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첫 우주발사체 나로호가 개발 7년만인 19일 발사될 예정이었지만 발사 직전 가동되는 자동시퀀스의 기술적 문제로 발사가 연기되는 상황을 맞았다. 나로호는 2002년 8월 개발 사업이 시작된 이래 6차례의 연기를 겪은 경험이 있어 이번 발사 연기는 더욱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렇게 우주로켓의 발사가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채연석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 연구위원은 “우주개발 기술은 기계공학, 화학공학 등 모든 과학기술의 총합”이라며 “이 기술의 어느 한 부분만 잘못돼도 처참한 실패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도 지적하고 있지만, 로켓 발사성공이 쉽지 않은 것은 먼저 복잡한 우주발사체 구조를 들 수 있다. 추진시스템(Propulsion)과 로켓 구조, 항공전자시스템, 분리시스템, 전기장비 시스템 등 로켓을 구성하는 많은 부분 중 하나만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로켓 발사의 실패는 물론 심각한 물적·인적 피해까지 불러올 수 있다. 항우연이 1957~2003년 사이에 발생한 우주발사체 비행실패의 원인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발사체의 추진시스템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비행실패 원인 가운데 추진시스템 관련은 66.2%로 가장 높은 비율을 기록한 것. 추진시스템이란 가장 중요한 액체엔진 및 고체 모터를 비롯해 추력기, 동력장치(TVC), 연소실, 노즐 및 노즐밸브, 연료 및 산화제, 터보펌프, 점화 장치, 연소실 내부의 단열장치 등을 말한다. 우리 나로호와 같이 `처녀비행`을 대상으로 한 통계에서도 추진시스템 문제로 발사가 실패한 비율은 56%로 가장 높았다. 두번째로 중요한 실패 원인으로는 나로호 등과 같은 2단형 이상 발사체에서 1, 2단 및 페어링 분리 메커니즘에 문제가 있거나, 분리를 위한 전기적 연결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꼽히고 있다고 항우연은 분석한다. 분리 기술 문제는 전체 비행실패 건수의 12.6%를 차지한다. 세번째로 높은 비행실패 원인은 항공전자공학(Avionics) 기계장치 문제로 전체 원인의 10.6%를 차지했다. 여기에는 발사체 탑재 소프트웨어와 컴퓨터를 비롯해 회로 보드, 비행안전 관련 장치, 비행 및 유도 제어 장치, 내부 측정 장치, 텔레메트리 장치, 비행장치 등이 있다. 이밖에 △고체로켓모터 내부 구조, 모터 케이스, 점화기 하우징(housing), 각종 탱크, 단 연결구조, 페어링, 발사체 외피 등과 관계된 구조부문(4.5%) △전기연결 및 배선, 전력공급장치, 전력 릴레이 박스, 솔레노이드 등 전기장비(4.0%) △번개 등 기상환경, 통신의 문제 등과 관계된 기타 요소(2.0%)가 있다. 전문가들은 “로켓 발사 카운트다운 10초를 남겨두고도 문제가 감지되면 발사를 중지시킬 정도로 항공우주산업에서는 작은 결함이 천문학적 비용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로켓 발사에는 신중을 기할 수 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연합뉴스
2009-08-20
국회서 영결식… 장지는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원수묘역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 형식이 가장 높은 예우를 갖추는 국장(國葬)으로 결정됐다.정부 핵심관계자는 19일 “국장이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일부 의견도 있었으나 이명박 대통령이 이에 대한 보고를 받고 대국적 견지에서 결단을 내렸다”고 말했다.이와 함께 김 전 대통령의 장지는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원수묘역으로 결정됐다.정부는 이날 오후 8시 한승수 국무총리 주재로 국무회의를 소집해 이 같은 장례 방안을 의결했다.김 전 대통령의 장례 형식과 절차를 놓고 정부는 국민장을, 김 전 대통령 측과 민주당은 국장을 각각 주장해왔으나 긴 협의 끝에 결국 `6일 국장`이라는 절충안이 채택됐다.그리고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빈소와 분향소, 영결식 장소는 국회로 결정됐다.김 전 대통령측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19일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내 임시빈소에서 기자 브리핑을 갖고 “민주주의와 의회주의의 전당인 국회에서 영결식을 치르기로 했다”고 말했다.박 의원은 “영결식과 빈소, 분향소를 국회 광장에 차리기로 정부와 협의를 끝냈다”면서 “정부에서 빈소와 분향소 등을 준비하면 내일 오전 중 그쪽으로 모시도록 하겠다”고 밝혔다./연합뉴스
