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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CES 2024

우정구 논설위원 세계 최대 가전정보기술 전시회인 CES 2024가 이달 9∼12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다. 미국소비자기술협회(CTA)가 주관하는 CES는 1967년 뉴욕에서 처음 개최된 이후 성장을 거듭해 지금은 가전전시회의 세계 최고봉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올해 전시회에는 150개 국가에서 3천500개 기업이 참가할 것으로 알려져 있고, 참관객만 13만명이 넘을 것으로 주최측은 예상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1만5천명의 재계 및 정관계 인사들이 이곳을 방문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전통가전 기업뿐 아니라 포스코, SK, 롯데 등의 대기업과 전국의 중소기업에서도 많은 이들이 신기술 구경과 비즈니스를 위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CES는 처음에는 가전전시회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자동차쇼와 뷰티, 푸드쇼까지 그 영역이 확대됐다. 급변하는 첨단 신기술의 경연장답게 각국 기업들이 내놓은 신제품들이 요란스럽게 눈길을 끈다.대구와 경북에서도 60여 개 기업들이 참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ABB(인공지능,빅데이터,블록체인)와 정보통신기술, 로봇, 디지털 헬스케어 등 다양한 업종의 기업들이 CES에 도전장을 내밀었다.그 중 13개 기업은 CES 혁신상을 수상하는 영광까지 안았다고 한다. 혁신상은 주최사인 CTA가 전시회 개최 전 기술성, 심미성, 혁신성 등을 평가해 우수제품과 신기술에 주는 상이다. 상을 받은 기업들은 이를 활용, 세계를 상대로 마케팅에 나선다.세계는 신기술혁신 등을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가고 있다. 지역에서도 CES에 참여하는 용기있는 기업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4-01-04

TK 의원들 뭣하나?

홍석봉 대구지사장 달빛철도가 지나갈 영·호남 14개 지방자치단체장이 ‘달빛철도 특별법’의 국회 통과를 촉구하는 공동 건의서를 국회의장과 261명의 국회의원에게 전달했다.특별법은 지난해 말 국회 국토교통위원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법제사법위원회와 본회의 상정도 못 하고 해를 넘겼다. 특별법은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와 국가의 행정·재정적 지원 등이 담겼다. ‘선거용 포퓰리즘’이라는 일부 주장과 기획재정부의 ‘예타제도 무력화’ 논리에 밀렸다. 동서화합의 상징이자 지방소멸 위기 극복, 수도권 과밀화 해소, 국토균형발전, 국가경쟁력 향상 등 건설 필요성과 당위성은 차고 넘쳤다. 하지만, 모두 허사였다.달빛철도 특별법은 근시안적인 경제논리와 수도권 일극주의의 족쇄를 끊고 영호남 30년 숙원사업을 성사시키는 입법이었다. 국회의원 261명이 공동발의했다. 헌정 사상 최다였다. 하지만, 이름뿐이었다. 최종 문턱에서 좌절됐다. 영·호남 국회의원 공동 책임이다. 필요성을 인정했다면 소신을 다해 통과시켜야 했다. 정쟁을 벌일 때면 죽기 살기로 덤비던 의원들이다. 정치생명이라도 걸어야 했다. 하지만, 무기력했고 무능했다. 정치력의 한계였다.국민의힘이 22대 총선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TK(대구·경북)를 비롯한 영남권이 물갈이 표적이 됐다. 지역 의원들은 전전긍긍이다. 초·재선들의 대거 탈락이 예고됐다.지역 의원들에 대한 의정 활동 평가는 부정이 주류다. 전문성을 살리지 못했다. 공천에만 목을 맸다. 주목받는 대야(對野) 활동도 없다. 나경원 전 의원의 당대표 출마를 막는 행동대가 됐다. 김기현 전 대표의 방패막이가 됐다. 당 지도부의 눈치만 살핀다는 비판이 나왔다. 오죽했으면 홍준표 대구시장이 “황교안에 붙었다가 김기현에 붙었다가, 이젠 한동훈에 붙어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는 군상들”이라고 통렬하게 비난했겠나.초·재선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역 국회의원 누구도 의정 활동을 좋게 평가받지 못한다. 50% 이상 물갈이 주장이 공공연히 나오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도 물갈이 여론이 50%를 넘는 판국이다.홍 시장은 “재산형성 경위도 소명 못하는 사람, 그냥 무늬만 국회의원인 무능한 사람,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존재감 제로인 사람, 비리에 연루되어 4년 내내 구설수에 찌든 사람, 이리저리 줄 찾아다니며 4년 보낸 사람, 지역행사에만 다니면서 지방의원 흉내나 내는 사람 등 이런 사람들이 가득하다”고 지역 의원들을 꼬집으며 ‘놈놈놈’ 식으로 구체적으로 거명했다.그의 언급이 정답일 수는 없다. 하지만,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밥값을 하지 못하는 의원들은 이참에 모두 퇴출해야 한다는 공감대는 형성되고 있다. 존재감 없는 선량은 필요 없다. 적어도 지역과 나라를 위해 몸을 불사를 수 있는 사람을 공천해야 한다.용산의 불통, 검사 일색의 인사와 가족의 처신을 질타할 수 있는 의원도 나와야 한다. 그런 국회의원을 보고 싶다. 달빛철도 특별법의 법사위와 본회의를 통과를 온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 이번엔 제 몫을 하길 바란다.

2024-01-04

손녀와의 소꿉놀이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린이는 할머니 집에서 잘래 하면서 집에 가기 싫다고 하는 손녀다. 나도 바라는 바이긴 하지만 평소 바쁜 아이들의 일상 때문에 쉽지 않다. 아침에 유치원에 갔다 오후에 학원에서 피아노며 미술을 배운다. 저녁에 두 손주를 데리고 집에 와서 저녁밥을 해 먹이면 아빠엄마가 퇴근 후 데리고 간다. 숙제도 있을 테고 씻고 잠자기에도 여력이 없다. 여간 빡빡한 게 아니다. 주말엔 저희 4가족이 완전체로 살아야 할 거라 싶어 서로 연락하지 않는다. 며칠전 모처럼 집에 데려와 잤다. 유치원 방학 덕분이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만나지만 같이 자는 건 오랜만이다. 책도 읽고 수다도 떨며 기분좋게 잠들었는데 밤에 기침을 좀 하더니 목이 간지럽단다. 저희 집보다 다소 추운 집 탓인가 걱정스럽다. 오랜만에 같이 잘 수 있어서 좋았는데 아프면 어쩌나 신경이 쓰였다. 병원에 갈래? 좋단다. 손녀는 병원에 가는 걸 좋아한다. 그 이유를 잘 안다. 어릴 땐 막대사탕 얻는 재미였다. 울며 진료실을 나오면서도 사탕을 챙겨 쥐었다. 그러나 이젠 간호사가 줘도 사탕은 받지 않는다. 대신 약국에 들어가면 눈이 반짝인다. 장난감코너에 몸과 눈이 먼저 간다. 아빠엄마는 턱도 없을 걸, 할머니와 할아버진 뭐든 잘 사준다는 걸 잘 안다. 그깟 5천원 남짓의 것, 두말 않고 사주니 병원길은 장난감 사러 가는 길인 셈이다. 작은 소꿉놀이세트를 골라 계산대에 올린다. 할머니랑 소꿉놀이 하고 싶어.포장을 여니 투명 원형 통 속에 다소 조악하고 작은 동물인형이 다섯 개 들어있다. 제 눈엔 예쁜가 보다. 할머닌 뭐가 이뻐? 선심쓰듯 날 보고 하나를 고르란다. 그건 할머니, 그리고 나머진 각각 아빠, 엄마, 오빠, 이모라 하기로 한다. 유성펜으로 인형 밑에 제가 이르는 대로 적었다. 원형통도 버리는 게 아니었다. 각각 밥, 국물, 반찬, 죽이란다. 또 적었다. 포장지도 쓸모가 있었다. 침대와 아기침대로 정했다. 그 역시 글씨로 적었다. 헷갈리지 않아야지 싶었다. 밥도 먹이고 잠도 재우면서 같이 웃으며 얘기하고 떠들었다. 빈 종이상자를 주니 놀이터를 만든다. 펜으로 화장실과 출입문과 미끄럼대를 그린다. 교실도 만든다. 창문을 그리고 책상 몇 개와 사물함과, 꽃도 군데군데 그렸다. 인형들을 데리고 놀이터도 갔다가 교실에 가서 공부도 했다. 그리고 돌아와 밥 먹이고 잠을 재웠다.이튿날 눈 뜨자마자 또 놀잔다. 밥 먹을까 하면서 밥, 죽, 국물을 챙겼더니 오늘은 수영장에 놀러간단다. 수영장 그릴 빈 상자를 주어야 하나. 그런데 놀이터가 수영장이란다. 밥, 국물, 죽, 반찬이라고 쓴 원형통은 보트이자 튜브고, 침대는 수영장의 코치가 앉는 곳이란다. 아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잘못한 것을. 난 한 번 정한 역할과 구실과 장소와 용도는 고정된 것이라 생각했고. 펜으로 적었더니 아니었다. 린이의 상상 속에서는 작은 원통은 때론 그릇이고 때론 보트다. 상상의 공간에서는 놀이터가 호수로, 교실이 운동장이 될 수도 있음을 난 몰랐다. 그러고 보니 어제 교실에서 공부하고 놀이터에서 논 건 가족이 아니라 모두 친구들이었구나. 소꿉놀이는 그렇게 하는 거였다. 내가 틀렸고 손녀가 옳았다.

2024-01-03

작심삼일 퇴치법

이규석 수필가 새해 아침, 동해에서 힘차게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저마다의 소원을 빌었다. 하지만 바닷가에 쌓은 모래성이 밀려온 바닷물에 스러지듯이 꿈은 사흘을 못 견디고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재일교포 3세의 한 청년은 가난했지만 꿈은 야무졌다. “이십 대에 사업을 일으켜 이름을 떨치고, 삼십 대에 천억 엔의 자산가가 되고, 사십 대에는 대기업가가 되며, 오십 대에는 비즈니스로 온 세상을 연결하고, 육십 대엔 후진에게 기업을 물려주겠소. 그리고 우리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명승지 곳곳에 별장을 지어서 아름다운 인생을 노래하며 삽시다. 나와 결혼해 주세요.” 지금은 일본에서 일등 부자가 된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이 대학생이었을 때, 사랑하는 여학생 앞에서 밝힌 꿈이었다.꿈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하늘의 별을 따겠다는 허황한 것이 아니라 실현가능해야 하며,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낼지도 분명해야 한다. 그는 사업을 시작한 첫 날 사과 상자 위에 올라가 서너 명의 직원들 앞에서 자신의 꿈을 이미 이룬 것처럼 연설했다고 한다. 지금 그는 삼백 개가 넘는 기업을 거느리고 있다.바보들은 결심만 한다. 오징어 물 맹세란 말이 있다. 실행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의 하나 마나 한 맹세를 두고 한 말이다. 새해 첫날에는 멋진 꿈을 세우지만 꿈은 사흘을 못 버티고,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며 쓴웃음을 짓는 사람들이 많다.‘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조지 버나드쇼의 묘비명 앞에서 해마다 무릎을 치지 않으려면 어슴푸레한 희망사항이 아니라 야무진 꿈이어야 한다.“발레든 공부든 벼락치기는 안 통한다. 나는 나 자신과 경쟁했고, 매일 조금씩 발전하는데 재미를 느꼈다. 힘들게 살지 않으면 기쁠 때 얼마나 기쁜지를 모른다. 인생의 내리막을 만나서는 울면서 다시 시작하기도 했다. 동료들은 나를 기계라 부르지만 쉬는 것은 나중에 무덤에 가서 쉴 수 있잖은가. 나는 조금씩 전진하는 기쁨에 나이 드는 게 좋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이 젊은이들에게 들려준 말이다. 공연을 위한 그녀의 성장한 모습은 화려의 극치이지만, 모진 연습 때문에 으깨진 발은 흉물스럽기 짝이 없었다. 집중과 단련의 달인, 강수진은 기어이 국립발레단장이 되었다.옛날 한 젊은이가 언덕을 오르다가, ‘이곳에서 넘어지면 3년 밖에 살지 못함. 조심하시오.’라는 푯말을 보았다. 겁을 먹은 청년은 너무 조심한 나머지 작은 돌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청년은 땅을 치며 통곡했다.“젊은이, 왜 그리 슬피 우는가?” 그의 곁을 지나던 노인이 물었다.“이 글을 보십시오. 저는 장가도 못 가보고 이제 곧 죽게 되었습니다.”“뭔 걱정인가, 서른 번만 넘어져 보게 젊은이, 백년도 넘어 살겠구먼,”우리도 작심삼일이라는 고약한 버릇을 고치려면 사흘마다 계획을 세워야 할까? 반드시 이루어야 할 꿈이라면 어찌 사흘 만에 무너질 수 있겠는가. 내가 꿈을 향해 달려가면 꿈도 내게 달려온다고 했다. 목표는 글로 써놓고, 이미 이룬 것처럼 상상하면서 매일 말하고 다니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했다.

