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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분홍으로 물든 천년고도에는

나는 봄에 떠났다가 겨울이 되기 전에 돌아오고 싶었다. 봄과 여름 동안 경북 바닷길 537km를 부지런히 걸었다. 물길에 잠겨 걷고, 바람길에 두 발이 붕 떠 날면서, 수평선에 불을 지르는 석양과 푸르스름한 별들의 자맥질을 향해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다시 울진에서 영덕, 포항을 통과해 경주로 들어서려는 순간, 뺨에 닿는 공기가 얼음을 흉내 내고 있음을 알았다. 차가운 대기 속에서 나는 계절이 바뀌듯 나도 어딘지 달라졌음을, 소리 없지만 분명한 변화가 내 안에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무엇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아직 모르는 채,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멀지 않았다는 서늘한 사실만을 피부로 느끼면서, 걸음을 재촉했다.아까시가 피고 지고, 장미가 피고 지고, 수국이 피고 지고, 장마와 태풍이 지나가고, 거리에 은행잎이 수북이 쌓이는 동안 몇 사람을 만났고, 몇 사람과 헤어졌다. 사람이 들어왔다가 나간 마음의 방은 이제 텅 비어,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긴 겨울을 기다리고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길은 열리고, 여행을 멈추는 순간 또 다른 여행이 이미 시작되는 법인데, 마음에는 작은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괜찮다. 지난 계절, 경북 바닷길을 혼자 누비면서 나는 자연과 끊임없이 교감했으며, 사람이 줄 수 없는 위로와 감동을 신라의 푸른 길 위에서 얻었기 때문이다.“갈수록, 일월(日月)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포항 양포를 지나 동해의 푸른 해안선을 왼쪽 옆구리에 낀 채 경주로 가는 길, 정현종 시인의 시 ‘견딜 수 없네’를 외우며 하늘과 바다를 한참 바라보았다. 불과 6개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있었던 “변화와 아픔들”을 생각했다. “흐르고 변하는 것들”과 “아프고 아픈 것들”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저 하늘과 바다가 나를 안아주었다. 이제는 저 파도와도, 저 수평선과도 헤어져야 할 때, 여행을 마치기 위한 여행이 막 시작되는 중이었다.마음이 허전하면 몸도 헛헛해진다. 허기를 달래기 위해 경주에 도착하자마자 찾은 곳은 월성 서쪽, 교동의 ‘교리김밥’이다. 경주의 식당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다. 전국 각지에서 온 손님들로 늘 문전성시를 이룬다. 메뉴는 오직 김밥과 잔치국수 뿐. 김밥 두 줄과 잔치국수 한 그릇을 주문했다. 이 집 김밥의 특징은 달걀지단이 잔뜩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소하고 은은한 단맛이 느껴진다. 씹을 때마다 보들보들하고 푹신한 식감이 입 안에 퍼진다. 화려하진 않지만 은근히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잔치국수는 본연의 맛에 충실하다. 아, 이 반가운 것!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 이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백석‘국수’) 앞에서 나는 새벽기도 드리는 신자의 둥근 등처럼 바짝 엎드리고 싶어졌다. 배고픔이 해소되니 마음의 허전함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언제 상념에 빠졌었냐는 듯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나라는 인간이 이토록 단순하다. 아니다. 김밥과 국수가 그만큼 힘이 세다.오후 두시는 햇살이 가장 너르게 퍼지는 시간, 이맘때의 날빛에는 온화하면서도 쓸쓸한 표정이 있다. 그 표정은, 뜨겁게 사랑했다가 그 정념 오래 전에 다 식고, 추억으로만 남은 옛 연인을 바라보는 이의 눈빛처럼 아련하고 애틋하다. 그래서 이 계절의 햇살 속을 걷는 것은 추억과 그리움의 이정표들을 따라 내 마음의 풍경들을 들여다보는, 내면으로의 여행이다. 지난날 함께 경주에 가자며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했던 사람은 곁에 없고, 그 새끼손가락의 감촉만 손 끝에 하얗게 남아 있는 가을 오후, 나는 추억을 향해 속력을 더 내기로 했다. 걷는 대신 탈것을 이용하는 편이 낫다. 보문관광단지 앞에는 전동스쿠터와 자전거, 4륜 바이크 등을 대여해주는 상점이 즐비하다. 전동스쿠터 한 대를 빌렸다. 전기로 움직이기 때문에 소음 없이 달리고, 제법 빠르기도 해 운전하는 재미가 쏠쏠했다.전동스쿠터를 타고 선덕여왕 공원으로 달렸다. 선덕여왕 공원이 있는 보문호수변은 지금 분홍색 축제가 한창이다. 핑크뮬리 갈대밭이 꽃차례를 하는 시절, 핑크뮬리와 울긋불긋한 단풍과 은빛 물결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색채의 콘서트가 열린 것이다. 선덕여왕 공원에는 수많은 연인들이 인생의 핑크빛 한 철을 만끽하고 있었다. 지금이 다시없을 순간이라는 듯이. 그 마음들을 아는지 핑크뮬리는 기꺼이, 폭죽처럼 터지는 소중한 웃음들의 배경이 되어주었다. 연인들의 두 뺨도, 하늘도 모두 분홍색으로 곱게 물들어 있었다.하지만 가을해는 지나치게 빨리 진다. 오후 다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도 사위가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주를 걷는 사람의 마음은 날이 저물어도 캄캄해지는 법이 없다. 경주는 신라의 천년 보석, 밤에 더 찬란한 ‘빛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석양과 어스름이 신비한 빛을 내는 저녁, 첨성대를 찾았다. 1300년 전 사람들이 별을 관측하고 우주를 가늠하기 위해 세운 탑,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다. 첨성대를 통해 신라 사람들은 해와 달과 별을 관측하고, 우주의 섭리를 학습하며, 국가의 길흉화복을 점쳤다. 우주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곧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이기도 해서, 신라인들은 인간은 소우주고 자연은 대우주라는 사실을, 미물에도 우주가 깃들어있다는 것을 일찍이 깨우쳤다. 그래서 그들은 육체가 죽어도 영혼은 하늘에 올라가 우주에 편입된다고, 해 달 별 바람 비 천둥 번개 흙으로 영원히 산다고 믿었다. 천문대는 첨성대인 동시에 제단(祭壇)이었던 것이다.첨성대에서 동궁, 월지까지 걸었다. 밤공기는 차갑고 신라의 불빛은 따뜻했다. 월지의 물거울 속에서 동궁은 금관처럼 화려한 빛을 뿜으며 일렁였다. 야경에 매혹된 사람들이 연못 주변을 빙빙 돌고 있었다. 지난봄에는 축제의 들뜸이 가득했는데, 늦가을 동궁과 월지에는 고요한 아름다움만 남았다. ‘가을이 저물어가는구나. 저 불빛들도 “시간의 모든 흔적들”이자 “그림자들”이자 “상흔”이 아닌가?’ 어떤 사람들은 연인과의 헤어짐처럼 계절과도 이별한다. 나도 그렇다. 가을을 보내는 마음이 애처롭다. 첫눈이 내리고 긴 겨울이 시작되면 오래된 사진을 펼쳐 보듯 가을밤 경주의 불빛들, 그 쓸쓸한 표정들을 오래토록 추억할 것이다.황리단길의 휘황찬란한 불빛들 속에서도 나는 색이 바란 은행나무 낙엽을 보았다. 거리는 깨끗했지만 마음속에서 자꾸 바스락 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황오동 ‘진가네 대구갈비’까지 걸었다. 이 집의 매운돼지갈비찜은 찬바람이 불 때 먹어야 제 맛이다. 양은냄비에 담긴 돼지갈비를 한 젓가락 집어 입에 넣고 우물거리면 입 안에 단풍이 든다. 화끈거리는 매운맛에 몸에서 열이 오르는 순간, 콧물인지 눈물인지 뭉클한 것이 갈비찜과 함께 쑥 목구멍으로 넘어간다.또 한해를 살았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스스로가 대견하다. 세상은 어수선하고 캄캄하지만 나는 여전히 저 불빛들처럼, 내 생을 온몸으로 태우며 멋지게 살아 있다. 세상이 자주 멈추고, 때로 후퇴하더라도 나는 끝없이 움직이고, 나아가야 한다. 올해는 다 가지 않았고, 내게는 아직 더 걸어가야 할 경북 동해의 바닷길, 영원으로 가는 신라의 푸른 길이 남아 있다. ‘그러니 다시 걷자. 발끝이 파랗게 물드는 저 길 위로 다시 나를 데리고 가자.’ 식당에서 나오니 경주의 불빛들이 아련한 눈시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인 이병철

2019-11-10

함께할 수 있음에 행복한 세상 가장 소중한 ‘가족’

어머니의 남자 - 고운기섣달 그믐밤 잠깐 정신이 들었을 때어머니는큰오빠가 가자한다고 또렷이 말했다누구 오빠?우리 큰오빠…여동생이 한 번 더 물었어도 같은 말을 했다기쁜 듯의기소침한 듯어떤 제삿날이었을까묵묵히 지방을 써주고 가던방 어두운 한 구석의 사내를나 또한 어렴풋이 기억한다마흔 갓 넘기었나,어머니의 큰오빠 나의 큰 외숙부는전쟁통에 홀로 된 여동생의 안부를지방 써주는 날에 와서 확인하던 것인데나는 이승에서 그의 모습이그날 단 한 번으로 가물거릴 뿐이다친정아버지도 아니고아이 둘씩 낳아준 두 남자도 아니고눈이 팔팔 내리던정월 초하룻날 새벽길 걸어 와어머니를 데리고 간 남자는큰 외숙부였으리라 믿고 있다.- 톤레삽 호수에서 만난 의좋은 남매는…사진에 찍힌 남매를 만난 건 몇 해 전 캄보디아 여행에서였다.빛나는 크메르의 유적 앙코르와트가 있는 도시 씨엠립. ‘무너지고 망가진 폐허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역설적 사실을 보여주는 그곳에서 7일을 묵었다.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약한 마지막 날. 일행의 권유로 아시아에서 가장 크다는 ‘톤레삽 호수’를 찾았다. 시내에서 출발해 붉은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 길을 1시간 남짓 달렸다. 창문이 없는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호수 초입엔 허름하고 낡은 목선 수십 척이 북미와 유럽, 한국과 중국에서 온 관광객들을 태우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기자가 오래 전 본 우리나라 1970년대처럼 빈한한 시골 풍광.‘톤레삽 호수 투어’를 위해 20달러를 지불한 여행자들이 각자에게 배정된 배에 올랐다. 그때였다. 채 10살이 돼 보이지 않는 어린 남매가 나타난 것은.▲ 열 살 누나를 돕던 예닐곱 살 어린 꼬마는투어를 함께 하게 된 일행 중엔 2m 가까운 키에 100kg이 넘어 보이는 네덜란드 대학생이 있었다.그런데, 이건 뭐지? 1m쯤 되는 키에 30kg이 될까, 말까…. 조그만 여자아이가 그 유럽 거구의 손을 붙잡고는 “조심해서 건너세요”라며 승선을 돕고 있었다. 누가 봐도 우스꽝스런 풍경. 그 꼬마숙녀는 기자의 손도 잡아주며 배에 오르는 걸 거들었다. 기자 역시 183cm에 90kg. 손바닥만한 거리를 널빤지에서 배로 뛰어오르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누가 있어 감히 조그만 손이 내미는 권유를 마다할 수 있을까. 그 와중에 잠시 밀려든 물결이 출렁, 허술한 목선이 흔들렸다. 이때 나타난 남자애 하나가 누나의 허리를 잡아준다. 겨우 예닐곱 살이나 됐을까? 동생을 바라보는 어린 누이의 눈망울이 터무니없이 맑아서 슬퍼 보였다.남매는 10명이 넘는 우리 일행 모두를 안전하게(?) 승선시키고는 고물(배의 뒤쪽)에 나란히 앉았다. 동정이나 연민 따위는 이미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둘을 보니 이상스레 가슴이 울컥했다.“무슨 사연이 있어 저러고 사는 걸까?”그 순간 동시에 떠오른 시 한 편이 있으니 고운기(58) 시인의 절창 ‘어머니의 남자’였다. 이런 문장이다.▲ 이성적 잣대로 해석 불가한 누이와 오빠의 관계고운기의 시가 그려내는 풍경을 요약하면 이렇다. 죽음을 눈앞에 둔 엄마. 아들은 임종을 위해 집을 찾았다. 그런데 위독한 모친은 부모도, 자식도 아닌 오빠를 가장 먼저 찾는다. 마지막 생의 순간에.아들은 ‘엄마의 오빠’, 즉 자신의 외숙부를 긴 세월 저편에서 겨우겨우 기억해낸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젊어서 홀로 된 여동생을 찾아와 제사 때마다 서러운 필체로 지방(紙榜)을 써주고는 구석에 앉아 말이 없던 사내. 그 사내의 ‘말없음’을 이제는 이해하게 된 아들. 그걸 먹먹하게 지켜보는 식구들.피를 나눠 가진 누나와 남동생, 오빠와 여동생의 서로를 향한 애틋함. 그걸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단어로 온전히 표현할 수 있을까? 그래서다. 이런 문장으로 시가 끝나는 것은.‘친정아버지도 아니고/아이 둘씩 낳아준 두 남자도 아니고//눈이 팔팔 내리던/정월 초하룻날 새벽길 걸어 와/어머니를 데리고 간 남자는/큰 외숙부였으리라 믿고 있다’.이미 죽은 오빠가 이제 곧 저승에서 만날 여동생의 마지막 길을 포근하게 안아주는 풍경. 아버지도 남편도 해주지 못한 일을 거뜬히 해내는 이름 ‘오빠’.이 시가 주는 울림이 깊고도 큰 것은 바로 이런 ‘새로운 시선’ 때문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합리적 잣대로 해석 불가한 피를 나눈 누이와 오빠남매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실체로 확인한 적은 또 있다. 인도 남부 도시 마이소르의 시끌벅적한 시장통에서다.유럽에서 왔다는 20대 관광객 네댓 명이 예쁘장한 인도 소녀에게 농담을 걸며 사진을 찍자고 하고 있었다. 부끄러워 자신이 할 말을 다하지는 못했지만, 서툰 영어로 싫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표시하는 소녀. 그걸 바라보며 재밌다는 듯 웃는 백인 청년들.소녀의 오빠로 추정되는 17~18세 소년이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자기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사내들 가운데로 나서며 “꺼져!”라고 일갈하는 ‘소년 오빠’의 눈빛에서 살의가 번득이고 있었다.외국인에게 한없이 친절한 인도 사람에게서 그처럼 무서운 기운을 느낀 건 그 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기세에 눌려 소녀 곁에 있던 청년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기자가 보기에도 오빠에게 총이나 칼이 없는 게 다행이다 싶었다.상황이 정리되자 여동생의 손을 잡고는 거리 저편으로 총총히 걸어가는 오빠의 등이 세상 무엇보다 든든해 보였다. 하이에나 무리에게서 새끼를 구한 수컷 사자 같았다.▲ 세상 가장 소중한 친구는 바로 남매가 아닐지몇 해 전에도 한 장의 사진이 우리의 눈시울을 붉게 만든 적이 있다. 저 먼 곳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군인들이 마구잡이로 쏘아댄 총탄에 조그맣고 가난한 마을이 쑥대밭이 됐다.신발도 신지 못한 3~4살 여자 아기가 폭음에 질려 잔뜩 웅크리고 있는데, 그 역시 고작 6~7살로 보이는 남자 아이가 웅크린 여동생의 어깨와 등을 꽉 끌어안고 있는 모습.카메라는 자신이 먼저 총에 맞아도 좋다는 어린 소년의 처연한 눈빛을 담아내고 있었다. 여러 말이 필요 있을까. 그는 분명 오빠였을 터.“세상이 주는 고통과 서러움을 함께 나누라고 신은 자매와 형제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서술엔 무신론자도 감동시키는 힘이 담겼다.때론 곁에 있는 오빠와 여동생, 형과 누나가 밉거나 싫어질 때가 있다. 사람이란 게 그렇고, 기자 또한 그렇다. 그럴 때면 위의 사진을 보며 마음을 바꾼다. 서로를 아끼고 위해주기에도 인간의 삶은 짧다. 그게 형제와 자매라면 더 말해 무엇할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11-07

가벼운 주머니 넉넉하게 만드는 기분좋은 한 끼를 찾다

60년을 한결같이… ‘몰랑몰랑’ 식감의 유희할매손두부두부는 만들기 쉽다. 어린 시절부터 집에서 두부 만드는 걸 봤다. 따라 만든다. 두부는 만들기 쉽다. 두부는 만들기는 어렵다. 상당 부분 기계화가 되었지만, 여전히 두부를 만드는 일은 힘겹다. 음식 만드는 최고의 공력은 꾸준함이다. 두부 만드는 최고의 레시피는 ‘알고 있는 대로, 꾸준히’다. 두붓집 역사 60년, 쉽지 않다.상주 함창버스터미널 앞 작은 골목 안에 ‘할매손두부’가 있다. 창업주에 이어 며느리 신복순 씨 부부가 두붓집을 운영하고 있다. 여름에는 일주일에 두 번, 겨울에는 일주일에 세 번 두부를 만든다. ‘한 번에 서른다섯 모 정도’ 만든다.수제 두부는 단면이 거칠다. 입에 넣어보면, 콩의 달짝지근한 맛이 살아 있다. 콩이 좋은 계절은 12월부터다. 겨울철에는 두부의 비릿한 콩 맛이 살아 있다.시골 손두부는 딱딱, 퍽퍽하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잘 만든 두부는 몰랑몰랑하고 부드럽다. ‘할매손두부’는 퍽퍽한 듯 보이지만 입에 넣으면 입자가 부드럽게 펼쳐진다.산초두부구이도 반드시 맛봐야 할 아이템. 산초의 은은한 향을 제대로 살린 두부구이다. 산초 채취가 힘들어지고, 산초 기름 가격이 급등하면서 산초 두부구이는 사라졌다. 산초의 향을 과하지 않고 은은하게 살렸다.된장찌개는 과하지 않은 곰삭은 맛과 구수함이 두루 좋다. 반찬 중에는 북어 껍질 조림도 아주 좋다. 북어 껍질의 파삭한 질감이 잘 살아 있다.놀라운 부분은 이 집의 기명(器皿). 사기그릇을 사용한다. 사기그릇은 무겁고 잘 깨진다. 웬만한 식당들은 멜라닌 그릇이다. 가격이 높지 않은 대중식당에서 사기그릇을 사용하기는 쉽지 않다. 정갈한 반찬들을 정갈한 그릇에 담았다. 손님들을 귀하게 여기는 주인 부부의 마음 씀씀이를 그대로 드러낸다.업력 60년 가볍지 않다. 2013년 무렵 선대 창업주가 돌아가셨다. 현재 주인 부부의 업력도 20년이다. 가볍지 않은 세월. 묵묵히 두부를 만들고 있다. 두부, 누구나 만들 수 있지만, 누구도 제대로 만들기는 어렵다. 작은 읍내에 숨어 있는 보석 같은 집이다.메뉴 단 하나… 소박하고 동화같은 가게꽃들추어탕가게에 들어서면 왠지 기분이 좋다. 깔끔하다. 손님을 대하는 주방 주인, 홀에서 음식을 나르는 이들이 마치 동화 속의 인물들 같다. 한결같이 부드럽게 웃는다. 가게 이름부터 ‘동화’스럽다. ‘꽃들추어탕’. 미꾸라지가 ‘들판의 꽃’이다.멀고 가까운 논배미, 개울, 크고 작은 웅덩이, 들판에서 미꾸라지를 잡는다. 직접 잡은 미꾸라지로만 추어탕을 끓인다. 가게가 문을 닫는 날, 부부가 직접 미꾸라지를 잡으러 길을 나선다. 들판 여기저기 통발을 놓고 미꾸라지를 기다린다. 하루 80그릇 한정. 더러 오후 나절에 준비한 미꾸라지가 부족해서 손님을 돌려보낸 적도 있다. 준비한 물량이 소진되면 문을 닫는다. 가게 입구에는 손님들이 기다리는 ‘대기실(?)’ 공간도 있다.미꾸라지를 곱게 갈아서, 채소 등을 넣고 끓인, 이른바, ‘갈추’다. 추어탕과 반찬들에 일체의 조미료, 감미료를 사용하지 않는다.부부가 모두 요리사다. 오래전부터 음식 만드는 일을 하다가 처음 문을 연 ‘내 가게’다. 위생, 맛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가격도 낮다. 메뉴는 딸랑 하나다. ‘꽃들추어탕 8,000원’ 원산지 표기도 재미있다. 단순히 국산, 국내산이라고 하지 않는다. 쌀은 함창, 고춧가루는 영양, 제피(초피, 산초가루)는 상주, 문경 등으로 상세히 표기한다. 모두 인근 지역들이다. 소박하고 동화 같은 가게다.‘2천500원의 행복’ 질리지 않는 집밥같은 맛남천식당숫자 몇 개로 이 가게를 설명한다. 1936년. 이 자그마한 식당이 문을 연 시기다. 시장통.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이른 아침의 한 끼 식사. 우거지 국밥이었을 것이다. 2천500원. 2019년 현재, ‘남천식당’의 우거지 국밥 가격이다. 메뉴도 딸랑 한 가지, 우거지 국밥뿐이다. 벽에 붙은 메뉴판에는 ‘해장국 2,500원’이라고 써 붙였다.해장국은, 기능성을 강조한 이름이다. ‘해장 국물’이라는 뜻이다. 재료를 이야기하면 우거지 국밥, 시래기 국밥이다. 곱빼기, 500원 더 받는다. 3천 원. ‘막걸리 1천 원’도 재미있다. 잔술이다. 막걸리를 한잔 가득 주고 1천 원이다. 이것뿐이다.문 입구에 “그동안 수천만 명이 다녀갔다”고 써 붙였다. 실제 그러했을 것이다.모녀가 운영한다. 어머니는 연세가 많다. 인근 시장 상인들 혹은 농민들이 각종 채소를 들고 찾는다. 무청 우거지, 배추 우거지, 근대 등을 가져온다. 이런저런 채소를 다듬는 것은 어머니의 몫이다. 2대째인 어머니가 언제부터 일하셨는지 물어봤다. “박정희 대통령, 윤보선 씨가 대통령 선거하던 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1963년 무렵이다. 3대 전승. 창업주, 어머니, 딸로 연결되었다.가격이 낮다고 해서 얕볼 집은 아니다. 국물이 맑으면서도 슴슴하다. 좋은 장을 사용하고, 내용물을 잘 만졌다. 우문현답. “어떤 채소를 사용하느냐?”는 ‘어리석은 질문’에 “이것도 쓰고 저것도 쓰고”라는 현답이 돌아온다. 한 가지 채소를 사용하지 않고 이것저것 섞어서 사용한다.채소는 부드러우면서도 씹히는 맛이 살아 있다. 국물은 맑고 시원하다. 수수하다. 매일, 매 끼니 먹어도 질리지 않을 ‘집밥’ 같은 맛이다.오래된, 널리 알려진 집들‘청자회관’은 이름과는 달리 중식당이다. 상주 외곽의 국도변. 바깥은 작지만, 내부는 상당히 넓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식당이다. 부자 2대 전승. 짬뽕밥을 주문하는 사람이 많다. 점심시간에는 기다려야 한다.‘고려분식’은 시내 시장통의 분식집이다. 매운맛의 꼬마김밥과 군만두가 유명하다. 군만두라고 부르지만 튀김만두다. 50년의 업력이다.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분식집이다.‘부흥식육식당’은 석쇠 돼지불고기 전문점이다. 3대 전승. 외부에 간판이 없는 특이한 집이다. 상주시와 공검면 사이 국도변 깊은 뒷길에 있다. 소금구이와 양념구이 두 종류가 있다. 양념구이는 단맛이 강하다.새롭게 문을 연 맛집 2곳뽕잎의 다양한 변신두락‘두락’은 상주의 농가맛집이다. 주인이 한방에 조예가 깊다. 한방 내용을 따라 밥상을 구성했다. 상주는 ‘농잠(農蠶)’이 번성했던 지역이다. 뽕나무, 누에치기가 한때는 번성했다. 단품으로는 뽕잎을 넣은 ‘뽕잎돌솥밥’이 이 집의 주력 메뉴다. 이외에도 ‘뽕잎대보탕’이나 ‘두락뽕잎밥상’도 있다.밥상의 반찬들은 종류가 그리 많지 않다. 많지 않은 반찬 중 몇 개가 눈에 띈다. 널리 사용하지 않는 식재료들이다. 대표적인 것이 뽕잎.‘상추 줄기 무침’도 특이하다. 상추는 흔하게 사용하는 식재료다. 늦여름부터 잎은 작아지고 대는 굵고 뻑뻑해진다. 상춧잎의 맛도 한결 쓰다. 먹기 힘든 시기다. 이때쯤이면 상추를 통째로 뽑아낸다. ‘두락’의 상추 줄기 무침은 늦여름, 가을의 억센 상추대로 만든 반찬이다. 예약하는 것이 좋다.낙동강변서 받아보는 조선시대 밥상시의전서‘시의전서’는 낙동보 언저리에 있는 한식집이다. ‘시의전서’는 조선 말기 상주 지방에서 발견된 요리 서적 ‘시의전서(是議全書)’에서 따온 것이다. 저자 미상의 ‘시의전서’는 1910년대 상주 군수로 일했던 심환진이 필사본으로 남겼다. 필사본이 상주 군청에서 사용한 편면괘지(片面罫紙), 모필인 것이 상주와의 인연이다.‘시의전서’에는 처음으로 ‘골동반(骨董飯)=부븸밥’ 표기가 나타난다. 비빔밥은 ‘혼돈반(混沌飯)’ 혹은 골동반으로 표기했다. 그 이전에도 한글로 ‘부븸밥’으로 불렀을 것이다. 글로 남길 때는 ‘骨董飯(골동반)’이었다. ‘시의전서’에, 지금까지 발견된 책 중에는, 처음으로 한글 표기 ‘부븸밥’이 나타난다.식당 ‘시의전서’에도 비빔밥 메뉴가 있다. 떡갈비, 갈비 등을 주제로 한 밥상도 가능하다. 문을 열면 낙동강이 보이는 곳의 한옥이다. 실내는 개별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음식평론가 황광해

2019-11-06

안전·편리·경제성 집중… 영남권 제1항공사 자리잡게 했다

□ 12년간 에어부산이 걸어온 길에어부산은 지난 2007년 8월, 부산시와 부산 지역 상공계가 힘을 합쳐 부산국제항공으로 처음 출범했다. 이후 2008년 2월, 아시아나항공의 대주주 참여를 통해 에어부산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재출범했다. 에어부산은 지역의 항공교통 편의 증진과 일자리 창출, 그리고 지역 관광 활성화를 목표로 2008년 10월 27일, 부산∼김포 노선으로 첫 취항했다. 당시 항공기 2대, 임직원 수는 100명이 채 되지 않는 항공사였다. 포항의 지역항공사였던 에어포항과 비슷한 규모였다. 하지만 취항 초부터 일관되게 회사의 핵심가치인 안전성·편리성·경제성을 잘 지켜가며 운영해온 결과, 2019년 현재 26대의 항공기, 국내외 39개 노선, 1천400명이 넘는 임직원이 근무하는 LCC 대표 항공사로 거듭났다. 특히 취항 첫해인 2008년 김해국제공항 전체 이용객 점유율이 1.4%에 불과했지만 6년 만인 2014년에 점유율 34.5%를 기록하며 대형 항공사를 제치고 김해국제공항 이용객 1위 항공사로 등극했다. 현재는 김해공항과 대구공항에서 총 32%의 이용객 점유율을 차지해 명실상부 영남권 제1항공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부산 하늘길 확장의 일등공신, 에어부산지역의 항공 교통 편의 증진을 사명으로 출범한 에어부산은 2008년 부산∼김포 노선 취항 후 지속적으로 지역의 하늘길을 넓혀왔으며, 현재 김해공항을 이용하는 승객 중 가장 많은 승객이 에어부산을 이용하고 있다. 불과 수년 전만 해도 부산에서는 가까운 해외 지역의 직항 노선이 없어 인천공항까지 가서 항공편을 이용해야만 했다. 일반대중교통수단은 수도권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였지만 유독 항공편만은 인천공항과 김포공항에 비해 노선 수나 운항횟수가 매우 적었다. 이러한 열세는 지역민들이 인천공항까지 갈 수밖에 없게 만들어 불필요한 시간과 비용 가중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는 것이 에어부산의 설립 목적 중 또다른 한 가지였다.에어부산은 현재 국내 7개, 국제 32개 등 총 39개 노선을 운항하고 있다. 초창기 당시에는 인기 노선이 아니었던 부산∼타이베이, 부산∼마카오 노선 등 신규 노선을 발굴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며 현재와 같은 인기 노선으로 만들었다. 또한 기존 대형항공사의 인천발 독점 노선이었던 몽골 울란바토르 노선에 어렵게 진입해 승객들의 선택폭을 넓혔으며, 대만 가오슝, 중국 시안 노선 등 부산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노선도 적극적으로 개발·취항해 새로운 여행 수요를 창출했다.한국공항공사의 항공 통계 자료에 따르면 2018년 김해국제공항 전체 이용객은 약 1천700만 명으로 본격적으로 이용객 수가 증가한 2010년과 비교해 약 900만 명이 증가했다. 지난해 에어부산의 이용객은 600만여 명으로 2010년 대비 약 400만 명 증가했다. 김해공항 이용객 증가분의 절반 수준인 44% 이상을 담당하며 김해공항 전체 이용객 증가를 이끈 것이다.특히 에어부산이 국제선을 첫 취항한 2010년 이후의 전체 이용객 수 증가 추이와 김해국제공항 전체 이용객 수의 증가 추이가 같은 증가폭을 보이는 점을 감안해보면, 김해국제공항의 이용객 및 항공수요 증대의 일등공신이 바로 에어부산임을 알 수 있다.□ 에어부산의 성공 비결에어부산에는 독특한 이벤트도 있다. 7년째 ‘웃음 전용기’행사를 벌이고 있기 때문. 이는 사우스웨스트의 직원 및 고객들의 웃음 유도 이벤트와도 흡사 닮아있다.올해는 코미디언 변기수와 오나미가 일일 승무원으로서 참여해 기내 분위기를 더욱 따뜻하게 만들었다.이 행사는 매년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의 시작을 알리는 에어부산의 대표적인 행사이기도 하다. 코미디언들의 유쾌한 입담과 기내방송을 진행하며 이용객들의 웃음을 자아내 ‘타면 즐거운’ 에어부산의 이미지 창출에도 기여를 하고 있다.음료 제공과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 공연 관람 티켓 증정, 에어부산 굿즈 등 경품 추첨 이벤트도 에어부산에서만 이뤄지는 진풍경이다. 에어부산의 승무원들이 직접 야구장에 등장해 시구를 하는 행사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야구 경기 관람시 주의해야 하는 사항을 평소 기내 안전방송을 하듯이 안내하는 색다른 장면도 연출됐다.지역민들과 소통하는 퍼포먼스의 개발을 통해 에어부산을 알림과 동시에, 향후 국내외 노선 개척시 잠재 이용고객을 미리 선점하는 기대효과도 예상하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마케팅 효과가 에어부산의 탑승 자체의 매력을 전달해 이용객들로부터의 좋은 반응도 얻고 있다.국토교통부와 한국교통연구원의 ‘2018년 항공교통서비스 평가’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에어부산은 ‘예약 및 발권의 용이성’과 ‘탑승 수속의 용이성’, ‘정보제공의 적절성’에서 높은 만족도를 보이며 이용자 만족도 1위에 올라섰다.이러한 성과와 더불어, 에어부산은 부산지역 사람들의 애향심을 크게 자극하는 이미지인 ‘부산 갈매기’모양을 로고로 사용해 일명 ‘끼룩이네’라는 애칭으로도 불리고 있다.“항공사 규모·조건 맞는 틈새노선 발굴 중요해”인터뷰 ▶▶ 박진우 에어부산 홍보팀 과장-에어부산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부탁드린다.△에어부산은 지난 2007년 부산국제항공으로 창립됐다. 부산시와 부산상공계 기업체들이 십시일반해 투자금을 모아 시작했다. 특히 신정택 전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이 에어부산의 산파 역할을 함과 동시에 부산시와의 가교 역할, 아시아나 기업 유치 등 혁혁한 도움을 주셨다. 사우스웨스트의 ‘허브 켈러허’와 비슷한 역할을 하셨다. 이후 2008년 2월 아시아나가 대주주로 참여했고 이때 ‘에어부산’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같은해 10월 비행기 2대로 부산∼김포 노선을 취항하면서 오늘날까지 이르렀다.-LCC 항공사 운영의 애로사항은.△LCC가 안전하지 않다는 막연한 인식을 타파하는 것이 선행 과제였다. 이에 안전 관련 투자에 초기 역량을 집중했다. 기존 대형항공사로부터 견제도 만만치 않았다. 영업과 계약부분 등 지역 여행사들이 에어부산과의 관계를 가까이 하지 않도록 하는 ‘텃세’가 존재했다. 또한 운항승무원을 채용해 양성하면 일부를 대형항공사에서 빼가기도 했다.-에어부산을 자랑한다면.△가장 안전한 항공사이자 정부로부터도 가장 좋은 평가를 받는 LCC 항공사가 ‘에어부산’이라고 자부한다. 국내 3대 서비스 평가기관에서도 LCC 중 유일하게 최고 7년 연속 등 1위를 계속 선점하고 있다. 안전에서도 검증됐고 지역에서도 사랑받고 있는 항공브랜드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특히 부산지역 젊은이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에도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일반사무직 인원의 70%가 지역 출신으로 구성돼 있고 올해로 12년째인 에어부산은 직원수 기준으로 부산 기업 중 6위를 차지할 정도로 지역경기 활성화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포항 거점 LCC 항공사 설립을 위해 조언을 한다면.△에어부산은 2014년부터 대한항공을 제치고 김해공항 점유율 1위로 올라섰다. 이 과정도 그리 녹록하지는 않았다. 우리 역시 대형항공사뿐만 아니라 KTX·SRT 등과도 경쟁해야 했다. 이에 출장 수요가 많은 점에 착안해 신속하면서도 안전에 대한 신뢰도를 확보하는 것에 주력했다.항공사는 또한 자본금이 든든하게 받쳐줘야 하는데, 포항에서도 주요 대기업·중소기업들이 십시일반해 지역 하늘길 창출에 도움을 주는 방식도 고려될 필요가 있다. 넉넉한 자본금은 곧 안전과 서비스로의 투자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국토부에서도 최근 신규 LCC 항공사 면허 발급시에도 자본금 헤드라인을 따로 정해놓은 것으로 알고 있다.-지역항공사 설립을 준비하는 포항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각 지역에 맞는 항공사는 그 존재가치가 분명하다. 유럽의 경우, 소형항공기를 운항하는 지역항공사가 많이 있다. 포항지역에 맞는 노선을 우선 검토해야 하고, 울릉공항이 신설되는 것을 대비해 울릉 노선도 고려해 볼만하다. 무조건 특정 노선을 고집하기보단 항공사 규모와 조건에 맞는 틈새노선을 발굴해 특색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황영우기자 hyw@kbmaeil.com

