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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교육 공화국

장규열 고문 한국사회에서 교육은 지식전달을 넘어, 나라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런데 사교육이 공교육을 압도한다. 최근 교육부가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작년 초중고 사교육비가 29조원에 이르며 한 해 7퍼센트 이상 증가했다. 학생수는 8만명이나 줄었는데 사교육비는 팽창일로다. 교육이 경쟁수단으로 변질되어 학생과 학부모의 경제적 부담을 증가시킨다. 저출산의 까닭이기도 하다. 교육이 사회적 불평등과 공동체의 와해를 부른다. 대학입시 중심의 경쟁시스템, 공교육에 대한 신뢰저하, 학벌주의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일부 엘리트층은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사교육을 활용하며, 교육이 사회적 계층을 고착시키는 수단이 되었다. 자녀의 미래를 위해 지불하는 고액의 사교육비는 가계에 큰 부담이다. 사교육을 받지 못하면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이며 교육이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하지 못한다. 공교육의 위기는 어디서 왔을까. 교사들이 과중한 행정업무와 학습지도 밖의 업무에 시달리면서 교육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운 환경에 처한 학생은 창의적 사고와 인격형성을 위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아니라 주입식교육과 입시경쟁에 내몰린다. 교육의 본질적 가치가 지속적으로 훼손되고 있다. 교육이 무너지면서 공동체 정신이 스러진다. 이전에는 마을과 학교가 함께 학생을 돌보며 교육을 책임지는 구조였다면, 지금은 각 가정이 각자도생으로 교육문제를 해결한다. 엘리트교육을 받은 일부 계층은 사회적 책임보다 개인의 성공을 최우선시한다. 사회적 연대감을 약화시키고 공동체의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사회계층 간 갈등을 초래하고 공동체 내 양극화를 부추긴다. 문제해결을 위해 교육에 공공선(public good)의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 교육이 개인의 성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사회의 발전과 공존을 위한 필수요소임을 분명히 해야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공교육의 질을 개선해야 한다. 교사들에게 자율성을 부여하고 창의적 교육 방식이 자리 잡도록 지원해야 한다. 주입암기식 학습이 아니라 비판적 사고와 문제해결 능력을 기르도록 교육과정을 전면 개편해야 한다. 사교육 의존도를 낮추려면 공교육 내 보충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 방과후 프로그램의 질을 높이고 교육 수준별 학습지원을 체계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경제적 형편과 관계없이 누구나 양질의 교육을 받도록 공교육 지원체계를 확대해야 한다. 교육이 사회적 연대를 강화하도록 공동체 중심의 교육모델을 도입해야 한다. 지역사회가 학교 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학교가 지역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하도록 재편해야 한다. 다양한 사회계층이 가진 교육적 자원을 학교공동체와 공유하는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사교육 팽창과 공교육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의 가치관과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시험하는 중요한 문제다. 교육이 경쟁이 아니라 공존과 연대의 수단이 되도록, 공공선을 중심에 두는 교육정책이 서야한다. 교육이 개인뿐 아니라 사회의 발전을 위한 공공재로 기능하도록 함께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때다. 교육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25-03-19

동아시아 문화도시 안동, 이젠 세계 무대로

안동시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는 2026년 동아시아문화도시에 선정되는 쾌거를 거뒀다. 동아시아문화도시 사업은 한중일 3개국이 각 나라의 독창적인 지역문화를 보유한 도시를 선정해 상호간 다양한 문화교류를 벌이는 사업이다. 2014년부터 매년 실시하고 있다. 올 하반기 중국에서 열리는 한중일 문화장관 회의에서 안동은 2026 동아시아 문화도시로 선포된다. 안동시는 ‘평안이 머무는 곳, 마음이 쉬어가는 안동’이란 슬로건으로 내년도 문화도시 행사를 준비할 예정이다. 안동이 가진 유교정신문화와 도덕적 가치를 한국의 정신으로 해외에 알리고, 한국의 문화유산을 통해서는 도시간의 문화적 이해와 교류 폭을 넓힌다는 구상이다. 안동은 독특하게 한국정신문화수도라는 브랜드를 가진 고장이다. 안동을 보면 한국을 알 수 있다는 말처럼 가장 한국적 문화가 잘 보존된 도시다. 또 유교문화가 가장 많이 남은 곳이기도 하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가장 한국적인 것을 보고 싶다하여 우리정부가 심사숙고하여 권한 지역이다. 정신문화적 면에서 안동은 지금도 전국에서 유교적 정신이 가장 강한 지역이다. 공자와 맹자의 고향을 이르는 추로지향이란 별명이 붙어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병산서원과 퇴계 이황선생이 후학을 가르쳤던 도산서원을 당시 모습으로 구경할 수 있고,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하회마을도 볼만하다. 불교문화도 곳곳에 산재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녀간 봉정사가 대표적이다. 문화유산, 무형문화유산, 기록유산 등 전국 최초로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고장이다. 각 시대별 역사와 고유문화가 잘 간직돼 한국문화를 알리는데는 안동만한 곳도 잘 없다. 한중일 2026 동아시아문화도시로 선정된 배경도 이런 풍부한 문화 인프라 덕분이다. 안동은 국제하회탈춤페스티벌 등으로 이제는 국제적 명성도 제법 쌓였다. 하지만 글로벌 문화관광도시가 되기 위해선 더 많은 국제교류가 필요하다. 이번 동아시아문화도시 선정은 이런 측면에서 세계무대로 나설 또 한번의 호기라 할 수 있다.

2025-03-19

배신자 프레임 갇힌 韓·劉, 여당의 자산이다

여당 강성지지층으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힌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와 유승민 전 의원이 18일 대구를 찾았다. 대학 강연차 왔지만, 조기대선 가능성을 염두에 둔 행보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이 임박한 예민한 시기에 두 사람이 보수안방인 TK(대구·경북) 지역을 찾은 것은, 정치적 장애물인 ‘배신자 프레임’을 정면으로 극복하겠다는 의지로 받아들여진다. 이날 두 사람에게 집중된 기자들의 질문내용도 배신자 프레임이었다. 한 전 대표는 경북대에서 열린 청년토크쇼에 참석하기 전 기자들과 만나, 윤 대통령 탄핵소추 과정에서 형성된 배신자 프레임과 관련해 “12월 3일 밤 10시 30분부터 하루가 넘어가는 과정에서 제 생각은 굉장히 단순했다. 국민과 국가를 생각했다. 이걸 막지 못하면 대한민국이 후퇴할 것이고,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는 절박한 마음이 있었다”며 비상계엄 반대에 대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날 경북대 강연에서는 신청자가 쇄도한 반면, 한 전 대표를 ‘배신자’로 몰아세우는 반대집회도 같이 열렸다. 한 전 대표에 대한 TK민심을 단적으로 보여준 장면이었다. 유 전 의원은 이날 영남대 강연 전 국민의힘 대구시당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박근혜 전 대통령과 오해를 풀고 지나간 것을 풀고 싶은 마음이 오래된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 회고록을 꼼꼼히 읽어봤는데, 유독 저에 대해 오해도 많고 서운한 감정이 있구나 라는 것을 절절하게 느꼈다. 이런저런 채널을 통해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한 전 대표나 유 전 의원 모두 국민의힘으로선 소중한 자산이다. 두 사람은 자신의 지지기반인 일부 보수세력의 비판을 감수하면서도, 현직 대통령의 일방적인 통치행위에 대해 여당 지도부로서 견제를 해온 정치인들이다. 쉽지 않는 일이다. 윤 대통령 탄핵정국 속에서 살벌한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두 동강 난 국가를 통합하고, 차기 대선에서 ‘보수 대통령’을 당선시키려면 여당에서는 중도외연 확장이 가능한 이러한 정치인이 반드시 필요하다.

2025-03-19

AI, 어떤 직업을 사라지게 만들까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10~20년 전. 스티븐 스필버그와 리들리 스콧이 할리우드에서 만든 AI(인공 지능) 관련 영화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에이, 저게 말이 되나. 감독의 상상력이 과도하군.’ 그런데 그게 말이 되는 세상이 눈 깜짝할 사이에 도래했다. 인간만이 가졌다 믿었던 학습, 추리, 논증 따위의 기능을 갖춘 컴퓨터 시스템이 생활 곳곳으로 이미 파고든 것. 세계는 자연 언어의 이해, 음성 번역, 로봇 공학, 인공 시각, 지식 획득, 인지 과학 등에 AI를 활용 중이다.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화가 불과 몇 십 년 사이에 세상을 뒤흔들고 있는 형국이다. 인간을 대신하는 시스템의 개발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일자리를 위협하게 된다. 최근 글로벌 컨설팅기업 맥킨지가 낸 보고서는 ‘3년 이내에 산업 현장에서 서비스·물류·인사관리 영역은 AI가 차지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세계 각국 기업 관계자 1400명에게 물어 대답을 받은 결과다. 대규모 해고 사태도 예언됐다. 응답자의 15%가 “서비스 직종 분야에 향후 3년 사이 총원의 20%를 초과하는 대규모 감원이 있을 것”이라 답했으니. 편리를 위해 개발된 컴퓨터 시스템이 특정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위협으로 다가서고 있는 듯하다. 세상의 변화는 이처럼 숨 가쁘고 예측을 불허한다. 좋건 싫건 그 변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게 더 큰 문제다. 상상력과 창의력 분야에선 아직 AI의 역할이 미미하지만, 그것도 앞으로는 알 수 없는 일. 터무니없어 보이던 영화가 명명백백한 현실이 되기까지의 시간을 감안한다면, AI 발달의 미래는 누구도 함부로 예상하기 어렵게 됐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3-19

소리의 서막은 희망을 내포하고 있다

정미영 수필가 어둠을 가르며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소리의 서막이다. 물기를 빨아들이는 압지처럼 사이렌 소리가 빌딩숲 주변을 맴돌던 소음을 흡수해 버린다. 도시는 순식간에 사이렌 소리가 존재하는 곳과 사이렌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나뉜다. 거리를 휘적휘적 헤쳐 나오는 사이렌 소리를 눈으로 살핀다. 마치 소리를 ‘보는 것’처럼 차창에 바싹 얼굴을 갖다 대기도 하고, 백미러로 후방을 주시하다가, 급히 달려오는 119 구급차를 발견한다. 나는 이런 경우에 갖게 되는 당혹감이 아니라 신중함을 가지고, 최대한 길을 만들어 주기 위해 자동차를 한편으로 옮긴다. 다행이다. 이 순간만큼은 운전자들이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떨쳐버리고 이타심을 발현한다. 서둘러 구급차가 지나갈 수 있게 길을 만들어 준 다음,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며 다들 제 갈 길로 간다. 운전을 하면서도 마음은 온통 환자에게 쏠린다. 얼마나 위중한 상태일까, 환자는 의식이 있을까, 사위스러움이 내 머릿속을 온통 부유한다. 몇 년 전, 스무 살 아들이 의무소방원으로 군에 입대했다. 선발 시험에 통과해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중앙소방학교에 입교했다.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시험을 치고 땀 흘리며 노력한 끝에 얻게 된 제복이라 그런지, 아들의 모습이 늠름하고 대견스러웠다. 강도 높은 교육을 마치고 무사히 수료식을 거쳐 소방서에 배치되었다. 아들이 소방서에서 복무를 시작했다. 그러자 내 온몸의 세포가 두 귀에 집중되어 소리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소방차나 구급차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를 들으면 나의 신경줄이 팽팽해지며 아들에 대한 걱정이 배가되었다. 혹시나 아들도 화재 현장이나 산악 구조 현장에 출동을 나가지는 않았는지,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사명감과 책임감도 중요하지만 무사안일과 안전을 기원했다. 그렇게 소리는 내 마음에 흔적을 남겼다. 공간에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는 시각적 이미지를 동반하기도 했다. 휴가를 나온 아들이 소방 공무원들과 동행해 산불 현장에 갔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가 있었다. 그즈음 사이렌 소리를 들으면 내 눈앞에 뜨거운 불길이 치솟는 것만 같아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또한 아들이 구급차를 타고 나갔다고 하면 죽음의 그늘을 마주하고 있는 장면이 떠올랐다. 지역 특성상 노인들이 많이 계셔서 사고사보다는 심정지를 당하시는 분들이 많단다. 119에 접수된 응급환자의 심정지, 노인의 마지막 숨결을 손에 쥐며 슬픔에 잠겼을 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엄마인 나는 아들이 죽음을 감당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일상으로 접한다고 하니 가량없이 애가 탔다. 아들은 처음에는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어르신들이 마치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 같아서, 죽음 앞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단다. 자신의 마음이 변하자, 임종을 대하는 태도에도 예의를 갖추게 되었다고 했다. 롤랑 바르트는 ‘애도하는 사람’만큼은 진짜 주체로 살 수 있다고 말했다.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일은 타인이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들이 의무소방원으로서의 생활 속에서도 스스로의 본질을 찾는 과정을 겪었다고 생각하니, 나는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았다. 소방관의 삶은 끝없는 도전과 위험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들의 헌신은 사이렌 소리가 전하는 희망과 함께 사람들에게 안전을 선사한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 고난과 시련을 마주했을 때 현명한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준다. 소리의 서막은 희망을 내포하고 있다. 구급차는 병이 위중하여 생명이 경각에 달린 환자라도, 살릴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열어둔 채 사이렌을 울리며 최선을 다해 달린다. 소리에도 ‘경중’의 미덕이 있다면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달려가는 사이렌 소리는 밀도가 높은 진중함으로 구현되는 것이리라.

