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광주에서 연출된 ‘이데올로기 양극화’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지난주 광주 금남로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 찬반집회는 우리나라 보수·진보 이데올로기 전쟁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5·18 현장인 금남로에서는 지난 15일 윤 대통령 탄핵에 찬성, 반대하는 집회가 동시에 열렸다. 경찰은 기동대 버스로 차벽을 설치해 양측의 충돌을 막았다. 경찰 차벽을 사이에 두고 보수·진보 집회가 동시에 열린 일은 지금 우리 사회의 분열이 얼마나 극단적인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다행히 집회는 큰 사고없이 끝났지만, 정치인들의 무차별적인 언어공격은 섬뜩함을 느끼게 했다. 마디마디가 살벌하기 짝이 없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탄핵반대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그는 페이스북에서 “전두환의 불법 계엄으로 계엄군 총칼에 수천 명이 죽고 다친 광주로 찾아가 불법 계엄 옹호 시위를 벌이는 그들이 사람인가”라며 탄핵반대 군중을 싸잡아 공격했다. 김민석 민주당 최고위원은 “계엄을 옹호한 극우 집회는 주력이 광주시민이 아닌 외지인 집회, 떴다방 버스 동원 집회”라고 했다. 민주당은 더 나아가 그저께 최고위원 회의를 열고 “5·18을 왜곡, 폄훼하는 극우 사이비 세력에 대해 당 차원에서 법적(5·18민주화운동 특별법 위반혐의)인 조치를 할 것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탄핵 찬·반집회에 참석한 국민은 보수·진보 가릴 것 없이 대부분 나라를 걱정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런 군중을 싸잡아 “악마와 다를 게 무엇인가”라며 극단적인 비난을 하거나, 법적조치까지 하겠다는 발상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보수와 진보이념을 대표하는 도시인 대구와 광주는 해마다 GRDP(지역내 총생산)를 발표할 때면 나란히 꼴찌 성적표를 받으며 경제적인 소외의식을 공유해왔다. 이 때문에 행정기관끼리는 ‘달빛 동맹’을 맺어 우의도 다지고 수도권에 대해 투쟁도 하고 있다. 대구시장은 5·18 민주화운동 행사에, 광주시장은 2·28민주운동 행사에 매년 꼭꼭 참석하면서 양 도시의 정체성을 서로 존중해주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윤 대통령 탄핵사태를 맞아 정치권이 거친 언어를 남발하며 국민 여론을 분열시키는 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조기 대선을 염두에 두고 상대 진영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는 방식으로 강성 지지층을 자극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렇게 정국이 점점 극단화로 치달으면 다음에 누가 대통령이 되든 나라의 미래는 암울할 것이다. 최근 정치권의 이데올로기 전쟁은 일상화되는 추세다. 도심 주요교차로와 가로수는 시민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정치현수막으로 얼룩져 있다. 경쟁하듯 자극적인 문구를 동원해 상대편을 비방하는 내용이 주류여서 출퇴근길 스트레스가 엄청나다. 이런 식으로 정치권이 사생결단식의 이념대결을 펼치면 헌재가 대통령 탄핵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우리 사회는 견디기 어려운 후유증이 발생할 것이다. 정치권이 우리사회의 미래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국민은 자기와 이데올로기가 다른 상대까지도 감싸 안는 그런 정치인을 보고 싶어 한다.

2025-02-18

美 대통령의 날

우정구 논설위원 우리나라 날짜로 이달 17일은 미국에서는 대통령의 날이다. 미국의 대통령 날은 매년 2월의 세 번째 월요일이다. 대통령 날을 정해 놓고 기념하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미국에서는 이날을 휴일로 정하고 학교 등 대부분의 기관들은 쉰다. 원래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생일인 2월 22일을 기념하기 위해 대통령 날을 제정했으나 1968년부터 모든 대통령을 기리는 날로 바꾸었다. 이날은 대통령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미국 전역에서 각종 행사가 펼쳐진다. 학교에서는 특별 프로그램을 만들어 워싱턴, 링컨과 같은 훌륭한 대통령에 대한 역사 공부도 진행한다. 또 사람들은 워싱턴 D.C 국립대통령 기념비를 방문하기도 하고 주에 따라서는 역대 대통령 퍼레이드도 펼친다. 미국 대통령은 국제사회에 있어 가장 막강한 영향력과 존재감을 과시하는 인물이다. 미국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세계 각국의 정치, 경제, 군사가 막대한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미국 대통령 선거에 누가 당선될지는 세계적 관심거리다. 미국 의회가 대통령의 날을 정한 것은 역대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추모가 목적이었다. 하지만 막상 정해 놓고 보니 그 이상의 가치가 생겨나고 있다. 국민이 미국의 역사를 익히고, 민주주의에 대한 국가적 성찰 기회도 마련되고 있는 것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지낸 이가 국민적 존경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더러 있다. 미국 국민이 40여 명의 역대 대통령을 함께 존경할 수 있는 대통령의 날을 가진 것은 행복한 일이다. 우리에게도 대통령의 날을 가지는 날이 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2-18

볼거리보다 이야깃거리가 많은 곳, 남원 교룡산성

광주와 대구를 연결하는 고속도로는 한때 88고속도로라 불렸다. 그 광대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유난히 눈길을 사로잡는 산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남원IC 인근에 있는 산으로 남원의 진산인 교룡산과 교룡산성이다. 두 개의 뿔로 형성된 산자락에는 교룡산성이 둘러쳐져 있고, 그 안쪽은 상당히 아늑한 느낌이다. 그 한 가운데에 ‘선국사(善國寺)’라는 절이 위치한다. 교룡산성은 백제가 신라와 대적하려고 쌓았던 삼국시대의 성으로, 여러 인물의 이야기가 녹아 있다. 고려 말에는 이성계가 왜구를 맞아 전열을 정비한 장소였고, 임진왜란 때에는 서산 휴정대사의 제자이면서 호남의 승병을 이끌며 이치대첩, 독산성 전투, 행주대첩 때 맹활약한 뇌묵 처영(雷默 處英)이 교룡산성을 크게 수축(修築)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가 경주 용담정에서 도를 깨우치고 교룡산성으로 숨어들어 사찰의 방 하나에 8개월 동안 피신 수양하며 동학의 교리를 완성한 곳이기도 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교룡산성으로 올라선다. 길옆에는 동학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동학성지 남원’이라 쓰인 조형물이 보인다. 가파른 길로 조금 올라서면 이내 교룡산성이다. 산기슭에서부터 능선을 따라 정상부까지 계곡을 여러 개 감싸며 축성한 교룡산성은 그 길이가 무려 3킬로다. 산성이 번성하였을 때 우물이 99개였고, 무기고까지 있었다. 동서남북 4대 문이 있었지만, 지금은 동문이었던 홍예문만 남아 그 흔적을 대변하고 있다. 그 홍예문 입구 좌측에 ‘김개남 동학농민 주둔지’라는 하얀 나무말뚝이 서 있다. 동학농민군 2차 봉기 때 그는 공주로 진격하는 전봉준을 따르지 않고 청주를 향해 진격하다 패하여, 태인에서 친구 임병찬의 밀고로 체포되어 전주로 이송되었다. 대의를 잃어버린 그의 야욕이 빚은 오판 탓으로,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하여 2만여 명이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위민’이란 백성을 위하는 일이다. 평소 사람들의 목숨을 아끼고 양반들과 관리자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달랬던 전봉준과는 달리 김개남은 양반들에게 엄청난 원망을 받은 두려움의 대상자였다. 그의 원래 이름은 김영주, 동학의 후천개벽을 알게 되면서 남쪽 세상을 열고 이상 사회를 건설한다는 뜻으로, 김개남(金開南)으로 고쳤다. 결단이 빠르고 과감한 추진력에, 활화산 같은 폭발성은 그의 가장 큰 매력이었으나 그것이 그의 한계이기도 했다. 권위에 대한 강한 애착과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질투와 시기심이 그 원인이었다. 고종의 지시로 내탕금을 전하러 내려온 선전관의 목을 베고, 2차 봉기 후 북상하는 도중에 남원 부사 이용헌과 그의 수행원 2명도 함께 참수했다. 고부군수 양성환은 그에게 붙잡혀 호되게 매질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의 최후는 비참했다. 열 손가락에 대못이 박히고, 소나무 서까래로 빙 둘러서 엮은 달구지 위에 태워졌다. 그러고도 불안했는지 짚둥우리를 서까래 위에 덮어씌웠다. 절대 탈출하지 못하도록 방지한 것이다. 재판 절차도 생략되었다. 붙잡힌 지 이틀 만에 한양으로 압송되던 중 목이 베어졌다. 그의 나이 42세였다. 그에 대한 양반들과 관리자들의 원한과 두려움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교룡산성의 정문에 해당하는 홍예문은, 기역(ㄱ)자형의 옹성으로 둘러쌓았으며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이다. 외부에서 성문을 보면 외부에 쌓은 작은 옹성(甕城)으로 인해 그 입구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측면은 장대석을 3단으로 쌓았고 그 위의 둥근 부분은 아홉 개의 돌을 쌓아 예술과 과학이 숨어 있는 아치형으로 맞추었다. 현재 전북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홍예문을 통과하자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아직도 교룡산성 안에는 민가가 몇 채가 남아 있다. 선국사로 바로 오르려다가 성의 형태가 어느 정도 남아 있는 교룡산성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돌아보기로 한다. 교룡산의 두 봉우리인 남쪽의 복덕봉(福德峯)과 주봉인 밀덕봉(密德峯)을 오르기 위해서다. 복덕봉에 오르면 발아래로 대구와 광주를 이어주는 광대고속도로와 남원 시내가 발아래로 한눈에 들어온다. 지리산 만복대에서 정령치와 바래봉, 덕두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서북능선과 고남산, 만행산 등도 시원한 조망으로 구분된다. 현재 통신 탑이 세워져 있는 주봉인 밀덕봉에서 우측 능선을 따라 칠백여 미터를 돌거나, 선국사에서 삼백여 미터를 뒤쪽으로 오르면 ‘은적암’ 터다. 일명 ‘덕밀암’ 터로 불리는데 동학에서는 은적암, 불교에서는 덕밀암이라고 한다. 최제우가 수도하면서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을 집필했던 곳으로,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백용성 스님이 출가했던 자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역사적인 장소의 의미는 어디로 가고, 현재는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 같은 작은 팻말 하나만 초라하게 세워져 있다. 삼백여 미터를 더 내려서면 선국사다. 평상시는 불법을 수행하는 도량이지만 전시에는 방어진지 역할을 하며 역사의 흥망성쇠를 함께 해온 전략적 요충지다. 지홍석 수필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다. 순조 2년에 다시 지었다는 대웅전에는 2017년 7월 13일 국가지정 보물 제1517호로 지정된 건칠아미타여래좌상(乾漆阿彌陀如來坐像)과 지방민속자료 5호로 지정된 큰 북이 보관되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의 인장인 ‘교룡산성승장동인’은 이번 기행에서 확인하지 못했다. 선국사에서 이백여 미터를 내려서면 처음 탐방을 시작했던 홍예문과 동학공원 주차장이다. 주차장에서 탐방을 시작해 시계방향으로 복덕봉과 밀덕봉, 은적암터를 지나 선국사를 두루 돌아보는데 약 2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남원 교룡산성은 영남지방에는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의병 1만여 명이 산화한 성지로, 최근 만인의총(萬人義塚)을 만들어 성역화 한 곳이기도 하다. 그곳을 찾아들면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숨겨진 이야기들을 찾아볼 수 있다. /지홍석 수필가

