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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식어가는 아메리칸 드림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뉴욕항으로 들어오는 이민자들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자유의 여신상이다. 1886년 프랑스가 미국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선물한 것으로 정식 명칭은 ‘세계를 비추는 자유’다. 자유의 여신상은 미국의 상징이자 큰 희망을 품고 미국으로 오는 이민자들에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기도 하다. 미국의 정신이 담긴 자유와 기회 그리고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드림은 미국의 역사학자 애덤스가 1931년 출간한 ‘미국의 서사시’에서 처음 언급됐다. 그는 “미국인의 꿈은 모든 사람이 부유하고 풍족한 삶을 살고 개인의 능력과 성과에 대한 합당한 보상이 존재하는 사회”라고 말했다. 미국으로 건너가는 많은 외국인들은 무슨 일을 하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곳으로 여기는 것이 곧 아메리칸 드림이다. 그러나 실상은 이민자들이 꿈꾸는 만큼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기가 쉽지 않다. 불평등, 인종차별, 이민자 소외, 계급의 고착화 등 미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여전히 상존하고 있는 탓이다. 최근 미국의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미국인의 70%는 “성실히 일하면 성공한다”는 말에 대해 부정적 답변을 했다고 한다. 아메리칸 드림이란 말은 이젠 옛말이 됐다는 미국 사회 분위기를 전하는 조사다. 트럼프 미국 정부가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인 미국 전문직 취업 비자(H-1B) 수수료를 현행보다 100배를 올려 받기로 했다. “미국인 일자리를 위협한다”는 이유에서다. 트럼프발 자국 우선주의가 아메리칸의 꿈을 역사의 뒤안길로 몰아넣고 있는 모양으로 느껴진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9-23

위기의식 커지는 국힘, 기댈 곳은 민심뿐

권성동 의원을 시작으로 당 주요 인사들에 대한 강제 수사가 본격화될 것이란 위기의식이 확산하면서 국민의힘이 뒤숭숭한 분위기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23일 “의원들 두세 명만 모여도 어김없이 특검 수사 얘기가 나온다”고 했다. 최근에는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충돌’ 사건으로 기소된 송언석 원내대표를 비롯해, 나경원·김정재·윤한홍·이만희 의원에게 검찰이 의원직 상실형의 실형을 구형하자 당내 긴장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현재까지 내란·김건희·해병대 특검의 수사 대상에 오른 국민의힘 현직 의원만 10여 명에 이른다. 3대 특검이 이미 압수수색 등 강제 수사를 진행한 현역 의원은 권성동 의원 외에 TK 출신 추경호(달성)·임종득(영주·영양·봉화)·조지연(경산) 의원, 그리고 윤상현·이철규·김선교 의원 등이다. 이 중 이철규·조지연 의원은 참고인 신분으로 압수수색을 당했고, 나머지 의원들은 피의자 신분인 것으로 전해졌다. 내란특검은 추경호 전 원내대표(12·3 비상계엄 당시 윤석열 전 대통령과 통화한 뒤 의원총회 장소를 국회에서 당사로 바꿔 계엄 해제 표결을 방해했다는 의혹) 외에도 당시 국회 원내대표실 안에 있었던 의원 모두를 어떤 방식으로든 조사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건희 특검은 지난 2022년 보궐선거 공천 개입과 관련해 당시 공천관리위원장이었던 윤상현 의원의 사무실과 자택 등을 압수수색했고, ‘양평고속도로 노선 변경 특혜 의혹’과 관련해선 김선교 의원을 출국 금지한 것으로 전해졌다. 채 상병 특검은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의 ‘구명 로비’ 의혹으로 임종득 의원을 수사하고 있다. 특검에 더해 행정안전부는 서울·부산 등 국민의힘 소속 광역단체장에 대한 비상계엄 가담 의혹 진상 조사에도 착수한 상태다. 수사 향방에 따라 특검 칼날이 당 전반을 겨눌 수 있는 상황이다. 국민의힘으로선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김병기 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 21일 국회에서 열린 취임 100일 기자간담회에서 “국민의힘과 민생은 함께하지만 내란 관련 세력에게 관용은 없다. 내란과 민생을 철저히 분리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 21일 국민의힘이 동대구역 앞에서 개최한 ‘야당탄압·독재정치 국민 규탄대회’는 민주당의 사법부 압박(조희대 대법원장 사퇴요구)이 트리거가 됐겠지만, 특검 수사에 대한 불안감도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국민의힘의 산실인 대구에서 열린 장외집회는 ‘국민적 분노’로는 연결되지 못했지만 보수진영 지지자들을 결집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됐다. 앞으로 추석 연휴 전까지 대전을 거쳐 서울로 올라가면서 강도 높은 장외투쟁을 이어간다니 어떤 성과로 귀결될지 주목된다. 다만, 국민의힘이 명심해야 할 부분은 장외투쟁이 오히려 민심에 마이너스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점이다. 대구집회에서도 일부 드러났지만 성조기를 들고 ‘윤 어게인’을 외치는 극우세력이 집회에 섞여 들 경우, 국민 눈에 어떻게 비칠지도 신중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국민의힘이 지금 기댈 곳은 민심밖에 없지 않는가.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2025-09-23

茶馬古道를 거닐며

어딘가 떠나고 싶고 누군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비로소 가을이라 했던가. 풀벌레 소리 청아해지는 만큼 하늘은 더욱 높푸르러 가고 그야말로 덥지도 춥지도 않은 때, 서늘한 바람따라 자연을 벗삼거나 어디론가 훌쩍 길 떠나기 좋은 계절이다. 어쩌면 옛적 차마고도(茶馬古道)의 마방들에게도 가을이 시작되는 9월이 차(茶)를 팔기 위해 길 떠나기 최적의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말이나 노새를 이용해 중국 운남성의 차와 티베트의 말을 사고파는 상인을 가리키는 ‘마방(馬幇)‘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온갖 위험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기꺼이 고산준령으로 향하는 길을 떠났으리라. 짧게는 3개월, 길게는 수년 만에 되돌아오는 말몰이꾼들에게 있어서의 차마고도는 삶의 의지와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숙명적인 생계의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차마고도는 중국의 차와 티베트의 말을 교환하기 위해 개통된 동아시아와 남아시아의 주요 교역로로 중국과 티베트, 네팔, 인도를 잇는 육상 무역로이기도 하다. 즉 차와 말을 교역하던 길로써 설산과 아찔한 협곡을 연결하는 이 길을 통해 운남의 명물인 차 이외 비단의 수출로였으며 말ㆍ소금ㆍ약재ㆍ곡식 등의 다양한 물품의 교역이 이뤄져 실크로드의 전성기보다 200여 년이나 앞선 고대의 무역로였다. 그러나 생존과 생계를 위해 단순히 차와 말을 사고파는 물물교환의 거래나 교역의 길만이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도시와 나라가 연결되며 문화의 교류와 상업활동의 교역을 이뤄주는 차마(車馬) 무역의 역사적인 길이 되어 여러 이민족의 문화와 종교와 지식이 전파, 교류되면서 나라의 운명까지 바꿔 놓은 질곡의 길이기도 했다. 천 길 낭떠러지의 협곡과 5000미터 이상의 험준한 산을 넘어야 했기에 새나 쥐가 다니는 조로서도(鳥路鼠道)라고도 하는 차마고도는 세상에서 가장 좁고 가파르며 힘든 길이지만, 주변 풍광이 예사롭지 않은 아름다운 길로 드러나면서 세계 3대 트레킹 코스로 불릴 정도로 세간에 회자되고 있다. 그러한 산길과 벼랑길로 이뤄진 차마고도를 직접 걸으며 주변 경치를 바라보는 느낌은 어떠할까? 코스모스와 산양이 반기는 해발 2500여 미터의 차마객잔~중도객잔~관음폭포까지의 차마고도 트레킹 내내 이어지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은, 필설로 못다할 감흥으로 다가왔다. 병풍같이 둘러쳐진 옥룡설산 허리의 운무가 선계와 속세를 구분 짓는 듯 걷혔다 피어나기를 반복하고, 까마득한 발 아래의 산비탈에 다닥다닥 아찔하게 붙어 있는 집들과 구절양장으로 이어지는 비탈길 그 밑으로는, 깎아지른 호도협 협곡의 세찬 물굽이가 옥룡(玉龍)처럼 꿈틀대며 금사강의 유장함으로 흐르고 있었다. (사)일월문화원에서 주관한 해외문화탐방으로 올해는 중국 서남쪽 변경지역에 26개 소수민족의 다채로운 문화와 풍부한 자연환경이 아름다운 색상으로 표현되는 칠채운남(七彩云南)의 길을 다녀온 것이다. 그 길 가운데 차마고도 행보는 그야말로 무한한 즐거움(樂無窮) 그 자체였다고나 할까? 차마고도낙무궁은 호도협 물굽이에 옥룡설산의 위용과 함께 오래도록 뇌리에 남을 것 같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2025-09-23

“울릉도는 망하지 않았다"…울릉도 망치는 것은 삼겹살 아닌 왜곡된 프레임

“드디어 울릉도 망했다” 구독자 49만 명을 가진 한 유튜버가 내건 제목이다. 그는 제작 영상에서 바가지요금, 불친절, 삼겹살 논란을 이유로 관광객이 절반 가량 줄어들 것을 예고했다. 이 영상은 하루 만에 수십만 조회 수를 기록하며 확산됐다. 일부 언론도 “울릉도 이러다가 망한다”는 등 검증없이 잇따라 추측성 기사를 쓰면서 ‘울릉도 몰락’이라는 프레임을 덮어씌웠다. 과연 그럴까. 실제 울릉도의 관광통계를 들여다보면 그와 정반대의 현상이 확인된다. 지난 6월 말 삼겹살 파동이 일었지만 7월 울릉도 관광객은 3만9864명으로 지난해 같은 달 보다 16.3% 늘었다. 울릉썬플라워크루즈 운항 중단도 과거의 적자 누적이 원인이라는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다. 더욱이 울릉썬플라워크루즈는 운항을 시작한 이후 올해 가장 많은 관광객을 수송하기까지 했고, 삼겹살 파동 이후 지난 여름 성수기 두 달(7~8월) 동안의 이용객은 지난해보다 19.2%나 증가했다. 이런 수치는 한때 논란이 된 주민의 바가지요금·불친절·비곗덩어리 삼겹살과는 전혀 상관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유트버들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울릉을 무차별 폭격해댔다. 마치 울릉 주민들 때문에 관광객이 줄어 들었고, 그로 인해 여객선이 경영난으로 운항을 멈춘 것 처럼 비치게 하려고 온갖 장난질을 했다. 물론 몇해 전 보다 전반적으로 관광객이 감소한 것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교통’과 ‘환경’이라는 요인으로 발생했다. 세계 최고 속력을 자랑하던 엘도라도 익스프레스호가 기관고장으로 운항을 중단했고, 코로나19 이후 폭발한 해외여행 수요가 결정적이었다. 이런 복합요인을 무시한 채 일부 유튜버와 언론은 ‘울릉도 주민 탓’으로 몰아갔다. 울릉 주민들이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울릉도는 지질공원 팸투어, 문화·역사 체험, 해양관광 프로그램 등으로 관광 콘텐츠를 확장하며 변화를 꾀하고 있다. 이 와중에 ‘망했다’는 자극적 제목 하나는 그간 쌓아온 울릉군과 주민들의 노력을 송두리째 흔든다. 왜곡된 프레임의 위험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자극적 콘텐츠가 낙인효과를 키운다. 부정적 이미지가 외부에 각인되면, 다시 회복하는 데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이 든다. 관광은 신뢰 산업이다. 울릉도는 ‘망했다’가 아니라 여전히 ‘살아있다’는게 진실이다. /김두한기자 kimdh@kbmaeil.com‘

