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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쿨존’

최근 기후변화의 속도는 인류의 적응 능력을 뛰어넘고 있다. 유럽, 북미, 아시아 등 세계 곳곳에서 폭염이 빈발하고 있으며, 사망자와 경제 피해도 함께 늘고 있다. 2025년 여름을 앞두고 기상청은 우리나라가 평년보다 높은 기온을 기록할 가능성이 60%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으며, 일부 기상 전문가는 올해 여름이 4월부터 11월까지 이어질 것이라 경고하고 있다. 특히 대구·경북 지역은 국내에서 여름철 최고기온이 가장 높은 곳으로 손꼽히며, 실제로 온열질환자 수도 전국 최고 수준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지역사회는 더 이상 ‘폭염을 견디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기후재난 시대를 맞아 시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적극적인 대응책으로 ‘쿨존(Cool Zone)’의 확대와 정착이 절실히 요구된다. ‘쿨존’이란 단순한 에어컨 공간이 아니라, 기후위기 속에서 시민들의 건강과 생명을 보호하는 생활형 안전망을 의미한다. 주로 공공도서관, 복지관, 지하철역, 정류장, 공공청사 등에 설치되며, 내부에는 에어컨, 냉풍기, 냉수대, 그늘막, 쿨링 미스트 등이 갖춰져 있다. 폭염특보 발효 시에는 무더위쉼터로 기능하며, 특히 노약자·야외근로자·취약계층에는 생명선 역할을 한다. 실제로 서울·부산·광주 등 주요 도시에서는 무더위쉼터를 중심으로 ‘쿨존’ 체계를 운영하고 있으며, 열지도(Heat map)를 바탕으로, 집중적으로 배치하거나 운영시간을 연장하는 식의 개선도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사각지대는 존재하며, ‘쿨존’ 간 정보 접근성, 시설 수준, 이용 편의성 등의 질적 차이 해소가 과제로 남아있다. 해외에서는 이미 수년 전부터 ‘쿨존’ 정책을 도시 인프라의 필수 전략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미국 뉴욕시는 매년 폭염기간 동안 공공도서관과 노인센터를 쿨링센터로 지정하여 시민에게 냉방 공간을 제공한다. 애리조나 피닉스시는 교회, 카페, 쇼핑몰과 같은 민간공간도 ‘쿨존’으로 활용하고, 무료 교통수단과 연계해 접근성을 높였다. 호주 멜버른시는 도심 내 ‘쿨링 스테이션’을 촘촘히 배치하여 시민의 열 스트레스를 줄이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대구·경북 지역에도 여러 시사점을 준다. 특히 도심 열섬현상이 심한 대구 도심이나, 야외 작업자 비중이 높은 경북 농촌지역에는 ‘지역 맞춤형 쿨존 전략’이 요구된다. 행정기관 주도뿐만 아니라 민간 공간과의 연계, 에너지 효율 기술 접목, 시민참여 확대 등 다양한 방식이 함께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쿨존’은 단기 대책이 아니라, 기후 위기 적응의 핵심 기반이 되어야 한다. 대구·경북은 여름철 고온 위험도가 높은 만큼, ‘쿨존’의 ‘양적 확대’는 물론 ‘질적 고도화’가 필요하다. 각 자치단체는 생활권 중심으로 ‘쿨존’을 확대하고, 열지도 기반의 취약지역 우선 배치, 정보 접근을 위한 ‘쿨존’ 안내 시스템 정비, 에너지 절감형 냉방 장비 도입, 민관협력 운영모델 마련 등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더불어 지역 주민 스스로가 폭염 대비 행동 요령을 숙지하고 ‘쿨존’을 적극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조금 더 친숙한 교육과 홍보도 병행되어야 한다. 우리가 지금 ‘쿨존’을 확대하는 일은 단지 무더위를 식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심화하는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지속가능한 지역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함이다.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25-05-22

보이스피싱 경계령

전화를 통해 개인정보를 빼내 사기를 치는 수법의 보이스피싱은 영원히 근절이 되지 않는 범죄일까. 수많은 서민에게 억울한 피해를 안기고 있는 범죄지만 당국의 꾸준한 단속에도 최근 몇 년 사이 보이스피싱 사기는 오히려 더 늘었다. 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올 1분기 보이스피싱 범죄는 전년 동기대비 건수는 17%, 피해 금액은 120% 증가했다. 사기 피해가 오히려 대형화되는 추세다. 피해자 연령은 정보기술 이용 수법에 취약한 50대가 가장 많았다. 50대 이상 피해자 비중은 2023년 32%, 2024년 47%, 올 1분기는 53%까지 높아졌다. 보이스피싱 피해가 근절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 때문이라 한다. 전화 통화를 통해 인증을 거치는 일들이 개인이나 공공기관에서 많아졌다는 것이다. 특히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것은 피해자 상당수가 피해를 입고도 피해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많은 피해가 발생한 뒤다. 대책도 없다. 금융감독원이 21일 고금리와 경기회복 지연 등으로 자금이 절박한 자영업자 등 서민층을 겨냥한 대출 빙자형 보이스피싱이 극성을 부린다고 경계령을 발령했다. 1분기 보이스피싱 피해자 중 42%가 대출 빙자형이라고 하니 나쁜 죄질에 분통이 저절로 터진다. 장사가 안돼 빚을 갚지 못해 쩔쩔매는 서민층을 상대로 금융사기를 치는 악질 보이스피싱 범죄에 강력한 철퇴를 내리는 방법은 없을까. 벼룩의 간을 빼먹는 세상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5-22

유발지진은 맞는데 인과관계는 없다니

필자처럼 숫자에 약한 사람도 이 날짜는 잊히지 않는다. 지진 났던 날. 2017년 11월 15일. 평소처럼 점심을 먹고 오후 재판이 있어 기록을 챙겨 사무실을 나왔다. 법원 언덕길을 올라 법원에 들어섰다. 7호 법정에 들어가 재판 순서를 기다리고 있을 때 두둥하고 작은 울림이 느껴졌던 것 같다. 내 재판 순서가 되어 원고대리인 석에 앉았다. 판사님의 질문에 무언가 답변을 하려는 순간 5.4 규모의 지진이 났다. 법정이 크게 흔들리고 전산에 오류가 난 듯한 삐 하는 소리 속에서 법정에 있던 사람들은 3초 정도 침묵 속에서 서로를 쳐다보다가 얼음땡이라도 한 듯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외벽이 일부 무너져 내린 법원 건물 옆에서 넋이 나가 서 있는데 저 멀리 우리 직원이 울면서 뛰어오고 있었다. “변호사님, 저 지금 집에 가볼게요!” 당시 포항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필자가 겪은 이런 일을 겪었을 것이다. 지진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후 공포와 트라우마가 더 무서웠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아들을 서울 시댁으로 일주일간 피난을 보냈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여진에 다른 가족들도 여차하면 바로 밖으로 뛰쳐나갈 준비를 한 상태로 잠을 자고 밥을 먹었다. 재판을 가면 법정 뒤엔 피난용 안전모가 놓여있고 집과 사무실 벽엔 금이 가 있었으며 한동안 깨진 화분과 액자들을 잔뜩 버렸다. 몇 달 뒤 가족여행으로 갔던 평창올림픽 폐회식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포항에서 왔다고 말하는 아홉 살 아들에게 대뜸 “아~ 거기 지진난 데?”라고 하는 것에선 무언가 모를 지역 비하까지 느껴졌다. 지진 때문에 우린 이렇게 힘들었다. 교통사고를 당한 것, 배우자가 외도하거나 누군가에게 맞은 것과 마찬가지로 우린 피해를 보았고 정신적 고통을 느꼈다. 정신적 고통에 대한 손해배상금이 위자료라면 우린 잘못한 누군가에게 위자료를 받을 수 있어야 했다. 이런 고통을 초래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정부가 밝혀내겠다고 나섰다. 1년이 넘는 조사를 거쳐 정부조사단은 2019년 3월 20일 포항 지진이 정부가 지은 지열발전소에 의해 유발된 촉발 지진이었다고 발표했다. 정부조사단의 공식 발표가 이러하니 피해자들 일부가 위자료 소송을 제기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4년 뒤 1심 법원도 지열발전소를 짓고 운영한 정부가 잘못한 것이 맞다며 포항 시민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했다. 법원까지 이렇게 판결을 내리니 포항 시민 45만 명이 소송에 참여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이번에 2심 법원인 대구고등법원은 포항 지진이 유발 지진이고 시민들이 정신적 고통 입은 것도 다 맞긴 한데 여기에 정부 과실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며 위자료를 몽땅 취소해 버렸다. 자연과학적 인과관계는 있을지 몰라도 사회적 · 법적 인과관계는 없어 보인단다. 나라가 세운 시설로 지진이 나서 국민이 고통을 입었고 나라가 나라 잘못이 있었다고 인정하길래 소송을 제기했더니 나라가 위자료를 주랬다가 다시 주지 말랬다가 한다. 포항 시민들은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가. 7년쯤 지났으니, 지진의 고통이 다 잊힌 줄 아는 것인가. 가해자는 원래 피해자의 아픔을 다 알 수 없는 법이다. △포항여자고등학교 고려대법과대학 이화여대로스쿨 현재)한동대 겸임교수 변호사김세라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김세라 변호사

2025-05-22

새순의 향연

산이 아기 엉덩이처럼 하루가 다르게 살이 오릅니다. 푸른 물을 머금은 나무들을 보면 마음부터 바빠집니다. 팝콘 터지듯 하는 꽃보다 연초록의 새잎에 마음을 뺏깁니다. 꿈틀거리는 새순의 옹알거림에 귀가 간지러운 날입니다. 스물 두어 살 즈음 4월의 그날, 내 눈에 비쳤던 그 연두 빛을 잊지 못합니다. 점심시간이면 으레 찾는 구내식당 밥이 싫었습니다. 친구와 나는 밥 대신 빵과 우유를 받아들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뒷마당으로 가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걸음을 멈췄습니다. 봄 햇살이 초록물감보다 노랑물감을 약간 더 섞어서 잔디밭에 훅 뿌린 것 같았습니다. 풋내가 확 덮쳤습니다. 새순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우리는 눈부심 속에 말없이 한참이나 앉아있었습니다. 봄이 오면 입이 먼저 엄마를 기억합니다. 가죽나무 순에서 엄마 냄새가 납니다. 친정 텃밭 한 귀퉁이에 가죽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엄마는 가죽나무 순으로 김치를 담았습니다. 식구 누구도 아닌 오롯이 나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봄 내내 엄마의 냄새를 즐겼습니다. 봄을 기다리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나의 봄도 사라졌습니다. 나는 이십여 년 동안 그 맛을 지어낼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나이가 들어 경주로 터전을 옮겼습니다. 잠시 시골집에 살 때였습니다. 옆집 할머니가 엄나무 순을 한 소쿠리 가져오셨습니다. 도시에서 온 우리가 먹을 줄 아느냐며 먹는 방법을 여러 가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눈만 끔뻑거리던 나는 가장 쉽다는 방법을 택해, 끓는 물에 살짝 데쳤습니다. 초고추장을 찍어 입에 넣는 순간, 엄나무 새순이 내 입맛을 홀렸습니다. 그동안 최고의 봄나물인 줄만 알았던 두릅이 엄나무 순에 밀려났습니다. 올해도 텃밭 한 귀퉁이에 보랏빛 제비꽃이 핍니다. 논둑에 냉이 꽃이 피고, 달래가 지천입니다. 텃밭에는 하얗게 완두콩 꽃이 피고, 부추와 쪽파가 자리를 잡습니다. 된장찌개 끓일 때마다 넣을 냉이와 달래까지 냉동실에 저장해 두었습니다. 쑥에 생콩가루를 묻혀 봄을 저장합니다. 비 내리는 초 여름날 저녁, 쑥국으로 마음을 채울 것입니다. 모양이 비슷한 씀바귀와 고들빼기를 분류합니다. 씀바귀를 무치고, 고들빼기김치를 담습니다. 쌉싸래한 맛이 입안에 맴돕니다. 나는 이제 봄나물을 만지고 먹어야 봄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첫물인 부추로 김치를 담급니다. 양념 묻힌 쪽파를 통에 가지런히 담습니다. 김치 안 되는 것이 없어 보입니다. 살짝 데친 머위를 김치 담그듯 양념에 무쳐봅니다. 된장으로 맛을 낸 것과는 또 다른 맛입니다. 시골 장에서 가죽나무 순과 초피나무 순을 샀습니다. 초피나무 순으로 장아찌를 만들고, 가죽나무 순을 만집니다. 인터넷을 뒤져 엄마의 맛을 내는 방법을 찾아봅니다. 그 맛이 나지 않습니다. 다시 또 해 봅니다. 어지간히 따라간 것 같은데 엄마 냄새는 없습니다. 김치 통 하나 채우려면 얼마만큼의 가죽나무 순이 필요하고, 고추장 단지가 움푹 비어버린다는 것을 이제야 압니다. 나도 엄마처럼 김치 통에 가죽나무 한 그루 담습니다. 아들과 딸에게 반찬 한 번 변변히 보내지 못했습니다. 가죽 나물을 먹을 때마다 엄마가 떠오르는데, 내 자식들은 언제 내가 생각날까. 이제야 애들을 생각합니다. 쑥을 한 움큼 보내겠다고 하자, 전화기 너머 딸애의 목소리가 뜨악합니다. ‘어떻게 하라고’가 말끝에 들려옵니다. 조금이라도 먹여 볼 요량으로 저마다 고유의 향과 맛을 가진 봄나물을 나열합니다. 바로 먹을 수 있도록 해서 보내겠다고 해도 손사래 치는 딸이 보입니다. 봄나물은 긴 겨울을 이겨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맛이 그냥 생긴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온 지난 세월도 그냥 지나온 게 아니 듯이요. 세파를 헤쳐 온 내 안의 세월이 봄나물을 끌어당깁니다. 겨우내 무뎌졌던 감각을 새순의 향기로 깨웁니다. 겨울을 이겨낸 쌉싸래한 맛으로 또 한해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돌나물 물김치까지 곁들여 식탁 가득 차립니다. 새순의 향연을 함께 즐길 엄마가 없어 서러운 봄날이지만, 나는 새순처럼 다시 일어섭니다. /윤명희 수필가

