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나는 두 항구 사이를 걸었다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을 무렵,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물 위에 줄지어 앉아 있는 수많은 요트와 어선이 차가운 지중해 바람을 따라 출렁거렸다. 마르세유는 그리스인이 세운 도시로 그들에게는 새로운 세계로의 관문이었다고 한다. 나는 새 지평을 열고자 희망에 부풀었을 누군가를 상상하며 마르세유 구 항구(Vieux-Port)를 걸었다. 부두를 걷다 보니, 마르세유의 대표적 상징 조형물인 파빌리온이 나왔다. 거대한 거울 지붕 구조로, 도시의 하늘을 반사하고 사람의 움직임을 담아내는 ‘움직이는 풍경화’로 유명한 공간이었다. 나는 주변 풍경이 빛과 어우러져 거울에 아름답게 반사되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었다. 건너편 마르세유 광장에서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고 있었다. 음악 소리가 흘러와 눈송이처럼 내 어깨 위로 내려앉고 사람들의 노래가 축복처럼 광장을 맴돌았다. 나는 화려한 조명 불빛이 도시를 감싸 안은 그 순간을 가슴속에 고이 간직했다. 해마다 겨울이 돌아오면 마르세유 광장에서의 추억이 떠오를 것이다. 언덕 위로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성당이 보였다. 어부들의 수호성인에게 바치는 기도처였다. 거센 파도 앞에서 두 손 모아 기원하는 것은 어느 나라든 같았으리라. 뱃사람들은 고깃배의 안전과 만선의 꿈, 무사히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신께 기도한다. 그것은 바다를 향한 간절한 기도이자, 가족과의 약속이다. 내가 살고 있는 포항을 떠올렸다. 동빈내항에 정박해 있는 어선과 갈매기 울음, 생선 비린내에 묻은 소금기, 죽도시장 상인들의 입담이 들려오는 듯해 마르세유 구 항구가 낯설지 않았다. 나는 분명 처음으로 프랑스 땅을 걷고 있는데, 동빈내항의 시간과 냄새가 뒤따라오고 있어 정겨웠다. 이 도시는 오래전부터 바다를 건너온 이방인들을 받아들였다. 북아프리카 지역과 유럽의 피난민들이 건너와 발자국을 겹겹이 남겼다. 그래서인지 골목길에 머무르고 있으니, 어디선가 북아프리카 사람들이 즐겨먹는 쿠스쿠스 냄새가 풍기고 아랍어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항구는 이방인들에게 처음은 낯선 곳이었지만, 결국에는 삶의 터전이 되었다. 생활의 뿌리를 내리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지만, 세월이 흐르고 언어가 섞이면서 문화적 다양성이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마르세유는 하나의 얼굴이 아닌 다채로운 얼굴로 살아가는 도시가 되었다. 포항과 마르세유는 닮은 듯했다. 동빈내항은 한국전쟁 직후 바다를 의지해 살아야 했던 이들의 출발점이었다. 그때는 항구가 곧 생존이었다. 마르세유처럼 동빈내항도 고단한 삶의 이주자들을 받아들였다. 시간이 흘러 포항종합제철을 중심으로 생계를 찾아 전국에서 모여든 이들이 정착했다. 용광로는 노동자를 불러 모았고 그의 가족들은 동빈내항 주변에서 생활했다. 고향 사람과 타 도시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의 서로 다른 억양과 습관이 모여 지금의 포항이 형성되었다. 본토박이들은 타지 사람을 배척하지 않고 모두 끌어안으며 제 몸처럼 품었다. 사물의 이치는 한결같으리라. 바다는 경계를 가르지 않고 흘러들어온 강물과 뒤섞여 움직인다. 이처럼 항구 도시는 항해자들을 수용하고 포용하며 마음을 연다. 마르세유와 포항이 외지인들과의 상생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온 것처럼, 앞으로도 도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삶의 결을 어루만지는 노력이 끊이지 않아야 할 것이다. 공동체란 벽을 두는 것이 아니다. 도시에서 함께 살아갈 집의 새로운 지붕을 같이 짓는 일이다. 지역에서 오래 뿌리내린 현지인과 이주민이 각자 개성이 넘치는 문화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어우렁더우렁 공존하는 길을 모색한다면 더욱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을 성싶다. 그것이 항구를 품은 도시의 진정한 삶일 것이다. 바다는 항해하는 자들을 데려가고 다시 데려온다. 마르세유의 짙푸른 바닷바람을 느끼며 동빈내항으로 돌아올 날을 생각했다. 두 항구는 서로를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 둘 사이를 걸었다. 내 발걸음마다 그리움의 흔적을 남겼다. /정미영 수필가

2025-08-13

명상과 침치료 뇌파를 바꾼다

스트레스와 긴장으로 인한 불면, 불안, 두근거림, 소화 장애 같은 증상을 겪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지만 몸이 보내는 신호는 분명히 이상하다. 병원 검사를 해도 별다른 문제가 안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런 증상들 대부분은 자율신경계의 균형이 무너졌을 때 나타난다. 한의학에서는 이 자율신경의 흐름과 장부의 기능 정서의 상태까지 함께 고려해서 접근하고 큰 효과를 보고 있다. 자율신경계는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으로 나뉜다. 교감신경은 긴장, 각성, 활동을 담당하고 부교감신경은 이완, 회복, 수면, 소화 등을 담당한다. 이 둘이 균형을 이룰 때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데 현대인들은 일상에서 계속되는 자극과 정보 속에 살기 때문에 교감신경이 늘 흥분된 상태에 놓이기 쉽다. 이 상태가 길어지면 수면의 질이 떨어지고 만성 피로, 소화불량, 가슴 두근거림, 불안, 집중력 저하 같은 다양한 문제가 생긴다. 이런 상황에서 주목할 만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명상이다. 명상은 단순히 눈을 감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뇌파를 긴장 상태인 베타파에서 이완 상태인 알파파나 세타파로 유도해주는 강력한 도구다. 호흡을 천천히 고르게 하면서 감각을 내면으로 돌리는 것만으로도 신경계는 반응하기 시작한다. 심박수와 혈압이 낮아지고 몸 전체가 회복 모드로 전환된다. 뇌에서는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변연계의 흥분이 줄어들고 전두엽의 조절 기능이 살아나면서 감정이 안정된다. 하지만 명상이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몸에 긴장이 가득한 상태에서는 명상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어렵다. 앉아 있으려 해도 초조하고, 잡념이 끊이지 않는다. 이럴 때 한방치료 특히 자율신경에 직접 자극을 하는 약침치료가 자율신경 조절에 큰 도움이 된다. 성상신경이나 미주신경 익구개 신경절에 있는 혈자리를 약침으로 자극하면 뇌와 장기 사이의 긴장된 신경 회로가 부드럽게 풀리기 시작한다. 약침을 맞고 나면 정신이 맑아지거나 긴장된 게 풀리면서 잠이 스르륵 오기도 한다. 이건 부교감신경이 서서히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여기에 더해 자율신경을 안정시키는 한약을 병행하면 치료의 지속성과 깊이가 달라진다. 대표적인 처방들에 들어가는 약재들은 복령, 시호, 치자, 황련 등이 있고, 이들 한약은 심장과 간 신장의 기능을 회복시키고 몸 안의 기혈 흐름을 부드럽게 하며 정서적인 안정감을 높여준다. 단순히 불안함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뿌리 깊은 원인을 해결하는 방식이다. 명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훌륭한 자기치유법이지만 몸과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오히려 명상 자체가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다. 이럴 땐 억지로 혼자 해보려 애쓰기보다 우선 간단한 걷기나 운동 혹은 스트레칭을 통해 몸을 이완시킨 후 명상에 드는 것이 좋다. 5분 10분 천천히 명상의 시간을 늘려 나가면 된다. 만약 안정이 안된다면 한약과 약침으로 몸의 긴장을 먼저 풀어주는 게 빠른 길이 될 수 있다. 명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깊은 이완과 집중의 상태는 한방치료와 함께할 때 더 안정적으로 더 깊게 접근할 수 있다.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5-08-13

방학을 방학답게!

평소 손주들의 하교를 친외할머니가 번갈아 가면서 도왔다. 정한 시간에 학교 돌봄교실에 가서 애들을 마중하고, 약간의 간식을 먹이며 학원에 데려다주었다. 방학이 되면 문제가 좀 복잡해진다. 누군가는 종일 집에서 돌봐주고 애들은 방학 내내 학원 뺑뺑이를 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학교 돌봄교실에 보낼 수밖에 없다. 3학년인 손자는 그렇게 2년, 4번의 방학을 보냈다. 방학이 되어도 학교엘 가야 하니 이게 무슨 방학이야 툴툴 볼멘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안쓰러워 영화관엘 데려가는 일탈을 감행하면 그렇게나 좋아했다. 7월, 여름방학이 다가오자 며느리는 아이들의 방학 중 스케줄을 짜느라 몇 날 며칠 골머리를 앓는 것 같았다. 도리없이 돌봄교실과 방과 후 수업을 선택할 것이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학원 순례. 손주들은 올 여름방학을 또 그렇게 보낼 게 뻔했다. 이번엔 내가 며칠을 고민한 후 통 큰 결단을 해 아들 내외에게 알렸다. 이번 방학엔 애들에게 방학을 방학답게 누리게 해주자. 돌봄교실도 방과 후 수업도 신청하지 말고 다니던 학원도 최소화해라. 예전 내가 초등학교 다닐 적 시골 외갓집, 이모집에 가서 한여름을 보냈듯이, 아예 할머니집에서 방학을 지내도록 해보자. 꼭 다녀야 할 학원은 직접 데려다줄게. 의외로 선선히 내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평소 세 군데 학원을 한 곳으로 줄이는 용단도 내렸다. 난 나대로 애들과 함께 할 방학 버킷리스트를 열심히 짰다. ‘동굴 탐험’, ‘고양이 카페가기’, ‘선비체험’, ‘미술관 가기’, ‘마술 배우기’, ‘대구시티투어버스 타기’ 등등. 그런데 예상보다 빨리, 어느 날 밤 두 아이가 짐을 잔뜩 챙겨들고 예고없이 들이닥쳤다. 그렇게 아이들의 할머니집 방학살이가 시작되었다. 아이들에게도 방학 중 버킷리스트를 메모해보라고 했다. 손자는 ‘시내 가서 놀기’, ‘음식 만들어 먹기’, ‘그냥 책읽기’, ‘매미잡기’, ‘할머니와 글씨연습’, ‘놀기 놀기 놀기’. 손녀는 ‘바다에 가서 해뜨는 모습 보며 높이뛰기’, ‘아지트 만들기’, ‘딱 하루 뒹굴거리기’. 방학 중 하루 일과표도 셋이 머리 맞대고 같이 짰다. 7시 반에 일어나고, 8시에 아침 먹고, 11시에 EBS 보기, 9시 반에 자기. 그리고 하루 한 시간 정도 공부 시간을 상의하고 정했다. 그 이외의 시간은 맘대로 하라고 했더니 ‘놀기 놀기 놀기’로 도배를 했다. 그래 그래 그러자. 방학이잖아... 크게 프린트해서 벽에 붙여두었다. 방학이 두 주나 지났다. 그 사이 스파게티와 또띠야피자를 만들어 먹었고, 뒷방은 아지트로 내줬다. 고양이카페에도 가봤다. 지난 토요일엔 벌레잡기를 대신해 예천곤충체험관엘 다녀왔다. 예전부터 알고 지낸 마술사와 약속을 잡아, 오늘 카페에서 두 시간 남짓 마술을 보고 배웠다. 집에 오자마자 손자는 할아버지에게 마술쇼를 펼치고, 손녀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일기부터 썼다. 이렇게 버킷리스트는 하나씩 체크되는데, 하루일과표는 절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아침엔 늦잠이 일쑤고, 놀기 시간이 아니어도 놀고 공부시간에도 논다. 뭐 어때 봐 준다. 방학이니까…. 손자는 할아버지와 한 침대에서, 손녀는 내 품에 안겨서 잠드는 행복은 덤이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8-13

