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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신도시 산업 유치구도심엔 생기를

△ 혁신도시와 원도심의 균형을 바로잡다최근 전국의 모든 지자체가 산업구조의 변화와 인구감소, 신도시 확장으로 인해 원도심 쇠퇴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혁신도시를 유치한 김천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신도시인 혁신도시가 원도심의 인구를 유입하는 현상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만, 외부지역의 인구유입이 없이 원도심의 인구만 끌어당긴다면 혁신도시와 원도심의 균형이 깨지면서 지역민들의 불만이 크질 수 밖에 없다.이에 김천시는 혁신도시의 정주여선을 개선하면서도 구도심이 활성화 될 수 있는 여러 방안들을 추진해 왔다.김천시는 혁신도시에 첨단교통 클러스터, 드론산업, 스마트 교통시티 등 미래 신성장 동력산업을 유치해 추진하고, 원도심에는 옛 명성의 회복을 위해 4개 지구에 575억원을 투자하는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추진하고 있다.특히, 원도심의 도시재생을 위해 2013년 9월 도시재생 전담조직을 구성해 전략계획을 수립하는 등 일찌감치 원도심 활성화를 준비해 왔다.김천시의 발빠른 대응으로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지산동, 평화동, 황금동 등 3개 지구가 국토교통부가 주관하는 도시재생 공모사업에 연이어 선정돼 2020년까지 312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도심재생에 참여한 혁신도시 공공기관김천시가 중심시가지형으로 추진하는 감호지구 도시재생사업에 한국교통안전공단이 참여하면서 지역 상생의 대표적인 사례가 되고 있다.감호지구 도시재생 뉴딜사업은 감호시장 장옥부지와 중앙시장 일대 19만800㎡ 부지에 2020년부터 2024년까지 263억원을 투자해 주요 거점 시설인 해피러닝 어울림 플랫폼, 은빛복지센터 조성과 뉴트로 문화공간을 조성해 원도심 활성화를 위한 기반시설을 마련하는 사업이다.한국교통안전공단과 협업해 교통정온화 기법을 적용한 교통안전 선도지구를 조성한다. 또 농기계체험 프로그램과 행복한 가게 프로젝트 등 다양한 프로그램 운영으로 물리적 환경개선과 새로운 문화컨텐츠 적용으로 지역상권 회복과 옛 전국 5대 시장의 위상을 다시 재현할 계획이다.감호지구는 혁신도시와의 거리가 5㎞로 매우 가까워 도시재생으로 추진하는 원도심 활력사업, 삶의 질 향상 사업, 상생협력사업이 원도심 뿐만 아니라 혁신도시의 정주여건 개선에도 많은 도움이 될 전망이다.△ 혁신도시가 지역 경제를 이끌다김천시에 혁신도시가 조성되고 공공기관들이 이전하면서 지역 경제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청년취업문제에도 공공기관이 도움이 되고 있다.‘혁신도시 조성 및 발전에 관한 특별법(혁신도시법)’개정안이 지난 10월 31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내년 5월부터 지역 대학생들의 공공기관 취업 기회가 대폭 늘어났다.그동안 공공기관들은 지역인재 채용을 18∼20% 수준에서 적용해 왔으나 혁신도시법이 개정되면서 30%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올해 초 한국도로공사가 지역인재를 26명 채용한 것을 감안하면 앞으로 지역 대학생들의 취업이 점차적으로 늘어나 청년취업에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김천시는 이번 지역인재 채용 확대가 지역을 떠나는 지역인재들의 유턴현상과 더불어 인구유입 효과까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또 공공기관의 급식에 지역 농산물을 우선적으로 공급하는 ‘로컬푸드’확대로 지역 농가들의 농산물 판로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혁신도시 공공기관 구내식당을 운영하는 한국도로공사, 한국전력기술 등 9개 공공기관은 지난 10월 김천시와 농업기술센터에서 회의를 열고 공공급식에 지역농산물을 확대 보급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했다. 이 자리에서 급식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농산물인 쌀, 감자, 양파, 무, 양배추, 당근, 대파 등 7개 품목을 우선적으로 지역농산물로 구매하고, 시는 이들 농산물을 차질 없이 공급될 수 있도록 했다.△ 혁신도시와 김천 미래 100년을 준비하다김천시는 드림모아 프로젝트, 국가혁신클러스터조성, 혁신도시 융복합 드론플랫폼 구축사업, 자동차 튜닝기술지원 클러스터 조성, 혁신도시 중심 미래교통 스마트시티 조성 등으로 김천 미래 100년을 준비하고 있다.또 국립구제역백신연구소, 국립구제역백신 생산지원센터, 첨단자동차 검사기술연구소와 교육원, 한전기술 일자리 프로젝트, 영남권 자동차 튜닝 인증·승인센터 설립, 건설안전교육지원센터 등의 사업도 함께 추진하고 있다.김천시는 혁신도시의 문화시설 확충을 위해 복합혁신센터 건립을 2022년 완공을 목표로 추진하고 있고, 생활체육시설 확충을 위해 한국도로공사 수영장 개방과 이전공공기관의 체육시설인 축구장, 테니스장 등을 주민들에게 개방토록 해 상생문화를 조성하고 있다.더불어 혁신도시를 자족도시로 완성하기 위해 최근 170병상 규모의 연합병원 착공을 시작으로 종합병원 유치에도 각별한 신경을 쏟고 있다.김천시는 정주여건 개선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부항댐권역을 놀거리, 볼거리, 즐길거리가 풍부한 대한민국 대표적인 관광지로 개발하고 있다. 시는 이곳에 물소리 생태숲, 산내들 오토캠핑장, 물 문화관, 패밀리 어드벤처파크, 둘레길 등을 조성했다. 전국 최고(93m) 레인보우 짚와이어, 최초(85m) 완전 개방형 스카이워크, 최장(256m) 출렁다리는 김천의 대표적인 관광상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시의 이러한 노력은 지역산업의 발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2021년 준공 예정인 김천1일반산업단지 3단계 조성사업이 현재 공정률 50%를 보이는 가운데 일찍부터 많은 기업들이 투자 의향을 밝히고 있다.김천은 KTX김천(구미)역, 경부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 김천-거제 간 남부내륙고속철도, 김천-문경 간 중부내륙고속철도 건설 등으로 뛰어난 지리적 프리미엄과 더불어 평당 44만원대의 초저가 분양가, 보조금 10% 지원우대, 고용 인원 인센티브 최대 10% 등의 혜택을 제공하고 있어 기업들의 투자가 지속적으로 이뤄질 전망이다.시 승격 70주년을 맞은 김천시가 혁신도시와 더불어 창출할 미래 100년의 청사진이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올 날이 멀지 않아 보인다. 끝/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9-12-05

땅 위의 폐허보다 더 슬픈 건 마음속 절망… 그 속에서 희망을 찾다

유럽과 지척인 이스탄불을 출발한 기차가 쉼 없이 20시간을 넘게 달렸을 즈음이다. 2층 침대가 마련된 특실에서 꼬박 하루를 먹고, 쉬고, 마시고, 자고를 반복하던 기자의 눈앞에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황량한 평원 위에 모습을 드러낸 기묘한 형상의 수많은 바위들. 지구의 풍경 같지 않았다.가보지 못했지만 화성이나 목성의 지표면이 저러할까? 그래.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터키의 아나톨리아 고원은 SF영화의 촬영지로 유명하다”는 이야기. 외계인과 우주에서 온 괴물 에일리언(Alien)이 등장하는 몇몇 영화가 떠올랐다. 함께 하이데라파샤역(驛)에서 기차에 올라 꼬박 하룻밤을 함께 보낸 터키의 노부부는 놀라움의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한국에서 온 사내를 보며 소리 내 웃었다.“조금 더 달리면 더 기막힌 풍경이 나타날 테니 그만 놀라고 기다려봐.”▲인간의 ‘의지’와 자연이 선사한 ‘물’로 건설된 고대도시터키의 수도는 앙카라.거기서 남동쪽으로 220km 가량을 달리면 아나톨리아 고원에 우뚝 선 카파도키아(Cappadocia)가 모습을 드러낸다. 예전엔 여러 차례의 화산 폭발이 있었다는 그곳은 ‘황무지와 폐허가 어떻게 아름다움으로 진화하는가’를 보여준다.화산의 재가 오랜 시간 빗물에 섞여 만들어진 독특한 카파도키아의 바위는 어떤 건 버섯 모양이고, 어떤 건 우주선 모양이며, 또 다른 건 고대 유럽신화에 등장하는 용(龍)의 형상을 하고 있다.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척박한 땅. 식수를 구하기도 쉽지 않을 듯 보였다. 하지만, 거기서도 인간은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삶을 이어갔다. 자그마치 2천 년 전부터. 그 배후엔 종교 탄압이 있었다.그 옛날 카파도키아에 정착했던 이들은 고향에서 쫓겨난 기독교도들이었다. 그들은 중장비 하나 없이 사람의 힘만으로 거대한 바위의 내부를 파내고 거기에 드넓은 지하도시를 만들었다. 곳곳에 암벽화를 그려 넣는 ‘예술적 행위’도 진행됐다. 인간은 인간이므로, 인간이 못할 일은 없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경이로운 시대였다.얼핏 보기와는 달리 그 지역엔 다행히 ‘물’이 있었다. 그 물로 농사를 짓는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인간의 의지와 자연이 준 물. 이 2가지가 폐허 위에 도시를 건설할 수 있게 했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폐허’ 혹은 ‘황무지’라는 단어를 떠올리니 마음 한편이 쓸쓸하고 서늘해졌다.사실 자신이 살아가는 곳을 모래바람 부는 황량한 땅이라고 느끼는 건 고대의 터키 사람들만이 아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적지 않은 수의 한국인이 자신이 발 딛고 선 나라를 황무지나 폐허처럼 느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정치적 후진성과 경제적 불평등, 문화적 빈곤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예술가들이 특히 그랬다.시인 최승자(67)의 ‘197×년의 우리들의 사랑’은 후진성·불평등·빈곤의 시대를 서럽고 아프게 형상화한 ‘디스토피아적 묵시록’. 이런 노래다.▲수난과 시련을 이겨내는 힘... 희망과 생존욕구까마득한 시절인 2세기 후반.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배척했다. 황제에게 머리 조아리는 걸 거부한 기독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카파도키아 지역으로 숨어들었다. 마치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만들어놓은 은둔지(隱遁地)를 찾아가듯.척박하지만 신비로운 풍경이 그들을 매료시켰다. 이런 타의에 의한 이주는 200년 넘게 계속됐다. 또 다른 수난도 있었다. 7세기 무렵 무슬림과 벌인 종교전쟁은 살벌하고 무서웠다. 창과 칼에서는 불꽃이 튀고, 피 냄새가 진동하던 시절이었다. 신들의 다툼 아래서 인간이 희생됐다.폐허에선 꽃을 피우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카파도키아 정착민들은 희망과 꿈을 버리지 않았다. 다시 바위산을 깎고 동굴을 뚫어 또 다른 지하도시를 세우고, 배수구와 식량 저장창고 등을 만들어냈다. 어떤 형태의 수난과 시련도 인간의 생존욕구를 온전히 꺾지 못했다.최승자가 묘사하는 ‘197×년’은 실체라기보다는 마음속에 존재하는 폐허의 시대다. 당시 한국 사회를 통치한 군사독재 정부는 젊은이들을 ‘잠들어 있거나 취해 있거나 아니면 시궁창에 빠진 헤진 신발짝처럼 더러운 물결을 따라 하염없이 흘러가기’를 원했다. 그들이 세상과 삶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버리기를 바랐다.하지만, 부도덕한 위정자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시인의 말처럼 ‘노쇠한 혈관을 타고’서도 ‘그리움의 피는’ 흐르는 법. 그 시기의 한국 사람들은 처참한 현실을 거부하며 ‘꿈속에서도 행군해 나갔다’. 구원의 메타포인 ‘그리움의 어머니’를 찾아가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그 결과가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닐까.▲터키와 한국, 두 나라 역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카파도키아도, 우리나라도 황무지와 폐허의 시절을 온몸으로 겪어냈다. 시대와 장소는 판이하지만 거기서 얻은 교훈은 동일하다.“땅 위의 폐허보다 더 슬픈 건 마음속 폐허다. 그걸 이겨내는 건 인간의 의지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터키 아나톨리아 고원지대를 여행한 후로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시간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세상에는 여전히 폐허와 황무지가 많다는 게 눈에 보인다.전쟁의 위험성이 상존하는 아프리카와 아랍, 인종 차별과 이민자 혐오가 지속되는 미국과 유럽, 기아와 절대빈곤을 벗어나지 못한 남미와 아시아…. 더 서글픈 건 사람들 마음 안에 존재하는 열패감과 허망함이다.그래서다. 기자는 오늘도 폐허를 아름다움으로 바꾼 희망을 되새긴다. 그것만이 황무지로 느껴지는 세상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므로.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류태규

2019-12-05

사랑스런 목가적 풍경도, 비극적 역사의 공간도 한달음 거리에

언덕배기 양떼목장서 양들과 친해지다하얗게 곱슬거리는 부드러운 털, 어떠한 세속적 욕망도 읽히지 않는 맑은 눈망울, 거기에 통통하고 동글동글한 몸까지. 양을 본 사람들은 남녀와 노소를 불문하고 “착하고 귀엽게 느껴져 쉽게 다가설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가축 가운데 아이들이 특히 좋아하는 것도 양이 아닐까. 그래서다. 칠곡군 지천면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칠곡 양떼목장엔 주말이면 ‘꼬마 관광객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목장에서 ‘양 먹이 주기 체험’을 진행하는 아주머니는 “처음엔 겁을 먹고 아빠나 엄마 뒤에 숨어있던 아이들도 건초를 날름날름 받아먹는 어린 양들을 가까이서 보면 금방 친해진다”며 웃었다. 하루에 한두 명쯤은 “양을 데려가 우리 집에서 키우겠다”며 부모에게 떼를 쓰는 애가 있다고 한다. 정겹고 재밌는 풍경일 듯했다. 이 목장에선 면양과 함께 젖을 짜는 양, 타조, 색깔이 고운 여러 마리의 닭도 함께 키운다. 트랙터가 끄는 관람차에 올라 목장을 한 바퀴 도는 체험 프로그램은 아이들에게 최고의 인기다. 책과 TV 화면에서나 보던 동물들을 직접 만날 수 있기 때문. 날씨 좋은 토요일이면 양젖을 짜는 체험장 역시 아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는 게 목장측의 설명이다. 살아있는 동물과의 교감은 아동들에게 풍부한 감성과 생명에 대한 애정을 기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는 이미 오래 전 아동학자들이 검증한 사실. 칠곡 양떼목장은 성인들에게도 흥미로운 공간이다. 기자 역시 양에게 먹이를 주며 잠시잠깐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자신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들에게 무언가를 베푼다는 건 어른들에게도 뿌듯한 감정을 선물하는 법이니까.이곳을 찾아온 연인들은 목장에 마련된 조그만 상점에서 구워 먹는 치즈를 구입하기도 한다. 바로 옆 따뜻한 휴게실로 들어가 난로를 앞에 두고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다. 매캐한 연기 가득한 도시의 술집에서 삼겹살과 함께 구워 먹는 치즈와는 또 다른 맛이리라.양떼목장 상점에선 직접 만든 치즈와 멸균된 양젖도 맛볼 수 있다. 직접 먹어보니 우유로 만든 치즈보다 담백한 맛이 혀끝을 감돌았다. 양젖 또한 평소엔 마셔보기 어려운 것이라 연거푸 두 병을 들이켰다.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관광·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시작한 이 목장은 “동물이 행복한 농장, 동물의 행동이 자유로운 농장, 사람과 동물이 함께 하는 농장”을 지향한다고 한다. 홈페이지를 통해 방문과 체험관광 예약이 가능하다.◇칠곡 양떼목장 홈페이지: http://79yangtte.kr/호국평화기념관서 ‘평화의 시대’를 생각하다전쟁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인간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 또한 1950년부터 3년간 같은 민족끼리 서로의 가슴에 총을 겨눈 비극의 역사를 경험했다. 칠곡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침입을 막던 ‘최후의 저지선’ 역할을 수행했다. 50일 넘게 이어지던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선 헤아리기 힘든 많은 수의 군인들이 포탄 아래 쓰러졌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자유는 그들의 희생 덕분이라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석적읍에 세워진 호국평화기념관은 70여 년 전 나라와 대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었던 영혼들을 위로하고자 만들어졌다. 이와 더불어 다시 발생해서는 안 될 전쟁의 처참함과 비극성까지를 후세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기념관 내부에 마련된 ‘호국전시관’에선 한국전쟁의 시작에서부터 낙동강 전투, 인천상륙작전, 정전 협정까지의 과정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대 초반 풍경을 실감나게 재현한 세트장도 눈길을 끈다.‘4D 영상관’으로 입장하면 어떤 명예나 대가도 바라지 않고 어머니와 조국을 위해 전쟁의 불길 속으로 자신의 몸을 던진 ‘이름 없는 군인들’의 이야기와 만날 수 있다. 호국평화기념관 뒤편엔 55m 높이에서 대형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그 아래 서면 한국전쟁 때 희생된 젊은 군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내가 두려움을 떨치고 죽음 앞으로 뛰어든 이유가 궁금하다고? 전쟁이 사라진 평화의 시대를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위대한 시인의 흔적을 찾아 구상문학관으로다수의 문학평론가들은 말한다. “그는 신(神)의 품에 기대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한 점잖은 작가”였다고.칠곡은 시인 구상(1919~2004)의 본적지다. 지척인 대구에선 영남일보 편집국장과 주필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니 칠곡군 왜관읍에 ‘구상길’이 있고, 거기에 구상문학관이 들어선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해 작품 활동을 했고, 서울대와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등 여러 곳의 대학에서 제자들을 길러낸 구상 시인은 독재정권의 사상적 탄압에 의연히 맞선 지사(志士)이자, 넉넉한 품과 혜안을 지닌 교육자였다. 칠곡군이 내세워 자랑해도 좋을 문인이다.구상문학관은 작지만 알차게 꾸며졌다. 시인이 생전에 사용하던 필기구와 안경, 모자가 단정하게 놓였고, 친필 원고와 함께 구상 시인을 추모하는 후배 작가들의 작품도 여럿 전시돼 있다. 문학관의 동선은 시인의 탄생에서부터 소멸까지를 연대순으로 돌아볼 수 있도록 구성됐다. 한 시절 단아한 선비로 살아온 예술가의 85년 세월이 자연스레 느껴진다. 구상 시인이 기증한 3만 권에 가까운 책은 2층에 보관됐다.문학관 입구엔 ‘그리스도 폴의 강’을 새긴 시비(詩碑)가 방문자들을 기다리고, 지척엔 화가 이중섭이 자주 드나들었다는 시인의 집필실 관수재(觀水齋)가 복원돼 있다.‘관호산성 둘레길’서 초겨울 산책을 즐기다해질 무렵 불어오는 찬바람이 겨울의 문턱에 들어섰음을 느끼게 한다. 이런 시기엔 평소 하던 운동도 이유를 만들어 피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춥다고 매일 방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는 노릇.‘걷기’는 돈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운동 중 하나다. 방한 점퍼와 머플러가 준비된 사람이라면 칠곡 ‘관호산성 둘레길’을 걸어보라고 권한다. 이곳에서의 산책은 건강이란 선물과 함께 초겨울 낭만까지 맛보게 해준다.낙동강을 따라 이어진 둘레길은 서로의 몸을 맞대고 서걱이는 마른 갈대의 노래들로 가득하다.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의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 중 ‘겨울’ 도입부가 절로 떠오른다.칠곡군 역시 이 길을 “최고의 도보여행 코스”라고 말한다. 호국의 다리를 지나 칠곡보까지는 25분, 칠곡보 입구에서 관호산성과 무림배수장으로 가는 구간은 1시간 남짓이 소요된다.건강과 낭만을 얻기 위해 그 정도 시간쯤 할애 못할 이유가 없다./홍성식·김재욱기자

2019-12-04

풍미 진한 이국의 맛… 제대로 만든 토종의 맛

‘경양식 맛집’ 2곳왜관은 왜(倭)인들이 살던 지역이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왔던 사신들, 한반도 영주권자들, 왜인 상인들이 살거나 일시 묵었던 곳이다. 한국전쟁 후에는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미군 부대 담을 따라서, 마치 외국을 옮겨 놓은 듯한 간판들이 여러 곳 있다. 한때 유행했던 경양식(輕洋食)집들도 많다. 이제 경양식은 사라졌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미군 부대 주변의 경양식집들’. 그중 두 집에 갔다.‘40년을 지켜온 집밥 같은 전통 경양식’. 가게 벽에 크게 써 붙인 문구다. 그럴듯하지만, 뭔가 어색하다. ‘집밥’과 ‘경양식’? 뭔가 묘하다. 어느 가정에서도 경양식을 일상의 음식으로 여기지 않는다. 전통 40년? 이것도 묘하게 다가온다.왜관 미군기지는 캠프 캐럴(Camp Carroll)이다. 미군 병참기지로 1960년에 조성했다. ‘한미식당’은 1980년 문을 열었다.‘한미식당’의 음식 수준은, 오히려, ‘40년 전통’의 맛을 넘어선다.이 식당의 대표 메뉴 ‘코던블루’는 ‘꼬르동 블루’다. ‘코르동 블뢰(Cordon bleu)’는, 절대권력의 프랑스 기사단이 사용한 ‘푸른 리본’이다. 푸른 리본을 단 기사들의 만찬에서 ‘코르동 블뢰’가 시작되었다. 음식 이름이면서 동시에 ‘최고의 만찬’을 뜻한다. ‘코던블루’는 일본식 발음 ‘코돈부르’의 변형이다. 유럽의 코르동 블뢰가 일본식 코돈부르로, 한글 표기로 ‘코던블루’가 된 것이다. 음식도 유럽, 일본을 거쳐 한국식으로, 이름도 마찬가지 길을 밟았다.음식 이름으로 ‘코던 블루’는 고기튀김이다.얇게 편 고기에 햄과 치즈 등을 넣고 돌돌 말아서 기름에 튀겼다. 김밥처럼 동글동글하다. 유럽인들은, 커트렛의 원형인 오스트리아식 슈니첼 형태로 만든 것은 특별히 ‘슈니첼 코르동 블뢰(Schnitzel Cordon Bleu)’라고도 부른다. 슈니첼은 송아지 고기다. 유럽에서는 대부분 쇠고기로 코르동 블뢰를 만들지만, 돼지고기, 닭고기도 사용한다.‘한미식당’ 메뉴 ‘시내소’는 ‘슈니첼(Schnitzel)’을 재미있게 표현한 것이다.돼지고기 요리는 냉장 원육을 사용한다. 주인이 일일이 손으로 다지고, 펴서 튀김옷을 입히고, 튀긴다. 변형 유럽 음식이지만, 놀라울 정도의 정성을 기울인다. 접시에 음식을 펼친 모양새도 아주 좋다.메뉴가 상당히 단출하다.‘돈까스’, ‘함박스테이크’, ‘샌드위치’ 3종류다. 유럽 출발, 일본 경우, 한국에 정착한 경양식 메뉴의 ‘정수’만 모았다.돈가스는 오스트리아 슈니첼에서 출발, 일본에서 돼지고기 튀김으로 바뀐다. 슈니첼은 기름을 두르고 어린 송아지 고기를 지진 것이지만 일본식 돈가스는 기름통에 튀김옷을 입힌 돼지고기를 완전히 넣고, 튀긴다. 딥 프라이드(deep fried) 방식, 일본식 ‘뎀뿌라’다.햄버거는, 잘 알려져 있듯이, 함부르크 항구 노동자들이 처음 먹었다는 음식이다. 함박스테이크는 ‘햄버거+스테이크’다. 고기를 다져서 굽는다. 고기 패티는 다진 것이다. 일본은 경양식의 주요 메뉴로 ‘햄버거+스테이크’를 일본식으로 발전시켰다. ‘아메리칸레스토랑’의 함박스테이크는 유럽, 미국, 일본을 거쳐 한반도에 정착한 것이다. 미군 부대 옆에 ‘아메리칸레스토랑’이 있는 것은 자연스럽다.단출한 메뉴지만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이다. 소스도 오래전 ‘경양식’의 풍미가 살아 있다.‘장어 맛집’ 2곳얼마쯤 생뚱맞다. 내륙인 경북 칠곡과 장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칠곡에는 빼놓을 수 없는 장어 맛집이 2곳 있다. 업력 30년을 넘긴 노포와 곁들이 반찬이 아주 좋은 가게다. 두 집 모두 바닷가의 장어전문점보다 오히려 낫다.칠곡에서도 지천면 창평리는 외진 곳이다. 인근에 ‘칠곡 양떼목장’이 있다. 30년 이상 된 노포다. 2대 전승 중. 아들 부부가 어머니에게 가게를 물려받는 중이다. 30년 이상의 세월 동안 장어전문점으로 자리를 잡았다.장어 손질이 상당히 깔끔하다. 잡냄새는 없애면서 장어 맛은 살렸다.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각종 장류와 소스. 직접 담근 장으로 음식을 조리한다. 소스도 은은한 향이 아주 좋다. 조미료 없이, 장과 소스로 장어 맛을 살렸다. 장어 곤 국물은 대단하다. 잘 만진 곰탕 같다. 색깔도 곰탕 국물 같이 뿌옇다. 붉지 않다. 잘게 썬 대파를 넣고 마시면 장어의 비린내 대신 희미한 곡물 냄새가 난다. 장어를 곤 다음, 여러 번 곱게 거른 것이다. 한때 점심 메뉴로 내놓았지만, 지금은 장어요리를 주문하면 서비스 메뉴로 내놓는다. 곁들이지만 대단한 정성을 기울여 만든 국물이다. 다른 장어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메뉴다.칠곡에서는 가장 ‘핫(hot)한’ 식당이다. 칸막이가 있는 실내와 넓은 주차장이 좋다고 표현한다. 음식이 수준급이라는 표현이 맞다. 음식 만지는 내공이 깊다.콩나물, 무나물의 간이 아주 좋다. ‘슴슴한’ 맛과 감칠맛이 돋보인다. 장아찌도 특이하다. 당귀 장아찌는 흔하지만, 당귀 잎사귀로 만든 장아찌는 드물다. 장아찌이면서 짜지 않고, 물기도 적당히 살아 있다. 부추장아찌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음식. 질기고 거친 부추 대와 이파리를 그대로 살렸다, 당귀 잎사귀, 부추 모두 향도 좋다.‘제대로 만든 음식’은 특출나게 만든 음식이 아니다. 평범한 재료로, 누구나 아는 방식으로, 그러나 제대로 만든 것이다. 이 식당의 음식들이 그러하다.경북 지방에서는 배추전, 무전을 제사에 사용한다. 귀한 음식이라기보다 필수적인 음식이었다. 무전은 사라졌고, 배추전도 다른 지방에서는 귀하다.제대로 만든 무전은 ‘충분히 잘 익었지만, 질감이 살아 있는’ 형태다. ‘청록식당’의 무전이 꼭 그러하다. 잘 익었지만 사각사각한 식감이 제대로 드러난다.장맛 좋은 식당의 음식을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식사로 내놓는 어탕국수도 수준급이다. 된장찌개는 대단한 수준. 장어와 고기 등을 파는 집의 된장찌개 수준을 넘어섰다.칠곡의 맛집 3곳‘진땡이국밥’은 국밥집이라기보다는 순대 전문점이다. 대창순대와 막창순대가 좋다. 국밥을 주문하면 순대와 더불어 내장 등을 뜨거운 육수에 토렴한다. 잘 만진 순대, 부속물에 잘 곤 국물의 맛을 더한다. 칠곡전통시장 안의 허름한 집이다. 채소, 고기를 갈아 넣어서 직접 만든 순대는 ‘전국구 맛집 수준’이다.‘소미할매칼국수’는 엉뚱하다. 칠곡군 약목면에 있다. 제법 먼 곳인 안동의 ‘건진국시’ ‘제물국시’를 칠곡에서 살렸다. 메뉴가 모두 5개. 뜨거운 칼국수, 건진칼국수, 잔치국수, 겨울철 메밀묵, 여름철 콩국수 등이다. 메밀묵을 제외하고 가격은 모두 5천 원.‘건진칼국수’는 안동의 ‘건진국시’다. 칼로 곱게 썬 칼국수를 삶은 후, 물에 헹군다. 맑은장국에, 삶아 건진 국수를 넣어서 먹는다. 뜨거운 칼국수는, 제물국수다. 멸치 육수 등에 칼국수를 넣고 그대로 삶은 후, 양념해서 먹는다. 2대 전승.‘지란방’은 화상 노포다. 메뉴가 단출하지만 재미있다. 고기만두, 꾼만두, 진교스다.고기만두는 바오쯔[包子, 포자]다. 만두 윗부분을 보자기 틀듯이 묵었다. 중국인들은 ‘바오쯔’라고 부르지만, 한반도에서는 만두다.꾼만두와 진교스는 교자로 만든다. 꾼만두는 자오츠[餃子, 교자]를 구운 것이다. 진교스는, ‘찐 자오츠’다. 교자를 찐 것이다. 이 식당의 추천 메뉴는 ‘진교스’ 찐 교자다.바오쯔는 피로, 발효한 곡물을 사용한다. 껍질이 두텁고, 부드럽다. 자오츠는 생피다. 뜨거운 물에 반죽한(익반죽) 곡물 피를 사용한다. 쫄깃하고 비교적 얇다.화상들이 한반도에서 지속적으로 변형시킨, 그러나 원형을 지니고 있는 포자, 교자다./음식평론가 황광해

