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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제는 우리가 나서야 한다

경북과 경남지역 산불은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고 약 4만8천여 ㏊에 달하는 산이 잿더미로 변했으며 3천여 동의 집이 불에 타고, 30건의 국가유산과 2천여 건의 농업시설 피해를 보았다. 불을 끄고 한숨을 돌리나 했는데, 대구에서 다시 산불이 났다. 대구 산불은 원인 규명 중이지만, 나머지는 사람이 불을 내었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온의 상승은 산불 가능성을 높이고 태풍급의 바람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산불을 퍼뜨렸다. 산불로 인한 유독 가스의 발생은 대피하려는 주민들이나 불을 끄려는 소방대원들의 생명을 위협했다. 불완전 연소로 인한 연기는 불을 끄려는 헬리콥터 조종사의 시야를 방해했다. 태풍급의 바람에 실려 온 불길이 넓은 고속도로를 가로지르는 바람에 차에 불이 붙을까 다급했던 이야기도 들린다. 빽빽하게 우거진 산림과 두껍게 쌓인 낙엽은 가뜩이나 힘든 산불 진화를 어렵게 했다. 우거진 산림은 헬리콥터가 뿌린 물을 막았고 떨어진 낙엽은 산불 진화를 방해했다. 낙엽 속에 남은 불씨는 다시 발화하여 수천 명의 노력을 허사로 만들기도 했다. 멀리 떨어진 집마다 바쁘게 돌며 주민들을 대피시키는 사람들과 그들의 긴박한 목소리. 제때 대피하지 못해 등이 탄 소를 보며 이번 사태가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갔는지. 전쟁보다 더한 처참한 산불에 할 말을 잃는다. 낮이나 밤이나 불길과 싸우는 최전선에서 여러 날을 집에도 가지 못한 채 불을 끈 소방대원들. 소방대원들에게 힘을 보탠 국군장병과 공무원들. 그리고 자원봉사자들. 그들의 헌신적인 희생이 없었더라면 불을 끄는 건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나타난 불에 녹아버리는 헬멧 같은 소방 용품은 우리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번 산불을 겪으며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 주거지와 산림층을 구분 짓는 방화선을 만들고, 산불 진화를 위한 임도 구축, 고령층 주민들의 빠르고 안전한 이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소화 방법으로는 대용량의 물로 한 번에 넓은 지역의 불을 끌 수 있는 대형 헬리콥터와 고성능 펌프를 장착한 산불 진화 차량이 더 필요하다. 목숨을 걸고 불을 끄는 이들에게 안전한 소방 용구의 공급은 우리가 준비해 주어야 할 기본이다. 이재민을 위한 구호 사업은 아직도 진행 중이고, 가축과 야생 동물의 사체와 생명을 잃은 나무들, 잿더미로 변한 산을 보노라면 그 피해를 가늠하는 것조차 어렵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지구의 경고를 무시하고 지금도 불을 지피며 지구온난화를 부추긴다. 그것도 모자라 불을 들고 산으로 들어간다. 기후 대응 협력 프로젝트 국제기구인 WWA(World Weather Attribution)는 340년 만에 한 번 있을 극단적이고 이례적인 기후의 영향이라고 보도했다. 또한 대한민국은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대형 산불의 발화 가능성이 2배 더 높아졌다고 보도했다. 대형 산불에 대한 대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산불을 예방하자. 지구가 보내는 다급한 신호를 겸허히 받아들이자. 이제는 우리가 나서야 한다. 지구 환경을 살리는 일이 우리가 사는 길임을 알아야 한다. /김규인 수필가

2025-05-11

스승이 존경받는 사회

스승의 날이 만들어진 것은 학생들의 단순하고 순수한 생각에 의해서다. 1963년 충남 강경고 청소년적십자단 학생들이 병환 중이거나 은퇴한 스승을 찾아 위로 활동을 해보자는 것이 유래가 성립한 배경이다. 이 운동이 계기가 충청남도 은사의 날이 민들어졌다. 정부 기념일로 제정된 것은 한참 이후인 1982년도의 일이다.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잡은 것은 민족의 스승이자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의 탄신일을 기년일로 삼았기 때문이다. 엣말에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다. 스승은 가르침을 받는 학생뿐 아니라 학부모 등 모든 사회 구성원이 존경할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소학에 등장하는 말로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란 말도 스승의 위상을 잘 말해주는 표현이다.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를 동일시한다는 것은 스승에 대한 은혜가 그만큼 크다는 의미다. 공자의 뛰어난 70명의 제자를 칠십자라 부르는데, 그들이 공자의 사상을 후대에 전하면서 동양사상의 근간을 이룬다. 한 사람의 훌륭한 스승이 미치는 영향력은 이렇게 큰 것이다. 누구나 학창 시절 마음으로 존경했던 선생님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않는다는 그때처럼 스승을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아니지만 아직도 스승을 공경하고 따르는 제자들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교단을 떠나가는 선생님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한때 가장 선망의 대상이던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다시 우리 사회에서 존경받는 집단으로 올라설 수 있도록 하는 범사회적 인식과 노력이 필요하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과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진다”는 가사처럼 그들의 은혜를 기리는 날이 바로 5월 15일 스승의 날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5-11

시와 정치의 상관성에 대하여

‘논어’를 읽다 보면 수긍하기 어려운 대목이 나온다. ‘정사(政事)’에 관한 ‘위정편(爲政篇)’에서 우리가 만나는 대목의 핵심은 기실 정치 행위가 아니라, 정치를 하려는 인간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덕목이다. 공자의 생각은 인륜 도덕과 예의범절, 효도와 학문, 말과 행동, 불의와 대면했을 때 응당 가져야 할 태도 같은 인간의 바른 자세에 집중돼 있다. 그 가운데서 내가 주목하는 대목은 두 번째 장에 나오는 짧은 언명(言明)이다. “'시경(詩經'에 들어있는 시 300편을 한 마디로 개괄하면 생각에 사특(邪慝)함이 없다.” 정치인이 지녀야 할 덕목의 핵심 가운데 하나를 ‘시’로 지적한 것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경이로울 따름이다. 여러분은 시를 암송하거나 시를 읽거나 시를 쓰는 정치인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는가? 견문이 턱없이 부족한 탓일 것이나, 나는 우리나라 정치인 가운데 누군가가 아침저녁으로 시를 읽고 시를 생각하고 시를 논한다는 얘기를 아직 들은 바 없다. 그야말로 역동적으로 변모하는 한국의 정치판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우리 정치인들은 마음 편히 혹은 여유롭게 시와 만나고, 시를 음미하고, 시를 기억할 최소한의 여유조차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자가 정치와 시를 연계한 데에는 까닭이 있을 터! 그것은 ‘논어’ ‘계씨편(季氏篇)’에서 찾을 수 있다. 진항(陳亢)이 공자의 아들 ‘백어(伯魚)’에게 아버지한테 특별히 들은 게 없느냐, 하고 묻자, 백어는 아버지 공자를 인용한다. “시를 공부하지 않으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지식인이 자신의 사유와 인식을 올바르게 전달하고자 한다면 시를 공부해야 한다는 말이다. 공자가 엮은 ‘시경’에 포함된 305편의 시를 공부함은 시를 통째로 기억하여 일상적인 대화 수준으로 만들어야 함을 뜻한다. 자연과 세상, 인륜과 풍속, 지난날과 당대의 세태, 각종 예법을 두루 포괄하고 있는 ‘시경’의 모든 시편을 암송함은 작은 백과사전을 머릿속에 내장하고 있음과 전연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공자의 생각을 단출하게 정리하면, 시로써 흥하고, 예의범절로 서고, 음악으로 완성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예악사상의 첫 번째 단추를 공자는 ‘시’에서 본 것이다. 그렇다면, 왜 공자는 정사의 요체로 시를 그토록 중시한 것일까? 정치인의 첫 번째 소양(素養)은 언어 구사 능력이다. 대중에게 자기의 생각과 의도를 설득력 있게 전달함이 무엇보다 긴요하기 때문이다. 잠시만 생각해 보시라! 고급하고 우아하며 세련된 시편(詩篇)에는 인간의 거칠고 우매한 심성과 진창으로 더럽혀진 영혼을 세탁하는 강력한 세척력이 내장돼 있다. 어느 정치인의 언사가 시어(詩語)에 기초한 아름답고 세련되며 고매한 것으로 점철돼 있다면, 그것을 듣는 시민의 마음은 과연 어떨까. 자명한 결과가 여러분의 눈에 선하지 아니한가! 어느 당에서 일어나고 있는 ‘진흙탕의 개싸움(泥田鬪狗)’과 일장활극(一場活劇)을 보노라니, 빈곤하다 못해 금수(禽獸)의 수준으로 타락한 그들의 언어로 오염되어 가는 우리 시민들과 어린 세대에게 부끄럽고 참혹한 마음 그지없다! 정치인들이여, 제발 시를 공부하시라!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05-11

영덕국유림관리소, 산림을 지킬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경북 영덕군 칠보산 자연휴양림 인근 임도에서 발생한 원목 운반 차량 화재 사건을 접하고 한편으로는 충격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무력감을 느꼈다. 사고는 겉보기엔 단순한 불꽃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영덕국유림관리소의 관리 소홀과 법 무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소나무재선충병 방제 특별법’은 말 그대로 산림을 지키기 위한 강제 법령이다. 산림 내 재선충병이 확산되면 피해 복구에 수십 년이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아는 우리는 이 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다. 특별법에 명시된 이동 제한, 감염목 제거, 방제작업 등은 모두 재선충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강제 조치들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 영덕국유림관리소는 이러한 규정을 무시하고 불법 원목 운반을 방치했다. 그것도 이동 제한기간 중에 말이다. 관리소의 방임으로 불법 반출 의혹까지 제기됐고, 주민들의 분노는 커져만 갔다. “법은 무슨 소용있냐”는 한 주민의 말에서 모든 것이 드러난다. 법과 규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집행할 책임이 있는 관리소가 이를 무시하고 눈감았다. 이제 누구도 이 사건을 단순한 실수라고 치부할 수 없다. 이 사건은 단지 관리 소홀을 넘어 산림 보호를 담당하는 정부 기관의 무능을 여실히 보여줬다. 당장 책임자 문책, 감사, 불법 반출 의혹 수사가 진행되지 않는다면 이번 사건은 영덕국유림관리소가 얼마나 관리 소홀과 비리의 온상이었는지를 더욱 명백히 드러내게 될 것이다. 문제는 산림청이 어떻게 이 사태에 대응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사건 발생 직후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이는 지역 주민들의 신뢰를 잃고 더 나아가 국민 전체의 신뢰까지 떨어뜨릴 수 있다. 산림청은 이제 ‘조직 보호’에 급급해선 안 된다. 이 사건을 조직 개혁의 기회로 삼고, 투명하고 철저한 수사와 책임자 처벌을 통해 지역민과 국민에게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우리 지역 산림을 지킬 책임은 관리소에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는 단지 산림의 문제가 아니라 공직 사회의 신뢰와 직결된 문제이기도 하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산림 행정에 대한 근본적인 재점검이 필요하다. /박윤식기자 newsyd@kbmaeil.com

2025-05-11

철강 산업의 위기, 문제는 경제야!

