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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방 안에 갇힌 스무 살 청춘들에게 건네는 위로

학생들의 일상 자체가 마비된 상황이 오래 지속되고 있다. 방학 동안 얼굴 보지 못했던 친구들과 만나 반가운 인사 나눌 때를 이제나저제나 기다려왔지만, 4월이 왔음에도 온전한 개학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아직은 혼자서 모든 걸 해내는 게 서툰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를 둔 맞벌이 부모들은 마음 놓고 자식을 맡길 곳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이다.조금 컸지만 중학생과 고등학생도 형편은 비슷하다. 학교를 가지 않으니 하루 종일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아들, 딸과 신경전을 벌인다는 부모가 적지 않다.학원을 보내려고 해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은 어쩐지 불안스럽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접촉으로 인한 감염’ 탓이다.학생만이 아니다. 교사들의 고충도 적지 않을 듯하다. 사람은 자신이 서야 할 자리에 있어야 마음이 편한 법. 익숙한 교단이 아닌 컴퓨터 모니터와 연결된 카메라 앞에서 어색한 표정으로 ‘강의용 동영상’을 만들며 밤을 새는 교사와 교수가 많다는 뉴스가 들려온다.갑자기 등장해 한순간에 세계를 멈춰버린 강위력한 바이러스가 사람들 삶의 형식은 물론, 내용마저 바꾸고 있다.▲‘바이러스의 시대’를 사는 불행한 젊은이들이러니저러니 해도 볕 좋고 꽃향기 가득한 이 빛나는 4월에 가장 불쌍해 보이는 건 스무 살 청춘들이다.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갓 대학에 들어가거나,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을 이들. 그들이 꼼짝없이 방 안에 갇힌 2020년 4월.한 세대 전 스무 살을 보낸 젊은이들은 어땠을까? 기자의 경험과 기억에 의하면 4월은 눈부신 달이었다. 따스한 바람에 화들짝 놀라 급하게 망울을 터뜨린 벚꽃. 그 아래서 친구들과 막걸리를 마시거나, 버스를 타고 나간 교외에서 너무나 관능적인 빛깔의 복사꽃과 만나는 계절.마치 폭설처럼 시야를 가리던 연분홍 벚꽃 잎들. 그걸 배경으로 “우리네 젊은 날도 언젠가는 저렇듯 허무하게 지겠지”라는 너스레를 떨며 슬그머니 연인의 손을 잡던 20대 청춘들.2020년과 달리 20세기의 젊음은 고통스러웠기에 아름다울 수 있었다. 그랬다. 그런 역설과 반어가 통하던 시절이었다.답답하고 갑갑한 현실은 좋았던 과거를 떠오르게 한다. 그 호시절의 재료가 돼준 영화와 노래도 더불어 기억 속에서 불러오게 된다. 낭만이 거세된 4월을 살고 있는 지금의 스무 살 청춘들에겐 어떤 영화와 노래가 어울릴까? 주제넘지만 추천해 볼까. 먼저 영화 이야기다.▲빛나는 낭만을 다룬 영화 ‘4월 이야기’벚꽃이 눈처럼 시야를 가리는 도쿄 근교의 작은 도시 무사시노(武藏野).홋카이도 시골에서 그곳 대학에 들어온 신입생 니레노 우즈키를 가장 먼저 반긴 건 “당신은 빛나는 벚꽃보다 아름답습니다”라고 적힌 예쁜 플래카드다.일본에 대한 관심이 있는 관객들에게 ‘무사시노’는 그리 낯설지 않은 곳이다.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피터 캣(Peter Cat)이란 카페를 만들어 끈적이는 찰리 파커와 마일즈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의 쿨 재즈를 밤낮없이 틀어대던 도시. 무사시노 미술대학에서 공부한 무라카미 류의 매력적인 소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의 무대가 된 도시.바로 이 무사시노에서 이와이 슌지는 “세상은 사랑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만든다. ‘4월 이야기’다.카메라는 시종일관 첫사랑인 고등학교 선배를 잊지 못해 무사시노까지 와서 같은 학교에 입학한 니레노 우즈키를 쫓아다닌다.이와이 슌지의 렌즈 속에 담긴 세상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도시를 뒤덮은 연분홍 벚꽃, 새내기들의 밝고 활기찬 웃음, 넓고 푸른 잔디밭, 거기에 스크린의 색감까지 은은한 황갈색이 감도는 낭만적인 톤이다.세상과 사람에 대한 기대와 설렘은 보편적이다. 그건 한국과 일본이 다를 수 없다.최인호의 소설 ‘겨울 나그네’를 읽고는 자전거를 사고, 그 자전거에 부딪쳐줄 소녀를 찾아 교정을 누비던 스무 살 청년들. 그런 로맨스는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임을 알게 되기까지 그들에겐 시간이 필요한 법.영화 ‘4월 이야기’는 단조롭고 심상하다. 근사한 남자 선배를 보기 위해 무사시노를 찾아온 예쁜 후배.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게 어색하고 서투르다. 차마 좋아한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선배의 곁을 서성이기만 하는 여린 마음. 그리고, 마침내 흩뿌리는 봄비 아래서 이뤄지는 스무 살의 첫사랑.이 영화는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사람이 아름다워지기 때문”이란 아주 당연한 진리를 느릿느릿하며, 쉽고, 아름답게 우리 귀에 속삭여준다.그래서일까? 작위적인 벚꽃 날림의 연출도, 서툴게 보이는 조연들의 연기도, 여배우가 직접 연주했다는 초등학생 수준의 피아노 솜씨도 용서가 가능해진다.선과 악의 대립 구조도, 갈등과 화해의 드라마도, 그 흔한 악역 하나 등장하지 않는 밋밋한 영화 ‘4월 이야기’.그러나 상영 시간 내내 관객은 이와이 슌지 감독이 의도한 ‘사랑과 그로 인한 가슴 흔들림’에 동화된다.그래서다. 바이러스가 횡행하는 바깥을 피해 방 안에 갇혔지만, 사랑과 낭만을 꿈꿀 것이 분명한 세상 모든 스무 살에게 ‘4월 이야기’의 속삭임을 소개하고 싶다. 이런 것이다.“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번이다. 그러니 네 영혼이 시키는 대로 살아라. 사랑을 배우고 익히고 행하라. 그것만 하기에도 인간의 삶은 짧다.”▲조금은 느긋한 마음으로 봄을 기다린다면….벚꽃이 도시 전체를 핑크색으로 물들이는 경북 경주와 경남 진해는 물론, 꽃놀이 인파로 걷기조차 힘들었던 서울 여의도까지 “제발 찾아오지 말아주세요”라며 관광객을 마다하는 희귀한 풍경이 연출되고 있는 요즈음.마음으로나마 아직 도착하지 않은 봄과 벚꽃을 마주하려는 청춘들에게 시 한 편을 선물하려 한다.‘무겁고 불편한 오늘과/저당 잡힌 내일’을 잠시 잊고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흐린 삶이 노래처럼 즐거워지길’ 바란다면 조용히 혼자서 읊조려 보시기를./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4-02

“영덕은 영감을 주는 마르지 않는 우물, 현실 바깥에서 나는 고향과 매일 만난다”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Victor Hugo·1802~1885)는 “성인은 세상 어떤 곳도 고향으로 느끼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이는 현재 서있는 곳이 태어난 곳만큼이나 귀한 자리이니, 거기서 세상과 인간을 위한 양심적 투쟁을 해야 한다는 뜻일 터.하지만 모두가 빅토르 위고처럼 살 수는 없는 일. 보통의 인간들에게 고향이란 잊을 수 없는 그리움의 공간이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권성훈(50)의 고향은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푸르른 바다와 산’을 품에 안은 영덕.어린 시절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40년을 살고 있지만, 권성훈에게 영덕 병곡면은 잊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애틋한 마을이다. 언젠가는 돌아가 자신의 마지막 문학적 정열을 쏟아붓고 싶은.고향 떠나 도착한 낯선 도시에서 처음 본 연탄을 신기해하던 열 살 아이가 타향에서도 그늘 없이 자라 대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됐다. ‘영덕 사람’ 권성훈 이야기다. 그를 만나 ‘몸의 고향’ 영덕과 ‘마음의 고향’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앞으로의 계획과 고향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도 더불어 들을 수 있었다.-현재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지.△경기대학교 교양대학 교수로 있다. 교양학부에선 문학을, 국문학과와 문예창작 전공 학생들에겐 현대 시론과 시평론을 강의한다. 지난해 우리 학교에서 국내 최초로 한류문화대학원이 생겼는데, 거기선 시조 창작과 현대 시조론을 강의 중이다.-‘코로나19 사태’로 개강이 늦어지고 있다. 익숙하지 않은 동영상 강의로 인해 교수는 물론 학생들도 어려움이 적지 않다는데.△대면 수업이 아닌 비대면 수업을 동영상 강의로 3주째 진행하고 있다. 인문학이라는 학문은 달리 말하면 ‘인간학’이다. 기본적으로 학생들과 눈을 마주치면서 문학을 매개로 인간의 삶을 서로 교환해야 하는데,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이 있다.강의 동영상을 교내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면서 방송통신대와 사이버대학 교수님들의 애로사항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루 빨리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할 날만을 고대하고 있다.-최근에 낸 책은 뭔지. 그리고, 상을 받기 위해 문학을 하는 건 아니지만 당신의 문학 관련 수상 이력도 궁금하다.△지난해 세 번째 시집 ‘밤은 밤을 열면서’를 냈다. 이 책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아르코창작기금으로 출간됐다. 운 좋게도 세종우수도서로 선정됐고, 2020년 ‘작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집’으로도 선택됐다. 감사한 일이다. 그간 펴낸 책은 연구서와 시론, 평론집 등을 합해 10권쯤 된다. 젊은 작가상, 한국예술작가상, 열린시학상, 인산시조평론상 등을 받았던 것도 행복한 기억이다.-현재 쓰고 있는 책은.△박사 학위 논문 주제가 ‘문학치료’였다. 문학치료 이론에 적용되는 정신분석을 테마로 한국 현대시인 중 이상, 김수영, 박남철 등을 분석하고 있다. 그들 시 세계를 무의식의 소산으로 보고 정신분석화 하는 작업 중이다.-경북 영덕에서 태어났다. 거기서 얼마나 산 것이고, 잊을 수 없는 그곳에서의 추억은.△영덕군 병곡면 거무역동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살았다. 열 살이 되던 해 경기도 수원으로 이사를 했다. 산과 바다, 꽃과 비를 좋아하는데 그것들이 내가 어렸을 때 항상 곁에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초등학교 1학년 봄날의 기억인데, 갑자기 천둥이 치며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산에 묶어둔 소를 찾아 같이 내려오는데, 천둥소리에 무서워하는 나를 안타깝게 돌아보던 늙은 소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마치 엄마의 눈빛 같았다.-중고교 시절엔 ‘문학소년’이었나. 영향 받은 작가와 작품이 있는가.△중학교 다닐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집이 가난해 서점에서 책을 사 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도서관에서 밤늦도록 책을 읽던 기억이 난다. 토요일 방과 후 책을 대출해 가방에 넣고 집으로 돌아올 때가 가장 행복했다. 닥치는 대로 독서를 했기 때문에 딱히 영향을 받은 작가는 없지만, 있다면 불특정 다수의 책 모두가 나를 가르친 선생님이자 친구였다.-수원에 정착할 무렵 잊을 수 없는 기억의 파편 같은 게 있는지.△형제들과 트럭 짐칸에 타고 부모님을 따라 수원으로 왔다. 저녁에 어머님이 연탄을 피우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시골에서는 아궁이에 장작을 때며 살다가 검정색 연탄이 하얗게 되는 것을 보면서 신기해했다. 돌아보면 웃음 나오는 추억이다.-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고향을 그리워한다는데, 당신의 경우는 어떤가.△나이를 좀 더 먹으면 영덕에 내려가 고향을 배경으로 한 연작시를 쓰고 싶다. 영덕은 내 작품에 영감을 주는 마르지 않는 우물 같이 느껴진다. 상상의 두레로 언어의 물을 퍼 올리며, 현실 바깥에서지만 나는 고향과 매일 만나고 있다.-시와 시조, 평론까지 문학의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고 있다. 인간에게 문학이 필요한 이유는.△‘그냥’이라는 말밖에 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냥이라는 단어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혹은, 변함이 없다는 뜻이 담긴 것 같다. 작품을 쓰면서는 항상 어떠한 형식과 구성이 더 좋을지 고민하게 된다. 창작뿐만 아니라 연구에도 몰두하는 건 둘은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연구를 통해 창작의 질을 높이고, 창작을 통해 연구의 장을 열어갈 수 있다고 본다. 개인적 바람은 시조의 활성화를 위해 연구와 평론을 좀 더 집중적으로 해보고 싶다.-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나만 존재하지 않는 세계가 의미 없듯, 나 혼자 존재하는 세계 역시 의미 없기는 마찬가지다. 인간은 같이 존재하고 함께 있기에 살아있는 것이다. 내가 속한 공동체는 나를 있게 한 중요한 삶의 동력이다. ‘나의 길’을 가는 것에서 만족하지 말고,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고향 영덕을 소재로 작품을 쓴 적이 있는지.△어릴 때 고향 바다를 두고 슬퍼하며 수원으로 이사했던 내 모습을 형상화한 게 있다. 아래 소개하는 ‘폐차’라는 시다.다음 생애 좋은 곳에서 태어나라십 년 살다 바다에 묻은 그 애도 그랬다울음소리 수리도 않은 채 도로를 넘나들며녹슨 바람에 이는 사월 파도를 태우는밤은 밤을 열면서 떠돌아다녔다.-인간에게 고향이란 어떤 의미일까.△고향은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간절해지는 곳이 아닐까 싶다. 고향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향 또한 시간을 돌릴 수 없으니, 예전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남아 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추상적 질문이다. 실용적 학문이 아닌 문학을 포함한 예술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예술의 효용성은 필요와 불필요에 의해 규정되는 게 아니다. 느끼는 사람의 것이며, 감동을 받는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모든 것이 허망하고 무용하다고 느껴질 때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실용적 학문이 접근할 수 없는 근원적인 것으로,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할 때 ‘예술적인 어떤 것’이 우리 곁을 지켜준다고 믿고 있다.-‘코로나19’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대구·경북에 어떤 위로를 전하고 싶은지.△“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말이 있다. 위대한 인간은 함께 살아남은 자라고 생각한다. 각자가 고향을 지켜온 힘이 재건의 원동력이 될 것임을 믿는다. 이 과정에선 분리되거나 분열된 나와 너가 없고, 우리만 있을 뿐이다.-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은.△열 살 때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한 번도 영덕의 푸른 산과 맑은 바다를 잊은 적이 없다. 신문과 방송에서 ‘코로나19 사태로 신음하는 대구·경북’이 거론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아무쪼록 지혜와 힘을 모아 경북인의 위대함을 보여줬으면 좋겠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코로나19’로 고통 받고 있는 대구·경북에게…“‘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말이 있다. 위대한 인간은 함께 살아남은 자라고 생각한다. 각자가 고향을 지켜온 힘이 재건의 원동력이 될 것임을 믿는다. 이 과정에선 분리되거나 분열된 나와 너가 없고, 우리만 있을 뿐이다.”

2020-04-01

찢어지고, 부서지고, 쓰라린… 러시아 마지막 날의 흔적들

◇ 러시아에서 마지막 날, 미끄러져 넘어지다러시아에서의 마지막 날 이번 여행도 끝날 뻔 했다. 모두 내가 잘못한 탓이다. 도로에 떨어진 돌을 피하려다 미끄러졌다. 다행히 크게 속도를 내지 않았고 도로에 흙이 깔린 곳에서 넘어졌다. 긴장을 늦추고 있었던 탓이다.나는 다친 곳이 전혀 없었지만 로시는 만신창이. 양쪽 카울과 앞쪽 깜박이등 하나가 깨졌다.더 큰 문제는 헤드라이트와 계기판을 잡아주는 지지대가 부러지고 사이드 박스 하나가 완전히 회생 불능이 된 것이다. 사이드 박스는 폐기처분하고 헤드라이트와 계기판은 덕테이프(덕테이프는 그야말로 만능이다!)로 고정시켜 숙소에 들어왔다.엔진이나 미션, 전장에는 문제가 없다. 넘어진 후 잠시 시동이 켜지지 않아 고민했었는데 다행히도 시동도 켜지고 경고등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일이 새는 곳도 없고.6-7미터쯤 미끄러진 듯한데 몸이 성한 건 슈트와 부츠 때문이다. 이리저리 기운 슈트와 물 새는 부츠가 제대로 역할을 했다. 사고로 바지 밑단이 찢어져 또 기워야 했다. 덕테이프로 고정하고 계속 달릴 수 없어 숙소에 와서 고장난 것들을 완전히 분리했다.안개등도 하나가 완전히 부서져 분리했다. 깨진 카울과 지지대, 앞 물받이를 수선했다. 가장 구경이 작은 별렌치를 버너에 달궈 구멍을 뚫고 케이블타이로 꿰맸다. 오토바이까지 깁다니. 이렇게 만들어 미안하다! 로시.미끄러지며 헬멧 안으로 흙이 밀고 들어왔을 때,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이 혹시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잠시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그리고 찰나가 지나고 나는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어쨌거나 달리는 데는 문제가 없다. 달리지 못할 상황이 아니라면 여행은 계속된다.계속 달려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고. 하지만 오늘 일로 일정이 틀어질 수도. 임시조치해둔 부품을 꼭 교환해야 한다. 우선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 가서 알아보기로. 어떻게든 러시아 국경을 넘는다.◇ 러시아여 안녕! 국경을 넘어, 라트비아로사고로 대범함+2, 상황대처능력+3.5 정도 능력치 상승했으나 에너지-7, 지출-10. 응급조치한 부분은 비포장길을 달렸음에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임시로 묶어둔 부분이 피로가 누적되면 별 수 없이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다.우선 라트비아로 넘어가야 해서 러시아의 벨리키예루키에서 가장 가까운 남쪽 국경검문소로 갔다. 러시아에서 유럽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넘어가려면 그린카드(유럽 자동차보험)를 만들어야 한다.국경 검문소 가까이 세 곳이나 보험회사 사무실에 들렀는데도 발급이 안 된다는 답변을 들었다. 라트비아에 가서 만들어야 한다고. 예전 여행자들이 남긴 정보가 틀린 경우도 종종 있다.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알아낼 수 없는 것들이 계속 나온다. 러시아 검문소에서 짐까지 검사 받았지만 다시 돌아나와야 했다.결국 라트비아 국경 검문소 안에서 그린카드를 발급 받을 수 있는 북쪽에 가서야 입국할 수 있었다. 3개월 보험료가 53유로. 신용카드 결제가 가능한데 내가 가진 카드 모두 불가능. 다행히 지갑 안에 60유로가 있어 그린카드를 만들 수 있었다.그때 신용카드 결제가 안 되었던 건 국내 점검시간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오후 6시 정각부터 몇 분 사이 결제를 시도했었으니까. 한국보다 6시간 빠르니 그때 국내는 자정. 나중에 숙소에 와서 문제없이 지불 가능한 걸 확인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갑 속에 150달러와 60유로, 그리고 쓰고 남은 루블화 약간 뿐이었으니까. 카드로 인출하거나 결제를 할 수 없으면 난감할 수밖에.해외에 나올 때는 다른 은행 신용카드를 준비하는 게 좋겠다. 둘 다 같은 은행이라 같은 문제로 동시에 사용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북쪽 국경에서 280킬로미터쯤 달려 밤 11시가 넘어서야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남쪽에서 다시 북쪽으로(가장 빠른 지름길을 찾아갔는데 비포장도로가 길게 이어졌다.), 또 거기서 리가까지. 아주 긴긴 하루였다.◇ 깜짝 놀랄만한 수리비, 수리를 포기하다BMW 모토라드에 가서 수리를 의뢰했다. 로시의 모델명은 F650GS TWIN. 2009년식이고 아주 짧은 기간 생산되었고 2011년부턴가 F700GS로 변경되어 나왔다. 호환되는 부품이 많지만 그래도 부품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드물 거라 생각했다. 역시나 예상이 맞았다.수리해야할 부분을 점검하고(밀린 일이 많아서 점검은 하루를 기다려야 한단다.) 독일 본사에 부품을 주문해 수리하기까지 ‘아마도’ 짧게는 일주일에서 2주일은 걸린다고. 일주일과 2주일 사이 ‘메이비(maybe)’가 얼마나 또렷하게 들리던지. 결국 리가에서 최소 10일, 최대 보름은 발이 묶이게 생겼다.헬멧을 들고 땀을 비질비질 흘리며 숙소로 걸어 돌아오는데 이렇게 된 거 요즘 유행한다는 ‘ㅇㅇ에서 한 달 살기’를 짧게 해보기로 결심했다.사실 이렇게 한 도시에 오래 머무르며 느긋하게 돌아보고 알아 가는 게 가장 추천할만한 여행 방식이라 생각한다. 주마간산, 달리고 달려서 반환점과 종착점를 찍는 여행은 꽤나 피로하고 놓치고 가는 것이 많다. 하지만 시간과 달려야할 할 곳이 정해져 있으니 어쩔 수 없다. 마트에 가서 과일(자두와 방울토마토)를 사서 먹었는데 뱃속으로 넘어가자마자 바로 분해되어 흡수되는 느낌이었다.그동안 과일을 사먹지 않았더니 몸이 바로 반응한다. 옛날 먼바다를 항해하는 뱃사람들도 과일을 먹을 때 이런 느낌이지 않았을까.옴스크부터 같이 달렸던 현묵 씨는 리투아니아 쪽으로 먼저 출발하는 걸로. 가능하다면 돌아갈 때 모스크바에서 만나기로 했다. 안전하게 가고 싶은 곳 모두 돌아보길. 비용을 줄이기 위해 내일부터 숙소를 좀 더 저렴한 곳(1박 9유로)으로 옮기기로 했다.쉬는 동안 라트비아 역사와 지리 공부나 해야겠다. 한 곳에 오래 머무르려면 대중교통과 음식, 그리고 통신, 이 세 가지를 먼저 해결하는 게 중요한 듯하다.지금 숙소에서 로시를 맡긴 모토라드까지 걸어가긴 먼 거리라 버스카드를 구입했다.버스나 트램을 10번 탈 수 있는 카드가 약 11유로. 심카드는 1.5유로짜리를 구입했다. 유심카드는 10일 동안 리가에 머무를 예정이라고 하니 직원이 알아서 건네주었다. 우리네 편의점 같은 곳에서 두 가지 모두 구입할 수 있다.모토라드에 다녀와서 견적서를 이메일로 받고 한숨을 내쉬었다. 로시를 사랑하지만 이 회사의 애프터서비스 정책은 나 같은 헝그리 라이더는 감당하기 어렵다.오 마이 갓! 차마 수리금액을 말하기가…. 견적서에 나와 있는 세금만으로 내가 생각했던 수리 금액과 거의 맞먹었다.문제는 굳이 바꾸지 않아도 될 부품들까지 견적서에 넣어둔 것. 결국 수리하지 않고 오토바이를 찾으러 가겠노라 답장을 보냈고, 길게 한숨 한 번 쉬고 내가 원하는 곳만 수리할 수 있는 곳을 찾기로 했다.모토라드에서만 수리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견적서에 나온 수리비를 그대로 내면 이대로 핸들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한 번의 실수가 많은 경험을 하게 만든다.    /조경국

2020-03-31

독립기념관만 화려하면 뭣하나…

사람은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떤 처신을 하는가가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 특히 나라를 잃었을 때 조국과 민족을 배반하고 자신의 영달을 꾀한 짐승보다 못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으면서 자신의 목숨도 버린 가슴 뭉클한 독립투사도 있다. 사람을 보는 기준은 다양하지만 죽음부터 역 추적해 보면 그 사람의 진면목을 강렬하게 알 수 있다. 안동은 기초단체로는 제일 많은 353명이 독립운동으로 포상 받은 독립운동의 성지다.향산 고택과 치암고택 가기 전에 향산 이만도((1842~1910) 선생이 순국했던 예안 인계리 순국유허비를 보고 태어난 하계마을과 치암 이만현(1832~1911)의 고향 원촌마을을 보고 갔다.#. 나라운명의 변곡점과 독립운동의 요람 안동‘추로지향(鄒魯之鄕)’. 추나라 맹자와 노나라 공자 고향의 출생지를 딴 이 한마디로 안동은 유학의 본 고장임을 입증한다.그러나 신라 고려시대까지는 불교문화가 융성하여 성덕왕 23년(724)에 만든 강원도 상원사 (왕실(세조)의 원당이었음) 범종은 성덕대왕 신종(경덕왕 1년·742)보다 18년이나 앞서는데, 조선 8도에서 가장 좋은 종으로 선발해 갔다. 소리가 웅장하고 맑아 백리(40km)까지 울렸다는 이 종은 원래 안동에 있었던 것이다.봉정사의 극락전도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앞선 시기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이다. 현존하는 국내 전탑 5개 중에서 여주 신륵사와 칠곡 송림사 전탑 외 법흥사지 7층 전탑, 일직 조탑리 5층 전탑, 안동역 앞의 운흥동 5층 전탑 등이 모두 안동에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안동은 나라의 운명을 가르는 중요한 고비마다 결정적 역할을 한다. 930년 후삼국 각축의 혼란기에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 견훤의 안동 병산전투에 안동의 토호세력 김행, 장길, 김선평의 향군들 도움으로 견훤 군사 8천명을 무찔러 후삼국 통일의 확고한 기틀을 만들어 고려가 후삼국을 평정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나라 대개의 성씨가 그러하듯 태조 왕건은 김행(金幸·안동 권씨), 장길(張吉(장정필)·안동 장씨), 김선평(金宣平)·안동김씨)에게 삼태사(三太師)로 공훈을 기렸다. 그리고 1361년 홍건적 난으로 공민왕(10년)은 수도 개경(개성)에서 안전한 복주(안동)에 피신 왔다. 유학이 건국이념인 조선왕조에서는 퇴계 이황의 우뚝한 유학자에 선비의 고장이 되었고, 명재상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 7년 전쟁의 참혹한 위기 때 국난극복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한입합방으로 나라가 망하자 안동의 선비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가솔들을 데리고 만주로, 단식으로 순국하고, 만세운동으로 나라 찾는 숭고한 일에 일생을 바친다. 고성 이씨 임청각, 의성김씨 집성촌의 내앞 마을과 진성 이씨 하계, 원촌마을에 수 십 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된 명예로운 안동이었다.그러나 오늘날 안동은 과연 ‘한국정신문화의수도, 선비의 고장’다운가? 상징적인 사건이 2019년 5월 김종길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장은 자유한국당(통합당) 황00 대표가 안동에 왔을 때 “보수가 궤멸해가는 이 어려운 처지를 건져줄 우리의 희망의 등불이요, 국난극복을 해결해줄 구세주”고 라고 추켜세웠고, 박원갑 경북 향교재단 이사장은 “100년마다, 1세기 마다 사람이 난다 그러는데 건국 100년, 또 3·1절 100년에 나타난 것이 황00 대표”라고 주장했다. 왕조시대보다 더 심한 마치 맹신도가 사이비 교주에게 하는 소리 같아 참담했다.다행히 “안동을 대표하는 유림이 한 정당 대표에게 ‘희망’ ‘등불’ ‘구세주’라고 칭송했다.”“선비라면 정치권력에 쓴 소리와 바른말을 해야지 아첨이나 하고 있으니 안동출신으로 너무 부끄럽습니다.” “친일적폐 속물적 부유로 변질한 소인배 유림을 규탄하고 그릇된 유림의 역사인식과 현실풍토를 성토하기 위하여 안동 문화의 거리에서 1인 시위를 한다”는 서애 류성룡의 14대손 류돈하(38)같은 참 선비다운 젊은 분이 있어 위안을 삼았다.#. 지조의 선비 향산 이만도와 부끄러움을 아는 치암 이만현져버린 매화를 대신하여 진달래, 개나리, 살구꽃, 자두꽃, 도화 꽃에 벚꽃 마저 활짝 피어버린 경주를 뒤로하고 안동으로 향했다. 산천은 화사한 꽃단장할 자신의 역할을 서서히 준비하고 있었다. 안동 북으로 조금가자 길옆 바위에 새겨놓은 ‘자력갱생’이 왜 ‘각자도생’으로 연결되고 꽉낀 마스크는 ‘자가격리’ ‘원천봉쇄’가 연상될까. 와룡 지나 예안 인계리 가는 길은 가난해도 이웃과 정 나누며 오순도순 살았을 억척스런 안동사람들이 연상된다. 향산 선생이 순국했던 장소는 도로 옆에 비석만 쓸쓸히 서있고. 옆에는 향산의 주손 이동석 시민운동가의 수목장한 소나무가 푸른 향기를 품고 있었다. 앞면은 백범 김구가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지기 전 마지막 쓴 글씨고 뒷면은 위당 정인보의 유려한 문장으로 새겨져있다.‘향산 공원’이라 해 놓았는데 이렇게 작은 공원은 처음 봤다. 여기서 향산 고택이 있던 하계는 강 건너 직선거리 7km로 멀지않지만 안동댐으로 한참을 돌아야했다. 가는 길에 도산서원에 만개한 매화의 짙고 그윽한 향기 보고, 듣고, 음미하며 퇴계 종택에 갔다. 굳게 닫힌 솟을대문에는 손소독제가 잡귀 쫓는 벽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안동댐으로 사라진 하계마을은 산비탈 경사진 퇴계묘소에서 내려다보니 흔적도 없고 저 멀리 강물은 말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산 고개 넘어서면 이육사 생가 터에 문학관이 들어서 있고 꽤 넓은 벌판이 펼쳐져있다. 이 마을에서 치암 이만현은 퇴계 11대손으로 나라 잃자 비분강개해 세상을 떠났다. 바위에도 부끄러워한다는 치암(恥巖) 이만현의 고택이 있던 자리에도 강 버들만 무심히 늘어서있다.이제 안동시내 안막동 좁은 산골짜기로 옮겨온 향산과 치암의 고택을 찾았다. 치암 고택은 4칸으로 큰집은 아니어도 절제된 균형미에 1칸은 정자형식의 누마루를 만들어 소박하고 단정한 낭만이 흘렀다. 고택체험 숙소로도 개방하여 하나하나에 손이 많이 간 고택이었다. 장독대며 연못 그리고 예쁜 꽃들로 잘 꾸며 고택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크지도 않은 공간을 잘 배치하여 여러 채가 있어도 답답하지 않았고 주인공 본채를 위하여 자신은 드러내지 않는 조연 역할을 충실히 하여 서로가 상생하며 살았다. 치암 고택에는 유독 글씨를 많이 붙여놓아 뜻은 좋지만 의미가 반감된다. 치암고택과 신독(愼獨), 청풍헌(淸風軒) 정도만 있어도 홀로 부끄러움을 아는 맑은 선비의 바람이 불어 좋으련만…. 마당에 잔디도 정갈한 백토였으면 더욱 담백한 고택의 맛이 날텐데.퇴계는 낙향해 “진나라 도연명은 굳은 절개의 상징인 소나무와 국화 그리고 대나무를 심어 정원을 만들었다. 그런데 고고한 풍경을 지닌 매화를 왜 심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며 절우사 뜰에 소나무, 대나무, 국화와 맑은 향기 지닌 매화와 연못에 연꽃을 심어 이 다섯 친구와 자신을 육우(六友)라 했다. 지금의 장복수 종부의 손맛으로 퇴계를 기리는‘ 육우원 다과’를 개발했다.앞에 향산 고택으로 갔다. 대문과 사랑채가 좁게 붙어있어 답답했다. 맞배지붕의 사랑채 뒤에는 ㄷ자 안채가 허술하게 서있다. 발길을 옮길 때마다 옳은 일에 신념을 바치고 독립운동을 하면 이렇게 된다는 산역사의 본보기 같아 마음이 울컥했다. 이집이 어떤 집인가. 향산 이만도는 과거에 급제하여 양산군수 홍문관 교리하다 1896년 예안 의병대장 활동에 1905년 을사늑약파기와 을사오적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 1910년 경술국치 뒤 일제통치를 부정하며 24일 단식 끝에 순국하였고, 아들 기암 이중업(1863~1921)은 파리장서운동 주도했다. 기암의 두 아들 이동흠과 종흠은 대한광복회 활동으로 옥고를 치루었던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문의 고택이 아닌가. 특히 향산의 며느리 김락(1863~1929) 여사의 눈물겨운 굴곡진 삶은 인간으로 느낄 수 있는 온갖 고통을 겪었다. 남편(이중업), 두 아들(동흠, 종흠), 언니 김우락(1854~1933)은 노비 풀어주고 신흥무관학교 세우고 상해임시정부 초대국무령 석주 이상룡의 부인, 친정오빠 백하 김대락(1845~1914)은 자신의 집 ‘백화구려’는 안동지역 애국계몽운동의 학교로 내주고 경술국치이후 67세의 고령에 마을 주민 150명과 서간도로 망명했다. 자신은 3·1만세운동 예안면 시위에 참여했다가 달군 인두로 눈을 지짐 당해 두 눈을 잃었으니 이 모진 수모와 지옥 같은 현실을 어떻게 견디어 내었을까. 온몸으로 나라에 바친 분들이 살았던 고택이 이렇게 방치될 수 있는가. 문중에서 관리하다보니 한계가 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하루빨리 정갈하게 관리하여 후세사람들이 옷깃을 여미는 교육의 장이 되어야 되지 않겠는가.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더니, 독립기념관만 화려하면 뭣하나. 8도 의병대장으로 서대문형무소 첫 순국자였던 구미의 왕산 허위의 장 손자 허경성은 대구서 짜장면 배달해야했고, 임청각의 고성 이씨 석주 이상룡의 손자, 손녀는 해방된 나라에서 고아원에 지내야했다. 김락 부인이 태어난 내앞 마을 ‘백화구려’ 가는 길은 하늘도 슬픈지 안개비 산천을 울리고 있었다. /글·사진= 이재호 기행작가