2019-11-06

적요하게 흐르는 강의 호흡을 따라 기암절벽 위서 부르는 ‘상주별곡’

아찔한 절벽은 ‘삼국지’의 제갈공명이 수십 만 위나라 병사들과 맞섰다는 적벽(赤壁)과 닮았고, 울울창창 늙은 소나무 군락은 조선 선비의 지조를 보여주듯 푸르게 꼿꼿했다. 상주 경천대(擎天臺)와 마주선 첫 느낌이었다.이곳 경치에 매료된 옛 문인들은 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무우정(舞雩亭)에 올라 “경천대야말로 낙동 제1경이로다”라며 감탄했다고 한다.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3분쯤 걸으면 바로 그 무우정과 만날 수 있다. 푸른 솔숲이 호위하듯 들어선 이곳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간 소현세자를 수행한 우담 채득기(1605~1646)가 은거하며 책을 읽던 장소. 사벌면 경천로 낙동강변에 자리한 경천대 주위엔 볼거리가 적지 않다.8.5m 높이에서 굵은 물줄기가 시원스레 떨어지는 인공폭포와 TV 드라마 ‘상도’가 촬영됐던 세트장에는 어린애들의 손을 잡은 젊은 부부 관광객이 적지 않았다. 전투 체험이 가능한 ‘밀리터리 테마파크’도 인기가 좋다.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경천대에 왔으니 무지산(159m) 꼭대기에 들어선 전망대를 빼놓을 수 없다. 그곳에서 만난 70대 노인은 “여태껏 내가 본 강(江) 풍경 중 최고”라며 엄지를 세웠다. 기자 역시 고개 끄덕여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상주시 관계자는 “야영장, 출렁다리, 어린이 놀이시설, 수영장, 눈썰매장 등도 갖추고 있어 가족 모두가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라고 경천대를 설명한다.도시의 소음이 사라진 적요한 가을날 오후. 무우정 뒤편 소나무 그늘을 지나 경천대에 올랐다. 울퉁불퉁한 바위를 조심스레 딛고 섰다. 펼쳐진 풍광이 저절로 한 편의 시를 불렀다. 권준호 시인의 ‘수향별곡’을 떠올린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날이었다.가을빛 저녁 강 노을 속으로물새 한 마리 스며들었네홀로 강을 건넌 내 사랑처럼숨어버렸네…(후략)현재 상주시는 경천섬을 관광지로 바꾸는 사업을 진행 중이다. 낙동강 물의 흐름에 따라 자연적으로 형성된 삼각주인 경천섬은 남이섬의 1/2 크기.원래는 인근 농민들이 감자와 무 등을 재배하던 곳이었는데, 여기에 다리를 놓고 꽃밭과 산책로를 깔끔하게 조성했다. 경천섬과 회상나루 관광지가 연결된 것이다. 그곳에서 만난 주민들은 “상주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생겼으니 내년엔 관광객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높이가 족히 4m는 돼 보이는 자전거, 단단한 쇠를 꽈배기처럼 꼬아 만든 자전거, 몸체와 바퀴를 나무로 만든 자전거…. 세상에 존재하는 희귀한 자전거를 모두 모아놓은 것처럼 보였다.상주시 용마로에 위치한 자전거박물관은 ‘자전거 마니아’가 아닌 보통 사람들도 충분히 흥미를 느낄 공간이다. 내부엔 자전거에 얽힌 유래와 역사, 각종 에피소드가 재밌는 소설처럼 펼쳐져 있다. 1940년대 중반에 일본에서 만든 자전거는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자그마치 쌀 1가마 가격에 팔렸다고 한다. “자전거는 부자가 타는 교통수단”이란 말이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던 시대가 불과 40~50년 전이었다.오르막과 내리막이 드물고, 대부분 평지로 이뤄진 상주는 오래 전부터 ‘자전거의 도시’로 불렸다. 자전거의 도시에 자전거박물관이 들어선 것은 자연스런 수순이 아니었을까?일제강점기. 쟁쟁한 일본 선수들을 단박에 꺾으며 ‘조선 자전거의 황제’로 대접받았던 엄복동(1892~1951)의 경주용 자전거 복제품도 상주자전거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이 자전거는 브레이크가 없고, 바퀴의 일부가 나무로 만들어졌다.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엔 이외에도 초창기 자전거부터 외국의 자전거까지 다양한 형태의 제품들이 방문객을 반긴다. 바퀴 폭이 1m를 넘는 우스꽝스런 것도 있다.4D영상관에선 자전거를 탄 듯 상하좌우로 움직이며 역동적인 화면에 푹 빠진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귀여운 조형물이 가득한 포토존도 마련돼 가족끼리 추억을 남기기에도 좋다.건강을 위해 자전거를 타는 이들이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다. 상주자전거박물관에선 자전거를 빌릴 수 있고, 안전 점검까지 가능하다. 자신의 체형과 체력에 꼭 맞는 자전거에 올라 시원스레 뻗은 낙동강 주변 도로를 달려보는 것도 ‘건강하고 행복한 여행’의 한 방법이 아닐까.엄마의 치마 끝을 붙잡고 종종거리던 네댓 살 꼬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로 눈앞에서 살아있는 듯 생생한 호랑이가 사슴을 쫓아 달리고, 이빨이 주먹만한 상어가 자기 머리 위에 나타났기 때문.상주시 도남동 국립 낙동강생물자원관에선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평소엔 그림책이나 아동용 애니메이션에서나 보던 온갖 날짐승과 길짐승, 희귀한 꽃과 풀, 곤충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얼굴이 웃음으로 환했다. 생물자원관 전시실과 로비엔 커다란 백상아리와 새하얀 북극곰, 등껍질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대모거북과 ‘낙동강의 귀한 손님’으로 불리는 재두루미가 각기 제 모습을 뽐내며 어린이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다.낙동강생물자원관은 ‘미래 생물주권의 확보와 생물다양성 보전’을 위해 만들어졌다. 여기에 “아이들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알려주고, 환경 보호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공간으로도 역할한다”는 것이 생물자원관측의 부연이다.야외 공간엔 옥외풍경원과 전시 온실, ‘계절의 화원’과 ‘생명의 샘’ 등을 조성해 정원을 산책하듯 자연스러운 관람을 유도하고, 철마다 피는 아름다운 꽃을 아이들과 만나게 해주고 있다.생물자원관은 놀이와 학습을 효과적으로 결합시킨 각종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이를 통해 방문자들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들의 놀라운 능력과 사라질지도 모를 생물들의 보존 필요성을 배운다.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곳이니만치 부모가 미리 관람 예절을 알려주는 것이 좋다.전시된 생물 표본을 만져서는 안 되고, 계단이 많아 뛰어다니면 위험하다. 사진을 찍는 것은 좋지만 플래시를 터뜨리면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니 조심해야 한다.2015년 7월 개관한 낙동강생물자원관의 방문객은 지난달 100만 명을 넘어섰다. 한 해 평균 25만 명이 찾는다는 이야기다. 적지 않은 숫자다.◇국립 낙동강생물자원관 홈페이지: https://www.nnibr.re.kr나이 지긋한 관광객들은 경천대와 상주자전거박물관을 돌아본 후 당연한 순서처럼 도남서원을 향하게 된다.상주의 유림이라면 이곳에 대한 자부심이 없을 수 없다. 그들은 “조선 유학의 정통성은 영남에 있다”고 말한다.선조 39년(1606년)에 세워진 도남서원은 숙종 때 사액서원(賜額書院·왕이 이름을 써 편액을 내린 사원)이 됐다.1871년엔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헐렸으나, 1992년 상주 유림들이 뜻을 모아 복원을 시작했다. 2002년 ‘유교문화 관광개발사업’으로 옛 모습을 찾은 도남서원엔 정몽주, 이황 등 9명의 선현이 배향돼 있다고 한다.주위는 강을 따라 서원을 바라보며 산책하기에 좋다.지척에서 수백 년을 유유히 흘러온 강물은 도남서원이 간직한 온갖 사연과 충절과 기개로 일생을 살아낸 그 옛날 선비들의 삶을 지켜봤을 것이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한마디 말이 없었다.도남서원 일대를 둘러보고도 시간이 남았다고 생각하는 여행자들은 인근 ‘회상나루 관광지’를 찾아가보면 어떨까? 그곳엔 주막촌, 객주촌, 낙동강문학관 등이 자리했다. 잊고 살았던 조선시대의 풍류를 잠시나마 맛볼 수 있을 것이다./홍성식·곽인규기자

2019-11-06

‘똑똑’ 치매 걱정되면 문 두드리세요

매년 통계청이 발표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인구 구조 변화 양상이 심상치 않다. 11월 현재 65세 이상 노인이 14.9%이지만 2051년에는 40%를 초과할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이다. 노인인구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치매유병률의 증가를 동반하게 된다. 지금의 추세라면 2050년 우리나라의 추정 치매유병율은 200만명을 돌파할 것으로 전망된다.최근 방영된 노년기 치매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가 인기를 끄는 것도 치매에 관한 국민적인 높은 관심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정부에서는 치매국가책임제 선언 이후 각 지방자치단체와 연계해 치매국가책임제의 지역 중심축(허브)인 치매안심센터의 운영을 통해 치매로 인한 사회적 손실 비용을 줄이고 고령 인구 증가에 따른 치매환자 증가를 사전에 예방하고 있다.영양군도 2017년 12월 군 보건소 내에 치매안심센터의 문을 열었다. 지난달 14일에는 289㎡ 규모로 증축공사를 끝내고 정식 개소했다. 노인인구가 많은 영양군의 변화와 희망을 알아본다.□ 선제적 국가책임 치매관리로 전환2017년 발표한 치매국가책임제는 치매 환자를 가정에서 무리하게 감당함에 따라 가족 갈등, 해체 등 치매가족의 고통이 심화되고 치매 치료 및 간병으로 인한 가계 부담 등 사회적 비용의 급증에 대한 선제적 대응을 위한 정책이다.치매국가책임제는 ▷치매지원센터 확대 ▷치매안심병원 설립 ▷노인장기요양보험 본인부담 상한제 도입 ▷치매 의료비 90% 건강보험 적용 ▷요양보호사 처우 개선 ▷치매 환자에게 전문 요양사 파견 등의 내용을 핵심으로 담고 있다. 전국 시군구 256개소에 치매지원센터를 구축하고, 치매안심병원도 현 34개소에서 79개소로 2배 이상 늘리는 것을 목표로 문재인 정부에서도 많은 공을 들이고 있는 복지 분야다.□ 영양군의 치매안심센터 개소치매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던 사람이 다양한 후천적 원인에 의해 인지기능에 이상이 생겨 혼자서 일상생활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한 영향을 주는 상태를 말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알츠하이머 치매(70%)이다. 이러한 치매는 조기 발견해 발견 당시의 뇌 인지 기능 상태를 더 이상 나빠지지 않도록 유지시키고 중증화를 방지함으로써 환자가 자존감을 갖고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영양군도 증가하는 치매환자 상황을 인식하고 2017년 12월 치매안심센터를 우선 개소해 각종 맞춤형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영양군 치매안심센터는 영양군 보건소에서 직영 형태로 운영하고 있으며 간호사, 작업치료사, 사회복지사 등 전문가로 구성해 전문성과 효율성을 높이고 있다.□ 치매안심센터 원스톱 서비스로 비용 줄여군은 보건소 건물을 3층(289㎡)으로 증축해 지난 10월 14일 치매안심센터를 정식 개소하고 운영에 들어갔다. 내부는 상담실, 검진실, 진단실, 프로그램실, 사무실, 가족 카페로 구성하는 등 군의 모든 치매 관련 사업을 이곳에서 이뤄지게 하고 있다. 이로써 치매환자의 중증화를 억제하고 환자 가족의 사회적비용 경감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현재 치매관련 상담·등록 관리, 일대일 사례관리, 조기 검진, 치매치료 관리비 지원, 예방 프로그램, 치매인식개선 교육·홍보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실종 치매노인 제로’… 경찰과 협업영양군 치매안심센터는 지난해 3월 치매노인의 실종예방과 신속한 발견을 위해 영양경찰서와 ‘치매노인 실종 제로(ZERO)사업 추진 업무 협약’을 체결하고 지문 사전등록시스템을 구축했다. 또 상습실종 치매노인 배회감지기 보급대상자를 선정, 지급하고 실종 치매노인 발생 시 신속발견을 위해 지역사회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치매안심센터와 영양경찰서는 업무협약을 통해 상호 협력을 강화하고, 경찰서에서만 가능한 치매노인 사전 지문 등록을 보건소 치매안심센터에서도 적용하도록 했다.□ 치매 가족들의 어려움도 함께 나눠야군은 치매어르신을 돌보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어려움도 이해하고 치매와 돌봄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가족지지프로그램인 ‘헤아림’을 운영하고 있다. 치매가족 대상의 △치매알기 △돌보는 지혜 △마음 이해하기 △부정적 태도 극복하기 △의사소통방법 △가족의 자기 돌보기 △자조모임 등이다. 이 프로그램은 치매안심센터 간호사와 사회복지사가 진행하고 있다. 치매가족들의 지속적인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어려움을 나누고 치매어르신과 함께 잘 지내기 위한 올바른 지식과 지혜를 배우는 자리가 되고 있다. 또 치매 질환정보 및 간병 경험을 공유하며 스트레스 해소와 심리적으로 서로 지지하며 돕는 자조모임으로 혼자가 아닌 나눔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다양한 프로그램 운영으로 치매 퇴치군은 단계별 치매인지 재활프로그램 운영으로 치매안심센터 역할과 기능을 확대해 주민들의 치매극복에 앞장서고 있다. 보건소에서는 치매환자를 위해 입암·석보·수비면보건지소 치매단기쉼터에서 만 60세 이상 주민들을 대상으로 인지 수준별 예방, 인지강화, 인지재활 프로그램으로 나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단계별 치매인지 재활프로그램은 등록된 치매환자 대상 ‘치매환자쉼터프로그램’, 인지저 하나 경도인지장애 진단자 대상 ‘인지강화프로그램’, 65세이상 일반노인 대상 ‘치매예방프로그램’으로 구성돼 있다. 내용은 인지자극, 현실인식훈련, 정서 및 건강교육 등 다양하다.□ 조기발견, 지속치료가 가장 중요치매는 조기발견, 조기치료가 가장 중요하다. 완치 가능한 치료제가 없는 진행성 질환이기 때문이다. 치매가 진행되면 점차 심각한 인지기능 저하, 행동장애는 물론 일상생활과 직업적, 사회적 기능장애를 보이게 된다. 치매의 진행을 늦추는 약물치료는 빨리 시작할수록 좋다. 초기에 약물을 사용하면 건강한 모습을 가능한 한 오래 유지할 수 있다.중앙치매센터 자료에 따르면 전 국민이 치매를 조기 발견해 진행을 지연시킬 경우 20년 뒤엔 현재 10% 가량인 치매 유병률이 8% 수준으로 낮아진다고 밝혔다. 또 치매 초기일 때부터 약물치료를 하면 5년 뒤 요양시설 입소율이 5분의 1로 줄어든다고 한다.약물치료를 지속하면 증상악화를 늦춰 치매 환자의 독립성을 연장하고 가족 돌봄의 비용과 시간을 아낄 수 있다. 이 때문에 영양군 치매안심센터에서는 조기발견, 지속치료 등 어르신들의 건강한 노후생활을 위해 치매관리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오도창 군수는 “치매안심센터의 정식 개소로 이제 포괄적인 치매관리가 가능해진만큼 치매의 조기 예방과 발견, 치매어르신과 가족을 위한 적절한 지원과 서비스가 원스톱으로 이어질 수 있는 중심체가 치매안심센터가 되길 바란다”며 “크게는 ‘건강 100세’시대를 준비하는 영양군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장유수기자 jang7775@kbmaeil.com

2019-11-05

읍호(邑號)를 강등하라

1739년(영조15) 10월 11일, 전라도 남원에 사는 양재육(梁再六)이란 사람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되어 왔다. 땟국이 꾀죄죄하게 흐르는 찢어진 옷, 헝클어진 머리에 오목한 눈만 번들거리는 그의 몰골에서, 걸어온 ‘유3천리’ 유배길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실감케 했다.양재육은 평범한 농부였다. 헌데 그가 동해안 땅 끝 고을인 여기까지 흘러온 사연은 이도령과 성춘향의 이야기로 유명한 저 남원부(南原府)를 일신현(一新縣)으로 강등시킬 만큼 큰 사건과 연결이 되어 있었다.읍호(邑號)는 고을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지만, 여기에는 ‘고을의 위격(位格)’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조선시대 왕들은 집단적 상벌 조치의 하나로 읍호를 올리거나 내림으로써 왕실에 대한 충성과 협조를 강요했다. 왕비의 출신지나 왕의 태실을 봉안하는 곳 , 또는 왕사나 국사의 고향과 같이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고을은 읍호가 승급된다. 반면에 고을에서 삼강(三綱:군신·부자·부부 사이에 지켜야 할 세 가지 도리)과 오상(五常:인·의·예·지·신의 5가지 기본적 덕목)의 도덕을 심하게 위반한 강상죄인(綱常罪人)이나 대역죄인이 발생한 고을은 읍호가 강등되기도 했다. 나름의 효과가 있었기에 조선 내내 왕들은 지방통제의 수단으로서 이 제도를 자주 이용하였다.장기현이 속한 경주부도 ‘읍호강등’의 수모를 겪은 곳이다. 1650년(효종 원년) 경주부의 속현으로 있던 기계(杞溪·현재 포항 기계면)에서 일어난 일이다. 예천에서 도망해 온 종 대립(大立)이란 자가 기계로 도망을 와서 숨어 살고 있었다. 본 주인이 어떻게 알고 그를 찾아와 잡으려 하자, 그는 도리어 그 주인을 죽여 버렸다. 노비가 주인을 살해한 이 사건은 강상죄에 해당되었으므로 대립은 처형되었고, 경주부(府)의 읍호는 강등되어 경주목(牧)이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살인이 일어난 곳은 경주부 기계현이지만, 죽은 주인과 종 대립은 사실상 예천 사람이었기 때문에 매우 복잡하게 전개됐다. 본래 강등된 읍호는 10년이 지나야 승호하였지만, 이 사건은 8년 후 다시 부(府)로 승격 할 수 있었다. 하지만 15년 뒤에는 이보다 더 끔찍한 사건이 관내에서 발생했다.1665년(현종6) 8월, 경주부 서면(西面)에 사는 이경무(李慶楙)가 아내를 박대하자 그의 아내 곽영(郭英)이 원한을 품고 아들 이만(李萬)과 공모하여 그를 죽이기로 작정하였다. 이들 모자는 집에서 거느리는 노비 옥매(玉梅)와 같은 집에 살고 있던 임용(林龍)·사남(士男)·최덕창(崔德昌)·암외(巖外)·치만(致萬) 등과 함께 밤을 틈타 경무를 돌로 쳐 죽였다. 조정은 이를 강상윤리를 위반한 대표적인 사례로 간주하여 매우 엄중하게 다스렸다. 임금이 특별히 경차관(敬差官) 신후재(申厚載)를 내려 보내 조사하게 했다. 후재가 미처 경주에 도착하기도 전에 곽영은 옥에서 죽었다. 이만 및 같은 패거리들이 범죄사실을 순순히 자백하였으므로 모두 한양으로 압송해가 의금부에서 국문하였다. 임금이 이들처럼 극도로 흉악무도한 자는 잠시라도 이 땅에서 살려두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그믐과 보름의 금기에 구애받지 말고 즉시 처형하라고 명하였다. 덩달아 경주부윤은 종2품에서 2등급이나 낮은 종3품 부사로 강등되었다. 이 사건은 죄질이 매우 좋지 않았기에 경주가 다시 부윤이 부임하는 부(府)로 승호하는 데는 14년이나 걸렸다.영조 시대에는 남인들과 준소(峻少·소론 강경파)들의 입지가 너무 좁았다. 영조 4년의 무신난(이인좌의 난)은 정계에서 배제되고 중앙의 실권에서 멀어진 남인과 소외된 준소 세력이 연합하여 일으킨 반란이었다. 이 반란 이후에도 뚜렷한 대안이나 해결책이 없던 현실 속에서 이들은 영조와 노론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다. 영조는 52년이라는 오랜 기간 왕위에 있었지만, 재위기간 중 반을 넘는 전반기 30여 년을 각종 모반과 반역에 시달리면서 불안하게 보냈다.1733년(영조9) 7월, 남원의 성 변두리에서 괘서사건이 발생하였다. 조정을 비난하고 정부의 관리를 비판하는 내용의 글이었다. 그리고 글 아래쪽에 이여매(李汝梅)와 이여진(李汝榛) 형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관에서는 이들 형제를 즉시 체포하여 추궁했으나 별다른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후 고을을 탐문하던 남원현감은 김영건의 집에 똑 같은 흉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체포하여 추궁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이 괘서사건의 주모자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김영건과 그 아들들은 이여매 형제와 평소 원한 관계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처벌받게 할 목적으로 괘서 아래쪽에 마치 이 형제가 그 글을 작성한 것처럼 이름을 적어 넣었던 것이다. 이 사건의 주모자인 김영건을 비롯한 김원팔 형제들은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1739년(영조15)에 일어난 양찬규(梁纘揆)의 옥사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 이미 무신난이 일어난 지 11년이 지난 시점이었고, 그동안 관련자들이 다수 처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라도 남원 지역에서는 여전히 무신난의 재현을 꿈꾸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양찬규의 모반사건을 통해 다시 한 번 표면에 드러났다.사건의 내용은 이랬다. 1739년 9월 16일, 두 남자가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집에 찾아와 문지기에게 남원에 사는 친척이라고 전하며 주인 만나기를 청했다. 김주신은 숙종의 장인이었다. 그러나 행색이 초라한 이들을 보고 문지기가 밖에서 쫓아버렸다. 얼마지 않아 이들이 다시 찾아와 이번에는 서장(書狀·편지)을 가지고 와서 주인에게 전해야 한다고 했다. 종들이 ‘여기는 서장을 바치는 곳이 아니다’ 라고 하며 또 쫓았으나, 뭔가 꺼림칙하여 포도청에 이런 사실을 신고하였다. 포도청에서는 이들의 뒤를 밟아 그 중의 한 사람을 잡아 성명을 물어보니 양찬규라고 했다. 그의 주머니를 수색해보니 봉투가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부원군 집에 바치는 글이었고, 하나는 ‘감고원몽(感故園夢)’이란 제목이 달린 글이었는데 거의 200구(句)나 되는 것이었다. 그 글들의 내용은 요사하고 간악하였고, 기괴한 말이 많았다.우포장 구성임(具聖任)은 우선 사람은 석방하고 그런 사실이 있음을 좌의정 김재로(金在魯)에게 알렸다. 김재로는 구성임을 대동하여 증거물을 가지고 영조에게 가서 ‘어떤 미친놈이 이상한 짓거리를 하고 다닌다’고 보고를 했다. 실제로 양찬귀는 자신이 왕자라고 자청하는 등 이상한 소리를 하고 다녔던 것이다.그런데, 영조의 생각은 달랐다.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필시 무슨 음모가 있을 것이고, 그 배후 세력이 있을 것이라며 친국을 열었다. 얼마 후 다시 잡혀온 양찬규·양안귀 형제는 고문에 못 이겨 자백을 했다. 자신들이 남원에 살고 있는 일가친척들과 광주에 사는 백성 최태원, 이덕방 등과 함께 호남의 괘서를 짓고 역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영조는 반드시 이들이 신임옥사를 일으킨 소론의 거두 김일경·박필몽의 잔당들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우선 양찬규 형제를 대역부도죄로 참형에 처하고, 남원부를 일신현으로 혁파하는 조치를 내렸다. 당시 남원부사 권감(權瑊)에게도 책임을 물어 즉시 파직시켰다. 이어서 남원과 호남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관련자들을 전부 잡아들여 추국했다. 이 과정에서 더러는 고문으로 죽고 남은 사람들은 극변으로 유배되어 갔다.그 후에도 영조는 미심쩍었든지 암행어사 이이장(李彝章)을 남원에 파견하여 동정을 살폈으나, 역모를 꾸몄다는 정황은 찾지 못했다. 오히려 평소 양찬규와 그의 아우 양안귀는 무명옷 속에 들어있는 솜을 빼내어 술을 사먹기도 했고, 패랭이에 용을 그려 머리에 쓰고 다니는가 하면, 사람들이 바늘로 두렵게 하면 겁을 먹고 달아나는 등 미치고 실성한 사람처럼 행동하고 다녔다는 진술만 확인한 것이다. 그래서 양찬규의 옥사는 두고두고 신빙성에 의문이 가는 사건이었다.어찌 보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이 옥사에 연좌되어 장기로 유배를 온 양재육은 양찬규의 삼촌이었다. 이 사건으로 양찬규의 또 다른 삼촌인 양재구(梁再九)·양재팔(梁再八)·양재오(梁再五)도 모두 연좌되어 먼 곳으로 유배를 갔다.읍호가 강등된 남원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에야 다시 부로 승격이 되었다. 그때 파직된 남원부사 권감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다행히 다시 서용되어 1744년(영조20) 동지중추부사(종2품)가 되었다.한편, 양찬규의 옥사가 있은 지 23년이 흘렀다. 1762년(영조38) 8월 4일이었다. 이번에는 전라도 담양도호부(都護府)의 읍호를 담양군으로 강등시키면서 장기현으로 유배 온 가족들이 있었다. 이홍범(李弘範)의 손녀 이황(李黃)과 이광(李光)이 그들이다. 이홍범은 담양좌수(潭陽座首)로 있으면서 영조를 망측스러운 말로 비방했던 사실이 3년 후에 밝혀지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홍범·이창거·이상필·이세진이 역모죄로 참형을 당하고 가족들은 연좌되어 장기현으로 와 노비가 된 것이다.담양은 고려 때는 현(縣)이었으나 1395년(태조 4) 국사 조구의 본향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하였다. 다시 1399년(정종 1) 정종의 비 김씨의 외가가 있던 곳이라 하여 부로 승격한 뒤, 1413년(태종 13) 담양도호부가 되었다. 이런 도호부가 1762년에 와서 역적 이홍범의 태생지라 하여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던 것이다. 이때 강등된 담양은 10년 후인 1772년 담양도호부로 다시 승격되었다.이후에도 무신난의 여파는 계속되었다. 영조가 사색당파를 고루 탕평했다고는 하지만 남인과 준소 세력이 정계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불만은 괘서, 비기, 투서 등의 형태로 계속 표출되었다. 1748년(영조 24) 권혜·권집의 투서 사건, 1755년(영조 31)의 이하징·윤지의 괘서 사건, 신치운·심정연 흉서 사건 등이 연이어 일어났다. 이 사건들은 모두 무신난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건들이었다. 덩달아 유3천리 경상도 장기현은 정계에서 밀려난 남인들과 소론(준소)들의 적거지(謫居地)로 자주 이용되었다. 유배객들이 늘어감에 따라 이들을 먹여 살려야 할 장기현 아전과 백성들의 시름도 이에 비례하여 깊어만 갔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11-05

과메기 파스타에 샐러드… 외국인 관광객들도 ‘엄지 척’

1일 서울 남산골 한옥마을 천우각에서 개최된 포항구룡포과메기 서울 미디어설명회 및 홍보·시식 행사는 과메기 첫 출시일이어서인지 서울시민은 물론 언론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정도로 대성황을 이뤘다.○…이날 참석자들은 ‘과메기, 스타 간식 되다’라는 슬로건에 주목했다. 과메기가 겨울철 별식이나 술안주로 인식되었던 것을 탈피했다. 2018년에는 ‘과메기, 밥상에 오르다’를 통해 밥상 차림을 선보였다면 올해는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는 간식으로 새롭게 선보이고자 과메기를 이용한 ‘과메기 샐러드’, ‘과메기 루꼴라피자’, ‘과메기 카나페’, ‘과메기 파스타’ 등이 선보여 참석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특히 필리핀 등 외국인 관광객들도 과메기에 큰 관심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과메기를 맛본 뒤 엄지를 치켜들기도 했다.○…행사장을 찾은 방문객들은 판매부스와 시식코너를 돌아본 뒤 과메기 상품을 양손 가득 사들고 귀가. 과메기 판매 부스는 하루 종일 북적였고, 포항시가 과메기 제조, 유통 등 모든 과정에서 인증제도화했다는 것이 입소문을 타면서 더더욱 인기를 끌었다. 실제 이날 ‘포항 해선생’이라는 브랜드를 서울 시민들에게 선보였다. 해선생은 포항시가 수산물 품질을 보증하기 위해 도입한 브랜드다.○…이날 행사에서는 포항 과메기 홍보대사를 맡은 탤런트 김청 씨가 단연 인기를 끌었다. 이강덕 포항시장은 위촉식에서 “김청 씨는 평소에 구룡포과메기 마니아로 알려져 있다”면서 “영양과 맛이 뛰어난 과메기를 온 국민이 즐길 수 있도록 하는데 함께 하게 돼 감사하고 기쁘다”고 말했다. 이 시장이 김청 씨에게 포항으로 이사할 것을 권유해 한바탕 웃음꽃이 피기도.○…행사가 끝난 뒤 이 시장과 서재원 포항시의회 의장, 경북매일신문 최윤채 대표, 탤런트 김청 씨가 과메기 홍보 방안을 놓고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김청 씨는 “김치에 과메기, 그리고 밥을 싸먹으면 정말 맛있다”며 자신이 홍보대사로 있는 ‘평창고랭지 김장축제’와 포항 과메기가 만나면 좋겠다고 밝히고, 즉석에서 “평창-포항 간 자매결연 맺는 것은 어떠냐”고 즉석 제안을 했다. 그러면서 그는 “과메기를 먹을 때 배추가 들어가지 않느냐. 찰떡궁합”이라며 이강덕 시장에게 강력히 요청했다.○…이날 초청된 파워 블로거들과 타지역 언론사 청와대 출입기자 등도 저마다 분주히 움직이며, 과메기에 큰 관심을 표명. 이 시장은 “일년 내내 과메기를 안 먹으면 못사는 분을 봤다. 건강이 나빠져 과메기를 1년 내내 먹고 거뜬하게 산을 오르는 분을 봤다. 그만큼 과메기 안에 좋은 성분들이 다 들어 있다”며 과메기 홍보에 열성을 보였다./박형남기자 7122love@kbmaeil.com사진/이용선기자

