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노인공화국

우정구 논설위원 얼마전 통계청이 발표한 세계와 한국의 인구현황 및 전망에 의하면 2070년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전체의 절반 가까운 46.4%로 추산됐다. 올해 65세 이상 노인인구 비중 17.5%보다 28.9% 포인트가 늘어난다.같은 기간 세계 인구는 79억7천만명에서 103억명으로 증가하고 한국은 5천162만명에서 3천765만명으로 줄어드는 것으로 조사됐다. 현재 세계 29위인 우리 인구가 59위로 하락한다. 저출산과 폐쇄적인 이민정책 등을 주요 원인으로 분석했으나 결과를 놓고 보면 매우 충격적이다.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늙은 나라로 전락하고 평균 가구원 수가 2040년에 가서는 현재 2.37명에서 1.97명으로 줄어든다. 한집에 사는 사람이 평균 2명이 안 된다는 분석이다.노인인구가 줄면 일할 수 있는 인구감소는 당연하다. 일할 수 있는 연령층이 대폭 줄어들면서 한국의 경제 성장은 뒷걸음질 할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과 공무원 연금은 고갈 상태에 빠지고 지하철에는 돈내고 타는 사람보다 무임승차하는 노인이 더 많다.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투표권을 가진 유권자의 절반이 65세 이상 노인이어서 노인들의 정치적 파워를 무시할 수 없게 된다. 경제적으로 생산력이 없는 노인을 위한 정책이 국가 정책의 주요 위치에 등장하면서 사회는 활기를 점차 잃어간다.한국개발연구원(KDI)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현재 65세로 통용되는 노인 연령을 10년에 1세씩 상향하는 제안을 했다. 노인 부양률을 줄이고 연금수급 개시의 연장 등 실효적인 은퇴연령을 늘리면서 사회적 충격을 흡수하자는 제안이다. 노령화가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만 해결을 위한 실제적 접근법이 서둘러 만들어져야 한다./우정구(논설위원)

2022-09-18

포항·포스코, 지금처럼 손잡고 위기 극복을

포스코지주사(포스코홀딩스) 서울설립 문제로 갈등을 빚어왔던 포항시와 포스코가 태풍 ‘힌남노’ 피해복구 과정에서 화해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이강덕 포항시장과 김학동 포스코 부회장은 지난 15일 포항제철소에서 만나 태풍피해 대책을 논의한 뒤, 포스코는 제철소 울타리에 차수벽을 설치하고, 포항시는 냉천 범람을 막기 위한 항구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 등에 합의했다. 그동안 포스코홀딩스 주소이전문제 등으로 포스코와 소원한 관계를 유지해왔던 이 시장이 이번에 포항제철소를 방문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태풍피해 이후 산업부 장관 방문에 동행한 적은 있지만, 양측의 현안협의를 위해 직접 포항제철소를 찾은 것은 아마 처음인 것 같다. 이날 이 시장은 “포항제철소의 빠른 조업정상화를 위해 시 차원에서 모든 것을 지원하겠다”고 강조하면서, “국가기간산업인 포항제철소가 침수로 조업을 중단했다는 사실에 시정을 책임지고 있는 당사자로서 매우 착잡하다”고 밝혔다.이 시장이 언급한 것처럼, 포항제철소는 국가기간산업이다. 이번 재해로 포항제철소 조업이 중단되자 철강자재를 쓰는 자동차·조선·기계·건설분야 주요 대기업들이 모두 비상사태에 접어든 것이 잘 대변해주고 있다. 포항시민들도 태풍피해를 당하면서 포항제철소가 지역경제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을 다시 한번 절감했을 것이다. 이 시장이 수해복구과정에서 과거의 섭섭했던 감정을 털어내고 포스코와 동반자 관계를 구축한 것은 포항은 물론, 국가 전체적으로도 바람직하다.포스코도 이번 재해복구과정에서 포항시라는 울타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태풍피해가 완전히 복구되면, 그동안 지방자치단체와의 갈등관계를 주도적으로 풀 필요가 있다. ‘상생협력 TF’에서 논의되고 있는 현안들도 양측이 신뢰를 기반으로 허심탄회하게 풀어나가면 절충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이강덕 포항시장과 최정우 포스코 회장이 직접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재해복구도 최대한 앞당길 수 있고, 상생협력과 같은 현안이 의외로 쉽게 해결될 수 있다.

2022-09-18

쌀값 폭락에 무너지는 농심, 정부 대책 필요

전례 없는 쌀값 폭락으로 농민들이 신음하고 있다. 공급 과잉이 원인이다. 지난해 미곡생산량(백미·92.9%)은 388만1천601t으로 전년보다 10.7%(37만5천22t) 증가하며 2015년 이후 6년 만에 증가세로 돌아섰다. 반면 1인당 쌀 소비량은 해마다 급감하고 있다. 서구식 식습관과 육류 소비 증가 등 때문이다. 지난해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56.9㎏이다. 2000년 93.9㎏에서 21년 만에 37㎏(39.4%)이나 줄었다. 이에 이철우 경북도지사와 김영록 전남도지사는 전국 쌀 주산지 8개 광역자치단체 도지사들을 대표해 지난 15일 국회에서 ‘쌀값 안정 대책 마련 촉구’ 공동성명을 발표했다.비료와 농자재 가격은 연일 오르고 있으나 쌀값은 폭락, 농업인들이 망연자실하고 있다고 했다.통계청에 따르면, 산지 쌀값은 세 차례 시장격리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10월 22만7천212원(80kg)을 기록한 이후 지속해서 하락해 2018년 이후 처음으로 17만 원 선이 무너지면서 지난 5일 기준 16만4천740원(80kg)을 기록했다. 8개 시도지사는 성명서를 통해 “생산비 상승과 쌀값 폭락으로 농업인들이 이중고를 겪고 있다. 쌀농사가 흔들리면 농업인들의 삶은 물론 대한민국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대안까지 제시했다. 식량안보 강화와 해외원조 확대를 위해 수입쌀 포함 80만t인 공공비축 물량을 순수 국내산 쌀 100만t으로 확대하고 2022년산 햅쌀 출하 전 2021년산 벼 재고 물량을 전량 매입할 것을 주문했다. 2022년산 공급과잉 예측 시 선제적 시장격리와 논 타작물 재배사업 국고지원 부활 등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쌀은 우리 농업의 근간이다. 때맞춰 국회 농축수산위 법안소위에서 쌀 초과생산량을 자동으로 정부가 매입하는 내용의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법적 뒷받침까지 마련된 셈이다. 이제 정부가 빨리 나서야 한다. 지자체의 힘만으로는 쌀값 안정대책을 마련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정부는 햅쌀이 나오기 전에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2022-09-18

세대간 교류를 위해

이정희 위덕대 교수·일본언어문화학과 옛날이야기를 보면 “옛날 옛날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았습니다”로 시작되는 이야기가 많이 있다. 아마 이것은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손주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화자가 할아버지나 할머니일 가능성이 크다.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손주들을 무릎 위에 앉혀놓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정겹다. 그만큼 할아버지나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교류가 빈번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어른들이 “요즘 애들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또한, “내가 어렸을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내가 자랐을 때와 달라도 너무 달라”라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뒤따라 나온다.게다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요즘 아이들은 대면 커뮤니케이션이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또래간의 대면 커뮤니케이션도 서툴고, 세대간 커뮤니케이션은 더더욱 힘들어 한다. 굳이 집 밖에서 인간관계를 맺지 않아도 집안에서 비대면 교류가 가능해 지게 되었다. 상대방의 눈을 보면서 이야기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서로 이야기 하면서 미묘한 감정 변화나 표정의 변화 등에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 모르는 사람들과도 익명으로 얼마든지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고, 의견이 맞지 않는 다거나 가치관이 다를 경우에는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으면 되고, 상대가 싫어지면 관계를 끊으면 된다. 이런 인간관계가 자연스럽게 성립된 것이다.게다가 요즘 아이들은 같은 또래, 같은 나이의 동급생끼리만 접할 기회가 대부분이고, 다른 연령층과의 교류는 놀라울 정도로 적다. 예를 들어 노인들과 중고등학생들과의 교류, 또는 노인들과 초등학생, 유치원생들과의 교류는 생각보다 훨씬 적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같은 나이의 동급생끼리의 관계 속에서 성장해 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세대간의 관계가 결여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러한 사회 환경 속에서 의도적으로 세대간 교류를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미 미국을 비롯해 유럽에서는 세대간 교류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활성화 되어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세대간 교류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도 있지만, 너무 부족하다.먼저, 곳곳에 있는 경로당과 노인정 등은 명칭을 바꾸고 세대간 교류의 장으로 마련했으면 좋겠다. 유치원에서부터 초등학교, 중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과 교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활성화 되어야 하겠다. 여기에 대학교육에서 세대간 교류를 위한 새로운 강의가 개설되면 좋겠다.세대간 교류가 활발해지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면,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해소하고, 해결하거나, 예방하여 살기 좋은 건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2022-09-18

족집게 코칭이 필요해

유영희 작가 장윤정은 자타가 인정하는 트롯 신이다. 본인이 노래를 잘할 뿐만 아니라 남의 노래를 잘 들어주고 조언도 잘해준다. ‘장윤정의 도장깨기’라는 프로그램에서 장윤정은 노래를 잘하고 싶은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레슨해준다. 프로그램 이름을 가만히 보니, 처음에는 ‘원포인트 레슨’이었다가 ‘족집게 코칭’으로 바뀐 것 같은데, 변경된 이름이 훨씬 좋다.출연자들이 어느 정도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장윤정이 레슨 신청자의 노래 부르는 습관 한두 가지를 귀신같이 포착해서 교정해주면 노래가 완전히 달라진다. 전 국민 가수 만들기라는 부제가 왜 달려 있을까 생각해보니, 그런 고급 레슨을 받을 수 없는 일반인들도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노래를 잘하게 될 수 있게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나 역시 한때 노래를 잘하고 싶어서 보컬 레슨을 받으러 다니기도 했고, 혼자 노래방에 가서 몇 시간씩 노래를 불렀던 경험이 있는 터라 흥미 있게 영상을 보면서 장윤정 레슨의 요점을 이해하게 되었다.레슨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노래와 상관없는 나의 습관이나 성격을 드러내지 말고 노래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몸짓과 목소리와 표정을 노래 가사에 일치시키고, 지나치게 멋을 부리지 말라는 등 신청자에게 필요한 조언을 해준다. 그런 조언을 듣는 신청자의 표정은 깨달음에서 오는 환희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영상 몇 개를 보니 그런 습관이 생기는 배경에는 노래 부르는 이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런 예 중에 가장 인상적인 출연자는 탈북 가수 노수현이다. 장윤정은 노수현에게 떠나는 임을 원망하는 가사를 자기 탓하는 방식으로 부른다면서 원망할 때는 확실하게 원망해야 한다고 하자 노수현이 갑자기 눈물을 흘린다. 구체적인 말은 안 했지만 아마도 누군가 자신을 떠났어도 자기 탓만 했던 경험이 있었던 듯하다.이렇게 가수는 다른 사람의 노래를 들으며 그의 습관과 마음을 보지만, 글쓰기 강의를 하는 사람은 글을 보면서 그 사람의 마음을 본다. K대 강의에서 어느 학생이 글마다 편차가 심하고 분노가 많이 느껴져 불러서 물어보니, 자신은 키보드 워리어라고 하면서 인터넷에서 공격적인 글로 문제를 많이 일으킨다고 한다.성인 글쓰기 반에서는 어느 수강생이 친구와 통화하는 장면을 쓴 것을 읽고 그때 마음이 어디에 있었느냐고 물으니, 자기 자랑만 하는 친구가 달갑지 않아서 빨래를 널며 통화했던 것 같다고 한다. 이렇게 글을 보면 글을 쓴 사람의 마음이 보이고 글을 지도할 방향을 알게 된다.그런데 노래나 글은 짧아서 이렇게 코치도 할 수 있고 귀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인생은 그럴 수 없다. 특이한 습관과 결핍으로 가득 찬 우리 인생도 누군가 한눈에 알아보고 코칭해주면 좋으련만, 인생은 길기도 길어서 코칭해 주기도 쉽지 않고 자기 삶을 볼 수 없으니 고치기도 어렵다. 그러나 노래든 글이든 자신을 자꾸 표현하고 코칭을 받다 보면 몰랐던 나의 모습을 알게 되고 그러면 삶도 조금은 달라질 수 있다. 용기 내어 나를 표현해보자.

