 주요 관광지와 문화유산 및 대구 지역을 순회하는 투어 사업을 운행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외래관광객 유치 및 지역 관광산업 발전을 이끌 예정이다.투어의 추석 연휴 운영 일정은 6일이라는 긴 시간에 맞게 오는 28일부터 10월 3일까지 운영된다. 단, 추석당일인 29일과 월요일인 2일에는 운휴한다.시티투어의 경우 도심순환노선으로 1일 7회 운영될 계획이다.도심순환노선의 경우 10개 지점에서 3대(2층버스 1대, 1층버스 2대)로 운영되며, 테마노선 및 특별노선도 3대(1층버스)가 운영된다.정기노선은 팔공산, 비슬산, 수성가창, 낙동강, 야경의 테마를 가지고 있고, 특별노선은 고(故) 이건희 특별전 연계노선 군위군 노선, 갤러리투어, 팔공산 국립공원 승격노선 등으로 구성돼 있다.이용요금은 성인 1만 원, 중·고생 8천 원, 어린이·경로·장애인 6천 원이다. 운행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50분까지 순환하며, 테마코스의 경우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운행된다.대구시는 추석연휴와 판타지아 대구페스타 행사 기간에 시티투어버스 도심순환노선 요금 50% 할인 이벤트를 진행한다.도심순환노선은 동대구역을 시작으로 김광석 다시그리기길, 동성로, 근대문화골목, 이월드·두류공원, 앞산전망대, 수성못 등 대구 도심 주요 관광지를 순환하는 것으로 1일 7회 운영된다. 올해는 테마노선 역시 눈길을 끌고 있다.오는 10월 1일에는 대구시로 편입된 군위군에서는 새로운 투어가 진행된다. 이날 군위군 투어는 20명 이상 모객시 운영이 되며, 운행노선은 청라언덕역(오전 9시 30분)→동대구역(오전 10시)→군위삼존석굴→한밤마을→부계면(중식)→화본역→인각사→일연공원→동대구역(오후 5시)→청라언덕역(오후 5시 30분)으로 구성돼 있다.또 오는 28일부터 10월 3일까지 5인 이상 모객 시 운영되는 팔공산 코스와 비슬산 코스, 낙동강 코스 및 수성가창 코스도 운영될 예정이다.도심순환노선 주요 정류장은 10지점으로 나뉜다. 각 지점의 즐길거리는 다음과 같다.1 동대구역 출발 KTX, 고속버스 등을 이용할 수 있는 대구 교통의 요충지로 동대구역 앞 시티투어 승강장에서 버스를 탑승해 도심순환노선 승차권을 구입, 멋진 대구관광을 즐길 수 있다. 특히 이곳에는 신세계백화점 대구점에 대구아쿠아리움이 있어 아이들을 동반한 부모가 가볼만 하다. 시티투어를 신청할 시 연계해 20% 할인 행사도 진행 중이다.2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가수 고(故) 김광석의 옛 모습과 주옥같은 노랫말로 가득 채워진 아름다운 문화예술 거리다. 이색적인 벽화를 감상하며 옛 추억을 공감할 수 있고, 예술가 공방에서 다양한 문화예술 체험을 즐길 수 있다. 주변에는 김광석 동상, 시민참여코너, 추억의문방구, 카페, 꽃집, 분식, 보리밥, 파전, 막걸리, 한우갈비 등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있다. 3 동성로 대구를 대표하는 가장 번화한 거리다. 유행을 선도하는 쇼핑몰과 백화점을 비롯해 영화관, 공연장 등 문화공간과 야시골목, 로데오거리, 화장품거리 등 곳곳에 명물거리가 자리해 있다. 주변에는 패션주얼리특구, 교동시장, 2·28기념중앙공원, 야시골목, 교동먹자골목, 호프골목, 커피골목, 떡볶이골목 등이 있다.4 근대문화골목 청라언덕은 대구의 기독교가 지역사회에 뿌리내려 정착하고 성장한 중심지다. 100여년전 옛 선교사 주택이 남아 있으며, 현재 의료선교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주변에는 은혜정원, 동산의료원 100주년 기념 종탑, 대구동산병원 구관 현관, 동무생각 노래비 등이 있다.5 청라언덕역·서문시장 조선시대 3대 시장의 하나였던 서문시장은 지금도 섬유 관련 품목들을 비롯해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달성공원은 우리나라 성곽 역사상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토성(서기261년)이다. 주변에는 관풍루, 향토역사관, 동물원, 상화시비, 수운 최제우 동상 등이 있고, 칼국수, 보리밥, 잔치국수, 납작만두 등 먹거리가 있다. 6 이월드·두류공원 이월드는 202m 높이의 83타워를 중심으로 스카이점프를 비롯해 다양한 놀이시설과 관람시설을 갖춘 유럽풍 테마파크다. 두류공원에는 문화예술회관, 야외음악당 등이 자리해 있다. 주변에는 문화예술회관, 야외음악당, 관광정보센터, 성당못, 이월드가 있다.이월드의 경우 시티투어와 연계해 주간 자유이용권 20% 할인행사를 진행한다.7 안지랑곱창골목 쫄깃한 양념곱창으로 전국 미식가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명물거리다. 전국 5대 음식테마거리로도 선정됐으며, 저렴한 가격에 맛있는 양념곱창을 맛볼 수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주변에는 앞산카페거리, 앞산맛둘레길, 안지랑골이 있다.8 앞산전망대 케이블카를 타고 앞산 정상부 전망대에 오르면 대구 시가지와 팔공산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특히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시가지 야경이 일품이며, 앞산 공원을 둘러보는 것도 좋다. 주변에는 낙동강승전기념관, 은적사, 안일사가 있고, 카페, 레스토랑, 한식, 중식 등을 즐길 수 있다. 케이블카의 경우 시티투어와 연계시 왕복권을 할인한다. 9 수성못 1년 내내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는 수성못 일대는 음악분수를 비롯해 벤치와 수목, 산책로, 놀이공원 등이 어우러져 유원지를 이루고 있다. 들안길 먹거리타운과도 인접해 있어 나들이 코스로 좋다. 주변에는 수성유원지, 영상음악분수, 수성랜드, 오리배, 아이스링크 등이 있고 카페, 한식, 중식, 양식 레스토랑 등도 있다.10 국립대구박물관 대구·경북 지역의 출토유물을 전시하고, 영남지역의 선비문화와 민속문화를 재현하는 곳, 전시업무 외에 유적발굴 및 학술조사, 청소년문화강좌, 영화상영, 어린이 문화재그리기 대회 등이 진행된다. 주변에는 범어공원, 대구어린이대공원이 있다./김재욱기자·안병욱인턴기자

2023-09-26

“영일만에 연 5천t 공장 건립… 이차전지 리더 도약할 것”

포항 영일만산업단지에 연산 5천t 규모의 실리콘 음극재 생산 공장이 건립된다. 포스코는 2025년까지 포항지역에 3천억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지난 4월 4일 포항시청에서 경북도와 포항시, 포스코실리콘솔루션은 실리콘 음극재 생산공장 건립을 위한 MOU를 체결했다.포스코그룹은 차세대 실리콘 음극재 사업 추진을 위해 지난해 7월 실리콘음극재 개발업체인 테라테크노스를 인수해 포스코실리콘솔루션으로 이름을 변경했다.이재우(43·사진) 포스코실리콘솔루션 대표와 최근 비대면 인터뷰를 가졌다. - 어떤 사업을 하고 있는 회사인지.△포스코실리콘솔루션은 차세대 배터리 소재로 주목받고 있는 실리콘산화물 음극재를 생산하는 회사이다.실리콘산화물 음극재는 기존 흑연계 대비 에너지 저장 능력이 크고 출력 특성이 좋아서 전기차의 주행거리 향상과 급속 충전을 가능하게 한다.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자동차사에서 실리콘 음극재를 도입하고 있다. 향후 인조흑연 다음으로 가장 큰 시장을 형성할 것으로 전망된다.- 스타트업으로 시작했다. 어떤 계기로 창업했는지.△오랜 기간 재료를 공부하면서 실리콘소재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실리콘소재가 더 널리 쓰이기 위해서는 기술혁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다. 최고의 실리콘 제조기술을 개발해보자는 연구자로서의 욕심이 독창적인 기술을 개발하고 회사를 현재까지 끌어올릴수 있는 계기였다.- 주요 보유 기술에 대해 설명하자면.△여타 실리콘산화물 음극재 제조업체들은 배치식 생산방식을 적용해 생산성 향상과 품질향상에 제약이 있는 반면, 포스코실리콘솔루션은 철강 제조공정에서 착안한 고온액상 제조방식을 통해 연속생산이 가능하며, 음극재 내 실리콘 함량도 높일 수 있다.- 포스코가 100% 지분 인수를 하면서 사명 변경, 생산공장 포항 설치 등 사업 추진 속도를 내고 있는데, 어떤 인연으로 포스코와 이어지게 됐나.△포스코는 이차전지소재 분야의 선도업체로서 실리콘 음극재 사업에 대한 의지가 강했고, 철강 제조공정에서 착안한 포스코실리콘솔루션의 실리콘 제조공정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포스코홀딩스는 테라테크노스의 생산기술 및 제품 양산성에 대한 검증을 끝마치고 2022년 7월에 인수했고, 테라테크노스는 포스코실리콘솔루션으로 재탄생하게 됐다.이 인수를 통해 포스코실리콘솔루션은 포스코홀딩스가 보유한 제조 공정 노하우 및 연구 인프라를 얻게 됐다. 더불어 포스코의 안정적인 시스템과 제도를 도입해 사업을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추진하고 있다.- 포항 지역에 생산 공장 건설을 결정하게 된 계기는. 생산 거점으로서 포항 입지의 매력도 얘기해 달라.△포스코실리콘솔루션이 포항 지역에 생산 공장을 건설하기로 결정한 계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포항은 포스코 철강사업뿐만 아니라 포스코퓨처엠, 에코프로 등 이차전지 특화 단지로 발전하고 있는 지역으로, 향후 이차전지 사업 및 인프라를 활용하기에 매우 적합하다.또한 포스코퓨처엠, 포스코홀딩스 미래기술연구원, RIST와 같은 포스코그룹의 기업 및 연구소가 밀집해 있어 이차전지 기술을 고도화하는데 있어 포스코그룹의 역량을 집중할 수 있는 지역이다. 향후 포항실리콘솔루션은 포항의 인프라와 기술 생태계를 활용해 생산 공장을 더욱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생산 공장 건설 이후 어떤 기업으로 성장하고 싶은지, 사업적 목표는.△현재 포스코실리콘솔루션의 사업적 목표는 2024년 상반기까지 연산 450톤 규모의 실리콘음극재 1단계 생산설비 준공하는 것이다.이 목표를 통해 안정적인 생산능력과 기술을 확보하고 단계적으로 생산 규모를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최종적으로 포스코실리콘솔루션은 차세대 이차전지 소재 분야에서 세계적인 리더로서의 입지를 확립하고,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포스코실리콘솔루션은 지속 가능한 미래에너지 산업에 기여하며,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포스코그룹 이차전지소재 밸류체인에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포스코그룹은 실리콘 음극재 생산설비 투자가 완료되면 양극재, 천연흑연, 인조흑연 및 실리콘 음극재까지 모든 포트폴리오를 완성하는 전체 밸류체인을 구축하게 된다. 이를 통해 이차전지 소재분야에서 확실한 글로벌 경쟁력을 보유할 수 있을 전망이다.- 포항에서 공장을 건설할 것으로 알려졌는데, 지역에서 필요한 지원이 있다면.△포스코실리콘솔루션은 포항에 지속적인 투자를 계획하고 있기 때문에 지역으로부터의 지원에 기대하고 있는 것들 또한 있다.먼저, 포항 지역 정착의 조기안정화를 위한 투자 인센티브와 행정적 업무 지원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지원을 통해 회사의 투자가 더욱 원활하게 진행되고, 지역사회와의 상호 협력이 강화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포스코실리콘솔루션은 공장 운영을 위해 많은 인재를 채용할 계획이다. 이에 따른 포항지역에서의 인력 확보와 인재 육성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지역 사회와 산업체들의 협력을 통해 지역 인재들에게 적합한 교육과 기술 지원들이 충분히 제공됐으면 한다.무엇보다 지속적인 증설투자를 위해서는 포항 지역 내 전력공급 인프라가 중요하다. 향후 5천 톤 이상의 증설투자를 위해서는 안정적인 전력공급 확대가 필요하며 이에 대한 지자체 및 관련기관의 적극적인 협력을 기대한다. 이재우 포스코실리콘솔루션 대표 - 직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회사는 직원들께 항상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한분 한분이 바로 회사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주인공이다. 직원분들의 기여와 노력을 소중히 생각하며, 회사는 직원들이 가진 각자의 장점과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회사와 직원들 모두가 서로를 지지하고 협력해 더 큰 성과를 이루기 위해 함께 노력하기를 부탁드린다.- 포항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포스코실리콘솔루션은 포항 지역 사회의 지지와 협력을 통해 더욱 더 발전하고자 한다. 회사의 목표는 포항 시민들과 함께 이뤄야 할 목표이며, 이를 통해 더 나은 포항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포항 시민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에 감사드리며, 포항 지역에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지역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린다./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

