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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치 무대에서 내려선 홍준표

1954년생. 올해 일흔한 살이니 ‘노정객’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이를 악물고 사법 시험에 도전해 검사가 됐다. 강력부 현역 검사 시절엔 거물 조직폭력배와 무소불위의 권력자를 줄줄이 구속시켜 많은 이들의 박수를 받았고, 그걸 발판으로 국회에 진출했다. 1996년 그의 나이 마흔둘에 치러진 15대 총선 당선을 시작으로 국회의원만 5번을 했고, 경남도지사와 대구시장을 지냈으며, 자신이 소속된 정당의 원내대표와 당 대표를 맡았고, 비록 패했지만 2017년엔 대통령선거에도 나왔다. 정치인으로선 안 해 본 게 거의 없는 셈이다. 이쯤 되면 드라마틱한 한 편의 소설이나 흥미진진한 영화 같은 삶이 아니었을까? 위엔 언급한 요약·설명을 읽었다면 많은 이들이 자연스레 그의 이름을 떠올릴 게 분명하다. 맞다 홍준표다. 2025년 4월 29일 홍준표가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이제 평범한 시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가 편하게 살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국민의힘 대선 경선에서 패배한 직후였다. 에둘러 말하지 않는 직설화법과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직진하는 특유의 저돌적 스타일로 인해 때론 곤경에 빠졌고, 여러 차례 비난에 시달리기도 했던 홍준표. 하지만, 그를 지지하는 이들은 누구보다 솔직담백했던 정치인으로 홍준표를 기억할 듯하다. 어쨌건 이제 홍준표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정치’라는 무대에서 내려왔다. 범부(凡夫)로 귀환한 그가 30여 년간 겪었던 한국 정치판의 혼란과 불화를 다 잊고 자신의 바람처럼 ‘평범한 시민’으로 유유자적하기를 바란다. 누구라 특정할 것도 없다. 고희(古稀) 넘긴 사내에겐 풍파 없는 평화로운 삶이 어울린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4-30

에도의 출판왕, 츠타야 쥬자부로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일본 만화는 전세계에서 1년 동안 대략 10억 부가 출판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만화 이외에도 일본은 ‘출판 대국’이자 ‘독서 대국’으로 불릴 만큼 책으로 유명한데요. 지하철 안의 모든 이가 책을 읽고 있다는 이야기는 전설이 되었지만, 여전히 출판 문화가 발달하고 독서 인구가 많은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책과 친한 일본 문화를 낳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이로 ‘에도 시대(1603-1867) 출판왕’ 츠타야 쥬자부로(蔦屋 重三郎, 1750-1797)를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NHK에서 2025년 대하역사드라마로 츠타야 쥬자부로의 일생을 다룬 ‘べらぼう-蔦重栄華乃夢噺(베라보-츠타쥬의 파란만장한 꿈 이야기)’를 방영하면서, 작년 연말부터 도쿄 시내 곳곳에는 츠타야 쥬자부로 관련 문화 행사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츠타야 쥬자부로와 관련된 우키요에나 주변 인물들에 대한 행사가 열리고, 일본을 대표하는 출판사들이 빠짐없이 츠타야 쥬자부로에 대한 책을 출판해 놓고 있는 겁니다. 심지어는 자료를 찾으러 간 일본국회도서관에서도 츠타야 쥬자부로에 대한 전시를 하고 있을 정도였는데요. 4월 22일부터 6월 15일에는 일본 최대의 박물관인 도쿄국립박물관에서도 츠타야 쥬자부로(줄여서 츠타쥬)가 유통시켰던 우키요에를 대거 전시하는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에도 막부의 유일한 공인 유곽인 요시와라에서 태어나 자란 츠타쥬는 일곱 살에 부모의 이혼을 경험하고, 아무런 배경도, 재산도 없이 오직 타고난 독창성과 감각만으로 ‘에도의 출판왕’이 된 인물입니다. 에도 막부에 밉보여서 재산의 절반을 압수당하는 처분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원하고 꿈꾼 문화 콘텐츠를 끊임없이 만들어간 츠타쥬는 그야말로 시대를 앞서간 ‘베라보’였던 것입니다. 츠타쥬가 활약한 18세기 후반에는 목판인쇄로 책들이 출판되었으며, 그 책들에는 대부분 그림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의 콘텐츠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작가, 화가, 조각가, 판화가가 협업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이를 전체적으로 기획하고 제작하여 출판 및 판매하는 역할이 필요했으며, 이러한 역할을 가장 훌륭하게 수행한 이가 바로 츠타쥬입니다. 그가 활동하던 18세기 말 에도(江戸, 도쿄의 옛날 이름)는 인구 백만의 세계 최대 도시였습니다. 우에노 국립박물관 전시 포스터에는 “잠재고객은 에도사람 100만인(潜在顧客は、江戸の衆、百万人.”이라는 문구가 크게 새겨져 있는데요. 츠타쥬는 날카로운 감각과 창의적 안목으로 대중들의 욕망을 읽어내고, 그에 바탕해 수많은 문화 콘텐츠들을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츠타쥬는 1773년에 요시와라 정문 앞에 고쇼도(耕書堂)라는 서점(本屋)을 내고 처음에는 책 대여를 했지만, 곧 본격적인 출판에 나섭니다. 그는 거의 모든 문화 콘텐츠를 만들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요시와라 안내서, 쿄카에혼(狂歌絵本), 기뵤시(黄表紙), 우키요에(浮世絵)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는 대중이 읽고 싶은 책과 보고 싶은 그림을 대중보다 먼저 알아채고서는 이를 콘텐츠로 구체화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츠타쥬는 최고의 연출자처럼 당대 최고의 재능들을 조합하여 멋진 무대를 만들어 냈던 것인데요. 츠타쥬의 손발이 되었던 천재들로는 산토 교덴, 기타가와 우타마로, 가쓰시카 호쿠사이, 도슈사이 샤라쿠, 교쿠테이 바킨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츠타야는 단순히 책만 편집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재능을 편집하여 최고의 콘텐츠와 시대를 창조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츠타쥬가 새로운 예술가들을 발굴하여 그들의 창조적 재능을 장려하고, 그들의 후원자 및 멘토 역할을 하였다는 점입니다. 미인화의 대가 기타가와 우타마로, 일본 역사에 남는 인기작인 ‘南総里見八犬伝’을 남긴 교쿠테이 바킨, 골계본이라는 장르를 낳은 ‘五十三次膝栗毛’의 짓펜샤 잇쿠처럼 무명의 재능을 발견하여 일본 문화의 상징으로 우뚝 일으켜 세우기도 했습니다. 츠타쥬는 그들에게 의식주를 보장해주었고,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감사의 표시로 선물과 접대 정도가 전부였던 시대에, 원고료를 지불한 것도 츠타쥬가 처음이라고 합니다. 수많은 명작은 물론이고 새로운 장르와 미디어를 낳은 츠타쥬는 새로운 유행을 창출하고 시대와 문화를 선도해나갔습니다. 이러한 츠타쥬의 활약이 오늘날 세계에서 인정받는 일본 망가나 출판의 기본적인 밑거름이 되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츠타야 쥬자부로는 채 오십이 되지 않은 1797년 5월 6일 저녁에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합니다. 한 인간의 본질은 삶의 마지막 순간이나 유언에 압축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요. 츠타쥬는 연극이 끝났음을 알리는 박자목(拍子木) 소리를 기다리며 죽었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그가 자신의 인생을 하나의 연기로 보며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자신을 활발하게 창조하고 또 창조하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이며, 자기 삶을 대상으로 한 예술가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츠타쥬는 수많은 명작과 예술가들을 낳았지만, 그가 창조한 최고의 콘텐츠는 아마도 츠타야 쥬자부로 자기 자신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5-04-29

보호자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 시인의 ‘엄마 걱정’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멈칫한다. 나도 그랬으니까. 내 유년의 집은 늘 어두웠고 나는 늘 혼자였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불 꺼진 거실과 차가운 공기만이 나를 맞이했다. 나는 그 집의 문을 여는 게 두려웠다. 마치 어두움 속에 함께 동거하는 무언가가 나를 짓누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바빴다. 사는 일이 바빴고 생계를 지키는 일이 하루를 삼켜버렸다. 붙들어야 했던 삶의 동아줄을 잡고 버티느라 내 곁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그 분주함과 비워진 시간의 계절은 어린 나에게 ‘부재’로 느껴졌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는 어두운 집에 혼자 앉아 텅 빈 소리와 싸웠던 기억이 지금도 아련히 내 마음 한 구석을 적신다. 나는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숙제를 하고 혼자 TV를 보았다. 누군가 내 옆에서 밥 먹어라, 숙제해라, 드라마 보자 등등의 말을 걸어주며 함께 있어 주기를 바랐다. 그런 순간이 올 때마다 내 가슴의 작은 불마저 식으며 꺼져버리는 것 같았다. 옆 집에 환하게 불을 켜고 숙제를 하는 친구가 부러웠고 그 시끌벅적함이 나도 갖고 싶었다.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어린 나도 알고 있었다. 그것이 부모님의 부재가 아니라 현실이었음을. 그럼에도 나는 나를 지켜줄 보호자가 필요했다. 어두운 방 안에서 나를 보살펴 주고, 이끌어 주고, 내 이름을 불러줄 보호자를 기다렸다. 기다림은 아무 것도 변하게 하지 않았다. 불안은 습관처럼 내 안에 자리 잡았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일이 어른이 되는 과정인 줄 알았다. 누구에게도 무게를 기대지 않고 천천히 아주 느린 속도로 스스로를 보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믿었다. 아프지 않게, 다치지 않게, 눈물을 잘 삼키는 연습도 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쪽에서는 늘 작은 빛 하나 반짝이는 희망 하나를 품었다. 언젠가는 부모님의 삶의 동아줄이 더 견고하고 단단해지는 날 내 이름을 다정히 불러줄 거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 사람은 남편이었다. 가끔 일이 늦어져 늦게 오는 날이면 아파트의 불을 환히 밝혀 나를 맞아 주었다. 큰 수술을 몇 번이나 할 때마다 주저없이 남편의 이름을 보호자 란에 적었다. 어린 시절 내겐 늘 보호자가 있었지만 보호받지 못했던 공허함이 자리잡았지만 남편으로 인해 마음 속 빈 의자 하나가 조용히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것처럼 내 안의 결핍이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주 오래된 바람 하나를 접어 작은 종이배로 띄운 것처럼 마음의 틈이 매워졌다. 휘청거리던 내 안의 외로움도 누구에게도 닿지 못할 것 같던 그리움도 서서히 시간의 질서와 함께 잔잔한 물살을 따라 흘러가기 시작했다. 과거의 결핍을 탓하지 않고 사랑으로 채워가며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도 하고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기도 하며 나 역시도 오래도록 기다렸던 보호자의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 부모님에게 내 이름은 보호자로 저장되어 있다. 지금, 나는 부모님의 보호자가 되었다. 어린 시절 내 곁을 지켜주지 못했던 그 시간들을 이해하게 되면서 나는 부모님을 지켜주는 사람이 되었다. 때로는 병원 복도에서, 때로는 어두운 골목길에서, 또 낯선 서류 앞에서. 나는 묵묵히 ‘보호자’라는 이름을 지켜나간다. 살아간다는 건, 어릴적 바라던 것들이 결국 삶의 무대가 되어 다시 누군가에게 건네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를 그리워하지만 이제는 누군가를 위해 따뜻한 불빛 하나를 지피며 살아간다. 삶은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보호의 노래처럼 흘러간다. 그리고 삶이 내게 말한다. “누군가의 기다리던 사람이 되어주라고”. 내 유년의 윗목은 먼 시간 끝에서 지금의 내 마음을 데워주는 아랫목이 되었다. /김경아작가