2019-11-03

드라마 주인공 된 듯 구룡포 누비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구룡포로 가는 길에는 언제나 기분 좋은 긴장 상태가 된다. 흔히 ‘설렘’이라고 말하는 감정의 고조를 느끼기 때문이다. 겨울과 봄 사이, 늦겨울이라고 부르기엔 따뜻하고 초봄이라고 부르기엔 추운 그 짧은 한 철을 나는 ‘겨우봄’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겨우봄 구룡포는 푸른 파도와 흰 담벼락 사이로 언뜻 붉은 입술을 비추는 동백꽃의 숨바꼭질이 명랑하다. 그러다 술래인 햇살이 세게 달려들면, 동백 무리는 일제히 꽃잎을 크게 벌리고 깔깔 웃는다. 그때 비로소 골목마다 봄빛 수다가 수런거리기 시작한다.가을과 겨울 사이를 ‘가울’ 혹은 ‘겨을’이라고 불러볼까? 너무 작위적이다. 아직 멀리서 오는 첫눈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으므로, 구룡포의 이 계절을 그냥 늦가을이라고 부르자. 단풍이 절정으로 타오르는 늦가을이지만, 지금 구룡포에는 엉뚱하게도 동백꽃이 여기저기 난리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이야기다. 일본인 가옥거리로 알려진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는 드라마 속 배경인 ‘옹산간장게장 골목’으로 모습을 바꿨다.근대문화역사거리에 들어서서 나는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룡포에 웬 간장게장집이?’ 동해안 홍게와 대게를 가지고 게장을 담그는 새로운 음식 문화가 생겨난 줄로만 알았다. 드라마를 보지 않은 탓이다. 인기리에 방영중이라 제목은 귀에 익은데, 이곳 구룡포에서 촬영한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이날 근대문화역사거리는 관광객들로 붐볐다. 아무리 주말이라지만 평소보다 훨씬 사람이 많은 이유는 바로 드라마에 있었다. 사람들은 극중 주인공 동백(공효진)이 운영하는 술집 ‘까멜리아’ 앞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길게 줄을 서고, 사진을 찍고는 함박웃음 짓는 것이었다. 행복이란 이토록 소박한 찰나에 있구나, 나는 생각했다.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가치관을 지닌 마을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실내포장마차를 운영하며 아들을 키우는 미혼모 동백, 그리고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 세상 통념과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무작정 돌진하는 동네 순경 용식, 그 둘의 러브 스토리를 중심으로 드라마는 차별과 소외의 상처를 치유하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청자들은 용식의 순정한 사랑을 통해 동백의 아픔들이 아물어가는 과정을 보며 위로를 얻는다.‘옹산’을 찾아온 사람들은 간장게장골목에서 호떡과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고두심이 운영하는 백두할매간장게장집의 원래 정체가 ‘호호면옥’이라는 사실에 박장대소하며 안으로 들어가 냉면과 갈비탕을 먹었다. 골목을 나서면 꿈에서 깨듯 다시 구룡포,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옹산 골목을 거닐던 사람들은 구룡포 전통시장과 수산물직판장으로 흘러들어 포항의 특산물들을 두 손 가득 구입했다. 드라마 제작진에 따르면 촬영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전국을 다 돌아다녔지만 구룡포만큼 아름다운 곳이 없었다고 한다. 한편의 드라마가 태풍으로 침체된 지역경제에 활력을 일으키고, 경색된 한일관계로 입장이 난처해진 ‘일본인 가옥거리’의 이미지마저 쇄신시킨 것이다. 문화 콘텐츠의 힘이 새삼 대단하다고 느꼈다.구룡포 해수욕장은 태풍이 헤집고 간 상처들이 아직 다 아물지 않아 보였다. 흰 모래가 곱던 해변에는 흙과 돌, 파도에 떠밀려온 쓰레기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그래도 구름과 파도는 여전히 새하얀 꿈과 푸른 희망을 노래하는데, 어디서 떠밀려왔는지 해변에 돼지저금통 하나가 굴러다녔다. 온통 희고 파란 색만 가득한 가을 바다에서 빨간 돼지가 풍경의 온도를 높이는 것이었다. 아프리카돼지열병도, 살처분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저 돼지, 배가 갈린 채 동전들을 다 토해내야 했지만 덕분에 돼지는 가벼움을 얻어 바다를 건널 수 있게 되었다. 이내 큰 파도가 달려와 돼지저금통을 바다로 실어갔다. 물살을 타고 망망대해로 멀어져가는 돼지저금통이 마치 동백꽃처럼 보였다. 내 마음의 끓는점에 불이 켜졌다.햇빛이 지상의 그림자들을 길게 늘어뜨리는 걸 보니 이제 또 다른 드라마를 만나러 갈 시간, ‘동백꽃 필 무렵’보다 한 1,900년쯤 전에 이미 포항은 문화 콘텐츠의 땅이었다. 포항이 ‘연오랑 세오녀’ 설화의 고장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 때 일이다. 포항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큰 바위가 바다에서 솟아올라 연오랑을 싣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에 간 연오랑은 한 고을의 왕이 되고, 남편을 찾아 나선 세오녀 역시 바위를 타고 일본에 가 부부는 재회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부부가 해와 달이 육화(肉化)된 신령한 인간들이었다는 점이다. 연오랑과 세오녀가 떠나자 신라의 해와 달은 빛을 잃어버렸다. 왕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 부부의 귀환을 요청했지만, 연오랑은 하늘의 뜻이라며 귀환을 거부한 대신 세오녀가 짠 명주 비단을 건넸다. 신라 사람들이 그 비단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자 해와 달이 다시 빛을 찾았기에 왕은 그 비단을 국보로 삼아 보물창고에 보관했다. 그리고 그 비단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불렀다.구룡포에서 포항 시내로 가는 길, 가을 햇빛이 비단처럼 영일만을 덮고 있었다. 남구 동해면 임곡리의 ‘연오랑 세오녀 테마공원’을 찾았다. 2017년에 개장한 이곳 공원은 연오랑 세오녀 설화를 주제로 ‘공간 스토리텔링’을 해 방문객들에게 지식적 유익함과 감성적 즐거움을 동시에 제공한다. 전설 속의 귀비고는 이곳 테마공원에 와 귀비고 전시관이 되었다. 귀비고 전시관에는 연오랑 세오녀 설화가 기록된 한국과 일본의 각종 고문헌들을 비롯해 4D체험관, 영상관, 포토존, 카페 등 다양한 체험 및 문화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귀비고 전시관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서면 잔디밭과 꽃나무들이 싱그러운 자연의 향기를 뿜는다. 바닷바람은 팽팽하게 당겨진 수평선이 연주하는 현악 소리를 귀에 실어 나른다. 야외공원엔 쌍거북바위, 일월대, 신라마을 등 여러 볼거리들이 있지만, 무엇보다 근사한 것은 노을이다. 연오랑 세오녀 테마파크는 포항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장소다. 세오녀가 짠 명주 비단이 되찾아준 빛일까? 태양이 영일만을 온통 금빛으로 휘감는 시간, 석양 속에서 역광의 그림자가 된 젊은 남녀들은 말없이 사랑의 대화를 속삭였다.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너무 많은 연오랑 세오녀들, 그 근처를 괜히 얼쩡거리다가 연인들의 기념사진을 망치는 ‘곤란한 정물’이 될까봐 나는 자리를 피했다.공원 한쪽에서는 2019 포항 무용제가 열리는 중이었다. 공식 경연에 앞서 포항시 어머님들 취미 무용단의 세오녀 길쌈놀이가 한창이었다. 한복을 차려입은 어머님들이 태양빛을 형상화한 빨간색 노란색 대형 비단을 펼쳐 들고 강강술래하는 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눈물이 터져 혼났다. 이유는 모른다. 어머님들의 동백꽃 같은 웃음 뒤에 첩첩이 쌓였을 고단한 삶을 엿본 탓일까. 아니면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길쌈놀이를 보며 아이처럼 손뼉 치고 좋아하는 할머님의 뒷모습 때문일까. 요양병원에 누워 꼼짝도 하지 못하는 내 할머니 생각이 났다. 정정하셨을 때는 장충체육관에 모시고 가 마당놀이 구경도 시켜드리곤 했다. 눈물로 얼굴이 더 엉망이 되기 전에 나는 서둘러 테마공원을 빠져나왔다.포항 시내의 토요일 밤은 화려한 불빛들이 밝혀드는 축제, 그러나 휘황찬란한 불빛들을 뒤로 하고 어둔 시장 골목, 허름한 옛 식당의 문을 열었다. 북구 장성동 장성시장 안에 있는 ‘영주식당’의 고래수육은 일품이다. 어떻게 삶아내는지 고래 특유의 냄새가 전혀 없고, 부위마다 다른 식감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고래수육 한 접시는 미식 중의 미식이자 최고의 안주, 술잔을 비우다 보니 접시도 금방 비워졌다. 얼큰한 국물 생각이 나 찌개를 주문했다. 메뉴판에 없는 가자미 찌개가 상에 올랐다. 한 숟갈 떠먹자 붉은 고춧가루와 탱글탱글한 가자미살이 몸속에 동백꽃을 활짝 피웠다. 꽃은 아래에서부터 피어 위로 올라오기에, 식당을 나서서도 나는 두 볼에 동백꽃, 동백꽃 발그레 매단 채 밤거리를 걸었다. 그날 밤에는 낡은 여관방 이불이 세오녀의 비단처럼 부드럽게 꿈속까지 감싸주었다.           /시인 이병철

2019-11-03

‘나만의 명소’ 찾아 떠나는 여행엔 먹는 즐거움이 최고

세월과 세태의 변화 속에 여행의 패턴도 바뀌고 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유명한 관광지로 우르르 몰려가 사진 한 장 찍고는, 또 다른 장소로 바삐 옮겨 다니는 천편일률적인 관광은 이제 차츰 줄어드는 추세다.가능하면 한 곳에 오래 머물며 꼼꼼하게 그 지역의 특색을 살피고, 남들은 잘 찾지 않는 ‘나만의 명소’를 발견하고자 하는 여행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더불어 신세대들은 새로운 걸 ‘보는 기쁨’과 함께 독특한 음식을 ‘먹는 즐거움’까지 포기하기 않으려 한다.영덕은 볼거리와 더불어 먹을거리 또한 풍부한 여행지다.해 뜰 무렵 강구항에 나가보면 “바다는 인간의 식량창고”라는 말이 실감으로 다가온다. 새벽부터 항구에 모여든 어부와 상인들은 싱싱한 해산물 사이를 바삐 오가며 ‘살아간다는 것의 엄혹함’을 몸으로 보여준다.청정한 바다에서 잡아온 대게와 물가자미, 청어와 멍게 등의 수산물은 물론이고 오염되지 않은 산과 들에서 자라는 송이버섯과 복숭아 등은 영덕이 ‘미식의 도시’로 발전할 수 있음을 구체화시켜 보여주고 있다. 아래 ‘먹는 즐거움’을 놓치지 않고 싶은 관광객들을 위해 영덕군이 내세워 자랑하는 식재료와 그것들을 이용해 언필칭 ‘맛집’으로 자리매김한 식당을 소개한다.◆‘물가자미’와 ‘송이’는 빼놓을 수 없는 영덕의 먹을거리영덕군은 6개 읍면이 64km의 바다와 접해 있다. 다소 비싸지만 그 맛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덕대게를 비롯해 다양한 해산물이 1년 내내 풍부하다. 대게와 함께 전국의 미식가들을 불러들이는 영덕 축산항의 ‘효자 생선’ 은 물가자미(미주구리)다. 영덕 해역에서 잡히는 물가자미는 수심 200m 이내의 모래와 뻘에서 주로 산다. “몸의 길이가 20~40cm 정도인 물가자미는 양식이 되지 않은 100% 자연산”이라는 게 영덕 어부들의 설명이다.영덕군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바다 목장화 사업’을 추진해왔다. 이는 수산자원을 보호하고, 해산물 품질의 우수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영덕의 수산물은 믿고 먹을 수 있다’는 신뢰감을 얻고자하는 목적도 있다. 물가자미는 회, 찌개, 구이, 조림 등 다양한 형태로 조리하는 게 가능하다. 얼마 전부턴 인공조미료를 쓰지 않고 뼈 채로 발효한 ‘물가자미 밥식해’가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영덕군청 관계자는 “생소하게 느꼈던 사람들도 한 번만 먹어보면 담백하고 고소한 맛에 매료돼 물가자미 요리 마니아가 된다”며 웃었다. 다른 생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해 ‘가격 경쟁력’도 갖춘 게 바로 물가자미다.물가자미의 뼈에는 칼슘이 풍부해 수술 직후 환자의 기력 회복에도 도움을 준다고 한다.2010년에 이미 ‘한국의 8대 웰빙 해산물’에 선정된 물가자미는 골다공증 환자에게도 권할만한 음식이다. 영덕군 축산항 인근에서 자란 물가자미는 타 지역에서 잡히는 것보다 갈색 무늬가 선명하고, 육질 또한 좋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예로부터 왕의 밥상에 오르는 등 귀한 대접을 받았던 송이버섯은 숲에서 소나무 뿌리에 공생해 만들어진다. 지구 위에서 생산되는 송이의 95%가 한국, 일본, 중국에서 나온다.송이는 강원도 인제, 삼척, 강릉 등지와 경북 영덕, 울진, 봉화 등에서 주로 자란다. 이중 영덕군의 송이 생산량은 전체의 30%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얼마 전부턴 중국에서 수입된 송이가 사람들의 식탁에 오르고 있지만, 씹히는 맛과 향에서는 국내산을 따르지 못한다는 것이 요리사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영덕군은 ‘송이 환경 개선사업’과 ‘솔잎 혹파리 방제사업’ ‘소나무 재선충 예찰 강화’ 등으로 영덕 송이의 명성 유지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동해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식물 생장에 적합한 토질이 영덕 송이버섯의 맛과 향기를 만들어낸다”고 영덕군청은 말한다.단백질은 높고 칼로리는 낮은 영덕의 송이는 건강 식품인 동시에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송이버섯은 비타민 B가 풍부하고, 구아닐산이 다량 함유돼 콜레스테롤을 낮춰주며, 동맥경화에도 효과가 있다”는 것이 식재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좋은 송이를 고르려면 “유백색 몸체에 짙은 갈색의 갓을 먼저 살피라”는 것이 요리사들의 조언.영덕군산림조합은 지역에서 생산되는 송이의 품질 향상과 유통질서 확립을 위해 이미 오래 전 ‘영덕송이 지리적 표시 등록’을 완료했다.◆‘입이 즐거운’ 영덕 여행을 위해 노력하는 식당들사람들의 입맛은 각기 다르다. 그렇기에 몇 군데를 선별해 “이곳이 맛집”이라 말하는 건 언제나 조심스럽다. 아래 소개하는 식당 외에도 영덕군에는 다양한 맛집이 존재한다. ‘맛집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각자의 취향과 기호에 따르는 것이다. 보리밥을 좋아한다면 ‘수석분식’에 들러도 좋을 것 같다. 제철 채소로 만든 나물과 보리밥을 내놓는다. 나물과 밥이 따로 제공돼 자기 입맛에 맞춰 스스로 비빔밥을 제조하는 재미가 있다.‘풍경시골’은 양기를 살려주는 음식으로 알려진 들깨칼국수를 낸다. 주재료가 모두 국내산이라고 한다.어린 시절 특식으로 먹던 불고기의 맛을 재현한 식당은 ‘이가네 옛날불고기’다. 한우를 사용하고, 함께 먹는 깻잎 장아찌도 맛있다.다양한 생선초밥과 함께 한우불초밥을 맛볼 수 있는 ‘해동초밥’은 재료가 신선하고 가격이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야성 숯불가든’은 무청과 재래식 된장이 하모니를 이루는 시래기정식이 인기다. 깊은 맛을 내기 위해 좋은 품질의 풋고추, 마늘, 멸치 등을 사용한다.미주구리찌개를 맛보려면 ‘나비산 기사식당’에 가면 된다.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물가자미에 채소와 고추장 양념을 올려 끓인다.‘낙원 보쌈식당’에선 여러 가지 한약재를 더한 보쌈을 즐길 수 있다. 돼지고기의 기름기를 잘 제거한 담백한 맛이 방문자들의 호평을 이끌어냈다. 돌솥에 지은 따끈한 밥에 정갈한 반찬이 차려지는 ‘토박이 돌솥밥’은 마지막에 먹는 누룽지도 좋다. 아이들을 위한 메뉴도 준비하고 있다.시원한 대구지리탕이 먹고 싶다면 ‘별미식당’을 찾으면 된다. 소박한 상차림이지만 손님을 위한 정성은 언제나 잊지 않는다고 한다.◆청년이 운영하는 독특한 카페도영덕군 강구면 금호리에 들어선 카페 ‘커피 앤 스프’도 흥미로운 공간이다.보통의 젊은이들은 꿈을 찾아 ‘도시’로 간다. 하지만, 이 카페의 운영자는 반대의 방법을 선택했다. 대도시 서울 출신임에도 자신의 꿈을 소도시 영덕에서 키워가고 있는 것.김수빈 씨는 서울에서 태어나 공부했고, 광고디자인 회사에 입사해 3년간 일했다. 야근이 잦았고 스케줄은 타이트했지만 즐겁게 일하려 애썼다. 하지만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퇴사한 김씨는 평소 동경해온 ‘조용하고 아늑한 자연과 함께 할 수 있는 지역’을 찾아 영덕에 정착할 계획을 세웠다. 물론 이전에도 영덕 여행을 수차례 다녔다.영덕의 특산물인 송이와 대게 등은 김수빈 씨가 꿈을 이루는데 도움을 줬다. 좋은 식재료를 구하는 건 카페 운영의 기본이다. 또한 ‘도시청년 시골파견제’는 그가 가게를 창업하는데 적지 않은 힘이 됐다.서울에서의 회사 생활을 마무리한 뒤 본격적으로 커피 만들기와 요리를 공부한 김씨는 외국에선 버섯커피를 마신다는 것에 착안해 송이를 활용한 ‘번영커피(송이 크림라떼)’와 송이 스프, 송이 마들렌 등을 개발해냈다.7년 동안 비어있던 공간을 리모델링 해서 지금의 카페를 만든 김씨는 직접 바닥 공사를 하는 등 힘겨운 육체노동도 피하지 않았다고 한다.“관광객과 주민들이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편안한 휴식 공간을 만들어가고 싶다”는 젊은 창업자의 꿈이 영덕의 바다 빛깔처럼 맑고 푸르게 커나가길 기대한다./홍성식·박윤식기자

2019-10-31

수려한 자연경관 기반 ‘굴뚝 없는 황금산업’ 최적지

흔히들 구미시는 천혜의 자연경관을 지녔다고 말한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낙동강과 영남의 명산으로 꼽히는 금오산, 천생산 등이 있기 때문이다. 낙동강은 구미지역 구간의 강 폭이 가장 넓어 수상레저스포츠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신라불교문화를 대표하는 도리사와 약사암 등의 유적들도 많아 문화와 역사의 도시이기도 하다. 또한 내륙최대의 국가공단이 위치해 한국 산업역사를 이끌어 온 곳이기도 하다. 구미시는 이런 관광자원들을 이용해 산업관광을 활성화시키는 다양한 시도를 진행하고 있다. 구미가 가진 관광자원들의 면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관광, 산업, 마케팅 전시 등의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어 앞으로 마이스산업에 적합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구미의 마이스산업 발전에 대해 알아봤다.△마이스(MICE)산업이란고층빌딩, 도심의 화려한 불빛, 관광과 레저, 거대한 전시장, 세계 최고 정상들이 모이는 회의, 역사를 만드는 이벤트 등이 바로 마이스(MICE)산업을 나타내는 말이다. 마이스(MICE)는 Meeting(아이디어와 정보의 교환, 토론, 네트워크 형성 등을 목적으로 진행되는 회의), Incentive Travel(회사에서 비용의 전체 또는 일부를 부담, 조직 구성원에게 성과에 대한 보상이나 동기부여를 위해 제공하는 여행), Convention(사회적 네트워크 형성, 토론, 정보 교환, 사업 등을 목적으로 진행되는 국제회의), Exhibition Event(유통업자, 소비자, 일반인을 대상으로 전문시설에서 마케팅 활동을 하는 전시)의 약자이다.마이스산업이 전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는 이유는 엄청난 파급효과 때문이다. 마이스 참가자들은 대부분 회사에서 모든 경비를 지불하기 때문에 가족들을 동반하고 일반 여행자에 비해 더 많이 쓰고, 그 지역의 특성을 파악해 더 많은 것을 보고 즐기려는 특징이 있다. 이렇다보니 그 지역의 숙박, 교통, 관광, 무역, 유통 등의 산업이 큰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지역경제 효과 뿐만 아니라 도시 브랜드 가치도 올릴 수 있다.△작은 농업도시서 글로벌 마이스산업 도시로 성장한 올란도1970년대까지 감귤 생산이 주요 수입원이었던 미국의 작은 농업 도시 올란도. 지금은 마이스를 통해 연간 4천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도시로 발전했다. 1970년대 세계 최대 테마파크인 디즈니월드가 생기면서 미국 최고의 레저관광휴양지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숙박시설과 쇼핑센터가 함께 들어서게 됐다. 엔터테인먼트 중심지로 시작된 개발에 마이스 개념이 더해지며 세계가 주목하는 도시로 급부상했다. 레저관광휴양지로 머물수도 있었지만, 다양한 공간을 지닌 호텔들이 들어서면서 모든 종류의 마이스가 가능해졌고, 이를 토대로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시설인 오렌지카운티 컨벤션센터가 생기면서 미국의 대표적인 마이스산업 도시로 급성장했다.하지만, 시행착오와 여러 문제점들도 많았다. 올란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마이스산업에 필요한 인재가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올란도에는 세계적인 대형 호텔들이 들어서고 있었지만, 지역에는 호텔경영 등과 관련된 교육프로그램 하나 없었다. 지역 대학에서는 재정문제로 이를 해결할 수 없었다. 이에 주정부가 디즈니월드와 상의를 했고, 디즈니월드는 일부 부지를 기증하는 방법으로 대학의 재정문제를 해결했다. 이로인해 올란도는 레스토랑, 호텔, 컨벤션, 컨퍼런스 등에 관련된 인재들을 육성할 수 있었고, 마이스산업을 성장시킬 수 있었다.△가공되지 않은 자연을 지키기 위해 영화제를 만든 일본 유후시연간 400만명이 찾는 일본의 관광도시, 오이타현 유후시. 온천이 대표적인 관광상품이긴 하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극장이 아닌 야외 스크린으로 영화를 볼 수 있는 곳, 또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제가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1976년 시작한 ‘유후인 영화제’는 ‘온천’이라는 지역의 관광상품을 알리고자 하는 유후인 마을 사람들과 오이타현의 젊은 시네필들이 의기투합해 만들었다. 이들의 기획은 성공적이었고, 1989년부터 ‘유후인 어린이영화제(3월)’가 1998년부터는 ‘유후인 문화·기록영화제(6월)’가 추가로 열리면서 유후인은 온천뿐 아니라 영화제 도시로 거듭났다.유후인 영화제가 특별한 것은 현존하는 가장 낡은 영화제이기 때문이다. 도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극장 하나 없는 곳이 바로 유후시이다. 이런 곳에서 영화제가 열리는 것도 특이하지만, 학교 운동장 천막 등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것은 이 곳만에서만 즐길 수 있는 영화 관람법으로 자리잡았다. 이 영화제는 가공하지 않은 자연을 그대로 유지하길 소망하는 지역 주민들의 바램을 고스란히 담고 있고 더욱 사랑을 받고 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제라는 타이틀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이 영화제에는 지금도 세계 각국의 영화인들이 많은 작품을 출품하고 있다. 유후인 영화제는 마이스산업이 규모가 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빈 운동장과 영화 등의 소재에 네트워크와 마이스가 결합되면 엄청난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구미와 마이스산업국내에서는 아직 마이스산업이라고 하면 거대한 컨벤션뷰가 있는 대도시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착각한다. 마이스에서 대형 컨벤션이 하나의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지금의 마이스는 네트워크와 결합으로 더 큰 이익과 효과를 낼 수 있다. 구미에는 마이스의 기본 요소인 관광·레저, 산업, 컨벤션 등의 요소가 이미 갖춰져 있다. 여기에 어떻게 네트워크를 결합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때이다.미국 올랜도 역시 처음부터 마이스산업과 관련된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마이스산업의 필수요건인 전문인력이 없었다. 문제해결을 위해 주정부와 기업, 대학, 시민들이 함께 나서 해결했다. 일본 유후시의 시민들은 관광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연을 헤치는 개발을 막기 위해 영화인들과 영화제를 만들어 온천관광과 연계해 큰 성공을 거뒀다.이 모든게 바로 네트워크이다. 구미에는 도심을 가로지르는 낙동강이 있고, 거기에서 매년 수상레저스포츠가 열린다. 사계절 내내 시민들의 사랑 받는 금오산 있다. 문제는 여기에 어떤 네트워크를 연결 할 것인가이다. 한 예로 일본 유후시가 영화제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긴린코’라는 작은 저수지였다. 아름다운 풍광으로 영화제를 보러오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선물이 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구미에도 아름답기로 유명한 금오산 저수지가 있고,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강동문화복지회관 맞은편에도 작은 저수지가 있다. 강동문화복지회관 맞은편 작은 저수지를 활용하는 방안을 찾는다면 제2의 긴린코도 가능하지 않을까.구미는 천혜의 관광자원이 너무나 많고, 인근 대도시와의 교통도 편리하다. 규모가 크지 않은 마이스를 할 수도 있고, 편리한 교통체계를 이용해 대형 마이스까지도 가능한 도시가 바로 구미시다. 구미가 가진 관광자원에 마이스와 네트워크를 접목한다면 구미시는 분명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산업관광 도시로 거듭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끝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9-10-31

미식의 계절 가을, 소문난 전국구 맛집 지나치면 섭섭하지

‘수제순대’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식재료 비용과 더불어 인건비 때문이다. 식당 종업원들도 힘든 일은 피한다. 순대 만드는 일은 힘들다. 대부분 ‘공장제 대량생산’ 순대를 내놓는 이유다. 순대 및 머리 고기 수육, 뼈를 우린 국물까지. 죄다 수제다. 맛이나 가격 모두 넉넉하다. 제법 수북한 순대 한 접시, 머리 고기 수육 작은 것이 1만 원, 큰 것은 2만 원이다. 잘 곤 국물은 덤이다. 두 사람이 순대나 머리 고기 한 접시만 주문해도 제법 넉넉할 듯하다.이른 새벽 3시 무렵에 주인 남자가 직접 순대를 만든다. 순대는 두 종류다. 대창 순대는 피순대다. 유명한 전주 남문시장의 피순대와 흡사하지만, 오히려 낫다. 좋은 피를 많이, 가능하면 100% 사용한 것이 좋은 것이다. 텁텁한 식감의 피순대는 별미다.막창 순대는, 흔히 ‘함경도 아바이순대’라고 부르는, 채소, 곡물 등이 잔뜩 들어간 것이다. 경북 김천의 작은 시장통 가게에서 함경도 식 아바이순대와 전주식 피순대를 동시에 맛볼 수 있는 것은 재미있다. 외부, 다른 이의 손을 빌리지 않고 경력 30년의 주인 남자가 직접 만든다.국물도 수준급이다. 돼지 사골을 비롯하여 3가지 정도의 뼈를 섞어서 곤다. 잡내가 나지 않는다. 쭉 들이키면 희미한 곡물 냄새가 난다. 정갈하게 곤 국물이다. 국물 음식을 주문하거나 순대, 수육을 주문하면 이 국물을 마실 수 있다.‘황금시장’은 재래시장이다. 시장의 기능은 많이 약해졌다. 순대 집들은 성업 중이다. ‘보람이순대’ ‘황금순대’ ‘장군순대’ 등이 현지인들이 좋아하는 곳들. 대부분 직접 순대를 만들거나 수육을 만진다. ‘지례순대’도 황금시장 안에 있다.무지했다. ‘갱시기’가 ‘갱식’에서, 갱식은 다시 데워먹는 ‘更食’인 줄 알았다. 갱시기는 ‘羹食(갱식)’이다. 국물이 있는 음식, 국밥 같은 음식이다.갱시기는 신 김치에 식은 밥을 넣고 끓인 것이다. 돼지고기, 콩나물, 두부를 넣어도 된다. 다 끓인 후, 김 가루를 뿌려도 좋다. 갱시기치고는 업그레이드, 화려한 버전이다.절대 빈곤의 시절은 아니라도 늘 뜨거운 밥에 반찬을 챙길 수는 없었다. 국물이 있는 음식, 그러면서 별다른 반찬 없이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바로 갱시기다. 갱시기의 시작은 보잘것없지만, 그 진화는 놀랍다. 갱시기는 김치찌개로 발전한다. 돼지고기, 두부, 콩나물 등을 넣는다. 때로는 햄, 소시지나 마른 생선도 넣는다.갱시기는 추억의 음식이다. ‘기차길옆오막살이’는 추억의 음식 갱시기를 파는 곳이다. 음식과 더불어 추억을 내놓는다. 가게 분위기도 복고풍이다. 멀리 기찻길이 보이고, 기찻길과 가게 사이에는 너른 들판이 있다. 가게 안팎에도 추억이 하나 가득하다. 고르지 않은 모양의 크고 작은 장독, 그릇이 있다. 꽃들도 나란하지 않다. 들쑥날쑥한 자연스러운 분위기다. 실내도 70~80년대 복고풍이다.음식 맛은 굳이 따지지 말자. 갱시기는 갱시기 맛일 뿐이다.동네 이름보다 ‘김천 아랫장터에 있는 만둣집’이라고 말하면 더 빨리 알아듣는다. 10평 언저리의 작은 가게다. 메뉴는 만두와 찐빵 두 종류. 대부분 만두를 주문한다. 가게 이름이 ‘중국만두’. 화상노포다. 예순을 넘긴 노부부가 운영한다. 바쁜 주말에는 가끔 아들인 듯한 젊은 남자가 일을 거든다.‘중국만두’의 만두는, 정확하게는, 바오쯔[包子, 포자]다. 그중에서도 소룡포자, 소룡포(小籠包)에 가깝다. 소룡포라 하지 않고 ‘가깝다’고 표현하는 이유가 있다. 소룡포는, 중국 상해의 남상(南翔, 난샹) 것이 유명하다. 흔히 ‘남상소룡포’라고 부른다. ‘소룡’은 작은 나무 찜통이다. 나무 찜통에 일정량의 포자를 넣고 쪄내면 소룡포다. ‘중국만두’는 작은 가마솥에서 쪄낸다. ‘소룡’은 아니다. 포자를 빚을 때 제일 위 끄트머리 부분을 보자기 묶듯이 틀어 올린 것이다. 북경, 천진 등의 ‘천진구부리포자’가 유명하다.전국적으로 인기 있는 이유가 있다. 작은 나무 찜통, 가마솥 부분을 제외하면 상당히 맛있는, 수준급의 포자, 소룡포다.“만두가 너무 늦게 나온다” “30분 혹은 한 시간 기다렸다”는 불평이 많다. 그럴 수밖에 없다. 미리 준비하는 것은 반죽뿐이다. 포자를 위한 반죽은 발효, 숙성 과정을 거쳐야 한다. 전날 반죽하여 숙성한 다음, 다음날 사용한다. 만두 속도, 물론, 미리 준비해야 한다. 돼지고기, 부추, 양파, 생강 등을 잘 다져서 섞어두어야 한다.주문을 받은 후, 만두를 빚는다. 바깥주인은 주방 안쪽에서 연신 만두피를 민다. 잠시도 쉬지 않고 하나하나 만두피를 빚는다. 안주인은 만두 속을 채우고, 일정량이 되면 가마솥에서 쪄낸다. 테이크아웃 용 만두를 포장하거나 작은 홀에 만두를 내놓는 일도 안주인 몫이다. 계산대나 손님 응대도 모두 안주인의 몫이다.주문 후, 피를 밀고, 만두를 빚고, 쪄낸다. 바로 만든 음식은 맛있다. 업력이 상당히 긴 노포다. 소룡포 같은 포자가 10개 5천 원이다(2019년 10월 기준). 음식에 대해서는 불만이 있을 수 없다. 전국구 만두 맛집이 된 이유다.대단한 수준급의 복어탕이나 복국을 기대한다면 가지 말 것. 내륙 도시 김천에서 복어 전문점(?)을 만나다니, 라고 생각하면 가볼 것.복집이지만, 복어가 중심이 아니다. 경상도 사투리로 ‘저래기’라는 표현이 있다. 무생채, 나물 겉절이 등을 이르는 말이다. 비빔용 겉절이, 저래기가 나온다. 겉절이로 밥을 비빈 후 복국을 한 그릇씩 떠서 국물 삼아 먹으면 된다. ‘겉절이 비빔밥+복국’의 형태다. 가격이 싸다. 1만 원 이하다.70년 가까이 버틴 이유가 있다. 복국을 내륙 식으로 바꿨다. 이 지역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 겉절이 비빔밥과 복국을 같이 내놓는다. 쪽파 썬 것과 새우를 무쳐서 내놓는 음식도 특이하다. 새우젓갈이 아니라 마른 새우를 쪽파와 무친 것이다. 양념 겸 비빔 나물이다.창업주에게서 며느리로 전승되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음식 만지는 일에는 얼씬도 못 하게 했다”고 말한다. 며느리는 긴 세월 동안 그릇 씻는 일, 청소, 정리하는 일만 도우면서 기다렸다. 음식 만지는 일은 10년이 채 되지 않지만, 곁에서 지켜보며 눈으로 음식을 익힌 세월은 수십 년이다.김천에는 두 곳의 큰 맛집 타운이 있다. 관광객들도 자주 들르는 곳들이다. 단체로 찾는 이들도 많다.황악산 직지사 아래에는 산채비빔밥, 산채비빔밥 정식을 내놓는 곳들이 상당히 많다. 업력 50~60년을 내세우는 집들도 제법 있다. 음식은 큰 차이가 없으나 상을 받으면 비빔용 채소나 반찬 등의 맛이 각각 다르다.‘부일산채식당’은 이 지역에서도 노포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깔끔한 맛의 산채비빔밥이 좋다. 정식은 2인분 이상만 가능하다. 뜬비지가 이 가게의 특징이다. 다른 곳 뜬비지에 비해서 곰삭은 구수한 맛이 돋보인다. 비지는 두부를 만들 때 나오는 부산물이다. 콩의 주요 영양분을 뽑아내고 남은 것이다. 별맛이 없다. 이 비지를 한 차례 띄우면(발효, 숙성), 뜬비지가 된다. 가난한 시절의 음식이지만 영양가도 높고 구수한 맛이 돋보인다.산채비빔밥 타운 안의 ‘일직식당’이나 ‘서울식당’ 등도 노포다.‘지례흑돼지타운’은 김천시 지례면의 특산물 흑돼지로 불고기 등을 내놓는다. 역시 2~3대 전승, 50~60년 된 노포들이 많다.‘지례식육식당(한마음농장)’, ‘장영선지례원조불고기’ ‘현구삼대원조불고기’ 등이 유명하다. 모두 2~3대 전승된 노포들이다. 소금구이 스타일의 비교적 맑은 맛의 돼지고기와 고추장, 매운 양념의 불고기가 모두 가능하다.흑돼지는 새로운 품종이 아니라 오래전 품종을 복원한 것이다. 크게 자라지 않아 찾지 않던 품종을 복원했다. 비계와 고기의 밀도가 높다. 특히 지방 부분이 차진 맛이 특징이다. 여러 명이 가면 먼저 소금구이를 주문하고 마지막에 양념 불고기를 먹는 것이 요령. 양념의 경우, 단맛이 강하다. 고기 맛을 가린다.     /음식평론가 황광해