2024-01-03

말 없는 말

피귀자 수필가 아삭아삭 생오이를 씹는 맛,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하다. 어린이들이 천진스럽게 표현하는 언어들은 싱싱한 야채처럼 달고 신선하다. 게다가 까르르 웃음까지 섞어주면 별처럼 색도 되고 빛도 된다.같은 밤길인데도 그 별빛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달라지듯 같은 말인데도 빛과 색에 따라 달리는 열매가 전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사람의 말마다 내는 빛이 있다. 밝고 맑은 말로 사람을 즐겁게도 하고 어두운 말, 탁한 말로 슬프게도 한다.또 어떤 사람은 눈부신 말로 빛의 샤워처럼 하늘에서 쏟아지는 영적 에너지가 보고 듣는 사람을 압도하고 설득하기도 한다. 서로 다른 나무들이 발갛게 노랗게 한데 어울려 터트리는 단풍들의 합창처럼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어도 시간의 결이 스며든 것처럼 익숙한 사이가 되기도 한다. 오래 간을 맞춘 사이처럼 편안하고 배려하는 말 한 마디에는 가슴이 녹기 때문이다.씨앗이 껍질을 벗어야 파릇한 새싹이 나오듯 친절한 말은 세상을 따뜻하고 평화롭게 만든다. 내가 먼저 친절을 베풀면 내 주변이 따뜻해지리라.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 작은 행동 하나로도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을 판단할 때는 가장 먼저 그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지 살피게 된다. 언어는 영혼, 부모의 영혼이 언어를 통해 아들딸들에게 전해진다. 말을 배울 적에 사랑을 배우면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가까이에 항상 예쁜 말을 쓰는 사람이 있으면 그런 사람과는 자주 대화하고 싶고 자연히 연락도 잦다.‘아’ 다르고 ‘어’ 다르듯 토씨 하나, 점 하나가 뜻을 바꾸는 것이 우리 말 아닌가. 토씨 하나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점을 밖으로 찍으면 ‘나’가 되고, 안으로 찍으면 ‘너’가 되니까. ‘길이 있다’와 ‘길은 있다’도 품은 뜻이 다르듯, 조사 하나로 칭찬의 말이 되기도 하고 조롱의 말이 되기도 하지 않던가. ‘배가 고프냐’에서 ‘가’ 대신 ‘배는’ 이나 ‘배도’를 넣어 억양을 어디에 두느냐를 살펴보면 의미가 극으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평생 우리말과 글을 쓰면서도 토씨 하나를 왜 알맞게 쓰지 못하고 오랫동안 어색하게 잘못 쓰고 있는가.무슨 말을 하고, 또 무엇을 하는지 유심히 보면 그가 타인에게 인색하고 자신에게는 너그러운 사람인지 가늠할 수 있으리라.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인지도 그 사람의 말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시간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말을 지킨다는 뜻이고 말을 행동으로 옮겨 언행일치를 보이는 것. 약속은 그 사람의 삶의 태도뿐만 아니라 믿음과 신용의 수준도 드러내므로. 말로 한 약속을 지키는지 아닌지 하나만 봐도 그의 모든 것을 쉽게 가늠할 수 있는 이유이리라.즐거움도 근육이 필요하듯 입말에도 맛이 있다. 단맛과 쓴맛, 상한 맛과 싱싱한 맛. 오묘하고도 질감 넘치는 언어의 맛에 울고 웃는다. 아프지 않다는 ‘통즉불통’이 소통 감수성에도 적용되는 말 같다. 아무리 찾아봐도 돈 안 들고 힘들이지 않으면서 큰 감동을 줄 수 있는 건 역시 말이 아닌가.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감정들은 말에서 나와 삶의 나침반이 되기도 하니까.말이 통하지 않는 먼 타국에서도 반겨주거나 친절을 베푸는 사람에게 엄지 척과 웃음 한 스푼이면 족하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만국 공통어는 웃음, 말이 필요 없는 아름다운 말임을 여러 곳에서 실감했기 때문이다. 흔히 말은 씨가 된다고 한다. 그 씨라는 말을 화분에 심어 가꾸고 싶다. 물 주고 거름 주며 비바람에 뿌리가 뽑히지 않도록 가꿔 모난 목소리를 깎아내면, 화음을 이루며 살며시 다가와 우리의 뺨을 어루만져주지 않을까.위대한 책은 행간이 넓은 책이라던가. 그런 책은 여백이 있고, 글이 곧 그림 같다는 느낌을 준다. 사람도 나이가 들고 삶의 지혜가 쌓여가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행간이 이윽고 보일 때가 있다. 여백도 생긴다. 새해엔 말에도 행간을 넣고 여백엔 웃음을 버무려 말이 필요 없는 말 웃음으로, 말맛을 차지게 살려봄이 어떨까.

2024-01-03

경칩(驚蟄)과 명리 이야기

24절기 가운데 세 번째 절기가 경칩(驚蟄)이다. 태양의 황경이 345도에 위치하며, 2024년에는 3월 5일(음력 1월25일)이다. 음력으로는 2월의 절기다.만물이 겨울잠에서 기지개를 켜고 깨어난다는 절기가 경칩(驚蟄)이다. 경칩의 한자를 풀이하면 놀랄 경(驚)과 숨을 칩(蟄)이다. 원래는 ‘열다’, ‘일깨우다’는 의미의 계(啓)자를 써서 계칩(啓蟄)이라 했다. 하지만 한무제(漢武帝)의 이름인 계(啓)를 피휘(避諱)하기 위해 놀랄 경(驚)자를 써서 경칩(驚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한서(漢書)에 나온다.전한(前漢)의 회남왕 유안(劉安·기원전 179~122)이 저술한 ‘회남자’ 권5 ‘시칙’에 보면 음력 2월에는 초요(招搖·북두칠성 자루 끝에 있는 별)가 묘(卯) 방향을 가리키고, 방위는 동쪽이고, 수는 8이며, 맛은 신맛이다. 이달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복숭아와 오얏나무에 꽃이 피기 시작하며, 꾀꼬리가 운다.천자는 청양(靑陽)의 태묘(太廟)에서 조회를 하면서 관리를 시켜 가벼운 죄를 지은 자는 방면하게 하고, 죄수의 손발을 묶은 족쇄를 풀어주게 하며, 볼기를 치는 형벌을 사용하지 않게 하고 송사를 금지시켰다. 또한 어린아이를 돌보아 주고, 고아나 자식 없는 노인을 보살핌으로써 ‘구부러진 어린 싹들’이 잘 자라나게 하며, 길일을 택하여 백성이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내게 했다.이 시기에 천둥이 치기 시작하면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이 모두 깨어난다. 동면하던 동물과 곤충들이 슬슬 지상으로 나오기 시작하는 시기다. 겨울의 차가운 기운이 사라지고, 따뜻하고 성장하는 목(木) 기운이 찾아온다. 초목에 싹이 돋아나듯이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고, 동면에서 깨어난다는 부활의 의미가 있다.경칩에는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나 알을 낳는다. 이때 겨우내 추위로 허해진 양기를 보충하고, 허리가 아픈데 좋다고 해서 새 생명인 개구리알을 먹는 풍습이 있다. 그리고 위장병에 효과가 있다고 해서 고로쇠나무에서 나오는 수액을 마셨다. 이 시기의 수액에는 땅의 정기와 봄의 양기가 농축되어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런 관습이 생겼다고 본다. 다시 말해 땅의 정기인 토(土)는 신체에서 위에 해당하므로 위장병에 좋다는 이유에서다.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경칩에 젊은 남녀가 사랑을 고백했다. 은행나무는 암수가 마주봐야 열매를 맺기에 ‘사랑나무’로 불렸다. 가을에 은행을 모아 두었다가 경칩에 사랑의 징표로 주고받았다. 은행은 남녀의 화합을 상징하는 표시다. 지금의 밸런타인데이와 유사한 형태지만 지금은 희미한 기억 속에 남아있을 뿐이다.명리에서 경칩과 춘분은 묘(卯)월에, 음력 2월(양력 3월)에 해당한다. 묘(卯)는 목(木)의 기운이 가장 왕성한 시기다. 묘(卯)는 무성하다. 즉, 양기가 생겨 번성한다는 뜻도 있다. 세시풍속으로 경칩에는 갓 나온 싹을 보호하기 위하여 농사를 짓는 밭에 불을 피우는 것을 금지하였다. 산불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아직 추위가 완전히 물러간 것은 아니어서 꽃샘추위가 찾아오기도 하는 시기다. ‘우수에 풀렸던 대동강이 경칩에 다시 붙는다’거나 ‘정이월에 김칫독이 터진다’는 속담도 있다. 경칩이 우수와 함께 아직은 겨울의 냉한 기운이 남아있지만, 봄으로 가는 절기임을 보여주는 것이다.묘(卯)는 동물로 토끼다. 토끼는 언제나 자신이 만든 길만 다닌다. 외부로부터 침입을 막기 위해 굴을 세 개 판다는 교토삼굴(狡兎三窟)이 있다. 그만큼 치밀하고 명석한 동물이다. 묘시(卯時)는 오전 5시와 7시 사이이므로 출근이나 등교하느라 늘 바쁘게 움직이는 시간대다. 그래서 이때 태어난 사람은 항상 부지런한 성격의 소유자들이다. 류대창명리연구자 하지만 무슨 일이든 시작은 잘하지만 마무리가 약한 것이 흠이다. 유시무종(有時無終)이다. 평소에는 잡생각이 많아 머리가 늘 피곤한 경향을 나타낸다. 변덕이 심하여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논리적이고 수학적이며 호기심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음력 2월 초에는 바람의 신인 영동할미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다가 올라간다. 농촌이나 어촌에서는 바람의 피해를 면하기 위해 풍신제(영등제)를 지냈다. 이를‘바람 올린다’고 한다. 풍신(風神)이자, 농신이므로 이렇게 풍신제를 올리면서 농사의 풍년과 고기잡이 만선을 기원하고, 가정이 무탈하기를 빌었다. 특히 어촌에서는 비바람 때문에 위험한 달이라서 조업을 하지 않았다. 이달에 결혼하면 바람난다는 속설도 있어 피했다.우리 선조들은 이처럼 절기에 맞는 행위를 함으로써 자연에 순응하여 각종 재난을 피하고 풍요를 기원했다. 곡식은 봄에 저절로 싹이 트지만, 반드시 사람의 노력이 있어야 오곡이 성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조들은 오랫동안 자연을 관찰하고 경험하면서 생활의 지혜를 축적했다. 이를 미신이라고 경멸할 수는 없다.

2024-01-03

장송곡 시위의 소음 기준

홍석봉 대구지사장 생활 소음은 갈수록 다양해지고 높아간다. 소음으로 인한 갈등도 커진다. 사람이 참을 수 있는 소음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 국가소음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022년 전국 주요 도시의 연평균 소음도는 61.57~70.57데시벨(㏈)이다. 국내 기준치 55㏈, WHO 권고치 53~54㏈보다 훨씬 높다.UN환경프로그램은 소음을 인류를 위협하는 세 가지 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소음은 건강도 해치고 난청 위험도 높인다. 환경부에 따르면 소음 관련 민원은 2009년 4만2천400건에서 2019년 14만3천181건으로 3배 이상 늘었다. 100㏈이 넘는 확성기 소음은 듣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대구고등법원이 지난 2일 ‘구청 앞에서의 장송곡 시위를 금지해달라’는 대구 서구청의 업무방해금지 가처분 신청에서 구청의 손을 일부 들어줬다. 법원은 집회나 장송곡을 막지 않는 대신 주최 측에 75㏈ 이상의 소음을 내지 말 것을 주문했다. 앞서 지난해 충남 태안 군청 앞의 장송곡 집회·시위에 대해서도 법원이 75㏈(야간 65㏈) 초과 소음 발생 행위를 금지했다. 법원은 지자체의 평온한 업무수행을 방해하고 정당한 권리행사 범위를 벗어났다고 봤다.국내 기준치보다 훨씬 높지만 75㏈은 앞으로 집회·시위의 소음 기준이 될 터이다. 장송곡 시위는 당사자는 물론 주위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소음 뿐만 아니라 장례용 각종 조형물 등도 시민에겐 일종의 테러다. 법원이 일정 지역 내에서 장송곡 재생과 영정 사진 및 장례식용 조형물·근조화 설치를 금지한 태안군 사례를 확대 적용해야 할 것이다.집회·시위를 주최하는 측은 앞으로 좀 더 정당하고 합리적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4-01-03

특별한 기대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새해가 밝았다. 흐린 하늘 탓에 수평선을 박차고 오르는 해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달력은 어김없이 용띠해로 접어들었다. 새날을 맞으며 거는 목표와 다짐이 한가득이지만, 올해는 유난히 사회와 나라에 바라는 바가 먼저 떠오른다. 개인적인 성취와 보람이 벅찰 터이지만, 공동체가 오늘보다 나아지기를 바라는 소망이 있다.먼저, 폭력이 사라져야 한다. 새해를 스산한 칼부림으로 시작하였다. 상상조차 끔찍한 폭력이 자행되는 오늘은 정상이 아니다. 누구를 미워하여 세상이 나아질 수 있을까.생각을 폭력으로 제압할 수 있을까. 남을 해치며 내가 이기는 게임을 오래 할 수 있을까. 칼이든 돌이든 물리적인 수단으로 거두는 성취는 보람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보복이든 반격이든 폭력은 곱절로 번지게 마련이다. 신체적인 위해만 폭력도 아니다. 정신적으로도 얼마든지 괴롭힐 수 있어 마음에 병을 깊게 들게 할 수 있다. 학교폭력이 그렇고 사이버폭력이 그렇고 성폭력도 그렇다. 폭력은 범죄다. 무겁고 가벼운 문제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가 사라져야 한다. 폭력을 물리치는 각성과 다짐을 새로이 하는 사회적인 캠페인이라도 일었으면 한다.새해는 정치판이다. 곳곳에 현수막이며 쉬지도 않고 전화벨이 울린다. 진심인지 빈말인지 헤아리기도 버거운 구호와 외치는 소리가 벌써부터 소란하다. 좋은 정치가 일어나 더 나은 세상이 되어야 하는데, 요란하기만 하고 공허한 세상이 오는 게 아닐까 걱정이 앞선다. 출사표를 던진 이들은 바뀔 것 같지 않으니, 깨끗한 한 표를 지닌 유권자들이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대한민국을 질곡에서 건져낼 사람을 찾아야 한다.거짓과 선동에서 나라를 구해야 하고 폭력과 협박에서 사회를 건져야 한다. 희망과 기대를 다시 찾아야 하고, 상상과 창의를 다시 올려야 한다. 멈춰선 오늘에 시동을 걸 사람을 뽑아야 하고, 어제보다 내일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비난과 욕설에 솔깃하지 말고 비전과 계획을 말하는 사람에 주목해야 한다.새해에는 진짜 문제가 조금씩이라도 풀리는 모습을 만나고 싶다. 정략과 술수로만 시끄러운 정치권은 담론의 주제를 바꾸어야 한다. 공천과 탈당이 문제가 아니라 저출산과 고령화가 진짜 문제다. 당신들 개인 욕심이 문제가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하루하루 민생이 진짜 문제다.정치판의 구도가 문제가 아니라 나라의 경제와 사회의 안녕이 진짜 문제다. 정치인의 이합집산이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안녕과 국토의 수호가 진짜 문제다. 다음세대 교육과 미래는 누가 챙기는가. 지구온난화와 기후문제는 돌아보고 있는가. 미래를 향한 비전과 계획을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고, 해결책의 실마리라도 붙들고 씨름하는 정치를 만나고 싶다. 개인적인 소망도 여러 가닥이지만, 2024년에는 사회적인 진전이 조금씩이라도 꾸준하게 벌어지는 모습을 보았으면 한다. 봄에 있을 총선이 단초가 되어 나라와 사회에 좋은 일이 겹겹이 생기는 새해를 기대하고 기대한다. 2024년, 파이팅!

