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문경 돌리네 습지

우정구 논설위원 습지는 물이 흐르다 흐름이 정체되어 오랫동안 고이는 과정에서 생성된 곳을 말한다.높은 산이나 깊은 계곡같이 물살이 세고 빠른 곳에는 습지가 잘 발달하지 않는다. 넓은 강 주변이나 하구, 갯벌같이 물이 느리고 고이는 곳이어야 습지가 발달하기 좋은 곳이다.문경 돌리네 습지가 지구촌 습지 보전을 위한 국제협약기구인 람사르 사무국이 인정한 람사르 습지로 등록됐다. 국내서는 25번째며 경북에서는 처음이다. 람사르 습지 등록은 지질·지형학적으로 희귀하거나 생물서식지로서 가치가 높아야 인정이 된다. 돌리네 습지의 생태학적 중요성이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은 셈이다.문경 돌리네 습지는 일반 습지와는 다른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엉뚱하게 산 정상부에 습지가 위치해 있고, 습지 발달이 어렵다는 석회암지대에 형성돼 있다는 점이다. 특히 석회암지대에 형성된 습지로서는 국제적으로도 희귀성을 인정받고 있다. 국내 석회암지대 습지로는 유일하다.돌리네 습지는 전체 면적이 약 15만평에 이른다. 습지 둘레가 3.2km에 달하고 보통의 걸음으로 둘레를 도는데 한시간 정도 걸린다.또 돌리네 습지 일대에는 수달 등 멸종위기종과 천연기념물 등 모두 932종의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생태계 보존상태도 우수하다.습지는 생물에게 다양한 서식환경을 제공하고 수질을 정화하는 힘도 있어 인류에겐 유익한 생태계다. 전 세계적으로 5∼8% 정도 차지하는 습지는 대기 중으로의 탄소 유입을 막고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 양도 조절하는 기능이 있다.돌리네 습지는 지난해 환경부로부터 생태관광지역으로 지정을 받은 데 이어 람사르 습지로 등록됨에 따라 경북의 새로운 관광명소로써 주목을 받게 됐다./우정구(논설위원)

2024-02-13

또 다시 우려되는 ‘의료시스템 붕괴’

심충택 논설위원 새해들어 대구 수성구에서 ‘삼도부(三都賦)라는 베스터셀러로 인해 낙양의 종잇값이 올랐다’는 중국 서주시대 고사성어가 현실화하는 일이 생겼다. 수성구에 있는 일부 명문고에서 2024학년도 수능시험 전국 수석이 나오고 수도권 의과대학 진학률이 높아지자, 해당 학교주변 아파트값이 고공행진을 이어간다는 것이다. ‘의대 열풍’이 낳는 특이한 현상 중의 하나다.이런 사회분위기 속에서 정부가 최근 2025학년도부터 5년간 의대 정원을 매년 2천명씩 늘리겠다는 파격적인 발표를 하자, 사회 전체가 ‘의대입시 블랙홀’에 빠지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의대정원 확대는 우리사회의 가장 민감한 이슈인 ‘사교육비 뇌관’을 건드리기 때문에, 어느 정부도 선거를 의식해 피해왔었다.정원 2천명 확대는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 자연계 모집인원 총 4천882명의 41%에 해당한다. 카이스트와 포스텍(포항공대) 등 5개 이공계 특수대학 모집정원 1천600명 보다도 많다. 성적이 상위권에 속하는 자연계열 학생이면 누구나 의대진학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숫자다.사교육 시장의 큰손인 수도권 대형 입시학원들은 지난해 10월부터 이미 ‘의대 마케팅’에 들어갔다. 그들로선 의대정원확대가 ‘황금알을 낳는 신시장’이기 때문에 정부정책에 두 손 들고 환영하게 돼 있다. 성적이 상위권인 초·중·고 학생들과 N수생(재수생 이상) 상당수는 입시학원의 새로운 수요자가 될 것이다. 대구학원가도 이미 의대반을 신설하거나 정원을 늘리고 있다. 일부 입시학원에서는 대학 재학생들과 직장인들의 의대재수 관련 문의가 급증하자 야간반 개설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과학·산업계는 우수인재들이 너도나도 의사가 되기를 희망하면 연구인력을 어디서 구할지 걱정이고, 재학생들의 대규모 자퇴가 예상되는 이공계 대학들도 비상이 걸렸다.정부가 의대정원 확대와 함께 지역인재전형 확대 방침도 밝히자 약삭빠른 수도권 학부모들이 지방으로 자녀를 전학시키려는 움직임도 벌써 나타나는 모양이다. 2028학년도부터는 지역인재전형에 지원하려면 중학교도 해당 지역에서 나와야 한다.의료계는 지금 폭풍전야다. 대한의사협회 산하 16개 시·도 의사회는 내일(15일) 전국 곳곳에서 정부의 의대 증원에 반대하는 궐기대회를 열 예정이다. 의사협회는 “정부가 싫증난 개주인처럼 목줄을 내던지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격한 표현을 쓰며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상급종합병원 등 대형 의료기관에서 주요 업무를 담당하는 전공의들과 응급의학과 전문의들도 집단행동에 가세할 예정이다.반면, 정부는 ‘면허 취소’라는 카드를 꺼내며 강경대응할 방침이어서 의료현장의 혼란은 불가피하게 됐다.대구·경북 시도민은 지난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사태를 겪으면서 의료시스템 붕괴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피부로 체험했다. 앞으로 의대정원 확대를 두고 의료계 파업과 정부 강경대응이 이어진다면 응급환자들이 진료도 받지 못하고 숨지는 사태가 속출할 수 있다. 정부와 의료계는 이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

2024-02-13

신(新)? 신(愼)!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설 명절이 지났다. 으레 즐거워야 할 음력설을 쇠고 나면 대한민국 곳곳에선 앓는 소리로 가득하다. 즐거운 마음으로 가족, 친지를 방문했다가 덕담(?) 아닌 독담(毒談)을 한 바가지 듣고 온 탓이다. 취준생에게 취업 이야기, 입시생에게 학업 이야기, 다른 형제자매와의 비교, 결혼 이야기, 난임으로 걱정인 부부에게 출산율 이야기, 여기에 더해 본인들 자랑질까지. 풀 세트로 받고 나면 그야말로 즐거워야 할 명절이 생지옥이 돼버리는 건 당연지사. 즐거운 시간만으로도 부족한 설, 왜 이렇게 아웅다웅하는 일이 많아진, 천덕꾸러기 명절이 돼버린 것일까?설은 ‘신(新·새로운)’의 의미를 지닌 순우리말로, 한해가 시작되는 새날 곧 설익은 시간을 의미한다. 익숙했던 시간을 지나 낯선 시간으로의 첫걸음을 떼는 날인 것이다. 우리는 보통 새로움 앞에서 긴장하고 설레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안에 떨며 초조해하기도 한다. 이런 불안함은 새해 전날 잠자면 눈썹이 센다고 믿으며, 밤새는 풍속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즉 잠을 자지 않으면 날짜가 바뀌지 않을 테고, 낯선 생경함과 불안을 느낄 필요가 없으리란 믿음의 결과였던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익숙한 것이 좋지 새로운 것은 두렵고 불편하다. 그 불편한 날, 우리는 바로 가장 편안하고 마음의 안정을 주는 가족과 친지들을 만나는 것이다. 그것이 설날이다. 즉,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을 혼자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감당하는 것, 서로에게 덕담을 건네며 설 차례도 지내면서 말이다. 미지의 시간이자 불안한 새해를 축하하되, 조상과 후손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서로 소통하는 의식의 시간인 설.그렇기에 전통 사회에서는 이렇게 뜻깊은 날을 단 하루로 마감하지 않았다. 보통은 정월대보름까지 큰 신년 의례 기간으로 보았고, 이 기간에는 일월(日月)에 예를 표하기도 했고, 왕에게 도움을 준 동물들(돼지, 쥐, 말, 까마귀)에 대해 고마움으로 12띠 동물날을 정해 기념하기도 했다. 이 중 까마귀는 띠동물은 아니지만 ‘오기일’이라 하여 찰밥을 차려 특별히 고마움을 표했는데, 이 오기일은 다른 말로 슬퍼한다는 뜻의 ‘달도(601B悼)’라고도 불렀다. 이는 익숙함에서 낯섦으로 전환되는 기간의 정점인 보름까지는, 새로움에 대한 불안함으로 슬프고 걱정되니, 모든 일을 금하고 삼가 조심하며 꺼리는 ‘신(愼·삼가다)’의 기간으로 간주했음을 의미한다. 해서, 우리 선조들은 설날 호들갑스럽게 떠들거나 자랑 또는 타인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남에 대한 배려가 아닐뿐더러 스스로에게도 합당하지 않는 일이자 새해맞이 태도가 전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이렇게 편안함을 나누며 조심스레 불안함을 떨쳐야 하는 중요한 날, 덕담 아닌 독담을 주고받는다면 기분이 어떨까? 그것도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지들로부터라면?바야흐로 설은 막 지났다. 그러나 아직 보름까지는 며칠 더 남아 있다. 현재 여러 이유로 명절 증후군을 끙끙 앓는 많은 이들, 이 新의 시간을 스스로 삼가고 자숙하는 愼의 시간으로 되새기는 노력을 해 보면 어떨까. 아마 푸른 청룡의 해가 보다 더 의미 있게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니.

2024-02-13

밥값 하는 나잇값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설 연휴가 끝나고 다시 평범한 일상이다. 모처럼 가족 친지를 만나 새해 인사를 나누고 차례를 지내면서 조상 섬기는 마음을 되새기는가 하면, 떡국을 먹으면서 새해의 소망과 덕담을 나누는 모습들이 정겹기만 하다. 시대적인 상황과 모바일 환경의 변화로 온라인 성묘와 원격 세배, 원격 세뱃돈, 온라인 연하장 등 설날 풍속도가 다소 달라지긴 했어도 설날 아침 떡국을 먹는 풍속은 그대로인 것 같다. 설날에 떡국을 한 그릇 먹어야 한 살을 더 먹게 된다는 말이 생겨나 떡국을 ‘첨세병(添歲餠)’이라 부르기도 한다.새해 첫날이나 설날이면 떡국을 먹고 나이도 한 살 더 먹으며 살아온 세월이 아슴푸레하고 까마득하기만 하다. 돌이켜보면 수십 그릇의 떡국을 먹으며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왔는데 과연 자신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떡국이 의미하는 밥값이나 나잇값을 제대로 해왔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매일 끼니를 때우면서 가정이나 직장에서 밥 먹은 값은 제대로 했는지, 또한 지금까지의 나잇살을 먹으면서 사회와 세월에 부끄럽지 않게 나이값을 떳떳하게 해왔는지 내심 의아스럽고 걱정스럽기도 하다.사람들은 대부분 하루 세끼 또는 두 끼의 밥을 먹으면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러면서 툭하면 “밥값은 했나?” 또는 “밥값은 해야지”라는 말을 쓰곤 하는데, 그만큼 삶을 지속시키는 끼니가 중요하고 밥심으로 살아가는 나날이 소중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매일 밥을 먹으면서 가족의 끼니를 책임지고 구성원들을 위해 진정한 노력과 성의를 다했는가에 대한 자조적인 말로 쓰여 지기도 하지만, 주어진 임무나 위치에 걸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비아냥거리는 투로 일종의 욕처럼 쓰기도 한다. 그래서 특히 정치판이나 공직사회에서 일들은 제대로 하지 않고 자기 밥그릇이나 챙기며 무사안일에 빠져있는 상황을 빗대어 얘기할 때 많이 쓰여 지기도 한다.‘밥값은 참으로 어려운 숙제 중 하나다/쌀 한 톨이 일곱 근 나가는 무게라는데/지금 밥값 못하면 다음에 밥값할 수 있을까//밥값을 해야 한다 반드시 밥값하고 살아야지/스스로 다짐하고 되새기며 밥을 먹는다/그래, 꼭 밥값은 하고 살아야지 암 살아야지//저녁에 다시 밥을 먹으며 밥값을 생각했다/더운 김 모락모락 나는 밥 냄새 맡으며/‘사람이 밥이고 밥이 사람이다’라고 써본다 -윤석홍 시 ‘밥값 했는가’ 전문밥값도 겨우 하는 사람들이 나잇값은 제대로 하고나 있을지 짐짓 궁금해진다. 나이에 어울리는 말과 행동을 낮잡아 이르는 나잇값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나이에 걸맞지 않게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언행을 일삼는 사람들을 볼 때면 개탄스럽고 한심스럽기만 하다. 처세에 능하여 기회를 잘 타는 사람들보다 열심히 정직하게 일하며 밥값을 올바르게 하고, 나잇값을 제대로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존경받는 사회가 좋은 세상을 만들어줄 것이다.자신 있게 밥값 하고 나잇값 하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닐테지만, 소리 없이 모두 밥값 하며 나이값을 해나가는 사람들로 사회가 한층 건전하고 밝아질 것이다.

