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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담백하고 간결하게

해가 뜨기 전 출발했다. 고요한 숲에 우리 발소리만 가득했으면 하는 바람이 일찍 잠을 깨웠다. 아직 잠이 덜 깬 7번 국도를 달리니 바다에 아침노을이 붉다. 동해에 잠겼던 해가 몸을 막 건져 올려서인지 바다와 주위의 구름까지 물들여 놓았다.가을 여행길에 어울리는 곡을 틀었다. 어제 음악 사이트에서 내려받은 노래다. ‘길을 걸었지 누군가 옆에 있다고/우~돌아선 그 사람 우~생각나네~’ 정경호의 ‘회상’이 차 안에 울려 퍼진다. 떠나버린 여자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을 읊조리듯 부른다. 진짜 노래를 잘 하는 가수가 부르는 열창이 아닌, 배우가 기교 없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담백한 수필 같아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한 번 더 들었다.예배시간에 이런 감동을 느낀 적이 있다. 순서에 맞춰 강대상에 올라 마이크 앞에 선 집사님, “예수님 우리 집에 멸치젓갈을 담갔는데 지금 딱 맛이 들었으니 한 번 오셔서 따뜻한 밥 한 숟갈에 얹어 맛보아 주세요. 그리고 베란다에 들여놓은 소국이 한창이니 향기도 함께 맡아 주세요.” 시를 써와서 낭독하듯 들려주는 기도가 생전 처음 듣는 기도라 가만히 고개를 들어 어떤 분이신가 하고 살폈다. 보통 장로님들은 나라 걱정으로 시작해서 태풍이 쓸어간 곳의 피해주민 안부를 챙기고, 목사님 말씀에 은혜가 넘쳐나길 염원하며 긴 기도의 끝을 맺는다. 그 많은 기도 중에 몇 해 전에 들은 그날의 기도가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는 건 아마도 그 집사님의 기도가 예수님을 친구라 여기고 드리는 담백한 초대장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글도 담백하고 간결한 문체가 좋다. 한자 말을 주저리주저리 엮어 펼쳐 놓거나 미사여구를 주렁주렁 걸친 어려운 글보다 이야기하듯 쉽게 쓴 글이 좋다. 오늘 찾아가는 숲도 그런 곳이다.사진 찍는 지인을 통해 알게 된 곳, 가봐야지 하다 몇 년이 쓰윽 지나버렸다. 이번에는 꼭 가려고 마음을 먹으니 매일 비가 쏟아져 길동무인 남편의 발목을 잡았다. 일기예보를 수시로 찾아보다가 내일이 태풍의 눈인지 하루 맑다고 나왔다. 코로나 걱정도 되어서 사람들 뜸한 새벽에 가서 보고 오자고 부추겼다.7번 국도에서 영덕 상주 간 고속도로에 올랐다. 며칠 내린 비가 하늘로 오르며 구름을 만들었다. 우리가 갈 영양 수비면 방향의 산 중턱에 구름이 걸렸다. 구름 아래 동네 논에 벼가 벌써 알을 채웠고, 고추 고랑마다 반짝 맑은 날이니 식구들 모두 나와 고추 따느라 바빴다.영양 수비면 죽파리 주차장에 다달았다. 대여섯 대 정도 댈 수 있는 주차장이라는 이야기에 우리 자리가 없으면 어쩌나 싶어 더 일찍 왔더니 다행히 세 번째였다. 차 한 대 정도 올라갈 수 있는 비포장 길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었다. 3.2 킬로미터를 걸어가야 숲이 나타난다니 천천히 걷기로 했다. 아무도 없는 길에 오롯이 남편과 나뿐이었다.며칠 내린 비가 골짜기에 쏟아져 내렸다. 그 소리가 어찌나 시원하게 큰지 귀가 먹먹하다. 한시가 바쁜 매미의 한껏 몸을 떠는소리도 물소리를 뚫고 나왔다. 또 걷자니 구부러진 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코끝에 느껴졌다. 칡꽃 향기다. 세찬 비에 보랏빛 꽃잎을 한 자락 길에 뿌려놓았다. 그 옆에 개머루가 터키옥처럼 파란빛으로 익어간다. 그렇게 물멍을 한참 매미멍을 또 한참, 한 시간쯤 걸으니 어느 순간 어둡던 숲이 환했다. 여기서부터는 자작나무의 세계에요 한다.산 하나가 자작나무의 세계다. 드레스코드가 하얀색인 파티에 초대받았다. 모두가 흰색인 틈에 남편과 나만 색깔 옷이라 확 튀었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니 자작나무가 자신의 순백의 삶을 들려준다. 자작자작, 숲의 목소리는 맑게 끓인 닭곰탕의 맛이다. 막냇동생 백일에 이웃에 돌린 백설기 떡이다. 담백하고 간결하게 하늘로 뻗어가는 문체다. 가을의 문턱에서 듣기 좋은 맞춤 곡이다. 진정성이 느껴지는 기도이다.산을 내려오며 뺨을 만지니 촉촉하다. 가을이 담뿍 묻어 있다. /김순희(수필가)

2021-08-29

이미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윤영대수필가 제16회 도쿄패럴림픽이 열렸다. 22개 종목 539경기에 162개국 4천403명이 참가했고 우리나라는 14개 종목에 159명의 선수단이 참가하였다.무관중으로 조용한 가운데 열린 개막식의 주제는 ‘우리에겐 날개가 있다’이고 스타디움은 ‘파라 공항’으로 꾸며졌다. 패럴림픽 엠블럼 ‘아지토스’가 바람에 떠다니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한 개막공연을 보면서 진정한 장애는 없다는 생각과 함께 3-3-3박수의 의미도 알았다. 마음-육체-영혼에 용기를 주어 장애인들이 가진 질병에 대한 회복력과 역경을 극복하는 강인함, 그리고 평정심을 상징한다는 것을….바닥에 표시된 ‘WeThe15’의 의미는 전 세계 인구의 15%가 장애인인 현실에서 ‘장애 차별 종식선언 캠페인’이란다. 입장식에는 휠체어 탄 선수들이 앞장서고 목발 짚은 선수들도 씩씩하게 걸어들어왔으며 얼굴에는 밝은 표정이 가득했다. 우리 선수들도 훈색의 생활한복 차림으로 82번째 들어왔다.이어진 개막식 공연은 ‘한쪽 날개 꼬마 비행기’ 이야기다. 주인공 꼬마 비행기 소녀는 13살, 선천적 신체장애를 갖고 태어나서 휠체어를 타고 있지만 ‘저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를 보여주고 싶어요’라며 오디션에 참여했다고 한다. 또 다른 여섯 대의 비행기도 모두 장애가 있다. 한쪽 바퀴 없는 비행기는 축구선수였는데 사고로 중도절단 장애이고, 작은 날개 비행기는 선천적 소인증(小人症) 장애이며, 긴 날개 비행기는 지적장애 연극배우이고, 수다쟁이 비행기는 청각 언어장애이며 프로펠러 비행기는 뇌성마비 장애인데도 그 유연한 몸놀림이 놀랍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마음의 눈 비행기는 시각장애를 가진 시인 작가이며 ‘장애인이 살기 좋은 사회는 비장애인에게는 더 살기 좋은 사회’라고 말한다.개회선언 후 패럴림픽기 입장 때, 파라 앙상블 연주에서 왼손 장애인이 피아노 치듯 하는 기타 연주가 신기하고,오른팔 의수로 능숙하게 바이올린을 켜는 간호사와 ‘여우춤’을 추는 자폐증 무용수, 의족 모델, 시각장애 연주자, 하지장애 무용수 등 15명의 친구들이 보내준 응원의 힘으로 마침내 꼬마 비행기는 하늘을 날아오른다.탁구경기에서 두 팔 없는 선수가 나오기에 ‘어떻게 라켓을 잡지?’하였는데 입으로 라켓을 물고 발가락으로 공을 잡아 올려 서브를 넣었다. 스매싱도 힘찼다. 우리 선수도 하지 장애가 있었지만 그에 비하면 비장애인처럼 보였다.우리 선수가 경기를 치르는 14개 종목 중에 배드민턴과 태권도는 처음 도입되었고 육상, 테니스, 배드민턴, 탁구, 농구는 휠체어를 타고 하는 종목이 있으며 유도는 시각장애인들의 경기다. 평소 자신을 이겨낸 영웅들이 좋은 성적으로 웃음 가득한 꽃길을 걸어오길 기대하며 우리 모두 응원을 보내자.“금4 은9 동21개의 20위를 꿈꾸겠지만 이기든 패하든 마음껏 즐기다 오세요. 패럴림픽 참가로 당신들은 이미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입니다.”

2021-08-29

취향과 공중

조현태​​​​​​​수필가 지금 읽고 있는 소설 제목이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이다. 애완동물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요즘은 ‘애완’대신 ‘반려’로 표현이 바뀌고 있다. 반려동물 하면 개나 고양이를 먼저 떠올리고는 하는데 워낙 반려동물이 다양해지다 보니 별별 동물이 다 등장한다. 심지어는 뱀이나 거미 또는 곤충도 사람과 함께 실내에서 산다고 한다.나는 개인적으로, 애완이든 반려이든 동물을 사람과 동일시하여 집안에서 동거하는 것은 반대하는 입장이다. 다만 사람이 특정한 목적으로 길들여 기르는 동물을 가축으로 분류할 뿐 그것이 어떤 종류건 동물이기 때문에 동거는 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인간우월주위를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특히 개의 경우, 한 집에 백여 마리나 기르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본다. 물론 돼지나 닭처럼 식용으로 키우는 것도 아니다. 설명을 들어보면 다쳤거나 유기견을 돌보는 중이라고 한다.유기견이 사회적 골칫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다쳤으면 동물병원으로 가야하고, 유기됐으면 올바르게 담당할 전문인에게 맡겨야 할 일이다. 아무런 준비와 지식도 없이 많은 개를 취급하다보니 주변에 엄청난 불편을 주고 있다. 시끄럽고 악취가 너무 심하다. 악취는 파리를 들끓게 하여 이웃이 대단히 싫어한다. 그렇다고 날마다 싸울 수도 없다. 처음엔 항의도 하고 싸우기도 했으나 이제는 아예 배 째라는 투다. 관계기관에 불편신고를 해도 별 대책이 없다. 공무원이 개인의 물건에 관여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어떻게 정보를 습득했는지 시끄럽게 짖지 못하도록 성대절제 시술을 하기도 한단다. 개가 짖는 것은 사람이 말하는 것과 같은데 강제로 말 못하게 하는 시술이라니 기가 막힌다. 뿐만 아니라 새끼를 낳지 못하게 중성화 수술도 한다는 사실에 화까지 난다. 그러면서 반려동물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이런 사람일수록 개를 먹는 것에 극구 반대한다. 식용으로 키워서 필요한 사람에게만 공급하면 소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육우는 고기로 먹을 것이요 젖소는 우유를 먹으면 되듯 반려견은 한 이불 속에 껴안고 잘 것이요 먹고 싶은 사람은 전문 사육장에서 사 먹을 일이다. 기러기를 사육하여 먹어도 된다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묻고 싶다. 그가 개를 사랑하므로 누구든지 개를 먹으면 야만인이라 낙인찍는다. 냄새 고약하고 시끄럽게 방치하다가 성대절제술이나 하는 사람은 고상한 문화인인가?바라건대, 유기견이나 길고양이를 개인의 취향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전문시설을 만들어 올바르게 담당해야 하지 않을까.이에 앞서 꼭 지켜야 할 것은 개나 고양이를 함부로 버리지 말아야 한다. 동물을 키워서 돈으로 바꿀 사람은 절대 버리지 않는다. 돈에 상관없이 애완용으로 키우다 싫어지거나 감당 못하여 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애완동물이 아니었을 터이다.너무 자기 취향에 빠져 남에게 피해를 주는데도 잘 한다고 칭찬하며 사료까지 지원하는 모순을 말하고 싶다.

2021-08-29

제 얼굴에 침 뱉는 구미시의원들

김락현경북부 최근 구미시의회 더불어민주당 소속 A시의원의 땅 투기 의혹과 관련해 동료 시의원 5명이 징계요구안을 제출했다가 반려된 사실이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7월 23일 신문식 시의원 등 5명은 구속된 A시의원에 대한 징계요구안을 의회에 제출했다.하지만, 이 징계요구안은 구미시의회 회의규칙 제89조 2항 ‘징계요구는 징계사유가 발생한 날, 징계대상자가 있는 것을 알게 된 날로부터 5일 이내에 해야한다’는 조항에 의해 반려됐다.그러자 구미참여연대와 구미YMCA, 민주노총 구미지부 등 지역시민단체는 지난 24일 구미시청 현관 앞에서 김재상 의장이 징계요구안 반려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며 기자회견까지 열었다.시민단체가 기자회견에서 지적했듯이 공무원 징계 시효는 2년인데 시의원 징계 시효는 5일 이라는 것은 비리를 저지른 동료 시의원을 감싸기 위한 잘못된 규칙이다. 시민단체가 잘못된 현안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땅 투기로 구속된 동료 시의원에 대한 징계요구안도 정당한 것이다.하지만,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이러한 회의규칙을 만든 이들이 바로 구미시의원들이고, 그동안 그 혜택을 충분히 누려왔으며, 자신들이 만들고 누린 그 혜택에 대한 규칙도 모르고 징계요구안을 제출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1995년 1월 1일 제정된 구미시의회 회의규칙은 1998년 7월 7일 개정 된 이후 현재까지 11번이나 일부개정이 이뤄졌다. 제8대 구미시의회에서는 2번의 일부개정이 있었다. 그럼에도 문제의 제89조 2항을 개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혜택을 누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징계요구안을 제출한 5명의 시의원이 정녕 그 사실을 몰랐다면, 자신들의 무지를 탓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민단체가 김재상 의장에게 책임을 묻는 것 또한 어불성설이다. 의장이 시의회의 수장으로서 책임이 막중하기는 하나 원칙과 규칙은 지켜져야 한다.시민단체는 의장에게 책임을 물을게 아니라 징계요구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된 5명의 시의원들에게 회의규칙부터 수정하지 않은 이유를 따져물어야 하지 않을까.구미/kimrh@kbmaeil.com

