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국가 사이에 시푸른 바다가 있다넘실대는 물결을 태양이 바라보고 있다물길을 가르며 정어리 떼가 태평양으로 가고 있다정어리 떼를 천천히 뜯어먹으려상어가 이빨을 빛내고 있다조국은 숱한 장벽으로 나뉘어졌고유배지는 통째로 절벽인데버림받음과 버림받음 사이에 바다가 있다바다는 폭발점을 품은 채적도 쪽으로 흐르고 있다국가가 태어나기 이전에이념보다 더 깊은 곳에이름을 가지지 않은 심해가 있다‘경계-장벽’은 삶을 분리시키고 고립시키겠지만, “통째로 절벽”인 “유배지”로 버림받은 사람들 사이에는 바다가 존재한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 있는 “시푸른 바다”. 정어리 떼와 그 정어리를 뜯어먹으려는 상어가 함께 돌아다니고 있는 그 바다는 “적도 쪽으로”, 즉 “폭발점”인 0도를 향해 흐른다. 그 바다 속 깊은 곳에는 국가의 장벽을 폭파시키고 유배지를 범람하게 할 수 있는 어떤 힘이 잠재해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05-11
등을 돌린 사람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준 벽지는등을 기대고 상처를 어루만지는 흔한 아픔들을조용히 보았을 터이다들이닥치는 도배장이들처럼이별은 예상보다 성큼 온다한껏 누추한 표정으로잠시라도 바라보아주기를 바라는 벽지는이내 덮인다상처가 아물듯벽지의 한 생이 묻힌다.(부분)도배장이인 시인의 눈에 저 벽지가 시적인 의미를 띠는 것은, 그 벽지 자신이 “등을 돌린 사람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주면서 숱한 삶이 겪어야 했던 고통의 흔적을 자신의 몸에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 벽지에 시대의 흐름에 파묻혀 사라져야 하는 소외된 삶이 어른거리고 있음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포착한다. 하여, 이 고통의 흔적 위에 새 벽지를 도배하여 “벽지의 한 생”을 묻음으로써 상처를 아물게 한다. 문학평론가
2022-05-10
우리가 어디론가 스며드는 일은조금은 비굴하게 흘러드는 일이고밤 불빛처럼 적요하게단단한 씨 하나로 뒤척이며 그럴수록 응고되는 것말없이 흘러온 길마다외투를 벗듯 쉽게 허물을 벗었나, 지금쯤똬리는 空을 품은 듯 틀었겠나, 겨울 길늦은 밤 희부연 차창처럼더듬이 하나 없이 견뎌온 길들남은 이파리 하나마저 털고자 호흡처럼 수천 번을긴 혓바닥 내민 채로 굳었지만그 바람소리를 깨우는 겨울나무 가지여(부분)생존의 압박으로 굴욕을 느끼며 살아가야 하는 ‘노동자들-우리’의 삶. 위의 시에 따르면, 그 ‘우리’는 “어디론가 스며”들어야 하기에 세상 속으로 “조금은 비굴하게 흘러”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밤 불빛처럼 적요”하나마 “단단한 씨 하나”를 가지고 흘러들었기에, 비록 세상 속에서 뒤척이기는 하지만 세상 속에 용해되지는 않는다. 도리어 어떤 ‘멍울진 옹이’처럼 응고된 무엇-‘허물’-을 흘러왔던 길마다 남긴다. 문학평론가
2022-05-09
쓸어 담을 것과 남겨야 할 것의 구분도 잊은 채모든 것을 쓰레기차 톱니바퀴가 집어삼킨다지나온 바퀴자국을 쓸어 담기도 모자란 시간,떼어먹은 임금 돌려달라고 거리서명을 받으며스쳐 가는 바람같은 무심한 희망일지라도너무나 인간적으로 잡아보는 숨결들우리도 사람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어찌 이보다 더 아름다운 말이 있을까(….)공단이 주는 옐로카드를 면하기 위해가장 더러운 몸이 되어야 할 때, 지금 들에 핀땀꽃은 더 이상 아침길 위에서발에 모터를 달고 달리지 않는다(부분)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쓰레기차 톱니바퀴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세태를 상징한다. 