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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펫팸족 1500만명 시대

과거 애완(愛玩)동물이라 부르던 호칭이 요즘은 반려(伴侶)동물로 바뀌었다. 애완의 완(玩)은 장난감을 뜻하는 완구에 쓰이는 한자 말이다. 사람이 동물을 대할 때 장난감처럼 좋아하는 도구 정도로 여겼다는 뜻에서 나온 표현이 애완이다. 반려(伴侶)란 짝이란 뜻이다. 사람이 단순히 동물을 좋아한다는 의미를 넘어 사람과 동물이 동등한 관계라는 뜻이다. 동물도 사람과 감정을 교환하고 아픔을 나누고 소통하는 존재로 인정받는 사회적 흐름이 호칭까지 바꾸게 된 것이다. 2020년 동물보호법 개정으로 동물의 정서적 가치가 인정되고, 그 생명과 복지를 위한 법적 보장의 길이 열리게 됐다. 학자들은 이때부터 반려동물이란 표현이 공식적 법률적 용어가 됐다고 한다. 최근 펫팸족이란 신조어가 등장했다. Pet+Family의 줄인 말로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여기는 사람을 가르키는 말이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도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1500만명을 넘는다고 한다. 반려동물의 인구 비중이 전체 인구의 약 30%에 이른다는 말이다. 열 집 중 세 집은 반려동물이 있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반려동물과 관련한 산업도 급격히 성장하고 있다. 2015년 반려동물 시장 규모가 1조7000억원 정도였으나 올해는 4조원이 넘을 거란 추측이 나온다. 반려동물과 관련한 산업을 펫코노미라 부른다. 관련 분야로는 먹거리를 비롯해 영양제, 의류, 액세서리, 펫보험, 장묘업, 동물병원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이런 사회적 추세를 반영하듯 대선후보들도 반려동물 의료비 경감 등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다. 반려동물 팔자가 상팔자라 할만하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5-29

두 글자를 새기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해.” 나는 아들에게 자주 말했다. 자신이 흘린 땀과 시간은 자아를 단단하게 만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시험을 앞둔 날이나 대회에서 고배를 마신 뒷날, 작은 성취 앞에서도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우리가 성실하게 무언가를 향해 나아간다면 그 여정 속에 의미가 담겨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결과에 욕심낼 때가 있었다. 아들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기를 기원하거나 안정된 기업에 취업하기를 바랄 때는 부모로서 간절히 결과에 집착했다. 아들의 어떤 실패는 나 자신의 좌절보다도 더 아프게, 더 무겁게, 더 쓰라린 상처로 내게 남았다. 아들이 성취하고자 했던 것으로부터 멀어질 때면, 마치 실패의 날 선 조각들이 내 안으로 들어와 가슴팍을 긁고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통은 자식뿐만 아니라 그를 품고 살아온 나에게도 전이되었다. 그래서 결과에 매달렸다. 이럴 때에는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 했던 순간들이 떠올라 부끄러웠다. 또한 살면서 과정이 중요한지, 결과가 중요한지, 내 마음속에서 의심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런 내게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해준 여행이 있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을 방문했을 때였다. 가우디의 흔적은 종교를 초월한 울림을 주었다. 돌마다 기도가 새겨져 있는 것 같은 조각품을 보니 가슴이 벅찼다. 성당 내부로 들어서자 시간의 성소에 머문 듯했다. 스테인드글라스에 비친 빛이 시간 위로 내려앉아 성스러웠다. 경외와 경이, 그 사이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며 빛을 올려다보았다. 믿지 않는 사람조차 기도하게 만들고 경건하게 만드는 공간이었다. 나는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게 만드는 공간 앞에서 말없이 오래 서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대성당은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장관이었다. 그런데 정작 내 마음을 붙잡은 건, 화려한 첨탑이나 섬세한 장식이 아니었다. ‘아직도 공사 중’이라는 대성당의 완성되지 않은 시간들이었다. 대성당은 1882년에 착공해 지금도 짓고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완성된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한다. 안정감과 질서를 주고 결과로서의 성취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성당 앞에서는 미완의 건축물인데도 경외감을 느낀다. 완성이 아니라 과정을 중요시하는 가치관에서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완성이라는 순간보다,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 속에서 더 깊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면, 완성은 그 자체로 정지된 상태다. 반면에 짓고 있는 것은 살아 있다. 변화하고, 이어지고, 다음 세대로 흘러간다. 대성당은 가우디가 짓지 못한 부분을 지금의 장인들이 이어가고 있다. 대성당의 미완성은 단순한 불완전이 아니다. 가우디의 신념이 세월을 통과해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다. 그 끊임없는 ‘도전’의 시간, ‘이어짐’의 마음이 곧 아름다움이었다. 언젠가는 완공될 그날보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더 진실한 현재다. 그제야 나는 아들에게 결과보다 과정이 소중하다는 것을 왜 말했는지 깨달았다. 우리네 삶 또한 미완성의 대성당처럼 매 순간 완성을 향해 지어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간혹 실패를 하더라도 결과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실패를 이겨내는 힘이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그곳에서 인식했다. 성취보다 더 오래 남는 건 결국 살아온 시간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가우디의 묘소가 있는 대성당에 머무르니, 공간이 내 감정을 일깨웠다. 공간에 나의 기억이 보태지면 특별한 장소가 되어, 공간에 대한 사랑인 토포필리아(topophilia)를 느낀다고 한다. 과정이라는 두 글자를 새기며 대성당의 품안에서 토포필리아를 만끽했다. /정미영 수필가

2025-05-28

‘대통령의 아내’라는 자리

지위가 높은 사람의 부인을 일러 영부인(令夫人)이라 칭한다. 보통은 선출된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의 아내를 부를 때 사용된다.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영부인 역시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사람이니 매사 몸가짐과 언사에 조심해야 한다는 건 재론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영부인의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이나 말이 남우세스러운 꼴로 대중 앞에 노출되는 걸 우리는 드물지 않게 봐왔다. 최근에도 그런 사건이 하나 있었다. 지난 26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영부인과 함께 베트남을 찾았다. 그런데, 하노이공항에 도착한 비행기 입구에서 눈꼴사나운 장면이 연출됐다. 영부인이 마크롱 대통령의 뺨을 때리듯 강하게 얼굴을 미는 모습이 여과 없이 영상을 통해 전해진 것. 스물다섯 살 연상의 아내에게 밀쳐진 프랑스 대통령은 면구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걸 전 세계 사람들이 지켜봤다. 프랑스 당국은 즉각 “영부인의 장난”이라고 해명했지만, 이미 늦었다. 각국 외신들이 ‘둘 사이에 불화가 있는 것 아닌가’라는 추측성 기사를 쏟아내고 있었으니. 비단 프랑스 영부인만일까? 적절치 못한 행실로 국민들의 입길에 오르내린 영부인이 적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아내는 공식 행사장에서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대통령이 내민 손을 뿌리쳐 화제가 됐다. 한국의 전 대통령인 문재인과 윤석열의 아내, 즉 한국 영부인들 역시 적지 않은 구설수에 휩싸여 있다. 영부인은 벼슬이 아니며, 안하무인(眼下無人)의 태도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자리는 더욱 아니다. 그 사실을 잊는 순간 자신은 물론 남편까지 망치게 된다. 그러니, 다들 자중하시라.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5-28

토론인가 배틀인가

TV 토론이 유권자에게는 후보자의 자질을 가늠할 수 있는 창이며, 후보에게는 자신의 정책과 비전을 국민 앞에 펼쳐 보이는 기회다. 최근 방영된 TV 토론에서 토론 주제가 있었고 후보자 간 시간 배분도 조율된다. 그럼에도 정작 토론의 시간을 채운 것은 정책이 아니라 인신공격이었다. 후보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온통 특정 후보에 대한 비난으로 채웠다. 본인의 비전이나 공약에 대한 설명은 단편적이거나 생략되기 일쑤였다. TV 화면 앞에 앉은 국민은 ‘우리가 왜 이 장면을 지켜봐야 하는지’ 회의감에 빠져들었다. 정치토론은 상대를 깎아내리는 자리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은 ‘다른 생각’의 공존이며 토론은 바로 그것을 드러내고 조율해가는 과정이다. 후보자들이 서로의 정책과 가치관을 비교하며 논리적으로 겨루는 가운데, 유권자는 각자에게 더 믿음직한 정책을 선택할 근거를 확인한다. 오늘 선거 토론은 본래의 취지를 잊어버렸다. 무엇이 문제일까. 토론문화 자체에 대한 후보자들의 바른 인식이 없다. 후보자들이 토론을 ‘전투’로 인식하여 공격과 방어로 점수를 따고 상대의 실수를 하나라도 끌어내어 그것을 확대·재생산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얼마나 명료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가인데 토론 시간을 상대방 흠집내기로만 날려버린다. 유권자의 시간을 낭비하고 정치혐오를 부추기는 결과만 낳는다. 토론의 운영방식도 문제다. 주제가 분명히 제시되었지만 무시하거나 의도적으로 비껴가며 엉뚱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후보에게 제재가 없다. 사회자는 때때로 공정한 중재자라기보다 시간 관리자 역할만 한다. 방송사의 편집방식도 갈등과 자극 위주로 흐르는 경향이다. 차분하고 논리적인 토론보다 고성과 자극적인 언행이 ‘돋보이는 전략’이 되고 만다. 토론에 대한 교육과 훈련 문화가 정착되어 있지 않다. 유권자도 정치인도 진정성 있는 대화보다 ‘말싸움’에만 몰입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회, 듣는 사람보다 말하는 사람만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토론이 목적을 이룰 수 없다.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공직선거 TV토론의 규칙을 더욱 엄격히 정비해야 한다. 주제 이탈, 인신공격, 반복 발언에 대한 경고와 벌칙을 정비하고 실효적 제재가 가해져야 한다. 사회자의 적극 개입권과 진행 권한을 강화해 토론의 질을 높여야 한다. 유권자의 시선도 바뀌어야 한다. 자극적인 발언보다 성실하고 조리 정연한 설명을 평가하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 언론이 정책중심 보도를 강화하고 선거 토론을 예능처럼 소비하는 구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누가 이겼나’가 아니라 ‘무엇을 말했나’를 무겁게 여기는 분석과 보도가 필요하다. 정당의 책임도 크다. 후보자에게 단순한 말싸움 기술보다, 시민과 소통하는 진정어린 화법과 설득력을 장착하도록 준비시키는 노력이 요구된다. 정당 스스로 ‘네거티브 선거’를 탈피하려는 의지를 세워야 한다.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 토론은 정치 이벤트가 아니다. 토론이 정치의 얼굴이어야 한다. 어떤 토론을 하느냐는 어떤 정치를 바라는가 보여주는 거울이다. 선거 토론은 배틀이 아니다. 토론이 성숙해야 정치가 숙성한다. /장규열 고문