2024-01-03

삶과 행복경영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아가길 원한다. 2024년 푸른 용의 해 갑진년을 맞이하며 신년운세를 보거나 사주를 보는 사람들이 많은 시기이다. 필자도 신년운세를 보니 ‘새로운 것을 구하고자 하면 능히 구할 수 있으니, 답답해 하지 말고 밖으로 나서라, 금의환향 할 수 있고 문제들이 쉽게 풀릴 수 있다’라니 재미로 보는 것이지만 즐거운 시작이다. 행복은 희망과 마음가짐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것은 여러가지 요건이 있겠지만, 개인의 가치관, 관심사, 사회적 연결, 성취감, 건강 등 다양한 측면에서 행복을 경험 할 수 있다. 행복은 주관적인 경험으로 각자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직장생활하는 사람에서 보면 삶의 시간을 일과 회식까지 연결하면 7할이 소요된다고 한다. 직장생활이 행복하지 않으면 행복한 삶이 어렵다는 것이다. 최근 기업에서는 행복경영이 화두가 되고 있으며 금년부터 ‘행복중시경영’을 선언하는 기업이 많다.기업에서 행복경영은 조직 내에서 직원들의 행복과 만족을 중시하는 접근이다. 행복경영을 실행하기 위한 조건은 다양하겠지만 6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첫째, 의미있는 일이다. 직원들이 자신의 업무가 의미있고 가치있게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안된다면 의견을 수렴하여 제도화하여야 한다. 둘째, 열린 의사 소통이다. 효과적이고 개방적인 의사 소통은 직원들 간의 신뢰를 증진시키며 행복을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셋째, 균형 잡힌 업무와 삶이다. MZ세대가 중심으로 가고 있는 요즘 워라밸이 중요한 요소다. 넷째, 자기계발 기회이다. 직원들에게 꾸준한 학습과 성장의 기회를 제공하여 자기계발을 촉진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장과정의 실적을 인사로 연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다섯째, 공정하고 인증받는 문화이다. 공정한 대우와 성과에 대한 인증은 직원들의 자부심을 증진시키고 행복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여섯째, 리더십의 역할이다. 리더들은 직원들을 지원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필자가 컨설팅 하고 있는 P사의 행복중시경영은, ‘개인의 성장과 행복한 일터’를 만드는 일이다.직원들의 생각과 바람을 파악하고 개인의 성장과 행복한 일터를 위해 2030세대가 직원의 반을 넘어서는 변화된 조직에 맞는 ‘행복경영’을 추구해가는 것이다. 세계 일류기업의 기업문화를 보면, 직원의 성장 비전을 회사가 제시해 주고 도전하면 미래가 보이는 기업이다. 개인의 성장 루트도 직책으로는 한계가 있어 ‘프로인재상’ 등 회사의 특성에 맞는 인재상의 조건에 이르면 성장과 인증하는 기업문화이다. 기업에서 개인의 행복한 삶을 다 만들어 줄 수는 없지만 아침에 눈 뜨면 출근 하고 싶은 직장이 행복한 일터가 아닐까.학습과 기회를 공정하게 주고 실적에 따라 보상을 주는 것이다. 개인화 되어 있는 MZ세대 중심조직에서는 기성세대의 팀활동에서 젊은 세대의 개인활동으로 제도적 변화를 모색하려는 것이다.변화된 사회적 가치관과 개인의 삶, 행복한 직장을 열어가는 길은 시대에 맞는 제도와 개인의 생각과 도전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2024-01-02

용이 날고 구름이 일어나듯이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용의 신령스러움 때문인지 2024년 갑진년의 첫 해돋이는 베일에 가려졌다. 부산이나 강릉 등 동해안 일부 지역에서는 구름 사이로 떠오르는 새해의 첫 아침해를 볼 수 있었지만, 영일만과 호미곶 인근 지역에서는 두터운 구름에 가려져 대부분 해맞이를 할 수 없었다. 일출명소에서는 해맞이객을 위한 이벤트를 마련하는 등 모처럼 활기를 띠며 부산한 모습들이었으나, 끝내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없게 되자 서둘러 발길을 돌리거나 아쉬워하는 눈빛이 역력해졌다. 매일같이 뜨는 해지만 새해 첫날에 뜨는 해를 맞이하는 건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산에서의 해맞이 상황도 비슷했다. 필자는 십수년째 새해 첫날 새벽에 포항의 관문격인 형산에 올라 해맞이를 하곤 했었는데, 올해처럼 해를 못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일출을 보러 온 사람들은 해가 떠오르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포항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을 배경삼아 사진을 찍거나 형산갓바위에 불공을 드리는 등으로 새해 새날의 설렘을 누리는 것 같았다. 약간의 아쉬움을 떨쳐버릴 순 없는 것 같았지만, 나름 뜻있고 진지하게 새날을 맞이하고 있었다. 필자 역시 새벽에 일어나 쓴 신년휘호를 산정에서 펼치며 새해의 다짐을 되새겨 보기도 했었다.올해는 갑진년 용의 해에 어울리는 사자성어 ‘용상운기(龍翔雲起)’를 나름대로 선정해 연하장 겸 새해의 바람이나 목표로 삼아 몇가지 서체로 써서 지인 등의 분들에게 나눠줬다. 용이 날고 구름이 일어난다는 뜻의 용상운기는, 전쟁과 대립, 이변 등 격랑의 여울 같은 시대의 소용돌이에 용이 승천하며 빙빙 돌면서 날 때의 힘찬 기운으로 구름이 흩어졌다 모이며 일어나듯이, 매사에 힘차게 용솟음쳐서 어려움을 극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청룡은 힘과 행운, 번영을 상징하기에 총선과 사회전반의 흐름, 북한의 위협적인 태도, 국제적인 정세 등에 용의 기상으로 지혜롭고 꿋꿋하게 헤쳐 나가길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기도 하다.용은 십이지 중 진(辰)은 유일하게 상상 속 동물인 비와 구름을 관장하는 영수(靈獸)로 다산과 농경사회의 중요한 상징으로 여겨왔으며, 황제와 지배층 등 왕실 예복에 용의 문양이 자주 새겨져 위엄과 존엄성을 나타내기도 했었다. 갑진년의 갑(甲)은 천간의 첫번째로 큰 나무(大林木)를 뜻하고 진(辰)은 지지의 다섯번째인 토(土)인데 열두 달 중에 음력 3월에 해당되므로 나뭇잎을 싹 틔우는 희망의 흙을 상징한다고 한다. 따라서 2024년은 ‘큰 나무에 새싹이 돋는 희망을 향한 변화와 변혁의 시기’로 ‘혼란을 극복하며 피어나는 희망의 꽃봉오리’라고 표현할 수 있다.새해 첫날의 잔뜩 낀 구름이 어쩌면 분쟁과 갈등, 혼란과 딜레마를 예고하는 암울함 인듯하지만, 구름 사이로 비치고 나타나는 밝은 햇살이 화합과 재도약을 모색하는 긍정과 희망적인 빛살로 비춰지리라 믿는다. 그래서 국민의 안위가 평온해지고 국운이 번성해지는 시기가 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해본다.

2024-01-02

새해에는 꿈과 희망을

어린 시절, 나는 ‘세일러문’이나 ‘웨딩피치’ 같이 마법 소녀가 등장하는 만화를 좋아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에 정의롭고 강한 힘까지 가지고 있다니. 그야말로 동경할 수밖에 없는 세계가 아닌가.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마트 한복판에 배 깔고 누워 엉엉 울기 신공으로 마법 소녀 변신 장난감을 얻어내는데 성공. 손에 넣은 요술봉을 힘차게 휘두르면서 외쳤다. 악의 무리는 내가 처단한다! 앙큼하게 포즈를 취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여전히 나는 무력한 아이였으니. 정해진 학교에 가고 학원을 다녀와서 숙제를 마치고 다시 학교에 가기 위해 잠자리에 드는 삶을 반복해야만 했다. 허탈한 마음을 달래주는 건 역시 텔레비전에서 등장하는 소녀들의 달콤한 목소리였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일이 잔뜩 있어. 그러니 어린이 여러분, 우리 모두 희망을 꿈꿔요.어느덧 나는 어른이 되었고 악의 무리를 처단하기는커녕 허리 통증으로 골골대는 슬픈 육체를 지니게 되었다. 내게 숨겨진 힘이라곤 종일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는 무적의 게으름과 동네의 숨은 맛집을 발견해 내는 신묘한 레이더가 전부다. 어렸을 때 꿈꾸던 미래는 이보다 훨씬 극적이었던 것 같은데.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빠진 만화처럼 내 삶도 맹숭맹숭한 느낌이다. 희망을 꿈꾸며 신나는 모험을 떠나는 것까진 기대하지 않지만 축 처진 일상에 낙관이라는 마법의 가루 한 스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요즘이다.이런 이야기를 하면 주변 사람들은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와하하 웃는다. 언제부터 꿈과 희망을 말하는 것이 유치한 일이 되었을까? 가족과의 대화는 늘 답답하게 끝이 나고 친구들을 만나면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만 나누게 된다. 아무래도 다들 낭만 없이 살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무턱대고 꿈만 꾸면서 사는 사람을 이기적인 몽상가로 보는 것은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저 사람 참 현실감각이 없네, 하고 혀를 차면서 답답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꿈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돈에 대해 말하는 게 더 쉽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어쩌면 꿈과 희망이라는 관념이 가벼워서가 아니라 너무나 무거운 것이기에 그러는 것일지도 모른다.마법 소녀를 꿈꾸던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소설가라는 또 다른 꿈을 품게 되었다.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문학에 완전히 매료되었고 읽고 쓰는 일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글 쓰는 일 외에 다른 일들은 다 우습게만 보였다. 누가 쿡 찌르면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공기가 과도하게 주입된 풍선 같았다. 저는 소설만 쓸 수 있으면 제 인생이 어떻게 되어도 괜찮아요. 그런 이야기를 버릇처럼 하곤 했는데,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포기한 것에 가까웠던 것 같다.그때의 나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학생들을 만나면 세계를 구하려는 마법 소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자기 자신을 내던져서 세상을 올바르게 만들겠다는 어떤 결연함을 품고 있는 소녀들. 나는 이제 그들이 안쓰럽다. 어깨 위에 얹힌 짐이 너무나 거대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늘을 짊어지고 사는 아틀라스의 형벌을 스스로 경험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마법 소녀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건 어른이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건 세상을 구한다든가 악의 무리를 처단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생겼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어느덧 새해가 밝았다. 정말이지 시간은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모래 같다. 내 삶에도 많은 일이 있었지만 돌아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만 같다. 시간이라는 파도를 타고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오랫동안 꼭 붙잡고 있는 꿈은 잘 살고 싶다는 마음. 잘 살고 싶다는 건 작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뜻, 더 나은 사람이라는 건 세상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씩 깨우치는 중이다.거짓말처럼 펑펑 내리는 눈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보다 운전 걱정부터 들고 가슴 아픈 사건을 보고서도 숨 한 번 길게 내쉰 뒤 다시 할 일에 몰두하는 새해 아침이다. 강력한 마법에 걸린 것처럼 내 삶이 완전히 뒤바뀔 거라고 믿지 않지만 좋은 세상을 바라며 요술봉을 휘두르던 그때 그 마음은 여전히 그대로다. 각자가 품은 아주 작은 꿈, 그거면 한 해를 살아낼 충분한 동력이 될 것이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일만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나쁜 일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우리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작년보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생기길 기대해도 좋겠다. 그러니 어른 여러분, 새해에는 우리 모두 희망을 꿈꿔요.