우리가 살아온 고유한 시간들이 톱니바퀴에 의해 산산조각 나버리는 한국 사회. 하나 시인은 인성을 파괴하는 이 사회 체제에서도 인간적인 것이 살아 있음을 해고 노동자에서 찾아낸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그 노동자의 말은 “무심한 희망일지라도” 인간적인 ‘숨결’의 표현이며, 이 시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05-08
어깨 옆에 어깨 옆에 어깨 옆에 어깨를 걸치고 빈틈없이 깍지낀풀들의 머리에 납가루 폭탄이몽땅 구멍을 냈다납가루는 풀의 심장으로스물스물 기어들어가 석고처럼 굳은납가루 심장을 만들어냈다얼굴이 납빛으로 파리해진 풀잎들순식간에 살이 다 녹아내려헐거워진 몸으로 눈을 감는다그날땅에 있는 풀밭은 모오두우구멍이 뚫려 눈감은 풀의 머리가땅 밑으로 쓰러졌다땅은 벌집 같은 구멍투성이가 되었다.(부분)죽음의 이미지가 주조로 되어 있는 위의 시는 묵시적인 암울함으로 덮여 있다고까지 할 수 있겠다. 현대 물질문명의 생태 살육행위는 전쟁에서의 살육행위에 비유되는데, ‘납가루 폭탄’이 어떻게 풀들을 죽이는가가 섬뜩하게 그려진다. 풀들을 죽은 육체로 점점 변화시키고 있는 납. 풀들이 구멍이 뚫려 쓰러지는 모습은 참혹하다. 이러한 상상적 묘사는 환경 파괴의 가공할 잔인성을 더 리얼하게 드러낸다. 문학평론가
2022-05-05
저 홀로 직선으로 허공을 오르지 못하자등나무는 그 푸른 힘을 밑으로 내려 퍼뜨린다.저 홀로 땅 속에 곡선으로 휘어 뻗은 뿌리는팔방으로 이리저리 퍼져나가다가불쑥불쑥 밭고랑에 새 가지를 돋아올린다.새 가지는 새순 내어 사방팔방을 더듬어보다가휘감을 나무가 없으면 구불구불 엎드린다.(부분)하늘로 오르려 했던 사람이 결국 오르지 못했을 때 얻게 되는 이미지가 이 휘어지고 엎드리는 나무 아닐까. 더이상 하늘로 오르지 못하면 반대로 삶의 힘을 밑으로 내려 지상에 퍼뜨림으로써 삶의 비밀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테다. 이 휘어진 등나무는 장년이 아니면 생각할 수 없는 이미지겠지만 노쇠의 표현은 아니다. 왜냐하면 저 낮은 곳인 ‘밭고랑’에 나무는 “새 가지를 돋아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2022-05-03
우리 집안 남자들은 난생설화 속에서 태어나기 때문에배꼽이 없다그러니 탯줄 없는 남자들을 무슨 수로 잡아매나밤하늘엔 연줄 끊어진 연들처럼 별들이 떠돌고우리집 나그네,라는 우리 친척 여자들의 말 속에는모계사회의 전통가옥과 거미줄과 삐걱거리는 툇마루뿐(중략)배꼽이 없는,그래서 세상에 아무 인연도 까닭도 없이엄마는 부엌에 쭈그리고 앉아 피똥 싸듯 나를 낳았다어서어서 자라서 훨훨 날아가라고 서둘러날개옷 같은 하얀 배냇옷 한 벌을 지어놓았다서른일곱에 정착도 못하고 나는 지금도 어딜 싸돌아다닌다“우리 집안 남자들은” 난생이어서 탯줄이 없다. 그래서 이들은 싸돌아다니며 사는 운명을 갖는다. ‘엄마’가 “피똥 싸듯” 낳은 ‘나’는 운명적으로 “연줄 끊어진 연들처럼” 떠돌아야 한다. “세상에 아무 인연도 까닭도 없이” 태어난 ‘나’도 새처럼 날아다녀야 하는 운명, ‘배냇옷’ 자체가 날개와 같았다고. 이 새는 비상(飛翔)과 해방의 이미지와는 무관하며, 정착지 없이 떠돌아다녀야 하는 남자들의 운명을 상징한다. 문학평론가
2022-05-02
조붓한 산길마다바람이 휘돌아오면기진한 플라타너스 손들이 땅에 나뒹군다햇살을 담아 한철 그늘을 짓던푸른 손들찬바람에 물기가 말라버린갈색 손들이 버석버석 소리를 지른다바람을 다독이며햇살을 담아내던 중노동으로나무를 놓친 손등이 거칠하다시인은 저 플라타너스 낙엽에서 노동하는 삶의 운명을 본다. 흥미로운 것은 ‘이파리’에서 삶의 핵심을 포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파리는 나무의 끝에서 자라나는, 삶의 중심에서 벗어난 주변부의 존재처럼 여겨진다. 인간의 육체에 비기자면, 머리도 아니고 심장도 아닌 손에 해당하는 존재. 그러나 일하기 위해 쓰이는 손, 나무를 먹여 살리다가 시들어버리는 노동하는 손이야말로 시인에게는 삶의 진실을 드러낸다. 문학평론가