2025-05-28

오장육부-정신과 육체

오장육부(五臟六腑)에는 몸과 마음, 그리고 삶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 마련된 거대한 지도가 담겨있다. 장(臟)은 에너지를 저장‧변화시키는 본체이고 부(腑)는 그 에너지를 순환‧배출시키는 통로다. 이 둘이 서로 호흡을 맞추면 기와 혈이 전신을 부드럽게 흐르고, 사람의 몸과 마음은 동시에 튼튼해지고 가벼워진다. 반대로 간이 울체되면 근육이 뻣뻣해지고 화(火)가 치밀며, 신장이 허하면 요통과 무릎 통증이 찾아오는 동시에 두려움이 증폭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전통적 관찰이 현대 의학의 언어로도 설명된다는 점이다. 장(腸)과 뇌를 잇는 ‘장–뇌 축’ 연구는 장에서 합성된 세로토닌과 도파민이 뇌의 감정 회로를 움직인다는 사실을 밝혔고, 이는 곧 비위(脾胃)와 심(心)의 연관성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한다. 몸과 마음은 결국 하나의 덩어리다. 일상에서 깊고 일정한 호흡으로 폐를 충분히 사용하면 산소 포화도가 높아지는 동시에 과다한 교감신경 흥분이 잦아들어 불안이 완화된다. 반면 수면이 부족해 비위 기능이 흐트러지면 달콤한 음식이 당겨 체중이 늘고, 뇌의 보상 회로는 과각성 모드로 돌입해 짜증과 집중력 저하가 뒤따른다. 규칙적으로 걷거나 달리는 전신 운동은 간의 기혈 순환을 촉진해 근육 뭉침을 풀어 줄 뿐 아니라 정체된 감정까지 배출한다. 이처럼 ‘좋은 컨디션’은 특정 장부 하나를 집중 관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장육부가 빈틈없이 협연할 때 비로소 꽃피는 총체적 상태다. 정신 건강 역시 장부 균형에 달려 있다. 한의학은 마음의 근거를 심장만이 아니라 간‧비‧신장까지 오장육부 모두가 폭넓게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간은 욕구와 창의성, 비는 사유와 기억, 신은 의지와 생명력의 뿌리를 맡는다. 과로로 비위가 허하면 사소한 일을 곱씹는 사려과다가 생기고, 간에 열이 오르면 작은 자극에도 짜증과 분노가 폭발한다. 반대로 장부가 조화를 이루면 감정 기복이 완만해지고 정신적 몰입과 통찰이 자연스럽게 찾아온다. 명상과 복식호흡이 주목받는 이유도 폐‧심‧간‧신의 리듬을 맞추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장부 균형을 지키는 첫 걸음은 몸의 언어를 듣는 일이다. 아침에 일어나 혀의 색과 설태를 살피고, 첫 소변의 색과 냄새를 관찰하며, 오후쯤 찾아오는 피로의 위치와 강도를 기록해 보면 어느 장부가 과부하를 받는지 윤곽이 드러난다. 이어서 하루 한 끼만이라도 따뜻한 밥과 채소 위주의 간소한 식사를 하고, 점심 후 10분 산책으로 기와 혈의 순환을 깨우며, 잠들기 전 5분간 복식호흡과 명상으로 정신의 안정과 마음의 평화를 찾으면 몸은 자연스레 건강해진다. 여기에 주 2~3회 가벼운 땀이 맺힐 정도의 운동을 더하면 오장육부에 생기가 돌고 머릿속 구름이 걷히듯 기분이 맑아진다. 결국 오장육부는 낱낱의 장기가 아니라 우리가 숨 쉬고 움직이는데 그리고 감정까지 영향을 미치는 정신과 육체의 주체다. 숨을 제대로 쉬고, 땀을 흘리고, 잘 씹어 먹고, 편히 잠드는 평범한 실천과 간단한 명상으로 건강하고 편안한 오장육부를 만들 수 있다. 오장육부가 건강하면 육체와 정신의 건강은 따라온다. 오늘부터 걷고 움직여 명상하며 육체와 마음을 다스려 당신의 오장육부에 작은 격려를 건네 보자.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5-05-28

모리 교수의 “이토록 멋진 인생이라니”

두 달 전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을 책장에서 꺼내 다시 읽은 적이 있다. 그때 또 한 권의 책을 샀다. 모리 교수의 제자인 미치 앨봄이 쓴 책이 아니라 모리 교수가 생전에 썼던 미출간 유고를 그의 아들인 롭 슈워츠가 사후 편집해 출간한 책이었다. 영어 원제는 모리의 지혜(The Wisdom of Morrie)인데, 우리나라에서 출간하면서 제목을 이렇게 멋들어지게 바꿔 놓았다. 처음엔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과 같이 머리맡에 두고 읽었다. 최근엔 가방에 넣어다니며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읽는다. 원래 소설 읽기를 즐기던 심히 편협된 독서 취미가 있던 나는 책 한 권을 잡으면 며칠을 밤새다시피 읽어 끝장을 보곤 했다. 그러나 서사가 없는 책은 내리읽을 필요도 없고 차례대로 읽지 않아도 되니 쉽다. 침대 가까이 두고 집히는 대로 잡아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곤 했다. 지난주 일요일 108 사찰순례 때는 가방에 넣어 가서 버스에서 읽기도 했고, 오늘은 손주들 하교 도우러 나설 때 가방에 넣었다가 차 안에서 한 페이지를 읽기도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건 아니고, 읽은 데를 또 읽기도 하고, 가까이에 쓸 것이 있으면 밑줄을 그어두거나 별표를 크게 하기도 하고, 그마저도 없으면 그 페이지 귀퉁이를 접어 두기도 했다. 모리 교수가 “책장을 가벼이 넘기지 않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시간을 두고 찬찬히 생각하고 다각도로 궁리하기”를 바랬으며 “이 책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라”고 주문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노년의 즐거움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제시하고 있어 현재의 노년의 내 생활에 가장 긴요한 주문들이 그득그득하기 때문이다. 67살 즈음 자신이 고령자임에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노년의 삶을 긍정하기 시작한 작가, 모리의 성찰과 지혜에서 우러나온 거의 모든 언사에 백배 공감한다. 책상 위에 있는 책을 들고 책의 접힌 부분을 슬쩍 펼쳐보니 34페이지다. “오늘 내가 살고 만들어가고 경험하는 ‘지금’이 인생의 화양연화임을 이제는 안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무릎을 탁 쳤고, 혼자서 씩 웃었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의 신황금기라 여기는 나와 똑같은 생각이기 때문이다. 259페이지에서는 소중한 관계의 가치를 얘기하고 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거나 적은 사람들 모두와 인연을 이어가자”를 읽으면서 소소하되 귀한 모임의 소중한 동반자를 떠올리고, “손주들의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도울 방법을 알아내자. 이때 자녀와 손주의 관계를 방해하면 안 되겠지만 오히려 자녀들이 반길 수도 있다”를 읽으면서 나의 현재 최대 관심사를 어찌 알았을까. 또 줄을 굵게 쳤다. 8장 ‘이토록 멋진 인생이라니’에서는 잘 늙기를 제안한다. 세상은 아름답다. 마음을 열어 하늘을 보고 타인을 존중하고 삶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며 매일 즐겁고 황홀하게 웃음거리를 찾자.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고 은퇴 후의 자유를 활용하라는 조언. 그리고 무엇보다도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더욱 충만하고 자유롭고 활기차게 살 수 있다는 모리 교수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 책은 요 근래 내 지근 거리에 있으면서 내 시선과 손길을 가장 많이 받고 있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5-28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어느 나라에나 국민들이 애독하는 첫사랑 소설이 있기 마련입니다. 알퐁스 도데의 ‘별’, 이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을 텐데요. 한국인에게 가장 익숙하고 정감 가는 한 편의 첫사랑 소설을 꼽으라면, 그것은 아마도 황순원의 ‘소나기’일 겁니다. 일본에도 국민 첫사랑 소설이 있는데요. 그것은 일본 최초의 근대여성작가로 꼽히는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1872-1896)의 ‘타케쿠라베(키재기)’(1895-1896)입니다. 놀랍게도 일본판 ‘소나기’에 해당하는 ‘타케쿠라베’는 요시와라 유곽과 그 주변 동네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히구치 이치요만큼 평생을 가난과 고통 속에서 살다간 문인도 드물 겁니다. 소설가가 된 계기부터가 소설 발표를 통해 원고료를 받는 친구에게 자극받았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본래 하급 무사의 딸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던 이치요는, 오빠와 아버지가 연이어 병사하면서 집안의 가장이 되어 어머니와 여동생의 생계를 책임지게 됩니다. 그녀는 24년의 짧은 생을 사는 동안 늘 빈곤에 시달렸으며, 흡족한 연애도 해볼 수 없었습니다. 정혼까지 했으나 경제적인 이유로 파혼당한 시부야 사부로, 마음속 짝사랑에 머물렀던 문학선생 나카라이 도스이와의 관계만을 남겼을 뿐이니까요. 이치요는 그 모든 현실적 불우를 오직 붓 한 자루에 의지해 헤쳐 나간 여성입니다. 1890년 9월 이치요는 혼고기쿠사카초(本鄕菊坂町)로 이사하여 빨래나 바느질을 하며 간신히 생계를 꾸려나갑니다. 1892년부터 본격적인 작가의 길에 들어섰지만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이치요는 1893년 7월에는 지금의 이치요기념관이 있는 시타야류센지초(下谷龍泉寺町)로 이사하여 완구나 과자를 파는 잡화점을 여는데요. 이 곳은 유곽 요시와라의 뒷골목에 해당하는 동네로서, 이 곳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 바로 ‘타케쿠라베’입니다. 잡화점에서 별다른 수익을 얻지 못한 이치요는, 문학에 전념할 생각으로 1894년 5월 최후의 거처인 혼고마루야마후쿠야마초(本鄕丸山福山町)로 이사를 하는데요, 이 곳 역시 겉으로는 술과 요리를 팔고, 속으로는 매춘 행위를 하는 사창가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 곳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 바로 ‘니고리에’(1895)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임 그리워 돌아본다는 오몬(大門) 옆에 서 있는 버드나무에 이르는 길은 멀지만 오하구로 도랑에 등불이 비치는 유곽 삼 층에서 벌어지는 소란은 손에 잡힐 듯 들리고 밤낮없이 오가는 인력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번영을 상기시킨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타케쿠라베’는 요시와라 유곽과 주변 동네의 풍경과 분위기를 매우 섬세하고 아름답게 표현한 명작입니다. 요시와라의 잘 나가는 유녀를 언니로 둔 미도리는 승려의 아들 신뇨를 좋아하는데요. 동네 아이들이 골목파와 큰길파로 나뉘어 대립을 하는 가운데, 센조쿠 신사의 여름 축제가 열리는 저녁 무렵, 골목파 패거리가 들이닥쳐 미도리의 이마에 진흙이 묻은 짚신을 내던집니다. 배후에 신뇨가 있다고 오해한 미도리는 다음 날 아침부터 학교에도 가지 않울 정도로 큰 충격을 받는데요. 신뇨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미도리지만, “정말로 저렇게 싫은 녀석은 없을거야.”라고 침이 마르도록 욕을 해대면서도, 신뇨의 뒷모습을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바라보는” 애틋한 마음만은 변화가 없습니다. ‘타케쿠라베’에서 미도리와 신뇨의 여린 마음이 가장 문학적으로 표현된 것은 심부름을 가다가 미도리의 집 앞을 지나던 신뇨의 나막신 코 끈이 끊어지는 장면에서입니다. 고생을 모르고 곱게만 자란 도련님인 신뇨는 코 끈이 끊어져 허둥대기만 하는데요. 이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미도리는 격자문 사이로 손에 든 빨간색 천조각을 가만히 신뇨에게 던집니다. 그러나 천성이 소심하기만 한 신뇨는 고마운 생각이 들면서도, 천조각을 줍지도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다 간신히 그 자리를 벗어나고 마네요. 드디어 둘 사이에도 이별의 순간이 다가옵니다. 존경받는 승려의 아들인 신뇨와, 유녀의 운영이 예정된 미도리의 해피엔딩이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었나 봅니다. 미도리는 언니를 따라 요시와라 유곽의 유녀가 되고, 그 이후로는 거리에서 아이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절을 이어받아야 하는 신뇨 역시 승려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동네를 떠나는데요. 신뇨는 승려학교로 떠나는 날 아침에 미도리 방의 격자문에 조화 수선화를 꽂아 놓습니다. 미도리와 신뇨의 사랑 이야기는 요시와라 유곽이라는 환락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더욱 애잔하고 순수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케쿠라베’로 이치요는 일본 문단의 최고 권위였던 모리 오가이의 격찬을 받으며, 일약 문단의 스타로 떠오르는데요. 안타깝게도 그로부터 1년도 지나지 않은 차가운 가을날 폐결핵으로 요절하고 맙니다. 다행스럽게도, 불운했던 이치요의 사후는 참으로 화려한데요. 수많은 문인들의 기념관이 있는 도쿄지만, 이치요기념관 만큼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2004년부터는 국가적 영웅들에게만 허락되는 지폐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는데요. 여성이 일본 지폐에 등장한 것은 신공황후 이후, 무려 123년 만이라고 합니다. 평생 가난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난 히구치 이치요가 100년이 훨씬 지난 후에 고액권의 주인공이 됐다는 사실은 조금 얄궂게 느껴집니다. 이치요의 불우했던 삶과 사후의 영광을 떠올릴 때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아주 오래된 말이, 새로운 울림으로 다가오고는 합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5-05-27

