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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필묵 속 해학·풍자… “평생 단 한 점 작품 위해 붓 들죠”

그 옛날 문인화는 어지러운 세상살이에 정신을 맑게 하는 수양의 한 가지였다지만 오늘날엔 그저 예스러운 예술의 한 장르로 여겨진다. 시를 다루는 화가는 물론 시대와 소통하는 작품이 드물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심관(心觀) 이형수의 문인화는 탁월성을 발휘한다. 심관의 화폭에는 고된 일상이 질펀하게 펼쳐지는 현재와, 사상은 빛났으나 조명받지 못한 사람들이 담긴다. 역사 속 인물이나 사건에도 현재를 읽게하는 해학과 풍자가 있다. 대상에 대한 깊이 있는 공부가 있어서 가능한 작업이다. 심관의 화론 또한 단순하고 일상적이다. ‘밥 먹듯이 하면 이루어진다’는 것. 그렇기에 ‘만사를 아는 것은 밥 한 그릇을 아는 것에 있다’던 해월 최시형은 선생의 오랜 공부 대상이다. 나이가 들면서 발 딛고 있는 지역의 문화예술 근원에 자연스레 눈이 떠졌다는 선생은 포항을 우리나라 근대사상의 시원지라고 말한다. 지역의 문화자원을 눈 밝게 발굴해 필묵으로 재해석하는 이형수 문인화가를 포항 북구 창포동에 위치한 선생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물 맑은 영덕 오십천변이 고향이라고.△영덕 오십천변 남석동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 노닐던 오십천의 맑은 물과 바람을 아직도 기억한다. 부친은 농산물검사소에 계셨고 집안에 여유가 있어 초등학생 때부터 형과 서울에서 공부했다. 영덕에서 서울까지 하루가 넘게 걸렸다. 직통 차편이 없어서 비포장도로를 버스로 3시간 넘게 달려 안동으로 갔다. 안동역에서 중앙선을 타고 꼬박 24시간 걸려야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연료가 석탄인 기차여서 코에서 시커먼 재가 묻어났다. 길이 멀다 보니 일 년에 두 번, 방학 때만 귀향했다.-그림에 눈을 뜬 계기가 있나.△부모와 떨어져 지내면서 사춘기를 심하게 겪었고 그림으로 풀어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이당 김은호(1892-1979) 화백에게 그림 한 쪼가리를 보냈고 문하생이 됐다. 이당 선생 옆에서 먹을 갈고 청소하고 공부를 하면서 1년을 보냈다.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 이당의 그림을 좋아해서 몇 점 올려보내달라고 해서 보내면 수표로 돌아왔던 기억이 남아있다.-당시에 어떤 그림을 배웠나.△이당에게 처음 받은 체본(體本)은 참새였다. 이당은 자세하고 세밀한 것이 특징인 북종화의 대가인데 당시 내 나이가 어려선지 시간이 지날수록 갑갑함이 생겼다. 남종화의 대가인 옥산 김옥진(1927-2017) 화백에게 가르침을 청하니, 이당이 워낙 대가다 보니 허락을 받고 오라더라. 그렇게 해서 옥산 선생에게 남종화를 배웠다. 지금까지도 세밀한 인물화는 북종화를 그리지만, 나머지는 생략하고 활달한 맛의 남종화를 즐긴다.-포항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옥산 선생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다 군대에 갔고, 부모님이 계시던 포항으로 내려와 정착하게 됐다. 이 작업실에서 30년째 붙박이로 있다.첫 개인전은 1979년 봄에 포항 도심의 ‘용 다실’에서 했다. 당시 포항 KBS 이동린 방송국장이 전시 서문을 써주었다. 경제성장과 함께 동양화가 대유행하던 시절이라 그림이 꽤 팔렸다. 울릉도에서 온 관람객이 그림값을 깎으려고 해서 젊은 치기에 팔지 않고 버린 적이 있다.-10여 회의 개인전 중 두 차례의 독일 전시가 눈에 띈다. 독일 관람객의 반응은 어땠나.△독일에 정착한 파독 간호사들을 많이 만났는데 눈물이 날 정도로 환대해 주었다. 고국의 향수가 묻어나선지 까치나 호랑이를 그린 빨랫방망이나 다듬잇방망이를 특히나 좋아했다. 독일 현지인은 사유나 철학이 담긴 작품에 관심을 보였고 특히 대나무 그림을 좋아했다. 나 또한 사군자 가운데 필력이 매력적인 난(蘭)과 함께 곧고 강직하면서 오랜 수련이 묻어나는 죽(竹)을 선호하는 편이라 반가웠다. -영덕의 인물 3인을 조명한 전시도 주목받았다.△호랑이 그림을 추적하다 보니 고향에도 이처럼 훌륭한 분이 있음을 깨달았다. 세계적인 여중군자 장계향은 사임당보다 더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네”를 지은 나옹선사와 대학자 목은 이색까지 3인을 그렸다. 세 명 모두 송천강이 배출한 위인이다. 상류로 가면 나옹선사가 태어난 곳이 있고 중간쯤에 장계향의 시댁인 충효당이 있으며 하류에서 목은이 탄생했다. 이토록 중요한 송천강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해 아쉽다.-포항에서 주목해 봐야 할 인문학적 자산은.△포항에 역사 문화자산이 부족하다고 말하는데 물신(物神)에 빠져 등한시되고 있을 뿐. 가진 것은 많은데 몰라보고 있다. 포항 역사의 대표적인 시원으로 5천 년 전 암각화를 들 수 있다.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러 곤륜산은 가지만 산자락의 귀중한 유적을 찾는 이는 드물다.그리고 한국 근대 사상을 일군 장소인 검등골이 있다. 신광면 마북리 검등골은 동학의 제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이 화전을 일구면서 동학의 기본사상을 깨우친 곳이다. 화전의 흔적과 허물어진 담장, 항아리를 묻은 화장실터가 남아있다. 상수원 보호를 명목으로 길이 막혔지만, 번듯한 길을 내어 널리 알려야 할 곳이다.검등골이 한국 근대 사상의 시원지라면, 경제를 일으킨 정신은 ‘롬멜 하우스’에서 찾을 수 있다. 포항제철 건립 당시 건설본부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롬멜 장군의 야전사령부 같다고 붙여졌다.-19세기의 해월을 지금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19세기 후반의 조선은 관직을 사고팔 정도로 그야말로 어수선한 시대였다. 지금의 시대라고 뭐 그렇게 나아졌을까. 해월은 신광 마북에서 도를 깨치고 ‘만사를 아는 것은 밥 한 그릇을 아는 것에 있다’며 밥 한 그릇을 도에 비유해 밥의 우주성을 설파했다. 그 시절 ‘사람이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을 설파한 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고, 해월은 포항의 정신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법 하다.강원도는 해월이 체포된 곳에 ‘마지막 피체지(被逮地)’를 알리는 표지석을 세웠다. 글을 새긴 이는 무위당 장일순으로 김지하 시인으로 그 사상이 이어진다. 체포된 곳도 비석을 세워 기념하는데 포항은 도를 닦은 중요한 장소도 저렇게 내버려 두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다.-해월의 가족들도 화폭에 담고 있다.△해월이 쫓길 당시 외동딸인 최윤은 죄인의 자식이라고 해서 아전과 강제로 결혼했다. 최윤의 아들 정순철은 동요 ‘짝짜꿍’을 만든 작곡가이다. 동학의 3대 교주 손병희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왔고, 방정환과 윤극영 등과 활동하다 6·25 때 납북됐다.-역사 속 인물을 문인화 언어로 현재화시키는 작업이 인상적이다.△하나 더 얘기하자면. 해월은 보따리 하나 짊어지고 골짝을 숨어 다니며 포교했기에 ‘최 보따리’라고 불렸다. 해월의 ‘보따리 철학’은 박이문 전 포스코 명예교수의 ‘둥지의 철학’과 닮았다. 박이문은 철학의 근간이 되는 존재 차원과 의미론적 차원에 대해 “두 개의 다른 존재가 아니라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존재 전체의 양면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둥지의 철학은 ‘인간은 하늘’이라는 해월의 보따리 철학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최근에 관심을 두고 화폭에 담은 인물은.△올해는 동해안 별신굿에 대한 글을 쓰고 김석출 옹을 그렸다.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전위 예술가 요세프 보이스가 세상을 떠나자 그 넋을 달래는 진혼굿판을 벌일 때 김석출과 김유선 만신 부부에게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백남준은 “굿은 자기 예술의 시원이자 뿌리”라고 말한 바 있다.-요즘은 어떤 작업을 하나.△수묵 인물화 한 점에 그 사람의 삶이 담겨있다는 생각으로 인물화를 그리다가 문득 내 얼굴을 들여다보게 됐고, 나의 삶을 돌아본다는 의미에서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다양한 표정의 나를 그리고 그날 공부한 글귀를 적는다. 강요배는 “며칠간의 공부와 고뇌만으로 거대한 노동 투쟁을 그려낼 수 없다”고 했다. 요즈음은 ‘평생일점’, 일생동안 좋은 그림 한 점 그리고 간다는 심정으로 붓을 들고 있다.이형수 문인화가는 1952년 영덕에서 태어나 동국대를 졸업했다. 현재 (사)한국서가협회 초대작가이며, 경북지회 초대 지회장과 수석 부이사장을 지냈다. 사군자를 소재로 한 ‘필묵의 즐거움(2007)’, 부처님 이야기를 담은 ‘먹빛이 마음빛이다(2008)’, 민화를 주제로 서울 인사동과 독일 베를린에서 선보였던 ‘까치는 호랑이의 외로움을 안다(2010)’,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2011)’, 100일 동안 편지 형식으로 쓴 ‘붓끝에서 피어나는 고향의 마음-심관 이형수의 수묵편지(2015)’, 영덕의 인물을 주제로 한 ‘영덕문향의 멋-심관 이형수의 수묵편지(2017)’와 ‘붓으로 그린 세월(2018)’, ‘죽도시장, 여명을 밝히는 사람들(2021)’ 등의 개인전을 열었다. 2015년부터 소셜미디어에 ‘손안의 수묵편지’를 띄우며 사람들과 소통한다./배은정 작가

2023-09-18

국내서 해외로 이어진 사회공헌활동 ‘뜨리마 까시, 포스코’

◇ 뜨리마 까시, 포스코“저는 포스코가 도와 달라고 하면 어떻게든 힘을 보탤 겁니다.”지난달 30일 찔레곤 크라카타우 포스코 제철소에서 약 2㎞ 떨어진 꾸방사리(Kubangsari) 마을.납시아씨(Napsiah·55·여)는 거실과 방 2개가 딸린 집에서 자식 내외, 손녀와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찔레곤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집 안은 맞바람이 들어 시원했다. 글 싣는 순서1. 포항 영일만의 기적, 인도네시아에 닿다2. 이차전지 날개 단 인도네시아, 포항시 기회 찾으려면3. 인도네시아와 포항 기업 간의 교류 현 주소4. K기업문화, 인도네시아에 퍼진 한국기업 저력5. 탄소중립 시대, 인도네시아에서는 어떻게납시아씨의 집은 포스코가 ‘스틸빌리지’ 사업의 일환으로 새로 지은 집이다. 포스코는 2018년부터 2022년까지 포스코1%나눔재단, 포스코 비욘드 봉사단 등 포스코 사회공헌 역량을 총 동원해 찔레곤 크라카타우 포스코 제철소 인근 저개발 지역 주거 환경 개선 사업을 펼쳤다.봉사자들이 직접 지은 집이라 다소 투박하지만 깨끗한 하얀 벽, 하얀 타일이 깔린 납시아씨의 집은 이 동네 집 중 비교적 신식이다. 납시아씨는 집을 찾아온 취재진을 반기며 포스코 덕분에 편안한 집에서 잘 수 있게 됐다며 연신 감사 인사를 전했다.그는 “포스코와 관련된 사람이라면 언제든지 자고 가도 좋다”며 “포스코가 도와 달라고 하면 무엇이든 도와줄 수 있다”고 말했다.꾸방사리 마을에 거주하는 마스투아(Mastuah·55·여)씨도 반갑게 취재진을 맞았다. 마스투아 씨가 살던 집은 빗물조차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 몇 달 씩 매일같이 비가 쏟아지는 우기(雨期) 동안엔 마스투아씨와 가족들은 비에 젖은 축축한 바닥을 닦고, 또 닦아야 했다. 포스코는 2018년 마스투아씨 집에 방 두개와 거실이 있는 새 집을 선물했다. 마스투아 씨는 “불편하기도 했지만 집이 무너질까봐 늘 불안했는데 새 집이 생긴 뒤로 편하게 잘 수 있다”고 밝혔다.찔레곤 현지에서 포스코가 받는 사랑을 한 눈에 체감할 수 있었다.스틸빌리지 사업으로 포스코는 주택 25세대 외에도 화장실 30개소, 학교 건물 3개소, 쓰레기 처리시설 1개소를 새로 지었다. 3년이 넘게 진행된 프로젝트에는 포스코그룹 임직원들, 포스코 비욘드 봉사단, 해비타트 봉사단 등이 개인 시간을 쪼개 참여했다.마을에는 스틸빌리지 사업을 통해 시설을 보수한 초등학교도 있다. 하교를 하던 아이들이 취재진과 포스코 직원들이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며, 졸졸 따라다녔다. 익숙한 듯 크라카타우 포스코 직원들이 아이들에게 인사를 나누자, 아이들은 밝은 표정으로 ‘뜨리마 까시’(terima kasih·감사합니다)를 외쳤다.크라카타우 포스코 관계자는 “인도네시아가 빈부격차가 심해 찔레곤 제철소 인근 저개발 지역은 사람들이 흙바닥에 나무 판자로 지은 집에 거주하는 등 주거 환경이 좋지 않다”며 “특히 학교, 유치원, 보육시설 등 교육환경이 열악한 경우가 많아, 스틸빌리지 프로젝트를 할 때도 미래세대 아이들이 희망을 느낄 수 있는 마을을 조성하는 데 중점을 두고 교육시설 개선도 함께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주민들의 자립을 돕는 사회공헌 프로그램포스코는 크라카타우 포스코를 건설한 직후부터 제철소가 위치한 찔레곤의 지역 발전을 위해 다양한 도전을 해왔다. 2013년 인도네시아 사업을 시작한 지 2년이 지난 2015년, 포스코는 크라카타우 포스코 사회적 기업, PT.KPSE (Krakatau POSCO Social Enterprise)를 설립했다. PT.KPSE는 포스코 1%나눔재단 기금 7억원과 KOICA 기금 7억원을 투입해 설립된 포스코의 자회사형 사회적 기업이다.PT.KPSE는 특별한 설립 배경이 있다. 크라카타우 포스코 제철소 가동 초기, 인근 마을 청년들이 생계를 이유로 자재를 훔치는 사건이 벌어졌다. 돈을 벌고 싶지만 일자리가 없어 생긴 일이었다. 포스코는 지역 빈곤층에게 드리운 가난의 고리를 끊기 위해 지역에 일자리를 창출하고, 지역민들이 경제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방안을 찾았다. 고심 끝에 나온 것이 바로 사회적 기업, ‘PT.KPSE’다.PT.KPSE의 사업은 장기적으로 지역사회의 지속가능한 일자리를 창출하고, 주민들이 역량 개발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있다. PT.KPSE는 6개월 단위로 30명씩 인성 교육, 직업역량 강화 교육 등을 실시한 후 교육을 이수한 지역민을 공장 환경 정비 요원 등으로 채용해 지속적인 경제 활동을 할 수 있게 돕는다. 마을 주민 대상으로 소규모 창업 지원 교육도 실시하고, 제철소가 위치한 인근 공단에 취업할 수 있도록 컴퓨터, 워드 등 기본 직무 능력 교육도 제공한다. 사회적 기업 운영으로 발생하는 이윤의 70%는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사회공헌기금으로 재환원해 선순환을 만들고 있다. 2015년 설립 이후 2023년 상반기까지 총 378명이 교육을 이수했고, 2022년까지 237명이 취업에 성공했다.포스코만의 특별한 사회공헌 활동의 정점은 포스코 커뮤니티 러닝센터(P-CLC, Community Learning Center)다. 2022년 스틸빌리지 사업 일환으로 개관한 찔레곤의 다목적 시설인 CLC는 현재 PT.KPSE에서 운영하고 있다. 시 정부에서 제공한 연면적 약 661.16㎡(200여 평) 규모의 부지에 세워진 지상 2층의 ‘스틸’ 건물은 낮은 목재주택들이 즐비한 찔레곤 마을에서도 단연 눈에 띈다. 지역 주민들의 교육시설이자 문화 공간인 CLC에는 강의실, 컴퓨터실, 도서관 등 지역민들의 역량 개발을 위한 시설들이 자리해 있다. 인근 지역에서 드물게 에어컨이 있는 이 건물은 지역 주민들이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쉼터가 되기도 한다.P-CLC에 들어서자 한국에서 온 포스코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포항과 광양제철소에서 근무하다 인도네시아로 파견을 간 직원들이었다. 현지에서 근무하고 있는 포스코 주재원, 현지 직원들은 ‘아요 스망앗’(Ayo Semangat·파이팅합시다)이라는 봉사단을 구성해 정기적으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포항제철소에서 하고 있는 재능봉사활동과 유사하다. 이날 직원들은 P-CLC에 조만간 들어설 한국어 학교 개관을 준비하고 있었다.크라카타우 포스코는 제철소 인근 지역사회 청년 및 보육시설 학생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을 위한 ‘K-Dream 한글학당’을 지난 7일 개원했다. 크라카타우 포스코의 한국인 임직원과 통역사 직원이 학생들에게 직접 한글을 가르치며, 약 1년간의 교육과정 운영 후 우수학생은 크라카타우 포스코 및 협력사로 직원으로 채용을 추진할 계획이다.포스코 생산기술전략실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다 지난해 9월부터 크라카타우 포스코 열연 공장장을 맡고 있는 이정희 부장은 “지역사회와의 소통을 중시하는 포스코 직원들답게 인도네시아에서도 주재원들이 봉사활동에 많은 열정을 쏟고 있다”며 “주민들의 만족도가 높은 게 눈에 보이니 봉사하는 직원들의 의욕도 함께 올라가는 것 같다”고 전했다.지역 주민들이 교육 프로그램에 만족하느냐는 질문에 PT.KPSE 아리(Mr. Arie) 대표는 자신있게 “그렇다”고 답했다.그는 “PT.KPSE가 들어서고 많은 것들이 변화하고 있다”며 “PT.KPSE는 지역민들에게는 ‘희망’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다른 사회공헌 프로그램들 보다도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 세계로 뻗어나가는 ‘기업시민’ 글로벌 임팩트, 그 원류는찔레곤을 감동시킨 포스코 커뮤니티 러닝 센터, 재능봉사단 아요 스망앗을 보면 포항의 ‘포스코 나눔스쿨’, ‘포스코 재능봉사단’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자회사형 사회적 기업 PT.KPSE는 장애인 고용 사업장인 ‘포스코 휴먼스’를 닮았다. 포스코가 국내에서 펼치고 있는 기업시민 활동이 이들의 원류이기 때문이다.기업의 사회 공헌 개념이 낯설었던 창립 초반부터 포스코는 사회환원과 지역상생에 매진해 왔다. 창립 후 광양제철소 건설이 완료될 때까지 포스코는 작은 어촌이었던 포항의 인프라 건설에 중점을 두고 사회공헌 활동을 개진했다. 문화시설인 효자아트홀 개관, 실내체육관 건립 지원이 대표적인 사례다.주목할 점은 미래세대 육성에 중점을 둔 것이다.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1986년 국내 최초로 연구중심대학 포스텍을 설립, 산학연 협력체제를 구축했다. 포스코의 선견지명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수도권 중심 주의가 강화되면서 지역 대학에 대한 선호도가 떨어지며, 지역 대학들의 경쟁력이 위협받고 있는 가운데 포스코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한 포스텍은 굳건히 국내 최정상 이공계 대학의 아성을 지키고 있다.연이어 설립한 실용화 기술 전문연구기관인 RIST (포항산업과학연구원)은 포스코, 포스텍과 시너지 효과를 내어 포항이 산업 연구 도시로 발전하는 마중물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포스텍-RIST-포스코로 이어지는 산학연 협력 체계는 지방 소멸 시대 포항이 지닌 주요 자산이다. 든든한 산학연 협력 체제가 있기에 비수도권 지역으로서는 드물게 벤처기업들도 포항을 주목하고 있다. 체인지업그라운드 등 포스코의 벤처 지원 사업과 맞물려 미국 CES에서 주목한 유망스타트업 그래핀스퀘어는 수도권에서 포항으로 본사를 이전했다. 전기차 배터리 플랫폼 기업 피엠그로우, 협동로봇 전문기업 뉴로메카 등은 포항에 공장을 신설했다.조업이 안정된 90년대 이후에는 더 적극적인 사회공헌 활동을 추진했다. 포항테크노파크, 환호해맞이공원 건립을 지원하고, 프로축구단 스틸러스를 설립해 지역 문화 발전의 후원자 역할을 자처했다. 소외계층을 위한 기부 사업도 꾸준히 개진했다. 실직자를 위한 실업기금, 연말 불우이웃돕기, 수재의연금 등으로 900여 억원을 출연했다.포스코의 사회공헌활동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임직원들의 참여를 기반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1991년부터 포스코는 각 부서와 포항의 마을, 단체, 학교와 자매 결연을 맺어 봉사활동, 교류활동을 펼쳤다. 2003년부터는 포스코봉사단을 창단해 더욱 적극적으로 봉사활동에 나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직원들이 휴일을 활용해 지역사회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2022년 1월부터 9월까지 봉사활동에 참여한 인원만 누적 5천55명으로, 누적 봉사시간은 11만 시간이 넘는다.나눔과 봉사 문화가 있었기에, 10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크라카타우 포스코 역시 기업시민 활동에서 큰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임직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든든한 뒷받침이 됐다.포스코 관계자는 “한국 최초 일관제철소를 만들며 포항과 강건한 상생관계를 만들어낸 사례가 있듯, 인도네시아에서도 모범적인 지역 상생 모델을 만들어 나가고자 한다”고 밝혔다./인도네시아에서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3-09-17

전남드래곤즈 창단하고 골프장도 운영

선생은 번지르르한 수사(修辭)가 아닌 실제로 전투를 치르듯 일했다. 1968년 시작된 포항제철 건설의 역사. 짧지 않은 기간 이어진 그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건 작은 몫의 역할을 했건 직원들에겐 국가 기간산업 구축에 자신의 힘을 보탰다는 자긍심이 있었다. 30대와 40대를 온전히 포항에서 보내며 자신의 열정을 포항제철에 바친 한경식 선생은 1990년대에 들어서며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을 맡아 호남으로 간다. 그곳에서의 삶과 생활은 어땠을까? 홍성식(이하 홍) : 포항제철 박태준 회장과 얽힌 추억이 많겠습니다.한경식(이하 한) : 젊은 시절엔 박태준 회장이 안전모를 쓴 내 머리를 때리기도 했고(그때는 이걸 ‘에밀레종’이라 불렀다고 한다), 정강이를 걷어차기도 했지.(웃음)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그런 행동을 했던 게 아닐까 싶어. 모두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하라는 뜻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린 거지.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박 회장에게 서운한 마음은 전혀 없어.홍 : 포항제철 건설 과정과 발전 시기를 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한 : 높은 설산(雪山)에 오른 산악인들이 정상에 태극기를 꽂고 눈물 글썽이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 내 젊은 시절을 돌아보면 그들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돼. ‘전투’라고 불러도 좋을 포항제철의 각종 공사와 프로젝트를 사명감과 애사심, 나아가 애국심을 무기로 완수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 듯해.홍 :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으로 일하던 때였군요.한 : 종합제철 건설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나라로부터 받은 조직의 한 사람으로서 생애를 걸고 일했지. 멸사보국(滅私報國)의 마음가짐으로 땀 흘렸던 사람이 어디 나 하나뿐이겠어? 그 시간을 함께한 동료와 선후배들 모두 그런 마음이었겠지.홍 : 1990년대엔 포항을 떠나 호남으로 가셨다고 들었습니다.한 : 1968년 대한석탄공사에서 포항제철로 이직해 22년이 흐른 1990년에 포항제철 상무이사(건설본부장)를 했지. 꽤 긴 세월이었어. 그 전후로 서울 테헤란로 포스코센터가 만들어졌는데, 거기 건축과 전기 관련 일에도 관여했어. 이후엔 제철장비 철구공업주식회사 대표이사와 제철설비주식회사 대표이사도 했지.홍 : 그러다가 포항에서 광양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이유가 있습니까?한 : 광양에서 일하게 된 건 19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노동조합 운동의 중재자가 되기 위해서였어. 사용자 측과 노동자 측 사이를 원만하게 만드는 임무를 맡았다고 해야 하겠지.1987년 6월항쟁 이후 7, 8월 노동자 대투쟁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이 시기엔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대우조선 등 대기업의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이 과격화·장기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 결과 신규 노조가 급증했고 기존의 한국노총에 대한 어용 시비가 일면서 1990년 1월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결성되었다. (‘두산백과’에서 인용)홍 :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죠.한 : 그즈음 경남 창원에서 생산된 재료들이 제때 포항제철로 입고되지 않아 회사가 크게 애를 먹었어. 포항제철은 다른 회사와 달리 1990년대부터 일찍 화상회의를 했지. 서울과 포항, 광양에 있는 임원들이 화상회의를 시작하면 박태준 회장이 주도했어. 박 회장의 성격이 보통이 아니란 건 많은 사람이 알고 있잖아. 그러니 회의에 참여한 간부들이 긴장을 많이 했지. 어떤 프로젝트라도 기한 내에 완료하지 못하면 엄청난 질책을 받았으니까. 포항제철이 제대로 운영되려면 제철 장비와 제철 설비가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했어. 내가 사장이 되어 그 역할을 맡은 거지. 홍 : 당시 노동조합은 강성이라 다독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한 : 1994년쯤일 거야. 포항제철에서 건설 파트를 만들 때 호남 쪽에서 노동조합의 파업이 자주 있었어. 내 고향이 그곳이니 노동조합 간부들과 노동 관련 관청의 후배들을 자주 만났지. 처음 광양에 가서 시청, 노동청, 검찰청, 경찰서 등을 쭉 다니며 인사했어. 광주고등학교와 전남대를 졸업했다고 소개하니, 그곳 관계자 대부분이 “그러면 선배시군요” 또는 “어, 내 후배네”라고 하더군.홍 :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인맥이 중요하군요.한 : 그렇다고 봐야지. 노동조합과의 협의도 편안하게 진행될 수 있었고, 관청과의 업무 협조도 조금은 편했지. 아무래도 타지 사람들보다는 내가 호남의 정서를 잘 알고 아는 사람도 많았으니까.홍 : 그때 협력업체 노동조합 간부들과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해나갔는지 궁금합니다.한 : 광양에 가면서 노동조합 사람들과 술도 많이 마셨지. 노동조합 간부들도 나와 이야기하면 잘 통한다며 협상의 길을 어렵지 않게 열어줬어. 한번은 광양제철소 사장과 강성 노동조합원 50여 명이 만나서 이야기하는 자리도 만들었지. “혹시 떠들썩한 인민재판이 열리는 것 아니냐”고 모두 걱정이 많았지만, 내가 중간에서 원만하게 중재했어.홍 : 그래서 그 자리가 잘 끝날 수 있었던 겁니까?한 : 협력사 노동자들은 “우리도 누구보다 힘든 일을 하는데 임금이 본사보다 지나치게 낮다”며 그간 쌓인 불만을 쏟아냈지. 사용자 측에선 “앞으로 회사가 발전하면 모두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달랬어. 회사에 다니면서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사람들은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포항제철 연수원에 교육 시설을 갖추고, 좋은 강사들을 부르겠다는 약속도 했지.홍 : 1990년대 중후반엔 포항제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승주골프장 대표이사와 축구단 전남드래곤즈 사장도 하셨지요?한 : 어째서인지 공장 시설이건 스포츠팀이건 난 뭔가를 처음 만드는 작업을 많이 한 것 같아. 팔자인지도 모르지.(웃음)홍 : 제철소와 골프장에서의 일은 그 형태가 전혀 다른데 힘들지 않았습니까?한 : 골프장을 처음 맡았을 때가 생각나는군. 알다시피 골프장은 회원권이 비싸잖아. 그러니 선뜻 그걸 구매할 사람이 별로 없었어. 궁여지책으로 내가 포항까지 가서 협력업체 대표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했지. 그에 앞서 골프장 운영이 어려우니 포항제철 재무 담당 이사에게 도움을 요청했어. 그랬더니 “먼저 열심히 자구 노력을 해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적극적으로 나선 거지. 그때 회원권을 30억 원어치쯤 팔았을걸.홍 : 승주골프장을 운영할 때 위기는 없었는지요?한 : 한번은 큰 태풍이 골프장을 덮쳤어. 물에 휩쓸린 골프장 전체가 박살이 났지. 토사가 쏟아져 내려 인근 논의 벼까지 다 쓰러졌어. 주변 농민들은 당연히 난리를 치며 분노하지 않았겠어? 배상하라고 할 것 아니야. 문제는 골프장으로 들어오는 도로였더라고.홍 : 그래서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한 : 맨 먼저 앞으로도 발생할 수 있는 태풍 피해를 근본적으로 막을 방법을 고민했어. 그래서 승주 군수를 찾아갔지. 우리가 돈을 댈 테니 군에서는 제대로 배수가 될 수 있도록 주변을 정비해달라고 요구했어. 만약 그걸 그대로 두면 해마다 태풍이 오는 시기에 비슷한 사태가 반복될 테니까. 서울에 가서 자초지종을 말하고 포항제철로부터 돈을 받아와 승주군에 전달했어. 흘러내린 골프장 토사 때문에 피해를 입은 농가에는 불만이 없도록 보상금을 나눠 주고, 주변을 깔끔하게 정비해달라고 했지. 그렇게 위기를 넘길 수 있었어.한경식1935년 전남 나주 영산포읍 오량리에서 태어났다. 광주농업학교를 거쳐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갔으나 4학년 때 중퇴했다. 이후 전남대 전기공학과에서 공부했다.대학을 마친 후 1961년 대한석탄공사에 입사해 장성광업소 전기계장으로 일하다가 1968년 포항제철로 회사를 옮긴다. 제2고로 건설과장, 제1고로 개수추진부장, 제선공사부장, 건설본부장(상무이사) 등을 거치며 포항제철의 초기 역사를 눈앞에서 지켜보았다. 1990년대엔 포스코 계열사라고 할 수 있는 승주골프장 대표이사를 지냈고, 축구팀 전남드래곤즈의 창단 작업을 주도해 사장을 맡았다.수준급의 솜씨를 지닌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하다. 홍익대 미술대학원 현대미술 최고위과정을 수료했으며, 여러 차례 개인전과 회원전 등을 열었다. 한국 제철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1981)과 산업포장(1988)을 받았고, 프로축구대상 특별상(1995)을 수상했다.대담·정리 : 홍성식(본지 기자)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포스코