2022-05-01
염소는 심심한 족속,수염을 기르고 있다.풀을 뜯던 염소가 이따금 공중을 올려다보는 건구름을 씹는 일구름을 씹으며 눈을 감는 건눈을 감고 실없이 웃는 건수염을 다듬는 일, 구름을 달고 있는저 근엄한 턱에서검은 똥이 나온다.수염은 독선의 정체, 적당한 그것이스스로를 길들인다. 그러므로혼자 있는 염소는 묶지 않아도 된다.수염 때문에 달아나지 못한다.저 심심한 족속인 ‘염소’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식인’들 아닐까? 염소가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수염에 “구름을 달고” 그 “구름을 씹”고 있는 염소는 시인에게 풍자의 대상인 것은 분명하다. 필자는 ‘구름’을 점잖게 뜯으면서 근엄함을 뽐내는 염소에서, 지식을 내세우고 권위를 주장하지만 결국 자기의 권위의 근원인 ‘수염’ 때문에 발이 묶여 권력에 순응하는 기성 지식인들을 생각했다. 문학평론가
2022-04-28
뭉쳐서 회전하는저 새들은 언제 하나의 깃털을 떨어뜨리는가.벌레들이 파먹은 뼈들공중에서 움직이지 않는 바퀴들태양을 좀먹는창문들이태양을 일제히 인쇄하는 아침지문 없는사람들이한 방향으로 손을 섞는 아침흩어져서 대열을 이루는저 뿌리들은 언제 나무를 쫓아내는가.이 시는 ‘아직’의 시간에, 하지만 곧 닥칠 전조의 시간에 놓여 있다. 무엇인가 곧 일어날 것만 같은 시간이 바로 이 시가 놓여 있는 ‘아직’의 아침이다. 그런데 그 일어날 사건은 불길한 무엇, 즉 추락이며 추방이다. “지문 없는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추락할, 그리고 땅으로부터 추방될 시간 앞에 놓여 있다. 파멸의 시간으로 수렴되어 집적되는 이미지들의 연쇄는 불안한 예감과 전율로 진동한다. 이 시의 매력이다. 문학평론가
2022-04-27
계고장이 날아들고집 나갔던 자식들이 빈손으로 돌아와어미애비를 파냈다집이 무너지자生死苦樂이 뿌리박았던 자리가폐허로 변했다굴착기가쓰러진 기둥에 飯哈을 떠 넣고 있다파골하고 있다어둠 속에서유골함에 날아드는 진눈깨비가 분분하다빈집이 무너진 자리,어느 별의 지붕이자세상의 가장 밑바닥인 그 자리에서몸을 잃은 사람들이모래알 같은 생쌀을 씹는다.알다시피 철거는 그곳에 뿌리박고 살고 있었던 사람들을 알량한 보상금을 쥐어주고는 “生死苦樂이 뿌리박았던” 그 땅에서 영원히 추방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살고자 하는 힘과 죽임의 권력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지만, 거의 언제나 돈과 무력을 갖춘 권력이 이긴다. 시인이 세상에 대해 갖는 임무 중 하나는, 바로 권력이 짜놓은 매트릭스 이면에 존재하는 피의 현실과 그 진실을 시로써 드러내는 일일지 모른다. 문학평론가
2022-04-26
여름과 가을의 노래 사이를 망설이며 날다가끝내 입을 다물고 날아가 버린다바람은 철망에 매달려 간신히 꽃을 피운 늦장미와또각또각 걷는 여자의 치마 사이에서 길을 잃고햇살은 나팔꽃 줄기에 머물러 씨앗을 먼저 터뜨릴까마타리의 몸 끝에서 꽃의 눈자락을 틔울까 망설인다망설임, 비는 여름비와 가을비 사이를 망설이며 내린다여름에서 가을로 건너갈 때열기와 서늘함이 서로를 슬쩍슬쩍 건드리며닿았다 풀려갈 때나는 망설인다마음속의 마음을 전할까, 감출까무엇인가 망설인다는 것은 사랑에 지금 막 빠졌다는 징조다. 사랑에 빠졌기에 ‘나’는 “마음속의 마음을 전할까, 감출까” 망설인다. 사랑에 빠지기 시작한 마음은 흔들리고 설렌다. 사랑이 시작되는 시간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때, 그때 사랑에 빠지기 시작한 것들은 망설임 속에서 존재 전화의 경계선에 놓인다. 가령 비는 여전히 여름비로 내릴 것인지 아니면 가을비로 전화할 것인지 망설이며 내리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04-25