2023-09-26

“연휴 기간 네트워크 흔들려선 안되죠” 24시간 비상 출동 대기

우리가 매일 쓰는 데이터 양과 정보량은 해가 갈수록 늘고 있다. 데이터를 실어 나르는 통신망이 점점 중요해지는 이유다. KT대구경북광역본부에 따르면 유무선 통신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경북동부권의 무인시설만 약 600개소, 통신망 길이를 모두 합하면 지구둘레에 버금갈 정도로 광범위하다. 안정운용에 투입되는 KT경북동부권 네트워크본부 인력은 100여명이 넘는다.365일 24시간 통신망 운용에 고군분투하는 KT네트워크본부 직원 가운데 지난 96년 입사해 26년을 포항, 경주 등 경북동부권에서 근무한 김병철(52·사진·대구/경북NW운용본부 경북액세스운용센터 포항운용부) ‘KT 명장’에게 26년 근무기간의 애환을 들어본다.‘KT 명장’은 현재 직무를 7년 이상 수행했거나 Pre-Meister 자격을 유지한 전문성을 갖춘 직원이 대상이 된다. 입사 25년 이상자 중 최근 3년 이내 일정 수준 이상의 고과성적과 최근 2년 이내 CEO표창자 중에 심사를 거쳐 선발되는 만큼 우수한 실력은 기본이다. 김 명장은 KT대구경북직원의 1%에 해당하는 명예 명장이다.김병철 명장은 “요즘은 통신장비들이 자동화하고 원격제어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이동 거리가 많지 않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장비가 설치된 무인국사까지 직접 이동해서 점검이나 정비를 해야 했다”며 “경북동부권역만 해도 관할지역이 워낙 넓기에 부서원 한달 평균 이동거리가 3만 ㎞를 넘었고 개인적으로도 한달에 2천 ㎞이상 경북 방방곡곡을 다녔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자연재해로 인해 통신서비스에 이상이 생기면 많은 고객들이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선제적인 점검이 필수”라며 “명절이나 휴가철은 물론 최근 전국적으로 피해를 입힌 집중호우와 같은 자연재해에 대비해 비상근무는 일상이라 가족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있다”고도 했다.김 명장처럼 전국에서 낮밤을 가리지 않고 본인의 일에 열중하는 통신사 직원들이 있기에 국민들이 마음 편히 전화, 인터넷 등 통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다음은 김 명장과의 일문일답이다. -최근 집중호우로 인해 예천을 비롯해 경북지역에서도 상당한 피해가 있었다. 재해 관련 기억나는 일이 있는지.△작년 힌남노가 최근에 겪은 일이라 기억에 남는다. 항상 태풍 등 자연재해에 대비를 한다고 하지만 막을 수는 없기에 긴장을 하고 있었다. 밤사이 회사 빌딩의 인근 변압기 터지는 소리를 시작으로 KT시설 피해가 있었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안전에 유의하면서 신속하게 복구해 고객불편을 최소화 했다. 큰비와 바람으로 즉각적인 조치가 쉽지 않았다. 특히 고객들이 밀집해 있었던 포항 오천의 아파트는 대부분 지하에 통신장비가 구축돼 있는데 지하에 물이 차고 뻘밭으로 변하면서 장비와 케이블 교체가 난감한 상황이었다. 인근의 여러 아파트가 같은 조건이다 보니 제한된 장비와 열악한 환경에서 복구가 늦어질 수 밖에 없었다. 태풍으로 전기도 끊긴 상황이라 휴대폰 충전이나 IPTV가 나오지 않아 주민들은 답답함을 토로했다. 사회공헌 업무를 담당하는 ESG추진팀과 협의해 발전기를 사용해 스마트폰 충전서비스를 지원하고, 모든 직원이 총 동원돼 최우선으로 통신서비스를 재개했던 기억이 난다.-기억에 남는 고객이 있다면.△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는 전국적으로 PC방 붐이 일었고, 제가 근무하는 포항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PC방 인터넷 개통 업무를 전담하여 매일같이 PC방을 다녔었다. 개통도 개통이지만 초창기라 서비스 안정화가 되지 않아 24시간 고장 신고를 받았다. 그러던 중 한밤중에 고장신고 전화를 직접 받았다. 사정이 급하다 보니 PC방 사장님이 고객센터가 아닌 개통을 담당한 저에게 바로 고장 신고를 한 것이었다. 분명 전화를 받은 기억은 있는데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다. 너무 죄송해 일어나자 마자 바로 해당 PC방을 찾았는데 사장님이 저를 보시더니 그냥 웃기만 하셨다. PC방 서비스 초기라 밤낮없이 개통과 장애처리를 하다 보니 너무 피곤한 나머지 통화를 하다 잠이 들어버린 것이다. PC방 사장님도 밤낮없이 PC방 업무를 처리하는 제 사정을 알고 그냥 웃고 넘어가신 것이다. 지금이야 이런 일이 없지만 그때는 PC방에 컴퓨터 한대만 고장이 나도 KT에 고장 신고를 하던 시절이었다.또 다른 사례는 포항 오천에 있는 해병대 부대 내에 장병들 복지를 위한 사이버 정보방용 인터넷 전용회선을 설치하러 방문했을 때다. 부대 통신실에서 사이버 정보방 설치 장소까지 약 200m 거리인데 구내통신 선로가 없어 난감 했었다. 빨리 개통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도저히 직원 2명이서 하루만에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 때 현장 상황을 살펴보던 부대장님이 부대원들을 동원해 1시간도 안되는 시간에 통신케이블을 포설해 줘 무사히 당일 개통을 마쳤다. 역시 ‘필승 해병대’ 라는 구호를 나도 모르게 떠올렸던 기억이 생생하다.-인터넷 서비스 장애가 발생했을 때는 어떻게 대처하는지.△지역에서 발생하는 인터넷 장애의 대다수는 사외공사로 인해 KT통신장비가 피해를 입어 통신 서비스의 이상이 발생하는 경우이다. 상시 모니터링을 통해 장애 알림을 받으면 내용을 분석해 어느 곳에서 어떻게 장애가 발생했는지 파악한 후 관련 부서와 협업해 이를 해결한다. 만약 케이블 끊어짐 등의 상황이라면 긴급 복구를 진행하거나 다른 경로의 케이블을 활용해 우회작업을 진행한다. 장비 불량이라면 동일 장비로 교체하거나 이중화된 장비로 전환해 지속적인 서비스가 되도록 조치한다. 또한, 소상공인들의 경우 유선인터넷 기반의 카드 포스기를 사용하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에 장애가 발생하면 즉각적으로 이동통신(무선) 기반 인터넷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장비를 긴급 투입해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KT네트워크본부 경북액세스운용센터 포항운용부 김병철 명장 -장애 예방을 위한 활동은.△지역 네트워크의 안정 운용을 위해 네트워크 장비 이중화, 경로 이원화를 통해 안정적인 서비스 제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주기적으로 네트워크 장비의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상태를 정밀하게 점검하고 클린업해 장애를 예방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외부기관 공사로 인한 케이블 단선 사례가 잦기 때문에 2019년부터 ATACAMA라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 시스템은 공사정보를 자동으로 수집한 후 KT 케이블이 매설된 지역과의 거리를 산출하여 근거리 공사시 자동으로 관련 직원이 출동할 수 있도록 정보를 공유한다. 시스템 도입전과 비교해 불필요한 출동이 줄어들어 대고객 서비스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공사업체 또한 출동한 KT직원으로부터 케이블 매설 정보를 사전에 알 수 있어 유용한 시스템이다.-끝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는지.△지금까지도 그랬듯이 퇴직할 때까지 우리 지역 주민들이 편안하게 통신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경북동부권 통신망의 안정적인 운용을 위해 24시간 쉬지 않고 움직인다는 각오로 임할 생각이다./김재욱기자 kimjw@kbmaeil.com

2023-09-26

고즈넉한 자연·탁트인 바다… 황금연휴 가족나들이 떠나요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풍성하고 정겨운 시간을 보낼 민족 고유의 명절인 추석이 다가왔다.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초가을. 무려 6일이나 이어지는 이번 추석 명절에는 차례와 성묘를 지낸 후에도 많은 시간적 여유가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다.전국 각지에서 오랜만에 어렵게 모인 가족들은, 모처럼의 귀한 시간들을 즐길 나들이 장소를 물색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경북 지역에는 가족 나들이에 적당한 관광 명소가, 어떤 곳이 있을까? 가족 단위로 산책하며 대화를 할 수 있는 편안한 곳, 새로운 분위기, 나만 알고 싶은 멋진 곳 등을 소개해 본다. △경주경주엑스포대공원이 추석 황금연휴맞이 다채로운 공연과 체험이 가득한 ‘한가위 한마당 행사’를 마련했다.‘한가위한마당행사’는 체험마당과 공연마당으로 나눠 진행 되는데 추석 당일 29일부터 10월 2일까지 공원 내 곡수원 일원에서 펼쳐진다.체험마당의 경우 관람객들은 다듬이놀이와 널뛰기, 말뚝이 떡 먹이기, 활쏘기, 떡메치기, 윷놀이 등의 민속놀이를 즐길 수 있다.또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과 프로그램 연계한 우리놀이인 깃털제기와 산가지, 실뜨기. 비사치기 등과 골든벨, 주령구 던지기 등 경품 제공 이벤트도 실시된다. 공연마당은 곡수원 옆에 마련되는 무대에서 마임과 트로트, 풍선아트, 브라스 밴드 등의 공연이 매일 오후 1시와 3시에 2차례 열려 관람객들의 흥을 돋울 예정이다. 이와 함께 인피니티 플라잉 공연도 추석연휴에 이어지고 29일 저녁에는 국악창작극 ‘오줌싸개 보희의 꿈’ 마지막 공연이 열린다.지구에 불시착한 네온 외계인을 쫓아가는 콘셉트의 체험형 야외이벤트인 ‘루미나 네온 카니발’도 추석 연휴기간 휴장 없이 개최된다.특히 경주엑스포공원은 28일부터 10월 3일까지 한가위 입장료 50% 할인 이벤트도 진행한다. 한복 착용자와 3대 가족 관람, 달 관련 아이템 소지자에 대해서는 경주엑스포대공원 및 루미나 네온 카니발 입장료를 일괄적으로 각각 6천원과 5천원을 받는다.△안동온라인 커뮤니티가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새롭게 떠오르는 핫플레이스 역시 다양하게 생기지만 가끔은 오래된 것들이 그립기도 하다.그럴 때는 한국정신문화의 수도인 안동을 찾는 것도 한 방법이다. 안동은 고즈넉한 멋과 전통미, 현대미를 모두 갖춘 도시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다수 보유한 고장이기도 하다.안동하면 가장 먼저 하회마을과 도산서원이 떠오르지만 병산서원도 새롭게 떠오르는 핫플레이스, 세계문화유산이다.병산서원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으로도 손꼽힌다. 낙동강이 서원을 휘감고, 푸른 절벽이 서원 주위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자연 속에서 힐링하기에 완벽한 곳이다.병산서원에 들어서면 ‘자기를 낮추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라는 ‘복례의 뜻’ 그대로, 소박함과 담백함을 갖춘 만대루와 입교당 마루를 만날 수 있다.고려 말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하는 피난 도중에도, 이곳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고 감동해 ‘서책과 땅을 하사했다’고 전해진다.조선시대 병산서원은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며 많은 학자를 배출했다. 서애 류성룡 선생과 인연이 깊은 곳으로, 현재 서애 선생의 문집을 비롯해 각종 문헌 1천여 종 3천여권이 소장돼 있다. 병산서원은 역사적 가치를 지닌 곳이기도 하지만 자연 경치가 뛰어나 인생 사진을 찍을 장소가 많다. △예천예천문화관광재단은 추석 연휴부터 10월까지 가을맞이 ‘삼강주막 나루터축제’, ‘삼강 낭만 나들이’, ‘금당야행’ 행사를 개최한다.‘삼강주막 나루터축제’는 추석 연휴 기간 삼강문화단지 일원에서 삼강주막과 보부상체험관, 강문화전시관 등을 개최해 다양한 콘텐츠 공연과 체험프로그램을 제공한다.축제는 Retro(레트로) ‘과거의 재현’과 Newtro(뉴트로) ‘과거의 새로운 해석’이라는 주제로 열린다. K-세일즈맨과 보부상운동회, 삼강골든벨, 스토리텔링 공연 등 삼강주막의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전통 문화 체험이 준비돼 있다. 또 삼삼오오버스킹과 나룻배만들기, 전통의상, 막걸리만들기, 전통놀이 등은 가족 단위 관광객들에게 많은 즐거움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된다.삼강문화단지에서는 ‘삼강 낭만 나들이 행사’가 10월 2~3일, 14~15일, 21~22일 등 3차례 진행된다. 이 행사는 각종 체험 프로그램과 공연, 트레킹 및 플로깅, 모꼬지, 포토존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관광객들에게 제공한다.용문면 금당실마을 일원에서는 10월 7일부터 이틀간 ‘금당야행’이 개최된다.스탬프투어와 체험프로그램, 전통혼례, 어린이 공연, 스토리텔링 공연, 예술인공연 등을 진행해 참여자들에게 돌담길 사이사이를 오가며 예천군의 독특한 가을 정취를 만끽할 기회를 제공한다. △포항포항 북구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관광지로는, 사방기념공원이 있다.사방기념공원은 한국의 근대적 사방사업(산에 나무를 심고 강둑을 높이는 등 자연재해를 방지하기 위해 실시하는 공사)을 성공적으로 이룩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사방기술의 산교육장으로 야외 시범전시장을 조성해 국내외 방문자들에게 산림복구기술의 우수성을 홍보하고 있다. 사방전시기념관은 전시실 3개에 자료 445점이 보관돼 전시 중이다. 이곳의 정상 지점인 묵은봉은 경치가 뛰어난데다, 최근에는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의 홍반장의 배가 있는 곳으로 유명해졌다.목은봉까지 가는 길은 산책로와 계단로 등 3개 코스가 있다.산책로 코스 중간 지점에는 실제 시공 현장을 모형으로 재현해 놓은 야외 사방 시설과 삼국시대 석실묘와 석곽묘 등을 전시해 놓은 문화유적 전시시설이 있다. 목은봉은 가족과 함께 산과 바다 경치를 내려다 보고 즐기며, 사진을 찍고 산책을 즐기기에 최고의 장소다.남구에서는 최근 장길리복합낚시공원이 인플루언서들의 각광을 받으며 새롭게 부각되는 곳이다. 이곳에는 확 트인 해안데크 산책로와 잔디공원, 부유식 낚시터 등이 인기 만점이다. 맑고 푸른 빛의 바다와 부드럽게 펼쳐진 해안 경관을 자랑하는 이 곳은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는 조류의 특성으로 전국 낚시꾼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최근 드론으로 보릿돌교에 서 있는 사람들을 촬영해 개인 SNS에 올리는 것이 유행하면서 또다른 인기를 누리고 있다.하지만 보릿돌교는 군사지역으로 허가 없이 드론 촬영은 금지돼 있기 때문에, 보릿돌교 사진 촬영을 원하는 경우 인접 전망대 4층에서 사진 촬영을 하길 권한다.시원한 바닷 바람을 맞으며 가족과 정겨운 대화를 나누기 좋은 이곳 해안데크 중간에 마련된 포토존은 특히 가족 사진 촬영에 안성맞춤이다. /정안진·황성호·피현진·장은희기자

