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사랑이라 되뇌건만 어찌 사랑이 실체더냐 심장으로 아니면 전심을 타고 울려오는 것 전기의 전율처럼 찌릿하며 내리쏟는 태양의 그 짙은 빛을 어디 감히 똑바로 바라볼 것인가 찬란히 피어나는 저 꽃들의 속삭임을 들어라 그것이 사랑 아니더냐 (하략) 사랑은 발견될 수 없다. 사랑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럼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가? 존재한다. 몸을 가진 물체가 아니라 전기처럼, 빛처럼 존재한다. 사랑의 빛은 찬란해서 똑바로 바라볼 수 없으나, 우리는 사랑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사랑으로 감전되었을 때 느끼는 전율로서 알 수는 있다. 사랑의 전율은 ‘삶-꽃’을 피어나게 하며, 그렇게 피어난 꽃의 아름다움은 사랑의 힘을 우리에게 속삭이듯 전해준다. 문학평론가
2024-09-26
(전략) 날이 흐리고 눈이 흩날리는 시간은 케이크 위의 설탕 과자처럼 부서질 것이다 언제라도 떠날 수 있고 어디에나 이를 수 있겠지만 오늘밤 붙박인 사람들은 작은 손을 모은다 물에 잠긴 수도원을 서성이는 발걸음은 무의미하다 최선을 다한 기도처럼 차가운 창밖을 부지런히 성의껏 달리는 흰 눈송이들 잿빛 세상을 다독이려는 듯이 눈발이 굵어진다 시인들은 눈 오는 풍경을 자기의 비전으로 곧잘 그리곤 한다. 위의 시처럼 말이다. 세상은 잿빛이다. 이 “세상을 다독이려는 듯이” 눈발은 “부지런히/성의껏 달리”며 굵어지고 있다. 하나 이 눈 내리는 풍경은 슬픔을 품고 있다. 저 땅에 떨어지는 눈들은 어느새 녹을 것이며, 하여 “눈이 흩날리는 시간은” “설탕 과자처럼 부서질 것”이기 때문이다. “붙박인 사람들”의 “최선을 다한 기도”가 ‘무의미하’게 되듯이. 문학평론가
2024-09-24
나는 물 위에 글을 쓰기로 맹세했다 나는 시시포스와 함께 짊어지기로 맹세했다 그의 육중한 바위를. 나는 시시포스와 함께하기로 맹세했다 열(熱)과 불꽃을 견디고 눈이 먼 안공(眼孔)들에서 마지막 깃털을, 풀과 거울을 위해 흙먼지의 시를 쓰는 그 깃털을 찾으며. 나는 시시포스와 함께 살리라 맹세했다 아도니스는 현재 파리에 거주하는 시리아 출신의 시인. 시시포스는 산 정상에 올리면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평생 굴려야 하는 형벌을 받은 그리스 신화 상의 인물. 시인도 그러한 형벌을 받았다. 그가 “열과 불꽃을 견디”며 쓰는 시는 물 위에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 시 쓰기가 헛되더라도 펜의 깃털을 찾는 운명을 받아들일 것임을 맹세한다. “시시포스와 함께 살리라”는 맹세를. 문학평론가
2024-09-23
걸어가는 양이 십 도쯤 기울어진 박스 리어카 할아버지 횡단보도도 아닌데 버스 택시를 비집고 길을 빠르게 건넌다 바퀴에 무게를 싣고 가벼워진 날갯죽지 속도를 낼수록 몸의 기울기는 도마 위 통통 잘려 나가는 무편처럼 어슷어슷 몸의 관절은 끊어졌다 이어지는 무성영화처럼 석양빛도 슬픈 기울기로 어스름해지는 저녁 하늘을 나는 돌부처의 모가지처럼 건너는 발은 없고 굽은 등이 바퀴로 굴러간다 가끔 박스 폐지를 리어카에 가득 싣고 힘겹게 끌고 다니는 노인을 볼 때가 있다. 시인은 그 노인의 존재를 지나치지 않는다. 그는 그 노인의 ‘무성영화처럼’ “끊어졌다 이어지는” 모습을 보이는 대로 묘사하면서 “하늘을 나는 돌부처”의 이미지를 포착한다. 노년에까지 삶에 충실한 노인의 모습에서 어떤 숭고함을 느끼고는 “가벼워진 날갯죽지”를 발견한 것, 하여 시인에게 노인은 발 없는 부처로 보였던 것이리라. 문학평론가