2025-02-18

‘가치 더하기’ 열린 조직문화로 가는 길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열린 조직문화(Open Organization Culture)는 조직 내에서 수평적 소통과 협업이 강조되고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여 혁신과 창의성이 장려되는 문화를 말한다. 조직 내 위계질서보다는 유연성과 투명성이 중시되며 직원들의 참여와 자율성이 강조된다. 열린 조직 변화는 거창한 이론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이 공감하고 생각이 모아지는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 가령, 생각에 생각을 더하게 하는 ‘가치 더 하기’, 개인화가 특징인 MZ세대에 우리로 변화를 주는 ‘같이 한데이’, 한밤중 돌발이 걸리는 ‘정비인의 저녁이 있는 삶’ 등 현상에 대한 변화의 모티브를 주는 키워드(Key Word)이면 열린 조직문화로 가는 단초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다. 열린 조직문화로 가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첫째는 수평적 의사소통 강화이다. 직급과 상관없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 할 수 있는 환경 조성과 경영진이 직접 직원들과 소통하는 ‘타운홀 미팅’ 도입이다. 둘째, 투명한 정보 공유이다. 경영진이 회사의 비전, 목표, 주요 의사결정을 공유하고, 내부의 커뮤니케이션 도구(블로그, 학습동아리 등)를 활용하여 정보 접근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 셋째, 유연한 근무 환경 조성이다. 자율과 책임을 원칙으로 한 시간 유연근무제, 재택근무, 자율 좌석제, 특정일 자율 드레스 코드 적용 등이다. 넷째, 피드백 문화 정착이다. 한쪽에 편중되지 않고 1대1 미팅, 다면 평가 시행과 성과 평가를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하는 것이다. 다섯째, 창의성과 혁신 장려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조직문화를 형성하고 사내 아이디어 공모전 등을 통해 직원들의 참여를 확대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반영하는 것이다. 선진기업 열린 조직문화 사례를 보면, 구글(Google)은 직원들이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20% 룰’(업무 시간의 20%를 창의적인 생각 갖기) 도입과 경영진과 직원이 직접 소통하는 ‘TGIF(Thank God It’s Friday)’ 미팅 운영이다. 넷플릭스(Netflix)는 유연한 근무 환경조성, 성과중심 문화 정착과 근속 연수가 아닌 기여도에 따른 보상체계 운영이다. 금년부터 컨설팅이 시작된 포스코스틸리온은 일류 기업으로 도약하는 꿈을 가지고 열린 조직문화를 조성하려 한다. 직원들의 생각과 행동에 변화를 주어 가치를 창출하고 보람과 행복을 주는 ‘가치 더하기’ 활동이 본격 시작된다. 예컨대 생산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어 장애가 없는 라인과 좋은 제품을 만들고, 기술개발팀은 창의적 사고로 생각을 더하여 소비자가 원하는 꽃무늬 컬러 강판을 개발하고, CEO와 임원은 직원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꿈을 실현하는 데 지원을 더하는 것이다. 컬러 강판 국내 으뜸은 물론 품질과 기업문화 면에서 월드 클래스 수준으로 거듭난다면 직원 개인의 성장과 회사의 발전을 이루는 행복한 일터가 될 것이다. 조직 문화는 직원이 공감하는 새로운 꿈을 여는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

2025-02-18

월포 龍山을 오르며?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이른 봄맞이라도 하듯 야트막한 산엘 올랐다. 청하면 월포리 해변이 한 눈에 들어오는 나즈막한 용산으로 비교적 가볍게 오를 수 있는 곳이다. 산중턱과 정상 부근에 군데군데 너럭바위가 있고 특히 청동기시대의 문화유산인 고인돌(지석묘)이 동쪽 등산로 초입에 있으며, 큰 암반 위에 솥모양으로 움푹 팬 솥바위 2개가 있을 정도로 신기하고 유서가 깊어 예로부터 청하 고을에서 신성시된 산이기도 하다. 용의 머리 형국을 하고 있다는 용산(龍山)은 용산으로 불러지게 된 슬픈 전설이 있는 산이다. 즉, 아주 오래 전 자식이 없어 고민하던 월포리의 한 부부가 천지신명의 도움으로 아들 하나를 얻게 되었는데, 기골이 장대하고 예사롭지 않아 장차 장수가 될 아이이나 큰일을 저질러 집안을 망하게 할 것이라며 집안 어른들의 우려와 결정에 따라 더 자라기 전에 죽는 순간 그 산에 살던 용이 아들의 한과 함께 하늘로 날아가버렸다고 해서 ‘용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믿기지 않은 주술적인 전설같지만 예나 지금이나 액운타파와 벽사진경(辟邪進慶)의 마음은 변함이 없는 듯하다. 숨고르기 하듯이 천천히 등산로로 진입하는데 용을 연상케 하는 큰 소나무 뿌리가 투박한 모습으로 길바닥에 드러나 꿈틀대는 듯하니, 불현듯 전설 속의 승천한 용의 화신이 현상계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탄한 솔숲 주변에 2기의 고인돌을 지나서 크고 작은 소나무가 빽빽한 가파른 산길을 한참 오르니 이내 용의 머리를 닮았다는 용두암에 이르렀다. 활처럼 휘어진 월포리 해변과 바다가 시원스럽게 펼쳐지고, 작년말에 개통된 동해중부선 철도가 너른 들판을 직선으로 가로지르며 힘차게 뻗어 있다. 그 옆으로는 포항~영덕 고속도로 건설이 한창인데, 올해 말 개통되면 동해안을 잇는 교통망·관광이 획기적으로 개선될 꿈에 부풀어 있는 듯하다. 북서쪽으로는 멀리 정상 부근에 잔설이 희끗한 내연산~천령산~삿갓봉의 연봉을 병풍처럼 두르고 들판 한가운데 자리잡은 청하읍내가 손에 잡힐 듯 정겹고 평온하게 다가온다. 또한 동쪽으로는 지척의 이가리 해안선 너머 호미곶 반도가 희미하게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용산 정상에서는 결코 조망할 수 없는 탁 트인 전경이 발 아래에 그림처럼 펼쳐지니, 과연 전설이 깃든 용산에서 용 한 마리를 타고 천하를 유람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해발 200여 미터의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 곳곳에는 너럭바위 등이 자리잡아 승천을 준비하는 교룡(蛟龍)의 억센 근육처럼 여겨졌다. 순탄한 둘레길 언저리에는 멸종 위기 종인 망개나무 덤불이 빨간 열매로 산객을 반기고, 진달래는 멀지 않은 날의 개화를 준비하는 듯 작은 망울을 내밀며 부풀고 있었다.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臥死步生)고 했던가. 몸을 움직여 걷고 뛰거나 함께 어울리다보면 저절로 생기가 나고 활력이 감돌 것이다. 천천히 여유롭게 산보하듯이 산길을 걸으면 이것저것 보이고 새롭게 느껴지는 바가 많아져서 산행 그 자체가 힐링이 되지 않을까 싶다.

2025-02-18

떼돈 버는 극좌·극우 유튜버의 위험성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19세기 한 독일 철학자는 “모든 극단은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이 말의 유효성은 세상이 바뀐 21세기 오늘도 유효하지 않을까? 이른바 ‘12·3 비상계엄 선포’와 윤석열 대통령 탄핵, 여기에 꽤 오랜 기간 이어지고 있는 탄핵 찬성과 탄핵 반대 집회 와중에서 “한국인들이 극단적으로 분열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국민통합의 구심점이 될 인물도, 사람들을 화해와 상생으로 이끌 이념도 보이지가 않는다. 이런 혼란 속에서 유튜브 콘텐츠도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진보와 보수 유튜버를 막론하고 ‘우리 편이 아니면 없애야 할 적’이라는 견해를 숨김없이 드러내는 형국인 것. 콘텐츠의 성격이 수익으로 직결되고 있어 유튜버들의 과격성과 편향성은 갈수록 더 커진다. 최근 매일경제는 ‘계엄 사태 이후 여론이 극단으로 분열되면서 혐오와 갈등을 먹이삼아 덩치를 키우는 정치 유튜브 채널이 빠르게 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작년 12월과 올해 1월 상위 30개 유튜브 채널의 후원 수익은 19억6900만원으로 집계됐는데, 이는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3.2배 늘어난 것이라고 한다. 수입이 대폭 늘어난 유튜브 채널의 절대다수는 진보와 보수 할 것 없이 자기 진영의 목소리와 의견만을 편협하게 담아낸 것들이다. 기계적으로라도 중도와 중립을 지키는 유튜버가 설 자리는 없어 보인다. 자칫 극좌와 극우의 입장을 가지지 않으면 SNS에서도 ‘돈이 안 되는’ 세태가 자리 잡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스럽다. 앞서 한 말을 다시 반복한다. 모든 극단은 위험하다. 그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가 아닐지.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2-17

‘공화(共和)정신’ 없는 공화국의 위기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우리헌법 제1조 제1항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선언한 것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결합에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민주주의의 자유와 경쟁의 정신, 그리고 공화주의의 공존과 연대의 가치를 함께 존중해야한다는 것이 헌법정신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민주화’에 치중한 나머지 ‘공화주의’ 가치를 경시했던 것이 사실이다. 공화정신이 없는 민주공화국은 허울뿐이다. 정치는 전쟁이 되었고, 사회적 양극화로 인한 분열과 대립이 극심하다. 다수의 횡포가 벌어지는 민주주의는 소수의 존재를 인정하고 공공성을 중시하는 공화주의와 함께해야 한다. 공화주의가 요구하는 시민적 덕성(civic virtue), 즉 ‘관용과 절제의 정신’이 다수결 민주주의의 약점을 보완해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치현실을 보라. 공화정신의 실종으로 나라는 온통 싸움판이다. 국가통합의 상징인 대통령은 야당을 외면하고, 국회를 장악한 야당은 ‘다수의 폭정’을 서슴지 않는다. ‘나’와 ‘내편’은 있으나 ‘우리’가 없는 증오·배제·독선의 정치는 민주공화정에 대한 배신이다. 공동선(common good)을 위한 법치·공공성·시민적 덕성과 같은 공화정신은 없고 이념·진영·지역·세대·성별 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만 있으니 나라의 미래가 암담하다. 이러한 공동체 위기가 다시 공화주의를 불러내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야 정치인들에게 요구되는 공화정신이다. ‘더불어’는 없고 ‘친명’만 있는 더불어민주당, 그리고 ‘국민’은 안중에 없고 ‘용산’ 눈치만 보는 국민의힘은 모두 환골탈태해야 한다. 공동선을 구현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할 권력이 개인적·정파적 이익을 위해 남용되고 있다. 공공성을 잃은 권력의 독선은 공화국의 적이다. 따라서 여야는 ‘적과 동지라는 이분법’이 아니라 ‘경쟁자이면서 동시에 협력자라는 이중적 정체성’을 가지고 소통·공존·통합의 정치를 모색해야 한다. 한편 주권자인 시민의 책임도 무겁다. 공화국의 시민은 권력의 ‘수동적 통치대상으로서 친애하는 국민’ 아니라 정치의 ‘능동적 주체로서의 동료 시민’이다. 진영정치에 예속된 신민(臣民)은 자유의지를 가진 공화국의 시민이 될 수 없다. 시민이 진영정치의 볼모가 되면 민주공화정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정치철학자 아렌트(H. Arendt)는 ‘시민의 덕성’과 ‘신뢰의 윤리’가 없으면 공화국은 위기에 처한다고 했다. 시민의 자유의지와 덕성, 책임감과 균형감이 없으면 민주주의는 천박한 ‘중우정치(mobocracy)’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민주화를 넘어 공존·공생·공영을 위한 ‘공화의 길’을 가야 한다. ‘너와 내가 함께하여 우리가 되는 공화정신’이 있어야 죽어가는 나라를 살릴 수 있다. 분열과 대립을 조장하는 좌우 극단주의자들의 선동을 배격하고 합리적 중도주의자들의 지적·도덕적·정치적 노력에 성원을 보내야 한다. ‘민주’와 ‘공화’가 동행할 때 비로소 대한민국은 진정한 민주공화국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2025-02-17

당김음

세상은 늘 일정한 질서 속에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높은 곳에 있던 물이 아래로 흘러가고 낮은 곳에 고여 있던 물이 증발해 다시 하늘로 올라가듯, 자연의 순환 속에는 끊임없는 위치의 이동이 있다. 땅 위에 단단히 뿌리 내린 나무조차도 계절에 따라 잎을 떨구고, 새로운 가지를 뻗으며 끊임없이 변한다. 우리는 익숙한 자리를 영원할 것이라 믿지만 세상의 모든 위치는 바뀌고 흐름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암묵적으로 정해진 지위와 역할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간과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한때는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이 다시 바닥에서 시작하기도 하고 보이지 않던 사람이 어느 순간 세상의 중심에 서기도 한다. 흔히 ‘성공’과 ‘평범’을 구분하지만 그 경계는 생각보다 유동적이다. 음악에서도 이러한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당김음은 원래 있어야 할 박자를 벗어나 예상보다 앞서거나 뒤로 밀려난다. 순간적으로 리듬이 어긋난 듯 보이지만 그 변주가 있기에 음악은 더 풍부한 은유를 만들어 낸다. 규칙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조화롭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탈선이 곡을 더 생동감 있게 만든다. 얼마 전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나갔다. 졸업한 지 꽤 시간이 흘러서인지 친구들의 얼굴에는 그때와는 다른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금세 그 시절로 돌아가 건배를 하며 유치한 대화를 주고 받았다. 나는 이야기를 나누던 중 당김음을 떠올렸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낯설었다. 다음 달에 있을 동창회 행사를 앞두고 그 시절 공부를 제일 못했던 친구가 유명한 사업가가 되어 기부금을 척척 내고 있었다. “올해만 해도 몇 백만원은 냈지.”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반면 공부를 제일 잘했던 친구는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다. 학생 때 우리가 부러워하던 ‘성공한 직장인’이었다. 사회적으로 보면 안정적인 직장이지만 그는 “와이프 눈치 보여서 기부는 힘들겠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학생 때 우리는 성적이 인생의 모든 것을 결정할 것처럼 생각했다. 공부를 잘하면 성공하고, 못하면 힘든 삶을 살 거라고 믿었다. 물론 어른들의 경험적인 삶에 비추어 보면 맞는 말일 수는 있지만 현실은 조금 달랐다. 어떤 친구는 예상대로 정박을 따라갔고, 어떤 친구는 엇박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어떤 친구들은 아예 박자를 바꿔가며 자기만의 리듬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김경아 작가 어쩌면 인생이란 단순한 4분의 4박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정해진 박자에 맞춰 사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당김음처럼 예기치 않는 흐름이 삶을 더욱 다채롭게 만든다. 공부를 못하던 친구가 사업가가 된 것도, 공부를 잘하던 친구가 월급을 받으며 사는 것도 결국은 각자의 박자대로 살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음악을 할 때 리듬을 타는 감각을 좋아했다. 일정한 박자 위에서 튀어나오는 당김음은 연주에 긴장감을 주고 곡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규칙적인 비트 속에서도 변주를 만들어 흐름을 깨뜨리는 순간 엇박이 정박이 되는 것이다. 중년이 된 지금은 음악이 아닌 글을 쓰고 있지만 내 삶의 리듬은 여전히 당김음처럼 흘러간다. 예측했던 길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찾을 때 마디마디를 연주하듯 글을 쓴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흐름 속에서도 나만의 박자로 살아가는 것, 박자가 어긋날 때조차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내 삶의 음악일지도 모른다. 동창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자동차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 안에도 어김없이 당김음이 섞여 있다. 박자가 예상과 다르게 흐를 때 우리는 놀라고 어색해하지만 그 당김음이 음악을 완성 시킨다. 살며시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당김음이 만들어 내는 리듬을 즐기며 나만의 박자로 걸어가 보기로 한다. /김경아 작가

