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생각했다 의식의 한 줌을 빛으로 모아 춥고 덥고 주린 시간을 벗어난다면 생을 건너는 방법이 육신에 걸리지 않고 빛으로 건널 수 있다면 나, 여기 땅에 있다 바람, 눈, 햇빛 적당히 가려주는 집을 갖고 굶주림에 굴복하지 않을 밥을 먹으며 나를 감출 옷을 두르고 세상에 산다 함께 있으나 함께 있지 않은 시간에 들면 길냥이처럼 홀로 있는 시간에 든다 “나를 벗는 시간”이 있다. “길냥이처럼 홀로 있”음을 처절하게 깨닫는 시간. ‘나’로부터 떨어져 나와 ‘나’를 응시하는 시간. 이 시간엔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것이다. 위의 시의 시인이 “육신에 걸리지 않고/빛으로” “생을 건너”고자 했었다는 것을 상기하듯이. 그러나 지금은 “나를 감출 옷을 두르고” “굶주림에 굴복하지 않을 밥을 먹으며” “여기 땅에” 살아간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기도 하는 시간. 문학평론가
2024-11-27
세면대 위에 칫솔이 놓여 있다 그곳은 칫솔의 자리가 아니다 버려진 사물의 자세는 티가 난다 아무 데나 누워 있는 거리를 닮아 있다 칫솔에 치약을 묻혀 양치한다 흰 거품이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거울 속에서 양치하는 나를 훔쳐보았다 자주 침을 뱉었다 목구멍 깊은 곳을 자꾸 건드려 헛구역질을 했다 구역질이 계속해서 구역질을 뱉어내고 있었다 사물이 죽는 방법은 간결했다 입 속에서 청결한 혀 냄새가 났다 사물이 있어야 할 곳이 있다. 시인에 따르면, 세면대는 칫솔이 있을 자리가 아니다. 칫솔은 입속에 있어야 하는 사물이라는 것일까. 시인은 칫솔에 치약을 묻혀 목구멍 깊은 곳을 건드린다. 헛구역질이 나고, 이윽고 구역질을 한다. 무엇인가 쌓인 것을 토하듯이. 이 행위로써 칫솔이란 사물은 ‘간결’하게 죽어가면서 시인의 과거를 씻어준다. 하여 혀는 청결해질 것이며, 이제 시인은 새로운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11-26
지상 깊은 곳에 드리워진 세상의 나무들은 지금껏 죽어간 아이들의 수와 일치한다 나는 이런 근거 없는 확신에 싸여 있는데 나무가 나무를 떠나지 못하는 건 사람들 때문일까 사람들은, 왜 나무를 떠나지 못할까 대낮에 나무에 기대 울면서 나는 의문에 싸여 있는데 죽은 아이들이 지하에서 지상으로 던진 나무에 살아가는 세상 모든 것은 왜 스스로 붙잡힐까 오늘도 어디선가 산 채로 불타고 있을 나무들을 죽은 아이들은 대낮이 잿빛이 되도록 왜 거두지 않을까 어떤 의문은 유일한 답이 된다 시인은 나무들로부터 “죽어간 아이들”을 본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아이들은 “산 채로 불타” 죽어간다. 가자와 레바논. 시인은 그렇게 생명을 펼치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을 생각하며 “나무에 기대 울”고 있다. 그 나무들을 “죽은 아이들이 지하에서 지상으로 던진” 넋이라고 여기면서. 아이들은 그 나무들을 “대낮이 잿빛이 되도록” 거두지 않는다. 그렇게 세상에 자신의 죽음을 증언한다. 문학평론가
2024-11-25