약속

아버지 나이 마흔에 나는 태어났다. 아버지는 깊은 병환에서 회복하는 단계였고 내 시작의 환경은 어려웠다. 아버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애 늙은이 같았고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내 나이 세 살부터 아버지는 내게 약속을 했다. “아빠는 막내딸 시집 갈 때까지 꼭 살거야.” 그 말은 마치 주문처럼 반복되었고 나는 그 약속을 믿고 자랐다. 아버지는 키가 작고 마른 편이었다. 걸음걸이는 늘 분주했고 어깨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새벽에 나가 땀을 흘리고 들어와도 나를 보면 피곤한 기색보다 웃음이 먼저였다. “너무 늦게 낳아서 너 크는 걸 오래 보고 싶어.” 그 말이 어린 마음에 자꾸 남아 나는 아버지가 늙어 가는 게 싫었다. 어느 날 아버지의 흰 머리카락을 보며 “아빠, 늙지마.” 그랬더니 아버지는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는 늙어야 오래 살지 하시며 내가 시집 가서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까지 보겠다고 말했다. 정말 그랬다. 내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날까지 아버지는 내 곁에 계셨다. 나보다 내 아이를 더 귀여워했고 아이 손을 잡고 동네 한 바퀴를 도는 것 뿐 아니라 자전거도 가르쳐 주고 토끼도 함께 키우며 자연을 배우게 했다. 아버지의 약속은 시집갈 때였지만 그보다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지켜졌다. 아버지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던 것 같다. 아침부터 엄마의 전화가 잠을 깨웠다. 일주일 전부터 아버지의 컨디션이 떨어지고 집 앞 의원에서 약을 먹고 수액을 맞아도 차도가 없어 아버지는 이전보다 훨씬 살이 빠져 있었다. 무조건 나를 불러라고 해서 엄마가 전화를 하였고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으로 가 입원수속을 밟았다. 병원에서 이런저런 검사를 받으며 아버지는 내게 조용히 말씀하셨다. “이제 약속 다 지켰으니 편안하게 기도 되겠제?” 울컥 감정이 올라왔다. 아버지는 단순히 오래 사신 것이 아니라 약속을 위해살아내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니요, 손주 결혼식도 보셔야죠.” 아버지는 웃었다. 그 웃음 속에 긴 시간 동안 묵묵히 약속을 지켜낸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평온함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약속이란 말은 단순한 언약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의 약속은 현재 진행형이다. 입원실 천장에 매달린 링거 줄을 바라보며 아버지는 다시 말했다. 손주 결혼식까지는 내가 봐야지라며. 그것은 병을 이기겠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늙고 아프고 작아져도 여전히 우리 곁에 있고 싶다는 다짐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부모의 약속인지도 모른다. 자식보다 오래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식에게 괜찮은 이별을 남기고 싶은 그 마음. 약속은 거창하지 않다. 한 줌의 흙 속에서도, 흰 종이 위의 주문서에도 병원 위의 다짐 속에도 있다. 그것은 곧 희망이다. 누군가 나를 믿는다는 증거이고, 내가 누군가를 위해 살아간다는 표식이다. 오늘도 나는 조용히 마음속 약속 하나를 꺼내어 다시 접는다. 아버지의 약속은 단지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우리를 향한 다짐이고 기다림이며 때로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아버지는 병을 이겨내겠다는 말 너머에 우리와 더 오래 머물고 싶은 간절함이 담긴 마음이었다. 삶은 예기치 못한 변수로 가득하지만 그 안에서 약속은 우리를 붙드는 끈이 된다. 나는 오늘도 나만의 약속을 되새긴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다시 한 번 약속을 꺼내어 본다. 언젠가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날이 오더라도 우리는 그 약속을 품고 살아온 시간을 기억할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진심으로 한 약속은 삶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든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약속을 기다리며 지키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김경아 작가

2025-05-27

Clean 작업장, Clean 마인드

사람의 변화는 쉽지 않다. 교육을 한다고 행동의 변화까지는 어렵다. 특히, 지식과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가치관이 강한 사람일수록 변화는 쉽지 않다. 사람은 교육을 받으면 생각이 열리고, 실행하면서 진짜로 변한다. 즉, 교육은 변화의 시작이고 실행은 변화의 완성이다. 교육은 사고의 틀을 넓히고,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삶을 바꾸는 것 사이엔 커다란 간극이 있다. 아무리 좋은 강의, 책, 워크숍을 통해 들어도 행동하지 않으면 변화는 인식에 그친다. ‘운동해야 건강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실천하는 사람은 적다. 실행은 실제 변화를 만든다. 실행을 통해서 사람은 몸으로 배우고, 경험으로 내면화한다. 시행착오, 피드백, 반복 속에서 진짜 변화가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가치관, 신념까지 바뀐다. 실행 없는 교육은 조리법만 배우고 요리는 안 하는 것과 같다. 사람이 실행하고 변화하려면, 혼자 힘만으로 어렵다. 주변 분위기, 시스템, 문화가 실행을 끌어내고 유지시킨다. 가령, 모두가 청소하는 회사에선 청소가 습관이 된다. 문제를 솔직히 공유하는 문화에선 감추기 보다 개선을 선택하게 된다. 교육, 실행, 환경이 새로운 이해와 실행 속에 습관화 되고 변화하게 된다. 즉 ‘Learning by doing’ 을 실행하면서 배우고 변화된 결과에 비로소 학습이 되는 것이다. ‘Clean 작업장, Clean 마인드’는 청소나 정리 수준을 넘어 조직문화와 업무 방식의 핵심 가치로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특히, 제조업, 생산 현장, 또는 혁신 지향형 조직에서는 이 두 개념이 성과와 안전, 품질, 효율을 동시에 향상시키는 기초 역할이다. Clean 작업장은 단순히 깨끗한 물리적 공간이 아닌 정돈된 시스템과 규율이 살아 있는 작업환경을 의미한다. 즉, 언제나 누구나 문제없이 일할 수 있는 시작과 끝이 있는 표준화 된 상태를 말한다. Clean 작업장을 만들기 위한 핵심 조건은 5S 활동의 철저한 실행이다. 필요 없는 것을 버리고, 필요한 것을 정돈하고, 청소를 해서 깨끗한 작업장을 만드는 일이다. 도구의 위치, 작업 절차, VM(Visual Management) 등이 시각적으로 명확하게 하는 표준화된 작업환경이다. 낭비를 줄이는 ‘Lean Thinking’ 사상으로 불필요한 물건, 불필요한 공정 제거로 생산 라인을 최적화하는 것이다. Clean 마인드는 명확하고 건전한 사고 방식, 즉, 책임감 있고 긍정적이며 자기통제력이 있는 마음가짐을 뜻한다. ‘내가 하는 일에 애정을 갖고 남 탓보다 나부터 돌아보는 태도’ 라고 할 수 있다. 실행 조건은 첫째, 책임의식과 자기관리이다. 실수나 문제를 숨기지 않고, 스스로 개선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둘째, 긍정과 존중의 소통이다. 불필요한 비난 대신 건설적인 피드백을 주고 받는 문화를 말한다. 셋째, 자기 성찰과 개선 지향이다. ‘왜?’ 라고 묻고, 더 나은 방법을 찾으려는 의지를 말한다. 넷째, 타인과 조직을 위한 행동이다. 이기심이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을 고려한 행동을 말한다. 다섯째, 감정 관리와 일의 집중이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목적 중심으로 일하는 것이다. 교육은 마음을 열게 하고, 실행은 몸이 익게 만들고, 환경과 문화는 그 변화를 굳게 만든다. Clean 작업장과 Clean 마인드는 조직 변화의 시작이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2025-05-27

동해안 기차여행

오월의 신록 속으로 질주하는 기차에 몸을 맡긴다. 연두에서 초록으로 짙어 가는 산과 모내기 준비가 한창인 들판을 지나 이내 탁 트인 동해바다와 마주하며 미끄러지듯이 내달린다. 몇 개의 교량과 터널을 지나니 차창 밖으로 지난 3월의 대형산불로 산림과 농가에 극심한 피해를 준 처참함이 푸른 산의 검버섯처럼 드러나는 영덕 일대가 스치듯이 지나간다. 간간이 농촌ㆍ산촌ㆍ어촌마을이 나타나고 바다와 산을 접하며 동해안 7번 국도와 나란히 강릉까지 이어지는 동해선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난 것이다. 올해 1월 1일부터 개통된 동해선 고속철도는 한반도의 등줄기로 불리는 동해안을 따라 강릉~동해~삼척~포항~경주~울산~부산(부전)을 이어주는 약 370km 구간이다. 작년 말 포항~삼척 구간의 고속전철화 사업이 완공됨에 따라 올해부터 이른바 ‘동해안 철도시대’가 열린 것이다. 오랜 염원의 동해선 개통으로 강릉~부산 간은 3시간 50분대에 주파 가능해져 동해안과 강원 북부권의 물류ㆍ산업ㆍ관광 등의 분야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특히 강원 동해안과 인구 300만의 부산과 경북ㆍ경남 동해안이 직선으로 연결되어 관광수요의 폭발적 증가는 물론 산업적인 측면의 시너지 효과도 상당할 것으로 여겨진다. 과연 항간에 명성(?)이 자자한 기차를 설렘 속에 직접 타보니 운행 내내 열차의 쾌적함과 편리함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평소 자동차로 제법 시간이 걸려야 가던 월포나 영덕, 울진 등지를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낯선 풍경 담기를 즐기다 보니 어느새 다음 역에 다다를 정도로 빠른 속도감이 들었다. 마치 수도권의 전철을 타고 가다가 얼핏하는 사이 금세 다음 정거장에 도착하는 것처럼 먼 거리가 짧게만 여겨졌다. 다만 예전의 완행열차 특유의 쇠바퀴 굴림의 덜컹거림이나 희미한 기적 속에 또렷하게 들려오던 “오징어 땅콩 카라멜~ 삶은 계란 있어요~”라고 외치며 기차 안에서 간식을 팔던 ‘홍익회’ 아저씨들의 목소리가 없어져서 수십년 전과는 사뭇 격세지감이 드는 듯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바다 가까이에 기차역이 있는 정동진역에 기차가 섰을 때는 잠시 추억과 낭만에 젖어 들기도 했었다. 어린 애들과 함께 정동진 해변 모래밭에서 사발이 오토바이를 신나게 타기도 했었고, 가족들과 함께 커다란 모래시계를 보면서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시간을 허비하지 말자고 다짐(?)하기도 한 것 같았다. 또한 5~6년 전 아들과 함께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동해안자전거도로를 따라 종주 중 정동진 고개 넘어 아들 자전거의 뒷바퀴 펑크로 때우는데 엄청 고생스러웠던 기억 등이 철썩이는 파도 결에 오버랩되기도 했었다. 차창에 어리는 풍경 감상과 아련한 회억에 잠기다 보니 어느새 강릉역에 도착했다. 비가 와서 한결 구미가 당긴 초당순두부전골, 환상적인 미디어아트에 몰입되는 강릉아르테뮤지엄,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선교장(船橋莊) 고택에서의 보기 드문 파이프오르간 연주, 허균ㆍ허난설헌기념공원과 경포대 산책로, 카페거리 안목해변 등 어디 하나 둘러봐도 발길 머물고 싶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이처럼 동해안 기차여행은 축지(縮地)로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먹고 즐길 거리를 무한정 가능케 해주는 묘미가 있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2025-05-27

대선승패는 ‘사전투표’와 함수관계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가 사전투표 첫날인 내일(29일) 광주에서 가장 먼저(오전 6시) 투표를 하겠다고 했다. 사전투표에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일부 보수진영 유권자에게 충분히 자극을 줄 수 있는 캠페인이다. 한 전 대표는 지난해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부정선거 음모론과 단호하게 선을 긋지 못하면 ‘민주당은 3일간, 우리는 하루만’ 투표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전투표는 젊은층의 투표참여를 높이는 경향이 있어 진보진영에 유리하다는 분석이 많다. 지난해 4월 치러진 22대 총선에서 사전투표율이 가장 높은 지역은 호남과 수도권이었다. 투표율 1위는 전남(41.19%)이 차지했고, 그다음 전북(38.46%), 광주(38%) 순이었다. 꼴찌는 대구(25.6%)였다. 당시 민주당은 “하루라도 빨리 윤석열 정권을 심판하겠다는 민심이 확인됐다”고 했다. 실제 이 총선에서 사전투표 결과로 당락이 바뀐 지역구가 52곳에 달했으며, 민주당이 압승했다. 이번 대선의 승부를 가를 최대변수도 사전투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최근 대선에서는 사전투표율이 본 투표율과 거의 차이가 없다. 3년 전 20대 대선 때 사전투표율은 36.9%로 본투표율 40.2%와 비슷했다. 지난해 22대 총선 때도 사전투표율(31.28%)이 본투표율(35.7%)에 근접했다. 사전투표가 사실상 보편적 투표 방식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번 선거는 본 투표일(6월 3일)이 휴일과의 간격이 좁아져 투표율이 낮아질 수 있다는 분석이 많다. 직장인의 경우, 월요일인 2일 휴가를 내면 5월 31일부터 나흘간 쉴 수 있다. 한국지방신문협회가 지난 24~25일 에이스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3028명) 결과, 응답자의 34.5%는 ‘사전투표를 하겠다’는 의사를 보였고, 63.3%는 ‘본투표를 하겠다’고 했다. 다만 보수 성향 응답자 가운데 75.4%는 본투표 참여 의사를 밝힌 반면, 진보 성향 유권자들은 사전투표(50.3%)를 하겠다는 응답자가 본투표(47.6%) 응답자보다 오히려 많았다. 중앙선관위는 사전투표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불안이 생기지 않도록 이번 대선에는 투·개표 관리를 철저히 하겠다고 발표했다. 우선 이번 사전 투표에서는 ‘투표소별’로 투표자 수를 1시간 단위로 공개하기로 했다. 종전에는 ‘선거인 주소지’를 기준으로 사전 투표자 수를 시간대별로 공개했다. 사전 투표자 수를 부풀려 투표를 조작한다는 의혹을 불식하려는 조치다. 그리고 이번 대선에서는 ‘공정선거참관단’도 운영한다. 공정선거참관단은 투·개표 과정뿐 아니라 후보자 등록, 선거인 명부 작성, 투표지 회송용 봉투 우체국 접수 절차 및 투표함 이송 등 사전 투표 전 과정을 현장에서 참관한다. 이번 대선도 선거일이 가까워질수록 주요 후보 간 지지도 격차가 좁혀져 박빙의 승부전이 예상된다. 이 때문에 각 정당과 대선 후보들도 경쟁적으로 사전투표를 독려하는 메시지를 내고 있다. 유권자들은 내일, 모레 사전투표일에는 아무런 부정선거 의심 없이 투표장에 나와 주권을 행사하길 바란다.

