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와 폭식을 반복하는 달의 이클립스 겨울 아침을 배회하는 바바리맨의 덜렁거리는 실존 설치류 떼에 물려 이 그지 같은 세상을 하직한 초식공룡 화석 Exit으로 오타 한 후의 가벼운 절망 침침한 은하계를 지그재그로 건너 나의 꿈속에서 현관에 버려진, 빨간 아기로 현현하는 일그러진 혜성 ‘exist’라는 말을 천천히 발음하면서, 시인은 우선 월식을 떠올린다. ‘이클립스-식’은 빛의 소멸을 뜻하는 바, ‘exist’는 가려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하는 달처럼 소멸의 반목을 가리킨다. 하여, 초식공룡이 소멸했듯이 인간도 소멸할 터, ‘exist’를 ‘exit’로 잘못 쓴 건, 절망으로부터 “은하계를 지그재그로 건너”는 ‘혜성’처럼 탈출하고픈 원망이 투영되어 있다. 하나 그 혜성은 버려진 아기처럼, 일그러진 꿈일 뿐이다. 문학평론가
2024-10-30
참 따뜻하네 눈 내리는 골목길 담벼락에 서서 한 봉지 군밤을 건네받은 연인이 하는 말입니다 그 말 한마디에 군밤을 건네준 청년의 마음은 연탄불처럼 뜨겁습니다 참 따뜻하네 담장을 타고 온 그 말 한마디에 고개를 내밀고 눈 내리는 골목길을 봅니다 군밤을 나눠 먹으며 팔짱을 끼고 가는 젊은 연인들의 뒷모습에 대고 나도 한마디 합니다 눈이 내려서 세상이 참 따뜻하네. 위의 시가 보여주듯 이상하게도 눈 내리는 날은 따뜻하게 느껴진다. 시인은 그 따뜻함이 사람들 사이에 번지는 소소한 정을 눈이 가시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가시화의 초점은 군밤. 청년이 건네준 군밤을 받아든 연인의 ‘따뜻하다’는 말 한 마디가 청년의 마음을 뜨겁게 한다. 그 “군밤을 나눠 먹으며” 골목길을 팔짱 끼고 가고 있는 연인의 모습이 눈과 어울려 세상을 따뜻하게 한다…. “참 따뜻”한 시다. 문학평론가
2024-10-28
흔들리자 흔들리면서 살자 아무렇게나 자란 갈대처럼 흔들리다가 흔들리다가 미련 없이 날리자 가볍게 바람이 이끄는 곳으로 수로부인이여, 또는 아사녀여 아니면 너여 나를 혹해다오 내 마음은 비무장지대 지뢰와 갈대가 몸을 섞는 곳 터뜨려다오 갈대만 남기고 숨 막히는 지뢰는 터뜨려다오 불꽃처럼 터지는 가벼운 삶 행복한 불혹, 혹 흔들리지 않는 나이, 40. 그 나이를 지나갔을 시인은 이 ‘불혹’을 불같은 흔들림이라고 바꾸어 생각한다. 바람의 ‘혹’에 흔들리다가 “불꽃처럼 터지”며 “미련 없이 날리”는 삶을 사는 나이가 불혹이라고. 하여 그는 수로부인이든 아사녀든 너든, “나를 혹해”주기를 바란다. 그의 마음은 “지뢰와 갈대가 몸을 섞는” ‘비무장지대’, 마음 속 “숨 막히는 지뢰”를 터뜨려주기를 빌면서. 안정이 아니라 열정의 나이 불혹. 문학평론가
2024-10-27
나는 어디에서 온 빗방울입니까 나뭇잎 발코니 허공이 조금은 막막하여 주저앉아 울었던 기억이 나는 듯도 합니다만, 어쩌자고 아직도 마르지 않고 태양을 견딘답니까 스스로를 깨뜨릴 수 없는 물방울을 위해 당신께서는 손가락을 빌려 주십시오 닿는 순간 한 채의 눈물 누옥에 갇혀 있던 날개가 폐허를 털고 날아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2024년 제2회 선경작가상을 수상한 한혜영 시인의 작품. 시인은 자신을 마르지 않는 빗방울로 비유한다. “허공이 조금은 막막하여/주저앉아/울었던 기억”을 갖고 있는 시인. 하지만 ‘자신-빗방울’은 여전히 마르지 않고 있다는 것. 그래서 “태양을 견”디며 폐허가 되어 살아야 한다는 것. 시인은 갈망한다. ‘당신’의 “손가락을 빌려” 날개를 달고 날아갈 수 있기를. 열망으로 샘솟는 서정시의 정수를 보여주는 시. 문학평론가
2024-10-24