2019-12-04

달문(達文)이를 아시나요

1764년(영조 40) 4월 초순경이었다. ‘달문(達文)’이란 사람이 역모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의금부의 추국(推鞠·특명으로 중죄인을 신문함)을 받는다. 이 사건에 대한 수사가 마무리된 그 해 4월 17일, 이상묵(李尙默)이란 사람이 달문이를 사칭한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되었다. 이를 두고 ‘이태정(李太丁) 역모사건’이라고 한다.달문이란 누구일까. 그는 1707년생으로 성은 이씨요. 이름이 달문이다. 이달문은 조선 팔도를 뒤흔든 최고의 스타 연예인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18세기 ‘아이돌’이었던 것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산대나례(山臺儺禮)였다. 산대(山臺)는 큰 길가나 빈터에 마련한 임시 무대를 말하는 것이고, 나례는 본래 귀신을 쫓는 의식인데, 광대놀음으로 더 잘 알려진 연희였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나 중국 사신의 행차를 환영하기 위해서 광화문 앞 대로변에 임시무대를 세우고 나례를 거행하였다. 이때는 으레 탈을 쓴 광대 달문이가 주연으로 등장했다. 그가 나타나면 장안의 풍류와 무협을 숭상한 유협(遊俠·협객)의 부류들이 그를 상석(上席)에 앉히고, 마치 왕을 모시듯 떠받들었다고 한다.달문은 단지 몸놀림으로 줄타기나 땅재주를 부리는 광대가 아니었다. 재담이나 흉내 내기와 같은 연기에도 타고 났다. 땅재주를 부리는 중간에도 눈을 흘기며 비뚤어진 입에서 지껄이는 어릿광대의 연기와 입심은 가히 따라갈 자가 없었다. 언젠가는 길을 가다가 자기들끼리 치고박고 싸우는 사람들을 보았다. 달문이 갑자기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흉내내자 싸우던 당사자들이 웃느라 싸움을 멈췄다는 이야기도 있다.우상에 가까운 명성에 비해 달문의 출신성분은 미미했다. 미천한 거지출신에다 얼굴마저 못생겼다고 한다. 입은 비뚤어졌는데, 그것도 너무 커서 얼굴의 반은 입인 것처럼 보였다. 몰골도 꾀죄죄해 째진 눈에 눈곱이 덕지덕지 끼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소싯적에는 청계천의 거지 패거리와 어울리면서 당시 하층사회에서 크게 유행했던 각종 연희를 골고루 배울 수 있었다.그가 특기를 보인 연희는 만석중놀이와 철괴무, 팔풍무였다. 만석중놀이는 황진이의 미모에 빠져 파계했다는 지족(知足)선사를 조롱하는 내용의 탈춤으로 조선 후기에 널리 공연됐다. 철괴무(鐵拐舞)는 이철괴(李鐵拐)라는 기괴한 모습의 신선을 흉내내면서 동쪽으로 달리다 서쪽으로 내닫는 역동적인 춤으로, 산대놀이의 하나였다. 팔풍무(八風舞)는 남사당놀이의 땅재주넘기와 유사한 놀이였다.달문이는 전국 순회공연도 다녔다. 1747년 무렵, 그는 영남을 시작으로 호남, 호서를 거쳐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돌아다니며 공연을 했다. 스타 광문이 고을에 나타나는 날이면 천민에서부터 사대부까지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달문의 고객 중에는 어사 박문수도 있었고, 좌의정 벼슬까지 했던 풍원군 조현명도 있었다. 그는 머리를 길게 땋은 채 장가도 들지 않은 추남이었지만, 그와 공연을 함께하는 기생들은 절세미인들이었다. 광문이 때때로 재상가집 연회나 왕손들의 잔치에 초청될 때면 이름난 기생들을 이끌고 가서 한껏 풍류를 과시하기도 했다.달문이 뭇 대중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뛰어난 재주 못지않게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측은지심의 마음씨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이런 면모는 당대 및 후대 문인들의 관심을 끌었기에 여러 편의 문학작품으로도 형상화되었다. 어려서부터 달문의 이야기를 즐겨 들었고 실제로 만난 적도 있다는 연암 박지원(朴趾源)은 달문의 의로운 행실을 알리기 위해 광문자전(廣文者傳)이란 소설을 지었다. 실존인물 달문을 ‘광문’으로 이름을 바꾼 이 소설은 비천한 거지인 광문의 순진성과 거짓 없는 인격을 그려 양반·서민 가릴 것 없이 인간은 다 똑같은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고, 권모술수가 판을 치던 당시의 양반사회를 은근히 풍자했다.이것뿐만 아니다. 역관이자 시인인 홍신유는 달문가라는 서사시를 지어 예술가로서의 달문의 삶을 조망하였다. 그 밖에도 이규상, 이옥, 조수삼 등도 달문에 관한 이야기를 문학작품으로 남겼다. 이처럼 달문의 명성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자,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일이 발생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역모 사건에 그가 말려든 것이다.때는 1764년(영조 40) 봄, 달문이 쉰여덟 살 되던 해였다. 경상도 영남지역에서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주동자는 1728년에 일어난 무신난(戊申亂·이인좌의 난)의 잔당으로 영남지역에 숨어살던 이태정이란 사람이었다. 이태정은 나주목사로 있다가 나주괘서사건에 연루되어 죽음을 맞은 이하징(李夏徵)의 서자(庶子)였다. 따라서 이태정의 역모사건은 반영조의 기치를 내건 소론의 실세회복을 위한 것이었다. 이태정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 방법을 강구하다가 당시 전국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던 달문의 명성을 생각해냈다. 사회적 분위기로 봐서 달문이의 인기를 이용하면 민초들의 세력을 쉽게 규합할 수 있을 것 같았다.이태정은 자신을 달문의 친동생 ‘달손(達孫)’이라고 속였다. 그의 공범인 작은만(者斤萬)은 한술 더 떠서 자신이 달문의 아들이라고 사칭했다. 이들은 같은 무리인 이상묵(李尙默)과 같이 노비, 점쟁이, 승려 등의 천민세력을 규합하였다. 예상했던 대로 세력이 규합되자 이들은 나라를 원망하는 망측스러운 말을 지어내고, 또 음흉하고 참혹한 시(詩)를 지어 퍼뜨리고 다녔다.그런데, 달문이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떠꺼머리총각이라는 사실은 온 조선 땅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 그에게 동생과 자식이 있다고 했으니 의심을 품은 홍유(洪洧)라는 사람이 관가에 이 사실을 고발함으로써 일당들이 모두 붙잡히게 된다.1764년 4월 17일, 영조가 직접 사복시(司僕寺)에 나아가 영남 죄인 작은만·홍유·이상묵·이달손(李達孫)·강취성(姜就成)과 승려 도행(道行)·문담(文淡) 및 달문 등을 친국(親鞫·중죄인을 임금이 직접 신문함)하였다. 이달손이 자신은 이태정임을 밝히고 대역부도죄를 시인하자, 영조는 숭례문에 직접 나아가서 그를 참수형에 처했다. 그의 처자도 연좌시켜 노비의 적에 올리고 재산은 몰수했다. 나머지 가담자들은 모두 정상을 참작하여 멀리 귀양 보내도록 했다. 이때 가담정도가 경미한 작은만은 진도(珍島)에 유배되었고, 이상묵은 경상도 장기(長鬐)로 유배가 결정되었던 것이다.그런데, 정작 조사를 해보니 달문은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영조는 그를 죽이려했다. ‘머리가 반백인데도 총각의 모습을 꾸며 인심을 현혹시키고 풍속을 괴란하였다’는 이유였다. 영조가 이런 착상을 하게 된 근거는 중국의 예에 따른 것이었다.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경공이 협곡(夾谷)에 나들이를 나갔는데, 이때 오랑캐가 풍악을 울리고 광대가 희롱을 하며 나오자 공자가 제후에게 ‘필부(匹夫)로 제후를 현혹한자는 죄가 마땅히 참수하여야 한다’고 건의하여 처단한 사례가 있었던 것이다.주위에서 반발이 심했다. 만약 달문을 죽일 경우 민란이라도 일어날 기세였다. 영조도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를 죽이지는 않고 함경도 경성(鏡城)으로 귀양을 보냈다. ‘달문은 승려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데 인심을 미혹시켜 역적 이태정이 그 모습을 본뜨고 그 말투를 본뜨게 했다. 비록 본건에는 연루된 일이 없으나, 그 사람 자체가 난리의 근본이므로 변방에 유배 보낸다’는 이유를 달았다. 역모에 가담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영조의 눈에는 달문의 행적이 곱게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전국을 누비며 민초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달문은 언제든지 세력을 모아 자신에게 도전해 올지도 모르는 위험인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영조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거듭된 만류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이가 많은데도 머리를 땋아 내린 자는 적발되는 대로 무겁게 다스리라’고 전국에 공포할 정도로 민감하게 대처했다. 이게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조선 최초의 장발단속 규정이다.원래 작은만이란 사람은 경상도 개령(김천시 개령면)에 있는 수다사에서 밥을 빌어먹던 사람이었다. 그는 관상을 보고 점을 치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절에 사는 스님들이 달문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스님들은 모두가 달문이를 칭찬하고 그리워하는 것이었다. 작은만은 달문이의 이름을 팔면 구박받지 않고 절밥을 더 잘 얻어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내가 바로 그 달문의 아들입니다’라고 했다. 스님들이 깜짝 놀라 그때부터 작은만을 지극정성으로 대접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본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바로 역모를 꾀하던 이태정이었다. 그는 작은만이 스님들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는 것을 보고 자신도 달문이를 이용하면 쉽게 사람들을 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작은만에게 자기를 작은아버지라고 불러주면 앞으로 함께 부귀를 누릴 수 있다고 꾀었다. 그때부터 작은만은 이태정을 삼촌이라 불렀고, 이태정은 자신이 달문의 친동생처럼 행동하게 된 것이다.이런 일로 달문은 경성에 유배 갔다가 다음해 9월 5일에 방면됐다. 달문이 유배에서 풀려 한양으로 돌아오자 남녀노소가 떼거리로 몰려나왔다. 구경꾼들로 인해 한양의 저잣거리가 한동안 텅 빌 정도였다고 한다. 달문의 인기는 그 사이에도 식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달문은 옛날의 그 달문이 아니었다. 열혈 팬들의 환대를 마다하고 어디론가 훌쩍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온 나라를 들썩이게 한 명성을 뒤로한 채 홀연히 사라진 그를 사람들은 추억하며 그리워했다.달문은 왜 이렇게 유명세를 탔을까. 비록 가문이 몰락하여 걸인의 생활을 하였지만, 신의와 의협심이 남달랐다. 남들이 업신여기는 기생과도 인간적인 교유를 맺었다. 외모가 못 생기고 어리석게 보였으나 생각이 깊고 남을 배려할 줄도 알았다. 심지어 자신의 인기와 명성을 이용하는 자들로 인해 억울한 유배생활을 하고 돌아왔지만 원망하지도 않았다.복잡다단한 인생 역정을 지닌 광대 달문의 삶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절정에 닿은 인기를 마다하고 바람처럼 사라져 오히려 더 유명해졌던 이달문. 그의 파란만장한 행적들이 가을걷이 끝난 빈 들판처럼 허허롭게 다가온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12-03

손맛·눈맛·입맛 사로잡는 볼락 “감성돔이랑도 안 바꿔”

겨울은 동해안 낚시의 최적기다. 낚시는 푸른 바다에서 힘차게 헤엄치는 물고기들의 생명력과 만나는 행위. 주목받는 젊은 작가이자 프로급 낚시꾼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이병철 시인이 동해안 곳곳을 누비며 낚시의 세계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이 연재는 12월 한 달간 진행될 예정이다.다시 겨울이 왔다. 계절에도 표정이 있다면, 겨울은 쓸쓸하고 삭막한 무표정의 얼굴이다. 봄의 생기와 여름의 정열, 가을의 너그러움을 모두 떠나보내고, 이제 어둡고 차가운 겨울을 오래토록 마주해야 한다. 잎을 버린 나무들은 빈 우듬지에 허공을 매달고, 강과 호수는 꽁꽁 얼어붙어 겨울 햇살이 아무리 쓰다듬어도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짐승도, 사람도 움츠러든다. 꽃이 사라진 거리의 빈곳을 크리스마스 전구 불빛들이 채우고 있지만, 찬바람이 파고드는 가슴까지 따뜻하게 하지는 못한다.낚시꾼들에게도 겨울은 궁핍한 계절이다. 나는 섬진강변에 산수유, 매화, 벚꽃이 차례로 피는 봄에 쏘가리 낚시를 시작한다. 봄철 동안 쏘가리랑 잘 놀다가 쏘가리 금어기가 되면 바다로 걸음을 돌린다. 태안, 보령, 홍성, 서천, 군산, 부안 등 서해안에 황금어장이 열리는 시즌이기 때문이다. 갯바위에서 우럭, 광어, 쥐노래미 등을 수확하고, 레저보트로 연안 홈통과 곶부리를 치고 빠지며 여름 농어의 손맛을 만끽한다.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낚시로 반찬거리를 장만하느라 분주하다. 백조기 낚시를 한번 다녀오면 한 일주일은 집에 조기 굽는 고소한 냄새가 끊이지 않는다. 주꾸미와 갑오징어는 또 얼마나 별미인가? 한번 낚시에 보름쯤은 넉넉히 먹을 만큼 잡곤 한다. 그런데 호시절은 다 끝났다. 서해안 낚시는 12월이면 사실상 종료된다. 차가운 북서계절풍과 한류의 영향으로 바다가 얼음장처럼 냉랭해지기 때문이다.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서해안 낚시가 종료되는 순간 동해안 낚시가 개막되기 때문이다. 겨울 동해는 태백산맥이 찬 공기를 막아주는 데다 난류가 흐르고 또 수심도 깊어 따뜻하다. 12월이 되면 황금어장은 서해에서 동해로 옮겨 온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자연의 섭리인가? 낚시꾼은 축복 받은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어서 울진으로, 영덕으로, 포항으로, 경주로 달려가자. 볼락, 부시리, 방어, 농어, 감성돔, 성대, 우럭, 노래미, 호래기, 참돔, 벵에돔 등 온갖 물고기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겨울 동해안 낚시 기행’의 첫 번째 주인공은 볼락이다. 많고 많은 물고기 중에서 왜 하필 조그마한 볼락을 첫손에 꼽았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작고 앙증맞은 볼락이 감성돔과 농어 같이 크고 늠름한 생선들을 제치고 기행문의 첫 손님으로 초대된 까닭은, 귀하기 때문이다. 볼락은 주로 동해와 남해에서만 만날 수 있다. 동해안이 볼락 낚시터라고는 하지만, 삼척 위로 올라가면 개체수가 급감해 좀처럼 보기가 쉽지 않다. 수심이 깊고, 난류가 흐르며, 수중 암초가 잘 발달된 경북 동해안이야말로 볼락 낚시의 메카인 셈이다. 특히 겨울은 볼락 낚시가 호황을 이루는 계절이다. 1월 전후로 산란을 위해 연안의 해조류와 몰밭으로 몰려드는데, 방파제 테트라포드와 석축, 갯바위, 내항 어디서든 탈탈거리는 볼락 특유의 손맛을 볼 수가 있다.낚시에는 흔히 세 가지 맛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손맛이고, 둘째는 눈맛, 그리고 셋째가 입맛이다. 볼락은 이 세 가지 맛을 모두 충족시켜주는 어종이다. 찌낚시와 선상 카드채비 낚시도 많이 하지만, 볼락은 최고의 루어낚시 대상어다. 7피트 전후 울트라라이트 액션의 낭창한 낚싯대에 1천∼2천번 소형 릴, 그리고 0.3∼0.6호의 가느다란 합사 낚싯줄을 사용한다. 1∼3g 정도로 가벼운 지그헤드에다가 1.5∼2인치 웜을 끼운 후 연안의 해조류 지대나 수중 암초 등 장애물 지형에 던져 느리게 릴링을 하면 ‘후두둑…’하는 입질과 함께 돌 틈으로 처박으려는 달음질에 짜릿한 손맛을 만끽할 수 있다. 물 밖으로 꺼내 올린 볼락은 참 귀엽고도 아름다운 자태를 지녀 심미안을 만족케 한다. 꼿꼿하게 펼쳐 세운 등지느러미는 마치 왕관 같고, 크고 동그란 눈은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난다.그런데 이 손맛과 눈맛을 다 합쳐도 입맛에는 견줄 바가 못 된다. 나는 우리 바다에서 나는 생선 중 볼락이 가장 맛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회, 구이, 매운탕, 튀김…. 어떻게 요리를 해도 다 환상적이다. 얼마나 맛있으면 경북 동해안 지역 사람들은 ‘바다의 황태자’인 감성돔과도 바꾸지 않는다고 한다. 잡히는 족족 산지에서 다 소비가 되어 서울에선 맛보기도 어렵다. 가끔 구이나 매운탕을 하는 식당들이 있지만, 볼락회를 내는 곳은 보지 못했다. 싱싱하게 펄떡이는 볼락을 회로 썰어먹는 기쁨은 오직 동해안에서, 낚시를 통해서만 누릴 수 있는 것이다.이토록 장황한 ‘볼락 예찬’을 먼저 하지 않고서는 글을 써내려갈 수 없다. 사실 이 말들로도 부족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볼락 낚시가 너무나도 하고 싶어져서 견딜 수 없다. 얼른 원고를 갈무리하고 낚싯대를 챙겨 포항으로 달려가야겠다. 엊그제 다녀왔지만 또 가고 싶다. 가서 볼락을 만나고 싶다. 낚시꾼은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물고기가 연인인 마냥 보고 또 보고, 보면서도 계속 보고 싶어 한다.지난 주말, 포항 남구 구룡포의 한 방파제를 찾았다. 이번 겨울 들어 처음 나선 볼락 낚시라 가슴이 몹시 설렜다. 낮에 도착해 낚시 준비를 하고, 방파제 주변 연안을 살펴보니 볼락의 은신처이자 산란장이 되는 몰밭이 꽤 형성돼 있었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몰밭 주변으로 야행성인 볼락들이 모여들어 활발하게 움직일 것이다. 볼락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아직 빛이 환하지만 집어등부터 켜두었다. 집어등 불빛을 보고 멸치나 꼴뚜기 등 작은 먹잇고기들이 몰려들면 그걸 잡아먹기 위해 볼락들도 모이게 된다. 그런데 캄캄한 밤에 갑자기 불빛을 밝히면 오히려 볼락의 경계심만 높아지므로, 미리 집어등을 켜두는 게 좋다. 밤낚시가 가장 효과적이지만, 해질녘과 동 틀 무렵 볼락들이 먹이활동을 부지런히 하는 이른바 ‘피딩타임’에만 집중해서 해도 스무 마리쯤은 너끈히 잡아낼 수 있다.이맘때 포항의 겨울은 포근하고 부드럽다. 분홍빛 석양이 지는 저녁 수평선을 바라보며 채비를 던지면, 한 번은 볼락이 물고 올라오고, 또 한 번은 낭만이 걸려 올라온다. 동해의 맑고 푸른 물살이 일으키는 해풍은 상쾌한 향기를 지녀서, 숨을 쉬면 들숨에 피가 맑아지고, 날숨에 고민과 걱정이 빠져나간다. 낚시는 단순히 물고기를 잡는 수렵 및 채집 행위가 아니라 신체와 정신을 모두 건강하게 만드는 스포츠이자 명상, 치유 행위인 것이다.채비를 던질 때마다 톡, 하고 입질을 하는 녀석들은 다 1년에서 2년까지밖에 아직 자라지 않은 ‘젖뽈’(작은 볼락을 칭하는 낚시꾼 은어)들이다. 열쇠고리만 한 어린 볼락들을 잡고 놔주고, 잡고 놔주고 하는 사이 드디어 ‘피딩타임’이 됐다. 물 속 암초와 테트라포드가 시작되는 물턱 자리에서 ‘후두둑’하는 시원한 입질이 연달아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달음질치면서 내 손에 짜릿한 진동을 안겨주는 볼락들은 20cm 전후의 완전한 성체, 포획 금지 체장인 15cm를 훌쩍 넘기는 놈들로만 골라 넣었는데도 살림통이 금방 찼다. 어느 정도 마릿수는 채웠으니 이제는 큰 놈을 노려야 한다. 30cm가 넘는, 민물 붕어로 치자면 ‘월척’에 해당하는 ‘왕사미’(대물 볼락을 뜻하는 은어)를 잡기 위해 나는 채비를 바꾸고, 낚시 장소마저 옮기기로 했다. 새 포인트로 가는 길, ‘왕사미’를 향한 기대와 ‘꽝’에 대한 걱정이 번갈아가며 내 가슴을 두드려댔다. /이병철(시인)

2019-12-01

아쉽고 아쉽고 아쉽지만 잘 가.. 청춘

마주 앉은 상대방의 왼쪽 어깨 너머로 에펠탑 꼭대기가 보이는 프랑스 파리의 소박한 야외 카페. 가게 안 스피커에선 니콜로 파가니니(Niccolo Paganini)의 ‘라 캄파넬라(La Campanella)’가 흘러나오고 있었다.클래식에 관해 아는 바 적지만 저건 분명 여성 바이올린 연주자다. 정돈되고 세밀한 현악기 소리가 해질 무렵 도시의 공기를 감미롭게 만들어줬다.천재성과 광기 사이에서 일생을 어지럽게 살아야했던 절름발이 화가 툴루즈 로트렉(Toulouse Lautrec·1864-1901)이 좋아했을 법한 포도주를 주문했다. 낯선 도시의 밤이 서서히 다가와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지인에게 소개 받아 그날 처음 만난 청년의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북아프리카 모로코에서 프랑스로 이민 왔다고 했다. 고생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아들과 딸, 손자를 잘 키워냈다. 한국 대학에서 1년간 교환학생으로 있었다는 청년은 프랑스어는 물론 영어와 한국어까지 능숙했다. 세칭 ‘글로벌시대에 어울리는 20대’였다.▲석양이 질 때면 떠오르는 ‘첫사랑’은 누구에게나 있다프랑스어도 영어도 서툰 기자에게 한국말을 곧잘 하는 청년은 자연스럽게 친구가 됐다. 무슬림이라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았지만, 한국 유학의 경험 때문인지 주석(酒席)의 분위기를 맞출 줄 알았다.나이에 관계없이 사내 둘이 만났으니 ‘여자’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여자 이야기는 곧 ‘첫사랑’에 관한 기억으로 이어졌다. 스물다섯 살 어린 ‘파리 친구’는 노래를 잘 부른다는 연인 이야기를 길게 했다.그 아기자기한 스토리를 고개 끄덕여 들어주며 떠올린 시가 있었다. 청춘을 아프게 반추하는 안도현의 절창 ‘저물 무렵’이다.▲빛나는 ‘연애시대’는 중년들에게도 있었으니…지금이야 신세대들로부터 ‘고루한 아저씨’ 취급이나 받고 살지만, 1980~1990년대 청춘을 보낸 중년에게도 왜 찬란한 ‘연애’가 없었겠는가. 흰 머리카락이 날마다 늘어가는 기자와 친구들도 마찬가지.스마트폰도 멀티방도 없던 시절의 연애는 단순하고 유치했다.비가 내리는 날이면 언제 수업을 마칠 지도 모르는 ‘고등학교 3학년 오빠’를 교문 앞 골목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던 감청색 교복 치마의 열일곱 여고생이 적지 않았고, 여자 친구의 생일선물로 한 달 용돈을 모두 털어 주머니 위에 말(馬)이 그려진 청바지를 사는 소년도 흔했다.20세기 말 ‘연애시대’는 가난하고 순박했다. 그랬기에 애처롭지만 아름다울 수 있었다.시인 안도현은 1980년대에 청춘을 보낸 사람. 앞서 인용한 시에서 웃음보다는 눈물, 환희보다는 우울의 향기가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 아닐지.아무리 찾아봐도 데이트 할 장소가 없어 해가 지는 강둑에 나란히 앉아 불과 몇 십 km 떨어진 이웃 도시의 이야기나 들려주고, 듣는 것 외엔 별반 할 게 없었던 어린 연인들.짧디짧은 한 번의 입맞춤이 일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는 연애. 그렇다고 이걸 ‘21세기식 사랑’보다 아래의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지난 세기에 10대와 20대를 보낸 이들에게 저물 무렵의 어스름과 곧 다가올 농밀한 어둠은 ‘우리가 세상을 물들이는 어린 노을’임을 깨닫게 해줬다. 그 힘으로 그들은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중년들에게 과거는 모두 ‘아늑하고 평화로운 날들’로 기억될 수 있는 것.그나저나 안도현의 시를 중년이 돼 다시 읽으니 궁금해진다. 요즘 젊은 친구들도 첫 키스를 아래와 같이 수줍게 기억할까?“어느 날 그 애와 나는/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포개었던 날이 있었습니다/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애의 여린 숨소리를/열 몇 살 열 몇 살, 내 나이를 내가 알고 있는 산수 공식을/아아 모두 삼켜 버릴 것 같은 노을을 보았습니다…”.▲옛일을 떠올리며 새벽까지 파리의 밤거리를 걷다가이민자의 손자인 프랑스 청년으로 인해 유쾌했던 저녁 자리가 끝이 났다. 악수를 나누고 웃으며 그를 배웅했다.그러고 나니 다시 혼자가 됐다.해가 지자마자 일찍 숙소로 돌아가 씻고 잠드는 건 아이들에게나 어울릴 일이지 오십에 가까운 중년사내의 여행 스타일은 아니다.파리의 어둠과 서유럽의 밤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하고 정한 곳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포항 영일대해수욕장 해변을 산책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기분으로.에펠탑 밑 벤치엔 한 세기 전 그랬듯 그날도 밀어(蜜語)를 속삭이는 연인들이 가득했고, 불 밝힌 골목의 고풍스런 극장에선 화려한 쇼가 펼쳐진다는 걸 홍보하고 있었다.더 한적하고, 더 어둡고, 더 낯선 장소로 가고 싶었다. ‘예술과 낭만의 절정’이라는 파리의 밤, 그 반대편의 맨살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고 싶었다. 취기 탓만은 아니었다.이윽고 한참을 걸어 도착한 센강의 지류. 오렌지빛 가로등이 드문드문 자리를 지켰으나 주위는 인적이 드물고 캄캄했다. 마침내 ‘거대 도시’ 파리에서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잠깐 사이에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다. 그때였다. 강 건너편 젊은 남녀 한 쌍이 눈에 들어온 것은. 일부러 보려한 건 아니지만 둘의 입맞춤은 길고도 뜨거웠다.순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내게는 저런 청춘시절이 다시 오지 않겠지’란 생각이 들었고, 무어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슬퍼졌다.그러나 그 슬픔과는 별개로 센강의 물소리는 신지아의 바이올린 연주처럼 청아하고 아름다웠다. 아이러니한 파리의 새벽녘이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11-28

자동차 튜닝·유통·판매·전시 원스톱 시스템 구축

△ 김천혁신도시, 지역발전의 거점이 되다올해 시승격 70주년을 맞은 김천시는 혁신도시를 신선장 동력으로 삼아 새로운 100년의 비전을 구상하고 있다. 이를 위해 김천시는 드림모아 프로젝트, 국가혁신클러스터 조성, 혁신도시 융복합 드론플랫폼 구축사업, 자동차 튜닝기술지원 클러스터 조성, 혁신도시 중심 미래교통 스마트시티 조성 등을 혁신도시 이전 공공기관과 함께 적극 추진하고 있다. 이 중 드림모아 프로젝트는 12개 공공기관과 공동협력을 통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발굴하는 상생협력 프로젝트로, 현재 △국가혁신 융복합단지 △스마트물류 4.0프로젝트 △드론산업 혁신거점단지 △한국전력기술 파워업 프로젝트 △한국도로공사 스마트교통 프로젝트 △국가재난안전클러스터(허브) △기업 혁신성장 타운 등이 추진되면서 김천의 미래 산업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자동차 튜닝산업의 메카로김천시는 한국교통안전공단의 혁신도시 이전을 계기로 자동차 튜닝산업을 지역전략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여 왔다.전문가의 자문과 용역을 통해 사업 타당성 확보를 시작으로, 비즈니스 모델 발굴, 수요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자동차 튜닝산업을 미래 먹거리 산업으로 준비했다.김천시의 이러한 노력으로 지난 7월 한국교통안전공단과 친환경자동차, 첨단자율주행자동차, 특수목적자동차 등 운행차의 안전성 확보를 위한 인증·승인·기술검토를 수행하는 ‘튜닝카 성능·안전 시험센터’ 건립 업무협약을 체결했다.‘튜닝카 성능·안전 시험센터’는 튜닝에 의한 운행자동차의 안전도 확보를 위한 튜닝기술검토를 실시하고, 신기술을 접목한 튜닝, 자율주행자동차 등 미래형자동차 튜닝에 대한 성능·안전시험, 튜닝항목 개발 및 확대를 위해 추진하는 사업으로, 김천시는 김천1일반산업단지 3단계 지원시설 용지 내 3만3천㎡에 414억원(국비 250억원, 도비 65억6천만원, 시비 98억4천만원)을 들여 2021년 착공할 방침이다.특히, 자동차 튜닝 범위에 전기차도 포함되는 만큼 전기차의 고전압배터리 작동 여부, 절연저항 여부, 수소이음매 누출 여부, 수소배관 손상여부 확인, 고전원전기장치 및 수소의 과열상태 확인 등 전기차의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역할을 센터가 수행하도록 할 계획이다. 김천시는 센터가 건립되면 국내 자동차 튜닝산업의 지형이 완전히 재편되면서 김천시가 자동차 에프터산업의 메카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미래 자동차산업을 선도하다한국은 연간 국내 자동차 400만대를 생산하는 세계 7대 자동차 강국이지만, 각종 규제로 자동차 에프터 마켓으로 불리는 튜닝산업은 성장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김천시와 한국교통안전공단이 추진하는 ‘튜닝카 성능·안전 시험센터’는 국내 튜닝시장을 활성화 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김천시는 자동차 튜닝산업에 걸릴돌로 작용하는 각종 규제를 풀기 위해 정부의 과감한 규제혁신을 요구하고 있다.김천을 지역구로 하고 있는 송언석 국회의원도 튜닝업체가 안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튜닝할 수 있도록 하는 자동차관리법 일부개정안을 대표 발의하는 등 김천시가 추진하는 자동차 에프터산업에 힘을 보태고 있다.김천시의 지형적 특성도 자동차 튜닝산업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충남과 영남권에 소재하고 있는 자동차 관련 업체들의 입장에서 김천시에 ‘튜닝카 성능·안전 시험센터’가 들어설 경우 물류비 절감, 인증, 승인 절차에 따른 시간 절약, 제작차 및 부품 제조 기업에 대한 지원 등이 수월하기 때문이다.여기에 김천시가 제작차 기업과 부품제조 기업을 유치할 수 있는 산업단지를 조성하면서 생산, 유통, 판매, 장착, 전시, A/S가 원스톱으로 지원되는 복합단지로 만들 계획이어서 벌써부터 관련 기업들이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김천시가 추진하는 미래 자동차 산업의 규모는 이미 여러 기관들의 연구 결과로도 나타났다.한국노동연구원은 지난 2015년 자동차 튜닝관련 규제완화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국내 자동차 튜닝시장은 2020년 이후 4조원대로 확대되고, 약 4만명의 고용찰출 효과가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한국교통안전공단 역시 2016년 ‘튜닝산업 현황분석 및 전망’보고서에 튜닝시장은 2015년 3조4천억원에서 연평균 4.18%씩 성장해 2020년 4조1천억원으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김천시가 자동차 튜닝산업을 미래 먹거리 산업으로 선정해 강력하게 추진하는 이유다.△ 융복합드론 플랫폼을 구축하다김천시는 미래 4차산업혁명을 이끌고 있는 드론산업에 주목하고 있다. 드론은 문화, 스포츠, 교통, 환경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면서 미래 먹거리 사업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김천시는 고난이도 페인팅 드론 개발 등 융복합 드론 플랫폼 구축을 위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드론산업 지역특화 방안 연구용역을 지난해 완료한 김천시는 융복합 드론 플랫폼 구축에 10억원 예산을 반영하고, 국토부에 드론 시범공역을 신청했다.이를 통해 고층 및 위험지역 등 구조안전 확보와 도색을 위한 특수드론을 개발하는 RD사업을 진행하고, 드론 개발과 시험을 위한 스마트드론혁신센터를 건립할 예정이다. 또 국토부 공모사업인 드론비행시험장을 유치할 계획이다. 김천시의 이러한 계획에 한전기술과 김천대, 경운대와 더불어 전국의 여러 기업들이 참여희망 의사를 보내고 있다.김천시는 융복합 드론 플랫폼이 구축되면 드론 관련 기업 유치 뿐 아니라 특수목적용 프리미엄드론 개발과 생산으로 김천을 대한민국 드론 특구로 육성할 방침이다.김천시는 드론과 관련한 다양한 사업도 전개하고 있다.지난 9월에는 국제드론축구대회를 개최해 큰 관심을 받기도 했다. 올해 처음으로 열린 이 대회에는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일본 등 4개국과 국내 등 60개 팀이 참가해 경쟁을 펼쳤다.특히, 개막식에서 100대의 드론이 밤하늘을 수놓은 비행쇼와 미니드론레이싱 대회, 드론체험존, 드론산업 박람회 등이 함께 열려 김천시가 드론산업의 거점도시임을 증명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9-11-28

