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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승자독식(勝者獨食)’의 저주

안재휘 논설위원“국민 여러분. 뭐든지 말해 보세요. 다 들어보고 결국은 내 마음대로 하겠습니다.”문재인 정부의 소통(疏通) 방식을 놓고 시중에 나도는 눈물 나는 패러디다. 여야 수뇌부가 청와대에 모여서 ‘협치’ 합창을 부른지 불과 며칠만에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이 펼치기 시작한 뒤끝 작렬, 일방통행, 승자독식 행태가 가관이다. 총선에서 대패한 미래통합당은 꽤 오래도록 힘을 쓰기 어렵게 생겼다.‘법대로’에 대한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의 현란한 마술부터 시작됐다. 민주당은 ‘총선 후 첫 임시회를 의원 임기 개시 후 7일 이내에 개최한다’는 국회법 5조 3항의 개원 규정을 존중해야 한다면서 53년 만에 단독개원을 강행했다. 지난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공수처법) 본회의 표결 당시 기권표를 던진 금태섭 전 의원에게 뒤늦게 ‘경고’ 징계 처분을 내렸다. ‘의원이 소속당의 의사에 귀속되지 않고 양심에 따라 투표한다’는 국회법 114조 2항은 존중되지 않았다.중요한 것은 이 조치가 앞으로 민주당을 일사불란, 만장일치, 단일대오 형태의 독재정당으로 운영하겠다는 신호탄이라는 점이다. ‘비민주적’이라는 지적을 반박한 이해찬 대표의 논리는 해괴하다. 그의 궤변을 요약하면 “당 대표가 먼저 말하지 않고 의견 다 들어본 다음 마지막에 마음대로 정리해 얘기하면 그게 민주주의” 정도로 된다.177석 민주당의 의기양양은 무시무시하다. 민주당 이수진 의원은 자신에게 실력이 없다고 폭로한 법관에게 “탄핵하겠다”며 복수의 칼을 내밀었다. 재판과 옥살이까지 다 끝난 한명숙 전 총리 사건도 뒤집겠다고 나섰다. ‘예술·학술·보도 등의 목적’으로 하는 표현의 자유까지 말살할 수 있도록 한 5·18 광주민주화운동 왜곡행위 처벌법도 결국 통과시킬 것으로 예측된다. ‘친일’ 목록에 들어간 유공자들은 국립묘지에서 파묘(破墓)를 당해 부관참시의 횡액을 당하게 생겼다.30년간이나 위안부 피해자들을 앵벌이 수단으로 악용했다가 이용수 할머니의 폭로로 위기에 몰린 윤미향 의원도 민주당 대표의 강력한 비호 아래 당분간 무사할 것 같다. 대한민국은 지금 또 하나의 잔혹한 ‘승자의 역사’를 기록하는 중이다.통합당의 최연소 남성 당선인 김병욱(포항남구·울릉) 의원이 언론 인터뷰에서 ‘중대선거구제’의 필요성을 거론했다. 불과 8%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도 의석수는 177대 103이 돼버린 소선거구제의 모순을 지적한 발언이다. 그러나 거대 여당 민주당은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다.‘중대선거구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지역주의 극복과 정치 다양성 수렴, 사표(死票) 방지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제도였다. 미래통합당은 ‘승자독식(勝者獨食)’의 꿀단지에 빠져 살던 긴 세월의 모순을 반성해야 한다. 지금 초라한 제1야당이 되어 당하고 있는 능멸은 그 어리석은 권력 놀음의 쓰디쓴 업보다. ‘견제와 균형’의 미덕이 사라져가는 여의도 국회는 지금 승자독식의 저주에 휩싸인, 이 나라 민주주의의 쓸쓸한 무덤이 돼가고 있다.

2020-06-07

코로나와 대프리카

대프리카는 대구의 여름철 대명사다. 아프리카만큼 덥다고 해서 붙여진 대구의 별명이다. 대구가 전국에서 가장 더운 이유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분지 지형이라는 지형적 특성을 배경으로 설명하고 있다. 대구는 1천m가 넘는 팔공산과 비슬산이 북쪽과 남쪽을 가로막아 서 있는 산지에 둘러싸인 분지도시다. 산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은 푄현상에 의해 산맥을 넘어오면서 건조하고 더운 바람으로 변한다. 대구에 들어온 더운 바람은 분지형 도시에 갇혀 대구 도심의 온도를 끌어올리게 된다는 것이 대구가 더운 이론적 설명이다.대구는 1942년 전국 최초로 여름철 온도 40도를 기록했다. 해방이후에도 더위로 명성을 떨치다 1994년 7월 39.4도로 해방 이후 또다시 최고 기온을 갱신했다.아스팔트에 계란을 깨뜨려 후라이를 해도 될 만큼 대구의 여름철 한낮 더위는 덥다. 숨이 헉헉 막힐 정도다. 여름철만 되면 대구의 더위는 전국의 뉴스거리가 된다. 대프리카라 하면 이제 누구나 알 정도로 대구 더위가 유명해졌다.대구시가 이런 도시의 특징을 모티브로 해 만든 것이 대구치맥페스티벌이다. 전국 최고의 축제 중 하나로 성장했다. 해마다 전국에서 1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 지난 4일 대구와 포항 등 경북 일부 지역의 기온이 35도를 넘어섰다. 6월초 때이른 기상청의 폭염 특보 발령으로 전국에서는 대구의 대프리카가 시작됐다는 네티즌의 얘기가 오갔다.그러나 진작 대구시민의 걱정은 다른데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으로 마스크 생활을 일상화하고 있는 시민에게 찾아온 대프리카는 마스크와의 새로운 전쟁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구시민의 코로나와의 전쟁은 올 여름이 고비가 될 것 같아 보인다./우정구(논설위원)

2020-06-07

영주시 ‘포스트 코로나’ 준비 박차

장욱현 영주시장국내에 코로나19 첫 환자가 발생한 이후 대구를 중심으로 경북지역에 많은 확진자가 발생한 가운데 영주시가 코로나19 대처의 모범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첫 환자 발생 후 석 달 동안 대구를 중심으로 경북지역에 많은 확진자가 발생한 가운데 영주시는 3월 11일 5번째 확진자가 발생한 이후 50여 일 간 추가 확진자가 발생하지 않고 있다.특히 영주에서 발생한 확진자 5명은 각각 개인 경로에 의한 감염으로 가족이나 이웃 등에서 2차감염이 일어나지 않았다.실내감염도, 집단감염도 없었다.아직까지 코로나19가 종식되지 않아 판단하기는 이르지만 지역 내 2차감염이 없었다는 것은 그만큼 안내와 관리가 잘 이뤄졌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영주시가 성공적으로 지역사회 확산을 차단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체계적인 재난대책과 철저한 방역시스템, 긴밀한 민관협력,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하고 있는 시민들의 노력이 어우러진 결과며 특히 중앙정부와는 별도로 지역 상황에 맞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 주효했다.시는 코로나19 방역과 함께 침체된 경제살리기에 시정의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다.특히, 방역을 소홀히 할 수도 경제 활성화를 더 이상 미룰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해있지만 이제는 타격을 입은 경제 살리기에 힘을 모아야 할 시기로 방역과 경제라는 두 가지 문제의 해결을 위해 특단의 노력을 기울여 나가고 있다.코로나19 종식 이후에도 경기침체에 따른 민생고충이 발생할 것으로 보고 이에 대처하기 위해 지난 5월 1일 시민화합, 경제활력, 생활방역 등 총 10개 분과로 구성된 코로나19 극복 범시민대책위원회를 출범했다.영주시장과 민간인이 공동위원장을 맡았 운영 되는 범시민 대책위는 분과별 회의를 통해 의견을 수렴하고 시민이 공감할 수 있는 실천과제를 발굴하고 있다.범시민대책위원회는 앞으로 201억원을 투입해 각 분과별로 총 100대 과제를 수행하면서 시민 의견을 수렴하고 보완해 나갈 방침이다.시는 영주시민 화합 한마당 행사, 우리마을 뉴딜 일자리 사업, ICT첨단기술을 활용한 효율적 감염병 대응 체계 구축, 코로나 블루 극복을 위한 치유프로그램 운영, 백두대간 유통 플랫폼 구축사업, 영주농산물 소득 1조원 달성 프로젝트, WHO국제안전도시 공인 인증 사업 등 시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시책을 추진할 계획이다.이달 1일에는 영주시청에서 코로나19 극복, 가치삽시다 Y세일 업무협약식과 함께 다시 뛰자 경북 영주 민생소통 간담회를 개최했다.이날 간담회에는 이철우 경북도지사를 비롯해 도의원, 코로나10극복 범시민 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 소상공인대표 등이 참석한 가운데 지역 소상공인 상권회복과 서민경제 활성화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가치삽시다, Y세일은 영주시가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자체적으로 펼치는 사업으로 코로나19로 침체된 지역경제 회복을 위해 재난지원금 사용 시 결재금액의 5%를 할인하는 이벤트다.시는 포스트 코로나를 대비한 사업들의 본격 추진에 나서고 있다.지난 4월 첨단베어링 클러스터의 핵심인 첨단베어링 국가산업단지 조성사업에 대한 예비타당성 조사에 착수한 데 이어 오는 10월 용역이 마무리되면 사업타당성 심의를 거쳐 내년부터 기본 및 실시설계 등 산업개발계획 수립에 본격 착수한다.시는 2023년 3월 국토교통부의 국가산업단지 최종 승인을 받고 2027년까지 국가산업단지를 준공한다는 계획이다.뿐만아니라 내년 9월 17일부터 10월 10일까지 개최되는 세계풍기인삼엑스포 준비에도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2021영주세계풍기인삼엑스포는 500여년 인삼 재배 역사를 배경으로 인삼의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기 위한 행사로 인삼, 세계를 품고 미래를 열다라는 주제로 전시, 이벤트, 교육, 학술, 체험행사 등을 준비할 계획이다.이제는 코로나19 종식 이후를 생각해야 할 때로 얼어붙은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정부와 경북도와 함께 협력해 조기에 성과를 낼 수 있는 노력과 더 다양한 지원 정책을 강구하는 등 발 빠르게 대응할 계획이다.

2020-06-07

26년 된 전자레인지를 버렸다. 콘센트에 꼽혔던 플러그를 뽑을 때마다 뻑뻑하니 쉽게 놓아 주지 않아 힘껏 잡아당기다보니 전선이 살짝 드러나 위험했다. 또 오래 사용하다보니 레인지 속이 데우던 음식이 끓어 넘쳐서 얼룩투성이가 되었다.하지만 쉽게 버리지 못했다. 물건에도 감정이입을 하는 편이라 그렇고 사연이 있는 물건은 더더욱 못 버린다. 이 전자레인지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사주셨다. 남편과 신혼여행을 다녀와 신접살림을 날 때 필요한 게 무어냐 묻고 싶으셨는지 시동생을 보내 신혼집을 확인하게 하셨다. ‘살림이 뭐 뭐 있드노?’ 하시면서.결혼할 그 즈음 무척 가난했었다. 쥐꼬리보다 작은 월급은 엄마에게 모두 드려 집안 살림에 보태야했기에 차비조차 받아썼다. 아직 학생인 남동생이 둘이라 쪼들리는 엄마는 내 월급으로 결혼 자금 같은 이름으로 모아 둘 형편이 못 됐다. 아버지 혼자 벌어서 다섯 가족이 살아가기에 엄마의 가계부는 늘 숨이 찼다.남편과 사귀기 시작하며 그 달치 월급부터 내가 쓰겠노라고 어렵게 말을 꺼냈을 때, 엄마는 몇 달 나와 말을 섞지 않았었다. 불편한 하루하루를 버티며 모은 돈으로 겨우 기본 살림을 장만할 수 있었다. 냉장고, 텔레비전, 세탁기 셋 다 작은 크기로 그것도 한 시즌 지난 이월 상품으로 하니 반 가격에 살 수 있었다. 장농과 삼단서랍장은 번듯한 이름표도 달지 못한 채 실려와 신혼살림의 구색을 맞추고 있었다. 25평 아파트가 휑하니 30평으로 보였다. 그 살림에 어머님이 전자레인지를 보태신 거다. 새로 들어온 며느리에게 가져온 지참금이 적다고 잔소리 하나 없이 부족한 구석을 채워주셨다. 그날 어머님도 똑같은 걸로 시댁에 처음 신문물을 들이셨다. 그렇게 양쪽 집에서 26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했다.낡고 선이 드러나도 음식 데우기만 하면 되기에 버리지 말자고 남편을 졸랐지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자며 리모델링하려고 이사하는 날 과감히 종량제스티커를 붙여서 버려버렸다. 무엇을 간직하려면 누가 뭐라고 해도 버티는 뚝심이 있어야 한다. 내겐 그게 부족했다. 부족한 마음이 후회가 된 것은 며칠 후였다.잠시 머무는 아파트에 이사를 해놓고 시댁에 다니러 갔다. 아버님 댁에 새 전자레인지가 놓여 있었다. 어찌된 일인가 하고 여쭈니, 며칠 전 그냥 불이 들어오지 않더란다. 고장이 나버린 것이다. 우리 집 것을 버리던 그즈음 어머님 것도 생을 마감해버렸다는 것이다. 우연일 것이다. 그래도 눈이 시큰했다. 만약에 어머니였더라면 하는 생각이 앞섰다. 아들이 선물한 전자레인지였다면 고장이 나서 먹통이 되어 쓸모가 없어졌더라도 무엇이든 넣어두는 보관함으로 변신시켜서 살려두셨을 것이다. 집안에는 어머님이 그렇게 들였다가 붙박이가 된 물건들이 쌓여있다.김순희수필가골동품이 되려면 여러 가지 조건이 있다. 태어난 지 오래되어야 하고 희귀한 물건이어야 한다. 두 가지 이유가 달리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흔한 물건이라도 오래 쓸고 닦아 보관하면, 시간이 희귀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남들이 다 분리수거 할 때 아끼고 살펴 보관해야 골동품이 되는 것이다. 어머님은 사람도 물건도 아끼는 분이셨다. 어머님이 내게 처음 사주신 선물을 그냥 떠나 보내버린 것이다. 내가 놓아버린 그 끈 끝에 어머니가 계셨다.한 달여 집을 고치는 동안 남편과 나는 새살림 장만에 들떴다. 장농은 붙박이장으로 맞추고, 침대와 소파를 보러 돌아다녔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바람처럼 훌쩍 지나 새집에 입주했다. 집을 새로 단장한다는 소식에 가까이 사는 경희가 전자레인지를 선물했다. 멀리 수원 사는 정원이가 에어프라이어를 보내왔다. 또 다른 끈이 내게로 와 손을 잡는다. 이 소중한 인연의 끈이 끊어지지 않고 오랜 시간을 버티도록 매일 쓸고 닦을 것이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우리 집의 골동품이 되도록.