2023-09-17

“일 잘하는 심부름꾼으로, 소통하고 신뢰받는 의정 구현”

“저는 20년간 정치를 해오고 있다. 저는 정치에 정치를 더하고 싶지 않다. 정치에 행정을 더하고 싶다. 정책의회를 추구하는 것도 정책제안을 통해 시민들에게 직접적인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고 싶어서”라면서 “지금까지도 초선 시절의 초심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 지나고 나서 하지 못한 일에 대해 후회하지 말고 주어진 자리에서 ‘후회 없이 일하자’고 다짐한다. ‘명분’, ‘원칙’, ‘소신’을 정치철학으로 삼아 시민들에게 희망을 드릴 수 있는 정치를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안동시의회 권기익 의장이 그간 의정활동 성과와 향후 의정활동 계획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한 걸음 더, 시민 곁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출범한 제9대 의회는 의정활동 전문성을 강화하고, 현장 중심의 의정활동을 펼치는 등 시민이 공감하고 신뢰받는 의정을 구현하고자 노력했다. □ 시의회 역할과 기능 강화제9대 안동시의회는 지난해 7월 개원한 뒤 현재까지 열 번의 임시회와 세 번의 정례회를 통해 총 250여 건의 안건을 처리했다.안동시의회 인사청문회 조례안을 비롯한 의원발의, 시정 질문, 5분 자유발언, 촉구결의안 등을 통해 시민 편익과 지역 현안 해결을 위해 다양한 정책 대안을 제시했다.특히, 9대 의회는 지난해 지방자치법 전면 개정에 따라 의회 소속 사무와 직원들의 인사권을 독립하고, 정책지원관을 충원해 의회 전문성을 갖추는 등 의원들의 의정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여건도 마련했다. 그리고 의원과 직원들은 1년에 2회 이상 다양한 주제로 전문교육을 진행해 의정활동 역량 강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여기에 농촌사랑연구회와 문화복지정책연구회, 자치분권 및 지역재생연구회 3개 의원연구단체의 역할과 기능을 확대 및 강화하고 자치분권, 도시재생, 축제, 관광, 저출산 극복 등 정책 현안별로 워크숍 개최와 지역실정에 맞는 정책 모색을 위해 시민과 함께 정책토론회를 열기도 했다.이 같은 노력으로 권기익 시의회의장은 지방자치와 지역 사회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아 ‘2022 서울평화문화대상’ 교육문화자치 부문 의정대상과 전국지역신문협회가 주관하는 ‘제20회 지역신문의 날’에서 의정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권 의장은 지방의회 5선 시의원을 지내며 투철한 국가관과 사명감으로 현장 중심의 의정활동으로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소통과 화합의 정치를 실천하는 등 지역발전과 주민복리 증진에 크게 기여를 한 점을 공적으로 인정받았다.□ 소통과 화합의 정치 실현권기익 의장은 취임 1주년을 맞이한 소감에 대해 “9대 안동시의회가 개원한 지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지난 1년간 안동시 의회를 대표하는 의장으로서 더 발전하고 변화하는 의회의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했다”고 평가했다.그는 이어 “수동적인 의회가 아닌 먼저 발 벗고 나서는 현장 중심의 의정활동을 펼치는 등 의회 본연의 책무를 내실 있게 추진했다. 의원들의 정책을 지원할 정책지원관을 충원 배치하는 등 원활한 의정활동을 위한 장치를 마련해 놓았다”고 덧붙였다.주요 현안 추진 상황과 인사권 독립 뒤 달라진 의회 모습에 대해 권 의장은 “지방의회가 출범한 지 30년이 넘었고, 지난해 ‘지방자치법’ 전부개정에 따라 지방의회의 권한과 책임이 이전보다 강화됐지만, 아직도 현행 지방자치법상 지방자치단체장에게 많은 권한이 집중돼 있어 의회의 위상 제고를 위해서는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입각한 실질적인 자치분권 실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그는 또 “의회 소속 사무과 직원들의 인사권을 독립하고, 정책지원관을 충원해 의원들의 의정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여건도 어느 정도 갖췄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의원과 직원들의 의정활동 역량 강화를 위해서 1년에 2회 이상 다양한 주제로 전문교육을 하는 등 의회의 위상 강화를 위해 더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제9대 안동시의회 의정 성과권 의장은 지난 1년간 시의회의 주요 성과에 대해 “‘한 걸음 더, 시민 곁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의정역량 강화 교육을 지속적으로 실시해 의정활동의 이해도를 높이고 안건심사의 전문성을 강화해 왔다”고 자평했다. 그는 또한 “100일이 넘는 기간동안 회의를 개회하고, 10번의 임시회와 3번의 정례회를 거치며 일하는 의회를 구현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그 결과 다양한 분야의 현안을 다루는 양질의 조례 110건 이상을 제·개정했다”고 밝혔다.이어 그는 “모든 의원들이 하나의 조례를 만들기 위해 법률 자문을 체계적으로 운영하고, 조례 당사자와의 간담회를 진행하는 등 조례 입안 과정을 촘촘하게 준비해 의정 성과를 이뤄낼 수 있었다”고 그간의 성과를 자랑했다.권 의장은 이와함께 “의원 연구단체 운영 활성화와 연구단체의 역할과 기능을 확대 및 강화했다”며 “현재 생산적인 연구 결과를 가져올 현재 총 3개의 연구단체가 등록돼 간담회, 현장방문 등을 통해 안동시 현안에 맞는 연구 활동을 통해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하고자 머리를 맞대고 있으며, 지방자치법 개정으로 마련된 정책지원 전문인력을 채용해 의회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안동시 집행부와의 갈등에 대해서는 “안동시집행부와 시의회는 지역과 시민들을 위해 의견을 개진하고, 주장을 펼칠 순 있지만, 대립과 반목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며 “앞으로 대승적인 차원에서 집행부와 더욱 소통하고 시민을 위한 생활 정치에 전 시의원들이 최선을 다하겠다는 뜻을 함께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향후 과제와 전망그는 다만 지난 1년간 의회는 시민을 대변하는 의정활동을 펼치려고 노력했다. 안동시 집행부도 같은 목적을 위해 정책을 펼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주요사업, 조직개편, 예산안 등 시에서 추진하는 일부사업에서 소통이 부족한 점은 있었다는 생각이다”고 지적했다.권 의장은 특히 “의회와 집행부는 안동시 발전이라는 공동목표 아래 상생하는 동반자 관계로, 의회는 시정 전반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집행부와 현실적인 정책 제안을 제시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해 나갈 의무가 있다. 두 기관 간의 소통강화와 협력을 위해 원활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노력해 가겠다”고 강조했다. 가장 시급한 현황 과제로는 “대내외 경기침체와 세수부족에 시 재정난과 지역상권 위축이 가장 시급히 해결 되야 할 현안”이라며 “코로나19 이후 경기불황과 소비위축이 고착화 되면서 주민과 소상공인들이 생계를 위협받고 있다. 의회는 집행부와 함께 시 재정난읕 헤쳐 갈 방법을 고민하고 시민들의 경제적 부담을 완화할 수 있도록 민생경제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지원책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답했다.권 의장은 의장으로서 초지일관 실천하려는 목표가 있다. 바로 ‘일 잘하는 심부름꾼’이 되겠다는 것이다. 권 의장은 “안동은 경북도청의 이전으로 여전히 발전 잠재력이 무궁무진한 도시지만 현재 성장속도는 시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 시의원은 시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지역의 현안을 신속히 파악하고, 핵심을 보는 일꾼이 되야한다. 안동시민의 행복을 지키는데 앞장서고, 시민의 대표기관인 만큼 최고의 행정서비스가 이뤄지는 안동시를 만들어 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권 의장은 “시민 한 분 한 분의 목소리를 허투루 듣지 않고 그 마음에 공감하며 안동시의회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는 걸 체감할 수 있는 의정활동을 펼치고 싶다”며 “원인과 해법을 정확히 짚고 변화하는 환경에 유연한 태도로 시민의 삶에 밀접한 현안은 더욱 밀도를 높여 촘촘히 살피고 문제의 본질에 집중하고, 선택과 집중을 통해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18명의 마음과 지혜를 모아 시민이 공감할 수 있는 발전적인 정책 대안으로 시민여러분께 신뢰를 드리는 안동시의회를 만들어 가겠다”고 약속했다./피현진기자 phj@kbmaeil.com

2023-09-17

마음의 평화 찾아 떠나는 아름다운 순례 ‘섬티아고 길’

프랑스 남부의 국경마을 생 장 피에 드 포르(Saint Jean Pied de Port)에서 시작해 스페인 북서쪽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무려 800㎞를 걷는 순례길이 있다. 수많은 전 세계 여행자가 걸었던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발톱이 빠지는 극한의 고통을 견디며 사람들은 산티아고까지 걷고 또 걸었다. 순례를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는 몸부림일 것이다. 규모는 여기보다 훨씬 작지만 국내에도 마음을 순화시키는 아름다운 순례길이 있다. 일명 ‘섬티아고 길’이라고 불리는 전남 신안군 기점·소악도의 ‘12사도 순례길’이다. 가을이 시작되는 눈부신 계절 12사도의 이름을 딴 독특하고 예쁜 건축물을 찾아 신안으로 떠나면 깊은 감동과 행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예수의 12제자 이름을 딴 건축미술배를 타고 가다 대기점도 선착장에 내리는 순간 그리스 산토리니풍의 하얀 건물이 보였다. 12사도 순례길의 시작점이자 오가는 배를 기다리는 공간이다. 건물은 한두 명이 들어가면 꽉 차는 미니 예배당(기도소)과 작은 종탑, 그 옆에 붙어 있는 화장실로 된 단출한 구조다. 건물 사이에 낮게 매달린 작은 종을 울리자 청아한 종소리가 바다를 가르며 물밑으로 떨어졌다. 순례의 시작이다.기점·소악도는 염전이 유명한 증도 옆 병풍도에 딸려 있다. 병풍도는 ‘맨드라미 섬’으로 불린다. 신안군이 주민들과 힘을 합쳐 약 2만㎡의 황무지를 꽃밭으로 탈바꿈시켰다. 약 200만 송이의 맨드라미를 심어 꽃동산을 만들고 맨드라미 거리도 조성했다. 집집마다 지붕을 빨간 색으로 칠했다. 꽃동산에서 내려다보면 마을 풍경이 만화 같다. 병풍도는 대기점도, 소기점도, 소악도, 진섬 등 작은 ‘새끼섬’을 거느린다. 이 다섯 개의 섬이 노두로 이어진다.기점·소악도에 있는 12사도 순례길은 대기점도, 소기점도, 소악도, 진섬, 딴섬을 연결하는 길이다. 때론 섬을 관통하고 섬과 섬 사이를 연결하는 노둣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 사색의 길이기도 하다. 병풍도, 대기점도, 소기점도, 소악도를 잇는 3개의 노두를 다 합치면 길이가 1.7km가 넘는다. 지금은 말끔한 새 노두가 놓였지만 20~30년 전에는 “망태, 바지게 지고 돌을 날라 만든” 투박한 노두가 있었단다. 썰물 때 갯벌이 드러나면 새 노두 옆으로 옛 노두의 흔적이 드러난다. 이 길을 더욱 신비롭게 하는 것은 물이 차면 사라졌다가 약 3~4시간 뒤에 하루 두 번 물이 빠지면 길이 열리는 신안의 자연이다. 물때를 기다리며 걸음을 멈추면 안 보이던 것이 보이고 귀도 열린다. 싱싱한 갯벌도 눈에 들어온다. 신안갯벌은 서천 갯벌(충남 서천), 고창 갯벌(전북 고창), 보성-순천갯벌(전남 보성·순천)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됐다. 신안 갯벌이 압도적으로 넓다. 노둣길과 함께 신비스런 풍경을 가졌다 하여 12사도 길은 기적의 순례길로도 불린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힌트를 얻어 ‘순례자의 섬’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지금은 섬티아고라는 애칭으로 더 익숙하다.12사도길의 처음부터 끝까지 12곳에 세워진 각양각색의 예배당은 특정한 종교의 상징물이 아니다. 어떤 신을 믿든 절대자 앞에 자신을 내려놓는 성찰의 공간이다. 12개의 작은 예배당을 짓는 프로젝트에는 11명의 설치미술 작가가 참여했다. 국적은 제각각이다. 강영민, 김강, 김윤환, 박영균, 손민아, 이원석 등의 한국 작가와 장 미셀 후비오(프랑스), 파코(프랑스·스페인), 브루노 프루네(프랑스), 아르민딕스(포르투갈), 에스피 38(독일) 등의 외국 작가들이 힘을 보탰다.신안군은 작가의 개성을 최대한 존중해 교회를 어떤 형태로 만들든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같은 예배당인데도 어떤 것은 성당을 닮았고 또 어떤 것은 러시아정교회처럼 둥근 지붕으로 세워졌다. 현실에서는 쉽지 않은 종교 간 화합을 건축으로 이뤄냈다.교회를 세울 장소도 작가들이 직접 물색했다. 숲속과 언덕, 호숫가, 마을 입구, 심지어 밀물이 되면 물에 잠기는 노둣길 중간에도 작품이 세워졌다. 작가들은 섬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 한국적인 소재를 건축물 속에 적극 활용했다. 돌절구, 구유와 연자방아의 받침돌 등도 건축 소재로 쓰였다. ◇교회 건축물에 녹인 섬사람의 삶건축물을 만들며 작가들은 작품 속에 섬사람의 삶과 이야기를 녹여 넣었다. 12사도 순례길의 두 번째 교회인 ‘생각하는 집 안드레아’에는 양파 모양의 지붕에 고양이가 앉아 있다. 이곳 성소가 고양이를 상징물로 택한 이유가 있다. 30여 년 전, 마을이 들쥐로 인해 농사에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자 쥐를 퇴치하기 위해 고양이를 섬으로 들여와 키우기 시작했다. 양파 모양의 지붕은 섬사람 대부분이 양파를 재배한다는 데 착안해서 건축물로 형상화했다.논둑길 끝 고요한 숲 속에는 동화 속에 등장하는 오두막 같은 ‘그리움의 집(야고보)’이 있다. 소기점도와 소악도 노두 앞의 ‘행복의 집(필립)’은 프랑스 남부지방의 전형적인 건축형태를 보여준다. 적벽돌과 갯돌, 적삼목을 덧댄 유려한 지붕 곡선과 물고기 모형이 독특하다. 소기점도 작은 호수에 떠 있는 ‘감사의 집(바르톨로메오)’은 전체가 유리로 마감됐는데 밤이 되면 은은한 불빛이 흘러나온다. 전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인증샷’명소다. 12사도 교회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장 미셀 후비오와 파코 작가가 만든 ‘필립의 집’이다. 프랑스 남부 툴루즈 지방에서 온 이들은 고향의 붉은 벽돌과 섬에서 채취한 자갈로 교회를 세웠다. 섬 사람이 사용했던 돌절구는 둥근 창문이 됐고 물고기 비늘 모양으로 잘라 얹은 지붕은 뾰족한 첨탑형으로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다. 전통적인 나무배의 형상을 떠올리게 하는 실내 구조도 특이하다. 이곳에서 노둣길과 바다를 바라보면 계절과 시간, 물때에 따라 변화하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소기점도를 지나 소악도로 넘어가는 노둣길 중간에는 ‘마태오의 집’이 있다. 밀물이 돼 노둣길이 바닷물에 잠기면 교회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집이 된다. 마태오의 집은 황금빛 양파 지붕이 러시아정교회를 닮았다. 12개 예배당 중 최고의 포토존이다.호수 위에 세워진 ‘바르톨로메오의 집’도 이색적이다. 저수지의 물을 사흘 동안 퍼내고 8개월이나 걸려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 풍경은 저녁에 특히 아름답다. 스테인리스 구조물과 스테인드글라스의 채색이 화려한 빛과 만나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한다.12번째 제자이자 예수를 배신한 ‘가롯 유다의 집’은 프랑스의 남부 도시 몽생미셸의 성당을 연상시킨다. 순례를 마칠 즈음 낙조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햇살은 금가루를 뿌리며 산란하고, 갯벌은 몸을 뒤척이며 밤을 맞을 채비를 서두른다. 해는 분분히 바다 밑으로 자취를 감추고 12사도 교회도 어둠 속에 평안히 잠이 들었다. 여행수첩신안 순례자의 길을 가는 방법은 세 가지다. 신안군 지도읍 송도 선착장에서 병풍도 선착장으로 가는 배(25분 소요)를 이용하는 방법과 목포에서 가까운 신안군 압해읍 송공 선착장에서 소악도(40분 소요)로 가는 방법, 셋째는 송공 선착장에서 대기점도(70분 소요)로 가는 방법이다. 물때를 잘맞춰야 순례자의 길을 다 걸을 수 있다. 당일에 걸을 수 있지만 1박을 하고 차분하게 돌아보면 섬의 아름다운 풍경을 덤으로 즐길 수 있다./최병일 작가

2023-09-14

향긋한 송이향 따라 봉화로 놀러오세요

올해로 27회를 맞는 봉화송이한약우축제가 오는 21일부터 24일까지 4일간 경북 봉화읍 내성천 및 관내 송이산 일원에서 ‘송이향에 반하고, 한약우 맛에 빠지다’라는 슬로건으로 개최된다.수해의 아픔을 이겨내고 열리는 이번 축제는 풍성한 볼거리와 즐길거리, 먹거리 등이 풍성하게 준비된다. 기존 판매행사 위주의 축제에서 탈피해 가족 단위의 관광객들이 즐길 수 있도록 체험 위주의 다채로운 연계행사들이 함께 진행된다.특히 올해는 송이축제 대표 콘텐츠인 송이채취체험을 비롯해 ‘도전! 송이한약우 골든벨’ 등 다양한 체험행사와 오색오미 대형 비빔밥 퍼포먼스, 개막 및 폐막 축하공연, 봉화송이한약우 가요제 등 다채로운 공연행사가 마련된다.송이판매장터와 송이한약우 먹거리 식당 등 다양한 먹거리들도 판매해 관광객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예정이다. 청량문화제와 봉화송이전국마라톤대회 등 연계행사도 풍성해 다채로운 문화·체험 행사를 통해 색다른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 눈과 귀를 즐겁게 해줄 다양한 공연개막 첫날인 21일에는 내성천 특설무대 앞 잔디광장에서 지역에서 생산되는 다양하고 신선한 나물과 봉화송이, 한약우로 만든 비빔밥을 방문객들에게 무료로 나눠주는 제2회 오색오미 대형 비빔밥 퍼포먼스를 시작으로 축제의 막을 올린다.오후 7시부터는 송이축제의 성공적인 개최 염원을 담은 개막선언과 함께 봉화 홍보대사 최우진, 인기가수 김다현, 현숙, 김용필, 신성이 출연해 멋진 공연을 선보이며 축제의 분위기를 한층 띄울 예정이다.이밖에도 축제기간 동안 내성천 특설무대에서는 매일 다양한 테마 공연이 펼쳐져 청명한 가을하늘 아래 축제장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준다.다문화 출신 가수들이 펼치는 힐링 콘서트 ‘공감’과 유명 개그맨이 진행하는 관광객 참여형 코미디 토크쇼 ‘Talk까놓고 말해보Show!’, 전국 각지 가수 지망생들의 열정이 가득한 제1회 봉화송이 한약우 가요제 등도 펼쳐져 서정적인 가을 분위기를 더욱 풍요롭게 한다.축제 마지막날인 24일에는 스탠딩에그, 유해준, DK(디셈버), 스페이스A가 출연해 전 세대를 아우르는 폐막축하공연과 300여 대의 다채로운 LED 드론을 활용한 멀티미디어 컬러 드론 라이트 쇼를 선보이며 축제의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할 계획이다. □ 송이 채취체험하고 송이 한약우도 맛보고올해는 봉화군의 우수 농특산물을 방문객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체험행사들로 축제를 더욱 알차게 준비했다.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송이축제 대표 콘텐츠인 송이채취체험은 축제기간 중 매일 오전 10시, 오후 2시 관내 송이산 일원에서 진행된다.솔향기 그윽한 소나무 숲의 맑은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며 송이를 직접 채취해 보는 체험은 각 회당 100명씩 선착순 사전접수를 통해 무료로 참여할 수 있다.봉화송이 및 한약우와 관련된 퀴즈를 통해 숲속도시 봉화를 알아보는 도전! 송이 한약우 골든벨은 24일 오후 4시부터 내성천 특설무대 앞 잔디광장에서 펼쳐진다.이외에도 품질좋은 등급별 송이를 구매할 수 있는 송이 판매장터와 안동 봉화축협에서 주관하는 한약우 홍보관 및 판매장터도 열려 맛과 품질이 우수한 봉화한약우를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또한 봉화군의 우수 농특산품을 직접 비교하며 구매할 수 있는 농·특산품 홍보 및 판매장터, 송이와 한약우의 화려한 조합을 맛볼 수 있는 송이 한약우 먹거리 식당도 운영된다.□ 문화, 전시, 체육 연계행사도 풍성축제기간 동안 진행되는 연계행사도 풍성하다.봉화군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베트남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고장인 만큼 베트남의 전통문화를 엿볼 수 있도록 축제기간 중 22일을 베트남의 날로 지정해 아이부터 어른까지 맞춤형 베트남 문화 체험을 하며 다문화 감수성을 높이는 기회를 제공한다.더불어 봉화군의 우호교류 도시인 박린성의 국제공연단 초청 전통 민속공연과 세계유교문화재단에서 주관하는 대형 창작 뮤지컬 ‘리롱뜨엉’도 진행된다.또한, 목재친화도시 플랫폼 구축을 위한 목재문화행사와 봉화출신 정치가이자 청백리에 선발된 계서 성이성(이몽룡) 문화제 등 봉화 곳곳에 숨겨진 관광명소들을 축제장에서 경험해 볼 수 있도록 준비했다.고유의 전통민속놀이를 재현한 주민화합의 한마당을 만드는 지역의 대표적인 연계문화행사인 제40회 청량문화제는 전국 한시백일장, 삼계줄다리기, 학생사생대회, 전국청량백일장, 장기대회, 작은음악회 등 다양한 문화행사와 다채로운 전시 및 체험행사로 구성돼 지역의 많은 문화단체들이 그동안 갈고닦은 기량을 뽐낼 예정이다.이밖에도 이색 열기구 체험인 오감만족! 봉화 하늘여행, 2023 봉화송이한약우배 전국 동호인 축구대회 및 테니스 대회, 2023 어린이집 연합운동회 아이사랑가족대축제, 가족건강걷기대회, 제11호 봉화송이전국마라톤대회 등 다양한 문화, 전시, 체육 연계행사도 열려 축제를 더욱 풍성하게 할 계획이다. □ 안전한 축제로 만족도 높여봉화군은 군민과 관광객 안심 축제 구현을 목표로 철저한 안전관리 계획을 수립하고 경찰, 소방, 전기, 가스 등 안전관련 유관기관과 협의해 안전사고 제로화에 힘을 쏟을 예정이다.또한, 최근 이슈가 된 바가지 요금과 관련해 바가지 요금 근절 의지를 담은 가격 표시제를 추진하고 업체 입점 자격 요건을 강화해 관광객들의 신뢰를 회복하고 관광 친화도시 이미지를 조성해 축제 만족도를 높일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박현국 봉화군수(봉화축제관광재단 이사장)는 “수해로 인한 아픔을 극복하고 개최하는 첫 축제인 만큼 다양성이 가득한 행사들을 준비했으니 숲속도시 봉화에 방문하셔서 좋은 추억 만들며 힐링하고 가시길 바란다”고 밝혔다./박종화기자 pjh4500@kbmaeil.com

2023-09-14

농민의 땀방울로 키운 ‘영주 특산품’으로 한가위 情 나누세요

농부의 땀방울과 사랑으로 키워진 영주농특산물이 소비자의 신뢰도를 쌓으며 인기몰이 중이다.영주시에서 생산되는 농특산물은 농심과 함께 천혜의 자연환경에서 생산돼 그 우수성이 더해져 소비자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이러한 인기몰이는 농가소득과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영주시의 특화된 농업정책과 이를 바탕으로 현장에서 농가들의 기술 접목, 우수제품 생산을 위한 관계기관 및 작목반들의 연구 노력의 결과가 모여 소비자들로부터 신뢰를 받는 원인이 되고 있다.특히 1차 산업에서부터 6차 산업에 이르기까지 생산된 제품에 대해 국내외 판로 확보와 소비자 신뢰도가 소비로 이어지기까지 유통 관련 지원업무가 적극 뒷받침된 것도 중요한 몫을 하고 있다.영주시는 소비자로부터 신뢰받는 농특산품 개발과 영주장날 쇼핑몰을 활용한 판매 확대,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만들어 가는 행복 먹거리 발굴을 위한 프드플랜 구축 등에 적극 나설 계획이다. □ 풍기 인삼국내 최초 재배삼의 시배지인 영주 풍기 지역은 500여년의 재배인삼 역사를 통해 품질이 우수한 인삼을 생산하고 있다.소백기슭의 풍부한 유기물과 대륙성 한랭기후와 배수가 잘되는 사질양토로서 인삼이 생육하기 좋은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어, 타지방보다 육질이 단단하며 유효사포닌 함량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인삼의 효능은 많은 연구결과 인삼을 장기적으로 복용하는 사람은 체내에서 병 발생에 대한 위험도를 감소시켜 효과적으로 병을 예방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홍삼제품에는 홍삼절편삼, 홍삼차, 홍삼정과, 홍삼정, 홍삼타브렛, 홍삼액, 홍삼분말, 인삼분말, 홍삼정, 홍삼캡슐, 홍삼비누, 홍삼제리, 홍삼캔디 등이 있다.문의 : 풍기인삼공사영농조합법인 054)638-2304.풍기인삼협동조합 054)636-2714. □ 영주사과영주시는 국내 사과 생산의 14.5%를 차지하는 전국 제1의 사과 주산지다.영주사과는 산록지대를 중심으로 천혜의 자연속에서 생산 되며 풍부한 일조량과 깨끗한 공기,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에 의해 맛과 향이 뛰어나며 성숙기 일교차가 커 사과의 향기와 당도가 높다.영주사과는 포장단위를 5kg, 10kg와 소비자들의 다양한 구매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봉지 사과를 출시하는 등 소비 다변화에 적극 대응하고 있다.최근 미국 및 말레이시아, 태국, 마카오, 홍콩, 대만,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시장에서 영주사과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수출 물량도 매년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문의 : 영주농협공판장 054)636-8594.풍기농협공판장 054)636-3209. □ 영주한우천혜의 환경을 자랑하는 소백산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에서 사육된 영주한우는 개량된 암소에 1등급 정액으로 인공수정해 생산된 우량 숫송아지를 5-6개월에 거세하고 한우고급육 표준사양관리프로그램에 의해 사육한다.영주한우는 위생 및 질병 안정성을 위해 부루세라병 등의 악성가축전염병을 차단하고 축산물의 위생·안정성에 대한 소비자 신뢰확보를 위해 사육 · 도축 · 가공 · 판매에 이르기까지 정보를 기록 · 관리하는 쇠고기 이력추적시스템을 2006년부터 실시해 소비자들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안전한 축산물을 생산하고 있다.영주한우는 2006년 쇠고기 이력추적 시범 경영체로 선정된데 이어, 농림부가 후원하고 (사)소비자시민모임에서 주관하는 2007년도 우수축산물브랜드로 인증받았다.문의 : 영주축협본점직판장 054)630-6710.횡재먹거리 한우 054)638-0094.□ 풍기인견풍기인견은 땀 흡수력이 탁월하며 정전기가 없고 부드러우며 식물성 자연섬유로 피부가 여린 갓난아기, 알레르기성 피부, 아토피성 피부 등 피부가 약한 분들에게 좋은 건강섬유다.가볍고 얇아서 여름 실내복, 반바지, 잠옷, 침구류, 천연염색을 한 외출복 등 다양한 제품들이 출시되고 있어 선물용으로 인기가 많다. 연로하신 노인 분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효도 상품으로 주목받고 있다.2012년 3월 5일 지리적 표시 단체표장등록과 (특허청 제44-0000142호), 한국능률협회인증원으로부터 2008년 4월 15일에서 2023년 4월 14일까지 15년 연속 특산명품 웰빙인증을 받았다.문의 : 풍기인견발전협의회 054)631-8866. □ 고구마빵영주지역에서 재배한 고구마는 당도가 높고 품질이 우수해 고구마빵을 만드는데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전국 최초로 지역에서 생산되는 순수 국내산 고구마을 활용해 고구마빵을 만들어 상품화했다. 고구마빵 전문업체인 미소머금고와 고구맘은 영주에서 재배한 고구마를 활용해 빵을 만들고 있다. 고구마는 칼륨성분이 많은 알칼리성이며 각종 비타민과 무기질 및 양질의 식이섬유가 함유된 건강식품이다.문의 : 미소머금고 054)638-1799.고구 맘 054)638-5955. □ 정도너츠영주지역에서 생산되는 국내산 찹쌀을 주원료로 사용하는 찹쌀 도너츠로 지역의 특산물인 인삼, 사과, 생강, 고구마 등을 재료로 만든 웰빙 식품이다.찹쌀을 주재료로 하기 때문에 밀가루로 만든 도너츠 보다 영양 성분검사를 해보면 적게는 7배 많게는 10배 이상 지방함량이 낮게 나오며 콜레스테롤과 트렌스지방이 0%로 먹을거리로 맛과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문의 : 054) 631-0061. □ 영주 쌀영주다이어트쌀은 소백산 자락에서 재배한 순수 국산 농산물로 2006년 농림부 선정 신지식인 197호 김기원씨가 정성 들여 생산 가공한 제품이다. 기호에 따라 깜찰, 날씬미, 백찰 혼합해 먹어도 좋다.문의: 삼진미곡처리장 대표 신지식인 김기원 (054)635-8480.이 밖에도 밥맛이 좋고 윤기 있고 구수한 소백산선비골쌀, 밥맛이 우수한 추청벼의 쌀에 전통가마에서 고온으로 구운 참숯을 넣어 포장한 참숯과의 만남 등이 소비자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다.문의 : 안정농협미곡종합처리장 054)632-4572.농협중앙회·농협하나로마트·영주축협·영주농협파머스마켓/김세동기자 kimsdyj@kbmaeil.com