2025-03-19

지역언론인 혹은 문화적 정신적 개화기를 꿈꾸며

서울 갈 때, 터미널에서 한겨레신문을 구해 읽기가 쉽지 않아 잠시 당황스러웠을 때, 그래도 그 신문 지사를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자칭 지역언론인 후배가 자랑스러웠습니다. 문화의 확장과 의식의 팽창은 작은 일에서부터, 사소한 일에서부터 챙겨야 합니다. 그리하여 풀뿌리 노동운동도 했고 민주학교도 꾸려 마음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그 뿌려진 씨앗들이 무럭무럭 자라 꽃피는 날들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엎어지고 자빠져도 우리는 어깨동무 합니다. 글은 죽지 않습니다. 그것을 나르는 일도, 그 새벽의 의미만큼 청명할 것입니다. 가끔 지역적 한계에, 그것이 정치적이든 문화적이든 부닥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모든 벽에는 문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 문을 두드리며 사람의 개벽을 기다립니다. 모두가 동참할 것입니다. 신문배달이라고 하자. 지국장이자 배달원이었던 후배는 여전히 그 직업을 사랑한다. 절망적인 판매부수에도 신문에서 손을 놓은 법이 없다. 새벽에 맡는 잉크 냄새는 뱃속의 기생충을 박멸할 정도로 자극적인 향기였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3-19

시험 치는 날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주인공은 영화감독 데뷔를 위한 시나리오를 쓴다면서도 잠만 잔다. 낮 12시가 넘어 일어나서 밥을 차려 먹은 후에도 노트북에 다가가기가 힘들다. 평소 잘하지 않던 방청소를 먼지 한 톨 없이 말끔히 청소하고 하릴없이 선풍기를 분해해서 깨끗이 닦는다. 더 이상 할 일이 눈에 띄지 않으면 그제서야 노트북 앞에 앉는다. 노트북을 켜고도 글자 폰트만 매만지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낮 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밤이면 친구들과 술자리. 그러기를 며칠째 반복하고 나서야 시나리오를 완성한다. ‘극한직업’의 영화감독 이병헌이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제작한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 ‘힘내세요, 병헌씨’의 첫 부분이다. 어쩜 나랑 저리도 똑같을까 공감하면서 피식 웃었다. 논문 마감일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하는 습관이 있었다. 평소 어질러진 연구실을 대청소하는 일이다. 책장에 마구 꽂힌 책들을 장르별로 가지런히 챙긴다. 누워있는 책들도 일으켜 세운 후 물걸레로 책장의 먼지를 깨끗이 닦는다. 심지어 책상의 방향을 다시 바꿀 때도 있다. 넓지도 않은 연구실에서 그것은 거의 대공사에 가깝지만 강행한다. 창문 쪽으로 놓인 책상을 입구 쪽으로 틀어 돌려놓거나, 혹은 좌우를 완전히 바꾸기도 한다. 좁은 공간에서 그렇게 낑낑대며 책상을 옮기고 나면 컴퓨터며 프린터 등의 부속품들도 자리를 바꾸게 되고 전선을 뺐다 꽂는 등 꽤나 작업시간이 걸린다. 책장 가까이 한 켠으로 배치되었던 소파의 위치도 연구실 가운데로 옮겨 보는 등 지치지 않고 일을 키우고 벌인다. 바닥 청소까지 멀끔하게 하고 난 후 재정리된 연구실을 휙 둘러보면서 잠시 만족감을 느낀다. 아차 할 일이 있었지 그제야 깨닫고 책상 앞으로 다가가 컴퓨터를 켠다. 더 이상 피할 데가 없다. 이제부터 논문을 쓰자며 또 밤샘이다. 자주 이런 일을 벌이니 영리한 조교는 잘도 알아챈다. 교수님 논문 쓰셔야 되죠? 작년 11월부터 한국어교사 자격증을 위해 인터넷 수강을 한다. 매주 8과목씩 15주를 듣는다. 수강하기만도 벅찬데 쪽지시험과 과제 제출도 만만찮다. 무엇보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두 번의 시험이 가장 큰 스트레스다. 욕심 내지 말고 설렁설렁해서 80% 정도 성적이면 된다며 마음먹었으나 그렇지 않았다. 비록 오픈북 형식이지만 시험은 시험이다. 시험일이 다가오자 긴장되고, 들었던 강의를 다시 들으며 시험공부라는 걸 하게 된다. 시험일이 닥치자 예전의 습관이 도졌다. 시험 친다고 컴퓨터를 켜 놓고는 책상 주변을 청소한다. 둘러보니 책장 정리가 필요하다. 이 방 저 방 흩어져 함부로 섞여있는 책들을 옮긴다. 내 책과 남편 책, 손주들의 책들이 제 자리를 찾아 앉는다. 주방으로 가 그릇장을 활짝 열어젖혀 잠시 멍하게 바라보다가 두 손 걷어붙이고 모두 꺼내 일을 벌인다. 화장실 바닥을 박박 문지른 후 대대적으로 물청소를 한다.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까지 하고 나서야 젖은 손을 털면서 컴퓨터로 돌아온다. 아침에 켜 둔 컴퓨터 모니터엔 ‘장시간 사용하지 않아서 로그아웃되었습니다.’라는 사인이 떠 있다. 깊은 밤이다. 밤을 꼬박 새워 시험을 치고 나니 새벽 창밖이 푸르다. 예전 연구실의 창밖 풍경과 어쩜 저리도 똑같을까.

2025-03-19

소화불량과 체기의 예방과 치료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현대 사회에서 잘 체하고 소화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단순한 식습관의 문제와 더불어 자율신경계의 균형이 깨진 경우가 많다. 특히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의 작용은 소화 기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자율신경계는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으로 구성되며 이들은 서로 반대되는 작용을 한다. 교감신경은 긴장 상태나 스트레스 상황에서 활성화되며 위장관 운동을 억제하고 위산 분비를 줄인다. 즉 소화 기능이 저하되면서 음식물이 위에 오래 머무르게 되어 속이 더부룩하고 체하는 증상이 발생한다. 부교감신경은 휴식과 소화에 관여하며 위장관 운동을 촉진하고 소화 효소 분비를 증가시킨다. 부교감신경이 원활하게 작용해야 소화 과정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진다. 지속적인 스트레스와 불규칙한 생활 습관으로 인해 교감신경이 과도하게 활성화되거나 부교감신경이 저하되면 소화 불량과 체기가 반복될 수 있다. 과식이나 야식, 기름지고 자극적인 음식 섭취 역시 자율신경계의 균형을 깨뜨려 위장 기능을 더욱 저하시킨다. 한의학에서는 소화기 기능을 강화하고 자율신경계를 조절하는 방법으로 침 치료와 한약 처방을 활용한다. 침 치료에서는 중완혈을 자극해 위의 기능을 조절하고 더부룩함을 해소하며 족삼리혈을 이용하여 위장의 기운을 보강하고 소화기계의 전반적인 기능을 향상시킨다. 내관혈은 교감신경의 과도한 흥분을 억제하고 위장 운동을 돕는다. 이러한 경혈에 침을 놓으면 자율신경계가 조절되면서 위장의 운동성이 회복되고 소화력이 향상된다. 최근엔 초음파를 활용해 등과 목에 있는 자율신경에 직접 약침을 놓아서 자율신경을 조절하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직접적으로 자율신경을 조절 하면 자연스레 위장기능이 돌아온다. 한약 처방으로는 위장의 습기를 제거하고 소화를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한약재와 위장의 기운을 북돋우고 소화력을 증진시키는 한약재 그리고 교감신경을 내리고 가슴에 울체된 화를 풀어 주는 약재들을 조합해서 처방을 하면 효과적이다. 이렇게 처방을 하면 자율신경이 조절될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위장이 튼튼해지기 때문에 좀 더 입체적인 효과를 볼 수 있다. 식이요법을 함께 병행하면 좋은데 따뜻한 성질의 음식을 섭취하고 찬 음식이나 기름진 음식은 줄이는 것이 좋다. 소화 기능이 약한 사람들은 식사를 급하게 하지 않고 천천히 씹어 입에서 죽을 만들어 먹는 것이 중요하며 소식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약 처방은 개인의 체질과 증상에 맞추어 적용되며 위장의 기능을 강화하고 소화 불량을 완화하는 데 효과적이다. 소화 불량과 체함은 단순한 위장 문제로 보기보다 자율신경계의 불균형과 관련하여 접근할 때 더 효과적인 치료를 할 수 있다. 자율신경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침 치료와 한약 처방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규칙적인 식습관과 충분한 휴식을 통해 자율신경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벼운 운동을 병행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으며 명상이나 요가 같은 심신 안정법을 활용하면 자율신경 조절에 효과적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한방치료와 함께 생활 습관을 개선하고 자율신경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궁극적인 치료와 예방의 핵심이 될 것이다.