2025-09-23

허위신고엔 더 무거운 처벌을

학교나 백화점처럼 다중이 밀집된 곳에 폭탄이 설치됐다는 허위 신고를 하거나, 특정한 공간에서 사람을 죽이겠다는 내용의 글을 인터넷 공간에 게재하는 행위는 용서 받기 힘든 범죄다. 이런 악의적 거짓말은 필연적으로 공권력의 낭비를 부른다. 앞서 언급한 허위 신고나 거짓 게시글이 문제가 될 때면 사회 안전과 민생 치안에 집중해야 할 경찰 인력이 적지 않게 동원돼 수색과 검문에 나서야 한다. 아무 소득 없는 헛수고에 국민들의 귀한 세금이 낭비되고 있다. 반복되는 허위 신고와 인터넷 거짓 게시글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는 엄한 처벌이 필요하다. ‘화풀이나 재미로 한 행동이 폐가망신을 부를 수 있다’는 걸 알려줘야 하는 것. 최근 여러 사람이 반길만한 판결이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2023년 신림역에서 여성들을 살해하겠다고 허위 살인 예고 글을 올린 최모(31)씨에게 ‘4300만원을 정부에 배상하라’고 선고했다. 이번 소송은 법무부가 다중 살인사건 대비를 위해 투입된 인적·물적 손해에 대해 최씨의 책임을 물으며 시작됐다. 최씨가 사람을 죽이겠다는 글을 올린 후 체포될 때까지 703명의 경찰력이 동원됐다. 낭비된 시간과 인력을 감안하면 4300만원도 큰 배상액이라 보기 어렵다. 이번 사례는 정부가 살인 예고 글을 올린 범죄자를 상대로 민사 책임을 물은 소송에서 나온 첫 번째 판결이다. 이제 판례가 생겼으니 향후 열릴 유사 사건에 대한 재판도 이 판결에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국민은 허위 신고와 악의적 거짓 게시글엔 더 무거운 처벌이 필요하다고 요구하고 있다. 법원은 이런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할 것이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9-22

선물과 뇌물의 경계, 마음속에 답이 있다

“선물을 잘 받을 줄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이 한 일이나 선물을 인정해 주고, 그 가치를 잘 살려 주고, 즐겨 주고, 좋아해 주는 것이다.”(최송목의 저서 ‘사장의 품격’ 중에서) 추석 명절이 다가오면서 선물 문화에 대한 고민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 누군가의 정성이 담긴 선물은 분명 마음을 따뜻하게 하지만, 그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 선물은 뇌물로 변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그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해 갈등과 불편함을 반복해 왔다. 2016년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제정은 바로 이 지점을 겨냥했다. 공직 사회와 기업을 흔들던 ‘명절 선물세트 관행’은 이제 법의 테두리 속에서 사라졌다. 한우·굴비·상품권이 오가던 시대에는 받는 사람도, 주는 사람도 늘 불편한 마음을 감췄다. 받는 이는 ‘대가를 치러야 하나’ 하는 부담을, 주는 이는 ‘관행이니 어쩔 수 없다’는 자기합리화를 반복했다. 이때 선물은 이미 뇌물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김영란법은 선물과 뇌물 사이의 모호한 공간을 잘라냈다. 5만 원, 10만 원이라는 가액 기준은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다. 이로써 주는 사람은 ‘여기까지는 괜찮다’는 확실한 선을 긋고, 받는 사람은 ‘거절하지 않아도 된다’는 명분을 얻었다. 제도의 도입은 곧 청렴 문화로 이어졌다. 이제는 선물을 받는 순간 ‘혹시 법에 저촉되지 않을까’ 하는 자기 검열이 자동으로 작동한다. 제도 시행 이후 공직사회의 풍토가 맑아졌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불필요한 의심과 눈치가 사라졌고, 선물 본래 의미가 조금은 되살아났다. 선물은 결국 받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관계를 따뜻하게 만드는 삶의 지혜다. 하지만 대가를 떠올리게 하고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뇌물이다. 선물과 뇌물의 경계가 분명해질수록, 주고받는 풍경은 덜 화려해졌지만 사회는 더 건강해지고 있다. /임창희기자 lch8601@kbmaeil.com

2025-09-22

셀프 세족례

언제부턴가 새 버릇이 생겼다. 아니, 버릇이라기보다 새로 하게 된 ‘셀프 세족례(洗足禮)’라고 하는 게 낫겠다. 새 셀프 세족례 전에는 발을 손으로 만지며 씻는 일은 뜸했다. 따뜻한 물에 발을 불려 굳은살을 각질 제거 돌로 밀 때나, 뗄 거나 씻을 것이 묻었을 경우 외는 거의 발을 만지지 않았다. 보통은 바가지로 물을 양발에 한두 번 붓고 말거나, 물을 부으면서 한쪽 발바닥으로 다른 쪽 발의 등을 몇 번 문지르는 정도였다. 젊은 날부터 오랫동안 성당의 봉사자 활동을 하면서 여러 번 세족례를 받아보기도 했다.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은 모범을 따라, 성목요일 미사 때 사제가 선정된 12명 신자의 발을 씻는 예식이 세족례다. 하지만, 그 의미를 알면서도 형식적 예식으로 치부하고 실생활에서 몸과 발, 여러 지체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살았다. 안다는 것과 깨닫고 행하는 삶의 거리가 북극성만큼이나 멀었다. 나이 들어가며 피부가 건조해지는 걸 느끼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이때, ‘몸에서 아픈 소리가 난다’라고도 했다. 젊은 날 어른들에게서 이런 소리를 들을 때는, 다른 나라 얘기처럼 그냥 흘려보냈었다. 한데, 어느 날 자신에게도 닥친 문제라는 걸 깨닫고 깜짝 놀랐다.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이 느끼는 바가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자기 몸이 여러 지체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비로소 바라다보았다. 이 무렵부터 발이 새로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지체처럼 발을 두 손으로 꼼꼼히 씻었다. 발이 자신을 위해 고난을 겪은 흔적이 고스란히 발견되었다. 발가락 사이엔 때가 많이 끼었고, 뒤꿈치는 굳은살이 늘어났으며, 박힌 티눈도 커진 걸 새삼 알아챘으니 말이다. 때, 굳은살, 티눈 모두가 온몸의 압박을 견뎌내며 죽어간 발의 세포들일 터. 발을 씻고 나면, 끝으로 맑은 물로 발을 헹구며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이것이 ‘발을 다른 지체들처럼 대접하는 행위 곧, 셀프 세족례’다. 가장 낮은 곳에서, 온몸을 떠받치고 걸어가야 하는 버거운 몫을 말없이 해내는 존재가 발이다. 이유 없이 천대받기도 하는 존재도 발이다. 가슴에서 맨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일까. 만일, 발이 없다면 인간은 문명은커녕, 생존조차도 못했을 터다. 발 못 쓰는 장애우를 보면 금방 그 소중함을 알고도 남는다. 사람이 여러 지체로 이루어진 생명 유기체라면, 국가는 사람으로 조직된 유기체다. 따라서, 국가도 지체들이 있기 마련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기술 등 여러 분야의 지체가 서로 이어져 유지, 발전하는 유기체가 국가이기에 생명 유기체와 닮았다. 국가의 지체는 지도층, 관리층. 감독층, 실무층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에서 발에 해당하는 지체는 실무층이며 근로자, 농어민, 소상공인 등이 그들이다. 국가란 몸의 발 역할을 감당하는 실무층이 무시되거나 소외당하고 저소득 구조에 가난하다면, 이는 자유민주주의 복지사회가 아니다. 따라서 보편복지가 아니라, 꼭 필요한 저소득층을 도와주고 돌보는 선별복지가 요구된다. 셀프 세족례가 발의 소중함을 알아주는 데서 나왔듯이···. /강길수 수필가

2025-09-22

쇼펜하우어 VS 니체

쇼펜하우어는 욕망과 권태가 인간 실존의 두 얼굴이라 보았다. 욕망은 삶의 본질이자 고통의 원인이요, 권태는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 드러나는 삶의 공허이다. 욕망이 충족되면 권태라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온다. 이렇듯 욕망과 권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영원히 회귀한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저자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묘비명에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고 새겼다. 사실일지는 모르지만, 카잔차키스 자신은 욕망하지 않았으므로 두렵지 않았고, 그래서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렇다. 욕망하지 않으면 불안도 없다. 고통의 뿌리가 욕망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이러한 욕망은 쇼펜하우어가 말한 ‘생존에의 의지’의 핵심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의 세계(Das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1819.)에서 밝힌 의지는, 생을 추동케 하는 맹목적 충동이자 끊임없는 욕망이다. 싯다르타의 고성제(苦聖諦. 삶이 고통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를 쇼펜하우어가 삶에의 맹목적 의지(욕망)로 치환한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욕망이 완전히 충족되더라도 ‘권태라는 악마의 등장’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권태는 단순한 지루함이 아니라, 존재가 아무런 욕망을 하지 않을 때도 만족하지 못하는 심리 상태이다. 보들레르는 ‘악의 꽃’에서, 권태는 단순한 무료함이 아니라, ‘존재의 근본적 피로와 무의미’이며, ‘모든 악의 근원’이라 보았다. 악의 꽃 마지막 부분에서, 권태를 괴물로 형상화하여 탐욕, 방탕, 허영을 능가하는 궁극의 악으로 규정하였다. 인간은 권태 속에서 공허를 견디지 못하고 술, 마약, 매춘, 심지어 폭력, 죽음까지도 찾아 나서기도 한다. 보들레르에게 권태는, 악의 꽃을 피우는 ‘토양’인 셈이다. 욕망과 권태의 윤회 속에서 인간은 허덕일 수밖에 없다는 쇼펜하우어의 진단에 대하여 니체는,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라 쏘아 부친다. 쇼펜하우어에게는 억제하거나 부정되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니체에게는 자기실현과 자기극복의 특급열차가 된다. 쇼펜하우어에게는 존재 자체의 무의미성이자 삶의 고통과 허탈감으로 드러나는 권태라는 이름의 악마는, 니체에게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삶을 자극하는 천사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두 사람의 견해 차이는 욕망과 권태로부터 구원받는 방식도 달라진다. 쇼펜하우어는 금욕, 관조, 욕망과 권태의 줄임과 제거를 주장하지만, 니체는 자기 극복, 새로운 가치창조, 아모르파티를 통해 욕망과 권태를 나의 일부로 포용하여 적극 수용하길 권한다. 예술의 경우는, 쇼펜하우어에게는 고통의 세계로부터 일시적 해방 또는 위안의 도피처이지만, 니체에게는 삶을 긍정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적극적 힘의 놀이터이다. 두 사람이 대하는 욕망과 권태에 대한 태도와 해결 방안 중 누구 것이 낫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니체를 따른다. 나로부터 분리하여 처리하여야 할 그 무엇이라기보다는, 영원히 함께하는 동반자요, 내 삶의 귀한 손님으로 생각하자. 안녕! 반가워~ 나의 욕망과 권태야! /공봉학 변호사

