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불법사금융 ‘대리입금’ 주의보

불법사금융이자 고금리불법사채의 한 형식인 대리입금은 콘서트 티켓이나 게임 비용 등이 필요한 청소년을 유인해 소액을 단기로 빌려준 뒤 고액 이자를 챙기는 방식이다. 대리입금 업자들은 SNS 등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접근해 1만~30만원 내외의 소액을 2~7일간 단기 대여해주는 방식으로 영업하고 있다.친근한 지인 간의 거래처럼 보이게 하려고‘이자’라는 말 대신 ‘수고비’나 ‘사례비’라는 용어를 쓰고, ‘연체료’라는 단어 대신 ‘지각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업자들은 수고비로 대출금의 20~50%를 요구하고, 약정기간을 넘기면 시간당 1천~1만원의 지각비를 부과한다.현재 대부업법과 이자제한법에는 법정 최고금리가 각각 연 27.9%, 연 25%로 명시돼 있지만, 시행령에서 최고금리가 모두 연 24%를 넘지 못하도록 돼 있어 법정 최고 이자율 상한은 연 24%이며, 이보다 높은 이자를 받으면 불법이다. 대리입금의 수고비와 지각비를 이자율로 계산했을 경우 약 20~50% 수준이며, 빌리는 돈이 소액이라 체감하기 어려울 뿐 실질적으로는 연 1천%에 달하는 곳도 있다.대리입금 피해 사례를 보면, 청소년 B군은 3일 동안 10만원을 빌리고 14만원을 상환했는데도 36시간 연체에 대한 지각비 5만원(시간당 1500원)을 내라는 협박 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이들 업자들은 신분 확인을 빌미로 가족이나 친구의 연락처 등을 요구하고 있어 개인정보 유출, 불법 추심 등 2차 피해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거래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대리입금은 코로나19로 호주머니가 텅 빈 가정의 청소년들을 유혹해 경제파탄에 이르게 하는 색깔 고운 독버섯이니 절대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한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10-05

포항이 국제항로의 MVP가 되려면

가끔 차가운 컨테이너 화물차량만 오가며 삭막함마저 풍기던 영일만항이 조만간 사람들이 북적이는 국제항만다운 모습을 보일 것 같다. 지난 9월 11일 서울에 본사를 두고 있는 두원상선이 포항을 모항으로 하는 국제카페리선(Eastern Dream호)을 투입하여 러시아와 일본을 오가는 정기 항로를 개시한 때문이다. 앞으로 부두 주변 상가에서 ‘안녕하세요’라는 목소리에 곤니치와(일본어)나 즈드랏스부이쪠(러시아어), 니하오(중국어) 등이 뒤섞여 시끌벅적한 모습을 보게 될 수도 있다. 비록 국가항만 기본계획이 수립된 지 11년 만이기는 하지만, 조만간 국제크루즈 여객부두와 국제여객터미널도 제 모습을 갖추게 된다. 운항을 시작한 국제카페리선은 코로나19로 인한 방역 문제 등을 고려하여 연말까지는 화물만 다룰 예정이라고 한다. 앞으로 코로나19 문제가 서서히 수습됨에 따라 영일만항은 화물과 승객을 모두 수용하게 될 이 국제카페리 항로를 통해 물동량도 착실히 늘어날 것이다.포항을 기점으로 운항을 개시한 국제카페리선의 행선지는 러시아어로 동방을 지배 내지는 정복한다는 뜻을 지닌 부동항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과 일본 서해안 북쪽에 위치한 교토부(京都府)의 관문으로 러일전쟁 당시 일본 전함들이 드나들던 군항이기도 했던 마이즈루(舞鶴)다. 포항-블라디보스톡-마이즈루가 삼각형을 이루는 이 국제항로의 발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이 국제카페리선은 포항을 주 2회, 러시아와 일본을 주 1회씩 운항할 예정이며, 매주 토요일은 포항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출항하며 매주 수요일은 포항에서 일본 마이즈루로 출항한다.지금 이 항로에 투입된 국제카페리선은 항차당 최대 여객 480명, 컨테이너 130개(TEU), 자동차 250대, 중장비 50대 정도가 최대치다. 하지만, 향후 이 노선이 활성화되면 투입선박이 늘어날 수도, 보다 대형 선박으로 교체될 여지는 충분히 있다. 항로도 상황에 따라서는 러시아와의 공동산업단지가 조성되고 있는 중국 지린성 훈춘(吉林省琿春)과 북한 나진항까지 연결되는 때가 오게 된다면 삼각형의 항로는 오각형을 이루며 그야말로 포항의 별(star)이 될 수도 있다.무엇보다 기대되는 것은 한일 간 항로다. 사실 2011년 당시 처음 일본의 마이즈루시와 정기 항로 개설과 관련한 협상테이블에 나섰을 때도 크루즈를 기대하던 일본 측과 달리 필자는 당장 화물과 승객 모두를 조금이라도 수용할 수 있는 카페리에 더 관심이 갔었다. 한일관계를 차치하더라도 당장 일본 서해안지역과 포항 간 국제크루즈선을 채울 정도의 관광 수요가 있을 것으로 상정하는 것은 무리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듯이 실무적 관점에서는 화물과 승객을 함께 수용하면서 조금씩 저변을 확충해 나갈 수 있는 카페리항로가 더욱 효율적인 것만은 틀림없다. 물론 이 노선의 관광수요가 결코 작다고 보기도 어렵다. 당시 일본 교토부와 마이즈루시가 계획하고 있던 크루즈상품의 주제는 ‘밀레니엄 시티 투어’였다. 이는 포항이 경주를, 마이즈루가 교토를 배후에 두고 있는데 착안한 것이다. 때마침 영일만항과 마이즈루항은 각국 정부로부터 비슷한 시기에 환동해거점항만, 환일본해거점항만으로 지정받았다. 특히 이번에 개설된 포항-블라디보스톡-마이즈루를 잇는 국제카페리항로는 일본에서 극동러시아를 정기운항하는 유일한 페리항로가 된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그렇기에 2012년 2월 이후 현재까지 3선에 성공한 다다미 료조(多3005見良三) 마이즈루시장은 지난 17일 포항발 국제카페리선 이스턴드림호를 환영하는 자리에서 ‘간사이(關西)경제권의 일본 측 게이트웨이를 지향’한다고 선언하였다. 이날 마이니찌신문은 다다미 시장이 이강덕 포항시장과의 온라인 회담에서 포항과 마이즈루 간 화물 집중을 위한 정기 정보교환체제 구축, 관광세미나 개최, 국제페리를 이용한 청소년교류 3가지를 제안하였으며 이 시장도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보도하였다.이번 국제카페리항로의 출범에 대해 기대 반 우려 반의 시각이 적지 않다. 하지만 포항에서 블라디보스톡과 마이즈루를 연결하는 국제카페리의 MVP(Maizuru-Vladivostok-Pohang) 노선이 국제항로 가운데 그야말로 최우수노선(MVP: Most Valuable Player)이 되려면 포항도 러시아, 일본에 뒤지지 않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다음 몇 가지 사안을 제안한다.첫째, 코로나19로 지금 당장이야 연말까지는 여객을 수용하지 않는다는 미봉책을 세웠다. 하지만 앞으로 코로나19가 수습되더라도 지금 세계 각국이 철저하게 마련하고 있는 선박과 부두 등에 대한 검역과 방역에 대한 가이드라인과 유사한 수준의 대책은 구축해 둘 필요가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카페리선인 만큼 컨테이너부두와 여객부두, 여객부두와 여객터미널 등에서의 물자와 사람의 원활한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선박과 화물, 그리고 승객 모두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철저한 방역 대책과 시설을 정비하고 점검해두어야만 한다. 이것이 전제되어야만 포항에 도착한 외국인 관광객을 시내 식당, 숙박업소 등에서 안심하고 환영할 수 있고 또 이 항로를 통해 일본이나 러시아로 여행을 가려는 국내 관광객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둘째, 포항과 마이즈루 사이의 노선은 경주와 교토라는 두 나라의 천년고도를 배후에 두고 있는 만큼 양 지역 관광객의 교차 방문과 관련 학자들의 학술교류를 정례화된 프로그램으로 만들 여지가 충분하다. 따라서 포항시는 경주시와 함께 카페리 노선을 통한 영일만항의 물동량 창출과 경주 관광객 유치 효과의 극대화를 위한 긴밀한 협력체제를 구축해야만 한다. 영일만항은 포항에 있지만 작게는 대구 경북 크게는 우리나라 전체를 시장으로 하는 동해의 관문으로 성장, 정착시킨다는 보다 넓은 범위의 전략을 마련해 나갈 필요가 있다.셋째, 이번 국제카페리 항로 개설을 계기로 러시아와 일본의 관광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 소비기반을 지금부터 차근차근 마련해 나가야만 한다. 일례로 숙박 기능을 갖춘 온천시설을 마련하여 북방지역 러시아와 중국 동북 3성의 관광객을 유치하는 방안도 생각할 수 있다. 아울러 영일만항에 기항하는 선박의 승무원들이 휴식할 수 있는 호텔 및 위락시설 등도 필요하다. 이왕이면 흥해지역 재건, KTX역세권 개발 등과 연계시켜 시너지효과를 도모하였으면 한다. 가능하다면 일본 교토부의 유명 호텔, 음식점 등의 포항 현지법인 유치도 병행하였으면 좋겠다.넷째, 영일만항에 도착한 국제 여객들이 근거리에서 쇼핑하고 휴식하고 즐길 수 있는 시설, 영일만항에 기항한 다양한 선박들이 필요로 하는 식품 등 주요 보급물자를 공급할 수 있는 보급기지 등도 최대한 빠르게 확충할 필요가 있다. 냉동냉장전용 컨테이너를 수용할 수 있는 영일만항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마지막으로 외국인 승객, 선원이 영일만항에서 포항, 경주 시내로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정기 셔틀버스의 운행, 외국어 구사가 가능한 택시 기사의 확보 또는 육성, 러시아 루블화와 일본 엔화, 중국 위안화 등을 편리하게 교환할 수 있는 환전센터의 설치 등도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도 많은 것은 아니다. 코로나19로 국제관광객들이 본격적으로 이동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이 모든 것을 준비할 수 있는 최고의 적기다./김진홍 한국은행 포항본부 부국장

2020-10-04

춤추는 ‘허깨비 풍선’

안재휘 논설위원가수 나훈아가 작심 발언을 내놨다. 그는 추석 특집 KBS 실황 공연 도중 “국민 때문에 목숨 걸었다는 왕이나 대통령을 본 적 없다”면서 “국민이 힘이 있으면 위정자(僞政者)가 나올 수 없다”는 멘트를 날렸다. “KBS는 공영방송이지요? 두고 보세요. KBS가 거듭날 겁니다”는 의미심장한 말도 했다. 상식을 가진 국민이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말이다.그런데 이 지극히 상식적인 발언을 놓고 야당이 먼저 반색이다. 장제원 국민의힘 의원은 페이스북에 “잊고 있었던 국민의 자존심을 일깨웠다”고 무릎을 쳤고, 원희룡 제주지사는 “(정치인으로서) 너무 부끄럽기 짝이 없다”고 했다. 반면 여권은 “정치적으로 ‘오버’해서 해석하지 말라”고 야당에 퉁을 놓는다.우리 공무원이 NLL 북방에서 북한군의 10여 발 총탄에 사살되고 불태워진 천인공노할 사태가 발생했다. 비극이 청와대에 보고된 시각은 밤 10시인데, 문재인 대통령에게 정식보고한 시각은 다음날 오전 8시 반이란다. 안보 부처 장관·참모들은 새벽 1시에 긴급회의를 열었고, 문 대통령의 유엔연설도 나왔다는데 참 해괴한 일이다.사건 직후 잠시 분기탱천하던 집권당은 북한 전통문에 담긴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에 일제히 입을 닫았다. 청와대는 숨겨왔던 김정은의 친서를 강력소화기로 써먹었다. 이 나라 최고 궤변가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김정은을 ‘계몽 군주’라고 칭송했다.예상대로, 서울동부지검이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의 군복무시절 황제 휴가 논란에 대해서 면죄부를 선사했다. 예측을 벗어난 것은 추미애 장관의 적반하장(賊反荷杖) 행태다. 동부지검은 수사결과와 함께 추 장관이 보좌관에게 카투사 대위의 전화번호를 알려준 카톡 내용을 함께 까발렸다.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는 추 장관의 주장을 한 방에 뒤집은 셈이다.추 장관은 “전화번호는 줬지만 지시는 안 했다”는 기괴한 논리를 들고나와 비판자들에 대한 가공할 보복 소송전을 을러댔다. 시중에 “술은 마셨지만, 음주는 안 했다”는 식의 패러디가 폭포를 이룬다.아무래도 집권 세력은 당분간 ‘추미애 사석 놀이’를 더 끌어가고자 하는 게 틀림없다. 문재인 정권은 강력한 팬덤정치의 마력을 중심으로 권력 프로그램을 힘차게 작동하고 있다. 문제는 야당이 맥없이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논리적 사유가 거세된 세상에서 야당은 권력의 바람 장난에 영락없이 놀아나는, 춤추는 ‘허깨비 풍선’이다.정권을 비판하는 여론은 허공에 겉돌 따름, 대안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고도의 정략 아래 뿌려지는 사석 밑밥에 눈이 어두워 도무지 ‘대안 정당’의 위상도, 지지여론을 일궈낼 적합한 수단도 구축하지 못하는 제1야당 국민의힘에 대한 실망이 깊다. 갈곳 잃은 민심은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길을 묻고 있는데 마냥 허깨비춤만 추고 있으니 대체 어쩌자는 건가. 가수 나훈아의 상식발언 한마디에 박수나 치는 초라한 야당 수준으로 대체 뭘 할 수 있나.