최근 초일류 강대국인 미국이 관세 폭탄으로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가운데, 국내적으로도 진영의 갈등으로 빚은 탄핵정국이 지도자를 잃은 채 대선 정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세계의 최첨단 산업은 한국의 반도체를 뒤로하고 AI와 로봇이 주도하고 있고, 중저가의 철강과 화학은 중국이 이미 한국을 따돌린 듯하다. 특히 탄소중립, 중국 저가 물량 과잉 공급과 고금리로 이어지는 내수 둔화로 위기에 빠진 철강산업이 설상가상으로 관세의 폭탄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다. 철강산업의 위기는 바로 포항의 위기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포항은 철강산업이 73%나 되는 단일구조여서 철강이 휘청거리면 지역이 심한 몸살을 앓으며 수렁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곳간에 인심난다’는 말이 있다. 경제가 돌아가야 시민들의 얼굴이 펴질 것이다. 포항은 어떤가. 지역의 주축인 철강이 이런 마당이니 물어보는 것이 그저 민망할 뿐이다. 지금 지역 민심은 지도자들에게 과연 어떤 문제가 있고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미국 전 대통령 빌 클린턴이 1992년 대선 후보 당시 내걸었던 “바보야, 문제는 경제”가 요즘 새삼 생각난다. 실제 경제가 선순환 되면 서민들의 어깨도 올라갈 것이다. 필자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선 기업들이 자유롭게 마음껏 뛰놀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한다. 이는 기업을 잘 아는 강력한 추진력의 리더가 뒷받침 된다면 가능한 문제다. 여력도 있다. 수십조가 투자되는 포스코의 수소환원제철소 사업을 조기 착공될 수 있게 하고 5000여 억원의 예산을 확보하고도 설계조차 되지 않고 있는 영일만대교 강력 추진도 급한 대로 대안 중 하나다. 환호공원 내 스카이 워크처럼 외부의 관광객을 끌어 모으는 거시적 관광정책도 더 확대되어야 하며 보다 많은 특급호텔이 포항에 건립되어야 한다. 특히 포항 산업의 다변화를 위해 제대로 된 창업 기업들이 태동할 수 있도록 해 줄 필요가 있다. 철강 원자재 생산지에 그를 바탕으로 한 그럴듯한 소비제품 제조기업 하나 없다는 것은 포항 경제의 쇠약함을 보여주기 충분하다. 기업은 속성이 있다. 돈이 되면 어디든 달려간다. 따라서 지자체와 지도자들은 기업들이 돈을 벌 수 있도록 환경만 조성해 주면 된다. 그게 바로 ‘give and take’다. 해양관광의 기본적인 인프라이면서도 공익적인 프로젝트라 할 수 있는 마리나, 케이블카, 유람선 등은 관이 ‘give’해주면 기업이 관광으로 즉시 ‘take’해 줄 수도 있다. 포항은 시군 통합으로 상대적으로 가장 싼 땅이 아직도 많이 있다. 장기면 등에 전국 최저가 민자 공단을 조성, 울산의 자동차, 조선, 화학 등의 공단을 유치해 보는 것도 고민했으면 한다. 그동안 앞선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일군 이차전지와 포스텍, 한동대를 위주로 한 R&D 구축과 제4세대 방사광 가속기 등을 기반으로 한 바이오 산업의 육성, 환동해 시대를 대비한 영일만 컨테이너 부두 등의 인프라를 이용한 물류산업도 보다 지속적인 투자를 해 나가야 할 것이다. 포항시가 ‘give and take’만 더 잘해도 기업이 들어오고 그러면 고용 증가로 인구가 늘어나고, 또 그 과실로 소비가 증가할 것이다. 당연 시민들의 발검음도 가벼워 질 것이고.… /공원식 포항지역발전협의회장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단체장 출마 희망자의 기고문을 받습니다. 후보자의 현안 진단과 정책 비전 등을 주제로 200자 원고지 7.5∼8.5장 이내로 보내주시면 지면에 싣도록 하겠습니다. 기고문은 사진과 함께 이메일(hjyun@kbmaeil.com)로 보내주세요.

2025-05-08

한국인의 울화통

서울대 보건대학원이 최근 설문 조사에서 밝힌 내용 가운데 특별히 눈길이 가는 대목이 있다. 전국 18세 이상 성인남녀 1500명을 대상으로 정신건강과 관련한 조사를 해 보았더니 국민의 절반 이상이 만성적인 울분상태에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는 것이다. 특히 30대와 저소득층일수록 울분을 많이 느끼고 있다고 대답했다. 또 응답자의 70%는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고 대답했으며, 공평에 대한 믿음이 낮을수록 울분 정도가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울분(鬱憤)이란 답답하고 분한 마음을 뜻하는데, 울화(鬱火)와 비슷한 표현이다. 답답한 마음으로 생긴 병을 울화병, 심화병, 속병이라 부른다. 여기서 나온 울화통은 몹시 쌓이고 쌓인 마음 속의 화를 속되게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내면의 감정을 외부로 드러내지 않고 속에 감추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살아왔다. 특히 여성은 가부장적 사회구조 속에 살면서 제대로 표현도 못해 남성보다 속병을 앓는 비율이 높다고 한다. 미국정신의학협회는 한국인의 울화나 화병 등은 한국문화와 연관된 특수한 질환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질병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증상이 지속될 경우는 정서 장애의 하나로 본다고 한다. 한국 사람은 울화통이 터진다는 말을 자주 쓴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주는 스트레스가 많다는 의미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조사에서 국민의 절반이 만성 울화를 겪는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인 일이다. 나라와 국민을 안정시키는 일보다 갈등과 반목을 일삼는 우리나라 3류 정치에도 책임이 없다고 하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5-08

대법원의 자기 얼굴에 침 뱉기

“변호사님 상고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의뢰인들이 있다. 1심과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피고인이 대법원까지 가 조금이라도 형을 줄여보고 싶다거나 결백을 입증해 무죄판결을 받고 싶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상고를 해도 소용이 없다. 사실판단과 법률판단 모두를 할 수 있는 1심, 2심과는 달리 3심 상고심은 법률판단만을 할 수 있는 법률심이고 상고 사유도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형사소송법 제383조가 정한 상고 사유는 네 가지이다. 첫 번째, 판결에 영향을 미친 헌법ㆍ법률ㆍ명령 또는 규칙의 위반이 있는 때, 두 번째, 판결 후 형의 폐지나 변경 또는 사면이 있는 때, 세 번째, 재심청구의 사유가 있는 때, 네 번째,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가 선고된 사건에 있어서 중대한 사실의 오인이 있어 판결에 영향을 미친 때 또는 형의 양정이 심히 부당하다고 인정할 현저한 사유가 있는 때이다. 이 중 재심사유는 판결에 쓰인 증거가 위조되는 등의 극히 드문 경우이고, 사실판단이 잘못되었다거나 형이 무겁다는 이유로 상고하는 것은 10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가 선고된 사건만 가능하므로 결국 대법원이란 곳은 형이 무겁다고 상고할 수 없고, 나는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는데 1·2심 법원이 사실을 잘못 보았다는 이유로 상고할 수도 없는 법원인 것이다. 이처럼 대법원 상고심의 벽은 매우 높은 산이다. 변호사들 사이에서는 상고심에서 파기환송 판결을 받으면 평생 자랑할 만한 성공 사례로 남기도 한다. 사실판단이나 양형문제로는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이 날 리가 없고 결국 매우 제한적 상고사유 중에서도 판결에 영향을 미친 헌법·법률 위반이 있었다는 것을 변호사가 밝혀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판단과 법률판단의 차이는 무엇인가. 예를 들면 말의 존재와 그에 대한 해석의 문제는 사실판단의 문제이고 그것이 어떤 범죄에 해당하는지는 법률 판단의 문제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최근 대법원은 한 대선주자 정치인인 피고인에 대해 사실판단을 하며 파기환송 판결을 했다. 피고인은 지난 대선기간 “마치 제가 골프를 친 것처럼 사진을 공개했던데, 제가 확인을 해보니까 전체 우리 일행 단체 사진 중 일부를 떼서 보여줬더군요. 조작한 거죠”라고 말했는데 이에 대해 2심 법원은 “골프를 치지 않았다”는 뜻으로 좁게 해석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존재하는 말에 대한 해석은 사실판단의 문제이며 항소심 법원은 이 사실판단을 끝낸 것이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것을 골프를 치지 않았다는 뜻이라며 다른 사실판단을 해버리더니 무죄를 선고한 2심 판결을 뒤엎었다. 사건이 접수된 지 한 달 만에 전원합의체 회부, 심리, 판결까지 끝내버리는 전례 없는 신속성까지 더해서 말이다. 대법원은 이렇게 특정 정치인에 대해서만 다른 피고인들과 다른 법 적용과 속도· 절차로 재판해서 사법부가 선거에 개입한다는 소리를 듣게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대법원은 스스로 자기 얼굴에 침을 뱉고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하고 있는 수많은 다른 법관들의 얼굴에도 먹칠을 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대법원장이 픽한 특정 정치인만을 위한 대법원을 따로 만들라는 이야기까지 나올까봐 겁난다. /김세라 변호사 ……… △포항여자고등학교 고려대법과대학 이화여대로스쿨 현재)한동대 겸임교수 변호사김세라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2025-05-08

‘푸드마일’

우리가 매일 먹는 밥상 위의 사과 한 알, 상추 한 줌이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푸드마일(Food Mile)’은 식품이 생산지에서 소비자의 식탁까지 도달하는 데 걸리는 ‘이동 거리’를 말한다. 이 거리가 멀수록 식품을 운송하는 데 쓰이는 에너지와 자원이 많아지고, 온실가스 배출량도 자연스럽게 증가한다. 다시 말해, ‘푸드마일’이 짧을수록 환경 부담은 줄고, 우리의 건강한 식탁도 더 가까워진다. 전 세계적으로 식생활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는 전체 배출량의 3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크며, 이는 단순히 식습관의 문제가 아니라 기후 위기 대응과 직결된 과제이다. 특히 대구경북처럼 도시와 농촌이 인접한 지역에서는 지역 농산물을 지역에서 소비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가 가능하다. 이를 위해 ‘탄소배출 저감형 유통체계’의 구축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가까운 곳에서 재배한 식재료를 소비하는 것은 탄소중립이라는 국가적 과제에도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일이 된다. ‘푸드마일’을 줄이기 위한 실질적인 정책들은 우리 지역에도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건 지역 농산물 직거래 장터이다. 예를 들어 경북도는 대구 시민을 위해 도심 곳곳에서 ‘바로마켓’을 운영하며 산지 농산물을 소비자와 직접 연결하고 있다. 명절이나 김장철에는 대규모 직거래 행사도 열리며, 생산자는 안정적 수익을 얻고 소비자는 신선한 먹거리를 저렴하게 구입하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또한 학교 급식에 지역 농산물을 활용하는 로컬푸드 급식 확대 정책도 탄소중립과 지역농업 활성화에 큰 힘이 되고 있다. 경북은 이미 학교급식지원센터를 통해 학생들에게 건강한 식재료를 공급하고 있으며, 군위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대구의 학교에 시범 공급하는 사례도 등장했다. 이러한 ‘도농 상생’ 급식 모델은 지역 먹거리 자립도를 높이고 아이들에게는 건강한 먹거리 문화를 심어준다. 이 외에도 옥상 텃밭, 주말농장, 아파트 상자텃밭 등을 활용한 도시농업 활성화 사업, 로컬푸드 꾸러미 사업, 공공복지시설에 지역 농산물 공급, 사회적경제 기반의 직배송 플랫폼 구축 등 대구경북은 다양한 먹거리 순환 정책을 통해 ‘푸드마일’ 감축의 실질적 성과를 쌓아가고 있다. ‘푸드마일’을 줄이는 일은 거창한 설비나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까운 곳에서 자란 식재료를 선택하고, 지역 농민이 키운 먹거리를 믿고 소비하며, 아이들의 급식에 로컬푸드를 더해주는 일부터 시작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가장 일상적인 실천이자, 대구경북의 탄소중립에 기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앞으로 ‘경북의 생산’과 ‘대구의 소비’를 하나의 선순환 체계로 연결하는 광역 푸드플랜 정책을 수립하고, 로컬푸드 유통 인프라를 확대하며, 도시농업과 공공급식의 지역자립도를 높인다면, 우리 지역은 지속가능한 발전과 기후 리더십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푸드마일’ 줄이는 그 첫걸음이, 결국 우리 삶의 질과 지구의 미래를 바꾸는 가장 힘 있는 변화가 될 것이다.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25-05-08