2025-04-29

포항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나라의 꿈

우리는 지금, 격동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험난한 국면을 넘어 조기 대선이라는 전례 없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혼란의 와중에도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정치란 국민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정치는 국민을 편 가르지 않고 하나로 묶어야 하며, 권력을 쟁취하는 수단이 아니라 국가를 튼튼히 세우는 도구여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정치 현실은 어떠했나? 당리당략에 갇혀 민심을 외면하고, 국가의 미래보다 정파적 이익을 좇은 결과, 대한민국은 분열과 갈등, 불신의 늪에 빠졌다. 이제 우리는 이 흐름을 바로잡아야 한다.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고, 오직 국민과 국가를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필자는 그 출발점을 포항에서 찾고자 한다. 포항은 고난 속에서도 끊임없이 도전하고, 자신의 힘으로 일어선 도시이다.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끈 포항의 정신에서 오늘 우리가 다시 일어서야 할 이유와 방법을 엿볼 수 있다. 포항은 위기의 순간마다 스스로 길을 만들어 온 도시이다. 아무것도 없던 벌판에 제철소를 세우고, 세계적 산업도시로 성장시킨 포항의 역사야말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축소판이다. 지금 대한민국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 포항의 정신이다. 중앙집권적 구조에서 벗어나, 지역이 스스로 성장하고 번영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 지역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포항이 살아야 대한민국이 산다. 정치를 시작하면서부터 가졌던 ‘지방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라는 믿음은 변함이 없다. 지역이 주체적으로 설 수 있을 때, 나라 전체가 튼튼해질 수 있다. 수도권 일극 체제는 이미 한계를 드러냈다. 사람이 떠나는 농어촌, 고령화로 활력을 잃어가는 중소도시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신음하고 있다. 포항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한때는 산업화의 상징이었지만, 이제는 미래를 다시 고민해야 하는 도시가 되었다. 그렇기에 포항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중앙의 틀에 갇히지 않고, 지역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한다. 지방은 단순한 행정구역이 아니다. 사람들의 삶터이며, 꿈과 희망이 싹트는 터전이다. 교육이 살아야 하고, 경제가 돌아야 하며, 문화가 숨 쉬어야 한다. 그래야 젊은이가 돌아오고, 아이들이 웃으며 자랄 수 있다. 그러면 포항이 살아나고, 경북이 살아나고, 대한민국이 새로워질 것이다. 화려한 구호나 거창한 약속은 필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작은 약속을 지키는 일이다. 지역 주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며, 느리더라도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포항에서부터 시작하자! 작은 변화부터 만들어 가자! 지역의 자존심을 세우고, 시민이 주인이 되는 지방자치를 실질적으로 실현해 보자! 절대 쉽지 않겠지만, 꼭 걸어야 한다.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포항이, 그리고 모든 지역이 스스로 빛나는 날이 올 것이라 확신한다. ‘지방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이 믿음을 지키며, 오늘도 묵묵히 나아간다.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단체장 출마 희망자의 기고문을 받습니다. 후보자의 현안 진단과 정책 비전 등을 주제로 200자 원고지 7.5∼8.5장 이내로 보내주시면 지면에 싣도록 하겠습니다. 기고문은 사진과 함께 이메일(hjyun@kbmaeil.com)로 보내주세요.   ※ 외부 기고는 기고자의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5-04-29

‘계엄의 늪’속에서 이재명을 이길 수 있을까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가 지난 27일 대선 후보 경선에서 89.77%의 누적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6·3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득표율은 반올림하면 90%다. 진보대통령의 대명사 격인 김대중 전 대통령(새정치국민회의·77.53%)도 달성하지 못한 수치다. 민주 당원과 지지층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 그만큼 똘똘 뭉쳤다는 방증이다. 국민의힘은 “조선 노동당에서 볼 수 있는 득표율”이라고 했지만, 이를 가볍게 봐선 안 된다. 이 후보가 얻은 표 중에는 진보지지층 뿐만 아니라 중도층까지 포함하고 있다. 민주당은 이번 경선에서 권리당원·대의원·재외국민선거인단과 국민선거인단 투표율을 50%씩 반영하는 룰을 적용했다. 국민선거인단 투표에서 ‘역선택 방지조항’을 적용하긴 했지만, 중도층의 전폭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90% 득표율이 나올 수 없다. 지난해 8월 당 대표에 연임된 이 후보는 핵심 과제로 ‘중도 공략’을 내걸었다. 진보층이 천박한 욕망이라고 비난했던 ‘먹사니즘(먹고사는 게 최고 가치)’을 그는 ‘유일한 이데올로기’라고 했다. 그는 민주당 후보로 확정된 후에는 통합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러나 이 후보의 이러한 변신에 반신반의하는 시선이 많다. 민주당은 그동안 국회를 장악한 이후 사실상 국정을 마비시켰다. 재계가 반대하는 상법 개정안 등 셀 수 없는 많은 법안을 본회의에서 일방적으로 강행처리했다. 30번의 탄핵안과 33번의 특검법을 남발했다. 헌정사 초유의 감액 예산안을 일방적으로 통과시키기도 했다. 이제 이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할 경우 대통령실이 당권과 입법권에 이어 예산권까지 장악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될 것이라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은 2028년 4월 총선까지 이어질 것이다. 이재명 대세론 속에서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사실상 대선출마 뜻을 밝히면서 각 당의 대선 구도에 변수가 생긴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한 대행은 개헌에 동의하는 세력과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는 대국민선언을 하면서 국민의힘 대선후보,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 이낙연 전 총리 등과 ‘반(反) 이재명 빅텐트’를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민의힘이 이 빅텐트의 주축이 되려면 우선은 ‘계엄의 늪’에서 벗어나 미래를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주에는 국민의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의 윤희숙 원장이 ‘당을 떡 주무르듯 한 윤석열 전 대통령과 이러한 패권적 행태를 방관하거나 지지한 친윤 그룹의 책임’을 지적한 당의 정강·정책을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윤 원장의 지적처럼 국민의힘은 지금 계엄과 탄핵이라는 ‘윤석열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어떤 공약도 빛을 발하지 못한다. 태연하게 탄핵정국에 머무르면서 중도층 민심 흐름을 외면하다가는 지난 4·2 재보궐선거에서 나타난 ‘TK지역만의 승리’라는 성적표를 또 받게 된다. 재보선에서는 TK(김천시장)를 비롯해 PK(거제시장), 서울(구로구청장), 충청(아산시장), 호남(담양군수) 5곳에서 기초단체장 선거가 치러졌는데, 국민의힘은 TK에서만 이겼다. 이게 불과 한 달 전의 민심이다.

2025-04-29

IMF의 경고

“시급한 외환 확보를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의 자금 지원체제를 활용하겠습니다” 1997년 11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다. 이를 시작으로 한국경제는 IMF 관리체제로 들어갔다. 당시 한국경제는 외환보유고가 바닥이 나면서 단기간에 많은 기업들이 파산하고, 대량의 실직사태까지 발생했다. 빚 독촉에 시달린 일가가 음독자살을 하는가 하면 회사 중견간부가 졸지에 집을 잃고 노숙자 신세로 돌변했다. 재계 14위였던 한보그룹의 부도 등 내로라하던 재벌들이 잇따라 무너지고 증권회사도 파산하는 전대미문의 일들이 벌어졌다. 한국 재벌기업들의 과도한 부채가 문제의 시작이었다. 수출보다 수입이 많아 달러가 고갈됐고, 국내 은행들도 무리한 대출을 해주면서 존폐 위기에 내몰렸다. 급기야 IMF 관리로 들어서면서 기업과 은행들의 통폐합 혹은 폐쇄가 속출한다. 국민의 삶의 질은 물어볼 것도 없이 핍박해졌다. IMF는 국제간 금융질서 확립과 균형발전 등을 목적으로 1947년 설립된 국제금융기구다. IMF의 지원을 받는 나라는 경제적 구조조정은 필수다. 한국의 IMF를 두고 국가 경제 주권이 빼앗긴 날로 부르는 이유다. 최근 IMF가 한국을 향해 잇단 경고를 보내 주목된다. 4월 세계 경제 전망 발표에서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1%로 낮추었다. 한달 전보다 1%포인트가 더 낮아졌다. 같은 기간 세계 경제성장률 하락치의 배다. 또 한국의 1인당 GDP(국내총생산)가 내년부터 대만에 역전당할 것이란 전망도 내놓았다. 한국을 향한 부정적 경제 수치들이 쏟아지는 분위기다. 한국경제의 불길한 징조일까 걱정스럽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4-29

교단 떠나는 초등학교 교사들

“교사가 학생과 학부모에게 존경받는 시대는 끝난 것 같아요. 여건이 허락한다면 다른 일을 찾으려는 동료들이 적지 않습니다.” 학교에 가고 싶지 않는 건 학생들만이 아닌 모양이다. 초등학교 교사들 중 3/4 이상이 교직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교사가 사회적으로 존중받고 있다고 생각하나’라는 물음에는 겨우 4.5%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보수에 대한 만족도를 묻는 질문에도 2%만이 긍정적 답변을 내놨다고. 교사노동조합연맹은 지난해 전국 유·초·중등·특수교사 1만1359명을 대상으로 ‘전국 교원 인식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위는 그 결과를 요약한 것이다. 교사 스스로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숭고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현실 탓일까? 교단을 떠나 다른 일을 찾고 싶어 하는 교사들이 적지 않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서울시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에 의하면 현직 초등학교 교사 중 42.5%가 ‘기회가 된다면 이직하고 싶다’는 속내를 털어놓았다고 한다. 이직을 희망하는 이유는 낮은 직무만족도와 생활만족도, 거기에 더해 성취감과 보람이 갈수록 사라지기 때문이라고. 최근엔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교육대학의 합격 점수가 낮아지고, 지원자도 줄어드는 추세까지 보인다. 현직 교사는 교단을 떠나려 하고, 교사를 꿈꾸는 입시생은 갈수록 적어지는 상황이 온 것이다. 세상이 변했고,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변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아야 한다’는 케케묵은 말만으로는 교사를 포기하려는 이들을 붙잡을 수 없다. 미래 세대의 교육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특단의 대책이 나와야 한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4-28

국민의힘, 민심을 직시하라

국민의힘이 ‘탄핵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대선은 코앞인데 민심에 역행하는 행태들이 가관이다. 탄핵된 대통령은 국민에게 사과는커녕 부아만 돋우고, 친윤 후보들은 계엄옹호와 극우행태로 민심이반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파면된 대통령과 친윤 후보들이 ‘이재명 당선 도우미’로 나선 것인가? 민심이 두렵다고 비겁하게 외면하지 말라. 잘못했으면 사죄하고 고치는 것이 진정한 보수다. 대선은 ‘우리끼리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다. 내 편 목소리만 듣고 ‘이것이 민심’이라고 우기는 ‘바보들의 행진’이 무슨 소용인가? 각종 여론조사는 “대통령 파면 결정이 잘됐다”는 응답이 70% 안팎으로 압도적이다. 그럼에도 파면된 대통령은 사저로 돌아가 지지자들에게 “이기고 돌아 왔다”, “대통령 5년 하나 3년 하나”라고 했다니 어이가 없다. 당과 보수를 궤멸의 위기에 빠뜨려 놓고서는 이게 도대체 대통령 했다는 사람이 할 소리인가? 게다가 후보들은 탄핵 책임을 둘러싸고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자해소동을 벌이고 있다. 비상계엄이 “2시간 해프닝이었다” 또는 “책임은 민주당에 있다”라고 주장하는 후보들이 본선에 진출한다면 국민들이 지지하겠는가? 최근 여론조사(리얼미터, 4월 21일)에 의하면 국민의힘 5강 후보들의 지지율 합계(35.9%)가 이재명 후보 한 명(50.2%)보다 작다. 또한 대선후보 가상 양자대결에서도 국민의힘 4강(김문수·안철수·한동훈·홍준표)과 한덕수 권한대행의 지지율은 이재명 후보(최소 52% 이상)에 비해 14%∼21%의 큰 격차를 보이고 있다(한국갤럽, 4월 24일). 이처럼 심각한 민심을 외면하고 경선토론회에서는 ‘네 탓 타령’에 ‘키높이 구두’나 물어보고 있으니 제정신이 아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낡은 보수와 단절하고 새로운 보수의 길을 열어야 한다”면서 “살가죽을 벗기는 수준의 고통스러운 변화가 수반되지 않으면 보수 재건은 요원한 과제”라고 했고, 유승민 전 의원도 “보수 대통령이 연속 탄핵 당했음에도 당은 제대로 된 반성과 변화의 길을 거부하고 있다”고 하면서 경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중도확장성이 크고 탄핵에서 자유로운 두 사람이 경선에 불참했다는 사실은 민심을 외면한 당의 현주소를 말해주고 있다. 국민의힘 지도부와 중진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대선은 다가오고 당이 가야할 길은 멀고 험한데 아직도 좌고우면(左顧右眄)하고 있으면 어쩌겠다는 말인가? 민심의 응징을 받고 난 후에 비로소 후회하면서 ‘탄핵의 강’을 건너려고 하는가? 윤희숙 여의도연구원장은 “권력에 줄서는 정치가 계엄이라는 처참한 결과를 낳았다”고 하면서 “깊이 뉘우치고 국민께 사죄드린다”고 했는데, 왜 당 지도부는 아무 말이 없는가? 이제라도 제발 정신 차리고 분노한 민심을 직시하라. 파면된 대통령은 정치에서 손을 떼고 자숙해야 하며, 당과 후보들은 민심을 받들어 철저히 환골탈태해야 한다. ‘민심의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일그러진 모습을 똑바로 보라. 민심을 받들면 살고 외면하면 죽는다.