2023-09-13

“내 인생의 자부심, 제1고로 제2대 화입식”

박태준 회장의 ‘제철보국’ 기치 아래 진행된 포항제철 건설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 경제와 관련된 박정희 대통령의 최대 관심 사업이기도 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건설 초기부터 여러 차례 포항을 찾아 공사 현장을 점검했다. 당시 포항제철 직원들은 그 시절과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홍성식(이하 홍) : 박정희 대통령이 포항제철 공사 현장을 자주 찾았지요?한경식(이하 한) : 1970년 4월로 기억해.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정비공장을 시작으로 한 종합 착공식을 마치고 상황실에서 건설 공정에 관한 브리핑을 하는데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터졌어.홍 :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한 : 당시 김완주 건설기획실장과 나는 상황실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마련된 조작실에서 대기 중이었어.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에게 공정표를 펼치고 설명을 이어가던 박태준 회장이 갑자기 바깥으로 나가는 거야. 모두 깜짝 놀랐지. 박 회장을 대신해 윤동석 부사장이 브리핑을 이어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축적된 피로와 스트레스 탓에 박태준 회장에게 위경련이 온 거야. 부랴부랴 대통령 주치의가 응급처치했지.홍 : 국가원수가 참석한 브리핑에서 그런 일이 생겼으니 모두 당황했겠군요. 그 후 어떻게 됐습니까?한 : 윤동석 부사장의 설명이 끝난 후 그 긴장된 시간에 박 대통령이 압연공장과 고로의 위치에 대해 질문하는 거야. 당시 윤동석 부사장은 공장과 고로를 축소해 만든 모형에 익숙하지 않았거든. 그러니 설명하다 실수할 수도 있었지. 그때 내가 임기응변으로 윤 부사장이 답변을 잘할 수 있게 조작실에서 작은 빨간 등을 깜빡거려 공장과 고로의 위치를 알려줬어. 한 가지 더 기억나는 것은 그런 상황을 눈치챈 육영수 여사가 나갈 때 조작실을 향해 수고가 많다는 듯 웃으며 자상하게 손을 흔들어주던 모습이야.홍 : 1972년에 포항제철에 만들어진 ‘주물선 건설추진반’에 대해 이야기 좀 해주시죠.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한 : 주물선 공장은 초기에 상당 기간 적자를 면치 못할 거라고 전망돼 회사로서는 달갑지 않은 설비였어. 어쨌건 최환용 건설반장 등 추진반 다섯 명이 서울 사무소에 파견돼 휴일도 없이 사업계획서를 작성하고 예산을 편성하며 구입 사양서 등을 작성했어. 그때도 잊지 못할 일을 겪었지.주물선은 용광로에서 나온 용선에 철·실리콘 합금인 페로실리콘을 첨가해 덩어리 모양으로 굳힌 선철(銑鐵)을 지칭한다. ‘주물’이란 쇳물을 틀에 넣고 원하는 모양으로 만드는 과정이고, ‘선’은 선철을 줄인 말로 쇳물을 의미한다. 주물선은 주물선 출선-전·후 배재 처리-주선 처리-야드 저장-제품 선별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는 것이 제철 전문가들의 설명이다.홍 : 어떤 문제였습니까?한 : 본사에서 ‘70일 공기 단축’ 지시가 떨어진 거야. 그런데 협조해줘야 할 일본 회사가 난색을 표명했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악재가 이어져 석유파동이 일어났지. 그때 포항제철은 한 번 세운 목표는 어떤 이유로도 변경할 수 없었어. 비상이 걸렸지. 이영우 부장이 당장 일본으로 건너가 강력하게 도움을 요청하고, 한국에 남은 우리도 병행작업 실시와 돌관 야간작업 등을 숨 가쁘게 진행했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모두 사표를 내고 영일만에 뛰어들겠다며 전쟁에 임한 군인처럼 일했지.홍 : 힘겨운 시간이었겠군요.한 : 섭씨 30도가 넘는 무더운 여름에 미친 사람처럼 현장을 바쁘게 오갔지. 그 험난한 과정을 일일이 설명하려면 하루로는 부족해. 어쨌건 결과적으로 열풍로 건조를 위한 화입식(처음 불을 넣는 일을 축하하는 의식) 전날 부산항에 도착한 건조용 버너를 밤을 꼬박 새워 설치해 열풍로 화입식을 할 수 있었어. 지금도 많은 사람이 말해. “주물선 공장은 포항제철 설비 중 가장 힘들고 고된 작업이었다”고. 1974년 10월 1일, 70일 공기 단축을 성공적으로 달성한 그때 일은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거야. 열풍로는 용광로에 열풍을 불어넣는 장치로 모양은 철판으로 된 원통인데, 지름이 6미터, 높이는 20미터 이상이다. 원통의 외피 속에 내화벽돌이 격자 모양으로 쌓여 있다. 이 안에 있는 내화벽돌층 사이에 용광로의 고로가스를 통과시켜 예열하고, 다음에 벽돌층 사이로 냉풍을 보내 열풍을 만든다. 이 열풍의 온도는 섭씨 600∼800도다. 이렇게 예열한 열풍이 용광로 내로 송풍된다.(『두산백과』에서 인용)홍 : 그 외에도 포항제철 건설 초기에 예상하지 못한 사고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한 : 그랬지. 날짜까지 떠오르는데 1977년 4월 24일 일요일이었어. 오랜만에 즐기는 휴일이라 늦잠을 자고 있는데 근처에서 소방차 사이렌이 크게 울리는 거야.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알아보니 회사에 불이 났다고 하더군. 그때는 내가 제1고로 추진반장을 맡고 있던 터라 긴급출동 연락을 받지 못한 거지. 그래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걱정되어 바로 회사로 갔어.홍 : 현장에서 발생한 화재가 컸나요?한 : 급하게 회사로 달려갈 때는 엄청나게 큰 불일 거라고 예상했지. 정문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제1제강에 화재가 발생했다”고 하더군. 하지만 바깥에서 보기엔 다행히 상황이 크게 나쁘지 않은 것 같았어. 진화작업도 순조로운 것 같았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현장으로 접근했어. 그런데 소방관들은 보이는데 정비요원들이 어디로 갔는지 없더라고. 제강건설 부서에 근무하며 일본에 연수도 다녀왔고, 전기는 내 전문 분야잖아. 그 감각으로 살펴보니 지하에 있는 케이블이 타면서 전기실로 연기가 퍼지고 있었어.홍 : 심각한 상황이었습니까?한 : 그랬지. 그래서 급하게 정비요원들을 찾았더니 다들 회의 중이라고 하는 거야. 당장 회의실 문을 열고 “지금 뭐하는 거냐”고 소리쳤지. 지하에서 타고 있는 불이 변전소로 옮겨갈 수 있다고 상황을 설명하니, 복구 회의 중이던 사람들이 그때서야 사태가 끝난 게 아니란 걸 알게 되었어. 내 의견을 받아들인 김준영 이사의 지시로 정비요원들의 응급 대처가 진행되었지. 불이 더 이상 번지지 않도록 지하의 케이블을 급하게 절단하는 등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전기실 기기가 적지 않게 파손되었어. 그래도 거기서 화재를 잡았으니 불행 중 다행이었지.홍 : 화재의 원인은 무엇이었고, 어떤 재발 방지 대책을 세웠나요?한 : 크레인 기사가 졸음운전을 하다가 전로(轉爐: 철을 제련할 때 압착된 공기를 불어 넣고 높은 열을 가해 불순물을 산화시켜 흡수함으로써 순수한 금속을 만드는 용광로)에 부어야 할 쇳물을 바닥에 쏟은 거야. 천만다행으로 사람이 죽거나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 화재는 포항제철 역사상 큰 피해를 입힌 사고 중 하나로 기록되었어. 화재가 있었던 그다음 날 복구본부를 만들었지. 김준영 이사가 본부장을 맡았고, 나도 기획조정 담당을 맡아 신속한 복구를 통해 철강 생산이 되도록 빨리 재개될 수 있도록 노력했어. 그때도 밤샘을 밥 먹듯 했지.(웃음)홍 : 포항제철의 탄생과 성장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며 장년 시절을 보내셨군요. 돌아보면 가슴 뿌듯한 기억도 많을 듯합니다.한 : 제1고로 제2대 화입식이 열렸던 날도 잊을 수 없어. 그 프로젝트도 애초엔 공사 기간이 78일로 예정됐지만, 57일 만에 마쳤지. 그게 우리나라 최초의 고로 개수작업이었어. 나를 포함해 작업을 진행했던 선후배들이 목이 쉴 정도의 큰 함성으로 만세를 불렀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전례가 없는 일을 해낸 것이니까. 말할 것도 없이 그날의 기억은 내 인생의 자부심으로 남았어.한경식1935년 전남 나주 영산포읍 오량리에서 태어났다. 광주농업학교를 거쳐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갔으나 4학년 때 중퇴했다. 이후 전남대 전기공학과에서 공부했다.대학을 마친 후 1961년 대한석탄공사에 입사해 장성광업소 전기계장으로 일하다가 1968년 포항제철로 회사를 옮긴다. 제2고로 건설과장, 제1고로 개수추진부장, 제선공사부장, 건설본부장(상무이사) 등을 거치며 포항제철의 초기 역사를 눈앞에서 지켜보았다. 1990년대엔 포스코 계열사라고 할 수 있는 승주골프장 대표이사를 지냈고, 축구팀 전남드래곤즈의 창단 작업을 주도해 사장을 맡았다.수준급의 솜씨를 지닌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하다. 홍익대 미술대학원 현대미술 최고위과정을 수료했으며, 여러 차례 개인전과 회원전 등을 열었다. 한국 제철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1981)과 산업포장(1988)을 받았고, 프로축구대상 특별상(1995)을 수상했다. 대담·정리 : 홍성식(본지 기자)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포스코

2023-09-13

거대한 고목 같은 아버지를 뛰어 넘으려 했던 문무왕

현대와 고대가 크게 다를 바 없다. ‘외교’는 국가 발전을 추동한다.이웃한 나라들과의 교류를 통해 얻어낼 건 얻어내고, 양보할 것은 양보함으로써 전쟁의 위험성을 줄이고, 경제 발전의 포인트를 찾아내는 건 7세기에도 중요한 일이었고, 21세기에도 여전히 중요하다.그래서다. 통치자에겐 ‘탁월한 외교 전략가’ 하나를 가지는 게 용맹한 장수 열을 가지는 것보다 더 큰 힘이 될 수 있다.그런 차원에서 청년 시절의 김춘추(무열왕·603~661)는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에게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를 받았다.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듬직한 신하였던 것.문무왕 김법민의 아버지 김춘추가 왕이 되기 전 어떤 외교적 성과를 보였고, 당시 초강대국 당나라에서 어떤 활약을 했으며, 그를 응접한 당나라의 태도가 어떠했는지는 ‘삼국사기’에 잘 기록돼 있다. 아래 인용한다.“648년 12월 김춘추는 아들과 함께 당(唐)에 입조하였고, 태종(太宗)의 환대를 받았다. 김춘추는 이곳에서 국학(國學)을 방문해 석전(釋奠)과 강론(講論)을 참관하였으며, 신라의 장복(章服)을 고쳐 중국의 제도에 따를 것을 청했다. 당 태종으로부터 특진(特進)의 벼슬을 받고, 당에 체류하던 중 태종의 호출로 불려가 만나게 된 자리에서 백제 침공을 위한 지원군을 요청해 허락받았다…(중략) 김춘추가 신라로 돌아갈 때 당 태종은 3품 이상의 관인들을 불러 송별연을 열었고, 귀한 책과 글씨를 선물했으며, 장안성(長安城)의 동문(東門) 밖까지 나가 직접 전송했다.” ◆당나라 왕과 관료들 매료시킨 김춘추의 외교 전략위의 문장을 지금의 형식으로 풀어 쓰면 ‘마흔다섯 살 신라인 김춘추는 중국 당나라를 방문해 국립대학에서 하늘에 올리는 제사와 학자들의 강의를 참관해 주목받았고, 높은 벼슬까지 얻었다. 이와 더불어 백제를 공격할 병사들을 지원하겠다는 당나라 왕의 약속을 받아낸 후 성대한 환송연 끝에 귀한 선물을 잔뜩 가지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왔다’ 정도가 될 터.2023년 오늘날 이 정도의 외교 성과라면 차관은 장관으로, 장관은 총리로 승진했을 게 분명하다.삼국통일의 과정에서 무신(武臣)으로서 최고 능력을 발휘한 건 단연 김유신이었다. 그렇다면 가장 빼어난 신라의 7세기 문신(文臣)은 누굴까? 답은 이미 나왔다. 김춘추다.김춘추는 중국어는 물론 일본어도 능숙하게 구사했으며, 선풍도골(仙風道骨)의 외모에 반한 당나라 귀족부인들이 추파를 던졌다는 야담(野談)까지 전한다. 그는 안팎이 모두 매력적인 사내였던 것이다.역사학자 박현숙 교수의 논문 ‘삼국유사 기이편 태종 춘추공조의 내용 구성과 의미’에서도 김춘추라는 이름은 여러 차례 등장한다. 박 교수는 그에 관한 학계의 엇갈리는 평가까지 서술하고 있다. 이런 대목이다.“천년의 신라 역사에서 중요한 분수령을 들라고 한다면, 신라의 삼국통일일 것이다. 그리고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김춘추와 김유신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김춘추와 김유신은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그동안 우리 역사에서 조명을 받아왔다…(중략) 김춘추에 대한 평가는 ‘외교를 잘 구사해서 실리를 도모한 군주’라는 평가와 ‘외세 의존적이고 반민족적인 행위를 한 음모가’라는 평가가 상존하고 있다. 그러나 근래의 연구에서는 부정적인 평가보다는 삼국통일에 있어서 김춘추의 정치·외교적 역량을 파악하고, 그를 매개로 당시의 대내외적인 상황을 복원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아버지를 넘어서야 한다’는 김법민의 강박 관념돌올하고도 빼어났다. 김춘추는 그런 인물이다. 지나치게 잘난 부친을 둔 아들은 ‘어떻게든 아버지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가지기 십상이다. 이는 극복하기 어려운 콤플렉스가 되기도 하다.문무왕 김법민은 김춘추의 아들. 아버지가 잘 닦아놓은 고속도로 위를 달려 고구려를 병합하고, 당나라를 몰아냄으로써 삼한일통(삼국통일)의 구체적 그림을 완성시킨 사람이 바로 문무왕이다.하지만, 나무가 크면 그늘도 짙은 법. 문무왕은 평생 거대한 고목(古木)처럼 자신 앞에 버티고 선 아버지의 그림자를 넘어서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압박감 속에서 살았을 듯하다.캐나다 총리인 쥐스탱 트뤼도(Justin Trudeau·52)는 잘생긴 외모로 유명한 정치인이다.세계 각국의 대통령과 총리가 모이는 G8 또는, G20 정상회담에서 그는 여타의 지도자들을 압도한다. 190cm에 육박하는 큰 키에 영화배우 같은 얼굴. 거기에 더해 탁월한 친화력과 외교적 수완까지. 그런 트뤼도 총리 역시 ‘아버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현 캐나다 총리 쥐스탱 트뤼도의 아버지는 피에르 트뤼도(1919~2000) 전 총리. 나무위키는 피에르 트뤼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캐나다 자유주의 진영의 신화와 같은 존재. 근현대 캐나다가 배출한 몇 안 되는 세계사적 비중을 지닌 정치인이다. 오늘날 캐나다 국민들이 자부심으로 삼는 무상의료와 자유주의의 토대를 세웠다. 아들과 달리 보수진영에서도 호평 받는다. 현대 캐나다의 기조를 만든 위대한 정치인 중 한 명이다.”이쯤 되면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트뤼도 총리가 가졌을 부담감과 스트레스가 미루어 짐작된다. 잘해봐야 “아버지를 닮았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뿐,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아버지는 훌륭한데 아들은 왜 저따위야”라는 비난을 받을 게 뻔하니까.아마 1천400년 전 문무왕 김법민의 심정도 그러했을 것 같다. 일생 부친 무열왕 김춘추와 비교되면서 살았을 터이니. ◆문무왕릉과 감은사를 돌아보고 쓴 졸시 한 편‘온전한 삼국통일을 이룬 영웅’이 아닌, 사는 내내 아버지와 외숙부 김유신을 뛰어넘기 위해 발버둥쳐야 했던 김법민의 감춰진 또 다른 모습이 분명 있을 것 같다.문무왕의 바다 위 유택(幽宅)과 용이 된 문무왕이 밤이면 찾아가 잠을 청했다는 감은사 터를 여러 차례 돌아봤다. 졸시 ‘문무왕의 잠’은 그때 기자의 머릿속을 떠돌던 복잡한 감정이 만들어준 것이다.신문왕이 울었다감은사 금당 아래를 들여다보며며칠째 아버지가 처소에 들지 않는다참꽃 매화 만개하고죽순도 무릎 높이로 자랐건만무엇이 하늘에 가닿지 못했나할아비 유택을 찾아 울어나 볼까아비는 문희 할미의 오줌에서 왔으니멀리 재 너머 바다는 푸르고쌍둥이 석탑 뒤로 해 떨어지는데잠을 잃은 용이 된 문무왕아들이 마련한 잠자리는 삼도천보다 멀고천자의 수중릉 희롱하는 흰 파도우울한 햇살 아래 일찍 온 제비 두 마리찬바람은 아직 그칠 기미가 없다.잘 알려져 있듯 문무왕의 유언은 “죽어서도 백성을 지키는 용이 될 것이니, 나를 산에 묻지 말고 일본 해적이 출몰하는 바다에 장사 지내라”는 것이었다.이는 끝끝내 아버지에게 뒤처지지 않으려 아등바등 했던 문무왕 김법민의 마지막 ‘콤플렉스 극복 시도’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9-12

새들은 형산강에 가서 산다

한 프랑스 소설가가 그랬다지요,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고.새들이 어디에 가서 죽는지 나는 모르지만새들이 와서 사는 곳은 이곳 형산강인가 봅니다.백로, 왜가리, 물수리, 흰꼬리수리,흰뺨오리, 흰비오리, 청둥오리, 홍머리오리…….형산강 위로 날아오르는 새들을 보고 있자면이곳을 날아오른 것이 새들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그 옛날 형산과 제산이 하나였을 무렵형님산과 아우산이 서로 부둥켜안고 우는 눈물에고을이 물에 잠기고 백성이 비탄에 잠겼다지요. 임금님 눈물로 치성드려형님 아우 가르고 용으로 날아오르실 때눈물 호수 마침내 형산강 되어 쏟아질 때그 변하신 옥체 올려다보고“용이다!” 부르던작은 아이 하나우리가 그 아이의 먼 후예일진대용이 되신 임금님 지금도형산강 위를 날고 계시겠지요.임금님지금 저희는 잘살고 있습니다.더는 큰물 때문에 눈물 흘리지 않으며물가를 거닐고 물 위에서 함빡 웃으며형산강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듯이오늘도 형산강에는새들이 날아오르고사람들이 살아갑니다. 글 : 이가은(서울대 국문과 박사 수료)임주은 1982년 포항에서 태어났으며 대구가톨릭대 공예과를 졸업했다. 개인전 2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아트페어에 서양화 작가로 참여했다. 현재 포항문화재단 이사, 포항청년작가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포항지부, 경북청년작가회 등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3-09-11

동국대 WISE캠퍼스, 지역 산업 혁신·특성화 선도

동국대 WISE캠퍼스가 해오름동맹 원자력혁신센터(센터장 반상우)를 맡아 제2기 해오름동맹 지역 6개 대학 RD 공동연구사업을 운영하며 지역 산업 혁신과 특성화를 이끌고 있다.제2기 해오름동맹 원자력혁신센터 사업 기간은 2021년 8월부터 2024년 8월까지 3년간으로, 한국수력원자력, 경주시, 포항시, 울산광역시가 지원하고 있다. 동국대 WISE캠퍼스를 비롯해 위덕대학교, 포스텍, 한동대학교, 울산대학교, 울산과학기술원 등 해오름동맹 지역 6개 대학이 참여하고 있다.원자력혁신센터는 연합캠퍼스 ‘원자력 안전 혁신 플랫폼 구축’을 목표로 해오름동맹 지역 6개 대학 공동연구를 통해 원자력 안전성 혁신, 탄소중립 신재생에너지 기술혁신, 지역가 중소기업 지원, 차세대 전문인력 양성을 목적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 해오름동맹 원자력혁신센터 운영2021년 8월, 해오름동맹 도시와 6개 대학은 동국대 WISE캠퍼스 100주년기념관에서 제2기 해오름동맹 지역 6개 대학 RD 공동연구사업 협약체결 및 원자력혁신센터 개소식을 가졌다.해오름동맹 지역 6개 대학들은 원전지역 특화연구, 지역협력 전략연구, 지역수용성 증진연구 등 3개 사업분야에 대해 33개 세부 연구 과제를 수행하고 있다.산업체와 대학 간 협력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내며, 2022년 4월에는 한수원과 해오름동맹 대학 간 연구성과물 기술사업화 공동추진 MOU를 체결하는 등 산학이 손잡고 ‘유망 지역기술 사업화’에 나섰다.지난 2022년 5월에는 사업에 참여하는 6개 대학 중 5개 대학이 교육부가 지원하는 LINC3.0(산학협력선도대학육성사업)을 신청해, 5개 대학이 선정돼 6년간 총 1천120억원의 국고를 수주하는 성과를 거두었다.8월에는 경주화백컨벤션센터(HICO)에서 열린 2022 국제원자력수출 및 안전콘펙스(NESCONFEX 2022)에 참가해 해오름동맹 6개 대학의 연구성과를 홍보했다.또 경북 기업연구소 협의회 기술교류회에 참가해 6개 대학 RD 공동연구사업을 소개하고 기술교류를 가졌으며, 11월에는 2022년 해오름동맹 벤처창업기업 혁신포럼을 개최했다.2023년 국제원자력 에너지산업전과 2023 대한민국 전기산업엑스포 등에 참가해 해오름동맹 대학들의 연구 성과를 전시하고 확산했다.지난 7월 13일 울산과학기술원 원자력공학과 방인철 교수를 초청해 ‘해오름동맹과 SMR’을 주제로 특강을 개최한데 이어 17일 전동섭 한수원 전략경영단 SMR사업팀장을 초청해 ‘i-SMR을 활용한 탄소중립 실현’을 주제로 특강을 개최했다. 이러한 전문가 특강을 통해 지역민들에게 해오름동맹의 의미, 원자력발전의 역사, SMR 기술개발 현황과 전망에 대하여 이해를 높이고 소통하는 장을 마련하고 있다.□ 해오름동맹 6개 대학과 33개 과제 운영 성과지난 2년간 제2기 해오름동맹 원자력혁신센터는 6개 대학에서 총괄센터 운영사업을 포함한 △원전지역 특화연구 △지역협력 전략연구 △지역수용성 증진연구 등 3가지 사업분야에 33가지 과제를 운영 중이다.2023년 8월에 종료된 2차년도에는 특히 대학별 연구 활성화 지원사업을 통해 대학별 연구를 활성화하고, 대학별 연구 분과 간 연구성과를 공유하며 발전방안을 모색하도록 했다.원전지역 특화연구 분야는 SMR을 포함한 원자력융복합 기초 연구 및 지역특화 방사성폐기물 처리·처분 기술, 중대사고 분석모델 개발, 원자력 안전기술 개발, 탄소 절감 기술과 연계한 신재생에너지 연구을 수행하고 있다.지역협력 전략연구 분야는 지역중소기업 지원사업, 지역상생모델발굴 연구, 재직자 교육 프로그램 운영 등이다. 지역수용성 증진연구 분야는 원자력, 전력산업 관련 전문인력 양성 교육 프로그램 개발 및 교육, 지역수용성 증진 프로그램 운영에 관한 내용이다. 총괄센터는 해오름동맹 6개 대학 RD 공동연구사업 수행관리 및 지원, 지역수용성 증진 목적 포럼, 특강 개최, 해오름 사업 홍보를 위한 대외 활동 등을 추진하고 있다.반상우 제2기 해오름동맹 원자력혁신센터장(동국대 WISE 창의융합공학부 교수)은 “해오름동맹 원자력혁신센터 연구개발 결과물은 탄소를 저감시키는 신에너지 기술 시장에서의 경쟁력 향상 및 에너지 관련 수출 시장에서의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기술개발에 활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반 센터장은 주요 내용으로 △탄소절감기술과 SMR을 포함한 원자력 기술간 상호보완적 기술개발을 통해 국내 원자력 및 신재생에너지 관련 기술력을 증진함과 동시에 시장경쟁력을 확보 △해오름동맹 혁신센터 사업을 통해 구축한 인프라를 향후 원전 안전성 강화 기술 개발, 원전 안전성 증대, 원자력 안전 인력양성, 신재생에너지 개발 연구 등 탄소제로기술 전반에 걸친 연구 활동에 활용 △해오름동맹 6개 대학 연합 RD 인프라 플랫폼 구축을 통해 향후 타 대학의 연합대학 RD 플랫폼으로 활용하는 성과확산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산학협력 교육혁신 경쟁력 높여동국대 WISE캠퍼스는 WISE(와이즈)캠퍼스로 명칭을 바꾸고, 새로운 캠퍼스 명칭과 함께 변화와 혁신으로 경쟁력을 강화하며 미래 가치를 창출하는 창의 융합 인재 양성에 매진하고 있다.동국대 WISE캠퍼스는 변화와 혁신 성과로 2020년부터 지금까지 601억3천만원의 국가 및 지자체 지원사업을 수주했다. 이는 동국대 WISE캠퍼스가 최근 11년간 받은 사업비의 73.7%에 달하는 역대 최대 규모이다.동국대 WISE캠퍼스는 지방대 활성화 사업을 통해 SMR, 자동차소재부품, 스마트 관광 분야 특성화를 통해 지역과 산학관 협력으로 인재를 양성해 지역 발전을 리드해 나간다.또한, 대학 자원의 선택과 집중을 통해 산업, 미래, 지역 등 다양한 수요에 부합하는 경쟁력 있는 학문 분야 육성 및 차별화된 학부 교육 선진화를 통한 대학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학문 분야 특성화 사업단을 운영하고 있다.□ 수시 1천614명 모집동국대 WISE캠퍼스는 2024학년도 수시모집에서 전체 모집인원의 92.6%인 1천614명(정원내)을 모집한다. 수시모집 정원내 전형 최초합격자에게는 장학금 100만원, 정원내 전형 충원1차 합격자에게는 장학금 50만원(불교추천인재전형(승려) 및 특기자/실기우수자 전형, (한)의예 제외)을 지급한다. 불교추천인재전형 합격자((한)의예 제외)는 전원 장학금 100만원을 지급한다. 또한 수시모집 합격자는 전원 기숙사 선발이 가능하다.자세한 일정과 전형 관련 사항, 장학금 지급 조건 등은 동국대 WISE캠퍼스 입학처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황성호기자 hsh@kbmaeil.com

2023-09-11

“이차전지 산업에 대한 과감한 투자·지원과 규제 완화 필요”

