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거울 앞에서

오낙률 시인·국악인 알고 보면 세상은 온통 거울투성이다. 그 거울은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이 나와 마주하게 되는 순간부터 생성되며, 한 사물과의 관계에서 나라는 존재가 어떠한 형태로든 인식될 때 필자는 그것을 거울을 보는 행위라 정의하고 싶다. 그렇게 거울이란 내가 보려고 노력해야만 비로소 그 역할을 나에게 베푸는 존재로서 인간의 발길이 닿는 곳곳에 존재하는 나를 의식할 수 있는 모든 그곳에 걸려 있는 것이다.현대인의 삶에서 선거라는 것과 무관하게 살기 어렵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구성원 몇 명이 모여서 거수를 하는 선거에서부터 오래전부터 달력에 붉은 글씨로 지정해놓은 선거까지, 실로 인간의 사회생활이라는 것은 선거를 통해서 조직화 되고 그 짜임새가 유지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선거에는 반드시 승패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특정인의 선출을 위한 일시적 수단에 그쳐야 함이 마땅함에도, 종종 나와 의견을 달리했던 소속원과의 관계를 집요하게 악화일로로 몰고 가는 사람 혹은 집단을 볼 수 있다. 그러한 행위는 선거에서 패한 사실이 상황에 따라서는 상대방의 의견이나 판단이 옳다는 뜻도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비교육적 사고에서 오는 무지함의 폭로쯤으로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가만히 주위를 살펴보면 우리 사회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다수의 국민으로부터 존경과 선망을 한 몸에 받는 몇몇 정치인의 입술에서까지 상식적으로 인내 불가한 자기중심적 망언들이 튀어나오는 것을 볼 때면 그런 사람을 두고 고민하며 선거에 임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인간 존중이니 이웃 사랑이니 하는 말은 입버릇처럼 하면서 선거 결과에는 승복하지 못하고 집요하게 비방 일색으로 자신의 주장이나 심리상태를 피력하는 행위는 참으로 반사회적이고 비인륜적이며 지성인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아주 먼 비인간적인 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여당이건 야당이건 간에 상대의 작은 결점도 놓치지 않고 가혹하게 물어뜯는, 가히 볼 성 사나운 정치권의 모습에 우리 국민은 너무나 익숙해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엔 자신이 지지하는 집단이나 정당의 일이라면 무조건 편을 들거나 어떤 잘못을 해도 침묵하는, 그러한 비지성적인 행위를 하고도 일말의 양심적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 탓에 정치는 뒷전에 미루고 맨날 싸움질만 한다며 아예 정치판에서 완전히 고개를 돌려버린 국민 또한 너무 많은 것이 우리나라의 정치적 현실이다. 무릇, 국민에 의해 선출된 정치인은 국민의 대표이다. 그래서 그들의 모습은 곧 그 나라 국민의 모습이 된다. 정치인이 포악하고 야비한 인성을 지녔다면 그 나라 국민성이 그러하다는 얘기가 되고 정치인이 품위 있고 지성미가 넘친다면 그 나라 국민 또한 그러하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인의 모습에서 우리 또는 나 자신의 모습을 인지할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누워서 침 뱉기식의 막말에 부끄러움도 느낄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치인과 국민은 서로의 거울이 되어 자신의 모습에 빗질하고 보다 말끔한 모습으로 세상 앞에 나서야 하지 않을까 싶다.

2022-09-22

혼란정국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정국(政局)이 매우 혼란스럽다. 경제계는 물가와 금리, 환율이 모두 상승하는 ‘3고 현상’으로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의 늪에 빠질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은데, 정치권에서는 최소한의 양심이나 이성도 팽개친 무리들의 난동과 패악질로 국력낭비를 가중하고 있다. 여당은 대표란 젊은이가 끊임없는 해당행위로 징계를 당하고도 오히려 당과 대통령에 대해 비난과 악담을 일삼고 있고. 야당은 전과 4범에다가 온갖 비리의 혐의와 의혹으로 기소되거나 수사를 받고 있는 인물을 대표로 뽑아 놓고 그를 수호(?)하기 위해 마치 자폭테러꾼들을 방불케 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대한민국은 지금 이런 정국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위기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을 가르게 될 기로에 서 있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가 왜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고, 왜 동족을 살상하는 무리들의 침략으로 누란의 위기에 몰리게 되었는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문재인 정권 5년 동안 우리는 종북 좌파들의 민낯이 과연 어떠한지를 똑똑히 보았다, 그들은 무엇보다 민주화투쟁 전력을 구국의 훈장처럼 달고 살지만, 막상 그들의 목표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였다. 좌파정권이 집권하는 동안 나라 전반에서 자행된 독단과 전횡은 자유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특히나 그들 정권을 지지한다는 패거리들은 중공의 홍위병들을 연상케 했다. 몽둥이나 죽창 대신 문자폭탄 같은 디지털 무기와 온갖 악의적인 선전선동이 다를 뿐이었다.다음으로 드러난 것은 좌파들의 무능이었다. 그들에게 능한 것은 오로지 투쟁뿐이었다. 누구든 일단 적으로 간주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위해를 가하는 능력(?)은 자타가 공인을 하는 터이다. 훼방하고 때려 부수는 데는 이골이 났지만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것에는 도무지 소질이 없다는 것이다. 원전건설을 파기하고 4대강 보를 파괴할 궁리나 했지 새롭게 무얼 만들어낸 능력은 없는 자들이었다.가장 심각한 것은 반지성과 도덕적 파탄이 팽배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유전자에는 반성이나 성찰이란 없다. 마치 무오류성의 신이나 된 것처럼 저들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하는 법이 없는 것이다. 같은 일이라도 상대가 하면 적패지만 내가 하면 정의요 혁신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거짓말을 밥 먹듯 하면서도 일말의 부끄러움도 느끼지를 못한다.정국이 혼란할수록 제정신을 가진 사람들의 바로미터 역할이 절실히 요구된다. 우리가 처한 상황에선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택일의 문제이지 화합이나 공조의 문제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반대세력들을 압도하거나 배격하는 것 말고는 길이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유우파 세력과 지지층을 넓혀나가는 게 필수다. 우선은 정권이 제몫을 해야겠지만, 애국심과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들의 헌신적이 노력이 성패의 관건이 될 것이다. 좌파노조가 장악한 공영방송 대신 자유우파 유튜버들이 밤낮으로 맹활약을 하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2022-09-22

‘어촌마을-소멸 위기의 시대’

소멸위기란 이야기가 자주 회자된다. 서울과 지방 간 인구격차를 논하거나, 인구절벽 등 인구감소 문제를 지적할 때 종종 사용된다. 이를 지표로 나타내는 용어도 있다. ‘소멸고위험지역’과 ‘소멸위험지역’ 등으로 분류해 지역이 소멸될 위기에 처했다는 긴박함을 알려준다. 그런데 그 지역의 분포가 참 특이하다.전국 시군구 소멸지수(2021년 5월 기준)에 따르면, 강원도 고성군과 속초시 등 동해라인을 시작부터 경북 포항시와 경주시까지 모조리 시뻘건 소멸위험지역이다. 부산 동구에 이르러서야 주의단계로 낮아진다. 즉,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항·포구 등 어촌마을을 끼고 있는 지역은 전부 사라질 위치에 처했다는 진단이다. 소멸위험지역은 65세 이상의 고령층이 20~39세 사이의 여성인구 비율보다 2배 이상 많은 경우를 뜻한다. 소멸이 시간의 문제라는 의미다. 소멸위험도까지 면밀히 살펴보면 상황은 더 나빠진다. 전국 탑텐(Top 10)에 속하는 지역으로 단연 1위는 경북 군위다. 그 뒤를 경북 의성, 봉화, 청송, 청도가 잇고 있다. 전국 소멸위험도 상위 10위 안에 경북의 5개 지역이 차지하고 있는 뼈아픈 현실이다.경상남도와 전라남도 어촌 마을은 이와 처지가 다르다. 오히려 전남과 경남은 농촌소멸지역이 더 많다.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진단이 가능하다. 먼저 이 지역은 연근해어업과 양식업이 발달한 곳이다. 완도의 전복과 통영의 굴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다도해가 가진 천혜의 자연경관, 즉 해양관광자원이 풍성해 전국의 관광객들이 몰린다. 먹거리와 구경거리가 있는 지역에 사람이 운집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인구소멸을 막기 위한 대안 역시 이 같은 현실에서 착안해야 할 것이다.2021년 기준 전국의 어가인구는 9만7천명이다. 그리고 그 인구의 약 40%가 만 65세 이상 노인이다. 수십만 명에 달하던 어업인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소멸을 막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말은 이제 상식이다.그 상식을 현실화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업이 있다. 바로 해양수산부가 추진하고 있는 ‘귀어지원프로그램’이다. 해양수산부는 어가인구의 상당수가 고령층인 점을 감안해 귀어인구를 늘이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먹거리와 구경거리를 만들고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어촌에 인구유입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먼저 귀어의 전 과정을 컨설팅해주는 ‘귀어닥터’ 프로그램이 있다. 정착 초기의 혼란과 어려움 등을 해결해주는 프로그램으로 창업 등 일자리 지원 뿐만 아니라 금융과 행정절차 등도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두 번째는 귀어학교다. 해양수산부는 2018년 경상대학교(경남 통영시 위치)를 귀어학교로 지정, 귀어를 희망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연근해어업과 양식어업 등 현장 중심 실무 교육을 6주간 실시했다. 2022년 현재, 전국에는 6개의 귀어학교가 있다. 교육 프로그램도 알차다. 창업절차와 귀어실태 등 기본적인 소양을 다루는 교과과정부터 어업, 양식, 수산가공, 수산물 유통 분야까지 두루 다룬다. 특히 3주간 현장 실습이 핵심이다. 실제 승선 후 어업활동 전반을 배울 수 있어 귀어인들의 호응도가 특히 높다.세 번째는 주거플랫폼 사업이다. 해양수산부는 현재 ‘어촌뉴딜300’ 사업을 추진 중에 있다. 어촌과 어항의 사회기반시설(SOC) 인프라를 확충하고, 지역 특화 자원을 활용해 개발에 나서는 사업으로 3년째 이어오고 있다. ‘어촌뉴딜300’ 사업에 더해 국토교통부와 함께 하는 사업이 바로 주거 플랫폼 사업이다. 주거플랫폼은 어촌뉴딜사업으로 사회기반시설이 확충되고 지역특화산업으로 일자리가 만들어지면 여기에 임대주택 공급을 통해 주거안정까지 이뤄내겠다는 포부로 시작됐다. 일자리와 주거문제까지 해결되면 귀어인구는 차츰 늘 것이라는 게 정책입안자들의 판단이다. 정현미작가 인생 2막을 여유 있는 시골 마을에서 보내려는 이들에게 귀어는 아직 생소하다. 실제 귀농·귀촌 인구가 수만 명에 달하는 것에 비해 귀어인구는 한 해 1천 명을 넘지 못한다. 2020년 귀어인구는 967명이었다. 이에 비해 귀농인은 1만2천570명이었다.귀어인을 위한 정책적인 지원도 이제 막 첫걸음을 뗀 상태다. 귀농인을 위한 다양한 제도와 지원, 홍보 등은 이미 십수년을 지나왔다. 귀어 역시 이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청년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대안이 되고, 장년층이 인생 2막을 시작할 수 있는 곳이 되기 위해서는 좀 더 촘촘한 지원과 그 지원이 현장에 스며들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우리나라 인구는 앞으로 더 급격히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그 여파는 가장 약한 고리부터 끊어낼 것이다. 어촌마을이 그 대상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다. 젊은 어업인들이 몰려 어장을 가득 메우고, 관광객들로 붐비는 어촌마을은 아직은 상상 속 현실이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이제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정책적 지원과 홍보, 인식 전환 등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경험하는 어촌마을은 지금보다 훨씬 활력 넘치는 장소가 되길 희망해본다.