2022-09-18

어떤, 생태행위-살금살금

이원만 맏뫼골놀이마당 한터울 대표 포항의 대안공간 ‘space 298’에서 ‘어떤, 생태행위’라는 콘셉트로 2022년 하반기 릴레이 전시를 하고 있다.첫 전시는 판화작가 이윤엽의 ‘둥질(nesting)’이다. 지난 8월 30일부터 9월 7일까지 진행된 이번 전시에서는 판화, 드로잉, 회화, 오브제 설치, 공동체 미술 등 다채널에서 활동하는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이윤엽의 다양하고 다채로운 면모를 담담하게 조명하였다.경기 수원 원천(현재 광교신도시), 화성 목리 창작촌(현재 동탄 신도시), 평택 대추리(현재 캠프 험프리스), 그리고 현재 안성 남풍리에 정착하기까지 지역의 변화와 삶의 행복과 지속의 문제는 이윤엽 작업에서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윤엽은 그가 만난 사람들, 이웃이었던 사람들, 그들의 힘, 같이 먹은 밥, 농사짓는 땅, 같이 겪어 낸 계절을 그린다.이번 전시 안내책자에 둥질은 ‘생명체가 환경에 적응하여 공동체를 꾸리며 진화해가는 생태학적 관점에서의 삶의 과정과 양상을 일컫는다’고 한다. 진화를 한다는 말에 ‘어떻게?’라는 의문이 생겨 오래 전시를 둘러보고 책자를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그러다가 나는 ‘왜가리’란 작품에 붙인 작가의 글에 꽂혔다. 아이들에게 자신의 ‘진화’이야기를 들려주는 삼촌을 만났기 때문이다. 망치자루가 녹아내리는 목판에 ‘일자리가 녹고 있다’는 제목을 붙이고서는 ‘그게, 포스트 휴먼이에요?’라는 글을 보태며 미래의 인간에 대한 담론에 못질을 하더니 ‘왜가리’에서는 ‘인간이 새와 이렇게 한통속일 수 있다’며 자신이 생각하는 진화 된 인간, 포스트 휴먼을 퍼포먼스로 보여준다.상세히 설명하면 이렇다. 작가가 우유를 사러 시내에 가다보니 논에 왜가리가 가만히 서 있는 걸 보았는데 미꾸라지나 개구리를 기다리려니 하고 지나쳤는데 올 때보니 그대로여서 뭔가 수상쩍었단다.가만히 보니 다리에 줄이 감겨서 날아가지 못하고 있더란다. 그래서 풀어주려고 다가갔는데 왜가리가 웬 짐승이 자신을 공격하는 줄 알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 근처에 가지를 못했다. ‘어떻게 할까’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왜가리처럼 가만히 서있기로 했단다. 한걸음 다가가서는 또 가만히 서있고, 또 한걸음 다가서서는 서고 그렇게 살금살금 조심조심 다가가니 왜가리가 공격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서 줄을 풀어줄 수 있었고 왜가리는 푸드덕거리며 날아갔다는 이야기다.전시를 기획한 이병희 space 298 디렉터가 말하는 이윤엽 작가의 작업특징은 ‘리더미컬한 자율’이라고 한다. 아, 맞네. 살금살금, 조심조심. 얼마나 리더미칼한가! 그리고 누가 시킨 일도 아니고 자신이 우연히 발견한 일에 가담한 것 아닌가!리드미칼한 자율적인 움직임으로 그는 왜가리와도 한통속인 인간으로 진화해 인간들이 버린 줄에 구속된 왜가리의 줄을 풀어 주었으니 ‘어떤 생태행위’가 아닌가! 심지어 ‘고마워요’라는 왜가리의 인사말까지 들었다고 생각한다니 얼마나 행복했을까!이렇게 잘 이해가 되는 전시라니! 나는 집으로 돌아와 그가 운영한다는 유튜브에서 띵까 띵까 춤추며 작업시작 준비운동을 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아하 인간의 진화가 쉽네’라고 생각했다.지구가 불타고 있다. 기후위기가 아니라 지구가열이다. 가뭄을 보라, 폭염을 보라, 폭우를 보라. 산불을 보라, 태풍을 보라. 고래 뱃속을 보라. 바다가 화가 났다. 인간이 욕망을 줄이고 ‘공생하는 인간 호모심비우스’로 진화하지 않으면 2050 탄소중립을 이뤄내지 못하면 여섯 번째 대멸종, 6도의 멸종이 올 것이다는 온갖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바닷물 수위가 올라가니 바닷가나 지하, 지상 1층의 부동산은 구입하지 말아야하나? 이 암울한 지구에 내가 내 자식들을 살게 할 수는 없으니 결혼과 출산은 고려해 봐야하나? 그래도 이 정도에서 멈추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야. 그렇지 않다면 정말 큰 일이잖아’우리가 답답해하고 있는 그런 지점에 이윤엽 작가는 ‘뭐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아’라며 시큰둥하니 우리 앞에 왜가리판화를 내밀어 보여준다. 고도성장 이후의 우리의 삶이 우리인간이 진화해 가야할 하나의 방향을 본 것 같아 반갑고 고맙다.작고하신 이어령 선생은 마지막 노트에 지금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눈물 한 방울’이라고 쓰셨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르는 타인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 인간의 따스한 체온이 남아있는 눈물. 인간은 이미 피의 논리, 땀의 논리를 가지고는 생존해갈 수 없는 시대를 맞이했다”며 눈물은 ‘희망의 씨앗’이라고 하셨다.눈물 한 방울로 뜨거워진 지구를 식힐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 그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인간은 살금살금 다가가서 고래의 지느러미에 걸린 그물을 풀어주고 바다사자 목에 걸린 줄을 풀어줄 수 있는 인간으로 진화할 것이다. 살금살금, 찔끔찔끔, 우리도 그렇게 매일 조금씩 진화했으면 좋겠다.

2022-09-18

‘신재생에너지 축소’는 기업경쟁력 포기

위현복(사)한국혁신연구원 이사장 지난 8월 30일 윤석열 정부의 전력수급기본계획 초안이 발표되었다. 전력수급기본계획은 2년마다 수립되는데 이번에 발표된 초안은 전략환경영향평가, 관계 부처 협의 등을 거친 뒤 올 연말께 확정될 예정이다.전력수급기본계획 초안을 요약하면, ‘원전 확대, 신재생에너지 축소’라고 할 수 있다. 이번 기본계획은 지난해 문재인 정부 시절 내놓은 NDC(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완전히 뒤집은 것으로 평가된다. 2021년 9월 30일 발표한 NDC 상향안에서는 신재생에너지가 30.2%로 가장 높게 설정됐고, 그다음 원전 23.9%, 석탄 21.8% 순이었다. 그런데 8월 30일 발표된 기본계획 초안에서는 원전이 32.8%로 8.9%포인트 늘어났고, 신재생에너지는 8.7%포인트 줄어 21.5%가 되었다.신재생에너지가 대폭 감축된 것은 한국 지형 특성상 태양광·풍력설비 등을 대폭 늘리기 어려운 데다, 원전 대비 불안정한 비용 문제, 발전 설비 인근 주민들의 거부감 등이 고려됐다고 한다. 신재생에너지 보급 속도와 송배전망 건설비 등 현실적인 어려움도 감안된 것으로 알려졌다.독일을 예로 들어서 국제적인 신재생에너지 비중 증가 속도를 살펴보자. 독일은 1990년 신재생에너지 비중이 1.0%다. 2000년에 들면서 6.6%이던 신재생에너지 비중이 2020년에는 44.9%까지 올라갔다. 독일의 2030년 신재생에너지 목표는 65%이고 2050년에 80%까지 늘린다는 계획이다. 영국의 경우 신재생에너지 비중이 2000년 초 2.7%에서 2020년 42.3%까지 증가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2000년 1.5%에서 2020년 6.4%로 거의 제자리걸음 수준이다. 독일은 매년 250억 유로 즉, 34조 원에 가까운 자금을 투입하여 신재생에너지를 확대하고 있다. 현재 선진국과 우리나라와 신재생에너지 격차는 현재 무려 20년에 달한다.유럽 여러 국가가 신재생에너지 공급에 집중하는 이유는 RE100(신재생에너지 100% 사용을 약속하는 글로벌 캠페인) 때문이다. RE100은 각 정부가 주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적 기업들이 국제단체와 함께 2050년까지 기업에서 사용하는 전기 100%를 신재생에너지로 사용하고 거래 기업도 100% 신재생에너지를 쓰도록 하겠다는 자발적인 협약이다.벌써 30여 개 이상의 글로벌 기업들이 RE100을 달성했고, 주요 글로벌 기업 대부분이 2027년까지 RE100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EU에서는 2026년부터 CBAM(탄소국경조정제도)을 실시하여 EU로 수출하는 국가에 탄소국경세를 징수하겠다고 선언했으며, 미국도 곧 이 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법안을 준비 중이다.우리나라는 무역이 GDP에서 60%나 차지할 정도로 해외교역을 통해 먹고사는 나라다. 따라서 RE100이든, CBAM이든,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될 수 있는 나라다. 지난해 신재생에너지 비율이 22% 넘어선 미국조차 향후 하나의 완결된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468조 원을 투입하고 있다. 이 돈은 태양광·풍력에 대한 투자, 새로운 송·배전망 구축, 전기 충전소 신규 건설, 전기자동차 보조금 지원 등에 소요되는 자금이다.이런 국제적인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가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전 정부에 비해 오히려 축소하는 것은 충격적이다. 요즘 산업현장에 가보면 대부분 기업들이 RE100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인데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대책을 세우는 곳은 거의 없다. EU에서는 2026년부터 발효하기로 한 CBAM을 2025년으로 앞당기려는 움직임이 있고, 미국도 곧 시행할 태세여서 조만간 우리 국가 경제가 난관에 봉착할 수 있는데도 정부가 신재생에너지 확대를 외면하는 것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다.우리나라 지역 특성이 신재생에너지 축소 이유로 거론된다고 하는데, 신재생에너지가 풍부한 독일의 경우 국토의 대부분이 위도 50° 이상, 우리나라는 위도 38° 이하에 위치해 있어 햇볕 양이 우리나라가 훨씬 풍부하다. 우리나라가 하루 평균 햇볕을 쬘 수 있는 시간은 약 3.9시간이고, 독일은 약 2.8시간에 불과하다.풍력에너지도 한국은 3면이 바다로 형성돼 있어 독일에 비해 비교적 풍부한 나라이다. 부지 또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으로 표현되는 오랜 농경 정책을 유지하다 보니, 식량안보라는 이름으로 농지에 태양광을 쉽게 설치할 수 없도록 돼 있어 신재생에너지를 설치할 부지가 부족할 뿐이다.한국환경연구원 발표에 따르면 주요국이 신재생에너지를 25%씩 증가시키는데 17년~30년 걸린 점을 감안한다면, 지금부터 우리나라는 선진국의 2배 내지 3배의 속도로 신재생에너지를 공급해야 겨우 따라잡을 수 있다고 한다.이제 신재생에너지 시대를 맞아 자원 빈국인 우리가 ‘신재생에너지 자립’만큼은 반드시 이뤄야 한다. ‘신재생에너지 자립’을 위한 충분한 햇볕과 바람, 토지가 있다. 선진국이면서 제조업 강국인 독일을 모델로 해서 최단기간 내에 ‘신재생에너지 자립’을 달성하는 것이 우리나라가 국제무역을 통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윤석열 정부는 신재생에너지 축소는 기후 위기 대응과 기업의 수출 경쟁력까지 동시에 포기하는 정책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2022-09-18