2025-05-27

포항이 크루즈관광 명소라면

크루즈 관광이란 단순히 배를 타고 이동하는 개념의 관광 서비스 산업이 아니다. 지금은 숙박, 교통, 관광, 엔터테인먼트를 종합적으로 연결하는 새로운 형태의 리조트 산업으로 발전하고 있다. 바다 위의 호텔에서 숙박을 하지만 배 안에서 제공되는 즐길거리로 여행의 재미는 배가 된다. 갖가지 세계 요리를 맛볼 수 있는가 하면 수영장, 놀이시설, 스파, 카지노, 영화관, 피트니스 등 다양한 위락시설은 크로스만이 가지는 장점이다. 또 특급호텔 서비스를 여행 기간 내내 누릴 수 있다는 것도 크루즈 여행의 매력이라 하겠다. 그래서 크루즈 여행을 찾는 인구는 매년 늘어난다. 작년 12월 포항 영일만항에서는 관광객 1100명을 태운 대형 크루즈 코스타 세레나호가 일본 오루타항으로 출항했다. 이 배는 오루타, 삿포로, 하코다테 등을 거쳐 5박6일 일정을 소화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탈리아 선사 소속의 코스타 세레나호는 11만4000톤급 선박으로 길이만 290m에 이른다. 포항은 동해안 유일의 항만인 영일만항이 있는 곳이다. 영일만항을 모항이나 기항으로 하는 크루즈관광 산업이 활성화된다면 포항은 동해안 최대의 관광명소는 물론 환태평양 관문 역할도 가능하다. 포항시는 2019년부터 크루즈관광 유치에 많은 공을 들여왔지만 아직은 크루즈의 불모지다. 대형 국제 크루즈 선박을 몇 채 띄운 적은 있으나 영일만항이 크루즈항이라고 아는 이는 드물다. 경주 APEC을 맞아 영일만항에 크루즈선을 띄우는 것이 검토되고 있다. APEC 경주를 찾는 관광객의 부족한 객실을 크루즈선으로 대체한다는 아이디어다. 포항을 크루즈 명소로 만들 좋은 기회 아닌가.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5-27

산림 가치의 재발견

국토의 약 63%를 차지하는 우리나라 산림은 기후 위기와 도시화가 심화되는 이때, 다기능적 가치가 더욱 주목받고 있다. 지난 3월 발생한 대형 산불로 의성, 산청, 울산 등 영남권 10만4000 ha의 산림이 소실되었다. 산림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 회복된다는 인식이 있지만, 이는 실질적인 재난 대응책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보다 효과적인 산불 대응은 무엇일까. 산림의 생태적 대응으로 ‘수종 전환’이 있다. 산림의 약 37%는 침엽수로, 특히 소나무는 산불에 매우 취약하다. 소나무재선충병과 같은 병해충 피해 저지를 위해서도 수종 다변화가 요구된다. 굴참·상수리나무 등 내화성 강한 활엽수 위주의 ‘내화 수림대’를 조성하면 산불 확산을 늦추는 자연 소화제 역할을 할 수 있다. 호주는 2019~2020년 대형 산불 이후 유칼립투스 대신 다양한 활엽수를 혼합 조림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며, 미국은 서부 산악지역에 폭 30~50m의 산불 차단 구역과 방화 도로 조성 및 AI 산불 감시 시스템 도입하고 있다. 산불 초기 대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임도’다. 산불 진화 인력의 접근성을 높일 뿐 아니라, 트레킹과 산악자전거(MTB) 코스 활용이나 양떼목장 같은 산지형 관광과도 연계할 수 있어 산악레포츠 자원으로도 가치가 크다. 산불 감시용 카메라 설치, 산림 인접 주택가와 사찰의 비상소화 시설 구축이 병행된다면 산불 대응과 예방 효과 모두 향상될 것이다. 산림의 경제·문화적 가치도 확대되고 있다. 지난 4월 방문한 포항시산림조합은 임산물 산지종합유통센터 건립, 로컬푸드 직매장 운영 등 임산물 시장 확대를 위한 다양한 사업으로 일자리 창출과 임가 소득 증대에 기여하고 있으며, 특히 ‘숲마을’이라는 산림 테마 복합문화공간을 조성하여 주목받고 있다. 연간 100만 명이 찾는 이 공간은 생태학습장, 숲 카페, 임산물 판매장, 명상쉼터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수목원을 옮겨놓은 듯한 자연친화적 공간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울산숲’과 국제정원박람회장 주변에 조성될 ‘미세먼지 저감숲’은 도시열섬 완화와 탄소 흡수 등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자연친화적 공간으로, 도시와 산림을 잇는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 최근 울산기업인 롯데정밀화학이 스마트 묘목장을 건립해 주었다. 도심 내 숲과 정원이 많이 만들어지면 더 많은 나무와 꽃이 필요해지고 묘목 재배와 화훼산업도 활성화될 것이다. 나무 의사, 식물 병원도 만들어져 현대인의 아픈 마음까지 치유해 줄 수도 있다. 결국, 산림은 단순한 휴식공간을 넘어 기후 위기 대응, 삶의 질 향상,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는 중요한 자산이다. 이제는 산림의 생산성과 재해 대응력을 높이고 정원문화를 확산해 산림정책을 고도화할 때이며, 이는 산림청을 산림부로 승격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어머니 나무가 있는 숲은 인류가 탄생하고 오랜 기간 자라온 삶의 터전이었다. 도시화로 인해 망각해 온 에덴동산을 새롭게 다시 찾아 만들어가는 것은 어떨까. /안승대 울산광역시 행정부시장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단체장 출마 희망자의 기고문을 받습니다. 후보자의 현안 진단과 정책 비전 등을 주제로 200자 원고지 7.5∼8.5장 이내로 보내주시면 지면에 싣도록 하겠습니다. 기고문은 사진과 함께 이메일(hjyun@kbmaeil.com)로 보내주세요. 외부 기고는 기고자의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5-05-26

정치와 문화

20세기 초까지 독일은 인류사상 유례없는 인문학적 성취를 이룬 나라였다. 칸트를 비롯하여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같은 쟁쟁한 철학자들과 괴테, 실러, 토마스 만, 헤세 등 굴지의 문호들이 독일의 정신세계를 이끌었고, 음악 분야에서도 바흐, 베토벤, 바그너, 브람스, 슈만 등 불멸의 작곡가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그런 문화적 자산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히틀러라는 희대의 독재자에 열광하며 나치즘의 길로 나아갔다. 그 결과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과 대량 학살, 그리고 국가의 파멸로 치달았다. 러시아와 그 주변 국가들이 소비에트연방으로 공산화 되는 과정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같은 세기의 문호들과 차이콥스키, 무소르그스키, 라흐마니노프 같은 천재적인 음악가들이 있었고, 정신적 지평을 떠받치는 철학자들과 종교 지도자들도 많았지만, 공산주의혁명이라는 이념의 광풍 앞에서는 그런 문화적 축적도 한낱 가랑잎에 불과했다. 그 결과 스탈린 집권기에는 수천만 명이 숙청·강제노역·기근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이념적 폭력은, 나치즘의 잔혹성과 견줄 만큼이나 인간의 존엄과 생명을 짓밟는 참상을 낳은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통해 우리는 인문학적인 축적이 사회 전체의 이성과 양심을 보장하지 않을뿐더러 정치적 광기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알게 된다. 문화적 지성이 오히려 선동과 조장의 도구로 전락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서 인류가 소중히 받들어 온 인문학적 가치가 한낱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감마저 든다. 작금의 우리나라에도 그러한 현상의 조짐을 보이고 있어 불안감을 더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지금 심각한 진영대립 가운데 대선 정국을 맞고 있다. 특히 우려스러운 것은 대다수 식자층과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이념적 편향성이다. 자신의 이념 성향을 이유로 특정 진영에 대한 맹목적 지지를 보내는 행태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조차 외면하는 처사이다. 소위 의식이 깨었다는 미명하에 대다수 식자층이나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특정 정치세력 옹호의 도구를 자청하는 행태를 보이는 것이다. 상대 진영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적대감과 비방과 서슴지 않으면서 자기 진영 후보의 범죄 혐의나 도덕적 결함에 대해선 비호하고 정당화하기에 급급한 비양심적이고 반이성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 이념은 사유의 출발점이지 판단의 종착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식자층의 역할은 권력의 감시와 공공성의 수호이지, 특정 진영의 정치적 방패막이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지성인들이야말로 가장 먼저 자기 성찰의 거울 앞에 서야 한다. 그래서 지금 대한민국이 처한 위기 상황에 대한 각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어느 편이 정권을 잡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지난 수년간 우리나라는 편향된 정치적 광풍에 휩쓸렸다. 그리고 지금은 절체절명의 고비를 맞고 있다. 국민 각자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묻기 전에 무엇이 옳은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2025-05-26

인간이 그리는 무늬, 침촌 인문학당

인문이란 무엇일까. 그 정의는 어렵지만, ‘인간이 그리는 무늬’ 정도로 하자. 인류 탄생 이후로, 인간은 지구라는 행성에서 수많은 무늬를 그려왔다. 그 무늬는 다양하다. 문학·철학·역사·종교· 언어· 예술 등등. 우리의 조상이 그렸고, 당신과 내가 그리고 있으며, 우리의 후손들이 그릴 것이다. 당신은 지금까지 어떤 무늬의 그림을 그렸는가. 자신의 과거· 현재·미래의 그림을 감상하고 통찰하는 것. 이것이 인문학이다. 우리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고 또 본다. 인류가 야만에서 문명으로 진화한 것은 우리 스스로가 좋은 그림을 그리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예술을 사랑하였으며,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책을 읽으며, 명상하였다. 2014년 봄, 포항시 북구 장성동 소재 침촌문화회관 1층 70여 평의 공간에 퀘렌시아를 개설하였다. 틈틈이 공부하여 쌓은 나름의 결실을 나누고, 나 자신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 마음을 내었다. ‘인문학당 침촌 싸띠스쿨’ 10여 년의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명상, 차와 음악, 그리고 인문학의 순서로 세 시간 동안 노는 곳이다. 변호사가 무슨 저런 일을? 곁눈질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좋은 일이니 그냥 가면 될 것이었다. 첫 시간은 ‘명상의 시간’이다. M.O.S.T.(mindscience origin sati technic) 풀이 하자면, ‘알아차림에 기반한 마음과학 기술’ 정도이겠다. 명상은, 과학이라는 근거에서 출발한다. 시냅스 가소성(synaptic plasticity)에 기반한 내면 소통 과정이다. 걷기 명상과 호흡명상으로 ‘알아차림 기술’을 연마한다. 삶에서 일어나는 외형적 조건들에 도전장을 내밀고, 자신과 끊임없는 내면 소통을 하는 시간이다. 둘째 시간은 ‘차와 음악’의 시간이다. 정갈한 차 한잔과 음악 속에서 침묵과 담소로 힐링의 시간을 가진다. 마음 편하게 차 한잔 나눌 수 있으면 그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리라. 셋째 시간은 ‘인문학 강의’ 시간이다. 학당의 기본 교재는, ‘MOST’(붓다빠라 반테 저), ‘뇌 생각의 출현’(박문호 저), ‘축의 시대’(카렌 암스트롱 저), ‘거의 모든것의 역사’(빌브라이슨 저), ‘빅 히스토리’(데이비드크리스천 저)로 출발하였으며, 이 이외에도 많은 교재를 도반들이 돌아가면서 강의하는 형식으로 공부하였다. 학생이 스승이요 스승이 학생인 학당, 최고의 학생이 최고의 스승인 곳. 가르침은 없다. 스승이 된 자는 자신의 무늬를 보여주고, 학생이 된 자는 그저 감상할 뿐이다, 학당이 위치한 건물은 전통을 자랑하는 수원백씨 참판공 종회 건물이다. 5층의 대규모 건물로 이쁜 정원, 주차장 시설까지 완벽하다. 평소 건물관리가 매우 잘 되어 있는 건물이다. 학당이 지금까지 잘 운영되어 온 것은 종회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내공을 닦는 곳이요, 쉬는 곳이요, 지식을 쌓는 곳이다. 오늘도 자유롭고 행복한 사유 여행은 계속된다. 잘랄루딘 루미의 ‘봄의 정원으로 오라’가 생각난다. “여기 명상과 차, 음악과 지혜가 흐르는 아름다운 학당이 있다. 하지만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리고 당신이 온다 한들 또한 무슨 의미가 있으랴” ‘나는 숨 쉰다. 고로, 존재한다.’ /공봉학 변호사