2024-01-02

너의 절망을 바라는

EBS에서 제작한 ‘대학입시의 진실’은 한국의 대학입시 제도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교육다큐멘터리이다. 총 6부로 구성된 이 프로그램에서는 종종 다른 나라의 제도와 문화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는데, 그 가운데 5부에서 일본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방식이 흥미롭다. 해당 장면에서는 일본의 사회적 문제로 급부상한 ‘격차사회’라는 현상을 다룬다. 2008년 리먼 사태 이후 회자되기 시작한 이 용어는 부모의 학력과 연수입이 자녀에게 유전되는 상관관계를 표현한 단어이다. 평균적으로는 사립대학 루트를 밟은 부잣집 아이와 공립교육 루트를 밟은 가난한 아이의 교육비가 3배 가까운 차이가 나는데, 이는 부모의 경제적 계층이 아이에게 세습되는 현상으로 직결된다.계층 이동의 통로가 막히면 사회의 역동성이 감소하고 젊은이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다. 이는 자녀의 인식 수준에서 보다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성공에 대한 자신감에 있어 상속부자 자녀의 경우 47.3%가 긍정 응답을 한 반면, 비정규직2세의 자녀들은 9.4%만이 긍정 응답을 하였으며, 노력의 보상에 대한 믿음 역시 계층에 따라 각기 61.4%와 26.8%로 집계되었다. 가난의 책임에 대해서도 상속부자 자녀들은 52.2%가 개인의 책임이라 응답한 반면, 비정규직2세의 자녀들은 9.8%만이 개인의 책임이라 응답하였다. 기회의 평등에 대해서도 상속부자의 74.1%는 긍정응답을 한 반면, 비정규직2세의 자녀들은 단지 23.2%만이 긍정응답을 하였다. 조금의 추상화를 거쳐 말하자면, 계층에 따라 사회 시스템에 대한 신뢰도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 흥미롭다고 느낀 건 이와 같은 부분만이 아니다. 사실 우리는 사회가 불평등할 수밖에 없으며, 어떤 제도도 모두에게 공정하게 작동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흥미를 느낀 건, 이러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완전히 다른 방식의 삶을 택한 일본 니트족의 사례이다. 프로그램에서는 나다 요시후미라는 자발적 니트족의 사례를 다루고 있는데, 그는 수입이 없음에도 매일매일 즐겁고 행복하다고 말한다. 한 달 100만원 가량의 생활비로 하루 한 끼만 먹으며 최소한의 생활을 하는 그는 미래 대신 지금의 행복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낮에는 파친코, 밤에는 인터넷 라디오 방송을 하는 그는 남는 시간에는 자신이 가보고 싶은 곳, 하고 싶은 일을 해보며 시간을 보낸다.비록 수입도 없고 생활도 궁핍하지만 자신의 생활에 만족한다는 그가 말하는 행복의 비결은 ‘3주 이후의 미래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어떻게 될지도 모르기에 그 이상의 미래를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싫은 일이나 힘든 일은 하나도 하지 않기에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를 보며 나는 꽤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저렇게 사는 것이 정말 좋은 삶인가? 불안하진 않은가? 그런 여러 종류의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어놨기 때문이다. 만약 중병에 걸린다면? 혹은 사고를 당한다면? 그의 가족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자신에게 불쑥 찾아든 불행에 그는 과연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어떤 재난과 불행으로부터도 보호받을 수 없을 그의 삶을 바라보며 나는 그가 내심 한심하다고, 혹은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어쩌면 그는 자신의 현실에 가장 책임감 있는 태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먼 미래에 찾아올지 모르는 불행을 막기 위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는 것이 책임감 있는 삶인 것일까? 어쩌면 내심 나는 나의 삶의 상시적인 불행에 대한 보상을 그의 삶에 대한 힐난으로부터 찾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내심 그의 삶이 나보다 불행해지길 바라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라도 나의 삶을, 현실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솔직해지자면, 나는 어느새 그에게 재난과 불행이 닥쳐오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의 현재를 긍정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이상하지, 그의 삶이 불행해지는 것과 나의 삶이 행복해지는 건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어떤 의미에서 그는 행복의 조건을 찾아낸 것이고 그것에 맞춰 삶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단지 자신의 행복을 위해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뿐인데, 나는 왜 그의 불행을 바라게 되는 것일까. 어쩌면 문제는 행복의 조건도 삶의 방향도 선택하지 못한 ‘나’의 문제인 건 아닐까? 부지불식간에 타인의 불행을 바라는 나의 모습이 문득 씁쓸하기만 하다.

2024-01-02

테슬라도 ‘출산율’보고 공장입지 정한다

심충택 논설위원 지난 연말 이탈리아 집권 여당이 주최한 행사에 참석한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가 ‘이탈리아에 투자할 의향이 있느냐’는 사회자 질문에 “이탈리아는 투자하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지만, 저출산 상황이 너무 걱정이다. 노동인구가 감소하면 누가 이탈리아에서 일할 수 있겠느냐”고 대답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이탈리아의 합계출산율(2020년 기준)이 1.24명으로 우리나라(0.7)보다는 월등하게 높은데도 다국적기업으로부터 이런 푸대접을 받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우리정부도 지난 2022년 11월, 머스크가 윤석열 대통령과의 화상면담에서 “한국은 아시아권 최우선 투자 후보지 중 하나”라고 밝힌 이후, 테슬라 전기차 공장 유치를 위해 총력전을 펼친 적이 있다. 항만시설과 여유산업부지가 있는 포항의 경우 유치팀까지 구성해 공장유치 사업제안서를 정부에 제출했지만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아마 윤 대통령도 저출산을 인류 최대의 위협요인으로 꼽는 머스크를 설득하는데 실패한 것 같다.삼성·현대 같은 우리나라 대기업들도 공장입지를 정할 때 해당지역의 인구구조를 우선시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인구규모가 경제성장 잠재력과 동일시되는 이치다.우리사회의 인구위기에 대해 진화생물학자인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는 “새끼를 낳아서 기를 수 없는 상황에서 새끼를 낳는 동물은 절대로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낼 수 없다. 상황이 좋아졌을 때 새끼를 낳아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한국사람들은 진화적인 관점으로 기가 막히게 적응을 잘하는 민족”이라고 했다. 최 교수의 주장은 우리정부도 이제 적은 숫자의 국민으로 어떻게 사람답게 살 수 있느냐를 모색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인구소멸’의 위험성을 너무 체념적으로 받아들이는 논리다.미국 CNN 방송은 최근 세계 최저출산율을 기록하고 있는 한국이 앞으로 국방력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까지 했다. 지금 우리나라는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저출산현상이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저출산 위기는 학교 폐교수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새해에 또 전국의 33개 초·중·고교가 문을 닫는다고 한다. 전북이 1등(9곳), 경북이 2등(6곳)을 차지했다.윤석열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만큼 우리나라 저출산의 원인과 대책에 대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면서 “저출산의 원인이 무엇인지 냉정하게 파악하고, 실효성 있는 대책을 찾아낼 것”이라고 했다.그러면서 우리사회 저출산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불필요한 과잉 경쟁’ 때문이라고 진단한 것에 대해서는 공감이 간다. 한국사회 저출산의 직접적인 원인은 뭐니뭐니해도 수도권 집중화다. 좋은 직장과 학교를 비롯한 모든 주요 자원이 수도권에 몰리니까 과도한 경쟁시스템이 유발되고, 청년들이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것이다. 새해에는 청년들이 비수도권에서도 마음 편하게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구체적인 해법이 나오길 기대한다.

2024-01-02

선거의 해

우정구 논설위원 올해는 전 세계적으로 70개국이 넘는 나라에서 선거가 치러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세계 각국 언론도 역사상 가장 많은 선거가 치러질 올해의 지구촌 움직임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갖고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는 지구촌에서 치러지는 각 나라 선거가 글로벌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대단히 크기 때문이다.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2024년 세계 경제를 전망하는 가장 큰 변수로 선거를 꼽았다. 특히 11월 있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승리할 경우 세계경제는 큰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내놓았다. 선거에서 승리한 정권이 어떤 정책과 규제를 펼치느냐에 따라 시장의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올 1월 가장 먼저 선거를 치르는 대만의 예를 보면,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민진당 후보의 당락에 따라 중국과의 긴장관계가 오락가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올 4월 10일은 22대 국회의원 선거 날이다. 여야는 100일도 채 남지 않은 선거에 대비한 전열 정비에 여념이 없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이번 선거는 한국 정치사상 가장 극렬한 진영 대결이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선거가 극렬하면 상대적으로 그 후유증도 큰 게 보통이다. 선거를 바라보는 유권자들의 근심도 덩달아 커지는 분위기다.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 부르는 것은 현대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적이고 핵심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남녀노소, 직업군과 계층·계급에 관계없이 누구나 평등하게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수단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유권자가 직접 참여하는 선거의 결과에 따라 나라의 흥망이 갈릴 수도 있다. 어느 선거든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겠으나 이번 총선 만큼은 유권자의 현명한 선택이 있어야 할 이유가 더 많은 것 같다./우정구(논설위원)

2024-01-02

지혜와 생명의 청룡처럼 도약하자

김진국 고문 새해 아침 동해에 해가 솟아올랐다. 갑진(甲辰)년의 시뻘건 해가 구름 낀 동해를 박차고 힘차게 떠올랐다. 2024년은 희망의 해다. 2023년까지도 절반은 코로나 팬데믹에 갇혀 있었다. 이제 답답하던 마스크를 벗은 뒤 처음으로 새해를 맞는다. 가슴을 활짝 펴고, 일출을 볼 수 있게 됐다.갑진년은 푸른 용[靑龍]의 해다. 십이지 가운데 진(辰)은 용을 나타내고, 십간에서 갑과 을은 오행 중 청색이다. 동쪽과 나무를 상징한다. 나무는 오행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 있는 생명이다. 그래서 생명이 움트는 봄을 나타낸다.용은 용감하고, 인내심이 강하고, 지치지 않는 추진력을 가진 전설 속 동물이다. 그중에서도 청룡은 살아 있는 나무와 생명, 봄의 기운을 안고 있어 창조적인 생각과 아이디어,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이 청룡의 기운을 받아 2024년에는 대한민국과 독자 여러분 모두 하늘 높이 도약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물론 청룡의 기운만 믿을 수 없다. 모두 우리가 하기에 달렸다. 60갑자를 되돌려 보면, 1964년 갑진년에 한국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한·일 회담 반대 시위로 전국이 들끓었다. 서울에는 계엄령이 내려졌다. 국군의 베트남 파병이 결정된 것도 이 해다.청룡은 도전적이고, 추진력이 강하지만, 그런 점이 독선적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다. 전쟁과 갈등의 화약 냄새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60갑자를 한 번 더 되돌리면 1904년. 그해에 러·일전쟁이 터졌다. 조선을 집어삼키려는 열강의 마지막 힘겨루기였다. 청·일 전쟁에 이어 또다시 이기면서 일본은 한반도를 완전히 수중에 넣었다. 열정과 도전은 큰 성취를 가져다줄 수도 있지만, 잘못된 길을 걸으면 추락하는 원인이 된다.올해도 외부 환경이 밝기만 한 것이 아니다. 안보 위협은 여전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연말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유사시 핵무력을 포함한 모든 물리적 수단과 역량을 동원해 남조선 전 영토를 평정하기 위한 대사변 준비에 계속 박차를 가해 나가야 하겠다”라고 말했다. 사실상 핵보유국이지만, 일부 지역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할 정도로 경제는 엉망이다. 드러내놓고 연평도에 포를 쏘는 무모한 정권이 어떤 도발을 할지 알 수 없다.국제 환경도 녹록지 않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세계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미국과 중국, 미국과 러시아의 갈등도 우리에게 큰 시련을 안겨주고 있다. 국내에는 구조적이고, 고질적인 개혁 과제들이 쌓여 있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국가적 과제에 대한 고민과 토론은커녕 소모적인 정쟁에 몰두한다.다음 세대가 희망을 품으려면 가장 먼저 청년 취업률부터 개선해야 한다. 일자리가 더 필요하다. 세계 최저수준인 합계출산율 0.78명은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유발하는 요인이다. 인구가 소멸하고, 지방이 소멸한다. 연금 고갈 시기를 앞당긴다. 그런데도 개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다행인 것은 올해가 포스트 코로나의 경제 활기를 만들어낼 기회라는 점이다. 미국에서도 전쟁을 빨리 끝내려는 여론이 일어나고 있고, 고금리 기조에도 변화가 있다. 이런 분위기를 어떻게 잘 살리고 기회로 만드느냐는 우리 손에 달렸다.민주주의는 국민이 주인이다. 링컨의 지적대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다. 중요한 국가 어젠다를 선정하고, 여론을 만드는 것도 국민이다. 정치가 잘 되건 못되건 일정 정도 우리 책임이다. 우리가 비난하는 정치인을 선출한 것이 바로 우리다.국민이 정치에 개입하는 가장 강력하고, 확실한 수단이 선거다. 선거는 포퓰리즘에 휘둘릴 위험도 크지만, 이런 과제를 해결하고, 전진할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미국과 러시아·우크라이나에서도 올해 대통령선거가 있다. 우리는 4월 10일 국회의원 총선거다. 지금 보고 있는, 이 인기 없는 정치도 우리가 만들었다. 변화와 안정, 새로운 도약은 우리 손에 달렸다. 이번에는 정말 잘 뽑아야 한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4-01-01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새해 첫날, ‘바람의 섬’ 제주에서 올레 길을 걸으며 ‘바람이 가르쳐주는 자유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삶을 옭아매는 수많은 그물에서 벗어나 대자유인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부처의 가르침이 가슴을 때린다.우리는 ‘바람과 같은 자유’를 원하면서도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살고 있다. 내가 만든 그물에 내가 걸려 허덕이는 것이다. 서로를 연결하는 인터넷은 이제 서로를 옭아매는 그물망이 되었다. SNS는 소통할 수 있는 ‘개방적인 연결망’이 아니라 고기들을 가두는 ‘어망 (漁網)처럼 폐쇄된 그물’이 되고 있다. 적과 동지를 구별한 ‘진영의 일원으로서의 나’만 있을 뿐이다. ‘독립된 나’를 상실하고 진영에 ‘종속된 나’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 밖을 볼 수 없다. 오만과 독선이라는 그물에 갇힌 우물 안 개구리들이 우물 밖 세상이 잘못됐다고 아우성이니 코미디가 따로 없다. ‘진보 꼴통’은 ‘보수’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보수 꼴통’은 ‘진보’의 의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념과 진영의 그물에 걸린 탓이다. 인간의 가장 큰 약점은 밀(John S. Mill)이 지적한 것처럼 “검증되지 않는 신념에 자신을 복속시키는 경향성”에 있다. 자유를 외치면서도 노예의 길을 가는 어리석음이다.‘탐욕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대의(大義)도 잃고 자유도 잃는다. 그물에 걸리는 이유는 물질적·외형적 가치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돈·권력·명예가 목적이 되면 집착하게 되고, 집착은 근심꺼리가 되어 자유로울 수 없다. 정치인들의 불행은 초심을 잃고 권력의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서 온다. 권력·명예·자유를 모두 잃어버린 역대 대통령들의 비극적 종말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어떻게 하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살 수 있을까? 무엇보다 그물 자체가 문제다. 바람이 지나갈 수 있도록 ‘마음의 거름망’을 촘촘하지 않고 성글게 해야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사고의 유연성을 잃으면 자유로울 수 없고 변화에도 적응하지 못한다. 자신을 옭아매는 수많은 ‘편견의 그물’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특히 권력자는 자신을 둘러싼 ‘예스맨(yes man) 그물’에서 벗어나야 한다. 소통·혁신·변화를 가로막는 낡고 쓸모없는 그물들은 모두 제거해야 한다.나아가 그물에 걸리지 않으려면 ‘마음의 근력’도 키워야 한다. 성찰과 명상을 통해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수행을 통해 마음의 근력을 단련함으로써 자유·진리·평화의 삶을 만들어야 한다. 물질에 집착하면 ‘정신의 근력’을 키울 수 없고, 그물에 걸린 삶을 합리화하면 ‘바람의 자유’를 얻을 수 없다. 자유인은 역경 속에서도 결코 자유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절망의 벼랑 끝에서 피는 희망의 꽃을 아는가. 엄동설한(嚴冬雪寒)에 피는 ‘매화의 기개’와 ‘동백의 열정’을 배워야 한다.