2020-06-07

일본군 성노예 문제, 그리고 양국의 미래

윤미향 사태를 둘러싼 논란은 세상이 겉보기와는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한다. 또 아무리 좋은 명분을 가진 것도 시간이 오래 가며 상하지 않기는 참 어렵다는 것도 다시 한 번 깨우친다. 비단 윤미향이나 정의연대만의 일이 아니요, 정파적 이해관계를 떠나 우리 모두가 되짚어 볼 일이요, 사람살이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그런데, 이용수 할머니가 윤미향과 정의연대 문제를 제시하며 말한 것 가운데 인상에 남는 것이 하나 있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가 증오를 가르치는 것으로 끝나서는, 일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우리의 아이들, 한국과 일본의 미래는 반목과 갈등보다 평화를 지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이용수 할머니가 위안부라는 전시 성노예제의 피해 당사자이기 때문에 이 말은 함부로 폄훼할 수 없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그가 대리인에 불과하다면, 대리인이란 그 피해 당사자는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어긋남이 있을 수 있다는 당연한 의미에서 그 진정성을 한 번쯤 시험대 위에 올려봄직도 하다고 할 수 있고, 또 피해자가 언제, 어디서나 옳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피해자의 말이라 해도 보편타당함에서 벗어나면 회의해 볼 수 있는 여지도 없지 않다.그러나 결국 사람의 삶이란 투쟁과 반목에서 벗어나 평화와 공존, 다른 말로 말해서 사랑의 마음을 품고자 할 때만 평온과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과거가 지배와 피지배, 착취와 수탈, 살육과 피해로 점철되어 있다 해도 미래는 과거를 딛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는 노력에 의해서만 더 나아질 수 있음은 물론이다.물론 한국과 일본에는 이 미래를 저해하는 인식과 행위들이 있다. 한국에는 가해자의 입장을 두둔하고 가해자의 입장이 자신의 입장이 된 기막힌 코미디를 진지하게 연출하는 사람들이 있어, 있는 것도 없다 하는 가해자의 거짓 논리를 한국어로 포장해 주는데 여념이 없고, 오히려 피해자들이 거짓말을 즐긴다는 마타도어를 유포한다.사실, 진실을 둘러싼 인식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한일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고 어둡다. 그러나 평화와 공존, 사랑이 유일한 해법이라면 이제 우리는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 지배자들과 그들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 논리를 넘어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전망을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의 운동이 배상 요구라는 피해의 물질적 측정 문제를 넘어서 더 넓고 깊은 설계를 해나가는 문제로 직결된다고 생각한다.결코 풀기 쉽지 않은 난제다. 그러나 과거를 딛고 미래를 여는 일은 ‘우리’가 ‘그들’보다 잘해 왔고 잘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이제 ‘탈식민’조차도 넘어서야 한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06-04

국회의원의 도덕성

공자의 논어 학이편은 배움의 즐거움을 가르치는 장이다. 그러나 배움이란 인간의 근본을 가르치는 것이므로 배움의 궁극적 목표는 결국 사람다움에 있다는 것이 공자의 철학이다.그래서 공자는 군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태도로 “듣기 좋은 말과 행동으로 상대방을 현혹시키는 일”이라 했다.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사람은 어진 사람이 적다”는 그의 말이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이란 표현이 여기서 나왔다. 자신을 변명하거나 자신의 잘못된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 억지를 부린다는 뜻이다.비슷한 말로 견강부회(牽强附會)가 있다. 가당치 않은 말을 억지로 끌어대면서 자기주장의 조건에 맞추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지나치게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하면서 다른 사람의 견해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을 가리킬 때 쓴다.아전인수(我田引水)도 비슷하다. 자기에게만 유리하도록 해석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빗댄다. 목불인견(目不忍見)은 어이가 없어 참고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어불성설(語不成說)이나 자가당착(自家撞着)도 자기의 언행이 모순될 때 하는 말이다.당선자에서 국회의원으로 변신한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바라보는 국민의 눈은 어떨까. 앞서 열거한 견강부회나 아전인수, 자가당착 같은 말로 국민들은 그를 바라보지 않을까.끝없는 의혹과 논란으로 그는 국회의원으로서 품격을 이미 상당히 상실했다. “그의 사퇴에 동의한다”는 국민여론 70%는 그가 법적인 자격의 국회의원 이전에 도덕적 기준에 적합하지 않다는 국민의 뜻이다.윤 의원을 둘러싼 각종 의혹은 검찰에 의해 밝혀지겠지만 여당 대표와 여당의원들이 굳이 그를 감싸야 할 이유가 무얼까.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은 법적 요건보다 도덕적 기준이 더 앞서야 하는 법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0-06-04

의문 아닌 질문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베스트셀러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의 저자 토니 로빈스는 넬슨 만델라에게 물었다. “그 오랜 감옥 생활을 어떻게 견뎌냈습니까.”만델라는 “난 견뎌냈던 적이 없다오. 준비하고 있었던 거지.”라고 대답했다. 그는 그때부터 “의문하지 말고, 질문하라!”는 말로 사람들 안에서 잠들어있는 거인을 깨우라고 설파하기 시작했다.의문하는 사람은‘이것을 내가 할 수 있을까?’라고 의심한다. 그러나 질문하는 사람은‘이것을 어떻게 하면 해낼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만델라는 ‘나는 분명히 건강하게 걸어 나갈 것이다. 그러려면 오늘 무엇을 해야 하지?’를 질문하고 있었다. 이것이 만델라가 70이 넘어 감옥에서 나와서도 건강하게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공수처법 표결 당시 당론과 달리 기권을 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은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전 의원을 둘러싼 논란이 정치권에 화두가 되고 있다. 당론에 따르지 않은 금 전 의원에 대한 징계는 당연하다, 반면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의 투표에 대한 징계는 부당하다는 목소리가 맞서고 있다. 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논란이 더이상 확산돼선 안 된다며 입단속에 나섰지만 당내에서조차 이번 징계가 헌법과 충돌한다는 반발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김해영 최고위원은 이 대표 면전에서 “당론에 따르지 않은 국회의원의 직무상 투표 행위를 당론에 위반하는 경우에 포함시켜 징계할 경우 헌법 및 국회법의 규정과 충돌이 발생할 여지가 있다”고 비판했다.시민단체인 경실련도 “국회의원의 양심의 자유와 국민의 대표자로서 소속 정당의 의사에 기속되지 아니하고 양심에 따라 투표한다는 헌법과 국회법이 부여한 권한을 위반한 것으로 철회되어야 마땅하다”고 했다.그 와중에 금태섭 전 의원이 페이스북에 올린 입장문이 화제가 되고 있다. 그는 입장문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한 지난 선거법 개정안이 잘못됐다는 점을 명확히 했고, 정치인은 사회에서 논란이 되는 이슈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고 토론을 이끌어내야 할 책무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즉, 지난 선거법 개정안은 위성정당을 양산하고 우리 선거제도와 정당제도의 근간을 무너뜨린 악법이라는 것이다. 자신도 당론에 따라서 찬성투표했지만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 금 의원의 주장이다. 그는 또 공수처법의 경우 자신이 형사소송법과 검찰 문제의 전문가로서 공수처를 다루는 사개특위에서 토론기회를 달라고 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이뤄지지 않았고, 토론이 없는 결론에 무조건 따르는 것은 자신이 배운 모든 것에 어긋나기에 따를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국 사태, 윤미향 사태 등에 대해서 당 지도부가 함구령을 내린 데 대해서도 일침을 놨다.이미 총선 불출마로 국회를 떠난 금태섭, 그는 자신에 대한 징계결정과 당지도부의 함구령에 대해 “이게 과연 정상인가.”라고 물었다. 그는 또 묻는다. “우리 정치는 정말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가.”그의 건강한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이미 국민들 마음속에 있다.

2020-06-04

그들의 민낯

김병래시조시인“정대협이 발족될 당시인 1990년 11월 16일. 당신들은 정대협 간판을 내걸며 ‘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권회복과 한일 간의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정대협을 발족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역사에 묻혀 숨죽여 살아온 우리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얼마나 가슴 벅찬 구호처럼 들려왔는지 지금도 그때의 일을 기억하면 눈물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겹도록 흘린 눈물은 당신들의 본래 모습이 하나씩 하나씩 들춰지면서부터 분노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위안부 할머니들이 정대협을 분노에 찬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발족의 변에서 밝힌 바 있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인권회복’과는 정반대의 길을 달려왔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정대협 관계자들이 위안부 문제를 빌미로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좀 더 거칠게 말자면 당신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역사의 무대에 앵벌이로 팔아 배를 불려온 악당들인 것입니다”2004년 1월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모임인 세계평화무궁화회 33인의 명의로 발표한 성명서의 일부이다. 정대협의 위선과 비리가 낱낱이 적혀있는 장문의 이 성명서는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던 당시에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고도 16년이나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고 여러 가지 일을 추진해온 정대협은 후신인 정의연(정의기억연대)의 이사장이었던 윤미향 씨가 지난 번 총선에서 더불어시민당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가 두 차례에 걸쳐 윤 씨의 비리를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이어서 지난 1일에는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가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해체와 더불어민주당 윤미향 의원의 사퇴를 촉구하는 기자회견도 있었다.일제가 저지른 만행 중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열 서너 살 소녀들까지 전장으로 끌고 다니며 성욕해소의 도구로 삼은 짓은 천인이 공노할 악행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이 미국에 항복해서 전쟁이 끝났지만 그 때 끌려 다녔던 소녀들은 평생을 씻지 못할 치욕과 피맺힌 원한을 안고 그늘 속에서 살아야 했다.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과 2015년의 일본군위안부협상 타결로 한·일 정부 간에는 ‘일본군위안부’문제를 일단락 지었으나, 당시 야권과 시민단체 등의 반발로 논란이 계속되다가 문재인 정권에 들어서는 원천무효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담당해온 사회단체인 정의연이나 나눔의 집 관련자들은 정작 피해 할머니들의 치욕과 통한을 공감하고 위무하기는커녕 또 다른 수모와 고통을 안겨 주었다는 것이 피해 할머니들의 주장이었다. 정의연의 경우, 처음의 취지와 의도가 어떻든 간에 결과적으로 저들 단체의 이념적 목적과 수익을 위해 할머니들을 이용하고 정계진출 등 출세의 발판으로 삼았다는 걸 알 수 있다. 피해 할머니들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모금한 돈과 정부의 지원금을 자의로 유용하거나 착복한 혐의에 대해서는 지금 수사 중이니 그 진상이 밝혀지면 그들의 민낯이 좀 더 확실하게 드러날 것이다.

