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석준 수필가육신의 죽음은 생(生)의 끝인가. 또 다른 생의 연속인가? 저 세상-천당과 지옥-은 정말 있는 것인가? 윤회한다는 것이 사실인가?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 이 문제는 정말 난제요, 수수께끼요, 아포리아가 아닐 수 없다.이러한 문제는 결국 형이상학적인 문제로서, 과거에는 철학과 종교에서 이를 다뤘으나, 18세기 독일의 철학자 칸트가 사후의 문제는 논증할 수 없는 것이라 해 철학에서 제외시켜 버림으로써 오늘날에는 종교의 영역에서만 다루고 있다.세계 4대 성인 중 공자를 제외한 다른 성인들은 한결같이 내세를 말하고 있는데, 문제는 내세에 대한 견해가 같지 않다는 것이다. 공자는 살아 있을 때, 십대 제자의 한 사람인 자로가 “우리가 살다가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라고 물으니, 공자는 “금생의 일도 다 모르는 데, 내생의 일을 어찌 알겠느냐”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것을 통해 볼 때 유교는 매우 현실적이다. 유교에는 내세관이 없기 때문에 유교를 종교라고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지금까지 늘 논란이 돼 왔다.소크라테스는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갈 수 있다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죽은 뒤에 심판이나 천당이나 지옥도 없고, 오직 자유만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기독교에서는 인간을 신의 피조물로 보았다.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까지도 신이 만들었다고 보았기 때문에, 사람이 죽어서 하늘나라에 갈 때에도 남자는 남자의 육체, 여자는 여자의 육체, 그리고 유아로서 죽은 사람은 성인의 육체를 가지고 승천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이 죽으면 천당에 가기도 하고, 지옥에 떨어지기도 하지만, 이때에 그렇게 가는 것은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도 따라서 간다는 것이다.그러면 어떻게 해야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천당에 갈 수 있는가? 그 선결조건은 철저한 믿음, 무조건적인 믿음이다.그런데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입장이 다르고, 개신교 내에서도 사뭇 다르다. 가톨릭에서는 전통적으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함께 선행을 실천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쳐 왔다. 그런데 루터는 “인간은 선행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신앙)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했고, 칼뱅은 “인간의 구제 여부는 전지전능한 신의 자의에 의해 미리 예정되어 있다”는 예정설(豫定說)을 내세웠다. 16세기 초 교황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반발을 계기로 벌어진 이 논쟁은 이후 가톨릭과 개신교가 갈라서며, 종교 전쟁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불교에서는 삶과 죽음을 같은 것도 아니며, 또한 다른 것도 아니며(不一不異), 삶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있으므로, 삶과 죽음은 하나(生死一如)라고 보고 있다.다시 말해서 우리의 마음과 육신은 같은 것은 아니지만 또한 다른 것도 아니며, 마음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 육신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육신에는 생노병사(生病死)가 있기 때문에, 그 육신으로써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을 경우에 마음은 그 육신을 떠나는데, 이것을 죽음이라고 보는 것이다.그러나 이렇게 떠나가는 마음은 육체로부터 해방돼 완전한 자유를 되찾아 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육신이 생전에 지은 업의 전부를 고스란히 지닌 채 자신의 업에 맞는 새로운 몸을 받는다고 한다. 이것이 이른바 불교의 윤회설이다.
2013-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