조국의 사면과 무너진 공정

상식을 가진 국민들의 의사에 반하는 조국 전 법무장관의 사면이 최근 결정됐다. 이재명 대통령에 의해서다. 실망스럽다. 조국 전 장관은 의사가 될 역량을 가지지 못한 딸을 각종 편법과 불법을 동원해 의사가 될 자격을 갖춰주려 했고, 아내인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와 함께 아들 시험의 답안을 대신 써주는 부정한 행위를 저질렀다. 과거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입버릇처럼 자신이 통치하는 동안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 했다. 조국 씨는 문재인 정권에서 청와대 민정수석과 내각 법무장관을 지냈다. ‘공정’이란 공평하고 올바름을 의미하는 단어란 걸 초등학생도 안다. 조국 씨의 행위가 공정했나? 대답은 뻔하다. 그럼에도 문재인 씨는 자신을 찾아온 이재명 대통령실 정무수석에게 “조국을 사면해 달라” 요청했다. 한심하다. 오죽했으면 민청학련 출신의 노정객 유인태 씨가 “참으로 염치없다”며 핀잔했을까. 조국 전 장관의 사면에 찬성하는 이들은 말한다. “수사와 기소 과정에서 검찰권이 남용됐고, 전수 조사를 하면 조국 정도의 편법과 불법을 사용해 자식을 조력한 장관과 국회의원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맞는 이야기일 수 있다. 그렇다면 기간을 한정하지 않고, 의심 가는 행적을 보인 전·현직 장관과 국회의원을 모두 조사한 후 재판에 넘겨 저지른 죄만큼 벌을 주면 될 일이다. 그런 걸 하라고 검사가 있고, 경찰이 있는 것 아닌가. 갖가지 이유를 들이대고 이런저런 사정까지 봐줘가며 죄 지은 자를 대통령 맘대로 풀어주는 것. 잘못 사용된 사면권은 시민의 피로 애써 만들어낸 ‘법에 의한 통치’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행위가 아닐까?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8-13

갑을문화 소멸선언

모두 ‘갑을관계’에 익숙하다. 모든 업무에서 갑은 언제나 상위의 위치를 차지하고 을은 그에 종속된다. 위계적 구조는 민간기업 사이에서 그치지 않고, 공공영역과 나아가 조직 내부의 관계 전반에 스며들어 있다. 직위, 연령, 경력, 출신 배경 등 외형적인 요소가 갑과 을을 규정하며 그에 따라 업무 관계가 형성된다. 갑을 구분은 전문성이나 성실성 등 본질적 기준보다 앞서 작동한다. 파면된 전 대통령을 대상으로 한 특검의 수사 과정에서도 한 장면이 포착됐다. 피의자 측이 경찰의 신문은 거부하고 특별검사가 직접 신문하길 요구했다. ‘검찰은 갑, 경찰은 을’이라는 인식이 작동했다는 점에서 씁쓸하다. 공권력 조직 안에서 상하관계로 계급화된 문화는 기관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훼손한다. 갑을관계가 작동하는 조직에서 의사결정의 흐름은 비논리적으로 흐른다. 갑이 내리는 지시나 요구는 을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기대하고 업무구조는 비판적 사고와 창의성을 억압한다. 을이 실질적인 지식이나 경험을 가졌더라도 감히 갑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정책이든 사업이든 수준높은 전문적 논의와 협력이 이뤄지기 어렵고 비합리적인 의사결정이 반복된다. 결과적으로 구성원의 역량과 전문성을 경시하게 만든다. 성실히 일하는 사람들의 노력이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면서 조직 전체의 사기는 자연히 떨어진다. 상사의 말 한마디가 절대적 기준이 되는 환경에서는 역량보다 눈치와 충성이 더 중요하다. 실적과 성과보다는 줄을 잘 서는 것이 생존의 방식이 된다. 유능한 사람은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관성과 위계에 길들여진 조직의 풍경만 남는다. 갑을위계는 스트레스의 원인이기도 하다. 상호 신뢰보다는 억압과 불신이 조직을 지배한다. 서로 협력하기보다는 눈치를 보며 경쟁하게 되며 건강한 조직문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내부의 역학은 갈등으로 점차 무거워지고 고스란히 조직전체의 비효율로 되돌아온다. 갑을문화가 업무적 관계를 규정하면 누구의 기여가 어떻게 평가되는지도 모호해진다. 공정한 보상과 인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진정한 리더십도 자리잡지 못한다. 갑을풍토에서 유능한 인재가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없어 조직은 지속적으로 활력을 잃는다. 사회는 갑을로 돌아가지 않는다. 신속하고 유연한 의사결정, 서로를 존중하는 협력시스템과 전문성을 기초로 하는 효율적 판단이 중요하다. 부당한 권위에 복종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걌다. 그럼에도 우리의 업무환경은 갑을관계를 문화적 기초로 삼는다. 바꿔야 할 것은 사람보다 시스템이다. 직위나 지위, 배경이나 학벌이 아니라 전문성과 성실성에 기반하는 관계를 형성하고 평가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누구나 자신의 위치에서 맡은 역할에 책임을 다하고 적절하게 존중받는 업무환경이 자리를 잡아야 한다. 정부든 기업이든 업무조직 내외부 어디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당신에게 을이었던 상대방은, 당신은 여러 여건상 할 수 없는 그 일에 최선을 던지는 전문인이 아닌가. 조직의 성격이 무엇이든 조직의 위치와 상관없이 구성원 모두의 자리에서 최상의 역량이 최고의 수준으로 발휘될 때, 관련된 조직들의 역량이 살아나고 전문성이 빛을 발할 터이다. 갑을문화는 사라져야 할 구태 중의 구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08-13

철강 산업을 다시 세우기 위한 정부와 국회의 역할

1970년대 영일만 바닷가에 세워진 포항종합제철(포스코)과 포항철강산업단지는 ‘한강의 기적’을 가능하게 한 우리나라 산업화의 산실이다. 특히 포항철강산단은 정부의 공업 입국 정책에 따라 포항제철의 태동과 함께 연관 산업을 유치하고 철강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국내 최초의 지방공업단지로 지정된 이후 국가 경제 도약의 발판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우리 선배들과 동료들의 피땀으로 일군 포항의 철강 산업은 반세기 수많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국가 산업화를 견인한 자부심과 혼이 깃들어 있다. 포항에서 생산된 철강 제품은 건설, 자동차, 조선 등 전후방 산업의 소재로, 오늘날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대한민국 제조업의 토대가 됐다. 그러한 포항의 철강 산업이 지금 글로벌 경기 침체, 중국산 저가공세, 산업용 전기료 인상, 미국의 고율 관세 등 이제껏 겪어 보지 못한 복합적인 원인으로 인해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다. 지역 내 철강업체 상당수가 가동을 멈췄고, 공장 문을 닫은 기업도 늘고 있다. 대기업조차 구조조정에 들어갔고, 중소업체들은 중대한 경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로 인한 고용 감소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으며, 지역 경제는 심각한 침체의 늪에 빠졌다. 산업 일터와 골목상권 등 생계 현장에서는 ‘IMF 때보다도 더욱 힘들다’며 전례 없는 위기로 인해 지역 전체가 생존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호소하고 있다. 국가 기간산업인 철강의 위기는 개별 기업이나 특정 지자체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문제다. 따라서 지역의 산업계와 포항시, 유관 기관단체들은 뜻을 모아 정부 차원의 종합 지원을 담은 철강산업 지원 특별법의 조속한 제정과 산업위기 선제대응지역으로 즉각 지정해줄 것을 지속 호소하고 있다. 이 밖에도 정부의 보조금과 재정지원, 전기료 인하, 탄소 감축 설비투자 지원, 중소기업과 중견기업의 연구개발 지원 등 실효성 있고 폭넓은 지원책 마련도 촉구하고 있다. 다만 정부와 국회는 지금의 위기 상황을 얼마나 절실하게 인식하고 있는가. 철강 산업의 기반 자체가 붕괴할지 모른다는 냉혹한 현실의 경고음이 울리는 사이, 여당은 ‘노란봉투법’ 통과를 외치고, 야당은 이를 막기 위해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로 시간을 끌고자 한다. 법안 하나를 두고 정쟁을 반복하는 동안, 산업을 되살릴 수 있는 골든타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다. 지금 정부와 국회가 해야 할 일은 정쟁이 아니라 현실에 기반한 입법과 정책 대응이다. 우선 철강품목 고율관세(50%) 유지에 따른 대미수출 철강기업 피해 최소화를 위해 여야가 모처럼 공동 발의한‘K-스틸법(철강산업 경쟁력 강화 및 녹색철강기술 전환을 위한 특별법)’제정이 급박한 상황이다. 동시에 산업용 전기료 인하, 금융·세제 지원, 기업 구조조정의 고용 연계 책임 강화 등 실질적인 방안 또한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 기업 역시 책임 있는 경영으로 위기에 처한 지역과 산업 생태계를 함께 살리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철강 산업의 위기는 단순한 포항만의 위기가 아니라 대한민국 제조업 전체가 무너지는 신호탄이며, 국가 경쟁력의 약화로 이어질 수 있는 중차대한 사안이다. 정부와 국회는 현실을 엄중히 직시하고 벼랑 끝에 선 철강 산업을 지킬 책임을 다해야 할 중요한 시기다. 다시 한 번 정부와 국회가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철강 산업을 다시 일으켜 세워 세계적인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특단의 법적‧제도적 뒷받침을 마련해 주실 것을 호소한다. /전익현 포항철강산업단지 관리공단 이사장

2025-08-12

금단

올여름 내 몸은 전혀 예상치 못한 신호를 보냈다. 이유 없이 심장이 두근거리고 밤이면 눈꺼풀이 무거워져도 잠이 오지 않았다. 숨이 가빠지는 순간마다 가슴속 어딘가에서 작은 종이 울렸다. 병원 진료를 받으니 의사는 ‘자율신경계 불균형’이라고 했다. 교감 신경이 필요 이상으로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며 마치 경계 태세를 풀지 못하는 병사 같다고 설명했다. 평생 괜찮다며 달려오던 몸이 이제는 더는 그렇게 살 수 없다고 은밀하지만 단호하게 경고한 순간이었다. 가장 먼저 내렸던 결정은 커피와의 이별이었다. 아침마다 주방에 들어서면 커피를 내렸다. 뜨거운 물줄기 위로 피어오르는 향기는 하루를 여는 기지개였다. 검은 물결 속에 흩어지는 갈색 거품을 바라보는 그 몇 초는, 나만의 고요한 의식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 의식을 중단해야 했다. 한 모금만 마셔도 심장이 두 배 속도로 뛰었고 숨이 가빠졌다. 아무리 ‘마임드 콘트롤’을 해 보아도 자의적으로 조절이 되지 않았다. 의사도 커피는 안 되겠다고 했다. 오래된 친구를 문밖으로 내모는 것만큼 서글픔이 밀려왔다. 커피 없는 아침은 텅 비어 있었다. 몸은 불안했고 마음은 허전했다. 마트 진열대에 놓인 원두봉지들이 풍기는 향은 마치 나를 시험하는 유혹 같았다. 텀블러 속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를 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본능적으로 손끝이 근질거렸다. 나의 커피 습관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었다. 늘 바쁜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기폭제였고 위로였다. 그것이 사라지자 몸뿐 아니라 마음에서도 금단현상이 찾아왔다. 그러다 문뜩 깨달았다. 커피만이 아니었다. 살아오면서 나는 알게 모르게 많은 것들을 놓아왔다. 결혼 후 혼자만의 여행은 먼 꿈이 되었고, 아이를 키우는 동안 책 한권 여유롭게 읽는 시간조차 사치였다. 좋아하던 피아노 건반을 만져본 지는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흐릿하다. 합창단의 단원으로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불러본지는 손으로 꼽기도 힘들 정도로 가물하다. 어느날 친구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를 듣다가 잊고 있었던 손끝의 설렘이 되살아났다. 그 순간 깨달았다. 커피처럼, 삶은 나에게서 많은 것을 조금씩 떼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놓음의 이유는 다양했다. 커피를 놓은 건 건강을 위한 나의 결정이었지만 다른 많은 놓음들은 내 선택이 아니었다. 상황이, 책임이, 혹은 나이 듦이 조용히 빼앗아 간 것들이었다. 피아노, 책, 느긋한 저녁 산책···. 그것들은 내 의지가 아닌 삶의 흐름에 휩쓸려 떠나간 것들이었다. 그 부재 앞에서 느끼는 허전함과 초조함은, 커피 금단이 주는 감정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금단은 불편하다. 몸과 마음이 저항하고 자꾸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 불편함 속에서만 피어나는 가능성도 있다. 커피 대신 나는 허브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물맛 같아 밋밋했지만 어느 순간 레몬밤과 케모마일 향이 은근히 스며드는 걸 느꼈다. 피아노 대신 노트북을 펼쳐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 속에서 오래된 나의 목소리를 다시 찾았다. 몸이 보내온 경고로 나는 커피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빈 자리는 빨리 다른 것으로 채워졌다. 여전히 커피향을 맡으면 가슴이 설레지만 나는 안다. 놓는 것이 반드시 잃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어떤 금단은 새로운 나를 만나게 해주고 오래 잊고 있던 나를 불러낸다. 오늘도 나는 커피 잔 대신 따뜻한 허브차를 손에 쥔다. 향은 옅지만 그 옅음 속에 이상하게도 마음을 가라앉히는 힘이 있다. 창밖을 바라보면 잃어버린 것들이 남긴 빈자리 위로 부드러운 빛이 조용히 내려앉는다. 예전의 나는 그 빈자리를 애써 매우려 했고, 매우지 못하면 불안해했다. 하지만 이제는 비워진 자리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간다. 금단은 우리를 잠시 멈춰 세웠다. 무엇인가를 내려놓고 난 자리에서 우리는 그동안 지나쳐 온 마음의 결을 천천히 들여다보게 된다. 때로는 그것이 상실의 슬픔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새로운 길을 발견하는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커피를 내려놓으며, 놓는다는 것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일이라는 것을. 내 안에서 커피의 자리는 허브차가, 피아노의 자리는 글이, 떠나간 시간의 자리는 다시 나를 만나는 시간으로 채워지고 있다. 언젠가 이마저도 떠나보내야 할 때가 오겠지만 그때 나는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삶은 그렇게 끊임없이 놓고 다시 채우는 과정 속에서 이어진다. /김경아 작가

