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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고령군,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한 ‘감동 복지 실현’ 박차

‘복지는 감동’이라는 목표로 탄탄한 사회안전망 구축과 체감할 수 있는 복지를 실현하고자 하는 고령군의 올해 사회복지예산은 823억원. 이는 고령군 전체 예산의 19%에 해당된다.고령은 장애인, 노인, 저소득층의 경제적 지원과 정서적 지원, 초고령화 사회의 활기찬 노후생활 지원 등 대상자별 맞춤형 복지를 통한 복지사각지대 해소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이는 인간다운 생활 보장과 삶의 질 향상을 구현하고자 하는 고령군의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아래에서 각 분야별로 고령군의 복지 정책이 어떻게 구체화되고 있는지 살펴본다. □ 지역사회 안전망 구축과 노인복지 향상복지기획 분야는 복지·보건·고용·주거·의료 및 저출산·고령화 등 지역사회 전 분야에 걸쳐 복지정책을 수립 중이다. 특히, 지역사회 보호 체계 구축을 통해 복지사각지대를 발굴하고, 지역 내 복지자원 개발·연계 등에 주력하고 있다.민관협력 강화를 위해 유관기관과 전문가, 주민 대표 등이 참여하는 지역사회보장협의체를 운영하고 있으며, 고령군 지역사회보장협의체는 ‘일촌보다 이웃사촌’이란 비전으로 군·읍면 협의체위원 200여 명으로 구성돼 활동 중이다.지역사회보장협의체는 지역사회 보장에 관한 심의·자문 및 복지서비스의 연계·협력추진과 지역 내 복지자원 개발 등 민관협력기구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취약계층 보호를 위해 지역사회보장계획 수립, 행복나눔공동체, 경북모금회사업, 기초푸드뱅크, 지역특화사업 등에도 노력한다.여기에 더해 국가를 위해 희생한 국가유공자와 보훈대상자의 삶이 원활하게 유지되도록 참전명예수당, 보훈예우수당, 참전유공자 미망인복지수당을 지원해 그들의 생활안정과 복지향상에도 힘쓰고 있다.생활유지 능력이 없거나 어려운 저소득 군민의 의료 문제를 해결하고, 의료급여사례관리사를 통해 수급자의 자가 건강관리능력을 향상시켜 합리적 의료 이용을 유도하는 것도 고령군의 역할이 되고 있다. 이는 군민 삶의 질 향상과 의료급여 재정 안정화에 기여한다.2023년 6월 현재 고령군은 노인 인구가 35%인 초고령화 사회다. 이런 인구구조에 적절히 대응하기 위해 소득·일자리, 돌봄, 주거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노인복지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어르신들의 사회참여 활성화를 지원하기 위한 노인일자리 및 사회활동지원사업을 벌여 1천336명의 어르신이 공익형, 시장형, 사회서비스형 등 다양한 분야의 사회활동에 참여하도록 해 활기차고 건강한 노후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중이다.노후의 안정된 소득기반 제공을 위해 기초연금을 8천491명에게 지원 중이며, 경제적으로 어렵고 거동이 불편한 독거노인을 위해 밑반찬 배달사업과 무료급식소를 운영한다. 이를 통해 노인 건강증진과 기본적인 삶의 질 향상을 도모하고 있다.일상생활이 어렵거나 안전에 취약한 어르신들에게 노인맞춤 돌봄서비스, 독거노인 응급안전 서비스를 지원한다. 양로원과 요양원 9곳을 지원해 시설 입소 노인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편의도 제공하고 있다.노인 여가복지시설인 경로당 210곳에 운영비, 냉·난방비, 양곡 등을 지원하고 경로당 보수도 지원하며, 건강기구와 필요 물품 역시 제공 중이다. 행복경로당 운영을 통해서는 밑반찬 지원 및 경로당 입식 환경개선사업을 추진한다.지난 2019년 10월부터는 경로당 행복선생님 지원사업을 실시해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획일적이고 답습적인 여가 프로그램에서 벗어나, 경로당별 이용자 욕구에 맞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고령군의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이 되고 있다. □ 소외계층 발굴과 지원책 모색희망복지 분야에서는 복지사각지대와 소외계층을 발굴하고 지원하기 위해 민관협력을 통한 지역단위 통합적 서비스 제공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복합적 욕구를 가진 위기가구에 다양한 맞춤형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찾아가는 보건·복지서비스 제공 및 지역주민의 복지체감도 향상에 기여하고 있는 것. 이는 긴급지원, 공동모금회 긴급지원, 함께모아 행복금고 등을 통해 실현되고 있다. 지속적인 모니터링 역시 필수다.또한, 희망복지지원단 운영으로 3명의 통합사례관리사가 8개 읍면을 3개의 권역으로 나눠 고난도 사례관리를 추진하고 있다. 공적서비스, 심신건강지원, 일상생활지원 서비스, 주거환경개선, 사회적 기능향상 서비스 연계 등의 활동을 통해 복지서비스 전달체계의 효율성과 주민의 복지체감도 향상에 힘쓰고 있는 중이다.올해 고령군이 새롭게 추진하고 있는 ‘함께모아 행복금고’ 사업을 통해서는 저소득계층 지원 및 복지사각지대 발굴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고, 긴급한 생계·주거·의료 문제는 적극 지원한다. 이를 위해 특화사업비도 편성했다.생활이 어려워지는 위기가 닥쳤을 때 최저생활을 보장하고 가구 여건에 맞는 지원을 위한 복지급여 대상자 조사 및 책정, 생활보장업무도 중요하다. 고령은 이를 위해 기초생활보장 급여지급, 정부양곡지원 및 저소득층 주거환경개선사업, 저소득주민자녀 장학기금 업무 등 생활전반에 걸친 밀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기초생활수급자들에게 직접 급여를 지급하는 업무이기에 공정하고 정확한 서비스로 수혜자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 고령군청의 부연.고령군 관내 기초생활수급자는 1천300여 가구. 이들을 대상으로 생계, 의료, 주거, 교육, 해산장제급여로 올해 72억원을 집행할 계획이다. 특히 저소득층 주거환경 개선을 위한 집수리 사업은 자가 가구를 대상으로 주택 노후도에 따라 지붕 개량, 화장실 보수, 도배장판 및 주방 교체 등을 실시 중이다. 해마다 평균 40여 가구가 이 혜택을 누리고 있다.또한 임차가구에게는 소득 수준에 따라 차등 급여를 지원하며, 2021년부터는 주거급여 수급가구원 중 취학, 구직 등을 목적으로 부모와 따로 거주하는 20대 미혼청년(만19세 이상 30세 미만)에게 별도 주거급여를 지급 중이다.2015년 맞춤형 급여체계로 개편 이후 수급자의 가구 특성과 소득인정액을 조사해 필요한 급여를 제공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통합조사팀에서는 저소득층의 기초생활을 보장하고, 단계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 장애인도 당당한 지역사회의 일원고령군의 장애인들과 저소득 주민을 위한 장애인복지업무(장애수당, 일자리, 바우처 등)와 자활시설 관리·지원도 주요하게 다뤄야 할 사업이다.고령은 관내 장애인들의 경제활동과 생활안정을 위해 장애인일자리 및 장애인연금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장애인일자리는 경북 내에서 포항 다음으로 많은 사업량을 확보했고, 현재 204명의 장애인들이 고령군청, 읍·면사무소, 장애인시설 및 단체에 배치돼 참여하고 있다. 또한, 근로능력이 상실되거나 줄어든 중증 장애인에게 지급되는 장애인연금은 매월 450여명의 장애인들이 지원받고 있다.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는 장애로 인해 혼자서는 생활이 어려운 중증장애인에게 활동 보조, 방문 목욕, 방문 간호 등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현재 96명이 지원받고 있는 중이다.기존에는 대가야읍에만 제공기관이 있어 이용자들의 불편이 있었으나, 올해 초 다산면에 활동지원 제공기관이 추가돼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장애인거주시설(성요셉재활원, 성요셉요양원)에서는 중증장애인에게 거주·요양·지원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또, 동아리활동 및 일상생활 촉진프로그램 등을 통해 사회 적응력을 높이고, 단계별 자립지원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직업재활센터에서는 박스 제조업과 장갑 제조사업을 통해 고령군 관내 재가장애인과 시설생활인에게 직업재활과 관련된 서비스를 제공하고, 직업을 통한 자활과 자립을 돕고 있다. 현재 11명의 계약근로자는 70~170만원의 급여를 받고 있고, 35명의 훈련생은 월 평균 35만원의 급여를 받으며 직업재활에 참여 중이다.수어통역센터는 청각·언어장애인의 복지증진을 위해 수어통역 및 상담서비스를 제공한다. 생활이동지원센터는 이동의 제약이 있는 장애인을 위해 차량 운행을 통한 이동서비스를 하고 있다.지체장애인협회는 주요사업으로 장애인 편의시설 증진, 여성 자립, 장애인식 개선, 문화예술 체험, 주거환경 개선을 진행 중이다,또한, 장애인권익협회는 장애인의 권익신장 및 인권옹호 사업을, 장애인정보화협회는 컴퓨터 정보화 교육을, 한국교통장애인협회는 교통사고 예방교육 및 안전캠페인을, 시각장애인협회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기초재활교육을, 농아인협회는 수어교실 운영을, 지적발달장애인협회는 지적장애인에 대한 권익옹호·재활·복지증진을 도모하는 등 장애인의 사회참여 확대와 복지증진 향상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은 상시 운영되고 있다.저소득 주민을 위해서는 근로 기회를 제공하고, 자활기반을 조성을 위한 자활근로사업을 추진한다. 현재 기초수급자와 차상위 대상자 43명은 공공건물 청소, 분식카페 근무, 식품 제조 분야 등에서 일하고 있다.근로소득이 있는 기초수급자와 차상위자를 대상으로 한 자산형성지원사업도 추진된다. 3년 동안 본인적립금 10만원을 모으면 근로소득장려금 10~30만원의 매칭금을 지원하는 시스템이다. 이는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이기에 저소득 주민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현재 41명이 이 제도의 지원대상자다./전병휴기자 kr5853@kbmaeil.com