2025-09-22

작가 윤흥길의 작은이모

살아간다는 것은 어렵다. 누구나 어렵다. 돈 많은 사람도, 없는 사람도 크고 작은 차이는 있어도 어렵다. 어려운 삶을 그 무게를 덜며 사는 법을 익힌 사람은 지혜롭다. 그래도 가난한 이들에게 천국이 가깝다는 말은 옳다고 생각된다. 이렇게도 생각한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들의 ‘죄’를 ‘대속(代贖)’하는 이들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이 성스러움이 그네들의 삶의 무게를 덜어주지는 않겠지만, 우리들의 삶 전체를 위해서는 이 생각이 없어서는 안되겠다. 소설 공부가 어찌어찌해서 윤흥길 작가 쪽으로 흐르는데, 문제작 ‘장마’며, ‘무지개는 언제 뜨는가’를, 해석을 달리해 볼 방향을 찾는다. 이 공부는 동학과 증산교와 기독교를 들락달락해야 한다. ‘장마’에서 마당에 나타난 구렁이를 죽은 삼촌의 혼령이 씌운 것으로 보고 집안일은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말고 어서 “자네” 가야 할 데로 가라는 그 달램을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가 문제다. 소설만으로 보이지를 않아 작가가 쓴 산문집 ‘텁석부리 하나님’(1993)을 찾아 읽는다. 거기 작가의 작은이모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작은이모의 남편 되는 분은 법원에서 일했는데, ‘인공’ 치하에서 잠시 외출했다 실종되어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작은이모는 폐결핵까지 얻어 어린 작가의 집에 깃을 들여 함께 살았다 한다. 산문집을 통독하다, 작가의 정신세계가 기독교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음을 쉽게 깨닫게 된다. 단편소설 「집」을 보면 작가는 어려서 참 지지리 궁상도 그런 궁상은 없었던 것 같고, 정직하면서도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힘겨운 성장통과 씨름도 잦고 컸다. 그 시절, 작은이모의 깊은 신앙심이 작가를 인도해 주었더라고 한다. 가난하고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잔잔한 수면 같은 고요한 마음 세계 그대로였던 작은이모의 곱디고운 모습이 어린 작가를 헛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끌어주었다고 한다. 마지막 숨을 거두고도 마치 산 사람처럼 평화롭고 미소마저 어려있던 작은이모의 모습은 이 글을 쓰는 나 자신에게도 너무나 ‘처연하게’, 그러면서 아름답게 상상되는 것이었다. 이 작은이모 이야기 속에서 한 가지 얻어 깨달은 것이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어느 작은 사람도, 세속에 크게 빛나지 않는 사람도, 고통이나 슬픔을 겪고 있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크고도 좋은 힘이 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이다. 또 사람은 애써 크고 좋은 사람이 되려 할 것도 아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충만하게 하는 일, 이 충만함으로 늘 기쁨이 어린 삶을 만들어 가는 일이야말로 누구나의 삶이 이루어내야 할 크나큰 좋은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의 일이 아니며, 또 종교만의 일도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윤흥길 작가의 작은이모는 어린 윤흥길에게 버티는 힘을 선사한 데 머무르지 않고, 작가의 작품에 살아 읽는 이들을 움직이고, 또 그 힘이 멀리 소설 공부하는 사람에게까지 미칠 수 있었다. 고요한 충만함, 내적인 충만함이 무엇인가를 다시 곱씹어보는 새벽에서 아침이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09-22

맑은 콩나물국에 비친 무른 콩나물

여행에서 돌아오니 냉장고의 콩나물이 물러 있다 무른 콩나물은 버리고 먹을 만한 콩나물은 골라 그릇에 담는다 버려야 할 것들까지 버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가 새벽의 노동 속에서도 계절이 흐르고 나는 가족을 이루었구나 좁고 기다란 식탁에는 김이 나는 콩나물국 고춧가루도 치지 않아 얼굴이 비치는 어느 아침 한 식구는 건더기를 모두 남기고 한 식구는 국의 절반을 버리고 국이 식도록 방에서 나오지 않는 식구도 있는데 맑은 국물 위의 떠도는 얼굴들은 모두 매운 점심을 지나 어느 무른 저녁으로 갈 터이니 버리려던 콩나물의 절반을 얻은 것이 기쁘고 오늘은 가족이 모두 콩나물국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서 있던 그 새벽의 고요가 기뻤으므로 손에 가득한 콩 비린내로 얼굴을 쓸며 해가 어디쯤에 가고 있는지 창밖을 내다본다 ―심재휘, ‘맑은 콩나물국’ 전문 ‘두부와 달걀과 보이저’(2025, 문학과지성사) 심재휘 시인이 그려내는 새벽 풍경에는 콩나물과 식구라는 두 가지의 언어가 있다. 기실 콩나물과 식구는 두 개의 기표이면서 하나로 수렴된다고 하겠다. 여행에서 돌아온 화자가 냉장고에서 발견한 콩나물은 “물러 있다” 여기에서부터 화자의 새벽 노동은 시작된다. 이때 새벽이라는 물리적 시간과 식탁이라는 장소성은 ‘식구’라는 기표와 등가성을 가진다. 이들은 한 식탁에 동참하거나 늦잠으로 불참하며 화자가 골라내는 “먹을 만한 콩나물”과 “무른 콩나물”로 병치 된다. 또한 “버려야 할 것들까지 버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화자의 태도에서 가족을 챙기며 돌보는 정성스러운 마음을 엿볼 수 있다. 한국인의 밥상에 자주 오르는 콩나물은 김치만큼이나 밥과 근친하는 식재료일 것이다. 여기서 콩나물은 밥처럼 자주 먹어도 물리지 않는 일상어가 된다. 말하자면 콩나물국은 매일 봐도 물리지 않는 식구와 같다. 이른 아침 화자의 콩나물국은 “고춧가루도 치지 않아 얼굴이 비치는” 맑은 이미지를 표상한다. 화자의 식구들이 콩나물을 대하는 방식을 통해 여느 가족의 일상적인 아침 풍경을 들여다볼 수도 있다. 가령 “한 식구는 건더기를 모두 남기고” “한 식구는 국의 절반을 버리고” 심지어 “국이 식도록 방에서 나오지 않는 식구도 있는데”처럼 식구들이 여럿인 가족의 일상은 이 풍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듯하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면, 화자가 궁구한 새벽 노동의 극진함과 달리 가족들은 제각각의 방식으로 아침 식탁을 맞는다. 이럴 때 ‘맑은’ 콩나물국은 생활인으로서의 일과 속 지난함과 곤함을 되비추는 거울과 같다. 화자의 말처럼 콩나물국에 비친 얼굴들은 “매운 점심을 지나 어느 무른 저녁으로 갈 터”이니까. 화자가 그토록 버리지 않으려고 애쓴 ‘무른 콩나물’과 식구들의 ‘무른 저녁’ 역시 등가이다. 결국 제목 ‘맑은 콩나물국’의 외현적 형식은 ‘무른 콩나물’이 표상하는 심상을 수반하고 있다. 이를테면 “어디쯤에 가고 있는지 창밖을 내다보는” 화자의 시선이 좇는 ‘해’ 역시 일과를 따라 움직이는 ‘식구’와 다름이 아니니 말이다. “새벽의 노동 속에서도 계절이 흐르고 나는 가족을 이루었구나”라는 언술에서 알 수 있듯 앞서 서술된 콩나물과 같은 값의 기표들은 유기적인 성격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어쨌든 화자는 “버리려던 콩나물의 절반을 얻은 것이 기쁘고” 무엇보다 “오늘은 가족이 모두 콩나물국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흡족하다. 하여 “생각하며 서 있던 그 새벽의 고요가 기뻤”다고 고백한다. “손에 가득한 콩 비린내로 얼굴을 쓸며” /이희정 시인

2025-09-21

숲이 숨 쉬는 봉화, 치유산업으로 미래를 열다

봉화는 현재 지방소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치유산업 육성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예로부터 봉화는 산림과 농업, 관광 자원이 풍부한 청정지역으로, 이러한 자원을 바탕으로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치유산업의 중심지로 도약할 수 있는 가능성을 꾸준히 모색해왔다. 날로 감소하는 인구와 고령화, 수도권 집중화로 인한 지방소멸 위기 앞에서 이제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 지속가능한 지역 성장 전략을 마련해야 할 때다. 단기적 대응에 머무른다면 미래 세대에게는 쇠퇴한 고향만 남길 수 있다. 이에 봉화군은 지역 자원의 특성과 정체성을 최대한 살린 ‘봉화형 치유산업’을 발굴해 나가며, 새로운 도전 속에서 지역의 활로를 찾아가고 있다. 치유산업은 단순한 서비스 산업이 아니다. 몸과 마음을 돌보고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본질적인 가치를 지닌 산업이다. 경제적 효과를 넘어 사회적 안정과 주민 삶의 질 향상에까지 기여할 수 있는 다층적 산업으로, 일자리 창출·청년 인구 유입·지역경제 활성화 등 종합적 파급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특히 숲이 가진 치유의 힘은 이미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산림의 다양한 자연환경 요소를 활용한 치유 활동은 면역력 강화, 스트레스 완화, 정신 건강 개선 등 긍정적 효과를 가져다주며, 치유산업의 핵심 자원으로 각광받고 있다. 봉화는 백두대간의 정기를 품은 천혜의 자연을 바탕으로 산림치유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최적지다. 최근 봉화군은 이러한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사람과 자연이 함께 숨 쉬는 치유 공간, 문수산산림복지단지를 개장하고 본격 운영에 들어갔다. 문수산 자락에 조성된 이 단지는 산림휴양·교육·치유 기능이 융합된 종합 산림복지 거점으로, 단순한 휴식 공간을 넘어 봉화형 치유산업의 상징적 모델로 자리매김할 준비를 하고 있다. 문수산산림복지단지는 중심지구, 체험·교육지구, 산림치유지구, 자연휴양림지구 등 4개 권역으로 나뉜다. 중심지구에는 산림치유센터가 있어 건강측정실, 족욕체험실, 명상치유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전문적이고 과학적인 치유 서비스를 제공한다. 체험·교육지구는 유아와 아동을 위한 자연친화적 학습 공간으로, 아이들이 오감을 통해 자연을 느끼며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다. 산림치유지구는 명상숲, 힐링치유길, 요가숲 등 테마별 체험공간이 마련되어 방문객이 일상에서 벗어나 심신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자연휴양림지구는 숙박과 야영시설을 포함해 가족 단위 관광객이 편안한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구성됐다. 정식 개장한 지 석 달여 만에 단지는 이미 방문객들로부터 높은 호응을 얻고 있다. 다양한 연령층이 치유와 휴양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만족도를 표현하고, 이 경험이 입소문을 타면서 봉화의 새로운 관광 브랜드로 부상하고 있다. 이는 봉화가 지향하는 ‘치유산업 선도도시’ 비전을 구체화하는 첫 성과라 할 수 있다. 앞으로 봉화군은 문수산산림복지단지를 단순한 휴양공간을 넘어 산림치유산업의 새로운 모델을 구현하는 핵심 거점으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전문 인력 양성과 프로그램 고도화, 디지털 치유 콘텐츠 확산을 통해 지속가능한 일자리를 창출하고, 청년층이 찾아오는 활력 있는 지역사회를 만들어갈 것이다. 또한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봉화정자문화생활관, 봉화목재문화체험장 등과 연계한 산림관광 네트워크를 구축해 봉화만의 독창적인 장기체류형 관광 모델을 개발하고자 한다. 이는 단순한 관광을 넘어 ‘머물고 싶은 도시 봉화’로 나아가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박현국 봉화군수 더 나아가 봉화군은 치유산업을 국가 정책과도 연계해 전국적 모범사례로 확산시킬 것이다. 지역 주민들에게는 안정적인 소득 기반을 제공하고, 외부인에게는 봉화만의 치유 문화를 체험할 기회를 선사함으로써, 지역 정주 여건 개선과 인구 유입을 동시에 실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치유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다. 급변하는 시대에 몸과 마음이 지친 현대인에게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가치이며, 동시에 지방이 살아남기 위해 찾을 수 있는 새로운 길이다. 봉화군은 산림치유라는 미래 산업을 통해 소멸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자 한다. 문수산산림복지단지가 봉화형 치유산업의 중심지로 자리 잡아 지역의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어가길 기대한다. 더 나아가 봉화군이 ‘치유산업 선도도시’라는 당찬 비전을 실현하며, 사람과 자연이 함께 웃는 지속가능한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2025-09-21