“생전에 숱한 고초 잊고 편히 쉬셨으면…”시·도민 “대한민국 위대한 지도자 한분 잃었다”정치권 “국민화합·남북평화 승화되는 계기 되길”18일 오후 서거 소식을 접한 지역 정치권과 학계를 비롯한 시·도민들은 서거 소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대한민국의 위대한 지도자 한 분을 잃었다”며 “생전에 수감생활, 해외 망명 등 숱한 고초를 겪었셨던 만큼 이제는 좋은 곳에서 편히 쉬셨으면 한다”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한나라당 대구시·경북도당= 오늘 우리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지도자 한 분을 잃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는 누구보다도 민주화, 인권,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헌신해오셨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생전에 이루고자 했던 숭고한 뜻이 국민화합과 남북 평화로 승화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민주당 대구시·경북도당= 김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인권, 남북화해, 평화통일, 중산층의 권익 보호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위대한 지도자다. 고인의 가르침을 받아야 할 일이 너무 많은데 먼저 가시니 어버이를 잃은 것처럼 황망하고 허전하다. 민주당은 고인의 뜻을 계승해 민주주의, 남북통일, 따뜻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을 계속해 나가겠다.◇자유선진당 대구시당=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한평생을 바치신 큰 별이 안타깝게 서거하셨다. 김 전 대통령은 한평생을 민주화 투쟁과 인권신장, 통일운동에 평생을 헌신하셨으며 남북정상회담을 비롯한 남북화해협력 시대를 열었고 그 공로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정치권도 분열과 갈등에서 벗어난 지역갈등을 없애고 화합하는 계기가 되어 우리 정치가 한층 성숙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창조한국당 대구시당= 김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통일, 그리고 경제발전을 위해 온몸을 던지신 한국현대사의 진정한 지도자였다. 김 전 대통령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 그리고 애민애족의 정신은 후세에도 영원히 빛날 업적으로 남을 것이다. 특히 대립과 대결보다 화해와 협력으로 상생하는 대한민국과 국제사회를 꿈꾸었던 그의 꿈은 남은 자들에 의해 반드시 이룩될 것이다.◇이종용씨(57·교사·대구시 동구 신암4동)=“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소식에 깜짝 놀랐다. 김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민주화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한국 현대사의 거목(巨木)이셨는데 이렇게 가셔서 너무 안타깝다”며 “부디 하늘나라에 가셔서도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해 애써 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김미주씨(여·27·대학생)=“아직까지 김 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 만났던 그 감격스런 장면이 눈에 선하다. 김 전 대통령이 남북화해를 위해 노력한 숭고한 뜻을 후손들인 우리가 잘 이어갔으면 좋겠다”면서 “생전 독재정권에 맞서 투옥, 수감생활, 해외 망명 등 숱한 고초를 겪어셨던 만큼 이제는 좋은 곳에서 편히 쉬셨으면 한다”고 했다.◇이용환씨(남·45·공무원)=“우리나라 헌정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와 해방 후 첫 남북정상회담을 이룩하고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김 전 대통령의 업적과 뜻을 남아있는 우리들이 잘 이어나갔으면 한다”면서 “서거한 김 전 대통령이 바라셨던 남북 화해가 하루빨리 이뤄졌으면 한다”고 전했다./사회1·2부
2009-08-19
반세기 가까이 한국정치를 움직여온 3김(金) 시대가 막을 내렸다.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와 함께 3김 중 한명이자, 정계 은퇴 후에도 유일하게 현실정치에 적극 개입했던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1960년대 이후 3김은 한국 정치사를 좌지우지하며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는 냉혹한 정치현실을 온몸으로 보여줬다.이들은 때로는 동지로서 손을 맞잡았고, 때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극한 대립의 정치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의 관계는 애증(愛憎)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도 부족하다는 평가가 나온다.정치에서 입신(入神)의 경지에 올랐다는 `정치 9단`의 칭호는 이들 3김에게만 허락된다. 그만큼 3김이 한국 정치사에 남긴 족적과 폐단은 깊고도 넓다는 의미일 것이다./연합뉴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37일 동안 위험한 고비를 수차례 넘기며 쾌유를 기원하는 가족과 지지자 등에게 희망을 줬지만 18일 끝내 병환을 이기지 못해 유명을 달리했다.