답답한 오월

오월은 행사가 많은 달이다. 한글날이나 개천절같이 그냥 행사가 많은 달이 아니라 어른과 애들을 챙겨야 하는 가정의 달이고 스승까지 챙겨야 하는 게 오월이다. 집사람 말로는 별로 기념할 만한 날이 아니라는 결혼기념일까지 끼어있고 가족 생일까지 있으면 상당히 심각한 한 달이 되어버린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손주들 어린이날 선물 일일이 챙기다가 한 달 내내 굶을 판이라는 오월이 왔다. 노년층만 이럴까? 요즘 나라 경제가 엉망이라고 난리다.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사는 부류는 공직자 같은 월급쟁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월급이라고 해야 몇 푼 되지 않아 한 달 살기가 바듯한 형편인데 이렇게 행사가 집중되어 버리면 답답해지게 된다. 건강한 경제구조라면 소비를 주도하는 계층은 30~40대이다. 이 세대가 돈을 쓰는 나라가 잘사는 나라이다. 그런데 이 세대가 돈이 쪼들리면 나라 경제가 엉망이라는 이야기다. 30~40대는 결혼을 했다면 대부분 빚이 많다. 혹 부모의 지원이 있다고 해도 재벌이 아닌 한 빚은 대부분 가지고 출발한다고 보면 틀림없다. 금융권 전세자금 대출의 70%를 30~40대가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애들 보육비도 장난이 아니다. 좀 더 큰애 교육비도 더 장난이 아니다. 여기에 할아버지 할머니 간병비도 있다. 명이 길어져서 거의 살아 있을 확률이 높다. 운 나쁘면 부모들도 여기에 합세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인은 평균 10년 6개월간 병치레를 한다는 통계를 본다. 젊은 세대들의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다. 이러니 30~40대 가계의 ‘엥겔계수’는 20% 이상이고 애들 밑에 들어가는 고정비용이 30%란다.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 이자 내고 나면 남는 게 없다. 상황이 이러할진 데 오월은 그들에게 잔인한 달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요즘 어린이 데리고 놀러 갈 장소를 물색해 보면 어린이 놀이터가 동네마다 있는 철봉에 미끄럼틀 정도의 그런 수준이 아니다.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돈도 엄청 비싸다. 우리 때처럼 애들 데리고 촌에 내려가 천렵하거나 텐트 치고 해수욕하는 그런 상상을 한다면 정말 대단히 헛다리 짚는 것이다. 고급 호텔이나 리조트 정도는 가줘야 부모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선물값 또한 만만찮다. 애들 낳으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귓등으로도 안 듣는 이유가 뭔지 몰라서 그러는지 위정자들은 연일 정권 욕심에 연일 바쁘다. 악마는 항상 디테일에 숨어있다. 젊은 층이 필요한 것을 제대로 파악해서 그들의 부담을 덜어주면 된다. 젊은 세대에게 대폭 집값을 내려줘서 금융 부담을 최소화하고 유치원도 늘리고 보육원도 늘려야 한다. 어른들 치매센터 늘리고 요양병원비 줄여주어 이런 잡다한 짐을 덜어줘야 한다. 취업 안 되고 일자리 없는 것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이지만 인간적 삶을 위한 복지 영역은 개인 문제가 더는 아니다. 비싼 장난감 선물비를 깎아달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건 그네들의 능력 문제이다. 더 비싼 놀이터에 애들을 데리고 가고 비싼 음식 먹고 좋은 선물 부모에게 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외적인 문제는 정부가 좀 책임져주면 어떨까 싶다. 뭐든지 다 들어주는 포퓰리즘 때문에 나라 망한다는 논리에 아연실색하겠다. 언제까지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 한다는 논리로 정책을 세울 것인가. 답답한 오월이다. /노병철 수필가

2025-05-08

아버지의 기일

부처님오신날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일이기도 했다. 벚꽃이 눈부신 화창한 봄날 아버지께서 위독하시다는 다급한 오빠의 연락을 받고 10개월 큰아들을 들어업고 버스를 탔다. 그 전해부터 간경변 진단을 받고 일 년을 못 버티실 것이며, 입원도 필요 없다는 의사의 진단에 우리 형제들은 모두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아직 끈을 놓지 못한 엄마는 집에서 온갖 좋다는 것은 모두 만들어 아버지를 극진히 간호하시는 터였다. 어디서 굼벵이를 잡아오고, 기와솔을 뜯어 달여 잡수시게 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기겁하며 말렸지만 엄마의 고집을 어쩔 수 없다는 오빠의 푸념을 전화로 듣곤 했다. 대학 다니던 동생이 벌써 와 앙상한 아버지 곁에서 손을 잡고 망연해하고 있었다.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내일이 사월 초파일이라 절에 기도 가셨다는 얘기를 듣고 그 또한 이해했다. 평소에도 초하루 보름이면 그 바쁜 와중에도 목욕재계하고 절에 다니던 엄마였다. 엄마 따라 절엘 가보곤 했던 나는 부처님 앞에서 무아지경 땀조차 흘리며 108배를 올리던 엄마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엄마 대신 우리 삼남매는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아버지와 밤을 새다시피했다. 엄마가 만들어 둔 조약도 드시게 하고, 정신은 말짱하신 아버지와 얘기도 나눴던 것 같다. 이튿날 아침 사월초파일이었다. 간밤 비교적 말짱한 정신의 아버지를 보자 우리들은 안심했다. 동생은 내일 등교를 위해 나갔고, 나는 잠시 옆방으로 가서 아이와 함께 잠이 들었다. 오빠도 아버지 곁에서 쪽잠에 들었다고 했다. 절에서 돌아온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혼몽했던 나는 다시 깊은 잠을 잤던 것 같다. 오빠와 엄마의 다급한 소리에 깨서 안방으로 달려갔더니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쉬고 계셨다. 그렇게 아버지는 56살의 젊은 나이에 부처님오신날 부처님 곁으로 가셨다. 43년 전이었다. 어제 오빠가 절에 아버지와 엄마의 등을 보내왔다. 몇 년 전부터 절에서 재를 지내고 등을 다는 것으로 매년 지내던 제사를 대신한 오빠였다. 40년 넘게 아버지의 제사를 지극히 모시던 오빠였다. 몇 번의 중한 수술로 건강이 좋지 않게 되자 삼 남매가 수의해 내린 결정이었다. 그조차도 오빠는 미안해했다. 사람이 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네 가지 고통을 피할 수는 없다. 그 중 가장 힘든 고통은 병고(病苦)라는 생각이다. 병고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본 날, 또 그 아버지를 지극한 효심으로 제사 받들던 오빠가 늙고 병든 몸으로 절에 가서 울음을 참는 심정으로 흰 등을 다는 날, 부처님오신날은 우리 삼 남매에겐 애달픈 날이기도 하다. 매년 정초, 온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공양을 올리는 거조암엘 간다. 초파일 전날, 거조암에 손주 넷을 데리고 가서 오백나한에게 백 원 공양을 올리게 했다. 한 바구니 묵직한 동전을 조금씩 나눠주면서 각자 소원을 빌라고 했다. 소원은 모르겠고, 각양각색의 나한상 앞 쟁반에 동전을 하나씩 떨구는 게 그저 신나는 모양새다. 그럼 어떠랴. 조용하고 정숙해야 할 법당이지만 아이들의 모습이 흐뭇한 보살님도 용서해 주신다. 바구니를 들고 따라다니면서 나는 아버지와 엄마의 극락왕생을 축수했다. 그리고 우리 모두 병고에 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5-07

AI와 SNS가 보내는 경고

21세기에 태어난 청소년은 더 이상 궁금한 걸 부모에게 질문하지 않는다. 어려운 수학공식과 영어단어 공부법은 물론, 볼만한 영화와 근사한 여행지에 관한 정보도 AI에게 문의하는 게 훨씬 빠르고 정확한 답을 얻어낼 수 있으니. 2025년을 사는 젊은 연인들은 펜으로 눌러쓴 연애편지를 주고받지 않는다. 친구들끼리 안부를 묻는 전화 통화도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왜냐? SNS를 통해 보다 쉽고 편하게 분과 초 단위로 언제건 연결이 가능하니까. 가속도가 붙은 첨단 기술의 발달은 생활의 많은 부분을 편하게 만들었다. 아버지와 엄마는 자식이 던지는 물음에 일일이 답해줘야 하는 어려움이 사라졌고, 오래 만나지 못한 친구를 그리워할 필요도 없어졌다. 친구 얼굴이 보고 싶다면 영상통화 버튼만 누르면 된다. 그런데, AI와 SNS가 만들어준 ‘신세계’가 마냥 좋기만 한 걸까? 빛만 있고 그늘은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은 듯하다. 최근 외신 보도에 의하면 2023년 10월 이후 유럽에서 적발된 테러혐의자 60명 가운데 60% 이상이 18세 미만 청소년이었다고 한다. 겨우 16~17세 소년들이 수백 명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그들의 소통 경로는 SNS였다. 특정 인종과 종교 혐오라는 극단주의가 SNS 속에서 싹트고 있었다는 것. AI에게 지나치게 자신의 감정을 쏟아 붓는 세태도 문제다. 사람과 대화하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생성형 AI챗봇에 과다 노출된 어린아이가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AI는 인간이 될 수 없고, SNS는 커뮤니케이션 수단 중 하나일 뿐이다. 이 사실을 망각한다면 더 큰 비극이 생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5-07

대통령의 자격

대한민국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는 정권교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사회적 갈등의 골은 깊고 세계질서는 급변하며 기후 위기와 인구구조의 변화는 복합적인 과제를 던지고 있다. 전환기적 시대에 국민이 요구하는 대통령은 행정가나 정치인을 넘어, 진정한 리더의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 두 번씩이나 대통령을 탄핵했던 불행한 역사를 쓰라린 배경으로 하면서 적어도 이번에는 선택의 결과에 후회하지 않는 투표의 축제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내일의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첫째 덕목은 ‘청렴성과 도덕성이어야 한다. 권력의 중심에 설수록 유혹은 커지고 공익보다 사익을 추구할 욕심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지도자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대통령은 법적 기준을 넘어 윤리적으로 모범이 되어야 한다. 국민이 신뢰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국정을 원만하게 이끌 수 없으며 권위는 명령에서가 아니라 도덕적 정당성에서 나온다. 둘째는 공감 능력과 소통하는 태도다. 한국 사회는 지역과 세대, 성별과 사회계층 간 갈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국민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다양한 목소리와 입장을 조율하여 대변하는 역량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소통하고 언론과 시민사회의 비판에 열린 자세로 응답하는 지도자만이 국민통합을 이끌어 낼 터이다. 셋째, 미래지향적 비전과 정책역량은 대통령이 현상을 유지하는 관리자나 조정자 역할을 넘어 국가의 방향을 제시하는 지도자로서 반드시 긴요한 자질이다. 기후변화와 기술 발전, 안보 위협과 국익 확보 등 복합적인 글로벌과제에 대응하려면 단기적 안목보다 긴 호흡의 관점에서 정책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역량이 필요하다. 표를 얻기 위한 공약 나열이 아니라 실행가능한 대안을 제시하고 결과에 책임지는 자세가 요구된다. 대통령은 국제감각과 외교적 역량도 갖추어야 한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날로 복잡해져 가며, 미중 갈등, 북핵 문제,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 등은 대한민국의 미래와 직결된다. 국제사회에서 국익을 지키고 주도적 역할을 하려면 세상의 흐름을 읽는 통찰과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를 펼칠 리더십이 필요하다. 대통령은 국민과 함께 나아가려는 겸손한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며 국정운영의 궁극적 목적은 국민의 삶을 개선하는 데 있다. 실패를 인정하고 교훈을 얻는 리더, 자신이 아닌 나라의 발전을 우위에 놓는 리더야말로 진정한 대통령이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그 꽃을 제대로 피우기 위해 유권자의 안목과 결기가 중요하다. 대통령 후보의 말솜씨나 이미지에 휘둘리기 보다 어떤 가치와 철학을 가졌는지,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지도자인지를 꼼꼼하게 따져야 한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결국 우리 손에 달려 있다.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선거 일정 동안 불꽃 같은 눈초리로 가늠해야 한다. 이번 대통령선거가 역사와 민족 앞에 드러낼 중차대한 의미를 깨우쳐야 한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다리를 성공적으로 건너온 대한국민의 앞길이 평탄하기 위하여 자질과 역량을 갖춘 리더를 선택해야 한다. /장규열 고문