텔레비전 화면이 풀죽처럼 흘러내린다술 취한 밥상이 아버지를 뒤엎고값싼 본드를 마신 아들이날개를 자르고 내려와 공터에서 헐떡인다더 이상 철거되는 걸 기다릴 순 없다다짐을 덧칠한 벽엔 금이 가고기둥은 토박이 정신을 버린다연탄가스가 독 오른 살모사처럼 기어오를 때상속권 없는 저녁별이 떠오른다불 꺼진 골목과 낙오자의 방21세기가 급하게 채널을 돌린다(부분)위의 시가 보여주는 희망 없는 철거지에서의 삶의 모습이 21세기적 삶의 현 주소 아니겠는가. 파괴된 철거 지역에서, 상속권이 없어 갈 곳 없이 여전히 삶을 연명해야 하는 사람들, 그 ‘낙오자의 방’에는 “독 오른 살모사처럼 기어오”르는 연탄가스가 그들의 생명을 노리고 있다. 지배층으로부터 추방된 이들의 삶은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하고 온갖 위험과 죽음에 노출되어 있는 것, 이것이 시인의 현실 진단이다. 문학평론가
2022-04-24
내 생애의 수많은 저녁 중에가장 포근한 저녁은황혼인지 샐녘인지 분간 못하게어슴푸레한 미명이었다어서 일어나 학교 가거라부시시 깨어 듣는 어른들 말씀이한바탕 웃음 끝에거짓말이 되는 순간이었다낮잠 자는 나를 놀리자고누군가 일부러 지어낸 말인 줄을알아차린 그 다음부자가 된 듯한 동안이었다우리가 부자였던 ‘순간’-‘동안’-이 있었던가. 있었다. 어른들의 놀림에 자신도 배시시 수줍게 웃던 유년 시절의 순간이 바로 그때다. 그 유년의 시간을 지금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저 흐릿하고 어두운 기억 창고 이외엔 없다. 유년을 기억하는 몽상-미명-의 시간은 시인에게 “가장 포근한 저녁”이다. 하나 유년의 순간은 다시 현실화 될 수 없기에, 그 아름답고 풍요로운 몽상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변화되리라. 문학평론가
2022-04-21
선운사 동백, 그 상처 붉게 붉게 절며 당도하는 곳가마미 바닷가에 한 사내 서 있었네.가마미 바닷가에 폭설이 있었네.폭설이 있었네. 그렇듯 죄 말하고 나서저 긴 수평선, 긴 수평선에 걸쳐 오래 자고 있네.폭설과 잠 사이, 발언과 침묵 사이의 가늠하기 힘든 시공간 속에 시가 놓여 있다. 의미와 무의미, 시간(역사)과 무시간 사이에서 이 시는 진동한다. ‘한 사내’, ‘폭설’, ‘가마미 바닷가’와 그 ‘수평선’은 실제 대상이 아니라 시의 시공간 속에, 즉 행의 발언과 행간의 침묵 사이에 존재한다. 하여, 그것들은 무로부터 드러나는 존재자들이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 무에서 솟아나는 존재자들을 통해 시의 경이를 역설적으로 경험한다. 문학평론가
2022-04-20
길이 모두 접혀 있는 건너편 언덕 밑에는울타리가 있는 집을 두 채 그려 넣는다조금 더 안쪽에는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와그늘을 펼쳐 그려 넣는다(….)나는 천천히 그 사이로 난 길을 걸어지금의 느티나무의 그늘을 한쪽 어깨에 걸고 있다산을 너무 멀리 그려 두었나?산으로 가는 길이 곳곳에 끊겨 있다(부분)상상으로 그려진 시의 세계인만큼, 시인 자신이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할 법이 없다. “시인은 천천히 그 사이로 난 길을” 걷는다. 이때 시 쓰기의 아이러니가 발견되는데, 내가 구축한 세계 속에 내 자신이 들어가 걸어갔을 때, 비로소 그 길들이 곳곳에 끊겨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시인인 내가 만든 상상 세계가 ‘나’와는 무관하여 알지 못할 무엇으로, 자족적 세계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2-04-19