절대비경, 그 느린 시간 속을 버스 타고 한바퀴

짙푸른 바다가 주는 낭만을 사랑하는 관광객, 복잡한 도시에서의 일상을 벗어나고픈 여행자에게 울릉도는 지상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유토피아’에 가깝다. 어떤 필설로 도동항 파란 물빛과 나리분지의 적요한 평화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울릉도에선 ‘아름다운 자연’이란 문장이 은유나 상징이 아닌 직설이 된다. 바로 이 울릉도를 최근 버스를 타고 일주했다. 그 경험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포항을 출발한 배가 3시간째 항해를 계속했다. 파도가 높지 않아서인지 울릉도를 향하는 썬플라워호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지레 겁을 집어먹고 멀미약을 잔뜩 챙겨 온 게 후회될 정도였다. 19세기 유럽 표상주의의 거장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1854~1891)의 시(詩) ‘취한 배’ 마지막 페이지를 덮자 선내 방송이 울릉 도착을 알렸다. 섬의 관문인 도동항이다.“이곳이 울릉도입니다”라고 누가 말하지 않아도 선착장 곳곳에서 해풍과 햇빛에 맛있게 말라가는 오징어가 울릉 특유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렇다. 울릉도에 무사히 온 것이다.점심시간이 훌쩍 넘었기에 도동항에서 오징어회로 허기를 달랬다. 먹물을 뿜으며 펄펄 살아 뛰는 오징어 3마리를 회치고, 각종 양념과 쌈채소, 거기에 소주 1병까지를 더해 단돈 2만원. 육지라면 상상하기 힘든 저렴한 가격이다. 사파이어빛 바다를 마주하고 마시는 술이 달콤했다. 일상 탈출이 주는 ‘행복 에너지’ 때문이었을 터.21세기. 여행의 방식과 여행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가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세대간 차이일 수도 있고, 남녀의 차이일 수도 있으며, 관광객의 취향 차이일 수도 있다. 모두는 각기 다른 형태로 각자의 패턴에 따라 여행지를 둘러본다.어떤 사람은 ‘가능하면 많은 곳’을 돌아보길 원하고, 혹자는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여행’을 지향한다. 스스로 차를 운전해 관광지를 향하는 이가 있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관광객도 적지 않다. 기자가 울릉도 여행의 방식으로 선택한 건 ‘버스 타고 섬 일주’.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울릉도의 기막힌 풍광도동항을 출발한 버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시내를 빠져나왔다. 마침내 펼쳐지는 원시의 바다 풍경. 눈이 시릴 정도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다.내수전 몽돌해변을 지나 얼마 달리지 않자 울릉도를 여행한 이들이 “최고의 비경”이라 입을 모으는 삼선암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3명의 선녀가 바위가 됐다는 전설. 게으름뱅이 막내 선녀가 변해 만들어졌다는 바위엔 풀이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재밌는 설화다.몇 년 전. 몬테네그로에서 크로아티아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 적이 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아드리아의 바다 빛깔이 너무 고와서 3시간 넘는 이동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울릉도 버스 여행의 시작도 그와 같았다.삼선암 뒤로 밀려가는 물결에 관음도와 죽도가 미려한 자태로 춤을 추고 있었다. 언젠가 본 단아한 매력의 승무(僧舞) 같았다.오랫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관음도엔 2012년 보행연도교가 생겼다. 이젠 탄성 부르는 그 섬의 숲을 관광객 모두가 볼 수 있다.울릉도를 사랑한 시인 김선우(49)는 “섬에 핀 작은 꽃 한 송이, 조그만 풀잎 하나까지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고 했던가? 그래서 2박3일을 예정하고 떠났던 울릉 여행이 1개월이 돼버렸다던가? 울릉도의 풍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김 시인의 심정이 이해되고도 남았다.100만 달러짜리 풍경을 시시각각 보여주던 버스는 두루봉과 석포 일출전망대를 스치듯 지나 천부항에 닿았다. 40분 남짓 아름다운 자연 다큐멘터리를 감상한 느낌이었다. 그 감흥을 안고 일단 차에서 내렸다.안개 낀 나리분지가 선물한 평화로운 고요해발 500m쯤에 자리한 나리분지는 겨울철 ‘무섭게 쏟아붓는 눈’으로 유명하다. “그 배경이라면 이와이 슌지의 ‘러브 레터’보다 더 근사한 영화가 나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진담 같은 농담 혹은, 농담 같은 진담이 떠도는 곳.나리분지로 가기 위해선 천부항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출발까지는 시간이 30여 분 남았다. 6m 깊이의 바다를 바로 앞에서 바라볼 수 있는 해중전망대는 돌아 나올 때 가기로 했다. 대신 천부항 방파제 부근을 짧게 산책했다.인적이 드문 섬의 해변. 여행자를 반기는 파도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소금기 묻은 바람이 애인의 손길처럼 머리칼을 매만져주는 나른한 오후.그 분위기에선 ‘소리꾼’ 장사익의 노래 한 자락이 참으로 잘 어울릴 듯해 스마트폰으로 ‘하늘 가는 길’을 플레이시켰다. 때론 혼자 흘리는 눈물 한 방울이 삶의 깊은 상처를 치료해주기도 한다. 그건 여행의 힘이기도 하다.나리분지행 버스에 오르자 눈 깜짝할 사이에 차창 밖 배경이 푸른색에서 향기로운 초록색으로 변했다. 울울창창 울릉도의 나무들 속엔 신령함이 깃들어 신선들이 숨어 있을 것 같았다. 도동항-천부항 구간과 마찬가지로 천부항-나리분지 구간도 최고의 버스 여행 코스였다. 오르막길을 달려온 버스가 내리막으로 접어들자 나리분지가 나타났다. ‘울릉도의 유일한 평지’로 불리는 나리분지는 동서와 남북이 약 2km 남짓. 작은 땅이다. 그러나 그 곳의 사람살이까지 작을 수는 없다.혹독한 자연조건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지혜롭게 극복한 울릉도 사람들의 ‘건축 기술’을 확인할 수 있는 너와집과 투막집을 둘러봤다. 말 그대로 ‘투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가옥들.기자가 도착한 날은 옅은 안개가 나리분지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숨을 들이쉬면 어디선가 밀려온 꽃향기가 몸 안으로 번져들었다. 주홍빛 열매를 매단 나무들이 예뻤다. 가끔씩 새가 울었고, 더 가끔 동네 사람들이 키우는 개가 울었다.고요하고 평화로웠고, 평화롭고 고요했다. 아스팔트와 네온사인이 점령군으로 행세하는 도시의 소음 속에서 살아온 기자는 나리분지의 고요와 평화가 진심이 담긴 울릉도의 선물로 느껴졌다.울릉도 서쪽을 굽이굽이 돌아 다시 도동항으로울릉도 버스 일주가 서장과 중장을 지나 종장으로 접어들었다.나리분지에서 천부항으로 돌아와 섬의 북쪽과 서쪽을 시원스레 내달리는 버스에 올랐다. 멀리 보이는 코끼리바위와 현포항을 지나 남서 일몰전망대까지의 풍경이 어떠했는가를 설명하려면 입 아프다. 당연지사 짐작했겠지만 ‘너무나’ 아름다웠다.통구미 몽돌해변에 잠시 내려 느린 걸음으로 주위를 배회했다. 목적이나 이유를 잠시 내려두고 근사한 자연을 벗 삼아 ‘어슬렁거린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우리는 너나없이 너무나 ‘목표 지향적’으로만 살아오지 않았던가. 답답하고 갑갑하게도. 통구미 마을엔 사람들을 보호해준다는 9마리의 거북이가 있다. 아니, 거북이 형상의 바위가 있다. 보는 위치에 따라 거북의 마리 수가 달라진다는 게 흥미롭다. 마을 절벽엔 향나무 수백 수천 그루가 좋은 냄새를 뿜어내고 있었다. 천연 향수였다.통구미 해변에서 도동항까지는 금방이다. 차로 10~20분. 울릉신항과 울릉예술·문화체험장을 뒤로 하고 사동항을 지난 버스가 여행의 출발지였던 도동항에 기자를 내려놓았다.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를 방불했던 ‘버스 타고 울릉도 일주’가 끝났다.천부항에서 점심으로 먹은 국수 값까지를 포함해 1만 원 가량의 작은 돈으로 ‘해보기 힘든 방식의 여행’을 마무리한 것이다. 기분이 어땠냐고? 부연할 것 없이 “좋았다”.울릉도 곳곳엔 숨겨진 매혹의 장소가 적지 않다. 행남 해안산책로, 독도박물관, 울릉자생식물원, 대풍감 해안절벽,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엔 ‘우리 섬’ 독도까지 있다. 1박2일의 짤막한 울릉 여행은 아쉽고 싱겁다. 시간과 돈을 투자해 일주일쯤 그 섬에 머물러보길 진심으로 권한다.랭보는 삶을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라고 규정했다. 시인의 세계 인식이라 그런지 지나치게 어둡고 비극적이다. 설마 인간의 생이 ‘지옥에서의 시간’만으로 구성됐겠는가. 폐일언. 울릉도 여행은 기자에게 ‘천국에서 보낸 3일’이었다. /홍성식·김두한기자

2019-11-27

산마늘 중 오직 울릉도산만 ‘명이’로 부른다

울릉도서 나고 자라 최고일 수밖에 없는 특산 5종가장 널리 알려진 울릉도 특산 나물. 다른 이름은 ‘산마늘’이다. 이파리가 마늘잎과 닮았지만, 마늘잎보다 넓고 크다. 마늘 향이 강하다. 생나물로 쌈을 싸거나 양념에 찍어 먹는다. 장아찌로 널리 먹는다.간장 절임 명이나물은, 울릉도 관광객을 통하여 외부로 전해졌다. 돼지 삼겹살이나 한우 기름진 부위와 궁합이 좋다. 기름기로 텁텁해진 입안을 깔끔하게 정리한다.한때는 ‘명이 이파리 하나가 5백 원, 1천 원’이라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명이나물 리필은 없다’ ‘명이나물 리필은 추가 요금’이라는 흉흉한(?) 이야기도 있었다. 중국산이 흔해지면서, 울릉도 특산 명이나물 가격도 안정되고 있다. 중국산과는 맛, 향이 전혀 다르다.산마늘 중 울릉도 산만 ‘명이나물’이라 부른다. ‘오대산 산마늘’도 있다. 오대산 산마늘은 비슷하지만 덜 달고, 맵다. 중국산은 대가 짧고 이파리만 있는 경우가 많다.‘부지갱이나물’로도 부른다.‘부지깽이나물’이 표준어(문화어)다. 약명으로는 ‘당개(糖芥)’. 부지깽이나물은 두 종류다. 섬쑥부쟁이와 갯쑥부쟁이. 부지깽이나물은 섬쑥부쟁이다. 울릉도에 널리 자생하는, 특산이다. 갯쑥부쟁이도 해안가에서 자란다. ‘갯=갯가’다.울릉도에서는 사계절 자라니 늘 채취한다. 주로 이른 봄에 많이 채취한다. 생나물로 먹는 것보다 데쳐서 간장, 소금을 넣고 향을 살리는 편이 낫다. 국화과의 다년생 식물이다. 향이 억척스럽게 강하지 않고, 은은하다.약재로도 사용하지만, 울릉도에서는 오래전부터 식용했다. ‘부지깽이나물 솥밥’, 나물무침으로 조리한다. 튀김 혹은 각종 찌개의 부재료로도 좋다.‘눈개승마’ ‘능개승마’로 널리 알려졌다. 울릉도 특산. 묘목, 뿌리가 외부로 유출되면서 내륙 산지에서도 재배한다. ‘삼’나물은, 이파리가 마치 인삼 잎 같이 생겨서 붙인 이름이다.‘눈개승마’는 ‘누운 개승마’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개승마는 미나리아재빗과의 식물이다. 눈개승마는, 성장 과정에서 ‘누운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누운 개승마’라는 표현은 어찌 어색하다.울릉도 삼나물, 눈개승마는 초본이다. 이른 봄, 울릉도 여기저기서 자생하는 것을 채취한다.지금은 울릉도와 내륙에서 재배한다. 시중에 나도는 것들은 대부분 재배한 것이다. 어린싹, 줄기를 나물로 먹는다. 갓 돋은 싹은 마치 두릅 같다.맛은 특이하다.“오래 씹으면 고기 냄새가 난다” “쌉싸래하면서 맛이 눅진하다”고 표현한다. 나물치고는 특이한 맛. 생나물이나 샐러드로 먹는다. 묵나물은 육개장 등에 넣는다.전호(前胡)나물은 애틋하다. 식물은, 대부분 이른 봄에 싹을 틔운다. 전호나물은 정반대다. 다른 식물들이 잎을 거두는 10월께 싹을 틔운다. 거꾸로다. 겨우내, 눈과 비, 바람을 겪으며 싹과 잎을 지킨다. 2월이면 몸체를 키운다. 다른 식물들이 싹도 제대로 틔우지 않았을 때다. 2월 초, 중순이면 먹을 정도 크기로 자란다. 2월 중순쯤이면 서울 등의 대도시 소비자들이 구할 수 있다. 미리 주문했다가 택배로 받는 이들도 있다. 겨우내 추운 울릉도의 눈, 바람을 겪으며 싹을 지켜낸 정성이 놀랍고 애틋하다. 전호나물은 ‘봄의 전령사’다. 미나릿과에 달린 여러해살이풀이다. 겉모양이 미나리 혹은 당근 잎사귀 같다. 미나리보다는 잎사귀가 작고 여리다.쌉싸래한 향이 독특하다. 날채소로 먹는 이들도 있지만, 슬쩍 데친 후 무쳐서 먹기도 한다. ‘전호나물 전’ ‘전호나물 생채 비빔밥’도 향이 아주 좋다.오징어가 ‘난리’다. 씨가 말랐다. 1만 t 수준으로 잡히던 오징어가 몇백 t으로 줄었다. 오징어잡이 배들이 아예 출항하지 못한다. 오징어는 귀하다. ‘20마리 한 축’이 다섯 마리, 세 마리 묶음으로 줄었다.우리는 오랫동안 오징어를 먹었다. 조선 시대 기록에는, ‘烏賊魚(오적어)’ 혹은 ‘烏魚(오어)’다. 오징어를,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이 바로 오적어다. ‘오(烏)’는 까마귀다. 오징어가 물 위에 마치 죽은 듯이 떠 있다가, 까마귀가 다가오면 잽싸게 낚아채서 물속으로 들어간다. 오적어라고 부르는 이유, 라고 설명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진 않다. 오징어의 먹물이 마치 까마귀처럼 검어서 생긴 이름이라는 설명이 적절하다.오징어는 많이 잡히는 생선이었다. 대도시에서는 뜨거운 물에 튀긴, ‘오징어 숙회’를 먹었다. 최근까지도 싱싱한 오징어를 통째로 쪄서 먹는 ‘오징어통찜’이 유행했다. 오징어가 귀해지면서, 오징어통찜은 귀한 음식이 되었다.오징어가 사라진 것은 ‘중국 배의 약탈적인 조업’ 때문이다. 지역 정치인들까지 나서서 ‘정부의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문제는 북한 해역이다. ‘중국-북한’ 간 북한 해역 어업권 거래가 있었다. 중국 배들이 회류(回流) 하는 오징어를 ‘길목’에서 마구 잡고 있다. 미처 자라지도 않은 것들이다. 남획으로 씨가 말랐다.싱싱한 오징어는 회, 회무침, 통찜으로 먹는다. 반쯤 말린 ‘피데기’는 찌거나 구워서 먹는다. 마른오징어와 땅콩은, 한때, 맥주 안주의 대명사였다.중국도 오래전부터 오징어를 먹었다. 조선 사절단들은 마른오징어를 공물로 챙겼다. 중국은 자체 생산되지 않던 오징어를 조선을 통해서 구했다. 이제 중국은 ‘약탈’로 오징어를 구한다. 대신 울릉도에는 오징어가 사라졌다.제대로 맛보는 별미집 4곳따개비, 홍합, 오징어를 이용한 여러 가지 음식이 가능하다. 약초해장국은 특이한 메뉴. 울릉도에서 자생하는 여러 약초, 산나물 등을 넣고 끓였다.오징어내장탕이 아주 좋다. 무나 콩나물 등을 넣고 끓이면 국물이 상당히 시원하다. 내장은 맑고 고소한 맛을 낸다.저동항 부근에 있다. 업력이 길다. 민간에서 널리 먹었던 오징어내장탕을 식당에서는 처음으로 선보인, ‘원조’다. 한우 암소도 취급한다. 따개비솥밥이나 홍합솥밥 등은 주문받은 후 준비한다. 20~30분 정도 기다려야 한다.울릉도 앞바다에서 잡은 해산물을 맛보려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집. 울릉도에서는 외진 곳인 사동항 부근에 있다. 오징어, 꽁치 등 물회가 유명한 집이다. 주인이 전문적인, 프로 다이버다. 직접 잡은 해산물 위주로 음식을 만든다. ‘해계탕’은 특이한 음식이다.‘해’는 바다, ‘계’는 닭이다. 닭을 아래에 두고, 전복, 문어, 각종 새우, 홍합, 뿔소라 등 여러 종류의 조개류를 얹거나 깔았다. 네댓 명이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양이다. 음식 모양은 ‘쇼킹’하다. 해계탕은 반드시 예약이 필요하다.다녀온 사람마다 ‘정애식당’ ‘정애칼국수’ ‘정애분식’ 등으로 다르게 부른다. 가게 입구에 크게 ‘정애’라고만 써 붙였다. 헛갈릴 만하다.메뉴도 마찬가지. 따개비덮밥(?)부터 따개비칼국수, 꽁치물회, 홍합을 이용한 여러 음식, 오징어 내장탕 등이 두루 가능하다. 마치 ‘분식집 메뉴’ 같다.저동항에 있다. 배를 타고 뭍으로 나오기 직전에 찾는 관광객들이 많다. 명이나물을 비롯한 밑반찬들이 깔끔하고 좋다. 종류와 양이 모두 넉넉하다. 대부분이 울릉도 특산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다.나리분지에 있다. 울릉도 산나물, 들나물로 만든 비빔밥이 좋다. 비빔밥 나물도 좋지만 곁들여 나오는 반찬들도 울릉도 특산이다. 삼나물, 부지깽이나물, 더덕, 명이나물 등이다. 산채 전도 권할 만하다. 향이 좋다. 씨껍데기 동동주와 곁들이면 아주 좋다.울릉도에서는 보기 드문 평지다. 멀리서 보면 아늑한 분위기고, 가게 안에 들어서면 소박하고도 포근하다. 건물 안팎이 모두 나무다. 가까운 곳에서 울릉도 전통가옥인 억새를 올린 너와집도 볼 수 있다. 제대로 된 울릉도 나물을 맛보려면 꼭 들러야 하는 집이다.

2019-11-27

왕이 왕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다

임오화변(壬午禍變)은 1762년 (영조38) 윤5월, 영조가 대리청정(代理聽政) 중인 사도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이다. 백성들은 감히 접근조차 어려운 구중궁궐 안에서 일어났던 일이었지만, 엽기적이고도 비극적인 이 사건은 한양에서 864리 떨어진 경상도 장기현 사람들에게도 마치 곁에서 일어났던 일처럼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해 윤5월 15일 장기로 온 홍지해(洪趾海)와 뒤이어 7월 11일에 온 목애(睦愛)가 바로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사도세자의 비극을 부른 이 사건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얽혀 있겠으나, 가장 대표적인 이유 하나를 꼽으라면 ‘신임의리(辛壬義理)’를 들 수 있다. 신임의리는 1721년(신축년)∼1722년(임인년)에 경종 대신 연잉군을 지지하다가 곤란을 겪었던 노론 측의 의리를 부르는 말이다.역사를 돌이키자면, 숙종이 사망할 무렵인 1700년대의 조선 조정은 세자(경종)를 지지하는 소론과 동생인 연잉군(영조)을 지지하는 노론으로 나뉘었다. 그때는 소론이 지지하던 세자가 경종 임금에 올랐으나, 경종은 병으로 몸이 약했다. 노론은 그런 경종에게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고 대리청정까지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소론의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이 일로 노론의 대표주자인 영의정 김창집 등 수백여 명이 죽거나 귀양을 갔다. 이른바 ‘신임옥사’란 것이다.경종이 일찍 죽고 이제 연잉군이 영조임금으로 즉위했다. 영조는 즉위하자말자 그때 자신에게 기울였던 노론들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른바 ‘신임의리’를 지킨 것이다. 덕분에 한동안 노론의 세상이 됐다.하지만 세월이 흘러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혈기왕성한 세자는 노론의 특수한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사도세자는 노론들이 내세우는 신임의리를 나 몰라라 했던 것이다. 당연히 노론과 사도세자 간에는 첨예한 갈등이 생겼다. 이는 아버지 영조의 왕위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까지 왜곡되게 받아들여지면서 그 결말은 비참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것이다.영조에게는 모두 여섯 명의 부인이 있었지만 아들 복이 없었다. 첫째 아들 효장세자는 일찍 병으로 죽었다. 그로부터 7년 뒤, 나이 마흔 둘에야 아들 하나를 얻었는데, 그가 바로 사도세자이다. 얼마나 애지중지했든지 영조는 이듬해 그 아이를 왕세자로 책봉했다. 세자는 1744년에 혜경궁 홍씨(헌경왕후)와 혼례를 올리고, 열다섯 살 때부터 대리청정을 하며 정계에 관여했다.조선왕조실록 등에는 사도세자의 악행에 대해 구구절절 기록하고 있다. 그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고도 했다. 실제로 사도세자의 손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환관을 죽이고 그 머리를 자신의 부인에게 가져다준 일, 영조의 침방나인이었던 박씨를 건드려 임신시킨 일, 후궁을 살해한 일, 가선이라는 여자를 겁탈하고 궁중에 몰래 들인 일 등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다. 영조가 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둘 때 반포한 폐세자반교문에 따르면, 세자에게 살해당한 사람이 백여 명이 넘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헌데, 정작 영조는 ‘나경언(羅景彦)의 고변’이 있기 전까지는 세자가 이렇게까지 패륜아인지 몰랐던 모양이다.잠시 당시의 상황을 정리해보자. 조정에는 영의정 홍봉한이 실권을 잡고 있었다. 그는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로 사도세자의 장인이었다. 이 무렵, 조정에는 사도세자를 시기하는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바로 김한구(金漢耉)였다. 김한구는 이제 겨우 열다섯 된 딸을 영조의 계비(정순왕후)로 들여보내면서 실권을 잡으려 했다. 그때 영조의 나이는 예순 다섯이었고, 이미 궁중에는 정순왕후보다 열 살이나 많은 아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김한구는 사도세자 측과는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그는 아들 김귀주(金龜柱)와 함께 외척당인 남당을 만들어서 당시 실세인 북당의 홍봉한과 대립하였다. 이들은 홍봉한을 탄핵하는데 주력해 공홍파(攻洪派)라고 불렸다. 하지만 영조가 오히려 홍봉한 등 척신들을 끼고돌자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김한구는 홍계희(洪啓禧),김상로(金尙魯),윤급(尹汲) 등과 힘을 합쳐 홍봉한 세력을 몰아내고 세자를 폐위시키기 위한 작전에 들어갔다. 그때 끌어들인 사람이 나경언이다.나경언은 형조판서 윤급의 청지기였다고 한다. 김한구 등은 1762년 5월 22일 나경언을 시켜 형조를 찾아가 ‘환시(宦侍)들이 반란을 모의한다’고 거짓으로 아뢰었다. 반란사건은 사안이 엄중하므로 임금을 직접 대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영조가 친국을 하자 나경언은 갑자기 옷소매에서 미리 준비해둔 고변서 한 장을 꺼내 바쳤다. 그 고변서에는 “세자가 일찍이 궁녀를 살해하고, 여승을 궁중에 들여 풍기를 문란시키고, 부왕의 허락도 없이 평안도에 몰래 나갔으며, 북성에 멋대로 나가 돌아다녔다”라는 등 세자의 비행 10여 조가 적혀 있었다. 그러면서 나경언은 ‘동궁을 무함하였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다.’고 자백을 하였다.충격을 받은 영조는 탕제(湯劑)와 정무(政務)를 거부하며, 세자에 대한 실망과 신하들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엉겁결에 영조 앞에 불려나온 세자는 창경궁 시민당(時敏堂)에서 20일 넘도록 대명(待命)하며 석고대죄해야 했다.억울함을 느낀 사도세자는 나경언과의 대질을 요구하였으나, 영조는 이마저도 거부했다. 이후 세자의 비행 문제는 더욱 확대되었다.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하라고 명을 내렸다. 세자가 자결하지 않고 버티자 결국 영조는 1762년 윤5월 13일 세자를 폐위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고 뒤주 속에 가뒀다. 속에 갇혔던 세자는 8일 만에 굶어죽었다. 이때 사도세자의 비행과 임오화변이 있었던 그날의 상황 등은 훗날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저술하는 배경이 되었다.그런데, 이 사건을 세밀히 따져보면 의심이 가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나경언의 신분부터 보자. 남의 집 하인에 불과했는데, 일개 하인이 목숨을 걸고 일국의 세자를 고발해야할만한 동기가 있었을까? 심지어 나경언은 자신이 갖다 바친 고변서의 내용도 숙지하지 못했다. 그 배후가 의심되는 것이다. 실제로 사건 당일 판의금부사 한익모(韓翼謩)는 나경언의 말을 믿을 수 없다며 이를 사주한 배후를 철저히 가려야한다고 주청했으나, 영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파직시켰다. 홍문관 관리들도 들고 나섰다. 바로 김종정(金鍾正)·박사해(朴師海)·남현로(南玄老)·홍지해(洪趾海)·이득배(李得培)가 그들이다. 이들은 윤5월 6일, 나경언을 빨리 역모죄로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영조는 크게 노하였다. 이 상소를 받아 준 승지 및 관리들의 파직을 명하고, 접수한 상소들을 모두 되돌려주게 하였다. 이튿날까지 영조는 분이 안 풀렸던지 상소를 올린 자들을 모두 역적으로 몰아 영남 바닷가(沿海)로 정배하라는 명을 내렸다.이에 따라 응교(應敎) 김종정은 청하현, 교리(校理) 박사해는 장기현, 교리(校理) 홍지해는 동래부로 귀양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이날 다시 남현노(南玄老)와 김종정, 홍지해와 박사해의 배소를 서로 바꾸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래서 홍지해가 윤5월 14일 경상도 장기로 오고, 박사해는 동래부로 귀양을 가게 된다. 영조는 이어서 세자의 비행을 알면서도 자신에게 알리지 않은 신하들을 문책하였다.영조의 이런 강경책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의 상소는 이어졌다. 홍낙순(洪樂純)과 남태제(南泰齊) 등이 나서서 ‘나경언은 세자를 모함한 대역죄인’ 이라는 주장을 계속해서 올리자 영조의 마음도 이제는 돌아섰다. 그해 윤5월 22일, 영조는 ‘나경언의 행동이 가상하지만, 형조에 거짓으로 반란이 있다고 신고하여 임금을 놀라게 한 죄가 있다’는 이유로 결국 그를 참수하기에 이른다.이 사건으로 또 한사람이 장기현으로 유배되어 왔는데, 여자였다. 바로 1762년 (영조38) 7월 11일 목중도(睦重道)의 나이어린 손녀 목애가 연좌되어 장기로 온 것이다.춘천에 살고 있던 조재호(趙載浩)는 사도세자를 구하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왔다. 조재호는 효순왕후(영조의 장남으로 일찍 죽은 효장세자의 비) 조씨의 오빠였다. 조재호는 과거에 급제한지 불과 10년 만에 우의정까지 올랐으나, 1759년 돈녕부영사로 있으면서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왕후의 책립을 반대한 죄로 임천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나 춘천에서 은거하고 있었다. 그는 사도세자가 위기에 처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구하기 위해 뜻을 같이한 목중도 등과 함께 한양으로 왔지만, 모두 역모죄로 몰렸다. 이들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졸지에 할아버지의 죄에 연좌되어 장기로 온 목애는 34년간 이곳에서 관노(官奴)로 있다가 1796년(정조 20) 1월 11일에야 유배가 풀려 자유의 몸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장기현 관아에서 썩힌 후였다.세자가 죽은 후 영조는 곧바로 아들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으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려 줬다. 그리고 아버지의 불명예스런 죽음으로 세손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조치도 강구했다. 그 한 가지 방법이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을 영조의 요절한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영조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천륜(天倫)보다도 세손이 왕(정조)이 되었을 때 겪어야 할 다음의 정치적 상황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하지만, 1777년 재위한 정조는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선언했다. 이후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장헌세자(莊獻世子)라는 시호를 올렸다. 이후에도 사도세자를 추존해달라는 상소가 계속되었다. 이때 조선 최초로 ‘만인소’란 게 나왔다. 영남 유생 1만 57인이 사도세자의 신원(伸寃)을 위해 연명 상소를 한 것이다.노론은 둘로 갈라져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파와 그렇지 않은 벽파로 나뉘었다. 두 당파는 정조의 탕평책으로 붕당 간의 싸움이 약간은 완화되었지만, 정조가 죽고 나이 어린 순조가 즉위(1801)하자, 권력은 다시 노론 벽파에게 넘어갔다. 특히 노론 중에서도 왕실의 외척들 손에 조정이 좌지우지되면서 조선사회는 다시 앞이 보이지 않는 혼란 속으로 빠져 들었다. /향토사학자 이상준

2019-11-26

경북 바닷길, 내 한 생애를 사로잡은 빛과 색 온도

빛은 차갑고 공기는 깨질 듯 투명하다. 우듬지 끝에서 쇠잔한 촛불처럼 마른 잎사귀가 흔들린다. 나는 지금 창문으로 서울의 쓸쓸한 겨울 오후를 바라보고 있다. 방 안에는 클라라 주미 강이 연주한 마스네의 오페라 ‘타이스의 명상곡’이 흐르고, 오른손에는 파나마 에스메랄다 게이샤 원두를 갈아서 내린 커피가 들려 있다. 음악도, 커피도, 책상 위에서 빛과 향기로 타는 향초도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나는 모든 걸 다 잃어버린 기분에 잠겨 있다. 아라파호 인디언들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불렀는데, 어째서 내겐 텅 빈 공허와 부재만 남은 걸까. 축제가 끝난 무대 위에 포스터와 팸플릿이 떨어져 나뒹구는 것처럼, 내 마음에는 지금 낙엽들이 스산하게 일어섰다가 넘어지는 중이다.환청처럼,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지난여름 포항 보경사로 가는 길, 내 귀에 푸른 잎사귀의 방울종을 잔뜩 매달아주던 내연산 매미울음이다. 추억의 주파수를 돌려 본다. 또 다른 환청일까. 아니다. 내 기억에서 들려오는 영덕 고래불의 파도 소리다. 울진 덕구계곡 용소폭포 소리도 들린다. 국립경주박물관 성덕대왕신종의 에밀레 소리가 무수한 금빛 동심원을 그리며 내 마음에 나선형 통로를 열고 있다. 그 안에서 빛과 소리와 냄새가 한 데 섞여 흘러나온다. 수평선이 훔쳐간 천국의 푸른 빛, 박달대게 찌는 냄새, 세상 그 어떤 술보다 아찔하게 달큼한 아까시 향기, 동궁과 월지에 쏟아지던 여자아이들 웃음소리, 울릉 도동의 아침놀, 문무대왕 수중릉을 향해 흔들어대던 무당의 방울소리…… 봄부터 가을까지 내가 다녀간 경북 바닷길의 풍경이다.비로소 마음의 겨울에도 햇볕이 든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여행은 일종의 정신 치료제이다. 그것은 일상생활 속에 갇혀 자신이 얼마나 노예가 되어 있는가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살고 있던 자에게 갑자기 그가 그 속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던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그것은 그래서 한편으로는 두렵고, 한편으로는 즐겁다. 자신의 달팽이집을 떠난다는 점에서는 두렵고,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는 점에서는 즐겁다”고 말했다. 경북 바닷길을 걸으며 나는 정말로 병들고 쇠약해진 내면이 건강하게 회복되는 걸 경험했다. 그래서일까. 긴 여행을 마친 후 허전함을 못 견뎌 무기력에 빠져 있었다. 다시 비좁은 달팽이집으로 돌아와 숨 막히는 일상에 멱살 잡히는 동안 경북 바닷길은 옛 일처럼 까마득히 멀어졌다. 그러나 온몸으로 받아들였던 낯선 감각들이 눈코입 그리고 귀에 아직 남아 있어, 눈을 감으면 나는 여전히 푸르디푸른 길 위에 서 있다.이제 나는 저 금빛 기억의 나선형 통로로 딱 한 번만 더 들어가 보려 한다. 지나온 걸음들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이 글이 경북 바닷길을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의 근사한 마지막 페이지가 되길 바랄 뿐이다.경북 바닷길은 발로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귀로, 그리고 코와 입으로 여행해야 한다. 7번국도를 따라 울진에서 영덕으로 이어지는 ‘블루로드’, 포항 호미곶에서 구룡포까지 연결된 해파랑길 14코스, 포항 장기에서 감포로 가는 해안도로에서는 오직 두 눈을 바다에 띄워야 한다. 울릉도 행남바닷길과 태하해안산책로를 걸을 때도 마찬가지다. 가장 순전한 푸른색이 경북 동해에 넘실거린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바다를 바라봐서는 안 된다. 쪽빛 파도를 훔친 두 눈이 푸른 수의(囚衣)를 입은 채 포승줄이 된 수평선에 꽁꽁 묶여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끔씩은 눈을 돌려 울진 불영계곡의 금강송을, 영덕 칠보산의 단풍을, 포항 보경사의 탱자나무를, 경주 황리단길의 야경을 보아야만 한다.고래불로 세차게 달려오는 파도 떼의 말발굽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라. 밤에 월송정에 오르면 달빛에서도 반짝반짝 소리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구룡포 삼정리 선창가 노을 아래를 걷다가 줄에 걸린 과메기들이 생나무 타는 소리로 몸 부딪칠 때 놀라지 말라. 울릉도 북서쪽 대풍감 절벽에서는 하늘도 바람도 머리를 풀어헤치고 운다. 경주의 아무 고택에서나 하룻밤을 자고 나면 천 년을 날아온 새떼들이 귓가에 금가루 은가루를 물어다 나르는 신비한 소리를 듣게 되리라.늦봄에 걸으면 황홀하게 엎질러진 아까시 향기에 정신을 못 차리고, 여름에 걸으면 햇살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연필심 냄새에 마음 여백마다 정념의 문장들이 쓰일 것이다. 가을에는 한 그루 소나무에서도 만 그루 금강송 군락의 서늘한 솔향이 나고, 겨울에는 대게 찌는 냄새가 마음속으로까지 짭조름하게 스며든다. 경주에 가서 황남빵이 노릇노릇 익어 가는 냄새를 맡아봐야 한다. 포항 죽도시장에서 돼지머리 삶는 냄새를 들이켜 봐야 한다. 울릉도 향나무들의 살 내음과 영덕 괴시마을 돌담에 내려앉은 조각구름 냄새를 들숨에 삼켜 봐야 한다.봄에는 도다리쑥국을 먹어야 한다. 바다의 못생긴 것과 땅의 못생긴 것이 몸을 합쳐 한 그릇의 아름다운 봄으로 오는 것을 떠먹으면 눈물이 난다. 여름에는 물회를 먹어야 한다. 경북 동해의 여름 더위는 물회 없이는 견뎌낼 수 없다. 사랑하는 이와 마주앉아 먹으면 달콤한 것은 여름의 낭만이고 새콤한 것은 사랑의 기쁨이 된다. 가을에는 문어를 삶아 먹어야 한다. 통통한 문어 다리가 옅은 단풍빛으로 물들면 제대로 삶아진 것이다. 쫄깃쫄깃한 문어숙회를 씹을 때 근심 걱정도 함께 씹으면 좋다. 겨울에는 박달대게와 홍게, 과메기 그리고 볼락을 먹어야 한다. 다정한 사람들과 함께라면 한 상에다 대게부터 볼락까지 다 올려놓고 만찬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밤이면 달의 꼬리가 희미해질 때까지 술잔이 돌기 쉬우므로, 아침에는 반드시 물곰탕이나 복국으로 속을 풀어야 한다.경북 바닷길 여행에 아쉬운 점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울진은 여전히 교통 여건이 불리하다. 교통 여건이 점차 개선될 때 지역 관광 자원에 대한 홍보도 더 적극적으로 이뤄졌으면 좋겠다. 영덕은 대게와 회 말고도 다른 먹거리들이 많이 개발되어야 한다. 관광객들에게 선택의 다양성을 제공해줘야 한다. 강구항을 비롯해 이곳저곳 너무 많이 설치되어 미관을 해치는 대게 조형물들은 정리를 좀 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울릉도는 딱 하나, 비싼 물가가 문제다. 육지와 멀리 떨어진 지리적 제한이 있다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여행지라는 오해만큼은 확실히 벗어야 한다. 포항은 여러 관광 인프라가 잘 마련되어 있지만, 1인 여행객들이 이용하기 편한 게스트하우스를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트렌드에 맞는 숙박시설이 생겨나길 희망해본다. 경주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우려된다. ‘황리단길’이 있는 황남동에는 지금 이 시간에도 새로운 한옥 건물이 지어지고 있는데, 겉의 형식만 한옥이고 전통일 뿐 그 속은 획일적인 유행문화로 채워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경주라는 도시의 특별한 매력은 오래된 가치를 지켜나갈 때 함께 보존되는 것이다.그러나 이런 지적들은 다 너무 사랑하기에 생겨나는 집착의 산물이다. 괜한 노파심이 빚어낸 볼멘소리일 뿐이다. 봄부터 겨울까지 내가 걸었던 경북 바닷길 537km는 내 한 생애를 사로잡은 빛과 색 그리고 온도가 되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내가 모르는 곳에서 저 동해는 한없이 아름답다. 지금 이 순간에도.“나는 그때 눈물 어린 눈자위로 큰 불빛을 쳐다보며 소리쳤었던 것이다ㅡ‘안녕’이라고. 사실 이 엄청난 불빛의 대화 앞에서 내가 자신 있게 뱉어낼 수 있었던 유일한 단어는 해후를 알리는 ‘안녕’ 이외에 아무것도 없을 것이 아닌가. 그래 나는 한없이 부르짖고 있었다ㅡ‘안녕 안녕’이라고.” 다시 김현의 글(‘불빛이 말하는 이유’)을 인용하는 것은 이제 나도 저 푸른 바닷길을 향해 안녕, 안녕이라고 인사해야 할 때가 됐기 때문이다. 삶은 우연들로 이뤄진 필연이다. 바닷길에서 스쳐간 수많은 햇빛과 바람과 파도와 사람들이 나에겐 영원의 풍경이 되었다. 경북 바닷길 위에서 세상은 한없이 아름다웠고, 나는 그 아름다움에 미쳐 몇 개의 계절을 환각처럼 고통 모르고 살았다. 다시 만날 그때까지 안녕, 안녕. /시인 이병철끝