◇ 이차전지 날개 단 인도네시아, 글로벌 전기차 허브 도약 꿈꾸다인도네시아가 전기차에 주목하고 있다. 배터리 필수 원료인 니켈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는 약 2천100만t의 니켈을 보유하고 있는 니켈 세계 최대 매장국이다. 2019년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전기차산업 글로벌허브 국가 발전전략을 제시했다. 2030년까지 전기차 생태계를 조성하고 전기자동차 생산·수출 기지로 도약하겠다는 그림이다. 아세안 국가 중 가장 큰 자동차 시장을 보유하고 있는 인도네시아는 전기차 허브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자국 전기차·이차전지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인도네시아가 가장 먼저 내세운 것은 ‘무역장벽’이다. 인도네시아는 2020년부터 배터리 필수 원료인 니켈 원광 수출을 금지했고, 현지 가공품 수출만 허용했다. 자원을 무기로 삼은 셈이다.기술력을 가진 해외 기업들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현지화율에 따른 인센티브 제도도 마련했다. 인도네시아는 전기차 생산 회사의 현지화율을 2030년 이후 80%까지 끌어올리고자 계획하고 있다.아세안 국가 사이의 국제 협력도 탄탄하기 때문에 전기차 관련 기업들은 인도네시아를 주목하고 있다. 2018년 맺은 아세안무역협정(AFTA)에 따라 인도네시아에서 생산한 차량은 아세안 회원국에 무관세로 출국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 생산 공장을 건설하면 인근 국가인 태국, 베트남 등 다른 아세안 국가들로 진출이 용이한 것이다.국내 기업들도 빠르게 인도네시아에 진출하고 있다. 공공시설에서 현대자동차 아이오닉5 광고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현대자동차는 지난해 연산 15만대 규모의 아세안 지역 첫 완성차 생산공장을 인도네시아에 준공한 뒤,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지난 5~7일 열린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현대자동차는 아이오닉5, 아이오닉6, 제네시스 G80 전동화모델 등 전기차 3종으로 특별제작한 아트카 23대를 운행하며 2023부산국제박람회와 자사 전기차 라인을 홍보했다. 현대자동차는 LG에너지솔루션과 함께 배터리셀 공장도 건설하고 있다. 2024년 상반기 중 배터리셀 양산을 시작할 예정이다. 합작 공장에서 생산되는 고성능 NCMA리튬이온 배터리셀은 2024년부터 생산되는 현대차와 기아 전기차량에 탑재될 예정이다. 글 싣는 순서1. 포항 영일만의 기적, 인도네시아에 닿다2. 이차전지 날개 단 인도네시아, 포항시 기회 찾으려면3. 인도네시아와 포항 기업 간의 교류 현 주소4. K기업문화, 인도네시아에 퍼진 한국기업 저력5. 탄소중립 시대, 인도네시아에서는 어떻게◇‘전기차’ 블루오션에서 먹거리 찾는 포스코그룹지난달 29일 방문한 포스코 가공공장은 훈훈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자카르타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까라왕에 있는 포스코 IJPC 인근에는 최근 전기차 공장이 들어섰다. 포스코 IJPC는 도요타, 혼다를 비롯한 자동차 기업들이 다수 포진한 KIIC(Karawang International Industry City) 공단 내에 위치해 있다. 지난해 새로 준공된 현대자동차 완성차 공장과는 차로 40분 정도 떨어져 있고, 2021년 5월 준공한 3공장 인근에는 LG에너지솔루션과 현대자동차의 합작공장이 건설되고 있다. 자동차 밸류체인 한 가운데 자리잡은 것이다.포스코 IJPC는 포스코로부터 철강 제품을 수입해 고객사가 요구하는 규격으로 절단, 가공해 판매하는 중간 다리 역할을 한다. 현재 주력하고 있는 분야는 단연 자동차용 철강재다. 자동차 외판부터, 부품에 쓰이는 소재까지 다양한 철강재를 이곳에서 공급하고 있다. 늘어나는 철강 수요에 발맞춰 지난해 포스코 IJPC는 3공장을 신설했고, 2010년 연간 5만t이었던 판매량은 지난해 27만t을 돌파했다.포스코 IJPC 관계자는 “크라카타우 포스코 제철소 2기투자가 성공적으로 완수되고, 인도네시아 내에서 냉연, 도금, 자동차 강판을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면 생산부터 가공, 유통까지 포스코그룹이 수행하는 밸류체인이 완성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설명했다.전기차 확대 정책에 따라 현대자동차의 인도네시아 시장 점유율이 높아지면, 일본 기업이 장악해왔던 인도네시아 자동차 시장을 한국 기업이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된다. 포스코 IJPC는 판매 수요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현재 4공장 신설도 추진하고 있다.포스코그룹은 이차전지소재 분야에서도 인도네시아를 주목하고 있다. 포스코홀딩스는 현재 인도네시아에서 니켈 생산 사업 2건을 추진하고 있다. 국내 기업 최초로 이차전지용 니켈 생산에 도전한 것이다.하나는 중국 닝보리친와 인도네시아 술라웨시 섬에 니켈 함유량 기준 연산 12만t 규모의 니켈 중간재(MHP 이Mixed Hydroxide Precipitate) 생산공장을 건설하는 것이다. 먼저 1단계로 니켈 함유량 기준 6만t 규모의 생산공장을 연내 착공해 2025년에 생산을 개시할 예정이다. 닝보리친은 니켈 광산에서부터 제련, 트레이딩까지 밸류체인 전반에 대한 사업을 한다. 이미 2021년 인도네시아 최초로 이차전지용 니켈 습식제련공장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는 선도기업이다. 이번 협력을 통해 포스코그룹은 니켈 원료를 안정적으로 확보, 원가경쟁력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신흥국과의 경쟁, 포항시의 강점 찾으려면정부 주도의 강력한 전기차 산업 육성 계획에 따라 인도네시아는 글로벌 투자 국가로 주목받고 있다. 테슬라 주요 배터리 공급업체인 중국 CATL은 인도네시아에 59억 6천800만달러(약 7조 3천346억원) 규모의 원자재 포함 배터리 생산 단지를 구축하겠다고 발표했다. 도요타와 미쓰비시사도 인도네시아에 대규모 전기차 생산공장 설립을 선언했다. 전세계를 ‘투자 유치 전쟁’에 뛰어들게 만들었던 테슬라 기가팩토리의 유력 후보지도 인도네시아다.에코프로, 포스코퓨처엠 등 유수의 이차전지 소재 기업을 보유하고 있는 포항도 최근 이차전지산업 특화단지로 지정되면서 ‘전기차 산업의 허브’로 발돋움하고자 힘쓰고 있다. 경북도는 포항시가 이차전지 양극재 산업 특화단지로 최종 선정됨에 따라 인근 구미, 김천, 경산, 영천, 경주 등과 함께 이차전지 산업벨트를 구축해 새로운 도약을 꾀하고 있다. 포항시는 2030년까지 양극재 100만t 생산, 매출액 70조원, 고용창출 인원 1만 5천명을 목표로 경북도와 이차전지 특화단지 추진단을 꾸리고 국내 이차전지분야 전문가, 선도기업들로 구성된 전지보국 전문가 자문단(TF) 가동 계획을 밝혔다. 관련 기업의 동반 성장과 협력 체제 구축을 위한 이차진저 기업 협의체도 오는 10월 발족 예정이다.포항시가 이차전지 특화단지의 성공적인 운영에 이토록 간절한 이유는 이차전지 사업 활성화가 지역 발전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포항시는 이차전지 특화단지 유치를 통해 생산 유발효과 23조 3천억원, 부가가치 유발효과 9조 5천억원, 취업유발효과 5만 6천여 명이 예상된다고 밝힌 바 있다.실제로 긍정적인 신호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에는 중국 CNGR사와 화유코발트가 포스코그룹 및 LG화학과 손잡고 각각 1조원 가량의 포항 투자를 약속했다. 이차전지 소재 기업들의 집적효과로 한국 기업들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셈이다.파격적인 규제개혁을 위한 포항시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지난 4일 대구상공회의소에서 열린 대구·경북 정책간담회에서 규제개혁추진단 위원장인 홍석준 국회의원과 김병욱·한무경 국회의원, 산업통상자원부, 중소벤처기업부, 국토교통부, 교육부 등 7개 정부 부처와 포항시, 대구상공회의소, 기업인들은 규제개혁 안건에 대해 토론했다.포항시는 원활한 기업경영과 국가첨단전략산업 육성을 위해 산업단지계획과 관리기본계획을 조기에 변경할 수 있도록 관계 부처와의 협의기간을 단축하고 우선 처리하는 ‘패스트트랙’ 처리를 건의했다.김병욱 의원은 “차세대 주력산업인 이차전지 산업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지원 뿐만 아니라 관련 규제 완화도 반드시 필요하다”며 “포항이 글로벌 이차전지 산업도시로 거듭날 수 있도록 관계부처와 규제 완화 방안을 계속 협의해 나가겠다”고 말했다.그러나 글로벌 보호무역 주의 기조와 해외 국가들의 파격적인 투자 인센티브로 기업들의 탈(脫) 한국 기조가 강해지고 있는 것은 유의해야할 신호다. 반도체 분야의 경우 TSMC, 삼성전자, 미국 마이크론 등 기업이 올해 잇따라 일본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삼성전자는 일본에 300억엔 이상을 투자할 예정이다. 이에 따른 보조금은 100억엔 이상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미국 텍사스주는 삼성전자 오스틴 반도체 공장에 대한 추가 투자 인센티브도 제시했다. 이미 2021년 9월 10년간 재산세의 92.5%, 이후 10년은 90%, 추가 10년은 85%를 돌려받는 인센티브를 적용받았으나, 텍사스 기업프로젝트의 ‘트리플 점보 기업 프로젝트’로 선정해 고용에 따른 지원금을 추가로 제시했다. 파격적인 투자유치책, 안정적인 노사환경 등을 내세우는 해외국가들 사이에서 투자처로서 포항의 매력을 호소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긴밀한 협업이 필요한 대목이다. 인터뷰자카르타 사무소 문홍부 경북도소장인도네시아 시장이 성장하면서 지역 강소기업들의 진출 기회도 늘어나고 있다. 특히 포항에는 금속 가공 기업이 다수 포진해 있어, 포스코를 비롯한 한국 철강기업들의 강세는 지역기업들에게도 호재가 될 가능성이 있다. 경북도는 2015년부터 경상북도 자카르타사무소를 개소해 경북도 지역 중소기업의 인도네시아 시장 진출을 지원하고 인도네시아와의 협력관계를 공고히 하고 있다. 지난달 31일 자카르타 사무소 문홍부사진 경북도소장을 만나 지역 기업의 진출 현황에 대해 들어보았다.-경북도 자카르타 사무소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지역중소기업 인도네시아 진출 지원이 가장 큰 업무다. 도내 수출 중소기업과 인도네시아 내 바이어를 찾아서 연결하고, 수출 상담을 지원한다. 인도네시아 진출을 희망하는 기업들에게 현지 정보를 제공하고, 행정 절차를 도와 성공적으로 현지에 정착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주요 목표이다. 지역 기업의 제품 홍보를 위해 각종 박람회와 행사에도 참석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인도네시아 내에서 한국 관광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고 있다. 경북도는 K-드라마의 성공과 함께 인도네시아 현지인들에게 관광지로서의 매력도 높다. 포항의 경우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 ‘킹더랜드’ 등이 흥행하면서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이런 트렌드에 발맞춰 경북 주요 관광지, 음식 등을 여행박람회에서 홍보하고, 인스타그램을 운영해 경북도 관광지를 알리고 있다.-인도네시아 내 경북도 기업들의 활약상이 궁금하다.△중소기업들도 인도네시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경산시에 위치한 기남금속은 지난해 31만 달러 규모의 맨홀뚜껑 수출 계약을 성사시켰다. 인도네시아 진출 전 과정을 함께 했기 때문에 더욱 뜻깊은 성과였다. 포항에 본사가 있는 제일연마공업도 인도네시아에서 오랫동안 사업을 하고 있다. 제일연마공업은 2002년 인도네시아 현지생산법인을 설립한 선구자다. 인도네시아에서만 공장 2곳을 운영하고 있는 국내 최대 연마석 제조기업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장기간 안정적으로 사업을 운영하고 있는 만큼, 새롭게 인도네시아 진출을 모색하고 있는 다른 지역 기업들에게 노하우를 공유하는 등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경북 농산물도 진출하고 있다. 경북도 사무소는 도내 농가의 해외수출 판로를 확보해 농가 수입의 안정성을 높이는 것에도 집중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청송사과 수입 쿼터 300t을 확보했고, 청도 네이처팜 반건시, 상주 복숭아와 배 등을 수입했다. 올해에는 판매처를 다양화하고, 샤인머스켓 등 수입품목도 추가하고자 한다.-인도네시아 진출을 꿈꾸는 지역 기업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인구와 자원이 풍부한 인도네시아의 성장 잠재력은 단연 주목할 만하다. 경제 성장률 또한 가파르기 때문에 지역 기업도 주시해야 할 시장이다. 그러나 지나친 낙관은 금물이다. 초창기 낮은 인건비가 강점이었지만 최근들어 최저임금이 지속적으로 인상되고 있는 추세다. 산업구조도 변화하고 있다. 이슬람 인구가 대다수인 만큼 식품, 화장품 같은 경우에는 할랄인증을 받아야 하고, 한국과 다른 행정 절차도 신규 진출의 장벽이 될 수 있다. 어려움을 감수할 가치와 매력이 있는 시장이지만, 충분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지역기업들이 진출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과 고충을 최소화하기 위해 경북도 자카르타 사무소는 최선의 지원을 다하겠다. 지역기업들이 인도네시아 시장을 전략적으로 활용해 궁극적으로 지역 경제 활성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이부용기자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3-09-10

석탄공사 직원 포항제철로 가다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바다를 지키는 함장이 되고 싶었던 청년의 꿈은 단 한 번의 사소한 실수로 꺾이고 만다. 그러나 마냥 좌절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1950년대의 청년들에겐 ‘고민의 시간’마저 사치였으니까. 20대 중반이던 한경식 선생은 광주로 돌아가 다시 새로운 꿈을 모색한다. 홍성식(이하 홍) : 해군사관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요?한경식(이하 한) : 4학년 때 육·해·공군사관학교 체육대회에서 우승하고 객기에 그만 실수했어. 그때는 사관학교 학생이 음주하면 안 되던 시절인데, 들뜬 기분에 서울에서 친구를 만나 늦게까지 술을 마셔버린 거지. 그게 문제가 돼 해군사관학교에서 징계위원회가 열리고 퇴교하게 되었어. 하지만 해군사관학교를 다닌 경험이 나를 많이 성장시켰지.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한길로 달려가는 기백과 희생정신을 배울 수 있었으니까. 세월이 많이 흐르고 50대 중반이 된 후에는 해군사관학교 13기 동기들이 “너도 사회에서 해군사관학교 출신들 이상으로 나름의 역할을 하고 살았다”면서 동문으로 대접해주니 고맙지.홍 : 해군사관학교 퇴교 후에는 어떻게 했는지 궁금합니다.한 : 당장 생계를 해결해야 하니 광주로 가 학원에서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어. 그러다가 전남대학교 전기공학과 3학년으로 편입했지. 1, 2학년 과정을 면제받은 건 해군사관학교에 다닌 경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어. 사실 내가 어릴 때도 공학과 기술에 관심이 많았어. 대학 다닐 때 학원강사도 하고 입주 가정교사도 하면서 학비를 벌었지.홍 : 해군사관학교 4년과 전남대 2년을 마친 후 첫 직장은 어디였나요?한 : 1961년 대한석탄공사에 입사시험을 치고 들어가 7년쯤 다녔어. 우리나라에 발전소가 생기면서 특별한 프로젝트를 맡길 사람을 뽑는데 그때 입사하게 되었지. 수백 명의 응시자 가운데 다섯 명을 선발했는데 나도 그중 한 명이었어. 강원도 태백 장성광업소 전기 파트에서 근무했지.대한석탄공사는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1월 1일 설립되었으며, 석탄 광산 채굴과 석탄 가공제품의 매입·매출·수출입 등을 담당했다. 한국석유공사처럼 일부 석탄이나 석유를 정부의 명령에 따라 비축하기도 했다. 한때는 국내 최고의 공기업으로 선망의 대상이었으나, 1980년대 말 주유종탄(主油從炭) 정책으로 사양화의 길을 걸었다.(‘위키백과’ 참조)홍 : 거기선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한 : 당시는 열악한 한국의 전기 설비를 선진적인 형태로 변화시키던 시기였는데, 그 과정에서 작지만 한몫했다는 긍지가 있어. 당시 내 월급이 한국전력 직원들보다 50퍼센트쯤 많았지. 대한석탄공사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나는 나라 발전의 기초가 되는 석탄을 생산한다’는 사명감이 있었어. 지금으로 말하자면 사원 복지도 나쁘지 않았지. 사택도 딸려 있어 거기서 딸을 낳았어. 7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르면서 태백이 고향처럼 느껴지기도 했지.홍 : 대한석탄공사에서 포항제철로 옮긴 건 어떤 이유고, 언제쯤인지요?한 : 태백이 워낙 벽지라서 커가는 아이들 교육 문제도 있고, 나도 전기와 관련된 공부를 좀 더 하고 싶었어. 그런데 마침 포항제철에서 사원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신문에 난 거야. 부랴부랴 서류를 준비해 서울 명동 유네스코회관에서 시험을 봤어. 운 좋게 합격해서 1968년 5월에 포항제철에 가게 된 거지. 자랑 같지만 입학시험과 입사시험에서 떨어진 적은 없는 것 같아.(웃음) 포항제철 입사시험은 짧은 기간 준비했는데, 거기 내가 예상문제로 공부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관한 논술 문제가 출제됐더라고. 홍 : 발령을 받아 포항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어땠습니까?한 : 상상을 벗어나는 풍경이었지. 지금과는 달리 그야말로 깡촌이었어.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 인근에 수녀원만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공장 건설에 필요한 전기 시설을 맨땅에 헤딩하듯 만들었지. 종일 반트럭(바퀴가 4개 달리고, 뚜껑 없는 적재함이 설치된 소형 트럭)과 낡은 오토바이를 타고 비포장길을 달리면서. 지금 청년들은 이해하기 힘든 시절이자 상황이었지.홍 : 조금 더 상세하게 말씀해주시죠.한 : 1968년 5월 15일 포항 건설본부 전기 담당으로 발령받아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시발택시를 타고 동촌동에 내렸어. 아름드리 소나무밭 오솔길을 따라 바다 쪽으로 가니 나무와 슬레이트로 지은 2층 건물이 보였어. 그게 이른바 ‘롬멜 하우스’로 불린 포항제철 건설본부였지. 거기에 먼저 온 김명환 소장과 박용진 차장이 있더군. 나는 쉽게 이야기하면 맨 아래 졸병이었지.홍 :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한 :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한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지는 종합제철소 건설을 성공시켜야 한다고 결심했어. 그건 우리나라 경제를 탄탄한 토대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사명감과도 결부되었지. 아직도 기억나. 당시 공장 건설에 실패한다면 우리 모두 영일만에 빠져 죽어야 한다는 각오였지. 그게 이른바 ‘우향우 정신’이야. 목숨을 걸고 일하던 시기였어. 그때 롬멜 하우스엔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공장 건설’이란 구호가 내걸렸지.홍 : 포항제철 입사 후 맡았던 주된 업무는 뭐였습니까?한 : 처음엔 내 전공인 전기 관련 업무, 그러니까 공사용 송전선로와 변전소 건설, 전화 인입 등의 업무만 하면 될 줄 알았지. 그런데 천만에. 하천과 돌산의 건설용 골재원 조사와 시료 채취 후 서울 본사 송부 작업, 주택단지 선정 기본 조사에다가 표토 제거, 착공 준비, 공장이 설 자리에 대형 공장 표시기 제작 설치, 정부 지원사업의 진도도 파악해야 했어. 정말이지 하루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홍 : 선생님만이 아니라 포항제철이 만들어지던 시기엔 직원들 모두 그렇게 바빴겠지요?한 : 말해 뭘 하겠어. 집을 떠나 포항으로 온 대부분 직원은 당시 동촌동에 있던 사찰인 부연사에서 숙식을 해결했어. 책임자인 박종태 소장은 롬멜 하우스에서 군대용 야전침대를 깔고 혼자 잤지. 그런데 어느 날은 자다가 모기장을 건드렸는지 아침에 보니 모기에 물린 자국이 여기저기 벌겋더군. 그래도 짜증 내지 않고 사람 좋게 웃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나.‘포스코 50년사’에 따르면 포항제철 건설 초기의 슬로건은 ‘제철보국(製鐵報國)’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1978년 3월 박태준 회장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창업 이래 지금까지 제철보국이라는 생각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다. 철은 산업의 쌀이다. 쌀이 생명과 성장의 근원이듯, 철은 모든 산업의 기초 소재다. 양질의 철을 값싸게 대량으로 생산해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고 국민 생활을 윤택하게 하며 복지사회 건설에 이바지하자는 것이 곧 제철보국이다.”홍 : 직원들 간의 화합은 어떻게 이뤄나갔는지 궁금합니다.한 : 포항제철 건설 초기 멤버들은 대부분 이전 회사 경력이 있는 직원들이었어. 대한중석, 대한석탄공사, 호남비료 등 여러 회사에서 발탁되거나 공모를 거쳐 채용된 사람들이지. 그래서인지 저마다 개성이 강하고 일 추진 방식이 달랐어. 업무에 관한 이해도와 관련 지식의 깊이도 천차만별이었고. 사실 그로 인한 불협화음이 없지 않았어. 하지만 그때 열두 명의 직원은 소장과 아침마다 체조하며 업무를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힘을 모았어. 우리가 포항제철의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가겠다는 굳은 의지로 하나가 된 거지.홍 : 지금도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적지 않겠습니다.한 : 당시 가장 어려웠던 업무 중 하나는 매주 건설 현황을 사진과 함께 서울 본사에 보고하는 일이었어. 자체로 진행하는 공사야 문제가 없었지만, 정부 지원을 받는 사업인 항만, 공업용수, 도시토목, 한전 관련 공사, 전화통신 공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거의 유일했던 교통수단인 반트럭에 올라 종일 돌아다녔어. 사진을 찍으려고 정부 각 지원사업 현장을 찾았고, 관청의 공사감독에게 계약 사항, 공정표, 매주의 실적 등을 물었지. 진땀 흐르는 일이었어. 대체로 협조를 잘해주었지만, 그래도 공식적인 협조 체계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이를 건의했지. 그래서 생긴 조직이 ‘현지공사 조정통제위원회’야. 이후엔 매월 한 번씩 회의를 열어 공정을 파악하고 각 부문의 협조를 쉽게 만들었지.한경식1935년 전남 나주 영산포읍 오량리에서 태어났다. 광주농업학교를 거쳐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갔으나 4학년 때 중퇴했다. 이후 전남대 전기공학과에서 공부했다.대학을 마친 후 1961년 대한석탄공사에 입사해 장성광업소 전기계장으로 일하다가 1968년 포항제철로 회사를 옮긴다. 제2고로 건설과장, 제1고로 개수추진부장, 제선공사부장, 건설본부장(상무이사) 등을 거치며 포항제철의 초기 역사를 눈앞에서 지켜보았다. 1990년대엔 포스코 계열사라고 할 수 있는 승주골프장 대표이사를 지냈고, 축구팀 전남드래곤즈의 창단 작업을 주도해 사장을 맡았다.수준급의 솜씨를 지닌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하다. 홍익대 미술대학원 현대미술 최고위과정을 수료했으며, 여러 차례 개인전과 회원전 등을 열었다. 한국 제철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1981)과 산업포장(1988)을 받았고, 프로축구대상 특별상(1995)을 수상했다.대담·정리 : 홍성식(본지 기자)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한경식

2023-09-10

나주 소년, 해사 생도가 되다

한국인이면서도 자유롭게 한국어를 말할 수 없던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태어나 8·15 광복과 6·25 전쟁을 겪었다. 청장년 시절엔 포항의 허허벌판에 거대한 제철소가 들어서는 역사적 과정에서 작지 않은 역할을 해냈다. 포항제철 건설본부장으로 일했던 한경식(韓璟植) 선생의 삶에는 ‘왕국의 몰락-식민지-해방된 가난한 나라-참혹한 민족 간 전쟁-비약적 경제 발전’으로 요약되는 한국의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겼다. 지난 늦봄, 현재 그가 거주하는 전남 순천을 찾아 사흘에 걸쳐 드라마틱했던 인생 편력을 세세하게 들었다. 홍성식(이하 홍) : 고향이 전남 나주라고 들었습니다. 아직 주소가 기억나시는지요?한경식(이하 한) : 나주 영산포 오량리야. 지금은 행정구역상 명칭이 오량동으로 변했다고 해.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태어났지.홍 : 지금 세대들에겐 까마득한 옛날이라 느껴질 겁니다. 어린 시절 기억이 아직 남았습니까?한 :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범한 농부였어.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 광복되었지. 그전 일제강점기 때는 동네에서 쇠로 만든 절굿공이와 놋그릇 같은 걸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빼앗겼어. 전쟁에 사용할 물자가 필요하니까. 할머니가 아끼던 무쇠 화로를 강탈당하지 않으려고 애쓰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라. 그런 것을 뺏기지 않으려고 집 안 곳곳에 숨겨야 했지. 우리 동네에도 이른바 ‘친일파’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숨긴 물건들을 찾아내려고 집집을 뒤지던 게 기억나. 그러니 어린 마음에도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 없었지.홍 : 또 다른 잊히지 않는 추억이 있을까요?한 : 소나무에서 흘러내리는 송진을 가져오라고 해서 그걸 모으느라 고생하던 것도 떠올라. 겨우 열 살 안팎의 애들에게는 힘든 일이었지. 게다가 학교에선 우리말을 못 하게 하고 일본어를 억지로 쓰게 하던 시절이었어. 심지어 집에서도 일본어를 쓰라고 교사들이 강요했지. 홍 : 나라를 뺏긴 민족의 서러움을 제대로 겪으신 거군요.한 : 그렇지. 형제끼리도 서로 감시하게 했으니까. 일본은 태평양전쟁이 확대되면서 전쟁 물자 조달에 총력 동원을 실시했다. 이 때문에 식민지인 우리나라는 물자 부족으로 비료와 농기구 같은 농업 생산에 필요한 물자까지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힘들었다. 여기에 노동력까지 징발해가니 농촌사회는 더욱 힘든 상황이 되었다고 ‘국사편찬위원회’는 설명한다.홍 : 형제들이 많았습니까?한 : 일곱 남매야. 남자 둘에 여자 다섯. 형님이 한 분 계시고 여동생이 많았어. 우리 집만이 아니라 예전엔 대부분 그렇게 자식을 많이 낳았지. 홍 : 다들 가난하고 어려웠지만 공부는 열심히 했을 듯합니다.한 : 지금처럼 동네마다 학교가 가까운 곳에 있는 게 아니라서 꽤 먼 길을 걸어 다녀야 했는데도 모두 열심히 다녔어.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이 공부밖에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나이 많은 학생들도 있어서 1등은 하지 못했지만 공부는 제법 잘했어. (웃음)홍 : 1945년 광복 즈음의 기억이 나는지요? 동네 분위기 같은 것 말입니다.한 : 광복되니까 선생님들이 우리말을 하셨어. 그리고 “앞으로 일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나라가 잘되려면 여러분이 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을 해주셨지.홍 : 이른바 친일파, 일본에 우호적이던 사람들은 광복 이후 어땠나요?한 : 30년 이상 억눌린 감정이 있으니, 동네 사람들이 공출에 앞장서며 일본에 협력하던 이들을 잡아서 망신을 주고 단죄하려고 했는데 우리 아버지가 나서서 말렸어. “저들도 먹고살려고 친일한 것이니 과거는 용서해주자”고 하더라고. 부친이 동네에서 신망이 두터웠거든. 그러니까 성난 사람들도 화를 조금 가라앉히곤 했지.홍 : 중학교는 어디로 진학하셨지요?한 : 고향인 나주를 떠나 광주로 가서 광주농업학교에 입학했어. 그때는 중학교 입학시험을 쳤지. 당시 광주사범학교와 광주농업학교는 성적이 좋아야 갈 수 있었어. 그러니 그 학교에 입학하면 동네 어른들이 크게 칭찬해주었지. 지역에서 조합장을 하던 아버지도 동네 사람들에게 한턱냈어. 내 기억에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풍족하진 않아도 자식들을 대처로 보내 공부시킬 형편은 되었던 것 같아.홍 : 선생님이 중학생이던 시절에 전쟁이 터졌겠군요.한 : 맞아. 중학교 2학년 때 전쟁이 터졌어. 전쟁 탓에 학교에 못 가고 집에 와 있는데, “학생들은 학교에 인명 등록을 해야 한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나주에서 광주까지 여덟 시간 넘게 걸어서 갔지. 그런데 학교 농기구 창고 근처에 가니 누군가 두들겨 맞는 소리가 나더라고. 이른바 좌우익의 심각한 대립과 갈등이 학교에도 있었던 거지. 다행히 그때 나는 겨우 열다섯 살이었으니 어리다고 인명 등록만 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어. 그즈음 우리 동네에서도 몇몇 사람은 맞아 죽기도 하고 그랬지. 전쟁이란 게 참혹하다는 걸 어린 나이에 알게 되었어.홍 : 전쟁이 끝난 후엔 어땠습니까? 한 : 광주농업학교에서 다시 시험을 보고 광주고등학교에 들어갔어.홍 :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 좀 해주시죠.한 : 1950년대 중반이었는데 그때 자취를 했어. 어머니가 귀한 아들 굶으면 안 된다며 쌀을 보내주셨지. 내가 쌀 한 말을 들고 나주에서 광주까지 오고 그랬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자식들 공부시키기가 쉽지 않았지. 신문 배달을 하면서 스스로 학비를 벌었어. 나주와 광주 사이를 오가는 버스가 다니다 말다 했으니, 집에 오가기도 쉽지 않았지. 다행히 좋은 담임선생님을 만나 학비를 면제받기도 하고, 먼저 광주에 가 있던 누님의 친구가 도와주기도 해서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어.홍 : 광주고 졸업 후엔 해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고 들었습니다.한 : 서울대 공대를 가려고 했는데, 해군사관학교 입학시험이 그보다 먼저 있었어. 바다를 좋아했기에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지. 어릴 때 고향 동네 길거리에서 만나던 마도로스(matroos)들이 멋져 보였거든. 게다가 해군사관학교는 학비를 내지 않고 다닐 수 있었어. 나 말고도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많이 지원했지. 그때 사관학교 인기는 어떤 명문대학보다 높았어.1946년 1월 17일 해군병학교로 개교한 해군사관학교는 한국의 해군 및 해병대 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줄여서 ‘해사’라고 불리며, 경상남도 진해에 자리한다. 한경식 선생이 입교하던 1950년대엔 가정형편이 어려워 일반 대학 진학이 힘든 우등생 다수가 육군사관학교와 해군사관학교를 선택하기도 했다.홍 : 해군사관학교 시절 이야기가 궁금합니다.한 : 나는 해사 13기로 입학했어. 스무 살이 넘으면 키가 안 자란다던데 나는 거기서 7센티미터나 컸지. 고등학교 때는 잘 먹지 못하다가 제대로 영양을 섭취하니 그랬던 것 같아. 공부도 열심히 했어. 학년에서 5등 안에는 들었으니까.한경식1935년 전남 나주 영산포읍 오량리에서 태어났다. 광주농업학교를 거쳐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갔으나 4학년 때 중퇴했다. 이후 전남대 전기공학과에서 공부했다.대학을 마친 후 1961년 대한석탄공사에 입사해 장성광업소 전기계장으로 일하다가 1968년 포항제철로 회사를 옮긴다. 제2고로 건설과장, 제1고로 개수추진부장, 제선공사부장, 건설본부장(상무이사) 등을 거치며 포항제철의 초기 역사를 눈앞에서 지켜보았다. 1990년대엔 포스코 계열사라고 할 수 있는 승주골프장 대표이사를 지냈고, 축구팀 전남드래곤즈의 창단 작업을 주도해 사장을 맡았다.수준급의 솜씨를 지닌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하다. 홍익대 미술대학원 현대미술 최고위과정을 수료했으며, 여러 차례 개인전과 회원전 등을 열었다. 한국 제철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1981)과 산업포장(1988)을 받았고, 프로축구대상 특별상(1995)을 수상했다.대담·정리 : 홍성식(본지 기자)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한경식

2023-09-06

김춘추는 김유신이 과감하게 투자한 ‘블루칩’

