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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구룡포읍 성동리에 황보 씨 집성촌이 있는 까닭은

선생은 황보 집성촌에 찾아가 황보인 가문의 충직한 여종 단량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뿐만 아니라 갑연, 순량 등 여종들의 충절을 기리는 비(碑)가 있다는 사실을 통해 포항이 예부터 충절과 보은의 고장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여 : 황보인이라면 조선시대 영의정을 말씀하시는지요?황 : 그렇지. 내가 거길 가보니 진짜 황보 성을 가진 사람들의 집성촌이라.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알아보니 사연이 기가 막혀. 계유정난 때 황보인이 수양대군 손에 죽었다는 건 역사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지. 그때 한양 황보인의 집에서 황보인의 둘째 아들 흠이 단량이라는 여종에게 황보인의 손자인 황보단(皇甫端)을 데리고 도망쳐 가문의 대를 이어달라고 부탁했다는 거야. 단량이 그 길로 황보단을 물동이에 넣고는 뒷문으로 도망쳤어. 단량이 황보단을 데리고 경북 봉화의 닥실마을까지 갔다는 거야.여 : 그 먼 길을 어린애를 데리고 사람들 눈을 피해 다녀야 했으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황 : 그랬겠지. 어쨌거나 단량은 황보인의 딸이 시집가 있던 봉화에 갔어. 조카를 데리고 찾아온 단량을 본 황보인의 딸과 사위 윤당은 기가 찼겠지. 한편 곰곰이 생각해보니 조카를 데리고 있다가는 다 같이 죽을 게 뻔했어. 그래서 단량에게 노잣돈을 주며 땅끝까지 도망가 숨으라고 일렀지. 그 길로 단량이 찾아간 데가 바로 지금의 호미곶면 구만리 짚신골이었어. 거기서 살다가 나중에는 구룡포읍 성동리에 옮겨 평생을 숨어 살면서 황보인의 손자 단을 키웠던 거지. 황보인 가문의 대가 안 끊기고 구룡포읍 성동리에 영천 황보씨 집성촌이 형성된 데는 그런 사연이 있었던 거야. 여 : 정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무엇보다 황보인 후손들로서는 단량에게 정말 큰 은혜를 입었군요.황 : 그렇지. 그러니 계집종이었던 단량에게 비석까지 세워주며 기리는 거지. 지금도 구룡포읍 성동리 광남서원(廣南書院)에 가면 단량을 기리는 비, 충비단량지비(忠婢丹良之碑)가 있어. 처음엔 나도 그걸 보고 깜짝 놀랐지. 계집종의 비석이 있으니. 그 당시 노비의 비석을 세운다는 건 생각도 못 할 일이었거든. 노비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어. 그러니 계집종의 비석을 세웠다는 건 정말 대단한 거야. 단량이 그만한 일을 하기도 했지만 말이지.여 : 당시는 더할 나위 없이 엄격한 신분사회였으니 아무리 단량이라 해도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황 : 얼마나 놀랍고 흥미로운 이야기인지 몰라. 그 이야기를 듣고 생각했지. 아, 여기 우리 고장에 이런 대단한 이야기가 있구나. 그런데 나중에 보니 단량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더라고.여 : 단량 말고도 놀라운 이야기가 또 있다는 말씀인가요?황 : 단량비 말고도 포항에는 여종을 기리는 비가 두 개 더 있어. 용흥동 연화재에 있던 충비갑연지비(忠婢甲連之碑)와 흥해 곡강 야산에 있는 충비순량순절지연(忠婢順良殉節之淵)이지. 사연을 들어보면 기가 막혀. 갑연(甲連)은 조선 순조 때 영일현에서 주막을 하던 송 씨 성을 가진 과부의 종이었어. 그런데 나쁜 패거리들이 홀몸인 송 씨를 해코지하려고 하니 송 씨가 더러운 꼴을 안 당하려고 형산강에 몸을 던지고 말았어. 그걸 본 여종 갑연이 주인을 따라 강에 뛰어들어 송 씨는 구해냈는데, 그만 힘이 다해 자기 목숨은 못 건진 거지. 이 이야기가 당시 암행 감찰을 하던 경상도 관찰사 박기수(朴岐壽)를 통해 조정에 알려져 비를 세우게 된 거야.여 : 가슴 아프지만 당시로 보자면 목숨으로 주인을 섬긴 충절을 높이 살 만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순량(順良)은 어떤 인물인가요?황 : 순량은 선조 때 흥해 이씨 집안 아씨의 몸종이었는데, 어느 날 한 한량이 빨래하는 아씨를 보고 희롱을 한 거야. 꼴에 선비라고 시를 써서 수작을 걸었는데, 이 아씨가 아주 대찬 답시를 썼지. “내 일찍이 중국 땅 형남(荊南)의 보배로운 옥덩이로 진나라의 열다섯 성(城)과도 못 바꿀 이였거늘, 어찌 계림의 한 썩은 선비와 같이하리.” 이 글을 본 한량이 화가 나서 친구인 흥해 군수에게 일러바치니 그 군수도 유유상종이라, 사령(使令)에게 이 씨를 추포해오라고 명을 내렸지. 하지만 사령은 양심이 있었던지라 아씨에게 도망가라고 말미를 주는데, 아씨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도망은 왜 가느냐며 유서를 써서 순량에게 주고 그 길로 곡강의 절벽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은 거야. 이걸 본 노비 순량도 아씨 없이는 내가 어찌 사나, 그러면서 같이 강물에 몸을 던지고 말지.여 : 두 사연 모두 안타까운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갑연이나 순량 모두 주인을 따르는 마음이 지극해 보입니다. 대단한 충절이 아니었나 싶군요.황 : 순량의 이야기는 잊히고 말았지만 순량이 목숨을 끊은 지 30년 후에 흥해 군수가 알게 되었지. 그 군수가 순량이 투신한 절벽 맞은편 천연바위에 암각으로 비를 새겨 기려주었는데, 그 비가 바로 ‘충비순량순절지연’ 비야. 그런데 비 제막식 날에 흥해의 곡강이 붉게 변하고 새도 한 마리 안 날았다고 하지.여 : 단량도 그렇고, 갑연, 순량 모두 애절하고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알게 되었을 때 선생님께서는 어떤 느낌이 드셨는지요?황 : 내가 작년 애린문화상 수상식에서도 말했는데, 여종들을 위한 비를 세우는 것이 당시 신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보상이었다 해도 포항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참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래서 묻혀 있는 조상들의 이야기를 좀 더 알아보자는 생각에 여기서 살아보자고 마음먹게 되었지. 여 : 선생님께서 포항과 포항 사람들에게 정을 느끼고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세 여종의 충절 이야기였군요. 저는 세 가지 이야기 가운데 특히 단량의 이야기가 놀랍습니다. 한 가문을, 그것도 역적으로 몰려 대가 끊길 뻔한 가문을 살린 단량이 정말 대단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황 : 조금 아쉬웠던 점은 1978년에 황보인 집성촌에 가보니 비각을 지어 비석을 세웠는데, 황보인 후대가 새로 만든 비석은 오석(烏石)으로 아주 잘해서 비각 안에 넣어두었어. 그런데 옛날 비석은 그대로 볼품없이 담벼락 옆에 서 있더라고. 문중에서는 나름대로 낡은 옛 비석은 그대로 두고 새 비석을 만드는 정성을 보인 것인데 오히려 주객이 전도된 거지.여 : 그러니까 원래 비석 대신에 새로 만든 비석을 비각 안에 보관했군요.황 : 그렇지. 내가 문중의 사당 관리인에게 “비각 바깥에 있는 게 원래 단량 비석인데, 이 비가 안에 있어야 안 되겠나?” 했지. 그리고 “이 비석이 오래되었고 역사적으로도 중요하니 문화재 신청을 하면 좋겠다”고 제안해서 문화재 신청을 하게 되었어. 문화재청 관계자들이 와서 보니 정말로 원래 단량 비석은 비각 바깥에 방치된 채 있고 안에는 황보씨 문중에서 새로 세운 비석이 있는 거야. 세월이 흘러 2015년 3월에야 원래 단량 비석이 비각 안에 가도록 비석 위치를 바꿔놓았지. 끝내 문화재로 지정은 못 받았어. 나는 지금이라도 그 비가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면 좋겠어.여 : 그렇군요. 그처럼 의미 있는 유적이라면 이제라도 다시 문화재 신청을 해서 지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충성스러운 여종 단량의 충절과 희생으로 대가 끊기는 화를 피한 황보 가문은 4대째 숨어 살다가 숙종 때 역적 누명이 풀려 황보인과 두 아들인 황보석, 황보흠은 관적을 회복했다. 그 후 황보인의 손자 황보단을 살려서 키워준 단량의 고마움과 뜻을 기려서 비를 세웠고, 그 비는 현재 구룡포의 광남서원에 있다.황 인195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대구로 이주해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영남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동해중학교에 교사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닿았으며, 포항정보여고와 동성고에서 2008년까지 재직한 후 정년 퇴임했다. 포항 지역의 고인돌을 처음으로 조사·발굴해 ‘영일군사’에 소개했고, 지역 민속놀이인 ‘월월이청청’을 조사·발굴한 후 포항정보여고 학생들과 공연해 제7회 청소년 민속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흥인군의 비석과 남파 대사의 비석을 발견해 비각을 세우도록 했고, 석곡 이규준 선생의 목판을 경북 문화재 자료로 지정하게 했다. 또한 석곡의 사상과 학문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알려 석곡기념관 건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포항시사’ 집필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포항문화원 향토조사 연구위원 등을 맡고 있다. 2022년 제12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대담·정리 : 여국현(시인)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황 인

2023-08-20

고적하면서도 예술향기 물씬

일본의 중부도시 시코쿠(四國) 북동 해안 에히메현(愛媛縣)의 마쓰야마는 소박하고 한적하지만 따뜻한 곳이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인 도고온천을 비롯해 일본의 국민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도련님(坊っちゃん·봇짱)’의 배경지이기도 한 마쓰야마는 깊은 여운이 남는 곳이다. 예술의 섬 나오시마도 마찬가지다. 때로 여행은 볼거리가 많지 않아도 번잡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즐거울 수 있다. 소도시 마쓰야마와 나오시마가 바로 그런 곳이다. ◇도고온천, 3000년 역사 지닌 문화재마쓰야마 첫 여행지가 이마바리 타월미술관이라고 했을 때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숱한 여행지를 두고 겨우 수건을 보러 가느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타월미술관을 둘러보고 나서는 편견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실감하게 해줬다.타월미술관은 일본 내 타월 생산의 60% 이상을 생산하고 있다는 이마바리시의 타월문화를 소개하는 세계 최초의 타월을 주제로 한 미술관이다. 땀이나 물기를 닦는 수건이 이곳에서는 예술의 옷을 입고 작품이 됐다. 전시관으로 향하기 전에 타월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도록 기계 설비를 전시해놓았다. 실제 공장과 똑같은 시설이지만 3분의 1 속도로 기계가 가동한다. 제품을 만드는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 판매하는 물품을 생산한다고 한다.본격적인 전시관에는 원피스 모양의 타월을 비롯해 일본의 타월전문작가가 만든 회화를 방불케 하는 작품도 전시돼 있다.하이쿠(일본 전통 시), 한시, 동화 이야기 등도 타월로 디자인돼 있어 보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핀란드 작가 토베 얀손의 작품 ‘무민’의 세계를 그린 ‘무민 특별 박물관’도 전시돼 있다.마쓰야마에서 가장 큰 관광지는 역시 도고온천(道後溫泉)이다. 일본 최고(最古) 온천이기도 한 도고온천은 무려 30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연간 한국과 중국 등에서 한 해 2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몰려온다. 1894년에 지어진 도고온천 본관은 1994년에 온천 시설로는 일본 최초로 국가의 중요 문화재로 지정됐다.3층 목조 건물로 ‘가미노유(신의 온천)’ ‘다마노유(령의 온천)’등 2개의 욕실을 선택할 수 있고, 목욕 코스는 ‘다마노유 3층 개인실 코스’ ‘다마노유 2층석 코스’‘가미 노유 2층석 코스’ ‘가미노유 아래층 코스’ 4가지로 나뉘어 있다. 무엇보다 도고온천이 유명한 것은 일본의 유명 애니메이션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가 2001년에 감독한 만화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배경지이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처럼 도고온천은 고색창연하고 입구와 기와형태까지 비슷하다. 몸무게를 재는 저울까지 바늘이 움직이는 아날로그 느낌이 물씬나는 도고온천은 낡고 퇴색했지만 왠지 마음을 따스하게 만든다.도고온천 본관에서 걸어서 3분 거리에는 도고 기야만 유리 박물관이 있다. 물과 녹음이 우거진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는 유리박물관은 관내는 빨간색과 검은색을 기조로 한 현대적인 구조로, 밤에는 조명을 비춰 환상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관내에는 도고온천 본관의 상징인 진 로각의 빨간 판유리를 비롯해 에도 시대의 희귀한 유리제품과 메이지, 다이쇼 시대의 일본 유리작품 약 300점을 전시 중이다. 큰 볼거리는 아니지만 소소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마쓰야마 시내에는 도고온천역이 있다. 한국에도 도고온천역이 있는데 같은 이름의 역이 한국과 일본에 나란히 있다는 사실이 묘하다. 도고온천역에는 스타벅스가 입점해 있다. 고베의 기타노이진칸점처럼 역사적 유적지에 스타벅스가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도고온천역 앞 광장에는 메이지시대에 사용했던 대형 솥에서 흘러나오는 온천수를 이용해 만든 무료 족탕시설인 호조엔이 있다. 호조엔 옆에는 1994년 도고온천 본관 10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자동인형시계가 세워져 있다. 오전 8시~오후 10시까지 매시 정각이면 시계 속에서 ‘일본의 셰익스피어’로 추앙받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도련님’속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이 음악과 함께 차례로 나타난다.일본 1000엔권의 화폐인물이기도 한 나쓰메 소세키는 마쓰야마의 중학교를 배경으로 그의 대표작인 소설 ‘도련님’을 집필했다. 자동인형시계의 대각선 방향으로 증기기관차가 세워져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증기기관차는 1888년부터 67년간 실제로 시내를 달리고 있고, 소설의 영향으로 ‘봇짱열차’라고 불리게 됐다. 현재 시내를 달리고 있는 열차는 2001년에 디젤 기관차로 복원한 것인데 복고풍의 차량이 관광객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기차표는 물론 승무원 유니폼도 옛날 유니폼을 재현했다. ◇순례자의 길을 걷거나 성을 구경하거나도고온천에서 차로 10분 정도 이동하는 거리에 있는 이시테지(石手寺)는 728년에 쇼무 천왕의 칙명으로 국사 오치 다마수미가 창건했고, 본존인 약사여래상은 교키 스님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1318년에 불사한 ‘인왕문’이 국보로 지정돼 있으며, 본당, 삼중탑, 종루 등 국가 중요 문화재 6개가 있다. 일본의 4개 주요 섬 중 가장 작은 시코쿠에는 88개의 절을 걸어서 도는 1200㎞에 이르는 순례길이 있는데 이시테지는 51번째 절이다. 88개의 절을 걷는 사람들을 오헨로(걷다)라고 부르는데 순례길을 가리켜 시코쿠 오헨로라고 한다. 시코쿠 오헨로는 1200년 전 진언종의 흥법대사가 88개의 절을 걸은 것에서 유래됐다. 자발적인 순례자들은 길을 따라 절을 순례하며 참배를 한다. 불교신자가 주를 이루겠지만 굳이 신자가 아니어도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자들처럼 많은 이들이 길을 걷는다. 사원 주변 식당에서는 이시테지의 명물인 ‘오야키’라고 불리는 떡을 팔고 있다.에히메현 중앙에 있는 마쓰야마 성은 현재 전국에 12개 밖에 현존하지 않는 에도시대 이전에 건축된 천수각을 가지고 있는 성곽의 하나다. 축성 당시의 천수는 5층이었지만 후에 3층으로 개축됐다. 히메지 성, 와카야마 성과 함께 일본 3대 연립식 평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가토 요시아키가 축성을 시작했다. 마쓰야마란 지명의 유래는 이 시기 가토 요시아키가 자신의 영지를 마쓰야마라 칭했기 때문이다. 마쓰야마성은 국가 사적으로 21채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돼 있으며 벚꽃 명소로도 이름이 높다. ◇아트 프로젝트로 살아난 나오시마여행의 하루를 예술의 섬인 나오시마에서 보내기로 했다. 마쓰야마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다카마쓰에서 북쪽으로 13㎞에 있는 나오시마는 원래 구리 제련소였다. 한때 지역경제가 활성화됐지만 제련소에서 나온 폐기물로 섬이 황폐화되면서 주민들이 하나둘씩 떠났다. 다 죽어가던 섬이 다시 살아난 것은 출판기업인 ‘베네세’가 1989년 시작한 ‘아트 프로젝트’ 덕분이었다. 섬 전체를 하나의 미술관으로 재탄생시킨 아트 프로젝트의 중심에는 일본이 낳은 천재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있었다. 그는 파격적 형태의 미술관인 지추(地中) 미술관을 건축해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모으는 데 일조했다.지추미술관은 섬 남부 산 위에 있는 계단식 밭 형태의 염전 터 지하에 만들어졌다. 시설 전체가 지하에 묻혀 있으면서도 자연광을 받아들여 하루 중에도 시간에 따라 작품이 달라 보이는 것이 매력이다. 프랑스 인상파 거장 클로드 모네와 월터 드 마리아, 제임스 터렐 단 3명의 작품만 전시돼 있다. 모네의 전시공간은 이탈리아 대리석 70만 개로 바닥이 장식돼 있으며 마리아의 전시공간은 엄숙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안도 다다오의 건축물뿐만 아니라 실내외에 놓여 있는 다양한 예술 작품부터 일본의 옛 모습이 그대로 보존된 마을 풍경까지 섬 곳곳에서 예술과 문화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나오시마의 입구인 미야노우라항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설치 미술가인 쿠사마 야오이의 작품인 대형 호박이다. 1993년 제45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거울로 장식된 방에 설치돼 있던 작은 호박이 1994년 나오시마에 검은 무늬가 있는 대형 호박 조각으로 이어졌다. 물방울 무늬와 무한 증식하는 반복과 통일의 호박은 어느새 나오시마를 상징하는 예술품이 됐다.항에서 거리를 돌아가면 곳곳에 재미있는 미술품을 볼 수 있다. 공중목욕탕이 예술품이 된 아이러브유(I Love Yu (I♥湯))가 대표적이다. 탕(湯)을 의미하는 일본어 발음 ‘유’를 재치있게 활용한 공중목욕탕으로 2009년 오타케 신로가 실제로 입욕할 수 있는 미술시설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나오시마의 입구인 미야노우라 항구에 만든 작품이다. 욕실에는 코끼리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욕조와 욕탕 내 그림 화장실의 변기까지 익살스러우며 독특하다.안도 다다오의 또 하나의 건축물인 미술관과 부티크 호텔이 결합한 베네세 하우스는 그 자체로 예술품이다. 거친 대리석 계단을 내려가면 숲으로 이어지며, 아트리움에서 자라는 나무들이 객실 창문을 넘나들 정도다. 예배당을 연상시키는 중앙 갤러리 위에는 유리 피라미드가 삐죽 솟아 있다. 어디에서나 윤을 낸 콘크리트 벽과 옅은 빛깔의 나무 바닥을 볼 수 있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와 일본에서 떠오르는 신성들의 작품이 놓여 있다. 관람객들은 미술관에서 하룻밤 묵으며 밤이나 낮이나 조각 작품을 손으로 만져보고, 그림을 코앞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 여행 정보시코쿠 섬 내 국제공항은 마쓰야마 국제공항, 다카마쓰 국제공항 등 두 곳이다. 국내 항공사 중에서는 제주항공과 에어서울이 각각 인천~마쓰야마 노선, 인천~다카마쓰 노선을 운항한다. 다카마쓰에는 우동을 만드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시설이 있다. 가가와현은 사누키 우동의 본고장으로, 수타 체험을 할 수 있다. 체험이 끝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우동을 먹을 수도 있다. 손으로 쳐낸 우동은 가지고 돌아갈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졸업 증서를 붙인 족자를 받을 수 있다. 이 족자에는 우동 만들기 비법이 붙어 있으며, 부속으로 달려 있는 막대는 면 밀대로 사용할 수 있다. 마쓰야마의 먹거리 중 명물로 꼽히는 것은 다이메시(도미밥)다. 쌀에 다시마를 깔고 도미 한 마리를 통째로 뚝배기에 얹어 짓는 향토요리. 도미와 다시마의 풍미, 간장의 고소함이 쌀에 스며들어 깊은 맛의 밥이 된다.올 시코쿠 레일 패스(ALL SHIKOKU Rail Pass)는 외국인 관광객만을 대상으로 판매하는 교통 패스로 시코쿠 전역을 연결하는 6개 철도 노선(약 1100㎞)을 이용할 수 있다. 3일권, 4일권, 5일권, 7일권이 있으며 국내에서 미리 구입하는 것이 현지보다 저렴하다. 11만300원부터./최병일 작가

2023-08-17

바다가 좋아 선택한 동해면의 한적한 중학교

이 글은 필자가 포항 지역의 사학자 황인 선생과 나눈 다섯 번의 대담과 수차례의 통화 그리고 서면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당시 선생은 임플란트 시술 중이었고, 필자 또한 서울과 포항을 오가야 하는 상황이라 인터뷰가 순조롭지 않을 수 있겠다고 우려했으나 기우였다. 첫 만남의 대담부터 선생은 매번 두 시간이 넘도록 포항의 역사와 문화, 문화재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었다.“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역사학자 E. H. 카의 말이다. 이 말이 맞다면 개인 또는 사회가 자신의 역사를 잊거나 혹은 왜곡해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은 그 개인과 사회의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끊기고, 과거와 현재가 단절되는 것이다.그렇다면 우리 지역은 어떤가. 우리 지역은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기억하고 기록하여 전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가. 다행히 우리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힘든 여건에서도 몇몇 분이 그런 노력을 기울여왔는데, 향토사학자 황인 선생은 그들 중 한 명이다.황인 선생은 1977년 포항 동해면 동해중학교에 부임한 이래 발굴되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포항의 역사와 문화 유물,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탐사, 기록, 보존하고 전하는 일에 헌신해왔다. 선생과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선생이 포항과 첫 인연을 맺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여국현(이하 여) : 선생님께서 1977년 동해중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을 맺었다고 들었습니다. 대학에서 국사학을 전공하셨으니 교사가 아닌 다른 길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교직을 선택하신 것과 당시로 보자면 낯설고 외진 동해를 첫 근무지로 선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황인(이하 황) : 대학 시절부터 교사가 되려고 했던 건 아니지. 그 이야기를 하자면 좀 길어. 군에 입대해서 대구 의무사령부 군의학교에 있었는데, 한 대학 선배가 대민 지원사업으로 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중학교 과정을 가르치고 있었어.여 : 그러니까 야학 같은 것이었군요.황 : 그렇지. 그 선배가 제대할 때 교직을 이수한 내가 적격이라고 생각했는지 그 자리를 내게 소개해준 거야. 지금은 없어졌는데, 효목고등공민학교에서 검정고시 과목을 가르쳤지. 1, 2, 3학년별로 교실 하나, 교무실, 숙직실 하나뿐인 작은 학교였어.여 : 군대 생활도 힘들 텐데 일과 후 학생들을 지도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황 : 피곤하긴 했지만 학생들이 워낙 열심히 하고 잘 따라서 보람이 컸어. 학교가 지금의 동대구 고속버스터미널과 동부시외버스터미널 사이에 있었는데, 당시 11월에 치르는 전국 검정고시 합격률이 98퍼센트나 될 정도로 성적이 좋았지. 게다가 운이 좋았는지 내가 가르친 그해 졸업생이 전국 검정고시에서 1등을 해서 졸업생 이름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났어. 지원하는 부대 사령관 이름까지 떡하니 나왔지. 사령관도 기분이 좋았던지 별이 박힌 지프차를 타고 부하 장교들을 주루룩 데리고 학교에 찾아와 교사로 있던 부대원들을 격려했지. 여 : 학생들과 선생님이 얼마나 간절히 공부하고 열심히 가르치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결과도 좋았으니 참 보람 있는 시간이었겠어요.황 : 그랬지. 그때 나한테 배운 학생들 가운데 한 친구는 영국 유학을 갔고, 교사, 목사, 호텔 총지배인이 되기도 했어. 육십이 넘은 제자들이 우리 집에 찾아와 같이 회를 먹고, 손자를 봤다고 찾아오기도 하니 정이 많이 들었지. 하여간 그때 가르치며 보람을 느꼈던 것이 나중에 교사를 하게 된 동기가 되었어. 그런 이유로 대학을 졸업하고 바다가 가까운 동해중학교로 오게 되었지. 여 : 어려운 상황에서 배우는 학생들이었으니 절실함과 고마움이 더욱 컸을 것 같습니다. 저도 포항제철에 다니면서 대학 생활을 했고 지금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서 그때 선생님과 학생들이 함께 느꼈을 마음이 헤아려집니다. 그런데 대구나 포항 도심에서 근무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텐데, 동해중학교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황 : 나는 그전부터 도시보다 조용한 시골이 좋았어. 특히 바다와 꽃을 좋아해서 학교를 정할 때 바닷가 근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사실 그때 동해는 포항과 한참 떨어진 데다 길도 포장이 안 되어서 한적할 거라 생각하고 지원했어. 당시 교장 선생님은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교사가 시골 학교로 오겠다 하니 걱정이 되었는지 얼마나 있을 거냐고 먼저 묻더군. 그러면서 학교가 포항에서 오가기도 편하고 사람들 왕래가 많아 외진 시골이 아니라는 점을 유독 강조했지. 다른 교사들이 부임했다가 시골구석이라고 금세 떠나곤 했던 모양이야. 그 말을 듣고 나는 오히려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 좋아서 지원했다고 했더니, 그제야 이곳이 외진 데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더라고. 그렇게 해서 동해중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지.여 : 당시 학교생활은 어떠셨어요? 생각만큼 만족스러우셨는지요?황 : 한적한 바닷가 학교는 나한테 더없이 좋았어.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른 면이 있기도 하더군. 학교 현실에서는 학생들을 잘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때는 가난하던 때라 등록금을 잘 거두는 교사, 성적 잘 내고 결석 안 시키는 것으로 교사를 평가하니 내심 갈등이 없지 않았어. 하지만 인생이 어디 다 좋기만 하고 나쁘기만 한가. 좋은 것이 있으면 조금 맘에 안 드는 것도 있고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이지. 정년퇴직한 지금 그 시간을 돌아보면 교사로 일해온 것을 큰 보람으로 여기지.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평생 할 수 있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어. 여 : 선생님께서 좋아하시는 일은 포항에서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역사를 찾아내고 널리 알리는 것일 텐데, 그 일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지요? 사실, 맨 먼저 여쭙고 싶은 질문도 이것인데요.황 : 계기라면 계기랄까. 우연이라는 게 참 이상하더라고. 내가 처음 역사 교사로 부임해서 반에 들어가 보니 황보(皇甫) 성을 가진 학생이 유독 많은 거야. 하루는 학생들한테 물었지. 그랬더니 성동리에 황보 성씨가 많이 모여 살고 자기들 조상인 황보인(皇甫仁)이라는 분의 비석도 있다는 거야. 황보인이라는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랐어. 설마 계유정난 때 영의정이었던 그 황보인인가 싶어 눈이 번쩍 뜨였지.선생의 말씀처럼 황보인은 조선의 6대 왕 단종 재위 시절의 영의정이었다. 그는 나중에 세조가 되는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 때 역적으로 몰려 목숨을 잃었다. 역적의 자손은 삼족을 멸한다는 당시의 법 혹은 관행대로라면 그의 자손들이 살아남을 수 없었을 텐데,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그 말이 역사 교사인 선생에게 놀라움을 안겨준 것은 당연했다.그러나 황보 집성촌이 형성된 배경에는 역사 교사인 황인 선생이 몰랐던 놀랍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황보인 가문을 살려낸 충성스러운 여종 단량(丹良)의 이야기였다. 여종 단량과 황보인 가문의 이야기는 선생이 포항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황 인1950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대구로 이주해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영남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동해중학교에 교사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닿았으며, 포항정보여고와 동성고에서 2008년까지 재직한 후 정년 퇴임했다. 포항 지역의 고인돌을 처음으로 조사·발굴해 ‘영일군사’에 소개했고, 지역 민속놀이인 ‘월월이청청’을 조사·발굴한 후 포항정보여고 학생들과 공연해 제7회 청소년 민속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흥인군의 비석과 남파 대사의 비석을 발견해 비각을 세우도록 했고, 석곡 이규준 선생의 목판을 경북 문화재 자료로 지정하게 했다. 또한 석곡의 사상과 학문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알려 석곡기념관 건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포항시사’ 집필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포항문화원 향토조사 연구위원 등을 맡고 있다. 2022년 제12회 애린문화상을 수상했다.대담·정리 : 여국현(시인)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황 인