2019-10-30

사방이 만산홍엽(滿山紅葉)… 이 좋은 계절을 어찌하나

몇 해 전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를 여행했을 때다. 키가 기자의 허리에나 미칠 정도인 5~6세 꼬마가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안장도 얹지 않은 말에 용감하게 올라 바람처럼 내달리는 아이의 해맑고도 진지한 표정이 오랜 시간 동안 잊히지 않았다. 덩치가 2배나 큰 유럽 병사들이 원나라(칭기즈칸이 세운 몽골족의 왕국) 기병에게 쩔쩔맸다는 건 역사적으로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때부터였다. 말을 타보고 싶었다. 그러나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승마(乘馬)는 한국에선 ‘귀족 스포츠’로 인식돼 있다.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말에 올라 시원스레 달려볼 수 있을까? 긴 기다림 끝에 마침내 기회가 왔다. 김천승마장에서 짧은 ‘승마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정보를 얻은 것.볕이 좋았던 지난주 화요일. 김천시 남면 봉천리에 자리한 김천승마장을 찾았다. 단단하고 균형 잡힌 체형을 가진 승마 체험 조교가 반겨줬다. 안전을 지켜줄 헬멧을 쓰는 등 간단한 준비를 마치고 마침내 말 앞에 섰다. 심장이 두근거렸다.말은 외형부터가 근사한 동물이다. 근육질의 다리와 늘씬한 등과 배, 거기에 사심(邪心) 한 점 없어 보이는 순정한 눈망울이 멋졌다.오스트리아 비엔나로 출장 갔을 때 마차는 타본 적이 있다. 그걸 끄는 말은 흰색 털에 갈색 점이 드문드문 박힌 ‘잘 빠진’ 준마였다. 김천승마장에서 기자와 만난 말 역시 ‘잘 생긴’ 녀석이었다. 등과 배는 희고 얼굴은 초콜릿빛 적갈색.마차의 좌석이 아닌 말의 등에 오르는 순간, 오추마(烏9A05馬)를 타고 하루에 1천 리를 내달리던 ‘초한지’의 항우가 된 듯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두려움이 함께 엄습했다. 올라탄 말의 등이 예상 밖으로 꽤 높았던 것. 조교가 “지상에서부터 170cm 정도”라고 미리 설명했지만, 내려다본 체감 높이는 3m가 넘어 보였다. 하지만 곧 안정감이 찾아왔다. 기자를 태운 말은 점잖고 기품 있는 걸음걸이로 둥글게 디자인된 실내의 흙길을 여러 바퀴 돌았다. 90kg에 육박하는 작지 않은 남성을 태우고도 거친 숨소리 하나 없이. 말은 의연하고 강한 짐승이었다.김천승마장은 주로 아동들을 위한 ‘승마 교육’을 진행한다. 유치원이나 놀이방 등에서 단체로 승마장을 찾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했다. 기자처럼 ‘꼭 한 번 말을 타보고 싶은 성인’도 사전에 예약하면 간단한 승마 체험이 가능하다.말은 3세 아이 정도의 지능을 가졌다. 그렇기에 목덜미를 쓰다듬어 칭찬해주는 걸 좋아한다. 반대로 말 앞에서 소리를 지르는 건 금물이다.“말에게 다가갈 때는 반드시 앞쪽에서 서서히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한 조교는 “사람이 지나치게 떨면 말 역시 두려워하니 편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김천승마장 체험 예약: 054-433-8773벚꽃이 하늘과 땅을 환하게 밝히던 지난해 봄. 직지사를 다녀온 이모가 말했다.“칠십 평생 그토록 아름다운 풍경은 처음 봤다”고. 과장이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젠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이모, 가을날 직지사는 더 좋던데요.”만산홍엽(滿山紅葉)이 가을이 완연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김천시 대항면 직지사에도 곧 단풍이 절정을 이룰 것이다.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그 이름을 들어봤을 ‘고색창연한 고찰(古刹)’. 직지사를 찾은 날은 평일이었음에도 방문객이 적지 않았다. 멀리서 본 절은 노랗고 붉은 나뭇잎을 배경으로 한 동양화 같았고, 가까이 다가서니 대웅전 처마 너머로 펼쳐진 푸른 하늘이 일상의 스트레스로 막힌 가슴을 뻥 뚫어 주었다.신라 19대 눌지왕 시절인 418년에 묵호자(墨胡子)가 도리사와 함께 창건했다고 알려진 직지사는 고려 태조가 중건한 절로도 유명하다. 사찰 안에는 대웅전 앞 삼층석탑과 비로전 앞 삼층석탑, 석조약사여래좌상과 대웅전 삼존불 탱화 등 보물이 가득하다. 때론 아이들만이 아닌 성인들에게도 ‘보물찾기’가 필요하지 않을까?선물처럼 다가온 가을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은 또 있다. 김천시 지례면 부항댐은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물빛이 그저 그만이다. 댐 인근을 산책하다보면 ‘자연이 그려낸 그림’은 어떤 빼어난 화가도 흉내 낼 수 없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부항댐 주변엔 레인보우 스카이워크와 짚와이어도 설치돼 있어 보다 ‘역동적인 여행’을 원하는 이들의 요구도 충족시켜 준다는 것이 김천시의 설명이다. 주말이면 김천부항댐물문화관을 찾는 가족 단위 관광객들도 많다고 한다.오묘한 하늘 색깔로 1천 년 변함이 없는 고려시대의 청자. 몇 세기 전부터 유럽의 왕가와 귀족 가문에서 사용해온 언필칭 ‘명품 식기’….고귀한 것의 생명은 세월을 뛰어넘는다. 우리는 그걸 일컬어 귀물(貴物)이라고 한다. 세상에 드물게 존재하기에 얻기 어려운 물건. 김천시 대항면 ‘세계도자기박물관’엔 귀물이 가득했다. 고려의 청자와 조선시대 진품 백자는 물론이고, 여기에 덴마크, 프랑스, 헝가리, 이탈리아, 영국의 도자기들이 미려한 자태를 뽐내며 박물관을 찾은 방문객들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박물관의 입장료는 단돈 1천 원. 동서양의 진품·명품 도자기를 한자리에서 관람할 수 있는 가격치곤 매우 저렴하다. 이윤에 앞서 도시의 홍보를 중요시하는 김천시가 운영하기에 가능한 일이다.박물관 안 도자기들의 전체 가격을 궁금해 하는 기자에게 입구를 지키는 직원은 “모르긴 몰라도 당신 상상을 훨씬 뛰어넘을 것”이라며 웃었다. 전시된 도자기 중에는 최소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작품’도 있기에 요즘 젊은이들의 말을 빌리자면 ‘가격 대비 만족감’이 높다고 할 수 있다.유럽 귀족 가문의 저녁 식탁을 재현해놓은 테이블이 흥미롭다. 거긴 온통 크리스털 식기로 반짝인다. 우리 도자기 30여 점과 유럽 도자기 500여 점, 크리스털과 유리로 만든 식기와 술잔 510여 점이 전시된 김천세계도자기박물관. 전통자기를 그윽한 눈길로 살피는 나이 지긋한 노인들부터 그릇과 찻잔에 새겨진 문양만 봐도 “이건 어느 나라 어느 회사가 만든 제품이야”라고 단박에 알아내는 식기애호가 주부들까지 흥미로워할 공간이다.◇김천세계도자기박물관 홈페이지: http://www.gimcheon.go.kr/mini/museum10살 안팎의 한국 아이들은 ‘기차’라고 하면 시속 300㎞에 가까운 속도로 번개처럼 달리는 KTX만을 떠올릴 게 분명하다. 자신들의 부모가 청년이던 시절엔 ‘비둘기호’ 혹은, ‘통일호’라 이름 붙인 시속 50㎞ 내외의 느린 기차를 타고 피크닉을 다녔다는 건 분명 모를 터.기차는 낭만을 부르는 교통수단이었다. 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운행을 멈춘 ‘옛날 기차’를 카페로 꾸민 공간이 김천의 ‘독특한 여행지’가 됐다. 지금은 아스라한 추억으로 남은 대항면 직지사역에 들어선 열차카페 ‘옛길’. 이곳에선 커피와 주스 등 마실 거리와 돈가스 등의 간단한 경양식을 판매한다. 폐차된 새마을호 열차 내부를 아기자기하게 찻집으로 꾸민 손길이 돋보인다.실내는 아늑하고, 흘러나오는 음악도 1970~80년대 유행했던 통기타 곡들이다. 30~40대 부모들이 어린 자녀들과 함께 찾아와 “엄마와 아빠가 서로 좋아할 땐 말이지, 기차를 타고…”라고 시작되는 이야기를 들려주기에 맞춤인 공간이다.카페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회갑을 훨씬 넘긴 할머니들. 주문 받는 것과 서빙이 조금 느리더라도 어머니를 떠올리며 너른 마음으로 웃으며 이해하는 게 좋다. /홍성식·나채복 기자

2019-10-30

직원을 사랑한 사우스웨스트, 탄탄한 조직력 비결 됐다

□ 직원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사우스웨스트설립 초기, 임원인 킹이나 라마 뮤즈 등은 사원용 선술집에 가서 직원들과 격의 없이 맥주를 마시는 일이 흔했다. 일례로 이런 모습을 본 경쟁사 브래니프 조종사들은 놀라서 맥주 잔을 떨어뜨리기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특히 킹과 라마 뮤즈는 직원들의 만남을 통해 승객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승객들의 반응을 궁금하게 여겨 물었다고 한다. 킹은 현장에 나가 직원들과 자주 어울리는 것을 중요한 일과로 여겼다고 알려졌다. 한달에 25∼30시간 비행기를 타면서 직원들과 함께 일하고 고객들과 대화를 나누고, 공항 현장을 점검할 기회를 가졌다. 심지어 킹은 1971년에 현장에 나가 최전선에서 뛰는 직원들과 함께하는 날을 제정함으로써 이러한 행동을 하나의 기준으로도 확립했다.사우스웨스트의 창업자 허브 켈러허. 그는 올해 1월 3일(미국 현지시간) 87세의 나이로 운명을 달리했다. /사우스웨스트 제공□ 의사소통이 핵심이다사우스웨스트의 창업 첫해는 매우 어려웠다. 자원은 풍부하지 못했고 이용 승객수도 많지 않았다. 비행기 연료조차 두달씩이나 라마 뮤즈의 개인 신용카드로 구입해야 할 정도였다.지상 장비도 턱없이 부족했고 그나마 있는 것도 낡아서 잘 가동되지 않았다. 때때로 직원들은 아주 낡았거나 버린 장비를 구해다가 대체품으로 사용했다. 한창 브래니프와 사우스웨스트 사이에 치열한 법정공방이 오갈 때여서 갈등이 심했지만, 브래니프 정비공들은 부품이나 도구를 사우스웨스트에게 빌려주기도 했다.어쩌면 불쌍하게 생각했거나 경쟁 상대로 여기지 않았을 공산도 크다. 업계 기준으로 볼 때 지상 장비가 불충분하고 작업 환경이 열악했지만 사기는 어느 회사 못지 않았다고 한다.열성적이고 직업 윤리가 강한 직원들은 항상 중진들과 격의 없이 의사소통을 했고 ‘재미를 추구하는’기업문화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외인구단이었던 사우스웨스트 직원들사우스웨스트 초창기 직원들은 상당수가 다른 항공사에서 해고된 사람들이었다. 당시 망해버린 퍼듀 항공사 출신이 많았고 군대 출신들도 받아주는 데가 없어 사우스웨스트의 문으로 들어오게 됐다.이런 사람들은 실직이 얼마나 뼈아픈지 잘 알고 있었다.직원들은 남들보다, 다른 경쟁 항공사들보다도 더 잘해내야 한다고 알고 있었고, ‘10분 턴’ 등도 이러한 절박한 마음에서 궁여지책으로 나오게 된 정책이였다고 회상한다.조종사, 승무원, 정비공 등도 틈만 나면 기내로 들어가 좌석을 정리하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수화물을 정리하는 일들을 도왔다고 한다. 그들은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고 실제로도 정말 해냈다.직원들 사이에서는 그때 금기사항이 2가지가 있었다고 하는데 ‘우리는 못해’와 ‘그건 내 일 아니야’였다. 이러한 생존 전략은 창의적인 정신만 함양시킨 것이 아니라 모든 직원들의 유대 의식을 아주 단단하게 단련시켰다.인터뷰 ▶▶ 빌 콜(BILL COLE) 전 사우스웨스트 기장험난했던 법정 소송과 갖가지 방해 공작에도 사우스웨스트는 살아남았고 오히려 성공했다. 이러한 전설을 남긴 초창기 직원들은 아직도 회사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심이 강하다. 22년 동안 사우스웨스트 항공기를 조종했던, 창립자 중 한 명인 허브 캘러허와 개인적으로도 교류가 있었던 빌 콜 전 기장을 만났다.-본인의 소개를 부탁한다.△이름은 빌콜, 올해로 77세다. 현재는 러브필드 공항 근처에 위치한 항공박물관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다. 이곳은 사우스웨스트는 물론이고 지역 투자자들이 합심해 만든 비행역사의 기록보관소 역할을 하고 있다.1965년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월남전 참전도 한 경력이 있다. 대한민국도 군 복무 당시 임무 수행차 들린 적이 있어 친근하다. 1980년부터 2002년까지 22년 동안 사우스웨스트에서 기장으로서 일을 했다. 마지막 2년 동안은 조종 훈련 시뮬레이터 강사로 일하기도 했다.- 성공한 항공사인 사우스웨스트에도 사고사례가 있었는지.△기체 결함 정도는 있어도 큰 사고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근무 당시 단 한번 사망사고가 발생한 적이 있었는데 이 사고도 옆의 비행기 펜이 고장나 조각이 날라오면서 우리 비행기 창가 승객 1명이 맞아 사망한 사례가 있었다. 그때 기장과 부기장이 침착하게 대처해 비행기를 급강하시켜 산소마스크를 내려오게 했고 대형 인명피해를 막아냈다. 우리 사우스웨스트는 조종사 훈련이 굉장히 철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런 비상상황에 대응 방법도 이미 숙지해 항상 승객 안전에 최선을 다한다.-사우스웨스트에 도움을 준 기관, 정부 등이 있다면.△정부는 우리에게 도움을 거의 안줬다. 거의 개인투자자들 중심이었다.새로운 지역항공사도 지자체나 우리의 ‘캘러허’같은 의지가 강한 인물이 나서서 투자자를 모으는게 우선으로 보인다. 사우스웨스트 설립자도 종잣돈을 가지고 개인 투자자들을 모아 시작했다.-사우스웨스트 항공사를 자랑한다면.△최고의 직장이었다. 직원들이 가족 같은 분위기였고, 사우스웨스트를 직장으로 가진 건 축복이었다. 일하면서 은행에 예금도 잘 되있고, 직원들간 소통도 잘돼 서로 잘 뭉쳤다.특히 허브 캘러허는 나에게 있어 영웅이었다. 기존의 리더가 아닌 전혀 색다른 타입의 리더였다. 다른 항공사는 해고를 잘 하는데 사우스웨스트는 정말 큰 이유가 아니면 해고를 안한다.그래서 직원들이 안정감을 느끼고, 흔히 회사가 어려울때 하는 정리해고도 우리 회사는 하지 않는다. 직원들이 실수를 해도 기간을 주고 개선하도록 도와준다.-회사에서 생각나는 인물이 있다면.△뭐니뭐니 해도 허브 캘러허가 제일 기억이 난다. 직원들을 가족처럼 아끼고 소속감을 느끼도록 항상 배려했다. 한번은 내가 조종사였을 때 공항에 내리면서 마주쳤는데 캘러허가 “조종사, 차가 어딨냐”라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직원 주차장에 있다”하니, 캘러허가 “1번 게이트에 내 차가 있으니 같이 가자”라며 운전해줬다. 캘러허는 항상 직원들에게 친근했고 스킨십도 서스럼없이 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직원들을 안고 키스하기도 했다.또한 내가 아들과 야구경기를 보러 간 적이 있는데 캘러허가 담배를 입에 물고 오토바이를 타고 들어와 시구하는 등 그는 정말 자유분방하면서도 그릇이 크게 느껴진 사람이었다.요즘에는 컴퓨터로 하지만 옛날에는 조종사들이 모여 노트에 몇시에 비행기를 타는지 기록하는 ‘파일럿 라운지’가 있었는데 캘러허가 항상 매일 아침 나와 인사하고 ‘우리’라는 개념을 상기시켰다.콜린 법률사무장도 기억에 남는다. 사우스웨스트 조직 문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사우스웨스트 문화조직위원장을 맡기도 했다.어느날 직원들에게 줄 먹을 것을 챙겨온 적이 있는데 직원들과 얘기하다가 “우리 이날을 문화의 날로 만듭시다”라며 즉흥적으로 제안해 실제 기념일이 정해지기도 했다.-포항시를 기반으로 했던 저가항공사가 최근 운항을 중단했다. 항공사를 두고 싶어하는 포항시에 조언을 한다면.△논리적으로 봐도 이용자가 시민들이다. 시민 중 사업하는 사람도 있을텐데 커뮤니티 등 단체를 만들어 ‘우리는 지역항공사를 원한다’라는 슬로건으로 항공사 창립 또는 유치 운동을 했으면 좋겠다. 세계적인 철강업체인 포스코도 있다고 들었는데 이러한 대기업들의 지원을 받는 것도 좋을 듯하다./황영우기자 hyw@kbmaeil.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2019-10-30

선택과 집중&전략적 벤치마킹

구미는 산업도시의 이미지를 벗고 역사와 문화가 넘치는 관광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구미가 가진 산업공단이라는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기 위해 산업관광이라는 전략으로 도시재생을 접목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전개하고 있다. 근대 산업 유산을 이용한 산업관광에 집중하는 구미시가 지속성을 가진 관광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일까. 관광전문가와 문화콘텐츠 전문가로부터 구미의 지속가능한 관광자원을 위한 방안을 들어봤다.석미란 구미대학교 호텔관광항공서비스학과 교수△석미란 구미대학교 호텔관광항공서비스학과 교수“구미관광, 선택과 집중이 필요합니다.”석미란(51) 구미대 교수는 구미시에는 많은 관광자원들이 있음에도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석 교수는 “관광이라는 것은 외지인들이 와서 그 지역에서 오래 머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며 “관광업계측에서는 ‘3·6·9법칙’이라고 하는데, 이 법칙이 적용이 되려면 관광자원에 임팩트가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3·6·9법칙’이란 관광객이 3시간을 머물면 음료수를 사먹게 되고, 6시간을 머물면 식사를 하고, 9시간을 머물면 잠을 자고 간다는 뜻이다.석 교수는 구미에 흩어져 있는 관광자원들을 이제 큰 테마로 묶어 서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하고, 그 중에서 임팩트 있는 자원을 대표성을 가지도록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그는 “예를 들어 국악과 관련된 공연과 행사가 구미에서 얼마나 많이 열리는지 구미시민들도 알지 못한다. 동편제가 구미에서 개최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이들이 많다”며 “국악과 관련된 공연과 행사를 특정 기간을 정해 개최 할 수 있다면 그 시너지 효과는 기대 이상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또 “구미시가 이미 만들어 놓은 관광자원들을 잘 활용해야 한다”며 “너무나 좋은 관광자원들이 활용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베이쿠미를 꼽았다. 베이쿠미는 베이커리와 구미의 합성어로, 구미지역 농산물을 알리기 위해 거북 알 모양으로 만든 수제 빵이다. 구미시는 베이쿠미를 구미의 대표 브랜드 식품으로 내세우고 있으나, 아직 홍보 부족으로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석 교수는 “베이쿠미가 진정으로 구미를 대표하는 빵이 되려면 다른 지자체의 상품처럼 그 지역의 대표 관광지에서 판매가 돼야 한다”며 “외지인들에게 손쉽게 베이쿠미를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만큼 좋은 홍보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관광자원들을 연계하는 네트워크 구축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신라불교초전지마을의 경우 그 마을 자체만으로는 임팩트가 약해 불교라는 큰 맥락에서 다른 관광지와 연계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며 “불교 신도들 말로는 하루에 사찰 세 곳을 방문하면 복을 받는다고 하는데, 이를 활용해 초전지마을 인근에 있는 구미의 도리사와 김천 직지사를 연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도리사와 직지사, 신라불교초전지를 연계한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제안한 것이다.석 교수는 마지막으로 구미시에 관광에 대한 사고의 전환을 요구했다.그는 “구미의 지역성을 보여 줄 수 있는 새마을운동테마파크, 박정희 대통령 밥상 등은 아쉬운 점이 많다”면서 “구미는 새마을운동의 종주도시라는 타이틀이 있음에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새마을운동을 높이 평가하고 있음에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말했다. 또 “관광자원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관광산업은 그 지역이 지닌 역사성과 지역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 성공할 수 있다”며 “구미시가 지역의 관광자원을 좀 더 유연한 시각으로 바라봤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석미란 교수 약력계명대학교 대학원 관광경영학과를 졸업(경영학박사)하고 현재 구미대학교에서 호텔관광항공서비스학과 학과장을 역임하고 있다. 구미시정책연구위원회 위원, 신라불교초전지 운영위원, 구미시 관광자문협의회 위원, 대한관광경영학회 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김정학 대구교육박물관 관장△김정학 대구교육박물관 관장“구미 관광의 전략과 전술, 벤치마킹에서 찾아야 합니다.”김정학(60) 대구교육박물관 관장은 어떤 일이든 전략과 전술이 필요하다면서 구미시가 추구하는 산업관광의 성공을 위해서는 구미와 비슷한 지역의 벤치마킹이 필수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고향이 구미인 김 관장은 구미문화예술회관 관장을 역임했던 인물로, 구미지역 문화적 특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문화콘텐츠 전문가이다.김 관장은 구미관광의 문제를 박물관 마인드에서 찾길 바랬다.그는 “구미와 가장 비슷한 도시가 개인적으로 미국의 시애틀이라고 생각한다.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이긴 하지만 세계적인 글로벌 회사들이 그런 작은 도시에 몰려 있다는 것 만으로도 구미시가 시애틀을 벤치마킹 해야할 이유”라며 “구미에도 시애틀과 같은 역사산업박물관이 반드시 있어야한다”고 강조했다.마이크로소프트, 코스트코, 보잉, UPS, 스타벅스 등 글로벌 기업들의 본사가 있는 시애틀은 미국에서도 가장 성장이 빠른 도시로 꼽힌다. 전문가들은 시애틀의 차별화된 라이프 스타일이 기업의 경쟁력이라고 평가한다. 시애틀의 라이프 스타일과 기업들의 경쟁력을 고스란히 들여다 볼 수있는 곳이 바로 시애틀 역사산업박물관(Museum of History Industry, MOHAI, 이하 모하이)이다. 이 곳에서는 19세기 초 작은 도시에서 세계적인 항구도시로 성장하기까지 시애틀의 역사 속 등장하는 세계 유명 회사들의 발전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김 관장은 “모하이는 단순한 산업유적을 전시한 박물관이 아니다. 시애틀이 어떤 도시인지를 알려주고, 혁신과 상상력의 전통으로 도시의 역사를 이어가고있다는 시애틀의 미래 각오까지 보여준다”면서 “이러한 박물관의 특성은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는 절대 알 수 없기 때문에 벤치마킹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그는 “벤치마킹을 단순히 베끼는 거나 인용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이는 큰 착각이다”며 “벤치마킹을 제대로 하려면 잘 된 곳은 얼마나 잘했는지, 또 잘못된 곳은 왜 망했는지를 세심하게 살피고 분석해야 한다”고 했다.4차산업과 가장 어울이는 관광산업은 융복합상태로 보여져야 하는 만큼 단순논리로 접근해서는 안된다고 충고했다.김 관장은 “관광산업에 대한 가장 큰 착각은 빙산의 일각만을 전부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관광산업과 도시재생은 가감승제와 같은 단순 셈법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다”며 “예외의 경우가 많은 관광산업과 도시재생의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그는 “국내에선 아파트 공사를 하다 유적지가 나오면 공사를 중단하지만, 일본 오사카의 경우는 달랐다”며 “그 유적지를 그대로 보존하고 그 위에 강화유리를 덮고 양측 기둥을 세워 1, 2층은 비워두고 3층부터 사람들이 살도록 해 유적관광지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이어 “이런 사례를 말로만 들어서는 접목할 수 없다”며 “직접 눈으로 보고 담당자를 만나 유적지 활용방법, 네트워크 활용방법 등을 배워야만 한다”고 덧붙였다. 또 구미시 원평동 도시재생과 관련해 일본 오이타현 분고타카다를 벤치마킹 해 볼 것을 제안했다. 이 곳은 일본에서 ‘옛 정취가 그리울 때 꼭 한번 가봐야 할 마을’로 알려져 있다. 마을 전체를 박물관으로 만들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곳의 가장 큰 특징은 이 마을이 어떤 곳이었는지 알게 한 뒤 돌아 볼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국내에선 서울과 전북 진안군이 마을박물관을 시도하고 있다.김 관장은 “구미시도 관광을 위한 전략은 분명히 있겠지만, 그 전략을 펼칠 수 있는 전술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아라며 “벤치마킹을 통해 구미만의 전술을 찾아 구미가 산업관광도시로 성장하길 기원한다”고 말했다.-김정학 관장 약력TBC대구방송 등 방송PD로 20여 년간 근무했으며, 영남대학교 천마아트센터 총감독, 국악방송 한류정보센터장, 구미문화예술회관 관장 등을 역임했으며, 경북도 ‘새경북위원회’위원(기획총괄분과),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조직위 문화기획단 위원,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전문위원, 대구광역시 시정혁신 과제발굴 전문가 자문단 등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대구교육박물관 관장을 맡고 있다./김락현기자

