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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잔인한 달, 4월

윤영대수필가 갖가지 꽃들이 피어나는 4월이 왔다. 살살 부는 봄바람에도 벚꽃잎이 눈발처럼 흩날리는 길을 걷노라면 꽃내음 짙어가는 화창한 계절의 시작이 가슴을 뛰게 한다. 생명의 계절, 환희의 봄날, 사랑의 4월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봄의 시작, 4월이 왜 ‘잔인한 달’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을까? 100년 전 영국의 시인 T.S. 엘리엇이 발표한 433행이나 되는 긴 시 ‘황무지’ 첫 줄에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라고 쓴 글귀가 사람들의 입으로 회자(膾炙)되면서 우리의 뇌리에 박혀버린 탓일까.4월 달력을 넘겨 보니 4·3 제주항쟁, 4·16 세월호 참사, 4·19 혁명 등 큼지막한 정치적 사건과 와우아파트 붕괴, 대구 상인동 지하철 도시가스 폭발 사고 등 가슴 아픈 기록이 있다. 불행하고 잔인한 달이 맞는 건지….그런데 엘리엇은 이어서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따뜻했다’고 오히려 겨울이 좋았다는데, 이는 1차 대전 후 삶의 방향과 의욕을 잃은 채 정신적 황폐를 겪고 있는 서구 문명의 상실감을 표현한 듯하지만, 그 모더니즘의 시구를 논하자는 것은 아니다. 따뜻해져 오는 대지에서 편안히 잠자고 있는데 봄비로 흔들어 깨워 힘들게 새싹을 키우는 것은 라일락에게는 잔인할지도 모르지만 줄기 뻗어 잎과 꽃을 피우는 것은 자연의 임무이자 즐거움이 아닐까.‘고통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No pain, no gain)’ ‘쓴 것이 다하면 달콤함이 온다(苦盡甘來)’는 말은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것이다. 이번 4월에는 고통을 이겨내어 즐거움을 얻어야겠다.올해도 어느새 1/4이 지나갔고 따뜻한 4월이 되었다. 춘곤에 겨우면 몸이 나른하고 정신도 몽롱해지고 마음이 흐트러지기 쉽다. 그래서 성폭력과 음주 운전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달이기도 하다. 마음을 맑게 먹고 몸에 생기를 불어넣어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할 때는 자칫 잔인한 달이 될 수도 있다. 아직도 코로나19는 각종 변형을 만들어 내며 우리 삶에 고통을 주고 있고, 우크라이나 전쟁도 2개월째 접어들어 처참하게 파괴되고 생명이 죽어가고 있지만, 인류의 염원이니 잔인한 달의 누명을 벗었으면 좋겠다.4월엔 많은 기념일이 있다. 1일 향토예비군의 날, 5일 식목일, 7일 보건의 날, 15일 민방위의 날, 20일 장애인의 날, 21일 과학의 날, 22일 새마을의 날, 25일 법의 날 등 봄의 기운이 넘치는 이달에는 나라와 국민을 위하는 마음으로 사회, 정치, 문화 전반에 희망의 꽃을 피우자. 또 4월 17일은 부활절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3일 만에 되살아나심을 찬양하는 날, 그 부활을 예찬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도 갖자. 잠든 마음의 뿌리에도 봄비를 내려 혹시 각자의 상실감이 있었다면 다시 깨치고 일어나 잔인한 날들을 이겨나갔으면 한다.4월의 탄생석은 다이아몬드. 승리와 고귀함, 변하지 않는 사랑을 의미한다고 하니 마음속에 조그마한 보석 하나씩을 간직하는 4월이 되자.

2022-03-31

꽃샘바람이 분다

윤영대수필가 춘분이 지났다. 낮과 밤, 추위와 더위가 반반이니 진정 봄날이다. 긴 겨울을 견디며 하늘과 땅의 좋은 기운을 빌어온 농부들은 봄보리 갈고 채소 씨앗 뿌려 춘경(春耕)을 시작하며 허물어진 담장을 고치고 파릇한 봄나물 뜯어 먹으며 한해의 풍년을 비는 철이다.‘춘분에 비 오면 병자가 드물다’고 했는데, 겨울 가뭄을 씻어버리듯 비가 내렸으니 역병인 코로나도 사라지겠지, 견뎌 보자. 이맘때면 남에서 봄바람이 꽃내음 싣고 오는 데 꽃샘추위가 봄이 오는 길목에서 심술부리니 멈칫멈칫 꽃망울을 펴지 못하고 있다.이 나라도 하늘의 기운을 닮아가는지 대선이 끝나고 좀 밝고 맑은 나라를 기대해 보려니 새 정치를 위한 ‘대통령 집무실 이전’ 문제를 두고 시끄럽다. 용산 국방부 청사로 옮기고 청와대를 개방하여 국민의 품으로 돌려보내겠다는 윤 당선인의 꿈을, 안보 공백이 우려되고 천문학적 이전 비용이 든다며 예산편성을 거부하는 문 정권의 트집으로 갈등을 빚으며 평화롭게 이어 나가야 할 대통령직 인수인계가 난맥상이다. 향기로운 꽃바람 불어오려는 봄날에 이를 시샘하는 꽃샘바람이 밀려와 가벼운 가슴으로 꽃길을 걷고 싶은 상춘객들에게 다시 옷깃을 여미게 하는 아쉬움이다. 겨울에 입었던 두껍고 무거운 옷들을 빨아 넣고 가볍고 밝은 옷을 꺼내 입으려던 마음도 멈칫하고 창밖 하늘을 올려다본다.코로나 역병이 창궐한 지 2년 2개월 넘어 16일 확진자 62만 명의 최고점을 찍고 22일에는 누적확진자 1천만 명을 넘었다. 국민 5명당 1명이 코로나바이러스 바람을 맞은 셈이니 한 가족 한 명꼴이다. 봄이 왔건만 꽃잔치와 꽃놀이도 못하는 억울한 마음인데 날씨마저 아직 겨울의 차가움을 밀고 있으니 더욱 봄날이 그리워진다.마음을 달래려 창포마을 뒷산에 올랐더니 드문드문 하얀 매화꽃과 노란 산수유꽃은 만개했고 숲속 진달래는 발그레 눈만 뜨고 있었는데 봄꽃 바람이 좀 서둘렀나? 꽃샘바람이 늦게까지 질투를 하는 것인가? 그래도 남쪽에서 많은 꽃소식이 들려온다. 오히려 개화 시기가 평년보다 앞당겨 이번 주말쯤이면 봄의 전령사 벚꽃도 경주 엑스포공원에는 화려한 벚꽃 터널을 만들 것이란다. 산길 내려와 철길숲을 걸으니 노란 개나리가 환하게 웃고 붉은 홍매화가 얼굴을 붉히며 서서 답답한 마음에 산책 나온 시민들의 눈길을 끈다. 코로나로 많은 봄축제가 취소된 이 봄날, 자연의 심술이 못마땅하다.전국적으로 꽃 소식은 평년보다 좀 빠를 것이라는데 예쁜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면 뭘 하나! 꿀벌이 갑자기 없어졌다는 ‘집단 실종’의 슬픈 소식이 들려오는데…. 전국에서 최소 77억 마리가 사라졌고, 이상 기후와 해충 응애 벌레 탓이란다. 지난 겨울 고온화로 꽃이 일찍 피어 서둘러 꿀을 모으러 나섰던 힘 빠진 벌떼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해 폐사됐다는 얘기. 왜 이리 자연도 왔다 갔다 갈피를 못 잡는 걸까.‘정2월 바람에 김칫독 깨진다’는 속담처럼 요즈음 새 정부 출범 앞에 날아오는 현 정부의 어깃장이 소중하게 익혀온 김칫독을 깨는 것은 아닌지….탐스럽게 피어나는 흰 목련꽃 보며 사랑을 노래하고 싶은 계절이다.