2020-10-04

LID 증후군

어느 때보다도 조용한 추석명절을 보냈다. 추캉스라 하여 제주도 등 일부 관광지는 추석 연휴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몹시 붐볐으나 보통의 가정은 쓸쓸할 만큼 조용한 추석명절이었다. 특히 정부가 코로나19 대유행을 우려, 언텍트 추석을 권하면서 노인들의 추석연휴 뒤끝은 여운이 남는다. 1년에 겨우 명절 두 번 정도 집으로 찾아오는 자식과 손자소녀를 이번 추석에는 만나보지 못함이 마음을 영 편치 않게 했다는 것이다.코로나19로 “올해 추석은 집에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막상 명절을 보내고 나니 그 허전함이 크다.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된다면 마음의 병이 될까봐 두렵다.LID 증후군은 핵가족화에 따른 노인의 고독병을 일컫는다. 자녀가 분가해 떠나고 주위에 의지를 했던 사람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면서 생기는 손실감(Loss), 자녀와 떨어져 대화될 상대를 잃은 소외감(Isolation), 또 이런 상태가 오래 동안 지속되면서 생기는 우울증(Depression) 등의 표현을 줄여서 한 말이다.전문가들은 LID 증후군이 오래 지속되면 무기력, 방황 등의 증상이 나타나고 삶의 질은 자연 떨어지게 된다고 한다. 이런 부정적 정서가 기억력, 언어 등 인지능력 저하로 이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노인들은 비록 1년에 두 번이지만 명절 때 자식과 손자손녀와의 만남을 삶의 공백을 메우는 기회로 여긴다.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갑작스레 바꿔진 명절 분위기로 어쩔 수 없다고치자. 하지만 노인들의 속내는 섭섭하기 짝이 없는 명절이었다. 비대면 추석을 보낸 젊은 세대는 부모세대의 섭섭함과는 달리 다수가 해방감으로 보냈다고 반응했다고 하니 세대 간의 온도차가 느껴지는 대목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0-10-04

보고? 상황 좀 더 보고 하지

박화진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코로나 바이러스 여파로 이번 추석은 을씨년스럽게 보냈다. 혈육 간 정 나누기 좋아하는 민족의 최대 명절인데 부모와 조상을 찾지 않는 것이 오히려 효도였으니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는 일을 많이 겪게 되는 요즘이다.한가위를 앞두고 우리 공무원 한 사람이 반도 한 쪽 땅에서 총살을 당하고 시신이 불태워졌다. 이런 만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해 아직도 같은 민족이라고 감상에 젖어야하는지? 역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라 당혹스럽다. 최근에 드물게도 같은 일을 두 번 경험하게 된다. 세월호의 시간, 당시 대통령 행적을 두고 아직도 논란과 억측이 난무하고 있는데 이번에 우리 공무원 한 사람이 총살되고 시신이 불태워지는 사건에 대통령의 시간을 두고 비슷한 논란이 쌓여가고 있다. 함정이 출동하고 국가안보실 참모들이 대응태세에 돌입한 상황임에도 정착 최고 사령탑인 대통령에겐 장시간 보고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민안전의 최후 보루이자 최종 책임자인 대통령이 중차대한 시간에 보고를 받지 않았거나 지연되었다는 것은 어떤 사유로도 합리화될 수 없는 일이다.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잃게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일까? 두 가지로 추론해본다.먼저 사태의 심각성에 대한 참모들의 안이한 판단 아닐까? ‘이 정도의 상황을 심야시간에 곤히 주무시는 대통령을 깨워서야 되겠느냐! 불충스럽게’ 다음은 보고 받는 사람의 평소 태도에 대한 참모들의 생각이다. ‘VIP께서는 심야에 잠을 깨우면 싫어하시니 어지간한 일은 아침에 하는 게 낫다’ 둘 다 문제다. 초임간부시절 상황근무를 하면서 상황보고에 대한 애로를 많이 겪었다. 경찰은 24시간 비상대기 조직이다. 여느 공무원들의 숙직근무와 달리 야간 상황실은 긴장의 연속이다. 특히 관내 강력사건이 발생하면 단위 지휘관인 경찰서장에게 아무리 심야시간이라도 내선전화로 취침중인 경찰서장을 깨워서 보고하고 지침을 받는다. 긴급한 상황임에도 잠을 깨운 상황요원을 타박하여 보고를 위축시킨 지휘관들이 있었다. ‘머 이런 일로 잠을 깨우고 보고하느냐! 아침에 하지’라는 꾸중아닌 꾸중을 듣게 되면 다음부터는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보다는 보고하느냐 마느냐 여부로 고민에 빠진다. 안하면 보고누락과 지연으로 질타를 받고 하면 하찮은 상황으로 잠을 깨운다며 핀잔을 받게 되니 어지간히 힘든 결정이다. 어느 경찰서장이 부임 일성으로 야간 상황근무의 중요성을 일깨우며 ‘아무리 심야시간이라도 나를 깨워라’ ‘지휘관의 잠을 깨우는 일에 위축되지 말라’고 했다. 이후 심야 보고여부에 대한 부담감 없이 일을 처리했던 좋은 기억이 남아있다. 보고를 받는 사람의 보고받는 태도와 인식이 중요하다. 보고자에게 보고외적인 부담을 주지 않아야 보고는 편히 이루어진다.우리 대통령께서는 그러시지 않겠지만 깨우지 않아서 보고받지 못했다는 변명을 하면 “국민이 위태로울 때 목숨을 거는 왕이나 대통령을 겪어보지 못했다”고 나훈아에게 또 한소리 듣게 된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 자주하는 정부인데 국민 위해 목숨 거는 대통령, 이것도 한 번 경험해보고 싶다.

2020-10-04

양치기 소년의 교훈

곽지영포스텍 산업경영공학과 산학협력교수2018년 방영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스페인 그라나다를 배경으로 개발된 증강현실 게임을 소재로 한 드라마다.사용자가 스마트렌즈를 착용하면 그 위치에서 게임 속 세상으로 자동 로그인되어 현실에는 없는 게임 캐릭터들과 싸운다는 설정이다. 그러던 중 주인공과의 게임 속 전투에서 사망한 사용자가 현실에서도 죽게 되는 심각한 버그(Bug, 컴퓨터 시스템이나 프로그램의 오류를 의미)가 생긴다. 더욱이 사망한 사용자는 게임 속 패배할 때의 모습 그대로 망령처럼 반복해서 나타나 주인공을 죽이려 한다.얼마 전부터 나는 차량에 탑재된 스마트 AV 장치의 전원을 아예 꺼두게 되었다. 퇴근 길 차 안에서 음악을 듣는 꿀맛 같은 휴식 시간과 낯선 길을 운전할 때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주는 네비게이션을 모두 포기하면서다. 게다가 다음에 차를 바꾸게 되면 그 회사 차는 이제 절대 사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있다. 소싯적부터 오랫동안 동경해 온 ‘드림 카’였을 뿐 아니라, 연비, 승차감, 주행감, 코너링 등 차의 성능 면에서는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이 마음에 쏙 드는 차인데도 말이다.그 이유는 요즘 운전자들 사이에 골칫거리로 급부상한 차량용 DMB 재난경보 문자 때문이다. ‘삐삐삐삐삐~’ 뇌를 직접 두드리듯 거슬리는 강한 불협화음 경보음과 함께, 네비게이션 화면을 뒤덮으며 나타나는 그 문자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한국에 비상 경고 발령 / 10:39 / 알 수 없음 / 도/광역시 / 피해 지역 보기 / 취소”. 어떤 재난이 어디에 발생했다는 건지 제대로 확인 가능한 문자는 몇 없다. 재난 내용과 위치 확인이 가능하더라도 벌써 2~3주 전에 소멸한 태풍에 대한 경보이거나, 내 현재 위치와 100km 이상 떨어진 곳에서 벌어진 ‘알 수 없는 일’ 때문이다. 알함브라 게임 속 망령을 연상시키는 이 미스터리한 문자는 주행 중 TPEG 수신 상태가 바뀔 때마다 똑같은 모습으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나타난다.한 시간 주행 중 적어도 30번 이상 들리는 경보음과 지워도 지워도 똑같은 모습으로 다시 찾아오는 같은 메시지들. 견디다 못해 차단하는 방법에 대해 제조사에 문의했지만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올 뿐이었다.알함브라 주인공은 현실과 가상세계를 넘나들며 버그와의 치열한 혈투를 벌인다. 자기를 희생하며 버그와 싸운 주인공의 열정까지는 아니더라도, 네비게이션 화면을 가려버리는 문자를 지우려다 아찔한 상황을 경험한 후, 아예 시스템 전원을 꺼버리게 된 운전자들의 애타는 마음 정도는 좀 헤아려 줬으면 싶다.재난 알림은 위험한 상황에 피해를 막고 소중한 생명을 지키는 생명줄이 되어야 옳다. 늑대가 나타났다며 거짓 알림을 반복한 양치기 소년의 최후, 있지도 않은 늑대에 놀랐던 동네 사람들이 정작 진짜 늑대를 본 양치기의 외침을 외면한 이유를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양치기 소년의 뒤늦은 후회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2020-10-04

시절인연

중학생이 된 그해 여름, 나는 묵계에 갔다. 남후면 개곡 예배당에서 안동 시내로 와서 버스에서 내린 뒤 다시 한참을 걸어서 반대 방향에 있는 길안면 묵계 교회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고 한나절을 흔들리고 나서야 도착했다. 작은 교회 두 곳이 연합해서 중고등부 수련회를 이곳에서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2박 3일이지만 오고 가는 시간이 대부분인 일정이었다. 그 교회에서 내려다보이는 앞들에는 강이라고 하기엔 뭣하고 내라고 하기엔 폭이 넓은 물이 흘렀다. 돌다리도 떠내려갔는지 바지를 둥둥 걷고 신발과 성경을 들고 건너가서 만휴정 계곡 너럭바위에 올라서 예배를 드린 기억도 있다.중학교 이후 묵계리를 다시 찾은 것은 결혼 후였다. 포항에서 본가인 안동을 가려면 죽장을 지나 구불구불한 국도를 달려 묵계리를 지나야 안동 길안에 들어설 수 있었다. 추석, 설을 포함해 1년에 두 번 이상은 지나다니는데 가끔은 차를 세우고 묵계서원과 만휴정을 거닐면 매번 방문객이라고는 우리뿐이었다.어느 해 겨울, 글동무들과 안동 고택에서 하루를 묵고 돌아오며 만휴정에 들렀다. 너럭바위를 흐르는 폭포가 하얗게 얼어 장관이었다. 하회마을, 봉정사는 유명해서 다들 알고 있지만, 묵계서원과 만휴정은 지인들도 처음 듣는 곳이라 안동 곳곳에 숨겨진 보물이 많구나 하며 내 고향 칭찬을 했다. 더불어 이런 좋은 곳을 알고 데려 와줘 고맙다는 말도 얹어주니 더 으쓱했다. 그때도 한적하기만 해 계곡에 우리 발소리만 울렸었다. 지인 여러 무리를 계절 따라 이곳으로 데려와 산책만 해도 모두 고즈넉함에 반해버리곤 했었다. 나만 아는 그런 숨겨진 보물로 남아있을 줄 알았다.지금은 강산이 네 번은 바뀌어 맨발로 건넜던 곳에 차가 다닐 수 있는 다리가 놓였고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높은 인기 덕분인지 관광객들을 위한 주차장도 생겼다. 아무 때나 가도 사람들로 북적이고 이병헌과 김태리가 독립운동하듯 ‘러브 합시다’ 하며 악수를 나눴던 다리 앞에는 인증샷을 찍기 위한 줄이 길게 늘어섰다. 묵계서원도 따라 유명해졌다. 옛 건물 그대로에 카페가 생겼고 ‘꼬마 도령 놀이터’라는 프로그램도 생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서원 마루에 사람들이 올라갈 수 있는 곳이 몇 안 되는데 이곳은 오래전부터 문이 열려있어서 나처럼 지나는 길에도 읍청루에 올라서 옛 선비들이 느꼈던 정취를 마음껏 맛보게 해주었다.김순희 수필가만휴정은 ‘만년에 휴식을 취할 곳’이라는 뜻으로 묵계의 깊은 산골짜기 송암 폭포 위에 있다. 산수화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아름다운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정자다. 영화 ‘미인도’, KBS ‘공주의 남자’ 촬영 배경이 될만한 경치이다.지난 2015년에 보백당 종가에서 특별한 보물이 발견됐다. 1868년 ‘연시례(延諡禮)’를 지냈던 기록이 있는 일기를 찾아낸 것이다. 2017년에는 보백당 김계행 선생 서세 500주년을 맞아 ‘연시례 재현행사’가 묵계서원에서 열렸다. 연시례는 임금이 내린 시호, 교지를 지역유림과 관원들이 축하하면서 맞이하는 의식이다. 일기에는 시호를 청하는 내용과 서원·사당 수리, 행사에 대한 논의 등 연시례에 관한 모든 과정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지금까지 임금이 내린 시호를 받은 선현들은 많았지만, 그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거의 부재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보백당선생 연시시 일기(寶白堂先生 延諡時 日記)’는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크다.지난해 가을에 수련회를 함께 간 친구들을 이곳에 데려갔다. 드라마의 그 유명한 장소가 여기였다는 것은 몰랐다고 한다. 나만 따라오라고 큰소리치며 만휴정으로 향했다. 가을 단풍에 물든 계곡은 더 아름다웠고 친구들의 탄성에 물소리가 묻힐 정도였다. 교회 옆 묵계서원 마당에서 투호 놀이를 하고 누각 읍청루에 올라 기둥 사이에 시절이 걸어놓은 풍경을 사진에 가득 담았다. 주차장 마당에 동네 주민들이 사과를 내놓고 팔았다. 단풍만큼 붉은 사과를 한 상자씩 싣고 내년에 또 안동에서 보자며 아쉬운 작별을 했다. 좋은 곳은 친구들과 나눌 때 더 좋은 추억으로 간직된다.

