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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황룡사지서 금동봉황장식 자물쇠 출토

신라시대 최대 사찰이던 경주 황룡사 터에서 통일신라시대 금동봉황장식 자물쇠가 출토됐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경주시 구황동 황룡사 터 서회랑 서편 발굴조사에서 길이 6㎝의 금동봉황장식 자물쇠를 포함해 통일신라·고려 시대 자물쇠 3점이 나왔다고 25일 밝혔다.한점은 청동, 다른 하나는 철제 자물쇠다. 연구소에 따르면 자물쇠가 출토된 서회랑 서쪽지역은 1976∼1983년 발굴조사 때 조사단 사무실이 있었던 장소로, 사역 내 유일하게 발굴하지 못해 미조사 지역으로 남아있던 곳이다. 그간 이곳은 금당, 목탑 등이 위치한 예불공간과는 달리 승려의 생활공간이나 사찰 운영과 관련된 시설 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돼왔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봉황 장식이 있는 자물쇠는 통일신라 유물로는 첫 사례로 평가된다. 봉황의 비늘과 날개 깃털 등의 문양을 세밀하게 표현해 매우 정성스럽게 만든 귀중품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해당 구역에는 중요한 물건을 보관하는 장치나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연구소는 또 “넓지 않은 조사구역 내에서 통일신라·고려 시대 자물쇠 3점이 출토된 것은 매우 이례적으로, 서회랑 외곽 공간의 기능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로 보인다”고 밝혔다.다른 2종의 자물쇠는 길이 10㎝의 고려시대 철제 잠금쇠와 길이 8㎝의 통일신라시대 청동제 잠금쇠로 ‘ㄷ’자 모양이다. 3종의 자물쇠들이 모두 크기가 매우 작아 문이 아니라 귀중품 담는 보관함이나 서랍장에 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조사에서는 삼국∼고려 시대에 사용된 기와류, 점토로 빚은 토기 및 도기류, 금속유물 등도 다수 출토됐다.연구소는 2018년부터 서회랑 서쪽(약 8천700㎡) 미조사 구역 중 북쪽을 우선 발굴해 통일신라∼고려 시대에 이르는 건물터, 배수로, 담장터, 기와가 묻힌 구덩이 등을 확인했다.특히 이곳 상층에는 고려 시대, 하층에는 통일신라 시대 건물터가 중복돼 있어 황룡사 외곽의 공간구성이나 건물 배치의 추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연구소는 설명했다.서회랑에서 서쪽으로 약 9m 떨어진 곳에서는 남북 방향으로 조성된 길이 35.5m의 고려 시대 담장도 확인됐다. 담은 길이 30∼50㎝ 사각형 석재를 기초로 그 위에 대형 암키와 조각을 여러 단 쌓아 수평을 맞춘 후 상부에 석재나 벽돌을 올리는 방식으로 축조됐다.이 담장은 예불 영역과 생활공간을 구분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연구소는 설명했다.또 통일신라 시대 건물터 아래에서는 5∼10㎝ 크기 자갈과 황색 점토가 섞인 층이 노출됐는데, 이 흔적은 도로의 기층부로 추정된다.연구소는 “이 도로 흔적이 남북방향의 도로 유구(자취)로 이어진다면 황룡사 서편의 사찰이 어떻게 확장됐는지 판단할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황룡사 서회랑 서편지역 발굴조사 성과를 25일 오후 2시 연구소 유튜브 채널(https://youtu.be/FvEpWuZCvog)을 통해 공개했다.경주/황성호기자 hsh@kbmaeil.com

2020-11-25

봉화 오고당 고택, 국가민속문화재 지정

조선 후기의 이름난 의사 박한진(1815∼1893)이 살았던 봉화군 봉성면의 ‘봉화 오고당 고택’이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됐다. 문화재청은 ‘봉화 오고당 고택’을 국가민속문화재 제298호로 지정했다고 9일 밝혔다.이 고택은 1820년에 건립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오고당’(五高堂)이라는 당호는 박한진의 호 ‘오고’를 따서 후손들이 붙였다.오고선생 유고집에는 박한진이 61세인 1875년(고종 12년), 헌종의 생모인 조대비 신정왕후(1808∼1890)의 병을 고치자 임금이 그의 의술을 높이 평가해 ‘만리’라는 호를 내렸다는 내용이 나온다.임금은 벼슬을 내려 고마움을 표하려 했으나 박한진이 거듭 사양했고, 이에 감탄한 고종은 박한진이 의리와 인품을 갖추고 있다며 ‘오고’라는 호를 하나 더 하사했다고 돼 있다.조대비도 박한진에게 여러차례 친필 편지를 보내 가까이 있어 달라고 했지만, 박한진은 이를 사양하고 7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향리에서 가난한 백성을 위해 의술을 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오고당 고택은 겉으로 닫히고 안으로 열린 내향적 배치인 ‘외폐내개’로 구성돼 있는데, 각 공간을 기능에 따라 창고와 외양간 등 부속채를 따로 마련하지 않고 본채 내에 집약적으로 구성한 게 특징이다.환기와 채광 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붕 용마루 아래에 까치구멍집을 냈다. 일반적인 까치구멍집의 지붕이 초가인 것과 달리 기와로 돼 있어 민가 건축의 변화과정을 살필 수 있는 매우 드문 사례로 평가받는다.이 고택은 본채와 별당채, 문간채 등 세 채로 돼 있다. 겹집 형태의 본채를 중심으로 오른편에 문간채를, 왼편에 별당채를 뒀다. 이는 상류층 양반가의 배치법인 남녀유별의 유교적 질서 체계를 실현한 것이다.문화재청은 별당채와 문간채는 건축적 내력을 확인할 수 없고 훼손이 심해 이번 지정에서 제외했다.봉화/박종화기자

