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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팬이 만들어 가는 일본의 SF 문화

강지우 SF평론가 일본은 ‘오타쿠’의 나라로 불린다. 한 분야에 열과 성을 다해 파고드는 마니아가 많다는 뜻이다. SF도 예외는 아니다. 12월 초, 교토대 SF/환상문학 연구회가 주최하는 ‘교토SF페스티벌’이 온라인으로 열려 한국에서도 참가할 수 있었다. 300여 명의 참가자 중에는 장년층 여성도 눈에 띄었는데, SF 향유의 역사가 길어서인지 팬의 연령대가 우리나라보다 넓은 듯했다. 페스티벌에서는 작가나 평론가를 초청한 강연이 오후에 펼쳐지고, 밤에는 료칸 숙소를 통째로 빌려 방마다 주제(SF 초심자의 방, 공모전 준비 방 등)를 잡고 밤새 이야기꽃을 피운다. 요즘은 합숙 대신 디스코드 채팅을 활용한다. 올해 페스티벌에서 다룬 주제 중에는 해외 퀴어 SF의 약진과 SF 작품의 아이디어를 산업계에 컨설팅하는 ‘SF 프로토타이핑’이 특히 흥미로웠다. 아마추어 SF 비평, SF 번역 등 동인지를 홍보하는 참가자도 많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형태의 팬 활동이라 내심 부러웠다.한국에서는 코로나 이후 명맥이 끊긴 SF컨벤션이 일본에서는 여럿 운영되고 있다. 우선 가장 큰 행사는 무려 1962년부터 이어져 온 ‘일본 SF대회’로, 성운상 시상식이 열릴 정도로 대표성을 띈다. 매년 1천 명 이상 참가자가 몰리며 전성기에는 수천 명 이상이 운집했다고 한다. 일본SF작가클럽이 주최하는 ‘SF 카니발’은 역사가 오래되진 않았지만 일본 SF대상 시상식과 작가 사인회 등이 열린다. 올해는 황모과, 해도연 작가를 초청해 한일 SF 대담이 열리기도 했다.가을에 ‘교토SF페스티벌’이 열린다면, 봄에는 ‘SF세미나’와 ‘HAL-CON(하루콘)’이 열린다.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나오는 인공지능 컴퓨터 HAL에서 이름을 땄는데, HAL의 일본어 발음 ‘하루’는 행사가 열리는 봄을 뜻하기도 한다. 2007년에 일본에서 개최된 월드콘(세계 최대 규모의 SF 컨벤션) 스태프들이 운영하고, 켄 리우, 래리 니븐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SF 작가도 초빙한다. 컨벤션 형태의 행사 외에 2001년부터 한 달에 한 번 ‘SF 팬 교류회’도 열리고 있다.이런 행사들에 참여해 보니 작가와 팬, 프로와 아마추어의 구분 없이 모두가 SF 팬이라는 정체성을 띠고 모여 즐겁게 어울린다는 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SF 팬이었다가 작가, 평론가, 출판 편집자 등 SF 업계에서 일하게 된 이들도 많다. SF 팬덤이 SF 문화를 이끌어가는 양상이 일본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 특유의 마니아적 끈기와 열정이 깊고 견고한 팬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다.우리나라에도 PC통신 SF 동호회를 기점으로 SF 팬 커뮤니티가 여럿 있어 왔으나 그 활동이 이제는 많이 움츠러든 상황이다. 최근의 SF 붐은 SF 마니아가 늘어났다기보다는 기존 문학 향유층이 SF까지 섭렵하게 된 영향이 더 크지 않을까 조심스레 짐작한다. 일본의 사례가 부럽기는 하지만, 우리나라는 마니아 지향보다는 SF 애호층의 외연을 넓히는 방향으로 SF 문화를 만들어 나가면 어떨까. 역사는 짧지만, 더 역동적이고 다채로운 문화가 피어날 것이다.

2023-12-26

한동훈, ‘새 정치문화’ 보여달라

심충택 논설위원 어제(26일) 국민의힘 전국위 의결을 거쳐 공식 취임한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그의 첫 ‘정치적 작품’인 비대위원 인선작업에 들어갔다.오는 29일까지 비대위원 임명 절차를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누가 비대위원이 되느냐에 따라 한 위원장의 당 쇄신 구상이 드러나기 때문에 국민의 관심이 많다. 한 위원장은 성탄 연휴기간 주변인사들로부터 여성·청년 인재를 중심으로 폭넓게 추천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현재 거론되는 인물들을 보면, 비대위가 젊음과 도덕성, 전문성으로 무장한 실력파로 구성될 것 같다. ‘한동훈 비대위’가 조만간 출범할 경우, 국민의힘은 전무후무한 정치적 에너지를 가질 가능성이 크다. 특히 운동권 중심의 ‘586 정당’이라는 퇴보적 이미지를 가진 민주당과는 대비되는 정당으로 재탄생하게 된다.‘한동훈 비대위 효과’는 그가 위원장으로 지명된 직후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대표적으로, 전국 유권자 1천6명을 대상으로 한 한국여론평판연구소의 차기 대통령감 적합도 조사에서 한 위원장이 45%를 차지해 민주당 이재명 대표(41%)를 4% 포인트 차로 따돌렸다. 그동안 차기 대통령감을 묻는 각종 다자대결 조사에서 이 대표는 줄곧 선두를 유지해왔다. 한 위원장의 중도확장성이 입증된 것으로 볼 수 있는 조사결과다. (자세한 조사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한동훈 비대위’의 앞날은 가시밭길이다. 내일(28일) 당장 민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검건희 여사 특검법안’을 단독처리한다.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2010~2012년 사이) 범죄를 조사할 이 특검법은 이미 올 2월 법원이 1심선고를 한 사건이다.1심에서 도이치모터스 회장 권오수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주가조작을 실제로 담당한 직원은 징역2년을 선고받았다. 김 여사는 이들에게 통장을 맡긴 91명의 전주(錢主) 중 1명에 불과하며, 유일하게 기소된 전주 1명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한 위원장은 “선전·선동하기 좋게 만들어진 악법”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야당의 ‘제식구 감싸기’ 프레임에서 어떻게 벗어날지 주목된다.‘인요한 혁신위’가 제안한 당 쇄신작업도 급하다. 국민은 지금 한 위원장이 어떤 혁신적인 정치문화를 선보일지 눈여겨 보고 있다. 한 위원장이 타깃으로 삼아야 할 혁신과제는 공천물갈이와 국회의원 특권 폐지, ‘중수청(중도층·수도권·청년층)’ 외연확대 등 산적해 있다.혁신과제 외에도 한 위원장만이 할 수 있는 숙제가 있다. 보수지지층 결집은 총선승리를 위한 필수과제다. 여당 스펙트럼을 넓히려면 어쨌든 이준석 전 대표와 유승민 전 의원과는 연대를 해야 한다. 이준석은 오늘(27일) 탈당한 후 1~2주 뒤 신당을 창당하겠다는 계획이다. 야당에게도 손을 내밀어 ‘대화의 정치’를 복원해야 한다.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에 따른 반사이익만 기대하는 안이한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동훈 비대위’는 그동안 뺄셈정치를 해온 ‘용산’과는 차별화의 길을 걸어야 성공할 수 있다.

2023-12-26

간병지옥에서의 脫出

우정구 논설위원 세계 각국마다 고령사회로 접어들면서 돌봄이 필요한 노년인구가 늘고 있다. 일찍 초고령사회로 들어선 일본은 돌봄 선진국으로 꼽히는 나라지만 나이든 부모 간병을 둘러싼 사회 문제가 적지 않게 발생한다. 간병을 하다 살인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종종 일어난다 하니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작년 일본에서 출간된 ‘불효돌봄’이란 책의 저자는 “병들고 나이든 부모를 돌보는 데 자식이 착해야 할 필요가 없다”며 “부모를 돌보기 위해 직장을 떠날 고민은 하지말고 할 수 있는 일만 하자”는 주장을 폈다.우리말에 “긴 병에 효자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고령사회로 접어든 우리도 부모 간병 문제로 고민하는 가정이 급격히 늘고 있다. 간병비 부담은 물론이거니와 간병을 누가 할 것인지를 두고 가족이나 형제간 갈등도 심각하다.부모 병 구완을 위해 간병인을 쓰다보니 간병비 지출을 감당못해 간병파탄 환자가 늘고 있다. 부모 간병 때문에 퇴직하는 간병퇴직, 가족간 불화로 빚어지는 간병지옥, 심지어 간병살인까지 벌어지는 비극적 상황도 목격된다. 집안에 간병할 사람이 생기면 온가족이 시한폭탄을 안은 것처럼 전전긍긍이다.하루 간병비 14∼15만원 주고도 사람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한달이면 400만원이 훨씬 넘으니 병을 오래 끌면 수천만원 부담도 금방이다. 간병비 때문에 한가정이 망할 참이다.정부가 간병 경감방안을 내놨다. 간호간병 통합서비스 확대와 요양원 입원 중증환자에 대한 건강보험 적용 등이 그 내용이다. 막대한 예산이 따르는 문제라 쉽지는 않아 보이나 진작 손을 봐야 할 문제라는 데 이의는 없다. 간병지옥에서 탈출할 묘안이 나와야 한다./우정구(논설위원)

2023-12-26

‘분산에너지’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대구시는 지난 19일 달성군에 위치한 한국전자통신연구원 대경권연구센터 주차장과 옥상에 시민햇빛발전소 10~13호기 설치를 완료하고 준공식을 개최했다. 2021년 11월 국가물산업클러스터 내 입주기업 (주)그린텍건물 지붕에 설치한 대구시민햇빛발전소 9호기가 가동된 이래 무려 2년 만이다. 2008년 9월 수성못에 설치된 대구시민햇빛발전소 1호기부터 이번 13호기까지 발전용량을 모두 합치면 이제 1천100kW로 1MW를 넘어섰다. 그러나 이 발전용량은 2023년 대구시 1일 최대 전력수요량 7.25GW에 비해서는 너무나 적은 양이다. 대구시는 전력 수요량의 단지 15%만 지역 내에서 공급하고 있다.이렇듯 대구시와 같이 전력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이 심한 지역은 내년 6월부터 시행되는 ‘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이하 분산법)’에 의해 일정 규모 이상의 신규개발사업 시행자와 신축시설의 소유자는 ‘분산에너지’ 설치의무 비율이 100%로 적용된다. 이는 이미 전력자립률이 100% 이상인 경북, 울산 등에서는 설치 의무비율이 25%인 것에 비하면 매우 높은 의무가 부과되는 것이다. 그리고 ‘분산법’에는 ‘분산에너지 특화지역’을 지정하여 해당 지역 내에서는 생산된 전력 등 지역에너지를 직접 판매할 수 있게 하여 지역에너지 자립을 유도하고 송전망 건설 최소화와 전력계통 안정성을 도모하고자 한다.정부는 현재와 같이 서해와 동해 등 해안가에 건설한 대규모 석유, 석탄 등 화석연료와 원자력 에너지원을 이용한 발전소에서 장거리 송전망을 통해 도시와 산업단지에 전력을 공급하는 중앙집중형 전력시스템의 운영은 낮은 주민수용성과 탄소중립 실현을 위해 한계에 봉착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지역에서 생산하여 소비하는 ‘지산지소(地産地消)’의 에너지 정책을 적극 도입하고자 하며, 이를 위해 ‘분산에너지’ 제도가 도입된 것이다.‘분산에너지’는 ‘분산법’ 시행령에서 규정한 바와 같이 중앙집중형 에너지 시설보다는 매우 작은 자가용전기설비, 발전설비(40E404 이하) 그리고 열에너지설비를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CHP(열병합발전소), 태양광, 연료전지, ESS(에너지저장장치), VPP(가상발전소) 등 다양한 에너지 설비가 ‘분산에너지’로 설치될 수 있다. 그리고 ‘분산법’에는 ‘분산에너지’가 급속히 확대될 경우에 대비하여 배전망에 대한 관리 의무를 강화하고, 일정 규모 이상의 전기를 사용하려는 사업자에게 ‘전력계통영향평가’ 실시의무도 부여하였다.많은 지역에서 ‘분산에너지 특화지역’ 지정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들 지역 내 ‘분산에너지 사업자’는 자유로운 전력거래를 통해 발전과 판매(배전)사업이 가능하게 됨에 따라 ‘특화지역’으로 지정받은 지역의 에너지와 탄소중립관련 융합기술개발과 관련 산업의 비약적 성장을 촉진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새해에는 대구경북에서 ‘분산에너지’ 제도의 활용으로 지역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다. 대구에서는 ‘누구나 햇빛발전 플랫폼 구축사업’의 활성화로 시민들의 햇빛발전소 건립 참여를 쉽게 할 필요가 있고, 경북에서는 ‘지역별 차등요금제’로 산업단지의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2023-12-25

‘삼시두끼’