2020-10-04

대한민국 철도중심도시 ‘영주’를 말하다

장욱현 영주시장영주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철도도시의 하나로, 커다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도시로 손꼽힌다.영주는 1974년부터 1999년까지 25년간 서울, 부산, 대전, 순천과 함께 전국 5개 지방철도청이 있던 곳으로, 오랜 기간 철도수송과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해왔다.영주에 자리한 한국철도 경북본부는 개청 후 강원도와 경북북부지역 석탄산업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고 강원도, 경북, 충북지역의 중앙선, 태백선, 영동선, 경북선 등 4개 노선 690km를 관장해왔다.영주지방철도청은 한때 종사원이 7천여 명, 하루 여객 2만여 명, 화물 12만 여t의 수송을 담당할 정도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지난 9월 한국철도가 코로나19 장기화에 따른 경영위기 극복을 위해 구조개혁을 발표했다.발표내용에 따르면 한국철도 경북본부는 대구본부를 흡수해 기존 6처, 4관리 역, 18사업소와 1천300여명에서 1단 7처, 11관리 역, 29사업소와 3천여 명으로 대폭 확대됐다.관할 구역은 경북도청 신도시를 포함해 11개 시와 7개 군으로 대구, 경북 전체를 아우른다.영주시 지역경제에 기여하는 파급효과도 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경북본부와 대구본부 통합과정에서 왜 대구가 아닌 영주로 통합이 이루어지느냐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그러나 중앙선과 경북선 영동선이 모두 통과하는 영주의 경북권역 역할 등을 고려할 때 더욱 타당한 것으로 판단돼 최종적으로 이같은 결정이 내려졌다.실제로 조직개편 후 한국철도 손병석 사장은 지역본부 가운데 대구경북본부를 가장 먼저 방문하면서 큰 관심과 기대를 나타내기도 했다.영주에서는 철도도시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사업들이 차근차근 진행중이다.먼저 철도 중심도시를 상징하는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 영주역사 신축이 본격 추진 중이다.역사신축은 중앙선 도담∼영천 복선전철 건설사업의 일환으로, 시는 역사 신축과 함께 역 광장과 대학로를 활용해 전통과 현대의 어울림이라는 주제로 도시재생뉴딜 공모사업을 추진, 새롭게 지어질 영주역사와 더불어 새로운 관광명소를 조성해 구도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계획이다.영주의 지도를 바꿀 또 하나의 중요 사업인 중부권 동서횡단철도 건설 사업은 3도(충남, 충북, 경북) 12개 시군(서산~당진~예산~아산~천안~청주~괴산~문경~예천~영주~봉화~울진)에 걸쳐 2030년까지 추진되는 사업으로 총연장 330㎞, 총사업비 3조 7천억에 달하는 대규모 국책사업으로 추진되고 있다.서해안 신산업벨트와 동해안 관광벨트 연결로 국토 균형발전과 중부권 12개 시군의 발전을 견인할 신성장 동력을 창출하고, 교통물류의 축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해 낙후지역의 교통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꿈의 노선이다.그동안 소외된 동서개발 축이 만들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서해안 신산업벨트와 동해안 관광벨트를 이어주는 역할도 담당하게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동서횡단철도가 완공되면 영주시는 중앙선 복선전철화사업과 함께 1970∼80년대 사통팔달의 철도중심도시로서 옛 위상을 회복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올해는 영주시가 시승격 40주년을 맞이한 역사적인 해다.그동안 영주의 많은 것들이 변화하고 발전했다.이 가운데서도 철도교통의 발달은 경제는 물론 관광분야에서도 많은 변화와 발전을 가져오게 될 기반시설로써 지역의 미래를 여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영주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역사문화도시이자 첨단산업도시, 교통의 중심도시로 다시 한 번 도약을 위해 노력 할 것이다.

2020-10-04

엄마 송편

박완서 선생님의 ‘솔잎에 깃든 정취’란 수필을 읽었다. 사변 중에 맞은 추석에 다른 음식은 몰라도 송편만은 꼭 빚으셨던 박완서 선생님께서 솔잎이 없어 송편의 정수가 빠진 것 같아 괜찮다는 시어머니를 뒤로하고 집을 나서셨다. 전시라 지뢰가 있을지도 모를 정릉까지 사촌들과 먼 거리를 걸어가 솔잎 한 소쿠리를 따왔노라는 이야기였다. 이 글을 읽고 나니 엄마의 추석 음식이 떠올랐다.우리 집도 제사를 지내지는 않는지라 명절 음식이 넘쳐나지도 않았고, 입도 짧고 기름진 음식을 잘 못 먹는 식성이어서 튀김류나 전을 많이 부치지는 않았다. 대신 엄마가 가장 신경 쓰시는 추석 음식은 송편이었다. 햅쌀을 방앗간에서 갈아와 찰지게 반죽한 뒤 작게 떼어낸 떡덩이 안에 푸른 콩 다발에서 까낸 콩과 밤을 주로 넣으셨던 엄마는, 반드시 솔잎을 깔고 송편을 찌셨다.깨끗한 솔잎을 구하기 위해 추석 전에 산에 다녀오시곤 하셨다. 언제고 집어 먹어도 솔잎 지국이 나 있는 솔향이 은은한 송편이 딱 엄마 송편이었다. 평상시 어디 다니다가도 떡집에서 다른 떡은 간간이 사 먹어도 송편을 사 먹어 볼 생각은 단 한 번도 든 적이 없다. 박완서 선생님께 송편의 솔잎은 목숨도 신경 안 쓸 만큼 없으면 미완성이라도 되는 궁합이 맞는 것이었나 보다. 엄마에게 송편의 솔잎은 어떤 기억 속의 음식이었을까?추석은 친정에서, 설은 시댁에서 보내기로 한 어머님의 결정으로 결혼 후 추석은 엄마와 보냈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가는 동안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음식은 못 먹어도 커피라도 한잔 사 마시고 화장실이라도 들르게 될 텐데 모두 조심해야 한다며 이번에는 엄마가 추석 때 오지 말라고 하신다. 엄마 솜씨의 송편을 맛보지 못하게 되었다. 아쉽지만 어린 아들과 함께 햅쌀가루로 익반죽을 해서 몇 개라도 빚어야겠다. 엄마가 좋아하시던 콩과 밤을 넣고 쪄보리라. 거리 두기 추석이라도 보름달은 온달이겠지./권현주(포항시 북구 장성동)

2020-09-28

안중근 의사를 능멸해도 책임지지 않는 정치인

서상문한국역사연구원 상임연구위원김구포럼 학술기획위원‘나라 위해 헌신하는 것은 군인의 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이라는 안중근 의사의 금언이 심한 모욕을 당했다. 이 말은 동양평화를 유린하고 대한제국의 식민화를 획책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암살한 안 의사께서 1910년 3월 26일 사형집행 2시간 전 일본헌병 간수 치바도시치(千葉十七)에게 써준 유묵의 글귀다. 뤼순(旅順) 감옥 수감 중 검찰을 오간 안 의사를 호송하면서 그의 평화애호사상과 고결한 인품에 감복해 안 의사를 기릴 상징물을 부탁한 것이다. 안 의사를 숭앙한 치바는 죽을 때까지 매일 그의 명복을 빌면서 살았다.이 유묵은 뜻이 간단해 보이지만 언중에 담긴 의미는 결코 공당의 원내대변인이 일개 병사의 탈법을 감싸기 위해 정무적 판단 없이 천박하게 인용할 만큼 가볍지 않다. 현직의 법무장관 아들이 과거 카투사군복무 시절 전화 한 통화로 두 차례 병가와 정기휴가 23일을 부대복귀 없이 단번에 사용한 걸 두고 그 아들이 수술까지 받으며 군인본분을 다 했다면서 안 의사의 “나라 위해 헌신”하는 “군인의 본분”을 몸소 실천한 것이라고 호도했다. 유력정치인 아들이 아니고선 상상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특혜”를 정당화하고 그 아들을 감싼답시고 안 의사의 말씀을 끌어다 썼지만 text와 context도 분간하지 못했다. 비유의 맥락이 전혀 다르고, 격도 맞지 않다. 공당 대변인이 갖춰야 할 역사지식과 역사의식의 천박함을 스스로 세상에 폭로한 셈이다. 자신의 비유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기나 할지 정무적 판단능력마저 의심된다. 그런 무지는 맥락적 이해에 치중할 수 없는 우리 역사교육 때문만은 아니다. 대변인 본인의 역사지식 및 역사의식의 불비 탓이다.일본군인의 부탁에 안 의사는 왜 하필 군인본분을 강조한 글귀를 써줬을까? 여기엔 절대성과 상대성을 지닌 중층적 의미가 내재돼 있다. 하나는 비록 적군이지만 국가 민족을 넘어 개인차원에선 치바를 결코 탓하거나 증오하지 않는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독실한 천주교신자였던 안 의사의 이러한 국가 민족을 초월한 절대적인 사랑의 실천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승천할 때 보여준 정신에 부합한다. 예수가 빌라도 총독 앞에서 표변해 “예수를 죽여라!”라고 광기로 외친 민중들 그리고 자기 손발에 못을 박아 사형을 집행한 간수들을 보고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한 말과 상통한다.다른 하나는 안 의사 본인을 얘기한 것이다. 자신이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은 이토 개인에 대한 증오와 원한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이토가 아시아평화를 유린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으려던 제국주의적 패도의 설계자이자 집행자였기에 대한의군 의병참모 중장이라는 신분에서 그를 단죄했다는 의미였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나라의 군인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군인의 본분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타민족의 고통으로 자기만 잘 살겠다고 남을 짓밟는 침략자를 응징한 의(義)의 실행이었다.과연 추 장관 아들의 탈법행위가 인류 보편의 사랑실천이었고, 나라 위해 일신을 버린 의(義)의 실천이었는가? 보편적 사랑과 의를 위해 몸을 던지기는커녕 극히 일신상의 개인이익에 불과한 휴가를 찾아먹기 위해 “엄마찬스”를 쓴 게 아닌가? 개인차원의 그런 일탈이 안 의사처럼 목숨까지 던져서 나라를 구한, 군인의 본분을 다한 행위가 아님이 명백한 이상 그 대변인에게는 안 의사를 능멸하고 모욕한 죄를 준엄하게 물어야 한다. 여론이 악화되자 바로 글을 내리고 일단 사과를 했지만 바닥이 드러난 공당 대변인의 무지가 어디 사과 한 마디로 메워질 일인가? 현행법으론 어쩔 수 없다 해서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정치인의 역사지식과 역사의식은 개인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공당 대변인 정도의 정치인이라면 애초부터 역사의식과 균형감각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자리에 앉아선 안 된다. 새털만큼 가볍고 경박스런 그런 빈천한 역사지식과 정무감각으로 대변인역할을 감당해선 안 된다.여야를 가릴 게 못 된다는 게 더 큰 문제다. 두 거대 정당이 사이비진보와 엉터리보수인 이상 서로 다르지 않다. 정권이 바뀌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신들이 비판하고 질타해오던 상대의 위법을 똑같이 해댄다. 정치인 자질 이전에 사람으로서의 자기성찰이 체화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에게 무시심(無邪心)은 기대할 바도 못 된다. 나라가 제대로 미쳐간다.

2020-09-28

인생 성공과 행복의 비결

조근식포항침례교회담임목사펩소던트 컴퍼니라는 기업에 찰스 럭맨이 사장으로 취임했는데 사람들은 그의 성공 신화를 부러워했고 그 성공 비결을 알고 싶어 무수한 질문을 했습니다. “사장님의 뛰어난 머리가 성공 비결입니까?” “아닙니다. 제 학력은 별 볼 일 없는 수준입니다.” “그러면 물려받은 재산 같은 것이 원동력이 되었나요?” “아니요. 저는 무일푼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실제로 찰스 럭맨은 물려받은 돈도 없고 학력도 별 볼 일 없는 평범한 남자였습니다.사람들은 그가 사장이 된 것을 궁금해하며 그 비결을 물어보았습니다. “제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11년 전 했던 단 하나의 결심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을 중요한 순서대로 처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한 그의 충고에 어리둥절했습니다. “쉽고 당연한 것 같지만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먼저 무엇이 더 중요한 일인지 결정하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그래서 매일 새벽에 일어나 오늘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며 어떤 순서대로 일을 처리해야 하는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하지만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더 어려웠던 것은 바로 그 계획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11년 동안 이 결심을 위해 노력했기에 지금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중요한 일부터 먼저 처리한다. 나는 이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저것이 더 중요한 것일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당연한 것을 제대로 지킬 수 있는 판단력과 현명함이 있다면 어떤 일이든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계몽주의 사상가. 철학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유명한 칸트는 행복의 세 가지 조건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첫째 할 일이 있고, 둘째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셋째 희망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금 행복한 사람이다.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기보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욕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내가 가진 것들과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남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길 기다리지 말고 나 스스로 행복을 느끼고 행복을 만들어 가며 주변 사람들에게 행복 바이러스를 널리 퍼뜨리는 것입니다.행복의 씨앗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행복이란 향수와 같다고도 말합니다. 자신에게 먼저 뿌리지 않고서는 남에게 향기를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멋진 사람보다는 따뜻한 사람이 되어보시기 바랍니다. 멋진 사람은 눈을 즐겁게 하나 따뜻한 사람은 마음을 데워 줍니다. 잘난 사람보다는 진실한 사람이 되어보시기 바랍니다. 잘난 사람은 피하고 싶지만, 진실한 사람은 곁에 두고 싶어지기 때문입니다. 대단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이 되어보시기 바랍니다. 대단한 사람은 부담을 주지만 좋은 사람은 행복을 주기 때문입니다.

