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밑에 매달린 고드름들 사이로,흐린 하늘에 목매달아 죽은 가오리연을 본다하늘을 휘젓는 연의 시체는 부드럽다까만 바람, 겨울은 낙타를 타고 걷는다(….)구상나무는 아무것도 모르고 순하게 죽어 있다뿌리에서 또 다른 슬픔이 자라는 줄도 모르고죽은 몸과 자라나는 슬픔 사이의 여백이 차갑다애인은 겨울을 건너, 봄으로 갔다내 발가락 사이사이 틈꼬아진 다리 사이멀리 돌아온 입술과 입술의 포개짐에도서글픈 여백이 맺히고,갈변한 사과를 반으로 쪼개면속살은 여전히, 잊혀진 듯 희다.겨울은 사막과 같은 시간을 건너가는 계절이다. 사막의 밤바람처럼 겨울의 바람도 까맣다. 그래서인지 겨울은 까만 죽음의 계절이다. 애인은 봄으로 떠나가고, 하여 “고드름 사이로” 가오리연이 목매달아 죽는 계절. 시인은 이 죽은 세계에 슬픔을 자라게 하여 “죽은 몸”과 “슬픔 사이”에 ‘여백’을 만든다. ‘갈변한 사과’와 같은 세계를 쪼개 차가운 여백, 그 흰 속살을 드러내기. 이것이 이 시인의 시 쓰기일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04-12
나는 나의 생을,아름다운 하루하루를두루마리 휴지처럼 풀어 쓰고 버린다우주는 그걸 다시 리필해서 보내는데그래서 해마다 봄은 새봄이고늘 새것 같은 사랑을 하고죽음마저 아직 첫물이니나는 나의 생을 부지런히 풀어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생’은 하루를 “두루마리 휴지처럼” 버리고 또 다른 하루를 다시 시작하는 반복의 연속이다. 그래서 생은 쓸쓸하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반복하는 것이 ‘생’인 것이다. 그것은 하루를 쓰고 버려도 우주가 항상 새로운 ‘생’을 ‘리필’해주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렇다면 ‘생’은 우주의 선물이며 축복이다. ‘생’의 허무는 극적으로 역전되어, ‘생’은 본질적으로 기쁨을 주는 것으로서 긍정된다. 문학평론가
2022-04-11
역사는 처음부터 없었다고다 낡은 환상만 내다놓은 나무 의자들공허가 주인공처럼 앉아 있다.그 발치엔 먼 데서 온 파도의 시린 발자국들햇살 아래 쏟아낸 낱말들이실연처럼 쌓이고우우우 모래바람 우는 소리,먼저 도착한 누군가 휩쓸고 갔나 보다.바닷새들이 그들만의 기호로모래알마다에 발자국들 암호처럼 숨겨놓고 난다.낯선 기호의 문장들이 일파만파 책장처럼파도 소리로 펄럭이면일몰이 연신 그 기호를 시뻘겋게 염색한다.나무 의자들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정동진역 풍경은 백지처럼 ‘공허’하다. 너무 공허해서, 정동진역의 존재 자체가 원래 없었던 환영 같아 보일 정도다. 하지만 그 풍경은 파도와 바닷새들이 찍어놓은 발자국들로 인해 해독되어야 할 책으로 변전한다. 발자국들은 그 누군가 존재했음을 암시하는 흔적, ‘낯선 기호’다. ‘일몰’에 “시뻘겋게 염색”당하는 그 기호는 시인에게 어떤 그리움과 슬픔을 뜨겁게 불러일으킨다. 문학평론가
2022-04-10
허공의 담즙이 흘러내릴 때꽃은 다 쓴 생리대 하나씩 머리끝에 매단다숨어서 냄새를 피우려고결국 시체가 되려고꽃은 핀다허공에서입술을 오므리고 있는 자줏빛 꽃잎들사람들은 낯선 꽃이 피었다고슬슬 피하기 시작한다허공에 뱀 대가리 활짝 핀다말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 꽃송이아름다운 독종이다시 쓰기를 삶의 소화 과정이라면, 시 쓰기 속엔 담즙이 흐르고 있을 것인데, 이 시에서 담즙은 특이하게도 생리혈로 치환된다. 수정하지 못한 시간은 썩은 채로 쌓여 있다가 담즙에 의해 소화되면서 생리혈이 되어 배출된다. 그러자 자줏빛 맨드라미 꽃잎이 피에 젖어 있는 “다 쓴 생리대 하나씩 머리끝에 매”달며 피기 시작한다. 시의 탄생이다. 이 자줏빛이 지금은 고인이 된 박서영 시의 특색이라고 하겠다. 문학평론가