2023-07-18

백제 멸망은 신라 무열왕 김춘추의 복수극?

서라벌(현재의 경주)에서 황산벌(지금의 충남 논산시 연산면)에 이르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경부고속도로와 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최단거리 노선도 대략 250km. 600리가 넘는다.2023년 오늘이라면 쌩쌩 달리는 자동차를 타고 3시간 만에 가닿을 수 있지만, 1천363년 전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황산벌전투에 동원된 신라군의 숫자는 5만여 명.그들 중 말을 탄 지휘관은 소수였다. 무장한 고대 병력이 하루에 행군할 수 있는 거리는 고작해야 50리 정도. 멈춤 없이 걸어도 최소 12일이 걸리는 거리다.황산벌전투가 벌어진 때는 660년 음력 7월 9일부터 10일까지. 이 시기를 요즘 사람들은 “아스팔트가 녹아내리는 염천”이라 한다. 옛사람들이라고 더위를 몰랐을까? 그럴 리가 없다. ‘개도 지쳐 혀를 한 자나 빼무는 여름’이었다.5월 말에 서라벌을 출발한 신라군은 무열왕 김춘추와 상대등 김유신의 지휘 아래 한 달하고도 보름에 걸쳐 낮에는 사람을 태워 죽일 듯한 땡볕 아래를 걷고, 밤엔 숲이나 들판에서 노숙을 한 끝에 낯선 백제 땅 황산벌에 닿았다.그게 여행이라면 ‘고생 끝 즐거움 시작’이었겠으나, 서라벌에서 황산벌까지의 행군은 룰루랄라 콧노래 부르는 소풍이나 원족(遠足)이 아니었다.곧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무시무시한 전투가 신라와 백제의 병사들 사이에서 벌어졌다. 최소 1만 명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전사했다. ◆의자왕을 깎아내림으로써 신라의 백제 침공 정당화성골 출신이 이어가며 왕을 하던 신라에서 최초의 ‘진골 출신’ 왕에 오른 탁월한 외교전략가 김춘추(무열왕)는 백제와 고구려를 병합해 한반도를 하나로 묶으려는 큰 야망을 가진 사내였다. 660년 백제 침공은 그런 ‘정치·군사적 목적’ 아래 결행됐다.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백제의 최고 권력자는 의자왕(재위 641~660). 김춘추는 의자왕을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로 인식하고 있었다.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삼국사기-백제본기’와 ‘삼국사기-신라본기’를 보자. 이런 대목이다.“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초기에는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릴 정도로 영특한 군주였다. 재위 2년(642)에는 신라를 공격해 미후 등 40여 성을 빼앗았으며, 윤충(允忠)으로 하여금 대야성을 공격해 점령하게 했다. 당시 대야성주는 김춘추의 사위인 품석(品釋)이었는데, 윤충은 품석 부부가 항복을 하자 이들을 죽여 머리를 도성으로 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기둥에 기대어 서서 앞에 사람이 지나가도 알지 못할 정도로 심한 충격을 받았고, 백제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의자왕의 신하 윤충에게 목이 잘린 품석의 아내 고타소는 김춘추가 문명왕후(문희)에게서 얻은 딸이다. 그러니, 김유신의 생질이기도 했다. 고대 전투에선 항장불살(降將不殺)의 불문율이 있었다.그럼에도 항복한 사위 품석은 물론 전투와는 무관한 딸 고타소까지 죽이고, 소금에 절인 둘의 수급(首級)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했던 의자왕의 행위는 김춘추의 넋을 나가게 만들었다. 그의 분노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그래서였을 것이다. ‘승자의 관점’에서 쓴 역사 아래 의자왕은 정치적으로 무능하며 성적으로 타락한 왕이라 기록된다. 알다시피 660년 신라와 백제와 맞붙은 황산벌전투의 승자는 신라였다.전북대학교 박노석의 논문 ‘백제 황산벌 전투와 멸망 과정의 재조명’엔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백제의 멸망 원인은 승자인 신라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에서는 백제의 멸망 과정을 진실하게 기록하였을까?”라는 의문과 함께 아래와 같은 서술이 등장한다.“의자왕은 삼천궁녀를 거느리고 주색에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하였다. 백제의 군신들은 사치하고 음탕한 생활에 빠져 국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들의 원망이 가득하였고, 신이 노하여 변괴가 번번이 나타났다. 성충, 흥수와 같이 직언을 하는 신하를 감옥에 가두고 멀리하였다. 정부 내에 신구 세력간 권력투쟁으로 국정이 혼미하였다. 신료들이 신뢰하지 않는 왕비의 국정 개입의 도가 지나쳤다…(후략)”이처럼 백제 몰락 후 신라는 의자왕을 아름다운 궁녀에만 집착하고, 충신을 백안시하며, 영악한 왕비를 내버려둔 혼군(昏君·어리석은 임금)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백제의 관료들을 폄훼하고 ‘신(神)까지 백제를 버렸다’고 신랄하게 비난한다.이는 신라의 백제 침공을 ‘하늘의 뜻’으로 만들어 백제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고도의 ‘선전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크메르 루즈(Khmer Rouge)의 악행을 막기 위해 우리가 캄보디아를 공격했다”고 말한 1970년대 베트남처럼. ◆멸망의 위기에 빠진 백제를 구하려 분투한 장군 계백(階伯)백제사(百濟史)를 전공한 역사학자가 아닌 현대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 인식 속에 의자왕은 무능한 군주로 각인돼 있다.그렇다면 678년을 이어지며 31명의 왕이 통치한 백제를 떠올릴 때 가장 긍정적 이미지로 기억되는 사람은 누구일까.적지 않은 이들이 황산벌전투에서 겨우 5천 명의 병력으로 신라의 5만 대군에 맞서 발군의 전투 실력과 견인불발(堅忍不拔)의 꺾이지 않는 기개를 보여준 백제의 명장 계백(출생년 미상~660)을 지목할 것이다.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실린 계백에 관한 인물 소개를 인용한다.“계백은 삼국시대 백제의 황산벌전투에 참전한 장수다. 660년 김유신과 소정방이 이끄는 5만여 명의 나당 연합군이 요충지인 탄현과 백강으로 진격해오자, 결사대 5천 명을 뽑아 황산벌에 나가 맞았다. 그는 전장에 나아가기에 앞서 처자를 모두 죽이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릴 것을 다짐했다. 결사대의 용맹은 연합군의 대군을 압도하여 처음 네 번의 싸움에서는 모두 승리를 거두었지만,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처자를 죽이고 절개를 지킨 그를 충절의 표본으로 여기고 부여 의열사, 연산 충곡서원에 제향했다.”혼란한 시대는 사서(史書)에 기록될 영웅적 인물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필연에 가깝다. 소설 ‘삼국지’와 ‘초한지’에 등장하는 범증, 장량, 관우, 조운이 그렇고, 우리가 겪은 일제강점기 이봉창과 김원봉이 그렇다.일기당천(一騎當千)의 기상으로 김춘추와 김유신의 명에 따라 황산벌에 온 신라의 5만 병사를 공포로 몰아넣은 계백은 백제의 관점에서 보자면 영웅이라 불러도 무방하다.물론, 그 전투에서 사망한 화랑 반굴과 관창 등 수많은 신라의 병졸 입장에선 ‘사납고 잔인한 적장’이었겠지만.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역사의 기억’이란 상대적이다. ◆논산의 계백 장군 묘를 찾아 떠난 먼 길1천363년이 흘렀다. 황산벌에서 말발굽이 일으키는 먼지와 신라와 백제 병사들의 함성이 사라진 지.그날 죽은 이들의 시신은 이미 뼈까지 흩어져 진토(塵土)로 바뀌었을 터이고, 전투의 흔적이 남아있을 가능성은 전무했다.그럼에도 ‘삼국의 통일’을 이야기하면서 황산벌전투 현장을 직접 찾아보지 않는 건 게으른 처사로 느껴졌다. 그래서다. 초여름 더위가 몰려오던 7월 초순. ‘계백 장군 유적지’로 향했다.그 옛날 서라벌로 불리던 경주가 지척인 포항에서 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갔다. 대전역에서 대전복합터미널로 이동해 시외버스를 타고 유성과 연무대를 거쳐 논산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거기서 ‘계백 장군 유적지’로 가려면 하루에 8차례 운행하는 307번 시내버스를 타고 30분을 더 달려야 했다.그 여정에서 기자의 눈길을 잡아챈 건 ‘계백로’였다. 경주에 ‘흥무대왕(김유신)로’가 있다면 충남 논산엔 계백로가 있었다. 논산에서 시작돼 대전 중구 서대전 사거리까지 이어지는 도로의 이름.부끄러운 역사 인물의 이름을 따 도로를 만드는 경우는 없다. 변절자 신숙주와 매국노 이완용의 이름이 도로명으로 사용되지 않는 것처럼.그러니, 김유신이 경주의 자랑스런 역사 인물이라면, 계백은 자랑스런 논산의 역사 인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했다.오전에 포항을 출발해 계백 장군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묘 앞에 도착했을 땐 까무룩 해가 저물고 있었다. 붉은 기운이 스며든 황산벌전투 유적지.660년 7월 10일. 신라군의 칼과 창에 찔려 쓰러진 계백이 삶의 끝자락에서 올려다보던 석양도 그처럼 붉었을까?(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7-18