2020-09-28

공간에 대한 전혀 새로운 해석 (디에고 벨라스케스)

스페인 바로크 미술의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1599∼1660). 그의 독보적인 회화적 능력은 독특한 공간해석에서 발휘된다. 그림은 실제 대상을 보고 그렸든, 어떠한 장면을 상상해 그렸든, 2차원의 평면에 가상의 공간을 창조한다. 미술사 서적이나 미학이론을 공부하다 보면 ‘미메시스’(μιμησι03C2)라는 용어를 접하게 되는데, 그리스어로 ‘모방’이라는 뜻이다. 모방은 어떠한 대상을 진짜인 것으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그럴 듯하게 그리는 것으로 르네상스가 발명한 원근법도 공간에 대한 모방이라 할 수 있다.동시대 대부분의 화가들이 현실을 모방하는데 몰두하고 있을 때, 벨라스케스는 그림 속 공간을 현실의 실제공간과 연결시킬 방법을 구상한다. 벨라스케스의 독특한 공간해석은 그의 대표작 ‘시녀들’에서 잘 관찰된다. 그림에 묘사된 공간은 스페인 왕궁 화가의 작업실이다. 벨라스케스가 커다란 캔버스를 세워두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 어린 마르가리타 공주가 시녀들과 함께 화가의 작업실에 들어왔다. 그런데 공주와 그 일행들이 조금 놀란 듯 보인다. 화가가 국왕 부부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바로 후경에 걸려 있는 거울에 이들의 모습이 비취고 있기 때문이다.벨라스케스 보다 200여 년 앞서 거울을 이용해 그림 속 공간과 실제의 공간을 연결시킨 플랑드르 출신의 화가 얀 판 에이크(1390∼1441)가 있다. 1434년경에 제작된 그의 대표작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에서도 거울이 사용되어 그림 밖 현실 공간을 비춰주고 있다. 그런데 두 그림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얀 판 에이크는 아르놀피니 부부를 앞에 세워두고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직접 모습을 그림에 드러내는 대신 벽에 걸린 작은 거울에 반사되어 보이도록 한다. 하지만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전혀 다른 구성을 보인다. 세워둔 캔버스 앞에 팔레트와 붓을 손에든 화가는 화면 밖을 응시하고 있다. 화면 밖에는 국왕 부부가 그림의 모델을 서고 있고, 이들의 모습이 벽에 걸린 거울에 비춰져 있다. 다시 말해 그림 속 화가는 그림 밖 현실의 공간에 있는 펠리페 4세와 왕비를 그리고 있고, 현실 공간에 자리한 인물들의 모습은 거울이라는 장치를 통해 다시금 그림 속 공간으로 들어오는 한층 복잡해진 구성이다.그림 속 가상의 공간과 국왕 부부가 위치한 현실의 공간 그리고 거울을 통해 비춰지는 현실의 공간. 공간의 확장과 확장된 공간의 재확장. 이렇듯 다양한 층위의 공간을 하나의 작품에 표현하는 것이 벨라스케스의 회화에서 찾을 수 있는 중요한 특징이다. 거울을 이용한 회화적 공간 확장을 경험할 수 있는 벨라스케스의 또 다른 대표작은 런던 내셔널 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는 ‘비너스의 단장’이다.옷을 입지 않은 비너스가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 등을 보이며 침대에 누워 있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심지어 관능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비너스의 모습이다. 큐피드는 거울을 세워 비너스의 모습을 비춰주고 있다.매끄러운 살결의 비너스는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화면을 두 영역으로 나누고 있다. 이를 통해 화면에는 감상자의 시선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비스듬히 누워있는 비너스는 거울로 시선을 던진다. 그런데 거울에 반사된 얼굴이 흐리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비너스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큐피드가 들고 있는 거울의 각도로 미루어 짐작건대 화면 밖에서 그녀를 응시하는 감상자를 향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거울에 희미하게 반사된 비너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살짝 지으며 감상자를 보고 있는 것 같다.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바로크 미술을 이끌었던 거장답게 비너스의 시선을 통해 그림 속 회화적 공간을 심리적으로 그림 밖 현실의 공간으로까지 확장시키고 있다. /미술사학자

2020-09-28

소박함이 주는 그 편안함… 대구 팔공산 염불암(念佛庵)

가을이 오고 있다. 폭염과 폭우를 피해 산사를 찾아다니던 지난하던 여름은 잊고, 어느덧 새로운 계절 앞에서 나는 또 설렌다. 풍요와 감사함으로 물결치는 계절이다. 매표소를 지나 동화사 산내 암자들이 모여 있는 길로 접어들자 울창한 숲 그늘이 이어진다. 휴일 뒤의 숲은 지친 기색도 없이 평온하다. 잘 닦여진 길조차 서로를 포용하며 숲의 일부분이 되어가고 있다.부도암을 지나자 숲은 더욱 고요하다. 가끔씩 배낭을 메고 도토리를 줍는 사람들과 마주친다. 시끌벅적한 말소리와 배가 터질 듯 불룩한 배낭이 자꾸만 눈에 거슬린다. 그들이 누리는 수확의 즐거움이 내 눈에는 다람쥐의 먹잇감을 뺏는 탐욕으로 비쳐져 씁쓸하다. 나는 묵묵히 산길을 오르고 그들은 더 큰 만족감을 얻기 위해 숲을 헤치며 사라진다.인드라망의 그물 같은 인연과 관계 속에 존재하는 삶, 그들이 주운 도토리는 어떤 통로를 거쳐 내 입을 즐겁게 할지 모른다. 하지만 지나침은 부족함보다 못하다 했던가. 누군가에게는 채우지 못해 안달하는 삶이 또 누군가에게는 비우지 못해 괴로운 게 인생이다. 아름다운 소유, 그것은 인간이 풀어야 할 영원한 숙제이며 딜레마이다.숲은 도토리 줍는 사람들로 떠들썩하다 다시 조용해지기를 반복한다. 그래도 가을햇살이 비쳐드는 숲은 그 자체만으로 자비롭다. 천천히 걷는 발걸음 사이로 번뇌는 사라지고 진정한 자유가 물결친다. 몸과 마음이 한없이 가볍다. 이 평정심과도 같은 마음, 아라한의 상태가 이와 같지 않을까?염불암은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경순왕 2년(928년)에 영조선사가 창건한 염불암은 동화사 부속암자이다. 고려중기에 보조국사가 중창한 후 여러 차례 중창을 거쳐 지금에 이른다는데 나는 초행길이다. 다리가 아파오자 수없이 떨어진 도토리들이 사랑스럽게 눈에 들어온다. 가던 길을 멈추고 도토리를 줍는다. 이내 주머니가 가득하다. 해찰하는 즐거움에 빠져 있을 때 산 위에서 차 한 대가 내려오다 멈춘다.“내가 주우려고 봐둔 도토린데 다 주워가면 안 돼요.”창문을 열고 농담처럼 건네시는 스님의 미소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탐욕에 눈 먼 몰지각한 사람으로 비쳐진 건 아닐까. 그런데도 사람을 무안케 하지 않는 스님의 너그럽고 재치 있는 화술이 고맙고 향기가 되어 머문다. 산 아래로 사라지는 차를 바라보며 뒤늦게 염불암 스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토토리를 줍고 버리기를 반복하는 사이 염불암이 보인다. 암자는 가을 햇살 속에서 눈이 부시도록 환하다. 팔공산 암자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절, 돌계단을 오르는 동안 낮은 감탄사가 자꾸만 터져 나온다. 역사의 깊이가 느껴지는, 소박하면서도 정겨운 사찰이다.인적 없는 경내에는 약수 떨어지는 소리만 가득하다. 작은 극락전은 단청이 벗겨져 고졸미가 흐르고, 그 뒤쪽에는 대구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마애여래좌상과 보살좌상이 새겨진 커다란 자연석이 두 손을 모으게 한다. 한 승려가 바위에 불상을 새길 것을 발원하자 안개가 7일 동안이나 낀다. 그 후 바위 양쪽에 불상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문수보살이 조각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또한 불상이 새겨진 바위에서 염불소리가 들려 염불암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마당을 서성이며 암자의 풍경을 마음에 담는다. 극락 전 앞에는 보조국사가 쌓았다는 청석탑이 유리보호막 안에 애처로이 서 있다. 세월의 흔적은 마음을 여미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극락전 법당으로 들어서는데 마룻바닥이 삐걱이며 고통을 호소한다. 세월의 무게조차 기도가 되어 숙연해지는 순간이다. 수많은 불자들의 염원이 실렸을 마룻바닥 위에 내 작은 기도도 더해진다.손때 묻은 카펫에서 어느 불자의 노고와 정성이 보인다. 이곳에서는 평범하고 작은 것들이 더 마음을 끈다. 오늘은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져가는 것을 위해 기도하리라 마음 먹고 백팔 배를 하는데 허리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 신기하다. 합장을 할 때까지만 해도 불편했는데, 이런 것을 두고 부처님의 가피라고 하는 것일까?조낭희 수필가마당 한켠에 한 됫박 정도의 도토리가 수행하듯 몸을 말리고 있다. 농담처럼 던지던 스님의 말씀이 떠올라 가슴이 훈훈해진다. 포행 중에 틈틈이 주워 모으신 듯하다. 도토리묵을 좋아하는 스님과 왠지 잘 어울리는 염불암이다. 탱글탱글하게 쑤어진 도토리묵이 공양으로 올려질 걸 생각하니 더 정감이 간다.다람쥐와 도토리를 나눠 먹는 염불암의 소박한 살림, 지나침이 없는 소유는 보는 이조차 겸허하게 만든다. 그 소박함 속에는 염불암의 오랜 기도와 여유로움이 서려 있다. 처음 와보는 절이지만 포근하고 신뢰감이 간다. 작은 도토리가 나를 염불암으로 이어준 것인지도 모른다.염불암 옆 동봉으로 가는 등산로는 휴면 기간이다. 자연도 인간도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 몇 차례의 태풍과 자연재해들로 마음을 졸이고 있는 지구촌, 그런데도 삶의 방식은 바뀔 줄을 모른다. 우리는 좀 더 천천히 갈 수 없을까?이 가을에는 소유욕에 물든 일상에서 벗어나 진정한 풍요로움을 느끼고 싶다. 특유의 떫은맛이 감도는 도토리묵 같은, 그런 소박한 즐거움을 누려 보리라.

2020-09-28

인생의 쇠사슬을 내려놓는 법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자기가 만든 쇠사슬을 걸치고 살아가고 있다. 영화 ‘노스바스의 추억’의 주인공 도널드 설리반의 말이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설리라고 불린다. 사람의 생김새가 모두 다르듯이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사연이 있다. 그런 사연이 사람들이 걸치고 살아가는 인생의 쇠사슬일 것이다.설리는 아들이 돌이 되기 전에 집을 나갔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가정폭력 트라우마로 아버지 노릇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설리에게도 추수감사절은 매년 돌아온다. 팁탑 건설회사 사장 칼은 추수감사절에도 설리에게 일을 시킨다. 설리가 일당을 두 배로 달라고 하자 추수감사절은 정상적인 사람들을 위한 시간이라며 칼은 설리의 요구를 무시한다. 슬프게도 칼의 말처럼 명절은 정상적인 사람들, 정상적인 직업과 정상적인 가정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허락되는 것이 현실이다.영화가 만들어진 지 25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그 사정은 변함이 없다. 정규직이 아니거나 직업이 없는 사람들에게 명절은 모욕의 시간이다. 부모나 배우자, 자녀 등 가족 구성원이 갖춰지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명절은 외로움의 시간이기도 하다. 설리의 담임선생님이었던 베릴 여사는 재산은 있지만 그녀만의 인생의 쇠사슬이 있다. 선생님의 아들은 엄마의 재산에만 관심을 두었고, 결국 업자에게 속아 사기를 크게 당하고 마을을 떠나버렸기 때문이다.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직업의 형태도 다양해지고 가족의 모습도 다양해지고 있다. 누구나 정규직을 가질 수도 없고 모든 가정이 정상 가족일 수도 없다. 어쩌면 정상이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있다. 이제는 누군가를 정상이냐 아니냐로 구분하기보다는 그들이 짊어진 쇠사슬 무게가 더 중요하다.설리는 남편 노릇, 아버지 노릇에는 무책임하고 무능했지만, 지능이 모자란 러브를 끝까지 챙기며 영원한 친구임을 약속하고, 치매 노인을 돕는 등 이웃에게 친절함을 잃지 않는다. 담임선생님 역시 설리의 트라우마 치유에 도움을 주고 마침내 설리는 자신이 짊어진 인생의 쇠사슬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따지고 보면, 사람들은 자기가 그것을 왜 선택하는지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팁탑 사장 칼은 대놓고 바람을 피운다. 그의 아내 토비가 설리에게 칼이 왜 그렇게 바람을 피우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설리는 자신이 하는 절반도 그 이유를 모른다고 말한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의식하지 못하는 트라우마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뜻일 게다.누구에게나 트라우마는 있다. 그 트라우마 때문에 어떤 측면에서는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 삶이 실패했다고 할 수는 없다. 사람에게는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을 뿐이다.해마다 명절이 돌아올 때면 혼자 지낼 누군가가 생각난다. 그 사람 역시 자기 인생의 쇠사슬을 짊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웃에게는 무한정 친절했던 설리처럼, 끝까지 제자를 믿었던 선생님처럼, 누군가에게 연민과 사랑을 품고 있다면 그 쇠사슬의 무게는 가벼워질 것이다.