태양광 복마전

우정구 논설위원 복마전(伏魔殿)은 마귀가 숨어 있는 전각으로 나쁜 일이나 음모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악의 근거지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소설 수호지(水滸志)에 등장하는 표현이다.책에는 왕의 심부름으로 용호산에 은거하고 있는 장진인을 만나러 간 홍신이 그곳에서 복마지전을 발견하고 그 속에 놓인 석비(石碑)를 들추니 108명의 마왕이 뛰쳐나왔다는 얘기로 꾸며져 있다. 100명이 넘는 마왕이 숨어 있었던 곳이니 악의 굴이라는 의미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부와 권력이 얽혀있는 듯하면서 사건의 전모가 잘 드러나지 않는 우리 사회의 각종 비리 사건들을 언론은 복마전에 곧잘 비유해 보도한다. 부산 엘시티 의혹이나 대장동 사건 등도 복마전으로 불렸다.문재인 정부가 탈원전을 선언하면서 친환경 에너지사업으로 강력하게 밀어붙인 태양광 사업이 복마전이 됐다는 소식이다. 정부 합동부패예방추진단이 전국 12개 지자체를 대상으로 태양광과 관련한 정부 사업비 운영실태를 표본 조사했더니 2천600억원이 넘는 돈이 부당하게 집행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한다.한덕수 총리가 이를 두고 “태양광 사업에 나랏돈이 밑 빠진 독에 물붓기처럼 새고 있다”고 개탄하듯 언급해 사태가 매우 심각함을 짐작케 한다. 더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이번에도 정부의 눈먼 돈이 얼마나 새어 나갔는지 궁금하다. 샘플 조사에서 드러난 비리가 빙산의 일각일 거라는 관측이 나오니 정부 사업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도덕적 해이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특히 탈원전의 대안으로 문재인 정권이 의미심장하게 추진한 태양광사업이 위법과 비리로 얼룩졌으니 사업의 신뢰 추락은 물론 전 정권의 친환경 정책에도 누를 남길 수밖에 없다./우정구(논설위원)

2022-09-15

복수의 정치학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한국의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데는 여야간 정치보복이 반복되기 때문이란 주장이 있다. 정치보복이란 말이 처음 나온 것은 우리 정치사에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해방이후 대통령제를 선택한 이후 정권을 잡은 대통령들이 나름대로 정치적 업적을 쌓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집권 후 자신의 업적을 쌓는 데 몰두했다.예를 들면 좌우 대립의 혼돈 속에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한·미 동맹을 이끌어낸 이승만,‘한강의 기적’으로 경제를 일으킨 박정희, 탈냉전의 북방정책으로 한국 외교의 르네상스와 남북 화해의 시대를 연 노태우, 독재정권과 목숨 걸고 싸워 민주화를 쟁취하고 금융실명제와 하나회 척결을 단행한 김영삼, 외환위기로 어려움에 처한 나라를 살리고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을 한 김대중이 있었다.물론 5·18 광주사태와 군부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정권을 쿠데타 동지인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물려줬다가 감옥살이를 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예외다. 이들은 각자의 시대가 던져준 어려운 숙제들을 피하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과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된다. 정치보복 얘기가 나온 것은 바로 그 이후의 대통령부터다.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수사를 받던 중 극단적 선택을 했고, 이명박 전 대통령과 탄핵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구속됐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집권기간 동안 적폐청산으로 포장된 ‘분열의 정치’를 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그래서 정치권에서는 보수·진보의 갈등도 모자라 친이·친박, 친노·반노, 친문·반문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인물 중심의 프레임이 난무했다. 결국 ‘국민통합’은 점점 더 이루기 힘든 과제가 됐다. 국가원수가 정치적 반대세력을 정죄하는 데 온힘을 쏟으며 포용의 자세를 버린 결과다.윤 대통령의 위기 요인은 분명하다. 부인의 허위 경력 의혹과 장모의 비리 혐의 등에 대한 뭉개기다.‘공정과 상식’을 모토로 집권한 그가 자신 주변의 허물을 모른체 하다보니 집권 후 고정 지지층까지 흔들리며 지지율이 떨어진 것이다.끝내는 야당이 ‘김건희특검법’으로 공세에 나섰다. 이에 맞서는 방법은 정공법이 최선이다. 부인의 과실이 있다면 사과하면 그뿐이고, 장모의 비리가 있다면 그에 상응한 처벌을 받으면 된다. 그런 연후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에 대한 수사 역시 똑같이 공정하게 처리하면 된다. 사실 이 대표에 대한 사법리스크는 야당 측도 짐작하는 바다. 대장동 개발 비리 의혹의 핵심 인물들이 공포영화의 주인공처럼 잇따라 목숨을 끊고 있는 것이 국민적 의혹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경찰과 검찰의 수사를 피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런데도 야당은 이 대표에 대한 수사 자체를 ‘정치보복’프레임을 걸며 진흙탕 싸움으로 만들려한다.보수와 진보정권이 번갈아 집권하며 권력의 부패를 견제하는 민주주의 작동원리는 존중돼야 한다. 이것이 정치보복이란 독소로 부패되지 않아야 한다. 이제는 여야 정치권이 내면의 양심과 역사의 엄중한 요구에 귀를 열고, 응답해야 할 때다.

2022-09-15

정부는 포항제철소 정상화에 총력 쏟아라

정부와 경북도가 태풍 ‘힌남노’로 심각한 피해를 본 포스코 포항제철소와 철강산업단지 기업들을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14일 “철강산업 피해 관련 수해 현장 복구를 총력 지원하고, 수요산업 및 수출입으로의 파급을 최소화하기 위해 ‘철강 수해복구 및 수급점검 TF’를 운영한다”고 밝혔다. 산업부는 이날 제1차 TF 회의를 열어 피해복구현황과 애로사항, 자동차·조선산업의 철강재 수요현황 및 전망에 대한 의견을 듣고, 포항지역 철강생산이 정상화될 때까지 TF를 계속 가동하기로 했다. 정부는 곧 ‘철강수급 조사단’을 구성해 정확한 피해상황 파악, 현장 복구지원 및 철강 수급영향에 대한 전문가 진단을 시행한다. 회의에 참석한 장영진 산업부 1차관은 “포항제철소 2열연공장의 경우 재가동까지 최대 6개월 걸릴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경북도도 이날 포항철강산업단지에서 이철우 도지사 주재로 ‘포항철강공단 정상화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열었다. 회의에 참석한 기업들은 “모터, 기계 등 장비·설비 침수피해가 커 장비 세척, 정비 전문 인력을 지원해달라”고 건의하면서, 항구적인 수해재발방지 대책을 요구했다. 경북도는 “신속한 피해복구를 위해 주 52시간 연장근로 신청 시 고용노동청에서 조기에 인가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현재 포항제철소와 포항철강산업단지의 피해복구가 지연되며 국내 산업계 전체가 비상이 걸린 상태다. 통상 산업현장에선 한 달치 재고만 확보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복구가 빨리 이뤄지지 않으면 자동차, 조선, 건설 등 산업 전반에 위기가 닥치게 된다. 산업부 조사단이 포항제철소에서 큰 피해가 발생한 것에 대해 책임여부를 따지겠다는 소리도 들리는데, 우선은 조업정상화를 위해 총력을 쏟는 것이 순서에 맞다. 철강재는 ‘산업의 쌀’이라고 불려왔을 정도로 국내 대부분 산업의 핵심 자재다. 산업부 TF와 조사단, 그리고 경북도는 포스코와 힘을 합쳐 철강재 생산 정상화가 하루라도 빨리 이뤄질 수 있도록 모든 복구조치를 마련하길 바란다.

2022-09-15

반도체 산업 육성에 지방이 소외되선 안 된다

지난 14일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의힘 반도체산업경쟁력 강화특별위원회 초청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 참석한 양금희 의원(대구 북갑)과 김영식 의원(구미을) 등 지역의원들은 반도체산업 육성과 관련해 지역의 현안을 건의했다.양 의원은 지역균형발전 차원에서 지방대학에서 반도체 인력을 양성할 수 있도록 법적 장치 마련 등 정부의 관심을 요청했으며, 김 의원은 구미 국가산업단지 5단지를 반도체 특화단지로 지정해 줄 것을 건의했다. 또 조명희 의원(비례대표)은 반도체 인력양성을 위해 지방거점대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고 한다.반도체 산업 육성은 새 정부의 핵심 경제전략이다. 정부는 10년간 반도체 인력을 15만명 양성하고, 5년간 340조원의 기업투자를 이끌어 반도체 초강대국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이다. 이날 오찬에서 윤 대통령도 “반도체는 4차산업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며 우리의 생사가 걸린 문제”라고 강조했다.미국을 비롯한 주요국도 반도체 산업시장 선점에 불꽃튀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국내서도 정부 반도체 산업 육성계획에 맞춰 지방도시마다 관련산업 유치에 혈안이다. 그러나 정작 정부의 전략은 수도권 규제완화 등으로 이어져 지방의 도시는 소외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정부가 수도권 비수도권 구분없이 반도체 학과 정원을 확대했다고 하지만 학생들의 수도권 선호를 감안하면 지방대학은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될 수 있는 것이다.특히 정부의 대규모 투자전략이 수도권에 집중되면서 수도권과 비수도권 격차가 지금보다 훨씬 더 심화될 수 있다. 윤 정부가 국가 시책으로 지향하는 국가균형발전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는 것이다.경북 구미 국가산업단지에는 SK실트론, LG이노텍 등 123개의 반도체 관련기업이 있으나 반도체특화단지 지정에 소외돼 있다. 구미시와 경북도가 특화단지 지정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지만 정부의 도움없이는 힘들다. 반도체특화단지로 지정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수도권 집중화에 밀리고 있는 것이 지방의 현실이다.반도체 산업의 지방도시 확대는 지방의 생사가 걸린 문제라는 정부의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2022-09-15

이재명 구하기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라이언 일병 구하기’란 영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스필버그 감독의 전쟁영화다. 라이언 일병은 4형제 중 막내인데, 위로 세 형들이 모두 참전을 했다가 전사했다. 이를 알게 된 육군참모총장이 그 막내아들만이라도 어머니의 품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행방을 알 수 없는 라이언 일병을 구출해오라는 특명을 내린다. 그 임무를 맡은 밀러 대위와 7명의 대원들이 벌이는 활약상이 영화의 줄거리다. 마침내 라이언 일병을 구출하지만, 그 작전을 수행한 대원들은 밀러 대위를 포함해 여섯 명이 죽고 두 명만 살아남는다. 이 영화는 웅장한 규모와 실감나는 전투장면이 압권이지만, 한 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여섯 명이 희생되었다는 측면에선 생각의 여지가 많다.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이 이재명 대표를 구하기 위해 총력전을 펴고 있다. 물론 위의 영화에 나오는 라이언 일병과 이재명 대표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네 아들이 모두 전쟁에 나가서 세 아들이 죽은 노모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정신에 대한 경의와도 ‘이재명 구하기’는 거리가 멀다. 구태여 공통점을 찾자면 그 과정에 우여곡절이 많다는 걸 들 수가 있겠다.민주당의 ‘이재명 구하기’는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여당시절부터 수사팀을 해체하고 정권에 추종하는 검사들로 교체하는가 하면 검찰총장의 옷을 벗게 하고, 꼼수와 편법을 써서 검찰 수사권을 완전 박탈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래놓고 이재명을 대선후보로 밀었다가 낙선을 하자 대신 국회의원 배지를 달아주고 당 대표를 시키더니 당헌까지 개정하는 등 3중 4중으로 ‘방탄조끼’를 입혔다. 그래도 검경의 수사가 계속되자 ‘김건희 특검법’을 들고 나와 맞불을 놓고, 심지어는 법무장관과 대통령의 탄핵을 거론하기도 했다. 그 일련의 과정이 하도 기상천외해서 대한민국 헌정사에 길이 남을 일이 아닐 수 없다.라이언 일병은 낙하산을 타고 적진에 뛰어들었지만 이재명 대표는 온갖 비리의 의혹에 둘러싸여 있다. 허위사실공표(선거법위반)로 기소된 것을 시작으로 변호사비 대납 의혹, 대장동과 백현동 개발특혜 의혹, 성남 FC 의혹 등 지금 수사 중인 사건만도 십여 개나 된다. 그야말로 항우장사도 어쩔 수 없는 사면초가여서 민주당이 이재명 대표를 무사히(?) 구출할 가망은 거의 없어 보인다. 영화에선 라이언 일병을 구출하려다가 여섯 명의 대원이 죽었지만, 겹겹으로 둘러싼 안전장치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끝내 이재명도 구하지 못한 채 엄청난 희생만 치르게 될 것이란 얘기다. 오로지 진영논리에 눈이 멀어 애당초 부당하고 승산도 없는 일에 올인 하다가 명분도 실리도 잃고 치명상만 입게 될 것이 빤히 보인다.밀러 대위는 죽으면서 라이언 일병에게 가치 있게 살기를 바란다는 유언을 했다. 그래야 자신과 대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을 것이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력투쟁을 하고서도 이재명을 구하지 못한 민주당에게는 과연 무엇이 남을 것인가. 이재명은 이제라도 국회의원직과 당대표직을 내려놓고 성실하게 검찰의 수사에 임하는 것이 그나마 당과 자신을 위한 최선이 될 것이다.