2025-08-12

대세르비아주의의 탄생:암흑기 세르비아의 빛

세르비아 민족주의는 민족의 정체성과 세르비아 민족에 대한 단초가 될 만한 요소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스만트루크제국의 압제 42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자의든 타의든 세르비아가 독립을 맞이하면서 세르비아 공국-세르비아왕국을 거쳐 민족이라는 장대한 용어가 사건과 역사와 인물이 조화를 이루어 화려한 부활을 맞는다. 19세기 중엽 수도사인 부크 카라지치(1787~1864)는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출발하는가?’ 등 자문자답하며 세르비아인에 대한 미래에 해답을 찾았다. 그는 언어학에 몰두하면서 발칸반도에 한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원대한 꿈을 꾼 인물이다. 그 뒤를 이어 정치가 가라샤닌(1812년~1874년)의 노력으로 민족주의가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른다. 그는 오랫동안 대세르비아주의 이념에 몰두했다. 그리고 가슴을 쿵쿵 두드리는 위대한 인물과 사건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세계가 우리(We)와 그들(They)로 규정될 때 가라샤닌을 비롯해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역사에서 코소보 전투를 살려냈다. 정의를 내걸었지만, 편향된 애국심이 가슴에 요동쳤고, 권력자 구미를 당겼다. ‘이교도와의 최후의 성전’은 민족주의 발흥에 있어 완벽한 조건을 두루 갖춘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때부터 유대인에게 예루살렘이 있다면 세르비아인에게 코소보가 성지로 거듭났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중세 발칸을 호령했던 듀산황제가 거느렸던 영토적 개념이 세르비아뿐이라면 별 문제가 없었다. 타 공화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세르비아인의 국가를 향한 군사적 저항을 정당화해버린다. 이제 더 필요한 것은 없었다. ‘검은 새의 들녘’ 코소보는 세르비아 민족 성지로 거듭났고, 20여 년 남짓 제국을 구축했던 듀산황제는 세르비아인 영원한 황제로, 코소보전투가 벌어졌던 1389년 6월 28일은 성 비투스의 날이자, 영원히 기록되어야 하는 성전의 날로 탄생했다. ‘강자 스테판 듀산!’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에 민족이라는 의기에 요동쳤고, 민족 이상에 상처를 내는 일에는 자동적 분기탱천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고구려 광개토대왕을 잊지 못하듯 세르비아인으로서는 민족주의라는 의기가 가슴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역사적 인물들을 세르비아민족주의의 영원히 빛나는 별로 새겨 넣었다. 그리고 이것이 훗날 살육의 싹이 자라났다. 스테판 듀산이 거느렸던 영역은 세뇌당한 국민 머리에도 반드시 차지해야 할 상징적인 국경선이 되어 버렸다. 20세기에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2차 세계대전에 이어 유고슬라비아 학살전쟁, 더 나아가 20세기 가장 더러운 보스니아전쟁과 코소보 살육전 신념으로 거듭나게 된다. 대세르비아주의라는 망령은 이렇게 해서 창조된 후 도미노처럼 연이은 사건으로 세상을 경악시켰다. 물론 세르비아로서는 억울한 면도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 극우민족주의 우스타샤 정권이 나치 지원 아래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에 살던 세르비아인 35만 명을 학살했던 상처는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이 자신들만 핍박해대니 억울하고 원통할 지경이다. 성지라고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던 코소보에 이방인들이 들어와 진을 치고 나라를 세웠다며 국제사회에 선언해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바가지로 물을 퍼내면 금세 다른 물이 채워지듯 네마냐 왕조가 이슬람제국에 멸망한 후 코소보에 살던 일부 세르비아인은 압제를 피해 지금이 수도 베오그라드를 비롯해 노비사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지로 몸을 피했다. 그러자 떠나고 난 빈집에 오스만제국이 평정한 알바니아계 이슬람이 몰려들어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코소보 땅에 알바니아인이 80% 이상을 차지하면서 자신감이 붙는다. 나아가 자주적 독립 국가를 선언하며 국경을 긋고 세르비아를 자극했다. 일촉즉발의 순간, 국제사회 동의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냉혹하기만 한 국제사회는 먹을 것 없는 코소보에 독립국가가 세워지든 말든, 폭력이 자행되던 말든 관심 두지 않았다. 그러자 알바니아계 민족주의자들은 세계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자민족 희생을 미끼로 걸었다. 코소보 내 세르비아인 경찰을 살해해 의도적인 폭력을 부추겼다. 울고 싶은 놈 뺨을 갈겨준 대가는 혹독했다. 알바니아계 민족주의자가 원하는 대로 세르비아는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를 향한 제노사이드를 감행했다. 알바니아계가 의도한 대로 자민족을 희생양으로 삼아 국제사회 관심을 끄는 것에 성공한다. 나토의 개입이 본격화 되자, 세르비아로서는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민족을 위해서라면 역사를 위조하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선동과 폭력이 확산되고, 결국 처참한 상처로만 남는다. 알바니아 내 세르비아인 학대가 일어나며, 몬테네그로 내 알바니아계에 대한 핍박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게다. 그리고 크로아티아에서 살아가는 세르비아인 역시 바늘방석이다. 만약 신이 있다면 인간이 얼마나 멍청한지를, 또한 악랄해질 수 있는지를 실험 중일 것이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5-08-12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꾸는 능력

‘레몬이 생기면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라’라는 영어 속담이 있다. ‘인생이 당신에게 레몬(신맛, 불쾌한 것)을 주면, 그것을 달콤한 레모네이드로 만들어라’라는 의미다. 어리석은 사람은 인생으로부터 레몬을 건네 받으면 단념하고, “어쩔 수 없어, 운명이다. 기회가 없어”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주위 상황을 탓한다. 하지만 현명한 사람은 레몬을 건네 받고 ‘이 불행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 레몬을 어떻게 레모네이드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예상치 못한 불운, 역경, 실패와 마주했을 때 그 상황을 활용해 긍정적이고 유익한 결과로 바꾸라는 뜻이다. 기업에서 보면,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꾸는 능력’은 여러 분야에서 다르게 불리지만, 본질적으로는 ‘역경 전환 능력’ 또는 ‘전환력(轉換力)’, ‘회복 탄력성’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불리한 상황, 손실, 실패를 오히려 유리한 기회나 성과로 바꾸는 힘이다.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꾼 한 여성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뉴욕시 모닝사이드 거리 100번지에 살고 있는 ‘델마 톰슨’이라는 여인은 “세계전쟁 당시 제 남편은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모하비 사막 근처의 육군으로 배치되었고, 남편과 함께 지내기 위해 그곳에서 살기로 했습니다. 남편은 군사작전으로 출동하여 혼자 남았고, 모래 사막과 선인장만 보이고 50도가 넘는 모하비 사막은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삶이 너무도 힘들고 차라리 감옥에 있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부모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아버지는 두 줄로 된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두 사람이 감옥 창살 밖을 내다보았다. 한 사람은 땅의 진흙탕을 보았고, 다른 한 사람은 하늘의 별을 보았다.” 이 단 두 줄의 글이 여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하늘의 별을 보기로 마음 먹고, 현재 처한 상황에서 좋은 면을 찾기로 한 것이다. 모하비 사막에 사는 인디언과 멕시코계 사람들과 사귀게 되고,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돈을 주고 산다고 해도 팔지 않았던 모하비 사막의 매력적인 형태의 선인장과 북미 원산의 다년생 관목인 유카(Yucca)를 선물 받았다. 후에 관상용, 조경 식물산업으로 수익 창출이 되었고, 수 만 년 전에 해저였던 사막 모래에 감춰진 조개의 비밀을 연구하고, 그 연구 결과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여인은 유명인이 되었다. 무엇이 이토록 상황을 변화시켰을까? 모하비 사막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인디언도 그대로였다. 단지, 그 여인이 마음의 태도를 바꾼 것뿐이다. 우리는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꾸고자 하는 단순한 시도를 통해 뒤가 아닌 앞을 보게 된다. 주어진 상황을 탓하며 부정적이던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이것은 창조적인 에너지를 발산하고, 바빠지도록 자극하여 지나간 일, 끝난 일 때문에 슬퍼할 시간과 마음이 없도록 할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얻은 것을 활용하는 것보다 손해를 이익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려면 레몬을 레모네이드로 바꾸는 지혜가 필요하고, 그것이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를 가져오는 것이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2025-08-12

넘치는 복을 주시는 박필근 할머니

“복 많이 받으세이~ 젊을 때 마이 노소~ 나도 젊을 때는 날아 댕겼니더.” 오랜만에 뵌 박필근 할머니는 여전히 우리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복을 나눠주셨다. 짧은 만남 동안에도 계속해서 “복 받으라”라는 말씀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이미 박필근 할머니로부터 너무도 많은 복을 받아왔다는 것을. 할머니는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늘 주위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복된 말씀을 건네시는 분. 내가 알고 있는 박필근 할머니는 그런 분이다. 8월 초, 숨 막히는 더위 속에 할머니를 다시 찾은 이유는, 싱가포르 매체 스트레이츠 타임즈(The Straits Times) 에서 202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80주년과 8월 14일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의 날을 맞아 일본군 전시 성노예 피해자분들을 기획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다른 생존자분을 인터뷰한 웬디 테오 특파원은 “오늘 할머니 컨디션은 어떠세요?”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부분 생존자분이 백 세에 가까운 고령이시고, 더위도 심해 나 역시 오늘 할머니의 상태를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할머니는 긴 평상 끝에 놓인 의자에 앉아, 마치 세월을 낚듯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어디서 왔노?”라고 반가워하시며, “서울서 나 보러 왔단 말이가”라며 연신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동행한 기자님도 할머니의 환대에 감동해 몸 둘 바를 몰라 했고, 우리는 함께 칼국수도 먹고, 마트에 들러 장도 보며 소소하지만 따뜻한 시간을 보냈다. 이어진 인터뷰에서, 기자님은 피해 사실을 직접적으로 묻지 않았다. 아픈 기억을 굳이 꺼내지 않으려는 그 배려에 나도 고마움을 느꼈다. 대신, 일본 정부에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사과를 받고 싶은 마음이 아직 있는지를 조심스럽게 여쭈었다.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자 소용없니더.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뉴스를 꼬박꼬박 챙겨보시며 “나는 일본에 사과도 받고 싶고, 배상도 받고 싶다”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던 그 할머니셨다. 그런 할머니가 이젠 “다 소용없다”라고, “이제 곧 죽는다”라고 되풀이하시는 모습에 우리는 말 없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오는 8월 14일은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의 날’이다. 올해 포항여성회에서는 환호공원에 세운 평화의 소녀상 건립 10주기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10년 전, 포항에서는 많은 시민들께서 마음을 모아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며, 참으로 뜻깊은 순간을 함께했다. 하지만 지금, 서울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은 바리케이드에 갇혀 보호받고 있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그 사이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하염없이 기다리시던 수많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고, 이제 박필근 할머니를 포함해 생존해 계신 피해자는 단 여섯 분만이 남아 계신다. 다가오는 8월 14일, 다시금 혐오와 조롱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우리 모두 따뜻한 관심과 존중으로 할머니들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그분들이 살아 계신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연대와 기억을 다 할 수 있기를. /김은주 포항시의원·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2025-08-12