2020-03-31

‘신과 인간이 결합된 등신불’은 ‘한국 인간주의’ 요체

김동리는 가장 한국적인 작가이다. 한국적인 특성을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 중 하나가 ‘무녀도’ 등에서 보여준 우리 민족 고유의 무(巫)였다면, 다른 한 기둥은 불교라고 할 수 있다. 불교의 문학적 형상화와 관련해서도 그가 경주에서 나고 자랐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다. 경주는 불교 왕국이었던 신라의 수도이기 때문이다. 흔히 경주를 ‘담장 없는 역사박물관’이라고 일컫는데, 그 박물관을 채우는 구체적인 세목은 대부분 불교에서 비롯된 것들이다.한국인이라면 한번쯤 가본 적이 있는 불국사, 석굴암이나 불국토를 꿈꾸던 신라인들의 염원이 곳곳에 아로새겨진 남산만 떠올려보아도 경주와 불교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불교가 경주에 남긴 무형의 정신자산도 대단한데, 최고의 역사서로 꼽히는 일연의 ‘삼국유사’를 수놓은 그 많은 대승고덕들의 주요 활동무대도 다름 아닌 경주이다.김동리는 불교에서 소재나 정신을 취해온 여러 작품을 남겼다. 이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등신불’(사상계, 1961.11)이다. 이 작품은 다솔사 소속의 광명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20대 중반 시절, 백형 범보와 만해 한용운이 나누는 소신공양 이야기에 충격을 받고 훗날 이를 토대로 완성해 낸 것이라고 한다. (김동리, ‘만해 선생과 등신불’, 나를 찾아서, 민음사, 1997)‘등신불’의 한복판에는 주인공 ‘내’가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에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간신히 탈출하여 머문, 양자강 북쪽에 있는 정원사(淨願寺)의 금불각에 안치되어 있는 등신불(等身佛)이 있다.이 등신불은 당나라 때 소신공양(燒身供養-부처님에게 공양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것)을 한 스님 만적(萬寂)의 타다 굳어진 몸에 금물을 입힌 불상을 말한다. 만적(속명은 기·耆)은 어머니의 학대로 집을 나간 이복형 사신(謝信)을 찾아 나섰다가 스님이 되고, 나중에 소신공양까지 하게 된다. 만적이 몸을 태우던 날 여러 가지 신기하고 영험한 일이 일어나 새전(賽錢)이 쏟아지며, 이 돈으로 타다 남은 그의 몸에 금물을 입혀서 탄생한 것이 바로 이 등신불이다.‘나’는 등신불을 보고서는 아래턱을 덜덜덜 떨면서 “저건 부처님도 아니다! 불상도 아니야!”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의 큰 충격을 받는다. 충격을 받은 이유는 등신불이 너무도 인간적인 특징을 많이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등신불은 아름답고 거룩하고 존엄한 여타의 불상과는 달리, “허리도 제대로 펴고 앉지 못한, 머리 위에 조그만 향로를 얹은 채 우는 듯한, 웃는 듯한, 찡그린 듯한, 오뇌와 비원이 서린 듯한, 그러면서도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랄까 아픔 같은 것이 보는 사람의 가슴을 꽉 움켜잡는 듯한, 일찍이 본 적도 상상한 적도 없는” 인간적 모습을 갖추고 있다.그렇다고 해서 이 등신불이 인간적인 속성만 지닌 것은 아니다. 금불각의 가부좌상은 고뇌와 비원이 서린 듯한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어떠한 대각보다도 그렇게 영검이 많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고 자문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적 특징과 신적인 특징이 혼합된 존재로 형상화된다.‘내’가 경험하는 충격은 대부분의 종교가 신과 인간 사이에 절대적인 위계를 설정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당연한 반응이다. ‘내’가 신과 인간이 결합된 형상으로 드러난 등신불 앞에서 그토록 당황하는 것은 “습관화된 개념으로써는 도저히 부처님과 스님을 혼동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사고에 익숙하기 때문이다.‘신과 인간이 결합된 등신불’은 김동리의 ‘한국 인간주의’라는 독특한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김동리는 ‘한국문학과 한국 인간주의’(김동리 문학앨범, 웅진, 1995)에서 ‘한국 인간주의’가 근대 인간주의(르네상스 휴머니즘)를 발전시킨 인류의 보편적인 이상이라고 주장한다. 중세 기독교의 신본주의(神本主義)에 대립하여 르네상스 휴머니즘은 적극적인 반신적(反神的)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그 결과 근대 인간주의는 무신론과 허무주의로 변모하여 급기야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비극까지 낳았다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신과 인간의 합작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 인간주의’를 대안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때의 ‘한국 인간주의’는 신과 인간의 합작인 동시에 신과 자연의 합작이어서 ‘신을 내포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테제(정립)로서의 신본주의에 안티테제(반정립)로 일어난 근대 인간주의가 진테제(종합)로 전개된 것”이 바로 ‘한국 인간주의’라는 것이다.이런 맥락에서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등신불’은 김동리의 사상이 응축된 ‘한국 인간주의’의 상징이다. 이러한 ‘한국 인간주의’는 ‘무녀도’에도 나타난 대칭성의 사고와도 통한다. 동시에 자타(自他)의 구별이 없으며 부분과 전체는 하나라는 대칭성의 사고는 불교의 핵심에도 존재한다. 이런 측면에서 김동리의 문학은 불교와도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이다.‘등신불’에서 만적이 등신불이 되어 가는 과정은 대칭성의 사고를 깨닫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만적의 어머니는 ‘신과 인간’이나 ‘인간과 자연’의 융합은커녕 극단적으로 자기만을 내세우는 인물이다. 그녀는 일찍 남편을 여의자, 아들인 만적을 데리고 사구(謝仇)라는 사람과 재혼한다. 사구에게는 신(信)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사씨 집의 재산을 탐낸 만적의 어머니는 신의 밥에 독약을 감춘다. 이 일로 신은 집을 나가고, 신을 찾아 나선 만적은 결국 출가를 하게 된 것이다.출가 이후에도 만적은 참된 깨달음의 세계를 향해 계속 나아간다. 만적은 자신을 거두어준 취뢰(吹7C5F) 스님이 열반하였을 때 그 은공을 갚기 위하여 처음 소신공양을 시도한다. 그러나 당대의 선지식인 운봉(雲峰) 선사는 “만적의 그릇(器)됨을 보고 더 수도를 계속”하라며 소신공양을 허락하지 않는다. 운봉 선사는 만적이 5년 동안 더 수행을 하고, 우연히 문둥병이 든 사신을 만나고 돌아온 후에야 소신공양을 허락한다. 사신을 만났을 때 만적은 자신의 염주를 벗어 사신의 목에 걸어주는데, 이 행동은 만적이 자기라는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났음을 상징한다.불교에서 깨달은 자를 의미하는 보살(bodhisattva)은 대칭성의 논리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자이다. 순수한 증여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금강반야경’에서는 “위대한 보살은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이라는 세 가지 생각조차 떨쳐버리고 보시(布施)해야 한다.”라고 밝힌다. 처음 소신공양을 시도할 때, 만적의 머리 속에는 ‘자신’이 ‘취뢰 스님’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친다는 생각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소신공양을 원할 때는 그 세 가지 요소가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고, 그렇기에 운봉 선사는 만적의 깨달음을 인가(印可)하는 차원에서 소신공양을 허락한 것이다.‘등신불’에서 ‘나’의 이야기와 만적의 이야기 사이에는 천년을 넘는 시간과 중국과 한국이라는 공간의 거리가 가로놓여 있다. 이러한 거리는 만적의 이야기를 마친 원혜(圓慧) 대사가 ‘나’를 향해 “자네 바른손 식지를 들어보게”라고 말함으로써 사라져버린다. ‘나’의 바른손 식지에는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진기수(陳奇修)씨에게 혈서를 바치느라고 살을 물어 뗀 상처가 남아 있다. ‘나’는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진기수 씨를 만났을 때, 식지 끝을 물어 뜯어 거기서 나온 피로 ‘願免殺生 歸依佛恩’(원컨대 살생을 면하게 하옵시며 부처님의 은혜 속에 귀의코자 하나이다.)라고 썼던 것이다. 만적처럼 자신의 온목숨을 바친 것은 아니지만, ‘나’ 역시 피를 흘리면서까지 뭇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서원을 세웠다는 점에서는 ‘또 하나의 만적’이었던 것이다.김동리는 ‘한국 인간주의’에서 신본주의에 대한 반발로 근대 인간주의가 극단화된 결과의 구체적 사례로 20세기에 발생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들고 있다. 이와 관련해 ‘등신불’의 배경이 태평양 전쟁이 한창인 1943년이고, ‘나’가 학병으로 끌려온 청년이라는 것은 주목을 요한다. 전쟁이야말로 자타의 구별이 가장 선명해지는 무대이며, 이 무대에서 인간은 신(神)은 고사하고 하나의 사물로 전락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전쟁을 배경으로 했을 때, ‘신이 된 인간’ 혹은 ‘인간이 된 신’은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등신불’ 이외에도 김동리는 “우주만상은 헤아리기 어렵고 인연 관계로 얽혀 있다는 화엄사상의 일면을 주제”(김동리, ‘불교와 나의 작품’, 소설문학, 1985.6)로 한 ‘까치소리’(현대문학, 1966.10)와 윤회 사상을 서사화 한 ‘눈 오는 오후’(월간중앙, 1969.4)와 ‘저승새’(한국문학, 1977.12) 등의 작품을 남겼다. 김동리의 문학에서 우리 고유의 무(巫)와 세계종교인 불교는 대칭성이라는 사고의 공통성을 바탕으로 조화롭게 어울린다.이러한 공존은 신라 이후 계속되어 온 한국의 종교적 다양성을 해명하는 하나의 시금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3-30

영천시, 코로나·경제침체 극복 총력… “함께 힘 모을 때”

“코로나19 사태로 힘든 상황이지만, 영천이 가장 먼저 사태를 종식하고, 안정화되는 전환점이자 희망의 도시로 거듭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이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지원정책을 추진해, 어느 누구도 소외받지 않도록 꼼꼼하게 챙기도록 하겠습니다.”최기문 영천시장의 말이다.영천시는 민·관·군의 노력으로 지난 7일부터 24일째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하지 않고 있다.현재까지 36명의 코로나19 확진자 중 완치 9명, 병원입원 17명, 생활치료센터 입소 9명, 자가격리 1명이다.또 424명이 격리해제돼 일상으로 돌아왔다.시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코로나19 예방생활과 성숙한 시민의식이 이같은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고 보고 조기 종식을 위해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지난 21일부터 4월 5일까지 15일간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하고 있다.사람들이 밀집돼 활동하는 교회, PC방, 학원, 체육시설, 교습소 등 412개소 시설들을 대상으로 ‘집중 관리사업장’으로 지정하고, 공무원 534명이 해당시설을 방문해 관리하고 있다.최근에는 요양원 등 27개소에 대한 코호트 격리조치를 해제했고, 종사자 25%를 대상으로 검체 검사한 결과, 모두가 음성으로 나왔다.격리조치가 해제된 요양원 등은 2주 동안 공무원 1명과 종사자 1명을 감염관리 책임자로 지정해 집중적으로 관리할 계획이다.발열·기침·인후통 등 증상 여부체크 및 유증상자 출입금지, 종사자 및 이용자 전원 마스크 착용, 손소독제 비치 및 출입시 소독, 시설 내 참여자간 간격 최소 1m 이상 유지, 주기적 소독 및 환기, 단체식사 금지 등 출입자 명단작성 등 방역지침 이행여부를 세밀하게 점검하고 있다.방역지침을 이행하지 않은 시설이 발견되면 집회 및 집회금지 등 행정명령을 내릴 예정이다.행정명령 위반시에는 고발 조치하고, 확진자 발생 시에는 손해배상을 청구 한다는 계획이다.시는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자영업자들이 급격한 매출감소로 경영난에 직면했고, 취약계층 뿐만 아니라 중산층까지도 피해가 확산된다”며 3만800여 가구에 230여억을 지원할 계획이다.중앙과 경북도 정책과 보조를 맞춰 긴급생활비를 기초수급자 및 차상위 가구 6천668가구에 34억9천여만원, 실직 및 휴·폐업한 중위소득 75%이하 가구에 생계비, 의료비 등 36억5천여만원을 영천사랑상품권, 온누리상품권, 기프트카드 형태로 지원할 예정이다.이 외에도 다양한 지원책들을 마련하고 있다.소상공인 경영안정화를 위해 경영안정자금 50억으로 확대해 신용등급에 상관없이 업체당 2천만원의 대출보증과 연 3% 이자를 2년간 지원하고, 소상공인 등에게 카드수수료와 공공요금도 지원해 국세, 도세 감면과 연계, 착한 임대인 재산세 감면 등 경영안정화도 모색하고 있다.지역산업을 이끄는 기업들을 위해서는 기업당 최대 10억이내 융자, 대출이자 3%를 1년간 지원한다.영천 기업들이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도록 투자유치진흥기금 지급요건을 완화했으며, 중소기업 기숙사 임차비도 월세 80%에서 90%로 확대했다.387개사 자동차 부품업체들을 위해 미래형자동차 부품개발, 테스트장비, 시제품 제작 등 기술개발과 함께 건축설계비 50% 감면을 추진해 일자리도 늘린다.농업분야에서는 경북도와 연계해 농어촌진흥기금 상환기간 연장 및 추가지원과 농가당 최대 5천만원 한도 내에서 대출과 이자를 지원하는 농업인 재해대책경영자금 지원책을 마련했다.농번기 인력수급에 차질이 없도록 농가참여근로자 3천명 일비 추가지원, 외국인 근로자 4천명 영농현장 수송, 농가일손돕기에 참여하는 유관단체에 운영비를 지원한다.특히 급식용 친환경농산물의 소비촉진 운동, 시립도서관, 재경학사, 체육시설 등 공유재산에 대한 사용료 감면과 시민교육, 문화강좌 등 중지에 따라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예술인들을 위한 강좌료 선 지급 등 100여건의 분야별 지원대책들을 마련하고 있다.최기문 시장은 “추가 확진자가 발생하지 않아, 자칫 완전히 종식됐다고 생각할 수 있다”며 “절대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하루 빨리 사태를 종식할 수 있도록 시민 모두가 힘을 모아 주길 당부한다.”고 말했다. /조규남기자 nam8319@kbmaeil.com

2020-03-30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보며 평화로움에 잠기고 싶지만

중국과 이란이 위기로 휘청거리더니, 이젠 미국과 이탈리아, 독일과 프랑스, 영국과 스페인까지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자로 인해 국가가 통째로 멈춰버리는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거대도시 뉴욕과 런던 거리에선 오가는 차량을 볼 수 없고, 이탈리아 외곽 지역 노인들은 의료진을 찾다가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여름에 일본 도쿄에서 열릴 예정이던 올림픽은 전례 없이 연기가 진지하게 논의됐다.프랑스 대통령과 영국 총리는 연일 TV에 나와 “사람들 간의 접촉을 줄이고 집에 있어 달라”고 목소리 높여 호소한다. 미국과 유럽만이 아닌 중동도 형편이 크게 다르지 않다.한국 또한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초토화 된 실정이다.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은 물론 대기업까지 “아사(餓死) 직전”이라는 호소를 정부에 보내고 있고, 최근엔 이웃과 친구들끼리의 다감한 커뮤니케이션도 눈에 띄게 줄었다. 특정 집단이나 지역에 대한 질타와 조롱도 비등한다.여기에 멀쩡하게 생겨서 더 경악스런 청년 한 명은 가장 악질적인 방식으로 미성년자들의 성을 착취해 신문과 방송을 뜨겁게 달궜다.서울 종로경찰서 앞에 얼굴을 드러낸 조주빈(25)은 스스로를 “악마”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너는 악마도 아니고 더러운 세균일 뿐”이라며 분노했다.▲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그리운 풍경대체 2020년 봄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봄이 품에 안아 데리고 오는 희망과 꿈이라는 분홍빛 단어도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들려오는 건 온통 짜증 섞인 불만과 안타까운 비명뿐.식구와 연인의 손을 잡고 벚꽃과 매화 흩날리는 강변에서 소박한 음식을 나눠 먹으며 환히 웃던 지난해 봄이 현실이 아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세상 전체가 비극적으로 꾸며진 시뮬레이션 세트장 같다.불투명한 미래와 비루한 오늘은 자연스레 좋았던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어디에 ‘행복한 꿈’을 파는 가게가 있다면 기꺼이 돈을 지불한 후 아주 길고 긴 잠 속으로 빠져들고 싶을 정도다. 올해 봄이 그렇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게 기자 하나만은 아닐 듯하다.떠올려보면 행복한 꿈같았던 과거는 누구에게나 있다. 나른하고 평화로운 봄날 백일몽 같은 기억들.몇 해 전 라오스를 여행했을 때다. 가난에 주눅 들지 않고 밝은 미소로 타인을 대하는 그 나라 사람들의 호의와 친절에 매료됐다.철없는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시시때때로 조용한 웃음을 보여주던 라오스.낡은 버스에 올라 그 나라 남부에서 시작해 북부까지를 2주쯤 돌아다녔다. 당연지사 많은 이들을 만났다.시장에서 남편이 사준 중국산 청바지 하나에 감동해 눈물 흘리던 어린 신부, 외국인이 준 조그만 사탕 하나를 동생에게 양보하며 쑥스러워하던 초등학생, 자식을 11명이나 둔 마흔아홉 살 농부까지. 그들 모두는 빈한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행복해보였다.‘동남아시아의 젖줄’로 불리는 메콩강과 그 지류들. 흙빛으로 숨죽이며 수천 년을 흘러온 라오스의 강이 선물한 평화로움과 고요함.저물 무렵 강 언덕에 드러누운 기자는 그 상황에서 아이러니하게도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1904~1973)의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를 떠올렸다.▲희망과 꿈을 빌던 라오스 동승(童僧)처럼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197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이 상을 선정하는 기관인 스웨덴 한림원은 네루다의 작품을 “고통 앞에 선 인간의 운명과 희망을 생생하게 그려냈다”고 평했다.생후 2개월 때 어머니를 잃은 불행한 유년,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던 10대 시절, 눈앞에서 봐야했던 스페인 내전의 광기와 처참함, 정치적 지향으로 인한 오랜 망명 생활까지. 네루다의 삶은 희망과 꿈을 떠올리기 힘든 나날로 점철됐다. 그러나 시인은 끝끝내 인간의 당연한 권리인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그는 언제나 희망으로 건너가는 ‘꿈’을 노래했다. 때론 감미로운 목소리로, 때로는 거친 함성으로.‘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라는 제목은 역설적이다. ‘이 밤 나는 가장 슬픈 시를 쓸 수 있으리’라는 문장으로 시작하지만, 이어지는 전개는 결코 어둡지 않다. 이 시에선 유독 ‘그녀’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게 ‘희망’과 ‘꿈’의 은유라는 건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네루다는 ‘그녀’를 잃지 않기 위해 분투한다. 희망과 꿈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마지막 행처럼 ‘이것이 내가 그녀에게 바치는 마지막 시라고 할지라도’ 가치 있는 싸움을 멈춰서는 안 된다.시인만이 아닌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포악한 바이러스와 추악한 욕망에 눈먼 악마를 앞에 둔 이런 막막한 상황일수록 더더욱.그날, 강변에서 시내로 돌아오는 길. 소승불교 사원에서 조그만 손을 모아 합장하는 어린 라오스 승려들을 봤다. 그 동승들 또한 분명 희망과 꿈을 빌고 있었으리라./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3-26

“인재 육성, 지역이 강한 나라로 가는 길”

대통령 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 김사열 신임 위원장은 균형위의 향후 과제를 국가균형발전을 위한 지역대학을 거점으로 한 지역인재 양성 등 교육체계 구축에 방점을 찍었다. 이전까지 사회간접자본(SOC) 위주였던 지역균형발전 전략에서 패러다임 전환을 선언한 셈이다.지난 9일 위원장으로 임명된 김 위원장은 25일 경북매일신문-한국지역언론인클럽(KLJC 회장 김진호)과 정부서울청사에서 가진 공동인터뷰에서 “지역혁신성장의 동력인 ‘사람’에 초점을 두고, 지역인재 양성 및 지역인재-일자리 선순환 구조를 확보하기 위한 교육체계 구축에 역점을 두겠다”고 밝혔다.그는 “대학과 지자체의 연결고리가 없다”며 “거점대학, 특히 국립대는 중앙과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하반기 추진하려는 지역대학과 지역일자리의 연계 등을 통해 인재들을 키우는 게 ‘지역이 강한 나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 수도권의 팽창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건강한 수도권’이 아니라 ‘비만 수도권’이다”라며 “강제적으로 사람을 내보낼 순 없으니 지역의 생활여건을 보완해야 한다. 특히 교육, 지역에서 학교를 졸업했을 때 이득이 없다. 이제 약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집중보완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특히 김 위원장은 “지난해 12월 기준 수도권 인구비율이 50%를 넘어선 것은 일본 동경이 31%, 프랑스 파리가 18%인 것을 감안하면 우리의 수도권집중이 매우 심각하다는 걸 알 수 있다”며 “더 이상 수도권집중이 되지 않도록 조속히 기반을 조성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김 위원장은 “공공기관 이전은 진행형이고 장기적으로는 민간기업체들이 지역으로 갈 수 있도록 정부가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며 “교육, 복지, 문화 등 가족들이 같이 가서 살 수 있는 정주여건을 만들어 지금까지보다 접근하기 쉽고 호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취임 소감과 비전은.△평생 지역에서 지역 주민의 한사람으로서 지역사회 내에서 다양한 시민활동을 지속해왔으며, 지역의 현실적 문제들에 대해 고민하고 또 대안을 실천해 왔다. 제가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된데는 그동안 쌓아온 경험들을 문재인 정부 국가균형발전정책의 목표인 ‘지역주도 자립적 성장기반 마련’에 기여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하며, 매우 영광스럽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균형발전정책의 국가적 중요성과 지역이 처한 현실적인 위기 앞에 무거운 책임감과 사명감을 느끼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고르게 발전하는 지역’이라는 국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범정부적으로 노력했다. 앞으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가교로서 큰 흐름에서 국가균형발전정책이 지역주도로 속도감 있게 전개될 수 있도록 하겠다. 또한 그 동안 다소 미진했던 분야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와 정책적 노력을 기울이겠다.-인구감소와 수도권 집중에 대한 대책은 무엇인가.△지방의 많은 지역은 수도권을 비롯한 대도시 지역으로의 인구유출로 이미 인구감소시대를 경험하고 있다. 지역인구 감소는 저출산과 같은 자연적 인구감소도 있지만, 특히 교육·문화·일자리 문제 등 사회·경제적 요인에 따라 지역인구가 수도권으로 유출되는 것이 더 큰 원인이다. 이에 균형위는 지역을 떠나지 않고도 지역 내에서 경제활동과 여가생활이 가능한 여건을 만들기 위해, 지역의 실정과 수요에 맞는 정책이 지역 주도로 마련되고 시행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적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우선 사람이 지역에 머무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일자리 창출을 지원하기 위해, 지역의 투자 및 일자리 관련 규제와 제도를 발굴해 개선을 위한 연구용역을 진행하고 있다. 또 지역의 발전전략을 지역 스스로 구상하고 실행함으로써 지역의 특성에 맞는 혁신성장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지역의 혁신성장과 관련해선 시도 자체사업은 물론, 지역단위에서 이루어지던 기존 중앙부처의 사업을 지역이 직접 기획해 이를 ‘지역혁신성장계획’을 통해 연계하는 시스템을 지난해부터 도입, 사업간 분절화를 막고 성장 효과는 높일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와 함께 700만명에 이르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본격적 은퇴 상황에 맞춰, 이들을 지역 단위에 효과적으로 유입시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연구도 진행 중이다.-혁신도시 시즌2 추진현황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지난 6일 균특법 개정안이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혁신도시 추가지정 사업 및 추가 공공기관 이전에 대한 기대가 높은데, 현재 추가이전과 관련한 국토부 용역과제가 진행 중이며, 2차 공공기관 이전은 용역과제 종료 후(5월 28일 예정) 연구결과에 따라 신중한 검토를 거쳐 결정된다. 지난해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이전(충북)을 마지막으로 혁신도시 건설 및 공공기관 이전이 마무리됐다. 물리적 기반조성이 마무리됨에 따라 혁신도시를 新지역성장 거점으로 만들기 위한 ‘혁신도시 시즌2’를 추진중인데, 균형위는 기업 입주 유도, 정주여건 개선, 지역 상생발전 등을 지속 추진해 혁신도시가 지역 경제의 新성장 거점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이다.일단 정주여건 개선을 위해 광역·연계교통 확대 등 교통편의를 제고하고, 문화·체육시설이 포함된 복합혁신센터 건립 등을 추진했다. 복합혁신센터 10개소가 2020년 중 착공되고, 2021년부터 순차적으로 개관할 예정이다. 또 산업 활성화를 위해 입주기업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고, 지역기업 우대 등 특색에 맞는 특구 지정, 산·학·연 클러스터 육성 등을 추진하고 있다. 공공기관 지역인재 채용은 2022년까지 30%로 확대하며, 지역 인재육성을 위해 이전기관과 연계한 오픈캠퍼스 확대·내실화 등도 추진된다. 이 같은 혁신도시 시즌2 추진으로 혁신도시의 입주기업, 정주인구, 지역인재 채용, 지방세수 등이 모두 증가되는 성과가 있었다. 실제로 입주기업은 2018년 기준 693개에서 2019년 1천425개로, 정주인구는 19만3천명에서 20만5천명으로, 지역인재 채용률 역시 23.4%에서 25.9%로, 지방세수도 3천814억원에서 4천228억원으로 늘었다. 이런 성과를 널리 알려주시길 바란다.-국가균형발전 5개년 계획이 추진되고 있지만, 체감도가 낮다. 대책은.△균형위에서는 작년 1월 ‘지역주도의 자립적 성장기반 마련’을 목표로 20개 관계부처, 17개 시·도와 함께 ‘제4차 국가균형발전 5개년 계획’을 수립해 발표했다. 이번 5개년 계획에서는 24조원 규모의 균형발전프로젝트(일명 예타면제 프로젝트) 추진, 지역발전투자협약제도 도입 등 지역 주도성을 강화하고, 5년간 175조원을 지원해 사람, 공간, 산업 3대 전략 및 9대 핵심과제를 집중 이행하고 있다.5개년 계획의 실효성과 국민 체감도를 높이기 위해 매년 실행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계획 실행 결과를 균형위에서 매년 종합평가하고 국회에 보고해 계획의 성과를 지속 관리 중이다. 올해에는 총 39조2천억원을 투입하는 내용의 ‘2020년 국가균형발전 시행계획(안)’을 수립했고, 4월초 균형위 심의를 거쳐 확정하고 시행해 나갈 계획이다. 또 2019년 국가균형발전사업에 대해서는 종합평가가 진행 중이며, 국회 보고, 내년도 정부 예산편성 시 평가결과 활용 등을 통해 계획의 성과 제고에 노력해 나가겠다.제4차 5개년 계획은 ‘지역 주도 혁신적 포용국가’ 구현을 목표로 하는 만큼 지역이 주도하는 정책추진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중앙정부 주도의 강력한 정책처럼 가시적이지 않고, 균형위가 추진한 사업들이 지역사업으로 인식하는 경우도 적지않다. 생활밀착형SOC, 지역발전투자협약 등과 같은 정책들은 시행 이후 체감성과가 나타나기까지의 공백 기간도 존재한다. 앞으로 균형위가 추진하는 지역균형발전 정책들에 대한 적극적인 홍보에도 힘쓰겠다.-총선이 다가왔다. 정치권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국가균형발전은 대한민국 헌법 가치로서 국가의 당연한 목적 중 하나이고, 의무다. 헌법 122조에는 ‘국가는 국민 모두의 생산 및 생활의 기반이 되는 국토의 효율적이고 균형 있는 이용·개발과 보전’을 위한다고 되어있고, 헌법 123조에는 ‘지역 간 균형 있는 발전을 위하여 지역경제를 육성할 국가의 의무’를 적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주민의 대표로서 지역발전에 공헌해야 하고, 이에 대해서는 여야가 있을 수 없다. 문재인 정부의 균형발전정책의 제도적 뒷받침을 위해 21대 국회와 정치권에 많은 관심과 협조를 부탁드린다./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2020-03-26

“사람의 情 나누는 기쁨 함께 합니다”