2025-04-28

평균의 종말

결론부터 말해 보자. ‘평균은 없다!’ 평균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측정하고 줄 세우는 이 시대를 보라. 평균점수, 평균신장, 평균소득…. 평균. 평균. 평균…. 모든 것이 평균을 중심으로 수치화되고 평균은 규범처럼 기능한다. 인간 존재의 고유성과 잠재력의 파괴를 담당한 ‘평균주의’라는 우상에 대하여 일말의 의심 없이 우리 자신을 송두리째 바쳐 숭배해 온 지난 역사를 돌아볼 때가 되었다. ‘평균적인 인간’이란 개념은 통계적 편의에 불과하며, 실존하는 누군가를 정확히 대표하지 못한다. 미국 공군이 조종사의 평균 신체 치수를 기준으로 조종석을 설계했으나, 결과적으로 그 평균에 부합하는 조종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례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조종석을 개별 조정한 이후에야 비로소 사고율이 현격히 낮아졌다는 점은, 평균이라는 기준이 얼마나 위험한 오판일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교육, 의료, 노동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맹활약 중인 평균은 중립적 기준인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누구에게도 정확히 맞지 않는 기계적 틀일 뿐이다. 시험 점수, IQ, 학점과 같은 수치들을 기준으로 한 서열화는 인간 개개인의 특별함과 다양성을 파괴하는 폭력일지도 모른다. 평균주의 사촌 ‘능력주의’를 보자. 능력주의는, ‘출신과 배경이 아닌 개인의 능력으로 평가받고, 노력한 만큼 보상 받는다는’ 얼핏 보기에는 매우 그럴싸한 슬로건을 내세운 이데올로기다. 그러나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생각해 보라. 우리의 삶이 탄생의 순간부터 평등하였는가를! 교육 기회, 정보 접근성, 사회적 자본의 분포가 공평하게 작동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는 걸 금방 눈치챌 것이다. 능력주의는 이러한 구조적 불평등을 은폐한 채, 성공을 개인의 탁월성으로, 실패를 개인의 무능으로, 해석하도록 유도한다. 평균주의가 능력주의를 만나면 수치화, 표준화된 인간을 탄생시킨다. 고유한 재능과 가능성을 지닌 개인은 사라지고, 정해진 기준에 맞는 소수만이 ‘합당한 인간’으로 간주된다. 그런 사회가 공정하다 할 수 있을까. 당신은 평균 이상인가? 그렇다면 근거를 제시하라. 아마도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돈, 외모, 학벌, 직업의 세계에서 평균 이상을 쟁취하기 위해 우리는 오랫동안 환상 속을 헤매어 왔다. 사람은 재단 되어서도 안 되며, 재단될 수도 없다. 당신은 능력자인가? 그렇다면 당신이 가진 능력 이외의 능력을 보여달라. 아마도 그렇지 못할 것이다. 노력조차도 능력일지도 모른다. 평균이 없으니, 평균 이상도, 이하도 없다. 능력 없는 사람 일지라도, 그에게 발굴되지 않은 능력이 있을 수 있다. 일류대 출신, 높은 스펙의 허상으로부터 깨어나야 한다. “성공은 평균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독자성을 완성하는 것”이라는 토드 로즈('평균의 종말' 저자)의 목소리를 기억하자. 밤 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줄 세우는 사람은 없다. 빛나지 않는 별은 없다. 크기와 밝기와 거리와 관계없이 그저 아름답다. 당신의 장점은 평균과의 거리가 아니라, 당신의 고유성에 있다.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는 평균을 기준으로 시스템을 설계했기 때문이며, 진정한 발전은 개별성을 존중할 때 이루어진다. 사람은 누구나 밤하늘의 별처럼 아름답게 반짝인다. 각자 다른 꽃이 피는 세상, 저 마다의 소질을 인정받는 세상은 우리의 생각과 의지에 달렸다.

2025-04-28

김문수와 이재명

이번 대선정국에서 여당과 야당의 선두 주자인 김문수와 이재명은 후보들 중 가장 대척점에 있는 두 인물이다. 정치 성향뿐 아니라 삶의 역정도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소년 김문수는 어려운 형편에서도 공부를 잘해서 지방의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3학년 때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경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아 결국 중징계를 받은 것이다. 입시 준비에 전념해야 할 시기에 학생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정의감과 패기가 남달랐음을 보여준다. 반면, 이재명은 일찍부터 학업을 잇지 못하고 소년공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 때를 회상하며 2006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는 “나보다 한 살 어린 꼬맹이 여자애가 나이를 두 살이나 속여 나로 하여금 ‘누나’라고 부르게 하여 머리끄덩이를 잡아 버르장머리를 가르쳐 주고, 점심시간에 힘 약해 보이는 동료에게 식판을 집어 던지는 만행(?)을 저지름으로써 공장 내에서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구절이 있다. 나이를 속였다고 여자애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버르장머리를 가르치고, 힘이 약해 보이는 동료에게 식판을 던져서 기세를 제압하는 ‘만행’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김문수는 그 어려운 일류대학교에 들어가서도 장래가 보장되는 대학 생활을 포기하고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1971년 위수령반대 시위와 1974년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되어 두 차례나 제적을 당하자, 한일도루코 공장에 위장취업하여 노조위원장을 지내는 등 적극적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그에게는 개인적인 출세 영달보다 노동자들의 인권과 사회정의실현이 우선이었다. 이 역시 오로지 신분 상승을 위해 독학으로 대학에 들어가고, 고시공부에 전념해서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재명과는 대조가 되는 행적이다. 두 번의 경기도 지사와 세 차례 국회의원 등 오랜 공직생활 중에도 김문수는 한 번도 부정과 비리에 연루된 적인 없는 그야말로 청백리였다. 경기도 지사 시절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도내 전 공무원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 청렴의 중요성을 강조 했으며, ‘부패즉사(腐敗卽死), 청렴영생(淸廉永生)’ 슬로건을 내걸고 부패공직자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퇴출이란 원칙을 적용하는 등 청렴문화 확산을 실행했다. 이 부분도 두 사람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재명은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로 재직하는 동안 온갖 비리에 연루되어 지금 재판 중인 사건만도 공직선거법위반, 위증교사혐의, 대장동·성남FC·백현동 개발 특혜, 대북송금, 경기도 법인카드 유용 등 다섯 건이나 된다.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며,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하고,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국가의 독립, 영토의 보전, 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가진다. 누가 대통령직을 맡느냐에 따라 국운의 향방이 달라질 수 있을진대 유권자들의 현명한 선택이 절실한 시점이다. 가장 훌륭한 인물이 누구인지를 판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나라를 위태롭게 할 사람을 가려내는 것이 먼저라야 한다.

2025-04-28

청소년이 안전한 디지털 환경

최근 여성가족부에서 발표한 제7차 청소년정책 기본계획은 현재의 청소년을 ‘디지털 네이티브’라고 정의하고 있다.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란 디지털 환경에서 성장하여 일상생활에서 디지털 기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세대를 말한다. 디지털 기기에 능숙한 요즘 청소년이 가담하는 범죄는 사이버 공간에서 이뤄지고 새로운 수단과 방식을 사용하는 신종 범죄로 진화하고 있다. 이에 경찰은 디지털 범죄 근절을 위한 정책을 전방위적으로 펼치고 동시에 학교전담경찰관을 필두로 집중 예방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여기서는 청소년 디지털 범죄의 대표적인 유형을 분석하고, 이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최근 청소년 온라인 도박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상했다. ‘온라인 도박 범죄자 세 명 중 한 명은 청소년’이라 할 만큼 온라인 도박은 이미 상당수의 청소년을 잠식하고 있다. 2024년 청소년 도박범죄 검거 인원은 564명으로 전년보다 230%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딥페이크(Deepfake) 범죄도 심각하다. 작년 딥페이크로 검거된 가해자의 약 80%가 청소년일 만큼 딥페이크에서 청소년이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으로 높다. 디지털 환경 속에서 청소년을 보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기성세대는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디지털 통제의 방식인 ‘게임 셧다운제’ 등을 도입했으나, 청소년의 자기 결정권 침해 및 부모명의 계정 가입 등 편법이 속출해 실효성 논란으로 결국 폐지됐다. 이는 청소년이 납득할 수 없는 일방적 통제로는 청소년을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을 방증한다. 디지털 네이티브인 현재 청소년을 보호하려면 가정, 학교, 경찰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먼저 가정에서는 자녀의 올바른 디지털 가치관 정립과 가정 내 온라인 환경을 정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대화와 관심을 통해 자녀의 디지털 사용을 지속적 모니터링하는 것이 필요하다. 학교에서는 정보기술 교육과 함께 디지털 윤리교육을 체계적으로 시행하고, 경찰에서는 청소년 대상 신종 디지털 범죄에 기민하게 대처하고 엄정하게 대응해야 한다. 또 예방과 재범방지 차원의 캠페인 및 사이버 범죄예방 교육을 정기적, 주기적, 반복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청소년의 디지털 범죄는 단순한 개인의 일탈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사회 전체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정책과제이다. 우리 사회가 청소년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고 안전한 디지털 환경을 조성할 때 건강한 미래 세대를 만들어 갈 수 있다. /대구 수성경찰서 여성청소년과 박지선 경감

2025-04-28

시를 쓰세요?

최근 새로운 곳에서 나를 소개해야 하는 상황이 많아지면서, 공통적으로 모두가 나의 이력을 신기하게 생각한다는 걸 알았다. 우선 전국에 몇 없는 문예창작학과를 대학에서 전공했다는 점도 그렇고, 특히나 시를 중심으로 4년간 공부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신기한 듯 했다. 그러다 누군가 시를 아직도 쓰냐는 질문을 했고,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게, 무언가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시를 쓰는가? 집에 돌아가는 내내 나는 물음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싶었다. 간혹 무언가 떠오르면 메모장에 적기도 하고 일기도 매일 쓰곤 하지만, 그건 시의 형태라고 말하긴 어렵다. 그렇다면 시는 무엇이지? 내가 쓰는 게 시가 아니라면, 간혹 내 이름 앞에 시인이라는 타이틀이 붙을 때의 나는 무엇이지? 생각하다 곤란해져버렸다. 급작스레 가까워졌던 한 지인과의 술자리에서 지인은 신춘문예를 어떻게 하면 등단할 수 있을지에 대해 물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다고, 아마 운이 아닐까요? 하는 나의 물음이 조금 성의없어 보였던 탓인지 그 사람은 그 이후 조금 심드렁해 보였다. 그러던 내게 급작스레 시인은 시집을 내야만 시인이라 불릴 수 있는 것 아니냐며, 말을 건네왔고 나는 명확히 답을 내리지 못한 채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그 이후 그 지인에게는 충분한 사과를 받았지만 그 이후의 나는 부끄럽게도, 신춘문예 등단 이력을 숨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신기한 이력은 나도 모르게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있고, 눈을 반짝이며 나의 이력과 전공에 관한 질문을 들을수록 나는 더 미궁에 빠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물음 속에서 시인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드러났으면 좋겠는 마음이 동시에 들고 있다. 말하고 싶지 않음은 물어보는 질문들에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하겠기 때문이고, 나는 시집 출판을 한 적 없기에, 시인이라는 타이틀이 무척 과분한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시인이라고 불리지 않는다면, 나는 조금 괴로울 것 같다. 시인이 되고 싶어 애써왔던 시간이 있었고, 문학이라는 세계에 합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지금은 왜이렇게 탐탁치 않은 채로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살아가는 걸까. 하루하루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나는 출근을 하고 정해진 시간에 퇴근을 한다. 그 이후의 시간은 대부분 쇼파와 한몸이 되어 불만이 많은 채로 뒹굴다 잠이 든다. 그리고 하루의 반복, 점점 탈출 할 수 없는 미로를 떠도는 기분이 든다. 이런 나에게 시인이라는 이름은 조금 과분한 걸까? 그런 생각도 들지만 며칠 내내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시인인지, 아닌지 두 가지로 판단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최근 낯선 사람에게 회사 생활을 어떻게 하면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고민을 털어놓았었다. 그날 처음 만난 사람이었지만 의외로 통하는 부분이 많고 성격 또한 비슷해서 나도 모르게 그때 내가 진지하게 했던 고민을 털어 놨다. 그 분은 골똘히 생각하다, 그냥 단순해지면 되는 것 아니냐는 답을 내놓았다, 그리고 나는 집에 가는 길에 단순함에 대해 생각하다 결국 명쾌해졌다. 어디에나 무례한 사람은 있다. 무례한 말에는 인상을 쓰고, 너무 혼자 모든 일을 떠안지 않고, 타인의 표정 하나하나에 의미부여를 하지 않고, 너무 좋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는 그 모든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모든 강박적인 피로에서 벗어나 본질만을 꿰뚫으면 된다. 본질은 언제나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함에 속해 있고, 단순해진다는 것은 불필요함을 제거하는 용기와 열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는 “단숨함이 복잡함 보다 더 어렵다, 단순하게 만들려면 생각을 깨끗하게 정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불필요한 구성 요소를 모두 제거해야만 제품이나 시스템에 진정한 영혼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믿었다. 단순함은 게으르거나 부주의하지 않다. 본질에 집중하여 하나를 정확히 꿰뚫는 것, 어쩌면 시와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명쾌하고 단순하게 살다보면, 나 결국 시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윤여진(시인)