홍석봉 대구지사장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먹는 데 진심이었다. 식사의 질이 문제가 아니라 끼니를 잇는 것 자체가 중요했던 시절이 있었다. “식사했느냐”고 묻는 것이 인사였다. 성경에도 기근 이야기가 여러 곳 나온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마태복음 구절도 당시 끼니 해결이 얼마나 절실한 문제였는지를 잘 보여준다.우리나라는 천재지변이 많았다. 왜적의 침범도 잦았다. 그러다 보니 가뭄과 홍수, 전쟁으로 말미암은 기근이 빈번했다. 식량난은 인간에게는 재앙이다. 굶어 죽는 이들이 속출했다. 북한은 1995년 8월 가뭄과 흉년이 겹쳐 심각한 식량난을 겪었다.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 한국에서 15만t의 쌀을 무상 원조받았다. 지금도 북한은 굶어 죽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9살 때 탈북한 20대 후반의 한 탈북민은 남한에 와서 “삼시세끼 먹을 수 있는 것 자체만으로 행복하다”고 했다. 1960년 대만 해도 우리 주변에 끼니를 거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노력한 끝에 우리는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선진국이 됐다. 지금은 각종 복지혜택과 사회보장제도가 잘 정비돼 굶는 사람은 없다.우리네 식생활 습관이 크게 바뀌고 있다. ‘삼시세끼’는 옛말이 됐다. 요즘 한국인은 하루 평균 두 끼 정도 먹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젠 ‘삼시두끼’라고 해야 할 판이다. 심지어는 하루 한 끼만 먹는다고 답한 이들도 있다. 체력 유지에 필요할 정도만 하는 식사가 됐다. 다이어트 열풍도 한몫했을 터다. 끼니가 생활의 보조 수단이 된 것이다. ‘삼시세끼’는 한 종편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예능 프로그램의 제목이 될 정도로 이젠 희화화됐다. 새삼 상전벽해(桑田碧海)를 느끼게 한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12-25

슬픈 크리스마스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크리스마스가 예수의 탄생일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역사적, 종교학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세계 여러 나라와 지역에서 크리스마스를 매우 중요한 축일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물론이고, 그렇지 않은 나라들도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단지 ‘빨간 날’ 중 하나로 여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날이다. 사랑하는 가족, 연인, 친구와 즐겁게 보내는 것은 물론이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기인 만큼 평소 바쁘게 지내느라 잊고 살았던 소외된 이웃들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 크리스마스의 또 다른 의미일 것이다.‘크리스마스 정신’이라는 표현이 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세상에 내려온 아기 예수의 뜻을 기려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을 환대하는 인류애를 되새기자는 것이다. 종교와 신앙의 차원을 넘어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가까운 사람들과 선물을 교환하고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그럴 때일수록 우리 주위에 소외된 이웃은 없는지 살피는 마음이 필요하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누군가가 취약계층을 위해 적지 않은 돈이나 물품을 기부했다는 훈훈한 소식을 접하곤 한다. 이들이야말로 크리스마스 정신을 실천하는 이름 없는 천사들이다.그런데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도 크리스마스 정신을 논하기 어려운 듯하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베들레헴에서 멀지 않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전쟁이 이 순간에도 진행 중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굶주림과 질병과 죽음의 공포로 신음하고 있다. 이 전쟁을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를 묻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전쟁을 멈추고 삶을 이야기하는 일이다. 이 잔혹한 현실 앞에서 크리스마스 정신은 무력하기만 하다.한국 사회의 상황도 그리 만만치는 않다. 장기화된 경제불황과 산업구조의 변화, 소비심리의 위축으로 인해 대다수 국민의 삶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내 삶이 팍팍하니 이웃을 향하는 마음도 인색해지기 쉽다. 보도에 따르면 올해 연탄 기부량이 목표치인 삼백만 장에 백만 장 가까이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더구나 기상이변으로 인한 한파의 습격까지 더해진 상황이다. 취약계층의 열악한 주거 형태와 난방비 부담을 생각하면, 이들에게 올겨울이 얼마나 힘겨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산업화의 결실은 소수가 누리고,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상이변이라는 피해는 특정 계층에게 더 가혹하게 돌아온다. 슬픈 겨울이고 슬픈 크리스마스다.이 칼럼이 나갈 시점이면 크리스마스는 이미 지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웃을 돌보는 마음이 크리스마스에만 발휘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겨울은 길고 봄이 찾아오려면 아직 멀었다. 경제를 살리는 일은 책임 있는 분들의 몫이겠지만, 경제가 살아날 때까지 버티게 하는 힘은 서로에 대한 환대와 호혜의 정신에서 나온다. '라면의 상식화'가 아닌, 크리스마스 정신이 상식화된 새해를 기대해 본다.

2023-12-25

2023 세모에

강길수 수필가 올해가 일 주간도 못 남았다. 다시, 세모(歲暮)다. 올해 끝날, 12월 캘린더 한 장을 넘기면 제야의 종소리를 타고 새해 2024년이 밝을 것이다.생각해보면, 시간은 인간사회처럼 다사다난한 게 아니라 그저 강물처럼 유장하게 흐를 뿐이다. 그런 시간을 사람은 책력을 만들어 구분하고, 생활의 방편으로 삼는다. 1년 동안의 해, 달의 운행, 월식, 일식, 절기, 기상변동 등을 적은 책이 책력이란다. 인간은 왜 책력을 만들까. 영적, 이성적 존재여서 그럴까.사람은 자연 속에 태어나 영향을 받고, 주면서 살다가 결국 그 품으로 돌아가는 존재다. 인간이 자연과 상호작용과정에서 터득한 천문(天文)의 한 분야가 책력이자, 캘린더이리라. 하여, 사람들은 해가 바뀔 때마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왔을 터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올해를 산 나도, 며칠 뒤 12월 캘린더를 넘긴다 생각하니 뭔가가 뒷등을 당기는 기분이다.2022년 2월, 러시아 침공으로 벌어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아직도 계속된다. 엎친 데 덮쳐 올해 하마스-이스라엘전쟁도 터졌다. 러시아는 공산주의 체제를 버렸음에도, 왜 서방과 척을 질까. 권력자들의 야욕을 이해할 수 없다. 따져 보면, 배다른 형제지간의 후손인 이스라엘과 아랍의 반목과 전쟁은 또 무엇일까. 인류의 집단지성 향상은, 과학기술 발전과 반비례한다는 말인가.우리 정치권은 왜 ‘좌우 대결’이란 헛된 프레임으로 역사상 가장 찬란히 이뤄낸 민족중흥의 복을 걷어차고, 쪼개기로 국민을 어둠으로 몰고 갈까. 한심하다. 우리 지성들과 언론들은 왜 부정선거, 여론조작, 통계조작 같은 사회 거악들의 본질적 문제들을 외면, 침묵하거나 빈 거짓된 말만 해댈까. 비겁하다! 설마 우리 사회에,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디스토피아(dystopia)가 스며든 게 아닐까. 무섭다. 오웰의 빅브라더가 이미, 우리 사회를 움켜쥐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마저 드니 말이다.그 무엇이, 이 세모에 내 뒷등을 당길까. 올 한해를 곰곰이 돌아본다. 맞아, 그랬어. 그 말이 뒷등을 당겼던 거다. 바로,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이었다. 유행가 가사에도 있듯, ‘입장 바꿔 생각하는 마음’ 말이다. 지난 한 해는 분명 나와 우리 집, 우리 사회와 우리나라, 나아가 지구촌도 역지사지를 더 잊은 한 해였다 싶다.‘콩 한 쪽도 나누어 먹는다!’는 속담이 있다. 겨레의 삶에 연연히 흐르는 ‘품앗이 문화’를 말하리라. 아이들 어릴 때, 이 속담이 들어간 동요를 “옛말에도 있었네. 콩 한 쪽도 나누어 먹자!…”하고 씩씩하게 부르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무리 세상이 돈, 권력, 야만으로 탁해져도 겨레의 마음에서 이 문화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콩 한 쪽도 나누는 마음은 바로 역지사지 정신’이니까.비록 나라 안팎 사정이 녹록지 않더라도, 2023년 세모에 나는 희망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콩 한 쪽도 나누는 품앗이 문화 곧, ‘역지사지의 삶’을 연연히 살아온 우리 겨레이기 때문이다. 분명, 우리 국민은 2024 새해에도 부정, 비리, 조작, 야만적 폭거 같은 사회악을 이겨내며 꿋꿋하게 살아내리라 믿는다.

2023-12-25

하나의 낱말이 주는 청량감 하나의 문장이 주는 따뜻함

시의 언어가 주는 새로운 감각을 경험해보고 싶다면, 한 권의 시를 낭독해보거나, 필사해보는 경험이 가장 좋을 것이다. 우리는 의미를 찾아내고 요약하는 방식의 독서에 익숙해져 있어서 언어가 주는 청각적 울림이나, 시각적 새김에 대해 신경 쓸 만한 여유가 없다. 하나의 시를 낭독을 해보거나 필사를 해보면, 그동안에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감각 기관을 쓰는 것처럼 새삼스러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서가에 꽂혀 있는 어떤 시집이라도 좋겠지만, 이 겨울에는 이문재 시인의 시집 ‘혼자의 넓이’로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사진은 창비에서 출판된 해당 시집의 표지이다. 가끔은 스치듯 지나가는 단어가 마음속에 들어와, 나가지 못하고 한참 동안이나 머물러 있는 경우가 있다. 책에서 툭 떨어진 한 낱말이 일으킨 감정의 파문이 오랫동안 계속된다. 누군가 쓴 글의 일부였던 그 단어는 그것이 본래 들어 있던 맥락으로부터 빠져나와 불의의 순간에 그것을 읽는 내 맥락 속으로 뛰어든다.가끔은 어떤 문장이 유독 머리에 맴돌아 그 짧은 문장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고작 몇 개의 단어를 엮었을 뿐인 그 문장은 머릿속에 그림처럼 새겨져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나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다. 분명 누군가 엮어두었을 그 문장은 나를 그 속으로 끌여들여서 그 속에서 헤매도록 만든다.책을 읽을 때나, 신문이나 잡지를 읽을 때, 또는 누군가의 SNS에 올라온 피드를 읽을 때, 우리는 그 문자가 울림이나 새겨진 이미지를 읽고, 그 문자에 담긴 의미를 파악한다. 이 당연한 과정은 어른이 되어 문해력이 높아지게 되면 망각되어 버린다.어린 아이들이라면 당연히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글자를 소리 내어 읽고 나서, 그 뒤에 의미를 이해할 것이다. 조금 더 읽는 연습을 하게 된다면, 눈으로만 보고 소리를 상상하지 않아도 의미는 저절로 떠오르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단어를 소리 내어 읽는 것으로부터, 그 소리의 울림을 상상하면서 읽는 것으로, 나아가 문자의 시각적 새김만을 눈으로 보고서 읽는 것으로의 변화는 음성을 표기할 수 있는 한글로 표기하는 한국어 글쓰기의 자연스러운 변화일 것이다.그래서일까. 우리는 무언가를 읽는다는 것 자체에는 그렇게 큰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안경에 묻은 티끌은 내가 그것에 신경을 쓸 때는 보이지만, 내가 그 안경의 렌즈 너머로 보이는 대상에 마음을 쓰기 시작하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가 글을 읽을 때 그 문자들의 연쇄가 만들어내는 의미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글을 읽는 방식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못한다. 소리를 내는 것이나, 소리를 내지 않고 시각적 새김만으로 읽는 것 모두 마찬가지이다. 어떤 단어를 소리 내어 낭독해보거나, 어떤 단어가 새겨져 있는 방식에 주목해보면, 어색한 느낌을 준다.가끔은 그래도 스치듯 울리는 단어들이 마음속에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시집이나 에세이집 속의 단어가, 누군가 손으로 쓴 삐뚤빼뚤한 편지 속 단어가, SNS에 누군가 남겨둔 단어가, 이유를 알 수 없게 갑자기 마음속에 들어와 귓전에 생생한 울림을 남긴다. 눈 아래 멍울과도 같은 잔영을 남긴다. 스토리가 있는 소설이나, 지식과 논리가 담겨 있는 인문 교양서와 달리, 시집이나 에세이집이 독자에게 줄 수 있는 공감이란 어쩌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글을 계속 읽어오고 문해력이 늘어나면서, 그렇게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자동적으로 읽어버리고 있던 ‘읽기’라는 과정을 새삼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것 말이다.사랑, 풀잎, 바람, 풍경…. 문득 마음속에 들어온 단어를 혀 위에 두고 굴리면, 왠지 새로운 감각으로 그 단어가 들어오는 경험을 하게 된다. 단어가 새겨져 있는 방식에 신경을 쓰면서 읽다 보면, 대체 어떻게 이런 새김으로 이런 단어가 되었을까 하는 낯선 느낌과 함께 그것이 가리키는 의미조차 새삼스러워진다. 내 귀와 눈에 남아 있는 그 단어는 이리저리 부딪히며 청량감을 준다. 또한, 어떤 문장을 되뇌이다 보면, 그것이 연결되어있는 방식의 다정함을 느끼게 된다. 물론 너무나 바쁜 우리에게 그런 낯선 언어 감각의 훈련조차 사치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세상에 그런 단어, 문장 하나쯤 있다는 것은 어딘지 든든한 일이지 않은가. /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3-12-25