2025-03-19

일본에 남은 ‘아버지’와 ‘할머니들’을 위한 기도

일본 최고 권위의 아쿠타가와 문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외국인이 누군지 아십니까? 그 주인공은 바로 올해 1월 5일에 별세한 재일 한인 이회성 작가입니다. 이회성은 1935년 남과 북에 고향을 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3남으로 사할린에서 태어났습니다. 아홉 살에 어머니와 사별하고, 1947년 일본으로 이주하여 오무라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이후 홋카이도의 삿포로시에 정착했는데요. 삿포로고교를 거쳐 와세다대학 러시아문학과를 졸업하였고, 대학교 시절에야 본명 ‘이회성’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이회성의 작품으로는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인 ‘다듬이질하는 여인’(1971)도 유명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죽은 자가 남긴 것’(1970)을 가장 좋아하는데요. ‘죽은 자가 남긴 것’은 아버지의 장례를 계기로 민단(한국 정부가 공인한 재일 한국인 단체)에 속했던 큰 형 태식과 총련(북한을 지지하는 재일 조선인 단체)에 속했던 아우 명식이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것은 양분된 재일 한인 사회의 화합과 나아가서는 민족의 통일에 대한 의지까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상가(喪家)에 모인 민단과 총련에 속한 한인들 역시 동식과 태식이 그러하듯이, 처음에는 어색하게 앉아 서로 상대편의 존재를 애써 무시합니다. 동식은 그 모습에 마음이 에이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한인들의 침묵이 자신과 형 사이에 흐르는 “침묵과 동질의 것이고, 아니, 그보다 더 부풀어 크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행히도 시간이 지날수록 어색함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서로 하나로 뭉치게 됩니다. ‘죽은 자가 남긴 것’에서는 민단과 총련으로 나뉘었던 한인들이 친밀하게 되는 과정과 동식과 태식이 화해하는 과정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저는 이 작품을 읽을 때마다, 동식이 진정으로 화해하는 대상은 형 태식보다도 아버지라는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동식이 형인 태식에 대해 갖는 마음은 애증에 가까우며, 이러한 복합 심리의 근원에는 ‘폭력적인 아버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동식이 형을 좋아했던 이유가 아버지의 난폭함과 봉건적 사고방식에 대해 형이 강력하게 대항했기 때문이라면, 형을 싫어하게 된 이유는 세월이 흐르면서 형이 점점 아버지를 닮아갔기 때문이니까요. 동식은 수많은 재일 한인들이 장례식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 아버지가 평생 보여준 폭력과 야만 뒤에는 아버지가 감내해 온 고단한 현실이 있었음을 감지합니다. 징용이나 징병으로 낯선 땅에 끌려와 겪은 간난신고와 민족 차별, 해방 이후에도 분단으로 돌아갈 고향마저 잃어버린 상황, 일본에서 재현되는 남북 갈등 등으로 아버지의 인간성은 파괴되었던 것입니다. 동식이 아버지의 고통스런 삶을 이해하는 모습은 죽은 아버지의 복사뼈를 만져보는 모습에서 절정에 이르는데요. 이 대목을 읽을 때면, 저도 돌아가신 아버지의 복사뼈를 만지고 싶은 마음에 울컥해지고는 합니다. 오랜만에 ‘죽은 자가 남긴 것’을 다시 꺼내 읽은 저는, 동식의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았던 재일 한인들의 흔적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공휴일인 2월 11일(일본 건국기념일)에 도쿄 근처에서 가장 많은 재일 한인들이 모여 살았던 가와사키의 사쿠라모토 마을을 찾아가 보았는데요. 가와사키는 도쿄에서 20킬로 정도 떨어진 게이힌 공업지대(京浜工業地帯)의 중심도시로서 1920년대부터 철강, 석유화학 등의 산업이 발달한 도시입니다. 그 결과 1930년대부터 노동을 하던 한인 커뮤니티가 가와사키의 사쿠라모토 마을에 형성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도 귀국하지 않은 수많은 재일 한인들이 이곳으로 모여들면서 일본의 대표적 한인 마을이 되었던 것입니다. 가와사키의 사쿠라모토에 도착하자, 오래된 낡은 집들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는데요. 오랫동안 이 곳은 무허가 판자촌이었으며, 홍수가 나면 큰 물난리를 겪는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또 당시 일본인들이 먹지 않고 버리던 소와 돼지의 내장(放るもん)을 구워 팔았다는 야키니쿠집이 여기저기 보였는데요. 그 중에서도 1967년 김도례 할머니가 창업하여 손녀사위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사쿠라엔이라는 야키니쿠집은 큰 규모를 자랑했습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가와사키의 사쿠라모토 마을에는 1990년대 말에 재일한인 할머니들의 모임인 ‘도라지회’가 만들어져 큰 주목을 받기도 했는데요. ‘도라지회’에서는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가난하다는 이유’로, 그리고 ‘여자라는 이유’로 평생 고통을 겪은 할머니들이 모여 향수도 달래고 글자도 배우며 여러 가지 전통문화 체험도 하던 뜻깊은 모임이었습니다. 2010년대에는 우경화되는 일본에 맞서 반전·반헤이트스피치 데모 등에 나서 뜨거운 사회적 관심을 받기도 했던 모임입니다. 할머니들의 흔적을 찾아 동분서주한 결과, 여전히 가와사키 한인교회에서 화요일마다 도라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할머니들을 만나게 되길 기대하며 돌아오는 길에, 저는 두 손 모아 ‘죽은 작가 남긴 것’에 나오는 아버지나 ‘도라지회’ 할머니들이 겪은 고통과 아픔이 사라진 세상이 되기를 기도해 보았습니다.

2025-03-18

숨비소리

전화기 너머로 친구의 목소리가 쏟아진다. 나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는데 그의 이야기 속에 갇혀 숨 쉴 틈이 없다. 궁금하지도 않은 자신의 주변 이야기들을 쓰나미처럼 쏟아내 나를 덮는다. 내 속은 점점 깊이 잠겨 버린다. 위로받고 싶은 마음에 내가 먼저 건 전화였다. 내 마음을 기대고 싶었다. 하지만 이 대화는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 내 안부를 묻는 가벼운 질문조차 없이 친구는 자신의 이야기만을 토해냈다. 자신의 아이들 일상을 풀면서 정작 내 아이들의 일상은 묻지 않았다. 마치 이 세상에 자신의 문제만 존재하는 듯 쉴 새 없이 넘나드는 거친 파도처럼 쉼이 없었다. 나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참았다. 물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나는 듣는 사람으로 남았다. 익숙한 일이다. 타인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적절한 순간에 맞장구를 치고, 간혹 짧은 감탄사를 얹으며 존재감을 유지하는 일, 감정을 삼키고 하고 싶은 말도 접어두는 일, 그 소실점에서 묘하게 차분한 순간이 찾아왔다. 마치 깊은 물속에 잠긴 것처럼. 말할 수 없는 심연 속에서 조용히 견디는 느낌이다. 숨을 참고 버티며 내 차례가 오길 기다렸다. 끝내 내 차례는 오지 않았다. 잠깐 내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다시 자신의 이야기로 전환된다. 친구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끊어진 전화기 너머로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쉰다. 마치 해녀가 물 밖으로 올라오며 내뱉는 숨비소리처럼, 참아낸 숨이 길수록, 내쉬는 숨은 더 깊고 진하다. 숨비소리는 해녀들이 물속에서 숨을 참고 작업한 뒤, 물 밖으로 나올 때 내뱉는 숨소리다. 깊은 바다에서 오랜 시간 머무르려면 숨을 최대한 참아야 하고, 마침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강하게 내쉬는 숨이 바로 숨비소리다. 그것은 단순한 호흡이 아니라 생존과 인내의 증거이며 다시 바닷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 나는 지금 물속을 헤엄치고 있는 중이다. 깊이 잠길수록 주변은 조용해지고 오직 나의 심장 소리만 또렷하게 들린다. 숨을 참고 견디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온몸이 묵직해지지만 나는 아직 떠오르지 않는다.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물 속에 오래 머물려면 급하게 숨을 쉬고 싶어도 참아야 한다. 그 순간을 견디지 못하면 방향을 잃고 허우적거리게 된다. 살면서 숨을 참아야 하는 순간들이 많았다. 아이가 원하는 대학을 가지 못했을 때 좌절하지 않도록 감정을 숨기고 숨을 죽이며 아이의 마음을 감쌌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는 자신만의 길을 찾았고 대학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개척해 주었을 때 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숨을 참았던 그 시간이 나와 아이를 더 강하게 만들어준 시간임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김경아 작가 때로는 하고 싶은 말을 꾹 삼켜야 할 때, 당장 도망치고 싶지만 버텨야 할 때, 조급한 마음을 누르고 기다려야 할 때, 숨을 참는 일은 힘들다. 하지만 그 순간을 이겨낼 때 비로소 물 위로 나와 크게 숨을 내쉴 수 있다. 해녀들이 힘겹게 숨을 내쉬며 다시 바다로 향하듯, 나 역시 삶에서 숨을 참고 견디는 과정을 반복하며 바닷속 보물들을 캐 나가는 것이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의외로 물속은 신비롭다. 빛이 닿지 않는 깊은 곳일수록 고요하지만,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 나는 잠시 그곳에 머문다. 물속에서 나의 감정들은 천천히 가라앉는다. 초조하고 불안하고 조급했던 흐린 감정들이 잠잠해지고 내 수면 깊숙이 덮여있던 언어의 조각들을 꺼내어 가만히 듣는다. 오래 참을수록 숨을 내쉴 때의 해방감은 더 크다. 친구가 다 들어주지 않더라도 견디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수면 위의 공기는 더욱 달고 청량하다. 다시 숨을 들이마신다. 그리고 물속으로 몸을 던진다. 숨을 참고 견디고 다시 떠오르기 위해. /작가

2025-03-18

여야의정協 나서서 의대생 복귀 매듭지어라

정부가 내년 의과대학 정원을 증원 이전 수준으로 되돌리겠다고 밝혔지만, 당사자인 의대생 대부분은 강의실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대구권 각 의과대학 강의실은 신학기 개강을 한지 20여 일이 됐지만 거의 텅 비어있다고 한다. 경북대·영남대·계명대·대구가톨릭대 등 대구권 의과대학들은 이 상태로 4월이 되면 1학기 학사 일정 운영에 차질이 생겨, 대규모 학생 유급 사태가 발생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허영우 경북대 총장은 최근 “복학신청 또는 질병, 육아, 군 휴학 신청을 하지 않으면 학칙에 따라 제적처리 됨을 알린다”는 가정통신문을 보냈고, 영남대 의대 교수들도 ‘의과대학 학생에게 드리는 글’을 통해 “나머지 해결 과제들은 선배 의사에게 맡기고 강의실에서 다시 만나자”고 호소했다. 계명대와 대구가톨릭대 의대도 최근 총장과 의대 학장이 의대 학생 대표들을 만나 수업 복귀를 설득했다. 서울대 병원을 비롯한 서울지역 의과대학들도 교수들이 나서서 학생들의 강의실 복귀를 호소하고 있지만 별 성과가 없다.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학생협회가 최근 24학번 이상 의대생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96.6%가 학교에 휴학 의사를 전했다고 했다. 전국 각 대학의 의대는 다음주 24~26일을 수업 복귀 마지노선으로 정하고 단체·개별 상담 등을 통해 학생들의 복귀를 유도하고 있다. 의대생 교육도 문제지만, 2년째 계속되는 의정 갈등으로 전국 상급종합병원은 제기능을 하지 못한지 오래됐다. 끔찍한 의료 붕괴사태를 막으려면 정부와 의료계가 하루빨리 협상테이블에 앉아 출구를 찾는 방법밖에 없다. 올해 갓 들어온 신입생을 비롯해 전국 의대생 대부분은 전공의들과 함께 움직이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결국 필수의료의 최전선에 있는 전공의들이 수련병원으로 돌아와야 의료시스템이 정상적으로 돌아간다. 여야 정치권과 의료계·정부는 민주당의 제안으로 이미 구성된 ‘여야의정협의회’를 가동해서 의대생·전공의들이 더 늦지 않게 복귀할 수 있도록 여러 쟁점을 매듭지어야 한다.

2025-03-18

서울은 급등하고 대구 집값은 68주째 하락

최근 서울지역 토지거래허가구역이 해제되면서 강남 3구를 중심으로 아파트 매매가가 크게 뛰고 있다. 강남 3구에서 시작한 서울 집값은 마포, 용산, 성동구 등으로 옮겨가고 지금은 재건축 단지를 중심으로도 상승세가 이어진다. 당국이 집값이 뛰는 서울지역 부동산 거래 동향파악에 나섰고, 금융당국도 가계대출 선제관리에 나서는 등 대책 마련에 부산하다. 오랜 침체에 빠진 지방에서 보면 별천지 세상이다. 한국부동산원이 조사한 2025년 3월 둘째주 주간아파트 동향에 의하면 대구의 아파트 매매가격은 전주 대비 0.10% 떨어져 68주 연속 하락세를 기록했다. 북구(0.16%)와 동구(0.15%) 등은 대구 평균치 보다 하락폭이 더 컸다. 서울과 지방의 집값 격차가 벌어지는 부동산시장의 양극화는 또 다른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 지방의 투자 수요가 서울로 쏠리면서 서울 집값을 부채질할 수 있고 집값 격차를 바라본 지역에서는 상대적 박탈감에 허탈해한다. 대구의 아파트가격이 이처럼 떨어지는 직접적 이유는 미분양 물량적체다. 2월말 현재 대구는 9900가구, 경북은 9100가구의 미분양 아파트가 적체돼 있다. 전국 순위에서 가장 많다. 대구와 경북에서 내년까지 입주할 아파트도 무려 3만8000 가구나 된다. 올해 대구서만 입주 예정물량이 1만2000 가구니 물량 해소가 난망이다. 정부가 부동산시장 안정을 위해 LH를 통해 지방 악성미분양 아파트 3000가구를 매입키로 했지만 그 숫자로는 지역경기를 끌어올리기에는 역부족이다. 미분양 아파트가 해소되지 않으면 지방의 부동산경기는 언제 회복될지 알 수 없다. 지방 실정에 맞는 지방단위의 주택정책이 있어야 한다. 광역지자체마다 지역실정에 맞는 주택정책 권한의 지방이양을 요구했지만 정부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부동산경기가 지방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대단하다. 대구 아파트가격이 68주째 하락했다면 지역경제 사정은 말 안해도 알만할 것이다. 지방 실정을 잘 아는 지방정부로 권한을 이양해야 지역의 부동산시장을 살릴 수 있다.