어느 날 어느 날이 와서 그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 그날에 네가 사랑으로 온다면 내 가슴 온통 물빛이겠네, 네 사랑 내 가슴에 잠겨 차마 숨 못 쉬겠네 내게 네 호흡이 되어주지, 네 먹장 입술에 벅찬 숨결이 되어주지, 네가 온다면 사랑아, 올 수만 있다면 살얼음 흐른 내 뺨에 너 좋아하던 강물 소리, 들려주겠네 한국 최초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의 시. 한강은 20대 초반에 시로 등단했는데, 위의 시는 등단 무렵 쓴 시로 판단된다. 한강 문학의 뿌리가 사랑임을 잘 보여주는 시. 화자가 오길 갈구하는 ‘너’가 사랑 자체가 되어 온다면, 화자 자신에게 일어날 변화를 시인은 말해준다. 사랑에 잠겨 “내 가슴 온통 물빛”이 되리라는. 그리고 ‘너’에게 무엇이 될 것인지도. “네 먹장 입술에” 강물 같은 “벅찬 숨결”이 되리라는. 문학평론가
2024-10-23
이사할 적에는 새 바람 새 빛을 바랐나보다. 그래서 나는 실망한다, 십칠년 만에 이사한 동네가 옛날에 떠났던 바로 그 동네여서. 그래도 반가워서 이 언덕 저 골목 서성이는데 놀랍구나, 모든 게 이렇게 새롭다니 아기들이 새롭다, 연립주택 낡은 문을 밀고 나오는. 젊은 엄마들이 새롭다, 뒤따라 나오는 헐렁한 옷 속의. 그루터기가 새롭다, 가지 잘린 플라타너스의. 간판이 새롭다, 새로 단장한 머리방의. 새롭지 않은 것은 오직, 오래되고 낡은 것들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 걷는 내 걸음뿐.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나신 신경림 시인의 시. ‘지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는 격언을 뒤집어 놓은 시다. 시인은 ‘새 바람’을 바라며 “옛날에 떠났던 바로 그 동네”로 이사했으나, 격언과 마찬가지의 풍경이어서 실망했다고. 하나 곧 아기들과 엄마들, 그루터기와 머리방 간판이, 즉 ‘모든 게’ 새롭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나 더 깨달은 게 있다. “새롭지 않은 것”이 있다면, “새로운 것을 찾아 걷는 내 걸음뿐”이라는 것을. 문학평론가
2024-10-22
가능한 적은 말을, 많은 말은 골(空洞)을 막아버리기 때문, 그래야 작별의 인사와도 같은 울림이 생기고. 가능한 적은 말을 그래야 말 한마디 한마디는 울림통 속을 돌고돌아 자신만의 메아리를 만들어내지. 넓은 공간 속에서 언어와 공동(空洞)은 서로 섞여들고, 언덕 너머 들릴 것만 같은 종소리, 그것도 한없이 느리게. 프랑스 현대시인 기유빅의 시. 말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 말들의 인플레이션. 시인에 따르면 말은 ‘공동’과 “서로 섞여들” 때 “자신의 메아리를 만들어”낼 수 있고, 넓게 퍼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적은 말을” 해야 한다. 말이 많으면 말들이 “공동을 막아버리기 때문”에. “울림통 속을/돌고돌아” 나오는 ‘말 한마디’는, 듣는 이의 마음 역시 천천히 울릴 테다. “언덕 너머” “한없이 느리게” 울려오는 종소리처럼. 문학평론가
2024-10-21
봄날 저수지 주변으로 소네트가 흐른다 나무는 맹목적으로 자라고 한때 내 사랑도 그러하였다 (중략) 지키지 못한 약속들 때문에 물빛이 어두워지고 서로에게 무엇이 되고 싶은지 알지 못해서 나무는 안간힘으로 그림자를 뻗는다 봄날 저수지에서는 당신에게 한 줄 기별을 넣어도 될까 손가락 사이로 돋는 푸른 새순을 못 본 척 눈 감는다 나무가 자라는 것과 같은 사랑의 맹목성. 사랑에 목적이나 목표는 없다. 다만 사랑할 뿐. 하나 두 사람의 사랑은 떨어지는 꽃잎처럼 스러지곤 한다. “서로에게 무엇이 되고 싶은지 알지 못”해서. 그때 사랑은 “안간힘으로 그림자를 뻗”을 터, 사랑을 잃은 시의 화자가 “봄날 저수지에서” “당신에게/한 줄 기별을 넣”고 싶다는 생각이 그 그림자일 테다. 그때 사랑의 ‘푸른 새순’이 다시 돋아나기 시작할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10-20