아침식사에 몰두하는 것은 형식에 몰두하는 것이다. 아침식사하고 산책을 떠올리는 것도 형식에 관해서이다. 밥을 목구멍으로 넘기면서 티브이나 신문을 같은 목구멍 으로 넘길 때, 정보가 시작된다, 일감과 같은. 나는 형식에서 멀어진다. 하나이고 모두인 형식에서 밀려난다, 최종적으로 한밤에 묻는다, 여기가 어디인가. 자유인가 몰락을 달라 왼쪽과 오른쪽이 없는 나날들 형식이 있고 정보가 있다. 형식은 삶을 잘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틀로, “아침식사에 몰두하는 것”이라든지 아침식사 후의 산책과 같은 것이다. 반면 정보는 삶을 어지럽히는 것, 해서 “형식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시인에 따르면, 정보에 감염된 우리는 “하나이고 모두인 형식에서 밀려”나고 있다. 하여 그는 “여기가 어디인가” 묻고는, ‘자유냐 몰락이냐’의 선택 앞에 인류가 서 있음을 우리에게 각성시킨다. 문학평론가
2024-11-24
영화 두 개 보는데 육백 원 하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대흥극장 동시 상영관 칼 싸움하는 영화 간판 밑에 쥐포 파는 할매 백 원도 비싸 반으로 나누어 파는데 연탄불 위에 구워지는 쥐포 반쪽은 자꾸만 작아지고 또 작아지고 아이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쳐다보고 있다 찬바람 부는 요술 사과 궤짝 위에 쥐포 열서너 마리 그것으로 할매는 이 추운 겨울의 서울특별시를 살아간다 이젠 옛날 얘기가 되었지만, 동시상영관이라는 것이 있었다. 입장료가 600원 하던 때면 상당히 오래전일 터, 하나 동시상영관 주위엔 언제나 아이에게 “쥐포 파는 할매”가 있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지금도 “쥐포 열서너 마리”를 전 재산 삼아 “이 추운 겨울의/서울특별시를 살아”가고 있는 ‘할매’의 모습을 뒷골목에서 발견할 수 있겠다. 나이 들어 어렵게 살아가는 이들 삶의 모습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 문학평론가
2024-11-21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었던 이 차후에는 산 기운 떨쳐낼 수 없으리 가슴속에 산맥이 들앉는 까닭에 바다 물밑에서 길을 찾아 기어 본 이 차후에는 그 숨결 잊을 수 없으리 몸 안에 바다 속살 출렁거리는 까닭에 사람에 빠져 길을 잃고 헤매었던 이 차후에는 그 신열 떨쳐낼 수 없으리 곳마다 그 사람, 미리 와 있는 까닭에 위의 시에 따르면, 우리는 “길을 잃고 헤”맬 때 삶에서 깊은 경험을 하게 된다. ‘깊은 경험’이란 몸에 그 경험 대상이 들어박힐 때를 말한다.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맸을 땐 “가슴속에 산맥이 들앉”으며, “바다 물밑에서” 헤맸을 땐 몸 안에서 바다가 출렁거린다. “사람에 빠져 길을 잃고 헤”맸을 땐? 몸에 일어나는 신열을 “떨쳐낼 수 없”다. 몸 안 ‘곳마다’ 그 사람이 미리 다녀간 흔적이 열을 발하고 있으므로. 문학평론가
2024-11-20
이십 리 신작로 먼지 길 걷다 보면 쉰여덟 해 떠난 고향마을 포내리 무릎까지 눈 내리고, 비바람 몰아쳐도 굽은 허리 질끈 묶고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마침 지나가던 어머니 굽은 허리 펴며 나무처럼 웅얼거린다 나무도 어머니도 한 시대 굴곡과도 같아 지금까지 잘 지탱해 주었으므로 누군가에게 뜨겁게 손 내민 적 없었다 그래서 마을은 사람과 나무와 이제야 한 통속이 되어 나무는 뿌리로, 사람은 속이 깊은 흙으로 서서히 몸을 눕히는 것이었다 땅 위와 그 아래로 서서히 움직여보는 것이었다 고루한 역사는 나중에 아주 먼 날 그때 남은 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었다 나이 들었는지 “굽은 허리 질끈 묶고” 고향 마을을 언제나 지키고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시인은 그 나무를 “굽은 허리 펴며 나무처럼 웅얼거리는”‘어머니’와 동일화한다. 