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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정문 스님 보경사 주지한국의 하늘은 유난히 푸르다. 그 푸름의 오묘함은 가을에 더욱 빛을 발한다. `눈이 시리게 푸르른 날`이라고 미당(未堂)은 노래했다. 어찌나 푸르던지 그 바라봄에 그만 눈이 시리다. 넘치는 말이 아님을 우리의 하늘을 본 사람이라면 넉넉히 공감할 구절이다. 근래 가을 하늘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특히 색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것을 표현할 색감(色感)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빛깔을 맞춰도 색이 갖는 감(感)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흉내는 내도 한국의 가을이 가진 정서에는 다다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탕에 흐름을 바르게 옮기지 못하면 몸은 왔어도 혼백은 없는 허수아비꼴이 되는 것이다. 그 색(色)이 무엇이 길래 어떤 색이기에 그렇게 힘들까. 쪽빛. 그것은 바로 쪽빛이다. 한국인이라면 쪽빛이 어떤 색을 이르는지 대강은 알고 있다. 우리의 가을하늘을 말할 때 코발트빛 푸른 하늘, 보다 좀 더 한국적인 색감으로 `쪽빛`을 사용한다. 그렇다면 쪽빛은 어떤 색인가. 어떻게 대답할까. 푸른색, 남색, 좀 더 고급한 표현으로 마린블루, 코발트블루, 그러나 결국 돌아오는 답은 쪽빛은 쪽빛이라는 답이다. 미술평론가 손철주씨의 `꽃피는 삶에 홀리다`에 보면 염장(染匠) 한광석씨의 답변이 나온다. 시인 김지하는 꿈결 같은 색이라 말하는데, 그렇다면 평생 쪽물을 들여온 염장(染匠)의 입에서는 쪽빛에 대한 분명한 답이 올듯하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더욱 모호한 답이 나온다. 청(靑)도 아닌 것이 벽(碧)도 아닌 것이 아닌 것이? 그렇다면 무슨 색이란 말인가. 염장은 그저 까마득한 색이라 말한다. 까마득한 색이라. 이 대목에 이르면 더 이상 물어볼 말이 없어진다. 청(靑)이니, 벽(碧)이니, 람(藍)이니 하는 푸름도 쪽빛의 그것을 담기에는 부족해서 결국은 시각(視覺)을 접고 생각을 접게 만드는 까마득한 색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색을 흰색이라 하지만 청자와 가을 하늘, 소나무와 대나무의 푸른기상을 사랑했던 조상들을 보면 흰색만큼이나 푸른빛을 좋아했던 것 같다. 민족마다 선호하는 색깔이 다르며 개인도 호불호(好不好)의 그것이 있다. 색의 기호(嗜好)로 성격을 분석하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색깔이 있다고 한다. 타인과 구별되는 고유한 본성을 이른 말 일 것이다. 색중에는 스스로 드러나 보이는 색이 있고 함께 있음으로 주위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색도 있다. 존재만으로 조화를 만들고 평온함을 주는 색도 있다. 숫타니파타에는 아름다운 싯구가 나온다. `세상 빛에 물들지 않는`다는 귀절이다. 세상속의 우리가 세상에 물들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 세상을 향해 길어 올리는 물빛이 더러워도 우리가 피워내는 꽃에는 탁함이 없다. 세상 빛에 물들지 않는 본래의 색이있기 때문이다. 나의 색을 갖되 나만의 색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푸른 가을날이다. 미당(未堂)은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든다고 했다. 내연산 보경사에도 지친 초록이 단풍으로 올 것이다. 눈 부신 쪽빛과 맞닿는 붉은 단풍, 깊은 가을이 기다려진다.

2009-10-15

위로의 하나님

박진석 포항 기쁨의교회 담임목사최근에 들어서 우리 사회에서 급성장하는 산업이 있는데 바로 `위로 산업`이라고 합니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는 사람들이나,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상대가 없어 깊은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산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로움을 달래줄 애완용 동물이 인기를 끌고, 싱글 여성들은 “남자 친구 팔베개 쿠션”을 애용하기도 한답니다. 또 술을 판다기 보다는 말상대를 해주는 토크 바가 생겨나기도 합니다. 또 호주에서 유행하여 전세계로 널리 퍼진 프리 허그(Free Hug) 운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을 거리에서 포옹함으로 따뜻한 위로와 정을 나누어주겠다는 운동입니다. 위로 산업이 번창하고, 프리 허그 같은 운동들이 일어나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만큼 위로에 굶주려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습니다. 최근 수년간의 통계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숫자가 하루 평균 33명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일년에 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들 멀쩡하게 잘 살아가는 것 같지만 곳곳에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탄식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 고린도후서 1장 3절에 보면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 자비의 아버지 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이 말씀은 초대 교회의 사도 바울이 선교 사역 중에 수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통과하면서 만난 하나님에 대한 설명입니다. `위로의 하나님` 이 때 위로라고 하는 헬라어 단어는 `파라클레시스`입니다. `파라`는 헬라어로 가까이라는 뜻이고 `클레시스`는 부르다 라는 뜻입니다. 위로가 성립되려면 누군가를 가까이 불러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때로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누군가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됩니다. 사실 말이 별로 필요 없습니다. 그저 나의 고통과 형편을 이해해주는 누군가가 곁에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의 위로와 도움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깊은 절망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위로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위로하지 못할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기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을 우리 가까이 불러야 합니다.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기도로 하나님을 우리 삶의 자리로 가까이 초청할 때 하나님의 위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위로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언제나 고통하며 위로가 필요한 자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불러 보십시오. 분명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기 원하시는 자비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가 우리 모두의 영혼에 풍성히 임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2009-10-08

창의적인 생각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학교에 가는 자녀에게 우리나라 부모들은 주로 어떤 말을 할까?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라.”, “차조심해라.” 아마 이런 내용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에서 가장 노벨상을 많이 받은 민족인 유대인들의 부모는 어떨까? 이들은 선생님께 질문을 많이 하라고 주문을 한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학교에서 돌아온 자녀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본다. “오늘 학교에서 어떤 질문을 했니?”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미국 동부의 명문사립 W대 1학년 장모양은 입학 직후 한 교수의 지적을 받고 크게 당황했다. “수업 시간에 왜 질문을 하지 않느냐”는 지적 때문이었다. 국내 특목고 출신인 그녀는 예습을 철저히 해 간 터라 “특별히 모르는게 없어서 그랬다”고 대답을 했다. 그랬더니 “다 알아도 궁금한 걸 찾아내서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따끔한 충고가 돌아왔다. 그녀는 “마땅히 물어볼 게 없는데 질문을 만들어 가는 것도 큰 고역”이라고 털어놓았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수동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찾아가며 하는 즐거운 공부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 다니면서 힘들게 공부를 하는 것이다. 같은 공부도 수동적으로 하기 보다는 능동적으로 해야 더 재미있고 창의력이 길러진다. 능동적인 공부는 어떻게 가능할까? 바로 질문에서부터 비롯된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 알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것이고 궁금증을 해결할 때 느끼는 기쁨을 맛볼 기회가 생긴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우리의 학교 현장에서는 질문이 없는 수업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학생들이 진짜 궁금한 것을 해결하려는 공부가 아니라 성적을 잘 받기 위한 공부를 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도 입시 위주의 양적인 교육을 하다 보니 질문에 일일이 답해주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질문을 많이 하고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해야 하는 토론중심의 학습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계속해서 같은 신문에 난 기사 내용을 더 살펴보자. 미국의 한 고교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자유롭게 토론을 하고 있다. 토론식 수업에서 교사는 학생들에게 한 가지 정답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미국 뉴욕의 입시학원 교사 최모씨는 최근 우리나라 고 2에 해당되는 한 학생의 에세이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수학과 다른 과목의 성적이 괜찮은 이 학생의 논리가 초등학생 수준이었던 것이다. 에세이 문제는 `창조는 언제나 모방 보다 좋은 것인가`였다. 그랬더니 “시험 도중 친구의 답을 베꼈더니 틀렸다”며 “경험상 남을 따라 하면 꼭 실패가 따른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왜 (Why)`, `어떻게 (How)`를 물을 줄 모르는 한국식 평면적 교육이 빚어낸 코미디 같은 이야기이다. 한국 학생들은 순종을 미덕으로 삼는 유교문화에다 주입식 교육의 영향으로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에 전혀 익숙하지 않다. 한국에선 어떻게 비판적으로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해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을 뿐더러 질문을 하려 들면 “쓸데없이 따지고 든다”는 핀잔을 받기 일쑤다. 이 때문에 한국 학생들을 접해본 미국 교사들은 질문할 줄 모르는 수동적 태도와 평면적 사고를 문제점으로 지적한다. 토론학습을 하려면 주제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하고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의 관점에서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주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문제의식을 가지기 위해서 질문을 통해 주제에 대한 자기의 이해가 올바른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런 다음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고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는 가운데 공감대를 형성하고 올바른 생각을 정립할 수 있다. 그래서 토론이 필요한 것이다. 평소에 토론학습에 익숙해 있지 않으면 특목고를 나오고 미국 유학을 갈 정도로 공부를 잘 해도 장양처럼 질문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외국의 창의성 교육은 학교에서 질문을 강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질문도 `무엇(What)`에 대한 것 보다 `왜`, `어떻게`에 대한 것이 많다. 우리나라도 학생들에게 창의성을 길러주기 위해 질문을 잘 하는 훈련부터 시작해야 한다. 부모님들도 학교에 가는 자녀에게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차 조심해라.”라고 당부하기 보다는 다음과 같이 말을 바꾸어야 한다. “오늘도 질문 많이 하는 것 알지?” Create yourself!포항제철지곡초 이용석 교사

2009-10-07

인도-산치 유적지

불교는 오랜 세월 인도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종교다. 불교는 인도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인도 전역에는 다양한 불교 유적이 건설됐다. 불교 건축물로는 예배를 올리는 장소인 사원과 수도승들이 수행과 학문에 매진했던 승원, 그리고 스투파가 있다. `스투파`란 흙과 벽돌, 돌로 지은 탑. 존경받았던 승려와 학문의 높은 경지에 오른 고승의 유골을 보관하던 곳이다. 힌두교가 국교가 되면서 많은 스투파가 사라졌지만, 산치 스투파는 울창한 숲 덕분에 살아남아 화려했던 고대 인도의 불교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인도 불교 역사, 산치 유적지 산치 유적지는 기원전 3세기쯤부터 서기 11세기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조성된 유적지다. 인도의 불교 유적지 중 보존 상태가 가장 뛰어나 불교의 발전 과정을 그대로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산치 부근에는 기원전부터 상업 도시로 발달한 `비디샤`라는 도시가 있었다. 비디샤 상인들이 번영과 안전을 위해 스투파와 사원을 하나둘씩 세우면서 산치 유적지가 탄생한 것이다. -산치유적 상징 `제1 스투파` 산치의 상징인 제1 스투파는 기원전 3세기 아소카 왕에 의해 완성됐다. 전체 모습이 밥사발을 엎어놓은 듯한 형태로,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스투파와 그 주변을 둘러싼 돌담으로 구성돼 있다. 돌담의 동서남북으로는 아름다운 4개의 토라나(문), 스투파 정상에는 자그마한 3층탑이 있다. 제1 스투파 북동쪽에는 제3 스투파가 있다. 크기는 작지만 제1 스투파와 모양과 형태가 비슷하다. 제2 스투파에는 정상에 장식이 없고, 토라나가 없다는 점이 제1 스투파와 다르다. 하지만 제1 스투파에는 없는 사리함이 있고, 죽은 승려의 이름이 10개나 새겨져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교 서적, 토라나 산치 스투파의 출입문인 토라나는 수많은 아름다운 조각들이 새겨진 것이 특징이다. 우주와 석가모니의 사상을 담은 불교 경전인 셈이다. 토라나에는 석가모니의 탄생 설화와 불교를 널리 알리는 장면, 여러 동물과 꽃 문양 등 다양한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중 서쪽 토라나에는 둥근 바퀴를 바라보며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을 새긴 조각이 있다. 이 조각은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가 녹야원에서 행한 최초의 설법과 교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불상이 등장하기 전까지 불교 신자들이 이런 상징물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을 보여준다.생각 생각 ▶초등1. 오랫동안 인도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종교는 무엇인가요?2. 기원전 3세기쯤부터 11세기에 걸쳐 인도에 조성된 대표적인 불교 유적지는 무엇인가요?3. 친구에게 이 기사의 내용을 알려주는 편지를 써 보세요.4. 인도에 여행을 간다면 어디로 가고 싶은지, 이유도 적어 보세요.

2009-10-07

캄보디아에서 배운 지혜

이슬동지여고 3저는 10일 동안 스레이니읏이라는 캄보디아 친구와 함께 생활하고 봉사 하였습니다. 스레이니읏은 저랑 동갑입니다.항상 해맑고 사진 찍는 걸 무척 좋아하는 친구입니다. 그 친구와 10일 동안 지내면서, 한국과 캄보디아가 다를 게 없다는 걸 많이 느꼈습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던 저와 스레이니읏이랑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 답답한 면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주변의 도움을 통해 10일동안 스레이니읏이랑 가깝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랐지만 우린 다른게 없는 친구였습니다. 저는 10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만 캄보디아에 봉사활동을 간 것이었지만 이미 현지에는 오랜 기간 봉사를 하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분들 덕분에 수월하게 봉사활동을 하였고, 봉사를 성공적으로 마칠수 있었습니다. 항상 저희의 불평불만을 들어주시면서 짜증 한번 안내시고 웃음으로 받아주신 분들… 봉사활동을 하는 기간 내내 좋은 얘기를 듣고 많은 도움을 받았던 덕분에 정말 힘들지 않게 현지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출발할 때는 너무나 길 것만 같았던 10일이 하루하루 지나면서 너무나 짧은 날이 되어 버렸습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헤어지는 것은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매번 누군가와 소중한 만남의 시간을 뒤로 하고 헤어져야만 할 때 가슴 한 켠이 찡해지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이번 캄보디아 우동지역에서 저희와 함께 힘든 일을 함께 해내고, 때론 즐거워하고, 같은 음식을 먹고 있다는 사실로 서로 친구가 되었음에 든든했던 마을 식구와 헤어질 때 우리는 그 어느 때 보다도 힘든 헤어짐의 순간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우동지역 어르신들, 그리고 현지 친구들은 우리가 떠나는 날이 되자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시고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정은 정말이지 세계 어느 곳에서나 공통되는 세계인의 감정이었습니다. 아무리 다른 땅,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아온들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간은 모두 같은 것 같습니다. 이번 해외봉사에서 저와 10일 동안 함께 고생했던 선생님 2분과 언니 오빠, 그리고 친구들을 비롯한 사랑하는 현지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었고, 이 좋은 사람을 많이 얻은 것만으로도 저는 이번 10일을 후회 없이 보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세상을 어렵고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작은 일에도 기뻐할 줄 하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배운 세상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앞으로의 나의 봉사활동에 즐겁게 임하겠습니다. 끝

2009-10-07

공식 출범 LH공사 김호경 초대 대경본부장

“신뢰 회복 으뜸공기업으로 재탄생”업무비리 연루 직원 즉각 퇴출현장중심 책임경영 정착 매진“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으뜸 공기업으로 재탄생하기 위해 직원 간 융화, 현장중심의 책임 경영체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업무추진, 청렴 문화 정착에 매진합시다”토지공사와 주택공사의 통합공사인 LH(한국토지주택)공사가 5일 공식 출범했다.이날 LH 공사는 초대 대구·경북본부장인 김호경사진 본부장 취임식을 갖고 본격적인 업무에 돌입했다.이 자리에서 김 본부장은 직원 상호 간의 융화와 현장 중심의 조직운영, 차질 없는 업무추진을 당부했다.-지역에서 거는 기대가 크다.▲새롭게 출발하는 LH 대구·경북 지역본부에 대한 관련 지자체와 지역주민, 그리고 지역언론들의 변화와 개혁에 대한 관심과 기대수준은 매우 높다. 기존의 토지공사와 주택공사 체제보다 인력과 사업량은 두 배 이상 많아진 만큼 현업 부서로서 넘어야 할 산이 많고 극복해야 할 대내외의 난제도 쌓여 있다. 지역본부가 첫 출발선상에 서 있는 만큼 직원들이 비장한 각오와 초심을 잃지 말고 최선을 다한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변화 요구 여론이 강한데.▲과거의 토공과 주공은 땅장사, 집장사 오명과 비리의 온상이라고 국민들에게 각인돼 있다. 새롭게 탄생한 LH 공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으뜸 공기업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민신뢰회복을 위해 비리자에 대해서는 내부 징계 없이 고발과 함께 즉각 퇴출시키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업무추진을 강화하기 위해 면책강화제도를 시행한다.-앞으로 조직운영은.▲앞으로 조직은 `현장중심`으로 운영할 계획이다. 우리가 핵심적으로 추진하는 정부 역점추진 사업들은 현장에서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결국은 그 사업의 성패를 좌우하므로 현장중심체제가 잘 운영될 수 있도록 지원과 점검을 아끼지 않겠다. 또한, 모든 업무는 팀장, 사업단장 책임하에 운영할 방침이다. 조직안정과 연말 경영목표 달성을 위해 사업지원팀 등 지원 부서는 교차배치하고 보상, 판매 등 현업부서는 기존 업무를 그대로 수행하게 되며 전 업무에 걸친 교차배치는 올해 남은 기간 상호 간 업무 흐름을 읽힌 후 내년부터 있을 예정이다.-LH공사 대경본부의 현안은.▲최근 대구시와 경북도가 지정받은 국가산단인 대구사이언스파크 등 2개 국가산업단지, 2개 혁신도시, 대구 테크노폴리스 등 대형 프로젝트와 보금자리 주택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야 한다. 대경본부는 앞으로 지역에서 펼쳐지는 국가 프로젝트 등 각종 사업이 대구·경북이 재도약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이곤영기자 lgy1964@kbmaeil.com