2022-09-15

인생도 운전처럼

윤영대 수필가 차를 운전하여오면서 인간의 삶도 운전과 같음을 알았다. 사고 없는 운전을 위해서는 운전 기술도 있어야 하지만 신호와 차선을 잘 따라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듯이 탈 없이 인생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도 지켜야 할 법과 가야 할 길을 잘 알아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가끔은 뜻하지 않는 장애물도 만나고 위반해 보고 싶은 유혹도 있을 것이며 자신도 모르게 교통위반 딱지가 날아오기도 한다.운전의 기본은 가고 서는 것이다. 출발과 정지의 기술뿐만 아니라 가야 할 때와 서야 할 때를 잘 판단해야 하는데, 그 가고 서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신호등이며, 길이 교차하거나 갈라지는 곳, 또 주의해야만 하는 곳에 설치되어 있다. 우리의 인생에도 무수한 신호등이 깜빡거린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신호등일 뿐이며, 모르고 지나치기 쉽고 지나고 나서 알았을 때는 이미 늦은 후이다. 빨간 신호가 들어오면 괜히 짜증 나고 푸른 신호에 맞게 잘 통과하고 나면 기분이 좋듯, 우리 삶도 앞이 막히거나 잘 풀리지 않으면 불안해지고 일이 잘되어 나가면 몸도 마음도 즐겁고 가벼워진다.빨간불은 정지 신호다. 그러나 좀 있으면 파란불이 켜진다. 그런데 그 몇 초간을 묵묵히 잘 기다리는 사람과 사뭇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성격 탓만은 아닐 것이다. 파란불은 계속 달려도 좋다는 신호다. 그러나 언제 빨간 신호로 바뀔지 모르는 것에 대비하여 브레이크에 발을 얹는 습관을 갖는 것이 좋겠다. 우리는 흔히 푸른 신호를 보고 달려왔을 때, 가속해 통과하려고 하기 쉬운데 자칫 신호 위반과 함께 사고의 위험이 따르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인생도 그렇다. 앞날이 약속되고 순탄하게 승승장구할 때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주위를 둘러보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안하무인으로 달려나가다 보면 자기 페이스를 잃고 큰 실패를 겪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신호는 빨간불보다는 파란불일 때 더 위험하다. 푸른 신호에서 브레이크를 밟아가는 사람과 가속페달을 밟는 사람, 이 두 경우 항상 사고는 후자의 경우에 많다는 사실이다. 나는 한적한 자동차 전용도로를 달릴 때 빨간 신호가 보이면 속도를 줄이며 다가가서 정지하는 일이 없이 다음 푸른 신호에 맞추어 통과하는 시도를 한다. 빨리 가서 기다리는 것보다는 서서히 가다가 서지 않고 통과하는 것이 쾌감도 있고 서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우리의 인생에도 신나게 달리는 푸른 신호만 켜지는 것이 아니다. 빨간 신호가 들어오면 잠깐 서서 허리도 펴고 눈을 들어 앞을 보는 여유를 가지자. 명절날 정체된 고속도로를 달려보면 버스 전용차선으로 용감하게 질주하는 규정 위반의 차들을 본다. 바쁜데도 차선을 지켜 가는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규정을 지키며 천천히 밀려가는 많은 차량을 볼 때 동행의 평온함을 느낀다.푸른 신호 앞에서 브레이크를 조금씩 밟아가는 지혜와 밀리는 차량의 물결을 따라 천천히 달리며 멀리 보는 여유를 운전하면서 깨달았다. 남은 내 인생의 운전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2022-09-15

삶의 종점을 내려다보며

정미영 수필가 비바람이 하릴없이 들이치는 날이다. 창밖을 내려다보니 국화원이 소슬히 떨고 있다. 오늘 떠나는 망자의 삶에도 비바람이 많았는지, 국화원이 슬픔을 응축한 채 웅크리고 있다.작년, 신축 아파트 담장 너머에 이층 건물이 들어섰다. 세련된 외벽에 국화꽃 한 송이와 국화원이라는 글자만 간판으로 걸려있어 몇몇 사람들은 미술관인줄 착각하지만, 이곳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장례식장이다. 아파트로 둘러싸인 도심 한가운데에 존재와 부재의 형체가 장례를 치르는 동안 서로 껴안고 이별하는 공간이다.나는 조문객의 움직임을 가만히 응시하며 가늠해 본다. 가까운 이와의 별리가 주는 슬픔의 깊이를. 가슴을 쥐어뜯으며 흐느끼는 사람, 땅을 치며 통곡하는 사람, 울음을 삼킨 채 눈물을 훔치는 사람 등 죽음 앞에서는 같은 상실의 무게를 지닌 것 같아도, 톺아보면 모두가 제각각의 농도로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공무원이셨던 친정아버지는 출장을 떠난 길 위에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나는 비보를 접하고 황망히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그 곳에서 보았던 안내판에 쓰인 망자의 이름이 낯설었다. 내 아버지지만, 더는 부를 수 없는, 손을 내밀어도 잡을 수 없는 공허감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영정사진을 쳐다보면 짙은 슬픔의 농도로 무거워진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그 날의 장면들이 오버랩 될 때면 장맛비에 봇물 터지듯 가슴속에 눈물이 쏟아져 차오른다. 먹먹하게 온몸을 짓누르는 강렬한 슬픔이 상실감으로 변주되어 내 마음속으로 재빨리 휘감아 흘러 들어온다.며칠 전, 지인의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죽음을 대하는 장례식장의 분위기가 무겁고 엄숙하지만은 않았다. 고인은 삼 년 동안 요양병원에서 생활했다. 죽음의 유예기간 동안 아흔여섯 살의 고인과 가족들은 많은 이야기를 했고, 서로 따뜻하게 감싸 안는 시간이 많았단다. 그런 연유로 현실을 받아들인다고 지인은 평온하게 전했다. 이미 마음속으로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죽음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삶의 완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리라.서아프리카 가나에서는 댄싱 장례식이 유행이라고 한다. 상여꾼들이 관을 어깨에 짊어지고 박자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춘다. 바닥에 앉거나 드러눕는 등의 다양한 퍼포먼스로 장례식장을 흥겹게 축제 분위기로 이끈다. 망자를 절차에 따라 추모하는 엄숙하고 차분한 진행이 아니라 템포 빠른 음악과 경쾌한 춤을 통해 고인과 작별하고 유가족과 조문객을 위로한다고 한다.나에게는 아직 받아들이기 어려운 풍경이지만, 고인의 생전 삶을 따뜻한 마음으로 돌이켜보는 것은 좋은 의미인 것 같다.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에서 가장 준비가 필요한 일은 각자의 죽음을 잘 대비하는 일임에랴.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현재에 남겨진 사람에게도, 서로가 후회와 미련이 남지 않도록 이별 연습을 미리 해보면 좋을 성 싶다.웰다잉(Well-Dying)! 가족들이 덕담을 주고받으며 서로 상처를 치유하고 보듬는, 훈훈한 내 장례식 풍경을 만들려면 평소에 자주 떠올려야 될 단어다. 죽음을 기억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금기(禁忌)를 상기(想起)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아 성찰을 통해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일이다. 뚜렷하게 돋을새김으로 각인된 의미 있는 장례에 대한 나만의 인식을 바람결에 날려 보내고 싶지 않다.어느덧 나도 계절을 알리는 인생시계의 시침이 가을로 접어들었다. 오늘, 나의 장례식 장면을 두 눈 감고 상상해 본다.향냄새가 코끝으로 스며드는 듯하더니 울컥, 미세한 애잔함이 눈물로 변해 뚝뚝 흘러내린다. 장례식장의 차가운 공기, 껴안고 흐느끼는 가족들, 문득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공허가 온몸을 감싸고돈다. 삶의 종점, 먼 것 같지만 언젠가는 내가 닿을 곳이다.나는 지금, 나의 장례식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국화원을 내려다보고 있다.

2022-09-14

경진(庚辰)

육십갑자 중 열일곱 번째에 해당하는 경진(庚辰)이다. 천간(天干)은 경금(庚金)이요, 지지(地支)는 진토(辰土)다. 천간과 지지가 모두 양(陽)으로 이루어져 아주 강한 기운을 가지고 있다.경진일주는 넓은 평원에 우뚝 솟은 바위산이다. 멀리서 보면 우장하고 당당하다. 마치 제련되지 않은 원석 덩어리다. 꿈과 이상이 크고, 순박한 성품이며, 목표를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경향이 있다.경금(庚金)은 강한 금(金)의 성질을 갖고 있어 자기주장으로 주변을 힘들게 할 수도 있다. 그러한 성질을 자제하고, 일관성 있는 논리를 갖추면 사회에 기여하여 두각을 나타내면 성공할 수가 있다. 진토(辰土)는 수기(水氣)의 창고로 나무가 잘 자라게 하며, 사람을 기르는 재주가 있다. 그러므로 꿈을 꾸고 살거나 다른 이의 꿈이 되거나 꿈을 심어주는 사람이 된다.경신일주를 가지신 분은 천하대장군이 경(庚)을 치고, 천하대장군의 낙처를 담당하는 지하여장군은 용, 즉 진(辰)이다. 앞으로 전진만 할 뿐, 뒤를 돌아보지 않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살면서 발생하고 일어나는 일은 다 세상의 살림살이고, 그 살림살이가 하늘의 낙처이기에 침묵해야 한다. 하늘시계의 말없는 가르침인 ‘10천간’을 잘 받아내는 땅의 안테나를 가진 12지신 상중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동물이 바로 용(龍)이다.그래서 용(龍)의 기운을 받은 사람들은 용이 물을 만나면 승천하여 본래 하늘의 기운이 되고, 물을 만나자 못하면 그냥 땅에 사는 도룡뇽이 된다. 수질이 3, 4급수들과 어울리면 지렁이 같은 토룡(土龍)이 되고, 올라가다가 떨어지면 이무기가 되기에 조심해야 한다, 주위 환경 변화에 잘 적응하며 처신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가 있다.별 진(辰)은 옥편에는 별이름이 수성이며, 또한 북두칠성을 나타낸다. 조선에서도 별자리에 대한 사료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 태조 4년(1395년)에 만들어진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다.‘천상’(국보 제228호)은 하늘의 상을, ‘열차’는 차에 따라 나열하고, ‘분야’는 지역에 따라 구분하여 그린 그림이다. 여기서 차(次)는 하늘의 북극에서 세로로 12구역으로 나눈 단위다. 분야는 점성술과 관련이 있다. 하늘의 별자리를 지상과 연관시켜 점성술의 일환으로 사용되었다.동양 별자리와 서양 별자리를 비교하면 이름이 크게 다르다. 서양 별자리는 대부분 그리스·로마신화 속의 동물이나 영웅들의 이름이다. 동양 별자리는 모양과는 상관없이 하나의 별을 하나의 대상으로 나타내었다. 여름 밤하늘의 대표적인 별자리 중 하나인 견우와 직녀(칠석)도 천상열차분야지도에 새겨져 있고, 만 원권 지폐 뒷면에도 도안되어 있다.강경진일주에 ‘괴강살’(魁罡殺)이 있다. 괴강(魁罡)이란, 괴(魁)는 북두칠성의 머리 부분에 있는 네별을 말한다. 일설에 문운(文運)이 있어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은 이 별에 기도를 드렸다. 강(罡)은 북두칠성의 다른 이름이다. 그만큼 강력한 힘과 권력을 나타낸다. 하늘과 땅의 기운을 가지고 있어 성품이 매우 강하며,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과 지혜가 강한 것이 장점이다. 외모가 준수하고, 지적인 매력이 있고, 기가 센 성격이므로 다소 잔인하거나 폭력성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한편으로 진취적인 성격으로 뛰어난 리더십을 보여주기도 한다.예전에는 여자 사주에 ‘괴강살’이 있으면 성격이 까다로워 남편과 시댁을 섬길 수 없어 백년해로하기가 어렵다고 해석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는 경쟁력을 가진 사주로 해석되어 성공하기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사주로 평가가 된다. 일지(日支)가 진(辰)으로 끝나는 무진, 경진, 임진의 여자는 대체로 아름답고 능력이 있고 재물복도 많다.‘여씨춘추’ 거사(去私)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진나라의 평공(平公)이 대신인 기황양에게 “남방지방의 현령으로 누구를 보냈으면 좋겠는가”라고 물었다. 기황양이 “해호라는 사람이 적임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평공이 “해호라는 사람은 당신의 원수가 아니오”라고 물었다. 그러자 기황양은 “임금께서는 누가 현령 자리에 적임인가를 물으셨지, 저의 원수를 묻지 아니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평공은 크게 감탄하였고, 곧바로 해호를 현령으로 임명하였다. 온 나라의 높고 낮은 사람들이 모두 훌륭하다고 말했다.얼마의 세월이 지난 뒤에 평공이 다시 기황양에게 “나라 안에서 군대 일을 맡길 사람을 찾지를 못 하겠네 누구에게 맡기면 좋겠는가”라고 물었다. 기황양이 “기호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평공이 “기호는 그대의 아들이 아니오”라고 물었다. 그러자 기황양이 “임금께서는 누구에게 군사 일을 맡겼으면 좋겠는가 하는 점을 물으셨지, 누가 제 아들이냐고 묻지는 않으셨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류대창 명리연구자 평공이 다시 한 번 크게 감탄하고, 기오를 임명하여 썼다. 온 나라의 사람들이 모두 잘했다며 안심했다. 공자(孔子)가 이 일을 듣고 “기황양은 참으로 훌륭하구나! 남을 추천하는 일에서 원수조차도 꺼려하지 아니하였고, 친족을 추천하는 경우에는 자기의 아들조차도 빼놓지 아니하였구나. 그 사람이야말로 공적인 일을 함에 있어서 한결같은 마음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사람은 개인적으로나 나라 전체로나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한 마디로 목표라는 것은 나라의 안위와 백성의 행복이다.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은 나라의 안위와 행복을 파괴하거나 방해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정치의 목적은 ‘인간을 위한 선’을 추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선’이 개인이나 국가에 대해서 동일한 것이라 할지라도 국가를 위해 좋은 것을 취하고 보전하는 일이 사실상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개인을 위한 선’을 실현하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지만, 민족이나 국가를 위한, 즉 보편적 ‘인간을 위한 선’을 실현하는 것은 더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2022-09-14