2025-05-26

국민의 근심이 된 정치

국민의 ‘희망’이 되어야 할 정치가 ‘근심’이 된 지 이미 오래다. 막장 권력투쟁, 사리사욕 정치, 아사리판 선거는 한국 정치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국민은 대선 때마다 ‘이번에는 혹시’하고 기대해보지만 결과는 언제나 ‘이번에도 역시’였다. 정치인들의 생각이 구태의연한데 정치가 달라질 수 있겠는가? 권력투쟁에 일그러진 정치인들의 모습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집권을 위한 감언이설(甘言利說)은 갈수록 교활하다. 평소에는 편 가르기를 일삼다가 선거 때는 통합의 화신처럼 말하고, 평소에는 독선을 고집하다가 선거 때는 민주주의자로 둔갑한다. 카멜레온 같은 변신 정치는 노회(老獪)한 정치꾼들에게 식은 죽 먹기다. 이들의 선거유세는 마치 공자가 부활한 것 같은데, 지금까지의 정치행태를 불 때 가소롭기 짝이 없다. 후보들은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잘못된 과거’부터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 민주당과 이재명 후보에 대한 우려는 무엇인가? 민주당은 이재명 일극 체제이며 정당민주주의는 죽었다. 민주당은 이재명을 구하기 위해 탄핵과 특검으로 행정부를 무력화하고, 사법부를 겁박해서 삼권분립을 형해화(形骸化)했다. 대법원이 이재명 사건에 유죄취지의 파기환송을 하자, 민주당은 대법관 청문회와 대법원장 특검으로 사법부를 협박하는 한편, 이재명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입법들을 서두르고 있다. 그러면서도 ‘깨끗한 법정’과 ‘사법 정의’를 말할 자격이 있는가? 이런 민주당의 이재명 후보가 ‘절대 반지의 제왕’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우려는 합리적 추론이 아닌가? 액튼 경(Lord Acton)이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고 경고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한편 국민의힘과 김문수 후보는 어떤가? 당명은 ‘국민의 힘’이지만 현실은 ‘국민의 짐’이 되고 있다. 권력에 줄 서는 ‘웰빙 보수’는 민심을 모른다. 친윤이 주도한 후보 교체 쿠데타의 실패로 당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정치경험이 전혀 없는 윤석열을 영입해서 위기를 자초하더니 또다시 한덕수를 영입하려다가 사분오열되었으니 도대체 당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게다가 김문수 후보는 보수혁신과 중도 확장에 소극적이고, 헌법재판소의 만장일치 탄핵을 공산국가에 비유하는 등 여전히 극우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도층과 개혁보수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대선은 필패라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가? 낡은 보수에 둘러싸여 악전고투하고 있는 개혁보수의 젊은 비대위원장 김용태의 모습이 처연하다. 이처럼 거대 양당과 후보들의 정치행태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권력에 눈이 멀어 정의를 말하면서 정의를 짓밟고, 국민을 말하면서 국민을 배신하는 표리부동의 정치는 대선 이후가 더 걱정이다. 부디 차기 대통령은 ‘권력의 노예’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괴물 같은 권력’이 되지 않으려면 목에 힘을 빼고 겸허한 자세로 비판과 고언(苦言)을 경청해야 한다. 역대 대통령들의 불행한 종말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기를 바란다.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2025-05-26

자랑할 건 ‘여권 파워’가 아니다

외국을 여행하는 사람의 국적과 신분을 증명하고, 방문하는 국가에 자국민의 보호를 당부하는 문서. 여권(旅券)이다. 그 여권으로 비자 없이 여행할 수 있는 나라가 얼마나 많은지를 가늠해 이른바 ‘여권 파워’라고 부르는 모양. 최근 한국 여권의 ‘힘’을 보여주는 조사 결과가 하나 나왔다. 영국 런던에 자리한 글로벌 시민권 및 거주 자문회사 헨리&파트너스는 ‘2025 헨리 여권 지수’를 발표하며 한국과 일본이 공동 2위에 올랐다고 밝혔다. ‘헨리 여권 지수’는 여권 소지자가 비자 없이 방문할 수 있는 국가의 수가 많을수록 높은 순위를 준다. 국제항공운송기구의 데이터가 조사의 토대다. 이 조사에서 여권 파워가 가장 강한 국가는 싱가포르로 드러났다. 싱가포르 여권 소지자는 비자 없이 193개 나라를 방문하는 게 가능하다. 한국과 일본의 여권으로는 190개 나라를 무비자로 여행할 수 있다. 해외 관광이 보편화된 시대이기에 나쁜 소식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한국 여권 파워는 세계 2위”라고 외치고 다니는 건 좀 낯 뜨거운 일인 듯하다. 왜냐고? 이어지는 ‘헨리 여권 지수’ 순위를 보자. 덴마크, 핀란드, 프랑스, 독일, 아일랜드, 이탈리아, 스페인 여권으로도 비자 없이 189개 나라를 여행할 수 있고, 오스트리아,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포르투갈, 스웨덴 여권도 무비자로 방문할 수 있는 나라가 188개다. 한국과 겨우 1~2개 국가 차이. 무엇이건 자화자찬이 과하면 웃음거리가 된다.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국가가 많은 걸 자랑할 게 아니라, 여행자로서의 매너를 잘 지키는 게 진정한 자랑거리가 아닐지.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5-26

비호감은 뒤로 숨는 게 후보를 돕는다

선거는 그 자리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고르는 일이다. 그런데 모두 마음에 안 들어, 그나마 덜 미운 이를 고를 때도 있다. 최근 우리는 그런 선거를 많이 했다. 비호감 선거다. 지난 대통령 선거가 그랬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와 민 주당 이재명 후보 모두 호감도보다 비호감도가 컸다. 이재명 후보는 지난 10일 유세에서 “정치는 우리가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가만히 있으면 상대방이 자빠진다. 그러면 우리가 이긴다”라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말을 인용했다. 국민의힘 당권파가 마음대로 후보를 만들려다 실패한 일을 꼬집었다. 과거에도 이런 사례는 무수하다. 2004년 열린우리당(현 민주당) 정동영 의장 은 “60대 이상 70대는 투표 안 해도 괜찮아요…그분들은 집에서 쉬셔도 되 고…”라는 말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전멸 위기였던 한나라당이 121석으로 살아났고, 200석을 넘보던 열린우리당은 152석에 그쳤다. 그 뒤 대통령 선거에서도 정동영 후보는 참패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두 번이나 다 이겼다고 생각한 대선을 망쳤다. 나중에 김대업이라는 사기꾼의 공작으로 결론이 났지만, 아들의 병역 회피 의혹이 만든 ‘비호감’ 탓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직후 자유한국당은 ‘국정 농단’ 사건에 대한 국민의 분노 속에서 선거를 치렀다. 제대로 끊어내지 못하고, 정권을 갖다 바쳤다. 이재명 후보가 24일 비법조인도 대법관으로 임명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추 진하는 데 대해 “섣부르다”라며 제동을 걸었다. 자신의 선거법 위반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한 대법원을 공격하던 이 후보도 여론의 반발을 의식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칠 수 있다. 최근 여론 흐름이 심상찮기 때문이다. 50%를 넘어서던 지지율이 내려앉고, 김문수·이준석 후보가 상승세를 탔다. 이 후보의 방탄복이 테러에 대한 동정심보다 ‘방탄 입법’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만 부각했다. 삼권 장악과 독재 위험을 경고했다. 차기 요직을 둘러싼 입소문이 오만함으로 비쳤다. 그러자 이 후보도 긴장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지난 21일 ‘부정선거, 신의 작품인가’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관람했다. 탄핵 이후 첫 공개 행보다. 그는 비상계엄의 명분 중 하나로 ‘부정선거’를 꼽았다. 이날 행보는 비상계엄이 정당하다는 무언의 시위로 비쳤 다. 그의 옆에 이영돈PD와 비상계엄을 ‘계몽령’이라 주장하던 전한길 전 역사 강사가 앉은 사진을 공개했다. 윤 전 대통령에 대해 엉거주춤한 국민의힘의 대선 전략에 비상계엄이라는 부담을 다시 한번 더해줬다. 그는 지난 11일 SNS에 “이제는 마음을 모아 주시라”면서 지지층 결집을 호소했다. 그가 움직이는 게 김문수 후보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는 탄핵에 반대하던 시위대가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정치적 팬덤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윤 전 대통령이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들이 이재명 후보를 찍을까. 그가 입을 열수록, 대중 앞에 나설수록, 비상계엄의 트라우마만 생생해진다. 민주당 측에 선 방송 패널들이 이재명 후보의 문제가 지적될 때마다 “그래도 비상계엄, 내란 세력만큼 나쁘겠느냐”라고 방어막을 친다. 윤 전 대통령 측의 착각이다. 지난 총선에서도 그랬다. 윤 전 대통령을 찍은 유권자라고 그의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게 아니다. 강서구청장 후보를 마음대로 뒤집어도, 국민의힘 후보를 마음대로 조작해도, 수사받고 있는 피의자를 대 사로 임명해 출국시켜도, 선거 직전에 의정(醫政) 갈등에 기름을 부어도, 자기 표를 얹어준다고 착각했다. 표를 깎아 먹으면서 지원한다고 착각했다. 이재명 후보는 계산이 빠르다. 여론조사를 믿는다. 대법원 선고 직후 분개했던 마음도 스스로 자제할 줄 안다. 당내 충성 경쟁이 오히려 표를 깎아 먹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윤 전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여전히 착각 속에 산다. 어차피 보수 후보를 찍을 유권자를 자기 표라 착각한다. 어쩌면 알면서도 선거 이후를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비호감인 사람은 뒤로 숨는 게 후보를 돕는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5-05-25