2022-09-21

그 후

배문경수필가 녀석의 눈이 훑고 지나갔다. 덩치가 커서 드리운 그늘도 넓다. 팔을 사방으로 펼치고 지나면 큰 나무도 쓰러지고 다 지어놓은 과실도 땅으로 곤두박질친다. 칼날같이 매서운 입김으로 집을 삼키고 강의 너비를 넓혀놓는다. 지나간 자리마다 새로운 길이 생기고 있던 길은 사라진다.방에서 자던 오빠도 처음엔 빗물이 방으로 들어오자 걸레로 슬슬 닦았다고 했다. 불어난 개울물이 안방으로 들어올 때도 이 정도야 뭐라고 심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댐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둔 여수로가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터지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촌집의 앞뒤가 포위당했다. 낮은 곳에 있는 논들은 벼들이 고스란히 물속에 갇힌 수생식물이 되었다. 마당으로 내려서자 허리까지 물이 차올랐단다. 오빠는 어둠 속에서 겁이 덜컹 났다고 했다.그래도 추석 차례상을 차렸다. 집을 떠나 가까운 거처에서 밤 대추 곶감 잘 구워진 생선과 삼색 나물을 올렸다. 마지막으로 매와 탕이 오를 즈음 바깥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침 햇살이 서서히 빛을 발한다. 술을 한 순배 돌리고 다시 모두 절을 했다.친정이 있는 곳으로 향할 때까지도 이렇게 난리가 나 있을 줄은 몰랐다. 세간은 육이오전쟁 사진을 보는 것 같았다. 물건들이 길바닥에 나와 구정물에 절여졌다. 냉장고며 주방용품, 옷장과 옷들이 흙탕물과 섞여 널브러져 있었다. 오빠는 연신 호스를 연결해서 흙탕물을 씻었지만, 밖에 설치된 수도 하수구가 막혀 애를 먹었다.옛 기록을 보면 ‘태풍’이란 단어 대신 ‘영풍폭우(獰風暴雨·거센 바람과 거친 비), 대풍우(大風雨·큰 바람과 비), 구풍(98B6風·회오리치는 세찬 바람) 등으로 기록했다. 자연재해를 온전히 겪은 당시 선조들에게 바다는 더욱더 공포의 대상이었다. 바닷길로 떠난 중국 명나라 사행길 기록을 담은 ‘죽천이공행적록(竹泉李公行蹟錄)’도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위한 사명감과 숭고한 업적을 위해 떠났을 것이다.“회오리바람이 급히 일어나 산 같은 물결이 하늘에 닿으니…. 배가 물결에 휩쓸려 백 척 물결에 올라갔다가 다시 만 길 못에 떨어지니 어찌할 방책이 없어 하늘에 축원할 뿐이라. 밤이 깊은 후 바람의 기세 더욱 심하여 배 무수히 출몰함에 지탱하지 못하네. 부사가 탄 배가 가장 험한 곳에 정박해 배 밑 널빤지가 부러져 바닷물이 솟아 역류하여 배 안으로 들어오니 사람들이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더라. 부사가 복건을 쓰고 심의를 입고 뱃머리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축문을 지어 깨끗한 비단에 싸 바다에 넣고 군관과 노졸로 하여금 옷을 벗어 틈을 막고 또 막게 하더라.”과학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자연현상은 두려운 존재이다. 화석연료 사용으로 지구는 점점 더워지고 곳곳에 기후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 국지성 폭우가 유럽의 도시를 휩쓸고 태풍도 점점 강해진다.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은 머지않아 사라지고 북반구 빙하도 사라진다. 그러면 해수면이 올라가 해안은 물에 잠기게 된다. 그 두려운 존재는 점점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누런 벼가 가득하던 곳이 태풍이 지나자 돌밭으로 변했다. 동네 어르신들은 자신들의 손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어 하늘만 바라보았다. 하늘이 답을 하듯 곳곳에서 사람들을 보내왔다.돌이 덮인 논밭에는 세상의 포클레인은 다 이곳에 집결한 것처럼 돌을 밀어내고 있다. 길거리에 덮인 진흙을 씻어내려고 다른 지역의 이름표를 단 소방차들이 달려와 물을 뿌렸다. 자원봉사자들이 건네는 도시락으로 속을 채운다. 물이 쓸고 간 자리에 사람들의 훈기가 들어앉았다.정신을 차리고 집을 돌아보니 그나마 이가 나가지 않은 밥공기와 국그릇이 의지하듯 포개져 있다. 접시들도 흙탕물을 씻고 겹겹이 서로 떨어지지 말자고 눌러 앉아있다. 어제의 좌절을 벗고 씻고 닦은 바닥과 높은 곳에서 잘 버틴 몇 벌 옷을 까슬한 바람에 옷걸이에 걸어 말린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듯 바람에 온몸이 한 점씩 꾸덕꾸덕해지고 있다. 물에 젖어 쓸 수 없게 된 삶터를 사람들이 일으켜준다.

2022-09-21

전쟁의 명분

노승욱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 우크라이나 교과서에 ‘한강의 기적’이 실린다. 며칠 전 우크라이나 주재 한국대사관은 전쟁 뉴스가 아닌 교육 소식을 타전했다. 우크라이나 교육과학부는 9월 20일(현지 시간) 한국의 발전상을 교과서에 포함하도록 10학년 ‘세계지리’, 11학년 ‘세계역사’ 교육과정 가이드라인을 변경하고 홈페이지에 공지했다.러시아의 침공으로 7개월째 전쟁을 치르고 있는 우크라이나가 전후 재건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달라진 전황이 이러한 생각을 우크라이나에 가져다준 것으로 보인다. 개전 초기에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속전속결 승리를 예견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현재 다윗은 잘 버티고 있고, 골리앗은 고전하고 있다.이번 전쟁처럼 전문가들의 예측이 빗나간 경우는 드물다. 이는 군사력의 우세와 열세라는 프레임으로만 이 전쟁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군사력 세계 2위의 러시아와 22위인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이 숫자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극단적인 전쟁에서 군사력의 숫자를 넘어설 수 있는 요인은 무엇일까?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실리에만 집착했다. 그가 내세운 전쟁의 명분은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반면에 우크라이나는 평화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국제 사회에 호소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는 평화를 원한다. 이를 위해 모든 것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평화라는 가치에 세계의 여론이 움직이면서 푸틴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올여름에 개봉한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은 전쟁의 명분이 왜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보통 이순신을 모티브로 한 영화는 나라와 임금에 대한 ‘충(忠)’의 주제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는 충직함을 강조하는 스토리텔링이다. 그런데 ‘한산’에서는 ‘의(義)’라는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이순신은 자신이 참전하고 있는 임진왜란을 “의와 불의의 싸움”으로 해석한다.이 영화는 한산도대첩에서 대승한 이순신의 전략과 전술에만 주목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순신과 조선 수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불의에 맞선 의로운 항전에 있었음을 부각시킨다. 당시 조선에 항복한 일본인은 항왜(降倭)로 불렸다. 이 영화에서 항왜 병사가 조선의 의병들과 같은 편으로 싸우는 장면은 매우 낯설다. 그렇지만 그가 들었던 깃발에 새겨진 ‘의(義)’라는 명분은 국가의 경계마저 무화시킬 힘을 갖고 있다.방공호 교실에서 수업하는 우크라이나 학생들이 6·25 전쟁의 폐허에서 일어선 한국을 통해 위로와 희망을 얻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우크라이나의 오늘은 평화가 아닌 전쟁이다. 폭격으로 깨진 유리창으로 들이닥치는 찬바람을 시민들은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국제 사회는 두 나라 군인뿐 아니라 민간인의 희생을 더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평화를 지키기 위한 의로운 대의명분만이 폭력적인 전쟁을 멈출 수 있다.

2022-09-21

따스한 눈으로 세상을 보자

김규인수필가 화살을 몸에 맞은 개가 제주의 한 마을회관 인근에서 발견됐다. 신고한 주민은 개가 아주 지쳐있고 헐떡이고 많이 아파한다고 했다. 병원에서 수술하여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하지만 신경계통에는 문제가 있을 거라는 의사의 말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말을 못 하는 개에게 화살을 겨누어 쏘다니 왜 그랬을까.동물을 학대한 경우는 이번뿐만이 아니다. 제주에서 코만 밖에 나온 상태에서 생매장당한 강아지가 발견되기도 했다. 구조된 강아지는 뼈밖에 없었고 사람을 보고 벌벌 떨고 있었다. 상처 난 발로 잘 걷지도 못했다. 이 강아지는 자신을 키운 주인에 의하여 생매장당했다.주둥이와 앞발이 노끈에 묶인 채 발견된 유기견. 19마리의 푸들을 입양하여 물과 불로 고문하며 잔인하게 살해하고 아파트 화단에 묻거나 유기한 사람도 뉴스에 나왔다. 자신에게 아무런 득도 없는 짓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 사람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보는 것 같아 두렵기까지 하다.세상은 빠르게 바뀐다. 어제 산 물건의 설명서를 살펴보고 있는데, 오늘 새로운 상품이 나온다. 문명의 빠른 변화는 사람들이 느긋하게 쳐다보고 대처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적응하지 못한 상태로 엉거주춤 따라가기 바쁘다. 깊이 생각하며 돌아볼 시간을 주지 않는 채 시간은 그렇게 흘러간다.휴대폰은 이러한 속도전의 선봉에 선다. 어린아이부터 어른들까지 틈만 나면 휴대폰을 펼쳐 든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보며 시간을 보낸다. 각종 매체는 선정적이거나 잔혹한 영상으로 사람들을 모은다. 이러한 영상을 보며 사람들은 웬만한 자극에도 무심해지는 것 같다. 오늘도 사람들은 더 자극적이고 더 빠른 그 무엇을 찾는다.60대가 책을 읽는 마지막 세대라는 말도 나온다. 젊은 세대들은 종이책을 잘 사지 않는다. 전자책을 사거나 간단한 짧은 글만을 읽는다. 긴 글은 지하철로 이동하는 시간에 다 읽을 수가 없다. 짧은 시간에 읽을 수 있는 글만을 읽는다. 책도 마음 놓고 읽을 수 없는 요즈음의 빠른 문명을 탓할 수밖에.이제라도 조금 더 사람다움을 찾아야 한다. 오늘 하루는 휴대폰 없이 살아보자. 마음을 통째로 빼앗아가는 휴대폰의 횡포에서 벗어나자. 얇은 책이라도 들고 다니며 시간 나는 대로 책을 읽자.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한 줄의 문장에 빠져보자. 마음에 와닿는 문장을 찾아 평생 마음을 지키는 호신부로 삼아보자.하루에 한 번은 해가 지는 서쪽 하늘을 쳐다보자. 자연이 주는 아름다운 노을에 자신을 적셔보자. 노을빛 물든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보자. 따스한 눈으로 세상을 보면 감사하지 않은 것 없으니. 애정 어린 손으로 꽃을 쓰다듬어보면, 사랑스럽지 않은 꽃이 없으니. 한 박자 느리게 살다가 보면 사람의 삶은 거기서 거기임을 깨닫게 된다. 세상이 빠르고 각박하게 돌아가도 우리는 더운 피가 흐르는 사람임을 잊지 말자. 반려견과 강가에 나란히 앉아 노을을 바라보는 사람을 본다. 한 폭의 그림 같은 모습에 나도 모르게 발길을 멈춘다. 그렇게 우리는 노을빛 품은 풍경이 된다.

2022-09-21

모방은 가라, 창의가 온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 아일랜드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가 선언하였다. “모든 유행은 틀려먹었다”남들을 따라하는 일이 처음에는 설사 그럴듯해 보여도, 나만의 무엇을 좀처럼 가지지 못하게 함으로 틀려먹었다는 의미. 남의 모습을 따라만 하게되어, 과감하게 도전하며 새롭게 만들어내는 열정을 죽여버린다. 식어버린 감각은 끝내 무디어지고 나만의 세계를 드러낼 방법을 잃게 만든다. 유행을 좇으며 흉내만 내는 일은 예술가에게는 금기인 셈이다. 그 뿐 아니다. 일본 소니(SONY)의 공동창업자 이부카마사루(井深大)는 ‘비즈니스나 과학기술의 세계에서 진짜 성공에 이르려면, 남을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하였다.‘효자손’을 경계한다. 관광지마다 똑같은 효자손이 어르신의 등을 시원하게는 하겠지만, 지역의 독특한 관광효과를 드러내는 데에는 빵점이다. 도시마다 도심재생을 한다면서 서로서로 닮은 모습의 시가지를 끝없이 반복하며 조성하는 모습은 애처롭다. 상상과 창의의 부재라기보다 추격과 모방에 붙들리다 보니 생겨난 결과가 아닐까. 지역에는 그곳에만 있는 그 무엇이 틀림없이 있다. 아니 있어야 한다. 우선 내가 가진 이야기를 찾아야 하고 이를 오늘의 모양으로 다시 빚어야 한다. 동네마다 마을마다 이야깃거리는 한가득이다. 문화와 예술이 똑같은 이야기로 수렴한다면 웃음거리가 아닐까. 우리 지역에서만 만날 수 있는 이야기를 찾아야 하고 다음세대와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오늘의 모습으로 다시 만들어야 한다.미국 가수 리 안 워맥(Lee Anne Womack)은 “세상을 정말로 놀랍게 하고 싶다면, 무엇인가 다른 시도를 반드시 해야하고 실패할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고 하였다.다른 곳에는 없는 무엇을 만들어야 한다.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을 반복하면 안 된다. 여기서만 만날 수 있어 이곳으로 사람을 끌어올 꿈을 가져야 한다. 내게는 있으나 남들에게는 없는 그 무엇을 찾아야 한다.‘사람들이 모두 남들이 되어간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경고는 섬칫하다. 남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찾고 살피며 그들의 삶을 모방하고 추격만 하느라 나의 모습은 잃어간다는 게 아닌가. 끝내 나 자신이 아니라 남이 되어가는 현대인이 살아가는 모습을 아프게 꼬집는다.도시마다 지역마다 특색있고 풍성하게 다른 모습들을 만나고 싶다. 포항의 색깔은 무엇일까. 지역의 이야기는 어떤 스토리라인을 가져야 하는지. 시가지의 저녁 풍경은 어떤 빛을 발해야 할까. 이곳의 사람들에게는 어떤 향기가 느껴지는지. 끊임없이 찾고 물으며 살펴야 한다. 독특하고 새로운 그림이 그려져야 하고,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는 색깔이 피어올라야 한다. 포항만의 삶이 있다. 여기에서만 발견하는 기쁨과 슬픔이 있고 우리만 느꼈던 즐거움과 상처가 있다.문화와 예술이 관광자원이 되고 지역이 도시브랜딩으로 성공하려면 우리만의 상상과 창의가 살아나야 한다. 우리만의 향기와 그림을 피우고 그려야 한다. 구경꾼을 부르고 사람이 모이는 지역이 되어야 한다.