출중한 능력에 빼어난 외모, 거기에 정치적 혜안까지 갖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아들은 마냥 행복하기만 할까?말이 나왔으니 연이어 질문 하나 더.그렇게 잘난 아버지는 물론, 나라 전체의 군사통솔권을 쥐고 수백 명 고위관료 위에 우뚝 군림한 외숙부까지 가졌다면 어떨까? 이 또한 조카에게 행복의 조건으로만 작용할까?한적한 평일 오후. 푸른 파도 일렁이는 경주 봉길리 해변에서 문무왕의 수중릉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런 의문들이 떠올랐다.661부터 681년까지 신라를 통치한 문무왕 김법민. 그는 무열왕 김춘추의 아들이며, 신라 태대각간(太大角干) 김유신의 조카다.재론의 여지없이 좋은 ‘외적 조건’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신라는 물론 660년 무너진 백제의 땅과 백성들까지 아버지에게 물려받았고,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는 과정에선 외숙부의 조력을 얻어낼 수 있었다.이건 각종 서적과 여러 고문헌을 통해 이미 상당수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그런데, 기자를 포한한 몇몇 사람들은 다른 각도에서 궁금증을 가지기도 한다. ‘문무왕에게는 열등감이 촉발한 내적 콤플렉스와 갈등이 전혀 없었을까’ 하는 것.문무왕은 1천342년 전 사망했다. 죽은 사람을 불러내 직접 물어볼 방법은 없으니, 그의 내면 풍경은 그저 주관적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비교적 정답에 근접한 추측을 도출해내기 위해 일단 시간을 되돌려 김춘추와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가 연애를 시작했던 시절로 가보자. 아직 문무왕이 태어나 전이다. ◆김유신, 김춘추라는 우량주(優良株)에 투자하다‘화랑세기’에는 김춘추와 문희가 맺어지게 되는 과정이 흥미로운 이야기 형태로 실려 있다. 그 시작은 이렇다.“어느 날 문희의 언니 보희가 잠 속에서 산에 올라 바라보니 서라벌에 홍수가 났다. 불길한 꿈이라 생각한 보희는 그 꿈을 동생 문희에게 비단을 받고 팔아버린다. 열흘 후 김유신이 김춘추와 축국(蹴鞠·남성들의 공놀이)을 하다가 실수로 김춘추의 옷을 찢어버리게 된다. 김유신의 부탁에 의해 바느질로 김춘추의 옷을 꿰맨 게 문희였다. 이후 김춘추와 문희는 사랑에 빠진다…(후략)”김유신은 신라가 아닌 몰락한 금관가야 출신이라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열등감의 극복을 위해선 신라 정통 귀족과 어떤 형태로든 이어지는 게 중요했다. ‘혼맥(婚脈) 형성’이 그 방법으로 선택된 듯하다.신라는 물론 당나라에서까지 탁월한 외교 협상력과 빼어난 문장을 인정받던 김춘추는 김유신이 미래를 보고 과감하게 투자한 ‘블루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그러니, 찢어진 옷을 수선한다는 이유를 들어 김춘추와 동생 문희를 만나게 한 건 철저하게 준비된 김유신의 계획이었을 터. ‘화랑세기’는 이렇게 이어진다.“1년쯤의 시간이 흐른 후 문희가 임신을 했다. 그때 김춘추에겐 이미 부인과 딸이 있던 상황. 문희를 받아들일 수도, 매정하게 내칠 수도 없었던 김춘추는 갈등했다. 그 갈등에 종지부를 찍은 건 김유신이다. 아버지를 알 수 없는 아기를 가져 집안을 망신시킨 문희를 태워 죽이겠다며 장작에 불을 붙인 것. 선덕여왕과 산책을 즐기던 김춘추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김유신의 집으로 뛰어갔고, 문희를 구한 뒤 자신의 집에 들인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김춘추와 먼저 혼인한 부인이 죽었고, 문 희는 첩이 아닌 정식 부인이 된다”는 스토리.그게 신라시대건 현대건 인간의 통념상 동생을, 그것도 뱃속에 아기를 가진 누이동생을 불에 태우는 끔찍한 방법으로 죽이는 오빠가 존재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그러니, 장작에 불을 붙이고 문희를 겁박한 김유신의 행위는 요즘 말로 하자면 ‘할리우드 액션’일 가능성이 농후하다.‘어이, 김춘추. 이래도 내 동생 문희와 결혼하지 않을 거야?’라는 협박성 제스처 말이다.◆‘삼국사기’가 평가한 문무왕의 외숙부 김유신“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봉준호가 연출한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다. 1천400년 전 김유신에게도 ‘계획’이 있었다. 그 계획은 김춘추와 문희의 결혼이 성사됨으로써 절반 이상 성공된 듯하다.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김춘추는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에 이어 신라 29대 왕이 된다. 김유신은 멸망한 나라의 망명객에서 왕의 손위 처남으로 신분이 격상됐다. 문명왕후(文明王后)가 된 동생 문희는 신라의 30대 왕에 오를 태자 김법민(문무왕)을 낳았다.김유신과 김춘추는 오랜 세월 서로가 서로에게 ‘호랑이 등에 달린 날개’ 역할을 했다. 당나라와 협정을 맺고, 백제를 병합하고, 신라 내부의 권력관계를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둘은 부정할 수 없는 동업자 관계로 살았다. 삼한일통(삼국통일)의 주춧돌이 그 시절에 놓였다.생애를 걸고 베팅(Betting)한 김춘추라는 우량주가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위치로 폭등했고, 아끼던 여동생은 다음 번 신라 왕 자리를 차지할 젖먹이를 출산한다. 바로 그 ‘젖먹이’ 어린 김법민을 바라보던 김유신은 얼마나 흐뭇했을까?김유신이 설계한 ‘혼맥 형성 프로젝트’는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수익을 가져왔다. 거기에 더해 자신의 명성 또한 천정부지로 높아졌다. 능력과 행운이 합쳐진 결과였다.김유신 사후(死後) 50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을 때 김부식에 의해 쓰여진 ‘삼국사기’에서도 ‘신라 장군 김유신’의 높은 위상이 확인된다.그와 관련된 단국대학교 사학과 전덕재 교수의 논문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의 원전과 그 성격’을 아래 인용한다.“김유신열전은 ‘삼국사기’의 열전 10권 가운데 무려 3권이나 차지할 정도로 분량이 많다. 그 이유는 일차적으로 ‘삼국사기’ 찬자(撰者·책을 쓴 사람)가 신라의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김유신을 매우 숭앙하였던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김유신열정 말미에 기술한 사론(史論)에서 ‘비록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의용이 있었더라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다면 기록이 없어 알려지지 않을 뻔하였다. 그런데 유신과 같은 이는 사람들이 칭송함이 고려시대까지 끊이지 않고 있으니, 사대부가 알아주는 것은 당연할 뿐만 아니라 꼴 베고 나무하는 어린아이조차도 능히 알고 있으므로, 그 사람됨이 반드시 다른 이들과 차이가 있다’고 언급했다. 이는 고려 사람들이 김유신을 역사를 빛낸 위대한 위인으로 칭송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인데…(후략)” ◆문무왕의 업적 또한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지만…‘삼국사기’ 속 ‘열전’의 3할을 차지할 만큼 주요한 역사 인물인 김유신에게는 밀리지만, 문무왕 역시 허술하거나 만만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외숙부 김유신과 아버지 무열왕이 닦은 토대 위에서 문무왕 김법민은 빛나는 행보를 보여줬다.‘한국학중앙연구원’이 요약하고 있는 문무왕의 업적은 여타의 신라 왕은 물론, 이후 우리나라 왕조의 어떤 통치자와 비교해도 부끄러울 게 없어 보인다. 이런 설명이다.“왕에 오르기 전부터 외교 활동과 백제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즉위 초에는 백제 부흥세력을 제압했고, 666년엔 당나라와 연합해 고구려를 병합시켰다. 이후 삼국 전체를 자국 영토로 삼으려는 당나라의 노골적인 대규모 침공을 물리치고 삼국통일을 완수했다. 5소경제와 군사조직인 9서당의 단초를 마련해 확장된 영역의 통치를 위한 기반을 다졌다.”이처럼 괄목할 만한 삶을 살았음에도, 문무왕에게 드리워진 외숙부 김유신과 부친 김춘추의 그늘은 너무 크고 짙었다. 때론 그 그늘이 안온함이 아닌 부담감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다음번 기사에선 김유신과 함께 문무왕에게 콤플렉스를 안겼을 수도 있는, 또 다른 한 사람 ‘무열왕의 삶’은 어떠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볼까 한다.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9-05

초록으로 물든 즐거운 사색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기찻길을 따라 자리한 철길숲.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역사가 공존하는아름다운 생태공간으로 바뀌었다.포항의 도심을 가로지르는 철길숲에 발을 디디면녹음 짙은 나무와 푸른 하늘의반가운 인사를 들을 수 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순간평온함과 함께바람이 나뭇잎을 부드럽게 스치며아늑한 분위기가 가득하다.새들의 노랫소리가 귀를 즐겁게 감싸며일상의 번잡함을 잊게 해준다.기차의 단조로운 리듬이이제는 고요한 발걸음으로 바뀌었지만그 기적(汽笛)의 무게는 여전히 숲속에 머물러 있다. 철길숲을 따라 걷는다는 건도심의 한복판에 새겨진 옛 추억의 흔적을 따라 걷는다는 것.포항의 시간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딘다는 것.아련한 향수와 자연의 아름다움이 어우러지고과거와 현재, 인간과 자연이 스며드는 순간을 느낀다는 것.초록으로 물든 철길숲은우리의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쉼터이자창의적인 영감의 원천.그 길을 걸으며 사색에 잠겨 본다. 글 : 김재건(서울대 국문과 박사 수료) 최수정 최수정 197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포항에서 성장했다. 계명대 서양화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6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포항지부, 현상회, 계명회 등의 회원이며 포항에서 갤러리m을 운영하고 있다. ‘호미곶 이야기’, ‘비밀이 사는 아파트’, ‘꿈꾸는 복치’ 등의 책에 그림을 그렸다.

2023-09-04

“기온·습도·강수량·바람… 24시간 하늘 관측하지요”

태풍 시 행동 요령으로 중요한 것은 날씨 정보를 청취하며 기상 상황을 지속해 파악하는 일이다. 최근 태풍이 북상할 때, 경북 동해안이 가청권인 라디오를 청취했다면 이 사람을 만났을 것이다. 채널을 불문하고 많게는 하루에도 서너 번씩 태풍의 이동 경로와 전망을 실시간으로 알려주며 피해 최소화를 당부한 포항기상관측소 김정희 소장이다. 기상 현장의 최전선에서 23년간 날씨 서비스를 제공해 온 기상 전문가이다.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된 기상 정보를 더 밀착해서 제공하기 위해 시간을 쪼개어 주민들과 소통한다. 지난 9월 1일 자로 대구지방기상청으로 자리를 옮겼기에 지금은 ‘전(前) 소장’이 된 그녀를 지난달 말, 송도 솔밭에 있는 포항기상관측소에서 만났다. -포항 날씨의 기준은 포항기상관측소가 위치한 송도라고 들었다.△흔히 방송에서 나오는 ‘포항의 날씨’는 관측소에서 나온 값이다. 이외에 호미곶과 구룡포, 기계, 죽장, 청하에 무인 기상관측 장비가 있다. 포항기상관측소는 1943년에 운영을 시작했다. 대한민국 기상관측사 중에서도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곳이다. 처음에는 두호동에 있다가 60년대 송도로 이전했다. 국내에 80년 기상관측 역사를 가진 곳은 많지 않다.-밖에서는 몰랐는데 들어와 보니 잔디밭이 상당히 드넓다.△대기 상층의 기상 상태를 관측하는 ‘고층기상관측’을 위해서다. 관측장비를 실은 풍선을 날리려면 부지가 넓어야 한다. 포항기상관측소는 지난 2004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세계기상기구(WMO)가 지정한 고층 기후관측소로 등록됐다. 고층관측소가 되려면 관측의 연속성, 관측의 정확성, 관측 횟수와 고도, 관측기록 등의 항목별 요구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포항기상관측소는 60여 년 동안 5천여만 회의 고층관측 기록을 가진 고층관측의 메카이다. -기상관측소에서의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나.△매시간 기온과 습도, 강수량, 바람 등 기상 상황을 관측해서 전문을 만든다. 이렇게 만든 자료는 실시간으로 모여 국내외 정보통신망으로 공유한다. 지상관측 외에도 고층관측은 하루 네 차례, 오존관측은 매주 한 차례 수요일에 실시한다. 악천후일 경우 수요일 전후의 최적 일을 택한다. 이외에도 해상관측 등을 하며 특이기상 상황은 상시로 관측한다. 위험 기상 시에는 관계기관이나 언론과 협업하고 시민들의 전화나 방문도 처리한다. 태풍이 북상하는 저녁이면 전국 기상청에서 심심찮게 받는 전화가 있다. 태풍 사라가 몇 년도에 왔는지에 대한 문의다. 근무지를 옮겨도 똑같은 전화가 걸려 오는 걸 보면 사라에 대한 기억이 깊게 남은 것 같다. 이러한 일들을 주야간 교대근무로 처리하므로 관측소는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다.-고층관측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가.△관측장비를 풍선에 묶어 하늘로 띄운다. 하늘에서 풍선이 터졌을 때 천천히 내려오도록 낙하산을 매달고, 풍선에 가스를 주입하고, 넓은 야외로 이동해 기구를 날리는데 준비 과정만 한 시간이 넘는다. 만약 풍선이 터지거나 정해진 고도까지 못 가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가스가 주입된 풍선은 성인 키보다 커서, 바람이 많이 불면 풍선을 붙잡고 이동하는 것조차 힘들다. 관측소에서 비양 지점까지 백 미터 넘게 포복 자세로 기어갈 때도 있다.-고생스럽게 일일이 사람 손을 거쳐야만 하나.△고층기상 관측용 자동 발사 장치가 개발되어 작년에 도입되었다. 이 장치는 정해진 시각에 자동으로 풍선에 가스를 주입해 사람 손이 닿지 않아도 하늘로 날려준다. 하지만 안정적인 기상 상황이 아닐 때는 사람의 손이 필요하고, 오존관측의 경우 센서를 달아야 해서 수동 관측만 가능하다. 오존관측은 고층관측에 비해 손이 많이 가고 까다롭다.-오존관측은 왜 하는 것인가.△대기 중의 오존은 성층권 오존과 대류권 오존으로 구분된다. 성층권 오존은 유해 자외선으로부터 생태계를 보호하고, 태양에너지를 흡수해 지구의 기후변화에 영향을 준다. 반면 대류권 오존은 주로 배기가스로 알려진 질소산화물 등에 의해 생성되며 환경에 악영향을 미친다. 오존의 90%가량은 성층권에 분포되어 있어 성층권의 오존 관측은 기후변화 감시에 중요하다. 포항기상관측소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세계기상기구(WMO)가 인정한 오존관측소이다. 1994년부터 현재까지 30여 년간 운영 중이다. -포항기상관측소의 국제적 위상이 그 정도인지 몰랐다. 말씀을 들어보니 고층관측과 오존관측은 방식이 비슷하다.△존데(Sonde, 전파를 이용한 기상 관측 기계)를 풍선에 매달아 하늘에 띄우는 방식은 동일하다. 다만 오존관측은 사전 테스트와 당일 테스트를 모두 거쳐야 하므로 일반적인 기상관측에 비해 훨씬 많은 시간과 전문성, 세심한 관측 기술을 요구한다. 고층 관측용보다 풍선이 커서 강풍이 부는 날에는 띄우기까지 위험한 상황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최소 2명이 팀으로 움직이며 최종 관측자료 생산까지 담당한다. 오존존데 시약 제조와 고층 관측용 헬륨가스 취급 관리도 병행하고 있어 전문성이 요구된다. -하늘에서 임무를 다하고 떨어진 존데는 어떻게 되나.△풍선이 하늘에서 터지면 낙하산을 펼치면서 떨어진다. 보통 해상으로 떨어지지만, 간혹 육상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혹시나 시민들이 놀랄까 봐 설명서와 연락처를 붙여놓는다. 그래도 찜찜한지 신고하는 분들도 계시는데 존데를 발견한다면 분리해서 버리면 된다.-송도에서는 관측기구를 매단 대형 풍선이 날아가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겠다.△주민들은 자주 봐서 그런가 보다 하지만 간혹 관광객의 신고로 경찰서에서 연락이 온다. 기상장비를 매단 풍선은 희귀한 볼거리인 만큼 포항 송도로서는 굉장한 자산이라 생각한다. 고층관측 기준시간은 08시 20분, 14시 20분, 20시 20분, 02시 20분으로, 그즈음 송도해수욕장 인근이라면 하늘을 유심하게 살펴보시길 권한다.- 직원들의 노고에 비해 기상청에 대한 국민 신뢰는 낮은 편이다.△ 일상생활은 날씨와 불가분의 관계니만큼 국민적 관심은 큰데, 자연현상을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일에는 오류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어느 농민은 예보에 없던 소나기로 콩 농사를 망쳤다고 항의를 하고, 어민들은 날씨가 좋은데 왜 특보를 내려 출항을 못 하게 만드냐고 따져 든다. 관측소에서 송도삼거리만 나가도 날씨가 다르고, 해상은 육지와 완전히 다른 기상이 전개된다는 걸 충분히 설명해 드리는 수밖에 없다. 기상청은 국민 신뢰 회복을 목표로 ‘하늘을 친구처럼 국민을 하늘처럼’을 내세우고 있는데 이 문구를 늘 마음에 새긴다.- 기상청 사람들의 직업병도 있을 것 같다.△ 하늘을 수시로 쳐다본다. 구름 모양을 잘 기억하는 편이다. 1분 전에 쳐다본 구름 모양이 이렇게 변했다는 것을 기억한다. 근무지를 자주 옮기다 보니 주말부부이다. 보통 가족끼리 안부를 물을 때 “밥 먹었냐?”고 묻지만, 우리 가족은 “거기 날씨 어때?”부터 묻는다. 10년 넘게 교대근무를 하면서 굳혀진 생활 패턴도 있다. 지금은 교대근무를 안 하는데도 관측 시간만 되면 여전히 긴장한다. - 기상청에서 일하면서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가끔이지만(웃음) 칭찬받을 때가 있다. 수고했다, 기상청이 있어 태풍을 안전하게 지났다는 한마디에 힘듦이 스르륵 녹는다. 울릉도에서 3년을 근무하고 나오면서 “이렇게 열정적으로 일하는 분은 여태껏 본 적이 없다.” “계속 여기 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눈물이 다 나더라. 포항에 와서는 태풍을 대비한 유관기관 긴급대책회의에 참석해 힘을 보탰다. 또 장기예보를 분석해 불빛축제 등의 행사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도와 지자체에서 감사패를 받았다. -기후변화로 날씨의 중요성은 커졌다. 기상 전문가로서 어떤 역할을 하고 싶나.△우리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날씨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제공되어야 한다. 태풍이 동해안으로 빠져나가면 태풍이 지나갔다고 안도하지만, 울릉도는 그때부터 시작이다. 울릉도에 가보니 주민들이 기상예보에 소외감을 가지고 있었다. 울릉도기상관측소장으로 재직하며 울릉도, 독도에 대한 맞춤형 기상예보 시스템을 구축해 큰 호응을 얻었다. 오지나 벽지일수록 밀착형 기상서비스가 절실하다. 변방의 장수가 유능해야 나라가 튼튼하다는 말처럼 기상청의 역할이 필요한 현장에 더 관심을 두고 살필 것이다. 김정희 대구지방기상청 기상주사는 환경에 관심이 많아 대학에서 환경대기학을 공부했고, 2000년에 기상청 사람이 되었다. 국가직 공무원이라 여수와 부산, 안동 등 전국을 돌아다녔다. 이렇게 힘든 일인 걸 알았다면 이 길로 들어서지 않았을 거라고 하지만 지난 23년간 최일선에서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기상 서비스를 제공했다. 2018년부터 3년간 울릉도기상관측소장을 지낸 뒤 2021년부터 2년간 포항기상관측소장을 지냈으며, 지난 9월 1일 자로 대구지방기상청으로 발령받았다. 우리나라 최동단 섬인 울릉도와 독도에서 위험기상 대응강화를 위해 ‘울릉도·독도 맞춤형 태풍기상브리핑’과 ‘독도기상정보표출시스템’을 구축했다. 지자체와 방재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울릉군과 포항시에서 방재업무유공 감사패를 받았다. 울릉도의 힘든 기상 상황을 떠올리며 쓴 시 ‘그해 겨울’로 기상청 문예전에서 시 부문 1위를 받았다.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지나간 겨울 지나/ 다시 봄이 오면/ 가족 실은 배도 고향 찾아 돌아오고/ 바다 건너 찬바람이 꽃밭이 되어 온다.” 헌신적인 공무원에게 주는 대한민국공무원상을 올해까지 3년 연속 국민에게 추천을 받았다. 기상청 내부가 아닌 국민에게 추천을 받는 일은 드문 일이다.   /배은정 작가

2023-09-04

포스코, ‘영일만의 기적’ 넘어 ‘찔레곤의 기적’ 만든다

산업의 기초가 돼 ‘산업의 쌀’ 이라 불리는 철강. 철강 패권을 거머쥐는 것은 곧 제조업의 근간을 다진다는 뜻. 철강은 제조업 전반에 소재로 쓰이고 있기에, 제조업 발달을 위해서는 안정적인 철강 소재 확보가 필수적이다.한국은 일찌감치 ‘철’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미국, 유럽, 일본에 비하면 후발주자지만 철강으로 나라를 다시 일으키겠다는 열정은 뒤지지 않았다. 전후 최빈국이었던 1960년대 대한민국은 일관제철소 건설에 사활을 걸었다. 실패하면 바다에 빠져 죽겠다는 ‘깡다구’로 만들어진 포항의 한국 최초 일관 제철소는 이후 반세기 동안 산업 성장의 기수가 돼 ‘산업의 쌀’로서 역할을 다해왔다. 철강이라는 토대 위에서 한국 산업은 꽃을 피웠다.포스코가 이룬 ‘영일만의 기적’은 한국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50년 역사 속에서 어느덧 아시아 철강 산업의 희망이 됐다. 포스코는 동남아시아 최초의 일관제철소를 인도네시아에 건설했다.글 싣는 순서1. 포항 영일만의 기적, 인도네시아에 닿다2. 이차전지 날개 단 인도네시아, 포항시 기회 찾으려면3. 인도네시아와 포항 기업 간의 교류 현 주소4. K기업문화, 인도네시아에 퍼진 한국기업 저력5. 탄소중립 시대, 인도네시아에서는 어떻게 ◇ 영일만 신화, 인도네시아에 닿다인도네시아는 포스코의 첫 해외 일관제철소 건설 기지였다. 포스코는 2008년 인도네시아에 제철소 건설을 결정했다. 2008년 인도네시아와 한국 정부가 맺은 기본 합의를 바탕으로 포스코는 인도네시아 국영 철강사인 크라카타우 스틸(Krakatau Steel)과 손잡고 연산 300만t 규모의 제철소 ‘크라카타우 포스코’ 를 건설했다.2000년대에 들어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는 빠른 경제 성장을 겪으며 새로운 시장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는 그 중에서도 가장 유망한 시장이었다. 200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5~6%의 안정적인 성장을 지속했고, 인도네시아 정부가 사회간접자본(SOC)확충과 조선업육성정책을 추진하면서 건설, 조선 산업이 크게 성장했다.그러나 인도네시아 철강 산업의 성장은 더뎠다. 2008년까지 인도네시아의 철강 수입 의존도는 52%. 철강 수입 증가율도 해마다 13.6% 가량 높아졌다. 철강 수요는 높은데, 철강 생산 능력은 턱없이 부족했던 것.인도네시아 시장의 잠재력을 본 포스코는 과감한 투자를 결정했다. 동남아시아 최초의 일관 제철소를 인도네시아에 짓겠다는 것이었다. 대부분 철강 기업이 제품을 생산하는 하공정 설비만 해외에 건설해 반제품을 해외에 판매하는 전략을 세워오고 있었기에 상·하공정을 모두 해외에 짓겠다는 포스코의 발표는 이례적이었다. 포스코는 인도네시아 내 하공정 공장을 이미 보유하고 있는 일본 철강사들 사이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고로 건설을 결정했다.야심찬 해외 시장 진출이었던 만큼, 건설 초기 인도네시아로 가던 포스코 직원들의 마음가짐은 비장했다. 한국과 다른 기후환경, 철강 시장 악화 등의 악재가 겹쳐 준공 이후 제철소가 안정화되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그러나 영일만 신화를 만들어낸 특유의 집념으로 포스코는 포기하지 않았다.약 10년간 이어진 고군분투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2021년 크라카타우 포스코의 영업이익은 5억200만 달러로 창립 이래 최고점을 찍었다. 다음해인 2022년에도 2억2천100만 달러의 영업이익을 달성했다. 무엇보다 영업이익률에서 큰 성과를 냈다. 크라카타우 포스코의 2021년, 2022년 영업이익률은 각각 20%와 10%로, 같은 해 포스코 본사의 영업이익률을 상회했다.모두가 기피하는 일관제철소를 건설한 ‘뚝심’도 빛을 발할 것으로 보인다. 인도네시아 내에 고로부터 제품 공장까지, 상·하공정을 모두 보유하고 있는 기업은 포스코가 유일하다. 하공정만 보유한 기업의 경우, 반제품을 수입해 가공해야하기 때문에 무역 리스크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에 반해 자체 고로를 보유하고 있는 포스코는 비교적 외풍으로 인한 영향이 적어 안정적인 철강 생산이 가능하다. 향후 자동차 강판 생산라인까지 구축되면 인도네시아 철강 산업의 패권도 쥘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수많은 자동차 기업들이 인도네시아에 진출해 있지만, 일관제철소를 보유한 것은 크라카타우 포스코 뿐이다.실제로 ‘영일만의 기적’을 넘어 ‘찔레곤의 기적’을 만들기 위해 포스코는 크라카타우포스코 제철소에 고로 1기를 추가 건설해 연간 조강량을 600만t 이상으로 확대하고, 자동차 강판을 비롯한 냉연 설비를 구축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포스코는 향후 2030년까지 1천만t 철강 클러스터를 구축하는 야심찬 포부를 품고 있다. 포스코만의 K-기업 신화가 인도네시아에까지 널리 뻗어나간 셈이다. ◇ 포항 영일만, 역사의 시작한국 제조업을 견인한 철강 산업의 원류는 바로 포항이다. 한국 최초의 일관제철소, 포스코 포항제철소가 탄생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탄생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1964년 12월 4일 제102차 경제장관회의에서 박정희 정부는 철강공업 육성계획을 의결했다. 종합제철 건설을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 뿐만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기술이 뒷받침돼야하기 때문에 당시 철강 선진국이었던 미국, 유럽, 일본 등의 협조가 필요했다. 그러나 선진 우방국조차 이제 막 전쟁이 끝난 ‘아시아의 빈곤하고 작은 나라’가 추진하는 종합제철 건설에 선뜻 힘을 보태려 하지 않았다.그럼에도 정부는 종합제철 건설계획안을 수립하고 국제차관단 구성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1966년에는 미국, 서독, 영국, 이탈리아 4개국 7개사와 한국에 종합제철을 건설하기 위한 기본사항에 합의하고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을 발족했다. 1967년 1월 프랑스가 추가로 참여해 구성원은 5개국 8개사로 늘어났으며, 1967년 10월 종합제철 건설에 관한 기본협정을 체결했다.이후 1967년 7월 포항을 종합제철 건설을 위한 최종 입지로 선정하고, 1968년 4월 1일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가 공식 출범했다.그러나 KISA 출범으로 빠른 진전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KISA를 통한 차관 교섭이 여의치 않자, 1969년 1월 31일 정부와 박태준 사장 일행은 KISA 대표단과의 담판을 위해 미국으로 향했다. 경제적 타당성 부족을 이유로 KISA를 통한 차관 조달은 결국 실패했고, 1969년 9월 2일 시효가 만료됨에 따라 KISA와의 기본협정은 자동적으로 해지됐다.종합제철 사업의 좌초를 막기 위해 새로운 자금 공여처와 기술 제휴처를 확보해야만 했다. 한일 양국이 농림수산 부문에 주로 투자하기로 합의한 대일청구권자금 일부를 종합제철 건설 자금으로 전용하고 일본 철강업계의 기술지원을 받는 것만이 제철소 건설사업 실현을 위한 마지막 대안이었다.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 민관 합동 노력에 나섰다. 일본 정부를 설득해 자금을 제철소 설립에 유용하는 것에 합의했다. 일본 철강업체들의 기술협력 분위기를 조성해 극적으로 제철소 건설사업이 추진될 수 있었다.정부 수립에서부터 한일 간의 기본협약이 체결되기까지는 무려 여섯 차례의 종합제철 건설 시도가 있었다. 결국 그 결실이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다.자금이 마련되고 제철소 건설은 빠르게 진행됐다. 창립 2주년을 맞은 1970년 4월 1일 경북도 영일군 대송면 동촌동 건설 현장에서 포항 1기 설비 종합 착공식을 거행했다. ◇ 한국 최초 일관제철소 만든 집념, ‘아시아 철강’ 시대 이끌다포항 1기 사업은 조강 연산 103만t(톤) 규모, 1973년 7월 완공을 목표로 계획됐다. 당시 언론은 종합 착공 관련 보도를 통해 포항제철소 건설사업이 유사 이래 최대 규모 단일투자라는 점을 강조하며 철강재 자급 촉진, 국제 수지 개선 및 고용 증대, 자주국방 능력 강화 등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됐다고 평가했다.제철소 건설이 시작되자 박태준 사장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건설현장을 시찰하며 모든 건설요원들에게 “민족의 숙원사업에 동참한다는 긍지와 사명감을 가질 것”을 주문했다. 특히 “선조들의 피값인 대일청구권자금으로 건설하는 만큼 실패하면 민족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니 우향우해 영일만에 빠져 죽어 속죄해야 한다”는 남다른 각오를 요구했다.이러한 각오는 곧 빠른 제철소 건설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열연 비상’ 사건이다. 생산설비 중 가장 앞서 1970년 10월 1일 착공했던 열연공장은 1971년 4월 콘크리트 타설 공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계획이 여러 번 변경되면서 설계가 지연됐다. 건설업체의 자재와 인원 부족에 여름 장마까지 겹치면서 공기지연 문제가 표면에 떠올랐다. 공기를 맞추기 위해 포항종합제철은 전사적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관리, 행정 직원까지 모두 투입돼 24시간 ‘돌관공사’에 들어간 것이다. 수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밤낮없이 공사에 참여했다. 그 결과 2개월만에 5개월 분의 콘크리트를 타설할 수 있었다. 심지어 건설 공기를 예정보다 1개월 단축할 수 있었다.산업 역군을 자처하고 나선 직원들의 곧 한국 최초 일관제철소 완공이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1973년 7월 3일 포항제철소는 1기 종합 준공을 무사히 완수했다.박태준 사장은 종합 준공에 대해 “종합제철의 탄생은 정부의 강력한 지원과 온 국민의 열의의 소산”이라며 “우리나라 철강공업의 기틀이 되고 중화학공업의 핵심적인 위치를 점해 더욱 비약적인 국가 경제 발전에 공헌할 것”이라고 밝혔다.박정희 대통령은 치사에서 “초현실적인 제철소를 준공하게 된 데 대해 감개무량함을 금할 수 없다”고 회고하며, “조강 연산 103만 톤의 종합제철공장을 완공하게 된 것은 우리나라가 중화학공업의 문턱을 넘어서 훨씬 더 깊은 곳에 도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전했다.포항제철소가 국가 경제 발전에 공헌할 것이라던 박태준 사장의 말은 곧 현실이 됐다. 포항 1기 설비 건설은 국내 철강산업 성장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자동차, 조선, 전자, 건설 등 국내 수요산업에 소재를 공급할 수 있게 됨으로써 국내 산업의 경쟁력 제고와 비약적인 성장의 밑거름이 됐기 때문이다. 역으로 이를 통해 성장한 국내 수요산업 또한 철강산업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든든한 수요 기반이 되며, 선순환 구조를 이룰 수 있게 됐다. 계속/인도네시아에서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3-09-03