2023-08-16

아우는 ‘신라’로, 장남은 ‘당’으로… 연개소문家의 자중지란

668년 고구려의 붕괴와 기원전 207년 중국 진나라의 멸망에서는 적지 않은 유사점이 발견된다.두 사건 사이에는 900년 가까운 시차가 있지만, 양국 모두 호걸(豪傑)의 사망과 간신의 횡포, 죽고 죽이는 형제간 다툼이라는 악재가 단시간에 겹쳤다.진나라의 최초 통치자는 모두가 알다시피 진시황(秦始皇·재위 기원전 246~기원전 210)이다.학자들을 산 채로 땅에 묻고, 농사법과 실용기술에 관련된 책 외에는 모두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린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독재자’로 이름이 높지만, 진시황은 그렇게 두부 자르듯 한마디로 단순하게 평가될 인물이 아니다.적게는 수만 명에서 많게는 수백만 명의 백성과 수천 명의 관료를 거느리고 국가를 다스린 인물이라면 그에겐 ‘빛’과 ‘그림자’가 동시에 존재할 터.‘냉혹하고 독선적인 왕’이라는 건 진시황의 그림자다. 그렇다면 그의 ‘빛’은 어떤 영역에서 환하게 반짝였을까. ‘위키백과’가 이에 답하고 있다.“진시황은 도량형을 통일하고 전국시대 국가들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했다. 또한,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와 군현제를 닦음으로써 이후 2천년을 이어질 중국 왕조들의 기본 골격을 만들었다.”중국 최초의 통일왕조 진나라는 진시황이 사망한 직후 바로 무너진다. 환관(宦官·내시) 조고(趙高)는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나라의 기강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뒤를 이은 진나라의 2대 황제 호해(胡亥)는 아둔한 사람이었다.조고와 호해는 순행(巡幸·왕이 나라 안을 살피며 돌아보는 일) 도중 숨진 진시황의 유서를 조작해 황태자 부소와 몽염을 죽이기까지 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는 진나라의 절멸을 아래와 같이 요약한다.“백성들은 오랜 전란이 그치고 통일이 되면 평화로운 시대가 오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진시황릉과 아방궁 등의 대규모 공사가 계속됐고, 변방의 수비에도 수시로 불려 나가야 했다. 엄청난 노동의 강요와 무거운 세금, 엄격한 법률은 백성들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진시황이 죽자 농민의 원성은 폭발했고, 마침내 진승, 오광 등의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봉기 소식은 전국에 퍼져나갔고, 여기저기서 농민들이 성난 파도처럼 일어났다. 봉기의 열매는 농민들의 손에 쥐어지지 않았지만, 최초의 통일 왕조 진나라는 이를 계기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진나라의 멸망 과정과 유사한 길을 걸었던 고구려누구도 흉내 내기 힘든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정치·군사적 실권을 제 손 안에 틀어쥐고 유일한 지배자로 군림했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진시황과 닮았다.연개소문은 시종일관하는 일기당천(一騎當千)의 기백으로 전투에서 맞붙은 적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후엔 실질적 왕의 역할까지 맡았다.‘한국사 개념사전’은 연개소문의 집권 배경과 타협을 거부하는 거칠고 직선적인 대외 정책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고구려를 무리하게 침략하느라 국력이 약해진 수나라는 결국 멸망했다. 수나라가 멸망한 뒤 들어선 당나라는 세계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고구려에 쳐들어오려고 했다. 이를 눈치챈 고구려는 중국과 맞닿은 국경선에 천리장성을 쌓고 이에 대비했다. 당시 고구려는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서 정치가 혼란스러웠다. 그 틈을 타 연개소문은 642년 당시 임금이었던 영류왕 대신 보장왕을 세우고, 대막리지(大莫離支·고구려 말기의 최고 관료)가 돼 정치를 장악했다. 연개소문은 강한 대외 정책을 써서 신라와 당나라에 맞섰다. 백제와 힘을 합해 신라를 공격했고,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라는 당나라의 요구도 거절했다.”‘천리장성의 축조자’이자, ‘거대 제국 당나라를 두려워하지 않는 맹장’으로 고대 왕국 고구려를 쥐고 흔든 최고 권력자였지만, 연개소문 역시 ‘삶이 유한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도 진시황과 마찬가지로 눈앞에 다가선 죽음만은 이기지 못한다. 666년. 고구려라는 이름이 역사에서 사라지기 2년 전 숨을 거둔 연개소문. 이후 진나라의 붕괴 과정에서 생겨난 것과 유사한 사건들이 고구려에서도 일어난다. ◆진나라 조고=고구려 연정토, 진나라 호해=고구려 연남생진시황이 죽은 뒤 간신 조고는 지록위마(指鹿爲馬·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 한 행위)로 진나라 2대 왕 호해를 조롱한다. ‘모든 관료들이 왕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진 나를 두려워하니, 사슴을 말이라고 해도 감히 반론하지 못할 것’이란 걸 보여주기 위한 악행이었다.고구려가 망해가던 무렵 조고처럼 영악한 행위로 나라를 망친 건 놀랍게도 연개소문의 동생이었다. 이름은 연정토(淵淨土).그는 형의 아들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의 사이를 이간질해 셋을 형제가 아닌 원수로 만들어버렸다. 연정토와 관련해서는 ‘삼국사기’와 ‘신당서(新唐書)’ 등에 그 기록이 남아있다. 이런 내용이다.“형인 연개소문이 세상을 떠난 이후 그의 아들인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3형제간에 권력 다툼이 벌어져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그러다 장남 연남생이 권력 다툼에서 밀리는 양상이 되자 적국인 당나라에 도움을 청하는 사태까지 이어지고, 이에 고구려는 당나라와 신라의 양면 전선에 놓인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다. 이런 때에 연정토는 666년 12월 고구려 남부의 12성 763호의 주민 3천543명을 신라에 바치고 투항했다.”고구려 멸망의 길에서 연정토가 진나라 조고와 비슷한 배역을 맡았다면, 연개소문의 큰아들 연남생은 진나라의 두 번째 왕 호해처럼 우매한 배역을 자처했다.아버지 덕에 아홉 살 어린아이임에도 선인(先人)이란 관직에 올랐고, 부친 사후에는 2대 대막리지가 됐던 연남생은 동생들과의 피 튀기는 권력투쟁에서 밀려나자, 연개소문이 그토록 적대시하던 당나라로 도망친다.‘내가 고구려의 지배자가 되지 못할 것이라면, 동생들 역시 망하게 할 것’이라는 이기적이고 단순무지한 선택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다음은 그의 행적에 관한 ‘위키백과’의 서술이다.“연개소문이 세상을 뜨자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연정토 넷이 권력 다툼을 크게 벌였다. 결국 연남생이 얼마 동안 대막리지에 올랐으나, 남건·남산이 남생의 아들 헌충(獻忠)을 죽이고, 남건이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남생을 쳤다. 이에 남생은 패하여 국내성으로 달아나 그의 아들 헌성(獻誠)을 당나라에 보내 항복하고 구원을 청했다. 결국 668년 당나라는 연남생을 앞세워 고구려를 공격했다. 연남생은 요동 지역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다. 또한 당나라 사령관 이적과 함께 고구려 수도인 평양성을 공격한다. 그 공적으로 연남생은 당나라로부터 작위를 하사받았다.” ◆무열왕이 만든 배경 아래서 고구려를 병합한 문무왕아우는 적국(敵國)이라 불러야 할 신라 밑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었고, 장남은 또 다른 적성국(敵性國) 당나라에 항복한 대가로 벼슬까지 받는다.연개소문이 살아있었다면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하다. 아마도 분노와 서러움에 땅을 치며 통곡하지 않았을까?그랬다. 로마 제국이나 남아메리카 잉카 제국처럼 내부로부터 무너지고 있었으니, 신라-당나라 연합군과 맞붙은 평양성전투에서 고구려가 패배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길게 말할 것도 없다. ‘두산백과’의 짤막한 요약은 이렇다.“평양성전투는 고구려 보장왕 때인 668년 도성인 평양성에서 신라·당나라 연합군과 벌인 전투로, 고구려가 패해 함락됐다.”이로써 문무왕은 아버지 무열왕이 백제를 병합한 660년으로부터 8년이 지난 뒤 고구려까지 절멸시키게 된다. 무열왕은 ‘왕위를 이어갈 아들’이란 자리를 만들어줌과 동시에 ‘김유신의 조카’라는 타이틀까지 문무왕에게 선물한 셈이 됐다. 삼한일통(삼국통일)의 초석을 놓은 무열왕과 ‘일통’의 여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김유신, 고구려 병합으로 ‘통일’의 90% 이상을 완료한 문무왕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박찬흥의 논문 ‘김유신 관련 사료를 통해 본 시기별 인식’에 등장하는 아래와 같은 대목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조선시기에도 무열왕·문무왕과 신라 김유신의 절대적인 신임관계로 인해 김유신이 큰 공적을 세웠다는 평가가 지속됐다. 그리고, 김유신은 신라의 武(무)를 대표하는 인물이거나 신라 왕조 전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됐다.”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8-15

“프로의 뿌리인 아마추어 체육에 더 많은 관심 가져야”

인터뷰는 매번 최인수 선생의 단골 식당에서 점심을 하고 나서 진행했는데 메뉴는 늘 된장 전골이었다. 식사하는 동안 선생은 필자가 물을 따르거나 수저를 놓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고 손수했다. 어린 아들에게 밥을 먹이는 아버지 같은 행동이었다. 최인수 선생은 포항시 체육회 부회장에서 물러난 후에도 지역 체육계를 보살피는 일을 계속해 나간다.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김 : 건강은 어떻습니까?최 : 몇 달 전에 녹내장 수술을 했어. 언젠가부터 눈이 침침하고 초점이 잘 안 맞았는데 나이 탓이려니 하고 방치해 적절한 치료 시기를 놓쳤나 봐. 수술 후에도 예전처럼 회복이 안 되는군. 더 나빠지지 않도록 관리를 잘해야겠지. 그 밖에는 크게 아픈 곳 없이 건강한 편이야.김 : 체육회를 떠나신 후에는 어떻게 지내셨습니까?최 : 바깥에 나가 체육회를 바라보니 체육회가 학교체육과 엘리트 체육 위주로 운영되고 있고 생활체육은 등한시하더군. 현역 시절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이었어. 그러던 차에 이상구 포항생활체육협의회 회장이 생활체육협의회 상임부회장을 맡아달라고 하더군. 체육회를 떠난 지 얼마 안 됐고 생활체육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많아 고민했지만 엘리트 체육과 생활체육 간의 간격을 좁힐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수락했지.김 : 생활체육협의회에 들어가보니 어떻던가요?최 : 예상은 했지만 체육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조직이나 재정 면에서 미흡하더군. 그나마 2009년 양학동에 국민체육센터가 개관돼 시민들이 체육을 접할 기회가 확대된 게 다행스러웠지. 생체협 지도 선생님들의 처우가 열악한 게 문제였어. 개선해보려고 했지만 뜻대로 안 되더군. 그분들한테 참 미안했지.김 : 생활체육협의회 상임부회장의 보수는 어느 정도였습니까?최 : 보수라고 할 게 있나? 상임부회장이라는 직책은 무보수에 봉사직이어야 한다는 게 변함없는 생각이야. 어느 날 사무국 직원이 활동비라면서 몇십만 원을 주더군. 당시 생활체육 지도교사가 여섯 명 정도 있었는데, 이분들은 지도 요청이 있으면 먼 곳까지 본인 차량을 이용해야 했어. 그래서 그 돈으로 주유 상품권을 사서 나눠주었지. 그나마 돈이 얼마 안 돼 다달이 번갈아 지급했어.김 : 생활체육협의회 업무가 쉽지는 않았겠습니다.최 : 맨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는 엘리트 체육 지도자들이 생활체육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이었어. 생활체육이 활성화되어야 엘리트 체육도 발전할 수 있지. 그런데 당시 엘리트 체육인들은 그런 생각이 별로 없어 보였어.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양쪽 관계자들이 참여하는 산악회를 만들어 정기적으로 산행을 했지.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양쪽이 좀 더 가까워지고 신뢰도 생겼어.김 : 상임부회장 재직 후에는 ‘포항 체육을 사랑하는 모임’을 결성하셨지요?최 : ‘체사모’라고 부르는 단체지. 포항에 거주하는 체육회 산하 가맹단체 원로들이 모여서 2014년에 만든 단체야. 체육 인재를 양성하고 체육인들의 친목 도모와 포항 체육 발전을 위해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모였어. 내가 8년째 회장을 맡아서 일하는데 회장직을 맡으려는 사람이 없어 걱정이야.김 : ‘체사모’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합니까?최 : 회원은 27명이고 회장과 고문, 자문위원, 정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어. 회원들에게 월 회비와 찬조금을 받아 운영하는데 체육 꿈나무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하거나 도민체육대회에 출전하는 포항 선수단에게 격려금을 전달했지. 그 밖에 체육회와 체육인들을 격려하고 후원하는 사업을 하고 있어.김 : 앞으로 ‘체사모’ 활동도 기대됩니다.최 : 다른 지역의 체육 원로들도 ‘체사모’에 관심을 보이고 벤치마킹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경북에서 체육 원로들이 모여서 활동하는 단체는 ‘체사모’가 유일하거든. 포항 체육을 홍보하기 위한 활동을 계속하고 장학사업을 확대하고 싶어. 현재 회원은 60∼70대가 주축인데 30∼40대도 가입할 기회를 만들려고 해.김 : 포항은 긴 해안선을 접하고 있어 해양 스포츠가 발달하기에 좋은 환경인 것 같습니다.최 : 그렇지. 포항은 해안선의 길이가 204㎞에 이르는 천혜의 해양도시야. 이를 충분히 활용해 전 연령과 활동 수준에 맞는 맞춤형 해양 레저스포츠를 체험할 기회를 시민들에게 제공해야 해. 그리고 해양 스포츠팀을 육성하고, 해양 스포츠센터, 계류장 같은 기반시설을 확충해 해양 스포츠를 산업으로 키운다면 포항의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겠지. 김 : 프로스포츠도 한번 짚어주시지요. 포항에 스틸러스 축구단이 있습니다만.최 : 포항 스틸러스가 적은 재정으로도 준수한 성적을 내고 있지. 스틸러스가 자생력을 더 키워 포항의 브랜드 가치를 키우고 스포츠 선진 도시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 기여했으면 하는 바람이야. 한때 박지성 선수가 뛰었던 영국 프리미어리그 명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연고지 맨체스터는 인구가 40만 명이야. 포항보다 작은 도시지. 그런 곳에 맨체스터시티와 더불어 두 개의 세계적인 명문 구단이 있어. 포항 스틸러스도 50년 전통을 가지고 있어. 일본 J리그 경우를 보면 우리보다 10년이나 프로리그 출범이 늦었지만 몇몇 구단을 제외하고는 거의 흑자 경영을 하고 있거든. 지역민들의 사랑이 커서 가능한 일이야. 스틸러스도 포항 시민의 관심과 사랑을 더 끌어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해.김 : 2012년 포항에 정식 야구장이 개장된 것도 포항 체육사에서 중요한 대목인 것 같습니다.최 : 포항에 1만2천 석 규모의 야구장이 건립된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지. 이 야구장이 건립되어 포항에 프로야구 유치를 할 수 있었고, 전국 규모의 아마추어 야구도 계속 열 수 있었어. 사회인들도 이 야구장에서 뛰면서 만족도가 크게 높아졌지. 하지만 프로야구의 근간이 되는 고등학교 야구의 현실을 보면 씁쓸함을 금할 수 없어. 경북 제1의 도시 포항의 유일한 고등학교 야구부가 존폐 위기에 놓였거든. 포철공고가 2013년 마이스터 고등학교로 전환하면서 관계 법령에 따라 야구부, 축구부가 포철고로 이관되었지. 마이스터 고등학교는 운동부를 운영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말야. 그래서 포철고에서 야구부와 축구부를 운영하는데 작년에 학교에서 느닷없이 야구부를 해체하겠다고 선언했지. 충격적인 일이었어. 야구부 학부모와 포철고 동문들이 들고 일어나 야구부 해체가 백지화되긴 했지만 이 사안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되었어. 상황이 이러니 포철고 야구부에 우수한 선수들이 오겠냐 말이야. 포철고 야구부는 2018년 청룡기에서 준우승을 하는 등 어려운 여건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뒀는데, 참 답답한 일이지. 프로스포츠의 화려한 면만 보지 말고 그 뿌리인 아마추어를 육성하려는 의지가 아쉬워.김 : 이제 인터뷰를 마무리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끝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 전해주시지요.최 : 몇 번 강조했는데 시민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는 사업이 필요해. 올해 울진에서 열린 경북도민체육대회에서 포항이 또 우승했어. 그런데 그 사실을 포항 시민들은 잘 몰라. 도민체육대회가 체육인들만의 잔치가 된 거나 마찬가지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선수를 양성하고 대회에 나가는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한번 생각해봐야 해. 그리고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내야 하고 말이야. 그러려면 생활체육을 활성화해야 하지. 또 한 가지 당부하자면, 포항이 경북 제1의 도시로서 경북 전체를 아우를 만한 그릇으로 키워야 해. 작은 것은 통 크게 양보하고 다른 시·군의 의견을 경청한다면 향후 포항체육회가 큰일을 도모할 때 힘이 되어줄 거라고 믿어.최인수1946년 서울에서 태어나 6·25전쟁 때 가족과 대구로 피난했다. 대구상고 시절 정구 선수로 활동했고 경북대학교 체육교육학과 재학 때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대학 졸업 후 대구 효성여고에서 교편을 잡았고, 1975년 포항 대동고등학교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되었다. 1979년 포철공고로 옮겨 야구부와 축구부 창단을 주도했다. 포항시 사립중·고등학교 체육교사협의회 회장, 포항시체육회 부회장, 포항시 생활체육협의회 상임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문체부장관 표창, 경상북도교육상, 포항시 최고체육 공로상 등을 수상했고 2007년 정년 퇴임했다. 2014년 종목별 원로들로 구성된 ‘포항 체육을 사랑하는 모임’(체사모)을 결성해 회장을 맡고 있다.끝대담·정리 : 김도일(소설가)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최인수

2023-08-13

도민체전의 살아 있는 역사… 44년간 선수와 임원으로 참가

1963년 제1회 경북도민체육대회가 대구에서 열렸다. 대구와 경북의 행정구역이 분리되기 전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정구 선수로 제1회 도민체육대회에 출전한 최인수 선생은 이후 44년간 선수, 혹은 임원으로 도민체육대회에 참가하게 된다.김 : 포항시 체육회에도 오래 몸담으셨지요?최 : 1975년에 포항으로 온 지 얼마 안 돼 체육회 이사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어. 그때는 포항시와 영일군이 통합되기 전이었고 체육회도 지금처럼 조직적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지. 변변한 사무실도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거든. 체육을 전공한 사람이 흔치 않은 데다 내가 정구대회에도 출전하다 보니 여러 방면에 쓰임이 있어 보였던 모양이야. 그때 이사직을 수락해 맺은 인연이 2009년 부회장으로 퇴임할 때까지 34년 동안 계속됐어. 김 : 체육회는 주로 어떤 일을 합니까?최 : 종목별로 활동하는 체육인들의 구심 역할을 할 조직이 필요해 체육회를 만들었지. 그러다가 사회적으로 체육의 역할이 커지면서 체육회의 위상도 단순히 체육인의 권익을 대변하는 것을 넘어서게 되었어. 지금 체육회는 학교체육과 생활체육 진흥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는 것은 물론이고 시민의 건강과 체력 증진, 여가 선용과 복지 향상에 이바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한편으로는 우수 선수를 양성해 경북도민체육대회나 전국체육대회 등에서 포항의 위상을 높이는 목적도 있겠고.광복 직후 사회적 혼란 속에서 포항은 1946년 대구의대 운동장에서 열린 3·1절 기념 경북도내 중학 축구 춘계 리그전에 포항중 등 8개 학교가 참가했다. 같은 시기에 포항중, 동지중, 포항여중 등에서 학교 운동부가 활동하기 시작해 포항 체육 발전의 디딤돌이 되었다.포항시 체육회는 축구인들이 주축이 되어 1947년 4월 1일 창립되었다. 초대 회장 김병준은 체육회의 재정적 후원자로 체육회 사무실 또한 그의 사업체인 수산회사 내에 있었다. 체육회가 발족한 해에 광복 2주년을 맞아 영흥초등학교 건너편 염전에서 ‘제1회 남선 체육대회’를 개최하는 등 포항에 본격적인 체육 활동의 계기가 마련되는 듯했으나 제자리도 잡기 전에 6·25전쟁이 발발해 활동이 정지되고 만다.한동안 침체기에 빠져 있던 포항 체육계는 1965년에 ‘포항시체육회재건위원회’가 결성되면서 명맥이 유지되었다. 1966년 어려운 재정 형편에도 경주시 황성공원에서 열린 제4회 경북도민체육대회에 450명의 선수단을 구성해 참여함으로써 체육회 결속을 꾀하였고 1973년에 열린 제11회 경북도민체육대회에서는 처음으로 종합 우승을 하는 등 중흥기를 맞았다. 1974년 제12회 경북도민체육대회가 포항에서 처음으로 열렸고 성공적인 대회 개최를 발판 삼아 ‘학교체육 육성 10개년 계획’을 수립해 체육 저변 확대, 지도자 양성, 체육 시설 확충에 전력을 쏟는 등 포항 체육 진흥의 기틀을 잡았다.1995년 포항시와 영일군이 통합함에 따라 체육회도 통합 체육회로 재구성되었고, 2016년에는 포항체육회와 포항생활체육회가 통합되었다. 2020년부터는 시장이 당연직으로 체육회장에 취임하던 것에서 변경되어 선거를 통해 체육회장을 선출했다.김 : 경북도민체육대회 이야기를 좀 해보죠. 선생님은 1회 때부터 선수로 출전하셨지요?최 :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도민체육대회가 열렸지. 10개 정식종목과 5개 시범종목에 33개 시·군이 참가한 것으로 기억해. 대구는 구 단위로 출전했는데 나는 대구상고가 있는 남구 대표로 나갔어. 전국체육대회처럼 성화도 있었는데 경주 토함산에서 채화해 경기장까지 봉송했지. 김 : 그 후로는 어떻게 참가하셨습니까?최 : 1974년까지 남대구 대표로 출전하다가 1975년부터는 포항 대표로 나갔지. 포항 선수로 뛴 것만 해도 20년이 넘어. 선수를 그만두고는 대회 임원으로 참가했으니 거의 반세기 동안 도민체육대회에 나간 것이지. 나도 그렇게 오랫동안 참가한 줄 몰랐는데 한 해 한 해 쌓이다 보니 그렇게 되었군.김 : 그렇게 오랫동안 참가하다 보면 재미있는 일도 많았을 것 같은데, 기억나는 일이 있으십니까?최 : 남동생이 둘 있는데 테니스를 했어. 1996년 도민체육대회 때 삼 형제(인수, 인국, 인호)가 모두 포항 대표로 출전했지. 두 동생이 테니스 선수로 출전하다가 그해에는 정구로 바꿔서 출전했어. 1999년에 포항에서 경북체육대회가 열렸는데 내가 개회식과 폐회식의 총지휘를 맡았어. 대규모 행사에서 막중한 임무를 맡다 보니 부담이 꽤 컸는데 실수 없이 잘 치른 덕분에 보람이 컸지.김 : 도민체육대회가 포항에서도 여러 번 개최됐지요?최 : 작년에 열린 대회까지 합하면 모두 여섯 번 개최했어.포항에서 처음 개최한 제12회 도민체육대회는 1974년 5월 18, 19일 이틀간 열렸다. 이 대회는 포항이 치른 최초의 도 단위 체육 행사였다. 성공적인 대회 개최로 지역 체육인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 지역 체육 발전에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었다. 두 번째는 1987년 5월 4일부터 6일까지 3일간 열린 제25회 대회였다. 대구시가 광역시로 분리된 직후여서 다른 시·군에서 개최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기에 포항과 경주에서 종목을 나누어 치른 대회였다. 그 후 1990년(제28회), 1999년(제37회), 2010년(제48회), 2022년(제60회) 경북도민체육대회가 포항에서 열렸다.김 : 전국체육대회도 포항에서 한 번 열렸지요?최 : 전국체육대회 이전에 1985년에 제14회 전국소년체육대회가 지방 중소도시 최초로 포항에서 개최되었어. 제15회와 제16회 전국소년체육대회 때는 사격, 축구, 체조, 수영 등 일부 종목이 포항에서 진행되었고. 그 후 10년이 지나 제76회 전국체육대회가 1995년 10월 2일부터 7일간 포항에서 열렸지. 전국소년체육대회 때 조성된 체육관, 종합운동장(제1종 육상경기장), 수영장, 사격장 등 경기 시설과 대회를 개최하면서 축적된 운영 경험이 전국체육대회 유치의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고 생각해. 도청 소재지가 아닌 중소도시에서 열린 최초의 전국체육대회이자 사실상 경상북도에 열린 최초의 전국체육대회였거든. 1995년은 광복 50주년이 되는 해였고 30년 만에 부활한 지방자치 시대의 원년이기도 했어. 이렇게 뜻깊은 해에 포항에서 전국체육대회가 열려 포항은 잔치 분위기였지. 다행스럽게 대회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포항의 위상을 전국에 알렸고 나 자신도 포항 체육인으로서 자부심을 느꼈어. 김 : 포항에서 열린 굵직한 체육대회에는 선생님의 노고가 더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말씀대로 보람이 컸을 것 같은데 보상도 있었습니까?최 :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고 자부심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되었지. 고맙게도 여러 기관과 단체에서 격려해주었어. 2001년에 포항시 최고체육상 공로상을 받은 게 각별히 기억에 남는군. 이 상은 학교장이나 가맹 경기단체의 장 또는 재정적 지원을 한 상공인이 받았는데 일선 교사는 내가 처음 수상하게 돼 무척 영광스러웠어.김 : 그만큼 포항체육회에 기여한 공이 컸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체육회에서도 많은 일을 하셨을 텐데요.최 : 오랜 기간 체육회에 있으면서 무난하게 일 처리를 해서인지 2005년에 체육회 부회장에 임명되었어. 학교체육 위원회장을 겸하는 자리였지. 부회장을 맡는 동안 학교체육의 기본 방침과 진흥에 대해 자문 역할을 했고 학생스포츠클럽 활성화와 신인 발굴, 꿈나무 육성 등 학교 운동부 운영에 대한 사업 전반을 살폈지.김 : 체육회 부회장은 언제까지 하신 겁니까?최 : 2009년에 부회장직을 내려놓고 체육회를 떠났지. 그 두 해 전에 교직 생활을 마감했고. 시간이 지나니 후배들에게 자리를 넘겨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더군.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리다 보니 지치기도 했고. 그동안 체육회에 몸담으면서 최선을 다했다고 느꼈기에 아쉬운 마음 없이 떠날 수 있었어.최인수1946년 서울에서 태어나 6·25전쟁 때 가족과 대구로 피난했다. 대구상고 시절 정구 선수로 활동했고 경북대학교 체육교육학과 재학 때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대학 졸업 후 대구 효성여고에서 교편을 잡았고, 1975년 포항 대동고등학교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되었다. 1979년 포철공고로 옮겨 야구부와 축구부 창단을 주도했다. 포항시 사립중·고등학교 체육교사협의회 회장, 포항시체육회 부회장, 포항시 생활체육협의회 상임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문체부장관 표창, 경상북도교육상, 포항시 최고체육 공로상 등을 수상했고 2007년 정년 퇴임했다. 2014년 종목별 원로들로 구성된 ‘포항 체육을 사랑하는 모임’(체사모)을 결성해 회장을 맡고 있다.대담·정리 : 김도일(소설가)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최인수

2023-08-09

연개소문 아들들의 ‘골육상쟁’이 부른 망국의 길

동서와 고금이 크게 다를 바 없다. 대저 ‘제국(帝國)’이 멸망하는 이유는 강력한 외세의 위협도, 바깥에서 오는 충격파 탓도 아니다. 내부가 무너지는 게 가장 큰 몰락의 시그널이다.고구려는 1천500여 년 전 신라와 백제를 포함한 우리 땅 고대 3왕국 중 가장 큰 영토를 차지했고, 당대의 강대국이었던 인근 수나라와 당나라의 모골을 송연하게 한 군사 대국이었다.그럼에도 668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무참하게 패배해 기원전 37년 동명성왕이 세운지 705년 만에 역사 속에서 이름이 지워진다. 허망하고 슬픈 마지막이었다.신라는 고구려의 절멸로 인해 삼한일통(삼국통일)에 한 발 더 성큼 다가선다. 당시 신라의 최고 권력자 문무왕 김법민과 태대각간(太大角干) 김유신은 고구려의 최후 항전 ‘평양성전투’에서도 승리를 맛본다.지금도 역사학자들은 고구려 멸망의 신호탄이 어디서 쏘아 올려진 것인지를 논쟁한다. 그 논쟁과는 별개로 고구려 말기의 흥망과 성쇠는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요약될 수 있다.2016년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간행한 ‘통일신라 시기-중앙과 지방’의 인용이다. “고구려는 오랜 기간 진행된 수나라·당나라와의 국운을 건 싸움에서 이김으로써 한동안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를 올렸다. 특히 642년 정변을 통해 집권한 연개소문이 군사력을 강화화고, 그를 기반으로 여러 차례에 걸친 당나라의 침공을 물리치는데 성공함으로써 내부의 정치적 안정을 되찾아갔다. 이로 말미암아 뒤이어진 당나라의 공격도 차례로 물리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대외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내부의 국력 소모가 만만치 않았다. 대외적 위기 속에 강압적 통치를 일삼던 연개소문이 666년 사망하자 그동안 누적돼온 모순이 즉각 겉으로 표출됐다. 연개소문이 죽자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으니 세 아들 사이의 정쟁이 그것이다. 장남 남생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막리지의 지위에 올랐지만 지방을 순행하는 사이에 동생 남건과 남산에 의해 쫓겨났다. 이에 남생은 평소 중앙정부에 반감을 갖고 있던 국내성 세력을 거느리고 당나라에 투항했다. 이로 말미암아 고구려는 예상 밖으로 쉽게 멸망하고 말았다.”◆‘태대각간’ 김유신에 필적했던 ‘대막리지’ 연개소문위에서도 여러 차례 이름이 거론되는 연개소문(594~666)은 김유신, 계백과 함께 삼국시대를 이야기할 때 신라, 고구려, 백제의 그 어떤 왕보다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다.보편적 대중들은 김유신을 가야 출신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삼한일통을 이룬 신라의 초특급 스타로, 계백은 풍전등화(風前燈火) 형국이었던 조국 백제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만고충신(萬古忠臣)으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대막리지(大莫離支) 연개소문은 어떤가.김유신의 벼슬 ‘태대각간’은 현대의 개념으로 보자면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근데, ‘대막리지’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겸 행정안전부장관’이라 말할 수 있는 것.그러니, 고구려의 마지막 통치자 보장왕(재위 642~668)은 ‘연개소문이 내세운 허수아비에 불과했다’는 이야기가 떠돈다.삼국통일 과정을 다루면서 연개소문의 삶과 죽음을 빼놓는다면 그건 ‘단팥이 빠진 찐빵’의 맛을 논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대막리지 연개소문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고구려 말기 그의 위상과 영향력을 말하기에 앞서 먼저 ‘당대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신라 김유신의 위상부터 살펴보자.육군사관학교 정재민 교수는 그의 논문 ‘영웅형 무장의 원형 김유신’의 서두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우리나라 최고의 명장을 꼽는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을지문덕, 김유신, 계백, 강감찬, 최영, 김종서, 이순신, 권율, 곽재우, 임경업 등 많은 장수들의 이름을 떠올릴 것이다. 이들 모두는 누란의 위기 속에서 나라를 구해낸 명장들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김유신은 다른 장수들에 비해 남다른 측면이 있다. 그는 7세기에 백제와 고구려를 합병해 삼국통일을 이룩했으며, 사후에는 흥무대왕으로 추존되었다. 또한, 軍威(군위·군대의 위신)에서는 將軍神(장군신)으로, 江陵(강릉)에서는 大嶺山神(대령산신)으로 마을을 수호하는 신격으로 숭배되고 있다.”살아있는 내내 권력의 정점에 있었고, 죽어서는 왕으로 추존(追尊)됐으며, 강원도 강릉을 포함한 일부 지역에서는 인간을 넘어 신(神)으로까지 추앙받는 게 김유신이다.이는 고대 왕국의 역사가 ‘승자독식(勝者獨食)의 관점’에서 기록되고, 그 기록이 영웅전설을 낳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얼마든지 이해가 가능하다.◆당나라까지 위협한 맹장(猛將)이었으나 그의 자식들은…헌데, 연개소문은 삼국통일 전쟁 과정의 승자가 아닌 패자임에도 가진 권력의 크기와 전장에서 떨친 용맹이 김유신을 위협하는 형국이다.여러 고문헌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앞뒤는 물론 좌우에서도 감히 바라보기가 두려운 거구의 맹장이었고, 전투에 나갈 때면 엎드린 호위병들의 등을 밟고 말에 올랐으며, 고구려의 어떤 귀족도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고 한다.영류왕을 죽이고 무력을 독점한 ‘쿠데타의 수장’ 연개소문은 뭇사람들에게 공포를 느끼게 하는 독재자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런 부정적 모습만이 그의 전부는 아니다.당시 중국 대륙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던 당나라의 왕들 또한 연개소문을 무서워했다.게다가 그는 고대 왕국의 틀을 갖추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권력의 중앙집중화’에도 적지 않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길고 드라마틱했던 연개소문의 생애를 아래와 같이 짤막하게 서술하고 있다.“연개소문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28대 보장왕의 즉위와 관련된 장수다. 동부대인이던 아버지의 직을 계승했으나, 귀족세력들이 영류왕과 함께 자신을 제거하려 하자 정변을 일으켜 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세워 국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당나라의 도사들을 맞아들여 도교를 육성했다. 당시의 국제 정세는 당나라의 대외팽창 정책으로 긴박한 형세였는데 강경 일변도의 대외정책을 구사했다. 화평을 청한 신라의 요청을 거부했고 당나라와의 전쟁도 불사했다. 연개소문이 살아 있는 동안 당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하지 못했다.” 연개소문은 나이 지긋한 중국인들이 너나없이 좋아하는 경극(京劇·노래와 춤과 연극이 혼합된 전통극)에까지 등장한다.다섯 자루의 칼을 휘두르며 당나라 태종 이세민(598~649)을 겁박하는 연개소문의 모습에서 1천400여 년 전 그가 가졌던 ‘대체 불가의 카리스마’를 짐작할 수 있다.하지만, 연개소문의 시대는 마냥 지속되지 않았다. 아들 셋을 남기고 연개소문이 사망한 건 고구려가 멸망하기 2년 전인 666년.그가 죽은 후 장남인 연남생이 대막리지 벼슬을 이어받는다. 사태가 어그러진 건 차남 연남건이 ‘이제 고구려의 권력은 내가 가져야겠다’는 야심을 품으면서부터였다.형 연남생이 궁궐을 비운 틈을 타 연남건은 동생인 연남산과 모의해 “이제는 형이 아닌 내가 대막리지”라고 선언한다.연남건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형 연남생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연헌충의 목숨까지 끊어버린다. 이는 ‘고구려판 계유정난’(癸酉靖難·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끌어내려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일)이라 불릴 만한 중차대한 사건이었다.연남생은 동생에게 당한 배신과 모욕을 참지 못하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모아 당나라에 투항해버린다. 이로써 연개소문의 아들 셋은 따스한 정을 나누는 혈육이 아닌 철천지원수가 됐다.◆평양성전투에서 고구려의 패배는 이미 예견된 것형제간의 골육상쟁으로 내부에서부터 붕괴의 조짐을 보였던 멸망 직전의 고구려.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은 신라의 고구려 침공은 이처럼 유리한 상황에서 전개됐다.신라는 문무왕과 김유신, 김인문(629~694·진골 왕족으로 무열왕의 아들이며 문무왕의 동생)이 수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당나라는 고종(당나라 3대 왕·재위 649~683)의 명령에 따르는 수많은 정예군으로 고구려의 평양성을 포위하고 1개월 이상 공격을 지속했다.지금으로부터 1천355년 전인 668년 늦여름. 한때는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넘어 서부 아시아까지 호령하던 로마 제국이 퇴폐와 방탕이라는 내부적 요인에 의해 무너진 것처럼 고구려의 운명도 저녁 하늘처럼 어둡게 저물고 있었다.(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8-08