2025-05-07

출산 후 몸과 마음의 회복

출산이 끝났다고 해서 몸과 마음이 곧바로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서구 정신의학계는 이 거대한 전환기를 사춘기에 견줄 ‘마트레센스(matrescence)’라 부르며 산후 변화를 단순한 회복이 아닌 성장 단계로 재정의한다. 분만 직후 여성의 몸은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이 급격히 떨어지며 냉증, 관절통, 과한 발한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다. 한의학은 이를 혈허와 어혈이 겹친 상태로 설명하면서 어혈을 풀고 양기를 돋우는 생화탕, 오로탕류를 산후 첫 두 주에 집중 투여해 왔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산후풍의 증상이 심하면 계지가황기탕이나 황기계지오물탕의 가미등으로 치료가 가능하다. 심리적 변화는 더 미묘하다. 산모의 절반가량이 ‘베이비 블루스’를 경험하고 15% 정도는 산후우울로 이어진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최근 뇌 영상 연구들은 이 시기의 회로 재편이 장기적으로는 회복탄력성을 높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때 관리를 잘하면 다시 건강상태를 회복하고 좀 더 나은 정신적 성숙을 경험할 수 있다. 한의학은 혈허·담음을 배경으로 불면과 정신영역을 설명하며 귀비탕·가미온담탕으로 심장과 비장을 보하고 담울을 풀어 왔다. 백회·신문·삼음교에 침을 놓아 자율신경을 조절하면 심박변이도가 의미 있게 개선된다는 국내 데이터도 있다. 회복 과정은 시기별로 겹쳐 흘러간다. 분만 직후 나흘간은 체온 유지와 어혈 배출이 핵심이기에 따뜻한 미음과 계지탕의 어혈방을 사용하고 유즙 분비를 돕는 가벼운 흉부 마사지가 권장된다. 이어지는 한 달은 인대와 근막이 늘어나 관절통이 잦으므로 황기계통으로 몸의 기력을 보해주는 처방을 사용한다. 출산 후 여섯 달쯤 되면 수유, 수면 리듬이 가장 불안정한 정점에 이르는데 귀비탕 계열 한약으로 기억력과 수면 깊이를 보강할 수 있다. 식생활은 기혈을 보하면서 소화가 편한 오리고기와 붉은 살 생선 장-뇌 축을 안정시키는 발효 곡물·콩이 핵심이다. 2023년 국내 조사에서 산후 여성의 70% 가까이가 비타민D 부족 상태였는데 하루 30분 햇빛 노출이 세로토닌과 골밀도를 동시에 높여 주므로 놓치지 말아야 한다. 배우자 역시 옥시토신과 테스토스테론이 변하며 양육 스트레스에 취약해지는데 부부가 함께 호흡 명상이나 가벼운 산책 루틴을 만들면 관계 만족도와 공감 지수가 유의하게 높아진다. 이는 궁극적으로 산모의 회복 속도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현재 국내 산후조리원은 편의 서비스에 머물러 치료 연속성이 약한 편이다. 특히 환자가 아프거나 산후풍과 같은 병이 있는 경우엔 그 병을 치료하는 것이 우선이라 근처 병원이나 한의원에 찾는 것이 우선이다. 산모는 모유수유도 해야 하기 때문에 효과가 좋고 안정성이 입증된 한방 치료를 받은 것이 나은 선택이다. 본인 몸에 맞는 치료로 몸이 건강해지면 마음과 정신이 같이 건강해진다. 결국 출산은 원래 모습으로 복귀하는 관문이 아니라 새로운 자아를 빚어 가는 길의 시작이다. 어혈, 혈허, 담음 이론과 뜸, 한약 같은 생활 요법이 호르몬, 뇌 신경 과학과 손을 맞잡을 때 한방 산후 케어는 모성과 삶 전반을 새롭게 조직하는 통합적 성장 기술이 될 것이다.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5-05-07

山門이 열리다

희양산 이마가 잔설처럼 하얗다. 바위가 거대한 성(城)처럼 보여 그 풍경이 시원하다. 아래로 내려올수록 참나무들이 자리를 잡았고 구부러진 소나무가 휘영청 밝은 달빛 받아 수묵화에서 걸어 나온 듯 담담하다. 그 곁에 봉암사가 봄빛을 받아 햇살에 노곤하다. 입구부터 예사롭지 않다. 산문폐쇄를 하여 수도정진만을 하는 처소이기에 검문초소의 통과의례를 거치고서야 봉인을 푼 산사와 눈을 맞출 수 있었다. 길 따라 흐르는 계곡에는 겨울이 녹아내려 시냇물 소리며 맑은 기운이 청아하기까지 하다. 고개를 들어보니 곱게 단장된 기와지붕이 열두 폭 치마를 펼쳐 둔 듯이 이어진다. 일 년에 아흐레만 산문을 연다는 봉암사. 해방 이후 불교계에서는 일대 선풍(仙風)이 불기 시작했다. 봉암사에서는 결사(結社)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결사는 불가의 스님들이 뜻을 모아 불교 내부의 잘못과 타락을 개혁하려는 종교개혁운동을 말한다. 천태종의 백련결사, 보조국사 지눌의 정혜결사, 당대의 고승들이 모여 한 봉암결사가 그것이다. 백련과 정혜는 고려 때의 일이지만 봉암결사는 해방 후 두 해가 지난 후의 일이다. 그해 시월, 봉암사에서 성철 스님과 지운, 보문, 우봉 스님이 ‘부처님의 법대로 살아보자는 뜻을 세웠다. 그로부터 3년간 결사에 참여한 오십여 명의 스님들은 가부좌를 틀고 뼈를 깎는 수행에 들어갔다. 밭을 매고 나무를 하고 동냥하며 수행하기를 반복했다. 어느 하나라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고 소홀하면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조선시대의 억불정책과 일본의 탄압을 넘어서는 불교 근간을 세우리라는 한국불교의 혁신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봉암 결사가 불교계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발우공양이며 금강경, 반야심경의 독송 의식도 결사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절에서나 이루어지는 절차들이 결국 이곳에서 시발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희양산의 희끗한 봉황의 머리를 둔다면 구왕봉과 곰틀봉이 좌우의 날개가 된, 이 자리가 당대 고승들의 수행 발자취가 그대로 남아있다. 산사의 지붕은 결 따라 곱다. 처마 끝 풍탁은 높이 매달려 지나가는 바람을 기다린다. 기다린다는 것은 홀로 그 속을 채워나가는 일이다. 숱한 밤을 지새우며 경전을 읽고 염불을 외며 하나의 길을 뚫고자 했을 승려들이 그려진다. 하나가 된 승려들도 창호지로 배어들 봄꽃의 향기에 취하고 벌과 나비가 희롱하는 여름 꽃에 시선을 빼앗길 만도 할 터인데, 저벅저벅 고무신 코만 보며 걷지 않았을까. 가슴속에 이는 숱한 불꽃과 바람을 잠재우며 단단히 쪼고 매었을 마음 자락이 오늘은 바람에 덩그렁 덩그렁 울리는 풍탁의 흔들림조차 산사를 향한 노래가 된다. 철없는 아낙의 불심이야 경전 한 장만 못 하겠지만, 불전에 두 손 모아 가족을 향한 끝없는 염원을 내려다보신 부처님께선 그래도 안쓰러운 마음에 머리라도 한 번 쓰다듬어주시지 않았을까. 한발 한 발 내딛는 발자국마다 살아온 나날이 물집을 남긴다. 좋은 일이건 슬픈 일이건 노엽고 괴로운 일이든 쌓이고 쌓여 인생이다. 그 인생길에 한 겹씩 쌓아 올린 업보라는 것이 저 얼음장처럼 차고 단단해 봄비에도 녹지 않겠다. 그래도 아침이면 조금씩 조금씩 깎아보려고 업장 녹이는 일에 정진한다. 때론 새들의 노랫소리가 천당인 듯하고 맑은 정화수 한 사발이 무거운 욕심을 씻어내니 네 귀퉁이 사자조차 정겹다. 나무 사이로 일어나는 햇살에 전신이 나긋해지며 여기까지 온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감사한 마음이 차오른다. 희양산 자락의 품은 신묘하다. 저곳에서 내려오는 정기야말로 희고 고와 세상을 깨끗하게 덮을 만하다. 그 앞에 서 있자니 세상을 지나며 잡힌 물집이, 겹겹이 쌓인 업보가 조금씩 허물어진다. 허물어지고 부서진 자리로 청아한 바람 한 점으로 풍탁이 안부를 묻는다. 오늘의 염려를 여기 내려놓고 가라고. 나는 소복이 내렸을 법한 그 기를 홀로 느끼며 대웅전의 부처님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그윽하다. 제 몸을 태워 피워 올리는 향(香)내여. /배문경 수필가

2025-05-07

어느 봄날 - 기계면 도원정사

배롱나무 꽃 피는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운지 낮잠을 못 자겠다 배롱나무 꽃 돋는 소리가 얼마나 켜켜이 쌓이는지 술을 못 미루겠다 봄날은, 마음의 멍울이 망울로 돋고 비와 바람에 꽃이 피고 져서 아지랑이도 서로 비비고 꼬이면서 온도를 재촉하며 순서도 명분도 없이 무분별하나 조용한 소요를 양분 삼아 투명하게 바쁘게 서두르고 있다 그 욕심의 작은 서막(序幕) 혹은 사람의 길은 아닐지 다행인 것은 외롭고 가난해도 왠지 더 윤택해지는 봄날의 느낌 햇살 한 조각 허투루 낭비 않는, 가만히 있어도 촘촘하게 흐르는, 그 봄날의 역학(力學)을 도원정사에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 .. 한 사람이 있었다. 혼자서도 잘 노는 사람이고 싶었다. 등대처럼 끊임없이 수신호를 보내는 사람이고 싶었다. 배경이 되고 노을이 되고 싶었다. 혼자면서도 더불어 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장대비가 쏟아지는데, 어머니는 시집을 간다고 한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5-07