2022-09-21

군위군 대구 편입에 ‘몽니’ 부리는 경북의원

군위군의 대구 편입이 경북 국회의원들의 몽니로 물 건너가는 분위기다.국회는 20일 군위 편입 법안을 심사하는 상임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 관련 법안을 안건으로 상정하지 못했다. 지난 2월에 이어 두 번째다. 이 때문에 대구시와 군위군이 목표로 한 내년 1월 1일 편입은 어려워졌다. 자칫 통합신공항 출범에도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군위군의 대구 편입은 군위·의성으로 대구경북통합신공항 건설 부지를 선정할 때 전제 조건으로 대구시·경북도, 지역 정치권이 합의한 사안이다.하지만 경북 정치권에서 발목을 잡고 있다. 김형동 의원 등 일부 국회의원들이 시간을 두고 논의할 것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신공항 안이 나온 뒤 편입을 추진하자는 것이다. 결국 다음을 기약하게 됐다. 상임위 심사, 본회의 통과 일정도 자동으로 미뤄졌다. 다음 법안심사소위는 국정감사 일정 등을 고려하면 11월은 돼야 열린다. 의원들의 몽니가 계속될 경우 군위 편입과 통합신공항 계획도 어그러진다.지역에서는 이미 합의된 사안을 경북 일부 의원이 정치적 목적으로 흔들고 있다며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홍준표 대구시장은 21일 다음 총선에서 시도민들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어름장을 놓고 “TK 미래보다 자기 것만 챙기려는 책동은 국사를 볼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맹비난했다. 홍 시장은 선관위가 군위군 2만3천명이 대구시로 편입돼도 경북 선거구의 변동이 없다고도 했다. 그런데도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선거구 변동이 없다면 의원들이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경북도세 약화 우려도 통합신공항으로 인한 인구유입 및 경제적 부가가치 창출로 상쇄하고도 남는다.대구시가 방안을 찾고 있지만 묘수 찾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다만 국민의힘 새 원내대표로 뽑힌 주호영 의원 등의 중재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다. 대구시는 속앓이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정치권과 함께 적극적으로 나서라. 정치인의 몽니로 지역 대계가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

2022-09-21

포항의 防災시스템 구축, 국책사업화해야

태풍 ‘힌남노’로 심각한 피해를 당한 포항시가 향후 100년을 대비하는 새로운 도시방재시스템을 갖추기로 했다. 이강덕 포항시장은 지난 20일 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태풍피해는 하천과 빗물펌프장 등 도시 방재시설물 기능의 한계 때문에 더 심각했다. 재난 양상이 과거 경험이나 데이터에 의존해서는 한계가 있음이 드러난 만큼 시설물 설계 성능을 최소 100년 이상 대폭 상향하는 재난방재의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포항시는 곧 ‘도시 안전진단 및 방재 종합계획 수립 용역’을 발주할 계획이다.포항시가 안전도시 구축을 위해 2035년까지 단계별로 추진할 방재시스템 개선에는 총 2조8천억원 규모의 예산이 투입된다. 가장 핵심적인 사업은 ‘도시 외곽 우회 대배수터널 건설’이다. 이 사업은 포항 인근 산악지대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냉천·칠성천·양학천·두호천 등 하천에 모이지 않도록 빗물의 유입 경로 자체를 끊어버리고 바다로 바로 흘러가는 터널(총연장 28㎞)을 만들겠다는 내용이다. 이번 태풍피해가 연안 만조시간에 포항제철소 인근 냉천이 범람하면서 심각해졌기 때문에 근본적인 대비책을 세우겠다는 것이다.연안 침수위험지역과 하천하류지역의 안전장치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차수벽(총연장 60㎞)을 설치해 하천 범람에 대비하기로 했다. 저지대침수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도심 저류지를 확충해서 빗물 수용능력을 높인다는 계획이다.포항시가 준비하고 있는 방재시스템은 도시계획을 전면적으로 새로 짜는 대규모 사업이다. 문제는 예산 확보다. 도시외곽을 우회하는 대배수 터널공사에는 1조3천억원, 차수벽 설치에는 1조2천억원, 도심저류지확충에는 3천억원이 소요된다. 평상시와 같은 예산확보로는 엄두도 못 낼 돈이다. 철강산업이 집적된 포항은 태풍길목에 위치해 있는 만큼, 정부도 포항의 방재시스템 구축사업을 국책사업으로 인식해야 한다. 포항시는 이번 태풍피해를 계기로 정부와 여·야 정치권을 상대로 특별법 제정 등을 통해 지속적인 예산투입이 가능하도록 총력을 쏟아야 한다.

2022-09-21

구애 아닌 명백한 범죄 스토킹

홍성식 특집기획부장 상대방 의도와 무관하게 장기간 쫓아다니면서 피해자의 정신과 신체를 고통스럽게 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스토킹(Stalking).얼마 전에도 스토킹이 살인으로 이어진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해 사회적 관심을 끌었다. 지난 14일 밤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 여자화장실에서 31세 전주환 씨가 서울교통공사 입사 동기인 28세 여성 역무원을 흉기로 살해한 사건이 세상을 놀라게 했다.스토킹 피해자가 신고한 지 1분 만에 동료들과 사회복무요원이 도착했고, 10분이 지나지 않아 구급대가 출동했지만 죽음을 막을 수 없었다. 피의자 전 씨는 불법촬영과 스토킹 혐의로 살해된 피해자에 의해 고소된 상태였고, 재판이 진행 중인 상황이라 충격은 더 컸다.스토킹 피해자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경찰의 대처와 피의자의 구속영장을 기각한 법원을 향한 비판의 목소리도 비등하고 있다.피의자는 이미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과 카메라 등 이용 촬영물 소지 혐의로 기소된 전력이 있음에도 이를 간과했다는 지적도 나온다.스토킹에 의한 피해는 이전부터 있었음에도 1999년 발의된 ‘스토킹 처벌법’은 20년 넘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 법이 시행된 건 지난해 10월. 스토킹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3년 이하 징역 또는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며, 흉기 또는 위험한 물건을 이용해 스토킹을 저지른 사람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게 스토킹 처벌법의 골자. 그러나, 이 법만으론 피해자 보호 조치가 미흡하다는 의견도 많다.스토킹에 있어 법 제정과 시행 이상으로 중요한 건 상대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의 접근은 구애가 아닌 범죄행위라는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 아닐까./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2-09-21

일회용품 천국

우정구 논설위원 얼마 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이주환 의원이 환경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의하면 지난해 국내 카페 프랜차이즈 14곳과 맥도널드 등 패스트푸드업체 4곳에서 사용한 일회용 컵의 수가 10억개를 넘었다. 올 상반기 중 이들이 사용한 컵만 5억2천여만개로 밝혀졌다.실제 국내서 사용되는 일회용컵의 양은 이보다 훨씬 많다고 보면 우리는 가히 일회용품 천국에 살고 있다해도 지나치지 않다.우리나라는 2016년 조사에서 연간 1인당 플라스틱 소비량이 98.2kg으로 세계 1위다. 일본의 66.9kg보다 약 47%가 많다. 플라스틱은 ‘20세기 선물’로 불릴만큼 처음 개발후 150년동안 인류의 삶을 지배했다. 값싸고 가벼운 데다 내구성이 좋아 인류의 삶을 아예 점령해 버렸다.그런 플라스틱이 이제 공해로 다가와 우리의 삶을 짓누르고 있다. 대기오염과 수질오염은 물론 제3의 산업공해로까지 불린다. 머잖은 장래에 인간이 플라스틱 산에 파묻힐 위험에 빠질 지도 모른다.플라스틱 일회용컵은 자연 분해되는 기간이 대략 500년이다. 종이컵은 20여년정도 지나야 자연속에서 분해될 수 있다고 하니 인간이 편리하기 위해 만든 제품이 되레 큰 짐으로 되돌아온 세상이 됐다.종이컵 250개를 만드는데 소나무 1그루가 필요하다고 한다. 특히 코로나 여파로 일회용컵의 사용은 거침없이 늘어나는 추세다. 개인컵을 사용하면 환경보호도 하고 돈도 절약할 수 있는 줄 알지만 종이컵의 편리함을 소비자들은 쉽게 외면하지 못한다.6월로 예정됐던 일회용컵 보증제가 12월부터 다시 시작된다고 한다. 정부의 규제나 단속보다 환경의 중요성을 먼저 깨닫고 소비자가 솔선수범하는 사회 분위기 조성이 지금부터 시작돼야 한다./우정구(논설위원)

2022-09-20

정부의 ‘포스코 재해 책임론’ 철회 바람직

이창양 산업부 장관이 그저께(19일) 국회 산자위 회의에서 태풍 ‘힌남노’ 영향에 따른 포항제철소 침수 피해와 관련, “경영진 문책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이 장관은 “경영진 문책 등은 현재 고려하지 않고 있으며 거버넌스(지배구조) 등에는 관심이 없다. 다른 의도나 목적은 산업부로서는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지난 14일 열렸던 ‘철강 수해복구 및 수급점검 TF’ 첫 회의 당시 “태풍이 충분히 예보된 상황에서도 큰 피해가 발생한 이유에 대해 중점적으로 따져보겠다”고 했던 이 장관의 발언수위가 한층 낮아진 것이다. 이 장관은 다만 “이전에 태풍 예고가 많이 되면서 기업도 사전 준비할 시간이 좀 더 주어졌기 때문에 더 강하게 준비해야 했다는 아쉬움도 있다”며 여운을 남겼다.정부는 일단 포항제철소 재해 원인에 대해 포스코가 자체분석한 판단을 수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 같다. 포스코는 이번 재해를 포항 앞바다 만조시간대에 폭우가 쏟아지면서 인근 냉천이 범람해 발생한 자연재해로 보고 있다. 포스코 측은 이와함께 역대급 태풍이 예고되면서 전 공정 가동을 미리 중단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는 한편, 태풍종합상황실 운영, 배수로 정비, 물막이 작업, 안전시설물 점검, 비상 대기 등을 통해 회사가 대비할 수 있는 사전조치를 모두 취했다는 입장이다.지금 포항제철소 재해현장은 전쟁터나 다름없다. 복구작업도 위험하기 짝이 없어 전 직원들이 바짝 긴장해 있다. 이런 상태에서 경영진을 상대로 책임을 묻겠다며 복구현장을 조사하고 다니겠다는 발상은 상식에도 어긋난다.산업계에서는 포스코가 포항제철소 정상화 기간으로 제시한 3개월을 넘기면 자동차, 조선, 가전 등 국내 주요기업의 피해가 빠른 속도로 확산될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는 포스코가 재해복구작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다각도로 지원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정부가 산업위기대응 선제지역 지정 등을 통해 포항제철소 복구지원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은 바람직하다.