노래와 놀이 그리고 춤, 월월이청청

예부터 달이 유독 청청한 밤에는 달빛 아래에서 전통 가무를 즐겼다. 본래 전통 가무는 노래와 놀이 그리고 춤이 따로 떨어지지 않고 모두 어우러져 행해졌다.주로 가장 생산성이 왕성하다고 평해지는 젊은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원형·선형·나선형 등의 형태를 그리면서 집단으로 놀았는데, 보름날에 달을 닮은 춤을 춘다는 점에서 풍요와 다산을 축원하는 축제로서 행해졌다. 특정 지역이 아닌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곳에서 연행되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현재 한국에서는 전라도의 강강술래·안동의 놋다리밟기·포항과 영덕의 월월이청청이 가장 유명하다.월월이청청은 경상북도 대부분, 경상남도와 강원도 접경에서 그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그중 포항과 영덕에서 가장 원형에 가까운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 포항은 ‘월월이청청’, 영덕은 ‘월워리청청’, 안동은 ‘얼얼이청청’, 구미는 ‘널널리청청’ 등으로 불렸다. 놀이 이름을 한자로 칭하는 과정에서 지역의 사투리가 섞이면서 여러 형태로 불리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월월이청청은 하나의 춤이 아니라 마당놀이처럼 여러 춤이 이어져 행해진다. 포항에서는 월월이청청·달넘기·외따기·재밟기·대문열기·실꾸리 감기와 풀기·생금생금 생가락지 등이 전해지며, 영덕에서는 월월이청청·달넘세·절구세·대문열기·산지띠기·동애따기·재밟기·생금생금 생가락지·재바재바·실꾸리 감기와 풀기 등이 확인되었다.원형, 나선형, 단선형, 대선형, 교차형 등 춤의 형식은 다양하다. 원형무에 속하는 월월이청청은 도는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지만 대개 오른쪽으로 먼저 돌기 시작한다. 춤을 추다가 방향을 바꾸거나 더러는 원을 좁혔다가 다시 넓게 펼치기도 한다. 느린 장단에서 점점 속도를 빨리하며 나중에는 옆 사람의 손을 놓치거나 댕기가 하늘로 솟구칠 정도로 활동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달넘세, 실꾸리 감기와 풀기는 나선무에 속한다. 원의 안쪽에서 바깥 방향으로 타 넘거나 팔과 팔 사이를 통과하는 형태로 춤을 춘다.처음 나선형을 이루던 행렬은 점차 커지다가 마침내 다시 원형이 되거나 뭉쳐져 있던 형태가 풀리는 형태를 취한다. 달넘세의 “달 넘세 달 넘세 달이나 쿵쿵 달 넘세”라는 후렴구에서 알 수 있듯이 원형은 모두 이지러졌다가 다시 완전해지는 달의 형태 변화를 춤으로 표현한 것이다. 부수적인 놀이에 속하는 단선무형은 산지띠기, 동애따기, 재밟기, 대문열기 등이 있다. 산지띠기는 어미 소에게서 송아지를 떼는 것이고, 동애따기는 동아(식물)를 따는 과정을 형상화한 것으로 일상생활을 춤으로 표현하였다. 꼬리잡기와 닮은 놀이인데, 모두 떨어질 때까지 한 사람씩 떼어낸다. 재밟기의 ‘재’는 ‘지애’의 축약형으로, 지애는 기와의 사투리이다. 등을 구부린 채 앞사람을 잡은 형상이 마치 연달아 놓인 기와처럼 보인다. 가장 뒷사람부터 차례로 굽혀진 등을 밟고 지나가면서 느린 장단으로 노래를 부른다. 대문열기는 대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손을 내리거나 올리는 것으로 대문의 모양을 만들며, 한 사람씩 대문 안에 가두는 형태도 드러난다.연행에서의 노래는 선후창의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즉흥성이 강한 편이다. 대개는 미혼 여성의 사랑을 노래한 경상도의 보편적인 서사민요의 내용을 담고 있다.월월이청청의 “토연토연 김토연아”는 토연이라는 처녀와 서울 선비 사이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고, “생금생금 생가락지”는 정조를 의심받은 미혼의 여동생이 죽기 전에 자신의 결백함을 호소하는 애절한 내용을 담고 있다. “재바재바”는 생금생금 생가락지의 일부분을 따로 떼어 노래한 것이고, 대문열기는 “서울이라 남도령아 대문 조금 열어주소”에서 알 수 있듯이 남도령이라는 미혼 남성이 살고 있는 집 앞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모두 미혼 여성들의 사랑이 노래의 서사로 쓰였다.강강술래는 미혼의 청춘남녀가 설·대보름·단오·백중·추석·중구 등 다양한 날에 개방적인 장소에서 행해진 놀이이고, 놋다리밟기는 혼인 여부를 가리지 않은 젊은 여성이 대보름에만 연행한 행사였다. 월월이청청은 담장이 있는 넓은 마당에서 설·대보름·이월 초하루·추석 등에 미혼 여성을 중심으로 연행되었다. 노래와 놀이와 춤이 함께 전승된 전통 가무는 다른 도구 없이 손만 마주 잡고 연행된 여성 중심의 집단유희이다. 이러한 전통 가무는 마을마다 전승되다가 일제강점기에 다른 대동놀이와 마찬가지로 축소 진행되었다. 해방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대부분 전승이 끊기다시피 사라졌다가 일부 마을에서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것을 지금의 형태로 복원하였다.월월이청청과 같은 전통 가무는 예전에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상황에 맞게 변형되어 즐기는 축제였다. 노래 또한 주고받는 형식으로 재미를 더했으며, 고난도의 동작이 없어서 배우기도 쉬웠다. 지금은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축제 문화의 매개체로 활용될 수 있으며, 학교에서는 또래 집단의 교류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복원을 넘어서 현재의 젊은 층까지 즐길 수 있는 문화로 거듭나기를 기대해본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2023-12-25

한 해를 마무리하며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올해도 이제 1주일이 남았다. 한 장 남은 달력 위에 성질 급하게 새 달력을 걸어본다. 예쁜 그림과 사진이 있는 달력도 좋지만 큰 글씨에 빈 여백이 많은 달력을 구했다. 옛날엔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 단오에는 부채를 주고받고 동지에는 달력을 나누어 주었는데 나는 새마을금고에서 나누어 주는 달력을 얻어다 쓴다. 요즈음 기억이 깜빡깜빡해서 중요한 모임이나 해야 할 일들이 있으면 그날에 큰 글씨로 표시해 두면 기억하기 좋기 때문이다.지나간 날들을 훑어보니 크고 진하게 표시한 기록들이 머릿속을 지나간다. 집안의 크고 작은 일-제삿날과 가족의 생일, 지인들의 자녀 혼사가 있고 행사와 모임도 표시했다. 그리고 나의 소소한 취미인 우표수집을 위해 그 발행 날짜엔 빨간 우체국 마크가 선명하다.갑자기 추위가 엄습한다. 이 추위는 북극에서 밀려온 한파가 주말까지 이어진다고 하는데, 전국 대부분이 최저 영하 15도 이하인 한파특보가 내려지고 경북 북동 산지에는 한파경보가 내려지는 등 올들어 가장 춥겠단다. 또한 전국이 대체로 맑겠지만 충청·전라 해안과 제주에는 폭설도 예상된다고 하니 빙판길 사고도 염려된다. ‘동짓날에 눈 오고 추우면 풍년이 든다.’했으니 이 추위도 즐겁게 견뎌야 하겠지. 그런데 강원 영동과 경상권 동부지방은 건조특보가 내려져 산불 등 화재 예방에도 총력을 기울인다니 이 좁은 나라의 동서가 이렇게 다를 수도 있구나. 세찬 바람에 체감 온도가 클 텐데 외투 깃 세우고 모자도 쓰고 요즘 독감도 설친다고 하니 몸조심 잘하며 계묘년 한 해를 무사히 마무리하기를 빌어본다.며칠 후면 아기 예수가 태어난 성탄절, 크리스마스이다. 대체공휴일처럼 일, 월요일 연휴이고 앞의 토요일까지 합치면 쉬는 날이 사흘이 된다. 벌써 교회나 성당에는 크리스마스 장식이 화려하고 이따금 들려오는 캐럴은 연말의 기분을 들뜨게 하고 거리에는 반짝이는 장식들이 가로수에 입혀져 겨울 축제를 예고하고 있다. 연말연시 인파가 몰리는 곳에는 안전관리에도 철저히 대비해야 할 것이다.우리 주위에는 불우한 이웃들이 많다. 포스코 그룹은 올해도 이웃돕기 성금 100억원을 기탁하였는데, 그동안 누적액이 1천920억이라고 한다. 그리고 2천700 여벌의 방한 의류도 기부했고 연탄배달 봉사도 한다고 하는데, 이 대기업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도 한국 노인빈곤률이 OECD 국가 중 1위라는 불명예를 씻기가 부족할 테니 국민 모두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야겠다. 또한 결핵 발생률도 1위로 인구 10만명당 35.7명이고 사망률 또한 3위이다. 이에 대한결핵협회는 결핵퇴치기금을 모으기 위해 매년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해 오고 있는데 올해 창립 70주년을 맞아서 만화가 ‘앤서니 브라운의 동화 속으로’란 타이틀로 10종류 1시트에 3천원짜리를 발행했다. 구입이 아니라 기부이니 카드나 연하장을 보낼 때 붙여 보내면 그 작은 정성이 이러한 불명예를 씻어주는데 작으나마 사랑의 열매를 맺지 않을까 싶다.이번 동지는 애동지다. 아이들에게 나쁘다고 팥죽은 안 쑤더라도 팥시루떡은 먹으며 모든 액을 물리쳐야지.

2023-12-21

태양의 부활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연중 밤이 가장 긴 동지(冬至)다. 오늘을 고비로 밤은 조금씩 짧아지고 대신 낮이 그만큼 길어진다. 정확하게는 날마다 30초씩 일출이 빨라지고 일몰은 30초씩 늦어져서 낮의 길이가 1분씩 늘어나는 것이다. 지구가 23.5도 기울어져서 태양을 돌고 있기 때문에 북위 38도에 걸쳐있는 우리나라와 같은 위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런 자연현상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 없었던 옛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신앙적 상상력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지동설이 나오기 전에는 낮이 가장 긴 하지(夏至)를 지나고부터 태양이 차츰 식어가다가 동지를 고비로 다시 회생하는 것으로 인식했을 터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삶의 양식을 규정하는 자연의 법칙이었고, 과학적 사실을 알고 난 후에도 달라질 게 없는 삶의 조건이다. 달도 차면 기울고, 태양도 식어가다가 다시 타오르는 되풀이에 맞추어 해(年)와 절기(節氣)를 구분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생활을 계획하고 실천하였다. 특히나 농경사회에서는 여러 가지 농작물을 심고 가꾸고 거둬들이는 일을 그 절기에 맞추어 실시했다.동지가 갖는 의미는 다른 절기에 비해 특별한 데가 있다. 실생활인 농경과는 관련이 없는 어떤 정신적이고 제의(祭儀)적인 측면이 그것이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이날을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생각하고 축제를 벌여 태양신에 대한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중국 주(周)나라에서 동지를 설로 삼은 것도 이 날을 생명력과 광명의 부활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며, 동짓날에 천지신과 조상의 영을 제사하고, 신하의 조하(朝賀)를 받고 군신의 연례(宴禮)를 받기도 하였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동짓날을 아세(亞歲)라 했고, 민간에서는 흔히 작은 설이라 하였다. 태양의 부활을 뜻하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설 다음 가는 작은 설의 대접을 받은 것이다.팥죽을 쑤어서 먼저 사당(祀堂)에 올리고 각 방과 장독, 헛간 등 집안의 여러 곳에 담아 놓았다가 식은 다음에 식구들이 모여서 먹었다. 동짓날의 팥죽은 시절식(時節食)의 하나이면서 신앙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 즉, 팥죽에는 축귀(逐鬼)하는 기능이 있다고 보았으니, 집안의 여러 곳에 놓는 것은 집안에 있는 악귀를 모조리 쫓아내기 위한 것이고, 사당에 놓는 것은 천신(薦新)의 뜻이 있다. 팥은 색이 붉어 양색(陽色)이므로 음귀(陰鬼)를 쫓는 데에 효과가 있다고 보았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발췌)잎이 진 겨울나무 잔가지에 어느새 새봄을 기약하는 꽃눈과 잎눈이 맺혀있다. 동지를 지나도 봄이 오기까지는 몇 차례나 더 한파와 눈보라가 몰아칠지 모른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겨울이 너무 길고 혹독할 것이다. 헐벗고 굶주리는 북녘의 동포들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프다. 집집마다 쌓여있는 옷가지라도 보낼 수 있었으면 좋을 텐데 그것마저 막혀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겨울이 아무리 혹독할 지라도 낮이 길어지는 만큼 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언젠가는 북녘 땅에도 봄이 올 거라는 희망의 불씨를 꺼트리지는 말자.