격동의 계절 그리스 근현대 ①발칸전쟁과 1차 세계대전

발칸 북부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로서는 러시아의 발칸침략에 아연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영국에서 배타적 민족주의, 광신적 애국을 주창하는 징고이즘(JINGOISM)이 분위기를 타면서 러시아 타도 운동이 불길처럼 번졌다. 기세에 눌린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가 요구하는 대로 협상 테이블에 다시 나설 수밖에 없었고, 산스테파노조약은 없었던 일이 되고 만다. 유럽 정세는 또 다시 먹구름 속에 들었다. 그리스 독립정부도 시류에 따라 요동치고 있었다. 예견했듯 초대국왕 오토가 그리스 국민 정변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뒤이어 강대국에 의해 떠밀리다시피 왕위를 이어받은 덴마크 출신의 게오르기오스 1세가 입헌군주정과 흡사한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게오르기오스 1세는 영토 확장에 눈을 돌려 대그리스주의라는 향수에 젖은 국민 신뢰를 얻는다. 1897년 국민 지지 속에 오스만터키와의 전쟁을 불렀다. 게오르기오스 1세는 아들 콘스탄티노스 1세에게 군대를 주어 출전시켰다. 그러나 의기만 충만했지 전쟁준비는 부족했다. 1897년 4월 그리스는 터키에게 만신창이가 되도록 얻어터진 후에야 패배를 인정했다. 크레타를 국제자치령으로 인정해야 했고, 영토 일부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400만 터키 파운드를 전쟁 배상금으로 물어야 했다. 그리스 본토는 온전했으니 그만하길 다행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오스트리아가 신생강국 도이칠란트의 뒷배를 믿고 발칸반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순식간에 점령해버렸다. 이를 불안하게 지켜보던 발칸의 나라들, 즉 그리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불가리아 등은 1912년 힘을 합치기 위해 발칸동맹을 맺으면서 터키와 오스트리아 이 둘을 동시에 견제했다. 드디어 발칸동맹과 터키와의 한 판 승부, 1차 발칸전쟁이 벌어졌다. 처음 터키제국에 선전포고를 한 나라는 스스로 전사의 나라 몬테네그로였다. 이에 발칸동맹국이 하나 둘씩 합세하자 예상을 뒤엎다. 대제국 오스만터키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며 유럽을 놀라게 했던 것이다. 기실 터키 주력부대가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에서 한 판 전투가 벌어지던 중이라 잔여 병력을 상대로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어찌되었던 터키로서는 뼈아픈 패전이었다. 이로 인해 현재 터키 국경이 된 이스탄불을 비롯해 인근지역만 남기고 500년을 호령했던 대제국은 영광의 이름만 남게 된다. 제2차 발칸전쟁은 욕심이 부른 난타전이었다. 1913년 6월 29일 불가리아는 발칸의 맹주라는 장대한 꿈을 품고 전쟁을 일으킨다. 불가리아는 기습적으로 마케도니아를 선점해 넓은 영토를 수중에 넣는데 성공했다. 불가리아와 경쟁관계에 있던 루마니아도 관망 자세에서 승리가 빤해 보이는 곳을 숟가락을 걸쳤다. 때를 놓치지 않고 그리스의 영원한 맞수로 생각했던 터키까지 발칸 동맹군에 가담했고, 전사군단 몬테네그로도 빠질세라 거들었다. 그러자 사면초가에 몰린 불가리아는 개전 두 달 만에 두 손발 다 들고 말았다. 말 그대로 엄청난 상처만 남긴 전쟁이었다. 그리스를 비롯해 세르비아 등 승전국은 다투어 전리품을 챙겼다. 덕분에 불가리아 영토만 쪼그라들었다. 그리스 게오르기오스 1세가 불가리아 비밀조직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그의 아들 콘스탄티노스 1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때를 같이하여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출신 19세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쏜 한 발의 총성이 유럽 전역을 전쟁의 광풍으로 몰아넣었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가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이 철없는 청년이 쏜 총에 희생되었다. 대세르비아주의는 보스니아를 합병함으로써 가능하지만, 점령국 오스트리아가 걸림돌이었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를 차지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로선 발칸반도를 지배의 구실로선 그야말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열아홉 살 청년에 의해 시작된 전쟁에서 그리스 역시 피해 갈 수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터는 응당 발칸반도였다. 그리스는 영국과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세르비아 등 연합군에 가담해 루마니아와 손잡고 불가리아를 공격해 승전국이 된다. 불가리아는 오스트리아와 도이치제국으로 줄을 잘못 선 탓에 또다시 패전국 신세로 전락하면서 발칸반도 승전국, 특히 세르비아와 루마니아에 땅덩어리를 내주어야 했다. 오스트리아도 역사에서 제국이란 깃발을 내려야 했다. 러시아 또한 볼셰비키혁명으로 공산화가 되면서 전쟁에서 발을 빼게 된다. 다행일까. 그리스는 승전국이 되면서 기세가 오르기 시작했다. 그 기세를 몰아 대그리스주의 꿈을 앞당기려 했다. 하지만 첫 번째 단추를 잘못 끼웠다. 세계대전의 포화가 채 가라앉기도 전인 1919년 그리스는 또다시 터키제국을 막무가내로 공격했다. 아무리 동네북 신세로 전락한 종이호랑이라 할지라도 제국의 에너지를 얕보았다. 1922년에 끝난 이 전쟁에서 그리스가 대패하면서 드디어 대그리스주의는 꼬리를 감추어야 했다. 능력의 한계를 절감했던 것이다. /스토리텔링 작가

2025-05-06

붙임줄

붙임줄은 악보에서 음과 음을 이어주는 곡선이다. 떨어져 있는 두 음을 부드럽게 잇는 이 작은 선은 잠시의 단절마저 노래로 묶는다. 음악을 그만둔 지 오래지만 나는 여전히 이 말이 좋다. 무엇을 이어 주는 마음 같아서. 3일의 여행 일정 중 첫째 날 일본의 오사카 도톤보리강 크루즈 위에서 나는 ‘붙임줄’을 떠올렸다. 반짝이는 간판들 사이를 거북목을 하며 헤매다 표를 끊었다. 어둠이 살며시 내려앉은 강 위로 크루즈가 오가며 환호와 함께 저마다 다른 언어들로 손을 흔들며 서로를 아는 척을 했다. 그 광경에 매료되어 남편과 함께 노란 배 위를 올랐다. 여기저기 익숙한 한국어가 들려왔다. 한국에서 단체로 관광을 온 여행객들 사이에 우리 부부도 함께 자리에 앉았다. 승객은 모두 한국인. 낯선 건 오히려 유일한 안내자였다. 마이크를 든 일본 소녀 한 명은 나이도 많아야 스무 살 남짓, 노란 모자를 쓰고 눈웃음과 입웃음을 잃지 않는 너무도 해맑은 일본 소녀였다. “곤니치와” 또렷한 인사와 함께 그녀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물론 일본어였다. 아무도 그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없는 듯 보였다. 별로 반응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망설이지도 않았고 표정이 바뀌지도 않았다. 손짓을 섞어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했고 큰 소리로 박수를 유도하고 웃음으로 몸 언어로 반응을 끌어냈다. 마치 혼자서 공연을 하기라도 하는 듯 배 위는 점점 밝아졌다. 그녀의 언어를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그 안에 담긴 표정과 억양은 분명했다. 설명이 아니라 그녀의 정서가 전해져 왔던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보가 아니라 분위기였다. 그녀가 웃으면 우리도 따라 웃었고, 그녀가 손을 흔들면 모두 따라 흔들었다. 통역은 없었지만 서로의 마음에는 무언가가 연결되었다. 나는 그 가느다란 연결감을 ‘붙임줄’이라 부르고 싶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과 같은 배를 타고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웃고 있던 시간, 어떤 연결은 말이 없어도 이루어진다. 꼭 알아듣지 않아도 좋았다. 감정은 언어보다 오래 머물러 있기에 그녀의 감정은 배를 탄 사람을 넘어 다리 위를 걷는 사람, 거리를 걷는 사람, 소중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든 이에게 연결되어 하나가 되는 이음을 만들었다. 배는 도톤보리의 물길을 따라 조용히 흘렀고 사람들 얼굴엔 하나씩 미소가 피어 있었다. 일본 소녀는 마지막까지 인사를 잊지 않았다. 두 손을 꼭 모은 채 눈을 맞추며 내리는 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녀의 진심은 그 순간 누구에게나 닿았을 것이다. 우리가 보내준 박수와 환호 또한 말보다도 더 많고 깊은 것으로 그녀에게 전달되었으리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소녀의 미소가 떠올랐다.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도, 수많은 인파들 속에 섞여 있던 소음도, 강 위를 미끄러지던 배의 진동도 아니었다. 나의 기억을 가장 오래 붙들고 있었던 것은 언어가 아닌 마음으로 이어졌던 그 시간이었다. 스쳐가는 만남이었지만 그 안에는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낯선 이들의 진심과 웃음이 있었고 얼마든지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삶의 철학이 있었다. 그것은 여행이 내게 준 큰 선물이었다. 일상으로 돌아온 후 버스에서 옆 사람과 잠시 눈이 마주쳤다. 괜히 미소를 지었다. 별일 아닌 그 장면에서 도톤보리강의 밤이 떠올랐다. 말없이 마음이 닿는 순간들, 그저 스쳐가는 인연도 조용한 선율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 여행에서 배웠다. 마음을 열면 언어가 아니어도 통할 수 있다는 것을. 붙임줄은 단지 음과 음을 잇는 기호가 아니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나는 그 크루즈에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언어와 언어를 잇는 부드러운 곡선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이해를 강요하지 않는 다정한 연결, 마음이 먼저 닿는 길이었다. 마치 붙임줄처럼 다르고 낯설었던 존재들이 순간적으로 한 장의 악보가 되어 내 삶 속에서 잔잔한 멜로디로 흘러 이어질 것이다. 오래도록. / 김경아 작가

2025-05-06

이제 대법원까지 손보겠다는 민주당

지난주 경북매일신문과 인터뷰를 한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김영수 교수는 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대통령이 될 경우 삼권분립이 위기에 처한다고 경고했다. 유력일간지 칼럼 등을 통해 이번 대선정국을 깊이있게 분석해온 김 교수는 “최근 끝난 민주당 경선결과(이재명 후보 89.77% 득표율)는 민주주의 경선으로 보기 어렵다. 제왕적 총재로 불린 김대중 전 대통령도 78.04%의 득표율에 그쳤다. 이 후보가 대통령이라는 절대 반지를 끼면 삼권분립이 위기에 처한다”고 했다. 공감이 가는 진단이다. 제22대 국회들어 192석을 차지한 야권은 입법권은 물론 공직자 탄핵이라는 수단을 통해 행정부까지 장악하면서 국정이 마비된 지는 오래됐다. 그런데 이제 대법원까지 겁박하며 사법부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흔들고 있다. 민주당은 지난 4일 대법원이 이재명 대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한 것과 관련해 조희대 대법원장에 대한 청문회와 국정조사, 특검추진까지 거론했다. 민주당은 앞서 형사 피고인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그와 관련된 형사재판을 중단하는 내용의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재명 후보가 당선 무효형(벌금 100만원 이상)이 확정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민주당은 대법관 수를 현행 14명에서 30명으로 늘리는 법원조직법 개정안도 발의했다. 친민주당 성향 대법관을 다수 임명해 대법원을 장악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민주당은 국회·대통령·대법원장이 각각 3명씩 선출하고 대통령이 최종 임명하게 돼 있는 헌법재판관에 대한 최종 승인권을 국회가 행사하겠다는 대선공약도 검토하고 있다. 이러니 “히틀러와 김정은 보다도 더 심각한, 집단광기 수준의 사법부 압박”이라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재명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민주당의 이러한 시도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그동안 민주당이 수많은 법안을 강행 처리했지만, 대통령이 재의 요구권(거부권)을 가지고 있어서 부결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민주당이 일방 처리한 법안에 제동을 걸 수단이 없어진다. 대통령을 제외한 공직자에 대한 탄핵소추도 국회 재적 의원 과반수(151명 이상) 찬성으로 가능해 민주당(170석) 단독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민주당은 그동안 자제해 왔던 국무위원 줄탄핵도 재개했다. 지난 1일 심야에는 민주당이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을 추진하자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가 전격사퇴했다. 이로인해 대행 3순위인 이주호 사회부총리가 대선 관리와 경제·외교·안보를 도맡게 됐다. 헌정사상 초유의 ‘대행의 대행의 대행’ 체제가 된 것이다. 민주당은 그동안 입법권만으로도 사실상 국정을 마비시켰다. 30번의 탄핵안과 33번의 특검법을 남발했다. 이재명 후보가 대법원의 파기환송 결정에 “국민 뜻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듯이, 결국 유권자가 6·3대선에서 현명한 판단을 하는 방법밖에 남지 않았다. 만약 이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민주당은 국민이 입법·사법·행정 3부 장악을 허용했다고 간주하고 지금처럼 독주를 계속할 것이다. /심충택 논설위원