2020-06-04

보리밟기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봄의 문턱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농촌에서는 보리밟기 행사가 열린다.겨울 추위로 들뜬 땅에 보리밟기를 함으로써 뿌리를 밀착시켜 주어 뿌리를 튼튼히 하고 많은 결실을 맺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겨울철의 대표적인 밭농사 작업 중 하나이다.보통 가족단위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정월에 펼쳐지는 다양한 가족 놀이와 함께 겨울철의 대표적인 가족행사로 보리밟기는 자리잡았다. 이웃들도 함께 어울려 때론 수십명이 어깨를 잡고 보리를 밟는 모습은 장관을 이루었다.지금은 보리농사의 축소로 보리밟기는 점점 사라져 가는 풍습이지만 가족 간의 협동과 사랑을 느끼는 대표적인 아름다운 농촌의 풍습이다.60∼70년대 미국으로 이민 가는 것이 이웃의 큰 부러움을 사던 시절 ‘보리밟기’라는 TV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미국 이민을 가기 위해 들뜬 엄마가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자신도 영어공부에 열을 올리는 모습이다. 서툰 발음으로 책을 들고 이방 저방 다니면서 영어공부를 하던 그 엄마의 모습은 자유분방한 나라 미국으로 이민 가는 것이 행복을 보장해준다는 흥분과 함께 코믹하게 투영되기도 했다. 그리고 드라마에서는 대반전이 일어난다. 드라마 말미에 보리밟기의 모습이 비추어 지면서 집의 대부격인 할아버지가 가족을 데리고 그 보리밟기 모습을 보여준다.그리고 말한다. “보리는 밟아주어야만 잘 자란다. 꼭 자유분방한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것만이 행복이 아니다”라는 교훈이 주어진다.40여 년이 지난 요즘도 그 드라마의 감동이 잔잔히 다가온다.금년 갑자기 들이닥친 코로나 바이러스로 지금 전국이 어지럽다. 벌써 금년도 상반기가 지났지만 바이러스는 고개를 숙일 기세가 아니다.필자가 주관하여 매년 개최하는 대학평가 관련 포럼도 금년에는 온라인으로 전환될 위기에 있다.대학가에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입학식 등 대부분의 행사가 취소되고, 각종 세미나나 교내 집단 행사 등이 모두 연기되거나 취소되고 있다. 강의도 모두 온라인으로 진행되고 있다. 사실상 캠퍼스는 정지 되었다. 싱그러운 젊음이 넘쳐야할 캠퍼스에는 학생이 보이지 않고 활기가 없이 적막감만 감돈다.갑자기 보리밟기가 생각난다.보리는 밟아야 더 성장한다는데 이러한 코로나 바이러스의 고통은 더 나은 내일을 위한 보리밟기와 같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위생관념은 더 철저해졌고 근검절약을 배우는 게 몸에 밴다. 다양한 온라인 상의 새로운 경제 모델이 생겨나고 있다. 대학은 온라인 강좌 등 강의 방식은 다양해지고 있다.긍정적 사고로 코로나19 사태가 지나고 나면 더 나은 사회 더 나은 경제를 꿈꿀 수 있지 않겠는가.우리는 지금 보리밟기를 경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2020-06-04

양치기 2주와 벌점

이주형시인·산자연중학교 교감“앞으로 2주 코로나 확산 고비”이 말은 최근 몇 달 동안 언론을 통해 전 국민이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이 말이 반복된다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가 2주의 고비를 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분명 우리 사회는 2주라는 마법에 걸렸다. 그 마법을 풀 수 있는 주문은 없을까!주문을 찾기 위해 고비의 뜻부터 찾았다. 사전은 고비를 “일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나 대목. 또는 막다른 절정”이라고 정의했다.어떤 일이 완성되려면 반드시 절정의 순간을 넘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일은 설익은 밥이 되고 만다.예전에 마라톤을 한 적이 있다. 출발한 지 몇 분도 되지 않았는데 숨이 턱까지 차서 도저히 뛸 수가 없었다. 그때 옆에서 달리던 사람이 조금만 더 참고 달리면 숨이 터질 것이라고 했다. 그땐 너무 힘든 나머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오기가 발동하면서 어떻게든 조금만 더 참고 힘을 냈다. 그랬더니 목에 걸렸던 숨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오면서 숨쉬기가 한결 편해졌다.비록 결과는 어디 내놓기 부끄럽지만, 그래도 필자는 완주했다. 그때의 기억은 필자의 마음에 오뚝이 심장을 심어주었다. 필자는 그 심장으로 지금까지 왔다.지금 우리 사회에 딱 필요한 말이 “숨을 트다”라는 말이다. 코로나 19는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다.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코로나 19라는 출제자의 출제 의도를 정확히 분석해낸 듯했다. 그 결과는 세계에 모범 답안으로 제시됐다. 그래서 나온 말이 K-방역이다.그렇다면 K-방역은 세계를 공포에 빠트리고 있는 지금의 위기 상황을 극복할 근본적인 방법을 제시할 수 있을까?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지금 찾고 있는 해결책이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모든 경우의 수를 다 동원하고 있지만, 바이러스는 분명 인간의 기술력을 능가하는 무엇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변이(變異)이다.그런 자신들을 정복하겠다는 인간의 오만 앞에 바이러스는 그저 웃을 뿐이다. 눈앞의 성과밖에 보지 못하는 인간들, 그들은 분명 2주를 양아치로 만드는 주범이다. 그런 양치기 정신으로는 그 어떤 것도 완벽하게 해결할 수 없다.양치기는 교육계에도 많다. 어느 학생이 심각하게 필자에게 말한다.“우리 학교는 마스크 벗으면 벌점 10점이래요. 점심시간 빼고는 물도 못 마신 대요.”물론 이 말을 한 교사의 의중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데 협박 수준의 공갈로 입학도 하기 전인 학생들에게 공포 정치를 하는 교사들, 그들은 분명 교육계의 양치기들이다.어느 교육청은 한술 더 떠서 다음과 같은 공문을 일선 학교에 뿌렸다.“등교 수업 이후에 학교 출입자에 대해 발열 검사를 하지 않거나 부실하게 실시하여 학교 내 확진자가 발생할 경우 해당 학교를 엄중 문책할 예정이므로 (….)”어떻게 가면 갈수록 교육계에는 양치기만 늘어나는지 모르겠다. 그들이 양아치가 되는 날, 이 나라 교육은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2020-06-03

트럼프와 미국의 민낯

김규종 경북대 교수1991년 12월 31일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뒤 유일 강대국으로 군림한 미국의 민낯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코로나19의 확산과 국가 경제의 피폐, 여기에 더해진 경찰의 비무장 민간인 살해까지. 이것이 세계 최강 미국의 모습인가, 하는 의구심이 급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다. 이런 상황 악화의 중심에 현직 대통령 트럼프가 있다. 세계 대통령이라 불리던 미국 대통령의 초라해진 모습이 약여(躍如)하다.코로나19로 10만이 넘는 사망자와 4천만이 넘는 실직자가 발생한 나라 미국. 설상가상 백인 경찰이 비무장 상태의 흑인 남성을 무참하게 살해한 사건으로 미국 전역에서 시위가 잇따르고 있다. ‘민중의 지팡이’인 경찰이 어떻게 비무장 국민을 한낮에 살해할 수 있단 말인가?!지난 5월 25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위조지폐로 담배를 사려 한다는 연락을 받고 미니애폴리스 경찰이 현장에 출동한다. 경찰관 4명은 비무장 상태의 조지 플로이드를 체포했고, 백인 경관 데릭 쇼빈은 무려 8분 46초 동안 군화 신은 무릎으로 조지의 목을 누른다. “숨을 쉴 수 없다.” 하고 조지가 애원했지만 쇼빈의 무릎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조지가 의식을 잃은 후에도, 심지어 응급 의료진이 현장에 도착한 1분 후에도 쇼빈은 조지의 목을 계속 짓눌렀다. 경찰차가 현장에 도착한 뒤 17분 만에 흑인 조지 플로이드는 사망한다. 뉴욕타임스가 현지시각 5월 31일 현장 CCTV, 목격자 촬영 영상, 관련 공식문서 등을 토대로 재구성한 ‘흑인 플로이드 사망 사건’의 전모다. 단언컨대 이번 사건은 백인 경찰이 합법성을 등에 업은 폭력으로 비무장 흑인을 악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조지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담은 영상이 SNS로 널리 유포되면서 시위가 시작된다. 하지만 트럼프는 5월 29일 백악관 앞에서 시위가 벌어지자 시위대를 조롱하고 ‘군대의 무한한 힘’을 통한 무력진압을 천명한다. 아울러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대응시위를 벌이라고 제안한다. 국가가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도 트럼프는 오직 재선을 위한 정략적 선택에 집중하고 있다.홍콩의 국가보안법 제정을 둘러싸고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는 한편, 코로나19 문제를 중국과 세계보건기구(WHO)로 돌리면서 무차별적인 비난을 멈추지 않는다.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은 치켜세우면서, 민주당 소속 시장들에게는 악의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는다. 모든 책임이 민주당과 지지자들 때문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 하는 그의 주장이 공허하게 메아리치고 있다.코로나19가 가져온 세계화에 대한 불확실성과 유럽연합의 분열양상, 미국의 신고립주의는 21세기 세계의 혼란과 분열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했던 제국 아메리카의 소멸 혹은 쇠락(衰落)이 목전에 전개되고 있다. 앞으로 어떤 예기치 못한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는 시간대가 지나가고 있다.

2020-06-03

물값

윤영대수필가아파트 생활을 하다 보면 편리한 점이 많다. 매달 우편함에 꽂혀있는 관리비 명세서를 가져와서는 거의 내용을 살펴보지 않고 모아 두지만 관리비는 자동이체되어서 이제는 거의 무관심에 이르렀다. 그러나 수년 전부터 나대로의 가계부를 정리하며 생활에너지 사용에 대한 부분만 살펴보고 있다.가계부에는 아파트관리비 부분이 있고 그 항목에는 전기, 수도, 가스 및 통신료 등이 있다. 우리 집의 생활에너지 사용 추이를 알아보겠다는 것인데 전기는 전력량(KWh)과 요금, 수도는 사용량(t)과 요금, 가스료와 통신료는 금액만 적어나가고 있다.그중에서 수도료, 그러니까 우리 집에서만 사용하는 물값을 보니 계절에 따라 약간의 변화는 있지만 1년 내내 월 1만원 내외이다. 물론 부부 둘이 사는 생활이라 해도 물값 1만원은 너무 싸다고 생각된다. 고급 커피 두 잔 값도 안 된다. 그 물값으로 한 달 동안 먹고 설거지하고 세수하고 목욕하고 화장실 쓰고 세탁도 하고 베란다 청소에다 화분까지 물 주고…, 사용량은 10톤 내외라니 그야말로 ‘물값’이다. 그렇다고 마구 풍족하게 쓰자는 것은 아니다. 생수병 1ℓ에 500원 정도이니, 만약 생수로만 생활한다면 10톤은 1ℓ의 만 배, 돈으로 500만 원… 엄청난 금액이다. 생수 물값이 금값이다.우리나라 수돗물 급수현황을 보면 지자체들의 수원지 사정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포항시는 ‘맑은물 사업본부’에서 하루 약 230만 톤을 생산하고 1인당 450~500ℓ를 소비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1인당 평균 물 사용량은 약 280ℓ로 유럽국가들의 2배 수준이라고 하고, 이 중 가정용이 약 180ℓ라고 하니 포항 시민들은 생각보다 많이 쓰는 모양이다. 그리고 요금체제는 가정용, 일반용, 대중탕용 등으로 나누지만 가정용은 20톤까지는 톤당 585원이고 이후에는 누진세가 적용된다고 한다. 우리 집의 경우 계산을 해보니 포항 평균의 반 정도밖에 쓰지 않아서 다행이다.생각해보니 먹고 마시는 식수로서의 양은 얼마 되지 않고 환경을 깨끗이 하는 데 많이 쓰고 있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화장실 수세식 변기의 경우를 보면 하루 대소변 5회를 이용한다고 봤을 때 1회 10ℓ 정도라면 1일 50ℓ, 즉 1일 사용량의 약 1/4, 참 많이 쓴다. ‘돈을 물 쓰듯이 한다.’ 더니 화장실 대소변처리에 수도요금의 1/4을 쓴다는 거다.예로부터 우리나라는 금수강산이라 물 맑고 깨끗하여 어릴 적만 해도 집에 깊은 샘이 있어 두레박으로 퍼서 마셨고, 산과 들에 흐르는 물도 그냥 마셨다. 수돗물도 그대로 마실 수 있는 축복을 받은 나라다. 외국에 나가 보면 수돗물도 제대로 마실 수 없는 나라도 많다. 그러나 중금속 검출과 공업단지의 페놀 유출 등 환경 오염사건으로 인해 수돗물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고, 수돗물도 안심이 되지 않아서인지 정수기를 갖추는 가정도 늘어나고 있다.생수의 국내판매가 공식 허용되기 시작한 90년대 초 이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산이나 계곡의 깨끗한 샘물을 찾아다니며 마셨다. 나도 산행을 겸해서 경주 토함산, 흥해 천곡사, 안강 사방약수까지 먼 길을 큰 물통을 들고 물을 뜨러 갔었다. 물론 공짜였다. 대동강물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 얘기하면서 “누가 물을 돈 주고 사 먹냐?”하며 웃었는데, 요즈음은 계곡물도 팔고 바닷물도 판다. 생수 개발이 보편화 되어 암반수, 심층수 등 종류도 300여 종이 넘고 외국산 생수도 들어와 있다. 이제 물까지 수입해서 먹는 판이다.요즘 코로나 사태로 국제원유가가 배럴당 20달러까지 하락했다고 하니 1ℓ 150원 정도이고 세금 등을 제외한 순수 휘발유 가격은 1ℓ 520원 정도로 생수 값과 거의 같다. 물론 수돗물값에 비할 수는 없다. 예전에는 중동지방에서는 물값이 원유가보다 엄청 비싸다는 말을 듣고 엉뚱한 생각도 해봤다. 수백만 배럴의 원유를 싣고 오는 대형 유조선의 일부를 수조로 개조해서 중동에 빈 배로 갈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맑은 물을 싣고가서 팔면 비싼 원유값 일부라도 보충할 수 있을 것 아니냐? 라고….우리나라는 알려진 것과 달리 ‘물부족 국가’는 아니라고 하지만 물은 언제나 아껴 써야 한다. 목욕탕에서 물을 줄줄 틀어놓고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괜히 짜증이 난다. “풍족하게 쓰시되 낭비하지 마세요.”라는 문구가 참 좋다. 아무리 물값이 싸다 해도 낭비해서는 안 된다.