2021-08-26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낙동강 녹조가 심각하다는 환경단체의 고발이 있었다. 독성물질 검출량이 미국 레저활동 허용기준의 수 백배를 넘는 수준이었다니 놀랍고,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토록 심각하게 유해 녹조류로 오염된 물을 대구·경북 시도민이 먹고, 마시고 있다며, 분기탱천한 사람도 많았다. 기자회견장에서 만난 환경단체 관계자는 낙동강유역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평범한 농부였지만 농업용수로 쓰는 강물에 녹조가 너무 심하다 싶어 직접 강물 채수에 나섰다고 한다. 낙동강은 ‘녹조라떼’로 뒤덮였다고 할 만큼 심각했다는 게 그의 증언이었다. 그런데도 환경부는 아직도 이 물을 사람이 먹는 음용수나 농업용수로 써도 별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환경부가 이처럼 주장하는 데는 채수방법 차이 때문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강물의 중앙에서 표층과 중간층, 그리고 아래층 물을 떠서 혼합해 녹조류 수치를 잰다는 것이다. 강 가장자리 표층에는 녹조류가 라떼 거품처럼 뻑뻑한 젤 상태가 돼 있어도 강물이 흐르는 중간에서 채수를 해 검사하니 별 다른 이상이 없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채수 지점도 문제다. 환경부의 채수 지점은 상수원 취수구와 상당히 떨어진 지점이라는 얘기다. 환경단체 관계자들은 낙동강 녹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낙동강 보를 전면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낙동강 녹조가 보 때문에 유속이 느려지면서 생긴 현상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다만 20조가 넘는 혈세를 들여 설치한 보를 녹조가 기승을 부린다고 해서 전면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보수정권의 실정을 비판하는, 정치적 의도가 일부 포함된 주장이기 때문이다.낙동강 보는 설치할 당시 적지않은 논란이 있었지만 해마다 반복되는 여름 홍수피해를 막고, 수변공간을 만들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농업·공업용수로 쓰기 위해 만든 게 아닌가. 4대강 사업에 대해서는 감사원이 4차례나 감사를 벌여 절차나 예산낭비 등 문제가 지적됐다. 하지만 그 실효성에 대해서는 찬반 논란이 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실시한 감사원 감사에서 비용 대비 편익이 보잘것 없다는 평가가 나왔지만 일부에서는 아직 큰 비가 오지 않아 홍수방지 효과를 편익으로 측정할 수 없었기에 두고봐야 한다는 신중론도 있다. 더구나 녹조는 낙동강에만 생기는 게 아니다. 4대강 사업으로 정비한 전국의 저수지와 호수에서도 빈발하고 있다. 녹조 범벅이 된 우리 강과 저수지를 어떻게 할 것인가. 마땅히 국력을 기울여 해결해야 할 과제다.이와 관련, 경북도는 한국건설기술연구원 등 연구기관들과 함께 지난 2018년부터 86억여원의 예산을 들여 ‘낙동강 녹조제어 통합 플랫폼’ 개발에 나서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효과적으로 녹조를 제거하거나 줄일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은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 경북도가 온 나라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녹조 문제 해결에 대한 단초라도 제시하는 성과를 내주길 기대해본다.

2021-08-26

부채(負債)의 함정

코로나 사태로 금융대출 받기가 어려워진 일용직 근로자나 영세자영업자 등만 골라 돈을 빌려주고 이자 명목으로 최고 2천%의 돈을 뜯어낸 불법 고리대금업자가 얼마 전 경찰에 붙잡혔다.이들은 대부금의 상환일을 한 달로 정하고 한 번에 100만∼500만원을 빌려준 뒤 이를 갚지 못하면 한 달뒤부터는 이자 명목으로 하루 10만원의 돈을 받아왔다고 한다. 피해자 대다수가 돈 갚을 능력이 없는 경제적 약자였다고 하니 우리 사회 한 구석에서는 여전히 빈곤이 판을 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최근 한국은행이 발표한 우리나라 가계부채가 2분기 기준으로 1조8천억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고 한다. 작년 2분기와 비교해 1년 사이 168조원이 증가했다. 코로나19에 따른 생활고와 ‘영끌’(영혼까지 끌어 모음)과 ‘빚투’(빚내서 투자) 등이 겹쳤기 때문이라 한다.특히 국제금융협회는 우리나라 가계대출 비율이 GDP 대비 102.8%로 회원국 61개 국가 중 가장 높았다고 했다. 하반기부터 금융권이 가계대출 규제에 나서기로 함에 따라 대출 증가세가 다소 둔화 될 수는 있으나 가계부채를 줄일 방법은 현재로선 없어 보인다.이런 상황에 국가부채도 내년에 1천조원을 돌파할 것이라 한다. 국가부채나 가계부채 등이 위험수위로 치달으면서 경제계 일각에서는 우려스런 시선을 보내고 있다.“외상이면 소도 잡아 먹는다”는 속담이 있지만 뒷감당이 가능할 때나 하는 말이다. 과도한 빚은 국가나 개인이나 언제든 위험한 함정에 빠지게 할 수 있다. 돈 빌릴 데가 없는 경제적 약자가 급전을 쓰다 고리대금업자에게 봉변을 당하는 일이 남의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다.감당할 수 없는 과도한 빚은 국가나 개인에게 모두 위험천만한 일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1-08-26

학생 없는 캠퍼스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 캠퍼스에 학생이 사라진 지 2년째 되어온다.대학 시절을 생각하면 친구들과 잔디밭에서 기타 치며 카드놀이 하던 생각, 체육대회 때 농구경기에서 부상당하던 일, 기숙사 파티에서 노래 부르던 기억들이 아름답게 추억과 함께 인생의 즐거운 편린으로 남아 있다.이제 캠퍼스에는 그런 모습이 없다.대학의 가을학기 개강이 한 주 앞으로 다가왔지만, 강의실 문은 여전히 닫혀 있다. 정부의 코로나19 4단계 방역시책이 계속되고 있으니, 이번 학기에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만나기는 또 어려울 전망이다.필자도 2년째 비대면 강의를 하고 있다. 온라인으로 학생들의 얼굴으로 보긴 하지만 만나본 적은 없다. 물론, 온라인 강의의 장점도 적지 않다. 준비만 잘하면 교실의 대면 강의 못지않게 질 좋은 강의도 할 수 있고 토론 등도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다.또한 장소 시간을 가리지 않고 온라인으로 접속하여 강의를 들을 수 있으니 강의를 제공하는 교수나 듣는 학생들 모두 편리한 점도 많다.그러나 비대면 강의가 채워줄 수 없는 것이 너무도 많다. 대학은 지식만을 얻는 장소는 아니다. 캠퍼스 생활을 통해 친구들을 사귀고 교수들과 대화를 직접 나누면서 그리고 각종 동아리 활동 등을 통해 자기 문화를 창조해 나가는 과정이 캠퍼스 생활이다. 그리고 문화를 공유하는 과정이다. 온라인 강의로 지식 전달은 가능하지만 문화의 공유는 어렵다. 문화의 공유는 교과서 학습만으로 되는게 아니며 직접 체험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캠퍼스가 비대면 강의에 지쳐가고 있다. 교수회의 교무회의 등도 온라인으로 진행되고 강의는 물론 졸업식, 입학식도 각종 세미나나 교내 집단 행사 등이 모두 비대면으로 이루어진다.학생들이 오가는 활기찬 모습이 캠퍼스의 모습이건만 지금 캠퍼스는 학생이 보이지 않는 썰렁한 캠퍼스로 변했다. 교수들도 비대면 강의의 여파로 연구실에 나오는 횟수가 줄어든다.일부 교수들은 불필요한 회의나 출장이 크게 줄어 연구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교수와 학생, 교수와 교수 간의 대화도 사라지고 침묵이 감도는 것이 캠퍼스의 현실이다.이런 와중에 코로나 확진자 수는 연일 증가하고 있다. 싱가폴처럼 ‘위드 코로나(With Corona)’를 선언할 날은 언제 일까? 독감처럼 코로나와 동반하여 살아갈 수는 없을까?신규 감염자 제로의 시간이 언제 올 것인가? 꽃을 피우고 녹음이 푸르르고 싱그럽던 캠퍼스는 곧 낙엽이 쌓일 것이다.언제 학생들과 교수들이 캠퍼스로 돌아올지 기약은 없고 캠퍼스엔 적막이 감돈다.지쳐가는 캠퍼스는 언제 활기를 찾을 수 있을까? 학생없는 캠퍼스는 이제 막을 내리고 위드 코로나로 다시 캠퍼스의 문을 열 수는 없을까? 참으로 고통의 순간들이 지나고 있다.

2021-08-26

반면교사(反面敎師)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1979년 아프가니스탄이 소련의 점령 하에 들어가자 이슬람조직을 중심으로 미국 등의 지원을 받은 저항세력들이 10여 년간 반소항쟁을 벌였다. 그 결과 1989년 소련군이 철수하였으나, 군벌들이 내전을 벌이는 등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런 와중에 등장한 탈레반은 엄격한 이슬람 규율로 무장하고 전국을 빠른 속도로 장악해갔다. 수도 카불의 무력한 기득권층과 북부 양귀비 재배 지역에서 아편매매 수입으로 횡포를 부리던 이른바 마약 군벌들과 경합하다가 1997년에 정권을 잡았다.집권 후 탈레반의 극단적 이슬람근본주의 정책은 세계인의 지탄을 받았다. 부정부패 청산을 명목으로 하는 숙청작업과 함께 대부분의 방송국을 폐쇄하는 등 언론을 탄압하고 종교의 자유를 억압했다. 특히 국제사회를 경악케 한 것은 여성의 교육을 전면 금지하고 모든 여성들을 집안에 감금시킨 탈레반의 조치였다. 부르카(얼굴과 온몸을 가리는 검은 옷) 착용을 의무화한 것은 물론 여성들의 사회활동을 금하고 외출하는 것도 막았다. 2001년 3월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바미얀 석불을 폭파시켜 유네스코와 많은 국가들이 충격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미국은 9·11 테러 사건의 배후인 알카에다 수장 오사마 빈라덴이 아프간에 있는 것을 파악하고 탈레반에 신병 인도를 요구했다. 탈레반이 그 요구를 일축하자 미국을 위시한 국제연합군이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군사 작전을 단행했고, 그해 12월 탈레반 정권은 축출되었다. 9·11테러 20주기인 지난 4월, 조 바이던 대통령이 20년간 주둔하던 미군의 철수를 선포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과 탈레반이 체결한 평화협정에 따른 거였다. 그러나 철수가 다 끝나기도 전에 탈레반은 다시 수도 카불을 점령해버렸다. 평화협정 따위는 걷어차버리고 곳곳에서 끔찍한 살육을 자행했다. 죽기로 싸우겠다던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돈을 챙겨 국외로 달아나고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하려는 사람들로 하미드카르자이 국제공항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국경지역에선 자식만이라도 살리겠다고 철조망 위로 아이를 던지는 여자들도 있었다.미군이 철수하고 아프간이 탈레반에 함락되는 것을 보면서 섬뜩한 느낌이 드는 것은 필자뿐일까? 황장엽 선생의 폭로대로라면 남한에는 지금 수만 명의 간첩들이 암약하고 있고, 수십 년 전부터 탈레반을 방불케 하는 종북주사파들의 활동으로 이제는 반공·방첩을 주장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정도로 국민들 대다수가 좌경화되었다. 허구한 날 미군 철수를 외치고, 사드배치를 막고, 한미연합 군사훈련까지 못 하게 하는 등 핵무기를 가진 북한 앞에서 정신적으로는 이미 무장해제를 한 상태다. 군대조차 수뇌부부터 국가수호의 의지가 없어 보인다.이대로 좌파정권이 이어져서 그들의 바람대로 북한과 평화협정을 하고 미군이 철수하고 나면 대한민국이 과연 온전할 수 있을까? 지금 이 땅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볼 때 결코 안심할 일이 아닌 것 같다. 표퓰리즘으로 망한 베네수엘라나 안보와 자유수호의 의지가 없어 탈레반에게 나라를 내준 아프간을 반면교사로 배우지 못한다면 결국 그들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21-08-26