자영업으로 성공하기 어려운 시대다. 비단 대구·경북만이 아니라 전국이 마찬가지다. 당장 우리 주위만 둘러봐도 이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짧으면 5~6개월, 길다고 해도 1~2년 사이에 간판을 바꾸는 소규모 식당과 카페가 부지기수다.상황이 이러하니 포항 죽도시장 골목길에 조그맣게 자리 잡은 카페 ‘죽도소년’이 돋보일 수밖에 없다. 1층과 2층을 합쳐 20명을 수용하기 힘든 작은 찻집이지만, 각종 SNS에서 확인 가능한 죽도소년의 인기는 어떤 ‘핫 플레이스’보다 뜨겁다.주말이면 고풍스런 한복집 등 최소 20~30년 이상 된 노포(老鋪) 사이에 돌올하게 들어선 젊은 감각의 카페로 경북과 부산은 물론, 멀리 강원도와 서울에서도 손님들이 찾아온다. 이 정도면 자영업으로 이룬 ‘작은 성공’이라 해도 좋지 않을까?최근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손님이 많이 줄었지만, 바이러스의 난동은 언젠가는 끝이 날 터. 죽도소년을 운영하는 김희준(45)씨는 “상황을 마냥 비극적으로만 바라보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얼핏 봐도 1천 권은 넘어 보이는 책과 수백 장의 음반으로 채워진 ‘카페 죽도소년’을 찾아 김희준 씨를 만났다.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완연한 봄의 향기 속에서 카페 운영의 노하우와 어머니뻘의 전통시장 상인들과 불화 없이 지낼 수 있었던 이유, 카페를 차리고 싶은 이들에게 전하는 조언과 앞으로의 계획 등을 묻고 그에 관한 답을 들었다.◇자기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걸 찾으려 노력해야30대 시절 김희준 씨는 학원 운영자였다. 포항 북구에서 시작한 학원은 경영 성과도 좋았다. 김씨가 대표인 2개 학원의 수강생이 400명 넘던 시절도 있었다.하지만 어느 날부턴가 매너리즘에 빠졌고, 그때부터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사실 학원을 할 때도 틈틈이 인테리어 관련 일을 했고, 커피 공부도 틈틈이 시작했다.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그런 고민의 결과물로 만들어진 것이 포항 중앙상가 골목의 폐가를 수리해 만든 ‘카페 1944’였다. 대학에서 전공한 경영학과 마케팅이 카페 운영 초기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줬다. 예술과 문화에 포커스를 맞춘 ‘스토리 마케팅 기법’이 카페가 쉽게 자리를 잡게 했다.입구 시멘트 바닥에 찍힌 고양이 발자국과 고양이 가면을 쓰고 커피와 주스를 가져다주는 카페의 주인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금세 입소문을 탔다.지저분했던 주변 벽에 귀여운 고양이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고, 김씨는 ‘친절하고 재밌는 사람’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셀 수 없이 많은 카페들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차별성 가진 아이템이 필수다. 이전 카페가 고양이라는 키워드로 유명해졌다면, 옮겨온 이곳 죽도소년에선 화려한 색감의 두건을 쓰고, 멜빵 달린 옷을 입은 나 스스로를 가게의 캐릭터로 만들었다. 결국은 아이디어 싸움인 것이다.”마케팅과 아이디어도 중요하지만, 자영업자에게 더 중요한 건 성실함이다. 김씨는 자신이 일하는 주위 공간을 따스하고 정 넘치는 곳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버려진 담배꽁초를 줍고, 먼저 나서 빗자루를 들었다. 여기에 ‘골목길 미술전’과 ‘작은 콘서트’ 등 문화행사까지 열었다.중앙상가에서 죽도시장으로 카페를 옮겨오면서도 이런 태도는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친구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한복가게를 리모델링해 죽도소년을 열 수 있었던 것도 주위 사람들이 김씨의 부지런하고 정직한 성정을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죽도시장 어르신들과 잘 지낼 수 있었던 이유는죽도소년 주위에서 만날 수 있는 이들은 대부분 수십 년 이상 그곳에 터를 잡고 장사를 해온 어르신들이다.청춘의 대부분을 가게에 바친 그들은 죽도시장을 제 몸처럼 여긴다.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 일으키는 작은 변화에도 민감할 수밖에 없다. 비교적 젊은 김희준 씨가 나이 지긋한 상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은 뭘까?“무엇보다 가장 열심히 하는 건 인사다. 내 가게 앞만이 아니라 주변 청소도 하고 있다. 근처 상인들이 커피를 주문하면 반값에 배달까지 해준다. 3년가량 이렇게 지내다보니 친해진 분들이 적지 않다. 카페를 찾는 관광객을 어르신이 안내해 올 때도 있다.(웃음)”사실 죽도소년 근처엔 ‘젊은 상인’이 별로 없다. 부모의 가게를 이어받아 하는 사람들이 소수 있을 뿐이다.김씨는 청년 자영업자가 전통시장에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없는 이유를 오래된 시장 특유의 보수성과 폐쇄성이 아닌, 중장년층 위주로 구성된 상권 때문이라고 보고 있었다. 또, 생선·채소가게 등은 일의 특성상 해가 뜨기 전 새벽부터 가게로 나와야 하는 게 청년들 입장에선 어렵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사람들이 찾아오는 카페는 어떻게 만들어지나재론의 여지없이 카페 운영은 장사다. 그렇기에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수익 창출은 기본 중 기본이다. 사업의 특성상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를 따라잡지 않으면 언제라도 어려운 상황이 올 수 있는 게 카페 운영이다.진입장벽이 비교적 낮기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카페를 열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가운데 지속가능성을 인정받아 오래 운영되는 카페는 드문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 김희준 씨는 ‘예비 카페 창업자들’에게 이런 조언을 들려줬다.“장사가 잘 된다는 소문이 나면 금방 주위에 비슷한 유형의 카페가 우후죽순 생기는 걸 여러 번 봤다. 파이의 크기는 한정돼 있는데 나눠 먹어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어떻겠는가? 철저한 사전 준비와 조사, 획기적인 아이디어, 여기에 열정을 바치겠다는 각오 없이 카페 문을 연다는 건 대단히 위험하다.”창업 과정보다 더 어려운 건 카페의 지속적 운영이다. 죽도소년의 경우엔 ‘단골’이 카페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고 있다. 10년 이상의 세월 동안 정을 주고받은 단골들은 김씨와 가족 이상의 유대관계를 형성했다.20대 젊은 손님들에게 ‘키다리 아저씨’이자 인생의 선배 역할을 하고 있는 김희준 씨는 “우리 카페는 단골들이 만들어가고 있다”고 잘라 말한다. 죽도소년에선 아기자기한 소품과 그림을 다수 만날 수 있는데, 그것들 대부분은 단골이 선물하거나 그려준 것들이라고.2년 전엔 김씨의 카페에서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 단골손님들의 ‘스몰 웨딩’이 죽도소년에서 진행됐다.전통시장의 작은 가게에서 결혼식이 열린 건 아마 시장이 생기고 처음이었을 것이다. 손님에게서 카페 운영의 즐거움과 보람을 찾는 게 죽도소년 주인의 마음가짐이라면, 자신들이 아끼는 공간에서 사람간의 정을 나누는 건 죽도소년 단골 모두의 기쁨이 되고 있다.◇활력과 웃음 넘치는 전통시장을 위해짧지 않은 기간 지속된 불황에 ‘바이러스 창궐’이라는 악재까지 겹친 전통시장의 한숨이 갈수록 깊어지는 요즘이다. 죽도시장도 다를 수 없다.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원의 손길을 내밀고 있지만, 아직은 제대로 체감되지 않는다는 게 상인들의 하소연.김희준 씨를 포함한 젊은 자영업자들은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전통시장을 활성화시킬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놓고 있다.낮과는 전혀 다른 밤 시간대 전통시장의 매력을 관광객에게 소개하는 ‘죽도시장 야간 투어 프로그램’과 영일대해수욕장에서 시작해 포항운하와 죽도시장을 걸으며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걷기 코스의 개발’ 등은 김씨가 고민해온 전통시장 살리기 방안이다. ‘코로나19 사태’가 끝나면 이 아이디어의 현실화도 가능해지지 않을까?어떠한 곤경 속에서도 ‘희망의 출구’를 찾는 노력은 계속돼야 한다. 어르신과 청년 상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활로를 찾으려 동분서주하는 죽도시장. 그 미래가 환하게 밝은 봄의 꽃길 같기를 기대한다.셀 수 없이 많은 카페들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차별성 가진 아이템이 필수다. 이전 카페가 고양이라는 키워드로 유명해졌다면, 옮겨온 이곳 죽도소년에선 화려한 색감의 두건을 쓰고, 멜빵 달린 옷을 입은 나 스스로를 가게의 캐릭터로 만들었다. 결국은 아이디어 싸움인 것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3-25

1만1천㎞ 달려온 홀로 여행… 우리네랑 다른 풍경을 발견하고

◇ 시베리아 지나 모스크바에 도착하다드디어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한국을 출발해 모스크바까지 로시로 달린 거리가 11,259킬로미터. 집에서 출발한 지 21일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17일이 걸렸다. 춥고 더운 것(도착한 날 모스크바 최고 기온 29도), 그리고 비가 자주 내렸던 걸 제외하면 크게 고생하지 않고 온 듯하다.시베리아 횡단하며 묵었던 숙소나 음식은 가격대비 아주 만족. 뭐 비만 피하고 배만 채울 수 있으면 어디든 뭐든. 혹시나 출발하기 전 겪었던 문제(간헐적 엔진 출력 저하)를 여행 중에 다시 겪으면 어쩌나 걱정했던 부분도 출발하기 전에 정확하게 진단해서 잘 해결(연료 펌프 교체)한 것 같다. 오는 동안 한 번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모스크바에 도착하니 이번 여행의 1막이 끝난 기분이다. 유럽을 여행하고 지금까지 온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하니 이제 4분의1이 지난 셈. 러시아를 벗어나 유럽 대륙의 가장 동쪽 끝인 포르투갈 호카곶까지 가야 절반. 러시아를 벗어날 때까진 긴장을 늦출 수는 없다.최대한 빨리 유럽으로 들어가고 모스크바는 돌아갈 때 여유 있게 둘러보기로. 추위에 고생하지 않으려면 넉넉하게 9월 중순까지는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돌아가야 하니 여유를 부리기 힘들다.엔진오일과 체인루브를 구하려 근처 바이크샵에 가려고 나왔더니 세찬 비가 내려서 포기. 예보가 틀린 적이 거의 없다. 모스크바에선 하루만 쉬며 정비하고 아침 일찍 러시아워를 피해 라트비아로 간다. 유럽 국가로 오토바이를 타고 들어가려면 보험(그린카드)을 들어야 하는데 라트비아 국경에서 받는 것이 가장 저렴하다.어디로 입국하느냐에 따라 3개월 보험료가 적게는 55유로,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경유해 러시아와 국경이 맞닿아 있는 핀란드로 갈 경우 수백 유로를 내야한다. 대부분 유라시아 횡단 여행자들은 몽골, 중앙아시아를 통과해 동유럽으로 가는 경우가 아니라면 보험료가 저렴한 라트비아나 에스토니아로 입국하는 경로를 선호한다.이제 유럽 내에서 어떻게 이동할지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야 한다. 쉴 때마다 지도를 보는데 동선을 짜는 게 쉽지 않다. 가보고 싶은 곳은 많지만 달릴 거리를 생각하면 여유가 많지 않다. 포기할 건 깔끔하게 미련두지 않기로.◇ 치킨을 먹으려 1시간 넘게 걷다시내 관광이라도 나갈까 했는데 비가 와서 강제 휴식 중. 밀린 빨래도 하고 주머니에 돈이 얼마나 있나 헤아리고 줄일 짐은 없나 뒤적거린다. 하나라도 줄일 수 있는 물건이 있다면 좋겠지만 있다 해도 놓고 가긴 어렵다. 한 번도 꺼내지 않은 노트북이 애물단지다. 챙기면서도 고민을 많이 했었다.몇 년 전 두어 번 긴 해외여행을 떠났을 때만해도 기록이나 숙소와 교통편 예약, 행선지 검색 모두 노트북으로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스마트폰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이것만 놓고 왔어도 2킬로그램은 줄일 수 있었을 텐데, 가방을 열 때마다 후회하는 중. 아직 달릴 거리가 많이 남았으니 집으로 돌려보낼 방법을 찾기로 한다.비가 그치자마자 바로 시내에 나갔다. 꽤 먼 거리를 걸었다. 10킬로미터쯤 걸어 다녔다. 모스크바 시내 반대편(숙소는 시내 동쪽 외곽에 있었고, 오토바이 매장은 서쪽 외곽)까지 가서 엔진오일과 체인루브를 샀고, 저녁으로 치맥을 먹었다. 길을 가다 오븐에 굽는 통닭을 봤고 숙소에 들어갔다가 다시 그 가게까지 걸어 1시간 넘게 기다려 사 왔다. 닭이 꽤 큰데 가격은 330루블(약 6천원)이었다.현재 함께 달리고 있는 현묵 군은 휴대폰 거치대와 탑박스를 가져오지 않아 고생 중이다. 어제 방문했던 매장에서 적당한 것을 구입하려고 했지만 찾는 물건이 없어서 실패했다.여행을 시작한 이후에는 무엇이든 바꾸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장거리 오토바이 여행은 처음 시작할 때 선택을 잘 해야만 불편을 줄일 수가 있다. 여행 경비를 최대한 아껴야 하는 처지에선 기존에 가져온 것을 두고 다시 구입하는 것이 쉽지 않다. 탑박스가 진열된 매대 앞에서 한참 고민하고 계산기를 두드렸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는지 포기. 나도 탱크백과 여름용 라이딩 자켓을 보고 마음이 혹했으나 가격표를 보고 가만히 내려놓았다. 러시아 오토바이 매장의 물건 값은 우리와 거의 비슷하거나 아주 약간 저렴한 듯.우리가 묵는 숙소는 커다란 낡은 창고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고 높은 담으로 아예 외부와 단절되어 있다. 트럭이나 버스 운전자들이 많이 이용하는 듯하다. 처음 도착했을 때는 이런 곳에 숙소가 있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안전하게 주차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다.◇ 붉은 광장에서 감상한 ’백조의 호수’다시 하룻밤을 보내고 모스크바에서 가장 큰 바이크샵을 찾아 나섰다. 어제 구입하지 못한 물건들 때문이었다. 버스와 지하철, 그리고 미니버스를 타고 1시간 30분이나 걸려서 도착했지만 역시나 이곳도 현묵 군이 찾는 물건이 없었다. 모스크바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택시를 제외한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트로이카 카드를 구입하면 편리하다. 우리네 교통카드와 같은데 지하철과 버스를 탈 때 사용한다. 단 미니버스는 현금을 내야 한다. 트로이카 카드는 지하철 역에서 구입할 수 있다. 보증금은 50루블이고 원하는 금액만큼 충전해서 사용할 수 있다.돌아오는 길에 모스크바의 상징 성 바실리 성당을 보고 왔다. 지하철에서 내려 붉은 광장으로 가는 길에 수산물 박람회도 구경하고 전통복장을 차려 입은 미인이 같이 사진 찍자고 내 손까지 잡았지만 미안하다고, 정중하게 거절했다.(왜 제 손을 잡는지 다 알아요!) 사진을 찍으면 모델료(?)를 요구한다. 주로 어리바리한 동양인 아저씨들이 대상인 듯하다.붉은 광장에는 서가가 가득 찬 부스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책 축제가 일주일 동안 열릴 예정이라 각 부스마다 출판사에서 나온 직원들이 책을 진열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러시아 출판사 사람들도 다들 책 만들고 파느라 고생이 많구나, 하고 생각했다.마음 같아선 내일 하루 더 짬을 내어보고 싶었으나 갈 길이 머니. 성 바실리 성당 가까이엔 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오케스트라가 리허설 중이었다.책 축제에 오케스트라가 공연을 하다니 우리네랑은 스케일이 다른 모습이었다. 크고 작은 책 축제에 가보았지만 이만한 공연은 보지 못했다. 비록 리허설이지만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실시간으로 들으며 붉은 광장을 둘러보게 될 줄은 몰랐다.돌아오는 길에 육교 위에서 병색 가득한 엄마와 함께 구걸하는 아이를 보았다. 예닐곱이나 되었을까. 주머니에 잡히는 동전을 모두 아이가 들고 있는 작은 종이 가방 속에 넣었다. 세상은 언제나 불합리하고 불공평하기 마련이다. 해맑은 아이 얼굴을 보며 한 인간에게 주어진 슬픔은 공평하게 총량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슬픔은 곱으로 쳐서 감할 수 있기를.내일은 러시아에서 묵는 마지막 밤이 될 듯하다.    /조경국

2020-03-24

웅장하면서 아름다운 탁청정

집은 장소와 터가 중요하다.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본래의 장소를 떠난 집은 무미건조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진기한 보물들을 모아놓은 박물관을 ‘명작들의 공동묘지’라 하지 않던가. 오늘 가는 오천문화재단지의 군자마을도 1972년 안동댐 수몰로 광산 김씨 예안파의 중요한 고택 20여 채를 옮겨놓은 곳이다. 같은 수몰지에서 옮겨온 것이라도 농암 종택이 분천마을과 비슷한 상류의 가송리로 옮겼다면 군자마을은 인근 산중턱으로 옮겨와 주위의 자연환경은 볼품 없지만, 집 그 자체에서 풍기는 고택의 향기는 대단하다. 우선 군자마을 주위를 살펴보기 위해 와룡면에서 예안 쪽으로 광산김씨 종택 긍구당을 지나 돌고 돌아 도산서원에서 흘러가는 낙동강을 보면서 이끼마을 선성현문화단지를 둘러 군자마을을 포위하듯이 보고 갔다.#.안동과 구곡(九曲)문화유학의 나라 조선에서 성리학은 신성불가침의 국가이념이었고 중심철학이었다. 그 성리학을 집대성한 남송의 주희(주자·1130~1200)는 선비들의 흠모를 넘어 숭모의 대상이고 롤 모델이었다. 주희는 중국 복건성 무이산에서 주자학(성리학)을 성립했고, 주자가 머물렀던 무이정사에서 서원의 모범으로 삼았고, 무이산 계곡에 이름붙인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받아 조선의 사대부들은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구곡을 정하여 자연과 일치되는 이상을 현실에서 실현했다.경남 고성에는 아예 무이산이 있듯이 주희를 흠모한 회재 이언적(晦齋·1491~1553)도 자신의 호 첫 자를 주희 호 회헌(晦軒)의 첫 자로 삼고 경주 옥산계곡에 4산5대와 9곡을 만들었고, 퇴계 이황(1501~1570)은 도산 구곡을 정하고 도산 12곡을 노래했다.퇴계도 군자마을에 제자 후조당 김부필(1516~1577)과 탁청정 김유(1491~1555)가 있어 자신이 지은 도산가 “안개와 노을을 집으로 삼고,/ 풍월로 친구삼아/….라고 노래했을 것이고, 분천마을의 농암을 만나서는 배위나 바위에 앉아 먼저가신 농암 이현보를 생각하면서 어부가를 부르며 자신의 4곡 “봄바람 부니 꽃은 산에 가득 피어있고,/ 가을밤에는 달빛이 누대에 가득하니.” 를 읊었을 것이다. 그리고 주희가 무이구곡에서 5곡(탁영)을 ‘산 높고 구름 깊어 숲이 언제나 안개구름에 어둑하다.’노래하며 그곳에 무이정사를 지었듯이 1565년 65세에 낙향한 퇴계도 자신이 지은 도산 12곡에다 도산서당을 마련하고 “오곡이 깊은 산 들어가니 은거하던 선비는 어디 있는고,/ 산 앞에 높은 대(臺)가 있고 대 아래에 물이 흐르는구나./ 그리고 청량산으로 가면서 고산정에서 제자 금난수와 학문을 논하면서 “고인도 나를 보지 못하고/ 나도 고인을 보지 못하니./ 했을 것이고, 청량산 코앞에 와서는 ”청산은 어찌하여 영원히 푸르며/ 흐르는 물은 또 어찌하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가./ 하면서 자신을 자연에 맡기고 다시 담담하게 학문에 몰입했을 것이다.율곡 이이(1536~1584)도 해주 수양산 석담에 머물면서 무이산 은병봉에서 따온 은병정사를 지어 고산9곡을 정하고 고산가를 불렀다. 공자의 나라 중국을 사모함이 지나쳐 죽을 때 망한 명나라의 ‘만동묘’에 제사지내라 했던 우암 송시열은 속리산 화양계곡에 머물면서 화양구곡을 정한다.이처럼 온 조선의 강과 계곡에는 100개가 넘는 구곡이 생긴다. 그중 경상도가 55개(51.4%)로 반이 넘고 충북이 22개로(20.56%)를 차지한다. 단일 지역으로는 안동이 10개로 제일 많은 것은 청량산에서 맑은 물이 낙동강으로 흘러오면서 강물은 산을 넘지 못하기에 물줄기가 계곡과 절벽이 부딪쳐 곡(曲)을 만들면서 구곡문화가 생겨난 것이다. 인걸이 자연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인걸을 만들었지만, 그 자연에 의미를 부여하고 감칠 맛나게 살려내는 것은 사람이다. 여기에 성리학으로 무장된 안동선비들은 주로 상류 낙동강 변에 살았던 자연환경이 구곡문화의 이상향을 만들게 했다. 퇴계가 죽을 때 ‘저 매화 분에 물주라’며 그토록 아꼈던 매화가 도산 서당 앞에는 꽃망울 터트리고 앞마당에 왕 버들은 흡사 구곡같이 휘어져 용트림하고 있었다.#. 명작들의 공동묘지 고택 박물관1972년 안동댐으로 곡(曲)들 일부는 수몰되어 원래의 기능을 잃었고, 마을도 사라지고 사람도 떠났지만 괜찮은 고택들은 여기저기 옮겨져 있다. 대개의 고택들이 사람이 살지 않아 생동감 없는 녹화방송같이 박제된 모습으로 앉아있다. 원래부터 있던 하회마을이나 양동마을 같이 기와집 초가집이 어우러진 마을이 아니라 문화재 고택들만 옮겨와서 정감 없는 ‘고택들의 야외박물관’ 같은 곳이 군자마을이다. 그러나 고택 하나하나 애정의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도 박물관에서 명품을 보듯이 잔잔한 여유와 옛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군자마을을 들어서자 마을을 감싸고 있는 경사진 산에 잡목들을 정리하여 미끈하게 쭉 뻗은 소나무들이 사람 하나 없어도 생기를 불어넣어 고택들이 한결 돋보였다. 혼자서 마음껏 눈과 마음을 호사했다. 임진왜란 때 영남의병대장으로 순국한 근시재 김해(1555~1593) 선생의 숭고한 비를 보고 왼쪽 산위에서 전체를 조망하고 내려와 군자마을 입향조 후조당 김부필(1516~1577)의 종택에 딸린 별당 후조당으로 갔다. ‘ㄱ’자집으로 흐트러짐 없는 단단한 격을 품고 있었다. 남부지방의 개방형이 아니라 기둥과 기둥모두를 여름이면 들어 올리는 합각문으로 꽁꽁 싸매어 답답해 보였으나 추운 안동지방의 자구책이다.대청마루에 퇴계가 제자에게 써준 ‘후조당’ 편액은 멋 부리지 않는 퇴계의 정직 담백한 글씨가 외롭게 걸려있다. 그 옆에는 정면 6칸의 단정한 누각형식의‘운암정사’가 붉은 매화와 봄의 향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붙어있는 설월당 정자도 4칸 누각형식으로 단정한 낭만을 드러내고 그 앞에는 아직 피지 못한 자목련이 매화에 질세라 검붉은 자색 꽃을 살며시 밀어내고 있었다, 마치 금붕어가 알을 낳듯 몽우리 진 수많은 자목련이 봄 햇살에 엷은 미소 머금고 속삭이듯 나오고 있었다. 하염없이 자목련이 다 필 때까지 옆에서 기다리고 싶었으나 이성의 발걸음은 파청정 정자로 향하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고택들을 돈보다 정신을 추구하는 광산김씨 문중의 힘으로 옮겼다니 대단한 일이다.#. 힘과 멋이 어우러진 탁청정과 낭만의 낙운정잘난 사람들만 다 모아놓아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가 있듯이 여기도 광산김씨 문중의 내노라 하는 고택들을 옮겨 놓았지만 군자마을의 스타는 탁청정과 김유이다.탁청정은 김유(1491~1555)의 호에서 따온 이름인데 멱라수에 빠져죽은 비운의 충신 초나라 굴원(BC343~BC223)의 어부사 중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에서 따왔고, 정자치고는 엄청 크다. 종이 웅장하면 맑기 어렵고, 맑으면 웅장하기 어려운데 이 정자는 웅장하면서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격이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 한옥도 하나의 로망으로 전국에 수없이 짓고 있는데 규모만 크고 멋도 울림도 없는 것은 안목 없는 졸부들의 천박한 과시용 때문이다. 그래서 신은 공평하여 안목 있으면 돈이 없고 돈 있으면 안목 없는 것이다. 퇴계나 남명이 기거한 도산서당이나 산청의 산천재를 보라. 대유학자들도 최소한의 공간으로 소박하면서 절제의 미를 품어내지 않던가. 건물 특히 정자는 주인의 철학과 안목, 인품이 스며있기에 결국 주인이 누구냐가 중요한 포인터가 된다. 원래 정자는 자연 속에 있는 듯 없는듯해야지 크면 자연과 분리되는데 이 탁청정은 크면서도 드라마틱한 장쾌한 미를 발산한다. 정자에 올랐다. 규모도 그렇지만 조선의 최고급 소나무들로 마음껏 멋을 부렸다. 김유 사후에 명필 석봉 한호(1543~1605)의 힘 있고 옹골차게 쓴 ‘탁청정’은 정자에 어울리는 화룡점정을 찍는다.그러면 이 정자의 주인 김유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이토록 큰 정자와 옆에 있는 큰 살림집을 지을 수 있었을까. 보통의 선비들이 그러하듯 과거보아 입신양명하는 것이 최고의 원하는 코스였다. 김유는 생원시에는 합격했지만 계속 낙방하여 과거를 단념하고 형님을 대신하여 부모님 봉양하면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낭만적인 삶으로 방향을 바꾼다. 고모가 남긴 유산으로 경제적 고민 없이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런 경제적 복을 사람접대와 1541년(51세)에 고래 등 같은 정면 6칸의 안채와 이런 멋진 정자를 지었다. 지금이야 먹방이 대세이고 남자 셰프들의 전성기지만 김유는 600여 년 전에 전통요리책 ‘수운잡방’을 지었다. 121가지 요리를 소개하는데 주로 술 담는 법 61항목, 김치가 17항목이다.집의 당호를 보면 주인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알 수 있듯이 ‘수운잡방(需雲雜方)’은‘역경’에 “구름 위 하늘 음식과 주연으로 군자를 대접한다(雲上于天需君子以飮食宴樂)”에서 따온 것으로 의미하는 바가 크다. 경제력에다 벼슬하지 않아 집 짓는데 올인 할 수 있었다. 마음껏 멋 부린 격조 있는 명품 정자를 지었던 김유는 행복은 부와 명승보다 좋은 관계에서 온다는 것을 웅변으로 보여준다. 탁청정이 근엄하고 권위적인 본부인이라면, 탁청정 아래 낙운정(落雲亭)은 수줍은 듯 낭만이 흘러 아름다움은 다 갖추었으면서도 말없는 첩 같아 연민의 정이 흐른다. /글·사진= 이재호 기행작가

2020-03-24

가장 한국적인 그러므로 가장 세계적인 꿈을 꾸다

김동리(1913-1995)의 묘비에는 “무슨 일에서건 지고는 못 견디던 한국문인 중의 가장 큰 욕심꾸러기. 어여쁜 것 앞에서는 매양 몸살을 앓던 탐미파 중의 탐미파. 신라 망한 뒤의 폐도(廢都)에 떠오른 기묘하게도 아름다운 무지개여!”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 글을 쓴 이는 거인 김동리와 평생을 교유하며 한국문학을 이끌었던 또 한 명의 거인 미당 서정주(1915-2000)이다. 함께 한 시간의 깊이와 최고 시인의 안목이 만난 결과인지는 몰라도, 이 묘비명만큼 김동리라는 인간과 문학을 요령 있게 압축해 놓은 글도 드물다.한국문학사에서 김동리는 많은 힘을 누렸던 문인이었다. 좌익의 내로라하는 맹장들에 맞서 순수문학을 옹호했던 김동리는 40대에 이미 한국문단의 원로였다. 1953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교수에 부임했고, 1954년에 41세의 나이로 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문예지 ‘현대문학’, ‘월간문학’, ‘한국문학’ 등을 실질적으로 운영하였다. 그는 문단 조직, 후배 문인 양성, 발표 지면이라는 문학장의 핵심적인 영역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이다.이러한 문단권력자로서의 모습은 김동리의 당당한 실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는 시와 소설이라는 장르를 넘나들며 신춘문예를 세 번이나 통과한 재사이다. 더군다나 그의 뒤에는 한국의 대표적 사상가로 이름이 높았던 맏형 김정설(1897∼1966)이 든든하게 버텨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힘의 근원에는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보편적인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비약하던 그의 작품이 존재했다.김동리는 가장 한국적인 작가라고 불린다. 이것은 작가가 “우리 민족의 가장 근본적인 것, 혹은 정신적 지주가 되는 것”(‘무속과 나의 문학’, 월간문학, 1978.8)을 추구한 결과이다. 이러한 필생의 과업을 수행하기에 김동리는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신라 천년 고도(古都)인 경주에서 나고 자랐던 것이다. 경주는 화랑도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의 고유한 정신이 가장 많이 남겨져 있는 곳이다. 김동리는 자신의 정신은 물론이고 육신에까지 경주의 고유한 정신과 풍속을 깊이 새기며 성장하였다.‘巫女圖(무녀도)’(중앙, 1936.5)는 경주라는 신성한 자궁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작품의 주요한 배경인 성건동은 일명 ‘무당촌’이라고 불릴 만큼 무당이 한 집 건너에 있는 무속 짙은 마을이었다. 김동리는 경주시 성건동 189번지(현재는 284번지)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에도 골목에 무당집이 많았다고 한다. 주인공 모화가 마지막에 굿을 하다 빠져 죽은 소는 예기소이다. 서천 변 금장대 절벽 밑에 있는 예기소는, 예기(기생)가 사람을 유혹하듯이 물이 사람을 유인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김정숙, ‘김동리 삶과 문학’, 집문당, 1996, 68-75면) 욱이가 처음 집을 떠나 머물렀다고 하는 기림사는 일제 시대 경주 지역의 14개 사찰을 관할하던 대사찰이었다.‘무녀도’는 작가의 출세작일 뿐만 아니라 작가 스스로도 무척이나 아낀 작품이다. 이것은 ‘무녀도’가 장편 ‘을화’(1978)로 개작될 것까지 포함하여 무려 세 번이나 개작되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무녀도’는 무당인 모화와 기독교인인 아들 욱이의 갈등을 다룬 작품이다. 신동으로 소문난 욱이는 공부를 하기 위해 아홉 살에 모화의 품을 떠났다가 약 10년 만에 ‘신약성서’를 들고 돌아온다. 이때부터 모화는 욱이를 “몹쓸 잡귀에 들린 것”으로 여기고, 욱이는 모화를 “사귀 들린 여인”으로 여기며 서로 갈등한다. 그 갈등은 점차 고조되다가 결국 모화가 욱이를 칼로 찌르는 지경에까지 이른다.모화와 욱이의 갈등에는 김동리의 유년기 체험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김동리의 아버지 김임수는 자수성가한 당당한 인물이었는데 50세를 전후한 시기에는 그만 술로 인생을 탕진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반발로 어머니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유교적 가풍에 젖은 아버지는 아내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아 둘의 갈등이 더욱 심해졌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술을 가리켜 “마귀의 음식”이라고 하고, 술에 취한 아버지는 “예수 잡자, 너구리 잡자”라며 미친 듯 어머니에게 달려드는 일이 매일같이 펼쳐졌으니, 어린 김동리가 받았을 충격과 공포는 대단했을 것이다.(김윤식, ‘김동리와 그의 시대’, 민음사, 1995, 103-105면) 이러한 부모의 싸움은 어린 김동리의 내면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것이 ‘무녀도’에서 모화와 욱이의 종교적 갈등이라는 명작을 낳았다는 것이다.김동리에게는 이때의 어머니가 모화이자 욱이이고, 또한 아버지가 모화이자 욱이였을 것이다. 기독교를 믿는 자와 배척하는 자라는 면에서 욱이는 어머니이고 모화는 아버지일테지만, 자신의 신앙에서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욱이가 아버지이고 모화는 어머니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핵심은 어린 김동리에게 무서움, 전율, 절망, 비분, 저주스러움을 전해준 아버지와 어머니의 그 처절한 싸움의 원체험이 ‘무녀도’의 밑바탕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결국 욱이는 죽지만, 그의 노력으로 이 미개하고 낙후된 마을에 복음이 전파되어 교회당이 서고 전도사가 들어온다. 대신 모화는 기독교를 믿게 된 마을 사람들로부터 배척받는다. 이 상황에서 모화는 일생일대의 시험에 나선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 앞에서 예기소에 몸을 던진 김씨 부인의 혼백을 건지는 굿을 함으로써, 자신의 영검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화는 김씨 부인의 혼백을 건지는데 실패하고, 대신 예기소 검푸른 물속으로 스스로 들어간다.모화와 욱이의 대결은 끝내 둘의 죽음으로 귀결되었다. 겉모습만 본다면 둘의 승부는 욱이의 승리로 끝났다고 볼 수도 있다. 욱이는 역사의 수많은 선교사들이 그러했듯이, 죽음을 통해 그토록 자신이 꿈꾸던 복음의 전파라는 꿈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둘의 대결에서 패배자는 모화이고, 모화의 죽음은 소멸해 가는 세계에 대한 비극성을 보여준 것으로 규정하였다.그러나 과연 모화는 거대한 시대의 변화에 맞서 무력하게 패배한 비극의 주인공이기만 한 것일까? 이와 관련해 작가 스스로 ‘무녀도’에 대해 말한 ‘신세대의 정신’(문장, 1940.2)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김동리는 ‘무녀도’의 모화가 보여준 무(巫)는 우리 민족 고유의 이념적 세계인 신선(神仙)관념의 발로이며, 신선의 이념은 “한(限) 있는 인간이 한(限)없는 자연에 융화(融和)”됨으로써 가능하다고 보았다. 김동리는 민족의 고유한 정신인 신선 관념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연속성과 동일성을 강조하는 것에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세계적인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1908-2009)가 말한 대칭성의 사고와도 상통한다. 대칭성의 사고에서에는 자타(自他)의 구별이 없으며, 부분과 전체는 하나라는 직감만이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할 뿐이다.이와 관련해 모화의 특징으로 만물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능력을 들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화가 소통하고 교감하는 대상에는 “사람뿐 아니라 돼지, 고양이, 개구리, 지렁이, 고기, 나비, 감나무, 살구나무, 부지깽이, 항아리, 섬돌, 짚신, 대추나뭇가지, 제비, 구름, 바람, 불, 밥, 연, 바가지, 다래끼, 솥, 숟가락, 호롱불…”이 해당된다. 이러한 모든 것이 “그녀와 서로 보고, 부르고 말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성내고 할 수 있는 이웃사람”인 것이다. 그리하여 모화는 그 모든 것을 “님”이라 부른다.모화가 검푸른 예기소로 걸어 들어가는 순간 “그녀의 춤과 물의 너울은 같은 박자 같은 율동으로 어우러지며 흘러내리기 시작했다.”고 표현된다. 어쩌면 모화는 단순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물이라는 대자연과 ‘같은 박자 같은 율동으로 어우러지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는 우리 고유의 신선이 된 것이며, 이런 측면에서 그녀는 죽음을 통해 만신(萬神)에서 신(神)이 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만물을 영혼 있는 존재로 여기며, 그것과 융화되기를 갈망하는 정신. 이것은 근대 과학의 눈으로 보면 하나의 미신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지금 대구·경북은 물론이고, 전세계가 코로나19로 인해서 2차 대전 이후 가장 큰 위기에 봉착해 있다. 많은 전문가들은 코로나19가 에볼라, 사스, 메르스에 이어지는 인수공통 감염병으로 살 곳을 잃은 야생동물이 인간과 접촉하면서 탄생한 재앙이라고 말한다. 인간만을 절대시하고 자연을 한갓 수단으로 여긴 결과, 자연의 보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바이러스의 대유행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 정신의 근본적 변화가 없는 한 제2, 제3의 코로나19는 언제든지 다시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구리, 살구나무, 부지깽이마저도 영혼 있는 존재로 여겨 ‘님’이라 부르는 모화는, 어쩌면 잃어버린 우리의 소중한 얼굴인지도 모른다.1913년 경주에서 태어났다. 많은 문학평론가들이 “전통의 세계, 종교의 세계, 민속의 세계에 천착해 이를 바탕으로 빼어난 작품을 써낸 소설가”로 평가하고 있다. 대구 계성학교와 서울 경신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35년엔 중앙일보, 이듬해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다. 대표적인 우파 진영의 작가. 한국청년문학가협회 창립을 주도했고, ‘무녀도’ ‘등신불’ ‘황토기’ ‘사반의 십자가’ 등을 썼다./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3-23

