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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나눔의 ‘선한 영향력’ 널리 전하고파”

자본주의사회라는 정글에서 많은 돈을 가지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보다 더 쉽지 않은 건 ‘돈을 가치 있게 쓰는 것’ 아닐까?1983년 포항에서 맨손으로 조그만 식당을 시작한 사람이 있다. 처음엔 작은 규모의 경로잔치를 동네 어르신들께 열어줬다. 사업이 커가면서는 건강보험료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보험료를 대신 내주고, 형편 어려운 학생들에겐 장학금을 쾌척했다. 소외계층과 다문화가정의 부부들에겐 결혼식을 열어주고, 효자와 효부에겐 상을 줬다. 청솔밭 이지곤 회장 이야기다.청솔밭이 최근 세대교체를 했다. 대표가 바뀐 것. 기부와 선행이라는 사회 공헌 활동을 꾸준히 진행해온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청솔밭 경영을 맡게 된 이경하 대표를 만났다. 아래는 이 신임대표가 들려준 ‘지나온 20년과 앞으로의 20년’에 관한 이야기를 요약한 것이다.-먼저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한다.△1975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을 이곳에서 살았고 학생 때는 사회복지학을 공부했다. 석·박사 과정에선 경영을 전공했다.-사회복지와 경영학을 전공한 이유가 있는지.△부모님이 37년 전에 조그만 식당을 시작했고, 그때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 주는 걸 보며 자랐다. 어릴 때부터 그런 모습을 일상처럼 봐왔다. 나 역시 작으나마 세상에 무언가를 나눠주고 싶었다. 사회복지는 그래서 공부하게 됐다.이후엔 ‘내가 만약 돈이 많다면 도움의 크기도 더 커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경영에 관심이 생겼다. 어릴 땐 식당을 하며 고생하는 부모님 모습이 보기 싫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1990년대 초반부터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거나 연구할 때 항상 나를 곁에 뒀다. 자연스레 경영 수업이 된 것 같다.지역사회, 직원들과 함께 더불어 성장하고 싶다고 말하는 청솔밭 이경하 대표.-청솔밭은 뭘 하는 업체이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운영하고 있는가.△1983년 아버지가 갈비집을 열었다. 그걸 시작으로 한정식집을 거쳐 1993년 청솔밭뷔페를 창업했다. 그게 포항 최초의 뷔페라고 알고 있다. 2000년부터 웨딩사업도 병행하기 시작했다. 간단히 말하면 외식사업과 웨딩사업을 하는 업체다. 현재 티파니웨딩과 더 원 뷔페를 운영 중이다.아버지는 ‘나눔’과 ‘더불어’의 정신을 자주 이야기한다. 또한 ‘항상 먼저, 항상 새롭게’라는 혁신의 마음가짐을 강조한다. 그것과 함께 직원들, 거래처, 지역사회와의 믿음을 지켜가야 한다고 말했다.-얼마 전부터 청솔밭 경영을 맡게 됐다. 아버지가 들려준 당부는.△지난달 20일에 대표 이·취임식을 진행했다. 말에 앞서 항상 실천으로 보여주시던 아버지였다. IMF 등 경제 불황 때도 포기하지 않고 우직하게 한길을 걷는 모습, 시련이 닥쳐도 흐트러짐 없이 자신의 의지대로 밀고 나가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 나 또한 ‘왜 안 되는가, 노력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태도를 잃지 않으려 한다. 그것이 초심을 지키는 것 아니겠는가.-아버지에 이어 대표를 맡고 보니 어떤가.△청솔밭 직원은 일용직을 포함해 100명이 넘는다. 아버지가 그동안 해왔던 일들의 의미를 그분들과 함께 진지하게 돌아봤다. 20년의 시간을 되돌아본다는 것은 다가올 20년을 준비한다는 의미다. 앞서 아버지가 해온 일을 발전적으로 계승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지역사회와의 협조, 직원들과의 화합을 통해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만들어가겠다.-형편이 어려워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사람들, 다문화가정을 위해 무료 결혼식을 여러 차례 올려줬다.△예전에 식당을 할 때는 경로당 등에서 소박한 잔치를 열곤 했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아버지는 사업으로 얻은 수익의 일정 부분을 사회에 돌려주겠다는 다짐을 오래전부터 했었다. 웨딩사업을 시작하면서 매년 4월 무료 결혼식을 진행하고 있다. 하객들에겐 식사도 대접한다. 신혼여행지도 아버지와 내가 미리 답사하곤 했다.결혼식 이후에도 연락하며 잘 살고 있는지, 어려움은 없는지를 묻고 있다. 현재까지 약 200쌍의 부부가 티파니웨딩에서 무료 결혼식을 올렸다. 내가 대표로 있는 동안은 이런 전통을 이어갈 생각이다.-사단법인 ‘효 실천회’도 창립한 것으로 안다.△2013년에 만들어졌다. 효자·효녀·효부가 드물어진 세상이니 효의 이념을 실천하는 이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포항 지역에서 학생들에게 인성 교육도 진행하고 있다. 1년에 2번쯤 해당 분야 강사를 초청해 학생들에게 효 관련 강의를 들려준다. 때마다 200명 이상의 아이들이 모이고 있으니 성공적이라고 본다. 강의 후에는 자신의 감상을 적어 보내오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어려운 가정에 건강보험료를 대납해주고, 장학금도 기부하는 것으로 안다. 세속적인 질문이지만 그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건강보험료 대납은 2006년부터 해왔다. 처음엔 1년에 600만원으로 시작해 지금은 매년 1200만원을 지원하고 있다. 돈이 없어 병원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에서다. 건강보험공단을 통해 지원 대상자를 선정하고 있어 우리는 누가 혜택을 받는지 모른다.다만, 몇 해 전 울릉도 주민 중 한 분이 치료를 받은 후 어렵사리 연락처를 알아내 감사의 말을 전해왔다. 그때는 우리가 그분에게 더 고마웠다. 장학금의 경우엔 2016년부터 매년 1200만원을 지원하고 있다. 많지 않은 금액이지만, 형편 어려운 학생들이 꿈을 키워 가는데 작은 도움이 됐으면 한다.-여러 가지 사회 공헌 활동을 하고 있다. 이유나 계기가 있었는지.△앞서 말했듯 아버지는 빈손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누구보다 없는 사람의 고통과 힘겨움을 잘 안다. 그런 이유로 사회적·경제적 그늘 아래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아버지는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을 돕는 걸 좋아한다. 그런 모습이 존경스럽다. 그 연장선에서 나 역시 지역사회, 협력업체, 직원들과의 약속을 꼭 지키려한다. 내가 어려운 상황이 오더라도 그들과의 신뢰 관계를 깨지 않을 것이다.-웨딩사업과 외식사업을 하면서 느끼는 보람과 어려움은.△청솔밭은 단순히 결혼식만 올리는 장소가 아닌 문화공간으로 발전하려 노력해왔다. 포항의 결혼문화를 선도해왔다는 자부심도 없지 않다. 여기선 결혼식, 돌잔치, 칠순 잔치 등이 열린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늙을 때까지 기념할만한 즐거운 일들 대부분이 이 공간에서 연출된다. 인생의 가장 소중한 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 곁에서 함께 웃어주고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보람이다.다문화가정의 부부들을 오래 봐왔다. 예전에는 여러 문제를 안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문제들이 상당 부분 해소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 밝고 건강하게 자랐으면 좋겠다.-2명의 아들에겐 어떤 사람이 되라고 조언하는지.△별다른 건 없다. 그저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남과 더불어 살아가라고 말한다.(웃음) 나부터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면 애들도 자연스레 거기서 뭔가를 배우지 않겠는가. 내가 부모님을 보며 지금의 내 생각과 태도를 정립했듯이.-청솔밭의 올해 경영 목표와 향후 청사진은.△대표에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거창한 목표와 먼 미래를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만 최근 열린 ‘비전 선포식’에서 이런 말을 했다. “지역사회의 경기가 어려워지면 우리도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려운 시기를 힘 모아 이겨내면 더 큰 기회가 오고, 그 기회는 희망의 다른 이름이 될 수 있다”고.아버지가 닦아온 지난 20년을 발판으로 앞으로 20년 동안 지역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청솔밭을 운영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양심을 지키면서 더 많은 사람을 고용하고, 더 많은 사회 공헌 활동을 하면서 포항과 더불어 성장하고 싶다.아버지는 ‘ 나눔’ 과 ‘ 더불어’ 의정신을 자주 이야기한다.또한 ‘ 항상 먼저, 항상 새롭게’ 라는 혁신의 마음가짐을 강조한다.그것과 함께 직원들, 거래처,지역사회와의 믿음을 지켜가야한다고 말했다.말에 앞서 항상 실천으로 보여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라초심을 지켜내야 하지 않겠나/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2-26

호수와 숲을 지나… 낯설은 아름다움은 예술이 되다

◇시리도록 푸른 호수를 지나다드디어 바이칼호를 보았다. 집을 떠난 지 11일만이었다. 유라시아대륙에서 가장 큰 호수이자 아직도 원시 상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바이칼호는 눈부시게 푸르고 아름다웠다. 6월이 가까워졌는데도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아 얼음이 호수 가장자리에 밀려와 있었다.바이칼 호수 남쪽엔 설산들이 우뚝 솟아 있었다. 태고부터 저 산의 눈이 봄볕에 녹아 숲을 적시고 낮은 곳으로 흘러 지금의 바이칼을 만들었을 것이다. 멀리서 보면 호수 그 자체가 푸른 보석이지만 가까이 가면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가 지천을 통해 흘러 들어간다. 바이칼호의 수원이 되는 강은 300개가 넘고 이렇게 바이칼호에 담긴 물은 안가라 강과 예니세이 강을 따라 바다로 흘러나간다. 호숫가에 마을에 쌓인 쓰레기를 보며 삶의 터전을 파괴하는 종은 인간이 유일하다는 말을 실감한다.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결국 쓰레기와 오수가 바이칼호를 더럽힐 것이다.바이칼호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러시아의 생활수준이 높아지고 바이칼호가 관광지화 되면서 방문객은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2009년에는 30만 명 수준이었던 것이 2015년에 130만 명을 넘어섰다는 기사를 읽은 것이 오래 전이었으니 그보다 시간이 지난 지금은 훨씬 많은 사람들이 바이칼호를 찾을 것이다.바이칼호에서만 사는 물고기인 ‘오물’이 크게 줄고 대신 녹조가 계속 늘고 있는 것도 결국 사람들이 분별없이 버린 쓰레기와 폐수 때문일 것이다. 지구온난화가 계속되면 주변 설산의 눈이 녹고 수원도 메말라 바이칼호로 흘러가는 수량도 그만큼 줄어들어 오염도 가속화될 가능성이 크다. 날씨가 더워질수록 수온이 올라갈 테고 생태계도 바뀌고 자정 능력도 떨어지겠지. 낮은 수온에서만 서식이 가능한 ‘오물’이 급격히 줄어드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본다.어쨌거나 멀리서 본 바이칼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횡단 여행자들이 대부분 묵어가는 알혼섬에 가는 건 깔끔하게 포기했다. 바이칼호 주변에서 가장 큰 도시인 이르쿠츠크로 바로 달렸다.◇울창한 타이가 숲을 지나 이르쿠츠크에바이칼 호수를 지나 이르쿠츠크로 가는 타이가 숲은 지금까지 달려본 곳 중에 손꼽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헬멧 실드를 올리고 달리니 나무 향기가 진하다. 어제 고생한 걸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바이칼호로 오며 길을 잘못 들어 비포장도로를 100킬로미터쯤 달렸지만, 숲길을 그만큼 달렸으니. 이르쿠츠크 시내에 들어오니 이전 도시들과는 다르게 풍요로운 기운이 가득하다. 숲과 강과 호수를 가까이 두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런 기운이 모이는 것이리라.이르쿠츠크의 숙소는 아주 낡은 저택을 개조한 곳(세븐 트레블 호스텔)이었다. 도착했을 때 철문이 굳게 닫혀 있고 인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영업하지 않는 줄 알고 한참 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마당을 청소하러 나온 직원에게 손을 흔들고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오토바이도 지하 창고에 주차하고,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곳이었다. 6인실 1박에 500루블, 우리 돈으로 1만 원도 하지 않았지만 침구도 깨끗하고, 요리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부엌까지 있었다. 짐을 풀고 샤워를 하니 잠이 쏟아졌다. 집을 떠나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어떻게든 빨리 시베리아를 벗어나 모스크바에 도착해야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이르쿠츠크에 도착하고서야 긴장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다음 날 점심때까지 침대에서 꼼짝 않고 잠만 잤다.5,000킬로미터 가까이 달린 터라 오토바이 정비가 필요했다. 여분의 엔진오일과 오일 필터, 체인 루브를 구입해야 했다. 이르쿠츠크에서 가장 유명한 오토바이 숍을 찾아 타박타박 한 시간쯤 걸었다. 가는 길에 우연히 작은 헌책방 ‘북박스’를 만났다. 이번 여행에선 굳이 책방을 찾아다니지 않기로 했다. 여유가 되면 찾아보고 아니면 느긋하게 달리며 즐기기로 했었다. 그래도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그냥 스쳐 지났을 수도 있었던 북박스가 멀리서도 보였다. 책방지기 나딤에게 인사하고 책방을 구경했다. 5평 남짓 될까. 19세기에 지어진 작고 오래된 목조 건물에 책방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 문을 연 지는 5개월이지만 자신의 파트너는 10년 동안 책방을 운영했단다.책방에서 유일한 한국책(대원사 빛깔 있는 책들 ‘탈’)도 바로 꺼내서 보여주고 한국어판 러시아어 교재도 찾아주었다. 얼마 전 바이칼의 식물에 관한 영상을 촬영하기 위해 이르쿠츠크에 온 한국인들이 다녀가기도 했단다. 사진책에 관심 있다니 바이칼에 관한 사진집도 바로 꺼내주었다. 책방을 돌아보다 바이칼 주변에 사는 새들을 세밀화로 그린 아담한 책이 탐났지만 내려놓았다. 오토바이로 여행 중이라 책을 살 수 없어 미안하다 말했다. 서로 이메일 주소를 주고받고 문을 열고 나오는데 나딤이 붙잡으며 보여줄 것이 있노라 했다. 1912년에 출간된 삽화가 들어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초판본이었다. ‘전쟁과 평화’가 책으로 묶여 나온 건 1869년이고 이렇게 삽화가 들어간 건 이 책이 처음이라고 했다. 장정도 훌륭하고 삽화도 아름다웠다. 3권이 한 세트였고 가격은 4만 루블. 현재 우리 돈으로 75만원. 조심스레 책장을 넘기며 100년 전 잉크와 종이 냄새를 맡았다. 여유 있는 여행자였다면 까짓 지갑을 털었을 테다.◇ ‘전쟁과 평화’ 초판본을 만나다엔진오일 3리터를 들고 오는 길에 장을 봤다. 라면 5개, 스프 5개, 빵, 쨈, 그리고 얇은 파스타면을 샀다. 라면이나 스프를 끓일 때 파스타면을 추가로 넣어서 양을 불린다. 오토바이로 이동하면서 매 끼니마다 식당에 가서 먹는 건 귀찮기도 하고 사치다. 출출할 때마다 간단하게 허기를 해결할 수 있는 요리를 직접 하는 수밖에. 꽤 많이 샀다고 생각했는데 400루블, 약 8천 원어치다. 숙소에 장본 것을 가져다 놓고 시내를 쏘다녔다. 지도를 보고 주로 동상을 기점으로 삼아 돌아다니니 편했다. 이르쿠츠크의 상징 담비를 물고 있는 바브르(호랑이)를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군의관 간호사 기념비, 알렉산더 3세, 극작가 밤필로프, 레닌, 다시 바브르로 돌아오는 코스로 산책했다. 그리고 130지구에서 거리공연을 보는 걸로 마무리. 130지구는 관광객도 많고 거리 끝에 대형 백화점이 있었다. 중국 관광객이 현지인만큼 많았다. 그래선지 간판에도 중국어 표기가 많았다. 중국과 그리 멀지 않으니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올 수 있겠지.이르쿠츠크에는 아름다운 건물이 많은데 특히 옛 목조주택은 예술품을 보는 듯하다. 나무를 아낌없이 쓸 수 있는 자연 환경의 결과물이리라. 하지만 대부분 낡고 관리가 되지 않는 듯하여 안타깝다. 보존만 잘 한다면 그 자체가 이르쿠츠크의 훌륭한 문화자산일 텐데 버려져 폐가가 되어가는 건물들이 내가 돌아본 지역만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바이칼과 타이가 숲에서 얻은 재료로 만든 집과 일상용품들이 후대까지 잘 전해졌으면 좋겠다. 숙소로 복귀하기 전 다시 시장에 들렀다. 같은 방을 쓰는 중국 무역상 류 씨가 왜 이르쿠츠크에 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러시아인, 몽골인, 중국인…. 중앙아시아 곳곳에서 찾아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근대 이전에는 모피를 거래하기 위해, 지금은 생필품을 비롯한 여러 물건을 구하기 위해 중앙아시아, 바이칼호 주변 사람들이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르쿠츠크를 찾는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시내를 관통하는 앙가라 강을 따라 걸었다. 앙가라 강 둔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이르쿠츠크에서 더 시간을 보내고 싶다 생각했다. 편하게 와서 이곳에서 오토바이를 빌린 다음 바이칼 주변을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하지만 갈 길 바쁜 여행자니 다음 여정을 미룰 수가 없었다.   /조경국

2020-02-25

죽음의 문턱에서장기(長䰇)로…

노론의 거두 우암이 장기현을 떠난 지 120년이 지났다. 이제는 남인계열의 핵심인물 한 분이 장기현으로 왔다. 1801년(순조 1) 3월 9일 다산 정약용이 장기로 유배된 것이다. ‘신유박해’라고도 이름 붙여진 천주교 박해사건이 다산으로 하여금 이곳과 인연을 맺게 했다.다산은 1762년(영조38) 6월 16일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태어났다. 다산이 태어난 해인 임오년(壬午年, 1762)은 영조의 아들로 세자에 책봉되어 임금의 대리청정을 맡아보던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해였다. 이 끔찍한 사건으로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싸움이 시작되었고, 이 싸움의 연장선상에서 신유옥사(辛酉獄事)도 일어났다.다산은 나이 아홉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렸던 그는 큰형수(정약현의 처)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다산의 큰형수는 초창기 천주교 연구자인 이벽(李檗)의 누님이었다. 그래서 이벽은 누님의 집을 드나들면서 다산 형제와 깊은 교제를 나눴다. 그러다 큰형수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1784년 4월 15일에 형수의 4주기 제사를 지내기 위해 다산 형제들이 고향에 모였다. 그곳에 이벽도 찾아왔고 제사를 지낸 뒤 함께 한양으로 가는 배를 탔다. 이 배 안에서 정약용은 둘째형 정약전과 함께 이벽이 건네준 서학(西學) 서적을 접하고 천주교에 잠시나마 빠져 들었다.하지만 다산은 이때 이미 벼슬길에 올라있었고,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바쁜 일과를 보내는 터라 천주교에 대한 관심은 그리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적힌 다산의 글을 보면 그는 분명히 천주교에 잠깐 관심을 가졌을 뿐이지, 깊이 믿지는 않았던 것 같다.조선 중기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는 조선사회에서 보면 도리에 한참 어긋나는 사교(邪敎)였다. 성리학이 정치 이데올로기로 지배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산의 집안은 숙명과도 같이 초기 천주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형수의 동생인 이벽은 조선시대 천주교 초기의 교도로서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한 주역이었다.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은 다산의 큰 매형이었고, 백서사건으로 처형된 황사영은 다산의 조카사위(정약현의 아들)였다.조마조마하던 찰나에 천주교인들이 조선 양반사회를 뒤흔든 큰 사건이 일어났다. 신해년(辛亥年·1791년)에 전라도 진산 (珍山)에서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이 부모의 제사를 지내지 않고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다 발각된 것이다. 이른바 ‘분주폐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두 사람은 참형에 처해졌다. 사건의 당사자인 윤지충은 다산의 외사촌이었고, 권상연은 윤지충의 외사촌이었다. 이때부터 노론 벽파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남인 시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공격의 대상은 이승훈(李承薰), 이가환(李家煥), 정약용(丁若鏞) 등이었는데 대부분 남인들이었다.그러던 중 1795년 4월에 중국의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변복을 하고 몰래 들어와 북악산 아래에 거주하며 전교(傳敎)활동을 했다. 이 사실이 발각되자 주신부는 피신하였고, 그를 국내로 맞아들였던 지황(池璜), 윤유일(尹有一), 최인길(崔仁吉)은 체포되어 장살(杖殺)당했다. 이 일로 천주교 문제는 정치권 정면으로 부상했고 노론 벽파의 공세는 더욱 거세졌다.연이은 천주교 관련 사건으로 정조 임금도 이제 더 이상 남인 학자들을 지켜주기가 곤란해졌다. 그해 가을에 이가환을 공조판서에서 충주목사로 좌천시키고, 이승훈은 예산현으로 유배를 보내고, 정약용은 우부승지(右副承旨)에서 금정 찰방으로 좌천시켰다.이런 와중에 1800년 6월 정조가 갑자기 사망했다. 나이 어린(11세) 순조가 즉위하게 되자 왕실의 최고 어른인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됐다. 그녀는 김한구(金漢耈)의 딸로서, 1759년(영조 35년) 정조가 세손으로 세워지던 바로 그 해에 14세의 어린 몸으로 영조의 계비가 되어 궁에 들어온 여자였다. 그녀의 오빠이며 벽파의 우두머리인 김구주는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부터 홍봉한(洪鳳漢)을 축출하려는 상소운동을 일으켰다. 홍봉한은 정조의 외조부이자 시파의 영수였다.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이제는 왕의 미움을 사게 되어 그 해에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감형되어 흑산도로 귀양을 갔다. 김구주는 흑산도에서 9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다가 잠시 풀려났고, 1785년 다시 전라도 나주(羅州)로 유배되어 살던 중 얼마 못되어 숨을 거뒀다. 이렇게 김구주가 비참하게 죽자 그의 여동생인 정순왕후는 정조 재위 24년 동안 임금은 물론 남인 시파 사람들에게 앙심을 품고 복수를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1800년 11월 하순, 정조의 장례가 끝나자 정순왕후는 시파의 모든 고관들부터 파직시켜버렸다. 이에는 천주교가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1801년 1월 11일 정순왕후는 만약 서학을 믿다가 적발되면 코를 배고 멸종시키겠다는 엄금조서를 반포했던 것이다. 부모와 임금을 모시지 않는 천주교는 인륜을 파괴하고 교화에 어긋난다는 구실을 달았지만 실상은 천주교를 빌미로 시파들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이게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긴급명령 쯤 될 것이다.이때 책롱사건( 冊籠事件)이 발생했다. 1801년 2월, 이때 명도회장(明道會長)이었던 정약종(丁若鍾)은 양근(楊根)에서 정순왕후의 긴급명령을 피해 서울로 이사와 있었다. 그는 신변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천주교 서적과 성물(聖物), 그리고 주문모 신부의 편지 등이 담긴 책 고리짝을 보다 안전한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처음에는‘임도마’라는 신도에게 그 고리짝을 지게에 지게하고 나무꾼처럼 보이려고 솔가지로 덮었는데, 솔잎이 너무 적어서 몰래 잡은 쇠고기를 운반하는 것으로 의심받아 불심검문에 걸린 것이었다. 책롱 속에는 대 여섯 사람의 문서가 섞여 들어있었다. 그 가운데는 다산의 집 서찰(書札)도 있었음은 물론이다. 조사 과정에서 상자의 내용물이 밝혀지자 사건이 포도청에서 의금부로 이관되었고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역적으로 취급되어 심문을 받았다. 다산도 예외 없이 혐의를 뒤집어 쓴 채 1801년 2월 9일 하옥되었다.먼저 권철신·이가환은 가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해 옥중에서 숨을 거뒀고, 2월 26일, 초기 천주교 지도자들인 이승훈·정약종·최필공·홍교만·홍낙민·최창현 등 6명이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를 당했다.다산은 주변사람들의 도움으로 투옥 된지 19일 만인 27일 밤 이고(二鼓)에 다행히 죽음은 면하고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된 것이다. 전교(傳敎)를 위하여 청나라에서 건너온 주문모 신부도 모진 고문 끝에 그해 4월 19일 한강변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종친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도 사사(賜死)당했다. 이게 이른바 신유사옥이다. 신유옥사라고도 한다.다산은 유배가 결정된 그 다음날 길을 떠나 숭례문에서 남으로 3리에 있는 석우촌(石隅村)이란 마을에서 숙부님과 형님들을 이별하였고, 한강 남쪽에 있는 사평촌(沙坪村: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처자와 이별했다. 그믐날 경기도 안성(죽산), 3월 초하루 가흥(충주시 가금면)에 묵고 초이틀 충주에서 서쪽으로 30 리에 있는 하담(荷潭: 충주시 금가면)의 선영에 들렀다. 계속하여 탄금대를 지나 조령을 넘고 문경과 함창(경북 상주시 함창읍)을 거쳐 3월 9일에야 경상도 장기(長䰇) 땅에 도착했다.장기에 도착한 다산은 마현리 ‘구석(龜石)골’ 늙은 장교(莊校) ‘성선봉(成善封)’ 집에서 기거를 하였다. 성선봉이 다산을 보호하고 음식을 제공하는 보수주인이 된 것이다. 성선봉은 장기현의 아전이나 군교로 짐작되고, 그의 집은 현재 장기초등학교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은 이미 예송사건에 휘말린 우암 송시열이 유배객으로 머물다 간 곳이기도 했다.옥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801년 9월 15일 황사영이 중국 북경의 구베아(Gouvea) 주교에게 보내려 한 편지가 조정에 압수당한 것이다. 이른바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사건’이었다. 백서의 내용에 충격을 받은 조정은 천주교인을 반역의 무리로 지목하여 그해 겨울 또 한 번의 옥사를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그해 10월 20일 정약은 장기에서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갔다. 다행이 이번에도 다산은 연루되지 않았다는 것이 판명되어 전라도 강진현(康津縣)으로 이배(移配)되어 갔다.유배 첫해인 신유년은 다산의 총 유배기간 18년을 대표하는 한 해였다. 그래서 일까. 다산은 유배기간 동안 234편에 해당하는 537수의 시를 남겼는데, 이중에서 유배 첫해인 신유년(1801)에 남긴 시만 75편 184수에 해당한다. 신유년에 쓰인 이 작품들이 대부분 장기(長䰇)에서 창작된 것이거나 이곳에서 창작하여 후에 다른 곳에 가서 발표한 것들이었다. 장기에서 보낸 유배 첫해가 다산의 전 유배기간을 대표하는 해라고 여겨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다산은 처음에는 장기의 풍물들을 시로 묘사하다가 차츰 그들의 삶 속에 있는 풍속과 애환을 그리는 데로 나아갔다. 그 속에서 민간의 가난함을 발견하고 가난의 원인이 당시 사회 체제의 구조적인 모순에 기인함을 밝히려 애썼다. 그는 이곳을 고향으로 삼으려는 마음을 가질 정도로 애착을 가졌다. 이런 마음은 시와 글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표출되었다.그는 장기에서 시와 저술활동만 한 게 아니었다. 실학자답게 어부들이 칡넝쿨을 쪼개 만든 그물로 고기를 놓쳐 버리는 것을 보고 무명과 명주실로 그물을 만들 것을 권고했다. 그물의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소나무 삶은 물에 그물을 담갔다가 사용할 것을 가르치기도 했는가 하면, 보(洑)를 만들어 물을 가두는 공법을 전수하기도 했다.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의금부도사에게 다시 체포되어 허겁지겁 압송될 때 이곳에서 저술한 기해방례변, 이아술, 촌병혹치 등의 저서가 분실되었다는 게 안타깝기만 하다. 하지만 그가 장기에서 남긴 기성잡시 27수, 장기농가 10장, 고시 27수 등 180여수나 되는 시와 그에 내포된 애민사상은 여전히 장기의 정신적 ‘유적’으로 남아 2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한 향기를 품어내고 있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20-02-25