2025-05-21

낮달-신광 법광사지 당간지주

그대, 떠돌이면서도 원주민인 사람 타인과의 경계가 그토록 마음에 걸렸을까 밤낮 없이 기웃거린 발걸음 나쁜 것을 먼저 배워 허무를 실천하는 사람 산에 가리고 강에 잠기면서 물음표 느낌표 다 깨물어먹고 맨발로 자기 속으로 숨는 사람 비겁함에 힘을 실어주고 웃는 사람 새털구름 잔주름 묻은 햇살을 녹인 소주 한 잔 마시고 그걸로 양치질하는 더러운 사람 보는 이 마음에 무혈입성하여 남긴 차가운 소인(消印) 그렇게 누구에게나 원죄는 있다고 다그치면서 살아가는 것이 곧 사죄이며 소멸의 시작임을 가만히 지적하는 무기질의 비웃음 폴폴 날리며 걷는 사람 하늘엔 문이 없다고 중얼거리면서도 문을 여는 마음이 예쁜 사람, 불치병이 없는 사람 그대 원주민이면서도 떠돌이인 사람. … 일상적 혹은 세속적인 것의 ‘장엄함’이란 말을 나는 자주 사용한다. 그보다 더한 철학은 없다고 믿는다. 평범해서 눈부시다. 모든 사람의 생애가 반드시 그러하다. /이우근 ..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5-21

알레르기 비염의 치료

알레르기 비염은 단순히 ‘코에 염증이 생겨 콧물이 흐르는 병’이 아니다. 코 점막의 과민반응은 전신 면역계의 불균형이 빚어낸 결과이며, 피로‧수면 부족‧스트레스 등 생활 리듬이 조금만 흔들려도 증세가 요동친다. 한방에서는 이처럼 과잉 흥분한 면역 시스템을 다시 균형점으로 돌려놓고, 차가워진 비강 내부의 기혈 순환을 회복시키는 것을 근본 치료의 목표로 삼는다. 실제 임상 현장에서 체력이 떨어지고 감기에 잘 걸리는 환자에게 먼저 쓰는 처방이 시호계지탕이다. 면역을 올려주고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약으로 이 약을 복용하면 환자들은 ‘몸이 덜 찌뿌드드하다’ ‘야근 뒤에도 코가 덜 막힌다’는 변화를 가장 먼저 체감한다. 면역 토대가 어느 정도 다져졌는데도 아침 기상 직후 맑은 콧물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재채기로 기침을 하면 면역과 함께 차가운 습기가 문제다. 몸이 마르고 약한 사람은 몸을 보하면서 한습을 제거 하는 소청룡탕을 사용한다. 약이 맞으면 재채기 횟수가 줄어들고 콧물이 더 이상 목뒤로 흘러내리지 않는다. 몸도 따뜻해지고 멍했던 정신이 맑아지는걸 느낄 수 있다. 동물실험에서는 소청룡탕이 비점막 내 히스타민, IL-4, IL-5 분비 자체를 억제해 재발 빈도를 낮춘다는 결과도 확인되어 약을 충분히 복용하면 먹을 때만 효과 나는 약과는 다르게 완치 가까이 된다. 약침 치료는 익구개신경절을 초음파로 정밀 타깃팅할 때 시너지가 극대화된다. 이 신경절은 코와 부비동 점막을 지배하는 교감 부교감 신경이 뒤엉킨 교차로라 이 부분에 직접 약침이 들어가면 부교감성 혈관확장을 억제하며 점막 충혈을 가라앉히고 교감성 섬유 흥분을 완충해 즉각적인 코 뚫림을 유도한다. 초음파 화면으로 내·외익돌근, 상악동, 내경동맥 위치를 실시간 확인하므로 시술 안전성도 높다. 2024년 발표된 무작위 대조 연구에서 4주 동안 주 1~2회 초음파 유도 SPG 약침을 받은 환자군의 총 비증상 점수가 대조군 대비 40% 이상 감소했고 뿐만 아니라 야간 수면 질 지표도 유의하게 향상되었다는 결과가 보고되었다. 침 치료와 부항요법은 이러한 약침 효과를 묶어주는 실타래다. 침으로 코 주변의 혈액순환을 원활히 하고 부항으로 등의 폐와 심장을 자극하는 신경에 사혈을 하면 약침 효과가 한층 더 증대된다. 집에선 37 ℃ 약염수로 하루 두 번 가볍게 비강을 세척하면 염증 매개물질이 빠르게 씻겨 나가 재발 곡선이 완만해진다. 수면 역시 방어막을 세우는 데 빠질 수 없다. 성인 기준 7시간 이하의 부족한 수면은 단 하루 만에 자연살해세포 활성을 30%나 떨어뜨린다는 보고가 있어, 충분한 숙면은 어떤 약물·약침보다 강력한 면역 조절제다. 시호계지탕으로 면역을 올리고 소청룡탕으로 급성 증상을 잡고, 익구개신경절 약침으로 신경·혈관 반응을 조정한 뒤 침·생활요법을 병행하면 대부분의 알러지 비염은 큰 효과를 본다. 제대로 치료가 되면 일시적인 증상의 개선이 아니라 몇 년이 지나도 큰 재발 없이 지낼 수 있다. 다만 체질과 동반 질환에 따라 약의 처방 구성이 달라지며 몸의 면역을 올리고 보하는 약재를 같이 처방을 해야 제대로 된 효과를 볼 수 있다.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5-05-21

손녀가 쓴 나의 이야기

몇 달 전 서울의 맏손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조부모님의 삶을 인터뷰해서 글을 써야 하는 숙제가 있다고 했다. 5학년인 손녀는 매우 조신했다. 특유의 조곤조곤한 말투는 나지막하되 다정했으나 더러는 집요하기도 했다. 할아버지께 양해를 구해 달라는 당부를 먼저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귀가 좀 어두우시니까 제 말을 잘못 알아들으실 것 같아서 할머니 인터뷰할 거예요. 할아버지께서 서운해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네 작은 전화 목소리를 어떻게 들으시겠니? 걱정말라는 나의 말을 듣고선 정해진 인터뷰 목록인지를 먼저 읽어주었다. 어린 시절, 학창 시절, 사회생활, 현재와 미래, 나에게 하고 싶은 말씀 등등이었다. 갑작스러운 전화였기에 준비할 겨를은 없었다. 약 20여 분 동안 손녀의 물음에 즉흥적이긴 했지만 성실히 답했다. 인터뷰를 다 마친 후 글로 적을 것이라면서 고맙습니다. 인사도 잊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나니 더 나은 대답을 할 걸 생각했지만 다시 전화하진 않았다. 그러곤 잊었다. 며칠 전 아들이 바로 그 책(?)을 우편으로 보냈다. 분홍색 종이 두 장을 반 접어 표지까지 총 8쪽. 빨간색 실로 묶은 선장본(?)이었다. 표지엔 제목인 듯 “이정옥 교수님의 삶”이라 크게 쓰고 손녀 이 윤 지음. 목차도 적었다. 오른쪽 하단에 내 얼굴임이 확실시되는 파마머리에 안경 낀, 팔자 주름 선명한 노인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뭐라고 떨리기까지 할까. 나를 어떻게 표현하여 썼을까 호기심, 설렘, 두려움 등등의 감정으로 책장을 넘겼다. 인터뷰한 내용을 거의 가감 없이 차례대로 적었다. 페이지마다 짧디짧은 글 아래 글의 내용에 꼭 맞는 삽화가 자그마하게 그려져 있었다. 예를 들면 “어린 시절 과수원에서 아침마다 토마토를 따 드셨다. 토마토즙 때문에 입술이 따끔거렸던 기억도 있다고 하셨다.”는 글 아래 토마토를 베어 물며 얼굴을 찡그린 어린 여자아이를 그려 둔 식이다. 학창 시절 가야금을 배운 에피소드 아래엔 가야금 타는 긴 머리의 여자아이와 음표. 현재와 미래 페이지에는 글 쓰는 할머니, 한국어를 가르치는 할머니 모습을 적고 그렸다. 표지의 목차에는 없는 내용도 있었다. 글쓴이인 나(손녀)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라는 제목엔 내가 꾼 손녀의 태몽 이야기를 적었다. “손녀인 나에게 나의 태몽-고래떼가 바다에서 춤추는 꿈-처럼 넓은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라는 말씀을 하셨다.” ‘넓은 세상’은 ‘바다’요, ‘자유롭게’는 춤추는 고래라며 화살표로 표식해 둔 것이 놀라웠다. 내 말을 찰지게 이해해서 비유 풀이까지 한 것 아니겠는가. 그 페이지엔 바다에서 춤추는 고래와 지구 위에서 웃으며 춤추는 여자아이의 삽화가 있다. 마지막 페이지는 무려 “작가의 말”이었다. 흐뭇하고 대견하고 기특하고 감동적이어서 그대로 옮겨본다. “그렇다. 생각했듯이 나는 할머니의 손녀이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의 작가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이정옥 할머니는 은퇴한 지금도 열심히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계신다. 여러분도 이정옥 할머니처럼 열심히 공부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 작가인 손녀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만든 첫 책(?)의 주인공이 된 이 맘을 어찌 표현할 말이 없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5-21

손흥민과 ‘임신 협박’

언필칭 ‘막장 드라마’ 방불이다. 젊은 여성 하나가 두 명의 남성과 동시에 연애를 했다. 와중에 임신을 했는데 여성은 그 아이가 어떤 남성과의 관계에 의해 생긴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둘 모두에게 “임신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는 게 싫으면 돈을 내놔라”고 한다. 남성 가운데 하나는 협박을 무시했고, 나머지 한 남성은 3억 원이란 거액을 송금한다. 이후 여성은 낙태를 했고, 결국 아이는 누구의 자식인지 알지 못하게 됐다. 여기까지만 해도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은 혀를 찰 일인데, 이야기는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여성은 또 다른 남성을 만나 교제한다. 헌데, 그 남성이 3억 원을 여성에게 준 남성에게 연락해 “여성이 당신을 만날 때 양다리를 걸쳤다. 사기와 공갈로 고소할 수 있도록 관련 자료를 줄 테니 내게 7000만 원을 달라”고 했다. 이건 여성 한 명과 남성 세 명이 등장하는 ‘치정 스릴러 영화’ 스토리가 아니다.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을 요약한 것이다. 협박에 못 이겨 3억 원을 건넨 사람은 유명 축구선수 손흥민이고, 협박을 한 여성과 7000만 원을 요구한 남성은 구속됐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 그것도 자신의 아이를 범행도구로 사기와 협박을 일삼은 여성의 행태는 ‘금수(禽獸)와 다르지 않다’고 질타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웬걸. TV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한 판사 출신 변호사가 덤덤한 어투로 말했다.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이것과 유사한 사건이 적지 않아요. 나도 재판정에서 여러 번 봤고요.” 대체 세상이 왜 이렇게까지 된 것일까? 21세기 한국 천민자본주의의 한 단면을 본 듯해 입맛이 한없이 쓰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5-21