2022-03-24

대선, 새로운 정권을 택하다

윤영대수필가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당선되었다. 코로나19의 급격한 확산 속에서 치르진 선거 열풍은 사전투표와 본 투표에서 총 유권자의 77.2% 투표라는 기록을 세웠고 광주에서는 81.5%가 참여할 만큼 이번 투표는 온 국민의 관심이 쏠린 선거였다. 4강 대결 구도였으나 마지막에 윤석열-안철수 후보의 단일화가 이루어졌고, 각자 ‘위기에 강한 대통령, 국민이 키운 내일을 바꾸는 대통령, 주4일제 복지국가와 일하는 시민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온갖 비리와 가정사를 뒤적이며 욕설과 폭로로 뒤범벅되어 싸워왔던 선거였다.사전투표에서 드러난 몇 건의 부정투표 흔적을 기억하며 투표장으로 가서 받아든 기다란 투표용지에 조심스럽게 도장 찍고 접어서 투표함에 넣으면서 깨끗한 선거가 되기를 빌었다. 확진자 투표가 종료되고 곧 시작된 개표방송에서 공개된 사전 출구조사는 차이가 1%를 밑도는 박빙의 대결이었고 6일간의 여론 조사에서도 오르락내리락하며 예측 불가의 선거판이 됐었다. 만18세가 처음으로 참여했고 40대는 2~30대, 5~60대와 지지 후보가 다른 세대 차이도 보였고 20대는 이대남, 이대녀로 갈라져 표심도 달랐으며 영남과 호남의 지역 격차가 컸다는 것도 우리 국민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방송사들은 정규방송을 중단한 채 개표방송에 들어갔고 처음에는 2%도 안 되는 작은 차이로 여당 후보가 앞섰으나 자정이 넘어서면서 야당 후보가 그만큼 앞서갔다. 48.6%와 47.8%의 수치는 출구조사 결과와 거의 같아서 놀랍고 변화 없이 차이를 유지하다가 새벽 3시가 지나자 당선 확실이라는 화면이 떴다. 이번 선거결과에 마음이 끌려 밤새워 시청하다가 창밖을 내다보니 많은 아파트의 창문에 불이 켜져 있어 모두가 이번 선거의 결과에 걱정이 많구나 생각했다. 한밤중에 휴대폰이 카톡 대며 지인들이 밤새워 선거결과에 대한 문자를 보내왔다.국내에는 아직도 울진, 강릉 산불이 숲을 태우고 있고 해외에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계속되는 우려 속에 우리는 이 나라 5년을 이끌어 나갈 대통령을 뽑는 어려운 일을 해냈다. ‘투표는 총보다 강하다’라는 링컨의 말처럼 국민 모두가 한표 한표 던져서 응원을 보냈고 후보들도 그 힘을 얻어 뛰었을 것이다. 각 후보들은 경제 분야에서는 기본소득, 청년 기회, 손실보상과 좋은 일자리 등을 설파했고 기후위기 과제에서는 에너지 고속도로, 탄소 중립, 탈원전 폐기 등을 내걸었으며 출산과 육아의 복지문제 등에도 각자의 정책을 내세웠다. 이제 당선자는 이들 선거공약을 재검토하고 상대방 의견도 받아들여서 그동안 비뚤어지고 엇길로 새어나간 정책 등을 바로잡고 정치와 정권 교체를 잘 이행하여 새로운 국가 사회를 이루어 주면 좋겠다.당선 확정 새벽에 한 인사말처럼 새 정부를 준비하고 헌법정신과 의회를 존중하며 야당과 협치하여 국민을 잘 모시겠다는 약속대로, 막대한 권한을 휘두르지 않는 대통령이 되어 ‘미래를 바꾸겠다’는 출마 의지를 지켜주기 바란다. 휘두르는 새 권력이 아니라 혼란을 극복하고 통합과 화합의 시대를 여는 새 살림꾼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2022-03-10