가짜뉴스? 민주당이 진원지다

민주당이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가짜뉴스에 대해 15~20배에 이르는 ‘징벌적’인 손해배상을 물리는 내용이다. 1천억 원의 매출을 올리던 고 김영애 씨의 황토팩이 KBS의 ‘소비자 고발’ 오보로 파산했다. MBC의 광우병 보도는 정권을 무너뜨릴 기세로 전국을 뒤집어 놓았다. 스카이데일리라는 인터넷신문은 중국인이 부정선거에 개입했다는 조작뉴스로 극우파 시위에 기름을 부었다. 그에 합당한 책임을 졌느냐 하는 문제 제기가 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다. 노골적인 사실 조작이 횡행하지만, 정치인이 앞장서 이를 이용한다. 내 편 가짜뉴스는 상을 주고, 상대편이면 ‘징벌’하는 식이라면, 언론자유를 핍박하고, 권력에 대한 비판에 재갈을 물릴 가능성이 크다. 청담동 룸살롱 폭로가 대표적이다. 김의겸 당시 민주당 의원은 국정감사장에서 청담동 룸살롱 의혹을 터뜨렸다. 유튜브 채널 ‘더탐사’(옛 열린공감TV)가 한 첼리스트의 통화 녹음을 근거로 잇달아 의혹을 부풀렸다. 의혹의 당사자였던 한동훈 당시 법무부 장관의 해명, 첼리스트의 경위 설명으로 오보임이 확인된 이후에도 한동안 물고 늘어졌다. 지난달 1심에서 관련자들이 한 전 장관에게 80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논란 속의 김의겸 전 의원을 이재명 대통령은 새만금개발청장으로 임명했다. 정치적 공격수로 오명을 감수하면 상훈이 있다는 전례를 만든 셈이다. 김어준, 전한길 유튜브가 논란의 중심이다. 최근에는 열린공감TV가 조희대 대법원장이 한덕수 전 총리와 비밀 회동했다고 보도해 정치권이 시끄럽다. 열린공감TV가 지난 5월 4인 회동의 녹음 파일을 들려줬다. 그 녹음에서 조 대법원장이 ‘이재명 사건이 대법원에 올라오면 알아서 처리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대법원이 이 대통령 선거법 위반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했다는 게 보도의 요지다. 이어서 서영교 민주당 의원이 법사위 청문회에서 이 녹음을 틀었다. 최근 부승찬 민주당 의원이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이 문제를 다시 꺼냈다. 정청래 민주당 대표는 조 대법원장의 사퇴를 요구했다. 대통령실도 이에 동조하는 듯한 발표를 했다가 발을 뺐다. 그런데 이 영상 앞부분에 ‘해당 음성은 AI로 제작된 것으로, 특정인들이 실제 녹음한 것이 아님을 알려 드린다’라는 자막이 붙어있다. 그런데도 서 의원은 ‘제보자가 특검에서 증언할 용의가 있다고 한다’라며 굽히지 않는다. 정청래 대표는 “억울하면 특검 수사 받고 결백을 밝히면 될 일”이라며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유튜버와 욕받이 정치인 한 사람이 던지면, 일제히 공세에 나섰다가, 슬그머니 빠지는 행태가 반복된다. ‘사실이라면…’ ‘억울하면…’이라며 책임지지 않을 ‘…라면’식 흠집 내기다. 가짜뉴스를 징벌하는 게 아니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민주당이 검찰을 비난하는 대표적 사례가 ‘논두렁 시계’다. 권양숙 여사가 받지 않았다는 게 아니다. 수사 내용을 흘려 모욕감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검찰을 대신해 수사하는 특검은 얼마나 달라졌나. 연일 확인되지 않은 추정까지 쏟아내지 않나. 문재인 정부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사퇴시키고, 47개 죄목으로 기소했다. 그런데 5년 만인 지난해 1월 1심에서 모두 무죄가 났다. 오는 11월 항소심 판결이 있다. 무죄건 아니건, 대법원장은 불명예 퇴진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법원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김명수 전 대법원장은 윤석열 정부에서도 2년 가까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 정부는 조희대 대법원장과 조금도 같이 있기 힘든 모양이다. 정파적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대법원장은 누구였나. 정청래 대표는 조 대법원장이 “계엄에 침묵하고 서부지법 폭동에 침묵했다”라면서 “깨끗이 물러나라”라고 요구했다. 지귀연 부장판사가 윤석열 전 대통령을 석방했을 때도 입장을 밝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 양 전 대법원장의 핵심 죄목 중 하나가 ‘재판개입’이다. 이제 와 대법원장이 하급심의 재판에 일일이 개입하라는 건가. 집권당인 민주당이 가짜뉴스의 진원지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5-09-21

국익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한국과 미국은 대(對) 한국 상호 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고, 한국이 총 3천500억 달러(486조 원)를 투자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구체적 이행 방안에 서로 의견 차이를 드러내며 협상이 난황을 보인다. 이미 문서로 합의한 일본은 16일부터 자동차·부품 관세가 15%로 낮아져 한국산 자동차가 일본산에 비해 비싸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런 가운데 미국에 근무하는 우리 근로자들이 비자 문제로 죄인처럼 손발이 묶인 상태로 연행되어 구금된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것도 한미 정상 간의 회담이 이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이다. 미국이 한국을 진정한 동맹과 경제 파트너로 생각하는지 의심이 든다. 상도의를 벗어난 미국의 요구는 안보를 볼모로 온갖 요구를 하고 있다. 주한 미군 부지를 달라고 요구하고 투자금을 현금으로 부담하고 투자에서 얻은 수익금의 90%까지 미국이 갖겠다고 한다. 이러한 불평등한 내용으로 압박하니 대처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의 대응은 제대로 이루어지는지 의구심이 든다. 국가의 모든 힘을 모아 미국의 요구에 대응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여기에 더해 해킹 문제로 사회는 불안하고, 물가는 오르고 국민의 삶은 힘들어지는데 여당은 삼권분립의 정신을 잊고 대법원장 끌어내리기에 바쁘다. 경제가 점점 힘들어지는데, 강화된 상법은 관세로 힘들어하는 산업체를 옥죄고 있다. 다른 나라들이 국가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제도를 개선하고 보조금을 지급한다고 난리인데 정부는 산업체를 살릴 의향은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중소기업체는 인력을 구하지 못해 난리인데도 정부의 대응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기업체를 옥죄는 일에만 열중이고 근로일수를 줄이고 근로자의 과도한 요구를 들어주느라 법을 고치기에 바쁘다. 모든 것은 때가 있지 않은가. 관세로 수출이 어려워 허덕이는 기업을 사지로 내모는 것인지. 해고도 자유롭지 않은 한국에서 기업이 선택할 방법은 무엇일까. 이재명 정부가 끝날 즈음에는 한국의 많은 기업이 해외로 생산기지를 옮기지 않을까 걱정이다. 지금이라도 기업의 가치를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일하러 미국에 가서 죄인 취급을 받은 우리 국민이 고통을 이야기하는데 정부의 대응은 미흡하다. 해킹 문제로 국민은 불안하고 해결하지 못한 관세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기업체를 위해 정부는 국가의 온 힘을 국민의 삶과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 기울여야 한다. 정부의 관련 부서만 움직이고 여당은 대법원장을 끌어내리느라 바쁘고 기업을 옥죄는 법을 만드느라 힘을 빼기보다 다양한 각도로 미국에 우리의 입장을 전하고 관세를 타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대통령의 미국 방문 시에 보여준 대미 협상팀과 기업인들이 하나가 되어 보여준 그런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런데 대통령이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불안한 사회다. 경제도 사회도 안정되기를 바라는 국민의 바람이 있는데, 4류의 우리 정치는 이해하지 못한다. 오로지 제 갈 길만을 가겠다는 정치행태는 이제 바뀌어야 한다. 힘을 모아 트럼프라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괴물과 싸워 이겨야 한다. /김규인 수필가

2025-09-21

노란봉투법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2주 전쯤, 건축업에 종사하는 이웃과 동네 일을 의논하러 만났다가 대화 주제가 노란봉투법으로 이어졌다. 그 이웃은 공사 현장에서 사람 다치고 죽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그렇게 패널티를 많이 주면 건축업이 위축된다면서 정부를 비판했다. 바로 며칠 전에도 유튜브 채널 부읽남TV에서 같은 논조의 영상이 올라왔다. 그는 건축 현장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죽었을 때 어떤 패널티를 주는지 조목조목 설명하면서 노란봉투법이 주택 공급 소멸 정책이라며 집값 폭등을 예고했다. 노란봉투법이라는 이름의 기원은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쌍용자동차의 해고노동자가 파업했을 때 법원에서 47억 원의 손해배상을 명령하자, 시민들이 노란 봉투에 4만 7천 원씩 넣어 후원했다. 현금으로 월급을 주던 시절 노란 봉투에 담아 주었기 때문에 노란 봉투에는 노동자의 생계를 보호한다는 의미가 있다. 노란봉투법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2조와 제3조를 일부 개정한 것이다. 제2조는 근로자와 사용자, 노동쟁의의 정의 등을 규정하고 있고, 제3조는 단체교섭 또는 쟁의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 및 배상 책임을 다룬다. 9월 12일 공포된 이 법안은 내년 3월부터 시행된다. 이 법은 크게 세 가지가 중요하다. 첫째는 사용자의 범위를 확대했다. 사용자를 근로계약 당사자만이 아니라 근로 조건을 실질적으로 결정하는 주체를 모두 사용자라고 보았다. 이렇게 되면 특수고용이나 플랫폼 종사자도 노조의 지위를 가질 수 있게 되어 원청과 협상할 수 있다. 둘째는 노동쟁의의 대상이 확대된 것인데, 이전에는 임금과 근로 조건에 직접 관련된 상황에서만 쟁의가 가능했지만. 노란봉투법에서는 근로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경영상 결정도 쟁의 대상이 된다. 물론 회사가 불법행위를 하거나 단협을 위반했을 때 가능하다. 셋째는 파업이나 노조 활동을 했을 때 지나친 손해배상 청구를 금지한 것이다. 쌍용자동차 파업 때 47억 원을 청구한 것이 부당하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노동자의 권익 보호의 폭이 확대된 것이다. 그러니 사업자 측이 반발할 것은 당연하다. 전국경제인연합은 경영권 직접 침해, 해외 투자 위축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정부는 “기준과 매뉴얼을 마련해서 불확실성과 남용을 방지하겠다”고 했지만, 갈등이 쉽게 수그러들지는 않을 것 같다. 이럴 때는 오히려 철학적이고도 원론적인 접근이 유효할 수 있다. 롤즈는 ‘무지의 베일’이라는 원초적 상황을 가정한다. 사회 계약 후의 내 지위를 전혀 알 수 없다고 전제했을 때 사람들은 모든 사람에게 기본 자유를 보장하고, 경제적 불평등은 최소 수혜자인 약자에게 최대이익이 되도록 조정하기를 원한다고 한다. 사회 정의를 고려할 때 자신이 약자가 될 경우를 가정한다는 것이다. 부읽남TV 댓글 중 한 명의 병사도 죽지 않기를 바라는 장수는 패한다는 말이 있었다. 건설 현장에서 사람 한두 명도 죽지 않기를 바라면 사업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만약 죽는 병사가 나라면, 내 가족이라면 그래도 그 장수를 훌륭하다고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면 좋겠다.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09-21

사법도시 대구

대구가 사법도시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역사적 사실들이 있다. 조선시대 경상감영이 대구에 설치된 이후 영남권의 사법,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대구가 한 것이다. 1895년 대구재판소가 설치됐고, 일제 강점기에는 서울과 평양을 제외하면 지금의 고등법원 격인 복심법원이 대구에 유일하게 설치됐다. 광주시에 고법이 신설된 1952년까지 지방에는 고등법원이 있는 곳은 대구가 유일했다. 더불어 민주당 김용민 의원이 대법관 증원 등 사법개혁에 반발하는 대법원을 향해 대법원을 대구로 옮기자는 제안을 해 제안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법개혁 추진 과정에서 대법원과 충돌하면서 나온 제안이라지만 김 의원은 작년 국가균형발전 명목으로 대법원을 대구로 이전하는 법안을 발의한 바 있어 그의 대법원 이전이 그냥 한 말로 보이지 않는다. 더불어 민주당은 5년 전에도 대구시당을 방문한 자리에서 대법원은 대구로, 헌법재판소는 광주로 이전하자는 구상을 밝힌 바 있다. 또 지난해 홍준표 전대구시장도 지역균형발전을 위해서는 수도권 외에 사법 수도를 두는 것도 검토해 볼만하다는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 대법원의 대구 이전설 자체가 생소한 이야기는 아니다. 김 의원의 대법원 이전 제안이 대법원장 사퇴를 요구하는 압박용이라는 설과 내년 지방선거를 염두에 둔 민주당의 포석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대법원의 대구 이전설이 그간의 사정을 살펴보면 현실화 되지 못할 것도 없다. 대법원의 이전은 지역발전 측면에서 메가톤급 구상이다. 김 의원의 제안이 대법원 이전 논의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될지 지켜 볼 일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9-21

시그나기를 아시나요?!