코로나도 멈출 수 없다… 복지·경제·문화정책 중단없이 추진

대구·경북은 물론 한국 전체가 패닉의 긴 터널 속에 갇혀 있다. ‘코로나19’ 탓이다.이 바이러스가 야기한 충격파는 유럽과 중동, 나아가 미국까지 뒤흔들고 있다. 아직은 비극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더 큰 문제다.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삶은 지속돼야 하는 법. 그건 모든 걸 뛰어넘는 대명제다. 지방자치단체 역시 마찬가지. ‘코로나19 사태’가 진행되는 기간은 물론, 이후에도 주민들을 위해 펼칠 각종 정책과 사업을 멈출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청송군은 전국이 겪고 있는 바이러스에 의한 혼란 속에서도 군민을 위한 경제-복지-사회-문화 관련 정책의 효율적 추진에 고심 중이다. 이는 미래를 위한 준비인 동시에 현재 겪고 있는 고통을 치유하는 적극적 방편이기도 할 터.아래에서 ‘산소 카페’를 지향하는 청송군이 진행 중인 다양한 정책을 체크해 보고자 한다.◆소외되는 사람 없는 ‘나눔 복지’의 실현올해 청송군 복지정책의 핵심은 ‘함께 누리는 따뜻한 나눔 복지’다. 이를 위해 노후 소득보장 지원 등으로 빈곤 완화와 삶의 질 향상에 주력하고 있다. 노인·아동·여성·다문화가정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맞춤형 복지의 실현에도 방점을 찍었다.교육환경 개선과 수준 높은 교육 기회 제공을 통해 우수한 인재를 육성하고 평생학습의 장도 마련할 계획이다. 군민 모두가 소외되거나 뒤처짐 없이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청송을 만들어 나간다는 것.경로당 지원도 현실화하고, 낡은 건물은 신축하거나 환경을 개선할 예정이다. ‘경로당 깔끄미’ ‘노노 케어’ 등 사회적 일자리를 발굴해 노인일자리사업도 점진적으로 확대한다.저출산 문제 해결도 주요 정책의 하나다. 영유아 보육료 및 가정양육수당 지원을 통해 맞춤형 보육서비스를 제공하고, 보육시설의 환경 개선도 추진한다. “가족이 함께하는 놀이공간인 키즈 카페와 어린이놀이터도 확대·정비할 것”이란 게 청송군청의 부연.다문화가족을 위한 방문 교육과 우리말 공부방, 사회적응 특화프로그램, 모국 방문 지원사업 등도 운영한다. 청송인재양성원을 통해서는 학생들의 교육의지를 높여 나갈 방침이다.참전유공자 배우자에게 복지수당 지급, 취약계층, 소외계층, 차상위계층에 생계비와 의료비 긴급 지원, 저소득층 임대보증금 지원, 현서면 장애인·노인 경제자립지원센터의 활용 극대화 등도 더불어 진행될 예정이다.◆‘코로나19’로 침체된 지역경제 부활 노력“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정주기반 조성으로 선순환 경제구조를 구축하겠다”는 건 청송군이 세운 도시·경제 분야 군정 방향.이를 구체화시키기 위해 주민 편익시설을 확충하고, 도시재생사업도 활성화할 예정이다. 치밀하게 준비된 도시계획은 낙후된 시가지에 활력을 불어넣고, 지역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에도 도움을 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청송군은 소규모 주민숙원사업에 124억 원을 투입해 농로 포장, 세천 정비, 배수로 개체 등을 추진하게 된다. 간판 개선사업에 사용될 예산 3억5천만 원도 확보했다. 이는 친환경 정주공간을 창출하기 위해서다.쾌적한 도시 건설을 위해 청송읍, 진보면에서 장기미집행 도시계획시설사업도 적극 진행한다. 도시계획구역의 난개발을 방지하고, 체계적 개발을 통해 주민 정주기반을 구축해 나갈 예정인 것.청송읍 4지구, 진보면 6지구의 도시계획도로를 개설하면 도시 기능이 제고되고, 사유재산은 보호될 것으로 전망된다. 또, 청송군관리계획 재정비를 통해서는 군 계획시설 등에 대한 민원을 해소해 주민들의 신뢰를 높여갈 계획이다. 이와 더불어 기초생활 인프라 및 기반시설 정비를 통해 지속가능한 도시재생 기반도 확충해나간다.‘지역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은 한국의 모든 지자체가 힘을 기울이고 있는 주요 사업. 청송군도 이를 위해 ‘청송사랑화폐’를 발행·유통했다. 지역 자금의 외부 유출을 막고, 소비 촉진을 유도하려는 목적이었다.이와 관련 청송군은 “전통시장의 시설 개선과 유지관리를 통해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 관광명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공공근로사업에 투여되는 8억 원, 지역공동체일자리사업에 사용될 29억 원의 예산은 어려운 계층의 고용 확대와 생계 안정에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일련의 경제 관련 정책을 추진하는 윤경희 군수는 “코로나19 여파로 침체된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청송사랑화폐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상반기 지방재정을 신속히 집행하겠다”고 밝혔다.◆‘산소 카페’라는 브랜드에 어울리는 청송으로청송군은 맑은 공기와 깨끗한 이미지를 표현한 도시 브랜드 ‘산소 카페 청송군’을 만들었다. 이는 문화와 관광이 강한 도시로 도약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산림자원 보호·육성, 산림휴양시설 확충, 산림소득사업 개발은 풍요로운 청송을 만드는 밑거름이다.숲 가꾸기, 도시림 조성 등의 사업을 추진할 청송군은 산림재해 예방을 위한 숲가꾸기패트롤 작업단을 운영한다. 미세먼지 저감을 위한 공익숲 가꾸기도 병행된다. 3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청송IC 입구에는 소나무를 심어 명품숲을 조성할 계획이다.아울러 숲속도서관과 북스테이 시설도 조성할 방침이다. 2021년 완공될 예정인 청송지방정원은 청송문화관광단지와 연계해 체류형 관광자원으로 육성한다.또한 청송은 ‘품격 높은 문화관광’이란 군정 목표 달성을 위한 사업도 진행한다. 빼어난 자연환경과 기존 자원을 활용한 관광인프라 확충 및 관광자원 개발 등이 바로 그것. 체류형 관광 활성화를 위해 청송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을 활용한 지질 교육과 국제슬로시티를 연계한 농촌체험 등을 활성화하고, 외국인 단체관광객 유치를 위한 인센티브 지원도 확대할 예정이다.송강생태공원 꽃단지, 주산지 테마파크, 남관 생활문화센터 조성 등 새로운 관광 인프라 구축에도 노력을 쏟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을 활용한 관광 활성화’도 주요한 역점사업이다. 이를 위해 신성계곡녹색길 등 지질탐방로의 유지관리와 태행산 꽃돌 생태탐방로 조성, 주왕산국립공원 세계지질공원 탐방안내소 증축 등이 추진된다.‘청송사과축제를 통한 관광 활성화’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이 축제는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 흥미로운 프로그램으로 이미 명품 축제로 자리를 잡았다.‘코로나19’의 확산 방지를 위해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는 청송군은 ‘군민이 건강하고 행복한 청송 만들기’를 위해 땀을 흘리고 있다.문화로 행복해지는 청송을 위해서는 문화예술 기반의 조성이 필수다. 이는 필연적으로 지역 문화유산의 전승·보존과 활용으로 이어진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지역 특성에 맞는 산악스포츠 육성과 생활체육시설 확충도 주요 정책이다. 더불어 “대중교통 서비스를 대폭 개선하겠다”는 것도 청송군의 약속.수준 높은 문화예술공연 개최, 문화예술동호회 활성화 지원, 문화누리카드 지원금 확대, 문화예술단체 육성 등이 청송군이 올해 펼칠 문화사업의 청사진이다. 덧붙여 국가·경북도 지정 문화재의 보수와 관리, 역사적·건축학적 가치를 지닌 문화재 발굴, 주왕산 인근 주차문제 해결 방안 수립도 함께 진행된다.◆농민 행복과 소득증대 위한 정책에도 관심‘농민에게 희망과 꿈을 주고, 살고 싶은 농촌을 만들겠다’는 것은 청송군의 바람 중 하나다.올해 청송의 농업 예산은 702억 원. 이는 농업경영 안정화 지원과 경쟁력 있는 농촌수익모델 창출, 지속가능한 미래농업 육성, 농산물 특화마케팅 등에 사용될 예정이다.농업경영 안정화와 농가소득 증대를 위해서는 농민수당 30억 원, 농작물재해보험 지원금 287억 원, 농업인안전보험 지원금 6억 원이 투입된다. 이는 청송군 농민들의 삶의 질 향상과 농촌의 공익적 기능을 증진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농촌소득 자원발굴 육성사업과 6차산업 경영체 활성화도 병행된다.유능한 청년 창업농을 키우고, 미래의 농업 인력을 확충하기 위한 여러 가지 사업도 진행할 계획이다. 청송사과의 명품 브랜드 이미지 제고에도 군민들의 관심이 높다. 이를 감안해 지속적인 홍보와 마케팅이 추진된다.청송군은 “농산물 유통구조 개선에도 앞장설 것”이라고 말한다. 군수가 직접 참여하는 대도시 판매촉진 행사와 언론매체와 대중교통을 이용한 홍보도 지속적으로 이어질 예정이다.윤경희 군수 역시 “소득이 보장되는 미래농업을 육성해 농업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며 “농업인의 밝은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김종철·홍성식기자

2020-03-19

“자치단체·지역주민 체감 가능실질적 자치분권 실현에 최선”

대통령 소속 자치분권위원회 김순은 위원장은 “자치분권의 법제화, 주민자치 활성화를 통해 자치단체와 지역주민이 체감할 수 있는 실질적인 자치분권 실현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20일 출범 2주년을 맞은 자치분권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김 위원장은 1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경북매일신문-한국지역언론인클럽(회장 김진호)과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지방분권의 과제와 방향성에 대해 이같이 강조했다.김 위원장은 이어 자치분권 관련 법률 조기 입법화 및 실행, 중앙권한 지방이양 적극 추진, 2단계 재정분권 추진, 자치경찰제 법제화 및 시범실시 등을 올해 업무계획의 주요 과제로 꼽았다.-먼저 지난 2년간의 활동성과에 대해 간략하게 평한다면.△제1단계 재정분권을 완료해 국세와 지방세 비율이 75대25에 접근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주민주권 홍보에 초점을 두어 자치분권의 르네상스를 열도록 노력해 왔다. 중앙권한과 사무 400개를 한꺼번에 지방에 넘기는 지방이양일괄법이 지난 1월 국회를 통과했고, 지난해 7월부터 ‘자치분권 사전협의제’가 실시돼 지방의 자치권 훼손을 예방하고 있다. 시·도가 20%의 범위 내에서 실·본부를 추가로 설치할 수 있고, 실·본부 산하에 국을 설치할 수 있는 자치조직권도 확대됐다. 특히 문재인 정부들어 큰 변화는 주민주권을 실현하기 위한 주민자치가 활성화되고 있다는 점이다.-지난해 성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도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어떤 어려움이 있었나.△자치분권의 틀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지방자치법 전부개정안’, 자치경찰제 도입을 위한 ‘경찰법 개정안’, 주민의 직접참여 확대를 위한 ‘주민참여 3법 제·개정안 등 지난해 국회에 제출·발의된 자치분권 주요 법률 제·개정안이 현재까지 국회 계류 중인 게 가장 아쉽다. 법제화를 통한 자치분권 제도화가 이루어지지 못해 자치단체, 지역주민 등 지역 현장에서 피부로 느끼는 자치분권 실현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자치분권 국가를 선언하고, 지방정부 구성의 자주권을 부여하는 등의 내용을 포함한 분권형 헌법개정이 이뤄지지 못해 자치분권 추진동력이 약해진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올해 총선과정에서 여야가 공약으로 내세웠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지 궁금하다.△총선에 대해서 대통령소속 위원회의 수장으로서 직접 얘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다만 이번 20대 국회 남은 임기동안 국회가 심의중인 지방자치법 전부개정안과 경찰법 개정안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20대 국회에서 자치분권 주요 법률안이 통과되기를 바라고 있다. 비록 남은 시간은 얼마 없지만 자치분권 제도화를 이룰 수 있도록 범정부적 차원에서 대응하겠다.총선 후 구성될 21대 국회에서도 지방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통한 지방 경쟁력 강화를 통해 국가 경쟁력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추가적인 자치분권 법제화와 자치경찰제 실시에 많은 지원을 당부드리고 싶다. 아울러 가능하다면 자치분권형 헌법 개정 논의도 재개되길 바란다.-자치분권위원회가 올해 핵심과제로 생각하고 있는 내용에 대해 설명해달라.△지방자치법 전부개정안과 경찰법 개정안 등 법제화와 보건·복지·의료 등의 분권화, 일반자치와 교육자치 연계와 협력방안, 인구감소에 대비한 공공서비스 전달체계 개선방안을 중점 추진해 나가겠다.지방자치법 전부 개정안은 30여년만에 추진되는 것으로 지방자치제가 한단계 도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크다. 주민자치 활성화와 직접민주주의 강화를 통한 주민 주권 구현에 역점을 뒀다. 주민이 직접 조례를 발의하는 주민조례발안제를 도입하고, 주민감사·주민소송 기준연령도 19세에서 18세로 낮추도록 했다.지방의회의 의회사무기구 인사권 독립과 정책지원 전문인력 확보, 부단체장 증원 등을 통해 자치단체의 역량을 강화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자치경찰제 도입을 위한 경찰법 개정안 국회통과를 대비해 지난해 4월부터 자치분권위원회와 행전안전부 등 자치경찰 관계기관 간 협의체를 구성해 하위법령 논의를 진행하고 있으며, 경찰법 개정 시 신속히 하위법령이 정비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이와 함께 정부 협업매체(전광판 등), 시범운영 희망 시·도(8개) 홍보매체 활용, 자치경찰 관련 학회·전문가 등 간담회 개최 등 국민 공감대 확보를 통해, ‘자치경찰제 도입 붐’을 조성해 나가겠다.-2단계 재정분권에 대한 관심이 높다. 논의는 어떻게 진척되고 있나.△자치분권위원회는 6월 중 2단계 재정분권 최종안을 마련하고, 8월 이후 예산안 반영과 관계 법령 개정을 통해 내년부터 시행할 방침이다. 범정부 2단계 재정분권 TF가 현재까지 13차례 논의를 거쳐 기초자치단체가 체감 가능한 지방세 확충, 지방세수 확충과 연계한 기능이양, 기초연금의 국가책임 강화 등 자치단체의 재정 자율성과 책임성을 높일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논의·조정해왔다.교육재정과 지방재정 연계·협력 강화, 지역 간 세원불균형 방지를 위한 재정조정 등 제도개선 분야에 대해서도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논의결과를 토대로 ‘2단계 재정분권 추진방안 TF안’을 마련해 국무조정실에 제출할 계획이며, 이후 국무조정실 주관으로 관계부처 등 이해관계자 협의를 거쳐 최종안을 마련할 것이다. 1단계 수준 이상 성과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에 앞서 1단계(2019∼2020년) 계획을 통해서는 연간 8조5천억원의 지방재정이 확충됐다.-시범실시중인 자치경찰제에 대한 평가는 어떤가.△현재 제주에서 실시되고 있는 제주 자치경찰에 대해 최초 시범운영 지역으로서 제도 도입 초기 단계에서는 일부 혼선이 있었지만 지난해부터 이원화모델로 3단계 확대 시범운영과정에서 혼선이 최소화되고, 범죄율 감소 등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관광객이 많은 지역 특성을 고려해 관광지 중심으로 맞춤형 치안활동을 전개하고, 단속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높은 환경 위해사범(폐수 무단방류, 산림훼손 등) 등 수사에 적극 나서 지역 내 긍정여론이 높다.현재 제주에는 국가경찰 총 268명이 자치경찰로 파견돼 제주 전역에서 주민생활과 밀접한 생활안전·여성청소년·교통사무를 처리하고 있다. 무엇보다 ‘자치경찰제’ 도입은 오랫동안 경찰 활동의 민주성·분권성·주민지향성을 위해 도입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으며, 지방분권법에 도입이 명문화되어 있는 과제다.자치경찰제가 도입되면 주민 생활과 밀착된 분야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어, 치안서비스가 더욱 촘촘해질 것이라 본다. 자치경찰 독립성의 우려가 있지만 독립된 합의제 행정기관인 ‘시·도 경찰위원회’를 만들어 ‘시·도 경찰위원회’가 자치경찰 사무를 관리해 시·도지사 등은 자치경찰 사무에 개입할 수 없도록 제도화 했다. 시·도지사가 자치경찰본부장 등에 대한 인사권 행사 시 ‘시·도 경찰위원회’가 추천·제청권을 통해 견제할 수 있도록 했다.-2주년을 맞은 자치분권위원회를 앞으로 어떻게 이끌어 나갈 계획인가.△인구감소 현상과 AI사회의 도래 등 행정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자치단체의 인구규모와 산업형태 등 지역 특성의 편차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자치단체의 규모와 자치역량에 부합하는 역할과 기능을 부여하는 맞춤형 분권 추진과 함께 AI사회에 부합하는 자치단체의 혁신 요구 등에도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해 나가겠다.20일이 자치분권위원회 2주년이지만 자치분권이 시작된 것은 1999년, 김대중 정부가 만든 지방이양추진위원회로부터 시작됐다. 중앙집권시스템에 익숙하게 고착된 시스템을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지만, 지금까지 보여드렸던 성과를 토대로 앞으로 한단계 더 도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중앙집권으로 고착화된 제도를 자치분권형으로 바꾸는 일은 결코 쉽지않다. 그런 측면에서 지역주민이 주인이 되는 자치분권제가 서서히 자리잡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2020-03-19

“문학은 스스로 개척하는 자기만의 영토 ”

예술가가 세상에 개입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희망과 꿈을 설파함으로써 고통과 좌절의 상황에 놓인 인간들을 위로하고 고무하는 것. 20세기 초반 러시아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가들’이 그랬다. 그렇다면 다른 한 가지 방법은 뭘까? 있는 그대로의 세상, 즉 불평등하고 불합리하며 때로는 처참하기까지 한 현실을 숨김없이 보여주는 것. 그 방식을 통해 인간들에게 ‘어떻게 하면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하는 것이다. 위의 전제를 놓고 보자면 소설가 백가흠(46)은 후자에 포함되는 사람이 분명하다. 첫 소설집 ‘귀뚜라미가 온다’를 시작으로 ‘힌트는 도련님’ ‘사십사(四十四)’ ‘나프탈렌’ ‘향’ 등의 작품을 써온 백가흠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둡고 습한 터널 같은 세상사와 인간사를 서술 혹은, 묘사해왔다. 축소하거나 과장하지 않는 담담한 문장으로.“현대인의 극단적 정신세계와 병적 불화를 아이러니와 판타지로 녹여냈다”는 평가를 받는 그가 3년 전 계명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대구에 왔다. 고향도 아니고, 오래 생활한 서울도 아닌 ‘아직은 낯선 도시’에서 삶과 문학의 뿌리를 새롭게 내리고 있는 것.향후 백가흠의 소설이 걸어갈 길과 대구에서의 생활이 궁금했다.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코로나19’의 무차별적인 공습을 받은 대구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탓에 인터뷰는 몇 차례의 통화와 이메일을 통해 진행됐다. 대면 인터뷰는 ‘코로나19’가 물러가는 날 술잔을 앞에 놓고 하자는 약속을 하면서.-2001년 데뷔했으니 올해로 등단 20년차다. 소설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은.△소설에 관심이 있던 때와 쓰기 시작한 때는 달랐다. 소설이 가장 재미있었던 시기는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물론 공부하기 싫어서였을 것이다. 집에 책이 꽤 많았는데, 사춘기 시절 야한 호기심이 발동해 처음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떤 밤에는 소설가 오정희도 걸리고, 황석영도 읽게 되는 밤이 생겨났다. ‘이게 뭐지?’ 이런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스스로 재밌고 즐겁게 읽는 소설이 좋은 소설이라는 것을 막연히 깨달았다. 어찌어찌 문예창작과에 들어갔는데, 뭘 쓰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대학 다닐 때는 주로 시를 썼다. 재능이 없다는 것을 일찍 깨달았고, 복학한 후 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 일 년 만에 데뷔했다. 그래서 습작기는 데뷔하고부터라는 게 맞을 것 같다. 물론, 여느 젊은 작가들처럼 힘들었다. 글을 쓰는 것은 재밌고 지치지 않았는데, 너무 가난했다. 그걸 견디는 것과 자존심 때문에 좀 많이 힘들었다.-좋아했거나 영향 받았던 작가는 누구인가.△몇 년에 한 번은 꼭 다시 읽는 작가가 있다. 프란츠 카프카와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좋아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아쿠타카와 류노스케,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작가의 작품도 즐겨 읽었다. 그들의 소설을 다시 읽으면 이전에 느꼈던 감정이 잘 떠오르지 않고 생소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런 게 매력이지 싶다. 한국에선 1970년대 작가들을 거론하고 싶다. 그중에서도 윤흥길의 초기 소설이 압권이다. 말이 필요 없을 정도다.-대구로 온 시기는 언제인지. 또 오게 된 특별한 이유나 계기가 있는지.△햇수로 3년째가 지나고 있다. 특별한 동기는 없고 대구가 그냥 좋았다. 심리적으로 워낙 멀게 느껴져 외국 같은 느낌(?)이 들었고,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조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게 가장 매력적이었다.-재직 중인 계명대 문예창작과와 경험한 대구의 분위기는.△한마디로 말하면 감동적이다. ‘사람들이 친절하고 따뜻하며 예의바르고 얌전하다’라는 게 내가 받은 첫인상이고 그 감정은 아직까지도 유효하다. 타인에게 피해주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다. 학생들도 마찬가지인데, 이렇게 얌전한 문예창작과 학생들은 처음 본다. 수업 시간에도 서로에게 말이 조심스럽고 예의바르다. 그게 단점으로 읽힐 때도 물론 있다. 하지만 멀리 보면 글을 쓰는 데 있어 큰 미덕이라고 믿는다.-학생들을 위한 당신만의 특별한 강의법이 있다면.△나는 친절한 선생이 되고 싶다. 좋은 문학 선생은 학생의 말과 글을 학생들 입장에서 들어주는 것이라 오래 전부터 생각했다. 나는 내 글을 쓰고, 학생들은 각자의 글을 쓴다. 내가 가진 생각이나, 좋다고 생각하는 글의 방향을 학생들에게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다. 결국 문학은 스스로 개척하는 자기만의 영토 아니겠는가.-친하게 교류하는 대구·경북의 작가는 누구인가.△아직까지 교류가 활발하진 않다. 다행스럽게도 데뷔했을 때부터 알고 지냈던 문학평론가 손정수와 김영찬이 학교에 함께 재직하고 있다. 그들과는 생활을 같이 하고 있는 기분이다. 대구·경북 작가 중에서는 장옥관(시인)이 가장 친하다. 송재학(시인)의 작업실에 놀러가서 음악을 들은 적도 있다.-문학의 길을 함께 걸어갈 계명대 학생 중 기억에 남는 이들은.△작년에 ‘소설 비평가’ 두 명이 나왔다. 세계일보와 창비(문예지)로 대학원 학생들이 데뷔를 했다. 젊은 시절 내가 다녔던 학교에선 30년간 등단한 친구들이 100명에 이르지만 비평가는 두 명 뿐이다. 그래서 조금 놀랐다. 계명대학교 학생들의 문학적 수준이 굉장히 높다. 물론 이들 외에도 기억에 남는 친구들이 꽤 있다. 하지만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듯하다. 어쨌든 비평가가 나왔으니 시간이 지나면 소설가와 시인도 나올 것이다. 경험상 소설이 먼저고 시는 더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학생들을 가르치거나, 소설을 쓰는 시간 외엔 뭘 하는지.△나는 일정한 패턴을 좋아하는 편이다. 월요일 저녁에는 테니스를 치고, 일주일에 세 번은 체육관에 간다. 주로 수요일이나 목요일에 술을 마신다. 음악은 작정하고 일주일에 서너 시간 듣고, 라디오 클래식 프로그램은 항상 틀어놓는다. 취미라고 하면 글쎄, 살림이 아닐까?(웃음)? 혼자 산 지 오래 돼 음식 만들고 청소하는 것을 좋아한다.-출간한 책이 여러 권이다. 가장 애착이 가는 한 권을 선택한다면.△책에도 운명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픈 손가락이 가장 신경 쓰이는 것처럼 책도 마찬가지다. 어렵고 힘들게 썼는데 문단과 독자의 평가나 판매가 가장 더딘 작품이 애착이 간다. 장편 ‘향’(문학과지성사)이 그렇다. 7년을 준비했던 소설이다. 그 책을 읽으면 소설에 대한 내 젊은 날의 패기와 부리부리 했던 감성이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대구·경북을 소재나 공간적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있는가.△공간은 소설에서 상징(알레고리)이다. 그래서 대구가 주인공인 소설은 없다. 물론 잘 몰랐기 때문이다. 배경으로 쓴 것은 두어 편 있다. 내 고향은 전북 익산인데, 이제 대구로 근원을 옮겨오는 중이다. 물론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내게 ‘문학적 말년’이 할애된다면 그 주인공은 이곳이 될 게 분명하다.-지금 대구는 ‘코로나19 사태’로 몸살을 앓고 있다.△그것으로부터 슬기롭게 벗어나고 있는 모습이 감동적이다.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이 진행되지 않아 감사한 일이기도 하고. 얼마 전부터 조심스럽게 일상을 찾는 연습을 하고 있다. 텅 비었던 거리에도 조금씩 사람이 늘어간다. 모두가 힘든 시기니 서로에게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한 때다. 아주 조심스럽게, 하지만 또 과감하게 일상을 되찾아야 하지 않겠나.-우문이다. 현답을 부탁한다. 소설은 뭐고, 소설가는 뭔가.△소설은 뒤통수다. 소설가는 앞서 걷는 사람의 뒤통수를 보며 따라 걷는 사람이다.-올해 출간과 집필 계획은.△곧 5년 6개월 만에 소설집이 출간된다. 첫 책을 낸 출판사에서다. 수록된 소설의 절반 정도는 대구에서 썼다. 대구와 경북을 배경으로 한 소설도 두 편 있다. 3월부터는 오래 전부터 쓰고 싶었던 주제로 장편소설 연재도 시작했다.-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은지. 더불어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반드시 어떻게 돼야겠다는 목적을 가져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다만, 성실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그런 인상으로 남을 수 있다면 좋겠다. 문학은 함께 걷는 여정을 나누는 일이다. 동료와 선후배 작가들이 그려내는 한국 문학의 수준과 위상은 세계적이라 자부한다. 바람이 있다면 한국 소설을 많이 사랑해주고, 책도 좀 사줬으면 좋겠다.문학은 함께 걷는 여정을 나누는 일이다.소설은 뒤통수고, 소설가는 앞서 걷는 사람의 뒤통수를 보며 따라 걷는 사람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3-18