2023-12-21

인천과 대구

홍석봉 대구지사장 대구는 인천과 함께 1981년 7월 직할시가 됐다. 그때만 해도 대구가 인구 규모와 면적이 월등히 앞섰다.대구는 서울과 부산에 이어 국내 3대 도시의 위상을 자랑했다. 하지만, 이젠 대구와 인천이 완전히 역전됐다.직할시 출범 당시 인천의 인구와 면적은 114만명 201㎢였고, 대구는 183만명 454㎢였다. 12월 현재 인천의 인구는 299만명, 대구는 240만명으로 60만명가량 차이가 난다. 면적은 대구시가 군위군 편입에 따라 1천499㎢로 7개 특별·광역시 중 최대 규모가 됐지만, 이전에는 인천이 1천66㎢로 가장 넓었다.1인당 지역내총생산은 2021년 말 현재 인천이 3천355만원, 대구 2천554만원으로 800만원가량 많다.2021년 말 기준 지역내총생산은 대구 61조원, 인천 98조원으로 대구는 인천의 61% 수준이다. 고령인구 비율도 대구는 19.2%로 인천의 16.2%에 비해 3% 높다. 이젠 모든 지표가 인천과 비교가 안 될 정도다. 이게 현재 대구의 모습이다.인천은 이 같은 성장세와 자신감을 바탕으로 지난 2015년 현행 정부의 각종 공문서상 지자체 표기 순서인 ‘서울·부산·대구·인천’을 ‘서울·부산·인천·대구’로 바꿔달라고 건의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역사와 전통을 무시한 채 각종 지표만으로 대구와 인천의 순서를 바꿀 수는 없었을 터이다. 이렇게 위상이 몰라보게 달라진 인천시가 획기적인 출산 지원책을 내놓았다. 2024년부터 인천에서 태어나는 모든 아이에게 만 18세가 될 때까지 총 1억원이 넘는 지원을 한다고 밝혔다.인천 지역 임산부와 아이들에게 그동안 부모 급여, 아동 수당, 교육비, 보육료, 급식비 등 7천200만원 수준이 지원됐다. 인천시는 여기에 아이 1명당 2천800만원을 더 얹어 주겠다고 했다. 인천의 인구 증가는 그동안 전입 인구가 전출 인구보다 많은 덕을 톡톡히 봤다. 그러나 이런 인구 증가 추세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해 특별한 지원책을 내놓은 것이다.재정 상황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허리띠를 조이는 등 ‘채무 0’를 선언한 대구는 인천의 형편을 부러움 반 시샘 반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대구·경북의 인구 감소 추세는 심각하다. 지난해 대구·경북의 출생아 수는 대구 1만 100명, 경북 1만 1천300명으로 1985년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2055년 대구와 경북 인구는 각각 180만명, 220만명으로 급감할 것이라는 예상도 나왔다. 대구·경북의 지난해 혼인건수는 1990년의 40% 수준으로 줄었다. 올 3분기 합계출산율은 0.7명에 불과하다.인구 대책은 백약이 무효다. 수백조의 예산을 퍼부었지만 나아질 기미는 전혀 없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생활인구’라는 다소 황당한 개념까지 도입했겠나. 통근·쇼핑·관광 등 목적의 체류 인구도 지역 인구로 잡자고 한다. 지방의 안타까움이 묻어나온다. 3대 도시로 성장, 여유와 저력이 느껴지는 인천을 보면서 대구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2023-12-21

솔로 이코노미

우정구 논설위원 얼마전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우리나라 1인 가구수는 750만2천명 정도다. 우리나라 전체 가구수의 34.5%에 해당한다. 1990년 9% 수준과 비교하면 30년 사이 4배 가까이 증가한 셈이다.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이제는 1인 가구가 대세인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유럽연합의 국가들도 우리보다 먼저 1인가구 시대를 경험했다. 지금은 그에 맞는 시장경제도 형성됐다. 조금 지났지만 2018년 기준으로 유럽의 1인 가구 비율은 33.9%다. 스웨덴은 56%, 덴마크, 핀란드, 독일 등은 40%가 넘는다. 도시별로는 스웨덴 스톡홀름의 경우 60%가 1인 가구다.우리나라도 지금과 같은 속도로 늘면 유럽국가 수준에 도달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1인 가구가 빠르게 증가하는 이유는 여럿 있지만 대략 간추리면 다음 3가지 정도라 할 수 있다.첫째, 저성장이다. 청년층이 취업난에 봉착하면서 연애와 결혼, 출산 등을 포기하면서 혼자 사는 젊은이가 늘어난 때문이다. 둘째는 이혼 및 여성들의 경제활동 증가를 꼽을 수 있다. 결혼을 미루고 혼자 사는 골드 미스터, 골드 미스 등의 증가다. 세 번째는 고령화다. 노인들의 수명이 늘어나면서 배우자를 잃고 나홀로 지내는 노령층이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솔로 이코노미가 주목을 받고 있다. 주택, 식품, 가전 등 산업계 전반에 걸쳐 홀로 사는 싱글족을 겨냥한 제품들이 앞다퉈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혼밥, 혼술을 넘어 혼영(혼자 영화) 혼행(혼자 여행)으로 이어지고 있는 시장경제 흐름에 맞춘 기업의 마케팅 활동의 산물이다. 앞으로 1인가구 비율이 더 늘어나면 소비시장의 핵으로 떠오를 가능성도 높다.바야흐로 1인 가구 전성시대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3-12-21

경산시의회에 스며든 꼴불견

심한식 경북부 ‘꼴불견’꼴불견의 사전적인 의미는 “하는 짓이나 겉모습이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우습고 거슬림”이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우린 크고 대단한 일이 벌어지거나 목격했을 때 꼴불견이라고 표현한다.하지만, 정도를 벗어났지만, 잘못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행동도 포함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국회의원들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가 ‘국민을 대표한다’이지만 과연 그들이 국민을 위해 대표하는 사례가 얼마나 될까.국민의 세금으로 개회된 국회 회기 중에 회의에 집중하기보다는 사적인 업무와 행동으로 질타받는 경우를 우린 자주 경험했다.그러나 당사자들은 시간이 지나면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며 더 크게 목소리를 높인다.국민이 부여한 권한을 마치 자신이 가진 보도(寶刀)처럼 휘둘러 놓고 남을 탓한다. 이때면 떠오르는 단어가 꼴불견이었다.국회의 이러한 모습이 어느새 지방 기초의회까지 감염시켰다.경산시의회는 20일 제250회 정례회 제2차 본회의를 열고 2024년도 본예산과 상정된 안건을 처리했다.방청석에 앉은 공직자들은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으나 시의원들 일부는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옆 의원과 잡담을 나누거나 휴대폰 화면을 보는 등 시민의 대표라는 직무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서슴지 않았으며 이러한 행동은 지나간 회기 중에서도 자주 목격되었다.하지만, 이들은 행정사무 감사나 예산심의, 주요 안건 보고 등의 자리에서는 시의원이라는 갑옷을 자랑했다.또 상임위 활동 중 출석 이후에는 자리를 지키지 않는 시의원도 있는 등 정말 꼴불견의 행동이 판을 치고 있다.기고만장한 인물들이 많은 국회를 떠나서 서민들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기초의회만이라도 회기에 집중하고 진정으로 지역민을 위하는 의원들이 되었으면 한다.선거철만 되면 허리가 굽혀지고 얼굴에 웃음을 짓는 선한 얼굴(?)이 아닌 낮은 자를 찾아가며 기초의원이라는 갑옷을 벗고 다정하게 손을 내밀 줄 아는 기초의원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일까?경산시의회가 21일부터 제251회 임시회를 개회해 의사일정을 진행한다. 이번 임시회에서는 웃는 얼굴로 경산시의원들의 회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shs1127@kbmaeil.com

2023-12-20

입춘(立春)과 명리 이야기

24절기 가운데 첫 번째가 입춘(立春)이다. 태양의 황경이 315도에 위치하며, 2024년에는 2월 4일(음력 12월 25일)이 입춘이다.입춘은 24절기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다. 음력 1월에 해당하며, 새해를 상징한다. 농경사회에서는 농사의 기준이 되는 첫 번째 절기로 큰 의미가 있었다. 명리 사주에서는 입춘을 일 년의 시작점으로 보기에 2024년 2월 4일 이후에 태어나야 갑진년(甲辰年) 용띠가 되는 것이다. 참고로 서양 점성술에는 춘분(春分)을 일 년의 시작점으로 본다. 태양의 황경이 0도이기 때문이다.입춘은 봄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명리학에서는 인월(寅月)에 해당한다. 인월은 절기로 입춘과 우수(雨水)를 포함한다.한자 인(寅)을 풀이하면 씨앗이 땅속에 뿌리를 내리고, 새싹이 올라오는 형태다. 언 땅에서 새로운 생명이 움을 트는 시기가 인월이며, 시작점이 입춘이다. 절기 중에서 설립(立)자로 시작하는 절기는 입춘, 입하(立夏), 입추(立秋), 입동(立冬)이 있다.입춘은 만물의 움직임이 시작하는 시점으로, 봄을 의미하는 목(木) 기운이 태동하는 시기다. 날씨는 아직 춥지만, 입춘은 글자 그대로 ‘봄이 일어나는 시기’다. 이때 농촌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거름 준비하기와 종자 손질하기다. 건실한 종자를 찾고, 종자가 뿌리를 잘 내리도록 땅에 영양분을 주는 것은 한 해 농사를 결정하는 중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입춘은 봄의 시작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항상 꽃샘추위를 동반한다. 이런 날씨를 반영하듯 ‘입춘에 장독 깨진다’는 속담이 있다. 이 무렵 추위가 매서워 장독이 얼어서 깨진다는 말이다. 예로부터 입춘이 되면 동풍이 불고, 얼음이 풀리며, 동면하던 벌레들이 깨어난다고 한다.전한(前漢)의 회남왕 유안(劉安·기원전 179~122)이 저술한 ‘회남자(淮南子)’ 권5 ‘시칙(時則)’에 보면 음력 1월인 정월에는 초요(招搖·북두칠성 자루 끝에 있는 별)가 인(寅) 방향을 가리킨다. 봄의 시작이므로 오행으로는 목(木)에 해당하며, 덕(德)을 상징한다. 방위는 동쪽이다. 수(數)로는 8이고, 색으로는 청색이다.입춘 날에 천자는 상대부들을 거느리고 동쪽 교외에서 봄을 맞이하고, 사당을 수리하고 신위(神位)를 청소하며, 귀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복을 빌며, 희생물로는 수컷을 사용한다. 이달에는 벌목을 금지하고, 새 둥지를 부수거나 태(胎) 속의 새끼를 죽이지 못하게 하며, 어린 사슴을 잡지 못하게 하고, 부화 중인 알을 취하지 못하게 한다.계절에 맞는 정치를 하는 것은 농경사회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바람으로 자연과 인간생활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1월 인월은 주역으로는 지천태(地天泰) 괘다. 땅인 곤괘는 위에 있고, 하늘인 건괘가 아래에 있다. 음(陰)은 가고, 양(陽)이 오니 길하고 형통하다는 뜻이 있다.천지가 교차하고 해와 달이 만나는 계절이라 만물이 형통하다. 그래서 지천태 괘가 나왔다면 모든 일에 원만하다고 볼 수 있다. 인월에 태어난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전진하는 태도는 지천태의 장점이기도 하다. 류대창 명리연구자 인(寅)은 동물로 호랑이다. 호랑이는 힘과 권력을 상징한다. 또한 먹이 사냥 때문에 이동이 많아 외지에 살며, 행동이 빠르고, 포부도 크다. 새해 첫 달이라 이제 막 태어난 아이처럼 순수한 면이 있다.성장기를 맞이한 만큼 난생처음이라는 말처럼 많은 어려움과 고초가 있으나, 고난과 시련 앞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굳은 의지와 신념이 요구된다.옛날에는 입춘첩(立春帖)에‘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이란 글귀를 써서 대문에 붙이고 복을 기원하기도 했다. ‘입춘을 기점으로 크게 길할 것이다. 양기를 바로 세움으로 해서 경사가 넘칠 것이다’라는 뜻이다. 입춘 날, 입춘 시(2024년 2월 4일 17시27분 이전에)에 입춘첩을 붙이면 ‘굿 한 번 하는 것보다 낫다’라는 속담도 있다. 음식으로는 파, 마늘, 달래, 부추, 무릇 등 다섯 가지 매운 나물 오신채(五辛菜)을 먹었다. 첫 절기에 맵고 쓴 오신채를 먹어 삶의 쓴맛을 미리 깨우치고 참을성을 키운다는 의미가 담겨있다.입춘은 한 해의 시작이므로 다른 절기보다는 점(占)에 관한 기록이 많다. 입춘이 음력설보다 빠르면 그해 봄은 춥다고 한다. 입춘이 음력 섣달에 갇혀 있는 형국에서 비롯된 속설이다. 입춘의 일진(日辰)에 따라 농사를 예측하기도 한다. 일진이 갑을(甲乙)이면 풍년이고, 병정(丙丁)이면 큰 가뭄이 일어난다. 임계(壬癸)면 큰 홍수가 일어난다. 또는 입춘 날에 맑고 바람이 없으면 풍년이 들고, 눈이나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흉년이 든다고도 한다.입춘이 지나면 곧바로 설이다. 새해에는 덕담으로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를 한다. 복은 받는 것이 아니라, 짓는 것이 아닐까? 소외된 사람을 위해 많이 베풀면 그 보답도 좋지만 원한을 많이 쌓으면 돌아올 재앙도 깊을 것이다. 적게 베풀고 큰 보답을 바란다거나 원한을 쌓고서 후환이 없길 원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결코 가능하지 않는 일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지나간 일을 살펴보면서 닥쳐올 일을 예측하게 되는 것이다.