2023-09-26

홀수 길일 맞춰 차례… 안동 풍산 류씨 종가의 ‘중양명절’

오는 29일은 ‘추석’ 명절이다. 한가위·가위·가윗날·가배일(嘉俳日)·중추절 등으로도 불리는 8월 보름 ‘추석’은 ‘설’과 함께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로도 손꼽힌다.각 가정은 추석날 아침 햇곡으로 빚은 송편과 각종 음식을 차려놓고 조상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한다. 추석 전에 산소를 찾아 미리 벌초를 해 두기도 한다. 그럼에도 현재 명절의 모습은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 핵가족화로 급속하게 쇠락했다. 여기에 2019년 발생한 코로나19는 명절 예법을 간소화하거나 폐지시켰다.우리나라에서 유교 사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안동을 비롯한 경북의 종가나 종택에서 조차 예법들이 간소화 됐다. 일부에서는 코로나19로 명절 차례에 참석하지 못하자 영상으로 절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전송하는 방법 등도 동원됐다. 우리 명절의 모습이 변한 것을 넘어 사라진 것이다. 다만 올해는 사정이 좀 다를 것으로 예상된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면서 그동안 전염병으로 고향을 찾지 못한 분들이 고향을 찾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10월 2일이 임시공휴일로 지정되면서 연휴가 6일로 늘어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친지들을 만나고 함께 차례도 지낼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추석에 “해외 여행이나 다녀 오라”는 명문 종가가 있다, 그것도 유교 사상이 가장 강하다는 안동에.추석을 그저 빨간날이 이어져 있는 날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곳은 바로 ‘하회마을’ 풍산 류씨 집안이다. 서애 류성룡 선생 15대 류창해(67) 종손은 “우리 집안에서 추석은 해외여행을 가는 등 부담 없이 쉬는 기간”이라며 “각 집안 사정에 맞춰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하회마을이 특이하게 ‘추석’에 차례를 지내지 않는 것은 ‘중양절’에 차례를 올리기 때문이다. ‘중양절’은 9월 초아흐레 중구를 말하는 것으로, 숫자에서 홀수를 양수(陽數), 짝수를 음수(陰數)로 치는데 중양(重陽)이란 홀수인 양이 겹쳤다는 뜻이다.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이 모두 중일명절(重日名節)로 길일이다. 특히, 중구라는 말은 양수인 구(九)가 겹친 날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중구는 중국 한나라 때부터 널리 행해졌다고 전한다. 숫자 ‘9’는 하늘과 임금을 상징하는 수로, 옛날 중국에서는 하늘의 제일 높은 곳을 구중천이라 일컬었으며, 땅이 아홉 개의 주로 이뤄졌다고 생각했다. 또한, 9는 황제만이 쓸 수 있는 숫자여서 일반 백성은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 중구는 임금을 상징하는 9자가 겹치는 날로서 양기가 센 날로 예로부터 경사스러운 날로 여겼다. 고려시대에 중구는 원단(설), 상원(대보름), 상사(삼짇날), 한식, 단오, 추석, 팔관, 동지와 함께 9대 속절로서 큰 명절이었고, 차례의 명절이기도 했다.‘풍류세시기(風流歲時記)’에는 ‘경북지방의 서북부지역에서는 1년 수확기가 추석 때보다는 아무래도 늦어지게 마련이어서 조령에 올리는 천신의 행제를 중양절에 가서야 올리게 되므로 이날이 곧 농공 추수감사제에 맞먹게 돼 명절답게 즐긴다고들 한다’고 기록돼 있다.사실 안동을 비롯한 경북 북부지역에서 추석날 차례를 지내기 시작한 것은 산업사회 전후로, 추석이 국가적인 공휴일이 되면서부터다. 경북 북부지역은 추석 무렵에 햅쌀이 나지 않으므로 중구를 앞두고 벼를 거두어 햅쌀로 만든 송편을 빚어 차례를 지낸 것이다. 현재도 하회마을에서는 중구 차례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이 밖에도 추석 때 햇곡식으로 차례를 드리지 못한 집에서는 중구에 차례를 다시 지냈고, 일부 산간 지방에서는 마을 제사를 올리기도 했다. 또한, 기일을 모르는 조상의 제사나 연고자 없이 떠돌다 죽었거나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의 제사는 중구에 지내기도 한다.중양절이 되면 하회마을은 온통 한복을 입은 사람들로 넘쳐난다. 거기다 마을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2010년)된데다 워낙 유명한 안동의 관광지다 보니 다양한 프로그램도 펼쳐진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과 하회마을의 중양절을 사진에 담으려는 작가들로 붐빈다, 이에 각 집안에서는 코로나19가 있기 전에는 이들의 접근을 막는 금줄을 치기도 했다.류한철 하회마을보존회 사무국장에 따르면 하회 류씨의 대종가인 양진당 차례는 늦게 시작된다. 충효당 등 아랫집에서 먼저 차례를 모신 다음, 대종가에 모여 차례를 지내야 많은 후손이 참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차(之次·맏이 이외의 자식들)들은 부모의 제사를 각 집에서 지내고, 돌아가신 분의 아버지가 속해 있던 큰집으로 가서 차례를 지낸다. 이후 점차 윗대로 올라가면서 차례를 지내다 고조부를 모시는 집에까지 이르면 그 집이 바로 종가다. 이날 양진당 안채에서는 문중 부인들이 모여 차례 음식을 차린다. 두 분의 불천지위(不遷之位·큰 공이 있어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와 종손으로부터 4대를 모시려면 열두 상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니 제수품은 간단해야 한다.원래 종가 차례상에는 많은 음식이 올라가지 않았다. 제례문화의 지침서인 ‘주자가례’에 따라 차례상에 술 한잔, 차 한잔, 과일 한 쟁반을 차리고 술도 한 번만 올리며 축문도 읽지 않는다.하회마을에서는 상마다 떡과 적, 포와 탕, 나박김치와 갖가지 햇과일과 종부가 직접 담근 술 등 모두 7가지를 올린다. 기제사 때 올리는 밥과 국, 나물은 올리지 않는다. 특이한 점은 술안주 적(炙)은 모두 날것으로 올린다는 것이다. 사당에서 모시는 다례 순서도 간단하다. 먼저 음식을 차린 뒤 집사가 신주 문을 열고 종손이 분향(焚香) 강신(降神)한 후 제주 이하 참석자가 절한다. 다시 종손이 신주마다 술을 올리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손잡이가 신주로부터 오른편에 가도록 해 시접 위에 가지런히 올린다. 이것을 삽시정저(揷匙正箸)라 한다.이대 제주 이하 참석자는 ‘조상님 덕분으로 새로운 곡식을 수확하게 됐으니 많이 잡수시라’는 뜻으로 부복해서 아홉 수저 잡수실 동안 기다려야 한다. 이후 집사가 수저를 거두고 제주 이하 참석자들이 두 번 절하는 것으로 조상을 배웅한다. 이러면 중구절 다례가 끝난다. 이렇게 간단한 다례를 두고 무축(無祝·축이 없음) 단작(單爵·술 한 잔)이라 말한다. 이 다례의 특징은 분향 강신 때 쓰는 모사(茅沙) 그릇에 있다. 일반적으로 모사는 모래를 담고 그 위에 띠(茅)를 꽂았으나, 양진당 다례에는 유기 대접에 솔잎을 담아 모사를 상징했다. 또한 술안주인 적(炙)은 모두 날것이다.류한철 국장은 “이것은 혈식군자(血食君子)라 하는데, 군자는 익히지 않은 음식을 올린다는 뜻이 담겨 있다. 하지만 날고기를 쓰는 더 구체적인 뜻은 배려와 나눔이다. 참석자들은 집으로 돌아갈 때 생선 한 토막씩 가져가는데 이는 봉송(奉送)이라는 제사 예절의 하나다.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내륙인 이곳에선 생선을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종가 제사 때 얻어가는 생선으로 탕을 끓여 온 가족이 나눠 먹으면서 오랜만에 생선 맛을 보았고, 조상의 음덕을 기렸다”고 전했다. /피현진기자 phj@kbmaeil.com