2025-03-18

네 탓 하는 정치

우정구 논설위원 미국이 한국을 민감국가에 포함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네 탓 공방이 가관이다. 우리나라 여야 정치가 책임보다 책임을 전가하는 네 탓에 익숙한 분위기라지만 민감국가 지정을 둘러싼 여야간 네 탓을 보면 한심할 지경이다. 민감국가란 미국정부의 안보를 위협할 우려가 있거나 테러지원 등의 우려가 있는 나라를 대상으로 미국이 일종의 규제를 가하는 제도다. 북한과 중국, 러시아 등이 이에 해당하는 나라다. 오랜 동맹관계의 한국을 민감국가에 올린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한국의 입장에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기분”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더구나 미국이 민감국가 목록에 동맹관계인 한국 이름을 올린 배경에 대해 아직도 우리나라 외교당국이 정확한 사유를 모른다고 하니 국가 외교력에 공백이 생긴 것 같아 실망이 크다. 이 문제를 둘러싼 정치권의 공방은 더 실망스럽다. 야당은 “계엄선포 탓”이라며 공격하고 여당은 “탄핵남발 탓”으로 응수하는 등 책임 떠넘기는 모습이 한국 정치 수준을 짐작케 하고 있다. “넘어지면 막대 타령”이란 우리 속담이 있다. 제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는 탓하지 않고 애꿎은 남탓할 때 쓰이는 말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내 탓이오”란 이름으로 스스로 책임지는 사회혁신 운동을 벌였다. 남 탓하기 전에 자신부터 되돌아보는 사람이 되자는 운동이다. 사람의 심리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렇지만 정치는 이렇게 하면 안 된다. 국가 이익과 국가 미래 앞에서 네 탓보다는 내 탓을 하는 책임있는 정치가 돼야 한다. 네 정치 이제는 끝내야 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3-18

‘한국무시’하는 미국에 대응할 외교력 있나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우려했던 미국의 ‘한국무시’가 현실화 됐다. 아직 미국의 공식 발표가 나온 건 아니지만, 에너지부(DOE)가 산하 국책 연구기관에 다음 달 15일부터 한국을 민감국가(Sensitive Country)로 분류하라는 지침을 내렸다고 한다. 문제는 우리나라가 미국으로부터 일종의 기피국가로 낙인찍혔다는 사실을 정부도 몰랐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완벽한 외교참사다. 트럼프 행정부 들어 세계 각국에 관세폭탄을 던지는 미국은 이제 한미자유무역협정(FTA)까지 재협상 대상으로 삼을 태세여서, 우리정부 공직자들이 정신을 바짝 차릴 때다. 작년까지 미국 에너지부의 ‘민감 국가 및 기타 지정 국가 목록’에 포함된 25개 나라는 심각성이 높은 순서로 테러지원국가(북한, 이란 등), 위험국가(중국, 러시아 등), 기타 지정국가(한국, 대만 등)로 분류된다. 이 목록에 오른 나라 중에서 미국과 ‘상호 방위 조약’을 맺은 동맹국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외교부는 지난 17일 밤 민감국가 지정에 대해 “에너지부 산하 연구소에 대한 보안관련 문제가 이유인 것으로 파악됐다”고 했지만, 미 행정부는 아직 공식적인 이유를 밝히지 않고 있다. 지정 주체가 미 에너지부라는 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023년 1월 국방부 업무보고 때 “대한민국이 전술핵을 배치한다든지 자체핵을 보유할 수도 있다”고 언급한 게 화근이 됐다는 말도 나온다. 윤 대통령의 이 발언은 당시 바이든 행정부에 큰 충격을 줬다. 미국이 우방국인 이스라엘과 대만을 민감 국가로 지정한 이유도 핵 비확산 문제 때문이다. 미 에너지부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면, 민감국가 목록은 DOE 산하 정보방첩국이 관리한다. 민감국가 출신 연구자들은 DOE 관련 시설·기관에서 근무·연구하려면 엄격한 인증 절차를 거쳐야 한다. 다만 한국은 최하위 관리범주에 속해 제한이 크게 엄격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국가외교가 이렇게 혼란한 상황인데도 정치권은 서로 남탓만 하고 있다. 민주당은 미국이 일방적으로 이러한 결정을 한 것은 정부와 여당이 초래했다고 공격했다. 이재명 대표는 17일 “민감국가 지정으로 인공지능, 원자력, 에너지 등 첨단 기술영역에서 한미연합과 공조가 제한될 것이 명백하다. 윤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선포와 핵무장론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은 이에대해 “민주당이 국익, 미래가 걸린 외교까지도 정쟁 도구로 삼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이 대표를 겨냥해 “이런 인물이 유력대권후보라 하니 민감국가로 지정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국민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정부의 대미외교 역량이다. 정부는 민감국가 지정에 대한 언론 보도가 나온 뒤에야 부랴부랴 상황 파악에 나섰다고 한다. 미국 에너지부가 밝힌 민감국가 적용 시한까지는 아직 한 달 남짓 남았다. 이번주 중 산업부장관이 미 에너지부 장관을 만나는 일정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전에라도 다양한 채널을 통해 지정 경위를 명확히 파악하고, 한미간 동맹체제에 금이 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2025-03-18

생각 변화가 삶의 질을 가름한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처음 혁신을 도입하는 기업이나 도입한지 오래되어 혁신의 피로도에 젖어 매너리즘에 빠진 기업을 만나면 한가지 질문을 한다. ‘혁신을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돈 버는 것’‘변화하는 것’‘가치창출’ 등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혁신은 편함을 바꾸는 것’이기에 거부감이 있고 저항이 따른다. 혁신은 생각에 변화를 주어 편함을 바꾸면 더 편해지고 일의 효율성이 높아지는 원리이다. 이것이 참으로 어렵다. 혁신 경영에 생각이 있는 CEO를 만나면 회사 전반적인 분석과 의견수렴을 통해 하얀 도화지에 밑그림을 그린다. 속 그림은 실행의 주체인 현업과 함께 그린다. 기업의 혁신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성공하는지 탐색해 본다. 혁신은 생각이다. 인공지능(AI)시대 생활문화, 과학 문명, 한강의 소설 등은 생각의 산물이다. 생각에 가치 더하기를 하면 혁신이 된다.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는 혁신의 정의를 ‘새로운 조합의 창출’이라고 하였고, 제품이나 서비스의 개발, 생산 방식, 시장 개척, 조직 형태의 도입 등이 포함 된다. 현대 경영학에서는 ‘가치 창출을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 프로세스 최적화, 제품, 서비스 등을 개발하고 적용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제조업의 혁신은 단순한 제품 개선을 넘어, 생산성 향상, 원가 절감, 품질 개선, 지속 가능한 경영 등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일반적으로 보면, 신제품 개발이나 기존 제품의 획기적인 개선 등의 제품 혁신, 낭비를 찾아 제거를 통한 생산 공정의 개선과 자동화, AI 적용의 공정 혁신, 새로운 판매 방식, 유통 채널 확장, 서비스 결합 등의 비즈니스 모델 혁신 등이 있다. 혁신을 통해 잘 나가는 기업을 따라 생산방식을 도입하거나 모방하면 실패 확률이 높다. 자사의 일의 속성, 설비 특성, 생산 프로세스 특징 등을 고려하여 적절한 혁신 방식을 선택하여 도입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학습 진화의 관점에서 6시그마, TPS, TPM 등 혁신 기법의 수행 원리와 기능을 이해하고 자사의 생산 조건에 맞는 기법을 선택하여 문제를 푸는 것이다. 일과 생산 조건 변화에 적용성, 효과성이 있으면 혁신체계를 재정립시켜 지속성 속에 고유의 혁신 문화로 만드는 것이 성공의 길이다. 일반 가정에서 보면, 정리 정돈의 방법론을 적용하면 생활의 질이 높아 진다. 옷장에 안 입는 옷을 버리지 못하고 같은 옷을 또 사는 경우가 많다. 유행이 지났거나 오래 된 것을 과감하게 버려야 가치 있는 변화의 시작이 된다. 신발장도 아까워서 못 버리는 경우가 많고, 냉장고 냉동실에는 몇 달 전에 사놓은 음식 재료를 잊고 또 구입한다. 이러한 것은 생각에 정리 정돈을 못하기 때문이고 물건에도 정리 정돈이 안 되는 결과다. 변화와 혁신은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 크고 거창한 것에서 시작하려면 초기에 멈추고 마는 경우가 있다. 혁신은 거창한 이론이나 큰 변화보다 작은 생각의 변화에서 행동의 변화, 사물의 변화를 주고 가치 있는 행복한 삶으로 이어 진다.

2025-03-18

꿈나무에서 실버까지 피우는 묵향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봄이 오는 길이 순탄치만은 않은 듯 비바람과 강원 산간에 ‘봄눈 폭탄’까지 내리니 막바지 동장군의 심술(?)이 만만찮은 것 같다. 더욱이 이번 주부터는 영하권의 꽃샘추위로 남도에 피기 시작한 산수유나 홍매화가 화들짝 놀라며 가녀린 꽃잎을 짐짓 다물지 않을까 싶다. 한창 망울이 부풀어가던 벚꽃나무 가지가 찬 기온에 필 듯 말 듯 낭창거리며 개화시기를 가늠하고 있어도, 볕 바른 곳엔 이미 파릇한 새싹이 돋아나며 생동의 새봄을 부추기고 있다. 생동하는 봄날의 리듬을 먼저 타기라도 하듯 고사리 여린 손길에서부터 백발의 주름진 더벅손까지 벼루에 물을 부어 먹을 갈고 붓을 잡는 모습들이 진지하게만 보인다. 사각거리며 먹이 갈리는 소리가 긴 겨울의 움츠림을 걷어내는 손끝의 기지개 같고, 붓에 먹물을 찍어 서툴지만 한 점 한 획 써내려 가는 운필(運筆)은 성글어진 마음의 밭을 일구는 쟁기질 같다. 마치 예전의 서당이나 글방처럼 지필묵(紙筆墨)을 가까이하며 은은하게 묵향을 피워가는 몸짓들이 사뭇 담담하고 새롭기만 하다. 이러한 광경은 포스코 붓글씨봉사단에서 펼치고 있는 ‘함께하는 서예 나눔’의 테마별 재능봉사활동 장면들이다. 즉, 포스코 붓글씨봉사단에서는 매월 지역의 아동센터를 방문해 학생들에게 서예체험학습을 통한 정서순화와 감성계발에 도움을 주는 ‘찾아가는 서예교실’을 운영하는가 하면, 고령화사회를 맞아 노년기의 인지력ㆍ기억력 개선과 치매 예방 및 어르신들의 활력증진을 도모하는 ‘실버인지 서예치유’ 교육 프로그램을 매주 진행하고 있다. 서예 꿈나무들의 육성에서부터 황혼기의 어르신들께 인지학습 소일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니, 세대와 공간을 아우르는 활기차고 유익한 서예 재능기부활동이 아닐 수 없다. 포스코 붓글씨봉사단은 2021년 4월에 창단돼 서예재능 나눔으로 관내 취약·소외계층을 배려하고 지원하는 다양한 재능봉사활동을 꾸준히 펼쳐왔다. 찾아가는 서예교실 30여 회, 포항다문화가정·탈북민가족 가훈 써주기, 사회복지시설 방문 부채작품 써주기, 포항문화원 주관 새해 가훈 써주기 등의 서예 나눔활동을 지속적으로 실천했다. 어르신들의 말벗을 해주며 인지능력을 향상시켜주는 이색적인 서예치유 프로그램은 올해 3월부터 실시돼 주위의 눈길을 끌고 있다. 서예를 배움은 단지 글씨를 잘 쓰기 위해서만이 아닌, 그에 수반되는 유용한 가치와 활동으로서 심신의 건강과 의지의 단련, 심미안을 높이는데 도움을 주는 고도의 정신수양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먹을 갈고 먹물의 농도를 조절해서 붓글씨를 순서대로 써내려 가는 과정에는 뇌의 여러 영역이 자극되고 교감해 뇌의 활발한 활동이 이뤄진다. 한글이나 한문 글자의 의미와 필순을 떠올리며 기억력과 표현력이 좋아지고, 글자의 대소강약이나 먹물의 퍼짐, 전체적인 구도를 생각하면서 붓을 움직이면 공감각적인 능력이 살아나는 등의 효능을 기대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음악치료나 미술치료, 웃음치료 못지않게 ‘서예 치유’가 실버세대들의 정신과 마음의 안정, 치매 예방과 건강을 유지하는 신 장르로도 주목받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서예 꿈나무 학생들이 붓을 잡는 것이 흥미와 설렘의 희망이라면, 실버들에게는 치유와 소일의 활력과 위안일 것이다.