2020-06-03

아는 사람 한 분도 못 봤다

1930년 경오생 조갑규 씨는 오늘도 일기를 씁니다. 소일거리로 만지던 재봉틀을 놓아버린 뒤 생긴 습관입니다. 91세, 노동에서 해방 되면 자유를 얻을 줄 알았는데 웬 걸요. 뒤늦게야 무료함이야말로 생의 가장 무서운 적임을 알게 됐지 뭡니까. 버젓한 자식들이 둘레둘레 있으니 사전적 의미로는 독거노인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매일 일기를 써도 홀로 사는 왕노년의 하루해는 길기만 합니다.또래 할머니들이 그랬듯이 조갑규 씨 역시 평생 ‘심심하다’는 말뜻을 이해할 여가가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열여섯에 시집 와, 농사일에서 장삿길까지 온몸의 뼈마디가 쑤시고 닳도록 노동과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삶보다는 죽음에 가까운 지금에야 일을 손에서 놓았지만 딱히 일 하지 않는 지금이 더 행복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잡념 생길 겨를이 없었던 바빴던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몸은 고되어도 성취감 때문에 날아갈 듯한 날도 많았으니까요.이상한 바이러스 때문에 요즘은 더 힘듭니다. 성당도, 경로당도 갈 수 없으니 심심함을 넘어 사방이 막힌 기분입니다. 무료함을 지나 적요함의 공기가 방 안을 감쌀 때면 죽음보다 더한 공포와 한기가 온몸을 파고듭니다. 혼자 사는 조갑규 씨의 요즘 화두는 ‘무료함과의 전쟁’입니다. 이런 조갑규 씨의 일기장을 훔쳐봤습니다. 두어 컷을 담았습니다. 몇 구절을 원본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코리나 병 때무내 백계 안 나가고 이섯다. 이 병이 언재 끈날지 모른다. 뱅글뱅글 돌면서 하류하류 지냇단다. 아무대 안 나가고 지배 이섯다. 하이 땃히 박게 내보이 버를입피 파락캐 도다낫다. 벅꼿 명알도 불근색가료 벌서 매자간다. 점심 반찬 토란국 계랄찜 해먹다. 오늘 책일다보이 시간가는 모고 이섯다가 벌서 5시가 다대다. 저녁 가래 해먹것다. 오를언 비가 와 날새 컴컴했다. 오늘도 그럭저럭 화루해가 다각구나. 고리나 병대무내 22째 집아내마 갓채이섯다.”조갑규 씨는 코로나 때문에 밖에 나가지 못합니다. 기약도 없습니다. 갇힌 날들을 셈하면서 조갑규 씨는 뱅글뱅글 집안을 돕니다. 봄이 오고 있습니다. 따뜻해진 밖을 내다보니 버들잎이 파랗게 돋아났습니다. 어느새 벚꽃 몽오리도 붉은 색깔로 맺어갑니다. 무료할수록 허기는 더 잘 찾아옵니다. 점심 반찬으로 토란국과 계란찜을 해먹습니다. 책 읽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모릅니다. 벌써 다섯 시가 되었습니다. 저녁으로는 카레를 해먹습니다. 비가 와서 날씨는 컴컴해집니다. 오늘도 그럭저럭 하루해가 다 갔습니다. 22일째 집안에만 갇혀 있습니다. 조갑규 씨 일기체의 담백한 서술 방식이 어쩐지 난중일기를 닮았습니다. 심리가 반영된 내용은 아니지만 진술과 풍경 속에 조갑규 씨의 공허한 내면이 읽히는 듯합니다. 사진에 찍힌 장면 몇 구절도 첨부합니다. ‘왕노년’을 보내는 조갑규 씨의 도돌이표 일상이 이어집니다. 읽기 편하게 맞춤법에 맞게 올려봅니다.“소설 파랑새를 두 번째 읽었다. 오늘은 37페이지까지 읽었다. 성경 야고보서 4장 11절까지를 읽었다. 점심은 미역국을 끓이고 조기를 구웠다. 새 밥을 해서 맛있게 먹었다. 28일 만에 처음 밖에 나갔다. 출렁다리를 건너서 망우공원을 둘러서 큰다리를 건너서 갔다. 옛날에 살던 동네인 방천에서 내려다보았다. 아는 사람 한 분도 못 봤다. 집으로 오다가 어떤 할머니가 나를 보고 손짓했다. 같이 놀다가 갑시다, 했다. 이야기도 하고 오랜만에 잘 놀다가 왔다. 큰딸이 쌀, 돼지고기, 쌀과자 등을 배달시켜줬다. 손자가 사온 파로 김치를 담갔다. 하도 여러 가지를 가져와서 숫자도 모르겠다. 오늘은 봄바람이 완연하다. 밖에 내다보니 개나리꽃, 벚꽃이 피어서 만발하다. 방천에 사람들이 벚꽃 구경한다고 얼마나 많이 다니는지. 막내 내외가 와서 점심 돼지찌개해서 먹었다. 함께 방천 꽃구경하고 공원에 갔다. 집에 와서 커피 한 잔하고 갔다. 한 달 20일 만에 망우공원에 갔더니 빵과 우유를 (봉사회에서) 주었다. 안과 병원에 갔다. 소설책 129페이지 읽었다. 요한묵시록 22장 12절에서 17절까지 읽었다.”-조갑규씨 일기 중김살로메소설가코로나 때문에 집안에서만 뱅뱅 돌다, 모처럼 나들이에 나선 조갑규 씨. ‘아는 사람 한 분도 못 본’ 대목에선 숙연해집니다. 동네 윷놀이 친구들은 모두 하늘나라로 떠나셨다지요. 성경 읽고 기도하고 소설책 읽고. 그래도 심심하면 식솔들에게 차례로 전화하는 왕노년 조갑규 씨는 제 엄마입니다. 절약 세대의 모범생답게 여백마저 아까워 빽빽하게 공책을 메우시는 분입니다. 얼마 전, 줄 넓고 칸 큰 일기장을 한 더미 사다드렸습니다. 동시대 할머니들이 쓴 시집과 일기집도 곁들였지요. 비껴 간 얘기긴 하지만, 시집과 일기집은 노년이 읽기엔 활자가 너무나도 작았습니다. 누구를 위한 책인지 살짝 아쉬웠습니다. 그나저나 아끼는 습관이 몸에 밴 조갑규 씨가 줄 넓은 새 일기장을 잘 활용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2020-06-03

디지털 지갑

디지털 지갑은 디지털화된 가치를 안전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모바일 기기상에 구현한 전자 지불 시스템의 한 종류로, 영어로는 ‘e-Wallet’이나 ‘Digital Wallet’이라고 한다.신용 결제뿐 아니라 멤버십·포인트· 쿠폰 등 다양한 결제 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스마트폰 혁명이 초래한 모바일 경제 시대의 새로운 결제 방식으로 각광받고 있다.한국에서도 디지털 지갑의 주도권을 놓고 카드사, 통신사, 은행, 스마트폰 제조사, 유통사 등이 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신한카드의 ‘신한 스마트월렛’, 삼성카드의 ‘삼성m포켓’, SK플래닛의 ‘스마트월렛’, KT의 ‘모카’ 등이 그런 경우다. 최근에는 카카오 블록체인 자회사 그라운드X가 모바일 지갑 서비스 ‘클립(Klip)’을 출시, 블록체인 서비스 대중화에 시동을 걸었다.국민 대다수가 이용하는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 안에 디지털 자산 지갑 ‘클립’을 탑재한 것이다. 클립은 카카오톡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디지털 자산 지갑 서비스다.디지털 자산이란 온라인 환경에서 자산으로 인식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정보 및 데이터를 말한다. 게임 아이템이나 가상 포인트 등이 대표적이다.특히 최근 블록체인 기술의 발달로 과거에는 가치를 매기거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던 온라인 활동 데이터와 개인 제작 콘텐츠 등도 자산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클립은 사용자들이 스마트폰에서 쉽게 디지털 자산을 접해 볼 수 있도록 개발됐다. 별도의 앱 설치 없이 카카오톡 모바일 앱 우측 하단의 ‘더 보기’탭 내 ‘전체 서비스’ 메뉴에서 이용할 수 있다. 회원가입과 로그인 역시 카카오 계정을 그대로 이용하면 된다.디지털 시대의 진화가 눈부시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06-03

팍스 아메리카나, 팍스 코리아나

장규열 한동대 교수미국이 흔들린다. 코로나19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하여 아슬아슬하였다. 방역이 시급하면서도 경제를 위한 대책에 급급하였다. 하필 이런 가운데, 백인 경찰이 흑인 용의자를 폭력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미국 내 흑인단체들은 물론 유색인종 시민들이 충격 속에 항거시위에 돌입하였다. 그런 와중에 약탈과 방화까지 벌어져 미국 대통령은 오히려 거센 비난과 함께 진압에 노력하며 정치적 행보만 거듭하고 있다.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도 가물거린다. 미국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탈퇴한 것을 시작으로 파리기후변화협약과 유네스코(UNESCO)에서 벗어나더니 이제는 국제보건기구(WHO)에 대한 지원도 중단하였다. 자국의 이익에 집중한 나머지 글로벌 환경에서 리더의 위치를 스스로 포기하는 모양새가 아닌가. 국제정치의 질서를 다시 만들려는 노력이 보이지만, 다시 한번 대결과 갈등의 구조를 시도하여 신냉전의 기운이 드리우지 않을까 염려스럽다.차별과 혐오의 맨 앞에 미국이 서 있다. 사람을 피부색으로 차별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이 낡은 생각이 아직도 살아있다니! 그것도 문명국가들 가운데 가장 앞서간다는 미국에 여지껏 인종차별이 횡행한다니. 코로나19가 요청하는 사회적 거리두기는 인종차별을 거부하는 시민들의 거센 시위물결에 힘을 잃고 말았다. 안팎으로 켜켜이 쌓인 난제들을 미국과 미국 시민들은 어떻게 이겨낼 것인지 멀리서도 불안하기 이를 데 없다. 한때 가서 살고 싶었던 나라 미국의 영광은 이제 저무는 게 아닌가.대한민국도 어렵다. 코로나19는 떠나가지 않으면서 학교와 교회 등의 언저리를 긴장시키고 있다. 선생님들은 오랜만에 만난 학생들과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집중하려 하지만 이미 어그러진 배움의 마당이 안정을 찾으려면 긴 시간이 들 모양이다. 갈 길이 아직도 멀지만 다른 나라들과 견주는 일이 많아지다 보니, ‘헬조선’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대신, 우리 안에서 발견하는 강점과 장점을 키워가려는 노력과 다짐이 보인다. 절망은 희망으로 바꾸고 낙담은 기대로 바꾸어 내리막을 오르막으로 만들어 낼 의지를 키워야 한다.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을 불러내었다고 한다. 함께 하겠다는 응수를 던지기는 했지만, 편가르기에 훈수를 더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이제는 국격이 올라간 만큼 다른 나라들을 설득하고 격려해 지구 상에 평화와 번영을 앞당기는 첫 자리에서 대한민국을 보았으면 한다. 차별과 혐오를 이겨내는 묘수도 전해주는 나라가 되었으면 한다. 21세기에 인종차별이 말이나 되나. 지난 세월 겪어온 수다한 경험과 고난이 이제는 남들에게 알려줄 소중한 지혜와 자산이지 않을까.‘대한민국이 있어 다행이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팍스 코리아나’를 기대하는 건, 너무 성급한 생각일까. 세상이 어려울수록, 준비된 자가 누구인지는 어렵지 않게 드러날 터이다. 코로나는 가라, 헬조선은 없다.