밝은 봄날을 맞고 싶다

윤영대​​​​​​​​​​​​​​수필가 쓸쓸한듯 설 명절을 보내고 나니 바로 입춘(立春), 봄의 문턱에 선다. 그러나 아직 진정한 봄은 아니다. 겨울이 끝난다는 느낌을 가슴에 안을 뿐…. 일일 평균 기온이 5~10℃, 최저 영하로는 내려가지 않아야 초봄이 된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은 벌써 새 생명이 태동하는 첫 계절을 준비하고 있다. 올해의 입춘 절입 시간은 2월 4일 오전 5시51분. 입춘방을 붙이려면 동트기 한참 전인 새벽이라 어렵겠지만 그렇게 해야 복이 온다고 하니 어쩌랴. 작년에는 ‘입춘대길 건양다경’을 붙였으나 올해는 대선도 있고 하니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써 볼까? 아니면 코로나 난리에 우울한 마음을 풀고 문 활짝 열어 마당 쓸며 황금 주워 복 받을 욕심에 ‘개문만복래 소지황금출(開門萬福來 掃地黃金出)’로 할까? 아니, 올해는 검은 호랑이 해이니 호랑이 호(虎)자를 크게 써 붙여볼까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춘첩 붙이는 것이 굿하는 것보다 낫다’는 말도 있으니 먹 갈아 한 장 멋있게 써 붙여야겠다.중부지방엔 흰 눈이 흠뻑 내려 산과 들을 하얗게 덮어 아름답지만 이곳 동해안에는 건조주의보가 내려져 참한 겨울 풍경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입춘에 맑고 바람불지 않으면 풍년이 든다 했으니 만족하자. 새해 첫날 새벽 마을로 나가 처음 듣는 짐승 소리로 그해의 운수를 점친다는 청참(聽讖)의 풍속에는 까치 소리는 풍년과 행운을, 참새의 재잘거림은 흉년과 불행이라고 한다. 선거 바람 타고 들려오는 소리는 까치인가 참새인가? 빌딩 숲속에서는 새소리도 듣기 힘드니 만나는 이웃과 덕담 인사를 밝게 나누어야겠다. 아침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난 귀여운 꼬마의 배꼽 인사가 바로 까치 소리다.이제 복조리 풍습도 잊은 지 오래다. 내 서재에는 수년 된 복조리 1쌍이 아직도 걸려있어 또 동전 몇 푼 넣어두어야겠다. 복조리는 쌀을 일어 낱알을 고르듯 그해의 행복을 일상에서 일어 얻어려는 기원이리라. 대나무를 잘게 쪼갠 죽사(竹絲)로 엮어 만들거나 사서 방이나 부엌 귀퉁이, 대청마루 기둥에 달아 돈과 엿 등을 넣어두곤 했지만 지금은 새벽녘에 복조리 사라 외치며 팔러 다니는 장수들도 없다. 올봄에는 밝은 정신으로 복조리 하나 잘 엮어서 나라를 맡길 인재를 잘 골라내자. 봄은 ‘보다’의 어원을 갖는다 말이 있다. 모든 것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자연과 가정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에 대해서도 밝은 마음과 올바른 눈, 긍정적인 생각으로 내다봐야 하며, 특히 올해는 잘 살펴보아야 참된 봄을 맞을 것 같다.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봄이라 한다. 봄은 영어로 spring- ‘튀다 솟아오르다’의 뜻처럼 봄기운에 땅이 녹으면 샘물도 힘있게 솟고 식물도 대지의 기운을 끌어올려 새싹을 틔운다. 서설(瑞雪)이 내려 덮인 대지의 껍질을 뚫고 생명의 봄날을 올리는 것이다. 이 계절을 많은 음악가도 아름다운 선율로 노래하고 시인도 따뜻한 마음으로 얘기해 왔다. 봄은 모든 생명의 교향악이기도 하다.화창한 봄날에 봄바람 살랑 부는 봄동산에 올라 봄나들이 나온 어여쁜 봄처녀가 부르는 봄노래 들으며 봄꽃 한아름 안고 봄맞이를 하고 싶다.

2022-02-03

설 명절 연휴는 어떻게…

윤영대수필가 이번 설 연휴는 5일이다. 국민의 일상생활과 각종 여가활동을 계획할 수 있도록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발표하는 달력 제작 기준인 ‘월력요항’을 보면 일요일 52일에 국경일, 설날 등 공휴일 19일을 합하여 71일이 휴일인데, 올해는 석가탄신일, 추석, 한글날, 성탄절 등이 일요일과 겹쳐져 그 4일을 빼면 67일이나 된다. 여기에 토요일까지 포함하면 전체 휴일 118일 중에서 가장 긴 연휴이고 여기에다 유급 휴가를 잘 쓰면 최장 9일간을 쉴 수가 있다고 한다. 대체공휴일 때문이다. 공휴일이 토·일요일이나 다른 공휴일과 겹치는 경우 대체공휴일을 지정할 수 있는 제도이며 설·추석날 전·후와 어린이날 등 7일만 적용되었으나 2021년 8월15일부터 삼일절 광복절 개천절 한글날 등 국경일 4일이 추가되어 11일로 늘어났다. 그래서 일 년 중 1/3쯤 쉬게 되는데 올해는 3일 이상 연이어 쉬는 날들이 6번이나 있다. 우리에게 휴일의 의미는 바쁜 직무와 일상에서 벗어나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쉬는 날이었고, 토요일도 조기 퇴근도 없이 살아온 지난날에 비하면 토요일 휴무제가 있고 최저임금 탓인지 퇴근 시간이면 칼같이 직장을 빠져나오고 야간근무도 거의 없어진 듯한 지금, 쉬는 것은 그냥 일상이 된 듯하다. 우리의 전통명절에는 설날, 정월 대보름, 단오, 칠석, 추석이 있어 피곤한 삶의 중간중간에 가족과 이웃, 지인들과 따뜻한 정을 느끼고 민족의 하나 됨을 느끼기도 하지만 점점 희미해져 가는 현실에서 고유한 풍속들의 가치를 잊고 명절 휴일의 의미는 그냥 ‘논다’는 것이 아닐까?올해 가장 길다는 이번 설 연휴도 마음 느긋이 가족들과 어울려 행복을 느껴보는 것이 좋겠지만 벌써 2년째 법석을 떨고 있는 코로나19의 오미크론 변이 사태로 불안한 마음에 진정한 명절 휴일을 느껴보기 힘들 것 같다. 갑자기 8천 명대를 넘어 여태껏 기록을 경신하더니 이제 1만 명 선을 넘었다. 설 연휴 비상사태를 염려한 각 지방자치단체도 특별방역대책을 세우고 선별진료소를 증설하고 강화된 시민 행동수칙을 알리고 있다. 귀향하기 전 예방접종을 완료하고 가능한 방문을 자제하며 거리 두기 등으로 모임 자체를 줄이라고 한다. 차례도 소규모 가족으로 지내고 온라인 성묘를 권하며 어른들에게는 비대면 세배를 드리란다. 귀향 때 개인차량 운행 시 고속도로휴게소도 가능한 패스하라고 한다.이러한 연휴에 택배노조의 투쟁으로 배송 대란이 우려되고 그에 따른 배송지연과 파손, 훼손, 분실 등의 피해도 염려된다. 물류뿐만 아니라 통신 서비스 문제를 걱정한 통신3사는 안정적 서비스 제공을 위해 시설의 집중관리 체제를 점검 보완하여 통신 인프라의 품질향상에 힘을 쏟고, 자가용 운행 증가에 따른 고속도로 정체 구간의 트래픽에 대한 대책도 강구하며 비대면 가족 모임을 돕기 위해 무료 영상통화를 제안했다니 고맙다. 또 설 연휴 기간 중 택배 선물과 안부 인사를 사칭한 보이스피싱 위험도 우려된다고 한다.명절을 명절 같이 보내지 못하는 요즈음의 세상, 참된 시민질서의식을 발휘하여 질병의 큰 파도를 넘어 밝은 우리의 명절을 즐기도록 하자.