2025-03-18

국공립 어린이집이 혐오시설?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최근 한국일보의 한 보도가 적지 않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요약하면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지난해 말. 서울 종로의 어느 아파트에서 운영되던 민간 어린이집이 사정상 문을 닫게 됐다. 폐원된 어린이집을 대신할 국공립 어린이집 설치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의 의견이 극단적으로 갈렸다고 한다. 사람 사는 세상이니 다양한 견해 표출이야 별반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국공립 어린이집으로의 전환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내뱉은 말들은 도가 지나치다. “우리가 사는 곳에 국공립 어린이집이 들어오면 저소득층, 장애인, 다문화가정 애들도 올 거 아니에요.” “영어유치원이면 괜찮지만 국공립 어린이집은 안 됩니다.” “일과 양육을 병행하기 어려우면 워킹맘을 때려치우세요.” 심지어 “너희들이 거지야?”라는 막말까지 나왔다. 특정 계층을 비하하고, 교육의 균등한 기회 제공이라는 대원칙을 부정하며, 심지어 국공립 어린이집 설치를 원하는 상대방의 인격을 모독하는 이야기까지 오갔다는 보도에 많은 이들이 혀를 찼을 게 분명하다. 21세기 사람들에게 중요한 건 내 집, 내 식구, 내가 사는 동네다. 더불어 살아가는 걸 지향하는 공동체의 붕괴는 극도의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주의를 가져왔다. 함께 살아가는 이웃을 돌아보는 경우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특히 자기보다 경제적 형편이 좋지 못한 주변을 바라보는 눈길은 차갑게 식어간다. 요즘 아이들은 같은 동네에 산다고 하더라도 아파트 평수에 따라, 그 아파트가 임대냐 분양받은 것이냐에 따라 친구를 가려 사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장이거나 거짓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깨달음에 서글퍼진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3-17

증오를 선동하는 정치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정치판이 ‘증오와 저주의 굿판’이다. 진영으로 갈라선 정치는 이미 전쟁이 된 지 오래고, 광장의 탄핵 찬반집회에서는 비난·욕설·저주가 난무한다. 통합의 구심점이 되어야 할 대통령은 갈등의 중심에 서있고, 여야 의원들은 자기편 집회에 참석해서 증오를 더욱 부추긴다. 온 나라가 총성 없는 심리적 내전상태다. 누가, 무엇을 위해 증오를 선동하는가? 국민을 빙자하여 권력투쟁을 벌이는 정치인들의 그 검은 속내를 모르는 사람이 있겠는가. 여야는 상대를 괴멸시키기 위해 ‘증오 마케팅’에 열을 올린다. 상투적 수법은 ‘정의로운 우리’와 ‘무도한 그들’로 나누어 적개심을 부추기는 것이다. 증오정치로 ‘주체적 시민(市民)’은 점차 이성을 잃고 감정에 따르는 ‘종속적 신민(臣民)’으로 전락했다. 그 결과 확증편향에 갇힌 정치팬덤들은 자기 진영의 돌격대로 기꺼이 선봉에 선다. 게다가 편향적 언론과 극단적 정치 유튜버들도 증오의 선동에 가세한다. 정치권과 연계된 당파적 미디어들은 정치적 증오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고 있다. 미디어와 정치권력의 공생관계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공정한 보도’가 아니라 보수 또는 진보의 이념에 부응하는 ‘편향적 나팔수’가 되는 것이다. 정치 유튜버들은 혐오를 부추길수록 조회 수가 늘어나고 더 많은 돈을 번다. ‘증오의 확대재생산’으로 그들은 돈을 벌고 나라는 망해간다. 이처럼 망국적인 증오정치를 어떻게 끝낼 것인가? 무엇보다 정치인들의 성찰과 반성이 시급하다. 권력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품격을 잃은 보수’나 ‘개혁성을 잃은 진보’는 똑같이 나치 독일의 선동가 괴벨스(P. J. Goebbels)를 닮았다. 이성을 잃은 권력은 괴물이고, 괴물이 된 권력이 감성을 자극하는 선동정치가 바로 파시즘이다.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지도자들이 ‘증오의 프레임’에 갇히면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증오는 편협을 초래하는 영혼의 타락’이다. 확증편향에 갇힌 정치인들이 독선과 아집을 버릴 때 비로소 민주주의는 다시 회생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괴물이 되어버린 정치인들에게 반성을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주권자의 각성과 혜안(慧眼)’이 매우 중요하다. 역사학자 리처드슨(H. C. Richardson)은 “민주주의는 총구가 아니라 투표함에서 죽는다.”고 하면서 “유권자가 깨어 있지 않으면 정치인들은 히틀러(A. Hitler)처럼 대중을 선동해서 권력을 잡는다.”고 했다. 선동정치는 분노를 먹고 자라기 때문에 국민들이 선동 당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깨닫지 못하면 백약이 무효다. 따라서 주권자는 ‘선동에 휘둘리는 감정’을 억제하고 ‘잘잘못을 가려내는 이성’의 눈을 밝혀야 한다. ‘비판은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지만, ‘선동은 감성을 자극’하는 것이다. 증오의 감정에 지배당하면 이성적 판단을 그르친다. 민주주의는 관용과 절제, 대화와 타협이라는 ‘이성의 작동’을 전제로 하고 있다. 선동정치에 휘둘려서 이성을 잃으면 ‘독재의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2025-03-17

대경선 효과, 대구권 동일 생활권으로 묶었다

작년 12월 개통한 비수도권 최초 광역철도 대경선의 개통 효과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최근 구미시가 대경선 개통후 2개월간 카드사별 실적을 분석해 보니 대경선 개통후 구미시내 소비가 258억원 증가해 소비율이 6.6% 성장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초 우려했던 소비 유출보다는 역외에서 구미로 유입되는 소비가 더 많아 긍정 결과를 얻었다고 한다. 실례로 예년이면 연말특수가 끝나면 줄어들던 소비가 올해는 연말특수 후에 오히려 더 늘어 대경선 개통이 지역경제활성화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분석했다. 또 구미 대경선 개통효과는 시내버스 이용에서도 나타났는데, 금오산에서 승차해 구미역에 내린 승객수가 작년 같은 기간보다 89%가 증가했다. 구미시는 금오산과 구미역을 오가는 시내버스 노선을 증편하고 관광객 유치를 위한 지원책도 별도 마련했다. 한편 대구시가 조사한 대경선 개통 효과도 긍정적이다. 개통 후 한달동안 87만여 명이 이용해 기대만큼의 성과가 나왔다고 판단했다. 출퇴근 시간대는 열차 안이 혼잡할 정도로 승객이 붐벼 증편 운행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온 바 있다. 대구 원대역과 칠곡 북삼역이 추가로 신설될 예정으로 있으나 그밖에서도 역 신설을 희망하는 곳도 나오고 있다. 또 대구에서는 광역환승제가 시행되면서 도시철도로 유입되는 이용객도 늘었다. 동성로 등 대구 중심가 상권과 백화점 등에 수요가 늘어나고 대구, 경산, 칠곡, 구미 등의 역세권 경기가 살아나는 등 대경선의 파급효과가 대구권 전역에서 일어나는 분위기다. 비수도권 최초로 개통한 대경선은 당초 예상한대로 대구와 인근 시군 350만 주민을 동일생활권으로 묶는 효과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특히 출퇴근 근로자의 생활패턴이 달라지고 주민들도 교통의 편의성에 따라 생활반경을 넓혀가는 추이를 보이고 있다. 교통의 혁명은 사람들의 이동시간을 단축시켜줄 뿐아니라 경제·사회적 파생효과를 반드시 가져온다. 대경선 개통이 대구권을 하나로 연결함으로써 지역간 동질감을 높이는 동시에 주민들의 삶의 질도 향상시킨다. 대경선의 효과를 더 확대하는 정책적 노력이 필요한 때다.

2025-03-17

헌재, 尹 탄핵선고 이후의 사회적 파장 고려를

윤석열 대통령의 정치적 운명을 가를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이번 주 중 이루어질 가능성이 거론된다. 이로인해 서울 종로구 헌재 주위엔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경찰은 헌재 정문 방향의 인도 양쪽에 투명 차단벽과 질서유지선을 설치해 일반인의 통행을 막고 있다. 지난달 25일 변론을 종결한 뒤 3주 가까이 거의 매일 재판관 평의를 열어온 헌재는 그동안 쟁점별 검토를 마치고 결론을 도출하는 단계까지 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법조계에서는 헌재가 이번 주 후반인 20, 21일쯤 선고를 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다만, 결론도출에 난항이 계속되면 오는 26일 예정된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공직선거법 위반 항소심 선고 이후로 판결이 미뤄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재판관들이 현재 심리 중인 한덕수 국무총리 사건을 먼저 선고해야 한다고 판단하거나, 마은혁 재판관 후보자가 중도에 합류하는 것도 선고기일 지정에 변수가 될 수 있다. 헌재가 쟁점검토에 시간이 걸리는 이유는 국회와 윤 대통령 양쪽이 제기한 쟁점이 워낙 많아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을 도출하기가 어렵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자칫 법적 공정성과 절차적 완결성이 문제가 될 경우, 후유증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를 수도 있다. 윤 대통령 사건은 사회적 파장을 고려해 재판관 간 전원일치 의견을 도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헌재는 그동안 자료송달, 재판관 기피신청, 기일 변경 등 모든 사안을 만장일치로 판단해 왔다. 헌법에 따라 파면 결정에는 재판관 6인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만약 재판관들의 의견이 엇갈린 채 선고가 내려질 경우, 그 파장은 심각할 것이다. 가뜩이나 예민해진 보수·진보 양진영에 불복여론이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파면 때는 재판관 전원일치로 결정돼, 결정문에 소수의견이 없었다. 그리고 헌재가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윤 대통령 탄핵심판을 공정하게 했다는 것을 국민에게 인식시키는 것이다.