‘경쟁’을 지워라

‘누구보다 앞서야 한다.’ 한국 교육을 관통하는 명제가 아닌가. 등수로 줄 세우고 시험으로 선별하며, 일등은 존경하고 꼴찌는 무시한다. 최종 승부처는 대학입시다. 그러면서 우리는 묻지 않는다. 교육이 본래 무엇을 위한 것인가. 경쟁이 교육의 본질인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은 교육 목표에서 ‘경쟁’을 제거했다. 나치 정권 하에서 교육이 어떻게 전체주의의 도구로 전락했는지를 처절히 겪은 뒤였다. 독일 헌법 제1조는 “인간의 존엄은 침해될 수 없으며, 이를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책무”라고 선언한다. 독일 교육은 이 선언을 실천하는 장치다. 경쟁보다는 공동체, 효율보다는 존엄을 우선시한다. 교실은 우열을 가리는 곳이 아니라, 시민을 길러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각성에서 출발한 기준이며 철학이다. 핀란드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모든 학교는 평등해야 하며 어떤 학생도 소외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뿌리를 내렸다. 시험은 고등학교 졸업 시기에 단 한 번 치러지며 평가는 절대평가 중심이다. 석차는 없다. 교사는 신뢰받는 전문가로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받고, 학생은 협력 속에서 스스로 배우는 힘을 키운다. 핀란드의 교육은 경쟁 없는 시스템으로 세계적 성취도를 자랑한다. 교육이 인간 존중 의식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원칙을 사회가 공유한다. 우리는 어떤가. 한국은 교육을 오랫동안 계층 상승의 사다리로 인식해왔다. 대학입시를 통한 선별 경쟁 시스템이 굳어졌다. 중학교부터 내신은 상대평가로 운영되며, 고등학교는 내신·수능·논술·면접 준비에 집중한다. ‘좋은 대학에 가야 성공한다’는 잣대가 교육의 근간을 지배하고 있다. 교육은 인간을 길러내는 공간이 아니라 선발과 배제를 위한 훈련장이 되고 말았다. 대입제도는 여러 차례 개편되면서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수시·정시 비율을 조정하고 내신과 비교과의 비중을 달리하면서 ‘공정성’ 논란에 대응하지만, 정작 입시가 왜 이처럼 중심이 되어야 하는지는 질문조차 꺼내지 않는다. 대학 서열과 연계된 입시경쟁은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왜곡시키고, 사교육 의존도를 극대화했다. 강남 8학군과 지방 학교의 격차는 해마다 끝을 모르고 벌어지고 있다. 이는 교육 격차이자 기회 격차이며 급기야 사회적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대학입시제도를 개선한다는 것은 단순히 전형 방식을 바꾸는 일이 아니다. 교육의 목적을 되묻고, 그에 맞는 평가 체계를 새롭게 설계해야 한다. 첫째,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보장하도록, 대학입시는 획일적인 시험 중심 선발에서 벗어나야 한다. 둘째, 대학 서열 구조 자체를 완화하거나 공론화함으로써, 입시에 과도한 의미가 부여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셋째, 독일이나 핀란드처럼 교육이 사회적 통합과 평등을 지향하도록 공동체적 교육 철학을 세워야 한다. 교육은 더 많은 문제를 푸는 사람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방법을 배우는 사람을 길러야 한다. 경쟁을 통해 극소수만이 살아남는 구조가 아니라, 각자의 적성과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다면적 교육 시스템이 필요하다.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입시제도’가 아니라, 경쟁을 덜어내는 교육 철학의 전환이다. 그것이야말로 미래를 준비하는 길이다. /장규열 고문

2025-05-21

소나기

학교 수업이 끝나갈 즈음, 하늘이 어두워지고 바람이 불면 아이들은 잰걸음으로 집을 향해 뛰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뛰어도 옷은 이미 젖는다는 것을. 누구 하나 우산을 챙겨줄 여유가 없었던 어린 시절의 우리 집, 생계를 책임지느라 바쁜 엄마 덕분이었다. 학교가 파할 무렵 소나기가 내리면 하나 둘 모여드는 엄마들 틈에 우리 엄마는 늘 없었다. 우산이 없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이미 너무나 익숙해져 있던 나였다. 옷이 젖고 신발이 질척거려도 소나기를 맞으며 귀가하는 건 나의 일상이었다. 그 날도 소나기가 내렸다. 아이들은 하나둘 우산을 폈고 엄마와 어깨동무를 하며 보폭을 맞춰 걸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어깨를 웅크린 채 교문을 나섰다. 그때였다. 뒤에서 다가온 누군가가 나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이 우산 써.” 선생님이었다. 하늘색 작은 우산을 내미시며 오늘은 빌려주시겠다고 하셨다.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우산을 받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처음으로 소나기를 맞지 않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비가 내리는 그 길을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힘차게 걸었다. 그 우산은 평소보다 무겁고 따뜻했다. 선생님의 손길이, 말없이 내민 그 배려가, 어린 내게는 유년의 수많은 소나기를 막아주는 커다란 지붕이 되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비에 젖지 않고 걸었지만 그보다 더 강하게 마음 깊이 스며든 건 누군가가 나를 챙겨 준다는 안도감이었다. 지금도 문득 빗소리를 들으면 떠오른다. 그날의 나의 표정과 어설프지만 힘차던 발걸음, 그리고 우산 위로 또르르 흘러내리던 빗줄기 소리, 세상 가장 조용한 위로는 그렇게 내 머리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세월이 흘러 나도 어느덧 어른이 되었다. 문득 5월을 보내며 스승의 날이 다가오면 하늘색 우산이 떠오른다. 삶은 여전히 예기치 못한 소나기를 퍼붓고 나는 가끔씩 젖고 때로는 비를 피할 곳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어린시절의 기억 덕분인지 나는 믿는다. 세상 어디엔가 나를 생각해 주는 따뜻한 마음이 있고 누군가의 조용한 배려 하나가 삶의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그 따뜻한 마음과 배려는 세상 골목골목 어딘가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도. 점심을 먹고 부른 배를 부여잡고 산책을 나섰다. 하늘이 잔뜩 심술을 부려 접이 우산을 하난 들고 나갔다. 아파트 입구 쯤에서 두둑두둑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펼쳐 쓰고는 부지런히 발걸음을 디뎠다. 아이들이 하교 중이었다. 거의 집에 다다른 아이들은 뛰기 시작했지만 학교 쪽으로 다가갈수록 아이들은 비에 젖어 있었다. 한 여자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뛰지도 않고 오롯이 비를 맞으며 걸어갔다. “같이 가자.” 그 아이의 어깨 위로 조심스레 우산을 씌웠다. 아이는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바짝 붙어 걸었다. 작은 우산 아래 둘이 들어가기엔 좁았지만 마음만은 넉넉했다. 나의 젖은 소매가 아이의 팔에 닿아 있었지만 아이는 춥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유년의 나처럼 따뜻함을 느꼈을 것이다. 빗소리는 여전히 컸지만 우산 아래에서는 우리 둘의 조용한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좋아하는 간식, 엄마 이야기, 우리는 천천히 집으로 걸었다. 나의 유년 시절 하늘색 우산은 지금 또 누군가에게 투명 우산이 되어 비를 함께 피하고 이 아이도 언젠가 또 누군가의 우산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작은 우산 하나가 내게 알려준 것은 비를 피하는 방법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였고,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우산이 되어야 한다는 다짐이었다. 어쩌면 인생은 끊임없이 소나기를 만나는 여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누군가의 우산이 되어주는 것도, 누군가의 우산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도, 누군가에게 마음 한 자락을 내어주고 받는 일이라는 것을. 비는 언젠가 그치겠지만 마음을 내어준 기억은 오래도록 남는다. 소나기는 잠깐이지만 우산 아래 나눈 온기는 오래도록 누군가의 삶의 눈부신 햇살을 밝혀줄 테니까. /김경아 작가

2025-05-20

격동의 계절 그리스 근현대

1차 세계대전 종식 후 유럽이 요동쳤다. 오스트리아제국 합스부르크왕가와 러시아 로마노프 왕정이 역사에서 사라졌고, 발칸반도에 슬라브족의 독립국이 불사조 정신으로 세워지면서 긴장 국면에 접어들었다. 전쟁 후유증으로 유럽경제가 몰락하면서 반대로 미국이 세계 강자로 급부상했다. 1930년대 세계는 긴박한 리듬을 타면서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나라마다 휘청대기는 엇비슷했다. 대공황으로 인해 대량으로 실업자를 양산했고 사회 곳곳에 만연한 부정부패는 벗어날 기미조차 없었다. 이탈리아에는 무솔리니가 등장하면서 파시즘 체제가 수립되어 국제질서를 위협했다. 배타적 민족주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자, 공산주의가 파시즘의 대항마로 설득력을 얻었다. 패전국 독일은 더욱 심각했다. 막대한 전쟁배상금으로 독일은 위기에 몰렸다. 그런데 그 여파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때 등장한 나치당 히틀러는 어려운 국민의 심경을 정확하게 읽었고, 독일 국민은 태양을 등지고 열변을 토하는 그의 연설에 열광했다. 히틀러가 독일 정권을 탈취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독일 국민이 히틀러를 선택했던 것이다. 1935년 베르사유조약에 불만을 품었던 이탈리아 무솔리니가 에티오피아를 급습하고 동아프리카제국을 세우는 데 성공한다. 1938년 패전 이후 굴욕감에 치를 떨던 독일은 에스파냐 내전에 개입하면서 뮌헨협정을 이끌어 내 보헤미아 지방을 자국 영토로 만들었다. 그해 3월 1차 세계대전 동맹국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베르사유조약의 무효화를 선언했다. 뒤이어 체코를 침략해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이탈리아 역시 발칸반도로 진격해 알바니아를 식민국가로 만들었다. 독일은 국제사회 눈치만 보던 소련과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하여 재갈을 물렸다. 공산당을 기피하는 파시즘이 공산주의 원조국과 손잡는 아이러니가 연출되었던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영국과 프랑스의 선전포고로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겉으로는 민주주의와 파시즘의 이념적 대립이었다. 그동안 그리스는 내부로부터 곪아갔다. 1924년 3월 25일 터키와 전쟁 패전의 책임을 물어 국왕 게오르기오스 2세를 몰아내고 공화정을 세웠지만 혼란을 거듭하다가 1936년 군부 내 실권자인 이오안니스 메탁사스 장군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찬탈했다. 전제군주 타도와 평등을 외치는 공산주의 바람은 발칸반도 신생 독립국에 의외로 거셌다. 국민은 그리스를 공산주의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메탁사스 군부를 지지했다. 왕당파였던 메탁사스가 왕정 복귀에 성공하면서 망명 중이던 게오르기오스 2세를 불러들여 국왕에 앉혔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의회와 정당을 함께 해산시켰으며, 헌법상 권리를 모두 백지화하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메탁사스는 자국민 통제에 맞는 체제를 위해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을 모방했던 것이다. 국왕 게오르기오스 2세는 허수아비일 뿐 메탁사스는 1941년 후두암에 걸려 죽기까지 절대 권력을 차지했다. 그 와중에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1940년 10월 이탈리아 무솔리니는 그리스가 영국에 기우는 것을 염려해 그리스를 침략했다. 알바니아를 점령했던 무솔리니가 발칸반도 욕심이 났던 것이다. 그러나 의외였다. 그리스 군의 대항 능력은 기대 이상, 이탈리아는 히틀러가 혀를 찰 정도로 전투력이 형편없었고, 알바니아에서 패한 후 도망치듯 물러나고 말았다. 나치는 소련 침공을 계획하고 쿠데타로 정신없는 유고를 10일 만에 점령하고 괴뢰정부를 세운 후 그리스에 영국군 비행장을 파괴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하늘에서 폭탄을 퍼붓고, 해변으로 전차와 독일군을 상륙시켰다. 영국이 개입했으나 만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후퇴했다. 그리스 총사령관 파파고스는 조상이 남긴 문화유산만이라도 지킬 마음으로 독일에 항복했다. 독립에 대한 열망이라면 그리스도 대한민국 못지않았다. 독재 치하 그리스 사람들은 터키독립전쟁에서 그랬듯 지하무장투쟁을 펼쳤다. 점령국 독일군에 의한 그리스 내 유대인 학살도 이어졌다. 워낙 어마어마한 사건이라 희생자에 누가 될까 언급하지 않겠다. 1944년 11월 마침내 그리스는 연합군의 노력으로 독일 손아귀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발칸반도에 유일하게 공산화되지 않은 그리스를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가 애지중지 했다. 만약 그리스마저 공산화가 된다면 지중해가 소련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래선지 전쟁이 끝난 후, 나치에 저항했던 그리스 레지스탕스가 소련을 견제하려는 처칠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대조적으로, 나치에 부역한 우파 민병대를 지원하면서 1946년 3월 30일부터 3년 7개월간 그리스 내전이라는 복선이 깔리고 만다. 어쩌면 이토록 한국전쟁 전 상황과 닮았을까. 프랑스가 나치 괴뢰정부에 조금이라도 가담한 인사들을 그냥 두지 않았던 것과는 비교되는 대목이다. 김일성이 남침하자 가장 먼저 돕기로 나선 국가가 그리스란 사실이 놀랍지 않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5-05-20

경제대통령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서방의 많은 국가로부터 비난을 받는 인물이다.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사회 질서를 깨뜨리고 경제적으로도 서방 국가에 많은 피해를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러시아 국민에게는 인기가 높다. 러시아 국민에게는 복지와 혜택을 가장 많이 준 대통령으로 인식되는 탓이다. 푸틴은 작년 대선에서 87%의 높은 득표율을 획득했다. 그가 대통령이 되면서 국제유가와 천연가스 가격이 상승해 러시아 경제가 되살아 나 국민적 여론은 나쁘지 않다. 그의 권위주의식 통치에도 다수의 국민은 그는 과(過)보다 공(功)이 더 많다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만약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관세 부과 등으로 미국의 부를 축적하게 되고 그 돈으로 국민에게 혜택을 준다면 미국인들도 트럼프를 계속 지지할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군사혁명이 아닌 방법으로 정권을 잡고 경제발전을 이룩했다면 그 역시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의 한 명으로 평가받았을지 모른다. 남미의 병자로 불리던 아르헨티나가 경제학자 출신인 밀레이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만에 경제가 재건되었다고 한다. 정부 지출삭감 등 강력한 개혁 조치로 어렵던 경제에 대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IMF 총재도 “포퓰리즘 척결의 경제 개혁이 인상적”이라는 말로 그를 칭찬했다. 대선을 앞두고 한 여론기관이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차기 대통령은 경제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대답이 압도적으로 많이 나왔다고 한다. 경제회복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라 볼 수 있다. 여야 대선 후보들의 경제적 안목과 역량이 이런 국민적 여망을 따라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는 대목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5-20