8월 ‘섬의 날’ 행사… 관광객 100만 시대 기틀 다진다

올해는 울릉도 관광의 대 전환을 가져올 중요한 행사가 많고 각종 축제도 이어진다. 울릉도에서 처음으로 국가행사인 섬의 날 행사가 8월 8일부터 11일까지 개최된다.이 행사는 울릉도 관광객 100만 명 시대를 대비한 전초전이다. 따라서 이번 행사는 울릉군의 숙박, 차량 운용 등 관광 인프라를 시험해 볼 좋은 기회이다.남한권 울릉군수는 “관광객 유치를 중점사업으로 관광객 수용 인프라구축에 최선을 다하겠다. 이를 통해 울릉군민 모두가 잘사는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올해 국가 행사인 섬의 날 행사 준비상황은 어떻게 되고 있나.△제4회 섬의 날 행사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관광객 및 외빈들이 대거 방문할 것으로 예상된다. 섬의 가치와 가능성에 대한 국민의식 고취시키고 섬 주민들 간 화합의 장을 마련해 100만 관광객 시대의 기틀을 다지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다.여러 가지 미흡한 점을 미리 살펴보고 각종 컨텐츠 등을 내실있게 구성해 울릉도를 찾는 모든 사람들이 다시 한번 찾고 싶은 섬으로 각인되도록 총력을 다해 준비 중이다.한 번도 육지와 닿지 않은 울릉도만의 고유한 특수성의 가치와 섬이 가진 일반적 보편성을 다양한 콘텐츠와 전문가들의 프로그램으로 보여주려고 한다.태고부터 형성된 울릉도의 천혜의 자연을 만나 볼 수 있는 생태존과 지혜롭게 척박한 환경을 개척한 선조의 발자취도 느껴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앞으로 어떻게 섬의 자연과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이 공존하며 지속가능한 섬의 미래를 만들 것인지 재고할 주제전시관을 준비 중이다.부대행사로 직접 울릉도의 고유한 전통문화를 경험할 떼 배 제작 및 체험과 너새너와 놀이 재현, 슬로푸드 시식 및 체험 등과 같이 보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감만족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선보일 예정이다.이어 8월에는 울릉군 대표적인 축제인 오징어 축제와 해변가요제 등 여러 가지 행사가 이어진다. 섬의 날 행사의 성공을 마중 물로 삼아 이어지는 축제가 성공적으로 개최되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하겠다.-눈꽃축제를 부활시키고 다양한 관광상품 공모전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지.△지금까지 울릉도는 성수기에 관광객이 집중돼 비수기에는 울릉주민의 경제여건이 좋지 않았다. 그 이유가 잦은 여객선 결항이었는데 대형크루즈선 운항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겨울 관광이 가능해졌다.이에 따라 지난 2월 나리분지 일대에서 14년 만에 진행된 겨울시즌 축제인 ‘설(雪)렘가득 울릉도 눈 체험’를 통해 울릉도의 비성수기 축제의 서막을 성공적으로 열었다.올해 축제의 결과를 토대로 미흡한 부분을 보완 재정비, 대한민국 대표 겨울축제로 성장시키고자 한다.이 밖에도 울릉군이 문화관광체육부와 경북도에서 공모 진행한 사업에 연이어 선정되는 성과를 거뒀다.울릉도 옛길에서 만나는 오카리나 역사해설과 얼마 전 열린 학포개척문화제는 울릉도를 개척한 이규원 감찰사의 업적을 기리고, 울릉도 개척사를 알리고자 울릉주민 및 학포 이장과 주민들이 직접행사에 참여, 문화제를 스스로 이끌었다. 독도선상 음악회, 해설이 있는 망루 산책 숲속 작은 음악회, 울릉도 해남&해녀와 함께하는 토크 콘서트, 너새너와일궈 놀이 한마당, 나리분지 야생화 사생대회, 어화(漁火)둥둥 밤바다 문화공연으로 울릉도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풍광과 문화요소를 곁들인 프로그램들이 선정됐다.경북도에서 실시한 야간관광상품 지원사업에서도 울릉군의 ‘나리 빛나는 밤에 만나요’가 선정, 기존의 오징어 축제에서 탈피, 사계절 주야를 가리지 않는 관광 상품을 선보일 예정이다.또한, 얼마 전 ‘2023 경북 대표관광상품 왕중왕전 공모’ 권역연계형부문에 포항시와 함께 ‘동해바다 뱃길따라 울렁울렁 울퐝투어’가 선정됐다. 여행프로그램을 직접 발굴하고 체류형 관광 활성화를 통해 생활인구 증가와 지역 경제를 살리고자 다른 지자체와 연대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다.-울릉도 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한 수학여행단 유치 노력의 성과는.△올해 초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 참석, 울릉도 독도 수학여행단 지원사업을 알려 지난 6월 1일 서울 문교초와 대청초가 2박3일 예정으로 방문했다.울릉도 독도를 찾는 수학여행단을 대상으로 아카데미해설사 전담지원, 학교별 맞춤형 체험프로그램 운영지원, 관내 관광지 무료입장 등 행정적 지원으로 학생들이 울릉도 독도에 대해 올바른 역사관을 가지게 하겠다.또한, 현장중심의 독도 체험을 통해 영토주권 의식을 고취시키고자 적극지원하고 앞으로도 많은 학생이 울릉도 독도를 찾기를 희망하고 있다.이처럼 끊임없이 관광상품을 개발하고, 다양한 판로를 넓히고 개척하는 등 지속 발전 가능한 관광체계 구축을 위해 관광종사자들과의 간담회를 개최하겠다.이를 통해 현장 최일선에서 힘쓰는 종사자분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현장의 의견과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울릉도 관광의 질적 향상을 위해 다양한 의견이 반영될 수 있도록 적극 검토 중이다.-늘어나는 관광객을 응대할 정주인구 증가대책은.△6월부터 경북 문화관광공사에서 울릉군의 관광마케팅 사업을 받아 위탁하고 있다. 그 중 하나인 ‘울릉도 식도락 여행’사업을 운영한다. 이 사업은 울릉도 내 지정된 먹거리(12종)를 먹고 이를 인증한 관광객을 대상으로 최대 3식까지, 개인당 총 3만 원에 해당하는 울릉사랑상품권을 지원한다.이를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는 물론이고 공급자는 음식의 질을 높이고, 수요자는 만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2023년 관광트렌드로 지역 맛집이나 특산품, 그리고 현지에서만 경험할 문화, 역사 체험 프로그램 등 지역 고유의 여행 콘텐츠 및 경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재택 및 원격근무의 증가로 체류형 여행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비교적 짧은 ‘살아보기’여행도 증가하는 트렌드도 반영하고 울릉군의 일손부족도 해결할 수 있는 ‘워킹홀리데이’시범사업을 실시, 참여업체를 모집 중이다. 7월 중순부터 시작, 1차 2차에 걸쳐 시행계획에 있다. 지원내용은 경북도에서 지역정착비를 지원하고 울릉군은 울릉도 독도 탐방 기회를 제공, 서비스업체는 고용지원과 일손부족을 해결하고, 일하고자 하는 분들에게는 울릉도의 생활을 체험하게 하고 지역이주 기회도 제공하는 것이다.-100만 관광객 시대에 대비한 숙박 주차 등 관광 인프라 부족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은.△울릉군은 앞으로 울릉공항 개항, 여객선 취항이 늘어나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관광객이 찾아올 것으로 전망되며, 관광산업 관련 개발수요도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이다.울릉군은 상주인구는 감소하는 데 반해 관광객 즉 주간활동인구는 늘어나는 추세여서 이러한 지역적 여건을 고려하면서 체계적이고 지속가능한 도시계획 수립이 필요하며 관광 인프라 구축을 위해 기업투자유치의 전문화를 위한 노력도 하고 있다. 또한, 자연환경이 우수하고 경사지가 많은 지역인 만큼 난개발을 방지할 개발행위 규제와 토지이용계획이 함께 검토돼야 할 것이다. 현재 군에서는 지구단위계획 정비까지 포함한 군 관리계획 재정비를 진행하고 있다.이번 계획은 상위계획인 ‘2025 울릉군 기본계획’과 개발수요를 고려해 용도지역, 용도지구 등을 정비하며, 도로, 공원, 녹지 등 불필요한 장기 미집행 군 계획시설을 해제 또는 변경하여 토지이용성을 향상시킬 계획이다.그리고 비도시지역인 서·북면 지역의 지구단위계획에 용적률을 상향시켜 개발수요에 맞게 토지이용성을 향상시킬 계획이다. 아울러, 군은 2040년을 목표연도로 하는 ‘2040 울릉군 기본계획’ 추진한다. ‘2040 울릉군 기본계획’은 현재 진행하는 군 관리계획 수립의 지침이 되는 상위계획으로 우리 지역의 국토를 효율적으로 이용, 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장기적인 발전방향 제시 및 공간적으로 발전해야 할 구조적 틀을 제시하는 종합계획이다.장래 100만 관광시대가 열릴 것을 대비해 지속가능한 발전방향이 담긴 종합계획이 수립되도록 ‘2040 울릉군 기본계획’을 신속하고 철저하게 준비해 나가겠다./김두한기자 kimdh@kbmaeil.com