2022-04-07
일몰 속에서 나는 우리가 꾸었던 꿈도이루어지지 않은 꿈의 파편들도다 그것대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꿈은 언제나 꿈의 크기보다 아름답게손에 쥐어졌다 사라지는 것이다그리고 안타까움이 남아 있는 날들을부축해 끌고 가는 것이다내일은 다시 내일의 신전이 지어지리라시대의 객체로 밀려나 폐허의 변두리를걷고 있을 덥수룩한 수염의 그를 생각했다익명의 쓸쓸한 편력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부분)“사암으로 쌓은 성벽의 붉은 돌”일 ‘꿈의 파편들’은 일몰을 통해 그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꿈을 무너뜨린 그 시간의 힘이 역설적으로 꿈의 폐허 그것대로 아름답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이다.잡았으나 사라져야 하기 때문에, 쓸쓸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아름다움. 이는 허무주의적인 아름다움은 아니다. 삶은 소멸할 운명이지만 그렇기에 삶은 더욱 살 만한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는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2022-04-06
교회첨탑 위에서 여러 개의 조명등처럼새들이 나란히 발들을 모으고 앉아있네밝은 기억들은이리저리 아래를 비추고 있다가서치라이트 강열한 틈 사이로 빠져 나오네도로 쪽 아래 한 쪽 모퉁이에 세워놓은 낡은 리어커군고구마 구어 내는 드럼통에서 김들과 함께 섞여 나오는 올드 팝송들낡은 기억들은 앞서간 것들을 뒤 따라갈 수 없기에생각은 저 혼자 비에 젖다가포물선 꼬리를 물고 뒤 따라가다가순간 생각의 끈 마디를 놓치네그래 오늘은 너에게 주는 식은 추억 한 줄을 두 손으로 꼬옥 잡고 가네남은 온기가 사라지기 전에‘밝은 기억들’이란 아지랑이처럼 재생을 여는 추억들이다. 그 추억들은 우리의 삶을 ‘조명등’처럼 비추고 우리의 정신을 새처럼 가볍게 비상하도록 만들어준다. 하지만 이렇듯 우리를 고양시키는 그 기억들은 어느새 저 하늘 위로 날아가 사라져버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 기억들은 “이리저리 아래를 비추”어 어떤 형상을 붙잡으며 자신에 육체성을 부여하고자 한다. 이 시인에게 ‘귀향’이란 이런 것이다.문학평론가
2022-04-05
빛무리와 엉키고 설켜짐작조차 할 수 없는 체위로 불어오는 바람만이수억만 년 길러온 머리카락을 지상에 드리우며앙상한 늑골의 흔적을 남길 뿐이었다길 없는 길은 나를 어디에도 내려놓지 않았다계속 나아가라는 뜻인지 그만 멈추라는 뜻인지알아들을 수 없는 전언이 세상에 가득했고손톱 밑에 가득 박힌 시간의 알갱이를 세며 나는날개를 떼어 놓고 가버린 새들의 근황이 문득 궁금해졌다 (부분)인간적인 것이 감히 틈입할 수 없는 절대적 공간. 이곳에 주름 잡힌 시간의 겹은 엄청나서 시인의 손톱 밑에까지 ‘시간의 알갱이’들이 가득 박혀 들어갈 정도다. 바람으로 상징화된 비인간적 시간의 힘은 모든 것을 소멸시켜 먼지로 만들어버린다. 새들조차 어디로 날아가야 할지 몰라 “날개를 떼어놓고”는 없어져버렸다. 이렇듯 광활하고 장대한 환몽에 압도당한 시인은 ‘몽유병자’처럼 그 ‘길 없는 길’을 걷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2-04-04