2022-01-27

포스코 1고로, 불을 끄다

윤영대수필가 지난해 12월 29일, 우리의 삶을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의 반열에 올려놓은 초석을 다진 포항제철 1고로의 종풍식(終風式)이 있었다. 허허벌판 모래밭에 뿌리를 박고 50여 년간 쇠를 녹여왔던 첫 용광로의 불을 끈 것이다. 그동안 영일만의 꿈을 키우며 2차례의 치료를 통해 생명을 연장해 왔었지만 이제 수명을 다해 연명치료의 호스를 제거한 것이다. 참으로 수고가 많았다. 그런데 그 종무식은 너무 조촐했던 것 같다. 코로나 탓인지 몇몇 포스코 임직원들이 참석한 내부행사로 끝난 영상을 보노라면 70년대 자전거를 타고 형산강 다리 위를 건너던 노란 제복 입은 산업역군들의 힘찬 대열이 눈에 아른댄다. 뜨거웠던 용광(鎔鑛)의 생을 마감하는 날, 그 흔한 현수막 하나 걸린 것을 보지 못했다. 그에 힘입어 발전을 거듭한 포항시도 무관심한 것인가, 내가 못 본 것인가….1고로가 숨을 멈춘다고 포스코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또 포항시가 다른 나라 몇 개 도시처럼 도시몰락의 길을 가는 것도 아니다. 50년 전, 송도 죽도 해도 대도 상도 5개의 섬마을이 있던 형산강 하구에는 매일 힘찬 마음으로 출퇴근하는 자전거와 오토바이의 물결이 넘쳤고 영일만에는 철광석을 싣고 오가는 거대한 선박들이 꽉 찼던 광경이 그립다. 그 철강 역사의 산실은 영일만의 기적을 낳았고, 녹슨 고로는 다만 산업 현장에서 임무를 다하고 사라질 뿐이다.1970년 4월 1일 첫 불을 당긴 고(故) 박태준 회장이 ‘선조들의 피 값으로 건설하는 제철소가 실패하면 우향우하여 영일만에 빠져 죽어 속죄하자’고 외친 ‘우향우 정신’은 포항을 제철입국(製鐵立國) 중심지로 만들었다. 1973년 6월 9일 첫 쇳물이 쏟아져 나오는 날, 국민 모두의 가슴에도 뜨거운 눈물이 흘렀을 테고, 그날은 ‘철의 날’로 지정됐다. 그 후 연간 생산 130만t의 소형로에서 1천500도의 열기를 뿜어내어 현재까지 5천500만t의 철강과 국가의 어려움을 녹여온 1고로, 수명 15년의 3배까지 일하면서 ‘민족 고로’로 힘을 다했지만 이제 생산효율과 탄소 중립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밀려 사라져간 것이다.그간 생산한 ‘산업의 쌀-철’은 가발, 섬유제품 수출로 겨우 연명하던 국내산업을 조선, 자동차, 가전제품 생산 왕국으로 탈바꿈시켰고, 연간 조강생산 3천600만t의 세계 5대 철강회사로 성장하며 세계 만방에 그 이름을 각인 시켰고 ‘철강도시 포항’이라는 명예도 안겨줬다.그 역사를 형제 고로들과 함께 묵묵히 다독여 왔던 높이 90m 키다리 아저씨, 그 1고로의 영구침묵을 지켜보며 산업역사의 기념물로 보존하자. 지금까지는 제철역사박물관으로 재탄생시킨다고 하지만 포항시와 포스코 둘만의 일을 넘어 국가가 나서야 하는 기념비적인 사업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국가 경제를 세운 기틀을 마련한 포스코의 첫 쇳물 정신을 기리자. 1고로는 단순한 산업폐기물이 아니다. 우리나라 산업근대화의 모체이고 상징이다. 비록 종풍을 통해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만 ‘민족 고로, 경제 국보1호’의 위용으로 세계 경제 10위의 꿈을 이루게 한 1고로의 불꽃을 가슴속에 간직하자.‘자원은 유한, 창의는 무한’.