2020-06-03

김재규 재심 청구는 수용될 것인가

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지 40년이 지났다. 그는 1979년 10월 26일 저녁 궁정동 만찬에서 차지철 전 경호 실장과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하여 군사 재판을 받았다. 그는 내란 수괴죄와 내란 목적 살인죄로 6개월 만에 전격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번 새로 입수된 재판 과정의 128시간의 녹음 테이프는 재판시의 김재규의 육성을 또렷하게 들을 수 있다. 김재규 유족들은 이 테이프를 근거로 서울 고법에 재심을 청구해 놓은 상태이다. 그의 재심이 수용되어 10·26사건과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가 초미의 관심사이다.김재규 전 부장이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일찍부터 있었다. 당시 서슬 퍼런 전두환 계엄 정국에서는 누구도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할 수는 없었다. 당시 박정희 유신 독재에 저항했던 사람들은 그를 ‘민주 투사’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내란목적 살인죄로 그의 측근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번 테이프에서도 김재규는 대통령 시해 목적은 ‘자유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불가피한 방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대통령이 되려는 과대망상’이라는 검찰의 주장에 ‘자유 민주주의를 살리기 위한 혁명’이라 주장하였다. 내란 목적 살인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그는 최후 변론에서도 자신의 행위가 독재를 막기 위한 혁명인데 어떻게 자신이 집권하겠다는 목적이 있었겠냐고 항변했다. 우리가 영화를 통해서만 보았던 시해당시의 상항을 그의 육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향해 ‘각하 정치를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라는 말과 함께 바로 옆 자리 김계원 비서실장에게 ‘각하를 똑똑히 모셔라’며 툭 치고 차지철 경호 실장에게 “이 버러지 같은 자식’하며 총을 쏘고 ‘1초’ 도 안 되는 순간에 대통령을 향해 꽝꽝 했다”고 진술했다.이번 녹음에서 김재규의 유신헌법에 관한 입장은 재판장의 저지로 발언이 수차례 제지당했다. 그가 10월 유신을 권력내의 쿠데타라고 규정하여 그 부당성을 설명하려 한 것은 분명한데 그의 육성이 녹음되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당시 중정 부장 김재규는 10·26 사건 전야 소위 부마사태의 현지를 방문하고 시국 수습책을 제시하려 했다. 이 문제로 경호 실장 차지철과 심각하게 다투었고 당시 박 대통령은 ‘사태가 악화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고 하면서 그를 질타했다는 내용도 녹음되어 있었다.당시 경남대학 교수로서 마산에서 대학생들의 데모를 현장에서 목도했던 사람으로서 그 감회가 새롭다. 이번 김재규 재판의 재심의 수용여부는 법원의 판단에 달려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재심의 요건인 새로운 증거인 53개의 녹음테이프가 나왔다는 점이다. 더구나 재판과정의 피고 김재규의 당시 발언이 공판시의 증거로 채택되지 못한 점은 재심의 또 다른 주요 요건이 될 것이다. 이번 재심을 통해 10·26의 실체가 정확히 드러나고, 김재규 전 부장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바르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재심의 수용여부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역사에는 영원한 은폐도 비밀도 없는 것 같다.

2020-06-02

텃밭을 가꾸며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주택가 변두리에 살면서 작은 텃밭과 정원을 가꿔온지 십 수년, 단조로운 일상의 리듬과 소소한 소일거리로 삼으니 넉넉하기만 하다. 텃밭이라야 손바닥만한 두어 평에 불과하고, 뒤뜰 역시 그다지 넓거나 비좁지 않은 둘레지만, 그 나름의 구실을 다해가며 도심 속 전원의 맛을 조금이나마 누리게 해주고 있다. 땅을 밟거나 흙을 만지는 일들이 흔치 않은 도시생활에 미미하지만 자연을 가까이 할 수 있음이 다행스럽다고나 해야 할까?‘아지랑이 피어나는 설레임의 한 켠에/땅을 파고 이랑 갈아 씨앗 몇 점 뿌리며/두어 평 일구는 텃밭/작은 행복 심는다//흙의 숨결 느끼며 땅의 말씀 귀담으며/거름을 주고 북돋움도 하면서/쏠쏠히 꿈을 키우듯/애틋하게 보듬네’ -졸(拙)시조 ‘텃밭을 가꾸며’ 중에서-상추, 고추, 배추, 열무, 정구지, 미나리 등 십여 가지 채소를 심어놓은 채전(菜田)에 수시로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벌레를 잡다 보면, 어느새 말쑥하고 푸르싱싱하게 자라나는 푸성귀들이 새뜻하고 착하게만 보인다.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농작물은 관심과 보살핌에 따라 튼실해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쑥쑥 자라난 푸성귀를 쌈이나 겉절이, 전 따위로 즉석에서 부쳐서 먹거나, 적은 양이지만 이웃에 나누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밥상머리에서 인심 난다는 말처럼, 작은 텃밭의 채소가 큰 인정을 나누는 배려의 바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하루에도 몇 번씩 텃밭과 정원을 거닐다 보면 식물과 나무, 곤충과 새들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읽어낼 수 있다. 때가 되면 움과 싹이 트고 잎과 줄기가 돋아나며 꽃이 피어나는 과정이 익숙하지만 새삼스럽게 여겨진다. 또한 뒤뜰 주위를 즐겨 찾는 새들은 그들만의 지저귐으로 다정한 대화와 사랑노래를 나누며, 물이 고인 작은 돌확에 차례대로 내려앉아 물을 먹는 모습이 앙증스럽기만 하다. 같은 무리들과 소통하고 어울리며 지켜가는 일들이 당연시되는 동·식물들의 생장현상 같지만, 가까이서 자주 살펴보면 의외로 보이는 것들이 많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경이로운 부분이 있다. 예컨대 꽃을 꺾거나 식물의 줄기를 자르면 그 가냘픈 비명소리를 고양이 따위의 동물이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어쩌면 돌 하나, 풀 한 포기에도 우주가 들어있고 자연계의 천지만물은 어떤 오묘한 법칙이나 질서 속에서 존재하고 생멸을 거듭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텃밭과 정원은 자연만물이 다 그러하듯이 생명의 움직임이 있어야 유지되고 자생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일이 작더라도 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事雖小 不作不成)는 말은, 결국 어떤 일의 시도와 움직임의 힘을 강조한 것이다. 움직임은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향과 지속성이다. 급하게 빨리 보다는, 제대로 꾸준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관건이다. 정성으로 가꾸고 다듬고 손질하려는 끈덕진 노력의 손길이 없다면, 아무리 작은 뜨락과 밭뙈기라도 이내 잡초가 무성해지고 황폐화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따름이다.

2020-06-02

닭은 벼슬을 자랑하지 않는다

이창훈경북도청본사 취재본부장중세 말기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이 발발하자 영국과 가장 가까운 프랑스의 항구도시 칼레는 영국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칼레 사람들은 시민군을 조직해 맞서 싸웠지만 전쟁이 길어지면서 끝내 항복하고 말았다.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파격적인 항복 조건을 내걸었다. “시민들 중 6명을 뽑아 와라. 그러면 칼레 시민 전체를 대신해 처형하고 나머지는 사면하겠다”는 내용이었다.칼레의 갑부 생 피에르를 비롯한 고위 관료와 부유층 인사 6명이 자원했다. 이들은 목에 밧줄을 걸고 맨발에 자루 옷을 입고 영국왕 앞으로 나왔다. 사형이 집행되려는 순간 임신 중이던 영국왕의 왕비가 처형을 만류했다. 이들을 죽이면 태아에게 불행한 일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이유였다. 왕은 고심 끝에 이들을 풀어 주었고 6명의 시민은 칼레의 영웅이 됐다. 이것이 가진 자의 의무를 상징하는 ‘노블레스(귀족) 오블리주(의무)’가 탄생된 배경이다. 원래 노블레스는 닭의 벼슬을 의미하고, 오블리주는 달걀의 노른자라는 뜻이다. 이 두 단어를 합성해 만든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닭의 사명이 자기의 벼슬을 자랑함에 있지 않고 알을 낳는 데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작금의 현실을 보면 우리나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다.요즘 언론의 화두는 더불어민주당 윤미향 당선자의 거취다. 그는 정의기억연대를 이끌다 최근 국회의원에 당선됨과 동시에 여러 가지 문제로 검찰수사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 중심에 위안부 피해자로 오랫동안 활동한 이용수 할머니가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문제는 사회적 통념이나 법으로 다뤄 바로잡으면 된다. 법의 심판은 법원에서 받고, 사회적 정서와 국민의 감정 등을 고려한 의원직 면탈은 자신이 소속한 당에서 결정하면 끝이다.그러나 이 사건의 본질이 왜곡되면서 당리당략적 정쟁으로 흐르고 있다. 지난 30년간 일본군 ‘위안부’ 운동 방향을 돌아보자는 이용수 할머니가 요구한 본질은 간데없고 인신공격만 난무하는 등 본말이 전도되고 있다. 이 가운데 다선 국회의원들이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호위무사로 방어벽을 치고 있다.국회의원들은 국민의 대표로 ‘선량(選良)‘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하지만 선량은 간데없고 ‘노블레스 말라드(Noblesse Malade)’, 즉 욕심에 가득찬 귀족만 가득하다는 생각이다.경북도의회도 다음달이면 새로운 지도부가 구성된다. 오랫동안 일당중심으로 오다 2년전부터 여·야당이 함께 동고동락해오고 있다. 그동안 크고 작은 불협화음도 있었지만 모두 다 시도민을 위한 업무 중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다수당은 좀 더 아량을 베풀고, 소수당은 억지보다는 실리에 방점을 찍는 실사구시를 추구, 협치로 나가야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프랑스의 작은 지방에서 싹텄듯 경북도의회가 타시도의 모범이 됐으면 한다.단 6명의 지도자가 칼레를 구한 것처럼 세상을 밝히는 등불은 아주 작은 불빛에서 시작된다. 희생과 나눔을 의무로 여긴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욱 밝아질 것이다.

2020-06-02

대구독립운동기념관

올 초 대구에서도 독립운동기념관을 건립하자는 뜻있는 인사들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지난 2월에는 대구광복회와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 등이 중심이 돼 대구독립운동기념관 건립추진위를 발족시켰다.지난 4월에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다 두 차례나 무기선고를 받았던 독립운동가 백산 우재룡 지사의 장남 우대현씨가 동구 용수동 소재 땅 4만7천㎡를 기증하면서 건립 운동은 더욱 탄력을 받았다.그러나 코로나19의 확산으로 발기인 대회 및 학술대회 등 추가적인 건립운동에 대한 제동이 걸리면서 아직은 건립운동이 제대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추진위 측이 밝힌 대구독립운동기념관 건립에 대한 당위성은 여러 가지다. 국채보상운동의 중심도시이자 일제하에서 가장 활발하게 독립운동이 펼쳐진 곳이라는 점이다. 대구는 159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해 인구비례로 볼 때 서울의 1.6배, 부산의 3배, 인천의 5배가 된다고 한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독립운동가 묘원인 국립 신암선열공원이 있다는 것도 건립의 배경이다.서울과 부산, 광주뿐 아니라 김포, 밀양, 나주 같은 중소도시에도 독립운동기념관이 건립돼 있다는 현실에 비춰볼 때 대구의 건립은 당연하다. 인구 250만 명 도시에서 일어난 국난극복의 정신을 알리고 대구시민의 자긍심을 키운다는 면에서 당위성은 충분하다.대구와 경북은 독립운동의 성지다. 다른 도시에서는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역사적 사료가 이를 입증한다. 독립유공 포상자만으로도 압도적이다.안동에 있는 경북 독립운동기념관과 함께 대구독립운동기념관이 건립된다면 국난극복의 중심도시로서 우리지역의 위상은 더 높아질 수 있다. 호국보훈의 달이라서 기념관 건립의 성공적 추진이 더 간절해진다. /우정구(논설위원)

2020-06-02

코로나19,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김재욱대구본부“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야구계 명언이 있다.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의 전설인 요기 베라가 한 말이다.1973년 베라는 뉴욕 메츠의 감독이었고 팀은 지구 선두인 시카고 컵스에 9.5게임차로 뒤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기자는 베라 감독에게 “시즌이 끝난 것 아닙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베라 감독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고 답했다.이후 베라 감독이 이끄는 메츠는 달라진 팀이 돼 점수를 쌓아 나갔고, 기적 같은 대역전극을 펼치며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우승을 차지했다.그해 메츠는 월드시리즈까지 진출했고, 7차전까지 가는 명승부 끝에 준우승을 거뒀다.이후 이 말은 야구계의 명언이 됐고, 우리 일상에서도 자주 쓰는 말이 됐다.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 역시 다를 바 없다.지난 2월 18일 신천지발 코로나19 감염자 확산으로 2개월 동안 혼란에 빠졌던 우리사회는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와 성숙한 ‘시민 의식’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듯 했다.4월 말부터는 코로나19 확진자가 한자릿 수까지 줄어들면서 정부는 5월 초부터 방역 정책을 ‘생활 속 거리두기’로 완화하기까지 이르렀다.하지만 ‘4말 5초’ 황금 연휴기간 이태원발 집단감염을 시작으로 ‘N차 감염’이 이어지면서 부천 쿠팡 물류센터에서 확진자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말았다.특히, 이들 중 무증상 감염자가 많아 역학조사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이런 상황이다보니 시민들은 다시금 불안감에 휩쌓이고 있다.불안한 감정과는 반대로 긴장감이 풀린 모습들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최근 들어 대구지역의 유흥가를 살펴보면 젊은 청년들이 식당과 술집에 가득 차 있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코로나19로 인해 감염에 대한 공포와 실내생활로 인한 스트레스 등을 지인, 친구와의 만남을 통해 해소하려는 것이다.문제는 절대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코로나19에 대응하기 위해 대구시민들은 자체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습관화하고 있다.한 순간의 방심이 지금까지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경각심이 필요하다.코로나19는 언제든 다시 확산할 수 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가 되새겨야 할 시점이다./kimjw@kbmaeil.com