중대재해 극약처방, 후폭풍 감당할 수 있나

“모든 산재 사망 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직보하라.” 지난 9일 휴가에서 복귀한 이재명 대통령이 참모들에게 처음으로 내린 지시 사항이다. 전날 경기 의정부 DL건설 아파트 공사장에서 50대 노동자가 추락해 사망한 사건을 보고 받고 나온 주문이다. 건설현장 사망사고가 연이어 발생하자, 대통령이 직접 실시간 챙기겠다는 의미다. 중대 재해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려는 대통령의 문제의식은 충분히 타당성이 있고 공감이 간다. 소년공 생활을 겪어본 이 대통령에겐 산재 사고가 남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실제 우리나라 중대재해 사고 발생 건수는 심각한 수준이다. 지난해는 매일 2명 이상 산재 사고로 사망했다는 통계도 있다. 특히 건설업의 산재 사망률은 다른 업종은 물론 선진국에 비해서도 몇 배 높다. 대통령이 직접 나설 정도로 긴급대책이 필요한 상황인 것은 맞는 것 같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국무회의에서 포스코이앤씨의 잇따른 공사현장 사망사고를 두고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책했다. 그 뒤 이 회사의 고속도로 공사현장에서 외국인 근로자 심정지 사고가 또 발생하자 “면허취소 등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 이후 건설업계는 산재 불안감으로 인해 공포 분위기에 휩싸여있다. 대구시내에서도 포스코이앤씨가 시공중인 아파트 건설현장 4곳이 중단된 상태다. 우리나라는 지난 2022년부터 최고 경영자에게도 산재의 형사 책임을 묻는, 세계에서 유례없는 강경한 중대재해처벌법을 시행 중이다. 그렇지만 이 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중대재해가 줄어들지 않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현장의 안전 불감증이 주요 산재 원인이겠지만 건설업계의 하도급 시스템, 외국인 근로자의 소통 문제, 고령 인력 등의 구조적인 이유도 있다. 특히 위험도가 높은 공사장에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외국인 근로자가 주로 배치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건설업계뿐 아니라 지난 2024년 1월 27일부터 중대재해처벌법이 5인이상 모든 사업장에 확대 적용됨에 따라 대구·경북지역 영세기업들도 매일 초비상 상태다. 금형·주물업 등 대구시내 공단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뿌리산업 사장들은 매일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기분으로 근무한다고 한다. 뜨거운 쇳물이나 무거운 금속을 다루는 공정이 있는 업종이 많아 직원들이 잠시만 방심해도 산재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재 발생 가능성이 상존하는 조선·철강·화학업종의 대기업 CEO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문제는 중대재해법상 형사처벌 근거가 되는 경영진 과실의 범위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의도를 가진 ‘고의 과실’이나 ‘중대한 과실’이 아니더라도 재해만 발생하면 대부분 경영진 과실로 인정될 가능성이 크다. 중소기업 중에는 만약 사고가 나서 사장이 구속되면 그날로 사업을 접어야 하는 업체가 대부분이다. 자연적 근로자와 그 가족의 생계도 막연해진다. 극약처방만으로 산재사고를 막는 방법은 뿔 바로잡으려다 소를 죽이는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할 가능성이 크다.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2025-08-12

모병제 시대 올까

전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보다 병력 수를 늘리는 것이다. 전투원의 손실은 고려치 않고, 많은 전투원을 한곳으로 빠른 시간 안에 집결시켜 적의 방어벽을 무너뜨리는 것을 두고 인해전술(人海戰術)이라 부른다. 인구가 많은 중국이 한국전쟁 때 썼던 수법이다. 그러나 이젠 많은 군사를 동원하던 시대는 끝났다. 대량 살상무기의 개발로 인해전술은 오히려 병력 손실을 키울 위험한 전술로 꼽힌다. 현대전에 맞지 않다. 소총이나 칼을 무기로 싸우던 예전에나 통하던 전략이다. 군사 수를 앞세웠던 중국도 지금은 병력보다는 기술전략 중심으로 전술을 바꾸었다. 우리나라 국군 병력이 급격히 줄고 있다고 한다. 최근 6년 사이 11만 명이 줄었다. 최근 국방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국군의 병력 수는 45만명 수준이다. 이는 국방부가 실제 전투 수행 시 필요한 최소 병력 수 50만명보다 5만명이나 모자란다. 군 병력이 급격히 줄어든 것은 저출산과 고령화가 직접적 원인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출산율을 보면 군병력은 당분간 늘어나기가 어렵다. 군병력의 급격한 감소는 북한과 대치한 우리 안보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다. 특히 군 병력 감소로 사단급 이상 부대도 59곳(2006년)에서 42곳으로 크게 줄었다. 사단급 부대 한 군데가 줄면 인근 부대가 전력을 분담한다. 현실적으로 병력 배치의 효율성이 떨어진다. 돌발 상황에 대응하는 속도도 늦어진다. 전문가들은 군병력 감소에 대응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고 한다. 모병제 도입이 생각보다 빨리 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8-12

어화, 벗님네야

“어화, 벗님네야. 우리 소리 들어보소!” 사람 손길 멈춘 두 번째 해 여름날. 우거진 푸른 생명의 노랫가락이 녹지 숲에 여울진다. 도시 한가운데서 진초록 풀들의 노래를 듣다니, 푸진 행운이다. 도심의 S 초등학교 서북쪽에 사람이 만든 녹지가 있다. 그 안엔 다 커 보이는 여러 그루 소나무가 적당한 거리로 살고, 측백나무 몇 주, 사철나무 서너 그루, 느티나무 두어 주도 함께한다. 나무들 사이에 잔디, 쑥, 망초, 바랭이, 강아지풀, 클로버 등 여러 종의 야생 풀들이 어우러져 살아간다. 못 보던 외래종도 함께 지낸다. 메마른 시가지에 이런 녹지가 있음은 주민에겐 분명 축복이다. 성경이 가르치듯, 사람은 자연에서 태어나 그 안에 살다가 그 품으로 돌아가는 존재니까. 사람들은 녹지 안 의자에서 담소하며 쉬어가고, 훌라후프를 하며, 애완견과 함께 산책도 즐긴다. 이를테면, 녹지는 동네공원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시민 삶의 질을 높이고 있다. 한 주에 대여섯 번 녹지 숲을 걸어서 오간 지가 10년째다. 하니, 나도 이 숲과 교감하는 사람이리라. 녹지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고 싶지 않다. 그런 게 녹지와 시민에겐 중요치 않으니까. 재작년까지, 한 해 두세 번 사람이 벌초했다. 한데, 작년부터 벌초가 사라졌다. 학교 문 오른쪽 녹지 중간쯤에 내걸린 현수막 하나 때문일 거다. 바람에 살랑이는 현수막엔 이렇게 씌어 있다. “…공원토지는 개인 사유지입니다. 주인의 허락 없이 본 토지를 사용 시 고발될 수 있습니다. -토지 소유자 알림- ” 그랬다. 이 녹지는 공공지가 아니고 사유지였다. 아마도, 지주가 벌초했던 측에 이의를 제기한 결과가 바로 현수막이리라. 바다 쪽으로 1/3 지점에 녹지를 가로질러 학교진입로가 있다. 벌초할 때는 그 왼쪽 녹지에도 산책로가 있었다. 벌초 안 하니 풀이 무성해져 발길도 끊어지고, 산책로도 사라졌다. 벌초는 달리 말하면, ‘풀에 대한 사람의 규제’다. 규제를 푸니 2년 만에 녹지는 풍성한 원래 모습으로 바뀌었다. 넉넉한 자연, 진초록 숲이 부르는 노랫가락을 마음의 귀로 듣는다. “어화, 벗님네야. 우리 좀 바라보소···.” 불현듯 ‘인간사회도 자연과 원리는 같구나!’하고 속 소리가 가락에 실려 들린다. 벌초 곧, 규제를 안 하니까 녹지가 자생력으로 싱그런 자연 숲을 이루었듯, 자유민주주의 국가사회도 규제를 줄여야 자생력‧경쟁력이 높아질 게 아닌가. 미국은 자국 경제를 위해 ‘관세 포탄’을 세계에 터뜨렸다. 각국이 전전긍긍 협상에 응하며 세계 경제 질서가 재편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관세 협상 같은 국익 챙기기보다 노란봉투법‧방송 3법, 법인세‧주식거래세 인상 등 국가경쟁력을 해칠 수 있는 전체주의적 입법과 규제정책에 넋이 나가 있다. 한심하다. 장기 집권을 위한 표를 의식한 때문인가. 부디 정치인들이 ‘벌초 않기’를 깨달아 개인과 당보다 나라와 국민을 더 헤아려, ‘어화, 벗님네야. 우리나라 앗싸!’라고 노래하는 길로 나서기 바란다. /강길수 수필가

2025-08-11

술꾼에 관한 그럴듯한 수명 계산법

장수는 모든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자 행복의 큰 부분이다. 한때 환갑이 장수의 기준이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 환갑은 장수마을에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인간의 수명이 날로 길어진다. 오래 살면 장수이지, 다른 장수가 있겠느냐는 너무나도 당연한 생각에 물음표를 던져 본다. 오래 산다는 것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 생물학적 장수가 장수일까? 아니면 진정한 장수가 따로 있을까? 술꾼의 수명에 관한 아래의 계산 방식을 보라. 90을 살아도 70에 죽은 자가 있으며, 70에 죽어도 90을 산 자가 있다. 술꾼의 수명을 언급하기 전에 물리학적 시간 개념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다소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현대물리학에서는 시간은 실재가 아니며,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이해한다. 전통 물리학에서의 시간은, 존재 하는 것이며, 흐르는 것이며, 과거, 현재, 미래로 나타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현대물리학에서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으며(상대적), 흐르지 않으며(심리적 인식),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양자중력이론에서는 기본방정식에 시간 항이 없다. Wheeler-DeWitt 방정식). 요약하자면,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라는 것이다(까를로 로벨리). 현대 물리학적 관점에서 시간은 존재 하지 않는 환상으로 치부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고전 물리학적 관점에서 세계를 이해한다. 물리학은 그렇다 치고. 시간이라는 게 당연히 존재하고, 세월도 흐른다는 개념을 전제로 술꾼의 수명을 계산하여 보자. 재미 삼아. 주 2회 술을 마시는 술꾼을 예로 들어보자. 이 술꾼은 술을 마실 때마다 과음하는 주당이다. 그는 퇴근 후 저녁 내내 술을 마시고 밤늦게 귀가한다.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시므로 다음 날 오후 정도 되어야 술이 제대로 깬다. 술을 마시는 데 필요한 시간과 술을 깨는 데 필요한 시간이 모두 술로 인하여 소비되는 시간이다. 이 주당은 1회 음주로 사실상 하루를 소비한다. 일주일에 2회 마시면 2일이 소요되므로 한 달에 8일(2일 4주)을 술을 마시는 데 소비한다, 계산의 편의상 하루를 양보하여 일주일(7일)이라 치자. 그러면 이 술꾼은 한 달에 일주일을 술을 마시면서 보내는 셈이다. 일 년으로 계산하면 12주 술을 마시고, 이를 달로 환산하면 3달이다. 20세부터 70세까지 50년을 술을 마시면 150달을 술을 마신 셈이고, 이는 12년의 세월이다. 어디 시간 낭비만 있으랴. 에너지, 인격, 돈, 가정의 화목 등등이 술과 함께 허무하게 소비된다. 술을 끊으면 술로 인하여 소비되는 그 시간에 또 다른 의미 있고 창조적인 것들을 할 수 있다. 술의 노예가 되면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기가 힘들다. 수처작주는 그림의 떡이다. 주인이 사람이 아니고, 술이다. 필자도 한때 그런 삶을 살았으나, 일찍이 깨달았다. 오래 살았다고 다 오래 산 것이 아닐지 모른다. 진정한 장수라는 타이틀은, 의미 있는 삶을 산 자에게 붙여져야 할지도 모른다. ‘한 번의 만취는 이틀의 시간을 뺏는다. 술은 마시는 자의 적이요, 인생을 단축시키는 달콤한 독이다. 술은 빌린 기쁨을 높은 이자로 갚게 만든다.’ 술의 지옥에서 탈출하자. 술을 끊으면 새로운 삶이 열릴지니, 천국이 그대의 것이라. /공봉학 변호사

2025-08-11

동시구속 위기에 처한 부부

전직과 현직을 불문하고 대통령과 아내가 동시에 구속되는 일은 아직까진 없었다. 재직 시 저지른 비리나 권력 남용으로 사정기관의 조사를 받거나, 재판 후 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혔던 대통령은 적지 않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그랬고, 이명박과 박근혜가 그랬다. 노무현은 검찰 조사 도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국의 흑역사로 기록될 부끄러운 사건들이다. 그럼에도 대통령의 아내가 구속된 사례는 아직까진 없었다. 그런데, 또 한 번 치욕스런 신기록(?)이 세워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윤석열 전 대통령 부부 이야기다. 윤석열 씨는 이미 뜬금없는 12.3 비상계엄 선포로 대통령직에서 쫓겨나 수감된 상태다. 그는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고 있다. 만약 죄가 입증된다면 사형이나 무기징역 선고가 불가피하다.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 낮췄지만, 윤석열 씨의 부인 김건희 씨가 의심스런 행위를 통해 부정하게 주식을 거래하고, 각종 청탁과 함께 고가의 가방과 목걸이 등을 받았다고 의심하는 국민들이 그렇지 않은 국민보다 훨씬 많다. 이미 여러 정황이 김건희 씨의 범죄 혐의를 지목하고 있는 상황. 12일 영장실질심사를 통해 김건희 씨의 구속 여부가 결정된다. 증거를 없애려 했다는 건 구속 사유 중 하나다. 김씨는 지난 4월 윤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 인용 직전 자신이 운영했던 사무실 컴퓨터를 포맷했다. 탄핵 이후엔 휴대폰을 바꿨다. 압수된 휴대폰의 비밀번호도 알려주지 않았다. 떳떳한 삶을 살았다면 할 필요가 없는 행동이다. 만약 김건희 씨가 구치소에 갇힌 남편을 따라 자신도 구치소로 가게 된다면 또 하나 한국 역사의 오점이 추가될 듯하다. 서글프고 개탄스런 일이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8-11