2023-09-26

긴 추석연휴 갑자기 아플 땐? 이 병원 기억하세요

28일부터 민족 고유의 명절 추석 황금연휴가 시작된다.정부가 휴일 사이에 낀 10월 2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면서, 28일부터 10월3일까지 무려 6일간의 최장 ‘추석 황금연휴’가 이어진다.누구나 오랫동안 못 봤던 가족과 친척, 친구를 만나 그간의 회포를 푸는 등 연휴기간 많은 모임과 즐거움을 기대하며 마음이 들뜨기 십상이다.하지만 한편으로는 혹시나 모를 급병 걱정이 머리를 스치면 ‘추석 연휴 때 문을 여는 병원이 있을까?’하는 염려가 일순 생기기 마련.세상만사 ‘혹시’가 사람 잡는 법.급병은 대상과 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응급상황을 대비해 반드시 연휴기간 문을 여는 병원들을 미리 확인해 둬야 한다.특히 어린이나 노약자가 있는 가정은 더더욱 그러하다.게다가 반드시 병원 질환별 맞춤 전문 치료도 감안해야 한다.의료 공백 없는 안전한 추석을 위해 연휴 기간에도 24시간 문을 여는 포항 지역의 대표 종합병원 3곳을 소개한다. □ 에스포항병원골든타임 내 치료 가능한 ‘뇌혈관 전문병원’최신검사장비 보유, 진단~수술 30분 최소화뇌혈관 질환은 흔하면서도 중요한 사망 원인이지만, 골든타임 안에 치료가 이뤄지면 건강 회복도 가능하다.추석 명절, 응급 뇌혈관 환자들의 신속한 진료를 위해 지역 유일의 ‘뇌혈관전문병원’ 에스포항병원 응급실이 운영된다.에스포항은 1기 신경외과 전문병원을 시작으로 2·3·4기 뇌혈관 전문병원까지 4회 연속 전문병원으로 지정될 만큼, 국내 대학병원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경북지역의 유일한 전문병원이다.신경외과 전문의 14명이 근무 중이며, 지난해 뇌수술을 917차례나 실시했다.이 가운데 뇌동맥류 클립 수술은 84차례, 뇌동맥류 코일 수술은 235차례, 파열돼 뇌출혈을 동반한 뇌동맥류 환자 69차례, 미세 혈관을 우회 연결하는 뇌혈관문합술의 경우 15차례를 진행했다.특히 응급 뇌혈관 재개통술의 경우 110차례나 된다.이같은 전문성으로 인해 에스포항 응급실에 뇌혈관 환자(상병코드 I60∼I64환자)가 내원할 경우 수술이 불가능해 타 병원에 가거나 골든타임을 놓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실제 지난해 응급실을 내원한 뇌혈관 환자 773명 중, 단 3명만이 권고 전원을 갈 만큼 그 치료 성과도 뛰어나다.이는 최신 장비를 통해 Acute stroke MRI 검사까지 소요되는 시간을 최소화하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춰, 뇌혈관 환자들의 생명을 지키는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에스포항병원 관계자는 “응급 환자의 골든타임 내 신경외과와 신경과 의료진이 직접 진단하고 적시 치료하기 위해 24시간 상주하고 있다”면서 “진단부터 수술에 이르는 시간을, 빠르면 30분 내로 최소화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 좋은선린병원포항·영덕·울진·울릉 응급환자 24시간 대응골절·교통사고 등 정형외과적 치료도 가능좋은선린병원은 오랫동안 동해안 지역 응급의료에 중추적인 역할을 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각종 사고와 질병에 대해 신속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연휴기간 포항과 영덕, 울진, 울릉 지역 응급환자에 대해 24시간 야간과 휴일 진료와 입원이 가능하다.정형외과적인(골절 및 교통사고) 응급치료 및 입원도 가능하다.또 북구 유일의 급성기 암 전문 통합병동도 운영 중에 있다.암센터 운영으로 암 진단을 받고 수술 후 관리 중인 환자들의 항암 및 방사선 치료 부작용에 대해서도 이번 연휴기간 입원 치료가 가능하다.물론 급하게 항암 치료나 면역치료가 필요한 환자들도 입원할 수 있다.간호간병통합병동으로 간호전문인력이 케어하는 병실과 암 병동 전용식당도 구비돼 있다.지속적인 항암이나 방사선 치료로 지친 환자들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피로와 통증완화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힐링 프로그램도 진행한다.특히 경북 유일의 보건복지부 지정 코로나 거점 전담병원인 좋은 선린병원은, 코로나 격리병동과 응급실을 운영 중이다.5년 연속 폐렴 적정성 평가 1위, 만성폐쇄성 질환(COPD) 적정성 평가 1위로 지정돼 있어 호흡기와 고열 환자 집중관리 및 응급진료도 효율적이다.좋은선린병원 관계자는 “전국 100대 명의로 선정된 실력 있는 정형외가 의료진이 상담부터 진료, 수술, 수술 후 관리까지 책임 진료를 진행하는 중”이라며 “포항시민의 건강 지킴이로서 의료 질을 중시하는 병원의 위상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 포항성모병원복지부 지정 ‘경북동해안 권역응급의료센터’소아청소년과 전문의 365일 진료체계 구축포항성모병원 응급의료센터는 지난 2017년 7월 보건복지부로부터 ‘경북동해안 권역응급의료센터’로 지정받았다.포항을 비롯한 경주와 영덕, 울진, 울릉 지역 중증응급환자의 최종치료와 권역 기반 응급의료체계 강화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특히 응급의학과 전문의 11명과 응급실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4명, 내과 전문의 3명 등이 상주 근무 중이고, 각 진료과 전문의가 이번 연휴에도 당직 근무를 한다.포항 지역 종합병원 중 소아청소년과 전문 진료의 경우 24시간 야간과 휴일의 진료와 입원이 포항성모병원에만 가능하다.포항성모병원은 응급실과 소아응급환자에 대해 진료·격리구역을 구분하고 있으며 병상도 운영 중이다.응급전용시설의 경우 수술실과 중환자실, 입원실을 준비해 응급실 포화에 항상 대비하고 있다.포항성모병원은 응급전용 수술실을 지정해 운용 중이고 응급환자진료구역, 중증응급환자진료구역, 음압격리실병상, 일반격리실병상, 소아응급환자진료구역 구분해 운영하고 있다.특히 응급전용 중환자실(EICU)은 20병상을, 응급전용 입원실(병동)은 30병상 운영 중이다.환자 포화 시 병상 확대 운용이 가능한 시스템이다.포항성모병원 관계자는 “권역 응급의료센터로서 포항뿐만 아니라 경북 동해안 중증응급환자를 위해 신속·정확한 응급 진료 차원의 의료진과 장비, 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며 “명절 연휴에 발생할 응급상황을 대비, 비상진료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다”고 설명했다./이시라기자 sira115@kbmaeil.com

2023-09-26

한국문화 속 조명되는 김유신의 엇갈리는 역사적 평가

무능한 조선의 왕 선조에게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라며 필마단기(匹馬單騎)로 끝까지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임진왜란의 명장 이순신(1545~1598).오늘날로 말하자면 해군 작전사령관격인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활약하며 보여준 이순신의 지략과 기개는 5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2023년까지 여러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그리고, ‘장군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또 한 인물이 있다. 이순신보다 1천 년쯤 앞 시대를 살다간 김유신(595~673)이다. 이 두 ‘장군’은 한국에서라면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이름을 알고, 대략의 업적을 이해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시간을 뛰어넘은 ‘빅 스타들’이다.김유신이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노력으로 인격과 품성을 만들어간 것인지는 대구한의대 천인석 교수의 논문 ‘김유신의 생애와 사상’의 서두에 잘 설명돼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김유신의 탄생은 가야 왕족 출신 진골 귀족과 신라 왕족과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출생설화부터 신이(神異)한 능력을 지닌 그는 어려서부터 지식과 교양을 갖춘 부모로부터 훌륭한 교육 기회가 주어졌고, 성장하면서 문자 교육을 비롯한 경전 교육, 그리고 당시 유행하던 다양한 학술과 무예를 배웠다. 15세에 화랑이 되고, 18세에 국선(國仙·화랑들의 우두머리)이 돼 당대 최고의 화랑으로 교육받았다. 그의 가계에서 전수된 충효의 윤리와 합리적 사고, 화랑으로서 ‘세속오계’로 표현되는 신념, 그리고 가문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끊임없는 수양과 노력, 왕도정치의 지향이 그의 사상 형성의 기본이 됐다.” ◆역사의 평가가 엇갈리는 ‘문제적 인물’로서의 김유신인간의 내부엔 선과 악, 긍정적 면과 부정적 면이 공존한다. 누구라도 그렇다. 이 명제에선 김유신도 자유로울 수 없다. 수많은 고문헌에선 ‘충성스럽고 용맹한 신하이자 빼어난 장수’로 김유신을 표현하지만, 이와는 전혀 다른 견해도 분명 존재한다.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며, 근대 한국 역사학계의 거목으로 평가받는 단재 신채호(1880~1936)는 김유신을 지목해 “민족의 배신자”로 냉혹하게 평가 절하했다.이와 관련된 논문을 읽어보자. 대구가톨릭대 임선애의 ‘한국문화와 김유신의 재현양상’ 중 일부를 아래 인용한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한 위대한 인물이지만, 역사학자 신채호에 이르면 김유신은 민족(고구려와 백제)을 배반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중략) 역사 기록물에 의하면 김유신은 영웅과 모략가라는 배치되는 단어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 연원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기록과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신채호의 저서)’의 주장이 대조를 이루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전자의 기록에서 보면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한 위대한 인물이지만, 후자의 주장에 이르면 김유신은 민족을 배반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김유신에 대한 양극화 현상은 이후 지금까지 한국문화 속에 조명되는 김유신의 재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후략)”위와 같은 역사학계의 평가만이 아니다. 김유신과 그 가족들의 ‘혼인 관계도’를 그려보면 지금의 상식으론 이해가 불가능한 걸 넘어 외마디 비명이 나올 정도다.잘 알려져 있듯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는 김춘추(무열왕)와 결혼해 후에 왕비(문명왕후)가 된다. 그런데, ‘화랑세기’에 의하면 김유신의 또 다른 여동생 보희도 무열왕의 아내였다고 한다.고대 제국의 왕이 여러 명의 아내를 두는 건 특별히 손가락질 받을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같은 친자매를 동시에 데리고 산다는 건 유례가 드문 경우. 이 혼맥 형성의 배후엔 김유신의 권력욕이 있었다는 게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 ◆김유신 장군이 여동생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여기서 놀라기엔 아직 이르다. 김유신은 예순 살이 되던 해 두 번째 아내를 맞는다. 그런데 그 여성이 누구인지 알고 있나? 바로 자신의 여동생 문명왕후의 딸이다. 회갑 노인이 어린 조카와 결혼한 것이다.‘삼국사기’ 등에 지소부인(智炤夫人)이라 기록된 이 여성은 평소 “외숙부”라 불렀던 사람의 아내로 살게 된다. 이 이야기를 들은 기자의 후배 하나는 “사람 족보가 왜 그래요?”라며 정색했다.이는 1천~2천 년 전 신라였으니 가능한 이야기다. 근친간의 혼인은 그 사례가 김유신 가문만이 아닌 신라 왕족들 사이에서도 흔했다고 한다. 왜였을까?수원과학대 교양학부 류선무 교수의 논문 ‘신라시대의 성문화 연구’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위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읽힌다.“신라는 족내혼(族內婚·같은 씨족, 종족, 계급 안에서 배우자를 찾는 혼인)을 철저히 지켰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정치권력과 부귀영화를 자기 성씨(姓氏)로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의 결과였다. 한 번 왕이 되면 가능한 한 자기 집안 사람과 결혼하게 했다. 신라 초기에 박씨가 지배하는 동안 여덟 왕이 왕위에 올랐는데,그 중 여섯 왕이 박씨 왕비를 맞이했으며,왕권이 석씨(昔氏)에게 돌아가자 석씨 또한 자기 씨족만을 왕비로 맞이했다. 4세기에 김씨가 왕위에 오른 후 초기에는 과거의 왕족이었던 박 씨나 석씨를 왕비로 맞기도 했으나 왕권이 강화될수록 김씨만을 왕비로 맞이했다. 왕족 김씨는 상류사회 계층을 형성해 김씨 사이에서 출생한 자손을 성골(聖骨·골품제도의 최상위 계급)이라 하여 신성시하고, 이 혈통 내에서 혼인을 하도록 권장했다. 신라의 혼인은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부계외 모계,적서(嫡庶·적자와 서자)의 구별은 분명했지만, 여성의 지위나 인권은 남자와 거의 대등하지 않았다 한다.”◆자신의 아들을 처형하라고 문무왕에게 요구한 냉혹한 측면도2023년 현대인의 상식으론 이해가 어려운 혼인을 진행시키고, 스스로도 행한 김유신에게선 덕장(德將)이나 지혜로운 관료의 모습이 아닌 차갑고 냉정한 모습도 확인된다.원술(元述)은 김유신의 아들이다. 20세기 한국의 일부 권력자들은 전쟁이 없는 시대임에도 자신의 돈과 힘으로 아들을 병역의무로부터 해방시켜주곤 했다.신라의 국무총리이자 국방장관이자 합동참모의장 역할까지 동시에 수행했던 김유신은 이들과는 달랐다. 자식인 원술을 가장 위험한 전쟁터에서 싸우게 했다.거기까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고위층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성)라고 볼 수 있다. 비판받을 일이 전혀 아니다. 근현대 영국의 왕자들과 귀족청년들 또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전투에 앞장서기도 했으니까.헌데, 문제는 원술이 당나라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살아서 돌아왔을 때 발생한다.김유신은 아들 원술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화랑들이 금과옥조로 삼는 ‘세속오계’ 중 ‘임전무퇴(臨戰無退)’를 저버린 것이라 판단해서였다.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김유신은 자신의 조카이자 당시 신라의 통치자였던 문무왕에게 “못난 아들 원술이 왕과 우리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으니 목을 베어 죽임이 마땅하다”고 권유한다.대의명분(大義名分) 앞에서는 혈족과의 인연도 주저 없이 단숨에 끊어버리는 냉혈한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하지만, 문무왕은 그럴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김유신은 문무왕의 외숙부. 그러니, 원술은 문무왕의 사촌인 것이다. 일부러 패한 것도 아니고, 죽을힘을 다해 싸우다가 안타깝게 진 장수를, 그것도 친척을 죽이는 건 왕으로서도 못할 짓이었기에.이 이야기는 서울예술대학 설립자 유치진(1905~1974)의 희곡 ‘원술랑’에 구체적으로 담겼다. ‘나무위키’는 관련 내용을 아래와 같이 부연하고 있다.“‘원술랑’ 2막의 내용은 신라군이 당나라군의 계책에 속아 궤멸 수준으로 참패한 뒤 원술이 아버지 김유신 앞에 나타났고, 김유신은 ‘전우들이 죽어가는데 어찌 비겁하게 혼자 살아 돌아왔느냐’며 꾸짖자 원술은 부끄러운 마음에 자결하려 하다가 사신이 ‘계급을 강등시켜 나라 밖으로 내쫓으라’는 왕의 명령서를 들고 오자 물러가는 것으로 끝난다.”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9-26