사랑의 외나무다리

백후자 수필가 “합시다. 러브. 나랑, 나랑 같이.”“좋소. 대답이 늦은 만큼 신중했길 바라오. 이제 무엇부터 하면 되오?”외나무다리 위에 마주 선 두 주인공, 국경을 초월하고 신분을 넘어선 애틋함이 내면에서 고요히 흐른다. 다리 아래로는 골짜기를 타고 내려온 개울물이 그들의 마음을 안 듯 모른 듯 무심히 흐른다. 묵계리에서 길안천에 놓인 하리교를 건너 오솔길을 따라 걷는다. 계곡의 물소리가 연인의 속삭임처럼 감미롭게 들린다. 송암계곡을 거쳐 송암폭포에 다다르니 시원하게 내뿜는 물줄기가 가슴팍의 땀까지 식혀준다. 폭포를 지나 조금 더 걸으니 자연 속에 어우러진 한 폭의 그림, 만휴정이다. 만휴정 안으로 들어가려면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한다. 외나무다리는 개울 하나 건너는 길이에 한 사람이 설 수 있는 폭이다. 나보다 일찍 온 연인들이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외나무다리 위에 마주 선 연인의 모습에서 그 자리에 섰던 드라마 속 두 주인공이 보인다. 애틋했던 그 모습과는 다르게 달달하다. 드라마의 영향으로 이 장소가 연인들이 찾는 명소로 탈바꿈한 것 같다. 연인들도 이곳에선 드라마 속 주인공 못지않은 멋진 배우다. 얌전하게 또는 깜찍하게 그 순간을 연기하며 즐긴다. 풋풋하고 사랑스럽다.내가 건널 차례다. 여주인공처럼 조신하게 걷는다. 어깨가 좁고 가냘파서 한복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던 그녀, 그러나 건장한 사내 못지않게 당차고 용맹했던 그녀가 섰던 자리에서 멈춘다. 시대가 주는 아픔에 사랑마저 아파야 했던 그들의 삶이 찐한 연민으로 자리 잡는다. 그들이 있었기에 내가 이 자리에 서서 사랑타령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냥 건너기엔 아쉬워 나도 여주인공 흉내 내며 추억 한 장 찍는다. 어느새 또 다른 연인 한 쌍이 줄 서 기다리고 있다. 새로 이룰 사랑도 없는 내가 얼른 다리를 건너 만휴정 안으로 들어간다. 안동 만휴정은 조선의 문신 김계행(金係行)이 말년에 독서와 사색을 위해 지은 정자이다. 앞면 세 칸·옆면 두 칸이며, 앞면 쪽 세 칸은 마루 형태로 개방하여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구조이다. 양쪽 툇간에는 온돌방을 들였는데 학문의 공간으로 활용하였다고 한다. 번잡하지 않고 소박해 보이나 품위가 느껴진다. 옛 정취를 오롯이 담고 있는 그곳에 서서 주변을 둘러본다. 물소리 새소리 자연의 소리가 맑다. 불어오는 바람에 내 안의 탐욕이 모두 실려 간 듯 마음이 편안하다.보백당 김계행은 청백(淸白)을 보물로 삼았던 인물이었다. 만휴정에 걸린 편액에 그의 청렴한 마음이 한 구절 시로 반듯하게 깃들었다.‘吾家無寶物(오가무보물) 寶物有淸白(보물유청백)우리 집엔 보물이 없으니, 오직 보물이 있다면 청백뿐이니라.’청렴, 이 한 단어만으로도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산들바람이 개울물을 타고 올라와 만휴정 우물마루에 앉는다. 보백당 선생이 산들바람과 벗하며 개울 건너 자연의 벗들도 부른다. 물 흐르듯 시 한 수 흘러나오고도 남을 듯하다.만휴정 나지막한 담장 너머로 외나무다리가 보인다. 여전히 사진 찍을 사람들이 띄엄띄엄 줄 서 있다. 다리 위, 마주 선 드라마 속 두 주인공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선 별이 총총히 쏟아진다.“통성명부터.”“아, 나는 고가 애신이오. 귀하의 이름은 아오.”두 주인공의 교차했던 감정이 한 방향으로 흘렀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이 가만가만 누르며 다가섰던 그 감정을 찾아보려 애썼다. 그 감정, 백분의 일도 찾지 못했다. 어찌 감히 그 감정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서로를 향한 마음이 차고 넘쳐 개울물을 타고 흘러 폭포수가 되었는걸.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다면 즐겨라. 외나무다리 위에 섰든, 폭포수 천 길 낭떠러지 앞에 섰든 함께라면 무엇이 두려우랴. 그들의 사랑이 그랬다. 사랑이냐, 조국이냐. 그녀는 조국을 택했다. 그는 그녀를 택했다. 그녀는 나라를 지키고 그는 그녀를 지켰다. 둘은 한 방향으로 걸었다. 사랑은 외나무다리를 걷듯 둘이 한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2021-08-25

들꽃이 피는 자리

뒷산에 생강나무꽃이 노란 꽃을 터트리면, 매화, 개나리, 진달래…, 산과 들에는 순서를 기다렸다는 듯 줄지어 들꽃이 피어난다. 만화방창 봄꽃이 한바탕 잔치를 벌이고 나면 여름꽃이 듬성듬성 벙근다. 가을이면 늦을세라 이질풀, 쑥방망이, 구절초, 국화가 한 시절 만발한다. 겨울이면 산에는 눈꽃이 피고 우리집 유리창에는 성에꽃이 핀다.긴산꼬리풀, 두메고들빼기, 갈퀴현호색, 선괭이눈, 매발톱, 뱀톱, 모싯대, 노랑갈퀴, 층층이꽃, 큰까치수염, 큰뱀무, 노랑투구꽃, 고깔제비, 각시붓꽃, 가래수염, 가지꼭두서니, 개망초, 개별꽃, 검정말, 갯패랭이, 금낭화, 금불초, 기린초, 꼬리조팝나무, 꽃마리, 꽃무릇, 나도개감채, 꽃방망이, 꽃기린, 꽃다지, 꼬리풀, 꿩의바람꽃, 노랑어리연, 노랑물봉선, 노인장대, 노린재나무, 노루오줌, 둥근잎꿩의비름, 들바람꽃, 둥굴레, 돌쩌귀, 동의나물, 딱취, 만주바람꽃, 딱지꽃, 모데미풀, 모래지치, 메꽃, 며느리밥풀꽃, 며느리밑씻개, 며느리배꼽, 바위솔….들꽃 이름을 음미해 보면 깜찍하고 재미있다. 어김에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잘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색깔, 모양새, 특징 등을 발음에 그대로 살렸다. 들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 같이 독특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앙증맞고 깜찍한 꽃다지, 샛노란 점박이 얼굴로 땅바닥에 착 달라붙은 쇠비름, 돌돌 말린 꽃대가 사르르 풀어지면서 방글대는 하얀꽃마리, 오동통한 잎 사이로 노랑별을 뿌려놓은 돌나물, 꽃잎이 노란 바람개비처럼 빙글대는 물레나물, 하늘 향해 좁쌀을 내뿜는 냉이, 대롱 끝에 하얀 별사탕을 피운 쇠별꽃, 올망졸망 방싯대는 금싸라기 은싸라기 웃음을 바라보면 절로 마음이 애틋해진다.”(김이랑 수필 ‘함백산의 봄’ 중)제비꽃은 제비가 날아올 때 피는 꽃이다. 오랑캐꽃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는데, 봄 춘궁기가 되면 북쪽 오랑캐가 내려와 백성을 괴롭혔다.그래서 제비꽃이 피면 오랑캐가 내려오고 제비꽃 뒷모양이 머리 테를 드리운 오랑캐 뒷머리와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전한다. 숱한 외침을 받은 수난의 역사가 꽃말에 들어있는 것이다.옛날옛날 강원도 산골짜기 암자, 스님이 부모를 잃은 아이를 데려와 함께 살았다. 어느 날 겨울나기를 미처 못한 스님이 먹을 것을 구하러 어린 동자승을 암자에 홀로 남겨두고 마을로 내려갔다. 그런데 눈이 많이 내려 암자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런 사정을 모른 동자는 추위와 배고픔을 참으며 스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동자는 끝내 앉은 채 굶어 얼어 죽고 말았다.쌓였던 눈이 녹기 시작하자 스님은 서둘러 암자로 갔지만, 동자는 죽은 채로 마당 끝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스님은 동자승을 바로 그 자리에 곱게 묻어 주었는데, 이듬해 여름, 무덤가에 이름 모를 풀들이 자라났다. 한여름이 되니 마을로 가는 길을 향해 동자의 얼굴처럼 붉은 꽃이 피어났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이 꽃을 ‘동자꽃’이라고 불렀다.옛날옛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밭을 매던 중, 시어머니가 볼일을 보러 풀숲으로 들어갔다. 볼일을 다 본 시어머니는 늘 그랬듯이 옆에 잡히는 호박잎을 손에 잡고 뒤처리를 했다. 그런데 시어머니의 손에는 호박잎이 아니라 며느리 밑씻개가 잡혔다. 가시 돋친 잎으로 뒤처리를 했으니 얼마나 따가웠을까. 시어머니는 “몹쓸 놈의 풀, 꼴 보기 싫은 며느리년 볼일 볼 때나 손에 잡힐 것이지”라고 원망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들꽃이 보고 싶은 날, 들로 나가 들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 나직이 물어본다. 너는 왜 피느냐고, 그러면 꽃은 그냥 웃기만 한다. 되물으면 그냥 바람에 흔들리기만 한다. 가만히 가만히 생각해보면 들꽃은 그냥 피지 않는다. 산에 피든 들에 피든 음지에서 피든 마음속에서 피든, 꽃은 다 피어야 하는 까닭이 있다.“별똥별 떨어진 자리에는 노란 민들레가 핀다. 노루가 오줌을 눈 자리에는 노루오줌꽃이 피고 제비가 똥을 눈 자리에는 제비꽃이 핀다. 장끼와 까투리가 사랑을 나눈 자리에는 꿩의바람꽃이 핀다. 사무친 그리움이 진 자리에는 상사화가 벙글고 애달픈 사연이 깃든 자리에는 찔레꽃이 핀다. 서러움 북받치는 자리에는 눈물꽃이 터지고 기쁨 넘치는 자리에는 웃음꽃이 핀다.”(김이랑 수필 ‘함백산의 봄’ 중)할머니 무덤에는 할미꽃이 핀다. 구절양장 한숨 쉬며 넘는 고갯마루에는 구절초가 핀다. 신선이 노닐다 떠난 자리에는 배롱나무꽃이 피고, 범이 낮잠 잔 자리에는 꽃범의꼬리가 핀다. 아버지가 지게를 지고 노루목 넘을 때 아버지의 등에는 소금꽃이 핀다.이 땅에 사는 민초는 마음을 들꽃에 담았다. 그리하여 들꽃이 피는 자리에는 사람의 마음이 피고 마음이 피는 자리에는 들꽃이 핀다./수필가·문학평론가

2021-08-25

유에프오와 국가 지배층의 무의식적 원형

강길수 수필가 일찍이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융은 그가 쓴 ‘현대의 신화’에서 유에프오(UFO) 문제를 다루었다. 왜 융이 1958년 미확인 비행물체를 심리학의 주제로 다룬 책을 냈을까.전에 논술을 공부하면서 ‘현대의 신화’를 읽었다. ‘융’은 ‘유에프오’ 현상이 미확인 상태이므로 ‘풍문(風聞)’으로 본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심리학자로서 ‘의심할 여지 없이 존재하는 심리적 현상’을 다루고 있다. 심층심리학의 분석적 방법이 보증하는 가능한 한 모든 결론을 ‘풍문으로서의 정신적 소산’에서 끌어내고 있다.하늘에서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는 유에프오 현상은, 2차대전 이후 세계적인 신드롬을 불러왔다. 1947년 미국 로즈웰 유에프오 추락 사건의 풍문은 그 대표적 사례다. 심층 심리 연구자 융이 당시는 물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유에프오 신드롬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융에 따르면, 유에프오를 인간이 조종한다면 급속한 비행으로 죽을 수도 있다. 이 점이 ‘유에프오’의 풍문성을 증명하며, 정신적 원인을 갖게 된다. 사람이 정신적으로 해리(解離)되었을 때 즉, 의식과 반대되는 무의식의 내용이 생기면 거기에 정신적 원인이 있다. 이때 비정상적인 확신, 환상, 착각 같은 현상들이 나타난다. 냉철한 판단과 비판적 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 무의식은 격렬한 작용을 하여 그 내용이 지각되도록 한다고 말한다.이어 그는, 유에프오 현상을 ‘꿈 해석의 원리’에 따라 해석한다. 사람들에게 지각된 원반 또는 구형의 둥근 대상은 심층 심리학적으로 ‘전체성의 상징’, 산스크리트어로 원(圓)을 뜻하는 만다라(Mandala)에 비유된다. 만다라는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한계를 짓는 원, 보호하는 원, 또는 재난 피하기를 소원하는 원으로 나타난다. 곧, 플라톤의 ‘이데아’이래 ‘태양,’ ‘연금술’, 종교들의 ‘신 상징’으로 나타난 원형(原型)상징이다. 유에프오 풍문은 그 물리적인 실재 여부를 떠나, 신비적인 경향을 기피하고 합리적인 정신이 우세한 현대인의 ‘무의식적 원형’이 된다.지금 우리 사회는, 융이 제시한 유에프오 풍문과 다른 형태의 ‘무의식적 원형’을 겪고 있는 게 아닐까. 그것은 자칫 사회 존립마저 위태롭게 하는 치명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586으로 대표되는 세대가 국가 지배층으로 군림하고 나서부터, 국민은 유에프오 신드롬처럼 긴가민가하다. 불안하다. 그들이 어떤 무의식적 원형을 가졌기에….민주화 운동 주역을 자처하는 그들의 행태는, 가히 전체주의를 능가한다. 자신들이 학생 시절 군사독재 체재로부터 억압받았다면, 지배층이 된 지금은 같이해서는 안 된다. 자칭 민주화 세력이기 때문이다. 5·18과 세월호가 무엇이기에 연구도 안 되고, 비판도 할 수 없도록 하는가. 도대체 그들의 민주주의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라 명운이 걸린 4·15 부정선거 문제에는 왜 눈길도 주지 않고, 꿀 먹은 벙어리인가.유에프오 풍문의 ‘무의식적 원형’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재미라도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현 지배층의 집단 ‘무의식적 원형’은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만 드리운다.깨어있는 국민이 일어나야 할 때다.

2021-08-25

독립 영웅 홍범도 장군의 재평가

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광복 76주년 홍범도(1868∼1943) 장군이 먼 이국땅에서 귀환하였다. 그는 카자흐스탄 크즐오라다를 떠나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되셨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이국땅에서 고생하다 돌아가시고 사후 78년 만에 고국 땅을 밟은 것이다. 만주 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는 영웅적인 전투 승리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중국과 러시아에서도 그의 항일 투쟁을 높이 평가하는데 정작 고국은 그를 외면했던 것이다. 그는 이제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최고 훈장인 대한민국장을 서훈 받고 영면에 들었다.평양 출신 홍범도 장군은 머슴살이하는 부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산 후유증으로 모친은 사망하고 부친마저 그가 9살 때 돌아가셨다. 그도 머슴살이를 하다 190㎝의 장대한 기골로 조선군 나팔수로 선발되었다. 그 후 금강산 신계사에서 승려 생활을 하다 비구니스님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2007년 필자도 금강산 신계사를 다녀왔지만 그가 거쳐 간 사찰임은 전혀 몰랐다. 10년간 포수 생활로 그는 총 솜씨가 뛰어나고 산을 잘 타 ‘나르는 홍범도’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 후 그는 의병 전쟁에 참전하여 주재소 습격 등 많은 전공을 세운다. 일제가 그를 회유하기 위해 그의 부인에게 귀환 편지를 쓰라고 강요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순절하였다.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7일 대한독립군이 최초로 일본군에 승리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홍범도 장군은 일제의 75사단의 월강 추월대와 교전하여 일본군 175명을 사살하게 된다. 물론 이 전투는 홍범도 장군 단독 전투가 아닌 합세한 독립군 연합의 승리이다. 독립신문은 이 전투에서 아군 장교 1명과 사병 3명만 희생되었다고 보도했지만 이 전과에 관해 일본은 인정치 않는다. 이 전투의 승리는 그해 10월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 승리로 직결되고 당시 독립 운동가들의 사기를 크게 북돋아 주었다.일제는 이 전투의 패배로 만주에서 대대적인 독립 운동가 색출 작전을 벌인다. 그는 인근 연해주로 긴급 피신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볼셰비키 혁명으로 집권한 레닌은 그의 항일 투쟁을 높이 평가하여 권총 한 정과 군복을 선사했다. 러시아는 그에게 작은 국영농장 콜호즈 책임자로 임명한다. 그는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에 의해 고려인 약 18만만 명과 함께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 당한다. 항일 영웅 홍범도 역시 자신의 뜻과는 무관한 디아스포라 신세가 된다. 그는 고려인의 도움으로 극장 수위 생활을 하다 해방 2년 전 세상을 떠났다.홍범도 장군이 고국에 안장되고 최고 훈장이 추서된 것은 늦으나마 무척 다행한 일이다. 북한이 뒤 늦게 홍범도 장군을 평양에 모시려 하였으나 카자흐스탄 당국과 현지 고려인들이 거부하였다. 북한 당국이 항일 혁명의 역사는 온통 김일성 항일 투쟁역사로만 국한했던 편협한 결과이다. 일부에서 홍범도의 공산당 입당 경력과 ‘자유시 사변’시의 행적을 비판하지만 그의 봉오동 전투 공적까지 폄하해선 안 된다. 이는 철 지난 이념 논쟁에 불과할 뿐이다.