고인의 병세가 세인에 처음 알려진 것은 지난달 13일. 가벼운 열이 나는 등 감기 기운이 있어 병원에 입원했고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 것.85세의 고령임에도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빈소를 직접 찾아 조문하는 등 최근까지 비교적 정정한 모습을 보였기에 김 전 대통령이 입원했다는 소식에도 많은 사람은 곧 회복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건강상태는 병원 바깥의 기대와 달리 매우 심각하게 악화했다.김 전 대통령은 입원 사흘 만인 지난달 15일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다음날에는 산소포화도가 처음으로 정상치를 밑도는 86%까지 떨어져 인공호흡기를 달아야 했다.다행히 며칠이 지나자 스스로 호흡할 수 있게 됐고, 7월 22일 인공호흡기를 떼고 일반병실로 옮기면서 회복 가능성을 보여줬다.안도와 희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반병실로 옮긴 바로 다음날 폐동맥이 막히는 폐색전증이 갑작스럽게 나타났고 김 전 대통령은 다시 중환자실로 옮겨져 인공호흡기를 달았고 이때부터 심각한 고비가 잇따라 찾아왔다.상태는 날로 악화해 김 전 대통령은 7월29일 기관절개 수술을 했고 갑자기 혈압이 떨어질 때마다 의료진은 강심제 같은 약물을 투여해야만 했다. 이때부터 가족과 측근들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김 전 대통령의 투병이 길어지자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물론, 과거 경쟁 또는 반목 관계에 있던 이들도 병상을 찾아와 극적인 `화해 드라마`를 연출하기도 했다.8월 10일에는 평생의 맞수로 최근까지도 불화를 빚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문병와 화해의 손을 내밀었고, 14일에는 김 전 대통령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을 1980년 권력의 정점에 서 있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찾아와 쾌유를 기원했다.고인이 병실에서 투병하는 동안 여야 정치권 인사들은 물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시린 에바디 노벨평화상 수상자 등 세계 곳곳에서 800명이 문병하기도 했다.많은 사람의 간절한 바람에도 18일 오전부터 다발성 장기부전 때문에 김 전 대통령의 혈압과 산소포화도는 크게 떨어졌고 오후 1시43분 한국 현대 정치사의 거인이던 고인은 끝내 운명했다./연합뉴스
50년 정치인생을 마감하고 서거한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궤적에는 그가 남긴 수많은 어록이 수놓아져 있다.김 전 대통령은 때로는 치밀한 논리로, 현안의 핵심을 찌르는 표현으로, 때로는 화려한 수사로 좌중을 압도한 달변가이자 뛰어난 대중연설가였다.군사정권 시절 그가 남긴 말들은 쉽사리 세상 빛을 보지 못한 채 `옥중서신` 등을 통해 재야 및 운동권 인사들 사이에서 `조용히` 퍼져갔다.이후 사면·복권으로 그가 세상 밖으로 나온 87년 이후 쏟아진 거침없는 발언들은 그를 지탱해준 최대의 정치적 무기였다.“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 “현미경처럼 치밀하게 보고 망원경처럼 멀리 봐야 한다” 등은 그가 생전에 즐겨 쓰던 문구들이다.“정치는 살아 꿈틀거리는 생물과도 같다”는 표현은 그가 몸담았던 한국 현대 정치사의 역동성을 대변하며 지금까지도 정치권에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92년 대선운동 과정에서는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며, 통일에의 희망이 무지개처럼 피어오르는..”이라는 감성적 수사로 표심을 자극했다.97년 `준비된 경제대통령`이라는 구호로 대권 도전 4수끝에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에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 `햇볕정책`, `제2의 건국` 등으로 자신의 통치철학을 드러내기도 했다.김 전 대통령은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언급해가며 강조하고자 하는 새로운 주제를 하나씩 추가해 나가는 `얼레(reel) 화법`을 구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연합뉴스
☎…김범일 대구시장과 김관용 경북도지사는 18일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애도의 뜻을 표명했다.김 시장은 “대구시민과 함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에 깊은 애도와 함께 명복을 빈다”며 “역사 속에 해야 할 역할을 다하신 분으로 이제는 국가발전을 위해 국민통합을 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김 지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민주주의 발전을 이끌어온 큰 지도자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최초의 한국인으로서 역사 속에 길이 빛날 것”이라며“ 300만 경북도민과 함께 삼가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이곤영기자