귀국을 하루 앞둔 8월 27일 오전 8시 20분 나와 김 이사는 호텔 로비에서 김 영사 가족과 대면한다. 오늘은 트빌리시에서 남동쪽으로 113km 떨어진 유서 깊은 도시 시그나기(Signagi)를 찾아가는 날이다. 어젯밤 늦도록 우리는 어떻게 하면 다 함께 뜻깊은 여행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 결과가 소형 버스를 이용한 시그나기 왕복 여행이었다. 9시에 불콰한 얼굴의 안내자와 함께 시그나기 여정이 시작된다. 환한 얼굴에 유창하게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안내자는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잠시도 쉬지 않는 끈기를 선물한다. 도중에 포도주와 차차 그리고 코냑을 시음하기도 했지만, 내게 인상적인 장소는 빵 굽는 곳이다. 노년을 바라보는 아낙이 바게트 크기의 빵을 굽고 그것을 500원 정도의 가격에 파는 것이다. 식료품 가격이 안정돼있는 나라는 정치가 엉망이어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법이다. 예나 지금이나 ‘목구멍이 포도청’이기 때문이다. 조지아는 카프카스산맥 남단에 자리하고 있는 산악 국가지만, 곳곳에 드넓은 평원이 자리한다. 그리하여 포도를 비롯한 각종 과일과 밀 생산이 제법 풍족하다. 목축과 그에 따른 육류 가공이 충실하여 국민의 식생활이 어렵지 않다. 서너 시간을 거쳐 마침내 시그나기에 도착한다. 시그나기는 ‘백만 송이 장미’의 주인공 니코 피로스마니 (1862-1918) 덕분에 우리에게 기억되는 도시다. 가난뱅이 화가 피로스마니는 프랑스에서 온 어여쁜 여배우에게 반해서 수많은 장미를 바쳤다는 일화가 아직도 전해진다. 러시아 여가수 알라 푸가초바(1949-)가 1982년에 ‘백만 송이 장미’를 불러 크게 유행한다. 나는 피로스마니를 이미 모스크바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것도 22년 전에, 그리고 얼마 전에 말이다. 모스크바 문화원의 박 원장 가족과 삼성 지사장으로 일하는 99학번 졸업생 병창과 어울려 피로스마니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것이다. 오래된 피로스마니 식당은 고색창연했고, 세계의 내로라하는 정치인들이 다녀간 곳으로 예전 명맥을 근근이 잇고 있었다. 그런 내력이 있는 도시여서 그런지 모르지만, 시그나기는 오다가다 만난 여행객들이 쉽게 결혼할 수 있는 도시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24시간 결혼이 가능한 교회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시그나기는 튀르키예 말로 ‘피난처’를 뜻하는 ‘시기나크(siginak)’에서 이름이 만들어졌다는데, 사랑의 도시란 수식어와 어긋난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시그나기 성벽을 따라 걷다 보니 크고 작은 노점이 성업한다. 조지아 국기가 들어간 초록색 모자와 자그마한 양탄자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상당히 저렴한 가격에 양탄자와 모자를 산다. 김 영사 가족과 김 이사가 나의 구매에 찬동을 표해 주었기로 힘이 솟는다. 얼마 뒤에 우리 일행은 1,7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보드베 수도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텔라비를 경유하는 귀로는 생각보다 멀고 지루했다. 하지만 평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고지대의 거대한 십자가 아래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김 이사 사진을 찍으면서 뭉클한 느낌이 찾아든다. 삶은 언제든 어디서든 어떻게든 살만한 것이라는 자명한 명제가 뇌리를 스친 까닭이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09-21

4차 산업혁명 시대, 전력망 적기 확충이 든든한 날개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전환의 가속화로 세계는 에너지 수요 급증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인공지능(AI) 학습, 데이터센터, 전기차 보급 확대 등은 전력 수요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고 있으며,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50년까지 전 세계 전력 수요가 2021년 대비 약 2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는 앞으로 국가 경제와 산업 경쟁력이 전력 인프라에 의해 좌우될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아직 충분히 대비되어 있지 않다. 전력망 확충은 국가 차원의 핵심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송전선로 건설은 평균적으로 13년 이상 소요되고 있다. 절차 지연, 주민 갈등, 환경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사업이 늦어지고, 이로 인해 미래 수요 대응에 차질이 빚어진다. 안정적인 전력공급이 흔들릴 경우, 첨단산업의 성장뿐 아니라 국민 생활 전반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근 국회를 통과한 ‘전력망 확충 특별법’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특별법은 송전설비 입지 절차를 합리적으로 단축할 것으로 기대한다. 무엇보다 주민·토지주, 지자체에 대한 지원 강화, 주민 재생에너지 사업 지원, 주민과 지자체의 목소리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의견수렴 등이 가능해진다. 이는 단순히 법제도 개선을 넘어, 전력망 확충의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전력망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국가 경쟁력의 ‘혈관’과 같다. 혈관이 막히면 인체가 건강할 수 없듯, 전력망 확충이 지연되면 국가 산업과 경제 성장도 멈춰 설 수밖에 없다. 이제는 전력망 적기 건설이 곧 국가경쟁력 강화와 국민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인식을 공유해야 한다. 한국전력공사는 앞으로 ‘전력망 확충 특별법’의 취지를 충실히 이행해 적기에 전력망을 건설하고 책임 있게 완수할 것이다. 안정적인 전력 인프라 위에서만 AI 시대의 데이터 경제도, 미래 모빌리티 산업도, 국민의 풍요로운 삶도 가능하다. 전력망 적기 확충이 곧 대한민국의 미래 경쟁력을 높이는 길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한국전력공사 경북본부장 박경수

2025-09-19

늘어나는 학교폭력

교육부가 지난 16일 발표한 2025년 1차 학교폭력 실태조사에서 학교에서 “학교폭력을 경험했다”고 대답한 학생의 비율이 2.5%로 나타났다. 전년보다 0.4% 포인트가 높아졌고, 교육부가 관련 조사를 시작한 2013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학교폭력에 대한 범사회적 관심과 예방 노력에도 학교폭력은 줄지 않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학교폭력의 유형도 과거 신체적 폭력이나 금품 갈취 등의 유형에서 언어폭력, 집단 따돌림, 사이버 폭력 등 정서·관계적 폭력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이는 학생들 간의 관계가 단절되고 학생의 심리적 상처를 남긴다는 점에 우려를 키우고 있다. 전문가들은 학교폭력의 원인에 대해 대체로 3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첫째 개인적 요인이다. 분노 조절의 문제나 공격적 성향 등 개인의 기질에 의한 문제다. 둘째는 가정환경으로, 부모의 무관심, 학대. 애정 결핍 등이 학교폭력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학교환경이다. 경쟁 중심의 교육, 집단 내 소외감, 교사의 방관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밖에도 학교폭력이 발생하는 이유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다. 교육은 학문과 지식의 습득 외도 인성을 바르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국가적으로는 국가와 인류 공영에 이바지하는 인재를 키우는 과정이다.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부모의 입장에서 학폭이 늘고 있다는데 걱정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학폭 예방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올해부터 대학입시에 학폭 전력을 의무 반영토록 했으나 되레 부작용으로 시끄러운 경우가 많다고 한다. 단순한 다툼에도 변호사를 내세우고 다투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가정과 사회, 학교의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이 필요한 때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9-18

법정에 내민 증거, 독이 되기도

법과 제도는 끝없이 변한다. 새로운 범죄가 생기고, 예전엔 아무 문제도 없었던 행동들이 범죄로 취급받는다. 반대로 범죄였던 행위가 더 이상 범죄가 아닌 게 되기도 한다. 5년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를 쫓아가거나 집 앞에 선물을 두는 행동은 범죄가 아니었다. 그로 인해 많은 피해자들이 생겼고 2021년 스토킹 범죄 처벌법이 제정됐다. 지금은 이런 스토킹 피해를 신고하면 바로 접근금지명령이 떨어지고 스토킹 범죄는 징역형으로 처벌된다. 길을 가다, 혹은 유튜브 방송을 하다 누군가가 센 척을 하고 싶어 “아 누구 오늘 하나 찌르고 싶네”라고 말해 버렸다고 하자. 공중협박죄가 올해 3월부터 시행되고 있으니 이제 이런 행동은 범죄다. 판례가 변하기도 한다. 제정 민법 이래 70년간 무효 혼인으로 취급되었던 8촌 이내의 결혼은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이제 무조건 무효는 아닌 것이 되었고, 간통죄, 혼인빙자간음죄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런 끝없는 변화의 물결 가운데 변호사는 더욱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법의 생성과 폐지, 변화에 가장 예민하게 귀를 귀울여야 한다. 변호사가 달라진 법률과 범죄를 몰라 소송에서 증거를 잘못 내면 의뢰인을 범죄자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송 상대방으로 만난 한 변호사는 우리 의뢰인의 잘못을 입증하겠답시고 의뢰인의 차량에 단 위치추적기에 찍힌 위치와 시간 정보를 준비서면에 빼곡히 적어 냈다. 한술 더 떠 그 장소에 잠복하며 찍은 의뢰인의 사진까지 증거로 냈다. 동의 없이 그 사람의 위치 정보를 수집하고 수집한 위치 정보를 이용해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는 건 위치정보보호법 위반과 스토킹 범죄에 해당하는 범죄행위다. 법을 모르는 당사자가 그런 증거를 가져왔더라도 법률전문가인 변호사가 내지 말았어야 했다. 제출하는 것 자체로 범죄를 자백하는 꼴이 되니 말이다. 상대방 변호사는 그것이 범죄라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결국 그 로펌을 선임한 사람은 전과자가 되었다. 외도를 입증하기 위해 은밀한 신체 부위가 촬영된 파일을 모자이크 처리 없이 증거로 내는 일도 여전히 많다. 몇 년 전 외도 현장을 급습해 촬영한 상간녀의 나체 동영상을 법원 전자소송 사이트에 증거로 업로드했던 소송 상대방이 성폭력처벌특례법에 따른 카메라 촬영 등 범죄로 징역 2년의 전과자가 되는 것도 보았다. 역시 소송대리인인 변호사가 새로 생긴 성범죄에 대한 지식 없이 증거를 제출해 발생한 일이었다. 얼마 전엔 우리 의뢰인과 친구가 식당에서 밥을 먹는 모습이 촬영된 식당 cctv 영상 캡처본이 증거로 나왔다. 식당 사장과의 친분으로 cctv 영상을 확보한 듯싶었다. 그런데 사진에 찍힌 손님의 모습은 개인정보다. 식당 운영자는 영업상 취득한 손님의 개인정보를 그 동의 없이 제공한 것이 되어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으로 처벌된다. 역시 상대방에 변호사가 선임된 사건이었기에 안타까웠다. 증거도 법리적 검토를 거쳐 조심히 내야 한다. 그렇기에 소송을 의뢰할 땐 소송을 담당하는 변호사 개인의 경력과 실력을 잘 따져봐야 한다. 인터넷에 도배되는 마케팅 펌들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화려한 광고만 보고 변호사 선택을 잘못해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생기니 안타깝다. /김세라 변호사

2025-09-18

PC방이란 무엇인가?