2025-02-17

도쿄대 교양학부 900번 교실을 지나며

도쿄대 정문에서 왼쪽으로 50미터 정도 걸어가면 고풍스런 강당이 하나 나옵니다. 정식 명칭은 ‘도쿄대학 교양학부 900번 교실’인데요. 1969년 5월 13일, 이 곳에서는 당시 일본의 사상지형에서 가장 오른쪽에 있던 미시마 유키오와 가장 왼쪽에 있던 전공투(全学共闘会議) 학생들 사이에 토론이 펼쳐졌습니다. 지난번에 말했듯이 미시마 유키오는 ‘국화’와 ‘칼’을 모두 쥔 ‘절대 천황제’를 주장했던 인물인데요. 이런 미시마를 초대하여 토론을 벌인 전공투는 권위주의 대학의 해체와 발본적인 혁명을 추구한 조직이었습니다. 기시 노부스케를 퇴진하게 한 ‘1960년 안보 반대 투쟁’이 “전후 민주주의의 수호”를 명분으로 내걸었다면, 대학 봉쇄와 운동 분파 간의 격렬한 폭력을 일으킨 ‘70년 안보 반대 투쟁’은 “전후 민주주의 비판”을 전면에 내세운 운동이었는데요. 미시마와의 토론회가 벌어졌을 때는, 전공투가 바리케이드를 쌓고 도쿄대를 점거한 상황이었습니다. 상식적인 차원에서는 가장 오른쪽에 선 자와 가장 왼쪽에 선 자들의 만남 자체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인데요. 의외로 당시 기록을 담은 ‘토론 미시마유키오 VS 도쿄대 전공투(討論 三島由紀夫 VS 東大全共闘)’(신조사, 1969)에 따르면, 이들의 만남은 처음부터 적대적이라기보다는 우호적이기까지 합니다. ‘900번 교실’ 앞에는 보디빌딩으로 단련된 털복숭이 상체를 수시로 드러내곤 하던 미시마를 ‘근대 고릴라’로 소개한 입간판이 놓여 있었고, 옆에는 고릴라 사육료가 100엔 이상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걸 보며 미시마와 학생들은 서로 웃음을 나누었다는데요. 인간이 웃으면서 싸울 수는 없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애당초 이 토론은 사생결단식의 대결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상적 지형의 양극에 서 있는 둘을 만나게 한 공통분모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기성 체제에 대한 분노와 부정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이들은 ‘전후 민주주의(평화주의)’로 일컬어지는 ‘일본의 기성 질서’에 대한 부정이라는 공통분모를 공유했던 사람들이었던 겁니다. 이것은 미시마가 모두 발언에서 “나는 지금까지 일본 지식인들이 사상과 지식에 힘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만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모습이 지긋지긋하게 싫었습니다.”라며, “제군이 한 일들을 전부 긍정하지는 않지만 다이쇼 교양주의로부터 유래하는, 우쭐대는 지식인의 콧대를 꺾었다는 공적은 절대적으로 인정합니다.”라고 말하자, 학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내는 것에서도 확인됩니다. 미시마와 전공투의 차이란, 미시마가 의미와 가치를 묻지 않는 기성 정치 체제에 비판의 초점을 맞추었다면, 전공투 학생들은 권위적인 대학체제와 마루야마 마사오와 같은 전후 지식인에 비판의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 정도겠지요. 미시마가 주장한 ‘천황 친정’과 전공투가 주장한 ‘직접 민주주의’는 국민의 의사가 중간 권력 구조의 매개물을 거치지 않고 국가의지와 직결하는 것을 꿈꾼다는 점에서도 유사합니다. 일본이 고도 경제 성장의 궤도에 오르고 평화로운 국가로서 재부상하면서, 미시마와 전공투 학생들은 오히려 삶에 대한 공허함과 무의미에 괴로워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것은 미시마의 대표작으로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금각사’(1956)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는 특징입니다. ‘금각사’는 미조구치라는 말더듬이 청년이 금박을 입혀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금각을 불태운다는 충격적인 내용의 소설인데요. 흔히 이 작품을 ‘미에 대한 절대적 동경과 그로부터 비롯된 왜곡된 심리’를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고는 했습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그러나 ‘금각사’를 찬찬히 읽어보면, 오히려 인간에게는 불가능도 한계도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세계를 맘대로 바꾸려고 한 근대의 근본 원리(심리)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의식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근대(미조구치)’란 결국 그 어떤 ‘위대한 전통이나 아름다움(금각)’도 파괴하고 말 것이라는 미시마의 두려움이 작품의 저류에는 강하게 흐르고 있는 겁니다. 근대의 원리나 심성만이 전면화되면 예술도 정치도 불가능하게 된다고 미시마는 믿었던 것이 아닐까요? 1969년의 도쿄대 토론으로부터 1년 후에 미시마가 할복이라는 방식으로 삶을 마감했다면, 전공투는 3년 후에 아사마 산장 집단 살인 사건으로 사회적 죽음을 당합니다. 미시마는 “이대로 간다면 ‘일본’은 없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날이 갈수록 깊어진다. ”(지키지 못한 약속, ‘산케이신문’, 1970년7월7일)며 할복까지 했지만, 미시마의 죽음은 자신의 우려에 대한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했습니다. 일본의 많은 지식인들은 1970년 미시마의 자살과 1972년 아사마 산장 사건으로 일본의 ‘좌우’가 모두 몰락했으며, 결국 현상태를 수용하는 가치 부재의 시대가 펼쳐졌다고 말하는데요. 어쩌면 1969년 미시마와 전공투가 도쿄대 교양학부 900번 교실에서 나누었던 토론은 전후 일본의 마지막 사상투쟁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5-02-17

요즘 풍경

허민문학연구자 동네 카페에서 주문한 테이크아웃 커피를 기다리는데, 근처를 지나가던 초등학생들의 대화가 들렸다. “야, 너희 계속 내 말 안 들으면 계엄 선포한다!”, “그래 맘대로 해봐라, 바로 탄핵할 테니까.” 내가 저 또래였을 때, ‘계엄’이나 ‘탄핵’이라는 단어를 알았는지 모르겠다. 아니 ‘선포’라는 말도 몰랐을 거다. 이렇게 빨리 알아야 될 말들인가 싶어서 괜히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세상의 변화는 일상의 언어로부터 감지되기 마련이다. 어른들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요즘처럼 법률용어가 친숙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인용’과 ‘기각’, ‘가처분’과 ‘적부심’, ‘공소장’과 ‘증인심문’, ‘평의’와 ‘변론 기일’, ‘피청구인’과 ‘방어권’ 등등, 전에는 알지도 못할 낱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쓰고 있다. 이제 대다수의 사람들이 ‘형사재판’과 ‘헌법재판’의 차이 정도는 마치 상식처럼 알고 있을 거다. 세상이 법의 언어와 사고에 지배되고 있는 형국인데, 이건 모두에게 긍정적인 현상은 아닐 거다. 법이 잊힌 상태가 가장 평화로운 법이기 때문이다. 지난주 학술대회 때 일이다. 발표를 맡은 선생들 다수가 ‘내란성 우울증’으로 글에 집중하기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나도 각종 ‘내란성 질환’으로 혼란을 겪고 있던 터였다. 아마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1차 체포영장 집행이 무산된 직후부터였을 거다. ‘2차 체포영장은 언제쯤 발부될지’, ‘이번에 발부된 영장은 대체 어떻게 집행할지’ 등, 틈만 나면 핸드폰으로 속보를 확인했던 것 같다. ‘내란성 불면증’으로 잠을 뒤척이다가도 체포 여부부터 확인했으니, 피로하지 않은 온전한 하루를 갖기가 어려웠다. 요즘은 탄핵 심판 중계로 ‘내란성 위염’이 다시 도졌다고들 했다. “계엄령이 아니라 계몽령이다”, “의원이 아니라 요원을 빼내라는 거였다”, “계엄의 형식을 갖춘 경고였다”, “탄핵공작이다” …. 언제까지 이런 궤변과 망언이 실시간으로 중계돼야 하는 걸까? “내란성” 신종 질환의 발견은 ‘비상계엄’이라는 사회적 트라우마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순히 지시하기 위한 언어유희가 아니다. 오히려 시대의 상처를 익살스럽게 상대화함으로써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공동의 방어 전략으로 봐야 한다. “내란성○○”을 함께 앓으며 서로를 위무하고 버티는 거다. 버스가 끊겨 택시를 타던 날 기사님이 말을 걸었다. “오늘 손님이 다섯 번째네요. 찾는 사람이 없으니 알아서 셈이 됩니다. 제가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인데, 요즘은 누가 타든 하소연하게 되네요.” 그렇게 말이 없다던 기사님은 내가 내릴 때까지 말을 했다. 손님이 없을수록 말을 할 기회가 없을 테니까 이해할 수 있었다. 택시 운전 20년 만에 이런 불황은 없었다는 호소를 듣다 보니 언제부턴가 한산해진 지하철의 광고판이 생각나기도 했다. 차에서 내리기 직전 마지막으로 들은 발언은 이러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상관없으니 제발 탄핵 국면만 지나가길” 이게 요즘 풍경이다. 지난 일주일간 겪은 일을 적은 것만 해도 이렇다. 윤석열 대통령은 탄핵 심판 중 “아무일도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체포가 없었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니다. 12·3 비상계엄은 아이들의 말과 우리들의 마음을 오염시켰다. 작지만 이미 커다란 일이다.

2025-02-17

딱지 두 개

강길수 수필가 요에 떨어진 딱지 두 개를 주워 책꽂이 책 앞에 두었다. 송사리 새끼와 나는 새 모양이다. 시간이 가며 그것이 떨어진 피부의 감각과 고통, 느낌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살펴보고 싶어서다. 지난 연말, 왼쪽 겨드랑이 아래 피부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이질감이 생겼었다. 약한 통증을 동반하기도 하면서 메뚜기라도 붙어 기어가듯 왼쪽 등으로 갔다가 돌아서 앞 왼 가슴 위까지 옮겨 다녔다. 처음 겪는 증상이었다.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지만, 신경 쓰였다. 속으로, “이게 어른들이 말하던 근육통 곧,‘담’인 게로구나”하고 생각했다. ‘텃밭에서 삽질 조금 했다고 담이 다 걸리다니’하는 마음도 들었다. 이삼일이 지나 제야(除夜)가 왔다. 담 증상이 멈추지 않고, 피부가 조금 이상한 것 같아 아내에게 등 좀 살펴 달라고 했다. 그녀는 피부에 발진이 왔으니, 병원에 가보라고 하였다. 이튿날이 신정 휴무여서, 그다음 날 피부과 병원에 가 진찰을 받았다. 의사는 피부 발진 모양을 보자마자, ‘대상포진’이라고 진단했다. 아프냐고 묻기에 별로 안 아프다고 했더니, 건강한 사람은 그럴 수 있다고 설명했다. 곧바로 치료에 들어갔다. 주사 맞고, 레이저 쏘이고, 처방 약을 사와 복용하는 과정이다. 일요일을 빼고 매일 두 주 가까이 통원 치료를 받았다. 다른 환자들처럼 바늘로 콕콕 찌르듯 심한 통증이 없어 견딜만했다. 하늘에 감사할 일이다. 딱지가 잘 앉았다. 돌아보면 중 2학년 겨울방학 때, 배가 매우 아파 고향 집에 한 달가량 앓아누운 적이 있다. 또 군시절 왼손등이 부어 두 주간 의무대에 입실했었다. 그 후로는 병원에 입원한 적이 없어, 나름 건강에 자신하며 지금껏 살았다. 대상포진 예방접종 광고를 볼 때, 나와는 먼일이라고 여겼었다. 한데, 그게 오고 말았으니 삶은 정말 새옹지마(塞翁之馬)인가 보다. 딱지를 두 개를 왼손바닥에 놓고 바라다본다. 몸에 대상포진 바이러스가 숨은 증거이자, 자기치유 싸움에서 희생된 세포들의 실체다. 반세기 이상 몸 면역력의 기세에 눌려 호시탐탐 공격기회를 노리던 수두 바이러스. 면역력이 떨어지자 싸움을 건 거다. 면역항체는 원상회복의 항전을 하여 상처 입고, 전사도 했다. 약과 레이저는 면역항체 지원군으로 참전, 이기도록 도왔다. 싸움 동안 쳐부순 바이러스와 전사한 면역항체가 뒤엉켜 말라붙은 딱지. 마침내 면역항체가 이겼다는 증표이기도 한 딱지…. 생각해보면, 살아있는 내 몸과 모든 생명체의 몸은 보이지 않는 작은 존재들의 싸움터이기도 하다. 미시세계부터 생태계, 나아가 우주까지 생존경쟁의 싸움 프랙털이라는 추론도 든다. 한편, 살아오면서 스스로 모르는 딱지가 마음에도 많이 붙었을 것이다. 여태 육신의 딱지는 신경을 쓰면서, 마음의 딱지는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고해성사가 있지만, 그것도 언제나 육신에 얽힌 것들이었다. 현대 양자역학이 물질과 정신이 상호작용을 한다고 밝히는 데도, 마음의 딱지에는 무관심했다. 이제부터라도 마음의 딱지도 함께 살피는 삶을 살아내야겠다.