숲이 우거진 도시엔, 낡은 아파트와 새소리 아이들 웃음소리

◇ 밀밭 나비떼를 뚫고 카잔으로 달리다우파에서 나와 드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달리는데 호분분 호분분했다. 나비들이 얼마나 많은지 노란 꽃잎이 바람 따라 날리는 듯했다. 오토바이를 타지 않았더라면 볼만했겠지만... 참혹한(?) 상황이 이어졌다.나비떼를 뚫고 나오니 오토바이뿐만 아니라 헬멧과 슈트까지 나비 시체로 범벅이 되었다. 본의 아니게 살생하고 업을 쌓았다. 오토바이고 라이딩 기어고 나비가 부딪치고 터지며 묻은 노란 체액으로 비린내가 진동했다. 허물을 벗고 드디어 하늘을 나나 했더니 곧 비참하게 생을 마감해버린 불쌍한 것들. 나비떼는 카잔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나타났다.이제 한국 시간보다 6시간이 빠르다. 시간도 공간도 근미래로 이동한 기분이다. 이곳은 이제 농사철이 시작된 듯. 우랄산맥을 넘은 이후 날씨도 완전히 봄이다. 더는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지 모르겠다. 곳곳에 농기계들이 넓은 들을 일구고 있다. 도로가에 서 있는 마을 상징물도 밀을 소재로 한 곳이 많다. 나베레츠니라는 곳에 있는 케밥집에서 거하게 점심을 먹었다. 대부분 도로 휴게소에서 간단하게 사 먹거나 요리해서 끼니를 해결하는데 오랜만에 제대로 식사를 하자 싶어 찾았다.식당에 가면 러시아어를 읽을 수 없으니 메뉴판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는데 다행이도 사진과 가격표가 크게 붙어 있었다. ‘베친’을 시켜 먹었는데 씹는 순간 전통시장 할머니 순대 좌판에 앉은 기분이었다.고기 맛이 이상해 무엇이냐고 직원에게 물었더니 친절하게 번역 어플을 이용해 ‘간’이라고 알려준다. 카잔의 숙소 직원도 여권을 보더니 똑똑한 발음으로 ‘안녕하세요’ 인사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제외하고 러시아에서 러시아인에게 거의 유일하게 들은 우리 말이 ‘간’과 ‘안녕하세요’였다.도로에서 모스크바 표지판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모스크바까지 약 700킬로미터가 남았다. 내일 모스크바 외곽까지 이동하고 모레 들어가는 걸로 일정을 잡았다. 현묵 군이 모스크바 한국 대사관에 연락했는데 조지아를 통해 육로로 터키로 들어가는 건 피하라는 답변을 들었다.최근 터키 국경지역 정세가 좋지 않아 여행 자제 경보가 내려졌다. 원래는 터키로 해서 유럽 남부를 여행하고 북쪽으로 빠르게 이동할 계획이었다. 모스크바 가는 동안 좀 더 고민해서 계획을 다시 짜는 걸로.◇ 옛 소련의 낡은 아파트에서 하룻밤조금씩 벌어지더니 부츠 굽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에서 유일하게 새 걸로 구입한 라이딩 기어인데. 본사가 이탈리아에 있으니 가는 길에 들러 수리를 받을 생각이다.‘이탈리아 명품 부츠’라는 홍보 문구를 보고 구입했으나 품질은 명품이라 하기 민망한 수준이다. 그때까지 밑창이 떨어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꽤나 평이 좋은 브랜드였는데 뽑기 운이 따라주지 않았던 것일까.우선 덕테이프로 임시로 수선했다. 부츠뿐만 아니라 슈트까지 여기저기 해져 터지기 시작하니 이 정도면 라이딩 기어의 반란이다.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떨어진 곳들을 찾아 또다시 꿰매고 수선했다.요제프 브로드스키의 ‘하나 반짜리 방’ 같은 곳이 오늘 카잔에서 잡은 숙소다. 소련 시절 지어진 낡고 어두운 아파트인데 5평쯤 되는 작은 방 두 개가 욕실과 화장실을 공유하는 구조다. 9층 건물인데 엘리베이터는 성인 2명이 타도 비좁다. 일부는 숙박시설로 사용하고 또 일부는 실제 입주민이 살고 있다.요제프 브로드스키의 ‘하나 반짜리 방에서’는 수필집이다. 국내에 번역되어 나왔으나 오래전 절판된 책이다. 소설가 안정효 씨가 번역했다.‘러시아의 우울’, ‘단테의 그늘에서’, ‘그림자를 위하여’ 등 10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하나 반짜리 방에서’는 그 중 한 편인데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매우 작은 아파트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1940년 소련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강제노동수용소에 유배당하기도 했고, 결국 1972년 추방당해 미국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이 작품에서 그는 자신이 살았던 공간과 부모님, 자신의 삶에 대한 생생하게 묘사했다. ‘열다섯 살 이후’ 자신만의 공간을 갖기 위해 그가 했던 일은 부모님 방과 자신의 ‘반짜리 방’ 사이에 늘어나는 책과 책장으로 바리케이드를 치는 일이었다. 그의 부모는 두터운 휘장을 쳐서 사생활(?)을 보호했다. 그의 글을 읽으며 예민한 사춘기 소년에게 책은 정신적 물리적 방벽 역할을 하는구나 생각했다.“해결 방법은 내 쪽에서 점점 더 책장을 많이 쌓아 올리고, 부모의 방 쪽에서는 휘장을 점점 더 두텁게 치는 것이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들은 이 해결 방법과 문제의 본질 자체를 둘 다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들과 친구들은 책보다 훨씬 천천히 그 수량이 늘어나게 마련이었고, 그뿐 아니라 책은 일단 소유하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아파트였음에도 창틀은 나무고 좁은 베란다는 바닥이 기울었고 녹슨 난간이 아슬했다. 블라디미르는 숲이 우거진 도시다. 나무들이 낡은 아파트들을 숨기고 감싸고 있었다. 숙소 아래서 쉬고 있는데 새소리와 아이들 웃음소리가 간간히 섞여 들려왔다.베란다에서 두 아저씨가 고개를 내밀고 계속 내게 말을 걸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 묻는 것이었다.“까레이스키!”라고 하자 또 북인지 남인지 궁금해 했다. 언제쯤에야 남과 북을 나눌 필요가 없을지.◇ 모스크바까지 남은 거리 170킬로미터드디어 모스크바로 입성하는 날, 어제는 봄이더니 오늘 날씨는 여름이었다. 28도까지 기온이 올랐다. 오토바이의 매력은 많고 많지만 치명적인 단점도 있다.가장 큰 단점은 몸을 드러내고 타니 날씨에 취약하다는 것.오늘처럼 기온이 올라가는 날 아스팔트 위에 있으면 금방 지친다. 이동하는 동안 1.6리터 생수병을 다 비우고도 목이 탔다. 무거운 라이딩 기어 안으로 땀이 비 오듯 흐른다. 앞에 매연을 뿜는 낡은 트럭이라도 있으면 그야말로 고문에 가깝다.지난 주 눈보라를 맞았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뜨거운 여름을 맛보는 중. 이제 곧 남쪽으로 가야하는데 통풍이 잘 되지 않는 지금 슈트로는 버티기 힘들 듯. 어떻게 해야 할지 달리면서 계속 고민했다. 러시아에 들어온 지 17일째, 어제까지만 해도 머뭇거리기 일쑤였는데 이제야 가스차니짜(휴게 음식점)에서 음식 주문하는 요령이 생겼다. 워낙 음식값이 저렴하니 주머니 가벼운 여행자에겐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빵 두 조각과 닭고기 커리 볶음밥, 커피까지 99루블(약 1700원). 매번 음식 이름을 외웠다가도 막상 주문하려면 발음이 잘 되지 않는다. 빵은 클리에프, 볶음밥은 블로우프, 커피는 코페. 모스크바까진 이제 170킬로미터쯤 남았다.하필 3일 내내 비가 내릴 거란다. 모스크바에서 며칠 발이 묶이겠다.   /조경국

2020-03-17

달빛에 산 그림자 강에 기울이고…

집을 옮긴다.언뜻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못으로 박지 않고 끼우거나 짜 맞춘 한옥들은 가능하다. 벽은 허물고 기와부터 나무하나하나 빼어서 레고 쌓듯이 역으로 조립하면 본래의 집이 된다. 예전에도 간간히 옮겨지었지만 6~70년대 공업화 산업화로 공단이 들어서거나 댐으로 마을이 없어지거나 수몰되면서 괜찮은 고택들을 대규모로 여기저기 옮겨지었다. 지금이야 건축가가 집을 설계하고 짓지만 예전에는 집주인이 건축가고 설계자이기에 주인의 생활철학과 가치관이 녹여나기에 결국 집은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격이 달라진다. 옮겨지은 고택이라도 원래의 장소보다 더 좋은 고택이거나 흠모할 수 있는 향기 나는 주인이거나 가슴 찡한 사연이 있거나 고택 자체에서 풍겨 나오는 아름다움이 흐르는 전국의 옮겨온 고택들을 관념으로 쓰지 않고 매주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서 살아 있는 글을 전할 것이다.#. 그리운 듯 찾아가는 농암 종택 가는 길소리도 없이 수줍게 피어버린 앵두꽃을 뒤로하고 길을 나섰다. 내비는 경주 수오재 집에서 안동 농암 종택 177Km를 가리킨다. 봄이 오면 언제나 희망을 갖지만 세상사 곡절이 많아 항상 봄은 왔지만 자신에게는 봄이 오지 않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었는데 올봄은 코로나19 때문에 전 세계가 춘래불사춘이다. 안동 시내 강변을 지나자 도심도 협소한 골짜기에 다닥다닥 집들이 붙어있고 아파트와 학교가 앞 뒤 산에 막혀 겨우 숨 쉬고 있는듯해 안쓰러웠다. 그러나 안동 들러오는 남쪽과 북쪽으로 나갈 때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라는 큰 글씨의 관문이 안동의 대표적인 문중들의 집들이 크고 웅장한 솟을대문과 연상된다. 원래 권위의 상징인 솟을대문은 안동양반들은 스스로 존대한 연유도 있고, 경주 양동마을의 기와집이 유독 큰 것은 청백리 우재 손중돈으로 대표되는 월성 손씨와 회재 이언적으로 대표되는 여강 이씨 문중의 경쟁의식이었듯이, 안동도 농암 이현보의 영천 이씨, 퇴계 이황의 진성이씨, 학봉 김성일의 의성김씨. 서애 류성룡의 풍산 류씨 등도 이런 연유일 것이다.북쪽으로 접어들자 온통 산으로 굽이져 마을을 이루지 못하고 띄엄띄엄 집들이 협소한 산비탈 밭에 의지하고 산다. 억척같이 일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조건이다. 그래서 안동여인들이 안동포의 한 올 한 올 만큼 강하고, 남자들은 외모는 순해보여도 안동소주만큼 강한 고집이 생겼을 것이다. 서러운 조건에 참고,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며 인내하는 속 깊은 안동사람이 될 수밖에 없구나 생각이 스치는데 곧바로 ‘속 깊은 고구마’ 큰 입간판이 나타난다.도산서원을 지나고 점점 깊어가는 산세는 봉화 청량산이 아스라하게 보이고 길은 굽이굽이 돌다 청량산이 성큼 다가왔을 때 농암 종택 가는 가송리로 접어들었다. 상류강변치고는 제법 너른 밭과 여러 집들이 보인다. 올 때 마다 감탄했던 수직으로 내리뻗은 절벽이 언제나처럼 서있다. 바위 끝의 고산정(孤山亭)은 푸르고 맑은 소리 내며 흘러가는 물을 보며 절묘하게 앉아 있다. 고산정과 절벽은 서로 놓아두면서 함께하는 묘한 조화를 이룬다. 마치 고산정을 지었던 성재 금난수(1530~1604)가 퇴계 이황(1501~1570)의 제자 되기를 한 달이나 매일 찾아가 제자 되었듯이 절벽이 퇴계 같고 고산정이 금난수 같다. 고산정은 결코 외로운 산이 아니었구나, 마치 정자 앞에 소나무 한 그루가 외롭지 않게 비스듬히 서있다. 미인과 소나무는 혼자 있을 때가 더욱 빛난다.#. 농암 종택을 입체적으로 보는 방법사람이나 사물이나 어느 한 시각에서 보면 진면목을 모를 수 있다. 특히 고택들은 주위를 감싸고 있는 자연환경이 그 고택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한눈에 보려면 위에서 보는 부감법을 활용한다. 일명 헬기, 드론기법이다. 그러나 사람의 눈으로 보아야 한옥의 살아 숨 쉬는 생경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농암 종택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은 강 건너 절벽 바위 위를 가기 위해 강건너 선비 길로 접어들어 절벽을 오르락내리락 선비 다람쥐 되어 걸었다. 산길 약 3Km를 가니 옮겨놓은 농암 종택이 한눈에 보고, 다시 되돌아와 강 건너 농암 종택에서 시심(詩心)의 길을 걸었다. 흐르는 물소리, 불어오는 바람소리, 숲 속의 새 소리가 나에게는 시였고 음악이었다. 사유지라 더 이상 갈 수 없는 강가에는 제법 넓은 너럭바위가 누워있고 그 위에 어미와 새끼 공룡 발자국이 강물 흐르는 남쪽으로 나있다. 지구역사 45억 년 중 거대한 공룡은 여기처럼 발자국과 뼈와 알만 남기고 1억5천만년 존재하고 완전히 사라졌다. 우리 인간은 겨우 3만년 존재하고 있는데 개발과 발전이란 논리로 지구를 못살게 파괴하여 온갖 재앙이 소리 없이 밀려온다. 여기 흐르는 강물도 이처럼 맑아도 하회 예천을 지나 구미 대구쯤 가면 낙동강 푸른 물은 어디로 가고 악취가 나고 하구인 부산쯤 가면 썩은 물인데 어찌할 것인가? 필자가 90년대 초 울산, 경주, 영천, 등지에 수많은 공룡발자국을 발견해 놓았는데 공룡 발자국은 단단한 화강암 아닌 진흙이 굳어서 바위가 된 여기처럼 이암(泥巖)에 찍힌다. 그래서 암각화를 새긴 울산 태화강변의 반구대 암각화나 천전리, 고령 양전동 알터 암각화 새긴 바위가 이암인 것이다.#. 옮겨온 농암 종택을 거닐며농암 종택은 살림집만 옮겨 온 것이 아니라 문중의 주인공 농암 이현보를 배향하는 분강서원과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종가 집들을 옮겨놓아 규모가 크고, 적당히 흩어지게 잘 배치하여 놓았다. 입구 솟을대문이 위압적으로 버티고 있다. 지금 사람 눈에도 위압적인데 양반 상놈 신분으로 사람을 높이고 깔 볼 때 이런 대문 앞에 서면 죄지은 사람이 대검찰청에 들어가는 심정일 것이다. 이 집에서 가장 낭만적인 긍구당(肯構堂)이 고택다운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멋을 감추면서 쓴 글씨도 예술이고 건물 배치도 누각형식으로 한옥의 절대적 미감을 살렸다. 이 긍구당은 1370년경 농암의 고조부 이현이 지은 650년쯤 되는 고택이다. 특히 농암이 이 집에서 태어나고 이 집에서 돌아가셨던 농암의 시작과 끝이 된 집이다. 긍구당 측면에서 사진 찍다 난간 아래를 보니 농암의 17대손 이성원 주인장이 소나무 옮겨 심을 위치를 선정해주고 있었다. 끝나기를 기다려 인사드리고 몇 마디 주고받았다. 대문 들어오는 들머리에 모여 있던 존재 없던 소나무들을 이렇게 옮겨놓으니 소나무가 살아나 좋다면서 저 앞산 너머 묘소에 누워계시는 ‘농암 할배’가 기뻐하실 것이라 했다. 종택 입구 아래부터 처음 백사장이 시작되고 절벽이 위치해 참 잘 정하셨다하니 수몰된 분천 고향마을과 여기가 흡사하다 하신다. 비록 문중과 선조지킴이었지만 개인의 집념이 이렇게 고택 살리는 대단한 일을 하셨다. 지금이야 여러 문중에서 고택체험숙소로 활성화 되었지만 종택으로는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개방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고택의 향기를 함께 느끼고 가니 문중을 넘어 사회로 확산한 것이다. 두루마기 벗어두고 작업복에 일 감독하듯 예전에 하인과 종들이 하던 역할을 지금의 고택주인들은 풀 뽑고, 마당 쓸고, 돌쇠, 마당쇠 되어야 고택이 살아난다.#. 선비의 이상향 농암 이현보와 애일당애일당(愛日堂)은 농암이 날을 아껴 효도하겠다는 뜻으로 아버지를 위해 지어주고 귀천, 지위고하, 남녀에 차별을 두지 않고 효를 실천한 의미 깊은 곳이다. 1519년 67세의 농암은 이곳에서 아버지를 포함한 아홉 노인을 모시고 색동옷입고 춤을 추어 즐겁게 해드렸다. 이 가풍을 이어받아 둘째아들 이문량이 1547년부터(농암 81세) 1902년까지 구로회는 400여 년간 이어진 대단한 행사다.2012년 애일당 건립 500주년을 맞아 안동지역노인 300명을 초청해 뜻 깊은 구로회를 다시 열었다. 농암 자신이 89세(1467~1555)까지 살았고 농암의 증조부 76세, 고조부 84세, 아버지 98세, 어머니 85세, 숙부 99세, 조부 84세, 조모 44세, 외조부 93세, 외숙부 두 분 93세, 73세, 동생들 91세, 86세이니 조선중기 당시 평균수명이 40인데 200년 동안 평균 80이었으니 친가, 외가 대단한 장수 집안이다.아마도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최고의 장수가문일 것이다. 그 농암이 애일당 앞 강가에서 “깊은 밤 난간에 의지하여 잠은 오지 않는데./달빛에 산 그림자 강에 기울이고….” 라고 읊으며 산 덕분일 것이다.조선시대 농암만큼 복된 삶을 산 사람은 없을 것이다. 권력도 형조참판으로 76세까지 적당한 벼슬을 했고 틈틈이 이웃 안동부사, 밀양부사 경주 부윤 등 8고을의 수장을 맡아 틈틈이 부모를 즐겁게 해드렸고, 말년 14년은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실천하여 달밤에 배 띄워 흥취에 어부가를 부르고, 집안 모두 장수하는 천복을 누리고 살았던 적선의 흔적이 농암 종택이다. /이재호 기행작가※ 기행작가 이재호는 우리문화를 알리고 지키며 1995년부터 경주에 정착해 사라져가는 고택 13채를 옮겨와 5채를 지은 수오재에서 살고 있다.동국대에서 한국미술사를 강의했고 ‘천년고도를 걷는 즐거움’ ‘삼국유사를 걷는 즐거움’ ‘왕의 길을 걷는 즐거움’ 등의 책이 있다.

2020-03-17

‘애국부인전’ 조선의 잔다르크 탄생을 고대하다

장지연(1864-1920)은 한말의 유학자요 역사가이자 또한 언론인이며 문필가이고 애국독립사상가이다. 그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직후에 발표한 명문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민족의 울분과 기개를 온 세상에 알린 인물이다. 구한말을 대표하는 우국지사인 장지연은 경북 상주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후손으로 경북 상주군 동곽리에서 태어나 한학을 깊이 있게 배우며 성장하였다.황성신문, 시사총보, 해조신문, 경남일보 등의 언론사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만민공동회’, ‘독립협회’, ‘대한자강회’, ‘국채보상운동’의 사회단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장지연의 모습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가 한때 소설을 창작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그는 단 한번 소설을 창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숭양산인(嵩陽山人)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애국부인전’(광학서포, 1907)이다. 이 때의 애국부인은 백년전쟁(1337년부터 1453년까지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전쟁)에서 활동한 프랑스의 잔다르크(Jeanne d‘Arc, 1412-1431)이다.흔히 개화기라고 불리는 19세기 후반부터 한일한방에까지 이르는 시기는 우리 민족에게 큰 위기이자 작은 기회의 시대였다. 이 시기 우리 민족의 절대적인 과제는 여러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자주독립을 유지하는 것과 전근대의 미몽에서 벗어나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현실과 긴밀한 관련을 맺는 문학, 그 중에서도 소설이 이러한 시대정신에 반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개화기의 시대적 과제에 민감하게 반응한 소설로, 이인직 이해조 최찬식 등이 창작자였던 신소설과 장지연, 신채호, 박은식 등이 창작자였던 역사전기소설을 들 수 있다. 신소설은 주로 반봉건 근대화라는 시대적 과제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이다. 신소설을 대표하는 이인직의 ‘혈의 누’(1906)에서 부모를 잃은 일곱 살의 옥련은 문명개화라는 절대적 이념을 따라 평양에서 출발해 오사카를 거쳐 워싱턴까지 거의 일직선으로 달려 나간다. 그 절대의 이념 앞에 조선이나 민족을 위한 자리는 놓여 있지 않다. 이에 반해 전통적인 한학을 공부했으며 민족의 자주독립을 추구한 애국지사들이 창작한 역사전기소설은 주로 반제 독립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로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서사건국지’(1907), ‘이태리건국삼걸전’(1907), ‘애국부인전’(1907), ‘을지문덕’(1908), ‘이순신’(1908) 등을 들 수 있다.여기서 다루는 인물들은 모두 민족적 위기를 극복한 영웅들이다. 신채호가 ‘을지문덕’ 서문에서 “과거의 영웅을 그려 미래의 영웅을 불러온다.”는 영웅대망론을 제시한 것처럼, 역사전기소설은 과거의 영웅들을 통해 외세의 위협 앞에 놓인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장지연의 ‘애국부인전’은 잔다르크가 17세의 나이에 참여한 오를레앙 전투(1429)부터 영국에 의해 화형을 당할 때(1431)까지를 다루고 있다.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이 상호 작용하는 끊임없는 대화”(E.H.Carr)라는 말이 있듯이, 역사란 그 시대정신에 의해 끊임없이 새롭게 쓰여진다. 과거는 불변이며 미래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역시도 현재의 관점에 따라 끊임없이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다. ‘애국부인전’의 잔다르크도 시공의 머나먼 거리를 뛰어 넘어 장지연의 관점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잔 다르크이다.소녀의 몸으로 나라를 구하고 결국에는 화형까지 당한 잔 다르크처럼 극적인 삶을 산 인물도 드물다. 그 결과 잔다르크는 참으로 많은 관심을 받으며 다양한 얼굴로 사람들의 이야기에 등장하였다. 잔다르크를 대상으로 한 문학작품은 잔 다르크가 처형당한 직후부터 창작되었으며, 지금까지 그녀는 성녀, 신비주의자, 전사, 예언자 등의 모습으로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심지어 셰익스피어는 ‘헨리 6세’에서 잔다르크를 “파렴치한 마법사요 마녀”로 그리기도 했으며, 대표적인 계몽주의자인 볼테르는 “형편없는 시골 처녀에다 불쌍한 정신착란자”로 규정하였다. (헤르베르트 네네, ‘잔다르크’, 이은희 옮김, 한길사, 1998, 174-179면) 장지연이 ‘애국부인전’을 통해 재현한 잔다르크는 성녀도 마녀도 아닌 ‘국민의 역할을 다하는 애국자’이다.잔다르크가 활동한 시기는 근대적 의미의 국가가 형성되기 수백년 전인 중세의 한복판이며, 잔다르크가 목숨을 내걸고 활동한 것은 자기가 속한 고향과 왕세자에 대한 연민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애국부인전’에 나타난 잔다르크의 모습은 민족지사이자 애국지사였던 장지연의 관점이 개입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프랑스에서도 잔다르크가 전투적 국가주의의 상징이 된 것은 1870년 이후이며, 특히 제 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모리스 바레스와 레옹 블루아는 증오심에 찬 자기들의 국수주의를 위해 잔 다르크의 이름을 끌어들였다고 한다. (헤르베르트 네네, 앞의 책, 189면) ‘애국부인전’에서 가장 많이 쓰인 단어로는 국가, 국민, 애국 등을 들 수 있다. 잔다르크는 출정을 말리는 부모님에게 “제 몸은 비록 여자이오나 어찌 법국의 백성이 아니리까. 국민된 책임을 다하여야 비로소 국민이라 이를지니”라고 말하고, 프랑스 장군 포다리고와의 대화에서 “우리 국민된 의무를 극진히 하여 법국 인민됨이 부끄럽지 않게 할 따름이요”라고 말한다. 이외에도 “국민의 의리”, “국민된 자의 염치”, “법국의 동포 국민된 유지하신 제군들”, “국민된 한 분자의 의무”, “국민의 책임”, “국민을 위함” 등의 말이 계속 해서 등장한다.장지연의 민족주의적 문제의식은 매 회의 마지막에 작가가 덧붙인 논평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2회에서는 우리 민족을 외세의 침략에서 구원한 양만춘, 을지문덕, 강감찬의 행적을 언급하며, “법국은 이때에 양만춘 을지문덕 강감찬 같은 충의 영웅이 뉘 있는고.”라는 논평을 마지막에 제시한다. 이것은 ‘애국부인전’의 잔다르크가 앞에서 언급한 영웅들과 같은 민족영웅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잔다르크에 투영된 장지연의 강렬한 민족의식은 한일합방 직후 일제가 ‘애국부인전’을 불허가출판물로 지정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개화기 역사전기소설에 호출된 영웅들은 대부분 남성들이었다. 장지연의 ‘애국부인전’은 프랑스혁명 당시 활약한 롤랑부인(Madame Roland, 1754-1793)의 일대기를 그린 ‘라란부인전’(1907)과 더불어 드물게 여성인물을 다룬 역사전기소설이다. ‘애국부인전’은 여성을 비하하고 국가 사업에서 소외시키는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가득하다. “어찌 남자만 나라를 위하여 사업하고 여자는 능히 나라를 위하여 사업하지 못할까. 하늘이 남녀를 내시매 이목구비와 사지백태는 다 일반이니 남녀가 평등이어늘 어찌 이같이 등분이 다를진대 여자는 무엇하려 내시리오.”라는 잔 다르크의 비판이나, “슬프다. 우리나라도 약안 같은 영웅호걸과 애국충의의 여자가 혹 있는가.”라는 작가의 논평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장지연은 이 작품을 읽은 여성들이 적극적인 애국활동에 나서기를 진심으로 원했던 것이다. ‘애국부인전’이 여타의 역사전기소설과는 달리 순한글체로 발표된 것도 당시 교육에서 소외된 여성을 주독자층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다.이 시기 장지연은 여성들의 계몽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애국부인전’을 발표한 다음 해에 출간한 ‘여자독본’(1908)은 일종의 열전(列傳)으로서, 모범이 될 만한 동서양의 여성들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또한 장지연이 관여한 ‘가정잡지(家庭雜誌)’도 여성을 계몽하려는 의도의 여성잡지였다. ‘애국부인전’, ‘여자독본’, ‘가정잡지’는 모두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여성교육”(배정상, 위암 장지연의 ‘애국부인전’ 연구, 현대문학의 연구 30집, 2006, 79면)을 위해 기획되었던 것이다. 유학을 기본적인 교양으로 익힌 장지연이 여성의 계몽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그러나 ‘애국부인전’을 공적 담론에서 소외된 부녀자만을 대상으로 한 작품으로 한정짓는 것은, 이 작품의 담론효과를 좁게 보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작품은 동시에 남성들에게도 국가를 위해 헌신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농민의 딸로 태어난 17세의 어린 여성이 나라를 구한다는 이야기는 일차적으로 조선 여성에게 큰 감동과 교훈을 주었을 테지만, 동시에 어린 여성보다는 나은 지위에 있는 가부장제의 남성들에게도 분발의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장지연이 이러한 효과를 다분히 의도한 대목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전쟁터에 나가겠다는 잔다르크의 충성심에 감복한 아버지가 “너는 여자로서 애국하는 의리를 알거든 남자된 자야 어찌 부끄럽지 아니하리오.”라고 한탄하거나, 잔 다르크의 연설을 들은 남성들이 “원수는 일개 연약한 여자로서 저러한 애국열심이 있거늘 우리들은 남자가 되어 대장부라 하면서 도리어 여자만 못하니 어찌 부끄럽지 아니하리오.”라고 스스로를 꾸짖는 대목 등이 그러하다.장지연이 그토록 원하던 조선의 잔다르크는 과연 얼마나 탄생했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변은 결코 초라하지 않다. 어두운 식민지의 하늘을 환하게 밝힌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국가보훈처에서 훈장과 포상을 받은 여성 독립유공자만 수백 명에 이른다. 이 위대한 여성들을 잊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장지연의 ‘애국부인전’을 제대로 읽는 독법인지도 모른다.1864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필력 좋았던 언론인이자 계몽운동가로 유명하다. 을미사변 때는 의병들이 일어나기를 촉구하는 호소문을 각 지역에 발송했다. 1905년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린 ‘시일야방성대곡’을 황성신문에 발표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체포되기도 했다. 교육 계몽단체인 대한자강회를 만들었고, 경남일보사 주필 등으로 일했다. ‘유교연원’ ‘대한신지지’ 등의 책을 썼다./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3-16

지나칠 만큼 코로나19 차단… “전국 가장 안전한 문경으로”

요즘 가장 많은 소원 중 하나는 무사(無事)이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있듯이 예상치 못했던 일들은 고통과 두려움의 대상이다.우리나라에도 지진, 산불과 같은 자연재해의 발생 빈도가 늘어나는 추세이고, 중국에서 시작해 세계적으로 유행 중인 코로나19 감염증(코로나19)처럼 여러 가지 환경변화로 안전이 위협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문경시가 무사한 이유는 전국에서 가장 안전하고 위기대응 능력이 뛰어난 도시를 건설하고자 하는 노력이 숨겨져 있다. 문경시는 코로나19 감염증 확산 방지와 시민들의 불안감 해소를 위해 마지막까지 만전을 기한다는 각오다.□ 2월 초부터 선제적 대응조치코로나19 감염증 확진환자가 우리나라에서 발생하자 문경시는 1월 비상방역대책반을 가동하고, 정부의 심각단계 상향일(2월 23일) 이전인 2월 초부터 코로나19 감염병을 심각단계로 인식하고, 모든 역량을 동원해 선제적 대응조치를 취했다.취약계층, 다중이용시설 등에 마스크, 손소독제 등을 배부하고 손씻기, 기침예절, 마스크 착용 생활화 등 예방수칙 홍보에 주력했다.공공기관, 아파트, 산업단지, 전통시장 등 인구 밀집 지역 및 종교시설, 지역 내 기업체 기숙사 등도 대대적인 방역 소독을 이어가고 있다.또한, 코로나19 환자의 조기 발견을 위해 ‘드라이브 스루(Drive-Through)’ 방식의 ‘차량이동 선별진료소’를 운영 중에 있다. 차량에 탑승한 채로 단계별 검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1인당 검체 채취 대기시간이 최대 1시간에서 10분 안팎으로 줄었다.전 공무원은 민방위복과 마스크를 착용한 채 근무하며, 문경시 보건소는 지난달 25일부터 코로나19 전담팀을 편성·운영하고 있다.보건소의 공중보건의사의 의료기관 선별 진료소 지원과 보건소 및 일부 보건지소의 진료 및 건강진단 업무 잠정 중단 등으로 코로나19 확산 방지에 총력을 다하고 있다.□ 지역 내 거주 확진자는 거의 제로16일 오전 8시 기준 전국의 확진자 수는 8천236명을 넘어섰다.문경의 4명의 확진자 중 1~2번 확진자는 대구에 거주하는 부부로, 이동 시 자가용을 이용했고 잠시 만난 접촉자도 검체 검사를 실시해 모두 음성 판정을 받았다.시는 모든 동선에 즉시 소독을 실시했다.3번 확진자는 타 지역 소재 대학 기숙사에서 확진 판정을 받아 국가지정입원병원으로 이송돼 입원치료 중이다.4번 확진자는 관내 거주자이지만, 증상이 전혀 없었고, 자가격리와 함께 매일 모니터링을 했기에 지역사회 전파는 희박하다.□ 확산방지 노력, 자가격리자 관리 철저대중교통에 대해서도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노력 중이다.유동인구가 많은 터미널(점촌시외버스터미널, 문경터미널 등)에 매일 5회 이상 소독방역을 실시하고, 손소독제를 비치했다. 시내버스는 노선 운행 전 차량 내부 소독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모든 택시를 대상으로 방역소독을 실시하고, 운수종사자를 위한 마스크를 배부했다.코로나19 확산방지를 위해 공공장소도 문을 닫거나 철저 통제 중이다.경로당 384곳, 마을회관 247곳, 공공체육시설, 도서관이 휴관 또는 폐쇄 중이며, 5일장인 점촌전통시장은 휴장했다. 문경시청과 읍면동 행정복지센터는 소독과 발열확인 이후 출입이 가능하도록 통제 중이다. 자가격리자에게는 격리통지서가 발부돼 14일간 격리된다. 격리 장소 외에 외출은 금지되며, 보건소에서 매일 증상 및 자가 격리 규정 준수 등을 확인하고 철저히 관리하고 있다.□ 선별진료소 및 음압치료실코로나19 환자의 조기 발견을 위해 선별진료소, 드라이브 스루, 카라반 음압실 3 트랙으로 운영하고 있다.시는 지난 1월부터 코로나19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선별진료소 3곳(보건소, 문경제일병원, 문경중앙병원)을 설치해 운영 중이다.대구에 거주하다 문경을 방문한 부부 감염자도 증세가 나타나자 바로 보건소 선별진료소에서 검사를 받아 지역 및 의료기관 내 전파를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드라이브 스루 방식의 차량이동 선별진료소와 카라반 음압실을 지난 2일부터 보건소에서 설치·운영하고 있다.음압시설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2억 원을 투입해 컨테이너형 음압실 4개동을 확보해 문경제일병원 및 문경중앙병원에 각 2개동 씩 긴급 지원할 예정이다.드라이브 스루 검사는 의심증상자가 차를 타고 선별진료소를 방문하면 모든 검사를 차 안에서 진행하는 방식으로 진행돼 소독과 환기가 용이하며, 검사 시간 역시 10여분으로 일반 선별진료소에 비해 3~4배 빠르다.□ 시민도 함께 코로나 극복 구슬땀점촌 역전 상점가 상인회(문경 도시재생뉴딜사업 일환으로 조직된 주민협의체)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코로나19의 여파로 이용객의 발걸음이 줄어들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이때 상인회 주도로 문경 살리기 SNS운동이 펼쳐졌다. 코로나19로 인해 팔지 못한 음식들이 소진될 수 있었다.점촌전통시장 상인회(상인회장 여순광)는 지난달 22일 코로나19의 확산 저지 및 예방을 위해 잠정적으로 5일장을 휴장하기로 결정했다. 장날이 되면 인근 지역 상주와 예천뿐만 아니라 대구에서도 상인들이 몰려와 코로나19의 감염이 우려됐기 때문이다.문경중앙시장(상인회장 최원현)은 코로나19로 시장경제가 침체에 빠지자 장보기 배송서비스 홍보에 적극 나서고 있다.대구, 경북 지역에 코로나19 확진 환자가 대거 발생하고 인근의 상주시까지 확산되자 외부활동을 꺼리는 소비심리로 인해 시장 방문고객이 급감하고 있어서 였다.문경중앙시장 장보기, 배송서비스는 지난해 12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 현재까지 930여명의 회원이 가입해 이용하고 있다. 전통시장을 찾기 힘든 직장인들을 위한 맞춤형 서비스이다.SNS의 댓글로 주문하거나 콜센터로 전화하면 퇴근시간에 맞춰 상품을 배달해 주는 편리한 서비스이다.외부활동과 다중이용시설의 방문 자제를 권장하고 있는 요즘에 꼭 맞는 맞춤형 서비스로 각광받고 있다.□ 따뜻한 나눔도 이어져문경시 오미자테마터널((주)오미원 대표 김태인)은 지난달 24일 귀국한 경북 북부지역 성지 순례단을 격려하기 위해 25일 문경오미자 스틱차 3천포를 안동시에 기부했다.중국 우한에서 귀국해 충남 아산과 충북 진천에서 격리된 우리 교민들을 위해서도 문경오미자 스틱차 2만8천여개를 기부했다.문경미소(주)(대표 김경란)는 코로나19 확산방지를 위해 비상근무 중인 문경시와 경북도 재난상황실을 찾아 드링크(오미소 및 오미자미소) 650박스, 1천 박스씩 기증했다.벽산조경(주)(대표 조윤희)는 200만원, 산북창구초등학교 30회 재경 졸업생(총무 김명숙)은 100만원, 호서남초등학교 55회 재경동기회(회장 박명희)는 50만원을 경북도공동모금회를 통해 기탁했다.영순면새마을회에서는 지난 3일 마스크 제조기업인 (주)디엠개발을 방문해 문경사과 10박스(15kg)를 전달했고, 점촌1동 새마을회는 5일 보건소를 찾아 귤, 바나나 등 10만원 상당의 위문품을 전달했다.고윤환 문경시장은 “안전에는 지나침이 없다. 전국에서 가장 안전하고 위기대응 능력이 뛰어난 도시 문경 건설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강남진기자 75kangnj@kbmaeil.com