☎…민주당 대구시·경북도당은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시·도당과 각 지역위원회 사무실에 분향소를 설치, 조문객을 맞았다.대구·경북지역 공동 분향소는 대구시당 사무소에 설치됐다.시당 관계자는 “김 전 대통령의 장례가 엄숙하고 장중하게 진행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며 “지금까지 진행돼 온 옥외투쟁과 각종 행사는 추도 및 장례기간 중 일시 중단한다”고 말했다./이현주기자
☎…민주당 포항시 남구울릉지역위원회는 김대중전대통령의 서거에 따른 분향소를 남구 상도동 민주당사에 설치해 조문을 받을 예정이다.분향소는 19일 오후 마련될 것으로 보이며 허대만 위원장은 당원들과 함께 서울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분향소를 직접 찾아 조문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이준택기자
지난 1979년 12월1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김종필, 박태준씨의 손을 들어 DJT 연대를 과시하고 있다./연합뉴스
김대중, 김영삼씨가 1985년 3.6전면 해금조치로 4년만에 만나 지지자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연합뉴스
1980년 8월14일 육군계엄보통군법회의 대법정에서 김대중씨가 `내란음모사건` 첫 공판을 받고 있다. 왼쪽은 문익환 목사./연합뉴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수차례 사선을 넘나들면서 육체적으로도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말년에는 정기적으로 신장 혈액 투석을 받고 입원을 반복하는 등 고통을 겪었지만 꾸준히 대외 활동을 벌이는 등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강한 `인동초`였다.그가 처음 육신의 고통을 짊어지게 된 사건은 1971년 5월24일 벌어진 의문의 교통사고였다. 8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전남 무안에서 지원유세를 하던 중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살해 기도 의혹이 일었던 이 사고로 그는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왼쪽 다리에 고관절 장애를 입고 여생을 불편한 다리로 지내야 했다.유신 이래 5년반의 투옥, 3년여의 망명, 6년반의 가택연금으로 신체의 자유마저 온전히 누릴 수 없었던 그는 80년 5.17사태를 주도한 신군부에 의해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이처럼 수차례 생사의 문턱을 오르내렸던 김 전 대통령은 고문 후유증 탓인지 찬바람을 극도로 싫어해 한여름에도 경호원들이 에어컨의 찬바람을 막아야 했다는 얘기도 있었다.네번째 도전만에 대선에 승리, 98년 2월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대통령 재임 시절인 2002년 4월 과로와 위장장애 등으로 국군 서울지구병원에 입원해 국민을 놀라게 한 적도 있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2003년엔 관상동맥 확장시술을 받았고 이후 주기적으로 매주 세차례씩 신장 혈액 투석을 받아 왔다.또 국정원 도청사건으로 떠들썩하던 2005년에는 폐에 물이 차는 폐부종 증세 등으로 2차례 입원하는 등 건강 상태가 극도로 나빠지기도 했으나, 이후 잦은 병원 신세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외부 활동을 통해 여전히 자신의 건재를 알려 왔다.그러다 지난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인한 충격으로 건강이 악화돼 영결식장에는 휠체어를 탄 채 등장했다. 당시 주변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구급차도 대기하고 있었다는 후문이다.김 전 대통령은 지난 6월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 특별강연회에서 현 정부를 비판하며 건강에 대한 세간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듯 했으나 최근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결국 반평생을 괴롭혀 온 육신의 고통을 조용히 내려놓고 영면했다./연합뉴스