2022-09-20

정치권은 왜 포스코 재해를 주목할까

심충택 논설위원 지난 19일 국회에서 열린 산자위 회의에서 민주당 김회재 의원은 “포스코 포항제철소 전 직원들이 추석 연휴, 주말 가리지 않고 피해복구에 매진하고 있는데 산업부가 이를 돕기는커녕 이때다 싶어 오히려 책임을 가리겠다고 한다”며 이창양 산업부 장관을 질책했다. 산업부가 포스코를 상대로 태풍 대비 사전 대응이 적절했는지 과실여부 조사에 나서겠다고 발표한 것과 관련해 부적절성을 지적한 것이다. 이 장관이 이에 대해 “경영진 문책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현재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해명했지만, 뒷맛은 개운치 않다.산업부는 앞서 포항제철소 재해와 관련해 ‘민관 합동 철강 수급조사단’을 구성했다. 포스코측이 피해 상황과 정상화까지 걸리는 시간 등을 축소 보고했는지부터 사전 대비와 사후 대책에 문제가 없었는지 등을 조사하기 위해서다. 정치권과 재계에선 이와 관련해 정부가 포스코 경영진에 대한 문책성 조사에 나섰다는 소문이 퍼져있다.지난 주말(16일) 국회에서 열린 국민의힘 원내대책회의에서 성일종 정책위 의장이 느닷없이 포스코 재해를 거론하면서 이 소문은 팩트가 되다시피 했다. 성 의장은 “세계적인 수준의 대한민국 대표 제철소가 미리 예고된 태풍에 철저히 대응하지 못하고 73년 창립 이래 50년만에 셧다운된 점은 분명히 그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며 정부에 이어 ‘경영진 책임론’을 다시 제기했다. 그저께 산자위 회의에서 국민의힘 이인선 의원(대구수성을)도 “포스코 내부에서 재해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보고가 있었는데 경영진이 예측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포스코 재해의 인재(人災) 가능성을 언급했던 것과 맥을 같이하는 발언이다.포스코 측이 누차 해명했듯이, 이번 포항제철소 재해는 태풍길목에 있는 제철소 인근 냉천이 범람하면서 손 쓸 새도 없이 갑자기 발생했다. 재해가 포스코 경영진의 예측 범위 밖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은 아직도 포스코측이 사전에 대비가 부족해 피해를 키웠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정부가 포스코 경영진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정상 가동 시점에 대한 예상에서도 감지된다. 포스코는 올 연말까지는 철강 완제품 생산을 할 수 있다는 예측을 하고 있지만, 정부는 복구 과정이 얼마나 걸릴지는 아직 불확실성이 많다고 보고 있다. 현재 포스코그룹은 전 계열사 임직원들이 모두 포항제철소 복구작업에 매달리고 있다.정부·여당과 포스코가 수해의 원인부터 복구 기간까지 이견을 보이면서, 사실상 포스코가 여권과 맞서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민주당이 포스코 경영진 편을 드는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정치권에서는 새 정부 들어 일부 여당의원이 특정 인물을 차기 포스코 회장으로 밀고 있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정책위 의장까지 나서서 포스코 경영진 책임론을 들고 나온 것은 최정우 회장 체제를 흔들기 위한 속셈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권 마음은 재해복구보다 콩밭에 가 있는 것 같다.

2022-09-20

태풍 피해 지역에 좀도둑이 극성이라니

잇단 대형 태풍으로 국민이 몸살을 앓고 있다. 대구·경북은 그제 제14호 태풍 난마돌이 지나갔다. 큰 피해는 없었다.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11호 태풍 힌남노로 인한 피해 복구에 정신이 없는 마당이었다. 거기에다 또다시 태풍이 대구·경북을 강타했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이 안 된다. 피해 규모는 차치하고라도 피해 복구는 손을 놔버릴 상황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스쳐 지나간 태풍에 그나마 안도할 뿐이다. 민관군이 합동으로 태풍을 대비한 것도 피해 최소화에 단단히 한 몫 했다.태풍 힌남노가 휩쓸고 지나간 포항과 경주지역은 지금 피해 복구에 안간힘이다. 자원봉사자들이 몰려와 복구를 돕는 등 온정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 어려운 이웃에 손길을 내미는 국민성이 빛을 발하고 있다.그런데 침수 피해 현장에 좀도둑이 날뛰고 있다고 한다. 포항시 남구 대송면 제내리 등 태풍으로 침수된 집과 차량이 절도범들의 표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수해를 입은 주민들은 경황이 없다. 복구 인력과 자원봉사자 등이 몰려 유동인구가 많다. 절도범들이 이런 허점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뻘로 변한 집과 점포에 문을 열어 놓거나 귀중품을 차량에 두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 틈을 노려 말리기 위해 바깥에 내놓은 가구를 들고 가거나 트럭까지 몰고 와 생활용품을 훔쳐 가고 있다는 것이다.경찰은 지난 6일부터 9일까지 나흘간 심야 시간을 틈타 태풍 피해가 심각했던 포항시 남구 일대를 돌며 침수된 차량 안에 있던 현금과 신용카드 등 금품을 훔친 50대를 구속하기도 했다.피해 복구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쪽박을 깨뜨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재민들을 두번 울리는 겪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성숙한 시민의식이 아쉽다. 우리는 예로부터 환난상휼이라고 해서 주변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서로 돕는 아름다운 전통을 면면이 이어 오고 있다. 십시일반으로 나서 피해복구를 돕고 위문금품을 보내 이재민들이 조속히 시름을 벗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2022-09-20

정치는 썩어도

조현태 수필가 필자 카톡에 올라온 아름다운 글이 있다. 좀 더 널리 공개하고픈 욕심이 발동한다. 지금 그 내용을 지면에 소개하려 한다.인터넷과 SNS를 통해 컴퓨터를 판매하고 있는 사장님이 경험한 이야기다.며칠 전 사장님이 어떤 아주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초등학교 6학년인 딸은 서울에서 할머니 보호를 받으며 어렵게 생활하고 있단다. 전화를 건 아주머니는 지방에서 따로 생활하는 중이지만 어린 딸에게 중고 컴퓨터라도 구입해 주고 싶어서 전화했단다. 열흘쯤 지나서 쓸 만한 컴퓨터가 나타났다. 아이가 할머니와 살고 있다는 서울 주소로 컴퓨터를 싣고 갔다. 다세대 건물 단칸방에 부업 일거리를 잔뜩 쌓아놓은 걸로 봐서 구차한 형편인가 보았다. 컴퓨터를 조립하는데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보고 환호하며 춤추듯 좋아했다. 할머니는 손녀 어깨를 토닥이며 열심히 공부하라고 네 엄마가 사 준 컴퓨터라고 설명했다.사장님이 설치를 마치고 큰길에 나오니 정류소에 그 아이가 학원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슴없이 학원까지 태워다 주기로 했고 학원 방향으로 십분 쯤 갔을 때 아이가 갑자기 화장실이 너무 급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화장실이 있을 법한 가게 앞에 차를 세워주자 사장님더러 그냥 가라면서 황급히 건물 안으로 뛰어갔다. 무심코 아이가 앉았던 자리를 보는 순간 검붉은 핏자국을 보고 깜짝 놀랐다. 첫 생리인 듯했다. 아마 속옷과 바지까지 버렸을 것이다. 당황하며 급하게 뛰어내린 아이 얼굴이 겹쳤다. 당장 화장실에 혼자 가서 어떻게 할까. 아이가 화장실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텐데. 첫 생리를 엄마 없이 겪어야 하는 아이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사장은 어찌할 바를 몰라 울상 짓고 있을 아이가 떠올라 마음이 급해졌다. 속옷과 생리대라도 구입하기 위해 멀리까지 찾아다녔으나 사장님이 해결할 사안이 아니었다. 바로 아내에게 전화했다. 즉시 택시 타고 오면서 전화하라고 일렀다. 아내는 위급한 상황을 짐작하고 택시 안에서 사장님의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어떤 물품들을 구해야 하는지 남편에게 차분하게 지휘했다. 드디어 도착한 아내가 남편이 구입한 물품들을 가지고 그 화장실로 갔다. 잠겨있는 화장실 앞에서 “얘야 컴퓨터 아저씨네 아줌마다. 안에 있니?” 울먹이며 겨우 대답하는 소리를 듣고 안으로 들어가 잘 처리해주었다. 평범한 가정이라면 축하와 함께 조촐한 파티라도 벌였을 터인데 낯선 화장실에서 혼자 얼마나 곤란하고 무서웠을까 콧날이 시큰해진다. 다시 남편에게 꽃도 한 다발 사라고 전화한다. 눈이 부어서 머쓱해있는 아이에게 꽃다발을 안겨 보내고 돌아오다가 아내가 말했다. 컴퓨터 값 22만원을 되돌려주고 싶지만 중고 컴퓨터 값이 내렸다고 둘러대고 10만원이라도 할머니께 갖다 주자는 통 큰 제안을 했다. 그날 밤 늦은 시각에 아이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중고 컴퓨터 구입한…”말을 잇지 못하고 목이 매여 울먹이는 소리만 들렸다. 사장님도 아내도 아무 말 못하고 충혈된 눈에서 따뜻하고 맑은 물이 흘러내렸다.정치는 썩어도 우리 사회가 아직은 괜찮다는 카톡 메시지다.

2022-09-20

대통령 곁에 어쩌다 있게 된 탓일까(?)

이명균 창원대 명예교수 정치경험이 거의 없이 떠밀려 대통령 되신 분은 국정 전반에 걸쳐 모르는 부분이 많은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정부의 주요 정책들이 ‘공정과 상식, 법과 원칙’에 맞는지를 대통령이 잘 챙기면 된다. 그러나 각 부처장관들은 밤새워 연구하고 배워서라도 부처 업무 특성들을 자세하고 정확하게 파악하여야 한다.최근에 행정안전부 장관이 지방경제회생과 인구분산 등 지역균형발전정책으로 현 대통령 임기 내에 대기업 3~5곳과 주요 대학, 특목고의 지방이전 추진을 밝혔다고 보도됐다. 해당 장관은 “젊은이들이 지방으로 가려면 대기업이 내려가야 하며, 공공기관 이전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대기업이 지방으로 가기 위해선 대기업에 인재를 공급할 주요 대학과 대기업 직원 자녀들이 공부할 특목고를 세트로 묶어 같이 보내야 한다”고 하였단다. 장관은 또한 “20대 대기업의 본사나 공장, 서울대·연세대·고려대·서강대 등 주목을 끌 만한 주요대학, 특목고를 함께 내려 보내야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구체적 언급까지 하였단다.기업이란 사회의 생산단위로서 각 기업마다 특정한 영역이나 분야에서 사람들 생활에 필요한 재화를 생산판매하거나 그에 따른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제활동 조직체이다. 반면에 학교란 대학이든 고등학교이든 사회의 전 분야에서 활동할 다양한 인재들을 교육하는 곳이다. 그런데 그러한 학교를 특정 기업에 인재를 공급할 기관으로 간주하여 세트로 묶어 지방으로 보내는 정책을 추진하겠다니 정말 어이가 없다. 대학을 특정 분야의 직업훈련소 정도로 생각하거나 특목고를 특정 대기업 직원들을 위한 사설학원처럼 여긴다는 말인가? 장관이라는 분이 기업도 제대로 이해 못할 뿐만 아니라 학교를 옛 서당 정도로 생각하는 수준 같다.기업유치를 위해서는 지방자치단체와 정부가 함께 노력하여 해당 기업이 그 지역에서 활동하기에 가장 적합한 여건을 만들어주면 될 것이다. 그러나 학교란 극히 일부 전문분야를 제외하고는 특정한 지리적 여건과 학생들의 교육과는 상관성이 별로 없다. 학교는 어디에 위치하든 교육을 열심히 잘 시키면 될 것이며, 학부모들의 거주지가 멀리 떨어진 경우는 기숙사제도를 잘 운영하면 된다. 정부의 정책수립과 이행을 여행사의 여행 상품판매나 마트의 세일행사처럼 세트로 묶어서 추진하겠다니 참 희한한 발상이다. 백보 양보해서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충심 끝에 떠오른 생각이라 간주하더라도 관련 부처나 전문가들의 의견을 먼저 들은 뒤에 언급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구상한 정책에 대한 타당성이나 가능성을 짚어보지도 않고 언론 인터뷰에서 그것도 현 대통령 임기 내에 추진하겠다고 먼저 말했다니 무슨 영웅 심리나 조급증에서 나온 발언인가 싶다.얼마 전 교육부 장관이 대통령 업무보고 사전 브리핑에서 ‘만 5세 초등학교 입학’에 관한 내용을 섣불리 발표했다가 35일 만에 사퇴하였다. 어쩌다 여당으로, 어쩌다 장관으로 보이는 모습들 때문에 대통령이 그저 안쓰럽기만 하다.