2025-03-17

내란 정국의 역사 기술과 ‘전환기’라는 시대 의식

허민문학연구자 훗날, 오늘의 내란 정국은 어떻게 역사에 기록될까? 국회와 선관위를 급습한 12·3 비상계엄의 발동, K-극우의 준동과 유튜브 수익 경쟁, 집권 여당의 부화뇌동, ‘야당 독재’라는 가짜 프레임과 다수 언론의 기계적 중립, ‘키세스 시위대’와 남태령의 트랙터, 아이돌 응원봉과 ‘다만세’ 제창, 내란성 불면과 우울증의 사회적 확산, 개헌 논의의 필요와 반동성 등, 분명 이 연쇄된 사건들은 한국 근현대사의 모순과 성취,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고 대립·갈등하는 정치사의 주요 국면으로 기술될 것이다. 그럼에도 미래에 남게 될 역사서술의 향방이 가장 궁금한 건 ‘내란 우두머리’ 혐의자에 대한 구속 취소와 검찰의 ‘즉시항고’ 포기에 있다. 경호처 영장 반려에서부터 예견된 이 기괴한 판결과 의도된 무력한 수용에 대해 역사의 페이지에는 어떤 방식으로 작성해야 하나? 그야말로 남들 보기에 창피한, 특별한 교훈(?)이나 철 지난 의미조차 없는 이 사태를 그 자체로 남길 수 있는 방법이 새삼 걱정된다. 물론 누가 작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언제나 중요하다. 반일종족주의나 뉴라이트 역사관을 봐도 그렇다.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죽은 자들도 적이 승리한다면 그 적 앞에서 안전하지 못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가 비유한 ‘역사의 천사’는 역사의 진보를 믿기보다는 과거의 잔해 속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찾는다. 시간은 결코 단선적이지 않으며 파열과 중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때론 작가 한강의 말처럼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도,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도 있다. 파당 정치나 계급투쟁, 진영 대결을 말하는 게 아니다. 역사의 법정을 바로 세우는 길에 관한 과업이며, 그 문턱에서 말소되어선 안 될 진실한 기억에 대한 사수를 호소하고자 하는 것이다. 가당치 않은 비상계엄의 정당성이 운위되는 작금의 사회적 대혼란이 누구에 의해 어떤 관점으로 역사에 남겨지게 될까. 그런 의미에서 탄핵 심판은 역사의 갈림길이다. 어쨌든 내란 이후의 한국 사회는 일종의 ‘전환기’를 맞이할 거란 사실만은 분명하다. 흔히 ‘이행기’나 ‘전환기’라고 불리는 특정한 역사의 국면에는 과도기적인 현상이 관찰되기 마련이다. 때문에 그 전후 시기의 단절과 연속, 상실과 회복의 교차를 비롯해 ‘과거의 잔여’와 ‘미래의 현현’이 ‘현재의 쟁점’ 속에서 충돌하거나 병행하는 복잡성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역사 인식의 방법이 필요하다. 이때 그 방법이란 역사학자들의 학문적인 고심으로부터 확보될 수도 있겠지만, 그만으로는 부족하다. 반대로 정치적 획책으로 도모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려 있기 때문이다. 과연 내란 이후의 한국 사회는 글로벌한 규모에서 횡행하는 우익 포퓰리즘의 바람에 말려 들어갈지 아니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가 아래로부터 다시 논의될 수 있는 극적 발판이 마련될지 솔직히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역사의 운명이 소수의 법비들에게 달려 있는듯한 요즘의 형국이 심히 불안하고 불쾌할 따름이다. 전환이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일과 가능한 데 불가능했던 일들을 점진적으로 이루어가는 과정을 말한다. 세상이 일거에 바뀔 수는 없다. 조금 지쳐도 더 나은 세계와 사회를 만들어가는 고달픈 경로라 생각하고 모두 힘을 냈으면 좋겠다.

2025-03-17

값과 가치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인터넷으로 난(蘭)을 몇 촉 샀다. 구입한 난의 종류와 재배방법을 알아보려고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깜짝 놀랐다. 난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는 내가 보기에는 잎의 모양이나 색이 조금씩 다를 뿐인데 판매 가격은 그야말로 천양지차였다. 몇 촉에 만 원 이하의 난이 있는가하면, 일견 비슷해 보이는 다른 종류의 난은 수십만 원에서 수억 원까지 값이 매겨져 있었다. 심지어 어떤 희귀종이라는 난은 20억 원을 호가하는 것도 있었다. 풀 한 포기의 값이 보통사람은 평생 만져볼 수도 없는 돈이라니, 놀라움을 넘어 기가 막히는 노릇이었다. 미술작품 중에도 천문학적인 가격으로 거래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작년까지 경매시장에서 팔린 작품 중에 가장 비싼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살바르도문디’라는 그림이라고 한다. 무려 4억5천30만 달러에 사우디 왕자가 낙찰 받았다고 하는데, 한화로는 5천억 원이나 되는 가격이다. 그 밖에도 폴 세잔, 폴 고갱, 잭슨 폴락 등의 그림이 3천억 원을 호가했고, 렘브란트, 앤디워홀, 마그로스코, 크림트 등의 그림이 2천억 원 상당에 팔렸다고 한다. 물론 경매시장에 나오지 않고 박물관 같은데 보관된 작품 중에는 그보다 훨씬 더 값나가는 것도 많을 것이다. 난이나 그림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는 사람들 중에는 그런 것을 그저 준다고 해도 마다할 사람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애호가들은 애지중지 수억 원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희귀난도 김매는 시골 아낙네의 눈에는 그냥 귀찮은 잡초로 보이지 않겠는가. 극단적인 예로 사막에서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수천억 원짜리 그림이 물 한 모금보다 나을 수가 없는 것이다. 고흐는 평생 단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를 못했고, 모딜리아니는 자신의 그림을 빵부스러기와 바꾸어 먹을 정도로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다 결국 요절하고 말았다 한다. 우주 만물에는 원래 차별이나 가격이란 게 없었다. 사람들이 자의로 구분하고 값을 매겨서 경중이나 귀천이 생긴 것뿐이다. 그래서 그것은 사물의 고유한 가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인간사회에서 통용되는 가격의 형성은 보통 상품으로서의 가치, 즉 경제적 가치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 가령 예술 작품의 경우는 시대적·문화적 의미부여와 상업적 계산도 작용해서 가격이 매겨지는 것이기에 누구에게나 수긍이 가는 가치일 수는 없을 터이다. 물론 세상에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더 많다. 우선은 하늘과 바다, 해, 달, 별, 눈비와 바람 같은 자연이 그렇고, 생명과 영혼과 사랑과 진실이 그렇다. 인간 사회는 물질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인위적이고 물질적인 가치가 삶의 기준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더 많은 재화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을 하게 되고,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은 상대적 박탈감으로 비관하고 좌절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마음먹기 따라서는 누구나 다른 가치관을 가질 수가 있다. 둘러보면 우리 주변에도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 무수히 많고, 그것으로 얼마든지 삶의 보람과 기쁨을 창출할 수가 있는 것이다.

2025-03-17

탄핵 반대 세력을 키운 건 이재명 대표다

김진국 고문 지난 주말에도 거리는 소란했다. 광화문 앞 세종대로를 비롯한 서울의 거리 곳곳은 물론 구미 등 지방 도시에서도 수만, 수십만 인파가 몰려 아우성쳤다. 이번 주에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올 예정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당하거나, 업무로 복귀하거나. 양단간에 결정이 난다. 그러고 나면 조용히 끝날까. 탄핵당하면 60일 내 다음 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 차기 대통령 후보들 경쟁으로 관심이 쏠릴까. 탄핵이 기각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걸까. 지금 거리에 쏟아져 나온 군중은 집으로 돌아갈까. 아무리 생각해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탄핵 찬성과 반대로 갈라진 군중이 더 흥분하지 않을까.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건, 그 결정을 반대하는 군중이 이제까지보다 훨씬 더 파괴적으로 흥분하지 않을까. 박근혜 전 대통령 때는 보지 못한 일이다. 그때도 문재인 정부 임기가 끝나도록 시위가 이어졌다. 토요일마다 ‘태극기 부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몰려와 서울 시청과 광화문에서 집회하고, 행진했다. 그래도 지금처럼 큰 규모는 아니었다. 박 전 대통령은 윤 대통령보다 혐의가 작았다. 그것도 자신이 직접 한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한 일을 책임졌다. 그런데 왜 지금 더 폭발했을까. 흥분한 보수 인사들이 주목하는 것은 이재명 민주당 대표다. 보수세력은 이 대표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비상계엄보다 더 두려워한다. 이런 식이다. “이재명이 대통령 되면 바로 공산화된다”, “빨갱이 세상이 되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나”…. 구체적인 근거도 없이, 논리를 비약하고, 비약해서 쏟아내는 억지를 일일이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그렇지만 이 모든 일은 이 대표가 뿌린 씨앗들이다. 이 대표의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적대적 공생 관계다. 윤 대통령이 당선된 것은, 그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아서가 아니다. 이 대표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아서다. 지금도 누구를 더 싫어하느냐로 세력을 끌어모은다. 탄핵 반대 세력을 모아준 1등 공신이 이 대표다. 뒤늦게 놀란 이 대표가 광화문 앞에서 연 최고위원 회의에도 빠졌다. 이 대표는 수시로 말을 뒤집었다. 최근 대선이 가깝다고 생각해선지, 우클릭 행보를 했다. 그러고는 여론의 눈치를 보며 다시 좌클릭했다. 이 대표는 과거 “존경하는 박근혜 대통령이라고 했더니 진짜 존경하는 줄 알더라”라고 말했다. 가벼운 말은 신뢰를 무너뜨린다. 최근 사법 리스크를 대처하면서도 상식과 다른 해명들이 신뢰를 흔들었다. 지난주 헌재는 민주당이 소추한 탄핵 건을 줄줄이 기각했다. 지난해 민주당이 밀어붙인 최재해 감사원장, 이창수 서울중앙지검장, 조상원 중앙지검 4차장, 최재훈 반부패2부장에 대한 탄핵 심판이다. 헌법재판관 만장일치로 기각했다. 탄핵 근거들을 모두 배척했다. 민주당의 무리한 탄핵소추였음을 확인시켜준 판결이다. 민주당은 윤석열 정부에서 탄핵소추안을 29번 발의했다. 13건을 강행 처리했다. 역대 모두 합쳐서 16건인 탄핵소추 가운데 3건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이 정부에서 민주당이 한 것이다. 지난주까지 그중에 8건이 기각됐다. 탄핵 요건을 전혀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탄핵을 기각한다고 없던 일이 되는 게 아니다. 탄핵 심판하는 동안 해당 고위공직자의 손발을 일하지 못하게 묶어놓게 된다.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의 이유로 지적했을 정도다. 쥐도 도망갈 구멍을 보고 쫓는다고 한다. 너무 궁지에 몰지 말라는 경구다. 그런데 이 대표는 권력을 너무 휘둘렀다. 이 대표는 대통령 관심 예산을 모조리 칼질했다. 윤 정부의 국정 방향과 충돌하는 법안을 끊임없이 밀어붙였다. 윤 대통령 내외를 특검으로 몰아세웠다. 당내 정치도 그렇게 했다. 지난 총선 공천이 전형적이다. ‘비명횡사’라는 말이 유행어가 됐다. 박용진 전 의원 낙천 과정은 드라마보다 극적이었다. 이 대표와 갈등을 빚은 사람들을 철저하게 짓밟았다. 집권하면 상대 정당에도 같은 보복을 할 것 같은 공포를 심었다. 탄핵 반대 여론이 높아진 책임의 상당 부분을 이 대표가 떠안아야 하는 이유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5-03-16