2020-11-09

이팝꽃 필 무렵 한번 만나요

포항시 북구 흥해읍 일대에 자생하는 이팝나무 군락이 천연기념물로 승격된다. 이팝나무 축제와 이팝나무 가로수 거리 조성 등 이팝나무를 지역 대표 식물로 특화시켜온 포항시 흥해읍의 이팝나무 도시 브랜드화가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문화재청은 12일 경상북도기념물 제21호‘의창읍(현 흥해읍)의 이팝나무 군락’을 천연기념물로 지정 예고했다. 경상북도기념물로 지정된 지 45년 만으로 이름도 ‘포항 흥해향교 이팝나무 군락’으로 바꿨다.흥해읍 옥성리 흥해향교와 임허사 주변에 있는 흥해향교 이팝나무 군락은 향교 건립(1398년 창건)을 기념해 심은 이팝나무의 씨가 번식해 조성된 군락으로 전해진다. 34그루의 이팝나무가 상수리나무와 섞여서 군락을 이루고 있다. 특히, 5월이면 만개하는 하얀 꽃은 주변 향교와 사찰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주고 있는 등 역사·경관적 가치가 크다. 또한, 예로부터 흰쌀밥모양인 이팝나무 꽃이 많고 적음에 따라 한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등 선조들의 문화와 연관성이 높아 민속·문화적으로도 가치가 크다.향교와 사찰 주변에 분포한 이팝나무 노거수 26주는 평균 가슴높이 둘레 2.73m, 평균 높이 12.5m다. 1991년부터 매년 5월이면 흥해이팝청년회 주관으로 이팝꽃 축제가 열리는 등 지역의 관광자원으로도 유명하다.포항시는 또한 흥해읍 시가지 도로에 이팝나무 가로수 조경사업을 통해 이팝나무 특화거리 조성에 나서고 있다. 현재 중성로 흥해읍 119안전센터와 흥해중학교 앞 도로, 삼흥로 약성삼거리부터 장성동 방향 등지에 404그루를 심었다. 흥해읍 옥성리에 위치한 이팝나무 천연군락지와 연계한 가로수길 조성으로 의미를 더하고 있다.이팝나무는 포항지역 향토수종으로 초여름 하얀색의 꽃송이가 20여 일간 잎이 안 보일 정도로 피어 장관을 이룬다. 옥성리 군락지와 흥해읍 도심에 심어진 이팝나무 가로수에 꽃이 만개할 경우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며 전국적인 명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이팝나무는 전 세계적으로 희귀한 수종으로 이팝나무의 학명은 치오난투스 레투사(Chionanthus retusa)인데, ‘하얀 눈꽃’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꽃송이가 사발에 소복이 얹힌 흰 쌀밥처럼 보여 ‘이밥나무’라고 했으며, 이밥이 이팝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라북도 일부 지방에서는 늦봄에 핀다 해서 ‘입하(立夏)목’ 또는 ‘이암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 해의 풍년을 점치는 나무로도 알려져 있는데, 꽃이 많이 피는 해는 풍년이, 그렇지 않은 해는 흉년이 든다고 믿어 왔다.문화재청은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팝나무는 전국적으로 노거수 6건, 군락 1건이다. 이들 중 흥해 이팝나무 군락은 생육 상태가 가장 좋고 수형과 규모 면에서도 양호하다”고 밝혔다.문화재청은 흥해향교 이팝나무 군락에 대해 30일간 의견을 수렴한 뒤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로 지정할 예정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10-12

신라 최대 사찰 황룡사 중문·남회랑, 디지털로 부활

신라 최대 사찰 황룡사가 1238년 몽골군의 침략으로 불타 사라진 이후 782년 만에 되살아 났다. 불타 터만 남아있는 신라 최대의 왕실 사찰 황룡사가 증강현실(AR) 디지털 기술로 부활했다. 경주시와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2일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 사업의 하나로 황룡사 일부 디지털 복원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디지털로 복원한 가상의 황룡사를 공개했다.국내에서 실물이 사라진 문화재를 디지털 기술로 복원, 구현한 것은 지난해 5월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서울시가 함께 복원했던 서울 서대문(돈의문)이 첫 사례였다. 하지만, 건물 구성 부재를 하나하나 복원해 세부를 자세히 표현하고, 내부에 들어가 살피며 체험할 수 있도록 실제 건축물 크기로, 정확한 위치를 고증하며 증강현실로 복원한 것은 황룡사 터가 처음이라고 국립문화재연구소 쪽은 밝혔다.이번에 복원한 부분은 황룡사의 건축물 중 가장 크고 화려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통일신라 시기의 중문과 남회랑이다. 황룡사는 남문에서 시작해 북쪽으로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차례로 자리하고 있는데 중문 양쪽에 남회랑이 이어져 있다.복원한 중문의 크기는 가로 26.4m, 세로 12.6m이고 남회랑의 길이는 중문을 포함해 272.5m이다. 복원된 중문은 2층 규모의 우진각(건물 네 면에 처마가 있는 집) 형태의 건물과 책을 엎어놓은 1층 규모의 맞배지붕 형태 등 두 가지로 구현됐다. 남회랑도 중문의 형태에 맞춰 두 가지로 만들었다.국립문화재연구소는 “과거의 일반적인 기존 디지털 복원물은 복원 건축물 앞에 사람이 있어도 건축물 뒤로 보이는 등 원근감이 무시됐지만, 이번 복원은 체험자와 건축물의 거리를 계산해 원근감을 최대한 살렸기 때문에 더 현실감 있다. 실감나는 증강현실 복원을 위해 시간에 따른 그림자를 계산하고 재질을 다양화해 건물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체험하는 것처럼 실제감을 최대한 살려 황룡사를 실제로 거니는 것 같은 생생함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와 경주시는 추후 황룡사지 방문객이 태블릿PC를 이용해 증강현실 프로그램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24년까지 황룡사 금당을, 이후에는 강당과 목탑을 디지털로 복원할 계획이다.경주/황성호기자 hsh@kbmaeil.com

2020-07-22

‘쪽샘 vs 탑동 적석목곽묘 전성시대’ 특별전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한국문화재재단과 함께 경주 쪽샘유적과 탑동유적에서 조사된 신라 적석목곽묘 조사 성과를 종합한 ‘쪽샘 vs 탑동 : 적석목곽묘 전성시대’ 특별전을 오는 12월 30일까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천존고 전시실에서 개최한다.이번 전시는 올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개소 30주년과 한국문화재재단 창립 40주년을 함께 기념해 기획한 행사로 쪽샘과 탑동으로 대표되는 경주지역 적석목곽묘 유적의 최신 조사 성과와 출토 유물을 한자리에서 비교할 수 있도록 마련됐다.1천500여 년 전 형성됐던 쪽샘과 탑동 두 무덤군을 비교해 신라 왕경(王京·수도)의 공간 구성을 엿보고, 조사 성과와 출토 유물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자리다.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돌무지덧널무덤)는 5~6세기 신라 지배층의 무덤 양식으로 나무곽(木槨)으로 매장시설을 만들고 돌을 쌓아 보호한 후 흙을 덮는 구조다. 전시에서는 쪽샘 44호분에서 발견된 ‘신라 행렬도’가 새겨진 항아리가 일반에 처음 공개된다. 높이 약 40㎝ 긴목 항아리로 추정되는 토기에 4단으로 구성된 기마행렬, 인물, 동물이 함께 행렬하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이밖에 ‘토우 장식이 붙은 뚜껑’, ‘동물무늬 항아리’ 등 729점의 유물이 선보인다.경주 남천과 인접한 도당산 아래에 위치한 탑동 유적에서는 적석목곽묘 76기를 비롯한 약 180여 기의 무덤이 조사됐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금 귀걸이, 은반지, 각종 말장식, 토기 등 411점의 유물을 선보인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05-31