2025-05-06

관봉권

조선시대에도 뇌물이 성행했던 모양이다. 왕조실록에도 지방의 수령이 백성으로부터 거둬들인 재물을 조정의 대신에게 뇌물로 주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지금처럼 화폐 유통이 원활하지 않아 뇌물로는 귀금속이나 포목 그리고 지역 특산물 등이 주로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해 관계가 얽힌 사람이 사는 사회에 뇌물이라는 부정한 거래는 시대를 막론하고 어느 나라에서든 있었던 악습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전직 대통령 영부인의 옷 구입비에 관봉권이 사용됐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관봉권에 대해 궁금해 하는 국민이 많다. 일반인에게는 낯설게 들리는 관봉권은 말 그대로 “관에서 봉인한 지폐”다. 금융권에서는 “조폐공사가 한국은행에 신권을 보낼 때 액수와 화폐 상태에 이상이 없음을 보증하는 의미로 십자 형태의 띠를 두르고 비닐로 싸서 보내는 지폐”라고 설명한다. 이런 관봉권은 은행이 개인에게 인출해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VIP고객이나 대기업이 명절 때 임직원에 지급할 목적으로 은행에 요구하면 지출되는 사례는 종종 있었다고 한다. 또 과거에는 청와대가 관봉권의 유통 경로였다는 얘기도 들린다. 5만원권 5000만원 뭉치의 크기는 각티슈 정도라고 한다. 5만원권이 처음 발행될 때 일각에서는 뇌물로 사용될 우려가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는 만원권에 비해 부피가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영부인 김정숙 여사가 청와대 시절 지불한 옷값이 4억원에 달한다는 경찰 조사가 있었다. 옷값으로 결제된 현금이 관봉권이라 한다. 개인이 소지하기 어렵다는 관봉권이 옷값으로 사용된 경위를 경찰이 조사한다는데, 그 결과가 궁금하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5-06

여성 없는 21대 대선, 이대로는 안된다

이번 6·3 조기 대선은 단순한 대통령 교체가 아니라 정치적 혼란 이후 국민이 어떤 리더십을 원하는가를 가늠하는 시험대다. 대선 후보들은 최근 잇따라 정치·경제·사회 분야 공약들을 발표하면서도 ‘여성의 삶과 경험’을 의제화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윤석열 정부 집권 1년여 만에 우리나라 ‘국가성평등지수’는 2010년 이후 처음으로 하락했다. 여성가족부는 지난달 17일 2023년 우리 국가성평등지수가 65.4점으로 전년(66.2점)보다 낮아졌다는 통계를 발표했다. 특히 감소 폭이 가장 큰 지표는 ‘가족 내 성별 역할 고정관념’ 인식 수준(60.1점→43.7점)이었다. ‘경제적 부양 및 가족의 의사결정은 남성이 하고 가사·가족 돌봄은 여성이 해야 한다’는 성별 고정관념에 동의하는 비율이 늘어난 것이다. 이 문제는 국가의 인구 정책, 노동시장 구조, 경제성장 전략과도 직결된 요소라 할 수 있다.   지난 4월 2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주최로 열린 ‘모두의 성평등 다시 만난 세계’ 간담회에선 많은 불만이 터져 나왔다. 김은주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소장은 “집담회의 부제이기도 한 ‘여성 없는 21대 대선, 이대로는 안 된다’는 정치 현실에 대한 여성들의 절박한 외침”이라고 강조했다. 이어서 “계엄 사태 이후 지난 몇 달간 광장과 거리의 중심엔 청년 여성들이 있었다”면서 “이번 조기 대선에 임하는 정당이나 후보들은 그들의 목소리와 의제에 응답해야 할 책임이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비판했다. 여성 의제들은 저출생·노동시장·고령화 사회 돌봄 이슈 등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음에도, 대선 후보들은 최근 잇따라 다양한 공약들을 발표하면서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여성 의제에 침묵하면 여성 유권자들은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여성가족부는 2008년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여성부를 폐지하고 가족 관련 사무를 보건복지가족부로 이관했다가 이후 2010년 3월에 다시 개편된 역사를 갖고 있다. 여성가족부는 양성평등 실현, 청소년 및 가족 지원, 다문화 및 한부모 가족 지원, 여성 폭력 예방 및 지원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역할하고 있다.  대선 후보들의 공약에는 여성의 권리와 가족의 복지를 향상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부족하고, 성평등 정책을 축소하려는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이런 흐름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가족의 복지를 위협할 수 있으며,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역행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여성과 가족의 복지 향상은 우리 사회가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과제다. 이를 위해 정부와 정치권은 성평등과 가족 복지를 위한 정책을 강화하고, 국민은 이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높여야 한다. 가정의 달 5월에 여성들은 여성, 젠더, 성평등, 가족, 질적인 여가부 기능을 확대하고, 그에 따른 예산 수립에 힘써줄 것을 주문하고 있다. 대통령 후보들은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윤희정 편집부국장 대우

2025-05-06

산불피해 복구, 희망과 베풂의 씨앗

극명한 대조였다. 밭두렁이나 길, 개울이나 둔덕, 골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토록 판이한 양상이 나타나다니, 참으로 조마조마하고 아슬아슬하게 희비가 엇갈리는 현실이 비탄스럽게만 여겨졌다. 대지는 파릇파릇 생기를 더해가며 무채색의 황량함을 초록으로 채워가는데, 지척의 산야에서는 불에 탄 흔적이 검버섯처럼 칙칙하고 시커멓게 멍들어가며 신음하는 듯하니 3월에서 4월, 불과 한 달새 이다지도 잔인할 수가 있단 말인가. 마른 하늘의 날벼락처럼 순식간에 들이닥친 초대형 산불로 경북 북동부지역이 초토화되면서 사상 최악의 피해가 속출했다. 일상을 삼켜버린 화마에 대대로 이어온 삶의 터전을 하루 아침에 잃고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재민들이 3000명을 넘는다 하니, 막막하고 암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실의에 찬 이재민들을 위한 온정의 마음과 피해복구의 손길들이 각계각층에서 더해지고 있어서 그나마 안도스럽지만, 피해지역이 워낙 광범위하고 상흔이 깊어서 일상회복과 정상복구에는 다소 시간이 걸릴 듯하다. 작은 관심이 큰 희망이 되듯,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돕고 위로하는(患難相恤) 상부상조의 양속이 예나 지금이나 주변을 밝고 따스하게 비추며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어가는 것 같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산불피해성금을 전달하는 어린이나 기업체 등의 기부, 자원봉사자들의 한결 같은 복구활동 참여, 지자체 공무원들의 발 빠르고 체계적인 복구계획 시행·지원 등으로 피해복구에 다소 속도를 내고 이재민들의 임시거처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는 것 같아 다행스럽다. 거기에 휴일까지 반납하고 복구작업에 적은 일손이나마 보태며 피해 당사자들을 위로해주는 미담이 전해져서 훈훈하게만 여겨진다. 휴일 아침 일찍 영덕군 지품면 수암리의 한 과수원엘 가서 불에 탄 사과나무와 복숭아나무, 감나무 등을 베어내고, 소실물 잔해 정리작업에 팔을 걷은 이들은 포스코 포항제철소 사진ㆍ붓글씨봉사단원들이다. 주로 사진촬영과 붓글씨 나눔활동을 실시해온 재능봉사단원들이 이날만큼은 카메라와 붓 대신 톱과 낫을 들고 산불피해가 심각한 과수농가에서 복구작업을 펼친 것이다. 봉사단원들은 과수원 주인의 안내와 요청에 따라 불에 탄 사과나무 등의 피해목 30여 그루를 전동톱으로 베어내고 잔가지를 정리, 포터차량에 실어 폐목 임시보관장소로 운반하는 등의 작업을 실시했다. 또한 농가 2채와 농막, 저온창고, 차량 2대가 전소된 건조물 바닥의 소실물을 정리하고, 일부 불에 타고 찢어져 썰렁하게 일렁이는 그물망을 제거하는 작업도 단계적으로 실시했다. 과수 정리작업을 마치고는 한 봉사단원이 사비로 마련한 양말, 수건 등의 생필품을 과수원 주인에게 전달하면서 산불피해의 아픔을 달래 드리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복구작업은, 포스코 1%나눔재단에서 최근 산불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의 조속한 피해복구를 위해 ‘Change My Town’ 지원 프로그램으로 진행된 자발적인 봉사활동이다. 기부자인 임직원이 지역사회의 개선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봉사활동까지 직접 실행하는 참여형 ‘체인지 마이 타운’ 나눔 사업은 2019년부터 시행돼 수혜처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지역을 아끼고 사랑하는 포스코의 상생협력 나눔활동이 희망과 베풂의 씨앗이 되길 기대해본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2025-05-06

정치와 막말

“과거 ‘여자는 밤에만 쓰는 것’, ‘주막집 주모’ 등 발언한 적 있느냐” “대통령 앞에서 깐죽거리고 했으니 얼마나 화가 났겠나” 도대체 듣고 있기가 쉽지 않다. 대선 국면에서 쏟아지는 막말들 말이다. ‘춘향이’ 운운한 어떤 발언은 입에 담기도 어려워 여기 적을 수조차 없다. 내란 정국 때는 ‘계몽’과 ‘요원’이란 단어가 히트(?)더니, 근래엔 ‘깐족’과 ‘아부’, ‘키높이 구두’와 ‘눈썹 문신’이란 말이 유행인가보다. 기억에 남는 정책이나 국정철학은 없고 오로지 ‘비아냥’과 ‘조롱’만 남은 모 정당의 토론회를 보고 있자니, 저들에겐 과연 역사에 대한 부채 의식이나 책임감 따위는 없는 건가 싶기도 하다. 대통령 파면으로 시행되는 엄중한 대선인데, ‘비상계엄’과 ‘탄핵’마저 희화화되고 있다. 정치란 기본적으로 공론장에서의 말(Lexis)과 행위(Praxis)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때 말과 행위는 전혀 다른 것을 뜻하는 게 아니다. 정치인의 발언은 그 수행적인 힘을 대의하는 자리에서 발화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언어의 생산과 교환은 일정한 언어 자본을 갖춘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상징적 권력 관계 속에 자리 잡는다고 논한 바 있다. 언어 교환의 권력 관계는 제도적이든 아니든 그들이 집단으로부터 받고 있는 인정에 따라 상이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누구든 말할 수 있고, 명령의 의미를 발화할 수 있지만, 필요한 권위가 결여되어 있는 자에게 그것은 ‘행위’가 될 수 없으며, 단지 ‘말’로만 남을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인의 말은 수행적인 힘을 갖는다고 여길 수 있다. 그만큼 책임이 동반되는 행위라는 거다. 말하는 자는 자신의 발화가 ‘언어의 장’에서 어떻게 수용될지에 대해 나름의 예측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와 담론은 언제나 ‘완곡어법’이자 ‘타협’이라 할 수 있다. 언어는 ‘잘 말하려는’, ‘적절하게 말하려는’ 전략적 수정의 결과이기에 ‘완곡어법’이며, ‘말해야 하는 것’과 ‘표현되는 것’ 사이의 긴장 속에서 발화 형태가 결정되기에 일종의 ‘타협’인 것이다. 그런데 언어의 수용가능성에 대한 이러한 예측은 의식적인 계산으로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언어적 아비투스(habitus)의 영역이라 수용가능성에 대한 감각, 혹은 자신이나 타인의 언어생산물의 잠재적 가치에 대한 감수성에서 기능한다. 이점을 비춰볼 때 막말을 해대는 정치인의 언어 감수성이 어느 레벨에서 작동하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선 토론을 겨우 ‘말싸움’ 정도로 여기는 천박한 권위 의식과 경쟁심이 결합 된 언어적 결과에 불과한 것 아니겠는가. 예전의 보수는 나름의 품격을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위선이라도 부렸다. 위선이란 적어도 세간의 이미지를 의식하고 남들 눈치 정도는 보기 때문에 가능한 가식이다. 그럼에도 즉물적 감정에만 휩싸여 위선의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저 오만한 권력이 언제까지 연명할 수 있을까? 토론 자리를 상대 ‘망신주기’의 기회 정도로 여기지 말기를 바란다. 막말이 계속되는 한, ‘천박한 정치’에 대한 ‘고상한 대중’의 심판도 오래고 지속될 것이다. /허민 문학연구자