2024-01-01

새해 소망

홍석봉 대구지사장 새해 첫 날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새해 소망을 염원한다. 가족과 애인의 건강과 사랑, 합격을 빈다. 동해안의 해돋이 명소마다 인파가 붐볐다. 해맞이는 어느덧 연례행사가 됐다.새해 소망을 비는 것은 서양에서 유래했다. 로마 신화의 신인 야누스(Janus)에서 비롯됐다. 야누스는 과거와 미래를 모두 볼 수 있는 얼굴이 두 개인 신이다. 새해의 첫달인 1월의 이름(january)도 야누스에서 따왔다. 로마인들은 새해 첫날 야누스에게 제물을 바치고 소망을 빌었다. 이런 풍습이 기독교 문화권에 퍼졌다.새해 첫날 새 목표를 세우고, 나쁜 습관을 고치며 그해의 안녕을 빌었다. 고려시대에는 새해에 왕이나 귀족들이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새해에는 더 나은 행실을 다짐하는 행사가 있었다. 일제시대 때 우리는 양력설을 신정이라고 부르고 음력설을 구정이라고 부르는 일제의 정책에 반발, 양력 1월 1일을 새해의 시작으로 여겼다. 이 때부터 새해에 자신의 목표를 세우고 안녕과 건강을 빌었다.우리나라는 새해 새로운 간지를 쓴다. 12간지(쥐, 소, 범,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다. 새해에 새로운 운명을 상징한다. 새해 자신의 운명을 좋게 하고, 좋은 일을 기원하는 것이 전통이었다.성인 남녀 3천명을 대상으로 ‘2024년 새해 소망’을 물은 한 조사에서 1위는 ‘건강’(34.7%)이라고 답했다. ‘경제적 자유’(22.8%)와 ‘경기 안정’(8.8%)이 뒤를 이었다. 경제 보다는 건강을 최우선으로 꼽았다. 이어 평범한 삶, 내 집 마련, 여행 등 순으로 나타났다.청룡의 해 갑진(甲辰)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엔 모두가 행복하고 건강한 한 해가 되길 소망한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4-01-01

모험의 끝이 영광은 아닐지라도

유영희 작가 지난 연말에 ‘호빗’을 읽었는데, 다 읽고 보니 새해를 맞이하는 멋진 이벤트가 되었다. ‘호빗’으로 새해 모험을 떠나는 내게 큰 통찰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호빗’은 마법사 간달프가 난쟁이 13명과 보물을 되찾으러 떠나기 전 호빗 족의 빌보를 합류시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눈치챘겠지만, 맨 나중에 합류한 빌보가 주인공이다. 빌보는 골목쟁이네라는 별명이 따라다닐 정도로 땅속 굴 생활에 만족하며 다른 세상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인물이다. 그저 이웃의 좋은 평판에 기대어 안락하게 살아간다.간달프의 재촉으로 모험 여행에 합류하기는 했지만, 빌보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고향에 가고 싶어 하고, 난쟁이들의 무시에 마음 상하기도 하는 등 소심한 면이 많다. 그러다 절대 반지도 얻고 간달프가 없는 상황에서 일행을 이끄는 역할을 한다. 결국 빌보는 악한 용 스마우그를 죽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평화롭게 산다.‘호빗’에서 특이한 점은 빌보가 영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난쟁이들에게서 엄청난 존경을 받는 것도 아니고,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의 이웃은 빌보를 불편해하며 상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의 백미는 빌보가 모험을 성공으로 이끈 부분보다는 마지막에 이웃의 냉대에도 개의치 않고 시를 쓰며 만족스럽게 살아간다는 결말 부분인 것 같다. 이런 여정을 보노라면, 모험에 성공했다고 반드시 칭송과 영광이 뒤따르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빌보도 모험의 대가를 바라기는 했으나, 나중에 자기 몫의 보물을 기꺼이 포기한 것을 보면, 빌보에게 잠재되어 있던 모험 정신이 발동한 면이 더 컸다.‘호빗’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는 이유는 새해에 시작하는 나의 모험 때문이다. 빌보가 제한된 곳에서 다른 세상은 모른 채 살았던 것처럼 나 역시 지금까지 연구자와 강사로만 살며 다른 세상을 모르고 살았는데, 우연히 뜻 맞는 퇴직자 5명이 모여 창업하게 되었다.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면서 인지력이 떨어지는 인구 역시 늘어가고 있고, 우리 역시 언젠가는 인지력 저하를 걱정하게 될 것이라, 인지력 저하를 예방하는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창업하는 과정에서 창업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어려운 순간이 수시로 찾아올 수도 있고, 동료와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 어쩌면 보물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호빗’을 읽노라니,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 빌보처럼 용기낼 수 있을까, 빌보처럼 조력자를 만날 수 있을까, 빌보처럼 만족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생각해본다.지난 6개월을 돌아보니, 필요할 때마다 조력자를 만났고, 갈등도 잘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도 생겼다. 보물을 얻고자 시작하지만, 그 보물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 데 쓰이는 것임을 기억한다면, 보물이 적거나 이웃의 칭송이 없더라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생긴다. 안 쓰던 뇌의 부위가 활성화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독자 여러분도 새해에는 잠재된 유전자를 발동시켜 모험을 떠나보라고 권하고 싶다. 머무는 것보다 확실히 성장하게 될 것이다.

2024-01-01

새해엔 우리를 찾아야 한다

김규인 수필가 새해가 밝았는데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에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전쟁으로 경제는 심하게 흔들린다. 고금리, 고물가에 서민의 살림은 빠듯한데 전세 사기는 서민들의 삶을 옥죈다. 그 여파로 아파트 시장은 싸늘하게 식고 미분양된 아파트는 늘어나고 국가의 부담도 늘어난다.아파트 미분양은 금융권의 PF 대출로 인한 악재를 만들고, 애플 페이의 국내 상륙은 그들을 잔뜩 긴장시킨다. 국경이 장애가 되지 않는 수익 사업은 돈이 되는 것이라면 지구 반대편이라도 한걸음에 달려간다. 이런 가운데 정보통신업계의 사업다각화에 대한 정부의 규제도 늘어날 것 같다.불안한 마음 탓인지 묻지마 범죄와 흉기 난동은 마음 놓고 길거리를 다니는 것조차 힘들게 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무슨 죄가 있는지 한 사람과 가정을 파탄으로 이끄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부족한 안전 의식은 오송 지하차도 참사를 일으켰고, 학부모들의 도를 넘은 간섭은 교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재판은 아직도 진행 중이고 자식을 가르치는 스승에 대한 존경은 고사하더라도 인간적인 배려마저 그들은 잊었다.마약은 미성년자까지 퍼지고 ‘오징어 게임’에서도 살아남은 배우를 죽음으로 내몬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어린 학생들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무작위로 권해 마약 하는 사회가 됐다. 마약에 대항하는 강력한 법은 언제나 만들어지는지 국회의원은 입법에 관심이 없고 정략적인 이용에만 바쁘다.빈대와 흰개미의 출현은 지금이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아닌지 의문마저 든다. 국내 굴지의 그룹 회장에게 철학을 가르쳤던 빈대는 붉은 반점과 가려움만을 준다. 지구가 아파서 빈대와 흰개미도 살기 좋은 곳으로 이동하는 것인지 과거로 돌아가는 이 상황이 어색하다.지구는 높은 열에 자주 두통을 앓고 정신을 잃을 때는 물난리, 불난리에 자신을 태운다. 지구의 아픔은 언제쯤 고쳐질 수 있는지. 아무 생각 없이 일산화탄소만 발생시키고 쓰레기만 쏟아내는 사람들은 어제의 일을 다시 반복한다. 언제까지 지구가 견딜 수 있는 것인지. 달을 수백 바퀴나 돌고 있는 누리호는 지구가 가장 살기 좋은 별이라고 말한다. 우주에서 지구의 대체물을 찾기보다는 지구를 고쳐주는 것이 사람들의 도리가 아닐까.의사 증원 문제와 연금 개혁 법안은 2024년에도 풀기 어려운 문제일까. 이 모든 문제를 압도하는 인구 감소 문제 해결 실마리를 찾기에 정부는 바쁘다. 그런데도 결혼하지 않는 젊은 사람들만 늘어난다. 아이를 낳고 살기에 우리나라가 그렇게 힘든 나라인지, 많은 것을 갖추고서야 결혼하려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외적의 침입에 몸으로 맞서고, 힘든 농사일을 함께 풀어나가고, 경제 위기에 금을 모으고, 월드컵 경기에 붉은 옷을 입고 한 마음이 되었던 우리를 찾아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을 줄 아는 우리를 찾아야 한다. 잠시 개인적인 이익에 흔들려 잃어버린 우리를 다시 찾자. 강강술래를 부르며 손을 잡고 나아간다면 우리를 둘러싼 문제도 저절로 풀릴 것이니. 새해는 그렇게 맞고 싶다.

2024-01-01

한동훈 발 정치 혁신 가능할까

홍석봉 대구지사장 2023년 계묘년(癸卯年)이 저물고 있다. 말 그대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다. 고금리·고유가·고환율 속에 국민의 삶은 피폐해졌다. 경제는 바닥을 기고 있고 정치는 정쟁으로 날밤을 지샜다. 그나마 손흥민 등 스포츠 스타의 활약이 위안이 됐다.세밑 어수선한 정국 속에 국민의힘이 법무부장관 출신의 50세 정치 신인을 여당의 ‘얼굴마담’으로 내세웠다. 한동훈의 비상대책위원장 수락연설은 통상적인 정치 연설과는 결이 달랐다. 그는 자신을 내려놓았다.국민만 보고 가겠다고 했다. 보수는 그의 연설에 환호했다. 내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 배지와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오직 동료 시민, 이 나라의 미래만 생각하면서 승리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했다. 더불어민주당의 폭주를 막고 운동권의 특권 정치를 배격하겠다고 공언했다. 불체포특권 포기자만 공천하겠다고도 말했다.‘선민후사’ 하겠다며 자기 희생의 의지를 보였다. 국민이 바라고 듣고 싶었던 외침이었다.그는 ‘여의도 사투리’를 쓰지 않겠다고 했다. 정치권의 말만 앞세운 치적 자랑과 알맹이 없는 답변, 헛된 구호를 배격하겠다는 다짐이다. 한동훈 표 리더십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그의 당찬 결의에 경의를 표하는 국민이 적잖다. 한동훈이 나오자마자 여당 지지율이 떴다. 단박에 차기 대선주자 1위로 올라섰다. 국민의 열망과 보수의 갈구가 만든 현상이었다. 한동훈 표 공정과 상식을 기대하는 국민이 적지않다. 정치경력이 없는 조선제일검이 검을 얼마나 잘 벼리고 써느냐에 달렸다. 국민은 정쟁을 일삼으며 금배지만 바라보는 정치권에 환멸을 느낀다. 정치에 좌절했다. 하지만, 한동훈의 등장과 그의 선언은 국민에게 한가닥 희망을 주었다. 새 바람을 몰고 올 조짐이다. 국민의 기대도 크다. 국민의힘에 정치후원금이 쏟아지고 있다. 한동훈 효과다. 이젠 한동훈 표 혁신이 필요하다.한동훈의 등장은 정치 혁신의 신호탄이나 다름 없다. 정치권은 그동안 2030을 영입하는 의욕적인 정치실험이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정치판에만 들어서면 금방 낡은 정치언어와 문화에 젖어들었다. 이준석과 박지현으로 대변되던 세대교체는 혁신 무늬만 그리다가 말았다.반면 한동훈은 세대교체를 이룰 수 있는 토대를 갖췄다. 참신성, 개혁성, 이미지 등이 남다르다. 정의의 칼을 휘두르며 부패와 부정에 맞선 경험이 있다. 정치권의 환부에 사정 없이 메스를 들이대도 될 듯 하다. 이참에 상향식 공천도 재고해야 할 것 같다. 노회한 정치꾼들이 공천권을 조자룡 헌칼쓰듯 휘두르게 놔두어서도 안 된다. 바야흐로 TK 정치권도 바람 앞의 등불이다. 소신 없이 눈치만 보던 정치인들은 좌불안석이다. 지역 정치권도 변화와 혁신이라는 대세의 흐름에 비껴 갈 수는 없다.한동훈 앞에는 장애물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 가면 길이 된다’는 한동훈식 좌표설정은 연착륙 보증수표가 될 수 있다.2024년은 갑진년(甲辰年), 청룡의 해다. 비상하는 청룡처럼 우리 정치가 한단계 더 성숙해지길 소망한다.