2024-09-22
오죽하면 내 어깨에 누우랴마는 몸이 아프면 내리는 눈발도 아파 보이는 때가 있다 이제 그렇지는 않고 고운 눈에게는 고운 눈의 삶을 돌려준다 그 대신 내가 아플 때 당신도 아프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당신도 돌려주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내 발자국 들어내고 싶네 이런 사랑뿐이라는 것이 못내 가슴 아프다 사랑하는 동안 살아가는 동안 눈 쓰는 자루와 비 쓰는 자루가 달라서 함께할 수 없는 자리 끝내, 결코 이곳을 떠나지 않고 둘이 될 수 없는 길 기어이 멈추지도 않는다 ‘당신’은 누굴까. 제목을 따라 시가 아니겠는가. “내가 아플 때” 아파하는 ‘당신’, 시. 그럴 때면 “고운 눈에게는 고운 눈의 삶을 돌려”주듯이, 시도 시 자체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것이 시인의 마음이다. 그런데 가슴 아프게도, 그것이 시에 대해 할 수 있는 사랑의 전부라는 것, 시인과 시는 합치될 수 없기에. 하지만 시인과 당신은 둘이 될 수도 없어서, 시인은 “끝내, 결코” 시가 있는 “이곳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9-19
빗소리가 만들어주는 공간. 빗소리가 들리므로 열리는, 저 공간이 살아나는, 그러므로 따라서 갈 수 있나. 할 수 있을까. 빗소리를 따라 한다면, 비를 따라 한다면, 어떻게? 비의 이음새처럼. 비의 물갈퀴라는 듯이, 비의 지느러미라는 듯이. 그 공간. 내내 있으면 문득 비에게 우엉을 주고 싶다는 기분이 드는데. 우엉밭에서 우엉을 캐다가 비에게 건네고 싶어. 이 공간. 빗소리가 계속 공간을 만드는데. 우엉을 건네나, 비에 씻긴. 이 빗소리에서 저 빗소리까지의 공간감. 거기서 나는 생겨나나. 생겨날 때 나는 건네는 것, 건네지는 것이라고. 그 공간과 빗소리와. 한옥에 살아본 사람은 빗소리가 주는 감각의 기억을 갖고 있을 터, 위의 시는 그 빗소리가 가져오는 어떤 변화를 섬세하게 말해준다. 빗소리에 새로 공간이 열리고 살아난다는 것을. 시인은 나아가 빗소리를 어떻게 따라갈 것인지, “비의 지느러미”가 될 것인지 생각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새로 생겨난다는 것을 느끼면서. 빗소리에 자신을 “건네”고 자신이 “건네지는” 가운데 ‘우엉’처럼 변화하고 있는 ‘나’를. 문학평론가
2024-09-18
열매, 꽃, 잎사귀, 나뭇가지 여기 있어요, 그리고, 그대만을 향해 뛰는 나의 가슴 여기 있어요. 그대 하얀 두 손으로 이 가슴 찢지 말아요, 하찮은 선물 그리도 아름다운 두 눈으로 반겨주어요. 나 왔어요, 아직도 이슬에 젖어 있어요, 이마에 맺힌 이슬 아침 바람에 얼어요. 그대 발치에 누워, 지친 이 몸 달래줄 귀하디귀한 그 순간들 꿈꾸게 해주어요. 그대 어린 젖가슴에 나의 머리 묻게 해주어요 그대의 지난번 입맞춤 소리 아직도 울리고 있는 이 머릿속 달콤한 폭풍 가라앉게 해주어요, 그대 누웠으니 내 잠시 잠들 수 있게 해주어요. 19세기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폴 베를렌의 시. 현대엔 써지기 힘든, 절절하게 구애를 표현한 시다. 이슬 얼 정도로 찬 바람 부는 아침에 ‘그대’에게 달려온 화자. “지난번 입맞춤”을 잊지 못하기에. 그의 머릿속은 그 키스의 기억이 일으키는 “달콤한 폭풍”으로 폭발 직전이다. 이 격렬함을 달랠 수 있는 건 그대밖에 없으니, 그는 자신의 “가슴 찢지 말”기를, 추위에 떠는 자신을 달래주기를 ‘그대’에게 빌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4-09-12