2019-11-24

벼랑 끝 수산업… 한반도 조업 환경 악재 산적

수산업은 식량안보 핵심산업이다. 에너지와 더불어 국가 경쟁력의 근간이 되는 기본조건이다. 식량과 에너지를 확보하지 못한 국가는 존립 위기를 피할 수 없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 등 세계 강대국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에너지와 식량이다.최근 세계 각국의 식량주권 전쟁이 격화한 가운데 수산물 공급은 정체된 반면 수요는 매년 증가하고 있어 글로벌 수산식량 위기가 올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다. 식량 문제에서만큼은 우리에게 중국과 러시아는 리스크에 가깝다.국내 수산업은 이미 벼랑 끝에 서 있다. 80년대 평균 151만t에 달했던 연근해어업 생산량은 90년대 140만t, 2000년대 116만t으로 감소하다가 2016년에 이르러 93만t을 기록하며 100만t 선이 붕괴됐다. 어업인구는 11만명대로 급감했고 이들 중 절반 이상이 60대 이상 고령층이다. 국내 낚시인구는 700만명을 넘어섰고, 중국어선의 싹쓸이 조업까지 횡행하면서 어족 자원은 점차 고갈되고 있다. 노르웨이 연어와 같은 수입산 수산물의 확산과 함께 국산으로 둔갑한 일본산 수산물까지 판매되고 있는 실정이다. 성장은 고사하고 산업 전체가 쇠퇴하고 있는 구조적 한계에 도달했다.□ 중국어선과 오징어 어획량의 반비례 관계현재 국내 수산업 전역은 악재투성이다. 수산업이 맞닥뜨린 현안들을 어업인 주도로 해결하기 위해 지난달 ‘우리바다살리기 중국어선 대책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가 발대식을 갖고 대정부 활동에 나섰다.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소속 자유한국당 강석호(영양·영덕·봉화·울진) 의원 등 여·야 의원 9명이 고문위원단을 맡았다. 추진위는 지난 22일 강석호, 김성찬 의원 공동 주최로 중국어선 불법조업과 한일어업협정 장기표류 등 수산업 위기 타파를 위한 어업인 성명서 발표와 함께 창립총회 및 정책토론회를 가졌다.대형어선으로 세력화된 중국어선이 먼저 도마 위에 올랐다. 동해안 북한수역에서의 남획 조업으로 오징어 등 회유성 수산자원은 씨가 마르고 있다.통계청이 발표한 어업생산동향조사 결과에 따르면 연근해 오징어 어획량은 지난 2014년 16만t에서 2018년 5만t 이하로 급감했다. 같은 기간 중국어선의 북한수역 입어 척수는 2014년 144척에서 2018년 2천161척으로 급증했다. 중국어선의 북한수역 입어 척수 증가와 반비례해 동해안 오징어 어획량이 감소한 것으로 풀이된다.이러한 어장 파괴로 국내 어선들은 러시아수역까지 진출하고 있지만 입어허가를 받은 근해 채낚기어선 70척은 극심한 어획 부진으로 2019년 10월 현재 쿼터량의 10%인 500t만 겨우 생산하고 있는 상황이다.추진위는 “해양경계 획정을 통해 양국 간 조업 구역을 구분하고 EEZ 내 입어척수 및 어획량 합의규모도 상호 비례하도록 중국어선 입어척수를 대폭 축소해야 한다”며 “유엔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결의 2397호에 따라 중국어선의 북한수역 입어를 금지해야 한다. 무분별한 불법 조업으로 수산자원을 고갈시키는 중국어선으로 피해를 입은 어업인을 중심으로 대정부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일어업협정 3년째 결렬어민들은 한반도를 둘러싼 조업 환경에 답답함을 호소한다. 동해는 국제협약에 따라 조업쿼터 제한에 걸리고, 러시아 쪽에서는 조업량 규제를 받는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국무위원장이 합의한 서해 북방한계선 평화수역 조성도 지연되고 있다.아래도 꽉 막혔다. 한일어업협정이 4년째 타결을 보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이라 2016년 7월부터 일본수역 내 조업이 차단됐다. 수산경제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한일어업협정 결렬로 인해 지난 3년간 약 2천억원의 누적 피해가 발생했다. 이는 고스란히 어업인들에게 돌아갔다.생존 터전인 어장은 축소됐지만 대체어장 마련은 지지부진한 상황 속에 생존권 위협을 느끼고 생업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위아래로 꽉 막힌 한반도 조업 환경 속에서 우리바다살리기 추진위는 현재 표류 중인 한일어업협상 재개로 숨구멍을 찾을 방침이다. 양국 공동 자원관리를 위한 대책 마련과 함께 수익성 높은 해외어장 개척을 계획 중이다. 농사짓는 땅이 넓으면 다양한 곡식이 나오듯, 조업 해역이 넓어지면 어종이 풍부해질 것이란 희망이다. 어선들 역시 과열 경쟁을 벌일 이유가 줄어든다.자유한국당 강석호 의원은 “한일어업협정 미타결과 중국어선 불법조업 등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직면한 수산업을 위한 실효적인 대안이 마련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힘을 실었다.□ 어업인 생존권 보호대책 마련 촉구추진위는 북한수역에 입어해 동해안 수산자원을 싹쓸이하고 있는 중국어선 문제와 한일어업협정 지연으로 피해를 입은 어업인을 중심으로 대정부 대안 마련 및 협상 재개를 촉구하고 어업인 생존권 보호 대책을 건의할 방침이다.아울러 멸치 어선을 비롯해 어민 대부분이 적자를 보고 있는데도 정부는 ‘수산혁신 2030계획’ 상의 수산자원관리 명목으로 규제 강화에만 치중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중국어선 싹쓸이 불법 조업과 같은 핵심문제 해결보다는 규제 강화 위주의 땜질식 정책들만 내놓은 정부를 비판했다.앞서 해양수산부는 지난 4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제19차 한·중 어업공동위원회에서 ‘2020년도 어기 한·중 어업협상’을 타결했다. 양국은 내년 입어 척수와 어획할당량을 감축하기로 했다. 한국과 중국의 배타적경제수역 내 상대국 어선의 입어 척수를 올해 1천450척보다 50척이 줄어든 1천400척으로 4년 연속 감축하기로 합의했다. 양국어선의 어획할당량도 지난 2017년 이후 3년 만에 1천t을 줄이기로 했다.이와 관련해 추진위는 “현재 국내 어업 상황을 보면 규제 강화보단 어민 지원을 강화할 때”라며 “어민들 속은 타들어 가는데 정부는 땜질식 처방만 내놓고 있다. 정책과 현실의 괴리로 정부와 어업인 간의 불신만 커지고 갈등만 야기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한중어업협정에 따른 양국 EEZ 입어척수는 등량등척 원칙에 따라 동일하지만, 지난 2018년 기준 중국 수역에 입어한 국내어선은 180여척, 중국 어선은 1천200여척이 우리나라 영해선을 넘어 조업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김대경 후포수협 조합장은 “이대로 가면 우리 먹거리를 수입 수산물에 의존해야 하는 때가 올 것”이라며 “한일어업협정 재개 등으로 어장이 넓어져야 조업 환경이 개선된다. 과도한 수산관계법령 강화와 바닷모래채취 등으로 위기에 처한 어업인들의 생존권 보호를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김민정기자 mjkim@kbmaeil.com

2019-11-24

경주세계문화엑스포, 흥겨운 잔치 계속된다

‘2019경주세계문화엑스포’가 45일간의 문화 대장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25일부터 상시개장에 들어갔다.(재)문화엑스포는 24일 오후 5시 엑스포문화센터에서 주낙영 경주시장을 비롯한 쿤 쏘다리 캄보디아 국회부의장, 수스 야라 아시아문화위원회 사무총장 등 국내외 인사 및 관광객이 참석한 가운데 ‘2019경주엑스포 폐막식 및 경주엑스포공원 상시개장식을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2019경주엑스포에 대한 경과보고, 축하 공연과 함께 ‘365일 운영 체제’로 전환하는 경주엑스포공원의 상시개장을 선포했다.□ 새로운 문화 이정표 세운 2019 경주엑스포경북도와 경주시가 주최하고 (재)문화엑스포가 주관한 이번 ‘2019경주세계문화엑스포’는 ‘문화로 여는 미래의 길’을 주제로 독창적인 전시와 체험, 공연 등을 다각적으로 선보이며 큰 호응을 얻었다.특히 첨단영상기술과 3D홀로그램, 로봇팔 등 ICT기술을 도입한 ‘4대 킬러 콘텐츠’와 한국, 캄보디아, 베트남, 인도네시아, 이집트 등 5개국 40여 개 팀이 참가한 공연 페스티벌은 화려한 볼거리로 관람객을 매료시켰다.그동안 경주엑스포는 경주와 해외에서 2년에 한 번씩 번갈아 가며 개최했다. 이런 방식으로 경주에서는 4년마다 엑스포가 열렸고 엑스포가 열리지 않는 기간에는 동절기를 제외하고 부분적으로 엑스포공원을 개장해 왔다. 이처럼 영속성이 보장되지 못하다보니 킬러콘텐츠 개발과 관광객 유치에 어려움을 겪어왔다.올해 엑스포는 기획과정에서부터 ‘누구나, 언제나 즐길 수 있는 엑스포’를 추구하며 관광객 편의를 높이는데 목표를 두었다. 연중무휴, 365일 상시개장을 염두에 두고 콘텐츠 개발에 전략적으로 투자했다. 예년 엑스포 때 보다 투입 예산은 절반으로 줄였고 시설, 운영, 홍보, 마케팅비를 최소화하면서 예산의 65%를 지속 가능한 상설 콘텐츠 구축을 위해 정성을 들였다.이전 엑스포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공연과 일회성 이벤트 행사는 지양하고 외형보다는 내실을 다졌다. 엑스포가 끝나면 볼 수 없는 콘텐츠가 아니라 계속해서 즐길 수 있는 콘텐츠를 구축하는데 중점을 뒀다.올해 엑스포 기간 동안 무리한 동원 없이 30만명(지난 23일 기준 29만6천750명)에 달하는 자발적인 관광객이 방문했다. 올해는 비수기에 지역관광 수요를 창출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10월 중순부터 11월 말까지 쉽지 않은 도전을 펼쳤고,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올해 2019경주엑스포를 앞두고 사전 연계행사(3월18일~10월10일)를 통해 경주엑스포공원을 찾은 관람객은 57만9천여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2018년(3월26일~11월31일) 33만8천여 명과 2017년(4월1일~11월30일) 26만7천여 명에 비해 큰 폭으로 증가한 것이다.(재)문화엑스포 이사장인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경주엑스포공원을 새로운 문화 창출과 관광산업의 미래를 이끌어가는 문화플랫폼으로 만들어 갈 것”이라며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 지역과 국가 경제에도 기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첨단기술이 융합된 4대 킬러콘텐츠올해 열린 ‘2019경주세계문화엑스포’는 지난 22년간 경주엑스포의 축적된 노하우와 대한민국의 발전된 첨단기술을 융합한 콘텐츠를 통해 경주엑스포 연중 상설화의 가능성을 보여 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그동안 ‘공연과 전시를 중심으로 한 문화박람회’의 역할을 수행해온 경주엑스포를 다양한 방식의 문화 콘텐츠를 경험하는 ‘체험형 역사문화 테마파크’로 한 단계 더 성장시켰다.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것은 ‘4대 킬러 콘텐츠’이다. 경주의 랜드마크인 경주타워 꼭대기 층 ‘신라천년, 미래천년’ 전시관의 4방향 전면 유리는 경주 보문단지의 아름다운 풍경을 관광객들에게 선사했다. 20분에 한 번씩 천장에서 스크린이 내려와 8세기 서라벌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구현하며 시간여행을 체험케 했다. ‘찬란한 빛의 신라’(타임리스 미디어아트)는 신라의 역사문화를 환상적인 첨단 미디어아트로 표현해 감탄사를 자아냈다.전국 최초 맨발 둘레길로 조성한 ‘비움 명상길’은 첨단 문화기술 사이에서 힐링 포인트로 자리했다. 밤에는 홀로그램과 조명이 어우러진 ‘신라를 담은 별(루미나 나이트 워크)’로 화려하게 변신해 야간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었다. 세계 최초로 로봇팔과 3D홀로그램을 적용한 상설공연인 ‘인피니티 플라잉’도 화려한 액션 퍼포먼스로 관람객을 압도했다.지난 12일 방문한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은 “경주엑스포에서 큰 감명을 받았고 문화재를 효과적으로 가꾸고 보존해 신라 문화의 혼이 잘 전수되길 바란다”는 평가를 남겼다.□ 국내 최초 야간 반응형 관광코스 도입경주엑스포는 이번 행사를 통해 과감한 콘텐츠 다변화를 시도하며 지역 관광시장에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대한민국 대표 역사문화 관광도시라는 타이틀 이면에 야간 관광 프로그램의 부재라는 고민을 안고 있던 경주에 새로운 해법을 제시했다.야간 체험형 인터랙티브 산책 코스인 ‘신라를 담은 별(루미나 나이트 워크)’은 유휴부지였던 공간을 20년 만에 처음으로 개발해 성공을 거뒀다. 2km 길이의 ‘화랑숲’을 조성하고 경주엑스포가 자체 제작한 입체영화 ‘토우대장 차차’의 이야기를 3D홀로그램과 레이저, LED조명 등으로 표현하며 체험요소가 가득한 ‘빛의 숲’으로 꾸며 인기를 끌었다. 야간 프로그램은 입소문을 타며 전국에서 관심이 집중돼 ‘경주 나이트 투어’ 활성화에 대한 기대감을 보여줬다.□ 문화 관광산업의 선두주자새롭게 선보인 경주엑스포의 콘텐츠는 신라문화를 감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치를 인정받으며 교육적인 효과도 발휘했다.고즈넉하고 웅장한 느낌의 문화유산을 역동적이고 창의적이게 표현해 낸 콘텐츠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지자체에서 찾아왔다. 광주시, 서울시 중랑구, 순천시, 영주시, 울산시 북구, 인천시, 전라남도 등지에서 콘텐츠 탐방을 위해 방문했다.전국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비롯해 경북교육청, 한국인재교육원, 대구지방법원, DGB금융그룹, 한국수력원자력, 언론사 등 학교, 기관, 기업에서도 견학과 교육 및 워크숍 코스로 경주엑스포를 선택해 역사문화 교육장으로도 위상을 재확인했으며, ‘민·관·학 문화소통의 창구’가 됐다.□ 글로벌 문화교류의 장이번 2019경주엑스포는 오픈 전부터 해외 각국에서 관심을 보이며 국제적인 ‘문화 선도자’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됐다.베트남과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몽골, 헝가리, 이집트, 러시아, 중국 등 세계 여러 국가에서 다양한 분야의 외빈들 참관이 행사기간 내내 잇달았다. 문화를 비롯한 다방면의 지속적인 교류협력 논의가 펼쳐져 ‘글로벌 문화교류의 장’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지난달 24일 경주엑스포를 보기 위해 한국에 왔다는 헝가리 9선 국회의원 졸트 네메트 외교위원장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훌륭한 콘텐츠”라며 극찬했다. 졸트 위원장은 25일 이철우 지사를 만난 자리에서 향후 헝가리와 경상북도의 공연단 상호 파견 등 활발한 문화 교류 방안에 대해 폭넓게 협의했다.□ 문화관광 경북, 경주의 새로운 동력경북도와 경주시는 전국 문화재의 20%를 보유하고 있는 문화 관광 일번지로 문화유적지를 바탕으로 한 조용하고 차분한 여행지의 대명사였다. 하지만 올해 엑스포는 ‘천년 신라, 빛으로 살아나다’를 콘셉트로 경주의 이미지를 역동적인 체험형 관광도시로 탈바꿈시키며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전유택 평양과학기술대학 총장은 지난 5일 “대한민국의 과거 역사와 미래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콘텐츠들이 매우 훌륭하다”며 찬사를 보냈다.이마드 마흐무드 이집트 룩소르주 부지사는 “아름다운 역사문화 도시 경주와 그에 맞는 훌륭한 콘텐츠를 가진, 모든 것이 멋진 엑스포다”며 “이번 방문을 통해 한국역사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됐고 앞으로 많은 문화교류가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시대 흐름을 앞서는 젊은 축제이전에 경주엑스포는 일정기간 동안 30~40개 나라에서 참여해 전시와 공연을 펼치는 ‘단기집중, 단체관광형’ 이벤트로 치러져왔다. 반면 올해는 첨단기술이 펼치는 화려한 모습의 콘텐츠를 엑스포 곳곳에 녹여내며 여행, 레저를 중요시하는 시대 흐름에 발맞춰 개별과 가족단위 관광수요를 적극적으로 유입했다.특히 ‘인증 샷’이 여행의 묘미로 자리 잡은 SNS시대에 첨단 영상이 꾸미는 참신함은 경주엑스포 전체를 ‘인증샷 명소’로 만들어 더욱 각광을 받았다.□ 문화복지와 문화나눔 앞장이번 엑스포를 통해 문화 사각지대 축소를 위한 ‘사회적 공헌’ 활동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나라 문화발전을 이끌어 온 만 65세 이상 어르신을 대상으로 입장료를 면제해 전통문화에 익숙한 어르신들이 첨단 문화 콘텐츠를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도록 배려했다. 또한 태풍피해 성금 기탁자에게 행사기간 입장료를 면제해 주는 캠페인을 벌여 재해지역을 돕고 피해 복구에 여념이 없는 국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문화 나눔’을 실천했다.문화복지 증대를 위해 장애인(1~3급)과 국가유공자, 기초수급자 대상 무료입장과 수능 수험생 50% 할인 등 다양한 제도를 펼쳤다. 뿐만 아니라 경주월드, 블루원 워터파크, 동궁원 등 지역 관광지와 연계 할인을 추진하고 지역 호텔과 리조트 등 숙박시설과도 제휴를 맺어 시민들과 경주에 오는 관광객에게 다양한 혜택이 가도록 노력했다.□ 향후 운영 계획경주엑스포공원은 ‘365일 힐링파크, 모두가 꽃이 되는 행복한 정원’을 캐치프레이즈로 25일부터 연중 상시 개장한다. 입장요금은 2019엑스포 행사기간에 비해 30% 이상 저렴하게 조정했다. 대인 8천원, 소인 7천원이며 연간 이용권은 1만5천원이다.공원 입장요금만 내면 경주타워, 찬란한 빛의 신라, 솔거미술관, 첨성대영상관, 자연사박물관, 경주엑스포 기념관 등을 관람할 수 있다. 공원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한다. 야간에 신라를 담은 별(루미나 나이트 워크)은 오후 5시부터 10시까지 운영하며 입장요금은 5천원이다.경주/황성호기자 hsh@kbmaeil.com

2019-11-24

“세상에 같은 대장(大腸)은 없다”

지난 2월 대만 첸칭병원 대장항문 전문의들이 대구 구병원을 방문했다. 자국민에게 더 나은 치료를 제공하고자 ‘구병원 방식(Koo’s Methods)’을 배우러 온 것이다. 당시 대만 의료진은 원형자동봉합기를 이용한 치핵수술을 참관했다. 직접 보고 배운 경험을 토대로 대만에서도 치핵 수술의 완성도를 높이겠다는 다짐을 남기고 돌아갔다고 한다.대구·경북 지역에서 대장항문 질환 수술을 가장 많이 시행하는 곳이 바로 구병원(병원장 구자일)이다. 지난 22일 수술 10만례 달성을 기념해 축하행사를 가졌다. 우수한 의료진과 첨단 의료장비로 대장항문 질환 치료에서만큼은 해외에서도 인정한 전문병원이다. 대만에서만 여덟 차례, 싱가포르에서도 두 차례에 걸쳐 의료연수를 받으러 왔고, 중국과 일본 등 해외 전문의 50여명이 구병원을 찾았다.구자일 병원장은 지난 1991년 구외과의원 개설을 시작으로 국내 대장항문 질환 치료를 선도해왔다. 대장항문학 연수를 통해 검사 또는 수술 방법 등을 전파하며 대중화를 이끌었다. 이러한 발자취로 이뤄낸 항문질환 수술 10만례 달성은 구병원의 양적 성장과 더불어 질적으로도 그 의미가 남다르다는 평가가 나온다. 독특한 수술기법 창안으로 성장을 이끈 구자일 병원장을 만났다.-구병원 방식이란 무엇이며, 왜 해외 전문의들까지 주목하는가.△우리 병원에서만 실시하는 치핵 수술법이다. 원형자동봉합기를 이용한 수술로 합병증이 제로에 가깝고 통증도 없다. 항문 협착과 변실금을 예방할 수 있는 수술 방법으로 국내 대장항문 전문의뿐만 아니라 대만이나 싱가포르 의사들도 연수받으러 온다. 지난 2001년부터 시행했는데 학회를 통해 수술 사례를 꾸준히 발표하면서 국내 대학병원을 비롯한 해외로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수술이 어떻게 진행되는가.△항문 밖으로 내려온 조직을 원형자동복합기를 이용해 위로 당기고 직장(直腸)에서 문합술, 즉 장기와 장기를 서로 접합시켜 이은 후 남은 조직은 잘라낸다. 미용적인 측면에서도 기존 방법보다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원형자동봉합기를 이용한 치핵고정술은 이미 여러 병원에서 시행되고 있는데.△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원형자동봉합기 수술을 시행하고 있지만 합병증이 많고 환자가 사망하는 사례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병원의 수술법은 합병증이 없어 1만여건의 수술 사례들이 해외 의료진에게 소개되기도 했다. 이러한 성과로 송기환 부원장은 지난 6월 몽골에서 열린 대한대장항문학회 공동 심포지엄에 ‘궤양성대장염의 진단과 치료’ 주제발표 연자로 초청받았다.-치료법을 연구하게 된 계기는.△근대 100년간 치핵 수술의 원칙은 혈관 절개법(고위결찰술)과 치핵조직 절제술로 제한돼 있었다. 이후 1998년 이탈리아 외과의사 론고(Longo)가 개발한 원형자동봉합기를 이용한 수술법이 시행됐으나 국내에서는 잘 먹히지 않았다. 앞서 말한 합병증을 비롯해 문제가 많아 6∼7년 전쯤 이를 보완하기 위한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한국인을 포함한 동양인에게 적합한 수술법으로 변형시켰더니 결과가 좋았다. 합병증이 월등히 줄고 오히려 방법은 간단해 수술시간도 단축됐다. 원형자동봉합기를 이용한 수술 기법은 시술하는 곳의 위치를 잡는 것이 중요하다. 수술 부위를 절개할 때 두께와 넓이를 조절하는 것이 핵심이다. 치상선 위에 분포한 치핵이나 점막을 고리처럼 동그랗게 절제한 뒤 근육 조직에 고정하기 때문에 재발과 협착증세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수술 후 출혈도 적어 회복이 빠른 것도 장점이다. 인도와 중동지역에서도 기술을 배우고 싶다는 러브콜이 온다.-사람에 따라 수술법을 다르게 적용한 것이 지금의 성과를 이룬 셈이다.△대장항문 질환 치료도 맞춤 진료 시대다. 증상 정도에 따라 치료법을 구분하는 게 아니라, 환자에 따라 검사와 수술법을 다르게 적용해야 한다. 사람마다 눈, 코, 입 생김새가 다르듯, 대장이나 항문 모양과 길이도 천차만별이다. 여러 질환 중에서도 치핵은 수술 빈도가 높은 편에 속하는 흔한 질병이다. 모양이나 위치, 크기도 제각각 다르므로 이를 고려해 수술하면 더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사람들은 흔히 항문질환을 치질이라고 말하는데 치핵, 치루 등과 어떻게 다른가.△일반적으로 항문질환을 치질이라고 부른다. 치질은 덩어리가 생기는 치핵, 항문 내벽이 찢어지는 치열, 항문 주위 조직에 고름이 차는 치루로 구분된다. 치질의 가장 흔한 증상이 바로 치핵으로, 전체 치질의 50% 이상을 차지하며 보통 치핵을 치질이라 부르기도 한다.-치핵의 원인은.△배변 시 지속적으로 과도하게 힘을 주면 항문 주위 조직이 변성돼 탄력이 떨어진다. 변을 볼 때마다 점차 조직이 밑으로 내려오면서 항문이 빠지는 증상과 함께 출혈이 발생할 수 있다. 치루일 경우에는 간단하게 절개술로 치료하면 되지만 고위복합치루, 크론병치루는 매우 난치성에 속하고 재발이 잦은 편이다. 괄약근 손상으로 변실금이 올 수 있어 괄약근 보존술식이 필요하다.-병원을 찾는 환자들은 주로 어떤 증상을 호소하는가.△고령사회로 접어들면서 변비, 변실금, 요실금, 직장탈출증, 자궁탈출증 등을 겪는 환자가 늘었다. 역동성 MRI 배변조영술을 시행해 골반근육 약화로 인한 다양한 질환들을 진단하고 치료하고 있다. 지난 4월에는 대한대장항문병학회에서 직장탈출증 환자에 대한 복강경 수술 사례를 발표,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시대 변화에 따라 환자 연령층이 다양해진 만큼 우수한 장비와 기술 도입에 늘 관심을 가진다. 반대로 서구화된 식습관으로 인해 젊은 층에서도 대장항문 질환 발병률이 높아졌다. 10∼20대를 중심으로 복통, 설사, 혈변 등을 동반하는 크론병 치루, 궤양성 대장염이 급격히 증가했다. 어떤 병이든 조기 치료가 중요하지만, 그중에서도 대장암은 처음에 특별한 증상이 없어 일찍 발견하기 어렵다. 암이 어느 정도 진행돼서야 변비, 설사, 혈변, 용변 후 잔변감, 복통, 소화 불량과 같은 증상이 나타난다. 대장암의 85∼90%가 선종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병원은 대장내시경 전문의 20여명과 환자 8명을 동시에 검사할 수 있는 장비를 갖추고 있다. 연간 평균 2만여명에게 대장내시경 검사를 시행한다. 국가암검진에 포함되는 위내시경 검사처럼 대장내시경도 2년마다 예방 검진이 시행된다면 대장암 발병률을 현저히 줄일 수 있을 것이다.-수술법 외에 구병원만의 특징이 있다면.△국내 최초로 배변장애 클리닉을 개설해 전문적인 치료를 제공하고 있다. MRI 배변조영술로 배변 기능과 장기 움직임을 실시간 동영상으로 확인하고 배변장애를 정확하게 진단한다. 빠르고 확실한 수술만이 환자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신념으로 복막염, 장파열, 장폐색, 혈복강과 같은 복부 응급 수술을 24시간 시행하며, 갑상선유방과 복강경수술 등 외과 진료 강화로 종합병원으로서의 위상을 다지고 있다. /김민정기자 mjkim@kbmaeil.com

2019-11-24

방울참외·껍질째 먹는 참외·씨 없는 참외미래 50년, ‘성주참외’ 세계로 도약

반세기. 한 아이가 태어나 소년과 청년 시절을 보내며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머리카락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 중년에 이르는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 장구한 세월 동안 한 가지에 집중했다면 무언가 의미 있는 성과가 없을 수 없다.성주군의 대표적 특산물인 참외. 50일 후인 2020년은 성주에서 참외 재배의 역사가 시작된 지 반세기가 되는 해다.가만히 눈을 감고 성주참외가 첫 출발을 알린 시절을 떠올리면 이를 ‘도저한 역사’라 불러도 좋겠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된다.이에 본지는 ‘성주군의 자랑’이자 보물인 참외의 어제와 오늘, 미래의 전망까지를 두루 살펴보고자 한다.◇통일신라시대에 이미 참외를 길러 먹은 사람들참외와 인간이 접목된 역사는 길고도 길다. ‘해동역사(海東繹史)’와 ‘고려사(高麗史)’ 등 고문헌의 기록에 의하면 참외는 삼국시대 혹은, 그 이전 시대에 중국(인도가 원산지라 주장하는 식물학자도 있다)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왔다.통일신라시대 때의 농민들은 이미 참외는 일반적으로 길렀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문헌과 관련 유적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참외와 관련된 흥미로운 에피소드 중 눈에 띄는 것은 ‘예술과 참외의 결합’이 구체화돼 나타난 사례다.세계적으로도 그 미려함을 인정받는 고려시대 청자. 그 가운데 대표적 작품의 하나인 ‘청자 참외 모양 병’(국보 제94호)은 먹음직스럽고 고운 참외를 형상화하고 있다. 그 우아함이 현대의 어떤 예술품도 모방할 수 없을 정도.이런 사례를 볼 때 참외는 이미 고려시대에 우리가 즐겨 먹던 농산물로 자리매김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성환참외(개구리참외), 강서참외, 감참외, 열골참외 등 우리나라의 재래종 참외는 전국 각 지방에서 다양하게 재배된 것으로 알려졌다. 1950년대 중반엔 일본에서 바다를 건너온 은천참외가 도입됐고, 이후 이 품종이 한국 참외의 주축을 이루게 됐다는 것이 관련 학계의 대체적인 주장이다.이제 눈길을 미시적 사안으로 옮겨 성주참외를 돌아보자. 누가 뭐래도 성주하면 참외가 떠오르고, “참외 하면 성주”라는 말은 이제 보편화됐다.지역적으로 산자락에 자리한 성주군은 대부분이 분지로 이뤄졌다. 여기에 비옥한 토양과 맑고 풍부한 물(지하수)을 자연으로부터 선물 받은 성주는 참외 농사에 적합한 고장이다. 요즘 젊은이들의 표현처럼 “하드웨어가 좋은 것”이다.또한 기상으로 인한 재해가 적고 겨울철에 안개 발생이 거의 없다. 이는 참외의 당도를 높이고, 품질을 향상시키는 최적의 조건. 좋은 하드웨어에 ‘소프트웨어’까지 힘을 보태니 성주참외가 고품질을 가진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아닐까?◇최고의 품질을 유지하며 미래를 향하는 성주참외어느 지역보다 유리한 환경적·지리적 여건 아래서 성주군 농민들은 1950년대부터 꾸준히 참외를 키워왔고, 1960년대엔 직파 및 온상 육묘법을 적극 도입해 기술력의 발전을 도모했다.1970년대는 본격적인 ‘본포 하우스 재배’가 시작된 시기다. 이때부터 큰 도시로 참외를 대량 출하했고, 대중적 상품화가 이뤄졌다. “이는 성주군 농가 소득이 높아지는 경사로 이어졌다”는 게 성주군청 농정과의 설명이다. 재론의 여지없이 성주는 꾸준히 쌓아온 풍부한 재배 경험과 축적된 농업 기술력을 바탕으로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전국 최고의 품질”이라 평가받는 참외를 생산했다.1981년부턴 ‘참외작목회’가 조직됐고, 이는 참외 재배 면적의 비약적 증대로 이어졌다. 1984년엔 ‘금싸라기 은천참외 육종’이 보급됐다. 참외 재배지는 더 늘어나게 된다.1990년대에 들어서서는 보온 피복자재 개선, 연장재배가 일반화되면서 원예시설도 참외 재배에 최적화 됐고, 1997년도에는 하우스 보온덮개 자동개폐장치가 개발돼 노동력 절감 분야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이뤘다고 한다.이제 성주참외는 ‘찬란했던 과거 50년’을 넘어 더욱 첨단화되고 과학적인 농법을 개발해 ‘미래 50년’을 꿈꾸고 있다. 이를 뒷받침할 핵심 성장전략도 이미 수립했다.소비 성향의 변화와 급변하는 국내외 농산물시장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참외 농업의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한 대응책 마련에도 분주하다. “그 어느때보다 체계적인 장기 계획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문제의식을 성주군청 관계자들 모두가 마음에 새기고 있다.성주군은 향후 ▲성주참외를 국제적 브랜드로 성장시키기 ▲재배 환경의 규모화·집약화·과학화 추진 ▲달라진 소비 패턴에 맞는 품종 개발 ▲성주형 스마트팜 구축 ▲최소의 노동력으로 고품질 참외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 개발 ▲성주참외 대체작물 개발 등에 진력할 방침이다. 이를 위해 “성주참외가 안고 있는 현 단계에서의 과제를 각 분야별 전문가와 민·관이 함께 고민할 예정”이라는 게 성주군청의 부연.◇한국을 넘어 ‘세계 속의 성주참외’로 가는 길이외에도 성주군은 생산량에만 의존하는 성주참외 산업의 발전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인근 참외 재배 시·군 관계자, 마케팅·수출·생산·유통 부문 전문가, 참외 생산농가와 더불어 토론회와 심포지엄을 개최할 예정이다.함께 연구하고 그 결과를 공유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운다는 건 성주군의 미래를 밝힐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사실 성주참외는 품목의 특성상 수출에 한계가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2019년엔 435t의 참외를 일본, 싱가포르, 홍콩, 말레이시아 등에 수출했다. 이는 전년에 비해 84% 이상 증가된 수치다.이에 부흥해 내년엔 태국, 2021년에는 베트남 시장을 추가로 공략한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이를 위한 상품 개발과 시장 분석, 현지 조사는 필수이기에 이 계획에도 게으름이 없을 터.성주군청 농정과는 “앞으로도 해외 신규 시장 개척은 지속될 것”이라고 말한다.지난 5일엔 성주군과 디원UAV아카데미가 농업기술센터에서 병해충 무인항공방제기 운영 전문가 양성에 관한 업무협약을 맺었다.이날 협약에서 농업기술센터 서성교 소장은 “고령화된 농촌에서 농업용 드론으로 병해충 방제를 하면 노동력과 경영비가 절감되고 시간 단축도 가능하다”며 “적기 방제, 실시간 작물 모니터링, 작물 생육관리와 축사 소독 등에도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내놓았다.디원UAV아카데미 이혜정 대표 역시 “농업인대학에서 드론 교육을 진행하며 드론에 대한 농업인들의 열정에 감명 받았다”며 “협약을 통해 내실 있는 교육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성주군은 이번 협약으로 농업용 드론을 운용할 수 있는 ‘초경량 비행장치 무인멀티콥터 조종자’ 자격 취득을 위한 교육과 사후 보수교육이 효과적으로 추진될 것이라 내다봤다. 이것만이 아니다. 성주군 농민과 농업 전문가들은 편리성과 간편함을 추구하는 젊은 세대를 위해 방울참외, 껍질째 먹는 참외, 씨 없는 참외 등을 개발해 변화한 소비 패턴에도 대응할 방침이다.소과, 고당도, 편리성에 맞는 상품 개발과 효율 높은 스마트팜의 구축, 기술영농, 과학영농, 6차산업에 맞는 가공식품 개발, 대체작목 개발과 연구에도 땀 흘린다는 것이 성주군의 내년 계획이다. 관심을 가지고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전병휴·홍성식 기자