2025-02-17

문장 속에 머무르기

얼마 전 어느 술자리에서 지인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어휘력을 늘릴 수 있느냐고. 나도 딱히 말을 잘 하는 편이 아니어서 명쾌한 답을 하지는 못했다. 다만 학생들에게 매 학기 첫 수업마다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어 그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시를 쓰고 소설을 쓰는 것은 언어로 할 수 있는 가장 고난도의 행위다. 운동이라고 생각하면 편한데, 운동 경험이 없는 사람이 피트니스 센터에 등록한 첫날부터 무거운 바벨을 들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고강도의 운동을 수행할 수 있는 근육과 근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트레이너로부터 바른 자세와 운동법을 배워 몸에 익힌다. 언어에도 근육이 필요하다. 언어의 근육을 만들기 위해선 트레이너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아름다운 문학작품들이 바로 그 트레이너다. 시나 소설의 멋진 문장들을 여러 번 소리 내 읽고, 필사하고, 암송하는 것을 계속 해나가다 보면 언어의 근육이 생기고 가용어휘 또한 풍부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나니 어딘지 허전했다. 시와 소설을 읽으며 좋은 문장에 밑줄을 치고 그걸 외우는 일이 어휘력을 늘리기 위한 기능적 행위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 문장을 오래 곱씹으며 그 안에 가만히 머무르는 것에는 다른 효용도 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가꿔준다. 순간을 사랑할 수 있게 해준다. 너무 오래 전에 읽어 내용을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이 한 문장만큼은 외우고 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나에게 봄이라는 계절은 이 문장을 알기 전과 후로 나뉜다. 이 문장을 알기 전에는 벚꽃과 목련과 철쭉이 피어도 매년 반복되는 자연 현상 정도로만 여겼지 꽃이 예쁜 줄 몰랐다. 하지만 이 문장을 알고 난 20대 초반의 어느 날부터 나는 꽃이 피면 꽃그늘 아래 단 5분이라도 머무를 줄 아는 사람이 됐다. 소설 속 허 생원과 동이가 보름달 아래 호수처럼 반짝이는 메밀꽃 윤슬을 보며 어떤 마음이었을지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의 첫 문장은 내게 눈 내린 아침의 황홀한 흰빛을 오래토록 감각하게 해줬다. 저 문장을 알기 전 눈은 그저 유년의 추억을 회상케 하는 매개이거나 하늘에서 내리는 예쁜 쓰레기였다. 내 청춘의 감수성은 저 문장을 통해 캄캄한 터널을 빠져나와 빛으로 들어섰으며 거기서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나 정지용의 ‘유리창1’ 같은 시를 만나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는 사람의 마음과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이의 “외로운 황홀한 심사”를 헤아릴 줄 알게 되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14년 전 초여름, 불빛 하나 없이 캄캄한 시골길에서 큰 교통사고가 났을 때 일이다. 콘크리트 기둥과 부딪치는 그 찰나, 쾅! 세상의 모든 문들이 일제히 닫히는 소리, 내겐 억겁과도 같이 느껴진 몇 십 초 후 정신을 차렸는데 내가 살았는지 죽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엉뚱하게도 시를 외웠다. “가자 애인이여, 햇빛사냥을. 일어나 보이지 않는 덫들을 찢으며 죽음보다 깊은 강을 건너서 가자. 모든 싸움의 끝인 벌판으로”라는 장석주의 ‘햇빛사냥’을. 그리고 한 편 더, 이성복의 ‘연애에 대하여’의 한 부분 “내 살아있는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피할 테지만 그날, 기울던 햇살,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 나는 듣는다”를 외우고 나서야 내가 살았음을 알았다. 그 일을 겪은 후 내게 시와 소설 속의 한 문장은 단순한 글귀가 아니게 됐다. 좋은 문장은 때로 내가 살아 있다는 감각이 되고, 또 때로는 당신에게 꼭 전하고 싶은 애틋한 마음이 되며, 마침내는 세상이 아름답다는 증거가 되어주는 것이다. 얼마 전 일본 도쿄에 가 우에노 공원에 핀 동백을 한참 바라보았다. 이제는 볼 수 없는 한 얼굴이 떠올랐다. 긴 겨울 지나고 봄의 예감이 부풀어 오르는 요즘 내가 장기투숙 중인 문장은 이것이다. “그는 땅바닥까지 늘어진 동백 가지를 들치고 그녀가 오도카니 앉아 있는 어두운 동백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머리칼에 동백 가지에서 떨어진 이슬이 묻어 있었다.”(조용호 소설 ‘그 동백에 울다’ 중)

2025-02-17

정리의 힘

2025년도의 2월이 끝나가고 있는 현 시점이지만, 나는 아직도 새해의 첫 마음으로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을 새로이 바꾸고 있다. 예를 들자면, 우선 일 년 여간 고집했던 집 안의 가구 구성을 전부 바꾸고 있고, 일 년 사이에 늘어버린 몸무게 탓에 작아져버린 여러 옷들을 옷장 속에서 골라냈으며, 그간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온갖 잡동사니 물건들을 전부 골라내어 버리거나 나누기 시작했다. 그간 흐린 눈으로 바라보던 집 안의 구석구석을 쓸고 닦고 교체해주며 다시금 새 것처럼 빛을 내는 작업을 두 달을 거쳐서야 드디어 끝을 냈다. 그 결과 지금 나의 원룸엔 내게 꼭 필요한 물건들만이 남아 있다. 꼭 필요한 가구, 여분도 없이 지금 딱 쓸 만큼의 물건의 양들, 손을 뻗으면 필요한 물건이 제자리에 있는 상황을 만들어 내며 나는 지난 한 해에 내가 그토록 집착하던 평안의 상태를 드디어 이르렀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평안, 차분한 마음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나는 작년 한 해 런닝도 열심히 뛰어보고, 기록도 4개의 노트에 나누어 기록할 만큼 꼼꼼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해보기도 했다. 심심하면 자발적으로 글도 써보고, 뜨개질도 하고, 새로운 취미를 갖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편안한 상태에 이렇게 쉽게 도달하기까지 가장 도움이 된 것은 청소라는 것을, 이제야 깨끗하고 명쾌해진 공간 속에 놓여 뒤늦게 깨달았단 사실이 조금은 허탈하고 또 피식 웃긴다. 집을 새로이 가꾸면서 나는 아주 작은 사소한 디테일에도 관심을 기울기 시작했다. 자주 먹는 약들은 약봉지에 담겨진 채로 하나씩 뜯어 먹는 것이 아닌, 불투명 상자에 칸칸이 약을 정리해서 바로 꺼내먹을 수 있게 만든 것, 휴지 케이스를 사서 두루마리 휴지가 방바닥에 마음 대로 굴러다니지 않도록 깔끔하게 정리해 놓는 것, 식탁 테이블 한 켠엔 언제든 따뜻한 차를 내려마실 수 있도록 깨끗하게 씻어 놓은 다기와 다구가 잘 정리되어 있는 것, 속옷 서랍을 열면 여유분의 속옷들이 말끔하게 개켜 있는 것 등등. 매일 조금씩 부지런히 해나가야 하는 집안일이라는 루틴이 없다면 절대 유지될 수 없는 일들, 하지만 조금만 움직인다면 제자리에 가지런히 놓여 마음의 평화를 찾는 데에 도움이 주는 아주 작은 요소들에 관심을 갖게 되고, 루티너리하게 움직이며 꾸준함의 힘에 대해 더욱 알게 되는 요즘이다. 동시에 하루에 시간을 내어 조금씩 집안일을 하다보면, 주말 내내 오랜 시간을 들여 청소를 할 필요가 없단 사실도 알게 됐다. 평일엔 일에 치여 집안일을 미루고, 주말에 몰아서 하는 편이었던 터라 주말만 생각하면 엄청난 가사노동에 시달릴 것이라 늘 지레 겁을 먹었지만, 이젠 조금씩 해나가는 덕분에 가사노동이라는 큰 부담감에서 벗어나 몸도 마음도 단순하게 살아가고 있다. 또한 새로운 물건을 살 때에도, 지금 완벽하게 구성된 나의 작은 방 안에 이 물건이 꼭 필요한 것인지, 곧 후회하며 다시금 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지, 꼭 필요한 것에 대해 나만의 기준점이 생기게 되었다. 결국 꼭 필요한 물건만을 들이는, 이상적이면서 유용한 생활상을 쉽게 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라는 말을 남긴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정리 컨설턴트 곤도 마리아는 정리를 통해 스트레스를 없앨 수 있고, 집 뿐만 아니라 회사에서도 삶에서의 행복을 찾을 수 있음을 말했다. 또한 정리에도 철학이 있어야만 잘 할 수 있고, 정리를 통한 자기 변화, 자신감 회복, 그리고 버리면서 알게 되는 비움의 미학을 강조한다. 물론 정리해둔 상태가 그대로 쭉 유지되면 좋겠지만 또다시 바빠지는 일상과 상황 속에서 물건은 흐트러질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곤도 마리에는 정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정리를 해야 하는 ‘정리 리바운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물건을 항상 그 자리에 두는 수납법만 유지된다면 일상을 더욱 윤택하게 유지할 수 있음을 말하기도 했다. 삶은 언제나 깨끗한 방처럼 완벽할 수 없다. 그건 작년 한 해에 내가 무수히 깨달은 지점이기도 하다. 그러니 올해는 조금 더 유연한 자세로, 단정한 일상을 위해 오늘도 집 안을 더욱 애정 어리게 가꾸고 있다.

2025-02-17

스스로 물러날 시간은 조금 남았다

김진국 고문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이 끝나가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20일 10차 변론기일을 한 번 더 열기로 했다. 한덕수 국무총리,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 조지호 경찰청장을 증인으로 부른다. 윤석열 대통령 측이 요구해 열리는 추가 변론기일이다. 더 이상 변론기일을 지정하지 않으면 3월 15일 전후 탄핵 심판 선고가 내려질 가능성이 크다. 노무현·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가 모두 마지막 변론기일 2주일 뒤에 이루어졌다. 법적으로 정해진 건 아니지만, 전례에 따라 진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으로선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인용할 것이라고 보는 법학자가 많다. 옳고 그르고는 잠시 옆으로 밀어놓자. 탄핵을 찬성하건, 반대하건 예측은 냉정해야 한다. 윤 대통령이 물러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파 진영에서부터 윤 대통령의 자진 사퇴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민주당 쪽이 오히려 자진 사퇴를 반대한다. 탄핵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때도 자진 사퇴 의견이 있었다. 사과 요구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탄핵으로 갔다. 사과했지만 별로 공감을 얻지 못했다. 일부 강경파가 사과하면 오히려 손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됐다. 윤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도 사과에 인색했다. 모든 일에는 타이밍이 있다. 적기를 놓치면 진정성을 의심받고, 효과도 보지 못한다. 박 전 대통령은 번번이 적절한 시기를 놓쳤다. 야당에 총리 추천을 제안하는 것도, 대국민 사과도 언제나 뒷북을 쳤다. 자진 사퇴는 엄두도 못 내보고 탄핵으로 끝났다. 윤 대통령에게는 아직 스스로 물러날 기회가 있다. 가장 좋은 선택은 비상계엄이 실패했을 때 사퇴해야 했다. 그게 국가 지도자다운 처신이다. 국가적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대통령 부재는 국정 마비를 의미한다. 더구나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으로 국제 관계가 격랑 속이다. 우리만 손 놓고 있다. 윤 대통령에게는 좋은 기회다. 여론 흐름이 좋아졌다. 보수가 결집했다. 비상계엄 전 20%대에 머물렀던 윤 대통령 지지율이 최근에는 50%를 넘긴 조사까지 나왔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전반적인 추세는 호전이다. 이런 결집 현상이 국민의힘에는 딱히 도움이 될지 의문이다. 중도 확장에 걸림돌이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 개인에게는 무척 고무적이다. ‘박수 칠 때 떠나라’는 말이 있다. 바닥을 치던 윤 대통령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졌다. 앞으로도 이런 지지율이 계속되기는 쉽지 않다. 스스로 물러나는 게 지도자의 품격에도 맞는다. 윤 대통령은 비상계엄의 원인이 야당 횡포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싸우더라도 법의 경계가 있다. 그 경계를 벗어난 사람이 책임질 수밖에 없다. 명령에 따랐을 뿐인 부하들과 그 책임을 다투는 모습은 너무 군색하고, 애처롭다. 스스로 물러난다면, 그동안의 언행을 모두 정리하고, 지도자답게 책임을 안고 갈 수 있다. 마지막 기회다. 윤 대통령은 할 말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궁색한 변명으로 들린다. 욕심을 내려놓고 나면 생각이 가벼워지고, 설득력도 커진다. 탄핵이 끝이 아니다. 최근 민주당은 다시 ‘명태균 특검’을 꺼냈다. 형사재판과 특검이 차기 대통령 선거 이후까지 이어질 수 있다. 윤 대통령 내외에게는 고통이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탄핵 직전 사퇴했다. 제럴드 포드 부통령은 대통령직을 승계한 직후 “대통령이 지시했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혐의에 대해 기소 전 특별사면한다”라고 선언했다. 닉슨은 형사처벌을 면했다. 포드는 이 일로 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윤 대통령은 스스로 사임해도 닉슨처럼 곧바로 사면될 가능성이 희박하다. 하지만 정상참작은 될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민심과 역사의 심판이다. 국민의힘은 더 문제다. 당 공식 입장이 아니라지만, 윤 대통령과 한 몸으로 움직이고 있다. 보수 결집 효과는 있겠지만, 중도 확장을 포기해야 한다. 이대로는 정권 재창출이 어렵다. 이제 돌아서기도 어렵다. 가능성은 작지만, 윤 대통령의 결단이 가장 쉬운 길이다. 지도자다운 뒷모습은 국민의힘과 보수 유권자에게 최소한의 보답이 될 수 있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5-02-16