2023-12-20

새벽을 열다

배문경 수필가 항구의 불빛이 환하다. 육지의 가로등 불빛과 어우러져 물결 위에 일렁인다. 어둠 속으로 출항한 배들은 다시 감청색 어둠을 뚫고 새벽 항구에 배를 정박시킨다. 그물에 걸려든 고기들이 항으로 쏟아져 내린다. 막 잡아 올린 생선의 비늘은 아직 바다의 푸른빛이 감돈다.경매인의 손에서 쩌렁쩌렁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낙찰을 보려고 몰려든 경매인들이 줄을 지어 쏟아진 고기 주위로 둥글게 말아 선다. 경매인이 입안에서 웅얼대는 소리를 그들은 잘도 알아듣는다. 겉옷을 열었다 닫았다하며 수신호를 보낸다. 추임새를 넣는 경매인들은 눈빛과 온몸으로 작업을 건다. 온갖 동작이 우습고 진지하다. 그들의 집중적인 의사표시는 원시 부족의 춤사위 같다. 언어 이전의 세계처럼 그들은 손가락과 표정으로 뜻을 전달한다.그들의 수신호가 아침을 연다. 가장 높은 값에 널브러진 고기들이 하나둘씩 다시 미끄럼을 타고 팔려 나간다.수런수런 넓은 어시장이 삽시간에 사고파는 사람들로 지도가 그려진다. 판매되는 물건에 따라 종류별로 지엽적인 모습을 갖추고 전체를 보면 큰 하나의 덩어리가 된다. 물에서 건져 올린 것에는 없는 것이 없다.제사상에 올릴 고기들은 끼리끼리 몰려있다. 조기며 열기며 돔들이 서로 이웃처럼 좌판에 드러누웠다. 뼈가 센 생선들이다. 바다를 종횡무진 얼마나 돌아다니면 저토록 센 뼈를 가질까. 그래서 제사상에 뽑혔나 보다.선조들은 온통 바다를 다닌 생선을 통해 바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굵직한 비늘을 치고 아가미를 통해 내장이 온전히 사라진 멀쩡해 보이는 생선을 담는 사람들. 누군가의 기일인 모양이다. 죽은 고기가 죽은 이들을 위해 상위에서 고요히 제값을 하게 되리라.바다의 포식자인 상어는 이미 냉동실에서 얼어 밖으로 나와도 뽀얀 표면을 지녔다. 검은 표피 속에 핑크빛 고운 살들이 무게를 재고 누웠다. 굵게 저며진 살은 꼬챙이에 끼워져 적당한 간을 맞추고 노릇하게 구워질 것이다. 산적의 대표인 돔배기는 포항과 인근 동해를 대표하는 음식이다. 소고기산적이니 삼색전이니 크고 작은 꼬챙이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바다를 가르며 다녔을 단단한 지느러미가 떠오른다.저들이 헤엄치던 바다는 지금껏 물이 마른 적이 없었다. 모든 물고기의 집이며 숙소이다. 물고기 특유의 비릿한 내음은 왠지 물고기들이 서식하던 곳의 냄새가 아닐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바다에 살 때 그들은 살아 움직이느라 바빠서 냄새를 간직하기 힘들었으리라. 뭍에 오르며 숨이 끊어질 때 바다로 돌아가려고 애쓰느라 비릿한 냄새로 소리를 치는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회귀(回歸) 본능이리라.어물전에서 제사에 쓸 고기를 샀다. 수산 시장은 사람들로 붐비고 갖가지 어물이 좁은 통로를 빼고 즐비하다. 바다에서 재수 없이 잡혀 온 고기는 얼마나 황망할까. 살아 꿈틀거리는 문어와 횟감이 된 생선들이 바다로 돌아가고자 발버둥을 친다. 몸부림 속에서 비늘이 벗겨 지기도 하고 상처를 입은 것들이 참혹하기도 하다. 싼값에 팔아야하니 주인의 표정은 밝지 않다.팔려나가는 고기들과 사람들이 썰물처럼 사라지자 어판장이 고요해진다. 언제 그렇게 시끌벅적했냐며 바닥에는 씨눈 달린 고기 한 마리 남아있지 않다. 동해 쪽에서 바다를 향해 햇살이 쏟아져 출렁거린다. 온전한 바다가 한 폭의 풍경이다. 하늘과 바다는 수평선을 놓고 하나가 된다. 바다와 육지도 철벅이는 아이들의 물장난에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포항 어시장을 어슬렁거리며 물에서 온 것과 육지에서 온 것으로 제사에 쓸 것을 쓸어 담는다. 시장은 삶에 필요한 것이 있는 사람들이 물고기가 되어 유영하는 곳이다. 물 작업복에 장화를 신은 노역자들의 힘찬 걸음이 장바닥을 휘젓는다. 사람 냄새가 더욱 진해지는 어물전에서 내가 어물쩍거린다.

2023-12-20

문화가 살아야 지역이 산다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2023년 대한민국 인구포럼에 참여했던 미국 위스콘신대 카렌 보겐슈나이더 교수는 ‘대한민국의 출산율은 절망적이다’라 하였다.그가 희망이 섞인 대안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현재 우리가 가진 인구위기는 구체적이며 현실적이다. 저출산과 고령화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사회적인 문제들이 속속 나타난다.이대로 가다가는 20년쯤 후는 나라의 경제, 사회, 문화가 총체적으로 가라앉지 않을까 싶다. 인구문제는 나라의 문제이면서 지역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구는 얼핏 머리 숫자 문제처럼 보이지만, 보다 넓은 영역의 생활여건을 마련해야 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내가 살기 힘든 곳에 아이들까지 낳아 고생시킬 부모는 없다. 살기 좋은 환경이 살아나려면 무엇을 먼저 고민해야 할까.대학을 졸업하는 청년들이 거의 모두 서울로 달려갈 꿈을 꾼다. 몇 년을 머물러 살면서 공부하고 생활했던 지역에는 왜 관심이 없을까. 청년들이 말하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는 일자리와 문화다. 경제력을 이어갈 일터가 부족하고 재미있고 신나게 즐길 문화텃밭이 척박하다는 것.일자리가 서울이라고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생각하면 진짜 문제는 문화인 셈이다. 돈도 필요하지만 즐길 거리가 필수라는 것. 살기 좋은 도시를 공표하는 해외 자료들에도 문화적 배경이 경제적 여건보다 우선순위 앞자리를 차지한다.마을과 지역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야기와 자랑거리. 외지 사람들마저 마력처럼 끌어들이는 흥미와 매력.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곳만의 독특한 그 무엇. 평범해 보여도 스토리텔링의 힘이 번득이는 홍보와 마케팅. 지역이 가진 문화의 힘 덕에 살아나는 지역시민의 자긍심. 솟아오른 긍지는 지역을 자랑스럽게 만들어내고야 만다.문화는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발굴하여 나누면서도 오늘의 감각에 맞추어 새롭게 다듬어야 한다. 문화콘텐츠를 멋지게 ‘현재화’할 때 어른들만이 아니라 자라나는 어린이들도 함께 즐기며 누리게 될 터이다. 담긴 의미를 그대로 두면서 아름다운 전통문화를 재미있고 알기 쉽게 새롭게 만드는 지혜를 키워야 한다. 세상이 우리와 함께 호흡하도록 ‘글로벌화’하는 일도 반드시 필요하다. 지역이 가진 소중하고 풍성한 이야기 소재들을 다시 돌아보아 오늘의 문화, 세계의 이야기로 새롭게 만들어내는 노력이 있었으면 한다. ‘옛것’으로서 문화를 넘어 오늘의 ‘일상’을 풍성하고 즐거우며 재미있게 만드는 문화의 텃밭을 가꾸어야 한다.문화가 살아나 지역민의 일상이 되면 지역의 자긍심이 올라가고 주변으로부터 사람들이 모여들 터이다.지역의 품격과 매력에 끌려 찾아올 관광객의 발걸음과 함께 경제적 발전은 지역의 안정적인 인구정책과 관리에도 도움을 줄 것으로 믿는다. 지역소멸을 두려워하기 보다 문화와 이야기의 힘에 승부를 걸었으면 한다. 우리만의 이야기를 살펴 발굴하고 오늘의 트렌드에 맞추어 새롭게 창조하여 문화와 예술이 넘실대는 지역으로 만들어야 한다. 문화가 살아야 지역이 산다.

2023-12-20

신품종 과일 전성시대

홍석봉 대구지사장 신품종 과일 전성시대다. 다양한 모양과 맛, 색깔을 자랑하는 신품종 과일이 국민 식탁에 오르고 있다.샤인머스캣은 최근 몇 년간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과일 시장에 대변혁을 가져왔다. 일본에서 개발됐지만 상표등록을 않아 로열티가 필요 없자 국내 재배 열풍이 불었다. 샤인머스캣은 캠벨, 머루포도 등을 대체하고 거봉포도 마저 제쳤다. 저장성이 좋아 겨울에도 제철 과일인양 판매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에는 검은 색의 스윗사파이어 종이 등장, 인기를 끌고 있다.국산 신품종 수박 블랙위너수박은 까맣고 얇은 과피와 아삭한 식감, 높은 당도를 지니고 있다. 순수 국산 품종으로 재배농가가 늘고 있다. 2020년 시중에 첫 출시돼 높은 관심을 모았다. 국내 신품종 감귤 윈터프린스도 달콤하고 청량한 맛, 부드러운 식감과 더불어 껍질이 쉽게 벗겨져 먹기 편해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 수출 및 온라인 쇼핑몰 판매가 많다.방울토마토는 일반 토마토보다 당도가 높고 한입 크기라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어 선호도가 높다. 대추토마토, 짭짤이 토마토, 노란색 토마토 등 종류가 다양하다. 상대적으로 가격도 싸고 과일 대용 채소로 상종가다.최근 상주에서 재배한 희귀 품종의 흰색딸기(신데렐라)가 수출길에 올랐다. 남상주농협 딸기수출단지에서 재배, 홍콩으로 첫 수출했다. 흰색딸기는 경도가 단단하고 맛과 향이 독특하며 붉은색이 아닌 흰색으로 소비자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신품종 과일은 맛과 색깔, 모양 등에서 기존 과일을 뛰어넘는다. 눈부신 농업 기술 발전의 결과다. 국민 영양 및 식단에 일조한다. 윈터프린스 감귤과 흰색딸기 등은 수출에도 일조한다. 농가소득 증대에도 큰 도움이 되길 바란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12-20

언니가 되고 싶어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어머니 이제 다 고쳤습니다.” 컴퓨터를 고치러온 AS기사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아들들은 엄마 혹은 어무이라 하고 며느리들은 어머님이라 부르니 나는 어머니라 불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나이가 꽤나 지긋해 보이는 생판 남이 나에게 어머니라니. 얼마전까지는 남자에겐 ‘사장님’, 여자에겐 무조건 ‘사모님’이던 고객응대 매뉴얼이 바뀌었나? 그조차도 거북했었는데 ‘어머니’는 정말 너무하다.우리나라에선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무례라는 통념이 있었다. 이름 대신 자(字)나 호(號)를 지어 호칭하고 지칭했다. 현대의 조직 내 호칭으로 성에 직함을 붙여 쓰는 것도 그 예이다. 그럼에도 내가 대학을 다니던 70년대엔 이성간의 호칭은 성과 이름을 함께 붙인 OOO씨였다. 누군가가 성을 떼고 OO씨라고 칭하면 그들 간의 사이가 예사롭지 않다고 짐작했고 아니나다를까 그들은 어김없이 훗날 결혼하는 사이가 되곤 했다. 대학 졸업 후 대학에서 강의하였고, 후배대학생들을 만나면서 그들 간의 호칭의 변화상을 목격했다. 80년대엔 남녀 동기간에 서로 형이라고 부르는 걸 봤다. 당시 대학가에 번졌던 소위 페니미즘이 성별 구분없는 중성적 호칭을 선택한 거라 짐작했지만 마뜩찮아했던 기억이 있다.사회적 관계에서 친족 호칭을 대놓고 사용한 것은 아마도 90년대 후반부터인 것 같다. 대표적인 게 ‘오빠’다. 손아래 여동생이 손위 남자 형제를 부르는 이 아름다운 호칭이 어느 순간 남남인 남녀 간에 통상적이고 지극히 당연한 호칭이 되어버렸다. ‘오빠’라 부르던 남자와 결혼한 후에도 ‘오빠’라 칭하다 아이들이 생겨도 남편을 ‘오빠’라 부르면 아이들과의 관계는 어찌 되나 걱정 아닌 걱정이 되었다. 사회적 관계에 친족호칭을 쓰는 게 온당찮다며 신문 칼럼으로 신랄하게 비판한 적도 있었다. 아랑곳없이 ‘오빠’의 기세는 매우 강력하여 이젠 당당한 사회적 범칭이 되었다. 심지어 나이와 상관없는 ‘오빠부대’도 있잖은가. 어떤 외국인 교수는 한국의 이런 호칭법이 사회적 관계를 가족 관계로 치환하는 아름다운 관습이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글쎄다.‘언니’는 ‘오빠’와는 좀 다르다. 같은 항렬의 손위 여형제는 물론, 남남끼리의 손위 여자를 이르는 정다운 말로 친족 호칭이자 사회적 호칭이기도 하다. 예전엔 남자형제들 간에도 형 대신 사용하기도 했다. 난 오빠와 남동생만 있어 날 언니라 불러 줄 여형제가 없다. 물론 이종과 고종사촌이 있긴 하나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보질 못한다. 어쩌다 그들이 불러주는 ‘언니’는 언제나 정답다. 누가 날 ‘언니’라 더 자주 불러주면 얼마나 흐뭇하고 좋을까. 최근 내방가사 일로 자주 만나 친해진 세 여자가 있었다. 서로를 회장님, 연구원님, 교수님이라 깍듯하게 불렀다. 호칭만 달라지면 더욱 다정한 사이가 될 듯싶었다. 아니, 언니가 되고 싶었다. 언니라 불리고 싶었다. 내가 제일 연장자라며 호칭정리를 제안했다. 나를 언니라고 불러줘요. 다음 모임이 기대된다.“언니, 오랜만이네요.”라고 인사를 건네줄까?