요코하마에 피는 꿈

혁신 활동의 종합 결과는 무엇인가. 경영자의 가치와 철학이 조직 라인을 타고 이어져 생산 현장 직원의 사고와 행동으로 나타나고, 설비와 제품에 스며들어 건강한 기업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말한다. 회사의 비전을 설정하고 전략과 목표를 정하여 체계적인 계획을 수립하여 실행하는 것만이 길은 아니다. 혁신의 토양이 되는 기업과 나라의 문화를 봐야 한다. 기업과 나라의 문화는 기업 혁신의 큰 흐름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성공의 열쇠가 된다. 기업 문화는 하루 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창립 초기의 사회 배경과 창립자의 경영 철학과 가치관에 따라 시작되며, 2세대, 3세대까지 사회 문화의 변화와 함께 만들어진다. 가령, 군대식 상명 하달식 조직문화는 다양성의 색깔이 있는 21세기에는 변화되어야 하는 문화다. 특히, 다른 나라의 혁신 토양은 그 나라의 오랜 시간 형성된 국민성, 종교, 사회문화, 가치관 등이 영향을 준다. 일본 기업의 혁신의 토양은 사무라이 정신에서 시작되는 매뉴얼 문화가 토대가 된다. 이를 이해 못하고 혁신을 적용하면 모래 위에 집 짓는 것처럼 사상누각이 된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성공의 길이 된다’. 나고야에 본사를 두고 있는 P사의 일본 법인은 경제 대국, 혁신 선진기업답게 자긍심이 높은 나라다. 일본에 있는 한국기업 경영자협회단 방문을 앞두고 컨설팅 요청이 왔다. 요코하마는 동경에서 40분 거리로 다른 지역과 달리 개성이 강한 독특한 지역 문화를 갖고 있다. 일본 법인의 요코하마 공장은 시내에서 먼 거리에 있고, 신입사원 선발에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2011년부터 큐슈, 나고야, 오사카, 요코하마 등 일본 전 지역의 법인을 지원한 경험이 있는 필자는 코로나19 이후 5년 만에 새로운 관점에서 컨설팅이 시작되었다. 주어진 시간은 6개월, 먼저 일본 총괄 법인장과 본사 및 요코하마 공장장, 일반직원들의 의견수렴과 생산 현장 진단을 토대로 법인 비전, 전략과 실질적인 운영제도 등 종합체계를 정립했다. 공장 내에는 혁신 룸을 다시 세워서 ‘공유의 장, 학습의 장, 토론의 장’을 만들어 개선 활동의 모멘텀을 끌어 올리기 위한 열린 문화를 형성시켜 갔다. 현장의 실질적인 개선은 종합 진단 결과에 맞춰 개선 실행의 순서를 설정하고 일본 매뉴얼 문화에 맞게 순서대로 활동 가이드 했다. 혁신 지향형 조직을 개편하고 공장장 중심으로 일체화 되어 설비 환경과 작업조건, 안전, 공장 운영체계까지 갖추어 나갔다. 그 해 11월, 일본 내 한국기업 경영자협회장단의 방문이 이루어지고, 혁신 우수기업 P사와 일본 해외법인 이미지를 높이는 성과가 나왔다. 이를 주도한 생산실장은 해외 개인 부문 표창을 받았고 감사 전화가 왔을 때 보람으로 다가 온다. 이후 큐슈, 나고야의 요카이치 공장 등 타 공장의 현장 개선 활동의 본보기가 되었고, 요코하마 개선 활동을 지원하고 체험한 직책자가 중심이 되어 확산 전개가 되고 있다. 요코하마 공장 성공 모델이 일본법인 7개 전 공장에 새로운 꿈을 주는 혁신이 되었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2025-05-20

부부의 날 단상

유난히 기념일이 많은 5월도 하순에 접어 들었다. 근로자의날을 비롯 어린이날ㆍ어버이날ㆍ입양의 날ㆍ스승의 날ㆍ성년의 날ㆍ세계인의 날ㆍ부부의 날 등 대부분 가족이나 가정, 이웃 등 사회구성원들을 배려하고 생각하며 기억, 기념하는 일들이 많아져서 가정의 달로 정해진 것일까? 그만큼 사람이 중요하며, 인류의 존엄과 가치, 인간의 현재적 소망과 행복을 귀중하게 여기는 인본주의(人本主義, humanism)가 바탕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중에 마침 오늘이기도 한 ‘부부의 날’은, 가정을 이루고 사회를 만드는 밑바탕이자 디딤돌의 역할을 해온 부부를 위한 날이기에 사뭇 의미가 크다 할 것이다. 즉 가족의 최소단위가 부부이며, 애정으로 맺어진 부부관계를 통해 가족이 늘어나게 되어 가정과 사회적인 요소의 근간이 마련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가정은 우주의 중심’이라고도 말하며, 가정의 참된 기능과 역할은 건강하고 화목한 부부생활에서 비롯되고 그 기반이 다져지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가 되는 부부(夫婦)는 서로 다른 두 이성이 만나서 합한 관계이다. 이는 곧 개인적으로는 두 사람이 합하여 가족을 구성하는 것이지만, 사회적으로는 두 가문의 결합이기도 하다. 가문의 뿌리가 서로 다르기에 상호존중과 배려로 예절을 지키면서 언제나 화목해야 하는 취지를 담고 있기도 하다. 즉 혼인은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사회가 인정하는 결합을 의미하며, 예로부터 ‘두 성씨가 합하게 되는 만복의 근원(二姓之合 萬福之源)’으로, 이는 곧 서로 사랑하고 배우며 협력하여 사회적인 조화를 이루는 큰 일(人倫之大事)로 매우 중요시하게 여겼다. ‘긴 상이 있다/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좁은 문이 나타나면/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걸음을 옮겨야 한다/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서로의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다 온 것 같다고/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걸음의 속도로 맞추어야 한다/한 발/또 한 발’ -함민복 시 ‘부부’ 전문 어쩌면 이상적인 부부의 길이란, 이처럼 서로의 안색(顔色)을 잘 살피며 인생의 속도를 서로에게 맞추며 함께 걸어가는 일이 아닐까 싶다. 부부로 만나 가정을 운영하며 살다 보면 이러저러한 일들로 상이 기울어지거나 모퉁이에 부딪쳐 상 위의 음식들이 떨어질 위기가 있어도, 한 발 한 발 서로를 찬찬히 읽으며 가는 길에는 사랑의 익숙함이 깃들어 세월의 노련함으로 편하게 걸어가게 될 것이다. 배려와 양보로 빠르게 가라고 재촉하지 말고 상대방을 변함없이 존중하며 끝까지 정다운 부부의 애정이 유지되도록 서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리라고 본다. 갈수록 우리나라의 높아지는 이혼율과 1인가구 비율 증가추세 등으로 인구절벽이 현실화되고 지방소멸마저 위협받는 때, 둘(2)이 하나(1)가 되는 부부의 날에 가정의 의미와 부부의 위상이 새삼 중요하게 여겨진다. 건실한 부부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화목한 가정을 일구면서 사랑과 행복의 꽃을 피워가는 새로운 부부가 많아지고 아름다운 삶의 동행이 꾸준히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2025-05-20

도심 속 보물, 포항의 바다를 지키는 시민의 힘

포항은 대한민국에서도 정말 특별한 도시다. 도심 한가운데 영일대해수욕장과 송도해수욕장이 자리해 있어, 일상과 바다가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다. 204km에 이르는 해안선을 따라 포항은 사계절 내내 바다와 함께 숨 쉬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 중 송도해수욕장은 2007년 폐장한 후 18년 만에 다시 개장한다. 포항시는 그동안 복원과 기반 시설 정비를 통해 한때 ‘명사십리’로 불리던 이곳을 피서객 맞을 준비를 마쳤다. 과거 연평균 12만 명이 찾던 명소였던 송도해수욕장은 1970년대 대규모 매립공사로 백사장이 유실되고 수질이 악화되어 폐장되었다. 이에 포항지방해양수산청은 총 사업비 304억 원을 투입하여 모래 유실을 방지하는 수중 방파제 3기를 설치하고, 15만㎥의 모래를 채워 복원했다. 이 결과, 오는 7월 7일 시 지정 해수욕장으로 재개장하게 된다. 최근 맨발 걷기와 어싱(Earthing)이 건강에 긍정적이라는 연구들이 주목받고 있다. 실제로 포항에서는 맨발 걷기 열풍이 불고 있고, 맨발로 걷기 좋은 길이 30곳이나 조성됐다. 접지 효과와 반사요법 덕분에 스트레스 완화, 면역력 증진, 수면 질 개선 등 다양한 건강 효과를 시민들이 직접 체감하고 있다. 바다와 가까운 해변 덕분에 누구나 쉽게 자연의 에너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이 포항만의 큰 장점이다. 여름에는 해수욕을 즐기고, 겨울에는 고요한 바다를 따라 맨발로 걷는 사람들로 해변은 늘 생기가 넘친다. 특히 도심에 인접한 해수욕장 덕분에 누구나 쉽게 바다를 찾고, 자연의 에너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도시가 바로 포항이다. 필자 역시 시민들과 함께 해변에서 맨발 걷기를 실천하며 운동과 힐링, 그리고 사람 간의 연결을 경험하고 있다. 더불어 매주 해변을 따라 쓰레기를 줍는 플로깅(plogging) 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플로깅은 환경 보호와 건강 증진, 공동체 의식 함양에 모두 도움이 되는 운동이다. 이런 작은 실천이야말로 우리 바다를 지키는 소중한 노력이다. 하지만 최근 영일대해수욕장과 송도해수욕장 등 도심 해변에는 해초와 각종 쓰레기가 집중적으로 밀려와 수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송도해변의 경우, 모래 유실을 막기 위해 설치된 해저 잠제(수중방파제) 주변에 해초가 자라면서 파도에 의해 백사장으로 대량 밀려드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는 일부 해초가 건강한 생태계의 신호일 수 있지만, 방치할 경우 자연과 시민 건강 모두에 해가 될 수 있다. 도심 속 해변은 한 번 훼손되면 복원이 쉽지 않은 귀중한 자산이다. 포항의 바다는 관광지가 아니라 도시의 정체성이자 시민 모두의 생명선이다. 우리는 이 자산을 누리는 동시에 보존할 책임도 함께 져야 한다. 작은 쓰레기 하나 줍는 일, 바다 생태계를 존중하는 마음, 무분별한 개발을 경계하는 시민의식이야말로 우리 스스로를 지키는 길이다. 지역구 시의원으로서 필자는 바다 자산 보존을 위한 정책적 기반을 마련하고, 시민과 함께 바다를 지키는 활동을 지속해 나갈 것이다. 도심 속 바다가 주는 혜택을 누리고 있다면, 이제는 우리가 그 바다를 지켜야 할 차례다. 포항의 해변이 다음 세대에도 자랑스러운 도시의 얼굴로 남을 수 있도록, 모두의 실천을 부탁드린다. /안병국 포항시의원·도시공학박사

2025-05-20

국민의힘은 그 많은 선거자금 어디에 쓰나

보수 텃밭인 대구·경북(TK) 민심이 심상찮다. 리얼미터가 지난 14∼16일 차기 대선주자 적합도 조사를 했더니, TK에서 김 후보 44.9%, 이 후보 43.5%라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대선을 열흘 정도 남겨두고, 이 지역에서 두 라이벌 정당이 오차범위 내 대접전을 벌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역대 대선에서 보수후보에 대한 TK지역 득표율과 투표율은 대부분 70%를 넘어섰다.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의 TK지역 득표율은 73.9%였다. 이런 TK지역 민심에 대해 가장 속이 타들어가는 측은 김문수 후보 캠프일 것이다. 김 후보 비서실장을 맡고 있는 김재원 전 의원은 지난 주말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TK에서의 김 후보 부진은 뼈아픈 부분”이라고 언급하면서 “대구경북은 25개 선거구 국회의원이 모두 우리 당 소속인데···.”라며 여운을 남겼다. 이 지역 국회의원만이라도 자기 일처럼 선거를 지원해주면 이런 결과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함축된 말로 들렸다. 사실 여론조사마다 거의 90%에 육박하는 이재명 후보의 호남 지지율을 감안하면, 김 후보가 TK지역에서 몰표를 얻지 못할 경우 표 차이를 만회할 방법이 없다. 선거일이 임박하면서 TK지역 국회의원에 대한 책임론이 거론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실제 각 정당 출입기자들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과거 대선 때와는 다르게 파장 분위기를 느낀다고 한다. 김 후보를 위해 적극적으로 선거운동을 하는 국회의원이나 지방의원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라는 것이다. 실제 필자도 이번 대선에서는 김문수 후보 지지를 호소하는 TK지역 국회의원의 문자 한통 받은 적이 없다. 하루가 멀다 하고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민주당 이재명 후보와 대조되는 현상이다. 길거리에서 국민의힘 간판을 단 유세차량을 본 적이 없다는 대구시민도 많다. 윤 전 대통령 탄핵과 대선후보 단일화 논란으로 발생한 당내 갈등이 아직 남아있는 것은 짐작하지만, 이 정도로 심각할 줄은 몰랐다. 후보 캠프 외에는 모두가 손 놓고 있는 것 같다. 선관위에서 선거보조금으로 받은 돈(242억8600만원)과 최근 출시한 ‘문수대통펀드(250억원)’를 어디에 쓰는지 궁금하다. TK지역과는 달리, 국민의힘 중앙당 차원에서는 윤 전 대통령 탈당 후 전열을 재정비하려는 기류가 형성되는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그동안 보수정당의 주류였던 TK지역 정치인들이 자당 후보의 지지율이 바닥을 치는데도 먼 산 구경하듯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년 지방선거나 2028년 4월 총선 공천에서 반드시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이미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TK지역 국회의원들은 단일 대오를 구축해 김 후보를 지원해야 한다. 국민의힘에 실망한 보수정당 지지자들이 대선 여론조사 전화를 받고, 투표장에 나오게 하려면 지역 정치인들이 골목골목 누비며 선거 캠페인에 나서는 방법 밖에 없다. 이 지역 지지율만이라도 과거수치를 회복하면 김 후보로서는 외연 확장에 나설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긴다. /심충택 논설위원