누굴까? 1천500년 넘어온 신라 금동신발

1천500년 전의 금동 신발 한 쌍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경주의 신라 고분에서 금동 신발이 출토된 것은 지난 1977년 경주 인왕동 고분군 조사 이후 43년 만의 일이다.27일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 사업의 하나로 경주 황남동 120호분과 일대를 발굴 중인 문화재청과 경주시는 “신라 시대 금동 신발 한 쌍이 경주 황남동 120호분에 추가로 딸린 고분에서 발굴됐다”고 밝혔다. 발굴된 금동 신발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왕족 또는 상위 계급의 부장품인 것으로 보고 있다.아직 신발이 묻혀 있는 상태에서 일부의 모습만 확인한 상황인 만큼 전체의 크기나 형태가 드러나지는 않았다. 금동 신발은 피장자 발치에서 발견됐는데, 경주 황남대총 남분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금동 신발이 출토된 적이 있다.신발은 표면에 ‘T’자 모양의 무늬가 뚫려 있고 둥근 모양의 금동 달개(瓔珞·영락)가 달려 있는 점이 확인됐다. 지금까지 신라 무덤에서 출토된 신발은 실생활에 사용하던 것이 아니라 죽은 이를 장사지내 보내는 장송(葬送) 의례를 위해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조사기관인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측은 “피장자의 물품은 신분을 말해 주는데 금동 신발이 나온 것으로 봐서 최고 상위 계급, 즉 왕족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라고 설명했다. 또 “보통 금동 신발이 출토되면 금관, 은으로 만든 허리띠, 목걸이, 귀걸이, 팔찌 등이 함께 나온다”며 “피장자 머리 부분에서 금동 달개 일부가 노출된 것으로 볼 때 금동관이나 새 날개 모양 관 꾸미개(冠飾·관식)가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정한다”고 덧붙였다.금동 신발이 출토된 곳은 120호분 남쪽에 위치한 120-2호분이다. 그동안 120호분 일대는 일제강점기에 번호가 부여됐으나 민가 조성 등으로 훼손되면서 고분의 존재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문화재청과 경주시는 지난 2018년 5월부터 유물의 잔존 유무와 범위 등을 파악하고, 앞으로 진행할 유적 정비사업에 기초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120호분에 대한 발굴조사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지난 해 120호분의 북쪽에 위치한 120-1호분과 남쪽의 120-2호분을 추가로 확인했으며, 내부 조사를 시행했다.문화재청에 따르면, 금동 신발이 출토된 120-2호분 120호분의 봉분 일부를 파내고 조성돼 있는 점을 볼 때 먼저 120호가 조성된 뒤에 추가로 들어선 후대의 무덤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신발 외에도 120호 무덤에서는 금동 말안장(鞍橋·안교)과 금동 말띠꾸미개(雲珠·운주)를 비롯한 각종 말갖춤(馬具·마구) 장식, 청동 다리미, 쇠솥, 다양한 토기류 등이 출토됐다.이처럼 중요한 유물들이 120호분에 딸린 120-2호분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 비춰볼 때 120호분의 주인은 왕족이나 귀족 등 높은 신분의 무덤일 것이라고 조사기관은 추정하고 있다. 120호분의 봉분 규모도 훨씬 큰 만큼 현재까지 출토된 유물보다 위계가 더 높은 유물들이 출토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김권일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아직은 금동 신발의 일부만 노출된 상황이지만 금동신발은 경주의 왕족과 비속 등의 무덤에서 현재까지 12켤레 정도 출토됐다”면서 “기본적으로 금관, 청동관 등 관과 은으로 만든 허리띠, 목걸이, 금귀걸이 등이 세트로 출토된다”고 말해 왕족 등의 무덤일 가능성을 시사했다. 또 “120호분과 함께 있는 소형 묘에서 나온 것으로 무덤에 묻힌 사람이 혈연관계일 가능성이 있다”며 “120호분이 두 배 정도 큰 점을 고려하면 더 중요한 유물이 출토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한편, 발굴조사단은 “아직 발굴조사가 초기 단계임에도 금동 신발 등 현재 출토된 유물의 중요성을 감안해 이른 시기에 발굴 현장을 공개했다”고 밝혔다. 조사단은 앞으로 120-1·2호분의 조사를 완료한 뒤 아직 내부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120호분의 매장주체부도 본격적으로 발굴할 예정이다.경주/황성호기자 hsh@kbmaeil.com

2020-05-27

의성 금성면 고분군, 제555호 사적 지정

의성군에 있는 의성 금성면 고분군(義城 金城面 古墳群)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됐다.문화재청은 “경북 의성군에 있는 경상북도기념물 의성 금성면 고분군을 국가지적문화재 사적 제555호 지정했다”고 밝혔다.의성 금성면 고분군은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 학미리, 탑리리에 걸쳐 조성된 324기의 대규모 고분군이다. 5∼6세기 삼국 시대 의성지역을 포함한 경북 북부지역의 역사·문화와 신라의 발전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돼 왔다.의성 금성면은 삼한시대에 조문국이라는 부족 국가가 있던 곳으로, 신라에 편입된 뒤에는 정치·경제·문화 측면에서 북방 거점이 된 것으로 보인다.1960년 의성 탑리리 고분군 발굴 이후 매장문화재 조사 17회, 학술조사 9회가 진행돼 신라 무덤 양식인 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돌무지덜넛무덤)를 독자적으로 변형한 묘제(墓制)가 확인됐다. 무덤 내부에서는 머리에 착용하는 관, 귀걸이, 허리띠 장식, 고리자루칼 등 신라 수도 경주와 관계를 보여주는 뛰어난 위세품이 발견됐다. 위세품(威勢品)은 왕이 지방세력의 수장에게 힘을 과시하고 세력권에 편입하면서 지방에 있는 수장의 위신을 세워주기 위해 하사하는 귀한 물품이다.또 지역적 특색이 돋보이는 이른바 ‘의성양식 토기’가 출토되기도 했다. 의성양식 토기 특징은 고배(高杯·굽다리접시), 항아리, 뚜껑 등에서 잘 나타나는데, 이러한 토기는 생산과 유통이 꾸준히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의성군은 금성면 고분군에 대한 사적 지정을 신청하면서 신라 거점 역할을 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유구(遺構·건물의 자취)와 유물이 경주와 유사하면서도 독특한 점이 있다고 강조했다.문화재청 관계자는 “의성군 금성면은 경주와 경북 북부를 연결하는 교통 요지이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곳”이라며 “고분 형성 시점을 분석하면 초기 국가에 해당하는 국읍(國邑, 중심 읍락) 지배계층 분묘일 가능성이 크다. 이 같은 고분군이 과거 강성했던 정치세력이 이 일대에 존재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의성/김현묵기자