2009-10-06

(6) 꽃가루날려야 은사시나무지

첫새벽에 시를 쓴다. 껍질 벗겨진 은사시나무의 실존에 대하여. 아니, 반성문을 쓴다. 그 나무껍질 벗긴 내 죄에 대하여. 내 죄는 부끄러움이나 자책에서 끝날 수 있지만 상대의 실존은 치명타를 입거나 고사(枯死)할 수 있음에 대하여. 어느 봄날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모 영내 은사시나무 삼십여 그루가 허리 껍질이 벗겨진 채 방치되어 있었단다. 은사시나무에서 꽃가루가 날려 식사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였다. 둥치에서 사람 허리만큼 올라온 부분의 껍질을 벗겨 방치하면 나무는 고사하는 모양이었다. 꽃가루 날려야 하는 건 은사시나무의 생존방식이고, 그게 방해가 되는 것은 인간의 실존이다. 따라서 불가피하게 자연을 이용해야 하는 입장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에 대해 뭐라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거창한 생태주의자나 자연보호주의자 입장이 아니라 그저 단순한 `실존`의 문제로 생각해봤을 때도 그 기사는 내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아무리 봐도 `방치`가 `고사`로 이어지는 일련의 파노라마는 은사시나무에게 너무 가혹한 형벌이다. 차라리 적법한 절차나 당국과 협의를 거쳐 은사시나무를 벌채했다면 이런 쓰라린 기분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방치와 고사가 주는 끔찍한 비열함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까. 은사시나무가 말라가는 동안, 인간들은 아무 일 없이 그 주변에서 점심을 먹고 수다를 떨 것이다. 뿌리나 둥치의 고통에 대한 그 어떤 자책이나 미안함보다 제 밥그릇에 꽃가루 날리지 않는 무탈함에 대한 수다를. 은사시나무는 적어도 해목(害木)이 되기 위해 자라지는 않았다. 자라기 전 곧장 뽑아주어야 할 나무로는 `어린왕자`의 바오밥나무로 족하지 않았던가. 적어도 걷잡을 수 없는 뿌리 번식으로 어린왕자의 별이 파괴되어서는 안 되니까. 그에 비하면 은사시나무는 무죄다. 햇빛 아래, 앞뒤 다른 색으로 반짝이는 잎들은 뭇 사람들에게 노래가 되고 쉼터가 되었을 뿐이다. 제 생존 본능을 위해 봄 한철 꽃가루 날린 것이 유죄라면 그건 애교 정도로 봐줄 수 있지 않을까? 그걸 양보 못해 순한 죽음도 아닌 `고사하기 까지 방치`하는 그 비열함에 반성문을 쓰고 싶을 뿐이다. 더러 비열하고, 자주 자책하는 게 인간이다. 의도하지 않은 죄이기에 양심 있는 자는 그 자책이 오래간다. 그 때 망가진 제 영혼을 순진무구한 풀밭에 마냥 풀어놓고 싶어지는 게 인간이기도 하다. 포리스트 카터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아름드리미디어, 2003)에서 우리는 잠시 위안을 얻어도 좋을 것이다. 성장소설이란 점에서는 `라임오렌지나무`와 닮았고, 자연 친화적 요소가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어린왕자`에 가깝다. 인간 속성이 아무리 비열하다 해도 자연에의 향수를 쉽게 잊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우리 영혼을 따뜻하게 데워주기에 충분하다. 주인공 `작은나무`는 자연의 이치를 할아버지로부터 배운다. 단순하지만 지혜롭게 살아가는 인디언의 모습은 `방치`와 `고사`를 일삼는 우리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아침이 오고 있다. 은사시나무를 위한 내 시는 여전히 미완성이고, 다만 나는 밑줄을 그을 뿐이다. `할머니는, 사람들은 누구나 두 개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하셨다. 한 마음은 몸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꾸려가는 것이다. 몸을 위해서 잠자리나 먹을 것을 마련할 때는 이 마음을 써야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것들과 전혀 관계없는 또 다른 마음이 있다. 할머니는 이 마음을 영혼의 마음이라고 부르셨다. 만일 몸을 꾸려가는 마음이 욕심을 부리고 교활한 생각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해칠 일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이익 볼 생각만 하고 있으면 영혼의 마음은 점점 졸아들어서 밤톨보다 더 작아지게 된다. 몸이 죽으면 몸을 꾸려가는 마음도 함께 죽는다. 하지만 다른 모든 것이 다 없어져도 영혼의 마음만은 그대로 남는다.`(소설가)

2009-10-06

서울 노원을 안동출신 권영진 국회의원

경북 안동출신의 권영진(서울 노원을)의원은 안동시 남선면의 60호 남짓되는 산골짜기인 양짓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안동서 나온 그는 대구 청구고등학교를 거쳐 고려대 영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고려대 대학원에 다닐 때는 총학생회장도 지냈다. 현재 한나라당 초선의원들의 모임인 민본21 회원으로서 의정활동에 열심인 권 의원을 만나 그가 꿈꿔 온 것과 그가 꿈꾸는 것에 대해 들어봤다. 편집자주 -안동에서 초등학교를 8년 다녔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어릴 때 조그만 마을에서 자라다 보니 나이가 1~2살 많은 동네 형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는 게 보통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형들이 학교에 갈 나이가 되니까 갈이 놀던 친구들이 하나도 없는 겁니다. 어디에 갔나하고 찾아보니 모두 학교에 갔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그냥 학교에 가서 같이 다녔습니다. 그때 학교는 천막을 치고 학생을 가르쳤는 데, 다른 친구들은 출석을 부르고 저만 출석을 안불러주는 겁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졸라서 출석부에 이름을 올려달라고 통사정해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나마 2학년 올라갈 때는 어리다고 진학도 안됐습니다. 그래서 1학년을 2번 다녔고, 5학년때는 안동시내로 전학을 갔는 데, 키도 작고 어려 보인다는 이유로 못받아주겠다고 해 다시 4학년으로 낮춰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8년 다녔습니다. 문제는 그 뒤인데, 중학교 다닐 때 본의아니게 선배들에게 많이 혼났습니다. 학교 교문앞에 서 있는 선도역할하는 형들 가운데 초등학교 친구들이 많았기에 “○○야!”하고 이름 부르다가 혼났습니다. 그랬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납니다. -청구고등학교에 다닐 때 재미있는 얘기가 있으면 소개해 주시죠. ▲청구고등학교가 축구로 유명한 학교입니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청구고를 물어보니 중앙상고를 지나서 언덕위에 있는 학교라기에 찾아갔는 데, 바람이 많이 불었습니다. 이쪽 축구골대와 맞은 편 골대 사이로 모래 먼지가 휘리는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처음에는 `뭐 이런 학교를 다녀야 하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청구고 출신 축구선수는 유명한 친구들이 있습니다. 변병주, 박경훈, 백종철 등이 유명하죠. -축구로 유명한 학교인 만큼 축구에 얽힌 에피소드가 있다면. ▲고교 2학년때 가을 전국대회때 청구고가 결승전에 진출했는 데, 선생님께 응원을 보내달라고 졸랐는 데, 허락을 안해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제 하숙비를 몽땅 털어 친구들과 함께 5명이 집단으로 무단결석을 하고 응원을 갔습니다. 열심히 응원을 했는 데도 지고 말았습니다. 다음날 시무룩하게 학교에 갔는 데, 교감선생님이 교문을 지키고 계셨어요. 교무실로 잡혀가 내내 벌을 서다가 마지막에는 `애교심이 가상하다`는 이유로 용서를 받았던 게 기억납니다. 그 다음해에는 이게 계기가 됐는 지는 몰라도 전국대회 결승전에 전교생이 응원을 갔던 것이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통일원 통일정책 보좌관으로 근무했는 데, 어떤 계기로 들어가게 됐습니까. ▲저는 80학번 민주화운동 세대였습니다. 그래서 공부보다 데모를 더 많이 했죠. 저는 그때 우리나라가 분단이 된 상태에서는 선진국으로 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북한과 관련한 공부를 했습니다. 석사와 박사학위 논문도 북한과 통일문제가 주제였는 데, 1990년 석사학위 끝날 무렵 재야통일운동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제도권 통일운동으로 궤도를 바꿨습니다. 그뒤 통일원 공채시험을 쳐 5급 사무관으로 6년 7개월 근무했는 데, 통일문제는 관료적 합리성으로는 해결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1997년 2월 통일원에서 사표를 내고 그만뒀습니다. 그때 저는 “통일은 의지만으로는 안되지만 언젠가는 된다. 그러나 통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통일이 돼야 하며, 통일 이후가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즉 남북이 함께 잘 사는 통일이 중요하고, 정작 통일사업보다 나라를 선진강국으로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결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목적을 이루기위해서는 바로 교육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학교로 돌아가서 박사학위도 하고, 교수생활을 하며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런 판단에도 불국하고 정치에 뛰어든 것은 어떤 이유입니까. ▲제 유전자 또는 DNA위에 정치가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1999년에 이회창 총재를 도와서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보좌역으로 일했습니다. 선진강국이 되려면 리더쉽이 중요하고, 민주화 이후 지도자는 국가경영자적 리더쉽이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이회창 총재를 돕기로 했습니다. 정치권보다 다양한 경험을 가진 이 총재가 대통령으로서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 총재는 제게 “젊은 부대를 만들어달라”고 당부했고, 저도 열심히 뛰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한나라당에 젊은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때입니다. 저는 소장개혁 그룹으로 `미래연대`를 만들었습니다. 2000년 총선때, 저는 출마하지 않았지만 미래연대를 통해 국회에 젊은 피가 수혈됐습니다. 오세훈 서울시장과 원희룡 의원이 당시 공동대표를 맡았고, 총선을 통해 멤버가운데 무려 14명이 국회의원에 당선됐습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2년뒤인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해 패배하고 말았고, 이 총재를 중심으로 한 꿈과 비전 역시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도 대학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어떤 길을 가야 할 것인가 고민이 커져갔습니다. 그러던 중 2003년 1월 다음해에 있는 2004년 총선에 출마할 결심을 굳혔습니다. 지역구는 서울 노원구 지역을 선택했고, 2003년 8월 그 지역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지역구를 선택할 때 무척 고심이 됐을 것으로 생각되는 데, 학교친구들이 많은 대구가 아니라 서울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실은 그 당시 대구에 있는 동기들을 두루 만났습니다. 한 50명쯤 될 겁니다. “대구에서 나와라, 같이 정치하자”는 친구도 있었지만, “대구에서는 큰 정치가 어렵다. 큰 물에서 정치를 해라”고 충고해 주는 친구가 적지 않았습니다. 저는 후자의 충고를 따랐습니다. 정치판 자체가 편가르기나 친구나 친인척과 사이가 소원해 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는 충고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고향은 고향대로 두고, 정치는 서울에서, 큰 물에서 하기로 굳게 결심을 했습니다. 다만 노원구를 선택한 것은 노원구 중계동이 서울 다른 지역보다도 교육열도 높은 데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 선대위원장을 했던 임채정 전 국회의장이 출마한다고 해 정치거물인 임 전 의장에게 도전해야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입니다. 출마를 결심한 이상 빨리 유권자에게 가야 한다고 생각해 이사도 서둘러 했습니다. 강북은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불모지이지만 깃발을 세워보겠다는 각오도 있었습니다. 결국 낙선의 고배를 마셨죠. -정치입문이 그리 순탄치는 않았던 셈인데, 낙선때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당시 낙선은 제 정치인생에서 큰 자양분이 됐습니다. 겨우 8개월 선거를 준비해 당선됐다면 유권자 한분 한분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저는 1.9% 표차로 낙선했는 데, 투표 3일전까지는 이기는 것으로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 당시 민주당 정동영 대표의 노인폄하 발언 여파가 역작용을 일으켜 상대후보의 표를 응집시키는 바람에 제가 떨어진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저는 그때 `약자를 위한 정치`와 `나눔과 배려의 정치`를 펴겠다고 강조해왔기에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서 상대방에게 몰표를 몰아주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 까`. 저는 그때 어려운 분들을 마음으로 위하는 정치인이란 신뢰를 받지 못했다는 뼈저린 반성을 했습니다.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정치인이 되려면 지역에 뿌리를 깊이 내린 정치인이 돼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뒤 4년동안 원외위원장으로서 저는 열심히 뛰었습니다. 2006년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서 장애인 단체로부터 감사패도 받았습니다. (권 의원은 이때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장애인 콜택시를 당시 120대에서 280대로 획기적으로 늘렸고, 바다구경조차 어려운 장애인을 위해 해변캠프를 조성하는 등 장애인 복지정책에 힘썼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시정을 평가한다면. ▲오세훈 시장과는 고대 1년 선후배 사이인데다 미래연대 멤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울시장과 정무부시장으로 취임한 뒤 “여러 사람이 반대하더라도 지금부터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을 장기계획으로 지금 당장 시작하자”고 의기투합했습니다. 그래서 문화, 디자인, 한강르네상스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이런 계획은 모두 8~10년 계획입니다. 임기 4년 막바지인 오세훈 시장도 그래서 한 번 더 서울시장에 출마해 프로젝트를 완성할 생각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초창기에는 시민들이 `디자인 서울`이란 화두에도 공감하지 않았는 데, 이제는 디자인 코리아로 발전했습니다. 잘 시작했다고 봅니다. 또 주거정책과 관련해서는 집이란 곳을 사고 파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란 개념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쉬프트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선풍적인 호응을 받고 있죠. 후분양제도도 함께 만들었습니다. -장애인 정책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된 계기가 있다면. ▲노원구가 서울에서 장애인이 가장 많은 지역구입니다. 그래서 자주 만나다 보니 자연히 관심을 갖게됐습니다. 특히 장애인들이 보통 사람들에 비해서도 작은 것에 고마워하고, 인간적으로 더 따뜻하다는 것을 잘 알게 되면서 더욱 많은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대한장애인체육회 배구협회장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더구나 장애는 후천적인 것이 90%인 만큼 누구나 잠재적인 장애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장애인 정책은 비장애인의 보험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끝으로 권 의원의 정치철학은 어떤 것입니까. ▲자유민주주의에서 좋은 공동체는 승자로서 앞서가는 사람은 세금내고 공정한 질서를 지키는 한 간섭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패자나 낙오자에 대해서는 나눔과 배려로 지원을 해 줘야 합니다. 이런게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정치는 그런데서 의미와 보람과 사명이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민본21이란 초선의원 모임을 통해 보수정당인 한나라당에서 정책균형추 역할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어느쪽이든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2009-10-05

안전도시 지정 선봉장 이재만 대구 동구청장

“외국기업·병원 유치 인프라 구축” 소방박물관·시민안전테마파크 연계 청신호첨복단지·혁신도시 등 건설로 위상 재정립대구 동구가 지난달 29일 행정안전부로부터 `안전도시 시범도시`로 지정됐다. `안전무방비 도시` `대형화재의 도시`라는 오명을 가진 대구의 이미지를 바꾸는데 선봉장의 역할을 맡은 셈이다.동구는 최근 안전도시 지정과 첨단의료복합단지, 대구 제2과학고 등 굵직한 사업을 잇따라 유치하고 있다.대구 이재만사진 동구청장을 만나 안전도시 사업 방향과 앞으로 동구의 새로운 비전에 대해 들어봤다.-안전도시란 무엇이며 간단한 소감은.▲안전도시란 안전, 안심, 안정된 지역을 만들기 위해 지역사회 구성원들이 합심노력하는 안전공동체를 형성해 각종 안전사고와 재난예방을 위한 환경을 개선해 나가는 도시를 말한다. 이번 안전도시 선정으로 주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지역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계기가 형성돼 기쁘다. 또 이번 사업유치가 구청 직원들의 자긍심과 화합의 계기가 돼 뿌듯하다.-대구·경북에서 유일하게 동구가 선정된 의미는.▲이번 안전도시 선정으로 소방박물관을 시민안전테마파크와 연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했다. 또 첨단의료복합단지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는 우리지역 브랜드 가치를 형성함으로써 외국 병원과 외국 기업들이 좀 더 편안하게 들어 올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의미라고 생각한다.-안전도시 선정에 따른 인센티브 5억원의 사용 계획은.▲당초 10억원의 사업계획 수립해 행안부에 제출 했으나 5억원으로 결정됨에 따라 사업 추진에 있어 차질을 빚고 있다. 우선적으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재난 예보, 경보 시스템을 구축할 방침이다. 보행자 보호를 위한 사업, 우범지역에 대한 방범 CCTV 등을 설치하는 등 주민들을 위한 안전도시 조성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동구가 최근 굵직한 사업들을 잇따라 유치하고 있는데 비결은.▲주민과 공무원 모두가 한 뜻으로 똘똘 뭉쳤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구청장은 실무자들과 전문가들이 잘 어울려 일 할 수 있도록 자리만 깔아줬을 뿐이다. 동구는 그동안 전국평생학습축제, 제2과학고, 첨단의료복합단지, 안전도시 등을 유치 할 때마다 실무자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T/F 팀을 구성해 거의 합숙을 해 가면서 기획안과 제안서 등을 만들어 왔다. 그것이 가장 큰 비결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고생한 만큼 큰 성과도 거둬 기쁘게 생각한다. 유치 성공에 기여한 이들에게 그만한 상이 주어질 것이다.-동구의 비전을 꼽는다면.▲현재 동구는 지역에서 가치와 위상이 새로이 재정립되고 있는 시점이다. 이시아폴리스, 첨단의료복합단지, 신서혁신도시 등 큰 국가사업으로 인해 동구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할 것이다. 이뿐 아니라 동촌유원지 개발, 동대구역세권 개발, 신암뉴타운 건설 등의 사업들로 인해 동구가 좀 더 알차고 성공적인 도시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김낙현기자 kimrh@kbmaeil.com