2023-12-20

고관절 골반통증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요추 천골 장골(골반) 고관절은 인체 하단을 서로 꽉 묶어서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유기적으로 요추 천골 장골 고관절이 연결되고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인체의 안정상태와 움직임 상태를 무리 없이 유지한다. 이 중 하나라도 삐걱거리기 시작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든 부분의 유기적인 연결이 약해지고 기능이상과 관절의 퇴행을 동반한다.허리가 아파서 내원한 사람 중 일부는 고관절과 장골 쪽이 아픈 경우가 있다. 허리 쪽 통증은 요추 천골 장골 고관절로 갈수록 심해진다고 보면 된다. 요추 주위가 삐거나 아픈 환자는 디스크가 아닌 경우는 통증이 심하다고 해도 빨리 낫지만 고관절과 골반 부위가 아픈 환자는 통증이 심하지 않아도 치료가 오래 걸린다. 고관절 쪽으로 내려갈수록 오랜 시간에 걸쳐 피로가 누적되었다고 보고 또 구조적으로도 위에서 밑으로 갈수록 더 안 좋아진다고 본다.고관절은 아주 커다란 대퇴부 쪽의 관절로 문제가 생기면 사타구니 부위나 골반 쪽 즉 엉덩이 깊숙이 아프다고 표현을 많이 한다. 직립보행으로 인간은 허리 쪽 부담이 갈 수밖에 없으며 장골의 균형은 틀어져 있어 양쪽 대둔근이 약해진다. 이에 허벅지 뒤쪽의 햄스트링의 긴장이 심해지고 걸을 때마다 고관절에 무리가 가 고관절의 전방 활주가 일어난다. 이렇게 고관절 문제는 골반과 연관되어 있고 엉덩이 깊숙이 아프기 때문에 환자는 통증이 사타구니 쪽에서 들어가는지 엉덩이 쪽에서 들어가는지 구별을 못할 때도 있다. 허리가 아프다고 해서 살펴보면 고관절 통증인 경우가 있는 것이다. 허리 치료를 같이 해줘야 하지만 주 치료를 고관절과 골반 쪽으로 해야 하며 치료 기간은 2~4주 이상 길게 잡아야 한다. 약침 치료나 추나 치료를 병행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고관절쪽 통증은 걸음을 걸을 때 아프다가 걷기 힘들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 걸을 때마다 고관절쪽에 부하가 실려 그쪽 인대나 힘줄 혹은 관절 쪽의 자극으로 걷기가 힘든 것이다. 사타구니쪽이 많이 아픈 경우는 압진으로 그 부위 통증이 심한지 확인 후 습부와 침치료를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엉덩이 쪽 대둔근 중둔근 소둔근 쪽 통증을 확인 후 그쪽 근육을 풀면 된다. 햄스트링 긴장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햄스트링 쪽 긴장을 확인해 풀어 주는 것도 좋다.추나 치료는 긴장된 고관절의 이완과 후방회전된 장골을 전방으로 교정하는 치료를 한다. 고관절을 살짝 당긴 후 긴장된 햄스트링을 신전시키면 전방활주 된 고관절이 천천히 자기 자리로 들어간다. 후방회전된 장골은 추나 테이블을 이용해 전방회전 시킨다. 최소 5회 이상 치료가 들어가야 하고 엉덩이쪽은 중둔근 소둔근의 긴장이상을 같이 해결해줘야 한다. 치료가 잘 되면 엉덩이 쪽 통증이 줄어 들면서 허리쪽 통증이 생기는 경우가 있는데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부의 고관절이 좋아지면서 틀어진 허리가 자연스레 교정되면서 생기는 통증이라 상태를 확인 후 그대로 치료를 하면 된다. 잘 나아도 최소 2주 이상은 치료를 해주는 것이 좋다. 앉아 있는 자세는 허리쪽의 부정렬을 유발하니 피해주고 일이 없으면 무조건 누워 있는 게 좋다. 앉아 있는 모임이나 술자리 그리고 걷는 운동은 고관절에 무리를 주니 금해야 한다.

2023-12-20

한국이 어쩌다 마약조직의 거점이 됐나

심충택 논설위원 남경필 전 경기도지사가 마약치유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는 기사가 최근 언론에 보도됐다.수차례 마약 투약을 한 혐의로 자식이 법정에 서야 하는 가슴아픈 일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남 전 지사는 “국가 도움 없이 가족의 마약중독을 치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달았다”면서 “정부가 부처급 기관인 마약 컨트롤타워(마약청)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마약 예방·방지와 수사·처벌, 재활 경로를 통합해 관리하는 국가기구 설립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윤석열 정부가 출범당시부터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겉으로 드러난 마약사범 적발 건수만 해도 급증하는 추세다. 올 1월부터 11월까지 검거된 누적 마약사범 수는 1만7천152명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던 지난해 연간 검거 인원(1만2천387명)과 비교해서도 38.5%나 증가했다.특히 올 하반기 검거된 10대 마약류 사범이 전년 동기보다 5배 넘게 급증했다는 통계는 충격적이다. 올봄에는 서울 강남 학원가에서 필로폰이 들어 있는 ‘마약음료’를 청소년들에게 나눠 주고 그 부모를 협박한 사건도 발생했다. SNS와 다크웹, 해외직구 같은 온라인 거래가 활성화된 것이 원인이다. 10대 마약류 사범들은 투약뿐만 아니라 밀반입·유통 범죄에까지 가담하고 있어 심각성이 크다.한국이 갑자기 해외 마약조직의 거점으로 부상했다는 섬뜩한 분석도 있다. 태국과 캄보디아, 나이지리아 등 다양한 나라 마약조직이 속속 국내로 활동 무대를 넓히고 있고, 최근에는 싱가포르 마약조직이 서울에 합숙소를 차려 2억원 상당의 마약류를 팔다가 적발되는 사건도 있었다.최근 5년간 해외에서 국내로 밀반입하다 적발된 마약류가 시가 3조원(약 1억명 동시 투약 분량)에 달한다는 통계도 있다.한국의 마약범죄가 이처럼 심각한 것은 ‘약한 처벌’과 ‘쉬운 판매’가 주원인이다. 싱가포르와 중국 등은 최근까지 마약사범을 사형 집행했다.미국도 종신형을 집행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한국은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경우가 많다. 국내 마약류관리법 위반 1심 사건 중 실형 선고는 2020년 53%였지만, 지난해부터는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렇다 보니 국제 조직이 한국으로 무대를 옮겨 활동을 이어간다는 것이다. 한국 마약시장의 판매 여건이 좋은 것도 문제다. 우리나라 마약단가가 수익성이 높아 해외 마약상들이 한국을 노린다는 분석이다. 인터넷과 SNS 등 온라인 익명 거래가 활성화된 것도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마약범죄 전문가들은 “혁신적인 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한국이 마약거래의 국제적 거점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경고하고 있다.현재의 수사체제(검찰, 경찰, 세관 합동)로는 마약범죄를 발본색원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마약시장은 제조와 유통 전 과정이 철저히 ‘점조직화’ 돼 있다. 남 전 지사가 말한 것처럼 정부부처수준의 컨트롤타워가 마련되지 않으면, 예방과 재활은 물론이고 장기수사는 더더욱 불가능하다. 이제 마약청 신설에 대한 공론화를 시작할 때가 된 것 같다.

2023-12-19

낙서 테러

우정구 논설위원 낙서(落書)란 아무 곳이든 자신의 마음이 내키는 대로 무작위로 글을 남기거나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뜻한다. 주로 문화재나 유명 장소의 건물 등에 낙서를 남기는 경우가 많아 낙서 자체에 대한 이미지는 별로 좋지 않다.그러나 유명 예술가 등은 낙서장을 가지고 다닐만큼 낙서를 통해 습작을 해 창작활동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2013년 일이다. 중국의 한 소년 관광객이 3천년 전 람세스 2세 때 세워진 이집트 룩소르 신전을 관광하면서 그곳에 “△△가 왔다 갔다”는 낙서를 남긴 사실이 알려져 이집트 당국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또 2015년 북경에서는 한 청년이 고궁박물관에 있던 300년 된 구리 항아리에 칼로 연인의 이름을 쓰고 하트 표시를 한 사건이 벌어져 소동이 벌어졌다.지금은 뜸하지만 우리나라도 한 때는 명승지 바위 등에 자신이 다녀간 기념으로 이름을 새기는 일들이 종종 벌어졌다. 1970년대 대학가 화장실은 불온낙서가 유행해 학교당국이 골머리를 앓기도 했다. 낙서를 지우고 나면 다음날 또 다른 낙서가 생겨나 곳곳에 낙서금지 문안을 붙일 정도였다.심리학자들은 낙서는 현실에 대한 강한 불만이나 욕구 등이 표출된 표현물로 본다고 했다. 사회적 제도나 규범상으로 용인되지 못하는 일들을 낙서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한다는 말이다.서울 도심 한복판에 있는 경복궁 담벼락이 지난 주말 사이 두 차례 걸쳐 낙서테러를 당해 경찰이 용의자를 쫓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드물게 보는 문화재에 대한 낙서테러란 점에서 범행 동기가 자못 궁금하다. 이유야 어쨌든 문화재 훼손과 복구비 등을 생각하면 엄벌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우정구(논설위원)

2023-12-19

포항탈북민들을 위한 온정의 불씨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매서운 기세로 동장군이 엄습한다. 주춤하던 추위가 동지(冬至)에 즈음해 본때를 보이기라도 하듯 바짝 수은주를 내리고 있다. 옷깃을 파고드는 강추위에 사람들의 옷차림은 온몸을 두텁게 감싸게 하고, 표연히 잎새를 떨군 겨울나무들은 간간이 바람피리 소리를 내며 파리해는 듯하다. 연말이 다가오고 날씨마저 추워지니 움츠러드는 건 나무들뿐만 아니다. 홀몸 어르신들이나 저소득 취약계층, 불우한 이웃 등이 맞이하는 세모의 한파는 해마다 을씨년스럽고 가슴저리기만 할 것이다.그러나 12월이 시작되면서 이웃사랑의 자선냄비가 길거리에 울려 퍼지고, 취약계층을 위한 ‘천사표’ 연탄 배달이나 사랑의 김장 나눔 등의 행사가 줄을 이으며 연말의 스산함을 따뜻한 온기로 녹여주고 있다. 또한 사랑의 쌀이나 생필품 전달, 후원금 기부 등의 연례적인 나눔행사가 지역별로 열려서 어려운 이웃들을 챙기고 베풀어 주는데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도 부분적으로 복지사각지대에 놓인 소외계층이 의외로 많고 지원의 손길이 절실하지만, 밀착형 지원책이나 골고루 도움과 혜택을 주기에는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그러한 차제에 최근 지역의 대표적인 기업체의 몇몇 봉사단이 힘겨움에 처한 한 단체를 자발적으로 돕고 숙원사업을 해결하는데 적극 나서고 있어서 참으로 가상한 일로 여겨진다. 포스코 포항제철소의 사진봉사단·벽화봉사단 등 5개 재능봉사단이, 지난 주말부터 시작된 포항탈북민연합회 사무실 환경조성공사에 내 일처럼 발벗고나서 힘을 보태 영하의 추위를 녹이는 훈훈한 미담이 되고 있다.이들은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씨에도 주말과 휴일의 개인일정을 뒤로하고 공사가 진행 중인 포항탈북민연합회 사무실을 방문하여 실내 대청소와 잔재물 정리, 벽체 거미줄 제거 및 콘크리트 파손부를 보수하고, 천장·벽체·바닥·베란다 등의 개소에 전면적인 도색작업을 합동으로 실시한 것이다. 특히 이날 봉사활동에는 3명의 자녀와 함께 참여한 직원이 있어서 봉사의 의미를 더했으며, 포항탈북민연합회 임원들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활동에 전념하는 봉사자들을 위해 북한식 강냉이죽과 감자만두 등을 새참으로 준비해 봉사단원들은 별미로 먹으며 잠시 추위를 잊기도 했다.순수 북한이탈주민들로 구성된 포항탈북민연합회는 도내 첫 자생적인 비영리민간단체로, 사회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탈북민들을 지원하고 회원간 유대강화와 화합을 다지기 위해 지난 2월초에 결성됐다. 지역사회와의 소통과 교류를 통해 일자리·교육정보 등 지역 탈북민들의 보다 나은 삶을 제공하고 도와주는 포항탈북민연합회가 여태껏 변변한 사무실 하나 없이 근근이 지내오다가, 최근 어렵사리 마련한 보금자리의 쾌적한 정주환경 조성에 포스코의 자원봉사자들이 함께하니 연말 사랑의 온도를 높이는 적선(積善) 사례가 아닐 수 없다.이와 같이 지역사회를 밝고 따뜻하게 만들어가는 포스코의 지역상생활동이 꾸준하고 다양하게 이어져, 춥고 외로운 이웃들에게 따스한 온정과 희망의 불씨로 되살아나길 기대해본다. 손잡고 더불어 함께 가는 길은 언제나 아름답다.