2019-11-21

공공기관 직원 지역발전 앞장-市는 정주여건 개선 최선

수도권과 지방 사이의 균형 발전을 위해 국가균형발전특별법이 제정(2004년)된 지 16년이 흘렀다. 당시 정부는 수도권에 있는 공공기관 가운데 단계적으로 지방으로 이전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2007년 수도권을 뺀 전국 광역시·도에 모두 10곳의 혁신도시를 지정했다. 이전할 계획이었던 153개 공공기관 중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을 제외한 152개 기관이 이전을 마무리했다. 김천시 율곡동 일원에 조성된 김천혁신도시에는 한국도로공사와 한국전력기술,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교통안전공사 등 총 13개의 공공기관이 이전해왔다. 당초 혁신도시 조성으로 김천은 경북 중·서부 발전의 신성장엔진으로 자리매김하면서 9조 원의 경제효과와 더불어 5만여 명의 고용이 창출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가 않다. 그렇다고 비관해할 필요도 없다. 김천혁신도시가 가지고 있는 인프라는 분명 김천의 미래를 이끌고 나갈 힘이 있다. 이에 본지는 김천혁신도시에 위치한 공공기관과 김천시가 만들어가고 있는 김천의 미래에 대해 알아봤다.△김천의 시민이 되다김천시는 혁신도시에 공공기관들이 입주를 완료하기 전부터 공공기관 직원들이 김천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2011년에는 김천포도축제기간에 맞춰 한국도로공사 등 13개 공공기관 직원과 그 가족을 초청해 포도따기 현장체험과 문화탐방행사를 가졌다. 이 행사는 이전공공기관 임직원들에게 지역민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게 함으로써 지역문화를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마련됐다.당시 한국전력기술 직원가족 150여 명과 한국도로공사 직원가족 80여 명 등 400여명이 참여해 포도축제와 직지사, 직지문화공원, 백수문학관, 도자기박물관 등 김천지역 관광명소를 둘러봤다.김천시의 이러한 적극적인 행보로 김천의 인구는 2017년 9월 14만3천여 명까지 증가했다. 이후 인구가 다시 감소세로 돌아서자 김천시는 이전 공공기관을 찾아 ‘김천愛 주소갖기 운동’을 전개했다. 공공기관 임직원들에게 ‘김천시민’이라는 주인의식과 지역발전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이로써 김천혁신도시 상주인구는 계획인구의 80%를 넘어서는 성과를 거뒀다. 지난 6월 기준 김천혁신도시 주민등록 인구는 2만1천674명으로 계획인구 2만6천명의 83%에 달했다. 하지만, 가족동반 이주율은 55.1%로 전국 혁신도시 중 최하위권으로 나타나 아직 김천혁신도시 정주여건 개선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지역발전에 앞장서다김천혁신도시에 이전한 공공기관들은 김천시와 함께 지역발전에 힘을 쏟고 있다. 이들 공공기관들은 김천시가 도농도시임을 감안해 매년 설과 추석에 농특산물 직거래장터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올해 1월 28일 한국도로공사 2층 로비에서는 15개 읍·면·동 27개 농가가 참여한 혁신도시 어울림 직거래 장터가 열렸으며, 1월 31일에는 한국전력기술, 2월 1일에는 농림축산검역본부와 한국교통한전공단에서 장터가 운영됐다. 지난 9월에도 추석을 앞두고 각각 공공기관에서 직거래 장터가 열려 이전기관과 지역주민 간 상생발전을 도모했다.직거래장터는 김천지역에서 생산, 가공되는 농특산물을 판매함으로써 지역 농민들에게는 새로운 판로를 개척하고 공공기관 임직원들에게는 안전하고 신선한 먹거리를 유통경로 없이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매년 진행되는 직거래장터는 그동안의 신뢰를 바탕으로 구매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 신뢰는 공공기관들의 지역 상생협력사업으로 이어졌다.공공기관들은 지역 마을들과 자매결연을 맺는 등 다양한 사업들을 진행하고 있다.한국도로공사는 농소면 신촌리와 자매결연을 맺었고, 구내식당과 도서관, 운동장, 테니스장, 농구장, 풋살장을 연중 주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지난 5월부터 개방된 수영장은 지역주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한국전력기술은 재능나누미 봉사활동으로 지역 아동들에게 학습지도 및 정서지원, 체험 및 신체활동, 드림스타트 프로그램 등을 제공하고 있다. 또 불우이웃 사랑의 쌀 기부, 취약계층 장학금기부 등의 기부 봉사활동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한전기술은 1본부 1촌 자매결연을 추진해 지역의 오지마을의 농촌일손을 돕고 있다.한국교통안전공단 역시 증산면 부항리와 자매결연을 맺었고, 어린이 안심통학버스 서비스 운영, 지역특산품 구입, 장애인 등 소외계층 지역복지시설 봉사활동, 주거개선사업과 지역축제 지원에 앞장서고 있다.이밖에 한국건설관리공사, 대한법률구조공단,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 농림축산검역본부,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국립종자원, 우정사업조달센터, 조달품질원 등도 지역 마을과 자매결연, 편의시설 개방, 사회복지시설 지원, 농촌일손돕기 등 지역발전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상생의 길을 모색하다김천시와 혁신도시 이전공공기관은 상시 소통으로 상생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김천시는 매년 신년에 혁신도시 이전 공공기관을 차례대로 방문해 지역과 상생·협력할 수 있는 방안 모색과 혁신도시 발전에 대한 협력에 대해 논의하고, 정주여건에 대한 애로사항을 청취하고 있다.특히, 공공기관 노조위원장과의 소통시간을 통해 상생발전 방안에 대해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올해 2월에도 김충섭 시장은 공공기관 노조위원장을 시청으로 초대해 정주여건 확충과 혁신도시의 역할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공공기관들은 김천시가 민선7기 출범과 시 승격 70주년을 기념해 진행하고 있는 ‘Happy together 김천운동’과 인구감소 대응책으로 추진하고 있는 ‘김천愛 주소갖기 운동’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또 김천시와 공공기관은 동호회 교류대회를 통해 동반성장을 위한 소통·화합·상생의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지난 6월에도 공공기관과 김천시청 등 12개 기관의 당구동호회와 탁구 동호회가 교류대회를 개최했다.한국전력기술은 지난 5일 김천시민과 함께하는 한마음 코러스 콘서트를 열었다. 한국전력기술 임직원과 김천 주민들로 구성된 한마음 코러스는 직원들의 정서함양 및 혁신도시 이전기관의 지역 상생 문화공연을 선보였다. 이날 콘서트는 정오에는 직원들을 위한 런치로비 콘서트, 오후 7시에는 김천시민들과 함께하는 한마음 콘서트로 진행되면서 큰 호응을 얻었다.혁신도시 공공기관은 상생을 위해 지역 인재 채용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2015년에서 2018년의 지역인재 채용율은 9.7%에서 23.5%로 크게 증가했다. 공공기관의 이러한 노력으로 입주 기업도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올해 1월에서 3월까지 혁신도시에 3개의 기업이 입주해, 산학연 클러스터 분양률을 52.1%로 끌어 올렸다.혁신도시 공공기관을 위한 정주여건 개선에도 만전을 기하고 있다. 김천시는 2020년까지 혁신도시에 문화시설 확충을 위해 도서관과 다목적 강당이 포함된 복합혁신센터를 건립한다. 또 공공기관 공동 직장어린이집을 만들고, 차량과 자전거 등에 대한 공유 모빌리티 플랫폼도 구축해 운영할 방침이다.여기에 자족도시 완성에 꼭 필요한 종합병원 건립을 진행하고 있다. 170병상 규모의 연합병원을 착공한 상태다.김천시와 혁신도시 공공기관의 상생을 위한 노력은 정주여건만족도에서 고스란히 나타났다. 지난해 9월 국토교통부가 작성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김천혁신도시의 주거환경분야 만족도는 63.4점으로 부산에 이어 전국에서 두번째로 높았다. 김천시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앞으로 정주여건 개선에 총력을 기울여 혁신도시 공공기관 임직원들이 김천에서 가족들과 함께 정착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나갈 방침이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9-11-21

추워야 제 맛 ‘평양냉면’·식감 좋은 ‘한우갈비’ 제대로 즐겨볼까요

왜 ‘영주의 평양냉면’인가?왜, 느닷없이 ‘영주 냉면’일까? 영주 인근인 봉화, 안동 문경 등지에는 이름난 냉면집이 없다. 경북 전체나 인근 충청도에도 별다른 냉면집은 드물다. 영주에는 업력 50년을 넘긴 냉면집이 있다.냉면은 북한 음식이다. 서울 장충동에서 냉면 노포가 시작된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전쟁 당시, 월남한 이들이 많이 살았다. 장충동 일대는 서울의 끝자락이었다. 피난민들이 쉽게 자리 잡았다. 이 지역에 서울의 냉면 노포들이 문을 연 이유다. 냉면은 북쪽 평안도 일대에서 온 이들을 통하여 서울에 정착한다. 피난민들을 통하여 냉면집이 생긴다. 냉면집 이름에 ‘평양’을 붙인 이유다. 영주의 냉면집들도 평양, 평안도, 북한발 냉면 전문점이다. 한국전쟁 때 피난 온 이들이 문을 열었다.서문가든윗대가 월남 가족이다. 현재 가게 위치와 부근도 마찬가지. 피난 온 이들이 시작한, 인견(人絹) 등을 생산하는 작은 수공업체가 가득했던 곳이다. 인견은 레이온(rayon), ‘사람이 만든 비단’ ‘인조견’이다. 누에고치의 실 대신 나무 펄프로 만든다. 서구에서 시작된 인조 비단이 한반도로 들어온다. 평안도 일대에 인견 공장이 많았고,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을 통하여 영주 풍기 지역으로 들어온다. ‘풍기 인견’의 시작이다. 현재 ‘서문가든’ 일대는 인견 공장 지역이었다. 자리에 누워도 인견 공장의 베 짜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서문가든’의 냉면은 오래된 평양냉면의 모습 그대로다. 메밀 함량은 70%, 나머지는 전분을 넣는다. 주문을 받은 후 바로 반죽을 시작한다. 여전히 손반죽을 고집한다. 냉면 뽑는 기계는, 당연히, 유압식이다. 오래전에는 손반죽, 사람 힘으로 내리눌러서 국수를 뽑는 방식이었다. 1980년대 이후, 냉면 기계는 대부분 유압식으로 바뀐다.냉면 고명은 원형 평양냉면 그대로다. 오이, 달걀 반쪽, 배나 무 등으로 고명을 얹는다. 매운 고추 등은 사용하지 않는다. 냉면 면발에 가뭇가뭇한 점이 있다. 하얀 녹쌀이 아니라 도정이 덜 된 거친 녹쌀을 사용한다. 검은 자국은 녹쌀 속껍질이다.재미있는 것은 반찬. ‘슴슴한 맛’을 추구하는 북한식은 아니다. 냉면은 북한식 그대로, 반찬은 ‘경북 영주 방식’이다. 냉면에 맵고 짠 영주의 밥상 반찬을 더했다.겨울철에 선보이는 콩비지가 대단히 좋다. 풍기 지역이다. 부석태(浮石太)를 사용하여 북한식 콩비지(되비지)를 만든다. 북한식 ‘되비지’는 비지가 아니라 날콩을 삶아서 통째로 비지찌개를 만든다.서부냉면오래된 냉면 노포다. 불과 10~20년 전에는 “한강 이남에는 서부냉면만이 평양냉면 전문점”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마당이 널찍한 가정집 한 귀퉁이에서 냉면을 만들었다. 이 지역 고기가 유명하니 고깃집도 겸했다. 지금도 불고기와 냉면을 같이 내놓고 있다.냉면은 전형적인 북한식 평양냉면. 물냉면이다. 육수 색깔이 상당히 검은 것이 특징. 면발은 꾸준히 달라지고 있다. 메밀 함량보다는 녹쌀의 도정 차이가 있다. 때로는 완전 도정한 녹쌀을 사용, 면 빛깔이 흰색이었다가, 때로는 가뭇가뭇한 점들이 박힌, 도정을 덜 한 녹쌀을 사용한다. 예나 지금이나 손님이 주문하면 그때부터 냉면 국수용 반죽을 시작한다. 메밀 함량도 상당히 높다. 반죽에 전분을 사용한다. 냉면 가락의 겉면이 매끄럽고, 반짝거린다.육수도 평양 방식 그대로다. 때로는 닭고기, 한약재 냄새가 났다. 원형 물냉면용 육수 재료는 닭, 꿩, 쇠고기를 모두 아우른다. 닭, 꿩, 쇠고기 어느 것이나 흠잡을 일은 아니다. 평양냉면을 제대로 내놓는 집에서는 돼지 살코기 혹은 뼈를 사용하기도 한다. 냉면 가락 위에 돼지고기와 쇠고기 수육이 동시에 올라간다. 두 가지 고기나 뼈를 모두 사용했다는 뜻이다. ‘서부냉면’은, 지금은, 쇠고기 위주의 육수다.50년에 가까운 업력이다. 3대 전승 중.‘영주 한우갈비’는 숙성보다 생육… 소백산 자락서 제대로 키운 신선한 육질에 반하다왜 영주 한우갈비인가?영주 쇠고기 마니아들이 제법 많다. 영주의 쇠갈비, 쇠고기는 특징이 있다. 별다른 장식 없이 무심한 듯 내놓는다. 그릇에 곱게 펼치지 않는다. 갈비의 경우, 경북지방에서는 대부분, 늑간(肋間)살을 곱게 펼치지 않는다. 양념을 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늑간살을 있는 모습 그대로 갈라서 내놓는다. 고기 단면이 네모꼴일 때가 많다. 고기가 상당히 두껍다. 숙성보다는 생육의 신선한 맛을 드러낸다. 얼마간 질긴 느낌을 준다. 입안에서 기름기가 살살 녹는 ‘한우암소갈비’보다는, 씹는 식감이 좋은, 얼마간 질긴 갈비를 선호한다. 이른바 ‘마블링’보다는 살코기 원래의 맛을 즐긴다.영주는 소백산 자락이다. 태백산맥과도 멀지 않다. 일교차가 심하다. 고기나 채소 모두 깊은 맛이 있다. 영주 쇠고기, 영주 갈비가 맛있는 이유다.중앙식육식당영주에는 삼겹살 등 돼지고기 전문점보다 한우 갈빗살 전문점이 훨씬 많다. ‘골목마다 갈빗살 집’이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중앙식육식당’은 그중에서도 비교적 오래된 노포다. 고기는, 영주의 다른 식당과 비교해도 질긴 편이다. 숙성보다는 생육의 싱싱한 맛을 따른다. 크지 않은 가게다. 입구에 들어서면 주방, 계산대에서 고기를 거는 쇠꼬챙이를 볼 수 있다.숯불에 석쇠를 사용한다. 한우갈비가 150g 기준 25,000원이다(2019년). 갈빗살이 유일한 메뉴인데, 메뉴판에 손글씨로 안창살 30,000원이라고 덧붙였다.소앤소한우전문점비교적 최근에 문을 연 가게다. 가게 내부는 식사보다는 저녁 술자리에 어울리는 인테리어. 검은색, 붉은색 위주의 깔끔한 분위기다. 연탄불이 어울릴 법한 둥근 식탁 위에 숯불을 놓고 고기를 구워 먹는다.부분육으로 정형한 고기를 가져와서 가게에서 손질하여 사용한다. 재미있는 것은 고기 구성. 접시에 내오는 고기의 질이 다르다. 아래는 ‘마블링’이 적은 갈빗살 위주. 접시 위에는 살치살에 가까운, 마블링이 많은 고기를 얹었다. 기름기가 많은 부위는 눅진한 맛을 내고, 아래의 갈빗살은 얼마쯤 질긴 고기 특유의 맛을 낸다. 숙성육보다는 싱싱한 고기 맛을 살린 구성이다. 젊은 세대, 외지 관광객들이 선호하는 고기 구성이다.횡재먹거리한우풍기 동양대 부근에 있다. 다른 고깃집과는 달리 메뉴가 상당히 다양하다. 청국장, 육회비빔밥, 갈비탕 등의 메뉴도 권할 만하다. 여러 가지 음식을 내놓지만 하나하나 정성을 기울였다. 수준급의 음식이다. 고기도 갈빗살을 비롯하여 등심도 아주 좋다. 영주 토박이가 운영하는 식당이다. 영주에서 생산된 원육을 고집한다. 등심, 갈비, 육회(우둔살), 갈비탕 등을 모두 내놓는 것은, 덩어리 고기를 식당 내에서 손질한다는 뜻이다. 밑반찬도 수준급이다. 고기 가격이 상당히 싸다는 점도 매력적. 이 지역 고깃집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숯불 직화 방식이다. 마블링이 적당한 고기를 내놓는다. 기름기보다는 살코기의 맛을 제대로 살린다.영주 맛집 2곳역한 냄새가 나지 않는 ‘한결같은’ 맛을 짓다한결청국장3대 전승 중이다. 가게 업력은 조금 혼란스럽다. 처음 가게 문을 연 것은 1970년대다. 가게 이름은 ‘인천식당’. 1980년대까지, 상당수 가게가 그러했듯이, 영업 허가도 없이 운영했다. 1980년대 정식 허가를 받고 운영하기 시작했다. 현재 식당 이름 ‘한결청국장’을 사용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창업주가 20~30년간 운영했던 가게를 아들 부부가 2000년대부터 운영하기 시작했다. 청국장에 기울인 노력이 대단하다. 2대 안주인이 멀리 대구까지 가서 청국장 공부를 따로 했다. 원래 손님이 꾸준했던 가게다. 2대에서 ‘학문적으로’ 청국장을 배워서 역한 냄새가 나지 않는 청국장을 만들었다. 손님이 꾸준한 이유가 있다. 현재 남편은 청국장 만드는 일을 위주로 하고, 아내는 식당을 운영한다. 덕분에 청국장 가루나 생 청국장을 전국적으로 통신 판매할 수 있다.재미있는 음식은 ‘콩탕’이다. 이 지역의 콩이 좋으니 청국장을 빚고, 한편으로는 콩탕을 만든다. 콩탕은 ‘콩으로 만든 탕’ 즉, 콩을 삶아서 거칠게 간 후, 마치 비지 탕이나 찌개같이 만든 것이다. 북한식 ‘되비지찌개’ ‘되비지탕’이 영주 인근의 콩탕이다.인삼·상황버섯 등 온갖 약재로 끓인 삼계탕토방식당별다른 특징이 없는, 평범한 식당이다. 영주 시내에 있다. 가게 유리에 고기부터 청국장, 상황삼계탕 등의 메뉴를 써 붙였다. 큰 기대 없이 들어가서 주문을 한다. 반전은 이 식당의 밑반찬들이다. 된장이나 무장아찌, 깻잎절임 등이 상당히 좋다. 모두 직접 담근 것이다. 채소와 더불어 먹도록 내놓는 된장은 압권이다. 투박하진 않지만 재래, 집 된장의 꼴을 갖추었다. 물기가 많지 않고 제법 되직한 된장이다. 직접 재배한 채소나 인근에서 구한 식재료들을 사용한다.영주는 풍기 인삼이 흔한 곳이다. 인삼을 넣은 삼계탕이 유명하다. 이 식당의 삼계탕은 인삼은 물론, 각종 약재, 상황버섯 등을 넣은 것이다.   /음식평론가 황광해

2019-11-20

고고한 멋을 간직한 선비의 고장, 속 깊은 가을빛에 젖다

조선시대의 왕은 요즘의 대통령과는 전혀 다른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대통령은 선거를 통해 일정 기간 동안 통치권을 행사하는 ‘최고위직 국민의 심부름꾼’이다. 반면 조선의 왕은 한번 자리에 오르면 죽을 때까지 하늘을 대신해 ‘백성 위에 군림하는 천자(天子)’로 행세했다. 그 시절엔 비단 조선만이 아닌 아시아 여러 국가의 황제, 유럽의 제왕도 마찬가지의 지위를 누렸다.그 같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왕이 특정한 교육기관의 현판을 직접 써주고, 여기에 땅과 책, 노비까지 선사한다는 건 대단히 큰 의미를 가지는 행위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왕의 신뢰와 애정을 받은 조선의 사립대학을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 부른다.영주의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그렇기에 영주시민들이 ‘선비의 고장’이라는 프라이드를 가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조선 중기 유림의 거두 주세붕(1495~1554)은 풍기군수를 지냈다. 그가 세운 서원이 백운동서원. 이후 ‘조선 성리학의 시스템을 완성했다’고 추앙받는 퇴계 이황(1501~1570)은 왕에게 이 서원에 현판과 서적을 내려줄 것을 청했고, 명종(조선의 13대 왕·재위 1545∼1567)은 퇴계의 부탁을 받아들여 ‘소수서원’이란 현판과 많은 책들을 선물한다. 더불어 면세·면역의 권한까지 부여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액서원이 된 소수서원은 조선 말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도 건재할 수 있었다.기자가 소수서원을 찾았던 시간은 늦가을 해질 무렵. 바람 소리와 은은하게 풍겨오는 소나무의 향기가 가득할 뿐 서원 주위는 고요했다. 건물 기와에 내려앉은 햇살이 부침(浮沈)을 거듭했던 조선 유림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고 있었다.세월의 때가 묻은 강학당 툇마루 아래 서니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는 젊은 선비들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 같았고, 사방을 둘러싼 은행나무가 노란 옷을 갈아입은 경렴정에선 주세붕의 그림자가 환영처럼 어른거렸다.어두워지기 전에 바쁜 걸음으로 취한대와 탁청지, 서원의 스승들이 생활하던 일신재 등을 돌아봤다.물론 ‘紹修書院’이란 쓴 명종의 글씨와 700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색채가 선명한 ‘대성지성 문선왕 전좌도(大成至聖 文宣王 殿坐圖)’도 만날 수 있었다.소수서원을 둘러본 후엔 이곳을 찾는 관광객 10명 중 9명은 찾게 되는 선비촌으로 향했다.“학문과 예의를 숭상했던 영주의 전통을 잇고, 현대를 사는 우리가 마땅히 계승해야 할 선비정신을 고양시키기 위해 조성한 공간”이란 게 영주시청 관계자의 설명.선비촌은 영주 선비들이 실제로 살았던 터전을 복원함으로써 그들의 정신을 잊지 않고 기억하도록 만들어졌다. 고풍스런 집들과 조그만 마을길이 여행자를 포근하게 안아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많은 시청자의 사랑을 받은 TV 드라마도 여러 편 이곳에서 촬영됐다고 한다.‘입신양명’, ‘우도불우빈’, ‘수신제가’, ‘거구무안’이라는 유학적 가치에 따라 공간을 구성한 영주 선비촌에선 전통가옥 체험과 예절 교육을 경험할 수 있다.대장간, 한지공방, 도예촌, 민속공예실 등은 도시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것들이라 아이를 동반한 부모들에게 인기라고 한다.시간이 넉넉한 사람이라면 조선 유교와 관련된 각종 유물이 다양하게 전시된 소수박물관까지 방문해보기를 권한다.영주시 풍기읍 창락리에 자리한 인삼박물관 앞에 섰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소설가 김종광(48)의 장편 ‘조선통신사’였다.1763년부터 이듬해까지 일본을 다녀온 ‘계미통신사’의 행적을 맛깔스럽게 소설로 옮긴 이 작품 속엔 당시 일본인이 조선의 인삼을 어떻게 생각했었는지가 짤막하게 등장한다.“먹으면 늙지 않고 죽지도 않는다”는 과장된 소문으로 인해 일본 사람들은 가느다란 인삼 한 뿌리조차 귀한 보물 모시듯 했다. 남녀를 불문하고 통신사 일행에게 적은 양의 인삼이라도 얻고자 온갖 아양을 떨었다고 한다.비단 옛날 일만도, 일본만도 아니다. 터키와 불가리아 등의 나라에선 현재까지도 인삼이 ‘희귀한 병을 치료하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인삼 성분이 소량 함유된 과립까지 인기가 높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이처럼 아주 오래전부터 귀한 대접을 받은 약재이니 우리에게도 인삼에 대한 궁금증이 없을 수 없다. 영주 인삼박물관은 이런 세간의 궁금증을 깨끗하게 해소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풍기 지역에서 재배한 인삼은 통상 10월 중순이나 11월에 수확된다. 다른 지역에 비해 수확 시기가 1개월 정도 늦다. 이로 인해 잎과 줄기의 영양분이 뿌리에 축적되는 시간이 더 길어진다.“소백산이 선물한 맑은 공기와 특유의 토질이 조직이 치밀하고, 향이 강한 인삼을 만들어준다”는 평가 또한 있다. 영주 풍기인삼은 약탕기에서 여러 번 끓여도 쉽게 물러지지 않는다. 최고의 인삼 산지로 일찌감치 자리매김한 영주에 ‘인삼박물관’이 들어선 건 당연한 수순처럼 보였다.인삼박물관측은 “한국 인삼의 역사와 효능을 관광객에게 알리고, 인삼과 관련된 유물을 한곳에 모아 전시하기 위해 ‘시간을 이어온 생명의 숨결’이란 주제로 박물관을 조성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박물관은 인삼의 전파 경로를 소개하고 기획전시를 여는 로비와 한국 인삼의 기원과 인삼의 생육 환경을 요약해 보여주는 ‘인삼 전시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1층에서 2층 입구로 이어지는 통로엔 인삼이 오가던 길을 흥미롭게 재현한 곳이 있어 어린이 방문객들의 호기심과 탄성을 불러낸다. ‘인삼 나라’라고 이름 붙인 체험관에선 인삼포 만들기, 산삼 캐기 놀이 등을 즐길 수 있다.널찍한 카페와 야외무대도 갖춘 영주 인삼박물관은 건강 정보와 함께 즐거움까지 얻을 수 있는 흥미로운 가족 여행지다.한국사를 전공한 선배에게 영주에 갈 것이란 말을 전하니 “금성대군 신단에 꼭 가보라”고 했다. “왜냐”고 되묻자 이런 슬픈 대답이 돌아왔다.“아끼던 조카(단종)가 임금 자리를 뺏긴 것도 마음 아팠을 텐데, 형(세조)에게 죽임까지 당했으니 얼마나 비극적인 삶이냐. 아픈 역사도 역사니까 듣지야 못하겠지만 가서 위로의 말이라도 한마디 전하는 게 좋지 않겠니.”‘세조(수양대군)-금성대군-단종’은 피로 이어진 혈족 관계였다. 그러나 보통의 친족들처럼 서로를 감싸주며 아껴주지 못했다. 조선 초기의 아픈 역사를 이야기 때 수없이 등장하는 스토리이기에 더 이상은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 숙부와 조카, 형과 아우가 다투다가 억울하게 피를 흘린 이 사건은 영화와 드라마, 연극으로도 여러 차례 만들어졌다.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쓸쓸하게 서있는 금성대군 신단(錦城大君 神壇)은 조카 단종을 다시 왕으로 복귀시키려던 금성대군이 이에 실패하고 형 세조에 의해 죽음을 맞은 후 세워진 제단(祭壇·제사를 올리는 단)이다. 세조 2년(1456) 사육신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된 금성대군과 추종자들은 죽음을 피해갈 수 없었다. 세조의 성격은 거칠고 불같았다고 한다. 그랬기에 당시 금성대군이 있던 순흥부는 폐읍(廢邑·일정 지역을 없애버림)의 고통까지 겪어야 했다.가을날 영주 풍경은 더없이 평화롭고 아름답다. 하지만 세상사 대부분이 그러하듯 환한 빛의 반대편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존재하는 법. 찾아오는 사람들 드문 금성대군 신단. 조그만 비석 하나만이 이곳이 그 옛날 ‘골육상쟁(骨肉相爭) 왕조사’의 현장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권력은 무엇이고, 왕의 자리란 과연 무엇일까. 동생과 조카를 죽이면서까지 차지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홍성식·김세동 기자