2024-02-13

대통령의 소통, 무엇이 문제인가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윤석열 대통령은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기는 이유를 “국민과 소통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는 “항상 언론과 소통하고 언론 앞에 자주 서겠다”고 하면서 “질문 받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했다.하지만 ‘도어스테핑’은 6개월 만에 중단됐고, 신년기자회견도 하지 않은지 2년째다. 국민은 왜 청와대를 나왔느냐고 묻고 있다.무엇이 문제인가? 우선 대통령의 소통 대상이 ‘제한적이고 선택적’이라는 사실이다. MBC기자는 대통령 전용기 탑승을 배제한 반면, 조선일보에는 대통령 단독인터뷰라는 특혜를 줬다.소통의 본질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 내가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나는데 있다. 편안한 여당, 우호적 언론만 상대하는 것은 소통이 아니다. 야당이나 비판언론이 불편할 수는 있겠지만 그들의 고언(苦言)은 국정운영에 좋은 약이 된다. “언론과의 소통이 국민과의 소통”이라고 했던 대통령이 불편하다고해서 기자회견을 피한다면 되겠는가.더욱 심각한 문제는 대통령의 소통방식이 ‘일방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는 사실이다. 소통은 ‘민주적 대등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상호적이어야 한다.대통령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듣고 싶어 하는 문제에 답해야 소통이 된다. ‘홍보’와 ‘소통’의 차이는 ‘쌍방향 여부’에 있다. 국무회의의 일방적 중계는 홍보의 일환이며, 대통령실에서 기획했다는 ‘민생토론회’는 참석자와 질문자를 사전에 선별한다는 점에서 소통이 아니라 ‘쇼(show)통’이며 일종의 홍보다.소통의 요체는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통한 공감능력에 있다.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욱 중요한 까닭이다. 소통을 위해서는 ‘대화의 수평적 관계’가 보장돼야 한다. 제왕적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 권위적으로 대화의 주도권을 장악하면 제대로 소통할 수 없다. 언론(조선일보)이 지적한 ‘59분 대통령’이라는 표현은 불통의 상징이다. 대통령이 상명하복의 검찰조직문화에 익숙하고 자기주장이 강하니 참모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하버마스(J. Habermas)는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에 기초한 의사소통, 즉 홀로 결정하는 ‘나’가 아니라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우리’가 보다 건강한 사회를 만든다고 했다.소통의 최대 장애요인은 대통령의 오만과 독선이다. 야당과 국민을 계도(啓導)의 대상으로 보면 소통할 수 없다. 군림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대화하는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참모들에게 “소통을 강화하라”고 지시만 할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솔선수범해야 한다.재임 8년 동안 158회의 기자회견을 한 미국의 오바마(B. H. Obama) 전 대통령은 “기자들의 날카로운 질문이 나를 단련시켰다”고 했다. 언론과의 소통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다.반면에 윤 대통령은 올해도 생방송 신년기자회견은 하지 않고 KBS와의 대담을 녹화, 편집해 3일후에 공개했다. ‘도어스테핑’을 하던 그 대통령이 아니다. 소통을 위해 집무실을 용산으로 옮기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2024-02-12

투표용지 길이?

홍석봉 대구지사장 지난 21대 총선에서 비례대표 선거에 나선 정당은 35개다. 역대 가장 많았다. 비례대표 투표용지 길이가 사상 최장인 48.1㎝에 달했다. 투표용지가 너무 길어 자동투표용지 분류기를 사용할 수가 없었다. 결국 수작업을 해야 했다.이를 두고 당시 북한 선전매체는 ‘정당 홍수가 터졌다’며 비아냥댔다. ‘괴이한 48.1㎝’ ‘역대 최장의 선거표’라고 비꼬았다.제22대 총선 투표용지 길이는 21대 총선보다 더 길어질 전망이다. 지난 총선과 마찬가지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적용되며 위성정당 난립이 예고되고 있기 때문이다. 제3지대 신당 등장도 투표용지 길이에 한 몫할 것으로 보인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12일 현재 등록 정당 수는 49개다. 이번 총선에서 지역구 및 비례대표 선거에 참여하는 정당 수는 후보자 등록 마감일인 오는 3월 22일 최종 결정된다.여야는 위성정당 출범작업을 진행 중이다. 국민의힘은 오는 15일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 창당대회를 가질 예정이다. 민주당은 범진보 소수정당과 함께 위성정당을 꾸리기로 했다. 조국, 송영길 신당 등이 줄줄이 등장할 전망이다. 정치권이 개선약속은 외면한 채 4년 전의 ‘꼼수’를 되풀이 하고 있다.거대 양당 간의 비례의석 나눠 먹기와 선거법을 피하기 위한 각종 꼼수 선거운동도 재연될 조짐이다. 국민들은 정당의 실체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투표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생겼다. 국민을 우롱하는 정도가 지나쳤다. 수작업 개표 등 예산 낭비도 불가피해졌다.이번 총선에선 투표지 길이가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기네스북에 올라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국제 사회에 조롱거리가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4-02-12

함께 가는 지구촌, 정겨운 미래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지구촌에 살아가는 사람, 동물, 식물, 미생물 등 모든 생명체는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원칙에 따라한 번 살다가 간다. 어떤 생명체라도 고귀하고 소중한 것이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은 더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지구촌 실상은 잘 사는 나라, 못 사는 나라, 한나라 같은 민족 간에도 신분에 따라 차별을 받는다. 조선시대를 보더라도 양반과 상민, 천민 등 살아가는 삶의 질이 다르기도 했고 오늘날에는 선진 민주화를 통하여 누구나 성장의 기회, 존중 받는 사회가 되었다.최근 일본에 사는 외국인은 300만에 육박하고 전체 인구의 2%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한국도 중국, 베트남, 태국 등 동남아 외국인이 250만을 넘어서고 있다. 이제 단일민족, 백의민족 하며 독자적으로 울타리를 치고 살아가는 지구촌은 소수 민족 외는 없는 것 같다. 국가의 경계선은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이미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글로벌 기업들은 투자에서부터 기업 운영체계, 이익 분배 등 자국 기업이라고 말하기에는 기업 경영이 세계화 되어 있다.필자는 코로나 이후 수 년 만에 열린 일본 오사카대학 동창회 총회에 갔다. 20여 년 전 유학중일 때와는 시내 거리와 사람들의 분위기가 사뭇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길거리에서 동남아 언어를 쉽게 들을 수 있고 얼굴 색깔도 다양하다. 2차대전 후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한 일본이지만 저출산으로 노동자의 손발이 부족하여 동남아 인구가 크게 유입되는 변모된 거리의 모습이다. 호텔 근처 축제가 열리고 있는 곳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중국, 베트남, 태국, 미얀마 등 일본에 사는 외국인의 축제인데 각 나라의 문화 특징을 살려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참여자 모두의 표정은 밝고 정겨움 마저 느껴졌다. 이것은 일본사회와 지역에서 이방인을 위한 사회적 배려와 친절이 몸에 밴 문화가 주는 정겨움이 아닐까.일본인은 두 가지의 국민성이 있다. 하나는 사무라이 정신에서 이어오는 ‘룰을 지키는 매뉴얼 문화’이고, 하나는 ‘혼네다테마에(本音建前)’로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치켜세운다는 뜻이다. 이것을 속과 겉이 다르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고 원류의 뜻은 아닌 것이다. 상대에게 조건없이 친절하게 대하는 국민성과 사회적 제도, 인간적인 존중과 배려가 외국인이 일본 사회에 어렵지 않게 적응하는 키가 아닐까.또 다른 사례를 보면, 일본은 문부성 주관 동경과 오사카 중심으로 나뉘어 외국인 유학생을 초청해서 ‘선상대학’ 이름으로 하루 유람선을 타고 유학생활 중 어려운 점을 서로 나누고 합당한 내용은 제도에 반영하여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하는 사회 문화가 오래 전부터 있었다.외국인이 선진국에 오는 것은 유학, 일자리, 이민 등의 이유가 많다. 쉽지 않은 타국 생활에 따뜻한 미소와 배려가 어울림이 되는 것이다. 사회적 제도와 문화는 사람들의 생각에서 나오는 산물이다.문화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오랜 역사에서 흐르는 국민성과 성숙된 사회적 제도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정겨운 사람 관계를 만드는 것은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과 말투와 태도에서 나온다.

2024-02-12

‘성직자들의 타락’

강길수 수필가 우리 사회가 걱정된다. 총선 두 달 앞. 예비후보들의 나라 사랑 없는 자찬 문자 폭탄에 짜증이 난다. 엎친 데 덮쳐, 한 자칭 성직자의 타락행위가 우리를 분노케 한다.성직자 신분을 정치공작 도구로 쓴 사악함을 국민은 목도 했다. 목사를 자처하는 사람이 대통령영부인을 상대로 함정 몰카 범죄를 자행한 것이다. 그는 재작년 성직자 신분과 동향 출신을 내세워 관저 입주 전인 영부인에게 접근, 아무도 모르게 선물전달 몰카를 찍었다. 1년 반 가까이 두었다가 총선 직전에 영상을 공개하며, 무슨 투사인 양 인터뷰하는 것을 보았다. 저의가 무엇일까.어느 종단(宗團) 할 것 없이 성직자가 정치꾼으로 타락하여, 국민을 허탈케 하고 종교에 정나미가 뚝 떨어지게 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재작년 성공회와 가톨릭의 성직자가, 해외 순방 중인 대통령이 전용기에서 떨어지기를 비는 기도문과 그림을 SNS에 올려 국민과 신자들을 절망케 했었다. 어떤 종단은 성직자들이 이권개입 칼부림까지 한 적도 있다. 지금, 우리 사회와 종교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종교는 삶의 궁극 목적을 알려주며, 현세초월의 인생길을 안내하는 주체다. 하여, 성직자는 신앙 인도자이며 모범이다. 성직자가 현세에 집착하면, 그게 바로 타락일 것이다. 정치에 관여하거나 통일운동을 하는 성직자들은 대체 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 걸까. 자기네가 신봉하는 교리나 신앙 규범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라야 영위될 수 있음에도 하나같이 좌파적이거나 친북, 친중적일까. 오랫동안 성당에 다닌 나에겐, 이해할 수 없는 성직자 타락 현상이다.우리가 누리는 자유, 민주, 풍요는 절대로 그저 주어지지 않았다. 우리 사회는 벌써 이를 잊은 건가.오늘의 나라 번영은 걸출한 선각 지도자들과 근면한 선배 국민이 함께 피땀으로 이룩한 것임을, 삿된 정치판에 물든 타락 성직자들이 알기나 할까.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은 구원이란 종교적 진리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희생이었음이 사실이다. 죄 없는 종교 성자(聖者)들을 지금도 타락 성직자들이 능욕하고 있다.타락 성직자들은, 그 종교의 창시자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눈에 보인다. 십자가 길을 걷지 않거나, 고행길을 따르지 않는 모습들이 드러나니까 말이다. 신자들은 종교집회에서 정치 선동을 당하고 싶지 않다. 함께 십자가를 진 성직자, 같이 고행하는 성직자와 살고 싶은 거다.선교와 통일운동을 겸하는 성직자라면, 북한의 인권·자유·민주를 신장시키는 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성직자라고 정치적 신념을 못 가질 이유는 없다. 하지만, 종교의 공적 집회에서 성직자가 본인의 정치적 신념을 신앙이나 교리처럼 주장하면, 그가 바로 하늘에서 땅으로 타락한 것이다.자유민주주의는 과정이 결과만큼 중요한 정치체제다. 만일, 선거 과정이 부정했다면 무효이듯, 성직자의 사악한 정치참여는 그의 타락이 된다. 부디 우리 사회의 성직자들이, 본분에 어긋나는 타락의 길을 가지 않기를 빈다. 그리하여, 국민이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기를 소망한다.

2024-02-12

돔배기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대구 경북 방언으로 방언시를 즐겨 짓고, 경상도 방언시집을 많이 출간한 상희구 시인의 시 중에 ‘돔배기’라는 시가 있다.“지삿날 큰집 백모님이/음복식을 나누어 주실 때/돔배기는 항상/제기 맨 우에 얹혀있었다./당당하게, 돔배기는 모든 지사 음식을 앞으로 끌어간다./지가 지일로 앞장서고/콩나물 고사리나물 무시나물…./소고기 산적도 끌어가고/민어 산적도 끌어가고…./이렇게 돔배기는/모든 지사 음식을 다 끌어간다/”경상도 제사상에서 으뜸인 제수가 돔배기임을 알 수 있는 시이다.돔배기는 무엇인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돔배기를 찾으면, 도마의 방언, 도막의 방언, 돔발상어의 방언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모두 잘못된 풀이다. 오픈사전에서야 “제사상에 올리는 상어고기”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가장 근사한 정의다. 더 정확하게 정의하자면 “주로 경상도에서 제사상에 올리기 위해 상어를 네모나게 토막낸 것”이어야 한다.그런데 경상도라도 모든 지역에서 돔배기를 제사음식으로 올려 쓰지는 않는다.우리말의 물음법은 여러가지 유형이 있다. 대표적으로 wh-의문사가 들어가는 의문과 의향을 묻는 yes no-의문법으로 크게 구분한다. 경상북도 방언은 의문사 의문법의 어미에 따라 크게 3그룹으로 구획된다. 대구, 경주, 포항지역은 “-는교”형, 안동, 영주, 의성 지역은 “-니껴”형, 김천, 구미, 선산 일부 지역은 “-여”형으로 나뉜다. 이들 지역의 방언 차이는 아마도 큰 산맥이나 강 등의 지형으로 구획되는 것 같은데 오랜 역사와 문화의 차이와 구분과도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제의의 절차나 형식, 제수음식 차이점을 보인다.“-니껴”형의 안동권역에서는 제수로 반드시 문어를 사용한다. 이 지역에서는 문어 없는 제사는 제사가 아니다. 문어(文魚)가 글을 숭상하는 안동의 문화와 관련있고, 문어의 먹물이 문방사우 중 먹을 상징한다는 것은 제의관습 이후의 해석일 것이다. 그런데 고대국가 신라권역이었던 “-는교”형의 대구, 영천, 경주, 포항지역에는 돔배기를 반드시 제수로 올린다. 돔배기 없이는 제사를 지내지 못한다고 할만큼 제수 가운데 최상으로 손꼽는다. 돔배기를 길게 네모나게 잘라 꼬치로 꿰어 구운 돔배기 산적이 있고, 상어껍질이나 연한 뼈와 함께 무를 토막내어 푹 끓인 어탕국도 빠지지 않는다.경산 진량 고분이나 대구 불로동 고분에서 상어의 등뼈가 발굴된 것으로 보아 “-는교”형 지역에서 돔배기가 제수나 음식으로 사용된 역사가 무척 오래임을 짐작할 수있다. 동해안을 타고 신라로 내려온 예족계열의 문화적 연계성은 아닐까 조심스러운 추정을 해본다.같은 경상도 안에서도 돔배기가 “-는교”형 지역에서만 사용하고 “-니껴”형 지역인 안동권으로 넘어가지 못했다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문화 현상이요, 연구해 볼 만한 문화유산인 셈이다.한국의 근현대시 100년, 그리고 한국현대시단을 대표해온 한국시인협회 50주년을 맞아 우리가 살고 있는 국토를 노래한 시들을 모아 엮은 작품집이 있다. ‘노래하자 아름다운 우리 국토를 : 국토사랑시집’(한국시인협회, 천년의 시작, 2007)에 필자는 ‘돔배기’라는 시를 발표한 적이 있다. 경상도 “-는교”형 지역에 살지 않아 돔배기를 먹어보지 못한 분들은 이 시를 통해 돔배기의 맛을 경험해 봐도 좋을 듯하다. 푹 삭힌 상어고기를 네모나게 토막(돔박)을 낸 돔배기의 싸한 맛과 코를 찌르는 듯한 냄새의 맛을…. 어쩌면 이 맛은 잘 삭아서 익은 전라도 홍어의 깊은 맛과 비슷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요즘은 냄새나고 알싸한 맛의 삭힌 돔배기를 잘 먹지 않는다.설날, 제사상에 오른 귀한 음식 돔배기를 소재로 한 시작품을 통해 오랜 역사의 틈새에 비친 우리 제사 문화의 잔영을 찾아보았다.