폭싹 속았수다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재밌게 봤다. 제주도 말로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뜻이다. 가수 아이유와는 또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배우 이지은의 1인2역이 눈길을 끄는데 특히 소녀가장으로 식모살이하면서도 문학소녀의 꿈을 잃지 않는 오애순을 핍진하게 표현해냈다. 생선집 아들인 광식(박보검)과 애순의 패가망신을 겁내지 않는 ‘요망진’ 로맨스가 가슴을 뛰게 하지만 그보다 더 인상적인 건 극 초반에 등장하는 애순 엄마 전광례(염혜란)의 눈물겨운 모정이다. 일찍 부모를 잃고 부모의 빚까지 떠안았다. 결혼하고서는 해녀 물질하면서 남편 병수발까지 했다. 남편 죽고서 얻은 새서방은 방구석에 누워만 있는 백수건달이라 밥이라도 안 굶기려고 딸내미를 시어머니 집에 더부살이 보냈다. 억척스럽고 강인한 엄마 광례는 언제까지나 애순의 곁을 지켜줄 것 같았지만 애순이 10살 되던 해에 물질해서 얻은 숨병(감압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예감한 광례가 애순의 손톱에 봉숭아꽃물을 들이면서 말한다. “두고 봐라. 요 꽃물 빠질 즈음 되면 산 사람은 또 잊고 살아져. 살면 살아져. 손톱이 자라듯이 매일이 밀려드는데 안 잊을 재간이 있나” 이 대목에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광례는 신산하고 박복한 삶을 산 우리들의 모든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오직 자식만 생각하며 자신을 희생한 어머니의 사랑이 ‘제주 해녀’라는 특별한 지역적 문화와 더해져 더 큰 감동으로 밀려왔다. 살면서 만난 여러 사람 중 제주도의 송협 형은 참 각별하다. 낚시로 맺은 인연이 이제는 거의 가족이 됐다. 가족보다 더 자주 통화하고 제주나 내가 사는 안양에서 며칠씩 동숙한다. 내게 “살다가 힘들면 제주 와라”라고 말해주는 이 형 덕분에 세상살이가 아무리 괴롭혀도 나는 끄떡없다. 나에게는 제주라는 피난처가, 거기서 온 맘으로 나를 맞아줄 아름다운 사람이 있으니까. 드라마를 보면서 제주에 가고 싶고, 형이 그립고, 형네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언젠가 형이 들려준 어머니 이야기야말로 드라마다. 1945년 제주 안덕면 사계리에서 7남매 맏딸로 태어난 김이선 삼춘은 초등학교를 그만 두고 밭일, 가게일, 동생들 돌보는 일까지 도맡아 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물질을 배워 열여섯 살에 해녀가 되어서는 형제섬 근처에서 미역을 캐고, 매년 2월부터 8월까지 강원도로 ‘바깥물질’을 다녔다. 그렇게 번 돈으로 부모님 밭 사드리고, 돌아가실 때 입혀드릴 수의도 사고, 동생들 옷과 신발을 샀다. 스무 살에 결혼해 쌍둥이 딸을 낳자마자 시어머니께 맡기고 또 바깥물질을 나갔다. 집안 어른이 춥게 물질하지 말라며 일본에서 구한 고무옷을 보내줬는데 전통 해녀옷인 ‘물소중이’를 입은 다른 해녀들이 질투해 못 입게 했다. 그래서 일부러 더 바깥물질을 다녔다. 그렇게 두 해 강원도에 다녀와서 보니 사계 해녀들도 전부 고무옷을 입고 있었단다. 닻줄에 발이 걸려 죽을 뻔했다. 물질하다가 시체를 본 적도 있다. 겁이 나도 물질은 그만 둘 수 없었다. 뱃속에서 이미 죽은 아이를 사산하기도 했다. 아이를 잃고 일주일만에 바다에 나갔다. 친정아버지가 “너 경허당 죽는다”고 해도 도무지 말릴 수 없었다. 바다에 가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운명이었다. 아무리 몸이 아파도 다른 해녀들이 미역과 소라를 캐서 나오는 걸 보면 저절로 바다에 뛰어들게 됐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몸을 혹사한 결과 양쪽 무릎을 수술하고, 물에 들어가든 들어가지 않든 뇌선(진통제)을 하루에 한 번 꼭 먹게 됐지만 젊어서나 지금이나 바다에 가고 싶은 마음은 한결 같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30년 동안 병수발 했다. 물질만으로는 살림이 되지 않아 장사도 했다. 생선, 미역, 톳 등 안 팔아본 게 없다. 낚싯배도 했다. 남편이 떠나고서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낚시 손님들을 태우고 가파도, 마라도로 직접 배를 몰았다. 그렇게 물질하고 장사하고 낚싯배 몰면서 집안 빚을 다 갚고 아이들 공부도 시켰다. 어머니의 일생이 드라마 속 광례처럼 파란만장하다. 어느 겨울 형과 함께 어머니가 담요 덮고 앉아 계신 집에 갔더니 귤을 잔뜩 꺼내주셨다. 현무암처럼 전복 껍데기처럼 거친 손에서 뭉클한 물소리가 들렸다. 그리운 사람과 그리운 바다를 만나러 봄날 제주에 간다. 험한 생의 파도를 넘어 이제 잔잔한 물가에서 볕을 쬐고 계시는 어머니께 “폭싹 속았수다” 말씀드려야겠다.

2025-03-16

덧없음의 위로

나의 삶의 주인공은 ‘나’지만, 언제나 그럴듯하게 멋진 것만은 아니다. 최근 재미있게 읽은 ‘미스터 초밥왕’에서는 주인공 쇼타 옆을 지키는 ‘오바타 신고’라는 인물이 있다. 신고의 별명은 ‘신코’로, 새끼 전어를 의미한다. 일본에서는 이른 봄에 나오는 새끼 전어를 ‘신코’라 부르는데, 아직 제몫을 못하는 견습이라는 뜻으로 미성숙하고 불완전 하다는 뜻에서 붙었다. 오바타 신고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름보다는 ‘신코’로 불린다. 주인공 쇼타와는 동년배이자 쇼타와 같이 일하는 오오토리 초밥에선 쇼타보다 반년 더 일찍 들어온 선배이지만, 어쩐지 주인공다운 쇼타의 엄청난 활약에 묻혀 오히려 비교당하고 계속해서 혼나며 결국 부담을 이기지 못한 채, 오오토리 초밥에서 야반도주하여 건설 현장에 일하게 된다. 뭐 어쨌거나 쇼타의 도움으로 다시 초밥 장인의 꿈을 되찾은 신코는 다시금 오오토리 초밥으로 돌아오지만 만화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하루하루 눈부시게 성장하는 쇼타와는 달리, 신코는 완벽한 주연처럼 쇼타의 활약에 ‘굉장해! 정말 굉장해! 쇼타’와 같은 대사만 날릴 뿐이다. 나는 어디에 소속되어 있건, 어디서나 주연보단 조연에 가까운 인물이다. 주인공의 활약을 돕고, 주인공의 서사를 더 극적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만들어진 어딘가 급조한 듯한 ‘신코’ 같은 캐릭터와 같달까. 어디서나 주인공처럼 주목 받는 게 부담스럽고, 실은 주목 받을 만큼의 엄청난 능력이 있어서도, 패기와 열정으로 똘똘 뭉친 사람도 아님을 객관적으로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을 조금 달리 해서 영화 ‘트루먼쇼’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영화 ‘트루먼쇼’의 주인공 트루먼 버뱅크는 가짜 세트장에서 조작된 삶을 살고 있단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가는 인물이다. 어느 날 하늘에서 조명이 떨어지고, 죽은 아버지를 길거리에서 만나고,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다 자신의 모습이 생중계되는 알 수 없는 일들을 겪는다. 그러다 첫사랑 실비아가 모든 것이 쇼라는 사실을 트루먼에게 남기고 사라지게 되고, 트루먼은 그 말을 쫓고 쫓아 결국 자신의 30년간의 일상이 모두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TV쇼였단 것을 알게 된다. ‘트루먼 쇼’라는 이름의 이 쇼는 트루먼 버뱅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현재까지 모든 일상을 촬영해 전 세계에 생중하는 최고 인기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깨닫고,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 결국 그는 세트장을 떠나 피지로 가겠다는 결심을 굳힌다. 물론 이 쇼를 제작한 총 책임자이자 트루먼의 삶을 조종한 크리스토프는 트루먼이 스튜디오를 떠나지 못하도록 온갖 방해 공작을 펼친다. 하지만 트루먼은 이미 주어진 운명을 거스르고 리스크를 겪더라도 자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행한다. 모두 나를 속이고 있지만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완벽한 세상을 버리고 미지의 세계로 결국 나아가는 것이다. 이전에 트루먼쇼를 볼 때에는 트루먼이 참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트루먼처럼 용기 있게 알에서 깨어나는 새처럼 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트루먼처럼 섬을 떠나기 위한 시도를 계속할 만큼의 의지와 용기가 없는 사람임을, 최근에 결국 깨닫고 말았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나는 근래에 새롭게 도전한 모든 것들에 적응하지 못했고, 결론적으로는 많은 실패를 남겼다. 그 실패 앞에서 지나치게 무력했다. 트루먼처럼 물 공포증을 이겨낸 채 다리를 건너 스튜디오 끝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음, 그렇지 못하다. 마치 미스터 초밥왕처럼 주인공 옆의 그림자처럼 자연스레 깔리는 ‘신코’처럼, 나의 역할은 이미 정해져 있는 듯하다. 그렇다. 나는 트루먼처럼 모든 것이 연출된 가짜 세상을 뛰어나갈 용기도, 결단도, 현명한 지혜도 없다. 그저 이 세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도 못하고 나약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나로서는, 실패를 실패로 여기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최선임을 안다. 실패 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보며 불편한 쾌락과 조롱을 하더라도 나는 나의 삶을 산다. 내가 현재 살아가고, 느끼고, 만나고, 해쳐나가고, 견디고 있는 이 모습만큼은 아직까지 내게 진짜이고 진실된 순간이라 믿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가짜 세상을 깨지 못하고 이 속에 바보처럼 살아가고 있다고 한들, 이 모든 것이 결국 다 덧없는가? 글쎄, 아직 아무것도 모른 채 이리저리 방황하는 인간이라면 우선은 현재의 삶을 충실하게 살 수밖엔 없다. 그 허무함과 덧없음에게서 나는 이상한 위로를 얻는다.

2025-03-16

與野, 헌재 선고에 승복한다는 약속부터 하라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를 앞둔 지난 주말에는 대구·경북을 비롯해 서울, 부산, 울산, 대전, 세종, 춘천 등 전국에서 대규모 찬·반 집회가 열렸다. 일부 헌재 재판관의 퇴임일이 임박한 만큼, 이번 주중 선고일이 잡힐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보수·진보 양진영이 총결집한 것이다. 나라 전체가 내란 상태로 치닫는 살벌한 분위기다. 지난 15일 구미역에서는 윤 대통령 탄핵기각을 요구하는 대규모 국가비상기도회(세이브코리아 주최)가 열렸다. 국민의힘 나경원·윤상현·이만희·장동혁·강명구·구자근 의원과 전한길 한국사 강사 등이 참석했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도 연단에 올라 애국가를 불렀다. 같은 날 오후 대구 동성로에서는 ‘윤석열퇴진 대구시민 시국대회’도 열렸다. 민주당을 비롯한 5개 야당은 이날 서울 광화문에서 ‘비상시국 범국민대회’를 열고 윤 대통령의 조기 파면을 요구했다. 야당 지도부가 총집결했다. 민주당은 국회에서 광화문까지 걷는 ‘윤석열 파면 촉구 도보 행진’을 나흘째 이어간 뒤 집회에 합류했다. 일요일인 16일도 양 진영은 서울 도심 곳곳에서 집회를 열었다. 정치권은 선고 막판까지 헌재 앞에서 릴레이 시위 등을 벌이며 여론전 수위를 최대한 끌어올리겠다고 했다. 탄핵선고가 임박하자 각종 음모론까지 불거지면서 양진영은 극도로 예민해져 있다. 탄핵 찬·반을 놓고 두쪽으로 갈라진 집회가 3개월째 이어지면서 이제 갈등수위가 최고조에 이른 분위기다. 오죽하면 경찰이 폭동대비책까지 세우겠나. 과열된 군중심리를 가라앉히려면 정치권부터 냉정해져야 한다. 탄핵 선고 이후의 국론분열을 조금이나마 걱정한다면, 지금부터라도 국민통합 분위기를 조성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상식이다. 탄핵당사자인 윤 대통령과 국회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아직 헌재 결정에 승복하겠다는 공식적인 의사를 밝힌 적이 없다. 국론분열에 가장 책임이 큰 두 사람을 비롯해 여야 정치권은 국민에게 헌재결정이 어떻게 나오든 승복하겠다는 약속부터 해야 한다.