재주보다 집요함으로 승부한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 한국의 골목길이 가장 미국적인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1949년 미국 텔레비전아카데미가 시작한 에미상(Emmy Awards)은 그 성격이 조금씩 바뀌어오긴 했다. 텔레비전이라는 매체가 드라마와 영화는 물론 최근에는 넷플릭스와 디즈니플러스 등 OTT 상영물까지 담게 되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은 그런 시점적 트렌드를 잘 타기는 했어도, 누가 보아도 스토리에 담긴 향수와 긴장감, 상상력과 도발성으로 장식한 콘텐츠가 강렬했다. 에미상의 남우주연상과 감독상을 비롯하여 무려 6개 부문을 획득하였다. ‘기생충’, ‘미나리’와 함께 칸영화제, 아카데미상과 골든글로브상을 거치며 인정을 받아 K-콘텐츠는 이제 글로벌 기준이 되었다. 이런 성공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실력. 어려움과 힘든 시간을 거치며 지치지 않고 쌓아온 내공의 힘이 아닐까. 스크린쿼터제를 썼어야만 했을 정도로 한국영화는 가시밭길을 거쳐왔다. 깊은 수렁을 지나면서 포기하지 않고 달려온 집요함이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았을 인고의 시간이었다. 탁월한 재주가 물론 마지막 빛을 발하지만, 바닥에 도도히 흐르는 집념이 이룬 결과가 아닐까.감독은 수상소감에서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역사를 만들었다’고 고백하였다. 진심이 아니었을까. 한국 드라마가 가장 미국적인 상을 받았다는데, 실제로 그 옛적 동네 골목길 이야기들로 글로벌시장을 승부한 셈이 아닌가. 우리에게만 있는 스토리베이스가 세계 천장을 뚫은 셈이다. 문화원형의 또다른 승리다. 우리만의 이야기가 또 무엇이 있을까 돌아보아야 한다.전 미국을 통틀어 텔레비전 수상기가 5만도 채 안 되던 시절에 에미상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겨우 걸음마를 떼었을 텔레비전이라는 뉴미디어의 오늘같은 성공을 상상이나 했을까. 씨앗도 그런 씨앗이 없었을 터에, 그 작은 성공의 가능성에 물을 주고 거름을 댄 사람들이 있은 다음에 74년이 흘러 오늘이 되었다.미국 텔레비전이라고 좋기만 했을까. 수다한 부침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을 미국인들의 집념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어떤 노력도 쉽게 펼쳐지지 않는다. 한국에서 영화를 한다는 생각도 한때는 얼마나 허무맹랑했을까. 문화와 예술은 단번에 피어오르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의 상상과 창의가 고단하고 집요한 노력을 만나 지치지 않고 길고 긴 시간과 싸움을 한끝에 겨우 조금씩 솟아오른다. 떼는 발걸음마다 무거웠던 날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지켜보는 눈길은 또 얼마나 아슬아슬했을까.잘 만들어야 하지만, 또 잘 알려야 한다. 아무리 멋진 스토리도 누군가 알아채지 못하면 보러올 재간이 없다. 기획과 제작, 홍보와 실행에 이르기까지 통합적인 전략이 구사되어야 작은 성공이라도 거둘 수 있다. 고집과 집념이 상상과 창의를 만나도록 이끌어야 한다. 지치지 않도록 지원해야 하고 기다려주어야 한다. 문화와 예술이 일어나면 사람이 모인다. 서울거리에는 외국인들이 북적인다고 한다. 가능성의 싹을 본 김에 문화로 승부했으면 한다. 정치보다 나아도 훨씬 낫지 않은가.

2022-09-14

신공항 확장 계획, 균형발전 차원서 바람직

대구시가 군위·의성지역에 건설될 대구경북 통합신공항을 중남부권 중추공항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신공항 확장안을 정부와 협의한다고 한다. 협의 될 내용은 2035년까지 민간전용 활주로(3.2km) 1본을 추가 건설하며, 대형 항공기의 이착륙은 물론 시간당 50회 이상 운항이 가능토록 하는 것 등이다. 대구시는 2030년 신공항이 개통되면 대구경북권역은 물론 충청권, 강원권 그리고 가덕도공항 완공 전 부산, 울산, 경남권에서도 공항 이용이 있을 것으로 예측하며 공항 2단계 계획에 박차를 가한다는 생각이다.대구시는 2035년 기준으로 국내 전체 국제 여객수요의 14%, 국제항공 화물수요의 25%가 신공항을 이용할 것으로 보고 확장 필요성을 정부측에 건의키로 했다. 특히 인천국제공항 중심의 일극체제 문제점을 제기하고 지방의 공항을 관문공항체제로 전환해 지역 균형발전을 도모하자는 뜻도 정부측에 전할 계획이다.대구경북 통합신공항은 500만 대구경북민의 미래를 위한 투자다. 반드시 성공해야 할 사업으로 지역민의 관심도 높다.항공기술의 발달로 향후 경제는 하늘길을 누가 선점하느냐에 승패가 달려있다. 수도권에 밀려 소멸위기에 처한 지방도시가 공항을 유치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자 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중국의 임공경제구역은 공항을 중심으로 발전하는 지역경제 개념이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현재 중국의 민간항공은 지방도시를 중심으로 안정적 성장세에 있다. 공항의 발전이 지역경제 발전과 시너지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을 알고 지방공항 활성화에 중국정부가 공을 들이는 것이다.대구시의 신공항 확장 계획은 이런 측면에서 바람직한 결정이다. 특별법이 발의된 상황이라 서둘러 확장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신공항은 대한민국 중추공항으로서 완성을 보아야 본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동네공항에 머문다면 이전 필요성도 없겠지만 대구경북의 미래도 없다. 홍준표 대구시장을 중심으로 지역사회가 중남부권 중추공항으로 발전시켜가야 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정부는 지방공항이 지방경제의 비즈포트가 되도록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2022-09-14

1인치의 장벽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세계적인 히트를 친 후 에미상 시상식에서 6개 부문을 휩쓸면서 한국 콘텐츠들이‘1인치 장벽’을 깨고 새로운 현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1인치 장벽’이란 2년전 영화‘기생충’을 연출한 봉준호 감독이 골든 글러브 수상소감으로 이야기함으로써 널리 퍼졌다. 자막의 크기를 말하는 것으로, 미국의 경우, 자막을 읽는 것이 부담스러워 해외 영화를 잘 보지 않는 데, 바로 그 자막의 장벽을 넘기만 하면 정말 좋은 영화가 많다는 것이다.‘오징어 게임’은 지난해 9월 공개된 지 엿새 만에 전 세계 넷플릭스 1위를 차지했다. 46일 연속 1위를 기록하며 최장 기록을 세웠다. 세계 곳곳에서 초록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패러디하는 것은 물론, SNS에는 달고나 만들기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 한국 놀이 영상도 잇따랐다.‘오징어 게임’신드롬은 결국 에미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빈부 격차와 경쟁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에 전 세계인들이 공감한 셈이다.황동혁 ‘오징어 게임’ 감독은 당시 신드롬에 대해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한탕주의 같은 것이 더 심해지는 세상에 파산한 사람들이 하는 그 게임이라는 게 지금 이 시대의 흐름이나 상황과 잘 맞아떨어져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국경을 뛰어넘는 OTT의 대중화도 한몫했다. 전 세계 시청자들이 단 한 번의 가입만으로 다른 나라의 드라마들까지 손쉽게 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영화 ‘기생충’ 등 한국 콘텐츠의 성공 이후 다른 나라 콘텐츠를 자주 접하며 자막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든 것도 ‘오징어 게임 성공’에 기여했다는 평가다. ‘오징어 게임’ 이후‘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등이 해외 시청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어 한국 콘텐츠가 1인치의 장벽을 넘는 도전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2-09-14

태풍피해 지원금, 도배도 못할 정도라니

힌남노 태풍피해 복구를 위한 정부지원금이 지나치게 적다는 목소리가 재난현장에서 강하게 나오고 있다.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정부의 현행 자연재난지원금(최대 200만원)으로는 주택침수 피해자들이 도배조차 할 수 없다”고 한탄할 정도다. 자연재난시 정부지원기준은 침수주택·상가에 대해서는 최대 200만원의 재난지원금이 한도다. 태풍에 주택이 침수된 주민들의 경우 도배·장판 교체는 물론 세탁기, 냉장고 등 가전제품을 새로 구입해야 하는데 최대 200만원의 지원금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경북도내에서는 이번 태풍으로 주택과 상가 6천 곳 이상이 침수됐다.주택뿐만 아니라 포항시 남구에 있는 공단지역도 이번 태풍으로 엄청난 피해를 당했다. 폭우로 인한 하천범람으로 침수된 곳이 많은 철강산업단지내 기업 상당수가 생사기로에 놓여 있지만, 아직 정부의 실효성 있는 지원대책은 나오지 않고 있다. 정부가 지난 12일 긴급재난지원금 대책회의를 열고 수해 기업에 대한 지원책을 발표했지만, 재난을 당한 기업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지원내용이 자금대출과 특례보증, 만기연장 등으로 피해에 대한 실질적인 보상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포스코 외주·연관업체들의 시름은 깊다. 포스코 포항제철소의 정상조업이 늦어지면 납품을 못해 앞으로 한계기업이 속출할 것으로 보인다.추석연휴기간 동안 윤석열 대통령과 많은 국회의원들이 포항에 내려와 피해주민과 기업에 대한 각종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현실적인 도움이 될만한 지원대책은 나오지 않고 있어 답답하다. 우선 정부는 포항을 ‘산업위기 선제대응지역’으로 지정해야 한다. 산업위기 선제대응지역으로 지정되면 위기 기업들이 실효성 있는 지원을 받을 수 있어 숨통이 트일 수 있다.현재 재난을 당한 포항지역 피해 당사자들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크다. 전국적인 온정 덕분에 복구 작업은 한창이지만 속도는 더딘 상황이다. 침수 피해 기업과 상인, 인명 피해 유가족, 농작물 피해 농민 등 힌남노가 할퀴고 간 상처는 신속하고도 근원적인 복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2022-09-14