2024-02-12

로마제국 침탈의 기록

서기 83년 로마가 스코틀랜드를 침략했을 때다. 브리튼 섬 북부 스코틀랜드 일대의 칼레도니아족은 사활을 걸고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칼레도니아 칼가쿠스 족장은 로마인을 ‘세상의 악당’이라고 비난했다.“약탈과 학살을 하면서 웃기게도 제국이라 칭하고, 세상을 사막으로 만든 후 평화라고 거품 문다”멋진 조상을 둔 민족이다. 그들은 칼레도니아, 즉 ‘강인한 민족’이란 뜻처럼 로마로부터 끝끝내 지켜냈다.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아우렐리우스, 콘스탄티누스, 유스티니아누스 등 이들이 엮어냈던 로마는 ‘세계의 머리(Caput mundi)’, ‘영원한 도시(la Citt00E0 Eterna)’라고 불렸다. 페르시아, 이집트, 잉카, 무굴, 오스만트루크, 몽골 등 무작위로 떠오른 제국 중에서도 로마가 앞서는 것은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세계의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정복지라 해도 도로와 수로를 만들어 시민의 일상적인 삶에 혜택을 골고루 부여했던 그들만의 지배방식에 있었다.도로란 반란에 대비해 정벌을 위한 것일 수도 있었고, 변방 민족이 침략했을 때 신속하게 대처할 기반이기도 했다. 로마가 그들이 야만족이라 부르는 민족에게 유린당할 때 이용되기도 하지만 말이다.조선시대 ‘무도안전(無道安全)’이란 말이 있었다. 도로가 없어야 오랑캐와 왜구 침략을 늦출 수 있다는 사고와 비교하면 들숨 날숨이 가빠진다. 약탈에 무방비로 노출된 변방의 하층민을 구해 줄 여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왜구가 기승을 부릴 때 섬을 비우는 공도정책(空島政策)을 폈다. 왜구 침략에 노출되지 말라는 뜻이다. 섬에 들어가 살면 죄를 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도가 우리 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민족 질긴 삶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각설하고, 로마제국의 참 매력적인 특징은 인종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정 세금을 내면서 군사, 정치, 행정제도에 온전히 따르기만 하면 로마 시민이 될 기회가 제공되었다. 이뿐 아니라 로마 황제까지 오를 수 있는 기회의 제국이었다. 차별이 만연한 현대와 비교했을 때 파격적인 질서다. 기실 차별에 증오심을 느껴본 인간일수록 차별에 앞장선다. 굴욕을 맛본 그들로서는 신분 차별철폐는 너머의 영역인 까닭이다. ‘혹독한 시집살이를 해본 며느리가 지독한 시어머니가 된다.’란 우리네 옛말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이랬던 로마였지만, 뼈아픈 침탈의 역사도 있다. 제국이 관리해야할 땅이 비대해질수록 이민족 침략이 기승을 부렸다. 제국의 땅을 통제하고 다스리는 데 기력이 달리면서 이민족은 살금살금 간 보기로부터 시작해 점점 노골화된다.멀게는 기원전 390년 켈트족에 의해 7개월 동안 탈탈 털린 것을 시작으로, 서기 384년 훈족의 침략으로 서로마 멸망, 뒤이어 406년 동고트족, 반달족, 알란족 등 이민족 침략, 410년 서고트족 로마 침탈, 이후 반달왕국의 알라리크에 의한 로마 완전정복, 439년 반달왕국에 의한 지중해 침탈, 특히 455년 로마는 반달족에 의해 보름간 남김없이 털리기도 했다. ‘반달리즘’이란 이때를 두고 한 말이다. 교황 레오1세는 보물을 찾아내기 위해 고문하지 말고, 불태우지 말고, 죽이지 말라 조건을 걸었다. 반달왕국 알라리크 왕은 약속을 지켰다. 단 약탈 기간에 대해 정해놓지 않았던 탓에 보름간 교회 지붕까지 뜯겼고, 황녀까지 포로로 잡혀가면서 로마는 폐허로 변했다.기독교인에 의한 약탈도 빠질 수 없다. 1204년 교회 십자가를 내려 장검으로 사용했던 약탈의 끝판 4차 십자군이 저지른 동로마 비잔티움에 대한 악행 역시 엄청난 후폭풍을 가져왔다. 비잔티움 제국이 식물 상태로 놓이면서 로마가 본격적으로 기울기 시작했다.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술탄 메메트 2세의 약탈도 기억해야 한다. 그는 3일간 약탈을 허락했다. 그러나 하루 만에 중지 시켰다. 더는 털 곳이 남아 있지 않았고, 죽이고, 강간하고, 노예로 끌고 간 후 남은 것이 없었던 까닭이다.이뿐 만이 아니다. 또 한 번 기독교인에 의한 파괴의 아픔도 겪는다. 1527년 합스부르크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가 메디치 가문 출신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변신(프랑스 프랑수아 1세와 결탁)에 격분해 2만이 넘는 군사를 보내 로마를 무참하게 짓밟았다. 야만족은 약탈에 만족했지만, 이들은 살인 방화 강간은 물론 도시를 파괴하고, 오랜 서류를 불사르는 만행을 저지르고서야 멈춘다.기이하게도 침략당하면서 비대해지는 나라도 있다. 자칭 세상의 중심이라 여기는 중국이다. 황허 문명, 양쯔강 문명을 자랑하지만, 속내는 이민족 침략에 시달리다 대항하고, 정벌을 꾀하다 먹히면서 비대해지는 중화사상, 즉 문화의 자존감을 지켜온 것이 원인이다. 만주족에 의해 청나라가 태어났고, 더 멀리는 원나라, 거란, 말갈, 서융, 북적, 동호 여진도 중국에 땅을 확장하는 데 한몫했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4-02-12

청년을 어찌해야 하는가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세대를 포위했었다. 지난 대선을 이긴 보수여권이 청년의 표를 끌어모았다. 기존 60대 이상과 신규 30대 미만 유권자의 마음을 사는 데 성공했다.청년들의 표심은 이념이 기준이었을까. 그렇지 않아 보였다. 실용에 뿌리를 두고 현실에 밝은 젊은이들의 시선을 살펴야 했다. 가르치려 하기보다 배워야 했고, 말하려 하기보다 들어야 했다. 젊은이들이 만들어낸 또 다른 골칫거리로 생각하지 말고 한 세대의 성난 몸부림으로 해석해야 했다. 진보도 보수만큼이나 기득권력이 되어버린 이상 새롭게 나타난 경보가 아니었을까. 다시 생각하라는 경고장이며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독촉장이었다. 트럼프가 다시 대세가 됐다는데, 우리 보수는 잘하고 있었는지. 미국의 인종갈등이야 경계선이 분명하지만, 한국에서 세대차이는 구분선이 모호하다. 표심으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다. 우리 청년들은 그만큼 절박했던 터였다.혜안과 통찰은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빛나는 법이다. 명철과 지혜도 위기를 만나야 번득인다. 케케묵은 이념을 고집하기보다 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용으로 나서야 한다. 이론보다 현실에 도움이 되는 정책이어야 하고 하루하루의 삶에 보탬이 되는 결정이어야 한다. 젊은 세대가 일상으로부터 용기를 회복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꿈과 용기만 있어도 회복과 성공에 이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줘야 한다. 세상만 바뀐 게 아니었다. 사람이 더 많이 바뀌었다. 그들이 당신을 지지하려면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생각해야 한다. 갈등과 혐오가 들끓는 세상에 ‘청년’이 열쇠로 등장하였다. 이번에는 누가 젊은이의 마음을 획득할 터인지 귀추가 주목된다.가벼운 구호로는 부족하다. 진심이 통해야 하고 진정이 보여야 한다. 성과가 있어야 하고 생활이 나아져야 한다. 기대만 높일 게 아니라 실질로 승부해야 했다. 정권을 심판한다는 총선의 표심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떠올랐던 청년들의 마음이 이번에는 누구를 지지하게 될까. 실용이 가라앉고 이념이 떠오르는 외침은 공허할 뿐이다. 과거에 혹 껍데기와 겉치레가 통했다면 미래로 건너가는 다리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혀야 한다. 모호한 외침은 수명을 다했으며, 분명한 길이 느껴져야 한다. 세대는 흐른다. 어제의 60대가 아니고 과거의 20대가 아니다. 결정의 방향이 다른지 몰라도, 모든 세대는 똑똑하고 현명한 방향으로 움직여 간다. 거짓말과 현수막에 쉽게 현혹될 국민이 이제는 없다.정치가 달라져야 한다. 선거판도 바뀌어야 한다. 민심을 따라가려면 아직도 멀었다. 국민은 저 앞에서 달리는데 정치는 구태만 반복하는 모습이 아닌가. 국민의 갈급함이 어디에 있는지, 청년의 절박함이 무엇에 달렸는지 헤아리고 살펴야 한다. 낡은 이념과 해묵은 지방색은 벗어야 하고, 새로운 세대와 변화하는 시대의 표심을 획득해야 한다.청년은 오늘도 지켜보고 있다. 한 번은 몰라도 연거푸 속일 수 없다. 진심으로 겨루고 실질로 승부해야 한다. 젊은이의 표심이 궁금해진다. 청년이 살아야 나라가 사니까.

2024-02-07

좀비 축구

홍석봉 대구지사장 좀비(zombi, zombie)는 살아 있는 시체를 말한다. 아이티를 비롯한 여러 나라가 믿는 부두교에서 유래했다. 부두교는 16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서아프리카에서 서인도 제도의 아이티로 팔려 온 흑인 노예들이 믿던 종교다.부두교에 좀비는 부두교의 사제 보커(bokor)가 인간에게서 영혼을 뽑아낸 존재다. 보커에게 영혼을 저당잡힌 사람은 지성을 잃은 좀비가 돼 보커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보커는 이 좀비들을 노동자로 착취하거나 팔아버리기도 했다.대중 매체에 등장하는 좀비는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인해 다시 부활한 시체를 일컫는 단어다. 영화와 소설 등의 공포 및 판타지 작품에 주로 등장한다. 보통 부패한 시체가 걸어다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서아프리카 부두족에서 유래된 말 ‘좀비’가 현대 사회에 화려하게 부활, ‘좀비족’이라는 용어가 탄생했다. 좀비족은 주체성이 없이 로봇처럼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현대 사회에서 요령과 처세술만으로 무사안일하게 살아가는 직장인들을 비꼬는 말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대기업의 관료화 현상에 비유하며 경영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한국 축구 대표팀 클린스만 호에 ‘좀비 축구’라는 별명이 붙었다. 사우디전에서 승부차기까지 간 끝에 승리했다. 호주전은 연장전에서 손흥민의 프리킥 결승골로 가까스로 이겼다.조별리그 2, 3차전에서도 후반 추가시간에 극적인 골을 넣었다. 분명히 죽은 것 같은데도 끝내 골을 넣고 살아났다. 집념과 끈기의 태극전사들이었다. 축구팬들이 열광했다. 하지만 ‘좀비 축구’는 결승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요르단에 2대 0으로 참패했다. 체력 한계와 전술 부재가 치명타다. 결정적인 순간 좀비는 없었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4-02-07