2022-01-13

호랑이 꼬리에 서다

윤영대​​​​​​​수필가 임인년 새해가 밝았다. 검은 호랑이 해에는 동물의 왕처럼 강인한 정신력으로 어려움을 이겨나가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바닷가에서 붉은 태양을 보고 싶었지만 올해도 해맞이 행사가 취소되고 일출명소는 폐쇄되어 안타까운 마음으로 있다가, 사흘 후 새벽 호미곶으로 차를 몰았다. 포스코 불빛을 보며 영일만의 희끄무레한 여명을 뚫고 호미곶 해맞이 광장에 섰다. 잠시 후 수평선에 태양이 솟는다. 백여 명쯤 되는 관광객의 환호 속에 ‘상생의 손’은 ‘화합하고 화해하며 서로 도우며 살라’는 의미를 담아 붉은 해를 떠올린다. 나도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빌며 두 손을 모았다.호미곶 한민족해맞이축전행사는 취소됐지만 포항시장은 사자성어 ‘임난용지(臨難勇智)’를 펼쳐 들고 ‘어려운 일에 임할 때 용기와 지혜로 극복하자’는 새해 인사를 전하며 시민들의 무사 안녕을 기원했고, 경북도는 ‘호랑이 기상으로 당당한 경상북도’를 신년 화두로 삼았다. 호미곶, 대보(大甫)는 육당 최남선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출’이라고 했고, 격암 남사고는 한반도를 호랑이 모양으로 보고 백두산은 코, 이곳을 ‘범꼬리’라 하여 호미등(虎尾嶝)이라 했다. 호랑이 꼬리는 바로 힘, 지도력의 표시다.광장으로 올라오면 왼손 모형 앞의 성화대 ‘천년의 눈동자’에는 새천년이 시작될 때 변산반도 해넘이, 호미곶 해돋이 그리고 독도와 태평양 피지섬의 햇살로 채화한 ‘영원의 불씨’가 타고 있어 기쁘지만, 새해 첫날 많은 관광객에게 떡국을 끓여주었던 국내 최대 가마솥은 뚜껑이 닫혀있어 아쉽다. 연오랑세오녀가 마주 보며 반기는 조각상을 보고 부부의 정을 생각해보며 새천년기념관 옥상에 오르면 하얗게 빛나는 태양의 난반사가 고운 동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국립등대박물관과 등대역사관, 국내 최대의 호미곶등대를 둘러보노라면 광장과 바다전망대의 돌문어 조각 두 개가 미소를 자아낸다.검은 돌이 파도에 씻기는 바닷가 해파랑길 옆 낮은 해송 숲속에서 이육사의 ‘청포도 시비’를 찾아 시도 읊조려 보고 ‘영일노래비’에서 옛 이름 ‘도기야’와 영일(迎日)의 뜻도 새겨본다. 과메기 말리는 구수한 냄새를 맡으며 대보항을 둘러보고, 고금산 정기 받은 호미곶과 보리향기 그윽한 구만리 벌판을 노래한 호미곶면가를 되새기며 언덕을 넘으면 흑구문학관 뒤쪽으로 넓은 청보리밭이 펼쳐지는데 아직은 파란 새싹들이다. 청어를 갈고리로 끌었다는 ‘까꾸리개’에는 일본 실습선 쾌응환(快鷹丸) 조난비가 있고 그 아래 신비로운 독수리바위가 영일만을 지키려는 듯 고개를 쳐들고 있다.호미곶은 원래 ‘말갈기 같다’고 장기곶(長鬐串)이라 했는데 학창시절에 토끼꼬리라고 배웠고 이제는 호랑이 꼬리다. ‘호랑이 꼬리에 나무를 심자’는 호미수회의 열정이 담긴 호미숲터에서 소맷돌 ‘악어바위’를 내려다보며 호랑이 꼬리 만지듯 지나 본 새해 아침, 청보리 푸른 3월 지나 노란 유채꽃 넘치는 5월도 지나면 청포도 익는 7월엔 청포를 입고 찾아오는 손님이 있으려니… 호랑이 기상을 받아 국운의 상승과 국태민안을 이루는 큰 손님을 맞이하고 싶다.

2022-01-06

가을의 문턱에서

김기포포항기계중앙교회 담임목사가을이다. 청명한 가을 하늘이 높고 푸르다. 아침저녁으로 스산한 바람이 불어온다. 가을이 몸속까지 파고든다. 따뜻한 가을볕에 벼 이삭은 익어 가고 과일들도 영글어 간다. 미리 알리지도 않았고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가을은 허전한 마음 깊숙이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이제 산과 들녘은 노란 옷으로 갈아입는다. 나무와 풀들은 겨울준비를 위해 무성했던 잎새들을 털어 버리느라 분주하다. 시인 릴케는 가을을 이렇게 노래했다. “잎이 집니다. …. 하늘의 먼 정원이 시들어 가는 듯 / 거부하는 몸짓으로 잎이 집니다. / 그리고 깊은 밤중에 무거운 지구가 / 고독에 잠깁니다. / 다른 모든 별들에게서 벗어나….” 시인은 가을이 마치 하늘 정원이 시들어 가듯이 지구가 무거운 고독에 잠긴다고 노래했다. 그래서 가을은 고독한 계절인지도 모른다. 또한 릴케는 `가을날`이라는 시에서 좀 더 성숙하고 사색적인 가을의 중후함을 노래한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중략)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시인의 노래처럼 가을은 고독과 사색의 계절이다. 가을은 단풍이 노랗게 물드는 계절이다. 낙엽이 질 때의 그 허무함, 그리고 언젠가 떨어져야 하기에 마음이 허전하다. 그 허전함과 텅 빈 마음 때문에 가을은 모두가 시인이 된다. 가을은 사람들에게 고독과 쓸쓸함으로 밀물처럼 밀려온다. 특히 가을비가 소리 없이 부슬부슬 내리는 날은 더욱 가을이 고독과 사색을 넘어 그리움으로 변한다. 그리고 가을은 차가운 기온과 더불어 심리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츠러들게 만든다. 그래서 가을은 고독의 깊이와 추억의 그리움과 인생의 쓸쓸함을 노래한다. 가을은 텅 빈 가슴을 만든다. 그 허전한 가슴에는 수만 리 깊고 깊은 우물이 있다. 우리는 그 우물에서 그리움을 퍼 올린다. 그 그리움은 하늘의 별과 같이 애절하다. 그 그리움은 고독을 씻어주고 허전한 마음을 채우고 외로운 마음을 달랜다. 가을은 무엇보다 열매의 계절이다. 수확의 계절이다. 가을은 모든 땀의 마침표다. 봄부터 농부는 열매를 바라보면서 땀을 흘린다. 농부에게 있어 열매는 기쁨이고 보람이다. 삶의 존재의미다. 열매는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열매는 타인을 위해 존재한다. 열매는 먹히기 위해 존재한다. 아니 먹힘으로 행복한 것이 열매다. 사람들은 꽃을 더 좋아한다. 꽃에는 향기가 있고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나 꽃은 그 속에 생명이 없다. 그러나 열매는 그 속에 생명이 있다. 그 씨앗 속에 내일이 있고 미래가 있고 숲이 있다. 우리들은 꽃처럼 한순간의 자랑이나 인기를 위해 살아서는 안 된다. 열매가 사람을 살리고 사람에게 기쁨을 주듯 이 가을에 우리는 열매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가을의 문턱에 서 있다. 찬바람이 피부 속을 파고든다. 나뭇가지에 붙어 있는 나뭇잎이 회색의 색으로 변하여 간다. 이제 점점 가을이 깊어 갈 것이다. 가을이 깊을수록 우리는 인생의 고독과 사색을 즐겨야 한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은 하나같이 고독한 사막을 건넌 사람들이다. 사막과 광야는 인생을 성숙하게 만들고 그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은 인생을 더 빛나게 만든다. 이제 얼마 후면 낙엽들은 하나 둘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진 앙상한 나무는 자기 내면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것이다. 이 가을 우리는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세속의 욕심을 털어버려야 한다. 인간의 위선, 가면, 자신이 아닌 것으로 자신을 포장 했던 그 많은 낙엽들을 떠나보내야 한다. 그래서 가을은 진실 된 인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계절이다. 태양이 가장 고울 때는 저녁노을이고, 잎이 가장 붉을 때는 가을이다. 그러나 그 소중함도 순간적이기에 더 아름답다. 갑자기 가을바람이 분다. 낙엽이 떨어진다. 떨어지는 낙엽조차도 아름답다. 그것이 자유를 향한 몸부림이기에….