2021-08-25

확인 없는 저널리즘은 누더기가 된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 뉴스가 넘치는 세상이다. 하루 중에도 새 뉴스가 다른 뉴스를 덮을만큼 뉴스거리가 쏟아진다. 미디어가 시민들에게 필요하고 중요한 뉴스거리라고 간추려 정리하는 기능을 게이트키핑(Gate keeping)이라 불렀다. 매체의 그 기능이 무색해질 정도로 새로운 소식거리가 많다.그럴수록 언론은 책임있는 기사발굴과 취재 그리고 보도에 집중해야 한다. 디지털과 뉴미디어가 범람하여 언론지평이 흔들릴수록 매체는 본연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에 더한 감시와 견제의 기능에 충실해야 한다. 언론이 본질적인 소명을 실천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필자는 ‘사실 확인’이라 부르고 싶다.‘언론의 요소들(Elements of Journalism)을 저술한 코백(Bill Kovach)과 로젠스틸(Tom Rosenstiel)은 ‘언론의 기본은 확인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시민의 알 권리를 충족하기 위하여 기사를 작성하지만, 사실에 근거하고 직간접 취재를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한 후에 보도행위가 있어야 한다. 사실을 벗어난 한 자락의 기사가 초래하는 위험은 상상을 넘는다. 미확인보도, 따옴표언론, 가짜뉴스는 모두 기자가 확인을 소홀히 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확인없이 마구 게재된 기사가 만들어내는 피해는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렵다. 언론인이라면 확인하며 글쓰는 일을 생명처럼 여겨야 한다. 사실로 확인한 끝에야 진실이 드러날 수 있으며 진정한 알 권리가 확보될 터이다.언론중재법을 두고 걱정하는 소리가 있다. 이해는 하면서도, 국민과 국회가 언론을 무슨 연유로 걱정하게 되었는지 돌아보는 일이 먼저여야 하지 않을까. 언론환경이 온라인과 디지털을 수용하면서 기존 레거시미디어의 책임 바른 언론행위가 디지털미디어의 폐습을 오히려 닮아가면서 심각하게 오염되었다. 이전에도 물론 부적절한 언론행태가 없지 않았지만, 디지털환경이 펼쳐지면서 그 폐습은 급속도로 자리잡았다. 속도경쟁과 특종문화가 변화하는 매체환경을 만나 ‘확인’은 아예 거추장스러운 일거리가 되고 말았다. 저널리즘의 본령인 ‘사실확인’이 무너진 자리에는 병든 언론이 만연하게 마련이다.언론중재법이 언론재갈법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함은 물론, 언론계와 언론인은 이를 계기로 본질을 회복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언론자유의 당당함을 유지함은 물론 충실한 사실확인을 토대로 한 책임있는 저널리즘을 회복해야 한다. 그 어떤 사실확인도 없이 의견과 주장을 게재한 후에 ‘아니면 말고’식의 언론행위는 사라져야 한다. 병폐가 얼마나 깊었으면 오늘같은 국민의 우려를 만났을까 돌아보아야 한다.민주주의를 구현함에 있어 언론의 자유는 기본이 아닌가. 돌아가는 사정을 시민이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언론은 사실확인에 성실해야 한다. 언론행위가 구실이 되어 부당한 손해가 발생하지 않으려면, 확인을 최우선에 두는 언론행위가 있어야 한다. 언론의 자유가 소중한 만큼, 사실확인이 분명한 언론을 기다린다. 언론이 살아야 민주주의가 선다.

2021-08-25

아기 울음소리 없는 사회

우리 사회가 아기 울음소리 없는 사회로 추락하고 있다. 사람이 한 나라의 국력이 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데, 인구가 지금의 절반, 혹은 그 이상으로 줄어든다면 어떻게 될까.아파트가 남아돌기 시작해 부동산 불패신화가 무너지고, 줄어든 인구 만큼 소비자 역시 줄어들어 자동차 판매량도, 스마트폰 판매량도 크게 감소하게 된다. 나라를 지킬 군인 충원도 어려워지고, 경찰과 소방관도 턱없이 부족해질 수 있다. 기업들은 인력확보에 비상이 걸릴 것이다.통계청이 25일 발표한 ‘2020년 출생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합계 출산율은 0.84명으로 집계됐다. 1년 전의 0.92명보다 0.08명(-8.9%) 감소했다. 이는 1970년 통계작성이 시작된 후 역대 최저기록이다. 우리나라 합계 출산율이 세계 꼴찌를 기록한 것이다. 정말 너무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우리나라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는 역대 최저인 0.84명까지 떨어졌다. 연간 출생아 수는 20만명대로 내려 앉았다. 38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의 평균 합계 출산율은 1.61명(2019년 기준)으로, OECD 회원국들 중 합계출산율 0명대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지난해 우리나라는 27만2천300명으로 1년 전보다 3만300명(10.0%) 줄어 역시 1970년 통계 작성 이래 최저치다. 1970년대만 해도 100만명대였던 출생아 수는 2002년에 40만명대, 2017년에 30만명대로 추락했고, 지난해 20만명대까지 떨어졌다.저출산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나라의 경제성장이나 국력신장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 아기 울음소리 넘치는 사회를 위한 사회적 관심이 필요한 때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1-08-25

낄끼빠빠 합시다

‘낄끼빠빠’라는 말은 “낄 데 끼고 빠질 데 빠지자”라는 뜻이다. ‘낄끼빠빠’만 잘 해도 어디 가서 욕먹을 일 없다. 사회생활, 특히 인간관계에서 꼭 필요한 게 이 ‘낄끼빠빠’의 지혜다. 학생들 술 마시러 가는 데 꼭 껴서 같이 놀려는 교수님, 친구 커플들 여행가는 데 같이 놀러가겠다는 모태솔로, 결혼식장에 신부보다 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온 하객, 주인공은 가만히 있는데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려고 오버하는 조연 배우… ‘낄끼빠빠’는 곧 눈치가 있고 없음의 문제다. 염치의 척도이기도 하다.물론 나라고 ‘낄끼빠빠’ 잘 하며 산 건 아니다. 학부 시절 학과에 좋아하던 여학생이 있었다. 나중에 안 얘기지만 그 애는 나 아닌 다른 녀석에게 이미 관심이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어떻게든 마음을 얻으려고 설쳐댔다. 둘이 놀고 싶지만 학과에 소문 날까봐 괜히 마음에도 없는 말로 “병철아 너도 같이 놀자” 한 건데, 나는 혹시나 싶어 정말 적극적으로 열심히 놀았다. 얼마나 보기 싫었을까? 지금 돌아봐도 얼굴이 화끈거린다.시간강사가 돼서도 마찬가지다. 재작년 수업했던 4학년 학생들이 제주도로 졸업여행을 가겠다고 해 나도 마침 제주도에 낚시 가는 일정이 있어서, 학생들에게 숙소와 렌터카를 제공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학비 버느라 아르바이트하며 아끼고 모아 여행 경비를 마련했을 텐데, 졸업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내 역할은 딱 거기까지여야 했다. 괜한 오지랖을 부려 운전기사를 자청해서는 학생들의 여행 일정 내내 동행했다. 자기들끼리 찍는 기념사진에도 등장하고, 저녁마다 한 테이블에 앉아 술을 마셨다. 얼마나 불편했을까? 미안한 마음 감출 길 없다.그렇다고 끼지 말아야 할 데 끼고, 빠져야 할 데 안 빠지기만 한 건 아니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면서 그동안 여러 군데 문예지와 문학 단체 등에서 편집위원이나 임원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다 거절했다. 내 경력과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다. 어떤 형태든 ‘감투’라는 걸 쓰면 사람이 우스꽝스러워진다는 게 내가 가진 아름다운 편견이다. 그 편견이 나를 나로 살게 해준다. 나는 아직도 ‘글은 혼자 쓰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낄끼빠빠’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지난 얼마간 시끄러웠다. 김연경 선수에게 무례한 질문과 감사 인사를 강요한 배구협회 유애자 홍보부위원장이 논란이 됐다. 여자 배구선수 중 세계에서 가장 비싼 몸값을 받는 선수에게 “포상금이 얼마인 줄 아느냐”를 계속 묻더니 배구연맹 총재, 배구협회 회장, 금융회사 회장 이름을 줄줄이 읊어댔다. 그러고는 대통령에게 감사 인사하라고 강요했다. 그야말로 ‘안물안궁’(안 물어봤고 안 궁금하다)이다. 윗선에 잘 보여 출세의 동앗줄 잡으려는 이들의 과잉충성은 언제쯤 사라질까? 익명으로 돈만 보내고 생색은 내지 않는 성숙한 후원 의식은 언제쯤 자리 잡을까?경기관광공사 사장으로 내정됐다가 당내 계파 간 갈등으로 번져 후보 사퇴한 음식평론가 황교익씨 소동도 ‘낄끼빠빠’ 문제다. 후보로서 자격을 갖추고 절차를 준수했다 하더라도 유력 대권후보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자신의 지원서 제출이 임명권자에게 일종의 ‘청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모를 수 있단 말인가? 관광공사 사장으로 하고 싶은 일이 정말 많다고 했는데, 아무리 의욕이 있고, 또 잘 해낼 능력이 있더라도 더 의욕 있고 더 잘 할 사람에게 양보했어야 한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2019년 강릉국제영화제 구경 갔을 때의 일이다. 개막식에 앞서 레드카펫 행사가 진행됐다. 맨 처음 안성기 배우가 등장해 환호성이 컸는데, 곧이어 국회의원이 레드카펫에 오르면서 본격적인 고요속의 워킹이 시작되었다. 호텔 사장, 부구청장, 도의회 의원들이 줄줄이 오르자 정말이지 박수는커녕 야유가 쏟아졌다. 이건 뭐 레드카펫이 아니라 수치스런 조리돌림이 되어갈 무렵, 당시 드라마 ‘스카이캐슬’로 인기 절정이던 김서형 배우가 등장해 죽어가던 레드카펫을 겨우 살렸다. 빛이 난다. 영화인들과 관객들의 축제에 정치인, 기업가, 지역유지들이 왜 얼굴을 들이미는 지 모르겠다. 과잉의전은 언제쯤 사라질까? 레드카펫 행사 제안을 받더라도 내가 낄 데가 아니라며 거절할 줄 아는 눈치를 높으신 분들에게 기대해볼 수는 없는 걸까? 제발 ‘낄끼빠빠’ 좀 잘 합시다!