2025-05-20

문제는 리더십이다

4년 후 2029년은 포항시 승격 80주년이 된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2049년에 시 승격 100주년을 맞이한다. 영일군 포항읍은 6·25전쟁 직전인 1949년 8월 15일에 시로 승격되는데 그 과정이 예사롭지 않다. 포항읍은 시로 승격될 수 있는 조건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는 게 당시 사정을 아는 원로들의 증언이다. 하지만 최원수 초대 영일군수를 중심으로 ‘포항시 승격 추진 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포항은 시로 승격될 수 있었다. 흥해 출신으로 경기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다녀온 최원수 군수는 앞날을 바라볼 줄 아는 혜안과 과감한 추진력, 탄탄한 인맥이 있었기에 이 일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만약 그때 포항이 시로 승격되지 못했다면 전쟁 때 초토화된 포항의 시 승격은 어떻게 되었을까? 한 지역의 성장과 발전 과정에는 변곡점이 있다. 역사적 의미가 있는 변곡점은 강한 힘이 작용해야 만들어진다. 포항의 시 승격이라는 역사적 변곡점은 한 지도자의 강한 리더십 덕분에 만들어진 것이다. 대한민국이 어렵고 포항도 힘들다. 최근 포항의 형편은 한 유력 일간지의 1면 머리기사(차갑게 식어가는 ‘철의 도시’)에 소개되었을 정도다. 지방 도시의 활력이 떨어진 상황에서 포항 경제의 양 날개인 철강과 이차전지가 고전하고 있으니 이런 기사가 나온 것일 테다. 그렇다면 지금 포항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포항을 다시 성장의 열기가 뜨거운 도시로 바꿀 것인가. 창조적 돌파구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포항은 산과 강, 204km에 이르는 해안선을 품고 있는 매우 드문 도시다. 즉 포항의 본원적 경쟁력은 아름다운 자연에 있으며, 이를 지혜롭게 활용한다면 매력적인 휴양관광도시로 거듭날 수 있다. 이런 잠재력이 실현되면 진정한 의미의 마이스(MICE) 도시가 될 수 있는 것은 물론, 국제적인 연구센터의 유치, 포스코 미래기술연구원의 설치도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좋은 도시 환경에 좋은 인재가 몰리기 때문이다. 포항이 이런 방향으로 가려면 특급호텔 유치, 동빈내항 정비, 해안의 난개발 방지, 세련된 도시 디자인 개발 같은 과제를 조속히 해결해야 할 것이다. 수소환원제철소의 건립과 수소도시로의 전환, 이차전지의 재도약, 바이오산업의 진흥은 포항의 명운이 걸린 사업이다. 이 사업을 힘차게 추진하려면 민관학연이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해야 하며, 이 네트워크는 포항을 넘어 글로벌 수준에서 구축할 필요가 있다. 글로벌 네트워크의 구축은 포항이 명실상부한 글로벌 도시로 도약할 수 있는 실질적인 기반이 될 것이다. 포항이 이 같은 사업의 성공적 추진을 통해 새로운 역사적 변곡점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차갑게 식어가는 ‘철의 도시’”는 현실이 될 수 있다. 새로운 변곡점은 새로운 리더십이 만들어낼 수 있다. 새로운 비전과 철학, 뜨거운 심장을 가진 리더십이 등장해야 한다. 4년 후 포항시 승격 80주년에 ‘백년 도시 포항’의 가슴 뛰는 비전을 제시하고 시민과 뜨겁게 한마음이 되어 달려갈 수 있는 리더십이 나타나야 한다. 문제는 리더십이다. /최용규 법무법인 도울 대표 변호사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단체장 출마 희망자의 기고문을 받습니다. 후보자의 현안 진단과 정책 비전 등을 주제로 200자 원고지 7.5∼8.5장 이내로 보내주시면 지면에 싣도록 하겠습니다. 기고문은 사진과 함께 이메일(hjyun@kbmaeil.com)로 보내주세요. 외부 기고는 기고자의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5-05-19

윤후명 선생과 예술지상주의 계보

윤후명 선생이 별세하셨다. 지난 5월 8일, 온 나라가 대통령 선거 후보 문제로 뒤숭숭할 때 조용히 세상을 떠나셨다. 윤후명 선생은 한국문학의 유미주의 계보학을 구성하는 아주 중요한 존재였다. 김동인·임노월에서 발흥한 현대 유미주의 계보는 이효석·이상·계용묵 등을 거쳐 해방 후 이제하 선생으로, 윤후명으로 이어지고, 여기서 다시 작가 심상대에게로 연결된다. 사적 친소 관계가 아니라 예술사적 계보학상에 그렇다는 것이다. 9일 저녁에 채만식 문학상 서성란 작가 시상식을 마치고, 바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대학로 ‘예술가의 집’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은 차로 불과 5분 거리다. 2층 5호실, 장례식장은 떠들썩하지도 않았다. 황충상 선생, 잡지 ‘문학나무’를 이끌어 가시는 작가께서 빈소를 지키고 계셨다. 황충상 선생과 윤후명 선생은 일생을 가까운 친구로 지내오셨다. 윤후명 선생 제자라 할 이평재 작가는 먼저 와서 계시다 가셨고, 이승하 선생, 구효서 작가, 윤대녕 작가 같은 분들이 뒤에 더 도착하셨다. 빈소를 떠나는데 정희성 선생이 막 조문을 마치고 계셨다. 재작년 11월 13일, 윤후명, 정희성, 강은교 세 분이 시동인지 ‘고래’를 앞에 두고 정담(鼎談)을 나누실 때 사회를 본 게 마지막이었다. 윤후명 선생을 그 후로 한두 번은 더 뵌 적이 있을 텐데 인상이 선명치 않다. 이 세 분은 저 옛날 ‘1970년대’ 동인을 함께 하셨던 사이셨고, 긴 세월 흘러 ‘살아계신’ 분들이 다시 모이신 것이었다. 이제 윤후명 선생이 세상을 떠나셨으니 정희성 선생의 심회는 무척 참혹하실 것이었다. 그날은 비가 무척 내리기도 했다. 홀로 집으로 향하는데, 빈소에서 본 윤후명 선생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몹시 안타깝고, 이 혼탁한 정치 세상에 조금만 더 버티고 계셨더라도 좋을 것 같았다. 지금 문단은 정치에 깊이 침윤되어 소란스러운 소리 그칠 새 없고 나 또한 그런 세상의 한 모퉁이에 서 있다. 소목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운명처럼 정치적인 상황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1980년대 중반에 대학에 들어간 세대의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윤후명 같은 작가는 그렇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윤후명 선생의 세대 또한 최인호, 황충상, 조금 더 뒤의 강석경 같은 작가까지 합쳐 생각하면 1940년 전후 출생 세대의 ‘6·25 전쟁 문학’에 대한 반작용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뭔가 다른 방향의 문학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고 절실히 느꼈을 때 비로소 시선에 들어온 작가가 바로 윤후명이라는 존재였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돈황의 사랑’, ‘누란의 사랑’ 같은 소설들은 나로 하여금 정치적 현실과는 다른 삶의 차원을 숙고할 수 있게 했다. 윤후명 선생은 스스로 엉겅퀴를 그리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술과 여행에 심취한 분이셨다. 윤후명 문학처럼 제도와 관습을 심문하고 거기서 이탈하기까지 하는 문학은 예술이 삶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진짜 문학은 정치 이전이거나 정치를 함축하면서도 정치를 초월해야 한다. 어찌 되었든, 나는 이 명제를 놓치지는 않겠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05-19

가난 선택한 대통령 호세 무히카

지난주 ‘호세 알베르토 무히카 코르다노’라는 긴 이름을 가진 우루과이 사람이 여든아홉 살 나이로 죽었다. 많은 국가가 그의 죽음을 알리며 애도했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호세 무히카는 농부였고, 13년이란 오랜 수감생활을 겪었던 민주화 투사였으며, 제40대 우루과이 대통령이었다. 사연과 굴곡 많았던 남아메리카 현대사 속에서 그는 영화나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았다. 우루과이 국민들은 그를 대통령 월급 90%를 사회에 기부하고, 자신의 집무실을 떠도는 노숙자들의 숙소로 개방했으며, 기사 딸린 대형 세단을 마다하고 조그만 승용차를 직접 운전했던 지도자로 기억한다. 그래서다. 대통령 자리에 있을 때 그는 ‘스스로 가난을 선택한 대통령’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지구 위 수많은 권력자들이 ‘검은 돈’ 탓에 권좌에서 밀려나 험한 꼴 겪는 걸 무시로 봐왔던 사람들에게 호세 무히카는 ‘별난 권력자’가 분명했다. 경제 성장률과 교육 수준의 향상, 문맹과 극빈층 줄이기, 사회적 소수자 보호라는 호세 무히카의 정치 지향은 재임 중에는 물론 퇴임 후에도 지속됐고, 이는 우루과이 사회를 보다 높은 단계로 성장시켰음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지난 2024년 4월이다. 그가 “식도암으로 투병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자회견을 통해 알게된 우루과이 사람들 다수가 눈물을 흘렸다. 정치인이 대중들에게 ‘검약’과 ‘탈권위’란 키워드로 기억되기는 쉽지 않다. 정치인의 죽음이 절대다수 국민들의 진심 어린 슬픔으로 이어지는 건 더 어렵다. 하지만, 호세 무히카는 그걸 해냈다. 한국도 이제 그런 대통령 하나쯤 가질 때가 됐는데…. 요 며칠은 우루과이가 부럽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5-19

다시, 오월을 살아내다

지난달 말 피기 시작한 이팝꽃잎들이 보도 위에 내려앉는다. 그 꽃잎을 밟고 걷기가 미안하다. 또, 담장에서 활짝 웃는 장미꽃이 행인들을 반긴다. 신록도 질세라 온 누리에 생기를 내뿜는다. 생명 찬란한 2025년 을사년 오월이다. 오월을 맞으면, 해마다 5·16과 5·18이 동시에 마음을 파고든다. 올핸 왠지 그 마음이 더 짙다. 학생, 군인, 직업인으로 살아오면서 두 역사(歷史)를 보고, 듣고, 겪고, 느끼고, 품으며 지냈기 때문이리라. 한국인은 누구나 이 두 역사와 함께 살고 있다. 나라의 산업화와 민주화, 선진국화 과정에 두 역사가 살아 숨 쉬니까 말이다. 나도 다시, 이 오월을 살아내고 있다. 하루에 두 번 오가는 동네 공원 보도블록 위엔 웬일인지, 그 많던 개미들이 하나도 안 보인다. 몇 해 전만 해도, 개미를 안 밟으려 조심하며 걷던 곳이다. 벌들이 사라져 수분(受粉)이 안 된다는 보도가 나온 지도 제법 오래되었다. 알게 모르게, 우리 생태계가 생물 살기 어려운 환경으로 더 빠르게 변하는 올 오월이다. 급변하는 것들이 어디 생태계뿐일까. 우리 사회가 보이는 이 오월의 참담한 모습들이, 생태계 변화보다 더 깊이 가슴을 파고든다. ‘민주’와 ‘국민’을 선동의 마약으로 입에 달고 사는 정치인들이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평생 아니, 자자손손 기득권을 누리려는 작태가 눈에 뻔하다. 이래도 우리 정치권, 언론, 학계, 시민사회는 거의 외면한다. 자정 능력은 팔아버렸을까. 정치의 근본은 ‘국리민복(國利民福)’이다. 선출직이든, 임명직이든 정치인과 공무원은 국리민복을 위해 헌신하는 게 하늘의 섭리다. ‘민주’라는 말을 당명에 담은 거대 야당은 국리민복을 일부러 외면하나 보다. 오로지 자당 대선후보를 위한 묘수 찾기에 골몰하니까. 그들은 주요 기관장과 국무위원, 대통령 탄핵도 모자라 대법원의 판결까지 시비 걸며, 대법관들을 탄핵과 청문회로 위협을 한다. 재판 기피, 연기 등 꼼수로 법정 재판기일을 몇 배씩 어기며 대선후보가 된 피고인 1야당 대표. 그는 대법원의 유죄취지 파기환송에도 후보 사퇴는커녕, 재판이 대선 운동을 저해한다고 압력을 가해 선거 후로 미루게 했다. 이로써, 사법부는 1극 체제 야당 권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거대 야당이 삼권분립을 깨부수며, 나라 체제를 무너뜨리려 한다. 너무 답답하다. 5·16은 ‘조국 근대화’로 경제발전을 이루며, 자유민주주의의 기초를 닦은 역사다. 5·18은 5·16의 기초 위에 자유민주주의를 꽃피운 역사다, 한데 지금, 거대 야당은 ‘탄핵’과 ‘방패 입법’이란 두 요괴 방망이를 마구 휘두른다. 방망이엔 국리민복도, 자유민주주의도 안 보인다. 부정선거 증거 동영상이 국회 소위 회의장에 상영되어도, 모르쇠다. 이런 야당의 모습을 5·18 영령들은 과연 어떻게 바라볼까. 이젠, ‘하늘도 무심하다’는 생각에 몸서리친다. 그래도, 5·16과 5·18을 품은 오월을 다시 살아내면서 간절히 빈다. 유월 대선에서 당일 투표 등으로 부정선거를 막아내어, 생명 찬란한 푸른 오월처럼 나라가 국리민복 공동체로 거듭나기를···. /강길수 수필가