국내외 인삼산업 상생… ‘풍기인삼’ 세계인삼 메카로

2021 세계풍기인삼힐링엑스포 유치를 위한 준비가 순항 중이다.영주시는 2017년 10월 21일 제20회 영주풍기인삼축제 개막식을 통해 세계 속 고려인삼의 종주국으로서의 위상 정립을 위해 2021 세계풍기인삼힐링엑스포 유치를 위한 추진 선포식을 가졌다.선포식이 개최된 지 2년여 간 지난 현시점에서 엑스포 추진 상황에 대해 알아보고 그 기대 효과에 대해 점검해 본다.□ 세계풍기인삼힐링엑스포 필요성·당위성영주시는 2021년 세계풍기인삼힐링엑스포 개최의 필요성과 당위성에 대해 산업적 차원과 국가적 차원, 지역적 차원으로 구분하고 있다.산업적 차원을 보면 미용, 의료, 헬스, 바이오 등 다양한 산업을 연계해 신규 시장 수요를 창출하기 위한 다양한 제품 개발을 통한 풍기인삼의 세계화를 추진한다.인삼산업의 재 위치와 산업경쟁력 강화 등 산업잠재력과 고려인삼 수출 및 소비확산 플랫폼 구축의 필요성에 의한 시장 잠재력, 융복합 산업으로 인삼클러스터 구축 및 마켓플레이스가 등 제품잠재력 확산이 산업적 차원의 주요 포인트다.국가적 차원은 풍기인삼의 역사, 문화를 바탕으로 스토리텔링을 추진하고 식품, 캐릭터, 상품을 개발해 풍기인삼이 세계인삼의 메카로 자리매김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이를 위해 인삼 종주국으로서 위상 회복과 국제 전시회장을 마련하고 고려인삼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국가브랜드로서의 입지를 높인다.지역적 차원을 보면 산학 협력을 통한 인삼산업 전문클러스터를 구축하고 지역특화산업의 상생효과와 지역균형발전, 경북도 영주 및 영주시의 전략적 산업으로 육성하며 인삼종주지로서의 경제성장 및 지역브랜드 강화를 도모하게 된다.□ 세계풍기인삼힐링엑스포 개최 전략세계풍기인삼힐링엑스포는 국내 인삼재배 도시들과의 상생을 목표로 인삼산업 다각화를 위해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인삼융합복합산업의 발전 가능성을 확인하는 기회가 될 전망이다. 또, 인삼 시배지 풍기의 특성을 살려 인삼 스마트 팜, 인삼밭 명상 등 인삼밭 체험, 국내·외 인삼 도시들이 참여하는 인삼산업 도시 간 협력 체제를 구축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인삼을 주제로 한 체험 중심의 주제전시와 체험프로그램 중심 운영 등 방문객 참여 기회를 최대화하고 인삼산업 및 융복합 상품개발 등 인삼산업 확대 콘텐츠를 통한 스마트 팜 등 신기술 수출의 기회를 모색하게 된다.□ 세계풍기인삼힐링엑스포 비전·콘셉트2021 세계풍기인삼힐링엑스포는 생명 가치의 연결, 인삼 산업의 미래 창조라는 주제로 개최된다.풍기인삼의 생명력 가치 부분은 인류 에너지원으로써 인삼이 가진 가치를 재조명하는 생명 엑스포, 인삼이 가지는 생명력을 다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체험 엑스포로 구성되고 인삼의 인류 행복 가치 부분은 인류의 건강한 삶과 행복의 희망을 제시하는 힐링 엑스포, 인삼을 통한 포용적 가치를 실현하는 사회적 엑스포, 인삼산업의 미래 가치는 첨단 기술로 진화하는 인삼을 체험할 수 있는 과학 엑스포, 인류를 위한 인삼 관련 기술과 정보를 공유하고 확산시키는 산업 엑스포로서의 비전과 콘셉트를 제시하고 있다.또, 국내 인삼산업 선도 및 고려인삼의 글로벌화 하는 2021 세계풍기인삼힐링엑스포 방향성에 부합하는 산업적 기능을 강화 추진한다.엑스포 준비 과정이 콘텐츠가 되는 산업역량 강화 콘텐츠 개발과 국내인삼 산업의 공동 대응 노력, 풍기인삼을 활용한 새로운 가치 창출과 글로벌 이슈 만들기에 역점을 두게 된다.엑스포의 콘텐츠는 인삼을 통한 새로움-예술-기술-체험-협력-즐거움을 체험하는 공간으로 구성한다.전시장 구성을 보면 푸드, 한방, 뷰티, 테라피 등 인삼을 활용한 힐링복합 체험 공간이 웰컴존, 다양한 인삼 관련 제품 및 특산물 판매 공간인 인삼마켓존, 인삼산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인삼산업 발전 방향과 비전을 공유하는 스마트인삼존, 국내외 인삼 유통가공 업체 홍보 및 판매 바이어 상당 공간인 상생산업존, 융복합 상품 체험관인 인삼융합존, 체험 전시 및 프로그램 운영 엑스포 부대행사 공연 공간인 인삼엔터테인먼트존 등으로 구성된다.□ 2021 세계풍기인삼힐링엑스포 사업개요영주시는 풍기읍과 봉현면 일원 87만 5천㎡ 규모에 215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해 2017년부터 2021년까지 5년간 엑스포 준비를 위한 사업을 추진한다.추진상황을 보면 2018년 세계풍기인삼힐링엑스포 기본구상 및 타당성 연구용역을 완료하고 2019년 중앙투자심사 승인, 국토부 공모사업 선정에 따라 조례 제정, 부지매입 완료, 기본계획 연구용역 완료, 실시설계 용역발주, (재)발기인 총회 및 창립 이사회를 개최했다.올해는 사무실 임차 계약 및 리모델링, 조직위 출범 및 운영, 예산편성, 실시설계 완료 및 조성공사 추진, 부문별 세부계획 추진, 홈페이지 개설 및 홍보 활동에 들어간다.2021년에는 사업장 조성공사 완료와 세계풍기인삼엑스포 홍보 마케팅을 지속 추진하고 2021년 세계풍기인삼힐링엑스포를 9월17일부터 10월 10일까지 24일간 개최된다.□ 엑스포 개최로 발생하는 파급 효과엑스포 기본구상 및 타당성 연구용역(2018.11월)에 따르면 2021세계풍기인삼힐링엑스포 개최를 통한 입장권 판매수입 72억, 임대수익, 후원·휘장·광고·협찬 수입 27억 원 등 직접적인 수입 99억원과 경제적 파급 효과로 생산유발 효과 2천474억원, 부가가치 유발 효과 1천5억원, 취업 유발 효과 2천798명 등 다양한 사업의 파급 효과의 발생이 기대된다.(방문 예상객 : 176만명)산업적 파급효과에는 인삼산업 경쟁력 강화 및 발전, 지역주민 소득 및 고용증대, 풍기인삼 관련제품의 수출 및 소비촉진이 기대 되고 있다.사회·문화적 파급효과는 인삼특화도시이자 주산지·시배지로서 위상과 브랜드 제고, 지역주민 단합도모 및 자긍심 고취, 지역관광산업 발전 및 관광도시로서 이미지 제고 등이 예상된다.이밖에도 엑스포 행사장인 500년 풍기인삼 문화팝업공원은 고려인삼의 최초 시배지이자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풍기인삼의 우수성을 홍보하기 위한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풍기인삼축제장의 문제점으로 지적된 공간부족 문제 해결과 이벤트와 프로그램 발굴 등 다양한 시도로 풍기인삼축제 재도약 계기를 마련한다. 관광객 증가를 통한 소비지출 확대는 관련 산업 성장과 일자리 창출 및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풍기인삼 역사삼국사기에 신라 성덕왕 33년 산삼 200근, 효성왕 3년 산삼 100근, 경문왕 9년 산삼 100근을 당나라에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다.삼국시대에 이렇게 많은 양의 산삼을 선물한 사례는 유일하게 신라에만 있다.이는 소백산에 많은 산삼이 자랐기 때문에 가능했다.그러나 무분별한 채취로 산삼의 생산량은 줄어들고 수요는 급중해 고려시대에는 산삼 공납으로 백성의 피해가 급증했다.조선 중종 37년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부임해 산삼공납에 의한 백성의 고초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 소백산 자락 풍기 지역의 자연환경이 산삼을 기르는데 가장 적합한 곳임을 알게 됐다. 주세붕이 금계동 일대에 산삼종자를 채취해 재배하기 시작한 것이 우리나라 재배의 시초가 됐다.□ 풍기인삼의 특징풍기인삼은 소백산맥의 유기질이 풍부한 토질에서 생산, 내용조직이 충실하고 인삼 향이 강하며 유효사포닌 함량이 매우 높아 동의보감에 신진대사의 기능에 효과가 탁월하다고 기록돼 있다.풍기인삼은 타지역 인삼에 비해 재·삼탕을 해도 물렁하게 풀어지지 않고 농도가 진하며 향기가 짙다. 또, 육질이 탄탄해 무겁고 약효도 뛰어나며 규칙적으로 복용 시 혈압조절과 간장보호에 도움을 준다.암과 당뇨 예방과 피로 회복과 식욕을 돋우어 주고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인삼은 한번 농사지었던 장소에 다시 지을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과 많은 기후의 변화에 민감하지만 재배기술의 발달로 요즘은 다양한 지역에서 인삼을 재배하고 있다.이런 가운데 풍기인삼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은 우리나라 최초 시배지인 역사를 배경으로 한 오랜 재배기술의 발달, 인삼 재배에 대한 다양한 경험이 풍부한 장인들이 많은 지역인 점, 인삼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점 등이다./김세동기자 kimsdyj@kbmaeil.com

2020-02-24

백신애, 규정된 ‘서발턴’을 거부하다

서발턴(하위주체, subaltern)이라는 용어가 있다. 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처음 사용했던 것으로, 민족, 계급, 연령, 젠더(성), 직위 등 모든 측면에서 종속적인 위치에 있는 계층을 가리킨다. 그들은 민족적으로도 온갖 핍박을 받아야 하는 식민지인이고, 계급적으로도 가진 것이 없는 빈털터리이며, 젠더적으로도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는 가부장제의 타자들이다. 백신애가 자신의 작품에서 즐겨 그리는 여성들이야말로 이러한 서발턴의 개념에 부합하는 존재들이다.백신애의 작품 중에서 남성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서너편에 불과하다. 작품의 양에 있어서도 다수를 차지하고 작품의 수준도 높은 것들은 서발턴에 해당하는 가난한 농촌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들(‘복선이’, ‘채색교’, ‘소독부’, ‘광인일기’, ‘식인’, ‘적빈’ 등)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백신애가 나고 성장한 경북의 지역성과 작가의 체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우선 이들 작품을 채우는 언어부터가 경북의 것이다. 백신애 연구의 초석을 놓은 김윤식은 백신애를 가리켜 “무뚝뚝하고 인정머리 없는 경상도 방언에 저려 있는 사람”(백신애연구抄, ‘경산문학’ 2집, 1986)이라고 평하였다. 국어학자 김태엽은 논문 ‘백신애 소설에 나타나는 경북 방언’(‘우리말글’ 44집, 2009)을 통해 일제강점기 경북 방언의 흔적을 잘 나타낸 작가로 백신애를 들고 있다. 백신애 작품의 상당 부분은 거친 경북 말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난한 촌민들을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 이러한 특징은 더욱 두드러진다.백신애 전집.백신애의 실제 농촌 체험도 무시할 수 없다. 백신애는 1936년 12월 반야월 괴전마을 과수원에 새 집을 지어 이사하고 직접 농사도 지으면서 농민들과도 마주했던 것이다. 수필 ‘과촌민들’(‘여성’, 1937.9)에서는 과수원을 경영하며 겪은 촌민들과의 일들을 기록하였다. “까다롭고 깍정이같이 밴질거리는 사람은 서울 놈이라 하고, 순박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촌놈이라고 하지마는 요지음의 촌사람도 여전히 순박하고 어리석은 줄만 알다가는 큰코다치기 쉽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수필에서 백신에는 촌민들의 불결함, 우둔함, 염치없음 등을 조근조근 펼쳐놓고 있다. 물론 “이들이 순박성을 일어버린 것은 너머나 남의게 속어만 오고, 없수임만 받어온 까닭”이라고 하여 그들을 이해하려는 태도도 보여주지만, 여타의 작가들이 자신의 이념이나 감상에 따라 농민을 이해한 것과는 달리, 백신애는 농민들의 삶을 자기 나름의 관점으로 깊이 있게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서발턴을 등장시킨 대표적인 작품으로 ‘식인(食因)’(‘비판’, 1936.7)을 꼽을 수 있다. 주인공 옥남이 처한 상황은 가난은 가난이되, 작가의 또 다른 소설 제목과도 같은 완벽한 ‘적빈(赤貧)’에 해당한다. 이 작품은 남편 최가가 아무것도 없는 옥남에게 돈 오전을 내놓으라고 막장의 욕설과 폭력을 퍼붓는 것으로 시작된다. 올해 스물아홉인 옥남은 지금 네 번째 임신을 하고 있는데, 앞의 아이들은 최가의 폭력으로 모두 죽었다. 해산이 임박한 옥남은 살기 위해 김문서의 농장으로 품을 팔러 간다.과거의 인연으로 인해, 김문서의 농장에서 품을 파는 것은 옥남이 어떻게 해서든지 피하고 싶은 일이다. 옥남과 같은 동네에서 자란 김문서는 아내를 잃은 지 얼마 안 되어 옥남에게 청혼하였는데, 이 때 옥남은 김문서의 청을 거절하고 대신 “얌전한 총각”이었던 최가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김문서는 착실하게 일하며 재산이 불같이 일어났고, 최가는 “잔인하고 무도한 비인간”이 되고 말았다.그러나 살기 위해 옥남은 김문서의 농장에 가서 일을 하고, 허기에 지친 옥남은 밭에 나 있는 무를 허겁지겁 뽑아 먹다가 아이를 낳는다. “밭 가운데서 어린애를 더구나 사내애를 해산했으니 그 밭 임자에게 무한한 복이 올 징조”라는 미신으로 김문서 아내는 옥남을 도와준다. 그러나 해산한 지 팔일 만에 집에 돌아온 최가는 밥을 지어내라며 옥남과 아이를 걷어찬다. 결국 이번에도 아이는 죽고 만다. 작품은 며칠을 굶은 옥남이 동네 건물 상동식에 쓰려고 준비한 음식을 먹으려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맞아죽는 것으로 끝난다.이처럼 옥남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존재이다. 그녀에게는 돈은커녕 당장 죽음을 면할 땟거리가 없다. 동시에 남편에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욕과 폭력을 당하는 여성이며, 심지어는 같은 처지의 동네 사람들에게도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한다. 민족, 계급, 연령, 젠더, 직위 등 모든 측면에서 종속적인 위치에 있는 서발턴인 것이다.이 작품은 ‘여류 단편 걸작집’(1939)에 수록될 때에는 ‘호도(糊途)‘로 제목이 바뀐다. 제목이 바뀌는 것과 더불어 내용도 적지 않게 변한다. 이러한 변화는 옥남의 비극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남편은 옥남에게 하는 욕설이 아직도 모자라다는 듯이 “이런 빌어먹다가 얼음판에 가 자빠져 문둥 지랄병을 하다가 죽을 년아.”, “목탕목탕 썰어 죽일 년 같으니”, “사람을 잡아먹고 아이 새끼로 입가심 할 년”과 같은 말을 퍼붓는다. 또한 젠더적인 차별의식도 보다 선명하게 강화된다. 아이의 성별이 아들에서 딸로 바뀌었으며, 최가는 “계집아이는 낳아 머 한다고, 재수 없게 이년, 이까짓 것 먹일 것 있거든 내나 먹자.”라며 갓 태어난 아이를 때려 죽인다.또한 옥남이 너무나 허기가 져서 무를 뽑아 먹을 때, 주위 농민들이 “무를 그렇게 뽑아 먹으면 어째, 도둑년!”이라고 욕하는 장면이 첨가되었다. 반대로 부자인 김문서 집의 호의는 생략되었다. ‘식인’에서 김문서의 마누라는 자기 밭에서 해산한 것은 좋은 징조라 하여 쌀 한 되, 미역 한 묶음, 명태 다섯 마리를 보내고, 나중에는 밥해 먹을 솥이 없는 것을 알고 냄비와 나무까지 지여 하인을 보내 밥과 국을 끓여먹게 한다. ‘호도’에서는 이 모든 일이 “쌀 한 말을 가져다주었다.”는 한 문장으로 축소되었다.이러한 변화에는 ‘호도’가 창작될 때까지 3년 여 간 백신애가 경험한 일들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백신애는 1938년 5월 남편과 별거를 시작하고, 같은 해 1938년 11월에는 정식으로 이혼한다. 이 무렵에 그녀는 오빠 백기호를 찾아 중국에 갔다가 칭따오와 상하이 등을 수개월간 여행하고 돌아온다. 이러한 일을 거치며 세상을 보는 그녀의 안목은 보다 깊어지고, 남녀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은 더욱 예리해졌을 것이다.무엇보다도 ‘호도’의 마지막에 동네 공동 건물의 상동식에 사용할 음식에 입을 댔다가 옥남이 동네 사람들에게 맞아 죽는 장면은 주목할 만하다. ‘식인’에서는 옥남의 죽음이 암시만 되며 끝나는데, ‘호도’에서는 “그의 입을 가린 수건 사이에 콩나물 한 개가 걸려 있을 뿐. 그는 눈을 뜬 채 영원한 침묵 속으로 사라져 갔다.”고 구체적으로 묘사된다.이 때 ‘침묵’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람시가 처음 사용한 서발턴이라는 용어는 별로 언급되지 않다가 인도 출신의 탈식민주의 학자 스피박이 사용하면서 유명해졌다. 스피박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논문에서 서발턴의 가장 큰 고통은 아무런 자산이나 능력도 없기에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서발턴은 고작해야 자신이 아닌 다른 이에 의해서만 자신들의 처지가 재현되고 해석된다는 것이다. 이 때 재현되고 해석되는 것은 ‘실제의 서발턴’이 아닌 재현하고 해석하는 이들의 의지와 욕망에 물든 ‘허구의 서발턴’일 가능성이 높다.일테면 누군가는 억압받는 식민지인으로만, 누군가는 가난한 자로만, 누군가는 힘없는 여성으로만 서발턴을 해석하거나 재현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온갖 고통이 중첩되어 있는 서발턴이 그 어느 하나로만 해석된다는 것은 심각한 오해이자 왜곡일 수밖에 없다. 서발턴은 억압받는 조선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빈민이며, 또한 집에 가서는 그 잘난 남편이나 아들을 돌보느라 허리가 휘는 여성인 것이다.백신애의 소설들이 더욱 의미를 갖는 것은 이러한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백신애는 그 많은 고통을 짊어진 이들을 그대로 보여주기만 하고, 함부로 특정한 맥락 속에 위치 지우려고 하지 않는다. ‘호도’의 마지막에 표현된 옥남의 “영원한 침묵”은 그 어떤 담론이나 이념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규정되기를 거부하는 옥남의 고유성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이 시기 농민들을 형상화한 여타 소설과는 구별되는 백신애의 고유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유성은 가족-사회, 전통-근대, 윤리-욕망, 공동체-개인, 중앙-지역, 남성-여성이라는 수많은 이분법 속에서도 끝내 자신만의 고유성을 유지하려고 한 백신애의 고투가 낳은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2-24

2020년 복지예산 1천400억 시대… 행복한 복지도시 문경 박차

문경시가 2020년도 복지분야 예산 1천400억 원 시대를 열었다. 2012년 679억 원에서 7년 만에 2배로 증가했다.시는 시민 건강증진과 사회안전망 구축을 위해 기초연금 497억 원, 생계급여 109억 원, 노인일자리 지원 79억 원, 영유아보육료 45억 원, 노인맞춤형돌봄서비스 34억 원, 장애인연금 29억 원, 주거급여 27억 원 등을 지원해 책임복지와 의료서비스를 강화해 나간다는 방침이다.올해 문경시에서 역점적으로 추진하는 사회복지정책을 살펴본다.□ 복지체감 높이고 사각지대 줄이고문경시는 정부의 국정과제인 ‘주민자치형 공공서비스 구축사업’의 추진을 위해 지난해 행정안전부로부터 기존 4개 권역의 중심 읍면동에 구성된 맞춤형 복지팀(문경읍, 산북면, 점촌3동, 점촌5동)을 14개 읍면동으로 확대하는 기본형 전환을 승인받아 올해부터 찾아가는 보건복지서비스를 추진한다. 확대된 맞춤형 복지팀은 기존의 복지대상자뿐만 아니라 생애전환기(출산·영유아양육·노인진입 등) 대상 고위험 1인가구·돌봄 필요가구 등에 대한 찾아가는 방문상담을 더욱 강화한다.지역사회보장협의체 위원을 비롯한 264명으로 구성된 명예사회복지공무원(행복문경지킴이) 등을 대상으로는 워크숍, 시민자치학교 운영을 통해 복지역량 강화는 물론 민관협력 연계로 복지사각지대 해소에 주력한다.어려움을 겪고 있는 소외계층이 없도록 보다 세심하고 꼼꼼히 주민과 더 가까운 곳에서 맞춤형 복지서비스도 제공한다.□ 사회적 약자 위한 종합복지관 신축지역 간 균형 있는 복지시설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종합적인 복지서비스 제공을 위해 총 사업비 36억원을 투입해 ‘흥덕종합사회복지관’을 지난 해 5월 개관했다. 점촌 1,3동은 물론 영순, 호계, 산양 지역 청소년 등 저소득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제공되는 경로식당과 다양한 건강증진 프로그램 운영을 통해 종합복지서비스 시설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장애인 종합복지관은 개관한 지 17년 만에 총 38억9천만원을 투입해 지난해 12월 증축 및 기능보강공사를 마쳤다.이로써 이용자들의 불편을 말끔히 해소하고 쾌적하고 질 높은 재활치료가 가능한 다양한 재활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게 됐다.□ 취약계층 생계비·의료비·일자리 걱정 줄인다.기초생활보장 생계지원에 109억원을 지원한다.생활유지 능력이 없는 저소득 주민의 질병예방, 건강관리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의료급여 진료비 16억원을 지원하고, 수급권자의 건강관리 능력 향상 및 합리적인 의료이용 유도 등을 위해 사례관리를 더욱 내실화 한다. 저소득층의 생활안정을 도모하고 주거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3억6천만원의 전세 및 영구임대아파트 입주보증금을 지원한다.융자대상자는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전세입주보증금 3천만원이며 영구임대입주보증금은 한국주택공사가 정한 입주보증금 내에서 장기 저리로 대여한다.근로능력이 있는 저소득층의 자립·자활을 돕기 위해 읍면동, 문경지역자활센터, 문경고용복지플러스의 협업을 통해 다양한 자활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전문성 있는 자립지원 직업상담사가 참여대상자 개개인의 특성에 맞는 자활지원 계획을 수립, 맞춤형 밀착사례관리를 진행하고 있다.근로소득이 발생한 수급자 및 차상위계층이 목돈을 만들어 탈 수급에 대비할 수 있는 희망·내일·청년희망기움통장과 청년저축계좌 사업을 적극 지원한다. 129긴급지원 사업에 지난해보다 24% 늘어난 1억8천773만원을 투입해 대상자 발굴·지원에 나설 예정이다. 갑작스런 위기상황에 처한 저소득층을 발굴해 위급상황을 신속하게 극복할 수 있도록 생계·의료·연료비 등을 지원하는 긴급복지지원사업은 지원대상자에 따라 129긴급지원,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한국제이티에스를 통해 지원하게 한다.생계가 곤란한 저소득층을 조기에 발견해 지원함으로써 실질적인 위기상황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보훈회관 건립 박차 등 보훈선양 사업 내실 추진문경시의 8개 보훈단체 1천600여 회원들의 오랜 숙원사업인 보훈회관 건립을 위해 올해 실시설계를 시작으로 2021년 말 공사를 마무리할 예정이다.이로 인해 노후된 시설물 관리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고 이용자의 편의를 도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보훈단체의 활성화를 위해 연간 9개 보훈단체에 1억9천만원의 운영비 지원과 전적지 순례비 지원을 비롯해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교두보 역할을 한 고(故) 박동진 중사 기념비 주변 주차장 환경개선 사업을 오는 3월 정비해 청소년 등 후세들의 산 교육장으로 적극 활용할 계획이다.□ 노후소득 보장 위한 노인일자리 사회활동 참여 확대올해 노인 일자리 및 사회활동 지원사업은 작년보다 인원과 예산이 대폭 늘었다. 인원은 42명 늘어난 2천210명이고, 사업비는 4억6천300만원 증가한 79억2천100만원이다.내년 일자리는 3개 유형 23개 사업을 진행한다. 독거노인 돌봄지원, 지역사회 환경개선, 학교 청결 도우미, 전래놀이 전수 등의 공익활동에 1천800명의 일자리를 창출한다. 또, 새재 참기름, 우리 표고 등의 시장형에 240명, 노인·장애인시설 등의 사회서비스형에 155명이 참여한다.어르신들의 쉼터인 384개 경로당에 행복도우미를 파견해 어르신 맞춤형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시설환경 개선 및 운영비도 지원해 건강하고 풍요로운 노년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는다.독거노인 및 장애인 등 취약계층의 안전 강화를 위한 응급 안전시스템 구축과 관련 올해는 2천72가구에 3억3천만원의 사업비를 투입한다.문경시노인복지관은 어르신들에게 여가선용 및 다양한 교육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지난해 29개 강좌에서 오카리나반 등 2개 과정을 추가로 신설한다. 총 31개 과정 1천100여명의 어르신이 맞춤형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돼 오는 3월 2일 개강을 앞두고 벌써부터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 영유아 성장환경 조성·청소년 교육·문화프로그램 지원아이를 낳고 기르기 좋은 문경시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요람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지원을 한다.흥덕생활공원 일원에는 어린이 야외물놀이터와 맘커뮤니티룸을 갖춘 아이토담센터를 설치하고, 영신숲 유원지에는 숲그네를 비롯한 밧줄암벽 등을 체험할 수 있는 영신숲 밧줄놀이터를 설치해 만 6세에서 12세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다함게 돌봄프로그램 사업을 진행한다.지난해 12월 문경제일병원내 개소한 맘 편한 돌봄공부방에 이어 놀이체험이 가능한 문경시육아종합지원센터 모전분소도 곧 개소할 예정이다.청소년 문화강좌는 지난해 60개에서 5개를 늘려 운영한다.지역 내 청소년들이 모두 참여할 수 있는 독서한마당 대회도 개최하고, 드림스타트, 지역아동센터, 다함께 돌봄교실, 청소년 문화의 집 등의 다양한 교육 문화프로그램 참여도 돕는다.시는 지난해 2018지역사회보장계획 시행 부문 우수기관상, 사회복지급여 점검관리 부문 5년 연속 우수 및 최우수 기관상, 경북도 자원봉사 우수기관 평가 대상, 노인일자리 및 사회활동 지원사업 최우수기관상, 경북도 식품공중 위생관리 사업평가 최우수기관상을 수상했다.고윤환 문경시장은 “지난해 추진한 복지분야 시책을 밑거름으로 주민의 복지욕구를 충분히 반영한 내실 있는 시책발굴과 주민의 삶의 질 수준을 향상시키고 누수 없고 더 투명하고 공정한 다양한 복지사업 발굴을 통해 다함께 행복한 복지문경을 만드는데 더욱 힘쓰겠다”고 말했다./강남진기자 75kangnj@kbmaeil.com

2020-02-23

눈 쌓인 블라디보스토크를 걷다가…

중년 이상의 한국인들이 ‘러시아’라고 발음하면 연이어 떠오르는 몇 가지 이미지들이 있다. 대부분 정치적인 것들이다.1917년 영국 망명에서 돌아와 볼셰비키 앞에서 열변을 토하던 사회주의 혁명가 레닌, ‘당의 무오류성’을 설파한 스탈린,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 연이은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보리스 옐친의 보드카 폭음, 그리고 최근 ‘21세기의 차르(제정시대의 황제)’로 불리는 블라디미르 푸틴의 권력욕까지.1980~90년대 한국에서 청년 시절을 보낸 이들은 러시아 혁명 역사와 그 나라 정치 지형의 변화를 원하건, 원치 않건 듣고 보며 살았다.비단 ‘이상적 사회주의’를 꿈꾸던 ‘운동권 학생’이 아니라 해도. 그때부터 우리에게 러시아는 멀고도 가까운 나라였다.1990년대 초반. 밧줄에 묶인 레닌의 동상이 거리로 끌어내려지는 모습을 보며 누군가는 안타까워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환호했다.‘어째서 소련의 사회주의 실험은 100년도 안 돼 실패로 막을 내린 것인가’를 탐구하러 러시아로 유학을 떠난 이들도 있었고, ‘그것 봐라. 이데올로기는 절대로 개별 인간의 욕망을 통제할 수 없다’며 소련 연방의 몰락을 당연시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지금의 20대 청춘들 대부분은 더 이상 ‘러시아 혁명사’를 읽지 않는다. 그들에게 지난 시절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이름은 고차원의 방정식처럼 낯설다. 이런 세태가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구세대가 지극한 정치적 관심으로 러시아를 바라봤다면, 신세대는 ‘여행지로서의 러시아’ 혹은 ‘이국적 매력의 러시아’로 관심의 초점을 돌렸다.그렇다면 이제 막 50대에 들어선 기자는 어떨까? 러시아에 관해서라면 구세대보다는 신세대의 감성에 가깝다는 게 스스로 내린 결론이다.▲‘러시아 여행’과 ‘러시아 문화’가 일상이 된 시대를 살며여행을 하다보면 세계 각국의 사람들을 자연스레 만나게 된다. 그 만남이 반복되다보면 사람들의 외형과 태도에서 드러나는 나라별 특징을 알게 될 수도 있다. 이게 흥미롭고 신기하다.기자가 겪어본 바에 의하면 많은 수의 러시아인은 ‘근사한 하드웨어’를 갖췄다. 키는 크고, 골격은 단단하며, 팔과 다리는 시원스럽게 길다.푸른 눈동자와 곱슬거리는 금발의 러시아 여성은 아시아와 유럽 어느 여행지에서도 돌올하게 눈에 띈다. 말수가 적고 잘 웃지 않는 시니컬한 슬라브족 여성이 매력적이라 느끼는 건 비단 한국인들만이 아니었다.몇 해 전 로마의 조그만 호텔에서 함께 묵은 스페인 대학생도, 프랑스 은행원도, 아르헨티나 전기기술자도 “슬라브 여자, 정말 예쁘지”라고 입을 모았다.지난해 말 다녀온 러시아 극동 도시 블라디보스토크. 거기서 러시아 여성들의 아름다움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여권 검사와 입국 수속을 돕기 위해 ‘포항 발 블라디보스토크 행 크루즈’에 오른 러시아 출입국관리소 직원들 중 절반쯤은 여성이었다.검은 코트에 털모자를 쓰고 발 맞춰 걸어 다니는 그녀들에게 승객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마치 일류 모델들의 패션쇼 같았다.그 광경을 보며 곧 배에서 내려 여행하게 될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던 건 비단 기자뿐이었을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20세기와 달리 21세기 한국인의 관심은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 정치가 아닌 ‘러시아 여행’과 ‘러시아 문화·예술’이 됐다.그래서였을 것이다. 그 순간 떠오른 시는 ‘전혀 정치적이지 않은’ 백석(1912~1996)의 사랑 노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였다. 슬라브 여성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을 가진 연인과 눈 덮인 러시아와 가까운 북관(北關)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지는.▲낯선 도시에서 떠올린 젊은 날의 첫사랑블라디보스토크는 문학청년들에겐 ‘문장강화’를 쓴 소설가 이태준(1905~?)이 네 살 꼬마였을 때 아버지를 잃은 곳으로 기억되는 도시.새파랗게 젊었을 어머니와 함께 창밖으로 거센 눈보라 치는 차가운 방에서 부친의 시체를 바라보며 통곡했을 어린 이태준을 떠올리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일제강점기엔 이태준의 아버지 외에도 적지 않은 ‘조선 사람들’이 각기 다른 저마다의 이유로 살던 곳을 떠나 간난신고의 삶을 이어가던 슬픔과 눈물의 공간이 바로 블라디보스토크였다.하지만 그건 이미 100년 전 이야기. 지금의 관광객들은 블라디보스토크라 하면 낭만적인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출발점 혹은, 먹음직스런 킹크랩과 러시아식 꼬치구이 샤슬릭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중국, 북한과 인접했기에 지난 세기엔 해삼위(海參5D34)라고도 불렸던 그곳에서 꼬박 하루를 여행자로 지냈다.눈 쌓인 길 위에서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아르바트 거리와 해양공원, 독수리 전망대와 러시아 정교회 성당, 붉은 지붕이 예쁜 토카렙스키 등대를 돌아봤다. 소비에트 연방 시절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갖가지 형태의 동상들은 흩뿌리는 진눈깨비에 젖어 있었다.백석이 ‘나타샤’와 함께 걷던 곳도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진원지를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온몸을 휘감아왔다. 그것은 타의에 의해 낭만이 거세된 중년사내의 우울 또는 서러움이었을 터.그걸 위로해준 건 조그만 공원에서 만난 러시아 사람들이었다.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꽁꽁 언 광장에서 매력적인 노래와 춤을 보여주던 그들은 인종과 국적이 다른 이방인의 손을 따스하게 잡아주며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다. 옆에 선 러시아 여자의 푸른 눈동자가 너무나 아름다웠다.그때였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로 시작하는 백석의 시구가 다시 마음에 새겨졌고, 흐릿하게 남아 있던 스무 살 첫사랑의 얼굴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블라디보스토크가 잊고 살았던 청춘 시절의 고향 같아졌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 류태규

2020-02-20

200만 관광객·부자 농촌·경제 활력·미래에너지 청정 봉화!