하늘과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마음의 안식처

자연과 인간의 손길이 어우러져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안식처.영일만의 물결과 짙은 녹음을 만끽할 수 있는물의 공원은 산책자들이 즐겨 찾는 곳.충만한 바다 위에 펼쳐지는 윤슬과춤을 추는 나무들의 행렬이 있다. 사시사철 자연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환호공원에는하늘로, 우주로 향하는 스페이스 워크가 있다.그 길을 따라 한발 한발 걷다 보면아득히 저 먼 곳에서누군가의 음성이 들릴 것만 같다.영일만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양지바른 곳에손춘익 문학비가 있다.작가의 얼이 새겨진 이곳에서그의 동화가 꿈꿨던 세계를 생각해본다. 환호공원 언덕에서 바라보는 영일만의 해와 달은일월(日月) 포항의 의미를 새삼 음미하게 해준다. 광활한 하늘 아래 푸른 영일만과 초록 산이잊을 수 없는 감동을 선사하는 곳.낯선 설렘과 감동이 마음을 채워주는 환호공원.- 글 : 김재건(서울대 국문과 박사 수료)최수정197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포항에서 성장했다. 계명대 서양화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6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포항지부, 현상회, 계명회 등의 회원이며 포항에서 갤러리m을 운영하고 있다. ‘호미곶 이야기’, ‘비밀이 사는 아파트’, ‘꿈꾸는 복치’ 등의 책에 그림을 그렸다.

2023-09-25

끊임없는 혁신 추구… 인도네시아에서도 이어지다

인도네시아가 하나의 ‘테스트베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인도네시아 시장의 잠재력이 높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전기차 허브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는 전기차 허브가 되기 위한 자원, 노동력, 시장성은 풍부하지만 기술력은 다소 부족하다. 자력으로 전기차 허브로 거듭나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에 전기차와 관련된 많은 기업들에 러브콜을 보내고, 투자 유치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배터리부터 완성차까지, 전기차 분야에 일찌감치 뛰어들어서 뛰어난 역량을 가진 기업들이 많다. 우리나라처럼 전기차와 관련된 밸류체인 전체를 갖추고 있는 나라가 드물다. 한국을 넘어 글로벌 진출을 위해서는 해외 한 거점에서 꽃을 피워야 한다. 인도네시아가 그런 꽃을 피울 거점이자 기회의 땅이다.글 싣는 순서1. 포항 영일만의 기적, 인도네시아에 닿다2. 이차전지 날개 단 인도네시아, 포항시 기회 찾으려면3. 인도네시아와 포항 기업 간의 교류 현 주소4. K기업문화, 인도네시아에 퍼진 한국기업 저력5. 탄소중립 시대, 인도네시아에서는 어떻게 ◇ 제2의 내수시장, 아세안포스코는 아세안 시장을 적극적으로 공략한다. 이미 저성장 국면에 돌입한지 오래된 내수 시장의 부진을 타개하기 위한 것이다. 최근 미·중 무역전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코로나19 등으로 아세안 국가의 가치는 더욱 더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중국, 일본 등 주변국은 현지 투자를 강화하고 있다. 중국만해도 일대일로 정책을 바탕으로 자동차, 철강업계, 니켈 등 다양한 분야에서 MA와 합작투자를 가속화하고 있다. 공급망 다변화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풍부한 자원, 2억7천만명의 인구에서 비롯되는 거대한 시장 규모로 인도네시아에 전세계의 투자가 몰리고 있다. 2022년 인도네시아 외국인투자(FDI) 규모는 456억달러로 2021년보다 44% 증가했다. 투자가 활발히 이뤄지고, 경제가 급격히 성장한다는 것은 철강업체에게 큰 기회다. 산업·인프라 투자에는 반드시 철강 수요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아세안 6개국은 2019년부터 2025년까지 연평균 3.4% 가량 조강 수요가 성장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이미 철강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한 국가다. 포스코는 이러한 적기를 놓치지 않고 있다.◇ 인도네시아 신수도 이전, 성장의 기회지난해 포스코는 행정수도를 자카르타에서 누산타라로 옮기는 인도네시아 신수도 이전 사업에 참여하기 위한 MOU를 인도네시아 정부와 체결했다. 인도네시아 신수도 사업은 오는 2045년까지 보르네오섬에 350억달러(50조원)을 투입해 서울 면적 4배 넓이(2천560㎢)의 스마트 시티를 건설하는 대규모 사업이다. 건설 부문을 비롯해 신수도 사업 건설에 필요한 철강재는 약 900만t 규모다. 포스코로서는 엄청난 철강 수요가 이미 확보된 셈이다. 전기차 허브로 도약하겠다는 인도네시아 정부의 비전 또한 크라카타우 포스코에게 또다른 기회다. 2기 건설을 통해 조강 생산 능력은 물론, 냉연, 도금 생산 라인을 확보하게 되면 크라카타우 포스코는 동남아시아 유일의 고급강 생산 가능 일관제철소로 거듭나게 된다. 고급강 생산 능력까지 갖추게 되면 크라카타우 포스코는 인도네시아 내 전기차 생산 기지에 전기차 강판도 공급할 수 있게 된다. 인도네시아 정부 입장에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전기차 생산에 필요한 소재의 안정적인 공급이 가능해지면 완성차 업계의 투자를 이끄는 것도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 인도네시아의 중심에서 K-기업문화를 알리다포스코는 인도네시아에서의 사업을 ‘장기전’으로 보고 있다. 저임금 신흥국의 생산기지로서의 이점만 바라보는 것이 아닌, 미래의 유망 시장이자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포스코의 아성을 더 공고히 하기 위한 전략적인 파트너로 인도네시아를 바라보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에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고, 크라카타우 포스코를 좋은 일터로 만들어나가고자 하는 노력도 그런 시각에서 시작된 것이다. 특히, 최근 포스코는 동반성장을 바탕으로 인도네시아에 철강 생태계를 조성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IBK 인도네시아와 함께 조성한 ‘철강생태계 상생 펀드’가 바로 그것이다. 포스코는 이미 한국에서 ‘철강ESG상생펀드’를 조성해 중견·중소기업에 저리로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철강생태계 상생펀드도 유사하다. 크라카타우 포스코의 협력사·공급사·고객사에 시중금리보다 2%p 낮은 금리로 총 1천만불까지 무담보 대출을 지원한다. 담보대출이 일반적인 인도네시아에서 무담보 저리 대출인 철강생태계상생 펀드는 중소 협력사·공급사·고객사 유동성 확보에 큰 힘이 되고 있다. 인재 육성에도 큰 힘을 쏟고 있다.지난달 29일 포스코는 인도네시아 산업부 PIDI 센터에서 인도네시아 산업부 산업인력개발청과 철강산업 현장인력 육성 협약을 맺었다. 인도네시아 산업부 산하의 기술대학교와 특성화 고등학교에 포스코 기업 문화·한국어 과정 등이 포함된 철강산업전문과정을 신설, 3년간 이론 교육과 현장실습 후 우수 졸업생을 크라카타우 포스코 제철소에 우선 채용하는 것이다. 크라카타우 포스코는 맞춤형 교육과정 개발 및 현장 실습을 지원한다. 포스코는 크라카타우 포스코에서 경험을 쌓은 우수 인재를 한국으로 보내 한국 철강 산업계에 다가오고 있는 인력난을 해소하는 것 또한 검토하고 있다.포스코는 인도네시아 현지 근무 환경도 가족 친화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 7월 찔레곤 크라카타우 포스코 제철소 인근에 직장내 어린이집과 유사한 ‘꿈꾸는 어린이집’을 개원했다. 부족한 보육시설로 보모를 고용해야하는 직원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보육시설을 조성한 것이다. 어린이집은 특히 육아 부담으로 장기 근속이 어려웠던 여성 직원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전문 육아교육기관에 위탁해 양질의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보육환경도 우수하기 때문이다.제선부 원료소결공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 직원은 “인도네시아에는 직장 내 어린이집이라는 게 흔치 않고, 가정 보육을 하는 게 일반적이라 아이가 있는 어머니들은 회사를 다니는 게 쉽지 않다”며 “믿을 만한 어린이집에 안심하고 아이를 맡길 수 있는 건 큰 장점” 이라고 설명했다.“탄소중립 위한 그린스틸 생산체계 구축” 포스코 인니 김광무 법인장 인터뷰 포스코 인니 김광무 법인장날씨부터 문화까지 모든 게 다른 타국에서 일을 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다. 특히 자카르타와도 거리가 먼 찔레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는 경우도 많다. 쉽지 않은 타국살이를 감수하고, 산업 현장을 지키며 인도네시아, 나아가 아세안에 한국 철강의 위용을 알리는 이들이 있다.지난달 29일 자카르타에 위치한 포스코 인도네시아 법인 사무실에서 김광무 법인장사진을 만나 인도네시아에서의 계획에 대해 들어 봤다.- 인도네시아라는 국가를 포스코에서 어떻게 활용하고 있나.△포스코그룹은 배터리소재부터 전기강판, 자동차 강판까지 전기차 산업에서 필수적인 소재들을 두루 다루고 있다. 우리나라가 가진, 포스코그룹이 가진 장점을 인도네시아와 협력을 통해서 시장을 넓혀 한국에서 갖춘 역량이 글로벌로 나갈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포스코그룹의 전기차 밸류체인의 가치가 글로벌로 실현될 수 있는 좋은 시험장이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크라카타우 포스코가 가동 초반에 우여곡절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떻게 극복했고, 앞으로 어떻게 실적을 개선해 나갈 계획인지.△해외에 일관제철소를 건설하는 것 자체가 ‘가보지 않은 길’이었기에 포스코에겐 큰 도전이었다.하지만 포스코는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하고, 그 과정에서 위기를 극복하면서 성장하는 기업이다. 포스코의 탄생부터가 ‘불가능을 향한 도전’ 아니었는가. 해외에서 처음 고로를 가동해 보는 것이었고, 생각보다 시장 확보도 어려워서 힘든 시간이 분명히 있었다. 특히 반제품인 슬라브와 후판 두가지 제품밖에 팔 수 없었던, 제품 포트폴리오의 한계가 있었다. 원가 절감, 내수 판매, 수익성 개선을 위해 노력을 정말 많이 했고, 파트너사와 협의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지난해 파트너사와 협의 끝에 열연공장 현물 출자를 받아서 열연공장 가동을 시작하면서, 수익성이 많이 안정화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10년간 쌓은 경쟁력이 이제 정말 빛을 발하지 않을까 싶다. 내부적으로 조금 더 좋은 경영환경을 만들기 위해 2기 투자를 검토하고 있다. 아세안 전체로 보면 철강 공급이 약 6천만 톤 정도 부족한 상황이다. 이 곳에서 메인 플레이어가 되어서 아세안을 내수 시장처럼 키워갈 것이다.- 추가 설비투자 계획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2016년에 인도네시아 조코위 대통령과 함께 ‘찔레곤 1천만 톤 철강 클러스터’를 만들기로 선언을 했다. 이를 위해 지난해 인도네시아 정부와 파트너사인 크라카타우스틸과 함께 40억달러를 투입해 2기 투자를 진행했다. 자동차강판을 포함해 600만 톤의 철강을 생산하는 3자 MOU를 맺었다. 아직은 밑그림 단계이지만, 궁극적으로는 3기까지 증설해서 탄소중립을 기반으로한 1천만 톤 체제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2기까지는 기존 포스코가 강점을 가진 고로 기반의 제철소를 만들었다면, 3기부터는 포스코의 수소환원제철기술인 하이렉스(HyREX)를 기반으로 한 제철소를 만들고자 한다. 인도네시아 같은 경우 탄소 포집 및 활용·저장(CCUS) 기술을 실현시키기 좋은 입지를 가지고 있다. 2기까지는 고로 체제를 유지하되 CCUS 기술을 바탕으로 탄소 배출을 상쇄하고, 3기부터는 수소환원제철기술을 도입해서 그린스틸 생산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목표이다.- 인도네시아에서 포스코가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끊임없는 혁신’ 이라고 생각한다. 철강이 무너지면 철강을 사용하는 우리나라의 관련 산업들도 휘청인다. 그런 사명감에서 포스코는 언제나 끊임없이 혁신을 추구해왔다. 이런 포스코만의 ‘혁신 문화’가 인도네시아에서도 이어지고 있고, 현지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한 번 건설한 설비에 의존해 조업을 하는 것이 아닌, 일상 업무에서 설비 혁신 활동을 지속해 안전, 환경을 개선하는 QSS 혁신활동을 통해 내부 경쟁력을 계속해서 높이고 있다. QSS 혁신활동을 현지 고객사, 파트너사에도 전수해 포스코만의 K-기업문화를 전파하고 있다. 혁신 활동이 인도네시아 현지에도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최근 추진하고 있는 부산물 자원화 사업이다. 고로, 제강공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인 ‘슬래그’는 시멘트, 콘크리트의 원료, 비료로도 쓰인다. 시멘트를 제조할 때 탄소가 발생하는데, 슬래그를 재활용해서 쓰면 탄소 배출을 저감하는 장점이 있다. 슬래그를 활용한 비료의 경우 규산질이 필요해 산성화된 토양의 토질을 개선하는 효과가 있다. 이러한 비료 또한 산성화 된 땅이 많은 인도네시아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슬래그를 인도네시아 현지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다양하게 활용하기 위해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다. 철강생산도 중요하지만, 이런 철강생산에 따른 부수적인 부분까지 세심하게 고민하고, 혁신하는 태도가 크라카타우 포스코가 가진 강점이라고 생각한다./인도네시아에서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3-09-24