2022-09-20

돈쭐내드립니다

어린 시절 추억을 자극하는 짜장면. 내가 사는 동네에 ‘복무춘’이라는 오래된 중국집이 있다. 나는 매일 그 집 앞을 지나간다. 춘장 볶는 냄새, 양파와 돼지고기가 커다란 웍에서 지글지글 볶아지는 소리, 달콤새콤한 탕수육 소스 향기, 윤기가 반들반들한 짜장면과 얼큰해 보이는 짬뽕… 시각과 후각, 청각을 모두 사로잡아 유혹하는데, 미치겠다. 다른 음식들도 침샘을 자극하지만 짜장면만큼 강력하진 않다. 짜장면은 내 소울 푸드다.어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 집에 들어갔다. 짜장면 한 그릇 시켜 맛있게 먹었다. ‘역시 이 맛이야’, 계산하려는데, 카드 단말기가 고장 났다고 한다. 아주머니께서 그냥 다음에 갖다 달라신다. 아니, 요즘 어떤 세상인데. 금방 은행 들러 현금 뽑아 갖다 드렸다. 삐거덕 소리를 내는 낡은 철문을 열고 나오자 옛 추억이 하나 떠올랐다.어릴 때 동네에 영빈관이라는 중국집이 있었다. 엄마한테 듣기로는 아버지 친구분이 하시는 집이었다. ‘아빠 친구 식당이니까 짜장면 한 그릇쯤 그냥 주겠지’ 싶어서 중학교 1학년 어느 날 친구랑 그 집엘 가 “저 가방공장 아들인데요” 했더니 정말 공짜로 먹었다. 그 후로도 몇 번 더 그랬다. 하루는 친구들 잔뜩 데리고 가 “나만 믿어” 큰소리치고 짜장면 한 그릇씩 먹였다. 어깨가 으쓱했다.이제 와 기억하니 내가 “가방공장 아들”이라고 했을 때 주인 내외분은 어리둥절해 했던 것 같다. “누구라고?” 한참 골똘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같다’가 아니라 ‘다’, 확실하다. 그 시절 동네엔 영빈관 말고도 신흥원, 양자강 등 다른 집들도 있었으니, 아마 엄마가 다른 집과 착각했거나 영빈관 주인께서 아버지와 친우관계가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맹랑한 소년의 터무니없는 공짜 주문이었지만, 내가 올 때마다, 심지어 친구들까지 데리고 오는 날에도 “곱빼기로 줄까”, “밥도 줄까”, “더 먹어라” 하셨다. 자식 같아 귀엽고 한편으론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그런 정이 있던 시절이었다.요즘 온라인에서 ‘돈쭐’이라는 신조어가 유행이다. ‘돈’과 ‘혼쭐’의 합성어인데, “돈으로 혼쭐을 내준다”는 의미다. 결식아동이나 독거노인들을 돕는 등 남몰래 선행을 해온 사실이 알려지거나 정직한 양심으로 오랜 세월 장사했음에도 건물주의 갑질 등 횡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른바 ‘착한 가게’들을 찾아가서 매상을 잔뜩 올려주는 게 ‘돈쭐’이다.한 학생이 치킨이 먹고 싶다며 떼 쓰는 어린 동생 손을 잡고, 가진 돈 전부인 5천원을 꼭 쥔 채 치킨집 앞을 서성였다. 장사가 안 돼 가게 앞에 나와 밤하늘을 보며 한숨 쉬던 치킨집 사장님은 대번에 어떤 상황인지 파악했다. 5천원어치만 먹을 수 있냐고 묻는 형제에게 가게에서 가장 비싸고 맛있는 치킨을 푸짐하게 내줬다. 코로나로 매출이 반토막 나 월세마저 밀렸지만, 돈은 받지 않았고, 아이들에게 알사탕을 쥐어줘 보냈다. 그 후로 초등학생 동생은 몇 번 더 가게를 찾아갔다고 한다. 이 미담은 고등학생인 형이 치킨집 본사로 편지를 보내 알려지게 됐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할머니와 함께 살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중이라고 한다. 사연이 알려지자 네티즌들은 가게 상호와 위치를 공유해 그야말로 잔뜩 ‘돈쭐’을 내줬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중학교 교복을 입으면서부터 학교 마치고 집에 오면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수년째 지방 어딘가에, 엄마는 식당에, 포장지 공장에, 인력사무소에. 그래서 나는 학교 마치면 할아버지 할머니 도와 폐지 줍고, 혼자 사당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공 던지고 공 차고, 혼자 철가방 들고 분식집 오토바이 배달하고 그랬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아무 데서나 자고 어디서 싸우다 두드려 맞고 그랬다. 술 취해 비틀거리는 새벽길에 교회 지하 기도실에 가 혼자 기도했다. 가족들이 다시 모여 살 수 있게 해달라고.이젠 그 비틀거리던 날들도 다 추억이 됐지만, 짜장면 냄새는 아직도 코끝에 향기롭다. IMF 사태로 아버지 가방공장 망하고, 얼마 안 가 영빈관도 없어졌다. 기억난다. 춘장 볶는 냄새가 달큼했던, 사진관 맞은편 속옷가게 건물 그 지하 식당. 엄마가 돈 빌렸다는 계란집을 피해서 일부러 빙 돌아 숨어 들어가던,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짜장면이 있던 그 중국집. 지금도 어디선가 장사하고 계시다면, 그분들을 찾아가 돈쭐을 내드리고 싶다.

2022-09-20

가을비와 감자수프

가을비가 내린다. 창가에 앉아 있으면 비릿한 물의 냄새가 난다. 올해는 비와 관련된 사고가 많았으므로 젖은 아스팔트나 짙게 물든 나뭇잎을 바라보는 일이 그리 유쾌하지 않다.그저 창문에 달라붙은 빗방울이 한 곳에 오래 맺혀 있는 장면을 응시한다. 가늘고, 연약하고, 지나치게 투명한 비. 세상 위로 두터운 솜이불이 덮인 듯 침울하고 잠잠하다.변화하는 계절에 앞서 해야 하는 몇 가지의 일이 있다. 첫째는 지금 살고 있는 낡은 집에 외풍 새지 않도록 창문 보수 공사를 해야 한다. 찬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PVC 재질의 얇은 투명막을 창문 표면에 붙이고, 틈 사이사이엔 ‘뽁뽁이’라 부르는 롤에어캡을 촘촘히 두른다. 그리고 지난 봄 한 쪽에 잘 개켜두었던 두꺼운 천을 가져와서 그 위를 덮는다. 그럼 투명막과 뽁뽁이가 가려져서 훨씬 보기 좋다.간단 보수가 끝났다면 옷장 깊은 곳에 넣어두었던 가을 옷을 꺼낸다. 세탁해야 하는 옷과 그만 버려야 하는 옷들을 분류한다. 지나치게 상태가 좋은 건 중고 장터에 팔기도 하고, 영 상태가 엉망인건 버리기도 한다.그렇게 부지런히 집 안을 움직이다보면 어느새 금방 배고파진다. 가을 더위는 여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금새 열이 오르고 금방 식는다.근사한 식사를 차리기엔 미처 체력이 도와주지 않고, 그렇다고 간단히 끼니를 때우기엔 아쉬울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감자를 얇게 썰어 버터와 우유를 넣고 푹 끓여내는 감자 수프다. 감자의 은은한 단맛과 부드럽고 느끼한 크림의 맛이 어우러져 단짠딴짠한 맛이 잘 살아있는데다 따스한 목넘김이 좋은 요리다.재료 준비는 간단하다. 버터 한 두어 조각, 양파, 감자, 우유, 크림, 체다 치즈 정도만 있으면 된다. 중간 크기의 감자 2-3개를 찬 물에 잘 씻은 다음 얇게 썬다. 한손에 단단하게 잡히는 감자의 촉감도 좋지만, 무엇보다 울퉁불퉁한 감자를 찬 물에 부드럽게 흘려 흙탕물을 씻겨 낼 때의 기분이 좋다.짙은 갈색의 껍질을 벗겨내 하얗고 미끌미끌한 감자의 속을 드러내는 과정 또한 케케묵은 반복의 일상을 반짝이게 닦아내는 기분이 든다.재료 준비가 다 됐다면 준비한 냄비에 버터를 넣고 녹힌 뒤 양파 한 개를 썰어 넣는다. 양파의 단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올 때쯤 썰어둔 감자와 종이컵 기준 물 2컵을 넣고 10분 정도 익힌다. 감자가 쉽게 으깨질 정도로 익었다면 우유 2컵 반과 생크림 2컵을 넣는다.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우유’와 ‘생크림’이다. 우유나 크림 대신 물을 넣으면 특유의 고소한 풍미와 감칠맛이 줄어든다. 불을 끄고 한 김 식힌 뒤에 끓인 감자를 믹서기에 넣어 간다.나는 스프에 감자가 어느 정도 씹히는 걸 좋아해서 제형을 봐가며 적당히 갈아준다. 간 감자 수프를 다시 냄비에 담고 모짜렐라 치즈 2장을 넣어 2분 정도 더 끓이면 완성이다. 그냥 먹어도 맛있지만 후추나 파슬리를 뿌려 먹거나, 빵 두어 조각을 곁들이면 훌륭한 식사가 된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이렇게 만든 감자수프는 마트에서 파는 수프 팩과는 또 다른 맛이다. 물론 손이 많이 가고 재료를 준비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만들어 먹는 수프는 재료 본연의 맛이 하나하나 살아 있다. 게다가 보글보글 수프가 끓을 때의 소리와 냄새는 백 마디의 여러 말보다 따스한 위로가 되어 다가온다. 잘 만들어진 감자 수프가 그릇에 담긴 모양새는 순하고도 무해해서 절로 긴장이 풀어진다.가을은 부엌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은 계절이다. 재료를 물에 씻고 다듬으며 내가 내는 소리에 집중하게 된다. 그럼 여름 내내 멈추어 있던 주방을 다시금 닦고 빛내어 윤택하게 만드는 듯한 기분이 된달까.그간 소음으로 느껴지던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조금씩 새곤 했던 수도꼭지의 물방울 소리, 인상 찌푸려졌던 뜨거운 불이 이제 더는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겨울을 대비해 음식을 구비해 두는 가을 다람쥐처럼, 생활의 애정과 부지런함을 품고선 가을의 한복판으로 나서 본다.

2022-09-20

바닥에는 검은 진흙이 <Ⅰ>

오빠. 나. 이 집 비우려고. 넓은 집에 혼자 지내려 하니 겁도 나고, 이 집에 남아 있을 명분도 없고. 오빠. 나 어떻게 해? 부른 배를 받쳐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는 거야?안나가 노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노마의 답을 기다리며 안나는 자신이 보낸 문자를 다시 읽었다. 엄마는 슬리퍼로 등짝을 후려칠 것이고, 아빠는 돌아 앉아 담배만 피워댈 것이 분명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소파로 몸을 옮겨 등을 기댔다.조금만 더 기다려봐. 필립 형님이 방법을 만들어 본다고 했어. 약속을 했으니 뭔가 말이 있겠지.노마에게서 답이 왔다.몰라. 이번 주까지 기다려보고 별말 없으면 나갈 거야.안나는 노마에게 답 문자를 보내고 핸드폰을 덮었다. 필립 형님? 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다음날 필립의 아내가 왔다.-우리 집 양반이 애 낳을 때까지 우리 집에 들어와 있으라 그러시네요. 그 몸으로 친정으로 돌아가는 것도 좀 그렇고, 이 넓은 집에 혼자 있는 것도 그렇고. 나더러 임산부 케어를 하랍니다.필립의 아내가 안나를 보며 말했다. 장례식장에서도 안나를 챙겨주던 그녀였다.-그래도 될지?안나가 물었다.-몸이 좀 힘들겠어. 친정에 돌아가 봐도 별수 없을 것이고. 싫은 소리만 듣겠지. 간단하게 중요한 짐만 싸요. 오늘 같이 집으로 들어가게. 짐은 내일 사람들 보내서 옮기면 되니까. 내가, 마음이 왔다 갔다 해. 그러니까 빨리 가야 해요.친정이라는 그녀의 말에 안나는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필립의 아내는 안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를 어째, 이를 어째. 안나는 눈물을 흘렸고 필립의 아내는 한숨을 내뱉었다.-아들이래요.어깨를 들썩이던 안나가 울음 끝에 말했다.필립이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회화나무를 마주하고 아내가 서 있었다.-여기서 뭐해?필립이 아내의 옆에 나란히 서며 물었다.-사내아이래요.-무슨 말이야?-안나 씨 뱃속의 아기. 이번에 산부인과 가니 말을 해주더래요. 아버님은 벌써 알고 계셨다 그러네요. 아버님이 다른 사람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 부탁을 하셨다 하네요. 안나 씨한테조차. 그래도 혹시나 잊어버리셨을까 싶어 지금 아버님께 알려드리는 중이에요. 당신이 있는데도 사내아이를 기다리셨잖아요. 대놓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내가 손자를 낳지 못한 것을 많이 섭섭해 하셨어요. 살아계셨으면 무척 좋아하셨겠지요. 그래서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당신 말대로 안나 씨 데리고 왔어요. 일단 애 낳을 때까지 만이라도 같이 있자고 했어요.필립의 아내가 나지막이 말했다. 목소리가 무거웠다.-그래요. 알겠어. 잘했네. 고마워.-지금 안나 씨, 자고 있으니까 조용히 들어가세요. 어째 우리 딸이 저렇게 된 것처럼 마음이 그래요.바람이 불어왔다. 반쯤 접힌 회화나무 잎들이 박수치 듯 흔들거렸다. 현관으로 향하던 필립의 아내가 발걸음을 멈췄다. 필립을 돌아보며 말했다.-가끔 당신 없이 혼자 있는 밤이면 회화나무 아래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아요.-무서워?필립이 물었다.-아니요. 그냥 소리가 나는 것 같을 뿐이에요. 오히려 같이 계신 것 같아서 마음이 편안할 때도 있어요. 누군지 아니까.필립의 아내가 대답했다. 덧붙여 말했다.-아버님이 살아계실 때보다 더 가까이 계신 것 같지 않아요?안나와 필립이 저녁 식탁에 마주 앉았다. 필립의 아내는 안나의 옆에 앉았다. 입에 맞지 않더라도 많이 먹어야 한다며 필립의 아내는 안나의 숟가락에 반찬을 올렸고, 안나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숟가락을 들었다. 필립이 자기 앞에 있던 오이소박이 접시를 안나 앞으로 밀었다.-이것도 좀 먹어 보세요. 우리 집사람이 이거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합니다. 시원하니 맛있어요.안나가 고개를 들어 필립을 보았다. 필립의 아내도 필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감사합니다. 저도, 아기도, 오빠도. 오빠에게 이야기 들었습니다. 로봇 관리사 그만두고 올더앤베러 로봇연구실로 들어가기로 했다고.무슨 말이야? 필립의 아내가 눈짓으로 물었다.-실력이 좋다 하더라고. 실력이 좋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있나. 어차피 우리 회사도 주력사업으로 검토하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고. 그쪽으로 경험도 많으니 회사에 제법 도움이 될 거야. 어찌 되었건 이것도 인연 아닌가, 인연.-회장님도 챙겨주시지 않았던 건데. 저희 부모님도 많이 고마워하세요. 감사합니다.안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부정한 자세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필립의 아내는 안나의 허리와 어깨를 붙잡고 다시 앉혔고, 필립은 안나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 안나가 자리에 앉자 필립이 말했다.-우리 이건 확실히 하도록 하지. 안나 씨나, 뱃속의 아기, 그리고 오빠 노마 씨까지는 나의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들은 해 줄 생각이야. 하지만 안나 씨 부모님은 달라. 나는 안나 씨 부모님까지 인연을 넓힐 생각이 없어. 알겠지. 기억해줬으면 좋겠어./김강 소설가