민선7기 반환점을 맞은 봉화군은 군민소통과 화합을 바탕으로 풍요로운 봉화 만들기 정책들을 역동적으로 추진해나갈 계획이다.승풍파랑(乘風破浪), 즉 ‘바람을 타고 물결을 헤쳐 나간다’는 자세로 올 한해 봉화군이 역점적으로 추진해나갈 주요사업은 농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농림분야 예산 역대 최대 규모 편성 △농업인 경영안정자금 지급 확대 △농산물 종합산지 유통센터 건립 등이다.□부자농촌 실현 위한 농업 경쟁력 강화최근 농촌지역은 WTO 개도국 지위 특혜 철회, 기후변화, 농산물 가격 하락으로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를 겪고 있다.봉화군은 이러한 농업의 위기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고 농업 인프라 구축과 생산성 향상을 위한 다양한 정책들을 시행함으로써 지역농업에 활력을 불어 넣고 있다.농림분야에 1천23억원을 투자해 부자농촌 만들기에 집중한다.이는 전년대비 127억원이 증가했고, 군 개청이래 역대 최대 규모의 농림분야 예산이다.농업인들의 기본소득 향상에도 적극적이다.지난해는 경북도 내 최초로 농업경영안정자금 총 33억원을 6천600여 농가에 50만원씩 지급했다.올해는 40% 증가한 70만원을 봉화사랑 상품권으로 지급해 농가안정은 물론 지역 상인에게도 혜택이 돌아가도록 지원할 방침이다.농산물 가격 하락에 대응하기 위해 농산물 가격 안정기금 100억원도 조성했다.농작물 재해보험 지원 98억원, 미래 스마트 생산기반 구축 14억원, 저품위 사과 수매 지원 30억원의 사업비를 투자해 농촌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안정적인 영농을 도모한다.봉성면 금봉리 일원에는 부지 35,000㎡, 시설면적 4,000㎡ 규모의 농산물 종합산지유통센터를 짓고 있다.올해 말 완공되면 지역 농산물의 물량 규모화를 통한 거래교섭력 제고와 농가의 물류비 부담 완화의 효과를 얻을 것으로 기대된다.□전국 최고의 관광도시 기반 확충봉화군은 지역축제를 비롯한 다양한 킬러 관광 콘텐츠 개발과 차별화된 관광 인프라 구축으로 관광객 200만명 유치에 본격적으로 나선다.지난해 은어·송이축제, 청량산도립공원,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등 지역 축제 및 주요 관광지를 방문한 관광객이 164만명으로 집계됐다.올해는 ‘2020 대구경북관광의 해’를 맞아 관광객 200만명 시대를 열기 위해 행정력을 집중한다.이를 위해 봉화읍 소재지를 가로지르는 내성천에 높이 66m의 내성천 경관타워를 건설해 봉화군을 대표하는 새로운 랜드마크로 각인시킨다.송이모양의 경관타워는 봉화읍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와 카페로 조성되며, 길이 115m의 인도교는 신·구시장을 연결, 분리된 상권을 하나로 묶는다.정자와 휴게벤치를 설치해서는 주민과 관광객이 휴식과 관광을 즐길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꾸민다.봉화 지역축제와 관광산업을 총괄적으로 관리하고 전문적이고 효율성 있는 추진을 위해 이달 중 봉화축제관광재단을 출범시킨다.민간이 주도하는 봉화축제관광재단은 앞으로 관광 콘텐츠 개발, 마케팅 활동, 축제운영 등 새로운 재미를 추구하는 관광객들의 다양한 수요를 충족시키고 지역 축제 자생력을 강화해 지역 축제의 품격을 한층 더 높인다.지역의 대표축제인 봉화은어축제는 올해 한국축제콘텐츠협회가 주관하는 ‘2020 대한민국축제콘텐츠대상’ 축제관광 부문 대상에 선정돼 국·도비 1억2천만원의 인센티브를 받기도 했다.분천 산타마을과 청량산도립공원,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등 봉화군의 주요 관광거점을 잇는 권역별 관광 벨트화와 특정 타깃을 정한 관광 상품 개발, 누정휴 문화누리 조성 사업 등 다양한 관광 인프라 확충을 위해서도 사업 추진에 속도를 낸다.□지역경제 활성화 선도시책 ‘봉화퍼스트’지난해 봉화군은 전국적인 경기 침체와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지방소멸 위기 속에서도 ‘지역경제 살리기’로 대변되는 봉화퍼스트 정책을 꾸준히 추진해 지역경기 회복을 위한 돌파구를 마련했다. 봉화퍼스트는 지역 내 자본의 외부유출을 최소화하고 지역경제를 선순환 시켜 군민들의 소득 증대를 견인하는 봉화군만의 차별화된 정책으로 많은 시·군에서 벤치마킹을 하는 등 지역 경제 활성화의 선도시책으로 각광받고 있다.시장애(愛) 불금축제는 봉화퍼스트 정책의 가장 성공적이자 대표적인 사례다. 한산했던 전통시장에 1만 5천여명의 방문객들이 다녀가며 지역상인들의 매출 증대에 큰 도움을 줬다. 올해 불금축제는 5월 개최할 예정이다. 축제에 대한 상인들의 자발적 역할 증대와 전통시장 아케이드 교체, 경관조명 추가 설치를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의 마중물 역할을 톡톡히 할 것으로 기대된다.봉화 최초의 지역화폐인 봉화사랑상품권 발행 또한 봉화퍼스트 정책의 일환이다. 지난해 총 51억원을 발행해 조기 매진되는 성과를 거둔 만큼 올해는 지난해보다 30억원 늘어난 80억원을 발행하고, 5만원권을 추가 발행하는 등 침체된 지역 상권에 새로운활력을 불어넣을 계획이다.□미래 에너지 전환도시로 도약전 세계는 과도한 화석연료 사용으로 심각한 기후변화를 겪고 있다. 봉화군은 이러한 기후 위기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이를 통해 주민소득을 높일 수 있는 주민참여형 신재생에너지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기존 에너지사업자 주도의 사업에서 탈피해 국가 정책과 주민소득을 직접 연계해 새로운 농가소득 창출과 지역 경쟁력을 제고한다는 복안이다.현재 ‘분양형, 협동조합형, 영농복합형, 계획입지형’ 등 4개 사업들은 각종 용역, 행정절차 등을 거치며 성공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올해부터는 풍력, 수소, 연료전지, 열병합 등의 다양한 신재생에너지 사업들도 추진할 계획이다.협동조합형 녹색에너지 사업은 다수의 지역주민들이 자본을 모으고, 신재생에너지 사업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발전이익을 공유하는 사업모델로서 대규모 자본이 없는 주민들도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사업이다. 지난해까지 관련 조례개정 및 사업대상지 조사를 완료했으며, 올해 상반기 협동조합 설립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추진된다.이 밖에도 신재생에너지 보급확산을 위한 에너지 기본조례, 에너지 기금운용 조례 제정을 비롯해 경북 최초의 에너지 센터 설립을 추진할 방침이다.봉화군의 이러한 노력은 지난해 ‘에너지전환포럼 출범 1주년 기념식’에서 에너지 전환에 선도적 역할을 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방자치부분 에너지전환상’을 수상했다.앞으로 봉화군이 추진하는 모든 신재생 에너지 사업들은 주민들이 직접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주민주도형 사업으로 추진 될 예정이다. 이를 통해 봉화지역의 새로운 수익창출 모델로 자리 매김할 전망이다. /박종화기자 pjh4500@kbmaeil.com

2020-02-20

“이야기 속에서 자유 느껴 서사의 힘 무엇보다 중요”

문학평론가, 출판사 휴먼&북스 대표, 교수, 한국 문단 최고 낚시꾼, 국악 연구자, 인터넷신문 문화 에디터…. 작가 하응백(59)은 활동 영역이 누구보다 넓은 사람이다.기자가 20년 가까이 지켜본 하응백은 ‘할 말 외에는 침묵을 지키는 과묵한 경상도 사내’였다. 그랬던 그가 지난해 말 ‘남중(南中)’이란 제목의 책을 써 ‘소설가’라는 또 다른 이름표 하나를 더 얻었다. 모두가 말하고 싶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발언의 통로를 찾지 못하거나 문장으로 표현할 수 없어 세상에 내놓기를 포기했던 ‘내 자신의 이야기’를 3부작 연작소설로 만들어낸 것이다.평생을 자유로운 ‘바람’처럼 살아온 아버지, 한국 현대사의 쓰라린 비극을 온몸으로 앓아온 어머니,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삶까지를 숨김없이 담담하게 써내려간 하응백.지난 주말 하응백에게 만남을 청했다. ‘시간을 뺏기고 손해를 보더라도 점잖은 표정을 잃지 않는 사람’인 그가 부탁을 거절할 리 없었다. 아래는 그날 오고간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최근 연작 소설 ‘남중’을 출간해 문단 안팎의 주목을 받은 작가 하응백.-대구에서 유소년기를 보냈다.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다면.△대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까지 살았다. 그 후 서울에서 40년을 살았지만 내 정체성은 대구 사람이라는 거다. 불볕더위에 서울 사람들이 난리를 치면 대구 사람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면서, ‘이까짓 더위야 대프리카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라고 생각한다. 대구에서의 추억은 차근차근 육화돼 앞으로 작품으로 나올 것 같다. 소설 ‘남중’의 주 무대도 대구 서문시장, 대명동, 봉덕동, 달성동이다.-대건고등학교 문예반이었다. 문학의 길로 들어선 이유가 있는지.△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다. 고등학교 때 선배들이 서클 가입을 권유했을 때 내가 갈 곳은 문예반밖에 없었다. 문학, 특히 소설은 개인사를 객관화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나의 가족사적인 핸디캡은 소설에서는 썩 훌륭한 소재가 된다. 그런 것을 이론적이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다. 소설과 같은 이야기 속에서 자유를 느꼈다. 내가 갈 곳은 문학밖에 없었다.-대구에서 보낸 문학소년 시절은 어땠나.△고등학교 국어 교사가 도광의 시인이다. 수업 때 문학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보들레르, 말라르메, 랭보와 같은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이야기를 주로 했다. 서정주의 시를 읊어주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가 좋았다. 손창섭과 김승옥의 소설에 매료되기도 했다.-1980년대 경희대 국문과를 다녔다. 쟁쟁한 선후배와 동기들이 있었을 텐데, 기억에 남는 동창은.△박덕규, 류시화, 김형경, 하재봉, 이문재, 이혜경 등 좋은 선배들이 많았다. 동기 중에선 시인 이산하와 친했다. 작고한 포항 출신의 박남철 선배도 기억에 남는다. 당시는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무언가 하고 싶은 열정으로 꿈틀대고 있었지만,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그런 막막함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선지 술을 많이 마셨다. 대학원 진학 후 만난 조태일 시인도 기억나는 분이다.-대구·경북 사람이 가지는 특징은 뭐라고 생각하는지.△조금은 어리석다는 거다. 어리석어서 손해를 봐도 친구라는 이유로 그냥 넘어간다. 그런 어리석음이 좋다. 그게 대구·경북 사람만의 특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친구들이 그렇다. 또 하나는 체면을 중시하고 점잖은 편이다. 서울처럼 전통사회가 해체돼 재편되었다기보다는 전통사회의 뿌리 위에 서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1991년 등단해 문학평론가가 됐다. 평론가의 삶은 어떤 건가.△문학평론가의 좋은 점은 직업적으로 책을 읽고 평을 쓴다는 거다. 그러면서 많은 시인과 작가들의 내면을 만날 수 있다. 결국 삶이란 타자와의 어울림 속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것이데, 그 사람의 속내를 들여다보면서 인간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문학평론가는 멋진 직업이다. 시인 황동규, 소설가 김주영, 김원일, 성석제, 김연수 등을 만났고 우정을 나누며 살고 있는 것도 행운이다.-18년째 출판사를 운영 중이다. 책은 무엇이고, 사람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출판사를 차린 이유는 교수를 그만 두고 생계를 꾸리기 위해 할 수 있을만한 직업이 출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책이 인간을 만들고 인간은 책을 만든다’는 구호를 믿지 않는다. 책이 정보를 전달하고, 정서적 위안을 주고, 사고의 깊이를 더하는 기능을 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책이 전지전능한 건 아니다. 안 읽어도 되는 책이 훨씬 많다. 다만 좋은 책은 효율적이고 압축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생각하게 해서, 어떤 식으로든 삶에 도움을 줄 수는 있다.-최근 ‘남중’을 내고 ‘소설가’라는 새로운 명찰을 달았다.△고교 때부터 쓰려고 했던 소설이다. 게으름과 삶의 분주함으로 계속 늦추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더 늦춰선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남중’은 내용도 그렇지만 형식을 많이 고민한 작품이다. 요즘과 같이 영상과 이미지의 전달이 쾌속으로 이뤄지는 시대에 맞는 소설 양식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남중’을 쓰며 서사의 힘이 중요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묘사를 없애고 스토리만으로 뼈대를 세운 소설이되, 독자들에게 스피디하게 읽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선후배 작가들의 평가는.△발문을 쓴 성석제는 좋다고 했고, 인터뷰를 한 작가 조용호가 감동적으로 읽었다고 했다. 몇몇 선배 작가들에겐 칭찬을 들었다. 소설가 전상국은 “묘사가 없으면서도 잘 읽히는 소설의 전범”이라 평했고, 김주영 선생은 “단숨에 읽었어, 좀 쓰네”라는 말을 전해왔다.-독자들은 ‘남중’을 어떻게 읽었다고 하던가.△‘일단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손에서 놓지 못한다’는 평이 많았고, 그게 가장 기분 좋은 반응이었다. 소설이 영상매체와 경쟁해 살아남으려면 독자들을 단숨에 붙잡아야 한다. 지금은 볼 게 너무 많은 시대다. 영화 ‘기생충’도 봐야 하고 유튜브도 봐야 하고, 텔레비전도 봐야 한다. SNS도 해야 한다. 소설이 어떻게 그것들과 경쟁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일단 잡으면 소설에서 빠져 나가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20~30대 젊은층에게 주목받지 못한 건 아쉽다.소설 ‘남중’엔 저자의 내밀한 가족사가 가감 없이 담겼다.-앞으로도 대구·경북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쓸 계획이 있는지.△내 작품의 상당 부분은 그곳을 배경으로 할 수밖에 없다. 잘 아는 곳이고, 가장 편한 곳이기 때문이다. ‘뻥’을 쳐도 잘 아는 곳에서 치는 게 좋지 않겠는가.-자타공인 ‘문단 낚시광’이다. 낚시엔 어떤 매력이 있나.△낚시는 치열하다. 물고기의 죽음이 나의 즐거움이 되는 이율배반적인 게 낚시다. 죽음에 희열을 느낀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열심히 몰두한다는 거다. 낚시하는 동안엔 사색하고 구상하는 뇌를 쉬게 한다. 내 경우 주로 선상 낚시를 하는데, 볼락이나 열기 낚시의 경우 소변도 참아야 할 정도로 바쁘다. 그때는 이성적 사고를 하는 나의 한쪽 뇌가 휴식하는 시간이다.-경북 동해안의 ‘늦겨울 낚시 포인트’ 한 곳을 소개해준다면.△포항 신항만이나 양포 쪽으로 나가면, 열기나 볼락을 많이 잡을 수 있다. 만약 내가 포항에 산다면 이 시기엔 아무 일도 못할 거다. 낚시해야 하니까. 바다가 곁에 있으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다.-올해 계획은.△국악에 관한 책을 한 권 낸다. 집필을 거의 마쳤다. 제목은 ‘인문학으로 읽는 국악 이야기’가 될 것 같다. 국악을 모르는 사람도 쉽게 국악을 이해할 수 있는 책이 될 것이다. 덤으로 인문학 공부도 된다. 경북 동해, 즉 울진·영덕·포항·경주를 배경으로 하는 한문학사도 정리 중이다. 영덕 괴시리에서 출생한 이색(李穡)의 작품을 위시해 많은 문학 작품들, 특히 한시가 경북 동해안에서 탄생했다. 물론 이따금 낚시도 다니며 동해의 물고기와 만날 예정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2-19

비에 젖은 시련의 날도 추억… 오랜 세월 로시와 함께하고 싶다

◇짐 줄이기, 안전하고 편안한 여행이 기본장거리 오토바이 여행을 안전하고 편하게 하려면 자신만의 짐싸기 법칙이 필요하다. 짐을 실을 공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경박단소하고 효율 높은 용품들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런 물건들은 대부분 비싸기 마련이라 어느 선에서 타협해야만 한다. 여유가 있다면야 그런 제품들을 구하겠지만 가진 것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면 이전 경험에 따라야 한다. 필요 없는 물건은 줄이고 방한 용품은 빠짐없이 챙겨야 한다.‘젊은 스쿠터 팀’이 치타를 향해 떠날 때, 불편하게 짐을 싣고 다니는 친구도 있어 어떻게든 단단히 싸매라고 했지만 많이 불안해보였다.바람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짐의 부피를 줄이고 펄럭거리지 않도록 여며야 하는데 뭔가 어설퍼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진심을 담은 충고도 반복하면 잔소리로 들리기 마련이다. 저리 달리면 불편하고 빨리 피로해질 텐데 걱정이 되었지만 “조심히 달리라”는 말로 충고를 대신했다.작은 불편이 피로가 되어 쌓이면 오토바이도 라이더도 힘들어진다. 미리 불편함을 없애야 한다. 출발 전도, 어딘가 도착해서도 미리 달릴 준비를 하고 짐 내리는 작업은 간결하게 끝내는 게 좋다. 생각보다 그 시간이 꽤 오래 걸리기도 하고 비가 오거나 날이 저물었을 땐 이런 사소한 것 때문에 지치기도 하니까.결국 경험이 쌓여야 한다. 몸으로 익히는 게 가장 확실하다. 떠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그 사이 많이 배웠다.오후 늦게 비가 그치고 해가 나오자마자 체인에 기름칠을 했다. 적어도 1,000킬로미터를 달리면 체인 점검을 해야 한다. 러시아에 와선 두 번째 체인 기름칠. 빗길을 달렸더니 로시가 엉망진창이다. 약국에서 아이들 감기약 넣어주는 약병에 체인 오일을 넣어왔다. 저렴하고 점도가 높아 장거리 여행용으로 적당한 듯하다. 주기적으로 점검하고 교체해야 할 것이 체인과 엔진 오일이다. 엔진 오일은 5,000킬로미터마다 한 번씩, 오일 필터는 10,000킬로미터마다, 타이어나 기타 소모 부품은 자주 들여다 보고 적절한 시기에 교체해야 한다.◇러시아 한증막 ‘빠냐’에서 추위를 떨치다주머니에 동전이 많이 남아 숙소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30루블, 우리 돈으로 500원 정도. 동전이 주머니에 짤랑거리면 물을 사거나 커피를 주문한다. 끓여 마셔도 되지만 카페에 편안하게 앉아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모습도 보고 일기도 쓰고. 어째 이곳은 손님보다 일하는 사람이 더 많은 듯하다.비가 그치고 이리저리 동네를 어슬렁거렸는데 큰 도로를 제외하곤 적막하다. 아주 작은 동네기도 하고 외지인이 찾지 않는 초원 위 외딴 섬같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간혹 사람들을 만나면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숙소에 씻을 만한 곳이 없어 왜 그런가 궁금했었다. 화장실도 하나뿐이고 샤워를 할 수 없어서 어제는 대충 씻고 잤다. 샤워를 할 수 없느냐 직원에게 물었더니 150루블이라고 해서 의아했다. 하루 방값이 500루블인데 샤워하는데 150루블이라니. 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 하니 아무래도 씻는 편이 나을 것 같아 값을 치르고 샤워실에 들어갔다. 샤워실에 들어서고야 왜 그런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씻는 곳이 아니라 ‘빠냐’라고 하는 러시아 한증막이었다. 충분히 값을 치를 만했다. 엊그제 묵은 숙소도 샤워실이 없었는데 따로 빠냐가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한증막에 벗고 누워 있으니 비를 맞으며 몸에 스민 한기가 봄볕 고드름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30분 제한이 있었지만 나 혼자 뿐이라 한 시간쯤 있었다. 땀을 엄청 흘렸더니 볼이 쑥 들어간 기분. 다음 숙소에 묵을 때 빠냐가 있으면 무조건 이용하기로.아침 일찍 울란우데로 출발하려던 계획이 비 때문에 틀어져버렸다. 일어나자 아침에는 그친다는 비가 오후까지 내린다고 예보가 바뀌어 있었다. 마냥 기다릴 수도 없어 비가 잦아지길 기다리다 출발. 시련의 날이 될 줄은 출발할 때까지도 예상하지 못했다. 네르친스크에서 울란우데까지 약 800킬로미터. 비와 눈과 추위와 더는 경험하지 못할 긴긴 ‘빨래판’ 비포장 도로까지. 온갖 난관을 모두 뚫고 새벽 1시30분 숙소에 도착했다.5월 중순이었지만 치타 근처는 고도가 높아선지 날씨가 변화무쌍했다. 네르친스크의 비가 치타에선 눈이 되어 내린 듯했다. 도로는 녹았지만 주변 풍경은 온통 하얗게 눈이 덮여있었다. 손끝 발끝에 감각이 없었다. 바람이 스미는 곳엔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아무리 껴입어도 냉기를 막을 수 없었다. 헬멧 쉴드에 계속 습기가 차서 앞을 보기 힘들었다.습기를 없애기 위해 쉴드를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쉴드를 올릴 때마다 시베리아의 시린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눈물과 콧물이 흐르는 것은 당연. 이런 눈 덮인 고원에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얼어 죽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다.◇눈 쌓인 고원에서 베테랑 여행자를 만나다시베리아의 꽃샘추위(?)에 치를 떨며 달리고 있는데 크리스 씨를 만났다. 그는 뉴질랜드에서 넘어와 유라시아 횡단 중이었다.장갑을 세 겹이나 꼈는데도 손이 시려 더는 가지 못하고 쉬는 중이었다. 그는 내 앞에서 장갑을 한 겹 한 겹 벗었다. 그의 낡은 스즈키 650DR은 깨진 곳을 임시 보수하느라 테이프가 덕지덕지했다.한 눈에 봐도 베테랑 라이더란 걸 알 수 있었다. 초콜릿과 에너지바를 서로 나눠 먹으며 날씨를 ‘욕했다’.내가 하루에 500킬로미터 이상 이동한다니 놀랍다고 했다. 자신의 650DR은 단기통이라 진동이 심해 오래 탈 수가 없다고. 잠시 로시를 부러워하는 듯 보였다. 사실 실린더 수가 많을수록 엔진 진동이 덜하다. 대신 실린더 수가 적으면 구조가 간단해 정비가 쉬운 장점이 있다. 로시는 2기통. 500cc이상은 2기통이 많다. 650DR은 650cc인데도 단기통인 특별한 모델인데 한때 대륙횡단 여행자들에게 인기 있었다. 지금은 단종된 상태.도로 상태를 장담할 수 없는 장거리 여행을 준비할 때는 어떤 오토바이를 선택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가장 현명한 선택은 온-오프로드를 가리지 않는 멀티 퍼포스(‘듀얼 퍼포스’라고도 한다)형 500cc 내외 배기량의 오토바이다.배기량이 작으면 힘이 없어 힘들고 배기량이 너무 크면 오토바이 자체 무게와 크기가 부담스러워 피곤할 수 있다.자신의 체형에 맞고 연비가 좋고 짐 실을 공간이 최대한 많이 나올 수 있는 오토바이가 최고다. 650DR은 현재 생산되진 않지만 그런 조건에 딱 맞는 오토바이 중 하나였다.생산된 지 오래된 오토바이를 어떻게든 고쳐서 타고 다니는 외국 여행자들 사연을 종종 읽곤 했는데 크리스 씨도 그런 여행자였다. 그의 650DR 적산 거리는 100,000킬로미터가 넘은 상태였다.나의 로시는 유라시아 횡단 여행을 끝내도 70,000킬로미터가 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오랜 세월 자신의 오토바이를 아끼고 수리해가며 여행하는 그들처럼 로시와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치타에서 울란우데 가는 길 중 대부분의 라이더가 선택하는 남쪽 길이 공사 중인 곳이 많고 힘든 코스라는 정보를 얻고 북쪽 길로 달렸는데 힘든 코스긴 매한가지였다. 비포장도로에 들어섰을 때 빨리 판단했어야 했다.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비포장도로는 끝없이 이어졌다. 엄청난 진동 때문에 핸들을 놓칠까봐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욕심 부리지 않고 치타에서 멈췄어야 했다.후회가 밀려왔지만 다시 되돌아가기엔 이미 늦은 상태. 역시나 휴대폰 신호도 잡히지 않았다. /조경국

2020-02-18

현감이 되레임지(任地)의 유배인으로…

1788년(정조 12) 10월 말경이었다. 경상도 장기현감으로 있었던 유환보(柳煥輔)가 떠난 지 수개월 만에 다시 장기현으로 되돌아왔다. 놀랍게도 이번에는 현감이 아니라 유배객의 신분이었다. 관직은 삭탈된 채 ‘탐관오리’란 오명까지 달고 온 그를 보고 사람들은 인과응보가 따로 없다며 수군댔다.사건의 발단은 경상도 장기현에 사는 김성걸(金聖乞)이란 사람의 격쟁(擊錚)에서 비롯됐다. 격쟁이란 조선시대에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한 사람이 궁궐에 난입하거나, 국왕이 거동하는 때를 포착하여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이목을 집중시킨 다음, 자신의 사연을 국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행위를 말한다. 조선 전기에 있었던 신문고 제도의 뒤를 이어 이용된 것으로, 16세기 중종·명종 연간에 관행적으로 정착된 제도였다.허나, 격쟁은 합법적인 호소 수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격쟁 사건이 일어나면 일단 격쟁인은 피의자로 간주되어 형조에서 그를 체포하여 갔다. 형조에서는 의례적으로 그에게 곤장을 친 다음, 억울한 내용을 구두로 진술하라고 했다. 격쟁인의 진술은 그 내용이 어떤 것이든 간에 빠짐없이 3일 이내에 국왕에게 전달되었다. 그래서 격쟁은 신체적 고통이 따름에도 불구하고 문자를 모르는 하층민들에게는 좋은 구제수단으로 애용되었던 것이다.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15세기 후반부터는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도 격쟁이 남발되었기 때문이다. 제도의 정비가 필요했다. 그래서 생긴 게 ‘4건사(四件事)’라는 것이다. 격쟁인에 대한 처벌문제와 함께 격쟁을 할 수 있는 사유를 4가지로 제한했던 것이다. 그 4가지 사유란 형벌이 자신에게 미치는 일, 부자(父子) 관계를 밝히는 일, 적첩(嫡妾)을 가리는 일, 양천(良賤)을 가리는 일 등이었다. 처벌조항도 만들었다. 만약 격쟁의 내용이 무고(誣告)로 판명될 때는 격쟁인에게 곤장 80대를 가했다. 하지만 이런 제한과 처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격쟁은 더욱 빈발하였다.1744년(영조 20)에는 격쟁할 수 있는 ‘4건사(四件事)’의 내용을 바꾸었다. 즉 자손이 조상를 위하여, 아내가 남편을 위하여, 아우가 형을 위하여, 노비가 주인을 위하여 하는 격쟁만 허용되었던 것이다. 함부로 격쟁하는 것에 대한 처벌규정도 한층 강화했다. 상습적으로 격쟁을 일삼는 자는 전가사변(全家徙邊·전 가족과 함께 변방으로 옮겨 살게 한 형벌)에 처하고, 관리를 무고한 자는 장(杖) 80을 치고, 거짓으로 격쟁한 자는 장 100에 처하는 등의 중벌을 규정하였다.하지만 갖은 통제책에도 불구하고 격쟁이 더욱 늘고 남발되는 추세를 보이자, 1771년(영조 47)에는 창덕궁 남쪽에 신문고를 다시 설치하여 격쟁 대신에 민원(民怨)을 수렴하기도 했다.그렇다면 김성걸에게는 어떠한 억울함이 있었을까? 그 내용은 이랬다. 병오년(1786년)에 경희궁(景熙宮)을 보수할 때였다. 장기에 살고 있던 김성걸은 궁궐 보수에 필요한 뇌록(磊綠) 500두(斗)를 납품한 사실이 있었다. 그 값으로 나라로부터 조(租:벼) 2343석(石)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중간에서 관리들이 다 떼어먹고 자신은 그 값의 1/3 도 안되는 745석만을 받았던 것이다. 현청을 찾아가 따졌으나 모두 나 몰라라 했다. 분통이 터진 그는 1788년 9월 4일 장기에서 860리 떨어진 한양까지 물어물어 올라갔다. 며칠 동안 그는 궁궐 앞에서 징을 치며 없어진 뇌록 값을 찾아달라고 호소했던 것이다.딱한 사정을 보고받은 임금 정조는 경상도 관찰사에게 명령을 내려 사실을 조사하라고 했다. 조사한 결과 당시 장기현감 유환보가 중간에서 뇌록 값을 착복했음이 밝혀졌다. 유환보는 1785년(정조 9)년 12월 27일 장기현감으로 부임하여 약 1년 6개월 정도 근무하다가 1787(정조 11)년 5월 23일 흥해군수로 영전하여 간 사람이었다. 그는 흥해군수로 있을 때도 강제로 아전의 곡식을 빼앗고 뻔뻔스레 부끄러워할 줄 몰랐다고 한다.1788년(정조 12) 10월 19일, 임금은 유환보를 잡아다가 전에 그가 현감으로 근무했던 장기현에 물한년((勿限年·햇수의 한정이 없음) 정배를 보내버렸다. 유형은 원래 기한이 없이 종신을 원칙이었지만, 중간에 죄가 감등되거나 단순한 자리 이동으로 유배지가 옮겨지기도 하고 사면으로 형이 풀리기도 하였다. 이런 것을 아예 못하도록 ‘물한년’의 조건을 붙여 그를 유배 보낸 것이다.‘뇌록(磊碌)’은 안료(顔料)의 일종이다. 이 암석은 어린 쑥이 올라올 때의 색보다 조금 더 진한 청록색을 띤다. 장기 ‘뇌록’은 궁궐이나 사찰의 단청(丹靑)에 반드시 필요한 귀중한 자연 광물 착색제였던 것이다. 이게 전국에서 유일하게도 장기에서만 생산되었다. 그래서 장기현감은 뇌록을 조달하는 게 가장 큰 임무였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에는 궁궐 수리에 필요한 뇌록을 빨리 올려 보내지 않았던 장기현감 신률(申嵂)을 파직했다는 기록도 보인다.광물이다 보니 채굴량은 한계가 있었다. 천길 깊은 곳까지 굴을 파고 들어가야 양질의 뇌록이 채취되는 실정이었기에, 매몰사고가 빈발하여 연달아 장정들이 죽어 나갔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깊은 굴을 파내려 가다가 50명이 압사했는데, 지금도 비바람이 칠 때면 귀신이 원통해 우는 소리가 굴 앞에서 난다고 한다. 지역민들은 뇌록을 파내던 이 굴을 ‘매새 구디이(굴)’ 또는 ‘쉰 구디이’라고 부른다. ‘쉰 구디이’라 부르는 것은 채굴하던 인부들이 매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주민들이 가 보았더니 채굴광 부근에 주인 잃은 ‘초배기(대나무 도시락)’ 쉰 개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50명이 죽은 구덩이라는 뜻으로 ‘쉰 구덩이’라고 불러 왔다는 것이다. 그 파낸 굴의 깊이가 하도 깊어 명주실타래 서너 개를 풀어 넣어도 끝이 닿지 않았다고 한다.이렇게 목숨 걸고 캐낸 뇌록 값을 현감이 중간에서 착복했으니 그 억울한 심정이 어떠했겠는가.유환보는 파직되어 장기로 유배를 왔지만, 그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다. 먼저 장기현 이방(吏房) 정덕유(鄭德裕)가 타깃이 되었다. 격쟁을 한 김성걸이 일자무식이었던 게 화근이었다. 김성걸이 매일 관가에 나와 뇌록 값을 못 받았다며 억울함을 호소하자, 내용을 잘 알고 있던 정덕유가 그의 억울한 사정을 대신 글로 적어 줬던 것이다. 형조에서는 정덕유가 어리석은 백성을 종용하여 구관을 모함한 것이라며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버렸다. 당사자인 김성걸도 먼 곳으로 유배를 갔다. 격쟁의 조건으로 정해 놓은 4건사(四件事)에 해당되지 않은 일로 임금을 놀라게 했다는 이유였다.조선 500년 동안 장기현에는 270 명이 넘는 현감들이 부임했다. 그중 선정을 베푼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대부분 관리들은 일부 아전들과 결탁하여 주민들의 삶을 핍박하게 만들었다. 세조 때는 이의돈(李義敦)이란 자가 부임해 왔다. 이 사람은 고을 사람들에게 선정을 베풀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공물로 거두어 둔 건어(乾魚) 50마리와 녹포(鹿脯:말린 사슴고기) 1속(束)을 대신(大臣)의 집에 뇌물로 바친 일이 들통 나 사헌부에 불려가 조사를 받고 탄핵되었다. 선조 때 현감으로 온 정응정(鄭應井)이란 자는 더했다. 인품이 외람된 것은 차치하고, 도임한 이후 재물을 침탈하는 것만 일삼다가 결국 임금에게까지 그 사실이 알려져 파직 당했다. 광해군 때 현감으로 온 신방로(辛邦櫓)란 자도 마찬가지였다. 부임한 후로 백성을 수탈하여 자신을 살찌우는 것만을 일삼아 연해의 잔약한 고을이 날로 형편이 없어지고 있었다. 사헌부에서 이런 사실을 알고 광해군에게 파직을 명하라고 하였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임금은 천천히 결정하겠다며 뒤로 미루었다. 그가 왕실과 어떤 연이 닿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후 백성들의 삶이 어떠했으리란 것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사정이 이렇다보니 암행어사도 여러 차례 다녀갔다. 현종 때는 장기현감 손흠(孫欽)의 비위사실이 암행어사에게 적발되어 추문(推問)을 당했으며, 효종 때는 장기현감 김양국(金樑國)의 범법사실이 적발되어 의금부 나장이 직접 와서 잡아가기도 했다. 숙종때는 암행어사 이언강(李彦綱)이 장기현감 박첨단(朴燂段) 등을 암행감찰하고 그 결과를 임금에게 보고한 문서도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다.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도 왔다 갔다. 그가 이곳의 실상을 파악하여 임금에게 올린 보고문은 당시 피폐했던 지역의 사정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한다. 그는 이곳 고을의 힘이 지극히 가난한 까닭은 한양에서 거의 천리나 되고, 또 능력 있고 세력 있는 자는 본래 현감으로 오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이처럼 탐관오리들이 제멋대로 평민을 토색하는 일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먼 연해고을의 힘없는 백성들은 사는 것이 곧 고난이었다. 비록 억울한 일이 있더라도 한양의 대궐이 높고 멀어서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이런 고을의 실상은 신유박해로 이곳에 유배 온 다산 정약용의 글에도 면면히 묘사되어 있다.‘민의창달(民意暢達)’의 기치를 내세운 정조의 애민(愛民)정책을 적극적으로 내세운 격쟁제도마저도 이곳 민초들에게는 빛 좋은 개살구였다. 후환을 알면서도 이들의 애환을 대변하고 차라리 유배형을 택했던 장기사람 ‘정덕유’ 같은 하급관리가 그들에게는 그 어떤 고관대작들보다 더 우러러 보였을 것이다. /향토사학자 이상준