2020-06-01

정의(正義)와 앵벌이

강희룡 서예가한국사회에서 7~80년대 만해도 어린아이들이 시장바닥이나 버스 정류장, 지하철, 번화가 같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구걸을 하거나 껌 같은 것을 파는 행위를, 어린아이들이 앵앵 울면서 돈벌이를 구걸한다는 말에서 유래한 단어가 ‘앵벌이’다.이러한 행위는 법적으로는 ‘구걸부당이득’이라 하여 다른 사람의 구걸을 통하여 이익을 얻은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경범죄처벌법에서 다루고 있다. 과거에는 전쟁고아 등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이라 앵벌이 아동을 자주 볼 수 있었고, 90년대 중반까지도 인신매매와 유괴가 심각했던지라 앵벌이 아동이 제법 많았으나 요즘은 거의 사라졌다.또 다른 유형의 앵벌이는 카지노에서 가진 돈을 모두 탕진하고 허드렛일이나 대리도박, 자리 맡아주기, 구걸 등으로 카지노에 기생하면서 푼돈을 벌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앵벌이도 잘 하면 수입이 괜찮다하지만 애당초 도박중독 때문에 그 지경이 됐으니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다시 도박으로 탕진하고 앵벌이로 돌아가고는 한다.지난달 25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던 이용수 할머니께서 오랜 세월 함께한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 할머니들을 30년 동안이나 이용했다고 폭로하며 울분을 토했다.2008년에 별세한 고(故) 심미자 할머니의 자필 일기장에서도 정대협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앞세워 윤미향 대표의 재산축적을 위해 돈을 모금한다고 그 이유를 적고 있다. 이어서 정대협은 고양이고, 할머니들은 생선이며 할머니들을 물고 뜯고 할퀴는 쥐새끼 같은 단체라고 비판하며, 할머니들의 피를 빠는 거머리라고 질타했다.심 할머니는 생존 시에도 정대협을 ‘당신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역사의 무대에 앵벌이로 팔아 배를 불려온 악당’이라고 주장했다. 정대협에서 정의연으로 이름을 바꾼 이 단체는 회계관리 부실부터 윤미향 대표 개인계좌를 통해 받은 후원금이나 모금 등 수많은 의혹을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할머니들의 말씀처럼 정의연이 저지른 부정행위가 사실이라면 개인의 돈벌이를 위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이용한 ‘추악한 현대판 앵벌이’를 한 것이다.정의기억연대의 정관에 명시된 목적은 국가권력 감시이며, 주요 임무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명예와 인권을 회복함이다. 이 과정에서 이 단체는 친일, 반일 프레임을 바탕으로 무소불위의 권력화가 됐다. 이 권력화를 이용해 정의연 간부들은 요소요소에서 그들이 바라던 영욕의 자리를 꿰찼다. 윤 대표 역시 제 21대 국회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로 당선되어 국회로 진출했다. 결국 겉은 할머니들의 얼굴로 포장하고 뒤로는 그들의 골수를 뽑는 앵벌이를 통해 부와 명예를 제 몫으로 돌린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의를 앞세워 대중의 관심을 끌고 난 뒤, 한 건 터뜨려 개인의 영욕을 충족시키는 몰염치한 사례가 극에 달한다. 최소한의 부끄러움과 도덕성도 없는 세계에 유례없이 특이한 시민운동을 한국인들은 지금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국어사전에서 정의(正義)라는 단어 뜻을 바꿔야 할 현실이다.

2020-06-01

예술지원과 공짜문화

류영재 포항예총 회장쉽사리 끝날 것 같지 않은 ‘코로나사태’가 기존의 가치체계를 많은 부분 뒤집어 놓았다.이 사태는 전 인류를 혼란에 빠트렸고, 경제를 불황의 늪으로 떠밀어 세계적인 부자들은 몇 조, 몇 십조의 손해를 입었다고 한다. 가난한 예술가 주제에 그들을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고, 예술인들에게 닥친 불황이 매우 걱정스럽다. 특히 대면활동을 주로 하거나 대중이 모여서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예술장르에 코로나는 치명상을 입혔다. 무대를 만들 수도 없고, 장을 열어도 사람이 없고, 함부로 사람을 부를 수도 없어 내상이 깊어만 가고 있는 실정이니 답답한 노릇이다.인류의 삶에서 문화예술은 대단히 중요하다. 예술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당연히 예술가를 우대해야 되고, 창작활동이 삶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예술활동의 대가를 주장하면 순수성을 의심받는다. 예술의 지고한 정신세계와 물질이라는 현실세계의 서로 상반된 요소가 빚어내는 이중주에서 불협화음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의 후원아래 불후의 명작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미켈란젤로의 경우에서 보듯이 훌륭한 예술적 성과를 위해서는 경제적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며, 그 성과는 도시나 국가의 미래에 기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스위스 연방의 바젤은 포항과 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은 도시다.세계적 제약산업의 중심이기도 한 바젤에 투자한 유명 제약회사가 포항에 투자를 고민하면서 “포항과 바젤은 여러모로 비슷하지만 포항에는 아트가 없다.”라 했다.포항을 세세히 다 알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행히 최근에는 예술인에 대한 지원이 활발해지고 있으며, 예술인 고용보험이 법제화되는 등 예술인에 대한 사회안전망도 정비되고 있기는 하다.그러나 예술인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누리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보조금의 정산 규정이 지나치게 까다롭고, 고용보험은 수급조건이 문제다.진짜로 춥고 배고픈 예술인들은 제대로 고용된 적이 없으니 고용보험의 실업급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공공예산의 지원이 행사를 만드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만, 지원받는 공연은 유료화 할 수 없다는 제약이 있다. 공짜문화를 양산하는 공공예산은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다. 예술문화의 진정한 발전은 입장권 한 장의 대가를 기꺼이 지출할 줄 아는 문화시민의 호주머니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소설가 신아연 선생이 매일 아침 공짜로 보내오는 칼럼의 일부다.“제가 대가 없이 글을 쓸 때는 비영리 단체 등 공익성이 있는 곳이거나, 아니면 살림이 매우 어려워 도저히 원고료를 지급할 수 없는 곳에 한한다는 나름의 원칙이 있습니다. 전자는 살면서 사회에 진 빚을 갚는 의미에서, 후자는 내가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눈다는 뜻에서입니다. 글쟁이로서 돈을 먼저 생각하고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정신노동이나 문화예술의 가치에 대해 몰염치한 우리 사회가 걱정스럽고 더러는 분노케 합니다.”

2020-06-01

태극나비를 본 적이 있는가… 밀양 무봉사(舞鳳寺)

이름만으로도 끌리는 도시 밀양, 영남루 바로 옆에 무봉사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불리는 영남루에는 휴일을 즐기는 사람들로 어수선한데, 그곳에서 살짝 돌아 앉은 무봉사 가는 길은 대숲이 밀양강을 막아주어 아늑하고 호젓하다. 일주문을 지나면 가파른 계단 위로 해탈문을 대신하는 무량문(無量門)이 보이고 작은 문안으로 하늘을 나는 봉황 모형이 선명하게 카메라에 잡힌다.무봉사는 신라 혜공왕 9년(773년) 법조(法照)가 세운 절이다. 지금의 영남루 자리에는 영남사라는 절이 있었지만 절이 타고 없어지자, 당시 무봉암이었던 절을 무봉사로 승격시키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여러 차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무봉사는 봉황이 춤추는 모습인 이곳 지형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무봉사에는 재미있는 전설도 전해진다. 통일신라 말기 나라가 힘들 때, 날개에 태극무늬가 있는 나비가 무봉사가 있는 아동산을 날아다니다 사라진 후 고려가 세워졌다고 한다. 그 후 나비가 나타날 때마다 경사스러운 일들이 생겨나, 지금도 태극나비를 찾아 많은 사람들이 무봉사를 참배한다고 한다.일주문에서부터 가파른 계단이 이어지지만 우측으로 밀양강변 풍경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절은 결코 작아 보이지 않는다. 정갈하고 고요하다. 대웅전에서 피부가 맑고 고운 비구니스님이 예불을 끝내고 막 나오실 것만 같은데, 아름드리나무들이 사찰을 지키고 봉황 두 마리가 방문객을 맞고 있다. 나비를 보지 않아도 길한 기운들이 내게로 전해져 올 것만 같다.참배는 되도록 짧게 끝내라는 안내문이 대웅전 법당 앞에 선 나를 주춤거리게 만든다. 매 주 산사를 찾아 백팔 배 하겠노라는 약속을 깨고 싶지 않아 남편과 나란히 백팔 배를 시작한다. 손 소독제를 비치하고 참배자들이 직접 연락처를 기입하도록 방명록을 준비해 둔 세심함까지, 대웅전 법당 마루도 유난히 정갈하여 구석구석 여성성이 느껴지는 사찰이다.화강암으로 만든 보물 제 493호 무봉사 석조여래좌상과 5구의 화불이 장식된 광배는 조각솜씨가 뛰어나고 화려하다. 법당 앞에는 오래된 회화나무 한 그루가 당당히 푸르고, 지장전 가는 모퉁이길 쪽에서 바라보는 절의 풍경도 멋스럽다. 무엇보다 절과 이어지는 두 갈래의 오솔길이 유혹하지만, 가보지 않은 길을 저만큼 걷다 돌아서고 말았다.운이 좋게 포행을 가시려던 스님과 마주친다. 비구니 스님이 아니라 평온한 인상의 비구 스님이다. 인사를 나누고 스님과 함께 둘레길을 걷는다. 스님은 아동산과 무봉사의 역사, 밀양읍성에 대해 설명해 주신다. 작은 절이지만 종각이 따로 있어 무봉사의 봉황이 날아가 알을 품을 수 있도록 아침저녁으로 타종을 하신다는 말씀까지 친절히 들려주신다.둘레길은 약간의 가파름을 숨기고 아동산 허리를 감고 이어진다. 초록은 녹음으로 변해 햇살을 차단하고 푸른 그늘을 드리운 오솔길을 만들고 있었다. 인적 없는 낯선 숲길이 스님이 계셔 든든하다. 벌걸음이 빠른 스님은 저만치 앞서 걷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마치 태극무늬 나비 한 마리 왔다가 사라진 것처럼.모처럼 둘레길을 걸을 수 있는 이 시간을 오래도록 즐기고 싶다. 둘만의 시간을 갖기가 쉽지 않은 요즘, 함께 다녔던 절과 숲, 도시를 떠난 일 년간의 삶을 돌아본다. 전원생활을 반대하던 남편이 쉽게 적응해 준 것도, 번번이 절 기행에 동참해주며 낮고 겸허한 자세로 법당에 들어서는 점도 고맙다. 그로 인해 공통의 관심거리가 생겼으며 대화도 많아졌다.이따금씩 알 수 없는 향기가 날아와 대화는 자주 멈춰야 했다. 우리의 발걸음을 붙잡고 돌아보게 만든 것은 백화등 향기였다. 나무들을 감고 울창하게 정글을 이루는 백화등 꽃무리에 탄성을 쏟아낸다. 수백 마리 나비가 날갯짓을 하듯 황홀하다. 적어도 백화등 덩굴에 감겨 질식할 것만 같은 나무들의 창백한 표정이 내 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어둠을 지닌 안쓰러운 생동감과 저 아득한 몸짓들, 내 안에서 한 마리 나비가 파닥거린다.조낭희 수필가밀양읍성 동문이 보일 무렵 우리는 성곽을 밟으며 다시 무봉사 쪽으로 향한다. 산책길 초입 쉼터에서 움츠리고 있던 한 남자가 생각났다. 햇빛 하나 들지 않은 어둠을 벗 삼아 강물의 소용돌이에 쓸려버릴 듯 작은 체구의 그가 떠오른다. 그는 어쩌면 태극나비를 찾아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닐까.나는 왜 우리와 함께 걷자고 말하지 못했을까. 선택은 그의 몫이지만. 일상에서 만난 작고 소소한 즐거움이 지친 날개에 힘을 실어 줄 때가 많다. 운이 좋아 무봉사 타종 소리가 그의 가슴에 스며들고 젖어들어 그의 어둠을 털어낼 수 있다면 좋겠다. 행운이란 그렇게 아무도 몰래 조용히 가슴을 흔들고 가는 것이리라.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쩌면 그가 날개 꺾인 한 마리 태극나비였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 마디를 찾아 이곳까지 날아온 전설 속의 나비를 나는 마음이 어두워 보지 못했던 건 아닐까. 백화등 향기는 더 이상 따라 오지 않았고, 무봉사는 말없이 밀양강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2020-06-01