2020-09-28

뇌 먹는 아메바

아메바는 몸 전체가 한 개의 세포로 돼있고, 크기는 1mm를 넘는 것도 있지만 대개 0.02~0.5mm 정도의 원생동물을 가리킨다. 겉모습이 변하며, 세포의 일부에 위족이란 돌기를 만들어 늘렸다가 줄였다 하면서 움직인다. 최근 미국 텍사스주 한 도시의 수돗물에서 뇌를 파먹는 아메바로 알려진 ‘네글레리아 파울러리’가 검출돼 비상이 걸렸다.6살 소년이 뇌 먹는 아메바에 감염돼 입원하자 수돗물을 검사했고,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검사 결과 11개 샘플 가운데 3개에서 네글레리아 파울러리 양성 반응이 나왔다는 것. CDC에 따르면 뇌 먹는 아메바 감염은 매우 드물지만, 치사율이 굉장히 높아 감염된지 4~5일만에 대부분 사망한다. 1962∼2018년 미국에서 네글레리아 파울러리에 감염된 사람은 모두 145명이며, 이 가운데 4명만 생존했을 정도다.‘뇌 먹는 아메바’는 수영하는 사람의 콧구멍에 들어가 후각신경조직을 거쳐 뇌에 도달하고, 이로 인해 아메바뇌척수막염이라는 뇌질환을 일으킨다. 이 뇌질환은 사람간에 전염되지는 않는다. 날씨가 더워져 수온이 오르는 6~8월에 많이 발생한다. 초기증세는 두통·열·구토 등으로 나타나며, 감기와 비슷한 증상을 보인다. 이어 균형감각 상실·마비·환시 등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죽음에 이른다.뿌옇거나 초록빛이 도는 호수나 강에서 물놀이할 때 코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특히 잠수를 피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아직 감염사례가 없으나 대만, 파키스탄, 타이완, 일본 등 주변국에서 감염사례가 보고돼 조심해야 한다. 예방법은 수온이 높은 민물에서의 수영을 피하고, 부득이 수영할 때는 코를 막는 제품을 사용하는 게 좋겠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09-28

무상(無常)은 무상(無常)이 아니다

김현욱 시인작년 초, 동병상련(同病相憐)했던 정 많은 지인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38세. 이름도 생소한 소장암. 병원 입원 세 달 만에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손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황망히 눈을 감았다.병문안을 갔다가 피골이 상접한 모습에 마음이 너무 아파 병실 밖에서 울먹거렸다. 발인(發靷) 때, 운구(運柩)에 참여해 착하고 따뜻했던 지인의 마지막 가는 길은 지켜보았다. 공자의 수제자인 증자가 이런 말을 남겼다. ‘새는 죽을 때 그 울음이 슬프고, 사람은 죽을 때 그 하는 말이 착하다.’ 열 살 외동딸에게 지인이 남긴 마지막 유언은 분명 슬프고 착한 것이리라.인생무상(無常).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인생의 덧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사실, 무상(無常)은 덧없음, 허무함을 뜻하는 게 아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라는 뜻이다. ‘주역(周易)’을 ‘역경(易經)’이라고도 하는데, 영어로 ‘Book of Changes’로 변역한다. 변화의 원리가 담긴 책이다. 무상(無常)은 변화에 가깝다. 모든 것은 변한다. 그러니까, 괴롭다.붓다는 괴로움을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 것, 싫어하는 것(사람)과 만나는 일, 좋아하는 것(사람)과 헤어지는 일,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일은 일반적인 괴로움이다. 둘째, 영원하지 않은 것은 모두 괴로움이다. 셋째, 조건 지워진 것은 모두 괴로움이다.”붓다는 영원하지 않은 것, 변하는 것을 모두 괴로움이라고 설했다. 내 몸과 마음은 순간순간 변한다. 내 마음대로 어찌 할 수 없다. 이것이 무아(無我)이다. 무아(無我)는 ‘내가 없다’라는 뜻이 아니다. 내 몸과 마음은 영원하지 않고 순간순간 변하기 때문에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이고 고(苦)인 것이다.붓다는 괴로움의 원인으로 ‘오온(五蘊)에 대한 집착’,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진리로 ‘욕망의 완전한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여덟 가지 길의 진리로 ‘팔정도(八正道)’를 설했다.붓다는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과 8가지 소멸의 길을 제시했다. ‘장부경’에서 붓다는 수행 방법에 의심이 많은 수밧다에게 위빠사나 수행의 중요성을 설했다.“내 나이 29세에 출가하여 50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나의 가르침인 사념처 위빠사나를 수행하지 않고서 구경각 아라한과에 도달한 사람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네. 위빠사나의 실천법인 팔정도(八正道)가 있는 한 아라한들은 계속 출현하고 승가는 끊임없이 발전하리라.”아침저녁으로 또는 틈날 때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을 꾸준히 하고 있다. 누가 명상이 뭐냐고 물으면,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 자기 스스로를 보는 것, 이라고 답한다. 죄를 참 많이 지었다. 그렇게 통탄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날마다 크고 작은 죄를 짓고 있다.몇 년 전에 아이를 위해서 했던 일이 얽히고설킨 인과(因果)가 되어 나에게 돌아온 것을 관찰명상을 통해 알아차리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가야 할 길이 참 멀다.

2020-09-27

춤추는 이벤트 풍선

박화진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한참 전 일이다. 동네 귀퉁이 작은 빵가게를 개업하는 곳을 지나치게 되었다. 동네 자영업의 어려움과 단기 폐업을 많이 들었기에 ‘잘 돼야 될텐데’라는 막연한 걱정을 하며 물끄러미 쳐다봤다. 네 출발은 미미하나 끝은 창대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동네 자영업은 잔뜩 기대로 시작하여 낭패를 경험하고 초라하게 마감하는 경우가 많아서 안타까움을 더한다. 가게의 인지도를 빨리 높여야 한다는 조바심 탓인지 개업식은 꽤 거창하게 벌리는 경우가 있다. 축하화환을 가게 앞에 진열하는 것은 기본이고 이벤트 회사에 의뢰하여 치어걸 같은 차림을 한 여성들이 동원되기도 한다. 가게 앞에서 춤을 추거나 홍보성 멘트를 큰소리로 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상대로 개업사실을 알린다. 사람모양의 풍선이 흥겹게 춤을 춘다. 인형풍선이 이벤트에 동원되어 흔들거린다.불어넣는 바람에 따라 춤을 추는 인형 풍선을 보고 있노라니 반평생 보낸 공직생활의 자화상을 보는 듯했다. 깊은 연민이 밀려왔다. 경찰직을 평생업으로 삼고 살아오면서 여러 형태의 정부를 겪었다. 정부의 성향과 최고 통치권자의 국정철학을 충실히 이행해야 하는 직업공무원으로서 냉탕과 온탕을 오갔던 것 같다. 공무원은 특정이념이나 정파에 관계없이 정치적인 중립이라는 헌법가치에 충실해야하는 규범적 의무감이 있다. 인형풍선처럼 뒤에서 바람을 불어넣는대로 춤을 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관료제를 주창한 막스 웨버는 ‘공직자는 영혼이 없어야 한다’고 설파했다. 가치중립적으로 정부의 업무를 충실히 이행해야한다고 이해했다. 어느 정부가 들어서든 그 정부의 국정 기조에 맞춘다는 인식을 가지고 일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자신의 의지나 생각은 앞세우지 않아야 기계적인 도구로서 관료제의 기본 취지에 맞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효율적 관료제를 위한 지침이었을 것이다.언제부턴가 ‘영혼이 없다’는 말은 비난의 말로 통용되고 있다. 아무 생각이나 개념없는 행동에 대한 비아냥섞인 말로 변질되었다. 뚜렷한 주관과 의식 있는 행동을 촉구하는 말이기도 하다. ‘영혼이 없는 공직자’, 과연 이벤트 인형풍선 같은 것일까? 국정을 수행하는 통치권자의 정책들은 오른손이 달린 곳으로 바람을 세게 불어 넣으면 오른손이 춤을 추고 왼쪽으로 바람을 세게 불어 넣으면 왼손이 춤을 추는 그런 행태가 될 수 있다. 이에 맞춰 열심히 춤을 춘 공직자를 영혼이 없는 공직자라고 몰아세울 수만 있는 것일까? 공직자의 영혼, 공직을 맡는 동안 주권자인 국민에게 위탁해 둔 것은 아닐까? 국민은 자신들이 선택한 정부에 공직자의 영혼을 재위탁하여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닐까? 공직을 끝마치는 날 자신들의 영혼을 찾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지나친 아전인수식 해석일까?맡긴 영혼을 찾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낡고 헤진 구멍으로 바람이 새나가서 용도 폐기된 인형풍선이 된 것 같다. 맑은 기운으로 빈 영혼을 다시 찰지게 채우고 싶다. 지금부터 내 영혼의 장단에 맞춰 신바람나게 춤을 추고 싶다. 바람따라 춤추는 이 땅의 많은 이벤트 인형풍선들이여 힘내시라!