2020-02-18

전통과 모던의 이분법, 그 긴장을 끝끝내 감내하다

백신애는 영천의 작가이다. 문학평론가 서영인은 “백신애는 영천에서 태어나 영천에 묻혔고, 그녀의 문학 역시 영천에서 태어나고 발견되었으며 더 깊이, 새롭게 읽혔으니 백신애는 과연 영천의 작가이다.”(‘백신애 문학의 안과 밖’, 전망, 2018, 10면)라고 명쾌하게 규정하였다.이러한 백신애는 두 개의 ‘최초’라는 타이틀을 지니고 있다. 그녀는 경북 최초의 여성 교사이자 최초의 여성 신춘문예 당선자인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범인이 흉내낼 수 없는 엄청난 에너지로 앞만 보고 달려가는 일반적인 선구자의 삶은 그녀의 것일 수 없었다. 백신애는 이광수와 같은 고아가 아니라 영천·대구 일대에서 소문난 갑부인 백내유의 외동딸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녀가 나고 자란 곳은 전통적인 가치와 인습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지역이었다. 백신애는 아버지로 대표되는 전통 사회의 각별한 보호와 관심 속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환경을 반영하여 그녀는 신식교육과 더불어 오랜 시간 한문학자인 이모부에게 한문을 배우며 성장하였다. 남녀차별이 극심한 사회의 여성이었기에, 그녀가 겪어야 할 심정 갈등은 더욱 컸을 것이다.백신애가 처한 환경에서는 뛰어난 문학적 재능조차 축복이 될 수 없었다. 박화성, 장덕조, 모윤숙, 최정희, 노천명, 이선희와 자리를 함께 한 ‘여류작가 좌담회’에서 백신애는 거의 침묵을 지키다가 “글을 쓰면 당장에 축출을 하려는 아버지 아래엿고 놀면서도 여가 업는 터이라, 한 가지 무엇이나 쓰려고 하면 밤중 남들이 다- 잠든 후 이불 속에서 전등불을 감초아 원고지만 빛어 놋코 가만히 씁니다.”(‘여성’, 1936.2)라고 고백할 정도였다. 그러나 전통적인 부덕(婦德)에 안주하기 백신애는 너무나 큰 개성이었다. 뛰어난 문학적 재능은 말할 것도 없고, 10대에 단신으로 상경하여 사회주의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시베리아·일본·중국을 드나들 정도로 백신애는 강하고 모던한 여성이었던 것이다.시대를 앞서가는 개인의 재능과 그것을 거부하는 사회적 환경이라는 굴레는 백신애를 문제적 인간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문제적 성격은 그녀가 남긴 두 개의 대조적인 독사진에서도 확인된다. 20세 무렵에 찍은 사진은 전통적인 한복을 입고 곱게 머리를 빗어 넘긴 모습인데 반해 일본 체류 시절 찍은 사진은 화려한 양장을 차려 입고 도발적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이다. 가족/사회, 전통/근대, 윤리/욕망, 공동체/개인, 중앙/지역, 남성/여성이라는 수많은 이분법 속에서 백신애는 자신의 고유한 삶과 문학을 힘겹게 펼쳐 나간다.앞에서 열거한 여러 이분법에서 비롯된 갈등은 백신애 문학의 시작과 마지막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나의 어머니’(‘조선일보’, 1929.1.1.-6)와 생전에 마지막으로 발표된 ‘混冥에서’(‘조광’, 1939.5)는 이러한 갈등을 거의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이 두 작품은 22편(콩트·소년 소설 4편 포함)에 이르는 백신애의 소설 중에서 자전적인 성격을 갖는 예외적인 작품들이다.‘나의 어머니’는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신식 여성인 ‘나’와 전통적인 가치관에 충실한 어머니가 주인공인 작품이다. 딸은 교원으로 근무하다 여자청년회를 조직하였다는 이유로 권고사직을 당하고, 지금은 여러 사회단체에서 활동하거나 책과 씨름을 하며 지낸다. 어머니는 이런 딸을 “언제든지 놀고 있는 것”으로만 여기며 늘 걱정한다.소설은 청년회의 문예부에 관여하는 ‘내’가 연극 준비를 하다가 한밤중에 귀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어머니는 잠도 자지 않고 밤늦게까지 딸을 기다린다. 연극연습을 하다가 왔다는 딸의 말에, 어머니는 “아무리 상것의 소생이라도 계집애가 그런 데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니? 모이는 자식들이란 모두 제 아비 제 어미는 모른다 하고 사회니 지랄이니 하고 쫓아다니는 천하 상놈들만 벅적이는데”라며 나무란다. 이 말을 통해 어머니는 사회운동을 이해하지 못 하며, 특히나 “계집애”가 그런 바깥 활동을 하는 것을 못마땅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면서부터 완고한 옛 도덕과 인습에 폭 쌓인 어머니”인 것이다.이러한 어머니의 모습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확대해 볼 수 있다. 트레머리(신식 여성 헤어스타일)를 한 여인이 사오인에 불과한 이 “완고한 시골”에서, 여자들은 남자들과 연극하는 것을 죽기보다 더 부끄러워하거나 부모의 야단이 두려워서 연극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는다.‘나의 어머니’는 자전적인 작품으로 이 당시 백신애의 신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백신애는 등단하기 이전에도 영천공립보통학교와 경산자인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조선여성동우회, 경성여자청년동맹, 영천청년동맹, 신간회 영천지회, 근우회 영천지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녀는 재능이 뛰어난 여성이었으며, 사회 변혁에 대한 관심이 큰 여성이기도 하였다. 작품 속의 ‘내’가 여자청년회를 조직하였다는 이유로 교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백신애도 서울에 가 사회주의 여성단체에서 활동한 사실이 탄로나 학교에서 권고사직을 당한다. 또한 이 작품에 언급된 오빠의 모습도 실제에 부합한다. 어머니와 ‘나’의 가장 큰 근심은 XX사건으로 ‘나’의 오빠가 감옥에 들어가 있다는 것인데, 실제로 백신애의 오빠인 백기호는 조선공산당 당원으로 1926년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검거되어 1년여간 옥살이를 하였다.보통의 혁명적인 서사라면 ‘나’는 당연히 이 고루한 어머니와 결별하고 역사의 새벽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에 대해 느끼는 경멸과 반감만큼이나 강렬하게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느낀다. 어머니가 “자신의 편함과 혈육(血肉)을 사랑하는 것 밖에 아모것도 모르고 도덕과 인습에 사모친” 인간이라 생각하면서도, 어머니가 오빠와 자기로 인해 받는 고통을 생각하며 가슴 쓰린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반감과 애정은 작품의 마지막에 압축되어 나타난다. ‘나’는 자신처럼 “불행과 저주에 헤매는 가난한 신세”인 장래의 남편이 될 연인이 있으면서도, 어머니가 결혼하기 원하는 김(金)가를 선택하지 못하는 것에 “죄송함”을 느낀다. 그러나 바로 자신은 어머니가 좋아하는 “김가에게도 이 몸을 바치지 않을 것”이고, 내일 밤에도 연극연습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가엽슨 나의 어머니.”라는 탄식으로 끝낸다. ‘나’는 가족과 사회 혹은 개인의 욕망과 전통의 윤리 중에 그 어느 곳에도 완전히 자신을 투신하지 못하는 것이다.이러한 갈등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해결되기는커녕 더욱 심각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백신애가 췌장암으로 경성제대병원에서 사망(1939년 6월 23일)하기 한 달 전에 발표된 ‘혼명에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의 ‘나’는 “가족들의 정성을, 아니 그보다 어느 때든지 그들을 배반하고야 말 인간임을 확실히 자인하면서도, 그들의 사랑을 배반할 수 없으며, 나에게 이 고통을 주는 가족을 미워하여야 될 것이로대 그 반대로 지극히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가족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과 태도를 보여준다. 어머니로 대표되는 가족에 대한 이러한 사랑과 반감은 ‘나’의 결혼과 이혼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나’에게 결혼은 “내 주위의 억센 힘들이 재주끝 던저 올린 돌맹이!”처럼 억지스런 일에 해당하고, 이혼은 하늘로 던져진 돌맹이가 도로 땅 위에 떨어지는 것과 같은 “틀림없는 자연 법칙”에 해당한다. 이혼 이후에도 가족은 “이혼한 여자란 불명예를 회복시키”고자 근신할 것을 명하지만, 일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나’에게는 “산(生)다는 뜻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눈물” 때문에 가족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이 작품에서 ‘나’는 S를 통하여 “옛날의 용기와 정열”을 다시 가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다시 만나기로 한 S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그러한 ‘나’의 의지와 신념의 지속 가능성이 다시 혼탁하고 어두워지며(混冥) 작품은 끝난다.시대를 뛰어넘는 의지와 재능을 지녔기에 늘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갈등하며 살아야 했던 백신애의 삶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자신을 옥죄던 수많은 이분법에 갇혀서도, 그녀는 결코 손쉬운 타협이나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끝끝내 그 두 가지 세계의 긴장과 갈등을 온전히 감내하고자 했던 그 정직함으로 인해 한국문학의 빛깔은 한층 다양해졌다.1906년 경북 영천읍 창구동에서 태어났다. 영천 공립보통학교와 대구사범학교 강습과에서 공부했다. 경산 자인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고, 상경해서는 조선여성동우회와 여자청년동맹 등에서 활동했다. 192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나왔고, 그해 일본으로 건너가 문학과 연극에 몰두한다. ‘복선이’ ‘채색교(彩色橋)’ ‘악부자(顎富者)’ ‘빈곤’ 등의 작품을 썼다.  /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2-17

“신성장 경제울진 구축… 2021 도민체전 손님맞이 총력”

전찬걸 울진군수는 희망찬 2020년을 ‘원전의존형 경제구조 극복 원년의 해’로 정하고 도민체전이 개최되는 2021년을 ‘울진방문의 해’로 선포했다.미래울진의 지속가능한 신경제 성장동력 육성과 더불어 도민체전 손님맞이 준비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이를 위해 미래 신산업 육성, 치유·힐링관광 완성, 스포츠·레저산업 활성화를 새로운 성장동력 산업의 3대 핵심전략으로 수립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6대 역점시책 사업도 추진 한다.-울진군의 역점시책을 소개 해달라.△해양과학·해양바이오·에너지 등 신산업 육성을 통한 ‘새로운 성장 경제울진’ 을 구축하겠다.기존의 전략자산인 경북해양과학연구단지와 연계하는 ‘해양바이오 산업 기술개발 산업화’, ‘해양심층수·염지하수 산업기반 구축’을 통한 의료, 화장품, 식품관련 기업의 적극 유치와 제조, 서비스, 대학교육, 관광서비스를 결합한 ‘해양바이오 메디컬헬스 특화단지 조성’을 위한 기반도 차근차근 준비해 나갈 예정이다.국내 최대의 원자력발전단지의 지역입지 여건을 최대한 활용해 경북 원자력방재타운 건립과 원자력 수출실증단지 조성 유치에 전력을 다하겠다.미래사회 차세대 에너지원인 수소에너지 생산기반 조성을 위해 수소에너지 특화단지 유치, 차세대 원자로 활용 수소에너지 생산기반 조성 선점을 위해 노력하겠다.투자유치 촉진조례를 개정해서는 대외 공격적인 투자마케팅으로, 양질의 기업유치로 농공단지 활성화를 도모하고 중소기업 인턴사원제, 지역혁신 일자리지원 프로젝트, 사회적경제 청년일자리 사업 등 다양한 청년유입 일자리 정책사업을 추진, 청년이 돌아오는 농촌으로 탈바꿈시키겠다.ㅡ온천·숲·해양치유를 결합한 머물고 싶은 힐링울진 건설도 추진한다고 하던데.△2020년은 관광도시 울진을 상징하는 대규모 관광인프라가 완료됨에 따라 힐링관광도시로 새롭게 도약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권역별 특성을 살린 소프트웨어 개발을 동해안 최적의 힐링 관광지로 가꾸어 나갈 것이다.남부권역은 후포 국제거점형 마리나항을 중심으로 백암온천 산림생태공원과 향후 조성될 해양치유 센터와 연계한 역사·문화, 해양·온천치유를 결합한 관광코스로 개발할 예정이다.중부권역은 항공기술 전문학교 유치로 울진공항 활성화 도모와 현종산 풍력단지 경관활용 특화관광지 조성, 오산 해양레포츠센터와 연계한 오산종합리조트 및 울진마린골프장 내 민자 리조트 유치와 동시에 엑스포공원과 연계한 왕피천 케이블카 설치, 염전해변 관광자원화 사업 완공으로 명실공히 울진관광의 허브로 조성할 계획이다.-북구권역 개발계획도 들려달라.△북부권역은 덕구온천 주변에 관광객 놀이체험·휴식공간을 조성하고 금강송에코리움과 연계한 국립해양과학관, 죽변해안 스카이레일 설치에 이어 죽변항 이용고도화 사업이 완료되면 죽변항에 유람선을 유치해 온천, 산림, 바다, 해양과학체험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울진의 새로운 휴양관광지로 발전시켜 나갈 것이다.그리고 스포츠, 레저, 여행을 결합한 스포츠관광을 울진의 신성장 산업 육성, 2021년도 경북도민 체육대회 기반조성을 위한 인프라 구축사업으로 울진마린CC 조성, 흥부생활체육공원 조성, 남부 스포츠센터 조성사업의 조속한 마무리와 후포마리나 요트, 해양레포츠 체험, 바다낚시 등 스포츠·레저투어 프로그램을 개발해 마케팅 집중과 전국단위 스포츠대회 및 전지훈련 유치로 관광서비스업을 활성화해 지역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도록 하겠다.또 주인예술촌 확대 조성으로 전국 유명한 예술작가들을 초빙해 작업할 수 있는 공간 마련과 유영국 화백의 생가를 복원해 문향울진의 긍지를 높이는 한편 울진 북부도서관신축으로 공동육아나눔터, 어린이도서관 등을 갖추고 유교, 향교문화의 전통적 가치와 올바른 인성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울진전통문화 교육회관을 건립 하겠다.-복지분야에 대한 비전은.△군민 누구도 소외됨이 없는 촘촘한 복지로 ‘더불어 잘 사는 복지울진’을 실현하겠다. 주거, 교육, 복지, 의료 등 군민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부분에 투자를 확대해 군민 삶의 질과 행복지수를 높이겠다.저출산 고령화 사회 극복을 위한 첫째아 출산장려금 및 전입아동 축하장려금 지원기준 마련과 양육에 대한 부담을 경감하기 위한 공공산후조리원 설치, 북면·후포 어린이집 신축, 맞춤형 돌봄서비스 통합을 통한 서비스 일원화, 경로당 행복도우미 지원으로 어르신들의 다양한 여가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 울진군립추모원 조성사업의 조기완공으로 군민들의 경제적 부담과 불편도 해소할 방침이다.-부자농어촌 건설을 위한 복안은.△돌아오고 싶고 살고 싶은 ‘풍요로움이 가득한 부자 농어촌’을 건설하겠다. 농산물 시장개방, 농촌의 고령화, 일손부족 등으로 지금 농어촌은 매우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농어업도 고도의 기술집약화 스마트 ICT농수산업으로 전환하겠다. 치열한 경쟁 끝에 전국 3개 시군만 선정된 ‘스마트축산 ICT한우단지 조성 시범사업’을 시작으로 ‘스마트 농업 테스트베드 교육장 조성’, ‘스마트 시설하우스’ 설치 등에서 나아가 수산업도 스마트 양식어업으로 바꾸고 스마트 팜 혁신기술을 활용한 ‘로컬푸드 직매장 구축’과 ‘친환경채소 스마트 팜 단지’를 조성하겠다.또한 농산물 가공교육관을 활용한 신제품 개발 및 농업인 가공창업 교육·지원 확대, 해양레저 관광의 거점 공간조성을 위한 ‘석호항 어촌뉴딜300사업’과 다목적 복합공간인 ‘후포 해양수산복합 센터 건립’ 및 ‘죽변 수산물유통 복합센터 건립’을 추진하겠다.-안전한 고장 만들기도 빼놓을 수 없는데.△사람중심! 안전하고 깨끗한 생활환경 조성으로 ‘행복가득 쾌적울진’을 만들어 가겠다.태풍 ‘미탁’ 침수피해 지역인 울진, 평해, 후포지구 배수펌프 시설 4개소 846억원의 국비예산을 확보했다. 군민의 소중한 재산과 인명이 보호될 수 있도록 시설개선 사업의 조속한 마무리와 농산어촌의 정주여건 개선을 위한 기성면, 북면, 금강송면 농촌중심지 활성화 사업, ‘평해읍 기초생활 거점 육성사업’을 추진하겠다. 전 군민 기본전기요금 지원과 LNG 배관망 설치 지원, LPG 소형 저장탱크 보급, 주택용 태양광·태양열 보급사업 등 에너지 경감 정책도 확대해 나가겠다.또 전기자동차 보급 및 충전 인프라 확충과 미세먼지 저감 조림사업, 숲 가꾸기 사업, 대기질 환경 개선사업 등 미세먼지 없는 청정울진 이미지 제고에도 적극적으로 대처하겠다.-군민과의 소통도 강조되고 있다.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군민과 함께하는 ‘소통울진, 현장행정’을 위해 ‘이동군수실’ 운영을 활성화하겠다. 현장행정 강화와 새로운 환경변화와 행정수요에 적극 대처할 수 있도록 조직개편을 하겠다. 1년 365일 군민 삶의 현장에 직접 뛰어다니는 소통행정을 통해 군민이 주인되는 군민주권시대를 열어 갈 것을 약속한다.울진군 공직자부터 시작한 친절 운동에 전 군민의 참여로 친절울진을 건설해 울진발전의 성장동력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 이 문화혁신 운동에 군민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부탁 드린다./장인설기자 jang3338@kbmaeil.com

2020-02-16

거대한 황제의 동상 앞에서 떠올린 인간 존재의 비루함

울란바토르는 몽골의 수도다. 나라 인구의 1/3이 그 도시에 산다. 20세기 초반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소비에트 연방은 국경을 맞댄 몽골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물론, 경제적 지배까지 면밀하게 계획했다.소련에서 생산된 석탄이 울란바토르로 대량 유입됐고, 몽골은 아직까지 그때 만들어진 난방 시스템으로 겨울을 나고 있다. 1~2월 울란바토르의 기온은 영하 20℃를 밑돈다. 숨을 들이쉬면 코로 들어가는 공기 중 습기가 얼어붙어 콧속이 쩍쩍 달라붙을 정도의 추위다. 직접 느껴보면? 끔찍하고도 재밌다.독한 술 보드카와 달군 돌에 구운 양고기만으로는 달랠 수 없는 차가움.그래서다. 몽골을 여행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석탄 연기 가득한 갑갑한 공간 울란바토르를 빠져나와 초원을 달리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기자 역시 그러했다.도심 한복판에서 겨우 1시간 남짓 차를 타고 막막한 초원 위를 내달렸을까? 함께 한 일행 모두가 입을 모아 외쳤다.“저게 뭐야?”야트막한 산과 기암괴석, 향기로운 들꽃이 아름다운 몽골 테렐지 국립공원(Gorkhi-Terelj National Park)엔 인공적으로 만든 조형물이 거의 없다. 그런데, 그곳에 아파트 20층 높이는 족히 될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동상이 번쩍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칭기즈칸(1162~1227)이었다. 아니 칭기즈칸을 형상화한 조형물이었다.높이 40m, 무게 250t의 어마어마한 크기. 그 앞에선 입을 딱 벌리고 놀라는 것 외에는 별로 할 게 없었다.▲장쾌한 왕의 삶 앞에 바쳐진 거대한 동상칭기즈칸이 황금 채찍을 들고 말에 오른 모습을 재현한 기마상(騎馬像)은 아시아와 유럽을 포함해 지구 위에 존재하는 동상 중 가장 거대하다고 알려져 있다.사실 칭기즈칸은 제 나라에선 ‘신(神)’으로 추앙받는다. 죽은 지 800년이 가깝지만, 그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칭기즈칸의 시대처럼 넓은 영토와 강한 국력을 가져보지 못한 몽골 사람들은 ‘좋았던 그 옛날’을 빛나는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칭기즈’는 위대한, ‘칸’은 황제로 번역되니 그 이름에서부터 존경을 바치고 있는 것이다.몽골인들은 말한다. “칭기즈칸이 없었다면 누가 힘없고 인구도 적은 우리나라를 제대로 기억하겠는가?”그랬다. 13세기에 주위 부족들을 하나로 통합해 거대한 제국의 기틀을 닦은 칭기즈칸은 비교적 합리적인 법률을 제정하고, 고유의 문자까지 만들었다.그의 손자 쿠빌라이칸(1215~1294)은 할아버지가 닦아놓은 길 위를 종횡무진 달려 더 넓은 땅을 몽골의 것으로 만들었다. 지구 면적의 30%에 해당했던 원나라의 영토. 그때까지 어떤 국가도, 어떤 왕도 가져보지 못한 방대한 넓이였다.겨우 수십 마리의 양이나 키우며, 물과 가축의 먹이를 찾아 거친 벌판을 헤매던 오합지졸 같은 사람들을 모으고 통합해 ‘잘난 체 하는’ 유럽 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동양의 황제.물론 당시 원나라 기병대에게 짓밟힌 아시아와 중동, 유럽 일부 국가에선 ‘잔혹한 정복자’로 칭기즈칸을 폄훼하기도 한다.인간에 대한 평가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게 세상사 이치. 칭기즈칸 역시 몽골 사람들에겐 영웅이지만, 정복지의 국민들에겐 ‘무서운 악당’으로 생각될 수도 있는 법이다.몽골인들의 칭기즈칸 사랑은 유별나게 느껴질 정도다. 랜드마크가 될 만한 건물과 광장의 상당수에 ‘칭기즈’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뿐인가. 몽골에서 가장 비싼 보드카의 명칭도 ‘칭기즈칸’이다.그러니 ‘장쾌한 삶’을 살았던 자신들의 왕을 추앙하며 세계에서 가장 큰 조형물을 만든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기자는 무시무시한 크기의 황제 동상 앞에서 ‘작고 사소한’ 절망과 슬픔을 노래한 시인 김수영(1921~1968)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떠올리고 있었다. 몽골 초원의 보잘것없는 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거대함’과 ‘사소함’ 사이에서 살아가는 인간들김수영은 민감한 문학적 촉수를 통해 20세기에 살면서 21세기를 예언한 작가다. 그는 그것이 권력이건 자본이건 ‘거대한’ 힘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하면서,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화풀이나 해대는 ‘사소한’ 소시민의 모습을 아프게 그려냈다. 이미 반세기 전에.‘왕궁의 음탕’이 아닌 가진 것 없는 허름한 ‘설렁탕집 주인’에게, ‘구청 직원’이 아닌 만만한 ‘야경꾼’에게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며 욱대기는 김수영의 작품 속 인물은 2020년을 사는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한 달 내내 말을 타고 휘몰아쳐 달려도 다 돌아볼 수 없는 ‘광대한 영토’를 욕망했던 칭기즈칸, 이와는 반대로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라고 노래하며 ‘사소한 서러움’을 속을 살았던 김수영.두 사람 중 누가 더 행복했을까? 답변을 내놓기가 몹시 어렵다. 본디 인간이란 거대함과 사소함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당신도 그렇지 않은가?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이만 나왔다고 분개하고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에게 욕을 하고옹졸하게 욕을 하고한번 정정당당하게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하여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3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가로놓여있다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부산에 포로수용소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너어스들 옆에서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떨어지는 은행나무 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있지 않고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이발쟁이에게 땅 주인에게는 못하고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정말 얼마큼 적으냐…./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 구창웅

2020-02-13

“시간이 흘러가도 변치않는 보석처럼 ‘나눔의 마음’도 지켜내며 살래요”

보통의 남자들처럼 ‘보석’에 별다른 관심 없이 살아가던 서울 남자와 어릴 때부터 ‘보석’의 매력의 빠져 대학에서도 보석 감정을 전공한 대구 출신의 여자가 만났다. ‘보석과 귀금속의 메카’로 불리는 종로3가에서였다.첫 만남에서 여자는 남자가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성실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남자 역시 상냥한 태도와 배려가 담긴 여자의 말투에 호감을 가졌다. 동시에 여자가 매료된 보석에 대한 관심까지 생겼다.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년여의 연애 끝에 두 사람은 결혼한다. 보석감정사인 아내에게 애정을 느낀 남편은 직업까지 보석세공사로 바꾼다. 포항시 북구에서 보석가게 다이아를 운영하는 육종성(45)-이효미(42) 부부 이야기다.사람이 사람에게 사랑과 신뢰의 감정을 가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런 감정에 이르기까지 매개체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종성 씨와 효미 씨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해 보인다. 둘 사이를 이어준 가장 중요한 매개체 중 하나가 보석이었다는 것.입춘 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날. 따스한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보석처럼 예쁘게 살아가는 부부를 만났다. 그날 오간 흥미롭고 가슴 훈훈한 이야기를 아래 옮긴다.◇보석감정사 아내‘보석감정사’가 대충 무엇을 하는 것인지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겠으나, 보통 사람들에겐 아직 생소하다.광학 계기나 화학 용액을 이용해 보석의 가치와 진위 여부를 평가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보석감정사다.그들은 보석의 가치에 영향을 미치는 결함과 특성을 찾아내고, 보석의 표면과 내부를 검사한다. 더불어 보석 가격까지 측정하는 보석감정사는 산업인력공단에서 시행하는 시험에 합격해야 자격을 취득할 수 있다.20대 초반부터 보석 감정과 판매 일을 해온 이효미 씨는 보석감정사 자격증 외에 미국에서도 통용되는 ‘보석가치평가사’ 라이선스도 가지고 있다. 벌써 경력이 20년이 넘는다.포항을 포함한 경북 지역에서 보석감정사가 상주하는 귀금속 가게는 극히 드물다. 효미 씨가 가진 2개의 자격증은 판매하는 보석에 대한 신뢰성을 높이고, 손님들이 이들 부부의 가게를 믿고 찾는 이유가 되고 있다.인터뷰 중에 가게를 찾은 한 손님은 효미 씨의 웃는 얼굴과 사람 대하는 자세를 보고는 “선량하고 친절하다”고 칭찬했다.효미 씨는 “보석감정사로 일하면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내가 감정하고 판매한 반지나 목걸이를 보면서 환하게 웃으며 만족감을 표시하는 손님을 볼 때”라고 답했다.사실 그렇다. 좋은 보석감정사가 되고 싶다면 남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처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가장 귀중한 순간에 선물로 역할 하는 게 보석이니까. 약혼식과 결혼식, 결혼기념일과 사랑하는 사람의 생일, 입학과 졸업을 축하하며 건네지는 보석들. 그 가격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그것들 모두는 주고받는 이들에게 더없이 소중한 것이다. 보석감정사는 보석은 물론, 그걸 주고받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헤아려 함께 기뻐하며 감동하는 사람이 아닐지.◇보석세공사 남편아내에 대한 믿음이 보석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진 육종성 씨는 결혼 전까지 하던 일을 그만두고 ‘보석세공사’로 직업을 바꿨다.보석세공사는 처음 캐냈을 땐 투박하고 거친 자연 상태의 광물을 화려하게 빛나는 보석으로 바꾸는 일을 한다. 다이아몬드, 루비, 에메랄드, 사파이어, 진주 등 5대 보석은 물론, 금과 은 등의 귀금속이 제대로 된 가치를 보여줄 수 있도록 땀과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게 바로 보석세공이다.그들의 일은 대부분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오랜 시간 숙련된 보석세공사의 세밀함과 정교함은 어떤 기계도 따라올 수 없다고 한다.종성 씨 역시 아내와 비슷한 심성을 지녔다. “내 만족보다는 손님이 만족하는 세공이 이뤄졌을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종성 씨의 말을 듣다보니 보석세공이란 ‘아름다움에 아름다움을 더하는 작업’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가장 다루기 힘든 보석은 뭔가”라는 물음에 “비싸기도 하지만, 지구에서 제일 단단한 광물이기에 쉽게 세공하기 힘든 다이아몬드”라고 답한 종성 씨에게 “그럼 가장 편하게 다룰 수 있는 보석은 뭔가”라고 연이어 물었다.우문에 현답이 돌아왔다.“보석은 대부분 아끼는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다. 아내를 향한 남편의 마음, 부모를 향한 자식의 마음, 서로를 향한 연인들의 애틋한 마음을 생각한다면 어떤 보석도 함부로 다룰 수 없다. 내가 세공하는 모든 보석이 가격과는 무관하게 똑같이 소중하다.”◇하루 종일 함께 있어도 지겹지 않아부부는 포항에 별다른 연고가 없다. 그럼에도 7년 전 포항으로 이주했고 가게를 시작했다. 두 딸도 여기서 자라 초등학교에 다닌다. 포항으로 온 이유를 물었다. 효미 씨의 답변은 심플했다.“오래 전에 포항을 여행했다. 음식도 맛있고 바다 풍경도 너무 예뻤다. 언젠가는 와서 살아보고 싶은 도시였다. 그래서 이사를 결정했다.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고, 살다보니 더 정이 들었다.”종성 씨와 효미 씨의 결혼 생활은 올해로 11년째다. 다른 부부들은 아침에 헤어졌다가(?) 밤에 다시 만나거나, 주말부부의 경우라면 일주일에 한 번 보기도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가게와 집에서 하루 24시간을 함께 지낸다. 농담처럼 물었다.“지겹지 않은가?”서로를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며 웃던 부부가 입을 모아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말이 통해서 좋았다. 우리는 아직도 이런저런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즐겁다. 그러니 지겨울 까닭이 없지 않겠나. 연애할 때나 지금이나 같이 보내는 시간이 행복하다.”보석전문가인 이들 부부에 따르면 ‘보석에도 유행이 있다’고 한다. 초록빛 보석의 대세가 지나가면 붉은 보석이 선호되기도 하고, 크고 묵직한 보석에 열광하는 시기가 있다면 작고 앙증맞은 보석이 인기를 모을 때도 있다.그런데, 종성 씨와 효미 씨가 상대에게 가진 신뢰와 애정은 유행을 타지 않는 보석처럼 한결같아 보였다. 아직 결혼을 하지 못한 기자는 그 모습이 부러웠다.◇두 딸과 함께 하는 봉사 활동 즐거워오랜 시간 보석을 곁에 두고 살아온 부부이니 이런 질문을 던져보는 것도 좋을 듯했다.“인간에게 보석이란 대체 어떤 의미인가?” 고민하지 않고 종성 씨가 답했다.“시간의 흐름에도 변하지 않는 영원성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에 효미 씨가 아래와 같은 말을 덧붙였다.“얼마 전 결혼 20주년을 맞은 남편이 1천만원이 넘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려고 가게에 온 적이 있다. 그 손님은 반지를 통해 아내에게 ‘처음 당신을 만나 사랑하게 됐을 때의 마음이 아직 변하지 않았다’는 뜻을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진실한 마음가짐으로 준비한 선물이라면 10만원짜리 반지도 다이아몬드 반지만큼 값어치가 있다고 믿는다. 보석의 가격보다 더 중요한 건 상대를 향한 애정 아니겠는가.”마지막으로 ‘또 다른 보석’ 이야기를 하나 해볼까 한다.부모에게 자식이란 같은 무게의 금이나 다이아몬드와도 바꿀 수 없는 세상 가장 귀한 보석이다. 종성 씨와 효미 씨 역시 분명 딸들에게 그런 감정을 느낄 터. 그렇기에 아이들에게 재산보다 귀한 ‘나눔의 마음’을 물려주고 싶어 한다.“쉬는 날이면 딸들과 무료 급식소 배식 봉사, 환경 정화 활동 등을 함께 하고, 양로원에 가서 외로운 할아버지·할머니의 말벗이 돼주기도 한다. 아이들도 그 시간을 좋아한다. 애들이 다른 사람을 자신처럼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어른으로 커갔으면 좋겠다.”종성 씨가 꺼내든 가족사진을 본 순간 기사의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다.‘포항에는 보석을 매개체로 만나 보석 같은 마음으로 살고자 노력하는 착한 부부가 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2-12