2025-05-19

행복의 저편-칼릴 지브란을 회상하며

누군가로부터, “행복하세요?“ 라는 질문을 받아 본 적이 있는가. 그랬다면 그때 아마도 대답을 망설였을 것이다. 행복은 드러나는 것이지,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행복은 찾는 순간 사라지는 신기루와 같은 것. 행복을 찾아보라. 찾지 못하는 당신을 발견할 것이다. 행복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되는 그 무엇이므로. 존재하지 않기에 찾을 수도, 추구할 수도, 도달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오늘도 항해를 떠난다. 행복이라는 섬을 찾아서. 하지만 지금까지 그 섬에 도착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충분히 만족하여도, 당신의 손은 만족한 몸의 맨살을 직접 만져보고 싶어 안달하며, 충분히 행복하여도, 당신의 귀는 행복한 마음의 소리를 듣고 싶어 견딜 수 없어 한다. 손이 행복의 맨살을 만지는 순간, 행복은 이미 당신의 손아귀를 빠져나가 저 멀리서 당신에게 손짓할 것이다. 귀가 행복을 듣게 되는 순간, 행복은 이미 저 산 너머 메아리로 사라지고 있을 것이다. 만지지 않고, 듣지 않을 때만 온전히 당신에게 머물기에. 행복은 ‘지금 이순간’ 당신에게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우주 속 빛의 속도처럼 일정하게 빌트 인(built-in) 된 그 무엇이 아니라, 삶에서 매 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사건들의 연속일 뿐. 주위를 둘러보라. 행복이 널려 있지 않은가. 고통이 찾아오면 당신은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고통은 행복이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자, 행복으로 인도하는 길. 고통은 당신이 스스로 선택한 행복의 동반자. 고통은 상처받은 행복을 치료하기 위하여 당신의 내면이 내미는 쓰디쓴 약. 행복이라는 의사를 믿고, 고통이라는 약을 안심하고 드시라. 그리고 친구처럼 고통과 대화하시기를. 행복은 고통의 부재가 아니라 고통을 껴안은 존재가 빚어내는 빛이요, 슬픔이 함께한 자리에서 피어나는 꽃이요, 삶의 어두운 골짜기를 걸어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신의 선물이다. 어찌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현자는 말한다. ‘삶이 그대를 괴롭힐 때에도 그 괴롭힘 속에 감춰진 선물을 찾으라고, 기쁨과 슬픔은 서로를 부르는 이름이라고’ 고통과 기쁨은 하나의 줄기에서 태어난 형제. 고통은 기쁨을 품기 위해 어두운 땅속으로 움추린 씨앗이요, 기쁨은 고통이 껍질을 벗기고 드러낸 맨얼굴이다. 기쁨은 고통의 어깨 위에 핀 꽃이요, 고통은 기쁨의 뿌리 아래 잠든 불씨이다. 기쁨의 눈동자 속에 드리운 슬픔의 그림자를 사랑하자. 우리의 삶이 곧 고통이요, 기쁨이 아닌가. 우리는 행복이란 창을 마음속에 만들어 두고 산다. 가끔씩은 그 창이 닫힐 때가 있으리라. 그러나 걱정하지 마시라. 이 창문이 닫히면, 저 창문이 열릴 것이다. 열리지 않으면 그냥 ”괜챦아“ 라고 말하면 된다. 이것이 행복의 창문을 여는 방식이다. 다만 한 가지 명심할 것은, 그 창을 통하여 들어오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는 사실. 다시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것은 밝은 빛과 시원한 바람. 그 빛과 바람은 방안에 웅크리고 있는 당신의 행복을 잠에서 깨울 것이다. 행복의 샘물을 마셔보자! 행복이란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 시원한 샘물의 맛이 어떤가요. 잊지 마십시오. 그 물속에는 기쁨과 슬픔이 함께 섞여 있다는 사실을. /공봉학 변호사

2025-05-19

자제하지 않는 권력은 민주주의를 파괴한다

“이것들 봐라? 한 달만 기다려라.” 대법원이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에게 무죄를 선고한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2심 판결을 뒤집고, 파기 환송한 지난 1 일 민주당 김병기 의원은 페이스북에 그렇게 썼다. 그런데 한 달도 못 기다렸다. 지난 14일 국회 법사위에 조희대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모두 증인으로 불렀다. 사법부는 삼권 분립의 중요한 한 축이다. 국회는 대법원장을 국회에 부르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그런데 대법관들을 모두 불렀다. 대법관들이 모두 불참하자 정청래 법사위원장은 “아직도 정신 못 차렸다. 탄핵해야 한다”라고 말했 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내란 혐의 사건 항고심을 맡은 지귀연 부장판사에 대해 서는 룸싸롱에서 향응을 받았다는 제보가 있다며 직무 배제하고, 감찰하라고 연일 공세다. 판사가 지나친 향응을 받았다면 징계하는 게 마땅하다. 그러나 특정 판결에 대한 보복은 차원이 다르다. 지 부장판사는 윤 전 대통령을 ‘구속 취소’했다. 필자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재판 결과를 보복하면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 없다. 더구나 민주당이 연루된 재판을 하는 판사들은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민 주당이 노리는 것도 ‘알아서 기라’라는 협박으로 보인다. 대법원장을 국회로 부른 것도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 재판에 대한 노골적인 보복이다. 범죄자가 판사를 협박하고, 어르는 꼴이다. 일종의 인민재판이다. 이게 민주주의일 수는 없다. ‘이재명 포비아’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이재명 후보는 중도층과 보수 세력에 게 공포감을 줬다. 지난 총선 공천 과정에서 정치적 반대자를 얼마나 잔인하게 짓밟을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대선을 앞두고, 우클릭하며 양처럼 친화적인 이 미지로 화장했다. 그런데 대법원 선고가 그 화장을 씻어냈다. 이 후보는 경남 유세에서 “지금도 숨어서 끊임없이 내란을 획책하고 실행해 2·3차 내란을 일으키려는 자들을 다 찾아내서 법정에 세워야 한다”라면서 “그 법정은 깨끗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법을 위반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까지 찾아내 처벌하겠다는 말이다. 일종의 관심법이다. ‘깨끗한 판사’라는 건 현재 판사들이 ‘더러운 판사’이고, 새 판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사법부 장악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퇴임하자 사법농단으로 수사하고, 김명수 대법원장을 발탁해 사법 부를 뒤집어놓았다. 이제 현직 대법원장을 뒤집어놓겠다고 으름장이다. 지난 14일 법사위는 ‘조희대 특검법’을 상정했다. 대법관 수도 갑절 이상 늘 리겠다고 한다. 현재 14명에서 김용민 의원안은 30명, 장경태 의원안은 100명 으로 늘어난다. 늘어나는 대법관은 새 대통령이 임명하게 된다. 유죄 취지 파기 환송한 이재명 재판을, 대법관을 바꿔 뒤집겠다는 속셈이다. 그뿐 아니다. 이 후보가 피소된 선거법 조항을 지우는 공직선거법 개정안도 상정했다. 처벌 근거가 사라지면 자동 면소(免訴)된다. 대통령에 당선된 피고인에 대한 재판은 정지하도록 고친 형사소송법 개정안도 냈다. 노골적인 위인설 법(爲人設法)이다. 이 후보는 대법원판결 직후 “법도 국민의 합의이고, 결국 국민의 뜻이 가장 중요하다”라면서 “정치는 결국 국민이 하는 것이다. 국민의 뜻을 따라야 한다” 라고 말했다. 국민의 투표권이 중요하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기초다. 그렇지만 절제가 필요하다. 정치인이 자신의 범죄를 다중의 힘으로 덮으려 하면 법치가 무너진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때 관료와 판사, 지식인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홍위병의 곤봉이 판사의 법봉을 대신했다. 그런 길로 갈 수는 없다. 국민의 뜻이 중 요하지만, 법의 테두리는 지켜야 한다. 더구나 특정인을 보호하려고, 법원을 개편하고, 법을 고칠 수는 없다. 민주당 내부에도 선거에 악영향을 미칠 거라고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 만 드러내놓고 말을 못 한다. 압도적인 지지율 탓에 여론을 걱정하는 목소리마저 힘을 잃었다. 이러다 선거가 끝나면 어떻게 될지 두렵다. 자제는커녕 충성 경쟁이 더 극심해질 게 뻔하다. 자제할 줄 모르는 권력은 민주주의를 파괴한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5-05-18

광주라는 ‘지금 시간’

어느덧 다시 오월이다. 1980년 오월에 일어난 일을 누구도 말할 수 없던 시절은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이성복, ‘그날’)던 무통의 기억을 날카롭게 갈아 45년이 지난 지금까지 가장 아픈 숨골을 쑤셔댄다. 입이 있지만 침묵함으로써 혀를 썩혔던 죄의식을 기형도는 “입 속의 검은 잎”으로 은유했다. 며칠 전 포항 ‘책방 수북’에서 열린 장석남 시인의 북토크에서 시인은 첫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이 오월 광주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운 공포의 기록이라 말했다. “찌르레기 떼가 몰고 온 봄 하늘은 햇빛 속인데도 저물었다”(장석남, ‘새떼들에게로의 망명’)던 시인에게 오월은 여전히 “유골함을 받아 안듯 오는, 봄”(장석남, ‘서울, 2023 봄’)이다. 문학은 오래전 그 일에 관하여 스스로를 ‘입 속의 검은 잎’이라 정죄했지만 그래도 문학만큼 진실된 목소리도 없다. 지금까지 문학은 왜곡된 기록을 생생한 기억으로 바꾸고 또 개인들의 기억을 공동체적 기록으로 바꾸면서 바늘의 역할을 해왔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인선’은 기계에 손가락이 잘려 봉합수술을 받는데, 간병인은 3분마다 한 번씩 주삿바늘로 수술 부위를 찌른다. 그래야만 신경이 죽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이 우리를 살아 있게 한다. 통각이 진실을 기억하게 한다. 우리가 4.3을, 5.18을, 세월호를 잊지 않도록 문학은 계속 바늘이 돼야 한다. 4.3과 보도연맹학살사건, 그리고 5.18 등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적 진실을 재현하는 한강의 소설 작업은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서부터 출발한다. 목젖과 옆구리가 총검에 절개되고 피와 뇌수로 범벅이 된 시신의 묘사는 끔찍하지만 독자에게 강렬한 충격을 입힌다. 그리고 그때 단순히 ‘기록’된 과거로서 문헌과 통계와 명단에만 박제돼 있던 ‘기억’이 비로소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감각에 생동하기 시작한다. 한강의 문학은 망각이라는 두터운 무덤 아래서부터 진실을 끌어올려, 겉땅에 오른 그가 비와 바람과 햇살로 흙에 파묻힌 얼굴을 씻고 직접 말하게 하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에게 역사는 강물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흘러 사라지는 장면들이 아니라 어느 순간 강렬한 의미로 멈춘 정지화면들의 연속이다. 그 정지화면이 바로 ‘지금 시간(Jetztzeit)’이다. 스크린에 상영되던 영화가 갑자기 멈추면 어떻게 될까. 그 순간 화면 속 인물의 표정과 빛의 질감과 배경의 아주 작은 소품까지 모든 게 더 생생히, 자세히, 선명히 보인다. 그리고 그때 영화에는 이전과 다른 의미가 나타나게 된다. 영화처럼 흘러가는 역사 속에서 어느 특정한 순간이 새로운 의미를 갖고 멈추었으나 생동하며 우리에게 온다. 교과서에서 무심히 보고 넘겼던 4.3과 5.18을 소설로 읽고 나니 1948년과 1980년에 죽어간 사람들이 오늘의 우리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지금 시간’은 우리로 하여금 흘러간 역사를 다시 보게 하고, 오늘에 어제를 겹쳐 새롭게 살게 하는 신비한 시간 체험이다. 한 온라인쇼핑몰에서 전두환의 얼굴과 “THE SOUTH FACE”라는 영어 문구가 프린팅된 가방을 판매해 논란이 됐다. 5.18 기념재단의 항의로 판매가 중단됐는데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들에는 “지겹다”, “시체 팔이 그만해라”라는 비아냥과 함께 전두환을 칭송하거나 광주를 비하하는 내용이 많았다. 그런 걸 만들어 파는 이와 그걸 옹호하며 학살자를 찬양하는 이들이 다 이 나라의 국민이라는 게 역겹다. 악은 평범해서 언제 어디에나 악마가 널려 있다. 지난 수십 년 그러했듯 악마들은 지금도 앞으로도 신나게 왜곡하고 은폐하고 조롱하며 낄낄대겠지만, 상관없다. 그 악마들이 무의미한 생을 멍청하고 한심하게 흘려보낼 동안 문학을 읽는 젊은 독자들은 글자 하나 하나를 바늘 삼아 스스로를 찌르면서 ‘지금 시간’을 체험하는, 깨어 있는 의식이자 사유하는 주체가 된다. 지난주 수업에서 학생들과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었다. 독후감을 발표하고 듣는 서로가 서로의 바늘이 되었다. 한 학생이 외쳤다. “어떻게 그런 가방을 만들어 팔 수가 있어요?”라고. ‘소년이 온다’에서 도청 앞 분수대가 물줄기를 뿜는 것에 분노하며 “어떻게 분수대에서 물이 나옵니까. 무슨 축제라고 물이 나옵니까” 항의전화를 건 ‘은숙’처럼. /이병철(시인)