청계천 문학기행

토요일 아침 열 시. 장소는 보신각 옆 할리스커피. 스물 남짓한 ‘창작교실’ 사람들이 일찍부터 모였다. 날씨는 그 뜨거운 날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갑자기 선선하다. 가끔 비도 뿌린다는 예보다. 오늘은 청계천 문학기행 날이다. 보신각이 기행의 출발점이다. 채만식 소설 ‘냉동어’에서 주인공 대영이 보신각을 가리켜 낡은 시대가 새로운 시대와 동거를 하고 있는 궁상스럽고 초라한 꼬락서니라 했다. 그러나 오늘 보신각은 한결 늠름하다. 종로 네거리 보신각 길 건너편에는 종로타워 33층짜리 빌딩이 높이 솟아 있다. 그곳이 옛날 ‘민족자본’ 화신백화점 자리다. 또 다른 길 건너편에는 전봉준이 두 팔을 묶인 채 앉아 있다. 죄인을 가두는 전옥서가 영풍문고 자리에 있었고 여기서 전봉준이 저형당했다고 한다. 이제 우리는 광교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광교 건너편에는 소설가 구보 박태원의 생가가 있었다. 다옥정 7번지, 그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 지금은 청계천이 넓혀져 이 번지수는 청계천 속에 들었다. 구보는 한낮에 청계천변 다옥정 집에서 나와 광교 건너 보신각 있는 종로 네거리 쪽으로 걸어가게 된다. 광교에서 우리는 계단으로 천변 아래로 내려간다. 가는 비가 흩뿌리는 청계천은 한결 운치가 있다. 수표교 쪽에서 다시 천변 위로 올라서 다리를 건너자 오늘 순례의 주된 장소라 할 전태일 기념관이다. 청계천은 문학사적으로 세 개의 심상(이미지)을 갖는다. 먼저, 청계천은 특히 북악산 밑 백운동 계곡과 청풍계 쪽의 백운동천, 인왕산 아래 수성동 계곡에서 발원한다. 청계천이라는 이름은 이 청풍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청계천은 청풍계를 중심으로 한 조선시대 문인들의 문학적 흐름과 관계가 깊다. 다음, 청계천은 작가 박태원이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나 장편소설 ‘천변풍경’을 통해 구축한 불결함과 가난, 그리고 이를 매개로 연결된 서민들의 ‘공동체’적 삶과 관련이 깊다. 이러한 청계천 이미지는 해방 후, 6·25 전쟁 후에까지 연결된다. 마지막 하나가 전태일의 청계천이다.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과 대구, 부산 등에서 성장한 전태일은 청계천 평화시장에 ‘시다’로 취직하게 되면서 운명적인 길을 걷게 된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1984년은 그의 뜻을 계승하고자 한 ‘청계피복노조’가 합법성 쟁취를 위한 싸움을 가열차게 벌이던 때였다. 뜻도 제대로 모르고 시위를 나갔다 전경에 쫓겨 고가도로 밑으로 뛰어내린 기억이 선명하다. 어렵고 어지러운 때면 이 전태일이라는 존재를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된다. 어째서 그의 죽음은 여전히 숭고하게 느껴지는가? 희생을 ‘내세운’ 다른 흔한 죽음들과 달리. 이것이 나의 지속적인 질문이다. 인간의 삶에서 나고 죽는 것만큼 근본적인 문제가 없다. 인간은 아직까지는 반드시 죽어야 할 존재이므로, 어떻게 죽느냐는 문제를 피할 수 없다. 전태일기념관을 나와 세운상가까지 걷다가 버스를 타고 버들다리(전태일다리)로 간다. 다리 위 전태일 반신상을 ‘참배’하는 것이 마지막 코스다. 세 시간 반,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많은 것을 다시 배우고 생각한 길이었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08-11

왜 ‘비상계엄당’이 되고 싶어 하나

컨벤션 효과라는 게 있다. 큰 행사를 하면 사람도 모이고, 돈도 돈다는 말이다. 그런데 정치적 효과에 더 자주 인용된다. 전당대회를 하면 정당 지지율이 상승한다. 다 그런 건 아니다. 맞불을 놓았을 때 효과를 보는 측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손해를 보는 쪽도 있다. 2021년 11월 여야 대통령 후보가 결정됐을 때가 그랬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는 10%가량 지지율이 올랐고,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오히려 조금 떨어졌다. 양대 정당이 전당대회를 치르고 있는 최근 여론 흐름도 그렇다. 민주당은 누구나 짐작할 만한 두 후보가 경쟁을 벌였다. 컨벤션 효과라면 국민의힘에 더 많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여론은 거꾸로다. 4개 여론조사 기관이 참여한 전국지표조사(NBS)에서 민주당 지지율은 44%, 국민의힘은 16%로 나타났다. 거의 세 배에 가깝다. 추세도 민주당은 오르고, 국민의힘은 떨어진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대통령 국정 운영에 대한 평가도 긍정 65%, 부정 24%다. 이 조사만 특별한 게 아니다. 비슷한 시기 다른 조사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민의힘에 심각한 경고 신호다. 전 연령대에서 민주당에 밀렸다. 심지어 70세 이상에서도 뒤처졌다. 지역적으로 전국에서 민주당 우세다. 국민의힘의 마지막 보루인 대구·경북(TK)마저 민주당에 내줬다. 내년 6월 전국동시지방선거다. 이 흐름대로라면 국민의힘은 전멸이다. 국민의힘은 갑자기 비상계엄이라는 뚱딴지같은 일을 저질러 정권을 넘겨줬다. 국민이 맡겨준 임기를 절반밖에 못 채웠다. 2024년 총선 때는 표 떨어질 일만 벌여 필리버스터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형편이다. 입법·행정부도 모자라, 이제 지방 정부까지 몽땅 내줄 처지다. 송언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국민의힘 지지율이 지지부진한 이유를 이재명 대통령의 허니문 기간이라서 그렇다고 설명했다. 대통령 선거에서 진 국민의힘 지지자들의 패배 의식과 상실감 때문이라고도 했다. 민주당 탓, 국민 탓만 한다. 국민의힘 책임은 없다. 길이 안 보인다. 최근 강선우 여성가족부·이진숙 교육부 장관 후보 청문회로 시끄러웠다. 이춘석 법사위원장은 본회의장에서 차명주식을 거래한 의혹으로 출당됐다. 정부·여당에 악재가 연이어 터졌다. 그런데 지지율은 오히려 올라갔다. 이게 국민 탓일까. 더 큰 원인은 국민의힘에 있는 게 아닌가. 이재명 대통령은 광복절에 조국 조국혁신당 전 대표 부부, 최강욱 전 의원, 조희연 전 서울시교육감, 윤미향 전 의원 등을 사면한다고 한다. 송언석 위원장은 “최악의 정치사면”이라고 비난했다. 그렇지만 뒤로는 야당 비리 정치인들의 사면을 청탁했다. 전략도 없고, 결기도 없다. 말썽이 나자 뒤늦게 “어떠한 정치인 사면도 반대한다”라고 말했지만, 무슨 망신인가. 호재를 악재로 바꾸는 기막힌 재주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선거의 여왕’이라고 한다. 어떤 어려운 조건에서도 기대 이상의 승리를 거둔 때문이다. 그는 과거에 매이지 않았다. 2004년 ‘차떼기당’이라는 오명과 탄핵 역풍으로 50석도 못 건진다고 전망할 때, 당사를 헌납하고, 천막당사에서 121석을 건져냈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패배하고, 디도스 공격 의혹 등으로 당이 위기에 빠졌을 때도 당명과 로고를 바꾸고, 과반 의석을 차지했다.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독점하던 ‘경제민주화’ 아젠다를 선점했다. 정권 심판론에 매달린 민주당을 ‘과거 회귀 세력’, 자신은 ‘미래 지향 세력’으로 규정하는 프레임 짜기에 성공했다. 박정희 지키기만으론 어림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민심이다. 민심에 맞춰 변해야 한다. 변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비상계엄이 잘못됐다는 여론이 70%를 넘었다. 윤 전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는 여론도 비슷했다. 그런데 이제 와 “계엄으로 누가 죽었나”라고 반문한다. 어쩌자는 건가. 미래를 팔아 과거를 뒤집자는 건가. 폭주를 막지 못한 자들의 면죄부로 쓰자는 건가. 그런 세력에 아부해 잔해더미에서 부스러기라도 주우려는 건가. 이런 자해 소동이나 벌이려면, 해체하는 게 옳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5-08-10

첨벙첨벙, 작약은 피고

첨벙첨벙 꽃이 피고 드디어 나무에는 물고기가 가득했다 꽃송이 속으로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쏘다녔고 나는 물 장화를 신고 정원을 쏘다녔다 해당화 그늘 속으로 헤엄치는 날들이 많아졌고 여름이 한참 지난 후에도 나의 놀이는 계속되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몰라서 멈출 수 없는 놀이 매일매일 사라지고 다시 생기는 별의 일에 대하여 날마다 멀어지는 일이 살아가는 일이라는 말에 대하여 잠든 것들의 모든 기척처럼 번지는 핏방울에 대하여 손을 숨길 주머니도 없이 벗어둔 물 장화 속에 물이 가득차서 배처럼 흔들리는 것을 모퉁이를 갖지 못한 채 살아와서라고 할 수 있을까 끝은 얼마나 아파야 제 끝을 다른 끝에게 내어줄까 쓰러져도 자꾸만 떠오르는 이 세계는 ―이승희, ‘물속 정원’ 전문(‘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2024, 문학동네) 시인은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하다”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이 시는 온통 식물적 상상력으로 특징할 만하다. 시의 제목이자 배경인 ‘물속 정원’은 두 세계의 만남인 육지와 물, 생과 죽음, 현실과 환상을 암시하는 이중적 공간으로 볼 수 있다. 정원은 생명의 공간이지만, 그것이 물속이라는 설정은 비현실적 장소로서 기억, 무의식, 상실의 공간을 연상시키니 말이다. 이승희 시인의 앞선 시집이 ‘맨드라미’나 ‘토마토’ 같은 식물의 이미지로 집중했다면, 이번 시집은 ‘작약’,‘물고기’ 잎이 없이 뼈로만 자라는 식물인 ‘포도’ 등의 이미지를 표출하고 있다. 그가 형상화한 이미지가 무엇이건 모두 ‘여름’이라는 계절로 수렴된다. 이를테면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연작을 비롯해 “여름의 우울”에서 “또 다른 여름”에 이르기까지 온통 여름이 인과가 된다. 이때 시인의 여름은 꽃과 함께 시적 자아의 결핍과 상처를 드러내는 주요한 식물적 상상력의 동인으로 복무하고 있다. 과연 “첨벙첨벙” 피는 꽃이란 있을까. “꽃송이 속으로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쏘다녔고”에서 나무에 물고기가 산다는 기이한 상상은, 물이 정원의 세계를 범람하며 부유하듯 “모퉁이를 갖지 못한 채” 삶의 방향을 잃은 존재, 즉 정서적 중심이 없는 상태를 상징하고 있다. “벗어둔 물 장화 속에 물이 가득차서 / 배처럼 흔들리는 것”에서 시적 자아의 내면이 정서의 물에 잠긴 상태를 보여주는 현실의 장화가 감정의 물성을 담고 흔들리는 배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마치 모네의 그림 ‘수련’이 보여주는 경계 없는 세계와 공명하며, 시인의 ‘고정된 시선 없이 흘러가는 존재의 물성’을 공유하는 듯하다. 언젠가 도쿄에서 찍어온 모네의 말년 연작 ‘수련’을 크게 인화해서 걸어두었다. 계속 들여다보자면 어느 순간 방향을 잃고 마는데 이는 수면 아래인지, 위인지, 수련인지 그림자인지 경계가 흐릿하기 때문이다. 그 불확실한 흔들림 속에서 ‘상실’의 풍경이 몽환적으로 피어나는데, 이는 화자가 장화를 신고 물속 정원을 헤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꽃 속에 물고기가 쏘다니고, 장화 속엔 물이 차오른다. “쓰러져도 자꾸만 떠오르는 이 세계는” 끝내 가라앉지 못한 감정, 다시 떠오르는 부재의 세계를 나타낸다. 가령 모네는 사랑하는 이를 먼저 보내고도 수련을 그렸고, 시인은 여름이 지난 뒤에도 멈출 수 없는 놀이를 계속한다. 결국 삶의 고통과 모순에도 불구하고 반복해서 살아가게 되는 이유, 혹은 존재의 부력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몰라서 멈출 수 없는 놀이” /이희정 시인