역사 속 ‘자유시 참변’… 세월마저 멈춘 듯 상처투성이

◇ 자유시 참변의 현장을 찾다비를 피해 하룻밤 보낼 수 있었지만 타이어 공기압 문제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공기가 반쯤 빠진 타이어로 장거리를 속도를 내어 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출발하자마자 주인아저씨가 알려준 에어 펌프가 있을만한 주유소로 갔으나 허탕, 다른 주유소를 찾아나서야 했다. 이른 아침이라 자동차 정비소는 문을 열기 전이었다. 마을 어귀에 있는 마지막 주유소에 가서도 에어 펌프는 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실망하긴 일렀다. 휘발유를 넣는 동안 내게 어디서 왔느냐 질문을 던진 노신사가 직원과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자신을 따라오라 했다. 노신사는 자신의 차 트렁크에서 “꼼뿌레샤!”를 꺼내 깊은 고민을 해결해주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그의 차 트렁크엔 웬만한 공구들이 다 실려 있었다. 하긴 인적 없는 시베리아 들판에서 고장이라도 난다면 직접 해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비사나 견인차를 부르는 것도 쉽지는 않을 테고 부르더라도 비용이 만만치 않으니 간단한 정비는 다들 스스로 하겠지. 공기를 가득 넣은 만큼 자신감도 불어났다. 어제만 해도 달리면서 조마조마했었는데 불안감이 완벽하게 가셨다.시베리아를 지나며 구체적인 경유지를 딱 한 곳 정했었다. 옛날 ‘자유시’라 불렸던 스보보드니. 그곳 역에 있는 급수탑이 경유지였다. 시베리아 횡단 메인도로에서 약간 벗어나 있긴 했지만 자유시만큼은 꼭 가보고 싶었다.1921년 6월 28일 독립군이 소비에트 적군에게 공격받아 학살당하고 도망치거나 포로로 잡혀 독립군 조직 자체가 거의 와해되다시피 했던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 바로 그곳이다.자유시 참변으로 홍범도 장군은 소비에트 적군에게 붙잡혀 카자흐스탄까지 끌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봉오동과 청산리전투의 승리로 기세를 올렸으나 독립군은 항상 변변한 무기조차 구하기 힘든 나라 잃은 군인이었다.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일본의 압박이 심해지자 소비에트의 지원을 받고자 찾았던 자유시에서 오히려 큰 화를 당하고 이후 다시 투쟁을 위한 대오를 갖추기까지 많은 세월을 허비해야 했다. 당시 소비에트 적군은 일본군과 맞서 싸우길 포기하고 그들의 회유에 만주 일대에서 모여든 독립군을 오히려 무장 해제시키려 했다. 아직 왕정 복고를 노리는 백군과의 내전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조선의 독립군을 지원하는 건 무리였다. 오히려 일본의 공격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그뿐 아니라 독립군 내부의 주도권을 놓고 일어난 내분도 자유시 참변의 원인이었다. 스보보드니 역 급수탑 주변은 소비에트 적군의 무장해제 명령을 거부한 독립군이 당시 마지막 항전을 벌인 곳이다.스보보드니 가는 길은 황량했다. 100년 전 독립군들은 나라를 떠나 이역만리에서 일본군과 싸우며 이곳까지 목숨을 걸고 왔을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2천킬로미터 넘게 떨어진 이곳까지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왔지만 동료들과 소비에트 적군의 배신으로 눈물을 삼키며 흩어져야 했다. 스보보드니는 시라고 하기에도 작은 마을이었다.마을을 관통하는 도로도 포장 상태가 엉망이었고 건물들도 세월이 오래 전 멈춰버린 듯 낡아 있었다. 역사의 현장이었던 급수탑도 마찬가지. 육교 위에 서서 급수탑과 역 주위를 살피니 ‘산천은 의구하나 인걸은 간 데 없다’는 옛말이 절로 떠올랐다.이곳에서 독립을 위해 총칼을 들었던 용감한 청년들은 몇이나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스보보드니를 벗어나며 그 시절 독립군이 불렀다는 ‘광야를 달리는 독립군’을 가만히 읊조렸다.광야를 헤치며 달리는 사나이오늘은 북간도 내일은 몽고 땅흐르고 또 흘러 부평초 같은 몸고향을 떠난 지 그 몇 해 이런가석양 하늘 등에 지고 달려가는 독립군아남아 일생 가는 길은 미련이 없어라.◇ 먼저 떠난 젊은 여행자들을 만나다제야강(흑하)을 다시 거슬러 올라 모고차로 향했다. 오후가 되자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뼛속까지 스미는 추위와 비바람 때문에 결국 모고차까지 가길 포기했다. 800킬로미터쯤 달려 숲이 첩첩 겹친 작은 마을 예로페이라는 곳에 멈추고 숙소를 찾아 들어왔다.종일 비가 오다 숙소에 들어올 때쯤 그쳤다. 이놈의 비. 예전 빗길에 미끄러진 아픈 기억이 있어서 빗길 주행은 항상 피곤하고 몸이 빨리 굳는다. 힘을 빼고 타야 오래 달릴 수 있는데 커브길이나 비포장길을 만나면 자연스레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달리다 쉴 때는 커피 한 잔 끓여 마시는 게 즐거움이다. 집에서 아이들 컵라면 두 개를 몰래 가져와 아껴 두었는데 밥 사먹을 곳이 마땅치 않아 하나 꺼냈다. 아우 성진이 선물로 챙겨준 칼로리바는 출출할 때마다 하나씩 꺼내 먹었다. 장거리 오토바이 여행자에겐 정말 탁월한 선물인 듯. 치타에 가까워질수록 초원이 펼쳐졌다. 순식간에 자연 환경이 바뀌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을 좀처럼 볼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랐으니 드넓은 지형을 만나면 괜스레 가슴이 뛴다.예로페이에서 하룻밤 묵고 네르친스크를 향해 달리다 일주일 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먼저 도착해 출발한 팀을 만났다. 20대 청년 다섯 명이서 스쿠터를 타고 포르투갈을 향해 달리는 중이었다. 반갑게 인사하고 함께 숙소를 잡고 밥을 얻어먹고 대신 맥주를 샀다. 젊은 시절 친구들과 함께 이렇게 멀리 여행할 수 있다는 건 두고두고 멋진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예로페이에 오기까지 꽤나 고생한 모양이었다. 배기량이 큰 오토바이로도 쉽지 않은데 작은 스쿠터로 달리며 두고두고 기억할만한 경험을 쌓았다. 중고로 구해온 친구들의 스쿠터는 언뜻 보아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 젊은 ‘스쿠터 팀’은 얼마 남지 않은 대도시인 치타에서 정비하고 몽골로 넘어 갔다가 유럽으로 가는 것이 목표였다.예보대로 다음 날도 비가 내렸다. 냉기가 가득한 봄비. 해가 지면 급격히 기온이 떨어졌다. 오는 길에 군데군데 녹지 않은 눈도 봤다. 더는 비를 맞으며 달릴 마음이 없었다. 이미 많은 비를 맞으며 왔고 떠나온 지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피로했다. 4일 만에 3천킬로미터 가까운 거리를 달렸으니. 일주일 전에 출발한 친구들을 따라잡았다는 건 그만큼 무리했다는 증거였다. 비가 그칠 때까지 며칠이든 쉬기로 마음을 굳혔다. ‘스쿠터 팀’은 다음 여정을 위해 치타로 출발했다. 마음 편히 쉰다고 생각하니 여유가 생겼다. 모든 짐을 풀어놓고 다시 정리했다. 가져왔을 거라 생각했던 예비 안경을 놓고 온 것과 또 몇 가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이 생각났다. 읽고 참고할 모든 자료들을 고장난 휴대폰에 넣어왔으니 그냥 그때그때 얻은 정보들로 일정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많은 정보가 오히려 결정을 머뭇거리게 만들 수도 있으니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이틀 전에 묵었던 곳처럼 네르친스크의 숙소도 건물만 컸지 휑했다. 원래 주유소까지 운영했던 곳이었는데 주유기는 버려진 채로 있다. 카페 영업으로 겨우 버티는 느낌이다. 대부분 횡단도로의 숙박업소는 카페를 겸하고 있다. 주로 트럭 운전자들이 이용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진 9천킬로미터가 넘으니 아직 3분의 1도 가지 않은 셈이다.별 문제가 없다면 보름 정도면 러시아를 통과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비가 오거나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길 수도 있으니 단정할 수 없었다. 숙소 벽에 네르친스크의 옛 모습을 담은 복사한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그중 쇠사슬에 묶인 수형자들 사진에 눈길이 오래 멈췄다. 동토의 땅에 철로와 도로를 만들었던 사람들은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확장과 개발은 언제나 폭력과 강제를 동반하는 것 아닐까 생각했다.   /조경국

2020-02-11

정감록(鄭鑑錄)역모사건

1787년(정조 11년)년 5월 초순 어느 날이었다. 50대 후반의 여인이 장기로 유배를 와 관비가 되었다. 그 여인의 이름은 계우(溪佑)라 했다. 바로 정감록(鄭鑑錄) 역모사건의 연루자로 몰려 효시(梟示)를 당한 유한경(劉漢敬)의 친어머니였다.‘정감록’은 조선시대 이래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온 예언서이다. 그 종류도 수십 가지에 이르지만 정작 저자의 이름과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책은 여러 비기(祕記)를 모은 것으로, 참위설(讖緯說) ·풍수지리설 ·도교사상 등이 혼합되어 나타난다. 그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조선의 조상이라는 이심(李沁)과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鄭氏)의 조상이라는 정감(鄭鑑)이 금강산에서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엮어져 있다. 즉 조선 이후의 흥망대세를 예언하여 이씨의 한양 도읍 몇 백 년 다음에는 정씨의 계룡산 도읍 몇 백 년이 이어지고, 다음은 조씨(趙氏)의 가야산 도읍 몇 백 년, 또 그 다음은 범씨(范氏)의 완산 도읍 몇 백 년과 왕씨(王氏)의 재차 송악(개성) 도읍 등을 논하고, 그 중간에 언제 무슨 재난과 화변이 있어 세태와 민심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차례로 예언하고 있는 책이다.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는 이 두 사람의 문답 외에 도선(道詵) ·무학(無學) ·토정(土亭) ·격암(格庵) 등의 예언집도 있다. 이 책은 그야말로 국왕의 심기를 극도로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읽어서도 소지해서도 안 되는 금서였다. 그러나 그런 금압((禁壓))에도 불구하고 필사본의 형태로 전국 각지에 널리 퍼지면서 조선 말기에 각종 반란과 동학 등 신흥종교의 등장을 야기하기도 했다.정조 9년(1785) 3월, 경상도 하동 지리산일대에서 정감록을 사상적 틀로 새 왕조를 꿈꾸는 역모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문양해 역모사건’ 또는 ‘홍복영의 옥사사건’이라고 한다. 그 배경에는 정조를 최측근에서 보필하다 실각한 홍국영(洪國榮)의 세력들이 있었다.홍국영 일파들이 정조에게 반감을 가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1777년 정조는 자신의 호위를 강화하기 위해 숙위소를 설치하고 홍국영을 대장으로 임명하였으나, 그의 권세가 너무 커지자 1779년 그를 조정에서 물러나게 하고 숙위소도 혁파해버렸다. 그러자 그 잔여세력들의 역모 시도가 끊어지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이번에는 홍국영의 사촌동생인 홍복영(洪福榮) 일파가 또다시 새 정치판을 원하며 역모를 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홍복영은 측근인 이율(李瑮), 양형(梁衡) 등과 의논해서 문양해 등 이른바 산속에서 술법(術法)을 행하면서 민심을 모으고 있던 도인(道人) 세력들을 끌어 들이고, 이들을 이용해 유언비어로 민심을 동요시켜 새 왕조를 건립하려 했던 것이다.그 본부는 하동 지리산이었다. 지리산은 삼국 시대부터 신성한 곳으로 여겨 신라의 국가제사인 ‘중사(中祀)’를 지내던 곳이었다. 고려 시대 이인로(李仁老)는 파한집에서 “지리산 안에 청학동이 있으니 길이 매우 좁아서 사람이 겨우 통행할 만하고 엎드려 수 리(里)를 가면 곧 넓은 곳이 나타난다. 사방이 모두 옥토라 곡식을 뿌려 가꾸기에 알맞다. 청학이 그곳에 서식하는 까닭에 청학동이라 부른다. 아마도 옛날 세상에서 숨은 사람이 살았던 곳으로 무너진 담장이 아직도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다”라고 하였으나 청학동을 끝내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 이후 사람들은 도참설의 이상향인 청학동이 하동 지리산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다. 정감록과 같은 비기가 나돌고, 숙종 대 이후 성행하기 시작하는 미륵세상의 갈망에서 본다면, 이런 지리산 청학동은 더 없는 사회변혁 세력의 의지처가 되기에 좋았다.정작 그 청학동의 위치에 대해서는 어떤 이는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에 있는 현재의 청학동이 그곳이라고 했고, 김일손은 쌍계사 북동쪽 계곡에 있는 불일폭포 부근이라고 했다. 유운룡은 그게 아니고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에 있는 세석평전이 그곳이라고 했는가 하면, 하동 악양면 등촌리에 있는 청학이골이 바로 청학동이라 하는 사람도 있다. 김종직은 피아골이 바로 그곳이라고 했던 것을 보면 지리산 곳곳이 청학동인 셈이다.홍복영의 사주를 받은 지사(地師·풍수설에 따라 집터나 묏자리를 잡아 주는 사람) 양형(梁衡)은 지리산 일대의 도사들을 다스릴만한 인물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 적임자가 친척 조카인 문양해였다. 문양해는 충청도 공주 출신으로 평민이었다. 나이 서른이 되었을 때 그는 상당한 도를 닦아 도인(道人)으로 통했다. 1783년 양형은 홍복영으로부터 자금을 받아와 하동의 지리산 쌍계사 골짜기 깊은 곳에 백여 칸의 집부터 지었다. 그 집의 당호를 ‘하천산당(荷川山堂)’이라고 붙이고 이곳에 문양해를 불러와 머무르게 했다.문양해는 이곳을 근거지로 하고 각지를 전전하며 동조자를 모았다. 그의 아버지 문광겸도 이곳으로 와서 지하본부를 총괄했고, 3촌 문광덕도 주거지를 하동으로 옮겨 약포(藥鋪)를 경영했다. 이들은 주로 평안도와 함경도 일대에서 활동하는 주형채·오도하 등과 연계를 맺으면서 한양과 지방 각지에서도 동참할 자를 모았다.이에 동참한 사람들은 승려 부류인 유한경·이태수·김명복 및 거사(居士) 출신인 조거사(趙居士) 등이었다. 이들은 ‘지리산 선원(仙苑)의 이인(異人)들’로부터 들은 내용이라며 유언비어를 만들어 퍼뜨리는 역할을 했다. ‘지리산 이인들’은 지리산의 선원(仙苑)인 하천산당에 은거하면서 선술(仙術)과 술법으로 정감록을 해석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지리산 선원의 이인(異人·재주가 신통하고 비범한 사람)은 향악(香嶽)으로 불린 김호(金灝), 징담(澄潭)으로 불린 고경명(高輕明), 노선생(老先生)으로 불린 이현성(李玄晟), 일양자(一陽子)로 불린 모문룡(茅文龍) 등이었다. 문양해는 이 이인들이 ‘정감록’ 같은 예언서에 적힌 내용을 해석해서 주면 이를 중간매개자를 통해 전국에 유포하는 역할을 했다.중인 출신의 양형은 ‘정감록’ 지하조직의 서울지부 책임자였다. 그는 서울의 조직원들에게 향악 선생과 노선생의 말을 전했다. 그 말들은 문양해로부터 전해들은 장차 나라가 어지럽게 된다는 예언들이었다. 더하여 홍복영은 구체적으로 ‘장차 나라가 셋으로 쪼개질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른바 ‘동국삼분지설(東國三分之說)’이다. 조선이 삼국으로 분열될 징조는 산천(山川)과 천문(天文)과 지리(地理)에 나타나 있었단다. 나라를 셋으로 나눠 가질 영웅들은 강원도 통천의 유(劉)씨, 전라도 영암의 김(金)씨 그리고 정(鄭)씨라 했다. 이중 정씨는 남해의 어느 섬에 숨어 있는데, 때가 되면 전국을 통일하여 나라를 세울 거라고 했다. 정씨가 출현할 시기는 정조 9년(을사년) 3월이 거병시기로 예정돼 있다고 했다. 이는 역성혁명, 즉 이씨 왕조의 멸망과 새로운 정씨왕조의 출현을 예고한 것이었다. 문양해는 도당을 불러 모아서 그 날짜를 정하고, 거사할 계획까지 세웠다.그러나 이 사건은 거사계획 단계에서 발각되어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문양해 등은 1785년 2월 29일 전 현감 김이용(金履容)의 고변으로 말미암아 혁명적인 이상국가 건설에 실패하였다. 하늘의 뜻과 산천의 기운으로 무능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겠다는 이들의 바람은 결국 사람에 의해 주저앉고 말았던 것이다.이 사건으로 1785년(정조9) 3월 29일 주모자 문양해는 참형에 처해졌다. 응좌인(應坐人)들도 덩달아 처벌되었는데, 어미 아기(阿只)는 황해도 풍천부(豐川府) 초도(椒島)에 계집종이 되었고, 아우 문금득(文錦得)은 함경도 부령부(富寧府)에 종이 되었다. 누이 문복혜(文福惠)는 평안도 운산군(雲山郡)의 계집종이 되었고, 누이 문숙혜(文淑惠)는 양덕현(陽德縣)의 계집종이 되었다. 문인방(文仁邦)·이율(李瑮)은 효시되었다. 문광겸(文光謙)은 지레 겁을 먹고 자살하였고, 주형로(朱炯魯)와 오도하(吳道夏)는 사형을 감하여 귀양 보냈다. 양형(梁衡)은 형을 집행하기도 전에 죽어버렸다. 하동에 있던 홍복영도 사형에 처해졌다.사건의 여파는 이듬해까지 계속되었다. 1786년 2월 11일(정조 10) 유한경·이태수·김명복 및 조거사(趙居士)가 삼수(三水) 인차동(仁遮洞) 이문목(李文穆)의 집에 모여 흉서를 작성하여 퍼뜨리다가 이태수와 유한경이 잡혔다. 국문결과 이들은 문양해 사건의 공범이란 사실이 밝혀져 모두 역모죄로 처형되었다. 연좌된 사람은 그 이듬해인 1787년(정조 11) 5월 3일에야 처벌이 이루어졌다. 유한경의 아버지 유계청(劉溪淸)은 연좌되어 교형에 처해졌고, 그의 어머니 계우(溪佑)는 경상도 장기현으로 와서 노비가 되었던 것이다.유한경은 평안도 안주목에서 태어났고, 이태수는 전라도 순천부 고돌산(古突山)에서 태어났다. 이들이 역모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나라에서는 그들의 고향 고을에도 연대책임을 물어 안주목(安州牧)을 강등하여 안북현(安北縣)으로 삼고, 순천부(順天府)를 강등하여 순천현(順天縣)으로 삼았다.‘정감록’은 비록 허무맹랑한 도참설·풍수설에서 비롯된 예언이라 하지만, 당시 오랜 왕정과 당파싸움에 시달리며 조정에 대해 실망을 느끼고 있던 민중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실제로 광해군·인조 이후의 모든 혁명운동에는 거의 빠짐없이 정감록의 예언이 거론되기도 하였다. 연산군 이래의 국정의 문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당쟁의 틈바구니에서 도탄에 허덕이던 백성들에게 ‘이씨가 망한 다음에는 정씨가 있고, 그 다음에는 조씨·범씨가 일어나 한 민족을 구원한다’는 게 그나마 한 가닥 희망이었던 것이다.정조 9년에 일어났던 이 홍복영·문양해 역모사건은 정감록을 이용하여 체제 변혁을 시도했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20-02-11

죽음을 마주한 절대의 순간 유언처럼 피어난 詩 ‘광야’

지난번 연재에서 필자는 육사의 시 중에서 고향을 연상시키는 ‘청포도(靑葡萄)’(문장, 1939.8), ‘자야곡(子夜曲)’(문장, 1941.4), ‘광야(曠野)’(자유신문, 1945.12.17)를 ‘육사의 고향 3부작’으로 규정하였다. 이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자야곡’은 ‘청포도’와 거의 반대되는 이미지와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청포도가 흰색과 푸른색의 청신한 대비를 통하여 아름다운 고향과 자연의 법칙처럼 반드시 오고야 말 광복의 희망을 감미롭게 노래했다면, ‘자야곡’에서는 더 이상 그러한 희망의 밝은 분위기는 찾아보기 어렵다.제목부터 생명의 푸른빛이 가득한 ‘청포도’에서 새까만 어둠으로 가득한 ‘자야곡’으로 바뀐 것이다. 자야곡은 자야(子夜)의 노래라는 뜻으로서, 자야는 자시(子時, 밤 11시부터 새벽 1시)인 한밤중을 의미한다. 또한 6연 12행으로 되어 있는 ‘자야곡’의 첫 번째 연과 마지막 연은 “수만호 빛이라야 할 내 고향이언만/노랑나비도 오쟎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리라.”이다. 수만호는 빛이 아름답고 광택이 나는 석영의 하나인 수마노(水瑪瑙)를 의미하는데, 본래 고향은 그 아름다운 빛깔로 가득해야 하건만 지금은 그 빛은 바랄 수도 없고 노랑나비도 오지 않는 곳이 되었다. 그 결과 무덤 위에 죽음을 연상시키는 푸른빛을 지닌 이끼만 가득할 뿐이다. 시의 나머지 부분에도 “검은 꿈”, “짜운 소금”, “바람”, “눈보라”, “매운 술” 등의 표현이 고향의 암담하고 괴로운 현실을 더욱 부각시킨다.‘청포도’로부터 ‘자야곡’까지는 고작 2년의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토록 고향의 느낌은 달라진 것일까? 그 원인은 시대적 이유와 작가 개인 차원의 이유 두 가지를 모두 생각할 수 있다. 2년여의 시간 동안 일제의 탄압은 극단을 향해 치닫는다. 1939년 10월에는 국민징용령을 실시하였고 친일문학단체인 조선문인협회가 결성된다. 1940년 2월에는 총독부에서 창씨개명을 실시하였고, 8월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강제 폐간 당한다. 1941년 3월에는 초등학교 규정을 공포하여 조선어 학습을 전면적으로 폐지하였다. 바야흐로 일제는 조선인의 말과 성을 빼앗고, 황국신민화의 단계로까지 우리 민족을 내몰았던 것이다.누구보다 민족의 아픔과 함께 해왔던 이육사 개인에게도 이 시기는 고통과 비극이 점차 강화되는 시기였다. 1941년 이육사는 폐질환으로 경주의 옥룡암 등에서 요양을 해야 했으며, 가을에는 명동 성모병원에 입원한다. 이 때 친동생처럼 가까이 지내던 시인 이병각이 이육사가 입원해 있는 성모병원에서 폐병으로 요절하는 아픔을 겪는다. 또한 이 해에는 유교에서 절대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아버지 이가호가 별세하는 참극을 경험한다. 이러한 절망의 막다른 골목에서 탄생한 시가 바로 ‘자야곡’이라고 할 수 있다.이후로도 이육사가 겪는 고난의 강도는 가파르게 상승한다. 1942년 6월에 어머니가 별세하고, 두 달 후에는 가장 역할을 하던 맏형 이원기마저 사망한 것이다. 의지할 가족은 사라지고 자신의 폐병도 극한에 이른 상황. 범부라면 자신 하나도 추스르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육사는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앞을 향해 당당하게 나아간다. 1943년 4월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조국 광복을 위해 홀연히 베이징으로 떠난 것이다. 역사학자 김희곤에 따르면, 이육사가 베이징에 간 것은 당시 중국지역 독립운동계의 양대 세력인 임시정부와 조선독립동맹의 전선통일에 그가 일조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한다.(‘이육사 평전’, 푸른역사, 2010) 이육사의 중국행은 시인의 개인적 사정이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일종의 순국을 향한 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결국 그는 1944년 1월 16일에 베이징 감옥에서 짧지만 강렬한 삶을 마감한다. 그 죽음을 마주한 절대의 순간 유언처럼 창작한 시가 바로 ‘광야’이다.‘광야’는 ‘꽃’과 더불어 해방 이후 1945년 12월 17일자 ‘자유신문’에 발표된 이육사의 유작이다. 이것은 마치 일제 말기 또 한 명의 저항시인이라 불리던 윤동주의 작품들이 해방 이후에야 유작의 형식으로 우리 민족의 품에 전달된 것과 비슷하다.이 작품은 광야(廣野)와 황야(荒野)의 두 가지 의미 사이에서 고유한 시적 의미를 확보하고 있는 시이다. 제목이기도 한 광야(曠野)는 “아득하게 넓은 벌판”과 “버려두어 거친 들판”이라는, 즉 신성한 땅이라는 광야(廣野)와 황폐한 땅이라는 황야(荒野)의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육사는 다분히 이러한 중의성을 의식하면서 시적 효과를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이 작품은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적 질서에 따라 시상이 전개되는데, 이러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 곳은 ‘광야(廣野)-황야(荒野)-광야(廣野)’로 변하는 것이다.과거에 이 땅은 닭 울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으며 그 강한 산맥조차 넘볼 수 없는 신성한 곳(廣野)이었다. 그러나 현재 이 곳은 눈이 내리는 고난의 땅(荒野)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인은 이 곳을 다시 신성한 곳(廣野)으로 되돌리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고자 한다. 그러한 도전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여전히 남아 있는 매화향기이다. 또한 이 매화향기는 이 시의 광야를 만주 대륙과 연결지어 바라본 그동안의 논의를 교정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매화는 황해도 이남 지역에서 자라기 때문에 만주에서 매화를 발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홀로 아득한 매화향기를 통해 이 시에 등장하는 광야는 시인의 고향인 원촌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매화는 매서운 눈보라와 추위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절의(節義)의 상징으로서, 조선 시대 선비들이 아끼던 꽃이다. 특히 이육사의 선조이기도 한 퇴계 이황은 매화를 각별히 사랑하였다. 퇴계는 매화를 매형(梅兄), 매군(梅君)이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이 했으며, 죽기 직전에 시자를 시켜 매화에게 물을 주도록 했다고 한다. 이육사는 ‘전조기’(조선일보, 1938.3.2.)나 ‘은하수’(농업조선, 1940.10)와 같은 산문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의 집의 화단에도 옥매화, 분홍매화 등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이러한 매화향기를 바탕으로 이육사는 이 땅에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고자 한다. ‘청포도’에서 손님은 자연의 순환질서처럼 반드시 올 존재이지만, 지금은 그러한 기다림을 뛰어넘는 필사의 투쟁을 통해서만 새로운 세상은 도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투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 이 땅은 초인이 오는 광야(廣野)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고난과 시련이 심해질수록 더욱 강렬하게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저항하는 것은 오직 고매한 정신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일이다. 실제로 수많은 문인들은 일제 말기에 제 한 몸을 건사하기 위해 온갖 오욕의 난경을 보여주었다. 이육사는 그 어지러운 난무 속에서도 진정한 의로움과 아름다움의 세계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청포도’, ‘자야곡’, ‘광야’로 이어지는 이육사의 고향 3부작은 우리 민족이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써내려간 양심의 기도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2-10