조기대선에 ‘한동훈 공간’ 있을까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머지않아 찾아뵙겠다”며 정계 복귀를 시사했다. 차기 대선 도전 결심을 굳힌 것으로 보여진다. 앞으로 여당내 경선구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주목된다. 한 전 대표가 정계복귀와 관련해 공식 입장을 낸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12·3 비상계엄 사태’와 관련해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에 찬성 입장을 밝힌 이후 당내에서 ‘탄핵 찬성파 책임론’이 거세지자 당대표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그 이후 잠행을 하며 ‘출사표’ 성격을 지닌 책을 쓰는데 주력해 왔다. 그는 잠행 중에도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 조갑제 닷컴 대표 등 보수·진보 진영 원로 인사를 두루 만나며 정치 행보에 관한 조언을 들은 것으로 전해졌다. 친한계 정치인들도 최근 그의 등판 분위기를 조성해왔다. 그의 지지모임인 ‘언더73’(1973년생 이하 소장파)은 이달들어 유튜브 채널 ‘언더73 스튜디오’를 개설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김상욱·김소희·김예지·진종오·한지아 의원 등이 소속돼 있다. 관심사는 조기대선이 치러질 경우 그가 배신자 프레임을 극복하고 여당 후보가 될 가능성이 있느냐다. 그는 당 대표 사퇴 전까진 당내 대선후보 지지율에서 압도적인 1위를 달렸다. 하지만 윤 대통령 탄핵소추 이후 배신자 프레임에 갇히면서 지지도가 당내 군소후보 수준으로 떨어진 상태다. 국민의힘 경선룰은 민심(국민여론조사)50%, 당심(선거인단여론조사)50%를 반영해 후보를 뽑는 방식이다. ‘역선택’을 감안해 경선룰을 바꿀 가능성이 있지만, 민심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더라도 당심을 얻지 못하면 경선에서 이길 확률이 낮아진다. 그가 윤 대통령 탄핵에 동조한 이후 친윤계에선 그를 마치 원수 보듯 하고 있다. 경선이 시작되면 집단적으로 ‘배신자 프레임’을 씌워 공격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선 유승민 전의원 사례와 닮았다.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은 16일 정치 복귀를 선언한 그를 향해 “윤 대통령이 탄핵과 구속을 당하고, 당이 분열되고, 보수가 이렇게 몰락한 계기를 만든 장본인”이라며 비난했다. 그의 정치적 중도성향이 오세훈 서울시장과 유사한 것도 핸디캡이다. 오 시장은 이미 조기대선에 깊숙하게 몸담은 상태다. 지금 국민의힘 지지율은 그가 대표직에 있을 때보다 상승추세에 있다. 계엄선포 이후 보수진영을 중심으로 윤 대통령에 대한 우호 기류가 퍼졌고, 일부 지지율은 민주당을 앞서는 결과까지 나왔다. ‘반윤’의 대명사처럼 돼 버린 한 전 대표가 끼어들 공간이 크지 않은 상황이다. 다만, 헌재 탄핵심판에서 윤 대통령 파면이 결정될 경우 ‘당심’이 요동칠 가능성은 있다. 그 시점에서는 ‘당선가능성’이 경선의 최대변수가 될 것이다. 한 전 대표가 여당의 취약지점인 중수청 (중도·수도권·청년) 지지세를 이어간다면,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등을 돌린 강성 보수층의 지지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2025-02-16

화(禍)와 허물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봄날처럼 화사하고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비친다고 좋아했더니, 어느 사품엔가 구름장이 몰려와 습기를 머금은 무거운 눈발이 거세게 날린다. 지구 곳곳을 급습하는 자연의 엄혹한 섭리에 놀라는 나날이 이어진다. 벌써 두 달이 넘도록 청도 화양읍에는 영상의 아침을 맞은 기억이 내게는 없다. 난잡한 시절과 냉혹한 절후(節候)로 인한 한숨과 스산함이 이어지고 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잦은 심부름 다닌 기억이 떠오른다. 추운 날이 이어지는 즈음이면 저녁 찬거리 때문에 한숨 쉬던 어머니 모습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벌써 끼니때가 닥쳤구나. 아침 먹고 돌아서면 점심이고, 점심 먹었나 했더니 저녁이구나.” 이런 말과 함께 얇은 지갑을 살피다가 두부 두 모와 덴뿌라 (어묵) 두 장 사 오너라, 하시곤 했다. 우리 살림은 아버지의 근면한 노동에도 4남매 학비와 생활비로 늘 빠듯하다 못해 곤궁을 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어린 시절 자주 먹었던 것이 두부와 파, 마늘 그리고 어묵을 진한 고추장에 풀어 끓인 국이었다. 연탄 한 장으로 겨울밤을 나야 했기로 그나마 뱃속을 뜨거운 국물로 채워야 했던 게다. 지나간 그 세월을 반추할라치면 더러 깊은 한숨이 토해진다. 언젠가 ‘가난’을 소재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머니가 “넌 가난이 지겹지도 않은 거냐” 하고 묻길래, 그냥 그래요, 하고 대답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머니는 고개를 살래살래 젓고 있었다. 빈곤과 추위와 무더위의 깊고 어두운 기나긴 질곡(桎梏)을 건너온 시련과 아픔의 시절을 어머니는 끔찍하게 여겼지만, 난 그 시절을 심드렁하게 떠올리곤 한다. 4남매를 키워야 했던 안주인의 쓰라린 심사와 철모르던 소년의 치기 어린 당당함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 어쨌거나 나는 남루하고 배고팠던 추억을 어디서나 숨긴 적 없고, 그것이 이후의 삶에서 귀중한 자양분이 되었다고 여긴다. 나이 들어서도 물적인 빈곤을 부끄럽게 여긴 적도 별로 없고, 가난으로 생겨난 난감함을 경험한 적도 기억에 별로 없다. 그래선지 물질과 권력과 부를 향한 욕망을 강렬하게 작동시킨 일도 나는 없다. 내게 허여(許與)된 것에 만족하고, 나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아주 조금이나마 베풀고 살아온 인생살이였다. 요즘 다시 책장을 넘기고 있는 ‘도덕경’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화(禍)는 없고, 얻고자 하는 것보다 더 큰 허물은 없다.” (46장) ‘도덕경’ 곳곳에서 노자는 만족할 줄 알라고 가르친다. 물질 만능과 승자독식이 지배하는 21세기 20년대 참혹한 한국 사회에서 족함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한다. 각자에게 주어진 만큼의 족함에 만족할 줄 안다면, 우리는 불행하지 않을 것이다. 송어 수준의 만족과 고래 수준의 만족이 자연스레 공존하는 그런 사회는 불가능한가?! 만족을 모르는 욕망의 비루한 노예가 초래한 비상계엄과 처참한 궤변, 극우 정치인들의 위헌적인 행악질에 시민들이 경악해야 하는 참람(僭濫)한 시절이다. 소박하지만 남 탓하지 않는 맑고 깨끗한 족함을 아는 사람들이 ‘기적의 나라’ 대한민국에 날로 많아지면 정말 좋겠다.

2025-02-16

한국의 핵무장

우정구 논설위원 1994년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특사교환 실무자 접촉에서 북한의 대표가 “서울이 불바다 된다”고 한 발언은 상당한 후폭풍을 가져온다. 그의 발언으로 국내 정계가 발칵 뒤집어졌고 한반도에서의 전쟁 위기감은 점차 높아진다. 판문점에서 불과 5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서울시내에 북한이 핵공격을 가해온다면 서울의 불바다는 너무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한국의 핵무장론이 고개를 든다. 한국의 핵무장론은 북한의 핵공격에 대비한 자강적 차원의 핵무장이다. 찬반 양론이 있다. 그러나 북한의 지속적 핵개발과 미사일 도발로 안보 위협이 커지면서 핵무장론은 점차 힘을 받는다. 2023년 최종현학술원이 한국갤럽을 통해 조사한 핵무장론에 대한 여론은 77%가 독자적 핵무장 필요성에 찬성했다. 이후에도 핵무장론은 반대보다 찬성이 높은 여론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부르며 북미정상회담 재개를 시사하는 발언을 함으로써 국내의 핵무장론은 여론의 힘을 더 얻어가고 있는 형국이다. 그렇지만 한국의 핵무장은 군사 측면뿐 아니라 외교 측면에서도 고려해야 할 문제가 많다. 한국의 핵무장이 주변국과의 관계에 미칠 영향이 크기 때문에 국민 여론만 따라갈 수 없다는 뜻이다. 미국의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이 최근 조사한 설문결과에 의하면 한국은 10년 내 세계에서 핵무장 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나라로 꼽혔다. 이란과 사우디에 이어 세계 세번째다. 미래 예측전문가들의 눈에는 북한과 대치한 한반도의 정세가 중동지역 못지않게 심각하게 보여진 탓은 아닐까. /우정구(논설위원)

2025-02-16

정확한 판단과 총력 대처가 중요하다

김규인 수필가 멕시코와 캐나다산 제품에 25% 관세를 부과하려는 트럼프가 한 달간 실행을 연기했다. 조건부로 시한을 연장하였으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다. 멕시코와 캐나다는 미국과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을 맺고 있다. 하지만 트럼프는 불법 이민과 마약을 문제로 제기하며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지난 4일 중국에 대하여도 10%의 추가 관세를 부과했다. 중국은 WTO 규정 위반이라고 항의하며 미국산 제품에 관세 부과로 맞대응했다. 미국산 원유, 농기계 등에 10%와 코크스, 무연탄, LNG 등에 15%의 추가 관세를 부과한다고 발표했다. 또한 중국은 알파벳, 엔비디아 등에 대한 반독점 조사 계획도 밝혔다. 이에 더하여 텅스텐, 비스무트, 텔루륨 등 5개 광물의 수출도 통제했다. 유럽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의 잇따른 관세 부과 공세에 유럽은 맞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CNN과 인터뷰에서 미국에서 관세를 부과하면 맞대응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미국 상무부는 지난해 유럽연합은 중국 다음으로 무역흑자를 냈다며 압박했다. 지난 2월 9일에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미국으로 들어오는 어떤 철강 제품이든 25% 관세를 부과받게 될 것”이며 “알루미늄도 그렇다”라고 발표했다. 철강과 알루미늄 제품까지 관세를 부과하며 다른 나라를 압박하고 나섰다. 이것을 시작으로 개별 제품에 대한 관세 부과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나라 기업들의 고민도 깊어진다. 포스코와 현대제철 등 철강업계와 고려아연을 비롯한 알루미늄 업체들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트럼프 1기 때 우리나라는 미국과 협상으로 철강 관세를 면제받는 대신 수출 물량 쿼터제로 관세를 면하기도 했다. 그러나 줄어든 물량으로 미국을 대체할 수출 지역을 찾느라 애를 먹었다. 중국 제품에 대한 보편적인 10% 추가 관세는 중국뿐만 아니라 미국 국민도 힘들게 할 것이다. 스마트폰이나 각종 소비재에 대한 관세는 미국민에게 물가 인상으로 이어진다. 트럼프 1기 때는 국민의 반발을 우려해 소비재는 제외했다. 이번에 25% 관세에 10%의 추가 관세까지 부과하면 소비자와 소매업자들의 불만도 높아질 것이다. 영국은 호주, 캐나다, 일본 등으로 구성된 환태평양무역블록에 가입했다. 영국은 EU와 경제 협력을 복원하며, 동남아국가연합(ASEAN)은 인도와 교역 규모를 늘리며 걸프 협력 기구(GCC) 6개 회원국도 만난다. 중국은 인도네시아,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과 자유무역협정 개정을 준비한다. 브라질과 멕시코도 무역협정에 대해 협상 중이다. 미국을 제외한 세계 각국의 대응이 활발하다. 우리나라는 경제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대미 협상력을 높이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며 어려움을 이겨내야 한다. 일본의 반도체 소재의 수출 금지로 반도체 소재 산업이 활성화하고 IMF 위기를 금 모으기로 이겨낸 유전자가 우리에게 흐르지 않는가. 힘이 들뿐 극복하지 못할 일은 없다. 정확한 상황 판단과 총력 대처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2025-02-16