2009-10-02

세 가지 고향

김기포포항기계중앙교회 담임목사추석 명절이 다가오면 마음은 벌써 고향이다. 고향의 하늘, 들판, 냇가, 뒷동산, 소꼽친구들, 그리고 덩그렇게 고향을 지키는 정든 고향 집…. 이렇게 명절은 그동안 잊고 살았던 고향의 소중함을 생각나게 한다. 그래서 고향은 늘 그리움이다. 고향은 따뜻한 어머니의 치마폭이다. 인자하신 아버지의 얼굴이다. 오순도순 이야기꽃이 피는 사랑방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고향 가는 길은 순탄하지 않다. 어린 시절 고향은 대체로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버스터미널에 길게 늘어선 구불구불한 고향 행렬은 뱀 꼬리처럼 길었다. 손에는 선물 꾸러미를 들고 버스를 기다리는 마음은 물 만난 고기처럼 생기가 있었다. 시외버스 안은 콩나물같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고향이 가까워지면 고향집의 굴뚝에는 하얀 연기가 마중을 나왔다. 지금 기억으로 아버지는 명절만 되면 가마솥에 돼지고기를 푹 익혀서 따뜻한 국물과 함께 내놓으셨다. 그 국물에 소금을 넣어 후룩 마시면 고향을 마시는 것 같았다. 이제는 그런 맛을 찾을 수 없다. 아, 그 맛의 그리움이여! 요즘은 개인 승용차가 있어서 과거의 그런 추억은 없다. 그 대신 고향 가는 길이 멀고 험난하다. 밀려드는 차량들 때문에 고향 가는 길이 복잡하다. 문득 꽉 막혀 있는 고향 가는 길을 보노라면 회귀본능이 강한 연어 떼가 생각난다. 연어는 산란기가 되면 예민한 후각이 있어 태어났던 모천(母川)으로 돌아온다. 수천 수만 리 바다에서 살다가 정확하게 고향을 찾아와 알을 낳고 일생을 마친다. 생명의 비밀이다. 정말 신비하다. 고향은 찾아가는 사람과 맞이하는 사람이 있어 더 즐겁다. 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사람의 설레임과 그리움, 그리고 고향을 지키며 긴 여행의 삶의 여정에서 맞이하는 사람의 기다림, 이렇게 고향은 그리움과 기다림이 맞물려 기쁨을 빚어낸다. 그래서 고향은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 고향이 있다. 첫째는 과거의 고향이다. 이것은 그리움의 고향이다. 추억을 찾아가는 고향이다. 가족과 친지의 품이 있고 어린 시절 추억이 있으며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과 보름달이 있는 육신의 고향이다. 그러나 이런 육신의 고향도 부모님이 안 계시면 점점 아늑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서글픈 인생의 단면인지도 모른다. 두 번째는 오늘의 고향이 있다. `사람이 살다가 정들면 고향이다. 혹은 이웃사촌이다.` 라는 말이 있듯이 태어난 고향이 아니더라도 이웃끼리 정들고 친해지면 곧 고향이다. 오늘의 고향은 현재의 고향이고 실존의 고향이다. 나와 네가 있고 이웃이 있고 우리들이 있으므로 살맛 나는 세상이다. 세 번째 미래의 고향이 있다. 이것은 죽어서 가는 고향이다. 영원히 안식할 수 있는 고향이다. 미래의 고향은 세상에서의 수고와 고달픔을 쉴 수 있는 영원한 고향이다. 우리들이 언젠가 찾아갈 본향이다. 하나님의 품이 있고 소망이 있으며 영생이 있는 영혼의 고향이다. 고향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안식처다. 고향이라는 말만큼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는 어휘도 드물 것이다. 고향은 귀소본능이다. 이것은 자신이 태어난 곳을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이다. 또한 고향은 안식본능이다. 쉬고 싶은 욕망이다. 고향을 떠나 나그네로 사는 삶의 고달픔을 고향에서 쉬고 싶은 마음이 있다. 고향은 영접본능이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고향에 가면 내 부모나 형제가 반겨줄 그리움이 있다. 고향은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열차다. 고향은 우리의 삭막한 감정을 부드럽게 한다. 그것은 숲 속에서 맞는 밤처럼 아늑하다. 봄날의 푸른 산처럼 푸르다. 빗속에서 걷는 것처럼 끈적끈적 한 그 무엇이 있다. 고향은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다. 그러나 우리는 고향을 초월하면서 살아야 한다. 고향이라는 말이 자칫 특정 지역의 이익을 챙기고 타인을 배척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고향이란 지금 나와 자식들이 살고 있으며 앞으로 살아갈 곳이 어디이든지 그곳이 바로 고향이다. 사람들이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내 고향 내 고향만 부르짖는 편협한 사고에 갇혀 있을 때 통합이니, 상생이니 하는 화합의 시대에 역행하는 길이다. 고향과 고향은 서로 만나야 한다. 우리는 오늘도 과거 현재 미래라는 고향의 연속선상에서 고향을 살아가고 있다. 결국 인생은 도상의 나그네다. 나그네에게는 언제나 돌아갈 고향이 있다. 멀리 추억 속에서 고향이 보인다.