2020-09-27

이제는 ‘환울릉(Ulleung Rim)’ 시대다

동해(East Sea) 명칭에 대한 한일 간 외교전쟁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나라는 일본해(Japan Sea 또는 Sea of Japan)로 표기되고 있던 동해의 명칭을 최소한 일본해와 나란히 병행 표시되도록 국제외교무대에서 첨예한 각축전을 벌여왔다. 한반도 동쪽의 해역, 동해가 국제기구가 발행하는 지도에 일본해로 표기되기 시작한 것은 1928년부터다. 국제수로기구(International Hydrographic Organization; IHO)가 그해 발간한 각국 해도에서 해양의 명칭과 경계의 기준이 되는 ‘대양과 바다의 경계(Limits of Oceans and Seas, Special Publication No. 23), 초판’에서 동해를 일본해(Japan Sea)로 표기한 때문이다. 초판 발행 당시는 일제강점기였기에 한반도와 일본 본토 사이의 해역명칭을 IHO가 일본해로 표기한 것에 대해 우리는 이의를 제기할 방법이 없었다. 이후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제3판(1953년)이 발행될 때는 6·25전쟁이 겨우 휴전되어 초토화된 국토재건에 여념이 없었던 때였기에 동해 명칭에 신경 쓸 여유가 있을 리 만무했다.대한민국이 비록 서울올림픽을 개최하면서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지만, 국제 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게 된 것은 1991년 9월 국제연합(UN)에 가입한 이후부터다. UN 동시 가입을 이루었던 남북한은 이듬해 개최된 제6회 국제연합지명표준화회의에서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국제무대에서 처음으로 이의를 제기하였다. 적어도 동해에 관한 한 남북한 모두가 한마음이었다. 이후 정부는 물론 사이버 외교사절단인 반크 (VANK: Voluntary Agency Network of Korea) 등 뜻있는 민간단체들까지 가세한 한일 간 외교전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1999년 시점에는 세계의 주요기관, 지도제작회사, 출판사 등이 발간하는 세계 지도에서 동해/일본해로 해역을 병행 표시하고 있던 비율은 불과 3% 정도였다. 하지만 이 같은 전방위적인 노력으로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2012년 시점에는 세계 지도 가운데 동해를 일본해와 나란히 표기한 지도 비율이 30% 수준까지 높아졌다.일본도 이와 같은 우리나라의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각국이 우리 주장을 받아들여 동해로 단독 표기하거나 일본해와 동해를 함께 표기할 것을 결정할 때마다 정치, 경제, 외교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반박하며 원상복구를 종용하였다. 일본 외교부 등 중앙정부, 지자체 등은 물론 미쓰이물산전략연구소 등 대기업 산하 민간연구소들도 연구보고서 등에 교묘하게 지도를 넣으면서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2014년 10월 도쿄 무사시노시(武藏野市) 시립중학교에서 일본해(동해)로 병행 표기한 지도가 배포한 사회과목 교재에 실린 적이 있었다. 당시 도쿄도와 무사시노시교육위원회는 전례가 없고, 학습지도요령의 취지에 어긋난 부적절한 교재라며 학교 측에 바로잡으라고 강요하였다. 이에 따라 지도가 들어간 교재는 다시 교체되었고 담당 교사도 해명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2017년 8월에는 니가타현 묘코시(新潟770C妙高市)가 발행한 한국어판 관광안내책자(17쪽 지도부분)에 동해로 표기된 것을 발견하자 이미 인쇄된 5천 부를 전량 회수하여 폐기하고 일본해로 수정한 책자를 재인쇄한 사례도 있다.이처럼 한일 양국이 수십 년에 걸쳐 동해에 대한 명칭과 표기에 대한 외교전쟁의 최종 결과는 오는 11월경 어떤 형태로건 결착을 보게 될 것 같다. 최근 IHO 사무국장은 현행 제3판(1953년 간행) 개정과 관련하여 ‘바다를 고유의 숫자로 식별하는 시스템’을 도입하는 방안을 한국과 일본에 제안하였다고 밝혔다. 디지털화 시대에는 문자로 된 이름보다도 숫자가 지리정보시스템의 활용에도 유용하기 때문에 모든 바다 해역에 고유 숫자를 부여하는 방안을 마련한 것이다. 이 경우에는 동해도 일본해도 모두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이 안건은 IHO 가맹국에 이미 회람된 상태이며 11월 총회에서 대양과 바다의 경계 개정안(제4판)이 의결될 예정인데 가맹국들의 의견도 대체로 긍정적이어서 통과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우리나라가 일본과 동해 명칭을 둘러싼 외교전쟁을 치르는 동안 국내 각계에서는 해양과 ‘환동해(East Sea Rim)’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현재 한반도에서 동해안을 접하고 있는 강원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등을 중심으로 ‘환동해’, ‘환동해경제권’이라는 말은 일반화된 지 오래다. 환동해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분야도 적지 않다.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행정조직, 주요 금융기관의 지역본부, 학계나 주요 단체가 개최하는 주요 포럼이나 국제심포지엄 등에 이르기까지 ‘환동해’라는 용어는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물론 일본에서는 ‘환일본해’지만.이와 같은 시점에서 우리는 앞으로 그동안 일상적으로 사용해온 ‘환동해’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더욱 미래지향적인 시각에서 재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오는 11월 IHO 총회 결과 사무국의 개정안이 원안대로 통과되어 바다와 해양에 대한 명칭이 문자가 아닌 숫자로 표기될 것에 선제적으로 대비할 필요가 있다. 물론 결과를 아직 모르는 상태이고, 어쩌면 숫자로 표기되는 명칭을 사용하기 위한 과도기적인 모습을 띨 수도 있다. 어떠한 결과가 나오더라도 미래에는 동해와 일본해 모두 사용되지 않게 될 가능성이 커진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 동해에 대해 우리나라, 경북도, 포항이나 울릉군이 주도권을 가지게 될 가능성은 지금까지 이상으로 높아진 것만은 틀림없다. 러시아(극동연방 관구), 중국(동북 3성), 북한(동해안), 우리나라(동해안)와 일본(서해안) 전역에 접하는 해양의 중심에 유일한 한국령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울릉지역이다. 우리는 바로 이 울릉군이 북동아시아의 해양 중심지에 있다는 지정학적 중요성을 지금까지 이상으로 인식하고 이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전략을 지금부터 마련해 나가야만 한다. 국제 사회에서 그 어떤 지역이나 국가라고 하더라도 명칭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는 부동의 명칭은 ‘환동해’도 ‘환일본해’도 아닌 ‘환울릉’이다. 울릉군을 중심축으로 삼은 주변 해역과 주변 경제블록을 논의할 때 그 어느 국가라고 하더라도 이 명칭에 대해서만은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울릉군은 한반도 가장 동쪽 국경 최전선에 있고 동해 해역의 유일한 거점이기에 미래 환울릉경제권시대의 중심지로 부상할 전망은 밝다. 당장 단체, 포럼 등이 사용하는 ‘환동해’ 명칭을 ‘환울릉’으로 쉽게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동해가 숫자로 표기된다면 앞으로 국제행사에서 ‘환동해’는 사용할 수 없다. 따라서 ‘환울릉’이라는 용어를 지금부터 선제적으로 사용할 필요가 있다.울릉군은 그저 경북도 23개 시군 중 하나가 아니다. 동해 한복판에서 대한민국 해양주권을 수호하고 대표하는 ‘국제적 도서’임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가능하다면 ‘특별군’으로 승격시켜 우리나라의 미래 ‘환울릉’시대의 거점으로 손색이 없도록 지금 추진 중인 공항, 항만시설도 국제수준으로 격상시켜 확충, 정비해 나가야만 한다. 우리나라가 미래 해양강국을 지향한다면 미래의 해양영토, 해양주권의 교두보인 울릉지역에 대한 전략부터 새로 구상해야만 할 것이다./한국은행 포항본부 부국장 김진홍

2020-09-27

‘미스터 트롯’ 방식

민영방송에서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미스터 트롯’은 신개념의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시청자를 통한 철저한 공개 검증과정과 서바이블을 겸한 불꽃 튀는 출연자의 경연은 시간이 지날수록 높은 시청률을 이끌어 냈다.1만5천여 명의 도전자가 참가한 이 오디션 프로그램은 본선 진출자 101명의 경쟁과정이 방송에 그대로 중계되었다. 매번 탈락자가 발생하고 승자의 다음 기회 진출, 또다시 반복되는 경쟁과정은 흥미를 유발하기에 충분했다는 평가다.‘미스터 트롯’ 경연방식이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 것은 이와 같은 공개 오디션을 배경으로 제공한 풍부한 볼거리에 있었다. 종래의 오디션과는 달리 출연자 한 사람의 재능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참가자간 팀워크를 평가하고 팀 플레이를 통한 개인별 역량도 평가에 반영함으로써 흥미 요소를 더욱 풍부하게 했다. 단순히 트롯이라는 음악의 한 장르에 머물지 않았다. 다양한 장르에서 다양한 재능이 겨누면서 남녀노소 누구나가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이어졌다. 그런 분위기 속에 스타의 대중성은 자연스럽게 수직 상승한 것이다.선풍적 인기를 모았던 ‘미스터 트롯’의 경연 방식에 정치권이 관심을 보였다. 국민의힘은 각종 선거에 나설 공직후보자 결정 방법을 민영방송에서 대성공을 거둔 공개 오디션 방식을 본보기로 참고하겠다고 밝혔다. 이른바 ‘미스터 트롯’ 방식이다.철저한 공개 검증이 핵심이므로 기존 공천 방법에 익숙한 기성 정치인에게는 불리할 수 있는 방식이다. 그러나 향후 선거에서 필승을 노려야 하는 야당의 입장에서는 그 어떤 방식도 선택지가 된다. 하지만 정치는 국민의 믿음이 밑바탕이다. 정당이 믿음을 이끌어내지 못하면 그 어떤 방식도 성공하기가 어렵다. /우정구(논설위원)

2020-09-27

‘종전’ 너머 ‘철수’가 보인다

안재휘논설위원유엔연설에서 세계를 향해 ‘한반도 종전선언’에 대한 국제지지를 호소한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에 의한 우리 공무원의 피격화형 사건으로 궁지에 몰렸다. 화상 연설형식으로 이뤄진 유엔연설 이전에 의문의 실종사건으로 사라진 해양수산부 소속 어업지도선 공무원이 북한 해역에서 북한군이 저격 살해된 뒤 끔찍하게도 기름에 불태워진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공무원 피격사건 때문에 분노하는 여론에 묻혀 있지만, 문 대통령의 ‘종전선언’ 지지 호소는 매우 심각한 논쟁거리다. 문 대통령은 유엔총회 화상 기조연설에서 “한반도 평화의 시작은 평화에 대한 서로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한반도 ‘종전선언’이라고 믿는다”면서 “종전선언을 통해 화해와 번영의 시대로 전진할 수 있도록 유엔과 국제사회도 힘을 모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종전선언’ 유엔연설 출발점은 지난 6월 15일 더불어민주당·열린민주당·정의당 등 범여권 의원 173명이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을 맞아 국회에 발의한 ‘한반도 종전선언 촉구 결의안’일 것이다.연설문 작성과정에서 ‘종전선언’에 대한 청와대 참모들의 일부 이견에도 불구하고 문 대통령이 최종결심했다는 후문도 들려왔다. ‘종전선언’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미군철수’ 주장의 빌미다. ‘종전선언’이 이뤄지면, 그게 아니어도 걸핏하면 ‘미군철수’를 부르대는 반미분자들의 목소리가 그악해질 게 뻔하다. 전쟁이 끝났는데 미군이 이 나라에 남아 있을 이유가 뭐냐는 논리는 어리석은 민심을 파고들기에 안성맞춤이다.주한미군·유엔군·한미연합사 사령관을 겸했던 버웰 벨 전 주한미군 사령관은 종전선언의 전제조건으로 “비무장지대 북쪽에 배치돼 서울과 남한의 북쪽 지역 도시들을 위협하는 북한의 대포와 미사일 역량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벨 전 사령관은 “해당 조건이 완전히 이행될 때까지 종전선언을 절대 논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종전선언→유엔사 해체→주한미군 철수는 북한이 노리는 긴 세월 불변의 적화통일 도식이다. 그 사실을 모를 턱이 없는 여권이 이런 불장난을 계속하는 것은 그 심중에 도대체 무엇이 있는지를 의심케 한다. 문 대통령의 연설은 ‘북한의 비핵화→종전선언→평화협정’이란 항구적 평화체제 공식의 포기를 뜻한다. 그래서 문 대통령의 ‘종전선언’은 위태롭다.문재인 정권의 ‘종전선언’ 카드는 집권 내내 공을 들여온 대북정책이 꼬여서 도무지 매듭이 풀리지 않은 답답함에서 나온 고육지책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토라진 김정은을 돌려세워서 한반도 평화의 새로운 국면을 만들고 싶은 그 뜻을 오해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북한의 선의에만 집착하는 문 대통령의 ‘종전선언’은 현실성부터 떨어진다. 1970년대 이래 판문점 선언 전까지 우리는 북한과 총 655회 당국자 회담을 했고, 그 결과 7·4 남북공동 선언 등 총 245건의 성명·선언·합의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 중 단 한 건도 제대로 이행한 적이 없다.

2020-09-27

경산의 새로운 미래, 경산지식산업지구

최영조경산시장경산지식산업지구는 사업 초기부터 지역민들의 관심사였다.하양읍 대학리와 와촌면 소월리 일원 382만 3천506㎡(116만 평)에 자리 잡은 경산지식산업지구는 면적도 넓지만, 지역산업을 이끌어 갈 신산업의 요람이기 때문이다. 사업비 9천984억원으로 조성되는 경산지식산업지구는 1단계 차세대 건설기계부품특화단지 조성과 2단계 의료기기 및 메디컬 신소재단지를 조성하는 것이다.1단계 사업은 현재 136개 기업과 7개 연구기관 등이 유치돼 분양률이 84%에 이르고 올 연말 준공되고 2단계 사업도 2022년 완공 목표다.경산지식산업지구가 2022년 완공되면 생산유발 2조 600억원에 부가가치 창출 8천800억원, 고용창출 1만 6천 명 등의 효과가 기대되고 경산은 산업단지 1천21만㎡(300만 평) 시대를 열어 경북의 첨단 산업단지 도시로 발돋움하게 된다.경산지식산업지구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아니라 주변과 어울린 지역균형발전에도 한몫하게 된다.하양과 와촌은 지역경제의 한 축이었으나 동떨어진 느낌이 강했다.경산지식산업지구 준공에 대구가톨릭대학 등 주변 4개 대학의 6만 명 대학생과 배후 주거지인 하양 서사지구 택지개발, 대구도시철도 1호선 하양 연장과 하양~남산 간 국도 대체 우회도로가 개설되고 최근 MOU가 체결된 신세계사이먼 프리미엄 아울렛이 입점하면 하양권역이 자족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지난달 대구·경북권역 최초로 신세계사이먼 프리미엄 아울렛 조성을 위해 체결된 투자유치 양해각서는 자족도시 발전의 한 축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된다.17만 7천㎡(5만 3천 평) 부지에 200여 개의 국내외 유명 브랜드가 입점해 2023년 오픈하면 직간접 2천여 명의 신규 일자리가 창출된다.경산지식산업지구에는 이미 차세대 건설기계 융복합센터 등 6개의 국책사업연구센터가 지난해부터 입주해 기업하기 좋은 도시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시는 4차 산업혁명 선도도시를 표방하며 경산지식산업지구를 정책적으로 지원해 지난해 6개의 국책사업 연구센터들이 모두 준공되었다.경산지식산업지구 1단계 사업의 중추인 국책사업들을 잠시 살펴보면 차세대 건설기계부품 융복합센터는 시험평가센터와 성능·환경시험동, 종합 실차시험장으로 구성돼 건설기계 부품 및 완성품에 대한 성능 시험 등을 지원한다.차세대 건설기계부품설계지원센터는 굴착기와 지게차 등 건설기계부품 관련 기업에 대한 설계·해석 기술지원과 실차 표준시험 절차 개발 등 기술지원 사업을 하고 있다.메디컬 융합소재센터는 의료기기, 미세먼지 마스크 등 의약외품의 핵심부품소재에 대해 시험·인증을 지원하고 있으며, 메디컬 융합소재실용화센터도 의약품 화장품 등 메디컬 융합소재 제품의 인체 유해성 평가로 상용화 사업지원을 하고 있다.철도차량융합부품기술센터는 미래의 주력 교통수단인 철도차량 산업을 신성장 산업으로 집중육성하고자 철도차량부품에 대한 시험과 기술표준화를 지원하고 무선전력전송 기술센터는 휴대폰 무선충전 시험·인증 등 무선전력전송 관련 기업 지원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4차 산업혁명의 기반기술인 무선전력전송은 스마트폰, 전기차, 드론, 로봇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되고 있다.경산지식산업지구에는 기업입주 공간과 연구·생산시설, 산업단지 캠퍼스로 구성되는 ‘패션테크 융복합산업 생태계’도 조성해 미래 먹거리의 하나인 패션테크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코로나 사태로 정책여건이 크게 바뀌었다.그러나 우리가 준비해온 4차 산업혁명은 비대면의 방향성에서 코로나와 공통된 요소가 있다. 코로나가 이를 본격화한 것이다.우리는 코로나 사태에서 오히려 기회를 찾고자 한다. 비대면 흐름에서는 사람의 이동이 최소화되며 직장과 주거의 근접이 강화된 자족도시 공간구조와 도보 접근이 가능한 자족형 근린생활권 조성이 중요해진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경산지식산업지구는 지역의 미래를 기대케 하는 경제활동과 산업활동에 시민의 자긍심을 높이는 중심에 설 것이다.