2021-08-24

말 많고 탈 많은 노튜브 존

출퇴근 길, 그리고 잠들기 전 꼭 빼놓을 수 없는 건 유튜브다. 언제부턴가 책 대신 유튜브로 빈 시간을 때우게 됐는데, 택스트를 읽는 것보다 피로감이 덜하고 손쉽게 유쾌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다수의 연예인이 유튜브에 뛰어 들었고, 먹는 방송은 ‘mukbang’이란 이름으로 전세계적인 유행을 이끌고 있다. 초등생의 직업 선호 1위도 유튜버라니. 유튜브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일상 가까이 거대하게 존재하고 있다.며칠 전 유명한 식당 앞에서 유튜버는 받지 않겠다는 안내문을 봤다. 일명 노튜브 존(No-Youtuber zone)이라 부르는데, 말 그대로 유튜버는 식당 입장이 제한되며 이 안에선 어떤 영상 촬영물도 찍을 수 없단 뜻이다.한때 논란을 일으킨 노키즈존에 이어 최근엔 맛집 위주로 노튜브 존이 성행하고 있다. 사전에 합의 없이 대뜸 현장에서 촬영 가능 여부를 묻는다거나, 약속 없이 주방까지 촬영을 하는 무분별한 방송인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단 이유에서다. 2019년 한 개인 방송인이 동의 없이 가게 주방에 들어가 점원과 손님에게 피해를 준 이후 생기기 시작했다.유명한 일례로 다수의 구독자를 보유한 유명 유튜버 또한 가게에 들어가 음식이 맛이 없단 평을 남겼고 결국 그 가게는 손님의 발길이 끊겨 폐업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엄밀히 말하면 피해를 입히는 방송인은 유튜브라는 플랫폼에만 있는 게 아닌, 다양한 인터넷 방송 플랫폼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자극적인 영상물, 과감 없이 드러내는 콘텐츠로 이슈를 만들어 내며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오래전부터 빈번했다. 개인방송에 대한 엄격한 규제나 가이드라인이 없기 때문에 일부 가게가 나서서 노튜브 존을 선언한 것으로 보여진다.모든 크리에이터들이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길거리에서 큰 소리로 이야길 한다거나, 대뜸 춤을 추거나 과한 리액션으로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몇몇 개인 방송인을 본 적 있다. 한때 한 플랫폼에선 길거리에서 예쁜 여성을 발견 하여 외모 평가를 하고 인터뷰를 요청하는 콘텐츠가 유행하기도 했다.몇몇 개인 방송인은 야외 촬영시 시청자가 후원하면 금액에 맞는 리액션을 장소나 상황 불문 보여준다. 그들에게 문제가 되는 건 태도다.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공공장소에서 춤을 춘다거나 과도한 리액션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데 개의치 않아 한다.문제는 이 뻔뻔한 행동을 유머로 승화시키고 금전적인 이익을 얻으며, 이를 단순 흥미로 받아들여 즐기는 구독자가 존재한단 거다. 10대와 20초반 사이에서 자주 쓰는 언어나 유행어도 대부분 이들의 영상 속에서 등장한 것인데,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비아냥거리는 유행어나 성적 조롱은 정말 가만히 듣기 힘들 정도다.그러니 노튜버 존을 내건 식당들의 입장도 이해 간다. 실시간 방송은 주위 손님의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할 수 없으니 고스란히 얼굴이 공개 되는데, 이에 대해 불만을 느끼는 손님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조용히 촬영을 한다고 해도 시청자와 꾸준히 소통을 해야 하기 때문에 소음이 발생하고 식사를 즐기러 오는 사람에겐 충분히 방해 될 수 있다. 더한 문제는 무료 홍보를 약속하며 공짜 식사나 서비스를 요구하기도 하는 방송인도 있다는 점이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무례한 개인 방송인 때문에 양심적인 방송인 까지 모두 난처한 상황이 안타깝지만 엄연히 사업장은 업주가 노력을 들인 공간이고, 진상 고객을 거부하는 것 역시 가게 주인이 주장할 수 있는 권리다. 출입 금지라는 극단적 상황에 안타까우나, 법으로 규제가 어려운 상황이니 어찌할 수 없이 택한 선택일 것이다.게다가 노튜브존만 성행하는 것이 아닌, 중고등학생의 출입을 막는 노 유스 존, 카페에서의 공부를 막는 노 스터디 존, 침을 뱉는 다거나 고성방가를 하는 행위 때문에 등장한 노 래퍼 존 등등 다양한 이유와 형태로 입장을 막는 곳도 있다. 어떤 이유로 특정인의 출입을 막는 곳이 있다는 건 마냥 이해가 되는 것이 아닌 씁쓸함을 남기기도 한다. 최선은 나의 태도를 다시금 점검해보는 일일 것이다. 많은 이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건 어떤 이유든 정당화 될 수 없다.

2021-08-24

팔고(八苦)에 관하여

김규종 경북대 교수 윤동주의 ‘팔복(八福)’을 읽노라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가 여덟 번 되풀이되다가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로 끝나기 때문이다. 윤동주의 시편 곳곳에서 드러나는 부정에서 긍정으로 나아가려는 지향이 ‘팔복’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기독교도였던 시인이 ‘팔복’의 원천을 ‘마태복음’ 5장에서 찾았을 것은 자명하다.‘반야심경 마음공부’에서 알게 된 사실은 불교에서 여덟 가지 고통, ‘팔고’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생로병사의 네 가지 고통에 다른 네 가지가 더 있다는 얘기다.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온성고(五蘊盛苦)가 그것이다. 사랑하는 대상과 헤어지는 고통이 애별리고, 밉고 싫은데 자꾸만 만나야 하는 고통이 원증회고다. 인간 세상은 정말 요지경이다.얻고자 하지만 손에 넣을 수 없기에 괴로운 것이 구부득고다. 팔고의 마지막 괴로움은 오온에서 비롯되는 괴로움이다. 오온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다섯 가지다. ‘색즉시공’이 가리키는 ‘색’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수), 그것이 불러오는 생각(상)과 거기서 발원하는 행동(행) 그리고 그것을 인식하는(식) 다섯 가지를 가리킨다. 그 모든 것에 괴로움이 차고 넘친다는 것이다.인간계는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 죽어가는 기본적인 네 가지 고통 말고도 후자의 또 다른 괴로움 네 가지가 중층적으로 엮어져 있다. 만일 고타마 붓다가 ‘원증회고’를 설했다면, 정말로 놀랄 일이라 생각한다. 어린 시절부터 자유와 평등, 형제애를 몸소 실천한 분이 싫고도 미운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을 설하다니?! 애별리고만큼이나 원증회고는 우리를 괴롭힌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나 대상을 날마다 대면해야 한다면 얼마나 끔찍하겠는가!구부득고는 21세기 한국인들을 좌절시키는 괴로움 가운데 하나일 듯하다. 아파트 공화국 시민으로 아파트 한 채 없는 사람들은 얼마나 심란하겠는가! 남들 타고 다니는 화려한 외제 자동차는 또 어떤가! 명품 가방과 핸드백 혹은 고가의 보석류를 갈망하는 사람이 그것을 얻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얼마나 괴로울 것인가! 이런 사람들은 노자의 ‘도덕경’ 44장을 읽고 위로를 받았으면 한다. “지족불욕 지지불태 가이장구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而長久)”내가 생각기로, 가장 커다란 고통은 역시 오온에서 발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색’이 불러오는 수상행식(受想行識)의 과정과 결과는 언제나 상상 이상이기 때문이다. 살아있음을 가리키는 가장 명료한 근거는 분명 즉자적인 욕망과 욕망을 달성하려는 구체적인 실현방식일 것이다.윤동주는 생에 내재한 이질적인 요소인 ‘슬픔’을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아닐까! 욕망하는 자들의 실현 불가능한 현실태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도로서 ‘슬픔’ 말이다. 그래서 차라리 ‘영원히’ 슬픈 족속으로 인간을 규정한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2021-08-24

둘 중 한 명이 노인인 나라

영국의 풍자작가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는 영국인 걸리버가 항해 도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소인국과 거인국을 차례로 경험하는 이야기다.제1편은 주인공인 걸리버가 키가 6인치도 안되는 소인이 사는 나라로 들어가 경험한 내용으로 꾸몄고, 제2편은 키가 교회 철탑만큼 큰 거인국에 들어가 왕의 장난감 취급당하다 가까스로 빠져나오는 내용이다.한 나라의 인구 가운데 두 사람 중 한 명이 65세 이상 노인이라면 과연 믿을 사람 있을까. 아무리 고령화 사회로 진행이 빨리 된다 하더라도 한 사람 건너 노인을 만나는 상황이라면 믿기가 어렵다.최근 감사원의 의뢰로 통계청이 추계한 100년 후의 한국의 인구실태 조사보고서를 보면 충격적이다. 막연하게 인구절벽을 상상했던 우리의 인구문제가 이처럼 심각한 상황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랍다.통계청은 2017년 기준으로 출산율과 국제이동, 기대수명이 중간 정도로 유지된다고 볼 때 100년 후인 2117년 한국의 65세 이상 노인 비율을 52.8%로 추정했다. 50년 후인 2067년은 49.5%다. 2017년 고령화 비율은 13.8%다.통계적 추정치에 불과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가 겪는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가 이런 결과를 나타낸다고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다. 이번 조사에서 100년 후 한국의 총인구는 2017년(5천136만 명)의 절반도 안되는 2천81만 명으로 밝혀졌다.지역별로 보면 대구는 2017년 246만 명이던 인구가 100년 뒤 지금의 22%인 54만 명, 경북은 지금 268만 명이던 인구가 70만 명으로 추락한다. 부산은 342만 명이 100년 뒤 73만 명으로 떨어졌다. ‘걸리버 여행기’에서나 보는 이상한 나라의 모습이 현실이 되는 것 같아 놀랍다. /우정구(논설위원)

2021-08-24

장보고와 재당신라인

오늘날 해외여행이나 이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전근대시대에는 한 국가 안에서 자신이 사는 지역 이외에 다른 지역으로 가는 것은 특별한 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국가의 통제와 불편한 교통수단 등을 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에 오고가거나 심지어 정착하는 일까지 있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장보고와 재당신라인들이었다. 이 글에서는 그들이 다른 나라로 건너간 이유와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사람들의 이동 또는 이주는 흔한 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고대 국가의 성립 과정을 자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외부에서 들어온 세력과 현지 토착 세력의 결합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동이나 이주는 보편적인 사건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국가 체제가 본격적으로 갖추어지기 시작하면 많이 줄어든다. 즉 세금 징수나 노동력이나 병력 동원 등을 위해 인원을 파악하고 통제하기 때문이다.신라인들이 해외로 이주한 사례는 6세기 말부터 등장한다. 587년 귀족의 아들인 대세(大世)와 그의 친구인 구칠(仇柒)이 서쪽 나라로 가서 자신의 꿈을 펼치고 싶은 뜻(西遊之志)을 품고 떠났다고 하며, 621년에는 설계두(薛7F7D頭)가 골품제도에 불만을 품고 당으로 건너가 당 태종의 고구려 원정에 참전하기도 했다.이에 신라인들의 이주는 자신의 의지를 바탕으로 개인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816년에 기근이 들자 중국으로 가서 식량을 구한 자가 170명이나 되었다는 기록을 볼 때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신라를 떠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신라를 떠난 사람들이 주로 정착한 곳은 당의 등주(登州), 초주(楚州), 양주(揚州)였는데, 이곳은 오늘날 산둥성(山東省)과 장쑤성(江蘇省) 일대로 비교적 한반도와 가까웠다.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신라방(新羅坊), 신라촌(新羅村)은 당에 건너간 신라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했던 곳이었다. 비교하자면 오늘날 해외에 있는 코리아타운 정도가 될 것이다.당에 정착한 신라인들은 당의 지방통치자인 절도사의 관리가 되거나 신라 및 일본과의 무역 등에 종사했다. 특히 일본 스님인 엔닌(圓仁)이 838년~847년 사이 당에 유학왔던 일을 기록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신라인들이 각종 편의를 베풀어 주고, 입·출국 관련 일을 대신 처리하거나 심지어 그가 귀국할 때 항로를 정하고 배를 운항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신라인들이 당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현지 사정에 밝았으며 바닷길에 익숙했기 때문이다.사실 이들이 당에 정착할 수 있었던 요인에는 670년대 이후 벌어진 당의 정치적 혼란과 755년에 발발한 안록산의 난이 큰 영향을 끼쳤다. 이 과정에서 국경 밖의 이민족을 통제하던 절도사가 반란 진압 과정에서 획득한 지방 행정 및 군사에 대한 권한을 이용해 자신들의 통치 구역인 번진(藩鎭)을 만들어 중앙정부와 대립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지방 통치에 대한 재량권을 확보했다. 즉 절도사가 지방에 있었던 이민족을 통제하게 된 것이다.또한 부여받은 재량권을 통해 그들 가운데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힘이 있었던 소위 유력자(有力者) 또는 유지(有志)를 절도사가 등용하여 이민족에 대한 통제를 맡겼던 것이다. 즉 변형된 이이제이(以夷制夷 :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제압한다) 정책이었다. 이러한 정책의 변화는 당 중앙정부의 의지보다 안록산의 난 이후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던 상황을 대처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제도화되었다.장보고가 당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근본적으로 당이 이민족이나 그들의 문화를 잘 받아들였던 경향과 관계있다. 다만 앞서 언급한 당의 국력 약화와 함께 이민족에 대한 통제가 느슨해졌던 상황도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신라는 당시 중앙의 진골귀족들의 왕위 계승 분쟁으로 인해 혼란한 상황이었으며, 호족이라는 불리는 세력이 지방에서 점차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전경효 경주문화재연구소 주무관 이 무렵 서해는 주인이 없는 바다였다. 신라와 당 어느 나라도 서해를 제대로 통제할 수 없었다. 장보고는 바다를 통해 자신의 세력을 키워갔다. 그런데 해적들은 이 바다에서 무역을 방해하고 사람들을 납치하여 노비를 삼는 일을 저질렀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들을 퇴치한 것은 바다를 둘러싸고 다투던 경쟁자를 제거한 것이 아닐까?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얻기 위해 백성이나 국민을 위한 다는 명분을 내건 자들이 많았다. 장보고도 해적에 시달리는 신라인들을 구원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신라와 당 어느 나라의 영향력도 미치지 못한 서해를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여 한 것일지도 모른다.장보고는 당의 황제, 신라의 왕 그리고 서해의 주인공인 자신이 어깨를 나란히 하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장보고를 비롯해 재당신라인들이 서해를 배경으로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어느 권력도 미치지 못한 9세기 바다라는 특수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2021-08-23