낮에는 활력이 넘치는, 밤에는 낭만이 흐르는 도시로

2020년 경자년(庚子年) 솟아오른 붉은 태양을 보며 새해 계획을 세웠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월을 지나 2월에 접어들었다. 언제나처럼 시간은 빠르고 해야 할 일은 많은 것이 세상사고 인생사다.올 한 해 역점적으로 추진할 사업에 관한 계획을 수립해 ‘군민 모두가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희망적인 고장’을 만들려는 청송군(군수 윤경희)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찬바람 몰아치는 겨울 추위를 녹이며 청송군이 올해 진척시키고 현실화시킬 주요 사업들을 몇 가지 키워드로 정리해 살펴보고자 한다.농민수당’으로 농가 안정·지역경제 활성화청송군은 지난해 하반기 “지역 농민들에게 농민수당을 지급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가장 먼저 ‘농민수당 심의위원회’를 열어 주민들의 뜨거운 관심을 확인했다. 이 자리엔 군의원, 관련 부서장, 농협 관계자, 지역단체장 등으로 구성된 심의위원들 다수가 참석했다.위원들은 농민수당 도입 취지와 추진 상황 등을 이야기 듣고 향후 이를 구체화시킬 방안 마련에 골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이들에게 위촉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윤경희 군수는 “농업인들이 직면한 어려움을 알기에 고심 끝에 농민수당 도입을 결정했다”고 밝혔다.농민수당은 농업인 경영안전 도모, 농가소득 양극화 해소, 농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지원하자는 뜻에서 마련됐다.지난 가을엔 안덕면과 부남면을 시작으로 읍면별 순회 설명회도 개최했다. 설명회는 공정하고 일관성 있는 ‘농민수당 지원사업’ 추진을 위해 군청 농정기획 담당자가 회의에 참석해 주민들에게 사업추진 경과와 신청 요령 등을 알렸다. 여기서는 농민들의 궁금증에 답하는 질의·응답 시간도 가졌다.또한 “농민수당은 경작 사실, 실거주 사실 등의 확인을 이장으로부터 받은 후 읍면사무소로 신청해야 한다”는 절차가 소개되기도 했다. 순회 설명회가 종료된 후엔 농가 신청을 마무리 한 후, 신청 농가 심의가 있다는 설명도 이어졌다.신설된 청송군 농민수당은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발행되는 ‘청송사랑화폐’로 지급된다. 이는 지역 상인들을 돕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청송군은 전망했다.이러한 과정을 거쳐 군은 지난해 10월 말 농민수당 신청·접수를 받았다. 현수막과 군정 소식지 등을 통한 사전 홍보가 주효했던지 첫날부터 많은 농민들이 몰렸다.“농민수당은 주민 소득안정과 소상공인들의 매출 증대에 기여하고, 지역경기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긍정적 전망이 나왔다.2019년 12월엔 ‘2020년 청송군 농민수당 지급대상자 확정’을 위한 심의위원회가 진행됐다. 1차와 2차에 걸쳐 지급되는 농민수당을 지급받을 이들은 6천여 명에 이를 것이란 게 청송군의 설명이다. 앞으로는 지원 금액이 더 늘어날 예정이다.‘청송사랑화폐’로 부활 계기 마련한 지역 상권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올 1월부터 차별화된 지역 화폐라 할 수 있는 ‘청송사랑화폐’가 제작·유통되고 있다.청송사랑화폐는 타 지자체의 상품권이나 카드와 달리 1회성이 아닌 재유통이 가능한 지역 화폐다. 이는 전국에서 청송이 최초라고 한다. 화폐 형태로 발행되니 가맹점 없이 청송군 전 지역에서 사용이 가능한 것도 장점.청송사랑화폐는 우체국을 제외한 농협은행 군 지부, 지역농협 8곳, 청송·영양축협 2곳, 신협 2곳, 새마을금고 3곳 등 금융기관 18곳에서 판매된다. 지역 화폐이니만치 타 지역으로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시스템도 갖췄다. 청송사랑화폐의 발행과 유통으로 청송군이 기대하는 경제 유발 효과는 약 150억 원.지난해 11월 말 군청은 청송사랑화폐의 사용 방법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 군민들의 이해를 도왔다. 청송 거주자 중엔 고령자가 적지 않다. 이에 애니메이션 상영이라는 차별화된 기법으로 사용법을 알린 것.“청송사랑화폐 도입 취지, 발행 규모, 특징, 구입처, 할인 혜택 등을 해당 애니메이션에 담았다”는 것이 청송군의 부연이다. 사과축제장과 마을회관, 경로당 등에서 상영된 애니메이션은 노인 인구가 많은 청송군이 선택한 ‘신의 한 수’로 평가받았다.비슷한 시기엔 청송사랑화폐 업무대행 협약식도 열렸다. 80억 원 규모로 발행된 청송사랑화폐는 총괄 대행점을 농협은행 청송군지부로 지정했고, 이외에도 청송농업협동조합, 청송영양축산업협동조합, 청송우체국, 청송새마을금고, 청송군산림조합 등과 협약을 맺었다.협약식에서 윤 군수는 “청송사랑화폐를 통한 지역의 소비 촉진으로 침체된 경제가 되살아나길 기대한다”는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지난달 6일엔 청송사랑화폐 출시를 기념하는 현판 제막식이 개최됐다. 이날 군은 발행 축하 행사와 청송사랑화폐 지급 퍼포먼스 등을 진행했다.시중에 유통 중인 청송사랑화폐는 관내에 사업자등록을 하고 있는 사업장에 한해서 환전이 가능하다. “자금 흐름을 보다 원활하게 해줬으면 한다”는 주민들의 뜻을 반영한 것이다.이와 관련 청송군은 “앞으로도 군민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들어 보완점을 찾아갈 것”이라고 말했다.청송사과축제 명품화와 농산물 택배비 지원‘2020~2021년 대한민국 대표 축제’로 선정된 청송사과축제의 명품화도 올해 청송군의 주요한 과제다. 청송은 전국에서 유통되는 사과의 10% 이상이 생산되는 지역이다.지난해 말 문화체육관광부는 청송사과축제를 포함한 전국 35개의 축제를 문화관광축제로 지정해 발표한 바 있다. 이로써 청송은 향후 2년간 국비 지원과 함께 한국관광공사를 통한 국내외 홍보·마케팅 지원 등을 받게 된다.지난 2004년 청송사과의 우수성을 홍보하기 위해 시작된 청송사과축제는 2013년부터 7년 연속 경상북도 최우수축제로 굳건하게 자리매김 했다. 2018년 축제장 이전 등으로 접근의 편리성을 높인 이 축제는 지역 경제에도 적지 않은 도움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대한민국 대표 문화관광 축제 선정에 안주하지 않고 지금까지 지켜온 명성에 걸맞은 명품 축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지속할 것”이라는 게 청송군청의 다짐이다.지난해 봄부터 시행돼 지역민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어낸 ‘농산물 택배지 지원사업’ 역시 올해도 이어진다. 청송사과를 비롯한 농산물의 소비 촉진과 유통 활성화를 위해서다.8억 원의 예산으로 시행된 이 사업은 택배비 지원과 관련된 단일 사업으로는 전국 최대 규모. 청송군에서 생산되는 모든 농산물이 택배비 지원 대상이다. 지난해엔 실제 지출된 택배요금의 50% 범위에서 농가 당 연간 최대 50만원이 지원됐다.이 사업의 조기 정착을 위해 고심한 청송군은 수입 농산물의 증가와 경기 침체로 인한 농산물 소비 부진을 극복해나간다는 복안을 세웠고, 이런 차원에서 2020년에도 중단 없이 농산물 택배비를 지원할 예정이다.청정한 ‘산소카페’같은 고장을 지향하는 청송군. 낮에는 활력이 넘치는 도시, 별과 달이 반짝이는 밤이면 서정적 낭만이 있는 지역으로 발돋움하려는 노력들이 오늘도 진행 중이다.‘희망과 꿈이 있는 농촌’ 702억 투입농업 경영 안정화 지원·미래농업 육성 마케팅·유통구조 개선 등 역점 추진‘희망과 꿈이 있는 농촌’을 지향하는 청송군이 최근 농업 관련 예산 702억 원을 확보하고, 향후 추진될 농정시책 방향을 발표했다.△농업경영 안정화 지원 △경쟁력 있는 농촌수익모델 창출 △지속 가능한 미래농업 육성 △농산물 특화 마케팅과 유통구조 개선을 주요 시책으로 설정한 청송은 농민수당 지급, 농작물재해보험 지원, 농업인안전보험 지원 등을 진행해 주민들 삶의 질을 높일 방침이다. 농촌의 다양한 잠재자원 발굴을 통해 새로운 수익 모델을 창출하고, 6차 산업 활성화를 추진한다는 게 청송군의 설명. 더불어 식량의 안정적 생산과 영농조직 육성을 위해 유기질 비료와 퇴비 생산도 지원하게 된다. 농업용수 처리기와 과실 장기저장제 등도 지원 대상이다. 또한 군수가 직접 대도시 판촉 행사에 나서는 특산물 마케팅도 강화한다.이외에도 변화하는 관광 수요에 맞춘 농촌 체험관광 활성화와 무인항공기를 이용한 영농 지원, 자두 명품화사업과 스마트팜 연구단지 조성 등도 청송군이 지역 농업 발전을 위해 준비한 사업들이다.“농촌경제를 활성화시켜 밝은 미래가 있는 고장을 만들어가겠다”는 윤경희 군수의 약속에 주목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김종철·홍성식 기자

2020-02-06

“경험과 학문적 연구 토대로 모두를 위한 발전방안 찾을 터”

모두가 인정하는 세칭 일류대학에서 사회학과 외교학을 공부했다. 미국 유학에선 국제정치학을 전공했다. 2차례에 걸쳐 서울대가 주는 우수논문상과 학술상을 받았다. 한국국방연구원 실장을 지냈고, 통일부와 외교부의 정책자문위원 역할도 한다. 이 정도 스펙과 경력이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 오만해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마주 앉은 상대에 대한 배려와 깍듯한 예의가 몸에 밴 사람. 기자가 한동대학교 박원곤(52) 교수를 접한 첫 느낌이었다.대학에서는 학생들이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같은 교수’로 역할하며, 방송 출연과 기고를 통해선 그간 연구해온 외교-국방-안보 관련 지식을 시청자와 독자들에게 알기 쉽게 전달하고 있는 박 교수.겸양지덕(謙讓之德)을 갖춘 학자인 그에게 스승으로서의 삶과 방송 출연 중 에피소드 등을 물었다. 더불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적 태도, 향후 국제 질서의 재편 방향도 질문했다. 아래 그 내용을 요약한다.-포털사이트 등에서 한동대 국제어문학부 국제지역학 교수로 소개되고 있다. ‘국제지역학’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걸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문인가.△국제학, 국제정치학, 정치학을 아우르는 영역이다. 우리 학교의 경우 거기에 영어도 포함돼 있다. 한동대 국제지역학 교수 대부분은 정치학과 국제정치학 전공자다. 다른 대학의 정치외교학과와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 2008년 이후 임용된 교수들은 모두 영어 강의가 가능하다. 한동대 강의 중 영어로 진행되는 게 40% 이상이다. 학생들도 전공과목 중 4개는 반드시 영어로 듣도록 돼 있다.-한동대로 오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지역적 연고가 있는지.△아니다. 난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한동대를 처음 알게 된 건 미국 유학시절인 1994년이다. 시카고에서 열린 ‘전미 유학생 수련회’에서 김영길(한동대 1대 총장·1939~2019) 선생을 만났다. 그의 열정적이고 진실한 특강에 감명 받았다. 그때부터 우리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다.-7년쯤 포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생활했다. 많은 학생과 포항시민들을 만났을 텐데.△본적은 경남 김해고, 아버지는 부산 사람이다. 영남은 내게 익숙한 곳이다. 포항의 경우엔 임용 후 처음 왔지만 불편함을 느끼진 않았다. 오래 생활했던 서울보다 좋은 점이 더 많다. 복잡한 대도시 생활에서 벗어나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공기도 좋고 바다도 가깝고, 삶의 질이 더 높아진 느낌이다. 게다가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가 친절하다. 그래서인지 요즘엔 이곳에서 생활하다가 서울에 가면 갑갑하다.(웃음)-재직 중인 한동대는 어떤 대학인가.△‘학생 중심의 학교’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로 오기 전 국방연구원에서 18년간 일했기에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볼 수 있었다. 한동대는 입학생들이 전공을 정하지 않고 들어온다. 그들이 1년 동안 자신의 원하는 강의를 듣고, 2학년 때 전공을 선택한다. 자율과 자기 결정권이 존중되는 것이다. 비슷하게 흉내를 내는 다른 대학이 있지만, 우리 학교의 경우엔 성적순으로 인기 있는 과에 몰리는 현상이 적다. 만약 그렇더라도 교수를 충원하는 등의 방식으로 유연하게 대처한다. 한 해 신입생이 700명 정도인 소수정예 시스템이라 가능했다. 지난 20년간의 실적이 이 시스템이 성공적이었다는 걸 증명하고 있다.-학생들과의 관계는 어떤지.△우리는 ‘학생과 교수의 공동체’를 지향한다. 모든 교수가 학기가 시작될 때면 학생 30여 명과 하나의 팀을 이룬다. 일종의 ‘담임 제도’ 같은 것이다. 팀원이 된 학생들과 1년간 동고동락한다. 크고 작은 활동을 함께 하며 고민을 공유한다. 그런 까닭에 편안한 친구처럼 느껴지는 교수가 될 수밖에 없다. 학생의 고민과 어려움을 들어주는 아버지 같은 교수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공동체 생활 훈련’이 4년 내내 지속되기에 한동대 졸업생이 사회에 나가면 ‘상대방을 존중하고, 팀워크가 좋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본다. 사실 사회생활에서 능력보다 더 중요한 건 조직원들과 불화 없이 어울리는 화합의 마음이 아닐까.-한동대에서 언론 노출이 가장 많은 교수 중 한 명이다. 방송 출연과 신문 칼럼 기고에 적극적인 이유가 있는지.△방송 출연을 처음 시작하게 된 건 한국국방연구원에서 일할 때다. 한미동맹과 북한문제 등 통일-외교-안보가 나의 연구 분야다. 이것들은 비단 한국만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도 중요한 문제다. 한동대에 오기 전부터 정책보고서를 써왔고, 김영삼 정권 시기부터 정부와도 밀접하게 소통했다. 그러다 보니 언론 매체와 자연스레 연결이 됐다. 기자들이 당면 문제에 대해 조언을 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들에게 내가 아는 정보와 지식을 제공했다. 방송 출연과 신문 기고는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내가 의도하거나 먼저 나서서 TV에 나가려고 한 것은 아니다.(웃음)-공중파, 케이블방송, 종합편성채널 등 다양한 방송에서 얼굴을 볼 수 있다.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면.△사람마다 타고난 성향이 다른데 내 경우엔 생방송이 잘 맞는다. 카메라 앞이라고 긴장하거나 하진 않는다. 오히려 녹화방송이 더 어렵다. 한 호흡으로 쭉 이어지는 생방송이 좋다.에피소드라면…. 2018년과 2019년엔 ‘북미-남북 문제’와 관련해 자주 방송에 출연했다. 지난해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을 때도 YTN 생방송에 출연 중이었다. 그런데 방송 중에 회담이 결렬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전에 준비된 시나리오도 없이 즉각적 판단에 따라 회담이 깨진 이유와 향후 전망을 예측해야 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25년 이상 공부해온 주제이니 당혹스럽진 않았다.-세간엔 언론 노출이 잦은 교수를 비판하는 시각도 있는데.△학기 중엔 주말에만 서울에 간다. 주중에는 내내 포항에 있다. 내 본업은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지 방송 출연이 아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세운 원칙이 있다. 전공 분야를 다루는 대담 프로그램과 토론 프로그램에만 출연한다는 것이다. 여당과 야당이 대립하는 국내 정치에 관해선 논평하지 않는다. 이는 방송계에도 잘 알려져 있다.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정치를 할 생각이 전혀 없다. 하나를 덧붙이자면 방송과 신문 기고를 포함한 나의 활동은 내가 가르치는 학문의 영역과도 많은 부분 겹친다. 그렇기에 방송된 토론 프로그램을 강의 중에 활용해 학생들과 의견을 주고받는 경우도 흔하다.-올해 한미 관계, 남북 관계 등은 어떻게 전망하는지.△한마디로 예측하기가 몹시 어렵다. 세계 질서 자체가 우리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다. 향후 30년 이상 넘어서야 할 힘겨운 문제가 연이어 발생할 것이다. 한-미, 한-중, 남-북, 미-북, 한-일 관계 등에서 세계의 변화와 흐름을 정확하게 읽어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내가 보기에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진보와 보수가 극단적으로 갈라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는 태도다. ‘국제 정치’라는 영역엔 정답이 없다. 항상 여러 가지 견해와 주장이 충돌한다. 이를 조율하기 위해선 끊임없는 토론이 필요한데, 아직 한국엔 그런 분위기가 완전히 정착되지 못했다. 진보-보수간 갈등 해결을 위해선 자기 의견을 내세우기에 앞서 상대방의 견해에 귀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다.-스승으로서 제자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건 뭔가.△우리 학교의 모토가 ‘공부해서 남 주자’다. 이는 자기 이익만 취하지 않고 남을 섬기는 게 목표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상대방 의견을 경청할 수 있을 것이다. 공부는 자기 이익과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하는 게 아니다.-당신은 ‘지식인의 사회 참여’가 어떤 형태로 드러나야 한다고 보는지.△어려운 질문이다.(웃음) 전공 영역인 통일-외교-안보 분야에서 한국이 제대로 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우리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앞으로도 고민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인터넷 댓글 등을 통한 비난이 있더라도, 내가 옳다고 믿는 생각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경험과 학문적 연구를 토대로 나와 더불어 타인을 위한 발전 방안을 찾아가는 게 소박하지만 바람직한 ‘지식인의 사회 참여’ 방식이 아닐까.-올 한 해 계획과 향후 학자로서의 궁극적 목표는.△작년부터 시작한 미-중 관계 연구를 지속할 예정이다. 미국 대선과 한국 총선이 있는 올해는 어느 시기보다 역동적일 게 분명하다. 이미 관련 논문 2편을 발표했다. 중장기적인 계획은 1953년 한국전쟁 이후부터 1990년 냉전이 해체될 때까지의 과정을 깊이 있게 연구해보고 싶다. 냉전사(冷戰史·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 역사)는 나의 세부 전공이기도 하니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2-05

고독한 홀로 여행… 뜻밖의 김치와 상상 밖의 여로

◇ 아무르 강을 건너 시베리아 고원으로하바로프스크를 지나 아무르 강을 건너 벨로고르스크까지 달렸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로프스크까진 북으로 올라가지만 하바로프스크를 기점으로 달리는 방향이 서쪽으로 바뀐다. 아무르 강부터 시베리아로 들어섰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시베리아는 서쪽 우랄산맥에서 태평양 연안까지의 지역을 가리키는 말(러시아말로는 ‘시비르’)이다.시베리아라는 말에 ‘추위’가 함께 연상되는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걸 확인하며 달렸다. 낮인데도 해가 구름에 가리면 냉기가 손끝과 목덜미로 파고들었다. 아무르강에서 150킬로미터쯤 달리면 작은 도시 비로비잔이 나오고 그 이후론 언제 끝날지 가늠하기 힘든 고원지대로 들어선다.비로비잔에서 모고차까진 오버랜더(대륙횡단여행자)들에게 꽤나 힘든 코스로 알려져 있다. 5월에도 영하로 떨어질 때가 있고 산속 날씨는 변화무쌍해서 예측 불가. 아예 비옷을 껴입고 달려야 했다. 도로엔 지뢰밭처럼 포트홀이 깔려 있어 속도를 쉽게 낼 수 없었다. 아침 출발할 때 계획했던 거리와 시간은 지킬 수가 없다는 걸 이미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할 때부터 깨달았다.어쩐지 문제없이 잘 나간다 했더니만... 뒷 타이어에 펑크가 났다. 긴 못이 구부러진 채 뒷 타이어에 박혀 있었다. 롱노즈 플라이어를 꺼내 조심스럽게 빼며 펑크가 아니길 바랐지만 바람이 샜다. 바람이 새는 걸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침을 구멍에 잔뜩 묻히면 된다. 침을 묻히니 기포가 조금씩 올라왔다. 이럴 때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고 펑크 때운 경험도 있어 그리 큰 문제는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못이 비딱하게 구멍을 냈음에도 펑크 씰(라이더들은 그 모양 때문에 ‘지렁이’라 부른다)이 잘 붙었다. 때운 곳에 문제가 없는지 또 침을 잔뜩 손가락에 묻혀 타이어에 발랐더니 입 안에서 타이어 맛이 났다.문제는 펑크가 아니라 다른 데 있었다. 함께 가져온 배터리에 연결해 사용하는 에어펌프가 갑자기 작동하지 않았다. 자동 펌프냐 수동 펌프냐를 두고 편한 쪽을 선택한 나의 실수였다. 떠나기 전 점검했을 땐 분명 제대로 작동했었다. 가장 험한 길을 달리고 있을 때 하필 고장날 줄이야. 빠진 만큼 공기를 채워 넣어야 하는데 펌프가 작동하지 않으니... 혹시나 배터리나 배선에 문제가 없는지 배터리 쪽 카울을 뜯어야 했다. 다른 문제는 없었다. 타이어 공기압이 부족해 속도를 낼 수 없었다.◇ 돌발 상황… 펑크가 나다치타로 가는 A-297 도로에서 할리 데이비슨을 타고 하바로프스크로 가는 라이더 알렉스를 만났다. 거의 오가는 차량을 볼 수 없는 고원 외딴 도로에서 오토바이 여행자를 만나면 반가울 수밖에 없다. 그는 천천히 달리고 있는 나를 보며 경적을 울리며 오토바이를 세웠다. 오토바이 여행자들에 대한 러시아 라이더들의 끈끈한 우정과 친절은 유명하다.시베리아 횡단 여행 중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러시아 라이더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경험담을 자주 들었다. 들은대로 그도 어떻게든 나의 문제를 해결해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인터넷도 전화도 터지지 않는 그곳에서 내게 유용한 정보를 알려주려던 그의 노력은 허사였다. 해가 지기 전 최대한 빨리 숙소를 찾아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행운을 빈다고 말하는 것 말곤 그가 내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맑았던 하늘에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그는 두둥거리는 낡은 할리 데이비슨의 엔진 소리를 높여 동쪽으로 사라졌다.알렉스가 말한 벨로고르스크쯤 오니 엄청난 먹구름이 머리 위를 덮고 있었다. 만약 해가 지고 비까지 내리는 상황에 벨로고르스크까지 오질 못했으면 간이 버스정류장 같은 곳에서 노숙해야 했을 수도. 하바로프스크에서 치타까지 2천 킬로미터가 넘는 구간 사이엔 큰 도시가 없다. 벨로고르스크도 인구 6만 명쯤 되는 작은 읍내 같은 곳이다. 750킬로미터를 달렸고 소나기는 이미 한 차례 맞아 몸과 마음이 눅진해진 상태. 더는 비와 다투고 싶지 않아 가장 가까운 숙소를 찾았다.카페를 겸한 게스트하우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수다스런 주인아저씨 알렉스는 내게 한국에서 온 라이더들이 이곳에서 묵고 갔다며 자신의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대여섯 명 정도 되는 젊은이들이 흥겹게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이 젊은 라이더들과는 나중에 만나게 된다.) 함께 팀을 이뤄 여행 중인 듯했다.아무도 없는 방에 홀로 짐을 풀고 잠시 누우니 소나기가 쏟아졌다. 홀로 여행을 떠나는 라이더도 있지만 유라시아 횡단의 경우 워낙 먼 거리를 달려야 하니 처음부터 동료와 함께 준비하거나 출발할 때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아 함께 달리는 경우가 많다. 어쨌거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면 홀로 떠나는 것이 좋겠지만 언제 어디서든 예측할 수 없는 난관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마음에 맞는 동료와 함께라면 훨씬 여행의 피로가 줄어들 테다.하지만 다시 떠날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혼자 떠나는 편을 선택할듯 싶다. 여행은 어쩌면 온갖 관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탈출구이니 마다할 수가 없다. 대부분 사람들은 평생 ‘나는 없고 관계만 있는 일상’을 거의 벗어나지 못한 채 산다. 누군가 곁에 없으면 고독하고 불안해한다. 누구나 언젠가는 혼자가 될 테니 미리 고독을 맛보는 일 따윈 굳이 할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방주사처럼 완전한 고독을 미리 체험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비를 피해 벨로고르스크에서 쉬다주인아저씨가 불러 카페로 나갔더니 커피와 빵과 김치를 내놓았다. 빵과 김치라니! 시베리아 작은 마을 카페에서 김치를 맛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사실 이 김치는 앞서 묵었던 친구들 것이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숙소에 한국에서 온 여행자들이 연속으로 묵어가는 행운을 잡은 주인아저씨는 계속 한국 여행자들이 벨로고르스크를 지나가는지 궁금해 했다. 내가 빵을 먹는 동안 내 앞에 앉아 구글 번역기를 사용해 내게 물었다. 하지만 번역기는 엉뚱한 말을 내뱉었고, 나는 “야 니 즈나유”(잘 모르겠어요)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했다.그는 끈질기게 자신이 원하는 답을 듣기 위해 노력했다. 나중에야 그가 묻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 말고 다른 여행자들도 이곳을 지날 거고 그들에게 오토바이를 안전하게 주차할 수 있는 이곳을 추천하겠다고 이야기를 들은 이후에야 내 앞에서 자리를 떴다. 이런 궁벽한 마을에서 외국인 여행자가 묵고 가는 일은 드물 테니 홍보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을 것이다. 오토바이를 주차하며 잠시 둘러본 느낌으론 이 게스트하우스는 큰 돈을 투자했지만 제대로 영업도 하지 못하고 퇴락해버린 공간 같았다.잠시 카페 소파에 앉아 졸다 인기척이 나서 눈을 뜨니 자그마한 체구의 젊은 남자가 접시를 치우고 테이블을 닦고 있었다. “스파시바”(고마워요)라고 말하니 고개를 살짝 숙였다. 20대 초반쯤 되었을까. 옅은 금발에 핏기 없는 얼굴을 가진 그의 눈빛은 공허했고, 어딘가 모르게 결핍되고 신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요리도 청소도 모두 그의 몫인 듯했다. 주인아저씨는 오로지 돈 만지는 일만 할 뿐이었다.테이블을 치우는 그의 손은 어렸을 때부터 험한 일을 해온 듯 손마디가 굵고 거칠었다. 손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나. 그날 밤 샤샤는 내 옆 침대에서 잤다. 따로 방이 없는 듯했다. 침대가 스무 개쯤 있는 넓은 방에 그와 나 뿐이었다. 샤샤는 밤새 뒤척이며 이를 갈았고 나는 비가 그치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잠이 들 수 있었다. 만약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물었을 테다. 하지만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떠나기 전 그가 지친 몸을 이끌고 주방으로 나가는 것을 본 것이 마지막이었고 나는 로시의 시동을 걸어 예로페이로 향했다.    /조경국

2020-02-04

훈련대장 일가의 몰락

능성구씨는 무인(武人)의 명가였다. ‘능성구씨사료집’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총 562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는데, 그 가운데 진사 144명, 문과 55명, 무과 363명으로 무과 출신이 65%를 차지한다. 따라서 능성구씨는 영조대(英祖代)에 이르기까지 조선왕조 권력의 핵심에서 가문의 세를 떨쳤다. 하지만 정조의 즉위 후 10년 만인 1786년 12월 9일, 구선복이 역모죄로 몰려 조카인 구명겸과 함께 죽음을 당하는 불행을 겪게 된다. 문효세자가 죽자 상계군(常溪君) 담(湛)을 세자로 추대하려 하였다는 ‘구선복 옥사’가 이 집안을 몰락의 길로 걷게 했다이 옥사의 연좌인으로 1787년(정조 11년) 1월 15일, 구명겸(具明謙)의 첩 아기련(阿只連)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다. 구명겸은 구선복의 조카이기도 하였지만, 마흔 살에 황해도병마절도사라는 중책을 맡은 이래 좌포도대장, 삼도수군통제사 등을 두루 거치며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권력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이는 구선복의 힘이 받쳐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노론에 속한 구선복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임오화변 때 그 뒤주의 감시책임을 맡은 포도대장이었다. 사실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가 사도세자의 뒤주를 마련한 장본인이라고 한다. 그는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를 조롱하기까지 했으며, 당시 세손이던 정조가 그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어린 세손은 이 모습을 보고 장차 자신이 왕이 되면 반드시 구선복을 징치(懲治)하리라 다짐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1792년(정조 16) 윤 4월 27일자 ‘정조실록’의 기록은 정조가 그동안 얼마나 구선복을 증오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정조는 “역적 구선복으로 말하자면 홍인한보다 더 심하여 손으로 찢어 죽이고 입으로 그 살점을 씹어 먹는다는 것도 오히려 헐후(歇後·뒤 끝에 붙은 말을 줄여 버림)한 말에 속한다. 매번 경연에 오를 때 마다 심장과 뼈가 모두 떨리니, 어찌 차마 하루라도 그 얼굴을 대하고 싶었겠는가. 그러나 그가 병권을 손수 쥐고 있고 그 무리들이 많아서 갑자기 처치할 수 없었으므로 다년간 괴로움을 참고 있다가 끝내 사단으로 인하여 법을 적용하였다” 라고 했다. 이는 정조가 그동안 극도의 인내로 복수의 칼을 품고 있었음을 고백한 것이었다.그랬다. 1776년, 정조는 즉위하자말자 노론 벽파의 영수 홍인한과 정후겸을 처단했지만, 막상 구선복은 징치하지 못했다. 그것은 구씨 일가가 무시무시한 병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구선복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구선복은 1757년(영조 33) 총융사로서 최초의 군영대장에 오른 이후 1765(영조 41)년에 마침내 훈련대장에 올랐다. 그는 종형이었던 구선행(具善行)과 번갈아가며 병권을 잡아 무반 벌열로서의 위세를 보여주었다. 정조 즉위 이후에는 홍국영과 교대로 훈련대장과 금위대장을 역임하였으며, 홍국영의 실각 이후에도 1786년(정조 10)까지 훈련대장의 직위를 유지했다. 정조가 즉위한 후 10년이 되었지만 그 10년 동안 중간 중간 홍국영이 맡은 3년의 기간을 뺀 7년간은 구선복이 훈련대장을 맡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무장들이 그를 ‘무종(武宗)’이라 받들 정도로 그는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다.구선복의 배경도 막강했다. 윗대부터 나라에 공이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은 집안 출신이기도 했지만, 특히 정조 즉위 초 영의정을 역임한 소론의 거두 김상철(金尙喆)과는 사돈지간이었다. 김상철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화완옹주(和緩翁主·영조와 영빈 이씨의 딸)와도 인척간이었다. 화완옹주의 시아버지인 정우량(鄭羽良)의 사위가 바로 김상철이었던 것이다. 그는 소론임에도 노론벽파인 정후겸·김귀주·홍인한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인물이었다. 구선복도 이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세력을 키워나갔기에 정조는 즉위하고도 10여년간은 강력한 그의 힘을 꺾지 못했던 것이다.이런 구선복은 훈련도감에서 궁중으로 파견한 하리(下吏)들을 통해 조정 대소사를 일일이 보고를 받았을 뿐 아니라, 정조의 모친인 혜경궁 홍씨의 오라버니인 좌의정 홍낙성을 빈연(賓筵·손님을 위해 베푸는 잔치)에서 업신여길 정도로 위세를 떨었다. 그래서 정조는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선복 일당을 제거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드디어 정조에게 기회가 왔다. 도승지 홍국영이 그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정조 초반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를 정조의 후궁(원빈)으로 들이기도 하면서 엄청난 권세를 부렸다. 그런데 원빈이 후사 없이 일찍 죽어버리자 홍국영은 정조의 조카인 상계군(常溪君) 담(湛)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장차 왕이 될 세자로 삼으려고 했다. 홍국영은 이 일로 정조의 미움을 사 축출되었다.그런 일이 있은 후 정조와 의빈성씨(宜嬪成氏) 사이에 문효세자가 태어났다. 당시 의빈은 후궁이 아닌 궁녀였기 때문에 정조는 문효세자를 원자로 정하기를 주저했으나, 소론의 요구로 결국 생후 3개월 만에 원자로 삼았다. 1784년 7월, 정조는 태어난 지 만 22개월짜리 원자를 세자로 책봉했다. 이는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의 세자 책봉에 해당한다. 하지만 왕세자로 책봉됐던 문효세자가 다섯 살 되던 해인 1786년 6월 6일 홍역으로 죽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의빈성씨도 같은 해 9월, 출산을 한 달 앞둔 시점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의빈성씨의 죽음을 두고 조정에서는 홍국영이 상계군 담의 일파와 짜고 그녀를 독살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상계군을 공석이 된 세자자리에 앉히려는 역모가 있다는 것이다. 상계군은 은언군(恩彦君) 인(4104)의 아들이었다. 은언군은 영조의 손자이자 장조(사도세자)의 서장자이며 정조의 이복동생이었다.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는 이 의혹을 공식화하는 언문전교까지 내렸다. 그녀는 반드시 역적을 찾아내어 처단해야 한다며 정조를 압박했다. 실제 정순왕후의 하교는 은언군을 노린 것이었다. 정조의 하나밖에 남지 않은 동생인 은언군을 역적으로 몰아 제거할 작정이었다. 그래야만 혹 정조가 후손을 낳지 못할 때 자신들이 마음대로 왕의 자리를 정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하지만 일은 정순왕후의 의도와는 영 딴판으로 전개되었다. 정조는 이 사태를 구선복일가를 제거하는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의심의 핵심에 있던 상계군 담이 갑자기 죽어버렸다. 이 죽음에 대해 의문을 가진 상계군의 외할아버지 송낙휴(宋樂休)는 김상철과 구이겸(具以謙)이 역모에 연관되어 있다는 고변을 했다. 즉 상계군이 죽기 전에 자신에게 고백을 한 게 있었는데 그 내용은 구선복, 구명겸 등이 짜고 상계군을 세자로 앉히려는 역모를 꾸몄다는 것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김상철은 구선복의 사돈이었고, 구이겸은 구선복의 양아들이었다.급기야 역모죄를 수사하기 위한 추국청(推鞫廳)이 설치되고 중심인물인 구선복이 잡혀왔다. 구선복은 처음에는 자신을 몰아내려는 음모라며 결백을 주장하다가 장언회(張彦恢)와 대질하자 결국에는 승복을 했다. 1년 전에 있었던 홍복영과 문양해의 역모사건에 자신과 구명겸 등이 관여하여 정조를 죽이고 상계군 담을 국왕으로 추대하는 반정(反正)을 추진하다 그만 두었다고 실토를 한 것이다.1786년(정조10) 12월 9일, 정조는 구선복을 최고의 형벌인 능지처사에 처했다. 구명겸에 대해서는 남문(南門) 밖에 삼군(三軍)을 크게 모아 놓고 조리를 돌린 뒤에 목을 베어 매달아 효수(梟首)하였다. 구이겸은 그 다음해인 1787년 1월 9일 의금부도사를 과천현에 보내 그 자리에서 목을 베었다.연좌인들에 대한 처벌도 있었다. 1787년 1월 15일, 구명겸의 가족과 처첩들은 전부 노비가 되었다. 처(妻) 정임(丁任)은 전라도 흥양현 발도, 첩(妾) 아기련(阿只連)은 경상도 장기현, 첩 아기(阿只)는 함경도 부령부, 첩 희안(喜安)은 길주목, 며느리 유임(有任)은 전라도 해남현, 서모(庶母) 함봉(咸鳳)은 함경도 이성현, 서모(庶母) 매선(梅善)은 경상도 하동부, 서녀(庶女) 순임(順任)은 전라도 흥덕현, 서녀(庶女) 희임(喜任)은 보성군, 손녀 소숙(小淑)은 평안도 희천군, 손녀 정숙(貞淑)은 영원군의 노비가 되었다. 그해 갓 태어난 손자는 전라도 강진현 신지도의 노비가 되었다.이 사건 이후 정조는 국왕을 음해하여 반정의 기운이 오래전부터 존재해왔음을 신하들에게 토로하면서 이 기회를 통해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정조는 “병오년에 이르러서야 국법에 의해 처단되었는데 시신을 저자에 버리는 형벌이 어찌 이 역적에게 법을 충분히 적용했다고 하겠는가. 사실은 살점을 씹어 먹고 가죽을 벗겨 깔고 자도 시원치 않았었다.” 고 했다. 또 재위 16년 5월에 다시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역적 구선복의 일은, 그의 극도로 흉악함을 어찌 하루라도 용서할 수 있겠는가마는 그 스스로 천주(天誅:하늘의 주벌)를 범하기를 기다린 연후에 죽였던 것이다”고 했다. 부친을 죽음으로 몬 인물이지만 사사로운 감정으로 처벌하지 않고 스스로 법망에 걸린 후 처벌했다는 뜻이다.결국 정순왕후가 정조의 동생 은언군을 죽이기 위해 시작된 언문전교 사건은 노론의 노련한 장수 구선복 일가를 몰락시키는 것으로 끝이 났다. 노론이 밀고 있던 정순황후측은 군부 한 축이 무너지는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대반전으로 병권을 완전히 장악한 정조는 오군영의 대표인 훈련도감을 약화시키고 새로운 친위 군영인 장용영(壯勇營) 창설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20-02-04