길과 길

오낙률시인·국악인 사람들은 인생 여정 (人生 旅程)이라는 말로 인간의 삶을 정의하곤 한다. 생각해보면 사람이 태어나서 걸음마를 시작한 이후, 잠자는 시간이나 직장에서 일하는 시간 등을 제외하고는 끝없이 어디론가 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어디론가 끝없이 가야만 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면 길이란 존재는 인간의 삶에서 필수 조건이 됨을 또한 부정키 어려울 것이다.요즘 사람들의 길을 내는 방식은 예전의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예를 들면, 도심이나 외곽지에 큰 도로 하나를 낼라치면 설계과정에서 담당 공무원이 지도위에 먼저 실선으로 표시하고 그다음은 중장비를 동원해서 길을 완성하면 끝이다. 그러나 문명이 오늘처럼 발전하기 전의 세상에서는 길 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지 꾀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최초의 한 사람이 그곳으로 지나가고, 또 뒤를 이어 먼저 지나간 사람의 흔적을 따라 다른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고, 그렇게 해서 수없이 많은 사람이 그 길을 지나고서야 비로소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고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이 되었을 것이다. 옛날, 우마차가 다니던 길도 최초에는 그렇게 작은 길이 만들어진 다음에 사람들이 삽이나 곡괭이로 길을 넓혔을 것이다.길은 소멸과 생성을 거듭한다. 도무지 길이 생기지 않을 것 같은 곳에 새로이 커다란 길이 생기고 영원히 존재할 것 같던 길이 몇몇 사람의 기억 속에 추억만 남기고 말끔히 사라지기도 한다. 필자의 뇌리에도, 지금은 농경지 정리로 말끔히 사라지고 없는 유년 시절의 길에 대한 기억이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또렷이 남아있다. 필자 나이 대여섯 살은 되었을까? 부모님께 흰 고무신을 싸 달라고 조르며 울다가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새터 마을 고무신 점을 향해 졸랑졸랑 따라 걷던, 할아버지의 사랑 어린 길에 대한 기억이며, 동네 신작로를 놔두고도 가깝다는 이유로 꼬불꼬불 좁은 논길을 즐겨 다니던 초등학교 등 하굣길에 대한 기억이다.인간의 삶을 원만히 유지하기 위해 인간이 다니는 길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길이 있다. 물길이다. 세상의 길 중에 물길보다 더 중요한 길은 없다. 물길이란 자연계의 왕도로서 인간마저도 범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길이며 지상 모든 생명의 존망에 관계되는 길이다. 해서 우리나라 법령에서도 물길에 해당하는 하천법을 최 상위법에 두는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해마다 태풍철이 되면 수해 소식으로 온 나라가 초상집 분위기이다. 그렇게 해마다 나타나는 수해 현상을 인간에게 길을 빼앗긴 물의 분노쯤으로 생각하면 어떨까? 몇 년 혹은 몇십 년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이라 해서 가벼이 생각하고 인간이 무단으로 둑을 쌓아 점령하여 사용하고 있는 탓은 아닐까? 해마다 도시와 농촌에서 일어나는 홍수의 형태를 보면, 도심의 홍수는 대부분 하천 주변이나 하천의 하류에서 일어나고 농촌의 홍수는 계곡 주변의 농토가 유실되거나 침수되는 형태로 일어난다. 이러한 홍수 현상은 농촌 도시 할 것 없이 물이 제 길을 찾아 흐르려는 현상일 뿐, 무단으로 물길을 점령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이기심에 의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2022-09-14

합계 출산율 0.75의 시대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추석을 맞아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부모님 집을 방문하며 아이들을 데리고 대형 쇼핑몰을 찾았다. 반려동물 출입이 자유로운 쇼핑몰에는 수많은 종류의 강아지와 각양각색의 반려견 유모차가 즐비했다. 물론 아이들도 적지 않게 보였지만, 반려견과 반려견 유모차의 수도 만만치 않았다. 대기업이 만든 복합 쇼핑몰에서 아이와 반려동물이 뒤엉킨 장면은 기괴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생명으로 동물을 인식하는 것이 보편화 된 시대이다. 도나 해러웨이는 ‘반려종 선언’에서 반려동물과 인간의 소통은 인간 중심주의를 극복한 새로운 인간, 즉 포스트 휴먼의 탄생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반려동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통계청은 지난 달 24일 2022년 2분기 합계출산율이 0.75라고 발표했다. 2018년 대한민국의 합계출산율이 처음으로 1 아래로 떨어졌고, 이로 인한 위기감이 팽배했지만 이후에도 출산율은 급격하게 떨어지기만 한 것이다. 지난 6월 출생아 수는 통계청이 월간 출생아수를 발표한 1981년 6월 이후 가장 최소인 1만8천830명이며, OECD 국가 평균 합계출산율이 약 1.6명인 것을 고려하면 대한민국이 얼마나 빠르게 아이를 낳지 않는 국가로 변화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더욱 심각한 것은 출산율 저하 문제를 우리 모두 알고 있으며,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오랜 시간 투입했지만 반등의 여지없이 아이를 낳지 않는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 ‘소비’의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내가 쇼핑몰에서 느낀 기괴함의 정체도 바로 이것이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유모차에 태워진 잔뜩 멋을 낸 반려견과 그 주인의 모습에서 아이를 위해서라면 빚을 내서라도 원하는 것을 해주는 부모를 떠올리는 것은 오독일까? 소비 자본주의 시대에 돈이 사랑을 대리한다는 의식이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정작 아이 혹은 반려동물과 어떻게 깊게 교감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돌봄에 수반되는 헌신이 사회적 관계의 재구성으로 나아가기 어렵다는 말이다.최근 오픈 서베이가 발표한 ‘Z세대 트렌드 리포트’에 따르면 한국의 Z세대 62.7%가 행복을 위해 소득과 재산이 가장 중요하다고 답한 반면, 미국의 Z세대는 인간관계와 우정을 꼽았다. 출산이 파산의 지름길이라는 Z세대의 인식을 단적으로 확인시켜준 결과이다. 개인이 체감하는 사회적 관계 혹은 가치를 재구성해야 합계 출산율의 반등을 이룰 수 있다.그 시작은 국가와 사회가 아이를 부모와 함께 키운다는 의식을 젊은 세대가 가질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함께 살아가는 대상이 꼭 구별 짓기를 통해서야 주체성을 드러내는 ‘사람’일 필요도 없다. 이질적인 대상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 문화가 형성될 때 출산율의 반등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돌봄은 이질적인 두 주체가 연결되는 과정이자 새로운 세상을 함께 가시화하는 시간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2022-09-14

기후 우울증

우정구 논설위원 2019년의 일이다. 영국의 어느 사회운동가는 “기후변화 해결 없이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출산파업을 선언했다. 그는 “극심한 기후변화에 대한 두려움과 살기 힘든 환경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고 싶지 않아 출산파업 운동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출산파업에 대해 한국의 젊은이 상당수가 동조하고 있다는 여론조사가 나온 적도 있다.모 환경단체는 “여름에 내린 비의 이름은 장마가 아니라 기후 위기입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기후변화에 대한 위기감을 호소하는 환경단체의 지속적인 환경관련 계몽운동에도 지구의 기후 위기는 여전히 상존하고 있다.지구촌 곳곳에서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과 가뭄, 산불 등 다양한 재난이 일어나지만 사람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그렇게 심각해 보이지 않는다.지금과 같은 지구온난화가 진행된다면 지구촌 인구의 20억명 정도는 사하라 사막과 비슷한 기후 환경에서 살아야 될 지 모른다는 경고도 나왔다. 기후변화로 먹고 살아가야 할 식량 생산이 줄고 각종 재난이 빈발해지면서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다는 지적에도 세상은 그저 무덤덤하다.유엔 산하 정부협의체인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협의체(IPCC)가 나서 지구의 기후위기 문제에 적극 대처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뾰쪽한 묘책이 안 보인다.초강력 태풍 힌남노가 포항·경주에서 10명의 목숨을 빼앗고 엄청난 재산 피해를 입혔다. 지구촌의 기후변화가 앞으로 힌남노보다 더 강력한 태풍을 몰고 올 거란 기상학계의 전망에 갑갑한 마음이 앞선다. 코로나 블루처럼 기후변화에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도 늘어난다는 소식도 들린다. 우울증 영역에 기후 우울증이 하나 더 추가된다는 얘기다. 우울한 소식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2-09-13

피해 심각한 포항제철소, 정부지원 절실

태풍 힌남노 영향으로 침수된 포스코 포항제철소가 복구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상가동을 기약할 수 없어 국내 전 산업계가 비상이 걸렸다. 포항제철소 철강생산이 중단되면 자동차, 조선, 기계, 건설 등 국내 산업이 한순간에 올스톱될 수도 있어 정부차원의 지원대책이 필요하다.포스코와 경북소방본부 등은 추석 연휴에도 인력과 소방차, 대용량 방사포, 펌프 등을 동원해 침수된 제철소 지하시설물 배수에 총력을 쏟았지만, 지하뿐만 아니라 지상에 쌓인 진흙과 쓰레기를 치우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가장 중요한 ‘쇳물’을 만드는 고로(용광로)는 가까스로 정상가동됐지만, 제강·압연라인 등의 피해가 커 정상 완제품이 출하되기에는 오랜 복구 기간이 필요하다. 포스코 관계자는 “고로에서 생산된 쇳물을 제강공정에서 처리하기 위한 제강·연주설비 복구에 집중하고 있다. 조속한 시일 내 모든 제강 설비를 정상화시킨다는 계획”이라고 밝혔다.포항제철소는 철강생산을 위해 제강(고로에서 생산된 쇳물의 불순물을 제거), 연주(슬래브 등 철강 반제품을 만드는 작업), 압연(열과 압력을 가해 용도에 맞게 철을 가공하는 작업)과정을 거치는데, 문제는 압연라인이다. 압연 공정을 거쳐야 슬래브가 강판이나 선재로 가공되는데, 압연라인은 인근 하천인 냉천 범람으로 대부분 시설물이 침수돼 현재까지도 물을 빼고 진흙을 제거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포스코는 일단 포항제철소 고로를 정상화시켜 생산되는 반제품을 광양제철소로 옮겨 완제품을 생산한다는 방침이다.포스코는 물을 빼낸 뒤 지하 시설물 피해가 얼마나 되는지 파악해야 생산 재개 시점을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포스코그룹 최정우 회장은 지난 6일 포항제철소를 찾아 비상대책회의를 주재하며 복구작업을 진두지휘했다. 업계에서는 포항제철소 정상화에 수개월이 소요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어 포항은 물론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는 포항제철소 복구를 기업에만 맡기지 말고, 각종 금융·재정지원을 통해 하루빨리 정상적인 조업이 이루어지도록 전력을 쏟아야 한다.