얘기를 끝내자마자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나는 창 바깥을 쳐다보았다 백색의 햇살 너머 북한산을 보았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뭘 보고 있는지 묻는 그에게 나는 날씨가 좋다고 말했다 버스에 그를 태워 보내고 나는 걸어서 집에 돌아왔다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의 책을 얼굴에 덮고 잠이 들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들과 우정을 나눌 차례가 왔고 아침이 왔다 주워온 조약돌 하나를 꺼내어 마주했다 돌이 말을 할 때까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들”과 만나는 시간이 있다. ‘이 세상’이란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라면, 저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북한산’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일 테다.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의 책”도 그러한 ‘것’일 터, 그러한 책을 읽거나 저 사람 없는 북한산을 쳐다보는 일은 그러한 ‘것’들과 우정을 나누는 일, “조약돌 하나를 꺼내어” 그 “돌이 말을 할 때까지” 마주하는 일처럼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4-09-11
기타가 천장에 누워 있고 술병이 제 그림자 껴안고 벽에 붙어 있다 앉아 있는 열 명과 서 있는 한 명이 의자와 식탁과 피아노가 시를 읽는다 옅은 불빛이 가만히 노래한다 누군가는 야간 비행을 읽고 12개의 그림이 한 액자에 담겨 있듯 우리의 생각을 장밋빛 영상으로 서로에게 담는 저녁이다 사물들이 숨 쉬는 공간이 있다. 저 ‘Book Bar’가 그런 곳. “천장에 누워 있”는 기타나 “제 그림자 껴안”은 술병을 보라. “의자와 식탁과 피아노가” 사람처럼 “시를 읽”고 있다. 사물들만이 아니다. 불빛도 노래하고 있지 않는가. 이러한 공간에서는 “우리의 생각”은 서로에게 비추어진다. ‘장밋빛 영상’을 통해. 메마른 삶을 살고 있는 우리지만, 저러한 공간이 있어서 그래도 우리는 삶의 원기를 잃지 않을 수 있다. 문학평론가
2024-09-10
12월이 죽었다 잠에서 깨어 그것을 들었다 풀이 가늘게 자랐다 슬픔은 더 얇아질 수 없어서 그림자로 남았다 더 얇아질 수 없는 옷을 걸친 물체들이 12월을 지나고 있다 건널 수 없는 것을 건너고 있다 계절도, 그 계절 속의 한 월(月)도 삶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12월도 죽을 수 있지 않을까. 위의 시는 그렇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죽음의 소식을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물체들’을 통해서. 가령 가늘게 자라는 풀을 통해서. 그렇게 물체들이 입은 얇은 옷을 투시함으로써. 그 얇은 옷은 “더 얇아질 수 없”는 슬픔이기에. 슬픔을 입은 물체들은 죽은 12월 안을 지나가며 “건널 수 없는 것을 건너고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9-09