2009-10-05

`내 사랑 내 곁에`

말할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그가 당신을 울린다생과사 기로에 선 사람들의 가슴 뭉클한 이야기루게릭병은 운동신경 세포만 선택적으로 파괴되어 지능, 의식, 감각은 정상인 채 온 몸의 근육이 점차 마비되어가는 희귀병이다.아직까지 발병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고 치료법도 없어 대개 발병 후 3~4년 안에 호흡에 필요한 근육마저 마비돼 인공호흡기를 달지 않으면 사망하는 무서운 질환이다.팔다리나 얼굴 근육 마비를 시작으로 결국에는 눈만 깜박거릴 수 있을 뿐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게 병이 진행되는데, 말짱한 정신으로 하루하루 식물인간이나 다름없이 변해가는 자신을 지켜볼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병`이라 불린다. `내 사랑 내 곁에`는 일반인들에게는 이름조차 생소한 루게릭병을 처음으로 조명하는 영화다.루게릭병과 힘겨운 사투를 벌이는 종우와 그의 곁을 지키는 지수의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를 통해, 아직까지 치료법이 없어 사회적 관심이 절실한 루게릭병에 따뜻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기존의 신파스토리와는 차별화된 눈물과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보는 이의 감정을 최대치로 이끌어내는 호소력 있는 연출로 휴먼 장르에 일가견을 보여 온 박진표 감독. `내 사랑 내 곁에`는 그가 전작들에 이어 새롭게 선보이는 휴먼스토리다. `너는 내 운명`에서는 남녀간의 지극한 사랑을, `그놈 목소리`에서는 유괴범에게 아이를 빼앗긴 부모의 애끓는 사랑을 다뤘다면, `내 사랑 내 곁에`에서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환자들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통해 가슴 뭉클한 가족애를 이야기한다.인간애, 가족애와 관련된 감정들을 총 망라해 전작들보다 한층 풍성해진 드라마를 선보이는 이번 영화는, 박진표 감독의 휴먼 3부작이자 그 완결이라 할 수 있다. `내 사랑 내 곁에`는 지수-종우 부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뿐 아니라, 중환자들이 모인 6인실 병동을 배경으로 다양한 형태의 가족멜로를 선보인다. 식물인간인 남편이 깨어나기만을 9년째 한결같이 기다리는 노부인(남능미-최종률), 혼수 상태에 빠진 아내를 지극정성 간호하는 남편(임하룡-임성민), 사고로 불수의 몸이 된 어린 딸 앞에서 눈물을 감추고 가슴으로 통곡하는 어머니(신신애-손가인), 회사와 병원을 오가며 24시간 형을 뒷바라지하는 동생(임종윤임형준) 등, 사연은 제 각각이지만 모두 자신의 삶을 희생한 채 환자 곁을 지키는 가족의 헌신적 사랑을 담은 에피소드들이다. 한계 상황에서도 살아갈 이유가 되어 주고 변함 없이 곁을 지켜주는 소중한 가족애를 그린 내 사랑 내 곁에는, 어려운 시대 먹먹해진 우리들 가슴에 따뜻한 위로가 될 것이다.20kg을 감량한 김명민과 긴 머리카락을 자르고 실제 염습까지 배운 하지원 못지 않게, 조연배우들의 연기 열정 역시 빛났다. 전신마비 혹은 식물인간 상태의 환자 역을 맡은 조연배우들이 바로 그들. 6인실 병동 환자들을 연기한 춘자 역의 `임성민`, 옥연의 남편 역의 `최종률`, 진희 역의 `손가인`, 배석중 역의 `임종윤`은, 혼수상태에 빠져 있거나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역할이라, 슛 사인과 동시에 한치의 움직임도 허용되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있는 연기를 펼쳐야 해 남모를 고충을 겪었다는 후문이다.이들 중에서도 특히, 교통사고로 혼수 상태에 빠진 춘자 역의 임성민은 뇌수술을 받는다는 설정을 위해 삭발 연기까지 불사해 스탭진의 찬사를 받았으며, 처음으로 연기에 도전하는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멤버 손가인은 아이돌 가수임에도 불구하고 몸무게를 8kg나 늘이고 노메이크업으로 출연하는 연기투혼을 선보여 눈길을 끈다. 개성 넘치는 조연들의 빛나는 연기 투혼 역시, 내 사랑 내 곁에가 기대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2009-10-02

내연산, 가을을 지나다 ①...김영아

하루만 지나면 민족 대명절인 한가위다.이번 한가위 명절은 연휴가 짧고 신종플루 때문에 고향에 오가는 사람도 줄어들 것이라고 한다. 한가위 연휴, 포항 청하 현감을 지낸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 정선의 사랑이야기를 잔잔하게 풀어놓은 김영아 작가의 `내연산, 가을을 지나다`를 펼쳐보자. 소설은 내연산과 12폭포와 진경산수가 병풍처럼 펼쳐져 `가을 풍경화`를 음미하듯 따뜻한 감동이 전해진다. 포항문인협회가 주최한 `포항시 승격 60주년 기념 포항소재문학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는데 포항 소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포항의 진면목을 드러낸 수작이다. 절집에 들어설 즈음 이미 날이 어두웠다. 아침부터 두텁게 누르고 있던 구름은 끝내 점심참을 지나서 비를 뿌리고야 말았는데 그걸 피하느라 월포리 주막에서 지체한 게 시간을 늦추었다. 비는 제법 당찬 꼴이었다. 다행히 바람이 잦아 뱃길을 열어주었던 모양이다.울진에서 출발한 뱃길은 길지 않았지만 겸재에게 유독 버거운 길이었다. 간밤에 날씨가 심상치 않아 뱃길이 어렵겠다는 사공의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하 낙담을 하자 그 모습이 오죽했으면 사공이 되레 왠만하면 가보도록 하자며 안심을 시켰다. 일단 그 산으로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자 한 순간이 급했고 산길보다는 바닷길이 먼저였다. 다행히 새벽에는 파도가 높지 않고 바람이 순해 출항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남쪽으로 순조롭게 불어줄 것 같은 바람이 시간이 지날수록 들끓기 시작했다. 점점 짙어지는 구름과 함께 바다도 저 깊은 속에서부터 몸을 웅크리며 조금씩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까지 온 것만도 용하다며 부산포로 멸치를 실러 가는 사공은 기어이 여기서 발이 묶이고 말았다. 겸재는 좀체 없던 멀미기운에 뱃속의 노란물까지 게워내고서야 기진맥진 뭍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환갑을 넘기고도 세 해가 지났으니 나이 탓인가... 겸재는 허우룩해진 자신의 몰골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울진에서는 길값을 치르느라 열흘을 앓아눕기까지 했는데 아직 그 추렴을 하는 건지 몸은 마음을 비웃듯 자꾸 처지고 있었다. 주막에서 비를 피하는 동안 잠시 몸을 가누고 걸음을 나섰지만, 월포 바다에서 절집에 이르는 평평한 들길에도 좀체 속도를 내지 못했다. 오늘 내로 내처 계곡을 올라 암자까지 가려던 계획은 아무래도 무리였다.자꾸 채이는 퍽퍽한 발걸음에 오늘밤은 산 아래 큰 절집에 몸을 맡겨야겠다고 마음을 눅였다. 그러자 며칠 전부터 솟구치던 알 수 없는 조급증도 할 수 없다는 듯이 푸시시 한 귀퉁이 바람이 꺼지고 말았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바람에 얼마동안을 떠밀려 다녔던가. 어디로 자신을 떠밀고 있는지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었던 이상한 열기, 달포 전에 서울을 나서 관동지방으로 내쳐 방향을 정했을 때만 해도 그것이 다 그림 때문이라 생각했다. 어머님 탈상 동안 소홀했던 그림공부가 그 열기를 식혀줄 거라 믿었다. 그런데 왠일인지 강릉 경포대에서 너른 바다를 바라보며 붓을 잡았는데도 막막함은 삭혀지질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망망대해에 나앉은 듯 아득함은 커져만 갔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강릉에서 삼척으로, 삼척에서 울진으로 걸음은 남쪽을 향하고 있었고, 급기야는 나그네의 노독이 병을 부르고 말았다. 온몸이 불덩어리로 타오르고 뼈마디마디는 제각기 녹아 흩어져 갔다.    몸을 버리니 정신은 도리어 가뿐해지듯 명료한 기운이 들면서 그제야 이 산이 떠올랐다. 이 계곡 물소리가 타는 듯한 갈증을 적시며 귓가를 울렸다. 내연산, 내연산 계곡으로 가자. 정신은 몸을 떠났다가 이윽고 돌아와 채근하듯 얼른 함께 가자 졸랐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서둘러 뱃길을 알아본 건 어쩌면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머뭇거리며 에돌아온 시간이 너무 멀었던 게 아닐까. 겸재는 이토록 진이 빠진 게 멀미 탓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절집에 이르는 긴 오솔길 앞에 서자 비로소 안도감이 들었다. 여기인가, 그토록 몸이 달게 쫓아온, 아니 쫓겨 온 곳이 이곳이란 말인가. 솔바람 한 줄기가 반가운 인사인 냥 겸재를 훑고 갔다. 아, 이 향기… 고작 길어야 사 년인데도 그 세월은 한 겁을 돌아온 듯 아득하기만 하다. 겸재는 시간 속으로 잠기듯 더욱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천천히 절집 불빛을 향해 걸었다. 저녁 예불도 끝난 절집 마당에는 기척이라곤 없었다. 요사채로 건너가 인기척을 내자 벌써 자리에라도 들었던가, 옷매무새를 다시 하며 불목하니 여자가 내다보았다. 여자는 어두운 마당에 후줄근히 서 있는 사내 몰골에 흠칫 놀라던 기색이더니 경계하는 눈빛을 바꾸지 않은 채 주섬주섬 방안의 불빛을 뒤로 하고 문밖으로 나왔다. “뭔 일인교?”“하룻밤 신세를 좀 질까 하는데…”도포갓에 청려장을 짚은 겸재를 어떻게 대해야할 지 몰라 애매한 목소리와는 달리 여자의 눈빛은 어둠을 핑계로 과감하게 겸재의 위아래를 훑고 있었다. 자그마한 체구는 피로한 기색에도 당당했고 행색은 소박했지만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기품이 엿보였다. 여자는 결정을 내렸는지 잠시 기다리라 하고는 마당을 질러가더니 잠시 뒤 나타나 겸재를 객방으로 안내했다. 내일 아침 예불 후에 스님을 찾아뵈라는 전갈을 하며 여자는 휑하니 가버렸다. 서넛 사람이 족히 누울 방 안은 이부자리 외에는 아무 것도 없이 휑했다. 저녁끼니 안부라도 좀 물어줄 것이지, 야박하단 생각에 혀를 차면서도 겸재는 방바닥에 녹아들듯 몸이 먼저 풀어졌다. 뱃멀미 후라 주막에서 먹은 점심은 한두 술 뜨는 둥 마는 둥 영 부실했더니 공복감이 심하게 밀려왔다. 쓰라린 공복감 위로 문득 그리운 냄새가 났다. 목을 따라 넘어오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죽, 죽을 떠 넣어주는 조용한 손놀림, 그 손동작을 따라 일었다 잦았다 밀려오는 맑은 향내, 산과 물과 초목이 녹아든 것 같은 깊은 향내, 겸재는 한 겁의 시간을 돌아 그 향기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가도 가도 형체가 보이지 않았다. 어둠인 듯 빛인 듯 모든 형체는 자취를 감추고 색도 없이, 사위는 사라지고 말았다. 내 몸 조차도 형체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땅 속 깊은 곳에서 씨앗 하나 싹을 틔우듯이 가슴 저 안에서 뜨거운 덩어리 하나가 터졌다. 얼음처럼 꽁꽁 굳어있는 몸속에서 그것은 너무나 작고 여린 것이었다. 하지만 희미하게, 혈관들이 꿈틀대기 시작하고 근육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끈기를 가지고 기다리지 않는다면 언제 다시 툭, 하고 끊길지 모를 위태로운 것이었지만 분명 땅을 뚫고 나오는 작은 생명의 시작이 그렇듯 그것이 몸을 살릴 불씨라는 걸 겸재는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불씨는 자신의 몸 안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후후, 숨을 불어넣어 살리고 있는 불씨, 이제라도 그 숨을 멈춘다면 하릴없이 꺼져버릴 불씨, 겸재는 불씨를 놓치지 않으려고 온 정신을 모을 뿐이었다. 간절함이 통했던가. 불씨는 조금씩 힘을 얻어 불꽃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윽고 스스로 온기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안정을 찾았다. 겸재는 세상의 문턱으로 다시 돌아온 자신을 느끼며 비로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온 몸이 따뜻하게 부풀면서 꽃이 되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겸재는 빛보다 먼저 소리를 들었다. 타닥타닥, 나뭇가지가 타들어가면서 터지는 소리였다. 자신이 누워있는 사방으로 뽀얀 연기가 자욱하니 들어차 있었다. 겸재는 저도 모르게 으컥으컥. 잦은 기침을 뱉고 말았다. 기침소리가 일자 나뭇가지 터지는 소리가 멈칫, 했다. 그리고 잠시 망설임이 일렁이듯 연기가 구석구석으로 몰리더니 낮게 지어낸 기침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문이 삐그덕 소리를 내며 열린 건 또 한참을 지나서였다. 문이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연기가 뭉클뭉클 방으로 몰려들었다. 연기 너머로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정신이 드십니까?”여인의 목소리였다. 여린 개울 물소리처럼 떨리면서도 곧게 떨어지는 폭포줄기처럼 숨김이 없는 목소리였다. “내가 어떻게… 으컥으컥”이곳이 어디인지, 당신은 누구인지, 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무엇보다 겸재는 바위에서 미끄러져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던 자신이, 그러다 어둠과 함께 살을 에는 추위에 점점 정신을 놓았던 자신이, 어떻게 지금 이렇게 세상의 문턱으로 돌아와 있는지 그것을 묻고 싶었다. 아니 이곳이 정녕 아직도 세상인지 그것을 묻고 싶었다. 여인은 그 와중에도 방안으로 몰려드는 연기를 어떻게든 막아볼 요량으로 부지런히 손사래를 치고 있었다. “이곳은 여름 암자로 겨울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으리의 상태가 하도 위중해서 이곳으로 모셨는데… 생솔가지를 태우다보니 연기가 많습니다.”말끝에 여인도 낮은 기침을 뱉고 있었다. 그제야 연기 틈새로 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살이 많지는 않지만 둥그스름한 얼굴은 순해 보였고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얼핏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모습이었다. 그것은 아마 여인의 옷차림 때문일 것이다. 여인은 치마저고리 대신 사내들이 입는 바지저고리 차림이었다. 그러고 보니 머리매무새도 뒤로 질끈 동여맨 수건차림이었다. “우선 방을 데워야 하오니 불편하시더라도 잠시만 참으셔요. 아직 움직이시면 아니 됩니다. 불을 지펴 더운 물이라도 준비할테니 잠시만 기다리셔요.”여인은 마지막으로 연기를 끌어 모아 문 밖으로 내리고는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방 안에 홀로 남겨진 겸재는 다시 방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흙으로 발려진 벽과 바닥은 군데군데 금이 가있고 한둘 제법 큰 구멍이 나있기도 했다. 일어서면 머리라도 부딪힐 낮은 천장엔 대들보 역할의 나무 기둥이 얼기설기 얽어져 있었고, 기둥에는 마른 나무뿌리와 푸성귀들이 어지럽게 걸려 있었다. 흙으로 다져진 바닥엔 갈대로 엮은 자리가 깔려 있었는데 겸재는 바로 그 위에 누워있었다. 이불이라고는 얇게 솜을 넣은 누비이불 한 채가 반은 깔리고 반은 덮은 채로 몸을 감싸고 있었고, 그 위에 한 겹 한 겹 옷조각들이 포개져 얇은 이불의 온기를 보태고 있었다. 제일 위에 걸쳐진 건 제법 두둑해 보이는 솜외투는 겸재의 것이 아니었다. 그때 겸재는 이불 속에 가려진 자신의 몸이 어딘가 낯선 느낌에 황급히 손으로 더듬었다. 웃옷은 속옷조차 벗겨진 채로 맨살이 닿았다. 당황한 나머지 급하게 몸을 일으키니 왼쪽 다리 무릎 아래로 칼날 같은 통증이 지나가면서 겸재는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물고 말았다. “으윽!”조심성 없이 터져 나온 신음소리에 또다시 문 밖에선 멈칫, 정적이 지나갔다. “괜찮으시옵니까?”여인의 목소리는 여름날 그득하게 물을 채운 저수지처럼 넉넉하니 일렁였다. “괜찮소…”“아직 움직이시면 아니 되옵니다. 그리고 의관은… 젖어서 지금 불기운에 말리고 있사옵니다.”여인은 마치 보고 있는 것 마냥 겸재의 속을 꿰뚫었다. 겸재는 머쓱하니 자신의 맨몸을 쓸었다. 아직 불기운이 올라오지 않은 방바닥의 냉기가 새삼 몸을 오그라들게 하였다. 조금 전 분명 나를 끌어올린 그 온기, 그 온기의 정체는 무엇이었단 말인가. 따뜻하고 부드럽고 조심스럽고 정성스러웠던 그 온기, 겸재는 이불을 더욱 당기면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 이상한 평온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도 겸재를 깨운 건 빛이 아니라 소리였다. 꽝꽝 얼어붙은 겨울 계곡 얼음장 아래로 얼어붙지 않고 흘러가는 물소리, 마침내 얼음을 녹이고 봄을 부르는 물소리, 그런 물소리를 닮은 여인의 목소리였다.“일어나셔요. 잠시 눈을 떠보셔요.”목소리는 겸재를 녹이고 겸재를 일으켰다. 눈을 뜨고 목소리를 먼저 보고서야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행색은 남자였으나 살짝 외로 꼬고 있는 자태는 영락없는 여인의 것이었다. 한결 밝아진 방 안은 그새 연기도 빠져나가고 없었다. 여인은 나무숟가락이 걸쳐진 사발을 겸재 곁으로 한 뼘 더 밀었다. “사람이 없는 곳이라 곡기 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곡식알을 있는 대로 모으고 부족한 대로 말린 푸성귀를 넣어 끓인 것이온데 얼른 허기를 달래도록 하십시오.”사발에서 솔솔 김이 올랐고 김이 퍼지자 구수한 냄새도 따라 퍼졌다. 겸재는 미처 몸을 일으킬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사발과 여인을 번갈아보았다. “오늘이 몇 일이나 됐소?”“열이레이옵니다.”열이레라… 보름달이 비치는 내연산 계곡을 보기 위해 들어왔으니 그새 이틀이 지났다. 겨울에 들어서자마자 내리기 시작한 눈은 올 겨울 유난히 잦았다. 내연산 계곡의 암벽들이 눈을 얹은 채 달빛을 받아 빛나는 모습은 다시 볼 수 없는 절경이었다. 동헌에 나앉으면 고을의 정사를 맡은 현감이었지만 동헌을 나서면 그림에 평생을 바친 환쟁이에게 그것은 놓칠 수 없는 기회이기도 했다. 따라나서는 시동마저 물리치고 기어이 혼자 걸음을 한 것은 오랜만에 한가한 틈을 타 마음껏 화폭을 채우고 싶은 욕심이었다. 절집에 들르지 않고 바로 계곡으로 들어온 것도 괜스레 현감 신분을 내세워 주위를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는 배려도 있었지만 굳이 따지자면 어두운 밤길이다, 얼어붙은 눈길이다, 염려하는 주위의 만류를 벗어나 내키는 대로 풍광을 흠씬 맛보려는 자신의 욕심이기도 했다. 그러다 밤이 어두워지면 잠자리를 얻어 들어가도 늦지 않으리란 계산이 있었고 마침 달은 밝고 눈이 그친 뒤의 밤공기는 포근하기까지 했다. 두껍게 쌓인 눈길을 밟으며 올라가는 계곡길은 더뎠지만 결코 더디게 느껴지지 않았다. 얼어붙지 않은 포실포실한 눈은 미끄럽지 않았고 발이 닿을 때마다 뽀드득뽀드득 맑은 소리를 내는 발자국을 만들었다. 한참 오르다보면 어디선가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눈뭉치가 텅텅 화답하곤 하는 것이 마치 낯선 세계로 들어가는 듯했다. 그래서 욕심도 잊고 절제도 잊었다. 그저 환하게 열린 길을 따라 무작정 들어갔다. 가다가 사무치면 화폭을 열어 붓을 들고 불같은 마음을 담았고, 그렇게 덜어낸 마음의 불덩이는 조금 가다보면 다시 뜨거워지곤 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었소.”겸재는 다시 떠올려도 사무치는 광경에 탄식하고 말았다. 뜬금없는 겸재의 탄식에 여인은 잠시 의아한 눈빛이었으나 이내 겸재의 마음을 꿰뚫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 골짜기의 아름다움은 천하명산 금강산을 옮겨놓은 것과 같다고 하옵니다.” 겸재는 여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흠칫 놀란 눈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살짝 고개를 틀고 앉아있는 모습은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정녕 놀라운 일이었다. 겸재는 서른 중반에 두 번 금강산을 다녀왔다. 처음엔 스승을 모신 길이었는데 그때 본 금강산의 아름다움이란, 말로도 그림으로도 다 할 수 없어, 그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모습에 그만 환쟁이의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 한 번 본 그 모습이 잊히질 않아 기회를 찾던 중에 이듬해 다시 친구의 배려로 두 번째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세상은 그때 남긴 몇 장의 그림으로 단박에 겸재에게 당대 최고의 화가자리를 내주었다. 하지만 정작 겸재는 그 그림만으로는 그 산을 볼 수도, 보여줄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아쉬움과 부끄러움이 더 컸다. 언제 다시고 그 산을 볼 수 있다면 내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텐데, 하지만 녹록치 않은 세상사의 인연은 좀체 그 기회를 주지 않았다. 금강산을 제대로 담을 수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겸재가 한평생 소망하는 일이거늘 세월은 무심하니 흘렀고 벌써 환갑이 코앞이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로, 어지러운 세상사 따라 흘러오다 보니 이를 수 없는 절망으로 가로막힐 때가 더 많았던 금강산. 그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그 자태를 돌이킬 때마다 머리엔 가슴엔 벌겋게 달군 인두 자국이 찍혔다. 내게는 아직도 이리 뜨거운 이름이거늘, 이리 아픈 이름이거늘 여인의 입에서는 저리 무심하게 나오다니…“금강산을 아시오?”겸재의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벗고 있는 자신의 몸보다 더 깊은 곳까지 송두리째 여인 앞에 드러내고 만 것 같았다. 그런 한편에는 여인 앞에서 무람없는 아이처럼 보채고 싶다는 간절함이 솟았다. “예, 일전에 한 번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아는지 모르는지 여인의 목소리는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눈뭉치마냥 텅텅 무심하니 거침없었다. 계속※ 이철진화가 프로필 △영남대학교 대학원 졸업△개인전 22회(뉴욕, 서울, 부산 등)△한국, 일본, 중국, 인도네시아 4국초청 작가전(일본/중국)△영남대학교, 동국대학교, 대구대학교 강사 역임△대구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앙비숑패션쇼 공동참여△현재)대구시미술대전 초대작가, 한국미협포항지부 한국화분과위원장, 포항예술고등학교 미술과 재직