그는 ‘저항’시인이자탁월한 저항 ‘시인’ 이었다

시인 이육사는…1904년 안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원록(源綠). 보문의숙과 대구 교남학교에서 공부했다. 21세에 의열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로 인해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1933년경부터 ‘육사’란 필명으로 ‘황혼’ ‘청포도’ ‘교목’ ‘파초’ 등의 시를 발표한다. 민족적 불행을 겪던 일제강점기에 뜨거운 저항정신을 드러낸 작품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안타깝게도 해방을 한 해 앞두고 사망했다.◇ 짧았지만 빛나는 삶, 이육사항일활동으로 체포되어 차가운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한 이육사만큼 저항시인이라는 명칭이 어울리는 문인은 없다. 39년 8개월에 불과한 그의 삶은 조국 독립을 향한 수많은 투쟁과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다. 널리 알려졌듯이 필명인 이육사는 장진홍 의사가 일으킨 대구은행 폭파 사건에 피의자로 연루되어 대구 감옥에 수감 중일 때 붙여졌던 수인번호 ‘二六四’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후 이육사는 필명으로 소리가 같은 육사(肉瀉), 육사(戮史), 육사(陸史)를 함께 사용하다가 1935년 이후에는 육사(陸史)를 주로 사용하였다. 다양한 뜻의 ‘육사’라는 말에는 모두 강렬한 항일정신이 담겨 있다.그의 항일투쟁은 안동, 대구, 일본, 서울, 중국에서 이루어졌으며, 특히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중국에서의 활동은 일본 중심의 다른 문인들과는 구별되는 이육사의 고유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활동은 글과 생각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총을 든 행동으로도 연결된 것이었다. 그는 무장투쟁단체인 의열단원이였으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이기도 하였다. 민족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그 고난의 삶은 이육사의 맏형 이원기가 1931년 이영우에게 보낸 서신의 다음과 같은 절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활군(육사)이 옥살이하는 정황을 탐문해보니 고통이 보통이 아니고 감방에서 병들어 누웠다고 합니다. 그 위독한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하니, 이 왜놈들은 도대체 어떤 인간들입니까?(중략) 이따위 세상에서는 비록 부처가 살아 있다 해도 막다른 길에서 통곡할 뿐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니, 차라리 확 죽어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아, 생명을 부지한다는 것이 이처럼 고통스럽습니까? (도진순, ‘강철로 된 무지개’, 창비, 2017, 295면)그렇다고 그를 ‘저항’시인으로만 보는 것은 육사의 삶과 문학에 대한 명백한 과소평가이다. 그는 ‘저항’시인이기도 하지만 저항‘시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산맥의 등뼈와도 같은 그 단단하고 매운 정신은 결코 날 것으로 시에 드러나지 않는다. 이육사의 시는 충분한 미적 단련과 숙고를 거친 후에야 탄생한 결과물이다. 이육사는 1930년대 한국시단의 큰 흐름을 형성한 계급문학, 순수문학파, 모더니즘, 생명파 등의 어느 유형에도 귀속되지 않지만, 그 모두를 아우르는 시세계를 펼쳐 나갔다. 그는 깊이 있는 사상과 세련된 언어, 거기에 새로운 감각과 진중한 생명의식까지 한데 아우르는 풍요롭고도 독창적인 시를 창조한 것이다.그의 시를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을 꼽자면 유교적 세계관에서 비롯한 선비정신과 미적 전통을 들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수천 년 동안 갈고 닦여진 미적·인식적·윤리적 단련의 세례를 통해 이육사는 자신만의 고유한 인장을 한국현대시사에 새길 수 있었던 것이다.이육사는 조선의 유학을 대표하는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1904년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천리(츨생 당시는 원촌동) 881번지에서 육형제의 둘째로 태어났다. 고향인 원촌(遠村)을 빼놓고 이육사와 그의 문학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마을은 이황의 5세손이자 육사의 9대조가 터를 잡은 마을이다. 이곳은 주자학적 질서가 삶의 전체를 촘촘하게 이끌어가는 곳으로서, 이러한 특징을 이육사는 “내 동리란 곳은 겨우 한百餘戶나 되락마락한 곳 모두가 내 집안이 대대로 지켜온 이따에는 말도 아니고 글도 아닌 무서운 규모가 우리들을 키워주엇습니다.”(‘季節의 五行’, ‘조선일보’, 1938.12.24.)라고 밝힌 바 있다. ‘무서운 규모’란 수백 년 동안 원촌을 지배한 유교적 삶의 질서를 의미한다.자신의 종교를 유교라고 말한 바도 있는 이육사도 이러한 원촌의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내면화하며 성장하였다. 이육사는 ‘전조기(剪爪記)’(‘조선일보’, 1938.3.2.)에서 자신이 여섯 살 때 ‘소학’을 배웠으며, ‘은하수’(농업조선, 1940.10)에서는 7,8세쯤에는 한시를 짓고 십여 세 무렵에는 사서삼경을 공부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계절의 오행’(‘조선일보’, 1938.12.24.)에서는 열다섯에 이미 “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道를 다 배웟다고 스스로 달떠” 있었다고 고백하기도 하였다.수백 년 길러온 선비정신은 독립운동으로 연결되었다. 역사학자 김희곤에 따르면, 독립운동사의 첫 장(1894년 갑오의병)이 열린 곳이 안동이고, 가장 많은 독립유공포상자(2010년 기준 320여 명)를 배출한 곳도 안동이며, 1910년을 전후하여 가장 많은 자결 순국자(약 90명 가운데 10명)를 배출한 곳 역시 안동이라고 한다.(김희곤, ‘이육사 평전’, 푸른역사, 2010, 251면) 그 중에서도 원촌과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하계는 그러한 항일정신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예안의병장을 지냈으며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단식하여 순국한 이만도도 육사의 친척으로서 원촌과 당재라는 작은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하계 출신이다. 이육사의 그 뜨거운 삶과 문학의 모태는 안동의 원촌과 그곳을 지배한 유교적 세계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이육사는 총 44편(시조 1편과 한시 3편 포함)의 시를 창작하였는데, 이 중에서 직접적으로 원촌이라는 지명이 등장하는 시는 없다. 그렇지만 간접적으로 시인의 고향을 연상시키는 시는 여러 편이 등장하며, 필자는 이 중에서도 ‘청포도(靑葡萄)’(‘문장’, 1939.8), ‘자야곡(子夜曲)’(‘문장’, 1941.4), ‘광야(曠野)’(‘자유신문’, 1945.12.17)를 ‘육사의 고향 3부작’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이들 시에는 육사의 전통적인 고향의 분위기가 깊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살펴보려고 하는 ‘청포도’는 시인 자신이 생전에 “가장 아끼는 작품”(김희곤, 앞의 책, 199면)으로 고백했다고 한다.청포도내 고장 칠월(七月)은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먼데 하늘이 꿈꾸려 알알이 들어와 박혀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청포도’는 흰 색과 푸른 색의 강렬한 대비를 통하여, “내 고장”의 맑고 깨끗한 이미지를 한껏 고양시키고 있다. 이곳은 결코 욕되고 더러운 세력이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울 수 없는 성지인 것이다. 또한 육사는 엄혹한 일제 시절이지만 반드시 오고야 말 “손님”에 대한 강렬한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손님이 온다는 사실은 마치 칠월이 되면 늘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과 같은 불변의 자연적 질서인 것이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맑고 깨끗한 이곳에서 반드시 올 손님을 담담하게 맞이하는 준비일 뿐이다. 1939년이라는 일제 말기에 수많은 지사들마저 변절의 길을 가는 상황에서, 이육사는 자연의 법칙처럼 도래할 광복의 미래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청포도’와 관련한 기념물은 이육사의 고향 원촌에 집중되어 있다. 1993년에 안동시 원촌리 생가 터에 세워진 시비에도 시 ‘청포도’가 새겨져 있으며, 2004년에 개관한 이육사문학관 앞에는 청포도샘이, 문학관에서 육사 묘에 이르는 구간에는 청포도 오솔길이 만들어져 있다. 흥미로운 것은 경북 포항에도 여러 기념물이 조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호미곶과 동해면 면사무소 앞에는 ‘청포도’ 시비가 세워져 있으며, 옛날 미쯔와 포도원 인근에는 청포도 문학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것은 육사가 김대청의 안내로 식민지 시기 거의 유일한 포도원이었던 포항의 미쯔와 포도원을 방문한 후에 영감을 얻어 ‘청포도’를 창작했다는 증언에 따른 것이다.‘청포도’의 배경을 안동의 원촌이나 포항의 포도원으로 한정짓는 것은 결코 본질적인 일은 아닌지도 모른다. 육사가 ‘청포도’에서 진정 말하고자 했던 ‘고장’과 ‘마을’은 그 어떤 불의의 세력으로부터도 훼손되지 않는 숭고한 공간이자 언젠가는 반드시 빛을 되찾고야 말 공간으로서의 조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조선에는 매운 선비정신을 담뿍 머금은 원촌은 물론이고, 참신한 포도송이로 생명력의 향취를 내뿜던 마쯔와 포도원도 담겨 있기 때문이다. 육사의 그 굴강한 정신이 있었기에 한국근대문학사는 부끄럽지 않은 내면의 당당함을 갖게 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2-03

슬플지라도 ‘겨울 제주도’가 그립다

혼자서, 또는 졸업을 앞둔 학생 때 단체여행으로, 혹은 지난 시절 연인과 함께 제주도를 가곤 했다. 이래저래 따져보니 ‘제주 여행’이 10여 차례가 넘는다.어느 곳을 가도 지척에 짙푸른 바다의 낭만이 있고, 싱싱한 해산물과 흑돼지 고기가 맛있는 섬.봄과 여름에 즐기는 제주도 여행은 물론 좋다. 그러나 ‘겨울 제주’의 매력도 만만찮다. 성산포나 우도에서 차갑게 출렁이는 푸른 물결을 보며 제주의 근현대사를 떠올려보는 건 쓸쓸하고 아프지만 분명 의미 있는 일일 터.몇 해 전이다. 제주에서 몇 년을 살다가 서울로 돌아간 소설가 A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제주도는 국수도 맛있어요. 멸치로 우려낸 국물 맛이 그만이죠. 작업실 아래에 있는 국수 가게를 1년 넘게 드나들었지요. 그런데, 그 긴 시간 동안 주인장은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라는 내 말을 듣고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뿐 대꾸가 없더라고요. 서운했지요. 하지만 생각해보니 4.3항쟁에서 입은 상처가 얼마나 컸으면 아직도 이방인에 대해 저처럼 배타적일까라는 생각에 슬퍼졌어요.”▲제주의 아픈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시와 소설들1948년 4월 유채꽃 만발하던 때 시작된 제주 사람들의 통곡은 21세기가 돼서야 겨우 위로받을 수 있었다. 국가 차원의 사과와 관련 특별법 제정이 추진된 것.갑작스레 닥쳐온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를 피하려 꽁꽁 얼어붙은 한라산으로 숨어 들어간 이들, 줄줄이 묶인 채 폭포 아래로 던져진 이들, 몽둥이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이들. 당시 제주도민의 15%가 죽었다. 지금도 제주도 작은 마을엔 제삿날이 같은 집이 많다. 이성이 상실된 광기의 시대였다.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살해된 이들 중 ‘폭도’로 불릴만한 인물은 이덕구와 김운민, 박남해와 김병남 등 무장 게릴라 400~500여 명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나머지 3만여 명의 사람들은…. 그야말로 억장 무너지는 억울한 죽음이었다.오래전 ‘문학인 평화기원제’ 취재를 위해 제주도를 찾았던 날. 여든에 가까운 할머니 한 명을 만났다.4.3항쟁 때 가족 대부분을 잃었다는 그녀는 행사에 참석한 작가들의 손을 잡으며 “할아버지와 아버지, 엄마와 오빠까지 다 죽고 저 혼자 살아남았습니다.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제발 다시는 이처럼 억울한 일이 없도록 도와주세요”라며 울먹였다. 사실 문학은 4.3항쟁의 진실이 알려지는데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 소설가 현기영의 ‘순이 삼촌’, 시인 이산하의 ‘한라산’ 등이 대표적이다. 두 작품이 역사적 사실로 직격하고 있다면, 원로 시인 이생진(91)은 우회적이고 서정적인 방식으로 제주의 서러움과 우울을 노래하고 있다.2년 전 ‘나 홀로 제주여행’을 떠났다. 20대 시절 여자 친구와 추억을 쌓았던 성산포에서 우도를 바라보며 기자는 이생진의 애끓는 시를 기억해냈다.▲풍광보다 사람이 아름다운 섬으로 남기를타지에서 온 손님을 마냥 살갑게만 대하지 못하는 국숫집 주인, 부모와 형제를 잃고 캄캄한 고통의 터널 속에서 살아온 할머니, 검은 바위 위에서 잡아온 해삼과 멍게를 파는 거친 손등의 해녀들, 아무 것도 모르고 노란 병아리처럼 종종거리며 웃는 제주도의 아이들….수난의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들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저 성산포의 바다가 빛나는 보석이 아닌 지울 수 없는 ‘푸른 멍’으로 느껴지는 정도가 고통의 공유 방식일 뿐.그래서였을 것이다. 이생진 역시 ‘빈 자리’라는 시어를 통해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결핍과 공허함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킨다. 고난의 메타포인 ‘파도’와 타의에 의한 고립을 지칭하는 ‘고독’이란 단어가 자주 사용되는 것 또한 제주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생진의 시는 끝없는 절망의 되풀이는 아니다. 행간 곳곳에서 읽히는 위로와 위안의 목소리 때문이다.‘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살아서 술을 좋아했던 사람/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살아서 그리웠던 사람/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한 짝 놓아 주었다…(후략)’‘그리운 바다 성산포’의 마지막 대목은 죽음이 아닌 부활의 노래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보리밭에도, 섬 꼭대기에도, 심지어 짚신 한 짝에서도 제주의 바람 냄새가 느껴지는 시.다시 ‘겨울 제주’를 가게 된다면 이번엔 성산포의 풍광이 아닌 성산포 사람, 아니 제주도 사람들의 향기에 취해봐야겠다. 그렇다. 모든 인간은 어떤 풍경보다 아름답다./사진제공 구창웅/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1-30

“푸르른 바다 곁에서 치유받으며 살고 있어요”

소년은 언제나 ‘지금 이곳’ 아닌 ‘또 다른 곳’을 꿈꿨다. 10~20대 시절엔 밤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이 땅 남쪽 끝을 향해 가거나,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바람처럼 서쪽으로 달리곤 했다. 그 소년은 남들보다 늦은 나이인 서른둘에 공무원이 됐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경북의 여러 등대를 떠돌며 드넓은 바다에서 삶을 이어가는 이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다. 항로표지관리원 김현길 씨다.한 달간의 독도등대 근무를 마치고 포항으로 돌아온 그를 본사 편집국에서 만났다. 기자는 김씨를 기다리며 초등학교 음악 수업시간에 목청껏 부르곤 했던 ‘등대지기’를 여러 번 반복해 들었다.“얼어붙은 달 그림자 물결 위에 차고”로 시작해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이란 구절로 끝나는 노래, 이상스레 우리들 마음을 아프게 울리는 그 노래를.-먼저 궁금한 것 하나 묻고 싶다. ‘등대지기’의 정식 명칭은 뭔가.△‘~지기’라는 말이 직업을 폄훼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최근엔 등대관리원 혹은, 항로표지관리원이라 부른다. 좀 더 정확하게 하자면 나는 해양수산부 포항지방해양수산청 항로표지과에서 독도항로표지관리소 운영·관리를 맡고 있는 팀원 중 한 명이다.-항로표지관리원을 시작한 시기와 현재 나이는.△53세다. 1999년 등대 지키는 일을 시작했다. 올해로 21년째다.-어릴 때부터 바다가 좋고, 외로움을 잘 견디는 사람이었나. 항로표지관리원이 된 이유가 궁금하다.△그렇지 않다. 일을 시작하기 전엔 등대에 관해 아무 것도 몰랐다. 고등학교를 마친 후 직업훈련원을 수료하고, 정비업체 등에서 일했다. 한 친구가 우연히 권유해 항로표지관리원 시험에 응시했고 운 좋게 합격했다. 어찌 보면 운명 같기도 하다.-등대를 지키기 전엔 어떤 청년시절을 보냈는지.△10대 때부터 여행을 좋아했다. 20대에도 기차와 모터사이클을 타고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낯선 곳에서 텐트를 치고 자다가 불심검문에 걸리기도 했고…. 짧지만 사찰에서 행자 생활도 해봤다. 내겐 역마살이 있다. 1999년 독도에 설치된 등대가 무인등대에서 유인등대로 바뀌며 인력 충원이 필요했다. 그해 나를 포함해 7명이 항로표지관리원이 됐다. 32세 때다.-유인등대와 무인등대의 차이는 뭔가.△쉽게 말하면 등대에 사람이 있고, 없고의 차이다. 통상 2년에 한 번쯤 근무지가 바뀐다. 경북에는 5개의 유인등대가 있다. 독도, 울릉도(도동등대와 태하등대) 울진 죽변, 포항 호미곶 등이다. 이 다섯 군데의 등대를 순환 형태로 돌아가며 근무한다. 각각의 등대에서는 3교대 방식으로 일하고 있다.다만 독도등대의 경우엔 ‘2개 팀·1개월 근무·1개월 휴무 시스템’이다. 1개 팀은 3명이고, 1명이 주간 근무, 2명이 야간 근무를 맡는다. 경북 전체에서 등대를 지키는 사람들은 대략 25명 정도라고 알고 있다. 무인등대는 280개쯤 된다.-항로표지관리원의 주된 임무는 어떤 것인지.△선박의 항해를 돕기 위해 등대와 부표를 관리한다. 관련 해상 시설을 점검하고 문제가 발생했을 땐 이를 해결하기도 한다. 예전엔 등대의 역할이 ‘어선과 어부 보호’에 방점이 찍혀있었으나, 요즘은 국가 영역을 표시하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독특한 직업이다. 힘겨운 점과 보람의 순간이 동시에 있었을 듯한데.△두 아들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다는 게 가장 안타깝다. 이젠 대학생이 된 자식들이 어릴 때 곁에서 돌봐주지 못했다. 예전 독도등대에 근무할 땐 겨울이면 50~60일간 만나지 못한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착하게 자라준 애들에게 고맙다. 보람이라면…. 독도등대에서 일본 순시선을 볼 때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들 땅이라고 억지 부려도 우리 영해를 쉽게 침범하지는 못한다. 대한민국의 동쪽 끝을 지키는 사람 중 한 명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독도등대에서 근무한 세월이 만만찮을 것 같다.△8년이다. 울릉도에선 4년쯤 있었다. 독도와 울릉도 근무를 합치면 12년가량 된다. 독도 근무를 꽤 오래 한 셈인데, 그건 독도와 나의 궁합이 잘 맞아서가 아닐까.(웃음)-독도등대에선 고독을 느끼지 않는가? 독도에 대한 애증이 있을 텐데.△처음 갔을 땐 낯설고 답답했다. 하루 종일 볼 거라곤 바다밖에 없으니까. 들리는 건 갈매기 소리뿐이고. 눈을 떠도 바다, 심지어는 감아도 바다가 보였을 정도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진과 글쓰기에 관심이 생겼고 이후론 답답함이 많은 부분 사라졌다. 독도 관련 사진을 모아 크고 작은 전시회를 30여 차례 열었고, 지난해엔 시집도 한 권 출간했다.-독도에 상주하는 이들은 얼마나 되는가.△서도엔 독도관리사무소 직원 2명과 독도 주민 김신열 씨와 김씨의 사위가 산다. 동도의 경우엔 독도경비대와 항로표지관리원 등 30명 조금 넘는 인원이 생활하고 있다.-항로표지관리원으로 일하면서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는.△2000년대 초반 독도 관련 모임에서 함께 활동하던 남녀가 비슷한 시기에 사망하자 영혼결혼식을 올려주고 둘의 유골을 독도에 뿌렸다. 이후 날씨가 흐리고 비가 내리는 날이면 손을 잡고 걸어가는 젊은 연인의 그림자를 본 독도경비대원들이 적지 않았다. 갑자기 삽살개가 짖어대던 날, 나도 그들의 그림자를 봤다.(웃음)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건 태하등대의 아름다움이다. 사진작가들 상당수가 한국 최고의 촬영 장소로 꼽는 게 태하등대 주변이다. 특히 일출과 일몰 때는 뭐라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풍경이 근사하다.-‘나도 등대를 지키는 사람이 되겠다’는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자기가 하고 싶은 걸 다하려고 한다면 택하기 어려운 직업이다. 남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희생하고 봉사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지 않을까. 나도 이 일을 시작하면서 애국심이 커졌다. 그걸 소명감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다.-바다를 떠돌며 살아왔다. 후회는 없나? 만족스런 인생이었다고 생각하는지.△가정적으론 곁을 지켜주는 아버지가 되지 못해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나쁜 삶은 아니었다고 믿는다. 울릉도나 독도까지 10시간 넘게 배를 타고 다니던 시절에 비하면 근무 여건도 좋아졌다. 누군가는 ‘당신이 등대를 지키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라고 말했다.(웃음) 틀린 말이 아니다. 난 갇혀 있는 걸 못 견디는 사람이니까.-마지막 질문이다. 항로표지관리원이란 세상에 어떤 도움을 주는 사람인가.△누군가에게 도움을 준다기보다 오히려 내가 푸르른 바다 곁에서 치유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직업을 가진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나 역시 지금의 자리에서 맡겨진 역할에 충실할 것이다.김현길 씨는 2001년 필름 카메라로 독도의 풍경을 찍기 시작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아무 것도 모르는 백지상태에서 셔터를 눌렀다”고 한다. 누구에게 배우거나, 정식 교육을 받은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일반인이라면 평생 한 번 가보기도 힘든 독도의 절경을 담아낸 김씨의 사진은 차츰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디지털 카메라로 장비를 바꾼 뒤엔 매일 얼굴을 마주하며 시시각각 변하는 독도의 모습을 더 많이 렌즈에 담을 수 있었다.정부와 지자체는 영토 주권의 문제이기에 “독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한다. 그런 차원에서 독도를 주제로 한 사진전에 보다 많은 관람객이 찾아주기를 김씨는 원한다. 그러기 위해선 정부와 지자체의 도움이 절실하다.포항은 울릉도와 독도를 향해 가는 출발점이다. ‘독도 사진 상설전시관’이 생긴다면 시의 이미지와 위상을 동시에 높일 수 있지 않을까?사진과 더불어 글쓰기로 독도에 대한 애정을 키워가고 있는 김현길 씨의 시 ‘독도 예찬’을 소개한다. 소박하고 소탈한 문장이 읽는 사람의 가슴을 흔든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1-29

낯선 도시, 낯선 사람들… 별빛 쏟아지는 자작나무 길을 달리다

◇ 여행의 필수품, 휴대폰 유심카드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으나 로시(오토바이)를 바로 받을 수 없었다. 통관에 걸리는 시간이 보통 이틀, 길면 일주일을 넘길 수도 있다고. 오토바이를 찾기까지 통관대행회사 근처 숙소에서 마냥 연락을 기다려야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내려 입국심사를 받고 난 다음 통관대행회사 직원을 만나 가장 먼저 했던 일은 휴대폰 유심카드 구입이었다. 옛 여행자 같으면 가까운 서점에 지도를 구하러 갔겠지만 요즘엔 인터넷이 연결되는 휴대폰만 있으면 지도뿐만 아니라 숙소 예약부터 통역까지 여행자가 겪는 거의 모든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으니 유심카드를 구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다. 여객선터미널 근처 통신회사에서 서류를 작성하고 선불제 유심카드를 받았다. 인터넷과 전화가 되는 걸 확인하고 아내에게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낸 후에야 한 번도 와보지 않았던 낯선 도시에 왔다는 걸 실감했다. 함께 떠나온 일행과 연락처를 교환하고 위치추적 앱(Zenly)을 설치했다.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하기 위한 최소한의 대비였다. 어디쯤 달리고 있는지 어디에서 묵는지 위치추적 앱만 켜면 알 수 있었다. 유심카드를 구입하곤 각자 예약한 숙소로 흩어졌다.예약한 숙소는 1박에 1만 원쯤(600루블)하는 보야지호스텔, 남성 전용 8인실이었다.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니 덩치가 산만한 남자들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오토바이 슈트를 입고 헬멧을 들고 있는 여행자를 쉽게 보긴 힘들 테니. 남자들만 있는 공간에서만 나는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짐을 풀고 침대에 앉으니 맞은편에 앉는 왈랴크 씨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러시아어로 말을 걸어왔다.“야 카레이스키”(나는 한국인입니다)라는 말만 두어 번 반복하곤 당신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곤 나를 제외한 6명의 남자들이 서로 열띤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논쟁의 중심에 내가 있는 듯했으나 언어의 장벽은 높고 두터워 단 한 마디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러다 구세주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하비프 씨였다. 인천에서 일하는 타지키스탄 사람. 바로 위의 침대를 쓰는 그는 유창하게 한국어와 러시아어를 번갈아가며 말했고, 나의 정체(?)에 대해 다른 사람에서 설명했다. 한국인이 맞고(내가 분명 ‘카레이스키’라고 말했음에도 그들은 내가 일본인이나 중국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책방을 하고 있으며 유럽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할 계획이라고. 하비프 씨가 설명을 끝내자 다들 엄지를 치켜세우며 나를 격려했다. 시베리아는 5월에도 추우니 조심하라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그리곤 자신들이 온 곳이 어딘지 말해주었다. 대부분 일자리를 찾아 중앙아시아나 타지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온 사람들이었다.◇ 첫날 밤, 러시아말을 배우다하비프 씨와 친구 무즈카쉬 씨는 비자문제로 잠시 블라디보스토크에 왔다고 했다. 한국 체류기간이 끝나면 비자를 갱신하기 위해 러시아에 나왔다가 다시 들어간다고 했다. 고향인 타지키스탄까진 너무 멀어 가장 비용이 저렴한 블라디보스토크에 와서 비자문제를 해결한다고 했다. 벌써 5년이나 한국에서 일했고(원래 그의 직업은 교사였다.) 자녀가 다섯이나 되어 열심히 벌어야 아이들을 교육시킬 수 있다고 했다. 한국 생활이 만족스럽다고 말했지만, 가족을 두고 먼 이국에서 하루하루 버텨야하는 그가 안쓰러웠다.보야지호스텔에서 묵는 이틀 동안 하비프 씨는 식사를 할 때마다 나를 챙겼다. 근처 식료품점에서 사온 빵과 주스, 통조림, 약간의 채소가 전부였으나 내겐 성찬이었다. 식사뿐만 아니었다. 여행하는 동안 꼭 필요한 러시아어를 내게 가르쳐주었다. 그가 알려준 러시아어는 따로 받아 적어놓고 틈나는 대로 연습했다. 할레브와 말라크, 코페는 러시아를 여행하는 내내 달고 살았다. 아래 ‘기초 회화’만으로 러시아를 건너가는데 별 문제가 없었으니 그의 짧은 러시아어 강의는 효과만점이었다.할레브 - 빵말라크 - 우유코페 - 커피카로아 마야사 - 쇠고기리바 - 생선다이티 - 주세요바춈 - 얼마입니까?즈드라스트위테 - 안녕하세요이드비나테 - 미안합니다무주키 - 아저씨데오시카 - 아주머니스파시바 오촘프쿠스노 - 잘 먹었습니다◇ 로시를 받고 먼저 시베리아로…이튿날, 휴대폰이 제대로 충전되지 않는 문제가 생겨 수리점을 찾아갔으나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중고 휴대폰을 구입해야만 했다. 떠나기 전부터 휴대폰 상태가 썩 좋지 않아 불안했는데 떠나서야 문제가 터졌다. 혹시 모르니 미리 휴대폰을 하나 더 챙겨가라는 경험 많은 친구의 조언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어쨌거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 이곳저곳을 쏘다닌 덕분에 길을 수월하게 익힐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가 고향인 영화배우 율 브리너의 동상도 보고 아르바뜨 거리도 가고,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헤매기도 했다. 종일 휴대폰을 고치기 위해 걸어 다녀 파김치가 되어 숙소에 들어가서 또 하비프 씨에게 저녁밥을 얻어먹고 러시아 여행에 대한 정보를 여러 가지 얻을 수 있었다. 그가 내게 베풀어준 친절은 처음부터 꼬일 듯했던 나의 여정이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었다.드디어 3일째, 오후에 세관에서 로시를 찾을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로시를 찾기 전에 영사관에 가서 면허증 번역공증서를 받아야만 했다. 러시아에선 한국에서 발급받은 국제면허증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따로 영사관을 찾아 번역공증서를 받아야 한다. 러시아어로 작성한 신청서를 만들어가야 하는데 미리 준비한 덕분에 쉽게 발급받을 수 있었다. 번역공증서를 발급받는 동안 영사관 관계자에게 2018년 7월 있었던 사고에 대해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트럭과 추돌해 라이더가 사망했고 영사관 직원이 이틀이나 걸려서야 사고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워낙 땅이 넓고 교통이 불편해 사고가 나더라도 쉽게 해결하기 힘드니 시베리아를 통과할 때는 각별히 주의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사망사고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사고들이 무시로 일어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고, 일행 중 한 분도 첫 번째 여행에서 러시아를 벗어나지 못하고 크게 다쳐 돌아와야 했고 절치부심하여 다시 도전한다고 했다.배에 오토바이를 실을 때 선사 직원에게 한 해 유라시아를 왕복해 다시 오토바이를 싣고 돌아오는 여행자가 얼마나 되냐고 물었을 때 “떠나는 사람은 100명 정도지만 왕복해서 오는 경우는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실패 쪽이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해결하기 힘든 문제를 만났을 때는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그렇게 마음을 잡았다.오후 5시 로시를 세관에서 받자마자 함께 배를 타고 왔던 분들께 작별인사를 하고 하바롭스크로 달렸다. 하바롭스크까지 거리는 약 750킬로미터. 새벽 2시까지 550킬로미터쯤 달리다 멈추고 길가에서 침낭을 깔고 노숙했다. 일찌감치 숙소를 잡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자작나무가 춤추고 별빛이 쏟아지는 밤길 위에서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날 밤 길엔 앞에도 뒤에도 아무도 없이 나 홀로였다.   /조경국