2023-12-28

운외창천(雲外蒼天)

우정구 논설위원 인류는 ‘희망’에 의존해 발전해 왔다는 말이 있다. 희망이 인류문명 발전의 원동력이었다는 뜻이다. 인간이 불행한 상황에 처했을 때 희망이라는 긍정적 기대감이 없었다면 과연 인류는 어떠한 삶의 궤적을 만들어 왔을지 궁금하다.철학자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했다. 이처럼 인간은 희망과 꿈이 있기에 현재의 잘못된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오랫동안 우리를 힘들게 했던 코로나 팬데믹이 끝났으나 우크라이나 전쟁과 글로벌 불경기 등이 이어지면서 세계 각국은 어느 해보다 다사다난했던 한해를 보냈다.국내도 마찬가지다.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 등 우리 경제를 압박한 이른바 3고 현상으로 기업은 기업대로 서민경제는 서민경제대로 힘들고 고달팠던 한해였다.중소기업인들이 내년도 경제를 바라보며 선택한 사자성어가 ‘운외창천(雲外蒼天)’이라고 한다. “어두운 구름 밖으로 나오면 맑고 푸르른 하늘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절망하면 안 된다”는 격려의 말을 할 때 잘 사용하는 표현이다. 희망을 잃지말고 난관을 극복하면 더 나은 미래가 있다는 뜻이다. 중소기업인들이 올 한해 많이 고생했음을 느끼게 하는 표현이다.새해를 앞두고 심기일전(心機一轉)이 필요한 때다.다가올 새해에는 우리 모두가 올해 못 이룬 모든 것을 소망하고 희망해야 한다. “세상이 당신에게 포기하라고 말할 때 희망은 한 번 더 시도해보라고 속삭인다”는 서양의 격언을 되새기면서 말이다. 희망은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마법이기 때문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3-12-28

이(利)와 의(義)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이맘때쯤이면 곳곳에서 송년회니 망년회니 하며 연말 모임으로 분주하다. 얼마 전, 그러한 모임 중 한 곳에 갔을 때의 일이다. 모임이 거의 끝나 갈 무렵, 결국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바로 차기 회장단 선출 건. 원래는 임기 2년씩인데, 몇 년 전, 회칙을 ‘회장단 임기 1년, 단 1회 연임가능’으로 수정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래도 관례적으로 늘 2년씩 해 왔고, 향후 혹 회장이 1년 하더라도, 총무는 2년 하기로 이전 총회서 합의까지 했는데, 일 더 하기 싫었던 총무가, 규정을 들먹이며 1년 임기라 우겨댄 것이었다.게다가 말나올까 싶어 회칙도 안 가져온 채, 연임가능 단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말로만 규정이 1년이라며 우겨대다가, 한 술 더 떠서, 2년 한 이전 총무는 규정도 모르고 일 더 했단 식으로 회장, 총무가 손발 짝짜꿍이 되어 얘기를 하니, 새로 와서 모르는 이들은 그런 갑다 했지만, 아는 사람은 황당한 표정을 짓고, 전 총무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툴툴대니 즐거워야 할 모임이,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돼 버린 것이었다. 자신이 일 더 하기 싫다고 굳이 교묘하게 규정 운운하며 열심히 일한 이를 바보로 만들어 버릴 것까지야, 참.옛말에, ‘견리망의(見利忘義)’라는 말이 있다. 장자가 쓴 ‘산목편’에 나오는데, 이익을 보면 의리를 잊는다는 뜻으로, 올해의 사자성어에 선정된 말이기도 하다. 어느 날 장자가 까치를 따라 밤 숲에 들어가니 까치는 사마귀를, 사마귀는 매미를, 매미는 시원한 그늘을 즐기고 있었는데, 각자 자신들에게 닥친 위험을 모른 채 눈앞의 이익에만 몰두하고 있더라는 이야기에서 나왔다. 사실, 그렇다. 우리 주변에는 눈앞 이익을 위해 원칙이나 도리를 잊고, 벼룩같이 남의 피를 빨아먹고 교묘한 짓을 자행하는 일이 얼마나 허다한지.몇 푼 이익을 더 챙기려고, 주인에게 상의도 없이 몰래 남의 땅을 침범해 보강토를 높다랗게 쌓아올린 건설업체가 글쎄, 며칠 전 쏟아진 비로 보강토가 와르르 무너져 내려 다시 보수하게 된 사건도 그렇고, 평소 수업자료도 준비 않고 학습 진도도 체크 않는 등 편하게 수업료만 따박따박 받아가던 취미반 악기 레슨 선생이, 수강생이 뭐 좀 있어 보였는지, 이제 두 번 레슨 받아 실력을 늘릴 때라며, 은근 돈 욕심을 내며 교사로서의 기본을 내팽개치던 모습도 그렇고.사실 당장은 눈앞의 이익이 주는 달콤함에 행복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고스란히 내 인생에 부메랑으로, 업보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것이 삶의 이치다. 굳이 셰익스피어의 ‘햄릿’ 중 클로디우스가 자신의 형을 죽이고 왕위와 왕비를 차지하나, 결국 죽은 왕의 아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익 앞에서 흔들린다. 그렇더라도 인간으로서 최소한 기본적인 義를 버려서야 쓰겠는가. 인간이기에 이익에 흔들릴 수 있지만, 또 인간이기에 이익에 태연하고 의로움을 지켜낼 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바야흐로 올 연말, 흥청망청 술판 대신, 견리(見利)앞에서 망의(忘義)하는 사람인지 최소한의 수의(守義)는 가능한 사람인지 한번쯤 생각해 보면 좋겠다. 아마도 다가오는 2024년이 조금은 풍요로울 테니까.

2023-12-27

다시 걷고 운동하자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생명체의 진화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무기물이 모여 수억 번의 우연이 반복되어 유기물이 되고 유기물은 에너지의 수출입이 생기고 에너지를 저장하며 내보내며 생명을 유지했다. 다시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로 이 에너지를 적극적으로 확보하는 유기물들이 생기고 이 유기물들은 적극적으로 움직이면서 타 유기물들을 흡수해 좀 더 많은 에너지를 확보하고 또 환경에 맞게 살아 남아 발전했다. 생명체의 진화 방향은 각 환경에 맞게 최대한의 에너지 확보로 나아간다. 가만 있으면 죽었고 움직이면 살았다. 생명체로서 더 우수하다 아니다가 아닌 각각의 환경에 적응하여 에너지를 좀 더 적극적으로 확보한 종은 살아남고 아닌 것들은 멸종했다.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면 포식자와 피식자간 격렬한 움직임이 일어난다. 이때 발생하며 버려지는 에너지는 엄청 나지만 피식자는 잡히는 순간 죽으면서 모든 에너지가 사라지고 포식자는 잡아서 에너지를 섭취하지 못하면 생명을 이어나가지 못할 수도 있다.모든 동물은 목적성을 가지고 움직이고 그에 최적화 되어 있는 동작을 수행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목적성을 가지고 움직인다. 인간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활동을 했으며 이에 적응하지 못한 인간은 모두 죽었고 씨를 남기지 못했다. 20만년 전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면서 그에 맞춰 움직이고 활동을 했으며 이는 곧 생활이자 생존이었다. 그러나 지금 현대의 인간들의 반은 움직이지 않는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목적수행을 위해서 앉아있어야 하고 서 있어야 한다. 실제 육체노동으로 목적수행을 하는 인간들은 한국에선 많지 않다. 이에 대부분이 운동 부족에 시달린다.움직여야 할 생명체가 움직이지 않으니 그에 따른 문제가 발생한다. 오래 앉아 있어 등과 어깨가 굽고 목이 앞으로 빠져 나온다. 많이 걷지 않으니 걷는 동작과 순서에 이상이 온다. 이에 따른 발 무릎 허리쪽의 부하로 관절의 부정렬과 변형이 발생한다. 당장 크게 아프지 않아도 온몸이 찌뿌둥하고 피로하다. 원인이 영양소 부족인가 싶어 각종 영양제를 챙겨 먹지만 조금도 나의 몸의 불균형은 해소 되지 않는다.답은 하나 밖에 없다. 다시 걸어야 한다. 운동을 해야 한다. 거창하게 할 필요가 없다. 집에 러닝머신 혹은 사이클 하나만 있으면 된다. 기능이 좋은 것 필요 없다. 제일 싸고 단순한 기능만 가진 제품을 사서 걷고 발을 구르면 된다. 밖에 나가면 더욱 좋다. 그냥 걸으면 된다. 이유를 가지지 말고 그냥 옷을 추려 입고 밖으로 나가자. 5만원 전후의 운동화 하나만 있으면 되고 자전거가 있으면 자전거를 타면 된다. 열심히 할 필요도 없다. 30분 걷다보면 1시간이 되고 2시간이 된다. 피로하면 택시 타고 집에 와서 푹 자자. 다음날 퇴근 하고 집에서 밥 먹고 TV 보다가 그냥 옷을 추려 입고 나가자. 이미 본 뉴스 내용과 드라마가 TV에서 나오고 있다. 더 볼 이유가 전혀 없다. 내 몸이 더 소중하다. 내 몸은 걸으면서 생존해 왔던 DNA의 후손이고 항상 채집과 사냥으로 운동을 하던 몸이었다. 나가자. 걷자. 달리자. 건강해지자.

2023-12-27

숨바꼭질

윤명희 수필가 비상깜빡이를 켜고 차를 갓길에 댔다. 서울 가는 남편을 역에 내려주고 집으로 가는 길이다. 새벽길은 한산하고 음악듣기 참 좋은 시간이다. 옆자리를 더듬거린다. 손에 엉뚱한 것이 잡힌다. 탁자위에 둔, 차 열쇠와 같이 들고 나온 게 분명한데 보이지 않는다. 평소 핸드폰을 꽂아두는 자리에 대신 빈 물병이 자리하고 있다.조수석에 앉은 남편이 발치에 차이는 빈 물병을 들고는 “여기 꽂아둬야지 내릴 때 갖다 버리지”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혹시 물병 꽂으면서 자기 것인 줄 알고 가져갔나? 조금 전에 내려줬던 역 앞 버스정류소에 내 핸드폰을 들고 서 있을 것 같아 가던 길을 돌려 다시 갔다.보이지 않는다. 대합실까지 가보고 싶은데 새벽 배웅을 위해 서 있는 차들로 주차할 장소가 마땅치 않다. 뒤따라오던 차의 불빛들이 비켜달라고 껌뻑껌뻑 위협을 한다. 떠밀리다시피 앞으로 나아갔다. 유료주차장에 들어가려해도 잠옷에 외투만 걸치고 나온 나는 주차비조차 없다. 기름이 떨어졌다는 불빛마저 반짝거린다.도로를 달리며 차선책을 생각했다. 핸드폰이 없으면 종일 업무에 차질이 생기는데, 오늘은 쉬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노트북에 깔린 앱으로 남편에게 카톡부터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가속기 페달을 밟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혹시 차 바닥에 떨어져있나 확인부터 했다. 없는 게 확실하다.방에 들어가자마자 노트북을 켰다. 로그인 되는 그 짧은 순간을 기다리지 못해 혹시 집에 두고 간 걸 착각 했나 해서 침대 이불을 털어보았다. 모니터 화면이 뜨자 남편에게 내 핸드폰 가져갔냐고 문자를 날렸다. 1분이 지나고 5분이 지나도 남편은 보지 않았다. 10분을 넘어서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집으로 오고 있는 거 아냐? 종일 핸드폰으로 일하는 내 사정을 잘 알기에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쳤다. 생각은 회오리가 되어 나를 옥죄었다.다친 다리가 아파 서울 병원에 예약해 둔 남편이다. ‘딸애까지 휴가를 내서 서울역으로 마중 나오기로 했는데’라는 생각이 들자 머리가 복잡해졌다. ‘열차는 탔어요?’ 다시 그에게 카톡을 보냈다. 핸드폰이야 가져갔던 말든 열차는 탔으면 하는 마음이다. 묵묵부답이다. 30분이 지나자 목발을 짚은 그가 금방이라도 집에 들어올 것만 같다. 가족 단체 톡방을 두드렸다. 누구든 아빠한테 전화하라고 했지만, 아무도 읽는 이가 없다. 아직은 젊은이들이 일어날 시간은 아닌가보다. 시계를 쳐다보고 모니터를 흘낏거리며 온 집안을 다시 뒤졌다.동네 친구들 단체 톡방을 두드렸다. 그들은 아무리 늦게 일어나더라도 지금쯤이면 화장실은 다녀올 시간이다. ‘누구 일어나신 분 없소?’ ‘왜? 나 아까 일어났어.’ 역시 금방 연락이 온다. 남편에게 전화 한 통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안 봐도 비디오라는 듯이 더 이상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는다.모니터에 남편이 떴다. 자기는 안 가져갔다는 짤막한 대답이다. 그는 벌써 목적지의 반을 통과하고 있었다. 차를 탔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마음의 회오리바람이 잦아든다. 그가 새벽 열차를 타기 위해 깬 잠을 다시 이어가는 동안 나는 내가 만든 생각 속에서 허둥거렸다는 사실이 멋쩍다. ‘그럼, 핸드폰은?’ 또 다른 바람이 몰려왔다. 집안은 다 뒤졌고, 분명 차 안에는 없는 걸 확인했는데 남편이 차에서 내리다 차 밖으로 딸려나갔나? 그럼 이건 또 어떻게 찾지? 매번 찾아다니는 내게 짜증이 달라붙는다.그제야 잠에서 깨어난 아이들의 말이 까똑 까똑 난리가 났다. 모두 돌아가며 내게 전화를 하겠다고 한다. 누군가 소리를 듣고 찾아달라는 요청이다. 집안에서는 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 다시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 문을 열자 반가운 소리가 들린다. 소리는 들리는데 보이지 않는다. 조수석 의자를 한껏 뒤로 밀어 봐도 없다. 나 찾아보라는 소리는 약 올리듯이 울렸다. 운전석 의자를 사정없이 밀어댔다. 엉덩이는 치켜들고 얼굴만 감춘 개구쟁이처럼 한 귀퉁이 바닥에 엎드려있다. 그것이 내 가까이 숨어 있었다. 숨바꼭질이 끝나자, 아침이 고요하다. 또 언제 숨어버릴지 모를 일이다.