미술사학의 아버지 조르조 바사리

오랫동안 미술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미술작품과 미술가들의 이야기만 전해왔을 뿐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나, 개별 미술가와 작품에 대한 단편적인 평가는 고대로부터 있어왔다. 하지만 미술에 대한 역사인식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은 르네상스가 무르익었던 16세기 이탈리아, 그것도 르네상스의 본고장 피렌체에서였다.메디치 가문의 연출가로 활동했던 미술가 조르조 바사리는 1550년 ‘치마부에로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는 가장 탁월한 이탈리아의 건축가, 화가, 조각가 생애’라는 긴 제목의 책을 출판했다. 줄여서 ‘미술가 열전’으로 불리는 책이다. 토스카나어로 쓰인 이 책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한 위대한 미술가들의 생애가 집대성되어 있다. 13세기에 활동한 치마부에(Cimabue)로부터 그의 제자였던 조토 디 본도네, 마사초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거쳐 미켈란젤로에 이르기까지, 토스카나를 중심으로 활동한 주요 미술가들의 방대한 정보가 담긴 놀라운 책이다. 이 한 권의 책으로 훗날 미술사 연구자들은 바사리에게 ‘미술사의 아버지’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선사했다. 19세기 역사학자로 미술사의 학문적 체계를 완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바사리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칭송하기도 했다. “바사리의 빛나는 저작이 없었더라면 유럽의 미술사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사리에 대한 부르크하르트의 평가는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니다. 그의 저서를 통해 비소로 단편적인 기록에서 벗어나 미술이 역사의 얼개를 통해 유기적으로 작용하며 흐름을 형성해 왔다는 인식이 생겨났다.고딕이나 매너리즘 혹은 르네상스에 해당하는 이탈리아어 리나시타 등과 같은 미술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도 바사리였지만, 그 보다 중요한 것은 ‘미술가 열전’ 서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역사관에 따른 미술 전개과정의 서술이다. 바사리는 고대에서부터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를 꽃피운 15세기 콰트로첸토(Quattrocento)에 이르는 미술의 발달과정을 특정한 역사해석의 틀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이탈리아인들의 선조 고대로마인들의 찬란했던 미술을 ‘정점’으로 보았고, 야만적인 양식이 지배한 중세를 ‘몰락’ 그리고 고대를 모방해 찬란한 재건을 꿈꾼 15세기 콰트로첸토를 ‘리나시타’(Rinascita), 소생으로 해석했다. 여기서 르네상스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완전했던 고대의 미술이 중세에 이르러 죽음을 맞이했고, 15세기에 다시금 부활한 것으로 보고 있는 바사리의 이러한 사관(史觀)에는 다분히 구원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가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바사리는 르네상스를 시기에 따라 세 단계로 세분화했다. 첫 번째 시기인 14세기 트레첸토(Trecento)를 발전 초기단계인 유아기, 두 번째 시기인 콰트로첸토를 청년기 그리고 세 번째 시기인 16세기 친퀘첸토(Cinquecento)를 성숙기로 규정했고, 그 최고의 정점에 조각가 미켈란젤로를 올려놓았다. 이렇게 짜인 틀 안에 각 시기에 속한 주요 미술가들을 위치시키고 그 생애를 서술해 나갔다. 바사리의 목적은 개별 미술가들의 방대한 정보를 수록한 백과사전이 아니었다. 자신의 시대를 고대의 부활로 규정하고, 피렌체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미술가들을 저서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태평성대가 아니라 대혼란의 시대였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1517)으로 유럽은 구교와 신교로 나뉘었고, 이탈리아 반도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그리고 교황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있었다. 게다가 1527년 5월 신성로마제국의 용병들이 로마를 급습해 영원한 도시를 폐허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불안과 공포, 패배의식이 지배하던 절망의 시대에 바사리는 콰트로첸토 천재 미술가들의 찬란한 업적을 찬양하여 미술의 부활과 함께 시대 부활의 염원을 담았던 것이다.바사리 개인과 그가 살았던 시대의 관계성 속에서 ‘미술가 열전’의 집필 동기와 목적을 추적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하지만 미술사의 역사에서 그의 저서가 가지는 더욱 중요한 의미는 미술가 개인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에서 벗어나 미술의 흐름을 역사적 틀을 통해 서술하고 있다는데 있다. /미술사학자

2020-06-01

온라인 공채시험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풍속도로 새롭게 온라인 공채시험이 떠오르고 있다. 대한민국 1위 재벌그룹인 삼성그룹이 지난달 30·31일 양일간 온라인으로 공채시험을 치르면서 온란인공채시험이 뉴노멀로 우리 사회에 자리잡기 시작했다는 방증이 되고 있다.학교고사장을 빌려 대규모로 시험을 봤던 과거와 달리 응시생들은 집에서 컴퓨터로 문제를 풀면서 시험보는 모습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했다. 삼성은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 삼성SDS의 최신화상회의솔루션 시스템을 도입, 감독관 한명이 응시생 9명을 스마트폰으로 감시해 부정행위를 차단했다.삼성은 온라인 시험응시자들을 대상으로 개인정보보호용 신분증 가리개와 스마트폰 거치대, 영역별 문제 메모지 등 시험에 필요한 도구들을 담은 꾸러미(키트)를 제공했고, 응시자들은 지원회사의 시험날짜에 맞춰 응시프로그램에 접속해 시험을 치렀다. 이틀간 4회로 나눠 치러진 온라인 시험은 일부 전문가들과 응시생들이 우려했던 서버오류나 부정행위 등의 말썽없이 마무리됐다는 평가다.이미 코로나 여파로 면접만큼은 화상으로 진행하고 있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최근 응시자들을 직접 대면하지 않고 화상으로 면접을 치렀다. CJ는 이번 상반기 그룹 공채에서 코로나예방을 위해 웹캠을 통한 비대면 면접을 추진하기로 했다.SK이노베이션도 코로나 여파로 잠정중단했던 채용을 시작하면서 화상면접을 도입했고, LG전자와 카카오 등도 경력직 또는 상시채용 지원자에 대해 화상면접을 진행했다. 삼성의 온라인공채시험은 면접뿐 아니라 대규모 필기시험도 온라인으로 치를 수 있다는 성과를 보여준 것으로 머지않아 온라인 필기시험이 기업채용에 새로운 트렌드가 될 것이란 분석이 유력하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06-01

코로나19, 우리의 삶에 주는 교훈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우리의 삶에서 코로나19는 ‘위기이자 기회’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격은 무심히 살아온 우리에게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가 코로나 사태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처하느냐에 따라 축복된 삶의 계기로 전환시킬 수도 있고, 유사한 재앙이 반복될 수도 있다.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일상화되고 있는 ‘사회적 거리두기’의 가치이다. 코로나의 확산은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감염의 위험 때문에 일상적 대면접촉은 극도로 제한된 반면, 원격의료·원격교육·원격비즈니스가 급속히 활성화되고 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인간을 멀리하고 경계하게 된 것’은 비극이지만, 일상의 소통과 업무가 비대면·온라인방식으로 전환되면서 자기성찰의 시간과 공간이 생겨나고 있다.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정신없이 살아온 일상을 잠시 멈추고 사색과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면 삶의 질은 그만큼 향상될 수 있다. 코로나는 ‘빨리 빨리’를 재촉하면서 살아온 우리에게 ‘천천히 생각하는 삶을 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나아가 코로나는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책임과 의무의 중요성’을 가르쳐주고 있다. 감염을 막기 위해 마스크를 쓰는 것은 본인은 물론 타인의 건강에 대한 배려행위이다. 이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하는 시민정신이며, 민주주의체제에서 시민정신의 실종은 곧 공동체의 붕괴를 의미한다. 의료인들의 고귀한 희생과 봉사정신이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 정치인·경제인·교육자 등 각 영역의 행위주체들이 각자의 역할에 충실할 때 비로소 공동체를 지켜낼 수 있다. 특히 코로나로 고통 받는 경제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와 지원은 공동체의 중요한 기반임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자연친화적인 삶의 중요성’ 역시 코로나의 가르침이다. 코로나의 공격으로 공장이 멈추고 사람과 자동차의 이동이 제한되었지만, 지구환경에는 오히려 축복이 되었다. 공기의 질이 나아지고 생태계도 조금씩 복원되고 있다. 자연환경이 좋은 곳에는 코로나의 위험이 없다. 코로나의 공격은 도시의 밀집된 공간에서 숨 막히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벗어나 가능하다면 ‘자연과 가까이 하라는 메시지’이다. 대자연의 꽃과 숲이 말하는 ‘정신이 건강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 속의 정신적 빈곤’에 허덕이고 있는 도시인들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교훈이다.이처럼 코로나는 ‘우리 자신’과 ‘공동체’ 그리고 ‘자연’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있다. 이러한 성찰을 바탕으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가치 있는 삶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코로나 사태로부터 올바른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멀지 않아 더욱 심각한 재앙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타성에 젖어 살아온 ‘구태의연한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개척자적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2020-06-01

월성원전 맥스터 증설, 의견수렴 거쳐 결정하면 될 일

황성호 경북부경주 월성원자력 사용후핵연료 임시저장시설(맥스터) 증설여부에 대한 찬반여론이 뜨겁다.맥스터 건설과 관련, 원자력안전위원회의 허가는 이미 득한 상태인데다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재검토위원회의 지역의견 수렴을 위한 공론화 절차 및 경주시의 공작물 축조신고 과정이 남아있는 상태다. 지역공론화를 위해 정부기관인 재검토위원회의 공식적인 절차에 따라 지역실행기구가 출범한 가운데 현재 주민설명회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맥스터 증설 관련 경주지역 주민설명회가 환경단체 등의 거센 반발로 무산됐다.월성 지역실행기구는 지난 5월 28일 오후 경주 서라벌문화회관에서 지역주민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설명회를 열었다. 하지만 김남용 실행기구위원장이 인사말을 시작하자 경주환경운동연합 관계자 및 민주노총 경주지부 회원 등이 맥스터 증설 반대와 설명회 중단을 촉구해 주최측이 설명회 종료를 선언했다. 이들은 “공론화는 맥스터 증설이 아니라 사용후핵연료 반출방안을 논의해야 한다. 정부가약속한 2016년 사용후핵연료 반출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이날 설명회는 이윤석 재검토관리위원회 대변인이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재검토 추진현황 및 향후 계획, 조사기관인 한국능률협회컨설팅의 김현기 본부장이 ‘월성원전 지역 의견수렴 방안, 한국수력원자력의 김재원 월성 제1발전소 운영실장이 ‘월성원전 임시저장시설 운영현황’ 등을 발표할 예정이었다.맥스터는 월성원자력 부지내에 기존에 있던 임시저장시설을 추가적으로 건설하는 것이다. 이전에 없던 어떤 시설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이미 오랜 시간 우리나라의 전기생산량의 일정부분을 담당했고 아직 수명기간이 남아있는 발전소 부지 내 지어지는 발전소 운영에 직결된 관계시설일 뿐이다.또한 시민단체는 월성원자력발전소가 담당하는 전력생산량이나 이를 통한 지역 지원금의 규모 및 맥스터 건설 불발에 따른 월성원전의 정지가 지역경제에 미치는 파급 효과 등도 시민들에게 알려야 하지 않는가.특히 지난달 29일 한수원 노조는 “월성원자력 2·3·4호기는 중수로형 발전소로 경수로형 발전소와 달리 매일 소규모의 연료교체가 이뤄지는 원자로 노형이다”고 밝혔다. 노조는 운영과정에서 사용후핵연료의 발생은 당연한 것이며, 이를 위한 임시저장소는 필수설비로 이러한 시설을 증설하지 말자는 것은 원자력발전소를 가동하지 말라는 것과 같은 뜻이라고 강조했다.현재 논의 중인 맥스터 증설 문제는 정부의 정책으로 공론화 위원회를 구성해 사전설명회를 시행하고 숙려기간을 거쳐 합법적으로 결정하려고 한다. 이렇게 중요 국책사업 과정마다 합법적인 과정을 만들고 거기에 따라 의견수렴을 거쳐 결정하면 될 일이다. 이러한 과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반기를 들어 압력을 행사한다면 정부는 아무런 정책도 시행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대안도 없는 발목잡기식의 투정으로 국가 발전은 물론 지역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한다./hsh@kbmaeil.com