2025-04-27

수국을 기다리며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었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나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저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 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중략) //매일 김포로 도망가는 상상을 해요/ 김포를 훔치는 상상을 해요/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 저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이원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득 나 자신에게 “내 삶은 나의 것인가?”하는 질문을 할 때가 있다. 열심히 노력하면서 앞만 보고 달려 나가는데 늘 불안하다. 이 길 끝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실패일까 봐서. 아니 그것이 성공이라 하더라도 그 성공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인지 솔직히 모르겠어서. 좋은 회사, 큰 집, 고급승용차, 명품… 남들이 다 선망하니까, 다들 그렇게 살아가니까, 그게 좋다고들 하니까 나도 그냥 따라가고 있는 건 아닐까? 내 욕망은 내 것이 아니라 타인들의 것이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고독한 군중’을 쓴 데이비드 리스먼은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따라 행동하는 ‘타자지향형’ 인간으로 변화했다고 말했다. 인스타그램이나 틱톡에 사진이나 영상을 올린다. 사람들이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남긴다. 처음엔 “내가 좋아서” 올린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걸 올려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 자신이 원하는 게 아니라, 타자가 원하는 걸 맞추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진짜 ‘나’는 점점 지워져간다. 세상에서 내가 점점 흐릿해지는 것 같을 때 이원하의 시를 읽는다. 화자는 “제주에서 혼자 살고” 있다. ‘혼자’는 고독의 상태이므로 ‘제주’는 유배지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유배지가 사회와 완전히 단절된 공간인 것에 비해 시인의 제주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과 교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장소다. 그러나 “화가의 기질을 가”진데다가 “얇고 연약”한 감수성을 지닌 화자는 타자와 잘 어울리지 못한다.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라는 혼잣말은 남들과 비슷한, 보편적 인간이 되지 못해 고독해진 “웃기고 이상한 사람”의 자기고백이다. 그럼에도 화자는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기존재성을 유지한 채 타자와의 소통을 끊임없이 시도한다. 사회 집단에 속하기 위해 자신의 개성과 취향, 생각을 포기하고 타인과 비슷하게 스스로를 맞춰가는 대신 “나의 정체는 끝이 없”음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며 “저에게 바짝 다가오세요”라고 손짓하는 것이다. 이 건강하고 활달한 소통의 방법론은 개인을 획일화되고 일률적인 틀에 종속시키려는 제도 사회와 타인들의 욕망을 무력화한다. 고독을 견디기 힘들 때면 보편적이고 평범한 교류 사회인 ‘김포’로 도망가거나 그곳을 훔치는 상상을 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도망가진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훔치진 않을 거예요”라고 이내 마음을 고치는 순간,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진다.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고독할 수밖에 없지만, 고독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의 특별한 라이프 스타일을 버릴 수 없다는 유쾌한 태도가 동력이 되어, ‘제주’라는 ‘혼자’의 장소에 새로운 유대의 가능성을 움트게 하는 것이다. 남들이 욕망하는 걸 똑같이 욕망하며 비슷하게 살려고 하는 대신 “웃기고 이상한 사람”이 되길 선택할 때 “나의 정체는 끝이 없”다. 타인에 의해 무엇으로 쉽게 규정되지 않는 개성적 삶이 되는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면 파도가 밀어 오는 수국 향기 맡으러 제주 종달리에 가고 싶어진다. 아니다. 이른 봄 테라스에 수국 묘목을 심었는데 그동안 작은 변화도 없이 고요하던 나무에 어느새 초록잎이 돋아났다. 초여름이면 꽃을 볼 수 있으리라. 우리 집 테라스에도 곧 수국이 만발할 테니 꽃을 기다리며, 나를 지키며, 나답게 살아야겠다. /이병철(시인)

2025-04-27

봄날저녁의 서정

변덕스럽다고들 하지만, 봄날은 분명 매혹적인 구석이 많다. 큰 일교차로 마음에 드는 옷을 갖춰 입기도 어렵고, 느닷없이 불어닥치는 바람으로 정신 사나운 경우도 왕왕 생긴다. 하지만 얼굴을 스치며 지나가는 산들바람 속에서 한겨울 삭풍(朔風)에 담긴 칼날은 이미 찾을 수 없다. 겨우내 굽었던 등줄기와 목덜미에 자연 힘이 들어가니 걸음걸이 또한 발라진다. 밀린 숙제처럼 텃밭에 심을 모종을 사러 나간다. 청상추, 청양고추, 오이고추, 방울토마토, 가지, 오이, 수박, 참외, 옥수수 어린 모종을 한 바구니 담아와 따사로운 햇살 아래 정성껏 심는다. 작년엔 이상기온 때문에 텃밭 가꾸기에 실패를 보았다. 오직 가지 하나만 늦가을 올 때까지 줄기차게 자라나 작은 즐거움을 선사했을 뿐이다. 앞으로 한 달 지나면 텃밭에서 이것저것 거둘 채소가 마당의 초목을 응시할 것이다. 물론 그런 유쾌함을 맛보려면 부지런히 물을 주고, 불원초(不願草)를 뽑아내고, 벌레를 잡아야 한다. 인간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기에, 정성을 다해야 소량의 수확이나마 기대할 수 있다. 모종을 심고 나서 민들레와 달래, 참죽나물을 건사한다. 자연이 주는 선물이다. 이른 저녁을 마치고 들로 나간다. 사납게 짖어대는 개들을 우회하는 산책로를 선택한다. 지나가는 사람을 향해 마구잡이로 울부짖는 개를 보노라면 낙후(落後)하고 시대착오적인 언사를 배설하는 일부 정치인이 떠오른다. 시대를 앞서가지는 못할망정 20세기 개발독재 망령에 사로잡혀 구태(舊態)를 반복하는 정치인들은 우리 역사를 질식시키는 맹독(猛毒)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촌길이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덮여 있기에 예전의 논길이나 밭길을 상상한다면 당혹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그 길에도 무릎까지 자라난 지칭개와 황새냉이가 병사처럼 우뚝하고, 바람결에 흔들리는 밀과 보리가 길손을 반긴다. 화양(華陽) 들판에는 켄 로치(1936-)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보리 대신 어른 만큼이나 키가 자란 밀이 떼 지어 온몸을 우줄대고 있다. 늦은 시각 귀로(歸路)에 오른 오리나 왜가리가 어두운 대기 속을 홀로 날아가며 우짖는 소리는 적이 쓸쓸하다. 다섯 마리 오리가 대열을 이루고 서로 자리를 바꿔 가며 날아가는 풍경과 사뭇 대조적이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도 무리 지어 살아가는 편이 그나마 덜 외롭고 힘든 것이다. 아차 하는 사이, 고라니 어린 녀석이 내 앞을 지나 밀밭 속으로 뛰어든다. 서녘의 불그스레한 빛이 서서히 잿빛으로 바뀌고, 창공에는 흰색 동체(胴體)의 비행기가 아득한 높이에서 날고 있다.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나서, 혹여 있을 올여름 나의 장도(長途)를 잠시 생각한다. 오고 감은 인생길에서 필연의 과제이되, 거기서 만나고 헤어지는 인연의 색깔과 향기는 또 얼마나 다채롭고 상큼하며 통절(痛切)한 것인가?! 분망했던 일과를 돌이키며 걷노라니 어둑한 골목길 끝에 동그마니 자리한 누옥(陋屋)이 나를 반긴다. 10년도 넘는 세월 한결같이 제 자리를 지키고 서서 오가는 세월과 여여(如如)한 인생을 반추하는 집이라니! 기특하고 고마운 상념이 멀리서 찾아온다. 삶은 위대한 축복이다!

2025-04-27

폴리페서의 계절

선거철만 되면 불나방처럼 정치에 등장하는 그룹이 있다. 일명 폴리페서로 불리는 정치 성향의 교수집단을 이르는 말이다. 불나방이란 곤충은 불빛을 향해 빙빙 돌다가 불 속으로 뛰어드는 습성 때문에 이름이 불나방으로 불린다. 유혹에 빠져 무모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부를 때도 불나방이라 한다. 폴리페서란 정치(Politics)와 교수(Propess)가 합쳐진 말. 국립국어원은 외래어 가운데 고유어로 토착화되지 못한 말을 고유어로 알기 쉽게 고친 말을 ‘다듬은 말’ 이라 부른다. 예컨대 MZ세대들이 잘 쓰는 미닝아웃(Meaning Out)을 ‘소신 소비’, 가축을 ‘집 짐승’, 노크를 ‘손기척’ 등으로 쓰는 말들이 그런 것들이다. 폴리페서는 오래전 국립국어원이 다듬은 말로 ‘철새 정치교수’라고 불렀다. 그 당시 누리꾼들은 철새 정치교수, 탐관교수, 덧걸이교수, 감바리교수, 가면교수 등을 우리말 표현으로 제시했는데, 국립국어원은 철새 정치교수로 선정 확정한 것이다. 누리꾼의 제시어에서 느낄 수 있듯 폴리페서에 대한 일반적 이미지는 부정적이다. 관직을 탐한다거나 잇속을 노리고 약삭빠르게 달라붙는 사람의 뜻을 폴리페서 해석에 붙였다. 6월 대선을 앞두고 폴리페서의 등장이 또 논란이다. 높은 학문적 성과를 이룬 교수들의 철학과 정책이 정치에 반영되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정치적 야욕에 눈멀어 선거 때만 되면 불나방처럼 선거판에 뛰어드는 교수들의 모습은 실망 그 자체다. 교수도 정치가 하고프면 공무원처럼 사직서를 내고 소신을 펼치는 것이 용기있고 옳은 일이다. 폴리페서 남발을 막을 제도 개선을 생각할 때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4-27