자동차 키 실종 사건

이것은 지난주에 벌어진 사건이다. 비공식 사건기록, 일명 ‘차 키 실종 사건’. 출근 시간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자동차 키를 찾아 거실을 헤매는 중이었다. 차 키를 책상 위에 올려둔 사실에 대한 기억은 명확하다. 위증할 이유도 없다. 무릎을 바닥에 대고 기어다니는 모습은 흡사 나의 반려견 보리의 포즈와 비슷했다. 고개를 숙이고 코끝을 들이밀며 테이블 밑, 가방 안, 옷더미 속을 거의 킁킁대다시피 하며 뒤지던 찰나,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네 짓이야?” 나는 기억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보리를 향해 쏘아붙였다. 그러나 보리의 눈빛은 조용히 말하고 있었다. ‘내가 이 집에서 가장 무고한 존재라는 걸 기억하라!’ 그제야 나는 사태의 심각함을 직감했다. 이건 단순한 분실이 아니라 존재론적 혼란에 가깝다. 그 순간 나는 차 키도, 존엄도 잃은 인간이 되어 있었다. 결국 차 키는 이불 밑에서 발견되었다. 도대체 왜 거기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쿨쿨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차 키를 손에 쥐고 다시 누운 것도 아닐 텐데.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바로 인간이라는 종의 불가사의인 것이다. 비단 차 키만이 아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꽤 중요한 것들을 자주 잊어버리곤 한다. 해야 할 일을 깜빡하고, 약속을 놓치고, 심지어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어째서 그러한 말을 했는지조차 잊는다. 기억은 언제나 정교하지 않다. 우리가 스스로 기억을 선택하고 있다고 믿는 건 사실상 착각에 가깝다. 뇌과학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망각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뇌 안에는 기억을 지우는 메커니즘이 존재하며 이것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이를테면 수업 시간에 분명 열심히 들었던 내용이 하루만 지나도 흐릿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24시간 이내에 학습한 정보의 70%가 사라진다는 망각 곡선은 뇌가 불필요한 정보를 선별적으로 지워버린다는 사실을 잘 알려준다. 그러니 ‘내 머리는 왜 이리 좋지 않은가?’ 하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뇌가 만든 아주 정교한 생존 전략 중 하나일 뿐이다. 그렇다면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찾는 행위나, 가스레인지를 끄지 않고 외출하는 일, 눈앞의 사람 이름을 떠올리지 못해 민망한 웃음으로 위기를 넘기는 순간 같은 행위를 뇌의 합리적 메커니즘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도 괜찮은 걸까? 종종 엉뚱한 일을 벌이는 우리 뇌를 두고 자연스럽다고 여기며 삶의 허점을 덮는 건 어쩐지 위험해 보인다. 마치 사고를 쳐도 당당한 사춘기 자녀를 보는 기분. 형편없는 시험 성적을 보고서 “왜 열심히 암기하지 않았느냐”고 혼내도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쏘아붙이는 것이다. “이건 제 문제가 아닙니다. 저의 뇌가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과정이라고요.” 문제는 이러한 영역이 아니다. ‘실종 사건’의 본질은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에 있다. 우리는 살면서 정말 소중한 것을 놓칠 때가 잦다. 소중한 사람과의 약속, 미처 전하지 못한 말, 놓치고 나서야 알게 되는 어떤 마음들. 그럴 때 우리는 우리가 인간이라는 동물이라는 사실을 또다시 한탄하게 된다. 도대체 왜 이렇게 중요한 것을 허술하게 다루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하다. 붙잡으려 애쓰지 않으면 모든 것은 아주 쉽게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인간 존재는 기억을 기록하고 감정을 박제하기 위해 애쓴다. 사진을 찍고 부지런히 문장을 쓰는 일도 분투의 과정 중 하나다. 책상 앞에 앉아 문장을 고민하는 나를 보고 보리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손에 쥐지 못할 것을 붙잡으려 애쓰는군. 참으로 안타까운 존재로다….’ 그렇다. 이토록 애처로운 노력 덕분에 우리는 사라지는 마음을 한순간이라도 더 붙잡을 수 있고 흐릿한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 그러니 나는 차 키를 아무 곳에나 두는 나의 뇌를 더는 탓하지 않기로 한다. 어쩌면 이것은 정말 나를 시험에 들게 하려는 보리의 은밀한 소행일지도 모르니. 내가 정말 오래 기억하고 싶은 건 녀석의 쫑긋거리는 귀와 움찔대는 작은 콧구멍,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눈빛 같은 것. 차 키를 어디에 두었는지 아는 것보다 이 장면을 자주 떠올리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안다. 그것이 바로 차 키 실종 사건을 해결하며 내가 내린 결론이다. /문은강(소설가)

2025-05-25

통통족의 패션, 그리고 스페셜리스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잘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내가 아주 신경 써서 옷을 입는 편이라는 사실. 실제로 옷을 잘 입거나 못 입거나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내 딴에는 나름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항상 뚱뚱한 체형을 유지하고 있어서 옷 태가 안 나서 그렇지, 그리고 추구하는 방향이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 듯)여서 그렇지, 나름 옷을 구입하는 과정부터 매칭 하는 과정까지 허투루 하지 않는 편이다. 이십대 때는 패션 매거진도 정기구독해서 꼬박꼬박 챙겨 봤고, 요즘도 여러 쇼핑몰이나 인터넷 사이트들을 살피며 트렌드를 파악하고 그 안에서 내 스타일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패션을 다루는 유튜브 채널을 자주 본다. 그런데 대부분의 채널들은 모델 같은 핏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적어도 표준 정도의 체형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운영하고 있기에 다소 활용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저들에게 어울리는 옷이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기도 하고, 저들이 추천하는 브랜드에 내 사이즈가 없기도 하기 때문에. 그래도 그 중에 나 같은 체형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나마 유용한 채널이 종종 있기는 한데, 그 중에 하나가 어느 배우가 운영하는 채널이다. 통통한 체구를 가진 그는 우리 같은 체형을 가진 이들을 ‘통통족’이라고 칭하며 우리에게 유용한 패션 정보를 제공한다. 얼마 전, 그 채널의 콘텐츠들을 탐독하다가 재미난 기획 하나를 발견했다. 통통하거나 그 이상의 체형을 가진 패셔니스타 두 명을 초대하여 세 남자가 자신들의 패션 노하우를 공유하는 기획이었다. 내용 중에는 다른 유튜버들이 통통족 남성들에게 패션 지식을 설파하는 콘텐츠들에 대해 실제 통통족들이 의견을 내는 코너가 있었다. 나는 여기서 재미난 깨달음 하나를 얻게 되었다. 많은 패션 유튜버들이 통통족들을 위한 패션 조언을 할 때 초점을 맞추는 부분은 바로 ‘뚱뚱하지 않게 보이기’였다. 이를테면 몸을 작아 보이게 하기 위해서 어두운 컬러를 선택한다거나, 세로로 된 줄무늬 옷을 입는다거나, 셔츠의 윗 단추를 몇 개 풀어 목을 길어보이게 하는 것 등. 그런데 이들은 여기에 대해 다른 의견들을 냈다. 꼭 뚱뚱하지 않게 보이는 것만이 멋이 아니라는 것이다. 뚱뚱해 보이건 말건 밝은 색상의 옷을 입어 화사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도 있고, 예쁘지 않으면 세로 줄무늬 옷을 기피하기도 하고, 셔츠의 단추를 끝까지 채워 단정하고 귀여운 분위기를 연출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뚱뚱하지 않게 보이는 것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은 예쁜 옷을 예쁘게 입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안 뚱뚱하면 좋겠지만, 당장 뚱뚱한 것을 어쩌겠나. 단점을 가리는데 급급해서 예쁜 옷을 입지 못하고 칙칙하고 일관된 것들만 선택해야 한다면 센스 있는 패션을 구사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차라리 자신의 단점은 시원하게 인정하고, 새로운 장점을 개발하는 것이 훨씬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옷을 입는 일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빠른 발이 장점인 축구선수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 대신 그는 몸싸움이 약하다. 그래서 체중을 비약적으로 불려서 보통 수준의 몸싸움 능력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그로 인해 빨랐던 발 역시 보통 수준이 된다면 감독이 그를 써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필요한 만큼의 웨이트 트레이닝과 더불어 자신의 빠른 발을 살려 단점을 극복할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옳은 길이 아닐까? 반대로 홈런을 펑펑 때리는 거대한 체구의 야구선수가 있다. 그는 발이 느려서 도루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는 처지이다. 그래서 그가 체중을 확 줄이고 리그 평균 수준의 주력을 갖게 된다면? 홈런을 때리던 그 힘을 잃게 되는 결과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지만 특출난 점도 없는 선수가 된다는 것. 그것이 과연 긍정적인 일일까? 한 때 모두에게 모든 면에서 능력을 갖춘 제네럴리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스페셜리스트도 필요한 시대이다. 부족한 점은 또 새로운 분야의 스페셜리스트와의 협업을 통해 극복하고,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하여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가능한 시대이다. 물론 단점도 극복하고 장점도 개발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 중에 우선순위를 정한다면 무엇을 앞세워야 할 것인가? 나는 당연히 장점을 개발하는 쪽이라고 생각한다. 단점을 가리는데 급급해서 다른 장점들을 챙기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강백수(시인)

2025-05-25

첫 투표, 더 나은 선택을 위한 준비

운전면허 학원에 처음 갔던 날, 강사가 가장 먼저 알려준 것은 “차에 타자마자 안전벨트를 매세요”였다. 그 덕분인지 나는 지금도 차에 타자마자 습관적으로 안전벨트를 맨다. 처음부터 제대로 배운 방식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몸에 익어 오랜 습관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나는 생애 첫 공직선거를 앞둔 고등학생들을 위해 매년 새내기 유권자 연수를 진행하고 있다. 18세가 되면 우리는 매번 대통령,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교육감, 지방의원과 정당을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막상 투표를 하려 하면 ‘나는 누구를 뽑아야 할까?’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따라서 나는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한다. 내가 바라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 내가 살면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무엇인가? 정당 정책과 후보자 공약에서 내 가치와 맞닿은 부분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을 바탕으로 정당과 후보자를 선택할 기준을 세워야 한다. 학생들이 처음으로 선거에 참여하는 만큼, 신뢰할 만한 정보를 확인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도 중요하다. 연수를 진행하며 다음과 같은 실천법을 강조한다. 정당과 후보자의 주요 공약 및 분야별 우선순위를 확인하기, 후보자의 경력·학력·납세·병역·전과와 전문성·공적·사회공헌 등을 점검하기, 우편으로 송달되는 선거공보 속 후보자 정보공개 자료를 꼼꼼히 읽어보기, 다양한 언론을 비교하며 후보자 정보가 어떻게 보도되고 있는지 분석하기. 이러한 습관을 들이면 선거 때마다 신중한 판단을 내리는 유권자로 성장할 수 있다. 연수에서는 선거의 의미뿐만 아니라 절차와 진행 과정 또한 중요한 부분으로 다룬다. 학생들에게 “투표소 및 기표소 안에서는 사진을 찍으면 안 되지만, 투표소 밖에서는 투표 인증샷을 찍어도 괜찮다”는 점도 알려준다. 아마 학생들은 이런 작은 팁만 기억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들이 첫 선거를 무사히 치르며 민주주의의 의미를 깨닫기를 바란다. 지난 총선에서 18번째 생일이 지나지 않아 참여하지 못했던 학생들도 이번 6월 3일 대통령 선거에서는 유권자로서 투표할 수 있게 됐다. 이제 각 가정으로 배달된 선거 공보를 펼쳐놓고, 후보자 공개 자료를 검토하고, 후보자들의 공약을 비교하고, 가족 또는 친구들과 의견을 나누면서 그들의 첫 선거를 멋지게 치르기를 바란다. /한국희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연수원 초빙교수

2025-05-25

“그렇지만 좋은 것들은 너무 많고”