2022-09-19

공립미술학교의 시작 : 프랑스 왕립미술학교

미술이 본격적으로 제도권 기관에서 교육되어진 것은 1648년 프랑스에서였다. 프랑스 보다 80여 년 앞선 1563년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1세에 의해 피렌체에 ‘아카데미아’가 설립되기는 했었지만 이곳은 미술교육기관이라기 보다는 학술적 논의가 이루어진 미술원의 성격이 강했다. 프랑스 왕립아카데미 역시 미술원의 기능을 일부분 수행하기는 했지만 일차적인 역할은 절대왕정의 통치철학에 부합하는 미술가를 길러내는 것이었다.아카데미에서는 체계적인 교육이 이루어졌고 오랫동안 미술창작의 규준으로 작용하게 될 이론들이 정립되었다. 예를 들어 역사화, 인물화, 풍경화, 정물화, 풍속화 등 주제에 따라 회화 장르를 구분한 것이 아카데미이다. 이렇게 회화를 구분한 것은 장르 간에 서열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역사화는 성서나 신화, 역사적인 사건을 주제로 다룬다. 주로 위대한 인물들의 영웅적인 행위가 묘사되어 있다. 역사화는 가장 높은 서열에 위치해 있다. 반대로 서열이 가장 낮은 회화 장르는 풍속화이다. 풍속화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이야기가 묘사되어 있다. 화가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역사화를 그려야 했다. 오로지 역사화를 그리는 최고 실력의 화가에게만 왕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서양미술사 최초 대규모 전시회의 시작도 아카데미에서 찾을 수 있다. 루이 14세 치하, 왕실에서 추구하는 미술취향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1667년 전시회가 기획되었다. 처음에는 아카데미 강당에 작품을 걸고 시작된 전시회가 왕실의 요청에 따라 매해 정기적으로 개최되면서 몇 차례 장소가 변경된다. 1725년부터 아카데미 전시회 개최장소가 루브르 궁전 살롱 카레(Salon Carr00E9)의 붙박이 행사로 이루어졌고 이때부터 ‘살롱전’이라 불리게 된다.아카데미의 교육과정은 체계화 되어 있었다. 신입생들은 거장들의 작품을 옮겨 놓은 판화를 모범 답안처럼 열심히 따라 그려야 했다. 거장들의 눈을 빌려 구도를 파악하고 인체와 인물 묘사를 익혔다. 그런 후 석고상으로 데생 연습을 한다. 평면을 평면에 모사하는 것과 입체인 석고상을 평면에 옮기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석고상의 입체적인 형태를 분석하고 비례와 균형 그리고 빛이 닿는 면과 그림자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어야 설득력 있는 그림이 만들어진다. 이 과정을 모두 마친 학생들은 실제 모델을 그리는 수업에 참여한다.아카데미는 해마다 ‘로마상’이라는 공모전을 열어 뛰어난 학생을 선발해 로마로 유학할 기회를 주었다. 17세기와 18세기 미술 공부를 위해 유학을 간다면 로마로 향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고대 유적을 직접 접할 수 있었던 로마에서는 아카데미가 모범으로 삼았던 르네상스 최고의 걸작들이 여전히 존재감을 뿜어냈다. 당시 미술의 최신 유행 바로크가 로마에서 발달했고, 각국의 미술가들이 활발하게 교류한 곳이 로마였다. 프랑스 왕실은 로마의 메디치궁을 매입해 그곳에 왕립미술학교 분관을 설치했고, 기량이 뛰어난 학생들을 국가 장학생으로 선발해 수년 동안 유학할 수 있게 있다.프랑스의 이 같은 미술환경 속에서 화가로 성공할 수 있는 엘리트 코스는 다음과 같다. 명망 높은 미술가의 문하생으로 기본기를 다지고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한다. 로마대상을 수상한 후 몇 년간의 유학생활 동안 수준을 한껏 끌어올린 후 파리로 돌아와 살롱전에 출품해 주목을 받고 궁정화가로 발탁된다. 궁중화가로 일하면서 아카데미 교수가 되어 영향력을 펼치면 화가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명예와 권력을 얻게 된다.유럽 여러 나라들은 프랑스를 모범삼아 왕립미술학교를 세웠다. 1713년 마드리드에 스페인 왕립미술학교가, 조금 늦은 1768년 영국 왕립미술학교가 설립되었다. 프랑스 왕립미술학교는 1791년 프랑스 혁명정부에 의해 폐쇄되었다가 1803년 미술학교 보자르(Beaux-arts)로 새롭게 문을 열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김석모 미술사학자

2022-09-19

대구교육청 IB교육 더욱 분발하기 바란다

국제 바칼로레아(IB) 본부 수장인 올리 페카 헤이노넨 회장이 지난 16일 대구시교육청을 방문, IB교육 현장을 둘러봤다. 그는 대구교육청에서 IB교육 참여 학생들의 실력을 높이 평가했다.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IB교육이 대구 교육에 도입된지 수년여 만에 상당한 성과를 내면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대구 교육 현장을 둘러본 본부 수장이 그 성과를 인정하고 있는 마당이다.이날 대구 외국어고를 찾아 영어로 진행하는 IB 수업을 참관한 헤이노넨 회장은 “학생들과 소통의 경험을 했고 IB 프로그램을 통해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의 표현력에 놀랐다”며 “대구 IB 교육을 받은 학생 실력이 뛰어났다”고 소감을 말했다.IB 교육은 주입식 교육에서 탈피, 학생이 스스로 배우고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교육 시스템이다.1968년, 스위스 제네바의 비영리 교육재단(IBO)에서 개발해 현재 전 세계 161개국 5천465교에서 운영 중이라고 한다.IB교육은 강은희 대구시교육감이 추진하는 핵심사업 중 하나다. 대구교육청은 2019년 7월 IB 본부와 협약을 체결한 뒤 IB 프로그램을 꾸준히 확대하고 있다.대구지역에서는 현재 27개 초·중·고가 IB교육에 참여하고 있다. IB교육은 대구가 전국에서도 선두주자로 꼽힌다. 현재 초·중·고에서 나아가 대학까지 연계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 중이다.하지만 아직까지 IB교육은 참여 범위가 소수 학교에 그친다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것도 공립학교가 대부분이다. 프로그램을 담당할 교사들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IB교육은 어떻게 보면 전교조가 추구하는 전인교육과도 궤를 같이하는 측면이 있다. 장벽을 낮춰 가급적 많은 학생들이 교육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학부모들의 이해와 지원도 이끌어내야 한다. IB교육은 우리 교육의 근본 틀을 바꾸는 일종의 교육 혁명이 될 수 있다. 보다 더 정교한 시스템을 갖춰 우리 교육 현장을 일신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구시교육청의 분발을 바란다.

2022-09-19

포항 냉천범람 원인, ‘상류저수지 책임론’

포항지역에 심각한 태풍피해를 가져온 냉천범람의 원인 중 하나가 오어지의 뒤늦은 수문개방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한국농어촌공사의 책임론이 불거지고 있다. 지방하천인 포항시 오천읍 냉천 상류에 위치한 오어지는 주변 농경지 245㏊에 농업용수 등을 공급하고 있다. 오어지의 일자별 저수율을 보면, 지난 5일 56%, 태풍이 내습한 6일 100%의 저수율을 기록했다.태풍 내습 당시인 6일 새벽, 몇 시간 만에 수위가 급격하게 차올랐으며, 저수지 둑을 넘은 물이 대량 방류되면서 하류에 있는 냉천 범람의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저수지 하류 주민들은 “6일 새벽 4시까지는 저수지 물이 넘치지 않았다. 이후 갑자기 물이 넘쳐흘렀고 시간이 지나면서 걷잡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주민들은 저수지 상단에 위치한 방수문(저수율 65% 지점)이 아니더라도, 저수지 하단부에 있는 이수용 수문(수위별로 뚫려 있는 구멍을 통해 농사를 위한 물이 나오는 곳)이라도 열어 저수지 물을 일찍 더 뺐더라면 하류쪽 침수피해가 적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본지 취재결과, 이 저수지의 문제점은 방수문 위치상 저수율 수위 65%가 될 때까지는 물을 빼고 싶어도 뺄 수 없는 구조다. 태풍이 시간당 110㎜라는 엄청난 폭우를 뿌려댔지만, 수위가 방수문에 도달할 때까지 빗물은 계속 저수지에 저장만 됐던 것이다. 이로인해 순식간에 저수지는 만수가 되고 저수지 둑을 넘어 물이 넘치면서 저수지 바로 밑 상가부터 초토화되기 시작한 것이다.하류 주민들은 “농어촌공사에 이수용 수문이라도 개방해 저수율을 낮춰줄 것을 사전에 요구했지만 묵살됐다”고 주장하고 있어, 진상규명을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농어촌 공사는 이와관련 “이수용 수문은 기능 자체가 달라 홍수를 대비해 여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포항시는 냉천범람의 원인을 다각도로 규명해서 앞으로 어떤 강력한 태풍이 오더라도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항구적인 재해방지대책을 세워야 한다.

2022-09-19

대학, 교수 그리고 권력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대학은 ‘진리탐구의 전당’이고, 교수는 ‘가치’와 ‘당위’를 가르치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명을 가지고 있는 대학과 교수들이 권력의 눈치를 봐서야 되겠는가? 김건희 여사의 학위논문 표절과 관련하여 해당 대학과 교수들이 보여준 정치적 행태는 매우 실망스럽다.국민대는 2008년 김건희 여사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했는데, 이미 2007년 국민대 연구윤리위원회는 “타인의 아이디어나 연구내용 등을 인용 없이 도용하는 행위를 표절”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국민대는 최근 표절에 대한 조사결과 발표에서 “베꼈다 해도 연구내용의 핵심 부분이 아니면 괜찮다”는 매우 정치적인 판정을 함으로써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졌다.이에 국민대 교수회는 자체 재검증을 위해 전체교수투표를 추진했으나 대학본부와 교무위원들의 개입으로 찬성 38.5%, 반대 61.5%로 부결되었다. 이는 대학과 교수들이 ‘지성적 판단’을 하지 않고 ‘지능적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식인의 침묵이 범죄’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권력 앞에 좌고우면(左顧右眄)한 대학과 교수들이 내린 정치적 판단은 ‘역시 Yuji대’라는 오명(汚名)을 남겼다.논문 표절의 피해자인 숙명여대 구연상 교수는 “출처를 숨기는 표절은 정신적 도둑질”이라고 하면서 “국민대가 도둑질을 방치한 악행을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자신의 논문을 “인용부호, 각주, 참고문헌 없이 몰래 따왔기 때문에 100% 표절이 맞다”고 반박하면서 “어떻게 그런 논문이 통과되었는지 불가사의하다”고 비판했다.나아가 전국 14개 교수·학술단체는 ‘김건희 여사 논문표절 검증을 위한 범학계 국민검증단’을 구성하여 1개월여 조사 끝에 그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해당 박사학위논문은 구연상 교수의 논문 외에도 9명의 논문을 표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해피캠퍼스, 디지털타임스, 점집 홈페이지, 사주팔자 블로그 등에서 복사 또는 짜깁기했음이 밝혀졌다. 인용 출처는 대부분 표시되지 않았고, 정상적으로 표기된 것은 187쪽 가운데 8쪽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이러한 엉터리 논문을 표절이 아니라고 판정했으니 어이가 없다. 물론 교육부의 행·재정적 지원과 감독을 받아야 하는 국민대로서는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곤혹스러움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의와 진리의 전당인 대학이 취해야 할 태도가 아니다. 대학의 정의가 무너지면 나라의 정의도 무너진다. 최고의 지성인 교수들이 불의와 야합한다면 나라의 정의는 누가 지키는가?‘학생과 동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대학’이 있고, ‘교수를 부끄럽게 만드는 교수들’이 적지 않다. 교수가 ‘올바른 교수의 길’을 가려면 ‘권력과 일정한 거리두기’를 해야 한다. 권력의 주구(走狗)노릇을 하는 정치교수들은 교수라고 할 수 없다. 표절 당사자인 김건희 여사의 사죄와 학위반납은 물론, 논문의 지도교수와 심사교수들도 책임을 통감하고 사과해야 한다. 대학은 대학답고 교수는 교수다워야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다.