2009-10-02

한가위 건강관리 Tip

추석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가 친지를 만나는 귀중한 시간. 그러나 혹시라도 사고를 당하거나 건강에 해를 끼치는 상황이 발생하면 명절 분위기를 망칠 수 있다. 특히 올해는 연초부터 계속되고 있는 신종플루 대유행이 예고된데다 연휴가 주말과 겹치는 바람에 귀향과 귀성, 성묘 등 일정을 소화하기에 연휴 기간이 너무 짧아 자칫 건강에 큰 무리를 줄 수 있다. 포항남구보건소 건강관리과 신건화 과장은 “일반적으로 명절에는 장거리 운전으로 인한 피로감과 과음, 과로가 누적돼 신체리듬이 무너지기 때문에 건강관리에 각별히 주의를 해야 한다”면서 “특히 올 추석에는 신종플루 대 유행이 예고돼 손씻기 등 기본 건강 수칙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장거리 운전, 5010 지켜야 장거리 운전은 근육피로로 운전자의 건강을 헤치고 졸음으로 교통사고를 유발할 수 있다. 때문에 운전 시에는 `50분 운전, 10분 휴식`의 5010원칙을 반드시 지키는 것이 중요한다. 운전 중간 중간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기지개를 켜거나 제자리를 뛰는 등 스트레칭을 하는 것이 좋다. 운전 중에는 등받이를 90도로 세우고 엉덩이를 뒤로 바짝 밀착시킨다. 운전대와의 거리는 발로 클러치를 밟았을 때 무릎이 약간 굽혀지는 정도로 하고 졸음을 예방하기 위해 수시로 환기를 시켜야 한다. ▲일상 생활 리듬 유지해야 일반적으로 연휴기간에는 평소보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고 음식 먹는 시간이나 양이 변화하기 때문에 평소 생활리듬이 깨지지 쉽다. 3일 이상 불규칙한 생활리듬이 계속되면 신체항상성(몸과 마음의 기능을 일정하게 유지시키는 능력)을 잃을 수 있다. 신체 항상성 유지가 흐트러지면 연휴 후 일상생활 복귀 우울증을 비롯한 각종 후유증으로 고생하기 쉽고 질병에 대한 저항기능이 떨어져 감기와 몸살 등이 동반 될 수 있다. ▲음식 섭취 시 `과(過)`는 금물 명절에는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에 아무래도 평소보다 많이 먹게 된다. 게다가 부침류, 떡 등 대부분 명절음식은 열량과 콜레스테롤이 높다. 여기에 식사와 곁들이는 반주와 과일, 식혜, 수정과 등의 후식까지 합하면 하루 열량 4천~5천㎉ 섭취는 아무 것도 아니다. 과음, 과식으로 배탈이 나거나 구토를 할 때는 기름기 있는 음식을 피하고 보리차, 꿀물 등을 마시거나 한 두 끼는 죽 등을 섭취한다. 설사를 할 때는 탈수 현상을 막기 위해 물을 충분히 먹고 체했다면 하루 정도 먹지 않고 위를 비우는 것이 가장 좋다. ▲쓰쓰가무시 등 야외 전염병 주의 추석 명절 때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성묘. 특히 성묘 시에는 일명 `가을철 열성 전염병`으로 불리는 쓰쓰가무시병, 렙토스피라증, 신증후군출혈열(유행성출혈열) 3대 전염병 위험에 쉽게 노출될 수 있다. 고열이 동반되는 이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긴 옷을 입어서 피부 노출을 최대한 줄이고 고인 물로 몸을 씻거나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 또 함부로 풀밭에 드러눕지 말아야 하고 논 등에 들어갈 때는 맨발로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성묘 후 1~2주일 후에 심한 열과 오한, 몸살 기운이 있으면 곧바로 병원을 방문해 진찰을 받아야 한다. /최승희기자 shchoi@kbmaeil.com

2009-10-01

고향 가는 길 `신종플루` 이렇게 대비하세요

10월2~4일 추석 연휴기간 전후로 신종플루 환자가 급격히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낮과 밤의 기온 차가 커지는 환절기인데다가 대중교통 이용 시 등 많은 인원이 밀집된 곳에서 호흡기를 통한 감염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보건당국은 추석연휴에도 거점병원과 약국이 변함없이 운영되도록 하고 공항과 항만, 관광지 등 다중이용시설에 손세정제 비치 등 방역대책을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예방수칙만 철저히 지키면 귀향을 포기한다거나 지나치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김석범 보량MCM의원 원장은 “현재까지 치명률이 일반적인 계절독감 수준인 0.1% 이하이기 때문에 과도하게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면서 “다만 인구 이동이 많은 추석연휴기간 중 확산 우려가 있으므로 국민들 각자 개인위생에 주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신종플루의 감염과 예방 감염자는 증상이 생기기 하루 전부터 아프고 나서 약 7일 후까지 다른 사람에게 감염을 전파할 수가 있다. 기침이나 재채기를 할 때에는 입을 통해서 아주 작은 비말이 매우 많이 튀어나오는데 감염된 사람인 경우에는 이 비말에 신종플루 바이러스가 포함돼 있어 감염자의 1~2 미터 이내 가까운 거리에 있는 다른 사람의 입이나 코, 눈과 같은 점막으로 들어와 감염이 전파된다. 따라서 명절을 맞아 고향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 공공장소에서 대규모 감염이 우려되고 있으나, 기침이나 재채기를 하는 사람에 가까이 가지 않거나 필요 시 마스크(일반 마스크)를 착용하는 등의 주의를 철저히 하면 감염의 위험을 상당히 줄일 수 있다. 또 다른 감염 경로로는 감염자가 재채기 등을 할 때 맨손으로 막아 바이러스가 오염된 손으로 만진 공공 시설물(문 손잡이, 엘리베이터 버튼, 대중 교통의 손잡이 등)을 손으로 접촉할 때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도 있다. 공공 시설물을 만진 이후 또는 외출에서 돌아왔을 때 손을 비누와 물로 깨끗이 씻어야 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고, 손으로 눈, 코, 입을 만지지 않는 습관을 들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알코올을 함유하는 손 소독제를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공공 시설물 접촉 후에 손 소독을 해주는 것도 감염 예방에 도움이 된다. ◆신종플루의 증상 신종플루에 감염되었을 때 증상은 해마다 겨울철에 유행하는 계절 인플루엔자 또는 일반적인 감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즉, 열이 나고 기침이나 목이 아픈 증상, 콧물이나 코막힘 등이 있을 수 있고 그 외에도 두통이나 몸살 기운(근육통), 구토나 설사 등이 있을 수도 있다. 현재 진단적 검사나 치료제 사용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 신종플루를 의심하는 기준으로 규정한 것은 열이 37.8도 이상 나고, 동시에 기침, 목이 아픈 증상, 콧물이나 코막힘 세 가지 중 하나 이상 있는 경우다. 만약 신종플루에 걸렸다고 느낀다면 우선 거점병원을 방문해 진료를 받아야 한다. 또 기침이나 재채기를 할 때 휴지로 코와 입을 가리고 쓰고 난 휴지들은 주의해서 버려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명절 대이동으로 공공장소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으므로 가급적 그 장소를 피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염을 막기 위해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 일단 편히 쉬고, 많은 양의 수분을 섭취하는 것도 중요하다. 만약 신종플루 확진이 내려진다면 타인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고 처방된 타미플루나 리렌자를 복용해야 한다. ◆신종플루에 걸렸다면 고향에 내려가기 전에 신종플루 예방수칙을 다시 한 번 점검하고 만약을 대비해 고향 근처의 거점병원과 약국을 확인하도록 한다. 추석연휴 기간에도 전국 454개 응급의료기관과 253개의 전국 모든 보건소, 1천300여개의 보건지소가 신종플루 비상진료를 실시한다. 이중 보건소는 매일, 보건지소는 3분의 1씩 돌아가며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진료한다. 이에 따라 낮에는 보건소나 보건지소, 야간 및 새벽에는 응급의료기관에서 신속하게 치료를 받을 수 있다. 거점약국도 당번약국을 지정해 연휴기간 중 최소 600개 이상을 매일 운영한다. 지역별, 일자별, 시간대별로 이용가능 한 의료기관, 약국 등은 복지부, 중앙응급의료센터, 질병관리본부, 각 보건소 홈페이지 등에 게시돼 있으며, 응급의료정보센터(1339), 건강보험공단 콜센터(1577-1000), 보건소(129)에서도 전화로 알아볼 수 있다. 특히 1339에서는 신종플루와 관련된 진료 상담도 가능하다. /이현주기자 sun@kbmaeil.com

2009-10-01

창의성을 키우는 다양한 소통놀이

마음을 열고 사고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분위기 조성이 매우 중요하다. 마음을 열게 하고 소통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놀이나 게임이 아주 좋은 방법이다. 창의성을 길러주기 위해서 놀이나 게임을 할 때는 창의성 요인을 고려하여 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면 유추성과 관련된 학습을 할 때는 스무고개나 퀴즈풀기를 하고, 유창성과 관련된 활동을 할 때는 끝말잇기나 스피드 퀴즈 같은 게임을 하면 좋다. 각 요인별로 알맞은 놀이를 몇 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유추성 및 호기심을 길러주는 비밀상자 게임을 해 보자. 이 게임은 속을 들여다 볼 수 없는 상자를 준비하여 그 속에 어떤 물건을 넣은 다음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아맞히는 놀이이다. 이 활동을 할 때 아이들은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 기관을 다 이용할 수 있다. 냄새를 맡아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상자를 흔들면서 소리를 들어보고, 식품 종류라면 맛을 보는 등 여러 감각기관을 활용하여 물건이 무엇인지 알아맞힌다. 처음에는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물건을 넣다가 나중에는 구조가 복잡한 물건을 넣고 무엇인지 알아맞히게 한다. 다음 민감성 및 정직성과 관련된 오감놀이를 해 보자. 창의성에서 이야기하는 정직성은 도덕적인 개념이 아니라 자신이 관찰한 것과 생각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꾸밈없이 표현하는 태도를 말한다. 청각놀이의 경우 시계소리, 새소리, 시냇물 소리 등을 가족과 함께 듣고 소리가 들리는 대로 적어보게 한다. 우리는 흔히 시냇물 소리를 `졸졸졸`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들어보면 물의 양, 개울의 모양, 물의 빠르기 등에 따라 소리가 각각 다르게 들린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같은 시냇물소리도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고 모든 사물을 다르게 보는 시각이 생기게 된다. 같은 종류의 사과나 나뭇잎에서도 다른 점을 찾아낼 정도가 되면 이 활동은 성공이다. 창의는 남과 다른 점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므로 이러한 활동은 간단하면서도 매우 효과적이다. 다음 융통성과 관련된 놀이로 다른 용도 말하기를 해 보자. 다른 용도 말하기는 어떤 물건을 정한 후 그것의 원래의 용도 이외에 다른 쓰임새를 많이 말하는 게임이다. 가족이 할 경우 두 팀으로 나누어서 하면 더 재미있다. `두루마리 화장지의 다른 용도 말하기`가 주제일 경우 `노래방에서 머리띠로 두른다`, `뭉쳐서 종이 눈싸움을 한다` 등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런 활동은 고정관념을 깨뜨리게 하고, 실제 생활에서 같은 물건을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할 수 있게 되므로 그 효과가 크다. 생활 속에서 자녀의 창의성을 늘 자극하기 위해서 다음 방법도 권하고 싶다. 자녀가 외식을 하자고 할 때 선뜻 요청을 들어주지 말고 주어진 주제에 대한 생각을 50가지 이상 적으면 외식을 시켜주겠다고 약속을 한다. 그리고 모조지 1/2 정도 크기의 종이를 벽에 붙여놓고 번호를 적어가며 주제에 대한 생각을 쓰도록 한다. 주제 : 두루마리 화장지를 다른 용도로 쓴다면? 이렇게 하고 며칠이 걸리더라도 50개가 달성되면 외식을 하는 것이다. 이런 훈련은 처음에는 어려워 보이지만 어느 정도 숙달되면 예상 외로 아이디어가 많이 나오게 되고, 한 가지 주제로만 계속 생각하기 때문에 몰입훈련을 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창의성 교육을 별도 프로그램을 가지고 시키는 것도 필요하지만 생활 속에서 이렇게 게임이나 놀이를 통해 쉽게 접근하는 것도 매우 좋은 방법이다. Create yourself!

2009-09-30

세기의 전투기

제1차 세계대전에 사용되었던 프로펠러 전투기들은 전투보다는 정찰과 연락이 주 임무였다. 주 무기는 총이었고 재래식 폭탄을 직접 던지는 원시적인 방법이 동원됐다. 총도 요즘처럼 비행기에 장착된 것이 아니라 비행기를 조종하며 권총이나 소총을 이용해 직접 사격하는 방식이었다. 제트 엔진 등장은 전투기 개발 역사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제트기 시대의 문을 연 첫 국가는 독일이다. 항공기 설계자였던 에른스트 하인켈이 개발한 HE178이 그 주인공이다. 1939년 8월 27일 처음 비행한 He178은 한스 폰 오하인 박사가 개발한 엔진과 헹켈 항공사의 특별 부서에서 제작한 항공기를 결합한 작품이다. 영국에서는 이보다 앞서 프랭크 휘틀이 제트엔진을 개발하고 있었지만, 정부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해 `세계 최초 제트기`의 영예를 He178에 넘겨주게 된다. 하지만 이후 정부 지원을 받아 완성된 휘틀의 제트엔진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첫 전투기인 글로스터 E28/39에 장착됐다.1941년 5월 14일 상공에 날아올랐다. 하지만 국제항공연맹이 인정한 최초 제트 비행은 1940년 8월 27일 이태리의 카프로니 캄피니 CC-2의 비행이다. He178의 첫 비행은 극비에 부쳐져 제2차 세계대전까지 그 존재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대 전투기인 첫 제트 `전투기`는 쌍발엔진의 하인켈 He280. 이 전투기는 1941년 3월 30일 첫 비행에 나섰다. 이 비행기는 3바퀴의 착륙장치와 비행기가 격추됐을 때, 공기압축으로 조종사를 사출시키는 좌석 등의 앞선 기술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 공군은 실전배치가 가능한 세계 최초의 제트기 개발을 위해 중도에서 프로그램을 중단했다. 이를 대신해 개발된 것이 바로 메서슈미트 Me262 슈발레(Schwalbe)다. 슈발레는 독일어로 `삼키다`라는 뜻이다. Me262는 시속 870km의 빠른 속도와 4개의 30mm 기관포를 갖췄다. 영국의 첫 실전배치 제트기는 글로스터 미티어로, 1943년 3월 5일 첫 비행을 했다. 자동차로 유명한 롤스로이스사의 휘틀 W2 엔진을 장착한 이 비행기는 첫 교전을 제트 전투기가 아닌 독일의 무인비행 유도폭탄 V-1과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미국은 독일과 영국에 비해 뒤늦게 제트기 개발에 나섰다. 첫 생산품은 1944년 1월 8일 록히드마틴 스컹크웍스사의 XP-80이다. 제트기의 이름인 `P-80`앞에 붙은 `X`는 시제품을 뜻한다. P-80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세 대가 유럽에 도착했으나, 실제 임무에는 맡지 못했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에서는 F-80이라는 이름으로 지상공격 및 정찰 임무를 왕성하게 수행했다.생각 생각 ▶초등1. 제트기 시대의 문을 연 첫 국가는 어느 나라의 누구인가요?2. 세대 최초의 제트 전투기는 무엇인가요?3. 기사에 나온 전투기 개발의 역사를 요약해 보세요.