2020-04-01

봉화 문화재수리재료센터 설계 착수

봉화군 법전면 풍화리에 들어서는 국립 문화재수리재료센터건립이 본격 시작됐다.문화재청은 봉화군 풍정리 일대에서 이달부터 설계를 시작으로 문화재수리재료센터 건립을 시작했다고 최근 밝혔다.문화재청과 경북도, 봉화군이 함께 추진하는 문화재수리재료센터는 339억 원을 들여 내년 6월까지 설계를 마무리하고 9월 착공해서 2023년 말 완공할 예정이다.문화재수리재료센터는 문화재수리 현장에서 수급이 어려운 문화재 수리용 재료를 정부로부터 공급받아 문화재의 원형보존 등 전통문화 전승을 하고자 건립되는 시설이다.국내시장에서는 구매가 어려워 현재는 외국산 수입목으로 재료를 대체하거나 공사단가보다 더 비싼 비용으로 재료를 거래하는 일 등이 있는 만큼 국가 차원의 대책 마련이 꼭 필요해진 품목들을 국가가 직접 확보해 시장에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센터가 건립되면 제재된 목재 기준 지름 45㎝ 이상의 대형 국내산 소나무, 자연스럽게 휜 소나무, 강과 산에서 수집한 자연산 막돌 등 문화재 수리시장에서 수급이 어려워진 재료들을 시장에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된다. 문화재수리재료센터는 목재보관소, 치목장, 부재보관소, 재료실험실, 운영 관리시설, 공용 공간 등으로 구성된다. 예상 대지 면적 21만㎡, 연면적 9천900㎡다.앞서 문화재청은 문화재 수리시장에서 일부 품목의 수급 불균형을 파악해 2013년 문화재 수리용 소나무 공급체계 개선 용역을 진행했고, 2018년 센터 건립부지로 백두대간을 따라 질 좋은 소나무인 황장목(黃腸木)이 많은 봉화를 선택했다. 봉화 주변 지역에는 문화재청이 산림청과 협약을 통해 관리하는 문화재 복원용 목재 생산림이 있다.문화재청 관계자는 “문화재수리 공사는 우선 재료의 선정과 품질 관리가 중요하다. 특히 대형 소나무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건조해야 강도와 내구성이 좋고 잘 썩지 않지만, 관리비용 때문에 민간에서 공급하기는 쉽지 않다”며 “센터가 건립되면 문화재 수리 사업과 지역경제가 활성화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03-30

“황룡사 동쪽 회랑 외곽은 고승들의 수행 공간 추정”

신라 시대 국가사찰이었던 경주 황룡사 동쪽 회랑 외곽은 고승들이 수행을 위해 홀로 머물거나 의례로 쓰이던 공간이었을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이 같은 경주 황룡사지(사적 제6호) 회랑외곽 발굴조사 내용을 담은 ‘황룡사 발굴조사보고서Ⅱ-동회랑 동편지구’를 발간했다고 30일 밝혔다.경주 황룡사지 발굴조사는 1976년부터 1983년까지 모두 8차에 걸쳐 조사가 이뤄졌으며 이번 보고서에는 6차(1981년)와 8차(1983년) 조사에서 본격적인 발굴이 이뤄졌던 동회랑 동편지구의 조사내용과 출토유물이 수록됐다. 이곳의 건물 배치나 구조 등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알려진 것들이 많지 않다.이번 보고서의 조사구역은 동회랑 동편에 남북으로 길게 설치된 담장으로 구획된 공간으로, 면적은 4천300㎡다. 이곳에서는 황룡사 전체 사역의 외곽경계로 추정되는 남북담장이 확인됐으며 이 밖에 크고 작은 담장으로 구획된 7개의 독립된 공간이 드러났다.또 이들 각각의 독립된 공간 내부에서는 1∼3곳 정도의 건물지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으며 그 주변에서 기와, 토기 등의 유물도 다량 발굴됐다. 특히 각 구역마다 다량의 등잔과 벼루가 출토된 점 등을 비춰볼 때 특정 행사나 의례용으로 이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고서는 분석했다.또 동회랑 동편지구가 담장으로 구획돼 매우 폐쇄적인 공간으로 보이는 것으로 미뤄볼 때 개방적인 공공시설보다는 고승들이 수행이나 수양을 위해 독거하는 공간이거나 중국 당대 사원에서 볼 수 있는 각종 의례 공간 등일 것으로 추정했다. 보고서에는 담장으로 구획된 독립된 공간과 그 내부에 분포한 건축 유구의 구조와 배치 등도 처음 소개됐다. 크고 작은 건물지 12곳이 드러났고, 담장과 우물, 배수로 등 생활시설 등이 함께 발굴됐다. 발굴과정에서 기와와 벽돌류, 토기·자기류 등 신라와 고려시대 유물이 다량 출토됐는데 이번 보고서에는 485점의 유물을 선별해 수록했다.보고서에는 조사 결과를 고찰한 논고와 함께 유구와 건물 배치, 유물 정보도 상세히 수록했다. 아울러 40여년 전에 조사원들이 작성한 야장(野帳·조사 내용을 기록한 수첩), 일지, 도면, 사진 자료도 담았다.이번 보고서는 국내·외 국공립 도서관과 국내 연구기관, 지방자치단체 등 관련기관에 배포됐으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누리집(nrich.go.kr/gyeongju)을 통해 열람할 수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03-30