댐 준공·국가산단 승인 겹경사… 영주시 ‘미래로 간다’

영주시의 최대 숙원사업이었던 영주댐과 첨단베어링국가산단이 각각 준공과 최종 승인이 발표됨에 따라 영주시가 추진 중인 미래 발전을 위한 경쟁력 확보에 청신호가 켜졌다.영주댐 다목적댐은 지난달 22일 환경부로부터 최종 준공 승인이 나면서 본댐 준공 7년만에 그 결과를 얻으며 영주시의 새로운 관광 지평과 경제적 성장에 큰 발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영주 첨단베어링 국가산업단지는 지난달 25일 국토교통부로부터 최종 승인을 받아 최근 5년간 신청된 국가산업단지 가운데 가장 빨리 국가산단으로 승인받는 성과를 이뤘다.국가산단은 영주시는 미래 전략사업인 소재부품 산업 중심지 도약을 통한 지역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할 전망이다. □ 영주댐 준공영주댐은 낙동강 유역 수질개선을 위한 하천 유지용수 확보, 이상 기후에 대비한 홍수 피해 경감 등을 위한 목적으로 2016년 본댐이 조성됐다.그러나 문화재 이전과 복원, 각종 개발사업 추진 과정에서 관련기관 간의 의견 차이가 발생하면서 오랜 기간 표류해 왔다.영주시는 그동안 승인이 늦어지면서 각종 개발사업이 지연되는 등 지역주민들의 불편이 야기되자 문화재 이전·복원 사업비 조정 및 처리방안 확정 등 준공에 필요한 절차를 모두 이행하고 준공을 앞당기고자 노력해왔다.특히 지난달 9일에는 수자원공사 영주댐지사에서 박남서 시장을 비롯한 각 분야별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댐 준공을 위한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었다.영주댐은 7년간의 표류 끝에 최종적으로 준공인가가 고시되면서 영주시민의 숙원사업을 해소하고 지역 발전의 새로운 발판을 마련했다.시는 댐 주변 지역을 치수 시설 외에 대규모 관광단지로 개발하겠다는 구상이다.이중 야간 경관을 위해 용마루 공원 일대에 빛 조명을 활용한 일루미네이션파크 조성과 숙박시설과 음식점 등 민자를 유치하려는 방안도 검토중이다. 경상북도가 투자심사 중인 영주댐 수변 생태자원화 단지와 영주댐 레포츠 시설 조성사업, 스포츠 콤플렉스, 영주댐 어드벤쳐 공간, 수상 레포츠 시설 등 체험형 관광시설을 확충해 영주댐 주변을 건강과 관광, 스포츠가 함께하는 명품 관광지로 만들어 나갈 계획이다.또, 이산면 번계들, 개산들 일대에 대통령 공약사항인 영주댐 수생태 국가정원 조성사업을 추진하는 등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관련 사업들도 함께 추진한다.특히, 댐 주변의 무분별한 난개발을 막고 체계적인 개발이 이뤄질 수 있도록 영주댐 주변 개발사업 기본구상 및 타당성 조사용역을 추진해 댐의 수변 자원을 활용한 경관 사업과 함께 지역의 생태계와 환경보전을 위한 사업을 함께 추진해 나갈 수 있도록 검토한다.영주댐은 댐 건설 초창기에 시민 간 찬성과 반대 등의 의견이 부딪치며 순조롭지 않은 여정을 걸어왔다.영주댐은 당초 영주시 평은면, 이산면, 문수면을 비롯한 봉화군 일대를 포함한 대형 다목적 댐으로 건설할 계획으로 추진됐지만 댐공사의 적절성을 두고 표류하다 2009년 정부가 영주송리원댐과 영천 보현댐 건설을 확정하고 안동댐과 임하댐을 도수로로 활용하는 방안을 발표했다.당시 일부 영주시민들과 댐 수몰 예상지구 주민들을 비롯해 봉화군민들은 송리원댐 반대 투쟁위를 결성해 댐 건설 반대 운동을 펼쳤다.송리원댐은 영주다목적댐으로 이름을 정하고 담수 면적을 줄이는 등 현재 규모로 조성안을 세웠다.영주댐은 내성천과 낙동강이 모이는 합류점인 평은면 내성천 인근 유역면적 500㎢, 길이 400m, 높이 55.5m, 유효 저수 용량 1억3천800만㎥, 총저수용량 1억8천110만㎥ 규모다.댐 주변에는 국내 최장인 길이 51㎞의 순환도로와 수몰 마을 주민들을 위한 이주단지 3개소 66세대, 영주댐 물 문화관, 영주호 오토캠핑장, 전통문화 체험장 등의 편의시설이 조성돼 있다. □ 첨단베어링국가산업단지영주시가 첨단산업도시의 날개를 달았다.영주 첨단베어링 국가산업단지가 지난달 25일 국토교통부로부터 최종 승인을 받았다. 2018년 8월 영주시가 국가산업단지 후보지로 지정된 후 약 5년간의 여정 끝에 맺게 된 결실이다.국가산단이 준공되면 우수기업과 인재들이 모여들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 영주시는 미래 전략사업인 소재부품 산업 중심지로 도약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또, 영주시를 중심으로 베어링 국산화 등 첨단산업 육성 동력이 마련돼 직·간접 고용 4천700여 명 등 1만300여 명의 인구증가 효과와 영주시 관내에 연간 760억원의 경제 유발 효과를 얻을 전망이다.승인 고시에 따르면 영주 첨단베어링 국가산업단지는 적서동과 문수면 권선리 일원에 118만㎡(36만평) 규모로 최종 결정됐다. 단지는 산업시설용지 60.3%(71만㎡), 지원시설용지 4.2%(5만㎡), 공공시설용지 34.3%(40만㎡) 등으로 구성된다. 유치업종은 베어링, 기계, 경량 소재 등 16개 업종이다.시는 국가산업단지가 승인됨에 따라 올해 하반기부터 토지보상계획 공고 및 감정평가 등 본격적인 보상을 위한 절차 이행을 시작해 2024년 착공, 2027년 준공을 목표로 관련 사업을 추진한다. 이와 함께 첨단베어링 산업과 베어링 전후방 기업 및 경량소재 관련 기업 집적화의 토대를 마련하고 소재·부품산업의 발전을 이끌어갈 유망 기업을 유치하고자 입주기업 재정지원, 산업인프라 구축,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등 지역과 기업이 함께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관련 정책을 추진해 나갈 방침이다.영주시와 첨단베어링클러스터 조기 조성 시민추진위원회는 25일 시청 강당에서 국가산단 지정·승인에 따른 비전 선포식을 개최했다.이번 선포식은 경북 북부권 최초 국가산업단지 지정 승인을 축하하고 산업단지 조성부터 성공적인 기업 유치까지 베어링 중심도시로 도약을 위해 마련됐다.2019년 8월부터 2020년 1월까지 경상북도개발공사에서 실시한 입주 의향 리서치에서 73개 기업, 분양면적 대비 129%의 기업이 입주 의사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영주시는 총사업비 2천964억원을 투입해 추진하는 국가산단의 기업 유치를 위해 평당 120만원으로 산정된 조성 원가를 50만원선으로 하향하고 조성원가 대비 분양가 차액에 대해 국비를 포함한 1천859억원을 단계적으로 지원하게 된다.김진영 영주시민추진위원장은 “끊임없는 노력 끝에 영주 첨단베어링 국가산업단지가 현실화됐다”며 “지정 승인을 위해 업무추진에 힘써 준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박남서 영주시장은 “10만 영주시민을 비롯한 지역사회 구성원 모두의 꾸준한 관심과 협조가 있었기에 영주 첨단베어링 국가산업단지가 최종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며 “첨단산업을 선도할 유망 기업들을 유치해 영주지역은 물론 경북북부지역의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며 각오를 밝혔다./김세동기자 kimsdyj@kbmaeil.com

2023-09-03

“지역사를 후손에게 잘 전승하는 게 우리의 소명”

다섯 번째 인터뷰하던 날에 비가 내렸다. 우산을 쓰고 선생과 동해면 신정리 선돌과 금광리 고인돌군을 둘러보고 금광저수지를 산책했다. 함께하는 네 시간 내내 선생은 우리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했다. 선생의 눈에는 지역의 거의 모든 것이 역사의 흔적이었고 이야기보따리였다. 신정리 선돌을 보러 가던 중에 선생이 승용차의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황인(이하 황) : 저기가 ‘학삼서원’인데 현판을 김구 선생이 썼어. 그걸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려는지? 김구 선생의 글 원판은 잃어버리고 말았어. 그걸 수소문해보니 어떤 고문서 수집가 손에 들어가 있었어. 그 중요한 걸 그냥 둬서는 안 되겠다 싶어 포항문화원을 찾아가 사정을 얘기하고 수집가를 만나게 되었지. 그런데 그 수집가가 값을 너무 비싸게 부르는 바람에 결국 못 사고 말았어. 그뿐 아니라 포항에는 많은 역사와 문화의 이야깃거리가 있어. 하지만 사람들이 그걸 잘 모르고 기록이 잘못되어 있기도 해서 안타까워.여국현(이하 여) : 선생님이 보실 때 아쉬운 일이 많겠습니다.황 : 연오랑세오녀만 해도 그래. 동해면에 있는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이 처음 개장했을 때 연오랑세오녀가 거북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되어 있었어.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거북이 아니라 바위를 타고 건너갔다고 기록되어 있지. 그래서 내가 바위를 타고 건너갔다고 했더니 고쳐놓더군. 이런 내용은 관련 문헌을 충분히 검토해야 해. 우리가 보존해야 할 역사와 문화유산이 잊히고 없어진 게 많아. 오천 문충리에 가면 포은 정몽주 생가터가 있는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 승마석뿐이지. 그래도 거기가 정몽주 생가가 아닌가. 정몽주 무덤이 있는 용인에서는 축제도 한다는데, 생가를 복원하는 게 불가능하진 않을 텐데…. 이육사 시인도 고향은 안동이지만 일제강점기 때 도구에 있는 동양 최대 규모의 포도 농장에서 그 유명한 ‘청포도’를 구상했지. 또 호미곶에 있는 등대에는 조선 왕실의 배꽃 문양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이런 게 사소한 것 같지만 잘 보존해서 시민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전해야겠지.여 : 저도 몰랐던 이야기가 곳곳에 있군요.황 : 어디 그뿐인가. 장기는 예부터 명망 높은 선비들이 귀양을 많이 왔지. 장기에 유배 온 대학자들이 장기는 물론 경북 일대의 학문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어. 우암 송시열이 장기에 4년 있다가 떠난 뒤 우암의 공덕을 기린 죽림서원이 세워졌고, 다산 정약용도 장기에 220일 머무는 동안 150여 수의 시를 지었지. 장기초등학교에 있는 우암과 다산의 사적비에는 두 분으로 인해 장기가 최고 수준의 학문을 전수받은 것은 행운이었다고 적혀 있어. 이런 걸 역사 시간에 가르치고, 학생들이 보고 듣고 체험하는 기회를 갖도록 하는 게 우리가 할 일이지. 우리 향토사부터 제대로 알고 기억하고 후대로 이어주는 게 참 중요해. 그런 점에서 내가 고맙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어. 포스코 문화재돌봄 봉사단이 진각국사 사당과 남파 대사 무덤에 가는 길 앞에 안내판을 설치하고 관리하는 등 애를 많이 썼어. 정말 고마운 일이지. 여 : 동해면에 목장성(牧場城)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황 : 동해면 흥환리 일대에 제주도를 제외하면 전국에서 가장 큰 말 목장이 있었어. 과거에 북벌 정책의 하나로 군마를 기르고 임금이 신하들에게 하사하거나 중국에 조공으로 바치는 말들을 사육하려고 만든 곳이지. 이곳이 특이한 건 말을 방목해 길렀다는 것이야. 말들이 있던 목장 둘레에 성을 쌓았는데 그게 목장성이야. 원래 둘레가 8킬로미터가 넘었는데 지금은 5킬로미터 정도의 흔적만 남아 있어. ‘감목관(監牧官)의 공덕비’라고, 목장을 관리하는 관리의 공덕비가 있고, ‘울목김부찰노연영세비(蔚牧金副察魯延永世碑)’ 같은 역사적 자료가 될 비도 남아 있지.여 : 포항에 봉수대 터도 꽤 있지요.황 : 모두 열세 개가 있어. 장곡, 대곶, 복길, 사화랑, 도리산, 오봉산 등등. 내가 그걸 두고 몇 번인가 포항시 정신문화자문위원회에서 이야기했지. 포항에서 불빛축제를 할 때 봉수대 터를 복원해서 봉홧불을 올리고, 등댓불도 이어서 밝혀보자고 말이야. 우리 지역에 남아 있는 역사의 흔적을 살려내 사람들이 쉽게 접하는 스토리텔링을 만드는 것, 그게 진짜 역사고 사람들한테 관심을 끌 수 있는 일인데, 좀 아쉽지.금광저수지를 돌면서 선생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그동안 역사와 연관된 이야기만 해왔던 터라 교사로서 선생이 기억하는 일화도 궁금해졌다. 개인적인 이야기라고 머뭇거리던 선생은 세 가지 이야기를 꺼냈다. 하나는 김규호 학생 이야기, 다른 두 이야기는 학생들과 했던 활동이었다.여 : 동해중학교 김규호 학생 이야기는 당시 지역방송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학생이 골수암 판정을 받았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치료를 받을 수 없었더군요.황 : 1998년에 이 사실이 지역 언론을 통해 알려져 당시로서는 거금인 5천만 원이 모금되었고 김규호 학생은 서울의 한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지. 그때 참 많은 사람이 도움을 주었어. 어느 날 한 포스코 직원이 출근하면서 봉투 하나를 주고 가더군. 이름이라도 가르쳐달라고 했더니 그냥 가버렸어. 당시에 그런 일이 참 많았지. 당시 나는 우리 세상이 아직은 살 만하다고 생각했어.여 : 포항여자전자고등학교에 계실 때 동해안에서 전승되던 민속놀이 ‘월월이청청’을 복원해 2001년 전국청소년민속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더군요.황 : 학생 100여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공연이었지. 전통 민속놀이를 발굴하고 복원한 것이라 참여한 교사와 학생들 모두 보람을 느꼈어. 이런 활동이 학생들에게 우리 지역과 나라의 역사를 제대로 알리는 기회지. 선생은 학생들을 문화재 현장에 데리고 가서 역사를 직접 느끼고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1980년대부터 6월이 되면 보이·걸스카웃 학생들을 데리고 이 지역의 의병 장헌문(蔣憲文) 대장과 임창규(林唱圭) 의사의 묘소를 참배하는 일을 20년 넘게 계속했다. 선생의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거둬 장헌문 대장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고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여 : 요즘은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어떻다고 보십니까?황 : 우리 지역에는 아직 발굴되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문화재와 유물이 많아. 다행스럽게 지역사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조금 늘어났어. 하지만 짧은 지식으로 역사를 자기식대로 해석하는 건 위험해. 사료에 대한 고증이 우선이지. 그렇지 않으면 역사가 다음 세대로 제대로 전달될 수 없어. 역사는 있는 그대로 기록해야지 미화해서도 폄훼해서도 안 돼.여 : 이제 인터뷰를 마무리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끝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황 : 지금이라도 우리 정신문화의 풍성함을 찾아야 해. 그게 멀리 있는 게 아니고 우리 역사와 문화 속에, 우리 선조가 살아왔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기록과 흔적 속에 남아 있지. 우리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잘 보존해서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 그것이 우리의 중요한 소명이라고 생각해.끝황 인195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대구로 이주해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영남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동해중학교에 교사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닿았으며, 포항정보여고와 동성고에서 2008년까지 재직한 후 정년 퇴임했다. 포항 지역의 고인돌을 처음으로 조사·발굴해 ‘영일군사’에 소개했고, 지역 민속놀이인 ‘월월이청청’을 조사·발굴한 후 포항정보여고 학생들과 공연해 제7회 청소년 민속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흥인군의 비석과 남파 대사의 비석을 발견해 비각을 세우도록 했고, 석곡 이규준 선생의 목판을 경북 문화재 자료로 지정하게 했다. 또한 석곡의 사상과 학문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알려 석곡기념관 건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포항시사’ 집필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포항문화원 향토조사 연구위원 등을 맡고 있다. 2022년 제12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대담·정리 : 여국현(시인)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황 인

2023-09-03

세상사 번뇌·시름말끔히 씻어 볼까

울진은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지니고 있다. 울진의 늦여름은 어린아이의 말간 얼굴이 연상된다. 순수한 자연과 향기조차 그윽한 금강송 송이가 있는 곳. 계곡 사이로 수정처럼 맑은 물이 흐르면 세상사 시름과 번뇌조차 말끔히 씻어지는 곳. 이제 얼마있어 가을이 오면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듯 울진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조선시대 보부상의 애환이 서린 길울진의 산은 그리 높지 않아도 등성이가 제법 험하다. 사람의 손길을 많이 타지 않은 산은 마치 부끄러운 듯 돌아서 있다. 울진금강소나무숲길은 조선 시대 보부상의 애환이 서린 십이령옛길과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금강소나무 군락지가 어우러진 길이다.금강산에서 시작해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을 따라 자라는 ‘금강송’은 줄기가 곧고 속까지 알차며 강도 또한 일반 소나무에 비할 바가 아니다. 소나무의 명품이어서 주로 왕실에서 쓰인다.금강송이 시원하게 뻗어 있는 소광리 금강송숲은 들어서는 순간 시원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소나무의 바다다. 소나무 원시림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했다는 이곳에는 금강송이 100만여 그루 이상 자라고 있다. 수령만 해도 200~300년이 넘는다.생태숲 초입에는 금강송 중 무려 540년이나 된 금강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조선조 제9대 임금 성종 시대에 태어난 것으로 추측되니 그야말로 조선 시대의 흥망성쇠를 모두 겪은 역사 그 자체다. 오백년소나무라는 이름이 붙은 금강소나무는 지름 96cm, 키 25m, 수령 약 540년이다. 흔히 소나무는 200~300년 되면 노송(老松), 300~500년은 고송(古松), 500년이 넘으면 신송(神松)으로 불린다. 오백년소나무 외에도 못난이소나무, 육백년소나무 등 신송이 있다.오백년소나무 옆 금강소나무전시실에는 금강소나무와 일반 소나무를 비교하는 자료가 있다. 금강소나무는 일반 소나무보다 나이테가 3배쯤 촘촘하다. 척박하고 추운 지역에서 더디게 자랐기 때문이다. 뒤틀림이 적고 강도가 높은 금강소나무는 궁궐이나 사찰 등의 건축재로 사용됐다. 일제강점기에는 삼척, 울진, 봉화 등 내륙의 금강소나무가 대량 벌채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해방 후 금강소나무 집산지(봉화 춘양역) 이름을 따 ‘춘양목’이라 부르기도 한다.이 때문에 금강송은 ‘소나무의 제왕’으로 불린다. 속이 황금빛을 띠어 ‘황장목’이라고도 불린다. 궁궐과 천년고찰의 대들보로 쓰이니 살아서도 영광이요, 죽어서 목재가 돼도 천년을 이어 영화를 누린다.금강송이 귀한 소나무이니 예전에는 금강송이 있는 숲에 일반인들의 출입을 엄격히 금했다. 황장금표가 바위에 새겨진 것도 이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는 금강송을 1그루만 베어도 곤장 100대에 3년을 복역할 정도였다. 요즘으로 쳐도 중범죄에 해당할 정도니 조선 시대 사람들이 얼마나 금강송을 귀하게 여겼는지 능히 짐작이 간다.울울창창한 소나무숲 사이로 산책로가 잘 정비돼 있다. 빽빽한 소나무숲 틈틈이 들어오는 햇살이 얼핏얼핏 얼굴에 닿으면 그지없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쪽동백나무 커다란 잎사귀 사이로 들어오는 투명한 햇살이 보석처럼 빛난다. 숲길을 20분쯤 걸으니 넓은 공터가 나온다. 여기가 탐방이 끝나는 지점에 ‘송낙정’이 있다. ◇향긋한 명품 송이버섯금강송 밑에는 또 하나의 명품이 자란다. 송이버섯이다.송이버섯은 향긋한 솔잎향이 코끝에 오래 머물고 한입 베어 물면 착 달라붙는 식감이 일품이다. 산의 기운을 받고 자란 송이는 오래된 소나무 뿌리 끝부분에 붙어 기생한다.송이버섯이라 해도 모두가 명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울진 금강송 송이버섯은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한 식감과 향기를 지녔다. 기생목인 명품 소나무 금강송에 화강암이 풍화돼 생긴 마사토와 바닷바람이 키웠기 때문에 타 지역 송이에 비할 수 없는 명품이 된 것이다.울진 송이는 표피가 두껍고 향이 진하며 맛이 잘 변하지 않는다. 양양의 송이도 일품으로 치지만 울진 송이 또한 송이가 나는 어떤 지역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맛을 자랑한다.송이는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일미다. 버섯이 나오면 대개 구워 먹는 게 일반적이지만 울진 사람들은 날것을 그냥 길게 찢어서 단숨에 입으로 옮긴다. 불로 구워 먹는 게 아니라 혀로 구워 먹는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동의보감’에는 송이는 성질이 서늘하고 열량이 낮아 보양식으로 제격이라고 기록돼 있다. 항암효과도 뛰어나다. 항균·해독에도 좋아 한방에서는 귀한 약재로 여겨져왔다.인공 재배가 안돼 9~10월 잠깐 시중에 나오는데 올해는 비도 많이 오고 늦더위까지 겹쳐 물량이 부족할 것으로 보인다. 가뜩이나 송이값이 비싼데 물건이 귀하다보니 가격이 올랐다. 1㎏ 단위로 상품(上品)이 70만원선, 중간 등급이 40만~50만원선이다. 그나마 이 정도인 게 다행이다 싶다. 한때 송이가 귀했을 때는 ㎏당 80만원을 호가한 적도 있다. ◇신선이 노닐던 듯한 신선계곡의 풍취울진엔 오지가 많다보니 구불구불한 심산유곡이 많다. 불영사까지 이르는 불영계곡도 뛰어나지만 백암산이 품고 있는 신선계곡은 금강산의 유수한 계곡보다 빼어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름 그대로 사방에 있는 계곡의 아름다움이 신선이 놀던 곳과 같다 해서 지어졌다. 기암절벽에 소나무와 참나무가 어우러진 울창한 수림계곡 곳곳의 담과 소는 비경 그 자체다.백암산의 품에 안긴 신선계곡 6㎞의 풍경은 물이 많고 길며 기기묘묘한 바위와 계곡수의 조화가 화려하다. 용이 살았다는 용소를 비롯해 바위 아래로 파고든 계곡수가 함지박만한 그릇을 만들어낸다. 물은 온갖 사물이 되어 흘러내린다.그릇처럼, 호리병처럼, 너른 접시처럼 다양한 형상이 되어 사람들의 시각을 홀린다.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합수곡이 나타나고 독골용소는 바닥을 모를 깊이로 선뜻한 느낌마저 준다.맑은 물이 흐르는 여름에도 뛰어나지만 단풍이 드는 가을철에는 실경이 아닌 선경이 펼쳐진다. 밑의 매미소를 지나 상류로 올라가면 작은 소들이 옥빛을 띠고 있고 바위 사이로 작은 폭포까지 아기자기하게 펼쳐진다.가족탐방로 주차장에서 18km쯤 구불구불 이어진 도로를 내려오면 불영사 주차장에 닿는다. 주차장에서 불영사계곡을 끼고 미끈한 금강소나무가 가득한 산비탈을 10분쯤 걸으면 불영사 마당으로 들어선다. 마당에 정갈한 고추밭이 인상적이고, 넓은 연못에 노랑어리연꽃이 만개했다.대웅보전(보물) 계단 양쪽으로 돌거북이 머리만 내민 모습이 재미있다. 두 마리 거북이 대웅보전을 업은 형상이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불영사가 있는 자리가 화산(火山)이어서 불기운을 누르기 위함이라고 한다. 연못 앞 벤치에 앉으면 산에 폭 안긴 듯 마음이 편안하다.여행 정보예전에는 울진금강소나무숲길은 워낙 오지여서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이었지만 예능프로그램 ‘1박2일’을 비롯해 다양한 방송매체에 소개된 후 찾는 이가 부쩍 늘었다. 산림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예약탐방제로 운영된다. 홈페이지(www.uljintrail.or.kr)를 통해 예약을 하고 출발장소인 울진금강소나무숲길 안내센터까지는 직접 이동해야 한다. 구간마다 탐방 인원을 하루 80명으로 제한하고, 자격증이 있는 숲 해설사가 안내한다. 홈페이지에 7개 구간 소개와 난도, 소요 시간 등이 자세히 나온다. 울진금강소나무숲길은 산림청이 국비로 만든 1호 국가 숲길로, 2010년 7월에 1구간이 열렸다. 총 7개 구간(79.4km) 가운데 현재 5개 구간을 운영한다(1·5구간 정비 중). 1구간(보부상길)과 2구간(한나무재길)은 보부상이 소금을 지고 다니던 십이령옛길이고, 3구간(오백년소나무길)과 3-1구간(화전민옛길)은 금강소나무 군락지를 지나는 길이다. 4구간(대왕소나무길)과 5구간(보부천길)은 600년 넘은 대왕소나무를 만나는 길이고, 가족탐방로에서는 오백년소나무와 못난이소나무 등이 반긴다./최병일 작가

2023-08-31

석곡기념관 건립의 기틀을 다지다

포항이 낳은 큰 인물로 석곡(石谷) 이규준(李圭晙, 1855~1923)이 있다. 석곡은 포항 동해면 출신으로 한의학은 물론 문학과 철학, 천문학 등을 폭넓게 연구한 학자이며 선비 의사의 삶을 살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포항시는 석곡을 기리는 기념관을 지난 7월 말 임시 개관했고, 오는 10월에 정식 개관할 예정이다. 남구 동해면 도구리 일원에 건립된 이 기념관은 지상 2층 규모다. 석곡의 삶과 학문을 재조명하고 그 의미와 가치를 널리 알려온 이가 황인 선생이다. 황인 선생이 석곡기념관을 건립할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석곡은 누구이며 그의 발자취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들어보았다.여국현(이하 여) : 선생님은 근대 한의학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석곡 이규준을 재조명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석곡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황인(이하 황) : 사실은 나도 석곡을 잘 몰랐어. 그런데 우연히 포항 시내에서 한의원을 하는 김학동 원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석곡이 참 대단하다는 말을 들었지. 김학동 원장이 소속된 소문(素問)학회에서 해마다 10월 마지막 일요일에 석곡 선생의 묘소를 참배한다고 하더군. 얼마나 대단한 분인가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 석곡 묘소에 참배할 때 따라갔지. 현장에 가서 석곡의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석곡이 참 대단한 학자였다는 걸 알게 되었어. 여 : 그때 어떤 말씀을 들으셨는지요?황 : 석곡은 독학했고, 전국을 다니며 대학자들과 토론하면서 학문을 쌓았지. 어느 날 청도의 한 서당원장이 학문이 대단하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해. 그런데 그때 거기서 무위당(無爲堂) 이원세(李元世)가 공부를 하고 있었어. 생판 모르는 사람이 찾아와서 스승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자기가 봐도 학문이 대단한 거라. 이원세가 석곡을 붙들고 배움을 청하러 찾아가겠다고 하니 석곡이 대구에 서병오라는 사람 집에 가 있으면 연락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이원세가 서병오 집에 8년 정도 머물게 돼. 서병오가 누군가 하면 어린 나이에 대구에서 천재라고 소문이 나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눈에 들었고, 나중에는 영천 군수에 오른 사람이지. 서병오가 혈압이 높았는데 누구도 못 고치는 걸 석곡이 고쳐준 뒤로 석곡에게 한의학을 배우게 되었어. 하여간 이원세가 서병오 집에 머물면서 석곡의 제자가 된 거야.여 : 서병오와 이원세 두 분 다 석곡의 제자들인 셈이군요. 그렇다면 그분들을 통해 소문학회가 만들어져서 석곡을 기리게 된 건가요?황 :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조금 더 이야기가 있어. 나중에 이원세가 부산에 갔을 때, 부산에서 한의학을 공부하던 사람들이 이원세를 모시고 함께 공부하게 되었지. 인원이 점점 늘면서 이원세가 스승인 석곡의 학문을 연구하자고 제안해 석곡학회가 창립되었어. 그렇게 석곡학회를 만들긴 했는데, 여기서는 석곡의 한의학 공부만 하는 거라. 하지만 석곡은 수학, 천문학, 유학 등 다방면의 학문에 관심을 가졌던 터라 석곡학회를 한의학만 공부하는 소문학회로 바꾼 거지. 이분들이 매년 음력 10월 마지막 일요일에 석곡 선생의 묘소에 참배하면서 석곡 선생을 기려온 거야. 여 : 하지만 포항에서는 아직 석곡이 누구인지,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황 : 1885년 포항 동해면 임곡리 출신인 석곡은 근대 한의학의 선구자로 알려졌어. 원래 유학에 바탕을 둔 학문에서 출발해 성리학까지 통달한 분이지. 사실은 유학과 성리학을 증명하기 위해 한의학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놀라운 일은 이분이 모든 학문을 독학으로 했다는 것이지. 그러면서 삼십 대에 ‘춘추(春秋)’, ‘주역(周易)’, ‘의례(儀禮)’ 같은 경전을 산정(刪定)해 26책으로 된 ‘육경소주(六經疏註)’를 펴냈어. 어디 그뿐인가. ‘논어’, ‘대학’, ‘중용’, ‘예운(禮運)’, ‘곡례(曲禮)’, ’효경(孝經)’, ‘명심보감’ 등도 산정해 많은 책을 펴냈고. 특히 유학의 이기론(理氣論)을 벗어나 기일원론(氣一元論), 심성정동일론(心性情同一論) 철학과 심양기론(心陽氣論) 의학의 바탕이 되는 ‘석곡심서(石谷心書)’는 대단한 저서로 인정받지. 여 : 독학으로 그 모든 학문을 습득하셨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산정’은 무엇인지요?황 : 산정(刪定)은 꼭 필요하지 않은 자구(字句)나 문장을 다듬고 정리하는 것을 말해. 석곡은 경전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배운 학문의 견해를 바탕으로 썼지. 그런 자세가 석곡의 탁월함이 아닌가 싶어.여 : 그러려면 경전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물론 석곡의 학문적 입장도 확고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 같습니다. 석곡은 한의학자로도 유명하다고 하셨지요?황 : 선생은 말년에 한의학 연구에 성심을 다했지. 한의학의 원전이자 이론의 기초라고 일컬어지는 책이 ‘황제내경(黃帝內經)’인데, 선생은 이 책의 본래 내용 가운데 필요 없는 건 정리하고 꼭 필요한 것만 추려서 ‘황제소문절요(黃帝素問節要)’를 쓰셨어. 또 ‘동의보감’을 선생의 이론으로 다시 정리해서 ‘의감중마(醫鑑重磨)’를 펴냈지. 약초에 관한 저서인 ‘본초(本草)’는 지금도 많은 한의학자가 찾는 명저 중의 명저야. 그러니 “북쪽에 사상의학을 주장한 이제마가 있다면, 남에는 이규준이 있다”는 말이 회자되지. 여 : 자료를 찾아보면 석곡은 ‘부양론(扶陽論)’을 강조했다고 하는데 알기 쉽게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황 : 부양론은 말 그대로 양기를 북돋운다는 말이지. 석곡은 인간의 몸의 중심은 마음(心)이라고 보았어.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 자리한 심장(陽)이며, 심장의 기운이 부족할 때 모든 병이 생긴다는 거야. 이는 중국의 주진형(朱震亨)이 주장한 이론과는 반대되는 이론이지. 거기서는 음기의 부족이 병의 근원이라 보았으니까. 그래서 기운이 약해지면 음의 기운을 돋우는, 즉 신장의 기운을 살리는 처방을 했어. 그런데 석곡은 양이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중요한 것은 사람 몸에 양의 기운이 부족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지. 그래서 어릴 때나 나이 들어서나 양기를 돋우는 약을 복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던 거야.여 : 선생님 말씀을 들을수록 석곡은 대단한 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황 : 내가 처음 석곡 묘소에 간 게 2008년이야. 소문학회 회원들이 석곡 묘소의 참배를 다닌 지 14년쯤 되었을 때지. 그 후로 방송에 나갈 때마다 석곡을 이야기했고, 그다음 해 묘소를 참배할 때는 지역 언론사의 기자들과 함께 갔어. 그때 석곡 묘소 참배하는 것을 YTN에서 소개하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지. 『동의보감』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안상우 박사가 그 방송을 보고 나를 찾아와 석곡의 학문을 번역해주겠다고 해서 큰 힘이 되었어. 그렇게 석곡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게 되었지. 여 : 선생님의 그런 노력이 마침내 석곡기념관 건립으로 이어지게 되었군요.황 : 여하튼 석곡기념관이 건립된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고 앞으로 많은 시민이 찾는 곳이었으면 좋겠어.석곡기념관은 소강당,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48호로 지정된 석곡 선생의 저술 목판을 보존하기 위한 수장고가 있는 1층과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영상관이 있는 2층으로 구성돼 있다. 외부는 전통가옥 구조물인 서까래 형태의 처마를 적용한 모양을 하고 있다. 포항시는 석곡의 일생과 학문, 사상 등을 소개하는 상설 전시와 함께 시문학, 유학, 천문학, 수학 등 석곡의 학문은 물론 후학과 관련한 주제 전시와 소장품 특별전 등 다양한 기획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황 인195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대구로 이주해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영남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동해중학교에 교사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닿았으며, 포항정보여고와 동성고에서 2008년까지 재직한 후 정년 퇴임했다. 포항 지역의 고인돌을 처음으로 조사·발굴해 ‘영일군사’에 소개했고, 지역 민속놀이인 ‘월월이청청’을 조사·발굴한 후 포항정보여고 학생들과 공연해 제7회 청소년 민속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흥인군의 비석과 남파 대사의 비석을 발견해 비각을 세우도록 했고, 석곡 이규준 선생의 목판을 경북 문화재 자료로 지정하게 했다. 또한 석곡의 사상과 학문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알려 석곡기념관 건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포항시사’ 집필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포항문화원 향토조사 연구위원 등을 맡고 있다. 2022년 제12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대담·정리 : 여국현(시인)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황 인