2009-09-25

공동체 의식

김기포포항기계중앙교회 담임목사이솝 우화 중에 아주 친한 네 마리의 황소이야기가 있다. 그들은 어디를 가도 함께 갔으며 함께 풀을 뜯고 함께 누워 쉬면서 사이좋게 서로 가까이 지냈다. 그들은 어떤 위험이 닥쳐와도 두려워하지 않고 서로 힘을 합해 대처해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주변에 그들을 잡아먹으려는 배고픈 사자 한 마리가 있었다. 사자는 어느 누구라도 일대일 대결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한 번에 네 마리는 불가능했기에 꾀를 부리게 되었다. 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을 때, 그중에 약간 뒤처진 황소에게 살금살금 다가가 귀엣말로 다른 소들이 너의 흉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소에게도 똑같은 방법으로 접근하여 저들이 너를 흉보고 있다고 했다. 마침내 네 마리의 황소는 서로를 의심하게 되었고 그 의심은 더욱 깊어져서 불신의 벽은 높아져 갔다. 이들의 문제는 다른 세 마리가 똑같이 자기를 흉을 보고 있다는 착각 때문이었다. 마침내 그들 사이에 우정은 깨어져 서로를 믿지 못하여 각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결국 사자는 하나씩 네 마리의 황소를 다 잡아 배불리 먹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공동체의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쳐준다. 요즘 우리 사회의 가장 부족한 자질로 공동체 의식과 도덕성, 그리고 배려심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가정이 핵가족화가 되면서 자녀들이 귀하신 몸이 되었다. 그래서 자녀들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우리 사회가 성공지상주의와 물질이 만능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도덕성은 빛 좋은 개살구가 되었다. 결과지상주의가 과정을 무시하고 성공만 하면 된다는 사생아를 낳았다. 결국 나라고 하는 개인의식은 살아 있지만 우리라고 하는 공동체 의식은 매우 약하다. 얼마 전에 북한에서 황강 댐을 방류하는 바람에 임진강 강가에 텐트를 치고 야영하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것도 새벽에 방류하면서 고스란히 자다가 큰 변을 당한 것이다. 댐을 방류할 때는 적어도 우리 측에 통보를 했어야 했다. 그것이 인도주의 정신이다. 이번 사건은 북한의 생명경시현상이 빛은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결국 남을 배려하지 않을 때 소중한 생명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배운다. 자기 생명이 소중하면 남의 생명도 소중한 법이다. 우리 조상들은 가정에서 뜨거운 물을 마당이나 화단에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혹시 뜨거운 물이 미생물을 죽일까 하여 물을 식혀서 버리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공동체는 단순한 사람들의 집합은 아니다. 우리는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공동체라고 부르진 않는다. 공동체는 독립된 유기체로 보아야 하고, 독립된 목적과 행동력을 보여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동체는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앞서야 한다. 의학에서 웃음 요법이라는 치료법이 있다. 많이 웃으면 있던 병도 낫고, 생길 병도 예방한다고 한다. 웃음에서 흘러나오는 생기가 세포 하나하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일 것이다.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웃을 수 있어야 한다. 비웃음도 아니고 허탈한 웃음도 아니며 거짓 웃음도 아니다. 진정으로 즐거움에 깔깔깔 웃을 수 있어야 한다. 미술에는 점묘법이란 기법이 있다. 작은 점들을 수없이 찍어서 형상을 만들어 간다. 각각의 점들은 서로 다른 색이지만, 이들이 모여 하나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오케스트라도 수많은 악기들은 서로 다른 음색을 지니고 있지만, 이들이 모여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 내고, 듣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강바닥에는 수많은 조약돌이 있다.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조약돌은 서로에 상처 입히지 않으면서도, 저마다의 개성을 살리는 모습은 강물의 아름다움이 아닌가? 공동체의 힘은 좋은 관계에 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네 마리 황소이야기는 먼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다. 남, 북의 공동체 안에 숨어 있는 이기적인 사자를 몰아내는 일이야말로 공동체를 살리는 길이다. 아름다운 공동체는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이제 우리는 바뀌어야 한다. “나는! 존재 한다.”라는 명제에서 “우리는 존재 한다.”라는 명제로….

2009-09-18

일상은 기적의 연속인 것을

기적은 초자연적인 힘이다. 기적은 상식으로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다. 사람들은 신에 의하여 행해졌다고 믿어지는 기이하고 특별한 일을 기적이라고 부른다. 성경에는 기적의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말씀의 능력으로 창조했다. 모세는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다. 뿐만 아니라 38년 된 병자가 고침 받고, 물 위를 걷고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이야기는 언제 봐도 흥미진진하다. 기적은 종교적으로 신비한 경험이나 개인적으로 신령한 체험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적은 복잡하지 않다. 오히려 기적은 단순하다. 기적은 지극히 일상적이다. 아침에 출근했다가 아무 사고 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도 기적이다. 걷고, 보고, 앉고, 웃고, 먹는 것, 자는 것, 일하는 것, 모두가 기적이다. 평범한 일상이 기적이고 아직 숨이 멎지 않고 호흡할 수 있는 것도 기적이다. 이렇게 기적은 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데 있다. 인간은 매일 기적을 경험한다. 이것을 깨닫기까지 우리는 너무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마음의 눈을 열어보면 감사가 보인다. 감사는 기적을 여는 통로다. 마음의 귀를 기울여 보면 어제와 똑같은 하루가 이 모든 것이 오늘도 여전히 우리 안에 은총으로 다가온다. 순간 보이지 않던 기적이 들리지 않던 기적이 우리의 일상에서 감사하는 사람에게 파도처럼 고동친다. 우리는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우리 앞에 크고 작은 어려움을 본다. 그러나 절대자에게 우리의 몸을 맡기고 우리의 문제를 맡기면 슬픔도 두려움도 사라진다. 일상에서 기적을 만들어 내는 기계는 긍정과 감사와 사랑이다. 오늘 또 하루를 주신 것은 사랑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일을 긍정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나아가 어떤 일을 만나도 감사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기적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다. 오늘 살아 있다는 것, 호흡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평범하지 않는 기적의 순간이다. 안젤름 그륀의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중에서 `행복이란 항상 선물이며, 언제나 기적이다.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기적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기적은 단지 일어날 뿐이다. 그리고 기적은 항상 하늘에서 내려온다. 언제나 예기치 않은 순간 우리에게 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기적이 우리를 비켜가지 않도록 손을 뻗어 잡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조용히 눈을 감고 긍정과 감사와 사랑을 생각하면 수많은 기적들이 하늘에서 쏟아진다. 기적은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과 같다. 비는 시시때때로 하늘에서 내리지만, 그릇에 담지 않으면 모두 밖으로 흘러가 버리고 만다. 그릇을 준비해야 빗물을 받을 수 있고, 그것도 깨끗한 그릇이어야만 그에 담기는 빗물도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다. 오늘도 기적은 마른 가뭄에 단비처럼 내린다. 문제는 빗물을 담을 수 있는 마음의 그릇이 있어야 한다. 안토니오라는 수도사가 수도원에 들어가서 오랜 세월 수도했다. 이제는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수도원을 졸업한다고 생각하고 구두부터 수선하려고 수선공에게 갔다. 구두 수선을 하는 동안에 노인에게 물었다. “식구는 몇 명입니까?” “아내와 아이들 모두 10명입니다” “그러면 구두를 수선하여 열 식구가 굶지는 않습니까?” 구두 수선공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하였다.“저는 다만 사람들의 신발이 오랫동안 편안하고 해지지 않도록 수선할 뿐입니다. 이것에만 최선을 다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겠지요.” 이 수선공의 말을 들은 안토니오는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는 아직까지 수도가 덜 되었음을 알고 다시 수도원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렇다. 도를 닦거나 수도하는 것은 어떤 신비한 환상을 보는 것도 종교적으로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감사를 찾아내고 지극히 사소한 것에서 진리를 찾으며 그 진리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런 것 같다. 시간만 흐르면 수도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수도가 끝나야 끝나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물 위를 걷거나 허공을 걸으면 기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말 기적은 물이나 공기를 밟고 걷는 것이 아니라 땅 위를 걷는 일이다. 기도가 전부인 사람에게 일상은 기적이다.