2023-12-19

보통 사람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또, 다시 한 해가 저물고 있다. 한 해가 저무는 아쉬움과 새로운 한 해에 대한 설렘이 교차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별 감정이 없는 연말이 반복되고 있다. 새해가 되어도 뭐 하나 달라진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평상시와 비슷하게 닥친 일을 처리하며 시간을 보내는 습관에 익숙해진 까닭이다. 올해도 비슷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지난 주말 넷플릭스에서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보았다. 영화는 대지진으로 모든 것이 무너진 서울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황궁 아파트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한파가 몰아닥치고 황궁 아파트로 외부 생존자들이 몰려들자, 입주민들은 회의를 통해 ‘영탁’을 대표로 선임하고 입주민들만 아파트에 살 수 있다는 규칙을 만들어, 외부 생존자를 모두 바깥으로 내쫓는다. 영화의 서사는 영탁을 중심으로 한 입주민의 단결과 이에 동의할 수 있는 ‘명화’라는 인물의 갈등이 주를 이룬다. 영화의 후반부에 그간 아파트 입주민을 대표했던 영탁이 입주민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아파트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한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 영탁은 아파트 입주를 위해 돈을 보냈지만 사기를 당하고, 이를 해결하려고 아파트에 왔다가 지진을 겪게 된 것이다.영화의 마지막에 외부 생존자의 습격으로 황궁 아파트를 간신히 탈출한 명화는 낯선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들의 거주 구역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황궁 아파트 사람들과 달랐다. 그들은 그냥 살아도 되는 거냐는 명화의 물음에 그걸 왜 자신들에게 묻냐며 살고 싶으면 살라고 답한다. 그때 다른 사람이 명화에게 황궁 아파트 사람들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이냐고 묻는다. 잠시 생각하던 명화는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었어요”라고 말한다.마지막 장면은 나의 이익을 위해서 타인을 배척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괴물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의 모습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영화에서 황궁 아파트는 복도식 구조를 가진 낡은 아파트로 묘사된다. 주변의 아파트로부터 차별 받아왔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으며, 입주민들도 이 점을 떠올리며 자신들이 이제 대한민국 최고의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는 자부심을 드러낸다. 차별을 받아온 사람이 위계의 기준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되돌려 주는 장면은 그들에게 차별과 위계의 정서가 얼마나 깊게 자리 잡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영화는 바로 이러한 마음이 문제라는 사실을 전한다.2023년 새해 첫 칼럼에서 나는 조세희 작가를 애도하며 “모든 것을 수치화하고 비교하는 우리의 마음을 새해에는 조금 더 들여다보고 개선할 방법을 찾아야겠다”라고 썼다. 1년이 지난 지금, 2023년 새해 다짐을 얼마나 지켰는지를 돌이켜보면 부끄럽지만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말해야겠다. 노력을 아예 안 한 것은 아니지만, 나 역시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현실을 외면하며 나의 이익을 취했다.새해에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 되지 않기를 다시 소망한다. 그래서 1년 뒤 오늘, 지난 한 해를 특별한 마음으로 되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2023-12-19

정의롭지 못한 희생

우리는 너무 많은 정보 속에서 길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Pixabay 그런 상상을 해보자. 당신의 소중한 사람이 납치당했다. 납치범들은 인질을 무사히 돌려받고 싶다면 영상을 찍어 인터넷에 공개할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당신이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만큼 수치스러운 내용의 영상을 인터넷에 올릴 것을 요구한다. 제한 시간은 앞으로 12시간. 당신은 순순히 납치범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을까?이와 같은 상상이 너무 손쉽다고 느껴진다면, 몇 가지의 가정을 더 덧붙여보자. 당신은 영국의 총리이며, 인질로 잡힌 사람은 공주이다. 납치범이 협박 영상을 유튜브에 올려버린 탓에 전 세계의 시민들마저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왕가에서는 ‘총리가 공주를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라 믿는다’는 언질이 전해온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당신은 영원히 당신의 치부가 될 영상을 인터넷에 올릴 수 있을까?어쩌면 당신은 ‘사람을 살린다’는 명제로 인해 이와 같은 순간에 대해 손쉬운 판단을 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영상’인가에 따라 판단을 달리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시민들 또한 상황에 대해 인지하고 있으므로, 시민들 또한 당신에게 그리 심한 인격모독을 저지르진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 모든 것이 당신의 생각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사실 이와 같은 가정은 실제 상황이 결코 아니다. 이건 그저 영국의 TV쇼인 ‘블랙 미러’의 한 장면일 뿐이다. 하지만 이 TV쇼는 우리에게 흥미롭고 불쾌한 통찰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이다. 그건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 모든 가정 속에서, 당신은 자신의 생각을 통해 상황에 대해 판단하고 옳은 결정을 하고자 시도하리라 생각하지만, 그건 당신의 생각일 뿐이라는 것.잠시 TV쇼의 내용을 살펴보자. 물론 총리는 현명한 사람이므로,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사람을 살리는 것이 급선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총리는 최후의 순간에 영원토록 자신의 치부가 될 영상을 촬영해 대중에게 공개하길 선택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다. 그의 선택이 결코 사람을 살린다는 대의를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실업률을 비롯한 경제적 문제로 인해 하락하는 국민들의 지지도와 왕가의 압력을 비롯한 여러 정치적 문제들이 대의보다 더 큰 압력이 되어 총리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그렇기에 그가 자신의 부끄러운 영상을 찍기에 앞서 국민들을 향해 ‘하지만 저는 아내를 정말로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때, 그에게서 보이는 것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고결함이 아니다. 거기에서 엿보이는 것은 압력에 휘말려 자신도 모르는 선택을 해버린 순진한 희생양의 모습만이 화면을 가득 채울 뿐이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어쩌면 단지 불쾌할 따름인 이 TV쇼가 현실에 전달하는 메시지는 단순하고도 강력하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고다이버즘(Godivaism)과 같은 정치 역학은 더 이상 불가능해진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 사람들은 모두 대의를 위해 행동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속내를 감추기 위한 포장에 불과하다는 것. 어쩌면 이러한 수사들마저 철지난 상식이 되어버린 것이 현재라는 시대라는 것이다.하지만 과연 이게 다일까? 어쩌면 우리는 여기에서 더 나은 한 걸음을 디뎌야 하는지도 모른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대의가 타자의 논리를 수용하기 위한 포장에 불과해져버린 시대에서, 우리는 다시금 삶의 이유를 재발견해야 한다는 것. 예컨대 주류 언론과 인터넷에 넘쳐나는 ‘주류 의견’에 대한 지향성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삶의 논리에 대해 성찰해야 하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우리는 그 대가로 선택의 자유를 지불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너무 많은 정보 속에서 우리는 길을 잃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희생양들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물론 이 말은 결코 반지성주의·반계몽주의적 입장에 서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입장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해내야 한다는 것이 요지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존재라 생각하지만, 과연 그럴까? 우리의 사유는 정녕 우리의 것일까? 우리는 단지 ‘주류 의견’에 스스로의 사유마저 내맡겨버린 껍데기에 불과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삶을 선택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 기준을 세우고 그로부터 선택을 감행하며 결과마저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예컨대, 자기에 대한 책임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그것뿐이다.

2023-12-19

소설이란 무엇인가

소설이란 무엇인가요? 이따금 받는 질문만큼 난감한 것은 없다. 백과사전식 답을 구한다기보다 문학에 관한 생각을 묻는다는 걸 알기에 괜히 더 어렵게 느껴진다. 나는 쓰는 사람이면서 읽는 사람이고 소설은 오랜 시간 내 옆에서 특별한 의미로 존재했다. 사적인 감상을 넘어 소설이라는 거대한 장르가 쌓아온 역사와 의미가 여타의 장르와 확연히 구분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대체 소설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 것일까?문학은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만들어지는 장르다. 영상이나 이미지로는 구현해 낼 수 없는 언어적 특성을 마음껏 드러내는 것이 문학 작품의 묘미다. 소설은 언어로 ‘이야기’를 쓴다. 소설에는 필연적으로 이야기를 내어놓는 사람, 즉 화자가 등장한다. 화자는 자기만의 목소리로 어떤 사건이나 생각 등을 내어놓는다. 독자는 화자를 따라가며 소설의 세계를 이해한다. 일련의 흐름 끝에 작품은 결론에 닿고 독자는 당연하게 누군가(등장인물 혹은, 작가)의 이야기를 읽었다고 생각하게 된다.그러나 소설을 이야기라고만 규정한다면, 놓치게 되는 것들이 많다. 줄거리만 두고 보자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작품도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대사회에서 공존하는 무수한 서사 장르는 소설보다 더욱 명확하고 흥미롭게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야기’ 앞에 ‘시의성을 가진’ 혹은 ‘징후를 짚어내는’ 정도의 수식어를 붙이면 어떨까? 물론 그런 것들이 좋은 글을 만드는 데 필요한 요소임을 부정할 순 없으나 소설의 본질을 설명하기에 완벽한 것 같진 않다.여기 소설은 ‘사고’라고 말하는 작가가 있다. ‘농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무의미의 축제’ 등의 작품을 썼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을 논할 때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작가, 밀란 쿤데라다. 그의 작품을 따라가노라면 어째서 소설을 ‘사고’라고 말하는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다. 한 편의 이야기를 감상한다기보다 철학적 논고 혹은 독특한 형태의 에세이를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응당, 소설이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는 쓰는 사람, 그러니까 작가가 전면으로 등장한다. 전통적인 방식의 소설에서 작가는 완벽하게 숨어야 하는 존재다. 작가가 보이는 순간 독자는 그 이야기가 허구라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쿤데라는 소설 속 인물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게 만드는 건 어리석다고 말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등장인물은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몇몇 문장, 혹은 핵심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고, 작가는 작품 속에서 직접 기술한다. 이들은 실존하지 않는다. 테레자는 꾸르륵 소리로부터 탄생했으며 토마시는 “한 번은 중요치 않다”는 문장에서부터 시작됐을 뿐이다.이제 소설은 모두 가짜이며, 이야기는 작가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 앞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작가는 인물을 통제하지 않으며, 단지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본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네 명의 인물은 모두 각자의 독특한 서사를 지니고 있다. 이들이 충돌하며 벌이는 사건과 그에 따른 결과는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흥미롭다. 거기서 작가는 또다시 인물과 세계의 해설자 역할을 자처한다. 작가가 만든 등장인물과 등장인물이 만드는 이야기, 다시 그것을 바라보는 작가, 이 모든 것이 합쳐지면서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낸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훌륭한 소설임에는 이러한 내막이 자리하고 있다. 기존의 소설과 다른 낯선 형식을 통해 도리어 소설이 가진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소설이 ‘사고’라는 쿤데라의 선언은 다만 형식적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작품에는 작가 고유의 논리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뜻임을 이해할 수 있다.그런 면에서 독자가 한 작가를 사랑하고 그의 작품을 따라 읽는 행위는 하나의 이야기를 읽는 것 그 이상이 될 수밖에 없다. 작품이 나아갈수록 작가의 발화가 영글어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 독자는 작품 내부의 서사와 더불어 또 하나의 세계를 읽어낼 수 있다. 그것을 읽어내는 순간 소설의 이야기는 이야기 너머의 이야기로 확장된다.소설이 무엇인지 묻는 것. 이것은 요즘 같은 시대에 소설이 왜 필요한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많은 작가가 작품을 통해 자신만의 답을 내린다. 그것을 읽어내는 것 또한 문학이 주는 모종의 재미다. 끝나지 않는 질문과 완전한 답이 될 수 없는 답이 섞여 매력적인 소설의 세계가 된다. 이 모든 것은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이 함께 만들어내는 것이다.