2009-09-30

캄보디아에서 배운 현명한 지혜

이슬 동지여고 3나와는 전혀 다른 그들을 만났던 날을 내가 기억하는 이유는, 우리보다 가난하고 냄새 나며 현저히 낮은 생활을 하고 있던 그들의 문화에 받은 문화적 충격 때문이 아닌, 가난 속에서도 삶에 대한 희망으로 최선을 다 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존경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작년 10월, 11월에 걸쳐 10일간 캄보디아로 해외봉사를 다녀왔습니다. 다들 `힘들었지?`라며 안부를 물었지만 `음… 아니?`하며 갸우뚱거리는 것이 제 대답이었습니다. 처음으로 하는 해외 봉사였지만 정말 즐겁게 생활하고 봉사하다 오는 것이 전부인 느낌입니다. 물론 24시간 내내 즐겁고 행복했던 것은 아니지만, 지난 날들을 회상해 볼 때는 늘 `아… 참 너무 행복하다.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심지어는 `여기에 더 있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저는 무엇을 하러 비행기로 6시간이나 날아가야 하는 캄보디아까지 간 것이었을까요. 아니, 무엇을 얻으러 캄보디아까지 가야했던 것일까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저는 그곳에 베풀어주고 온 것보다 얻어온 것이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캄보디아 공항에 도착했을 때 바닥에서 올라오는 그 습습한 열기, 엄청난 습도에 한번 숨을 고른 뒤에야 캄보디아 고유의 분위기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호텔로 향하는 버스에서 동남아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의 사람들의 모습과 야자수와 같은 잎이 넓은 나무, 높은 건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수도 프놈펜의 모습에 우리나라와는 너무나 많이 달라 어색하게 느꼈습니다. 드디어 내가 다른 세상에서 떨어져 와있구나 하는 생각에 한껏 마음이 부풀어 있었습니다. 캄보디아에서 지낸 10일 동안 저는 도마뱀이 천장을 기어 다니는 방에서 지냈습니다. 우리나라 만큼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다거나, 정수기에서 나오는 시원한 물을 마시는 것, 그리고 인터넷에 접속해 하루의 뉴스를 확인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10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10일, 저는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으로 바쁘게 살아가던 그 어떤 때보다 정신적으로 풍요롭고, 행복했던 시간을 보냈습니다. 출발하면서 생활환경의 불편함에 대해 불만 섞인 걱정을 늘어놓았던 제가 한없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다음날 드디어 봉사활동을 하게 될 우동지역으로 향했습니다. 버스로 약 4시간 정도를 달렸는데 캄보디아의 풍경은 마치 그림 한 폭을 보는 듯 했습니다. 티끌하나 없는 파란 하늘에 넓은 초원에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집, 그리고 마른 소들과 그 소를 모는 현지인도 영원히 잊지 못 할 풍경이었습니다. 제가 봉사하였던 곳은 우동지역에 있는 청소년센터입니다. 우리나라에 문화원과 같은 곳으로 여러 학생들이 와서 많은 문화를 배우는 곳입니다. 정좌와 센터 본 건물이 있는 그 곳 처음 봤을 때는 많이 허술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10일 동안 오전에는 정원 정리와 페인트 작업으로 센터를 보수하고, 오후에는 현지 친구들과 서로의 언어 가르쳐주기, 서로 문화놀이 가르쳐주기 등으로 여가 활동을 하였습니다.계속

2009-09-30

(5) 모든 걱정은 사소하다

오늘 하루 그대 일과는 위대하였고 거기에 파생하는 걱정은 사소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그 사소함이 충분히 위대할 수 있었던 그대 일과를 망쳐버렸다. 실은 일과를 망친 것도 아니다. 망쳤다고 생각하는 건 그대가 느끼는 `사소함이란 유령` 때문이다. 대부분의 걱정은 사소한 것에서 출발하고 그것이 그대 하루를 번민하게 만들므로. 오늘 하루 얼마나 사소함이 그대 영혼을 너덜거리게 했는지를 증명해보자. 한 달에 한 번 봉사하러 가는 그대, 오늘도 상담자의 편지를 개봉한다. 기름을 먹인 듯한 반질거리는 편지지에 세로로 정갈하게 써내려간 글엔 가을을 맞는 사내의 우수가 담겨 있다. - 어김없이 가을이 왔네요. 입술은 바싹 말라가고, 책을 읽어도, 글을 써도 예전처럼 집중되지 않아요.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면담자의 아픔은 깊고, 그대 자질은 얕기만 하다. 최선을 다해 들어주었건만 결과는 그대의 이러한 사소한 걱정이 그대를 압도한다는 사실이다. `내게 누군가의 얘기를 들어줄 자질이 없는 게 아닐까? 영혼이 아프다는 그 사람에게 필요한 말은 무엇이었을까? 왜 더 많은 것을 주지 못했을까?`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자책하고 자책한다. 하지만 자책은 불필요하다. 그대는 성실하게 그의 얘기를 들어주었고, 어쩌면 편지를 쓰는 순간 그 사람은 이미 스스로 치유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봉사를 마친 그대는 급하게 공식 자리에 참석할 일이 생겼다. 그제야 그대는 복장을 살핀다. 살짝 찢은 청바지에 흰 점퍼를 입은 그대는 망설일 수밖에 없다. 공식의 밥상에 권위주의라는 주요반찬이 빠진 적이 없으므로 자기검열에 빠진 그대는 또 사소함에 목매기 시작한다. 가을 분위기에 맞는 갈색 원피스를 갈아입고 나오기엔 시간이 촉박하고, 운전대를 잡은 그대는 빨간 신호등에서 교차로를 건널 만큼 찢은 청바지 패션에 골몰한다. 허겁지겁 자리에 앉았건만, 마음이 편치 않으므로 꼬리뼈는 아파오고 지루한 시간이 지속된다. 옆자리 누군가가 흘깃 쳐다만 봐도 찢어진 청바지를 탓하는가 싶어 식은땀이 난다. 실은 갈색 원피스와 찢어진 청바지 사이엔 별 차이가 없다. 투명 비닐 따위를 첨단패션이라고 뒤집어쓰지 않는 한 아무도 그대를 주목하지 않는다. 그대의 고민은 그대가 혹은 세상이 만들어 놓은 허상의 지표를 따라야 한다는 부담에 지나지 않는다. 행사가 끝난 뒤 그대는 지인들과 정담을 나누기 시작한다. 당신과 따로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지인의 눈신호를 보면서 그대는 기꺼이 시간을 할애해야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사할 사람은 많이 남았고, 그대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지인은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그대는 자책한다. 의례적 인사는 접어두고 지인의 얘기를 먼저 들어줄 걸. 하지만 이 역시 사소한 고민에 지나지 않는다. 지인은 그대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당신을 기다렸던 것이고, 그 부탁이라는 것은 꼭 오늘 이 자리가 아니어도 가능한 것이다. 그야말로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행복해지고 싶은 우리는 정작 그 행복을 위해 너무나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고 말하는 책이 여기 있다. 리처드 칼슨의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창작시대, 2000)는 알게 모르게 우리가 얼마나 사소한 것들의 일상에 얽매여 사는지를 곱씹게 해준다. 사소한 오해가 가져다주는 걷잡을 수 없는 파국, 생각과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무분별성, 자기 능력을 의심하거나 회의하는 피곤함, 수시로 변하는 기분에 집착하는 자기연민, 스트레스를 밖으로 표출하지 못하고 환경 탓으로 돌리는 비겁한 자아 등은 모두 인간이 가지는 특질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일수록 이 허상의 우물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 우물에서 질퍽거리는 동안 우리 섬세한 영혼은 잘 보이지도 않는 우물벌레에게 야금야금 갉히고 만다. 작가는 말한다. `몸의 주인이 당신인 것처럼 감정의 주인도 당신이다. 행복은 현재 당신 마음속에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사소한 것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는지도 모르겠다.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기엔 우리 생이 아직은 환희와 풍요의 나날이므로.(소설가)

2009-09-29

에이스리서치 예천출신 조재목 대표

경북 예천출신의 조재목(49) 에이스리서치 대표는 대구·경북지역에서 정치지망생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사다. 대구·경북지역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정치전문 여론조사기관으로는 손가락에 꼽는 실력을 가졌다고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도 조사연구방법론에 관한 한 국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할 만큼 치열한 공부를 통해 정치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런 자부심으로 대구에 여론조사전문기관 에이스리서치를 세운 지 벌써 15년. 지난 2003년에는 서울에, 2005년에는 중국 북경에 별도 법인을 세웠다. 주로 외국계 기업들이 선점하고 있는 여론조사업계에서 꿇리지 않고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에이스리서치는 앞으로 수요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이는 기업 마케팅 분야를 더욱 키우려는 의욕에 가득 차 있다. 조재목 대표를 최근 새로 단장한 서울시 강남구 논현동 사무실에서 만나 회사 설립을 전후한 뒷이야기, 선거여론조사를 둘러싼 에피소드 등을 들어봤다. 편집자주 -대구·경북 여론조사 전문기관으로서 서울 사무실 확장·이전이 반갑습니다. ▲저는 1994년 대구에서 처음 에이스리서치를 설립해 15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는 2003년 1월 대구와는 별도로 서울 에이스리서치를 설립했죠. 이는 대구에서 성장한 기업이 돈을 번 뒤 서울로 옮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나름의 애향심 때문이기도 합니다. 중국법인은 2005년 북경에 사무소 개념으로 설립했는데, 앞으로 중국이 세계 경제를 주도할 것이란 전망이고 보면 중국시장이 크게 성장할 것으로 봅니다. 에이스리서치에 근무하는 상근 직원은 15명이다. 그렇지만 비정규 계약직은 100여명을 넘어선다. 전화 여론조사나 면접조사나 모두 일거리가 있을 때마다 채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서울 사무실에만 전화부스가 60석 있고, 대구 사무실은 서울보다 더 커서 80석의 전화여론조사 부스가 상시운영되고 있다. 연간 매출은 15억~20억원 정도라고 했다. “일 년씩 계약하는 마케팅 조사부문보다는 단발적인 정치여론조사나 사회여론조사에 치중해 왔기에 매출규모가 크지는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조 대표는 “선거가 있는 해는 매출규모가 크게 변하니까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리서치업계에서 에이스리서치의 위상은 어느 정도입니까. ▲리서치업계는 기본적으로 자본력이 뒷받침된 외국계 업체가 톱을 달립니다. TNS나 닐슨이 1위와 2위를 다툽니다. 이들 업체들은 주로 기업마케팅을 다루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기업비밀도 많이 다루니까, 일반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바라지도 않구요. 토종브랜드로는 한국리서치나 갤럽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에이스리서치는 기업마케팅 부문보다 정치나 정책분야 조사를 많이 하다 보니 매출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그래도 전국에서 15위권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조 대표가 자본력이 뒷받침돼야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경쟁이 치열한 리서치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데는 사연이 있었다. 조 대표는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때 대구로 이사 와서 남산초등학교, 사대부속중학교, 영남고교를 거쳐 1988년 계명대 심리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이어 1990년 계명대 대학원 심리학과 석사를 취득한 뒤 박사학위를 위해 곧바로 프린스턴 대학 유학을 가려 했다. 그런데 그 해에 계명대에 처음 심리학과 박사과정이 생겼다. 학교에서는 “박사과정 1회 졸업생은 특혜가 있으니, 유학은 안 가도 교수가 될 수 있다”고 설득을 했고, 그 말에 대학교수가 꿈이었던 조 대표는 그냥 눌러앉아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비사특별장학생으로 전면장학금까지 받았다.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니 지도교수와 사이가 벌어져 학업에 열중하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결국 조 대표는 1994년 학교를 나와서 에이스리서치를 설립해 리서치업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정치 여론조사를 처음 한 고객은 누구였습니까. ▲최초 고객은 대학 다닐 때 문희갑 전 시장이 무소속으로 대구시장에 출마했을 때로 기억합니다. 정치여론조사로는 그때가 처음이었고, 회사를 차린 후 본격적으로 한 것은 얼마 전 돌아가신 이의근 전 경북도지사 선거 때입니다. -정치 여론조사를 하는 동안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은데요. ▲박근혜 전 대표가 대구 달성군에 자리 잡게 된 데는 제가 일조를 했던 일화가 있습니다. 당초 박 전 대표는 경북지역 보궐선거에서 문경·예천에 내정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구 달성군에 상대후보가 당시 실세였던 엄삼탁 전 병무청장이 내정되면서 적수를 찾을 수 없게 됐습니다. 당시 대구 지부장이었던 강재섭 전 대표가 이를 두고 고민하길래 제가 그랬습니다. “문경·예천에 내정돼 있는 박근혜 전 대표를 국민적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 만큼 달성에 냅시다. 여론조사를 해 보면 알겠지만, 엄삼탁 후보에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후보로 생각됩니다”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한 강 전 대표가 이를 허락했고, 여론조사를 해 보니 과연 박 전 대표가 이기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에 따라 박 전 대표는 대구 달성군, 문경·예천에는 당시 문경전문대 학장인 신영국씨가 공천됐고, 의성에는 정창화씨가 공천돼 대구·경북지역에서는 보궐선거에서 모두 이기는 결과를 연출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난해 있었던 18대 총선도 친박연대와 친박무소속 후보의 출현으로 상당히 혼란스러웠는데, 어땠습니까. ▲당시 수도권과 대구·경북지역 총선의 선거결과는 모두 예측 가능했습니다. 차이가 크게 나타난 곳은 박근혜 효과가 더 나온 지역이었다는 분석입니다. 처음 친박연대나 친박무소속 연대후보들은 그리 선전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언론에 보도되는 투표 7일 전까지도 그런 양상을 보이다가 막판 3,4일을 남겨두고 여론조사결과가 뒤집어진 겁니다. 그래서 일반국민들은 막판 여론조사 결과를 알 수 없으니, 뒤집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여론조사를 했던 후보들은 자신이 이겼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셈입니다. -정치여론조사 가운데 어떤 선거가 여론조사 결과와 잘 들어맞는지요. ▲여론조사로 선거결과를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대통령선거입니다. 이명박 대통령 경선결과나 본선 선거결과 모두 1% 이내 오차로 맞췄으니까요. 그다음이 광역자치단체장, 그리고 기초자치단체장 선거입니다. 제일 어려운 게 국회의원 총선입니다. 총선의 경우 그때 어떤 바람이 부느냐에 따라 막판 뒤집기가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궐선거는 결과 예측이 매우 쉽습니다. -그러면 지난 4월 경주지역 재보선은 어떻게 된 겁니까. 여론조사가 상당히 빗나가는 바람에 말들이 많았는데요. ▲당시 경주지역 재보선 때는 한국 유수의 여론조사전문기관들이 모두 틀렸습니다. 이런 경우는 해석도 어렵습니다. 갤럽의 경우 한나라당 정종복 전 의원이 12.8%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고, 중앙일간지 자체조사에서도 14% 앞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저는 그래도 9.8% 앞서는 것으로 나타나 결과와 제일 작은 오차를 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결과가 빗나갔으니, 조사전문가로서 뭐라 변명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여론조사를 하는 것은 국을 끓이는 데, 국 맛을 보기 위해 다 먹어볼 수 없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국 맛을 보려면 국을 잘 섞은 뒤 떠먹어봐야 국맛을 알 수 있겠죠. 그런데 경주지역의 경우 이 국에 다른 이물질이 들어 있었던 겁니다. 즉 성실히 응답하지 않으려는 유권자들이 너무 많았던 거죠. 저도 현지에 가보니 분위기는 한나라당이 불리한 것 같은 데, 여론조사결과는 여당후보가 이기는 것으로 나오니 그대로 발표할 수밖에 없었죠. -여론조사 전문기관 대표로서 보람은 어떤 것입니까. ▲정부 정책이나 지역 현안문제에 대한 조사에 여론조사가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지역민의 여론을 응집하는 역할을 할 때 보람이 있죠. 또 어떤 정책이 여론조사를 통해 사전적으로 맞을까 어떨까를 조사할 수 있습니다. 국민의 눈높이와 맞는 정책인지 아닌지를 알려주고, 해결책도 제시하는 것이 여론조사의 순기능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정책실행 평가도 가능하죠. 결국 여론조사는 국가나 자치단체 운영에 꼭 필요한 업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여론조사 전문가로서 앞으로 다가올 19대 총선을 전망한다면. ▲지역구도가 많이 완화돼 변화가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동안 영남과 호남이 갈라져 있었다면 내년 지방선거를 계기로 완화될 것이고, 19대 총선에서는 더욱 완화돼 후보의 능력위주로 선거가 치러지지 않을까 하는 전망입니다. 나라발전을 위해서도 후보능력 위주로 뽑는 그런 선거가 되길 희망하기도 하구요. -대구·경북지역민에게 당부할 말이 있다면. ▲여론조사는 DM이나 방문판매와 같이 영리목적이 아닙니다. 즉 여론조사와 마케팅은 구분돼야 한다는 겁니다. 여론조사 요청이 올 때 성실히 답변해주시면 지역주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2009-09-28