2023-08-30

330년 고택에서의 하룻밤, 봉화 바래미마을로 오세요

처서가 지나고 어느덧 여름의 끝자락에 서있다. 비가 오고 무더웠던 여름 더위의 기세도 한풀 꺾이니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는 것만 같다.아직 휴가를 떠나지 못했다면 여유롭고 한적한 고택에서 늦여름의 정취를 느껴보는 건 어떨까.봉화군에는 옛 아름다운 정서를 고이 간직한 고택들이 모여 있는 전통문화마을이 있다. 과거에 마을이 하상(河上)보다 낮아 바다였다는 뜻을 가진 바래미마을이다.바래미마을은 봉화읍에서 영주쪽으로 약 2㎞ 정도 떨어진 해저리에 있다. 자연과 사람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옛 정취가 지금까지 간직되어 내려온 작은 마을로 독립운동 훈장을 받은 유공자만 14명이나 배출한 유서 깊은 마을이기도 하다.병풍을 두른 듯한 마을에는 수십여 채의 한옥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고즈넉한 운치를 느낄 수 있다. 고택마다 가지고 있는 매력이 달라 취향껏 고르는 재미가 있으며, 하룻밤을 머물며 다양한 전통체험도 함께 즐길 수 있다. □ 330년이 넘은 국가 지정 문화재 만회고택바래미마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만회고택은 영주·봉화 지역의 첫 국가민속문화재이자 바래미마을 내에서는 유일한 국가 지정 문화재이다.만회고택의 안채는 1690년에 준공돼 33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전통 한옥이다. 사랑채는 200년이나 된 국가문화재로 문화유산부문 최고등급인 관광공사지정 명품고택으로 지정됐다.만회고택은 최소 1인에서 최대 4인까지 이용가능한 객실들이 준비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방 내부에 화장실이 있어 불편 없이 이용할 수 있다.만회고택에는 정자와 방이 함께 있는 명월루가 있는데 그 시절에는 보기 힘든 건축양식으로 풍경이 특히 아름다운 곳이다. 여름에는 태백산의 바람이 루를 감싸고 돌아 자연이 주는 바람의 진수를 느낄 수 있다. 밤이면 이름에 걸맞게 밝은 달을 품고 있어 이곳에 앉아 있으면 자연에 둘러싸인 봉화의 매력에 흠뻑 빠져든다.또한 삼애실에는 다락방을 개조해 만든 전용 공간이 있는데 계절별로 소품 등을 바꿔 꾸며 놓는다.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공간으로 사진을 찍으며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기에 좋다.이곳에는 어린 자녀를 둔 가족들 혹은 커플들이 즐겁게 체험할 수 있는 것들도 가득하다. 부채, 보석함 등을 채색해 보는 민화체험과 컵매트 등을 만들어 보는 직조체험, 이밖에도 악세사리를 만드는 칠보체험 등을 해볼 수 있으며 체험들은 일정 인원수 이상 사전 예약을 통해 가능하다. □ 1천500평 규모의 아름다운 정원을 갖춘 토향고택토향고택은 11대째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오고 있는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명품 고택이다. 고택의 방은 전통을 느낄 수 있으면서도 현대식이라 불편함 없이 편안한 밤을 보낼 수 있다.객실은 한 칸 크기의 아담한 문간방을 비롯해 최대 4명까지 이용가능한 다양한 객실이 마련되어 있으며 간단한 과일로 구성된 아침식사가 제공된다.특히 별도 마련된 독채는 최대 8명까지 머물 수 있는 신축 한옥으로 가족들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용호정이라는 신축 한옥에서는 연꽃 연못을 바라볼 수 있어 운치 있는 하루를 만들어준다.고택정원에는 연못과 다양한 꽃들이 있어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다. 토향고택 이곳저곳을 산책하며 맑은 공기와 함께 온전한 휴식을 누리면서 하루를 보내기에 충분하다.토향고택 앞 정원에는 연꽃 연못과 각종 야생화와 나무, 산책길, 도자기 장작가마, 바비큐장 등이 있으며 마을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야생화 언덕과 함께 전통그네와 투호던지기, 활쏘기를 할 수 있는 민속놀이터도 마련되어 있다.특히 도자기 체험, 서예 체험은 토향고택의 독특하고 특별한 자랑으로 자연과 예술이 함께 하는 힐링과 재충전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일상에서 벗어나 차분한 휴가를 즐기려는 가족 나들이객들에게 인기가 많다. □ 고즈넉한 한옥의 멋이 매력적인 소강고택과 남호구택소강고택은 100여 년이 넘은 말 그대로 전통한옥집이다. 조선조 후기의 전형적인 양반가의 형태로 문살 하나까지 전부 춘양목으로 지어졌다. 중후한 멋이 깃든 만큼 조선 후기의 양반가의 옛 가옥을 느껴볼 수 있다.소강고택의 객실은 어사방부터 사랑방까지 총 6개이며 많은 객실 중 도령방은 고택에서 유일한 황토방으로 방문을 열면 사랑마당과 큰 정원, 담 넘어 나지막한 산이 보이는 정겨운 풍경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다.소강고택 맞은편에 위치한 남호구택은 응방산 줄기의 낮은 야산을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양질인 고급 목재를 사용해 100년이 넘은 고택인데도 불구하고 변형되거나 보수한 흔적이 많지 않다. 대청마루와 사랑채의 문을 올리면 넓은 공간이 생기는데 많은 사람들이 한 번에 이용할 수 있고 마당까지 넓어 워크숍 같은 행사 장소로도 이용 가능하다.특히 별채 영규헌은 옛날 도서관 용도로 지은 건물로 독채로 되어있다. 방 2개, 대청마루로 구성되어 있으며 최대 6인까지 지낼 수 있어 가족 단위로 조용하게 하룻밤을 보내기 좋다.널뛰기, 제기차기, 투호, 윷놀이 등 민속놀이가 무료로 이용 가능하며 한복 입고 사진찍기 체험을 비롯해 사전 예약을 하면 전통혼례 체험도 가능하다./박종화기자 pjh4500@kbmaeil.com

2023-08-29

그렇게 왕 지렁이가 되었다

삼국통일이 이뤄진 7세기는 소설의 소재가 될 만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당나라를 축출한 문무왕 김법민은 죽어서 용이 됐다는 설화가 전한다. 바로 그 설화에서 소재를 얻은 김강 씨가 짤막한 소설 한 편을 완성해 본지로 보내왔다. 딱딱한 연재기사를 잠시 쉬어간다는 차원에서 이를 게재한다. 2017년 심훈문학상 수상자인 김강 씨는 작품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 등을 출간한 소설가다. 편집자 주#1구릉과 계곡의 휘어진 길을 벗어나자 시야가 탁 트였다. 맑은 날이면 수평선이 보인다 했는데. 흐린 하늘이 이어져 끝을 가늠할 수 없었다. 저기쯤이겠지. 무채색 건물들의 낮은 지붕 너머 흐린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건물과 버스 사이 중간 즈음 짙은 회색 구름 덩어리가 보였다. 저 아래는 비가 오고 있으려나.얼마 지나지 않아 차창으로 빗방울이 부딪혔다. 한동안 차창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던 빗물이 아래로 방향을 틀었고 우리는 버스에서 내렸다. 막 베어낸 보리 짚단이 여기저기 쌓여있는 밭을 옆으로 두고 섰다.“비가 오네.”용대가 우산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우산 챙겨 나오라고 했잖아. 내가.”용대는 한번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손으로 횡단보도를 가리켰다. 우산대를 잡아끄는 용대를 따라 걸었다.“비가 안 올 줄 알았지. 그리고 준비성 좋은 네가 있잖아.”용대는 씩 웃었다.“하긴 비가 온 건 아니지. 우리가 들어간 거지.”“뭐라고?”“아니다. 저기다. 가자.”#2분명 용이었다.취침 옵션, 세 시간으로 해두고 잠이 들었는데 에어컨이 꺼지자 땀이 흘렀고 몸이 찌뿌둥해진 탓에 나는 일어나 앉았다. 베개 위에 덮어두었던 수건을 들어 이마와 목덜미를 닦았다. 에어컨을 다시 켜야겠다, 마음먹은 나는 더듬어 리모컨을 쥐었지만 어두운 탓에 버튼이 잘 보이지 않았다. 불을 켤까? 생각했지만 아내가 마음에 걸렸다. 아내는 중간에 잠이 깨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할 수 없이 핸드폰의 배경 화면 빛으로 어찌 해보려던 그때, 큰길 쪽으로 난 커튼으로 그림자가 비쳤다.굵고 긴, 나선으로 꿈틀거리는 무엇. 창의 너비로는 감당할 수 없는 무엇이었다. 그리고 곧, 침대 머리맡 커튼에도 그림자가 나타났다. 명확하게 뿔인지는 알 수 없으나-그림자였으니까-, 크고 뾰족한, 위로 솟구친 두 개의 무엇과 그것들 앞으로 길게 내민 주둥이-그림자였지만 직감적으로 무언가의 주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가 커튼 밖에서 아래위로, 좌우로 흔들렸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핸드폰과 리모컨을 양 손에 쥔 채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두 개의 그림자를 볼 뿐이었다. 머리에서부터 이마를 거쳐 뺨으로 흘러내리던 땀방울도 제자리에 멈춘 듯했다. 숨도 쉬지 못하고, 땀방울도 놀라 멈췄는데 오직 심장만이 거칠게 뛰었다. 멍했다. 눈썹위에 멈췄던 땀방울이 제 무게를 못 이기고 아래로 내려왔다. 땀이 눈 속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휴, 어설프게 숨을 내쉰 나는 창가로 다가갔다.바깥을 살피려 커튼을 잡으려던 순간, 그것이 움직였다. 부드럽게 그리고 우아하게 회전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다시 멈칫 했고 그것은 큰길로 난 창에서 침대 머리맡의 창을 거쳐 사라졌다. 그것이 사라지고 난 뒤 커튼 틈으로 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가로등 불빛이 환했고 하늘은 검었다. 여전히 깊은 밤이었다.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상상하다, 아내를 깨울지 말지 고민하다, 다시 잠을 자야할지 어떨지 망설이던 중이었다. 그림자가 다시 나타났고 한동안 창 밖에 머물다 움직였고 사라졌다. 그러기를 두 번, 그것은 세 번 우리 집을 휘돌고 갔다. 세 번째 돌아나갔을 때 나는 그것이 용이라 확신했다. 이후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에어컨을 다시 켠 것 같기도 하고 베개의 수건을 갈은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잠이 든 것 같기도 하고.출근 준비 할 시간 아니냐며 아내가 몸을 흔들었을 때 나는 놀란 듯 허억,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깨었다. 그리고 아내에게 말하려했다. 지난밤 우리 집에 용이 왔었어.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이렇게 말했다.있잖아. 어젯밤에, 새벽에 말이야. 그러니까…….정리를 해서 깔끔하게 이야기해야겠다, 잠시 뜸을 들이던 중이었다.새벽에 뭐? 새벽에 일어나서 핸드폰 좀 보지 말라고. 그러니까 잠을 설치는 거잖아. 아휴. 애나 어른이나. 나 바빠. 애들 밥 차려야해.아내는 방을 나갔고 나는 열린 방문을 바라보기만 했다.#3마주보고 선 탑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천 년을 마주보았을 그들이었다. 백 년마다 한 마디씩 나누었을까? 아니면 천 년 동안 서로 바라보기만 했을까? 이상한 상상을 했다. 우리는 벤치에 앉으려다 바지가 젖을 듯해 그냥 서서 대종천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짙은 회색 구름은 물길을 따라 바다로 움직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그쳤다.“용이 돌아가는 모양이네.”용대가 무슨 말이냐며 물었고 나는 지난밤 용에 대해 말해주었다.“그러니까 꿈에 용이 나온 것하고 여기하고 무슨 관곈데?”지난밤의 일을 용대에게 말한 직후였다. 용대는 주저하지 않고 꿈이라 했다.“꿈이 아니라니까.”“꿈이 아니면? 그 말을 믿으라고? 그리고 나는 왜 데려 온 거냐? 내 이름이 용대라서?”“저기 저 쪽 바닷가에 문무대왕 수중릉이 있잖아. 동해를 지키기 위해 용이 되었다고 하잖아. 그 용이 이곳 감은사 아래까지 왔다 갔다 했다지, 아마. 지금 보이는 저 대종천을 거슬러 올라왔다 돌아가고는 했다네. 간밤에 용이 우리 집을 세 번 돌고 사라지는데 이상하게 문무대왕이 생각나더라고.”용꿈을 꾸었는데 로또를 사야지, 수중릉을 찾아오는 것이 정상이냐, 로또를 사고 당첨이 되어서 친구에게 크게 한 몫 떼어주는 게 정상인 것 아니냐며 용대는 비아냥거리다 투덜대다를 반복했다.“정상이 아니지. 그런데 와보고 싶더라니까. 로또야 돌아가는 길에 사면 되는 거고. 근데 웃기지 않냐? 그 시절 사람들은 용, 하면 나라와 백성을 지키고 비를 내리고 또 뭐냐 나쁜 놈들을 벌주고, 뭐 그런 생각을 했는데 말이야. 우리는 용, 하면 로또부터 생각하지. 재밌네, 재밌다니까. 암튼 이제 내려가자. 여긴 다 보았으니. 대왕님 뵈러 가야지. 어젯밤에 왜 우리 집에 왜 오셨는지 물어도 보고.”수중릉으로 가는 동안 용대는 자기 이름이 용대라서 같이 가자 한 것이냐 다시 물었고 나는 그런 점이 조금은 영향을 준 것 같다고 대답했다.#4바다에 다다른 회색 구름은 이내 흩어졌다. 흐린 하늘이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사장(沙場)에서 바다로 뻗어나간 수중릉 돌무더기위로 갈매기들이 앉아 쉬고 있었다. 온 김에 사진 한 장 찍어주겠다며 용대는 나를 세워두고 몇 걸음 물러났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으려던 용대가 갑자기 웃었다.“왜?”“이게, 화면으로 보니까, 꼭 주먹감자 같단 말이지. 저쪽 건너편 섬나라를 보며 내민 주먹감자.”“그러네, 맞네. 딱 주먹감자네.”#5우리는 오래 있지 못했다. 근무시간 내 사무실로 복귀해야했다. 거래처에 다녀온다며 사무실에서 나왔고 거래처 주차장에 차를 두고 왔었다. 나는 거래처로 가는 내내 주먹감자를 내밀고 있는 용의 모습을 상상하며 픽픽 웃었다. 거래처에 다녀온다 했으니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담당자를 만나 이미 합의했던 사항과 지나간 업무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담당자는 우리가 방문한 이유를 궁금해 하는 눈치였지만 우리는 소소한 안부를 묻고 날씨 이야기를 하다 돌아왔다.직장으로 복귀하는 차 안에서 용대가 물었다.“그래서 수중릉에 가니 용이 무슨 계시를 주더나?” 소설가 김강. 나는 대답할 거리가 없었다. 간밤의 흥분, 수중릉까지 찾아가며 가졌던 기대는 어느새 사라지고 지난밤의 용이 사실이었는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어설픈 잠 속의 꿈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모르겠다. 그게 용이었는지, 이무기였는지, 왕 지렁이였는지.”“네가 너무 거창한 생각을 하니 그렇지. 자, 받아라, 오백 원. 여기 둘게. 그리고 저기 저 앞에 편의점에 좀 세워라. 살게 있다.”용대가 오백 원짜리 동전을 컵홀더에 넣으며 말했다.“이게 뭔데?”“일단 세우라니까.”나는 차를 세웠고 용대는 급하게 문을 연 뒤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그 꿈 내가 샀다. 복권 사러 간다. 당첨되면 좀 줄게.”

2023-08-29

등대의 불빛과 고래의 전설이 있는 곳

원시의 바람을 느끼고 싶다면 호미곶으로 가야 한다.망망한 수평선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은갈기를 휘날리며 한반도의 동쪽 끝으로 몰려온다.바람이 거세 쌀농사가 힘들었기에 온통 보리밭이었다.호미곶 처녀는 시집갈 때까지쌀 서 말을 못 먹는다고 했다.호미곶 구만리에 보리가 피어나면초록의 물결이 온 누리를 뒤덮는다.차가운 땅 밑에서 키워 온 생명의 기운은사람의 마음밭도 초록으로 물들인다.이른 봄 샛노란 유채꽃이 피어나면하늘색과 바다색도 더 짙어진다.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유채꽃밭으로 뛰어들어한 송이 꽃이 된다. 세워진 지 백 년이 지난 순백의 등대는일몰에 불빛을 켜고 일출에 불빛을 끈다.먼바다를 향해 빛을 뿌리는 등대가 있어호미곶 밤바다는 쓸쓸하지 않다.호미곶 앞바다는 아득한 옛날부터 고래의 바다였다.사람이 오기 전에 고래가 평화롭게 다니고 있었다.출산한 어미 고래가 미역을 먹으러얕은 바다까지 들어왔다는 옛이야기도 전한다.한반도의 동쪽 끝 호미곶에 가면하얀 파도의 노래를 들려주려고래 한 마리가 다가오리라. 임주은 임주은 1982년 포항에서 태어났으며 대구가톨릭대 공예과를 졸업했다. 개인전 2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아트페어에 서양화 작가로 참여했다. 현재 포항문화재단 이사, 포항청년작가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포항지부, 경북청년작가회 등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3-08-28

고려 진각국사 배천희·조선의 큰스님 남파 대사 배출한 포항

황인 선생은 포항이 고인돌, 선돌 같은 선사시대 유물 외에도 명망 높은 고승을 낳은 곳임을 발견하고 널리 알려왔다. 특히 고려시대 진각국사(眞覺國師) 배천희(裵千熙)와 조선시대 남파(南坡) 대사에 대한 재조명은 선생의 대표적인 업적이다.(여국현=여) : 선생님은 고려시대 배천희 국사에게 많은 관심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황인=황) : 배천희 국사는 1307년 흥해 출신으로 13세에 출가해 19세에 승과에 합격했지. 그 후 10여 개 사찰의 주지를 지내다가 1367년(공민왕 16년)에 국사가 되었고 1382년 76세로 입적하셨어. 당시 국사(國師)는 국가 최고의 정신적 지주를 일컫는 말이니 배천희 국사는 대단한 인물이었지. 이 사실도 우연히 알게 되었어. 어느 날 우리 학교 출신 제자를 만났는데, 그 제자의 남편이 자기 조상 중에 유명한 스님이 있다고 말하는 거야. 그러면서 지금도 자기들이 그 스님 무덤에 제사를 모시고 있다고 하더군. 여 : 스님은 무덤이 아니라 사리탑 같은 걸로 모시지 않는지요?황 : 나도 그게 이상해 스님이 무슨 무덤이냐고 했지. 사리탑이나 부도가 있어야지 했더니 틀림없이 무덤이 있다고 하는 거야. 제사도 지내고. 그러니 더 궁금했지. 알아보니 천곡사 입구에 사당도 있고, 포항 공원묘원 안에 ‘국사배선생유허비(國師裵先生遺墟碑)’까지 있는 대단한 분이더군. 이분이 흥해에서 태어났다고 왕이 흥해를 현에서 군으로 승격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더군. 나중에 스님이 입적했을 때는 ‘진각국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비를 세우라 명했는데, 그 탑비의 비명(碑銘)을 당대의 문장가 목은(牧隱) 이색(李穡)에게 쓰라고 했어. 그것만 봐도 배천희 국사가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알 수 있지.여 : 배천희 국사가 고려 말 원나라 간섭기를 벗어난 개혁 시대의 주체적 한국 불교를 이끈 인물이라는 평가도 있습니다.황 : 맞아. 그러니 우리 지역에서 이런 인물이 나왔다는 건 대단한 일이지. 스님의 무덤은 크기도 하지만 왕이나 큰 스님의 무덤 앞에 세우는 당간지주 모양의 석물이 양쪽에 떡하니 서 있는 게 한눈에 봐도 평범해 보이지 않았어. 게다가 제자 남편의 말이 수원에 가면 스님을 기리는 비석도 있다는 거야. 그 말을 듣고 가만있을 수 있나. 그 탑을 보고 탁본을 뜨려고 수원까지 갔지.여 : 그 먼 데까지 탑을 보러 가신 것도 놀랍지만 탁본 뜨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황 : 그랬지. 겨울방학 때 찾아갔는데, 엄청 추운 1월 초였어. 물어물어 수원성에 갔더니 허름한 비각에 탑이 있는 거야.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彰成寺眞覺國寺大覺圓照塔碑)’라는 그 탑은 보물 14호인데 온전치는 않더라고. 우여곡절 끝에 수원시청 문화공보실을 찾아가 배천희 국사에 대한 자료를 주면서 탁본하러 왔다고 했지. 담당자가 일언지하에 거절하길래 그날은 그냥 그렇게 앉아 있다 나왔어.여 : 그럼, 그 먼 길을 가셔서 탁본도 하지 못하고 그냥 오셨나요?황 : 아니지. 그냥 올 수는 없었어. 근처 여관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다시 수원시청에 출근했지. 문화공보실에 가서 그냥 앉아 있다가 문화공보실 직원들에게 커피도 사주고 신문도 보고 이야기도 하면서 하루를 보냈어. 다음 날에 또 가서 얼굴도장을 찍었지. 그렇게 며칠 출근하다시피 하니 공보실장인가 하는 사람이 진심을 알았는지 탁본을 딱 한 장만 하라고 아주 조심스럽게 말하더군. 그래서 탁본하러 갔는데 수원시청 담당자가 탁본을 보관할 수 있게 두어 장 더 할 수 있느냐 해서 내가 탁본을 더 해줬지. 그렇게 그 비의 탁본이 지금 남아 있게 된 거야. 여 : 문화 유적이나 유물, 그 기록을 남기고 보존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선생님 말씀을 들으며 실감합니다. 배천희 국사에 대한 보존 사업은 잘되고 있는지요?황 : 이분이 대단한 분이라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되고 포항시에서도 그런 사실을 확인했지. 2009년에는 국사를 포항시의 인물로 지정해서 선양사업도 했어. 국사의 형인 배전(裵詮)의 후손들도 매년 음력 10월 7일에 국사를 기리는 제를 올리고 있고. 유허비와 천곡사 앞에 있던 사당이 허물어져 가는 걸 문중에서 새로 건립했으니 정말 다행이었지.여 : 선생님께서 노력하신 덕분에 포항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인 배천희 국사가 새롭게 조명되고 관련된 유물과 유적들이 보존되었군요. 선생님은 남파 대사의 유적지 보존도 주장해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황 : 남파 대사는 조선 중기에 선(禪), 교(敎) 양 종단을 이끌고 승병의 최고 책임자인 수호도총섭(守護都總攝)을 지낸 분이지. 포항 장기면 묘봉산 자락에 있는 석남사지(石南寺址)에 그분의 비석이 있어. 문살이 훼손되고 대나무 숲 가운데 방치될 것 같아 내가 보존이 필요하다고 수차례 주장했지.여 : 저도 선생님을 뵙기 전에는 남파 대사가 어떤 분인지 잘 몰랐습니다.황 : 남파 대사는 1740년 장기에서 태어났고, 이름은 화묵(華默)이야. 열두 살 때 삭발하고 승려의 계를 받았는데, 승과에 합격한 후 대사(大師)까지 올랐어. 앞에서 말한 것처럼 밀양에 있는 표충사의 수호도총섭을 지낸 분인데, 조선시대 선, 교의 맥을 이은 화엄경의 조종(祖宗)으로 일컬어질 정도의 고승이었지. 내가 남파 대사가 주지로 있던 석남사지를 발굴해 문화자원으로 조성하자고 했고, 방치되었던 남파 대사의 비도 보존하자고 주장했어. 그래서 포항시에서 2005년 11월에 비각을 세워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지. 남파 대사 비의 비문은 조선 최고의 명필 가운데 한 명인 계오(戒悟) 스님이 쓰셨으니 서체 연구로도 가치가 있지. 그러니 문화재 지정을 해서 보존 대책을 세우는 게 무엇보다 시급해. 그건 누구 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포항 사람들 모두의 책임이지.여 : 포항에는 불교문화의 유적이 많은 듯합니다. 보경사, 천곡사, 오어사 같은 사찰의 문화적 의미가 큰 것 같습니다.황 : 그렇고말고. 신라시대에 창건된 세 사찰은 그 자체로 귀중한 문화유산이지. 보물 제252호인 원진국사비가 있는 보경사는 602년 진평왕 때 창건된 천년 고찰이고,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된 천곡사에는 선덕여왕의 전설이 있지.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선덕여왕이 세상 좋다는 약은 모두 써봐도 효력이 없다가 한 신하의 권유를 듣고는 동해안 천곡령(泉谷嶺) 아래에 있는 석천(石泉) 약수로 며칠간 목욕한 뒤 완쾌되었다는 거야. 그러자 약수의 효력에 감복한 선덕여왕이 서라벌로 돌아와 자장율사에게 절을 짓게 하고, 그 이름을 천곡사로 했다는 전설이 있어. 그곳엔 고란초(皐蘭草)가 유난히 많이 자라지. 여 : 오어사에 관해서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다던데요.황 : 오어사는 신라 진평왕 때 창건된 천년 사찰이지. 처음 지었을 때는 항사사(恒沙寺)라 했는데 오어사란 이름을 갖게 된 일화가 재미나. 어느 날 원효대사와 혜공 스님이 계곡에서 고기를 잡아먹고 변을 봤는데 물고기 두 마리가 튀어나와 한 마리는 물을 거슬러 가고, 한 마리는 아래로 내려갔다는 거야. 두 스님이 그 물고기를 보고는 물을 거슬러 가는 고기가 서로 자기 고기라고 우겼다는 이야기에서 오어(吾魚), 즉 ‘저 고기가 내 고기’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하지.여 : 속세의 장난꾸러기 청년 같은 스님들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해학이 느껴지는 일화 같기도 합니다. 오어사에는 특별한 유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황 : 우리나라에 몇 안 남은 동종(銅鐘)과 목비(木碑) 등 불교와 관련된 희귀한 유물이 보존되어 있어. 신라시대부터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는 불교 역사의 귀중한 사료의 보고로도 그 역사적 가치가 대단하지.황 인195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대구로 이주해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영남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동해중학교에 교사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닿았으며, 포항정보여고와 동성고에서 2008년까지 재직한 후 정년 퇴임했다. 포항 지역의 고인돌을 처음으로 조사·발굴해 ‘영일군사’에 소개했고, 지역 민속놀이인 ‘월월이청청’을 조사·발굴한 후 포항정보여고 학생들과 공연해 제7회 청소년 민속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흥인군의 비석과 남파 대사의 비석을 발견해 비각을 세우도록 했고, 석곡 이규준 선생의 목판을 경북 문화재 자료로 지정하게 했다. 또한 석곡의 사상과 학문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알려 석곡기념관 건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포항시사’ 집필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포항문화원 향토조사 연구위원 등을 맡고 있다. 2022년 제12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대담·정리 : 여국현(시인)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황 인