역귀성(逆歸省)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설날을 집에서 쇠지 않은 지 꽤 여러 해다. 차례는 성묘로 대신하고 설날엔 가족여행을 같이 했다. 모두 모이면 10명, 경주나 부산엘 갔다. 심지어 대구라도 집 아닌 호텔에서 만나 느긋하고 여유로운 명절 연휴를 즐긴다. 며느리들에게 명절증후군 따윈 물려주고 싶지 않은 나의 결심과 용단이 늘 뿌듯하다.얼마 전 남편 생일로 온가족이 모인 김에 설날 장소를 상의했다. 며느리들에게 멋진 제안을 해보라고 했더니 핸드폰을 꺼내들고 날짜를 확인한다.올 설날은 예년보다 좀 늦어 2월 중순께 있다. 큰 아들이 업무 때문에 2월 내내 많이 바쁠 거란다. 특히 인사이동이 있어 설 연휴를 비우기가 어렵단다. 작은 아들도 마찬가지로 설연휴를 온전히 쉴 수 없을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좋다. 올해는 모이지 말자. 각자 가족끼리 오붓하게 지내는 걸로 하자. 만약 아버님이 서운해 한다면 내가 설득시키겠다. 아들들의 직장형편을 잘 아는 남편은 얼마든지 이해할 양반이다. 그러자 오히려 며느리들이 서운해 하는 기색이었다.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큰며느리가 운을 뗐다. 그래도 설날인데 오고 싶어요. 애아빠는 일하고 우리 셋만 올게요. 작은며느리도 저도 같이 쇠는 게 좋아요 박자를 맞춘다. 우리가 서운해할까봐 하는 말이라 생각해서, 난 괜찮다며 오히려 우리끼리 온천이나 가고 싶으니 설모임은 생략하자. 그러자 큰며느리가 제안했다.그러면 이번 설날 모임은 서울로 정해요. 호텔은 제가 알아볼게요. 형편이 여의찮은 사람은 두고, 아버님 어머님과 우리들만이라도 함께 해요.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잠시 또 정적. 고맙고 기꺼웠다. 좋아 그렇게 하자. 대구 손주들이 서울 구경을 하는 것도 좋겠다. 저희끼리도 종종 서울로 오라거니 서울 구경하고 싶다거니 얘기하는 걸 본 적 있었다. 그렇게 뉴스에서나 듣던 말 그대로 역귀성이 결정되었다.친구 중에 안동 명문가 종녀가 있다. 4대 봉사와 묘사에 명절 차례까지 1년 10번 넘는 제사로 손마를 날 없던 엄마의 골물을 늘 안타까워하던 친구다. 친구도 서울에 터잡고 살고, 남동생도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니 자손 도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십수년 전, 친구의 아버지께서는 위로 2대 조상을 매혼하는 결단을 내렸고, 당신이 귀경하셔서 제사를 지낸다는 얘기를 했다. 역시 안동 혁신유림다운 결정이라면서도 놀랐다. 그런 발상의 전환과 실천이 오히려 전통을 잇는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 노릇은 그렇게 하는 거라 존경심이 생겼다.큰 며느리는 호텔을 예약했고, 명절 서울 계획을 짜느라 부산하다. 서울 나들이가 처음인 대구의 손주들과 합류할 아이들을 위해 궁궐과 롯데월드를 꼭 넣겠다고 했다. 한복 입혀 경복궁엘 가 수문장 교대식을 보여주고 싶다. 애들이 롯데월드에 가면 나는 짬내어 종묘를 구경하고 싶다. 큰아들이 전화했다. 명절 교통정체로 힘들 거라며 미안해 한다. 무슨 소리, 역주행이라 막히지 않고 수월할 거라고 말하니 펄쩍 뛰는 소리를 낸다. 아이고 어머니, 역주행은 큰일나요, 역귀성입니다. 늙으니 헛말이 자주 나온다.

2024-02-07

하늘의 그물, 천망(天網)의 가르침

주낙영 경주시장 세상엔 다양한 그물이 있다. 물고기를 잡는 어망부터 해충을 막는 방충망까지, 우리네 일상에 뗄레야 뗄 수 없는 게 그물(網)이다.그물은 노끈이나 실, 쇠줄 따위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 물과 공기는 통하되 그물코 보다 큰 물체는 드나들지 못하게 하는 구조다. 이같은 그물의 규칙성을 법(法)에 적용해 법적인 감시와 제재를 뜻하는 ‘법망(法網)’이라는 그물도 세상에 존재한다.“법망이 더 촘촘해졌다”, “법망을 빠져 나간 범죄자” 라는 식의 표현이 대표적인 용례다. 때문에 세상의 어떤 그물이던 제 기능을 못한다면 우리의 일상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상상해 보자. 방충망에 자그마한 구멍만 나도 모기떼에 밤잠을 설칠 것이며, 법망에 구멍이 났다면 사회의 법과 질서는 무너지지 않겠는가!망 가운데 ‘천망(天網)’이라는 그물도 있다. 하늘이 인간의 악행을 언젠가 걸러낸다는 그물이 천망이다.중국의 사상가 노자는 도덕경을 통해 ‘천망회회 소이부실(天網恢恢 疎而不失)’이라, “하늘의 그물은 굉장히 넓어 엉성한 것 같지만 선한 자에게 선을 주고 악한 자에게 앙화를 내리는 일은 조금도 빠뜨리지 아니한다”고 했다.하늘엔 인간 세상사를 걸러주는 망이 있고, 그물코가 넓고 커 성긴 것 같지만 놓치는 법이 없어 악행은 반드시 언젠가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이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반드시’ ‘언젠가’라는 표현이다.종종 선한 사람이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악한 사람이 잘되기도 하여 ‘천망(天網)’이 허술한 건 아닌지 의심을 사기도 하지만, 무엇이 됐건 천망에 ‘반드시’ 걸리게 되어 있다.1980년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경기 서남부 연쇄살인 사건’도 30여 년 만에 진범이 검거됐고, 미궁에 빠져 있던 1991년 대구 초등학생 실종사건 또한 사건 발생 11년 6개월 만에 아이들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범인이 곧 밝혀질 것이라 확신한다.이처럼 ‘천망(天網)’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처럼 세상엔 비밀이 없고, 악행은 반드시 밝혀지게 마련이다.비록 하늘의 섭리인 천망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인간이 만든 법망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우리가 항상 정도(正道)를 가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공직사회 역시 마찬가지다.아무리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것이 공직자의 행위다. 공직자의 일거수일투족은 유리어항 속의 관상어처럼 항상 노출되어 있다. 청렴하고 투명한 행정은 결국 시민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청렴이란 금품·향응 수수·부정청탁 근절은 기본이고, 소극적 행정 탈피도 포함된다.공무원이 단순히 청렴만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민 입장에선 공무원의 청렴함과 적극성이 곧 유능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그물이 엉성한 것 같아도 그 그물을 빠져나가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노자의 ‘천망회회 소이부실(天網恢恢 疎而不失)’의 가르침을 우리 모두 되새기며, 청렴 도시 ‘경주’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한층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2024-02-07

우물쭈물하면 좀 어때

정미영 수필가 경북대학교 신년음악회에 다녀온 친구가 동영상을 보내왔다. 뮤지컬배우 최정원이 활약한 대목을 꼭 보라는 당부와 함께. 얼마나 감동적인 무대였는지, 궁금증이 일었다.최정원은 10년 만에 초대를 받아서 왔다고 했다. 10년마다 불러주신다면, 10년 뒤 66세가 되는 해에 이곳에서 여러분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녀는 자신의 미래가 기다려진다며, 관객과 나눈 따뜻한 마음을 추억으로 떠올릴 수 있어 행복할 것 같단다. 사랑스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그녀는 뮤지컬 ‘맘마미아’로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 17년 동안 무대에 서 왔다. 그런 이유로 기네스북에 오를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단일 역 단일 작품으로 1천300회 이상 부른, 아바의 명곡이자 ‘맘마미아’의 명곡 ‘The Winner Takes It All’을 열창했다. 풍부한 감정의 몰입이 스며든 노랫말의 서사가 전해지자 내 가슴이 아리고 저렸다.노래와 입담에 푹 빠져 있었는데 벌써 앙코르곡을 부를 순서가 되었다. “저는 이 곡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뒤에 이어지는 그녀의 말이 압권이었다. 저는 훗날 80세 90세가 되는 어느 날, 인생을 마감하게 되었을 때 딸에게 묘비명으로 이 가사를 써달라고 했어요. ‘신나게 춤춰 봐. 인생은 멋진 거야. 기억해. 넌, 여러분은, 당신은, 최고의 댄싱 퀸입니다.’ 그녀의 ‘Dancing Queen’ 노래와 춤에 관객들이 함성과 박수로 호응하는 기분 좋은 순간, 카톡방이 들썩였다.먼저 본 친구들이 저마다 감상평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그 중에 한 친구가 “나도 어떻게 살다 갈 건지, 묘비명을 생각해 둬야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다른 친구가 “나는 미영이 북콘서트가 생각나면서 조지 버나드쇼의 묘비명이 떠오르더라.”라고 맞장구를 쳤다. 우리에게 익숙한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라는 묘비명은 오역이라는 말과 함께 해석이 분분하다. 아무튼, 친구 말의 본질은 ‘우물쭈물’이 나와 같다는 의미였다.내가 평소 우유부단하다고 느꼈단다. 그것이 취향이 정립되지 않은 탓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그런데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고 했다. “단어를 하나하나 쓰고 지우고 앞으로 써나갈 글감을 하나하나 쌓아두었다가 시의적절하게 꺼내 쓰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고’ 그래서 최선의 것을 선택할 때까지 우물쭈물하고 있었던 거구나! 우물쭈물이 있어서 감동 있는 좋은 글이 나올 수 있구나. 우물쭈물이 있어서 오래 전 지나간 사람들과의 소중한 경험들과 그때 나눴던 사소한 대화들도 모두 차곡차곡 쌓아놓고 기억하고 있었구나.그러면서 자신은 “우물쭈물이 없구나. 새로운 것 다른 것 흥미로운 것으로 바로바로 넘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구나. 두 사람이 참 반대구나.” 그러자 또 다른 친구가 말했다. “나는 미영이처럼 우물쭈물하다가, 너처럼 새로운 것 다른 것 흥미로운 것으로 바로바로 넘어가는 결단력을 배워 큰일을 한 번 내어 보기를 스스로에게 기대해볼게.”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 얼마나 근사한 위로인가? 40년이 된, 막역한 벗들이 내게 건네는 훈훈한 마음이 있기에 내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살아갈 힘을 얻고, 내가 빛이 날 수 있는 거구나. 지금껏 내게 맡겨진 업무를 할 때에는 야무지게 매듭지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 외에는 우유부단할 때가 많았다. 여럿이 모여 음식을 선택할 때나 여행지를 고를 때 등 나의 태도가 누군가에게는 배려보다 답답함과 불편함으로 크게 다가갔을 것이다.나라는 실존의 뿌리는 부모님이다. 그 곁뿌리로 친구들이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기에 수많은 인생의 갈림길에서 객관적 관점과 거리를 두고 성찰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자가 치유의 변명을 굳이 하자면, 내가 생각하기에 대부분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 그런데 우유부단한 나를 한없이 보듬어 품어 주고 자존감을 세워주는 친구들이 곁에 있는 한 ‘우물쭈물’ 좀 하면 어떨까 싶다.

2024-02-07

공간스토리텔링, 삼국유사테마파크

인각사의 지붕과 삼국유사 서적의 모양을 형상화한 테마파크의 입구(가온문)를 통과하여 조금 걸으면, 거대한 신화목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신화목은 환웅이 3천명의 무리를 이끌고 땅으로 내려왔던 태백산의 신단수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삼국유사를 주제로 하는 테마파크의 첫 장소이자 기이하고 환상적인 세상으로 들어가는 입구로서 매우 상징적이다. 일단 방문객들은 17미터나 되는 그 크기에서 한 번, 단군신화를 모티브로 한 공간스토리텔링에서 한 번 테마파크의 이미지를 마음에 새기게 된다.공간스토리텔링은 ‘스토리나 담화를 반영하여 공간의 가치를 새롭게 창조하는 활동으로 서사에서 공간의 특징을 강조하는 이야기 방식’이다. 현재 우리나라 곳곳에 지역문화와 연계되어 조성되는 대부분의 복합적 역사문화공간은 공간스토리텔링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장소들이다. 공간스트리텔링의 이용자들은 어떤 특정한 세계관이나 역사관, 또는 그 공간만의 특별함을 체험하기를 원한다. 재미와 감동은 물론이고, 정서적 만족과 호기심 충족도 이뤄지길 바란다. 이를 위해서는 공간에 표현된 이야기나 오브제가 관객과 상호소통이 잘 이뤄져야 하고, 타 장소와의 차별성도 필요하며, 디자인이 공간의 주제를 명확하게 표현해 관객의 몰입을 높여야 한다. 또한 체험되는 스토리텔링이 공감이나 감정 이입 등 체험자 자신의 이야기로 승화하여 좋은 기억으로 남아야 한다. 삼국유사는 수많은 이야기가 들어있어 다양한 공간스토리텔링의 표현이 가능하다.삼국유사는 고려 승려 일연의 저서로,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아볼 수 있는 역사서이자 신앙·풍속·전설 등 야사를 기록한 책이기도 하다. 단군의 고조선 건국부터 삼국의 역사, 후삼국의 멸망, 고려의 건국 직전까지 들어 있으며, 민간과 사찰에 전해지는 설화도 다수 기술되어 있다. 총 5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권1 왕력에서는 삼국 및 가락·후삼국의 왕대와 연표를, 기이편에서는 고조선부터 삼국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였다. 권2 기이편은 신라 문무왕 이후 통일신라와 후백제 등을 기록하였다. 권3 홍법에서는 신라의 불법 전래와 불교 전래·역사와 번성 및 쇠락을, 탑상에서는 탑과 불상의 기록을 기술하였다. 권4 의해는 신라 학승 및 율사의 전기이며, 권5는 신주에서 밀교 신승의 사적을, 감통에서 근행감응을, 피온에서 행적을 감춘 고승을, 효선에서 사람들의 효행과 선행을 기록하였다. 삼국유사테마파크는 삼국유사에 담긴 이야기와 그 역사성·우수성을 재조명하여 핵심 스토리를 중심으로 넓은 부지에 조성한 복합문화공간이다. 크게는 자연휴양과 놀이·공연을 즐길 수 있는 공간, 문화콘텐츠나 교류·수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 역사와 교육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구분한다. 역사돔을 중심으로 해룡놀이터와 얼쑤먹거리촌에서는 휴양과 즐거움이 목적이다. 중국 남부에서 구한 대장경을 들고 귀국하던 승려들이 신룡까지 설득해 돌아와서 해룡왕사를 지었다는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혜통미로에서는 혜통스님을 따라 곳곳에 숨은 도둑을 잡아 볼 수 있다. 죽엽군 수련마당과 승마장 등에서 단체 교류나 수련활동도 체험할 수 있다. 죽엽군이란 이름은 신라 미추왕때 전쟁을 도운 의문의 군대가 미추왕이 보낸 대나무군이었다는 전설에서 따온 것이어서, 신라의 화랑들처럼 화랑정신을 갈고 닦길 바라는 뜻이 깃들어 있다. 역사와 교육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은 신단수를 지나 운사의 구름쉘터 양옆으로 길게 펼쳐져 있다. 왼쪽으로는 박혁거세의 신화를 표현한 알 건축물과 보살을 모티브로 한 영웅신화길이 있으며, 오른쪽에는 웅녀동굴과 벽면을 따라 고조선부터 삼국과 발해까지의 건국이야기 벽화가 그려져 있다. 천지인 폭포에서는 하늘과 땅과 사람을 의미하는 세 줄기 물이 합쳐지는 장관이 펼쳐진다. 감은못은 문무대왕릉을 축소하여 그 중앙에 형상을 놓은 연못으로 만 가지 파도를 잠재우는 만파식적과 마주 보고 있다. 바다를 건너 일본의 왕과 귀비가 된 연오랑세오녀 분수나 지증왕때 울릉도를 정복하기 위해 만든 지철로사자상 전망대 등 대중적인 설화는 현실 공간에서 재미를 더한다. 또한 향가 14수를 주제로 헌화가·서동요·우적가의 공간과 소원을 비는 단을 마련한 향가원도 좋은 공간스토리텔링이다. 특히 헌화언덕은 성덕왕 때 한 노인이 아름다운 수로부인에게 절벽에 핀 철쭉을 바치며 부른 헌화가를 상징하는 곳으로 철마다 꽃들이 장식되어 아름다움을 더하며, 꼭대기에 올라가면 바람개비와 탁 트인 정자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지막으로 가온누리관은 삼국유사관·설화체험관·일연대선사관·신화서클 영상관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많은 부분을 만화의 형태로 전달하고 있다.삼국유사테마파크에는 방대한 삼국유사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굵직한 이야기들이 그 몸체를 드러내고 있다. 환상 세계로 들어섰던 신단수를 지나 다시 현실로 돌아오며 삼국유사가 어렵지 않았던 까닭을 곰곰이 되돌아본다. 들은 적은 많지만 다 읽은 사람은 많지 않은 일연의 삼국유사를 공간스토리텔링으로 쉽게 풀어 놓았고, 체험과 놀이가 접목되어 있어 재미있었던 덕분일 것이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최정화 스토리텔러