하늘빛 닮은, 맑고 푸른 강이 흘러

포항은 예부터 물의 고장이었다.아호(阿湖), 두호(斗湖), 환호(環湖)라는 세 개의 큰 호수가 있었고형산강과 지류가 흐르며 다섯 개의 큰 섬을 낳았다.그리하여 포항을 삼호오도(三湖五島)라 했다.강은 포항의 곳곳을 적시며 흘렀다.형산강과 동빈내항 사이에도 유장한 강물이 흘렀다.지금 동빈내항보다 폭이 더 넓은 강에서아이들은 헤엄치며 조개를 잡았고 어른들은 낚싯대를 드리웠다.세월이 흐르며 그 강은 사라지고 말았다.형산강 너머 철강공단이 들어서고 주거지가 필요해지면서 강은 매립되고 말았다.매립된 강 위로 집들이 이마를 맞대고 촘촘히 들어섰다.강의 흐름이 끊기자 동빈내항의 수질은 나빠졌으며동빈내항과 인근 도심에 사람들의 발길도 뜸해졌다. 그 강이 다시 살아났다.포항운하라는 이름으로 형산강과 동빈내항 사이에 다시 물길을 냈다.운하 주변에 꽃과 나무를 심고 형형색색의 스틸아트 작품도 세웠다.‘찰랑교’라는 이름의 산뜻한 다리도 들어섰다.강의 흐름이 다시 이어지면서 동빈내항의 수질이 좋아졌으며동빈내항과 인근 도심에 사람들의 발길도 잦아졌다. 포항운하에서 출발한 유람선이 동빈내항을 지나 송도 바다를 지난다.유람선이 지나갈 때 갈매기 떼가 따라가며 즐겁게 합창한다. 포항운하에는 하늘빛 닮은, 맑고 푸른 강이 흐른다.물의 도시 포항은 강이 살아야 생명력이 넘친다. 임주은 임주은 1982년 포항에서 태어났으며 대구가톨릭대 공예과를 졸업했다. 개인전 2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아트페어에 서양화 작가로 참여했다. 현재 포항문화재단 이사, 포항청년작가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포항지부, 경북청년작가회 등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3-08-07

“젊고 힘 있는 고령 만들자” 인구증가 정책 추진 총력전

인구 감소로 인한 지역 소멸 위기는 어느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한국 농어촌이라면 모두가 고민하고 있는 보편적 문제다. ‘앞으로 한 세대가 더 지나면, 우리 마을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은 경북 역시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다.결국 문제는 인구 감소와 지역 소멸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대처할 것인지가 아닐까? 이를 위해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는 구성원들의 지혜를 모으고, 예산을 투여하며, 여러 형태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으로 개별 지자체의 존속을 위해 낮밤 없이 애쓰고 있다.고령군도 이런 추세에 발 빠르게 적응 중인 것은 당연한 이치. 이와 관련 이남철 고령군수는 “젊은 고령, 힘 있는 고령이란 군정 목표의 성공을 위해서도 모든 정책이 인구 늘리기 정책이 될 수 있도록 전 행정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지역에 맞는 실효성 있는 정책의 내실 있는 추진을 통해 활력 넘치는 고령군을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아래에서 인구 감소를 효과적으로 막아내고, 지역 소멸이란 위기의식을 잠재우기 위해 고령군이 펼치고 있는 각종 정책을 상세하게 알아보고자 한다. □ 지역 소멸 위기 극복을 위해 조직개편 후 인구정책과 신설가장 먼저 고령군이 선택한 주요 정책은 지역 소멸 위기 극복과 인구 감소 문제 대응을 위해 지난해 10월 조직개편을 통해 인구정책과를 신설한 것이다.그간 지역의 인구 감소 문제에 대한 단기대책으로 ‘고령사랑 주소갖기’ 운동에 행정력을 집중해 매월 30여 명에 달하는 인구 자연감소 폭을 최소화 하고 있다. 또한 이에 발맞춰 고령군 인구증가시책 지원 조례 개정을 통해 전입장려금을 전입자 1인당 10만원 지급하고 있다. 이주세대에 대한 주택대출 이자 지원, 인구 증가 우수마을에 대한 상사업비 지원 등도 전입 유도를 위한 정책 강화 차원에서 진행 중이다.또한 지난해 12월 교육, 청년, 여성, 학부모, 농업인, 기업인 등 각 계층을 대표하는 55명의 위원으로 ‘인구증가시책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는 것이 고령군의 설명. 이와 관련해 아파트 예비입주자 모임, 고령군 거주 희망 청년, 다자녀가구 등 각계각층의 주민들과 소통간담회를 통해 다양한 의견을 듣고 정책에 반영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단기대책과 더불어 중장기대책도 수립했다. 지방소멸대응기금 160억 원을 투자해 청년창업센터, 임대형 스마트팜, 농산물가공센터, 문화예술창작소 등의 지역 정착여건 향상을 위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것. 또한, 주민의 정주여건 개선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행정복지센터, 마을 소공원, 어르신 돌봄시설, 아이 돌봄시설, 주민 커뮤니티시설, 공용주차장 등의 주민복지·편의시설과 주민 대상 교육·컨설팅 등을 포함하는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에도 2019년부터 2026년까지 총 사업비 700억 원을 투자한다. 현재 관련 사업이 8개 읍·면에서 60여 개 추진 중이다.인근 신도시로의 전출이 인구 유출의 주요 원인으로 보고, 취약한 주거환경 개선을 위한 신규 주거단지 조성도 적극적으로 진행 중에 있다.곽촌지구 도시개발사업은 경북개발공사가 시행한다. 다산면 곽촌리 일원 26만2천917㎡ 면적에 인구 수용 4천600명, 주택 계획 1천849세대의 규모로 개발이 예정돼 있다. 현재 개발제한구역 해제 절차를 진행 중이며, 향후 도시개발사업 구역지정 및 개발계획 승인 절차를 밟은 후 2025년 착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대가야읍 도시개발사업은 민간기업에서 시행하는 사업이다. 올해 투자계획을 받았으며, 대가야읍 장기리 189번지 일원, 8만1천690㎡ 면적에 인구 수용 1천250명, 주택계획 625세대의 환지 개발방식으로 추진된다고 한다. 총 사업비는 1천700억 원으로 예상된다.□ 미래세대인 청년을 위한 각종 사업에도 노력 기울여그밖에도 고령은 삶과 일자리, 문화와 교육이 결합된 로컬주거단지를 조성하는 경상북도 역점사업인 ‘천년건축 시범마을 조성사업’에 경북 8군데 대상지 중 한 곳으로 선정됐다. 이와 함께 앞으로 국토교통부, 행정안전부, 문화체육관광부 등 7개 부처 협력사업으로 주거·문화·복지·일자리·돌봄·여가 등을 통합한 주거단지를 조성하는 사업인 ‘지역활력타운 조성사업’에도 공모할 계획이라는 게 고령군청의 부연이다.주요한 사업은 또 있다. 가장 많이 지역을 떠나고 있는 세대인 청년인구를 붙잡기 위한 다양한 지원정책도 펼치고 있는 것.올해 일자리·청년창업지원센터와 청년소통 플랫폼 ‘드루와樂’을 개소했으며, 청년 월세 지원사업, 청년근로자교통비 지원사업, 청년창업자 임대료 지원사업, 청년 창업공간 리모델링 지원사업 등을 통해 가능하면 많은 청년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 중이다.또, 경북도내에서 두 번째로 산후조리비 지원사업을 실시해 출산을 돕고 있고, 청년 임대주택 조성사업, 전통시장 청년몰 조성사업, 청년 복합귀농타운 조성사업 등도 순조롭게 추진되고 있다는 게 고령군청의 설명이다.이런 청년정책의 성과로 최근에는 행정안전부 주관 ‘2023년 청년마을 만들기 지원사업’에 고령군 1호 청년기업인 청년다운타운의 ‘플레이리스트(Playlist)’가 최종 선정돼, 3년간 국비 6억 원을 지원받게 됐다. □ 인구 늘리기 정책 통해 머물고 싶은 고령으로올해 1월부터는 인구감소지역지원특별법이 시행됨에 따라 지역에 월 1회 이상 체류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생활인구’ 개념이 도입됐고, 이러한 정책 변화에 대응한 결과 경상북도 공모사업에 3건이 선정돼 총 51억5천만 원의 사업비도 확보했다. 도시 사람들이 지방에 제2생활거점을 마련해 체류할 수 있도록 하는 ‘작은정원(클라이가르텐)사업’에 40억 원, 전입자의 주택 신축, 리모델링, 도로, 상하수도, 전기 등의 기반시설을 지원하는 ‘생활SOC 지원사업’에 10억 원, 도시지역 중장년들이 지속적으로 고령을 찾고, 교류하기 위한 프로그램인 ‘1시군-1생활인구 특화프로젝트’에 1억5천만 원을 확보한 것이다.이밖에도 생활인구의 주요한 축인 외국인의 지역 정착을 위한 ‘지역특화형 비자 시범사업’에도 선정돼 지금까지 33명의 외국인이 지역 정착을 위한 혜택을 받았다.인구 감소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처함으로써 지역 소멸을 막아내기 위해 고심하고 있는 이남철 군수는 “군정 목표 달성을 위해 우리가 추진하는 모든 정책의 중심에 인구 늘리기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고령의 지역적 특성에 맞춰 진행되고 있는 ‘인구 감소-지역 소멸’을 막기 위한 각종 사업들이 ‘가고 싶은 고령, 머물고 싶은 고령, 활력 넘치는 고령’이란 군정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발걸음에 실질적인 힘을 실어줄 수 있을 것인지 주목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전병휴기자 kr5853@kbmaeil.com

2023-08-07

박태준 회장의 특명, 운동부를 창단하라

1980년 5월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은 포철공고에 축구와 야구 중 교기 육성 종목 하나를 선정해 창단하라고 지시했다. 이 업무를 맡은 최인수 선생은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충분한 기초자료를 수집한 후에 우수 선수를 많이 확보할 수 있는 종목을 선택한다. 김 : 포철공고로 가서 1981년에 야구부를 창단하게 됩니다.최 : 포철공고에서 근무를 시작한 이듬해에 박태준 회장님이 축구와 야구 중 하나를 정해 교기(校技)로 육성하라고 지시하셨어. 그래서 먼저 선수 확보를 위해 경북도내 중·고등학교 운동부를 대상으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지. 당시는 대구가 경상북도에서 분리되기 전이었어. 자료를 살펴보니 야구부는 공립 중·고등학교에서 주로 운영하고 축구는 사립학교에서 운영하더군. 이게 왜 중요하냐면 축구를 하는 사립학교는 선수가 중학교를 졸업하면 거의 다 같은 재단의 고등학교로 진학하거든. 그만큼 선수 확보가 어렵다는 거지. 반면에 야구는 연계된 상급학교가 따로 없어서 선수 확보가 쉬운 편이고. 그래서 야구를 선정하게 된 거야.김 : 어느 학교가 야구부를 운영하고 있었습니까?최 : 중학교는 포항중, 경주중, 경주 무산중, 대구중, 경상중, 경복중이 있었지. 고등학교는 경북고, 대구상고, 대구고에 야구부가 있었고.김 : 그래도 신생 학교가 선수를 확보하려면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요.최 : 오히려 그 반대였어. 포철공고의 장점이 뭐냐면 선수들의 학비와 운동회비를 면제하는 것은 물론, 장비 일체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이었어.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야구 장비는 꽤 비싸서 선수와 학부모가 부담스러워했거든. 이런 조건을 걸고 선수 확보를 했더니 전국 상위권인 대구중학교 3학년 전원이 포철공고를 지원한 거야. 그랬더니 대구 지역 고등학교에서 난리가 났어. 경북고, 대구고, 대구상고가 합심해 경북교육위원회에 대구 지역 중학교 야구부의 포철공고 진학 포기 협조 요청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지. 김 : 선생님께서 참 난감하셨겠습니다.최 : 그랬지. 교육감님이 포철공고 교장에게 전화해 조금만 양보하라고 설득하더군. 결국 경북교육위원회 중재로 포항중 야구부 전원은 포철공고로 입학하고 다른 중학교 선수들은 각 고등학교에서 돌아가며 한 명씩 지명하는 방법을 택하지. 전국 최초로 드래프트 제도를 시행한 거야. 포철공고의 양보로 성립된 중재안이었어, 대구 지역 고등학교가 ‘제2의 장효조’라 불리던 대구중 정성룡 선수를 포철공고에 양보함으로써 갈등이 해소되었지.김 : 야구부가 창단된 다음해에 프로야구가 개막합니다. 시기가 참 절묘합니다.최 : 그런 셈이지. 원래 고교야구가 전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었는데 프로야구가 생기면서 야구 붐이 일었어. 야구를 하는 학생들에게도 커다란 동기가 유발되었고 말이야.김 : 야구부의 성적은 어땠습니까?최 : 야구부는 창단하고 얼마 되지 않아 큰 성과를 거뒀어. 창단 3년 차에 봉황대기, 청룡기, 전국체육대회, 황금사자기에서 준우승을 했고 무등기에서는 3위에 입상하며 돌풍을 일으켰지. 우승도 곧 할 수 있을 것 같더군. 그런데 아직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어. 오죽하면 내가 정년 퇴임사에서 “야구부가 준우승만 네 번 하고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한 게 한으로 남는다”라고 했겠나.김 : 그래도 훌륭한 선수를 많이 배출했지요?최 : 정성룡, 김성범, 최해명, 오봉옥, 강민호, 권혁, 최준석, 김동현, 김정혁, 이민호, 신동주, 김희걸, 김인철 등이 기억에 남아. 강민호는 지금도 삼성 라이온즈에서 없어서는 안 될 선수지.김 : 강민호 선수는 고향이 제주도인데 어떻게 포철공고로 오게 되었습니까?최 : 강민호는 제주 신광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포철중학교로 진학했어. 제주도에 야구부가 있는 중학교가 제일중학교밖에 없었지. 고등학교 야구부는 아예 없어 야구를 계속하려는 학생은 육지로 진학했고 대부분은 중학교 졸업 후에 그만두었어. 소년체전 때 강민호의 재능을 눈여겨본 포철중학교 감독이 스카웃했지. 강민호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권혁과 함께 금메달을 목에 건 것은 포철공고의 보람이기도 했어. 김 : 야구부를 창단하고 4년 뒤 축구부도 창단됩니다.최 : 그에 앞서 1983년에 포철중학교 축구부가 창단돼. 원래는 그 학생들의 고등학교 진학에 맞춰 1986년에 창단하려고 했는데 박태준 회장님의 지시로 한 해 앞당겨 창단한 거지.김 : 축구는 대부분 연계된 상급학교가 있어 선수 확보가 어렵다고 하셨는데.최 : 당연히 힘들었지. 게다가 1981년에 대구직할시와 경상북도의 행정구역이 분리되는 바람에 선수를 확보할 수 있는 학교가 더 줄었어. 선수를 데려올 수 있는 학교가 안동중, 강구중, 풍기중, 울진중 정도였지. 포철중은 3학년이 없어서 불가능했고. 고등학교는 안동고, 경주고, 영덕종고, 동지상고 등이 있어서 이전에도 고등학교끼리 선수 확보 경쟁이 치열했어. 게다가 기존 학교 보호를 구실로 경북축구협회에서도 비협조적이더군. 당시 경북축구협회가 안동에 있었거든. 경북축구협회에 가서 포철공고에 축구부를 창단하려고 한다니까 부회장이 대뜸 창단할 수 없다고 하지 뭔가. 너무 어이가 없어 언쟁을 벌어졌는데 사무국 직원이 뜯어말리느라 혼났지.김 : 그렇다고 축구부 창단을 포기할 수는 없었겠지요.최 : 하는 수 없이 경북체육회에 가서 선수등록부를 보고 연락처로 일일이 전화했어. 그랬더니 소식을 들은 중학교 감독과 코치들이 자기들 모르게 선수를 빼간다고 난리가 났지. 사실대로 말하고 사과한 후 협조를 구했어. 그렇게 해서 강구중 6명, 풍기중 2명, 울진중 2명을 확보했고, 서울 한양공고 2학년 재학생 4명을 전학시켜 인원을 채웠지. 안동중은 안동고가 있으니 끝까지 거절하더군. 골키퍼를 결국 못 구해 일반 재학생 중 소질 있는 한 명을 선수로 등록해 15명으로 1985년 3월 29일 창단했어. 김 : 포철공고 축구부는 성적이 정말 좋았지요.최 : 엄청났지. 내가 학교에서 나올 때까지 대통령배, 문화체육부장관기, 전국체전, KBS배, MBC배 등 전국대회에서 우승과 준우승, 3위를 각 8회씩 했으니까. 특히 이동국 선수가 입학한 1995년부터 최고 전성기였어. 1997년 KBS배 전국대회에서 우승했을 때 해병대에서 지원해준 차를 타고 포항 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했지. 일본 시즈오카에서 열린 한국, 일본, 캐나다 3개국 고교 축구대회에 포철공고가 한국 대표로 초청받아 참가하기도 했고. 이동국 외에 이창원, 이원재, 남의경, 박원재, 황진성, 오범석, 이수환, 이재동, 신광훈, 김강현, 신화용, 임경훈, 오주포, 김대한, 신수진, 김석근이 포철공고 출신의 최상급 선수들이야. 김 : 이동국 선수의 기량은 출중했지요.최 : 이동국은 원래 포항동부초등학교에 다녔어. 동국이가 4학년 때 포항시 초등학교 육상대회에 나가서 100m, 200m, 400m 계주, 멀리뛰기에서 우승했지. 동부초등학교는 육상부도 없어서 출전하는 데 의의를 두었는데 동국이 덕분에 단체 3위를 했거든. 동국이를 눈여겨본 포항 스틸러스 유스팀 이영환 감독이 동국이에게 축구를 권한 거야. 그래서 포철동초등학교로 전학한 거지. 동국이는 축구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차범근 축구상’을 받을 정도로 소질이 뛰어났고, 고등학교 때 전국 최고의 스타가 되었어.김 : 포철공고 운동부가 다른 학교와 비교했을 때 특별하게 운영되었던 게 있습니까?최 : 야구나 축구를 하는 학생 중 상급학교 진학이나 실업·프로팀으로 진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 이를 대비해 전 선수들이 훈련 후에 기능사 자격 취득을 위한 교육을 이수하도록 했어. 또 선수들의 정신교육과 체력 단련을 위해 매년 해병대에 입소해 유격훈련을 실시했지. 특히 축구는 우수 선수를 선발해 포항 스틸러스에서 브라질 유학을 보내주었어.최인수1946년 서울에서 태어나 6·25전쟁 때 가족과 대구로 피난했다. 대구상고 시절 정구 선수로 활동했고 경북대학교 체육교육학과 재학 때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대학 졸업 후 대구 효성여고에서 교편을 잡았고, 1975년 포항 대동고등학교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되었다. 1979년 포철공고로 옮겨 야구부와 축구부 창단을 주도했다. 포항시 사립중·고등학교 체육교사협의회 회장, 포항시체육회 부회장, 포항시 생활체육협의회 상임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문체부장관 표창, 경상북도교육상, 포항시 최고체육 공로상 등을 수상했고 2007년 정년 퇴임했다. 2014년 종목별 원로들로 구성된 ‘포항 체육을 사랑하는 모임’(체사모)을 결성해 회장을 맡고 있다.대담·정리 : 김도일(소설가)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최인수

2023-08-06

싱그러운 초목과 깨끗한 물, 올 여름은 ‘산소카페 청송군’으로

올 여름은 ‘엘니뇨 현상’으로 오랜 기간 폭염과 열대야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와 동시에 가파른 물가 상승의 여파 등으로 어려운 경제 상황도 지속되고 있는 실정이다.그럼에도 ‘코로나19 사태’의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왔기에 고약한 바이러스의 영향에서 일정 부분 벗어난 ‘엔데믹 시대’를 즐기려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렇기에 관광에 대한 갈증을 시원하게 해소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여행자들의 요구도 높아지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모두가 알다시피 ‘코로나19 사태’가 초래한 가장 큰 변화 중 하나가 언택트 생활문화의 확산과 정착이다. 이는 기존의 관광 형태를 대폭 변화시켰다. 이와 관련해 여행과 관광 전문가들은 “휴가와 휴양을 즐기는 다양한 요소들이 적지 않게 바뀔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한다.이런 추세를 반영한 듯 2023년 여름 현재 보이는 관광·여행 트렌드의 가장 큰 변화는 과거에 관광명소로 유명세를 떨치던 휴양지보다 비교적 사람들이 몰리지 않는 여행지를 선호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는 것.그 연장선에서 조용하고 공기 맑은 산과 계곡을 곁에 두고 편안한 마음으로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어낼 수 있는 경북의 여행지는 어딜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들이 많다.이미 오래전부터 깨끗하고 청정한 자연을 배경으로 최고의 여름 휴가지로 각광받고 있는 지역 중 하나가 청송군이다. 청송을 휴가지로 선택해 여행한 사람들은 “행복하게 여행하려면 가벼운 마음이 필수다. 청송은 사람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선물 같은 관광지”라고 입을 모은다.‘청송군 세일즈맨’이자 ‘청송 관광홍보맨’을 자처해온 윤경희 군수는 “힘들고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성큼 다가온 여름의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고민하는 분들 많다”며, “번잡한 도심을 피해 싱그러운 자연과 깨끗한 물, 한여름 8월의 풍성한 기운을 받으며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산소카페 청송군’에서 여유롭게 삶의 쉼표 하나를 찍어보시면 어떨까요”라며 청송 방문을 적극 권유하고 있다.이번 여름. 청송을 휴가지로 선택한 여행자들을 위해 ‘청송 100배 즐기는 방법’을 미리 알려주고자 한다. 그럼 지금부터 볼거리와 먹을거리, 거기에 더해 즐길거리까지 풍성한 청송으로 떠나보자. 출발지는 싱그런 녹음이 유혹하는 신성계곡이다.□ 여유로운 여름 산책 즐기는 ‘신성계곡 녹색길’신성계곡 녹색길은 관광공사 주관해 평가한 ‘여름철 관광지’로 선정된 걷기 좋은 여행길이다.갯버들 하천 길, 갈대 봇도랑 길, 방호정 길, 자암 길, 하천 과수원 길, 백석탄 길로 이어진 12km의 짙푸른 녹색길은 맑은 물과 푸른 숲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여기에 보너스로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까지 들으며 걷다 보면 갑갑한 일상에서 훌쩍 벗어났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특히 녹색길을 아우르는 신성계곡은 절경과 맑은 물, 그리고 빽빽한 소나무숲을 자랑한다. 방호정에서 고와리 백석탄에 이르는 계곡 전체가 청송군의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불리는 청송8경의 제1경으로 지정된 곳이다.또한, 이곳은 신성리 공룡발자국 화석산지, 방호정 감입곡류천, 백석탄 포트홀 등 청송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지질명소 4곳을 품고 있기에 아이들의 지구 환경 학습 장소로도 안성맞춤이라는 게 다녀온 사람들의 공통된 평가다.신성리 공룡발자국 화석산지는 2003년 태풍 매미 때 산사태가 발생해 약 400개의 공룡발자국이 발견된 곳이다. 공룡 모형이 설치돼 있는 소공원은 학습장의 역할과 동시에 사진 찍기 좋은 포토존으로도 활용되고 있다.방호정 감입곡류천은 아름다운 하천, 퇴적암 절벽, 도지정 민속문화재 ‘방호정’이 어우러진 명소로 유명하다. 방호정은 조선시대 선비 방호 조준도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해 생모 안동 권씨의 묘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세운 정자다. “신성계곡을 찾게 된다면 이곳을 빼놓으면 안 된다”는 게 청송군청의 친절한 설명이다.안덕면 고와리 계곡에 위치한 백석탄 포트홀은 알프스산맥의 미니 암봉 같은 바위 군이다. 하얀 바위 사이로 흐르는 깨끗하고 맑은 물은 ‘이곳은 신선이 산다는 선계(仙界가 아닐까’라는 착각까지 불러일으킨다.계곡의 흐름에 따라 오랜 시간 동안 침식돼 바위에 항아리 모양의 깊은 구멍들이 생겨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조선 인조 때는 경주 사람 송탄 김한룡이 백석탄의 시냇물이 맑고 아름답다 하여 고계(금)라 칭한 적도 있다고 한다. □ 깊은 골짜기에서 나무 향기와 함께 하는 ‘청송 얼음골’신성계곡을 돌아봤다면 다음 방문지로는 청송 얼음골을 추천한다. 여름의 최고 여행지로 손꼽히는 청송의 또 다른 명소가 얼음골이다.얼음골 계곡 주변은 한여름 외부 온도가 섭씨 32℃를 넘으면 얼음이 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일종의 더위가 불러오는 기적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자연의 신비로움을 간직한 장소이기도 하다.청송 얼음골은 골이 깊고 갖가지 나무들이 울창하며 상대적으로 인적이 드물어 산새들의 지저귐 속에서 일상의 피로를 날려버릴 수 있다. 또한, 계곡 골짜기를 따라 부는 시원한 바람과 맑은 공기를 한껏 호흡할 수 있는 잘 알려진 관광명소다.□ 달기·신촌 약수 한잔 마신 후엔 약수 백숙 먹으러달기약수탕은 청송읍 부곡리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30여 년 전 조선 후기 때 금부도사를 지낸 권성하가 벼슬을 마치고 낙향해 이곳 부곡리에 살면서 마을 사람들과 수로 공사를 하던 중 바위틈에서 솟아오르는 약수를 발견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수로를 만들던 이들이 물을 마셔보았더니 소화가 잘 되고 속이 편안해져 그 후 주민들이 즐겨 마시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 달기약수탕은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솟아나는 양에 변함이 없고, 찬바람 부는 엄동설한에도 얼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 색과 냄새가 없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상주-영덕간 고속도로 동청송IC 인근에 있는 신촌약수터는 조선 말 조정에서 전국의 약수를 점검하고 평가한 일이 있는데, 당시 이곳 약수가 가장 무겁고 맛이 독특했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한다. 이 약수는 위장병에 효험이 있다는 소문이 전해지면서 여행자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됐다는 후문이다.달기약수터와 신촌약수터에서 솟아나는 물에는 철분이 많아 약수터 주변이 붉게 산화된 모습을 볼 수 있다.탄산수는 톡 쏘는 맛이 특징인데, 이를 제대로 음미하려면 근처 가게에서 판매하는 달콤한 엿과 함께 먹어보는 것도 좋다. 또 약수로 밥을 지으면 푸른색 윤기가 도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밥은 찰기가 있어 지친 여름철 입맛을 돋우는데 그만이라고 한다.약수터에서 시원한 달기약수를 한 모금 마셨다면, 주위의 먹을거리를 찾아보는 것 역시 여름휴가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즐거움일 것이다. 달기·신촌 약수탕 근처에는 이곳 약수를 사용해 우려낸 약수 닭백숙이 여름철 보양식으로 잘 알려져있다.약수 닭백숙은 철분 함량이 높은 약수가 닭의 지방을 제거해줘 맛이 담백하고 소화가 잘돼 위에 부담을 덜하다.약수에 닭, 인삼, 황기, 감초, 대추, 녹두를 넣어 푹 고아서 닭이 알맞게 익으면 닭은 건져내 따로 담고, 국물에 쌀을 넣고 죽을 쒀 닭고기와 함께 먹는다. 닭죽은 위장병에 좋고, 몸의 기운을 돋우어 준다고 해서 많은 여행자들이 약수탕 인근 백숙 식당을 찾고 있다.□ 청송 여행의 마지막 보너스는 쾌적한 ‘캠핑장’수려한 산세와 울창한 수목을 가졌기에 전국에서 가장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장소로 호평 받는 청송군에는 캠핑과 삼림욕을 즐길 공간도 적지 않다.청송자연휴양림, 부남면 청송오토캠피장, 상의자동차야영장, 수달캠핑장 등이 바로 그런 곳들이다. 청송의 휴양림과 캠핑장, 야영장 모두는 비단 여름만이 아닌 봄과 가을, 겨울에도 가족단위 관광객들이 캠핑을 즐기며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공간으로 이름을 높이고 있는 중이다./김종철·홍성식 기자