차마 말 못 하고 있었는데…

민주주의에서 선거는 국론을 모으는 과정이다. 후보들의 차이점을 부각하면서도, 결국 수렴하게 만든다. 분명하지 않던 의견 차이가 경쟁 후보와 비교할 면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그렇지만 유권자를 의식해 점점 경쟁 후보와 닮아간다. 왼쪽에 있는 후보는 조금 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고, 오른쪽에 있는 후보는 그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특히 양당제 구도를 가진 나라에서는 누 가 중도층을 더 많이 확보하느냐를 두고 경쟁한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공을 들이는 게 그런 노력의 하나다. 이렇게 국론을 하나로 모으면 바람직하다. 하지만 늘 그런 것도 아니다. 겉으로는 비슷해져 가면서도, 진영 대결의 감정을 소화하지 못하고, 깊은 편 가르기가 병이 되는 경우도 많다.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되는 일도 허다하다. 선거 때만 사탕발림하는 거짓말이다. 특히 이런 과정을 방해하는 것이 극단 세력이다. 도식적으로 극우와 극좌에 있는 집단이다. 오른쪽에 있는 후보가 중간 지대를 공략하려 해도 극우세력이 견제하면 쉽게 움직이기 어렵다. 자칫 중간에서 얻는 표보다 오른쪽에서 빼앗 기는 표가 더 많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광훈 목사가 “아직도 계엄이 잘못됐다고 하는 40%는 북한으로 가라”라고 주장하는 게 그런 사례다. 왼쪽도 마찬가 지다. 6·3 대선은 윤석열 전 대통령이 탄핵당해 치른다. 비상계엄은 헌법재판소가 위헌으로 심판했다. ‘찬탄’(탄핵 찬성)과 ‘반탄’으로 갈라져 세 대결을 펼쳤지만, 비상계엄에 대해서는 ‘반탄’ 세력조차 쉽게 지지하지 못한다. 이런 국면에서 대선을 ‘찬탄’ 대 ‘반탄’ 대결로 몰아가면 ‘반탄’ 후보가 백전백패다. YTN 이 엠브레인퍼블릭에 의뢰한 지난주 여론조사를 보면 ‘정권 교체’ 여론이 54% 로 ‘정권 연장’ 36%보다 크게 앞섰다. 중도라고 답한 응답자는 정권 교체 의견이 갑절로 많았다. 국민의힘이 탄핵에 분명한 태도를 보이지 않은 영향이 크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국민의힘에서도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윤희숙 여의도연구원장은 24일 정강· 정책 방송 연설에서 “권력에 줄 서는 정치가 계엄과 같은 처참한 결과를 낳았다.다”라면서 “국민께 진심으로 사죄드린다”라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윤 전 대통령의 반민주적 정치에 순응한 것을 조목조목 반성했다. 처음, 이 연설을 들을 때 당내 분란을 촉발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의외로 국민의힘 지도부가 공감을 표시했다. 권성동 원내대표는 “전반적인 취지에 동의한다”라면서 “건강한 당정 관계를 구축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한다”라고 말했다. “차마 말 못 하고 있었는데…”라는 느낌이다. 대신 물꼬를 터준 셈이다. 대선 경쟁에 의욕을 되찾았다는 의미다. 정권 연장을 포기하고, 차기 당권이나 잡자는 분위기에서는 탄핵 반대가 유리하다. 다음 총선 공천을 걱정하는 의원도 함부로 ‘찬탄’ 목소리를 못 낸다. 당장 대선 당내 경선 후보들도 자세를 바꾸고 있다. 가장 탄핵에 반대했던 김문수 후보도 윤 원장의 발언을 “절박한 심정에서 나온 간절한 목소리”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26일 ‘4강 토론회’에서 김 후보는 “사과는 당연히 할 때가 되면 하겠다”라면서 “민주당은 하나도 반성·사과하지 않고, 우리만 계속 사 과하라는 것은 맞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홍준표 후보는 “제가 최종 후보가 되면 검토하겠다”라고 말했다. 기회를 보고 있을 뿐 사과할 뜻은 있다는 말이다. 이미 계엄 반대와 사과를 밝혔던 한동훈 후보는 “절대로 겪으셔서는 안 되는 일을 겪게 해드려서,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서, 당시 당 대표였던 사람으로서 국민께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한다”라고 거듭 사과했다. 안 후보는 “우리 당이 대선에서 승리하려면 탄핵의 강을 건너야 한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29일 국민의힘은 4강 대결 결과를 발표한다. 과반 득표자가 없으면 5월3일 최종 후보를 발표한다. 그 가운데 한덕수 총리와 단일화 과정을 거칠 가능성이 크다. 누가 후보가 되건 경쟁 후보들의 힘도 끌어모아야 한다. 그러려면 탄핵에 대한 의견부터 먼저 하나로 모아야 한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5-04-27

고전으로 현실을 비판할 수 있나요?

비상 계엄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고 파면된 윤석열 전 대통령이 한남동을 떠나던 날, 많은 언론에서는 전 대통령이 국민에게 사과 한마디 없었다고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법을 어겼으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주면 그만이지 왜 사과를 기대하거나 요구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회 고위층의 잘못은 매우 계획적인 데다 자기가 옳다는 신념에 가득 찬 경우가 많아서 사과할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SNS에 올리니, 그들이 인간임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일 거라는 답글이 달렸다. 그 일이 있고 며칠 후 SNS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인간이 아니라는 논지의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종교학을 전공하고 스테디셀러를 많이 낸 문화 셀럽이다. 그 교수는 앞뒤 아무 맥락 없이 맹자의 사단의 마음을 소개하며 부끄러움을 알아야 사람이라고 강조하더니 뒤이어 역시 맹자의 ‘방벌 사상’도 소개했다. 방벌 사상이란 임금답지 않은 임금은 임금이 아니니 그를 죽이는 것은 임금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잘못을 하고도 사과하지 않는 정치인들을 비판한다는 것은 독자들이 다 알 수 있었다. 두 게시글에는 ‘좋아요’가 수백 개 달렸다. 고전을 연구하는 많은 인문 지식인들은 현실 비판의 근거로 고전을 곧잘 인용한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고전에 조예가 있는 교양인들도 개인적인 공부를 넘어 고전이 현실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한다. 때로는 어느 수강생의 말처럼, 고전을 현실에 접목하려는 시도가 무력하고 공허한 점도 있다. SNS의 글쓴이가 주장하는 ‘부끄러움을 모르면 사람이 아니다.’, ‘임금답지 못한 사람은 임금이 아니다.’, 이런 말은 지식인의 탁상공론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기득권을 옹호하는 논리로 사용될 때는 고전에 강한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고전을 읽는다. 고전은 상당히 우회적이어서 삶의 지침을 직접 제시해주거나 현실의 문제를 바로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새로운 생각의 원천인 것은 틀림없다. 중국의 인문학자 양자오도 ‘시경을 읽다’에서 우리가 고전을 읽는 이유는 현대와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오히려 더 새로운 인식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새로운 인식이 얼마나 실천으로 이어질지는 각자 사정에 따라 다를 뿐이다. ‘대학’과 ‘중용’에는 ‘나의 마음을 미루어서 남의 마음을 헤아리라’는 ‘충서’가 표현을 바꾸어 거듭 나온다. 군주가 실천해야 할 최우선의 임무가 ‘충서’라는 뜻이다. 국민에게 총을 겨누면 안 되고 자연 재해나 사회적 재난을 당한 국민에게 진심 어린 보호를 제공해야 하는 것은 군주 자신을 향한 마음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충서’의 마음이 없는 지도자를 지지하는 것은 전도된 인식이다. ‘중용’의 다른 구절에서는 ‘주나라의 기틀을 닦은 문왕과 무왕의 통치 철학이 서책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을 실천할 사람이 없으면 소용없다’며 인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현대 사회의 시민은 모두 정치인이다. 지도자에게 충서의 마음이 없을 때라도 바른 인식을 가진 시민 정치인이 많아지면 바른 정치가 실현될 수 있다.

2025-04-27

욕 속에 감춰진 아이들의 마음을 살펴보자

요즘 아이들 대화는 욕에서 시작하여 욕으로 끝난다. 욕은 감정을 표현하거나 소통하는 방식 중 하나가 되었다. 욕이 들어가지 않으면 대화가 되지 않는다. 카톡이나 SNS 등 온라인이나 일상의 대화에서 욕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인터넷의 발달로 개인 방송이 늘어나고 걸러지지 않은 막말이 인터넷 사이트에 넘쳐흐른다. 이런 지경이니 아이들은 욕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미취학아동과 초등학교 저학년인 경우는 하고자 하는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거나, 싫다는 의사를 표현할 때나,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 때문에 기분이 상했을 때 욕을 내뱉는다. 사춘기 아이들은 사회적 집단에 어울리기 위한 수단으로 욕을 사용한다. 의미도 모르고 사용하거나, 정말로 화가 났을 때나, 주변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나, 주변의 부모나 어른들의 언어습관을 따라 하며 욕을 사용한다. 욕하면 상대방에게 수치심을 주지만 반대로 자신의 감정 해소가 되어서인지 심지어 어른들조차 욕을 쓴다. 이러한 경향은 사회가 힘들어질수록 더 심해진다. 특히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온라인에서는 더 심하다. 사소한 잘못일 경우도 마녀사냥하듯이 남의 인격을 무시하고 무참하게 짓밟는다. 이런 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늘어난다. 욕辱은 한자로 남의 인격을 무시하는 모욕적인 말을 뜻한다. 욕에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포함한다. 매우 충동적이고 아주 짧고 강렬한 말로 표현한다. 그래서인지 머리에 강력하게 남아 나쁜 상황이 되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경우가 많다. 한두 번 사용 경험은 마약처럼 머리에 남아 반복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뇌가 빠르게 자라는 영유아기에 받은 언어폭력의 상처는 뇌의 발달에 치명적이다. 욕이나 고함을 듣고 자란 아이는 뇌 회로 발달이 늦어진다. 해마는 뇌에서 감정적인 행동과 공간 개념, 장기 기억을 조절한다. 거친 언어를 듣고 자란 아이는 감정을 언어로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거친 말을 쓴다. 어린 시기에 언어폭력을 당한 아이는 욕을 무의식적으로 반복 학습을 하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폭력적인 언어를 사용하게 된다. 친구나 주위 사람들에게 욕을 자주 쓰며 아무런 생각 없이 언어폭력의 피해자이며 가해자가 된다. 충동적이면서도 강렬한 느낌 때문에 쉽게 머리에 남아 다른 사람에게 욕을 내뱉는다. 아이들이 욕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자. 요즘의 욕은 단순히 자신의 화나 분노를 표출하는 수준이 아니다. 한 사람에게 집단으로 폭력적인 말을 사용하여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극단적인 분노 표출로 피해자는 일생을 두고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불행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그들의 아픔에 이제는 어른들이 나서야 한다. 욕 속에 감춰진 아이들의 진실한 마음을 살펴보자. 부모의 화난 감정이 고스란히 자녀에게 거친 언어로 나타나지는 않았는지, 애정 어린 충고로 시작한 것이 끊임없는 잔소리를 마구 해대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자식들은 부모가 내뱉는 백 마디의 좋은 말보다 한마디의 감정 섞인 마음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아이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공감해 줄 때 아이들은 저절로 다가온다.