약속 시간에 이르게 도착한 김에 정말 오랜만에 PC방에 들어가 봤다. 족히 십 년은 아니, 이십 년은 넘었을 것 같은 세월 동안 너무도 많이 변해있었다. 백화점 식당 코너를 방불하는 메뉴 구성에 안마 의자인가 싶은 시트, 모니터도 40인치는 넘어 보였다. 그야말로 최첨단의 전자 놀이터구나 싶었다. 한때는 매일 살다시피 지내던 공간이었는데, PC방에서 ‘격세지감’을 느낄 줄이야. 문득 PC방의 추억(?)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알려진 대로 PC방이 한국사회에 안착한 것은 1997년을 전후한 시점이었다. 이때는 ‘IMF 사태’의 여파로 ‘명퇴’한 직장인들이 거리를 배회하던 때이며, 맞벌이 부부의 증가로 아이들이 집에 혼자 남겨진 시기이기도 했다. PC방은 퇴직자들에겐 소규모 투자로 창업이 가능한 아이템이었고, 아이들에겐 외로운 시간을 달랠 수 있는 위로의 공간이었다. 그러다 1998년에 이르면 PC방을 대중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스타크래프트’가 발매된다. 미국 블리자드사에서 개발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인 ‘스타’는 PC방을 새로운 시장의 블루오션으로 떠오르게 만든다. ‘스타’ 이후, 점차 게임산업이 활성화되면서 그에 맞는 고사양의 컴퓨터가 필요해졌고, 온라인시장이 확장되면서 초고속 통신망이 설치되어야 했다. PC방은 저렴한 값으로 온라인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장소로 떠올랐다. 아이들은 끼리끼리 모여 오락실이나 당구장 대신 PC방을 찾았고, 전국의 PC방 관련 사업자 수는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PC방은 온/오프라인의 접경지역이자 ‘사이(間)’ 공간이다. 교실의 패거리들은 온라인 세계에 함께 접속하기 위해 물리적인 장소에 공존해야 한다는 역설적인 감각을 형성하고 있었다. 온라인게임에서 자신의 아바타가 위기에 처하면, 육성으로 “헬프(HELP)!”를 외치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이는 오프라인에서의 인적 관계망이 온라인상의 네트워크로 이행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준 것이자, 현실적인 정체성을 게임 아바타에 쉽게 이입해버리게 하는 결과를 야기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 속도와 드넓은 통신망을 갖추었으면서도 바로 그러한 온라인서비스를 소비하는 관행에는 현실 세계의 규칙이 별다른 고민 없이 개입 돼버리곤 했던 것이다. 물론 현실과는 너무 다른 온라인 인격이 따로 형성되는 일도 빈번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이야말로 온/오프라인의 접경지대로서의 PC방이 지니는 한국적 특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즉 한편으로는 온라인서비스를 소비하는 집단적인 차원의 관행이 현실의 패거리 문화와 쉽게 접속되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점차 개인화 성향이 만연해진 사회적 분위기로 말미암아 온라인 세계를 ‘현실로부터 유폐되어 있는 공간’으로 상상하게 되는 인식의 전도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PC방은 온/오프라인의 분할에 대한 감각을 매개하는 동시에, 그에 대한 한국적 맥락을 보관하고 있는 ‘반(半/反) 장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C방에 대한 젠더화 된 경험에 천착해 보면 오늘날 남성 청년들의 보수화를 살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허민 문학연구자

2025-09-18

씨 없는 수박은 어디 갔나

우장춘 기념관에 다녀왔다. 담당 공무원 아가씨가 점심 먹다가 나왔는지 연신 입맛을 다시며 열심히 설명한다. 내가 몰랐던 사실을 많이 짚어 준다. 여태 내가 알고 있던 우장춘이란 분은 ‘씨 없는 수박’을 만들어낸 과학자 정도로 알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 이상 알 필요도 없고 세세하게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다. 먹고살기 바쁜 세상에 씨가 있고 없고는 내 생에 별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의 아버지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기 위해 경복궁에 난입한 일본 낭인들에게 문을 열어준 조선군 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이었다. 우리 때는 민비로 배웠는데 요즘은 명성황후라고 칭하는 모양이다. 미신에 미쳐서 나라 꼴을 망친 누구와 비슷하지만 그래도 당시에 국모라 더는 말을 하지 않겠다. 더욱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분이라 욕되게 할 이유는 없다만 너무 추켜세우는 것도 마뜩잖다. 대형 사고를 친 우범선은 조선에 있다가는 죽을 것 같아 일본으로 망명해서 일본 여자와 결혼해 자식들을 낳는다. 그의 장남이 우장춘이다. 우범선은 우장춘 여섯 살 때 고영근 의사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우리 민족은 뒤끝이 강한 민족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우장춘도 일본 여자와 결혼해 자식이 있다. 하지만 그는 속죄할 마음이 있었던지 돌연 어머니와 처자식을 모두 일본에 남겨둔 채로 한국에 온다. 그는 한국에서 무, 배추를 비롯해 씨 없는 수박을 보급한 공로로 죽기 전 병상에서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는다. “내가 이렇게 대접받으려고 한국에 왔는가.” 그가 통곡하면서 남긴 말이다. 일본인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정부는 그를 일본으로 보내지 않았다. 그는 울부짖으며 한국 정부의 처사를 원망했다고 한다. 왜 안 보냈는지 잘은 모르지만, 우리나라에선 그가 필요했으리라 짐작된다. 일본에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불효도 불효지만 처자식과 완전 생이별을 시키고 만다. 나라에서 개인에게 너무 가혹하지 않았나 싶다. 요즘 그 씨 없는 수박은 왜 안 보이는 것일까? 씨 없는 수박은 껍데기가 두껍고 공동(空洞)이 드문드문 생기며, 당도가 떨어져 상품 가치가 없어 상품화되지 못하고 만다. 씨 없는 수박을 개발했다고 떠벌릴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쓸데없이 부풀리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우장춘 박사가 한국 농업 발전에 수박 말고도 상당한 일조를 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민족 반역자의 아들이지만 나름대로 속죄의 길을 걸은 건 사실이다. 그래서 수박 말고 다른 부분으로 주목받았으면 어떨지 생각해 본다. 고려 충렬왕 때 나라를 배반하고 원나라의 앞잡이가 되어 삼별초를 멸망시켰던 홍다구(洪茶丘)가 가져온 과실이라 하여 고려말이나 조선 초의 선비사회에서는 수박 먹는 것을 천하게 여겼다. 그런 상품화 되지도 못한 ‘씨 없는 수박’을 개발했다고 난리 칠 것까지는 없지 않나 생각해 본다. 요즘 일본과의 관계가 나름 순조로운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완전 일본인이 된 우장춘의 여섯 자녀는 일본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사라지고 없는 씨 없는 수박보다 그들을 찾아보는 것이 도리인 듯한데 자못 궁금하다. 오지랖인가? /노병철 수필가

2025-09-18

울릉도 ‘관광객 감소=붕괴’라는 프레임을 경계한다

최근 일부 언론에서 울릉도를 두고 “여객선도 끊겼다”, “바가지 논란 요금”, “울릉도 이러다 다 죽는다”는 식의 자극적인 제목을 내세운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제목만 보면 울릉도는 관광객이 끊겨 생존을 위협받는 지역처럼 비친다. 그러나 현장의 사정을 차분히 들여다보면 사정은 다소 다르다. 실제로 여객선 운항 문제는 심각하다. 울진 후포~울릉도를 잇던 썬플라워크루즈가 경영난으로 이달부터 멈췄고, 970명을 태울 수 있는 엘도라도 익스프레스호도 지난 4월부터 휴항 상태다. 대신 8월 29일부터는 썬라이즈호가 투입됐다. 성수기마다 표가 없어 발길을 돌려야 했던 관광객 입장에서는 분명 불편이 크다. 울릉군의회와 울진군의회가 연석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관광객 감소도 수치상 사실이다. 2022년 46만1천여 명이던 울릉도 관광객은 2023년 40만8천여 명, 2024년에는 38만여 명으로 줄었다. 올해 1~8월 기준 26만9000여 명으로 지난해보다 6% 줄었다. 코로나19 이후 해외여행 수요가 급증한 것이 가장 큰 배경이지만, 불친절·바가지요금 논란이 겹치며 울릉도의 이미지가 악화된 것도 원인으로 꼽힌다. 삼겹살 고기질 논란, 예상의 두 배에 달한 택시비, 고가 렌터카 사례는 실제 소비자 불만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들을 ‘울릉도 다 죽는다’는 프레임으로 엮어내는 건 지나치다. 6% 감소는 수치상 줄어든 것이 맞지만, 정원 970명이 타는 엘도라도호가 빠진 상황을 고려하면 오히려 선박 수송 능력에 비해 관광객이 꾸준히 유지됐다. 운항이 정상화되면 다시 회복할 가능성도 크다. 더욱이 울릉도 경제의 모든 기반이 관광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울릉도는 전국에서 고용률 1위를 10년 넘게 유지해온 섬이다. 관광업이 중요한 축임은 분명하지만, 여객선 운항 차질과 일부 바가지 논란이 곧 지역 붕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언론의 보도 태도다. 주민의 불안과 관광객의 불편을 지적하는 것과, 사실을 과장해 “울릉도 붕괴”라는 이미지로 소비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지나친 위기론은 울릉도의 신뢰를 더욱 해치고, 되레 관광객 발길을 끊게 만드는 자충수가 될 수 있다. 울릉도는 지금 ‘죽어가는 섬’이 아니다. 여객선 문제는 제도 개선과 준공영제 도입 같은 구조적 해법을 모색해야 할 사안이고, 관광업계는 서비스 개선과 바가지 근절로 신뢰 회복에 힘써야 한다. 언론이 해야 할 일은 “다 죽는다”는 자극적 문구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한 합리적 대안을 비추는 것이다. 섬은 위기 속에서 더 강해진다. 울릉도가 지금 필요한 건 위기의 과장이 아니라, 냉정한 진단과 차분한 해법이다. kimdh@kbmaeil.com

2025-09-18

일본의 선택과 한국의 대안

트럼프 행정부가 관세라는 무기를 들고 세계 각국을 압박한다. 예외는 없다. 동맹국조차 ‘안보를 이유로’ 관세부과 대상에 올리며 협상을 강요한다. 일본은 협상에 응해 농산물과 자동차 분야에서 일정한 양보를 포함한 합의문에 서명했다. 표면적으로 일본은 ‘최악의 충돌’을 피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농축산물 시장을 열어주되 자동차 부문에서는 부분적 유예를 얻어냈다는 식이다. 일본 내부에서는 회의적인 시선도 있다. 막대한 관세 압박 앞에 사실상 ‘방어적 후퇴’를 선택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이번 합의로 일본경제에 돌아올 실질적 이익은 제한적인 반면, 미국이 얻는 정치, 경제적 성과는 확연하다. 일본언론과 경제계 일각에서 ‘미국의 요구를 선제적으로 수용했을 뿐’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한국은 어찌해야 할까. 한국 역시 미국의 관세공세에서 시달린다. 철강과 자동차는 물론, 반도체와 배터리 같은 전략산업까지 협상테이블에 올라올 가능성이 짙다. 일본처럼 조급하게 협상하는 것은 단기적 충돌을 피하는 방편일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한국 산업의 자율성과 교섭력을 훼손할 위험이 크다. 한국이 지혜롭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전략적 선택이 필요하다. 첫째, 다자무역체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WTO나 FTA 협정을 근거로 미국의 조치가 ‘차별적이며 위법적’임을 분명히 하면서 국제공조를 강화해야 한다. 일본이 미국과 양자 협상에 매몰되어 상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을 감수한 것과 달리, 한국은 다자적 협상의 틀을 조성하여 협상력을 높여야 한다. 둘째, 산업다변화와 내수강화다. 미국시장 의존도를 낮추고 유럽, 동남아, 중동 등 대체시장을 적극 공략하여 대미협상에서 ‘대체 가능성’을 확보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다소 불편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우리 산업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길이다. 셋째, 최근 발생한 미국의 이민 단속 실수를 전략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조지아주 배터리공장에서 일하던 한국인 기술자들이 이민당국의 과잉 단속으로 불법 구금되었던 사태가 있었다. 동맹국 기업과 인력의 정당한 활동을 침해한 명백한 행정 실패다. 외교적 항의를 너머 무역과 관세 협상에서 레버리지로 삼아야 한다. ‘동맹과 투자 파트너를 존중하지 않는 한, 협력의 지속은 어렵고 상생의 의미는 없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하여 상대의 압박을 견제할 수 있다. 한국의 선택은 ‘단기적 양보 또는 장기적 자율성을 확보하는’ 기로에 섰다. 일본은 양보를 택했지만 이는 한국의 해법이 아니다. 국제공조와 전략적 옵션을 활용해 냉정하고 차분하게 대응해야 한다. 미국의 관세압박은 피할 수 없겠지만 대응방식에 따라 한국 경제의 미래 지형은 크게 달라진다. 급박해 보이는 상황을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오늘의 위기는 내일의 기회로 바뀔 가능성마저 제공할 터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에서 예외나 면제는 없다’면서 무차별적 재촉에 나서지만, 이는 미국의 단견과 조급함을 드러낼 뿐이다. 대한민국은 정돈된 전략적 선택을 통해 국익을 착실하게 확보하는 길로 들어서야 한다. 정권교체를 앞두고 경솔하게 결정하여 체면을 크게 깎인 일본의 선택과는 달라야 한다. 국민의 일상을 지키고 나라의 이익을 지켜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09-17