“곧 아흔이지만 도전하고 싶은 생각은 여전해”

곧 아흔을 맞이하지만 한경식 선생의 기억력은 스무 살 청년 못지않았다. 포항제철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던 때를 정확하게 이야기해줬고, 당시 급박했거나 감동적이던 상황까지 자세한 설명을 이어갔다. 반세기 전에 관계 맺었던 사람들 이름도 잊지 않고 있었다. 전남드래곤즈 사장을 끝으로 일흔 살이 가까워서야 조직 생활을 끝내고 자유로운 생활인으로 살아가게 된 한경식 선생. 그의 노년을 즐겁게 해준 취미는 그림 그리기였다. 주위에서는 “아마추어 수준을 뛰어넘는 솜씨”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한 선생의 70대 이후 삶은 어떠했을까? 그 궁금증과 더불어 포항제철 후배들, 나아가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어떤 격려와 당부를 전하고 싶은지 물었다. 홍성식(이하 홍) : 사장을 맡았던 축구단 전남드래곤즈가 만들어진 과정이 궁금합니다.한경식(이하 한) : 먼저 자문단을 구성해 광양에 있는 포항제철 협력업체들의 도움을 받았어. 협력업체가 직원들에게 경기 입장 티켓을 사주면, 그 회사 직원들이 축구장에 가서 응원도 하고 스트레스를 풀며 여가를 보낼 수 있지 않겠어. 게다가 전남드래곤즈는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축구팀이니, 지역민들에게 ‘나도 우리 지역의 축구팀과 함께한다’는 자부심이 생겼지.1994년에 창단된 전남드래곤즈는 전라남도를 연고로 하는 K리그 소속의 프로축구단이다. 김태영, 김도근, 마시엘, 김남일 등 빼어난 수비수들을 배출한 구단이며, 체계적인 유소년 시스템이 구축된 구단이다. 같은 모기업을 가진 포항 스틸러스와 함께 선진 축구 시스템을 일찌감치 도입한 구단으로 평가받는다.홍 : 축구단 운영 역시 마냥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한 : 전남드래곤즈가 너무 잘해서 곤란하기도 했어.(웃음) 창단 초기에는 축구계 관계자 대부분이 신생 팀이니 하면 얼마나 잘하겠냐고 생각했는데, 예상 밖의 뛰어난 성적을 거둔 거야. 게다가 포항제철의 최초 출발지이자 근거지인 포항의 축구팀(스틸러스)에게도 이길 때가 적지 않았으니 “한 회사가 축구팀 두 개를 운영하며 승부조작을 한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까지 떠돌았지. 그것 때문에 나와 허정무 감독이 마음고생을 했어.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다 웃을 수 있는 추억이지.홍 : 30대부터 오랜 인연을 이어온 포항제철을 떠난 건 언제인지요?한 : 일흔 살이 가까워서였지. 1994년에 이어 1999년부터 2003년까지 두 번째로 전남드래곤즈 사장을 한 이후야. 그때 든 생각은 ‘이제 후배들에게 모든 걸 물려주고 나는 남은 인생에서 해보지 못한 다른 걸 시도해야겠다’는 것이었지. 홍 : 그렇다면 그림은 은퇴 후에 그리기 시작했나요?한 : 그림을 그리는 건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좋아했어. 당시는 “그림을 그려서는 밥을 먹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있던 시절이잖아. 예술가 대접이 지금과는 전혀 달랐지. 사실은 포항에서 광양으로 오면서부터 조금씩 시간을 내 붓을 잡기 시작했어. 젊은 시절엔 사진에도 관심이 있었지. 포항제철 역사에 관련된 사진을 많이 찍었어. 사진대회에 출품해서 입상한 경력도 있고.홍 : 주로 무엇을 그리십니까?한 : 광양으로 온 후에 ‘순천 미술사의 산증인’으로 불리는 김덕기 화백을 만났어. 그림을 배우고 싶다는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줘 지도를 받게 되었지. 휴일이면 캔버스를 들고 야외로 나가 머리도 식히면서 화우(畫友)들과 그림을 그렸어. 수채화를 그리다가 본격적으로 유화를 시작하게 되었지. 그러면서 화가들이 참여한 단체에도 가입하고 전시회도 열게 되었어. 내 그림의 주된 소재는 세상 풍경이야. 삶의 체험을 풍경 속에 녹여내고 싶어. 그러고 보니 벌써 유화를 시작한 지 30년이 되었네.홍 : 적지 않은 연세인데도 새로 시작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시는군요.한 : 곧 아흔이지만 도전하고 싶은 생각은 여전해.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람은 죽을 때까지 뭔가를 해야 하지 않겠어? 젊은 세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나는 그들에게 “자기 앞만 보며 달려가지 말고, 소중한 걸 놓치는 게 없는지 주위를 살펴보라”고 말해주고 싶어.홍 : 말이 나온 김에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조언이 있습니까?한 : 어떤 분야에서 일하건 자신의 몫으로 맡겨진 건 건성으로 넘기지 말고 끈질기게 파고들어 끝을 봐야지.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꾸려면 하고자 하는 일을 연구하고 집중하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나 역시 아흔이 가까우니 그걸 알게 되었어.홍 : 포항제철 후배들에게도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 텐데요.한 : 신문과 방송을 통해 포항제철의 상황을 보고 있지. 요즘 젊은 친구들은 나와는 여러 면에서 생각하는 게 다를 거야. 다만 무언가를 이루려면 그에 상응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건 시대를 뛰어넘는 진리 아니겠어. 2022년 태풍 힌남노가 포항제철을 덮쳤을 때 걱정을 많이 했지. 그런데 회사 구성원들이 힘과 지혜를 모아 고난을 극복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어. 이후에 모두의 노력으로 재난을 잘 극복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마음속으로 박수를 쳤지. ‘아직 포항제철의 전통은 살아 있구나’라고 칭찬해주고 싶었어.2022년 9월 6일 포항 일대를 덮친 태풍 힌남노는 여의도 면적의 세 배에 달하는 포항제철소 생산 라인을 완전히 침수시켰다. 하지만 포항제철은 135일 만에 공장을 복구했고, 그 과정을 ‘함께 만든 기적,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는 책에 담았다.홍 : 포항제철의 전통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합니까?한 : 그게 어떤 일이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남들이 말해도 포항제철 직원들은 해내곤 했어. 밤을 새우더라도 공사 기간을 맞추고, 기존의 해결 방식이 없다면 어떻게든 새로운 해결 방법을 기어코 찾아냈지. 그게 포항제철의 전통이 아닐까. 어떤 큰 고난도 이겨낼 힘이 바로 거기서 나오지.홍 : 포항제철이 다른 기업과 비교해 가진 장점은 뭘까요?한 : 어떤 사람들은 포항제철을 ‘주인 없는 회사’라고 말하는데, 실상 포항제철은 국민이 주인인 기업이라고 봐야 해. 그러니까 구성원들이 책임감 있는 자세로 일해야지. 내가 임원으로 있을 때도 후배들에게 항상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어.홍 :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었다고 생각하는 건 무엇인지요?한 : 젊은 시절에 국가 기간산업의 기틀을 만드는 데 작은 힘이나마 보탰다는 거야. 어떤 어려운 일을 맡아도 절망하지 않았지. 고생이 클수록 고생 이후의 보람 또한 커진다는 걸 포항제철에서 일하면서 깨달았어. 돌아보면 그때가 내 삶의 황금기였지. 나와 동료들이 허허벌판에 세계에서 손꼽는 철강공장을 만드는 초석을 놓았어. 국가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개인이 힘을 보탤 수 있다는 건 큰 보람이 아니겠어? 그렇기에 부끄럽거나 후회되지 않는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지.홍 : 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씀이 있습니까?한 : 포항제철 성공의 핵심은 공사 기간 단축이었어. 공기 단축은 건설 원가를 줄이는 것은 물론, 불황일 때 제품을 만들어 호황일 때 판매할 수 있게 해주니까. 다만 그 과정에서 부실공사가 있어서는 절대 안 되겠지. 21세기인 지금도 다를 게 없어. 철저한 사전 준비를 통해 부실이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빈틈없이 확인하고 감독해야겠지. 이는 개별 회사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 적용할 수 있는 원칙이 아닐까 싶어.한경식1935년 전남 나주 영산포읍 오량리에서 태어났다. 광주농업학교를 거쳐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갔으나 4학년 때 중퇴했다. 이후 전남대 전기공학과에서 공부했다.대학을 마친 후 1961년 대한석탄공사에 입사해 장성광업소 전기계장으로 일하다가 1968년 포항제철로 회사를 옮긴다. 제2고로 건설과장, 제1고로 개수추진부장, 제선공사부장, 건설본부장(상무이사) 등을 거치며 포항제철의 초기 역사를 눈앞에서 지켜보았다. 1990년대엔 포스코 계열사라고 할 수 있는 승주골프장 대표이사를 지냈고, 축구팀 전남드래곤즈의 창단 작업을 주도해 사장을 맡았다.수준급의 솜씨를 지닌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하다. 홍익대 미술대학원 현대미술 최고위과정을 수료했으며, 여러 차례 개인전과 회원전 등을 열었다. 한국 제철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1981)과 산업포장(1988)을 받았고, 프로축구대상 특별상(1995)을 수상했다.끝대담·정리 : 홍성식(본지 기자)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그림 제공 : 한경식