2022-09-19

가을 전시회 감상법… 푼크툼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하늘이 높고 푸른 가을철, 사진작품이나 옛 유물, 미술작품 전시회를 찾을 기회가 많아졌다.이런 전시회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법으로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가 ‘찌름’을 뜻하는 라틴어 ‘푼크티오넴(punctionem)’에서 따온 ‘푼크툼(punctum)’을 추천한다.푼크툼은 사진작품이나 옛 유물, 미술작품 등을 감상할 때 관객이 작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작품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똑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일반적으로 추정·해석할 수 있는 의미나 작가가 의도한 바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지극히 개인적으로 작품을 받아들이는 것이다.예를 들어 낙동강 서부 지역에서 4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손잡이가 달린 머그잔을 감상한다고 하자. 원래 있던 자리를 벗어나 세상을 돌다 온 유물들은 우리에게 들려줄 정보가 별로 남아 있지 않다.이처럼 오랜 세월이 지난 옛 유물들과 소통할 유일한 방법이 바로 푼크툼이다. 객관적인 정보나 해석에 기대지 않고 자신만의 기억에 비추어 예술 작품을 느끼는 것이다.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빙글빙글 웃는 동물 장식을 보고 오래전 세상을 떠난 애견을 떠올리며 뭉클해하는 식이다.푼크툼으로 어떤 기억과 감정을 떠올릴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감상하는 작품이 눈에서 곧장 마음속으로 뛰어드는 경험을 하고 나면 잘 모르는 것들도 더욱 더 잘 바라볼 수 있게된다. 푼크툼은 매우 직관적이다. 그래서일까.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다르리라”는 유홍준 교수의 말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2-09-19

詩와 음악의 가을 마중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가을을 시샘하는지 또 다른 태풍이 지나갔다. 비록 한반도 아래쪽으로 비껴가긴 했지만, 2주 전에 휩쓸린 태풍피해가 워낙 커서 바짝 긴장과 조바심의 끈을 늦출 수 없었다. 태풍으로 인한 풍수해의 상흔이 곳곳에 아직 생채기처럼 남아 있는데, 가공할 태풍이 연이어 위협하게 된다면 설상가상(雪上加霜)의 피해를 가져올 수도 있다. 이에 정부에서도 과하다 싶을 정도로 태풍 대비에 적극적인 행정조치를 시행하는 등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선제적이고도 실효성 있는 현장 대응활동을 지원하며 만전을 기했다.계절의 바뀜이 예사롭지 않음을 익히 알고 있지만, 수십년 전부터는 복병 같은 태풍이 가을날의 길목에서 산천을 할퀴고 들판을 쓸고 가니 천지간에 무엇 하나 순탄치 않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만큼 지구의 환경이 변하고 세상이 달라져서, 에너지의 순환이 점차 거칠어지고 만물의 움직임이 급작스레 코로나19같은 돌연함으로 치닫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리 난마 같은 기상이변도 계절의 수레바퀴 한 켠에서 무모한 듯 솟아오르는 상사화의 꽃대를 누르지는 못하고, 구절초와 쑥부쟁이의 흰눈 같은 하늘거림을 멈추게 할 수는 없으리라.마치 가을을 마중이라도 하듯이 일제히 긴 목을 뽑아 붉은 꽃을 피운 상사화가 초록에 어우러진 한켠에서 지난 주말, 시와 음악의 향연이 꽃무릇의 운치 마냥 멋스럽게 피어나고 들꽃 같은 문학 얘기가 도란도란 엮어졌다. 온갖 나무와 화초들이 자연스러운 모양새로 자리잡아 가지런하고, 새들의 지저귐 따라 바람 결에 수런대는 잎새들도 함께하며 반겨맞는 그곳은 포항시 북구 청하면에 소재한 기청산(箕靑山)식물원이다. 이야기가 있는 박물관식 식물원에서 경북문화재단이 주최하고 공감놀이터 ‘어링블’에서 주관한 ‘이정록 시인 초청강연·시낭송·노래가 된 시’를 테마로 시와 음악의 콜라보를 선보인 ‘붉은 상사화 음악회’가 싱그러움 속에 이채롭게 열린 것이다.시낭송과 수필 낭독이 차분한 음색으로 흐르고 성악과 악기 연주가 우렁차면서도 매끄럽게 울려 퍼지는가 하면, 어링블 꿈다락 어린이들의 이정록 동시집 ‘지구의 맛’ 동시 낭송은 맑은 목청과 고운 표정으로 자연사랑과 환경보전을 환기시켜서 의미가 있었다. 또한 선한 눈길과 맑고 밝은 언어로 많은 독자들과 호흡해온 이정록 시인의 구수한 입담과 해학적인 표현으로 ‘쑥은 쑥스럽게, 바람은 바람직하게’라고 말하는, 인문학적인 감성으로 짧으면서도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며 더욱 아름다워지고 바르게 되는 계기로 시를 쓰게 된다는 세상을 보는 너른 시선이 인상적으로 여겨졌다.상사화 피는 때에 맞춰 소소하고 수수하게 열린 숲속 음악회가 조금이나마 태풍의 상처와 코로나의 상심을 보듬고 다독이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현실의 삶이 복잡하고 힘에 부칠수록 자연과 예술을 찾아 교감하며 마음의 안정과 위무의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시와 음악으로 가을 마중하듯이, 공감과 치유의 마음 마중으로 정갈한 가을을 열어가자.

2022-09-19

변화는 장수기업을 만든다

김종찬포스코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미국 캘리포니아주에는 남안의 샌프란시스코와 북안의 마린 반도를 연결하는 골든만에 설치된 금문교가 있다. 이 다리는 1937년에 완공된 최초의 현수교라는 것 외에도 그 당시 기술로는 어렵다고 했던 2.7km의 길이를 자랑하며 수면으로부터 높이가 67m에 이른다. 그러나 이런 제원을 떠나 이 다리는 8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어떤 다리들과 비교해도 성능이나 환경과의 조화인 예술성에서 뒤떨어지지 않으면서도 안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고 진단 장비들이 첨단화 되어도 변하지 않았던 것은 정해진 규정을 반드시 지키는 꾸준함이 축적된 문화에 있다. 일상점검을 통해 작은 결함이 심각한 문제로 성장하기 전에 발견하여 조치하고 결과가 표준화되어 매뉴얼에 업데이트되니 성능이 유지되는 것이다. 일상점검은 이상이 자주 발견되는 것도 아니어서 허투루 한두 번 해 보고 ‘적당히 해도 되겠지’라고 생각하여 지속되기가 어렵다. 문화화되기 위해서는 ‘단순하고 지루한 일’이 ‘중요하고 즐거운 일’로 바뀌는 축적의 과정을 겪어야 하며 그 과정을 겪지 않았다면 결코 문화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 금문교를 보면서 기업 역시 100년을 가기 위해서는 처음의 설계도 중요하지만 지속적인 유지관리가 중요하단 생각을 하게 된다. 녹슬거나 이음새의 틈이 기준 이상으로 열화 되기 전에 보완해야 하듯 기업도 경쟁력을 잃기 전에 정확하게 진단하고 그 약점을 강점으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특히 장치산업은 호황기 때는 규모의 경제를 통해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었지만 불황기 때는 매출액은 줄어드는데 고정비 지출은 줄지 않아 경영 성과가 악화되기 때문에 지속적인 유지관리를 통해 기능과 성능의 유지가 매우 중요한 산업이다. 대표적 장치산업인 화학산업도 중국과 중동 국가들의 대규모 설비투자로 인한 공급과잉으로 마진이 한계 상황이지만 바스프(BASF)란 기업은 글로벌 강자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바스프는 1865년 독일에서 창립되어 전 세계 11만여 명의 직원이 1만여 개의 제품을 생산하는 거대 화학기업이다. 바스프의 특징 중 하나는 공정 간 프로세스 연결을 의미하는 페어분트인데 이는 자원순환 친환경 공급망 체제라고 얘기할 수 있다. 페어분트를 통해 한 공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과 열을 다른 공정의 원료로 투입하는 생산체계를 만들었다. 공정은 환경으로부터 부담스럽지만 제품은 최고의 재활용성을 가지는 것이 강점이다. 제철소에서도 철광석을 녹일 때 많은 열량이 필요하지만 설비 관점에서는 발생된 열을 식히는데 물을 사용하고 그 물은 가정의 난방으로 사용하니 그것도 페어분트라고 할 수 있겠다. 페어분트는 바스프 내부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고객사에도 확장하여 바스프와 고객사가 밀접하게 통합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이렇듯 바스프의 성공 요인은 100년이 넘는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안주하지 않고 현재 노력에 충실하여 고객과 함께 가치를 높이는 노력과 미래 변화를 예측하여 끊임없이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2022-09-19

국민은 진실 규명을 원한다

김진국 고문 지난 대선은 비호감 선거였다. 여야 후보를 막론하고 좋아하는 사람보다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가운데 윤석열 대통령이 0.73% 이겼다. 윤석열 후보를 찍은 사람은 민주당, 혹은 이재명 후보가 싫고, 이재명 후보를 찍은 사람은 국민의힘, 혹은 윤석열 후보가 싫었다는 말이다.왜 민주당 정부를 거부했나. 당시 최대 유행어가 ‘내로남불’이었다. 임기 절반을 질질 끈 조국 사태는 정의를 상대적 개념으로 추락시켰다. 극심한 진영 갈등으로 진실보다 누구 편이냐가 유무죄의 판단 기준이 됐다. 정치인에게는 공정보다 진영과 표가 중요했다.윤석열 대통령은 평생 검사 경험밖에 없다. 표를 던진 사람도 그에게 큰 기대를 한 게 아니다. 미워하는 문 정부의 대항마여서 선택한 사람이 많다. 그렇지만 ‘공정과 정의의 실현’을 기대했다. 그 일은 검사가 적임자라 생각했다. 그가 잘하리라 기대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를 싫어한 사람도 많다. 정의를 실현한다며 보복의 칼을 빼 들어 정치는 사라지고, 국정이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 탓이다. 임기 초에 벌써 그런 국면을 마주했다.윤 대통령은 자신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의 기대와 협치 사이에서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경제도 안보도 매우 어려운 시기다. 국회의 절대다수 의석을 민주당이 차지하고 있다. 야당의 협조 없이는 고난의 행군을 할 수밖에 없다.최근 드라마 ‘수리남’이 인기다. 드라마에서는 대통령이 뇌물을 받고 군대까지 동원해 마약상을 돕는다. 수리남 정부가 국가 이미지를 훼손했다며 발끈했다. 90년대 수리남에서 실제 벌어진 일을 모티브로 삼은 드라마다. 하지만 이제 마약을 구하기 어려운 나라로 달라졌다는 것이다.범죄는 용납할 수는 없다. 드라마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나라도 아니다. 과거 한 범죄자가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無錢有罪)’를 외쳐 국민적 공감을 얻었다. 범죄는 밉지만 그런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하나다. 마찬가지로 ‘유권무죄 무권유죄(有權無罪無權有罪)’도 안 된다. 권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범죄를 저질러도 건드리지 못한다면 나라가 아니다.그런데도 말이 많다. ‘검수완박’이느니 ‘감사완박’이느니 하는 말이 나온 것도 법 집행의 공정성 때문이다. 한쪽은 공정하지 않은 검사의 수사권을 없애자고 하고, 다른 쪽은 그러면 범죄를 방치하자는 거냐고 반박한다. 한쪽이 그럼 그 권한을 경찰에 넘겨주자고 하자, 다른 쪽은 경찰은 공정하냐고 반문한다.권위주의 정부는 사정 기관을 정치에 이용했다. 야당 의원의 약점을 이용해 협박하고, 협조하게 했다. 선거 운동 중에 구속해 손발을 묶기도 했다. 공권력으로 국민의 선택을 방해하는 정치를 혐오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선 직전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자금 수사를 중단하도록 지시했다.추석 직전 넥스트리서치 여론조사에서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 대한 수사를 ‘법과 원칙에 따른 수사’라는 응답이 51.4%였다. ‘정치 보복 수사’라는 답변은 41.2%였다. 김건희 여사에 대한 특검법도 64.5%가 찬성했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불법이 있으면 차별 없이 수사하라는 게 국민의 다수 의견이다.정의 실현과 정치 보복은 어떻게 다른가. 수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진실만 중요하다. 무리한 몰아가기는 역풍을 맞는다. 요란을 떨고, 결과가 허망해도(泰山鳴動鼠一匹) 비난받는다. 그런 일로 국정과 협치를 포기할 수는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때의 ‘논두렁 시계’처럼 망신 주기나 시간 끌기는 정치 보복 의혹을 키우게 된다.특히 정치 수사가 어려운 건 ‘내로남불’이다. 자기희생이 필요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친척들을 특별 감시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도 처삼촌부터 구속했다. 그런데도 동생 전경환 문제에 걸렸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도 아들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남을 치려면 내 주변부터 단속해야 한다. 대통령과 영부인이란 자리보다 더 영예로운 게 있나. 박사가 뭔가. 논란이 된다면 먼저 던지는 게 방법이다. 잘못이 있다면 인정하고 털어버려라. 진실만큼 튼튼한 방패는 없다./본사 고문김진국△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중앙SUNDAY 고문,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2-09-18