물푸레나무 앞으로 집을 짓는다바람이 잘 통하고자줏빛 그늘이 진다귀가 없는 새가 와서여기저기 기웃거린다보고 싶은 사람이 온다기에막 피어난부용꽃 꽃잎으로 또 한 채집을 짓는다무엇인가 귓전을 매암돌다멀리멀리 너울져간다종소리 모양의장맛비가 저만치 오고 있다.시인은 상상의 힘으로 집-시-을 짓는다. ‘부용꽃 꽃잎으로’ 만들 수도 있는 비현실적인 집. 이 집은 상상의 시공간에 존재하기에 소리 없는 세계다. 그래서 귀 없는 새가 와서 자신의 집으로 삼을까 기웃거리는 집이다. 하지만 이 집의 바깥 세계에서 나는 장맛비 소리가 이 상상 세계 안으로 틈입하면서 이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이 소리와 소리 없는 상상 공간이 교차될 때 위의 시의 시적 순간이 마련된다. 문학평론가
2022-04-18
지붕을 타고서 휘돌아온 바람이물고기의 몸 흔들 때마다얇아질 대로 얇아진 몸추녀 끝에서 펄럭이던, 하지만 방향도 없이찰랑 차르르 바람 속을 헤엄쳐 나가는물고기의 몸 이미 있어도 없는소리뿐인 몸이었네계단 끝 텅 빈 마루방 하나,이른 새벽 바람이 씻어내고 있었네(부분)목어가 찰랑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시인은 깨달음을 얻는다. 우리 삶은 흔들리며 헤엄치는 소리만으로 존재한다는 깨달음. 그 소리는 보이지 않는 바람의 존재 역시 알려줄 터, 바람에 깎이고 휘둘려온 목어-삶-의 몸은 “얇아질 대로 얇아”져 있다. 시인은 저 소리가 가져온 깨달음을 통해 소멸해가는 시간 속에서 소리로만 남게 되는 몸을 인식하고, 소멸로부터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이 우리 삶임을 발견한다. 문학평론가
2022-04-17
마당가 돌무더기에 흰 끄나풀 같은 것이 어른거린다뱀허물이다 머리를 땅에 박고,이리로 저리로 요렇게 조렇게 들어가셨소내가 그 증거요!온 허물로 가리킨다이건 단순한 허물이 아니라뱀에 의한,뱀이 썼던 허물이 분명하다한 마디로, 이 안에 뱀이 있었다는 것저 안 어디쯤진짜가 있다는 것울고불고 마지막까지뒤집어쓰고 살아온 시를 놓아주고생것이 사라져간 쪽을 향해입 꽉 다물었다시는 뱀이 쓴 허물이다. 진짜 생것은 “저 안 어디쯤” 사라져갔다. 시는 껍데기일 뿐이다. 하지만 시는 껍데기긴 껍데기이되, ‘생것’의 흔적으로 남아 있으면서 생것의 존재를 ‘증거’한다. 생것은 언어와 의미로 번역될 수 없는 육체적 삶 그 자체 아닐까. 아무튼 발화와 침묵 사이에 있는 저 허물 같은 시는, 그 ‘사이’를 통하여, 생것이 실재했음을 확인시켜주면서 우리 앞에 그것이 도래하리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문학평론가
2022-04-14
소풍 가서 보여줄게그냥 건들거려도 좋아네가 좋아상쾌하지미친 듯이 창문들이 열려 있는 건물이야계단이 공중에서 끊어지지건물이 웃지네가 좋아포르르 새똥이 자주 떨어지지자주 남자애들이 싸우러 오지불을 피운 자국이 있지2층이 없지자의식이 없지홀에 우리는 보자기를 깔고음식 냄새를 풍길 거야소풍 가서 보여줄게건물이 웃었어단순해 보이는 이 시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화자의 주체성이 완성된 건물과 같이 건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녀는 자의식을 건축할 의지가 없다. 무너진 건물에서 ‘너’를 좋아할 뿐이다. 그래서 소녀는 계단 끊긴 건물처럼 흉물스럽다. 하지만 시에서는 이 ‘미완성’ 자체가 긍정되면서, 불량하다고 해야 할지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 소녀의 단순한 진술이 낯선 시적 문법으로 전화된다. 문학평론가
2022-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