2023-08-03

책을 보며 온전하게 휴식 취하는 북스테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책을 보면서 온전하게 휴식을 취하는 여행을 꿈꿔본 적이 있을 것이다. 책과 더불어 그림 같은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북스테이(book stay)가 최근 인기를 끌고 있다. 아직 우리에겐 북스테이가 다소 낯설지만 유럽에는 책방이나 북스테이와 관련된 체험공방 등이 마을 전체에 들어선 곳이 적지 않다. 그런 곳을 책마을이라고 부른다. 영국 웨일스 지방의 ‘헤이 온 와이’, 벨기에 플랑드르의 ‘담(DAMME)’, 프랑스 부르고뉴의 ‘퀴즈리’ 같은 곳이다. 여름의 절정, 책과 함께 쉼을 얻는 북캉스를 떠나보면 어떨까? 북스테이를 하기 좋은 두 곳의 서점과 전북 완주에 있는 한국형 책마을을 소개한다. ◇ 온전히 책 속에 몰입하다… ‘숲속작은책방’10년전 국내 최초 충북 괴산에 터 잡아소설부터 팝업북까지 책 3천여권 소장산막이 옛길 산책코스도 함께 즐겨볼만충북 괴산의 ‘숲속작은책방’은 국내에서 가장 먼저 북스테이를 시작한 곳이다. 서울에서 작은 어린이도서관을 운영하던 김병록·백창화 부부가 이곳에 터를 잡고 서점과 북스테이를 시작한 지 올해로 벌써 10년째다.숲속작은책방은 오봉산 기슭 평온한 전원마을에 있다. 유명세를 치른 곳이니 구경삼아 들락날락하는 사람은 없을까. ‘책방에 들어오면 책을 꼭 사는 것’을 원칙으로 내걸었더니 ‘인증샷’을 찍으려는 이들이 눈에 띄게 줄었단다.정갈한 정원에는 해먹을 걸어둔 정자와 피노키오를 조각한 오두막이 있고, 그 뒤로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듯 예쁜 이층집이 그림처럼 서 있다. 책방의 1층에는 인문서를 비롯해 에세이, 소설 등 3000여 권의 책이 진열돼 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그림책과 팝업북도 빈틈없이 갖췄다. 서점 벽면을 가득 채운 책꽂이와 가구는 모두 김병록 씨가 만들었다. 볕 잘 드는 거실 창 옆으로 그림책 작가를 위한 원화 전시공간도 마련했다. 창가 쪽에는 부부가 좋아하고 추천하는 책이 놓여 있는데, 책마다 일일이 소개 글과 감상을 적어 띠지로 둘렀다.2층은 오롯이 북스테이를 위한 공간이다. 두 곳의 객실을 서재와 침실로 꾸몄다. 서재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그림책이 대부분이지만 ‘식객’‘송곳’ 같은 유명 만화도 있다. 침대와 에어컨을 갖춘 침실에 텔레비전을 두지 않은 건 조용한 공간에서 편안히 독서를 즐기라는 책방지기의 배려다. 특히 거실은 여느 작가의 서재 같다. 김병록 씨는 “책을 편하게 읽을 공간이 없어서 책을 잘 안 읽게 된다”며 “어느 곳에서든 책을 접하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공간이 이곳의 콘셉트”라고 말했다.제약이 많은데도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것에 대해 책방지기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는 책에 관한 얘기, 사는 얘기를 주고받으며 하루를 보내면 금세 ‘가족’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곳에선 이름난 관광지 여느 펜션의 밤 풍경을 떠올리면 안 된다. 마당을 거닐며 머리를 식히고 의자에 앉아 달과 별을 보며 게으름을 부리는 일은 가능하다. 마당도 정갈하다. 북스테이 공간에는 작은 책상과 노트가 놓여 있다. 묵었다 떠날 때에는 반드시 노트에 글을 한 편 남기는 것도 원칙이다. 다시 찾았을 때 각자의 글을 펼쳐보며 추억을 곱씹고 마음도 다잡아보자는 취지란다.숲속작은책방이 있는 미루마을 산책도 꼭 해볼 만하다. 원래 교육문화를 테마로 조성된 전원마을이어서 동네 전체가 그림책에서 방금 튀어나온 것처럼 아름답다. 집집마다 파스텔톤 외벽으로 단장했다. 잔디 마당과 정성스레 가꾼 나무와 화초를 품은 정원도 갖췄다. 평온한 마을 풍경이 마음까지 편안하게 만든다. ‘산막이 옛길’까지 갔다 오는 이들도 있다. 숲속작은책방에서 산막이 옛길까지 걸어서 약 20분 거리다. 산막이 옛길은 칠성면 사오랑 마을에서 산막이 마을까지 괴산호를 따라 약 4㎞에 걸쳐 만들어진 산책로다. 호수를 끼고 가는 길은 풍경이 수려하고 오래된 느티나무 위에 만든 ‘괴음정’, 바닥을 강화유리로 마감한 고공전망대, 연하협 구름다리 등이 볼거리도 많다. 대부분 구간이 나무데크로 조성돼 걷기가 편하고 경사도 거의 없다. 30~40분이면 완주할 수 있다. 산 좋아하는 이들은 산책로 말고 호수를 에두른 등잔봉(450m), 천장봉(437m), 삼성봉(550m)을 잇는 능선 길을 타기도 한다. 등잔봉과 천장봉 중간에선 산막이 옛길의 상징이 된 ‘한반도 지형’도 볼 수 있다. 숲속작은책방에서는 갈론구곡(갈은구곡)도 가깝다. 자동차로 약 15분 거리에 있다. 화양구곡, 쌍곡구곡 등 괴산의 이름난 계곡에 비해 조금 덜 알려진 곳이다. 칠성면 갈론마을을 지나 2~3㎞ 계곡을 따라 거슬러 가면 강선대 등 9곳의 비경이 펼쳐진다.숲속작은책방 북스테이 입실은 오후 3시, 퇴실은 다음날 오전 10시다. 오직 한 가족만 이용할 수 있다. 1박 숙박 비용은 조식 포함, 2인 10만원, 3~4인 15만원, 5~6인 20만원(매주 수, 목, 금, 토요일 운영) ◇ 책 속에서 노는 ‘이루라책방’네이버 예약으로 하루 한팀만 이용 가능오두막·루프탑서 즐기는 바다전망은 덤200여 권의 책으로 만든 ‘책조명’도 이색강화군 내가면 구하리에 있는 ‘이루라책방’도 대표적인 북스테이 전문 책방이다. 이루라책방은 운영 시스템부터 특이하다. 네이버 예약을 통해 매일 시간대별로 단 한 팀만 받아 방문객이 방해받지 않고 책방 공간 전체를 오롯이 누릴 수 있도록 했다. 내부는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북카페 분위기다. 아동서부터 소설·경제·문학 등 다양한 책이 3층 높이의 책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책방에 앉아 있으면 통유리창 밖으로 강화의 시원한 풍경이 그대로 들어온다. 바닷바람과 정원 너머의 푸른 숲 덕분에 저절로 힐링이 되는 느낌이다. 200권의 책으로 만든 ‘책조명’이 특히 눈길을 끈다. 책방지기인 이정훈 씨의 작품이다. 책방을 연 김영선·이정훈 씨 부부는 모두 작가다. 부인 김씨는 아동문학계에서 이름이 알려진 동화작가, 남편 이씨는 경제·경영 관련 베스트셀러를 냈다.숙박 공간은 2층과 3층으로 분리돼 있다. 3층은 멀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글램핑장으로, 주로 가족 단위 방문객이 찾는다. 2층의 다락방처럼 생긴 오두막에서는 천창을 통해 달을 보면서 책과 함께 뒹굴 수 있다. 오두막 손님만을 위한 벚꽃정원도 따로 마련돼 있다.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3층 루프톱의 글램핑 시설에서는 황홀한 노을을 감상하고 온갖 새 소리, 개구리 소리를 들으며 자연을 만끽할 수 있다. ◇ 한국형 책마을, 완주 삼례 책마을일제 강점기때 만들어진 양곡창고 개조희귀한 동서양 고미술품 판매숍도 인기서점 옆 박물관에선 ‘만화전’ 등 열기도 전북 완주시 삼례에는 책마을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김제와 익산, 정읍 등지의 쌀을 옮기기 위해 만들었던 양곡창고를 개조해 조성한 삼례책마을이다. 영국의 책마을 ‘헤이 온 와이’를 모델로 삼았다. 북 하우스, 한국학아카이브, 북 갤러리, 삼례책마을센터 등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책마을로 들어서면 2층 천장까지 들어찬 책더미에 순간 멈칫한다. 입구에 옛 책방의 향수가 느껴지는 무인서점이 자리잡고 있어 누구나 마음에 드는 책을 구입할 수 있다. 희귀한 동서양의 고미술품을 전시, 판매하는 뮤지엄 숍도 인기다.서점 옆 박물관은 1년에 두세 차례 기획전을 열어 볼거리를 더하고 있다.박대헌 삼례책마을 이사장이 중학생 때부터 수집해온 희귀 기록과 인쇄물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시집 연애보’와 ‘철수와 영이: 김태형 교과서 그림’ ‘옛날은 우습구나: 송광용 만화일기 40년’을 전시 중이다. /글·사진=최병일 작가

2023-08-03

대동고를 거쳐 포철공고 교사가 되다

최인수 선생은 1975년에 포항 대동고등학교에 부임하게 된다. 대구 효성여고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한 지 1년 만의 일이었다. 20여 년간 터를 잡고 살아온 대구를 떠나 객지로 오기까지 결심이 쉽지 않았을 것이고 오는 과정에서도 우여곡절을 겪었을 터이다. 김 : 대구에서 포항으로 온 이유와 과정이 궁금합니다.최 : 효성여고에서 정신없이 보내다 보니 어느덧 겨울이 되었지. 방학인 데다 테니스부 운동도 잠시 쉬는 기간이라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는데 어느 날 한 친구가 집에 찾아왔어. 고등학교 때 같이 운동한 친구인데 포항에 자리를 잡고 있었지. 예전에 복잡한 일 때문에 생각을 정리할 겸 포항에 바람 쐬러 간 적이 있는데 그때 송도 근처에서 우연히 이 친구를 만나 크게 대접받은 적이 있었어. 친구가 술 한잔하자기에 그때 진 신세를 갚을 겸 따라나섰지. 당시에 일명 ‘나라시’라고 부르는 장거리 합승 택시가 있었거든. 대구역에서 그걸 잡아타고는 경주에 가자고 하더니 가는 도중에 포항으로 행선지를 바꾸지 뭔가. 제대로 얻어먹으려나 보다 생각하고 아무 말 없이 포항까지 갔어. 술자리가 파한 후(선생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 어릴 적 부친이 술로 건강과 재산을 잃는 과정을 본 까닭이다.) 다음 날 오전 10시에 포항전화국 옆 다방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여관방에서 하룻밤을 보냈지. 다음 날 아침, 다방에서 친구를 기다리는데 약속한 시간이 되어도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어. 대신 다른 사람이 다가오더군.김 : 그 사람이 누구였습니까?최 : 김현호 대동고등학교 교장이었어. 김현호 교장은 포항정구협회 회장을 맡고 있어서 예전부터 친분이 있었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드리며 여기는 어떻게 오셨는지 물었어. 나를 만나러 왔다고 하면서 사실은 여름에 대구 효성여고에서 열린 전국사립고등학교 교장 회의에 참석했다가 선수를 지도하는 나를 보고 대동고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고 하시는 거야. 그래서 친분이 있던 내 친구에게 자리를 마련해달라 부탁해서 나를 포항에 데리고 온 거라고 하더군. 내가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마침 친구도 나타났어.김 : 김현호 교장이 선생님을 데리고 오려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요?최 : 1973년에 대동고등학교가 개교했으니 2년이 지난 시점이었지. 신생 학교여서 학생 유치에 어려움이 많았던 모양이야. 교장은 이를 해결할 방안으로 당시 교사들 사이에 인기가 많은 정구대회 개최를 생각한 거야. 무슨 말이냐면 그 대회에 중학교 교사들을 초청해서 우수 학생들을 보내달라고 홍보할 구상을 한 거지. 그뿐 아니라 대동고등학교에도 정구부를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러던 차에 효성여고에서 나를 보고는 이 계획을 실행할 적임자로 생각했나 봐. 이런 얘기를 하면서 대동고로 오면 안 되겠냐고 간곡히 부탁했어. 친구도 자기와 운동을 같이하며 포항에서 살자고 설득했고. 그렇지 않아도 여고 근무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터라 잠시 고민하다가 그러자고 했지.김 : 효성여고에서도 선생님이 필요했을 텐데 전근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습니까?최 : 왜 없었겠나? 사립학교 교사가 다른 사립학교로 옮기려면 전(前) 학교 교장의 허가가 있어야 하거든. 대동고로 가겠으니 허락해달라고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며 펄쩍 뛰었지. 아주 난리가 났어. 몇 번을 찾아가서 사정하고 온 가족이 포항으로 이사했다고 거짓말도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어. 하지만 이미 마음이 떠났는데 붙잡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는지 결국에는 못 이기는 척하고 승낙해주더군. 허가서를 주면서 “최 선생, 거기 가면 분명히 후회하고 돌아오고 싶을 거다. 앞으로 3년 동안 최 선생 후임자는 뽑지 않을 테니 그 안에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돌아오라”고 하셨어. 정말 죄송하고 또 고맙더군. 우여곡절 끝에 대동고등학교에 부임했을 때는 이미 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이 지나 있었지.김 : 대동고등학교의 첫인상은 어땠습니까?최 : 포항터미널에 내려 택시를 타고 기사에게 대동고등학교로 가자고 하니까 대동고등학교를 모르는 거야. 동료 기사에게 묻고 물어 학교에 도착하니 입구가 비포장이라 시커먼 진창길이야. 건물 두 개 중 하나는 아직 완공되지 않은 상태였어. 지나가는 학생에게 고등학교 건물이 어디냐고 물어보니 짓고 있는 건물을 가리키더군. 그 순간 효성여고 교장이 한 얘기가 떠올랐어.김 : 다시 대구로 돌아가고 싶었겠습니다.최 : 김현호 교장을 만나 인사를 드리는데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어. 김 교장도 내 웃음의 의미를 알았는지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3년만 도와주면 안 되겠냐고 하더군. 나도 그 난리를 치고 왔는데 자존심 때문에 바로 돌아가기는 싫었어. 그래서 3년은 하고 돌아가자고 생각했지. 그렇게 대동고등학교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차츰 학교에 정이 들었어. 얼마 뒤에는 대구로 돌아갈 생각을 아예 안 하게 되었고 말이야. 김 : 당시 학교의 체육 교육은 어땠습니까?최 : 신생 학교라 시설이 완공되지 않았지만 운동부는 꽤 활성화되어 있었어. 육상부와 조정부가 있었지. 이듬해에 검도부가 창단되는 등 당시에는 체육 교사가 흔치 않았는데도 운동부 육성에 열성적이었어. 그 당시 대동고 외에 동지상고(현 동지고)에도 검도부가 있었고 포항수고와 동지여상(현 동지여고), 포항실업전문대(현 포항대학)에 조정부가 있었지. 1978년에는 포항고에 사격부가 생겼고.김 : 하지만 3년 뒤에는 대동고등학교를 떠나게 되는군요.최 :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어. 포항에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결혼했어. 학교 앞 주택에 신혼집을 차렸는데 집주인이 교장 선생님의 동생이었어. 동생도 교사였는데 울진 매화중학교로 발령을 받아 내가 그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지. 그런데 집주인이 갑자기 포항으로 다시 오겠다고 하는 바람에 당장 집을 비워주고 다른 집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 된 거야. 집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무렵에 포항제철에서 공립이었던 포항공고를 인수했어. 포항제철이 필요한 인력을 직접 양성하겠다는 조치였지. 그게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야. 그런데 포항공고에서 근무하던 교사 중 다른 공립학교로 전근한 이들이 많아서 교사가 부족했지. 그때 포철공고에서 교사로 오면 13평 아파트를 제공해준다는 거야. 그런 이유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지.김 : 선택의 여지가 없었겠습니다.최 : 그게 아니었다면 대동고에 남았을 거야. 김현호 교장은 내가 학교를 옮긴다고 하니 엄청 화를 냈지. 내가 학교에 남아 학생 유치에 도움을 주고 정구대회에도 같이 나가주길 바랐으니까. 얼마나 화가 났는지 나한테 아예 포항을 떠나라고 하더군.김 : 전후 사정을 얘기해보지 그랬습니까?최 : 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옮긴다는 것을 사실대로 말했으면 오해가 풀렸을 텐데 자존심 때문에 그러지 못했어. 그 후 몇 년 동안은 우연히 만나 인사를 드려도 아는 체도 하지 않더군. 참 마음이 아팠어. 그러다가 어느 해, 크리스마스카드에 용서를 비는 말과 함께 대동고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자세하게 적어 보냈어. 그제야 관계가 회복되었지. 그 후로는 교직원 국가대표로 일본에 같이 다녀오고 내가 포항사립중·고등학교 체육교사협의회 회장에 취임할 때 축사도 해주셨어. 최인수1946년 서울에서 태어나 6·25전쟁 때 가족과 대구로 피난했다. 대구상고 시절 정구 선수로 활동했고 경북대학교 체육교육학과 재학 때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대학 졸업 후 대구 효성여고에서 교편을 잡았고, 1975년 포항 대동고등학교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되었다. 1979년 포철공고로 옮겨 야구부와 축구부 창단을 주도했다. 포항시 사립중·고등학교 체육교사협의회 회장, 포항시체육회 부회장, 포항시 생활체육협의회 상임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문체부장관 표창, 경상북도교육상, 포항시 최고체육 공로상 등을 수상했고 2007년 정년 퇴임했다. 2014년 종목별 원로들로 구성된 ‘포항 체육을 사랑하는 모임’(체사모)을 결성해 회장을 맡고 있다.대담·정리 : 김도일(소설가)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최인수

2023-08-02

“국가균형발전과 지역경기 부활이란 시민들의 염원 이룰 것”

신현국 문경시장은 1년 전 취임식에서 다시 한번 얻은 기회에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1%의 가능성에도 포기하지 않는, 시정 발전을 위해 긍정적인 자세로 끊임없이 도전하는 시장이 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문경시청 제2민원실을 설치해 구도심지역 주민들의 원활한 민원 업무 처리가 가능하도록 했고, 기존 2층에 위치했던 시장 집무실을 청사 1층으로 이전해 시민들과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다. 시민들과 소통하며 규정과 절차에 얽매인 소극적 행정에서 벗어나, 주민의 입장에서 쉽고 빠른 해결책을 찾는 데 역량을 집중해 왔다.신 시장은 “인구감소와 지역소멸의 위기 극복을 위한 ‘3대 시정 프로젝트’ 추진에 사활을 걸겠다. 국가균형발전이라는 국정과제와 지역경기부활이라는 시민들의 염원 달성을 이루어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문경시 ‘3·3·3 운동’은 무엇인가.△3·3·3운동이란 긍정, 친절의 3대 마인드와 시정 3대 중점과제를 아우른 것으로, 감동의 긍정행정, 멋진 친절도시, 지방부활 명품정책의 삼박자를 시민과 함께 만들어 가기 위해 제안한 3대 프로젝트이다.먼저, ‘새롭게, 재밌게, 멋있게’ 비슷하지만 같지 않게 시민에게 감동을 주고, 의미와 재미가 가미된 기획을 통해 품위 있는 정책으로 멋이 깃든 문경을 만들기 위한, 중복되는 접미사 ‘게’를 활용한 ‘3게 긍정실천운동’이다.다음으로 ‘가슴으로, 정성으로, 따뜻함으로’ 라는 친절정신을 공직자에서부터 공단, 유관기관, 나아가 시민이 다함께 참여하여 ‘친절’을 관광 상품화해 전국 최고의 친절 도시로 발돋움할 계획이다. 3·3·3운동을 통해 문경시가 긍정적이고 친절한 도시로 거듭나고, 더불어 중점 사업도 성공적으로 해내겠다.-한국체육대학교 유치 문제는 어디까지 진행됐나.△문경시 역시 시대적 문제인 지방소멸의 파도를 피해갈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해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체육대학교를 문경으로 유치해 학생과 교직원을 전입 인구로 확보하고, 경기 활성화를 도모할 계획이다.한국체육대학 문경이전을 위해 지난해 12월 한국체육대학교 문경 이전 범시민 추진위원회가 출범했으며, 조례를 제정하고 주변 인구감소지역 및 비혁신도시와 연대를 구축하는 등 정부의 2차 공공기관 이전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문경에 국군체육부대가 있고, 세계적인 군인체육대회를 치를 만큼 잘 조성된 스포츠 인프라와 수도권과의 탁월한 접근성을 들어 한체대 이전의 최적지이다.1%의 낮은 가능성으로도 국군체육부대를 유치했던 기존의 경험을 살려 끊임없이 전국을 누비며 유치를 위해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숭실대 문경캠퍼스 설립 추진현황은.△숭실대 문경캠퍼스 유치 역시 한국체육대학교 유치와 함께 제 중점 공약 중 하나이다. 지난해 11월 숭실대학교 문경캠퍼스 유치 추진위원회 출범을 시작으로, 문경시와 문경대 간의 확약서를 체결했다.숭실대와 문경대 간의 대학통합이 성사된다면 문경시로서는 인구증가 및 고등교육 인프라 구축과 더불어 지역경제 활성화까지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둘 것으로 기대된다. 숭실대와 문경대 양 학교 측에서 학령 인구 감소라는 문제에 직면해 새로운 변화와 도전이 필요하다.이미, 10년 전 모든 문경시민이 합심해 국군체육부대와 서울대 연수원, STX리조트, 숭실대 연수원 등을 유치한 경험이 있는 만큼 결코 쉽지 않겠지만 1%의 가능성도 포기하지 않고 전진하겠다.-농민사관학교 및 소방장비기술원 유치 성과는.△한체대와 숭실대 유치 등 문경시가 당면한 인구감소문제의 해결을 위해 기관 및 기업 유치를 목표로 노력해 왔는데, 그 과정에서 올해 초 경북도 산하 기관인 농민사관학교와 경북소방장비기술원을 문경시에 유치하는 성과를 이뤄낼 수 있었다.농민사관학교는 이전 예정지로 문경향토음식학교를 증축, 리모델링해 이전하기로 확정했다. 내년 2월에는 이전 개소 및 교육 운영을 개시할 수 있도록 힘을 기울이고 있다. 농민사관학교의 유치가 문경 디지털 혁신 농업 도시 조성사업과 연계되어 미래 스마트경북형 농업으로 도약하는 시너지 효과가 기대된다.경북소방장비기술원은 이전지 선정 심사위원회에서 직접 발표자로 참석해 중부내륙고속철도가 지나가는 교통의 중심지인 문경시의 강점과 도 소속기관이 없다는 형평성을 내세워 이전의 당위성을 설명한 결과 최종적으로 유치를 확정지었다.경북소방장비기술원은 안동시에 위치한 경북소방학교와 포항시에 위치한 119특수대응단과 함께 경북소방벨트로서 안전한 대한민국 구축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스포츠 체육 분야의 성과 및 활성화 계획은.△문경 브랜드를 앞세운 전국 단위 체육대회를 개최해 스포츠도시 문경의 이미지를 굳건히 하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매년 문경의 특산품과 관광명소를 타이틀로 하는 체육대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2023년에는 아시아하키연맹 정기총회를 비롯한 73개의 체육행사를 유치했다.민속씨름 문경장사대회, 춘계 전국 초중고 유도연맹전, 동아일보기 전국소프트테니스대회, 문경새재배 전국 파크골프대회 등 다양한 종목을 아우르는 전국 규모의 대회가 열렸다. 8월에는 1만여 명이 함께하는 문경새재 맨발 페스티벌이 개최될 예정이다.최근 2024 세계태권도 한마당 문경 개최를 확정지었고, 2025 아시아소프트테니스선수권대회도 총력 유치전에 나서고 있다.이렇게 다양한 국내·외 스포츠대회와 전지훈련을 유치한 배경에는 문경국제소프트테스장, 배드민턴 전용경기장, 온누리 스포츠 센터 등 우리 시가 갖춘 우수한 스포츠 인프라가 있다.앞으로도 시민운동장을 리모델링하고 국제클라이밍센터를 보수, 파크골프장 추가 조성 등 체육시설 보강을 통해 생활체육을 활성화하여 함께하는 활력도시, 스포츠 메카로 만들어 나갈 계획이다.-축제 성과 및 향후 계획은.△그동안 200t 19억원의 판매 실적을 올리며 국가대표 명품 감홍사과의 명성을 알린 사과축제, 6만 명의 관광객을 동원하며 5억원의 판매 수익을 올린 오미자축제, 50두의 한우를 완판한 약돌한우축제 등 지역에 활력이 도는 많은 축제들이 있다.가장 최근 진행한 2023 찻사발축제의 경우 코로나19 이후 전면 대면 축제로 개최하게 되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입장료와 주차요금 그리고 새재 내 전동차 이용료까지 전면 무료화하고, 우천 상황에 대처해 야자매트를 설치하는 등 축제장을 찾은 관광객들의 편의에 신경을 썼다.축제 진행 9일 동안 24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은 이번 찻사발축제는 경제적 효과로 137억여원의 실익을 거두는 등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축제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투자’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가 만족하는 축제를 기획하는 것이 목표이며, 축제의 기간과 컨텐츠를 늘려 더 많은 관광객들이 축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힘쓰고 있다.-농촌 인구의 감소와 노령화 대책은.△농촌의 고질적인 인력난 해소를 위해 지난해 베트남 라이쩌우성과 농업 분야 계절근로자 도입을 위한 세부 협약을 체결하였으며, 120여명의 근로자를 과수, 원예 등 신청 농가 일손돕기에 투입했다.또한, 농촌인력지원센터를 조성해 농민이 잘살고 대접받는 농촌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더불어, 용배수로 설치와 농로정비 등 농업기반정비와 농촌 취약지역 생활여건 개선사업 등 환경정비와 함께 각종 보조사업을 통해 농가의 부담을 줄이는데 노력하고 있다.벼 육묘대 지원, 벼 건조료 지원 및 기초 농산물에 대한 지원, 사과, 오미자 등 과수 및 특용작물에 대한 지원, 축산 농가에 대한 풀자료 지원 등 농사짓기 편하고 살기 좋은 농촌을 위해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다. /강남진기자