대화의 기술이냐 팃포텟이냐

유영희 작가 며칠 전 여성 지인이 직장 상사가 갑질한다며 하소연을 해왔다. 사무실 하나에 상사 1명과 직원 1명이 근무하는 아주 작은 직장이라 꼬투리 잡으며 사표를 내게 종용하는 상사 때문에 억울하다고 한다. 두 사람의 감정의 골이 깊어진 데에는 평소 직설적 성격의 지인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지 않을까 의심했으나 그 직장 상사가 자기 아내는 고분고분한데 당신은 왜 의견이 많으냐는 말을 들으니 해결책이 필요해보였다. 그러던 중 며칠 전 탄핵 심판정에서 대통령이 국회 기조 연설할 때 야당 의원들이 박수 안 쳐주고 악수도 거절했다고 불만을 말했다. 남의 말을 경청하라는 대화의 기술 측면에서 야당 의원들의 행동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야당 의원들에게 대통령에게 감성적으로 접근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부적절해 보였다. 어떤 책에서는 거절도 예쁘게 해서 감정 상하지 않게 하라는데, 대통령의 요구가 부당할 때 야당이 예쁘게 거절하라는 것도 무리다. 사회에서는 힘 있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을 문제 삼는 상대의 태도만 문제 삼는 경향이 강하다. 이것은 아마도 전통적 사고방식 때문일 것이다. 유교 전통 중에는 ‘집안의 윤리를 그대로 사회에 적용하면 사회 윤리가 된다’는 사고가 있다. 자식이 부모에게 하는 효도로 백성이 군주에게 하는 충성하면 되고, 동생이 형을 공경하는 원리로 연장자를 공경하면 된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군주가 백성을 사랑하면 된다고도 했으나 이것은 큰 주목을 못 받고, 상명하복의 사고만 부각되었다. 그러다 보니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순종하기만 바라며 아랫사람의 도리만을 강조하게 되었다. 의무를 강조하는 칸트의 도덕철학 역시 상대의 태도와는 상관없이 마땅히 내가 해야 할 도리를 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도덕을 위한 철학 통조림’의 저자 김용규는 이런 태도를 반대한다. 현실에서는 분명히 상대를 해치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도덕적인 행동만 고집한다면 세상은 나쁜 사람으로 가득 찰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용규는 부당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팃포탯’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팃포탯은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평화와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한 셈이다. 팃포탯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존 내쉬의 균형이론에 기원을 둔 게임이론 전략인데, 처음에는 협력하더라도 상대가 배신하면 나도 배신해서 승리하라는 이론이다. 실제로 로버트 액설로드 교수는 이 전략으로 게임 대회에서 두 번이나 우승했다. 상대의 말을 끝까지 기다려주고 내가 할 말은 참으라거나 문제 상황이 발생하면 자신의 무의식을 돌아보라는 식의 대화의 기술은 가족이나 친구 관계에서나 활용할 수 있을 뿐, 사회관계에서는 상대가 부당하다면 적절하게 응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부당한 행동을 할 때 옳은 쪽이 승리하기 위한 팃포탯이 무엇인지는 아직 답을 못 찾았지만, 지인에게는 휴가를 내서 쉬면서 거취를 생각해보고, 퇴사하더라도 상사의 부당함을 공론화할 것을 조언했다.

2025-02-16

다행인 상처가 있어

이희정 시인 러시아 인형처럼 외부의 모양과 내부의 모양이 똑같다면, 누구도 상처받지 않을 것이다. 부서지고 깨어진 상처는 우리 가 세상에 포함될 때, 그 속박에 굴복하지 않고 벗어나려는 몸 부림이다. 그래서 나는 상처가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것이라고 믿는 다. 상처받는 것은 세상의 모양과 나의 모양이 끝없이 부 딪쳐 모서리가 부서지고 깨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할 때, 마침내 상처는 우 리에게 해방을 가져다줄 것이다. 그것이 봄꽃과 가을 단풍과 저 석양이 자신의 상처로 물드 는 이유이고, 한 생명의 탄생이 다른 생명을 찢고 나오는 이유 이며, 시인들이 자신의 상처로 시를 쓰는 이유이다. ―신용목,‘다행인 상처’부분 (‘당신을 잊은 사람처럼’, 난다, 2024) 울음소리가 깊었다. 긴 울음 끝 양쪽 눈은 비대칭이 되고 마는 것. 아닌 게 아니라, 이제 짓이겨지고 깨어진 한쪽 눈은 완벽한 상처다. 상처도 힘이 된다면 소리 내어 울어 볼 일이다. 바닥에서부터 울어 본 적 있는가. 호피족 잠언을 빌리자면“우는 걸 두려워 마라. 울음은 당신 마음을 슬픈 생각에서 해방시킬 것이니, 소리 내어 진정으로 울 줄 아는 자는 진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자, 이제부터 탈출기를 쓸 것이다. 마음의 유린도 반복되면 폭력이 된다. 마음은 몸을 상하게 하기에. “세상의 모양과 나의 모양이 끝없이 부딪쳐 모서리가 부서지고 깨진” 생명체의 안쪽이 되지 못한, 바깥은 그들에 의하면 흘리는 눈물조차도‘아무것도 아닌 일’에 불과할지 모른다. 눈물이, 슬픔이 무기가 될 수는 없다. 그저 진심을 말하려는 것일 뿐. 약한 자는 울음으로 가해하지 않는다. 다스리려는 자는 상대를 아끼지 않는 자이다. 그들의 언어는 가변적이고 비겁하기 일쑤여서 여러 차례 변주되었던 언어는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 비열한 웅변을 토해낸다. 대체로 그들의 종결법은 상대의 상처를 제 것으로 전복하려는 제언처럼 여겨진다. 이제까지 지탱해 온 외피를 안에서부터 송두리째 흔들어버린다. 이럴 때 진실은‘쓸모’가 끝난 후에야 발견된다. 대개 약한 자들은 이 상처에서 침묵으로 진실을 가리기 쉬울뿐더러 그것이 슬픔의 궁극적 이유다. 하지만 시인은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할 때, 마침내 상처는 우리에게 해방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통성으로 부르짖는 울음이 상처를 찢고 나오는 詩의 이유, 이유의 이유가 되는 것이라고. 이것이 신용목(1975~) 시인의 산문집‘당신을 잊은 사람처럼’이 2016년 초판 이후 재발행된 이유와 다름이 아닐 것이다. 새처럼 소리를 잘 내는 자, 잘 울게 하는 자. 기실 시인은 선명자(善鳴者)라고 했다. 언젠가 시인이 육성으로 낭독해 주던 긴 시편을 내 한쪽 눈은 기억하고 있다. 그것이 그가 약한 이들을 돌보는 애도의 한 방식이란 것을. 기어이 꽃샘의 상처를 이기고, 봄은 오고야 말 것이니. “자신의 상처로 물드는”, “한 생명의 탄생이 다른 생명을 찢고 나오는”것처럼 “시인들이 자신의 상처로 시를 쓰는 이유” 그러니, 이제 나와 당신들의 상처가 탈출기가 될 것이라는 독해에 부서진 눈을 얹어 보는 것이다.

2025-02-16

지속 가능한 청송의 미래를 위한 길

윤경희 청송군수 인구 감소와 고령화가 가속화되며 지방소멸의 위기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지속 가능한 지역 발전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청송군은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희망적인 변화를 이끌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성과로 2024년 지방자치단체 재정분석 평가에서 경북 도내에서 유일하게 ‘최우수’ 등급을 받았다. 이는 어려운 재정 여건 속에서도 효율적인 예산편성과 안정적인 재정 운용을 통해 재정건전성을 인정받은 결과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첫 단추를 잘 끼웠다고 생각한다. 청송군은 올해 농업 경쟁력 강화와 정주 여건 개선을 핵심 과제로 삼고, 지역의 미래를 위한 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특히 청송군의 대표 농산물인 사과 산업은 기후 변화와 노동력 부족이라는 두 가지 큰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군은 스마트 농업 도입을 확대하고, 생산비 절감과 노동력 부족 해결에 적극 나서고 있다. 대표적으로 꼭지 무절단 사과 유통을 들 수 있다. 사과 꼭지를 자르지 않고 유통하는 것으로 꼭지를 자르기 위해 인력과 비용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사과 꼭지 절단에 드는 인건비는 우리나라 전체 사과 생산량 55만t기준으로 연간 66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2023년산 만생종부터 꼭지 무절단 ‘청송사과’유통을 시작해 지난해부터 완전히 정착시켰다. 또한 ‘무적엽 사과 생산’으로 불필요한 재배 과정을 없애 영농 인력을 절감했다. 반사필름 없이 고품질 사과를 재배할 수 있는 ‘평면과원 조성사업’을 통해 농업 비용과 영농 폐기물 감소의 이중 효과를 거두고 있다. 청송군의 사과농업 혁신으로‘2024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대상’을 수상했다. 사과브랜드 부문 12년 연속 대상을 받았고 ‘산소카페 청송군’은 도시브랜드 부문 5년 연속 대상 수상의 성과로 이어졌다. 청송사과 산업 미래 100년의 비전을 제시하고 사과 농업의 혁신을 이끌 사과 전문연구시설인 ‘청송황금사과 연구단지’를 지난해 11월 개소했다. 청송황금사과 연구단지는 총 면적 4㏊ 규모로 청송황금사과 미래관, 농산물품질관리실, 종묘연구실, 실증시험포장 등의 첨단 시설을 갖췄다. 이와 함께 스마트농업 교육장, 공동연구실, 토양검정실, 사과무병화묘생산 종묘연구실, 농업 유용미생물배양실 등 농업인 수요 핵심시설로 운영할 계획이다. 이곳에서 사과 스마트 재배 표준 매뉴얼 개발과 평면형 수형 재배 기술 연구 등을 진행해 청송사과의 과거 100년을 기반으로 미래 100년을 준비하고 있다. 또한, 유통비용 절감을 위해 올해 여름부터 산지공판장에 온라인 경매 시스템을 도입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더 많은 중도매인들이 사과 경매에 참여할 수 있게 돼 공판장 처리 물량을 증가시키고 소비자와 생산자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유통 구조를 구축할 것이다. 농업 발전과 함께 지역 내 정주 여건 개선도 중요한 과제이다. 청송군은 청년들이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주거환경 개선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업으로는 청송공공임대주택 청년빌리지와 진보면 공공임대주택 건립 사업이 있다. 이러한 주택은 청송군 내 거주하는 청년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될 예정이다. 이를 통해 청년들이 지역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지역 경제 활성화와 청년 유입 증가를 기대하고 있다. 또한, 농촌중심지 활성화 사업과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도심 환경을 정비하고, 회전교차로 설치와 도시계획도로 정비를 통해 교통 환경을 개선할 것이며, 노후 상수관로 정비 및 급수구역 확장을 통해 안정적인 생활 기반을 마련하는 데 주력할 것이다. 청송군의 이러한 노력은 단순한 정책 추진을 넘어,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필수적인 변화이다. 농업 혁신과 정주 여건 개선이 함께 이루어질 때, 청송은 ‘살고 싶은 도시’로 거듭날 수 있다. 지역 주민과 행정이 함께 협력하여 이러한 변화를 이끌어 간다면, 청송군은 지속 가능한 발전의 모범 사례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2025-02-16

[칼럼] 꿈을 챙기는 달(윤진석 ㈜건우테크 대표이사)