2019-11-20

안동이 청년을 응원합니다

최근 지방 중소도시에선 청년인구 유출과 고령화, 저출생 등으로 인한 지방소멸을 걱정하고 있다. 경북 도내에는 전국에서 소멸위험이 가장 높은 지역인 군위·의성을 비롯해 소멸 위험이 큰 상위 10개 시·군 가운데 6곳이나 됐다.한국고용정보원 이상호 연구위원은 지난 14일 열린 ‘제20차 저출산·고령화 포럼’에서 올해 기준 소멸위험지수가 전국에서 가장 낮은 기초자치단체는 경북 군위와 의성(0.143)군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지방소멸 위기 속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청년창업’을 통한 지역 정착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정부와 자치단체들은 이를 위해 각자 청년창업을 지원하기 위한 정책을 쏟아내고 있는 상황이다.이런 상황에서 안동시도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젊은이들의 창업을 통한 지역 정착을 유도하는 다양한 현장 중심의 청년 일자리 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다. 대표적으로 청년예비창업 지원사업과 청년마을일자리 뉴딜사업, 일자리 창출 우수기업 지원 사업 등을 소개한다.◇ 안동시 청년예비창업 지원 사업안동시는 지역 대학 창업지원센터와 연계해 만 18세 이상 39세 이하 예비 또는 청년 창업가에게 창업활동비를 지원하는 ‘청년예비창업 지원 사업’을 벌이고 있다. 시는 올해 1억1천만원(도비 3천300만원, 시비 7천700만원)을 투입해 11명의 청년예비창업가를 지원한다. 이들에겐 팀당 700만원의 창업활동비, 창업교육 및 컨설팅, 창업공간과 기자재 등을 지원하며 관계기관과의 네트워킹 및 사업 연계도 지원한다.안동시는 올해 안동대 창업지원센터와 안동과학대 창업보육센터에 각각 청년예비창업자를 모집해 교육 및 컨설팅을 진행하고 있다.우수한 청년창업자 발굴, 양성에 일조하고 지역경제 활성화 및 청년 일자리 창출을 도모하기 위한 이 지원 사업에 올해 11명이 선발돼 사업 준비가 한창이다.안동대에선 총 7명(기창업자 3명, 예비창업 4명)의 각기 다른 참신한 아이디어의 창업 아이템을 갖고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이 가운데 안동대 마카롱과 케이크 맛집으로 유명한 ‘달콤한정류장’을 운영하고 있는 전주영(39·여)씨는 맛있는 딸기케이크를 1년 내내 맛볼 수 있는 가게를 구상, 안동시 청년예비창업 지원 사업을 통해 안동시청 옆에 신규 매장을 오픈할 예정이다. 전 씨는 유치원, 초등학생, 중학생들의 창의 수업과 두드림 수업 등 아이들에게 베이킹으로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도록 케이크 만들기와 마카롱 만들기 출강 수업도 진행하고 있다.아울러 그녀는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케이크와 마카롱을 직접 집에서 만들 수 있는 DIY세트 프렌차이즈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전 씨는 “취미로 시작했던 홈베이킹이 지금은 파티시에라는 나의 천직으로 자리 잡았다”며 “케이크로 마음을 전하고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받을 때마다 너무나 행복하다”고 말했다.이 밖에도 야외에서 손쉽게 설치할 수 있는 반려동물 울타리, 지역 농산물을 활용한 쿠킹클래스, 멘토링 인터넷 플랫폼, 홈트레이닝 영상 콘텐츠 사업 등 기발한 아이디어를 활용한 사업들이 창업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안동시와 안동대가 돕고 있다.안동과학대에선 총 4명(기창업자 2명, 예비창업 2명)의 청년 (예비)창업가를 지원하고 있다.대표적인 사업 아이템에는 최근 농촌 관광 활성화 사업 중 하나인 농촌 체험을 보다 효율적이고 많은 사람이 찾을 수 있도록 6차 산업과 IT를 융합한 농촌 체험 O2O 플랫폼 구축 사업을 비롯해 지역 특산품을 활용한 비누 만들기 체험, 광고 디자인, 소음측정 파라솔 등이다.◇ 청년마을일자리 뉴딜사업‘청년마을일자리 뉴딜사업’은 지역 청년들이 마을 자원을 활용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사업화함으로써 청년의 지역 정착과 지역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 마련됐다. 올해 시는 이 사업에 1억5천750만원(국비 7천312만5천원, 도비 4천218만8천원, 시비 4천218만7천원)을 들여 3팀(9명)을 선발해 지원하고 있다. 시는 우선 이들에게 창업 성공을 위한 교육과 맞춤형 컨설팅을 하고 지역의 마을자원을 활용한 6차 산업화 아이템에 대한 창업 사업비를 1명당 연 1천500만원 팀당 최대 6천만원까지, 1년차 사업평가 결과에 따라 2년 차까지 지원한다.올해 안동시는 풍천면과 서후면, 와룡면 등에서 사업을 펼칠 3팀을 선정해 지원하고 있다.△ 글 쓰는 책방 ‘가일서가’‘글 쓰는 책방 : 가일서가’ 팀은 안동시 풍산읍 가곡리 가일마을에서 고택을 활용, 문화공간을 창출해 관광객을 비롯해 경북도청신도시, 마을 주민들의 문화적 갈증을 해소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이 팀은 안동시 문화유산 제25호인 노동서사 및 노동재사 건물을 리모델링해 창작그림책 및 북큐레이션으로 컨셉을 담은 서점을 운영 중이다. 이곳에선 ‘자연과 글을 벗하는 시골의 삶’을 주제로 곁에 두고 읽을 만한 100여 권의 책을 선정해 판매하고 있다. 또 장기적으론 가일마을 전체를 작가 및 프리랜서들의 정주형 공간으로 형성한다는 복안이다. 이를 위해 우선 고택(빈집 등)의 순차적인 공간 리노베이션을 통해 마을 전체의 공간콘텐츠 확대하고 마을주민들의 유휴공간(집, 방) 활용을 통해 숙박시설 확충, 도시를 떠나 글을 쓰거나 작업을 하는 프리랜서들을 위한 레지던시 기능도 할 예정이다.김현정·이가람 가일서가 대표는 “마을주민들의 소득증대 및 자부심 고취, 지역 내 창의적 문화공간으로 지역주민들의 갈증 해소, 국내외 관광객 수 및 정주시간 증대 등을 기대하고 있다”면서 “앞으로 글쓰기와 책만들기 등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예술프로그램을 기획 및 개발해 운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마을 생산 농산물 활용한 ‘청년방앗간’‘청년방앗간’은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인근 폐가 및 폐건물을 활용해 가공시설을 비롯해 체험· 휴양 시설을 갖추고 지역 특산물인 안동고추를 활용한 체험학습을 운영할 계획이다.체험 참가자들은 고추의 선별 방법 등을 배우고 직접 선별한 고추를 활용해 고춧가루를 만들고 고추장까지 만들어 볼 수 있다. 또 마을 인근 ‘종택’에서의 문중 유교체험 프로그램과 연계한 체험 프로그램도 계획하고 있다.이 팀은 ‘지역 농업과 함께 성장하는 청년창업’이라는 목적으로 1차 농업만이 주류인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고 청년들이 2차, 3차 역할을 담당해 이를 통한 농가 소득 창출뿐만 아니라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발판이 되고자 이 사업을 추진하게 됐다고 한다.△ 체험용 가족 테마파크 ‘어드벤처 스토리’어드벤처 스토리(Adventure Story) 팀은 안동시 와룡면 이하리에 실내 테마파크인 플레이 파크를 조성할 예정이다.이 사업은 최근 미세 먼지로 인해 소극적인 야외활동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인 아이들에게 쾌적하고 미세먼지 걱정이 없는 공간을 제공하고자 추진됐다. 이곳에선 어린이들이 꿈과 희망을 펼칠 수 있도록 다양한 체험활동을 비롯해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아무런 걱정 없이 온몸 놀이에 흠뻑 빠질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또 지역마을자원을 활용해 마을의 농산물을 활용한 체험, 소개, 판매를 할 수 있는 사회적 역할도 할 계획이다.이곳엔 가족과 함께하는 체험형 테마파크, 농촌 테마별 체험, 실내 익스트림 스포츠 체험, 근거리 관광코스, 농산물 직거래 장터 등이 마련된다.◇ 일자리 창출 우수 기업 지원 사업안동시는 청년 일자리 창출을 위한 창업 지원뿐만 아니라 이들을 비롯해 중장년층까지 신규 고용실적이 우수한 지역 중소기업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대표적인 사업이 일자리 창출 우수 기업 지원 사업이다.이 사업은 기존 중소기업 인터사원제와 별도로 고용실적이 우수한 기업에 근로환경개선을 위한 다양한 지원을 비롯해 지역 중소기업에 대한 인식개선 및 청년 일자리 미스매치 해소도 돕는다.안동시는 올해 총 사업비 9천782만6천원(도비 2천935만원, 시비 6천847만6천원)을 투입해 우수 중소기업의 근로자 복지시설 개보수 또는 물품 구입 지원을 한다. 기업 당 지원 규모는 신규 채용 인원에 따른 고용지수별로 최대 4천만원까지 받을 수 있다.김광수 안동시 일자리경제과장은 “지역에 다양한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해 도시 청년의 유입하는 동시에 지역 청년들의 정착을 유도하겠다”면서 “앞으로도 지역 일자리를 만들고, 마을 공동체 복원을 비롯해 지역 중소기업까지 상생할 수 있는 다양한 시책을 펼쳐나가겠다”고 말했다.한편, 안동시는 이밖에도 중소기업 인턴사원제, 공공부문 및 지역공동체 일자리 사업 등 현장과 연계한 다양한 일자리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손병현기자 why@kbmaeil.com

2019-11-19

괘서사건과 이성 잃은 영조

경종 즉위 후 노론과 소론은 연잉군(훗날 영조)의 세제 책봉과 대리청정 문제로 마찰을 빚었다. 급기야 서로 상대방을 역적으로 몰아가는 극단적 붕당싸움으로 번졌다. 이런 복잡한 시기에 경종이 갑자기 죽고 노론의 지지를 받은 영조가 즉위했다. 위기에 처한 소론의 급진세력(준소)과 남인들은 영조의 정통성을 부인하며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이들의 불만은 결국 무신난(戊申亂·이인좌의 난)으로 표출되었다.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무신난이 진압된 뒤에도 또다시 ‘나주괘서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를 두고 윤지(尹志)가 주도하였다고 하여 ‘윤지(尹志)의 난,’ 또는 옥사가 일어난 해가 1755년 을해년(乙亥年)이므로 ‘을해옥사(乙亥獄事)’라고도 한다.엄밀히 따지자면 을해옥사는 이해 2월에 발생한 나주괘서사건과 바로 뒤이어 5월에 일어난 ‘심정연(沈鼎衍) 시권(試卷:답안지)사건’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나주괘서사건의 실체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영조는 이 사건을 불만을 품은 소론급진 세력들의 역모로 몰아갔다. 사건에 대한 조사가 마무리 되자 으레 그랬듯이 유3천리 경상도 장기현은 유배인들을 맞느라 분주했다. 장기로 배정된 유배인의 숫자는 확인된 것만 무려 아홉 명이나 된다. 김창대((金昌大), 이양조(李陽祚), 이석조(李錫祚), 단이(丹伊), 단이의 강보에 싸인 생후 1년 미만 된 아이, 강이노(姜二老), 이백련(李白連), 성불상 희(喜), 김몽성(金夢成)이 그들이다.이 사건의 발단은 단순했다. 1755년 2월 4일, 전라감사 조운규(趙雲逵)는 나주의 객사 망화루(望華樓) 벽에 익명의 괘서(掛書)가 붙은 사실을 보고받고 조정에 급보했다. 괘서는 ‘조정에 간신들이 가득 차서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는 내용이었다. 영조는 필시 무신여당의 행위라고 단정을 짓고 좌우 포도대장에게 기한을 주며 괘서의 주모자를 색출하여 체포할 것을 지시했다.수사 7일 만에 주모자로 체포된 자는 나주에 살던 윤지(尹志)였다. 그는 숙종때 과거에 급제하여 지평(持平·사헌부의 정5품)을 지냈던 인물이었다. 그의 아버지 윤취상(尹就商)은 형조판서를 지낸 인물인데, 1724년(영조 즉위)에 있었던 김일경(金一鏡·소론의 거두)의 옥사에 연루되어 고문 끝에 죽었다. 윤지도 그 사건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18년 만에 나주로 이배(移配)된 인물이었다.윤지는 자신의 가문을 파멸로 몰아넣은 노론과 영조를 언젠가는 제거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자면 세력들을 모아야 했다. 우선 아들 윤광철(尹光哲)을 통해 나주지역을 중심으로 필묵계(筆墨契)를 조직했다. 이 조직은 표면적으로는 학동들의 계모임이었지만, 실제로는 거사를 위한 비밀결사단체였다. 또 전 나주목사 이하징(李夏徵)과 아전들도 포섭했다. 집안과 교유하던 유배인들 뿐 아니라, 서울과 충청도 지역에서도 뜻을 같이하는 집안들을 끌어들였다. 세력이 결집되자 윤지는 먼저 민심을 동요시키고자 했다. 1755년(영조 31) 정월, 그는 조정을 비방하는 익명의 글을 작성하여 처남과 집안의 노비를 시켜 몰래 나주 객사에 붙이도록 했다. 하지만 수사망을 피해나가진 못했다. 작은 고을에서 목숨을 걸고 영조를 비난할 만큼 간 큰 양반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수사는 40일간 진행되었다. 윤지와 친분관계에 있던 나주 지역의 관리와 아전들, 같은 처지에 있던 유배인들, 윤지에게 학문을 배웠던 자들, 편지를 주고받았던 서울의 소론 정치인들이 하나둘씩 체포되었다. 윤지는 영조의 직접 심문을 받았으나 자백을 하지 않고 버티다가 능지처사되었다.이 해 3월 8일, 영조는 왕세자인 사도세자를 비롯한 백관과 도성의 백성들이 지켜보도록 한 뒤, 참혹하게 윤지의 아들 윤광철을 공개 처형했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서 절대 권력을 과시하고 통치기반을 다지기 위한 본보기의 하나였다. 이로써 윤취상의 집안은 아들인 윤지와 손자 윤광철까지 3대가 영조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래도 화가 안 풀린 영조는 윤지 부자의 집을 연못으로 만들어버렸다. 박찬신(朴纘新)은 자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즉시 남대문 밖에서 효시되었다. 이들 외에도 조정과 포도청 등에서 60여 명이 가혹한 심문을 받았다. 김윤(金潤)·조동하(趙東夏)·민후기(閔厚基)·민효달(閔孝達)·김주천(金柱天)·이시희(李時熙)·이명조(李明祚) 등도 공범으로 몰려 함께 참형을 당했다. 이광사(李匡師)·윤득구(尹得九) 등은 귀양을 갔다. 특히 서예가이자 양명학자로 유명한 이광사는 윤광철과 몇 차례 서신을 주고받은 것 때문에 의금부에 하옥되었는데, 그가 참형을 받을 것이라는 소문에 절망감을 느낀 부인 유씨는 두 아들과 일곱 살 배기 딸 하나를 두고 목을 매달아 자결했다. 친국 끝에 종신유배형을 받은 이광사는 총 23년간의 유배생활 끝에 유배지 신지도(薪智島)에서 생을 마감했다.이 사건으로 모두 65명이 화를 입었다. 영조 재위기간에 모두 열다섯 차례의 괘서사건이 발생했는데, 단일 괘서사건으로 가장 많은 인명이 살상된 것이다.피비린내가 잠시 멈춘 그해 3월 20일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온 김창대(金昌大)는 사건 연루자인 임천대(林天大)와 같이 나주에서 조직한 필묵계 계원 중 한 사람이었다. 또 그보다 열흘 뒤에 장기현에 도착한 이양조(李陽祚)와 이석조(李錫祚)는 참형을 당한 이명조의 동생들이었다. 이들은 한양 사람들로서 윤광철과 교유했다는 이유로 화를 입었다.영조는 나주괘서사건을 처리한 후 종묘에 나가 역적들을 토벌했다고 고하고, 5월 2일에 춘당대(春塘臺)에서 특별과거시험인 토역경과정시(討逆慶科庭試)를 열었다. 나주 괘서사건이 마무리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실시한 특별과거시험이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시험장이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시험 답안지(試券)에 콩알만 한 작은 글씨로 영조의 치세와 조정의 인물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며 비판하는 내용과, 익명의 투서까지 함께 나왔던 것이다. 영조실록에는 답안지와 같이 제출한 투서의 내용이 너무 적나라하여 ‘임금이 다 보지 못하고 상을 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적고 있다.조사결과 주인공은 나이 스물아홉의 심정연이었다. 심정연은 본관이 청송(靑松)이고,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무신난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이미 큰 화를 입고 있었다. 아버지 심수관(沈受觀)과 형인 심성연(沈成衍)·심익연(沈益衍)이 모두 무신난 때 죽임을 당했다. 심정연은 친국하는 영조에게 ‘이는 일생 동안 내가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생각으로 과장(科場)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써 두었던 것’이라고 답했다.심정연은 윤지의 숙부 윤혜(尹惠)와 모의했으며, 김일경의 종손인 김요채(金耀采)·김요백(金耀白) 등과 같이 춘천에서 거병(擧兵)을 계획했다고 자백했다. 사건은 이제 역모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윤혜를 비롯한 여러 명이 춘천에서 잡혀왔다. 영조는 갑옷을 입고 숭례문의 누각에 서서 그들의 심문을 감독했다. 윤혜로부터 압수한 문서에는 선왕들의 휘(諱:이름)가 적혀 있었다. 영조가 그 이유를 묻자 ‘내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참고하려고 썼다’고 태연스럽게 답했다. 영조가 주장(朱杖:붉은 곤장)으로 마구 치게 했으나, 윤혜는 혀를 깨물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종묘로 달려간 영조가 엎드려 ‘저의 부덕으로 욕이 종묘에 까지 미쳤으니 제가 어떻게 살겠습니까?’라고 흐느낄 정도로 선왕들의 휘는 금기였던 것이다.윤혜가 드디어 대역부도의 죄를 시인하자 영조는 대취타(大吹打:군악)를 울리도록 지시했다. 훈련대장 김성응(金聖應)에게는 윤혜를 효수(梟首)하게 한 후, 그 머리를 깃대 끝에 매달고 여러 백관에게 돌아가며 조리돌리도록 명했다. 이를 말리는 판부사 이종성을 곧바로 귀양보내고, 즉시 윤혜의 머리를 바치지 않은 김성응에게는 곤장까지 친 후 귀양을 보내버렸다. 영조실록에도 이때 영조는 ‘술에 취해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고 적고 있다. 분노 속에 이성을 상실한 영조는 그나마 남아 있던 소론세력들을 대거 숙청하기에 이른다.심정연은 주모자 윤혜·김도성(金道成)·신치윤(申致雲)·강몽협(姜夢協)·강몽상(姜夢相)·유봉린(柳鳳麟)과 함께 사형을 당했다. 이 밖에도 김일경의 일파라고 하여 김인제(金寅濟)·박사집(朴師緝)·이전(李佺)·이준(李峻)·유수원(柳壽垣)·김성(金渻) 등도 참형을 당했고, 그 가족들이 연좌된 것이다. 아울러 심정연 등이 춘천부의 사람들이었으므로 춘천부가 현(縣)으로 강등되었고, 유수원이 충주 출신이었으므로 충주목(牧)이 충원현(縣)으로 강등되었다.그 여파는 동해 땅 끝 장기고을까지 흘러들어 왔다. 1755년 (영조31) 5월 14일, 강몽상의 처 단이(丹伊)와 그해 출생하여 아직 이름도 짓지 못했던 아들 하나, 그리고 조카 강이노(姜二老)가 유배객의 신분이 되어 장기현으로 왔다. 강몽상은 강몽협의 사촌 동생인데, 60여 명으로 춘천부(春川府)를 공격하려 했다는 혐의로 사형을 당했다. 이들만이 아니었다. 그해 5월 18일에는 이준(李埈)의 손자 백련(白連), 며느리(子婦) 희(喜)가 왔고, 6월 9일에는 김성(金渻)의 서질 아들 김몽성(金夢成)이 장기로 왔다.연달아 일어난 이 두 사건으로 처형당한 소론 강경파는 500여 명에 달했다. 영조는 이미 지난 무신난 때 용서해 줬던 사건의 관련자들을 다시 역적으로 규정짓고 해당 가족들을 연좌시켜 처단하기도 했다. 또 이종성(李宗城)·박문수(朴文秀) 등 극소의 인물을 제외하고는 소론 온건파들도 모두 조정에서 쫓아냈다. 그해 11월, 영조는 이를 계기로 천의소감(闡義昭鑑)이란 책자를 펴냈다. 을해옥사에 연루된 인사들의 숙청, 왕위계승 과정, 재위 기간에 발생한 옥사 처리의 정치적 정당성을 천명하기 위해서였다.다음 해인 1756년(영조 32) 2월, 영조는 노론에서 정신적 지주로 삼는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했다. 드디어 노론이 한 당파의 이념을 뛰어 넘어 국가의 이념임을 선포한 셈이었다. 소론과 남인은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정도로 전락하였고, 노론들의 독주가 진행되었다. 아울러 전제군주가 된 영조는 어지간한 신하들의 반대에도 자신이 원하는 일은 밀어붙였다. 균역법의 전면 실시, 서얼의 등용 등 영조 후반의 과감한 제도개혁은 이처럼 광기(狂氣)의 피비린내 나는 굿판을 벌이고 나서야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11-19

“전국 최고 스포츠 도시, 전지훈련 메카 문경으로 오세요”

문경시가 2013년 국가스포츠의 요람이자 엘리트 체육의 산실인 국군체육부대의 문경 이전과 함께 2015 경북문경세계군인체육대회의 성공적 개최, 국제적 스포츠 인프라 구축으로 국내·외 스포츠대회는 물론 전지훈련의 메카로 우뚝 섰다◇사통팔달의 교통 요충지문경은 대한민국의 사통팔달의 교통 요충지로서, 전국 어디에서나 2시간대에 접근이 가능한 대한민국의 중심지이다. 현재 차질없이 진행중인 중부내륙고속철도가 개통되면 수도권과 1시간대에 접근가능하며, 국군체육부대의 우수한 스포츠 인프라와 함께 천혜의 자연환경과 관광자원을 연계한 융복합 스포츠 산업으로 스포츠·전지훈련의 메카로 발돋움해 앞으로도 더 많은 대회와 전지훈련 유치가 가능할 전망이다.◇전국 최고 시설 국군체육부대국군체육부대는 2013년 성남에서 문경으로 이전됐으며, 태릉선수촌의 5배 규모로 국제규격 스포츠 시설을 자랑하는 국가 스포츠의 요람이자 엘리트 체육의 산실이다.건립비 3천900억원으로 호계면 견탄리 일대 45만평 규모에 실내훈련장 18동, 실외훈련장 10동, 실내육상장 1동, 선수 숙소 등 29개동과 영외 아파트가 있다.1만2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메인스타디움은 4개면의 축구장, 근대5종 복합경기장, 사이클 벨로드롬을 갖추고 있다. 국제규격 경기장은 축구, 럭비, 핸드볼, 농구, 유도, 복싱, 레슬링, 수영, 육상, 태권도, 아이스하키, 빙상 등 25개 하계종목과 바이애슬론, 아이스하키, 빙상, 스키, 루지, 봅슬레이, 스켈레톤 등 7개의 동계종목을 치러낼 수 있다. 14개 종목 동시훈련이 가능한 V자형(520m)의 세계 정상급 수준인 국내 최대 실내훈련장, 세계 유일의 근대5종 전용 실내경기장 등도 있다.◇전지훈련의 메카로 부상2013년 국군체육부대가 문경으로 이전하고 난 뒤 문경시와 국군체육부대가 협력한 적극적인 스포츠마케팅으로 2018년 325팀 4만1천100명이 전지훈련을 위해 문경을 찾았다. 올해는 9월 말 현재 275팀 3만6천여명이 다녀갔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2020년 도쿄올림픽을 대비해 국내·외 전지훈련 선수단 5만여명 이상이 문경을 다녀갈 것으로 예상된다.문경을 방문하는 전지훈련팀은 종목별 국가대표팀과 국가대표 상비군, 한국체대를 비롯한 각종 대학팀, 전국의 체육 중·고등학교, 실업선수팀 뿐만 아니라 문경시, 국군체육부대, 한국관광공사 등 3개 관계기관이 긴밀히 협력해 노력한 결과 미국, 중국, 일본, 대만,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스페인,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등 해외 훈련팀의 참여도 해마다 늘고 있다.문경 전지훈련의 가장 큰 매력은 국군체육부대의 최첨단 시설을 갖춘 경기장에서 국가대표급 체육부대 선수들이 멘토로 지도를 해주는 등 훈련 파트너로서 실전연습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또한 훈련장과 숙소 간 차량지원과 함께 관광체험, 지역 특산품 홍보 등 전지훈련 선수단에 대한 타지역과 차별화된 문경시의 다양한 정책으로 문경을 방문하는 전지훈련 선수단들이 훈련에 더욱 집중할 수 있다는 점도 문경이 추진하고 있는 스포츠마케팅의 강점이다.◇전국단위 규모 체육대회 유치시는 문경 브랜드를 앞세운 전국 단위 체육대회를 개최해 문경 브랜드 홍보 및 스포츠도시 문경의 이미지를 높이고 있다. 매년 문경의 특산품과 관광명소를 타이틀로 하는 체육대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지난해 28개 전국대회에 이어 올해는 33개 전국대회를 성황리에 개최했다.또한 국군체육부대와 스포츠 발전 상설협의회를 운영해 문경시, 국군체육부대 간 스포츠발전 상호 협력체제를 강화하고 있으며, 두 기관의 긴밀한 협조체제를 통해 전국 단위 체육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그 중에서도 올해 체육부대와 함께한 2019 KBL 유소년 클럽 농구대회와 제28회 국방부장관기 전국 단체대항 태권도대회는 대회에 참여한 선수들과 학부모들에게 큰 호응을 얻으며 문경의 스포츠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앞으로도 시는 국군체육부대와 연계해 다양한 대회운영 노하우와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각종 전국단위 체육대회 유치를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와 스포츠도시 이미지 제고에 노력할 예정이다.◇우수한 공공체육시설 구축시는 국제규격의 최신시설을 갖춘 국군체육부대와 문경국제소프트테니스장, 배드민턴 전용경기장, 문경온누리스포츠센터, 문경국제클라이밍센터, 문경야구장, 영강체육공원 등 다양하고 우수한 스포츠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2019년에는 문경국제정구장 돔 설치와 국민체육센터 및 실내체육관 리모델링 등 공공체육시설 개·보수로 사계절 전지훈련의 스포츠 메카로서의 입지를 더욱 다지고 있다.◇스포츠 메카도시 부상·경제 활성화시는 매년 전지훈련팀과 전국대회 규모가 늘어나고 있으며, 지난해 4만1천여명의 전지훈련 유치와 47개의 체육대회 개최를 통해 모두 40만명이 문경시를 방문해 290억원의 지역경제 유발효과를 거뒀다.올해에도 9월까지 3만6천여명의 전지훈련 선수단이 방문하고 41개의 체육행사를 개최했으며 올해 말까지 9개의 체육대회가 더 예정돼 있어 2019년에도 300억원 이상의 경제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문경시의 적극적인 스포츠마케팅으로 매년 증가하고 있는 체육행사와 전지훈련팀 유치로 지역 숙박업소와 음식점 등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고윤환 시장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우수한 스포츠 시설을 활용해 적극적인 국내외 전지훈련 유치와 전국대회 개최를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하겠다. 문경이 스포츠 메카도시로 거듭나 지역의 미래를 견인해 나가겠다”고 말했다./강남진기자 75kangnj@kbmaeil.com

2019-11-17

생경한 풍경·소리·냄새… ‘낯선 차원’으로 떠났던 길

이제는 지나온 길들을 추억할 때다. 지난봄부터 시작한 경북 바닷길로의 긴 여행은 겨울비와 함께 끝났다. 그러나 여행은, 단 한 번 물리적 체험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회상이라는 마음의 발걸음을 통해 언제든 재방문과 열람이 가능한 무한재생의 세계다. 나는 겨울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봄으로 지나온 길들을 되돌아가며 그때는 미처 눈길을 주지 못했던 풍경과 사람들을 향해 다정하게 인사하고자 한다.여행이 가장 아름다워지는 순간은 뜻밖의 풍경과 마주할 때다. 예기치 못한 특별한 경험을 통해 ‘나’의 상투적인 관념과 습관들이 쇄신될 때, 여행은 더욱 가치 있는 체험이 된다. 널리 알려진 명소를 찾는 것이 여행의 큰 기쁨이겠지만, 알려지지 않은 장소를 발견하거나 또는 전혀 특별해보이지 않는 곳에서 특별한 순간과 만날 때 여행의 기쁨은 무한대로 증식한다. 상투성과 관념, 기성의 유행에 길들여진 ‘나’를 낯선 곳으로 데리고 갈 때, 거기서 퇴화된 감각들로 하여금 새로운 감동과 충격을 받아들여 눈과 코와 입을 갱신하게 할 때 여행은 참된 의미를 획득한다.그러므로 우리는, 가끔씩이나마 편리하고 익숙한 일상의 자리에서 벗어나 생경한 풍경과 소리, 냄새가 있는 ‘낯선 차원’으로 갈 필요가 있다. 시와 평론, 논문, 칼럼, 에세이 등 온갖 글쓰기로 좀처럼 일상을 벗어날 수 없던 나도 ‘낯선 곳에서의 방랑’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다. 일상에 갇혀 있으니 생각도 고인 물이 되어 썩어갔기 때문이다. 새로움에 대한 갈증이 깊어졌다. 새로움을 위해선 익숙함과의 결별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데, 자기존재를 ‘모르는 자’이자 ‘질문하는 자’, ‘감동하는 자’로 복원하는 과정에는 방랑이 필수적이다.그동안 부계(父系)의 혈통인 석양을 따라 서쪽으로, 모계 혈통인 “김 냄새 나는 비”(백석, ‘통영1’)를 따라 남쪽 바다로만 다녔던 나는 울진부터 경주에 이르는 경북 바닷길을 이번에 처음으로 ‘종주’했다. ‘종주’의 사전적 정의는 “능선을 따라 산을 걸어, 많은 산봉우리를 넘어가는 일”인데, 해안선을 따라 해변을 걸어, 많은 파도를 넘어갔으니 이번 여행을 바닷길 종주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여행은 보편 공감의 영역에서 어느 장소의 분위기와 정서를 타인과 공동으로 향유하는 집단체험이 아니다. 개별의 뒷골목에서 상점의 불빛과 음식 냄새와 노랫소리, 살갗에 피어나는 호기심을 나 혼자 감각으로 전유하는 행위다. 특히 경북 바닷길은 패키지 단체 관광이 아닌 단독 자유 여행이어야 한다. 몸은 다시 돌아가도 마음만은 떠나온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 편도 여행이어야 한다. 여행은 어떤 식으로든 사람의 내면을 변화시키기 마련이다. 나는 이번 여행으로 얼마나 달라졌을까? 내 내면을 새롭게 한 감동과 충격들을 어디서 어떻게 만나왔을까?지난계절 동안 파도를 수직으로 깎아내는 울릉 태하 대풍감에 서 있었다. 아까시 향기가 수평선을 노랗게 물들이는 걸 바라보며 울진 월송정에 앉아 있었다. 해물잡탕국수가 모락모락 끓는 포항 구룡포항에 퍼질러져 있기도 했고, 햇살과 물이 금빛 동색(同色)으로 흐르는 영덕 오십천에서 낚시도 했다. 신라의 달밤 아래 천 년 전 사람들의 미소가 연못에 비치는 경주 월지를 한참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선명한 장면들의 틈새마다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별 것 아닌 순간들’이 내 여행을 키운 ‘팔할의 바람’이었다.지난봄 “만 그루 소나무 가운데”에 세워진 울진 월송정에서 초록빛 솔향에 몸을 씻을 때, 정자 앞 소나무 숲에 한 무리의 교인들이 돗자리를 깔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차를 아무렇게나 세워놔 경치를 망치고, 마이크와 앰프로 시끄러운 소음을 내 고요한 명상의 기쁨을 깨뜨리는 것이었다.그 공해를 피해 월송정에서 내려오니, 나를 위로하듯 멋진 카페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몸을 뻗어 올린 울창한 소나무 숲 속, 기와지붕과 모던한 통유리 건물이 옛것과 새것, 한옥과 양옥, 동양미와 서양미의 조화를 이루는 카페 ‘노바(NOBA)’다. 화이트 톤의 벽과 은은한 조명빛, 한옥식 나무 서까래가 어우러진 내부도 좋지만, 그곳이 매력적인 이유는 바깥에 있다. 야외 테라스에 앉아 아이스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커피와 함께 피톤치드가 몸속으로 스며들며 불쾌함이 싹 씻겨나갔다. 내 몸속 나쁜 피와 불쾌감까지 깨끗하게 씻어준 그 한 잔의 커피에게 이제야 고맙다고, 늦은 인사를 보낸다.영덕에서는 목은 이색 기념관으로 가는 길, 영해면 괴시마을의 고즈넉한 정취가 마음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그곳의 오래된 햇살에선 해금 소리가 나는 듯했다. 괴시마을을 걷다가 괴정(槐亭) 앞에 멈춰 섰다. 1766년 조선 영조 때 괴정 남준형 선생이 지은 정자다. 마당에서는 전통 활쏘기 체험이 한창이었다. 담장 너머로 그 광경을 엿보다가 활쏘기를 지도하던 영양남씨 괴시파의 어르신과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나도 마당으로 가 활을 당겨 보았다. 지금도 내 몸엔 그날 손끝에서부터 손목, 팔꿈치, 어깨로 이어지던 팽팽한 근육의 긴장이 새겨져 있다. 따사로운 봄볕 속에서 고요히 침묵하는 입술은 바짝 마르고, 머리칼을 한 올 한 올 세고 가는 섬세한 바람에 뺨이 부르르 떨렸다. 그때, 한 눈을 감고 바라본 세상은 참 아름다웠다. 몇 번 연습 끝에 과녁을 명중시키자 어르신께서 활짝 웃으며 박수를 쳐주셨고, 그제야 긴장이 풀리면서 내 온몸이 가벼워졌다.포항에는 뜻밖의 ‘밤의 카페 테라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산 아귀찜’에서 아귀간수육과 아귀찜을 배불리 먹고 숙소로 들어가던 길, 모던풍의 레스토랑과 카페들이 밀집해 있는 환호동 카페거리의 불빛에 매료되어 아무데나 들어간 곳이 ‘커피명가’였다. 그곳 야외 테라스에서 영일만의 야경을 바라보며 갓 구워낸 빵과 커피, 아포가토 등 디저트를 즐겼다. 커피도 커피지만 페이스트리와 케이크 등 빵맛이 빼어났다. 깨끗하게 씻긴 달과 별과 어선의 불빛들이 수평선 빨랫줄에 나란히 걸린 밤, 음식 평론가 황광해 선생, 홍성식 기자와 마주 앉아 나누는 대화는 어둠이 푸르게 깊도록 좀처럼 지치지 않았다.문무대왕릉과 감포를 지나 선덕여왕릉에 오를 때까지 경주는 내내 맑고 따사로웠다. 황남동에 도착하는 순간, 마른하늘에서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나기는 이른 여름의 열기를 식혀주면서, 선덕여왕을 짝사랑한 천민 지귀처럼 혼자 애달파 끓는 내 가슴 열병을 달래주면서 시원하게 내렸다. 갑자기 내린 비에 황남동은 한바탕 소란스러웠다. 비를 피해 이리 저리 뛰어다니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배낭으로 비를 막으며, 막기는커녕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으며 처마를 때리는 빗소리가 왁자지껄 웃음소리처럼 들리는 ‘황남고택’의 문을 열었다. 삐거덕거리는 문소리, 마당에는 벌써 물웅덩이가 요란스럽게 부서지고 있었다. 처마 밑에 겨우 비를 피하고 섰더니 그 집 주인 어르신께서 맨발로 달려 나와 마른 수건을 건네주셨다. 비에 젖은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낸 후 나와 어르신은 마주보며 웃었다. 경주는 그렇게 천년의 마음으로 나를 격하게 환영해준 것이었다.이런 일들도 있었다. 해파랑길을 걷다가 갑자기 배낭의 어깨끈이 떨어져나가 당혹스러웠고, 시장 상인들끼리 드잡이하는 걸 구경하다가 버스를 놓쳤다. 지갑을 두고 와 밥값을 외상으로 치르기도 했다. 경주 보문단지에서 빌린 전동스쿠터가 방전돼 손으로 낑낑 밀면서 간 적도 있다. 그때는 별로 대단한 사건들이 아니었는데, 지금 돌아보니 참 잊히지 않는 장면들이다. 늘 환하게 켜져 있어서 빛이 빛인 줄 모르는 사이, 사소하기에 특별한 순간들이 여행을, 우리의 삶을 가로등처럼 밝혀준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알겠다. /시인 이병철