2025-05-18

저녁 퇴근길에 생각한 것

요즘 회사를 출퇴근할 때 지하철을 타는 대신 열심히 걸어 다니고 있다. 이직하면서 회사가 집 근처로 아주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집과 회사 사이에는 도림천이 잘 형성되어 있어서 높은 건물 없이 푸르른 하늘이 잘 보이고, 나무나 풀이 많아서 초여름의 연두를 눈에 실컷 담을 수 있어 좋다. 하루 온종일 컴퓨터 모니터 화면만 보면서 업무를 하나씩 해치우고, 온갖 어지러운 생각들에 갇혀 있었다면 자연 속에서 걸을 때는 모든 복잡한 생각들을 내려놓고 무념무상 상태로 걸을 수 있다. 왼쪽과 오른발을 차례대로 지면에 내딛으며 발바닥의 감각, 힘이 들어가는 발목과 허벅지, 허리와 배에 중심을 잘 잡고선 걷는 명상에 빠져 들다보면 하루에 시달렸던 온갖의 고통에서 해방된다. 그렇게 자유롭게 삼십여분 정도를 걸으면 익숙한 동네가 나온다. 대학교를 졸업 하고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서울로 상경했을 때부터 쭉 살고 있는 작은 동네, 이곳의 초입부터 들어서면 마음이 편안해져서 불필요한 힘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질 정도다. 날이 좋은 날이면 바로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쉬워서 근처를 배회한다. 자전거를 타고 강변을 달리는 사람들,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사람, 아이 유모차를 끌다 꽃을 따는 내 또래의 젊은 여자를 본다. 그 광경이 너무나 평화로워서 어느 꿈결 속에 앉아 있는 듯 하고, 나는 실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지 노심초사하는 마음도 든다. 이렇게 평화로운 마음이 극에 다다를 때쯤 기다렸다는 듯이 잡념이 따라온다. 하루 중 상대가 나에게 했던 말들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그 말을 들을 때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건 왜 그랬던 것인지, 업무를 내가 잘해내고 있는 건지, 실수가 있었다면 그 실수를 왜 했던 것인지 차례대로 온갖 생각이 따라 붙어 생각에 빠져 들기 바쁘다. 대체로 유쾌하지 않은 불편한 생각들이고 나는 또 울상이 되어 또 피곤해진 채로 어깨를 한껏 안쪽으로 말게 된다. 그럴수록 사람은 왜 현재의 행복에 안주하지 못하는지 생각한다. 동시에 행복이란 무엇인지도. 이토록 평화롭다가도 왜 불행의 편에 고개를 향하는지. 단순한 일도 어려운 문제로 만들어 생각하는 나의 피곤한 성격 때문이겠지, 그렇게 고개를 휙휙 젓다가 다시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되는 것은 다시금 현실을 바라보는 일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편에 서서 마음을 앞서 걱정 한다기보단. 현재 나를 이루고 있는 것에 다시금 감사함을 느낀다. 집에 돌아가는 집이 있다는 것, 이사간 집은 하루 온종일 햇빛이 들어 시시각각 변하는 해의 밝기와 세기를 누려볼 수 있다는 것, 동생과 함께 건강한 저녁 식사를 만들어 먹은 지 한 달이 되었고, 본격적으로 운동을 도와주는 선생님이 있고, 나는 전보다 더 건강해 지기 위해 부던히도 노력하고 있다. 이 노력의 방향과 힘이 너무 지나치지도 않고 너무 부족하지도 않게 딱 적당한 정도라는 점과 잘 살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현재의 모습에서 큰 안정감을 느낀다. 그리고 엄마가 해주는 옛날 이야기를 떠올린다. 내가 아주 어릴 적 번개가 심하게 치던 날에, 창문 가까이 위태롭게 앉아 있던 어린 나를 엄마는 발견했다고 한다. 잠시 화장실을 갔을 뿐인데, 어느 사이엔가 어린 나는 창문가에 붙어 있었고 엄마는 그런 나를 발견하고선 황급히 낚아채어 거실 한가운데서 품에 안고 한참을 있었다고 했다. 어린 너는 참 겁도 없었다면서 나를 나무라는 엄마는 지금도 아주 가끔 그 이야기를 꺼낸다. 실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나는 어렸고 그 이야기를 엄마의 입에서만 들은 것뿐이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어떤 확신을 느꼈다. 이따금씩 자꾸만 삶에 혼자 있는 것만 같다고 느껴질 때, 그 품과 손아귀의 힘을 기억할 것이라고. 사랑이 무엇인지 생각할 때면 목에 커다란 체리 씨앗이 걸린 듯이 막막해지고 시야가 흐려진다. 나는 이런 나의 연약함이 정말 싫었지만 이젠 이것을 말할 수 있고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음에 이젠 안도한다. 사랑은 멀지 않고 이렇게 내 몸 속에 있다. 생각만 해도 느낄 수 있고 걸을 땐 자연스레 떠올리고 그럴 땐 주체 없이 전화를 걸 수 있는 상대가 있다. 전화를 끊고선 내 곁에 이루는 사람들을 생각하다, 다시금 뚜벅뚜벅 걸어가 사무실 책상에 앉아 다시 씩씩한 모습을 한 나를 꺼낼 수 있다. 그렇게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하루하루를, 일년을, 몇 년을 살다보면 나는 좀 더 사랑의 언어를 더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더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되어가고 있다. /윤여진(시인)

2025-05-18

구미아시아 육상사의 새로운 역사 서곡

바야흐로 2025년, 대한민국 구미의 하늘 아래에서 아시아 육상의 새로운 역사가 쓰여진다. 오는 27일부터 닷새간의 장정으로 펼쳐질 ‘2025 구미 아시아육상경기선수권대회’는 48억 아시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화합의 서사시이자, 구미가 글로벌 스포츠 도시로 웅비하는 장엄한 전주곡이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움직임인 달리고, 뛰고, 던지는 행위가 만들어내는 육상이라는 드라마는 그 자체로 순수한 열정과 감동의 결정체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육상사의 첫 페이지는 역설적이게도 영광과 비애가 교차하는 양가감정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故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가슴에 품고 월계관을 쓰던 순간은 민족적 비원과 환희가 뒤섞인,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흐른 1992년 바르셀로나 몬주익 언덕, 황영조 선수는 마침내 그 아린 역사를 온전한 환희로 승화시키며 대한민국 육상의 자존을 드높였다. 바로 그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 감독이 대회 홍보대사로 동행하며 본 대회의 역사적 의의를 한층 빛내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감안할 때, 41만 시민의 불굴의 의지와 열망이 마침내 열매를 맺어, 대한민국에서는 20년 만이자 기초자치단체로서는 최초로 유치하는 이번 대회는, 구미가 지닌 문화적 역량과 국제적 감각을 증명하는 쾌거라 할 수 있으며, 구미의 내재된 저력과 무한한 가능성을 아시아 전역에 각인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아시아의 꿈, 구미에서 세계로!’라는 웅대한 슬로건 아래, 북한과 브루나이를 제외한 아시아 43개국 1,200여 명의 정예 선수단이 트랙과 필드, 도로를 아우르는 총 45개 세부 종목에서 210개의 메달을 놓고 불꽃 튀는 각축을 펼칠 것이다. 특히, 높이뛰기의 제왕 우상혁, 100m의 섬광 조엘 진, 3000m 장애물경기 한국 신기록 보유자 조하림을 비롯하여, 우리 고장 출신의 고교생 포환던지기 유망주 박시환 선수와 같은 차세대 주역들의 패기 넘치는 도전은 시민들에게는 자긍심을, 미래 세대에게는 무한한 영감을 부여할 것이다. 대회의 마스코트인 ‘러닝 토미’ 역시 귀여운 모습으로 선수들과 관람객을 맞이하며 축제 분위기를 돋울 예정이다. 구미시는 본 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제반 준비에 만전을 기해왔다. 주경기장인 구미시민운동장은 세계육상연맹(WA)의 ‘클래스-1 등급’ 공인을 획득한 최첨단 트랙으로 탈바꿈했으며, 선수들의 기량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탄성 우레탄 포장으로 세심하게 마감했다. 또한, 양쪽에서 입체적으로 경기를 관람할 수 있도록 대형 전광판을 추가 설치하고 야간 경기를 위한 LED 조명탑 개선 등 국제 기준을 상회하는 경기 환경을 구축했다. 선수단과 관람객의 편의를 극대화하기 위한 숙박시설 리모델링 지원, 음식점의 외국어 메뉴판 보급 및 입식 테이블 전환, 도심 환경 정비 또한 빈틈없이 완료하였고, 아시아육상연맹 실사단으로부터 수차례 “완벽하다”는 호평을 받으며 대회 성공의 청신호를 밝혔다. 본 대회가 지역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촉매제로서의 역할 또한 중대하다. 대회 기간 중 인동 거리에 매일 밤 조성되는 ‘달달한 낭만 야시장’은 선수단 숙소촌과 인접하여 외국 선수들도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한국의 밤문화를 체험하는 교류의 장이 될 것이다. 구미 라면 축제의 명성을 잇는 특별 시식 부스는 갓 튀긴 면과 이색 라면 요리를 선보이며 K-푸드의 정수를 알리고, 경기장 주변에 마련될 ‘아시안 푸드 페스타’는 방문객들에게 오감 만족의 향연을 선사하며 지역 상권에 온기를 불어넣을 것이다. 나아가, 삼성전자와 SK실트론을 비롯한 구미에 소재한 글로벌 기업들의 제품을 홍보하는 기업홍보관 운영을 통해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포진한 첨단 산업도시 구미의 역동성을 아시아에 널리 알리고, 구미의 국제적 위상을 제고하는 귀중한 전기를 마련할 것이다. 본 대회의 성공은 무엇보다 시민들의 따뜻한 환대와 적극적인 참여에 달려있다.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국내외 손님들을 맞이하고, 경기장마다 뜨거운 응원의 함성으로 가득 채워주길 부탁드린다. 아울러 이번 대회를 발판 삼아, 우리 구미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무대로 힘차게 비상하길 간절히 염원한다.

2025-05-18

동심원

J는 베트남 어머니를 둔 다문화 가정의 학생이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운 환경 탓에 베트남에서 엄마와 십여 년을 살다가 13살이 되어서야 한국에 왔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언어였다. 열심히 한국어를 배웠지만 원활한 소통이 어려웠고 쓰기는 더욱 힘든 문제였다. 학교를 다녀야만 했기에 자신의 나이에 맞는 학년보다 두 학년을 낮춰서 들어갔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 말씀을 다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어가 잘 이해되지 않으니 모든 과목에 문제가 생겼다. 그 학습을 도와주기 위해 처음 만나게 되었다. 낮은 자존감도 큰 문제였다. 문득 중3 때의 일이 생각났다. 도덕 선생님이 다음 시간에 앞에 나와 발표를 시킬 것이라고 하면서 숙제를 내주셨다. 그 당시 난 굉장히 소심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학생이었다. 앞에 나가서 무엇을 하는 것이 겁이 났고 자신감도 없었다. 한 마디로 눈에 띄는 학생이 아니었다. 다음 수업 시간에 발표자로 내 번호가 지목되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나며 온 몸이 떨려왔다.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랐고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리는 것 같았다.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가 덜덜 떨면서 발표를 했다. 그런 내게 선생님은 말을 아주 조리 있게 잘 한다고 이야기하시며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추천해주셨다. 나도 놀랐지만 반 아이들은 더 놀란 거 같았다. 다들 ‘늘 말없고 존재감도 없는 애가 할 수 있다고’하는 눈빛이었다. 긍정적인 선생님의 한 마디 말이 동심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일 이후 친구가 되고 싶다는 편지를 받는 일이 생겼다. 다가와 말을 시키는 아이들도 있었다. 나 자신도 조금 변하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어떤 일을 해도 할 수 없을 거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많아서 시작도 못한 일이 많았는데. 아주 미세하지만 해 봐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서서히 피어올랐다. 선생님은 별 다른 생각 없이 한 칭찬인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내 삶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다. 여름 방학을 지나면서 미래에 대해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게 되었고 계획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세우며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J에게도 긍정적이며 위로가 되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다. 어쩌면 나처럼 작은 불씨가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커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아버지는 연세가 많고 엄마는 자신보다 한국어를 못하니 돈을 많이 벌고 싶고 대학도 가고 싶단다.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너는 한국어를 앞으로 잘 하게 될 거고 또 베트남어를 할 수 있으니 그런 면에서 유리한 면도 있다고. 더구나 베트남어는 배우기 어렵다고 하는데 두 가지 언어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 않냐고. 거기다 학교에서 영어도 배우니 열심히만 하면 3개 국어를 할 수 있는 좋은 점을 가지고 있다고. J는 활짝 웃으며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고 묻는다. 그렇다면 열심히 해 보겠다고 한다. 다음 만남을 가졌을 때 자신의 꿈을 스튜어디스로 결정했다고 한다. 5월은 많은 만남이 주어진 달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 등. 다른 때보다 많은 교제와 관계가 형성된다. 그런 관계를 유지하고 연결하는 것이 말이다. 말은 성능 좋은 자동차와 같다고 생각한다. 목적지를 정하고 도로 규칙을 지켜 운전을 하면 안전하고 편안하게 도착할 수 있다. 그러나 규칙을 준수하지 않고 지나치게 과속을 하거나 거친 운전을 한다면 사고가 나거나 목적지에 도착했다 할지라도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불쾌감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조심하고 상황을 살피며 대화를 하면 그 만남의 시간은 즐겁고 편안한 시간이 될 수 있지만 상대를 배려하지 못하는 대화는 상대에게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다. 한 선생님이 툭 던졌던 한 마디 말이 한 아이의 자존감을 높여줬던 것처럼 말은 무한한 힘을 가졌다. 3개 국어를 할 수 있다고 격려했던 말이 그 아이의 마음에 미래를 꿈 꿀 수 있게 한 기회가 되었다. 큰 칭찬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를 늘 생각했으면 좋겠다. 이 다음 언젠가 당당한 사회인으로 선 J를 만날 날을 상상해본다. 다양한 만남이 있는 이 한 달 오늘도 누군가의 작은 격려의 말이 누군가를 일으키는 하루가 되기를 바라면서. /시조시인 전영숙