2020-05-31

‘민주당 시계’, 또 거꾸로 돈다

안재휘 논설위원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대개가 ‘승자의 역사’다. 길고 긴 야만 시절 이긴 자들은 어김없이 패자의 진실을 철저하게 말살하고 왜곡해왔다. 역사 기록에 남은 옳고 그름은 치명적인 조작 여지가 내재돼 있다. 단지 힘으로 이겼다는 이유로 승자가 언제나 ‘참’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이치는 조금만 고민해봐도 다 알 법한 진실 아닌가.중국 춘추시대 초나라의 대부 오자서(伍子胥)는 사사로운 원한을 풀고자 한때 자기가 모시던 초평왕의 주검을 끄집어내어 목을 끊고 구리 채찍으로 300대의 매질을 가했다. 이른바 굴묘편시(掘墓鞭屍)의 고사다. 우리 역사에서 무덤에서 시신을 꺼내어 다시 목을 자르는 잔혹한 부관참시(剖棺斬屍) 형벌을 일삼은 폭군은 연산군이었다. 생모인 폐비 윤 씨의 사사(賜死) 비극에 원한을 품은 연산군은 김종직·송흠·한명회·정여창·남효온·성현 등 여러 명에게 끔찍한 한풀이를 했다.지난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 당시에 노무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이 있었는지, 회담록을 수정하거나 폐기했는지의 공방이 벌어졌을 때, 민주당은 ‘부관참시’라며 반발했었다. 일부 극우 인사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 훼손을 시도하고, 국립현충원 앞에서 묘소를 파헤치는 퍼포먼스까지 벌여 시끄러웠던 일도 기억난다.유례를 찾기 힘든 총선 대승으로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더불어민주당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사건을 재조사해야 한다는 요구가 터져 나왔다. 1987년 북한 공작원들에 의한 KAL 858기 폭파 사건 진상 조사 결과를 재검증하자는 주장도 다시 불거졌다.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현충원에 있는 친일파 무덤을 파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그동안 진보 일각에서는 ‘친일 인명사전’을 기준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된 60여 명을 계속 문제 삼아 왔다. 여권 내에서는 여수·순천 사건 재조명, 동학농민혁명의 명예회복 등도 추진되고 있다. 이 같은 무분별한 과거지향 행태에 대해서 일부 네티즌들은 “살수대첩도 재조사하자고 할 거냐”는 비아냥을 퍼붓기도 한다.민주당이 왜 또 과거사 뒤집기에 나서고 있는지를 놓고 여러 해석이 나돈다. 가장 설득력이 있는 분석은 ‘2022년 대선 준비’다. 민주당의 정치전략은 철저하게 과거사를 이슈화해 한(恨)을 끄집어내고, 그에 반대하는 세력을 수구꼴통 불의세력 프레임에 가두는 선동기법에서 출발한다. 지난 선거에서 연전연승한 결정적인 비결이기도 하다.그러나 이제 이런 ‘갈등 재생산’ 방식의 정치는 삼가야 한다. 코로나19라는 악마적 바이러스 발톱에 무참히 할퀴어 생존 여부를 놓고 전전긍긍하는 국민 앞에 매머드 여당이 혐오를 퍼뜨리는 정치공작만을 궁구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모처럼 건강한 정책 야당이 되고자 몸부림치는 제1야당과 함께 미래를 겨루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냄새나는 쓰레기통 엎어놓고 선동질에 몰두하는 정치로는 위기의 대한민국을 살릴 수 없다.

2020-05-31

홍콩 엑소더스

탈출이라는 뜻의 엑소더스(Exodus)는 많은 사람이 동시에 특정장소를 떠나는 상황일 때 사용하는 용어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탈출한 내용의 출애굽기에 나온 표현이다. 요즘은 증권가에서도 투자금이 한꺼번에 빠져나갈 때 엑소더스라는 용어를 사용한다.홍콩 대탈출이 시작됐다는 외신이다. 중국이 홍콩보안법을 통과시키면서 홍콩 전역에서 홍콩을 떠나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 홍콩의 환전소에는 홍콩 달러를 미국 달러로 바꾸려는 사람들이 연일 줄을 잇고 있다 한다.홍콩에서 반중시위가 격화된 작년 6월 이후 대만으로 이주한 홍콩사람은 전년보다 41%나 늘었다. 대만은 아예 홍콩시민의 이주를 돕겠다고 나서는 분위기다. 영국도 홍콩 내 영국의 해외 시민여권을 보유한 31만 명의 홍콩인에 대해서 이주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싱가포르 등지에도 홍콩인의 이민 문의가 느는 등 바야흐로 홍콩인의 엑소더스가 세계적 관심사가 되고 있다. 동양의 진주로 불리며 에너지 넘쳤던 홍콩의 앞날에 짙은 안개가 드리운 셈이다. 중국의 홍콩보안법 통과로 일국양제(한나라 내 두 체제)가 흔들리고 자유와 민주의 가치가 크게 훼손될 것이란 관측이 나오면서 홍콩을 떠나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미국도 홍콩에 부여했던 특별지위권을 박탈하겠다고 나섰다. 아시아 금융허브인 홍콩의 경제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상황에 빠졌다.19세기 아편전쟁을 통해 영국의 지배를 받아야 했던 홍콩의 얄궂은 운명이 또한번 역사적 시련기를 맞고 있다. 자유와 민주를 위해 싸울 것인지 사회주의 체제인 중국에 굴복하고 말 것인지 결정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우정구(논설위원)

2020-05-31

소중한 포항의 6월 역사를 살리자

작년까지 매년 6월이 되면 그 전 달부터 매우 바쁜 일정을 보냈었다. 이는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한국은행이 1950년 6월 12일 창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매년 6월에는 창립기념 지역경제 세미나를 개최하여왔다. 하지만 올해에는 다소 느낌이 다른 6월을 맞이하였다. 코로나19로 인해 각 기관들도 행사를 취소 내지는 연기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밀집되어 함께 호흡하는 세미나를 개최하는 것은 ‘사회적 거리두기’의 실천과도 배치되기 때문이다.그런데 6월은 한국은행만 기념하는 날이 있는 것은 아니다. 포항시민들에게도 6월 12일은 매우 특별한 날로 기억되고 있다. ‘시민의 날’이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계기는 1962년 6월 12일 포항항이 국제무역항으로서 지정된 것과도 관련된다. 국제무역항으로의 지정은 포항시민들이 오랫동안 고대하였던 것이기에 당시 포항시에서 이날을 ‘시민의 날’로 삼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인 의미에서 포항항이 외국과의 무역선이 오갈 수 있게 개항한 것은 이미 100년 전인 1920년 조선총독부에서 지정항으로서 일본과의 교역을 개시한 때부터다. 해방된 이후 포항시가 적극적으로 지정항 선정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었지만 의외로 국제무역항 지정은 생각보다 늦어졌다.또 6월 12일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포항의 대표적인 축제인 ‘국제불빛축제’가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잘 모르는 사람은 다른 지역에서 벌이는 것은 ‘불꽃축제’인데 왜 포항은 ‘불빛축제’라고 할까 궁금해하기도 한다. 필자도 처음에는 잘못 적은 것이라 여겼었다. 2004년 포스코가 포항시민의 날을 기념하여 영일만을 상징하는 ‘빛’과 제철소의 용광로를 상징하는 ‘불’을 주제로 불꽃 쇼를 기획한 것이 지금까지 ‘불빛’ 축제로 이어져 온 것이다.내친김에 일제 강점기 시절까지 거슬러 과연 6월에는 포항에 어떠한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을지를 조사해 보았다. 다양한 단체가 있지만 6월과 관련이 깊은 곳으로는 포항우체국을 제일 먼저 꼽고 싶다. 포항에 우체국이 들어서게 된 것은 1905년 6월 9일 연일에 ‘임시우체소’가 설치된 것이 최초다. 그리고 4년 뒤인 1909년 6월 1일에는 포항의 연일 우편취급소에서 처음으로 전신업무를 개시하면서 이름도 ‘포항우편전신사무취급소’로 개칭되었다. 포항우체국과 6월은 연이 깊다고 할 수 있다. 포항시민들의 우체국 사랑도 남달랐던 것 같다. 6·25전쟁 기간 동안 폭격으로 파괴되었던 포항우체국(지금의 중앙동 우체국)을 재건하기 위해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던 1952년 4월 포항시민들은 1천만 원의 성금을 모아 당시 체신국에 포항의 우체국과 통신 시설을 재건해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하여 결국 성사시켰다.이외에 6월에 벌어졌던 사건들은 수없이 많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한국통감부 시절인 1908년 6월 11일에는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영구지배할 목적으로 동해안에 대한 해류조사를 위해 영일만 동쪽 15리 해상(위도 36.8도, 경도 129.45도)에서 위치를 기록한 병 10개를 처음으로 바다에 투입하기도 하였다. 이후 해류조사는 계속되어 1922년 종합보고서가 간행되기도 하였는데 그만큼 영일만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이미 그들은 알았던 것 같다. 110년 전인 1910년 6월 10일에는 지금의 청하초등학교 전신인 사립 천일학교가 개교하기도 하였다. 포항의 교육열이 최근 높아진 것이 아니다. 교통 분야에서도 적지 않은 사건들이 있었다. 1919년 6월 25일에는 지금은 사라졌지만 학산역이 영업을 개시한 날이며, 1945년 6월 10일에는 포항과 부산진 간 동해남부선 철도가 개통되어 영업을 개시하기도 하였다. 그에 앞서 1924년 6월에는 포항과 구룡포 간, 포항과 영덕 간 자동차 여객노선이 정기 운행을 개시하기도 하였다.한편, 1920년 6월 10일에는 대한제국 순종황제가 서거하면서 학생조직을 중심으로 6·10만세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이달 30일에는 박문찬 목사가 흥해 예수교 예배당에서 흥해청년회를 발족시킨 후 본격적인 애국 계몽운동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1924년 6월 4일에는 포항청년단이 창립되었으며, 1933년 6월 4일에는 포항체육회 주관으로 당시 남빈동에 있었던 공설운동장에서 포항시민 대운동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지난해 3·1만세운동은 100주년을 맞이하였지만 80년 전인 1940년 6월에는 조선총독부가 우리 민족의 뿌리를 흔들고 전쟁에 필요한 많은 조선인을 강제동원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였던 ‘창씨개명’을 집요하게 추진하였던 달이기도 하다.하지만 올해 포항에서 맞는 6월은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동안 사실 6월 첫 주가 되면 여지없이 찾아오는 6일 현충일은 국기를 조기로 거는 날 정도로 여겼다. 정부가 6월을 ‘호국보훈의 달’로 삼은 것은 6·25전쟁으로 인한 순국선열과 호국 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국민의 호국ㆍ보훈의식, 애국정신을 함양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크게 통감하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올해의 6월은 조금 달라졌다. 지난 수개월 동안 6·25전쟁 기간 동안 포항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전투와 희생들에 대한 사료와 기록들을 모아 다른 세 사람과 함께 포항의 6·25전쟁사(포항 6·25)를 집필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료수집을 위해 지금도 생존해 계신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노병의 눈물과 생생한 육성 증언을 통해 지금까지 지식으로만 존재하였던 6·25전쟁이 심장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여전히 한반도는 국제법상으로는 평화지대가 아닌 전쟁이 일시 휴전상태인 채로 70년이 지났다. 올해의 6월은 그런 달이다. 특히 포항시의 경우에는 6·25전쟁이 발발한 지 한두 달 만에 대한민국의 마지막 영토를 수호해야 하는 낙동강 방어선의 최후의 보루로서 형산강을 남북으로 두고 북한군과 대치하면서 형산강 이북에는 공중 폭격과 함포사격으로 인해 교회 건물 하나 외에는 모두 사라져 버리는 엄청난 희생을 겪었다. 그러하기에 포항인들에게 6월은 단순히 현충일이 있는 달이 아니라 지금도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고 고통을 느끼기에 가급적 6월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분들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럴수록 역설적으로 우리 후손들은 역사를 통해 미래를 준비해야만 한다.포항은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할 정도로 수많은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는 도시다. 아예 산 이름조차 ‘탑산’이라 바꾸어 부를 정도로 6·25 전쟁과 관련한 전적비, 충혼비, 충혼탑들이 들어서 있는 도시인 것이다. 포항시민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분이 당시의 흔적들을 기억하고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는데 그쳐서도 안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포항만이 가진 소중한 유적이고 유산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전국의 지자체마다 온갖 산책로를 만들며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풍광이 좋은 길이거나 둘레길일 뿐이다. 전국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길의 하나일 뿐이다. 6·25전쟁에서 낙동강 방어선의 최후의 보루였고, 다시 북진하는 대반격의 출발지였기에 ‘혈산강(血山江)’이라 불렸던 형산강은 오늘도 도도히 흐르고 있다. 포항시민들이 자부할 수 있는 증거들이 탑산을 비롯한 도시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다. 포항은 당당하게 다크투어리즘으로 보상받을 자격이 있다. 이러한 유적들을 서로 연결하여 탐방하고 생각하며 호국 영령을 기릴 수 있는 그 ‘길’이야말로 어느 지자체도 따라 할 수 없는 포항 고유의 ‘길’일 것이다./한국은행 포항본부 부국장 김진홍

2020-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