2019-10-30

매흉(埋兇)으로 왕자를 죽이다

무신난(戊申亂·이인좌의 난)이 끝난 1728년 11월이었다. 영조의 외아들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갑자기 병석에 눕더니 홀연 세상을 떠났다. 그때 세자의 나이가 열 살이었다.그로부터 2년 뒤인 1730년(영조6) 3월, 궁궐 안에서 매흉((埋兇)의 흔적이 발견되면서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매흉이란 저주를 통해 왕과 세자 등 왕실의 가족들을 병들게 하거나 죽기를 바라는 뜻으로 흉한 물건을 일정한 곳에 묻는 것이고, 화흉(和兇)은 이 저주물들을 왕실 가족에게 먹이는 독살기도를 말한다.과연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추국(왕명으로 의금부에서 수행한 중죄인의 심문)결과 2년 전 무신난에서 피해를 본 소론과 남인 일파들의 짓임이 밝혀졌다. 이들은 궁녀들을 사주하여 궁궐 안 곳곳에 사람의 뼛가루와 흉물을 묻어놓았고, 그런 흉물을 음식물에 섞어 세자와 공주들에게 먹이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한 궁녀는 임금이 쓰는 뒷간부근 흙을 식칼로 판 뒤 저주의 말을 읊으면서 인골을 묻었다며 자백도 했다.이 해괴망측한 사건의 내막을 파헤쳐 보면, 보통 사람의 상식과 도덕적 기준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다.효장세자의 이름은 행(緈), 아명은 만복(萬福), 자는 성경(聖敬)이다. 1719년(숙종45) 2월 15일 영조와 정빈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빈이씨는 동궁전 나인(內人)이었는데, 영조가 연잉군 시절 사가로 불러들여 첩으로 삼은 여인이다. 1721년(경종1) 8월 연잉군이 노론의 적극적인 지지로 왕세제가 되었을 때 정빈이씨도 내명부 종5품 소훈(昭訓)이 되었지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효장세자는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남의 품에서 자란 것이다.1724년(경종4) 영조가 즉위하면서 소훈 이씨는 내명부 정4품 소원(昭媛)에 추증되었고, 아들 이행은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다. 이듬해인 1725년(영조1) 2월, 우윤 심정보, 예조판서 민진원이 경의군을 왕세자로 봉하자는 상소에 따라 영조는 경의군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그해 3월 20일 인정전에서 책봉례를 거행했다. 그때부터 효장세자는 일곱 살의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서연(왕세자에게 경서를 강론하던 자리)에 참여하여 왕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효장세자는 아버지 영조를 빼닮아 스스로에게 매우 엄격했다. 1727년(영조3) 9월, 영조는 풍양조씨 가문의 이조 참의 조문명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들였다. 그때 세자의 나이는 아홉 살이었고, 세자빈은 그 보다 세 살 위인 열두 살이었다. 세자빈 조씨는 성품이 온유하고 다정다감해서 시아버지 영조의 마음에 쏙 들었다. 똑똑한 왕세자와 착한 며느리를 바라보면서 영조는 당쟁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조정의 시름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길지가 않았다.잠시 필름을 과거로 돌려보자. 1728년(영조4) 3월, 이인좌 등 남인과 소론 강경파들이 밀풍군 이탄을 옹립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다행이 소론 온건파 계열(緩少系列)의 영의정 이광좌, 병조판서 오명항 등이 발 빠르게 대응하여 반란은 한 달여 만에 진압되었다. 영조는 당쟁이 국왕을 끌어내리려는 반란으로 비화하자 새삼 붕당의 폐해를 절감했다. 하지만 당쟁이란 것이 원래 정치에 대한 이견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긍정적인 측면도 많았다. 그래서 국왕으로서 이를 무작정 배척하기보다는 양자를 공평하게 등용하여 조정에 참여시키는 탕평책까지 구상했다.한데 그해 11월, 효장세자가 갑자기 병석에 눕더니 그달 16일 경복궁 자선당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효장세자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심지가 굳고 효성이 지극했다. 졸지에 믿고 사랑했던 후계자를 잃은 영조의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임금이 자식을 잃고 애절하게 통곡하자 입시하고 있던 신하들까지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훔칠 정도였다고 한다.1729년(영조5) 1월 13일, 영조는 죽은 왕세자의 시호를 효장(孝章)으로 정했다. 지혜롭고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을 효(孝)라 하고, 경건하고 신중하며 고상하고 현명한 것을 장(章)이라 했다. 효장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은 가례(嘉禮)를 치른 지 1년 밖에 되지 않은 세자빈 조씨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합방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서 청상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1730년(영조6) 봄바람에 아지랑이가 나부낄 3월이었다. 그러고 보니 효장세자가 죽은 지도 벌써 2년이 지났다. 영조가 궁궐 내를 산책하다가 우연히 여러 전각 근처에서 흉물이 묻혀있는 흔적을 발견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영조는 바로 의금부에 조사를 명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소론 일당의 지시를 받은 궁녀 박순정, 김순혜, 무당 태자 등이 과부 이세정으로부터 건네받은 사람의 뼛가루를 창경궁의 양화당, 동궁, 빈궁의 침실 등에 묻었고, 예전부터 그것을 음식에 타서 왕세자와 강보에 싸인 네 명의 옹주에게 먹였다고 자백했다. 이를 먹은 화순옹주는 홍진과 함께 하혈 증세로 시달렸다. 영조는 비로소 효장세자의 죽음이 저들의 지속적인 매흉(埋兇)과 화흉(和凶) 탓임을 알게 되었다. 영조의 놀라움과 분개는 극에 달했다. 그달 9일자 영조실록의 기사에는 분개한 영조의 목소리가 가감 없이 실려 있다.궐내에서 매흉과 화흉을 직접 행동에 옮긴 박순정은 효장세자를 두 살 때부터 일곱 살 때까지 보살폈던 최측근 궁녀였으니, 영조의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효장세자가 요양을 위해 거처를 옮겼을 때도 계속 따라다니며 독수(毒手)를 펼쳤다. 그녀가 세자에게 먹인 뼛가루의 재료는 대현산(서울 성동구 금호동)의 여러 무덤에서 채취했거나, 길가에 거적으로 말아놓은 개가 뜯어 먹다만 시체, 혹은 불에 탄 사람의 해골이었다. 끼니 때마다 그처럼 비위생적인 흉물을 섭취한 효장세자는 단기간에 위중한 상태에 빠져들었고, 병의 원인을 알 리 없는 의관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효장세자의 사인이 밝혀지면서 충격을 받은 영조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한동안 조용하던 조정에 피바람이 불었다.사건 당일 영조는 대신들과 사헌부, 사간원, 의금부 당상, 좌·우포도대장을 불러들인 다음 새벽 3시에 국청을 열고 죄인들을 심문했다. 주모자 박순정과 이세정, 그들을 도와 궐내에 흉물을 묻거나 먹인 궁녀들과 여종들이 모조리 처형됐다.조사가 진행될수록 이 사건의 배후 인물은 궁궐 밖으로 확대됐다. 가장 먼저 조사 대상에 오른 사람은 가선대부 박도창(朴道昌)이었다. 그는 무신난 이전에 강성파 소론계인 전라감사 황이장, 권첨, 정사효의 군관을 차례로 지내며 명성을 얻었고, 진휼을 잘해서 종2품 당상관까지 오른 사람이었다. 또한 박도창은 순천 방답진(防踏鎭)에 노비 수백여 명을 거느리고 있던 재력가였고, 장흥 등 바닷가 인근 읍의 뱃사람들과도 모두 친했으므로 따르는 세력들도 상당했다. 그와 공모한 자들도 있었다. 정사효의 첫째 아들 정도륭, 정사효의 둘째아들이자 여흥군의 매부인 정도중, 그리고 정사효의 서얼 동생 정사공 등이 박도창과 함께 이 일을 꾸민 것으로 밝혀졌다. 정사효는 전라도관찰사로 재임하던 중 무신난에 가담한 혐의로 국문을 받다가 죽은 인물이고, 나머지 인물들도 모두가 지난 무신난에서 역적으로 몰려 처형된 사람들과 관련이 있는 인사들이었다.이 사건에서 박도창은 궁궐안의 사람들과 결탁하고 내통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여종 하복랑을 궁궐로 들여보내 궁녀들에게 뼛가루 등 흉물을 넘겨주었고, 소요되는 비용은 정도륭이 지원했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소론과 남인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론을 제거해야 하고, 노론을 제거하려면 그들이 받드는 영조를 제거해야 했다. 바로 그 시작이 임금의 피붙이인 세자와 옹주들의 제거였다. 반란에 성공을 하면 양원군(성종의 15남)의 아들인 여흥군 이해(李垓)나 여릉군 이기(李圻)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계획이었다.이 무렵 영조를 놀라게 한 또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엽기적인 매흉·화흉 사건의 수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4월 중순이었다. 19세의 어린 환관 최필웅 등 여러 명이 한밤중에 궁궐 담장을 넘어갔다가 체포된 것이다. 부쩍 의심을 품은 영조가 앞서 있었던 매흉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의심하여 엄중한 심문을 명했다. 심한 낙형(烙刑·불에 달군 쇠붙이로 피부를 지져 고문을 가하는 신문)을 견디지 못한 최필웅은 자신이 정사효의 일가붙이인 남인 박재창의 지시에 따랐다고 자백했다. 박재창이 일단의 노비들을 궐내에 잠입시켜 미리 구입한 화약을 터뜨려 불을 지르고, 궁인들이 놀라 뛰쳐나가면 자객 이태건이 임금을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연이어 일어난 이 두 가지 사건은 같은 무리의 사람들이 일으킨 역모사건이었던 것이다.경술년(1730) 이 해 이 두 모반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약 200명이 넘는다. 이들에 대한 조사는 1년 6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상궁, 환관 등 사건을 일으킨 직접 당사자들은 즉시 처형되었다. 그리고 무신난에서 용케도 살아남았던 정사효, 권첨, 목중형의 핵심 세력들과 그 이전에 김일경 상소에 동참했으나 영조의 배려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던 이진유, 윤성시, 서종하 등이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또한 무신년 당시 괘서사건에 관련되었다가 살아남은 나머지 인물들도 이 사건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되어 모두 처형되거나 신문을 받던 중 고문으로 죽었다.아이러니하게도, 경술년에 일어난 이 두 가지 사건으로 영조는 자신의 정통성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였던 반대세력들을 뿌리째 제거할 수 있었다. 남인과 강경파 소론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은 영조와 노론에게 완전히 진압당하면서 재기불능 상태로 추락하고 만다. 수십 년에 걸친 남인· 준소((峻少)와 영조의 대결은 결국 영조의 완판승리로 끝이 났고, 한계를 여실이 드러낸 탕평정책도 막을 내렸다. 이후 정국은 노론의 일방적 독주로 전개가 되었다.이 희대의 사건에 가담하였던 박도창은 심문도중에 독살을 당했다. 이런 일은 종종 있었다. 매질을 견디기 힘들었던 본인들의 뜻도 있었으나, 죄를 시인하게 되면 가족들은 연좌를 당하게 될 것이며, 가산도 지키기 힘들 것이라는 점을 염려한 집안사람들이 의금부 나장에게 뇌물을 주고 독약을 타 먹여 죽게 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던 것이다.박도창은 그렇게 죽었지만, 연좌된 첩 덕순(順德)과 첩의 아들 아지(阿只), 첩의 딸 영애(永愛)가 이 엄청난 사건의 뒷이야기를 짊어지고 장기현으로 유배되어 왔다. 그게 1730년 4월 29일이었다.당쟁은 선악의 측면이 공존한다. 그 나름의 이념과 제도를 갖추어 적절하게 운영하면 사회발전의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이것을 잘못 사용하면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독약과도 같은 것이 된다. 어린 세자와 옹주들에게 무덤에서 파온 부패한 인골을 갈아 먹였다는 이 사실이 부끄럽게도 영조실록에 정사(正史)로 기록되어 있다. 당리당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당쟁의 폐해를 반면교사로 삼으라는 뜻일 거다. 당쟁은 시대적으로 계속되어 왔고 지금도 진행형이다. 다만 그 평가는 역사가 할 것이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10-29

순도 높은 파랑, 찬란한 금빛… 아름다운 것들은 늘 그대로다

다시 영덕으로 가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얼마 전 태풍 ‘미탁’으로 경북 동해안 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고래불로 가는 길, 가을 하늘은 언제 그토록 흉포했냐는 듯 눈이 부시도록 맑았다. 햇살 속에서 소나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초록빛을 빛내고 있었다. 그러나 바다는 아직 태풍의 날카로움을 기억하고 있었다. 세차게 밀려오는 파도는 방파제에 부딪쳐 낱낱이 부서지고, 여기저기 심하게 할퀴어진 해변은 말이 없었다. 곳곳에 모래와 자갈, 쓰레기 등이 한 데 쌓여 더미를 이루고, 찢어진 천막과 간판, 쓰러진 나무와 기둥들이 바람 불 때마다 바다를 대신하여 신음하는 것이었다.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한 사람이라도 더 찾아주는 게 바다에게도,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그나마 작은 위로와 기쁨이 될 것이다. 거센 태풍도 영덕 바다의 아름다움을 해치지 못했다고, 아름다운 것들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고, 나는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고래불과 대진 해수욕장은 여전히 순도 높은 파랑을 빚어내고, 태풍이 지나간 하늘은 공중에다 하얀 뭉게구름을 국화꽃처럼 피워놓고 있었다.태풍이 휩쓸고 간 해변에는 ‘쓸쓸한 황홀함’이 있다. 이때 황홀함은 풍경이라는 외부적 자극에 의한 고취인 동시에 슬픔이라는 내적 작용이 몰고 온 일종의 환각적 상태다. 슬픔 속에 오래 침잠되어 있다 보면 세상이 비현실적 공간처럼 여겨진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이든 육체의 고통 또는 현실의 절망이든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다. 영덕 바다는 거짓말처럼 아름다웠다. 대진해수욕장을 걸으면서 나는 정지용이 ‘유리창 1’에서 토로한 “외로운 황홀한 심사”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바닷바람이 목 소매로 들어가 등이 서늘했다. 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파랑 때문인지, 또는 수평선이 튕겨내는 가을 햇살 때문인지 눈에 자꾸만 물기가 고였다. 무언가 활달하고 복작거리는 온기가 필요한 시간, 눈을 좀 말려야겠다. 장날은 아니지만 영해만세시장의 표정이 궁금해졌다. 상설시장이 운영되고 있으니 언제 찾아도 시장 구경하는 쏠쏠한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티 없이 푸르른 하늘 아래 빨강 노랑 초록 파랑 파라솔들이 무지개를 띄워 놓은 영해읍내를 걸었다. 오래된 전통 시장은 이제 아케이드 안으로 자리를 옮겨 비와 바람, 추위로부터 안전해졌다. 바닷바람에 시렸던 내 몸도 아케이드 안에서 훗훗해졌다.말린 생선, 멸치, 김, 젓갈 등 해산물과 함께 눈길을 끄는 것은 돼지 머릿고기와 순대였다. 아니, 눈길을 끄는 게 아니라 콧길을 끌었다. 냄새가 나는 쪽으로 코를 벌름거리면 그곳엔 어김없이 어르신들 몇이 대낮부터 식당에 주저앉아 털 숭숭한 머릿고기와 따끈따끈한 돼지 간을 안주 삼아 탁주를 마시고 있었다. 입에 고인 침을 삼키며 고개를 돌리면, 장사는 뒷전인 채 화투놀이를 즐기는 상인들이 보였다. 물건 하나 사지 않아도 마음의 장바구니가 가득 찼다. 아니, 어느 한구석이 허전해졌다. 그러니 빈손으로 갈 수는 없어, 나는 집에서 국물 낼 때 쓸 멸치를 좀 사서는 시장을 나섰다.대탄리의 해맞이공원은 영덕의 대표적인 명소이다. 해맞이공원에서 바라보는 영덕 바다는 ‘영덕 블루로드’가 자랑하는 절경 중의 절경, 뒤를 돌아보면 그에 못지않은 풍경이 펼쳐진다. 바로 풍력발전소의 거대한 풍력발전기들이 푸른 하늘을 가르는 장관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근교의 잔세스칸스(Zaanse Schan)는 ‘풍차마을’로 유명한데, 아기자기한 네덜란드 풍차마을에 비해 이곳 영덕 대탄리는 호방하고 장쾌한 멋이 있다. 풍력발전기라는 단어보다는 ‘풍차’가 예쁘고, 풍차라는 말보다는 ‘바람개비’가 곱다. 커다란 바람개비들이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영덕신재생에너지전시관과 해맞이캠핑장 사이에 ‘산림생태문화공원’이 있다. 이곳에서는 거대한 바람개비를 가까이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다양한 체험 활동까지 즐길 수 있다. 지난 1997년, 대형 산불이 발생해 폐허가 되어버린 창포리 산지를 영덕군이 수년에 걸쳐 복원하고 가꾼 것이 오늘의 산림생태문화공원이다. 출렁다리, 음악당, 인공계곡, 목공예체험장, 조각공원, 식물원 등 다채로운 시설들이 지역민들과 관광객들에게 기쁨을 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를 끄는 것은 ‘달려라 왕발통’이다. 왕발통은 ‘세그웨이(Segway)’라 불리는 1인용 전동휠바이크다. 이 세그웨이가 영덕산림생태문화공원에 와 왕발통이라는 귀여운 이름을 얻었다.9천원을 주고 왕발통을 빌렸다. 2시간 동안 실컷 탈 수 있다. 헬멧과 무릎보호대 등 안전보호장구를 착용하고 주행을 시작했다. 산림생태문화공원 이곳저곳 ‘전동휠 체험코스’가 잘 닦여 있어 어린이와 노인들도 어렵지 않게 왕발통으로 누빌 수 있다. 왕발통을 달리며, 단풍으로 물든 산 능선 사이로 새파란 바다가 보일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가을을 탄다’는 말은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이 바뀔 때 고독감이나 낭만 지향성이 민감해져 마음 싱숭생숭한 상태를 뜻하지만, 나는 단순히 ‘탈것에 몸을 얹다’는 사전적 의미에 충실하게 가을을 타기로 했다. 왕발통을 타고 만추의 고즈넉한 정취 속을 달리는 일은 곧 가을을 타고 낭만과 행복 속으로 내달리는 것이다. 울긋불긋한 단풍과 푸른 수평선이 내 마음의 팔레트에 오색 물감을 채워, 나는 지상의 그 어떤 풍경도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는 ‘색채의 마법사’가 되었다. 그 순간 ‘색채’란 예술적 감수성의 다른 이름이다.왕발통을 타고 하도 신나게 달렸더니 출출해졌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찾은 곳은 영덕읍 남석리의 옛날불고기 식당. 남석리에는 두 곳의 옛날불고기집이 영업 중인데, 외지인들에게 잘 알려진 곳은 ‘아성식당’이다. 인기가 많아선지 오후 2시인데도 벌써 점심 장사가 끝났다고 한다. 그래서 옆집인 ‘이가네 옛날불고기’로 향했다. 지역민들에게 오랫동안 사랑 받은 집이다. 메뉴, 요리법, 양, 가격은 두 식당이 거의 비슷하다. 질 좋은 한우 불고기 1인분 120g에 8천원. 하지만 2인 기준 3인분이 최소 주문 단위여서, 나는 혼자 3인분을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향 좋은 숯이 가득 담긴 화로가 열기를 뿜으며 상에 오르고, 두꺼운 철근으로 제작된 삼각형 화구가 얹어졌다. 그리고 양념육수와 고기를 분리해서 익히는, 정말 옛날 방식의 불고기 불판이 등장했다. 치익 칙, 하는 고기 굽는 소리, 스멀스멀 오르는 맛있는 냄새, 동백꽃잎처럼 얇게 저며진 선홍빛 소고기가 점점 가을빛으로 익어가는 광경, 화로에서 오르는 열기는 얼굴을 화끈거리게 하고, 알맞게 익은 불고기를 계란노른자 소스에 푹 찍어 입에 넣는 순간 육즙과 양념과 한우의 담백한 맛과 식감이 입 안에서 팡팡 터졌다. 영덕의 옛날불고기는 미각뿐만 아니라 청각, 후각, 시각, 촉각까지 오감을 모두 충족시키는 음식인 셈이다.3인분을 게 눈 감추듯 뚝딱 해치우고는 아무데로나 아무렇게나 걷기로 했다. 영덕 우체국과 영덕 버스터미널과 영덕 소방서와 영덕군민공원을 지나자 황금빛 벼가 강물처럼 넘실거리는 덕곡리,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은 벼들이 대견하고 고마워서 대뜸 코끝이 시렸다. 어느 시인이 묘사한 것처럼, 어미소가 송아지 등을 핥아주듯 바람이 불 때마다 가을논의 벼들은 나란히 누웠다가 나란히 일어서면서, 한없이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나는 그곳의 낮아지는 저녁해에 마음을 내어 말린다”(장석남, ‘저녁 햇빛에 마음을 내어 말리다’)던 시인처럼, 나도 덕곡리 황금물결에 축축한 마음의 옷들을 하나 둘 벗어 내어 말렸다. 투명한 알몸이 되어 버린 내 마음에다 따사로운 볕이, 고추잠자리의 비행이, 참새 떼의 지저귐이, 오십천 흐르는 물소리가 스웨터를 짜 입혔다. 나는 아마 가을 내내, 아니 겨울까지도 춥지 않을 것이다.            /시인 이병철

2019-10-27

힘 모아 태풍 이겨낸 영덕으로 가을 여행을

태풍 ‘미탁’의 영향으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영덕군에도 가을이 성큼 와 닿았다. 주민과 군 관계자의 노력, 여기에 국민들의 크고 작은 지원에 힘입어 ‘동쪽 바닷가 아름다운 관광도시’로서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는 영덕.자연 재난으로 인해 아픔을 겪은 지역을 찾아가는 것은 거기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도움을 줄 수 있다. 영덕을 여행하며 그곳 숙박업소와 식당을 이용함으로써 지역 경제에 보탬을 주고, 태풍으로 인한 군민들의 상처를 다독여주겠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영덕의 가을 여행지’ 몇 곳을 소개한다.◇아름다움 뽐내는 산림생태문화체험공원과 해맞이공원영덕읍 창포리 산림생태문화체험공원은 1997년 큰 산불이 발생한 지역에 만들어졌다. 영덕군은 버려진 땅을 희망의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2008년부터 7년간 104ha 규모의 근린공원을 조성했다.이를 통해 주민들과 관광객들은 ‘희망의 재생산 과정’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이 공원은 근사한 자연 경관과 맑은 공기로 일상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있다.산림생태문화체험공원은 조경시설, 휴양시설, 교양시설, 편의시설로 나눠 형성됐다. 출렁다리, 인공 계류지, 자연형 계류지, 모래연못, 데크 로드, 관찰식물원은 여행자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나이테 쉼터, 갈림길 쉼터, 통나무 쉼터 등은 편안한 휴식을 선물한다. 숲속음악당과 국립 청소년환경센터는 교양시설의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주변에선 전국적으로 유명한 영덕대게와 동해 청정해역에서 잡아 올린 싱싱한 해산물도 맛볼 수 있다. 예술의 향기 가득한 해맞이예술관과 목공예체험장도 인기다.영덕군 시설관리사업소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붉은 태양을 떠올리게 하는 꽃무릇과 핑크빛 추억을 안겨주는 핑크뮬리를 심어 낭만을 더했다.해맞이공원은 울창한 해송으로 둘러싸인 창포리 일대 해안선을 따라 조성됐다. 만들 당시 “자연 그대로의 공원을 지향한다”는 목표를 세웠다.산불로 인해 쓰러진 나무가 침목 계단이 됐고, 산책로의 주요 재료로 다시 태어났다. 사진 촬영과 경치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데크가 마련됐고, 파고라도 생겼다.해맞이공원 전면엔 갖가지 야생화가 심어져 아름다움을 더한다. 1천500여 개의 나무 계단이 바다까지 엮여 내려간 산책로도 멋지다.영덕대게의 집게발을 형상화한 창포말등대의 높이는 24m. 그 아래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을 1년 내내 볼 수 있다. 이곳은 일출 풍경이 아름답기로도 유명하다.이색적 경관조명이 장관을 이루는 해맞이공원 산책로도 멀리서 영덕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빛의 축제가 펼쳐지는 ‘루미나리에 길’은 해맞이공원의 밤을 휘황하게 수놓고 있다.◇드라마 촬영지의 낭만 느낄 수 있는 삼사해상공원영덕군이 “동해의 맑은 정기가 곳곳에 서린 곳”이라 설명하는 삼사해상공원. 청정한 바다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동해와 근사한 하모니를 이루는 주위의 경관 또한 일품이라는 평가다.아이들의 손을 잡은 젊은 부부들은 주말만이 아닌 평일에도 이곳을 찾아 낭만을 즐기고 추억을 만든다. 영덕 군민들은 삼사해상공원을 “가족 단위 관광객들에게 최고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공간”이라고 말한다.북한이 고향인 이들의 서러움을 달래주는 망향탑과 경북대종, 공연장과 폭포 등이 흥미로운 볼거리다. 1997년 1월 1일 처음 개최한 ‘해맞이축제’의 인기는 지금도 여전하다.공원 광장에는 500대의 자동차를 세울 수 있는 주차시설이 완비돼 있다. 인공폭포 역시 많은 이들이 찾는다는 게 영덕군청의 부연이다.이곳은 오래 전 큰 인기를 끈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드라마가 방영된 이후 영덕은 대게의 명성과 아름다운 풍광을 보다 널리 알릴 수 있었다.인근 골프장과 산책로, 해안 드라이브 코스는 비단 여름철만이 아닌 지금도 사람들이 적지 않게 방문해 영덕이 주는 즐거움과 치유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정크트릭아트·신재생에너지·어촌민속전시관각종 전시관은 영덕군이 내세우는 또 다른 ‘행복한 여행 공간’이다. “상상 이상의 즐거움을 제공한다”는 정크트릭아트 전시관은 일상생활 속 폐품을 소재로 만든 정크 작품과 평면 그림으로 착시효과를 주는 트릭아트 작품을 융합해 연출됐다.산림생태문화체험공원 안에 자리하고 있으며 지난 2017년 개관했다. 1층엔 서바이벌 로봇레이싱, ‘내가 홈런왕’ 등 정크아트가 전시됐고, 2층엔 ‘손오공 VS 헬보이 빅매치’, ‘헐크와의 결투’, ‘아슬아슬 폭포’ 등의 트릭아트를 선보이고 있다. 3층으로 올라가면 팬더동산이 아동 관광객을 반긴다.“트릭아트를 제대로 즐기려면 포인트를 잘 잡고, 정면보다는 비스듬한 각도로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것이 관계자의 조언이다. 주위엔 신재생에너지 전시관, 풍력발전단지, 바다숲 향기마을, 해맞이캠핑장도 자리했다.신재생에너지 전시관은 영덕의 대표적 관광자원인 천혜의 자연과 해맞이공원의 아름다움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신재생에너지에 관한 교육이 이루어진다.신재생에너지 클러스터의 중심지인 이곳 1층엔 휴게 카페와 편의시설, 2층엔 태양·바람·물·지열 등을 이용해 신재생에너지의 생성 원리를 체험할 수 있는 전시시설이 들어섰다. 빛을 이용한 프리즘 체험 코너와 동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 고성능 망원경은 부모와 함께 전시관을 찾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높다신재생에너지 전시관은 태양광 자동차, 해바라기 에너지정원, 수소자동차, 바이오매스 원료, 파력발전 등 풍력, 태양열, 수소에너지와 같은 신재생에너지의 종류와 원리도 알기 쉽게 체득할 수 있는 곳이다. 또 전시 코너와 체험 코너를 갖추고 있어 저탄소 녹색성장의 실질적인 교육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전시관을 중심으로 바람개비공원, 항공기 전시장 등의 볼거리도 적지 않다.어촌민속 전시관은 사라져 가는 바닷가 마을 전통과 문화를 발굴하고 보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어업문화의 계승·발전은 물론 관광객에게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경북에서 처음으로 조성된 가족단위 체험·놀이공간이기도 하다.전시시설, 체험시설, 3D 입체영상관, 옥외조형물 등을 갖춘 이 전시관은 지난 2005년 말 문을 열었다.영덕군은 “동해 강구항과 풍력발전단지가 만들어내는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며 “동양의 나폴리라 칭해도 과장처럼 느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제1전시실에선 영덕의 삶과 의식주, 어촌의 놀이 및 문화, 동해안 별신굿, 어선의 제작 과정, 대게 잡이 당두리배, 영덕의 다양한 어구·어법 등을 이해하기 쉽게 알려준다.제2전시실에서는 각종 유물과 영덕 바다의 비경을 볼 수 있고, 해녀들의 삶도 잠시나마 체험해 볼 수 있다.◇빼놓으면 아쉬운 산성계곡 생태공원지난 21일 개장한 ‘영덕 산성계곡 생태공원’은 아직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 자연 그대로의 환경이 보존된 ‘특별한 관광지’다.달산면 옥산리 숲에 그 모습을 드러낸 공원은 경관이 아름다운 것은 물론이고, 맞닿은 옥계계곡의 비경이 관광객을 불러 모을 것으로 전망된다.영덕군청은 “지역 주민들에게도 유익한 자연 쉼터가 돼줄 것”이라고 덧붙였다.산성계곡 생태공원에 설치된 체험시설인 ‘네트 어드벤처’는 요즘 트렌드를 반영해 만들었다. 영덕군은 오는 11월 30일까지 이를 운영한 후 관광객들의 반응을 살핀 뒤 체계적 운영 계획을 수립할 방침이다. ‘네트 어드벤처’는 통상의 숲 체험시설과 달리 맨몸으로 숲의 기운과 향기를 맛볼 수 있어 모험을 즐기는 여행자들에게 제격이라고 한다.영덕의 대표적인 산림 체험공간으로 자리 잡을 이 공원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숲과 버려진 농지를 자연친화적으로 복원한 것이며, 환경부가 조성 예산을 지원했다./홍성식·박윤식기자

2019-10-24

트램이 달리는 문화·예술공간 조성 ‘다시 젊음의 거리로’

△원도심이 살아야 관광도 산다도시가 형성되고 발달하는 과정에서 최초로 도심지 역할을 한 지역을 원도심이라고 한다. 구미시는 원평동 일대가 대표적인 원도심으로 꼽힌다. 이곳은 구미역과 문화로(2번 도로), 새마을 중앙시장을 중심으로 가장 활기가 넘치는 젊은이들의 거리다. 구미가 산업도시로 성장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새로운 산업단지가 조성되고, 도시 외곽의 신도시 개발로 인해 점점 쇠퇴해 왔다. 주말이면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비었던 문화로의 모습은 옛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게 됐다. 이러한 원도심의 쇠퇴는 젊은이들의 문화·소비가 타지역으로 이탈하는 현상으로 이어지면서 지역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이에 구미시가 원도심인 원평동 일대를 도시재생으로 다시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 결과 지난해 ‘구미를 당기다’를 주제로 신청한 공모사업이 국토교통부가 추진 중인 2018 도시재생 뉴딜사업에 최종 선정됐다.구미시는 이번 사업으로 청년·소상공인 상생플랫폼, 복합문화센터, 마을센터를 조성할 계획이다. 또 주민들을 위한 친환경 쉼터를 조성하고, 중앙시장 구간에 야간조명시설과 간이 쉼터를 제작해 상권 활성화를 유도할 계획이다. 문화로에는 구간 특화조명을 설치하고 청년문화프로그램 ‘원평 청춘가로 페스티벌’ 기획 및 홍보를 지원해 다시 젊은 거리로 조성한다는 방침이다. 특히, 자발적인 주민참여로 진행될 수 있도록 도시재생 마을학교, 주민제안사업, 도시재생 기록화 사업을 통해 주민들이 직접 전 과정에 참여해 평가와 성과 진단, 사업 추진 기록물을 제작할 예정이다.△구미의 대표 유흥 장소를 문화적 유흥 공간으로 바꾸다구미의 대표적인 유흥 장소였던 금오시장로(路)가 최근 누구나 즐겨 찾을 수 있는 문화적 유흥 공간으로 변신하고 있다. 구미시가 추진하는 문화적 도시재생사업으로 지역의 예술가들과 시민들이 금오시장로에서 창의적인 문화활동을 전개하면서 변화가 시작됐다.문화적 도시재생사업은 지역별 문화를 활용해 낙후된 원도심을 활성화하기 위한 전국 지자체 대상 문화체육관광부 공모사업으로, 구미시는 올해 초 사업대상자로 선정됐다. 시는 우선 금오시장로 일대를 문화적 공간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인적그물망을 구축하고, 구성된 인적자원으로 문화콘텐츠 구상과 공동실행, 지속가능한 변화를 이끌 수 있는 프로그램 개발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인적그물망 구축을 위한 워킹그룹은 현재 생생 금오통, 청년 아무거나 연구소, 구미 맘 놀이연구소, 금오시장로 아티스트, 금오시장로 홍보단, 금오시장로 환경정리단 등 6개 그룹으로 구성돼 매주 수요일 저역 워킹그룹 라운드 테이블을 통해 다양한 의제와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있다.또 이들은 금오시장로 인근 주민들과 매주 수요일 반상회를 열어 지역의제를 공유하고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하고 있다. 콘텐츠를 실행할 시민모임 ‘쌀롱 드 금오’는 지난 7월 첫 모임을 시작했다.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의 시민 30여 명이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 금오시장로에서 진행될 문화공연 등에 대해 자유로운 생각을 나누고 그 의견을 반영한다. ‘쌀롱 드 금오’는 그동안의 의견들을 정리해, 주민들과 함께 만드는 마을축제 ‘낮밤없는 문화포차’, ‘금오시장로 예술놀이터’, ‘반짝반짝 금오시장로’ 등의 프로그램을 내년 2월까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구미의 대표적인 유흥 장소에서 시민 중심의 문화적 유흥 공간으로 탈바꿈을 시도한 금오시장로가 구미의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거듭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구미 산업관광의 필수요소 ‘트램’구미시는 지난해 무가선 저상 트램 실증노선 선정 공모사업에 신청하려 했으나 일부 지역 시민단체의 억측과 왜곡으로 발생된 반대 여론에 부딪혀 곤혹을 치렀다. 다행히 구미시는 포기하지 않고 예산을 편성해 무가선 저상 트램 조사용역을 진행하고 있다. 빠르면 올해 말 결과가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트램은 도로위에 깔린 레일 위를 주행하는 노면전차를 뜻하는 것으로, 무가선 트램은 전력을 공급하는 전선 없이 배터리로 운행된다. 국내에선 한국철도기술 연구원이 2010년 세계 최초로 무가선 저상 트램을 개발해 시범 운행 공모를 진행했다. 구미시가 추진했던 바로 그 트램 공모사업이다.구미시가 트램 사업 진행에 주춤하는 사이 광역단체 등 18개 지자체가 트램 도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 트램 열풍이 부는 이유는 무엇일까. 건설 비용이 지하철의 1/6 수준이고, 운영비용 또한 지하철의 25%, 경전철의 60%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트램 1편의 수송인원이 버스보다 3배나 많은 것도 장점이다. 지상으로 이동하다 보니 지역 상권 활성화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각에서는 지역 교통 특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예산낭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교통전문가들은 지하철, 택시, 승용차, 버스전용차로 등 다양한 교통수단과의 연계성을 고려해 트램의 편익을 종합적으로 분석할 것을 조언한다.구미지역의 교통 현실은 어떨까. 도심지가 분산돼 있는 특성으로 자가용 의존도가 50% 이상이며, 노선이 적고, 배차시간이 긴 시내버스보다 택시를 이용하는 경우가 더 많은 곳이다. 교통수단 중 버스가 차지하는 수송분담률은 고작 20.9%에 불과하다. 최근에는 대중교통만을 이용해 해당 지역을 여행한 체험수기를 자신의 SNS에 올리는 여행가들도 늘어가는 추세여서 대중교통이 관광산업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모노레일로 추진된 대구도시철도 3호선의 대구관광 영향은 차치하더라도 트램이 도시재생의 효과와 더불어 관광객 유치에도 큰 효과가 있다는 것은 이미 미국과 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 입증이 된 사실이다. 트램은 구미시가 추진하고 있는 도시재생과 산업관광 성공의 필수조건인 셈이다.△지속가능성은 기본 조건구미시는 도시재생을 기반으로 산업관광에도 활력을 불어넣으려는 다양한 프로젝트 추진하고 있다. 장세용 구미시장의 말대로 도시재생은 공간을 무엇으로 채우냐가 중요한 것으로, 그 공간에는 문화, 복지, 관광, 교육 등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모든 것을 담아야 한다. 도시재생 전문가인 장 시장의 말대로 구미시는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낙후된 도심공간을 채우는 도시재생사업을 진행하고 있다.이러한 도시재생은 분명 관광에도 영향을 미쳐 구미시가 대한민국 대표 산업관광도시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관 주도의 사업에 익숙한 탓에 주민 스스로 사업을 주도한다면 지속성을 확보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에 구미시는 지난 5월 도시재생 지원센터를 개소해 주민 주도형 도시재생을 돕고 있다. 지난 7월에는 국토부의 도시재생뉴딜 교육비 지원 사업에 선정돼 1천만 원을 지원받아 주민 역량 강화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주민활동가를 양성해 도시재생에 주도적인 역할도 하도록 할 계획이다. 이 밖에도 센터는 서울시 도시재생지원센터와 업무협약을 맺고 도시재생에 대한 정책·정보 교류, 도시재생대학 등 학습 및 교육, 도시재생 관련 홍보 등 포괄적인 업무에 협력하기로 했다. 주민 주도형 도시재생이 지속가능성만 확보한다면 구미시의 산업관광 또한 지속가능한 성공을 확보한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9-10-24