오늘은 해가 떴다. 그러니까 오늘은 환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야구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나는 180도로 다른 얼굴이 되어가지. 모자 속에 눈이 묻히고 총에 맞아도 웃음이 살아남는 인형의 입술이 되고 그리고 진짜 아침을 먹으면 목 밑에 목이 이어지는 것처럼 오래도록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야. 마술사의 손을 가진 것처럼 피아노를 칠 수도 있을 거야. 그다음엔 하얀 장갑을 끼고 열 개의 손가락을 가져야지. 사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거야. ―신해욱,‘굿모닝’전문 (‘생물성’, 문학과지성사) ‘나’란 과연 누구이며, 무엇일까. 신해욱의 시에는‘얼굴’,‘눈’,‘손’과 같은 신체에 관한 언술이 많다. 일본 애니메이션‘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는‘가오(얼굴)나시(없음)’라는 독특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여기서 가오나시는 온갖 부정성과 이물질이 뒤섞여 과잉이거나 결핍인 현대인의 페르소나를 상징하는 듯하다. “야구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나는 180도로/다른 사람이 되어야지.”라는 화자의 언술처럼 페르소나란 다른‘나’가 되는 것으로 “총에 맞아도 웃음이 살아남는/ 인형의 입술이 되”듯 그것은 자연인이 아니라 서정시의 내적 요구에 따라 배당된 일종의 배역적 존재인 셈이다. 하지만 “동양적 전통에서‘글’과 ‘사람’은 혼연일체를 이루는 한 몸의 결속체로 인지되어왔다. 하지만“글이 곧 사람이다.”라는 선언적 명제는 정작 페르소나를 품은 현대의 서정시에서는 시인과 페르소나가 두 개로 갈라지게 된다.”(유성호, ‘가히’ 2025년 봄호) 신해욱의 시에는 일인칭 화자가 고백하는 페르소나의 언술이 많다. 가령 이 시집에서 인용되지 않은“나에게는 두 개의 눈이 있다/한 눈으로는 왼쪽을/한 눈으로는 오른쪽을 본다”라든지 “너는 좋아 보이는구나/나는 손가락에 붕대를 감고 있어”“쥐에게도 개에게도 얼굴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나는 터무니없이 부끄러워지고 풀이 죽는다.” 는 기표들처럼 화자는 미학적으로 가공된 목소리를 통해 다양한 전언을 들려주고 있다. 말하자면 페르소나는 독자나 청자에게 말을 건네는 존재이다. 이어지는 고백들에서는 시인과 좀 더 멀리 분리되거나 해체된 화자를 대면할 수 있다. 이를테면 “나는 수요일이 아닌 채로 수요일을 대신하며 옷을 벗게 된다/나는 그런 욕망에 사로잡혀 수요일이라 할 수 없는 나를 대신 끌어안고/수치를 견디는데/ 그런데 누군가 나보다 먼저 내 방을 사랑하고 있다/ 키가 크고 있다/사소한 훼손도 없이” 이처럼 화자는 시인과 세계, 시인과 작품, 작품과 대상과의 관계를 암시해 주지만 동시에 그 자신이 되기도 한다. 다시 처음의 얼굴로 돌아와서 이런 질문에 답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문학을 혹은 예술을 하는 이유에 대해, 결국은‘자신을 알아가기 위한 것’이라고 말이다. 일상에서 되도록 멀리 가 보려는 것, 그래야 겨우 알 수 있을 법한‘나’란 존재에 대해 서른다섯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선택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140편의 단편 소설을 썼던 이유 또한 답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실은 이 질문은 나의 질문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은가. 쓰는 일과 그림을 보는 일이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런데“그림은 왜 그린 대요?”라는 그 질문의 질문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해서 배턴을 넘겼을 뿐. “하지만, 미안. 좋아하는 것들이 많아져서 너의 그림자를 건드렸다.” /이희정 시인

2025-05-25

예천군, 맨발걷기 특화도시 조성

땅은 곧 삶을 지탱하는 수단이었다. 주위에 조금만 터가 있어도 콩을 심고, 고춧대를 세우고, 호박과 옥수수를 기르던 풍경은 우리 세대에게 낯설지 않은 기억이다. 먹고사는 일이 최우선 과제였던 시절에는 아주 작은 터조차도 허투루 두지 않았다. 그만큼 한 평의 땅도 소중했고, 농작물은 생계와 직결된 생활의 일부였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경제적 안정과 생활 수준의 향상은 생활 양식을 크게 바꿔놓았다. 이제는 단순히 ‘무언가를 길러내는 땅’보다는 ‘머무르고 싶은 공간’, ‘눈길이 머무는 곳’, ‘마음을 쉬게 하는 장소’로서의 공간이 주목받고 있다. 조경이라는 개념은 더 이상 일부 고급 주택이나 특수 시설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 삶의 질을 높이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전국 각지의 도시들이 생활 환경 개선과 도시 이미지 제고를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예천군 또한 공원과 경관 조성, 건강 도시 환경 구축을 통해 ‘힐링 도시’로의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예천군 곳곳에서는 최근 몇 년간 작은 공원 조성과 공공 조경 사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마을 입구, 유휴지, 공공청사 주변, 그리고 개인 주택 앞까지 꽃과 나무로 꾸며진 아름다운 정원은 그 지역의 인상을 한층 부드럽고 따뜻하게 바꾸고 있다. 이러한 공원은 단순한 미관 향상을 넘어서 외부인의 발걸음을 이끄는 명소로 자리 잡고,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공간을 가꾸며, 관광객은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사진을 찍으며 자연스럽게 주변 식당이나 카페, 전통시장을 찾게 된다. 잘 조성된 공원 하나가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공원은 개인의 여유를 넘어 마을의 품격, 나아가 지역 전체의 경쟁력을 높이는 자산이다. 도시개발에서 ‘경관’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공간이 주는 인상은 곧 도시의 정체성과 연결되며, 이는 주민의 자긍심은 물론 방문객의 만족도로 이어진다. 예천군은 최근 ‘맨발 걷기’에 최적화된 도시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본격적인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단순한 산책로 정비를 넘어 도시 전체를 하나의 치유 공간으로 조성하려는 시도는 지역 정책에서 보기 드문 접근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남산공원 정비사업, 예누리길 조성사업, 개심사지 역사공원 조성사업이다. 이 세 개의 거점 사업은 기존 한천 산책길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예천 전역을 하나의 대형 힐링 산책로로 엮고자 하는 구상이다. 도청신도시에서 예천읍으로 오다 보면 시가지 입구에서 맞이하는 개심사지는 고려 현종 2년(1010년)에 건립된 오층석탑이 남아 있는 유서 깊은 장소이다.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곳은 최근 역사공원으로 새롭게 조성되어 예천의 문화유산과 자연환경을 결합한 대표 치유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예천이 자랑하는 천년고찰 용문사, 명봉사, 장안사와 연계하여 불교 성지순례 코스로의 확대를 준비 중이며, 단순한 관람이 아닌 명상과 산책이 함께하는 정신적·신체적 치유의 장소로 주목받고 있다. 신도시 진입도로 개설로 기능을 잃은 경북선 폐철도(예천읍 구간) 부지도 새로운 도시재생의 무대로 떠오르고 있다. 예천군은 이곳에 길이 1.2km, 면적 2만7천㎡ 규모의 ‘옛기찻길’을 조성했다. 이러한 형태의 공간 조성은 행정 주도가 아닌 주민과 행정이 함께 만드는 공동체적 공간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예천군은 이들 핵심 공간을 중심으로 기존의 한천 산책길과 예누리길 등을 연결해 도시 전체를 하나의 유기적 걷기 코스로 재편할 계획이다. 건강, 역사, 자연, 치유가 어우러진 복합적 산책 환경을 통해 군민에게는 삶의 여유를, 외부 방문객에게는 여행 이상의 경험을 선사하고자 한다. 결국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도시의 대답이다. 예천군이 공원을 가꾸고, 산책로를 잇고, 치유 공간을 조성하는 일은 단순한 공간 정비를 넘어서 주민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도시의 미래를 설계하는 일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생계를 위한 땅이 전부였다면 이제는 마음을 쉬게 하는 공간이 필요하다. 작물을 심던 공터가 이제는 사람을 불러 모으고, 머물게 하며, 그 안에서 지역의 정체성과 미래를 함께 길러내고 있다. 예천의 이러한 변화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변화가 도시의 방향성을 바꾸고 있으며, ‘살고 싶은 도시’에서 ‘머물고 싶은 도시’로의 진화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의 예천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2025-05-25

사람과 정책, 무엇이 중한가

대통령 선거일이 다가온다. 유권자가 대통령 후보의 정책을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은 오늘부터 딱 7일 남았다. 유권자들의 알 권리를 위해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가 대통령 후보들의 토론회를 주관하고 있고, 이를 지상파 3사에서 분야별로 각 두 시간씩 방송하고 있다. 지난 18일에는 저성장 극복과 민생경제 활성화, 대외 통상 등 경제 분야를 주제로 1차 토론회가 열렸고, 23일에는 사회 갈등 통합 방안, 초고령 사회의 연금 및 의료개혁, 기후위기 대응 등 사회 분야 토론이 진행되었다. 마지막 3차는 27일에 정치개혁, 개헌, 외교안보 등 정치 분야를 토론할 예정이다. 토론회가 끝나면 지지율에 변동이 생기니 각당 후보들은 두 시간 동안 모든 정책을 펼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대선 토론회가 과연 얼마나 유권자의 기대에 부합했는지는 의문이 많이 남는다. 특히 2차 토론회에서는 인신공격과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가 난무했다. 이 두 가지는 대학에서 토론 수업을 할 때 강조하는 것이다. 인신공격이란 정책과 큰 관련 없는 개인 신상을 공격하는 것인데 토론의 본질을 흐린다. 아무래도 정책 평가는 어렵지만 사람 평가는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이다. 허수아비 공격이란 상대방 주장을 왜곡하거나 과장해놓고 비판하는 것인데 이것은 토론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현대의 문제를 분석하면서 고전을 인용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고전의 문장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아니고, 옳다 하더라도 아전인수격으로 적용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중용’에서 가장 중요하게 주장하는 가치가 지극한 정성인데, 말 자체는 흠잡기 어렵지만 지금 여기에서 순수한 진정성인지 무엇인지 판단하기는 자기이해가 반영될 여지가 많다. 그럼에도 고전은 짧은 경구는 갈등을 해소하는 데 중요한 참고가 된다. 공자는 ‘문왕이나 무왕 같은 위대한 정치가들의 정책이 책에 다 있지만, 그것을 실천할 사람이 있어야 제대로 시행된다’고 했는데, 이 말은 정책 자체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사람이란 추상적이거나 사적인 인격이 아니고 그 정책을 실천할 공적이고 구체적인 역량을 말한다. 정책 실천 역량과 높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인 신상을 비판하는 것은 정책토론만으로도 부족한 두 시간을 낭비하고 유권자의 알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도자가 아무리 자신을 선하다고 주장해도 백성에게 실질적인 효과로 나타난 것이 없으면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는 대목에서는 무릎을 치게 된다. 대선 후보들이 아무리 자신이 옳다고 주장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국민에게 신뢰를 얻을 수 없다. 그동안 그들이 한 행동이 국민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는가가 대통령 자격을 판단하는 가늠자가 되어야 한다. 대선 후보를 선택하는 것은 이념으로 해서도 아니고 인상 비평으로 해서도 안 된다. 이제 남은 일주일 동안 우리 모두 부수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을 구분하고 어떤 정책이 국가와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지, 그 정책을 실천할 능력이 얼마나 있는지 냉철하게 분석해보자.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05-25

‘진정성이 있어야’

요란한 선거 홍보 현수막에 질린다. 말끝마다 국민을 위한다는 데 나에게는 왜 와 닿지 않을까. 남을 위한 선행은 요란하지 않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하는데 정치인은 하지도 않는 일을 입만 가지고 말만 한다. 그들에게 무엇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방송에 나오면 말없이 채널을 돌린다. 노점상으로 힘겹게 돈을 벌어 1억 원이라는 거액을 기부한 김정순 여사(80)의 기사가 나를 잡는다.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 편지를 읽고,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서 보람을 느낀다는 할머니의 기사를 읽는다. 우연히 본 기사인데도 오랜 시간 마음속에 남아 잊히지 않는다. 힘겨워 휘어진 손으로 장학금을 내밀 때의 마음이 전해진다. 금호타이어 광주공장에서 발생한 불을 끄느라 지친 소방대원과 주변 상황을 정리하는 경찰관들에게 무료로 식사를 선물한 광주광역시 광산구의 한 식당이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한다. 온전한 음식 대접을 위해 일반 손님을 받지도 않았다. 경기마저 나쁜 상황에서 선뜻 하기 힘든 일이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주인의 마음을 느낀다. 육군 이규탁 중사는 양평군 양서면 수도권제2순환고속도로를 운행하던 중 사고가 난 차를 발견했다. 범퍼가 많이 부서지고 에어백이 터진 상태에서 운전자도 피를 흘린다. 이 중사는 가지고 다니던 구급낭을 꺼내 지혈하고 119구급대가 올 때까지 환자를 돌보며, 추가 사고를 막기 위해 교통정리도 하였다. 아이유 씨의 선행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펜클럽의 이름으로 불우한 이웃을 위해 거액을 기부한다. 돈이 있다고 하여 남을 위해 기부를 하는 건 아니다. 이 세상에 돈을 가진 사람은 많다. 그들은 내어놓기보다 더 모으는 데 힘을 쏟는다. 남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돈을 내고 위로 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여러 번에 걸친 선행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지 않으면 하기 어려운 일이다. 배우 박보영도 그러하다. 2014년부터 물품과 금품을 후원하는 일을 꾸준히 한다.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쩌면 진정성은 평상시 어떤 생각으로 세상을 보고 행동하는가의 문제이다. 행동과 생각이 다르거나 일시적으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건 선행이 아니다. 단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선행한 사람들이 자신을 알리는 현수막을 걸어놓은 걸 본 적이 없다. 그렇듯 남을 위하는 마음은 언제나 가슴 바닥 깊은 곳에서 조용히 뿜어나온다. 정치인들은 왜 모르는가. 말하지 않아도 그들의 밑바닥에 숨은 남을 위한 마음이 뿜어나오게 할 수는 없는가. 선거철만 되면 몸을 비틀어도 없는 진정성을 짜내느라 잠을 설치며 돌아다니기보다 평상시에 국민을 위한 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오늘도 거리를 나서면 나를 보라는 듯 정치인의 현수막이 바람에 나부낀다. 주인을 닮은 가벼운 몸놀림이 눈을 어지럽힌다. 이 혼잡한 시간이 언제 지나가려나. 국민을 위한 진정성은 없으면서 말끝마다 내뱉는 국민이란 두 글자에 머리가 아프다. 박수를 보낸다. 이 시대를 함께 사는 말 없는 선행자들을 위해. /김규인 수필가