2025-05-18

고맙습니다 대신

지난 15일 제44회 스승의 날, 교사들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은 ‘고맙습니다’라는 기사가 여러 매체에 실렸다. 이런 결과가 나온 설문 문항을 찾기 위해 검색해보니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가 여러 번 반복적으로 조사했고, 해를 바꾸어 같은 결과의 기사가 여러 개 뜬다. 교총이 어떤 의도와 맥락으로 이런 조사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올해도 교총은 교사 5천 591명을 대상으로 교원 인식 설문 조사를 했다. 그러나 교사들이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듣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교총 조사 결과에 의하면, 학생이 교육활동 중 휴대전화로 몰래 녹음하고 촬영할까 봐 걱정하는 교원이 약 86%에 달했다. 다른 교원단체인 교사노조가 올해 8천 25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 중 교사가 사회에서 존중받느냐는 질문에도 약 65%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스승의 날 유래를 보니, 1958년 강경여자중고등학교 청소년 적십자 단원들이 병환에 있는 선생님을 위문하고 퇴직한 스승을 위로하는 활동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후 은사의 날로 기념하다가 1965년 세종대왕 탄신일인 5월 15일을 스승의 날을 정했고, 1982년에는 법정 기념일로 정했다. 그러나 스승의 날을 법정 기념일로 제정하고 기념해도 교권 추락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실제로 학생에게 휴대폰 사용을 지도하다가 폭언을 들은 교사가 34%가 넘는다는 교총의 조사에서 보듯이, 스승의 날 제정 44년이 지난 지금 교권 추락을 호소하는 교사는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교사가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받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한편, ‘고맙다’의 사전적 의미는 ‘남이 베풀어 준 호의나 도움 따위에 대하여 마음이 흐뭇하고 즐겁다’이다. 교육 활동은 교사가 당연히 해야 할 본분일 뿐, 호의나 도움은 아니다. 그런데도 교사들이 고맙다는 인사를 받고 싶은 데는 이유가 있다. 지금 교육 환경은 교사들이 교육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다. 교사노조와 전교조 설문에서 모두 비슷하게 과도한 민원이나 행정업무 등으로 사직을 고민하는 교원이 60%에 육박할 한다고 나왔다. 그러니 잘 가르치기 위해 준비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잘 가르치려고 애쓰다 보면 누구라도 고맙다고 인사해주면 고마울 것이다. 교원이 교육활동을 하는 것은 맡은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교사 자신이나 학생 모두 교원을 ‘스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괜히 교원을 스승이라고 추켜세우는 것은 호칭 인플레로 교사에게 과도한 부담만 지울 뿐이다. 실제로 2024년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에서 학생들에게 바라는 교사의 모습은 교과를 잘 가르치는 것을 우선순위로 꼽았다. 학생들 마음을 잘 이해해주는 선생님도 원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잘 가르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다. ‘스승의 날’ 같은 형식적인 기념행사는 교사와 학생 모두를 민망하게 한다.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 될 수 있도록 교육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면 학생들은 저절로 선생님을 좋아하고 존경할 것이다.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05-18

트럼프 관세 정책은 폐기되어야

“평균 관세가 미국보다 4배가 높다. 군사적으로 한국에 다른 방법으로 매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고 우리나라에 대해 트럼프는 말한다. 심지어 미국에 공평하지 않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의도적으로 잘못된 정보를 들이밀며 힘으로 자신의 관세 정책을 추진한다. 트럼프의 관세 정책으로 우리 경제가 요동친다. 국제통화기금은 한국 성장률을 2.0%에서 1.0%로 수정하여 발표했다. 국내 다른 기관은 0.6~0.7% 정도로 더 낮은 성장률을 보고했다. 이는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국 트럼프 발 관세 정책이 세계 경제를 저성장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다. 미국 경제 전문가 짐 폴슨은 “거의 모든 기업 CEO가 전망치를 하향 조정하고 있다”며 기업 경영 환경 악화를 말했다. 미국의 높은 소비자 물가에 국민의 불만도 높다. 트럼프의 관세 정책이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를 저성장 혼돈 상태로 만든다. 미국의 이러한 정책에 다른 나라들의 대응도 만만찮다. 145%라는 고율의 일방적인 관세에 대해 중국은 즉각적인 행동으로 보여준다. 중국은 맞불 관세를 부과하며, 여기에 더해 희토류 제품의 수출도 막았다. 또한 관세에 무관심하게 대응하며, 자국의 소비 촉진과 다른 국가와 경제 협력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있다. 중국의 대응에 답답한 건 미국이다. 계속 중국과 협상 중이라는 기대 섞인 정보를 흘리며 기다리다 지쳤다. 트럼프의 예상과는 다르게 중국은 지켜보기만 했다. 결국 제네바협상을 통해 상호 관세를 115% 내린 10%로 조정했다. 90일 간의 유예기간을 두지만, 협상이 트럼프의 예상을 빗나가고 있다. 대만 정부 관계자는 “TSMC가 미국에 첨단 공정 기술을 그대로 가져가면 대만의 국가 존립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며 미국에 반도체공장 짓기를 바라는 트럼프의 계획에 찬물을 끼얹었다. 세계를 대상으로 관세 전쟁을 치르는 트럼프의 계획이 곳곳에서 파열음을 낸다. 예상치 못한 대만의 반격에 미국도 당황하였으리라. 한국·중국·일본을 비롯한 세계 83개국에 대한 관세 시행이 90일간 유예됐다. 미국 스스로 90일의 시간을 가지며 숨 고르기에 들어간 모습이다. 세계 경제가 한 강대국의 이익 때문에 어려운 시간을 보낸다. 생명을 가진 유기물과 같은 경제를 인위적으로 조정하려고 하면 제대로 될까. 트럼프의 관세 인상은 미국 경제를 더 어렵게 한다. 이런 정책이 지속된다면 미국의 고립만 자초할 뿐이다. 미국 경제 문제는 내부적인 원인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는 것을 트럼프는 알아야 한다. 더 이상의 경제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트럼프의 설익은 정책은 폐기되어야 한다. 문제가 지속될수록 트럼프는 사면초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가 없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인위적으로 경제 흐름을 바꾸려는 건 혼란과 어려움만 줄 뿐이다. 누구에게나 어느 나라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국민을 포함한 모두가 힘들어하는 정책은 굳이 왜 하여야 하는가. 작은 것을 얻으려다가 더 많은 것을 잃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김규인 수필가

2025-05-18

홀리데이 포퓰리즘

정부가 임시공휴일을 지정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수경기 진작에 있다. 설날이 있은 1월도 임시공휴일을 하루 지정하면서 6일이 연속 쉬는 날이 됐다. 가정의 달인 5월도 어린이날이 석가탄신일과 겹치는 바람에 다음날이 대체공휴일이 되고, 중간에 낀 금요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네티즌 간 논란이 있었다. 징검다리가 낀 날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면 길게는 일주일 정도 황금연휴가 만들어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정부는 임시공휴일을 내수경기 활성화의 촉매제로 기대했으나 실제로는 연휴 지정 효과가 나타난 사례는 거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연휴를 기해 해외로 여행을 떠나는 바람에 내수경기는 오히려 엉망이 되고 만다. 시중의 상인들도 연휴가 이어지는 게 오히려 더 두렵다고 말한다. 작년 12월 계엄선포 이후 우리나라 내수경기는 최악이다. 올들어 트럼트 발 관세전쟁이 시작되면서 수출까지도 크게 흔들리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최근 밝힌 경제 동향에서 5개월 연속 경기 하방 압력이 증가하고 있다고 했다. 소비자들도 먹고 입고 마시는데 지갑을 잘 열지 않는다. 유통경기가 전례 없이 불황이다. 백화점업계는 올 1분기 매출이 역성장했다고 울상이다. 이런 가운데 대선을 앞두고 유력 대선후보들이 주 4.5일 근무제를 공약으로 꺼냈다. 나아가 주 4일제 근무까지 하겠다고 한다. 저출생 극복과 노동시간 단축을 핑계로 주 4.5일제 정책을 내세우나 아직은 우리 경제가 주 4.5일제를 수용할 만큼 여유롭지 않다.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선심성 포퓰리즘은 국민 경제를 멍들게 할 뿐이다. 유권자인 국민의 현명한 판단이 옥석을 가려야 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5-18

인간과 시간

날마다 지구촌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으로 80억 인류는 오늘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인터넷에 차고 넘치는 지식과 정보가 인간을 자유롭게도 하지만, 확증편향으로 왜곡된 인간을 강철 족쇄로 압박하기도 한다. 남는 문제는 우리가 선택하는 정보와 지식이 얼마나 올바르고 유용한지, 확인할 정도의 지적-정신적 수준을 확보하는 작업이다. 지구 생명체 가운데 인간보다 더 많은 지적 호기심을 가진 존재는 없다. 알고 싶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인간은 심해(深海)를 탐사하고, 에베레스트에 오르고, 목숨 걸고 남극과 북극을 탐험했다. 사랑과 명예, 돈과 권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호기심을 충족하겠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걸고 장정에 나선 탐험가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언제부턴가 ‘시간의 화살’이라는 자명해 보이는 이론에 대한 회의(懷疑)가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138억 년 전 이른바 ‘대폭발(빅뱅)’이 일어나 시공간이 생겨났고, 그 결과 우리은하와 태양계도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이론. 그것에 기초하여 시간은 공간과 더불어 과거의 어느 시점에 발생하여 현재를 거쳐 미래로 질주한다는 것이 ‘시간의 화살’이다. 지질학자들은 시간의 화살 이론을 입증하는 유력한 근거로 지층(地層)을 거명한다. 오래된 지층이 아래쪽에 자리하고, 시간 연대기 순서로 층위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논리 전개다. 실제로 이것은 우리가 맨눈(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이기도 하다. 사정이 이런데도 나는 정반대되는 생각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달리는 게 아니라, 미래에서 출발한 시간이 현재를 거쳐 과거로 향하는 게 아닐까?! 영원히 사라져 버린 과거는 되부를 수 없이 완전 소멸했지만, 현재를 향해 달려오는 미래는 오늘의 우리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이란 시점은 내일이나 모레의 미래를 보고 느낄 수 있는 간이역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다. 시간의 뿌리는 과거의 심연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있으며, 그것이 현재라는 중간 정거장을 통과한다는 게 내 생각의 요지다. 이런 생각에 기초한다면, 시간 기계(타임머신)로 갈 수 있는 곳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일 것이다. 영원히 사멸하여 무화(無化)되어 버린 과거가 아니라, 생성되고 있는 미래만이 우리가 도달할 시간대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대면하는 지나간 역사의 근간도 실상은 미래에 기초한 현재를 만드는 과업이다. 현재의 시공간에서 지나간 시간과 사건과 인과율을 들여다보는 일의 함의(含意)는 오지 않은 미래를 예비하고 기획하는 데 있다. 철면피하고 극악무도한 인간 집단의 무수한 악행을 낱낱이 통찰하고, 그것에 유의함으로써 미래세대의 안녕과 복지를 준비하는 것이 역사다. 1980년 5월 18일 광주가 어언 45년 지나갔다. 지나간 45년은 오늘의 우리뿐 아니라, 다가올 세대까지 구원함으로써 시간의 연속성을 확보한다. 과거와 미래의 교차점인 현재에서 양자를 성찰하고, 건강한 미래로 나아가는 위대한 발걸음의 하나로 5·18 광주항쟁을 예찬(禮讚)한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