방에는 개와 나 ? 우리 둘뿐이다. 마당에는 사나운 폭풍이 무겁게 울부짖는다. 개는 앞에 앉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도 개를 바라본다. (중략) 나는 알고 있다. 우리 둘은 똑같다. 저마다의 가슴속에 똑같이 떨리는 불꽃이 타오르며 빛난다. 죽음이 날아와 자신의 차가운 넓은 날개를 퍼덕거리면… 끝장이다! 우리네 가슴속마다 어떤 불길이 타는지 누가 알까? 아니야! 지금 시선을 주고받는 것은 동물도 인간도 아니야… 서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두 쌍의 동일한 눈이다. 동물과 인간도, 이 두 쌍의 눈에도, 동일한 생명이 서로를 의지하며, 겁먹은 채 서로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19세기 러시아 문호 이반 투르게네프의 시. 개와 인간이 “똑같다”라는 것을 언제 알게 되는가. 개는 말을 못하지만, 인간처럼 생명을, 삶의 의지를 갖고 있다. 시에 따르면 창밖에 불어오는 사나운 폭풍우로 죽음이 “넓은 날개를 퍼덕거리”며 다가오고 있을 때, ‘나’와 개는 “동일한 생명”으로 존재함이 드러난다. 이때엔 동물과 인간의 구별이 별 의미 없다. “서로를 의지하며” “겁먹은 채 서로에게 다가”갈 뿐이기에. 문학평론가
2024-09-08
오래전부터/ 운동 삼아 걷기를 하는데 갓밝이 무렵 오늘따라/ 천근만근이다 어제 종일 비 온 뒤라/ 상대 습도가 높은 때문인가 천근만근, 이 무게는/ 도대체 무엇일까? 터덜터덜 집에 돌아와/ 체중계 눈금을 읽으니 그끄저께 그저께/ 몸무게랑 같다 눈이 저울이던 어머니라면/ 혹시 모르겠지만 체중계가 어찌/ 천근만근을 알 수 있으랴 모든 것을 수치화하는 기계가 우리 몸에 대해 알려줄 수 있는가. 체중계는 같은 몸무게를 보여주지만, 어느 때는 ‘천근만근’이지 않는가. 시인은 자신의 몸이 왜 ‘천근만근’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천근만근’은 몸의 감각이기에 의식으론 원인을 알 수 없는 것. 하나 “눈이 저울이던 어머니”는 시인의 ‘천근만근’을, 그 원인을 알아챘을 테다. 의식 과잉인 현대인과 달리, 그녀는 몸과 하나인 직관을 갖고 있었기에. 문학평론가
2024-09-05
개보다 더 단순한 진심으로 가장 어두운 밤보다도 더 가장 어두운 얼굴로 밤을 견딥니다 삶을 이해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불가해하듯 밤을 이해한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마음도 마음 아닌 것도 모두 잠들지 못하는 밤 그건 뭐였을가요? 봄에는 직장을 잃고 가을에는 사랑을 잃었습니다 구직도 구애도 구원도 없는 가장 어두운 밤보다도 더 가장 어두운 얼굴로 밤을 건넙니다 개보다 더 단순한 진심으로 죽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여 가끔 눈부셨던 그건 뭐였을까요? 눈물처럼 빛나고 진실처럼 부서진 위의 시에 따르면, “가장 어두운 밤보다도 더 가장 어두운 얼굴로 밤을 견”딜 때, “개처럼 더 단순한 진심”이 된다. 사랑을 잃고 직장을 잃고, 이젠 “구직도 구애도 구원도” 불가능하게 되었음을 감지할 때, 그런 진심을 갖게 될 터, 이때 우리가 밤을, 죽음을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하나 이 어둠 자체를 대면할 때야말로 “눈물처럼 빛나”던 그것이 기억에 떠오르고, 그것의 존재가 무엇인지 질문하게 되리라. 문학평론가
2024-09-04