바쁜 걸음 쉬어가게 하는, 과하지 않게 담박한 맛을 찾다

재미있는 닭집 2곳 여정식당 오경통닭10가지 한약재와 옻이 부드럽게 엉킨 ‘여정식당’ 옻닭옻닭을 내놓는 집들은 많다. 오래된 집들도 많다. ‘여정식당’ 특이하다. 단순히 옻을 넣은 닭이 아니다. 옻과 더불어 열 종류 이상의 한약재를 넣고 만든다.‘주인 할매’의 음식에 대한 정성이 아름답다. 간판에 ‘박정늠 아지매, SINCE 1970년’이라고 써 붙였다. 사진도 걸려 있다. 젊은 얼굴이다. 오래전의 간판, 사진이다. 실제 박정늠 할매는 여든의 노인이다. 지금도 꾸준히 가게에 나온다. 자신만의 ‘맛’ ‘음식’을 고집한다. 음식 만드는 일에 헌신한다. ‘나만의 옻닭’의 맛, 모양, 색깔을 가지고 있다. 닭이 상당히 큰 닭이다. 모른 척하고 슬쩍 물어본다. “토종닭입니까?” 대답이 재미있다. 조금 머뭇거리더니 “쪼매 노아 먹인 거래여”.토종닭은 드물다. 병아리 수준의 닭들이 많으니 웬만큼 크면 토종닭이라고 내놓는다. 그렇지는 않다. ‘박정늠 할매’가 말하는 ‘일정 조건 방사닭’이 맞다. 예전에는 산과 들에 놓아먹인 닭들이 있었다. 양계장이 생기면서, ‘A4 용지 반장 크기’의 시설 안에서 키우는 닭들이 대부분이다.닭고기 맛은 전혀 다르다. 왜 ‘쪼매 놓아먹인 닭’이라고 표현했을까? 큰 닭장을 만들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자라도록 기른 닭이라는 뜻이다. 온전한 방사닭은 아니다. 육질은 비교적 질기지만 오랫동안 잘 삶았다. 살이 잘 부스러지면서도 쫄깃한 식감이 아주 좋다. 한약재와 옻의 맛도 적절하다. 한약재 고유의 맛과 옻의 맛이 서로 부드럽게 엉겼다. 고수가 ‘선’을 잘 정한 음식이다.시장통의 어수선한 작은 식당이다. ‘먹고 살려고’ 시작한 생계형 식당. 2대 전승은 아니다. 아들, 며느리가 일을 돕고 있지만, 아직은 1대 박정늠 할매가 정정하다.오직 닭고기만 소복이… ‘오경통닭’ 옹치기간판에 가게 이름보다 ‘옹치기’라는 표현이 더 크다. 오래전에는 닭 한 마리를 통째로 요리하는 경우가 잦았다. ‘오경통닭’도 마찬가지. 주인이 ‘닭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빗대어 ‘옹치기’라고 이름 붙였다. 많은 사람이 ‘옹치기’를 궁금하게 여긴다. 주인이 독창적으로 붙인 이름이다.눈여겨 볼만한 것은 이 집의 음식이다. 안동찜닭과 비슷하다. 닭볶음탕이 아니라 졸임이다. 안동찜닭이나 이 집 모두 흥건한 육수를 넣고 서서히 졸인다. 고기는 익고 양념은 닭고기 속으로 밴다.긴 시간 졸인 것이라 고기는 쫄깃하면서도 부드럽고, 살코기에 양념 맛이 잘 배어 있다. 주문할 때 매운 정도를 조정할 수 있다.안동찜닭과 다르게 채소와 당면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쟁반에 매운 고추나 통깨 이외에 닭고기만 소복하다. 닭고기 ‘정면승부’라는 표현이 떠오른다. 당면, 양파, 당근, 대파 등이 보이지 않는 특이한 닭고기 조림이다. 닭은 1.5Kg 내외로 비교적 큰 것이다. 닭고기 맛은 큰 닭이라야 온전하다.순한 장맛 잘 배어든 순수한 맛 ‘소나무집’더하는 음식이 아니라 빼는 음식이다. 대단히 맛있는 음식이 아니다. 오히려 맛이 없다. ‘무미(無味)’다. ‘단짠’을 뺀 음식이다. 재료의 소박한 맛이 살아난다. 순한 장맛이 잘 배어든 재료의 순수한 맛, ‘소나무집’의 맛이다.분위기와 음식이 모두 푸근하다. 소박하다. 잘 정리된 ‘시골 할매집’의 음식이다. 나이든 노부부가 운영한다. 정원도 깔끔하고 음식도 깔끔하다. 청국장은 청국장의 맛이고, 직접 빚는 두부도 두부, 콩 그 자체의 맛이다. 더하지도 빼지도 않는다.직접 담근 장으로 맛을 더한다. 그뿐이다. 억지 맛을 위해 조미료, 감미료를 더하지 않는다. 풋고추 무침도 맛있다. 아주까리 장아찌는 특이한 반찬이다. 아주까리는 피마자다. 오래전에는 흔했는데 이젠 귀한 음식이 되었다. 현지 생산 콩으로 만든 두부도 아주 좋다.주인 할머니의 얼굴과 말투에 푸근함이 묻어 있다. 외진 곳을 찾는 외지 손님들을 위하여 음식에 정성을 더한다. ‘채널A 먹거리X파일’에서 ‘착한 청국장’으로 선정했다.추어탕 맛집 3곳, ‘황토추어탕’ ‘대원식당’ ‘덕산추어탕’청도의 추어탕은 추어탕이되, 추어탕이 아니다. 원형 청도 추어탕은, 미꾸라지를 주원료로 한 추어탕이되 메기와 피라미 등을 넣은 ‘잡탕 추어탕’이었다. 이제는 ‘잡탕 추어탕’은 대부분 사라졌다. 대신 추어탕과 메기탕, 찜 등의 메뉴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청도 읍내에서는 ‘황토추어탕’이 유명하다. 좁은 골목길 안의 허름한 노포다. 내부도 꼬불꼬불, 복잡하다. 메뉴에 추어탕과 미꾸라지 튀김, 미꾸라지를 넣은 만두도 있다.“경상도식 추어탕은 토란대, 풋배추, 부추 등과 양념으로 산초가루, 방아잎 등을 넣는다”고 써 붙였다. 반찬 중에 곱게 구운 두부가 좋다. 두부 요리도 있다. 노포.각북면은 청도와 대구를 잇는 교통의 요지다. 청도, 대구의 중간 지점이다. 30년을 넘긴 추어탕 집이 두어 곳 있다.‘대원식당’은 오래된 청도 식 추어탕 흔적을 지니고 있다. 추어탕에 작은 양의 메기를 넣는다. 추어탕과 더불어 메기매운탕이 있다. 우리 콩으로 만든 두부도 있고, 두부 부침개도 내놓는다. 가게 내부와 음식이 깔끔하다. 열무, 배추를 섞은 물김치와 가지나물, 고추찜이 아주 좋다.‘덕산추어탕’은 추어탕과 더불어 호박전, 미나리 전이 특이하다. 호박전은 겨울철 메뉴이나 미나리 전은 제철인 봄철과 가을에도 가능하다. 가을 미나리 전은 줄기가 없는 이파리로, 밀가루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부쳐내는 미나리 전이다.유일하게 뼈대 볼 수 있는 조선의 냉장고 석빙고(石氷庫)‘청도에 있는 돌로 만든 얼음 저장 창고’다.얼음의 의미는 가볍지 않다. 음식은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의 주요 도구다. 음식은 제사 모시고, 손님맞이의 필수 조건이다. 조선 시대 제사 중 가장 큰 것은 ‘나라의 제사’ 즉, 종묘 제사와 공자(孔子) 모시는 제사다. 손님맞이는 지방 관청을 찾는 중앙의 관리들이다. 군현의 경우, 관찰사 등 상위직 관리들과 지방을 찾는 관리들에게 늘 음식을 내놓아야 했다. 공식적인 ‘지응(支應)’이다. 각 지방 관청에서도 선왕을 모신 제사와 더불어 공자 제사를 중요히 여겼다. 지방 관청마다 향교가 있고, 향교에는 대성전이 있다. 청도도 마찬가지. 청도 읍성 안에 향교가 있고 지방 관청이 있었다. 향교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석빙고가 있다. 겨울철을 제외하면 음식은 쉬 상한다. 냉장, 냉동고가 없던 시절이다. 관청 옆에 향교가 있고, 향교 옆에 빙고가 있었다.대부분의 얼음 창고는 나무로 만들고 짚으로 지붕을 덮은 ‘목빙고’였다. 쉬 무너진다. 물이 묻은 나무는 빨리 삭는다. 늘 보수를 해야 한다. 지붕도 매년 새로 이어야 한다. 낭비가 심하니, “석빙고로 만들자”고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예산이 문제다. 석빙고는, 한번 만들면 오래 가지만, 처음 만들 때 많은 예산이 필요하다. 돌을 깎아야 하고, 많은 인력을 동원해서 힘들게 만들어야 한다. 목빙고에 비해서 재료, 인력이 몇 곱절 필요하다. 시간도 많이 걸린다. 목빙고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석빙고 몇 개가 경주, 안동, 현풍, 창녕 영산 등에 남아 있다. ‘청송석빙고’를, 숙종 조에 만든 오래된 것, 경주 석빙고 다음으로 큰 것이라고 설명한다. 부족하다. “유일하게 빙고의 뼈대를 모두 볼 수 있고 따라서 석빙고의 구조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해야 한다.석빙고의 내부 구조는 홍예(虹蜺)와 판석(板石), 바닥의 돌들, 물길, 공기 구멍으로 이루어진다. 홍예는 돌을 짜 맞추어 마치 무지개처럼 만든 것이다. 석빙고의 내부에서 천정을 보면 마치 갈빗대 같은 돌 구조물이 보인다. 홍예다. 홍예를 지탱하고 연결하는 것은 넓적한 돌, 판석이다. 청도석빙고에는 4개의 홍예가 남아 있다. 공기를 차단하더라도 빙고 내부의 얼음이 녹고, 물이 생긴다. 이 물들을 외부로 빼내는 물길이 있었고, 공기를 통하게 하는 공기 구멍이 있었다. 청송 석빙고는, 물길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만, 공기 구멍은 볼 수 없다.청도석빙고. 재미있다. 제대로 보존되지 않아서 대부분 무너졌다. 앙상한 뼈대 몇몇만 남아 있다. 봉분이 없으니, 오히려 석빙고의 안팎을 제대로 짐작하고, 그려 볼 수 있다. 청도석빙고의 ‘반전’이다.     /음식평론가 황광해

2019-10-23

정성스레 그린 동양화·수 만개 조명의 향연… ‘일거양득’ 만추 기행

추색 짙은 풍경, 천천히 걸어 즐긴다 ‘공암풍벽’·‘운문사’길이 끊긴 높고 거대한 절벽에 꽃빛 닮은 단풍이 흐드러졌다. 재론의 여지없는 절경이다. 인간의 능력 밖에서 자연이 만들어내는 가을 풍경이 놀라움을 불러왔다.‘공암풍벽(孔巖楓壁)’. 청도팔경 중 4번째로 손꼽히는 수려한 경관이 기자를 매혹했다. 오래 전 이곳을 찾은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은 풍벽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노래했다고 한다.‘강 속 바위는 쪼개진 채 몇 해를 살아왔나비탈길 오르고 좁은 길 통과하니 서늘한 기운산수 좋은 곳에 산다고 부질없이 말해왔건만나, 오늘에야 참된 별천지를 보았노라.’청도군 운문면 대천리에서 경주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한 공암풍벽은 30m에 육박하는 기세 좋은 바위에 오색 단풍의 손길이 더해져 여행자를 불러 모은다.반원 형태의 절벽은 사철 내내 감탄사를 선물하지만, “가을에 보는 풍광이 최고”라는 게 청도군청 직원의 설명이다.운문댐이 만들어지면서는 풍벽 아래로 가는 길이 끊겼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신비감과 서정적 낭만을 더해준다. 원래 ‘진짜 아름다움’은 만질 수 없는 먼 거리에 있을 때 그 진가를 드러내는 법이 아닌가.공암풍벽을 찾아가는 길. 조그만 시골마을 여러 개를 통과하게 된다. 빠알간 감이 익어가는 소읍의 풍경이 그저 그만이다. 잊고 살았던 1970년대 유년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소환됐다.막막한 생의 절벽 끝에 서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꿈꾸는 삶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한탄하는 사람, 절망감에 혼자서 오래 울어본 사람들에게 공암풍벽과 마주해보길 권한다. 희망은 먼 곳에 있지만 온전히 사라지진 않는다.신라 진흥왕 18년(557년)에 창건된 천년고찰 운문사도 빼놓으면 서운한 ‘최고의 가을 관광지’다. 공암풍벽에서 15분쯤 차를 달리면 널찍한 땅 위에 큰 규모로 들어선 운문사와 만나게 된다.이 절은 1958년 비구니 전문강원이 생긴 후부터 여성 스님들의 사찰로 유명했다. 올라가는 길 주위로 수백 그루의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거져 은은한 향기를 내뿜는다.운문사에는 국가가 지정한 보물이 9점이나 있다. 절 안을 돌아보며 금당 앞 석등, 동서 삼층석탑, 대웅보전, 비로자나삼신불회도, 달마대사 벽화, 석조여래좌상 등을 찾아보는 재미도 만만찮다.공암풍벽과 운문사는 천천히 걷는 것이 어울리는, 느림이 얼마든지 용인되는 청도의 가을 여행지다.기자가 20대 초반이던 시절.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프랑스 여배우 소피 마르소가 주연한 영화 한 편이 개봉됐다.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는 제목이 참으로 시적(詩的)이라며 무릎을 쳤던 기억이 난다.밤이 낮보다 아름다운 곳은 또 있다. 화양읍에 자리한 ‘청도 프로방스 빛축제장’이 바로 그곳. 앞서의 영화 제목처럼 말하자면 “아이들의 밤은 어른들의 낮보다 아름답다” 정도가 될 듯하다.수천수만 개의 환한 조명이 청도의 밤을 밝히는 빛축제장은 해가 지고 나서야 그 진가를 드러내는 관광지.“폴 세잔, 마르크 샤갈, 앙리 마티스 등 이름난 화가들이 사랑한 프로방스(포도주로도 유명한 프랑스 남동부 도시)의 분위기를 청도로 옮기고자 했다”는 것이 관계자의 말이다.터지는 빛의 향연에 넋을 빼앗긴 꼬마들은 엄마의 손을 꼭 잡고 거울로 만들어진 미로를 헤매다가 유령 차장의 안내에 따라 열차에 오른다. 반짝이는 야광 물고기와 신기한 것들로 가득한 프로방스 스튜디오도 아이들에게 인기가 높다. 빛이 없는 어두운 벤치에선 갓 연애를 시작한 젊은 남녀가 밀어를 속삭이기도 한다. 나이 지긋한 여행자들은 그 모습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고.밤이 내린 ‘청도 프로방스’는 아이들에겐 즐거움을, 어른들에겐 낭만을 선물하는 공간이다.청도 프로방스 빛축제장 지척엔 포도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와인 터널’이 있다. 청도 특산이라는 ‘감 와인’이 애주가의 눈길을 끈다.대한제국 말기인 1898년 만들어진 이 터널은 붉은 벽돌의 아치형 천정과 자연석 벽면으로 조성돼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터널 중 하나’로 불린다. 지난 2006년부터 와인 숙성고와 와인 바로 사용됐다고 한다.“내부는 항상 섭씨 13~15도 정도로 유지된다. 여름에는 피서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려는 관광객들이 찾아온다”는 게 와인 터널 입구에서 만난 동네 주민의 자랑 섞인 설명이다. 숫자를 헤아리기 힘든 와인과 동창과 가족의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날짜를 써 붙여 만든 와인 저장통, 꽤 큰 규모의 와인 바가 이곳을 처음 찾은 방문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터널로 들어가기 전 조그만 상가에선 곶감과 감식초, 청도의 농산품 등을 판매하고 있다. 손님을 부르는 아주머니들의 경상도 사투리가 정겨웠다.여기까지 와서 ‘감으로 만든 와인’ 한 잔쯤 마시지 않을 이유가 없다. 진열·판매되는 와인도 부담스런 가격은 아니다. 포도가 아닌 다른 과일로 만들어진 와인을 맛보는 색다른 즐거움에 와인 바에 마주앉은 노부부의 얼굴이 미소로 환했다.□청도 프로방스 홈페이지: http://www.cheongdo-provence.co.kr“아는 만큼, 애정을 가진 만큼 보이는 것”이 유적이고 관광지다. 기왕지사 청도를 찾았으니 가능하면 많은 곳들을 둘러보고 싶었다. 여행자라면 누구나 마찬가지 심정이었을 것이다.운문면에 시원스럽게 들어선 ‘청도 신화랑풍류마을’은 충절을 지키고 예술을 아꼈던 화랑의 정신을 계승하고, 미래를 살아갈 청소년들의 몸과 마음을 성장시키고자 하는 뜻에서 만들어졌다. 화랑의 정체성을 알리고 연관된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전시관, 연수교육과 수련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화랑오계관, 국궁장, 3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소인 화랑촌, 오토캠핑장 등을 갖췄다. 가상현실 체험이 가능한 화랑정신기념관도 흥미롭다.애초엔 소를 키우는 목동들이 재미로 시작한 것이 이제는 청도를 대표하는 관광 상품의 하나가 됐다. 바로 ‘소싸움’이다. 한국 농경사회의 전통이 사람들의 피 속에 존재하는 호전성을 일깨운다. 살아있는 동물들의 다툼이라 호오가 갈릴 수 있으나 흥미롭다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주말에는 실전 소싸움을 관람할 수 있다. 경기가 없는 평일에 청도를 찾은 사람들은 ‘청도 소싸움테마파크’에서 아쉬움을 달랜다. 역사관, 문화관, 기획전시실이 청도 소싸움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싸움소와 힘을 겨루거나, 가상의 소와 달리기를 하는 독특한 경험도 할 수 있다. 소싸움장은 물론 테마파크도 입장이 무료다.차를 타고 청도 시내를 달리다가 발견한 특별한 풍경이 있다. ‘범곡리 지석묘군(凡谷里 支石墓群)’이다. 우리의 기억 아득한 곳에 존재하는 옛날 사람들이 삶을 다하고 묻힌 곳. 이 곳의 지석묘들은 상석을 지면에 밀착시켜 만든 남방 스타일이다. 그렇기에 얼핏 보기엔 커다란 바위들이 풀밭 위에 불규칙하게 들어서 있다는 느낌을 준다. 기자 또한 그냥 지나칠 뻔했다.50m 정도의 간격을 두고 동편에 22기, 서편에 12기의 지석묘가 있다. 이 유적으로 볼 때 청도엔 작지 않은 규모의 집단거주지가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게 학계의 견해다. 범곡리 지석묘군은 경북기념물 제99호.차를 멈추고 잠시 여기를 걸어보았다.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우리의 삶은 얼마나 짧고도 덧없는 것일까? 불쑥 다가온 형이상학적 질문들 곁으로 소슬한 가을바람이 불고 있었다./홍성식·심한식기자

2019-10-23

고향 지킨 ‘뚝심’, 직원과 이익 나눈 ‘파격’ 통하다

□ 댈러스의 토종 공항, 러브필드댈러스 러브필드(DALLS LOVE FIELD) 공항은 지난 1917년에 군공항으로 개항해서 1927년부터 민항기를 취급하고 있다.러브필드의 ‘러브(LOVE)’는 사랑을 뜻하는 것이 아닌 1911년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한 조종사 모스 러브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하지만, 사우스웨스트는 ‘THE REASON PEOPLE HAVE ALWAYS LOVED LOVE FIELD(우리가 러브필드를 러브(사랑)해온 이유’라는 캐치프레이즈로 공항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사우스웨스트의 본사 역시 이 공항에 있다.러브필드 공항은 단순한 공항으로 보기보단 댈러스 지역주민들과 함께 호흡하며 역사를 함께해온 공항으로서도 의미가 크다. 그 유명한 존 F. 케네디 대통령도 암살 당하기 전, 1962년 11월 22일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 원을 타고 러브필드 공항에 첫발을 내딛은 바 있다.그때 미국 정계는 혼란한 상태였다. 케네디 대통령의 민권을 앞세운 정책이 각계에서, 특히 극우세력들의 거센 반발을 받는 상황이었다.케네디 대통령은 대선을 앞두고 텍사스 주 지역의 지지도가 떨어지자 이를 회복시키기 위한 의도로 댈러스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이를 역사로 남기기 위해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 다운타운 딜리 플라자에 ‘6층 박물관(6th floor museum)’이 자리잡고 있다. 박물관에는 현재까지도 케네디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케네디 대통령 암살과 관련한 미국 갤럽의 조사결과, 미국인의 60% 이상은 여전히 케네디 암살에 배후가 있다고 믿었고 오스왈드 단독범행이라는 답변은 30%에 그쳤다.러브필드 공항에서 내린 케네디 대통령은 시가지에 오픈카 종류인 전용차를 타고 부인과 행진하다가 암살범 오스왈드에 의해 모두 3발의 총격을 맞고 사망했다.한발은 전용차를 빗나갔고, 한발은 케네디 대통령과 텍사스 주지사를, 나머지 한발은 케네디 대통령의 머리를 직격했다.오스왈드는 대통령 암살을 위해 여러 장소를 물색하다가 다른 곳에 비해 덜 눈에 띄면서도 대통령의 동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장소이기에 딜리 플라자를 선택한 것으로 알려졌다.박물관에는 당시 행진 이후의 스케쥴이었던 댈러스 지역 유지들과의 만남 장소에서 사람들이 대통령의 총격소식을 듣고 손을 모은 채 회복을 기도하는 사진 등 역사의 흐름이 여실히 소개되고 있다.박물관에서 만난 텍사스 주민 앤더슨 씨는 “러브필드 공항은 지역의 상징적인 장소로 케네디 대통령 방문 역사는 물론, 현재 댈러스 발전에 일등공신 역할을 하는 교통인프라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러브필드 공항을 고집한 사우스웨스트지금의 댈러스 제1공항 댈러스 포트워스 국제공항이 완공되어가는 당시, 사우스웨스트는 기존의 러브필드 공항에 그대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면서 공항 관리공단 측에 신공항으로 옮겨 가지 않겠다는 뜻을 미리 전했다.댈러스 도심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러브필드 공항이 도시에 빨리 들어가 일을 보고 싶어하는 출장자들에게 안성맞춤 공항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고객들을 상대로 도심에서 30분이나 떨어진 포트워스 공항으로 발착지를 옮겨 간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게 사우스웨스트의 입장이었다.하지만, 1968년 채권 규정에 의하면, 신공항은 항공사들의 이착륙비와 시설 사용비 등 공항 이용료를 통해 공항 시설에 투자된 돈을 회수하기로 되어 있었고 만약 손실이 발생하면 공항 관리공단이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다.결국 이전에 사우스웨스트가 휴스턴의 인터컨티넨털에서 하비로 옮겨 간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휴스턴과 포트워스 일대의 항공사들은 또다시 사우스웨스트의 공항 비이전 고집을 괘씸하게 생각해 1972년 6월 6일, 법원에 고소한다.또다시 법정 싸움에 돌입한 사우스웨스트는 32일간의 심리 끝에 ‘러브필드 공항에 머물러도 좋다’는 판결을 간신히 얻을 수 있었다. 연방 대법원에서도 상소를 ‘이유 없음’으로 기각했다.오히려 1975년 2월 14일 사우스웨스트를 공격한 브래니프와 택사스 인터내셔널이 미 정부에 의해 기소됐다. 혐의는 사우스웨스트의 정당한 영업 행위를 방해해 그들을 항공업계로부터 쫓아내려 했다는 것이었다.브래니프와 텍사스 인터내셔널은 ‘이의 없음’으로 혐의를 인정했고 10만 달러의 벌금형에 처해졌다. 1977년, 러브필드 공항을 사수하기 위한 5년간의 법정공방은 사우스웨스트의 승리로 끝났다.물론 33회에 걸친 사법부 및 행정부 처분을 거치면서 사우스웨스트는 전국의 법원이나 행정부 중 가보지 않은 곳이 손에 꼽을 정도로 경험(?)을 쌓았다.이후에도 1979년에 연방의회가 포트워스 공항을 살리기 위해 러브필드에서 장거리 영업을 못하도록 하는 법안을 제정하자, 사우스웨스트는 해당 조항에서 취항이 허가된 인근 주에 미니 허브를 만들어서 환승환적을 해가면서까지 영업했다.해당조항은 지난 2006년에 폐기됐고 사우스웨스트는 사랑하는 러브필드를 지켜냈다. 더욱이 공항에서 나가는 도로 이름마저 사우스웨스트의 창업자의 이름을 따 ‘허브 캘러허 웨이’로 바꿔버렸다.□ 러브필드 사랑만큼 색다른 조직 운영러브필드 공항을 고집하는 사우스웨스트는 그 애향심만큼이나 조직운영에서도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이러한 사우스웨스트의 정신을 키워온 캘러허는 1978년 회장에 취임했다. 취임 후 인사부에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을 채용하라’라는 특별 주문을 했다.사우스웨스트는 유머가 많은 사람일수록 변화에 잘 적응하고, 스트레스를 받아도 창조적이며 또 보다 효율적으로 일한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놀 때 열심히 놀고 남들보다도 더 건강하다는 것.사우스웨스트는 직장 분위기가 밝지 않으면 생산성, 창조성, 적응성을 떨어뜨리며 직원 채용 기준에서 유머를 최우선 조건으로 설정함으로써 직장 안팎에서 즐거움, 자부심, 재미 등을 찾아가는 방법을 고민한다.특히 직원을 자원 이상의 존재로 여긴다. 직원 채용에 통일된 하나의 근본 원칙으로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을 뽑는다는 것이다.유머 감각은 물론이고, 남들에게 베풀 줄 아는 이타심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도 중요 기준이다. 즉, 태도를 본다는 것인데 실제로 항공업계에서는 파격적인 회사 제복인 버뮤다 반바지를 입을 용의가 있냐고 물어보고, 이를 거부하는 사람은 탈락시켰다.모험정신을 본다는 의미로, 필요한 일은 뭐든지 하려고 달려든다는 정신을 함양시키는 문화로써 사우스웨스트에 유난히 장기 근속자가 많은 이유 중 하나로도 들고 있다.‘10분 턴’을 가능하게 하는 정신적 자세가 이미 입사에서부터 만들어짐을 볼 수 있다.사우스웨스트는 항공사의 이익도 직원들에게 나눠줄 만큼 파격적이다. 1973년 사우스웨스트는 항공사로는 처음으로 직원을 위한 이익 나누기 계획을 도입해다.오늘날에도 모든 사우스웨스트 직원은 채용된 다음해 1월 1일자로 이 계획에 참여하고 있다.사우스웨스트는 세전 소득의 15%를 이익 나누기 계획에 배정한다. 1970년대에 사우스웨스트는 사원들의 임금 양보를 요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회사 주식을 나눠 준 유일한 항공사였다.1973년 이래, 매년 이익을 내온 사우스웨스트는 이익을 직원들에게 나눔으로써 오히려 주가가 몇배로 뛰어오르는 진풍경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이익 나누기는 중역들뿐만 아니라 여러 명의 직원들을 백만장자로 만들었다. /황영우기자 hyw@kbmaeil.com

2019-10-23

원평동 일원 도시재생뉴딜사업 ‘구미를 당기다’ 선정

도시재생에 관광을 접목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아직은 옛것을 새롭게 고쳐 쓰는 것에 한정돼 있지만 폐공장, 오래된 창고, 오래된 도심 등을 리모델링해 카페나 미술관, 문화거리로 조성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산업수도인 구미시도 근대 산업 유산을 이용해 산업관광도시의 외연을 넓히고 있는 지금, 구미의 정체성을 살린 지속가능한 산업관광 도시로의 발돋움이 가능할지, 그 가능성을 살펴봤다.△도시재생, 관광 트랜드가 되다최근 국내에서도 도시재생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많은 광역·기초 자치단체들이 지역 특성에 맞는 도시재생 모델을 찾는데 주력하고 있다. 낡은 구도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도시재생이 주변 지역에 경제적 파급효과와 더불어 새로운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시재생이란 무엇일까. 2013년 제정된 도시재생특별법 제2조는 도시재생을 인구의 감소, 산업구조의 변화, 도시의 무분별한 확장, 주거환경의 노후화 등으로 쇠퇴하는 도시를 지역역량의 강화, 새로운 기능의 도입·창출 및 지역자원의 활용을 통해 경제적, 사회적, 물리적, 환경적으로 활성화시키는 것으로 정의했다. 즉, 아파트 건설 위주의 개발사업에서 벗어나 낙후된 부도심을 살리고, 여기에 주민들의 삶의 질도 함께 향상시키는 것을 의미한다.사람이 사는 공간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바로 도시재생의 본질이다. 도시재생을 통해 관광명소로 거듭난 곳들은 생각보다 많은데, 대표적인 예가 서울역 고가를 재생한 ‘서울로 7017’, 폐채석장을 활용한 ‘포천아트밸리’, 폐광 이후 방치됐던 광산동굴을 재생한 ‘광명동굴’, 한옥보존지구로 개발이 묶여있던 ‘익선동’ 등이다. 이곳은 최근 관광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하는 관광지 100선에 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골칫덩어리로 여겨지던 폐공장, 오래된 창고 등이 카페나 미술관으로 바뀌면서 그 지역을 대표하는 관광상품으로 뜨고 있다. 지역의 정체성을 살리고, 지속가능하고, 운영주체만 분명하다면 도시재생이야말로 가장 큰 관광자원임이 틀림없다.△버려진 섬에서 예술의 섬으로… 일본 ‘나오시마’일본의 나오시마는 한때 구리제련소로 유명한 지역이었으나 1960년대 이후 경기 침체로 인구마저 줄어들면서 버려진 섬으로 전락했다. 그러다 섬의 낡고 버려진 집들을 예술작품을 조성하는 프로젝트를 실천하면서 예술의 섬으로 거듭났다. 섬의 동쪽 혼무라 지역을 중심으로 1998년에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다. 작품들이 마을 곳곳에 위치하고 있어 도보로 마을 곳곳을 둘러볼 수 있도록 조성돼 있다. 빈집을 활용한 카페와 게스트 하우스도 인기를 얻고 있다. 도시재생으로 관광명소로 거듭난 나오시마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주민 참여다. 주민들이 직접 작가들과 협업해 폐가를 작품으로 만들었고, 관광객들에게 직접 작품 설명도 하며, 예술제 기간에는 물품보관소를 운영하는 등 주민들이 주체가 돼 섬을 이끌어가고 있다. 주민 스스로의 변화 분위기는 관광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해 1992년 방문객이 3만 6천1명이던 것이 2004년 10만 6천958명, 2013년 70만 5천72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현재는 매년 5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고, 3년마다 열리는 예술제 기간에는 100만여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기업의 사회적 가치로 탄생한 ‘로컬라이즈 군산’국내 민간기업 중 최초로 도시재생에 나선 SK그룹의 에너지 기업 SK ES가 지원하는 프로젝트 ‘로컬라이즈 군산’이 큰 화제를 모으고 있다. 로컬라이즈(Local:Rise)군산은 ‘지역화하다(Localize)’와 ‘떠오르다(Sunrise)’를 조합한 것으로, 군산시의 구도심인 영화동 일대를 문화·관광 중심지로 발전시켜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현재 23개 소셜 벤처기업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항구 도시로 번영을 누렸던 군산시가 최근 주력산업인 조선소, 자동차 산업의 침체와 공장폐쇄로 어려움에 직면하자 SK ES가 그룹의 사회적 가치 기조에 따라 지난해 10월 시작한 것으로, 스웨덴 말뫼 사례를 벤치마킹했다. 영화동 영화시장 골목길에 위치한 3층 건물을 개조해 로컬라이즈 타운으로 만들어 23개 소셜 벤처기업들이 사용하도록 했다. 이들 23개 소셜 벤처기업들은 ‘문화가 흐르는 관광도시’, ‘모두가 잘 사는 경제도시’, ‘골고루 누리는 행복도시’라는 3가지 테마로 군산 지역의 일자리 창출과 광광객 유입을 목표로 지역의 낡은 공간을 리모델링해 문화·상업 공간을 구축하거나, 지역 특색을 살린 여행상품, 지역 특산품 개발 등 개별 사업을 구체화하고 있다. 지난 12일에는 영화동 일대에서 열린 ‘로컬라이즈 군산 UP 페스티벌’에서 ‘군산을 즐기는 새로운 방법’이라는 주제로 프로젝트 진행 과정을 공유해 큰 관심을 모았다. 국내 최초로 기업의 사회적 가치로 탄생한 ‘로컬라이즈 군산’으로 구도심 영화동 일대가 젊은이들의 거리로 바뀌기 시작했다. 젊은 벤처기업가들의 아이디어가 지역 관광자원과 만나면서 침체된 지역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로컬라이즈 군산’은 도시재생과 관광산업의 새로운 성공사례로 꼽히고 있다.△구미, 도시재생에 관광자원을 녹이다구미시는 지난해 장세용 시장이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도시재생 사업에 들어갔다. 장 시장은 자타가 인정하는 ‘도시재생 전문가’로 취임과 더불어 구미시의 도시재생 사업을 체계적으로 진두지휘하며 성과를 내고 있다. 구미시 특성에 부합되는 도시재생을 찾기 위해 취임 초기, 관련 공무원들과 독일과 네덜란드를 방문해 도시재생의 의미와 과정, 파급효과에 대해 직접 알아보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시는 지난해 국토교통부가 추진하는 도시재생 뉴딜정책 공모에 원평동 일원 ‘구미(口味)를 당기다’를 주제로 신청한 사업이 최종 선정됐다. 총 사업비 420억 원을 들여 2023년까지 원평동 일원 22만 3천㎡에서 주거환경개선사업과 복합문화전시공연시설 조성 사업 등이 진행된다. 모든 사업이 주민 주도형으로 진행되며, 이 중 청년문화·예술콘텐츠 조성 사업이 구체화되면 산업관광과 연계할 계획이다. 선주원남동의 소규모 재생사업과 금오시장로의 문화적 도시재생사업은 지역 특색을 살린 문화행사를 주민들이 주체적으로 진행하도록 함으로써 도시재생의 의미와 관광자원으로서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시는 앞으로 공단동에도 경제 기반형의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할 계획으로 도시재생사업으로 도시 공간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관광 등 도시 생태환경 변화에 주력할 방침이다. 시는 구도심의 문화·예술 활성화를 통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전략을 세우고 세부적인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김락현기자kimrh@kbmaeil.com