해도 빨리 자리를 거둔 異國의 낯선 교정흐린 저녁은 비가 되고, 강의 실 창문을 열면 한 장 검정 도화지처럼내 가슴을 닮아 어두워오는데학교가 먹은 나이와 같다는 교정 한 가운데 은행나무바람에 불러 소리칩니다, 놀러 나간 어린 나무들에게이제 깜깜해졌다 집으로 들어오너라바깥 풍경은 점점 도화지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요, 나는어린 나무가 되어 달려나갑니다, 가는 동안머리에 어깨에 조금은 비를 맞지만요.이국의 풍경이 낯설어지면서 시인의 마음도 어두워진다. 그 마음의 어둠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학창시절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면서, 시인은 그리움을 느낀다. 그리움의 부름에 답한 것이 “학교가 먹은 나이와 같다는” 은행나무의 출현이다. 저 나이 든 은행나무는 어머니처럼 “집으로 들어”오라고 부르고, 이 부름에 응답하면서 시인은 ‘어린 나무’가 되어 어둠을 털고 집으로 달려가는 어린 시절의 아이가 된다. 문학평론가
2022-04-03
가도 가도 하얗게 막막한 러시아 설원.자작나무 처녀림 그 미끈한 아랫도리에 쏟아내는뜨거운 오줌발, 절로 굵어지는데아, 수피(樹皮) 겹겹 피나게 벗겨가며 백옥처럼 더 환해져가던그때, 그 러시아 자작나무 눈부신 처녀들.온갖 귀신 이야기들 문풍지 매섭게 때리는 유년의 겨울밤.해 떠오르면 꿈도 두려움도 가웃가웃 함께 날려 보내던 가오리연연줄 끊어져 눈 시린 빛살 되어 날아갔던 그 때 그 연, 연줄들.그 처녀, 그 연들 눈의 요정 되어오늘은 초부리 겨울 저 자작나무로 희디희게 서 있는 것인가.(부분)시인에게 현재 눈앞의 현실은 과거의 기억과 융합되어 현현한다. 저 러시아 자작나무 ‘처녀’가 유년시절 날린 연들이 “눈의 요정 되어” “희디희게 서 있는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을 보면. 이렇듯 지금 바라보고 있는 자작나무의 아름다움으로부터 연 날렸던 유년 시절에 대한 기억으로 비월함으로써, 시인은 그 시절에 가졌던 꿈, 좌절되기도 했던 그 꿈을 지금의 현실에 되살리면서 유년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다. 문학평론가
2022-03-31
바람 가득한 풀벌레소리에낮별들 깨우는 가만한 새소리자지러지게 울던 아이의 딸꾹질 소리잔반처럼 남은엊그제 천둥소리숯덩이 하나 물에 젖어푸시시 가슴 삭이는 소리내 무릎 속의 그대무릎을 징검돌처럼 더듬어가을을 건널 때슬픔이 고요해진 눈빛 같은 거사랑이틀어놓은 축음기 같은 거내 무릎을 짚으면방금처럼그대 무릎이 다녀간다(부분)사랑의 축음기는 슬픔을 고요하게 만드는 역설적인 소리를 퍼뜨린다. 시인은 사랑의 발성, 그 표현을 시인은 “슬픔이 고요해진 눈빛”으로 상징화하는데, 그것은 사랑이 슬픈 운명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대’는 언젠가 내 몸속에서 세월의 ‘징검돌’을 건너 나의 몸으로부터 떠나가리라는 운명, “방금처럼/그대 무릎이 다녀”가리라는 운명. 사랑은 흘러가는 것이어서 헤어짐의 슬픔을 동반할 운명인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03-30