다정해서 좋구나 뒷산 스님 혼자 기거하는 샛길은 은행잎이 샛노랗게 묻어두었다 아마도 스님은 출타 중인가 보다 나는 무밭에 나가 무 하나 뽑아 무생체를 만들고 옅은 커피 한 잔 듣고 테크에 나와 앉아 커피를 마시네 고양이는 종이상자 안에서 잠을 자고 햇살 받은 고양이 등이 하릴없이 따스하다 내일 일은 내일로 미뤄두고 오늘은 밤나무 숲에 들어가 벌레 숨어든 밤송이나 주워 와야겠다 저런 “다정해서 좋”은 ‘소일’의 시간을 가져본 적이 언제였던가, 이런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프다. 내일에 대한 어떤 걱정도 하지 않고 지금 다가온 감각을 만끽하는 소일.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다. 어느새 마음에 걱정거리만 가득 찬 삶을 살게 되어서다, “내일 일은 내일로 미”루고, 종이상자 안에서 잠자는 고양이처럼 ‘소일’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져버린 것. “밤송이나 주워 와야겠”다는 마음을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4-09-03
사랑이 망할 때마다/ 녹지 않는 눈이 내려 하늘의 살을 덮고/ 오래 잔다 꿈속에선 아무 잘못이 없어/ 이마를 내놓고 놀고 하늘에선, 내가 나를 포기하는 속도와 상관없이/ 눈이 계속 내리고 그럼 꼭 사면될 수 있을 것 같아/ 즐겁게 맞고 눈이 그치면 돌아가야겠지만/ 돌아갈 곳이 없이 눈은 그치지 않는 그런 꿈/ 그런 밤은/ 영영 밤이고 어느 날 다시 궁금해지겠지 가망이 없어 사랑이 망하는 걸까/ 사랑이 망해서 날 망치는 걸까 위의 시에 따르면, 사랑이 망하면 마음에는 “녹지 않는 눈이 내”리며 하염없이 쌓이기만 한다. 사랑이 망한 시인은 이 눈-‘하늘의 살’-을 덮고 잘 터, “나를 포기하는 속도와 상관없이” 내려주는 눈은 그래도 자신을 망치고 있는 시인을 사면해준다. 돌아갈 곳 없는 시인을 덮어주는 눈이 그치지 않고 내리는 밤, 하나 이 눈은 잠 속의 꿈에서 만날 수 있을 뿐이며, 그 눈을 덮고 자는 건 “영영 밤”을 사는 일과 같다. 문학평론가
2024-09-02
연탄은 제 몸에 왜 저리도 많은 구멍을 뼈아프게 내야 잘 타는지 내가 연탄처럼 속이 새까맣게 타들며 온몸에 구멍이 난 채 밤 지새워 누군가를 데워보지 않았을 때는 몰랐네 19공탄 구멍 뚫린 몸끼리 진저리 치도록 함께 불타다가 벌겋게 달궈진 집게에 짚여 올라오면서도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던 불타는 응집력 어둠이 투창처럼 완고하던 한겨울 마당 숭숭, 내가 구멍 뚫린 심장이 되어 죽은 듯이 드러누워서야 다 보았네 위의 시는, 연탄이 보여주듯이 구멍이 많아야 잘 탈 수 있다는 아픈 깨달음을 말해준다. 구멍이 많다는 건 상처가 많다는 것, 상처가 있어야 다른 이를 데울 수 있다. 상처를 통해 타인과 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 응집력의 불이 “누군가를/데”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한겨울에 연탄이 필요하듯, 시대가 추울수록 심장엔 구멍이 뚫리는 법, 하지만 뚫린 심장은 우리를 잘 타게 해주고 타인과 함께 불탈 수 있게 해준다. 문학평론가
2024-09-01
가슴에 칼을 맞고 거리에 사람 하나 쓰러져 죽어 있었네. 아무도 그를 알지 못했네. 가로등이 어찌나 떨던지! 어머니 길가의 조그마한 가로등이 어찌나 떨던지요! 때는 새벽이었네. 아무도 냉혹한 공기를 향해 부릅뜬 눈을 차마 마주볼 수 없었네. 가슴에 칼을 맞고 거리에 사람 하나 죽어 있었네. 아무도 그를 알지 못했네. “거리에 사람 하나 쓰러져 죽어 있”다. 위의 시는 죽어가는 그 사람을 아무도 몰랐다는 것, 하여 그는 죽음까지 극도의 외로움 속에서 맞아야 했다는 것에 주목한다. 그런데 어떤 사물이 죽어가는 그의 옆을 지키고 있다. 사람들에게 존재감조차 없던 가로등이, 이 비참한 죽음을 내려다보며 덜덜 떨면서. 거리의 무심하고 냉혹한 사람들과는 달리, 저기 버려진 사물-가로등-이 인간적인 감정을 지켜내고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8-29
