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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종현 시민기자의 유머산책) ‘장원급제’

등록일 2026-04-19 15:58 게재일 2026-04-2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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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종현 시민기자

세상에 상(賞) 싫어하는 사람 있을까요?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데, 하물며 내 실력을 인정해 주는 상이라니요. 그중에서도 ‘장원급제(壯元及第)’네 글자는 듣기만 해도 콧구멍이 벌렁거릴 만큼 치명적인 유혹입니다.

사실 상이라는 게 참 묘합니다. 모두가 받을 수 없어서 더 안달이 나죠. 학창 시절 성적표를 기다리던 그 ‘심멎’의 순간들, 0.01점 차이로 희비가 엇갈리는 비정한 시스템 속에서 우리는 평생을 ‘줄 세우기’의 희생양(혹은 주인공)으로 살아왔습니다.

상의 끝판왕을 꼽으라면 단연 조선 시대 ‘알성급제’입니다. 요새 오디션 프로그램은 저리 가라입니다. 초시, 복시 등 총 8번의 지옥 서바이벌을 뚫고 올라온 33인이 마지막으로 임금님 앞에서 파이널 라운드, 즉 전시(殿試)를 치릅니다. 거기서 딱 1등을 찍어야 ‘장원’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죠.

조선시대 과거 제도는 꽤나 복잡했습니다. 칼 좀 휘두르는 무과(武科), 외국어와 의술에 능한 전문직 잡과(雜科), 그리고 뼈대 있는 집안의 자존심 문과(文科)가 있었죠.

특히 문과는 예선 격인 소과(小科)에 붙어 ‘생원’이나 ‘진사’ 타이틀을 따야 성균관 입학증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던 ‘박 초시’, ‘윤 초시’ 할 때 그 초시(初試)합격자도 전국에 700명뿐이었다니, 사실 이분들도 동네에서는 “우리 집안에 천재 났다!”며 잔치를 벌였을 ‘능력자’들이었습니다.

왕의 질문, “너는 세상에 대책이 있느냐?”

대망의 마지막 시험, 임금님이 직접 문제를 내는 책문(策文)은 요즘의 논술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스케일이 다릅니다. “나라의 위기를 어찌 구할 것인가?” 같은 심오한 질문에 응시생은 대책(對策)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단순히 글 솜씨가 좋다고 뽑히는 게 아니라, 세상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있어야 했으니 장원급제자는 그야말로 조선의 브레인이었던 셈입니다.

장원이 되면 종6품의 벼슬을 제수받고 보너스도 화끈했습니다. 임금이 하사한 꽃, 어사화를 귀 뒤에 꽂고 3일 동안 동네를 휘젓는 ‘유가행렬(遊街行列)’이 허락됐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오픈카 타고 시내 퍼레이드를 하는 격인데, 이때 장원급제자의 기분은 아마 “우주 정복도 가능하겠는데?” 싶은 ‘근자감(근거 있는 자신감)’의 정점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1등만 기억하는 이 더러운(?) 세상에 반전의 묘미가 있습니다. 바로 상의 이름입니다. 요즘은 경제 논리에 따라 금상, 은상, 동상으로 줄을 세웁니다. 1등은 금(Gold)이라 비싸 보이고, 3등은 구리(Bronze)라니 왠지 좀 억울합니다. 하지만 우리 조상님들이 쓰셨던 ‘수·우·미·양·가’를 보십시오. 이 얼마나 낭만적인 ‘정신 승리’입니까?

수(秀):빼어나게 잘했다. (말해 뭐해, 최고!) 

우(優):우수하다. (넉넉하게 잘했다.)

미(美):아름답다. (비록 3등이지만 네 실력은 예쁘다.)

양(良):양호하다. (이 정도면 훌륭하다.)

가(可):가능하다. (옳다! 너도 할 수 있다.)

낙제나 실패의 단어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꽃이고 모두가 가능성입니다. 0.1점에 벌벌 떠는 지금의 점수제보다, “너는 참 아름답고 가능성이 있구나”라고 추켜 세워주던 그 시절의 성적표가 훨씬 인간적이지 않나요?

장원급제면 어떻고 ‘가(可)’면 어떻습니까. 장원이 나라를 이끄는 머리라면, ‘수우미양가’를 골고루 갖춘 우리 모두는 나라를 지탱하는 든든한 몸통입니다. 1등만이 선(善)은 아닙니다. 오늘 내 삶에 ‘수’가 아니라 ‘미’나 ‘양’을 받았더라도, 조상님들의 지혜를 빌려 스스로에게 말해줍시다.

“괜찮아, 너는 충분히 아름답고(美), 가능성이(可) 있어!“   

/방종현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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