훼손 남파대사비, 관리·보호 시급

조선시대 선(禪)·교(敎) 양종을 이끌었던 인물로서 승병의 최고 책임자인 수호도총섭(守護都總攝)을 지낸 남파대사(南坡大師·1740~1817). 포항시 남구 장기면 묘봉산 자락에 있는 옛 절터 석남사지(石南寺址)에 위치한 그의 비석이 보관된 비각의 문살이 심하게 훼손되고 있어 시 차원의 적극적인 보호·관리가 요구된다는 지적이다. 특히 이 비각은 자라난 대나무 수풀 속에 방치돼 있어 관리 보호가 시급한 것으로 드러났다.남파대사비는 포항 장기 출신의 조선 중기의 고승 남파대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남파대사가 입적한 다음 해인 1818년에 건립된 이 비석은 높이 170㎝, 폭 80㎝의 화강암 비석으로, 조선 시대 명필로 이름을 날린 승려 계오가 비문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오랫동안 폐허가 된 절터 잡초 속에 방치되다시피 해 마멸이 심하게 진행된 것을 2005년 11월 포항시에서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비문에 따르면, 남파대사는 조선 영조 경신년(1740) 장기에서 태어나 순조 정축년(1817)에 향리인 장기 석남사에서 입적(향년 78세)한 조선조 때 고승이다. 이름은 화묵(華默), 자는 자은(自隱)이라고 했으며 남파는 호(號)다. 속성은 이(李) 씨로 12세 때 삭발, 용계(龍溪) 대사로부터 계(戒)를 받았다. 화엄경 십지론의 대조종으로 승과에 합격한 후 나중 대선과 대사에 올랐으며, 밀양 표충사 수호도총섭(守護都總攝)을 지냈다. 특히 조선조 때 번창한 선(禪)·교(敎) 양종의 맥이 보광대사로부터 시작해 회당대사 → 서악대사 → 용계대사 → 남파대사로 이어졌다고 기록돼 있다. 이처럼 남파대사는 조선조 때 선교 양종을 두루 섭렵한 화엄경의 조종으로 일컬어질 정도의 고승이었다.그런 만큼 남파대사비는 대사의 유일한 옛 비석이라는 점과 함께 비문의 글씨 또한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향토사학자 황인(70) 씨는 이 남파대사비를 문화재로 지정해 체계적으로 보존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황 씨는 “남파대사가 주지로 있었던 석남사지를 발굴해 문화자원으로 개발토록 촉구한 덕분에 그래도 이 비문이 오늘날까지 이나마 보존되고 있는 것”이라며 “지난해부터 이 비각을 둘러싼 문살들이 부서지기 시작해 앞으로 얼마나 더 훼손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인 만큼, 시 차원의 적극적인 보호 관리가 하루빨리 이뤄져 유지관리는 물론 향후 보존방안이 논의돼야 한다”고 지적했다.그는 또 “남파대사는 조선 중기의 고승으로서 조선 시대 명필이었던 계오 스님이 비문을 지어 비석을 지을 만큼 뛰어난 분이었다”며 “하루빨리 보수작업을 거쳐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인물, 연혁 등에 대한 역사·문헌적 고증을 강화하고 문화재 지정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했다.황 씨는 특히 “비문 중 20여 자가 이미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됐는가 하면 일부 한자도 점차 훼손이 심해지고 있다”며 “남파대사 비각을 하루빨리 문화재로 지정해야만 더 이상의 훼손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남파대사비는 조선 시대 최대 명필이자 유학자였던 계오 스님의 서체 연구는 물론 비문 내용으로도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한 만큼 하루빨리 문화재 지정 등 보존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남파대사 비각은 장기면 소재지에서 하천길을 따라 서쪽으로 6km쯤 떨어져 있는 괴정마을(방산2리) 서쪽 산골짜기(묘봉산)에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03-22

국보 ‘부석사 조사당 벽화’ 2026년까지 보존 처리 진행

고려시대 후기에 제작해 현존 최고(最古) 벽화로 추정되는 국보 ‘부석사 조사당 벽화’가 체계적인 보존 관리에 들어간다.9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문화재위원회는 최근 영주 부석사 조사당 벽화 보존처리에 관한 안건을 심의해 가결함에 따른 오는 2026년까지 보존처리 사업을 진행한다.부석사 조사당 벽화는 의상대사를 모신 건물인 국보 ‘부석사 조사당’ 벽면에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과 제석천(帝釋天), 범천(梵天)을 6폭에 그린 작품이다.일제강점기에 해체해 목재 틀에 넣어 별도로 부석사 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이다.벽화는 흙벽에 바탕을 녹색으로 칠하고, 붉은색·백색·금색으로 채색했다. 한 폭은 길이 205㎝, 폭 75㎝다. 비록 많이 훼손됐고, 후대에 덧칠했으나 율동감 넘치는 유려한 선이 남아 품격이 느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문화재청은 현 상태에 대해 “과거에 여러 차례 보존처리를 했으나, 과도한 광택과 오염 등으로 본래 색채를 알아보기 어렵고 채색층이 떨어져 나가는 현상이 심각하다”며 “보강부위 일부가 균열 등으로 물성이 약화했고, 보강부위 외에도 추가적 균열이 있다”고 설명했다.벽화가 퇴락하는 현상을 막는 보존처리는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가 한다. 전문가 조언을 바탕으로 보존처리 방안을 수립하고, 가역성(可逆性·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성질) 있는 재료를 사용하며, 과정을 세세하게 기록할 방침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0-03-09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2’ 등 3건 문화재에