2025-05-25

담배 소송

국민건강보험공단이 흡연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공단 재정 누수 방지 등을 목적으로 담배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500억원대의 담배소송이 11년만에 항소심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2014년 소송을 시작한 이 사건은 2020년 1심 재판부가 원고 측인 공단 쪽의 청구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의 질병이 흡연 외 다른 요인에 의해서도 발병할 수 있다는 이유 등으로 담배회사 측의 손을 들어 주었다. 공단 측은 즉각 항소하며 흡연과 질병의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학술적 자료와 담배 퇴치에 대한 국민적 지지와 의견수렴을 증거 자료로 재판부에 제출했다. 소송이 11년을 끌어오는 과정에서 담배의 유해성에 대한 범국민적 인식이 크게 높아졌고, 시민단체의 호응도 커져 항소심에서의 판결이 1심의 결과를 뒤집을 수 있을 지 여부에 대해 세인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미국에서는 1990년대 후반 46개 주 정부가 담배회사를 상대로 의료비용 환수를 위한 소송을 제기해 우리 돈으로 약 280조원에 달하는 배상을 받아낸 바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도 1심과 다른 판결이 나올 수 있다는 견해가 조심스레 나오기도 한다. 미국의 담배 배상 판결 후 캐나다 등 세계 많은 나라에서는 영향을 받아 담배회사를 상대로 한 소송이 자주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11년을 끌어온 담배 소송은 재판부의 판결 결과를 떠나 담배판매 기업과 흡연자들에게 주는 사회적 메시지는 분명히 있다. 유해 물질을 파는 기업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따지는 것과 판결이 국민의 건강권, 소비자 보호 등에 관한 사회적 인식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란 점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5-25

남가일몽(南柯一夢)

교양 강의 ‘동서 고전의 만남’을 진행하면서 느끼는 소회가 적잖다. 학생들이 기초적인 한자마저 등한히 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 아프게 다가온다. 한자어는 상당수 한국어의 근간으로 작용하기에 문해력을 늘리려면 한자어 실력 배양이 필수다. 하지만 실상을 살피면, 상황은 정반대임을 알게 된다. 한자어를 영어가 대체하는 요지경이 펼쳐지고 있다.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에는 읽기와 쓰기, 말하기가 있다. 타인이 쓴 글을 올바르게 독서하는 능력이 읽기다. 필자의 생각과 느낌을 적절하게 전달함이 쓰기이며, 말하기는 화자의 생각을 구두(口頭)로 발화하는 것이다. 우리의 언어생활을 자연스럽고 윤택하게 해주는 세 가지 능력의 바탕에는 우리 고유어와 더불어 한자어가 자리하고 있음은 주지하는 바다. 우리 언어생활에 굳건하게 뿌리내린 한자어를 버리고 영어로 대체함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불필요한 노릇이다. 사정이 이럴진대 중고등학교 교육에서 한자어가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그야말로 불 보듯 뻔하다. 예전 세대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썼던 사자성어 혹은 고사성어를 알고 실생활에서 활용하는 청년 세대는 거의 멸종된 것 같다. 그런 연유로 ‘동서 고전의 만남’에서 일주일에 하나 정도 고사성어를 소개하고 있다. ‘남가일몽’도 그런 인연으로 다시 만나게 된 고사성어다. 남가일몽은 당나라 덕종 치세의 선비 순우분이 한바탕 꿈을 꾸고 일어나 확인해 보니 홰나무 남쪽 가지 아래 개미굴이 있었다는 얘기에서 나왔다. 꿈속에서 흘러간 20년 세월이 그야말로 순식간의 일이었던 셈이다. 나는 남가일몽을 고교 국어책에 실린 정비석 선생의 ‘산정무한’에서 만났다. 금강산을 두루 유람하고 소감을 글로 남긴 것이 ‘산정무한’이다. 글 끄트머리에서 선생은 쓴다. “천년 사직이 남가일몽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년이 지났으니, 유구한 영겁(永劫)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須臾)던가. 고작 칠십 생애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하다가 한 움큼 부토(腐土)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愁愁)롭다.” 경순왕 김부(金傅)가 935년 나라를 들어 고려 태조 왕건에게 바치고자 할 때 태자가 결연히 반대하지만, 김부는 고집을 꺾지 않는다. 이에 태자가 베옷(마의)을 걸치고 금강산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신라의 천년 사직도, 태자가 세상을 버린 뒤 흘러간 천년도 영겁의 세월에 비춰보면 잠시의 일 아니겠는가, 하며 선생은 쓸쓸해한다. 남가일몽과 비슷한 뜻을 가진 고사성어가 있으니 ‘한단지몽(邯鄲之夢)’이다. 인간이 영위하는 지상의 삶이 유한함을 가리키는 고사성어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자명하다. 길지 아니한 덧없는 삶을 살면서도 우리는 진실로 가치 있고 아름다운 대상은 놓쳐버리고,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것들에 몸과 마음을 탕진하고 있음은 아닌지, 돌아보라는 게 아닐까. 선거를 앞두고 내란 잔당의 해괴한 언사와 설익은 칼춤이 난무한다. 작은 권력과 돈푼에 육신과 영혼을 팔아넘기는 내란 잔당들을 본다면 지하의 마의태자는 무슨 말을 남길 것인가.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05-25

구미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 ‘작은 거인’ 구미의 선전 기대

이제 하루만 지나면 아시아 육상스타간 ‘별들의 전쟁’ 구미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가 구미일원에서 화려한 막을 올린다. 27일부터 31일까지 열리는 이번 육상대회에는 세계 최고 높이뛰기 선수 우상혁을 포함해 한국남자육상 100m 유망주인 고교생 조엘진, 3000m 장애물경기 한국신기록 보유자 조하림, 우상혁 라이벌인 카타르의 바르심, 세계육상대회 장대높이뛰기 은메달리스트인 필리핀의 어니스트 존 오비에나 등 한국과 아시아 육상 스타들이 대거 출전한다. 이들 참가 선수들은 트랙과 필드, 도로를 아우르는 총 45개 세부 종목에서 210개의 메달을 놓고 불꽃 튀기는 명장면을 연출할 예정이다. 그러나 구미아시아육상대회는 당초 예정에도 없던 조기 대선으로 대회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당초 기대보다는 가라앉은 모양새다. 오죽하면 김장호 구미시장이 지난달 13일 한 행사장에서 우연히 만난 이준석 개혁신당 대선후보에게 “예기치 않게 대선 일정이 육상대회 일정과 겹쳐 국민들의 관심이 대선에만 쏠릴까 걱정”이라며 대회 홍보와 관심을 당부할 정도였다. 이러한 응원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관심은 온통 대선에 쏠리고 있다. 이 때문에 구미시와 육상대회조직위는 글로벌 스포츠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마치 ‘거인 골리앗’과 같은 대선 열기가 상대적 약자인 ‘다윗’ 같은 육상대회 분위기간 대결 양상까지 연상되고 있다. 신문이나 방송에는 각 대선 후보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끊임없이 보도되고 중계되는 반면 구미아시아육상대회에 관한 소식은 ‘가뭄에 콩나듯’ 하고 있다. 구미아시아육상대회는 대형 국제도시에 비해 상대적 약자인 기초자치단체가 아시아 최초로 유치한 국제육상 대회란 점도 특이하다. 구미시는 2023년 12월24일 구미 보다 인구가 6배나 많은 중국 샤먼시를 물리치고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 유치에 성공하는 기염을 토했다. 지금까지 이 대회는 베이징·도쿄· 뉴우델리· 도하· 방콕· 자카르타· 쿠알라룸프르 등 유명한 국제도시에서만 열렸다. 우리나라에서도 서울 인천 등 수도와 광역시에만 개최됐던 대회이다. 기초자치단체란 왜소한 체구로 ‘거구 도시’와의 외로운 싸움 끝에 대회를 열게된 구미시는 이제 또다시 예기치 않게 대선 이슈란 거대한 복병을 만나게 됐다. 그러나 우리는 늘 거인과 난장이 싸움에서 약자의 선전을 응원하듯 ‘작은 용사 다윗’의 활약을 상상한다. ‘다윗 같은 작은 거인’ 구미가 개최하는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에 대구와 경북 시도민은 물론 전국민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 열기가 모아지길 기대한다. /류승완기자 ryusw@kbmaeil.com

2025-05-25

어디까지가 한계인가

우리는 송해 선생님을 참 부러워했다. 돌아가셨을 때 연세가 95세다. 우린 연세가 많은 것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돈을 버셨다는데 주안점을 두고 말한다. 그 연세에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경이로울 지경이다. 정말 부러웠다. 이제는 대상이 바뀌었다. 그동안 송해 선생님 때문에 가려졌던 분들이 하나둘 그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시형 박사, 김동건 아나운서, 허영만 화백 등이 그분들이다. 게 중 맛있는 것을 전국 팔도를 다 돌아다니면서 섭렵하는 허명만 화백이 제일 부럽다. 돈 벌고 맛있는 것 먹고. 이제 겨우 육십이 넘어 정년퇴직한 햇병아리들이 세상 다 산 늙은이 흉내를 내는 것을 보고 답답함을 느낀다. 백세 시대에 아직 살날이 사십 년이 더 남았는데 얼마나 노후 준비를 충실히 해 놓았는지는 모르겠다만, 집 한 채 덜렁 남아 있고 국민연금에 목 빼고 살 지경이면 바로 재충전해서 일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왕년에 내가 누구라는 것을 상기하며 자존심 세우다간 시대에 뒤처지는 인간으로 낙인찍힌다. 밥 세 끼를 제대로 다 먹고 사는 세대이자 해외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세대, 손에 전화기 들고 다니는 첫 세대이고 주판 대신 전자계산기 두드리는 세대가 바로 지금 노인으로 분류되는 세대이다. 하루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급변하는 문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면 바로 ‘꼰대’ 소리 듣는다. 시대가 바뀌면 문화도 바뀐다. 며느리나 딸이 애 낳으면 산후조리원비를 포함한 생산 축하 자금을 내놔야 한다. 그냥 대충 재래시장에 가서 산모용 미역 한 다발 사 들고 가는 시대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애 결혼 시켰다고 방심하다가 주위에 돌아가는 꼴을 보고 아연실색하게 된다. 산후조리원 동기끼리 자기 시부모가 뭘 해줬다는 것을 다 까발린다고 하지 않는가. 한참 떨어지는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되면 자신이 시댁에 처참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해 아들을 쥐잡듯 잡을지도 모를 일이다. 도대체 그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한숨만 나오고 이런 풍토를 확산시키는 요즘 잘나가는 부모들에게 한소리 질러주고 싶다. “제발 고마해라.” 딸을 시집보내고 이번엔 며느리를 맞이하는 지인이 있다. 사위 인사 올 땐 대충 밖에서 밥 먹고 들어오자는 딸 말만 믿고 대충했는데 며느리 될 애가 인사 온다고 하니 집안에 비상이 걸린단다. 제대로 며느리에게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전화 받고 싶으면 대충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들리기 때문이다. 처음 봤을 때 그렇게 착하고 순진하던 며느리가 차츰 애 낳고 살더니 주위에 듣는 소리가 있는지, 없는 시부모 괄시하는 게 눈에 보인단다. 하긴 몇백만 원씩 척척 내놓는 시부모가 있는가 하면 100만 원 가까이하는 애 유모차를 사주는 부모에게 더 정이 가기 마련일 것이다. 며느리가 자기 생일상 안 차려 준다고 툴툴거리는 사람을 봤다. 아마 상다리 부러질 정도를 기대한 모양인데 물려받은 시골 뒷산이 몇십억 한다면 모를까 꿈은 빨리 깨는 것이 좋다. 효도라는 단어가 곧 사라진다. 이웃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면 정말 남의 일이 아니다. 사위가 차를 바꾼단다. 그 이야기를 왜 지금 하는 거지? 그냥 바꾼 다음 말하면 안 되나? /노병철 수필가

2025-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