문장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맛

유독 어떤 문장들은 읽고 지나간 뒤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문장은 어떤 뜻인지 알듯 말듯해 끝없이 미끄러지며 그 주변을 맴돌기도 하고, 어떤 문장은 마치 내 청춘의 한 조각인 것만 같아 유독 가슴 아프게 나를 물어뜯기도 한다. 또, 며칠 전부터 내 머릿속에서 오가던 희부윰한 생각들을 그야말로 딱 맞는 문장으로 풀어낸 누군가의 글이 주는 그 시원함 때문에 잊지 못하고 어딘가에 갈무리해두었다가 답답한 마음이 들 때마다 꺼내보게 되기도 한다. 하나의 문장이 나의 마음속에 던지는 것, 그리고 조금씩 살이 붙어 무시할 수 없는 어떤 또 다른 것이 되어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언어로 된 무언가를 읽는 이유일지도 모른다.우리를 그냥 스쳐지나가지 않고 반드시 건드리고 지나가는 문장은 우리를 혼란에 빠뜨린다. 어떤 문장을 읽고 혼란에 빠진다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마음의 방심 상태를 그 문장이 습격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대개 격언이나 금언, 경구, 잠언 등을 의미하는 아포리즘(aphorism)은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을 비틀어 혼란에 빠뜨리거나, 반대로 그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선언하면서, 그것을 읽는 우리를 새삼스럽게 만든다.오스카 와일드는 하나의 문장을 통해 인간의 심리적 허점을 찌르는 분야에 있어서는 가장 탁월하다고 해도 좋은 작가였다. “경험이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실수에 붙이는 이름이다”라든가 “유혹을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에 굴복하는 것이다” 같은 문장은 인생에서 번민에 빠진 인간에게는 찌릿거릴 정도의 혹독함을, 아직 번민을 경험하지 않은 인간에게는 당연하고 만연한 사고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생각의 자유를 허용한다. 한 권의 책으로 묶어도 충분한 오스카 와일드의 문장들에는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답답한 삶의 국면들을 잠시 벗어나도록 하는 단호함과 새롭게 찌르는 시각이 있다.또, 어떤 문장은 우리를 그 책 속에 들어 있는 세계 속으로 뛰어들게 한다. “박제가 된 천재를 아시오?” 이상(李箱) 소설 ‘날개’의 첫 문장은 그것을 읽는 순간 우리를 여기 현실이 아니라 그가 펼쳐놓은 상상적 기호놀음 속으로 끌어들여 그 속에 길을 잃게 만든다. 어떤 미로는 출구로 빠져나갈 때보다 그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더 의미 있는 것이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는 문장의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나 “역사에 걸쳐 여성은 익명의 존재였다”는 문장의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은 어떠한가. 그것은 단지 하나의 문장에 불과한 자리를 넘어, 독자로 하여금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가 그 세계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해보고 싶도록 만들지 않는가. 이 문장은 절대로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붙들어 더 깊숙한 곳까지 끌고 들어간다.그래서, 어떤 문장은 마치 익숙한 노래 가사처럼 사라지지 않고 맴돌고,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서 문득 떠올라 내가 그 문장을 통해 고민하고 있던 장면들을 소환한다. 하나의 문장에 압축된 기억, 그리고 하나의 문장의 여백에 남겨진 기억들이 그것을 읽었던 시절에 우리를 바로 그 때, 그 세계 속으로 초대하는 것이다.그러니, 우리가 독서를 한다는 것은, 그 책 속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가 하는 것을 알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문장에 귀 기울이는 것이기도 하다. 책을 덮고 난 뒤에도 우리를 붙잡는 문장의 뒷맛은 우리를 오랫동안 그 책 속에 머물도록 만든다. 그러니, 이미 널리 알려진 유명한 소설의 명문장에 너무 구애될 필요는 없다. 어떤 문장이 우리를 붙드는 이유는 사람마다 제각각이니 말이다. 마음을 붙드는 자기만의 문장을 갖는 것은 독서를 통해 우리의 마음이 웅숭깊어지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홍익대 교수

2021-08-23

섬김으로 완성되는 혁신의 미학

장광일​​​​​​​포스코 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모든 것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오늘날, 많은 기업체에서도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변화와 혁신을 추진하고 있다. 혁신과 변화를 시도한다고 해서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질적인 변화와 혁신을 통해 괄목할만한 성장과 발전을 이룬 회사의 성공적인 혁신 스토리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으면 변화와 발전에 한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2008년초 심각한 경영난을 겪으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요청한 혁신컨설팅에 필자가 참여하게 된 회사는, 칼라강판과 도금강판을 생산하여 국내와 해외에 수출하고 있는 표면처리강판 전문 중소기업이다.방문 첫날부터 필자는 하루 종일 현장을 진단하면서 현장 곳곳에 산재돼 있는 다양한 문제점을 발굴했다. 그 결과에 대한 설명과 해결방안을 논의하고자 사장실에 들렀을 때 당시 CEO의 강한 이미지와 과묵함에 중압감이 들었었다. 현장진단 항목인 환경관리, 설비관리, 품질관리의 문제점은 물론 안전상의 위험점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하는 내내 함께 참석한 공장장들은 사장의 불호령이라도 떨어질까봐 불안한 눈빛으로 안절부절하는 듯했다. 발표가 끝나자 최사장은 몇 분간 침묵하며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내가 어떻게 하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냐?”며 말문을 열었다. 필자는 사장이 보기와는 다르게 편안하게 대해 주며 고민 끝에 질문해준 것에 한가지 제안으로 답변했었는데, 그것은 바로 “전원이 참여할 때까지 사장의 솔선활동과 격려활동을 꾸준히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그로부터 1년동안 실제로 그 사장은 꾸준하게 솔선활동과 격려활동에 참여했다. 또한 개선활동에 여념 없는 현장을 찾아가 독려하고, 배려와 진심이 우러나는 섬김의 자세로 직원들을 챙기는 ‘서번트(Servant) 리더십’을 몸소 실천했다. 그 결과 현장과 설비는 몰라보게 탈바꿈했고, 품질 불량률, 설비 고장률, 안전재해율 등의 성과지표는 최고의 실적으로 나타났으며, 모범적인 혁신활동으로 P사의 혁신페스티벌(IP)에서 최우수 혁신사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었다.이와 같은 변혁과 결실의 요체는 CEO의 의지와 솔선, ‘서번트 리더십’으로 귀결된다고 본다. 변화의 촉매가 컨설턴트라면 혁신의 화룡점정은 섬김의 리더십이다. 리더는 인간존중이 바탕이 되고 작은 것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 직원들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진실되게 섬기는 자세로 경영자 스스로 솔선하여 모범을 보일 때, 혁신의 발걸음은 성공을 향한 꾸준한 각도로 변모될 것이다.기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성장해야 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혁신을 해야 한다. 생존하고 성장하는 기업은 리더에게 책임과 권한을 위임하고, 리더는 직원 스스로 혁신역량을 개발하도록 배려하며, 창의적 사고로 무장할 수 있도록 ‘서번트 리더십’을 십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과거에는 전쟁에서 패하면 죽음이지만, 현대에는 변하지 않으면 도태라는 말이 실감나는 현실이다. 섬김으로 완성되는 혁신의 미학은, 변화와 진화의 성공기반은 물론 기업의 독창적인 혁신문화로 정착돼 지속가능한 발전과 미래 경쟁력의 특장점이 될 것이다.

2021-08-23

계절의 和音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 풀벌레 울음소리가 한결 맑고 또렷해졌다. 처서 지난 하늘은 조금씩 높아져가고 아침저녁의 공기가 서늘해지니, 새벽녘이나 해거름에 새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온갖 벌레들의 합창이 청아하기만 하다. 특히 비가 오고 난 뒤나 습도가 높은 날에 많이 울어대는 지렁이 소리는 어찌나 크고 선명한지, 귀를 의심할 정도로 요란하지만 결코 시끄럽거나 어수선하게 들리지는 않는다.여름날의 문서를 벽장 속에 넣어둔다고 하는 처서(處暑)는 더위를 마감하고 선선해지는 때라 할 수 있다. 요즘처럼 수일째 가을장마가 계속되기도 하지만, 맑은 날에는 노염(老炎)이 만만찮게 꼬리를 물기도 한다. 계절이 바뀌게 되는 현상은 달력의 숫자보다도 먼저 미세한 자연의 변화나 울림에서 느낄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들이 여름날을 노래하는 매미나 가을날을 부르는 풀벌레들의 거침없는 울림이다.“소나기 멎자/매미소리//젖은 뜰을/다시 적신다//비오다/멎고//매미소리/그쳤다 다시 일고//또 한여름/이렇게 지나가는가//소나기 소리/매미소리에//아직은 성한 귀/기울이며//또 한여름/이렇게 지나보내는가” -김종길 시 ‘또 한여름’ 전문최근 들어 장마 같은 비가 수시로 내리다 보니 소나기도 잦아졌다. 무더위와 코로나에 시달리는 후줄근한 일상의 쉼표 같은 빗줄기가 시원하게 쏟아지고 나면, 때에 따라서는 하늘에서 고운 무지개가 피어나며 잠시나마 행운의 몸짓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소나기 그치기가 무섭게 매미들은 약속처럼(?) 일제히 선율을 토해낸다. 마치 퍼붓는 소낙비 마냥 온 사방에서 열창(熱唱)을 쏟아내며 여름날을 노래한다. 하긴 7년을 땅 속에서 살았으니 한달 남은 일생을 옹골차게 마무리하기 위해서라도 혼신을 다해 뜨겁고 벅차게 여름날의 세레나데를 구가하는지도 모른다.아직은 한낮의 매미소리가 쟁쟁한데, 어느새 귀뚜리며 여치 따위의 풀벌레와 지렁이까지 합세하여 자연의 시계소리 같은 가을의 시작음(始作音)을 연주하는 듯하다. 하찮은 미물도 이렇게 때가 되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온 힘으로 외치거나 울고 노래하면서 계절의 화음을 이어간다. 피고지는 꽃처럼 자연의 변화는 이처럼 울림이나 색채 등으로 아무런 거리낌이나 막힘없이 이치에 순응하며 넘겨주고 이어져서 조화로움을 더해가고 있다.과연 인간사회에서는 이 같은 자연의 편안한 어울림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것일까? 물러나고 나설 때를 알고 목소리를 내고 침묵할 때를 알며, 타인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배려와 존중의 지혜는 그토록 까다롭고 체득하기가 어려운 것일까? 사람에게는 말과 글로 의사를 표시하는 것 이상으로 때와 장소에 따라 낄끼빠빠하며 신뢰와 융통성있게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알량한 학식과 경박한 언행은 빈번한 엇박자로 자신과 주변을 찡그리게 하는 불협화음으로 치달아, 종국에는 자승자박의 그물에 갇히게 되는 꼴이 될런지도 모른다.물소리와 바람소리, 새소리와 풀벌레소리 등은 결코 아무렇게나 울리고 들리는 것이 아니라, 동화와 상생으로 공명하고 조율되며 변주하는 것이리라.

2021-08-23

대선 주자들, ‘부동산 블루’에 응답하라

변창구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 부동산공화국에 살고 있는 서민들은 집값 폭등으로 ‘벼락거지’가 되었다. 손 놓고 앉아 있을 수 없어서 ‘영끌’과 ‘빚투’로 집을 샀지만, ‘빚 폭탄’을 안고 있으니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청춘들은 평생 빚 갚다가 인생 끝나게 되었으니 ‘이생망’이라고 한탄한다. ‘부동산 블루(우울증)’가 덮친 대한민국의 민낯이다.나라꼴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무능한 정권의 오판과 오기가 주범이다. 집값 잡는다고 26차례나 내놓은 부동산 대책은 모두가 ‘사람 잡는 실책들’이었다. 인간본성과 시장논리에 대한 진단이 잘못되었으니 처방이 제대로 나올 수가 없었다.정권이 저질러놓은 잘못은 고스란히 국민의 고통이 되어 돌아왔다. 대출상환의 부담 때문에 출산까지 미루고, 위험한 줄 알면서도 가상화폐와 같은 투전판에 뛰어들어 아슬아슬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심지어 아파트 매입문제로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참극까지 벌어졌다.온 나라가 부동산 블루를 앓고 있으니 대선의 최대 이슈는 집값 안정이다. 하지만 후보들은 유권자의 표심을 잡으려고 실효성 없는 포퓰리즘 정책들을 남발하고 있다. 부동산 규제가 문제라고 진단하는 후보는 공급확대와 세금완화를 주장하고, 투기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후보는 투기규제와 세금강화를 역설한다. 이는 프리드먼(M. Friedman)이 지적한 ‘샤워실의 바보(a fool in the shower room)’현상이다. 부동산 정책의 중심을 잡지 못한 채 급격하게 냉·온탕(규제와 공급)을 반복해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이제는 정치지도자의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부동산을 많이 가진 것이 고통이 되게 하겠다”고 했던 것처럼, 부동산 문제는 보수나 진보의 이념문제가 아니다. 후보들은 각자의 대책을 제시하고 상호검증을 통해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특히 집값 안정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이슈, 즉 ‘공급확대’와 ‘투기규제’ 그리고 ‘지방발전’이 정책경쟁의 핵심이다.공급확대와 투기규제는 동전의 양면이다. 공급확대는 부지확보와 재원조달방안이 핵심이며, 투기규제는 실수요자 보호를 위해 필수적이다. 특히 후보들은 투기규제의 가장 강력한 수단인 ‘보유세 인상’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혀야 한다. 또한 공급확대는 지방발전과 연계되어 있으며, 지역균형발전을 통해 수도권에 집중된 주택수요를 분산시킬 수 있다. 서울공화국을 해체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을 지방 거점도시로 분산시켜야 한다. 대선 주자들이 수도권 유권자들의 표심을 의식하여 국가균형발전의 당위성을 회피하면서 부동산 블루를 해결하겠다고 한다면 ‘소가 웃을 일’이다.부동산공화국은 ‘존재가치’가 아니라 ‘소유가치’를 추구하는 나라다. ‘꿈’을 쫓는 사람은 어리석고 ‘돈’을 쫓는 사람이 똑똑하다고 평가받는 이 부동산 광풍(狂風)의 나라에 정말로 희망은 없는가? 국정을 책임지겠다는 대선 주자들은 이 엄중한 물음에 반드시 분명한 응답이 있어야 한다.