2020-03-16

붉은 태양 보며 희망의 노래 부를 날을 기다린다

저무는 태양이 소멸과 우울함이란 단어를 떠오르게 한다면, 솟아오는 붉은 해가 연출하는 일출은 희망과 새로움의 은유다.그래서다. 많은 사람들은 새해가 오면 바닷가로 몰려가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꿈과 소망이 이뤄지기를 빌곤 한다.2020년이 시작된 지 70일 넘었지만 올해는 ‘희망’과 ‘다시 시작함’의 메타포인 일출이 온전해 보이지 않는다는 기분이 든다. 기자만이 아닌 적지 않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끼지 않을까?‘코로나19로 인한 비극적 사태’가 아직 안정화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대구·경북지역의 바이러스 감염 확진자는 차츰 줄어들고 있는 추세지만, 다른 지역에서 또 다른 ‘코로나19 폭탄’이 터지고 있는 형국이다.이번 주 중반엔 서울의 한 건물에서 90명 이상의 새로운 감염자가 나타났고, 다른 도시에서도 특정한 몇몇 공간에서 수십 명의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진자가 확인되기도 했다.국가를 가리지 않고 창궐하는 바이러스의 위험성은 가까운 중국과 일본도 여전하고, 이로 인해 활발했던 두 나라와의 경제·문화적 교류도 자의 반 타의 반 거의 끊어진 상태다.항공업계와 여행업계는 직격탄을 맞아 휘청댄다. 상당수의 항공·여행업 종사자들이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임금 삭감과 순환 근무, 장단기 휴직과 실직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뉴스가 어제도,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에서 세계로 뻗어나가던 하늘길이 한 순간에 막혀버린 것이다.그뿐 아니다.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유럽 국가들도 비상 상황에 들어섰고, 이란에선 정부 고위층 인사 여러 명이 코로나19 감염증으로 치료를 받고 있다. 사망한 이들도 적지 않다는 외신 보도가 들려온다. 이란은 장기간의 경제 제재와 봉쇄 탓에 진단 장비와 약품이 부족하니 앞으로가 더 문제다.설상가상 미국의 감염자 증가 속도 또한 가파르다. 최근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마이크 펜스 부통령 등 최고위층 지도부가 한국인 입국 금지를 심각하게 논의했다는 소식도 있었다. 미국으로 오가는 길도 폐쇄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것.▲따스한 햇살이 ‘코로나19’를 태우는 상상을 하며…인간은 여러 가지 한계를 지닌 동물이다. 붉은 보석처럼 환하고 아름답게 밝아오는 일출의 아침을 보면서 소원을 말할 때도 가장 먼저 자기 자신과 관련된 일들을 떠올린다. ‘부자가 되게 해주세요’, ‘다른 누구보다 건강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대학 입학 시험과 승진 시험에 꼭 합격하기를 원합니다’ 등등.개개의 인간이 지닌 희망과 소망의 범위는 지극히 협소하다. 그게 넓어진다 한들 겨우 가족 등의 아주 가까운 피붙이나 소수의 친구를 위한 것들에서 멈추기 십상이다. 하지만 누가 그걸 탓하랴. 너나없이 우리 대부분은 일상을 허위허위 살아가는 겁 많은 소시민일 뿐인데.9년 전쯤 이란을 여행했을 때다. 해변과 호숫가, 강변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본 경험은 이전에도 많았지만, 고대 도시 야즈드(Yazd)에서 처음으로 본 사막에서의 일출은 생경했고, 그랬기에 더 장엄했다. 야즈드는 불을 숭배하는 조로아스터교도들의 피신처이기도 했던 곳. 이른바 수난과 고통을 어느 지역보다 많이 겪은 곳이다.그날이다. 어둡던 모래밭에 눈부신 햇살을 무한정 뿌리며 이글거리는 사막의 태양을 함께 맞이하던 독일 청년과 이란 성직자에게 농담처럼 물었다.“한국에선 사람들이 해를 보며 소원을 빌어. 이처럼 아름다운 일출을 봤으니 너희들도 소원 하나쯤 말해보지 그래.” 연이어 돌아온 두 사람의 대답이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다.이란의 성직자는 “우리 아이들이 차별과 폭력 없는 세상을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독일에서 온 20대 초반 젊은이는 “인종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전쟁이 사라졌으면 한다”는 바람을 들려줬던 것.만약 그날 기자가 박두진(1916~1998)의 시집(詩集)을 들고 있었더라면 ‘해’라는 박 시인 최고의 절창을 낭송해줬을 게 분명하다.절망을 떨치고 희망으로 걸어가는 흥겹고도 단호한 행진곡 같은 시, 어떤 지독한 바이러스도 단번에 활활 태워버릴 에너지로 넘치는 시 말이다.▲꽃과 함께 나른한 봄을 즐길 시간이 올해도 오겠지‘만 사람의 손가락질은 심장으로 날아오는 독화살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저주가 그 저주받는 대상을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걸 뒤집어 해석하면 ‘만 사람의 간절한 기원은 어떤 극악한 저주도 풀 수 있다’는 게 아닐지.거창한 소원이 아니면 어떠랴. 지금은 한국인 모두의 희망 섞인 소망이 하나로 모여도 좋을 시기다.그게 어느 바닷가이건 무슨 상관일까. 또한 거기에 몇 명이 모였다는 것도 중요한 게 아닐 것이다. 그저 다들 똑같은 심정으로 이런 소망을 빌어보면 어떨까.“저 뜨거운 햇살에 지긋지긋하고 징그러운 바이러스가 녹아내리기를 바란다. 바로 그 자리에 분홍빛 진달래는 필 것이고, 우리는 지난해처럼 빛나는 꿈을 노래할 것이다.”이번 주말엔 마스크를 벗고 가까운 산길에서 깔깔대며 기자와 이웃들을 반길 봄꽃과 반갑게 악수하고 싶다. 아래는 ‘돗돔’을 희망으로 은유한 졸시다.돗돔을 기다리며수영하는 아이를 삼킨다는 거대한 은빛비늘/소문은 끈질기게 떠돌았다/누군가는 아름드리 참나무를 꺾어/해지는 방파제 끝에서 오랫동안 서성이고새까만 낯짝의 사내들이/닻을 올리고 먼 바다로 떠날 무렵/선착장마다 만삭의 아내들이 흐느꼈다/길잡이굿의 징소리로도 돌아오지 못할 사람들먼저 떠난 작은 섬의 노인은 낡은 액자 속에서/아직도 귀때기 파란 스무 살인데/부랴부랴 굵은 낚시를 건사하는/남편의 손놀림은 아내를 무시한 채 등을 돌렸다/주춤대던 아이의 울먹거림은 기어코 울음이 되고허나, 공포와 마주 서지 않는 삶이란 여기 없으니/기어코 떨쳐야할 두려움 너머로/보라, 저기 울컥대는 파도 위 날랜 달음질로/돗돔이 돌아온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 구창웅

2020-03-12

시민이 하나될 축제 제대로 만들어 내야죠

음식이 육체를 살찌운다면, 문화와 예술은 인간의 정신적 키를 키운다. 일상에서 문화예술을 접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식은 축제와 공연을 즐기는 게 아닐까.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포항에서 열리는 3가지 대표적 축제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신재민(38) 포항문화재단 축제운영팀장의 역할은 막중하다. 신 팀장은 지난 4년간 시민들의 문화적 욕구를 효과적으로 충족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해왔다.그러나, 올해는 상황이 좋지 않다. 축제와 공연은 참여자들이 합심해 만들어가는 것인데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사람이 자리를 함께 하기 어려운 시기가 계속되고 있는 것. 하지만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언젠가는 ‘악질 바이러스’가 물러갈 것이고, 그때가 되면 다시 관객들이 하나 될 축제를 선보여야 하기 때문이다.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민들을 위해 땀과 정성을 쏟고 있는 신재민 팀장을 만나 ‘포항의 축제’와 ‘지속돼야 할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먼저 자기소개를 부탁한다.△1982년 신탄진 출생이다. 2000년대 초 한동대에 입학하면서 포항과 인연을 맺었다. 공연영상, 언론정보, 경영학을 공부했다. 현재 포항문화재단 축제운영팀장으로 일하며 포항국제불빛축제, 포항스틸아트페스티벌, 호미곶한민족해맞이축전을 기획·운영 중이다.-공연기획에 관심을 가진 시기는 언제인가.△대학에서 동아리 활동을 하고 싶었는데,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공연기획학회’라는 곳이 있다는 걸 알고 들어가 영어 뮤지컬 공연 스태프로 참여했다. 그게 현재 내 모습의 시작이었다. 군대를 다녀온 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공연기획학회장이 됐고, 이야기가 있는 콘서트 ‘소소한 일상’을 무대에 올렸다. 시스템을 체계화하고, 조명과 영상을 외부 업체 맡기는 등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 덕분에 대학생활이 ‘불꽃처럼’ 바쁘고 뜨거웠다.-‘미추’라는 유명 극단에서도 일을 했는데.△2009년 들어가 생애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온라인 홍보와 공연장 운영 담당을 맡은 기획실 막내로 일했다. 연출가 손진책과 김성녀 등에게서 어떤 자세로 인생과 예술을 바라봐야 하는지 배웠다. 마당놀이 ‘이춘풍 난봉기’ 공연이 떠오른다. 40회 공연에 2만 명의 사람들이 몰렸다. 관객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몸으로 익힌 순간이었다. 어르신 관객이 건네준 엿 한 가락의 맛이 아직 잊히지 않는다.-미국에선 라디오방송 PD를 했다고 들었다.△‘영어에 대한 장벽을 깨보자’는 현실적인 이유로 미국 한인라디오 방송국에 1년간 다녀왔다. 교양·예능 프로그램 제작과 진행을 했다. 그때 라디오라는 매체의 매력에 빠졌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조수미, 송해, 시애틀 상·하원의원 등과 인터뷰를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잊을 수 없는 일은 가수 정훈희를 만난 것이다. 좋아하는 노래 ‘꽃밭에서’를 라이브로 들을 수 있었다.-GS칼텍스재단과 정동극장 경주사업소 등도 거쳤는데.△운 좋게도 대기업 재단에서 지역사회 공헌사업의 일환으로 만든 아트센터 홍보 담당자로 일할 수 있었다. 극장의 구조와 운영까지 배울 수 있었던 기회였다. 지금도 지역 아트센터 중 우수 사례로 꼽히는 ‘여수문화예술공원 GS칼텍스 예울마루’에서 일한 기억은 소중한 경험이다.많은 전문가들이 “지역 아트센터는 관광형 상설공연 있어야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동극장 경주사업소는 양질의 관광형 상설공연을 진행한 곳이다. 거기서 세월호, 메르스, 경주 지진까지를 겪으며 관광형 상설공연의 명과 암을 체험할 수 있었다. 축제 기획, 해외 공연, 티켓 판매, 예술교육까지 다양한 부분을 경험한 것이 업무적 자산이 돼주고 있다.-참여한 공연 중 잊을 수 없는 공연은 뭔가.△2017년 이란 테헤란에서 진행한 넌버벌 퍼포먼스(대사 없이 몸짓만으로 진행하는 예술행위) ‘바실라’다. 이란에서의 공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출발 한 달 전 경주에서 지진이 발생해 연습 장소를 구하기도 힘들었다. 종교적 이유로 여성 무용수가 무대에 설 수도 없었다. 이란은 계좌이체와 카드 결제가 불가능해 대관료 입금에도 문제가 있었다. 수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공연장을 찾아 기립박수와 환호성을 보내는 이란 관객들을 보며 준비 과정의 고통을 다 잊었다. 무용수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던 이란 사람들이 너무 고마웠다.-포항문화재단으로는 언제 왔는지.△4년 전 봄이다. 14회 포항국제불빛축제가 펼쳐지기 100일 전에 입사했다. 포항문화재단 축제운영팀에 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축제 브랜딩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한국의 축제는 대부분 이름만 다를 뿐 콘텐츠는 획일화 돼 있다. 지속적인 브랜딩에 대한 시도가 없었던 탓이다. 그런 이유로 상당수의 지자체 축제가 유사하다. 단순한 이벤트가 아닌 시민들과 어우러지는 즐거운 경험을 쌓고 싶어 포항으로 왔다.-당신이 맡고 있는 포항의 축제는 어떤 것들인가.△포항국제불빛축제, 포항스틸아트페스티벌, 호미곶한민족해맞이축전을 우리 팀이 진행한다. 불빛축제는 ‘연오랑 세오녀 설화’를 테마로 포항의 자부심을 담은 축제다. 대형 마리오네트(관절 인형)를 내세운 퍼레이드와 한국 최대 규모의 불꽃 연출을 만날 수 있다. 스틸아트페스티벌은 산업자원인 철에 예술의 따스한 감성을 담아낸 순수예술제다. 스틸아트 작품들과 통합예술교육 프로그램, 스틸 크루즈 투어 등으로 내실 있게 진행할 예정이다. 한민족해맞이축전 역시 떠오르는 해를 보며 호미곶에서 펼쳐질 감동의 한마당이 될 것이라 믿는다.-포항으로 와서 일하며 기억에 남은 순간은.△이곳으로 오면서 눈물이 많아졌다. 개인적으로 공황장애의 고통까지 감내하면서 일했던 걸 잊을 수 없다. 지난해 불빛축제 때 ‘돌아가신 할머니와 하늘나라로 떠난 아버지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불꽃쇼를 만들어 달라’는 한 시민의 사연을 전해 들었다. 약을 먹어가며 축제장을 지켰는데, 마지막 순간 불꽃이 터질 때 나 또한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슬픈 불꽃은 처음이었다.-현재는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축제와 공연이 열리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문제가 해소되면 포항에선 어떤 공연이 열리게 되나.△올해는 포항문화재단 구성원 모두가 고생해 많은 것들을 준비했다. 불빛축제도 그렇고, 스틸아트페스티벌도 그렇다. 해외의 새로운 빛 콘텐츠를 가져오기 위해 자비로 프랑스도 다녀왔다. 루마니아, 프랑스 등 해외 빛 아티스트와 연결돼 그들이 포항에 오기로 했는데, ‘코로나19 사태’로 참여가 어렵다는 의사를 밝혀와 너무 안타깝다. 그래도 묵묵히 축제를 준비 중이다. 일정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지만 불빛축제가 시작되면 영일대해수욕장을 낭만의 공간으로 바꿀 것이며, 우리가 잘 아는 게임 속 한 장면이 불꽃으로 연출되는 순간도 준비해뒀다. 현대음악과 빛, 그리고 기술이 접목된 프로그램과 포항 스틸아트의 진면목을 보여줄 프로그램도 선보인다. 시민들이 소중한 사람과 더불어 즐거운 추억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을 다할 것이다.-조금은 추상적 질문이다. 인간에게 ‘공연예술’이 필요한 이유는.△문화예술은 인간의 영혼을 채워주며, 나와 주변 삶의 의미를 알아가는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그걸 통해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느끼고, 바쁜 일상 속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진실한 감정을 찾아낼 수 있다.내가 문화 관련 일을 하는 이유는 두 딸에게 줄 수 있는 작은 선물이기 때문이다. 축제 준비를 하다보면 딸들과 보낼 시간이 부족하다. 하지만, 아빠가 준비하고 모두가 함께 하는 축제는 아이들에게도 소중한 선물이 되지 않을까.-공연기획자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조언 한마디.△‘내가 저기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심장이 뛰는 직업을 가지려면 자기 일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있어야하지 않겠나. 시간과 돈을 투자해 공연장을 찾는 관객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항상 고민해야 할 것이다.-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포항은 내게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알려준 도시다. 지금까지 행복한 일을 하며 가족도 부양하고 있으니 행운이 아닌가. 이젠 내가 받은 행복과 행운을 포항시민들에게 돌려주고 싶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공연기획자를 꿈꾸는 후배들이여!‘ 내가 저기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심장이 뛰는 직업을 가지려면 자기 일에 대한긍지와 자부심이 있어야하지 않겠나. 시간과 돈을 투자해 공연장을 찾는 관객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항상 고민해야 할 것이다.

2020-03-11

궂은 날 버티며… 아시아의 경계를 넘어 유럽으로

◇ 옴스크 가는 길, 중국 라이더들과 만나다옴스크에서 드디어 현묵 군을 만났다. 대구가 고향인 현묵 군은 같은 배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고 오토바이를 열차에 실어 옴스크로 보냈었다. 러시아를 벗어날 때까지 동행하기로 했다.옷을 얼마나 껴입었는지 헤아려보니 상의만 여섯 벌이다. 티셔츠, 조끼, 슈트 내피, 슈트, 비옷, 형광조끼. 그렇게 입고도 이가 딱딱 마주칠 정도로 떨었다. 비가 눈보라로 변하더니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옷에 붙은 눈이 바로 얼어붙을 정도였다. 시베리아 날씨는 정말 종잡을 수 없다. 5월 말에 난데없는 눈보라라니.도저히 그대로 달릴 수 없어 간이 버스 정류소에서 멈췄다. 현묵 군과 다시 옴스크로 돌아갈까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찰나 10대가 넘는 오토바이가 지나갔다.라이더 10명에 지원차량 2대까지 함께 가는 횡단 여행팀이었다. 만약 그 팀이 지나가지 않았으면 다시 되돌아갔을 수도. 나중에 그들과 카페에서 만나 식사하며 인사했다. 그들은 중국 라이더였다. 여러 기업에서 후원을 받은 듯했다. 미캐닉이 동행하고 고장난 오토바이를 실을 수 있는 밴과 쉴 수 있는 캠핑카까지 갖춘 대형 프로젝트 팀이었다.이런 날씨에 아무 곳에서나 편히 쉴 수 있는 캠핑카까지 뒤따른다면 딱히 힘들 것도 없겠다 싶어 부러웠다. 그들은 상하이에서 출발해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가는 중이었다.우리도 북한과 길이 연결되어 있었다면 그들처럼 배를 타지 않고서 바로 국경을 통과해 여행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언제나 그런 날이 올지. 한 중국 라이더가 유명한 한국인 라이더를 안다고 반갑게 인사했다. 그는 김선호 씨(2018 BMW GS 트로피 한국 대표선수)와 친구였다. 그가 전화 연결을 해준 덕분에 김선호 씨와 통화까지 할 수 있었다.투먼에는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도착했지만 숙소를 잡는데 두 번이나 실패했다. 저렴한 러시아 숙소들은 대부분 폐쇄적인 출입문(?)을 가졌다. 카메라나 직접 방문자를 확인하고 문을 열어준다. 두 번째 방문했던 곳은 분명 안에서 소리가 났는데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아마 우리 꼴을 보고 수상한 사람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내 행색은 거지 중에 상거지에 가까우니….러시아에 도착하고서 내내 비를 맞고 다닌데다 외투는 한 번도 빨아 입지도 못했다. 종일 흙탕물을 맞고 다닌 터라 날이 저물 때쯤에는 꼴이 더 사나울 수밖에. 그래도 투먼 시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닌 덕에 깨끗한 숙소를 구해 들어왔다. P군이 탁월한 선택을 했다. 지금까지 묵었던 곳 중에 최고였다. 오토바이도 안전하게 둘 수 있는 주차장까지 갖추고 있었다.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아무래도 추위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하나씩 고장나는 물건들, 괜찮을까이제 예카테린부르크로 간다. 이렇게 화창할 수가. 달리기 완벽한 날이었다. 저렴하고 훌륭한 숙소에서 충분히 휴식도 취했고, 오랜만에 장도 봐서 영양 보충도 했다. 소시지에 라면에 요구르트에 치즈에 빵에 과자에... 꽤 많이 샀는데도 900루블(1만5천 원). 보드카 매대 앞에서 한참 구경했다. 어느 마트에 가더라도 주류 매대가 잘 갖춰져 있다. 우리네 같으면 큰 마트에 가야만 볼 수 있을 만한 수준이다. 그만큼 러시아인들이 술을 가까이한다는 증거겠지.러시아의 체감 물가는 한국의 절반 정도다. 물론 모스크바 같은 큰 도시의 물가는 만만치 않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저렴한 비용으로 생활할 수 있다. 옥탄가 95인 고급 휘발유 값도 45루블(850원) 정도다.러시아 사람들의 벌이를 생각하면 이 물가가 적당한 것인지 나로선 짐작할 수 없다. 일반 러시아 국민 소득 수준을 기준으로 본다면 저렴한 물가인지는 모르겠다.물건들이 하나씩 고장 나고 있다.작동불능인 에어펌프는 이미 버렸고, 시계는 5월 14일 오후 6시에 멈춰버렸다. 오기 전에 배터리를 갈고 왔는데, 이럴 수가.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에 가서 쿠델카의 손목시계 사진을 오마주 할 계획이었다. 멈춘 시계 그대로 찍는 것도 재밌을 듯하나 왜 벌써 고장 났는지. 바짓가랑이도 해졌다. 중고 슈트를 구입했으나 그동안 별 문제가 없었는데 지금에야 하필 가랑이가 찢어지다니.숙소 주인 아주머니께 실과 바늘을 빌려야 하나 고민하는 중이었는데 현묵 씨가 가방에서 꺼내주었다. 여동생이 혹시 모르니 챙겨가라 했단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안쪽으로 수선을 해야 깔끔한데 내피를 뜯어내야 해서 그냥 바깥쪽으로 임시로 꿰맸다. 면실이라 오래 버티지 못할 듯하고 나일론실을 구해 다시 꿰매는 수밖에. 계속 비에 젖었다 말랐다 반복한 부츠는 뒤꿈치 접합 부분이 점점 벌어져 비가 내릴 때는 어김없이 물이 스며들었다. 아직 여행의 초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여러 문제들이 계속 연쇄 반응처럼 일어날 줄이야.시베리아를 지나는 동안 몸도 물건도 만신창이가 되고 있지만 러시아 라이더들의 호의는 계속 이어졌다. 예카테린부르크로 가는 도중 잠시 쉬며 체인에 오일을 바르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길을 가다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줄 알고 멈춰 도와주려는 라이더가 그 시간동안 두 팀이나 있었다.◇ 우랄 산맥을 넘어 유럽에 가까워지다드디어 우랄산맥을 넘었다. 집을 떠난 지 18일째.이제 지리적으론 아시아의 경계를 넘어 유럽으로 넘어온 셈. 바이칼을 끼고 이르쿠츠크로 가는 숲길이 최고라고 했었는데 첼랴빈스크에서 우랄산맥을 넘어 우파 가는 길이 더 아름다웠다.규모에서 도저히 상대가 안 된다. 이쿠츠크 가는 길이 라이트급이라면 우랄산맥 넘는 길은 울트라 헤비급이라고 해야겠다.달리는데 정신이 팔려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다. 눈과 마음으로 담았으니 그걸로 만족한다.산맥을 넘다 자전거로 여행 중인 다이스케 군을 만났다. 알래스카에서 시작해 계속 여행 중이다. 그는 볕에 까맣게 그을린 선한 얼굴을 가졌다. 그의 여행일기장에 나의 이름을 남겼다.매일매일 꼼꼼하게 자신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었다. 쓰는 사람을 보면 반갑다. 언젠가 다시 만나 더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는 무엇을 찾아 여행 중인 걸까.우파에 가까워서 한참 길 위에서 멈춰있었다. 1시간 넘게 정체되어 있었는데 느긋하게 차에서 내려 담배를 피거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운전자들이 많았다. 그러고보니 경적을 울리는 운전자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 현묵 군이나 나나 러시아 운전자들의 오토바이에 대한 배려가 우리보다 훨씬 낫다는데 달리면서도 계속 공감했다.울란우데에 있는 ‘젊은 스쿠터’ 팀은 오토바이가 계속 말썽인 모양이다. 오토바이를 기차에 실어 모스크바로 보내고 팀원들 모두 버스로 몽골로 갔다 다시 모스크바로 향한다고. 오토바이에 문제가 생기면 몸도 마음도 지칠 수밖에 없다. 우파에 들어와서도 결국 젖을 만큼 비를 맞았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숙소에 도착하고서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맑은 날이 별로 없다. 꼭 장마철 날씨 같다.어제 가랑이 터진 바지를 겨우 꿰맸는데 오늘은 왼쪽 겨드랑이가 터졌다. 근육을 키우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옷이 해지는지 모르겠다. 나중에는 기운 자국으로 덕지덕지할 듯. 입을만한 라이딩 기어는 워낙 비싸니 돌아갈 때까지 어떻게든 바느질로 버티는 수밖에. 문제없이 달린다면 3일 후면 모스크바에 도착한다. 이제 시베리아도 거의 건너온 셈이다.    /조경국

2020-03-10

혼을 이어 가는 사람들

유구한 세월 속에서 어느 한 시점의 손길과 숨결을 느껴보는 것은 참으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조선시대 형벌 중에서 ‘유3천리’ 형을 받아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던 220여 명 중 굵직한 사건 34개를 추려내어 그들이 이곳까지 와야만 했던 사연과 남긴 흔적들을 살펴보는 일은 더욱 그랬다. 이는 그동안 어느 누구도 다루지 않았던 생소한 내용들이었기에 나름 사료들을 찾는 데는 애를 먹었다. 하지만 이 어려운 작업은 과거와 교감하는 일이었으며, 나아가 과거를 살았던 사람들과 교감하는 일이었기에 내내 행복했다.영의정을 지낸 퇴우당 김수흥처럼 이곳에서 객사한 유배인도 있었고, 충신 박팽년의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 이시애의 난에 연루된 사람들의 가족들처럼 끝까지 복권되지 않아 지역민으로 살다가 한과 애환을 품은 채 죽어간 사람들의 애환도 다루었다.다산과 우암 같은 석학들이 있었는가 하면 지방 차별과 조정의 부패에 항거하여 일으킨 농민 항쟁에 희생되어 온 사람들, 그리고 ‘정감록’의 예언을 토대로 유토피아를 꿈꾸며 왕권과 지배계층의 부조리에 저항하다가 여기까지 흘러온 사람들의 레퍼토리도 있었다.이들의 사연들을 엮어나가다 보니 어느새 파란만장했던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가 꿰뚫어졌다.글을 써내려가는 동안 유배라는 것은 억울하면서도 가혹한 형벌이었다는 부정적인 생각도 들었지만, 그 내면에는 긍정적인 부분이 더 많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조선시대 유배는 오히려 선비들에게 염치와 명분의 상징이었고, 때로는 자기완성의 공간이었으며 자기성찰의 기회이기도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이제 그들은 가고 없지만, 그들이 지나간 ‘경상도 장기(長鬐)’라는 그 자리에는 역사와 효충(孝忠)과 예가 면면(綿綿)히 흐르고 있었다. ‘귀양지’라는 부정적인 면 보다는 학문을 숭상하고 염치를 아는 사람들이 그 유·무형의 문화유산들을 고즈넉하게 간직하며 긍정의 에너지로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그 좋은 예가 2001년 12월 22일 장기초등학교 교정에 나란히 세워진 우암과 다산의 사적비였다.이 비들의 건립은 ‘장기발전연구회’의 노력과 뜻있는 지역 인사들이 앞장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장기발전연구회는 낙후된 장기(長鬐)의 발전을 염원하는 뜻있는 인사들의 모임체였다. 그 구성원들은 교수, 교사, 사업가, 회사원, 공무원, 농·어업인 등 다양했다. 매년 장기지역의 역사, 문화, 예술, 민속, 산업 및 기타 분야에 대한 조사 연구와 교육을 해온 자생단체였다.이들의 주선으로 2001년 12월 22일, 다산과 우암 두 집안의 후손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적비 제막(除幕)식이 거행되었다.다산 측에서는 법무부장관을 지낸 정해창씨가 집안사람 수십 명을 데리고 왔고, 우암 측에서도 송월술 외 여러분의 자손들이 참석하였다. 비석의 주인공들은 살아서는 결코 나란히 서지 못할 노론과 남인의 대표자였겠지만,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서 와서 어느 사람의 학문은 옳았고, 누구의 학문은 돼먹지 않았다고 평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이날 두 가문의 후손들은 각자 선조들이 유배를 왔던 이 자리에서 화합의 악수를 나눴다.장기에 독특한 흔적을 남긴 사람들에 대한 유허비도 건립했다.2008년 11월 22일, 영의정으로 있다가 기사환국 때 이곳에 유배를 와 죽은 퇴우당 김수흥 선생 유적비를 건립했다. 멀리서 퇴우당의 후손들이 참석하여 이곳사람들의 성의에 감사해 했다.회재 이언적 선생의 흔적을 찾아 그가 남긴 시를 적어 현장에 시비(詩碑)를 건립했을 때는 여강이씨 문중에서 감사패를 갖고 와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장기충효관도 지었다. 장기사람들이 민간자본 보조금을 받아 2004년 6월 19일 개관 하였다.운영비는 순전히 장기발전연구회와 지역 유지들의 협찬금으로 충당하다가 건물과 부지 일체를 포항시에 기부 체납했다.이곳에는 장기 출신 의병장, 장군, 애국지사, 예술가들의 사료뿐만 아니라 장기지역에서 출토된 유물, 그리고 각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던 각종 고서류 등이 전시되어 있다. 소강당에서는 얼마 전까지도 지역민들을 대상으로 사자소학, 명심보감, 한글·한문서예, 경전강독 등을 교육했다.역사책의 발간과 학술대회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2006년 12월 1일에 발행된 ‘장기고을 장기사람 이야기’는 장기지역의 향토사를 총 망라한 것이었다. 전국 읍·면 단위에서 이 정도 수준의 역사책을 발간하는 것은 보기 드물다는 전문가들의 혹평도 있었다.2007년 11월 14일, 포항시청 대회의실에서 ‘포항 장기현과 우암 송시열’이란 주제로 개최한 학술대회에는 정주영, 이민홍, 이종길, 김윤규, 배용일 등 장장한 석학들이 나와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뿐만 아니다. 애국지사들의 추모비 건립은 더 의미가 있다.장헌문은 구한말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은 지역출신 애국지사다. 출소 후 광복이 되기도 전에 사망하였고, 직계 유족들조차도 일제의 등살에 시달리다가 만주로 피신했다. 이후로 직계후손들의 생사조차 확인할 방법이 없었음인지 그의 공적은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았다. 점차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었던 그의 행적들을 애석히 여긴 장기사람들이 지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나섰다.후세의 본보기로 삼기 위해 장기초등학교 교정에 번듯하게 추모비를 세운 것이다. 2011년 8월 15일에 있었던 일이다.지역 출신 엄주동 선생도 항일투사로 유명하다. 장기면 임중리 출생인 그는 1916년 대종교 창시자인 나철(羅喆)과 같이 활동하다가 나철 선생이 구월산에서 일제의 폭정에 항거하여 자결한 뒤에는 만주로 건너가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총재인 서일(徐一)의 연락책으로 활약하였다. 청산리 전투에도 참여하였고, 1921년 상해로 가서 신규식(申圭植)과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22년에는 간도 용정(龍井)에서 군자금 조달을 위하여 미곡상을 경영하기도 하다가 1929년 이후에는 국내에서 서상일(徐相一) 등과 같이 군자금을 조달하는 활동을 하였다.그의 숭고한 얼을 추모하고 후세 교육의 본보기로 삼기 위하여 장기사람들은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그게 2016년이었던가 보다.이것만일까. 유배인들이 남긴 사료들을 활용한 문화관광 콘텐츠의 필요성을 깨달았다.이미 경남 남해군이 서포 김만중 등의 유배역사를 유배문학촌으로 관광 상품화 했듯이 장기도 지금까지 남아있는 흔적과 유산을 잘 활용을 하면 관광은 물론 주민들의 자긍심을 높이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여기에는 면장과 지역 시의원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고, 이강덕 시장 이하 포항시 담당자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다.장기발전연구회 이민홍 회장이 연구한 우암의 ‘적거실기’, 필자가 그때까지 여러 고서에서 찾아낸 117명(현재는 220여 명)의 명단과 이미 발행된 ‘장기고을 장기사람 이야기’등도 실증의 토대가 되었다.이를 바탕으로 드디어 2019년 3월, 장기면 서촌리 일대 1만여㎡ 부지에 장기유배문화체험촌이 개관 됐다. 이곳은 앞으로 지조와 충절의 선비문화 계승을 위한 테마공간으로 각광을 받게 될 것이다.조선시대 장기지역에는 우암을 배향한 죽림서원을 비롯해 지역의 충신과 학자들을 모시며 강학(講學)을 하는 서원이 12개나 있었다. 한 개의 현(縣)에 12개의 서원이 있었다는 것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거기다 향교까지 있었으니 지방의 교육열이 어떠했는지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그 교육열은 현대까지 이어졌다.당연히 걸출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별 네 개의 공군참모총장을 비롯한 장군, 국세청장, 도의회의장, 세무서장, 문경시장, 국회의원, 포항시장, 구청장, 정당의 위원장, 학교의 재단이사장, 교육장, 교수, 대학총장, 각 급 학교의 교장, 의사, 판·판검사, 변호사, 예술가, 문학인 등이 수두룩한가 하면, 재계를 주름잡은 굴지의 그룹 회장들이 줄줄이 나왔다.그것뿐이겠는가. 사법·행정·외무고시에 합격한 자만도 수십 명이다. 그래서 ‘장기 가서 고시자랑 하지마라’는 유행어도 생겨나지 않았던가. 근래에는 정계, 관계, 학계 등에 두루 포진해 있는 장기사람들로 인해 ‘마카다(온통) 장기판’이라는 새로운 유행어도 나돈다.장기사람들이 지금도 각계각층에서 선조들이 남긴 소중한 자산과 전통들을 이어가고 있다는 증거이다.그동안 관심 있는 많은 독자들로부터 호응과 격려를 받았다. 글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장기를 찾아 한번쯤은 유배인과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면 큰 소득이다. 장기유배문화체험촌에서 장기읍성 북문으로 이어지는 대숲 길은 숨겨진 비경이다. 그 길을 ‘우암과 다산의 사색의 길’이라 이름 붙였다. 누군가가 이 길을 거닐면서 우암과 다산이 이곳에 유배 와서 가졌을 사색과 고민이 무엇이었는지를 느낄 수 있다면 이제까지 필자가 연재한 이 졸필들의 보람으로 여길까 한다. /향토사학자 이상준끝