2023-12-27

우수(雨水)와 명리 이야기

24절기 가운데 두 번째가 우수(雨水)다. 태양의 황경이 330도에 위치하며, 2024년에도 2월 19일(음력 1월 10일)이 우수(雨水)다.우수(雨水)는 봄이 시작되었지만, 땅에 아직도 겨울의 기세가 드센 시기다. 절기로는 봄에 해당하지만, 찬 기운은 아직 물러갈 마음이 없는 것 같다. 그 시점에서 내리는 비는 봄이 왔음을 알리는 신호다. 우수(雨水)는 눈 대신 비가 내리며, 강의 얼음이 녹아 물이 되어 흐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수에 내리는 비는 온 천지에 봄이 왔음을 알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24절기 가운데 비 우(雨)가 들어있는 절기는 우수(雨水)와 곡우(穀雨)다. 우수의 비는 겨울 추위를 녹이는 비이고, 곡우의 비는 씨앗을 뿌리라는 의미다. 이 시기에 비가 오지 않으면 봄 가뭄이 온다고 한다. 봄 가뭄이 닥치면 뿌린 씨앗이 싹을 틔우기는커녕 말라 죽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봄비는 농사를 비롯한 만물의 생장에 큰 영향을 주기에 비 우(雨)를 넣은 듯하다. 특히 농경문화권에서는 농작물 수확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절실하다.우수에 내리는 비는 겨우내 얼었던 땅을 녹여주는 비다.‘우수 경칩에 대동강 물이 풀린다’는 속담도 있다. 또한 언 땅을 녹여주면서 흙속에서 겨울잠을 자던 벌레들을 깨우는 역할도 한다. 만물이 우수의 비로 인해 눈을 뜨고, 얼었던 흙도 윤기가 나기 시작하는 시기다. 농촌에서는 담벼락을 수리하고, 밭도 손질하면서 한 해의 농사를 준비하기 시작한다.음력 1월은 주역으로는 지천태(地天泰)괘에 해당한다. 지천태괘는 위로 음효 3개(☷)가 있고, 아래로는 양효 3개(☰)가 올라오고 있는 모양이다. 물상으로 보면 땅속에 숨어있는 양기가 땅 위로 올라오는 형국이다. 경복궁 교태전(景福宮 交泰殿)은 경복궁의 내전으로, 왕비의 침전(寢殿)으로 사용되었던 전각이다. 전각의 명칭인 교태(交泰)는 지천태괘(泰卦)의 천지교태(天地交泰)에서 유래한 것으로,‘하늘과 땅의 기운이 조화롭게 화합하여 만물이 생성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위에 있는 땅의 기운이 아래로 내려가고, 아래에 있는 하늘의 기운은 위로 올라가서 서로 화합하는 모습이기에 즐거울 태(泰)가 되는 것이다. 지천태괘의 반대는 천지비(天地否)괘다. 하늘은 위로 올라가고, 땅은 아래로 내려가서 영원히 만날 수 없고, 화합할 수 없으니 아닐 부(否)가 되는 것이다.명리에서 인월의 인(寅)은 동물로 호랑이다. 시간으로는 새벽 3시에서 5시까지다. 어둠이 사라지는 시간이다. 특히 종교인들이 새벽예불이나 새벽기도로 하루를 여는 때다. 호랑이가 여명(黎明) 무렵에 먹이를 사냥하러 나서듯이 낯선 환경에도 두려움이 없고 진취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어려움을 큰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창의적인 일을 시작하면서 역동적이고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저력을 가지고 있다. 인월에 태어난 사람의 장점이기도 하다.새해를 정월(正月)이라 부른다. 즉, 한 해를 바르게 살려면 첫걸음이 반듯해야 하기에 정월이라 불렀다. 호칭 하나에도 교육적이고 자기성찰이 되도록 했던 것이 우리 문화의 전통이다. 2024년에는 설날(2월 10일)이 지나면 우수, 그리고 정월 대보름(2월 24일)이 이어진다. 1년 열두 달 중 가장 큰 달이다.이 시기에 달풀이 또는 월령체(月令體)라는 노래를 불렀다.‘정월(正月)이라 십오야(十五夜)에 망월(望月)하던 소년들아, 망월도 하려니와 부모봉양 늦어진다’는 부모의 은덕에 보답하려는 정성 가득한 뜻이 담겨 있다. 그리고 쥐불놀이, 달집태우기와 보리밟기 등 풍속을 즐겼다. 달집태우기는 달집이 훨훨 타야 마을이 평안하고 풍년이 든다고 한다. 지금은 지자체에서 관광 또는 홍보 차원에서 행사하고 있다. 보리밟기는 서릿발에 뜬 보리를 살짝 밟아 통풍을 차단함으로써 뿌리가 마르거나 썩는 것을 방지하는 농사일의 한 가지다.옛날 농촌에서는 우수 즈음에 장(醬)을 담갔는데, 정월(正月)에 담그는 장을 으뜸으로 쳤다. 우수에 장을 담그면 약 40일 후인 청명과 곡우 사이(대략 4월)에 장물과 된장을 가를 수가 있어 된장을 발효하기에 최적의 날이 되므로 우수에 담근 장을 으뜸으로 쳤다. 류대창 명리연구자 이 시기에 장을 담가야 맛과 색이 변하지 않기에 추위에도 불구하고 장 담그기가 행해졌다. 세월이 많이 변했지만, 지금도 이때를 맞춰 장을 담그는 가정도 더러 있다. 시기로는 우수 전후 삼일, 정월 마지막 날인 오일, 그믐, 손 없는 날(음력 중 끝자리가 9와 0인 날)이다. 오전에 장을 담그면 장에 벌레가 생기지 않아 좋은 날이라고 여겼다.중국에서는 원소절(原宵節)이 정월 대보름이다. 대부분 지역에서 문 앞에 초롱을 달고, 오색 천으로 장식하여 불꽃놀이를 즐겼다. 마치 불타는 나무와 은색 꽃 같다는 뜻으로 화수은화(火樹銀花)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농경 문화권에서는 절기에 맞춘 놀이와 풍습을 통해서 마을 사람들의 협동심과 향토 사랑을 키웠다. 정월 대보름은 새해를 맞이한 뒤 처음 보는 큰 보름달이다. 달은 여성과 대지와 물을 상징하므로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가 많았다. 추운 겨우내 지친 몸과 마음을 춤과 노래로 달랬던 것이다. 오늘날 함께 즐겼던 절기 풍습이 점차로 잊혀지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그러나 수 천 년 동안 이어진 놀이와 풍습은 쉽사리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 몸속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2023-12-27

문과와 이과부터 사라져야 한다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사람은 사람을 모른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에 관해서 늘 궁금하다. 나는 사람들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다 보니, 사람을 유형별로 나누는 습관이 생겼다.혈액형으로 사람을 제 종류로 구분하더니, MBTI는 인간의 성향을 열여섯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대학입시와 관련하여 문과와 이과로 나눈다. 공교육의 문턱을 나서는 어린 학생을 두 가지 성향으로 나누어 오가지 못하게 설정하는 게 옳은 일일까. 다행히 최근에 수능은 문이과를 구분하지 않는 통합형으로 치른다.그러면서도 수학과목에 통계와 확률을 선택하면 ‘문과’로 이해하고 기하와 미적분을 선택하면 ‘이과’로 본다. 문과와 이과를 구분하는 뿌리깊은 인식구조가 아직 살아있는 셈이다.문과와 이과 구분을 없앤다는 정책이 저 ‘선택’ 탓에 오히려 왜곡되고 있다. 고등학교에서 문과가 사라지고 있어 교육계는 학교교육이 뒤틀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과를 선택하면 대학입시에 유리하여 문과 성향 학생들마저 이과 수학을 선택한다고 한다. 이과적 또는 문과적 성향의 구분이 과연 가능할까.학문과 전공분야에는 이과와 문과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선택지가 넘치도록 많다. 직장사회와 직업구조도 문이과를 구분하기보다 오히려 문과와 이과적 사고와 태도 가운데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기를 기대한다. 문과적으로만 생각하거나 이과식으로만 사고하는 세상이 이미 아니다. 문과와 이과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누구나 겸비해야 하는 소양성향쯤으로 이해해야 한다. 개인의 기호와 성향에 따라 상대적으로 더 가질 수도 있고 덜 가질 수도 있지만, 누구나 문과와 이과적 이해와 태도를 버무려 장착해야 한다.문제는 유형별로 발생하지 않는다. 기업경영은 문과인가 이과인가. 가정살림은 이과인가 문과인가. 상황은 언제나 복합적으로 발생한다. 통합적이며 균형잡힌 사고가 날마다 필요하다. 상황을 분석해야 하고 사람을 읽어야 한다. 숫자에 밝아야 하고 느낌을 짚어야 한다.배경지식도 필요하고 미래예측도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가. 문과와 이과라는 벽을 치고 칸을 만들어 서로 오가는 일마저 불편해져 버렸다. 문과와 이과는 함께 나눌 이야기마저 궁핍해져서 사회는 또 다른 양극화를 겪는다. 넘나들기 어려운 섬들이 생겼다. 문과적 소양과 이과적 능력을 따로 구분해서 배우고 가르치는 일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 학생들이 균형잡힌 인성을 형성해가도록 이끌어야 한다. 문학과 역사, 수학과 과학을 넘나들며 폭넓게 배우도록 도와야 한다.무엇을 가르쳐야 하나. 유네스코(UNESCO)는 네 가지 영역을 든다. 분석적 사고 (Critical Thinking), 상상과 창의(Creativity), 협력과 상생(Collaboration), 소통과 교류(Communication)라 한다. 문과나 이과의 구분은 보이지 않는다. 과목의 이름도 없다. 통합적으로 균형잡힌 교육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래를 바라보며 정상적으로 발전하기 위하여 우리 교육이 문과와 이과라는 케케묵은 구분부터 실질적으로 없애야 한다.