2020-09-27

행복의 조각보

내 행복의 중심엔 가족이 있다. 몇 해 전 남편과 해인사에 갔을 때였다. 가을이 왔다고 절 주변 담장 밑에는 애기단풍을 중심으로 많은 꽃이 피어 도란거리고 있었다. 꽃향기를 느끼며 이곳저곳을 구경하다가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그곳의 많은 것 중에 내 눈에 뜨인 것은 엽서 꾸러미였다. 갖가지 꽃과 곤충, 풍경을 담은 엽서들도 있었지만 내가 고른 것은 전통 보자기 그림이었다. 엽서 속의 그림을 보니 몬드리안이나 칸딘스키가 떠올랐다. 그들이 혹시 우리나라 조각보의 문양들을 커닝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조각보는 쓰다 남은 천 조각을 이어서 만든 것이다. 자투리 천을 활용하는 생활 지혜의 소산이므로 주로 일반 서민층에서 널리 쓰였다. 정성을 많이 들여야 하는 조각보는 공을 들인 만큼 복을 불러들이고, 조각을 많이 이을수록 명이 길어진다고 하여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보자기는 물건을 싸서 보관하거나 운반하는데 간편하게 쓰인다. 또한, 예절과 격식을 갖추는 의례용으로도 사용된다.보자기에 무언가를 싼다는 것은 복을 싸는 것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복(福)이라고도 하고, 보(褓), 보자(褓子), 또는 지방에 따라 보재기, 포대기, 밥수건, 밥뿌재라고도 부른다. 보재기, 밥뿌재…, 참 정겹다.서로 다른 자투리들을 이어서 쓸모 있는 보자기를 만든다. 우리의 삶도 그런 것이 아닐까. 일상의 작은 조각들이 나를 중심으로 모여 기쁘게 하고 슬프게도 한다. 엽서의 조각보 속에 내 삶이 보였다.오늘도 남편은 자정을 넘겨 집에 돌아왔다. 요즘 따라 술자리가 잦다. 제발 좀 쉬엄쉬엄 마시라고 했더니, 안 취했다며 시치미를 뗀다. 한술 더 떠 몸에 좋지 않은 술이라 빨리 마셔서 없애버려야 한다고 중얼거린다. 그러고는 뭐라고 대꾸할 사이도 없이 잠들어 버린다. 취하기만 하면 잠드는 것이 그의 술버릇이다. 집에 손님이 와 있어도 소파에 살짝 기대어 코를 골며 잠을 청한다. 시아버님 말씀이 재미있다. “야야, 얼매나 순하노. 잘 먹재 잘 자재. 키우기 그저 그만 아이가.”그 말에 나는 그만 웃을 수밖에 없다. 그 웃음 끝에 내 행복의 조각보는 또 한 뼘 넓어진다.김순희수필가나는 목욕 갈 때 친정엄마와 함께 간다. 엄마와 함께 가면 친정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큰동생이 근무하는 회사에서 진급한 이야기, 작은동생이 새로 안마의자를 사준 것, 이모들의 소소한 다툼까지….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엄마는 내 등을 밀어주신다. 꼼꼼하게 내 몸 구석구석 씻어주면서 살이 쪘으니 다이어트 하라고 하신다. 그 말이 잔소리 같기도 하지만 거슬리지는 않는다. 엄마와 함께 몸을 씻으면서 마음도 편히 쉬고 온다. 이 또한 내겐 행복이다,내 삶의 조각보에 또 다른 고운 무늬를 더해주는 사람은 친구이다. 늦은 오후에 전화벨이 울린다. 친구가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한다. 비도 오고, 외출하고 돌아와서 저녁밥 하기 싫은 걸 어찌 용케도 알았을까. 생각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그 이름 친구! 친구는 또 다른 이름의 가족이다.지인이 유기묘를 데려와 새끼를 다섯 마리 낳았다기에 한 마리 데려와 키우기, 은규샘과 수목원 산책하기, 남편과 가까운 곳에 답사하기, 퀴즈프로 보면서 문제 맞히기, 두 문제 맞히고 옆에 앉은 아들에게 뻐기기…. 한 조각 한 조각 수명과 복을 기워 가는 조각보처럼 내 행복도 작은 기쁨과 사연들로 채워 가야겠다. 조각보는 쓰다 남은 천 조각으로 만들지만 내 행복의 조각보를 이어주는 것들은 소중한 삶 그 자체이다.돌아가신 어머님이 재봉틀로 박아 만든 밥뿌재가 하나 있다. 가족 누군가의 옷 자투리에서 나온 것들로 기운 것이다. 오래 사용하셔서 색이 바래 처음의 색깔을 다 잃었다. 어머님의 세월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아서 더 좋다. 나도 어머니의 삶의 한 조각을 채운 맏며느리이니 이 조각보는 내가 간직해도 될 것이다. 고이 접어 서랍장에 넣었다.

2020-09-27

긁어 부스럼

부스럼은 피부에 나는 종기다. 종기라고 하지만 괴롭고 귀찮고, 더럽기도 한 고약한 병이다. 특히 옛날에는 더 그랬다. 많은 사람의 목숨까지 앗아간 무서운 병이었다.뾰족하게 부어오른 작은 부스럼은 뾰루지, 목뒤 머리털이 난 가장 자리에 생기는 부스럼은 발찌, 풍열 때문에 볼 아래에 생기는 것은 볼거리라 부르는 등 종기는 생기는 부위마다 이름도 제각각이다.우리의 선조는 이런 종기가 생겨나지 않게 정월 대보름날에는 새벽부터 일어나 부럼을 깼다. 밤, 잣, 땅콩 같은 것을 까먹고 깍지를 버리면 한 해 동안 부스럼이 생기지 않는다고 믿었다. 종기가 얼마나 사람을 괴롭혔으면 이런 풍습이 생겼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현대의학이 발달한 요즘도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치병이 있으니 그 옛날에야 종기와 같은 질병이 준 고초가 얼마나 컸을까 짐작이 간다. “긁어 부스럼 만든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 일을 공연히 건드려서 걱정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가만있으면 중간은 한다”는 말과 뜻이 통하는 속담이다. 사용하기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사서 고생한다”는 우리말도 일맥상통하는 표현이다.사람이 살다보면 실수도 하는 법이고 잘하겠다고 했던 일이 어긋나 손해를 보는 일도 있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는 말은 어설프게 알아서 걱정거리가 된다는 말이다. 우리 속담에 “아는 것이 병”이라는 말과 비슷하다.정부 정책은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이 막중해 신중해야 한다. 최근 정부와 여당이 재난지원금 명목으로 전 국민에게 2만원의 통신비를 지급하려다 선별지급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유야 어쨌던 기대했던 일부 국민의 불평이 터져 나왔다. 사려 깊지 못한 정책을 밀다가 긁어 부스럼 낸 꼴이 됐다./우정구(논설위원)

2020-09-24

국회의원과 이해충돌방지법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공정성 논란이 뜨거운 여의도 정치판에 ‘이해충돌방지법’이란 이름의 폭탄이 터졌다. 이해충돌방지법은 당초 지난 2015년 일명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의 핵심내용이었지만 당시 국회 심의 과정에서 “지나치게 포괄적”이라는 이유로 통째로 삭제된 바 있다. 이 법안은 그 이후 19·20대 국회에서 잇따라 제출됐지만 무산됐다. 그런데 이번에는 분위기가 미묘하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추미애 법무부 장관 사건으로 공정성 논란에 시달리던 여당이 박덕흠 국민의힘 의원 관련 의혹 등을 계기로 이해충돌방지법 카드를 꺼내들었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아예 이번 정기국회 내에 처리하겠다며 팔을 걷어붙였고, ‘박덕흠 의원’ 탈당사태로 면목없는 야당도 일단 이해충돌방지법 논의에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과연 이 법안이 무사히 통과될 수 있을까.동상이몽격으로 시작된 이해충돌방지법안이지만 법 제정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국민권익위원회가 지난 6월 국회에 제출해 정무위 법안심사소위에 회부된 상태인 이해충돌방지 법률안은 공직자의 이해충돌 상황을 예방·관리하기 위해 직무관련자가 사적 이해해관계자인 경우 신고·회피·기피, 고위공직자 및 채용업무 담당자의 가족채용 금지, 고위공직자 및 계약업무 담당자 본인 또는 그 배우자, 생계를 같이 하는 직계 존·비속과 수의계약 체결 금지 등 8가지의 구체적인 행위기준들을 담고 있다.그러나 여야 정치권 내부를 들여다보면 이해충돌 법안에 대한 태도는 다분히 이중적이다. 여당 지도부 일각에선 벌써 법안내용을 신중하게 다뤄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제척과 기피제도와 관련해 국회직은 일반공직자와는 다르다는 이유에서다. 제척·회피제도 수위가 높아지면 판사·검사출신은 전문성이 있어도 국회법제사법위에서 활동하지 못할 수 있고, 의사출신 의원이 보건복지위를 피해야 하고, 기업인출신은 기재위를 비롯해 예산과 경제활동에 관련있는 대부분의 상임위에서 일하기 어려워진다. 실제로 대기업 오너 출신인 정몽준 의원의 경우 7선을 거치면서도 국회의원 시절 내내 주로 외교통일위원회를 맡아 오가야했고, 산업통상자원위나 국토교통위원회에서는 한번도 활동하지 못했다.야당도 마찬가지다. 이해충돌방지법은 특히 기업인 출신 국회의원의 행보를 크게 제한한다. 따라서 보수야당도 적극 찬성하기 어렵다. 이 법안이 제정되면 기업의 자유활동을 보장하는 야당이 스스로 기업인출신의 국회활동을 제한하는 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국민의힘은 이해충돌 법안처리에 찬성 입장을 보이면서도 민주당 의원들의 이해충돌 소지를 먼저 해결하라는 입장이다. 피감기관 장관·이사장 출신인 도종환·이개호·김성주 의원, 포털사이트 출신으로 ‘카카오문자’논란을 일으킨 윤영찬 의원의 이해충돌 소지를 먼저 해소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주장이다. 결국 이해충돌방지법안의 오랜 표류에는 국회의원들과 정면으로 이해충돌하는 법안이란 이유 때문은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2020-09-24

GM 사장의 일갈

서의호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카허 카젬 한국GM 사장은 최근 “한국에는 유능한 인재들이 아무도 오려 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한국GM 사장이 되면 곧바로 전과자가 된다”는 사실이 글로벌GM에도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노조와 정부규제로 일하기 힘들고 이를 타개하는 과정에서 전과자가 된다는 것이다.귀족노조로 변질한 일부 노동조합들로 인해 기업들 특히 해외에서 들어온 기업들의 고충이 심하다. 적자인 회사가 그들의 인상 요구를 들어주면서 기업 이익을 유지하려면 결국 납품업체에 대한 비용 절감으로 충당된다. 그리고 이는 곧바로 그 업체의 노동자의 급여에 타격으로 이어진다. 귀족 노조들이 그보다 더 열악한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자본가에 항의한다면서 그 주체가 귀족노조로 대체된 우리 노동시장의 모습이다.정부규제도 마찬가지로 기업들을 어렵게 만든다. 국가 신인도와 한국 홍보에 공헌한 기업들이 각종 규제와 사법부의 압박으로 힘든 상황이다.최근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여야 대표를 만나 ‘공정경제 3법’추진에 대한 재계의 우려를 전한 지 하루 만에 정부가 또 다른 기업 규제인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확대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재계에서는 “집단소송의 본고장인 미국에서도 피해자에 대한 효율적 구제수단이 아니라 기업에 대한 ‘합법적 협박’으로 변질됐다는 비판이 나온다”며 “기업을 옥죄는 법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진보정권의 집권으로 한국을 대표하였던 기업들에 대한 냉소와 옥죄기는 심화될 전망이다.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둘러싼 2개 재판이 겹치게 되면서 삼성이 냉가슴을 앓고 있다고 한다. 초격차를 앞세워 투자 확대에 나섰지만 계속되는 오너리스크로 성장 동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다. 특히 경쟁사들이 코로나19 사태에서도 ‘위기 속의 기회’를 모색하며 투자에 속도를 높이고 몸집 불리기에 나서고 있지만 삼성은 경영 시계 제로 상태에 빠질 위기에 처하게 돼 재계 안팎에서도 우려하는 모습이다.재계와 법조계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지난 2016년 이후 지금까지 검찰에 10차례 소환돼 조사를 받았고, 구속영장 실질심사만 3번 받았다. 특검 기소에 따른 재판은 80차례 열렸고, 이중 이 부회장이 직접 출석한 재판은 총 70여 차례에 달했다. 요즘 기업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사업을 접고 싶다”고 넋두리를 한다. 기업을 키워놓고 보니 온갖 규제와 제재, 조사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기업인들은 “공장을 증설하기로 해도 한국에서는 아니다”라고 한다. 반기업 정서와 일부 극단적인 노조, 여기에 동조하는 정치권과 정부의 제재에 기업들의 고통이 깊어가고 있는 것이다. 카허 카젬 사장은 최근 회사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올해 노조 파업으로 생산 차질이 또다시 빚어진다면, 한국 사업을 정말 그만둘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 그는 출국금지를 당했다. 이제 한국은 기업이 떠나고 싶은 나라가 되어 가고 있다.