2025-08-10

경주, APEC 2025로 평화·문화·경제의 중심에 서다

오는 10월 말, 2025년 APEC 정상회의가 경주에서 열린다. 21개국 정상과 주요 부처 장관, 글로벌 기업인, 언론인 등 약 2만 명이 한자리에 모이는 이번 회의는 단순한 국제행사를 넘어, 경주와 대한민국의 위상을 새롭게 쓰는 전환점이 될 것이다. 세계가 지금 경주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 도시가 지닌 복합적인 역량—‘평화의 기억, 문화의 정체성, 경제의 가능성’—때문이다. 경주는 단지 시간이 흐른 도시가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세계와 소통해 온 도시이다. 단순한 과거의 흔적이 아닌, 오늘을 살아가는 도시의 품격과 비전이 공존한다. 천년 왕국 신라의 수도였던 이곳은 일찍이 바다를 건너 아시아 각국과 교류하며 국제적 감각과 포용의 가치를 키워왔다. 폐쇄가 아닌 개방, 갈등이 아닌 융합의 전통이 이 도시에 스며 있다. 석굴암, 불국사, 첨성대 등으로 대표되는 유산은 단지 아름다운 문화재를 넘어, 수천 년 전부터 세계와 연결되어 온 우리 민족의 소중한 자산이다. 그 정신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경주는 그 역사적 깊이를 바탕으로 세계와 다시 대화하려 한다. 또한, APEC과 같은 회담이 열리기에 경주만큼 잘 어울리는 도시도 흔치 않다. 경주는 전쟁이 아닌 문화로 경쟁하고, 무력이 아닌 예술과 기술로 국가를 성장시켜 온 전통을 간직한 도시이다. 과거를 기억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도시는 세계가 찾는 진정한 회의의 장이 될 수 있다. 이번 APEC의 핵심 가치인 ‘지속 가능한 한 번영 역시, 그 뿌리를 경주의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자연과 공존하며, 사람 중심의 철학을 실현해온 이 도시는 지속 가능한 삶의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는 모범이 된다. 문화의 정체성 역시 경주만의 뚜렷한 경쟁력이다. 경주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박물관이자, 살아 있는 예술의 공간이다. 과거의 유산이 지금도 시민들의 삶 속에서 호흡하며, 도시의 곳곳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세계유산은 일상이 되었고, 시민의 삶 속에는 전통이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 거리와 골목, 축제와 공연까지—도시의 모든 요소가 세계인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생생한 문화 콘텐츠가 된다. 이번 회의를 통해 우리는 단순히 최신 시설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 도시 전체를 무대로 삼아 경주의 정체성과 일상을 세계와 나누고자 한다. 경제적 잠재력 역시 주목받고 있다. 경주는 미래산업 도시로 빠르게 변모하고 있다. SMR(소형모듈원자로) 산업단지, 수소·에너지 클러스터, 디지털 의료관광 기반 조성 등 차세대 산업기반을 중심으로, 미래 대한민국 산업을 선도할 핵심 도시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단기적인 성과가 아닌, 장기적 전략 아래 추진되고 있다. APEC 회의는 이 비전을 세계에 선보이는 중요한 무대가 될 것이다. 이번 APEC 정상회의는 이러한 경주의 잠재력과 비전을 전 세계에 알릴 절호의 기회이다. 포항·울산과 함께하는 ‘해오름동맹’을 통해 산업·관광·문화가 어우러지는 광역 협력 모델도 가시화되고 있다. 이 지역 연합은 단순한 지역 발전을 넘어, 대한민국의 균형 발전을 이끄는 새로운 플랫폼이 되고 있다. ‘지나온 천 년’과 ‘다가올 백 년’이 공존하는 도시—그 중심에 바로 경주가 있다. 회의 준비는 겉으로는 조용해 보이지만, 안에서는 치밀하게 이뤄지고 있다. 경주시와 경상북도, 외교부 등 관계 부처 실무진은 매일 여러 차례 회의를 거듭하며, 표지판 하나, 의자 하나까지 세심하게 점검하고 있다. 리모델링을 마친 호텔 객실에는 조명과 동선을 확인하는 전문가들이 상주하고, 각국 의전을 위한 리허설도 실시간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도시는 말이 없지만, 곳곳에서 수천 개의 손이 움직이고 있다. 무엇보다 소중한 변화는 시민들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자원봉사 교육장에는 매일 시민들이 찾아오고, 손님맞이 친절 캠페인도 자발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 행사를 ‘우리 모두의 일’로 여기는 시민들의 참여야말로, 경주 APEC의 가장 큰 자산이다. 경주의 APEC은 보여주기식 행사가 아니다. 단 한 명의 실무자도, 단 한 사람의 자원봉사자도 무대 뒤에 숨지 않도록 하겠다. 모두가 하나 되어 만든 결과는 어떤 외교적 성과보다도 값질 것이다. 모든 준비는 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바로, 평화를 기억하는 도시, 문화를 품은 일상, 미래산업이 살아 숨 쉬는 경주를 세계에 진정성 있게 보여주는 것. 그 진심이 닿는 순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APEC은 단지 ‘경주에서 열린 회의’가 아니라, ‘경주가 세계로 도약한 순간’이었다는 사실을. /주낙영 경주시장

2025-08-10

쏘니, 덕분에 행복했던 10년

2014년 5월 14일, 한국 축구의 상징이라 할 수 있었던 선수 박지성이 은퇴를 선언했다. 이것은 내 또래의 축구 팬들에게는 몹시 허탈한 소식이었다. 주말 밤마다 우리에게 치킨과 맥주를 준비하게 만들었고 가슴을 설렘으로 부풀게 만들었던 일상의 행복 하나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아쉬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던 어린 선수, 손흥민이 바로 다음 해에 프리미어리그의 또다른 명문구단 토트넘 홋스퍼에 입단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사실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했을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박지성이 입단했던 2005년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그야말로 세계 최강의 구단이었다. 그러나 2015년의 토트넘 홋스퍼는 분명 명문구단이었지만 세계 최강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었다. 그나마 손흥민이 입단 하면서부터 등번호 7번을 받았다는 것이 고무적이었다. 7번이 어떤 숫자인가. 데이비드 베컴, 크리스티아누 호나우두, 라울 곤잘레스 같은 전설적인 선수들의 번호이며 팀의 키플레이어라는 상징이 아닌가. 한국 선수가 세계 최강의 구단에서 웨인 루니나 크리스티아누 호나우두 같은 선수들의 핵심적인 조력자 역할을 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지만, 비록 세계 최강을 넘보는 팀은 아니었을지라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상위권 팀에서 한국 선수가 그야말로 주인공 역할을 하며 뛰는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가슴을 벅차게 하기엔 충분했다. 손흥민은 몇 경기 만에 자신이 왜 토트넘 홋스퍼의 7번인지를 증명하며 팀의 중심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박지성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 짜릿하고 행복한 주말 밤을 매주 선사해주였다. 질풍처럼 내달리는 모습과 왼발과 오른발을 가리지 않고 대포알처럼 꽂는 슈팅은 우리 세대에게는 한국인이 저럴 수가 있나 싶은 생소한 모습이었고, 어른들에게는 그 옛날 차범근의 활약을 떠올리게 하는 반가운 장면이었다. 우리는 주말 밤마다 머나먼 나라의 경기장을 보며 치킨과 맥주를 시켜두고 한 주 간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특권을 자그마치 십 년이나 더 누릴 수 있었다. 손흥민이라는 선수와 같은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특히 마법같았던 순간 몇 개가 떠오른다. 하나는 2020년, 한 해 동안 가장 아름다웠던 골을 넣은 선수에게 주어지는 푸스카스상을 그가 거머쥐는 장면이었다. 프리미어리그 번리 전에서 70미터를 질주하며 상대 선수 6명을 추풍낙엽처럼 제쳐내고 골망을 흔드는 장면은 잠시나마 그에게 축구의 신이라도 강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또 하나는 2022년의 프리미어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노리치 시티와의 경기에서 2골을 몰아치며 리그 공동 득점왕 타이틀을 거머쥐는 장면이었다. 아시아 선수가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가 될 수 있다니. 포효하는 그를 보며 전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장면은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장면이었다. 지난 10년간 많은 것을 이루었음에도 무관이라는 오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그였다. 그러나 올해 UEFA 유로파리그 결승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격침시키며 드디어 꿈에 그리던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한국인이 주장완장을 차고 유럽 메이저 대회의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장면 역시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감동적이었던 것이었다. 그때 그의 허리에는 커다란 태극기가 감겨 있었다. 박수칠 때 떠나라고 했던가. 손흥민은 그에게 폭포 같은 박수가 쏟아지던 바로 그 시기에 팀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세계 언론들과 선수들은 지난 10년간 보여준 토트넘 홋스퍼에 대한 그의 헌신을 인정하고 전설에 걸맞는 예우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의 다음 행선지는 LA. 새로이 떠오르는 리그에서 그는 또 다시 마법과 같은 플레이들을 보여줄 것이다. 더군다나 미국은 다음 월드컵의 개최지이다. 미리 적응해서 대한민국 대표님에서 활약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내린 결정이라니.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국가대표님의 주장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의 활약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국가대표팀에서의 환상적이었던 순간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의 토트넘 홋스퍼와 프리미어리그에서의 경력이 마무리 되었을 뿐이지 국가대표 손흥민, 축구선수 손흥민으로서는 앞으로도 보여줄 것이 얼마든지 남아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난 10년동안 함께 웃고 울수 있어서 참 행복했다는 말을 한 사람의 팬으로서 전하고 싶다. 그리고 새로운 리그에서 또 다른 전설을 써내려가길 기대한다는 말 또한 적어본다. /강백수(시인)

2025-08-10

나 조금 귀여울지도?

스스로에게 살갑고 다정하게 구는 게 언제부터 새삼스러웠더라.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고개를 기울였을 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날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지만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기원을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충만한 순간이 있다. 그것은 유효기간이 짧으니 최대한 빨리 섭취해야 한다. 머리카락 방향, 셔츠 깃의 빳빳함 정도, 양말 끝이 바지 기장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것까지 마음에 드는 그런 날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니. 오랜만에 안부를 묻는 친구처럼 거울 속 나와 눈을 맞춘다. 한쪽 눈을 찡긋, 손가락을 탁 튕기면 위풍당당해 보이는 것을 넘어 사랑스러워 보이기에 이른다. 이런 호들갑도 잠시,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사정이 달라진다. 폭염에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땀이 문제였을까. 어깨 위에 내려앉은 묵직한 습도에 결국 당하고 만 것인가. 상가 유리창에 비친 낯선 행인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누구보다 당당하게 거리를 가르고 있다고 믿었건만, 어깨는 구부정하고 입술은 굳은 채로 어색하게 걸어가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세상에. 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린다. 제발, 아닐 거야…. 다시 고개를 돌려 확인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역시 그렇다. 거울 앞 내 모습은 어디에도 없고 낯설고 불만족스러운 현실 속의 나만 남아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나의 외모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머릿속에서 그리는 이상적인 나와 현실의 나 사이의 불일치에 대해 써보려 했을 뿐. 이렇듯 장황하고 횡설수설하는 나 자신도 참 부끄럽다. 어째서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견디는 일을 이렇게 어려워하는 것일까. 어떤 순간에도 나를 사랑하고 지지하는 자기 신뢰가 있으면 좋겠건만, 그건 거울 속에서 완벽한 내 모습을 발견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다. 특히 타인에게서 비난조의 말을 듣게 되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세상이 바라보는 나 사이에 틈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 사실이 적나라하게 확인된 기분이다. 내 딴엔 환하게 웃었는데 누군가의 눈에는 비아냥처럼 보이고, 별생각 없이 허공을 바라보는데 왜 그렇게 화가 났느냐고 물어오기도 한다. 순간 내가 생각하는 나는 실은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이미지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스친다. 때때로 나는 내 안에 거울이 하나 더 있는 것처럼 타인의 시선을 빌려 나를 점검한다. 사진 속의 표정, 영상 속의 걸음걸이, 심지어 누군가의 무심한 한마디까지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내가 생각하는 나 자신과 세상이 바라보는 시선 사이의 거리를 조금이라도 줄여보려 애쓰지만,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아무리 걸어도 끝이 안 보이는 러닝머신 위의 거리감과 비슷하달까. 내가 아는 나는 언제나 빛을 한 번 돌려받은 뒤의 형상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반사와 왜곡은 필연적으로 함께 간다. 빛이 표면에 부딪혀 돌아오는 순간, 경로를 통해 형태는 틀어질 수밖에 없다. 그때 발생하는 변형이 현실을 아름답게 보정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 인생의 비극적 사실 중 하나다. 오히려 숨기고 싶은 지점을 더욱 적나라하게 들추어내기도 한다. 그렇지만 내가 미처 몰랐던 나를 비추는 창이 항상 불편하게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어긋남 속에야말로 내가 모르는 나의 표정과 몸짓, 그리고 살아가는 방식을 확인하는 기회가 숨어 있다. 때로 어떤 틈새는 그 자체로 나를 지켜주는 완충 장치이기도 하다. 낯설면서도 나를 확장하는 여백으로 존재하며 그 틈에서 나는 숨을 고르고 다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결국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건 완벽한 스스로가 아니라, 변하고 비틀린 모습을 포함한 나 자신이다. 다른 측면의 나를 보는 일은 물론 괴롭겠지만, 내가 상상했던 내 모습보다 훨씬 아름다울 수도 있다. 내가 의식하지 않은 채 흘린 말이 누군가의 하루를 기쁘게 바꿔놓을 수도 있고 툭 던진 작은 선의에 뜻밖의 인사를 받기도 한다. 세상이 비춰주는 나는 생각보다 종종 쓸 만하고 가끔은 내가 믿는 나보다 더 괜찮다. 그렇게 생각하면 거울 앞에 서는 일은 일상에 흩어진 나를 거두어 모아 정리하는 의식처럼 여겨진다. 이리저리 흩뿌려진 나를 차곡차곡 주워 담는 일. 그렇게 펼쳐진 내 모습은 분명 완벽할 수 없겠지만, 가끔은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였던 내 안의 심판관을 잠시 쉬게 해도 괜찮겠다. 어차피 왜곡된 형상을 봐야 한다면 내 편인 쪽이 당연히 낫지 않겠는가. 유난히 어깨가 처지고 목소리가 작아지는 날이면 셔츠 깃을 쓱 고쳐 세우며 중얼거려 보는 것이다. 나, 조금 귀여울지도? /문은강(소설가)