이젠 안녕, 로버트 레드포드

지금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된 1970년대 영화팬들에겐 로버트 레드포드란 이름이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가슴에 새겨져 있다. 찰랑이는 금빛 머리칼에 훤칠한 키, 매력적인 눈웃음의 미남자로 또래 소녀들을 매혹한 그는 빼어난 연기력까지 갖춘 걸출한 배우였다. 한국에서도 개봉돼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내일을 향해 쏴라’와 ‘스팅’에선 또 다른 미남배우 폴 뉴먼(2008년 사망)과 호흡을 맞춰 영화가 줄 수 있는 즐거움의 최대치를 관객들에게 선물한 로버트 레드포드. 그가 죽었다. 16일 미국 캘리포니아 자신의 집에서 지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뉴욕타임스’ 등의 외신을 통해 알려졌고, 연이어 한국 언론도 앞다퉈 이를 보도하고 있다. MZ세대에겐 낯선 이름이겠지만 전성기 때 로버트 레드포드의 인기는 현재 할리우드 최고의 인기배우로 불리는 톰 크루즈와 브래드 피트를 훌쩍 넘어섰다. 배우만이 아니라 감독과 제작자로서도 높은 성취를 이뤄낸 로버트 레드포드는 자신의 진보적 정치 성향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반전·평화운동과 환경운동에도 나섰고, 거기서 이뤄낸 성과로 세계가 권위를 인정하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비교적 순탄하고 행복한 삶이었으나, 지울 수 없는 슬픈 그림자도 있었다. 5년 전 아들인 제임스 레드포드가 병을 앓다가 먼저 사망한 것. ‘죽은 자식은 땅이 아닌 부모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미국이라고 다를까? 만약 ‘저세상’이란 게 있다면 젊은 날처럼 백만 달러짜리 환한 웃음 지으며 그리워했던 아들을 다시 만나 안아보기를. 전 세계 영화팬들과 함께 그의 명복을 빈다. 이젠 안녕, 로버트 레드포드.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9-17

움직이기 힘든 허리통증

허리 통증은 많은 사람들이 일생 동안 한 번쯤은 겪게 되는 흔한 증상이다. 단순히 근육이 뭉쳐서 생기는 일시적 통증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경막성 통증이나 추간판 탈출증 즉 흔히 말하는 디스크 쪽 질환이 근본 원인인 경우가 많다. 경막은 척수를 감싸고 있는 얇고 단단한 막으로 이곳이 자극을 받으면 허리뿐만 아니라 엉덩이와 다리까지 뻗치는 방사통을 유발하기도 한다. 디스크 또한 신경 뿌리를 압박하거나 자극하면서 허리 통증의 주요 원인이 된다. 허리 통증은 단순히 허리 근육만의 문제가 아니라 신경과 구조적인 요소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에 정확한 진단과 치료가 중요하다. 갑작스럽게 통증이 발생하면서 허리를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는 근육의 문제보단 허리 척추 쪽 즉 경막성 통증이 원인이다. 이곳이 지속적으로 자극을 받으면 미세 손상이 발생하고 염증이 발생하며 신생혈관이 자란다. 허리가 아팠다 안 아팠다 반복하다가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심한 통증이 발생한다. 허리의 움직임이 전혀 되지 않고 골반이 빠진 것처럼 몸이 비스듬하게 틀어진다. 이런 경우는 단순한 치료로는 빠른 치료 효과를 보기 힘들다. 처음부터 추나요법으로 틀어진 허리 골반 꼬리뼈를 바로 잡고 초음파 가이딩 약침으로 직접 경막에 약침을 뿌려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천장관절의 불균형을 추나요법을 통해 교정하면 허리 주변의 근육 긴장과 통증이 빨리 개선되고 허리가 빨리 제 기능을 찾는다. 초음파 가이딩 약침 치료는 허리 속을 직접 보면서 허리에서 나오는 신경이나 경막 혹은 경막 안쪽까지 약침을 뿌려줄 수 있기 때문에 통증이 심하거나 다리가 저린 디스크엔 초음파 약침 치료를 하는 것이 좋다. 또 장요근이나 요방형근과 같은 깊은 근육 그리고 천장관절 주위까지 정확하게 약침을 주입할 수 있기 때문에 허리가 틀어진 경우에도 빠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약침을 그 부위에 직접 놓으면 염증과 긴장이 완화되고 혈액순환이 개선되면서 통증 감소와 회복 속도가 뚜렷하게 좋아진다. 순간적인 효과는 스테로이드에 비해 떨어지나 지속 효과는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낫다. 한약 치료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허리를 강화하고 기혈 순환을 원활히 하여 허리 부위의 혈액 공급을 돕는 한약을 함께 복용하면 추나와 약침 치료만으로 닿지 않는 부위까지 혈액순환이 되고 염증이 가라 앉아 더 완벽하게 허리를 튼튼하게 할 수 있다. 허리 통증은 단순히 아픈 부위만의 문제가 아니라 신체 전반의 균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추나, 약침, 한약을 종합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허리 통증 치료의 핵심은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맞는 치료를 꾸준히 이어가는 것이다. 경막성 통증과 디스크로 인한 통증은 단순한 휴식이나 파스 진통제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어렵다. 그러나 추나로 구조를 바로잡고 초음파 가이딩 약침으로 신경과 근육을 정확히 치료하며 허리를 강화하는 한약을 병행하면 빠르게 허리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허리가 아플 때는 절대 운동을 하지 말고 충분히 쉬는 것이 중요하며 치료와 회복 후에 허리 근육을 강화하는 운동을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 재발 방지의 지름길이다.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5-09-17

이명(耳鳴)

처음엔 늦여름의 매미가 요란스럽게 우는 줄 알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길래 밤중에 베란다로 나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귀 기울여 보았다. 우리 집 가까이에는 매미가 앉아 울 만한 큰 나무가 없으니 저 건넛산에서 우는 건가? 한밤중에 느닷없이 이상한 짓을 하는 날 보고 남편이 왜 그러냐고 묻는다. 매미소리가 크지 않냐고 되물으니 자기에겐 안 들린다고 했다. 자기에겐 당연히 안 들리겠지라며 웃었다. 귀가 어두운 남편이다. 그런데 그 소리가 언제 어디서나 들리는 걸 알아차리고, 아 이것이 이명이라는 거구나 생각해 낸 건, 그러고도 한참 후였다. 참으로 기이하다. 바깥 어디에서도 나지 않는 소리를, 그래서 남들은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나 혼자만 듣는다고? 이명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외부로부터의 청각적인 자극이 없는 상황에서 귀에서 들리는 소음에 대한 ‘주관적 느낌’이란다. 느낌이 아니고 진짜로 들리는데? 조용히 나 혼자 있으면 더 크게 들린다. 치르르르 수백 마리 매미떼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솨아아아 키 높은 대나무들이 꽉 차 있는 대숲에 큰바람이 지나면서 내는 댓잎소리 같기도 하다. 우렁우렁우렁 깊은 골짜기 좁고 높은 계곡에서 떨어지는 폭포소리 같기도 하고, 촤르르르 고운 모래 아닌, 오랜 파도에 풍화된 작고 동글돌글한 몽돌이 깔린 바닷가에 파도가 밀려들어왔다 빠지며 나는 파도소리로도 들린다. 처럭처럭 고요한 밤 창밖에서 들리는 제법 굵고 먼 빗줄기 소리 같기도 하다. 이 모두 자연에서 나는 소리로 들리니 어쩌면 집중력에도 좋고 숙면에도 좋다는 백색소음일 수도 있나 생각해 봤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바다나 산이나 시골에 가서 찾아 듣는 자연의 소리가 아니라, 깨어있는 동안엔 항상 귓속에 쟁쟁하니 소음도 이런 소음이 없다. 시끄러워 괴롭긴 해도 머리가 아프거나 하진 않아 그나마 다행이다. 바깥에 나가 누구랑 만나 얘기하고 있거나, 운전 중 라디오 소리에 귀 기울이면 이명을 잊기도 한다. 집에선 최근 잘 켜지도 않았던 TV를 크게 틀어 놓게 된다. 올여름, 손주 둘 돌보며 마음은 즐거웠으되 몸은 지쳤던지 어지럼증이 도져서 병원을 찾았다. 누웠다 일어나면 눈앞이 팽하고 돌고 천장이 춤을 췄다. 20여 년 전 급성 이석증으로 큰 고생을 한 적이 있어, 당연히 그 때문인 줄 알았다. 평형검사, 뇌파검사 결과, 전정기관의 이상이 아니었다. 극도의 피로와 신체적 스트레스 때문에도 어지럼증이 생긴다니 약 먹고 좀 쉬면 나을 줄 알았는데 이명이 덮쳐올 줄이야···. 인터넷을 뒤져 얻은 정보들은 비관적이라 더 걱정스럽다. 이명은 치료한다는 개념보다는 관리한다는 개념이 더 맞는 질병이란다. 이겨내고 극복하려고 하기보다는 이명으로 인한 생활의 불편과 지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명에 덜 집중하고 이명을 무시하는 것이 궁극의 관리란다. 믿기지 않지만 나을 수 없다는 얘기 아닌가? 평생 껴안고 가야 한다면 백색소음이라며 달래며 익숙해지는 방법을 찾아야 하나. 그러나 현재는 괴롭고도 괴로운 소음이다. 참 기이한 병도 다 있다 싶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9-17

포항통신

몸에 좋단다 검정콩 흑미 검은 깨 다 빠사가지고 몇 봉지 만들었다 머리 빠지는 것에도 효과가 있다더라 아침마다 문안인사하듯 이 미숫가루 챙겨 묵아라 해줄 게 이밖에 없다 동네 늙은이들 심심풀이 무농약으로 가꾼 것 눈여겨 보고 챙겼으니 두루두루 단디 챙겨 묵으먼 몸에 쪼매 도움이 안 되것나 술 적게 묵고 돈 벌 요량을 해라 세상이 만만찮아도 성실하면 누가 이기겠노 참, 서울 멀다, 꿈길에도 못 갔다 그저 연속극 나부랭이나 보고 곱씹으며 찬밥 한 숟갈 뜬다 그렇게 하염없이 세월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저렇게 살아왔지만 사람의 길이 중요함은 이미 지켜보고 있다 하여 문밖이 저승이라 함부로 아무 말도 못 한다 타향살이 풍진에 부대낄 니 생각 아프고 아프다 그래도 사는 게 행복타 서럽고 고맙다. … 뜬금없이 보내온 꾸러미 속의 편지에 잠을 못 이루었다. 서울의 늦가을 달빛이 찼다. 미숫가루는 못 먹고 막걸리 잔에 깊이 손을 담그는 밤이었다. 친구인 고두현의 시 ‘늦게 온 소포’와 뉘앙스가 비슷해서 머쓱하지만, 내 앞의 현실이었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9-17