2024-02-07

출산지원금의 진화

우정구 논설위원 얼마 전 뉴욕타임즈 칼럼니스트가 한국의 저출산 인구 감소세가 흑사병이 창궐했던 14세기 유렵 중세 때보다 더 심각하다고 경고를 해 우리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준 바 있다. 1960년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은 6.16명이었으나 불과 60여년 만에 0.7명대로 추락했다. 지난해 전국의 초중고교 가운데 입학생이 0로인 학교가 무려 2천138군데나 됐다. 학생이 없어 문닫는 학교도 급격히 늘었다.인구가 곧 국가경쟁력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불과 60여년 만에 세계 꼴찌의 출산율을 기록한 우리나라는 그동안 수많은 출산장려 정책을 폈으나 백약이 무효했다. 지금 상태라면 우리나라는 옥스퍼드대학 인구문제연구소의 지적대로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사라질 나라가 될지도 모른다.인천시가 올해부터 인천에서 태어난 모든 아기에게 18세까지 1억원의 출산장려금을 주기로 해 전국적 화제를 모았다. 사실 인천뿐 아니라 전국의 적지 않은 지자체가 출산지원금 확대 지원에 나서고 있다. 충북 영동군은 1억원 성장프로젝트를 올해부터 실시하기로 했고, 경남 거창군도 출생아 1인당 1억1천만원의 출산지원금을 지급하겠다고 했다.정부와 지자체의 출산지원금 지급과 달리 민간기업 차원의 출산지원금 지원이 등장해 눈길을 끈다. 부영그룹은 2021년 이후 출생한 직원 자녀 70명에게 각 1억원씩 70억원의 출산지원금을 지급했다고 한다. 출산지원금 지급이 정부나 지자체뿐 아니라 민간기업까지 확산된다면 세계 꼴찌의 우리나라 출산율의 반전도 기대해 볼만한 것 아닌가 싶다. 기업의 출산지원금의 기부명세 제도 등 기업이 동참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이 적극 필요하다./우정구(논설위원)

2024-02-06

尹대통령 신년대담, 국민소통 계기 될까?

심충택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이 설 연휴를 이틀 앞둔 7일 저녁 KBS를 통해 신년 대담을 하며 국정구상을 밝힌다. 대통령의 지지율 반등이 절실한 여권으로선 신년대담을 앞두고 초긴장상태다. 대담 내용과 이에 대한 여론 추이에 따라선, 신년대담이 국민소통보다는 불통 이미지를 더 굳히는 악재가 될 수 있어서다.최대관심사는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논란에 대한 대통령의 발언 수위다. 윤 대통령은 대담 녹화 전 “어떤 질문이든 다 받겠다. 내 생각 그대로 솔직히 말하겠다”며, 예상 질문·답변지를 작성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의혹을 없애기 위한 조치다. 일단 명품백 수수 논란과 관련해선, 김 여사가 가방을 받게 된 경위를 비롯해 그동안 제기돼왔던 국민적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 집중할 것으로 예상된다. 관심이 가는 부분은 ‘몰카 공작’과 ‘함정 취재’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아니면 직접 유감을 표명하며 부정적 여론에 대한 돌파구를 모색할 지 여부다.지난 5일 발표된 리얼미터 조사에서는 윤 대통령 국정지지율이 37.3%로 상승하긴 했지만, 지난주(2일) 발표된 한국갤럽 조사에선 29%까지 떨어지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총선 민심이 굳어지는 설 명절이 바로 코앞이라 여권으로선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여론추이다. 부정평가 요인은 ‘경제·민생·물가’가 19%로 앞 순위를 차지하지만 ‘소통 미흡’(11%)과 ‘독단적·일방적’(7%), ‘김건희 여사 문제’(6%)’등도 주요원인으로 꼽혔다.국내외 복합적인 요인이 얽힌 경제문제는 해법을 찾기가 어렵겠지만, 국민소통 등 기타 문제는 대통령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개선할 수 있는 사안들이다. 명품백 문제만 하더라도 김 여사가 함정취재의 피해자인 건 확실하지만, 국민들은 대통령의 솔직한 설명을 듣고 싶어 한다. 이런 측면에서 대통령이 KBS와의 단독대담을 통해 국민과 소통하는 방식은 문제가 많다. 당장 이번 신년대담으로 인해 대통령실 출입 기자들을 상대로 한 신년 기자회견은 무산돼 버렸다. 윤 대통령은 지난 2022년 8월 17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을 진행한 후 약 1년 6개월간 기자회견을 하지 않았다. 작년 새해에는 조선일보 단독 인터뷰를 통해 국정 운영 구상을 밝혔다.물론 좌파언론의 편향된 질문과 예기치 않은 돌출행위가 껄끄러울 수 있고, 경호상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전 녹화방식의 신년대담은 대통령의 불통 이미지를 오히려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 이번 대담 준비과정에서 윤 대통령이 방송사 측 질문을 여과없이 수용했다고는 하지만, 녹화방송은 질문과 답변의 민감성을 편집으로 걸러낼 수 있어 리스크 관리를 했다는 의혹이 생길 수밖에 없다. 당장 민주당이 “사전에 각본을 짜고 사후 편집이 가능한 녹화 대담은, 대통령이 하고 싶은 말만 하겠다는 것”이라며 비판하지 않는가. 대통령직은 좌파든, 우파든 모든 국민을 포용해야 하는 자리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2024-02-06

산행(山行)과 인생길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사람이 살아가는 목적은 생존이다. 생존의 질과 양을 증가시키는 것이 인생이고, 질과 양에는 삶의 가치관과 인생 방향에 맞는 선택과 도전이 있다. 질과 양을 높이는 것은 삶의 시선의 높이를 결정하는 일이고, 시선의 높이가 삶의 수준을 말한다. 미술관을 갔을 때와 가라오케를 갔을 때 어느 쪽이 편하고 즐거운가, 즐거운 쪽이 내 시선의 눈높이고 불편하고 불균형이면 내 눈 높이가 아닌 것이다. 균형을 이룬다는 것은 공감한다는 것이고 공감이 즐거움과 행복을 생산한다. 정상을 향하여 가는 산행이나 내 삶의 목표를 향해 가는 인생길은 여러 가지로 닮아 있다.‘산은 왜 오르는가’ 물으면, 산이 늘 거기 있으니까, 건강을 위해서, 힐링, 운동 등 여러 대답이 나온다. 보편적인 대답은 ‘건강과 힐링’이고 삶의 질과 양을 높이는 일이다.최근 베이붐 세대가 대거 은퇴하면서 산행 인구가 증가하고 있고 필자도 지난 주말 강원도 태백산(1천566m) 눈꽃 산행을 했다.태백산 입구에서 천제단 정상까지 왕복 산행 거리는 8.2㎞로 4시간 정도 소요되는 거리다. 산행의 시작과 끝은 정해졌고 가는 여정에 다양한 일들이 일어난다. 땀이 나서 겉옷을 벗기도 하고 정상에 가까워 올수록 기온이 떨어져 다시 입기도 한다. 사람에 밀리면 기다려주기도 하고 눈 길 속 길을 잃으면 돌아 오르기도 한다. 도중에 비닐 쉴터를 치고 식사를 하는 동안 엉덩이는 차고 떡국은 퍼진다. 힘겨운 전쟁을 치르고 정상에 오르는 여정에 신비로운 눈꽃을 만날 때 고난의 일들은 눈 녹듯이 사라진다. 천제단 정상에 오르는 기쁨도 잠시 한정된 시간에 쫓겨 하산길에 오른다. 미끄러지기도 하고 두갈래 길에 선택의 고민에 빠지기도 하는 등 하산길에도 다양한 변수가 있고 동료와 협력해서 여러 변수를 극복하며 내려간다. 얼마만큼 알고 준비하느냐에 따라 얻는 결과는 달라진다.산행을 하며 닮은 인생을 읽는다. 첫째, 정상을 향해 가는 고된 여정이다. 모처럼 가는 겨울 산행에 길을 잘 못 들어서 돌아가거나 사람에 밀려 장애물을 만나면 내 몸집을 키워서 넘어가는 흐르는 물처럼 인내하며 기다림의 미학으로 극복해간다. 둘째, 도전과 역경이다. ‘인생은 선택과 도전의 연속이고 자기창조’라는 말처럼 큰 산을 도전할 때는 두려움이 앞서지만 과정에서 일어나는 역경을 극복하며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한다. 셋째, 목표를 향해 간다. 산행은 정상의 목표가 있고 인생은 성공이나 행복 등 다양한 목표가 있다. 목표가 있으니 긴 여정에서 일어나는 것은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넷째, 협력이다. 에베레스트 산처럼 위험을 안고 등정하는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지만 동료간 서로 배려하며 힘을 합치지 않으면 정상에 이르는 데 큰 난관을 만나기도 한다. 다섯째, 성취감이다. 산행에서 정상에 오르는 만족감처럼 인생길에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에 이르는 기쁨과 행복 같은 것이다.산행도 삶의 시선을 높이는 길이고 한 번 사는 여정에 내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도전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품질은 달라진다.

2024-02-06

봄 마중 먹 내음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입춘에 즈음해 며칠째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다. 메마른 대지에 비나 눈이 내리니 멀지 않아 봄날이 성큼 다가올 것만 같다. 얼음장 밑에서도 물고기가 헤엄을 치고 있듯이, 촉촉하게 적셔진 땅 속에서는 인동의 뿌리가 꿈틀대며 새 생명의 물을 긷고 있을 듯하다. 길게만 여겨졌던 육중한 겨울날이 가녀린 비에 밀려 서서히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지만, 결코 만만하게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꽃이 피고 잎이 돋는 걸 막으며 막바지 추위로 시샘도 할 것이다. 그래서 2월을 시샘달이라고 했던가.벌써 2월이라 이른 봄의 절기가 시작됐다. 숫자나 시간의 단위로 년·월·일 등을 구분해 열 두 달을 나타내는 달력의 표기와는 달리, 한 해를 스물넷으로 나눈 절기(節氣)는 태양의 황도상 위치에 따른 기온의 고저와 계절의 변화 등 자연현상을 근거로 삼고있다. 따라서 한 해의 시작은 1월이지만 절기로는 계절의 끝이 될 수 있고, 위도와 경도의 차이로 인해 나라별·지역별 계절의 처음과 마지막이 다소 차이가 날 수 있는 것이다. 한 해 24절기의 시작인 입춘이 지나니 기온의 변화가 감지되는 듯 비가 잦아지고 바람의 결이 달라지며 그야말로 봄날이 가까이에 온 듯하다.산골짝 응달의 잔설이 녹고 얼었던 강물이 풀리며 서서히 다가오는 봄날을 서둘러 마중함은 그만큼 봄날을 기다렸기 때문일까? 무채색의 겨울날 끝자락에 기웃대며 조심스럽게 들어서는 봄을 묵향(墨香)으로 피워 반갑게 맞이함은 봄날에 대한 희망과 설렘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른바 ‘봄이 되니 크게 길할 것이요, 따뜻한 햇살이 비치니 경사로움 많으리라(立春大吉 建陽多慶)’ 등의 입춘서 또는 춘련(春聯)을 붓글씨로 써서 대문이나 문설주에 붙이는 것은, 새로운 한 해의 행운과 건강을 기원하며 정성을 다해 봄을 송축하기 위함일 것이다.이러한 측면에서 지난 주 포스코 붓글씨봉사단에서 봄맞이 입춘방과 새해 소망을 담은 글귀를 두 차례에 걸쳐 붓글씨로 써서 나눠주는 재능봉사활동을 펼친 것은 가상한 일로 여겨진다. 즉 1차적으로는 사내 직원들이나 협력사·공급사 등 포스코 본사 방문객들을 대상으로 신청한 희망 글귀 또는 부서 목표 등을 붓글씨로 써준데 이어, 입춘일 당일에는 포항시 북구 기계면에서 일반 시민들에게 입춘첩과 신년 덕담을 묵향 생생한 서예작품으로 써줘서 눈길을 끌었다. 휴일도 반납한 채 이틀 간 봉사단에서 써준 입춘서와 새해 글귀는 200여 점으로 대구, 울산 등지에서 온 방문객들은 입춘일에 뜻밖의 멋진 글귀까지 받게 돼 올해는 행운이 따르고 신수가 좋아질 것이라며 함박웃음을 짓기까지 했다.새해 절기의 시작에 맞춰 귀한 손님 마중하듯이 그윽한 먹 내음과 멋진 붓글씨로 맞이하는 풋풋한 봄날은, 차츰 잊혀져 가는 세시풍속의 계승 그 이상의 각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해마다 찾아오는 봄날에 대한 새로운 기대와 의미부여로 다시 새출발을 하며, 부풀고 설레는 가슴으로 더욱 밝고 희망찬 봄날을 열어가길 빌어본다.