2025-04-27

출렁다리 위에서

4월, 봄이 휘청거린다. 여름과 겨울의 시샘이 예사롭지 않다. 하루는 패딩을 입어야 활동할 정도로 온도가 낮아졌다가 다음 날은 초여름 날씨로 훌쩍 건너뛴다. 꽃들도 적응하기가 어려운가 보다. 어릴 적 기억으로는 봄꽃이 순차적으로 피었다. 매화, 동백이 피고 나면 삼월 들어 개나리와 진달래가 고개를 내밀었다. 목련이 순수함으로 벚꽃이 화려함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뺏고 나면 라일락이 뒤를 이었다. 오월이 되어 아카시아가 온 산에 향기를 뿜고 난 뒤 밤꽃이 피면 아 여름이 오겠구나 생각했었다. 요즈음은 동백과 벚꽃, 개나리, 진달래가 한꺼번에 우르르 나온다. 날씨가 왔다 갔다 하니 꽃들도 나올 자기 순서를 찾아 나오기가 어려운가 보다. 혼란은 날씨나 계절 뿐만은 아니다. 우리 일상생활도 더 빠르고 다양하고 발전해서 따라가기가 벅차다. 새로운 것을 계속 익혀야 하는 현실에 머리가 복잡하다. 평생학습관에서 강좌 하나를 듣고 있다. 인기가 많은 수업이어서 빨리 신청하지 않으면 등록이 어려웠다. 수강 신청은 온라인과 현장 접수로 양쪽이 가능했다. 대부분의 수강생들이 나이가 있는 분들이어서 현장에서 접수하는 쪽을 선호했다. 어느 날, 공지사항이 떴다. 앞으로 현장 접수는 없애고 온라인 접수만 받는다는 것이었다. 수업 후에 휴대폰을 꺼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다. 다음 수업 때 물으니 아들이나 딸이 대신 신청해줬다는 분들이 꽤 있었다. 하나를 배우고 나면 그 다음 배울 것은 몇 배로 늘어나는 느낌이다. 지프리 프사, 즉 지브리 스타일의 프로필 사진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SNS 프로필을 지브리 캐릭터로 꾸미고 있다. 이러한 트렌드는 특히 젊은 세대 사이에서 더욱 두드러지며, 그 배경에는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감성과 매력이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챗GPT의 이미지 생성 기능에 대한 사용자 반응은 매우 긍정적인데 이 기능을 통해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란다. 배워야 할 것이 또 늘었다. 얼마 전 경주에 지인들과 놀러갔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 같이 챗GPT앱을 깔았다. 사용법을 배워 시험 삼아 챗GPT에 경주, 모화를 넣은 시조 한 수를 부탁했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구체적인 정보를 주면 더 나은 시조가 나올 거라고 하기에 서정주풍에 고급 어휘를 넣어 달라고 했다. 즉시 시조 한 편이 올라왔다. "눈은 잠시 내려앉아 흰빛을 품은 산길 푸른 소나무 한 그루 천년을 껴안았다 바람 끝에 묻은 숨 신라의 꿈을 적시네" 아주 잘 썼다고는 할 수 없으나 주어진 정보에 충실한 시조가 한 편 완성되었다. 뒤늦게 글을 쓰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가끔은 쓴 글을 문예지나 잡지사에 보내야하는 일도 있다.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메일을 통해 원고를 보낼 수 있으니 편리한 세상이다. 주위에 나이 들어 글을 쓰는 분들이 있다. 컴퓨터를 사용할 일이 별로 없던 분들은 급하게 메일을 만들어야 했고 원고를 보내는 일이 힘들 때도 있다고 한다. 인공지능이 점차 발전하면서 작가라는 직업도 위협을 받고 있다. 몇 년 전에만 해도 AI가 나와도 없어지지 않을 직업에 작가가 있었다. 아무리 컴퓨터가 발전해도 인간의 감정과 정서를 깊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이 대세였다. 지금은 초기 형태의 챗GPT이지만 더 많은 정보와 지식을 얻고 스스로 진화한다면 과연 우리가 쓴 건지 컴퓨터가 쓴 건지 구분이 가능한 시대를 살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어쩌면 많은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인공지능의 글이 더 섬세한 감정을 표현하게 되지 않을지 고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것을 감사해야 할까? 삶은 출렁다리 위를 건너는 것 같다. 심란한 마음에 TV를 켰다. 벚꽃의 화사한 웃음 위에 눈이 소복한 장면이 눈길을 끈다. 생경한 아름다움이다. 정말 드물게 보는 4월의 벚꽃과 눈꽃이다. 그래, 꽃은 어쨌든 저리 피어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는데 어쩌랴. 질서가 흩어지고 변화가 두드러진 시대를 사는 우리지만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걱정은 저만치 밀어두고 오늘, 지금 그래도 글을 써야겠다. /시조시인

2025-04-27

주민이 바꾸는 마을의 미래, 상주형 마을리빙랩의 실험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서울 공화국’이다. 수도권에 거주하는 인구 비율은 2019년에 이미 우리나라 전체인구의 절반을 넘겼고, 각종 인프라와 일자리 또한 대부분이 수도권에 몰려 있는 상황. 우리나라의 수도권 집중화 현상은 갈수록 심화되고 수도권과 비수도권, 지방의 양극화는 더 심해질 전망이다. 지방소멸이 현실이 되고 있다. 농촌과 중소도시의 인구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으며, 고령화와 저출생, 청년층의 수도권 집중이라는 삼중고가 겹쳐 지역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하고 있다. 상주시도 이러한 인구 구조의 변화와 그에 따른 지역 소멸위기에 봉착해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해법은 멀리 있지 않다. 가장 실효성 있는 해결책은 지역을 가장 잘 아는 주민이 마을 문제를 스스로 진단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며 직접 실행해보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마을리빙랩(Living Lab)’이 주목받고 있다. 리빙랩은 ‘생활 속 실험실’이라는 의미처럼, 마을 현장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를 주민 스스로 발굴하고 해결 방안을 제시해 마을 자생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상주시는 기존의 행정주도형 개발 사업과는 다른, 주민이 주도하는 리빙랩 방식을 통해 마을의 기능을 회복하고 공동체를 되살리는 실험에 나서고 있다. 상주시는 지방소멸대응기금을 활용하여 ‘주민주도형 마을리빙랩 사업을 본격 추진하고 있다. 2024년 4월부터 2025년 3월까지는 마을의 문제를 발굴하고, 해결책을 마련하여 자신만의 리빙랩 운영 매뉴얼을 만들 수 있도록 4단계 집중 교육을 실시했다. 1단계 교육은 인구감소 및 지방소멸문제 대응, 2단계는 주민 및 지역 역량 강화, 3단계는 생활인구 확보 방안 모색, 4단계는 사업 구체화 및 경영 전략 수립 순으로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외부 전문가들의 멘토링과 성과관리 기법, 타 지역 우수 사례 견학, 해외 마을재생 사례 탐방 등 현장 밀착형 학습도 병행했다. 올해 4월부터는 수료한 교육내용을 바탕으로 각 마을에서 본격적인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오는 9월에는 ‘ESG 전문가 자격증 취득 과정’과 연계하여 지속 가능한 마을 공동체 운영을 위한 전문성도 확보할 예정이다. 교육을 마친 16팀(32명)의 마을활동가들은 각 마을의 사업계획서를 발표하고 상주시는 이를 면밀히 심사했다. 10개 마을에는 각 2천만 원, 6개 마을에는 각 1천만 원의 사업비를 지원해 본격적인 마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사업 내용은 공동체 공간 조성, 마을 경관 개선을 통한 관광상품 개발, 돌봄경제구축 등 다양하며, 모두 마을 주민의 실제 수요와 의견을 반영한 결과이다. 한 사례로 지난 4월 18일 상주시 마을리빙랩 연구진과 마을 주민은 상주시 지천동 일원에서 현장탐방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마을 현장탐방은 본격적인 마을 사업을 추진하면서, 매주 각 마을 탐방을 통해 그 마을의 사업 구상을 공유하고 그 사업의 실현 가능성 여부를 토의하는 것이다. 이날 현장탐방은 상주시 신흥동 2개 팀이 공동으로 진행했으며, 1부는 지천동 마을투어, 2부는 용흥사 역사문화탐방 순으로 이루어졌다. 신흥동 마을 리빙랩 사업의 주제는 ‘주민 참여형 조형물 제작을 통한 공동체 활성화’ 및 ‘휴식과 건강이 살아 숨 쉬는 담쟁이 마을 조성’이다. 갑장산과 용흥사, 질병을 낫게 한다는 계곡 질구내를 연계하여 관광인구를 유입하고 예술마을로의 브랜드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 마을 입구 솔밭에 조형물을 설치하고, 기와돌담 포토존을 조성하여 마을 경관 조성에 본격 착수했다. 이렇듯 마을리빙랩은 마을리더 및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마을 공동체 활성화는 물론 농촌 소멸위기 해소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정은 주민이 직접 기획하고, 실행하며, 스스로 평가한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행정은 조력자로서 지원에 집중하고, 주민이 변화를 이끄는 주체가 되는 구조이다. 이는 단기 성과에 그치지 않고, 장기적으로 마을의 자생력 확보와 정주 여건 개선, 더 나아가 관계인구 유입의 기반 마련으로 이어질 것이다. 상주시는 앞으로도 ‘상주형 마을리빙랩’ 모델을 지속적으로 확산해 나갈 계획이다. 지역 곳곳에 주민참여 기반의 사회문제 해결 생태계를 구축하고, 마을순환 경제체제를 정착시켜 인구 10만 회복이라는 목표에 다가설 것이다. 지역을 바꾸는 힘은 바로 주민에게 있다. 행정이 기획한 정책보다 더 강력한 것은, 마을을 사랑하는 주민의 손으로 시작된 변화이다. 상주시의 마을리빙랩 실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 중이며, 그 성과는 마을마다, 사람마다 다른 방식으로 피어나고 있다.

2025-04-27

전통주 찬가

안동 임청각(臨淸閣)은 일제강점기 이전의 모습으로 복원 및 정비하기 위한 종합계획이 2025년까지 완료될 예정이다. 문화재청, 경상북도, 안동시는 중앙선 철로 개설로 훼손되기 이전의 임청각과 그 주변을 옛 모습에 가깝게 복원 정비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를 위해 1763년 허주 이종악이 발간한 문집 ‘허주유고’ 속 그림인 ‘호해람’, 1940년을 전후하여 촬영된 사진과 지적도 등 고증이 가능한 자료를 근거로 계획을 마련했다. 임청각은 단순한 99칸짜리 민가가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합의로 추대된 민족의 지도자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집을 내놓았던 애환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9명의 독립투사를 배출한 역사적 장소다. 이러한 이유로 임청각의 복원은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상룡 선생은 고성 이씨 집안 출신으로, 최근 안동 고성 이씨 가문에서 ‘음식절조’(飮食節造)라는 귀중한 책이 발견되었다. 이 책에는 다른 옛 조리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술 제조법이 포함되어 있어 주목을 받았다. 특히 향온주, 하일주, 보리청주, 자하주(紫霞酒) 등 다양한 전통주 제조법이 기록되어 있어 앞으로 고성 이씨 가문의 전통주가 새롭게 조명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자하주는 한 번 마시면 몇 달 동안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다는 신선의 술로, 유하주(流霞酒)라고도 불린다. 이 술은 신선이 마시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전북 무주의 한풍루라는 전각에서 처음 접했다. 그런데 이 술이 안동에서도 빚어졌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그런데 자료를 뒤지다보니 김만중의 ‘구운몽’에도 자하주가 나오고 작자미상의 한문소설 ‘운영전’에서도 자하주가 나온다. 그럼 남해에도 자하주를 마셨다는 이야기가 된다. ‘춘향전’을 보면 월매가 춘향과 이도령을 엮으려고 술상을 보는데 여기에 나오는 술 이름을 보면 자하주가 나온다. 춘향전의 고향은 남원인데 남원에서도 자하주가 빚어진 모양이다. 대한민국 온 산천에 산신이 산다고 하니 산신이 곧 신선이라 보면 이 나라 삼천리강산 곳곳에 자하주가 있다 해도 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조선 시대 성리학의 대표적인 인물인 일두 정여창과 옥계 노진을 배출한 함양 개평마을에 들렀다. 한국에서 내노라하는 양반들도 명함 꺼내놓기 힘들었다는 이 마을을 ‘좌 안동, 우 함양’이라 불릴 만큼 지위가 높았었다. 개평마을에 와서 ‘솔송주’를 한 병 샀다. 일두 선생의 16대손 며느리 박흥선이 빚는다는 전통주라고 한다. 사실 솔송주 역시 여러 군데서 만들고 있는 술이지만 그 집안의 독특한 비법이 어떤 맛을 만들어내는가가 중요하기에 호기심 반으로 호기를 부렸다. 당시 일두 선생은 술을 마시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는 걸 보아 선생 시절에 만들어진 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지만 별로 따질 생각은 없다. 지방마다 특색있는 술맛을 맛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충남 서천군 한산의 ‘한산 소곡주’, 평안도 전통 주 ‘문배주’ 충남 면천의 ‘두견주’, 경주 교동 최씨가의 ‘법주’ 등고 같이 또 다른 전통주를 기대해 본다.