2023-07-17

“文學의 숲에 들어섰으니 詩나무 돼 걸어 나와야지”

대학 시절 풍물에 빠져 지낸 지인이 필자가 포항에 있다는 말을 듣고 했던 첫마디가 ‘원만 사부가 사는 곳’이었다. 한강 이남에서 꽹과리를 가장 잘 노는 상쇠이자, 앞서 이끌기보다는 스며들어 함께 가는 보기 드문 리더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원만 사부가 포항에 풍물을 뿌리내린 ‘한터울’의 이원만 대표였다. 인연이 닿아 만나게 된 그는 만날 때마다 세상을 넓혀가는 사람이었다. 꽹과리 연주자로 시작해 국악으로 다양한 창작 공연을 선보이더니 직접 기획하고 감독한 국악창작뮤지컬 ‘강치전’은 전국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전 이 대표의 시가 실린 계간지가 우편으로 배달됐다. 시를 읽고 난 후 그를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등단을 축하드린다. 시를 쓰는 풍물꾼이 풍물 하는 시인이 되었다.△시 쓰면 시인이지, 싶어서 그냥 작품만 쌓아두고 있었는데 얼마 전 친구가 사무실에 와서 쌓인 책들을 쓱 둘러보더니 써놓은 거 보여달라더라. 그래서 몇 편 보냈더니 허락도 없이 투고해 버린 거다. 시가 계간지에 실린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출판사 측에서 신인상 추천까지 해줘서 하루아침에 시인이 되었다.-언제부터 시를 쓴 것인가.△어릴 적부터 썼고 고교 문예 동아리에서 시에 푹 빠졌다. 안도현, 이정하, 서정윤 시인 등을 배출한 대구 대건고의 ‘태동기’이다. 당시 지도 교사였던 도광의 시인을 얼마 전 찾아뵈었는데 예순이 되어 무슨 등단이냐고, 뭘 그리 오래 참았냐고 그러시더라. 그러면서 좋은 작품은 쓰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쓰면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하셨다. 그 말이 가슴속에 깊이 박혔다.-시 창작 방향을 ‘탄소 포집용 시’라고 밝힌 이유는.△팬데믹을 거치면서 ‘삶의 생태적 전환’은 지구에 붙어살기 위한 생존의 문제가 됐다. 코로나 전과 똑같이 살아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그런 고민을 하다 제주도의 ‘비자림로를 지키기 위해 뭐라도 하려는 시민모임’의 ‘그 숲에 들어간 사람들은 나무가 되어서 나왔다.’라는 표현을 접했다. 한 문장이지만 찌릿했다. 시인은 나무와 풀과 동물의 말을 인간 언어로 동시통역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에게 나무와 풀들의 말을 전하는 시를 쓰고 읽게 해서 기후변화의 감수성을 키워주면 ‘생태적 슬픔’을 느끼고 행동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탄소를 포집하는 시라고 얘기했다.-등단작인 ‘산책 간다’에서 산책을 ‘살아있는 책을 보러 간다는 말’로 표현했다. 산책하면서 시적 영감을 받는 편인가.△영감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늘 관심을 가지고 익숙해지면 자연스레 말문이 서로 트이는 것이다. 양동 마을의 둘레길, 오어지 둘레길, 그린웨이 등을 다니며 친해진 자연에 슬쩍 말을 걸어 보다가 시가 나온다. 뭔가 떠오르면 바로 메모를 하고 그것이 시가 된다. 호기심이 많아서 질문이 생기면 끝까지 파고드는 편이다. 공부는 내가 보지 못한 세상을 보여준다. 그런 인식의 변화가 나를 행복하게 하고 조금 나은 인간이 되게 하니 멈출 수가 없다. 하나의 주제에 빠지면 책장 한 칸을 채운다. 언젠가 나무에 관한 공부를 하는데 ‘나무는 존재 자체가 선물이다.’, ‘자신의 가지를 자른 사람에게도 그늘을 내준다.’는 말들이 시처럼 느껴졌다. 나무에 대한 시작(詩作)은 그렇게 시작(始作)됐다.-‘참새 무덤 이장하기’라는 시도 인상적이다.△오래 전 사물놀이 가르치러 간 학교에서 겪은 일이다. 아이들이 손으로 물을 떠서 참새에게 뿌리고 있더라. 발견했을 때는 움직임이 있었던 모양인데 내가 볼 때는 죽은 상태였다. 참새를 살리려고 애쓰는 아이들을 설득해서 은행나무 아래 묻었다. 그러면서 은행나무에 참새를 저축하는 거라고 말해주었다. 미심쩍어하는 아이들이 혹시 실망할까 봐 참새 무덤을 옆으로 옮긴 얘기다. 그걸 그대로 받아 적었으니, 아이들이 준 시이다.-아이들이 준 시라고 하지만 눈높이가 맞는 시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시이다.△시 쓰기의 시작은 동시였다. 동시와 시는 대상과 언어가 다를 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별반 다르지 않다. 사물놀이를 가르치러 다니면서 만난 아이들에게서 얻은 시로 동시집을 준비하고 있다. 내년이 한국 동요 100주년이라고 한다. 동시에 곡을 붙여 북 콘서트도 해볼 계획이다.-시인이기 이전에 꽹과리를 치는 상쇠였다. 꽹과리의 시의 공통점이 있다면.△만만하지 않다. 심금을 울린다. 늘 ‘만족과 부족’ 사이를 걷게 만든다. 그 정도가 아닐까. 꽹과리를 치면서 ‘큰 기교는 기교가 없다’라는 전통음악 이론을 접하였다. 시에 접목하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않고도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덕목으로 연결된다.-꽹과리는 시를 쓰는 데 어떤 도움이 되나.△쇠를 칠 때 물 흐르는 소리를 내라고 배웠다. 딱딱한 금속에서 부드러운 물소리라니 처음에는 기가 막히더라. 그런데 해보니까 그게 또 됐다. 진동으로 떨리는 쇠판으로 채가 들락날락하면서 희한하게 조화를 이뤘다. 그 경지를 보면 그때부터 말 그대로 환장하게 된다.꽹과리 가락의 맛을 내는 기운을 얻기 위해 일부러 찾아다니던 풍경이 있다. 태풍이 불면 바다의 들끓는 기운을 보러 갔다. 바람 많은 날 대나무밭은 일렁이는 불꽃 같다. 비학산에서의 일출도 잊을 수 없다. 막걸리가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날 커피를 마시면서 해 뜨기를 기다리는데 들판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해가 보였다. 그 후로 ‘칠채 장단(일곱 번 친다고 해서 이름 붙은 홀수 박. 끝날 듯 멈추지 않는 역동성이 특징)’을 칠 때마다 그 장면을 떠올린다. 풍물 잘하는 친구가 내가 칠채 장단을 치면 ‘맛있다’고 하더라. 풍물의 어떤 경지에 이룬 연주자들을 보면 소리의 기운이 덩어리로 천장에 모인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고 미쳐야 미친다고 하지 않나. 시는 아직 꽹과리만큼 몰입하지 못했지만, 꽹과리를 친 것이 감수성 훈련에 도움이 됐다.-35년 동안 몸담은 한터울이 ‘맏뫼골 놀이마당’에서 ‘아트플랫폼’으로 바뀐 것은 어떤 변화의 반영인가.△사물놀이와 풍물놀이 단체에서 공연 창작과 기획, 교육 콘텐츠를 연구·개발·보급하는 단체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지역 예술가들이 단순한 기능 전수가 아닌 자신의 언어를 발산하는 예술가로 자각하는 계기를 만들고 싶었다. 젊은 예술가들이 포항에 뿌리내리고 활동할 수 있는 일자리도 필요했다. 4년 전에 사회적 기업을 만든 것은 그런 고민의 결과이다.-지금까지 개발한 교육 콘텐츠를 소개한다면.△흥부전의 제비노정기를 조류 보호를 위한 창극으로 재창조한 ‘지지배배(知知拜拜)’는 아이들과 새로운 버전의 판소리 한 대목을 나누며 생태를 고민하는 교육 콘텐츠이다. 강치전을 바탕으로 만든 교육 프로그램 ‘바다가 그랬어’는 올해만 30곳에서 운영한 효자 프로그램이다. 토속민요극 ‘남의 눈에 꽃이 되고’처럼 어르신을 대상으로 한 콘텐츠도 있다.-한터울에서 기획하고 제작한 국악 가족뮤지컬 ‘강치전’이 전국 순회공연을 하고 있다. 지역의 정체성과 문화적 가치를 담은 콘텐츠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평가받는다.△포항의 예술가들이 오디션을 봐서 작품에 참여하고 그 작품이 전국에 초청받아 공연하러 다니고 있다. 한 공무원이 예술은 돈을 쓰는 분야인지 알았는데 벌어오기도 하구나, 말하더라. 코로나로 어려움은 있었지만 꾸준하게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단순히 1회 공연이 아닌 예술성을 인정받은 작품으로 활동폭을 넓히면서 다듬어 나갈 계획이다.-지금 구상하는 작품이 있나.△독도 강치 다음 타자로 고래가 등판을 준비하고 있다. 살아있는 동안 나무 천 그루의 탄소를 포집하는 고래는 죽어서도 바다를 지킨다. 해양 깊숙이 서서히 가라앉으면서 수많은 바다 생물들의 먹이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해양생물 보호종 고래는 죽어서 항구에 들어오면 매립장에 묻는다. 그 장면을 사진으로 보면서 울컥했다. 쓰레기처럼 매립할 것이 아니라 먼바다로 돌려보내 주어야 한다. 자기 몸을 나눠 바다가 풍성해지는 ‘고래 낙하’를 담은 ‘WHALEFALL(웨일 폴)’을 준비 중이다. 이번에는 대본을 직접 썼고 여러 번 수정을 거쳐 탈고한 지 얼마 안 됐다. 오는 11월쯤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앞으로의 계획은.△‘강치전’이나 ‘WHALEFALL’ 같은 지역 예술가들의 창작 작품을 전국으로 유통하는 기획사도 만들고 싶고 전용 극장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개인적으로는 대본 작가의 능력도 제대로 갖추고 싶다. 주변에서 더러 나이도 있는데 일을 조금씩 내려놓지 뭘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고 한다. 이제 겨우 시인이 되었고 그걸 써야 겨우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으니 어떻게 포기하겠나. 문학이라는 숲으로 들어섰으니, 시라는 나무가 되어서 걸어 나와 봐야지, 안 그런가? 이원만 대표는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포항에서 30여 년 꽹과리를 치며 살았다. 포항의 젊은 예술가들과 사회적 기업 (주)아트플랫폼 한터울에서 기후 혼란과 공생하는 인간, 생태적 감수성 등을 담은 뮤지컬을 제작하고 문화예술교육콘텐츠를 개발해 보급한다. 5년 차를 맞는 ‘강치전’은 2020년~2023년 4년 연속 국공립예술단체 우수공연 프로그램으로 선정됐다.계간 문학나무 2023년 여름호 시 부문 신인상으로 당선되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심사를 맡은 박덕규 시인은 다음과 같이 평을 했다. 오래 연마한 흔적이 역력하지만 타성에 젖지 않았으며 ‘새로우려고 애쓴 흔적’조차 내지 않으려는 긴장이 있다./배은정 작가