2009-09-11

자는 것

사람들은 하루 평균 6~8시간을 잔다. 하루의 3분의 1을 자고 평생 3분의 1을 자는 셈이다. 동물들도 잠자는 시간이 있다. 대체적으로 말은 2.9시간, 노루는 3.09시간, 소는 4.0시간, 개는 10.7시간, 사자는 13.5시간, 박쥐 19.9시간, 돌고래는 10시간 정도 잔다고 한다. 과학자들은 머리가 클수록 전체 수면 시간과 상관없이 더 많은 렘수면을 취하는 것을 알아냈다. 또 잠자리가 밖으로 노출된 동물일수록 수면 시간이 적고 사회적인 동물일수록 덜 자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상생활이 너무 피곤하고 고단할 때 혹은 힘든 일에 지쳐 젖은 솜방망이처럼 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눈은 빨갛게 물들었을 때, 특히 먼 길을 걸어온 사람, 긴 여행에 지친 나그네들에게 단잠처럼 달콤한 게 또 있을까? 그래서 잠은 예술이다. 이처럼 잠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삶의 큰 몫을 차지한다. 잠은 누구나 다하는 작업이다. 잠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열심히 일한 사람의 단잠, 일이 잘 안되어 마음이 무거워 잠을 못 이루는 불면증, 그리고 게으른 사람의 늦잠도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잠을 죽음의 표상 혹은 죄에 탐닉한 상태를 비유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잠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유순한 마음의 시간을 의미하기도 하고 의미 있는 꿈을 가리키기도 한다. 꿈은 일상에 억눌려 있는 인간의 내면을 호소함으로써 하나님의 계시와 뜻을 알아차리기도 한다. 인생에게는 낮과 밤의 주기가 있다. 낮에는 생산과 활동의 시간이다. 낮에는 부지런히 움직이므로 인간존재의미를 찾는다. 즉 일을 통해서 자신의 욕구를 발산한다. 그러나 밤은 활동을 멈추는 시간이다. 밤은 휴식을 갖게 하거나 가족과의 만남과 대화의 자리가 되기도 한다. 만일 밤이 없고 낮만 계속 된다면 많은 사람들의 건강은 심각하게 해칠 것이다. 인간의 창조목적도 밤에는 쉬거나 잠을 자게 되어 있다. 아무리 건강이 좋고 강한 체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밤에는 잠을 자야 한다. 밤은 세상이 모두 잠든 듯 고요해진다. 모든 소리가 묻혀버리는 그런 고요의 밤이 오면 사람들은 자기만 느낄 수 있는 고요한 생각에 젖어든다. 고요한 밤은 사색인의 친구다. 밤은 그렇게 사색의 뜰을 만들어준다. 사람은 분위기를 즐길 줄 아는 차원 높은 동물이다. 그런 밤의 고요는 무슨 일에 진지하게 몰두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준다. 공부하는 학생에게는 정신집중을, 시를 쓰는 시인에게는 상상력과 영감을, 사랑을 속삭이는 청춘 남녀에게는 은밀한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그런 아름다운 밤은 낮과 같이 매일 온다. 낮은 생산을 위해 있고 밤은 휴식을 위해 있다. 밤이 아니면 이렇게 평안한 잠을 이룰 수 있을까? 밤이 아니면 어떻게 깊은 생각에 잠길 수 있을까? 밤은 하루의 매듭을 만들어준다. 밤이 있기에 내일에 대한 새로움과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쓰린 가슴 가진 자, 뜨거운 가슴으로 창작에 몰두하는 자, 무슨 일엔가 미쳐버린 사람들이 모두만의 고요를 친구로 맞이할 수 있다. 그러나 불면증은 정말 악몽이다. 지독하게 피곤을 느끼면서도 잠이 안 오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은 없다. 그래서 잠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신체조직 속에 쉴 수 있는 잠을 심어 두었다. 그래서 잠은 은혜다. 축복이다. 우리는 잠을 청하지 못하게 될 때까지는 잠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잠을 자지 못하고 비로소 잠을 잃어버린 후에야 잠의 소중함을 배운다. 우리들이 매일 자는 잠은 매우 신비스러운 것이다. 인격과 자유를 갖추고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인간이 잠이 들면 자기를 풀어 모든 육신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잠이라는 또 다른 무의식의 세계에 내맡긴다. 잠은 인간 세계가 근본적으로 올바르고 안전하고 선함을 신뢰하는 행위다. 인간 본연의 행위다. 자기 몸과 영을 자기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는 현실을 수락하는 행위다. 그것은 무의식의 세계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잠에 대한 믿음과 신뢰다. 깊은 잠에 빠져도 반드시 아침이 온다는 사실, 반드시 깰 수 있다는 진실을 믿기에 우리는 평온하고 안락한 잠 속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흔히 죽음을 가리켜 영면이라고 한다. 영원히 잠들다는 뜻이다. 그렇다. 인간이 영면하기 위해서는 낮 동안에 열심히 일해야 한다. 잠은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 누리는 특권이다. 인생에서 가장 좋은 일은 자유이다. 잠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자유이다. 성경은 말한다.“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편 127편 2절)

2009-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