2023-08-27

“포항에 고인돌이 많았다는 것은 살기에 좋았다는 뜻”

황보 집성촌을 찾아가던 선생은 우연히 고인돌을 발견하게 된다. 이 우연은 이후 선생이 포항의 고인돌과 선돌을 비롯한 선사시대 유물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여 : 단량의 일화가 선생님께서 포항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직접적인 계기라고 할 수 있겠군요.황 : 그렇기도 하지만 내가 더 놀라고, 포항이 예사 고장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건 그 집성촌(구룡포읍 성동3리)을 찾아가던 도중에 일어난 일 때문이지. 내가 그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방앗간이 하나 보이더군. 여기에 웬 방앗간이 있나 싶어 가보았더니 방앗간 뒤에 고인돌이 있는 거야. 하나도 아니고 자그마치 네 개나. 그러고는 상정 쪽으로 조금 가다 보니 왼쪽에 언덕이 보이는데, 거기 농가에 또 고인돌이 있고, 또 조금 가다 보면 고인들이 주욱 있더라고.여 :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고인돌이 있다는 걸 알고 찾아다니다가 발견한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죠?황 : 그렇지. 황보 집성촌을 안 것도 그렇고 방앗간 뒤 고인돌도 그렇고, 그게 다 우연이었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을 텐데 내가 국사학을 전공했으니 보이기도 한 거지. 여 : 그저 운이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처음은 우연이었더라도 직접 찾아 나선 선생님의 관심 그리고 수천 년의 시간을 견뎌낸 고인돌이 자기를 알아본 선생님을 부르는 힘이 더하여 이 모든 일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황 : 그렇기도 하겠지. 하여간 이것 참 재미있다 싶은 생각이 들어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봤어. 당시 컴퓨터가 있나 인터넷이 있나. 그냥 닥치는 대로 논문집을 뒤져보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지. 그런데 논문집에 이쪽 지방(구룡포)에는 고인돌이 없고 기계(杞溪)에 몇 기(基)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어. 그래서 우선 ‘여기 고인돌이 있습니다’ 하고 문교부에 조사보고서를 냈지.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 고인돌이 한두 군데에 있는 게 아니야. 성동1리에 가니 거기는 논 가운데에 고인돌이 여섯 개나 있더라고. 그때부터 내가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싶어서 직접 보고 조사하고 기록하기 시작했지. 안 다닌 데가 없다시피 돌아다녔어. 주말이면 아예 집을 나와 미친놈처럼 논이며 밭이며 산을 헤매고 다녔지.여 : 주말마다 그렇게 다니다 보면 기억에 남는 일도 많았을 것 같군요.황 : 웃지 못할 일이 많았어. 황보 입향조 비석을 탁본하러 뇌성산(磊城山)에 갔을 때 일이야. 내가 그 비를 발견하고는 문화재 관리 지원을 받으려고 탁본하러 갔어. 뇌성산에서 탁본하고 내려오는데 경찰관이 기다리고 있다가 파출소로 데려가는 거야. 못 보던 사내가 양복을 입고 사진기, 나침반, 지도에 카메라까지 들고 산에서 내려오니 마을 사람들이 간첩이라고 신고한 거지. 별일 없이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런 황당한 일이 한두 번 아니었어.여 : ‘영일만의 3천 년 문화유산’이라는 방송을 보니까 선생님께서는 고인돌을 비롯해 발굴한 문화유산을 전부 지도에 기록해두었더군요.황 : 그랬지. 다 기록했어. 직접 찾아다니며 얻은 자료를 보면 포항 지역에 500여 기의 고인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돼. 내가 하나하나 다 기록했는데, 사진만 해도 500장이 넘어. 내가 기록한 고인돌 조사 지도를 가지고 방송국에서 영일만 지역의 고인돌 분포도를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었어. 그렇게 해서 기계면에서만 65기, 흥해와 동해에 각 30기 등 포항에 213기의 고인돌이 있는 것을 확인했지. 그러고 나니 나중에 대학교수들도 내게 찾아와 자료를 받아 갔어. 그런데 그 고인돌이 지금은 많이 사라졌어. 남아 있는 게 얼마 안 돼. 여 : 그건 정말 안타깝습니다. 고인돌 외에 포항의 선사시대 유적 가운데 대표적인 것을 말씀해주신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황 : 암각화와 선돌도 많지. 암각화는 대표적인 것으로 1990년 흥해읍 칠포리에서 발견된 게 있어. 약 3천 년 전 청동기시대 유물로 경북 유형문화재 제249호로 지정되었지. 청하면 신흥리 암각화는 특별한 성혈(星穴)을 보여줘 더 중요한 의미가 있어. 아마 하늘의 별자리를 표시한 게 아닌가 추측하는데 그 성혈이 바위에 여럿 남아 있지.여 : 선돌은 무엇을 말하고, 어떤 것이 있는지요?황 : 선돌은 말 그대로 돌을 세워놓은 것이지. 주로 마을의 경계를 표시하거나 어떤 믿음을 표현하거나 어떤 사건을 기념하려고 세운 것으로 보면 될 거야. 동해초등학교와 신정리 마을에 세워둔 게 있는데, 동해초등학교에 있는 거는 할배짝지돌, 신정리에 있는 거는 할매짝지돌이라 부르기도 해.여 : 두 이름이 서로 어울리는 걸 보니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처럼 서로 한 쌍을 이루는 것처럼 들립니다.황 : 그렇지. 그런데 두 선돌에도 사연이 있어. 원래는 할배짝지돌만 발견되었는데, 기록을 살펴보니 할배짝지돌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할매짝지돌이 있더군. 그걸 찾고 싶어서 신정리, 금강리 부근을 몇 년 다녔는데 결국 못 찾았지. 그러던 어느 해 신정리 마을청년회장한테 연락이 왔어. 마을 앞 보(洑) 공사를 하다가 도랑에서 커다란 돌을 하나 찾아서 꺼내 놨다고. 그래서 가보니 수년간 찾던 바로 그 할매짝지돌이었어. 그걸 수호신으로 삼아 마을 입구에 세워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지.여 : 선생님께서 선돌을 찾아다니시는 걸 알고 신정리 마을청년회장이 연락했군요. 그걸 평범한 돌로 여겨 버리거나 깨버리기라도 했다면 사라지고 말았겠습니다.황 : 그럴 수도 있었지. 사실 여기 와서 내가 고인돌을 찾아다닐 때만 해도 사방에 고인돌이 보였어. 상정, 중산, 공당까지 밭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사방에 고인돌이 늘어서 있었거든. 그런데 그때는 사람들이 그게 중요한 걸 알았나. 문화재라는 개념이 있었어야 말이지. 밭 간다고 쟁기질하다가 걸리면 치워버리거나 깨버렸고 나중에는 포클레인으로 부수기도 했지. 그렇게 사라진 고인돌이 셀 수 없이 많았어. 여 : 고인돌이나 선돌 같은 거석문화의 유물이 청동기시대의 흔적을 보여준다는 것을 고려하면 우리 지역의 고인돌, 선돌이 제대로 보존이 안 된 것은 정말 아쉽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지역에 고인돌이 많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일까요?황 : 고인돌은 쉽게 말해 부족을 이끄는 족장의 무덤이야. 고인돌이 많다는 것은 큰 규모의 부족이 살았다는 증거이고, 그것은 예부터 우리 지역이 그만큼 살기에 좋은 곳이었다는 걸 말해주지. 고인돌과 선돌이 많이 사라졌다는 건 3천 년 된 우리의 역사가 사라진 것이나 다를 게 없으니 가슴 아픈 일이지.고인돌과 선돌, 암각화는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만 그것을 만들고 세우고 깎아낸 선사시대인들의 삶의 흔적, 곧 그들의 문화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고인돌 하나, 선돌 하나, 암각화 하나가 사라지는 것은 곧 선조들의 삶의 흔적이 지워지고 잊히고 사라지는 것이다.우리가 기억하고 보존하고 물려주어야 할 문화는 특정한 물건이나 대상만이 아니다. 그 안에 담겨 전해지는 우리보다 앞서 살아간 이들의 삶의 방식이자 역사다. 다행히 선생의 발굴과 발견은 그 후 지역의 많은 관심을 불러와 고인돌을 보존하는 마을 자치 모임이 생기는 등 다양한 노력으로 이어졌다.황 인195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대구로 이주해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영남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동해중학교에 교사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닿았으며, 포항정보여고와 동성고에서 2008년까지 재직한 후 정년 퇴임했다. 포항 지역의 고인돌을 처음으로 조사·발굴해 ‘영일군사’에 소개했고, 지역 민속놀이인 ‘월월이청청’을 조사·발굴한 후 포항정보여고 학생들과 공연해 제7회 청소년 민속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흥인군의 비석과 남파 대사의 비석을 발견해 비각을 세우도록 했고, 석곡 이규준 선생의 목판을 경북 문화재 자료로 지정하게 했다. 또한 석곡의 사상과 학문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알려 석곡기념관 건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포항시사’ 집필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포항문화원 향토조사 연구위원 등을 맡고 있다. 2022년 제12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대담·정리 : 여국현(시인)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황 인

2023-08-23

고구려 정복 후 드러낸 한반도 지배야욕… 동맹국서 적으로

무열왕 김춘추, 흥무왕 김유신, 문무왕 김법민. 인척(姻戚) 관계로 맺어진 이 세 사람은 ‘삼한일통(삼국통일)의 트로이카’라 불러도 무방하다.무열왕과 김유신은 660년 의자왕과 계백을 제압하며 백제를 병합했고, 무열왕 사후(死後)인 668년엔 무열왕의 아들인 문무왕이 외숙부 김유신의 도움을 받아 연개소문 자식들의 갈등으로 혼란스러웠던 고구려까지 절멸시킨다.하지만, 온전한 삼국통일을 위해선 한 가지의 문제를 더 해결해야 했다. 바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동맹세력으로 활동했던 당나라를 내몰아야 한다는 것. 외부세력의 축출 없는 삼한일통은 반쪽짜리에 불과했을 터이니.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나라는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7세기 지구 위 초강대국. 고구려 멸망 이후 ‘승전동맹국’이라 할 신라와 당나라는 전후(戰後) 처리를 놓고 갈등을 지속했다.당시의 정치 지형과 역사적 상황을 경북대학교 대학원 전경효의 논문 ‘7세기 후반 나당(羅唐·신라와 당나라)관계와 김유신’은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7세기는 한국사에서 변동의 시기였다. 특정 국가 내에서 일어난 정치적 변화가 대외관계에 영향을 끼치는가 하면 대외관계가 국내 정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특히 당의 등장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심화시켰다. 또한 전쟁의 양상은 국지전에서 전면전으로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총력전의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따라서 7세기는 여러 국가가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인 시기였다.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후략)”한때는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처럼 손을 잡고 어떤 일을 도모했으나, 이후에 서로가 가진 입장 차이와 일 처리 과정의 불협화음 탓에 파국을 맞는 경우는 개인은 물론 국가 사이에서도 흔했다.◆ 세계 제2차대전 종전 후처럼 신라와 당나라도 갈등 겪어신라, 백제, 고구려, 당나라가 때로는 갈등하고, 어떤 부분에선 협력하며 경쟁하던 7세기만이 아니었다.전쟁이 끝난 후 각자가 많은 몫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이전투구(泥田鬪狗)의 다툼을 벌이는 현상은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20세기까지 끊임없이 지속됐다.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돼 1945년에 끝이 난 세계 제2차대전은 수천만 명의 사람이 죽거나 다친 인류사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다.이 전쟁이 미국과 소련을 주축으로 한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이후 ‘제 몫 챙기기’로 인한 불화가 7세기 신라와 당나라의 갈등처럼 수면 위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세계 제2차대전 종전 후의 역사를 기록한 각종 문헌이 정리된 ‘위키백과’는 “연합국은 점령한 오스트리아와 독일 영토에 점령 지역 행정부를 세웠고 처음에는 각각 서방 연합국이 서쪽을, 소련이 동쪽을 통제하는 지역으로 나누어 통제했다. 하지만 두 연합국은 서로 갈라졌다…”는 서술로 유럽에서의 승전국 간 갈등을 보여준다.반목과 갈등은 ‘원자폭탄 투하’라는 극단의 방법으로 군국주의 일본을 항복시킨 아시아 지역이라고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위키백과’의 설명은 아래와 같이 이어진다.“미국이 일본 본토와 일본이 통치했던 구 서태평양 도서 지역을 점령했고, 소련은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점령했다. 일제강점기 치하에 있던 한국은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분할 점령하면서 분단됐다. 1945년에는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에 각각 자신이 한반도 전체의 합법적인 정부라고 주장하는 별도의 공화국이 수립됐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이어졌다…(중략) 전후 세계도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NATO)와 소련이 주도하는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두 편으로 갈라졌다. 두 세력 사이의 오랜 정치적 긴장과 군사 경쟁인 냉전이 시작됐고, 냉전 기간 동안 전례 없는 군비 경쟁과 전 세계의 수많은 대리전이 이어졌다.” ◆ 신라와 당나라, 얻어낸 땅을 누가 차지하느냐로 다투다위에 언급된 세계 제2차대전 종결 후 일어난 갖가지 사건처럼, 668년 나당연합군의 고구려 병합 이후에도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선 쉽사리 타협과 협상이 불가능한 문제가 여럿 발생한다.그중에서도 문제의 핵심은 전쟁으로 얻은 고구려 영토의 점유와 관련된 것이었다. 신라도, 당나라도 큰 희생을 치르며 얻어낸 땅을 한 평이라도 더 가지고 싶었을 터. 그와 관련해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출간한 ‘통일신라 시기 1-중앙과 지방’을 간략하게 인용한다.“무열왕 김춘추와 당 태종 이세민은 나당동맹을 체결하면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 대동강 이남의 땅은 신라가 차지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이 시기 고구려의 수도 평양은 대동강 북쪽에 있었다. 때문에 당은 고구려 수도를 차지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 결과 신라는 대동강 이남의 땅을 차지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당은 신라와 공동 군사작전을 펼쳐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에는 한반도 전체를 자신의 직할영토로 하려 했고, 신라는 김춘추와 당 태종 사이에 맺어진 전후 처리 합의대로 대동강 이남을 영토로 하려고 했다.”국가와 국가 사이에 체결된 약속이 깨질 경우 통상은 두 나라 가운데 더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가 보다 유리한 입장에 서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동서양의 지나온 역사를 되짚어 봐도 대부분이 그러했다.하지만, 신라는 달랐다. 당나라가 애초에 맺은 협정을 부정하며 백제와 고구려는 물론, 신라의 영토까지 ‘식민지화’ 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이를 거칠게 거부한다.입으로는 동맹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삼한(신라·백제·고구려)을 한꺼번에 집어삼키려 했던 당나라의 야망은 이미 백제가 절멸된 660년 직후부터 시작됐다. 이 사실은 다음에 인용되는 ‘나무위키’의 서술을 읽어보면 이해가 가능하다.“백제를 멸망시킨 이후 아직 고구려와 본격적으로 싸우기 이전부터 영토 문제를 비롯한 당나라와의 여러 이익들이 상충되기 시작하면서, 신라의 불만은 점점 축적돼 갔다. 당에게 주권의 일부까지 바치다시피 하면서 전쟁을 수행했지만, 실익은커녕 위협까지 생긴 격이었으니 말이다. 특히 이런 불만 속에서 663년에 당 조정이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삼고 문무왕을 계림주 대도독으로 임명하는 등의 행태를 보였다. 물론 실제로는 신라가 멀쩡히 존재했으니, 구 백제 땅에 설치한 웅진도독부와 달리 당나라의 계림대도독부로 기능하는 건 아니었지만 상징적으로 당나라에 편입시킨다는 의도가 엿보이는 행위였다.”문무왕과 김유신을 비롯한 7세기 후반 신라의 집권층은 마구잡이로 뻗어가는 당나라의 정치·사회적 욕망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그럴 경우 백제와 고구려를 무릎 꿇리기 위해 사용된 국력의 손실을 어디서도 보상받을 수 없었기 때문.그래서다. 신라는 부득불 당나라와의 결사항전(決死抗戰)을 백성들에게 선언한다. 황산벌전투와 평양성전투에 이어 다시 한 번 많은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전쟁이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 676년, 마침내 당나라를 축출하고 이룬 온전한 삼한일통대부분의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건 일이나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이 아닌 최종 결과다. 그렇다면 신라와 당나라 간의 전쟁은 어떻게 끝이 났을까?이에 관한 결과부터 먼저 이야기하자. 많은 이들이 역사책을 읽어 잘 알고 있듯 이 전쟁에선 신라가 이긴다. 다시 한 번 ‘통일신라 시기 1-중앙과 지방’의 한 대목을 옮긴다.“(앉아서 당하고만 있을 수 없던 신라는) 당의 정책에 정면으로 대결했다. 이리하여 나당전쟁이 벌어졌다. 7년간 행해진 이 전쟁 가운데 매소성전투와 기벌포해전의 승리로 신라는 마침내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완성했다.”참으로 길고 긴 싸움이었다. 660년 백제가 무너지고, 8년 후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굴복한 뒤로부터도 8년의 시간이 더 흘러서야 신라는 완성된 형태의 삼한일통(삼국통일)을 제대로 맛본다. 676년. 마침내 당나라가 신라에게 백기를 들고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간 것.“신라는 자력으로 당나라의 한반도 지배 야욕을 저지하고 쫒아냈다. 신라가 승전했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 쉬우나, 나당전쟁은 오늘날로 치면 중견국이 어떤 나라의 지원군이나 경제적인 도움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초강대국과 1대1로 싸워 물리친 것과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국력 차이를 지혜롭게 극복한 위대한 승리였다.”위의 문장은 ‘나무위키’가 나당전쟁의 역사적 의미를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8-22

“전 세계의 아름다운 바닷속을 더 많은 이들과 다니고파”

심해를 맨몸으로 유영하는 프리다이버의 모습은 신비로움 그 자체다. 땅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외계의 생명체 같다고나 할까. 실제로 바닷속 환경은 우주와 가장 유사하다고 알려진다. 행성을 탐사하기 전 우주비행사들이 대서양 아래서 훈련하는 이유기도 하다. 바다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프리다이버가 많다고 한다. 바닷속 가장 신비로운 생물들에게 다가가는 빠르고 효율적 방법이 프리다이빙이기 때문이다. 우주를 유영하듯 바닷속을 헤엄치려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훈련이 필요하다. 우주를 유영하듯 바닷속을 오가는 사람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도전하는 프리다이버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 비영리 프리다이빙 단체 한국지부로 연락했고, 포항에서 ‘수심 좀 탄다’는 이수형 프리다이버와 만날 수 있었다. -프리다이빙을 사진으로는 접했지만 아직은 생소한 스포츠이다.△최근 소셜미디어를 타고 수중에서 촬영한 프리다이버 사진이 인기를 끌면서 실제로 배우려는 사람도 늘고 있다. 프리다이빙은 물속에서 호흡을 돕는 장비를 사용하지 않고 잠수하는 운동이다. 말 그대로 모든 것에서 벗어나(free) 한계에 도전한다. 국내에 도입된 지 10여 년 됐다. 종종 해외에서 배우고 들어온 사람들은 있었지만, 교육시스템을 갖추고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스킨스쿠버와 무엇이 다른가.△‘스킨스쿠버’는 스쿠버다이빙과 스킨다이빙을 아우르는 말이다. ‘스쿠버다이빙’은 공기통을 사용하는 수중 스포츠이고, ‘스킨다이빙’은 우리가 흔히 아는 ‘스노클링’이다. 프리다이빙은 장비 없이 자신의 숨을 갖고 하는 운동이므로 스쿠버다이빙에 비해 진입장벽이 낮다.-프리다이빙을 시작한 계기는.△포항이 고향이라 어릴 적부터 물에서 하는 스포츠를 좋아한다. 6년여 전 서핑 강사를 하면서 프리다이빙에도 관심을 두게 됐다. 국내에서 배우다가, 강사를 가르치는 트레이너 자격증은 필리핀에서 땄다. 그전에는 프리다이빙의 전신인 ‘스피어 피싱’을 취미로 즐겼다. 물속에서 숨을 참으며 작살이나 총으로 물고기를 잡는 원초적인 어로 활동으로 현재 국내에서는 불법이다.-훈련은 주로 어디서 하나.△제한 수역과 개방 수역이 있다. 제한 수역이라면 수영장과 다이빙 풀이 있고 개방 수역이라면 먼바다를 말한다. 포항에는 전용 풀장이 없기에 울산과 대구, 울진으로 가야 한다. 이곳들의 최대 깊이는 5미터이다. 국내 최대 수심은 경기도 용인에 있는 사설 풀장으로 수심 36미터이다.-수심 5미터를 내려가려면 숨을 얼마나 참아야 하나.△초급자가 묻는 말도 안 되는 질문 중 하나이다. 숨을 참는 건 하기 나름이다. 프리다이빙은 숨을 오래 참는 운동이 아니다. 예를 들어 10미터를 다녀오는 과정이라면, 몇 초 만에 다녀오든 상관이 없고 10미터에 도달하기만 하면 된다. 숨을 참는 시간은 훈련을 지속하면 늘어난다. 맨 처음 나는 1분 15초 정도 숨을 참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훨씬 길어졌다. 참고로 강사 자격을 따려면 최소 4분 이상 숨을 참아야 한다.-숨을 오래 참는 훈련은 어떻게 하나.△편안한 상태를 유지한 뒤 ‘호흡 충동’을 다스려야 한다. 숨을 참고 어느 정도 지나면 딸꾹질이 난다거나 침이 꼴깍 넘어가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등의 불편한 반응이 일어난다. 이산화탄소가 배출되지 못하고 몸에 쌓이면서 나타나는 호흡 충동 반응이다. 호흡 충동을 어떻게 조정하고 능숙하게 다루는지가 관건이다. 호흡 충동 간의 거리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다. 처음에는 누구나 불편하다. 욕심을 부리면 물에서 기절하는 사고가 일어난다.-숨을 참다가 기절까지 한다면 위험한 운동 아닌가.△무리하면 저산소증으로 블랙아웃(일시적 기절)이 오기도 한다. 기량을 늘리려는 선수들에게 종종 나타난다. 숨을 조금씩 늘리면 문제없다. 목표치를 수없이 반복해서 완벽해지면 조금씩 늘린다. 성급하면 안 하던 실수도 하게 되니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어서 늘 상태를 의심해야 한다. 무엇보다 프리다이빙은 2인 1조로 움직인다. 다이버의 근긴장이나 떨림, 날숨, 청색증 등을 살피는 사람을 ‘버디’라고 한다. 다이버 또한 버디에게 수신호로 상태를 알려야 한다. 올라오는 도중이나 수면으로 상승하기 직전에 블랙아웃이 올 수 있기 때문에 버디가 수면 아래 3분의 1지점까지 마중 갔다가 같이 올라온다. 이수형 프리다이버. -프리다이빙 경기는 무엇을 겨루는지 궁금하다.△먼저 정지된 상태에서 오래 숨을 참는 ‘수면무호흡(STA, Static Apnea)’이 있다. 수면에 떠서 숨을 참는 이 종목의 국내 최고 기록은 7분 30초 정도 된다. 세계 기록은 10분대이다.그리고 물속에서 멀리 나아가는 ‘수평 잠영(DYN, Dynamic Apnea)’, 모노핀을 착용하고 내려가는 ‘수직하강(CWT, Constant Weight)’, 줄을 잡고 내려가는 ‘자유하강(FIM, Free Immersion)’ 등이 있다. 더 오래, 더 깊이, 더 멀리 가느냐를 겨루는 것으로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목표 거리를 호흡이 되는 만큼 다녀오는 것이다. 마라톤의 시간 단축 훈련처럼 자신의 기록을 깨는 운동이다.-수영을 잘해야 프리다이빙을 할 수 있을 것 같다.△수강생의 3분의 1은 수영을 못 한다. 물공포증 극복이 목표인 수강생도 있다. 욕심을 버리고 천천히 하면 누구든 할 수 있다. 교육할 때도 “천천히 하세요”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한다.무리하지 않기 위해 밟아야 할 단계가 있다. 다이빙하기 전에는 반드시 짧은 수심을 오가면서 자신의 체력 상태를 점검한다. 무리하면 목 안이 찢어지거나 폐를 다친다. 표가 안 나는 상처지만 회복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므로 다이버 스스로가 조심한다. 다이빙하기 직전에는 힘을 빼고 마음을 편하게 내려놓아야 한다. 물에 들어가기 전에 준비 호흡이 필요하고, 그다음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최종 호흡을 한다. 깊게 수심을 탈 땐 숨을 멈추고,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회복 호흡을 한다. 가볍게 내뱉고 재빨리 들이마시길 세 차례 반복하고, 회복이 끝나면 버디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내야 한다.-숨을 참아가며 물속으로 들어가는 까닭은.△대부분 다른 종목은 다른 사람과 겨루는 스포츠라면 다이빙은 스스로 한계에 도전하는 스포츠이다. 나를 이기는 느낌, 성장하는 재미를 느낀다. 1년이 넘도록 진전이 없던 수강생이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을 붙들고 있더니 얼마 전에는 강사 과정에 도전하겠다고 연락이 왔더라. 프리다이빙을 가르치는 강사로서 그럴 때 흐뭇하다.-물에 들어가면 무슨 생각이 드나.△보통은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내 호흡 외에는 잡념이 사라지는 점이 프리다이빙의 매력이다. 바다로 나가면 바닷속 생물들 보는 재미에 푹 빠진다. 필리핀의 말라파스쿠아나 보홀, 사이판 로타섬, 일본의 오키나와, 미아케지마 등으로 다이빙 투어를 다닌다. 최근에는 고래를 보러 일본에 다녀왔다. 고래는 공기 방울을 싫어해서 산소통을 메면 가까이서 마주하기 힘들다. 일본은 돌고래 투어 상품이 다양하게 개발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상품화만 안 됐을 뿐 울릉도 오가는 선박에서 돌고래를 볼 수 있다.-바닷속 상황이 안 좋다고 하는데 실제로 어떤가.△바다가 너무 나빠지고 있다. 특히 해양쓰레기 문제는 심각하다. 전국이 다 그런 것 같다. 최근에 울릉도와 독도를 다녀왔는데 그나마 울릉도는 쓰레기가 적었고 독도는 다행히도 깨끗했다.-프리다이빙을 즐기기에 포항은 어떤 곳인가.△대구 경북지역에서 접근성이 이 정도로 좋으면서 시야가 잘 확보되기로는 포항만 한 곳이 없다. 하지만 전국 다이버들에게 포항은 먹거리 다이빙으로 악명이 높다. 화산지형인 제주나 울릉도와 달리 포항의 해저 지형은 밋밋한 편이다. 해저에 볼거리가 없다 보니 포항을 찾는 다이버의 90%가 전복이나 문어를 보고 온다. 그러니 다이버들이 바닷속 쓰레기를 줍는 플로빙 활동에도 어민들은 민감할 수밖에 없다. 세계적인 다이빙 포인트에서 아이디어를 구하면 어떨까? 다이버들의 성지인 이집트 바다에는 24미터짜리 코끼리 동상이 있고, 스페인의 물속에는 박물관이 있다. 바닷속에 볼거리를 만들면 관광객도 늘고 수산물을 무단으로 채취하는 사건도 감소할 것이다. 강릉은 최근 바다에 난파선을 빠뜨리고 해산물 불법 포획이 줄었다고 한다. 포항시에, 스틸아트페스티벌에서 전시한 작품을 바다에 빠뜨려 달라고 건의한 적이 있다. 로봇 태권브이 같은 조각상이 바닷속에 있다면 훌륭한 다이빙 포인트가 될 것이다.-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나.△개인적으로는 동해에서 수심 80미터 이상을 타는 것이 목표이다. 마지막으로 내려간 수심은 65미터이다. 울릉도에서 프리다이빙 대회를 개최하고 싶은 바람도 있다. 동해는 냉수대가 심해 여건상 어려움은 있지만, 울릉도 바다는 20미터 이상 시야가 확보되어 해외 어디 내놔도 부럽지 않은 다이빙 포인트이다. 전 세계의 아름다운 바닷속을 더 많은 이들과 다니고 싶다. 투어를 다녀온 사람들이 평생의 버킷리스트를 이뤄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할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전율을 느낀다.이수형 프리다이버는용인대학교에서 체육학을 공부하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격투기 종목을 두루 섭렵해 용무도 4단, 태권도 4단, 유도 3단, 주짓수 브라운 벨트 등 합이 무려 17단에 달한다. 자동차 관련 사업으로 돈도 제법 벌었지만 자유로운 생활을 쫓아 프리다이버가 됐다. 포항에서 유일하게 프리다이빙 강사를 가르치는 트레이너이며, 수중사진 강사 트레이너, CMAS(세계수중연맹) 프리다이빙 심판, 민간해양구조대원 등으로 활동한다. 다이빙 전문 여행사를 운영하며 전 세계 바닷속을 누비고 있다./배은정 작가

2023-08-21

초록 향기 짙은, 마음의 고향

포항은 바람의 땅사람도 꽃도 나무도 채소도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자란다.영일만에서 샛바람이 거세게 불면육지는 모래투성이가 되었다.일제강점기에 송도 백사장에나무를 촘촘히 심어 방풍림을 조성했고이를 송림이라 불렀다. 나무는 쑥쑥 자라 어느새 하늘을 가렸고울창한 숲을 이루었다.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빽빽했고다람쥐, 청설모, 산토끼, 노루가 무리를 지어 다녔다.세월이 흘러 송림은 사람들의 아늑한 쉼터가 되었고어린 학생들이 소풍을 즐기는 곳이 되었다.술래잡기, 보물찾기를 하기에 더없이 좋았고나무 아래 팔베개를 하고 누우면 솔향기가 온몸을 감쌌다. 송림에 변화의 바람이 솔솔 불고 있다.세련된 스틸아트가 세워졌고맨발로 걷는 사람도 있고찻집도 하나둘 둥지를 틀었다.눈을 감고 송림을 떠올리면시원한 바닷바람과 바람결 따라 휘어진 소나무싱그러운 솔향기가 느껴진다.조선소에서 배 만드는 소리도 들려온다. 어느 날 문득 마음의 고향이 그립다면초록의 향기 짙은 송림에 가볼 일이다. 최수정 최수정 197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포항에서 성장했다. 계명대 서양화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6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포항지부, 현상회, 계명회 등의 회원이며 포항에서 갤러리m을 운영하고 있다. ‘호미곶 이야기’, ‘비밀이 사는 아파트’, ‘꿈꾸는 복치’ 등의 책에 그림을 그렸다.

2023-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