파란만장했던 영욕의 삶후광(後廣)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통일운동과 민주화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목(巨木)이었다.“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으로 그가 헤쳐나간 반세기 정치역정에는 한국 현대사의 질곡이 오롯이 투영돼 있다.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향한 의지는 투옥과 연금, 망명의 고통을 딛고 마침내 인동초(人冬草)처럼 피어올라 헌정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와 해방 후 첫 남북정상회담이란 열매를 맺었다.그러나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그가 놓지 못했던 남북화해라는 화두는 미완의 유업으로 남았다.■섬소년에서 정치인의 길로김 전 대통령은 목포 앞바다에 솟아있는 섬, 하의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어머니가 전답을 팔아 뒷바라지해 준 덕분으로 목포로 유학, 목포상고(현 전남제일고)에 수석 합격했다.졸업 후 강제징집을 피해 일본인이 운영하던 해운회사에 취직했다 해방 후 이 회사 관리인으로 사업수완을 발휘, 목포일보까지 경영하는 등 청년실업가로 성장했다.그는 해방공간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이 좌우익을 망라해 구성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좌익계열이 주도권을 잡자 환멸을 느껴 탈퇴했다. 그러나 건준에 몸을 담은 이력은 그를 평생 `색깔론`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한 멍에였다.54년 실시된 제3대 민의원 선거 때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쓴 잔을 마신 그는 56년 장 면 박사가 이끌던 민주당에 입당, 본격적인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64년 김준연 의원의 구속동의안 처리 때에는 본회의장에서 5시간19분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연설로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해내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40대 기수론에서 6월 항쟁까지71년 첫 대선 도전에서 97년 4수 끝에 최고 통치권자에 오르기까지 36년간의 대권 도전사는 좌절과 재기의 반복이었다.67년 7대 총선에 당선된 뒤 그해 5월 한평생 정치적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원내총무 경선에서 첫 대결을 펼치지만 고배를 마셨다.그러나 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철승 의원의 막판 지원으로 YS를 누르고 이듬해 대선에 나섰으나 박정희 대통령에게 95만표차로 석패했다.그의 대권 도전은 야당의 대표 정치인으로 도약한 계기가 됐지만 긴 가시밭길에 들어서게 만든 원인이 됐다. 박정희 정권이 정적으로 지목, 탄압을 본격화한 것이다.유신이 선포된 72년부터 87년 6.29 선언까지 17년의 시간은 납치와 망명, 투옥, 연금으로 점철된 암울했던 시기였다. 73년 일본 도쿄에서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납치돼 수장당할 뻔했으나 미 정보기관의 도움으로 살아났고, 74년에는 명동성당에서 `3.1 민주 구국선언`을 주도했다가 3년간 복역한 뒤 가택연금을 당했다.79년 10.26 사태로 복권, 정치일선에 컴백했지만 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다시 민주화의 꽃을 피우려던 그의 꿈은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무산됐고,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이후 군사정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사형에서 무기, 무기에서 20년형으로 감형돼 죽음의 그림자에서 또 한 번 벗어났지만 82년말 미국으로 쓸쓸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양김 분열 후 정권교체까지그는 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YS와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평민당을 창당해 출마했다. 당시 YS로 단일화될 경우 민주진영의 정권교체가 보다 유력시되는 상황이었지만 두 사람은 끝내 권력욕 앞에서 갈라졌다.대선에서 노태우, 김영삼 후보에 이어 3위에 그치면서 민주진영으로부터 지역주의에 기댄 야권 분열의 책임자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김 전 대통령 스스로도 훗날 “당시 내가 후보직을 사퇴하는 게 옳았다”고 회고했다.92년 12월 대선에서 YS에게 패해 대권 3수에 실패하자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홀연히 영국 유학을 떠났다. 곡절 많은 정치인생에 마침표가 찍히는 듯한 순간이었다.93년 7월 귀국한 김 전 대통령은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하는 등 통일운동에 전념하는 듯한 행보를 보이다 95년 7월18일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호남을 지역적 기반으로 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정치전면에 복귀했다. 우여곡절 끝에 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박정희 정권의 최대 실세였던 김종필(JP) 자민련 총재와 손잡았고, `DJP 공조`는 외환위기를 맞아 `준비된 대통령` 탄생을 갈망하는 국민 여론을 타고 정권교체의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DJ정부 출범… 불운했던 말년국민의 정부 5년은 순탄하지 않았다. 