2023-12-19

정부는 포항지진특별법상 소멸시효 기간 연장해야

금태환 변호사 정부는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고 모든 국민의 기회가 실질적으로 보장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정부는 집단 피해가 발생하였을 경우 모든 피해자가 균등하고 완전한 피해구제를 받을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조치를 해야 한다.눈을 돌려 작금의 포항을 한번 살펴 보자. 지난달 16일 포항지원이 포항지진에 대한 국가 책임을 인정하고 국가가 포항시민 4만 7천여명에게 지진 당시 겪은 정신적 고통에 대해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판결 직후 나머지 45만 시민이 소송을 제기하기 위해 허겁지겁 갈팡지팡하며 변호사 사무실이나 길거리에서 사건을 접수하고 있다.왜 이리 동분서주하고 있는가. 포항지진특별법 위자료 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일응 2024년 3월 20일로 끝나기 때문이다. 이제 겨우 석달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석달 안에 소송을 제기하지 않으면 자신의 권리를 잃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정부는 길거리에서 헤매고 있는 45만 포항시민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이 영하의 날씨에 대기번호를 받고 변호사와의 관계도 불분명한 사무실 앞에서 6시간을 기다리는 사태를 계속 방치할 것인가. 이것은 놀림꺼리로 해외 토픽감이다. 어린아이, 돌아가신 분을 포함한 포항시민 전부가 한사람도 빠짐없이 소송을 제기해야만 포항지진 위자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명백히 넌센스다.포항지진의 발생원인이 정부의 잘못에 기인한다는 것은 정부조사연구단 발표, 감사원 감사결과, 진상조사위원회 보고, 그리고 이번 포항지원의 판결로써 명백해졌다. 이번 포항지원의 판결은 이때까지의 지진 발생 원인에 대한 결론을 내고 포항시민에 대한 위자료 금액을 제시한데에 큰 의미가 있다. 이번 포항지원의 판결은 포항시민 각각에게 최대 300만원의 위자료를 인정하였는데 대체적으로는 수긍이 가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더 고통을 받은 사람, 사망자의 유족, 병원치료를 받은 사람, 증세가 심하거나 계속 중인 사람, 이재민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 물론 정부에서도 할 말이 있으리라. 정부도 할 만큼 했고, 포항지진 특별법에 따른 지원도 하지 않았느냐. 그러한 의미에서 정부가 위 판결에 항소한 것도 이해가 된다.그러나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정부가 석달 안에 45만명이 소송을 제기해야 하는 상황을 보고 있는 것이다. 45만명 속에는 농어촌 거주 노인, 문맹자, 지체 장애자, 요양원, 장애시설 입주자, 지진 당시 미성년이었다가 이제 전국 각지에 나가 활동하는 사람, 지진 당시 해병사단에 근무하다가 이제 생업으로 복귀한 사람, 당시에는 포항 시민이었다가 이제는 각지로 흩어진 사람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도 포항 지진 피해자이고 이 중 어느 누구도 위자료를 받는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 이들 모두가 위와 같은 판결이 있은 줄 알아야 되고, 자신이 소송을 제기해야만 위자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의 위자료 청구권이 실질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위자료 청구권이나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포항지진특별상의 소멸시효기간은 5년이다. 포항지원의 위자료 청구소송의 1차 판결이 나는데 5년 가까이 걸렸다. 1차 판결을 지켜보다 보니 시효가 이제 석달밖에 남지 않았다. 시효가 임박해 권리행사를 해야 하는 상황은 국가가 만들었다. 포항시민의 책임이 아니다. 또한 누구 책임을 떠나 석달안에 45만명이 소송을 제기해야 하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그러하기 위해서는 국가는 3달 남은 시효기간을 연장해야 한다. 적어도 1년, 하다 못해 6달이라도 시효를 연장하여 지진피해자 모두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국회는 즉각 포항지진 특별법 상의 시효기간 연장 원 포인트 개정을 하여야 한다. 이후 조금 여유를 가지면서 포항시민 45만명이 소송을 제기하지 않고도 배상을 받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2023-12-18

파부침주(破釜沈舟)할 사람 어디 있나

홍석봉 대구지사장 파부침주(破釜沈舟)는 밥 지을 솥을 깨뜨리고 돌아갈 때 타고 갈 배를 가라앉힌다는 뜻이다. 결사적 각오로 싸우겠다는 굳은 결의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사마천이 쓴 사기의 ‘항우본기’에 나온다.진(秦)나라 시황제 말기 폭정을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시황제의 죽음을 계기로 여기저기서 들고 일어났다. 진나라를 치기 위해 옛 초나라 땅에서 군사를 일으킨 항우는 거록 전투에서 강을 건넌 후 타고 왔던 배를 침몰시키고 싣고 온 솥을 깨뜨리도록 했다. 그리고 병사들에게는 3일 분의 식량만 나누어 주었다. 돌아갈 배도 없고, 밥을 지어 먹을 솥도 없는 병사들은 결사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이에 항우는 진나라 주력부대를 궤멸시키고 유방과 패권을 다투는 맹주가 됐다. 이 고사에서 유래된 말이 파부침주다. ‘파부침선(破釜沈船)’, ‘기량침선(棄糧沈船)’이라고도 한다.홍준표 대구시장이 최근의 정치권 혼란 상황에 대해 답답한 심경을 토로하며 ‘파부침주할 백마탄 기사는 어디에 있나’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때아닌 겨울비에 감상에 젖어 쓴 글이지만 항우와 같이 결사항전의 각오로 나라를 구하는 인물이 왜 나오지 않는지 묻는 시국한탄이다.지금 정치권은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국민의힘은 비상대책위원장 선임과 중진 사퇴 압박 등으로 어수선하다. 더불어민주당도 ‘친명계’와 ‘비명계’로 나뉘어 당이 쪼개지기 일보 직전이다. 정치권의 이합집산이 코앞이다. 국민들은 고금리와 고물가 등으로 신음하고 있다. 올해의 사자성어로 견리망의(見利忘義: 이익을 보고 의로움을 잊는다)가 선정됐다. 견리망의 대신 의를 생각하는 견리사의(見利思義)가 절실하다. 백마탄 기사는 정녕 보이지 않는가. /홍석봉(대구지사장)

2023-12-18

명분 없는 정치는 가라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정치는 대의(大義)와 명분(名分)이 있어야 한다. 대의 없는 권력 추구는 야만이며, 명분 없는 권력 행사는 폭력이다. 정치의 이상이 대의를 구현하는데 있음에도 현실의 정치는 권력투쟁뿐이다. 대의도 명분도 없이 오직 권력에만 혈안이 된 ‘야만의 정치’ 때문에 국민의 고통이 크다.총선이 코앞인데 아직도 ‘게임의 룰’이 확정되지 않았다. 여야가 ‘명분 없는 실리’를 위해 잔머리를 굴리고 있기 때문이다.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거대 양당이 위성정당을 만들지 않으면 손해고, 병립형으로 돌아가자니 정치적 야합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여야는 자신에게 유리한 선거제에 관심이 있을 뿐, 나라의 미래를 위한 대의는 외면하고 있다. ‘견리사의(見利思義)’해야 할 정치지도자들이 ‘견리망의(見利忘義)’하고 있으니 국민의 불행이요 국가의 위기다.국정을 책임진 대통령의 행태도 명분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동관 방통위원장을 임명하여 분란을 자초했던 대통령이 그의 후임으로 또 다시 검찰 선배, 김홍일을 지명했다. 이를 두고 야당은 물론 친여 언론들까지 나서서 방송통신분야의 전문성이 없는 ‘내 편만을 생각한 명분 없는 인사’라고 비판했다.대통령이 약속한 ‘공정과 상식’이라는 대의는 없고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내 편만 집착하고 있으니 민심이 흉흉할 수밖에 없다.엑스포 유치경쟁 참패로 화난 ‘부산 민심’을 달래려고 ‘대통령의 국제시장 먹방’에 기업 총수들을 동원한 것도 명분 없는 권력의 횡포였다. 치열한 세계경제전쟁에 촌음을 아껴 써야 할 바쁜 총수들이 불려나와 떡볶이 접시를 들고 대통령 주변에 들러리서있는 모습은 안타깝고 한심하다.국민을 바보 취급하는 정치쇼가 총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어리석다.강서구청장 보선 참패로 출범한 인요한 혁신위원회의 윤핵관·지도부·중진 등의 희생 요구에 장재원 의원은 세력을 과시하며 반발하다가 마지못해 불출마선언을 했고, 진즉 물러났어야 할 김기현 대표는 용산의 눈치를 보다가 벼랑 끝에 몰리자 사퇴했다. 이 과정에서 중진의원보다 더 노회(老獪)한 초선의원들이 대표 호위무사 노릇을 하다가 이제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으니 측은하다.총선을 앞두고 분출하는 정치인들의 탈당과 창당 및 그들 간의 연대도 분명한 철학과 원칙이 있어야 한다.물론 제3지대가 극단적 대결정치의 폐해를 극복하고 중도의 민심을 반영하고자 한다면 명분은 있다. 하지만 선거 때마다 권력을 목적으로 정치공학적 계산 아래 이루어지는 합종연횡은 공익을 명분으로 사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성공하기 어렵다.정치는 대의명분으로 하는 것이다. 정치인들은 ‘명분’과 ‘실리’가 충돌하면 대부분 실리를 선택한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한 실리, 즉 권력은 명분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지속될 수 없다.더욱이 그 실리가 국민과의 약속을 파기해서 얻은 것이라면 불신을 자초함으로써 결국 권력도 잃게 된다. 정치지도자는 명분과 신의를 목숨처럼 소중히 지켜야 한다.

2023-12-18

다시 희망을 말한다

김규인 수필가 벌써 12월이 반을 지났다. 새해가 되면 잔뜩 기대를 품고 시작했건만 연말이 지나도 달라진 건 찾기 힘들다. 이건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끝날 기미도 안 보이고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은 연일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다.전쟁으로 세계 경제는 바닥을 기고 회복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미국과 중국의 경제 패권 다툼은 서로에게 상처를 내고 세계 경제를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다. 내년도 전망을 보아도 속 시원하게 나아진다는 보도는 찾기 어렵다. 이렇게 경제가 휘청이는데 퇴로를 찾을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경제가 움츠려 많은 공장이 멈추어도 지구는 덥다고 몸살을 앓는다. 몇 달간 산불이 지속되는 곳이 있는가 하면 물난리로 집과 농작물을 물에 떠내려 보내고 목숨을 잃는다. 지구는 시간이 갈수록 더 아프다고 신호를 보내는데 사람들은 남의 일인 양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한다.고개를 안으로 돌리면 수출에 의존하는 나라 경제는 힘들다고 아우성을 친다. 수출은 어렵고 생산이 줄고 양질의 일거리도 줄어든다. 내년에는 회복되기를 바라는 서민들의 마음은 답답하기만 하다. 이런 동안에도 물가는 계속 오르고 가격을 올리는 기업도 사 먹는 소비자도 신경이 곤두선다.내수 진작으로 경제를 떠받혀야 할 인구는 자꾸 줄어든다. 줄어드는 인구를 정부는 안간힘을 다하여도 나아질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이 줄면 몇 년 뒤 지방 대학은 생사의 갈림길에 선다. 시간은 하염없이 흐르기만 하는데 뾰족한 대책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 이대로 시간이 흐르는 대로 가야만 하는지.일하지 않아도 월급을 받는 국회의원은 많기만 하고 자신들의 권한은 해마다 늘려나간다. 심지어 아무 곳에나 현수막을 다는 권한까지 법으로 챙긴다. 남의 말을 듣는 그들의 귀는 점점 작아지고 자기의 말만 하는 입은 커져만 간다. 자신을 위해 움켜쥐는 손은 크고 국민을 위한 생각은 관심이 없다. 그런데도 말끝마다 하는 말은 ‘국민을 위해서’다.시간이 지나도 고금리, 고물가, 저성장의 짙은 먹구름은 좀처럼 걷힐 기미가 안 보인다. 이제는 물가도 이율도 고공 행진을 하느라 사람이 딛고 사는 땅을 잊은 것 같다. 한국은행은 내년도 경제 성장률 전망치도 조심스레 제시한다. 이제 살얼음판을 걷는 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기술이 된다.나라의 살림살이가 이러한데, 거기에 얽매인 서민들의 삶은 더 팍팍해진다. 그런들 어쩌겠는가 그렇게 얽매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을. 그래도 돌아보면 힘내어 살아야 할 이유는 많고 문제가 어려울수록 풀고 난 다음 손맛의 남다름을 우리는 안다. 얽힌 실타래를 하나씩 차근히 풀다 보면 문제는 의외로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문제는 해결하라고 있고, 어려움이 있어도 이를 이겨낸 것이 대한민국의 역사이듯 우리는 이겨낼 것이다. 밝은 얼굴로 살면 삶도 나아질 것이니 웃으며 기다릴밖에. 그렇게 다시 희망을 말한다. 2024년은 다시 일어서는 한 해가 되기를 두 손 모은다.

2023-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