2019-11-17

경북 중·서부 발전 新 성장엔진 달다

수도권과 지방 사이의 균형 발전을 위해 국가균형발전특별법이 제정(2004년)된 지 16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당시 정부는 수도권에 있는 공공기관 가운데 단계적으로 지방으로 이전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2007년 수도권을 뺀 전국 광역시·도에 모두 10곳의 혁신도시가 지정됐다. 현재 이전할 계획이었던 153개 공공기관 중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을 제외한 152개 기관이 이전을 마무리했다. 김천시 율곡동 일원에 조성된 김천혁신도시에는 한국도로공사와 한국전력기술,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교통안전공사 등 총 13개의 공공기관이 이전해왔다. 당초 혁신도시 조성으로 김천은 경북 중·서부 발전의 신성장엔진으로 자리매김하면서 9조 원의 경제효과와 더불어 5만여 명의 고용이 창출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지금 현실은 그리 녹록지가 않다. 그렇다고 비관할 필요도 없다. 김천혁신도시가 가지고 있는 인프라는 분명 김천의 미래를 이끌고 나갈 힘이 있다. 이에 본지는 김천혁신도시에 위치한 공공기관과 김천시가 만들어가고 있는 김천의 미래에 대해 알아봤다.◇ 혁신도시란혁신도시(革新都市, Innovation City)는 행정중심복합도시 사업과 연계해 고(故)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지역균형발전사업으로 공공기관 지방이전과 산(産)·학(學)·연(硏)·관(官)이 서로 협력해 지역의 성장거점지역에 조성하는 미래형 도시를 뜻한다. 혁신도시는 수도권 소재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을 계기로 혁신 주도형 경제의 지역 거점을 형성함으로써 수도권과 지방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지역의 특색 있는 발전을 촉진하는데 목적이 있다.당시 공공기관은 중앙행정기관을 포함해 전국적으로 410개인데, 그중 약 85%인 346개 기관이 수도권에 위치해 있었다. 이 중에서 수도권 입지가 불가피한 것을 제외하고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심의를 거쳐 176개 기관을 이전 대상 기관으로 선정했으며, 이전 기관과 지방의 특성에 맞춰 집단 이전을 하도록 했다. 현재 전국 혁신도시에 152개의 공공기관이 이전을 완료했다.◇ 김천, 혁신도시로 선정되다2004년 1월 국가균형발전특별법이 공포되자 정부는 공공기관 이전 방안의 기본 원칙과 추진 방향을 2004년 8월 31일 발표한다. 이 발표에서 공공기관은 원칙적으로 집단 이전으로 결정하고, 혁신도시 입지는 시·도지사가 이전 기관 의견을 수렴해 결정키로 했다. 2005년 6월 수도권 소재 공공기관 시·도별 배치 방안 발표에서 경북에는 한국도로공사, 한국건설관리공사, 교통안전공단, 대한법률구조공단,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 조달교육원, 조달품질원, 농림축산검역본부,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국립종자원, 기상통신소, 우정사업조달센터, 한국전력기술(주) 등 13개 이주 기관 명단이 확정됐다.이에 경북도는 그해 9월 혁신도시입지선정위원회를 구성하고, 혁신도시 후보지 신청을 받았다. 경북도내 23개 시·군 중 영양, 청송, 울릉을 제외한 20개 시·군이 유치 신청을 했다. 혁신도시 유치를 신청한 20개 시·군은 접근성 등 지리적 여건, 교육·주거·문화환경, 도시 기반시설, 미래발전 가능성 등을 제시하면서 자신들이 최고의 적지라며 유치에 열을 올렸다.김천시는 농소·남면 일대의 고속철도 역세권개발단지 170만평을 미래형 혁신도시 조성 후보지로 제시하고, 혁신도시 건설에 최적지임을 홍보했다. 김천시의 전략은 그대로 통했다. 혁신도시입지선정위원회 위원들은 접근성과 혁신거점도시 등 전체 평가항목에서 김천시에 고르게 높은 점수를 주면서 2005년 12월 13일 김천시가 혁신도시로 확정됐다.◇ 험난하기만 했던 김천혁신도시 조성김천시가 혁신도시로 결정되긴 했지만, 조성까지는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우선 혁신도시 유치에 뛰어들었던 다른 지자체들이 혁신도시 분산론을 꺼내며 반발했다. 탈락한 경북북부지역의 반발이 가장 거셌다. 이들 지역은 낙후된 경북북부 지역을 배제하고 혁신도시를 선정한 것은 북부지역의 몰락과 침체된 경제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것이라며 경북도를 분할, 새로운 도를 신설하는 분도(分道) 운동까지 전개했다. 여기에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혁신도시를 축소하려는 움직임까지 나타나면서 김천시는 혁신도시 건설에 많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게 된다. 특히, 혁신도시 변경이 수도권의 각종 규제 완화와 맞물리면서 위기감은 최고조에 달했다.이에 김천시는 10개 혁신도시가 들어서는 전국 14개 시·군·구청장으로 구성된 전국혁신도시협의회를 중심으로 정부의 혁신도시 축소에 공동 대응했다. 당시 박보생 김천시장이 협의회 회장을 맡았다. 김천시가 중심이 된 협의회의 지속적이고, 끈질긴 대응으로 혁신도시 건설은 계획대로 추진하게 됐다.◇ 김천, 경북 성장거점도시로 거듭나김천시는 농소·남면 일대 381만 1천㎡ 터에 8천676억원을 투입해 김천혁신도시를 조성했다.2010년 우정사업조달사무소가 연면적 8천188㎡에 지하 1층∼지상 4층 규모의 사옥을 건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한국도로공사 등 모든 이전 공공기관이 사옥을 건립하고, 2016년 이전을 완료했다.김천혁신도시는 2010년 개통한 KTX 김천(구미)역으로 인해 전국이 반나절 생활권이 됐고, 경부고속도로와 혁신도시를 바로 연결하는 동김천IC와 더불어 인근 김천공단과 구미5산업단지를 연결하는 도로와 혁신도시를 경유하는 국도 우회 대체도로 등이 개설되면서 인근 대도시와의 접근성도 높였다.2015년도 말 기준으로 김천혁신도시 인구가 9천234명이던 것이 현재는 2만1천674명으로 2배 이상 증가했다. 물론 이전 공공기관의 가족 동반 이주율은 55.1%로 전국 10개 혁신도시 가운데 9번째에 불과하지만, 김천시 전체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기에 큰 문제는 아니다.국토교통부가 지난해 10월 전국 10개 혁신도시의 정주 여건 개선 등을 위해 2022년까지 4조3천억원을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여기에 혁신도시 종합발전계획(2018∼2022년)도 제9차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심의에서 확정됐다.김천혁신도시는 첨단자동차 산업 육성을 테마로, 첨단 미래교통·안전 클러스터를 조성하고 자동차 부품·소재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할 계획이다. 교통안전공단 등과 연계해 첨단자동차검사연구센터도 건립할 예정이다.또 김천시는 지난 7월 16일 교통안전공단과 친환경자동차, 첨단자율주행자동차, 특수목적자동차 등 운행차의 안전성 확보를 위한 인증·승인·기술검토를 수행하는 ‘튜닝카 성능·안전시험센터’ 건립 업무협약을 체결하기도 했다.‘튜닝카 성능·안전시험센터’는 튜닝에 의한 운행자동차의 안전도 확보를 위한 튜닝기술검토를 실시하고, 신기술을 접목한 튜닝에 대한 성능·안전시험, 튜닝항목 개발 및 확대를 위해 추진하는 사업이다.김천시는 자동차 튜닝산업을 지역전략산업으로 육성해 명실상부한 경북의 성장거점도시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된다./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9-11-14

성주하면 ‘참외’… 노란빛 달콤함으로 유혹

특정한 물품이나 음식 또는, 과일이 그 지역의 명칭 바로 뒤에 붙어 도시를 대표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존재한다.경기도 이천의 도자기, 전라북도 전주의 비빔밥 등이 바로 그런 경우.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지역 대표 특산물’이 또 하나 있으니 바로 경북 성주의 참외다.맛깔스런 노란빛으로 사람들을 달콤하게 유혹하는 과일 참외. 성주군은 바로 이 참외의 주산지다. 많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 ‘성주=참외’라는 등식이 새겨져 있다.내년은 성주가 참외를 본격적으로 기른 지 50년이 되는 해다. 지역을 대표하는 먹을거리가 지천명(知天命)을 맞았으니 성주군으로선 이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1970년부터 오늘날까지 우리 군 농가의 보물이 되어준 ‘성주참외’의 50번째 생일을 의미 있게 축하하고 기념할 계획”이라는 게 성주군청의 각오다.◇참외의 잎은 부지런한 농부의 손과 닮았다참외는 박과의 1년생 덩굴식물로 타원형의 모양을 가졌고, 노란색·연한 초록색 등 여러 가지 빛깔로 탐스럽게 익는다.인도 혹은, 중국이 원산지로 알려진 참외는 야생에서 자라던 것을 인간들이 오늘날의 형태로 개량해왔다. 참외의 역사는 의외로 길다. 중국에선 기원전부터 키웠고, 이미 1천500년 전쯤에 현대 품종과 유사한 참외가 생겨났다.원줄기가 길게 옆으로 뻗어나며 다른 물체로 기어 올라가는 참외. 참외의 잎은 열심히 농사를 짓는 농부들의 손바닥과 닮았다.6∼7월에 꽃을 피우는 참외는 실수로 위험한 음식을 먹었을 때 이를 토해내는 약제로도 사용됐다.한국에선 6.25전쟁을 전후해 재래종들이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육질이 단단하고 단맛이 강한 성주참외는 오래 전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명품 과일’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자신의 고장에서 생산되는 특산품 ‘참외’에 자부심을 가진 성주군은 ‘나이 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과일’이라는 참외에 대한 선입견을 불식시키고, 20~30대의 젊은 세대까지 ‘성주참외의 팬’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미래 소비층이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도록 ‘성주참외’의 브랜드 이미지를 정착시키는 리뉴얼을 진행하고 있는 것.사실 성주참외가 고품질 재배 기술을 개발하고, 생산 분야와 시설 분야에서의 발전에 애쓰는 동안 현대인들의 소비 트렌드는 급속도로 변했다.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여기에 외부적 시장 환경 또한 변하고 있다.성주참외에 열광하며 가격에 상관없이 구매하던 베이비붐 세대들은 이제 대부분 은퇴했거나 은퇴가 가깝다. 빠른 속도로 고령화사회로 가고 있는 한국. 해가 거듭될수록 ‘나 홀로 세대’와 맞벌이 부부가 증가하고 있다. 그들은 간편식의 구매와 소비가 이미 일상으로 굳어졌다.이런 형태의 환경 변화가 농산물의 생산과 소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인구 구조의 변화는 식습관의 변화도 동반하고 있다.◇젊은 세대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성주참외로깎아 먹는 과일보다는 씻어서 먹기 편한 과일, 가벼운 간편식이 21세기형 식습관으로 굳어지고 있는 세태. 성주참외 같은 과일에겐 매우 불리한 시대가 온 것이다. 집에서 밥을 해먹는 오랜 전통마저 무너지고 있는 게 2019년 오늘이다.요즘 젊은이들은 친환경·유기농 과일을 선호하고, 스마트폰 기반의 ‘모바일 라이프’가 일상화됐다. 동영상 등 시각 정보에 의존해 소비의 패턴을 결정한다는 것도 이전 세대와는 다른 점이다. 성주군은 이에 발맞춘 ‘참외 홍보 방식’에 고심하고 있다.“내년엔 성주참외 50주년을 기념하는 것과 함께 변화하는 소비 트렌드를 감안해 감각적이고 매력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새로 만들고, 마케팅에도 진력할 예정”이라는 게 성주군청의 목표다.이를 위해 성주참외의 장점을 명확히 드러낼 BI(브랜드 이미지의 통일화)와 신세대에게 어필할 수 있는 캐릭터를 개발하고, 참외를 포장하는 박스와 각종 홍보물에도 디자인의 개념을 입힌다는 계획을 세웠다.성주참외가 경북을 넘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특화 품목의 하나로 자리매김했다는 건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다. 전국 참외 재배 면적의 70% 이상을 성주군이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만 봐도 그렇다.성주군의 참외는 농산물 수입이 늘어가는 와중에도 지속적으로 가격이 올랐고, 2019년을 기준으로 조수입 5천50억 원을 기록하기도 했다. 연간 18만t이 생산된다는 것은 성주참외가 한국의 대표 과일이라는 걸 증명한다.성주의 농민들은 “다른 지역은 따라올 수 없는 맛과 향을 가졌고,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도 알아주는 명품 브랜드”라는 말로 자신이 기른 참외에 자부심을 드러낸다. 최상의 위치에 우뚝 선 성주참외와 ‘참외의 고장 성주’라는 명성을 앞으로도 이어가기 위해 군민과 군청은 힘을 모으고 있다.◇‘성주참외’의 명성을 이어가기 위한 행사들내년엔 ‘성주참외 순회 런칭 행사’가 펼쳐질 예정이다. 1년 중 성주참외가 가장 달콤한 향과 맛을 자랑하는 시기인 3월에서 6월까지 집중적으로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성주참외 리뉴얼 런칭’은 서울과 광역시 등에서 열리게 된다.“생산 현장으로 소비자를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소비의 현장으로 진입하는 순회 런칭 행사는 내년에 처음으로 도입하는 것”이란 게 성주군청의 부연이다.성주군은 개선된 성주참외의 브랜드 이미지를 들고 기존 소비층인 50대 이상 중장년들과 더불어 새로운 소비층인 20~30대들에게 파고든다는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직접 참외를 들고 대학가와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거리로 찾아가는 공격적 마케팅을 진행한다는 것이다.순회 런칭 행사는 단순한 판매 위주의 홍보 이벤트가 아닌,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풍부하고 문화와 예술이 결합되는 페스티벌 형식으로 소비자들과 만나게 된다.성주군은 이런 행사를 통해 “2020년이 성주참외 50년이 되는 해임을 전국에 알리고, 참외 주산지로서의 명성을 재정립 시킨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성주를 가본 사람은 이미 봤을 것이다. 대구에서 서쪽 방향으로 국도를 달려 낙동강을 건너면 성주참외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가 장관을 이룬다. 바다처럼 넓은 참외밭은 ‘아름다운 8개의 성주 풍경’ 중 하나가 됐다.성주군은 영남 내륙에 자리한 분지다. 서북쪽은 가야산에 둘러싸여 겨울 북서풍이 덜하고, 동남쪽은 4대강의 하나인 낙동강을 따라 넓은 평지가 펼쳐진다. 이런 자연환경이 성주를 시설하우스 재배의 최적지로 만들었다.또한 풍부한 햇빛과 깨끗한 농업용수, 비옥한 미사질 양토(부드러운 모래진흙)가 참외 재배의 적지라는 걸 알려준다.◇지속적인 혁신이 오늘의 성주참외를 있게 해성주참외의 시설재배가 시작된 것은 1970년대. 오늘날 ‘최고의 참외’라는 위상과 명성을 얻은 배경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하우스 시설재배법을 도입해 발전시킨 것이 가장 큰 요인이라 할 수 있다.성주참외는 2006년 ‘성주참외산업특구’ 지정으로 다시 한 번 도약의 계기를 맞이했다. 특구 지정은 농가소득 증대와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정부의 지원 조치인 동시에 성주참외의 차별성과 브랜드 가치를 인정받은 경사였다. 이후 성주군은 농산물산지유통센터를 건립했고, 산지 가격 형성을 주도하는 등 유통 과정에서도 혁신을 추진했다.2008년 고품질 참외를 소비자에게 공급하기 위한 저급 참외 수매, 2011년 참외 박스 10kg 규격화와 디자인 단일화, 참외사업의 자동화 등이 바로 그 혁신의 결과물이다.농민들의 노력과 성주군의 지속적인 지원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상품 고급화를 위한 공동브랜드 도입과 철저한 선별 과정을 거쳐 품질을 인증하게 한 것도 참외 가공품 개발, 수출, 기능성 참외 품종 재배 등의 성과로 이어졌다.반세기의 역사를 가진 성주참외. 성주군은 향후 이를 알리는 기념행사도 열 예정이다. ‘2020년 성주생명문화축제’와 ‘제7회 성주참외 페스티벌’ 등이 바로 그것.이와 관련 성주군청은 “우리 군 농민들은 성주참외의 명성을 만들어준 선대 농민의 수고를 잊지 않고 있다”며 “성주참외 재배 농가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한 각종 프로젝트를 꾸준히 추진할 방침”이라고 약속했다./전병휴·홍성식 기자

2019-11-14

첨단과 전통의 공존, 영주시 100년 먹을거리 ‘새 동력’

영주시는 지역균형발전과 미래지향적 행정 계획을 바탕으로 후손에게 물려줄 경쟁력 있는 도시 건설을 위해 다양한 제도 개선과 100년 먹을거리 마련을 위해 역량을 모으고 있다.올해는 경제, 사회, 문화, 복지, 농업, 보건, 체육,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원과 정책 마련 등 영주 발전을 다지는 한해가 됐다.이 중 산업을 통한 미래 역량을 결집한 베어링산업 국가산단, 2021년 개최를 목표로 준비 중인 영주 풍기 세계인삼엑스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부석사와 소수서원을 통한 세계 속의 문화관광 중심 도시로서의 역량 강화, ‘한 테마파크 사업’으로 추진 중인 선비세상은 영주 미래의 새로운 동력이 될 전망이다.◇베어링산업 국가 산단 추진 배경시는 국내 베어링산업 앵커기업인 일진그룹 (주)베어링아트를 발판으로 첨단베어링산업을 지역의 대표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국내 유일의 베어링 전문연구기관인 하이테크베어링 시험평가센터 건립, 베어링 관련기업, 연구소 유치에 나서는 등 베어링산업 중심지 기반구축을 적극 추진 중이다.시의 지속적인 베어링산업 육성 당위성 요구에 중앙정부에서도 국가경쟁력을 강화할 산업으로 인정해 2017년 7월 첨단베어링산업 클러스터 조성사업을 새 정부 100대 국정과제 경북지역공약으로 선정, 이후 본격적으로 사업을 추진하게 됐다.베어링 클러스터 사업은 총 5천억원 규모의 국토부 사업으로 2천500억원이 투입되는 베어링국가산업단지 조성사업과 산업부 사업으로 2천500억원이 투자 되는 첨단베어링 제조기반 구축, 핵심원천기술 개발과 고부가 베어링 제조기술개발, 베어링 전문 인력 양성 및 사업화 지원 사업으로 구분 된다.사업대상지는 영주시 적서동, 문수 권선리 일원에 130만㎡ 규모로 조성된다.△지역 불균형 해소 큰 기여할 듯경북 북부권 일대 지역에 국가 산단이 전무한 상황에 있어 베어링클러스터가 들어서면 지역 불균형 해소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영주를 중심으로 인접한 중부내륙 3개도 8개시군(충북동부, 강원남부, 경북북부) 1만5천개 일자리 창출과 인근 동양대학교 등 7개 지역대학 인재확보 및 청년일자리 창출에 큰 몫을 할 것으로 기대 된다.계획대로 첨단 베어링클러스터 사업이 추진될 경우 베어링 국산화 83.9%, 수출 5조원에서 10조원, 베어링 세계시장 4.1%에서 10% 점유, 세계베어링 시장 10위에서 5위 진입 달성 목표가 가능해질 전망이다.베어링클러스터 조성 사업은 2027년까지 준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2021풍기세계인삼엑스포시는 세계 제일 풍기인삼의 경쟁력 확보와 국내 최초 재배인삼 시효지인 풍기의 역사적 사실을 재조명하고 글러벌 인삼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해 2021풍기세계인삼엑스포 개최를 추진 중이다.2021풍기세계인삼엑스포는 영주시 풍기읍과 봉현면 일원에 총사업비 215억원의 예산을 투자해 87만5천㎡규모에 주 행사장과 부대행사장을 마련해 전시, 이벤트, 교육, 학술, 경연대회, 체험 행사 등을 펼치게 된다.엑스포 개최를 위해 시는 2017년부터 현재까지 주민여론 조사 및 부지선정 용역, 풍기세계인삼엑스포 기본구상 및 타당성연구용역, 올해 2월 경북도 지방재정평가를 완료했다.또, 올해 5월부터 9월까지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 발주와 중앙부처 투자심사 의뢰에 이어 조건부 승인을 받았다. 국토부 지역수요 맞춤지원 공모사업에 선정 국비 30억원을 확보해 엑스포 행사장 부지를 매입했다.시는 올해 중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 완료와 도비예산 확보, 조직위 출범준비(발기인 대회, 법인설립 허가 신청, 법인등기, 사무실 및 인력확보)를 마치고 2020년에는 조직위를 1-2단계로 출범하고 예산편성, 실시설계 완료 및 조성공사 추진, 부문별 세부계획 추진, 홈페이지 개설 및 홍보에 들어간다.2021년에는 행사장 조성공사 완료와 함께 풍기세계인삼엑스포 홍보 마케팅, 2021풍기세계인삼엑스포를 9월에서 10월중 개최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선비세상 조성 사업 추진시가 추진 중인 선비세상은 한국문화테마파크조성 사업의 또 다른 명칭이다.한국문화의 기반을 튼튼하게 해줄 선비세상은 배움의 자양분으로서의 역할과 새로운 상품과 교육의 컨텐츠는 사람들을 불러 모을 힘을 갖게 되면서 영주 한국문화테마파크는 자생력을 가진 테마파크로 성장 할 것으로 전망 된다.선비세상은 영주시 순흥면과 단산면 일대에 추진 중인 사업으로 총사업비 1천470만3천600만원이 투자돼 96만974㎡규모로 2010년부터 2020년까지 추진되는 사업이다. 선비세상에는 한문화RD지구에 한문화센터, 한국전설체험관, 전통인형극장, 전래동화4D상영관, 오픈공연장, 전망대, 선비정원, 민가정원, 인포메이션 등이 마련된다.전통숙박 지구에는 전통숙박시설, 전통음식촌, 습지공원, 솟대마을 등이 시설되고 전통문화지구에는 전통무예장, 국궁장, 매화공원, 선비의길 야외무대 등이 갖춰진다.선비처럼 보고, 입고, 먹고, 배우고, 즐기며 선비정신의 가치를 생각해 보는 공간인 선비세상은 선비를 핵심테마로 한옥, 한복, 한식 등 한국문화속 선비정신을 경험하는 공간이 마련된다.◇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된 부석사·소수서원△부석사부석사는 676년 신라 화엄종의 개창자 의상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다.이후 고려(918~1392)와 조선(1392~1910)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단절 없이 한국불교의 미타신앙을 대표하는 산사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부석사는 종합 승원으로서 출가자와 신도들의 신앙과 수행과 생활을 위한 다양한 건축물을 갖추고 있다. 신앙 공간으로는 무량수전, 지장전, 자인당, 응진전, 단하각이 있다.주불전인 무량수전 내부에 봉안된 아미타불상은 서방세계에 있는 아미타불을 의도해 좌향 불상을 동향으로 자리 잡아 부석사가 미타신앙을 중심 교리로 삼고 이를 가람 구성에 구현한 것으로서 의미가 있다. 무량수전은 13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 중의 하나이며, 중국 북방과 남방건축 양식이 모두 나타나는 독특한 유산으로 동아시아 목조건축의 발달과정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가치를 갖는 아름다운 건축미를 자랑하는 유산이다.△소수서원중종 38년(1543)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 말의 명신이며 대학자인 회헌 안향(安珦)선생을 추모하고 그 분의 얼을 계승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해 사묘를 건립하고 영정을 봉안하고 강학당을 세워 강학의 중심으로 삼도록 한 것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그 후 명종 4년(1549)에 풍기군수 퇴계 이황이 서원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고 국가적인 뒷받침을 위해 백운동서원의 사액을 요청해 이듬해인 1550년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친필 현판과 함께 토지, 서책, 노비 등을 하사받아 최초의 사액서원이 됐다.소수서원은 고종 때 서원철폐령이 내려진 가운데서도 훼철되지 않은 전국 47개 서원중의 하나이며 서원의 기능이 다할 때까지 약 4천여명의 유생들이 이곳에서 수학했다.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부석사와 소수서원에 대해 문화재활용사업을 펼쳐 나갈 방침이다.시가 추진하는 문화재활용사업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관람과 강연, 사진전시 및 체험활동, 야간관람과 숙박을 병행하며 여러 가지 자료를 집대성한 사료집 발간, 디지털 안내시스템 구축, 홍보리플렛과 종합 가이드북 발매와 원형유지를 위한 여러 가지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세계인이 찾을 수 있는 명소로 만들어 나가는 사업이다./김세동기자 kimsdyj@kbmaeil.com

2019-11-13

소규모 황금노선 운항 성공 ‘투자 선순환’ 부른다

□ 에어포항, 우여곡절 겪으며 포항공항에서 사라지다포항의 하늘길 관문인 ‘포항공항’은 지난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진행된 활주로 재포장공사 이후 취항 항공사의 부재로 어려움을 겪었다.이에 포항시·포항시의회·포항상공회의소·포항지역발전협의회가 국토교통부와 아시아나항공을 방문해 35만여 명이 참가한 경북 동남권 주민들의 서명부를 전달하는 등 항공기 재취항을 위해 노력해왔다. 그 결과 김포행 대한항공의 재취항에는 성공했지만, 기존 아시아나가 운영하던 제주노선이 없어져 ‘절반의 성공’이라는 비판을 받았다.운항횟수 축소, 노선의 단일화, 지속적인 재정지원부담 문제가 매번 발목을 잡자 아예 민자 유치를 통한 지역 저가 항공사 설립으로 돌아섰다.설립 초기, 한중 합자사업 형태로 추진되기로 했으나 당시 사드 배치로 인한 한·중 관계 악화로 인해 무산된 후, 동화전자가 초기 자금 100억 원을 들여 지난해 2월 7일 포항∼김포 노선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운항에 나섰다.포항∼제주 노선과 김포∼포항 노선에 편도 총액 1만원이라는 파격적 할인도 운항 초기에 실시하며 이용률이 최고 85.5%에 달하는 등 인기를 얻기도 했다.하지만, 할인기간 이후 책정된 정상 가격이 KTX 요금과 비교해도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았고, 사우스웨스트 항공사가 ‘박리다매’정책을 펼치며 잠재 고객들을 발굴하고 유지시켜온 행보와는 달리 에어포항은 그자리에만 머물렀다. 점차적으로 승객이 줄어들었고 최저 이용률이 40.4% 수준까지 떨어지기도 했다.이에 에어포항은 매달 4억∼5억원 가량 적자가 계속적으로 발생했고, 경영상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더욱이 에어포항이 보유한 항공기 2대 운행에 적합한 인력 수준이 많아야 90명으로 업계가 분석했지만, 무려 120명을 고용하며 자금압박을 가중시켰다.또한 외부 투자자와 합리적인 회사 경영을 진두지휘할 임원진들의 절반 가량이 군 출신으로 배치돼 있어 이러한 어려움을 타개할만한 대책도 성사시키지 못했다.사우스웨스트 항공사의 경우, 군 출신들은 대부분이 비행기 조종사에 그쳤고, 경영진과 임원진들은 모두 타 항공업계에서 주목할 만한 실적을 낸 바 있는 ‘검증된 전문경영인’으로 구성됐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이러한 문제점이 중첩되다보니 결국에는 ‘매각설’이 나돌기 시작했고, 지난해 10월 기존 동화전자에서 신설 소형항공사 법인인 베스트에어라인으로 대주주가 바뀌게 됐다.동화전자 투자분의 15% 정도를 인정하는 조건과 동화전자의 기존 채무 50억 정도를 상환하기로 했고, 직원 고용도 보장해주기로 한 것으로 당시 알려졌다.그러나 이미 ‘곪아있던’ 에어포항의 기존 채무가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이었고 베스트에어라인 측도 결국 기존 직원들을 대거 권고사직 등의 형태로 해고하기 시작했다.이 과정에서 직원들의 급여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직원들이 노동청 등에 소송을 내는 사태로 악화되는 등 회사의 명운이 더욱 암울해져만 갔다.이어 보다못한 경북도와 포항시가 출자지원금 40억원을 에어포항에 지원하려고 했으나 ‘이미 포항공항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은’것으로 알려진 에어포항은 이마저도 거부했다. 끝내, 지난해 12월 1일부터 포항∼김포 노선, 12월 10일부터 포항∼제주 노선 운항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당시 에어포항을 이용하던 시민들의 불편함과 실망감은 컸다.에어포항을 회사 출장용으로 자주 이용하던 한 시민은 “회사와 거리도 그다지 멀지 않고 무엇보다도 업무 시간을 단축할 수 있어어 자주 애용했다”며 “하지만 무턱대고 이리 운항을 중단해버리는 것은 이용객들을 우롱하는 일”이라고 토로했다.운항 중단 당시, 에어포항(베스트에어라인)은 중단 이유로 비행하던 CRJ-200기종이 지난 2007년부터 생산이 중단돼 정비부품 공급에 어려움을 겪어서라고 설명했고, 이후 언론을 대상으로 한 공식기자회견에서 ‘포항 본사 사무실을 철수해 서울로 직원을 집중시키겠다’고 말한 뒤, 보잉 기종의 도입과 새 노선을 준비 중이라며 ‘장밋빛 계획’을 내세웠지만 끝내 실현하지 못했다.에어포항의 재기가 어렵다고 본 포항시도 ‘새로운 지역항공사’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지만, 이마저도 추가 투자자 등의 확보가 어려워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시는 이에 포항공항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대한항공의 포항∼제주 노선 재운항에 초점을 맞췄고, 지난 9월 16일 이 노선이 운항을 시작했다.그러나 대한항공이 기존에 수익을 내지 못해 시의 재정지원금을 받아온 김포∼포항 노선의 운항을 중단하면서, 포항공항의 온전한 하늘길이 또다시 무산돼 버렸다.□ 포항 지역항공사 다시 취항하나세계 3대 항공사 사우스웨스트(South West)가 자리잡고 있는 미국 텍사스 댈러스는 요즘들어 가장 급부상하고 있는 ‘핫’한 도시다.미 연방 인구조사국이 배포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6년 7월부터 2017년 7월 사이 텍사스 주 댈러스 대도시권(댈러스-포트워스-알링턴) 인구는 14만6천238명이 증가하며 전체 인구 740만여 명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다.신생아 수(10만 2천423명)가 사망자 수(4만5천826명)을 크게 상회했고, 국내 전입자 수가 전출자보다 5만8천829명 많아 미국내 최고를 기록했으며, 해외 유입 인구도 3만798명에 달했다.댈러스의 이러한 성장의 배경에는 ‘교통’편의가 크게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교통 인프라 구축이 뛰어나 기업들이 사업하기에 유리하다고 판단해, 기업들이 사업 정착을 하면서 일자리가 자연스레 늘어나게 되고 이에 뒤따른 부가사업도 증가하고 있다.실제로 최근 삼성전자 공장이 댈러스에 위치하면서 한인사회가 떠들썩하기도 했다. 10만명이 웃돈다고 추산되는 한인사회의 규모가 3만명 이상 더욱 늘 것으로 한인사회는 전망하고 있다.한인 김모(43)씨는 “삼성전자 공장이 댈러스에 들어오면서 한인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며 “입지 선정에 까다롭기로 알려진 삼성전자의 선택은, 타 유수기업들에서도 반영되는 만큼 댈러스의 발전이 더더욱 기대된다”고 말했다.러브필드 공항의 터줏대감인 ‘사우스웨스트’항공사는 우리나라 포항공항 격인 러브필드 공항에서 오랜 시간동안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며 수많은 국내 노선을 확장시켜 왔다.‘10분 턴’ 등 빠른 회전율로 특히, 시간이 촉박한 비즈니스맨들의 사랑을 받아왔고, 이러한 신뢰가 결국 기업들 유치에도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 지역주민들의 평가다.댈러스 주민인 KIM(50·여)씨는 “대학생 때부터 사우스웨스트를 애용해왔다”며 “저렴한 가격과 다양한 노선이 구축돼 지역 교통의 자랑거리이다”고 말했다.사우스웨스트 기장 출신인 빌 콜씨는 ‘에어포항’의 좌초에 대한 얘기를 듣자마자 ‘너무나 비합리적이고 낭비적인 운영’이었다고 일갈했다.우선, 전문 경영인들과 회계사 등이 구성돼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최소 노선을 구비하고, 최소 인력으로 ‘여러번’ 운항하는 실리적인 운영방식을 보여야 흑자운영에 접어들 수 있다고 조언했다.흑자운영이 전제돼야 투자자들이 수익을 기대해 추가적으로 투자를 할 수 있게 되면서 ‘선순환’구조가 형성된다고도 했다.빌 콜씨는 “포항 지역항공사가 재부활하려면 우선 시민들 중에서 사업자 등이 크라우드 펀딩을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시나 지자체가 이러한 과정을 도우며 머리를 맞대 작지만 강한 항공사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라고 첨언했다.에어부산 측도 마찬가지다.에어부산 관계자는 “우리 에어부산도 초기에 일정부분 자금적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며 “하지만 황금노선이라 지칭되는 서울∼부산 노선의 성공을 위해 집중했고 이를 토대로 오늘날의 에어부산이 자리잡게 되는 큰 힘이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이런 가운데, 울릉공항도 올해 말까지 설계공모를 마친 뒤 오는 2023년 공사에 돌입, 2025년 공사를 마무리할 예정이다.울릉도의 관광 수요는 물론이거니와, 포항공항을 허브공항으로 세운 새로운 ‘지역항공사’가 이를 통해 국내 노선 확장을 시도할 수 있어 그 존재 필요성이 다시금 부각된다는 것이 업계 전현직 관계자들의 평가다.특히 서울에서 울릉도까지 비행시간이 1시간 정도로 짧고, 최소 6∼7시간이 걸리는 등 육지와 연결되기 위한 시간과 비용 모두 단축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어 ‘황금노선’이라는 평가도 적지 않다. 끝※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황영우기자 hyw@kbmaeil.com