사람의 손을 잡는다는 것/ 참 쑥스러운 일이라/ 자주 못 하고 살았네 따뜻한 눈빛으로/ 좀 천천히/ 그 눈 마주 보지 못했고/ 웃음도 인색했었네 나를 세우고 버티는 힘은/ 정작 견고한 침묵이 아니었네 혼자만의/ 가을이 되고 겨울이 오네 해 뜨고 달 지는 창가에 서 있다가/ 볼 때마다 낯선 거울 앞에 서 있다가 물음도 대답처럼/ 나 아직 여기에 있네. 과거를 돌아보면 후회할 일이 많다. 위의 시에서 시인은 “사람의 손을” “자주 못 하고 살았”으며, “따뜻한 눈빛으로” 상대를 “마주 보지 못”하고 “웃음도 인색했”음을 후회한다. 필자 역시 그런 후회를 할 때가 있다. 어느덧 시인처럼 혼자임을 깨닫고 삶의 겨울에 다다랐다는 느낌이 든다. “견고한 침묵”으로 “나를 세우고 버티”려 했던 과거가 어리석었다는 깨달음으로 ‘나’를 비추는 거울이 낯설어지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10-17
당신 눈에 빛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당신 눈 속에 반사된 풍경 안에 내 모습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세상의 여러 틀이 자발적으로 윤곽을 잡게 되었습니다 별이 바람에 흔들릴 때면 당신 눈동자가 흔들린 거라 믿게 되었습니다 사랑이 왔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위의 시는 말해준다. “당신 눈에 빛이 비치기 시작”하고, “당신 눈 속에” “내 모습도 나타나기 시작”할 때라고. 보이지 않던 당신 눈의 빛이 보일 수 있는 것은 ‘내’ 마음에 움튼 사랑이 만든 새로운 눈 때문일 터, 하여 그 눈엔 “세상의 여러 틀”이 새로 “윤곽을 잡”으며 나타난다. 세상의 이 윤곽에서는 하늘의 별과 당신 눈동자가 서로 조응하며 바람에 함께 흔들리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4-10-16
어느 조그만 배에 키 작은 부인 하나 키 작은 뱃사람 하나가 조그만 노를 잡고 있다 그들은 여행을 떠나려 한다 고요한 어느 냇가 위에서 덧없는 어느 하늘 아래에서 그리고 어느 섬에서 잠들려 한다 오늘은 바로 일요일 허벅지를 서로 포개고 키스를 주고 또 받고 즐기기에 좋은 날 아름다운 삶은 바로 이런 것 물가의 저 일요일 키 작은 선원을 부러워하며 행복에 젖은 사람들. 프랑스 초현실주의 시인 로베르 데스노스의 시. 이 시는 아름다움과 행복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뱃사람과 부인이 조그만 배를 타고 섬으로 간다. 그곳에서 둘은 서로 키스하며 “허벅지를 포개고” 잠들 터, 일요일의 한가함이 주는 사랑으로 가득한 시간이다. 이 간명한 시를 읽고 이상하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저 둘의 모습이 너무 부러웠기에. 저런 행복을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으로. 문학평론가
2024-10-15
주인공인 나만 없을 것이다 벅찬 고통을 감당하기 어려워 일찍 떠났으므로 엉킨 실타래 같은 검은 부재의 바람이 불고 태극기 휘날리고 잿빛 비둘기만 구구거리며 하늘로 날아오를 것이다 무거운 공기가 이제 진짜 안녕이라며 작별을 고할 것이다 새 없는 공중으로 검은 비가 내릴 것이다 한가한 사람들도 오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인 나만 홀로 슬플 것이다 2018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배영옥 시인. 그는 자신의 장례식에 대한 시를 미리 써두었다. 지인들이 참석하겠지만 “나만 없을” 장례식. 슬퍼하던 그들이 떠나면 “검은 부재의 바람”만 불어올 장례식장. “잿빛 비둘기만” 날아오르다가 그들도 사라질, 결국 “한가한 사람들도 오지 않을” 그곳엔 “주인공인 나만 홀로/슬”퍼할 터, 죽음은 우리를 더욱 고독의 운명으로 빠뜨리리라는 슬픈 진실을 이 시는 말해준다. 문학평론가
2024-10-14