2024-02-06

가오슝에서 타이완을 생각한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 가오슝 시는 타이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다. 타이완 남부에 있다. 아주 큰 컨테이너 항구를 가진 항구도시다.타이완에 대한 나의 기억은 무엇보다 조용한 나라라는 것이었다. 타이페이에 2박 3일 머물러 본 기억밖에 없으나, 그 차분함은 오래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거리의 가게 간판들은 번자체 한자여서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하철의 규모나 운영 방식은 한국과 일본을 섞어 놓은 것 같았다. 사람들은 한국인, 일본인들과는 아주 다르게 느껴졌다. 몸에 배인, 일본인들과도 다른 차분함 같은 것이 있었다. 억눌려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면 큰 실례가 될 것 같다.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이 절제는 어떤 역사적 경험에서 오는 것 같았다.이번의 가오슝행은 학교의 공식행사였다. 코로나 이후 학교 구성원들이 처음으로 단체여행을 떠난 것이다. 인천공항에서도, 비행기 안에서도 나는 밀린 원고를 생각하며 시름겨워 했다. 세 시간 넘게 일찍 나와 수속을 빨리 마치고 어느 구석에 앉아 마저 일을 끝내려 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가오슝 공항에 도착하자 안내해 주시는 분이 우리를 맞았는데, 타이완에서 나서 자란 한국인이라고 했다. 성은 ‘박’이요, 할아버지 때부터 타이완에 살았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만주에 계시다 타이완으로 옮겨 왔고, 여기서 어선을 사들여 사업을 했노라고 했다. 그렇게 오래 전부터 타이완에 살았다니. 나는 모자란 소설가다운 호기심으로 이 분의 가계에 흥미를 가졌다.시가에는 선거의 분위기가 아직 다 가시지 않았다. 이번 선거는 아주 뜨거워서 ‘탈중국’의 민진당 후보 라이칭더가 간신히 승리했다고 했다. 표차가 100만표를 넘지 못했고 국민당의 허우유이 후보도 많은 득표를 했기에, 앞으로 정국이 험난할 것이라 했다.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잡은 ‘박’ 선생에 따르면 대만에는 한국 해방 당시 3만명이나 되는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 했다. 아주 많다고는 할 수 없어도 생각보다 많은 숫자였다.타이완이라면 일본과 일찍 관계가 깊었다. 청일전쟁에 패한 청나라가 일본에 타이완을 넘겨주면서 1945년 일본 패전까지 일본 통치가 이어졌다. 본래의 원주민 대신에 대륙 쪽의 한족이 이주해서 주류 사회를 이루었고, 공산당에 밀린 장제스가 정부를 타이완으로 옮겨 오면서 오래 독재 통치가 이어졌다. 그 사이에 타이완은 일본에 기대어 경제를 운영해 왔다. 도로에는 일본 자동차가 넘치고 거리의 건물들은 일본식 조립 방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한국이 타이완을 ‘배신’하기 이전에 타이완 정부는 한국계, 한국 유학생들에게 아주 관대했다고 한다. 한국이 타이완, 곧 중화민국에 사전에 알리지도 않고 단교하고 지금의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기까지는 말이다.지금 카타르에서 아시안컵 축구대회가 한창이다. 타이완 사람들은 심정적으로 한국팀이 지기를, 잘 안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고 한다. 가오슝에서의 2박 3일, 나는 잠시나마 한국인 아닌 타이완 사람들의 심정이 되어본다. 같은 사태도, 누가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마련이다.

2024-02-05

만년 들러리 신세 ‘예천’의 운명

홍석봉 대구지사장 인구 수 5만5천 명의 예천군은 선거 때마다 지역구가 바뀌었다. 인구가 적다보니 인근 시·군과 합쳐야 선거구를 유지할 수 있다. 예천군은 1988년 소선구제가 실시되기 전에는 문경·예천군이 중선거구제로 하나로 묶여 있었다. 이후 소선거구제가 되면서 점촌·문경시 선거구와 예천군 선거구가 분리됐다. 그러다가 1996년 15대 총선부터 예천은 다시 문경과 복합선거구가 됐다. 이후 16~19대까지 문경·예천은 한 선거구로 지속됐다.20대 총선 때는 다시 바뀌었다. 인구 상하한선을 정하는 공직선거법이 개정됐기 때문이다. 인구 감소로 경북은 의석수가 2석 줄었다. 이 여파로 영주시 단독 선거구가 영주시·문경시·예천군을 묶어 한 선거구가 됐다. 이후 21대 때는 안동과 합쳐 안동·예천 선거구로 선거를 치렀다. 예천의 운명은 선거때마다 이쪽에 붙었다가 저쪽에 붙었다가 하는 들러리 신세가 됐다. 22대 총선을 2개월 여 앞두고 예천은 의성·청송·영덕 선거구와 통합하는 안이 나왔다. 다시 바람 앞에 등불 신세다.하지만 주민들 중에는 이 안을 반기는 이들이 적잖다. 의성과 청송, 영덕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구가 많기 때문이다. 이들 군과 선거구가 묶이면 예천군 출신 국회의원을 배출할 수 있는 호기라는 생각에서다. 들러리 설움도 벗어날 수 있다. 지역 정치권은 반대 입장이다. 안동시와 예천군의원 23명은 선거구 분리 반대 성명서를 냈다. 이들은 신도시가 위치한 호명면은 안동시민과 예천군민이 한데 섞여 하나의 생활권으로 성장하고 있는데 안동·예천 선거구 분리는 지역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입장이다. 선거구 분리를 둘러싸고 예천군민과 호명면 주민의 정치적 이해가 맞부딪쳤다. 선거구획정위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주목된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4-02-05

시 작품에 방언의 옷을 입히다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내가 국립국어원장으로 일하던 때였던 2006년, 당시 한국시인협회에 전국시인들이 고향 방언으로 창작한 시를 묶은 방언시집 출간을 요청하였다. 현대시 100주년인 2007년을 기념하는 차원이었다. 국립국어원의 뜻밖의 요청에 시인들은 놀라워하면서도 크게 반겼다. 반면 국어학 연구 교수들은 방언시집 발간이 국립국어원의 역할인가 의문의 눈초리를 보냈다. 강한 거부의사도 서슴치 않았다. 모 대학 교수는 국립국어원장이 표준어의 어문정책을 파괴하는 행위를 한다며 청와대에 국민청원을 내기도 하고 더 나아가 원장 파면을 선동하는 글을 SNS에 올리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기조는 확고했다. 시인은 새로운 언어의 창조자다. 방언은 표준어 이전의 모국어이자 모태어다. 시를 통해 모국어를 보다 풍성하게 할 수 있다. 국어의 언어다양성을 지키고 지지하는 것 또한 국립국어원의 역할이자 의무라는 논거로 이 사업을 지원했다며 당당히 맞섰다.사실 국립국어원은 국어의 발전과 국민의 언어생활을 향상하는 연구 사업을 추진하고 체계적인 정책 수립의 기반을 마련하는 기관이다. 합리적인 국어정책 추진에 필요한 체계적 조사와 연구를 하며, 언어 규범을 보완·정비하는 목적을 가진 기관이다. 그런 점에서 기본언어는 표준어가 맞다. 그러나 국가 언어 자원을 수집하여 통합 정보 서비스를 강화함으로써 국민 언어생활의 편익을 증진한다는 또 하나의 기본 목표가 있다. 국가의 언어자원에는 방언이 큰 몫을 한다. 모국어를 보다 풍성하게 살리려면 표준어 관리도 중요하지만 지역 방언도 중요하다는 국어정책의 기본을 안다면 이 얼마나 필요충분한 사업인가. 정제된 언어인 표준어를 관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지역 방언을 되살려 표준어의 경계와 범주를 확대하는 것 또한 중차대하다. 특히 넘쳐나는 차용외래어의 환경과 무분별하게 생성되는 신조어의 홍수 속에서 우리말을 온전하게 지키는 언어생태환경 조성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안이다. 방언이 표준어를 훼손하는 일이 아니라 언어 다양성을 존중하는 언어라는 것을 알리는 사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표준어를 신화처럼 여기던 국어학계에서도 말문을 닫았다. 국가언어정책의 기본 틀의 변화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나는 사업이었다.그렇게 해서 ‘시인 101명, 내 고향말로 시를 쓰다’라는 부제의 방언시집 ‘요 엄창 큰 비바리야 냉바리야’(서정시학)가 출간되었다. 토착 방언들로 지은 시 작품이 과거를 하나씩 호명하듯 기억의 거미줄에 걸려들었다. 방언이 섞인 시의 맛이 따뜻하고 신선하다는 평가들이 이어졌다. 환경과 기술의 빠른 변화 속에서 잊혀진 시간과 공간의 풍경들을 방언 시를 통해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며 반가워했다. 표준어의 위력에 억눌려 숨을 쉬지 못하고 있던 토속적인 감정과 그들 간에 유통되는 토속의 지식정보들이 보석처럼 빛나는 방언으로 살아났다.당시 국가 어문정책의 책임자인 나는 국어학자이면서 시인이기도 했다. 문학 작품 속에 깃든 방언을 문학 비평적 관점에서 연구한 ‘방언의 미학’(살림)과 ‘위반의 주술 시와 방언’(경북대출판부)을 간행하기도 했다. 나의 이런 연구가 시인들에게 방언으로 된 시 창작을 부탁하게 된 이유가 된 점도 없지 않다. 이후 국어국문학계에는 문학방언에 대한 연구 붐이 일어났다.내친 김에 나는 언어다양성 정책을 학술적으로 지원하기로 하고, 2008년 한국언어학회와 공동으로 제8차 세계언어학자대회를 한국에 유치하였다. ‘언어의 다양성’을 주제로 자본의 우위와 식민지배로 인해 절멸해 가는 세계의 언어와 변두리의 방언 보전과 유지를 위한 국제협력의 장을 펼쳤다. 언어학자대회이지만 문학인들을 대거 초청하여 발표의 기회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또한 파격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문학어야 말로 언어의 존속과 창의적 변용을 통한 집단의 정체성과 지식정보 축적의 기본으로 한 언어의 다양성 보전의 첨병이라는 학계의 동의를 선언적으로 얻었다.이 두 사업은 방언이 문화의 다양성 속에 창의성이나 독창성뿐만 아니라 개성과 정체성을 확보하는 자산이며 특히 지식정보 전달 매체인 언어와 방언이 지역과 계급적 차등과 차별을 뛰어넘는 기초가 된다는 나의 언어관을 실현한 매우 의미있고 기쁜 일이었다. 학자로서 그리고 시인으로 가장 보람된 일 가운데 하나로 내 기억에 남아 있다.

2024-02-05

오키나와에서 만난 아리랑

평소 오키나와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던 저희 일행이 오랜 준비 끝에 인천공항을 출발한 것은 지난 1월 15일 오전이었습니다. 그날 서울의 아침 기온은 영하 7도였는데요. 2시간여의 비행을 끝내고 나하 공항에 착륙했을 때, 활주로의 곳곳에는 이름 모를 들꽃이 활짝 피어 우리를 반겨주었습니다. 서울에서 남쪽으로 1천200㎞가 떨어진 섬에 왔다는 걸 고려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풍경임에는 분명했습니다.비즈니스 호텔에 여장을 푼 일행은 오키나와의 역사를 상징하는 슈리성(首里城)으로 향했는데요. 슈리성은 1429년 오키나와 전체를 지배하는 류쿠 왕국이 탄생한 이후, 류쿠 왕국을 대표하는 최대의 성이자 왕궁이었습니다. 나하 시내 언덕 위에 위치해 전망도 빼어난 슈리성은 2019년 거의 전소된 이후, 지금도 복원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일본 2천엔 지폐에 새겨져 있을 정도로 슈리성은 매우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인데요. 하루 빨리 복원되어 한때 조선과 중국과 일본을 연결해주던 류큐 왕국의 위용이 세상에 제대로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저녁에 우리 일행은 오키나와 전통 요리점으로 이동했는데요. 그곳에서는 우미부도(바다포도)나 고야참푸르(여주, 두부, 햄 등을 함께 볶은 요리)와 같은 오키나와의 전통 요리를 맘껏 맛보았습니다. 한창 식사 자리가 무르익어 갈 무렵 오키나와 전통 의상을 입은 한 남성이 뱀가죽으로 몸통을 두른 오키나와 전통악기 산신(三線)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참고로 오늘날 일본의 전통 현악기로 첫손에 꼽히는 샤미센(三味線)은 산신(三線)이 일본 본토에 전해져 토착화한 것입니다. 처음 그 악사는 시마우따(島唄)와 같은 오키나와 전통 음악을 들려주며 분위기를 띄웠는데요.정작 놀라운 일은 마지막에 일어났습니다. 그 악사는 갑자기 아리랑 가락을 너무나도 구슬프게 연주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리랑 가락이 반갑고도 신기했던 우리 일행은 오키나와 악사에게 그 노래를 어디서 배웠느냐고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아리랑을 자신의 할머니에게서 배웠고, 할머니는 그것을 이웃의 조선인에게서 배웠다는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악사의 할머니에게 아리랑을 가르쳐 준 조선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키나와 역사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아라사키 모리테루의 ‘오키나와를 안다, 일본을 안다(沖縄を知る 日本を知る)’(1977)는 오키나와 입문서로 유명한 책인데요. 역사학자 김정자는 2016년 이 책을 ‘오키나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번역하면서, 부제로 ‘일본이면서 일본이 아닌’이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늘 이 부제보다 오키나와의 특징을 정확하게 압축해 놓은 말은 아마도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본래 오키나와는 류큐라는 이름으로 중개무역 등을 통해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온 독립 왕국이었죠. 그래서 류큐의 전통문화에는 중국과 조선의 흔적도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랬던 것인데, 일본은 일찍부터 류큐 왕국에 손길을 뻗쳐, 1609년에는 사쓰마번이 무력으로 침략하고, 1872년에는 류큐국을 류큐번으로 격하했으며, 1879년에는 아예 오키나와현을 설치하여 일본에 편입시켜 버립니다. 그러다 1945년에는 2차대전 중 일본에서는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진 지옥의 땅이 되어버리기까지 합니다.오키나와전은 참으로 끔찍한 전쟁이었는데요.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일본 군부는 오키나와(인)를 바둑판의 사석처럼 여겼습니다. ‘본토 결전’을 위해 최대한 시간을 벌고, 천황제를 지키기 위한 평화교섭의 길을 모색하는 기회로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결사항전을 하고자 했고, 온갖 흉악한 일들을 벌여 미군으로 하여금 본토에 상륙할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만들고자 했죠. 이경재 숭실대 교수 이런 일본군의 눈에 오키나와인의 생명이나 존엄 따위가 들어올 리는 없었습니다. 이런 광기 속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일본군의 (반)강제에 의해 집단자결하는 일이 속출했습니다. 어찌 보면 침략자일 수도 있는 일본 제국을 위해 수많은 오키나와인들이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죽어갔던 것입니다.그 결과 오키나와전에서는 본토 출신 군인 약 6만5천 명과 오키나와 출신 군인 약 3만 명이 희생되었고, 무려 10만 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습니다. 10만이라는 희생자 수는 당시 오키나와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이때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은, 오키나와전에서 징용 또는 종군위안부로 한반도에서 강제연행 된 만여 명의 조선인 또한 희생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식당에서 만난 악사의 아리랑은 일제시대 오키나와에 끌려온 수많은 조선인들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그 어떤 아리랑보다도 그 악사의 아리랑이 더 슬프게 느껴졌던 이유는, 거기에 지난 시기 동아시아의 비극이 녹아 들어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4-02-05