2019-11-13

묵 한사발에 담긴 농밀한 메밀향에 취하다

묵집3곳서너 해 전에 가본 적이 있는 식당이다. 음식이 아주 좋았다. 메뉴는 단출했다. 칼국수와 메밀 묵밥. 국수와 메밀묵이 별다른 맛이 있을 리는 없다. 메밀묵과 밀가루 국수의 맛이었다. 오래전에 먹었던 그 음식 맛이었다. 사진을 찍었지만, 정리할 때 막연했다. 간판이 없다. ‘간판 없는 집’으로 저장. 그리고 잊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름은 ‘두산묵집’. 간판은 여전히 없다)오래간만의 영주 나들이. 풍기읍은 영주에서도 제법 멀다. ‘확인 차’ 다시 가보기로 했다. 아뿔싸. 가게 이름도 모른다. 초행일 때도 안내하는 이의 차를 뒤따라 갔다. 풍기 외곽 언저리라는 것밖에. 위치를 모르고, 주소도 없다. 이름으로 검색하는 것도 불가능.알만한 이들에게 전화하고, 인터넷으로 열심히 검색했다. 가게 전화번호 ‘054-636-8304’를 겨우 구했다. 전화하니 엉뚱한 대답. 나이 드신 노인분이, “주인이 없어 주소를 모른다”는 대답. 나중에 받은 명함의 ‘영주시 봉현면 두산2동 838번지’나 가게 이름 ‘두산묵집’ 모두 차량 내비게이션에 나타나지 않는다. 도깨비에 홀린 듯하다.‘영주시 테라피로 417’. 이 정보(?)는 도움이 된다. 차량 내비게이션에 나타난다.음식은 단순하지만 수준급이다. 전형적인 경북 북부의 밥상이다. 반찬들이 얼마간 맵고 짜다. 조미료를 절제하니, 달지 않고 투박하다. 북어포무침은 간간하지만 맛있다. 거칠지만 잘 무친 맛이 난다. 간장이 아주 재미있다. 일반적인 간장보다 칼칼하고 짜다. 콩간장에 어간장(맑은 생선 젓갈 물)을 섞었다. 비린내에 예민한 사람이라면 싫어할 수도 있다.칼국수, 메밀묵, 도토리묵이 메뉴다. 가격은 6천 원 선. 술은 동동주가 있다.칼국수는, 당연히, 가게에서 직접 썬 것이다. 경북 북부의 칼국수는 대부분 콩가루를 넣는다. 이 가게의 칼국수에는 검은콩을 넣었다. 국수에 작은 점들이 있고, 전체적으로 검은 색깔을 띤다. 묵도 직접 쑨 것이다. 매끈하지 않지만 부드럽고 툭툭 끊어진다. 오래전의 음식이다.점심시간엔 만석. 기다리는 줄도 생긴다. 풍기읍내에서도 제법 떨어진 곳이지만 현지 손님들로 가게가 빼곡하다. 30~40명 정도 앉는 좌석에 빈자리가 없다. 바깥에는 승용차들이 넓은 지방도 길가에 빼곡하다.바쁘기도 하고, 별로 친절하지도 않다. 무뚝뚝하다. 국수나 메밀 묵밥 한 그릇 후루룩 먹고 나가는 손님들이 대부분이다. 몇 마디 물어보면 바로 지청구 듣기 십상이다.“메밀묵을 직접 쑤느냐?”는 질문에 대답이 없다. 그저 쳐다본다. “메밀묵을 직접 쑤지, 그럼 어디서 사 오느냐?”고 되묻는 표정이다. 구수한 칼국수에서는 밀가루 냄새가 풀풀 난다. 쫄깃하기는커녕 툭툭 끊어진 채로 내놓는다. 밀가루의 풋 냄새가 아련하다.40년 전통의 순두부, 태평초 전문 식당이다.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영주 읍내에 있다. 가게 안팎의 분위기가 아주 좋다. 바깥마당은 가정집 분위기. 깔끔하게 정리한 작은 정원이 정취가 있다. 아늑하다. 실내는 깔끔하면서 아늑하다. 대청마루를 식당 공간으로 개조했다.메뉴는 순두부와 태평초다. 태평초는 메밀묵, 돼지고기, 신김치를 넣고 한차례 끓인 음식이다. 안동, 예천, 영주 등에서 즐겨 먹는 음식이다. 영조 시대 시작했다는 탕평채에서 태평초가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정확지는 않다. 태평초가 서민적인 음식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겨울이면 신김치는 흔하다. 메밀이 흔한 계절이다. 메밀묵도 겨울이면 흔하다. 쇠고기 대신 돼지고기다. 서민적인 음식, 가난한 시절의 음식이다.봉화는 인접 지역이다. 봉화유기를 사용한다. 묵직한 유기가 품위를 더한다. 서민 음식인 태평초를 유기에 담았다. 어색하지 않다. ‘대접받는다’는 느낌이 든다.순두부는 아주 좋다. 재래 간장을 조금 얹어 먹으면 고소한 기운이 온몸에 번진다. 가벼운 술안주, 해장에도 좋다. 반찬들이 소박하지만 단아하다.두 가지 반찬을 눈여겨볼 만하다. 된장고추박이. 시판 된장고추박이는 흉내만 낸 것이다. 전통 재래 된장도 아니고 제대로 삭힌 것도 아니다. ‘전통영주묵집’의 된장고추박이는 재래 된장에 고추를 넣어서 제대로 삭힌 것이다. 배추 무침도 재미있다. 경북 북부지역은 배추를 잘 사용한다. 배추전도 부치고, 배추 무침도 흔하게 사용한다. 잘 만진 배추 무침이다.묵직한 유기에 푸짐하게 담아낸 순두부와 단아한 반찬들, 추천한다.40년 전통, 노포다. 널리 알려진 ‘전국구 맛집’이다. 묵밥과 두부가 메뉴의 전부다. 메밀 묵밥은 구성이 재미있다. 가마솥에서 직접 쑨 메밀묵 채에 고춧가루, 김 가루 등을 뿌려서 내놓는다. 육수가 ‘자박자박한’ 그릇에서 먼저 메밀묵을 건져 먹는다. 작은 그릇에 좁쌀밥을 준다. 마지막에 좁쌀밥을 넣고 말아 먹는다. 가난한 시절의 음식이다.순흥으로 귀양 온 금성대군은 ‘단종 복위’를 꾀했으나 실패. 안동 감옥에 하옥된다. 순흥의 많은 이들이 이 사건에 얽혀서 죽었다. 융성했던 ‘순흥도호부’는 단종 복위 사건으로 강등된다.영주시의 홈페이지 등에서는 이때 몰락한 순흥 사람들이 먹을 것이 귀해서 메밀묵을 먹었고, 이게 지금의 ‘순흥 묵’으로 연결되었다고 말한다. 그렇지는 않다. 영주는 태백산과 멀지 않고, 소백산 지역이다. 다른 지역보다 산지가 많고 평야는 좁다. 태백산맥 언저리의 산골에서는 대부분 메밀과 도토리를 많이 먹었다. 어디나 식량은 귀했다. 결국, 메밀과 도토리 등이다.메밀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은 종류가 다양하지 않다. 막국수, 메밀전병, 메밀묵 등이 모두다. 국수가 필수적이었던 경북 북부는 수입 밀가루가 흔해지면서 죄다 밀가루로 국수를 만들었다. 안동 지방의 ‘건진국시’나 ‘제물국시’ 등이다. 메밀로 묵을 만들기는 힘들지만, 방법은 쉽다. 메밀을 곱게 갈아서 가루로 만들고 체로 친다. 뜨거운 물을 부어 곱게 내린 물을 가마솥에 넣고 끓인다. 이때 눋지 않게 나무 주걱으로 잘 저어준다.‘순흥전통묵집’의 메밀 묵밥은, 겉면이 매끈하지 않고 부드럽게 감기는 맛이 있다. 두부도 좋다. 이른바 ‘시골 두부, 촌 두부’지만 단단하지 않다. 입자는 거칠지만, 입안에서는 부드럽다. 수준급 두부다. 콩의 단맛과 적당히 부드러운 식감이 아주 좋다.빵 도넛 2곳37년의 업력이다. 생강 도넛이 유명하다.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가게다. 사과, 인삼, 커피 등을 첨가한 도넛도 개발했다.경북 북부 도시인 영주에 도넛 가게가 있다. ‘영주의 도넛 가게’? 얼마간 생뚱맞다.주인 부부는 오랜 기간 외지에서 경제적으로 고생했다. 서울 생활을 접고, 남편 고향인 풍기로 낙향한 후 분식집을 열었다.‘정아분식’. ‘정아’는 아내의 애칭이었다. ‘정아분식’을 운영하던 시절 생강 도넛을 개발했다. 가게 이름은 ‘정아 생강 도너츠’. 이 이름이 ‘정도너츠’로 바뀌었다.지금은 서울을 포함 전국 여기저기 분점, 직영점을 운영하고 있다. 원래 ‘정도너츠’ 자리는 ‘본점’이고 영주 읍내 외곽의 새 건물은 ‘본사’다. 본사에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고구마 빵’ 전문점이다. 쿠키 모양, 비스킷 모양 등 다양한 고구마 첨가 빵을 만날 수 있다. 빵이라고 부르지만, 쿠키, 빵, 케이크가 혼재된 형태다. 실제, 고구마 케이크도 있다.풍기 IC 부근에 있다. 새로 지은 건물이다. 바깥 분위기는 반듯하다. 내부 인테리어는 깔끔하다. 마치 카페 혹은 대도시의 디저트 카페 같다. 실제로도 카페처럼 운영한다.연결된 건물에서는 고구마 빵 관련 체험학습도 할 수 있다.‘미소머금고’의 고구마 빵은 맛, 식감뿐만 아니라 색깔도 잘 살렸다.비슷한 맛이라고 짐작하지만, 실제 먹어보면 맛이나 식감이 모두 다르다. 선물용 세트도 판매한다. 1만 원부터 3만 원대까지 다양한 세트가 있다./음식평론가 황광해

2019-11-13

광활한 가을이 머무는 산사서 천년 세월을 건너 남겨진 혜안을 찾다

균형과 절제·조화와 우아함을 갖춘 부석사유서 깊은 절을 찾아가는 길. 가로수로 서있는 은행나무에서 눈이 부신 황금빛 잎사귀가 무더기로 떨어지며 함박눈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 읽던 동화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었다.영주시 부석면 봉황산 가운데 웅장하게 들어선 부석사. 초입에서부터 경내까지 나무란 나무는 모두 가을 옷을 갈아입고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그 노랗고 붉은 형상이 여행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일주문으로 들어서자 오면서 본 ‘은행나무의 화려한 페스티벌’이 한 번 더 펼쳐졌다. 이어서 관광객들에게 눈 호강을 시켜주는 천왕문과 안양루가 나타났고,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무량수전. 정면 5칸·측면 3칸의 무량수전은 팔작지붕이 미려하기로 이름 높은 국보(제18호)다. 부석사의 본전인 무량수전은 건축을 전공한 학자들로부터 “한국에서 가장 멋들어진 목조 건물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60여 년 전에 국보로 지정된 이 건축물은 배흘림기둥(조화와 안정을 위해 기둥 중간 부분의 배가 약간 볼록하도록 꾸민 양식), 귀솟음(건물의 귀기둥을 가운데 기둥보다 높게 꾸미는 기술), 안허리곡(건물 가운데보다 귀퉁이 처마 끝을 더 튀어나오도록 만든 것) 등의 공법으로도 주목받는다.나무 문 하나, 기둥 하나에까지 선조들의 숨결이 묻어나는 부석사 건축물들은 균형과 절제, 조화와 우아함을 모두 갖췄다.꽃 피는 봄과 눈 내린 겨울 풍경이 절경이라는 부석사. 하지만 사람을 설레게 하는 면에선 부석사의 가을 풍광이 최고일 듯했다. 이 사찰엔 국보도 여러 개다.앞서 말한 무량수전을 필두로 측면을 바라보는 독특한 형태로 제작된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은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것으로 “부처의 위엄이 잘 표현돼 있다”는 평가를 얻었다.천년 세월을 뛰어넘어 무량수전 앞에 오연하게 서있는 석등(石燈) 역시 국보다. 3m쯤되는 이 석등은 신라시대 석공의 돌 다루는 기술이 얼마나 세련되고 정교했는지를 알려준다. 볼거리 가득한 절 안을 이리저리 돌아보다 조사당(국보 제19호) 앞에 섰다. 그곳엔 사찰을 만든 의상대사의 형상이 안치돼 있었다. 그걸 본 순간, 기자의 상상력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까마득한 옛날로 날아가 부석사가 만들어질 무렵에 이르렀다. 모든 것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가을날이었다. 범종루 근처에서 들려오는 법고(法鼓) 소리가 맑고 선하게 살아오지 못한 지난 삶을 반성하게 했다. 부석사는 ‘착하게 살아가는 방식’을 고민하게 하는 절이다.내성천 아슬아슬 외나무다리 건너 ‘무섬마을’이른 아침. 보드라운 물안개가 관광객들의 볼을 어루만졌다. 저 멀리 강을 건너기 위해 나무로 만든 다리가 보였다. 산속에선 작은 새가 청명한 소리로 울고 있고…. 도시에선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에 포근한 둥지처럼 자리 잡은 무섬마을. 이곳엔 사당과 우물이 없다.옛날 풍수학자들은 “마을이 가라앉을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를 내놓았고, 이를 믿은 사람들이 우물을 만들지 않아서다. 사당 역시 홍수가 날 경우 조상들의 위패가 떠내려 갈 것을 우려해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또 하나 무섬마을이 특이한 것은 농사짓는 땅이 없다는 것이다. 과거엔 농부들이 배를 타고 건너편 탄현리까지 가서 모내기와 벼 베기를 하곤 했다. 아슬아슬한 외나무다리가 생기고부터 배는 사라졌다.‘무섬’이란 단어는 물 위에 떠 있는 섬을 의미한다. 수도리(水島里)의 우리말인 것. 그 이름처럼 무섬마을은 물과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휘돌아 앞을 흐르는 내성천은 서정적인 풍경을 이 마을에 선물했다. 그런 이유로 일 년 내내 관광객이 적지 않다.하지만 마냥 좋았던 시절만 있던 건 아니다. 조선 후기까지 경상도 각 지역 특산품이 모여드는 큰 마을이었지만, 장마 때면 불어난 물에 의해 다리가 떠내려가고 마을은 어김없이 수해를 입었다. 무섬마을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 전통을 이어온 귀한 공간이다.무섬마을을 대표하는 건 목재 외나무다리.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든 이 다리는 폭이 30cm에 길이가 150m에 이른다. 무섬마을을 찾았다면 꼭 한 번 걸어보길 권한다. 현재는 물이 얕아 빠져도 큰 위험은 없을 것 같았다.‘양반의 고장’답게 무섬마을엔 고택과 문화재도 숱하다. 해우당고택, 만죽재고택, 김규진 가옥, 김위진 가옥 등을 살펴보는 재미를 빼놓을 수 없다.전통한옥에서 생활하고 잠드는 체험관광도 가능하다. 문의는 054-633-1011(무섬마을 전통한옥 체험수련관).600살 대장부 ‘영풍 태장리 느티나무’자그마치 600살이라고 했다. 속을 텅텅 비워내면서까지 견뎌온 그 아득한 시간이 실감으로 와 닿지 않았다. 기자가 ‘무한’이 아닌 ‘유한’을 살아가는 인간이라서 그랬을 터.곧게 뻗은 소나무와 초봄에 꽃을 피우는 매화나무가 선비의 지조를 상징한다면, 영주시 순흥면 태장리에 거대한 모습을 드러낸 느티나무는 ‘대장부의 넉넉한 품’이라 부르면 좋을 듯했다.둘레가 9m에 가깝고 동서와 남북으로 뻗어 내린 가지가 25m에 육박하는 태장리 느티나무는 제 몸 안에 웅장함과 수려함을 두루 가지고 있다.만약 여름날 초등학생들이 소풍을 온다면 족히 2~3학급 아이들 모두에게 넉넉한 그늘을 나눠줄 수 있겠다 싶었다.세월의 흐름과 지나온 영주의 역사를 눈앞에서 지켜봤기에 누구보다 현명해 보이는 고목. 하지만, 세상의 현자(賢者)가 그러하듯 나무는 모든 것을 알지만 입을 열어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멋질 수 있는 것 아닐까? 태장리 느티나무는 천연기념물 제274호다. 마을 사람들은 휴식처를 제공하고, 마음의 위안을 선물해온 이 나무를 무엇보다 아낀다고 한다. 해마다 정월 보름이 되면 나무 아래서 동제(洞祭·마을의 공동 제사)를 지내며 안녕과 행운을 빈다.프랑스의 시인 이지도르 뒤카스(Isidore Ducasse)는 “나무는 자신의 위대함을 모른다”라고 했다. 이 짧은 문장에 담긴 깊숙한 은유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태장리 느티나무와 만나는 것이다.조선의 장관 3명이 생활한 ‘삼판서고택’판서(判書)란 지금으로 말하자면 장관에 해당하는 고위직 벼슬이다. 특정한 어떤 한 집에서 3명이나 되는 판서(장관)가 나왔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드문 일. 가문으로선 영광이고 혈족들에겐 큰 자랑이다. 영주시 가흥동 언덕 위엔 삼판서고택(三判書古宅)이 있다. 여기서 3명의 판서는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활동한 영주 출신의 정운경, 황유정, 김담을 지칭한다. 이들 모두는 앞서 말한 삼판서고택에서 살았다.고려 말기에 형부상서(조선시대 형조판서에 해당)를 지낸 정운경은 ‘조선의 일등 개국공신’으로 불리는 삼봉 정도전의 아버지다. 삼봉의 어머니는 순흥 안씨로 알려져 있다.정운경의 사위인 황유정은 조선이 개국된 초창기 공조, 예조, 형조에서 판서로 일했다. 그 역시 정도전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 했고, 마찬가지로 개국공신이었다.조선 세조 때 이조판서로 봉직한 김담은 황유정의 외손자. 황유정은 사위에게 집을 물려줬는데 그 사위의 아들이 ‘장관’이 된 것이다. 김담의 어머니는 삼봉의 여동생이다.삼판서고택을 찾은 날은 볕이 좋았다. 따스한 가을 햇살 아래 고택의 검은 기와가 흑진주처럼 빛났고, 돌아본 집 내부에선 은은한 향기가 났다.입신양명(立身揚名)의 절정에 섰던 ‘3명 판서’의 기운을 받기 위해서인지 주말이 아님에도 찾는 이들이 많았다. 산책 나온 영주시민도 여러 명이었다. 이 집에선 판서만 나온 게 아니다.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교리, 훈련원 녹사, 단성 현감, 통례원 좌통례 등의 벼슬아치도 태어났고, 천문학 교수 김만인도 여기서 첫울음을 터뜨렸다. 원래의 삼판서고택은 1961년 영주 대홍수 때 상당 부분이 파손됐고 이후 철거됐다. 현재의 고택은 영주 유림들이 뜻을 모아 2008년 복원한 것이다. /홍성식·김세동 기자

2019-11-13

유토피아를 꿈꾼 사람들

어떤 이는 영·정조시대를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말한다. 탕평책을 실시해서 붕당의 폐해를 줄이려 했고, 세금 부담을 들어주기 위한 균역법을 실시했다. 암행어사를 파견하고 신문고를 부활하는가 하면 학문과 제도를 정비했고, 많은 책을 펴내 문화발전에 도 기여를 했다. 규장각을 짓게 하고 정약용, 박제가 같은 숱한 인재들도 나왔다. 새로운 학문이라고 일컬어지는 실학이 점차 뿌리를 내린 것도 이시기였다.이런 치적들이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이 통치한 18세기는 이전 어느 시기보다도 역모사건이 많았다. 정감록과 같은 조선왕조의 몰락을 예언한 서적들이 급속하게 퍼져 나간 것도 이때였다. 이들 비결서(秘訣書)들이 역모세력의 길잡이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때의 ‘역모사건’이란 ‘왕권과 지배계층의 부조리에 대한 저항’을 말한다. 현재로 치면 정치적 집단 간의 정견의 차이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데모나 집회 같은 것으로 이해하면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때문에 이 시기에는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온 유배객들의 숫자가 급격히 증가했다. 모두가 역모사건에 엮였거나 아니면 연좌된 그 가족들이었다. 1748년(영조24) 2월 29일 장기로 온 심해용(沈海容)과 1760년(영조36) 3월 21일 유배를 온 이광필(李光弼)은 이색·이염의 모반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었다. 또 1755년(영조 31) 3월 17일에 장기로 온 이차원(李次願)은 권혜·권집의 모반사건에 연좌된 왕실의 여자였다. 이 두 사건의 당색은 1728년(영조4) 3월에 일어난 무신난(戊申亂:이인좌의 난)과 맥을 같이했다. 무신당(戊申黨)과 뜻을 같이하는 남인계열은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반영조의 기치를 내걸고 모반을 시도했던 것이다.무신난 잔당들은 하나같이 백성들을 선동하는 수단으로 괘서를 내걸었다. 이때 가장 대표적으로 인용되는 것이 정감록(鄭鑑錄이었다. 정감록에는 ‘조선은 운명이 다했으니 진인(眞人)이 나타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간다’는 예언이 적혀있었다. 이는 기존의 도참설에 비해 역성혁명과 이상사회의 지향에 대한 논리를 보다 구체적으로 담고 있었기에 난의 주모자들은 이를 통해 민심을 얻고자 했다.흔히 무신난의 핵심인물로는 이인좌를 꼽지만, 그에 못지않게 황진기(黃鎭紀)란 불가사의한 인물이 있었다. 선전관으로 있다가 무신난에 가담했던 그는 이인좌와는 달리 그때 잡히지도 않았다.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을 검토해 보면, 황진기는 역적임에도 지략과 검술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는다. 황진기 아버지 황부(黃溥)는 함경도 경흥부사(종3품)로 무신난에 가담했다가 1728년(영조4) 6월에 잡혀 죽었다. 그는 죽었지만 아들 황진기가 홀연히 나타나더니 백성들의 이상향을 충족시켜줄 구심체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졸지에 나타난 황진기는 정감록에서 예언한 정도령과 함께 그 시대의 ‘메시아’요 ‘미륵’과 같은 존재로 취급되었던 것이다.동해 가운데 삼봉도(三峯島)라는 섬이 있다고 했다. 그 섬은 둘레가 매우 크고 사람도 많으나 옛날부터 나라의 교화를 벗어나 도망친 사람들이 만든 섬이라고 했다. 황진기는 이 섬에 살고 있었다. 때가되면 가난하고 미천한 자를 위해 망명 역적인 그가 장군이 되어 진인(鄭眞) 정씨를 모시고 울릉도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에게 청주와 문의(충청도 청원군 문의면)가 먼저 함락되고, 곧이어 한양이 함락될 것이라고 했다. 그 후에는 이(李)씨 대신에 정(鄭)씨가 들어서서 가난 없고 귀천 없는 새 세상이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이게 이른바 해도진인(海島眞人) 설이다.황진기가 등장하는 해도진인설에는 전설의 저 편으로 숨은 아틀란티스와 같은 유토피아가 등장한다. 그곳은 질서 정연하게 이루어진 도시라고 했다. 나라가 부유해 백성들은 세금 걱정이 없었다. 강력한 군대가 있어 전쟁걱정도 없었다.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초(超)고대문명이 전설만을 남기고 바다 속으로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바로 아틀란티스 이야기다. 해도진인설에 등장하는 미지의 섬 ‘삼봉도’는 조선의 아틀란티스였다. 조선지배층의 부패와 부조리, 차별 등을 타파하고 삼봉도에서 이상국가를 만들기 위해 나타난 황진기는 그래서 모든 백성들의 구세주요 영웅이었다. 대부분의 모반사건에서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무신난으로부터 17년의 세월이 흐른 1745년 12월, 황진기는 충청도 서산에 있는 가야산 백암사(白巖寺)의 승려로 신분을 감추고 있었다. 드디어 그는 무신난 때 핵심역할을 하다가 처단된 사람들의 가족들을 끌어 모았다. 황진기는 이들을 이끌고 전라도 낙도(樂島)에서 영조 타도를 외치며 또다시 봉기를 했다. 이들은 황해·평안도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오랑캐들을 불러들여 평안·함경도 북변(北邊) 땅을 점령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난의 주동자들이 모두 잡혀 영조의 친국을 받고 능지처사되었지만, 이번에도 황진기는 청(淸)나라로 도피하여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흔치않은 망명사건이 발생하면서 영조와 조정은 바짝 긴장했다. 황진기가 이미 처벌된 무리의 일당들과 연락해서 다시 역모를 일으키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던 것이다. 영조는 그를 잡기 위해 청나라로 군사를 보내는 등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국내외 어느 곳에서도 황진기의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그 뒤에도 황진기는 ‘평안도에서 중이 되었다’ ‘충남 가야산에서 은둔했다’는 등의 소문만 무성했고, 20년이 넘도록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한 때 180여 개에 달했다던 충남 가야산의 절집은 그가 도피했다는 풍문이 돈 이후에는 거의 폐사가 됐다고 한다.조정은 황진기 대신 그의 가족들을 잡아와 고문을 하고 닦달했다. 1752년(영조28) 11월 9일에는 황진기의 아들 황영(黃英)이 붙잡혀와 포도청에서 조사를 받다가 죽었다. 하지만 황진기는 그 후 수많은 수배령에도 끝내 붙잡히지 않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1745년(영조 21) 10월, 무신여당 이색과 이염 등이 모반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영조의 친국을 받았다. 흉서를 만들어 한양에서 퍼트리다가 붙잡힌 것이다. 이색은 무신난에 가담한 이순관(李順觀)의 친척으로 남인계열이었다. 이염 역시 무신난에 연루되어 능지처사된 이만구(李萬衢)의 숙부였다.이들이 지은 흉서의 내용에도 황진기가 등장한다. 황진기가 칠보사(七寶寺)의 중이 되었다가 모반하여 승군을 조직하였고, 그 군사들이 압록강을 건너 북변을 할거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색은 황진기가 지금은 환속해서 무산(茂山)에서 살고 있다며 민중을 선동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 말을 믿고 육진(六鎭) 일대 지리에 익숙한 오위장 이양중(李陽重)에게 명하여 황진기를 붙잡도록 했다. 이양중이 국경지대로 나가 탐문했으나 헛수고였다.이색·이염의 괘서사건은 모반사건으로 간주되었다. 당사자 뿐 아니라 여러 사람이 연루되어 능지처사되었다. 이때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 온 심해용은 역적으로 몰린 이색의 생질이었다. 이색과 이염은 이미 3년 전에 처형되었지만, 1748년에 와서 심해용도 그때의 역모사건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것이다.이 괘서사건은 그 후에도 계속 여파가 미쳐 1760년(영조36) 3월 21일 이광필이 같은 무리로 몰려 장기로 유배되어 왔다. 그는 고치룡(高致龍)과 중(僧) 청윤(淸潤) 등과 함께 잡술(雜術)을 가지고 나쁜 무리들을 종용하였다는 이유였다.한편, 1748년(영조 24) 11월에는 권혜(權嵇) · 권집(權鏶)의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권혜는 여천군(驪川君) 이증(李增)의 외손자로서 당시 열여덟 청년이었다. 이증은 효종의 4세손으로, 영조와 8촌간이다. 영조의 근친은 그리 많지가 않았다. 그래서 이증은 영조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았다. 1743년 이증은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등과 더불어 사도세자의 관례(冠禮)를 주재하기도 했다. 영조는 이증의 집 사당에 제14대 선조의 서자인 왕자 의창군, 인조의 막내아들인 낙선군의 신위 뿐 아니라, 선조의 후궁인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신위를 옮겨 제사를 지낼 정도로 그를 아꼈다.그런데 1748년 11월, 이증의 집 묘당(廟堂)에서 괴이한 투서가 발견되었다. 국문(鞫問)결과 놀랍게도 그 투서는 이증의 동생인 이학(李學)과 외손인 권혜·권집 형제가 작성했던 것이다. 이들은 이증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역모혐의를 덮어선 이증은 삼사로부터 집요한 탄핵을 받고 제주도로 유배를 가서 죽었다. 이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755년(영조 31)까지 삼사의 끈질긴 탄핵이 이루어졌다. 그해 3월 17일 이증의 딸이자 권혜의 어머니인 이차원(李次願)이 이 사건에 연좌되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되어 왔다. 이는 왕실의 딸이 장기로 유배를 온 최초의 사례가 된다.이처럼 18세기부터 일어난 각종 반란이나 대규모 민란에는 거의 정감록이 등장했다. 조선 왕조가 무너지고 만민 평등의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정감록의 예언은 조정에서 밀려난 양반들과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민초들에게 조선판 ‘유토피아’였다.돌이켜보면, 조선 후기 백성들은 자연재해에 거의 방치되어 있었다. 정치도 평탄치는 않았다. 영조가 탕평책을 실시하고 법전을 정비하며 혼탁한 사회를 정비하였다고는 하지만,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당파싸움은 근절되지 않았다. 이에 지배계층에 저항하는 무리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 정계에서 배제된 양반들이 동조 세력을 규합하고 거사를 추진했다. 이들은 이상사회 구현을 목표로 삼았다. 이때마다 정감록이 사상적 틀로 이용되었던 것이다.이런 반체제 변혁 운동이 꿈틀거리고 있었음에도 18세기 조선의 지배계층은 위기의식이 없었다. 그들은 영·정조라는 현명한 군주와 함께 그들만이 누릴 수 있는 학문 또는 예술의 부활을 꿈꾸며 백성들의 요구를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들은 그저 부덕하고 불손한 역모자들에 불과했다.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아 홍경래의 난, 동학농민운동, 그리고 왕조체제 붕괴라는 무서운 대가가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 대가는 시대의 경고를 무시해 버린 왕실과 조정 뿐 아니라 힘없는 민초들까지도, 꺼져 들어가는 패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이었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