산판도 없는 겨울산판집에서 겨울을 나는 사내는눈이 나리면 부지런히 길을 쓸고누가 다녀갔는지 인적도 찾을 길 없다그렇게 겨울을 지날 때푸른 밤하늘에 정점으로 박혔던 간결한 달이방 안으로 조금씩 녹아드는 거다손가락으로 기타 현판을 천천히 끄는 소리처럼산판집 사내가 이불을 스스슥 끌어 올려 얼굴을 덮는다그 소리에 놀란 고양이들은더러 죽은 자의 집에서 떠나기도 했다산판집 겨울은 꽃도 있고 나무도 있어봄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부분)‘산판’은 “나무를 찍어내는 일판”이라고 한다. ‘사내’는 그러한 일판이 없어 텅 빈 “산판집에서 겨울을 나”고 있다. 그는 유령처럼 보인다. 화자가 이 산판집을 “죽은 자의 집”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래서 저 ‘산판집’의 겨울은 봄이 필요하지 않다. 그곳은 인간의 소망이 필요하지 않는 공간일 테니까. 그곳에서 산고양이들도 피하는 어떤 사내가 외로이 홀로 살고 있는 이 풍경은 극도로 쓸쓸하고 을씨년스럽다. 문학평론가
2022-03-29
화악산 날 등 바위 한 발 나가면한 발 밀리고 아이젠 신고도 미끄러지는 눈길, 낯설다다음 세상 찾아가는 길이 이럴까느닷없이 눈앞에 나타난 한 장면,누가 도끼로 찍은 것처럼 간밤 내린 눈에 잘생긴 소나무 정수리 쪼개졌다제 몸통 제가 반 갈라 올리는 소신공양이다(….)하얗게 꽁꽁 염했다, 지난 밤 컴컴한 시간화악산 골짝마다 쩡, 쩡, 소나무 몸 열리는 소리 컷겠다그 때 어떤 영혼이 경계를 넘었을라나팔다리 흔들면서 걷는 내가 도무지 내가 아닌 것 같다꽃피고 새가 울면 사라진 길 다시 만나는 걸까바람도 숨 쉬며 하늘과 땅 사이에서 논다시인은 “화악산 등 바위”에서 미끄러지면서 죽음과 맞닥뜨린다. 그러나 그 죽음과의 마주침이 시인에게 공포를 가져다주지는 않은 것 같다. 눈으로 “하얗게 염”한 소나무의 “어떤 영혼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었을라나” 추측하고 있는 모습은 공포에 사로잡힌 자의 모습이 아니다. “꽃피고 새가 울면 사라진 길 다시 만나는” 미래에 대한 낙관 또는 윤회론이 시인을 공포에서 자유롭게 해주었기 때문이리라. 문학평론가
2022-03-28
겨울의 심처에는유리로 된 성채가 있어고양이 눈 속의 잔설 한 움큼을 움켜쥐면피가 흐르겠다, 파편처럼 찔러오는 통증이 있겠다얼어붙은 잔설 위에는드문드문 발 없는 새의 깃털눈물로 변해서 흘러다니는 새들의 발자국눈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는교목의 가지들이제 그림자에 닿아가는 속도가점점 빨라지고 있다바람소리 세차다 적막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부분)삶의 무게-시제인 ‘눈의 무게’-에 허리가 점점 빨리 휘어지면서 죽음의 “제 그림자에 닿아가”고 있는 “교목의 가지들”은 삶의 운명적인 비애를 드러낸다. 그것은 “파편처럼 찔러오는 통증”처럼 고통스럽다. 세찬 바람에도 “미동도 하지 않는” 적막은 이 비애의 풍경을 전반적으로 압축해준다. 이 적막한 풍경 속에서, 시에 등장하고 있는 존재자들은 마치 슬로우비디오를 보는 느낌을 주듯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2-03-27