2023-08-02

명실상부한 ‘고대 통일국가 신라’ 완성시킨 문무왕

‘삼국통일(삼한일통)’에 가장 큰 힘을 보탠 이가 누구인지를 논쟁할 때면 언제나 뜨거운 갑론을박 속에 견해가 갈린다.“백제를 병합하고 고구려를 무너뜨릴 국력의 토대를 마련한 무열왕 김춘추다”라는 의견이 있고, “그렇지 않다. 실상은 왕보다 더 큰 국가 무력의 실질적 지휘자였던 김유신”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그러나, 결국 역사는 풍문이 아닌 ‘팩트(Fact)’로 기록된다. 백제에 이어 고구려를 병합하고, 당나라를 축출함으로써 크건 작건 명실상부한 ‘고대 통일국가 신라’를 완성시킨 건 문무왕(文武王)이다.세상이 그를 부르던 이름은 김법민(金法敏). 626년에 태어나 681년에 죽었으니, 지상에서 머문 시간은 55년. 신라의 서른 번째 왕으로 군림했던 건 백제가 멸망하고, 아버지 무열왕이 사망한 661년부터 681년까지니 20년이다. ◆아버지가 무열왕, 외숙부는 김유신...금수저 중 금수저그렇다면 역사는 그를 어떤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을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고문헌을 총괄한 ‘두산백과’를 아래 요약한다.“성은 김(金) 이름 법민(法敏), 시호는 문무(文武)다. ‘삼국유사’엔 문호왕(文虎王)이라고도 기록돼 있다. 무열왕의 적장자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명왕후. ‘삼국유사’엔 왕비는 선품(善品)이라 기록돼 있다. 어릴 때부터 영특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진덕여왕 때는 사신으로 당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무열왕 집권 후 655년 태자로 봉해졌다. 660년 백제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공을 세웠다. 무열왕이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 무열왕의 뜻을 계승해 백제의 저항운동을 무력화시키고, 668년엔 당나라와 연합해 고구려 평양성을 함락시켜 삼한일통(三韓一統)을 완수했다. 676년 나당전쟁(羅唐戰爭·신라와 당나라의 싸움)에서 승리해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옛 고구려의 남쪽 지방까지 영토를 넓혔다.”문무왕은 ‘태생적’으로 복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21세기엔 돈이 풍족하고, 권력을 가진 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금수저를 물고 나왔다”고 이야기한다. 2023년 오늘이라면 재벌과 최고위직 공무원의 아들, 딸쯤에 해당되겠다.허나, 김법민이 태어나며 물고 나온 건 ‘금수저’ 정도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빼어난 능력과 수완으로 성골(聖骨)이 아닌 진골(眞骨)임에도 신라 왕에 최초로 오른 김춘추.엄마의 오빠, 그러니까 외숙부는 신라와 백제, 고구려까지를 통틀어 최고의 무장(武將)이자 용장(勇將)이라 불리던 신라 권력의 핵심 김유신이었다.허니, 문무왕 김법민은 금수저 따위는 우스운 ‘다이아몬드 수저를 갖추고 태어난 아이’였던 것.조금은 속된 비유가 될 수 있으나, ‘에이스 카드 2장을 처음부터 쥐고 치는 포커 게임은 이기기보다 지는 게 더 어려운 법’.부친 김춘추라는 ‘스페이드 에이스 카드’에, 외삼촌 김유신이라는 ‘클로버 에이스 카드’까지 손에 들고 나머지 두 장의 에이스 카드를 모아 ‘삼국통일’이란 과업을 향해 질주했던 문무왕 김법민.그러나, 문무왕은 타자가 부여한 태생적 행운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부각시키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바로 이것이 오늘날 퇴폐적인 몇몇 재벌의 아들이나, ‘갑질’을 자신의 권리인 줄 착각하는 몇몇 고위직 공무원의 딸과 문무왕 김법민의 변별점이라 할 수 있다.서울교대 사회교육과 임기환 교수의 논문 ‘고구려 멸망기 신라의 군사 활동’을 보면 문무왕이 삼한일통으로 가는 주요한 길목이라 할 ‘고구려 병합’ 과정에서 어떤 결의와 역할을 했는지가 서술되고 있다. 주요 대목을 옮긴다.“667년에 문무왕은 당 고종의 공식적인 참전 요청이 없었음에도 대규모 신라군을 이끌고 북진했다. 이는 평양성 공격에 신라군이 배제되어 전후 처리 과정에서 고구려 영토에 대한 권리를 잃지 않기 위한 의도였다…(중략) 문무왕은 그동안 준비를 갖춘 대규모 원정군을 출정시켰다. 신라군의 참전으로 고구려군은 압록강 방어 전략을 대대적으로 수정하여 평양성 전투에 승부를 걸었으며, 그 결과 당나라 군대의 압록강 전선 돌파가 가능해졌다…(후략)” ◆문무왕, 선친을 넘어서는 괄목할 업적을 남기다시인 고운기는 그의 책 ‘인물한국사’를 통해 문무왕의 생애가 어떤 행운과 굴곡으로 이어졌는지를 보다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문무왕은 태자 시절부터 벌써 아버지(무열왕 김춘추) 이상의 눈부신 활약을 한 사람이다.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기도 전인 진덕여왕 때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고, 늦게 왕위에 오른 아버지를 도와 병부령(兵部令·신라 군사직의 으뜸 벼슬)의 자리에서 나라의 기강을 잡았다. 아버지는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사비성을 함락한 승전보 속에 생애를 마쳤지만, 아들(문무왕 김법민)은 계속되는 백제의 부흥운동을 제압하고, 고구려를 쳐서 멸망시킨 다음 당나라 군사마저 쫓아내기까지 과중한 임무를 맡아야 했다.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무열왕의 업적이 화려한 서곡에 불과할 정도로 문무왕은 통일의 주역으로서 자신의 몫을 다했다.”더없이 운이 좋았던 출생 배경에만 안분지족(安分知足) 했다면, 김법민은 ‘그저 그렇게 잘 먹고 잘 살다가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죽은 흔하디흔한 왕족 중 하나’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을 터.하지만, 김법민은 달랐다. 왕을 대신해 당나라를 오가며 신라의 국익 실현에 동분서주했고, 아버지 사후에는 백제를 부활시키려는 군대, 거친 기질이 몸에 밴 고구려의 군인들 앞에 목숨을 걸고 모습을 드러냈다.뿐 아니다. 당시의 초강대국 당나라의 축출이란 고난도의 과제까지 완수한 것. 이로써 실질적 삼국통일(삼한일통)에 마침표를 찍었던 문무왕은 죽음과 마지막에 남긴 말까지 영화적이었다.‘삼국사기-신라본기’는 681년 7월 초하루 세상을 떠난 문무왕의 유조(遺詔·왕의 유언)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나는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해 영토를 안정시켰고 마침내 멀고 가까운 곳을 평안하게 했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었고, 백성을 어질고 오래 살게 했다. 여러 어려운 고생을 무릅쓰다가 마침내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렸다. 운명은 가고 이름만 남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종묘의 주인은 잠시도 비워서는 안 되므로, 태자(신문왕)는 곧 관 앞에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 지난날 모든 일을 처리하던 영웅도 마지막엔 한 무더기의 흙으로 돌아갔다. 그러니, 내가 죽고 10일 뒤 화장(火葬)하면 족하다. 장례는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라.” ◆자신의 뜻에 따라 신라의 바다를 지키는 용으로...신문왕은 위와 같은 말에 더해 “죽으면 왜구로부터 내 나라 백성을 지켜주는 용이 되고 싶으니, 내 뼈를 동쪽 바다에 묻어라”고 한다.이로써 삼국통일, 또는 삼한일통을 논할 때 무열왕 김춘추와 흥무대왕 김유신에 필적하는 역사적 위상을 가진 문무왕 김법민의 통치 20년은 마무리 된다.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그의 유택(幽宅)으로 추정되는 곳은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해변 앞 커다란 바위 가운데다. 이른바 문무왕릉. 신라 왕의 유골이 봉안된 곳이라 해서 속칭 ‘대왕암(大王岩)’이라고도 불린다. 아래는 그와 관련된 ‘두산백과’의 부연.“대왕암은 육지에서 200여m 떨어진 바다에 있다. 큰 바위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고, 중앙에 약간의 넓은 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에 대석을 이동해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대왕암 주변은 큰 화강암이 둘러싸고 있는데, 네 방향으로 물길이 나있어 주변 바위는 네 부분으로 구분돼 있다. 물길이 난 가운데 공간을 가다듬은 흔적이 발견됐다.”그리고 여담 하나.문무왕은 아버지와 외숙부 복만 있었던 게 아니다. 그의 뒤를 이어 신라의 집권자로 등극한 이는 큰아들이었던 신문왕 김정명(金政明·재위 681~692).신문왕은 아버지의 애국·애민 의지를 계승하겠다는 뜻에서 문무왕릉 지척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었고, 용이 된 아버지가 밤이 되면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절 아래 커다란 공간까지 만들었다.아버지는 왕이었고, 외삼촌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이었다. 거기에 효자 아들까지 뒀으니 이쯤 되면 “문무왕은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까지 행복했던 사람”이라 말해도 될 것 같다.(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8-01

수많은 추억이 무늬진, 포항의 영원한 노스탤지어

송도는 그리움이다.송도 다리를 건너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하늘을 덮은 가로수길을 걸어가면평화의 여상(女像)과 모래언덕이 반갑게 맞아주었고명사십리와 푸른 파도, 갈매기의 군무가 황홀하게 펼쳐졌다.백사장은 어린아이들이 아무리 뛰어가도끝이 없을 정도였고그 넓은 곳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해수욕객이북적거렸다.바다에는 크고 작은 유람선이 떠다녔고다이빙대에는 어린아이들이 바글거리며 바다로첨벙첨벙 뛰어들었다.동해안에서 가장 이름 높은 해수욕장은 포항 송도였다. 송도는 예술의 탄생지였다.일제강점기 때 이육사는 태풍이 휘몰아치는 송도 바다에서강렬한 내면의 체험을 했고,광복 후에는 한흑구가 거의 매일 같이송도 해변을 거닐며 ‘은둔의 사색가’로 살았다.포항의 예술가들도 송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시와 그림과 노래의 영감을 얻었다.송도는 새로움이다.유실된 백사장을 살려내고갈매기가 인도하는 유람선이 다니며평화의 여상 주변에 삼삼오오 모여 악기를 연주하고흥겹게 노래를 부른다.카페촌에는 사람들이 모여앉아 차 한 잔, 술 한 잔에파도를 담아 그리운 이름을 불러낸다.파도 소리 정겨운 송도해수욕장에는 낭만의 선율이 흐른다. 예나 지금이나 송도는 해 뜰 무렵 찬란하고해 질 녘에 애잔하다.수많은 추억이 무늬진 백사장에 추억은 계속 쌓일 것이다.송도는 포항의 영원한 노스탤지어다. 최수정 최수정 197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포항에서 성장했다. 계명대 서양화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6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포항지부, 현상회, 계명회 등의 회원이며 포항에서 갤러리m을 운영하고 있다. ‘호미곶 이야기’, ‘비밀이 사는 아파트’, ‘꿈꾸는 복치’ 등의 책에 그림을 그렸다.

2023-07-31

전통시장·소상공인에 진심인 김천, 다각도 지원으로 날개 단다

김천시가 전통시장 상인들과 소상공인이 직면한 경영 위기 해결을 넘어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다양한 지원사업을 통해 자체 경쟁력을 갖춘 튼튼한 자립기반을 구축, 민생경제 되살리고 나아가 지역경제 활성화를 꾀할 방침이다.김충섭 김천시장은 “코로나19 이후 일상회복의 단계에서 소비심리 위축, 경기침체 등으로 영세 소상공인들의 완전한 회복을 이루기에는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다. 김천시에서는 전통시장과 소상공인의 위기를 함께 이겨내기 위해 다양한 시책을 발굴하고 추진해 소상공인의 디딤돌이 될 수 있도록 더욱 매진하겠다”고 강조했다. □ 김천사랑상품권 할인 혜택 10%유지김천시는 지역자금의 역외유출을 방지하여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 소상공인 살리기의 일환으로 2019년부터 ‘Happy together 김천사랑상품권’을 발행하고 있다올해는 국비 지원의 대폭 감소에도 불구하고 시비를 최대로 반영해 월 50만원 한도, 할인율 10%를 유지해 운영중이다. 2023년 발행목표는 1천251억원으로 6월 말 기준 표의 63%에 달하는 794억원이 판매됐다. 이는 김천사랑상품권에 대한 시민들이 끊임없는 관심과 이용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주요 이용처는 일반음식점(30%), 슈퍼마켓·편의점 등 소매점(14%), 주유소(13%), 병원·약국(10%), 학원(6%) 등으로 시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다양한 업종의 사업장에서 폭넓게 이용되고 있다.또한 김천시에서는 전입지원금(1인 20만원), 임신축하금(1인 20만원), 입영지원금(1인 10만원), 경북도 농어민수당(1인 60만원, 상·하반기 각 1회) 등 다양한 정책지원금을 김천사랑카드로 지급해 시민들이 쉽고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올해부터는 고향사랑기부제 답례품도 김천사랑카드로 제공하여 지역경제 활성화는 물론 지역공동체 강화에도 기여하고 있다.□ 소상공인 특례보증한도 상향지속되는 경기 불황으로 자금난을 겪는 지역 소상공인들에게 경북신용보증재단의 100%보증으로 융자를 지원하고 2년간 3%의 이자를 시비로 보전하는 소상공인 특례보증사업을 시행중이다.특히 올해는 심각한 경제위기 상황과 소상공인의 빠른 회복 지원을 위해 보증규모를 100억원에서 200억원으로 대폭 확대하고 보증한도 또한 2천만원에서 최대 3천만원까지 상향했다.이 사업은 지난 2018년 시작으로 2022년까지 5년간 시비 80억원을 출연해 800억원 규모로 총 3천200여명에게 지원하며 복합위기에 놓인 소상공인들의 경영 회복과 성장을 위한 버팀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소상공인 고용보험료 지원 대상 확대김천시는 지난해부터 소상공인의 사업자 폐업이 불가피할 때 생활 안정과 전직·재창업 준비를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소상공인 고용보험료 지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지난해는 1인 소상공인만 지원 대상이었으나 올해부터는 전체 소상공인으로 대상자를 확대했다. 또한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과 업무 협약을 맺어 소상공인의 고용보험 가입을 활성화와 정보 공유하는 등 소상공인 지원에 힘쓰고 있다.지난 4월 사업 공고 후 대상자를 상시 모집중이며 대상자로 선정된 소상공인은 납부한 고용보험료의 40∼60%를 김천시에서 최대 3년간 지원받을 수 있다. 또한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을 통한 고용보험료의 20∼50%을 추가 지원받아 최대 90%보험료 지원으로 고용보험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소상공인 온라인 시장 진출 지원소비 및 유통환경의 비대면·온라인화, e커머스 시장의 급속한 성장이 두드러진 가운데 김천시에서는 소상공인의 온라인시장 진출을 집중지원 한다.각종 SNS나 오픈마켓 등에서의 광고를 통해 사업장을 알리고 매출을 증대시킬 수 있도록 온라인 홍보비용을 최대 30만원까지 지원하는 ‘온라인 마케팅 홍보비용 지원사업’을 지난해에 이어서 시행중이다. 이 사업은 지난 6월 공고 이후 많은 소상공인들의 관심으로 신청이 이어지고 있으며 예산소진 시까지 온라인 또는 방문(김천시청 일자리경제과)를 통해 신청할 수 있다.온라인시장이 확대되고 있으나 온라인이라는 진입 장벽과 준비 없는 창업으로 실패를 맞는 소상공인에게 판로개척과 경쟁력 제고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8월에 ‘온라인 마케팅 역량강화 컨설팅’도 예정되어 있다.□ 착한가격업소 이용 활성화김천시는 지역 평균 가격 대비 저렴한 가격으로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소를 지원함으로써 물가 안정에 기여하고 있는 업소 23곳을 ‘착한가격업소’로 지정해 운영하고 있다.착한가격업소들은 인근 상권 평균 가격 대비 10∼20% 저렴한 가격을 일정기간 이상 유지하고 있으며 업소에는 매년 150만원 상당의 물품을 지원하고 있다. 현재 대상 업소를 상시 모집 중에 있으며 가격뿐만 아니라 위생, 이용만족도, 공공성 등을 통해 착한가격업소의 당위성을 갖춰 시민들에게 신뢰를 주는 업소로 자리 잡고 있다. □‘불금불토 밤나들이 야시장’ 운영김천시는 전통시장에 활력을 북돋기 위해 지난 5월 19일부터 4주간 ‘불금불토 밤나들이 야시장’을 운영했다. 평화시장 일원에서 개최된 야시장은 여름밤 가족들과 함께 먹거리와 볼거리를 즐기는 기회를 제공하여 뜨거운 호응 속에 시즌1이 완료됐다.이동통신 기지국 기반 빅데이터에 따르면 야시장 기간동안 평화시장 일대 유동 인수는 야시장 이전과 비교하여 평균 4∼5천명 차이를 보여 전체 시즌1 기간동안 총 3만에서 4만여 명이 방문한 것으로 집계돼 시민들이 찾는 전통시장으로 한 발 더 다가섰다.더욱 알찬 구성으로 오는 8월 25일에 ‘불금불토 밤나들이 야시장 시즌2가 예정돼 있다. 평화로상가와 평화시장 축제가 함께 시즌2를 이끌어 원도심 상권 활성화도 도모할 예정이다.김천/나채복기자 ncb7737@kbmaeil.com

2023-07-31

“문화유산 활용은 더 잘 보존하고 향유할 수 있게 하는 것”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은 오래된 논쟁이다. 보존에 가치를 두는 쪽은 허울 좋은 활용은 훼손과 다름없고, 어떤 방식의 활용도 문화재 본연의 가치를 전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활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기존의 문화재 보존은 문화를 박제하고 화석화한다고 비판한다. 끊임없이 변동하는 문화의 속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보존과 활용은 상반된 개념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라는 주장이 제기됐고, 정부의 문화재 정책은 보존에서 활용으로 흐르고 있다.보존해야 할 ‘문화유산’과 ‘활용’이라는 단어가 병행하는 ‘경주문화유산활용연구원’의 최경남 대표를 만났다. 칠불암을 활용한 프로그램으로 문화재청이 주관하는 지역 문화재활용 우수사업 명예의 전당에 오른 곳이다. 최 대표와 약속을 잡고 찾아간 사무실은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 특유의 끈끈함과 활력이 감돌았다. -‘칠불암 5감(感) 힐링체험’의 참가자 만족도가 높다고 들었다.△문화재청이 지원하는 전통산사문화재 활용사업 6년 차에 접어드는 사업이다. 2019년부터 3년 연속으로 지역 문화재활용 우수사업으로 선정되어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경주시 담당 공무원과 상을 받으러 갔는데 문화재청장이 수여하면서 “잘 받기 힘든 상입니다.”라고 했다. 전국에 400개 넘는 문화유산 활용사업이 있지만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사업은 1년에 한두 팀 나올까 말까라고 한다.-답사와 공연 관람이 혼재하는 프로그램인가.△비슷하지만 하나가 빠져있다. 칠불암의 ‘7’을 스토리텔링 해서 문화재, 숲, 명상, 예술을 5감으로 풀어낸다. 초기에는 답사로 알고 오거나, 체험비에 대해 “문 없는 사찰에 가는데 왜 돈을 내느냐?”고 따지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 프로그램은 칠불암의 7개 스토리를 다섯 가지 감각으로 버무린 융복합 문화재 체험 행사다. 중요한 것은 예술인의 감성으로 풀어내는 문화유산 프로그램이라는 점이다. 지역 예술가들이 모든 과정을 동행하며 두런두런 대화할 수 있는 것도 특별하다.-지역 예술가들과의 만남은 어떻게 이뤄지나.△칠불암 가는 길 내내 동행한다. 해설자만 있는 기존 답사와 달리, 예술인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함께 한다. 30여 명의 지역 예술인과 문화계 인사가 1인 3역을 하며 함께 움직인다. 칠불암으로 이동하는 시간은 50분이지만 전체 운영은 5시간이 걸린다. 출발하기 전 명상부터 시작해 숲 해설가의 설명을 듣고 칠불암 주지 스님과의 만남도 있다. 한 호흡 가다듬고 천천히 하산하면서 원효 스님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사상과 요석 공주와의 사랑을 담은 연극을 볼 수 있다. 공연은 20분 정도로 주제만 전달하도록 구성했다.-문화유산 활용 대상으로 칠불암을 선택한 이유는.△칠불암은 남산 유일의 국보를 보유한 사찰로, 신선암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압권이다. 물도 전기도 부족한 곳이지만 공양간은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스님이 직접 다려 주시는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칠불암을 올라가는 초입에는 ‘칠불암 올라가는 짐’이 있고, 암자 마루 밑에는 ‘내려가는 짐’이 있다. 누구든지 마음 내키는 만큼 짐을 옮겨준다. 객도 없고 주인도 없는 모든 이들의 공간인 셈이다. 사찰이라고 하면 불국사처럼 큰 사찰을 먼저 떠올리지만 이처럼 작은 산사만의 독특한 문화가 있다. 전통 산사의 맥이 이어지는 칠불암의 매력을 전하고 싶었다. -경주와는 어떻게 인연이 닿았나.△1990년대 말 보문단지 야외 공연팀 일원으로 경주에 왔다. 당시 국악을 전공하는 학생으로 일일이 뵙고 찾아다니며 배워야 하는 정순임, 정경호, 주영희, 이성애 선생 같은 쟁쟁한 대가들이 한자리에 계셔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판소리와 아쟁, 가야금, 대금 등 각 분야 대가가 모였으니, 무대는 또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거기다 보문단지 공연장은 너무 아름다웠다. 경주 사람들은 늘 봐와서 귀한지 모르겠지만 대가들의 공연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무대는 드물다. 아쉽게도 상설 공연은 끝났지만, 그때 인연으로 지금까지 경주에 정착해서 살고 있다.-국악인으로 활동하다가 문화유산 활용사업에 뛰어든 계기는.△고등학생 때 기타를 배우러 갔다가 장구에 홀려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장구 소리가 천둥처럼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장구를 치면 목탁 소리처럼 편안해지기도 했다. 국악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 동시에 사람과 만나는 도구이다. 예술이란 끝없는 자기와의 싸움이고 평생 가지고 갈 나의 정체성이다. 하지만 예술인에게도 일이 필요하고 그 일이 세상에 도움이 되기를 늘 바라왔다. 보문단지에서 공연하던 팀이 흩어지고 문화체육관광부 예술강사지원사업 국악 강사로 활동했다. 경북지역 대표로 문체부 지원정책에도 참여했고, 대한민국 국악 강사 협의회를 이끌기도 했다. 여러 분야 예술인과 교류하면서 새로운 무대를 시도했고, 이 정도면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괜찮겠다는 자신감도 얻었다. 내가 가진 재능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이기를 바라면서 예술인의 감성으로 풀어내는 문화유산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경주문화유산활용연구원은 그렇게 탄생했다. 2017년에 설립해 이듬해부터 ‘칠불암 5감 힐링체험’ 행사를 시작했고 2020년 사단법인으로 허가받았다.-경주의 문화유산 활용단체 가운데 경주문화유산활용연구원이 갖는 차별성은.△경주문화원과 신라문화원,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 경주향교, 서악서원 등 10여 곳에서 문화유산 활용사업을 하고 있다. 우리 연구원은 콘텐츠 개발 전문 단체로 주로 감성형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사업에 참여한다는 점이 강점이다. 참가자와의 교감을 중시하며 체험객의 특성 파악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일반적으로 문화재는 유지, 보존되어야 한다고 인식된다. 문화재의 상품화와 관광객 유입으로 문화재 훼손을 우려하는 시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10여 년 전부터 문화재청은 ‘최고의 보존은 활용’이라는 가치를 내걸고 활용사업을 권장하고 있다. 문화유산 활용사업은 사람이 많이 찾는 관광지가 아닌 숨겨지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을 위주로 진행한다. 또 지나가는 관광객이 아니라 프로그램 참여를 위해 모인 대상자를 위해 진행한다. 사업의 첫 번째 목표는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알리는 것이다. 그다음은 닫힌 문화재, 숨겨진 문화재를 개방하고 알리기다. 활용사업을 하기 전 향교나 서원은 춘향대제와 추향대제 그러니까 1년에 두어 번 개방했다.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빈집은 시간이 지나면 결국 무너져 내린다. 방문객을 맞으면서 건물의 수명이 연장된 셈이다. 이처럼 문화유산 활용사업은 소중한 문화유산을 더 잘 보존하고 제대로 향유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것이 활용사업의 진정성이다.-사업을 하면서 힘든 점이 있다면.△국비 사업이라 매년 심사를 받아야 한다. 보조사업의 특성상 끊임없이 시험대에 오른다. 어제도 서류 작업을 하느라 밤을 새웠다. 프로그램의 기조는 바뀌지 않지만, 세부 사항은 매달 개선하고 체험객의 성향에 따라 내용을 조정하는 일도 끝이 없다. 체험 물품도 직접 제작하고 모객도 신경을 써야 하지만 가치있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이 있다. 광주에 우리처럼 명예의 전당에 오른 월봉서원 행사가 있다. 사업이 성공하고 체험객이 몰리면서 담당 공무원이 특진하고, 문화재활용팀이 독립됐으며, 교육체험관이 지어졌다. 경주도 그렇게 되리라 기대한다.-앞으로 더 활용하고 싶은 경주의 문화유산이 있나.△경주에는 문화유산이 다양하지만 실제로 발길이 모이는 곳은 한정되어 있다. 관광객의 다양한 취향이 반영되도록 관광지가 세분되고 분산되면 좋겠다. 신라에 푹 빠져 경주에 왔지만, 막상 와보니 지나치게 신라에만 집중하고 있다. 경주에는 신라 말고도 주민들과 함께해 온 유적지가 많다. 지금까지 조명을 덜 받은 문화유산을 알리는 작업을 하고 싶다. 현재 복원 중인 경주읍성은 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담은 곳이다. 경주읍성을 주제로 ‘경주읍성 생생 나들이’를 진행한 바 있고 기회가 된다면 내년에 개선된 프로그램을 선보이려 한다.-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경주의 숨은 명소는.△사업을 하면서 보니 경주에 숨은 명소가 많았다. 배리 삼존불입상과 옥룡암 탑곡마애불상군, 삼릉숲, 감실할매부처라고 불리는 불곡마애여래좌상도 좋아하는 곳이다. 말하고 보니 모두 남산인데, 남산은 굳이 등산이 아니라도 둘레길만 걸어도 좋다. 동남산과 서남산을 잇는 셔틀버스가 있다면 더 많은 이들이 둘레길을 찾을 것이다.-수많은 경주의 명소 가운데 문화유산 활용사업의 첫 발을 뗀 곳이 남산이다. 최경남 대표에게 ‘경주 남산’은 어떤 곳인가.△‘나를 만나게 해주는 곳’이다. 신라의 시작과 끝이 함께 있는 곳. 신라를 모두 담았다고 해도 될 만큼 이야기가 많은 곳이다. 고청 윤경렬 선생을 비롯해 남산을 알리고 지켜온 어른들이 계신다. 미약하나마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 뜻을 이어가고자 한다.최경남 대표는대구예술대학교에서 한국음악을 공부하고, 중앙대학교 국악교육대학원에서 국악초등교육을 전공했으며, 동의대학교 스토리텔링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 진주검무, 처용무 전수자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예술강사지원사업 국악 강사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국악 강사 협의회장을 역임했다. 신라만파식적보존회가 주관하는 ‘경주세계피리축제’와 신라처용무보존회의 ‘경주시 문화의 날’ 축하공연, 경주문화원의 ‘문화재 야행’등을 기획·운영하며 쌓은 노하우로 경주문화유산활용연구원을 설립했다. 전통산사문화재 ‘칠불암 5감 힐링체험’과 세계유산 활용 프로그램 ‘오래된 미래’, 전수교육관 활성화 사업인 ‘똑똑한 문화재 열려라 참깨’ 등을 진행하고 있다.배은정 1974년 대구 출생. 경북대학교 사학과 졸업. TBC·포항MBC·경북교통방송 작가. ‘포항문화의 상징과 공간’ 공저/배은정 작가