2023-12-27

수(手)개표의 부활

홍석봉 대구지사장 2002년 6월 지방선거 때 전자개표가 첫 도입됐다. 당시만 해도 신세계였다. 유권자가 투표한 투표지를 전자개표기(투표지 분류기)에 넣으면 광학센서가 기표 내용을 인식, 후보자별로 그 결과를 자동 집계했다. 기표 오류 투표지만 개표 요원이 수(手)개표했다.전자 투·개표는 1948년 제헌국회 선거 이후 50년 이상 눈에 익은 개표장 풍경을 확 바꿨다. 개표 요원들이 밤을 새며 분류·합산하던 작업을 기계가 대체했다. 자동 개표기의 등장이다. 2020년 21대 총선에선 다시 수개표를 했다. 당시 비례대표 등록 정당 수가 역대 최대인 38개, 투표용지 길이만 51.9cm에 달해 투표지 분류기의 처리 한계를 넘어섰다. 할 수 없이 수개표로 진행한 것이다.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내년 4월 총선부터 전수 수(手)개표를 도입키로 했다. 전자개표 뒤 사람이 투표용지를 전수 검사하는 방식이다. 전자개표기가 부정선거에 악용된다는 의혹을 불식하기 위해서다. 수개표가 시행되면 개표 과정의 투명성은 높아진다. 하지만 선거 결과의 지연 발표는 불가피하다. 21대 총선 직후 전자투개표에 대한 부정선거 의혹이 집중 제기됐다. 지난해 20대 대선과 지방선거에서도 부정선거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지난달 발생한 행정전산망 마비 사태는 투개표 불신 우려를 키웠다. 독일과 프랑스 등 일찌감치 전자 투개표를 도입했던 선진국들도 수년 전부터 직접투표와 수개표로 바꿨다. 해킹 위험 때문이다.수개표는 인공지능 시대에 아날로그 방식으로의 회귀다. 하지만 선거 부정 시비를 일소하고 신뢰를 담보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측면이 강하다. ‘소쿠리 투표’ 소동 등 선거 부실 관리로 불신을 초래한 선관위의 책임이 크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12-27

크리스마스 기도

내년 크리스마스엔 나를 포함, 모두가 행복했으면. 세상 돌아가는 데 무심한 나도 크리스마스에는 저절로 들썩인다. 산타클로스, 오색찬란한 트리, 흥겨운 캐럴, 코미디 영화, 외식, 선물, 데이트 등 동화적인 축제 분위기가 사람을 괜히 들뜨게 한다. 밖에 나가고 싶고, 누구라도 만나고 싶고, 맛있는 거 먹고 싶다. 놀이공원이나 백화점에 가고 싶다.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만30대의 마지막 성탄절에 약속 없이 집에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크리스마스이브 점심이다. 늦게 일어나서 고춧가루 팍팍 넣고 짜파게티 끓여 먹었다. 창문을 여니 간밤에 눈이 내렸다. 곱게 쌓인 눈을 보니 짜증부터 난다. 집단축제를 싫어하면서도 축제에 끼고 싶은 아웃사이더의 양가감정은, 낄 곳이 없다는 걸 아는 순간 비틀린 심술이 된다. 눈 대신 비나 실컷 와서 거리가 온통 질척거리면 좋겠다. 미세먼지가 가득하면 좋겠다. 건물 외벽을 통째로 성탄 특집 디지털 아트로 만들어 구경꾼이 넘쳐 나는 명동 백화점에 정전이나 되면 좋겠다. 그냥 다 망했으면 좋겠다.연휴의 나른함에 원고 마감을 깜박하고 있다가 급히 책상에 앉았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재재작년에도 나 홀로 집에서 보냈다. 30대를 돌아보니 크리스마스에 데이트 같은 걸 해본 기억이 없다. 낚시를 가거나 혼자 포장마차에서 허파볶음에 소주를 마시거나 티브이 보다 쓰러져 잠들었다. 대학 강사가 되면서부터는 성적 입력하느라 자체 가택연금이었다. 20대 때는 나가 놀기라도 했는데, 그래봐야 같은 공기 마시는 것조차 짜증나는 친구들이랑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술 들이부은 게 전부다. 오늘 저녁엔 뭐 할까. 그래도 성탄전야인데 소고기 구워서 와인이라도 마실까? 혼자라고 생각 말기, 힘들다고 울지 말기. 눈물이 앞을 가린다.몇 해 전 방영된 ‘공부의 배신’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종종 생각난다. 공부 열심히 하고 스펙을 아무리 쌓아도 처음부터 저만치 뒤쳐진 채 출발한 흙수저라서 꿈을 포기해야 하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서울 명문대 국문학과에 다니는 선혜씨는 학업과 알바를 병행한다. 얼마 되지 않는 월급으로 방세 치르고 공과금 내고 독서실 끊고 하면 생활비도 안 남는다. 근사한 외식이나 쇼핑은 사치다. 그런데도 그 빠듯한 용돈으로 엄마 선물부터 고른다. 착한 친구들은 이렇게 답답하도록 착하다. 자신을 위해선 한 푼도 쓰지 않는다. 하고 싶은 것 많고 멋 부리고 싶은 20대에 포기부터 배운다. 그래서 아예 밖에 안 나간다. 나가면 보이고, 보면 사고 싶어지니까. 유진목의 시 ‘누란’은 떠올릴 때마다 눈물 난다. “엄마 엄마는 맛있는 것 다 먹었어? 가고 싶은 곳 다 갔어? 하고 싶은 것 다 했어? 나는 못했어”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심리적 문제, 취업 실패 등 여러 이유로 외출 없이 방 안에서만 생활하는 ‘은둔 청년’이 서울에서만 13만 명이라고 한다. 전국적으로는 6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경제적 빈곤에 의해 비생산적 활동인 사교 모임, 여행, 외식, 문화생활 등을 금지당하고, 그저 ‘살아 있음’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생활비만 움켜 쥔 채 좁은 방에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이다. 무기력함이 임계점을 돌파하는 순간 마침내 너무 많은 결핍들은 아예 결핍을 무화시켜서 주체로 하여금 그 무엇도 바라지 않는 욕망 불구의 상태에 머무르게 한다. 그것만이 돈 안 드는 생활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크리스마스는 가슴 설레는 축제가 아니라 찬란한 빛에 더욱 짙어지는 유폐, 춥고 초라한 그늘의 감정일 뿐이다.한 때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가장 좋아한 복음성가에 이런 노랫말이 있다. “가난한 영혼 억눌린 영혼 지극히 작은 영혼까지 주의 사랑을 전하리라. 아름다운 그 사랑을…. 주님 사랑 그들에게 전하리라.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주님 사랑 온 세상에 가득하리라. 온 세상에 가득히.” 앞에서 몽니를 부렸지만 진심이 아니다. 주님 사랑은 됐고 축제의 흥겨움이나 온 세상이 함께 나누면 좋겠다. 수많은 선혜씨들은 왜 크리스마스의 들뜸까지 포기해야 하나. 그들은 가난한 영혼도 억눌린 영혼도 아니고 지극히 작은 자도 아니다. 크리스마스이브 하루만이라도 돈 걱정, 사치라는 죄의식 다 집어던지고 즐겁게 보내면 좋겠는데, 산타할아버지 가능해요? 안 울면 소원 들어준다면서요. 안 울게. 제발, 제발 좀 모두 행복하게 해줘요.

2023-12-26

마음의 서랍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서랍은 조금씩 깊어진다. /언스플래쉬 2023년도 끝나간다. 올 해는 조금 특별했다. 과거를 돌아보는 경험이 그 어느 때보다 많았기 때문이다.예기치 못한 과거를 마주했을 땐 쓸쓸함이 감돈다. 마음을 아프게 했던 사람과 방문했던 미술관 앞을 우연히 지난다거나 이제는 연락이 끊긴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나누었던 카페를 예기치 못하게 들리는 등 과거의 시간과 현재가 불쑥 겹쳐질 땐 해독할 수 없는 암호를 마주한 듯 난처해진다.A는 여전히 시를 쓸까? 늘 퀭한 얼굴로 유령처럼 미끄러지듯이 걷던 사람이었다. 말을 걸기 전까진 표정 변화가 크지 않아서 처음엔 다가가기 참 어려웠는데, 알고 보니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늘 피곤한 얼굴로 다니던 거였다. 강의도 자주 빠져서 게으름이 많은 사람으로 생각했으나 알고 보니 밤새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며 읽으며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이었다. 나와 A는 대학 졸업 이후 더 가까워졌지만 모종의 이유로 마음도, 거리도 멀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따금 A의 안부가 궁금해지지만 연락은 하지 않는다.어떤 일은 그대로 묻어두어 침묵으로 용서를 구하는 편이 나으니까. 그래서 나의 서랍 한 칸엔 미안한 사람들이 몇 있다. 미성숙함으로 내가 상처를 준 사람들. 잘 지내고 있길 바라며, 그들의 건강을 조심스레 빌어본다.올 해의 나는 병원을 꾸준히 다니고 있고 주기적인 상담도 받고 있다. 이런 변화를 소중한 이들에게 거리낌 없이 알리며 조금 더 변화에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그리고 과거의 나를 스스로 마주하는 횟수도 점차 늘고 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들, 미성숙한 것들, 강박에 가까운 것과 나의 취약점, 그리고 동시에 나의 장점 나만이 가진 특징, 나의 능력도 살펴보게 됐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다채롭고 특징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설렜다. 머릿속의 안개가 차차 걷히며 실체가 드러나는 기분이었고 그 실체는 생각보다 끔찍하지 않았으며 그 실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어떻게 미래를 그려나가야 하는지 기대 되기 시작했다.물론 그날그날의 사정에 따라 머릿속의 안개는 포악한 뭉게구름이 되기도 하고, 소나기가 되어 급작스레 온 몸을 젖게도 한다. 눅눅하고 축축한 기분이 들 때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시금 비가 멈추고 안개가 걷히길 기다린다. 그 시간 동안은 조급해하지 않는다. 감사하게도 시간은 당연하다는 듯 흐르고 변화하니까.이 시간들이 반복되며 여유를 보관할 마음의 서랍이 칸칸이 생겼다. 이젠 과거를 상기하며 불편한 외로움을 끄집어 내지 않을 수 있고, 지난 사람들의 안부를 죄책감 없이 빌어볼 수 있으며 나에 대해 조금 더 관대해지고, 좋고 싫음을 구분할 수 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그리곤 타인에 대한 사랑의 정의도 다시금 바라보고 있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 이해 받을 수 없는 지점이 있다고 해서 공허함을 느끼지 않는 것, 서로 다른 생각 앞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그들의 입장을 헤아리는 것. 물론 내가 너무 다치지 않을 만큼 건강할 정도로만.설날과 추석, 일 년에 두 번 나는 본가로 향한다. 서울에서 목포까지 그리고 더 들어가서 영암까지 3시간 반 정도 걸린다. 집에 가면 부엌 식탁 위엔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차려져 있다. 나를 기다리며 삼일 내내 장을 봤다는 엄마. 본가 왔을 때 많이 먹어두라며 툴툴거리는 아빠, 그리고 다섯 여섯 살 차이 나는 동생들까지 모여 가족의 형태를 이룬다.우리 가족이 만난 한 시간 정도는 늘 평화롭다. 하지만 그 이상이 넘어가면 우리의 대화는 또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우리가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라는 걸 인지할 때마다 나는 늘 커다랗게 자리한 화를 누르기 바쁘다. 하지만 곧 무력해진다.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 가족을 이루고, 이는 아주 평범한 모습이라는 걸 아니까. 사랑의 형태는 서툴고 어설프고 그래서 곧 깨어질 듯 불안정하다. 그래서 나는 자주 화를 내며 도망치지만, 이젠 이 또한 보통의 사랑의 형태임을 안다. 그러니 눈을 감고 호흡을 하며 저 멀리 있는 사랑을 불러본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마음의 서랍이 조금씩 깊어지고 있다.

2023-12-26

아름다운 마무리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한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다. 숱한 희비와 애환의 사연으로 점철된 2023년이 서서히 세월의 바톤을 넘겨주려 하고 있다. 새해가 시작된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해의 끝자락에 와있으니, 새삼 시간의 흐름이 빠르게 여겨짐은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는 반증일까?개인별로 느껴지는 시간의 속도가 나이에 비례한다는 말이 어쩌면 빈말은 아닌 듯하다. 지나간 날들은 한순간처럼 짧게만 여겨지고 다가올 날들은 녹록하지 않으니, 지난 일 탓하지 말고 오는 일을 쫓는 것(往事不諫 來者可追)이 중요할 듯싶다.저물고 마무리되는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서녘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피는 언덕이 아름답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즐겁게 퇴근하는 발걸음이 경쾌하다.또한 한 해를 성찰하고 정리하는 송년의 자리가 의미 있으며, 주어진 임기를 마치고 홀가분하게 떠나는 모습에서 당당한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다.이렇듯 모든 일에는 마무리가 잘되고 아름다워야 시작의 의미와 가치가 살아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항간에서는 일의 끝맺음을 잘하여 좋은 결과를 거둔다는 유종지미(有終之美)를 강조하는 것일까?한 해가 가고 새해가 오게 되면 만감이 교차하여 달라지고 바뀌는 것들이 많아진다. 즉, 12월이 지나면 한 살 더 먹게 되어 한 학년이 올라가거나 사회에 첫발을 내딛어 고대하던 일들을 새롭게 시작하는 새날이 되기도 한다. 반면, 해를 거듭할수록 도전과 열정의 강건함이 수그러들고, 직장생활도 마무리되는 정년퇴임의 시간을 맞이하기도 한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듯이, 짧게는 한 해가 마무리되지만 길게는 오랜 일터의 삶을 마감해야만 하는 비장(悲壯)의 시간이기도 하다.‘또 한해가 가버린다고/한탄하며 우울해하기보다는/아직 남아있는 시간들을/고마워하는 마음을/지니게 해주십시오//한 해 동안 받은/우정과 사랑의 선물들/저를 힘들게 했던 슬픔까지도/선한 마음으로 봉헌하며/솔방울 그려진 감사카드 한 장/사랑하는 이들에게/띄우고 싶은 12월//…./가라 옛날이여 오라 새날이여/나를 키우는 모두가/필요한 고마운 시간들이여…’-이해인 시 ‘송년의 시’ 중에서겨울과 12월은 만물이 완성되고 제자리로 돌아가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나이 들수록 시간은 더 빨리 간다고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사람과 사물과의 만남의 기회는 줄어들고 헤어짐의 순간은 잦아들기만 하니 세월따라 강퍅해지는 마음 탓일까? 아니, 어쩌면 더 비우고 가볍고 단순해지려는 연습인지도 모른다. 그리운 것들은 마디마디 꺾이고 세월의 여울은 흐느끼듯 웅성이는데, 멀어지고 잊혀지며 보내야 하는 것들이 아집에 사로잡히는 마음뿐이랴. 매사에 인정과 감사함을 남겨 놓으면 훗날에 다시 웃으면서 만날 수 있으리라.남겨진 삶 동안 어쩌면 다시 못 올 계묘년이지만, 유난히 파란만장하고 다사다난 했었기에 쉽사리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토끼의 숨가쁜 뜀박질이 용의 힘찬 비상을 기약하는 도움닫기가 되어, 새해 첫날의 설렘이 일년 내내 기쁨으로 열리길 믿어본다.

2023-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