2025-08-10

인공지능과 양자컴퓨터가 여는 세상

국민 24%가 인공지능 기술을 이용한다. 이제 인공지능 기술이 일상 깊숙이 파고든다. 요즈음 인공지능과의 채팅과 영어 회화 공부가 활발히 이루어진다. 인공지능으로 인하여 우리의 일상이 많이 달라질 것 같다. 그가 여러 자료를 종합하여 판단한 결과가 우리 일상을 어떻게 바꿀지 기대된다. 인공지능에 양자 컴퓨터가 연결되면 어떻게 될까. 양자는 소립자로 에너지를 운반하는 기본 입자이다. 양자 컴퓨터는 양자가 가진 중첩, 얽힘, 양자 간섭 등 양자역학을 이용하여 만든 컴퓨터로 기존의 컴퓨터로는 계산하기 어려운 문제를 짧은 시간에 계산할 수 있다. 세상의 온갖 정보를 종합하여 판단하는 인공지능과 슈퍼컴퓨터가 수십, 수백 년에 걸쳐 계산할 문제를 단 몇 분 만에 계산하는 양자컴퓨터가 결합한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보다 빠르고 정확한 판단에 세상은 더 빨리 달라질 것이다. “미래를 이끌 핵심 기술은 인공지능(AI)과 양자컴퓨팅의 결합이 될 것이다”라고 ‘IBM 리서치’ 취리히 연구소의 테오도로 라이노(Teodoro Laino) 박사는 말했다. 2030년에 상용화가 될 것이라는 양자컴퓨터는 미국, 캐나다, 중국, 스위스 등 각국의 치열한 개발 경쟁으로 그 시기를 대폭 당길 가능성도 크다. 국내에선 100 큐피드급의 IBM 퀀텀 시스템을 도입한 연세대학교와 한국과학기술원과 스타트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체에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IBM 퀀텀 시스템 원을 설치하여 연구 중인 나라는 미국, 캐나다, 독일, 일본에 이어 우리나라가 5번째이다. 인공지능과 양자컴퓨터의 결합은 현존하는 여러 문제를 풀 수 있는 게임체인저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가 연구개발에 선도적인 국가가 되었으면 한다. 정부의 첨단산업에 대한 지원도 아직은 인공지능에만 머무르고 있다. 과학기술에 대한 정책과 경제적인 지원으로 우리나라가 양자컴퓨터 원천기술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원천기술을 가진 우리나라가 인류를 위한 제품 개발과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국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주어진 정보를 종합하고 활용하는 인공지능만 해도 타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만 한데 양자 컴퓨터를 활용한 연구로 새로운 정보를 공급하는 양자 컴퓨터가 합세한다면 인류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너무나 크다. 인류는 아직 풀지 못한 문제가 많고 지금도 지구온난화에 따른 피해를 보고 있다. 인공지능과 양자컴퓨터가 힘을 모으면 질병 연구와 신약의 개발, 불치병에 대한 치료 기술, 삶을 풍요롭게 할 새로운 물질이나 기술, 환경 오염 문제 해결 등 인류가 풀어야 할 문제는 많다. 양자컴퓨터를 이용한 다양한 지식과 정보가 사람을 위한 기술 개발에 힘을 합칠 때 인류의 삶은 한층 더 밝아질 것이다. 지금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적대세력에 대한 공격은 계속되고 지구는 매일 아프다고 말하고 질병으로 사람들은 죽어간다. 우리는 인류가 함께 나아갈 미래를 꿈꾸어야 한다. 인공지능과 양자컴퓨터에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의지가 더해진다면 해결하지 못할 문제도 없지 않을까. /김규인 수필가

2025-08-10

부끄럽지 않기를 바라지 말고

지난주 인지 건강 강의에서 공자의 즐거움을 소개했다. ‘논어’의 첫 문장,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는 인지 건강에 중요 요소인 공부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뒤이어 나오는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으면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도 당연히 소개했다. 수업이 끝날 때 수강생들은 배우는 기쁨을 한껏 느꼈다면서 한문을 다 같이 소리 내어 읽을 때는 전율이 느껴진다고도 하셨다. 공자만 소개하면 서운해서 맹자의 삼락도 덧붙였다. 칠십 대 이상인 분들도 있어서 ‘부모가 모두 생존하고 형제가 무탈한 첫 번째 즐거움’과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시키는 세 번째 즐거움’은 생략하고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두 번째 즐거움’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한 수강생이 ‘이건 불가능해요.’라고 하신다. 순간 아, 그렇지, 하고 바로 수긍하게 되었다. 하늘에 부끄러움 없기야 말할 것도 없이 불가능하지만 사람에게 부끄러움 없기도 쉽지는 않다. 맹자는 물론, 제아무리 공자라도 부끄러움이 하나도 없게 떳떳했을까 의문이 든다. 설령 그들 스스로 부끄러움 없다고 자부했다면 그것이 더 수상쩍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 잘못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나 그런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러나 너무나 떳떳하여 부끄러움이 전혀 없는 상태를 즐거움으로 삼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는 다른 사람에게 가혹할 가능성이 많다. 그런 즐거움이라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 그러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하고 또 가능한 일은 잘못을 저지르는 자신을 인정하고 그것을 반성할 줄 아는 것일 게다. 지난 3월 7일 구속취소되었던 윤석열 전 대통령이 넉 달만인 7월 10일 재구속되었다. 구속취소 전에도 모든 조사를 거부했고, 재구속 이후의 조사도 다 거부하고 있다. 지난 1일에는 속옷만 입고 누워서 버텼다는 보도가 나와 국민을 당황하게 하더니 7일에도 완강히 거부해서 부상을 우려한 특검팀이 결국 체포 집행을 중단했다고 한다. 윤 전 대통령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정설이 없다. 혹시나 부끄러워서 그러는 것일까? 아니면 무서워서 그러는 것일까? 그러나 시민 104명이 12·3 불법계엄으로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며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이 나자 바로 항소한 것을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더군다나 윤 전 대통령 변호인 측이 ‘10여 명의 젊은 사람들이 앉아있는 대통령을 양쪽에 팔을 끼고 다리를 붙잡고 그대로 차량에 탑승시키려 했다’면서 이것은 ‘법치국가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관계자들을 불법체포감금죄 등으로 고발하겠다고 성토하는 것을 보면, 어쩌면 자신들이 무고한 시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더 당당하게 나와서 조사받아야 할 텐데 일관성이 없다. 부끄럽지 않을 경지를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잘못을 반성할 줄 아는 것은 배워서 할 수 있다. 공부를 놓지 말아야 할 이유다.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08-10

일하는 노인 천만명시대

통계청이 밝힌 5월 중 고령층 부가 조사에 의하면 55~79세 국내 고령층의 경제활동 인구가 1000만 명을 넘어 사상 최대치를 기록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수치는 고령층 전체 인구의 60.9%에 해당하는 것으로 10명의 노인 중 6명은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통계청의 이 발표는 우리 사회의 노동시장 구조가 새로이 바뀌어가고 있음을 시사하는 통계로서 우리 사회에 던지는 의미는 상당하다. 우리 사회 노인들은 은퇴 후에 여생을 무의미하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삶을 선택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하고 있다. 20년 전(500만명)과 비교하면 그 숫자가 2배 이상 증가한 것은 이런 세태를 잘 반영한 결과로 보아야 한다. 이제는 고령층의 경제활동 참여를 예외적 경우로 보지 않으며 보편적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초고령사회로 접어든 우리 사회에 고령층의 노동시장 참여 증가는 국가적이든 개인적이든 긍정적인 면이 많다. 노동시장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어주고 이것이 노년층의 생활 안정으로 연결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고령층의 경제활동이 늘어난 배경에는 수명이 늘면서 70대에도 활동이 가능한 건강이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령자의 절반 이상이 아직까지 생활비 조달을 목적으로 일을 하는 것으로 조사돼 노인들의 경제활동 증가에는 노인 빈곤 문제가 여전히 숨어 있다. 우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노인빈곤율이 가장 높은 나라다. 노인들의 경제활동 참여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기 위해선 노인 빈곤 문제부터 퇴치돼야 하는 숙제가 남아 있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8-10

산업재해 없는 나라

길을 걷다 보면 깜짝깜짝 놀라는 수가 있다. 수많은 개미가 사람들의 발밑을 태평하게 지나다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은 운동화나 구두가 언제 생명을 앗아갈지 모를 판국인데 개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길을 간다. 이런 일은 어제도 한 달 전에도 10년 전에도 일어났으리라. 어떻게 개미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유유자적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것일까?! 개미를 들여다보다 문득 인간의 생명과 운명을 생각하게 된다. 만일 우리 머리 위로 거대한 공룡 무리나 매머드 코끼리가 지나간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궁금하다. 혹은 사악한 악마나 잔인한 운명의 소용돌이가 우리를 덮친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고 싶다. 개미와 인간, 인간과 초자연적이고 숙명적인 존재의 관계를 유추해보는 것이다. 정착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인간은 문명을 일구었고, 그 결과 자연과 대립하는 담장을 만들었다. 인간들이 모여 사는 담장 안의 안온한 사회와 담장 밖의 황막한 자연이 구별되기 시작한다. 자연에서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정글 법칙이 진행되었지만, 인간 세계에서는 유소년과 노인 그리고 병자 같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려와 실천방안이 마련되기 시작한다. 산업혁명과 궤를 함께한 19세기의 악랄하고 병리적인 자본주의와 극단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가들 때문에 장시간 노동에 내몰린 어린아이들을 포함한 수많은 노동자가 산업재해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코난 도일(1859-1930)의 추리소설 곳곳에 등장하는 런던의 끔찍한 스모그와 그 속에 방치된 시민들의 일상은 당대의 가혹한 사회상을 어렵지 않게 짐작하도록 한다. 최소한의 치안과 국방을 제외한 모든 영역에서 무제한의 자유를 보장한 사회·경제정책에 따른 폐해를 사람들은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인간의 생명과 재산을 최우선에 두는, 인간의 얼굴을 한 국가가 나타난다. 이것은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국민 개개인이 돈과 권력을 위한 일회용 소모품이 아닌, 사회 구성원으로 존중받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사회는 아직도 대형사고의 그늘에 자리한다. 우리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대참사와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잠들지 않고 깨어있는 기억만이 또 다른 참사를 예방하는 토대로 작용한다. 대형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를 좀먹는 것이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 사고다. 해마다 반복되는 산재를 예방하는 것이 중차대한 사회 문제로 대두된다. 최근 3년의 산업재해 사망자는 2022년 2223명, 2023년 2016명, 2024년 2098명이다. 해마다 2000명 이상의 노동자가 산업 현장에서 목숨을 잃고 있다. 하루 평균 5~6명의 귀한 생명이 노동 현장에서 덧없이 스러지고 있는 셈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국민 주권 정부’는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 사고를 최대한 줄이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고 한다. 참 좋은 일이다. 빨리빨리 문화와 안전 불감증을 산재 원인으로 보았던 언론도 사태의 핵심을 치밀하고 면밀하게 들여다볼 때다. 광고 수주를 위해 재벌과 대기업 고용주의 눈치만 볼 게 아니라, 노동자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깊이 있는 접근과 인간적인 자세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08-10