2023-07-31

정구, 소년 가장에게 희망이 되다

포항 역사에서 체육은 중요한 맥을 이룬다. 1945년 조선무술회를 결성한 동암(東庵) 문달식의 인생을 되짚어보면 포항이 김정행, 정성숙, 김재범 같은 한국 유도계의 거물을 배출할 수 있었던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1960년대 국가대표로 한국 여자농구를 이끌었던 이귀복, 이춘자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면 동지중·고등학교 영어 교사 남인우가 포항에 농구를 들여온 1951년을 만나게 된다. 포항수산고(현 한국해양마이스터고) 3학년 천인태는 1981년 한 해 동안 7개의 한국 신기록을 수립해 ‘포항 물개’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정규 풀(pool)이 없어 영일만을 훈련장으로 삼았다는 그의 이야기는 지금보다 푸르고 맑았을 40년 전의 영일만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또 한 명……. 선수, 교육자, 체육 행정가로 포항 체육사에 선명한 발자취를 남기고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최인수(崔仁秀) 선생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김도일(이하 김) : 체격에 비해 손이 두껍고 힘이 좋으신 것 같습니다.최인수(이하 최) : 그런가? 정구를 오래 해서 그런 것 같아. 지금도 일주일에 한두 번 코트에 나가거든. 골프장에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나가고.김 : 태어나고 자란 곳은 어디입니까?최 : 서울 종로에서 광복 이듬해에 태어났어. 다섯 살 때 6·25전쟁이 발발했는데 그때 대구로 피난 왔지. 피난 중에 학교에 갈 나이가 되어서 삼덕초등학교에 입학했고, 전쟁이 끝나서도 서울로 가지 않고 대구에 정착했지. 그 후 초등학교 세 개(동인, 중앙, 삼덕)가 통합돼 동덕초등학교가 설립되었는데 1959년에 2회로 졸업했어. 김 : 전쟁에 대한 기억은 있습니까?최 : 너무 어려서 또렷한 기억은 없어. 집을 나와서 가족들과 산속에 숨어 있는데 멀리서 들리던 총소리는 생각나. 당시 선친이 종로에서 양행점(洋行店, 서양식 잡화점)을 운영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어. 집이 단독주택이었고 말이야. 전쟁이 터지자 지하실에 경찰 고위 간부를 숨겨주었는데 그분이 피난 때 트럭을 제공해주어 편하게 대구까지 온 기억이 나. 김 : 대구 생활은 어땠습니까?최 : 선친이 대구에서도 양행점을 열어 크게 성공했지. 당시 대구에 2대 양행점이 있었는데 하나는 대구백화점 창업주가 운영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가 선친이 운영하는 것이었어. 장사가 잘된 만큼 부모님은 자식들을 돌볼 겨를도 없이 바빴어. 그러다가 내 바로 밑에 남동생이 있었는데 삶은 달걀과 건빵을 먹은 다음 날 새벽에 장이 막혀 급사했지 뭔가. 선친을 많이 닮아 유독 귀여움을 받던 동생이었지. 그 일을 계기로 선친은 사업을 팽개치고 술에 의지해 살았고, 그러는 사이 연이어 사기를 당해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어. 누님의 고등학교 입학금을 못 낼 정도였지. 그때 누님과 내 학비를 벌려고 다방과 술집을 돌아다니며 담배와 껌을 팔았어. 텃새 때문에 맞기도 하고 돈과 물건을 빼앗기기도 하고……. 그러다가 체육 교사였던 박근수 선생님께 들켰지. 당시에는 겁이 나서 도망갔는데 다음 날 선생님 앞에 서니 서러움에 북받쳐 눈물만 나오더군. 나중에 선생님이 사정을 알고 극빈자로 등록해주셔서 학비를 면제받을 수 있었지. 선생님의 배려 덕분에 장사도 계속할 수 있게 되어 누님이 고등학교 들어갈 때 학비를 낼 수 있었고. 내가 평생을 체육계에 몸담을 수 있었던 것도 박근수 선생님의 영향이 아닐까 싶어.김 : 정구 선수로 활동하셨지요.최 : 1962년에 대구상고에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했지. 중학생 때 농업 선생님이 덴마크에서 유학하신 분이었어. 그분이 유학 시절에 배운 배드민턴을 학교에 보급하며 대회를 개최했지. 내가 그 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보면 운동에 소질이 있었던 것 같아. 대구 중앙통 한일은행에 정구 코트가 있었는데 대구중, 계성중 정구 동아리 학생들이 그곳에서 운동을 했지. 가끔 그 학생들과 어울려 정구를 같이했어. 대회에 나가기로 한 대구중학교 선수 하나가 갑자기 몸이 아픈 바람에 내가 대신 출전했는데 처음 나간 대회에서 3위를 했지 뭔가. 그때 대구상고 정구부 감독 눈에 들었어.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하면 학비가 전혀 안 든다는 것이 정구 선수가 된 결정적인 이유였지. 김 : 본격적으로 운동선수의 길로 들어선 것이군요. 어땠습니까?최 : 예상보다 훨씬 혹독했지. 운동도 힘들었지만 선배들한테 기합과 구타를 당하는 게 더 견디기 어려웠어. 거의 매일 3학년이 2학년을, 2학년이 1학년을 집합시켜 가혹행위를 했어. 한번은 맞다가 허리를 다쳐 한 달 동안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선수 생명이 끝나는 줄 알았지. 퇴원 후 때린 선배를 찾아가 복수한다고 난리를 치다가 오히려 선배와 선배의 친구들에게 두들겨 맞고 운동부를 나와버렸어. 나중에 3학년 선배의 중재로 때린 선배와 화해하고 허리도 괜찮아져 운동부에 복귀했지만 지금도 그때의 영향으로 허리가 안 좋아.김 :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삼호방직에 들어가셨지요?최 : 당시 전매청과 더불어 대구에 실업팀을 운영하는 두 곳 중 하나였지. 선수도 직원이어서 안전관리과에 소속되었어. 아침에 출근해 오전 내내 잡담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오후에 연습 좀 하고 퇴근하는 게 일과였지. 그러다가 대회가 있으면 출전하고. 평생 선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작은 기술 하나라도 배워야겠다 싶어 무엇이라도 배울 수 있는 직책을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했어. 회사 사정도 이해되는 것이 선수들은 대회나 연습 때문에 근무 시간이 들쑥날쑥해서 오히려 방해만 되었겠지. 계속 이런 생활을 하다가는 미래가 없을 것 같아 2년 만에 퇴사한 거야. 김 : 퇴사 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최 : 퇴사를 고민하던 시기에 경북대학교에서 정구부를 만든다며 입학 제의가 들어왔어. 그런데 입학 조건이 체육특기생이 아니라 일반 학생 자격이었어. 국립대 특성상 제한이 있었던 것 같아. 여전히 집안 형편이 나아지지 않아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어서 쉽게 응하지 못하다가 중학교 은사인 박근수 선생님을 보며 입학을 결심했지. 당시 선생님께서는 중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공부를 계속해 대구한의대 교수로 재직 중이었거든. 박근수 선생님을 롤 모델로 삼은 거지. 예상했지만 학비를 벌면서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는 것은 정말 힘들었어. 코트 관리를 하며 정구장 회원들한테 얼마간의 관리비를 받고 쌍화차를 끓여 새벽에 운동하는 회원들에게 팔기도 했지. 나중에는 회원들이 내 사정을 알고 많은 도움을 주었어.김 : 실업 선수로 있다가 대학 선수가 되신 거네요?최 : 그런 셈이지. 2년간 실업팀에서 많은 경험을 쌓은 덕분에 크고 작은 대회에서 입상할 수 있었어. 그러다가 3학년 때 국가대표로 선발돼 일본에서 열린 국제대회에 출전했지. 그 덕분에 이름이 알려지자 도움을 주는 분도 많아졌어. 당시 정구 대신 테니스붐이 일어났는데 이영길 대구정구협회장의 도움으로 대구 아카데미극장 옆에 작은 테니스용품 가게를 열었지. 일본에 갔을 때 스포츠용품 영업사원들이 와서 자사 제품들을 홍보하더군. 그때 알게 된 용품 회사 직원인 고바야시라는 사람에게 정가보다 30퍼센트 할인된 가격으로 물품을 받아 판매했는데 꽤 잘되었어.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되어야 해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동생에게 용품점 운영을 맡겼지.김 : 졸업하고 바로 교직에 들어간 겁니까?최 : 1974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교수의 추천으로 테니스부가 창단된 대구 효성여고에서 처음 교편을 잡았어. 가톨릭 계열의 보수적인 효성여고에 총각 선생님이 부임한 것은 내가 처음이었지. 그만큼 테니스부에 거는 기대가 컸던 모양이야. 대구에는 이미 경북여고와 남산여고에 테니스부가 있어서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선수들을 확보하려는 경쟁이 치열했어. 당시 경주여중 테니스부에 좋은 선수가 많았는데 신생 학교인 효성보다는 경북이나 남산을 선호했지. 테니스부에 애정이 많았던 교장은 선수 확보에 대한 기대가 컸던지 본인이 생각한 만큼 선수 확보가 안 되자 나를 심하게 질책했어. 또 힘들었던 것은 내가 학교의 유일한 남자 미혼 교사여서 학생들이 수업에는 관심 없고 자꾸 장난을 치려고 하는 거야.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나는 여학생들의 짓궂은 장난에 얼굴을 붉힌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당시에는 심각한 문제여서 다른 학교로 전근을 해야 하나 고민도 했어.최인수1946년 서울에서 태어나 6·25전쟁 때 가족과 대구로 피난했다. 대구상고 시절 정구 선수로 활동했고 경북대학교 체육교육학과 재학 때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대학 졸업 후 대구 효성여고에서 교편을 잡았고, 1975년 포항 대동고등학교로 부임하면서 포항과 인연이 되었다. 1979년 포철공고로 옮겨 야구부와 축구부 창단을 주도했다. 포항시 사립중·고등학교 체육교사협의회 회장, 포항시체육회 부회장, 포항시 생활체육협의회 상임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문체부장관 표창, 경상북도교육상, 포항시 최고체육 공로상 등을 수상했고 2007년 정년 퇴임했다. 2014년 종목별 원로들로 구성된 ‘포항 체육을 사랑하는 모임’(체사모)을 결성해 회장을 맡고 있다.대담·정리 : 김도일(소설가) / 사진 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 제공 : 최인수

2023-07-30

“살맛 나는, 찾아오는 서구로”

“살맛 나는 서구, 찾아오는 서구를 만들겠습니다”민선8기 1주년을 맞은 류한국 서구청장은 서대구역세권 개발과 광역교통망 확충과 교육·복지·문화 등을 아우르는 안전하고 쾌적한 생활인프라를 조성으로 살맛 나는 서구를 만들겠다는 포부다.지난해 3월 서대구역이 개통한 후 지금까지 170만 명이 이용하며 서구가 대구 서부권의 교통중심지로 급부상하고 있다.10조 원이 넘는 서대구역세권 개발사업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줄어들던 인구도 재개발·재건축사업을 통해 증가세를 보이는 등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게 서구의 현주소다.특히, 서대구역세권 개발사업은 음악분수, 야외무대 등 서대구역 광장 조성사업을 시작으로 환승시설과 문화시설이 복합공간으로 조성한다.또, 복합환승센터 건립, 서대구역 인근 4개 하·폐수처리장을 북부하수처리장 부지 지하에 통합하고, 상부에 수변 생태공원과 돔형 종합스포츠타운 등 여가시설을 조성하는 하·폐수처리장 통합지하화 사업 등 3개 사업이 오는 2030년까지 단계적으로 추진한다.이와 함께 구미와 경산을 잇는 대구권 광역철도가 내년에 개통되고, 대구산업선철도, 달빛내륙고속철도, 신공항철도 등 4개 철도가 예정돼 광역교통망 확충과 함께 역세권개발이 완료되면 서구가 대구의 교통·물류·소비·문화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서구는 재개발·재건축 사업을 통해 올해 7천여 세대의 인구유입이 예상되고 오는 2026년까지 16만 명이던 인구가 20만 명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실제로 지난 3월을 기점으로 서구의 인구 증가세를 보이면서 1988년 달서구 분구 이후 줄어들던 인구가 늘어나는 추세로 전환됐다.류 서구청장은“구민이 지역에서 즐기고 활동할 수 있도록 교육·복지·문화 등 여러 분야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정책 방향을 제시했다.류 서구청장은 독서와 학습 등 교육활동을 지원하고자 권역별 도서관 건립을 목표로 사업을 추진한 결과 취임 당시 1곳이었던 구립도서관이 현재 5곳으로 늘면서 인구 대비 도서관 수가 대구에서 가장 많은 지역으로 변모했다.추가로 평리권역 도서관이 올해 준공되고 내년도 상반기에 내당권역 도서관이 착공될 예정으로 서구 주민 누구나 10분 내에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도록 교육환경을 조성할 예정이다.인구 고령화로 노인복지에 대한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권역별 노인복지관 건립도 추진 중이다.올해 1월, 인동촌 노인복지관을 개관하면서 서구에는 4개 복지관이 운영 중이고, 추가로 비산권역에 제5노인복지관을 건립하며 내년 착공예정이다.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체육시설 인프라도 구축한다.구 단위 최고 예산인 450억 원을 투입해 중리동에 헬스키즈드림센터를 건립한다.수영장과 체력단련실 등 체육시설과 영유아를 위한 실내놀이터, 장난감 도서관이 포함된 복합시설로 조성되며 오는 2025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서구에는 2개 산업단지가 있어 쾌적한 대기환경 조성은 정주여건 개선을 위해 중요한 사업이다.이에 서구는 대기오염 저감 및 감시 인프라 구축과 더불어 지역 특성에 맞는 대기 관리 종합대책을 추진하고 있다.대기오염 방지시설 설치 지원사업을 통해 염색산업단지 악취다량 배출사업장에 악취와 오염물질 제거 효율이 높은 첨단시설 교체를 지원하고 있고, 124곳 중 116곳이 올해까지 개선된다.류한국 서구청장은 “2014년 취임 첫해 서구는 회색빛 이미지가 가득했지만 정주환경 개선을 위한 노력이 결실을 맺으며 장밋빛 도시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정주환경 개선을 위해 추진 중인 사업을 꼼꼼하게 살펴 구민 모두가 서구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고, 서구에 사는 것이 자부심이 될 수 있도록 살맛 나는 서구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심상선기자 antiphs@kbmaeil.com

2023-07-30

“대구 첫 그린시티 선정 쾌거”

“달서의 시대를 향한 변화와 혁신의 새 바람을 일으키 겠습니다”민선8기 1주년을 맞은 이태훈 달서구청장은 이같이 밝히고, 취임 1년동안의 성과와 소회를 밝혔다.달서구는 최근 한국은행에서 미래성장 잠재력을 나타내는 지역경쟁력지수를 평가한 결과 대구경북지역 31개 구·군 중 3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그동안 달서구는 기업과 주민의 관점에서 행정혁신과 효율성 제고, 도시공간구조 개편, 생활인프라 구축 등으로 매력적이고 지속가능한 미래조성에 힘써 왔다.특히, 행정수요조사에서도 87.6% 달서구에 계속살고 싶다고 응답했다.생활 SOC복합시설을 지속 확충해 도시공간구조 혁신으로 문화와 배움, 건강과 휴식이 있는 공간을 조성으로 주민의 정주 만족도를 꾸준히 높여왔기 때문으로 분석된다.이 청장은 “그동안 구민분들과 함께 대구 중심, 달서의 시대를 활짝 열어가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본인을 비롯한 1천300여 공직자들은 구민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살피며 힘껏 달려왔다”면서 “그 결과 대구경북 31개 시·군·구 중에서 유일하게 스마트 도시 인증에 이어 대구 최초 그린시티로 선정되는 쾌거를 이뤄냈다”고 언급했다.달서구는 1개 대통령상, 4개 국무총리상을 비롯해 5년 연속 일자리대상, 지역복지사업 평가 5관왕, 공공기관 종합청렴도 평가 전국 유일 10년 연속 우수, 지역경쟁력평가에서 3년 연속 대구경북 1위를 달성은 했다.또, 대구 유일한 아동친화도시에 3회에 걸친 여성친화도시 지정 등 괄목할 만한 성과와 613억원의 국·시비도 확보했다.달서구는 도시환경과 인구구조가 역동적이다.도시공간구조 혁신으로 문화와 배움, 건강과 휴식이 있는 공간을 단계적으로 조성하고 있다.아동과 청소년을 위한 아이꿈센터, 달서선사관, 목재문화관, 청소년문화의 집, 영어도서관 등을 건립하고 청년을 위한 시설로는 청년센터와 청년창업지원센터, 행복주택과 사회적경제지원센터 등이 있다.중장년과 어르신을 위해 50플러스센터, 평생학습관, 가족문화센터, 은빛복지관, 노인전용체육관, 월배노인종합복지관의 복합시설도 갖추고 있다.또한, 송현희망센터와 송현복합센터, 보훈회관 건립을 추진중이며, 친환경 건강 도시 조성을 목표로 별빛캠프와 월광수변공원, 그리고 와룡산 자락길을 명품 휴식처로 변모시키는 등 그린카펫정책을 통해 녹색 달서의 이미지를 명확히 하고 있다.달서구는 AI등 디지털시대이지만 마음의 힐링을 구하는 시대인 만큼 구민들의 여가와 관광산업 활성화 차원에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특히, 금호강 및 달성습지 인근에 대구 서부권 관광 랜드마크가 될 ‘달성습지 에코전망대’를 계획하고, 타당성 및 기본구상 용역을 진행하고 있다.앞으로 에코전망대라는 새로운 랜드마크를 통해 달성습지, 낙동강물줄기, 고령들판 뿐만 아니라 금빛 낙조를 대구 시민들이 조망할 전망이다.대구산업선 개통과 함께 친환경 생태관광과 성서 산단의 과거·현재·미래를 학습하며, 성서아울렛타운 쇼핑 등 대구 서부권의 관광명소 탄생을 예고하고 잇다.또한, 누리호 발사에 따른 7대우주 강국을 추구하는 정부의 뜻과 국민적 관심과 기대를 담아 현재 앞산 별빛캠프에 천문우주분야 전문과학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우주 관련 내용을 교과과정과 연계해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는 콘텐츠로 구성하고, 동굴형태의 지하건축물로 건립해 청소년들이 즐기면서 우주를 향한 꿈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줄 예정이다.이태훈 청장은 “올해로 출범 35년이 되는 달서구는 금년도 예산 1조원 시대를 맞이하는 등 양적, 질적인 면에서 수도권을 제외한 최대의 자치구로써 대구경북 중심에 우뚝 서 있다”면서 ‘1천300여 달서 공직자들은 열정과 통찰력으로 달서구는 물론 대구의 중심이 될 수 있도록 미래발전에 앞장서겠다”고 강조했다. /심상선기자antiphs@kbmaeil.com

2023-07-30

“변화와 혁신의 행정도시로”

민선8기 성주군이 출범한 지 1년이 지났다. 이병환 군수는 민선7기에 이어 ‘중단없는 성주 건설’을 다짐하며 민선8기를 힘차게 시작하며 ‘군민의 삶이 더 행복하고 더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드는 데 군정의 역량을 집중했다.이병환 성주군수는 “공직자들의 넘치는 열정과 우수한 역량 그리고 무엇보다 군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협조가 있었기에 값진 성과들을 거둘 수 있었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변화와 혁신을 통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자세만이 발빠르게 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살아남을 수 있고 이러한 자세로 남은 민선8기 역점 사업들도 차질없이 추진하여 성과물로써 보여드리겠다”고 강조했다.□ 우수한 행정역량 평가성주군은 민선8기 1년간 중앙 평가 7개, 경북도 평가 21개, 외부기관 평가 5개 등 총 33개 분야에서 수상하는 성적을 냈다. 중앙정부로부터 보건복지부 지역복지평가 대상, 환경부 공공하수도 운영·관리 실태점검평가 우수, 행정안전부 국민행복민원실 선정 우수, 국토교통부 건축행정평가 우수상을 받았다.경북도 수상은 지방세정 종합평가 대상, 민원행정평가 대상, 수질오염 총량관리 실태평가 대상 등이다.이 중에서 특히 정부합동평가와 연계한 경상북도 시군평가에서 4년 연속 우수시군으로 선정됐다. 정부합동평가는 지자체의 행정역량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성주군의 행정역량을 대외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국도비 공모사업 선정민선8기 1년 동안 국도비 지원 공모사업에서도 두드러진 성과를 보였다. 주요 공모사업은 △농촌협약 공모사업 총사업비 355억원 △취약지역 생활여건 개선사업 58억원 △산업혁신 기반구축사업 50억원 △농산물산지유통센터 지원사업 42억원 △공공승마시설 설치지원 사업 38억원 △지역수요맞춤지원사업 121억원 △기초생활거점 조성사업 40억원 등이다.군은 각종 공모사업을 통해 사업비를 확보함으로써 성주군 발전의 밑거름인 재원 마련에도 큰 성과를 올렸다.더불어 민선7기부터 중앙부처와 도청을 문턱이 닳도록 방문하며 예산확보에 일로매진한 결과 민선8기 1년차 역대 최초로 본예산 6천억 시대를 열게 되었다.이병환 성주군수는 행정전문가 출신답게 우수한 행정역량으로 성주군을 경쟁력 있는 행정도시로 만들었으며 이는 각종 평가와 공모사업 실적 및 예산 확보에 있어 눈부신 성과들이 반증하고 있다.□ 신뢰받고 일 잘하는 공직문화 실현성주군은 공직사회 전반에 걸쳐 조직문화 혁신을 더욱 가속화 함으로써 공정하고 청렴한 조직을 만들기 위한 기틀을 공고히 다졌다. 일과 성과 중심의 인사방침에 따라 창의적인 생각과 도전적인 마인드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창출하는 직원에 대한 인사상 우대를 확실히 했다.시대에 맞지 않는 불합리한 조직문화 쇄신을 위해 MZ세대 공무원과 혁신 공감 토크를 실시하는 등 수평적 의사소통의 장을 20회 이상 마련했다.특히 국민권익위원회 종합 청렴도 평가에 있어 저조한 등급을 받았던 성주군은 이병환 군수 취임 이후 민선7-8기 주요 공약으로 ‘청렴’을 선정하고 체계적인 분석과 강도 높은 반부패·청렴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이같은 노력으로 2022년에는 경북도내 군단위 최고 성적인 2등급을 달성함으로써 군민들이 신뢰하는 공정하고 투명한 행정문화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군민중심 소통·현장행정 강화이병환 군수는 민선8기에도 군민중심의 소통·현장행정을 더욱 강조했다. 주민과의 격의없는 소통을 위해 군수실에 ‘군민 사랑방’을 운영하고 ‘현장에 답이 있다’는 군정 철학을 바탕으로 주민과의 정책소통간담회, 민생현장 탐방 등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생생한 현장을 찾아 다니며 직접 눈으로 보고 군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다양한 지역현안 문제를 계속 해결해 나가고 있다./전병휴기자 kr5853@kbmaeil.com

2023-07-26

“자원봉사자들의 에너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국민의 5대 의무 중에 자원봉사가 포함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분, 자원봉사자가 사회적 자본의 중심축이라고 하시는 분, 현장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분, 교육, 워크숍, 회의는 전국 어디든 다니면서 출근은 칼같이 하시는 분. 자원봉사센터 직원들이 떠올리는 권순남 소장의 모습이다. 그 많은 활동을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사진은 몇 장 없는 권순남 선생의 이야기를 정리해본다.최미경(이하 최) : 정말 많은 봉사활동을 하셨는데 사진 자료가 거의 없습니다.권순남(이하 권) : 어느 해 크리스마스였나. 성모자애원 아이들에게 선물을 들고 간 적이 있었어. 대개 아이들이 과자를 받으면 바로 먹기 바쁜데 자애원 아이들은 과자를 앞에 두고도 가만히 앉아만 있었지. 내가 한 여자아이에게 다가가 “과자 싫어해?”라고 묻자, “사진 찍고 먹어야 하잖아요”라고 대답하더군. 그때 ‘이 아이들은 누가 무엇을 가지고 와도 사진 먼저 찍어야 손을 댈 수 있다는 걸 배웠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무너져내렸어. 나는 그 후로 되도록 사진을 남기지 않는 습관이 생겼지. 최 :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많으시군요.권 : 한번은 보호관찰소의 한풍남 소장에게 연락이 왔어. 포항, 영덕, 울릉, 경주에 있는 1천800여 명의 보호관찰소 학생들을 상담해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어. 각계 전문가들을 초청해 집단 상담이나 개인 상담을 하지만 재발 방지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센터에 도움을 요청한 거야. 그 후 자원봉사자를 모집해 2개월간 정식 교육을 했지. 그렇게 수료한 60명의 청소년 상담원을 한 달에 한 번 보호관찰소 학생들과 1 대 1로 연결해 상담을 진행했어.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라고 당부했지. 소외된 아이들의 마음을 끌어안으라고. 그랬더니 상담원들은 아이들이 도망치면 잡으러 가고, 다시 오면 새벽까지 온갖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아이들을 끌어당겼어. 아이들은 힘들고 외로울 때 잡아주고 사랑을 주면 반드시 변해. 그렇게 하면 다시 탈선의 길에 들어서지 않는다는 걸 나는 믿었지. 어렵게 청소년들을 선도해 나간 결과 청소년 재범률이 40% 이상 줄었고 전국으로 확산되었어.자원봉사활동을 진작시키려면 법에 근거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1990년대 초 자원봉사단체들로부터 제기되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2004년 하반기에 자원봉사 단체들과 전문가의 노력으로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가 발의한 자원봉사활동기본법이 2005년 6월 국회를 통과했고, 2006년 2월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 신입 관리자 교육’, ‘자원봉사 바로 알기’, 김인하(성동구자원봉사센터소장), 2012.최 : 자원봉사활동기본법의 필요성이 제기된 지 10년 만에 제정되었군요.권 : 자원봉사의 범위와 기본적인 사항 그리고 개념을 확립하고 자원봉사자의 안전을 확보해야 했지. 현장에서 활동하다가 다쳤을 때 그들의 인권을 보장해줄 법적인 안전망도 필요했어.최 : 자원봉사활동기본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권 : 2002년 전국 250개 센터의 중앙협회 회장직을 맡았어. 10년 동안 정치적인 문제로 자원봉사활동 기본법을 통과시켜주지 않자 2003년부터 직접 국회에 들어갔어. 이 법과 관련된 상임위원회 소속 의원들을 이틀이 멀다 않고 찾아갔고, 공청회도 했지. 그리고 2년 가까이 법 제정을 반대하는 기관, 단체,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자원봉사센터는 지방자치단체가 지원하고 민간이 투자한다는 설명을 했어. 자원봉사센터를 키워서 정치적인 목적에 쓰지 않겠다며 정치인들을 설득했고, 전국에 있는 자원봉사센터도 거기에 맞는 교육을 해야 했기에 여간 힘든 게 아니었지. 그때 교통비만 6천만 원 가까이 쓴 것 같아. 그렇게 국회를 들락거리니 한 의원이 왜 이렇게 국회에 자주 오냐고 물었어. 그래서 사정을 말하니 이상득 의원을 찾아가 보라고 하더군. 포항에서 심야버스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니 새벽 4시인가 5시였어. 터미널에는 노숙자와 취객뿐이었지. 가장 환한 곳을 찾아보니 텔레비전 앞이었어. 의자에 앉아 이상득 의원에게 할 말을 정리하고 날이 밝자마자 국회로 갔지. 내게 주어진 시간은 5분이 채 되지 않았어. 무슨 이야기를 하고 나왔는지도 모르겠어. 그런 절실함 덕분인지 2005년 6월 기본법이 통과되었다고 연락이 왔지. 10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어. 전국에서 모인 자원봉사센터 소장들과 봉사자들이 박수 치고 만세 부르고 난리가 났지. 최 : 자원봉사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권 : 2007년 태안반도 기름유출사고야. 세계 해양과학자들이 바다를 다시 살리려면 15년은 걸린다고 했어. 그런데 초등학생부터 노인까지 전 국민이 기회만 있으면 태안으로 왔지. 바위 구멍에 고인 기름을 파내고 부직포로 기름을 걷어냈어. 전부가 한마음이었지. 그렇게 3년 만에 복구되었어. 전 세계가 놀랐지. 기적이었어. 그 기념으로 자원봉사 전국대회를 태안에서 했어. 그 일이 있고 나서 이 길을 선택한 것에 자부심을 느꼈어. 솔직히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었을 때, 오해와 억측에 시달렸을 때, 내가 선택을 잘못한 것은 아닌지 후회도 했어. 하지만 태풍 수해 현장, 대구 지하철 폭발사고 현장 등 숱한 재난 현장을 다니며 자원봉사자들의 에너지로 세상이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최 : 20년간 자원봉사센터 소장으로 재직했는데, 오랫동안 성공적으로 일하신 비결이 있는지요?권 : 모든 사람에게는 장단점이 있어. 그런데 단점만 보면 같이 일할 수 없지. 나는 사람들의 장점을 찾아내 주목하고 그것을 살려 그들 스스로 일할 기회를 많이 주었어. 그렇게 신뢰를 쌓아갔지. 또 센터를 운영하면서도 끊임없이 배웠어. 어디든 배울 기회만 있으면 달려갔고. 그런 배움을 통해 젊은 사람들과 호흡하며 에너지를 얻었지.최 : 자원봉사의 발전을 위해 꼭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권 : 예전보다 자원봉사센터의 필요성과 인식에 대해 많이 개선되었지만 자원봉사센터 직원의 업무는 많고 처우는 열악해 여전히 어려운 점이 많아. 자원봉사센터 운영 지원 지침이 지켜지지 않는 지방자치단체도 많고, 때로는 지침 수준이 너무 낮아서 그 이상으로 예산을 책정하기 어려워 걸림돌이 되기도 하지. 그리고 지방자치단체의 정책과 정치적인 이유로 자원봉사센터의 거버넌스가 안정적이지 못한 경우도 있어. 그래서 중앙정부가 지원하는 예산 비율을 일정하게 확보하여 지방자치단체가 센터의 자율성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보호해야 해. 시민사회의 활성화를 위해서도 자원봉사센터가 제대로 자리 잡고 지원받는 것이 필요하고.다섯 번의 인터뷰를 하는 동안 권순남 선생의 휴대전화는 수시로 울렸다. 여든이 넘었는데도 찾는 이가 많다는 것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돕고 함께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마지막 인터뷰를 마칠 즈음에도 전화벨이 울렸다.최 : 선생님을 찾는 분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권 : 지금 전화한 이는 포항시자원봉사센터 이상섭 국장이야. 주말에 비가 온다는데 예정된 프로그램을 바꾸는지 묻는군.최 : 무슨 프로그램인지요?권 : 자원봉사센터 초기부터 함께한 이들이 있어. 김현옥, 김영남, 안승화, 구자영, 유길준, 박윤애……. 자원봉사기본법의 중요성에 대해 밤낮없이 전국을 돌며 함께 고민하며 의견을 나누는 사람들인데, 내가 퇴직하고 나서는 1년에 한 번씩 모여 여행을 해. 그게 이번 주말이라서 포항에 오기로 했는데 내가 운전을 하지 못하니까 이상섭 국장이 운전과 가이드를 맡기로 했어. 재작년에는 충남 보령에 있는 안성학 소장네에 놀러 갔었지. 나에겐 사람이 재산이야. 인연은 돈으로 살 수 없어. 모두가 마음으로 모이고 진심이야.최 : 인터뷰를 마무리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혹시 지금 더 생각나는 분들이 있으신지요?권 : 20년 가까이 센터를 운영하면서 감사한 사람들이 참 많아. 매년 1월 1일 호미곶에서 떡국 나눔 행사를 하는 자원봉사자들이 있어. 200명 가까운 봉사자들이 전날부터 와서 떡국을 준비하는데 숙박할 곳이 없어. 그래서 대보초등학교 교실에 석유난로 두 개를 켜고 마룻바닥에서 쪽잠을 자. 그분들이 꼭두새벽부터 바람 찬 호미곶에서 달걀 프라이 3천 개를 지지고, 파를 썰어 1만 명의 떡국을 준비하지. 그분들에게 일일이 고맙다는 말을 전하지 못해 미안해.최 : 앞으로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요?권 : 어떻게 하면 인생을 잘 마무리할 수 있을지 고민이야. 나를 내려놓고, 나를 지우는 것, 옷도 버리고 필요 없는 모든 걸 버리는 것. 그러면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정리하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 오랜 기간 나와 자원봉사활동을 한 소중한 이들과 함께 즐겁고 화사하게 죽음을 준비해보려고 궁리 중이야.권순남1939년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 포항으로 왔다. 포항초등학교, 포항여중·고를 졸업하고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약학과에 입학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퇴했다. 1957년부터 봉사활동을 시작해 지금까지 자원봉사를 삶의 전부로 여기며 실천했다. 포항JC 부인회를 통해 장애재활사업 후원, 양로원 지원, 소년소녀가장 지원 등을 해왔다. 1996년 포항시자원봉사센터 소장, 2003년 한국자원봉사센터협회 회장을 맡아 지방자치단체별 자원봉사센터 설립과 운영의 효율성, 전문성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자원봉사활동기본법 제정에도 앞장섰다.대담·정리 : 최미경(시인) / 사진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제공 : 권순남끝

2023-07-26

신라 삼국통일 과정의 최대 비극은 ‘황산벌전투’