`델마와 루이스`

여자, 모순을 넘어 세상을 향해 쏘다영화계에서는 논쟁이 생기면 흥행에 성공한다는 오래된 속설이 있다. 그래서 일부러 논쟁을 만들어 내려 하는 제작들이 있는가 하면, 영화의 본질상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있고, `델마와 루이스`처럼 예기치 않게 논쟁에 불을 붙이게 된 영화도 있다. 이 논쟁의 아이러니는 그것이 바로 `델마와 루이스`가 비판적으로 조명한 성차별주의적 관점에서 촉발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개봉하자마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흥행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이 로드무비 영화는, 논쟁과 별개로, 그 자체로서 비범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겉으로 보기에도 화려한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다. 지나 데이비스와 수잔 서랜든은 동시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되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 외에도 `델마와 루이스`는 감독상·편집상·촬영상 등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고, 시나리오작가인 칼리 쿠링에게는 각본상을 안겨주었다.이 영화를 길과 여행의 속도감으로 볼 때, 남성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여성의 현실을 중심으로 나타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비극의 화근은 여행 가방 속의 권총 한 자루, 그리고 델마와 루이스의 자존심이었다. 이는 여성은 결코 나약한 존재가 아니며 더 이상 남성에게 굴복하지도 않는다는 의미이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오만과 편견에 가득한, 소위 이 사회의 `강자` 들을 향하여 델마와 루이스 두 여주인공을 등장시킴으로써 사회적으로 희생당하고 있는 약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그렇게 시작된 도피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되고, 마침내 두 여성은 해방감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의 본성을 되찾게 된다. 여성으로서 자신들이 받았던 사회에서의 억압과 남성들의 차별·구조적인 모순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고, 단지 비극적인 순간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감을 찾고 기쁨에 넘친다. 이것이 바로 `아이러니` 이다. 그들은 경찰에 쫓기면서 자신들을 가두고 있던 사회의 벽을 뛰어넘는다. 그리고는 마침내 새롭게 세상에 눈을 뜨게 된다.그들은 말한다, `모든 것이 달라져 보인다.` 고, `새롭게 눈을 뜬 것 같다.` 고. 그들은 여성으로서의 자신,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되찾은 것이다. 그녀들을 죽음의 벼랑에 몰아넣은 것은 다름 아닌 남성이었다. 학대하는 남편, 성폭행을 일삼는 술집 남자, 돈을 훔쳐 달아난 사기꾼 등등의 남성들로 인해 두 여성의 삶은 급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현실은 본질적으로 `남성들이 지배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그 결과는 비극적이다. 아주 비극적인 영화의 결말은, 그러나 오히려 희망을 말하고 있다.아름다운 두 여성의 죽음이 결코 어리석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델마와 루이스가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희생된 가엾은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사건의 중심에서 문제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이 영화는 리들리 스콧 감독 특유의 영상미도 뛰어나지만 오락 영화로서의 재미와 스릴도 넘치고 남성과 여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며, 인간의 자유와 자아발견, 그리고 내적 성장에 관한 심리분석 드라마로서도 나무랄 데가 없는 걸작으로서, 대부분의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흥미로운 이야기와 라스트의 감동, 수려한 영상, 적재적소에 삽입된 음악까지 완벽히 갖춘 작품이다.

2009-09-25

배용일 향토사학자

"포항의 역사·문화 연구는 포항의 정신문화, 즉 포항의 역사·문화의 뿌리를 규명, 포항의 정체성을 정립해 유구한 포항의 역사문화를 떳떳하게 선양할 수 있는 시민의 자부심과 긍지를 앙양하기 위해서 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역사는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끌어 간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포항 미래의 밝은 역사는 포항을 사랑할 수 있는 자부심과 긍지가 있는 시민들만이 이끌어 간다는 가르침입니다."22일 포항시 북구 흥해읍에 위치한 포항대학 캠퍼스성실관 203호에 자리잡은 연구실에서 향토사학자 배용일(68·사진) 포항대학 초빙교수를 만났다. `일월(日月)정신`을 `포항정신`으로 최초로 주장한 그는 냉철한 `역사학자`라기보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닌 `맏형` 같은 인상을 풍겼다. 그는 인터뷰 내내 시종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포항시의 정체성과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문화행정과 시민의식 확대, 기관단체 간 융합교육 강화 등에 밴 자신의 철학을 힘주어 강조했다. 1941년 포항에서 태어난 그는 포항고, 고려대 교육대학원 역사교육과를 졸업한 뒤 `박은식과 신채호 사상의 비교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고향인 포항에 정착해 학문적이고 체계적인 포항향토사 연구로 포항의 정체성을 정립해 이를 대내외에 알리고 시민의 역사·문화의식을 고양시키며 시정발전을 위한 여러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포항의 선진화에 앞장서 왔다. 1980년 포항시 민방위강사가 되어 국민정신교육분야를 강의할 때 포항의 역사를 먼저 알아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졌다는 그는 그러던 중 1984년 `포항시사` 자료를 모으면서 `포항의 정체성 찾기`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1987년 시작된 `포항시사`와 `영일군사`등 포항향토사와 관련한 저술 활동(7권)뿐 만 아니라 `포항지역 정신문화의 전통성과 현대적 발전방안`등 일반 논문도 수십편 저술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보이면서 2005 포항시민상 수상, 경북도문화재도록 편집위원, 포항시사 편집위원장, 포항정신문화연구회 부위원장 등의 활동을 통해 향토사를 정립하는 데 앞장서 왔다. 포항의 정신을 정립하는 데 반세기의 시간이 흘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연오랑 세오녀`설화를 연구해 지난해는 이를 `연오랑 세오녀 신화`로 주장하면서 이를 포항문화의 뿌리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를 포항정신의 고향이며 포항문화의 원류로 주장하고 있다.문화 행정·시민의식 확대 등 역사 바로 세우기 앞장`연오랑 세오녀`의 일월정신… 영일만 발전의 원동력“깊고 폭넓은 연구로 후학의 길 밝게 열어주고 싶어” 연오랑세오녀의 일월사상과 정신은 한국 선사문화의 원류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족오태양숭배사상과 건국이념인 천손사상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인류 출현 이후 일월(태양)은 인간 신앙 최고의 숭배대상이었습니다. 일월은 온누리를 밝히는, 모든 생명을 생동케하고 이롭게 하는 광명정대(光明正大)사상의 주체로서 홍익·풍요·희망·용기·정열·개척·화합의 진취적 삶을 이루게 하는 최고의 정신적 가치를 생성하는 실체입니다. 연오랑세오녀 일월정신은 영일만 포항의 천혜적 지리환경과 유구한 역사적 특성을 함축하며 포항발전의 원동력이 되어 왔다는 사실입니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광명정대의 일월정신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연오랑세오녀 일월신화를 비롯하여 해맞이의 성지, 국토방위의 호국정신, 포은 정몽주와 농고 최세윤의 충절정신, 제민창 포항창진 설치와 포항 5도의 개척정신, 동학사상의 요람, 학도의용군의 자유·민주 수호정신, 포스코의 영일만신화 창출, 새마을운동 의 산실, 대통령을 배출한 위대한 포항정신으로 승화되어 왔습니다.” 그는 그동안 포항이 경주의 접경 배후지역으로 광북 후 현대에는 한국근대화의 핵심도시로서 국가 경제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해오는 동안 포항은 포항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과 연구에 소홀해왔던 것이 가장 아쉽다고 했다. 이러한 경향은 포항의 대학에 인문과 예술 계통의 학과가 전무한 결과까지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에 그는 시민과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포항문화원, 여성문화회관, 문화해설사 양성과정, 교사직무연수 등에서 `포항문화의 뿌리, 연오랑 세오녀 일월신화`라는 제목의 포항역사와 전통의 강의를 통해 향토에 대한 자긍심과 포항시민으로서의 자부심을 확산시켰다. “포항의 역사·문화 연구는 포항의 정신문화, 즉 포항의 역사·문화의 뿌리를 규명, 포항의 정체성을 정립해 유구한 포항의 역사문화를 떳떳하게 선양할 수 있는 시민의 자부심과 긍지를 앙양하기 위해서 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역사는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끌어 간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포항 미래의 밝은 역사는 포항을 사랑할 수 있는 자부심과 긍지가 있는 시민들만이 이끌어 간다는 가르침입니다.” 포항을 `연오랑 세오녀의 고장`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한 그의 열정은 또다시 불붙었다. 지난 5월 포항시 북구 흥해읍 학성리 도로개설 공사현장에서 발견된 포항 중성리 신라비와 `사랑에 빠진것`이다. 최근 중성리 신라비는 국립문화재연구소로부터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신라 비석으로 판명됐고 그는 포항시사 집필위원들과 함께 이 비문을 최초로 판독했다. 비문을 판독한 그는 발견된 비석의 서체와 내용이 국보인 포항 냉수리 신라비와 비슷한 점으로 미뤄 제작시기를 6세기경으로 추정했다. 오는 10월 포항시와 한국고대사연구회가 주관하는 이 비석의 가치를 조명하는 학술대회에서 그는 `포항 중성리 신라비의 발견경위와 고대의 포항과 흥해`라는 주제 발표를 한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비석의 발견 경위 보고와 그 발견 지역인 포항 흥해의 역사 및 고고학적 고찰에 이어 중성리비가 신라 금석학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비문의 어문학적 검토, 비문 내용과 건립연대, 비문의 서체와 고신라 문자생활과 같은 개별 발표와 이에 대한 개별 및 종합토론이 있을 예정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고대 포항이 역사적으로 어떤 곳인지 재조명 하게 될 것 입니다. 특히 흥해의 발전 양상을 찾아보고 영일이 근기국 시대의 소국이었던 것에 비해 흥해는 그에 못지 않은 진한의 한 소국이었음을 유추해 볼 것 입니다.” 이런 `빡빡한`논문 활동에도 `정신문화`발전에 대한 진한 애정은 그의 가슴 한 켠에 여전히 깊이 남아있었다. “포항의 정체성과 포항을 상징하는 조형물이나 큰 사업은 정기적인 계획과 연구를 통해서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후손들을 위해 좋은 자리는 어느정도 남겨두는 지혜를 가질 때 앞날의 시행착오를 줄이고 도시문화 전반과 조화할 수 있는 가장 포항적인 문화유물로 세계화에 나설 수 있을 것입니다. 무형의 정신문화운동은 오랜시간이 걸리더라도 시민자발적인 운동이 될 수 있도록 행정적인 뒷받침이 꾸준히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또한 나의 마지막 염원이자 앞으로 포항이 이루어야 할 가장 중차대한 다급한 일은 포항의 대학에 인문계통과 예술계통 학과를 개설하는 일입니다. 진정으로 포항이 21세기 문화시대에 세계 일류도시가 되는 것이 꿈과 희망이라면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온 시민이 머리를 맞대어 고뇌해야 합니다. 포항문화의 정체적 전통을 잇고 계발해 나갈 인재를 키우는 일은 시급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 모두가 그동안 경제성장의 가치를 우선과제로 두고 앞만 보고 달려오는 동안 묵묵히 지역의 역사·교육·문화 연구라는 한 우물을 고집해 시민들이 고장의 역사와 문화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해 향토애와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한 `자랑스런 포항인`이자 `진정한 포항시민`이 아닐까. “송구스러운 말씀일 따름입니다. 전혀 그런 생각하고 연구생활 한 것 아니며, 내가 포항을 위해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전공을 살려 힘닿는데까지 노력해 왔을 뿐입니다. 보다 앞서 씨를 뿌린 분들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광복후 대표적인 인사로는 교육의 하태환 선생님, 역사에 박일천 선생님, 문화에 이명석 선생님을 꼽을 수 있고 현재까지 꾸준히 활동해오신 대표적 원로로서는 신상률 경북예총 회장님, 서상은 호미수회장님을 비롯해 여러 중진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분들이 밟던 길을 나의 전공을 살려 보다 깊고 폭넓게 가꾸어 후학들의 길을 더욱 밝게 열어주고 싶을 뿐 입니다 ” 이는 `지역 문화계에서 오늘의 포항정신문화를 발전시켜 놓은 전위적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09-09-25

포항서 특강 허병기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

“녹색성장분야 기술인력 집중 양성” 고학력 청년실업자 9천300명 흡수 계획지역 산업기반 반영 특성화 학과로 개편전국적으로 60만명에 육박하는 실업사태 속에서, 근래의 취업시장은 개인에게 특별한 능력을 요구한다. 바로 개인의 `기술력`이다. 특화된 기술력은 냉랭한 취업시장에서 필수불가결한 `경쟁력`이다.한국폴리텍대학은 이러한 기술력을 국가지원을 통해 무료로 제공하는 곳이다. 최근 특강을 위해 포항을 찾은 허병기사진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을 만나 청년실업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먼저 한국폴리텍대학을 소개해 달라.▲폴리텍대학(Polytechnics)의 어원은 종합을 의미하는 `POLY`와 기술의 `TECHNIC`이 합쳐진 말로 `종합기술대학`을 뜻한다.전국을 권역으로 분할한 7개 대학과 4개의 특성화 대학으로 구성돼 11개 대학, 38개 캠퍼스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포항캠퍼스는 대구·경북권의 Ⅵ대학에 소속돼 있다.폴리텍대학은 국민 누구나 나이와 학력에 상관없이 입학해 학비 걱정 없이 기술을 익혀서 취업할 수 있도록 공공직업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포항캠퍼스의 향후 특성화 발전계획은.▲포항캠퍼스의 실적은 그 어느 캠퍼스에도 뒤지지 않고 우수하다. 금년도 양성과정 지원율 3:1, 2월 수료생 취업률 98% 등 전국에서 최상위권에 있다. 재학생 50% 이상이 전문대졸 이상 학력을 갖고 있으며, 연령별로는 20대가 88%, 연고가 포항인 학생이 83%로 대다수가 포항을 연고로 하는 군필 고학력생들이다. 이에 고객(기업+학생)들의 인사이트(insight)에 맞춰 특성화를 구축하고 있다. 지역산업 수를 반영, 올해 전기제어학과를 신설했고, 약 15억원을 투자해 컴퓨터응용기계학과는 선박기계제작 분야 선도학과로, 산업설비학과는 조선용접 특성화학과로 개편했다.2010년에는 포항시에서 중점 추진하는 연료전지, 태양광발전 신성장 산업에 필요한 인력양성을 위해 전기제어 학과에 약 10억원을 투자해 `신재생에너지 분야` 신성장동력 학과로 육성시킬 계획으로 있다.아울러 재학생 중 과반수가 전문대졸 이상인 점을 고려해 기술의 무한경쟁시대, 인문과학과 자연과학, 기술과 기술이 융합하는 통섭의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도록 융합형 기술 엘리트(크로스 오버)를 양성 할 것이다.-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한데.▲대학교 졸업 후 취업준비생 60만 명, 청년층 고용률 3년 연속하락. 이것들이 대한민국 청년 취업시장의 어두운 현주소다. 온종일 영어책을 끌어안고 공부하면서 면접 성형까지 준비하지만, 취업의 장벽은 높기만 하다.한국폴리텍대학은 청년실업자를 대상으로 향후 10년간 우리 경제를 이끌어 갈 녹색·신성장동력분야 중간기술인력을 중점 양성할 계획이다.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88만개 일자리 창출을 위한 녹색·미래신성장동력분야의 인력양성 정책에 부응하기 위해 올해부터 5년간 관련분야 50개 학과개편 및 신기술장비 구축에 655억(매년 131억 원)을 투입해 향후 5년간 9천300명의 고학력 청년실업자들을 흡수할 계획이다.21세기는 학력이나 간판보다는 실력이 중시되는 실사구시, 실용의 시대다. 제대로 된 전문기술 하나는 평생 직업을 보장받을 수 있다. 취업으로 고민하는 많은 청년이 기술 분야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고 기술의 가치, 땀의 가치를 실현하기 바란다./신동우기자

2009-09-24

메주 덩어리(일치의 소명)

원유술 주임신부 죽도성당중국 정부는 본토에 있는 약 50개의 소수 민족들의 장·단점을 파악하여 책자로 정리하고, 지도자들로 하여금 그 책자를 참고해서 잘 다스리라고 한다. 그 소수 민족중의 하나인 “조선족”의 장, 단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장점은 `이 세상에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살아남을 민족은 바로 조선족이다.` 그들은 참으로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어떤 역경과 환난 속에서도 억측같이 살아간다. 구 소련에서는 한밤중에 기차로 강제 이주를 시켜 사막에 던져 놓았지만 그들은 사막을 옥토로 만들었다. 중동 지역에서는 한때 살인적인 더위의 뙤약볕 속에서도 밤에 횃불을 밝혀들고, 대수로 공사를 기한 내 완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열악한 이민생활 속에서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요즈음 `24시 편의점` 처럼 열심히 모든 어려운 여건들을 극복하며 악착같이 살아가고 있다. 한강의 기적! 다른 나라들은 몇 백년 걸리는 경제성장을 몇 십년 만에 이룩한 놀라운 저력을 가진 민족이며, 온 세상이 멸망해도 살아남을 민족임을 장점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단점은 `죽어도 일치되지 않는 민족`이다. - 지금도 한 개울가를 두고, 서로 마주 보며 몇 백년 동안 앙숙으로 살아가는 문중들! 세계 유일의 분단국! 지역! 혈연! 학연! 오늘도 우리 사회는 모든 분야에 서로 갈기갈기 찢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을 `메주 덩어리`에 표현하고 있다. 메주콩을 삼고, 찧고, 뭉치고, 새끼줄로 꽁꽁 동여 메어 놓지만, 얼마가지 않아서 갈라지고, 틈새로 곰팡이가 번져 나가는 것처럼 지독히 일치되지 않는 민족이라 표현한다. 참으로 부끄럽고, 슬픈 우리의 모습이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셔서 실패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일치`였다. 당신 손수 밤세워 기도하시며 사랑하는 제자들을 선택했지만 그들은 당신을 배반하고 십자가에 그를 넘겼다. 예수님은 다른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훈계하시고, 질책하시고, 명령하셨지만, 이 `일치`만큼은 당신이 눈물을 흘리시며 간절히 기도하셨다. `요한 복음 17장` 고별사를 통하여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 바로 `일치의 삶`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습이요, 하느님의 삶이다. 그래서 “일치가 있는 곳에 구원이 있고, 구원이 있는 곳에 일치가 있다.” `일치의 삶`은 또한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과 거룩함을 드러내는 일이며, 아버지의 뜻이 완성되는 삶이다. 일치의 삶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며,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는 진리의 삶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바침으로써까지 `일치`를 이루어 내셨다. 오늘 우리 교회의 소명은 바로 분열이 있는 곳에 참된 일치를 가져오는 사명을 그 어떤 가치보다 우선적으로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