2023-09-20

평생교육·안심 행복도시로, 촘촘한 복지안전망 구축

살기 좋은 도시, 살고 싶은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교육과 사회보장은 필수적인 요소로 경산은 오래전부터 교육에 대한 굳건한 인프라와 함께 사는 사회를 추구해왔다.지역의 교육 흐름과 진행되고 있는 사회복지와 그 규모를 살펴본다. □ 자랑스러운 교육인프라경산의 교육은 유아에서부터 노년의 평생교육까지 모든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가장 내세울 수 있는 자랑거리다.경산지역의 교육은 고려 시대의 향교(경산·자인향교)와 조선 시대의 향교(하양향교)·서원·서당 등으로 교육의 기틀을 다졌고 근대의 신식 학교, 현대의 초중고와 대학 등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발전을 시켜왔다. 특히 인구가 꾸준하게 증가하며 교육기관인 학교도 꾸준하게 지역에 설립돼 현재에는 57개의 유치원, 31개의 초등학교, 16개교의 중학교, 지역 인재의 산실인 경산과학고 등 13개 고등학교, 1개의 특수학교가 있다. 특색 있는 학과로 지역을 대표하고 있는 영남대·대구대·대구가톨릭대·대구한의대·경일대 등 13개의 대학교, 평생학습 기관 등에서 활기찬 교육이 이루어지며 어느 한 쪽에만 치우친 교육이 아니라 다양한 방면의 교육이 이루어지는 특색도 갖고 있다.경산 교육의 시작점인 향교의 역사는 경산향교가 1390년(공양왕 2) 지금의 옥곡동에 명륜당을 세워 강학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자인향교는 공민왕 연간에 처음 설립되었다고 전해지나 연도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또 하양향교는 1481년(성종 12) 이전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역 교육을 담당하던 향교 외에도 많은 서원과 서당이 지역에서 서민들의 교육을 책임졌다. 서원은 향교처럼 교육과 제향 기능을 동시에 수행했지만, 향교와 다른 점은 제향 된 인물들이 경산을 비롯한 경상도 지역에 연고가 있는 유학자라는 것이다.이황(李滉)과 이언적(李彦迪)을 모신 관란서원 등과 지역의 유일한 사액서원인 금호서원은 허조(許稠)를 제향했다. 특히 1910년대 설립된 공립초등 교육기관인 경산공립보통학교(현 경산초등학교)와 하양공립보통학교(현 하양초등학교), 자인공립보통학교(현 자인초등학교) 등은 개교 100주년을 훌쩍 넘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1979년부터 초등학교의 학생 수가 줄어들기 시작해 1990년대는 산간벽지의 초등학교는 폐교되고 대규모 아파트 단지나 주택단지가 조성된 지역에 초등학교가 신설되며 학생 수가 늘어났으나 고학년의 학생 수는 줄어드는 기현상을 보이기도 했다.중등교육 기관이 밀집된 대구지역으로 전학을 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그러나 1980년대 이후 고등교육 기관이 계속 증가해 대구·경북지역에서 가장 많은 학교가 자리 잡으며 ‘학원의 도시’로 불리게 됐다.경산시는 지역의 인재 양성을 위해 2006년 (재)경산시장학회 설립을 위한 육성조례를 제정하고 장학회를 설립해 현재 출연금 95억 원과 기탁금 119억 원 등 214억 원의 장학기금을 조성하고 2007년부터 올해까지 9천615명에게 95억 8천400만 원의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올해는 진학장학금 지원 대상자를 확대해 217명에게 2억 7천300만 원의 장학금을 지원해 인재 양성에 큰 몫을 하고 있다. 또 학교와 교육지원청에 교육경비를 지원해 노후 위험시설을 개선하고 특기 적성 및 인성교육, 방과 후 학교 운영, 다목적 강당 증축사업을 펼치며 올해 40억 1천800만 원을 지원하는 등 교육의 질을 높이고 고등학교 무상교육비(3억 6천200만 원)와 교복 구입비(12억 원)를 지원해 학부모의 부담을 들어주는 등 교육에 대한 끊임 없는 투자로 교육도시의 변모를 굳혀가고 있다. □ 사회복지로 지켜주는 행복 복지안전한 주거와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일자리, 다급한 순간에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복지는 현대의 생활과 때어 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사회복지는 어려운 이웃이나 노인층을 위한 것으로만 오해하기 쉬우나 국민 누구나 누리는 것이 사회복지다.사회복지는 국민의 생활 향상과 사회보장을 위한 정책과 제도 전체를 아우르는 것으로 대표적인 사회복지가 국민건강보험임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하지만, 사회적인 약자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사회보장인 것은 틀림없다. 경산시 사회보장의 목표는 ‘지켜주는 행복 복지’로 취약 계층을 위한 복지 사업을 확대하고 증가하는 복지 수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시가 2023년부터 2026년까지로 수립한 경산시 제5기 지역사회보장계획의 목표 또한 ‘함께하는 미래를 만들어 가는 행복한 경산’이다.경산시가 올해 투자하는 사회복지 예산은 4천290억 4천500만 원 규모로 주민 복지와 노인복지, 여성복지, 어린이 복지, 장애인 복지 등에 사용된다.시의 주민 복지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로 빈곤층에게 급여를 지급해 시민의 최저 생활을 보장하고 희망복지지원단과 경산사랑나눔사업을 통해 복지 사각지대의 어려운 주민들에게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노인복지는 2023년 8월 말 지역의 노인인구가 전체의 18%를 초과하며 고령사회로 접어들어 급식과 주거 편리, 의료 서비스 등으로 안정된 노후 생활을 도모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 기초연금 지급, 경로당 운영 지원, 노인 일자리와 사회 활동 지원사업, 거동 불편 저소득 재가 노인 식사 배달 사업 등도 진행 중이며 경로당 387개소, 노인 복지관 2개소, 노인 주거 복지시설 2개소, 재가 노인복지시설 179개소, 노인 의료복지시설 62개소, 노인 일자리 전담 기관 3개소 등의 노인복지시설을 통해 노인복지를 실현하고 있다.여성복지를 위해 여성새로일하기센터를 통해 경력 단절 여성의 취업을 지원하고 지역의 20여 개의 여성단체 활동 지원으로 여성 친화 도시로 지정되기도 했다.저소득 한 부모 가족 지원으로 양육 부담을 해결하고 성·가정폭력 상담소 지원으로 폭력 피해자 보호에도 앞장서고 있다.현재 경산시의 한 부모 가정은 모자 가정 994세대 2천353명, 부자 가정 234세대 639명, 청소년 한 부모 가장 세대 3명 등이다.자라나는 세대인 아동의 복지를 위해서는 소년·소녀 가정과 가정 위탁 아동보호, 아동 급식 지원, 아동 양육시설과 일시 보호시설 운영, 입양 지원, 아동 학대 신고 등을 운영하고 있다.아동 보호·교육, 건전한 놀이와 오락 제공 등으로 아동의 건전한 육성을 돕는 지역아동센터가 22개소 운영되며 시민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영유아와 아동의 건강한 성장 환경을 조성하고 부모들이 맡길 수 있는 보육환경을 위해 정부 지원 어린이집 20개소, 민간 어린이집 70개소, 가정 어린이집 30개소, 직장 어린이집 3개소에 아동수당을 지원하고 가정 위탁 아동도 지원하고 있다.사회적 아픔인 장애인 복지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지역에 등록된 1만 5천214명(8월 말 기준)을 위해 일자리 사업과 활동·수당 지원, 장애 아동 발달 재활서비스 사업, 언어발달 지원, 장애인 정도 심사 제도 운용, 의료비 지원, 보조기구 교부사업, 특수학교 저소득 장애인 간접 학비 지원, 휠체어 수리 비용 지원에 나서고 있다.시는 2024년부터 전동 휠체어의 보험료를 지원할 계획이다.경산시는 복지 사각지대의 고립 위기가구 발굴을 위한 명예사회복지공무원 제도를 운용하는 등 틈새 없는 복지안전망을 구축해 행복한 경산을 만들어 간다./심한식기자 shs1127@kbmaeil.com

2023-09-20

삼한일통 이룬 신라 ‘문화와 예술의 부흥’을 이룩하다

전쟁은 땅을 황폐하게 만들고,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 부정할 수 없는 비극이다. 그건 옛날과 지금이 다를 바 없다.신라는 백제와의 격전, 고구려와의 전투, 당나라 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싸움을 오랜 시간 벌였다. 쉽게 이야기하면 7세기 중반과 후반 모두가 ‘전쟁의 시기’였다. 나라가 불길에 휩싸이는 경우가 흔했고, 많은 신라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긴 시간의 전쟁이 야기한 처참한 상황이 끝나고, 삼한일통(삼국통일)을 이룬 신라가 안정화의 길을 걷게 된 건 문무왕(김법민) 때에 와서다.아버지 무열왕(김춘추)과 외숙부인 태대각간 김유신의 조력을 등에 업은 김법민은 ‘삼국통일을 완성한 스타 주군(主君)’이 돼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 7세기 후반 일이다.그렇다면 전쟁이 끝나고 평화로운 시절이 도래한 신라가 문무왕의 주도 아래 계획한 차기 프로젝트는 뭐였을까? 즉답하자면 ‘문화와 예술의 부흥’이었다. ◆건축물을 통해 왕실의 권위와 번성한 국가의 힘을 보여주다비단 신라만이 아니다. 전 세계 여러 고대·중세 왕조는 왕실의 권위를 과시하고, 강성한 국력을 내외에 보여주기 위해 거대한 건축물을 경쟁적으로 만들었다.2023년 현재 한국인들이 가장 즐겨 찾는 여행지 중 하나인 베트남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기 전 베트남의 마지막 군주 국가 ‘응우옌(Nguyen)’은 중국의 자금성(紫禁城)을 모방한 화려한 궁전을 축조한다. 이른바 후에 왕궁(Hue Imperial Citadel)이다.베트남 중남부의 매력적인 여행지에 자리한 이 궁전은 응우옌 왕조가 빛났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아래는 후에 왕궁에 관한 ‘베트남 셀프 트래블’의 부연.“후에를 수도로 한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 응우옌의 궁터로, 해자와 10km에 달하는 성곽으로 둘러싸여 시타델(Citadel·성채)이라고도 부른다. 프랑스와 미국 등 세계열강과의 전쟁을 거치며 많은 문화유산들이 소실됐으나, 종전 후 베트남 정부와 유네스코의 관심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돼 건물들이 복원되고 체계적인 관리를 받고 있다.”베트남과 이웃한 캄보디아에도 과거 번성했던 크메르 왕조의 흔적을 보여주는 압도적인 건축물이 존재한다. 앙코르 와트(Angkor Wat)다.한 해 수십 만 명의 한국인이 찾는 핵심 관광지이며, 프랑스와 독일, 영국과 스웨덴에서 10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고 온 유럽인들의 입을 벌어지게 만드는 완벽한 조형미의 사원.기자 역시 이곳을 4번 찾았고, 갈 때마다 이름난 이탈리아 로마의 어떤 성당보다 빼어난 미적 완성도에 감탄하곤 했다. ‘위키백과’는 앙코르 와트를 이렇게 설명한다.“캄보디아 시엠레아프 주의 앙코르에 위치한 사원으로, 12세기 초에 수리야바르만 2세에 의해 크메르 제국의 사원으로서 창건됐다. 앙코르 유적 중 가장 잘 보존돼 있으며, 축조된 이래 크메르 제국 모든 종교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맡은 사원이다. 처음에는 힌두교 사원으로 힌두교의 3대 신(神) 중 하나인 비슈누 신에게 봉헌되었고, 나중에는 불교 사원으로도 쓰였다. 옛 크메르 제국의 수준 높은 건축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동궁과 월지, 통일 완성한 신라의 화려한 문화예술 부흥신라는 베트남 응우옌 왕조와 캄보디아 크메르 왕조에 한참 앞서 신성함이 담긴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어냄으로써 통일을 이룬 나라의 무너질 수 없는 권위와 뻗어나가던 국가의 힘을 보여준다.예전에는 안압지(雁鴨池)로 불렸던 월지(月池) 일대에 신라의 탁월한 건축기술과 예술적 세련미가 담긴 다수의 건물들을 쌓아올리기 시작한 것. 그렇다. 바로 ‘동궁과 월지’다.동궁과 월지의 건설은 삼한일통을 이룬 문무왕의 ‘문화예술 프로젝트 제1호’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1978년 당시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은 나라의 자랑 중 하나인 동궁과 월지를 지목해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동궁과 월지는 경주시 인왕동에 위치해 있는 통일신라시대 궁원지로, ‘삼국사기’에는 문무왕 14년에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宮內穿池造山 種花草 養珍禽奇獸) 또한, 문무왕 19년에는 궁궐을 화려하게 중수하고 동궁을 지었다’(重修宮闕 頗極壯麗… 創造東宮)고 쓰여 있다. 그리고, 건립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월지 인근의 ‘임해전에서 연회를 개최하였다’는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이와 같은 문헌 기록들은 발굴조사를 통해 드러난 연못과 건물지군, 그리고 ‘의봉4년(儀鳳四年)’ ‘조로2년(調露二年)’이라 새겨진 와전(기와와 벽돌)과 다수의 목간(木簡) 등으로 그 신빙성이 입증된 바 있다.”인공 호수를 파고, 왕자를 교육시킬 동궁을 짓고, 임해전 등의 미려한 건물을 만든 문무왕은 거기에 희귀한 꽃을 심고, 보기 드문 짐승들까지 풀어 신라 왕실의 힘을 보여줌과 동시에 어렵게 이룬 삼국통일이란 크나큰 성취를 백성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살아가는 내내 아버지 무열왕과 외숙부 김유신을 넘어서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졌을 것이 분명한 문무왕 김법민은 내심 “선친과 외삼촌은 전쟁에서의 용맹만을 보여줬지만, 나는 문화와 예술에 대한 감각도 더불어 갖춘 성군(聖君)”이란 걸 은근히 자랑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물론, 이는 기자의 추측일 뿐이지만.어쨌건 현대에 들어와 동궁과 월지에선 발굴과 복원이 지속됐고, 그건 21세기인 지금도 진행형이다.복원된 1천400여 년 전 신라의 문화 유적이 2023년 오늘 경주를 찾는 수많은 관광객들에게 흥미로운 볼거리와 함께 문화적 자긍심까지 선물하고 있으니, 문무왕은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慧眼)을 가진 통치자였던 듯하다. ◆신문왕, 대를 이어 문화예술 ‘주요 프로젝트’를 진행하다동궁과 월지는 경주 시내 한복판에 자리했다. 그러니, 경주를 찾는 남녀노소 거의 모두가 어렵지 않게 둘러볼 수 있다.첨성대와 대릉원(大陵苑), 거기에 최근에 ‘경주의 핫 스폿’으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황리단길이 모두 동궁과 월지 지척에 자리했다. 말 그대로 신라 천년의 역사와 청춘들의 즐거움이 어우러지는 공간인 셈.그 정도의 감각적 만족으로는 무언가가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자가용이나 택시, 혹은 버스를 타고 30분쯤을 달려 감은사(感恩寺)가 자리했던 터를 찾는다.동궁과 월지가 문무왕 김법민이 완성시킨 통일신라의 ‘랜드마크(Landmark)’라면 감은사는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김정명)이 긴 시간의 노력 끝에 만들어낸 통일신라 불교예술의 절정을 보여주는 공간이다.사찰의 이름인 ‘감은(感恩)’은 말 그대로 ‘은혜를 고맙게 여기다’라는 뜻. 누가 누구의 은혜에 감사하다는 것일까? 일연의 ‘삼국유사’에 이에 대한 해답이 담겼다. 다음이 그 내용이다.“신라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이룬 후 나라를 더욱 굳게 지키기 위해 감은사를 짓기 시작했으며 신라 31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즉위한 이듬해(682년)에 완공했다. 문무왕은 승려 지의(智義)에게 ‘죽은 후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을 유언하고 죽었다. 이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大王巖)에 안장했으며, 신문왕이 선왕(先王)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그 이름을 감은사라 했다.”문무왕에게는 콤플렉스와 함께 큰 유산(遺産)을 물려준 두 사람이 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무열왕과 김유신이 바로 그들.신문왕 역시 누구도 쉽게 물려줄 수 없는 커다란 물질적·정신적 자산을 선사한 사람이 분명 있을 터. 그는 다름 아닌 아버지 김법민, 즉 문무왕이었다.통일된 국가에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고 떠난 아버지 문무왕은 신문왕에게 ‘마음 속 스타’였을 터.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이라는 비극 위에서 만들어진 통일신라. 그 시작점인 7세기 후반. 세계 어느 나라도 흉내 내기 힘든 ‘문화예술의 집적체(集積體)’ 감은사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계속)/사진 이용선기자/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9-19