2019-10-23

‘불에는 불’로 맞선 영조의 한 수

영조가 왕이 된 지 4년째 되던 해인 1728년 3월, 당시 야당이었던 이인좌(李麟佐) 등이 정권 탈취를 기도하며 난(亂)을 일으켰다. 이 난의 특징은 사대부 양반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란이란 점이다. 난이 평정되자 ‘유3천리’에 처해진 연좌인 10명이 각자의 사연을 짊어지고 경상도 장기현으로 왔다.골수 남인인 이인좌(34세)는 세종대왕의 11세손이었다. 선대 때부터 청주목 송면(松面.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 일원에서 살고 있었다. 청천면은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을 제향한 화양서원이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이인좌는 노론의 성지(聖地)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그들의 위세를 보며 자랐다. 이인좌는 남인이 축출된 1680년(숙종6) 3월의 경신대출척 때 서인에게 사사된 윤휴(尹鑴)의 손녀사위였다. 이런 태생적 여건으로 그는 노론이 집권할 당시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입신(立身)이 어려운 처지였다. 더구나 1694년(숙종20) 갑술환국(폐비민씨 복위운동을 반대하던 남인이 화를 입어 실권하고 소론과 노론이 재집권하게 된 사건) 이후 그를 포함한 일족들은 과거시험 응시조차 할 수 없는 폐족(廢族)의 신분이었다. 그런 그가 노론에서 추대한 영조를 인정할 수 없다며 세력을 모아 난을 주도한 것이다.이인좌의 난은 전국적인 내란이었다. 그래서 그 명칭도 지방마다 다르다. 경상도에서는 거창의 정희량이 주도를 하였으므로 정희량의 난, 전라도에서는 태인현감 박필현이 주도를 했으므로 박필현의 난, 충청도에서는 청주일대의 이인좌가 주도를 했으므로 이인좌의 난이라고 한다. 또 누렁 원숭이의 해인 무신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그냥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불린다. 이 난의 내막부터 진압과정을 살펴보면 영조의 탕평정치에 대한 노련한 한 수가 돋보인다.왕이 되기 전 영조는 붕당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임금이 된 후에는 탕평책(蕩平策)을 본격적으로 외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조의 탕평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를 왕좌에 앉히기까지 공을 들인 노론인사들이 가만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론들은 지난 1721년(경종 1)~1722년 사이 왕통문제와 관련하여 소론이 노론을 숙청한 신임옥사에 대한 책임부터 묻고 나왔다. 가장 먼저 말문을 튼 이는 이의연(李義淵)이었다. 지난날 처형된 노론 대신들을 신원(伸寃)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는 너무 성급한 청이었다. 당시는 노론과 소론의 연합정권이 성립되어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이의연은 오히려 소론의 반대에 부딪혀 귀양을 가야만 하는 신세가 되었다.그러나 노론들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목호룡(睦虎龍)을 매수해 신임옥사를 주도한 김일경을 처벌해야 된다는 상소가 각처에서 연달아 들어왔다. 결국 영조는 김일경과 임인년 고변으로 공신이 된 목호룡을 잡아와 국청(鞫廳)을 열었다. 이들은 심문을 받다가 죽었다. 자신들의 정치적 후원자인 경종도 이미 죽었고, 어디 기댈 곳이 없었던 소론들은 이제 모두 제 얼굴빛이 아니었다. 천만다행인 것이 그래도 영조가 탕평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었다. 영조는 김일경과 목호룡을 죽이면서까지 소론에 대한 탄압을 하면서도 소론의 이광좌를 영의정으로 삼았다. 되도록 붕당을 막아보려고 노력한 결과였다.하지만 영조의 이런 정책에 맞서는 노론의 공격은 집요했다. 결국 영조는 신임옥사 때 노론4대신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는데 앞장 선 이진유 등 여섯 명을 귀양 보냈다. 이어 영의정 이광좌, 우의정 조태억 등 소론대신들도 조정에서 내쫓고, 민진원과 정호(鄭澔) 등 노론세력들을 영입했다. 득세는 했지만 노론들은 영조의 솜방망이 처분을 못마땅해 했다. 귀양을 보낼게 아니라 이광좌 등 여섯 명은 반드시 참형에 처해야 한다며 계속해서 들볶았다. 참다못한 영조가 발끈했다. 노론 대신들이 무고와 모함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사실들을 밝혔고, 원통한 것을 풀어줬으면 됐지 더 이상의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불러온다며 화를 내었다.노론들은 승복은커녕 마치 난이라도 일으킬 기세였다. 화가 치민 영조는 영부사(領府事) 민진원, 우의정 정호 이하 여러 노론들을 파면하고, 2년 전에 파면했던 소론계의 이광좌·조태억 등을 다시 등용하여 정승으로 삼아버렸다. 정부요직도 소론들로 채워 넣었다. 졸지에 정국이 뒤바뀐 것이다. 노론은 복수에 너무 목메다가 오히려 자신들의 지위를 잃은 꼴이 되었다. 이 해가 정미년(1727)이기 때문에 이를 두고 ‘정미환국(丁未換局)’이라 한다.영조의 이 정미환국이 바로 이듬해 일어날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 ‘신의 한 수’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당시 소론은 온건파인 온소(緩少)와 강경파인 준소(埈少)로 갈라져 있을 때였다. 영조와 공존을 추구했던 사람들은 소론 온건파들이었다. 정치적 지위를 위협받게 된 박필현 등 준소(埈少) 인사들은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들을 포섭해 영조와 노론을 제거할 계획을 짜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정권을 잡자 반란 세력들의 의견이 분열되었고, 막상 반란이 일어나자 한양 세력들은 내응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다시 이야기를 되돌리자면, 무신란을 준비하는 세력들은 남인과 소론의 강경파들이었다. 이들은 난의 명분으로 경종이 영조에게 독살되었다는 의혹과, 영조는 숙종의 친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내세웠다. 난이 일어나기 1개월 전, 이들은 이런 내용이 적힌 괘서를 전국 주요 길목에 내걸며 소현세자의 증손자인 밀풍군(密豊君)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단숨에 전국 각지에서 20여 만 명이 동조세력으로 가담했다. 그중에는 향리, 관군, 노비까지 다양한 계층이 포함되어 있었다.기회를 엿보던 이들은 1728년(영조4) 3월 15일, 이인좌를 대원수로 삼아 합천 묘산에서 기병(起兵)을 하면서 반란이 시작되었다. 반군은 장례 행렬로 위장해 무기를 운반했다. 낮에 가까운 숲 속에 무기를 숨겨두었다가 밤이 되면 숨겨둔 무기를 들고 내응 세력의 도움을 받아 순식간에 청주성을 점령해버렸다. 병영을 급습해 충청병사 이봉상 등을 살해하고 청주목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어 병마를 모집했다. 관아를 점령한 후 백성들에게 곡식을 풀어 나누어주자, 전염병과 기근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이 살기 위해 반군에 가담했다. 경종을 위한 복수의 기(旗)를 세우고, 경종의 위패를 군중(軍中)에 설치해 아침저녁으로 곡배를 하면서 군사들을 뭉쳐나갔다.영조는 이 반란에 큰 충격을 입었다. 소론에게 권력을 실어 주었는데도 소론의 일부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다. 더구나 왕위에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반란이 일어났으니 그 불안감은 더 컸다.반군은 파죽지세로 청주에서 목천·청안·진천을 거쳐 안성·죽산으로 향하였다. 이들이 한양을 향해 북상할 때, 영조는 또 맞불작전에 들어갔다. 소론인 병조판서 오명항을 순무사(巡撫使)로 삼아 불로 불을 끄는 전략에 나섰던 것이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참여한다고 약조는 돼 있었던 소론계 인사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반군들에게 협조를 하지 않았다. 오명항은 오히려 이인좌의 첩자들을 역이용해서 유인전술을 펼쳤다. 반군이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일제히 공격했고, 반군은 수적 열세에 밀려 무너지기 시작했다. 만약 한양의 반군세력들이 안성·죽산전투에 참여했더라면 상황은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배신으로 3월 24일 안성에 이어 죽산에서도 패한 이인좌는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했다. 안성·죽산에서 반군의 패보는 삼남 지방의 반군에도 큰 타격을 줬다.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이 청주를 거쳐 4월 초 추풍령을 넘어 남하했을 때에는 영남지방의 반군도 이미 지방관군에 의해 소탕된 후였다. 무신란이 17일여 만에 진압된 것이다.영조는 난을 수습하는데도 직접 나섰다. 수많은 관련자 중 핵심자만 처벌하고 그들을 따라간 백성들은 처벌하지 말라고 명을 내렸다. 영조실록에 무신란의 역적으로 기록된 사람은 총 642명이지만, 이중 62명만 극형에 처해진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극형에 처해진 사람들의 재산은 몰수되었고, 연좌된 일가친족들은 모두 유배를 보냈다. 이때 이들의 친족 일부가 장기로 유배를 온 것인데, 그 일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우선 1728년 (영조4) 6월 21일 안찬서(安賛瑞)의 처 끗열(唜烈), 딸 연이(連伊)와 사매(士每), 아들 일기(日記)등 일가족 4명이 연좌되어 장기로 왔다. 이 집안의 가장인 안찬서는 이인좌의 군대에서 장수로 활동하다 역적으로 몰려 참형에 처해진 후였다.이듬해인 1729년(영조5) 5월 20일에는 최용서(崔龍瑞)의 처 봉업(奉業)이 왔고, 6월에는 아들 최흥선(崔興先), 딸 최아기(崔岳伊)가 연좌되어 장기로 왔다. 가장인 최용서는 이인좌의 군대에서 용맹을 떨친 장수였다. 가장은 참형에 처했고 일가족 3명이 장기로 온 것이다.8월 23일에는 울진현 주둔군(駐屯軍)에 노예로 공급되어 있던 조세추(曺世樞)의 동생 탈(梲)과, 유3천리 안치에 처해졌던 조카 조중휴(曺重烋)가 이배되어 장기로 왔다. 조세추는 문경에 기반을 둔 조하주(曺夏疇:1650∼1725)의 일족이었다. 조하주는 이인좌의 외할아버지인데, 처남이 성호 이익(李瀷)이다. 그는 남인으로 영남 제일의 부자였다. 남인의 핵심 축이었던 조하주 문중은 난에 가담하여 재정을 책임지는 등 큰 역할을 하였지만 이 난이 실패함으로서 역적가문으로 몰렸다.난이 평정되고 17년이 지난 후, 새삼스럽게 장기로 유배를 온 사람도 있었다. 당시 조사에서 빠졌던 김덕삼(金德三)의 조카 3명이 숨어살다가 공홍(公洪: 공주 홍주) 감사에게 적발되었던 것이다. 공홍감사는 이를 의금부에 보고를 하였고, 의금부에서는 이들을 유3천리 안치형에 처했다. 이때 김덕삼의 조카 김동엽(金東曄)이 장기로 위리안치되었다. 김덕삼은 이인좌의 난에 깊이 개입하였다가 대역부도죄로 이미 1745년(영조21) 12월 18일 능지처사되었다.이인좌의 난으로 영조는 즉위 초부터 주창한 탕평책의 명분을 더욱 굳힐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왕권강화와 정국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던 것이다.골육상쟁(骨肉相爭)의 비극이라고 할까. 무신란을 평정하는 데는 정미환국으로 등용된 소론 정권이 앞장섰으나, 난의 주모자 대부분도 소론이었다. 때문에 소론들의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이후에는 노론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고, 소론은 재기 불능상태가 된다. 이 사건 이후 조정에서는 지방 세력을 억누르는 정책을 강화하게 되었으며, 덩달아 영남지역 선비들의 중앙정계 진출은 앞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막하게 되었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10-22

‘무조건 성공’ 보장 없어… ‘지역관광 상생’ 전략 세워야

김영록 전라남도지사는 지난 10월 18일 ‘목포해상케이블카’ 탑승체험을 한 후 정인채 새천년종합건설 회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도지사가 직접 케이블카 사업을 맡은 건설사에 감사패를 전달한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데, 이는 그만큼 목포해상케이블카가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전남도청에 따르면 새천년종합건설은 850억원을 투자해 목포 북항∼유달산∼고하도를 잇는 총 연장 3천234m(해상 820m·육상 2천414m)의 목포해상케이블카를 조성해 지난 9월 개통했다. 이 케이블카는 국내 최장 운행거리와 전 세계 최고 지주 높이 155m를 자랑하고 있다. 목포해상케이블카 개통 이후 18일까지 33일간 케이블카를 탑승한 이용객 수는 21만1천여명에 달한다. 하루 평균 6천400명이 이용한 셈이다. 주중 5천여명, 주말 1만여명이 이용하는 등 케이블카 개통으로 목포를 찾는 관광객 수가 급증하면서 서남해안을 대표하는 명품 관광상품으로 떠오르고 있다.김 지사는 감사패를 전달하면서 “최근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서도 새천년종합건설의 아낌없는 투자와 헌신에 감사드린다”며 “전남 서남해안의 아름다운 섬과 바다 등을 세계적 해양관광자원으로 개발하고자 하는 전남의 새천년 비전인 ‘블루투어(Blue Tour)’ 실현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지역 사회가 똘똘 뭉쳐 케이블카에 사활을 걸고 있는 경우도 있다.설악산오색케이블카 사업이 전형적인 예다. 설악산오색케이블카사업의 경우 이를 백지화시킨 환경부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반발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이며, 이와 관련해 친환경설악산오색케이블카추진위원회는 지난 10월 10일 양양군 양양읍 남대천 둔치에서 ‘환경부 규탄 범도민 궐기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앞서 환경부는 지난 9월 16일 설악산오색케이블카사업과 관련해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 사업이 자연환경과 생물 다양성 등에 미칠 영향과 사업 승인 부대조건의 이행 방안을 검토한 결과, 환경 가치 훼손이 심각하고 보완 대책도 미흡해 사업이 재검토돼야 한다”며 부동의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지난 2015년 8월에 국립공원위원회가 조건부 승인을 낸 이후 4년 만에 이러한 결정이 떨어지자, 친환경설악산오색케이블카추진위원회를 비롯한 지역사회는 “환경부는 적폐를 내세워 강원도와 양양군을 헌신짝처럼 버렸다”며 “사업을 불허하려면 일찍 할 것이지 수년 동안 끌어오다가 이제 와서 부동의 한 환경부를 그냥 둘 수 없다”고 즉각 반발했다. 김진하 양양군수 역시 “양양군민 모두가 단합된 힘으로 밀고 나가자”고 밝히는 등 민관이 하나 돼 케이블카 사업을 다시 재개하기 위한 바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이들 사례 외에도 통영케이블카의 성공으로 촉발된 케이블카 건설 사업은 ‘무조건 성공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수많은 지자체에서 추진하고 있다. 포항을 비롯해 강화, 춘천, 화성, 거제 등이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케이블카 사업에 뛰어드는 등 전국이 케이블카로 들썩이는 상황이다.□ 양날의 검, 케이블카그렇다면 케이블카는 절대 실패하지 않는 사업일까.여수해상케이블카의 경우 출발은 좋았으나, 현재 시와 업체가 소송을 벌이며 시끄러운 상황이다. 사업 시작 당시 운영업체에서 매출액의 3%에 해당하는 기부금을 지역사회 환원 명목으로 내기로 했었지만, 이를 약 2년 전부터 거부하며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이어 업체 측은 지난 2016년 만들어 여수시에 기부한 오동도 주차타워도 다시 찾아오겠다는 의지를 최근 내비치고 있어 지역 사회와의 갈등은 더욱 심각해질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이는 기본적으로 민자사업으로 추진됐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는데, 사천시시설관리공단이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사천바다케이블카의 경우 “민자사업 이슈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해봐야 할 것”이라고 조언하고 있다.관광 사업의 경우 서로 상생하는 ‘공적인 측면’이 중요하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 사천시시설관리공단 박태정 이사장은 “우리나라 케이블카 중 케이블카 수익만으로 제대로 돌리는 곳이 절반도 될까 말까다”며 “사천시와 같이 시설공단이나 공사가 하는 것이 버티는 면에서 유리하다”고 말했다. 그는 케이블카의 미래에 대해 “어느 시점에 가면 분명히 인건비가 나오지 않을 경우가 있다”면서 “만약 시에서 운영한다면 적자분에 대한 보전이 되면서 재활성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겠지만, 개인 회사는 바로 문을 닫아야 한다. 이는 상당한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하며 실패에 대한 대비가 충분히 마련돼야 한다고 밝혔다. 케이블카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그는 “돈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이와 관련해 “이 상태로 가면 5년 내나 10년 내 적자로 가지 않을까 싶다. 다른 것을 찾아서 돈을 벌어야 한다”면서 주변에서 연계하고 소비하게 하는 촉매제 역할로서의 케이블카를 강조했다. 즉 주변과 시너지를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런 부분은 민자 사업으로는 어려울 것이라는 걱정을 내비친 것이다.그는 “개인이 한다면 주변 땅을 다 사서 하지 않는 이상 서로 상생하는 점은 불가능하다. 케이블카를 실컷 지어놨더니 주변 식당이나 상가가 돈을 벌어가는 상황이 온다면 사업주는 어떤 판단을 내리겠나. 고철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면서 “10년을 해야 본전을 찾을 것이다. 그 이후를 돌아봐야 하고 대비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포항은 아직 시작단계, 지역 사회와 충분한 소통 필요민자 사업 이슈 외에 지역민과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지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부산에서는 해운대와 이기대를 연결하는 해상케이블카 사업이 추진되고 있는데, 이를 둘러싸고 지역사회는 찬반 논란이 가열되며 둘로 쪼개진 상황이다. 반대 측에서는 “공공재인 부산 앞바다가 기업에 사유화되고, 동백유원지와 이기대가 상업 개발로 환경이 훼손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찬성 측에서는 “해상케이블카가 설치되면 연간 312만명이 이용할 것으로 추정되는 등 침체한 경제를 살리기 위해 케이블카 도입은 필수다”라고 맞서고 있다.포항의 경우 아직 시가 업체와 MOU만 맺은 상황이어서 구체적인 계획은 나오지 않았지만, 타 지자체의 사례를 충분히 검토해 사업 실패 확률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사업지 선정부터 사업 추진 방식까지 전부 백지화하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지역민을 포함한 전문가들과의 충분한 검토와 논의가 선행돼야 한다는 소리다.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민자 사업으로 추진하더라도 지역 관광과의 상생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해법이다. 만에 하나 케이블카가 수익성 저조로 폐쇄돼 흉물로 전락한다면, 영일만관광특구 지정으로 상승기류를 타고 있는 포항 관광에 찬물을 끼얹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입지에 대한 재논의도 필요하다. 포항의 현 사업지인 영일대해수욕장과 관련해 타 케이블카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풍광이 걱정스럽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즉 동해 자체가 지평선 외에 볼 것이 없는 상황에, 영일대 해수욕장의 나름 장점인 포스코 야경의 경우에도 “산업단지라는 정서가 관광적인 목적으로 크게 와 닿지는 않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즉, 상생의 손으로 대표되는 일출 명소이자 호미반도 해안둘레길로 이미 풍광의 우수성이 입증된 호미곶과 같은 최적의 장소는 제외하고, 굳이 주거지와 상가가 몰려 있는 영일대해수욕장을 고집하는 것은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계획대로 영일대해수욕장이 사업지가 된다면, 해수욕장과 바로 인접해 있는 주민들과의 갈등 또한 신경 써야 할 부분이다. 이미 국제적인 행사로 거듭나고 있는 포항국제불빛축제만 하더라도 영일대해수욕장 인근 주민들이 소음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으며, 여기에 추가로 케이블카가 들어서면서 생기는 소음과 인파는 분명히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여수시 관계자는 이와 관련, “여수는 섬지역이고 교통이 평지와 비교하면 제한돼 있어서 일시적으로 몰리면 여파가 시 전체로 퍼져 나간다”며 “포항의 경우에도 케이블카 사업지 인근에 주거지가 있다고 하는데, 복잡한 곳에 설치하게 되면 교통 문제가 가장 걱정이다”고 밝혔다.사업 타깃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케이블카는 인근 관광지와의 연계가 중요하며, 어떤 연령층을 주요 타깃으로 잡느냐에 따라 이 연계의 방향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즉, 사업 초기단계부터 고령층을 중심으로 정적이고 휴양적인 프로그램으로 짤 것인지, 젊은 층을 중심으로 활동적이고 체험적인 프로그램을 짤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잡아나가야 한다.이러한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케이블카가 무조건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전국에서 너도나도 해당 사업을 진행하고 있어 케이블카 자체가 ‘레드오션’이기 때문이다. 수요는 정해져 있는데 파이만 늘어나면 경쟁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 포항시가 단순히 “MOU만 맺었으니 끝”이라는 자세에서 벗어나 좀 더 적극적으로 사업을 이끌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한다./전준혁기자 jhjeon@kbmaeil.com끝※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2019-10-21

고요한 가을 숲에는 계곡물 흐르는 소리와 내 숨소리만이

올해 여름 더위는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예년 같은 폭염이 찾아오지 않아 좋았다. 하지만 세상이 하도 소란스러운 탓에 장마보다 권태롭고 뙤약볕보다 고통스런 계절이었다. 연달아 북상하는 가을 태풍도 세상의 온갖 소음과 낯 뜨거운 풍경들을 다 쓸어버리진 못했다. 자꾸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이상, ‘날개’)에서부터 불어오는 열풍 때문이었다. 생활과 사람과 뉴스로부터 내가 달아나는 수밖에 없다. 아직 여름의 잔열이 남아 있는 서울을 벗어나 더 깊은 가을로 들어가는 순간, “혈이 탁 트이고서야 내 온몸이 잠망경으로 솟아오를 수 있”(김지훈, ‘시월의 잠수함’)음을 나는 믿어보기로 했다.다시, 울진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경북 바닷길 537km 기행의 마지막 발걸음을 뗀 것이다. 두 개의 계절이 지났다. 어느덧 햇살은 땅 위에 금빛 앙금을 남겨둔 채 허공에서 점점 얼음의 투명함을 입고 있었다. 가을, 가을이었다. 서울을 떠나 영동고속도로를 통과하면서 강릉 옥계의 흐린 낯빛과 마주봤다. 먹장구름이 심상치 않았다. 차창 밖 중앙분리대 너머에서 동해는 회색빛으로 넘실거렸다. 희끄무레한 파도가 마치 늙은 아버지의 흰머리 같았다. 삼척에 들어서자 빗방울이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 비는 단풍을 더욱 붉게 물들이고, 갑각류의 속살을 단단하게 할 것이다. 서리를 흉내 내며 지상으로 흩어지는 가을비는 겨울의 마중물이다. 비가 그치고 나면 기온이 더 내려가고, 그때 빗방울은 눈송이로 몸을 바꿔 포구와 산 능선과 슬레이트 지붕과 녹슨 자전거 안장을 하얗게 덮을 것이다.지난 늦봄의 울진은 아까시 내음으로 온몸을 뒤채는 거대한 한 마리 짐승이었다. 그때 불영사로 가는 길, 나는 금강송 군락을 통과하면서 입술까지 초록빛으로 물들어버렸다. 끊임없이 몸속으로 스며드는 아까시 향기에 대책 없이 취해 정신을 못 차렸다. 망양정에서 바라보는 아득한 ‘세상의 끝’ 수평선을 향해 나를 던지고 싶었다. 죽변항 대원대게센타에서 박달대게 살을 파먹으며 감격했다. 그러나 가을 울진에서는 그 들뜬 황홀감을 아마 다시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오월의 무성한 녹음, 웅장한 초록 그늘, 짙은 초록 페로몬, 축제의 환희, 나른한 게으름은 이미 옛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대신 또 다른 기쁨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어느새 내 발길은 울진 북면의 응봉산 덕구계곡을 향하고 있었다.숲에 들자 비가 그쳤다. 단풍잎 사이로 옥빛 계곡물이 흐르는 풍경에 절로 감탄을 터뜨렸다. 나뭇잎을 흔드는 계곡의 바람은 “별보다 반음 낮고 얼음보다 반음 높은 음조로”(김영래, ‘큰개자리 여인숙’) 내 귓가에서 음악이 되었다. 숨을 쉬면 서늘한 공기 끝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뒷맛이 묵직한 와인을 마시는 듯한 미감을 만끽하며 계곡의 더 깊은 내부로 걸어 들어갔다. 숨이 달 수도 있구나! 들이마시는 숨이 맛있어서 벌컥벌컥, 돌계단 몇 개를 거침없이 뛰어 올랐다. 고요한 가을 숲에는 계곡물 흐르는 소리와 내 거친 숨소리만이 들렸다. 떼쓰다 악에 받쳐 우는 애 울음 같던 매미 소리 잠잠한 수풀 속에서 풀벌레들이 이따금 장단을 맞췄다.서둘러 잎을 버린 우듬지마다 흐린 가을 하늘이 걸려 있었다. 맑은 날씨가 아니어도 대기가 머금은 물방울들 덕분에 계곡의 오후는 한없이 청명했다. 아니다. 청명함은 내 마음의 날씨에서 돋아나는 것, 가을엔 풍경의 여백만큼이나 마음도 넉넉해진다. 봄도 좋지만 봄은 변덕스럽고 까칠하다. 봄에 비해 가을은 안정적이고 성숙하다. 예측 가능한 계절이자 다 자라난 어른이다. 30여분 정도 가을 숲을 걸어 들어가 용소폭포의 아름다움과 마주하는 순간, 나는 세상과 시간을 오래 견딘 지혜로운 이와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착각을 했다. 그는 물소리로, 나는 내 마음의 문장으로… 이야기가 깊어지려는데, 후두둑, 빗방울이 다시 떨어졌다.덕구계곡에는 4㎞의 송수관이 설치돼 있다. 이 송수관은 땅에서 솟는 온천수를 실어나른다. 덕구온천리조트는 우리나라에서 단 한 곳뿐인 자연용출온천 관광 시설이다. 칼륨, 칼슘, 철, 중탄산, 불소, 나트륨, 마그네슘, 라듐, 황산염, 탄산, 규산 등이 함유되어 약알칼리성을 띠는 이곳의 온천수는 사철 자연용출온도 42.4℃를 유지한다. 그 물로 온천욕을 하면 신경통 완화 및 피부미용에 좋다고 한다. 행정안전부에서 지정한 ‘국민보양온천’ 시설인데, 까다로운 자격요건을 모두 충족했다. 인체유해성분 안전기준 25℃ 이상의 온천수를 하루 300t씩 양수할 수 있으면 ‘일반온천’으로 개발 및 이용이 가능하지만, ‘국민보양온천’의 기준은 훨씬 엄격하다. 온천수는 35℃ 이상이거나 25℃ 이상인 경우 유황과 탄산 등 인체에 유익한 성분을 1000㎎/ℓ 이상 함유하여야만 한다. 그밖에도 주변에 빼어난 자연 경관이 있어야 하며, 숙박 및 편의 시설 등을 갖추어야 보양온천으로 인증 받을 수 있다.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갈아입을 옷과 간단한 짐을 챙겨 ‘대온천장스파월드’로 향했다. 빗줄기가 거셌지만, 비를 맞으며 노천 온천을 즐길 생각을 하니 신이 났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끊고 ‘스파월드’부터 이용하기로 했다. 스파는 실내와 야외 시설로 나뉘어져 있는데, 수영모와 수영복을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 야구모자와 반팔, 반바지도 허용된다. 다만 면 소재의 티셔츠는 지양하는 게 좋다. 인공 야자수와 분수, 선베드가 이국적 풍경을 연출하는 실내 스파에는 평일임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바깥으로 나가 노천 레몬탕과 녹차탕, 히노끼탕에 번갈아 몸을 담갔다. 42.4℃의 온천수는 마음까지 훗훗하게 데우며 그동안 도시에서 쌓인 피로와 불안, 근심들을 한꺼번에 씻어주었다. 너무 편안해서 달콤한 졸음이 몰려왔지만, 차가운 빗방울이 이마에 떨어질 때마다 아늑함에 나른해지던 정신이 번쩍 깼다.이번엔 대온천장에서 목욕할 차례다. 열탕에 몸을 담갔다가 찬비 흩날리는 야외 데크에 나가 뜨거운 알몸을 서늘한 공기로 식히는 묘미가 각별했다. 살갗에 오소소 돋는 소름이 마치 낯별처럼 보였으니까. 사우나까지 알뜰하게 이용한 후 몸의 물기를 털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온천의 열기가 아직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채로 휴게공간에 딸린 카페에 앉아 아이스커피를 마시니 그야말로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황홀했다. 이런 순도 높은 휴식이 또 어디 있을까? 온천 관광이 발달한 일본에서는 북해도 노보리베츠의 유황온천을 으뜸으로 치는데, 그곳의 대형 료칸인 ‘마호로바’나 ‘석수정’, ‘후루카와’ 등과 비교해도 덕구온천은 전혀 부족함이 없다. 지금 이 계절만큼 온천욕을 즐기기에 좋은 때도 없다. 물론 눈 내린 겨울, 노천탕에서 응봉산의 설경을 바라보는 일 또한 환상적이긴 할 것이다.온천욕으로 몸의 긴장을 풀었더니 호텔방에서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니 어느새 어두운 저녁, 호텔에 한식당과 푸드코트가 있지만 나는 종일 그치지 않는 가을비를 헤치고 죽변항으로 달렸다. 대숲의 기슭이라는 이름마저 낡아버린 죽변항, 사람들은 대부분 후포나 영덕으로 가고, 손님이라곤 가을비 타고 흘러든 나 같은 뜨내기뿐인 쇠락한 선창가. 나는 죽변의 그 쇠잔함을 좋아한다. 부두에 고인 빗물 위로 불빛들이 엎드린 채 등을 들썩이며 흐느끼고 있었다. 일찍 문 닫는 식당들을 어찌하지 못하고 그나마 불 밝은 집에 들러 홍게와 가리비를 포장해왔다. 게 찌는 동안 아주머니가 나 먹으라고 내준 고구마와 귤이 벌써 맛있었다. 아아, 어느 한 구석이 따뜻해지는 걸 보니 겨울이 가깝긴 가까운 모양이다.그렇게 나는 가을 울진의 품에서 따뜻한 위로를 받았다. 호텔로 돌아오니 창밖으로는 얼음 같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창을 통과한 불빛들은 그저 따사롭기만 한 가을밤의 평화가 나를 오래토록, 넉넉히 안아주었다.              /시인 이병철