2023-07-17

“구민이 행복한 함께하는 중구”

“구민이 행복한 함께하는 중구를 만들겠습니다.”민선 8기 1주년을 맞이한 류규하 대구 중구청장이 ‘새롭게 도약하는 행복도시 중구 건설’을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류 구청장은 중구가 도시재생사업과 대규모 재개발·재건축사업 추진으로 지난해 12월 인구 8만 명을 회복한 점과 오는 2024년까지 준공을 앞둔 공동주택 만여 세대의 입주가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2025년 말 정주인구가 10만 명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그는 이러한 인구유입에 발맞춰 구민이 행복한 중구를 만들려고 무엇보다도 구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다양한 복지 인프라 구축에 힘쓰고 있다.현재 중구는 쾌적하고 살기 좋은 환경 조성을 위해 구립도서관, 복지누리반다비 체육센터 건립 사업을 진행 중이며, 마을단위 공영주차장 확충과 대단지 아파트 일원 노후화된 행정복지센터 신축도 준비하고 있다.또 국가보훈대상자의 위상 제고와 자긍심 고취를 위해 보훈회관 건립도 추진하고 있다. 3개소로 분산운영되고 있는 보훈단체를 모두 수용할 수 있는 보훈회관 건립을 통해 국가보훈대상자의 공훈과 나라사랑 정신을 선양코자 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역량을 모으고 있다.코로나19 이후 무너진 동성로 상권에 대해서도 그는 고심이 많다. 유통환경의 변화 등으로 유동 인구가 감소했고, 상가 일대에서 공실률이 늘어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이에 중구는 침체한 상권의 재도약을 위해 중소벤처기업부 주관 ‘상권활성화 사업대상지 모집공고’에 응모해 동성로만의 거점공간 조성과 디지털 상권환경 조성, 점포 내 스마트 기술 도입 등의 사업을 추진해 옛 명성을 회복한다는 방침이다.향후 중구의 관광사업에 대한 생각도 들을 수 있었다. 중구에는 김광석길, 근대골목, 서문시장 등 대구를 대표하는 관광지가 몰려 있기 때문이다.이와 관련, 중구는 근대골목 밤마실, 김광석길 다른그림찾기 등 관광객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특별히 올해 3월부터 골목투어와 쓰레기를 수거하는 자원봉사‘플로깅’을 접목한 ‘쓰담투어’를 운영해 전국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지난해에는 동성로 야외무대를 미디어아트형 ‘동성로 28, 아트스퀘어’로 새롭게 단장해 동성로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조성한 바 있다.또한,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 2020년부터 ‘동성로 스마트쇼핑관광-DDS’를 구축해 운영 중에 있으며, 이 프로그램 중 DDS는 다국어로 돼 있고, AR도보네비게이션, 텍스리펀계산기, 패키지 상품 등을 포함하고 있다. 올해는 재한외국인을 대상으로 프로모션행사를 추진하고, 언어교환 플랫폼을 활용해 외국인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홍보한다는 계획이다.아울러 역사문화자산의 보존과 복원을 통한 관광 인프라 구축을 위해 영남제일관이 위치했던 남성로에 대구읍성영상관을, 경상감영공원에 버츄얼체험존을 조성하고 있으며, 약령시 구 에코한방웰빙체험관에 천재화가 故이인성 화백의 작품을 활용한 전시체험공간을 조성해 지역문화예술자원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애국선열의 숭고한 정신을 기억할 수 있는 대구형무소 역사관도 삼덕교회 60주년 기념관 2층에 건립할 예정이다.더불어 김광석길 콘서트홀 내 미디어플랫폼을 구축하고, 김광석길 벽화대전 개최로 더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해 관광객을 유입을 통한 주변상권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한다.류규하 중구청장은 “민선 7기부터 이어오던 사업들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중구의 발전과 미래를 위해 새롭게 추진한 사업들이 이제 결실을 맺기 시작하고 있다. 구민과의 소통이 무엇보다 구정을 이끌어가는 기본이자 원동력이라고 생각하며, 구정에 건의하고 싶은 사항이 있으시면 언제든 전화, 홈페이지, 또는 방문을 통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말씀해 주시기 바란다”며 “올해 여름은 유난히 덥고 강수량이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건강 유의하시고 혹시 모를 자연 재난에 미리 대비해 소중한 재산과 인명 피해가 없도록 해 주시길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김재욱기자 kimjw@kbmaeil.com