2021-08-23

퀵 커머스 시대

코로나19가 유통업계에 가져 온 변화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배달서비스의 대중화요, 짧은 시간에 각 가정에 배달해주는 퀵 커머스 시대를 앞당겼다는 평가다.퀵 커머스 선두업체인 바로고가 24일부터 신선식품과 생필품을 10분만에 집앞에 배달하는 동네 편의점·마트 배달서비스 ‘텐고’를 시작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운영중인 창고를 거점으로 현장에 대기중인 라이더가 주문 즉시 역삼동·논현동 일대에 10분 이내 단건 배달 서비스를 제공한다. ‘10분 배달’을 모토여서 앱명칭도 ‘텐고(Tengo)’로 정했다.소비자는 요리하다 급하게 필요한 마늘, 영화보면서 먹을 수 있는 시원한 아이스크림, 아이스 커피 등 다양한 상품을 저렴한 가격에 즉시 받아볼 수 있다. 창고에 상시 대기하고 있는 라이더가 주문 즉시 출발하고, 다른 경유지 없이 한 곳만 배달한다.배달대행 업계가 정보기술(IT)기반 종합유통·물류 플랫폼으로 전환하고 있다. 도심형 거점 창고를 구축해 식당에서 갓 조리한 음식은 물론 편의점·마트 물건이나 제조약, 스마트폰, 유심칩 등 배송가능한 모든 상품을 30분 이내 배달한다. 바로고는 현재 GS25, CU, 이마트24, 미니스톱 등 편의점 업체와 계약해 퀵커머스 서비스를 제공한다. 지난 6월엔 CJ올리브영 즉시 배송서비스 ‘오늘드림’주문 건 배달을 시작, 최대 3시간내 배송하고 있다. 최근에는 비대면진료지원 플랫폼 ‘닥터나우’와 손잡고, 처방약 배달서비스를 시작했다.퀵커머스 사업은 10분 배달로 독일 스타트업중 최단시간 유니콘 반열에 오른 식료품 배달업체 고릴라스가 모델이다. 비대면·편리함을 추구하는 현대사회에 퀵 커머스 서비스는 어쩌면 당연한 시대적 추세로 읽힌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1-08-23

공무원

조현태수필가 요즘 뉴스 중에서 가장 빈도가 높은 두 가지를 간추려보면 코로나19 관련 보도와 차기 대선 주자 관련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둘 다 ‘어떻게 국민을 안전하고 바르게 섬길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응대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고 있다.‘공무’라는 어휘 자체가 공중을 위한 업무를 뜻하기 때문에 모든 공무원은 업무의 대상이 국민이어야 한다는 기본에는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국민을 상대하다보면 별별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 많은 사람들에게 빠짐없이 흡족하도록 맡은 업무를 처리하기란 대단히 어렵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맡은 바에 열과 성을 다할 수밖에 없는 직업도 공무원이 아닌가 한다.특히 모든 국민을 상대로 가장 힘겨운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코로나19 관련 종사자들의 노고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어떤 한 부분에 애써 노력하면 그에 반하는 사람이 있고, 그 분야를 고려하면 또 다른 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형편이다.이런 보도를 보노라면 미국의 유명한 공무원 ‘라 구아디아’를 떠올리게 한다. 법원 판사와 뉴욕시장을 맡았던 그의 놀라운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여 세계 여러 나라에도 많이 알려져 있다. 오죽하면 La Guardia Airport라는 공항 이름까지 생기게 했을까.그의 명 판결이 있던 날, 법정에 참관한 사람들 마음이 한결같지는 않았다. 그의 판결이 옳다고 여긴 사람도 있었고 그르다고 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뜬금없는 십 센트의 벌금까지 참관인들에게 부과했지만 아무도 싫어하지 않았고, 오히려 전원이 같은 마음이 되도록 하나로 묶어 준 판결이었다. 심지어 피고와 원고까지 공감하게 했으니 말이다.사람의 생각이란 각양각색이어서 의견도 분분하지만, 같은 생각으로 공감되어지는 요건이 있다. 그것은 사랑하는 마음이 꿈틀거릴 때 아무도 그 사랑을 억누르지 않게 되고 긍휼한 마음으로 통일되는 것이다. 아무리 사랑 어쩌고 해도 그 순서에 자신을 앞장세우면 반드시 반론에 맞서게 된다. 사랑은 남을 위해야 한다는 말이리라.나는 선거 시기가 올 때마다 우스운 경우를 본다. 선거 전에는 재래시장이나 뒷골목까지 나타나 구십도 절을 하면서 성실한 머슴이 되겠다고 호소하고는 당선 후 자신의 권세나 명예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여주니 말이다. 어떻게 국민 없는 공무가 있으며 자신이 앞서는데 남을 사랑할 수가 있을까? 물론 모든 공무원이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차라리 봉사보다는 직장 개념으로 근무하는 말단공무원이 더 사랑스럽지 않은가.어떻게 보면 예비후보들이 선별진료소 간호사 또는 자원봉사자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시작할 때와 끝날 때의 긍휼함에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4차 대유행을 치달리고 있는 요즘, 자연재해 측면에서 보면 누구를 탓할 수도 없고 누구를 지도하며 도와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아무리 좋은 헌법이 있더라도 그 법을 준수하지 않으면 소용없듯이, 감염병이 아무리 무섭다 하더라도 모든 국민이 하나같이 바이러스에 대처한다면 이기지 못할 것도 아니라고 본다. 우리 국민 전체가 스스로 공무원이 되어야겠다.

2021-08-22

국경일에는 태극기를 달자

윤영대수필가 광복절 아침, 맑은 하늘을 보며 아파트 베란다에 태극기를 꽂고 머리를 내밀어 밖을 살펴보니 태극기의 펄럭임이 드물다. 지난 제헌절에도 토요일이라 그랬는지 국기게양이 적었다.다른 곳은 어떤지 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정오쯤 나서서 우리 아파트부터 둘러보았는데 가끔 내리는 소나기 탓인지 드문드문 4~5개, 아예 없는 통로도 있다. 인근의 신축 고층아파트 단지는 베란다가 안 보이는 유리 벽면이라서 그런지 국기 단 곳이 아예 안 보이고 어쩌다 한 집의 창밖으로 꽂아둔 태극기는 절벽에 홀로 외롭게 핀 한 송이 꽃 같다. 환여동을 지나 양덕동과 장성동의 대단지까지 둘러보는 큰 도로변에는 그래도 가로기(街路旗)가 열 지어 펄럭이고 있으니 아름답다. 몇몇 아파트 단지 안에도 들어가 보았으나 몇 개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을 뿐 마찬가지다. 연휴라서 그런지 즐비한 상점에도, 한적한 마을 골목길에도 드물었다. 텅 빈 학교에는 외롭게 게양되어 있는데 값비싼 조각작품들이 놓여있는 대단지 아파트 입구에는 국기 게양대가 아예 없다. 무언가 아쉬웠다.국기는 5대 국경일과 국군의 날, 그리고 정부지정일에는 게양해야 하고 현충일과 국장일에는 조기(弔旗)를 걸어야 한다. 대한민국 국기법과 그 시행령에는 국기 관리 및 선양 방법 등과 함께 ‘모든 국민은 국기를 존중하고 애호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국기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국가의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교육과 홍보 활동 등 국기 선양사업을 추진·지원한다’고 되어있다. 또 국기에 대한 경례, 맹세, 그리는 법 등이 상세히 규정되어 있고 게양방법과 위치도 정해 두고 있다.단독주택은 대문 왼쪽, 공동주택은 난간 중앙 또는 왼쪽에 달도록 한다. 그러고 보니 요즘 도시에서는 거의 아파트에 살다 보니 태극기 달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난간이 있으면 건물 벽면에 기울여 달 수 있겠지만 앞면이 거의 유리도 덮어져 있는 경우 달 곳이 마땅찮으니 방법을 마련해야겠다.국기게양의 전국 실태는 어떨런지 SNS를 훑어보았더니, 높은 빌딩에 홀로 게양된 곳도 있고 대부분 10% 미만의 상태라고 알리고 있다. 그런데 서울 성동구 한 아파트 단지에서는 ‘공동주택 태극기 달기 운동’으로 수십 층 난간에 일렬로 나란히 걸려 있어 장관을 이룬다. 높은 아파트의 벽면 가득히 태극기가 펄럭이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거대한 화판에 태극 꽃을 그린 퍼포먼스와도 같겠다. 그런데 수원과 안양시청에서는 평화를 기원한다며 한반도기를 내걸었다니 참 어이가 없다.코로나 지원도 좋겠지만 태극기를 전국 가구에 나누어주고 앞으로 국경일에는 온 나라가 태극기의 물결로 일렁이도록 하면 어떨까? 지자체 민원실, 편의점, 문구점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도록 하고 시상품이나 기념물로도 주고 전입자, 혼인신고자에게도 증정품으로 나누어 주자는 의견도 있다.국경일을 그냥 놀아버리는 공휴일로 보내지 말고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드높이고 선열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여 집집마다 태극기가 펄럭이는 아름다운 그 날을 보고 싶다.국경일에는 우리 모두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충성을 굳게 다짐해 보자.

2021-08-22

대마 주산지 안동, 국가 헴프 산업 전초기지 되다!

권영세안동시장 고대 그리스 신화 속 미소년 나르시스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사랑에 빠져 연못만 바라보다가 빠져 죽고 말았고, 그 자리엔 수선화가 피어났다. 수선화(narcissus) 향기의 마취 성분에 연유하여 마약을 뜻하는 영어 단어 ‘narcotics’가 유래했다고 한다.마약은 의학이 발달하기 전 고대부터 고통을 억제하는 민간 요법으로 사용돼왔다. 기원전 3천여 년 수메르인들이 아편을 사용한 흔적이 발견됐고, 기원전 1천500년 파피루스에도 이에 대한 기록이 있다. 동양에서는 기원전 2천727년 중국 최초 약물학 서적인 신농본초경에 대마 씨앗을 치료에 사용한 기록이 있고, 삼국지에는 화타가 대마로 마취해 수술했는다는 기록도 있다. 우리나라 동의보감에도 대마가 오장의 기가 부족할 때, 정신을 맑게 하고 딸꾹질, 타박상 등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최근 우리나라에서 수백년간 삼베옷의 원료로 이용해온 대마가 전세계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대마 속 유용한 물질이 의약 원료 등으로 활발히 사용되면서 새로운 시장이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일반적으로 대마라고 알려진 대마초(마리화나)는 대마의 꽃이나 잎에서 추출된 테트라히드로칸나비놀(THC)이라는 환각 성분을 이유로 역사적으로 숱한 사회적 이슈를 생성하며 부정적 시각을 고착화해왔다.이와 구별하여 ‘헴프’는 대마 속 환각 성분인 ‘THC’(테트라히드로칸나비놀)가 0.3% 미만인 대마식물과 그 추출물을 의미한다. 헴프에는 CBD(칸나비디올)라는 천연 성분이 있어 통증과 염증을 줄이고, 간질 발작을 조절하며 정신질환과 중독을 치료하는 데 유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소아뇌전증, 치매, 파킨슨병에 효과가 크다고 한다. 이미 캐나다, 미국, 영국, 호주 등 50여개 국가에서는 의료용 목적으로 대마를 합법화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칸나비디올(CBD)은 이미 하나의 새로운 산업 분야로서 매년 20% 이상의 성장세를 어어나가고 있다. 미국 그랜드 뷰 리서치(시장조사기관)에 따르면 2027년 전세계 대마 시장 규모는 약 150억 달러(16조 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19세기 미국의 ‘골드러시’에 이어 대마 산업으로 자금이 몰리며 ‘그린러시’라 불리며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대마초 합법화 공약과 함께 기대감을 모으던 지난해 12월, WHO 권고를 받아들인 UN 산하 마약위원회가 60년 만에 대마를 마약류에서 제외하는 규제 완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국내에서도 대마 활용을 위한 보폭이 넓어지고 있다. 2020년 7월 중소벤처기업부는 대마 주산지인 안동 일대를 경북 산업용 헴프 규제 자유특구에 지정했다. 이로써, ‘마약’은 곧 ‘범죄’라는 사회통념과 마약류관리법 등에 막혀 70여 년 동안 시도조차 못한 대마를 활용한 산업화의 문이 비로소 열리게 됐다.안동시 임하면과 풍산읍 일대의 헴프특구에는 2021년까지 약 380억 원의 사업비가 투자된다. 특구사업에는 (재)경북바이오산업연구원, 한국콜마(주), (주)유한건강생활, 교촌에프앤비(주), (주)우경정보기술 등 21개의 국내 유수의 기업과 기관이 참여하고 있다. 안동 대마 재배지에는 최신 기술이 결합된 스마트팜이 조성됐고, 앞으로 6개 기업에서 약 20t의 헴프를 재배해 총 62kg의 CBD(칸나비디올)를 추출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원료의약품 제조와 전주기 이력관리하기까지 모든 과정에 대한 실증사업을 추진한다. 헴프 활용을 위한 모든 실증사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공정 전주기에 대한 표준 방식이 도출되면 이를 근거로, 마약류관리법도 개정될 전망이다.안동시는 헴프 실증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대한민국 헴프 산업을 견인해나갈 수 있도록 관련 기관, 기업과 협력하고 행·재정적 지원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번 특구 사업으로 30여 개 기업이 안동에 유치되면 신규고용 약 70여 명과 함께 수출 효과도 상당할 것이다. 대형 공장이나 중견 기업이 없는 안동으로서는 청년 일자리 마련과 지역 경제 활성화 효과에 더욱 주목하고 있다.수백년간 옷감으로 활용되며 명맥을 이어온 대마가 바이오 신기술을 만나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드러내면서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고령화, 인구감소에 시달리는 지역 경제에도 새로운 희망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2021-08-22