2020-03-10

우연히 만난 포항 바닷가자연의 아름다움에 살다

로마 시대 스토아 철학을 대표하는 세네카(BC 4년 추정-65년)는 “모든 예술은 자연의 모방에 불과하다”고 했으며, 불멸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년-1890년)도 “자연에 대한 사랑을 유지하라. 그렇게 하는 게 예술을 더 깊게 이해하는 진정한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두 선인의 말은 해방 이후 한흑구 수필을 해명하는 나침반과도 같은 명언이다.해방 이후 한흑구는 월남하여 서울에서 미군정의 통역을 맡으면서 살아간다. 그러다가 1948년 경주로 여행하러 가는 길에 우연히 포항 바닷가에 들렀다가 그 아름다운 풍경에 반하여, 아예 그곳에 정착한다.(이강언·조두섭, ‘대구경북 근대문인연구’, 태학사, 1999, 295면) 포항에 정착한 이유가 보여주듯이, 이후 그의 문학세계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깊이 천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해방 이전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하던 한흑구는 해방 이후에는 주로 수필에 자신의 창작열을 집중한다. 총 31편의 수필(한흑구 문학선집(민충환 엮음, 아시아, 2009)과 한흑구 문학선집Ⅱ(민충환 엮음, 아르코, 2012)에 수록된 수필의 합계) 중에서 해방 이후에 발표된 것은 24편인데, 이 수필들의 제목은 ‘닭 울음’, ‘나무’, ‘여름 단상’, ‘보리’, ‘눈’, ‘비가 옵니다’, ‘감’, ‘진달래’, ‘밤을 달리는 기차’, ‘새벽’, ‘길’, ‘제비’, ‘동해산문’, ‘한여름 대낮의 움직임과 고요’, ‘코스모스’, ‘석류’, ‘들 밖에 벼 향기 드높을 때’, ‘흙’, ‘노목을 우러러보며’, ‘낙엽과의 대화’, ‘봄이 오면’, ‘흰 목련’, ‘나의 필명의 유래’, ‘모란봉의 봄’이다. 이러한 제목들은 한흑구의 해방 이후 수필이 한두 편을 제외하고는 자연을 그 대상으로 삼았음을 선명하게 보여준다.자연을 대상으로 한 한흑구의 수필에는 예술적 감동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빼곡하다. 몇 가지만 꼽아보면, 비오는 날의 보리를 “보리 수염들이 파랗게 버티고 서서 은구슬 같은 빗방울들을 하나하나 줄줄이 꿰고 있습니다.”(‘비가 옵니다’, 1956)라고 표현하거나 나무들과 온갖 초목들을 “7색 무지개의 빛을 지닌, 하나의 커다란 옷”(‘감’, 1956)에 비유한 것을 들 수 있다.또한 봄의 샘물소리를 “마치 갓난애의 손가락같이 보드러운 감촉을 느끼게 하는 그 새맑은 소리”(‘봄이 오면’, 1975)라고 표현한 것도 참으로 인상적이다. 이렇게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문장들은 작가가 자연과 짙은 교감을 나누었을 때만 탄생할 수 있는 것들이다.이 대목에서 필명 ‘흑구’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일제시대 ‘흑구’가 죽어도 변치 않는 애국심을 지닌 청년을 형상화한 것이었다면, 해방 이후 포항에 정착한 이후의 ‘흑구’는 한가롭게 동해 바다를 떠다니는 지족의 현인을 떠올리게 한다. ‘나의 필명의 유래’에도 마지막 부분에 유유자적하는 갈매기의 모습을 재미있게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가 조국의 광복을 찾은 뒤에, 검은 갈매기들이 사라호 태풍에 밀리어서 동해에까지 날아와 살게 되었”으며, 그들은 “제비와 같은 철새는 아닌지 그대로 남아서, 푸르고 고요한 동해를 즐기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조국의 광복 뒤에 동해에 와서 “푸르고 고요한 동해를 즐기면서 살아가는” 검은 갈매기야말로 한흑구의 해방 이후 모습에 그대로 대응한다.해방기에 쓰여진 수필에는 해방 이전의 ‘흑구’와 포항 정착 이후의 ‘흑구’가 함께 나타난다. 식민지 시기 애국청년이었던 이력을 증명하듯이, 자연을 통해 나라와 겨레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해방 이후 처음 발표된 ‘닭 울음’(1946)에서는 닭 울음과, 해방 2주년의 국경일을 맞이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새로운 국가를 이룩하리라”는 희망으로 부르는 애국가를 연결시킨다. 이듬해에 발표된 ‘나무’(1947)도 “잎마다 잎마다 햇볕과 속삭이는 성장(盛裝)한 여인과 같은 나무”의 아름다움과 “성자(聖者)와 같은 나무”의 후덕함을 감각적이고 유려한 문장으로 찬미한다.동시에 미국에 망명 중이던 아버지가 편지마다 썼던 “너는 십일홍(十日紅)의 들꽃이 되지 말고, 송림(松林)이 되었다가 후일에 나라의 큰 재목(材木)이 되라”는 구절을 떠올린다. 한흑구의 대표작으로 회자되는 ‘보리’(1955)에서도 “모든 고초와 비명”을 견뎌낸, 그리하여 “항상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보리는 식민지와 전쟁을 이겨낸 우리 민족을 자연스럽게 환기시킨다.인생의 말년에 창작된 수필에서는 ‘푸르고 고요한 동해를 즐기면서 살아가는 검은 갈매기’ 한흑구의 모습이 보다 뚜렷해진다. ‘한여름 대낮의 움직임과 고요’(1971)에서는 “오늘과 같이 조용한 날엔 고요한 바다 위를 떠오르는 해가 보고 싶다”며 “송도(松島)의 다리를 건너고, 새로 심은 플라타너스들을 눈여겨보면서 영일만(迎日灣) 사장(沙場)”까지 걸어간다. ‘노목(老木)을 우러러보며’(1974)에서는 청하에 있는 보경사(寶鏡寺) 앞뜰에 앉아서, 하늘 높이 솟아오른 느티나무를 바라보며 자연을 향한 외경심을 느낀다. ‘흰 목련’(1975)에서는 보경사에서 “두부장수의 손종을 거꾸로 세워 놓은 듯한 모양” 같기도 하고, “옥수수 이삭을 짜개서 펼친 듯한 모양” 같기도 한 목련에 취하기도 한다.그러나 한흑구의 자연을 대상으로 한 수필이 감각과 감상으로만 가득찬 음풍농월(吟風弄月)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우주적 규모의 형이상학이 존재하니, 그것은 다름 아닌 생태주의이다. 생태주의(ecology)는 지구라는 생태계가 그 안의 모든 생명들이 분리될 수 없는 필연성으로 깊이 연결된 유기적 통일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자연을 인간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인간중심주의를 배격하고 인간도 생태계의 일부로서 자연과 상호관계를 맺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동해산문’(1971)과 ‘흙’(1974)에는 생태주의의 기본 입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표현이 여러 곳에 등장한다.‘동해산문’에는 “이 지구 위에서 인간이라는 동물들은 흙에서 나오는 것을 먹고, 물에서 나오는 것을 먹으면서 살아간다. 모든 다른 생물들도 흙과 물에서 살고, 또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이 운명을 도피할 자는 이 지구 위에는 하나도 존재할 수 없다”고 하여 유기체로서의 지구를 강조한다. 또한 “깊고 넓은 볼륨 속에는 모든 생물들과 인간의 슬픈 역사가 고이 간직되어 있는” 바다에 비할 때, “나는 한낱 인생인 것이다”라고 하여 인간중심주의와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여준다. ‘흙’에서도 “사람은 흙에서 나서, 흙에서 나오는 것을 먹으면서 살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다른 모든 생물들이 하는 것과 같은 하나의 본연의 자세”인데, “이제 사람은 흙에 대한 애정을 잃어가”서 “지구의 피부와 살을 다 뜯어먹고, 긁어먹고, 자기의 한 몸뚱이를 영원히 담아서 쉬게 할 곳도 없는 슬픈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고 한탄한다.본래 생태주의는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자연이 파괴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인류의 지속적인 생존을 담보하고자 하는 시대적 열망에서 탄생한 사상이다. 한국 문학에서 생태주의적 문제의식이 본격화 된 것이 1990년대 이후라는 것을 생각할 때, 한흑구의 수필은 매우 선구적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흑구의 수필에서 생태주의적 입장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시기가 1970년대라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때는 한국 전체는 물론이고, 그가 뿌리내리고 사는 포항이 거대한 산업도시로 변모한 시기이기 때문이다.한흑구의 포항 생활은 한 명의 문인으로서나 인간으로서 복된 시간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달관의 성자 한흑구도 어쩔 수 없는 아픔은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실향민으로서의 향수이다. 그동안 주목받은 적은 없지만, 그의 수필에는 실향민의 정서가 곳곳에 묻어난다. 봄을 맞아 꽃을 피운 진달래를 보며 “어릴 때에 보던 모란봉 위의 진달래”와 “영변 약산 동대의 진달래”(‘진달래’, 1957)를 떠올리며,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가는 밤 열차에서 “죽어도 집에 가서 죽는다”며 퇴원을 한 노인을 보면서 “이북에 있는 나의 집을 한번 다시 머릿속으로 그려”(‘밤을 달리는 열차’, 1957)보는 식이다.이러한 향수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깊어지고 생생해진다. 제비를 보며 “집과 고향은 자기가 난, 단 하나의 곳이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도 그리워하는 것일까?”라며 “깊은 노스탤지어”(‘제비’, 1969)에 사로잡히고, 벼가 익어가는 계절을 맞이하여 자신의 유년기를 회고하며 “38 이북에 두고 온 내 고향과 어린 시절의 낭만과 꿈을 되찾을 길이 없다.”는 “설움”(‘들 밖에 벼 향기 드높을 때’, 1973)을 느낀다. 타계하기 일 년 전에 발표한 ‘모란봉의 봄’(1978)은 평양을 항공 촬영한 것처럼, 평양의 대표적인 명소가 생생하게 묘사된 수필이다.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났어도 한흑구의 마음속에서는 금수산, 모란봉, 을밀대. 부벽루, 기자림 등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남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타계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작가의 영혼이나마 남과 북의 하늘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빌어본다./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3-09

어떤 어둠 속에서도 봄은 오고 꽃은 핀다

이처럼 참담하고 막막한 봄이 또 있었던가? 오십이면 많지는 않지만 적지도 않은 나이다. 그 50년 세월 동안 2020년 봄 같은 건 겪어보지 못했던 것 같다.개인의 문제가 아닌 느닷없이 이 땅, 아니 인간이 사는 지구 전체에 밀어닥친 ‘코로나19’라는 병원균 탓이다. 초대받지 않은 공포스럽고 몰인정한 바이러스.거리엔 우울한 눈빛 아래로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들이 멀찌감치 서로를 피해 다니고, 평소 점심과 저녁을 먹던 식당엔 손님이 없다.가게 주인들은 “전기세도 못 낼 지경”이라고 한다. 택시기사들 역시 “이대로라면 병으로 죽는 게 아니라 굶어서 죽을 판”이라는 하소연을 하고. 매서운 추위 뒤에 다가올 봄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던 때가 불과 얼마 전인데, 몇 주 사이에 한국 대부분의 도시가 디스토피아(Dystopia)를 다룬 SF영화 속 장면처럼 어둡고 눅눅해졌다. 앞으로도 내내 이 ‘수난의 겨울’이 끝나지 않는 건 아닐까 의심하는 이들까지 생겼다. 비관과 불안이 사회를 야금야금 파먹고 있다.확진 받은 환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대구·경북만이 아니다. 친구들 다수가 생활하는 서울도, 친인척이 사는 부산·경남도, 지인들 몇몇이 삶의 터전으로 옮겨간 유럽과 오스트레일리아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들 걱정 속을 헤맨다.이 시기면 봉오리를 터뜨리기 시작한 매화 아래로 사람들이 몰리고, 곧 난분분 꽃잎을 휘날릴 벚나무의 개화를 기다리는 게 당연한 시절을 살아왔다. 우리들 대부분이. 그런데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은 왔으나 그 봄이 봄 같지 않다.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일상은 무너지고, 웃음은 사라졌으며, 어울림의 즐거움은 자취를 감췄다. 꽃과 꽃을 피우는 나무에 대한 찬사와 동경이 사라진 오늘. 자꾸 청춘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영화 ‘희생’(The Sacrifice)을 보던 날 밤이 떠오르고19세기를 대표하는 표상주의 작가 로트레아몽(1846~1870)이 쓴 시 중에 ‘나무’라는 게 있다. 너무나 짧아서 역설적으로 길고 강렬한 울림을 주는 작품. 단 한 줄의 노래다.‘나무는 자신의 위대함을 모른다.’겨우 하나를 알면서 열을 아는 것처럼 목소리 높이던 문학청년들을 한없는 자기반성 속으로 이끌었던 시. 그들에게 의문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나무가 왜 위대한가?” 많은 이들이 대답을 찾고자 골몰했다.기자 역시 궁금했다. 그때 만난 영화가 러시아의 거장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1932~1986)의 ‘희생’이었다. 거기엔 고사목(枯死木)에서 꽃이 필 것임을 믿는 아버지와 아들이 등장한다. 아들은 언어 상실증에 걸려있다.“태초에 말이 있었다. 그러나, 너는 침묵하는구나. 마치 말 없는 철갑상어와 같이…”라는 아버지의 독백으로 시작해 마침내 입을 연 아들의 “태초에 말이 있었다죠. 그런데 그 말이 무엇이었을까요?”라는 질문으로 끝나는 영화.여기서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불어오는 바람과 떠가는 구름, 흐릿한 햇살과 강물의 흐름까지를 미세하게 포착해 영상에 담아낸다.특히 말라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부자(父子)의 모습은 감동과 눈물을 부른다.영화라기보다는 연극에 가까운 롱 테이크 화면, 오차 하나 없는 밀도 높은 카메라의 섬세한 움직임, 시나리오 속에 내포된 강렬한 메시지는 ‘희생’을 빼어난 문학작품으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현실에서 맛본 좌절감으로 인해 삶에서 희망을 찾기 힘들었던 20세기 말의 청년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함께 그들을 위로한 건 이성부(1942~2012)였다. 아니, 그의 시 ‘봄’이었다.▲그래도 놓치지 말아야 할 ‘희망’과 ‘생명’을 향한 경외영화 ‘희생’의 마지막 시퀀스는 이렇다. 언어를 잃었던 아이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죽은 나무에 물을 주던 아버지를 떠올린다.어떤 극악한 상황에서도 놓치지 않았던 생명에 대한 외경(畏敬). 메말랐던 가지 가득 푸른 잎사귀를 단 나무 아래 평화롭게 누워있는 나른한 꿈. 너와 내가 잊었지만 엄연한 청사진. 포기할 수 없는 미래의 꿈.맞다. 그랬다. 곧 멸망할 것이라던 위기의 세상과 아들을 구한 건 죽은 나무의 생명조차도 구원과 부활의 대상으로 믿었던 아버지의 꿈이었다.절망과 비탄, 눈물과 원망을 반복하는 생일지라도 포기할 수 없는 희망. 이것이 인류를 오늘의 삶으로 이끌어 왔다. 누가 그 엄연한 사실을 부정하겠는가?그래서다. 타르코프스키가 영상을 통해 전한 것과 거의 같은 메시지를 시인 이성부의 문장에서도 읽는다.‘꽃’과 ‘나무’가 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이성부는 바이러스 횡행하는 2020년 3월을 마치 예언이나 한 듯 시의 서두를 이렇게 시작한다.“기다리지 않아도 오고/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고. 그리고 연이어 그 고통과 수난을 이렇게 진단한다. 어느 순간 인간이 살아간다는 건 “뻘밭 구석이거나/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라고.하지만 시는 ‘절망의 진단’만에서 끝나지 않는다. 전망을 향해 나아간다. 이런 대목이다.“너를 보면 눈부셔/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지금으로부터 한 세대 이전을 살아온 문인들은 말했다.“시는 추락하는 것의 슬픔이 아닌, 추락을 거부하는 이들의 전망을 노래해야 한다”고.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올해는 봄이 없을 듯했다. 습기 가득한 침침한 거리,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불신의 시간을 견디는 시민들, 갑갑한 마스크 속에서 말을 잃은 이들의 두려움, 격리된 적지 않은 숫자의 ‘코로나19’ 환자들을 보며 정부조차 믿기 힘들어진 연약해진 마음.그러나, 사람이 ‘희망’과 ‘생명’에 대한 외경을 잃어버린다면…. 그건 앞서 언급한 모든 비극적 인식보다 더 위험할 터. 그래서다. 아직은 이런 말을 하고 싶다.“이성부의 시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읽고 보며 얻은 깨달음을 버리지 않길 바란다. 아무리 짙은 어둠 속에서도 꽃은 피고, 빛나는 봄은 온다. 그 믿음이 우리를 살아있게 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3-05

“청춘들이여! 생존 이데올로기 그 너머에는 뭐가 있는지 고민해보시라”

반세기 전 들었던 포항 옥계계곡의 물소리를 여전히 기억하는 시인이 있다. 10대 중반 고향을 떠난 그는 부산을 거쳐 서울에서 생활하며 영민한 문사(文士)이자 가슴 뜨거운 사회운동가로 성장했다.제주 4·3항쟁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시집 ‘한라산’, 빼어난 성장소설 ‘양철북’, 미려한 문장으로 축조한 사찰기행문 ‘피었으므로 진다’ 등을 출간한 이산하(60). 그는 작가인 동시에 민주·인권 관련 시민단체에서 ‘지식인의 사회참여’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다. 얼마 전엔 2차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된 유럽의 강제수용소로 취재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역사 속에서 인간이 입은 상처들이 내 핏줄처럼 보여 하나하나 쓰다듬어주고 싶다”고 말하는 이산하를 만나 삶과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인에겐 ‘시인의 어법’이 있으니 가급적 답변은 그의 말투를 그대로 옮긴다.-경상북도 영일(현 포항 북구)에서 태어났다. 유년은 어떻게 기억되는가.△‘전국 오지기행’이란 책에 소개될 만큼 깊은 산골이 고향인데, 해발 930m의 내연산 옥계계곡으로 유명한 죽장면이다. 거기서 크다가 중학교 1학년 끝 무렵 눈 오는 날 이사했다. 저수지에 빠져 죽을 뻔했던 트라우마와 중학교 국어선생님이 칠판에 써놓고 낭독한 ‘종달새’라는 시가 떠오른다.어릴 때 할머니가 달걀 하나를 앞에 두고 잡아보라고 했는데, 아무리 손을 뻗어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았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손을 뻗어도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세계, 그 삶의 비의가 내 문학적 화두가 아닐까 싶다.-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나 계기는 뭔지.△시골에서 도시로 전학을 가니 친구도 없고 할 수 있는 놀이와 놀이공간도 없어 우연히 도서관에 들렀다. 그런데 거기가 혼자 놀기에 너무 좋았고, 책 속엔 친구들도 너무 많았다. 매일 다양한 친구들과 사귀며 시공간을 넘어 낯선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다. 고등학교 때도 대학 갈 형편이 아니라 아예 도서관 서고에 틀어박혀 문학과 사상, 철학 관련 책들을 탐식했다.어느 날 선생님이 시 한 편을 써오라고 해서 ‘시 같은 것(?)’을 썼는데 그게 부산의 한 신문에 실린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그 뒤로도 여기저기 문학상에 응모했는데 다 당선됐다. 내 시시한 작품이 뽑힐 정도면 전국에 글 쓰는 학생들이 몇 십 명밖에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어느 시상식장에서 교수인 심사위원이 “당선자는 대학 등록금 면제”라고 해서 눈이 번쩍 뜨였다. 글을 잘 쓰면 대학도 공짜로 다닐 수 있단 걸 알았다. 그때부터 사생결단으로 써서 전국 대학 문예공모전에 응모했다. 운이 좋았던지 모두 당선됐고, 원하는 대학을 골라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됐다.-고교 시절엔 시인 안도현과 ‘한국 고교 문단’을 양분했다고 들었다.△안도현은 서로가 인정한 유일한 라이벌이었다. 1978년 ‘학원문학상’에도 같이 당선됐다. “안도현이 이상백(본명)과 한 판 붙자고 한다”는 이야길 여러 차례 들었는데 한 번도 ‘맞짱’을 뜬 적은 없다. 당시 소년문사들 사이에서 최고 인기였던 경희대 고교생 현상문예는 3학년만 응모가 가능했다. 2학년이었던 안도현은 응모 자격이 없었다. 내가 3학년일 때 그 상을 받았고, 이듬해엔 안도현이 수상했다.(웃음)-당신이 쓴 소설 ‘양철북’을 보면 한때 ‘떠도는 승려’를 꿈꾸었던 것 같은데.△고교 시절 외할머니가 주지스님으로 있던 경산의 암자에 들어가 책도 읽고 글도 썼다. 어느 날 만행 중인 젊은 스님이 들렀는데, 마치 김성동의 소설 ‘만다라’에 나오는 파계승 지산스님과 비슷했다. 그 스님과 섬진강을 따라 송광사 불일암까지 흘러갔고, 거기서 법정스님을 만나 많은 얘기를 들었다.여러 절을 보고 많은 스님을 만나기도 했지만, 평생 머리를 깎을만한 ‘결정적 사건’은 없었다. 불교는 내게 돌 위로 흐르는 강물 같은 사상이었다.-‘예민한 시인’이 학생운동과 사회 변혁운동에 뛰어든 이유는 뭔가.△어느 날 글을 쓰는데 문득 200자 원고지가 200평 토지로 보이고, 볼펜이 곡괭이로 보였다. 토지는 강의실 창문 너머 있었으니 당연히 땅을 갈아엎고 개간해서 씨를 뿌리려면 세상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많은 이들이 억압당하면서도, 스스로는 그걸 느끼지 못하던 아픈 시절이었다.-오래 교류해온 대구·경북의 문인은 누군지.△소설가 박덕규, 김완준 시인 안도현, 박기영, 백무산, 장정일 그리고 문학평론가로는 ‘김수영 전집’을 낸 이영준 교수 등이다. 자주는 못 보지만 그들의 문장을 통해 저물녘 긴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숨결을 느낀다.-당신의 책 ‘피었으므로 진다’는 사찰기행문이다. 돌아본 경북의 사찰 중 인상적이었던 곳은.△영천 은해사엔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많다. 대웅전과 보화루를 비롯해 조실스님 거처의 시흘방장, 백흥암의 6폭 주련, 그리고 지금도 최고작으로 꼽히는 불광각의 불광(佛光) 등이 모두 추사의 작품이다. 이 글들은 추사가 제주 유배에서 풀려난 60대 중반에 쓴 것들이다. 획 하나마다 가파른 숨결이 녹아 있을 텐데, 그게 어떻게 녹아서 보이지 않는지, 바로 그 보이지 않는 걸 보러 갔다.그 가운데 ‘불광’이란 편액에 대한 일화도 유혹이었다. 추사로부터 불(佛) 자의 한 획이 유독 아래로 길게 뻗은 글씨를 받은 주지스님이 목판에 새기다가 그 획이 너무 길다고 뚝 잘라버리고 새겼다. 얼마 후 은해사에 우연히 들른 추사가 그것을 보자 현판을 떼어내 불태워버렸다. 이 일화를 통해 난 법당의 부처에게 이렇게 묻고 싶었다. “손가락 하나가 길면 잘라도 좋겠느냐”고….앞으로 꼭 가보고 싶은 절은 오어사이고, 추천하고 싶은 절은 청도 운문사다. 새벽 예불이 장엄하다고 들었다.-세계 2차대전 때 유대인 학살이 자행된 곳을 두루 돌아봤다. 무엇을 느꼈나.△2년 전 ‘다크투어(참상이 벌어진 역사적 장소를 찾아가는 여행)’로 독일 베를린 작센하우젠, 바이마르 부헨발트, 뮌헨 다하우, 폴란드 아우슈비츠, 체코 프라하 테레진, 오스트리아 린츠 마우트하우젠 등 많은 나치의 강제수용소들을 혼자 답사했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지점이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있다는 것과 인간은 어느 누구든 한계상황에 처하면 단지 1% 정도의 차이밖에 없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됐다.-시인으로서, 또 인간으로서 유독 ‘역사’와 ‘상처’에 집착하는 이유는 뭔지.△모든 생명은 상처를 갖고 있고 그 상처 속에 모든 무늬가 들어 있다. 어느 상처이든 그 무늬가 내 핏줄처럼 보여 하나씩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상처 앞에서 흘리는 눈물이 역사다. 그게 나의 기원이다. 그럴 때 비로소 상처는 넓이가 아니라 깊이가 된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이 말을 두어 번 반복해 읽다보면 무슨 뜻인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최근 발표하는 작품들은 ‘이야기 시’의 형태다. 이런 형식을 취하는 이유는.△앞서 얘기했듯 세상과 인간이 지닌 상처의 무늬를 따라가는 것이다. 부사와 형용사 같은 수사학 이전으로 돌아가는 거다. 잎이 많으면 꽃이 보이지 않는다. 가끔 유골 발굴현장에 가는데 여기저기 흩어진 뼈들을 모아 온전한 모습으로 복원하다보면 꼭 마지막에 뼈 하나씩이 부족했다. 시도 그처럼 마지막에 꼭 뼈 하나가 부족하다. 그래서 모든 시는 미완성이 아닐까.-문학소년, 시인, 사회운동가, 여행자 등으로 살아왔다. 앞으론 어떤 삶을 살아갈 것 같은가.△해가 바뀔 때마다 한 살 더 먹는 건 나도 처음이라 아주 당혹스럽다.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 더욱 그렇다. 다만 그동안 게을러 과작이었던 시집을 몇 권 더 내는 게 작은 바람이다. 지금은 21년 만에 낼 새로운 시집을 정리하고 있다.-젊음을 버거워하는 오늘날 청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아무도 자의에 의해 태어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마치 자의에 의해 태어난 것처럼 너무 ‘생존 이데올로기’에만 집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나라가 병들고 썩은 이유는 ‘좌우 이데올로기’보다도 어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닐까? 이 앞에서는 면죄부처럼 모든 것이 용서된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이 면죄부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인간은 숨어있는 괴물이고 ‘기생충’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 생존 이데올로기 너머에 뭐가 있는지 고민하는 건 청춘들의 책무 중 하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3-04

끝도 없이 이어진 길… “기회를 찾아 떠나보자”