그가 평생을 사용한 일인용 흔들의자에 기대어 깜박 잠이 들고 나면 몸을 뒤척이지 않아도 발 구르지 않아도 의자는 그의 옅은 호흡에 맞춰 조그만 긍정의 속도로 삐걱대는 어깨를 가누고 고개를 내밀며 다가가 그에게 속삭인다. 다만 두려워 말라, 멈추지 않는 기울기와 끄덕이는 황혼에 관한 그의 낡고 비낀 꿈에게도 절룩여 말한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요즘 사는 것이 지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위의 시를 읽고 저런 위로를 해주는 흔들의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에 등장하는 ‘그’는, 아마 ‘황혼’과 어울리는 나이 지긋한 사람일 테다. 이젠 호흡도 옅어지고 꿈도 낡았으니. 하나 그가 평생 앉아왔던 흔들의자는 그에게 “다만 두려워 말라”고,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속삭여준다. 이 ‘조그만 긍정’이 그가 삶을 계속 살아갈 커다란 힘이 되어 주리라. 문학평론가
2024-10-13
슬픔의 밥솥에 밥을 안친다 슬픔은 껍질을 벗기면 가라앉는 마늘처럼 알싸하고 달았으니 밥을 먹고 슬픔은 설거지를 한다 우리의 밥은 당신의 집보다 아름답다 슬픔도 집은 필요하니까요 새는 공중에도 잠시 집을 짓는다 멀리 날고 있는 것이 새인지 벌레인지 중요하지 않다고 거짓말하는 응원이 필요한 치어(稚魚)리더 여기 있습니다 회사가 없는 사회인은 이자가 많아서 걸린다 방 안에 눈물이 고인다. 슬픔이 물든 밥을 먹는 사람들. “회사가 없는 사회인”이 그러한 이들이다. 슬픔은 돈과 연결된다. 돈이 없으면 빌려야 하고, 빌리면 이자를 내야 한다. 그때부턴 이자를 갚기 위해 삶을 살아야 한다. 슬픔은 삶을 설거지해주어서, 아름답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나 이 말은, 벌레도 멀리 날기에 새를 부러워할 필요 없다는 ‘응원’의 거짓말임을 시인도 알고 있다. 그래서 눈물이 방 안에 고이는 것은 막을 수 없다…. 문학평론가
2024-10-10
석등의 신열이 밖으로 붉게 번지고 연화문 돌이끼는 묵언을 물고 얼룩이 졌다 한 자락 바람의 보시로 젖몸살 앓았을 꽃망울,? 우듬지 끝까지 시리고 아팠을 것이다 한평생 그 향기 팔지 않았으나 끝내 지키지 못한 꽃 입술 터질 듯 부푼 살 내음의 통증으로 어쩌자고 홍매 그렇게 피고, 법당 앞 화강석 석등에 불이 켜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주지 스님 잰걸음보다 더 재게 해가 덜컥 넘어갔다 석등의 ‘신열’이 석양과 함께 절의 대기를 아프게 물들인다. 그 열병을 대기에 옮기는 바람의 ‘보시’를 받으면서, 홍매 역시 “터질 듯 부푼 살 내음의 통증”을 “꽃 입술” 벌려 터뜨린다. 홍매는 “젖몸살 앓”으며 “우듬지 끝까지 시리고 아”픈 삶을 살아왔던 것, 결국 “향기 팔지 않았으나” “꽃 입술”은 “끝내 지키지 못하고” 자신의 아픔을 발설한다. 이 ‘발설’이 개화일 터, 이 개화는 시를 의미함을 짐작할 수 있다. 문학평론가
2024-10-09
인간의 마음은 우리가 알지 못하고 탐험할 엄두도 못 내는 또 하나의 우주. 이상한 잿빛의 거리가 맥박 치는 인간 마음의 대륙을 우리의 창백한 지성으로부터 멀리한다. 먼저 간 이들은 육지에 아직 닿지 않았다. 콩고나 아마존보다 더 어두운 충만과 욕구의 슬픈 마음의 강이 흐르는 내부의 신비를 남자도 여자도 아는 이 없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D. H. 로렌스의 위의 시에 따르면, 두세 뼘 넓이의 가슴 속 세계, 즉 마음 역시 하늘 위의 우주처럼 거대하다. 인류가 우주를 아직 “탐험할 엄두도 못 내는” 것처럼, 이 마음 역시 “우리의 창백한 지성”으로는 알 수 없는 “내부의 신비”로운 대륙이다. 하지만 “이상한 잿빛의 거리가” 서서히 어둠 속에서, “충만과 욕구의 슬픈 마음의 강이 흐르는” “인간 마음의 대륙”의 맥박을 드러내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4-10-07