대구시가 3건의 유형문화재를 지정하고, 1명의 무형문화재 보유자를 인정했다. 대구시는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2’, ‘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 ‘대구 광덕사 신중도’를 유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전연호(66)씨를 무형문화재 단청장 보유자로 인정했다고 9일 밝혔다. 이번 신규 문화재 지정과 보유자 인정은 대구시 문화재위원회 분과위원회의 심의 통과 후 30일간의 예고 기간을 거쳐 지난달 31일 문화재위원회에서 최종 결정됐다. 대구시에 따르면, 이번에 지정된 유형문화재 제90호 ‘감지금니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2’는 당나라의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화엄경’ 주본 80권 가운데 권22 승도솔천궁품(昇兜率天宮品)이다. 10개의 연화문으로 이루어진 표지화는 매우 드물고, 정확한 기록이 없어 만들어진 연대를 알 수 없지만, 종이의 질이나 그림과 글씨의 솜씨 등으로 미뤄 14세기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유형문화재 제91호 ‘불설장수멸죄호제동자다라니경’은 현세의 죄업을 모두 소멸시키고 장수(長壽)의 법을 설법한 밀교 계통의 경전이다. 이 책은 권말제(卷末題)와 시주명단으로 보아 15세기 후반(세조∼성종초기)에 간행된 목판본이다.유형문화재 제92호 ‘대구 광덕사 신중도’는 해외에 유출됐다가 경매를 통해 환수된 경우다. 제작 기록(畵記)에 의하면 1812년(가경17) 11월에 순천부 영취산 흥국사 보현전에 봉안했던 것이다.무형문화재 제14호 단청장 보유자로 인정된 전연호(66)씨는 무형문화재 단청장의 전수교육조교로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으며 단청 기능을 전승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2020-02-09

신라 거점 유적 ‘의성 금성면 고분군’ 사적 지정예고

5∼6세기 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 374기가 밀집한 고분군이 국가지정문화재가 된다.문화재청은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학미리·탑리리에 있는 고분들을 묶은 경상북도기념물 ‘의성 금성면 고분군’을 사적으로 지정 예고했다고 20일 밝혔다.의성 금성면은 삼한시대에 조문국이라는 부족 국가가 있던 곳이다. 이후 신라에 편입된 뒤 정치·경제·문화 측면에서 북방 진출의 거점으로 발전했다. 이곳은 1960년 의성 탑리리 고분군 발굴 이후 매장문화재 조사 17회, 학술조사 9회가 진행돼 신라 무덤 양식인 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돌무지덜넛무덤)를 변형한 묘제(墓制)가 확인됐다.무덤 내부에서는 머리에 착용하는 관, 귀걸이, 허리띠 장식, 고리자루칼 등 신라 수도 경주와 관계를 보여주는 뛰어난 위세품이 발견됐다. 또 지역적 특색이 돋보이는 이른바 ‘의성양식 토기’가 출토됐다. 의성양식 토기 특징은 고배(高杯·굽다리접시), 항아리, 뚜껑 등에서 잘 나타고 있다. 이러한 독특한 토기 양식은 이후 생산과 유통이 꾸준히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의성군은 금성면 고분군에 대해 신라 거점 역할을 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유구(遺構·건물의 자취)와 유물이 경주와 유사하면서도 독특한 점이 있다고 강조했다.문화재청 관계자는 “의성 금성면 고분군은 경주와 경북 북부를 연결하는 교통 요충지이고 고분 형성 시점을 분석하면 국읍(國邑, 중심 읍락) 지배계층 분묘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문화재청은 예고 기간 30일 동안 각계 의견을 수렴한 뒤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지정 여부를 확정한다.의성/김현묵기자 muk4569@kbmaeil.com

2020-01-20

포항서 5세기 신라 금귀걸이 3쌍 출토

포항에서 고구려 귀걸이와 유사한 금귀걸이가 발견됐다. 매장문화재 조사기관 화랑문화재연구원(원장 오승연)은 포항 흥해읍 대련리 유적 발굴조사를 통해 5세기 후반 고구려 귀걸이 제작 기법을 모방해 신라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금제굵은고리귀걸이 1쌍을 발견했다고 18일 밝혔다.굵은고리귀걸이는 길이가 5cm 무게는 18.5g으로 통통한 고리 아래에 원을 연결해 만든 듯한 구형(球形) 장식이 있다.이른바 ‘태환이식’(太環耳飾)이라고도 하는 굵은고리귀걸이는 돌방 길이가 5.3m 너비가 1.8m인 횡혈식 석실묘(橫穴式石室墓·굴식돌방무덤)에서 나왔다.연구원은 이번에 횡혈식 석실묘 6기와 석곽묘(石槨墓·돌덧널무덤) 1기를 조사했는데, 무덤 대부분은 도굴됐으나 4호 횡혈식 석실묘는 무너진 뚜껑돌이 부장품을 덮어 귀걸이 등이 발굴됐다.이 고분은 유적에서 가장 큰 것으로 시신을 두는 받침인 시상(屍床)이 상하 두 겹으로 겹쳐진 상태였다. 아래쪽 시상에서는 금제굵은고리귀걸이 1쌍, 금제가는고리귀걸이 1쌍, 은제 팔찌 1쌍이 나왔고, 위쪽 시상에서는 또 다른 금제가는고리귀걸이 1쌍이 출토됐다. 유물 제작 시기는 모두 5세기 후반으로 추정됐다.굵은고리귀걸이는 길이가 5㎝, 무게는 18.5g이다. 통통한 고리 아래에 원을 연결해 만든 듯한 구형 장식이 있다. 다만 고구려 귀걸이와는 달리 장식 중간에 눈금을 새긴 굵은 선 형태의 각목대(刻目帶)가 있다. 구형 장식 아래에는 원뿔형 장식이 존재한다.화랑문화재연구원 측은 “충북 청원 상봉리, 서울 능동, 강릉 병산동 등에서 이와 유사한 형태의 귀걸이가 출토된 바 있다. 다만 대련리 유적에서 출토된 귀걸이는 샛장식에 새김눈금선대(각목대)가 존재하고 샛장식 아래쪽의 원반상 장식이 생략되는 등 전형적인 고구려산 귀걸이와 차이를 보이고 있어 고구려의 제작 기법을 모방해 신라에서 제작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전했다.‘세환이식’(細環耳飾)이라고도 불리는 금제가는고리귀걸이는 중심 고리 아래에 원통형 중간 장식, 나뭇잎 형태 장식이 차례로 달렸다. 원통형 장식에는 줄무늬와 뚫어서 새긴 무늬가 있고, 넓적한 나뭇잎 형태 장식에는 작고 오목한 다른 나뭇잎 장식 2개를 추가했다.가는고리귀걸이 중 1쌍은 형태가 비교적 완전하나, 나머지 한 쌍은 나뭇잎 장식이 사라졌다. 온전히 보존된 귀걸이는 길이가 4.9㎝, 무게가 7g이다.이러한 귀걸이는 경주 천마총·서봉총·보문리 부부총과 창녕 송현동 고분에서 나왔다고 알려졌다.조사단은 이외에도 4호 석실묘 돌방 남쪽 부장품 공간에서 기대(器臺·그릇받침), 장경호(長頸壺·긴목항아리), 고배(高杯·굽다리접시) 등 형태가 다양한 토기 수십 점을 찾았다.화랑문화재연구원 측은 “이번에 나온 유물들은 경주 외곽에 해당하는 포항 일대의 횡혈식 석실묘 수용 시기와 경로, 신라와 고구려 교류 관계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9-12-18