2020-09-24

바보 공부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젊었을 때는 공부란 지식을 쌓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문학, 철학, 종교, 예술, 역사…. 각 분야를 총망라한 지식의 체계로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고자 했다. 그래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었다. 하지만 독서량이 늘어갈수록 인간도 우주도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어서 지식의 거미줄로는 얽어맬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지식은 무지(無知)의 어둠을 밝혀줄 광명이 아니라, 오히려 속박과 질곡이 되어 무명에 갇히게 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인간의 모든 갈등과 분쟁은 무지에서 오는 게 아니라 무얼 안다는 것에서 야기된다는 걸 알았다. 모든 지식이란 부분적인 것일 수밖에 없고, 부분적인 지식이란 결국 편견일 수밖에 없기에 그렇다. 편견은 독선과 아집을 불러오고, 독선과 아집은 걸핏하면 충돌해서 불화와 분쟁을 일으키게 마련인 것이다. 바둑의 초보자는 열심히 정석을 익히지만 어느 단계에 올라서는 그 정석을 버릴 줄도 알아야 진정한 고수가 된다고 한다. 처음에는 지식을 쌓는 공부를 했을지라도 나중의 공부는 그 지식을 넘어서는 것이라야 한다는 얘기다.고 김수환 추기경이 아주 단순하게 그린 얼굴 밑에‘바보야’라고 쓴 자화상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분이 평생을 바친 독서와 명상과 기도를 통해 마침내 도달한 것이 고작‘바보’였다니. 현자(賢者)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고, 대성(大成)은 모자란 것처럼 보이고, 대교(大巧)는 졸렬한 것처럼 보인다고 한 노자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늙어서의 공부는 어리석게 보이고 모자란 것처럼 보이고 졸렬해 보이는 공부라야 한다는 생각이다. 잘나고 똑똑해지는 공부가 아니라 단순하고 소박해져서 바보가 되는 공부라야 한다는 것이다.평생을 공부랍시고 해서 내가 얻은 것도 남다른 재주나 능력을 갖지는 못한 대신 빈털터리로 사는 것에 이골이 난 것이 고작이다. 결국 채우는 공부가 아니라 비우는 공부였던 셈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 잃을 것도 없어 죽음 앞에서도 별로 미련이 없을 터이다. 소설가 박경리 선생은 말년에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고 하셨는데 나는 버릴 것도 없으니 다만 허전할 뿐인가.많이 벗어난 얘기지만, 요새 우리나라 아이들의 공부는 지식의 탐구는커녕 출세를 위한 ‘스펙’이 목적인 것 같다. 그러니 부모들도 자식을 위한답시고 지위나 권세, 편법과 비리를 다 동원해서 자식들의 스펙 쌓기에 이바지한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이른바 ‘조국 사태’가 그 실상을 잘 보여주었다. 자신은 그럴 능력이 없어 자식들에게 미안하고 자괴감이 들었다는 부모들도 있는데, 정말로 그런 마음이 들었다면 그들은 조국을 나무랄 여지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제대로 된 보모라면 ‘봐라, 나는 적어도 너희들을 저런 식으로 교육하지는 않았다’라고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말해야 옳지 않은가.‘아빠가 조국이 아니어서 미안해’라거나, ‘엄마가 추미애가 아니어서 미안해’가 아니라, 적어도 그렇게는 살지 않은 것에 긍지와 자부심을 가진 부모라야 건강한 부모다. 그런 부모의 슬하에서 반듯한 자식이 나온다. 공부가 전혀 안 된 사람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

2020-09-24

추석발 스미싱 주의보

올 추석은 코로나19 확산으로 가족과 지인 간 문자메시지나 메신저 등으로 안부 인사를 전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추석발 스미싱 주의보가 내렸다.안랩에 따르면 최근 아들·딸 등 가족 구성원을 사칭하거나 안부 인사로 위장한 메시지로 악성 앱 설치나 금융정보 탈취를 시도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자녀를 사칭한 문자 메시지로 개인정보와 금융정보, 문화상품권 구매 후 핀번호 등을 요구하거나 스마트폰 원격 조종 등 악성 앱 설치까지 유도하는 것. 가족이나 친지의 문자라도 문자메시지로 앱 설치를 유도하거나 금전거래를 요구할 경우, 직접 전화를 걸어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스마트폰 전용 백신을 사용하는 게 좋다.고향 방문 대신 선물을 보내는 상황을 노리거나 사회적 이슈를 악용한 보안위협도 이어지고 있다. 해커가 택배 알림으로 위장한 스미싱 문자나 메일로 악성코드를 유포하거나 유명 국제 배송업체의 송장 확인 메일을 위장해 악성코드를 유포하는 사례다. 심지어 정부가 소상공인 등 코로나 2차 재난지원금 대상자에게 문자메시지 안내를 보낸다고 예고하자‘2차 재난지원금 지급’으로 위장한 스미싱 문자메시지도 발견된다. 피해 예방을 위해선 출처가 불분명한 문자메시지 및 메일의 URL, 첨부파일은 실행을 하지 않는게 중요하다. 사용하고 있는 프로그램과 앱을 항상 최신으로 유지하고, PC와 스마트폰에 백신을 설치하는 등 보안 수칙을 실천해야 한다. 추석 연휴에는 PC나 스마트 기기로 영화, 게임, 인기 동영상 등의 콘텐츠를 즐기는 사용자가 많아 이를 노린 해커들의 공격이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추석은 코로나와 스미싱 위험을 피해 조용히 지내는게 좋겠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09-23

남자들에게만 맡겨둘 세상이 아니다

장규열한동대 교수‘세상은 남자들의 작품이다.’ 프랑스 작가 시몬느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가 남긴 말이다. 세상이 남자들의 관점으로만 해석되고 구성되며 운영되는 일을 꼬집었다. 세상이 그렇게 된 까닭을 설명하려 하지만, 그 어느 설명도 가당치 않다고 했다.미국작가 캐롤라인 페레즈(Caroline Perez)는 그의 책 ‘보이지않는 여성(Invisible Women)’에서 구체적인 정책과 제도의 입안과 수립과정도 남성중심의 사고방식과 고정관념에 점령당했다고 했다. 기초자료로 사용되는 통계치들도 ‘여성의 존재’를 간과하는 경우가 허다해 여성이 거기에 있었음조차 무시되곤 한다는 것이다. 교육과정설계, 도시계획입안, 정책수립과정 등에 있어 여성의 시각이 누락되지 않아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최근 작고한 미연방대법관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가 남긴 일화가 있다. 진보적 성향을 가진 그에게 기자가 물었다. ‘아홉명 정원 대법원에 여성대법관이 몇 명 앉아야 공정한가?’라는 질문에 그는 ‘아홉명 전원’이라고 답했다.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같은 질문을 뒤집어 ‘아홉명 전원이 남성이라면 같은 질문을 했겠느냐?’고 되묻는다. 남성이 지배하면 당연하고 여성이 들어서면 이상하다 여기는 생각부터 잘못된 것이 아닌가. OECD는 노동임금수준의 성별 간 차이를 발표한다. 회원국들 평균 여성이 남성에 비해 13% 덜 받는다는데, 한국은 단연 그 격차가 추종을 불허하는 1위로 34%나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존재가 되외시될 뿐 아니라 그 가치마저 저평가되고 있음이 아닌가. 남녀 간에 물리적으로 다른 것을 인정하더라도 인격과 인권 면에서 무시되고 소외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교회는 여성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주요교단 하나가 ‘여성이 목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결정했다고 한다. 성경 어느 곳에 남자만 교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이 적혀 있는지 모를 일이다. 세상이 저렇게 변했는데, 남자 목사들끼리 모여앉아 저런 결정을 하는 배포가 놀라울 뿐이다. 아니 세상이 변하기 전에 이미 당신들의 대표 선생이었던 바울 사도가 ‘남자와 여자가 예수 안에서 하나임’을 선포하였던 일은 무시해도 되는가. 그런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어디로 흩어질 것인지 두렵지도 않은가.여성 가수 한 사람이 어렵게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릴 적에 성폭행을 당했었노라고. 수많은 날들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지내왔음도 고백했다. 오늘도 폭력 앞에 무너지고 있을 다른 여성들에게 위로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세상에 자랑거리가 많아 보이는 나라에서 이 같은 야만이 아직도 존재한다니 경악할 따름이다.무시당하고 값싸게 취급되며 폭력까지 감내할 양이면, 우리의 누이들에게 이곳은 선진국일 수가 없다. 갈 길이 아직 먼 숙제들은 이제 여성만의 몫이 아니다. 그동안 누리면서도 몰랐거나 무심했던 남성들이 깨어날 차례가 아닌가. 인류의 나머지 절반이 세상을 구할 수 있도록 소매를 걷어야 하지 않을까.

2020-09-23

오리 날다

배문경수필가보문호수는 윤슬로 춤춘다. 우거진 녹음 사이로 바람이 분다. 멀리 떠가는 오리 배, 수면 아스라이 앉은 오리와 뭇 새들이 풍경을 이룬다. 乙자 모양의 오리가 수면을 치며 날아오를 때, 순간 담담하던 풍경이 소스라치듯 놀란다.새들의 군무를 보았던 일이 떠오른다. 일몰 직후 노을 진 하늘 위로 떼 지어 날아오르던 새들은 가창오리였다. 그들의 비상과 선회는 한 폭의 점묘화를 이루며 나의 시선을 압도했다. 그 광경은 한 마리 한 마리가 단지 생존으로 다급한 힘겨운 몸짓에 불과했다. 그러나 작은 두 날개가 추위와 굶주림을 넘어서 함께 어울려 펼쳐 놓은 것이었기에 더욱 숨 막힐 듯 아름답게 느껴졌다.하늘 한 쪽에 펼쳐진 거대한 그림을 보며 어느 순간 하늘을 거침없이 날아올라 자신을 드러낼 구도자의 춤을 떠올렸다.아버지는 집에서 오리를 키웠다. 친정집 뒤에는 큰 도랑이 있어 오리를 키우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우리 집 앞에는 오리솟대가 있었는데 새들이 날아갈 때는 솟대의 오리도 날개 짓하는 것 같았다.오리들은 흰 깃털이 때가 묻어 늘 거무죽죽했다. 그 오리들 사이에 색깔부터 다른 청둥오리 몇 마리가 끼여 있었다. 아버지는 어디선가 청둥오리 알을 가져와 서너 개를 부화시켰다고 했다.어느 날, 약으로 쓴다며 오리를 사러온 사람에게 아버지는 두 날개를 끈으로 묶어 청둥오리를 넘겼다. 내 눈처럼 오리는 젖은 눈으로 퍼덕였다.청둥오리들은 가끔씩 날개를 펼쳐 날아오르기도 했지만 야생으로 영 날아가 버릴 생각은 애초에 없는 것 같았다. 가끔 비탈진 언덕을 오르거나 뒤뚱대며 내려올 뿐이었다. 이미 퇴화된 날개는 어깨의 일부처럼 붙어있었다.어느 날, 아버지는 높은 장대를 설치해서 그물을 치기 시작했다. 날개에 힘이 오른 청둥오리들이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을까. 하지만 그 여름 태풍이 한번 휘몰아치자 냇가에 세워둔 아버지의 그물막도 장대가 넘어지면서 한쪽귀퉁이가 무너져 내렸다. 그물막을 수리하는 동안 초막에 갇혀 지내던 오리들이 다시 냇가로 나왔다. 지저분한 날개를 씻어 깨끗해졌을 때, 아버지와 나는 서로 눈이 마주쳤다.그 아주 짧은 순간, 내 기억은 눈부신 빛 속으로 흩어졌다. 청둥오리 한 마리가 날개를 펼치며 몸을 위로 띄웠다. 그리고는 머리와 몸채가 평형이 되게 하고는 날개를 쭉 펼치자 앞으로 날아올랐다. 그때였다. 신호를 서로 보내고 있었을까. 한 무리의 오리들이 하늘에 낫 모양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청둥오리는 솟대를 지나 그 무리를 향해 더 높이 날았다. 지상에 있던 흰 오리들이 꿱꿱하며 날개를 퍼덕였다. 청둥오리는 날아오르다 잠시 공중에 멈춰 인사라도 하듯 고개를 젖혔으나 위로만 날아올라 무리들에 섞여버렸다.낮잠은 달았고 오리들은 자맥질 중이었다. 나는 청둥오리들이 푸른 하늘을 날아올라 자유롭기를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오랫동안 나는 반복된 일상에 젖어있었다. 나 자신의 꿈은 내려놓은 채 가정에 모든 것을 붓는다고 자위했다. 피곤에 절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더러 나의 꿈을 돌이켜 본다. 한 때 영화공부를 해보고 싶었고 외국에서 영화감독이 되어 돌아오는 나를 그려보았다. 밥벌이가 중요하다고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나는 꿈을 접어 넣는 습관에 익숙해졌다. 그러면서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이러다 늙어죽는 것은 아닐까. 의문기호가 많아질 때, 나는 집에서 키웠던 청둥오리를 떠올린다. 그 많던 오리 중에 유일하게 울타리를 박차고 창공으로 날아오르던, 무리와 하나가 되어 훨훨 날아가던 오리.다시 보문호수에 바람이 불자 물결은 찰랑거린다. 언제 보아도 물 위의 오리는 수면 아래 물갈퀴 발을 열심히 움직인다. 오리 배는 여전히 묶여 있고, 에메랄드빛 하늘로 새들은 드높이 날아간다.

2020-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