눈 비비는 골목이었어요거무스레 나서고 있는 잔잔한 기침들 꽃잎이 시린 볼을 감싸고 있었지요길게 늘어선 눈빛 어디로 향하는 갈구일까 싶어휘어진 팔자걸음마다 낙화 된 시든 이파리어쩌면 새벽의 반대편 노을의 색감을 보는 듯이 길은 어느 길로 가는 길인지 알 수 없지만이른 길을 나서는 수많은 걸음들목적지 알 수 없는골목이 잠을 깨는 아침이다. 계절은 늦가을인 듯하다. 이파리가 낙화가 되었다니 말이다. 날씨도 쌀쌀하다. 골목을 지나가는 행인들의 잔기침 소리가 들리고 “꽃잎이 시린 볼을 감싸고 있”다. 날도 저물고 있다. 한 해가 겨울을 향해 저물고 있듯이. 시인은 이 스산한 골목길 풍경에서 삶의 운명을 본다. 우리 삶은 골목을 지나가는 이들처럼 “어느 길로 가는 길이지” 모르면서 노을의 색감에 물들어간다는 운명을. 문학평론가
2024-08-27
술 취한 바닥이 이마에 붙었다 머리카락이 거꾸로 섰다 쾌청하다는 말로 삿대질을 했다 빙빙 혈관이 겹쳐지고(중략)있잖아 생일날 아득해져서 악다구니가 되더라초록을 잡초라고 우겼다 초록 물결이 차가워서 호호 불어주었다 내가 나를 안아도 춥구나조명에 간격이 생기고 내가 내 머리카락을 잘랐다 복병처럼 비명을 쥐어짜고 있었다엎어져서 처분만 기다리는 줄 아무도 몰랐다 내가 생소해서 검은 밥처럼 굴러갔다바닥은 바닥으로 넘쳐났다.스무 살 생일은 비성인과 성인의 경계선이 되는 날이다. 위의 시의 시인은 그날에 대해 무척 부정적인 기억을 갖고 있다. 스무 살 그땐 바닥의 바닥까지 내려갔으며, 그해 생일엔 악다구니가 되어 “비명을 쥐어”짰다는 것. 그에게 성인이 된다는 건 “내가 생소해서 검은 밥처럼 굴러”가는 것처럼 어두운 일이다. 그런데 지금 위의 시를 읽고 나니, 바로 그러한 낯섦이 스무 살에 걸맞은 심정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문학평론가
2024-08-26
삼십 년 전 구로 3공단에서 납땜 경력 쌓은편집도 하고 경리도 보는 출판사 관리팀장앞세우고 가산디지털단지역 근처 빌딩지하 케이터링 업체 네댓 줄로 식판을 들고줄을 선다 양도 많고 값이 싸니까(중략)굴뚝이 디지털이 되었다 하더라도밥과 국그릇에 스파게티만 가득 담은 청년과노동에서 손을 뗐어도 한참 되었을 노인이몰래 비닐봉지에 닭튀김을 꾹꾹 담는 것 사이에산업화 시대와 디지털 산업 시대 사이에 어떤차이가 있나 식권 열 장 카드로 사면 칠만 원현찰로 사면 열한 장 칠만 원 사십 년 전보다싸지도 비싸지도 않은 유리빌딩 지하의 점심에는노동과 임금 수준과 체계에는 아직도 금일 저녁야근을 할 건지 말 건지 질문이 담겨 있다야근자에게는 저녁 식권 한 장이 주어진다삼십 년 전 노동자와 현재 노동자 처지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시에 따르면, 근본적으로 변화가 없다. 둘 다 근근이 먹고 사는 정도의 보수를 받고 있어서, 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야근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한다. 야근하면 저녁 식권이 주어져서 저녁 비용을 줄일 수 있기에. 공장이 빌딩으로, “굴뚝이 디지털이 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노동자들은 밥값을 줄이기 위해 저녁의 삶을 포기할지 고민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