중대재해처벌법을 어떻게 하나

김규인 수필가 1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동일한 사고로 6개월 이상의 치료가 필요한 부상자가 2명 이상 발생하거나 동일한 유해 요인으로 직업성 질병자가 1년 이내에 3명 이상 발생한 경우 중대재해로 규정한다. 중대재해특별법은 사고가 발생할 때 사업주나 경영책임자 등이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10억 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한다.2022년 1월 27일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시행하며 영세 사업장의 부담을 우려해 50인 미만 사업장과 50억 원 미만의 건설 현장에 주어진 2년간의 유예기간이 이제 끝났다. 정부의 대비에도 불구하고 영세 사업장의 준비는 아직 미흡하다. 그런데도 1월 27일부터 전면 시행이 이루어진다. 고용노동부 장관은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시행을 앞두고 ‘중대재해처벌법 확대 적용 대비 긴급 전국 기관장 회의’를 열고 대책을 서두른다.법이 시행된 이후 기대만큼의 중대재해 감축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산업현장에서 노사 간의 갈등은 더 늘어났다. 정치권에서는 이를 두고 서로 네 탓 공방만 해댄다. 이를 지켜보는 국민의 마음은 그저 착잡하다.법은 국민의 안전과 행복한 삶을 추구할 수 있도록 만들어지고 실행되어야 한다.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지킬 수 있고 지킴으로서 얻는 이득이 국민에게 돌아가야 한다. 어느 일방을 옥죄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법을 만드는 과정이 선거를 앞두고 어느 집단의 표를 의식해서 만들어진다면 법의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쉽고 편하게 만든 법은 국민을 불편하게만 한다. 산업현장은 언제나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산업현장의 사고가 일어나는 과정을 면밀하게 조사하고 분석하여 근본적으로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을 줄이는 입법이어야 한다. 두루뭉술한 법을 만들어 국민에게 지키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 국회의원에 여러 명의 보좌관이 도움을 주는 게 아닌가. 사고는 불완전한 시설 때문에 발생하기도 하지만 근로자의 불완전한 행동 때문에도 일어난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사업장의 문을 닫아야 한다면 사업자에게는 평생 쌓은 모든 걸 접어야 하고 소속된 근로자는 소중한 일자리를 잃는다. 자식을 위해 식당을 여는 사람도 작은 부품을 만드는 사람도 소중한 국민임을 알아야 한다.오늘도 우리의 정치는 극한으로 치닫는다. 지난 정부 5년 동안 지속된 적폐 청산은 국민을 내 편과 네 편으로 철저히 갈라놓았고 현재의 정부는 국민을 화합으로 이끄는데 머뭇거린다. 못난 정치 때문에 국민은 상대방에 칼을 들이대고 돌멩이를 마구 휘두른다. 그래서 국회의원을 줄이자는 제안이 너무나 반갑게 들린다. 국회의원이 살아남으려면 그 존재 이유를 스스로 증명해야만 한다. 산업체의 99%를 차지하는 중소기업, 가만히 두어도 인력난에 낮은 수익에 사업주는 힘이 든다. 정치는 그들을 옆에서 돕는 일을 해야 한다. 홀로서기도 힘든 기업을 짓누르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3고의 시기에 국가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를 찾아야 한다. 중소기업은 우리 국민 대다수의 삶이 깃든 직장이기 때문이다.

2024-02-05

침묵의 방관자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지난 1월 25일부터 26일까지 제1회 한국현대문학자대회가 개최됐다.이번 대회는 단순한 학술대회가 아니라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절박감이 만든 것이다. 이것은 각자도생의 삶을 넘어서 새로운 학술제도 및 문화를 수립하겠다는 공동선언에서 알 수 있듯 대한민국 일반의 문제를 공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도 이번 대회에 작은 힘이나마 함께 하며 2주에 한 번씩 온라인 회의를 하는 강행군에 동참했다. 처음 줌 회의에 참석했을 때 참여자의 다수가 나보다 어린 것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대회 첫째 날 논평자로 대회장을 찾았다. 내가 논평을 맡은 세션이 되어 앞쪽 무대로 나가서 대회장 전체가 시야에 들어오자, 객석의 2/3 이상이 나보다 어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그때야 내가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어느 학문 공동체나 직급과 성별, 지역에 따른 위계가 존재한다. 그 위계란 공동체 구성원 스스로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50대 중반 이상의 남성 전임교수가 만든 것이다. 나는 경험적으로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그렇지만 이번 대회에 참석한 나보다 어린 후속세대를 눈앞에서 바라보니 ‘50대 이상’ ‘남성 교수’라는 대상을 여전히 겨냥하는 것은, 동조자의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나도 후속세대가 아니라 기성세대라는 현실을 잊고 있었던 탓이다. 수많은 후속세대가 보기엔 나도 지금의 위계를 만들어 낸 사람일 뿐이다.2월 7일 우리 대학의 총장 선거를 앞두고 후보마다 다양한 공약을 내세우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교수, 직원 등 투표 당사자의 마음을 사는 정책이 가득하다. 신임 교수 지원을 강화하겠다는 정책도 빠지지 않는다. 4년 전 총장 선거 당시에도 신임 교수 지원을 강화하겠다는 정책이 발표되었지만, 뭐 하나 바뀐 것은 없다. 의사결정을 하는 당사자는 신임 교수가 아니고 보좌진은 결정권자의 심기를 건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한편 4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이 분주하다. 양당 정치를 끝장내겠다는 제3지대가 얼마나 정치적 파급력을 갖게 될지가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다른 곳에 있다. ‘올드보이’의 귀환이 속속 발표되는 가운데 젊은 초선 의원들은 연달아 불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예비후보 가운데 20~30대는 4.2%, 40대는 13.5%에 불과하다. 젊은 정치인을 배출하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정치구조를 비판하며, 기성 정치인의 양보(?)를 기대하는 것은, 지금의 현실이 증명하듯 불가능한 일이다.결국 필요한 것은 기존 공동체의 문법을 벗어나려는 문제의식을 공유한 사람들의 연대다.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한 사람들이 모여서 현대문학자대회를 개최했다. 나를 포함한 40대는 중간 세대로서 기성 문법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과감히 새로운 공동체 구축을 위한 노력을 할 것인가라는 갈림길에 서 있다.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할 필요가 있다. 의사결정권자 탓만 하는 방관자가 돼서는 안 된다.

2024-02-05

울릉도 눈(雪)축제사전홍보부족…공무원 열정·기획·구성은 성공

김두한 기자 경북부 울릉도 눈 축제가  ‘가족·연인·친구와 함께하는 설(雪)렘 가득 울릉도 눈 체험’을 주제로 나리분지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지만 아쉬움을 남겼다. 14년 만에 부활한  올해 눈 축제는 지난해에 이어 지난 1일부터 3일까지 개최된 부활 두 번째 눈 축제로 나리분지에 많은 눈이 쌓인 가운데 개막식에 눈까지 내려 의미를 더했다. 하지만, 개막식에 200여 명이 참석해 분위기가 설렁했다.  이런 가운데 울릉군 공무원들의 열정, 많은 눈, 기획과 구성, 진행은 나름대로 작은 성공은 거뒀다는 평가다.  그러나 울릉도 눈 축제는 참가자가 많은 게 전부가 아니다.  울릉도 축제는 예산대비 인원동원 등 가성비는 전국에서 가장 꼴찌 수준이지만 축제를 반드시 개최해야 한다. 그 이유는 울릉도 홍보에 있다. 울릉도 축제는 언론노출이 육지 축제보다 훨씬 많다. 이번 울릉도 눈 축제도 뉴스 공급사인 연합뉴스, KBS,  MBC, 조선일보 등 50건  이상 언론에 보도됐다.  이 같은 언론 노출은 최소 10만 명 이상 몰려드는 축제보다 많기 때문에 수십억 원의 광고를 효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번 눈 축제는 사전 언론 홍보가 없었다. 이번 울릉도 눈 축제는  지난 1일부터 개최됐지만, 지난달 23일까지 언론보도는 지방지 1~2건 정도에 그쳤다. 올릉도 축제는 전국민들을 대상으로 관광객 유치전을 펼쳐야 한다. 전국 언론을 대상으로 축제 홍보자료를 배포해야 한다.   울릉군은 처음부터 보도 자료를 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본지가 울릉군의 언론 보도 미흡을 지적하자 급기야 1월 24일 축제 홍보 자료를 냈다. 하지만  이미 홍보의 데드라인을 훨씬 지났다. 서울, 경인지역이나 전국에서 참가하려면 최소한 한 달 전에 계획을 세워야 한다. 따라서 울릉도 눈 축제 일정이 잡히면 곧바로 보도 자료를 내야 참가자들이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이런 일정은 최소한 2~3개월 전에 계획이 확정된다.  이때부터 홍보에 들어가야 축제에 참가할 국민이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축제 관광객 유치도 중요하지만 홍보기사가 전국 언론에 게재되는 것만으로도 울릉도는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이며 축제가 개최된다는 홍보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축제 참가 인원수가 적어도 수십억 원의 광고 효과 이미 봤기 때문에 행사는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 눈 축제는 개최 며칠 전까지 대 언론 홍보는 묵묵부답이었다. 울릉군은 그들만의 찬치를 하려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울릉도의 축제는 육지에서 쉽게 접근이 어렵기 때문에 관광객 유치보다 울릉도 홍보가 목적이어야 한다. 10억 원을 들여 축제를 한다고 해도 100억 원 광고 효과를 내면 축제는 성공한 것이다.  울릉도 축제를 주관하는 공무원들은 안일한 생각과 단순한 홍보로 그들만의 축제로 만들 것이 아니라 수백억원의  홍보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김두한기자kimdh@kbmaeil.com