2023-07-16

“차별화된 유일한 수성구 조성”

“차별화된 유일한 수성구를 만들겠습니다.”민선 8기 1주년을 맞이한 김대권 대구 수성구청장이 향후 수성구의 중점추진 중인 사업과 정책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김 구청장은 평소 인구축소와 기후변화라는 시대과제에 선제로 대응하고, 특색있는 도시공간과 건축 디자인이 도시의 가치를 더하는 ‘차별화된 유일한 수성구’를 만들겠다는 비전을 품고 행정에 집중하고 있다. 이에 수성구가 사람을 끌어들이는 구만의 차별화된 콘텐츠를 갖춰 집객자원을 확보하고, 자연과 인간의 관계성을 새롭게 정립해 기후 위기 대응의 변곡점에 대처할 수 있도록 시대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마음가짐이다.특히 수성구의 가장 강력한 경쟁력을 ‘교육’으로 생각하는 만큼, 다양한 형태의 교육사업을 진행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는 지역에 분포하는 교육 수요자의 선택권을 넓히기 위함이다.수성구는 현재 국제학교 설립과 교육자유특구 지정을 추진하는 한편, 대구스타디움 미래교육관 건립, 미래교육재단 운영을 통해 자신의 꿈과 미래를 설계하는 창의적 인재를 양성하고자 역량을 모으고 있다.또 김 구청장은 수성구가 국제적인 도시로 변모하기 위해서는 외부인들의 시선을 끄는 랜드마크와 월드클래스의 문화콘텐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이와 관련, 수성못 수상공연장과 수성브리지, 생각을 담는 길 거점지역에 유명 건축·조경가들의 설계로 예술성을 더한 오브제와 건축물을 조성하는 ‘수성국제비엔날레’를 추진해 건축이 예술이 되는 특색있는 명소로 만들어 갈 예정이다.아울러 한옥에 세계적인 조경을 가미한 고산전통문화교육관과 한옥촌, 대구미술관과 간송미술관, 사립미술관을 연계한 미술관 클러스터를 조성해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매력적인 콘텐츠를 만들고, 들안예술마을 공공예술 창작촌 공예사업과 수성구 캐릭터 ‘뚜비’를 연계한 굿즈 제작으로 골목상권을 활성화할 방침이다.이와 함께 망월지 두꺼비 생태교육관 건립과 생태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다음 세대의 환경 감수성도 키운다.이러한 사람이 모이는 경제구조를 만들어가려면 미래교통을 선점해야 한다는 점도 분명히 밝혔다.김 구청장은 “5군지사 이전 후적지 UAM 버티포트 조성과 수성못∼용지봉 헬리패드 간 UAM 운송서비스 시범 운영, 대구권 광역철도·도시철도 3호선 등과 연계한 복합환승센터 건립을 추진해 미래교통의 중심지로 도약하겠다”고 말했다.또한, 해외 자매·우호도시교류를 활성화하고자 ‘교류협력단’을 신설해 알파시티 입주기업과 문화예술인의 해외 진출을 통해 교육·문화·경제적 글로벌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고, 대구시와 과기부가 중점 추진하고 있는 ABB산업을 핵심으로 수성알파시티를 ‘제2의 판교’로 발전시켜 미래 디지털혁신 중심도시로 거듭나겠다는 목표도 설정했다.이 밖에도 그는 △도시 공간 내 건축, 조경 및 다양한 구조물과 행정서비스 등 수성구만의 독자적인 파이프라인을 프리미엄급으로 형성할 수 있는 기반 구축 △‘아동이 행복한 도시, 수성구’의 이미지 구축 △해외도시와의 활발한 교류를 통한 수성구의 미래 도약 등을 중점 추진 사업으로 꼽았다.김대권 수성구청장은 “우리 수성구는 수성구만의 도시 이미지를 더욱 확립하고, 다양성을 갖춘 도시 공간을 열어 미래 가치를 선도하고 지역 스스로 창조역량을 강화하는 등 ‘차별화된 유일한 수성구’ 그 속에서 주민들의 가치를 높이고 수성구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는 수성구라는 도시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최우선 목표”라며 “커뮤니티센터, 생활문화센터, 공공도서관을 확충하고 추진 중인 수성행복드림센터, 제2구민운동장, 팔현정구장 등 각종 생활체육시설 조성을 차질없이 추진해 주민 생활에 활력을 더하고, 수성구형 종합사회복지관 모델 개발과 공백없는 생애주기별 돌봄 체계 구축을 통해 함께 누리고 희망을 나누는 수성구를 만들어 가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김재욱기자 kimjw@kbmaeil.com