역사책은 참 이상하다. 왕과 장군의 이름만 나온다. 워털루 전쟁 대목에서도, “워털루 전쟁에서 나폴레옹이 졌다”라고만 돼 있다. 어디 나폴레옹이 싸웠나? 졸병들이 싸웠지. 역사책 어느 페이지를 들춰봐도 졸병 전사자 명단은 없다. ‘삼국지’를 봐도,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제갈량한테 대패(大敗)하다”라고 되어 있다. 어디 조조와 제갈량만 싸웠나? 졸병들이 싸웠지. ‘가자, 장미여관으로’를 낸 고 마광수 교수의 시. 마 교수 세계관의 근저를 보여주는 위의 시는, 책에 기록된 ‘위대’하고 ‘고상’한 세계에 진실이 있지 않음을 말해준다. 전쟁만 해도 장군이나 왕이 싸운 것처럼 책에 쓰여 있으나 사실은 “졸병들이 싸”우지 않았나. 하지만 역사책에는 “어느 페이지를 들춰봐도 졸병 전사자 명단은 없”다. 이에 문학은 고상함을 벗어버리고 저 ‘졸병-하층’의 세계를 보여주어야 한다. 문학평론가
2024-10-06
바람이 말라가 마른 바람이 쓸고 가면 빈 얼굴만 남지 얼굴에 적막이 걸리지 맥박은 흐려지지 창문에 머무는 흰 고요 입술을 떠난 입김이 체온을 그리워하듯 죽은 새가 떠도는 북극 마지막 하늘 고요가 오래 머물면 얼굴은 멀어지지 입김이 되어 흘러나오지 고요가 영혼을 데려가지 적막, 고요, 고독을 극한적으로 시화한 시. 말라버린 삶이 있다. 불어오는 바람도 말라있다. 그 바람을 맞은 얼굴은 빈 얼굴만 남아 적막만 걸린다. “고요가 오래 머물”자, 얼굴마저 “입술을 떠난 입김”처럼, 몸을 떠나 “체온을 그리워하”며 떠돈다. “고요가 영혼을 데려”간 것, 그 ‘영혼-얼굴’은 “죽은 새가 떠도는 북극”까지 떠돌아다니고, 그곳엔 “마지막 하늘”이 걸려 있을 뿐. 그리고 “맥박은 흐려”지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10-03
햇볕 아래 뜨겁게 달궈지던 바위들이 가만히 들어 앉아 등을 내 보이고 있다 나도 건너 편 산에게 내 굽은 등을 곱다시 내보이며 산을 오른다 등 뒤의 바위들이 제 나이만큼의 돋보기를 꺼내들고 내 등의 단면을 유심히 읽고 있다 꼼짝없이 들키고 만 내 살아온 날들 살아갈 날들 환히 다 들여다보이는 늦가을 가랑잎 손금같은 내 안의 굽은 등고선 산을 오르는 시인의 눈앞에 바위의 등이 ‘등고선’을 이루는 풍경이 펼쳐진다. 이 자연의 진솔한 모습에 시인도 자신의 ‘굽은 등’을 내보인다. 시인은 자신의 등을 바위들이 “유심히 읽고 있”음을 느끼지만, 사실 바위의 시선은 시인 자신의 시선이다. 시인 눈앞의 등고선은 이미 시인의 내면에 형성된 등고선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그 등고선은 ‘손금’처럼 시인이 “살아온 날들”의 궤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4-10-01
바람이 다니는 길이 있었다. 풀씨가 뒤를 따랐고 나무가 길을 내었다. 들꽃들이 달려가자 벌 나비가 뒤를 쫓았다. 바람이 다니는 길이 있었다. 산새가 누군가를 부른다. 다람쥐 가족이 기어들었다. 노루가 돌아다보았다. 돼지가 고목에 몸을 비빈다. 풀섶을 헤치며 약초꾼이 나타났다. 바람이 다니는 길이 있었다. 해가 비추고 구름이 흐르고 달이 뜬다. 여전히 풀꽃은 나무들과 길을 떠난다. 저들과 하염없이 걷는다. 엄마가 막내랑 토방에 앉아 강낭콩을 까고 있는 오두막이 나올 때까지. 길은 사람만 내는 것이 아니다. 자연 자체가 낸 길이 있는 것. 그 길로 바람이 지나가면, 풀씨와 들꽃들, 벌 나비가 바람 뒤를 따른다. 산새, 다람쥐 가족, 노루, 돼지와 같은 동물들과 약초꾼까지 바람을 따라 그 길로 들어온다. 하나 시인은 그 길의 존재를 과거형으로 회상하듯 말한다. 그 길은 시인이 엄마와 함께 살았던 고향 오두막으로 향하는 길이기도 했던 것, 현재엔 그 오솔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문학평론가
2024-0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