2009-09-24

창의적인 부모의 감정코치

초등학교 3학년인 동현이는 2학년 때 담임선생님으로부터 꾸중을 듣기 일쑤였다. 사교성이 많은 동현이가 공부시간에 옆짝과 소곤소곤 이야기를 자주하였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동현이가 소곤거릴 때마다 야단을 쳤다. 선생님께 인정을 못받고 잦은 꾸중에 주눅이 들어서인지 동현이의 성적은 학급에서 중간 정도에 머물렀다. 동현이가 3학년이 되자 새로운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3학년 때 선생님은 인상이 좋고 사교적인 동현이에게 호감을 가졌다. 공부 시간에 옆짝과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면 야단을 치기 보다는 쉬는 시간에 하라고 타일렀다. 얼마 후 중간고사를 치게 되었는데 동현이의 성적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동현이는 자기를 인정해주는 선생님께 더 인정받기 위해 공부하는 태도를 바꾼 것이다. 동현이와 같이 감성적인 아이는 누군가 자기의 감정을 조금만 이해해 주어도 태도가 확 달라진다. 감정코치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감정코치를 받은 사람이 받지 않은 사람보다 건강하고, 학업성적도 우수하며, 교우관계가 원만하다는 연구 보고가 있다. 감정코치를 받은 사람은 부정적인 감정 보다 긍정적인 감정에 더 많이 노출되고 무엇보다 정서적으로 안정된다. 그러므로 잠재능력이 무한한 어린 시절에 창의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감정코치를 잘 받아야 한다. 감정코치의 권위자 가트맨 박사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자녀의 감정에 대처하는 부모의 스타일에는 네 종류가 있다. 첫째, 부정적 감정을 무시하는 스타일이 있다. 이 유형은 자녀의 부정적인 감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렇게 하면 아이들은 무시당한 기분을 느끼게 되고, 슬픔과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고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자기의 슬픔이나 분노를 잘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둘째, 억압하는 스타일이 있다. 이 유형은 자녀의 부정적인 감정을 위협적인 말과 행동으로 규제하려고 한다. 이렇게 위협을 받으면 아이는 자신의 감정표현이 잘못된 것이라고 인식하게 되고 격한 감정을 다룰 줄 몰라 친구와 자주 다투게 된다. 셋째, 자유방임 스타일이 있다. 이 유형은 자녀가 부정적인 감정을 나타낼 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내버려둔다. 이 경우 자녀들은 일시적인 편안함을 느끼지만 감정을 적절하게 처리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므로 나중에 인내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된다. 넷째, 감정을 코치하는 스타일, 이 유형은 자녀의 입장이 되어 그 기분을 함께 느껴주고 감정을 해소하는 방법을 안내하는 가이드 역할을 한다. 감정코치형 부모에게서 자란 아이는 감정을 표현하는데 자연스러우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EBS에 감정코치와 관련된 내용이 소개된 바 있다. 한 여자 아이가 자신이 키우던 금붕어가 죽어서 울고 있다. 이때 감정코치형의 부모는 이렇게 말한다. “아빠가 어떻게 해줘야 되겠니?” “붕어를 살려줘..” “붕어든 사람이든 한 번 죽으면 살릴 수 없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 이렇게 시작하여 아이가 스스로 감정을 추스르고 해결 방안을 낼 때까지 부모가 공감하고 끝까지 지도를 한다. 이렇게 감정코치법을 적용하면 뇌가 적절한 자극을 받아 긍정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문제 상황에서 그 원인을 발견하고 스스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힘은 창의력의 원동력이다. Create yourself!포항제철지곡초 이용석 교사

2009-09-23

중국 자금성

중국 베이징에는 500년 넘게 절대 권력의 중심지였던 거대한 궁궐이 있어요. 중국 황제들이 살았던 궁궐, 자금성이지요. 자금성은 명나라와 청나라 두 왕조 시대, 중국의 중심지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이곳을 세상의 중심이자 신성한 장소로 생각합니다. 자금성에 살았던 중국 황제들은 하늘의 아들이란 의미로 `천자(천자)`라고 불렀습니다. 명나라 제3대 황제 영락제는 황제가 된 지 4년째인 1406년, 수도를 남쪽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기면서 거대한 궁궐을 지었어요. 약 100만 명의 사람들이 14년 동안 건설한 끝에 모습을 드러낸 자금성은 이전까지의 어떠한 궁궐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웅장했어요. 전체 면적 72만제곱미터, 건축 면적은 15만 제곱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건축물이었지요. 방의 숫자가 9000여 개나 됩니다. 자금성은 `자주색의 금지된 성`이란 뜻입니다. 이는 중국의 천문학(우주관)에서 우주의 중심으로 여겼던 북극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북극성을 진한 자주색으로 알고 있던 중국의 권력자와 천문학자들이 하늘의 아들인 천자가 머무는 궁궐의 색을 자주색으로 정한 것이지요. 이곳에는 황제가 나랏일을 볼 때 사용했던 책상과 의자, 보석, 미술품, 공예품은 물론이고 궁궐을 장식한 돌조각까지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자금성은 질서 정연한 대칭 구조로 돼 있는 것이 특징이지요. 크게 외조와 내정으로 구분되는데, 외조에선 황제가 공식적인 업무를 처리하고, 내정은 황제와 황후, 빈과 상궁들이 사용했던 사적인 공간이에요. 외조는 황제의 공식 집무실인 태화전(타이허텐)과 방문객을 만나거나 신하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중화전(중허뎬), 황제의 책을 보관하는 도서관이자 연회장이었던 보화전(바오허뎬)으로 구성돼 있답니다. 자금성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태화전은 황제가 중요한 나랏일을 결정하고 공식적인 행사를 치르던 장소이지요. 황제의 즉위식과 탄생 축하 행사, 결혼식, 국가의 칙령 발표, 외국 사신 접대 및 조공 등 나라의 중요한 행사가 주로 이곳에서 열렸어요. 태화전은 중국에서 가장 큰 건축물로, 온통 흰 돌로 이루어진 넓은 마당에 세워져 있어요. 황제만 다녔던 길을 따라 조각이 새겨져 있고, 건물 안과 밖에는 용과 봉황, 사자와 기린, 말과 물고기 등의 장식으로 꾸며져 있답니다. 내부도 금박 병풍과 옥좌 등으로 매우 화려하게 꾸며져 있어요. 또 태화전의 3단의 기단은 오직 하늘의 아들인 황제가 머무는 곳에만 사용되었어요. 한마디로 태화전은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축물이었지요. 생각 생각 ▶초등1. 중국 황제들이 살았던 궁궐의 이름은 무엇인가요?2. 기사에 나온 태화전의 특징을 써 보세요.3. 그외 알고 있는 중국의 문화유산을 적어 보세요.4. 중국의 문화재와 관련된 사진들을 모아 정리해 보세요.

2009-09-23

내가 만난 소중한 사람들 (2)

포항시 자원봉사센터 봉사수기 청소년부문 최우수상한 림오천고 2꽃동네에서 봉사활동을 체험하고 난 후 2월에는 포항 성모병원의 `마리아의집`이라는 여성자애원에서 주관하는 `함께 가자 이 길을`이라는 1년 동안 하는 봉사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마리아의 집에서 하는 봉사활동은 1년 동안 격주로 둘째, 넷째 토요일 마다 마리아의 집에 가서 몸이 불편하시거나 정신지체를 가지신 이모님들과 함께 가족이 되어 도자기를 굽거나 함께 정원을 가꾸고 요리활동 등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봉사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라면 꽃동네 친구들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 친구들이 아니었더라면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심을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선호와 꽃동네에서 만난 친구들이 다 남자들이여서 마리아 봉사를 하기 전 신경이 몹시 쓰였다. 예비 모임 때 학생 8명과 장애인 이모님 4분이 함께 하는 `동행`이라는 조에서 조장을 맡게 되었다. 영숙 이모님과 파트너가 되었는데 영숙 이모님께서는 몹시 꼼꼼하시고 요리도 무척 잘하셨다. 처음 만난 날 우리는 김밥과 떡볶이를 만드는 요리활동을 가졌다. 처음에는 내가 혼자서 일을 다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만 하고 있자 이모님께서는 순서를 가르쳐 주시며, 김밥에 들어갈 재료의 간을 맞춰 주셨다. 나중에는 김밥을 말기까지 하셨다. 4월 둘째 주 일요일. 흥해에 있는 생명의 숲에서 나무를 심고 산책도 하며 점심을 먹기로 했다. 관광버스를 빌려 휠체어와 필수품을 싣고 즐겁게 출발 했다. 나는 영숙이 이모님의 휠체어를 끌고 산책로를 올라가는데 걸어서 올라가기도 힘든 곳을 휠체어를 밀고 올라가니 정말 힘들었다. 그런데 봉사선생님께서 ``너희는 잠깐 힘드는 것이지만 이모님들은 계속 이렇게 생활해야 하는데 누가 더 힘들까?``라고 물으셨다. 선생님의 질문을 받고 고작 몇 시간을 못 참고 힘들어한 내가 부끄러웠다. 우리는 언제나 장애인이 될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아직 우리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나 역시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하지만 친구 선호와 꽃동네, 그리고 영숙이 이모님을 보면서 장애인은 결코 우리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좀 더 늦게 하고, 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보다 많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헬렌 켈러가 말했던 것처럼 `장애는 불행한 것이 아니라 불편한 것`뿐이다. 우리는 장애라는 것을 불행한 것으로 생각해 장애우들에게 아픔을 준다. 앞으로 장애를 불행하다고 말하지 말고 불편한 생활을 좀 더 편안하고 편견 없이 장애우들을 바라보며 장애우들에게 희망을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해외봉사를 나가서 금전적인 지원을 해주는 것도 좋지만, 주변에 있는 장애우들에게 먼저 작은 도움을 주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더 많은 사랑과 기쁨을 나누려고 한다. 마리아 집 봉사 프로그램이 끝나더라도 주변에 나의 작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친구들이나 시설에 찾아가고, 더 나아가 호스피스에 계시는 환자분들에게 작은 기쁨과 희망을 드리고 싶다. 또 학업에도 더욱더 매진하여 PD가 될 것이다.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과 장애우들의 삶을 카메라에 담아 그들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것이 나의 꿈이다. 그렇게 모두가 서로를 이해하고 도우며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하는 우리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끝

2009-09-23

지하철역 소극장 개관 정판규 대구메트로아트 대표이사

“2호선 대공원역, 새 문화공간 변신” 추석이후 연극·뮤지컬·콘서트 등 본격 공연2011년 대구세계육상대회 붐 조성에도 도움대구도시철도 2호선 대공원역에 전문 공연을 선보이는 `소극장`이 22일 개관했다.부산도시철도 광안역 소극장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문을 여는 대구메트로아트의 정판규(50·사진) 대표이사를 만났다.정 대표는 “이번 소극장은 2011년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의 성곡정 개최를 위한 붐 조성과 지하철이 시민들의 새로운 문화공간과 명소로 재창조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지하철 역사에 소극장을 마련한 이유는.▲대구지하철이 대구시민들의 발이 된지 어느덧 열여덟 해를 맞고 있다.지하철은 이제 우리 서민들의 일상이 되었다. 지하철이 그저 탈것의 하나로 고된 하루의 여정을 실어다 주는 지하철이 아니라 가고 싶고 타고 싶은 지하철이 되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었다.원래는 부산의 모 업체에서 먼저 시작을 하려다 그만둬 이번에 대구메트로아트가 사업자로 선정돼 5억여원을 들여 이번 소극장을 마련하게 됐다.-다른 소극장에 비해 대구메트로아트센터만의 장점이 있다면. ▲가장 큰 장점이라면 접근성이다. 지하철 역사 내에 위치하고 있어 도심 어디에서나 접근하기 쉽다.또 이 곳 대공원역은 2011년 대구세계육상경기대회의 중심에 있는 역사다.앞으로 대회 붐 조성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면서 서로 윈윈(Win-Win)할 수 있는 관계가 될 수 있을 것이다.또 다른 소극장에 비해 시설이 매우 뛰어나다. 350여평 규모인 소극장에는 220석 규모의 공연장과 리허설장, 분장실, 탈의실, 샤워실까지 모두 갖추고 있다.여기에 최고의 음향시설과 조명시설까지 갖추고 있어 규모만 작을 뿐 대형 공연장과 비교해도 장비 만큼은 손색이 없다.-앞으로 어떤 공연을 선보일 계획인지.▲22일 개관하기는 하지만 본격적인 공연은 추석 이후일 것이다.그동안 시뮬레이션 작업을 통해 보완해야 할 점을 찾아 보완해 좀 더 완벽한 시스템으로 관객을 맞을 예정이다.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공연을 선 보일 계획이다.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이 시간대별로 다른 만큼 거기에 맞는 공연을 할 생각이다.오전에는 주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형극이나 영어 연극 등을 공연하고 오후에는 작품발표회, 저녁에는 뮤지컬, 연극, 콘서트 등을 선보여 지역 공연문화 수준을 높일 수 있도록 하겠다./김낙현기자 kimrh@kbmaeil.com

2009-09-23

(4) 아버지를 부탁해

과히 신드롬이다. 아니,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창비, 2008)는 이제 신화가 되었다. 언제나 불황이라는 출판업계의 투정을 가벼이 웃어넘기듯 백만부 판매라는 빅뉴스를 독자들에게 보너스로 주기까지 한다. 올해 포항의 원북 역시 `엄마를 부탁해`이다. 원북 행사란 전국 몇몇 공공도서관에서 시행하는 범시민 책읽기 운동의 일종이다. 시민들이 접수한 후보 도서 중 한 권을 각계에서 위촉된 원북 심사위원들이 토론으로 선정하고 도서관측은 그 책을 올해의 원북으로 선포한다. 한마디로 `책을 가까이 하는 시민`이 원북 행사의 취지이다. 따라서 보다 많은 시민들이 원북을 읽을 수 있도록 도서관측에서는 도서대출 및 교환, 원북 작가와의 행사 그 외 공개토론회 등을 마련해 적극적인 홍보를 하고 있다. `엄마를 부탁해`가 올해의 원북 도서로 정해진 도시는 서너 곳이 된다고 한다. 백만부가 팔리기까지 이러한 원북 운동도 일조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많은 독자의 마음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책 그 자체가 주는 감동 때문이라는 건 의심할 필요가 없다. 원북 행사의 일환으로 지난주에 공개독서토론회가 있었다. 나를 포함한 시립포은도서관 주부독서회팀이 주축이 되어 시민들과 자유로운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우선 출간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독자들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을 수밖에 없는 이 책의 미덕은 무엇인가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역시 신경숙 소설의 문체미학과 감성미학이 빠질 수 없었다. `부엌 살강에 엎어진 밥그릇`이나 `흙담 밑에서 뻗어가는 호박넝쿨`도 놓치지 않는 작가의 미시적 눈썰미와 `엄마를 잃은 게 아니라 잊었다`는 감성적 성찰이 그미 소설의 특장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 외 시점 변화의 독창성과 다소 신파인 곰소 아저씨와의 로맨스 등이 충분한 공감과 대중성을 획득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다음은 엄마의 희생은 과연 온당한가, 라는 의견을 나눴다. `엄마는 멀리서 생각하면 눈물 나고, 가까이서 보면 화가 난다`는 작가의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 `처음부터 (희생만 하는)엄마로 태어난 게 아`니라 애초에 엄마는 여자였다, 라는 것을 강조하는 반어법일 것이다. 엄마의 희생이 전제되어야만 온전한 가정이 지탱될 수 있었던 시절에 대한 회한의 기록은 그대로 엄마에 대한 헌사가 되어버렸다. 이것은 많은 독자를 울린 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려이기도 하다. 혹여, 이러한 모성의 희생이 가부장적 혐의가 짙은 이들에 의해 현재진행형의 미덕으로 칭송되거나 강요되지나 않을까 하는. 맏아들로 살아간다는 것의 힘겨움과 나머지 아들들의 정체성 혼란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의견도 의미 있었다. 장자인 형철이 밖으로 도는 아버지를 대신하는 동안 나머지 두 아들은 둘째놈, 또는 아우라는 보통명사로만 존재한다. 아버지가 쓰던 밥그릇을 큰아들이 물려받고, 장독에 숨겨둔 `귀한` 라면을 큰아들만 먹고, 고구마 캐는 노동에서 맏아들이 면제될 때 나머지 아들들은 절규한다. `형만 장땡이냐`고. 남은 두 아들들을 보듬는다고 너희들도 장땡이다, 라고 엄마가 말한들 남겨진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릴 적 상처는 성장한 뒤의 트라우마가 되니까. 가족애란 이름으로 한량이었던 아버지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은 타당한 것인가, 라는 주제도 패널과 방청객 모두를 몰입하게 했다. 신경숙 가족소설에는 빈번하게 `아버지의 부재`가 나온다. 그미의 책을 읽다보면 그 부분은 의도적이라기보다 경험적, 실체적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젊은 여자 때문이든, 역맛살이 낀 팔자 때문이든 집 나간 아버지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든든히 집안을 지키고 있는 아내 품으로 돌아온다. 그 어떤 아내의 힐난도, 이렇다 할 자식들의 반항도 없이…. 집안에 아버지는 부재중이지만 언제나 그 아버지는 면죄부를 받는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그래서 감히 부탁해본다. 책 속에서 아버지가 맏딸에게 엄마를 부탁하고, 맏딸이 성베드로 성당의 피에타상에게 엄마를 부탁하듯 이제 아버지를 부탁해본다. 아니, 아버지께 부탁한다. 이 세상 아버지(남성)들아, 이 책을 읽고 싱겁다거나 뻔한 얘기라고 옆으로 밀어놓는 일만은 제발 없기를!(소설가)