2020-01-28

충효의 고장에 ‘호래자식’이 웬 말

강상죄(綱常罪)는 삼강과 오상의 도덕을 해친 범죄를 말한다. 삼강오상은 현대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삼강오륜과 같은 의미이다.조선시대는 유교 윤리가 통치의 근간 이념이었다. 그 가운데 특히 효(孝)는 백행(百行)의 근본으로 여겼다. 그래서 불효죄는 본인을 처형함은 물론이고, 그들이 살던 고을 읍호가 강등되고 관할 수령은 파직되는 경우도 허다했다.1751년(영조 27년) 9월경에 충남 예산에 살고 있던 박우천((朴右天)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는데, 그 죄목이 바로 ‘불효죄’였다. 박우천이 그의 어미가 죽었는데도 분상(奔喪)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분상이란 먼 곳에서 어버이의 죽음을 듣고 급히 집으로 달려오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 상례(喪禮)에서 분상은 매우 중요한 절차였다. 그래서 분상하는 사람에게는 가능한 한 편의를 보아주는 것이 통례였지만, 상주가 이 절차를 어길 때는 가차 없는 처벌이 내려졌다.통상적으로 유배를 온 사람들은 1~2년이면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관례적이었는데, 박우천은 어찌된 영문인지 유배가 풀리지 않았다. 그가 장기로 온지 10년이 되는 해였다. 박우천을 관리하던 장기현감이 그의 고향인 오산(烏山·현재 충남 예산) 현감에게 공문을 보내 사실조회를 했다. 그가 도대체 어떤 모진 죄를 저질렀는지 궁금했던 것이다.수개월 후 오산현감이 답장을 보내왔다. 우선 공부상에 적힌 범죄사실로는 강상죄의 구성요건이 충분했다. 이 사건의 당초 고발자는 박우천의 외삼촌인 김선의였다. 김선의는 나이가 많은데도 자식이 없었다. 게다가 가난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가 없어서 박우천에게 얹혀 의식주를 해결하고 있었다. 김선의는 노망(老妄)이 들어 정신도 오락가락했다. 조금만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좌수어른이나 관가에 고발장을 제출하기도 했다. 그래도 박우천은 그의 생질인 까닭에 감히 다투거나 따지지도 못하고 매번 순종하여 그의 청을 받아주었다고 한다.그런데, 신미년(1751, 영조27)에 이르러 김선의가 박우천에게 돈 10냥을 달라고 해서 줬더니 그 돈을 생활비에 쓰지 않고 그의 처족(妻族)에게 줘버렸다. 박우천이 이 사실을 알고 그 돈을 돌려달라고 누차 말하였는데도 김선의는 돌려주지 않았다. 박우천과 김선의는 모두 성격이 날카롭고 표독한 사람들이었다. 둘은 이 문제로 술을 마시고 다투며 따지다가 술에 취한 김선의가 홧김에 관아에 박우천을 고발해버렸다. 김선의는 자신의 생질인 박우천이 그 어미가 죽었는데도 분상(奔喪)하지 않았고 또 약간의 돈을 갚지 않는다는 이유로 더러운 오물을 자신의 입속에 채워 넣었다는 것이었다. 실제 고발하러 온 김선의의 입에는 오물이 칠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감이 봤을 때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어미의 상(喪)에 분상하지 않은 것도 모자라 외삼촌을 구타하고 입에 오물까지 처넣었으니 천하에 이런 호래자식이 없다고 생각했다. 광패한 박우천의 행위에 매우 놀란 현감은 전라감영에 보고하여 그를 섬에 유배하기로 조율(照律)을 하다가 마침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보냈다는 것이 이제까지 인정된 사실이었다.장기현감의 사실조회 요청에 따라 현임 오산현감은 신사년(1761, 영조 37년) 9월 초3일, 박우천의 10년 전 죄상을 물어보기 위해 그의 고향인 현내면 연지동(蓮池洞)의 좌상(座上) 윤취번(尹就幡)과 유사(有司) 배악불이(裵惡不伊), 그리고 박우천의 인척인 송인철을 불러 위에서 밝힌 인정사실이 틀림없는지 다시 조사를 했다.그런데,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참고인들로 불려나온 동네사람들의 진술은 공부상에 적힌 위의 내용과는 좀 달랐다. 오물을 김선의의 입속에 채울 때에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기에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할 수가 없으나, 모친상에 그가 분상하지 않았다는 일에 대해서는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당시 박우천은 관아에서 심부름을 하던 사령(使令)으로 있었는데, 관가의 심부름이 없는 날이면 관문(官門)에서 오래 지냈고 애당초 멀리 나간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어미의 병이 여러 달 낫지 않고 있다가 마침내 죽게 되었는데, 그때 박우천이 분명히 분상을 했다는 것이다. 발상(發喪)할 때 동네 사람들이 모두 가서 조문하였으며 행상(行喪)할 때에도 동네 사람들이 모두 상여를 메고 갔기 때문에 박우천이 상여를 뒤따라가는 것을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고 했다. 그 뒤에 박우천이 장사하러 다른 곳에 나갔다가 여러 달 동안 돌아오지 않았던 사실이 있었는데, 김선의가 이것을 분상(奔喪)하지 않은 것으로 허위 고발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박우천이 멀리 장기현으로 귀양을 간 사실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애매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진술했다.김선의의 생질 송인철도 김선의는 외삼촌이고 박우천은 이종(姨從)간이 되지만, 어느 쪽도 두둔할 필요가 없다면서 본리(本里) 좌상과 유사의 진술내용이 사실과 다름이 없다고 못을 박았다.사실이 이러하다면, 10년 전에 내려진 박우천에 대한 유3천리의 판결은 사실인정에 중대한 오류가 있었다. 책임 있는 관리였다면 그 판결의 당부(當否)를 다시 심리하는 비상수단적인 구제방법을 거쳐 그를 즉시 해배시켜야 할 것이지만, 장기현감은 위와 같은 답변을 통보받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앉았던 모양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782년(정조 6년) 12월 6일 유배인들의 처리에 관한 형조의 문서에도 박우천은 여전히 장기현의 유배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정통 유학이 깊이 뿌리 내린 장기현은 “충효의 본고장”이라할 만큼 충효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장기면 양포리의 장인풍(張仁豊), 임중리의 김사민(金士敏), 산서리의 최학진(崔鶴振)과 김시상(金時相), 정천리의 김윤찬(金潤瓚), 금곡리의 허기(許琦), 대곡리의 박춘무의 처 김해김씨 등 조선시대 효와 열의 행적들이 정효각, 효자각, 열녀각과 함께 남아있다.효자·열녀각에 얽힌 사연들도 각양각색이다. 특히 산서리 김시상의 효행은 효자비에 전하는 비문 뿐 아니라 ‘효행전(孝行傳)’이라는 서사적 구조를 갖춘 문헌설화까지 전해온다. 김시상은 영조 때 인물로 8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소년가장이 된 시상은 집안이 가난하여 시장에 나무를 해다 팔아서 식량을 구해 어머니를 봉양해 왔다. 하루는 장터에 갔다가 어머니에게 드릴 고기를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난데없이 솔개가 날아와 고기를 빼앗아 갔다. 난감해진 시상은 고기를 다시 사려고 했지만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어머니의 밥상에 난데없는 고기가 덩그렇게 놓여있었다. 시상이 어찌 된 영문인지를 몰라 어머니께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아까 솔개 한 마리가 문 앞에 날아와 무언가를 떨어뜨리고 갔기에 자세히 보니 그게 고기였다고 했다. 그 묶은 끈을 확인한 결과 시상이 낮에 시장에서 산 것이 분명했다. 생각해 보니 어머니 밥상의 반찬이 허술하고 아들의 걸음이 늦음을 하늘이 알고 솔개를 보내 먼저 고기를 집으로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언젠가 시상의 어머니에게 안질이 생겨 실명위기에 놓였다. 시상은 집 뒤에 정화수를 떠놓고 꿇어앉아 저녁마다 북두칠성에게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하늘도 감응을 받았는지 어머니의 눈이 다시 밝아졌다. 어머니의 연세가 일흔이 되었을 때였다. 병석에 누워 신음하던 어머니가 갑자기 숨을 거두려하자 시상은 칼로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하늘에 축원을 하면서 어머니 입에 드리우니 피가 목에 넘어가며 다시 회생하였다. 어머니는 그로부터 5년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어머니의 상을 치른 후 시상이 하루는 성묘를 가는데 산처럼 큰 호랑이가 길목에 버티고 앉아 길을 막고 있었다. 시상이 호랑이를 꾸짖어 “너는 산중 영물이요 나는 인간죄인이라, 가는 길이 각각 다른데 어찌하여 어버이 보려고 가는 자식 앞을 막고 앉았는고? 빨리 산으로 가거라” 하니 호랑이가 물러갔다는 것이다. 하늘이 내린 이런 효자를 나라에서도 알고 영조 23년(1747)에 효자각을 건립하게 하였다고 한다.장기 금곡리에는 ‘삼효각(三孝閣)’이 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이곳에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한 허기(許琦)란 사람이 살았다. 그는 나이 18세 때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묘소 옆에 움막을 치고 기거를 하며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렸다. 어머니에게도 예를 다하고 공손하게 대하여 자식의 도리를 다 했다. 그는 나이가 어려 상을 당했던 관계로 아버지의 묘 터를 잘 골라 쓰지 못하였던 것을 늘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뒤늦게 좋은 명당 터를 찾아 이장을 한 다음 제사를 드렸더니 이상하게도 술잔에 부어두었던 술 3잔이 모두 말라 없어지는 게 아닌가? 이를 이상하게 여기던 차에 아버지 제삿날 제사를 지내고 고개를 들어보니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시와 똑 같이 제상에 앉아 있어 제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놀란 일이 있었다 한다.허기에게는 허식(許湜)과 허온(許溫)이란 두 아들이 있었다. 허식은 장가 간지 8년 만에 불행하게도 세상을 떴다. 허식의 처 곡강 최씨(曲江 崔氏)는 남편이 죽자 3년 동안 머리를 빗지 않고 시어머니에게 정성을 다 했다. 시어머니가 이질에 걸려 한 달이 넘도록 자리에 눕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옷도 벗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면서 항상 곁을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변을 손수 받아 처리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시어머니의 추한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허온의 처인 월성 최씨(月城 崔氏) 역시 타고난 성품이 온화하고 허씨 가문에 시집 온 뒤에 며느리로서 도리를 다했다. 시아버지가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직접 변을 받아내기도 하고, 또 변의 맛을 보아가면서까지 병환의 상태를 점검하며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했다.어느 해 겨울, 찬바람이 불고 눈이 하얗게 쌓인 날이었다. 시아버지가 갑자기 고기가 먹고 싶다고 했다. 최씨는 무작정 길을 나섰으나 고기를 팔러 다니는 상인이 없어 구하지 못하고 돌아오는데 홀연히 기러기 한 마리가 날아와 도로변에 앉았다. 최씨가 쫓아가서 손으로 잡아 그것으로 시아버지의 저녁 반찬을 해드린 일이 있었다.이런 허기와 그 두 며느리의 효행은 금방 고을전체에 퍼졌다. 이에 조선 순조 때 도내의 유림(儒林)들이 연명하여 경상감사와 예조에 장계를 올렸더니 왕께서도 감명을 받고 정려(旌閭)를 내렸다.‘반면교사’란 말이 있다. 부정적인 것을 보고 긍정적으로 개선할 때, 그 부정적인 것을 반면교사라고 하였다. 장기에 효자와 효부가 많은 이유는 애당초 유현(儒賢)의 고을로 예절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졌던 점도 있었지만, 강상죄로 인해 장기로 유배를 오는 여러 사람들을 접하면서 그들이 겪는 고통과 시련을 반면교사로 삼았던 것도 무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20-01-28

현실비판이 강했던 작가는 왜 일본문단에 목말라 했을까

일제 강점기를 대표하는 저항 문인으로 ‘청포도’와 ‘광야’의 시인 이육사의 오른편에 앉을 만한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이육사가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할 때, 매우 우호적인 태도로 인터뷰를 한 문인이 있다. 조선일보 1932년 3월 29일자 기사에서 이육사는 그 작가의 응접실 겸 침실 겸용인 서재에 찾아가, “그의 눈은 리지에 타는 듯이 빗낫다(빛났다)”고 감탄하기도 하며 그에게 수필을 하나 써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이 날 이육사를 이토록 격동시킨 인터뷰이(interviewee)는 과연 누구였을까? 놀라지 마시라. 그는 다름 아닌 친일파로 일본과 조선에서 명성이 높았던 “조선 출신의 대일본제국의 작가 초 가쿠추”(시라카와 유타카, ‘장혁주 연구’, 동국대 출판부, 2009, 344면), 바로 장혁주(張赫宙)이다.그는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을 올린 대표적인 친일문인으로서, 본명은 장은중이고, 일본명은 노구치 미노루(野口稔)이며, 귀화 이후 필명은 노구치 가쿠추(野口赫宙)였다. 장혁주는 일반인들에게는 잊힌 작가이지만, 엄청난 열정으로 수많은 작품을 써낸 일제 시기의 유명작가다. 등단하여 해방될 때까지 장혁주는 장편 15편을 포함한 소설 90여 편(조선어 작품 10여 편)을 발표하였으며, 단행본으로 30권 이상을 출판하였다.장혁주는 일본어 글쓰기가 극히 드물던 1930년에 일본어 작품을 일본잡지에 발표하며 등단하였고, 조선어보다 일본어로 훨씬 많은 작품을 창작하였다. ‘문단의 페스토균’(1935)을 통해서 조선 문인들을 실력도 없이 질투나 일삼는 무리들로 매도한 바 있는 그는, 1936년 여름부터는 아예 도쿄로 이주해 버린다. ‘조선의 지식인에게 호소함’(1939)이라는 일본어 논설에서는 조선의 완전한 ‘내지화(일본화)’를 주장하며, 이를 위해 한국인의 단점을 고쳐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이후에도 당국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여러 활동과 ‘이와모토 지원병’(1943)과 같은 국책에 순응하는 작품을 창작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일본에 머물던 그는 1952년에는 일본인으로 귀화해 사망할 때까지 창작활동을 이어갔다.이육사의 인터뷰는 이번에 다루려고 하는 장혁주의 ‘餓鬼道(아귀도)’(가이조, 1932.4.)와 관련해서도 많은 것을 알려준다. 인터뷰는 ‘아귀도’가 수록된 ‘가이조’ 4월호가 “각 서점에서 짐을 풀자마자 전화가 빗발치듯 하고 나는 듯이 팔려 그 다음날부터 절품”이 되었을 정도로 큰 주목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또한 이 무렵의 장혁주는 사회주의 문인으로서의 풍모를 풍긴다. 장혁주의 서재에는 프리체의 ‘예술사회학’과 같은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사회과학 서적이 꽂혀 있으며, 가장 친한 친구로는 경주에서 함께 청년운동을 한 박로아를 들고 있다. 또 다른 글에서 장혁주는 ‘아귀도’를 쓸 무렵에는 “구레하라 고레히토(藏原惟人) 이하의 프로문학제이론의 영향이 외부적으로 졸작을 움직이었다”(‘정독하는 양 대가’, 동아일보, 1935.7.11)고 고백하기도 하였다. 구레하라 고레히토는 NAPF의 이론적 지도자로서 일본의 경향 작가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지닌 비평가였다.장혁주만큼 많은 작품에서 경북 지방을 소설의 배경으로 그린 작가도 드물다. 이것은 그의 개인적인 삶의 내력에서 기인한다. 장혁주 연구의 권위자인 시라카와 유타카 교수에 따르면, 그는 1905년 대구에서 구 한국군 장교를 지낸 아버지와 술집 등을 경영하던 어머니 사이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순탄치 않은 가정 환경으로 어린 시절부터 생모를 따라 경상도 지방을 전전해야 했다. 이후 1926년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상북도 청송국 안덕면립학교의 교원으로 부임하였으며, 1927년에는 경북 예천군 지보면립보통학교의 교원이 돼 1929년 봄까지 머문다.이때의 경험은 예천군 지보면을 배경으로 한 ‘아귀도’를 창작하는 원천이 된 것으로 보인다. 장혁주는 ‘나의 修業時代(수업시대)’(동아일보, 1937.8.13.-15)에서 “예천(醴泉)의 산촌교원을 하면서 거기서의 체험을 기록했다”고 직접적으로 밝히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장혁주는 조선을 그린 대부분의 소설에서 경북 지역을 작품의 배경으로 삼았다. 주로 대구 경북 지방에만 머물다가 서른이 갓 넘은 나이에 일본으로 이주한 장혁주에게는 대구 경북 지방이야말로 자신이 아는 조선의 전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장혁주의 등단작은 1930년 10월 ‘다이치니타쓰’에 발표한 일본어 소설 ‘白楊木(백양목)’이지만, 본격적으로 작가의 이름을 알린 것은 1932년 4월 ‘가이조(改造)’ 현상공모에 ‘아귀도’가 당선된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아귀도’는 경북 예천 지보면을 배경으로 당대 조선의 농민들이 겪는 온갖 시련을 알뜰하게 모아 놓은 일종의 ‘고통 박물관’과도 같은 작품이다.이 작품은 제목이기도 한, ‘아귀도’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적나라한 생존의 막장이 펼쳐진 작품이다. 불교에서 유래한 말인 아귀도는 중생이 머무는 여섯 개의 세계(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아수라도, 인도, 천도) 중 하나로 이곳의 중생은 늘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괴로움을 겪는다. 이 작품에서는 1930년대 경북의 농민들이 겪는 괴로움을 드러내기 위해 단편의 분량 안에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다양하게 담아 놓고 있다. 이러한 과도한 의욕으로 인해 인물들은 뚜렷한 개성이나 심리도 없이 무한고통의 세계에서 신음하고 탄식하는 일종의 중생 차원에서 그려질 뿐이다.농민들의 고통은 두 가지 사건을 계기로 발생하는데, 첫 번째는 가뭄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을 구제한다는 미명하에 벌어지는 저수지 공사장의 비인간적 상황이고, 다른 하나는 소작농의 불합리한 생산조건이다. 공사장에서는 감독과 십장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농민들 몫으로 배정된 알량한 돈을 가로채고, 농민들을 마소 다루듯이 채찍으로 때리기도 한다. 마을의 아녀자들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농사를 짓지만 수확을 해보아야 대부분을 지주에게 빼앗길 뿐이다. 이 와중에 가난과 빚을 감당하지 못해 야반도주하는 농민이 나오고, 풀즙이나 먹던 아이가 좁쌀을 급하게 먹어 급체로 죽는 사건이 발생하고, 칡을 캐러 갔던 부인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비극이 발생한다. 결국 인간 생존의 극한 상황에 몰린 농민들은 자연발생적으로 단결하여 십장과 감독들에게 저항하는 것으로 작품은 끝난다.이 작품은 식민지 조선 현실의 핍진한 재현의 차원을 넘어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실천적 전망을 담아내고자 하는 경향소설로서의 성격도 선명하다. 그것은 이러한 빈궁과 고통을 그대로 감내하는 차원을 벗어나서 뚜렷한 저항의 모습까지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저항의 의식은 매우 선명한 것이어서, 이 작품의 도처에는 너무나 많은 복자(伏字, 검열을 통해 글자를 삭제하고 대신 X와 같은 기호로 표시한 것)로 인해 독해가 불가능한 부분도 여러 곳이다.장혁주는 초창기에 복자로 독해가 어려울 정도의 정치의식이 강렬한 작품을 주로 발표하지만, 이러한 정치의식은 점차 약화된다. 나중에는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모습으로까지 변절한다. 이러한 변모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러한 비극은 작가 장혁주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대타자가 늘 일본이었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아귀도’를 비롯한 경향소설에 가까운 작품을 쓰던 시기는 “일본 문단에서는 프롤레타리아문학이 침체기에 접어 들어가고 있어, 한국 작가의 ‘동반자문학’이 참신하게 보였던 시기”이기도 하다. 장혁주는 이육사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어로 작품을 발표한 이유 중의 하나로 일본 문단에 “조선의 사정을 한번 소개”하려는 것을 들고 있다.소설가 장혁주의 작품집.조선 농민에 대한 장혁주의 천착은 간절한 내적 고뇌와 양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일본 문단의 인정에 목말라 했기 때문은 아닐까. 인간이 견뎌낼 수 없는 고통에서 허우적거리는 동물화 된 조선 농민의 모습은 일본인들에게 흥미로운 이국적 소재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상징적 아버지가 일본(좁게는 일본 문단, 넓게는 일제)인 장혁주이기에, 일본의 요구와 태도가 변화되어 감에 따라 그는 동반자 문학가에서 순수 문학가로, 다시 순수 문학가에서 국책 문학가로 몸을 바꿔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자신을 지탱시켜 나갈 상징적 아버지가 너무나도 미약한 정신적 고아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당대 일본인 작가들이 장혁주를 겁이 많고 나약한 인물로 평가한 것도 한번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해방 이후 장혁주는 친일 행적으로 조국은 물론이고 재일조선인 사회로부터도 배척받았다. 그러나 1997년 별세할 때까지 창작활동은 계속 이어나간다. 흥미로운 것은 말년에 영어로 소설 창작을 시도했고, 실제로 1991년 12월에는 ‘Forlorn Journey’라는 영문 장편소설을 출판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영어 창작이 지니는 의미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경북의 벽촌에서 문학을 시작한 장혁주가 일본보다도 더욱 강력한 아버지를 영어(미국)에서 발견한 것이었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평생 자신을 옥죄던 한글과 일본어라는 굴레(한국과 일본)에서 벗어나 새로운 창작을 꿈꿨던 것이었을까? 장혁주는 해방으로부터 수많은 날이 지난 지금도,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한국문학의 정체와 양심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다.소설가 장혁주는…1905년 대구 출생. 보통학교 교원 등으로 일하다가, 1932년 일본어로 쓴 소설 ‘아귀도’를 시작으로 본격적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농민들의 처참한 실상을 사실감 있게 그려냄으로써 비판적 현실 인식을 보여줬다고 평가받는다. 일본 문단에서 주로 활동했으며, 해방 이후엔 일본인으로 귀화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무지개’, ‘삼곡선’, ‘여명기’, ‘인왕동시대’ 등이 있다.  /문학평론가 이경재

2020-01-27

전통시장 활성화·청년 일자리·신재생 에너지 분야 집중 추진

김천시가 2020년 경자년 새해를 맞아 전통시장, 일자리창출, 에너지관련분야에 공격적인 행정 추진으로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고 있다.시가 역점을 두고 추진하는 지역경제활성화 사업에 대해 알아보고, 그로 인해 변화될 김천의 경쟁력에 대해 살펴봤다.△소상공인이 살아야 지역경제가 산다김천시는 나날이 어려워지는 소상공인들을 위해 다양한 시책을 전개하고 있다. 먼저 김천사랑 상품권 발행규모를 올해 200억원으로 대폭 늘리고, 시민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 오는 7월 모바일 상품권을 본격 출시할 계획이다. 시는 김천사랑 상품권이 지난해 판매 개시 4달만에 30억원이 조기 매진되는 성과를 거둔 만큼 올해도 골목상권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에 올해는 발행규모를 대폭 확대하고, 5만원권 추가 발행, 모바일형 상품 개발 등 공격적으로 사업을 추진한다. 또 지난해 소상공인 특례보증사업이 3개월만에 60억원이 모두 소진됨에 따라 올해는 지난해 대비 160% 상향된 100억원 보증 규모로 확정했다. 소상공인의 경영자금도 개소당 2천만원 범위 내 2년동안 3%의 이자보전 함으로써 지역 골목상권 활성화에 일조하도록 했다.△2020년은 전통시장 활력 기반의 해김천시는 2020년도를 ‘전통시장 활력 기반의 해’로 삼고, 전통시장 공모사업으로 총 사업비 42억2천만원(국비 23억3천만원)을 확보해, 올해부터 지역 상권의 뿌리인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해 평화시장 청년몰 조성 및 황금시장 주차장 조성사업을 시작한다.평화시장 청년몰 조성사업은 2개년도에 걸쳐 사업비 15억원을 투자해 20개 이상 청년몰을 조성해 시장 내 지역순환(가공)센터, 로컬푸드, 로컬직매장 등으로 활용하는 사업이다. 이 사업과 더불어 청년동아리 창작공간, 체류형 게스트하우스 등 공용공간이 추가로 조성되면 청년과 중장년층이 함께 북적북적하는 활기 넘치는 시장으로 거듭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황금시장 주차장 조성사업은 27억원의 예산을 편성해 2개년도 동안 920여평 부지에 주차장 98면을 조성한다. 기존의 협소한 주차장을 보완하고 현대화된 신규 주차장을 설치해 이용객의 편의성을 높여 찾고 싶은 전통시장으로의 변화가 기대된다. 김천시는 이러한 공격적인 사업 준비로 지난해 경북도로부터 지역경제 활성화 부문 최우수 시(市)로 평가받았다.△청년 일자리가 곧 지역의 미래다김천시는 ‘일자리가 곧 지역의 미래’라는 신념으로 일자리 창출에 매진하고 있다. 시는 올해 청년 일자리, 취업취약계층 일자리 사업을 중점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김천시 청년센터’를 설치해 김천시 청년 일자리 사업의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고, 취업취약계층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청년의 취·창업 정보 제공과 다양한 취업 프로그램 운영, 사회적 경제기업 네트워크 구축 등 청년 활동 공간으로 운영될 김천시 청년센터는 구직 청년의 역량강화와 일자리 창출, 취업 극대화를 목표로 지난해 7월부터 (구)김천소방서를 리모델링해 오는 3월 개관을 앞두고 있다. 또 청년스타트업 지원사업은 특성화 고등학교 졸업생 취업률 향상을 위한 취업역량강화 교육, 공공기관 및 기업체 현장 탐방, 직업교육 훈련을 지원한다. 여기에 특성화고교 졸업(예정)자 및 청년 구직자들로 하여금 취업을 위한 초청강의, 집합교육, 지역 우수기업 탐방 등 기업과 구직청년 간 일자리 미스매치 해소를 위한 1사-1청년 더 채용 릴레이 운동도 전개할 방침이다.시는 청년창업과 취업을 지원하기 위한 △도시청년 시골파견제 △청년마을 일자리 뉴딜사업 △청년 CEO 육성사업 △취업지원센터 운영 △중소기업 인턴사원제 사업 △대학생 공공기관 직무체험 지원 △기업 직무체험 지원 △일자리창출 우수기업 근로환경 개선사업비 지원 △일자리 네트워크 협력사업 △지역실업자 직업훈련 사업 등도 지속적으로 지원할 계획이다.사회적 약자를 위한 일자리 사업으로는 △지역공동체 일자리사업 △공공근로 사업 △취업박람회 등 청년뿐만 아니라 전 연령을 위한 사업으로 확대 추진할 예정이다. 추가로 올해 고용노동부 공모사업인 △지역산업 맞춤형 일자리창출 지원사업 △김천시 운송관련 제조분야생산 품질관리자 양성지원사업 △신중년 일자리를 위한 NEW-START 인력양성사업 △START-UP 창업 성공을 위한 희망프로젝트사업 등을 철저히 준비해 신청할 예정이다.민선7기 출범 이후 김천시는 ‘민선7기 일자리대책 종합계획’을 수립해 일자리 비전과 목표인 5대 핵심전략, 20대 전략과제 및 40개 실천과제를 발표했다. 임기 중 1천542억원의 재정을 투입, 매년 6천여개의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5년간 3만개의 공공형 일자리를 창출할 계획이다. 지난해에만 7천109명이 취업해 목표치 대비 116% 웃도는 성과를 거뒀다. 시는 이를 바탕으로 일자리부분 전국 기초자치단체장 매니페스토 우수사례 경진대회 우수상, 경북도 상반기 일자리창출 추진실적 우수상을 수상했다.△신재생에너지로 삶의 방식을 바꾸다김천시는 올해 산업통상자원부 신재생에너지 융복합 공모사업 ‘어모 Eco-Friendly 에너지타운 조성사업’에 선정돼 국비 10억원, 도비 3억원 등 총 22억원의 예산을 확보했다. 안전하고 깨끗한 청정에너지 자립마을 조성을 목표로 하는 이 사업은 태양광·지열·수소연료전지 등 2종 이상의 신재생에너지원을 설치해 마을이나 개별 가구에 공급하게 된다. 이 사업으로 어모면 그린스마트빌리지 외 8개 마을(태양광 167개소, 지열 37개소)이 에너지 자립마을로 거듭나게 될 전망이다. 2008년부터 시행중인 신재생에너지 주택지원사업은 태양광, 태양열, 지열, 소형풍력 등 신재생에너지를 주택에 설치할 때 해당 건물주에게 설치비의 약 60%를 보조하는 사업으로 김천시는 지금까지 총 384가구를 지원했고 2020년에는 10가구를 늘린 61가구를 지원할 계획이다. 시는 신재생에너지설비 부담을 경감하고, 전기료 비용 절감 및 온실가스 배출 감소를 위한 이 사업을 앞으로도 적극 추진할 방침이다. 시의 이러한 노력으로 지난해 경북도가 주최하고 한국에너지공단이 주관한 ‘2019년 경상북도 에너지효율대상’ 공공부문에서 우수상을 수상해 상사업비 5천만원을 받기도 했다.김충섭 김천시장은 “지난해는 민선7기 시정 첫 번째 목표인 일자리· 경제 분야에서 눈부신 성과를 이룬 해로 이는 시민 모두가 시정 운영에 적극 협조한 결과”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2020년은 지역경제 분야 예산이 전년대비 135% 증액 편성되는 등 관련 분야의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한해가 될 것”이라며 “철저하고 적극적인 시책 추진을 통해 상권이 살아나고 지역이 살아나는 활력 넘치는 경제 도시로 성장하도록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강조했다.김천/나채복기자 ncb7737@kbmaeil.com

2020-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