2019-10-20

성주군 ‘일자리 창출’로 최고 복지 실현 ‘성큼’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와 닿는 최상의 복지는 일자리”라는 말이 있다. 요즘처럼 실업률이 높은 상황에선 이 말이 가진 의미가 더욱 크게 가슴을 친다.2019년 오늘의 한국. 어느 지자체 할 것 없이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고민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성주군도 다르지 않다. ‘좋은 일자리가 삶의 조건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킨다’는 건 어린아이도 아는 명백한 사실.일자리 창출을 위해선 지역에서 활동하는 중소기업을 효율적으로 지원하고, 기업인들이 생산과 연구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자체와 기업 간의 원활한 의사소통 구조를 만드는 것도 시급한 문제다. 성주군은 지역 발전과 중소기업 지원책 마련, 안정적인 일자리 확대를 위해 올 한해 멈춤 없이 꾸준히 노력해왔다. 그 노력들이 어떤 구체적 프로젝트를 통해 진행되었는지 살핌으로써 향후 성주가 열어갈 경제적 미래를 예측해보고자 한다.◇지역 일자리 창출과 기업 지원 방안 다양하게 모색성주군은 올 하반기 군청 소회의실에서 산업·농공단지, 개별공단, 기업인단체 대표 등 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먹·자·쓰·놀 운동(성주에서 먹고 자고 쓰고 놀자는 뜻)’ 추진과 사업하기 좋은 성주를 위한 기업인 간담회를 가졌다.이는 지역 발전과 함께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고심과 고뇌에서 만들어진 자리였다.여기서 성주군은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추진 중인 중소기업 운전자금 지원, 일본 수출규제 합동대응반 운영, 일자리창출 지원사업 등 기업 지원시책에 대한 정보를 알리고 이를 기업 관계자들과 공유했다.이와 더불어 성주군 역점시책 사업인 ‘먹·자·쓰·놀 운동’의 기업인 동참을 위해 상호협약체결도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당시 협약을 통해 ‘성주군 특산품과 공산품 이용을 적극 실천하자’, ‘각종 행사 및 모임 때 관내 음식점을 이용하자’, ‘기업 소유 차량은 관내 주유소 이용을 활성화하자’, ‘소속 직원들의 관내 주소 이전 등을 위해 모두가 노력하자’는 것에 상호 합의했다.또한, 군의 역점시책 분야에 대해 심도 깊은 논의를 나눴고, 사회적 분위기로 자리 잡은 일본 수출규제 대응을 위한 피해 예방과 상호협력체계 구축 방안도 덧붙여 의논했다.성주군 관계자는 “협약 체결식에선 합동대응반 운영을 통한 정보의 적극적 교환 등이 집중적으로 이야기됐다”고 전했다.성주군은 일본 수출 규제조치에 따른 대응 전략으로 기업의 피해 사례를 접수받고 있다고 밝혔다. 관련된 상담을 원하는 기업은 성주군청 기업지원과를 직접 방문하거나, 전화(054-930-6433)로 해당 사항을 문의하면 각종 지원책을 안내받을 수 있다는 게 성주군의 이어지는 설명이다.◇‘먹·자·쓰·놀 운동’으로 지역 경제 생태계 선순환을이와 함께 성주군청은 “먹·자·쓰·놀 운동의 동참해주신 기업체에 고마움을 전한다”며 “일본 수출규제 조치로 어려움을 겪는 성주군 기업체들을 돕고자 합동대응반을 꾸려 행정·재정적인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기업인 단체, 대표와 협력해 다양한 대안을 마련해 나가겠다”고 약속하고 있다.이에 따라 무더위와 폭우가 한창이던 지난 8월 말에도 성주군 기업지원과는 선남면 도성공단협의회 월례회에 참석해 ‘성주에서 먹·자·쓰·놀 기업이 함께 합니다’라는 슬로건 아래 일자리 창출과 지역 발전을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는 개별 공단협의회와의 ‘릴레이 간담회’의 일환이었다.이 간담회는 앞서 진행된 산업·농공단지, 개별공단, 기업인단체 대표와의 간담회를 통한 상호 협약체결 이후, ‘먹·자·쓰·놀 운동’의 분위기를 지속적으로 이어가고자 하는 취지에서 열렸다는 게 성주군청 기업지원과 관계자의 부연이다.◇기업과의 ‘릴레이 간담회’ 통해 일자리 만들기 노력성주군이 14곳 개별공단협의회 기업인들과 릴레이 간담회를 개최하는 것은 생산과 소비의 효율적인 맞춤은 물론, 지역의 일자리 창출로도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이날 간담회의 주요 내용은 각종 기업 지원시책 안내, 일본 수출규제 합동대응반 운영, 기업 애로사항 및 건의사항 수렴, ‘성주에서 먹·자·쓰·놀 운동’의 기업 동참 유도 등이었다고 한다.참석한 기업 지원 관계자와 도성공단협의회 회원들은 “먹·자·쓰·놀 운동에 기업이 참여한 것이 지역에 대한 사랑과 지역 기업에 대한 애정을 키우는데 적지 않은 보탬이 됐다”며 “릴레이 간담회가 기업 지원 서비스와 개별공단과의 소통 강화로 연결되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바람을 전했다.이번 달에도 성주군청 기업지원과의 릴레이 간담회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군은 적극적 의지를 가지고 이를 진행 중이다.간담회는 올 여름 산업·단지, 개별공단, 기업인단체 대표와 간담회를 통한 상호 협약체결 이후, ‘먹·자·쓰·놀 운동’ 분위기를 계속적으로 이어가고자 펼쳐지고 있다.성주군은 이미 지난 9월에도 선원공단협의회, 대산공단협의회와 상생·소통 간담회를 개최한 바 있다.자리를 함께 한 기업 지원 관계자와 도성공단협의회 회원들은 “먹·자·쓰·놀 운동의 참여와 성주군의 기업지원 서비스가 가까운 시일 안에 시너지 효과를 불러올 것 같다”며 “성주군과 개별 공단과의 상생·소통 강화는 지역 발전의 초석이 될 것이다. 이런 시책이 단순히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앞으로 지속적으로 진행돼 범군민 운동으로 정착됐으면 한다”고 말했다.◇여성기업인협의회와 힘 모아 지역 현안 해결을지난 여름 성주군은 여성기업인협의회(회장 김점열)와 지역 한 식당에서 월례회를 열고, 성주 100년 미래 발전의 초석이 될 남부내륙철도 성주역 유치에 대한 결의를 다지는 시간도 마련했다. 군정에 대한 지역민의 협조를 부탁하고, 군정 방침을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한 자리였다. 이날 월례회 후에는 당시 열리고 있던 성주군 축제 행사장을 방문한 수많은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군내 기업인들의 염원인 남부내륙고속철도 성주역 유치의 필요성을 알리며, 시원한 생수를 무료로 나눠주기도 했다.이런 활동은 지방자치단체와 관내 기업이 힘을 합친 홍보 활동의 좋은 사례가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성주군 여성기업인협의회는 “남부내륙철도의 성주 노선 통과와 역사 유치를 위해 앞으로도 힘을 쏟을 계획”이라고 지속적으로 말해왔다.이날 자리를 함께 한 이병환 군수는 “지역의 숙원사업을 위해 기업인들이 솔선수범해 준 것에 감사드린다”며 “침불안석(寢不安席), 식불감미(食不甘味)란 고사성어가 있다. 누워도 편치 않고,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게 현재 우리의 솔직한 심정이다. 지역을 찾는 관광객들이 성주역에 내려 물 한잔 마실 수 있도록 모두가 힘을 모으자”고 당부했다.◇좋은 일자리 늘어나고 기업하기 좋은 성주로지역에서 고용 창출과 생산성 향상에 땀 흘리고 있는 중소기업을 격려·고무하고, 지원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하는 것은 지방자치단체가 짊어진 주요한 책무 중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성주군은 최근 (주)거산알루미늄(대표 홍정호)과 ‘사업장 확장을 위한 투자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거산알루미늄은 지난 2012년 그 출발을 알렸다. 이후 2018년엔 250억 원의 매출을 올린 건실한 중소기업으로 알루미늄 창호를 생산하는 업체다. 당시 투자양해각서 체결을 통해 성주군과 거산알루미늄은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산업단지 내 4천200평 부지에 80억을 투자해 생산라인을 증설할 계획을 세웠다.이와 관련해 임현성 성주부군수는 “성주군민은 어려운 경제 환경에서 과감한 투자 결정을 내린 거산알루미늄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며 “향후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민선7기가 시작을 알릴 때부터 “효율적 지원과 상생의 마음을 바탕으로 기업이 발전하고, 양질의 일자리가 늘어나는 살기 좋은 지역’을 지향해온 성주군의 발걸음에 밝고 환한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를 기대 가득한 눈길로 살펴보는 군민과 중소기업 관계자들이 적지 않다./전병휴·홍성식 기자

2019-10-17

산림생태 체험하고 캠핑도 즐기고 ‘다 되네!’

구미시는 공단도시, 회색도시라는 이미지로 인해 천혜의 아름다움을 지닌 자연경관이 관광자원으로서의 빛을 제대로 발하지 못했다. 잘 알려진 금오산과 천생산, 팔봉산을 비롯해 도심을 가로지르는 낙동강 등 구미지역의 자연경관은 예로부터 선인들의 극찬을 받아왔다. 구미시도 공단도시, 회색도시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자연도시, 녹색도시 구미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고, 이러한 노력들로 인해 현재 많은 관광자원들이 만들어져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구미가 지닌 관광자원을 대해 알아봤다.△사시사철 구미시민의 사랑을 받는 금오산 도립공원높이 976.5m의 금오산은 구미의 대표적인 산으로 1970년 6월 1일 대한민국 도립공원 1호에 지정된 명산이다. 금오산이라는 이름은 어느 날 이곳을 지나던 아도(阿道)가 저녁노을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이라 이름 짓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名山)이라 한데서 비롯됐다고 전해진다. 산 전체가 바위로 이뤄져 기암절벽에 급경사가 많고, 산 아래에서 대혜 폭포까지는 케이블카가 설치돼 있다. 산 정상에는 약사암과 마애보살입상, 중턱에는 해운사·도선굴·대혜폭포 등의 이름난 명소가 있으며, 산 아래에는 길재 선생의 뜻을 기리는 채미정이 있다.도립공원 지정과 더불어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관광명소가 됐다. 산의 북동쪽 자락에 위치한 금오산 저수지는 보트 놀이 등 수변 위락 공간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9년간의 조성공사를 통해 2016년 준공된 총 길이 2.43㎞의 올레길은 제당산책로, 부잔교, 아치교, 데크로드, 콘크리트구간, 흙길산책로 등 다양한 구간으로 구성돼 걷는 재미와 금오지와 금오산의 풍경을 즐길 수 있어 평일에도 산책을 즐기는 시민들로 북적인다.또 금오산도립공원 내 위치한 구미시탄소제로교육관은 대구·경북의 대표적인 기후변화 체험관으로 태양광·태양열·지열·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이용 설비 설치 등으로 경북도내 공공건물 최초 녹색건축 최우수(그린 1등급) 인증을 받았다.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2천389㎡의 규모로, 관람시설로는 기후변화관, 탄소제로관, 제로실천관 등이 있다.수려한 자연환경과 문화유산 등 풍부한 관광자원을 가지고 있는 금오산 도립공원은 구미에서 가장 많은 문화·예술축제가 열리는 장소로 사시사철 구미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명소이다.△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구미 에코랜드구미시 산동면 일원에 위치한 구미 에코랜드는 구미시산림문화관, 산동참생태숲, 자생식물단지, 어린이테마교과숲, 문수산림욕장 등 주변시설을 통합해 2017년 5월 11일 개장했다.이곳은 산림생태 체험관광이란 색다른 테마로 산림문학관, 생태탐방 모노레일(1.8㎞), 산동참생태숲, 어린이테마교과숲 등 다양한 산림휴양·체험·교육단지가 조성돼 있다. 산림문화관 3층에 위치한 모노레일은 에코랜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상품이다. 생태숲 일대 1.8㎞ 거리를 30분 간 모노레일을 타고 즐기는 생태탐방 모노레일은 8인승으로, 6대가 상시 운행된다. 산림문화관 뒤편 생태 숲은 도심에 비해 기온이 3∼5℃낮아 한여름에도 생태 숲에서 나오는 피톤치드를 만끽하며 자연을 감상할 수 있어 여름철 큰 인기를 얻고 있다.이러한 인기로 여름철에는 모노레일 이용 예약이 대부분 오전에 마감되고 있어 구미시는 모노레일 1대를 추가로 설치할 예정이다. 자연을 인간과 최대한 접목시킨 테마별 숲은 인근 도시 어린이집, 유치원의 자연견학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구미 에코랜드는 개장 후 첫해 36만 명, 월 최대 6만3천여 명이 방문할 정도로 구미를 대표하는 관광시설로 자리매김 했다. 구미시는 늘어나는 방문객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각종 편의시설 등을 증설할 계획이다.△불교문화에 디지털 콘텐츠 결합한 신라불교초전지구미시 도개면 도개리에 위치한 ‘신라불교초전지’는 2017년 10월 13일 개관했다.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파한 아도화상의 발자취와 신라 불교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이곳은 도개리 일대 부지 3만6천919㎡, 건축연면적 2천537㎡ 규모에 국비 131억 원, 도비 17억 원, 시비 52억 원 등 총 200억 원을 들여, 자연친화적인 한옥과 초가 등을 조성해 교육과 체험이 가능한 공간으로 만들었다. 특히, 신라불교초전기념관은 첨단 전자산업의 메카인 구미시답게 불교문화에 첨단 디지털 콘텐츠를 접목한 기념관으로 주목받고 있다.이곳에는 아도화상의 발자취와 부처님의 일상을 그린 팔상도, 한반도 불교 전래 과정 등 다양한 불교문화 콘텐츠를 첨단 디지털로 만나볼 수 있다. 총 1천467㎡ 면적에 4개의 기획관으로 구성된 기념관은 제1관 아도, 신라로 향하다, 제2관 신라, 불교의 향이 퍼지다, 제3관 신라, 불교의 꽃을 피우다, 기획관 100년 전 선산 불교문화유산과의 만남 등으로 구성돼 있다.야외에는 신라시대 의·식·주·법 생활상이 그대로 재현된 야외 전시가옥 7개 동도 갖춰져 있어 다양한 볼거리도 제공한다.이밖에도 전통한옥가옥체험관과 불교문화체험관을 조성해 운영하고 있다. 총 4개의 체험관으로 구성된 전통한옥가옥체험관은 규모에 따라 성불관, 자비관, 해탈관, 견성관, 오도관, 득도관, 대각관으로 4∼10명 단위로 사용할 수 있다.△레저·수상스포츠의 대명사 구미낙동강체육공원구미시는 4대강 사업으로 한층 넓어진 낙동강 둔치를 활용하기 위해 2012년 5월 7일 구미낙동강체육공원을 조성했다. 구미낙동강체육공원은 낙동강 살리기 사업과는 별도로 국비 350억 원을 들여 도심과 가까운 낙동강하천둔치에 산책로, 초화원, 체육시설, 생태습지 등 친수와 복원을 병행해 조성한 수변휴식공간으로, 종합경기장 1면, 천연 잔디 축구장 10면, 야구장 2면, 인라인스케이트장 1면, 인조 잔디 풋살장 5면, 게이트볼장 4면, 농구장 5면, 배드민턴장 10면, 족구장 10면 등 총 9종 48면의 체육시설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 산책로 15㎞, 자전거도로 11㎞, 이벤트 공간, 피크닉장 등의 다양한 시설을 갖추면서 개장 첫 해인 2012년 5만5천명에 불과하던 이용객이 2016년 50만 명을 넘었고 2018년에는 100만 명을 돌파했다.낙동강 수상레포츠 체험센터는 수상레포츠 저변을 확대해 구미를 수상레포츠 도시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지난달에는 국민체육진흥공단과 구미시가 공동으로 국내 최대 레저스포츠 축제인 ‘2019 레저스포츠 페스티벌 in 구미’를 개최해 5만여 명의 시민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이 행사에 참여한 시민들은 스포츠클라이밍, 서바이벌, 카트와 스마트 모빌리티, 플라잉디스크, 드론, 조정, 카약·카누, 고무보트 등을 체험하고, 전국드론축구대회, 스케이트BMX 빅에어 대회, 서바이벌 대회, 플라잉디스크대회 및 인도어사이클 대회를 관람하기도 했다.또 2017년 9월 개장한 구미캠핑장은 구미시민 뿐만 아니라 타지역인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7만1천300㎡ 부지에 카라반캠핑 10면, 오토캠핑 80면, 일반캠핑 80면 등 170면의 캠핑 시설을 갖추고 있다. 구미 도심을 관통하는 낙동강변의 특성상 접근성이 뛰어나 도심에서 캠핑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평일에는 직장인들이 회사동료나 친구들과 캠핑장에서 배달음식으로 모임을 개최하는 새로운 문화도 생겨나고 있다./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9-10-17

투명한 물빛·눈부신 단풍… 신비하고 찬란한 찰나에 발길 붙들려도 좋아라

과객이 되어 머무르고픈 ‘아흔아홉 칸 집’ 송소고택규모부터가 입을 벌어지게 만든다. 큰 건물을 이야기할 때면 등장하는 ‘아흔아홉 칸 집’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청송군 파천면 송소고택(松韶古宅)이다.뒤로는 야트막한 산이 있어 집을 따스하게 안고 있는 형상이고, 앞으론 널찍한 들판이 펼쳐졌다. 풍수지리에 관한 지식이 없는 기자가 보기에도 명당(明堂)임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2개의 사랑채와 안채, 별채, 넓은 정원 등으로 이뤄진 송소고택은 조선 영조 시절 거부(巨富) 심처대의 후손인 심호택이 1880년 경 조상이 살던 덕천마을로 돌아오면서 만든 집이다.솟을대문과 홍살, 팔작지붕에 빗살무늬 교창 등이 19세기 후반 한국 상류층 주택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여기에 송소고택에 살던 사람들은 경주 최부자와 함께 ‘양심적인 사회 공헌’으로도 이름이 높았다.해질 무렵 천천히 고택 안을 돌아봤는데, 어찌나 넓은지 과장을 좀 섞자면 ‘집 안에서 길을 잃을 지경’이었다.드나드는 손님들이 여성이 생활하는 안채를 함부로 쳐다볼 수 없도록 만든 ‘마당 속 또 다른 담’과 집 안에 만든 3개의 우물이 특히 이색적이었다. 안채에선 요즘 보기 드물게 전통 방식으로 곶감을 말리고 있었다.현재 송소고택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심재오 씨. 어린 시절부터 서울에서 살다가 9년 전 아내와 함께 고향으로 내려왔다. 만만찮은 저택 관리에 허리가 아프다고 하면서도, 조상들 이야기를 할 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장작불을 넣은 뜨끈한 아랫목에서 잠들고 싶은 사람이라면 여기서의 숙박이 즐거운 경험이 될 것이다. 기자 역시 그랬으니까.□ 송소고택 홈페이지: https://songso.modoo.at/늙지 않는 신선이 사는 ‘별천지’절경 중의 절경 주산지·주왕산기암과 단애(斷崖)가 줄지어 늘어서 감탄을 자아내는 주왕산과 맑고 투명한 물빛이 유혹하는 주산지에 가본 사람들은 알게 된다. 왜 이곳의 관광 슬로건이 ‘산소카페 청송군’인지. 청정하고 달콤한 공기가 여행자의 몸은 물론 마음까지 편안하게 해준다.주왕산면에 한적하게 자리 잡은 주산지는 299년 전 조선 경종(景宗) 때 농사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저수지다. 물 아래로 뿌리를 내린 수백 년 된 아름드리 나무가 기가 막힌 풍경을 만들어낸다. 한국의 사진작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카메라를 메고 ‘인생 작품’을 남기기 위해 방문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1km 가량 주산지로 걸어 오르는 산길은 우거진 소나무가 만들어내는 향기로운 그늘과 도시에선 밟아보기 힘든 황토의 색채가 여행자들의 환한 웃음을 불러낸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지향한다”는 문장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가족 혹은, 연인과 주산지를 찾은 이들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장수 관우(關羽)의 팔뚝보다 훨씬 굵은 수백 마리의 잉어를 보며 탄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봄과 여름에 만나는 주산지도 좋지만, 노랗고 빨간 단풍과 함께 어우러진 ‘가을날의 주산지’는 절경 중 절경이라는 게 세간의 평가다. 청송이란 지명은 ‘늙지 않고 죽지도 않는 신선이 사는 세계’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1시간쯤 주산지 주변을 산책하니 이 말이 과장처럼 느껴지지 않았다.산에 오르는 걸 즐기는 여행자들에겐 ‘가을 주왕산’이 귀한 선물처럼 다가올 것이 분명하다. 청송군 부동면 일대에 펼쳐진 백두대간 한복판의 경치가 그저 그만이다. 독특한 형상의 바위가 사람들의 눈앞으로 성큼 다가서고, 그것들을 등 뒤로 하고 갈라치면 눈부신 단풍이 오감을 아찔하게 흔들어댄다. 이만큼 드라마틱한 산행이 어디에 또 있을까? 1976년 한국의 12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주왕산은 그 품 안에 대전사, 백련암, 주왕암 등의 사찰과 주왕계곡, 절골계곡, 주방계곡, 학소대 등을 안고 있다. 등산 코스가 다양해 초보 등산객은 물론 등산 전문가들까지 만족감을 드러낸다고 한다. 관광객이 늘어나는 계절엔 인근 식당과 숙박업소도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청송군은 소상공인 보호와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70억 원 규모의 ‘청송사랑화폐’ 발행 계획도 세우고 있다.작가 김주영의 예술혼이 살아 숨쉬는 ‘객주문학관’1939년 청송에서 태어난 김주영은 치밀하고 성실한 취재, 유장한 문장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소설가. 그는 ‘작가로서의 삶’을 아래와 같이 요약한 바 있다.“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민들은 모든 소유물을 몽땅 가지고 다닌다. 비단과 향수, 그리고 씨앗과 소금, 요강과 유골, 하물며 고통과 증오까지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닌다. 격정적인 삶으로 그 모든 것이 탕진되는 날, 하나의 무덤이 거친 바람이 흩날리는 초원에 마련될 것이다.”‘객주’, ‘홍어’, ‘화척’ 등의 작품을 쓴 김주영은 대산문학상, 김동리문학상, 김만중문학상 등을 받은 한국의 대표적인 소설가 중 하나. 청송이 내세워 자랑할 만하다.진보면 진안리 폐교를 리모델링해 조성한 객주문학관은 바로 이 김주영의 생애와 작품 전반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공간. 그간 출판된 소설과 산문은 물론 작가의 취재수첩과 펜, 작품의 소재가 꼼꼼하게 메모된 공책 여러 권이 문학청년들을 기다리고 있다.사진 촬영에도 발군의 실력을 보여준 김주영은 1998년 선배 작가, 언론사 사람들과 함께 북한을 여행했다.객주문학관엔 그때 사용한 카메라와 현상한 사진 수십 점도 함께 전시돼 있다. 금강산, 묘향산, 백두산, 평양 등 현재는 여행하기 힘든 우리 땅 반쪽의 풍경을 보는 건 이곳에 들른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보너스다.“운이 좋다면 1년에 절반쯤은 청송에 머무는 작가를 여기서 만날 수도 있다”는 게 객주문학관 해설사의 귀띔이다.돌에 핀 꽃을 찾아서 ‘꽃돌박물관’30년 넘게 수석(壽石)을 모아온 선배가 있다. 어느 날 그가 말했다. “이 돌 안에 세상과 인간이 있어. 너는 안 보이지?” 당연지사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타깝거나 아쉬울 것도 없었다. 돌, 범위를 좁혀 수석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청송 수석꽃돌박물관’은 흥미로워할 것 같다. 왜냐? 그 돌들 속에는 환하게 핀 ‘꽃’이 보이기 때문이다. 매화, 장미, 국화 등 종류도 다양하다. 예술적 심미안을 가지지 못했더라도 얼마든지 ‘돌의 아름다움’을 완상할 수 있다. 박물관을 채운 ‘꽃돌’은 청송의 지역적 특수성이 만들어낸 것이다. 화산암 중 구과상유문암에 속하는 암석을 꽃돌이라 부른다. 수석 용어로는 화문석. 유문암은 유리처럼 반짝이는 결정을 가진 화산암인데, 청송군 진보면 괴정리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고 한다. 전문가들도 희귀한 돌로 인정하는 한국산 ‘꽃돌’의 80%가 청송에서 나왔다. 조그만 박물관엔 청송 꽃돌을 포함한 수백 점의 수석이 전시돼 있다. 청송 수석꽃돌박물관 지척엔 유교문화 체험관과 도예촌도 있으니, 한국의 전통문화에 빠져드는 시간도 가져보면 좋을 듯하다./홍성식·김종철기자

2019-10-16

‘어떻게 하면?’ 끊임없는 질문이 항공사 날게 했다

교통은 지역의 발전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이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인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문명까지 모두 큰 강의 유역이다. 하나같이 농업에 유리한 물이 풍부하다는 장점과 함께 교통이 편리하다는 특징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세계 무역의 중심이었던 실크로드 또한 세계 각국으로 통하는 사통팔달의 교통로이다. 중국 비단의 로마로의 무역, 당제국과 비단길 무역, 불교의 전래 유통로, 몽골 제국와 동남아시아 및 해상 비단길까지 아우르고 있다. 현재 실크로드는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에 의해 철도, 항로 등 신 비단길이 형성되고 있다.동해를 끼고 있는 포항시도 최적의 교통망 개설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향후 북한과 러시아 연해주를 비롯한 중국과 일본으로 통하는 환동해 물류중심도시도약의 길이 열려 있다.하지만, 인구 50만의 도시에 비해 하늘길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포항시가 야심차게 기획했던 지역항공사 ‘에어포항’은 임금체불, 경영난 등으로 취항 10개월여만에 운항을 중단했다. 미국 댈러스 러브필드 공항을 허브공항으로 두고 있는 세계 3대 항공사인 ‘사우스웨스트’의 성공사례를 토대로 날개가 꺽인 포항의 저가항공사 재취항 가능성을 짚어봤다.□ 사우스웨스트의 성공은 정신에 있다위대한 업적을 기록한 회사들의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신념, 의무, 사명감 등이 있다. 사우스웨스트도 예외는 아니다.이 회사 직원들은 단순한 수익을 내기 위한 고용된 직원이라기보다 스스로 항공사업에 동참한 ‘십자군 운동가’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정신적 토대가 바로 사우스웨스트의 최저운임 유지의 기반이 되고 있다.직원들은 평상시에도 ‘우리 비행기를 타는 손님들을 어떻게 하면 잘 보호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중소기업을 보호할 수 있을까, 저비용 때문에 우리 회사 비행기를 타는 노인들에게 어떻게 하면 잘 해드릴 수 있을까’ 등을 수시로 확인하는 원칙을 고수한다.이러한 원칙들을 사우스웨스트가 포기했다면 미국 소비자들이 혜택받은 연간 수십억 달러의 요금 인하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수익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수익을 추구하는 이면에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동기는 바로 이러한 정신적 원칙에 기인하고 있고 이 점은 회사 창립에서부터 두드러지고 있다.사우스웨스트 항공사의 역사를 보면 용기와 인내로 점철돼 있다. 미국 항공 업계 역사상 사우스웨스트 항공사처럼 극적인 투쟁을 거쳐 항공업에 진출한 유래가 없다.사우스웨스트 항공사는 샌안토니오의 사업가이면서 자그마한 항공 서비스 회사를 소유한 콜린 킹과 그를 지원하는 은행가 존 파커의 합작품이었다.1966년 킹은 대형 비행기를 가지고 텍사스 주의 주요 3개 도시를 운항하는 새로운 항공 회사를 만들겠다는 기획서를 들고 현재까지도 사우스웨스트의 역사적 인물로 일컬어지는 ‘허브 캘러허’를 찾아간다.캘러허는 처음엔 이 아이디어가 황당하다고 생각했으나, 흥미도 가지고 있어 사업구상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했다. 1967년 3월 15일, 캘러허는 에어 사우스웨스트 컴퍼니(현재 사우스웨스트)의 법인 설립 서류를 법원에 제출한다.킹은 캘러허의 도움을 받아 사업 구상을 대내외에 적극적으로 알리며 최초의 종자 자본을 모금했다. 2차 자본 모집에도 박차를 가했고, 정계의 정치적 도움도 요청했다. 결국 2차 자금 모집에서 킹, 캘러허, 내글리(캘러허의 처남), 피스(샌안토니오의 변호사·사업가·정치가) 등 4명의 사업가는 54만 3천 달러를 거두게 됐다.1967년 11월 27일 캘러허는 사우스웨스트의 신청서를 텍사스 항공 위원회에 제출했고 1968년 2월 20일, 항공위원회는 이 신청을 허가했다.하지만, 사우스웨스트는 하늘에 비행기를 띄워 보기도 전에 브래니프, 트랜스 텍사스, 컨티넨털 항공사 등 기존 항공사들로부터 법적인 공격에 직면하게 된다.□ 어려움 속에 싹튼 기업 정신기존 항공사들이 항공 위원회가 사우스웨스트에 항공업 면허증을 발급하지 못하도록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낸 것이다. 이들 항공사들은 사우스웨스트가 취항하려는 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이며 신규 회사가 들어올 여지가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양측의 소송은 너무나 치열해 ‘텍사스 리포트’지는 한때 독자들에게 연예 오락이 따로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캘러허와 기존 항공업체를 대변하는 변호사들 사이의 법정 싸움이 매일 벌어졌으며 1심 법원에서 사우스 웨스트가 이 시장에 신규 진입하는 것은 허가할 수 없다는 판결마저 내려졌다.종잣돈도 소송 비용으로 다 써버린 탓에 사우스웨스트 이사회 이사들은 피곤한 데다 좌절감마저 느꼈다.이사회 중 일부 이사들이 차라리 손절매하고 회사 설립 구상을 포기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마저 내놓았다.하지만 ‘파이터’캘러허는 당시 “여러분, 한 번만 더 싸워 봅시다. 내가 계속 회사의 법정 대리인으로 나서겠습니다. 나에게 주는 변호사 비용의 지불을 무기한 연기해도 좋습니다. 또 각종 법정 비용은 내 호주머니에서 대겠습니다”라며 설득했다.캘러허의 열변과 사자후가 통했는 덕분이였을까. 대법원은 고등법원의 판결을 뒤엎고 사우스웨스트의 손을 들어주게 됐고 결국 사우스웨스트는 항공업 면허를 받게 됐다.사우스웨스트가 중요한 싸움에서 이겼지만, 기존 항공사들은 ‘끈질긴 방해공작’을 그만두지 않았고 연방 대법원에 항소하며 향후 몇년 동안에도 여러번 법정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다행히 타 항공사에서 백전노장으로 알려진 라마 뮤즈를 신임 대표 이사로 영입하면서 희망의 불씨가 재차 살아났다. 뮤즈는 항공업계 친구들 및 관련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7백만달러의 자금을 추가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사우스웨스트의 초창기 법정싸움은 직원들을 오히려 하나로 똘똘 뭉치게 만드는 기폭제가 됐다.직원들은 댈러스 모닝 뉴스나 댈러스 타임스 헤럴드 등 지역 신문지에서 본인들의 회사 전망이 암울하다는 기사를 보면서 회사와 함께 죽기 살기로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느꼈다.□ 경쟁 속에서 생존 전략을 찾아내다사우스웨스트는 저운임 정책을 혁신적으로 도입했다. 당시만 해도 미국 항공 업계는 민간 항공국에서 승인받은 균일한 운임을 책정했다.항공사들은 시장은 비행기 값을 낼 여력이 있는 세력과 그렇지 못한 세력으로 나뉘어 있다고 바라봤다. 항공료 인하는 곧 수입 감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기존 항공사들은 항공기 수송에 문제가 생기거나 비용이 상승하면 곧장 항공료를 올렸다.하지만, 사우스웨스트는 이와 정반대로 움직였다. 낮은 운임과 훌륭한 서비스를 연결시키면 얼마든지 새로운 승객 수요를 창출할 수 있다고 봤다.1973년이 되자 수익이 어느 정도 나기 시작한 상태에서 뮤즈는 리오그란데 밸리 일대에 눈독을 들이고 할링언 공항에 추가 취항을 신청한다.이 판단은 정확했고 당시 텍사스 인터내셔널이 심한 노사 분규에 휘말린 상태에서의 밸리 일대 공백을 정확히 노려 기존 승객수의 거의 3배 가까이 증가하는 성과를 거둔다.증가의 원인으로는 사우스웨스트의 낮은 운임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비행기를 탈 기회를 줬기 때문이고, 이를 통해 박리다매 가격 정책의 성공을 한번 더 확신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또한 지금도 회자되는 ‘10분 턴’전략을 실시해 마찬가지로 성과를 거두게 된다. 비행기를 빠른 시간 안에 회전시켜 정기 스케줄을 유지할 수 있었고, 또 항공업계 내에서 정시 발착을 가장 잘 지킨다는 전통을 쌓아 올릴 수 있었다. 기장 등 조종사와 타 부서 직원들도 비행기 출항 준비에 부서 구분없이 협력한 것이 비결이었다./황영우기자 hyw@kbmaeil.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2019-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