2025-05-01

관식이 타령

집안에 음기가 너무 세게 흐른다. 집안에 남자라곤 나 혼자이다. 첫애가 딸이라고 했을 땐 그래도 둘째는 아들이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에 불과했다. 삼신할머니에게 그만큼 빌고 빌었건만 둘째도 달지 않고 나왔다. 딸 둘에서 멈췄다. 딸 셋이 되면 내가 집을 나갈 것 같아서다. 삼 형제를 두신 우리 아버지의 업적에 큰 누를 끼치고 말았다. 집안의 대가 끊어졌다. 여자들의 세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네들의 세상은 여태 내가 겪지 못한 사건의 연속이었고 그 모든 것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다 안다고 하기엔 많이 역부족이다. 여자들의 심리는 그만큼 복잡하고 다양했다. 드라마에 나오는 ‘실장’ 혹은 ‘본부장’이란 타이틀은 대체로 재벌가 아들이 걸치는 직책이다. 얼굴도 잘생기고 키도 크다. 아는 것도 많고 매너나 에티켓도 좋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구석은 다 갖춰져 있다. 이렇게 설정해 놓고 가난한 여자를 좋아하게 만들면 그 드라마는 대박이 난다. 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랑의 구도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보는 모든 여자는 가난한 여자가 되어 꿈속에서 헤매게 된다. 이수일과 심순애 이야기가 언제 적 이야기인가. 일제 강점기 때 조종환의 ‘장한몽’에 나오는 이야기 아니던가. 이런 이야기가 AI 시대에도 먹히고 있으니, 기가 막히는 일이다. 김중배의 다이아에 심순애는 이수일을 차버리지 않는가. 결국 돈 앞에는 사랑이고 뭐고 없다. 냉혹한 돈의 현실만 있을 뿐이다. 난 여태 돈 많은 남자 싫어하는 여자는 잘 보지 못했다. 우리 집 여자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졸지에 돈을 잘 벌어오지 못하는 나는 평생을 죄인처럼 눈치만 보면서 살았다. 오랫동안 실장이나 본부장에게 몰입되어 있던 여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바뀌었다. ‘폭싹 속았수다’에서 양관식이란 인물이 나타난 것이다. ‘지고지순’이란 단어를 남자에게도 사용할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양관식. 거의 외계인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현실 세계에선 극히 찾아보기 힘든 캐릭터이다. 대부분 부상길, 아니 ‘학 씨 아저씨’란 인물이 현실 속 전형적인 한국 남성 모습이 아닐까 싶다. 졸지에 장안의 화제로 떠오른 관식이 때문에 참 피곤하다. 오직 한 여자와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감내하는 한 남자의 순애보는 모든 여자의 로망이 되었다. 덕분에 나 같이 여자가 많은 집에선 전부 양관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심지어 곁눈질로 나를 보면서 ‘학 씨 아저씨’보다 더 한 꼰대 인간 취급을 한다. 세상이 개벽했다. 여자들의 생각이 하루아침에 이 정도로 변화된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돈 없는 관식이가 돈 많은 본부장을 밀어내고 말았다. 걱정은 둘째 딸이다. 삼십 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는데 아직 관식이를 찾고 있다. 세상에 관식 같은 남자는 없다. 대부분이 학 씨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고 귀에 따까리가 앉도록 말했건만 꼼짝도 하지 않는다. 관식이 타령이 끝이 없다. 제발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직시해 줬으면 싶은데, 그 드라마 한 편이 정신을 흐려놓았다. 그 전에 자기 남편감은 경제력이 우선이었다. 지금은 “돈 많은 양관식.” 이다. ‘히떡’ 자빠질 뻔했다. 이번 생애에 둘째 사위 보기는 힘들 것 같다. /노병철 수필가

2025-05-01

스페인 대정전

블랙아웃(Black Out)은 앞이 캄캄해진다는 뜻이다. 발전 용어로는 모든 전력공급이 중단된 최악의 정전사태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 국어 순화사전에는 이를 대정전이라고 부른다. 특정 지역 혹은 특정 도시가 불랙아웃되는 일은 가끔 있었으나 한 나라가 통째로 블랙아웃되는 일은 세계적으로 극히 드물다. 지난달 28일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동시에 블랙아웃 현상이 벌어졌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리스본 등 대도시 곳곳에서 관광객과 시민들이 기차와 지하철, 엘리베이터 안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대소동이 벌어졌다. 문제는 국가적 대정전에도 아직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전력 복구에 나서고 있지만 정작 알아야 할 정전 원인은 오리무중이라 한다. 때문에 정전 원인에 대한 각종 관측이 난무한다고 한다. 사이버 테러 등도 거론이 되나 현재로선 재생에너지원의 과부하가 가장 유력한 원인일 것으로 관측이 되고 있다. 스페인은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 의존도가 유럽에선 독일 다음으로 높은 나라다. 날씨 변화에 따라 전력 생산이 급격히 변동될 수 있는 전력 환경이다. 이번 사태도 불안정한 전력 공급이 전력 시스템에 부담을 주어 대규모 정전을 일으킨 것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설득력 있는 분석으로 외신은 전한다. 아직도 정확한 정전의 원인은 알려진 바 없다. 그러나 재생에너지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위험하다는 교훈은 주목할만한 평가다. 그리고 지속 가능한 전력 사용을 위해 지금의 전력 생산 패러다임도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눈여겨 볼 부분이다. 세계가 반면 교사할 블랙아웃 사태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5-01

새로 생긴 공중협박죄와 공공흉기휴대죄

2023년 7월 온라인상에 길이 30센티가 넘는 칼을 구입한 구매 내역과 함께 “수요일에 신림역에서 여성 20명을 죽이겠다”는 글이 올라왔다. 신림역 흉기 난동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라 신림역 인근 주민은 물론 전 사회가 공포에 떨었다. 글을 올린 용의자가 긴급체포되어 구속기소 되었지만 올해 1월 대법원에서는 최종적으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 형이 확정되었다. 기소된 정보통신망법 위반죄와 협박죄 일부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공포심이나 불안감을 유발하는 문언을 반복적으로 도달하게 하면 성립하는 정보통신망법 위반죄와 피해자에게 해악을 고지함으로써 공포감을 일으키게 하여 성립하는 협박죄는 피해자별로 성립하는 범죄인데 ‘신림역 인근 상인들 및 주민들‘이 피해자라고 하기엔 너무 범위가 넓어 피해자가 특정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게 법원 판단이었다. 한국인 여성을 대상으로 혐오와 증오를 표출하는 글을 1700여 건 작성한 것도 ‘한국인 여성’의 범위가 넓어 피해자가 특정되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보았다. 다만 해당 날짜 신림역 인근을 방문하거나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20~30대 여성들을 살해할 목적과 특정성은 인정되어 이들에 대한 협박 및 살인예비 혐의만이 유죄로 인정되었다. 어쨌든 피고인은 실형을 면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온라인상에는 이런 범죄를 예고하는 글들이 일 년에도 수백 건 이상 올라오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불특정인을 대상으로 한 협박이나 범죄 예고를 해도 피해자가 특정되어야 하는 기존 범죄들의 구성요건적 한계 때문에 처벌이 어려운 면이 있었다. 공공장소에서 대중을 대상으로 흉기를 소지하거나 드러내어도 경범죄 처벌법으로 밖에 처벌하지 못해 법정형이 벌금 10만원 이하로 처벌 수위가 낮고 현행범 체포나 긴급체포 하지 못하게 되는 문제도 있었다. 이에 최근 형법에 공중협박죄와 공공장소 흉기휴대죄가 신설되어 지난달부터 시행되고 있다. 신설된 형법 제116조의2 공중협박죄는 불특정 또는 다수의 사람의 생명, 신체에 위해를 가할 것을 내용으로 공연히 공중을 협박한 사람에게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처하는 죄이다. 실제 지난달 라이브 방송 중이던 유튜버가 “누구 한 명 죽이고 싶네”라고 말했다가 이 공중협박죄로 입건되었다. 형법 제116조의 3의 공공장소 흉기소지죄는 정당한 이유 없이 도로·공원 등 불특정 또는 다수의 사람이 이용하거나 통행할 수 있는 공공장소에서 사람의 생명, 신체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흉기를 소지하고 이를 드러내 공중에게 불안감 또는 공포심을 일으킨 사람을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한 죄이다. 이 죄 시행 첫날 서울에서 행인을 향해 흉기를 꺼내 든 중국인이 검거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신설 범죄들이 생긴 이상 불특정 다수에 대한 묻지마 범죄와 모방범죄를 사전에 차단하는 효과가 있겠지만, 수사기관도 적용 대상과 한계를 명확히 하는 적절한 대응 매뉴얼을 만들어 불의의 피해와 혼선을 방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김세라 변호사 .……… △포항여자고등학교 고려대법과대학 이화여대로스쿨 현재)한동대 겸임교수 변호사김세라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2025-05-01

어린이를 생각한 사람, 오늘 우리가 할 일

5월 5일, 우리는 ‘어린이날’을 맞는다. 아이들을 위해 행사를 벌이고 선물을 주며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나간다. 이 날은 단지 어린이를 위한 특별한 하루가 아니라, 그 날이 담고 있는 정신이 온 사회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방정환 선생을 새롭게 떠올리게 된다. ‘소파 방정환’은 어린이문학의 선구자 또는 아동 인권 운동가라는 타이틀을 넘어,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로서 기억되어야 한다. 1923년 5월 1일이었다. 일제의 서슬 시퍼런 억압이 거셌지만, 3·1운동 이후 우리 사회에는 잠시나마 ‘문화정치’라는 명목으로 자치와 표현에 작은 여유가 생겼다. 많은 이들이 해외로 나가 독립을 도모하던 때에 청년 방정환은 ‘나라를 되찾은 다음은 누구의 날들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직면했고, 그 답으로 ‘어린이’를 들어 올렸다. 어린이를 단지 보호받아야 할 존재를 넘어, 어린이는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서 자율성과 존엄성을 가진 주체라고 생각했다. 이 땅에 되찾을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의 주인은 다음 세대 ‘어린이’라 믿었다. 어린이가 주눅들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진정한 해방과 독립의 열매는 어린이들이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애’나 ‘아이’ 같은 단어 대신 ‘어린이’라는 낱말을 지어내었다. 아주 작은 차이였겠지만 ‘어린이’에는 깊은 소신과 철학을 담았다. 어린이들에게 책을 읽히고 글을 쓰게 하며 목소리를 키우고자 했다. 어린이를 위한 잡지 ‘어린이’를 창간했고 ‘색동회’를 만들어 어린이 문화운동을 펼쳤다. 어른 중심의 세상에 어린이라는 존재의 가치를 새기려는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이며 파격적인 시도였다. 우리는 방정환 선생이 바라던 미래를 살고 있다. 해방을 맞았고 민주주의를 실현했으며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고 법적으로 보호받는다. 참으로 그가 꿈꾸던 ‘어린이가 주눅들지 않는 세상’이 실현되었는지는 아직도 질문으로 남는다. 경쟁과 입시, 차별과 폭력 속에서 우리 사회의 아이들은 얼마나 안전하고 존엄하게 자라고 있을까. 새 정부가 들어선다. 정권이 바뀌고 시대의 문이 또 한번 열린다. 청년 방정환의 생각을 되새길 때다. 어린이는 가르침을 받아야 할 존재일 뿐 아니라 어른들의 생각을 이끄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 사회는 어린이의 일상을 중심에 두고 설계되어야 하며 정책과 제도의 뿌리에는 언제나 ‘어린이를 생각하는 세상’이 자리잡아야 한다. ‘어린이날’을 하루 기념일로만 여길 게 아니라, 일 년 365일을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이 영그는 날들로 만들어야 한다. 100년 전 방정환이 하루라도 어린이를 귀하게 생각하자 떠올렸다면, 오늘 우리는 어린이는 날마다 소망과 기대가 열리는 꿈나무로 여겨야 한다. ‘어린이헌장’은 이렇게 선언한다. ‘어린이는 우리의 내일이며 소망이다. 나라의 앞날을 짊어질 한국인으로,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세계인으로 자라야 한다.’ 어느 청년의 꿈일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꿈으로 어린이를 키워야 한다. 당장 투표하지 않아도 내일 나라를 이끌 기둥 ‘어린이’를 나라살림의 한 가운데에 두어야 한다. /장규열 고문