포항서 5세기 신라 금귀걸이 발견…"고구려산 모방 제작"

굵은 고리 아래에 동그란 구형(球形) 장식, 원뿔 장식을 매단 고구려 귀걸이와 유사한 금귀걸이가 경북 포항에서 발견됐다.매장문화재 조사기관 화랑문화재연구원(원장 오승연)은 포항 흥해읍 대련리 유적에서 발굴조사를 통해 5세기 후반에 고구려 귀걸이 제작 기법을 모방해 신라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금제굵은고리귀걸이 한 쌍을 수습했다고 18일 밝혔다.이른바 '태환이식'(太環耳飾)이라고도 하는 굵은고리귀걸이는 돌방 길이가 5.3m, 너비가 1.8m인 횡혈식 석실묘(橫穴式石室墓·굴식돌방무덤)에서 나왔다.연구원은 이번에 횡혈식 석실묘 6기와 석곽묘(石槨墓·돌덧널무덤) 1기를 조사했는데, 무덤 대부분은 도굴됐으나 4호 횡혈식 석실묘는 무너진 뚜껑돌이 부장품을 덮어 귀걸이 등이 발굴됐다.이 고분은 시신을 두는 받침인 시상(屍床)이 상하 두 겹으로 겹쳐진 상태였다. 아래쪽 시상에서는 금제굵은고리귀걸이 1쌍, 금제가는고리귀걸이 1쌍, 은제 팔찌 1쌍이 나왔고, 위쪽 시상에서는 또 다른 금제가는고리귀걸이 1쌍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물 제작 시기는 모두 5세기 후반으로 추정됐다.조헌철 화랑문화재연구원 연구원은 "주검받침이 두 번에 걸쳐 만들어졌고, 귀걸이가 여러 점인 사실로 미뤄 시차를 두고 주검 3구 이상을 묻은 듯하다"고 설명했다.굵은고리귀걸이는 길이가 5㎝, 무게는 18.5g이다. 통통한 고리 아래에 원을 연결해 만든 듯한 구형 장식이 있다. 다만 고구려 귀걸이와는 달리 장식 중간에 눈금을 새긴 굵은 선 형태의 각목대(刻目帶)가 있다. 구형 장식 아래에는 원뿔형 장식이 존재한다.조 연구원은 "이 같은 귀걸이는 충북 청원 상봉리, 서울 능동, 강릉 병산동 유적에서 출토된 바 있다"며 "고구려 귀걸이에는 구형 장식과 원뿔형 장식 사이에 원반 장식이 있지만, 대련리 유적 귀걸이에는 없다"며 고 말했다.이어 "신라 유적인 황남대총 북분에서 고구려산 귀걸이가 나오기는 했지만, 대련리 유물은 전형적인 고구려 귀걸이와는 차이가 있어 고구려 제작 기법을 본뜬 신라산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학계에서는 귀걸이가 나온 무덤 구조에도 주목했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횡혈식 석실묘는 고구려 영향으로 신라에 유입됐다고 본다"며 "그 시기를 수도인 경주는 6세기 전반, 지방은 5세기로 추측해 왔다"고 강조했다.최 교수는 "신라 지역 5세기 횡혈식 석실묘는 지금까지 알려진 유적이 매우 드문데, 대련리에서는 6기나 나왔다"며 "일부 학자는 무덤 조성 시기를 5세기 초중반으로 올려 보기도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세환이식'(細環耳飾)이라고도 불리는 가는고리귀걸이는 중심 고리 아래에 원통형 중간 장식, 나뭇잎 형태 장식이 차례로 달렸다. 원통형 장식에는 줄무늬와 뚫어서 새긴 무늬가 있고, 넓적한 나뭇잎 형태 장식에는 작고 오목한 다른 나뭇잎 장식 2개를 추가했다.가는고리귀걸이 중 한 쌍은 형태가 비교적 완전하나, 나머지 한 쌍은 나뭇잎 장식이 사라졌다. 온전히 보존된 귀걸이는 길이가 4.9㎝, 무게가 7g이다.이러한 귀걸이는 경주 천마총·서봉총·보문리 부부총과 창녕 송현동 고분에서 나왔다고 알려졌다.조사단은 이외에도 4호 석실묘 돌방 남쪽 부장품 공간에서 기대(器臺·그릇받침), 장경호(長頸壺·긴목항아리), 고배(高杯·굽다리접시) 등 형태가 다양한 토기 수십 점을 찾았다.조 연구원은 "이번에 나온 유물들은 경주 외곽에 해당하는 포항 일대의 횡혈식 석실묘 수용 시기와 경로, 신라와 고구려 교류 관계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2019-12-18

신라 호국사찰 경주 사천왕사 정비·활용 모색

통일신라시대 으뜸가는 호국사찰이던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어떻게 정비되고 관리될 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오는 23일 오전 경주 드림센터에서 신라 문무왕 19년(679) 경주 낭산 기슭 신유림(神遊林)에 세운 호국사찰 사천왕사터 정비와 활용 방안을 모색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한다.2006년부터 2012년까지 진행한 사천왕사터 발굴 성과를 돌아보고 절터 보존 정비와 문화 콘텐츠 개발 방안을 논의하게 된다.삼국유사에 따르면 670∼676년 벌어진 나당전쟁 때 명랑법사가 낭산 남쪽에 임시로 절을 만들었는데, 싸움을 하기도 전에 당나라 배가 침몰하자 이곳에 정식으로 건설한 사찰이 사천왕사다.이곳에서는 일제강점기인 1915년 조사가 이뤄져 ‘녹유신장상’(綠釉神將像) 조각이 나왔고, 1922년에는 금당터와 탑터 실측조사가 시행됐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006년 70여 년 만에 사천왕사터를 재발굴해 금당 하나에 탑이 두 개인 일금당이탑(一金堂二塔) 양식이라는 건물 배치와 규모를 확인하고, 유물 4천여 점을 찾아냈다.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중국과 한국 절터 보존정비 현황과 사례를 고찰한 발표에 이어 사천왕사터 발굴조사 현황과 주요 성과, 사천왕사터 출토 유물의 과학적 분석과 복원, 사천왕사 불교문화 원형 발굴과 활용 방안, 경주 낭산 유적 스토리텔링과 대중 문화콘텐츠 개발 전략에 관한 주제 발표가 진행된다. 주제발표가 끝나면 발표자와 토론자 간의 질의응답을 포함한 종합토론이 있을 예정이다.한편, 사천왕사터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6∼2012년 발굴조사를 마친 뒤 동해남부선 철도와 국도 7호선으로 인해 사역(寺域)의 범위를 명확히 밝히지 못했을 뿐 아니라 유적 정비도 임시방편으로 이뤄져 사실상 방치됐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와 더불어 추가 발굴조사로 사역을 확인하고 주변 낭산, 선덕여왕릉, 망덕사터와 연관성을 찾아 성격을 정확히 밝혀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 것으로 전해졌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8-20