구미의 지속가능한 성장, 문화에서 찾아야

김장호 구미시장 유서 깊은 건축물과 걸음을 옮길수록 느껴지는 이국적인 풍경들. 수백, 수천 년 켜켜이 쌓인 도시의 역사와 문화는 여행자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유명 박물관과 미술관에 들르지 않더라도 거리 곳곳에 예술이 흐르고 문화가 펼쳐지는 도시, 삶의 여유와 낭만이 삶의 단면인 도시야말로 현대인이 지향하는 도시의 모습이다. 영국의 공업도시 리버풀이나 지중해의 항구도시 프랑스 마르세유 같은 도시들 말이다.영국의 전설적인 록 그룹 비틀스의 고향 리버풀은 한때, 가난과 실업을 대표하는 쇠락한 도시였다. 침체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 리버풀은 도시 곳곳에 비틀스의 숨결을 심었고, 음악, 미술, 스포츠 등의 다양한 문화 인프라로 도시를 가난에서 구했다.마르세유 역시 마찬가지다. 높은 실업률과 많은 이주 노동자들로 슬럼화되었던 마르세유는 흉물로 전락한 담배 공장을 예술가들에게 임대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냈다.문화를 통해 지역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이는 관광산업의 성장과 지역 경제 활성화로 이어졌다.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이러한 문화 활성화가 우리 구미에 필요하다. 지난 50년 경제발전의 중추도시로 산업 발전과 고도성장을 이끌어온 구미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있어 매우 특별한 도시다. 산업현장에서, 생업 일선에서, 우리 부모 세대가 흘린 땀과 눈물 덕분에 우리는 가난과 배고픔을 이겨내고 공부도 할 수 있었고, 3만 불 시대도 열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성장에는 누가 뭐라고 해도 구미의 노고가 굳건히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그런 구미가 지금 정체냐 지속성장이냐의 기로에 서 있다. 도약과 후퇴를 결정하는 중대한 갈림길이다. 글로벌 경제위기와 산업 질서의 재편은 구미에 더 큰 변화와 혁신을 요구하고 있으며, 더 큰 질적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문화예술 활성화가 반드시 필요하다.필자는 민선 8기를 출범하며 낭만과 품격이 있는 도시로 거듭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제대로 내세울 축제 하나 없는 구미에 대표 명품축제를 육성하고, 미술관, 미디어아트 전시관 등의 문화 인프라도 유치해야 한다. 침체된 원도심 구미역 인근 1, 2번 도로와 인동 시가지도 활성화시켜야 한다. 문화·예술을 곁들여야 할 수 있는 일들이다.마침 구미는 내년 10월 법정문화도시 지정을 목표로 시민들과 함께 문화도시 구미의 청사진을 그리는 중이다. 핵심 키워드는 일과 삶이다. 구미가 가진 산업과 노동, 그 의미와 가치를 통해일과 삶이 조화를 이루는 문화도시로 나아가는 데 방점을 두려 한다. 서면평가와 현장평가를 통과하고 최종 예비도시 선정을 앞두고 있는 만큼, 문화가 시민들의 일과 삶 속에 녹아내릴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심혈을 기울일 방침이다.지금까지 구미문화는 척박했다. 경제와 산업에 치중하느라 문화에 소홀했던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산업과 문화는 별개일까. 트위터와 페이스북, 구글 등의 첨단 테크 기업들이 몰려있는 실리콘밸리를 보자. 실리콘밸리가 위치한 샌프란시스코는 다양한 문화 예술 공연이 상시로 열리는 창의적인 도시로 꼽힌다. 실리콘밸리의 혁신이 가능했던 건 그러한 다양성과 창의성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는 다양한 인간의 행동 스펙트럼이 어떻게 조합되는가에 따라 문화가 달라진다고 말했다. 즉, 도시에 살고 있는 시민들이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도시의 문화와 정체성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결국 사람이다.이제 구미는 기업도시, 공단도시에 더해 풍부한 문화적 색채를 느낄 수 있는 문화도시, 낭만이 흐르는 예술도시로 나아가려 한다. 영국의 공업도시 리버풀이나 프랑스 마르세유처럼 구미의 문화자산으로 구미의 정체성을 살리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문화도시. 그 반가운 소식을 전하고 싶다.

2022-09-18

그리스 최고의 영웅 - 헤라클레스자리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을 꼽으라면 단연 마초적인 캐릭터 헤라클레스다. 헤라클레스는 신들의 제왕 제우스와 페르세우스 손녀인 알크메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알크메나는 티린스의 왕 암피트리온의 왕비, 즉 유부녀였지만 바람둥이 제우스는 개의치 않았다. 제우스는 남편의 모습으로 변신해 그녀에게 다가갔던 것이다.이를 안 헤라는 화가 머리까지 치솟았다. 헤라는 어린 헤라클레스에게 뱀 두 마리를 보내 죽이려고 했지만, 헤라클레스가 목을 눌러 죽여 버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헤라는 포기하지 않았다. 훗날 헤라는 헤라클레스에게 주문을 걸어 아내와 아들을 죽이게끔 만든다. 죄를 뉘우친 헤라클레스는 델포이 신전에서 티린스의 왕 에우리스테우스를 12년을 섬기며 그가 명하는 12가지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신탁을 듣게 된다. 해라가 신탁을 통해 헤라클레스에게 고난의 모험을 겪게 계략을 짰던 것이다.처음 ‘사자자리’ 신화 황금사자를 죽이는 일부터, 괴물 뱀 히드라를 퇴치하는 일, 케리네이아 산에 사는 사슴을 비롯해 에리만토스 산의 멧돼지, 크레타의 황소, 괴물 게리온이 가지고 있던 소, 사람 잡아먹는 4마리의 말, 저승을 지키는 개 케르베로스(마지막 임무)를 산 채로 잡는 일이었다. 이 외에도 3천 마리 황소가 사는데도 30년간 청소하지 않은 아우게이아스 왕의 가축우리를 정리하는 일, 사나운 새를 퇴치하는 일, 아마존 여왕 히폴리테 띠를 탈취하는 일, 요정妖精 헤스페리데스가 지키는 동산의 황금 사과를 따오는 일 등 모두 12가지의 힘든 업을 모두 마쳐야 했다.이 과정에서 지하세계 하데스에게 사로잡혀 있던 테세우스를 구해주었으며, 인간에게 불을 전해주었다는 죄로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며 바위산에 묶여 있던 프로메테우스를 구출해 주는 등 그의 영웅담은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하다.마침내 고난의 12가지 임무를 모두 마친 헤라클레스는 오이칼리아 공주 이올레의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왕이 약속을 저버리자 배신감에 격분한 나머지 오이칼리아 왕자이자 친구인 이피토스를 죽이고 만다. 헤라클레스가 분을 삭이지 못하게끔 꾸민 집념의 헤라 작품이었다. 이에 대한 벌로 헤라클레스는 옴팔로스 나라 옴팔레 여왕의 몸종으로 들어가게 된다. 헤라클레스는 영웅의 모습 대신 여장을 하고 3년을 지낸 뒤에야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훗날 자신의 두 번째 아내 대이아네아라를 유혹한 켄타우스로 족 네소스를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네소스가 죽기 전 헤라클레스가 변심하면 히드라의 독이 스민 자기 피를 옷에 발라서 입히라는 거짓말을 아내가 곧이곧대로 믿는 바람에 죽음을 맞는다.하늘의 신들은 지상의 영웅이 죽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았으나 제우스만은 그러지 않았다. 비록 인간의 육신은 불에 타버렸을지라도 자기 아들은 영원히 죽지 않음을 알았다. 신들은 헤라클레스를 하늘로 올려 헤라와 지긋지긋한 악연을 끊고 헤라의 딸이자 청춘의 여신인 헤베와 부부의 연을 맺어 준다.헤라클레스자리는 여름철 북쪽 하늘의 별자리로, 직녀성과 지난번에 다뤘던 왕관자리 중간에서 3등성 이하의 어두운 별들과 더불어 H자를 이루고 있다. 독자들은 직녀별을 찾아 서쪽에 무릎을 꿇고 거꾸로 서 있는 헤라클레스를 그려보시기를 바란다. 중심 부분에 H자로 펼쳐진 별들이 헤라클레스의 몸체인데, 특별히 밝은 별은 없으나 전체적으로 뚜렷한 윤곽을 가지고 있어서 쉬이 찾을 수 있다. /박필우 스토리텔러

2022-09-18

과거를 묻지 마세요

김규종 경북대 교수 영화배우 겸 가수로 이름을 날린 나애심(1930∼2017)의 대표곡 가운데 하나가 1958년에 나온 ‘과거를 묻지 마세요’다. 고통스러운 시간이 흘러 이제 꽃이 피어나고 희망이 환하게 빛나는데 지나간 시절을 새삼 물을 이유가 있느냐는 노래다. 지금과 여기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가는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천만번 지당한 얘기다.하지만 세상은 온갖 종류의 사람이 모여 사는 공간이다. 그나 그 여자의 과거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사람도 적잖다. 그들에게도 논리가 있다. 과거의 누적이 현재에 응축돼 있고, 과거는 미래에도 깊고 너른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란 얘기다.우리는 이런 주장을 트라우마 이론 혹은 인과론 또는 결정론이라 부른다. 20세기 심리학의 대가 프로이트(1856∼1939)의 이론이 여기에 바탕을 두고 득세해왔다.과거에 경험한 마음의 상처가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미래에도 지속될 것이라는 주장이 트라우마 이론의 토대다. 과거의 상처 때문에 현재의 불행이 생겨나고, 그것은 과거를 바꾸지 못하는 한 미래까지도 계속되리라는 논리다. 많은 사람이 이런 논리로 현재의 불행을 과거로 돌리는 것에 동의하면서 임상을 진행하고 있다.문제는 과거에 마음의 상처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누구나 크고 작은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경험하면서 성장하기 마련이다. 괴로움과 아픔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성장과 성숙을 이뤄나간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말처럼 과거는 영원히 정지해 있기에 우리는 과거를 변화시킬 수 없다. 과거가 현재와 미래의 행불행을 결정한다는 트라우마 이론은 지독할 정도로 운명론적이고 허무주의적이며 염세적이다. 이런 주장에 반기를 든 인물이 알프레드 아들러(1870∼1937)다.인간은 감정이나 과거에 지배받지 않으며,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든지 간에 그것은 미래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 아들러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인생은 찰나의 연속이며, 과거도 미래도 없다는 것이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우리의 지금과 여기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게다. 나아가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되든 지금과 여기에서 생각할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 아들러의 담대한 주장이다.아들러의 주장에는 많은 게 함축돼 있다. 과거에 의지하거나 과거를 핑계 삼아 현재의 엄살을 합리화하지 말라는 것이 첫 번째 결론이다. 현재의 행과 불행의 원인을 오직 과거에 돌리는 인간에게는 아무런 선택지도 없다. 과거의 노예이자 수인(囚人)으로 평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묶인 인간의 미래 역시 과거에 달려있다는 주장을 거부하는 것이 두 번째 결론이다. 아들러는 과거와 미래의 무관함을 강력하게 천명하는 용기의 심리학 이론가다.세 번째, 아들러는 지금과 여기를 살아가야 한다고 천명(闡明)한다. 그러므로 지금과 여기를 용기 있게 살려면 과거나 미래 따위는 던져버리라는 그의 주장에 상응하는 노래가 ‘과거를 묻지 마세요’ 아닐까 잠시 생각해본다. 창밖에 물까치 조용히 운다.

2022-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