저 그리움이 내 성소다능선을 굽혀놓은 고갯마루 서낭당물길 굽혀 흐느끼는 여울목의 망부석그 성소 앞에서 등허리 굽힌 사람은등고선의 품을 일구며 사는 신신들이 탯줄 같은 골목을 따라 집으로 돌아간다한 장정이 훔쳐보는 옆집 우물 쪽으로 골목이 휜다장정이 고개 감춘 곳에 내 얼굴을 드러내 본다보리쌀 씻던 처자의 젖이 내 얼굴을 품어 안는다나는 젖니를 오물거리며 신의 젖능선을 경작한다(부분)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이를 잃고 땅에 엎드려 등을 굽히고 있는 사람 모두에서, 그리고 그 굽은 등이 만들어내는 ‘등고선’-굽은 ‘능선’, ‘여울목’, ‘탯줄 같은 골목’ 등-에서 시인은 신의 존재를 발견한다. 그리움의 성스러움을 인식한 시인은 이제 자신이 어린애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그리움의 성역을 이루고 있는 몸의 ‘앞품’에 안겨, “젖니를 오물거리며” 삶을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문학평론가
2022-03-24
봉분 한편에서는키만 말쑥하니 자란 채꽃이나 아니나서너 망울 피기도 전에 져버린지난여름의감국 몇 그루를 자양분 삼아여릿한 떡잎이젖이나 되는 양봄빛을 쑥쑥 빨아 먹더니밤이 되어서는 반딧불두서넛이 다투어 빛났다‘망월 묘지’에 묻힌 희생자들의 봉분 옆에서 ‘감국 몇 그루’의 죽음을 “자양분 삼아” 떡잎이 자라나고 있다. 희생자들로 인해 성장한 떡잎은 또한 그 희생자들을 재생키는 것이기도 하다. 죽음과 삶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의 순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생명을 부여하는 봄빛-봄은 재생의 계절이다-이다. 이 봄빛 아래에서 죽음과 삶이 조화된 망월묘지는, 오월의 광주를 찬란하게 부활시킨다. 문학평론가
2022-03-23
초겨울 산행길에서 월명(月明)을 맞닥뜨리다벗은 나뭇가지가 가리키는 손끝 세상황망히 자취도 없이 모습을 감춘 이파리들내 삶의 자취도 저렇듯 흔적 없이한 잎 이파리로 피었다 진 자리뿌리째 뽑혀 버린 채 사라져버린 빈 하늘눅눅히 썩어가는 발 아래 낙엽을 보며빈 손 빈 마음을 새삼스레 들여다본다써늘한 바람 한줄기 뒤통수를 치고이 시를 낭송해보면 금방 어떤 쓸쓸함의 유장함이 느껴진다. 그러한 유장한 쓸쓸함의 리듬은 근대적인 정서를 표현하는 것으로서, 개인의 삶이 안고 있는 죽음과 삶의 문제를 상기시킨다. 하지만 향가 ‘제망매가’가 발산하는 고아한 풍취에 대한 독자들의 기억과 전형적인 시조 형식이 구심력으로 기능하면서 정서의 발산과 증발을 막고 있다. 즉 위의 시는 근대적 정서의 고전적 변용을 모범적으로 보여준다. 문학평론가
2022-03-22
시간의 무게에 눌린수많은 선과 선 사이사람의 인연들이 적멸의 색 입히니화공은 번짐의 붓끝으로마른 혼을 덧칠한다오래 묵은 빛깔은어둠과 닿아 있어응어리진 마음까지 색이 번진 울음이 깊고비워둔 허공의 침묵은살아 못 건널 강이다내 보았던 사람은 늘 바람숲에 있었다육신을 비워 꿈꾼 자유를 위해침침한 미소를 걷은실핏줄을 더듬어간다그어진 한 선에서 시간의 무게를 읽고, 선과 선 사이에서 인연의 적멸을 읽으며, 선의 번짐에서 적멸 속의 혼을 읽는 시인의 그림에 대한 응시는 삶과 예술의 상관관계를 숙고하게 만든다. 시인은 나아가 선의 빛깔 변화와 선과 선 사이의 여백 속에서 어둠, 울음, 허공의 침묵을 읽어내고, 이와 함께 행간의 여백은 다시 삶과 죽음, 자유와 허공의 변증법을 시조의 정형적 형식 자체에서 음미할 수 있도록 해준다. 문학평론가
2022-03-21