촌주 이름 새긴 청동접시 첫 출토

▲ `달온심촌주(達溫心村主)`글자 . /문화재청 제공(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이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조사 중인 경주 황룡사 남쪽 담장 외곽 정비사업 부지에서 `달온심촌주(達溫心村主)`라는 촌주(村主) 이름이 새겨진 청동접시가 출토됐다. 촌주는 지방의 유력자에게 부여한 신라의 말단 행정관직으로,`촌주`(村主)라는 글자가 새겨진 청동접시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조성윤 신라문화유산연구원 팀장은 “촌주 앞에 있는 달온심은 인명 혹은 지명으로 짐작된다”며 “청동접시의 정확한 용처는 알 수 없으나 함께 출토된 토기 등으로 미뤄 의례 행위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그는 “청동접시는 상류층이 사용한 물품으로, 왕궁과 붙어 있는 황룡사에서 지방 관직의 명칭이 새겨진 유물이 나온 것도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청동접시가 발견된 우물에서는 편평하고 납작한 토기인 편병(扁甁), 중국 백자 조각, 평기와, 청동제 손칼이 함께 출토됐고, 밤과 복숭아의 씨앗 껍질과 생선뼈 등도 나왔다.이번 조사에서는 황룡사와 동궁을 연결하는 동서축 도로와 황룡사와 분황사를 잇는 남북축 도로 유적도 발굴됐다.도로는 길이 20~30㎝의 돌덩이를 깔아 기초를 만들고, 그 위에 작은 자갈을 덮은 것으로 드러났다. 또 도로 한쪽에 너비 100㎝, 깊이 40~100㎝의 배수로를 설치했다가 길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배수로를 메운 사실도 확인됐다.또 황룡사가 늪지를 매립해 세운 사찰이라는 점도 밝혀졌다. 늪에 굵은 돌을 깔고 흙을 다져 올리는 기법으로 대지를 다졌던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원은 이번 조사의 성과를 17일 오후 2시에 발굴 현장에서 공개한다./윤희정기자

2016-06-17

`유교책판` 세계유산 등재 기념식

경북도는 16일 안동 한국국학진흥원 대강당에서 지난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된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유교책판`을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기념행사에 앞서 국학진흥원 앞 마당에 입석을 마련하고 제막식을 거행했다.이번 기념행사에는 유교책판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해 책판을 기탁한 전체 305개 기탁 문중 가운데 90여 문중대표와 개인 소장자를 비롯한 문화재청 관계관 등 500여명이 참석했다.행사는 세계기록유산등재 입석 제막식, 샌드아트 공연, 세계기록유산 등재경과보고 영상상영, 세계기록유산 등재 기념 동판·표창패·공로패 전달, 경북대 남권희 교수 특강 순으로 진행됐다.유교책판은 한국국학진흥원에서 2002년부터 국내 문중과 개인을 대상으로 목판 기탁운동을 전개해 718종 6만4천226장을 기탁받았다.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지난 10월 `KBS이산가족을 찾습니다`와 함께 우리나라 12번째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유교책판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문집(文集), 성리서(性理書), 족보(族譜)·연보(年譜), 예학서(禮學書), 역사서(歷史書), 훈몽서(訓蒙書), 지리지(지도) 등 저작물을 인쇄·발간하고자 제작됐다.경북도 김현기 행정부지사는 “유교책판은 세계의 문화 자산으로서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해 국학자료를 기꺼이 기탁한 문중과 개인 소장가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며 “선조가 물려주신 문화유산의 체계적인 보존관리 시스템을 구축하고 후대에 전승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서인교기자

2015-12-17

예천 삼강리서 구석기 석기 대거 발견

예천 삼강리 유적에서 8만년 이전의 전기 구석기시대와 4만~8만년 전의 중기 구석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기 160여 점이 발견됐다.문화재청은 동국문화재연구원이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산8-1, 낙동강과 내성천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삼강리 유적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을 출토했다고 18일 밝혔다.동국문화재연구원은 지난 6월부터 삼강나루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삼강리 구석기시대 유적 발굴조사를 해왔다.이번 발굴조사에서 내성천 인근의 계단식 지형인 하안단구에서 높이 4~4.5m에 이르는 퇴적층을 확인했다. 이곳 유적의 지층은 시대가 확연히 나뉘는 5개 문화층으로 구성됐다.조사단은 그중 하층부인 4~5문화층이 전기 구석기시대, 상층부인 1~3문화층이 중기 구석기시대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중기 구석기시대 문화층에서 강돌을 활용해 만든 몸돌, 찍개, 여러면석기, 격지(몸돌에서 분리한 돌조각) 등이 출토됐고 특히 1~2문화층에서는 직사각형 석재를 얇은 조각으로 떼어낸 석기가 발견됐다.전기 구석기시대 문화층에서는 화산암의 일종인 안산암으로 제작한 사냥용 주먹도끼와 찌르개가 출토됐다. 차순철 동국문화재연구원 책임조사원은 “삼강리 유적은 지층의 연대 측정이 이뤄지지 않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상층부와 하층부 유물이 뚜렷하게 구분된다”면서 “영남 지역에는 드문 전기 구석기시대 유적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그는 이어 “주변의 구석기시대 유적인 상주 신상리 유적과 안동 마애리 유적은 지층이 한두 개에 불과한데 비해 삼강리 유적은 문화층과 유물 구성이 다양해 가치가 높다”고 덧붙였다.동국문화재연구원은 19일 오후 2시 출토 현장에서 설명회를 갖고 발굴 성과를 보고한다.예천/정안진기자ajjung@kbmaeil.com

2015-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