대선 승리의 감격을 누릴 여유도 없이 당선 다음날부터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김대중 정부는 5년 동안 외환위기를 단기간에 극복하고 역사적인 6.15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분단의 벽을 허물어 남북화해와 통일의 기반을 구축하는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집권세력 내부의 갈등과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견제,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측근 비리 사건이 잇따라 터져나오면서 YS처럼 조기 레임덕에 빠지는 고통을 맛봐야 했다.퇴임후 그는 외부활동과 정치적 발언을 통해 건재를 과시했다. 2006년 10월 북한 핵실험 사태가 터지자 “북미관계가 안 돼서 진전을 하지 못한 것”이라며 햇볕정책 책임론을 반박했고, 2007년 대선 전에는 여당의 대통합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그의 `한마디`는 퇴임 후에도 민주당과 전통적 지지층에 무시못할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민주주의와 서민경제, 남북관계가 위기에 빠졌다고 비판하면서 민주개혁세력의 연대를 주문하는 등 왕성한 정치활동 때문에 현실 정치 개입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이명박 정부를 독재로 규정하는 등 대정부 투쟁의 선봉에서 한나라당과 보수 진영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연합뉴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 서거하자 전국 각지에서는 애도의 물결이 끊이지 않았다.`3김 정치`를 직접 경험했던 노·장년층에서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는 물론 영·호남 등 지역을 막론하고 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부산공동어시장에서 일하는 박수만(60)씨는 “우리 정치사에 큰 획을 그었고 민주화에 헌신했던 분이 갑자기 서거했다고 하니 무척 울적하다”고 슬퍼했다.소상공인 이형진(56·경기 안양)씨는 “이 시대의 국가원로를 잃어 너무 슬프다. 노 전대통령에 이어 이번에도 김 전 대통령 빈소를 찾을 계획”이라며 “기업을 하면서 `김대중 정권`의 정책에 대해 불만이 있었지만 김 전 대통령이 추진한 남북대화와 민족공존의 정신을 높이 산다”고 평가했다.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취약지`였던 영남 지역도 안타까움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울산에서 택시운전을 하는 최성길(47)씨는 “여러차례 대통령 선거에서 떨어지면서도 매번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 결국 대통령이 된 분”이라며 “이런 강한 의지는 국가원수로서 큰 귀감”이라고 말했다.부산에서 지난 20여년간 `영원한 DJ맨`의 길을 걸어온 정오규(48) 전 통합민주당 부산시당위원장도 “김 전 대통령은 한반도에 평화와 화해의 빛을 밝혔다”면서 “정치적 아버지와 같은 분이었는데..”라며 눈시울을 붉혔다.김태일 영남대 정치행정대학장은 “김 전 대통령은 지역발전을 위해 밀라노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등 대구·경북 지역에 대해 끊임없이 애정을 표현했다”며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지역간 편견이 없어지고 국민이 진정으로 손잡는 나라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희망했다.민주화와 남북대화 등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업적을 평가하는 목소리도 높았다.이광호(56) 부산 민주공원 관장은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6·15공동선언`을 이끌어냄으로써 남북의 화해와 협력, 한반도 평화 조성에 큰 업적을 남겼다”고 말했다.경기 안산 탈북청소년 생활공동체 `우리집`의 최경숙(45·여) 총무는 “`우리집`은 김 전 대통령 재임 때인 2001년 남북을 잇자는 의미에서 `다리공동체`란 이름으로 시작됐다”면서 “남북화합과 평화통일에 애쓴 거목이 쓰러져 안타깝다”고 슬퍼했다.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광주·전남 지역의 슬픔은 남달랐다.광주 지역 대표적 재야 원로인 조비오(71) 신부는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국가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더 해주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면서 “민주화와 시장경제의 발전, 남북교류와 통일의 기틀을 닦은 `평화 지도자`였다”고 회고했다.김 전 대통령의 초등학교 동창인 박홍수(87)씨는 “고난의 세월을 이겨온 강한 친구라 병마를 떨치고 일어날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가다니 허망하기 그지없다”고 흐느꼈다.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 당선 직전까지 1년 남짓 살았던 경기도 고양시 정발산동 3통 권영숙(56·여) 통장은 “대통령과 한동네에서 살았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너무 안타깝다”면서 “좀 더 오래 사시길 바랐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또 남기헌(50) 충청대 행정학부 교수는 “김 전 대통령으로 인해 한국이 세계 속에서 민주주의 국가라는 평가를 받게 됐다”고 평가했다./연합뉴스