2025-04-24

‘탄소중립 교실’

요즘 대구광역시 교육청을 중심으로 ‘탄소중립 교실’을 조성하려는 노력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탄소중립 교실’이란 학교에서 탄소 배출을 최소화하고, 남은 탄소는 흡수하거나 상쇄하여 순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친환경적 학습공간을 말한다. 학생들은 일상 속에서 에너지 절약, 나무 심기 같은 탄소흡수 활동을 직접 실천하며 배우게 된다. 현재의 기후 위기는 미래 세대, 즉 지금의 학생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칠 문제이다. 따라서 학교는 이런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핵심 역량을 기르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대구경북 지역의 현장을 살펴보면, 아직 ‘탄소중립 교실’ 운영은 일부 학교에 국한되어 있고, 체계적인 지원이나 확산 전략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제는 모든 학교가 일상 교육 속에서 탄소중립을 자연스럽게 실천할 수 있도록, 보다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탄소중립 교실’을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이론 교육을 넘어, 학생 참여 중심의 체험형·프로젝트형 프로그램이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학교 내 에너지 사용량을 조사해 절감 방안을 제시하거나, 텃밭을 가꾸며 탄소흡수 활동을 실천하는 프로젝트 등이 있다. 이 과정에서 학생 자치회가 중심이 되어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행하며, 결과를 공유하는 방식은 자발성과 책임감을 높이는 좋은 방법이다. 실제로 일부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스스로 ‘탄소중립 주간’을 기획해, 교내 플로깅(plogging) 캠페인, 제로웨이스트 급식 주간을 운영하기도 한다. 또한 교과 수업과 비교과 활동을 통합하여, 과학 시간에는 기후변화를 배우고, 국어 시간에는 탄소중립 실천 일기를 쓰는 식으로 다양한 교과목과 연계하는 전략도 중요하다. 이렇게 하면 ‘탄소중립 교실’은 학생들의 생활 깊숙이 스며들어 자연스러운 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다. 대구시교육청은 ‘생태전환교육 실천학교’를 중심으로 ‘탄소중립 교실’을 확산시키려는 정책을 추진 중이다. 이러한 정책과 ‘탄소중립 교실’ 운영을 효과적으로 연계하려면 몇 가지 전략이 필요하다. 우선 탄소중립 학생위원회, 생태 리더 양성 과정 등 학생 주도 프로그램을 강화해 학생들이 스스로 변화를 이끄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학교장 리더십을 키워 학교장이 ‘탄소중립 교실’ 운영을 학교경영의 핵심과제로 삼고, 교사와 학생들을 적극 지원하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교내 탄소중립위원회를 공식적으로 운영하거나, 교직원 워크숍을 통해 기후 위기 대응 역량을 강화하는 방법 등이 있다. ‘탄소중립 교실’은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학교 문화를 바꾸고 지역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작은 씨앗이다. 대구경북은 ‘탄소중립 교실 실행 가이드’를 마련하고, 학교별 성공 사례를 브랜드화하여 전국적인 모델로 확산시켜야 한다. 처음은 소박할 수 있지만 한 학급에서 시작한 작은 실천이 교내로, 지역사회로 퍼져나갈 수 있다. 학생이 주도하는 작은 변화가 쌓이면, 학교 전체가, 나아가 지역사회 전체가 탄소중립 문화로 바뀌게 된다. 이제 대구경북은 ‘학생이 바꾸는 탄소중립 학교문화’를 선도하는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 그 출발점이 바로, 오늘 우리가 만드는 ‘탄소중립 교실’이다.

2025-04-24

경주APEC에 바라는 것들

2025년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는 미·일·러·중 세계4강을 비롯해 태평양 연안의 21개국 정상·관료·언론인 등 2만여 명 이상이 역사와 문화의 도시 경주를 방문하는 대규모 국제행사다. 2005년 부산 개최 후 20년 만에 열리는 국제행사를 통해 대한민국의 역사 문화와 전통을 소개하고 선진국과는 협력을, 개발도상국에는 한국의 경제 기적을 공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이번 APEC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계절인 한국의 가을에, 가장 한국적인 도시 경주에서 열린다. 25만 경주시민과 220만 경북도민의 뜨거운 지지와 성원 속에 한마음 한뜻으로 착착 준비되고 있다. 지난 전북 잼버리 대회는 준비와 전략 부족으로 어이없이 실패하였다. 경주는 예방주사를 미리 맞은 셈이다. 한국은 올림픽·월드컵에서 보듯 국제행사에 매우 강한 나라이다. 손님맞이에 최선을 다하며, 행사 관계자들도 주인의식을 가지고 혼신과 열정을 다 바친다. 경주는 내심 이번 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글로벌 100대 관광도시’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요즘 잘 먹히는 마케팅 전략은 ’내가 가진 것과 잘하는 것을 세상이 원하게 하라!’ 다. 산라인의 가장 뛰어난 특질은 무엇일까? 신라가 삼국통일을 달성하게 된 배경에는, 경주의 3대 정신인 ‘개방성·포용성·진취성’이 있었다. 8세기 신라의 수도 경주는 4대 국제도시였다. 7세기에 해양부를 만든 황금의 나라가 신라다. 신라시대부터 경주는 늘 국제사회에 열려 있었으며, 백제 유민을 포함한 외국인까지 모두 받아들이는 포용성을 가졌었다. 화랑도들은 진취적 기상 화신이었다. 88올림픽은 행사의 준비도 탁월했지만 화룡점정은 이어령·표재순 콤비가 엮은 개막식의 연출 능력, 정적 속에 울려 퍼진 다듬이 소리와 굴렁쇠를 굴린 소년의 등장이었다. 치밀하게 준비되고 있는 경주APEC에 몇 아이디어를 보탠다. 첫째, 행사장을 비롯한 경주 시내 전체를 꽃향기가 진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국화가 좋겠다. 경주시 농업기술센터와 원예 농가들이 여름부터 준비하면 된다. 아파트 베란다도 국화로 장식하면 경주는 꽃의 도시로 기억될 것이다. 둘째, 행사 기간 중에는 되도록 시민들이 한복을 입었으면 좋겠다. 한복을 입은 시민들 모습은 사진에 담고 싶게 경이롭다. 셋째, 전국 ‘플래시 몹(群舞와 합창)’ 경연대회를 개최하는 것이다. 대학응원단을 비롯한 전국의 합창단·무용단이 누구든지 참가할 수 있다. 16강전부터는 경주 도심지에서 개최하여 도시 전체가 흥겨운 축제 무드에 휩싸이게 하여야 한다. 넷째, 모든 참가자와 시민이 참여하는 야외음악회를 개최하자. 한국 남녀성악가 1인씩 포함하여 참가국가의 3테너 신성과 3소프라노 신성의 6인 음악회를 열자. 앞으로 세계무대를 주름잡을 성악가를 등장시키자. 또 한국의 세계적 명성의 청춘남성 피아니스트가 달빛 아래에서 합주하여 감동의 무대를 연출하자. 다섯째, 음식은 김치세계화 전략으로 백김치와 동치미(신건지)를 맛보이며 ‘한국의 불가리스’로 홍보하고 세계인을 건강하게 하자. 경주 빵·경주 떡 한 쌍 포장하여 사가게 하자. 여섯째, 경주는 원자력 도시이다. 가난과 에너지 획득은 환경의 최고 적이다. 열대우림과 맹그로브 숲 등 지구 환경보전과 가난 탈출을 위해 원자력이 최고의 선물임을 홍보하는 장으로 삼자.

2025-04-24

임시공휴일 논란

국가가 특별한 행사가 발생해 지정하는 임시공휴일은 나라에 따라 다양한 이유들이 존재한다. 개발도상국 중에는 올림픽에서 첫 금메달을 딴 기념으로 공휴일을 지정한 사례도 있다. 아프리카 대륙 서단에 위치한 세네갈은 2002년 월드컵 개막전에서 프랑스를 격침하자 이날을 임시공휴일로 정했다. 월드컵에 처음 출전한 세네갈이 월드컵 챔피언 국가인 프랑스를 격파한 대이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네갈은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은 역사적 배경이 있어 임시공휴일 지정이 특별한 이유가 됐다고 한다. 정부가 5월 2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할 것인가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쏠렸다. 현재로선 공휴일 지정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전해진다. 5월 1일이 근로자의 날이고, 5월 5일 어린이 날이 석가탄신일과 겹쳐 6일이 대체 공휴일이 된다. 2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면 최장 6일을 쉴 수 있는 황금연휴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정부는 임시공휴일 지정에 난색이다. 공휴일 지정으로 내수경기 활성화가 일어나야 하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지난 1월 설날을 앞두고 정부가 임시공휴일을 지정했지만 연휴기간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빠져나가 내수진작 효과가 없었다는 것. 게다가 6월 3일 대통령 선거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해야 하는 부담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네티즌의 반응은 다양했다. 직장인은 공휴일 지정을 기다리는 눈치인 반면 자영업자들은 영업에 악영향을 우려, 반대하는 눈치다. 일부 네티즌은 “또 쉬나” “공휴일이 많아 돈 나갈 곳이 많다”는 반응도 보였다. 국내 경제 사정이 최악인 상황이어서 기업들의 생산성도 고려해야 하는 시기다. 정부의 현명한 판단이 필요하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4-24

글 읽을 줄 아시죠?

OECD가 ‘성인 인지능력(Survey of Adult Skills)’을 조사해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오늘날 어른들이 겪고 있는 인지능력의 변화가 흥미롭다. AI와 디지털의 변화가 눈부신 가운데, 세계적으로 문해력, 산술력과 문제해결능력 등이 전반적으로 하락하고 있으며 특히 한국인들의 문해력 저하는 더욱 두드러진다. 어찌된 일일까? 문해력이 내려간다는 것은 단순히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게 아니다. 표면적으로 읽고 새기는 능력은 유지되고 있지만, 이면의 의미를 이해하고 분석하여 문맥을 파악하며 내용을 자신의 사고로 끌어오는 능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글은 읽지만 생각하지 않는다. 정보는 접하지만 맥락은 사라진다. 기사는 보지만 분석은 하지 않는다. 문제는 역설적으로, 디지털 환경의 급격한 확산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스마트폰과 SNS를 중심으로 한 정보 소비는 빠르고 피상적이며 단편적이다. 이용자는 짧은 문장과 놀라운 이미지, 요약된 해설에 익숙해지고 스크롤과 클릭으로 반복되는 표면적 정보탐색에 길들여진다. 이런 정보환경은 장문의 글을 읽고 천천히 사유하는 능력을 약화시키고 결과적으로 문해력을 감퇴시킨다. 4월 23일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World Book and Copyright Day)’이었다. 책은 여전히 독해와 사유의 공간이며, 문해력의 가장 전통적이며 강력한 훈련 도구다. 독서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행위이며 언어를 통해 구조화된 사고를 익히고 타인의 시선과 저작을 통해 자기 인식을 확장하는 행위다. 독서를 멀리하는 경향은 인간의 사고력과 공감능력을 점차 축소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한국 사회의 문해력 저하는 단지 교육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소통의 위기이며 민주적 판단력과 비판적 사고력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는 경고가 아닌가. 정책과 언론, 여론과 소통의 흐름이 점점 더 자극적이고 단선적이며 감정적인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는 현상은 복합적 맥락을 해석하고 대응하는 능력의 약화를 드러낸다. 가짜뉴스를 솎아내고 의미 있는 콘텐츠를 선별하여 높은 수준의 지적 능력을 길러내는 일도 적적한 문해력이 기초를 잡아주어야 가능하다. 문해력은 개인의 삶을 위한 기술이면서 공동체의 건강성을 지탱하는 집단적 자산이다. 기술 발전이 인간의 지적 능력을 자동으로 향상시킨다는 믿음은 허구다. 오히려 문명을 유지하고 확장해왔던 기본적인 인지기술, 특히 문해력은 더욱 의식적으로 단련하고 보존해야 하는 영역이다. 아인슈타인은 ‘교육의 목적은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지, 사실을 암기하게 하는 게 아니다’라고 하였다. 인간이 장착해야 하는 도구로 생각하는 능력을 꼽은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자칫 느리고 비효율적인 듯 보이지만, 바로 그 ‘느림’은 곧 사유의 깊이와 너비를 의미한다. 세상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생각은 오히려 더 깊고 넓어져야 한다. 그것이 가능한 길은 여전히 책 안에 있다.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은 단지 책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사유하는 인간으로 남기 위한 최소한의 자각을 요구하는 날이다. 글을 읽을 뿐 아니라 독서를 통하여 시민의식을 높이고 시대정신을 꿰뚫는 지혜를 길러야 한다.