2009-09-22

대구 다문화공동체센터 이재화 상임대표

“다문화가족 직접 참여 분위기 만들 터” 전국 첫 결혼이주여성 포커스 맞춘 `나비TV` 개국고국 가족 소식 전하는 `영상편지` 콘텐츠 선보여 대구 다문화공동체센터(상임대표 이재화)가 전국 최초로 결혼이주여성에 포커스를 맞춘 다문화 인터넷TV `나비TV`를 21일 개국한다. `나비TV`는 전국의 결혼이주여성들을 대상으로 자신들의 얘기를 풀어놓을 수 있는 장을 제공함은 물론 한국민과 이주여성 배우자 및 가족 등에게는 서로에 대한 차이를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설립됐다. 이재화사진 상임대표는 “이제 우리나라는 민족이 국가와 동일시되는 사회를 넘어 어엿한 다문화사회로 진입했다”며 “다문화와 한국문화의 공존을 통해 건강한 문화를 만들어가야 우리 사회가 진정한 미래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나비TV를 개국하게 된 배경은 ▲외국인 이주여성 등 다문화가족 구성원들이 생업에 종사하느라 서로 교류하는 기회를 자주 갖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들에게 조그만 도움을 주고자 지난 2월 다문화공동체센터를 출범시켰고 인터넷방송을 통해 현실적인 소통의 장을 제공하고자 신철원 협성재단 이사장과 구정모 대구백화점 회장, 장익현 대구변호사협회장, 법광 파계사 주지스님 등 100명을 발기인으로 인터넷방송 개국을 준비해왔습니다. 나비TV란 이름은 나비의 두 날개처럼 `균형 잡힌 문화`를 지향하자는 취지입니다. -방송 스튜디오 등 제반 여건은 어떠한가.▲대구 서구 평리동 다문화공동체 사무실(100여㎡)에 스튜디오를 차렸습니다. 아직 방송장비가 열악한 상태지만 센터 관계자 등이 십시일반으로 낸 자금과 대구변호사회 등의 도움으로 시작은 작지만 내실있는 인터넷방송으로 키워갈 생각입니다. 또 자체 제작 뿐 아니라 전국의 다문화지원센터 90여곳과 네트워크를 구축해 전국의 소식을 제공받는 한편 계명대, 경일대, 영남이공대 등 지역 영상미디어과 관련 대학생 20여명이 자원봉사로 제작을 지원하게 됩니다. -어떤 콘텐츠를 담게 되나▲5개의 콘텐츠를 선보일 계획입니다. 전국 각지의 다문화가족 소식을 전달하는 `나비뉴스`, 다양한 정보를 전문가 대담 형식으로 소개하는 `나비칼럼`, 고국에 있는 가족과 친지 등에게 자신의 소식을 전하는 `영상편지`, 장기자랑을 통해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도록 하는 `장기자랑`, `한국어 및 영어교육방송` 등입니다. 특히 나비뉴스의 경우 이주여성들을 리포터와 사회자 등으로 등장시켜 다문화가족이 직접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하는 분위기를 만들어갈 계획입니다. /이현주기자 sun@kbmaeil.com

2009-09-21

자연보호중앙연맹 포항출신 이수광 총재

“독도문제 좀 더 관심 갖고 적극적인 태도 취해야”포항출신의 이수광 자연보호중앙연맹 총재는 약 30년째 독도 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다. 경영학박사이자 공인회계사로서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회계법인인 안건회계법인을 창립해 회장까지 지낸 이 총재는 스킨스쿠버다이빙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국수중탐험대를 창설해 현재도 대장을 맡고 있고, 서울대학교 해양연구소 여름 바다학교 교장도 맡고 있다. 지난 2001년 10월에는 독도중앙연맹을 창립해 총재로 봉사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독도 명예특별시장을 맡고있다. 이런 자연보호운동과 함께 나라 사랑에 대한 열정 때문에 최근에는 세계자연보전연맹 한국위원회 수석부회장도 맡게 됐다. 이 총재를 만나 다채로운 이력에 얽힌 이야기와 에피소드, 그리고 독도 이야기 등을 들어봤다.편집자주회계법인 회장으로 지내면서 시간·경제적 여유 생겨 사회봉사 시작 국내 최초 독도 해저지형 연구논문 발표… 독도 명예시민 운동 전개 -먼저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시죠. ▲저는 포항시 북구 남빈동 412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죽도시장 앞쪽이어서 해변가 마을이었고, 송도해수욕장은 저의 놀이터였죠. 6·25때 대구로 피난 나오게 됐고, 대구 달성초등학교와 계성중학교를 거쳐 계성고를 다니다 서울로 전학해 선린상고와 건국대학교 상학과를 졸업했습니다. -공인회계사 생활은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대학교를 졸업한 뒤 신한제분에 입사해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직장에 다니면서 시험을 준비해 1968년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그 뒤 금성화섬이란 섬유회사에 다니다 1976년부터 공인회계사 개업을 했는데, 처음에는 아주회계법인 대표를 맡았다가 안건회계법인을 창립해 대표와 회장까지 지냈죠. -자연보호중앙연맹 총재를 맡았는데, 처음 여기에 뛰어든 계기가 무엇입니까. ▲공인회계사로서 회계법인 대표와 회장을 지내면서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있었기에 사회봉사 차원에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특히 스킨스쿠버 다이빙이란 자연친화적인 취미활동을 하다 보니 자연보호운동을 하는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되기도 했구요. 1977년 자연보호중앙연맹에 가입해 활동하기 시작해서 32년째 꾸준히 하고 있는 셈입니다. -스킨스쿠버 다이빙을 배운 것은 언제이며, 어떻게 배웠습니까. ▲처음 스킨스쿠버 다이빙을 배운 것은 대학 다닐 때니까 약 45년쯤 됐을 것 같네요. 그때는 잠수장비가 없어서 군 특수부대인 UDT에서 쓰던 장비가 나오면 그걸 갖고 어깨너머로 배웠죠. 어렸을 때부터 수영이 몸에 밴 상태였기에 남들보다는 쉬웠습니다. 그래서 동호인들을 모아 한국수중탐험대를 창설했고, 매년 여름에는 청소년 해양학교를 열어 학생들에게 수중탐험을 가르쳤습니다. 그게 1979년 무렵이었으니 스킨스쿠버 다이빙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만도 30년쯤 됐네요. 제게 스킨 스쿠버다이빙을 배운 사람이 1만명이 넘을 것입니다. 야간 수중 다이빙도 많이 했습니다. 특히 방송국 카메라 기자들에게 수중촬영을 하는 것은 거의 제가 가르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MBC에서 방송용 ENG방수카메라를 처음 가져온 이후 수많은 방송국 사람들과 연예인들이 스킨스쿠버와 함께 수중촬영을 배웠죠. 그래서 그런지 지금은 수중촬영 전문가가 많이 늘었습니다.(웃음) -스킨스쿠버 다이빙 전문가로서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은 데, 소개해 주시죠. ▲건국대 상학과를 다닐 때 해양학술조사를 많이 다녔어요. 당시 거문도와 백도의 학술조사를 나갔을 때 얘기입니다. 백도 동굴 수중탐사를 하면서 랍스터가 많이 있길 래 채집을 하고 있는데, 상어가 나타났습니다. 바깥에 대 놓은 배에서는 비상이 걸렸죠. 모두들 정신없이 피하느라고 난리법석을 피웠는데, 다 피했다고 한숨 돌리고 보니 제가 아직도 나오지 않은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상어에게 공격을 당한 것 아니냐`며 크게 걱정을 하고 있었나 봐요. 저는 랍스터 채집에 빠져서 상어가 나타난 것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눈치를 챘습니다. 그러나 저는 미리 마을주민들에게 그곳에 가끔 상어가 나타나는 데, 망치 상어종류로서 사람을 공격하는 성향은 별로 없다는 얘기를 들어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바다 바닥에 가만히 앉아 상어를 관찰하다가 상어가 다른 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채집망까지 챙겨서 배로 귀환했습니다. 일행은 저의 침착, 대담무쌍한 행동에 탄복했고, 저는 그때 완전 영웅(?)이 됐죠. -독도 학술조사를 많이 하신 것으로 압니다. 어떤 사연이 있습니까. ▲1981년쯤 독도문제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독도에 관한 자료가 거의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1956년에 산악연맹 등반대가 낸 자료가 있었는데, 정작 바다에 대한 학술자료는 하나도 없었죠. 그래서 `우리 땅인 데,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해 학술조사에 뛰어들게 됐습니다. 당시 자연보호협회가 각계 전문가로 구성한 독도종합학술조사단을 구성했는데, 그때 수중탐험대장을 맡으면서 독도와의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그때 조사단장은 서울대 홍순우 교수였는 데, 당시 조사 보고서로 제가 낸 논문이 `독도의 해저지형`입니다. 이게 국내 최초의 독도 해저지형에 대한 연구논문이어서 그 뒤로 여러 논문에 많이 인용됐죠. 1995년 제2차 울릉도 및 독도 자연실태 종합학술조사단이 구성됐는 데, 그때는 제가 부단장을 맡아 조사활동을 펼쳤고, 2004년부터 2007년까지 4회에 걸친 독도의 동도, 울릉도에 대한 자연실태종합학술조사단에서는 제가 단장으로 조사단을 이끌었습니다. 독도처럼 영토분쟁의 가능성이 있는 땅은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많아야 합니다. 그런 뜻에서 앞으로도 독도에 대한 학술조사는 계속돼야 합니다. -독도중앙연맹 총재이자 독도명예특별시장으로도 일하고 있는데, 사연을 소개하신다면. ▲독도 학술조사를 하고, 독도에 대한 관심을 갖는 사람들과 모임을 하다가 공식화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서 2001년쯤에 `독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독사모)를 결성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툭하면 일본에서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 독도를 명예 특별시로 선포, 명예시민을 다수 등록해 우리나라에서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더 이상 아무런 이의를 제기할 수 없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은 국가차원에서 독도를 차지하기 위한 교묘하고 장기적인 포석을 놓고 있습니다. 1999년 신한일어업협정으로 영역을 슬금슬금 넓히더니 독도 근처에서 어업을 하는 어민을 위해 독도에 의사를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의사를 허용하면 그다음에는 자국민의 안전을 위해 병력을 파견한다는 얘기가 나오게 될 것입니다. 잠시도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독도에 살지는 않더라도 독도를 사랑하는 시민들이 독도의 명예시민이 되어 활동하는 방안을 생각해 낸 것입니다. 결국 2007년 1월1일 울릉군민회관에서 회원 200여명과 함께 독도 명예 특별시를 선포했습니다. 현재 특별시민으로 울릉도 주민을 포함해 1만5천명이 등록돼 있는 데, 목표는 100만명입니다. 언론에도 크게 떠들지 않고, 자연보호연맹과 함께 조용히 민간차원에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독도를 명예 특별시로 선포함으로써 얻어지는 효과는 무엇입니까. ▲독도에 대한 실효적 점유를 강화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독도 명예시민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독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독도의 학술적 가치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를 하고, 자연스럽게 관광목적이든 학술목적이든 독도에 자주 감으로써 독도가 우리 땅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부가 이런 운동을 주도하면 당장 해결될 성질의 문제도 아닌데, 일본과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외교적 마찰을 빚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은 민간 차원에서 주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명예시민 확장운동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명예시민 목표가 100만명인 것은 100만명이 특별시가 되기 위한 최소 인구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등록할 때 명예시민에게 1만원씩의 등록비를 받고 있는데, 순수하게 십시일반 시민의 힘으로 독도를 지키겠다는 의미입니다. 독도 명예특별시민은 천연자원인 독도의 자연을 보호하는 운동과 독도에 대한 자료수집활동, 교양강좌, 간담회 개최 등을 통해 각종 문화사업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회원이 어느 정도 모이면 서울에 독도박물관을 짓고, 독도를 지킨 안용복 장군, 홍순칠 대장 등 33명의 동상도 건립할 예정입니다. 울릉도에 있는 독도 박물관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지고, 사람들이 접근하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독도를 피부로 느껴야 합니다. 동도와 서도의 교통로를 개설하는 것도 계획 중 하나입니다. -끝으로 독도 지킴이로서 널리 알려져 있는 데, 바라는 게 있다면. ▲독도가 중요한 까닭은 섬 자체보다 주위를 둘러싼 거대한 바다영토 때문입니다. 다만 일본은 항상 독도에 관심을 보이며, 총선에서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이름) 탈환이 단골메뉴로 등장하고 있고, 자위대가 가상 독도 상륙훈련을 하는 등 국가차원에서 독도문제에 접근하고 있는데, 우리는 일본 측의 망언이 있을 때만 관심을 보이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정부도 독도 문제에 좀 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2009-09-21

포항 보경사

어느 고장이나 그곳을 대표하는 혹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산이 있다. 포항에도 많은 산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산이 운제산, 비학산, 내연산이다.오늘 소개할 보경사를 품은 내연산(710m)은 포항시 송라면과 죽장면 그리고 영덕군 남정면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원래 종남산(終南山)이라 불리다가 신라 진성여왕이 이 산에서 견훤의 난을 피한 뒤에 내연산(內延山)으로 개칭한 것으로 전해진다. 긴 계곡을 끼고 연결되는 등산로와 12폭포 등 수려한 경관으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1733년에는 겸재 정선이 청하 현감으로 와서 내연산 폭포를 화폭에 담은 진경산수화가 지금도 남아서 전해진다. 포항에서 7번 국도를 타고 영덕 방향으로 가다 보면 송라면에서 보경사 방향 이정표를 만나게 되는데, 우측으로 진입 후 마을 길을 따라 5분여 정도 가다 보면 보경사 주차장이 보인다.보경사는 신라 진평왕 25년(602년) 중국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대덕(大德) 지명(智明)에 의해 창건되었다. 지명은 왕에게 자신이 진나라의 한 도인에게 받은 팔면보경(八面寶鏡)을 묻고 그 위에 불당을 세우면 왜구의 침입을 막고 이웃나라의 침략을 받지 않으며 삼국을 통일할 수 있다고 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지명과 함께 동해안 북쪽 해안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해아현(海阿縣) 내연산 아래에 있는 큰 못 속에 팔면경을 묻고 못을 메워 금당(堂)을 건립하고 나서 보경사(寶鏡寺)라 하였다.한편, 조금 늦은 시기의 기록이지만 1588년에 쓰인 `보경사금당탑기`에 적힌 보경사의 창건 동기는 약간 다르지만, 지면의 한계로 소개하는 힘들고 여기에도 `십이면원경`과 `팔면원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 팔면보경이 보경사의 창건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아두자.보경사는 창건 이후 성덕왕 22년(723년)에는 금당 앞에 5층 석탑을 조성하였고, 경덕왕 4년(745년)에도 중창하였다. 그리고 고려 고종 1년(1214년)에 승방 4동과 정문을 중수하고 범종. 경(磬). 법고 등도 완비하였다. 조선 숙종 3년(1677년)에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1695년에 가을에 준공하였으며, 삼존불상과 영산전의 후불탱화도 조성하였다. 영조 1년(1725년)에는 성희와 관신이 명부전을 옮겨지어서 단청(丹靑)하였으며, 성희는 괘불을 중수하였는데, 이때의 사세가 가장 컸다고 전해진다.근대에 와서는 일제강점기인 1916년부터 1921년까지 전당과 탑을 중수하였고, 1932년에는 대웅전과 상지전을 중수하였으며, 1975년 이후 약간의 단청 불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보경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적광전(寂光殿)인데 주존인 비로자나불과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셨다.창건연대는 알 수 없고 1678년(숙종 3년)에 중건한 후 몇 차례의 중수가 있었다. 적광전 앞에 5층 석탑이 있다. `보경사금당탑기`에 의하면 신라 성덕왕 22년인 당나라 혜종 계해년(723년)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탑의 양식으로 보아 당나라가 아닌 고려 현종 14년인 계해년(1023년)으로 추정하고 있다.전체적으로 가늘고 길어 날렵함과 상승감이 돋보인다. 1층 몸돌 앞뒤로 자물쇠와 문고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이곳에 부처님의 사리를 모셨다는 의미이다. 적광전과 대웅전을 지나 계단 우측을 보면 작은 전각이 보이는데, 보물 제252호인 원진국사비(圓眞國師碑)이다.고려 중기의 승려인 원진국사 신승형(申承逈)의 탑비이다. 원진국사는 경북 상주 사람으로 성은 신씨, 자는 영회, 법명이 승형이다. 1215년 대선사의 지위에 오른 후 왕명에 의하여 보경사의 주지로 부임하여 만년을 보냈다.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의하면 고종이 사람을 보내어 여러 차례 왕사(王師)로 봉하려 하였으나, 끝내 왕사의 지위를 사양하였다. 1221년 원진국사가 51세로 입적하자 고종이 국사(國師)로 추증하고 `원진`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비는 입적 3년 뒤(고종 11년. 1224년)에 세워졌는데, 비문은 당대의 문신 이공로가 지었고 김효인이 썼다. 이 비문은 구양순체의 글씨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활달함을 잘 살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비신을 높이 183cm, 너비 104cm, 두께 17cm이다. 원진국사비를 등지고 바라보면 원진국사부도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보인다. 작년까지도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는 곳이었는데 지난 봄부터 공개되고 있다.담장 뒤로 난 오솔길을 따라 5분정도 올라가면 소나무 숲에 보물 제430호인 원진국사부도가 보인다. 평면 팔각을 기본으로 한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부도로 높이 4.5m이다. 부도는 승려의 묘탑(墓塔)이란 뜻이다. 원진국사 부도는 팔각을 기본으로 중심에 장대석을 이용하여 넓은 탑구를 마련하고, 중앙에 사각형으로 된 지대석을 놓았다.하대석은 3단의 팔각석재로 되었다. 밑의 2단은 표면에 아무 조각이 없고, 상단은 복련석으로 윗면에 단엽의 연화문 32판을 조각하였으며, 그 중앙에는 2단의 각형 굄이 있어 중대석을 받치고 있다. 중대석은 각 모서리에 우주형이 있을 뿐 아무런 조각이 없다. 팔각의 탑신이 길고 커서, 부도의 높은 느낌이 강조되고 있다. 탑신에는 적광전 앞의 5층 석탑처럼 자물쇠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 역시 사리가 보관되어 있다는 뜻이다.건조연대는 사찰 경내에 있는 원진국사비 명문에 따라 1224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보경사만을 살펴보려면 두 시간 정도면 가능하지만, 그보다는 한나절의 시간을 내서 사시사철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내연산 등반도 꼭 같이 권하고 싶다. 가을이 서서히 깊어간다. 이번 주말도 좋고, 아니면 좀 더 기다렸다가 단풍이 깊어가는 계절에 보경사와 내연산을 찾으면 이 가을이 더욱 깊고 풍성하게 느껴질 것이다./photokid@kbmaeil.com

2009-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