2023-07-16

“아이들이 허기져 쓰러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효성여대 약학과에 입학한 권순남은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과외, 입주 가정교사, 공장 노동자 등 가리지 않고 일했다. 하지만 학비와 생활비를 혼자 감당하기엔 힘겨워 결국 졸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권순남 선생의 결혼 이후 사회활동에 대해 들어보았다.최미경(최) : 자녀는 몇 명을 두셨는지요?권순남(권) : 딸만 둘이야. 당시 풍조가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키우자’였는데 남편이 새마을지도자회 회장이어서 정부 말을 참 잘 들었던 것 같아. 최 : 1970년대는 ‘새마을’을 많이 붙였지요?권 : 그랬지. 새마을어머니회, 새마을부녀회처럼 ‘새마을’을 붙이는 게 혁신이라 믿었던 것 같아.권순남 선생은 예절과 도의를 강조한 아버지에게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결혼한 후에는 아이를 잘 키우고 내조를 잘하면 된다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기에 사회활동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고 한다.최 : 사회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말씀해주세요.권 : 큰애가 영흥초등학교 2학년 때였어. 몇 번이고 어머니회에 나오라고 했는데, 시부모님이 싫어하셔서 미루다가 큰애의 학교생활이 궁금해 처음으로 나갔지. 회의를 진행하던 중 회비를 20~30원 정도 걷는다길래 회비의 용도를 물었더니 학교 선생님들을 위해 쓴다고 하더군. 내가 그 자리에서 박봉의 선생님들을 위해 쓰는 것도 좋지만 어머니회에서 걷는 회비는 아이들을 위해 쓰는 게 낫지 않겠냐고 의견을 내놓았지.최 : 처음 어머니회에 가서 그런 발언을 하셨다니 눈총을 받지는 않으셨나요?권 : 당시에 그런 얘기를 꺼내는 건 일반적이지 않았을 거야. 게다가 영흥초등학교는 학부모의 교육 수준이 다른 학교에 비해 낮은 편이었어. 해도는 원래 섬이었는데 진펄을 메워 거주지가 만들어졌지. 그곳에서 ‘반티(함지 그릇을 일컫는 경상도 사투리)’ 장사를 많이 했어. 생계에 급급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거든. 내 눈에는 그런 것만 보였지. 이런 내가 어머니회에 처음 가서 던진 말에 좋게 보는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을 거야. 하지만 아이들을 위한 일인데 그냥 넘어갈 수 없었지. 어느 날인가, 학교에 다녀온 큰애의 운동화가 엉망이었어. 깨끗하게 신고 간 운동화가 엉망이 되었기에 어디 가서 놀다가 왔냐며 종아리를 쳤지. 그런데 학교에 가보니 운동장에 물이 빠지지 않았어. 비가 그친 지 이틀이 지나도 학교 운동장이 마르지 않았던 거야. 시어른에게 물어보니 염전 위에 세운 학교라 배수 처리가 되지 않을 거라고 했지. 이런 교육 환경은 개선해야 한다는 생각에 영흥초등학교 어머니회 회장과 시청 담당자를 찾아갔어.최 : 공무원 반응이 어땠나요?권 : 시청 담당 공무원은 자기 관할이 아니라며 교육청에 가라고 하고, 교육청에 가니 예산이 없다고 하더군.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남편에게 말했지. 남편이 영흥초등학교 체육진흥회장을 맡고 있던 터라 새마을운동 차원에서 하천으로 물이 내려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어. 임시방편으로 아이들이 들어가고 나가는 학교 입구 쪽만 우선 조치했지.최 : 당시 여성들의 사회활동은 교육 현장에서 주로 이루어졌던 것 같습니다.권 : 큰애가 3학년 때 학교 어머니회 회장을 맡았어. 이제는 내 아이디어로 뭔가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학교 운동장을 뒤집어 자갈을 깔고 숯과 모래를 그 위에 올리면 삼투압에 의해 물이 빠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데 이걸 도와줄 일손이 부족했어. 여기저기 알아보니 오천에 있는 해병대 공병부대를 부르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어. 곧바로 해병대 사단장 부인을 만나러 갔지. 부인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자 사단장을 만나면 물어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하더군.그날 밤 권순남 선생은 사단장 부인에게 전화를 받았다. 다음 날 계획서를 들고 찾아오라는 연락이었다. 권순남 선생은 밤새 한숨 못 자고 학창 시절 과학 시간에 배웠던 것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다음 날 사단장에게 영흥초등학교 운동장 복토 공사를 해야 하는 이유를 차분히 설명했다.권 : 사단장을 만나고 나오면서 맨 먼저 떠오른 것이 상대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어. 첫 번째 감동 포인트는 전교생 위문편지 쓰기였지. 여학생은 오빠라고 시작하고, 남학생은 형님이라고 시작하는 위문편지를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두 쓰게 했어. 그리고 어머니회를 중심으로 치약, 칫솔, 비누, 타올 등을 모았어. 마지막으로 위문 공연을 준비했지. 이렇게 준비된 것을 갖고 해병대로 찾아가 장병들을 앞에서 3부에 걸친 위문 공연을 진행했어. 1부에서는 남학생 둘, 여학생 둘이 편지를 읽은 후 장병들에게 전달했고, 2부에서는 학생들이 리코더를 불고 노래도 하고 고적대가 준비한 위문 공연을 했어. 붕대를 감고 있던 상이용사들이 어린 학생들의 노래와 공연을 보며 눈물을 흘리더군. 그리고 3부에서 위문품을 전달했지. 이 모든 과정이 해병대 사령관을 비롯한 장병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마침내 운동장 복토 공사 승낙이 떨어졌어.그해 여름방학 한 달 동안 해병대 공병부대에서 트럭 3대가 매일 아침 영흥초등학교로 왔다. 각 트럭마다 20명씩 탑승했으니 매일 군인들 60명이 영흥초등학교에서 종일 땀 흘리며 공사를 진행했다. 권순남 선생은 어머니회를 소집해 간식 조를 짰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6일간 6조, 한 조에 5명씩 임원을 배치해 장병들이 간식을 먹으며 일할 수 있도록 도왔다.권 : 그때는 사람들이 순수하고 헌신적이었어. 여름방학 내내 해병대 장병들도 어머니회도 애를 참 많이 썼지. 그렇게 운동장이 개선되니 신이 나고 재미있었어. 그래서 어머니회가 더 활성화된 것 같아. 이 밖에 권순남 선생은 학부모들과 도서 모으기 캠페인을 전개해 학교 안에 작은 도서관을 만들었고 고적대도 만들어 지원했다.최 : 영흥초등학교 고적대가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다고 들었습니다.권 : 음악을 전공한 한영대 교사가 영흥초등학교로 온 것을 알게 되었어. 우리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자며 한영대 교사와 의기투합했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영흥초등학교 고적대였어. 악기 살 돈이 없어 군악대의 오래된 악기를 가져오고, 동지상고·포항수고 악대부에 고장 나거나 못 쓰는 악기도 가져왔지. 어느 늦은 밤 학교에 갔는데, 한 교실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어. 한영대 교사가 집에 가지도 않고 헌 북을 고치고 있더군. 교사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가만있을 수 없었어. 대회를 앞두고 고적대 아이들의 유니폼을 제작하려고 모금을 했지. 영흥초등학교 고적대는 처음 출전한 대회에서 경상북도 우수상을 받았고, 그다음 해 대통령 표창을 받았어.최 : 결식 학생들을 돕는 절미(節米) 운동도 진행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시작하셨나요?권 : 한번은 학교에서 식목 행사를 한다고 해서 어머니회에서 30명 정도 나무를 구입해 학교에 갔지. 조회 시간이었는데 아이들이 운동장에 픽픽 쓰러졌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사정을 알아보니 아침밥을 못 먹은 아이들이 허기를 못 견디고 쓰러진 거였어. 한 반에 50명 넘는 아이들의 가정실태조사를 교사가 일일이 할 수 없었기에 아이들이 어떤 환경에서 학교에 다니는지 알 수 없었지. 그래서 어머니회에서 아이들의 주거환경을 살펴보기로 했어. 초가집이나 양철집에 사는 아이도 있었고, 텐트를 치고 사는 아이도 있었어. 텐트 안에 들어가니 흙바닥에 나무 판때기를 놓고서 석유곤로로 밥을 해먹고 가마니때기를 깔고 잠을 잤어. 그런 가정이 예닐곱 군데였어. 그중 팔이 없거나 다리가 없는 상이용사 집이 네 군데였고, 어머니가 가출하는 바람에 아버지가 품팔이해서 겨우 먹고사는 가정이 세 곳이었지. 참담한 상황이었어.권순남 선생은 그들을 도우려 일주일간 고민하다 신주머니 100개를 만들어 어머니회에 나누어주었다. 세끼 밥을 안칠 때마다, 쌀 한 숟가락을 덜어 그 신주머니에 넣어달라고 했다. 그렇게 한 달간 모은 신주머니 100개를 자루에 담으니 열두 자루가 나왔다.권 : 어머니회 임원들을 불러서 쌀자루를 하나씩 주고 저학년부터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을 찾아가 전해주라고 했어. 그렇게 쌀자루를 들고 간 임원들은 돌아올 때면 눈이 퉁퉁 부어 있었지. 허기져서 아이들이 쓰러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3년 동안 절미 운동을 했어. 권순남 선생은 자녀들이 중학교에 진학할 즈음 시어른이 하던 직물 사업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그 사업을 할 때도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을 지원하고, 고아원·양로원·장애인 시설의 후원을 지속적으로 했다.최 : 남편의 이해 없이는 사회활동을 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잖아요. 부군께서는 선생님의 활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나요?권 : 남편은 건축을 전공했어. 시어른이 사업을 물려받으라고 하자 장사는 싫다며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 그래서 내가 그 사업을 받았어. 그이는 포항JC에서 임원을 하며 봉사활동을 했어. 봉사에 대한 가치관이 나와 비슷해. 내가 하는 일을 믿고 응원해주었지.권순남1939년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 포항으로 왔다. 포항초등학교, 포항여중·고를 졸업하고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약학과에 입학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퇴했다. 1957년부터 봉사활동을 시작해 지금까지 자원봉사를 삶의 전부로 여기며 실천했다. 포항JC 부인회를 통해 장애재활사업 후원, 양로원 지원, 소년소녀가장 지원 등을 해왔다. 1996년 포항시자원봉사센터 소장, 2003년 한국자원봉사센터협회 회장을 맡아 지방자치단체별 자원봉사센터 설립과 운영의 효율성, 전문성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자원봉사활동기본법 제정에도 앞장섰다.대담·정리 : 최미경(시인) / 사진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제공 : 권순남