안동

자두가 맛있는 계절이다. 물렁한 것보다 단단한 식감이 취향이라 과일가게에 가면 주먹만 한 자두를 골라 바알간 부분 한 입 깨물어보고 산다. 새콤한 맛이 입안에 번진다.어릴 적 내 고향 안동에서는 자두를 자두라 부르지 않았다. 우리 집 담장에도 이웃집 미정이네 마당에도 한 그루씩 있던 추리나무, 누구보다 봄을 부지런히 준비해 잎보다 먼저 하얀 꽃을 피웠다. 후루룩 봄바람 따라 꽃이 떨어지면 그 자리에 꽃잎 대신 초록색의 열매를 내민다. 새끼손톱만 하던 초록색이 하루하루 옅어지다 연두색이 될 즈음 우린 나무를 흔들어 추리를 따먹었다. 한꺼번에 나무를 터는 게 아니라 올려다보고 젤 굵은 것을 골라 하루에 몇 개씩 골라 먹었다. 빨갛게 다 익을 즈음엔 몇 개 달려 있지 못했다. 글을 쓰는 지금, 생각만으로도 입안 가득 침이 고인다.우리 동네에서는 추리였던 과일이 자두라는 걸 포항으로 전학을 오며 알았다. 포항이 고향인 남편은 자두를 애추라 불렀다. 애추를 따먹다 나무에서 미끄러져 발목을 가물탔다고 했다. 가물타다, 진짜 오랜만에 듣는 소리였다. 함께 일하는 선생님이 한쪽 발에 반깁스를 하고 출근했다. 발을 잘 못 디뎌 접질렸다며 한동안 절룩거려야 한다니 여름에 고생이라고 위로해 주었다.출근 전에 남편이 ‘가물탔다’라고 해서 웃었다고 했더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묻는다. 발목 접질렸다는 말이라고 해도 듣느니 처음이라고 포항에서 나고 자란 사람조차 모른다고 했다. 고향 친구들 단톡방에 물어도 안 쓰는 말이라니 나만 아는 말이었나?저녁에 남편에게 가물탔다라는 말을 아무도 모르더라고 하니, 핸드폰을 펴서 한참을 찾더니 글 한 편을 보여주었다. 경상도 사투리를 모아 명사, 동사, 형용사로 나눠 뜻풀이를 자세히 해 놓았다. 한쪽 발로 뛰기는 깨금뛰기, 그저께는 아~레, 인지 가 온나는 지금 가져오라는 뜻이다. 도련님은 대렴, 빻은 가루는 채가 아니라 얼기미로 곱게 치고, 방문에 구멍이 나면 한지 대신 문조오를 발라야 한다. 많은 사투리 사이에 가물탔다도 껴 있다.옆에서 큰아이가 혼자 하기 제일 힘든 일이 갈비집에 가서 고기 구워 먹는 일이라니 누구든 ‘비우만 넙적하면 된다’고 남편이 답한다. 아들에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냐고 하니, 문맥상 얼굴에 철판 깔면 된다는 뜻 같은데 비우가 무엇인지 넓적하면 된다는 게 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단다. 그렇지, 뜻만 통하면 되지 정확한 의미까지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다.여름 방학 특강 마지막 날, 안도현 시인의 시를 주제로 수업을 했다. 안동 옆 동네인 예천에서 태어난 시인도 자두를 추리라고 불렀다고 썼다. 포항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문제로 내었더니 처음 듣는 말이라 전혀 떠올리지 못해 ㅊ, ㄹ 초성까지 힌트로 주어도 온갖 모음을 다 갖다 붙이고 나서야 정답을 맞혔다. 자두가 추리라니 신기하고 재밌단다.수업을 끝내고 핸드폰을 켜자 울릉도에 살러 간 친구의 문자가 당도해 있었다. 안도현 시인의 신간을 읽다가 ‘안동’이라는 제목의 시를 보자 내 생각이 났다며 시 전문을 꾹꾹 눌러 적어 보냈다. 시 속에 시인의 어머니는 매화로 피고, 누이에 대한 시를 적어서 어머니를 기쁘게 하고 싶지만, 집 나간 아버지가 30년 넘게 돌아오지 않아 누이는 태어나지 못하고, 그래서 누이에 대한 시는 한 줄도 시인에게 오지 못 한 채 안동시 태화동 어머니 아파트로 저녁은 절룩거리며 오고 있다고 읊조렸다.문자를 읽으며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포항에 어느 교실에서 내가 안도현의 시를 아이들 입에 떠먹이는 순간에 친구는 바다 건너 울릉도 학교 관사에 엎드려 같은 시인의 시를 읽다니, 그것도 많은 시 중에 안동을 읽다니. 혹시 우리 교실에 CCTV 달아 놓고 지켜본 것이냐고 농담을 건네니 친구도 소름이 돋았다고 한다.고향 떠나와 포항에 산 지 40년이다. 안동에 살았던 시간은 겨우 14년, 그 안동이 이런 기적의 시간을 만들어 내게 보내준다. /김순희(수필가)

2021-08-22

섬의 날과 울릉도(독도)의 현실

김윤배한국해양과학기술원 동해연구소울릉도독도해양연구기지 대장 지난 8월 8일은 섬의 날이다. 정부에서는 국민의 소중한 삶의 터전이자 미래의 잠재 성장 동력인 섬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국민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2018년부터 섬의 날을 지정했다.최근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유인도 464개를 포함하여 약 3천300여개의 섬이 분포하고 있다.독도를 부속 섬으로 두고 있는 울릉도는 우리나라 섬 중에서(제주도 제외) 육지부 면적기준으로 8번째로 큰 섬이며, 인구 기준으로는 12번째인 섬이다. 그러나 본토와 다리로 연결되지 않는 섬만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 섬 중에서 육지부 면적이 가장 넓은 섬이며, 가장 많은 인구가 거주하는 섬이다. 또한 지리적으로 울릉도의 부속섬인 독도는 한반도 본토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동해 한복판에 위치한 지리적 특징으로 인해 우리나라 항로 중에 연간 100일 내외로 여객선 결항률이 가장 높은 곳이다. 1974년 최고 2만9천810명의 정점을 찍었던 인구는 올해 7월말 기준 8천990명으로 급격한 인구 감소 추세와 함께 우리나라 유인도서 중에서 향후 평균인구 예측 감소율보다 2배 가까이 인구감소가 추정되는 섬이다. 또한 65세 이상 인구비율이 2005년 16.9%에서 2018년 22.7%로 급격한 고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섬이다.의료 인프라가 열악해 1년에 50회 이상 응급환자가 해양경찰청 헬기 등의 도움을 받아 육지로 긴급 후송되는 섬이기도 하다.최대 수산 소득원인 오징어 어획량은 해양환경변화에 따라 2000년 1만359t에서 2019년 711t으로 급감했다. 더욱이 북중어업협정에 의한 2004년부터 매년 많게는 수천 척 이상의 중국 어선의 동해 북한 수역 조업에 따른 동해 오징어 남획과 기상 악화시 중국 어선의 울릉도 연안 피항에 따른 해저시설물 훼손, 해양쓰레기 배출, 기름 누출 등으로 2중고를 겪고 있는 섬이다.지난해 9월 울릉도를 강타해 아직까지도 복구가 한창인 태풍 마이삭과 하이선이 보여 주듯 동해 한 복판에 위치하여 각종 자연재해에 수시로 노출되어 있다. 해안가 50t의 육중한 테트라포드를 터널 내부로 옮길 정도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였고, 방파제가 유실되고, 울릉도 해안 지질 관광 명승지인 해안산책로가 파손되고, 항구내부에 정박하였던 10여척의 선박들도 침몰되거나 파손되는 피해를 입었지만, 태풍 피해보다 울릉도 주민들을 더 가슴 아프게 했던 것은 섬 주민으로서 소외감이었다. 언론에서 흔히 태풍이 동해상을 빠져 나간다고 보도할 때 울릉도는 본격적인 태풍 영향권의 시작이다. 그래서 울릉도 주민들은 절규하였다. “울릉도도 대한민국 땅입니까?” 그동안 태풍 때마다 울릉도를 유령 섬 취급하였던 언론의 태도와 함께 육지와의 교통, 의료, 교육, 문화 등 총체적인 낙후 지역에 사는 울릉도 주민들의 뿌리 깊은 소외감을 대변한 절규였다.울릉도는 육지와의 교통, 의료, 교육, 문화 여건이 매우 열악하다. 1년에 100일 넘게 여객선 결항은 물론이요, 3시간 이상의 배 멀미로 주민들은 고통받고 있다. 울릉도를 찾는 관광객 또한 마찬가지이다.다행히 울릉도 교통여건 개선에 관심을 둔 뜻있는 분들이 모인 업체에서 9월 16일 예정으로 2만t급 초대형 카페리호를 취항한다고 하니 결항률의 획기적 개선이 기대되지만, 코로나19에 의한 관광객 감소 등을 고려할 때 얼마나 안정적으로 운항이 유지될 지는 여전히 걱정이다. 통제와 규제의 여객선 안전 대책에서 벗어나 섬 복지 차원에서 정부의 대선 공약이었던 연안 여객선 공영제의 도입이 반드시 필요하다. 선사의 영세성, 여객선의 노후화 등 문제와 함께 육상 교통비보다 과도한 여객선 요금(포항-울릉간 여객선 요금은 km당 316원, 서울-부산간 ktx 요금은 km당 135원 가량)이 주민과 관광객의 발목을 잡고 있다.역사를 돌이켜보면 2가지 섬 정책의 민낯을 보게 된다. 1629년 조선 조정은 제주도민들이 육지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는 정책을 200여년간 펼쳤다. 제주도민들이 말, 전복 등 특산물의 지나친 진상과 그에 따른 부역 증대 등으로 섬을 떠나자 특산물 진상, 군액 축소 등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한편으로 1417년 조선 조정은 울릉도(독도) 섬을 비우게 하는 정책을 400여년간 펼쳤다. 섬에 사람이 거주하면 왜구들의 노략질이 많아지고 섬을 기반으로 본토에 침략하기 때문에 섬을 비우자는 논리였다. 섬 주민의 삶과 섬의 가치를 등한시한 정책이었다.섬의 날 제정을 계기로, 그리고 한국섬진흥원 개원을 계기로 보다 섬 주민 중심의 섬 정책을 기대해본다. 더불어 섬은 그 특성상 섬마다 높은 다양성과 함께 단편적인 학문체계로는 접근하기 힘든 복합성이 존재한다. 육지와 바다의 통시적 접근이 필요한 공간이다. 다학제간 현장 중심의 접근이 가장 필요한 곳이다. 살고 싶은 섬, 가고 싶음 섬, 지속가능한 섬에 대한민국의 미래를 풀 열쇠가 있다. 그 핵심에 울릉도(독도)가 있다.

2021-08-22

반세기 동안 땀과 수고로 바꾼 대한민국의 위상

박문하전 포항시의회 의장 우리나라가 태극기를 달고 국제 마라톤 경기에서 처음 우승한 것은 서윤복 선수가 출전한 1947년 미국의 보스톤 마라톤 대회였다. 160cm 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체구의 동양인 선수가 태극기를 가슴에 붙이고 결승선으로 다가 올 때도 저게 어느 나라 국기인지 대한민국을 아는 나라가 없었다고 한다.동대문에서 서대문까지 전차를 따라 다니며 연습을 했고 일본이 버린 헌옷을 주워 입고 리어카 바퀴에서 떼어낸 고무를 신발에 덧대어 뛰었다는 안타까운 후문도 있다.마라톤 출전을 위해 보스톤으로 갈 때는 미 군용기를 얻어 타고 갔지만 귀국할 때는 여비가 없어 화물선을 얻어 타고 18일 만에 도착했다고 하니 실로 믿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눈물겨운 이 모습이 그 당시 대한민국의 실상 이었다.지난 20세기의 대한민국은 시련과 절망의 연속이었고 더불어 고난과 도약이 교차한 격동의 나날 이었다. 1945년 식민지 시대가 종식되고 1948년에 남북한이 각각 독자적인 정부수립을 한후 전쟁과 정치불안,보릿고개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북한과 달리 민주와 자유, 시장경제를 채택한 대한민국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함께 수출중심의 새로운 경제 정책의 시동을 건다. 그 정책원년인 1962년 수출규모 5천660만 달러는 아프리카의 우간다, 카메룬에게도 뒤지던 세계 104위 였다.대한민국의 경이로운 발전을 상징하는 백미는 2010년, 국제사회의 엄격한 실사과정을 통해 국제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산하 개발원조위원회(DAC)가입된 일이다.전문가들은 지난 50여년 동안 한국이 받은 원조규모는 개략 127억달러 정도로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600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처럼 반세기 전만해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대규모원조를 받던 수혜국에서 드디어 원조를 주는 공여국으로 옷을 갈아입은 것이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2번째이고 세계에서는 23번째 쾌거이다. 이처럼 놀라운 성공스토리는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다.얼마전 코로나19 와중에 감동스런 기사하나가 실린 것을 보았다 ‘50여년 만에 한국으로부터 받은 보답’이란 제목의 이 보도는 우리나라의 위상과 국격을 확인시키기에 충분했다. 미국 뉴욕주에 사는 샌드라 네이선씨는 은퇴한 인권, 노동변호사로 올해 75세인 그녀는 하루에 20만명 이상이 발생하는 코로나 와중에 50년전 한국에서 평화봉사단으로 일한 자신에게 ‘코로나19 생존박스’라는 소포가 배달되고 있다.이 예기치 못한 선물 안에는 한국을 위해 봉사한 귀하의 헌신에 감사함을 표시하고 마스크 100장, 항균장갑, 홍삼캔디, 은수저, 비단부채, 피부보호제 등이 들어 있었다. 네이선씨는 여러 언론인터뷰에서 ‘마치 1968년부터 나를 향해 기나긴 여행을 다녀온 상자 같았다. 거기에 담긴 마법 같은 것이 나를 눈물짓게 했다’고 밝히고 있다.시카코 대학을 갓 졸업하고 21세 때 한국평화봉사단에 자원한 네이선시는 춘천에서 여고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그 당시 한국은 질병과 독재, 가난과 6·25전쟁으로 폐허처럼 찌들어 있었다.아이들은 신발도 없이 돌아다녔고 밤이면 쥐들이 천장을 뛰어다니는 소리로 밤잠을 설쳐야 했다. 뒷간에는 화장지도 없었고 겨울에는 얼음을 깬 물로 세수를 해야 했다. 살을 에는 추위에도 교실에는 작은 숯불난로 하나가 전부였다.이런 환경에도 학생들의 영어공부에 대한 열정은 추위를 녹일 정도였다. 그리고 2년 후 정든 학생들을 뒤로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그로부터 50년 후 눈부신 발전으로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한국이 나이 든 네이선씨를 지켜 주겠노라며 잊지 않고 코로나 19 생존 물품을 보낸 것이다.10년전 2011년에 한국정부로부터 초청을 받아 남편과 함께 서울을 찾은 그는 ‘상전벽해’라는 말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을 것 같다며 감동했다는 말도 전 한다.독일의 역사가 슈펭글러는 그 어떤 강대국이나 민족도 흥망성쇠를 피할 수 없다고 했지만 토인비는 그런 역사 숙명론을 거부하면서 자연 조건이 지나치게 좋은 환경에서는 제대로 된 문명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강조 한다.이집트 역사도 독사가 우글거리는 나일강변 밀림지역으로 옮겨 농경과 목축을 선택한 부족이 찬란한 문명을 일궈냈다. 중국의 문명도 온화한 기후와 맑은 물이 흐르는 쾌적한 양쯔강 아니라 쿤룬 산맥의 혹독한 추위로 배조차 다닐 수 없고 사시사철 혼탁한 물이 흐르는 험난한 황허 강변에서 꽃피웠다.오천년 동안 외침과 가난에서 자유롭지 못한 대한민국, 부존자원 하나 없이 분단위협에 시달리면서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반세기만에 원조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바꾸어 놓은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다.오직 앞만 보고 다려 온 반세기 동안 피땀으로 쌓아 올린 금자탑을 다가올 50년에도 무너지지 않도록 더 높이 더 튼튼하게 쌓아가는 그런 대한민국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2021-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