푸른 미래를 비추는 포항의 불빛

해가 저물어도 더 밝은 곳이 있다.푸른 바다 위에 솟은 포스코의 불빛이밤하늘을 환하게 밝히며 포항을 지키기에포스코의 밤은 해가 진 뒤 더욱 찬란하다.태양보다 뜨거운 것이 있다.철철 끓는 쇳물의 소리가 공장지대를 울릴 때사시사철 용광로를 지키는 노동자의 땀방울은쇳물보다 더 뜨겁게 흘러내린다. 포스코의 쇳물은 포항의 핏줄삶의 곳곳 어디에도 깃들지 않은 곳이 없다.오십여 년 전 영일만을 쩡쩡 울리던 커다란 꿈도포항의 가슴속에 영원히 이어진다. 섭씨 1500도 쇳물로포스코는 대한민국을 일으켜 세웠고더불어 푸른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포스코의 불빛은 꺼지지 않는다.빗물에 잠시 눈 감을지언정포스코의 불빛은 잠들지 않는다. 태양보다 밝고 태양보다 뜨거운 포항의 심장이여하늘보다 푸르고 바다보다 푸른 포항의 꿈이여포스코의 불빛은 밤하늘을 밝히며포항의 미래를 비추고 있다.- 글 : 이가은(서울대 국문과 박사 수료)임주은 1982년 포항에서 태어났으며 대구가톨릭대 공예과를 졸업했다. 개인전 2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아트페어에 서양화 작가로 참여했다. 현재 포항문화재단 이사, 포항청년작가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포항지부, 경북청년작가회 등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3-09-18

문경시, 국내외 스포츠대회 유치 지역경제 불 지핀다

문경시의 주된 시정 목표 중에 하나가 ‘문화가 융성하고 품격이 넘치는 스포츠·관광도시’이다. 국토의 중심에 위치해 전국 어디서나 2시간대에 접근할 수 있는 교통요충지이다.연간 40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문경새재와 철로 자전거, 에코랄라 등 풍부한 관광자원은 중부내륙 최대의 관광지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여기에 우수한 스포츠 인프라를 바탕으로 스포산업의 옷을 입힌다.전국 최고의 스포츠 인프라와 우수한 문화·관광자원을 연계한 융복합 스포츠 산업 육성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를 꾀하고 있다.신현국 문경시장은 “스포츠 대회 유치는 지역경제에 보탬이 되는 대회를 유치하는 것을 최우선 원칙으로 두고 전 행정력을 동원하겠다”며 “대회 참가를 위해 문경시를 방문한 선수, 임원에게 경기장 및 숙소에 관광·축제 홍보 책자를 비치하고 대회 기간 중은 물론 경기를 마치고도 문경에 머물러 주요 관광지와 체험 등을 즐길 수 있도록 홍보하고 이용하는 데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 국내·외 스포츠 대회 유치문경시는 올해 아시아하키연맹 정기총회와 전국단위 육상·유도·탁구·테니스·태권도·씨름 등 국제대회 2개, 전국대회 45개, 도 단위 대회 19개, 시 단위 7개 등 총 73개 대회를 유치했다. 73개 대회의 절반이 올해 신규로 유치해 개최되거나 개최될 계획이다.지난 1월 문경 생활체육 유소년농구대회를 시작으로 8월 말 현재 3만 2천여 명의 선수·임원이 참여한 것으로 잠정 집계되고 있다.또한, 2015 세계군인체육대회 성공적 개최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2024년에는 세계 60여 개국 6천여 명의 선수와 임원이 참가하는 세계 최대의 태권도 축제인 ‘2024 세계태권도 한마당’과 ‘2024 아시아 유·청소년 유도대회’, ‘2024 국무총리배 세계 바둑선수권 대회’ 등 굵직한 국제대회 3개를 이미 유치했으며, 2025 아시아소프트테니스선수권대회와 2031 세계군인체육대회 유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올해로 25회째 맞는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명예 관광 축제인 2023 문경찻사발축제 기간에는 ‘문경새재배 파크골프 대회, 전국 생활 체육대 축전, 동아일보기 전국 소프트테니스대회’ 등이 개최됐다. 경기 관계자 4천여 명 정도가 축제장을 방문해 생활자기 및 명품 도자기 경매에도 참여해 ‘문경찻사발축제 경제효과 137억 돌파’에 일조했다.이외에도 9월 오미자 축제, 10월 사과 축제 기간에도 국방부 장관기 전국 단체 대항 태권도대회, 문경시 소프트테니스협회장배 대회, 문경울트라마라톤대회, 문경사과배 전국 배드민턴대회 등이 개최돼 선수, 임원, 경기 관계자, 가족 등 1만여 명이 축제장을 다녀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홍보에도 역점을 둘 계획이다.이러한 문경시의 스포츠 마케팅 정책은 지역의 숙박업소, 식당, 카페, 농·특산물 등 코로나 이후 침체한 지역경제에 불을 지피고 있어 시민들도 대회 유치를 적극 지지하고 있다. □ 특색있는 문화·체험행사문경시는 각종 스포츠 대회 유치로 문경을 방문한 선수 및 스포츠 관계자들에게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관광자원을 활용한 맞춤형 문화·체험행사는 지속적인 지역경제 발전의 솔루션을 제공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지난 3월 STX 문경 리조트에서 아시아하키연맹 31개국 대표단과 국내 관계자 등 총 300여 명이 참석한 ‘2023 문경 아시아연맹 정기총회’를 개최했다.스포츠 체육 도시 육성을 시정 목표로 하는 문경시는 국군체육부대 하키팀과 경북 여자하키팀의 숙소가 속해있는 곳으로서 오랜 시간 하키 종목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오며 인연을 맺어와 이번 하키 연맹 총회가 열리게 됐다.또한, 올해 8월에는 한국, 미국, 영국, 호주, 일본, 중국, 태국, 베트남 8개국 초청 국제대학 배구대회를 준비하면서 각국 선수들이 한국에 입국하기 전부터 문경 문화 체험행사 프로그램을 영어로 작성해 배포했고, 희망하는 국가의 신청받아 경기 휴식기에 ‘어서 와 문경은 처음이지?’ 문경 문화 체험행사를 추진했다.진남역 철로 자전거 체험을 시작으로 물레 체험, 전래놀이 체험, 문경새재 오픈세트장 용상 체험, 전통시장을 탐방하며 뻥튀기, 오미자 시음 등 다양한 문화 체험을 하도록 했다. 매일 이어지는 경쟁으로 긴장되어 있던 각 국가 선수가 단체 관광과 체험행사로 우정을 다지는 기회가 됐다.이번 문경 문화 체험행사에 참여한 미국배구선수 백 웨버는 “한국을 다시 오고 싶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만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따뜻하게 저를 대해주셔서 다시 방문하고 싶습니다”고 했다.대한민국의 중소도시인 문경시의 전통시장, 상점가도 방문해 보며 시민들과의 스킨십을 통해 문경 문화를 체험하게 되면, 향후에 한국을 방문할 때는 선수 스스로 문경을 다시 찾아오게 되어 지역경제 파급효과를 낼 수 있기에 지속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 전국 최고 스포츠 인프라문경시는 전국 최고의 문경 국제소프트테니스장, 시민운동장, 배드민턴 전용 경기장, 온누리 스포츠센터, 국제클라이밍센터, 문경야구장, 파크골프장 등 스포츠 관광도시의 명성에 걸맞은 다양하고 우수한 스포츠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또한, 문경시 마성면 남호리에 설치 중인 다목적 야외씨름훈련장은 야외 공연도 겸할 수 있는 다목적 훈련장으로 올해 10월에 준공을 앞두고 있다. 호계면 호계리에 조성 중인 필드하키장은 내년 10월에 사업을 완료해 필드하키 국제대회를 유치, 전 세계에 스포츠 도시 문경을 홍보하기 위해 조성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최근 급증하는 테니스 이용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 부족을 해소하고 이상 기상 여건에 따른 제약을 해소하기 위한 ‘실내테니스 경기장 조성사업’ 추진하고 있다. 사업부지 전체 토지 보상은 지난 5월 완료했으며, 내년 1월 실시설계용역 후 25년 12월에 준공할 계획이다.문경시는 전국 어디에서나 2시간대에 접근이 가능한 대한민국 사통팔달 교통의 중심지이다. 국제규격의 최신시설을 갖춘 국군체육부대를 비롯해 전국 최고의 스포츠 인프라도 갖추고 있다. 우수한 문화·관광자원을 연계한 융복합 스포츠 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각종 스포츠대회와 전지훈련의 성지로 거듭나 국내·외 스포츠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면 코로나로 인해 움츠렸던 지역경제에 불을 지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강남진기자 75kangnj@kbmaeil.com

2023-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