2025-04-30

스님의 소고기

좀처럼 속내를 내비치지 않는 그녀가 남편과의 불화를 얘기했다. 나는 문제를 풀어 볼 요량으로 남편 입장에 서서 그녀가 해 주었으면 좋을 얘기들을 늘어놓았다. 그렇게는 이미 다 해 보았다고 토로하는 그녀의 얼굴에 섭섭함이 묻어났다. 친구를 위해 한 말이 괜한 화를 불렀다. 입을 다문 그녀의 표정에 예전의 내가 보였다. 서른 즈음, 다섯 살인 딸애와 갓 두 돌 지난 아들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힘든 나날이었다. 유모차를 끌고 대문을 나서면, 골목 마루에 앉아 담소 중이던 아주머니들이 오늘도 시댁에 가느냐고 묻곤 했다. 나의 일상은 집과 시장을 맴돌이 하는 것과 시댁에 가는 것이 전부였다. 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하는 내게 폭탄이 터졌다. 남편의 공장이 부도가 났다. 예상치 못한 연쇄부도에 그는 우왕좌왕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화난 거래처의 전화를 받는 것뿐이었다. 밀린 자재 값이 무엇인지 얼마인지도 모르면서 미안하다는 사과와 갚겠다는 약속을 하고 또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댁과의 작은 오해가 부도보다 더 크게 나를 휘몰아쳤다. 풀려고 해도 꼬인 매듭의 끄트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기댈 남편마저 채권자를 피해 어디론가 사라졌다. 모든 잘못은 이미 내 것이었고, 나는 혼자였다. 아이들을 친정엄마께 맡기러 갔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엄마는 내일 밭에 일할 사람들을 불러놨으니 아침 일찍 와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나는 눈이라도 마주칠까봐 대답도 없이 대문을 나섰다. 엄마의 불안한 눈빛이 골목으로 따라 나왔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자 팔공산은 어스름 날이 저물고 있었다. 이십대에 자주 갔던 곳을 찾아가는 발길이 자꾸만 허방을 짚었다. 작은 절은 여느 때와는 달리 불빛 하나 없었다. 아무도 없어서 좋았다. 요사채 마루에 불도 켜지 않은 채 멍하니 앉았다. 친정에 두고 온 아이들도 내 머리 속에는 없었다. 풀벌레 소리조차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한참 후, 돌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를 발견한 스님은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고 묻지 앉았다. 그를 보자 눈물이 먼저 말했다. 나는 두서없는 말들을 쏟아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내게 그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게 다 내 업이라고. 그 말에 가슴이 시렸다. 억울했다. 내가 뭘 어쨌는데 다 내 탓이란 말인가. 내겐 혈육과 상관없이 오빠처럼 지낸 스님이었다. 딸과 아들도 외삼촌이라 부르는 그가 하는 말은 내가 원하는 것과는 전혀 엉뚱하게 법문처럼 들렸다. 절에는 스님만 있을 뿐 오빠는 없었다. 그 밤이 오래오래 지나갔다. 나는 여명 사이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산을 내려왔다. 내 하소연이 원하는 것은 ‘너, 참 힘들었겠구나.’라는 한마디였다. 그저 들어주기만 해도 내 생각의 서랍을 조금이나마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 먼 길을 찾아 갔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산을 내려오는 내내 나는 혼자라는 것을 확인했다. 길가에 앉아 집으로 가는 첫차를 한참 기다렸다. 정신없는 생활 속에서 점점 잊어가던 어느 날, 스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남편과 나는 약속 장소로 갔다. 뜬금없는 소고기 식당이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나는 약속 장소가 맞는지 다시 확인했다. 하얀 고무신을 신은 스님이 먼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섰다. 우리는 엉거주춤 따라 들어갔다. 스님과 소고기는 뭇사람의 눈길을 받기에 충분했다. 고기를 굽는 그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고기가 익기 바쁘게 남편과 내 접시에 올려주었다. ‘어서 먹어라’는 채근에 마지못한 듯 젓가락을 들었다. 소고기가 입에 살살 녹는 듯 했다. 접시는 빠르게 비었고, 또 채워졌다. 목에 찰 때까지 먹고 나서야 가격표가 눈에 들어왔다. 그날 우리는 얇은 스님의 주머니를 바닥냈다. 그가 말했다. ‘힘내야지’라고. 나는 그제야 스님이 상추쌈만 몇 점 드셨다는 것을 기억했다. 내 인생에서 잘라버리고 싶었던 그 시절의 기억이 싱싱하게 떠올랐다. 나는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친구에게 했다. 너만큼 하기 쉽지 않다고, 곧 괜찮아질 거라고. 친구는 내 추임새에 한참을 더 속을 풀어냈다. 나는 빈 찻잔에 따뜻한 차를 채워주었다. 친구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손을 꼭 잡아주었다.

2025-04-30

무창포 ‘신비의 바닷길’

밀물이나 썰물, 조수간만의 차라는 단어는 머릿속 지식수준이요, 지구와 달의 인력에 의해 생긴다는 상식으로만 알 뿐이다. 그러다 보니 바다가 갈라지고 육지와 섬 사이에 바닷길이 생긴다는 뉴스는 저세상 이야기인 듯 그저 신기해할 따름이었다. 우리나라 서해안과 남해안은 유독 수심이 낮은 바다란다. 수심이 얕은 바닷속 지형이 썰물 때 해수면 위로 드러나면 육지와 섬 또는 섬과 섬 사이에 바닷길이 생겨 마치 바다를 양쪽으로 갈라놓은 것처럼 보이는 바다 갈라짐 현상이 많다고 했다. 이를 ‘신비의 바닷길’이니 ‘모세의 기적’이니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바다 가운데로 떼지어 들어가는 뉴스 속 영상은 정말 신이했다. 평소 사람 많은 축제장에 휩쓸리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내 평생 한 번쯤은 나도 저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이 있었는데 며칠 전 이뤘다. 언젠가 이화회 모임에서 그곳을 가고 싶다는 얘기를 비쳤다. 엘라 할머니께서 간 적이 있다고 하셨고 우리 언제 한 번 가요 입을 맞췄다. 바닷길이 열리는 날이 정해져 있다며 숙소까지 예약하셔서 4월의 말 이화회 세 명은 무창포 여행을 감행했다. 무창포는 충남 보령의 바닷가였다. 해변에서 눈앞에 보이는 석대도까지 1.5km 바다 갈라짐 현상이 나타나 신비의 바닷길로 유명하다고 했다. 대구에서 세 시간도 넘어 걸리는 다소 먼 길이었지만 설레며 나선 길이라 내내 신났고 들떴다. 바닷가 바로 앞 숙소에서 내려다본 바다는 파도 넘실대고 있었다. 서해니까 얕은 바다겠지 짐작할 뿐 물색으로는 그 깊이를 가늠할 수도 없었다. 잘디잔 모래와 작고 둥근 색색의 자갈이 뒤섞여 있는 해안은 길었고 꽤 아름다웠다. 해안에서 머잖은 곳에 작은 섬 몇 개가 떠 있었다. 그 중 한 섬으로 바닷길이 생기고 내일 아침이면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그 열린 바닷길을 걸어 저 섬으로 걸어갈 수 있다니 반신반의할 뿐이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숙소 베란다에서 바다를 살폈더니 모래밭이 더 넓어지고 어젯밤엔 보이지 않던 암초 같은 것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시간대별로 비교해 보고자 사진을 찍는데, 해안가에서 섬 쪽으로 기다란 띠 같은 길이 어슴푸레 보였고 흥분이 밀려들었다. 과연 물때가 되자 해안가로부터 길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모여들고 엎드려 조개 잡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도 작은 바구니도 하나 들고 그들에 합류했다. 바닷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바위엔 연초록의 해초가 미끌거렸고, 돌 위엔 작은 고둥 같은 것이 붙어있었다. 사람들은 물 빠진 바다 위에서 돌을 헤집고 모래를 파며 제법 조개 따위를 찾아내느라 열심이었다. 올리브 할머니와 나는 지금 우리 바다 속에 있는 거 맞죠 연신 확인하며 흥분해했다. 조심히 딛는 발 아래 돌에 붙어있는 따개비 따위가 보였고, 떼어 바구니에 담기도 했지만 바닷길을 걷고 있다는 신기한 마음에 그저 섬으로 섬으로 걸어들어 갈 뿐이었다. 물결무늬가 선명한 모래 위를 디디면 단단해서 발자국도 남지 않았다. 한 시간 남짓 동안의 경험은 기이했다. 해변 가득 품어 안았던 저 바닷물은 어디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걸까. 물결무늬 선명하게 남긴 채 빠졌다 어디서 다시 들어오나.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다시 솟아오르나. 의문은 신비로 남을 뿐이었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4-30

한약의 과학적 효능, 어디까지 밝혀졌을까?

한약은 수천 년간 동아시아인들의 건강을 지켜온 전통의학의 핵심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는 그 효능과 안전성에 대해 ‘과학적으로 얼마나 검증되었는가’라는 질문이 따라붙는다. 전통 지식이 현대 과학의 언어로 얼마만큼 설명될 수 있는지가 중요한데 최근 한약의 과학적 연구로 그 효과가 객관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황기(Astragalus membranaceus)는 대표적인 예로 한의학적으로 기를 보강하고 면역을 높이는 효능이 있다고 전해진다. 현대 연구에 따르면 황기에는 폴리사카라이드, 사포닌, 플라보노이드 등의 활성 성분이 함유되어 있으며 이들이 면역세포인 대식세포나 자연살해세포의 활성을 촉진하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일부 연구는 암 환자의 보조 치료제로 황기를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도 제시하고 있다. 작약(Paeonia lactiflora)은 진통 및 진정 효과로 널리 쓰여왔으며 근래에는 그 안의 파에오니플로린 성분이 항염증 및 신경 보호 작용을 한다는 연구가 발표되고 있다. 이는 류마티스 관절염, 생리통, 신경통 등의 질환에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작약의 효능을 현대적으로 설명해주는 근거가 된다. 감초는 거의 모든 한약 처방에 등장하는 약재다. 감초의 글리시리진 성분은 항염, 항바이러스 작용뿐 아니라 간 보호 효과까지 보고된 바 있다. 흥미로운 점은 코로나 팬데믹 초기에 일부 연구자들이 글리시리진이 바이러스의 증식을 억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며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실험실 단계의 결과이며 임상적으로 안전하고 유효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검증이 필요하다. 이 외에도 유명한 약재들인 천궁, 당귀, 인삼, 오미자 등 다수의 약재들이 혈액순환, 항산화, 스트레스 조절, 간 기능 개선 등 다양한 생리 작용과 관련해 연구되고 있다. 그러나 과학적 검증이 이뤄지고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곧바로 임상에서 적용 가능한 것은 아니다. 한약은 단일 약재보다는 복합 처방을 중심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개별 약재 간의 상호작용이나 복합적 효능을 분리해서 연구하는 데에는 여전히 한계가 존재한다. 같은 약재라도 산지나 채취 시기 가공 방법 등에 따라 성분과 효과가 달라질 수 있어 표준화된 품질 관리를 위한 연구도 병행되어야 한다. 최근 주목할 점은 최근 연구들이 단순히 개별 약효를 밝히는 것을 넘어서 약리 작용 메커니즘을 분자 수준에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으로 경험과 관찰에 기반 했던 한의학의 이론이 현대 과학과 접목되어 구체화되고 있다는 의미다. 또한 동물실험, 세포실험, 임상시험 등을 통해 한약재의 효과가 재확인되면서 의학적 신뢰도도 점차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결론적으로 한약의 과학적 효능에 대한 연구는 이제 막 본격적인 길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전통의 지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인류의 지식 자산이며 이를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고 구조화하는 과정은 앞으로도 큰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다. 한약은 단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대 의학과 건강 산업의 미래를 풍요롭게 할 중요한 열쇠가 되고 있다.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5-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