그들은 ‘굽은 허리’처럼 “한 시대 굴곡”을 같이 살았다. 이제 고루한 역사를 뒤에 두고 “나무는 뿌리로,” 어머니는 “속이 깊은 흙으로/서서히 몸을 눕히”고 있다. 그와 함께 마을은 그들과 “한 통속이 되어” 서서히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11-19
만일 그대가 나무에 핀 꽃이라면, 나 나무 되리. 그대가 이슬이라면, 나는 꽃이 되리. 그대가 햇살이라면, 나는 이슬 되리 오직 우리의 존재가 하나 되기 위하여 소녀여, 만일 그대가 하늘이라면 나는 별이 되리라. 소녀여, 만일 그대가 지옥이라면(우리의 존재가 하나 되기 위하여) 나 저주를 받으리라. 페퇴피는 1849년 헝가리 독립 혁명에 참가하여 26살에 실종된 헝가리의 민족시인. 그는 민족의 자유를 열망하고 노래했지만 열렬한 연시도 썼다. 위의 시가 대표적이다. ‘그대’의 존재가 무엇이든, 그대를 받치는 존재가 되어 “우리의 존재가 하나”이게 하겠다는 시인. “그대가 하늘이라면” 별이 될 테고, 반대로 “그대가 지옥이라면” 지옥에 가기 위해 “저주를 받”겠다니. 이보다 사랑을 열렬히 표현할 수 있을까? 문학평론가
2024-11-18
창문 밖 하늘에는 여러 모양의 구름이 겹겹이 쌓여 가벼워 보이지는 않은 것이 잠시, 지상과의 인연을 생각하는 듯 벌레 한 마리 생각이 많아진 것인지 숨죽이고 구름을 보는 듯 오후 시간 내내 창문에 붙어있다 그나 나는 시간이 구름에 묻어 지나가고 있음을 이제 이별의 시간이 왔음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바람이 선뜻하다. “바람이 선뜻”한 것을 보니, 때는 가을, 그 가을 “하늘에는/여러 모양의 구름이 겹겹이 쌓여” 있는 바, 시인은 구름이 “지상과의 인연을 생각하”다가 그렇게 쌓이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창문에 붙어” “숨죽이고 구름을 보”고 있는 ‘벌레 한 마리’는 시인 자신의 모습이기도 할 터, 청명한 가을 하늘의 흩어져가는 구름처럼 시간도 점점 흩어질 것임을, 즉 “이별의 시간”이 오고 있음을 시인은 ‘직감’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4-11-17
모두 떠난 재건축아파트 복도식 현관문마다 흰 페인트로 크게 X가 그려 있다 40년 넘게 새와 바람을 불러들이고 그늘을 만들던 나무들은 빽빽한 나이테를 드러낸 채 밑동이 잘려 있다 제집을 잃은 새들은 키 작은 나무를 뽑느라 파헤쳐진 흙바닥에 기억의 뿌리를 찾아 부리를 박기도 하고 붉은 발바닥 도장을 찍으며 서성인다 나무들이 다 어디 갔는지 둥지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널브러진 잔가지 위에 앉아 두리번거리다 날아간다 강변에서 저녁놀 묻은 발을 끌고 둥지로 돌아온 몇 마리 비둘기 발을 헛딛는다.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지는 파괴. “40년 넘게 새와 바람을 불러들”여 왔던 나무마저 무참히 “밑동이 잘려”나간 모습을 보라. 사람들 사는 집을 새로 짓는다고 나무 위에 지은 새들의 집을 파괴해버린 것. 위의 시는 자연을 파괴하여 뭇 생명들이 살고 있는 터전을 없애버리는 현대 사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바, 흰 페인트로 현관문에 그려 있는 ‘X’가 현대 사회의 파괴성을 을씨년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4-11-14