2025-03-16

사교육비 줄일 묘수는?

우정구 논설위원 지난주 교육부가 발표한 2024년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 결과를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조사 자료에 의하면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쓰인 사교육비는 무려 29조 원이다. 전년보다 7.7%가 증가했고 4년 연속 최고치를 경신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의 각종 사교육 경감 대책에도 일선학교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교육비는 좀처럼 줄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초중고 학생의 사교육 참여율이 80%에 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초등학생은 참여율이 87.7%, 중학생은 78%에 달한다. 학부모들의 사교육비 경감을 목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늘봄학교 운영 등 각종 대안에도 사교육비는 꾸준한 증가세다. 학생 1인당 사교육비를 분석해 보니 월평균 59만2000 원. 800만 원 이상 고소득 가구의 사교육비 지출이 300만 원 미만 저소득 가구의 7배나 됐고, 반면에 증가율은 저소득 가구가 고소득 가구보다 더 높았다. 또 지역별로 보면 사교육 참여율은 서울이 86.1%로 최고다. 참고로 대구 81.8%, 경북 75.4%다. 1인당 사교육비 역시 서울이 67만3000 원으로 가장 높았다. 대구는 47만8000 원, 경북은 35만6000 원이다. 통계를 놓고 보면 국내가정의 사교육비 지출은 줄어들 기미가 전혀 안보인다. 지역별로 편차도 심해 이러다 교육 격차가 더 벌어질 판이다. 사교육 열풍이 줄지 않는 데는 학벌주의, 노동시장 불균형 등 우리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기인함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대구시교육청이 늘봄 확대 등 각종 대안 제시로 사교육 경감에 나서고 있지만 사교육비 추세로 보아 성과가 나올지 의문이다. 교육을 백년대계라 했다. 백년을 내다본 공교육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3-16

공자, 정치의 근본을 말하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청도 인문학’에서 ‘논어’를 읽기 시작한 것도 어느새 10회차 두 달을 넘어선다. 그동안 ‘학이편’과 ‘위정편’을 마치고, 이번 주부터 ‘팔일편’에 접어든다. 복잡다단한 국내외 정세로 인해 공부에 마냥 집중할 수는 없었으나, 나름대로 여러모로 애쓴 점은 확실하다. ‘위정편’을 완독하고 나니 머릿속이 조금은 명쾌해지는 느낌이다. 공자가 정치에서 본질적인 요체를 설파한 ‘위정편’은 21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글 첫머리에 ‘시경(詩經)’을 도입한 것이다. “시경에 들어있는 300편의 시를 한 마디로 개괄하면 생각에 사특(邪慝)함이 없다는 것이다.” 현대 독자들은 이 대목에서 상당한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 혹은 문학과 정치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위정’이라 함은 정치 혹은 정사(政事)를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위정편’에서 정치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보다는 정치의 근간 혹은 근본을 설파한다. 공자가 ‘위정편’에서 강조하는 정치의 핵심은 세 가지다. 그것은 학문과 효, 그리고 군자다. 학문은 네 차례, 효는 다섯 차례, 군자는 세 차례 언급되어 모두 12개의 장이 할애돼 ‘위정편’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공자는 왜 학문과 효 그리고 군자라는 덕목을 강조한 것일까?! 그것은 유가(儒家)의 핵심인 ‘수기치인(修己治人)’에서 기인한다. 선비가 먼저 제 몸과 마음을 닦아 인간이 된 연후에야 백성을 다스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자신을 닦는 행위의 근저에는 효와 학문이 자리한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충이 아니라, 부모를 향한 효를 강조한 공자의 심사가 실로 아득하다. ‘서경(書經)’을 인용하여 효 역시 정치하는 것이라고 역설한 공자가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공자는 효와 형제 우애가 정치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다. 먼저 인간이 된 후에야 비로소 정치 행위를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나아가 그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지식인의 가장 기초적인 자세를 역설한 것이다. 지식인의 개인 수양에서 앎의 중요성을 설파하면서 공자는 ‘학이사(學而思)’라는 공부법을 가르친다. “책만 읽고 생각하지 않으면 남에게 속기 쉽고, 생각만 하고 책을 읽지 않으면 위태롭다.” 책을 읽되 비판적으로 독서해야 하며, 생각하되 망상(妄想)에 빠지지 말고, 근거를 책에서 찾으라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공자의 공부법이다. 효와 학문에 이어 공자는 ‘군자불기(君子不器)’를 역설한다. 특정한 용도와 크기, 형태, 색깔과 무게를 가진 그릇으로 군자를 규정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공자는 친하게 지내되 무리를 짓지 아니한다는 ‘주이불비(周而不比)’로 군자의 본질 가운데 하나를 설명한다. 이것은 화합하되 같지 아니하다는 ‘화이부동(和而不同)’과 같은 맥락이다. 벌써 100일 넘도록 진행된 내란 사태가 종결되지 않고 있다.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이다. 이러매 정치와 정치인의 기초적인 덕목을 새삼 돌이켜보는 것이다. 법 기술자들이 권력을 농단하고, 국민을 우롱하는 역겨운 상황이 조속히 종결되어 화평한 날들이 오기를 간절히 희구한다.

2025-03-16

달성군 대구 편입 30년, 대구발전 중심축 되길

달성군 논공읍 달성군 청사 앞에는 달성군 100년 타워가 우뚝 서 있다. 1914년 대구군 외곽지역과 현풍군을 통합해 신설한 달성군이 2015년 100주년을 맞아 세운 이 기념탑은 달성군민의 자긍심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과거 100년을 잘 이끌어 온 역사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전국 최고 도농도시를 꿈꾸는 100년 미래에 대한 희망이 담긴 기념물이라 할 수 있다. 경북도 관할에 있던 달성군은 1995년 정부의 행정통합 조치에 따라 대구시로 편입됐다. 당시만 해도 농촌도시로 세상의 주목을 끌지 못했던 달성군은 대구 편입 30년만에 전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도시로 부상했다. 100년 타워 설치의 목적에 부합하는 성과들이 하나 둘 쌓여가고 있는 것이다. 통합 당시 11만여 명이던 군 인구가 지금은 27만명으로 시급으로 성장했다. 1읍 8면이 6읍 3면으로 바뀌었다. 예산은 편입 당시 722억 원 수준에서 올해 본예산 기준으로 9568억 원으로 증가해 10배 이상 성장했다. 달성군의 평균 나이는 43.1세로 대구는 물론 전국 82개 군 단위 중 가장 젊다. 얼마 전 발표된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지난해 달성군의 출생아 수는 5년 연속 전국 군 단위 중 1위다. 합계출산율도 1.05명으로 전국 평균의 2배에 이른다. 대구 편입 30년만에 달성군이 이룩한 성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화려하다. 지역에 경제적 활기를 불어넣을 산업단지도 4곳에서 대구국가산업단지를 포함해 8곳으로 늘어났다. 산단에 입주한 업체만 1100여 군데에 달한다. DGIST 등 대학과 연구기관, 대구과학관 등 각종 산업인프라가 투자되었다. 특히 국가로봇테스트필드 유치와 모빌리티, 모터소재 부품·장비 특화단지 지정 등 미래산업으로 발돋움할 여건들이 잘 채워져 있다. 또 대구농수산물도매시장이 2032년까지 달성군 하빈면으로 이전하면서 달성군은 도농복합도시이자 첨단산업도시로서 착실한 성장이 예고되고 있다. 대구편입 30년 맞은 달성군의 눈부신 성장이 대구 발전의 축으로 지속되길 기대하며 30년 편입을 경축한다.

2025-03-16

환상 방황

전영숙 시조시인 어제도 그 남자 곁을 지나갔다. 집을 나서면 거의 매일 보는 사람이다. 오랫동안 씻지 않아서인지 찌든 쉰내가 코를 스친다. 장시간 이발을 하지 않은 머리는 이리저리 엉켜 어깨 뒤로 늘어져 있다. 다행히 검은색 두툼한 패딩점퍼를 입고 신발도 방한화를 신고 있다. 빈 가게 앞 계단에 손을 가슴 위로 모으고 누워 있다. 겨울치고 날이 따스해서 해바라기라도 하나 보다. 그 남자가 움직이는 행동반경은 비교적 일정한 듯 했다. 자주 편의점 앞에서 컵라면과 큰 사이즈의 콜라를 먹고 마셨다. 우리 집 근처 약국에서 시작해서 두 정거장 정도 떨어진 재래시장 근처까지 갔다가 다시 이쪽으로 돌아오는 일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내가 본 것만 3년이 넘었는데 노숙의 삶이 몸에 익었나 보다. 노숙에 익숙해지면 좀처럼 그 생활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한다. 그런 삶을 사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붕괴된 기족 관계, 무너진 가정 경제, 실직 등이 가장 큰 요인이라고 한다. 요즘은 실직으로 젊은 노숙자의 수가 증가 추세에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 남자가 눈에 들어온 것은 일정한 범위 안에서만 움직인다는 것이다. 무엇이 이 동네에서 그를 떠나지 못하게 붙잡고 있는지 궁금했다. 문득 환상 방황, 윤형 방황으로 풀이되는 링반데룽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산에서 등반 중 본인은 어떤 목표물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방향감각을 잃고 큰 원을 그리며 같은 지역을 맴도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열심히 목적지를 향해 간다고 믿고 움직이지만 같은 자리를 맴돌다 보면 사고력이 둔해지고 이런 행동을 무리하게 하면 조난사고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한다. 특히 눈보라나 안개가 많이 끼었을 때 일어나기 쉽고 해나 달 같은 방향을 알려주는 기준점이 없을 때 더 심하게 나타난다는 연구보고서도 있다. 위기에 처하면 생각이 흐려지고 감각이 둔해지기 때문이다. 사람의 삶은 늘 평탄한 길만 걸어가는 것은 아니다.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때론 안개나 눈보라, 폭풍 같은 것도 만날 수 있다. 그런 어려움이 닥치면 처음에는 어떤 식으로든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지만 힘든 일이 반복되며 더 깊은 어려움 속으로 들어가면 방향성을 상실할 수도 있다. 우리는 삶에서 이런 환상 방황을 크게나 작게나 겪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엘리베이터에 갇힌 일이 있었다. 단순히 엘리베이터가 멈춘 것이 아니라 불까지 몽땅 나가서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에 놓여 있었다. 손을 얼마만큼 뻗어야 비상 호출을 누를 수 있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방향도 거리도 측정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같이 탔던 고등학생과 나는 숨소리조차 죽이며 잠잠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지금 같으면 휴대폰이 있어서 밖으로의 연락이 가능했겠지만 그 당시엔 휴대폰이 일상화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처음에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어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진한 무력감을 가지고 왔다. 하지만 다른 한편 누군가는 문을 열어 줄 것이라는 작은 희망이 있어서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노숙의 삶을 살다가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있다. 존 폴 디조리아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두 번이나 노숙자 생활을 했다. 그런 중에도 그는 늘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가지려고 했다고 고백했다.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스스로 믿었다고 한다. 두 바퀴 스케이트보드로 유명한 강신기 대표도 안정적인 직장을 버리고 사업을 하던 중 외환위기를 겪었다. 그 후 식구들은 처가로 보내고 서울역에서 노숙을 했었다. 그러나 인력시장을 나가면서 희망과 긍정적인 마음이 늘 마음에 남아 일어설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부모나 주변의 격려도 일어서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고백했다. 오늘도 이 동네를 떠나지 못하고 원을 그리는 삶을 사는 그 남자를 지나쳤다. 요즘은 몸이 많이 힘든지 걸어 다니는 시간보다는 앉아 있거나 누워있는 시간이 더 많다.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 마음 가운데 스스로를 일으켜 세워야겠다는 마음이 작은 불씨로 일어났으면 좋겠다. 자신의 환상 방황을 끝내고 평범하지만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삶으로 돌아가기를 빌어본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자신을 일으켜 세웠으면 싶다. 그래서 이 동네에서 말끔해진 그를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시조시인

2025-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