윤진석 ㈜건우테크 대표이사 한해 달력을 펼쳐놓고 보면 2월처럼 아픈 손가락도 없지 싶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섣달의 요란하고 거룩한 뜻에 내몰려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기죽어 있는 11월이 있기는 해도 2월보다는 그래도 낫다. 새해를 맞아 활기차게 출발한다는 허울 좋은 정월의 수다에 얼굴 한번 세상에 내밀지 못하고 스스로 뒤로 물러나 옹색하게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은 안쓰럽기 그지없다. 더구나 2월은 다른 달보다 하루 이틀이 짧아 겉으로는 왠지 왜소하여 막내 같은 아련함이 있다. 아이한테는 배부름을 느끼게 해 줄 수는 있지만 2월이란 작은 체구로 견뎌내야 하니 바라보기에도 애처롭다. 흔히 11월이 안쓰러우면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는 달’이라며 체면치레해 주고 달랜다. 그러면 11월을 하찮게 여기던 사람도 다시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막 달을 위해 온갖 애를 쓴다. 그러나 2월은 그것마저 마땅한 게 없다. 대개의 사람은 1월의 큰 다짐으로 대단한 결심을 세우지만 그것도 잠시뿐, 다가오는 2월을 그냥저냥 보내면 된다고 자기 스스로 위로한다. 그러니 언제나 2월은 있는 듯 없는 듯 그 존재감이 허약해 아무리 돌이켜봐도 2월만큼 아픈 손가락은 없지 싶다. 한 해를 시작한다는 대단한 각오로 뽑아든 칼은 뭐라도 자를 기세이지만, 대다수 사람은 그 칼마저 녹슬게 하기 일쑤다. 막연하게 남이 장에 가니 나도 간다는 식으로 새해를 맞는 경우가 허다하니 이번에도 2월은 달라질 게 없다. 커다란 꿈을 가졌으면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이 따라야 한다. 그 계획을 챙겨야 하는 달이 2월이다. 그래야 한 해의 희망이 영글게 된다. 이제 2월에 ‘꿈을 챙기는 달’이라고 머리띠라도 매어줄까. 새해의 대단한 각오를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챙겨서 한 해의 삶을 값지게 만드는 충전의 달이라고 내걸면 확실히 의미 있는 길을 가게 되지 않을까. 이른 봄 조급하게 피는 꽃들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모든 식물은 순서의 순리에 따라 성장의 길을 가게 된다. 새순이 돋고, 잎이 피고, 그 다음에 열매를 위한 꽃이 되어야 벌 나비도 찾아오고 수정도 가능하다. 마음이 조급해 잎이 돋아나기도 전에 꽃부터 피운 것이 열매를 갖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준비되지 않은 조급함은 어긋남을 초래한다. 충분하고 치밀한 준비로 순리대로 삶을 운영해야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지구의 온난화 때문인지는 몰라도 양지바른 화단의 한 켠에 민들레와 할미꽃이 피었다. 시기로 보면 아직 추위도 가시지 않은 2월인데, 며칠의 따스함이 그를 유혹한 모양이다. 충분한 준비도 없이 욕심부려 뛰쳐나오다 보니 몰골이 약하기만하다. 제대로 성숙하여 피웠더라면 나름 튼실한 열매를 맺는 꽃들인데 한 열흘 자태를 뽐내다가 그만 고개를 숙이고 말라간다. 두 꽃 모두 씨앗에 깃털을 달고 바람 타고 떠돌아다니는 처지라 아픔만 더한다. 분명 2월은 저 나름의 변명과 명분이 있다. 강렬한 1월의 꿈을 충실히 준비시키는 달이 필요하다. 세상은 큰 꿈만을 기억해 주고 그를 응원하지만, ‘꿈을 챙기는 달’의 숨은 공헌이 있어야 완성된다. 세상을 가늠하기 어려운 때에는 작은 것의 존재에 의미를 주는 게 현명하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에 귀를 주는 것도 탁월한 선택이다. 영원히 서러웠을 2월. 다른 달들이 꼬맹이라 들볶아도 좌절하지 않는 그의 모습이 문득 대견하다. 날짜를 늘려 달라고 투덜대거나 축원을 하지 않는다. 그의 대견함에 박수를 보내며 그의 위치와 슬기를 가슴에 새기는 참이다. 아무리 아픈 손가락이라 하지만 그는 오늘도 내게 삶의 슬기를 가르쳐 주고 있다. 꿈을 챙기는 달이여. ◇윤진석 프로필 △㈜건우테크 대표이사 △(사)중소기업융합경남연합회장 △청송 진보초등학교 총동창회 수석부회장

2025-02-14

하늘이법

우정구 논설위원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란 말이 있다. 옳고 그름을 법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뜻이다. 법을 위반하지 않더라도 비윤리적 혹은 비도덕적인 행위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의 다양한 가치관이 충돌 할 때 법이 만들어진다. 갈등을 중재하고 이를 기준으로 사회의 질서도 유지된다. 복잡한 현대사회에 법이 지속적으로 제정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음주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 예방을 위해 5년 전 윤창호법이 만들어졌다. 부산에서 만취 운전자가 몰던 차량에 치어 목숨을 잃은 윤창호씨의 경우가 재발되지 않게 정치권이 여론을 받들어 만든 법이다. 이 법이 시행되면서 음주운전 사고가 줄어들었는 지는 지금도 논란 중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 민식이법이 있다. 2019년 충남 아산 어린이보호구역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던 김민식군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을 계기로 만든 법이다. 스쿨존 내에서는 어린이가 다치기만 해도 최대 징역 15년을 선고받을 수 있게 한 법이다. 이 역시 실제로 잘 적용되는지 알 수 없다. 대전의 한 초등학교에서 정신질환 병력의 교사가 8살 학생(김하늘양)을 흉기로 살해한 끔찍한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주었다. 이번에도 정치권이 똑같은 사고의 재발을 막기 위해 교육감이 직권 휴직할 수 있게 한 하늘이법을 만들 것을 약속했다고 한다. 법 제정으로 위와 같은 사고를 막을 수 있다면 법은 얼마든지 만들어야 한다. 다만 법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최고의 수단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사회가 정말로 안전하기 위해선 범국가적 차원의 또다른 노력들이 보태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2-13

영호남, 대한민국 건각이 되어라!

신광조​​​​​​​ 사실과 과학 시민네트워크 공동대표 건각(健脚)이란 튼튼하고 잘 뛰는 다리나 그런 다리를 가진 사람을 뜻한다. 영호남 지역은 대한민국의 두뇌나 복부보다는 두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해왔다. 영호남이 건강하고 튼튼해야만 대한민국이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 과거 영남 지역은 새마을운동을 통해 조국의 근대화와 산업화에 이바지했고, 호남 지역은 5·18 민주화 운동을 통해 민주주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영호남은 오랜 기간 자신보다 나라와 국민을 살리기 위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왔다. 하지만 최근정치라는 권력에 취해 영남이라는 한 다리는 우측으로, 호남이라는 한 다리는 좌측으로 기울어져 버렸다. 그 결과 나라는 제대로 뛰지 못하고 갈지(之) 자 행보를 하고 있다. 인간 세상을 움직이는 문제와 이를 풀어가는 길에는 딱딱한 ‘힘’과 부드러운 ‘정(情)’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이 두 가지 요소의 농도와 결합 방식이 지역성을 연출하고 삶의 모습에 반영된다. 상대적이긴 하지만, 영남 사회가 수직적인 힘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강하다면, 호남은 수평적인 정이 앞서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제도적 질서를 중시하는 반면, 후자는 좀 더 인간적이고 감성적이며 일상적이다. 정의 특질인 ‘내유(內柔)’에 강한 호남인과 힘의 특장인 ‘외강(外强)’에 익숙한 영남인이 어떻게 협력하고 제휴할 것인지는 양 지역의 발전은 물론 국가 발전에도 매우 중차대한 문제이다. 현재 나라는 극심한 양극화와 단절에 휩싸여 있으며, 이념·지역·계층·남녀·세대 간의 심각한 갈등으로 인해 경직된 대치 상태에 놓여 있다. 나라의 기둥인 영남과 호남이 수평과 수직을 결합·융합해 십자가의 원리로 문제를 풀어내지 못한다면, 결국 나라가 망할 것이다. 현재 영호남은 정치라는 독이 든 성배(聖杯)에 마취되어 있다. 영남은 빨간색 술에 취해 있고, 호남은 파란색 술잔에 정신이 나가 있다. 원래 정치란 건강한 상태에서는 보수와 진보가 48:52 또는 그 반대의 팽팽한 승부를 펼친다. 깻잎 한 장 차이의 승부를 펼쳐야 정치인들이 국민의 마음을 얻기 위해 더욱 노력하게 된다. 내 고장 전라도는 예수가 출마하더라도 더불어민주당의 옷을 입지 않으면 시의원조차 되기 어렵다. 경상도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인물 경쟁이 아닌 편싸움으로는 지역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제 정치에 대한 몰입을 줄이고 지역 발전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 앞으로 100년 이상, 국민이 먹고살아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전력과 반도체이다. 영호남이 국가 전력 공급의 베이스캠프가 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영남은 이미 잘 하고 있다. 그러나 호남은 전기 생산 단가가 10배 이상 더 드는 재생에너지에만 매달리고 있어 답답하다. 반도체 산업은 기업의 부동산 투자 장래성, 연구 인력 선호 등을 이유로 수도권 외에는 어렵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반도체 산업은 연구 인력, 전력, 용수의 삼박자가 요건이다. 전력과 용수는 영호남이 수도권에 비해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남은 것은 연구 인력 문제인데, 지방 대학이 목표와 의지를 가지고 인재를 육성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일본 남쪽의 구마모토가 반도체 생산의 메카가 된 것처럼, 우리의 영호남도 충분히 가능하다.

2025-02-13

정치가 깨어나야 한다

노병철 수필가 시국이 참으로 어수선하다. 연일 방송엔 계엄 이야기로 도배를 한다. TV 속에 나오는 대통령의 그 뻔뻔함을 보면 참 기가 막힌다. 자기 잘못은 절대 인정하지 않는 투다. 여기에 야당 대표인 이재명은 그럼 아주 착한 사람인가. 까보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도긴개긴이란 말이다. 정치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얼굴에 철판을 깐 사람들이다. ‘면후심흑’(面厚心黑) 즉, 두꺼운 얼굴(面厚)과 시커먼 속마음(心黑)을 갖춰야 정치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얼굴이 얇아 체면을 버리지 못하고, 마음이 맑아 의중을 숨기지 못하는 자는 성공한 정치인이 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정치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정치를 하는 사람은 결코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않고, 거짓말을 가볍게 여기며, 사과하는 법이 없다. 품위와 인격은 일찌감치 개한테 줘버리고 이 길을 택한 자들이다. 그들이 체득한 생존술은 국민을 위하기보다는 자신의 안위가 최우선이며 그 권력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다. 그들에겐 정치공학은 딱 한 가지이다. 이기면 모든 것이 미화되어 ‘절세의 군주’가 되고, 패하면 모든 것이 폄훼돼 ‘만고의 역적’이 된다는 것을 머리에 새기고 있다. 이번 계엄도 성공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위기의 대한민국이 계엄이 살린 것이 된다. 이게 21세기 대한민국 국민이 이해하고 넘어갈 보편타당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본다. 온갖 거짓 뉴스를 남발하는 유튜버들이 하루 52시간 근무도 하지 않고 엄청난 돈을 번다고 한다. 먹방으로 한 달에 1억 이상을 번다니, 명문대 졸업 후 어렵게 얻은 직장에서 잘리지 않으려 애쓰며 버는 돈과 비교하면 상대적 박탈감이 크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에스키모족이나 마사이족처럼 경제력이 낮아도 행복도가 높다며, 돈보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일하지 않고도 세금을 쓰는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데, 정치의 기본 개념조차 모르는 듯하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며, 이를 바로잡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마오쩌둥은 죽기 직전의 병석에서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절대 권력이 1인에게 집중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노년층, 중년층, 청년층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권력 핵심부가 필요하다고 한 것이다. 마오쩌둥은 이미 세대 간의 갈등을 봉합하는 것이 정치라고 간파한 것이다. 이 추운 날에 태극기 손에 들고 거리로 나선 노인들과 응원봉을 들고 춤을 추면서 거리에 함께하는 젊은이들을 봉합할 방법은 없을까? 우리나라 정치를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라고 치켜세우는데 이건 그런 이념적 갈등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역갈등이 여전하고 종교가 정치화되고 세대 간의 갈등은 이미 선을 넘었고 심지어 이젠 젠더 갈등 또한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정치 영역이다. 국민 간에 내전이 일어나기 전에 정치가 빨리 개입되어야 할 시점인데 그들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나올 줄 모른다.