2024-02-05

결정장애인가, 노회한 전략인가

김진국 고문 총선이 65일 앞으로 다가왔다. 두 달 남짓이다. 그런데 선거법도 선거구도 준비가 안 돼 있다. 어디로 갈지 아직 모른다. 결정권을 쥐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저울질만 하기 때문이다.공직선거법에는 “국회는 국회의원 지역구를 선거일 전 1년까지 확정하여야 한다”라고 명시해놨다. 당연히 그 틀인 선거제도도 그 전에 마무리되어야 한다. 다 이유가 있다. 선거일이 가까워질수록 이해관계가 분명해진다. 반발도 크다. 여야 합의가 쉽지 않다. 그러니 이해관계가 첨예하지 않을 때 규칙을 정리해놓으라는 뜻이다.더구나 이번에는 개정 이유가 분명하다. 2020년 총선은 사기극이었다. 이유야 어떻건 법에서 정한 규칙의 취지를 거꾸로 뒤집었다. ‘준연동형’은 국민이 준 표의 비율에 가깝게 국회 의석을 배분하겠다는 것이다. 득표율보다 지역구 의원이 많으면 비례대표는 적게 주고, 반대의 경우 비례대표를 더 주는 제도다. 그런데 민주당과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이 위성정당을 내세워 작은 정당들이 가져갈 의석까지 싹쓸이했다.21대 국회가 출범하자마자 고쳤어야 했다. 연동형이 살아나도록 위성정당을 막든지, 아니면 연동형을 포기해야 했다. 그런데 임기가 끝나도록 방치했다. 무엇이 유리한지 계산기만 두드렸다. 국민의힘은 병립형을 고수했다. 병립형(竝立形)이라는 뜻은 지역구와 비례대표가 따로 간다는 말이다. 지역구에서 의석을 얼마를 얻었건 비례대표를 결정하는 데는 영향이 없다. 정당투표에서 얻은 비율만큼 비례 의석을 배분한다. 연동형(連動型)은 각 정당이 얻은 득표율에서 지역구 의석만큼 빼고 비례 의석을 나누는 방식이다. 득표율보다 지역구 의석이 많으면 비례 의석을 적게 받고, 득표율보다 지역구 의석이 적으면 비례 의석을 더 받는다.21대 총선에서 서울지역을 예로 들어 보자. 민주당 지역구 후보가 얻은 표는 53.63%,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후보는 42.08%였다. 득표율대로라면 각각 26석과 21석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41석(83.7%)과 8석(16.3%)을 얻었다. 민주당은 15석을 더 가져갔고, 국민의힘은 13석이나 손해를 본 셈이다.서울의 비례 의석을 20석이라고 가정하면 전체의석은 49석. 득표 비율대로라면 민주당은 37석, 국민의힘은 29석이다. 연동형으로 비례 의석을 나누면 민주당은 이미 41석을 얻었으니 한 석도 못 받고, 국민의힘은 20석을 모두 가져간다. 결과는 41대 28이 된다.문제는 위성정당이다. 위성정당 때문에 이런 의도가 빗나갔다. 국민이 투표한 결과에 가까운 순서대로 나열하면 이렇게 된다.연동형>준연동형>병립형>위성정당을 못 막는 연동형.그러니 준연동형을 도입한 명분이 오히려 후퇴했다. 병립형보다 못하다. 위 순서에서 뒤로 갈수록 거대 양당이 가져갈 의석이 많아진다. 개정 방향은 분명하다. 위성정당을 막는 조항을 추가해 연동형의 취지를 살리거나, 병립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국민의힘은 처음부터 병립형을 고수한다. 군소정당에 의석을 나눠주면 결국 정의당 같은 민주당의 우당(友黨)만 생긴다는 생각이다. 이준석 신당도 반갑지 않다. 이재명 대표는 지난 대선 때 위성정당을 막아 준연동형을 살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욕심이 생겼다. “멋있게 지면 무슨 소용이냐”고 말했다. 병립형으로 돌아가거나 위성정당이 가능한 현행법을 방치하는 것이다.사실 위성정당을 금지해도 비례 의석을 받을 민주당 우당(友黨)이 많다. 야권비례연합정당 제안도 있다. 군소정당과 비례연합을 하면 수도권 선거 등에서 공조해 진보 표를 결집할 수도 있다. 비례에서 양보하는 이상으로 지역구에서 이익을 챙길 수 있다. 보수진영과는 다르다. 그런데도 이 대표가 고민한다. 대선만 생각한다. 이낙연당이나 지난 대선에서 당락을 바꾸는 표를 잠식한 정의당에 의석이 가는 게 싫은 모양이다.선거법은 합의 처리가 불문율이다. 패스트트랙에 태울 시간도 없다. 국민의힘이 병립형을 고수하는 한 법 개정이 어렵다. 이 대표가 책임지고 결단해야 한다. 결정 장애인지, 못 이긴 척 더 많은 의석을 노리는 욕심인지 알 수가 없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4-02-04

‘운동권 청산’과 ‘검사 독재 청산’의 격돌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총선 60여 일 전이다. 총선 전반전은 여야의 고질적인 격돌구도이다. 선거구도 면에서 양대 정당 사이에 여러 개의 신당이 창당된 것이 달라진 점이다.이들 제3의 정당이 약진하여 양당의 갈등구도를 완화시킬 지는 미지수이다. 현재는 여당과 야당에서 이탈한 세력끼리 통합하여 합종연횡을 모색하고 있는 실정이다.아무래도 이들이 하나의 빅 텐트를 치기는 어려운 정황이다. 여야의 공천관리 위원회는 후보 공천의 ‘공정성’을 강조하지만 공천 탈락자들이 상당수 신당 참여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여당은 선거 사령탑이 한동훈 비대위원장으로 교체되었지만 야당은 이재명 대표 체제가 그대로 유지될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야의 대표적 선거 슬로건은 ‘운동권 청산’과 ‘검사 독재 정권 청산’으로 집약되고 있다.이러한 선거 슬로건은 여야의 정치적 대립과 갈등을 증폭시킬 뿐이다. 이러한 상대를 청산제거하려는 정치 프레임은 시대에 뒤진 선거 전략이며 민생 문제 해결에는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한동훈 비대위원장은 개딸 전체주의 비판의 연장선에서 ‘86 운동권 청산’을 여당의 총선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86세대란 80년대 학생운동을 주도한 60년대 출생의 학생 운동권 세력을 지칭한다. 집권 여당은 시대에 뒤진 운동권 부패 기득권 세력의 청산이 시대정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80년대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학생 운동세력이 이제는 기득권 세력으로 전략했기에 이번 총선에서 반드시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생과 개혁을 외면하고 특권 카르텔을 형성하여 ‘내로남불’의 정치를 일삼는 운동권 세력을 제거하자는 취지이다.이러한 주장이 보수 강경층의 절대적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여당은 운동권 출신 공천 지역에는 경제 전문가 등을 후보로 내세워 선거 승리를 획책하고 있다.운동권 출신 민주당 정청래 후보에 김경율, 임종석에 윤희숙, 윤건영에 태영호, 김민석에 박민식 후보를 내세운 이유도 거기에 있다. 집권 여당의 운동권 청산이라는 선거 전략이 어느 정도 성공할지는 판단하기 이르다.민주당은 이에 대해 ‘검사 독재 청산’을 전면에 걸고 있다. 이재명 대표는 신년 기자 회견에서 현 정부를 ‘검사정권’으로 규정하고 이의 청산을 선거 슬로건으로 내걸었다.민주당은 운동권 세력청산은 과거 군사 독재권 시절 사용했던 낡은 구호라고 맞서고 있다. 이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입신 출세만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여 성공한 정치인들을 비판하고 있다.운동권 세력은 엄혹한 군부 독재시절 자신의 출세나 영달까지 포기하고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이들은 군부 독재에 대항하여 민주화에 이바지한 자신들의 역할과 공헌을 폄하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민주당은 윤석열 정부의 검찰독재 청산이 시대적 과제라고 강변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정계나 관계, 심지어 국영기업체에 수많은 검찰 출신이 포진된 것은 사실이다. 야당은 대통령 부인 특검 거부와 명품 선물 사건에 대한 수사 부진도 검찰 독재 정권과 연관시켜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상대를 청산하기 위한 선거 프레임은 보수나 진보 진영의 결속을 다지는 데는 일정 부문 기여할 지는 몰라도 선거의 정책적 이슈는 적절치 못하다.보수 정당의 운동권 세력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오늘 갑자기 등장한 문제가 아니다. 야당 역시 정권 심판론을 총선의 단골 메뉴로 부각하였다. 야당의 검사 독재 청산도 정권 심판의 연장선상에서 그 청산대상을 분명히 했을 뿐이다.결국 운동권 심판이나 검찰 독재 심판은 상대를 타도하기 위한 선거 전략일 뿐이다. 시대에 뒤진 이러한 네거티브 프레임이 등장한 것은 여야의 극한 대결 정치가 초래한 당연한 귀결이다.최근 야당 대표와 여당 의원의 정치 테러 사건도 이러한 증오의 정치가 초래한 일 단면이다. 여야 정치권이 아직도 처절한 자기반성 없이 네거티브 정치에 매몰된 것은 우리 정치의 후진성을 그대로 나타낼 뿐이다.여야의 이러한 반목적인 선거 프레임이 4·10 총선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러한 선거 전략이 중도층 표심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슬로건은 자기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집권 여당 내에도 80년대 운동권 출신 정치인이 있으며 민주당에 상대적으로 많이 있을 뿐이다.야당이 윤석열 검사 독재 정권 청산을 슬로건으로 걸었지만 민주당 내에도 검사출신 정치인은 여러 명 있다. 총선 구호로 상대를 제거하려는 네거티브 프레임은 건전한 정책 대결을 막는 장애물이다. 이러한 상호 거부적 분열적인 선거 프레임으로 건전한 표심을 끌 수 없다.기후 위기와 인구 절벽, 안보와 민생 위기 등의 거대 담론도 총선 공약에는 통하지 않는다. 흔히 사용했던 포퓰리즘적 정책이나 안보 이념 프레임도 이제 쉽게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국회의원 정수 축소, 세비 삭감, 의대입학 증원, 육아 비 지원, 교통비와 물가 등 민생 문제가 표심을 흔들 가능성이 높다. 여야 공히 네거티브 선거 전략부터 걷어 치워야 한다.

2024-02-04

교수의 정년 퇴임 정당한가?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 필자는 포스텍 명예교수회(APPE·Association of Postech Professors Emeriti) 사무총장으로 매년 쏟아져 나오는 명예교수들을 APPE에 가입시키고 명예교수회의 행사를 진행하는 일을 하고 있다.65세 기준으로 강제 퇴임 당하는(?) 교수들을 매년 수십명씩 보고 있고 그 인원은 이제 100명을 넘어 200명을 향해 가고 있다.필자도 포스텍을 정년퇴임하고 타 대학 특임 교수를 하고 있고 일부 교수들이 계속 전문성을 유지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요즘 퇴직 교수나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 직종들은 65세가 넘어도 모두 여러 가지 형태로 일을 계속 하고 있거나 계속 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강하다.그러나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교수들은 그 아까운 지식과 지혜가 사회나 교육계를 위해 사용되지 못하고 사장되고 있는게 안타까울 때가 많다.미국이나 캐나다 등 많은 서구 국가들은 강제퇴임 규정이 없다. 종신직(Tenure·테뉴어)을 받은 교수들은 본인이 원할 때까지 대학교수를 계속 하면서 가르치고 연구를 계속할 수 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을 최근 방문했을 때 거의 40년 전 필자를 가르쳐준 스승들이 아직도 80대 나이에 가르치고 연구를 활발히 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그러한 활동은 그들의 건강에도 도움이 되었고 전문성은 여전히 대단한 수준이었다. 퇴임 교수들이 캠퍼스에서 고별 강연을 하고 퇴임식을 하고 몸은 떠나지만 대학을 마음에서 떠나 보내는 교수는 없을 것 같다.포스텍 산업경영공학과 교수연수회에 초대되어서 강연할 기회가 있으면 항상 현직 후배 교수들과 어울리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서 그들이 생각하는 학교, 학과발전에 나의 생각을 정리해 보여주었다.내 마음의 소리는 “아직 나는 시니어가 아니다. 나는 현역이다”라는 마음이었다. 대부분의 은퇴교수들의 마음은 현역일 것이다. 이제 캠퍼스를 떠나 바깥사회로 나가는 교수들의 아쉬운 마음을 읽을 수 있다.“어제는 봄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특별한 볼일 없이 학교에 들렀다. 왠지 ‘교수로서 마지막 날을 학교에서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라는 생각 때문인가? 공식적인 정년퇴임식을 갖고, 곧 바로 연구실을 정리했다.후배 교수들과 연구실 제자들이 마련한 고별강연을 마치고 오늘부터 진정한 백수(?)가 되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지난 세월 석박사 제자들이 함께 지냈던 학생연구실을 둘러보았다”퇴임 교수들에게 마지막 학기, 마지막 강의, 마지막 지도학생 등 ‘마지막’이란 단어는 만감을 교차케 한다. ‘고별강연’이라는 행사가 있다.그 교수가 전공한 분야에 대한 마지막 강연을 캠퍼스에서 학생, 교수, 직원들을 상대로 하는 강연이다.대부분 전공강연으로 끝나지 못한다. 걸어온 인생을 반추하는 시간은 그 전공분야의 흥망성쇠 와 결을 같이 한다. 그들의 눈가는 젖고 희끗희끗한 머리는 강연을 듣는 제자들의 검은 머리위에 내리비춘다. 만감이 교차한다.“언제나 삶은 서툴 수밖에 없다. 교수생활도 항상 서툴다. 좀 더 마음과 감성과 지식을 새롭게 성장시키려 했던 나날인 듯하다. 알게 모르게 함께 한 사람들을 기쁘게도 했겠지만, 또한 알게 모르게 많은 실수를 하고, 사람들을 섭섭하게도 했을 것이다. 그동안 수없이 많았을 저의 서툰 삶을 관대하게 포용해 주시길 기원해 본다”이런 퇴임사를 할 때 사실 그 은퇴교수의 마음은 어떨까?떠나면서 강의실, 실험실, 책상, 걸상 그리고 캠퍼스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그들을 보면서 왜 이들이 여전히 연구와 교육의 열정을 갖고 있는데 이런 아쉬운 마음으로 떠나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포스텍 캠퍼스에는 길마다 길이름 표지판이 있다. 학생회관에는 만국기가 휘날린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 길을 걸으며 그리고 세계적 인재를 꿈꾸는 새내기 인재를 만날 때마다 그 표지판과 만국기를 걸던 순간이 떠오른다.아직도 은퇴한 시니어 교수들의 애교심과 연구 교육에의 정열은 주니어 교수들 아니 그 누구보다 강렬하다.젊은이들의 꿈과 희망을 위해 애쓰는, 그래서 지혜를 사회와 국가 발전을 위해 오늘도 시니어 아니 시너이 교수들, 은퇴 교수들은 뛰고 싶다.이제 시니어는 사회와 국가발전을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세대로 자리잡고 있다. 교수의 정년과 강제 퇴임은 이제 손을 봐야 할 때가 왔다. 과거 교수가 철밥통일 때와는 달리 이제 교수들은 연구를 통해 생존하고 있다.그 연구자들이 일시에 연구실과 장비를 반납하고 길거리에 내 앉는 교수강제 퇴임은 전면 재고되어야 한다. 100세 시대의 65세 은퇴는 한창 연구와 교육에 완숙한 경지에 들어서는 시니어 교수들에게는 맞지 않는 제도이다.필자도 특임 교수로 있는 대학에서 포스텍 보다 더 좋은 강의 평가를 받고 있다. 서울대에서 포스텍으로 그리고 울산대로 옮겨간 70학번 전국대학 예비고사 수석의 한 교수가 생각난다. 아마도 그와 같은 교수들에게는 정년퇴임은 영원히 필요없는 제도일 것이다.

2024-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