나의 소소한 여행

“사람은 자기 삶의 일부로 살아가지 않은 것들에 대해 책임이 있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이 문장을 읽었을 때였다. 나는 마음 한편이 저릿했다. 살아오면서 미루어 두었던 계획, 말로 꺼내기에는 조심스러워 지나쳐 버렸던 감정, 가지 못했던 여행이 생각났다. 어느새 그 모든 것이 가슴 밑바닥에 침잠되어 나의 침묵으로 머물러 있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될까?”라는 문장도 계속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러면서 앞만 보고 살아온 세월이 머릿속을 흘러갔다. 갑자기 내 안에 억눌려 있거나 표현되지 못한 수많은 가능성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그 중 하나가 주인공 그레고리우스처럼 무작정 떠나는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오십을 넘긴 나이에 40년 지기 친구 셋과 우리만의 첫 해외여행을 떠났다. 포르투갈 여행에서 리스본으로 향하기 전,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인 까보다로까에 도착했다. 뒤로 물러설 곳 없는 절벽 위에 서자, 대서양의 바람이 심장을 두드렸다. 땅끝마을을 상징하는 십자가 돌탑에는 포르투갈의 서사시인 카몽이스가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라 칭송했던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십자가 돌탑을 배경으로 친구 셋이 사진을 찍었다. 나는 뒤로 물러나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우정이라는 단어가 실체를 얻는다면 아마 저 장면이리라. 바람에 흐트러진 서로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고, 눈빛만으로 “괜찮아”를 주고받는 장면에서 든든한 신뢰가 엿보였다. 친구들과 나의 환한 웃음소리가 바람에 버무려져 바다를 향해 내달렸다. 우정의 흔적을 남겨둔 채 우리는 리스본으로 출발했다. 벨렝탑을 보았다. 테주강 위에 세워진 탑인데 지금은 강물의 흐름 때문에 강물 위로 노출되었다고 한다. 외국 선박의 출입을 감시하고 통관 절차를 밟던 곳으로, 대항해 시대에는 선원들이 왕을 알현하던 장소였다. 나는 친구들과 그 앞에서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시를 지켜보는 돌탑처럼, 우리도 긴 시간을 서로의 옆에 서서 침묵을 나눈 적이 많았다. 무언가를 말하지 않아도 편한 친구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 여행 내내 증명하고 있었다. 어쩌면 매년 나이를 더끔더끔 먹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곁에 오랫동안 고요하게 머물 줄 아는 능력이 보태진다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발견자의 기념비 앞에 섰다. 대서양을 향해 돛을 펼친 모양의 조형물이었다. 왕자, 항해사, 지도 제작자, 시인 등 그들의 시선은 내가 서 있는 반대편을 향해 있었지만, 나는 그들이 한때 품었을 꿈에 대해 생각했다. 무엇이 저들을 바다로 향하게 만들었을까. 사람은 늘 무엇인가를 시작하려다 말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그들은 대항해를 시작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 두려움 없는 확신이었을까, 아니면 두려움을 품고도 떠나야 했던 용기였을까. 나는 기념비를 쓰다듬었다. 문득, 쏟아지는 햇살 아래에서 무언가 허락받은 기분이 들었다. 내 안에 여전히 망설이기만 했던 꿈을 실천해도 좋을 것 같았다. 내가 사고의 틀을 열어젖힌다면 꿈을 이룰 용기가 펼쳐질 것이다. 두려움을 버리고 마음속 울림에 귀 기울인다면 언젠가는 내 삶이 충만해질 수 있으리라. 나는 내가 이미 포르투갈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리스본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앞으로 현재보다 더 용기를 낼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내 가슴속에서 변화의 기운이 꿈틀댔다. 알가르브 지방의 최남단 도시인 알부페이라로 이동했다. 해안으로 내려가 보트를 타고 석회암 바위절벽의 정취를 만끽하며 베나길 동굴로 향했다. 동굴의 뚫린 천장으로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출렁이는 물결 위에서 생각했다. 살아간다는 것은 내 영혼이 기댈 수 있는 문장 하나를 찾아 가슴에 품는 일이라고 인식했다. 포르투갈에서의 따뜻한 순간도 두고두고 문장으로 반추되겠지. 나와 친구들과의 소소(炤炤)한 여행도 문장으로 끊임없이 남겨질 것이다. *소소(炤炤): 밝고 환하다 /정미영 수필가

2025-09-17

근대의 고독

가마쿠라 대불과 관월당 터를 뒤로 하고 고토쿠인을 나선 저는 하세역으로 향했습니다. 하세역에서 에노덴을 타고 가마쿠라 해안에 가기 위해서였는데요. 에노덴 노선은 후지사와역부터 가마쿠라역까지를 연결하는 총 길이 10km의 짧은 노선입니다. 이 노선은 해안선과 주택가를 따라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과 70미터가 조금 넘는 4량의 작고 귀여운 모습의 열차로도 유명합니다. 에노덴은 가마쿠라의 수많은 관광지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수단이면서, 그 자체가 훌륭한 볼거리이기도 합니다. 가마쿠라 해안은 나쓰메 소세키(1867-1916)의 ‘마음’에서 매우 중요한 공간으로 등장하는데요. 나쓰메 소세키는 설명이 필요 없는 일본의 국민작가입니다. 일본 문부성 장학생으로 런던에서 유학했으며, 도쿄제대 전임교수였던 나쓰메 소세키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1905)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저는 나쓰메 소세키의 식지 않는 인기를 직접 확인한 일도 있는데요. 2025년 2월 13일 작가가 묻혀 있는 조시가야 공원묘지를 찾았을 때, 그의 무덤 앞에는 절절한 동경의 마음을 담은 장문의 편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150년 전에 태어난 작가를 향한 팬심은 무척이나 드물고 귀하여 놀랍기까지 했습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신경쇠약과 위궤양에 시달리면서도 ‘우미인초’」, ‘산시로’, ‘그 후’, ‘행인」’ ‘문’ 등의 수많은 명작을 남겼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마음’(1914)입니다. 이 작품은 1946년부터 지금까지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으며, 1000만부 가까이 팔렸다고 합니다. 와세다대 근처에 있는 ‘나쓰메 소세키 산방기념관’에서는 2025년 4월 24일부터 7월 13일까지 ‘외국어가 된 소세키 작품’ 전시가 열렸는데요. 이 전시회에 따르면,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중에서 가장 많이 번역된 작품 역시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토록 유명한 ‘마음’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이 다름 아닌 가마쿠라 해안입니다. 대학생인 ‘나’는 가마쿠라 해안에서 한 초로의 남성을 만나고, 그의 인품과 교양에 매료되어 그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따르게 됩니다. 선생은 세상과 절연한 채, 아내와 단둘이서만 살아가는데요. 아버지를 간병하기 위해 귀향한 ‘나’에게 선생으로부터 두툼한 편지가 도착합니다. 놀랍게도 그 편지는 ‘선생의 유서(遺書)’인데요, 거기에는 젊은 날의 선생과 친구 K, 나중에 선생의 아내가 된 하숙집 딸을 둘러싼 비극의 드라마가 펼쳐져 있습니다. 저는 선생의 유서에 담긴 이야기가 근대라는 문명이 낳은 질병, 즉 개인주의의 어두운 심연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가족, 부족, 종교단체 같은 집단 속에서만 정체성을 가졌던 사람들은, 근대에 이르러 독립된 존재로 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인간은 자율적 사고와 감정, 목적, 욕망을 가진 개인으로 재탄생한 것인데요. 문제는 이러한 개인에의 강조가 자신의 욕망만을 절대시하는 이기주의로 변질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마음’에서 고립된 채 살아가는 선생의 외로운 삶은 근대라는 문명의 고질병으로 규정됩니다. 이는 선생이 ‘나’에게 “자유, 독립 그리고 나 자신으로 가득 찬 현대에 태어난 우리는 그 대가로 모두가 이 외로움을 맛봐야겠지”라고 말하는 것에서도 드러나는군요. 선생과 K는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입니다. ‘나’는 줄곧 K를 동경(질투)하며 살아왔는데요. K는 타고난 두뇌도 뛰어나고, 중고등학교 시절 성적도 늘 우수했으며, 모든 방면에서 ‘나’를 앞섰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K는 금욕적 이상주의자로서, 종교나 철학 등의 관념적 세계를 통하여 “자신의 의지력을 키워 강한 자가 되는 것이 최종 목적”인 구도자와도 같은 인물입니다. 그런 K의 일거수일투족은 늘 ’정진(精進)‘이라는 단어에 합당한 듯 보였습니다, 이런 K가 경제적으로 궁핍해지자, ’나‘는 K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모녀 단둘이 사는 자신의 하숙집 방으로 K를 불러들입니다. 결국 K는 하숙집 딸을 좋아하게 되고, 그 사실을 ’나‘에게 고백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자 ’나‘는 그동안 받은 열등감을 되갚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정신적으로 발전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자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거나 “자넨 자네가 평소에 주장하던 그 ’길‘을 어찌할 셈인가?”라며 K를 궁지로 내몹니다. 더욱 잔인한 것은, K의 고백을 들은 이후 평소 자신을 신뢰하던 하숙집 사모님에게 “사모님,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라고 말하여, 결혼승낙을 받아내는 것입니다. 결국 K는 ’나‘와 하숙집 딸의 결혼 소식을 들은 이후,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선생은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욕망)을 위해 친구 K의 성(城)을 무너뜨려 결국 죽음에까지 내몰고 만 겁니다. 저는 ‘마음’을 읽을 때마다, 근대의 개인주의가 도달할 수 있는 잔인함의 막장에 몸서리가 처지고는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마음’을 다시 읽으며, 이전에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희망’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이기주의의 “천벌”을 감내하며 고립과 은둔의 삶을 살던 선생이 ‘나’를 향해 자신을 온전히 개방하는 대목에서입니다. 선생은 유서에서 “나는 지금 내 스스로 나의 심장을 도려내어 그 피를 자네의 얼굴에 쏟아부으려 하네. 나의 심장이 고통을 멈추고 그 대신 자네 가슴에 새로운 혼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네.”라고 격정적으로 토로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개방적 자세야말로 친구 K를 향한 진정한 속죄이자, 선생이 이 세상에 남길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이 아내에게도 꽁꽁 숨겨둔 비밀을 털어놓게 되는 ’나‘를 만난 곳이 바로 여름의 가마쿠라 바다입니다. 이곳에서 ‘나’는 선생에게 매혹되고 선생 역시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타인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게 됩니다.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가마쿠라의 바다는 분명 그런 힘을 가진 듯이 보였습니다. 제가 가마쿠라 해안을 찾은 이 날은, 멀리 구름 위로 후지산이 보이기도 했는데요.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이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이유는, 근대의 어둠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가마쿠라 바다의 생명력에서 비롯된 ‘희망’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경재(숭실대 교수)

2025-09-16

유튜브 권력

1998년 미국에서 상영된 왝더독은 정치인의 권모술수를 주제로 다룬 영화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 현직 대통령이 백악관에 견학 온 걸스카우트 학생을 성추행한 사건이 벌어진다. 초비상 상태에 빠진 백악관 참모들이 모의, 궁리 끝에 국민에게는 생소한 알바니아를 적대국으로 몰아 전쟁 위기로 끌고가는 내용이다. 왝더독(Wag the Dog)은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는 뜻이다. 정치에서는 권력자가 국민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연막을 치는 것을 두고 이렇게 부른다. 왝더독을 우리 말로 번역한다면 주객전도(主客顚倒)가 적당하다. “주인과 손님이 바뀐다”는 뜻인데, 본말이 전도됐을 때 쓰는 표현이다. 공부해야 할 학생이 놀이에만 정신을 팔았다면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물건 값보다 배송비가 더 비싸면 이것도 주객이 전도된 경우다. 원래 왝더독은 주식시장에서 선물이 현물시장보다 커졌을 때 이르는 용어다. 선물은 현물시장을 보완하기 위해 개설한 것인데 주객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주객전도가 자주 일어난다면 잘못된 현상이다. 주인이 주인답고 고객은 고객다워야 한다. 세상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위해는 각자가 제자리에서 역할을 다하는 것이 옳다. 민주당의 한 의원이 “유튜브 권력이 정치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며 유튜브 방송을 비판해 정치권 안팎에서 파장을 일으켰다. 유튜브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여야를 막론하고 유튜브의 눈치 보는 잘못된 정치풍토를 비판한 발언으로 일각에선 신선하다는 평가도 받았다. 정당의 정치가 당당하지 못하고 강성 층에 밀리고 유튜브 등의 눈치만 본다면 그거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것 아닐까. /우정구(논설위원)

2025-0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