개나리아파트 어디를 둘러봐도 개나리가 없다 개나리가 없으니 개나리꽃이 피지 않는다 꽃이 피지 않으니 봄이 올 리가 없다 관리사무소 소장은 유실수나 꽃나무 지원을 구청에 요청했다 한다. 작년에도 올해도 하지만 늘 예산이 없다는 대답뿐이란다 기초의회에 근무하시는 나리 분들 주민 생활 관련 조례 제정 건수가 평균 0.8건인데 연봉이 오천만 원 참, 개 같은 나리들이다 지천인 개나리 하나 개나리아프트에 못 실어주는 이름은 ‘개나리아파트’인데, 아파트 화단엔 개나리가 없다. 이름과 실제의 불일치다. 한국엔 이름뿐인 현실이 얼마나 많은가. 게다가 “꽃나무 지원을 구청에 요청”해도 “늘 예산이 없다는 대답”만 돌아오는 것이 현실. 별 하는 일 없어 보이는 기초 의회 ‘나리 분들’은, 많은 연봉을 받아도 주민들의 이러한 ‘기초’적인 생활환경을 개선할 의지가 없다. ‘개나리’가 ‘개 같은 나리들’로 나타나는 한국의 우울한 맨얼굴. 문학평론가
2024-11-13
다시 잎이 진다, 저녁의 바람이 어디론가 몰려가 어둠에 섞이고 저기 그림자를 되돌아보는 이는 불 꺼진 방 안에 누워 뉘우침의 감옥에 갇힌다,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 짧게는 약이 될 저 소리는 제 몸에 젖어 있는 기억들이 내지르는 비명이다, 환하게 만들다 결국에는 더 큰 구멍으로 자신의 몸을 관통할 총탄이다 누가 서글픔에 창문을 본다, 나무들의 침묵, 그 사이로 떨러지는 붉은 울음들, 삶의 배경이 되는 허무의 울음들 그리하여 어떤 이는 먼 바다에 이르러 굽이치는 자신의 파도를 달래느라 우두커니 연민의 배경이 되고 또 어떤 이는 제 침묵 속에 기다란 막대기를 집어 넣어 죽은 노래를 깨운다, 날이 가물고 펄럭이는 것들이 굶주린 정원에서 헤매이고 비명 소리는 자지러지게 울려 퍼진다 대개 사람들은 ‘가을’ 하면, 낙엽에서 연상되는 쓸쓸함과 애상의 이미지를 떠올릴 테다. 하나 위의 시는 애상을 넘어 매우 고통스럽고 강렬한 가을 이미지를 보여준다. 어둠에 섞인 가을 저녁 바람은 “뉘우침의 감옥”에 어떤 이를 가두고, 자신의 몸에 총탄을 박도록 그를 끌고 간다. “자지러지게 울”리는 비명의 이미지로 가득한 가을. 가을은 “허무의 울음들”을 ‘배경’으로 부르는 “죽은 노래를 깨”우는 계절이다. 문학평론가
2024-11-12
둑으로, 골짜기 아래로, 그러다가는 곧장 모퉁이를 돌아 길이 꿈틀대는 리본이 되어 멈추지 않고 앞으로 뻗어 간다. (중략) 어떨 때는 내리막으로, 어떨 때는 오르막으로 곧은 간선도로가 앞으로 달려간다. 과연 삶이란 오직 그렇게 줄곧 위로 그리고 멀리 돌진하는 것이다. 무수한 환장을 지나 장소와 시간을 지나 장애와 도움을 지나 삶도 목적지를 향해 질주해 간다. 굽이굽이 곁을 지나가는 길이 저 먼 광활한 땅을 활기차게 하듯, 밖에서도 집에서도 삶의 목적은 모든 것을 겪고 모든 것을 이겨 나가는 것이다 ‘닥터 지바고’를 쓴 파스테르나크는 원래 시로 문학적 경력을 시작했다. 위의 시는 그가 말년에 이르러 쓴 시. 노인이 된 그는 비로소 삶의 목적에 대해 깨닫는다. “모든 것을 겪고 모든 것을 이겨 나가는 것”임을. “곧은 간선도로”처럼, “위로 그리고 멀리 돌진하는 것”임을. 그러한 삶은 길이 광활한 땅-삶의 터전-을 활기차게 하는 형상으로 나타난다. 이 돌진이 없다면, 삶이란 허허벌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11-11