잔인한 복수의 칼날

두 개의 잔혹한 이야기가 들렸다. 육십 대 초반의 한 남자는 자기 생일날 며느리와 손주가 보는 앞에서 자기 아들을 총으로 쏴 죽였다. 그러고는 이야기한다. 이혼한 아내가 너무 미워서 어떻게 해서든지 복수하고 싶었고 그래서 택한 방법이 아내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아들을 죽이는 일이라 생각하고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이유였다. 아내가 그렇게 미웠으면 그냥 아내에게 총을 쏘면 될 일인데 왜 자식에게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지른 것일까. 눈앞에서 할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아버지를 보았을 어린 손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단 말인가. 이런 일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또 다른 이야기는 삼십 대 초반의 남자 이야기다. 젊은 나이에 객기를 부리다가 사업에 실패했다. 재기를 위해 처가의 돈을 많이 빌렸다. 하지만 계속된 사업 실패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장인의 돈 독촉은 연일 계속되었다. 급기야 이혼 이야기까지 나오고 말았다. 그러자 이 남자는 모든 사업자 명의를 자신의 아내에게 다 돌려버리고 모든 빚을 그쪽을 향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아내가 자는 방문 앞에서 목을 매고 죽어버렸다. 밤이 새도록 남편의 시체를 방문에 걸어 놓고 잔 셈이 되었다. 아침에 잠에서 깬 아내는 방문에 목을 매 죽어 있는 남편을 보게 된 것이다. 이 일이 있은 지 꽤 되었지만, 아내는 정신과 약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참으로 독한 인간이 아닐 수 없다. 이게 장인을 향한 보복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참으로 끔찍한 짓이 아닐 수 없다. 어찌 인간으로서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싶다. 최근 이야기 두 개를 뽑았을 뿐이지 비견한 사례는 셀 수도 없이 많다. 분명히 이 사회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현대 사회에 부모라는 개념, 부모와 자식이라는 개념이 있을까? 가족이란 개념은 전혀 없는 사회에 살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까지 든다. 예를 든 두 남자는 지네 부모에게 증오의 표출 방법으로 아주 잔혹하게 남을 짓밟는 것만 배웠지, 가족에 대한 사랑은 눈곱만치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자기는 무조건 옳고 남이 다 잘못했다는 지극히 이기적 사상관으로 세상을 살아온 것이다. 자기 잘못은 도외시 한 체 남에게 상처받는 것을 못 참고 분노 조절 장애를 가지고 사는 이들이 주변에 의외로 많다. 자격지심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대충 넘어갈 성질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존경받는 어른이 없어진 지 오래다. 어른이 없어지니 전부 어른 행세를 한다. 나이가 조금 먹었다 싶으면 안하무인처럼 행동하고 아무 날이나 걸림이 없다. 이러니 젊은이들조차 예의는 사라지고 몰염치만 남았다. 이를 바로 잡아야 할 종교 성직자들은 정치 놀이에 여념이 없고 납골당이나 팔아먹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으니 국민정신 건강은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다. 사랑으로 남을 보듬어주는 정(情)이 없어졌다. 남에게 절대 지지 않으려고 죽기 살기로 악다구니처럼 살아가는 군상들이다 보니 남에 의한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힘은 사라지고 복수의 칼날만이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있는 느낌이라 갈수록 세상살이가 피곤해진다. /노병철 수필가

2025-08-07

반려(伴侶)의 의미

우리 집 고양이들에겐 저마다 사연이 있다. 첫째 ‘마루’는 어느 식당에 출몰한 쥐잡이용으로 용인5일장에서 삼천 원에 팔려 왔고, 둘째 ‘보리’는 꼬리가 잘려 피투성이가 된 채 길 한구석에서 울고 있었다. ‘셋째’ 용이는 내가 다니던 문학관 주변을 맴돌며 방문객들의 손길과 발길질을 번갈아 맞고 있었고, 넷째 ‘송이’는 구내염에 시달리며 아파트 단지의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다. 막내 ‘핑코’는 자기가 골목대장인 줄 알았지만 산책 나온 개들에게 종종 쫓겨 다니곤 했다. 마루, 보리, 용이, 송이, 핑코는 이제 없어서는 안 될 나의 소중한 가족들이다. 나도 내가 고양이 다섯의 ‘집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금도 가끔은 믿기지가 않는다. 사실 나는 동물을 좋아해 본 적도 없다. 그럼에도 이 아이들은 우연히 내게 찾아왔고, 각자를 마주한 순간들이 너무 절박했다. 내가 손을 내밀지 않으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첫째가 온 지 9년, 막내가 온 지도 벌써 4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 나는 반려의 의미에 대해 알게 됐다. 미국의 생물학자이자 철학자인 도나 해러웨이는 개를 키운 경험을 바탕으로 ‘반려종 선언(2003)’을 제시한 바 있다. 대체로 “우리는 서로를 위태롭게 만들고 남의 살점으로 존재하며 서로 먹고 먹히고 소화불량에 걸리며 살다 죽는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종이 서로 반려가 되어 살아가는 일은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창발적 실천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반려종’은 당연히 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반려종이 존재하기 위해선 적어도 두 개의 종이 함께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반려종은 관계가 존재론의 최소 단위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해러웨이는 자신과 반려견 사이의 대화와 훈련 경험을 통해 소통과 조율을 오가며 ‘서로 만들어가는 존재’가 됐다고 말한다. 개와 인간이 서로에게 의미 있는 타자로 존재할 수 있는 윤리를 알게 됐다는 것이고 이는 단순한 애정 관계가 아닌 정치적이고 철학적으로 사유되는 관계라고 말한다. 결국 ‘반려종 선언’은 인류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과 비인간 간의 관계를 재구성할 것을 요청하는 의제라 할 수 있다. ‘필멸’이라는 우리 삶의 조건에서는 ‘생명 우선’이 아닌 ‘지속 우선’의 태도가 수립돼야 하며, 다른 종 간의 상호의존적 관계 맺기 만이 기후 위기와 생태적 재난 시대에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죽여도 되는 종’을 끊임없이 지정해 왔다. 가령 ‘침략종’이 그렇다. 이들은 서식처나 생태 복원을 구실로 죽여도 되는 존재로 숨어 살게 된다. 이는 “특정 생명체를 위한 결정이지만 다른 생명체를 위한 것은 아니고 어떤 사람들을 위한 결정이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내리는 것은 아닌” 결정이라 할 수 있다. 근대의 생명정치가 살 가치가 있는 종과 그 외부의 타자를 구분하는 사고에 기초한다면, 그리하여 그러한 인식에 입각하여 나치의 ‘인종청소’가 시행된 것이라면, 특정한 국면에서는 우리 자신조차 ‘죽여도 되는 종’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반려란 지속가능한 생태를 함께 이루어가는 일이기도 하다. 해러웨이만큼이나 우리집 다섯 고양이가 그 사실을 내게 알려줬다. /허민 문학연구자

2025-08-07

수능 기도

갓을 쓴 바위란 뜻의 갓바위란 이름을 가진 곳은 전국에 여러 곳 있다. 예컨대 충주시 동량면 조동리에 있는 바위는 모양이 갓을 쓰고 있는 것과 닮아 이 마을에서는 오래전부터 갓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동네 이름도 여기서 유래돼 관암(冠巖) 마을이다. 목포시나 경기도 양주, 서울 우면동, 공주시, 보령시 등에도 갓바위란 이름을 가진 마을이나 바위가 있다. 그러나 경북 경산시 와촌면 팔공산 갓바위의 인지도에 밀려 대부분의 갓바위들은 그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다. 팔공산 갓바위는 팔공산 봉우리의 하나인 관봉 정상부에 있는 높이 5.48m의 불상이다. 9세기 초반 제작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머리 위에 씌인 갓모양의 바위는 그 이후인 고려시대에 따로 만들어진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석굴암 본존불상처럼 후덕하고 무뚝뚝한 이미지를 주고 있다. 1965년에 문화재 당국이 보물로 지정한 소중한 우리의 유산이다.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이 특별히 유명한 것은 한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 소문이 나 있기 때문이다. 불교 신도이든 그렇지 않든 소원을 빌러오는 사람들이 연중 끊이질 않는다. 한해 250만명이 찾는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니 갓바위 부처님에 대한 가도가 영험한 모양이다. 수능시험 100일을 맞은 이번 주에도 갓바위 부처님을 찾아 많은 기도객이 몰렸다고 한다. 30도가 넘는 무더위 속에서도 산을 올라 기도하는 이들의 정성이 놀랍다.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盡人事待天命)고 했다. 각자가 바라는 소원은 다르나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은 믿고 싶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8-07

양육비를 받기 위한 방법

“나중에 양육비를 안 주면 어떡하죠, 변호사님?” 10년 넘게 이혼전문 변호사로 일하며 필자가 의뢰인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이다. 실제로도 힘들게 협의이혼이나 재판이혼을 하고 나서도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 양육비를 받지 못해 고생하는 의뢰인들이 많다. 이혼 소송의 의뢰인이 다시 양육비 지급을 강제하기 위한 소송의 의뢰인이 되기도 한다. 민법 제913조에 의해 부모는 자녀를 보호하고 교양할 권리·의무가 있으므로 이혼하고 자녀를 키우지 않고 있는 부모에겐 양육비 지급 의무가 지워지는 것이다. 양육비는 보통 한 달에 한 번 주는 것으로 정해진다. 그런데 이렇게 정기적으로 보내야 하는 양육비를 3번 이상 안 보내면 감치에 처해질 수 있다. 감치는 30일 이내의 기간 동안 채무자를 교도소 등 장소에 구금시켜 놓는 것이다. 양육비 채무자가 정기적 급여를 받는 근로자인 경우 양육비 채권자가 다니는 회사에 직접 양육비를 청구하는 방법도 있다. 그럼 회사가 채무자의 월급에서 양육비를 떼서 양육비 채권자에게 직접 보내준다. 이것이 양육비 직접지급명령 제도이다. 양육비 미지급자에겐 출국금지 처분과 운전면허정지 처분도 내려질 수 있다. 나아가 양육비 채무자의 이름과 나이 직업, 주소 근무지 등을 공개하는 신상정보공개 처분이 내려지기도 하고 양육비를 일시금으로 지급해야 하거나 법원에 양육비 지급을 담보하기 위한 일정 금액의 담보금을 공탁해야 할 수도 있다. 형사처벌도 된다. 양육비 미지급에 따른 감치 결정을 받고도 1년 동안 여전히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으면 1년 이하의 징역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양육비를 안 주다간 전과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금전채무도 이런 많은 제재 수단을 가지는 것이 없다. 아이들의 생계, 기본권과 관련된 양육비 채무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많은 강제 수단들이 있으므로 사실 정상적 경제활동을 하는 비양육자들은 양육비를 잘 보낸다. 문제는 자기 이름으로 받는 급여도, 자기 이름으로 된 재산도 없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경제활동을 하며 사는 비양육자들이다. 그 자들에 대해서도 감치와 형사고소 등 위 수단들을 취할 수 있겠지만 여기엔 알아볼 시간과 노력, 또 법률 비용이 든다. 양육비를 못 받으며 홀로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 대부분은 생계를 꾸리는 데 바쁜 사람들이기에 양육비를 받기 위한 강제수단이 많다는 법률 정보를 정확히 알기 힘들거나 알아도 법률 비용을 쓸 여유가 없다. 몰라서 못하고 알아도 못한다. 정부와 법원의 소극적 대응도 문제이다. 부모 명의 회사에 다니며 떵떵거리며 살면서도 양육비를 보내지 않고 있는 남성에 대해 감치 결정을 받았지만 법원은 감치 집행에 너무나 소극적이었다. 특히 대상자의 소재가 불분명하면 감치 집행이 거의 불가능했다. 모든 사회적 문제가 그렇겠지만 특히 양육비 이행 문제에서는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것보다 이미 존재하는 제도들을 잘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미 충분히 마련되어 있는 양육비 이행을 위한 강제수단과 제도들이 잘 활용될 수 있도록 실무 집행자들의 의지와 노력이 더해졌으면 한다. /김세라 변호사

2025-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