2025-04-23

어지럼의 진짜 원인을 찾아서

어지럼증은 매우 다양한 원인과 증상을 가진 흔한 증상 중 하나로 빈혈부터 자율신경계의 불균형, 내이 질환, 경추 이상, 심리적 요인까지 폭넓게 연관될 수 있다. 어지럼은 크게 회전성 어지럼(빙글빙글 도는 느낌), 체위성 어지럼(자세를 바꿀 때 핑 도는 느낌), 실신성 어지럼(깜깜해지며 쓰러질 듯한 느낌), 그리고 균형 장애형 어지럼(한쪽으로 쏠리는 느낌) 등으로 나뉜다. 각각의 어지럼은 그 원인에 따라 접근 방법이 달라야 하며 치료의 핵심은 증상 자체보다 그 배후의 불균형을 바로잡는 데 있다. 최근 많은 연구와 임상 사례에서는 어지럼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자율신경계의 부조화를 꼽는다. 자율신경계는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으로 구성되며 이 둘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혈류, 심박, 혈압, 소화 기능 등 다양한 생리기능이 흐트러지게 된다. 어지럼 역시 이런 불균형의 신호 중 하나로 나타날 수 있다. 특히 현대인들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교감신경 항진 상태는 스트레스, 수면 부족, 경추 긴장 등과 관련되어 있으며 부교감신경의 기능이 저하될 경우 회복력과 안정감이 떨어지면서 어지럼증이 만성화되기 쉽다. 치료는 증상의 완화와 근본 원인의 조절이라는 두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진다. 상부경추 추나는 어지럼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경추의 불균형을 바로잡는 데 효과적인 치료 방법이다. 경추 1번과 2번 사이의 미세한 위치 이상은 척수 신경뿐 아니라 자율신경계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이 부위의 긴장을 풀어주는 추나 요법은 교감신경의 과도한 흥분을 억제하고 부교감신경의 기능 회복을 돕는다. 또한 초음파 가이딩 하에 정밀하게 시술되는 약침 치료는 성상신경절이나 미주신경 부위에 직접적으로 작용하여 자율신경계를 조율할 수 있다. 성상신경은 교감신경계를 대표하는 부위이며 미주신경은 부교감신경계의 핵심으로 이 두 부위를 조절함으로써 어지럼의 근본적 원인인 자율신경 불균형을 치료할 수 있다. 한약 처방은 체질과 증상에 맞추어 자율신경 조절 및 체내 순환 개선을 돕는다. 영계출감탕은 몸이 차고 습담이 많은 사람에게 적합하다. 위장의 기능을 도와주고 수분대사를 개선하여 체내의 불필요한 수분이 뇌에 영향을 주는 것을 막는다. 소시호탕은 스트레스로 인해 화가 차 있을 때 사용하는데 교감신경 항진 상태를 안정시키는 데 효과가 있다. 당귀는 혈을 보하고 순환을 돕는 효능이 있어 혈류가 원활하지 않아 생기는 어지럼증을 개선하는 데 자주 쓰인다. 당귀가 포함된 여러 복합처방은 어지럼증뿐 아니라 동반되는 피로감, 집중력 저하, 두통 등의 증상을 함께 개선할 수 있다. 어지럼은 단순한 증상으로 넘기기보다 자율신경계의 조절과 전신적인 균형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며 이를 위해 한의학적 치료법인 추나, 약침, 한약 요법이 매우 유효하게 활용될 수 있다. 특히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의 균형을 되찾는 것은 단순히 어지럼을 치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반적인 건강 회복과 스트레스 대응 능력 향상, 면역력 강화 등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몸과 마음이 균형을 이루는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 어지럼증 치료의 진정한 목표이며 이 과정에서 한의학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5-04-23

건망증인지 치매인지

지난주 TV에서 치매를 앓는 팔순 노모를 돌보는 갸륵한 딸과 사위의 이야기를 봤다. 예쁜 치매를 앓고 있다고는 하지만 가족들에게는 한없는 희생을 요구하는 할머니가 가엾고 가족들이 안타까웠다. 젊었을 땐 총명했다는데도 치매로 고생하는 그 할머니를 보면서 나의 일이십 년 후를 생각하니 심히 걱정스럽다. 심각한 건망증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기억하는 몇 건의 건망증을 떠올리면 실소를 금치 못한다. 연구실에서 퇴근 준비 중 전화를 받았다. 컴퓨터를 끄고, 가방을 챙기면서도 내내 통화 중이었다. 3층 계단을 내려오면서도, 계단에서 누군가를 만나 목례를 하면서도 주차장에 와서도 계속 통화 중이었다. 차를 타려다가 문득 핸드폰을 챙기지 않았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차에 가방을 던져 놓고 다시 연구실로 뛰다시피 올라갔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 “이 교수님 왜 그렇게 숨차하세요?” “아, 제가 퇴근하려 내려왔더니 핸드폰을 두고 온 것 같아서 다시 연구실로 올라가고 있어요.” “저랑 지금 통화 중이시잖아요...” 며칠 후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동료 교수에게 이 일화를 얘기했다. 치매가 아닌가 걱정이라고 했더니, “지금 젓가락을 들고 계시면서 젓가락을 찾는다면 건망증이요, 그걸로 글씨를 쓰려고 하신다면 치매”라며 안심하라는 동료의 말씀에 안도했다. 잠시 후 식사를 마치고 퇴식구에 식판을 들여놓은 후 컵을 들고 식수대가 아닌 벽걸이 냅킨박스에 갖다대고 있는 나를 보더니 “건망증이 아니라 치매일 것도 같은데요...” 별로 덤벙대는 성격도 아닌데 왜 그런지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메모벽이 생겼다. 연구실 탁상달력에도, 문에도 달력을 걸어두고 이중삼중 메모를 해 두었고, 다이어리에도 메모해 두고 어떤 일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지금은 달력이나 다이어리 대신 핸드폰의 메모장에 거의 모든 것을 항상 메모한다. 약속은 물론,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 장단기 계획 등 모든 것을 메모한다. 달력에도 빠짐없이 기록한다. 빽빽한 달력이 일하는 사람 못지않을 정도다, 이 모든 것은 건망증을 극복하기 위함이다. 그 덕에 약속이나 계획을 놓치는 법은 잘 없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종종 건망증으로 곤욕을 치른다. 곰솥을 불 위에 올려두고 나가 솥도 태워 온 집안을 역한 사골 탄내로 채운 적도 있었다. 어쩌다 휴대폰을 냉동실에 넣었는지 모르겠지만 며칠을 찾은 적도 있었으니 심각한 지경이다. 그래서 내 생활방식을 좀 바꾸기로 했다. 좀 있다가 해야지 생각하면 바로 잊을 것이니 뭐든 생각날 때 바로 실행하기다. 의식의 흐름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침에 일어나서 들기름 한 숟가락 먹기를 잊고 안 먹는다. 참기름을 음식에 넣다가 들기름이 생각나면 바로 냉장고로 가서 꺼내 먹는 식이다. 동선은 꼬이고 일의 맥락은 좀 없어도 덜 놓치게 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도 매일 꼭꼭 챙겨먹지는 못한다. 기름을 쓰지 않을 땐 잊으니까. 휴대폰을 어디에 둔지 몰라 이 방 저 방 헤매고 다니다가 결국 남편에게 전화해 달라고 했더니 식탁 위에 있더라며 가르쳐준다. 이 글을 쓰던 중이었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4-23

따뜻한 말 한 마디의 힘

사람의 언어에는 무게가 있다. 나비처럼 살포시 머무는 말이 있고 바위처럼 묵직하게 가라앉는 말이 있다, 어떤 말은 꽃잎 위에 포근하게 내려앉는 햇살처럼 내 영혼에 조용히 스며들고, 어떤 말은 비에 젖은 흙덩이처럼 묵직하게 내 가슴을 짓누른다. 내가 일상생활에서 주고받는 문장 가운데 좋아하는 언어는 따뜻한 말이다. “괜찮아” “수고했어” “넌 잘하고 있어” 등의 말들은 고단했던 하루에 피로를 풀어주고, 얼어붙은 마음을 조금씩 녹여주기도 한다. 나에게 진심으로 건네는 말 한 마디에 위로를 받고 때로는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런 연유로 나도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을 전해주고 싶다. 그러면 누군가는 마음이 무너지려고 할 때 내가 건넨 말 한 마디에 신명을 느껴 거친 일상을 버텨낼 수 있으리라. 그런데 좋은 뜻으로 전한 나의 위로가 타인에게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얼마 전, 아는 후배를 만났다. 평소에도 말수가 적은 그였는데, 다른 때보다 더 침묵했다. 한참을 가만히 있더니 나에게 말했다. “아들이 대기업에 취업하려고 지원서를 냈는데, 또 떨어졌대요.” 나는 무엇이라도 힘이 되는 말을 전달하고 싶었다. “괜찮아. 다시 도전하면 돼.” 그날 후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며칠 뒤 연락이 왔다. 솔직히 조금 서운했단다. 자기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었단다. 나는 미안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말은 분명 위로였는데, 후배에게는 상처가 되었다니. 다시 도전하면 된다는 말이, 겉으로는 힘을 북돋는 말이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자신의 아픔이 가볍게 여겨진다는 느낌을 받았나 보다. 실패를 마주한 사람에게는 상실의 아픔이 깊고 감당하기 버거웠을 텐데, 나는 그 마음을 보듬어 주지 못했던 것이다. 장자(莊子) ‘지락(至樂)’ 편에 나오는 바닷새 일화가 떠올랐다. 한 마리 바닷새가 노나라 땅에 내려앉았다. 기이하게 여긴 임금은 바닷새를 불러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고, 맛난 고기를 먹이며, 술을 권했다. 그러나 바닷새는 사흘 만에 죽었다. 장자는 말했다. “임금은 새를 기르되 자기를 기르듯 하였다. 새를 기르되 바닷새를 기르는 도리로써 하지 않았다.” 따뜻한 듯 보였으나 실제로 그것은 따뜻한 것이 아니었다. 상대인 바닷새의 방식이 아니라 나인 임금의 방식으로 대접해준 것이 문제였다. 나도 후배에게 ‘노나라 임금이 바닷새 대하듯’ 말했다. 후배가 진정으로 위로 받고자 하는 방식으로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언어는 내뱉는 순간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가슴에 남는다. 선한 의도로 내민 말일지라도, 때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고 싶다. 그러나 따뜻함이 진심이 되려면 먼저 상대의 마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나는 그 진실을 후배와의 대화를 통해 배웠다. 말이 위로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아니라 듣는 사람의 마음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 앞으로 나에게 자신의 답답함을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래, 속상했겠다”라고 건네야지. 내가 전해준 말이 특별한 말이 아니더라도, 마치 나뭇결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같기를 나는 소망한다. 그러면 그 말이 머물렀던 자리에 한동안 훈훈한 기운이 고여 있을 것이라 나는 믿는다. 따뜻한 말은 사람 사이를 잇는 다리다. 당신의 슬픔을 다 알 수 없지만, 곁에 머물고 싶다는 뜻의 조심스러운 접근이다. “많이 힘들었구나”라는 말은 당신이 아픈 것을 안다는 공감이고, “잘 견뎌줘서 고마워”는 당신 존재 자체를 존중한다는 고백일 것이다. 언어에도 진심이 담기면 잔잔한 물결이 되어 상대의 가슴에 퍼진다. 심장을 조용히 두드리는 은빛 종소리 같은 다정한 말은 상대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 감정의 온도를 높여준다. 그러면 말의 온기는 추억 속에서 행복의 편린으로 오래도록 남을 수 있으리라.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를 건네고 싶은, 화창한 봄날 오후다.

2025-04-23

오래 기억될 프란치스코 교황

드물고 희귀한 사례다. 가톨릭 266대 교황 프란치스코(본명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가 지난 21일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가톨릭교도가 슬퍼하는 건 당연하다. 헌데,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종교와는 무관하게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애도를 표하고 있는 상황. 심지어 무신론자까지 추모 대열에 합류하고 있는 형국이다. 왜일까? 이유가 있다. 프란치스코는 일생 내내 ‘거리를 떠도는 빈곤한 자들의 아버지’ ‘권위를 내려놓은 친구 같은 성직자’로 불렸다. 젊었을 땐 낡은 신부복을 입고 가난한 마을을 찾아가 병든 아이들을 끌어안으며 그들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빌었고, 교황이 된 후에는 일흔을 넘긴 노구를 이끌고 전쟁과 불화를 겪는 세계 곳곳을 찾아다니며 화해와 상생의 메시지를 전했다. 피격의 위험성이 상존했음에도 방탄복 입는 걸 거부했다니, 그의 믿음과 용기는 공포를 뛰어넘은 차원의 것이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가지기 힘든 태도다. 한국의 세월호 유가족들은 아직 기억하고 있을 터. “고통 받는 사람들 앞에서 정치적 중립을 말할 수 없다”는 프란치스코의 따스했던 위로를. 이미 세상에 잘 알려진 그의 검약과 소박함, 사회적 소수자와 핍박당하는 이들을 향한 긍휼의 눈길은 재론할 필요도 없을 테고. 밑창이 닳은 구두를 신고 금이 아닌 쇠로 만든 십자가를 목에 건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 발코니에 나타나던 순간을 오래 기억할 가톨릭교도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의 온화하고 선량한 미소는 더 많은 이들이 쉽게 잊지 못할 듯하다. 무신론자인 기자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