오케스트라가 침묵할 때, 베일 쓴 여인들의 그림자 나뭇가지 밑을 지나가고, 마른 나뭇잎들 사이로 차가운 달빛 망상, 창백한 노을 구름이 스민다. 망각 속의 아리아를 흐느끼는 입술들이 있고, 상아색 드레스는 커다란 붓꽃을 가장한다. 실성한 무리들의 수다와 미소가 거친 풀숲에 실크 향을 뿌린다. 햇살이 그대의 귀환을 웃음으로 맞아 주길. 그대가 단아한 자태를 드러내면 축제는 금빛 창조로 노래하리라. 그러면 나의 시는 그대의 땅에서 음메 하고 울리라, 온통 신비로운 구릿빛에 싸여, 그대 사랑의 아기 예수가 탄생했다고 흥얼거리며. 20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페루 시인 바예호의 시. 성탄 전야의 축제를 신비스럽게 묘사했다. 차가운 달빛이 “마른 나뭇잎들 사이로” 흔들리며 비추는데, “아리아를 흐느끼는 입술들”과 “실성한 무리들의 수다와 미소”들이 난무한다. 시인은 이 광기 어린 축제를 보며 ‘그대의 귀환’-‘아기예수’의 재탄생-을 기다린다. ‘그대’가 오면 “축제는 금빛 창조로 노래”할 것이며, “나의 시는 그대의 땅에서” 소처럼 울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11-10
장엄하고 느리고 슬픔에 빠져 있는 비극적 선율이 조금씩 우리들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최후의 길은 이렇게 차갑고 냉정하고 섬세한 구조로 짜여 있는 것일까 미쳐버린 새들은 둥지를 떠나 북쪽 하늘가를 날고 있고 귀를 닫아버린 아이들은 정처 없이 골목을 떠돌아다니는데 우리는 이제 입을 틀어막고, 가슴을 바짝 움켜쥐고, 처참한 애도를 드러내야 하나 장송곡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데, 우리는 외마디 비명처럼 하얗게 얼어붙은 몸으로 벌거숭이 된 채 서 있다 마음이 아파오면서도 섬뜩한 느낌을 주는 시다. ‘하염없는 슬픔’을 가져다 줄 ‘비극적 선율’이 “조금씩 우리들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예언을 전하고 있기에. 우리가 세상 종말 직전에 서 있다는 예언. 그래서 지금 새들은 미친 채 날고 있고 아이들은 귀 닫고 “정처 없이 골목을 떠돌아다”닌다. 곧 죽음이 들이닥치고 ‘장송곡’이 울릴 터, 이 종말 앞에서 “우리는 외마디 비명처럼 하얗게 얼어붙”어 있을 뿐이다…. 문학평론가
2024-11-07
슬픔을 예약했어요/ 다음 주 토요일로 울고 싶은 날이죠/ 취소는 안 된대요 실연의 주인공을 따라/ 한강변으로 갈게요 추가된 옵션으로/ 웃음을 구매하면 자동으로 당신도/ 업데이트될 거래요 또 다른 감정들을 모아/ 장바구니에 담아둬요 AI 시대다. 이젠 AI가 특정한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도 학습하여 조언을 해주기도 한다고. 알고리즘에 따라 그 사람 취향에 맞게 상품을 권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AI의 인도에 따라 감정을 쇼핑할 수 있게 되었다. 위의 시는 감정도 쇼핑 대상이 되는 현 세태를 풍자한다. ‘슬픔’을 사고 싶으면, ‘실연’을 맛보고 싶으면 AI는 거기에 맞는 행동을 권하며, AI를 통한 감정 구매를 통해 “자동으로 당신”은 업데이트된다. 문학평론가
2024-11-06