2022-09-13

TK인구 ‘500만명’ 붕괴의 의미

심충택 논설위원 추석연휴 찾아간 고향마을 골목은 조용했다. 10여 년 전만 해도 해도 작은 산골동네지만 집집마다 귀성 가족들로 붐볐는데, 올해는 명절분위기가 거의 나지 않았다. 고향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탓이다.정치·경제적 상징성이 강한 대구경북(TK)인구 ‘500만명’이 지난 3월(500만135명)을 마지막으로 무너졌다. 행정안전부 자료에 따르면 8월말 기준 대구인구는 237만1천936명, 경북인구는 260만9천356명으로, TK인구는 모두 498만1천292명이다. 행안부 인구현황을 가끔 들여다보면 TK인구가 매달 3천500여명에서 많게는 6천여명씩 줄어들어 아찔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TK인구 500만명은 정치적 지분이라는 무게감과 함께 경제적 의미도 컸다. 기업이 공장입지 선택을 할 때 가장 먼저 보는 데이터가 청년층 유출입 통계인데, 대구·경북은 이제 이 부분에서 매력적인 곳이 되지 못한다. 부산시도 인구 감소 걱정을 하는 것은 대구와 마찬가지다. 8월말 기준 333만1천444명으로 매달 1천400여명씩 인구가 줄고 있다. 청년인구가 살길을 찾아 떠나가는 비수도권 도시의 공통적인 비극이다.반면, 8월말 기준 경기도는 1천359만56명, 인천시는 296만3천117명으로 매달 인구가 2천~4천500여명씩 증가하고 있다. 인천시가 대구시 인구를 추월한 것은 아주 오래됐다. 유정복 인천시장(국민의힘)은 최근 한 언론 인터뷰에서 ‘서인부대’ 시대를 열겠다고 밝혔다. ‘서인부대’는 서울, 인천, 부산, 대구의 머리글자를 딴 것으로, 경제 규모에서 인천이 서울 다음가는 국내 2대 도시로 거듭나겠다는 뜻이 담겼다.부산과 대구는 인구가 감소하는 추세지만, 인천은 경제자유구역과 원도심 개발 활성화로 인구 증가세가 이어지고 있어 국내 2대 경제도시로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나타낸 것이다.TK인구 감소는 곧 청년 인구 감소를 의미한다. 대구시 자료에 따르면 지난 한 해 순유출 인구 2만4천여명 가운데 20~29세 청년 인구만 9천여명이다. 청년 인구 감소와 노인 인구 증가는 결국 ‘지방소멸’의 문제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지극히 부정적인 현상이다. 청년층 인구의 중요성에 대해 UC버클리대 엘니코 모레티 경제학과 교수는 “세계적으로 청년층 창조계급을 유인하는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간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모든 권력과 사회적 자원이 지금처럼 수도권으로 몰리는 한 국민은 좋은 직장과 교육 환경을 찾아 서울로 몰려들 수밖에 없다. 정부가 국토 전체를 효율적으로 쓰겠다는 각오를 단단히 하지 않으면 인구위기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것이다.지역균형발전이 제대로 되려면 수도권에 집중되는 국가자산(일자리·교육·의료·교통·문화)을 규제하지 않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수도권규제를 완화하면서 비수도권 균형발전을 도모하겠다는 발상 자체는 애초에 불가능하다.다시 강조하지만 사회 모든 분야에서 균형발전이 이루어지려면 최고 권력자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2022-09-13

전국서 온 봉사 손길, 포항 수해 극복의 힘이다

제11호 태풍 힌남노로 엉망이 된 마을과 집안을 정리하던 수재민에게 위로가 된 것은 전국 각지서 달려온 자원봉사자와 사회단체 그리고 군 장병, 공무원 등의 헌신적 지원이다. 혼자서는 도저히 엄두도 못 낼 폐허가 되다시피한 현장을 복구하는 데는 이들의 도움이 큰 힘이 됐다.추석 연휴를 넘긴 현재 도로, 하천·상수도 등 공공시설은 어느 정도 복구를 마쳤으나 주택과 상가, 공장 등은 원상복구까지 아직 멀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 같다”는 어느 자원봉사자의 말처럼 포항시내 피해 현장은 그 많은 봉사자의 헌신적 노력에도 복구를 꿈꾸기에는 여전히 가마득하다. 포항시에 따르면 그간 포항에는 공무원 6천여 명, 군인 1만8천여 명, 자원봉사자 6천600여 명 등 3만5천여 명의 인력이 동원돼 피해복구 작업에 나섰다. 놀라운 것은 자원봉사를 위해 나선 기관·단체 등이 전국적이라는 사실이다.부산, 대구, 울산, 전남, 경북 등 전국 각지의 자원봉사센터 회원과 전기공사협회 회원, 영일만서포터즈봉사단, 도배봉사단, 삼성전자서비스센터, 해병전우회, 대구에서 온 경찰봉사단 등 일일이 이름을 거론하기에는 너무 많다. 그들은 추석 연휴에도 불구하고 주택정리와 세탁봉사, 급식지원, 전기시설 복구 등 피해현장 곳곳에서 봉사활동을 펼쳐 실의에 빠진 수재민에게 재기의 희망을 심어 주었다. 상부상조 정신이 바로 이런 것이라 할만하다. 이차전지 양극재를 생산하는 에코프로 가족이 포항 수해복구를 위해 100억원의 성금을 낸 것도 시민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었다.그러나 힌남노로 인한 포항지역 피해 규모가 추산이지만 2조원을 넘어 피해 정도가 매우 심각하다.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수마로 9명의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포항지역 사회에 준 정신적 충격도 적지 않다.전국 각지 자원봉사단체의 헌신적 지원에도 포항은 피해를 극복하기에는 여전히 일손과 장비가 부족하다. 그러나 자원봉사자 등의 응원을 업고 포항은 과거 포항지진을 극복했던 것처럼 이번 재난도 잘 극복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자원봉사자들에 대한 보답이기도 한 것이다.

2022-09-13

나만 괜찮아

조현태 수필가 추석을 턱 앞에 두고 11호 태풍 ‘힌남노’가 몰려와 엄청난 피해를 남기고 사라졌다. 먼저 소중한 생명을 잃고 침수로 재난을 당한 모든 분께 진심어린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더구나 민속명절 한가위를 맞아 얼마나 상심이 크겠으며 추석인들 명절로 느껴질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부디 용기 잃지 마시고 이 재난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태풍 상륙 며칠 전부터 역대급 태풍으로 ‘사라’에 버금가는 진로방향과 위력이라고 모든 방송이 재난대비를 반복하여 알렸다. 필자는 태풍이 닥치기 전날(9월 5일) 감포 어느 바닷가에 갔었다. 때마침 점심시간이어서 전촌항 주변에 횟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모든 횟집이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출입문을 제외한 모든 유리창문은 전부 두꺼운 합판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리고 멀리서 찾아온 손님도 돌려보내며 영업을 중단하고 있었다. 잠시 동안 여러 팀이 횟집에 왔다가 아쉬운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영업이익을 목적으로 횟집을 운영하는데 많은 팀을 돌려보내기가 쉽지 않을 터이다. 그런 모습을 보며 안전을 우선으로 하는 영업에 박수를 보냈다. 충분히 그럴 법 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둘러보니 각종 선박을 도로 위로 끌어올려 단단히 결박해 놓았다. 재난대비 방송을 듣고 충분히 이해한 대책으로 보였다.그런데 막상 태풍이 지나고 보니 예상 외로 피해를 입은 곳이 많다는 보도다. 재난대비 방송을 듣지 않거나 무시했을까. 아니면 ‘나는 괜찮아’로 뭉그적거리고 있었을까. 이도저도 아니면 자연의 위력보다 자신이 더 세다는 자기우월주의에 빠졌을까. 모르긴 해도 나름대로 최선의 대비는 했으리라 여긴다. 만조와 폭우가 겹치면 어떤 상황일거라는 예상을 방송사마다 종일 외쳤으니까. 정보에 가장 민감하게 살아가는 현시대에 재난방송을 모른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은 자연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깨우치게 하는 사건이다.그날 양동마을에는 자동화재경보기가 작동했다. 억수같이 비가 퍼붓는 가운데 하룻밤에 세 차례나 소방차가 출동을 했다. 결국 화재경보가 울린 것은 습기로 인한 오작동이라는 설명이었고 경비원이나 소방대원이 완전 밤샘을 했다. 불이 나지도 않았는데 세 번씩이나 출동하였건만 소방대원은 전혀 귀찮아하거나 힘들어하지 않았다.화재감지 센서가 워낙 예민해 화재가 아닌 습기에도 작동했다면 예방효과는 확실하다고 봐야하지 않겠는가. 하룻밤을 꼬박 뜬눈으로 새웠더라도 불이 나거나 큰 사고가 난 것 보다야 훨씬 다행이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횟집에서 문과 선박을 단속하고 손님을 돌려보내더라도 태풍 피해를 덜 입는 쪽을 택하는 것이 훨씬 안전하지 않은가. 태풍 때문이라면, 지하주차장이 침수되는 상황과 바닷가 월파 상황이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얼마만큼 예방에 노력을 하느냐에 달려있지 않겠는가.아직도 12호 태풍 ‘무이파’가 활동 중에 있다고 한다. 꼭 태풍만 아니더라도 살면서 위험하거나 불가항력이 닥칠 때를 미리 대비하는 마음가짐과 자세를 잊지 않기만 바랄 따름이다.

2022-09-13

아름답게 오래되기 위하여

이재현 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시간은 모든 것을 쓸어가는 비바람 / 젊은 미인의 살결도 젊은 열정의 가슴도 / 무자비하게 쓸어내리는 심판자이지만 // 시간은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거장의 손길 / 하늘은 자신이 특별히 사랑하는 자를 / 시련의 시간을 통해 단련시키듯 / 시간을 견뎌낸 것들은 빛나는 얼굴이 살아난다 // 오랜 시간을 순명하게 살아나온 것 / 시류를 거슬러 정직하게 낡아진 것 / 낡아짐으로 꾸준히 새로워지는 것 //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노동자 시인이라고 불리는 박노해의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느린걸음, 2010)에 수록된 시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의 1연에서 4연까지이다. 인용이 좀 길지만 모두 8연으로 된 시의 앞 절반을 가져와 보았다. 사람이건 사물이건 시간이 흐르면 늙고 낡아지고 때론 썩고 부패하기도 하고, 결국에는 스러지고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오래된 것들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였고, 오래된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고 선언한다.지난 9월 8일,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가 세상을 떴다. 1952년 25살의 젊은 나이에 영국의 여왕이 된 그녀는 영국을 포함한 열여섯 개 나라(영 연방)의 군주로서 70년을 통치하였다. 물론 영국의 왕은 정치적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는 입헌군주국의 형식상의 최고통치자이기에 엘리자베스 2세 또한 영국의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비록 정치에 개입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상징적이기는 하지만 영연방의 수장이면서 영국 성공회의 최고 치리자로서(세계 성공회 전체의 수장은 캔터베리 대주교이다.) 영국뿐 아니라 세계 많은 나라의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해 왔던 것은 사실이다.일찍 왕위에 올랐고 오래 산 만큼 오랫동안 영국의 왕으로 재위한 까닭에 엘리자베스 2세는 2022년 기준으로 입헌군주제의 나라와 절대군주제의 나라를 모두 포함한 세계의 왕들 가운데서 최고령의 왕이었고, 최장기간 재위한 군주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이런 오래됨이 마냥 행복하고 아름다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영국의 왕이 된 찰스 3세의 아내이자 자신의 며느리였던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비운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고, 남편 필립공을 먼저 보내는 슬픔도 겪어야 했다.제국주의 시대 영국의 왕족을 거쳐 왕이 되었기에 본인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제국주의 폭력의 주체가 될 수밖에 없었고, 계속되는 군주제 폐지론에 시달리며 왕권이 흔들리기도 하였다. 실제로 자메이카와 앤티카바부다 등 카리브해의 섬나라들은 여왕의 서거를 계기로 영연방으로부터 탈퇴하여 공화국으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한때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리기도 했던 영국은 이제 많이 쪼그라든 것이 사실이다. 여왕의 시대가 저물면서 그 쇠퇴가 더 빨라질지도 모른다.오래된 것이 빛을 발하고 가치가 높아지고 고전으로 명작으로 그 삶을 이어가기도 하지만, 모든 것이 그런 것은 아니다. 시인의 말처럼 비바람의 시간을 잘 견뎌내고, 노회하게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낡아가고 늙어갈 때 오래된 것이 진정 아름다울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2022-09-13