십자가는 죄인을 죽이는아주 불길한 나무로 만든 형틀이었다이름도 음습한 사형대그런데, 누가 그곳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나신성한 그림자흡사 밤의 어둠이밝은 낮을 만들듯이어두운 밤은 홀로 촛불을 켜고기도를 드리기에 적당하다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만든 십자가의 그림자. 이 그림자는 밝은 곳에서 보이지 않고 어두운 곳에서 발견될 수 있다. 홀로 기도를 드리기에 적당한 어두운 밤에서야 비로소 그림자는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 이 그림자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명료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이 그림자에서 우리는 마음의 미세한 움직임을 경험하기에 사물에서 그림자를 찾아내는 일은 사랑을 찾아내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문학평론가
2022-03-20
시는 어디로 갔나앞에서는 높은 빌딩들이 줄줄이 막아서고 뒤에선 인터넷의 바다가 출렁이고머리 위를 번개처럼 가로지르는 핵탄두 미사일인도의 새끼코끼리 귀만한광화문 네거리 플라타너스 새 잎사귀에 머물었나백화점 에스컬레이터 3층 완구점에서 내려파란 스웨덴 인형의 눈알 속에 숨었나핸드폰 뚜껑 속 번호의 유령리모컨으로 조종하면스크린에 알록달록 빈 그림자들이 뜬다시는 어디로 갔나서울역 앞 지하에서 너끈히 사흘을 굶은풋내기 노숙자들의 체중에 휴지로 밟혔나높은 빌딩이 거리를 점령하고 인터넷이 소통 방식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시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 시인이 겨우 시를 찾아볼 수 있는 곳은 도심의 플라타너스 잎사귀나 수입 인형의 파란 눈알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유령 같은 ‘알록달록’한 시뮬레이션이 우리들의 감각을 사로잡을 뿐이다. 현란한 허상의 세계가 삶을 지배하고, 실제 삶은 비참한 이 세상에서 시가 살아남기는 힘들다는 것이 시인의 판단이다. 문학평론가
2022-03-17
공단 도로에 벚꽃 활짝 피었다휴일 점심시간, 특근을 하다 잠시꽃향기에 취해 나무 밑에서 이야기하는나이 든 여공들, 벚꽃처럼 환하다봄나들이 대신 한적한 거리에서벚꽃 같았던 처녀 적 얘기 하는지꽃이 그녀들 머리 위로 떨어지자가만히 꽃잎 털어내고 있다(중략)그래도 일할 직장이 있어 낫다고벚꽃 나들이야 늙어서도 갈 수 있다고관광버스가 지나가든 상관하지 않는다바람 불자 벚꽃들 눈송이처럼 날리고그들 마음에 환한 눈송이 쌓인다제 아이들 커서는 제발 휴일엔 편히맘껏 쉬는 세상이 되도록 기도하다작업 시작종 올리자서둘러 공장 안으로 들어간다벚꽃의 아름다운 모습과 이젠 나이 들어버린 여공들이 대조되면서, 휴일에도 쉬지 못하고 고단한 삶을 살아야 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비애가 짙게 우러나는 시다. 하지만 그녀들은 “꽃향기에 취”하면서 자신의 아이들은 휴일에 벚꽃 구경 갈 수 있는 세상이 오길 기도한다. 벚꽃의 아름다움이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기원을 낳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은 현실적인 희망을 가져올 수 있다. 문학평론가
2022-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