정부는 18일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추모하기 위한 분향소를 서울광장을 비롯해 전국 지방자치단체별로 설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행정안전부 관계자는 “서울지역 대표분향소를 서울광장에 설치하고 전국 각 지자체는 지역 실정에 맞게 적당한 장소에 분향소를 마련하기로 했다”라고 말했다.재외공관의 분향소는 외교통상부에서 준비한다고 행안부 측은 전했다.행안부는 전국 분향소를 이날 밤 설치해 19일 오전 9시부터 조문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연합뉴스
18일 오후 1시43분 다발성 장기부전으로제15대 대통령이면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1시43분께 향년 85세를 일기로 서거했다.연세세브란스병원 측은 이날 폐렴 증세로 37일째 입원중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고 밝혔다.병원 측은 김 전 대통령이 1시35분경 심장이 정지했고, 의료진이 심폐소생술을 실시해 40분께 다시 심장이 뛰었으나 3분후인 43분께 서거했다고 전했다.김 전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폐렴으로 신촌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고, 중환자실에서 집중 치료를 받아 증세가 호전되면서 같은달 22일 일반병실로 옮기기도 했었다.그러나 바로 하루 뒤 폐색전증이 발병해 인공호흡기를 부착한 채로 치료를 받아왔다.유족으로는 부인 이희호 여사와 세 아들인 홍일, 홍업, 홍걸씨 등이 있다.박지원 민주당 정책위의장과 박창일 연세대학교 의료원장은 2시 35분께 기자회견을 열고 김 전 대통령 서거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박지원 의원은 공식 브리핑을 통해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을 역임하고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김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1시43분 연세대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서거했다”고 밝혔다.이어 박 의원은 “쾌유를 빈 국민과 의료진에 감사한다”면서 “세브란스 병원 영안실 특1호실에 임시 빈소를 마련해 이희호 여사 등 가족과 정부와 잘 조율해 대통령의 마지막 가는 길을 잘 모시겠다”고 말했다.박 의원은 또한 김 전 대통령의 유언이 있었냐는 질문을 받자 “여사님께 구체적으로 듣지 못했다”고 답했다.이어 박창일 원장은 “김 전 대통령이 오늘 오후 1시43분 서거하셨다”면서 “7월13일 폐렴으로 입원하셨지만 마지막에는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인해서 심장이 멎으셨고 급성호흡곤란 증후군과 폐색전증 등을 이겨내지 못하셨다”고 말했다.박 원장은 김 전 대통령 서거 원인은 “급성 호흡곤란 증후군, 폐색전증, 다발성 장기부전증 등의 증세”라고 밝힌 뒤 임종 직전 “사실상 심폐소생술이 의미없는 단계였기 때문에 심폐소생술 등의 조치는 실시하지 않았다”고 밝혔다./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나로호 발사대로 이동·19일 오후 카운트다운… 성공 기대감 고조 “우주강국 코리아! 힘찬 발걸음을 떼다.” 우리 땅에서 우리 힘으로 쏘아올릴 `나로호(KSLV-1)`의 힘찬 발걸음이 시작됐다. 17일 오전 8시15분 약한 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전남 고흥군 봉래면 나로우주센터 조립동 문이 활짝 열리자 나로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흰색 바탕에 자랑스러운 태극 마크와 `대한민국 나로`를 몸에 새긴 나로호는 느리지만 힘차게 첫 걸음마를 했다. 진동을 방지하는 특수이동차량 2대에 실린 나로호는 무인 조종으로 조립동에서 1.5km 떨어진 발사대로 이동했다. 조립동을 나와 1시간30여분만에 발사대에 도착한 나로호는 연료공급선 및 시스템 운용을 위한 최종 점검을 거쳐 19일 오후 4시40분부터 역사적인 발사 카운트다운을 기다리게 된다. 이날 나로우주센터에는 이른 아침부터 안개가 낀 가운데 약한 안개비가 내려 연구진들을 긴장시키기도 했지만 나로호가 이동할 때에는 성공적인 발사를 예고하듯 구름 사이로 간간이 햇살이 비치기도 했다. 나로호가 발사대로 이동해 사실상 발사 준비에 들어간 가운데 나로우주센터 주변도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나로우주센터 앞 봉래면 진입도로에는 경찰 차량이 나와 검문 준비에 들어갔으며 나로우주센터 입구는 군·경 통제선이 설치돼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되고 있다. 