88년, 서울

영화 ‘서울 대작전’(감독 문현성)은 80년대 후반의 서울을 배경으로 올드카의 향연이 눈에 띠는 영화이다. 쏘나타, 포니 픽업, 르망, 프라이드, 스텔라, 그랜저, 포터, 프레스토, 베스타, 코란도 등 다양한 올드카들이 멋지게 튜닝된 모습으로 서울 공도를 질주하는 모습은 그간의 한국 영화에서 보지 못한 색다른 재미라 할 만 하다.하지만 보다 주목을 요하는 것은 이 영화가 ‘88년의 서울’을 재현해내는 방식이다. 그 모습은 그간의 작품들에서 그려진 ‘현실감 있는 서울’의 모습과는 다르다. CG를 통해 구현된 서울의 모습은 현실적이라기보다 만화적이라는 느낌에 가까우며, 이는 할리우드가 자신들의 80년대를 재현해내는 방식과 닮아있다. 더불어 극의 초반에 자신의 차를 압류당하고 빌린 차를 튜닝해 문제를 해결해나간다는 플롯의 구성은 최근의 카 체이싱 영화 뿐만 아니라 ‘니드 포 스피드’와 같은 게임 속 분위기를 연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채롭다.하지만 이는 ‘서울 대작전’이라는 영화가 80년대의 서울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지 못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영화 속 서울의 모습은 촌스러움과 ‘힙’한 느낌이 한껏 과장된 채 서로 공존하는 문화적 혼종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 대작전’은 재현의 실패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영화라 할 수 있겠으나, 이를 작품의 실패로 간주하는 것은 다소 섣부른 진단이 아닐까 싶다.그렇다면 이 영화가 지향하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 속에서 자주 노출되는 “서울 바이브”라는 단어를 곱씹어보자. 그때 그 시절과는 맞지 않는 ‘바이브’라는 단어는, 이들이 원하는 바가 충실하게 재현된 과거가 아니라 자신들의 리듬으로 재구성된 문화적 구성물임을 선언한다. 관객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 영화로부터 거대한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영화의 미학적 지향이 그 시절을 그 시절답게 재현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발칙하다고 할 만하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우리가 살아온 과거를 제멋대로 비틀고 찢어 조합했을 뿐인 영화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그간 레트로를 지향해온 다방면의 문화 컨텐츠가 자꾸만 놓치고 마는 과거의 요소를 억지로라도 붙잡고 있기 위해 노력한다. 예컨대, 그간의 레트로를 표방하는 컨텐츠들이 당대의 문화적 요소를 조망하면서 의도적으로 정치경제적 문제에 대해서는 흐린 눈으로 지나쳐간 것과 달리, ‘서울 대작전’은 88년 서울의 뒷모습을 영화 속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88올림픽의 재개발로 집이 사라진 철거민들의 모습과 그 위에 나붙은 세계화, 축제, 올림픽, 발전과 같은 표어들. 독재 정권의 관성으로부터 완전히 이탈하지 못한 인물들의 모습. 깡패보다 악랄한 정권의 부역자들과 이들을 스쳐가듯 날아가는 검게 그을린 흰 비둘기의 모습에 이르기까지.그와 같은 부분적 요소들을 거쳐 다시 영화를 바라보자면, 이 영화가 원하고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한결 뚜렷해진다. 그것은 과거를 재현하고 곱씹으며 “그땐 좋았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새롭게 재구성된 문화적 혼종성의 공간을 통해 이들이 욕망하는 바는 관습과 관행으로 물든 한국적 정치경제적 체질과의 단절이다. 이는 영화의 플롯에서도 두드러지는데, 영화 속 주인공들은 전 정권과의 단절을 원하는 신 정권과도 단절하길 원한다. 예컨대 이들에게 88년 서울이란 여전히 독재의 관습과 관행을 버리지 못한 채 ‘새로움’과 ‘민주주의’라는 외피를 둘러썼을 뿐인 구시대에 다름없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88년의 서울’이라는 상징적 시공간을 단순한 재현이 아닌 패스티쉬의 방식으로 묘사한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이는 ‘레트로’를 지향하고 표방하는 문화 컨텐츠들이 지향해야 하는 바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도 이어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정치적, 경제적 위험성이 거세되어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향락의 대상으로 전락한 과거가 아니다. 과거에 내재된 정치경제적 불안의 요소들마저 새로운 감각을 통해 문화적으로 재현해내는 감각이 필요하다. ‘서울 대작전’이 실패하는 바가 있다면, 그와 같은 재현이 보다 미학적이지 못했다는 점뿐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미학적 실패는 영화 전체를 퇴행적 좌파의 꿈으로 읽어낼 여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깊은 아쉬움을 남기는 지점이기도 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나름의 의미와 재미를 갖추고 있다. 그 시절을 얼마나 ‘그 시절답게’ 재현하는 가가 아니라 그 시절에 미처 현실화되지 못한 ‘가능성’을 탐문하고자 시도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 대작전’이 던지는 메시지란 “그땐 좋았었지”같은 싸구려 노스텔지어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란 “그리하여 우리에게 미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가까울 것이다.

2022-09-13

낭만과 실용 사이

아이폰의 새로운 시리즈가 출시되었다는 소식에 괜스레 통장 잔고를 확인해본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잘 쓰던 핸드폰의 속도가 어쩐지 급속도로 느려진 것만 같다. 카메라 화질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건 느낌에, 그립감도 만족스럽지 않고, 액정이 너무 작은 것은 아닌지, 용량이 모자란 것은 아닌지, 쓸데없는 투정을 늘어놓게 된다. 아이폰 시리즈에 추가된 기능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소유하기만 해도 금방 편리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내가 얼마나 많은 기기를 보유하고 있는지 헤아려본다. 아이폰, 아이패드, 애플펜슬, 에어팟과 노이즈 캔슬링이 되는 헤드폰, 초경량 노트북…… 요리하다가 ‘시리야, 8분 타이머’하고 외치면 정확한 시간에 알람이 울리고 펜과 노트는 물론이거니와 지갑을 가지고 다닐 필요도 없다. 이런저런 기기를 용도에 맞게 사용하다 보면 문득 아, 얼마나 편안한 세상인가, 하고 감탄하게 된다.스마트해져 가는 세계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소비하게 되는 것들도 있다. 애플워치를 사고 싶은 이유는 친구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터치 한 번으로 집 안의 모든 것이 제어된다는 리모컨에 눈독 들이는 것은 인터넷에서 마주친 광고 때문이다. 많은 물건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발 빠르게 주시하지 않으면 늦었다는 소리를 듣는다. ‘말도 안 되게 편리하다’는 추천에 구입한 로봇청소기에는 뽀얀 먼지가 내려앉았고 ‘죽은 빵도 살려낸다’는 토스터는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다. 이 모든 소비가 정말 나의 의지는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작년 12월, 나는 보자마자 첫눈에 반한 동네로 이사 왔다. 이곳이 마음에 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저층 빌라들로 이루어진 단지는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개성 강한 맛집과 카페들이 넘친다는 것도 좋았다. 커다란 마트나 병원처럼 편리에 의한 공간은 부족하지만 산책할 수 있는 거리가 잘 조성되어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우리 집이 꼭대기 층이라는 것이었다. 승강기가 없는 건물의 4층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불편하다. 지하 주차장에서 올라가게 되면 숨이 가빠오고 거기다가 손에 든 짐이라도 많은 날엔 팔다리가 바들바들 떨린다. 엘리베이터가 얼마나 훌륭한 발명품인지 여실히 깨닫는 요즘이다.재밌는 점은 승강기가 버젓이 존재하는 건물에서도 사람들은 일부러 계단을 이용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건강상의 목적뿐만 아니라 자기 육체를 사용하여 걷는 감각을 느끼고자 할 때가 있다. 온갖 단점이 넘쳐나는 복층 구조가 ‘자취생들의 로망’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자명하다.인간은 실용적인 것으로만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무의미한 것들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고 있다. 그러니까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의 가사, ‘밤늦은 항구에서’ ‘돌아올 사람은 없을지라도 슬픈 뱃고동 소리를 들어’보는 마음이 우리의 시간을 얼마나 아름답게 만들어주는지 안다. 편리하고 실용적인 상품보다 다음날 시들어버리고 마는 꽃 한 송이가 주는 설렘도 느껴본 적 있을 것이다.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면서 눈물 흘리는 일처럼 어리석은 일이 때론 우리 삶을 지탱하는 놀라운 힘이 될 때가 있다.물론 인간은 낭만만으로 살아갈 수도 없다. 낭만을 꿈꾸는 사람들은 그것이 삶으로 들어왔을 때 예상치 못한 부조화를 겪게 될 것이다. 그것은 쓸데없는 일에 힘을 쏟는 것이며 책임보다 무책임의 영역에 더욱 가깝다. 어슴푸레한 새벽에 만나게 되는 직장인의 무거운 발걸음에서 낭만을 발견하는 사람은 그날 아침 출근하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너무 싫은 사람마저도 사랑해버리겠다는 포부를 외치는 사람은 상사의 무차별적인 폭언에 시달리면서도 직장을 그만두지 못하고 속으로 삭이는 말단 직원이 아닐 것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현실에 발을 디디면서 살아가는 이들을 마주치면 낭만이라는 단어는 허무하게 휘발되고 만다. 먹고 사는 일은 낭만보다는 실용에 무게를 더 싣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때때로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쉽다. 세상은 숨 쉴 틈도 주지 않는 답답한 곳으로 느껴진다. 모든 것을 쓸모 있음과 없음으로 구분한다면 나 자신의 존재는 과연 유의미한 것인지 고뇌할 수밖에 없다.그러니까 살아간다는 건 낭만과 실용, 이 두 세계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현실에 발붙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것들에 타협하면서도 허상에 가까운 관념을 꿈꾸기 위해 갖고 있는 에너지를 아무렇게나 소비하는 것. 이러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분명히 어렵다. 낭만과 실용을 오가며 고민하는 것 자체가 감상적 태도로 현실을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폰과 꽃 한 송이 사이에서 갈등하는 오늘을 지나고 조금 더 선명하게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내일이 올 것이라고 기대해보기로 한다.

2022-09-13

책 읽기의 미래, 미래의 책 읽기

독서하는 노인의 모습을 묘사한 알브레히트 뒤러의 그림. 요즘 주변에서 더 이상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 세대들의 등장과 그로부터 초래된 문해력의 위기에 대한 우려들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곤 한다. 한 세대 내에서 일상적으로 쓰던 말들이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말들로 채워지는 것은 한 세대가 스러지고 다음 세대가 등장하는 당연한 시대의 변화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이 위기에 대한 예감을 단지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것은 이 위기가 자연스러운 변화라기보다는 인류가 지금까지 세워 올리고 영위해왔던 문명들이 본질적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진단에서 비롯된다.지금 우리에게 제기되고 있는 문해력의 위기에 대한 진단은 인류가 구축해온 문명들이 동시에 변곡점을 지나가고 있는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전세계적인 상황으로 당연히 책이라는 미디어가 이끈 문자와 서사의 문명의 변화이고, 다른 하나는 동아시아적인 상황으로 한자라는 중국에서 기원한 문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한자 문명의 변화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두 가지 층위의 문명들이 지금 여기 한국에서 어딘가 그 형태를 드러내지 않는 새로운 문명을 향해 전이해가고 있는 상황이 지금 제기되고 있는 문해력의 위기의 문명적 기반이다.종이가 낱낱으로 흩어지지 않게 한 쪽 끝을 묶어 고정시킨다고 하는 간단한 아이디어에 불과했던 책이라는 미디어가 기반이 되어 쌓이기 시작한 인류의 지식은 지금 우리의 인간다운 문명을 보증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로 작용해왔다. 사실 이는 문자의 문명이라기보다는 서사의 문명이라고 불러야 할 것인데, 종이 낱장이 아닌 30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을 통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길게 이어붙여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지적 능력을 축적하고 확인하는 과정은 이뤄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처럼 빠르게 정보를 습득하고 반응하는 것이 미덕인 시대에 책 한 권을 읽고 정보를 얻는다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내가 원하는 정보에 닿기 위해 서론부터 읽어야 하는 것 역시 비효율적이다. 지금 책이라는 미디어 문명이 겪고 있는 위기와 변화의 요체는 바로 여기에 있다.동아시아적인 상황에 국한해서 한자 문명이 겪고 있는 위기는 조금 국면이 다르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개념들은 대부분 한자어로, 조선시대 이래로 내려온 개념들과 서구의 새로운 문명의 개념들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들이 한자표기가 아니라 한글로만 표기되고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제는 어떤 개념을 받아들일 때 그 한자어의 한자 의미를 떠올려 의미를 파악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영어를 떠올려 파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가능성’이라는 단어를 이해할 때 ‘可能性’이 아니라 ‘possibility’를 떠올리면 오히려 이해가 더 분명해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 한자교육을 강화한다는 식으로 문명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 비효율적이라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을 것이다.하나의 책을 읽는 데는 자주 어려움이 발생한다. 툭툭 튀어나오는 어려운 단어들 때문에 사전을 계속 찾아봐야 한다는 문제가 비교적 사소한 것이라면, 책을 쓴 사람의 생각, 이른바 주제를 알아내기 위해 길고도 지루하기 짝이 없는 긴 독해의 과정을, 서사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은 본질적인 어려움이다. 그 힘든 과정을 견뎌야 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는 판단의 변화가 바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명의 변곡이 가지고 있는 요체이다. 내가 원하는 정보를 언제나 바로 접할 수 있는 시대에 그 길고 지루한 과정을 참아내는 것은 비효율적이고, 비효율성만큼 지금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는 또 없는 것이다. 매클루언이나 플루서 같은 미디어 학자들이 진단하고 있듯, 문자와 책, 글쓰기 같은 문명들은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다. 이제는 새로운 시대에 ‘책’, 혹은 ‘책읽기’에 대해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다. /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2-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