충남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에 조성된 ‘계백 장군 유적지’는 야트막한 수락산에 감싸 안긴 모습이다. 아래쪽으론 제법 큰 탑정호수가 푸른 물빛을 빛내고 있다. 아름다운 풍광.인간의 상상력이 가닿기조차 힘든 까마득한 옛날인 660년 7월 9일과 10일. 고대국가 신라와 백제는 생사결단의 싸움을 그곳에서 벌였다. 최소 1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황산벌전투’의 현장.지지난 주. 귀하디 귀한 사람의 삶과 죽음이 촌음(寸陰) 사이에 결정되던 비극의 장소인 그곳을 2시간 가까이 천천히 돌아봤다. 황산벌전투에서 가장 장엄하고 비극적이며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계백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죽음을 각오한 5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황산벌에 도착하기 전. 계백은 아내와 자식들을 제 손으로 죽인다. “與其生辱 不如死快”라고 했다. “살아있다면 적군에게 너희들이 당할 치욕과 고통을 알기에 내가 죽일 수밖에 없다”는 뜻.거센 바람 앞에 선 촛불처럼 위태로워진 나라의 사령관. 자신이 전쟁에서 패배한 후 벌어질 일을 이미 예상했을 게 분명하다.1789년 프랑스혁명과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혁명 직후 왕족과 귀족들이 겪은 일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프랑스에서도, 러시아에서도 다수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거나 혁명군의 총에 맞았고, 왕과 귀족의 아내와 딸들은 육체적 모욕을 당해야 했다. 혁명이나 전쟁이나 ‘그 이후’는 동서고금이 유사했다. ‘천하의 계백’이 그걸 몰랐을 까닭이 없다. ◆계백의 유택(幽宅) 앞에서 떠올린 슬픈 시 한 편황산벌전투는 승자인 신라 무열왕 김춘추에겐 ‘삼한일통(삼국통일)’을 이룰 출발점이 됐고, 김유신에겐 드높은 전과(戰果) 중 하나로 기록됐다.그러나, 맞서 싸운 상대편의 수장 계백은 거기서 모든 걸 다 잃었다. 수천 명의 부하와 일생을 함께해 온 식구는 물론, 자신의 목숨까지.논산 변두리 외진 곳. 계백의 유택으로 추정되는 무덤 주변엔 웃자란 풀들이 미지근한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경주의 김유신 묘소처럼 화려하지도 않았고, 승자의 기운이 깃들지도 못한 쓸쓸한 풍경이었다. 거기 서있자니 그 역시 서러운 인생을 살아온 시인 이산하(63)의 시(詩) ‘복사꽃’이 떠올랐다.전쟁에 패한 장수가 낙향해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마지막으로물끄러미 바라보는 꽃복사밭 건너논에 물이 들어가고 있었다.‘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5~6세기에도 복숭아는 있었다. ‘그해는 복사꽃의 개화가 늦었다’는 문장이 등장하는 걸로 미루어 볼 때.그랬다. 시절이 평화로웠다면 계백 역시 유유자적 복사꽃이나 바라보며, 그 복사꽃이 만들어낸 달콤한 복숭아를 맛보며 말년을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다. 계백이 복사꽃을 본 건 660년이 마지막이었다. 황산벌전투에 참전한 백제 병사 대부분이 661년 열매 맺은 복숭아를 먹어볼 수 없었다. 죽은 자에겐 저작(咀嚼)할 입이 없으므로.‘황산벌전투’는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백제라는 개별 국가가 겪은 가장 큰 비극이다. 그렇다면 이 ‘비극의 씨앗’이 잉태되는 과정은 어떠했을까? ‘삼국유사’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등을 종합하면 이런 답이 나온다.“642년(의자왕 2년)에 백제가 신라를 공격해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함락하며 신라를 압박했다. 신라는 고구려의 힘을 빌리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당나라에 연합을 요청한다.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당 태종의 신임을 얻고, 나당(羅唐·신라와 당나라)동맹을 맺는 데 성공했다. 660년 당 고종은 소정방을 신구도행책총관(神丘道行策摠管)으로 삼고 유백영 등과 함께 13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정벌을 명령하였다. 신라 무열왕은 김유신을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고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당나라 군대와 합세하게 했다. 당나라는 수로를 통해 백제의 백강(白江·백마강)으로 진격했고, 신라의 5만 정예군은 육로를 통해 백제의 탄현(삼국시대 백제가 방어용 목책을 구축했던 전략상 주요한 고개)으로 출정했다.”◆백제의 절멸은 신라가 더 큰 꿈 펼칠 디딤돌로…의자왕은 모욕당하고, 계백은 처참하게 전사하고, 항복함으로써 굴욕 속에 살아남은 충상과 상영 등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신라의 하급 관료가 돼야 했던 660년 황산벌전투.신라의 정치·군사·사회적 실권을 거의 독점했던 무열왕과 김유신에게 이 전투는 고구려를 병합하고, 당나라를 축출시킬 수 있는 단단한 지렛대가 됐다.그랬기에 김유신은 피붙이인 어린 조카 반굴을 죽음으로까지 내몰았다. 알다시피 반굴은 관창과 함께 ‘신라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희생양으로 선택된 화랑 중 하나다.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수십 번 이상 사람들의 눈앞에서 재현된 황산벌전투. 그러니, 그 결과를 재삼 거론하는 건 무용해 보인다.그저 다음처럼 간략하게 요약하면 될 듯하다.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이상훈 교수의 논문 ‘황산벌의 위치와 전투의 재구성’ 인용이다.“660년 여름. 당군 13만 명이 덕물도에 도착했고, 신라군 5만 명이 경기도 이천으로 북상했다. 신라군과 당군은 합군하지 않고, 각각 행군하여 백제의 수도로 향했다. 당군은 수로로 이동하고, 신라군은 육로로 이동했다. 황산벌에서 신라군 5만 명과 백제 결사대 5천 명이 격돌했다.…(중략) 660년 신라는 당과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켰다.”신라 백성이 아니고, 백제의 백성도 아니며, 21세기 대한민국의 국민인 기자는 신라와 백제 두 나라 중 어느 한 편이 돼 황산벌전투의 승리와 패배에 관해 기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는 객관적 입장에 서는 게 가능하다.그럼에도 계백의 무덤 앞에서 1천363년 전 ‘그날 그 자리’에서 내가 피를 흘리며 죽어가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된 후 같은 핏줄을 가졌고, 유사한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서로를 원수처럼 죽고 죽이는 행위가 70년째 없다는 건 분명히 ‘행운’일 터. 더불어 그 행운이 앞으로도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까지 간절했다.어쨌건 황산벌전투를 끝으로 간헐적이고 부분적인 몇 건의 저항 이후 백제라는 고대국가의 이름은 사라진다. 기원전 18년 온조왕이 세운 나라가 678년 만에 절멸된 것이다. ◆백제 멸망 1년 후 무열왕 김춘추도 세상 떠나다수의 역사학자들은 백제 멸망의 원인을 ‘국내적 요인과 국외적 요인의 복합적 작용’에서 찾고 있다.백제의 마지막 통치자였던 의자왕은 ‘왕권 강화’라는 슬로건 아래 지방 귀족들의 권력을 제한·통제하려 했고, 이는 기존의 헤게모니를 포기가지 않으려 몸부림치던 지방 귀족계급의 반발을 불렀다.북으로는 고구려의 압박이 갈수록 심해졌고, ‘야심가’ 김춘추와 김유신이 존재했던 동쪽 신라의 침탈이 나라를 흔들어댔던 시기.의자왕 역시 계백처럼 ‘비극적인 최후’를 맞아야했던 인물로 역사에 기록됐다. 몇몇 고문헌에 언급된 의자왕의 죽음은 아래와 같다.“660년 9월 3일 왕후인 은고부인, 자식들, 신하, 백성들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된 의자왕은 그해 11월 1일 당나라 고종 앞에서 모욕적인 항복 선언을 했다. 나라를 잃고 심한 충격을 받은 그는 망국의 회한에 괴로워하다가 며칠 만에 먼 이역 땅에서 생을 마쳤다.”황산벌전투의 패자인 계백과 의자왕은 660년 죽었다. 그렇다면, 승자인 신라 권력의 핵심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은 어땠을까.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는 명제를 증명하듯 황산벌전투가 벌어진 이듬해 김춘추가 죽었고, 13년 뒤엔 김유신도 지상에서의 삶을 끝낸다.백제 병합에 이어 ‘고구려 병합’이란 삼국통일의 제2막을 열어젖힌 건 김춘추의 아들이자, 김유신의 조카였던 김법민(金法敏). 문무왕(文武王)이다.(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7-25

지역경제 회복 역점 ‘역대 최대’ 국비 확보… 미래 100년 박차

김재욱 칠곡군수는 취임 1주년을 맞아 대규모 기념행사 대신 민생현장 방문과 봉사활동으로 민선 8기 2년 차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했다. 평소 격식에 얽매이기보다 소통과 효율을 중시하는 김 군수의 뜻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김 군수는 군정 구호를 ‘곳간 채우고, 경제 살리고, 군민 늘리고’로 정하고 지난 1년간 5대 목표, 73개 공약을 중심으로 군민과의 약속을 실천하고 튼튼한 칠곡 미래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난해 6월 군수직 인수위원회 출범과 함께 ‘칠곡 세일즈맨’을 자처하며 국·도비 확보에 총력전을 펼쳐 왔다.대통령실은 물론 중앙부처·경북도청을 찾아 사업추진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설명하는 등 직접 발로 뛰는 적극성을 보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칠곡 복합커뮤니티센터 설계비 등 90억원(총사업비 465억원) △첨단 농기계 실증 랩 팩토리 설계비 등 95억원(총사업비 233억원) △칠곡할매문화관 200억원 △문체부 법정문화도시 150억원 △농촌협약 공모 선정 400억원 △한국산업단지공단 아름다운거리조성 사업 11억원 △문화관광형 시장 10억원 △농어촌 취약지역 생활여건 개조사업 44억원 등 역대 최대 규모의 국비 확보를 이끌었다.김 군수는 전문 경영인으로서의 오랜 경험을 살려 경제 군수로 지역경제 회복에 역점을 두고 군정을 안정적으로 이끌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김 군수는 민선 8기 핵심 공약과 주요 정책을 속도감 있게 추진하고, 변화하는 행정수요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신산업정책 특별팀’및 ‘도시경관팀’을 신설하고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특히 기업투자, 각종 공모사업 등을 통한 칠곡의 미래 먹거리 사업 발굴과 추진에 중점을 뒀다. □ 호국을 넘어선 문화·관광산업 육성민선 8기가 출범하면서 칠곡군의 가장 큰 변화로 문화와 관광 분야로 꼽히고 있다.6·25 전쟁 당시 다부동 전투로 인해 칠곡군은 과거 지향적인 ‘호국의 도시’ 이미지가 형성됐다. 김 군수는 천주교인이 평화를 갈망하며 걸었던 한티가는길을 통해 칠곡군을 미래지향적인 ‘평화의 도시’로 확장 시켜 나가고 있다.천주교 대구대교구와 MOU를 체결하고 순례길과 안내판을 정비하는 것은 물론 구간별로 쉼터를 마련하고 동명성당과 지천면 창평리에 숙박 시설을 조성했다.또 지난해 12월에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칠곡군이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는 ‘4차 법정 문화도시’에 선정되는 쾌거를 거뒀다.칠곡군은 5년간 150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개인과 마을에 형성된 인문 자산과 가치를 바탕으로 문화를 통해 미래자산을 형성하고 인문 도시로써 도시 브랜드 가치를 높여 나갈 계획이다. 성인문해교육을 통해 일흔이 넘어 한글을 깨친 다섯 할머니의 글씨체인 칠곡할매글꼴이 대통령 연하장에 사용되면서 전국적인 인기를 끌어냈다.윤석열 대통령은 김재욱 칠곡군수와 칠곡할매글꼴 주인공 할머니들을 대통령실로 초청했고, 이 자리에서 200억원을 투입해 ‘칠곡할매문화관’ 건립을 추진하기로 했다.칠곡할매글꼴은 제주에서 전이수 작가와 특별 기획전을 열면서 하나의 문화 관광상품으로 자리 잡게 됐다. 이와 함께 지난해 열린 낙동강세계평화 문화대축전에서 축제 공간을 처음으로 왜관 원도심으로 확장했다. 왜관시장은 개설 이후 역대 최다 인파가 방문했고 축제를 통해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올해도 축제 본연의 의미는 살리면서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체험 행사와 원도심 축제를 더욱 풍성하게 마련한다는 계획이다.이 밖에 소규모 축제인 ‘호국평화 야시장 및 프리마켓’을 개최해 왜관시장을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육성하고 있다.□ 경제도시 구현김 군수는 군정 최우선 목표를 지역 경제 활성화와 미래 먹거리 발굴에 두고 전문 경영인의 능력을 발휘하며 차별화된 행보를 보여왔다. 취임 초기부터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산업 다각화 필요성을 강조하고 고부가가치 성장산업 유치를 위한 발전 전략 수립에 착수했다.산업통상자원부가 주관하는 첨단 농기계 실증 랩 팩토리 조성사업에 선정돼 첨단 농기계 산업 선점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총사업비 233억원(국비 95억원, 지방비 138억원)을 투입해 왜관읍 금산리 일대에 랩 팩토리 센터를 조성해 농기계 첨단화를 추진할 계획이다. 또 한국산업단지공단 ‘활력 있고 아름다운 거리 조성사업’ 선정으로 왜관1공단 내 유동 인구가 가장 많은 근로자종합복지관 일대 1.7㎞ 구간에 칠곡할매글꼴을 활용한 산업단지 상징물, 미디어아트형 마이크로뮤지엄 등을 설치한다.공장담장녹화, 기존 보도에 띠 녹지 조성, 야간 시야 확보를 위해 LED 가로등으로 교체하는 등 걷고 싶은 거리, 건강한 거리, 안전한 거리를 조성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적극적인 행정 지원과 긴밀한 협업을 통해 칠곡군은 현대자동차 출고량 1위에 이름을 올리며 명실상부한 영남권 교통·물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이 밖에 김 군수는 칠곡군 베트남·태국 무역사절단을 이끌며 역대 최대 규모의 수출 MOU를 체결하는 성과를 거뒀다.무역사절단은 베트남 하노이와 태국 방콕에서 89건, 4천216만 달러의 수출 상담액과 1천225만 달러의 수출 MOU를 체결했다.김재욱 군수는 현지 바이어에게 “군이 기업과 제품의 우수성을 보증한다”라며 지원군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평을 받았다.이와 함께 (주)동일정공과 MOU를 체결하고 왜관산단에 180억 원 투자와 80명의 신규 고용을 끌어내고 LG전자 가전 물류센터와 외국계 기업 물류센터 유치를 추진하고 있다.김 군수는 대구권광역철도망, 신공항 등 광역교통망 구축으로 달라질 입지 조건을 활용해 물류·관광 등 산업 전반에 걸친 파급효과를 최대한 끌어내겠다는 각오다. □ 교육 환경 개선을 통한 도시 경쟁력 강화김 군수는 자치단체장 가운데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교육에 관한 관심과 열정이 높은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교육이 바로 지역의 미래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임종식 경북교육감은 물론 이주호 교육부 장관을 만나 지역 교육 현안 사업을 건의했다.특히 일반형 중학교 대비 과학, 영어, 수학 등의 특정 과목 교육 시간을 늘린 중점학교 지정과 칠곡군 지천·동명 지역 중학교 학군을 대구 북구 지역으로 확대하는 학군 조정 방안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그는 영재교육원 확대 운영도 건의하며 교육 수요에 따라 지자체 차원의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임을 강조했다. 이와 함께 이주호 교육부 장관에게 다부동전투 역사 교과서 수록을 건의하며 지역의 가치를 높이고 균형 잡힌 역사관 확립을 위해서도 노력했다.이 밖에 미래교육지구 공모사업 선정을 통해 지역과 함께 아이들에 대한 돌봄과 교육에 관한 관심을 높여 나가고 있다.□ ‘100년 칠곡’ 디자인 원년김 군수는 “2023년은 더 큰 미래를 준비하는 100년 칠곡 디자인 원년으로서 향후 관광·물류·교통의 중심지로 급부상할 것에 대비해 체계적인 도시설계에 나설 절호의 기회”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첨단산업 관련 정책을 발굴하고 정부 정책 동향을 분석해 대응 방안을 수립하는 신산업정책 특별팀과 공공디자인 진흥 계획을 세우고 경관 개선 사업을 추진하는 도시경관팀을 신설했다.도시계획과 공모사업 등과 관련한 전문가 포럼·세미나도 여러 차례 개최해 논의의 장을 마련했다. 주민대표단·자문단 구성을 위해 관련 조례를 제정하고 정책 수립 용역에 착수하는 등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항상 낮은 자세로 군민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마음가짐만큼은 처음과 변함이 없다고 말하는 김 군수는 “수많은 점과 선이 모인 탄탄한 설계 위에 미래의 후손들이 다채로운 색깔을 칠할 수 있도록 군민과 함께 힘을 모아 나갈 것”이라며 “변화와 혁신을 바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새로운 칠곡을 향해 나아갈 것”이라고 밝혔다.칠곡/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23-07-24

시민사회에 뿌리내리는 자원봉사

“남을 가르치려면 내가 완벽해야 한다”는 게 권순남 선생의 소신이다. 미국 뉴욕에서 세계 자원봉사 지도자 워크숍이 열렸을 때 권 선생은 자비로 참여한다. 그 열정으로 숱한 시련을 극복하며 우리 사회에 자원봉사의 가치를 확산해 나가는 이야기가 펼쳐진다.최미경(최) : 1997년에 세계 자원봉사 지도자 워크숍에 가셨다고 들었습니다.권순남(권) : 전 세계 자원봉사 리더들이 미국 뉴욕에 모인다는 소식을 들었어. 정부의 담당 부서를 찾아가 “자원봉사센터만 만들어놓으면 뭐 하느냐. 운영체계와 시스템을 배워야 한다. 30명 이상 한국에서 출발해야 동시통역사를 붙여준다고 하니 전국에 있는 자원봉사센터 소장과 리더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 하지만 1997년은 IMF가 터진 해였어. 정부도 기업도 지원할 수 없으니 알아서 가야 한다는 답변을 들었지. 누가 자기 돈으로 뉴욕까지 워크숍을 가겠는가. 하지만 나는 가야 했어. 적금 하나를 헐어 혼자 뉴욕행 비행기를 탔지. 최 : 아무런 후원도 없이 혼자 뉴욕에 간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권 : 무서울 게 없었지. 사명감이 있었으니까. 뉴욕 힐튼호텔에서 워크숍이 진행된다는 정보만 가지고 존 에프 케네디 국제공항에 도착했어. 택시를 타려니 표를 하나 주며 기다리라고 하더군. 영어를 잘하지 못해서 답답했어. 한 시간쯤 있으니까 흑인 기사가 왔어. 우여곡절 끝에 밤 11시쯤 호텔에 도착했지. 그런데 프런트에 예약자명을 대니 내 이름으로 예약된 건 없다고 해. 아시아 지역 이사로 워크숍에 참석 중이던 이강현 박사가 내가 묵을 룸을 예약하기로 했거든. 그는 워크숍에 참석하고 있어서 연락이 닿지 않았지. 로비에서 한 시간 넘게 기다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강현’으로 예약자를 찾으니 룸이 있었어. 이강현 박사가 한국 대표 참가자들의 방을 자신의 이름으로 예약해놓은 걸 뒤늦게 알았지. 자정이 지나서야 체크인을 하고 침대에 누웠어.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긴장한 탓에 잠이 오지 않더군. 새벽 5시부터 호텔 조식이 나온다는 말에 다음 날 일찍 방을 나섰지. 그런데 세계에서 수천 명이 워크숍에 왔는데 음식이 남아나겠어? 토스트와 과일 등은 눈 깜짝할 사이에 없어지고 우유와 오렌지주스밖에 남아 있지 않았어. 별수 없이 우유 한 잔 마시고 오전 9시부터 워크숍을 강행했지.그날 워크숍은 조를 나눠 진행되었다. 청소년, 노인, 일반, 장애인 등 다양한 대상과 주제로 세분화되었고, 권순남 선생은 7명과 한 조가 되어 청소년 자원봉사에 대한 토론에 참여했다.권 : 하고 싶은 이야기가 가득한데 말이 되지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었지. 돈을 들여 여기까지 와서 아무것도 못 얻고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어. 조의 리더부터 한 사람씩 자기소개를 하는 동안 머리에서 가슴까지 땀이 흘러내리는 기분이었어.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지. 포기할 수 없다는 마음에 더듬더듬 말했어. “나는 한국에서 왔다. 여기 공부하러 왔다. 영어는 읽는 것은 되지만 말은 안 된다. 여러분들이 나를 도와달라.”최 : 참여자들 반응은 어떻던가요?권 : 거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원봉사자 경력자였어. 그들은 내 이야기를 듣고 다 같이 박수 치며 “우리가 권순남을 도와주자”고 하더군. 각자 청소년 자원봉사의 문제점과 해결 방안에 대한 의견을 냈고, 리더는 사람들의 의견을 정리했어. 나는 다른 사람 말은 하나도 안 들리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했지. 그때 리더가 큰 종이를 토론 참여자들에게 나누어주었어. 나는 “한국 청소년들은 입시 중심으로 자원봉사에 대한 개념이 없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여러분들이 고민해달라”고 적었어.권순남 선생은 워크숍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의 명함을 전달했다. 한국에는 자원봉사에 대한 자료가 부족해 자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정성이 통했는지 워크숍이 끝나고 두 달 후 뉴욕에서 워크숍 결과지와 청소년 자원봉사 키트 자료가 왔다. 이후 권 선생은 대학생과 청소년 자원봉사에 더욱 매진했다. 또한 한동대 도형기 교수를 센터 운영위원으로 위촉하고, 사회복지과·심리학과 교수들이 자원봉사 리더 교육에 참여해 본연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준비는 대학교 내 자원봉사 시스템을 체계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최 : 한국의 학부모와 교사들은 학생들의 공부에만 집중하잖아요. 이런 환경에서 봉사활동을 이끌어낸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권 : 그랬지. 5년 정도 중·고등학교를 찾아다니며 청소년 봉사에 대해 설명했지만 학생들이 봉사활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어. 고민하던 차에 포항고등학교 청소년연맹에 소속되어 있던 최현우 선생님을 자원봉사센터 청소년단장으로 모셨지.최 : 흔쾌히 승낙하셨나요?권 : 최현우 선생님이 퇴직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포항고등학교 교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센터로 모시고 와서 도와달라고 했어. 학교에는 자원봉사 전담 교사가 없으니 각 학교별 청소년연맹 선생님을 자원봉사 지도자로 섭외해달라고 부탁했지. 어렸을 때부터 봉사활동을 해야 봉사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깨우칠 수 있다는 내 생각에 최현우 선생님도 동의하셨어. 최 선생님은 청소년연맹에 있던 선생님 10명을 불러 자원봉사 지도자 교육을 했지.1998년 권순남 선생은 최현우 청소년단장과 청소년자원봉사단을 꾸려 발대식을 가졌다. 봉사단의 소속감을 높이기 위해 조끼와 배지를 제작하고 청소년 자원봉사활동 사례 발표회와 청소년봉사단 예술대축제를 진행했다. 포항의 청소년 자원봉사 사례는 전국 최초였으며, 타 시·도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었다.최 : 청소년과 대학생 자원봉사단뿐 아니라 다양한 봉사단을 구성하셨지요?권 : 청소년 봉사자들에게는 즐거움이 필요했어. 그래서 문화예술경연대회(예술대축제)를 준비했는데 장소가 필요했지. 롯데백화점 포항점에 가서 행사 취지를 설명하자 옥상을 빌려주었어. 음향 시설이 되어 있는 곳이라 금상첨화였지. 백화점 상품권도 후원받았어. 감사한 마음에 자원봉사 모범 기업으로 올리자 롯데백화점 점주들이 스스로 봉사팀을 만들었어. 최 : 포스코 사회봉사단도 창단되었죠?권 : 포스코를 찾아가서 자원봉사에 대해 이야기하니 이미 부서별로 동네와 MOU를 맺어 농기구를 수리해주는 등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고 하더군. 그래서 기업 바깥으로 나가서 하는 것만 봉사가 아니라 직원 간의 소통 그리고 관계를 형성하는 것도 봉사 교육으로 가능하다고 설득했지. 그렇게 포스코 자원봉사자 교육이 시작되었어. 이강현 박사, 이윤구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 거물급 강사를 모시고 포스코 과장급, 팀장급을 모아 자원봉사의 가치와 인식 개선에 대한 교육을 진행했지.최 : 자원봉사센터를 운영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권 : 1996년 재단법인 한울타리에서 포항시로부터 운영을 위탁받아 12월 16일 자원봉사센터를 개소하고 소장으로 업무를 시작했는데, 개소 후 3년간 정말 힘들었어. 중앙정부의 시책으로 개소했지만 자원봉사센터에 대한 지방자치단체의 이해도가 낮았고 예산 지원도 적어 센터 직원의 급여와 사업비가 늘 부족했지. 게다가 자원봉사센터에 대한 홍보가 되지 않아 오해하는 공무원이나 정치인도 있었고.최 : 어떤 오해인가요?권 : “자원봉사를 하는 데 왜 돈이 필요하냐”, “그렇게 조직을 키워서 정치에 입문하려고 하냐?” 등등의 오해와 억측이었어. 지역 언론도 터무니없는 기사로 센터를 매도하고 참 힘든 일이 많았지. 결국 1999년 3월에 나와 직원 모두 사표를 제출하고, 법인도 포항시에 반납했어.1996년부터 1998년까지 포항시자원봉사센터는 청소년자원봉사단, 주부자원봉사단, 도서관자원봉사단 등 크고 작은 봉사단을 조직했고 일반 교육사업부터 관리자교육, CEO 교육 등 자원봉사에 관련된 다양한 교육을 주관했다. 또한 자원봉사 박람회, 이동자원봉사센터, 자원봉사인형극, 행복마을만들기, 자원봉사물결운동 등 늘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해 시행했다. 권순남 선생의 이러한 노력은 포항시에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위탁법인을 찾는 과정을 거쳐 볼런티어21(현 한국자원봉사문화) 포항지부와 1999년 4월 위탁계약을 체결하고, 권 선생은 지부장이자 소장으로 본부의 운영 매뉴얼과 교육콘텐츠를 지원받아 좀 더 전문적으로 센터를 운영하기 시작했다.권 : 일보다 사람들에게 자원봉사센터를 이해시키는 것이 어려웠어. 시의원들을 찾아다니며 예산 지원의 필요성을 설명하면 부정적으로 인식할 때가 더 많았지.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행정기관이나 시의회에 우리가 부탁하는 것처럼 보일 필요가 없겠다 싶더군. 그래서 자원봉사자들이 ‘무형의 거대 자본’이라는 사실과 자원봉사센터는 ‘인적자본’을 축적하고 가동하는 시스템임을 증명하려고 더 많이 고민하고 투자를 진행했지. 센터를 투명하게 운영하는 것은 기본이고, 밤 12시에도 모여 프로그램을 고민했어. 자원봉사자를 요청하는 기관에 봉사자를 효율적으로 배치하고 자원봉사에 관한 정보와 자원을 제공하니 점차 시민사회로부터 인정받게 되었지. 정말 감사한 것은 우리 센터 직원들이 어려운 여건에서도 불만 없이 최선을 다해준 거야.권순남1939년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 포항으로 왔다. 포항초등학교, 포항여중·고를 졸업하고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약학과에 입학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퇴했다. 1957년부터 봉사활동을 시작해 지금까지 자원봉사를 삶의 전부로 여기며 실천했다. 포항JC 부인회를 통해 장애재활사업 후원, 양로원 지원, 소년소녀가장 지원 등을 해왔다. 1996년 포항시자원봉사센터 소장, 2003년 한국자원봉사센터협회 회장을 맡아 지방자치단체별 자원봉사센터 설립과 운영의 효율성, 전문성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자원봉사활동기본법 제정에도 앞장섰다.대담·정리 : 최미경(시인) / 사진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제공 : 권순남

2023-07-23

기업유치로 경기불황 타개 ‘중단없는 김천발전’ 역량 집중

김충섭 김천시장은 민선8기 1년 동안 신규 산업단지 기업유치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특히 중소기업 경영활동 지원과 소상공인 및 골목상권 활성화, 위기에 내몰린 취약계층이 소외되지 않도록 ‘경제, 일자리, 복지, 안전’등 민생안정 정책에 최우선을 두고 시정을 운영했다.김 시장은 “지난 1년은 민선 7기에 다져 놓은 기반을 바탕으로 더 큰 김천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면 앞으로 3년은 미래의 희망과 꿈을 실현하고 누리는 시간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김 시장 이어 “그동안의 노력을 발판 삼아 공약의 완전한 이행을 위해 ‘중단없는 김천발전’에 모든 역량을 쏟겠다”고 강조했다.□ 산업단지 확장, 기업유치 성과심혈을 기울인 김천일반산업단지 3단계 사업은 준공하기도 전에 (주)쿠팡, 아주스틸(주), 덕우전자(주), (주)에스에스라이트, 네오테크 등 37개 기업으로부터 3천529개의 일자리와 7천721억원의 투자유치를 이끌어내면서 100% 완판 분양되는 성과를 거두었다.현재 20개 기업이 공장건립을 마무리하고 운영에 들어갔다.3단계 산업단지의 성공적인 조성을 발판 삼아 38만평 규모의 4단계 산업단지도 조성하고 있다.골목상권을 중심으로 소상공인들이 다시 활기를 되찾을 수 있도록 도내 최대 규모로 특례보증을 확대하고, 서민들의 가계에 보탬이 되는 김천사랑상품권도 최대 규모인 2천587억원의 판매 실적을 거두었다.지난해 11월에는 관내 6개 기업과 함께 싱가포르에서 수출 상담회를 개최해 현지 25개사 바이어와 상담하여 316억원의 실적을 올렸으며, 98억원의 현장 계약도 맺는 성과도 냈다.□ 외국인 근로자 활용 농번기 인건비 안정올해 김천시에는 외국인 계절근로자(캄보디아, 라오스) 100여 명과 김천대 유학생 인력풀 50명, 농가 직고용(캄보디아)50명 총 200명의 외국인과 180명의 내국인 인력 등 380여명의 인력을 활용해 김천형 인력중개 시스템을 구축하고 농업 분야 인력난을 해소하고 있다.이러한 노력으로 농번기 치솟던 인건비가 안정돼 농민들의 영농비 부담 경감과 농번기 일손부족을 동시에 해결했다.아울러 김천시의 자매결연 도시인 서울 강북구와 도농 연계 사업을 통해 농촌 일자리 사업도 추진했다. □ 십자축 광역철도망 제2경부축 형성미래 100년 먹거리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고 광역교통망을 확충해 김천 발전의 청사진도 크게 그려 놓았다. 김천시에서 경남 거제시까지 연결하는 남부내륙철도는 총연장 177.9㎞에 4조8천억원을 투입해 2028년 개통한다. 이와 관련해서 2022년 1월, 김천역사 환승을 위한 증·개축비 89억원을 포함해 기본계획을 확정·고시했고 현재 기본 및 실시설계를 추진 중에 있다.또한 서울 수서∼경남 거제를 잇는 국토내륙철도의 유일한 단절 구간인 김천∼문경 구간이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하면서 교통 중심지로 거듭나게 됐다.2022년 11월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한 중부내륙철도(김천∼문경) 건설사업은 총연장 71㎞에 1조 2천억원이 투입되며, 사업이 완료되면 남부내륙철도를 연계하여 수도권(서울 수서)과 남해권(경남 거제)을 연결하는 또 하나의 국가 대동맥을 구축하게 된다. □ 미래발전 전략산업 육성김천시는 ‘튜닝카성능안전시험센터’를 유치해 자동차 관련 산업을 미래의 동력산업으로 중점육성하고 있다. 이 센터가 완공되면 김천시가 비수도권 튜닝 특화지역으로서의 입지를 굳힐 것으로 보고 있다.특히나 시험센터 주변으로 약 12만평 규모로 조성될 예정인 자동차서비스 복합단지가 완공되면 수도권이나 대도시에 주로 있는 튜닝기업들의 입주를 적극 유도할 계획이다. 현재 입주의사를 밝혀온 역외기업들이 40여개 이상이나 되며, 우수한 기업들의 유치는 곧 양질의 새로운 일자리 창출로 연결되어 김천시에는 이전에 보지 못한 신산업이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된다.또 하나 김천시에 주목할 만한 미래산업은 바로 드론산업이다. 드론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여러 분야에서 각광받고 있으며, 일부산업은 이미 드론으로 대체되었고 그 사용분야는 점점 증가하고 있다.드론산업의 지속적인 성장으로 자격획득 및 시험운영기관의 필요성이 증가돼 지역거점 드론실기시험장을 유치했다. 2026년까지 연평균 29% 급성장이 예상되는 만큼 향후 드론시장에 주요 인프라 구축을 선점해서 드론산업을 지역 전략산업으로 활성화시킬 계획이다.□ 다시 찾고 싶은 관광휴양도시김천시 교동 연화지가 전국적으로 유명한 벚꽃 명소가 되었다. 올해 다녀 간 관광객만 18만명이나 된다. ‘보라빛 향연 김호중 소리길’과 연계돼 김천의 새로운 볼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김천 출신의 세계적인 그래피티 아티스트 심찬양 작가가 김천문화예술센터 측면 벽에 독특한 벽화를 그려 넣어 관광 특화거리에 의미있는 벽화로 자리잡아 많은 시민과 관광객의 시선을 모았다. 또한 전통한옥촌, 숲속 야영장, 숲체원 등 새로운 트랜드 변화에 걸맞은 휴양시설을 확충하고 사명대사공원 미디어아트, 사명대사 모험의 나라, 추풍령 관광자원화사업 등 체험프로그램과 즐길거리를 강화했다. 김천시만의 특색있고, 차별화된 관광자원 개발로 머물고 즐기는 체류형 관광도시로 만들어 가고 있다. □ 농산물종합유통타운 건립김천시는 농업의 미래 먹거리 마련을 위해 핵심적인 하드웨어 중 하나인 ‘농산물종합유통타운’ 건립에 나섰다. 시는 2022년부터 2027년까지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김천휴게소 뒤편 농소면 신촌리 일원 10㏊를 대상으로 사업비 480억원을 들여 농산물종합유통타운을 건립할 예정이다.농산물종합유통타운은 농산물 생산·유통·소비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고 지속 가능한 농업을 지향하면서 로컬푸드, 다변화된 식문화, 농업서비스까지 포함하는 혁신적인 모델의 농업 유통·물류 시설이다.또 농업관련 시설을 하나의 장소에 집약화한 공간적인 개념이자 소비자와 생산자를 연결해 체험, 가공, 식품개발 등 6차 산업까지 아울러 미래형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농·식품 복합 문화공간이기도하다.‘과수거점 산지유통센터(APC)’는 농산물 선별·포장 등 상품화와 수집·저장·물류를 담당하는 복합시설로 농산물종합유통타운의 핵심시설이다. □ 공약 이행평가 4년 연속 SA(최고등급)대외적인 평가에서도 전국 지자체 평가 1등급, 지방자치단체 일자리대상, 농식품 수출정책 평가 대상, 행정안전부 재난관리 평가 우수기관 선정 등 여러 분야에서 수상하는 성과를 냈다.특히, 한국매니페스토 실천본부에서 시행한 전국 기초단체장 공약이행 평가에서 도내에서는 유일하게 4년 연속으로 최우수 등급을 받아 그 의미를 더했다.이같은 결과는 전국적으로 시부에서는 김천시와 경기도 시흥시 단 두 곳밖에 없을 정도로 김천시가 공약이행에 많은 공을 들인 성과라 할 수 있다.김충섭 김천시장은 “하루가 다르게 우리 김천의 모습이 변하고 있다. 시민들의 지역발전에 대한 염원과 미래를 위한 꾸준한 투자로 도시 규모가 커지고 경쟁력 또한 높아지고 있다. 희망은 가슴속의 열정에서 싹 트고, 그 열매는 준비하고, 도전하는 사람의 몫이다. 1천200여명의 공직자와 더불어 중단없는 김천발전을 위해 뛰고 또 뛰겠다”고 밝혔다./나채복기자 ncb7737@kbmaeil.com