육상은 물론, 나로우주센터 앞 해상과 상공도 일반 선박과 항공기의 출입이 제한되는 등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나로호 발사가 임박해옴에 따라 발사 성공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다. 나로우주센터 인근 봉래면과 고흥읍내 곳곳에는 `성공발사`를 기원하는 대형 현수막이 내걸렸으며 휴가철을 맞아 우주센터를 찾는 관람객들의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 부산에서 가족들과 함께 나로우주센터를 찾은 문선옥(37·여)씨는 “아이들과 우주과학관을 보러 왔는데 구경을 못해서 아쉽다”며 “나로호가 성공적으로 발사돼 우리나라가 우주강국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리나(10)양은 “TV에서만 보던 나로호를 모형이지만 직접 보니 자랑스러운 생각이 들었다”며 “학교에 가면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로호는 19일 오후 4시40분에서 6시20분 사이에 발사되며 지상과의 첫 교신은 발사된 지 12~13시간 지나 이뤄질 전망이다./연합뉴스
2009-08-18
드디어, 한국 첫 우주발사체 나로호(KSLV-I)가 오는 19일 전남 고흥군 봉래면 외나로도 나로우주센터에서 발사된다. 이번 나로호 발사는 `우리 땅에서 우리 위성을 우리 발사체`로 쏘아 올리면서 자연스럽게 우주강국으로 발돋움한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교육과학기술부는 나로호 발사를 사흘 앞둔 16일 “현재 나로호는 1, 2단 로켓이 완전 조립되고 과학기술위성 2호도 탑재된 상태”라며 “나로호는 발사 54시간 전인 17일 발사대로 이동해 이렉터를 이용해 수직으로 세워져 발사대에 고정된 뒤 발사 하루 전인 18일 최종 리허설이 실시된다”고 밝혔다. 나로호의 발사시간은 19일 오후 4시40분부터 약 2시간 이내로 잡혀 있다고 교과부는 전했다. 교과부는 발사를 위한 최종 준비 상황과 발사 당일의 기상조건에 따라 발사가 연기될 수 있음을 고려해 오는 26일까지를 발사예비일로 설정했다.`이제는 우주기술 자립`한국형발사체 KSLV-II 개발 시동한국 첫 우주발사체 나로호(KSLV-I)가 오는 19일 발사되고 나면 같은 모델로 내년 4월 나로우주센터에서 두번째 시험발사된다. 이후 정부는 항공우주 기술자립에 초점을 맞춘 우주개발진흥기본계획을 본격화한다. 먼저, 우주기술 개발의 자립화를 위해 핵심기술 확보에 중점을 두고 추진하고 우주개발 사업을 통해 확보된 기술을 바탕으로 기술을 자립화할 수 있도록 위성체와 발사체 추진 일정 및 전략을 재조정한다는 게 정부 방침이다. 또한 대학의 기초기술연구 지원을 확대해 원천기초 연구능력을 높여 나갈 계획이다. 오는 2016년까지 우주개발진흥기본계획 기간에 총 3조6천억원의 예산이 투입될 전망이다. 특히 나로호에 이어 한국형발사체(KSLV-II) 개발 사업이 본궤도에 오른다. 이는 1.5t급 실용위성을 지구저궤도에 발사할 수 있는 발사체 개발 및 발사를 말하며 오는 2018년까지 10년간 진행될 예정이다./연합뉴스
2009-08-17
온 국민이 기대감에 부풀어 숨죽이며 지켜볼 한국 첫 우주발사체 나로호(KSLV-I)의 실제 발사진행 과정을 미리 보면 어떨까. 일단 나로호의 발사 시점은 오는 19일 오후 4시40분부터 2시간 이내로 잡혀 있으며 당일 기상조건 등을 감안해 구체적 발사 시점이 정해질 예정이다. 발사를 위해서는 먼저 발사 예정일로부터 최소한 사흘 전(D-3)에는 발사체 조립과 관련한 모든 작업이 완료된다. 1단 액체 엔진과 2단 킥모터(고체모터)로 구성된 2단형 발사체인 나로호는 이때까지 고체모터동에서 상단부조립, 위성시험동에서 위성조립, 발사체 종합조립동에서 1, 2단 발사체 조립 등의 과정을 각각 거치게 된다. 모든 조립이 완료된 발사체는 발사 54시간 전에 트랜스포터를 이용해 발사대까지 이송된다. 이동은 수평으로 실시하며 이후 이렉터를 이용해 나로호를 수직으로 세워 발사대에 고정시키게 된다. 나로호가 발사대에 설치되고 나면 발사를 위해 나로호의 연료와 전기 계통을 중점적으로 점검하는 등 모든 부분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발사 하루전(D-1) 나로호가 장착된 상태에서 최종 리허설을 실시하게 된다. 이어 발사 약 4시간 전부터는 발사대 기계와 공급장비를 연결시켜 1단 발사체에 쓰일 연료(등유)와 산화제(액체산소) 주입, 고압가스 충전을 위한 절차가 시작되는데, 주입과 충전 개시가 결정되면 모든 발사준비는 사실상 끝나게 된다. 이어 발사 예정 시간 18분전 실제 발사를 할 것인지에 대한 최종 결정이 내려진다. 이후 발사 예정시간까지 모든 기기가 정상 상태를 유지하고 기상 상태와 주변 환경 역시 발사에 이상이 없을 경우, 발사 15분 전부터 자동 발사기능이 작동하면서 최종 카운트다운에 들어가 이륙과 음속돌파, 페어링 분리, 1단 분리, 위성 분리까지 자동화 시스템하에서 `비행 시퀀스`가 진행된다. 발사 준비 및 발사는 발사지휘센터(MDC)와 발사체 통제센터(LCC)가 있는 발사통제동(MCC)에 모든 상황을 총괄 지휘한다. 발사 후 200여초 뒤 위성을 감싸고 있던 페어링이 떨어져 나가고 발사체 1단이 분리된다. 이후 고도 200㎞쯤에서 2단 킥모터(고체연료 엔진)가 연료를 다 태우고 난 뒤 100여초 후 과학기술위성 2호(STSAT-2)가 분리된다. 이 시점에서 나로호 발사의 성공 여부는 확인된다. 과학기술위성와 지상국(대전 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과의 첫 교신은 발사 후 약 13시간 뒤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