◇ 칸스크 가는 길, 드넓은 숲과 초원이르쿠츠크에서 아침 일찍 출발해 크라노스야르스크까지 가려했으나 결국 칸스크에서 멈췄다.로시를 지하 주차장에서 꺼내지 못해 출발이 늦어져 크라노스야르스크까지 가는 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지하 창고 열쇠를 가진 직원이 늦게 출근하는 바람에 일정이 꼬여버렸다.모든 짐을 챙겨 숙소 마당에 내려놓고 아침 일찍부터 직원이 오길 기다렸지만 그는 평소와는 다르게 하필 내가 출발하려는 날 늦게 출근했다. 이르쿠츠크에서 칸스크까진 약 800킬로미터, 크라노스야르스크까진 10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 아침 일찍 출발해도 크라노스야르스크에는 밤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와 도시 사이 거리가 워낙 멀고 가능하면 큰 도시에 가야만 더 저렴하고 깨끗한 숙소를 찾고 밥을 먹을 수 있으니 무리하더라도 달리는 수밖에.종일 달리기만 했다. 이르쿠츠크를 벗어나자 숲과 초원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솔직히 러시아의 넓은 땅덩이가 부러웠다. 강진 땅끝마을에서 고성 통일 전망대까지 달려봐야 700킬로미터가 되질 않는다. 2014년 작은 스쿠터를 타고 해안도로를 따라 전국일주를 다녀왔을 때 우리나라를 한 바퀴 돈 거리가 약 2200킬로미터였다. 제주도 한 바퀴까지 포함해도 2500킬로미터면 끝난다.이놈의 러시아 땅은 가도 가도 끝날 줄을 모른다. 러시아 사람들이 시베리아로 진출한 가장 큰 이유는 모피를 얻기 위해서였다. 귀족들만 입을 수 있었던 모피가 부르조아 계급의 성장으로 수요가 폭발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모피를 얻기 위해 동쪽으로 계속 이동했다. 16세기 이반 뇌제는 그들을 더욱 부추겼고 영토 확장의 기회로 삼았다. 탐험가와 사냥꾼들이 시베리아를 건너 길을 내기 시작하자 사람들도 새로운 땅을 기회를 찾아 떠나기 시작했다. 도로가 나고, 마을이 생겼다. 이반 뇌제가 영토 확장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러시아는 없었을 것이다. 단순히 모피의 수요가 늘어난 것만으로 러시아의 광대한 영토를 설명할 순 없다. 이반 뇌제의 영토에 대한 욕구는 어쩌면 광기에 가까웠을 수도.◇ 러시아 라이더 마르쫌을 만나다칸스크까지 가는 길에도 여러 번 소나기를 만났다. 비가 나를 따라다니는 건지 내가 비를 따라다니는 건지 알 수 없는 하루였다. 오후 늦게서야 날이 완전히 개기 시작했다. 하루 동안 눈을 제외한 모든 기상 상황을 다 경험한 듯 우박까지 맞아보았으니. 시베리아를 관통하는 도로는 일부 구간만 제외하곤 대부분 왕복 2차선 도로고 대형트럭들이 많아서 항상 조심해야 한다. 공사 구간도 많은데다 비까지 내리면 속도를 낼 수 없어서 오히려 더 위험하다. 중간에 비도 피하고 끼니도 해결할 겸 두 번 쉬었는데 저녁을 먹을 때 사이드카가 달린 빨간 러시아제 오토바이 우랄을 타고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의 동쪽 끝에 있는 항구도시 마가단까지 여행 중인 마르쫌을 만났다.오토바이가 비를 맞으며 세워져 있는 걸 보고 가던 길을 돌아왔다고. 만나자마자 “괜찮냐?”고 물었다. 사실 그때 나는 라면 물 끓이는 중이었는데 등을 보이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무슨 문제가 있는 줄 알았단다. 마르쫌은 모스크바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일한다고. 그의 우랄을 대충 훑어보았는데도 얼마나 자신의 오토바이를 사랑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사소한 액세서리까지도 모두 ‘깔맞춤’에 정성 들여 정비한 티가 났다. 마르쫌에게 숙소 정보도 얻고, 노보시비르스크의 실력 있는 미캐닉 연락처도 얻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여행을 즐기는 라이더들 커뮤니티가 있어 어디에 있든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했다.마르쫌 뿐만 아니라 러시아 라이더들은 외지에서 넘어온 오토바이 여행자들을 친구처럼 돕는 게 전통인 듯하다.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고 비가 잦아들 때까지 그는 차를, 나는 커피를 마시며 짧은 영어로 이런저런 이야길 나눴다. 그리고 서로 연락처도 교환했다. 젖었다 말랐다를 반복하며 숙소에 들어왔더니 쉰 냄새가 진동했다. 가장 큰 문제는 부츠, 완전 방수가 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빗물에 발가락이 퉁퉁 불었다. 옷처럼 쉽게 마르지도 않고 쉴 때마다 햇빛에 발가락을 꼼지락대며 신발 밑창도 꺼내놓고 말려야했다. 비를 피해 중간주간 쉬느라 시간을 너무 허비한 탓에 밤늦게야 숙소(오케이호스텔)에 도착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거의 5000킬로미터를 달린 셈이니 이제 겨우 러시아를 절반 지났을 뿐. 아직 10일쯤 더 달려야 러시아와 라트비아 국경에 닿을 듯하다.◇ 솜씨 좋은 미캐닉 이고르와 우랄 오토바이칸스크에선 잠만 잤을 뿐 어디 한 곳 둘러보지 않고 바로 옴스크로 향했다. 거의 1000킬로미터를 달려왔는데 숙소를 구하지 못해 옴스크 시내에서 또 빙빙 돌았다. 겨우 새벽 2시가 되어서야 방을 잡아 들어왔다. 오토바이를 안전하게 주차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하는데 그런 곳을 찾기 어렵다. 특히 주말에는 저렴하고 괜찮은 곳은 일찍 예약하지 않으면 허탕 칠 수도 있다. 옴스크 오는 길에 노보시비르스크에 들러 정비했다. 지난 번 비포장도로를 오래 달린 이후로 이곳저곳 삐거덕거리는 곳이 생겼다. 어제 만난 마르쫌이 알려준 안드레아라는 미캐닉을 찾아갔으나 자리를 비워 그의 친구를 소개 받았다. 혼다 자동차의 미캐닉으로 일하고 있는 이고르는 우랄 라이더기도 하다.로시를 받자마자 능숙하게 문제들을 해결해주었다. 부품이 없는 것은 자신의 우랄에서 빼내 로시에 이식(?)했다. 정비공장에 세워져 있는 우랄 최신형 모델에 앉아보기도 했다. 엔진 실린더가 좌우로 움직이는 수평대향 대형엔진을 사용하는 오토바이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BMW와 모토구찌, 그리고 우랄 일부 고배기량 모델에 수평대향 엔진이 장착되어 있다. 실제 주행해본 적은 없지만 장거리 라이딩을 할 때 피로가 적고 무게중심이 낮아 조작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다고 들었다. 우랄 오토바이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적국이 되기 전 BMW의 기술을 빌려 군납용 오토바이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 우랄의 시작이다. 나중에 전쟁에서 승리한 소련이 독일에 있던 BMW 오토바이 생산라인을 뜯어 와서 아예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당시 오토바이나 내가 앉아본 최신형이나 우랄의 기본 디자인은 오랜 세월 거의 변함이 없는 듯하다.이고르가 유튜브로 물이 세차게 흐르는 강을 우랄을 타고 건너는 자신의 영상을 보여주었다. 물에 완전히 잠겼는데도 시동이 꺼지지 않고 다들 강을 건넜다. 사이드카의 바퀴에도 동력을 전달할 수 있으니 웬만한 험지나 강도 헤쳐 나갈 수 있다. 매력 있는 오토바이인 건 확실하다. 하지만 국내에는 아쉽게도 수입사가 없다. 국내 오토바이 시장은 혼다, 야마하 등 일제 오토바이의 점유율이 아주 높다. 오토바이에 대한 도로 규제가 많고 시장이 작으니 다양한 우랄 같은 오토바이가 들어올 자리가 없다. 엄격한 환경 검사도 수입하기 힘든 이유 중 하나. 이고르의 꼼꼼한 정비 덕분에 든든하게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타이어 교체할 때 체인만 함께 점검하면 된다.옴스크에서 현묵 씨를 만나기로 했다. 그는 오토바이를 기차에 실어 노보시비르스크로 보냈고 거기서부터 달리기 시작했다. 블라디보스토크부터 달리기 부담스러우면 기차로 미리 실어 보내는 것도 좋은 방법인 듯하다. 현묵 씨와는 모스크바까지 함께 가기로 했다. 내내 혼자 달리다 드디어 함께 갈 동료를 만났다.    /조경국

2020-03-03

세도정치가 불러온 백성들의 난

세도정치란 국왕의 위임을 받아 정권을 잡은 특정인과 그 추종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조선의 정치형태를 말한다. 조선후기에 세도정치가 생긴 이유는 어린 왕이 갑작스럽게 왕위에 오른 탓이 컸다. 정조가 죽고 난 다음 열한 살 먹은 순조가 임금 자리에 올랐다. 이때 처가인 안동김씨 가문이 정치일선에 나섰다. 그렇게 34년 통치를 마감한 순조는 왕통을 아들 효명세자에게 이어줄 작정이었으나, 그 세자가 일찍 타계하는 바람에 왕위는 손자인 헌종에게 돌아갔다. 그때 헌종의 나이는 여덟 살 꼬마였다. 헌종의 어머니는 풍양조씨 조만영의 딸이었기에 이제는 풍양조씨가 정권을 좌지우지했다. 그 다음 임금이 ‘강화도령’으로 잘 알려진 철종이었는데, 철종의 비는 다시 안동김씨 가에서 간택되었다. 그래서 안동김씨의 세도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왕의 외척, 즉 처가나 외가가 권력을 잡았다고 해도 정직하고 바르게 정치를 했으면 별 문제가 없다. 문제는 외척세력들이 핵심 정치집단을 형성하면서 모든 권력을 장악한데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가문만을 위한 정치를 하게 되면서 부정부패가 판을 치기 시작했다. 특히 삼정의 문란이라 하여 전정·군정·환곡 등의 세금제도가 엉망이 돼 버렸다. 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가장 고통을 받은 것은 가난한 농민이었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농업기술의 발전으로 농토에서 불필요한 노동력이 다량으로 축출되었다. 이들은 결국 고향을 버리고 유민(流民)이 되어 떠돌아다니거나, 세금을 피해 산속에 숨어 살면서 화전민이 되기도 했다. 더하여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광산 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일부 광산은 이른바 잠채(潛採)라 하여 불법적인 형태로 채광되기도 했다. 농토를 잃은 유민들은 이런 광산에 모여들어 경제력을 모은 사람도 있었고, 더러는 화적패거리가 되어 횡행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이들이 조정에 대한 강한 불만세력으로 성장하였다.농민들 외에도 조정에 불만을 가진 층이 적지 않았다. 특히 평안도 지방은 대청무역(對淸貿易)이 활발해져서 유상(柳商:평양상인)이나 만상(灣商:의주상인) 가운데는 대상인으로 성장한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경제적으로 성장한 만큼의 사회적·정치적 지위가 따르지 못했다. 이들이 축적한 부(富)가 오히려 조정이나 수령들로부터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평양감사는 돈벌이가 가장 잘되는 가장 부러운 요직으로 여겨져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 유행어가 이래서 생겨났다.지역적인 불만도 갈수록 누적되었다. 과거에 합격하더라도 한양의 양반들만 청요직에 임명되었고, 서북사람들은 한직에 배정되었다. 상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세도가와 결탁한 대상인들이 모든 이익을 독차지하면서 다른 상인들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각계각층에서 일어난 이런 불만 세력들은 서로 연결되어 뭉치면서 반항의 싹을 틔웠다.그 반항의 싹이 1811년 12월 18일 드디어 밖으로 드러났다. 평안도 가산(嘉山)에서 일군의 무리들에 의해 저항의 기치가 올려 졌던 것이다. 그 중심에는 평서원수(平西元帥)라 불리던 홍경래(洪景來)가 있었다. 그는 평안도 용강 출신으로, 여러 차례 과거시험에 응시했지만 평안도 출신인 그가 합격할 수는 없었다. 사실상 평민이 된 그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비참한 삶을 목격했고, 이 상황을 갈아엎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홍경래는 비밀리에 동지들을 규합해 나갔다. 가산 지역에서 우군칙(禹君則)과 이희저(李禧著)를, 곽산 지역에서는 홍총각과 김창시(金昌始)를, 개천 지역에서 이제초(李齊初)를, 황주 지역에서 김사용(金士用) 등을 동지로 규합하였다. 이렇게 구성된 지도부는 사회에서 밀려난 다양한 계층들로 포진되어 있었다. 양반 출신인 진사 김창시가 있었는가 하면, 상업과 광업에 종사하였던 우군칙이 있었고, 대상인인 이희저도 있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지방차별 타파를 구호로 내걸었다. 당시 평안도가 안고 있던 정치·경제·사회적 모순에 대한 불만이 지역 공감대를 형성하여 이들을 하나로 묶었던 것이다.지도부를 구성한 홍경래는 평안도 가산군 다복동(多福洞)을 근거지로 삼았다. 이곳에서 광산을 개발한다며 사람들을 모았다. 삽시간에 1천여 명이 모였다.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생활이 어려운 농민층이었다. 홍경래는 이들을 봉기군으로 조직하고 군사 훈련을 시행하였다. 1811년에는 전국적으로 대흉년이 들었다. 특히 평안도는 피해가 극심했다. 홍경래는 이때가 봉기에 적당한 시기라고 판단했다. 자신이 대원수를 맡고 부원수에 김사용, 선봉장에 홍총각, 후군장에 이제초를 배치하고 우군칙과 김창시에게는 모사(謀士)의 역할을 맡겼다.홍경래는 봉기군을 남북 진영으로 나누어 행동을 개시하였다. 당시 봉기군의 초반 행로는 의외로 순탄하여 전투다운 전투 한번 없이 주변지역을 점령해 나갔다. 한순간에 가산과 곽산 관아를 접수하였고, 이후 정주·선천·태천·철산·용천·박천 등지를 접수하여 순식간에 청천강 이북의 아홉 개 읍을 점령하는 성과를 올렸다.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각 지역마다 내응세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책임한 지방관들의 태도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심지어 관청의 군교사령들이 봉기군에 가담하기까지 하는가 하면, 대부분의 수령들은 도망가기에 급급했거나 아예 항복을 해버렸다. 다만 가산군수 정시(鄭蓍)는 달랐다. 그는 끝까지 봉기군에 저항하다 살해되었다.항복한 지방관 가운데 선천부사 김익순(金益淳)도 있었다. 김익순은 김삿갓으로 더 잘 알려진 김병연(金炳淵)의 할아버지다. 가산군수 정시는 싸우다가 죽어 영웅이 되었지만, 김익순은 봉기군에 항복했기에 천고의 역적으로 몰려 참형을 당했다. 그의 집안 또한 몰락했다. 당시 여섯 살이었던 김병연은 어머니와 형 등과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어머니는 이런 사정을 어린 김병연에게는 철저히 숨겼다. 불행한 가정사를 알 길이 없었던 김병연은 성장하여 향시에서 장원급제를 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 향시의 시제가 ‘가산군수 정시의 죽음을 논하고 하늘에 사무치는 김익순의 죄를 탄식하라’는 것이었다. 김병연은 김익순의 불충에 대해서 ‘한 번 죽어서는 그 죄가 가벼우니 만 번 죽어 마땅하다’고 했다. 그는 이 글로 장원급제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익순이 바로 친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스스로 천지간의 죄인이라며 삿갓을 쓰고 하늘의 해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초반에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봉기군은 그러나 박천의 송림전투에서 패전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이어진 전투에서 거듭 패한 봉기군은 마침내 정주성으로 집결했다. 이후 3개월 동안 정주성에서 이루어진 봉기군의 저항은 처절했다. 계속되는 진압군의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적극적이면서 조직적으로 대응했다. 정주성 밖에서는 관권에서 이탈된 민심이 성에서 농성하는 봉기군을 도우기도 했다.대치가 계속되면서 진압군 측에서는 정주성의 함락이 여의치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화약을 매설하여 성을 폭발시킨 뒤에야 봉기군을 진압할 수 있었다. 그게 홍경래가 거병한 지 4개월 만인 1812년 4월 18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홍경래는 전사하였고, 약 2천938명의 봉기군이 체포되었다.한편, 난이 진행되면서 조정에서는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일선 관리들에 대해 문책을 했다. 이에 따라 조선조 정치1번지로 통했던 경상도 장기 땅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연좌된 가족들이 줄줄이 유배되어 장기(長䰇)로 왔기 때문이었다.우선 난이 채 진압되기도 전인 1812년(순조 12) 2월 6일, 정성한(鄭聖翰)을 참형에 처한 다음 가산을 적몰(籍沒)하고 연좌된 가족들을 유3천리 유배형에 처하는 판결이 있었다. 정성한이 살았던 평안도 철산부는 연대책임을 물어 현으로 강등시켰다. 이에 따라 그해 3월 28일, 정성한의 처 전녀(田女)가 장기로 유배되어 왔다.정성한의 죄목은 숙부인 정경행(鄭敬行)과 같이 충신의 후손으로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았고, 일찍부터 벼슬길에 나아가 지방 수령으로 있던 사람이었지만, 난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숙부와 조카가 나란히 봉기군의 두목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봉기군에 항복하여 용천현감이란 직책을 받기도 했다. 결국 봉기군에 군량미를 제공하고 진압군을 공격하는 등 모반 대역죄를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난이 평정된 후에도 유배행렬은 계속되었다. 1812년(순조 12)년 7월 13일, 봉기군에 항복한 평안도 서림진(西林鎭) 첨사(僉使) 김인후(金仁厚), 임용(林溶)등에 대한 처벌이 있었다. 김인후가 항복한 것은 김익순과 다름이 없다하였고, 임용은 관리로 있었으나 난리를 듣고는 적진에 자진해서 들어가서 창감(倉監)이란 직을 맡았다가 승진되어 좌수(座首)까지 했다는 것이다. 모두 모반 대역죄를 적용하여 참형에 처했고, 가족들은 유배를 보냈다. 이에 따라 그해 7월 28일 김인후의 첩 점례(占禮), 그해 11월 12일에는 임용의 조카 임도양(林道陽)이 각각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다.홍경래와 농민군이 봉기한 이유는 지역차별 없는 사회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부패한 정권의 타도를 꿈꾸었다. 난이 성공을 하면 뛰어난 능력을 지닌 진인(眞人)이 나타나 세상을 다스릴 것이라고 했다. 이른바 정감록의 진인출현설(眞人出現說)로, 지배세력의 부정을 넘어 ‘이씨왕조’의 타도까지 꿈꾸게 하는 이념이 되었다. 그러나 한계도 있었다. 지방차별 타파라는 명분이 전국적인 호소력을 갖지는 못했던 것이다. 보다 더 큰 신분제폐지나 토지개혁, 그리고 당시 사회적 모순이 집약된 삼정(三政) 문란에 대한 개혁조치가 없었다는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하지만 이 난은 세도정치를 타파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장기간의 준비를 거친 민란이었기에 19세기 농민항쟁의 선구적 역할로 평가를 받았다.평안도민의 항거에도 불구하고 부세제도의 모순은 시정되지 않았다. 철종대에 이르자 불만을 품은 민중의 항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진주민란이었다. 홍경래의 난을 경험한 일반농민층은 봉건정부의 강압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의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는 대원군 집권기에도 이필제의 난(1871) 등으로 지속되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1894년 갑오동학혁명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향토사학자 이상준

2020-03-03

시대의 아픔 통찰한 탁월한 수필가이자 포항의 대표 문인

수필은 물론이고 시와 소설, 평론, 논문, 번역 등 다방면에서 활동한 한흑구(본명 한세광韓世光, 1909-1979)는 포항을 대표하는 문인이다. 태어난 곳은 평양이지만 1948년 포항으로 이주한 이후 1979년 별세할 때까지 포항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포항에서 흐름회(1967), 포항문인협회(1970), 한국문인협회 포항지부(1979)를 창립하며 포항문학의 토대를 닦았다. 이를 기리는 많은 기념물이 포항에는 남아 있다. 청하 보경사 숲에는 한흑구 문학비가 1983년에 건립되었고, 2012년에는 호미곶 구만리에 한흑구 문학관이 조성되어 있다. 또한 두 권의 ‘한흑구 문학선집’이 만들어져, 그의 문학적 자취를 찾아보려는 이들에게 훌륭한 지침 역할을 해준다.포항에서 활동하던 무렵의 한흑구는 “온후하고 은둔적인 사색가”(서정주), “겸허와 달관으로 인생을 값있게 보내신 분”(수필가 빈남수), “겸허와 진실이 체질화된 사람”(손춘익) 등으로 불린다. 이러한 평가는 동양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 중 하나인 은자(隱者)를 떠올리게 한다. 한흑구는 부귀공명에 집착하여 자신의 지조와 생명을 헐값에 팔아버리는 속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형이었던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를 유유자적하는 갈매기와 명리를 초월한 한흑구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어울린다.그러나 이 흑구(黑鷗·검은 갈매기)라는 필명이 만들어진 계기는 낭만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필명에는 조국 잃은 청년의 짙은 슬픔과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강인한 신념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청년 한세광이 1929년 3월 대양환(大洋丸: 2만 톤급의 여객선)을 타고 아버지 한승곤이 있는 미국으로 갈 때, 검은색 갈매기 하나가 일주일이나 쉬지 않고 쫓아왔다고 한다. 한흑구는 그 검은 갈매기와 자신의 모습이 두 가지 측면에서 같다고 보았다. 첫 번째는 “옛 길을 버리고 새 대륙(大陸)을 찾아서 대양(大洋)을 건”너는 개척자적인 모습이고, 두 번째는 “조국도 잃어버리고 세상을 끝없이 방랑”하는 유랑민의 모습이다. 흑구라는 필명에는 당시로는 드물게 시카고의 노스파크대학(North Park College)과 필라델피아의 템플대학(Temple University)에서 각각 영문학과 신문학을 공부한 선구자의 자부심과 조국을 잃어버린 식민지인의 비애가 담겨 있는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흑구의 흑에는 “외로운 색, 어느 색에도 물이 들지 않는 굳센 색, 죽어도 나라를 사랑하는 부표(符表)의 색이라는 생각에서 ‘흑(黑)’자를 택하기로 했다.”(나의 필명의 유래, ‘월간문학’, 1972.6)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변치 않는 애국심과 지조가 아로새겨져 있다.해방 이전 한흑구는 필명 흑구가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산 열혈청년이었다. 한흑구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버지 한승곤 목사를 빼놓을 수 없다. 기독교적 민족주의자인 한승곤은 미국에 간 지 3년만인 1919년에 흥사단 본부 의사장에 선임될 정도로 흥사단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흑구도 미국에서 1930년 3월 흥사단에 입단하여 활동하였으며, 1934년 귀국한 이후에도 평양에서 동우회 활동을 이어갔다. (한흑구의 흥사단 활동에 대해서는 한명수의 ‘한흑구는 민족시인이다’(포항문학 46호, 2019)를 참고)일제 시기 민족운동은 크게 무장투쟁론과 실력양성론으로 나눠볼 수 있다. 무장투쟁론을 대표하는 이는 단재 신채호이며, “부지깽이라도 들고 나가서 싸우자”는 명제로 요약되는 그의 사상은 의열단의 투쟁 선언문으로 작성한 ‘조선혁명선언’(1923)에 잘 나타나 있다. 실력양성론은 조선이 식민지가 된 이유를 실력의 부족에서 찾고, 독립을 위해서는 우선 다방면에 걸친 민족계몽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실력양성론을 대표하는 이가 도산 안창호이며, 그의 사상을 실천하는 단체가 바로 흥사단이다. 한흑구가 도산의 사상에 연결되어 있음은 도산의 체포 소식을 듣고 지은 ‘잡혀간 님-도산 선생님께 드림’(新韓民報, 1932.10.6.)이라는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벌써 벌써 주고 간 님의 뜨거운 맘-아! 나를 어찌 떠나리이까?”라고 절규하는 이 시는 한흑구에게 도산이 거의 육친화 된 숭배의 대상이었음을 증명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1937년에는 아버지 한승곤 목사와 함께 흥사단의 후신인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고통을 받는다. 이 때 일제는 도산 안창호를 비롯해 180여명을 검거하였으며, 도산 안창호는 이 사건으로 사망한다.흥사단 이념에 충실하여 민족독립운동에 매진하던 한흑구의 모습은 일제 시기 창작된 수필에 잘 나타나 있다. 수양동우회(흥사단과 같은 계열의 단체)의 기관지인 ‘동광’에 발표된 ‘젊은 시절(時節)’(1933)은 세상에 당차게 맞서고자 하는 젊은이의 의기로 가득하다. 이 글에서 한흑구는 젊은이의 신조로 “사어이상(死於理想)!”을 내세운다.‘재미(在美) 6년간 추억 편편(片片)’(신인문학, 1936.3)은 제목처럼 미국에서 생활하며 경험한 여러 가지 일들을 기록한 수필이다. 여러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정신은 이 시기 한흑구의 마음 속에 가득한 민족의식이다. 한흑구는 “영문으로 창작을 힘 쓰는 동안 조선문 창작이 퇴래(退來)할 것”을 걱정하면서 “영문 공부도 조선인적 태도”로서 할 것을 결심하기도 하고, “해외에 있을 때 조선인적 태도를 몰각하는 사람”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특히 템플대학에 다닐 때 동양 학생 강연회에 조선 학생 연사로 나서, 5분간이나 연단에서 머리를 숙이고 침묵하는 장면에서는 나라 잃은 청년의 고뇌가 묵직하게 느껴진다.이 시기 한흑구는 미국 흑인들의 삶과 문학에 주목하는데, 이는 같은 피억압 인종으로서의 동질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재미(在美) 6년간 추억 편편(片片)’에는 방랑 중에 남부 흑인들이 사는 촌락을 지나며 “흑인종은 무엇하려 낳나? 목화송이나 따려 낳지!”라는 구슬픈 노래를 들으며 발을 멈추는 모습이 등장한다. 한흑구는 10여 편의 소설을 창작했는데, ‘황혼의 비가’(백광, 1937.5)는 텍사스의 목화 농장에서 여전히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흑인들의 아픔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또한 ‘미국 니그로 시인 연구’(동광, 1932.2) 등의 평론을 통해서 흑인문학을 한국에 소개하기도 하였다.한흑구는 자신의 수필관이 담긴 ‘수필의 형식과 정신’(월간문학, 1971)에서 “수필은 하나의 산문시적인 정신으로써 창작되어야 할 것이며, 줄이면 한 편의 시가 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수필의 예술성을 중요시하였다. ‘봄의 초조(焦燥)’(백광, 1937)는 일제 시기 수필 중에서 한흑구의 민족 의식과 예술적 형상화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명작이다.이 수필은 “봄이 오는 것이 반가운 한편 무섭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반가운 것이 “생의 신비와 충동과 초조”라는 단어들로 표현되는 봄의 가공할 생명력이라면, 무서운 것은 보릿고개로 상징되는 춘궁(春窮)의 고통이다. “겨우내 찬밥도 못 먹고 끼니를 굶던 젊은 색시는 늙은 부모와 그 지아비와 옷 벗은 빨가숭이 어린애를 버리고 눈물과 한숨의 겨울을 원망하며 꽃 피는 봄을 찾아 걸어보지도 못한 산길을 더듬어 도망”가는 것이다. 도망간 젊은 색시가 향하는 곳은 한반도 너머의 저 먼 곳이다. 그것은 “이렇듯 춘궁(春窮)의 한숨은 두만강을 넘고 춘궁의 눈물은 압록강을 넘는다.”는 시적인 표현을 통해 드러난다. 심지어 생존의 고통에서 도망간 처녀는 “아지랑이 같이 엷은 처녀의 꿈은 도시의 항간(巷間)을 헤매고 혹은 버드나무 푸르게 서 있는 우물(井) 속에 잠겨 버린다.”라는 암시적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도시의 어둠 속을 헤매거나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동포의 삶과 현실에 누구보다 민감한 한흑구에게 봄은 낭만과 도취의 대상이 아닌 초조함을 가져오는 잔혹한 현실(‘봄의 초조’)인 것이다.식민지 시기 한흑구는 참으로 단단한 정신과 해박한 지성으로 민족의 고단한 현실을 누구보다 깊이 있게 통찰한 수필을 남겼다. 그것은 한흑구의 본래 성품에서 비롯된 바도 있겠지만, 식민지라는 시대 상황이 서정보다는 지성을 긍정보다는 비판을 요구한 까닭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의 아픔을 탁월한 수필로 승화시킨 한흑구는, 어두워져 가는 하늘 아래 고고하게 떠올라 날카롭게 지상을 응시한 한 마리 검은 갈매기였던 것이다.본명은 세광(世光). 190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숭인상업학교와 보성전문학교에서 공부했고, 1929년 미국으로 건너가 영문학을 전공했다. 포항 수산초급대학 교수를 지냈고, 수필가, 번역문학가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수필 ‘젊은 시절’ 시 ‘북미 대륙 방랑시편’을 썼고, ‘어떤 젊은 예술가’ 등의 소설도 집필했다. 1948년 포항으로 거처를 옮겨 활발한 창작 활동을 이어갔고, 담백한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3-02

무신론자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날이 있으니…

젊은 시절. 적지 않은 숫자의 무신론자 청년들을 매혹시킨 이야기를 들었다. 아르헨티나 출신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Che Guevara·1928~1967)의 에피소드다.쿠바 혁명이 성공적으로 완수된 후 아프리카 콩고 등을 떠돌던 게바라는 죽기 몇 해 전부터 볼리비아에서 소수의 농민들과 함께 게릴라전을 펼쳤다. 그러나, 남아메리카 전체를 해방시키려던 ‘이상주의자’ 게바라의 꿈은 동료의 밀고로 인해 비극적으로 끝나버린다.볼리비아 정부군에 체포된 게바라를 미국 CIA에서 파견된 심문관이 조사한다. 둘 사이에선 이런 대화가 오갔다고 한다.심문관: “당신의 행위는 신(神)이 만든 질서에 반하는 것이다.”게바라: “신?”심문관: “그렇다. 당신도 신을 믿는가?”게바라: “아니. 난 인간만을 믿는다.”이후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게바라는 총살당했고, 이후 수십 년간 시체조차 고향인 아르헨티나로도, 그가 사랑한 나라 쿠바로도 돌아가지 못했다.기자는 신을 믿지 않는다. 무신론자다. 게바라처럼 장대하고 염결한 뜻이 있어서는 아니고, 그저 자신의 기준으로 설정한 합리와 이성의 바깥에 신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신을 믿는 사람들을 경원하거나 조롱해본 적은 없다. 세상과 사물에 대한 가치 판단은 저마다 다르다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다. 아니, 오히려 진실한 마음과 겸허한 태도로 신을 섬기는 이들에게 ‘무언가 가슴 찡한’ 감동 비슷한 걸 받은 적도 있다.▲방콕의 ‘왓 아룬’을 앞에 두고 본 광경1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태국의 수도 방콕을 몇 차례 오갔다. 거긴 일 년 내내 무더위에 혀를 빼물게 되는 곳이다. 용광로 옆에 서있는 듯한 괴로움을 떨치려 강 위를 시원스레 달리는 수상버스에 올랐던 날.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 채 멀리 보이는 탑을 향해 고개 숙이는 한 무리의 태국 사람들을 목도했다. 왓 아룬(Wat Arun·새벽사원)을 지날 때였다.수상버스가 오르내리는 차오프라야강(江) 한편에 자리한 이 사원의 늙은 나무들은 태국 아유타야 왕조의 번성과 멸망을 바로 곁에서 지켜봤다. 게다가 사원 가운데 우뚝 선 높이 80m의 불탑은 ‘우주의 중심’을 상징하고 있어 태국인들이 신령스럽게 떠받든다.바로 그 탑을 향해 공손히 머리 조아리며 무언가를 염원하는 사람들. 그 모습이 어찌나 경건해 보였던지 술에 취해 떠들던 외국인 관광객들 모두가 입을 다물 정도였다. 기자 또한 자기 외의 어떤 존재에게 희망과 꿈을 비는 광경을 오랫동안 숙연하게 바라봤다.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 신의 존재를 신뢰하며 숭배하는 사람들의 합장(合掌)을 진지하게 지켜본 건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궁금했다. 저들이 어떤 걸 기원하고, 무얼 소망하고 있는지가. 그러나 도저히 알 수 없는 일. 다만 중학교 시절 읽었던 시 한 편이 맥락 없이 떠올랐을 뿐이다. 김종길(1926~2017) 시인의 ‘성탄제’였다.▲‘앙코르 와트’는 간절한 바람이 흐르는 공간신의 존재는 ‘도저한 자기희생’과 타자를 향한 ‘조건 없는 사랑’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성탄제’에서 보여지는 아버지에게선 ‘신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추운 겨울날 ‘눈 속을’ 헤쳐 아픈 아이를 위해 ‘붉은 산수유 열매’를 따오는 가난한 아비.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자식에겐 그가 신처럼 보였을 게 분명하다.절대자에게 기대고 싶은 건 어린아이만이 아닐 터. 어른들 역시 그런 마음을 숨기고 살 뿐이다. 그래서다. 김종길은 시의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한다.“아버지(신 혹은, 절대자)가 눈 속에서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른다”고. 여기서 ‘산수유’란 분명 뜨거운 위로나 크나큰 위안의 은유일 터. 태국 이상으로 신을 믿는 이들이 많은 캄보디아에서도 저마다의 간절한 바람을 손 모아 비는 사람을 여럿 볼 수 있었다. ‘크메르 왕들의 도시’로 불리는 시엠립 앙코르 와트(Angkor Wat)에서였다.1천 년 전 크메르인들은 왕과 귀족이 죽으면 섬겼던 신과 하나가 된다고 생각했다.그런 이유로 다수의 왕들이 사후(死後) 자기와 합쳐질 신의 사원을 경쟁하듯 축조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앙코르 유적군(遺蹟群)’이다.힌두교와 불교, 10세기 전 왕과 신화 속 여신의 형상 수천수만 개가 곳곳에 산재한 거기서 보았다. 석상 앞에서 무언가를 웅얼거리며 한참 동안 미동도 하지 않고 기도하는 캄보디아인들을.대체 인간에게 신이란, 신에게 인간이란 서로에게 어떤 의미이고 존재일까? 유신론자들에겐 정말 신의 실체가 감지될까? 신은 어떤 공간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날까? 낯선 국가 사원 앞에 선 무신론자의 궁금증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누구도 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신이 보고 싶고, 신을 느끼고 싶었다.2020년 2월. 절대자에게 기대 무언가를 빌고 싶은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대구와 경상북도, 아니 한국 전체가 ‘코로나 19’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괴물의 습격으로 공황 상태에 빠진 요즈음. 조금 과장하면 도시들 대부분이 말벌집을 건드려 놓은 것처럼 불안하고 위태롭다. 누구라도 바이러스의 숙주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이처럼 흉흉한 시절임에도 점심을 먹으러 간 식당의 주인이 제 몫으로 사놓은 마스크 중 2개를 꺼내 흔쾌하게 내밀었다. 마스크 구입이 쉽지 않다는 걸 잘 알 텐데도.“이런 때일수록 뭐든 나눠야죠.” 이 말을 전하며 쓸쓸하게 웃는 그에게서 신의 그림자를 느꼈다고 하면 누군가는 터무니없는 과장이라고 할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 구창웅

2020-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