사랑이 피어날 때도 그랬지만 사랑이 질 때도 저랬었겠지 감탄 속에서 떠오르는 꽃망울들이 스스로 유배의 길을 떠나겠지 떨어지는 벚꽃 잎처럼 그녀의 얼굴에도 이제 곧 그늘이 지겠지 향기 속으로 번져가는 우리의 생도 한때는 저렇게 미소 지었으련만. 예나 지금이나 서정이 솟아오르는 터전은 지나가버린 사랑의 시간이다. 하지만 피어난 벚꽃처럼 아름다운 그 시간 역시 “스스로 유배의 길을 떠나”는 벚꽃처럼 져버릴 터, 이 흩날리는 벚꽃도 또한 처연한 아름다움을 발한다. 서정이 풀려나오는 곳은 이 사라져가는 사랑의 모습에서다. 그 모습은 서정의 향기를 세상에 퍼뜨리고, “우리의 생도” 서정을 통해 “향기 속으로 번져”간다. 서정시의 원형을 보여주는 시. 문학평론가
2024-11-05
일찍 커버린 아이의 빈방에 앉아 창밖을 본다 썼다 지웠던 안부처럼 꽃눈이 환하다 꽃의 자리를 더듬으며 아이는 먼 곳을 생각했겠다 가끔 눈이 매웠겠다 내게도 강이 있어 길게 흐를 수 있다면 아이의 다정이 아직 남아 아껴놓은 비밀을 읽을 수 있다면 이 마음을 갚을 수 있을까 새 주가 시작하는 월요일. 창밖엔 새로 피어날 듯 “꽃눈이 환하”고, “일찍 커버린 아이”도 이제, 창밖 “꽃의 자리를 더듬으며” 자신이 나아갈 길-“먼 곳”-을 스스로 찾기 시작할 테다. 시인은 아이에게 닿는 긴 강이 자신에게 여전히 있어서 아이의 “아껴놓은 비밀을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야 아이가 그에게 준 “마음을 갚을 수 있을” 것이기에. 물론 “아이의 다정이 아직 남아” 있어야 그 갚음은 가능하리라. 문학평론가
2024-11-04
오래도록 소식 없는 사람은 소식올 날을 가만히 헤아리고 있는 사람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매 순간 짐작으로 천지를 건너는 사람 138억년 전 지구로 이주한 먼지의 기별로 올 사람 밤이면 별빛에 애를 태우며 별을 빚는 사람 오래도록 소식 없는 사람은 오래도록 소식 없을 사람 우주를 건너는 사람 우주를 만드는 사람 위의 시에서 소식 없는 사람과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이 동일화되는 바, 시는 소식을 기다린다는 것이 어떤 상황인지 보여준다. “오래도록 소식 없는” 이는 “오래도록 소식 없을” 이일 것, 왜냐면 그는 숨 쉬는 ‘매순간’ “138억년 전 지구”에서 “우주를 건너” “먼지의 기별로 올 사람”이기에. 하여 소식을 기다리는 이는 하늘의 “별빛에 애를 태우”고 “별을 빚”을 터, 그럼으로써 “우주를 만”들 기에 이를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11-03
누군가 연 문누군가 닫은 문누군가 앉은 의자누군가 쓰다듬은 고양이누군가 깨문 과일누군가 읽은 편지누군가 넘어뜨린 의자누군가 연 문누군가 아직 달리고 있는 길누군가 건너지르는 숲누군가 몸을 던지는 강물누군가 죽은 병원프랑스 현대 시인 프레베르의 시. ‘누군가’는 누구일까. 시는 그 누군가를 조명하지 않는다. 조명하는 건 그의 손과 발이 닿은 사물들과 장소들. 클로즈업 된 이것들을 통해 그 누군가가 자살하기 직전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누군가’는 문을 열고 들어와 의자에 앉고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편지를 읽는다. 편지를 읽자 충격 받은 그는 급히 방을 뛰쳐나가 강물에 몸을 던진다. 편지의 메시지는 어떤 내용이었을까? 문학평론가
2024-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