2025-02-13

하늘아 사랑해, 미안해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대전의 한 초등학교 선생이 같은 학교 8살 1학년 여학생을 무참히 살해한 사상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도 같은 학교 내에서…. 뉴스를 접하는 순간 ‘무슨 날벼락 같은 일이냐!’ 하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곧 뉴스와 SNS를 달구는 사건의 진상을 대하며 교사의 범행, 아이의 안타까움에 비통한 마음으로 학교 현장의 정신병을 읽어야 했다. 미술학원에 오지 않았다는 신고를 받고 학부모와 경찰이 휴대폰 위치추적으로 겨우 사건 현장을 찾았으나 이미 때는 늦었고 아이는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우울증을 겪고 있던 40대 여교사가 돌봄교실에서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어린 여학생을 교내 시청각실로 유인하여 준비해둔 칼로 무자비하게 살해하고 자신도 자해했다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사건이다. 교사는 학생과 아무런 관계도 없고 그냥 “어떤 아이든 상관없이 같이 죽으려 했다”고 진술했다. 우발적 범죄도 아닌 계획범죄임이 분명하고 조현병이라는 정신분열 상태도 의심된다. 이 교사는 우울증 증세로 병가를 신청하였으나 곧 20여 일 만에 복직하였고 사건 며칠 전에 컴퓨터를 부수고 다음 날 동료 교사를 폭행하는 등 교직자로서 자질은 물론 인간성 자체를 상실한 듯하다. 그러나 학교는 교육지원청의 권고를 듣고도 강력한 통제를 하지 못하여 이런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학교는 교육을 위한 곳이고 교사의 덕목은 제자를 사랑하는 일이 우선이며, 열정과 친절, 배려로 제자들을 사회에 우뚝 서도록 가르쳐야 하지만, 교육의 뜻에서 가르치는 교(敎)도 중요하지마는 정신적 가슴으로 품어주는 육(育)이 특히 초등학교 아이들에게는 더욱 중요한 가치일 것이다. 이번 ‘하늘이 사건’은 학교폭력을 넘어선 살인 사건이니만큼 교사의 정신 건강 관리와 학생 안전문제에 있어 교육계 전반에 걸쳐 교육의 근간을 바로 세우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교실은 신성한 학문의 전당이니 스승과 제자는 서로의 정을 나누는 관계를 유지하여야 한다. 요즘 학생 수 감소에 의한 교직의 불안감과 학부모의 갑질로 인해 교직이 극한 직업이라는 말도 나돌고 있으니 교사들의 정신적 안정에도 신경을 써주어야 한다. 12일 교육부장관은 17개 시도교육청 교육감 간담회를 열고 이러한 사건을 예방하기 위한 가칭 ‘하늘이 법’ 추진을 제안하였고 국회도 당정협의회를 거쳐 대응책을 마련하겠다고 하였으니 이제 학교도 교사도 학생들도 모두 안전하고 사랑 가득한 교육환경 속에서 가르침과 배움을 엮어나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그리고 이번 사건에서 본 바와 같이 신체적 정신적 장애로 교사 자격이 염려되는 교사를 휴직 또는 파직시킬 수 있도록 ‘질환교원 심의위원회’ 활동도 강화되면 좋겠다. 질병 휴직과 복직에도 전문의료진 진단을 의무화하고 비뚤어진 일탈 행위에도 제재를 가할 수 있도록 학교폭력예방법, 아동복지법 등을 보완하여 안전해야 할 학교, 사랑과 배려가 넘치는 학교가 되도록 모두가 마음을 모아야겠다. 영정 사진 속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어린 소녀 김하늘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하늘아 사랑해, 미안해.”

2025-02-13

정월보름날에 대한 기억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경주 남산 통일전 옆에 작고 아름다운 연못이 있는데 바로 서출지다. 여름이면 연못을 둘러싼 오래된 나무 백일홍이 아름답고 연꽃 명소로도 이름이 높아 많은 사진애호가들이 찾는 곳이다. 이 못의 유래가 삼국유사에 실려있다. 신라 21대 소지왕이 정월 보름날 행차에 나섰다. 까마귀와 쥐가 와서 까마귀를 따라가라 하므로 왕은 신하를 시켜 따라가게 했다. 동남산 양피촌 못 가에 이르러 신하는 그만 까마귀를 놓쳐 버렸다. 이때 갑자기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글 쓴 봉투를 들고 나타난 왕께 전하고 물속으로 사라졌다. 봉투엔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라고 적혀있어 한 사람이 죽는 게 더 낫다며 왕이 보지 않으려 했으나 일관이 두 사람은 평민이고 한 사람은 왕을 가리키니 열어보라고 조언했다. ‘사금갑(射琴匣)’ 즉 ‘거문고 갑을 쏘아라’라고 적혀 있었다. 대궐로 돌아와 거문고 갑을 쐈더니 사통하는 사람 둘이 숨어있었고, 왕을 해치려던 사람들이었다. 봉투에 적힌 대로 둘은 죽었고, 왕은 살았다. 노인이 건네준 봉투 덕분에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이후 왕은 매년 첫 쥐, 돼지의 날에는 모든 일을 삼가고 행동을 조심하며 정월 보름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으로 까마귀에게 공양하는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또한 노인이 나타나 건네 준 글이 적힌 봉투로 왕이 살게 되었으므로 못의 이름을 서출지로 부르게 되었다. 내겐 설날보다 정월 보름날의 기억이 더 많다. 엄마는 유독 정월보름을 챙겼다. 초등학교 졸업 후 우리 삼남매는 모두 대처로 공부하러 가 있었고, 정월보름날은 휴일이 아니었다. 정월대보름날이면 엄마가 밤새 장만한 오곡밥과 온갖 나물을 챙겨 싸 주시고 아버지는 새벽기차를 타고 오셨다. 기차역에서 우리 자취집까지는 걸으면 족히 30분은 걸릴 거리였지만 그날만은 택시를 타셨다. 등교 전에 먹여야 한다면 엄마가 당부당부했다며 바리바리 싸오신 보따리를 내려놓고 아직 자고 있는 우리를 보고 큰 숨을 몰아쉬셨다. 세 개의 찬합이 있었다. 첫 번째 찬합엔 부럼용 생밤과 설날 먹고 남은 강정 등이 담겨 있었다. 아버지는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부럼부터 먼저 깨라고 하셨다. 자다가 일어나 눈도 채 뜨지 못한 채 강정 하나를 입에 넣었던 까끌한 기억. 두 번째 찬합엔 굵은 콩, 노란 조와 붉은 수수 등이 섞인 질척한 밥이 가득했다. 찬합에서 온기를 느끼며 아침밥을 짓지 않고 도시락까지 챙겨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온갖 나물로 그득한 마지막 찬합을 열면 입이 절로 벌어졌다. 보름 음식 중에 엄 마가 가장 신경썼던 것이 나물이었다. 가짓수가 생각나진 않지만 ‘땅에서 나는 세 가지, 바다에서 나는 세 가지, 산에서 나는 세 가지’가 기본이라고 들은 기억이 있다. 콩나물, 무나물, 시금치에 호박과 가지말랭이는 땅의 나물일까. 물미역 무침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름도 모르는 시커먼 묵나물이었다. 아버지는 엄마의 당부를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하셨다. 첫 입은 피마자잎에 크게 싸 먹으래. 평소 줄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그날 하루 공식적으로 허락된 귀밝이술도 안 드시고 우리를 위한 새벽기차를 타셨다.

2025-02-12

마음이 튼튼한 아이 키우기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아이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서는 신체적 발달뿐만 아니라 정서적 안정과 심리적인 발달이 필수적이다. 부모가 아이의 감정을 공감하고 적절히 반응하는 것이 정서적 안정을 돕는 첫걸음이다. 부모와 안정적인 애착을 가진 아이가 더 건강한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 있기에 애착 형성은 아주 중요하다. 부모가 꾸준한 사랑과 관심을 보이며 감정 표현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면 아이는 심리적으로 안정된다. 따뜻한 스킨십과 눈맞춤 칭찬은 자존감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감정 조절 능력은 아이가 좌절감을 줄이고 건강하게 성장하는 데 필수적이다. 부모는 아이의 감정을 읽고 이름 붙여 주며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예를 들어 ‘속상했구나’라고 말해 주면 아이가 감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림 그리기나 역할 놀이를 통해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자기조절 능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 이는 충동을 조절하고 목표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된다. 부모는 아이가 기다리는 연습을 하도록 유도하고 규칙을 정해 지키게 함으로써 자기조절력을 키울 수 있다. 또한 자기조절을 잘했을 때 칭찬하면 긍정적인 행동이 강화된다. 사회성 발달은 또래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협력과 배려 타협을 배우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다. 또래와의 놀이 기회를 제공하고, 친구와의 갈등 해결법을 알려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공감 능력을 키우기 위해 ‘친구가 속상했을 것 같은데 어떻게 도와줄까?’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자존감이 높은 아이는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부모는 결과보다는 노력과 과정을 칭찬하고 아이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 형제나 친구와 비교하는 행동은 자존감을 떨어뜨릴 수 있으므로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아이도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으므로 적절한 해소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충분한 놀이 시간과 자연 속에서 뛰어노는 기회를 제공하면 아이는 정서적으로 더욱 안정될 수 있다. 육체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의 스트레스 지수도 감소시키니 시간이 나면 야외 활동을 같이 하는 것이 좋다. 부모의 양육 태도는 아이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또 부모가 완벽하려고 하기보다는 실수를 인정하고 개선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부모가 실수 했을 때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보면서 아이도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빨리 인정하고 사과를 하고 다시 나아갈 수 있다. 부모가 자신의 감정을 잘 관리하면 아이도 심리적으로 안정될 가능성이 높다. 아동심리를 이해하고 활용하면 아이의 정서적 안정과 건강한 성장을 도울 수 있다. 애착 관계 형성과 감정 조절, 스트레스 관리, 부모의 양육 태도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하면 더욱 건강한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태도다. 부모의 사랑과 관심 속에서 아이는 가장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

2025-02-12

꿈, 현실이 되다

정미영 수필가 헤밍웨이의 작품을 읽고 습작하던 시절이 있었다. 수식어를 쓰지 않고 건조하면서도 간결한 문체를 즐겨 썼던 그였다. 하드보일드 문체만큼이나 인상 깊었던 것은 헤밍웨이의 글쓰기에 대한 신념이었다. 소설가는 이야기에 살을 붙일 수 있지만,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글을 써야 한다는 그의 가치관은 내게 신선했다. 그는 직접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것은 ‘무기여 잘 있거라’, 아프리카의 사냥 경험은 ‘킬리만자로의 눈’으로 발간되었다. 경험으로 배우는 것이 많아질수록 진실에 가깝게 상상할 수 있다고 작가 지망생들에게 자주 언급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유달리 헤밍웨이의 작품을 읽을 때면 소설의 배경 장소와 집필 공간이 궁금했다. 언젠가는 문학 기행으로 꼭 가보고 싶었다. 내 꿈은 현실이 되었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에 영감을 주고, ‘오후의 죽음’을 집필했던 장소가 남아 있는 론다에 갔다. 해발 739미터에 위치한 론다는 강원도 평창과 비슷한 위치라고 한다. 주변의 낮은 평원 위에 우뚝 솟은 암석 고원이라는 설명이 막연했는데, 우리나라 지형과 비교를 하니 쉽게 이해가 되었다. 론다는 스페인 투우의 본고장으로 유명하다. 가장 오래된 투우장이 있고 현대 투우 방식도 이곳에서 탄생했다. 이 고장 출신의 전설적인 투우사 로메로가 경기 방식을 바꾼 덕분이었다. 로메로는 투우 관람을 즐겼던 헤밍웨이가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소설에 그의 이름을 그대로 썼을 정도로 유명했다고 한다. 론다에는 ‘헤밍웨이 산책로’가 존재한다. 나는 헤밍웨이의 흉상 옆에서 사진을 찍고는 곧장 그 옛날 그의 발자국을 상상하며 내 흔적을 남겼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기에 알맞은 마을”이라고 했다. 쪽빛 하늘을 배경으로 강렬한 절벽을 도화지 삼아 누군가 그림 한 폭을 그려놓은 듯한 풍경을 보고 있노라니 헤밍웨이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누에보 다리로 갔다. 120미터 깊이의 엘 타호 협곡 위에 놓인 아치형의 다리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양쪽으로 절벽이 계속 이어지고 한가운데에는 과달레빈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아찔하면서도 황홀했다. 주변의 경치를 내 마음에 담으면서 한편으로는 다리를 만든 사람들이 떠올랐다. 절벽 위에 선 론다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면서도, 닿을 수 없는 거리 앞에서 오랫동안 한숨을 삼켰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절망은 포기하지 않는 집념으로 변했고 꿈은 현실이 되었다. 변화를 위한 갈망과 화합을 위한 노력은 결실이 되었다. 절벽을 사이에 두고 나뉘었던 삶이 연결되었다. 42년간의 공사를 거쳐 1793년에 새로운 다리를 뜻하는 누에보 다리가 완공되면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원활하게 소통되었다. 다리를 건설했던 노동자에게는 고단하고 아슬아슬한 생의 단면이었고, 또 다른 이에게는 두 지역을 연결해야 한다는 간절한 소망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흘린 땀과 눈물은 협곡 아래로 스며들었지만, 꿈은 다리로 남아 지금도 수많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내가 발을 딛고 있는 곳에서는 다리 전체를 온전히 바라볼 수가 없었다. 측면이 아닌 정면을 온전히 보기 위해서는 다리 아래 협곡으로 내려가는 입장권을 사야 했다. 표를 끊고 안전모를 쓴 채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걸었다. 누에보 다리 전체 모습이 내 두 눈에 담긴 그 순간이었다. ‘노인과 바다’ 책 속의 주인공인 산티아고의 독백이 떠올랐다.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는 않아.” 그는 84일 동안 고기를 잡지 못하고 바다를 헤맸다. 그러나 고기를 잡겠다는 꿈을 잃지 않았기에 마침내 커다란 청새치 한 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청새치는 상어 떼의 습격을 받아 뼈만 남았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다로 나갈 용기와 희망을 다시 얻었다. 내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꿈은, 현실이 되리라.

2025-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