2023-07-20

끝없는 초록… 제주의 숲에서 즐기는 온전한 휴식

“‘숲’이라고 모국어로 발음하면 입 안에서 맑고 서늘한 바람이 인다.” 소설가 김훈이 ‘자전거 여행’에서 예찬한 것처럼 숲에는 언제나 청량한 기운이 넘친다. 제주의 숲은 화산 지형이 만들어낸 독특한 풍광과 울창한 원시림이 어우러져 이채로운 느낌을 준다. 사려니숲길 외에도 제주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숲길이 꽤 많다. 한적하게 걸으며 사색을 즐길 수 있는 길부터 가족과 함께 오붓하게 걸을 수 있는 숲길까지 토박이들만 아는 제주 숲길을 소개한다. 숲길을 따라 걸으며 자연의 숨결을 느껴보면 어떨까?주민 즐겨 찾던 산책로 사색의 길 단장 ◇ 삼다수숲길… 빽빽한 삼나무 사이 이국적 풍경북제주군 조천읍 교래리의 삼다수 숲길은 원래 지역 주민이 즐겨 찾는 산책로였다. 제주를 대표하는 생수인 삼다수 공장이 인근에 있지만 삼다수숲길이 있다는 걸 아는 이는 의외로 드물다. 원래 이 지역은 말을 풀어 기르는 방목터이자 사냥터여서 ‘테우리(말몰이꾼)’와 ‘사농바치(사냥꾼)’만 출입하던 곳이었다. 2010년 삼다수를 생산하는 제주특별자치도개발공사와 교래리 주민이 숲길을 정비해 ‘삼다수숲길’이란 이름을 붙여 개장했다.삼다수숲은 용암이 식은 땅 위에 형성됐다. 숲길 초입의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하늘을 가릴 정도로 빽빽하다. 삼나무들은 1970년대에 심은 것인데 어느새 훌쩍 자라서 30m가 넘는 거목이 됐다.숲길에 들어서자마자 상쾌한 피톤치드 기운이 몸 구석구석 스민다. 촘촘하게 얽힌 나뭇가지들이 만든 그늘도 시원하다. 삼나무 아래에는 고사리와 푸른 이끼가 자라고 있어 마치 원시림을 향해 걸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삼다수숲길은 언제나 한적한 분위기여서 오롯이 자신만 생각하며 사색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숲길은 3개 코스로 나뉜다. A코스 꽃길은 1.2㎞, B코스 테우리길은 5.2㎞, C코스 사농바치길은 8.2㎞다. A코스는 짧은 ‘맛보기용’ 산책로로 마을 주민이 주로 이용하는 길이기도 하다. 가장 인기있는 B코스에선 탐방로 옆으로 야생화가 지천으로 핀다. C코스 사농바치길은 온전히 숲길을 다 걷는 코스다. 봄에는 복수초 군락을 볼 수 있고 여름에는 산수국, 가을에는 하천을 따라 물든 단풍을 볼 수 있다. ◇ 머체왓숲길… 영화 ‘킹덤’ 속 울창한 원시림서귀포시 한남리에 있는 머체왓숲길은 드넓은 목장 초원과 원시림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머체는 돌이 엉기정기 쌓이고 잡목이 우거진 곳, 왓은 밭을 일컫는 제주어다. 머체왓은 ‘돌로 이뤄진 밭’이라는 뜻이다. 머체왓숲길은 최근 전지현이 주연한 영화 ‘킹덤’과 예능 ‘네바퀴집’ 등에 나오면서 유명해졌다. 제주 중산간의 울창한 원시림을 탐방할 수 있는 숲길은 날것 그대로의 제주 숲을 만나게 한다.숲길 입구를 지나면 방목 중인 소들이 숲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입구가 꺾인 출입구가 나온다. 한라산을 보며 초지를 가로지르면 잠시 뒤 어두컴컴한 숲길이 시작된다. 길은 대체로 완만하며 깊이 들어갈수록 울창한 활엽수가 펼쳐져 있다. 쌓인 돌 위로 짙은 이끼가 자라는 특이한 풍광을 만날 수 있다.머체왓숲길 외에 머체왓소롱콧길(6.3㎞), 서중천탐방로(7.0㎞) 등 3개 탐방로가 조성돼 있다. 머체왓숲길 코스 중간 즈음에는 제방남기원쉼터가 있고, 전망대에서는 마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망원경도 있다. 소롱콧길 코스 삼나무숲에는 40~50년 전 주민들이 실제 거주했던 머쳇골 옛집터도 볼 수 있다. ◇ 화순곶자왈생태탐방숲길… 암석·가시덤불·야생식물 한눈에곶자왈은 제주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지형이지만 안덕면 화순리에 있는 화순곶자왈생태탐방숲길은 의외로 덜 알려졌다. 화순생태탐방로는 곶자왈 생태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곶자왈이란 제주 말로 ‘숲’을 의미하는 ‘곶’, 암석들과 가시덤불이 뒤엉켜 있는 곳을 가리키는 ‘자왈’이 합쳐진 제주 방언이다. 곶자왈은 화산 폭발로 분출된 용암 지형으로 나무와 돌 따위가 제멋대로 뒤섞여 있는 제주의 독특한 숲을 의미한다. 돌과 바위를 비집고 태어난 나무들은 휘어지고 구부러진 채로 자라났다.탐방길을 걷다 보면 아열대 식물인 천량금, 주름고사리, 개톱날고사리 등 남방계 식물은 물론 한라산 고지대에서 서식하는 좀고사리와 골고사리, 큰지네고사리 등 북방계 식물도 볼 수 있다. 탐방로는 왕복 3.2㎞의 코스인데 가족끼리 탐방한다면 자연곶자왈길보다는 데크길이 조성된 송이산책로가 좋다. 걷다 보면 소나 말을 방목해 기르기 위해 쌓아 놓은 돌담인 ‘잣담’을 볼 수도 있고, 때로 방목 중인 소떼와 마주칠 수도 있다. ◇ 비밀의 숲… 감성사진 최고의 핫플레이스제주 스냅 사진의 비밀 명소로 알음알음 알려지기 시작한 안돌오름 편백나무 숲길은 이미 많은 이들이 찾는 숲 명소가 됐다. 길 양쪽에 펼쳐진 나무사이로 난 오솔길이 이색적이다. 원래 사유지였으나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일반인들에게도 개방했다.해가 쨍한 날, 흐린 날, 비오는 날 어느 때나 가도 분위기가 좋다. 날씨에 따라 다른 색을 내는 숲에서 다양한 감성 사진을 찍을 수 있다. MBC 드라마 ‘내가 가장 예뻤을 때’에서 신혼여행을 온 임수향과 하석진이 손을 잡고 걷다 이마에 입맞춤하던 곳이기도 하다. 숲길은 공원처럼 조성돼 있는데 돌담길, 야자수와 그네 오두막, 나홀로 나무 등 볼거리가 다양하다. 초록 숲과 잘 어울리는 민트색 푸드 트럭은 비밀의 숲 전용 카페로 아메리카노, 한라봉주스, 타르트와 쿠키, 빵 등 다양한 디저트를 팔고 있다. 원래 유랑하는 푸드 트럭이었지만 이제는 안돌오름 비밀의숲에 정착해 이곳을 관리한다. 숲이 생각보다 넓어 길을 잃을 수 있으니 입구에서 지도를 촬영해 참고하는 게 좋다. 휴무일은 공식 인스타그램에서 공지한다. ◇ 절물자연휴양림… 삼나무 숲속 데크서 즐기는 쉼봉개동 화산분화구 아래 산림청이 관리하는 국유림에 조성된 숲이다. 수령이 30년 이상 된 울창한 삼나무숲으로 삼나무 외에도 소나무, 산뽕나무 등이 서식한다. 까마귀와 노루도 볼 수 있다. 쭉 뻗은 삼나무숲 곳곳에 마련된 평상처럼 넓은 데크에 앉아 책을 보거나 누워서 나무 사이로 파란하늘이 보인다. 숲이 내뿜는 피톤치드를 맡으면 세상 근심이 모두 사라지는 듯하다.휴양림 가운데 자리 잡은 절물오름은 해발 650m의 기생화산으로 등산로를 따라 정상에 오르면 말발굽형 분화구가 펼쳐진다. 분화구 전망대에 오르면 제주시와 한라산이 내다보인다. 오래전 절 옆에 약수가 있어 ‘절물’이라 이름 지은 제주시가 지정한 제1호 약수터도 있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아 예전에는 주민들이 식수로 이용했다고 한다./제주=글·사진 최병일 작가

2023-07-20

“엄마 인생의 마지막 꿈이라면 도와줄게”

영흥초등학교에서 자원봉사에 눈을 뜬 권순남 선생은 더 넓은 세계로 걸어 나온다. 포항JC 부인회 활동으로 지역사회의 주목을 받은 권 선생은 포항시로부터 자원봉사센터 소장직을 제안받는다. 자원봉사센터 소장직을 수행하려면 자신의 삶을 센터에 오롯이 바쳐야 하는데 권 선생은 어떤 선택을 할까?최미경(이하 최) : 부군께서 포항JC에서 활동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포항JC 활동과 관련해 각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권순남(이하 권) : 어느 날 남편과 이야기를 하다가 울릉도 아이들이 한 번도 기차를 타 본 적이 없다는 얘기를 들었어. 아이들의 소원이 기차를 타 보는 거라는 얘기를 듣고 그 소원을 이루어주고 싶었지. 1977년이었어. 울릉도 아이들은 난생처음 기차를 타 보았고 서울 방송국 견학도 했지. 최 : 부군의 JC 활동에 내조를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권 : 남편이 나를 믿어준 만큼 나도 힘을 보탰지. 1970년대 말 남편이 청년회의소 경북지구대회를 포항에서 유치하고 싶어 했어. 포항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재정적인 면에서 걱정이 앞섰지. 그래서 포항JC 임원 부인 7명을 모아 연말 송년회를 열자고 했어. 젊은 남성들이 지역사회를 위해 애쓰는데, 우리도 힘을 보태야 하지 않겠느냐며 마음을 모았어. 그런데 우리 여성들이 뭘 할 수 있겠어? 그때만 해도 사회활동이 쉽지 않았던 시절이니 마땅한 대안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더군. 그러다 각자 잘할 수 있는 일을 떠올렸지. ‘살림살이의 기술’이 바로 그것이었어. 김밥 잘 싸는 사람. 감주 잘 만드는 사람. 동동주 만들어올 사람……. 이렇게 하나씩 맡아 송년회를 준비했지. 나는 과일을 대신할 과자 안주를 맡았는데 한 번도 만들어본 적이 없어 고민이었어. 서울에 가서 외국 음식 요리책을 구입해서 보니 이쑤시개에 치즈, 체리, 메추리알 이런 것을 끼운 게 눈에 띄더군. 그런데 막상 해보니 모양새가 영 나질 않았어. 여러 차례 시행착오 끝에 양배추에 쿠킹 포일을 씌워 이쑤시개에 끼운 과자 안주를 멋지게 만들어냈지. 테이블 세 개를 연결해서 그 위에 각자 준비해간 음식을 세팅해놓고 포항JC 회장에게 오라고 전화했어. 120여 명의 포항JC 회원 중 60여 명이 참석했는데 차려놓은 음식을 보고 모두 깜짝 놀랐지. 월례회에는 몇 명 정도 참석하느냐고 묻자 30~40명 정도라고 했어. 왜 그 정도밖에 안 되느냐고 물었더니 일을 마치고 오면 주변 식당이 문을 닫아서 저녁도 못 먹고 회의한다고 하더군. 그러니 열정 있는 사람이 아니면 누가 그곳에 오겠어? JC 회원들이 송년회를 마치고 집으로 가면서 다음해에는 자기 아내도 끼워달라고 해서 회원 아내들을 모아 팀을 짰지. 혼자는 어렵지만 모두 함께하니 회비 30만 원으로 100만 원의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알았어.송년 파티를 통해 권순남 선생은 포항JC 경북지구대회를 개최할 수 있도록 남편을 도왔다. 포항JC는 경북지구대회뿐 아니라 1990년 8월 전국대회까지 유치했다.최 : 전국대회는 경북대회와는 수준이나 규모가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권 : 숙박이 가장 큰 문제였어. 전국에서 천여 명의 JC 회원이 오는데 포항에는 이들을 수용할 숙박 시설이 없었어. 포항공대로 찾아가서 총장님을 만났지. JC 전국대회를 통해 포항공대와 포스코를 홍보하면 어떻겠냐고 했어. 포항공대도 득이 되고 지역사회에도 득이 되니 포항공대 강당과 기숙사를 빌려주면 고맙겠다고 부탁했지. 다행스럽게 총장님이 부탁을 들어주셨어. 그렇게 포항공대 방학에 맞춰 JC 전국대회를 개최했어.최 : 다른 문제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권 : 두 번째 문제는 음식이었어. 한 번에 천 개의 도시락을 만들어본 식당이 포항에는 없었거든. 흰밥, 고기, 전, 김치가 들어간 도시락 샘플을 만들어 승리식당에 찾아갔지. 샘플처럼 천 개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했어. 그런데 당일 1200명이 온 거야. 어떻게 했겠어? 한 시간 동안 포항JC 부인들이 도시락 200개를 만들었지. 그리고 포스코를 견학하고 돌아온 전국 JC 회원들에게 천 개의 아이스 수건을 내놓았어. 견학 후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새까매진 얼굴과 손을 씻을 만한 곳이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지. 그래서 전국대회 며칠 전에 천 개의 수건을 구입해 포항JC 부인들을 모두 불러 수건을 하나하나 접어서 말았어. 그렇게 꺼낸 아이스 수건과 수제 도시락을 받아든 전국 JC 회원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지. 포항에서 열린 JC 전국대회는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 이후 여성들이 사회에 나와야 세상이 변한다는 것을 깨닫고 포항JC 임원 부인뿐 아니라 회원 부인도 함께할 수 있는 포항JC 부인회를 1981년 결성하게 되었다. 포항JC 부인회는 복지시설을 대상으로 나눔 운동을 전개했고 장애인 재활 후원사업도 진행했다.최 : 그 큰 행사를 포항에서 치렀다는 자긍심이 대단하셨겠어요?권 : 예쁘게 보일 생각은 하나도 없었어. 회장 부인만 잘 차려입고 나오라고 하고, 30명 정도의 JC 부인은 새벽부터 나와서 머리를 질끈 묶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지. 모두가 사명감을 갖고 일했기에 신이 났어.그 일을 계기로 1982년 국제청년회의소 세계대회를 서울에서 유치하게 되었다. 권순남 선생은 사람의 힘을 믿었다. 좋은 의도를 갖고 좋은 방향으로 함께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늘 믿었다. 그러한 믿음이 그녀로 하여금 사람들을 하나로 결속하게 하는 연대를 만들었다.권 : 1996년 4월 포항시 공무원이 나를 찾아왔어. 당시 시장이 박기환이었는데 포항JC 활동을 오래한 분이었지.최 : 그러니까 박기환 시장님이 권순남 선생님의 활동을 알고 자원봉사센터 소장직을 부탁한 거군요.1995년 정부는 2002년 월드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88올림픽이 자원봉사자들의 힘으로 성공적인 결과를 거둬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질서정연하고 자발적인 자원봉사자들의 모습에 전 세계가 감동했고 올림픽 역사상 최고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5년 행정자치부 최형우 장관이 자원봉사에 관심을 갖고 자원봉사자 교육과 투입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일본, 미국 등 5개국을 벤치마킹했다. 그 결과 자원봉사를 관리할 수 있는 센터가 필요하고, 그 센터는 정부가 지원하고 민간이 운영해야 한다고 보고되었다. 이를 통해 행정자치부에서 16개 시·도에 시범센터를 운영할 수 있도록 자원봉사센터를 설치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권 : 포항시 차원에서 자원봉사센터를 만들어야 했고 이를 추진할 사람이 있어야 했지. 적임자를 물색하다가 내가 추천되었는데 나는 상근직은 부담스러웠어.최 :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권 : 갑작스러운 제안에 답을 줄 수가 없었어. 당시 내가 하는 교복 사업이 잘되고 있었거든. 성업 중인 사업을 정리하고 봉사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 고민스러웠지. 근본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자원봉사센터가 전무했기에 그곳에서 무엇을 하는지 내가 무얼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어 걱정이 앞섰어. 처음에는 4~5개월 정도 도와주겠다고 했지. 교복 사업의 비수기(7~10월)에는 도와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힘들었거든. 그런데 시에서는 도와달라고 계속 연락해왔어. 고민 끝에 가족회의를 했어. 딸들에게 “엄마가 지금 고민하는 일은 무보수다. 그러니 너희가 재정적으로 후원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지. 남편에게는 “자원봉사센터가 시범 운영된다고 하니 나는 꼭 성공해야 한다. 그러려면 가정에 충실하기 어려울 텐데 이해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최 : 가족들의 반응이 궁금하군요.권 : 두 딸은 이 일이 엄마 인생의 마지막 꿈이라면 최대한 도와주겠다고 말해주었어. 남편도 당신은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누가 말려도 하는 사람이니까 편하게 일하라고 했고. 남편과 두 딸의 말에 큰 용기를 얻었지.최 : 자원봉사센터 소장직을 맡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인가요?권 : 전국을 다녔어. 자원봉사센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대구, 부산, 서울로 다녔지. 그리고 좋은 자료를 찾기 위해 애썼어. 어떻게 하면 봉사를 체계적으로 할까 고민하다가 사회복지에 관한 전공 서적을 구입했는데 전부 영어로 되어 있더군. 그렇게 자원봉사에 관한 것이라면 다 찾아다니고 뒤졌어. 그러던 중에 이강현 박사를 만났지.이강현 박사는 우리나라 자원봉사 역사에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주요 자원봉사 단체와 조직, 제도와 정책이 대부분 그의 아이디어와 기획을 거쳐 탄생했다. 1991년 우리나라 최초의 자원봉사 전문기구인 ‘한국자원봉사연합회’를 만들었고, 1996년 자원봉사 관리자 양성을 목표로 하는 ‘볼런티어21(현 한국자원봉사문화)’을 창립했다. 2008년에는 아시아인 최초로 세계자원봉사협의회(IAVE) 회장에 뽑혀 7년간 국제사회의 자원봉사 운동을 이끌었다.최 : 정말 열정적이셨군요.권 : 한 달에 한 번 서울에서 리더십 교육을 했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어. 서강대에서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자원봉사 지도자 교육을 한다는 것을 알고 2년간 매주 서울에 갔지. 남을 가르치려면 내가 완벽해야 했으니까. 교육이란 교육은 다 듣고 다녔고 세미나, 포럼, 연구발표를 한다면 어디든지 찾아갔지.권순남1939년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 포항으로 왔다. 포항초등학교, 포항여중·고를 졸업하고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약학과에 입학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퇴했다. 1957년부터 봉사활동을 시작해 지금까지 자원봉사를 삶의 전부로 여기며 실천했다. 포항JC 부인회를 통해 장애재활사업 후원, 양로원 지원, 소년소녀가장 지원 등을 해왔다. 1996년 포항시자원봉사센터 소장, 2003년 한국자원봉사센터협회 회장을 맡아 지방자치단체별 자원봉사센터 설립과 운영의 효율성, 전문성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자원봉사활동기본법 제정에도 앞장섰다.대담·정리 : 최미경(시인) / 사진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제공 : 권순남

2023-07-19

“전국 최고 청정도시 울진, 희망과 번영의 도시로 도약”

울진군의 민선8기 지난 1년은 대형산불로 인한 피해, 지역경기 침체, 지방소멸의 절박한 상황속에서도 원자력수소 국가산업단지 후보지 선정, 경북 도민체전 성공개최 등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로 빛나는 성과를 거뒀다.군민과의 약속을 지키고 울진 발전을 위해 쉼 없이 달려온 손병복 울진군수는 “지난 1년 울진군이 만들어 낸 성과는 군민 여러분들과 공직자들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한 방향으로 나아갔기에 가능한 일”이라며 “지금까지의 과정이 희망과 번영의 울진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가겠다”고 소회했다.손 군수는 이어 “변화하고, 다가가며, 실천하는 군정으로 ‘화합으로 새로운 희망 울진’건설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겠다”고 밝혔다.□ 미래 100년을 책임질 신성장동력 확보손병복 군수는 민선8기 최우선의 목표로 “군민들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울진군을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국가산업단지의 울진군 유치를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먼저, 연구 중심이었던 기존의 ‘수소 실증단지 조성’사업의 추진 방향을 ‘원자력수소 국가산업단지’로 전략을 수정하고, 수소 관련 기업들과 MOU를 맺는 등 적극적인 유치 활동을 진행했다. 그 결과, 올해 3월 울진 원자력수소 국가산업단지 후보지로 선정돼 울진의 미래를 책임질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보했다.또한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개를 위해 관계부처와 집중적인 협의를 거치는 등 발빠르게 움직인 결과, 평균 승인 기간에 비해 19개월이나 일정을 단축시키며 올해 6월 실시계획 승인을 이끌어냈다.산불피해복구와 더불어 이재민들의 일상 복귀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동시에 대형 산불에 입은 큰 상처를 또 다른 기회로 만들기 위한 노력도 이어갔다. 400억원 규모의 국립 산지생태원, 360억원 규모의 국립 동해안 산불방지센터, 720억원 규모의 경북도 119 산불 특수대응단을 유치하며 재난으로부터 안전하고, 지역 경기에도 보탬이 될 수 있는 기틀를 마련했다.□ 울진 관광 1천만 시대 준비‘1천만 관광시대 개막’은 ‘원자력수소 국가산단 조성’과 더불어 민선8기 울진 미래 비전의 전략적 양대 축이다.이에 울진군은 빅데이터 활용 등을 통한 중장기 관광 개발계획을 수립하여 기존의 자연 풍광 위주의 관광에서 해양레저, 로컬체류 등 프로그램의 다변화 방안을 모색하고, 1천만 관광 시대 준비를 위한 전략적 과제를 도출했다.또한 대한민국에서 초미세먼지 농도가 가장 낮은 맑은 공기 모범도시 이미지를 활용해 새로운 관광브랜드를 만들어 가기위해 ‘대한민국의 숨, 울진’으로 관광 슬로건을 확정하고 홍보 마케팅에 적극 활용했다.울진군만의 차별화된 전략의 일환으로 울진군 일원에 워터파크를 포함한 600실 이상 규모의 사계절 전천후 오션리조트 개발을 위한 기본구상을 완료하고 적극적인 민자유치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경북도 도민체육대회의 성공개최에 이어 제17회 경상북도 농업경영인대회, 제45회 경북도 4H연합회 야영대회, 제33회 한국 임업후계자 전국대회, 1회 대한민국 해양과학 산업축전 등 전국·도단위 체류형 행사를 유치해 울진군 홍보와 더불어 지역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 보편적인 복지체계 기반 마련“민선8기 울진 군정의 중심에는 군민이 있다. 그리고 군민이 행복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항목 중 하나”라고 말하는 손 군수는 혜택을 받는 군민들의 각자 상황에 맞는 맞춤형 복지를 강조해왔고, 지난 1년 적극 실현 시켰다.어르신들의 건강과 돌봄체계 강화를 위해 어르신 목욕비 및 이·미용비 지원 사업을 실시하고 경로당 운영비의 활용 범위를 확대한 경로당 운영지원 기준을 새롭게 마련했다.아이 키우기 좋은 환경 마련을 위해 각종 난임부부, 임산부에 대한 지원 및 학생들에 대한 장학금을 확대했다. 기존 군수 관사를 다함께 돌봄센터로 전환해 돌봄을 위해 먼거리로 이동해야 하는 학부모와 아이들의 불편을 해소했다.또한 보훈 대상자에 대한 지원 및 보훈단체 운영 보조금을 확대해 조국을 위해 희생한 분들에 대한 예우를 잊지 않았다. 기존에 예산 소진 시까지만 진행되던 울진사랑카드 캐시백 혜택을 더 많은 군민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예산을 확대 편성했다.□ 경쟁력있는 울진형 산업기반 구축일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일할 수 있고, 열심히 일한 만큼 보상받을 수 있는 사회. 민선8기 울진군이 만들어가고자 하는 경제구조이다. 열악한 조건에 놓여 있는 울진농업이 새롭게 도약해, 돈 되는 농업이 될 수 있도록 ‘울진 농업대전환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울진농업의 미래를 위한 로드맵을 마련했다.임대형 스마트팜 표고버섯 재배단지 조성과 계절 농산물 장기 보관용 대형 저온저장고 건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농가의 안정적 소득을 위한 표준모델을 만들어가고 있다.또한 울진군의 신선한 수산물이 대도시에 당일 배송될 수 있는 새로운 유통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한 기본 계획을 수립 중에 있다. □ 안전하고 쾌적한 정주여건 마련민선8기 손병복 군수는 군민 모두가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함을 강조하고 수도·전기·도로·안전 등 모든 군민들이 누려야 할 보편적 인프라 조성에 노력하며 군민이 최우선이 되는 군정을 실천해 왔다.특히 지방상수도 공급 불가 지역 급수와 관련하여 상수도 운영에 필요한 전기 및 통신료 지원, 6개 읍·면 15개소 소규모 수도시설 개량 사업을 추진하는 등 깨끗한 물을 마실 군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해 노력했다.또한 도비 12억원을 확보한 온정면 생활문화 센터 등 주민편의 시설을 확충하고, 군민 안전보험 보장 범위를 기존 19개 항목에서 26개 항목으로 대폭 확대했다.쾌적하고 살기 좋은 농촌 공간 조성을 위해 울진읍, 북면, 금강송면, 근남면, 매화면, 죽변면 등 북부 생활권에 2027년까지 336억 원이 투입될 예정이며, 후포면은 2026년까지 총사업비 120억 원 규모의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 군민과 소통하는 섬김행정 실현울진군청 공무원들의 이름표에는 특별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군민을 섬기겠습니다’이다. 군민을 존중하고 섬기며, 군민에게 존중받는 공직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민선8기 울진 군정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이러한 군정을 실현 시키기 위해 민선8기 손병복 군수의 첫 행보는 군민과 소통의 시간을 갖는 것이었으며, 이후 ‘군민 섬김데이’를 통해 정기적으로 군민들의 이야기를 들어왔다.또한 군수직통 문자메세지로 민원을 받는 ‘군수 직통 온라인 민원창구’는 지금까지 360건의 민원 중 완료 205건, 진행 48건으로 70%의 민원을 해결했다.군민과 공직자들의 전문성 및 역량강화를 위한 ‘굿모닝 목요특강’과 공직자들의 자발적 연구모임인 ‘혁신 아이디어 뱅크’를 운영하고 있다.더불어 기본에 충실하고, 적극적으로 일하는 공직문화 조성을 위해 업무실적에 연계한 인사시스템과 각종 포상제도를 마련했고, 적극행정 실행의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울진군 적극행정 우수공무원 선발 등에 관한 규정’을 제정하였다,또한 조직개편을 통해 군정 전반에 조정 능력을 극대화하고 현안 사업의 효율적인 추진을 위해 군수 직속의 정책홍보관을 신설했다.정책의 수립과 조정, 추진과정의 문제점 등을 분석해 대안과 발전방안을 도출하기 위해 매주 군수 주재의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장인설기자 jang3338@kbmaeil.com

2023-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