2023-07-16

누구나 살고 싶은 ‘풍요로운 행복 도시 봉화’ 토대 마련

박현국 봉화군수는 민선 8기 군정 목표를 ‘군민이 주인인 희망찬 봉화’로 정하고, 지난 1년 동안 ‘군민 소득 1조 원 시대’ 실현을 위해 숨 가쁘게 달려왔다.또, 인구감소와 지역소멸 위기에 맞서 봉화를 되살려 주길 바라는 군민의 간절한 염원을 이루기 위해 지역 활성화를 통한 누구나 살고 싶은 풍요로운 고장 만들기에 최선을 다해왔다고 밝혔다.먼저, 행정환경 변화에 능동적이고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행정조직을 정비하고 공직사회에 공정과 상식, 신뢰와 공감의 청렴문화를 불어 넣는 데 힘썼다.봉화의 곳곳을 누비며 군민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지역 현안 해결이라면 국회, 중앙부처, 도를 비롯한 관련 기관을 찾아 사업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했다.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본예산 기준 최초 군예산 5천억 원 시대를 열었다. 아울러, 풍수해생활권 종합정비사업, 농어촌 취약지역 생활여건개조사업 등 20여 개의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총 593억 원의 사업비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박현국 봉화군수는 “군민이 주인인 희망찬 봉화 건설을 위해 군민과 소통하고 공감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다”면서 “양수발전소 유치, 베트남마을 조성 등 아직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아 있기에 소멸 위기 봉화의 ‘제2의 도약’을 위해 더 열심히 뛰겠다”고 말했다. □ 미래형 영농기반 구축으로 부자 농업인 육성박현국 봉화군수가 이끄는 민선 8기 봉화군정은 군의 근간인 농업정책에 최우선 가치를 두고 농업의 경쟁력 강화와 지속 가능한 농업 생태계 구축을 위해 힘썼다.기후변화에 대응해 봉화 임대형 스마트팜 단지 조성사업을 추진해 안정적인 농가소득 향상을 도모하고 있다.이를 통해 영농을 희망하는 청년과 기존 농업인들에게 임대함으로써 일손이 적게 들고, 소득은 높은, 디지털 농업기술을 널리 확산시킬 계획이다.또한 농산물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6차산업 창업지원과 기후변화에 대응한 신소득 작목 발굴, 농업환경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정예농업인 육성에도 앞장서고 있다.이와 더불어 고질적인 농촌 일손 부족 해결을 위해 외국인 근로자 적기 도입을 추진했으며, 농업인 권익향상을 위한 다목적 농업인교육관 신축, 안정적인 판로개척과 농산물종합산지유통센터 활성화, 봉화군 농산물 브랜드 가치 제고 등 부자 농촌 구현을 위해서도 적극 노력하고 있다.□ 풍부한 산림자원을 활용한 임산업 육성군 면적의 83%가 산림인 봉화군은 산림의 공익적·경제적 가치 증진을 위해 올해 1천273ha 규모의 조림사업과 숲가꾸기 사업을 추진해 지속가능한 산림경영을 위해 힘쓰고 있다.지역 임가의 경쟁력 강화와 임산물의 고부가가치 창출을 위해 12억 원 규모의 임산물 재배단지 및 생산기반 시설을 지원했으며, 임산물 산지종합유통센터 조성을 통해 임업인의 안정적 경영기반 구축을 도모했다.2024년 개장을 목표로 조성 중인 문수산 산림복지단지는 지역을 찾는 방문객에게 숲과 자연에 머물러 갈 수 있는 산림휴양 치유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숲속도시 봉화의 기틀을 다지는 데 한몫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또한, 국책사업인 문화재수리재료센터는 현재 공정률 38%로 연내 준공을 목표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며, 국립봉화양묘기술체험교육관 건립은 실시설계를 완료하고 곧 착공할 예정이다.아울러, 경북도와 봉화 바이오메디 U시티 업무협약을 체결함으로써 산림기반 바이오메디 연구를 통한 기업과 대학 캠퍼스 유치를 통해 봉화에서 좋은 일자리를 가질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지역 청년들이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발판을 조성했다.□ 글로컬(glocal) 관광자원 확충으로 오감만족 봉화 구현봉화군은 관광산업을 농림산업과 더불어 지역경제를 이끄는 양대 축으로 육성하고 있다. 베트남 국가주석 면담과 뜨선시와 우호 강화 협약체결, 덴도 축제 공식 방문으로 한-베 교류 선도도시의 입지를 다진 봉화군은 베트남마을 조성사업의 국가 정책화를 위해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또한 분천산타마을의 국제적 명소화를 위해 관광콘텐츠를 대폭 강화하고, 노루재 구국도를 활용한 루지체험장 조성, 명호 범바위 전망대 구축, 백두대간 힐링 펫빌리지 조성 등을 통해 관광객의 오감을 만족시킬 수 있는 다채로운 관광자원 확충에도 노력하고 있다.아울러 지난해 대한민국축제콘텐츠대상 축제관광부문 대상을 수상한 봉화은어축제는 코로나19 종식 이후 폭증하는 관광수요에 발맞춰 올해는 더욱 신나고, 화려한 라인업으로 관광객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이외에 봉화송이축제, 분천산타마을 축제 등도 다채로운 구성으로 지역의 문화·관광 산업에 힘을 보탤 것이다.□ 적극적인 인구정책으로 지방소멸 위기 극복봉화군은 민선 8기 최우선 과제로 인구감소 및 지방소멸 위기 극복에 두고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 먼저 인구전략과를 신설해 인구정책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하게 하는 등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또한 도시민 유치 기반 조성을 위해 경북형 작은정원 조성, 두 지역 살기 기반 조성, 신규 모듈러 주택단지 조성, 빈집 리모델링 사업을 비롯한 4개지구 신규 전원주택단지 조성사업도 순조롭게 진행하고 있다.지역에 살면서 전입신고를 하지 않은 주민을 찾아 주소 이전을 유도하는 봉화사랑 주소갖기 운동도 지난해부터 꾸준히 진행해 온 결과 인구 감소 추세가 완화되는 효과를 거뒀다.전입축하금 지원, 전입 청년 주택임차료 지원, 가업승계농 정착지원 등 인구 증가를 위한 다양한 시책 마련 및 추진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더불어 사는 따뜻한 행복도시 조성품격있는 맞춤 복지 실현으로 군민의 복지수준을 한단계 높이고 있다. 민선 8기 공약사업인 치매전담형 노인요양시설 확충을 통해 공공의료서비스의 질을 높이고, 사회서비스형 어르신 일자리 확대로 취약계층의 근로 기회를 제공해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고 있다.또한, 아이키우기 좋은 환경 조성을 위해 석포면 국공립어린이집 신축, 모두의 놀이터 조성, 키즈카페 및 놀이시설 건립을 비롯한 유니세프 아동친화도시 인증 획득을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골고루 잘사는 균형발전 실현쇠락하고 침체된 도심에 활력을 불어넣을 봉화와 춘양의 도시재생사업들은 사전 행정 절차를 밟으며 순조롭게 진행 중이며, 군민의 오랜 숙원사업인 내성지구 도시개발사업은 첫 삽을 뜬 이후 하루가 다르게 봉화를 변화시키고 있다.또한 농촌지역 주민의 소득과 기초생활수준을 높이고, 농촌 편의 증진을 위한 농촌중심지활성화사업, 기초생활거점사업 등을 통해 누구나 살고 싶은 새로운 농촌을 만들어가고 있다.도시발전의 기본이 되는 교통망 확충을 위해 중부권 동·서횡단철도 조기건설과 남북9축 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국지도 88호선 선형개량과 지방도 915·918호선 확포장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민선 8기 1년, 군민이 주인인 희망찬 봉화 건설의 초석을 다진 박현국 군수는 앞으로 남은 임기 동안 군민들과 같은 생각, 같은 마음으로 군정에 새바람을 불어넣겠다는 각오를 밝혔다.1조 원 규모 국책사업인 양수발전소 유치, 봉화 베트남마을 조성사업 국가정책화 추진 등 봉화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사업들을 비롯해 그동안 구상하고 준비했던 계획들을 하나씩 차근차근 실천해 ‘보다 나은 봉화, 내일이 있는 봉화’로 만들겠다는 계획이다./박종화기자 pjh4500@kbmaeil.com

2023-07-13

압독국∼조선시대 역사·자연 등 다양한 관광자원 보유

경산은 고대의 압독국이 자리 잡은 곳으로 일찍부터 고대인들의 생활문화 공간이었다.이를 뒷받침하는 임당·조영동 고분군 등의 각종 고분군과 대승불교를 전파한 원효(元曉, 617~686)와 이두를 풀이한 설총(薛摠, 655~?),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一然, 1206~1289) 등이 태어난 고장이다.경산시는 자연 자원과 문화재, 역사자원 등 다양한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경산자인단오제를 비롯한 압독국에서 조선 시대까지의 문화를 보여주는 요소들이 많다.경산의 문화와 관광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 경산의 문화경산의 문화를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쉽지 않다.고대 압독국에서 현대까지, 농경사회에서 중소기업도시로 변모하며 문화적인 부침도 겪었지만 압독국이 지역 문화중심에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이 시기에 조성되었던 임당·조영동의 고분군을 비롯해 부적리, 신상리, 대동, 소월리 등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고분군에서 지금까지 봉분형태의 20기의 봉분 중 15기가 발굴돼 출토유물도 1만여점으로 방대하다.특히 고총·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금동관식, 은제허리띠, 고리자루칼(環頭大刀) 등 최고 지도자를 상징하는 유물들은 압독국의 실체와 당시 문화예술을 규명하는 결정적인 자료다.고분 중 출토된 유물들을 봤을 때 왕이나 왕비의 무덤으로 추측은 가지만 확실하지 않으면 고총이라 한다.경산 문화의 또 하나의 흐름은 원효와 설총, 일연 등으로 지역에서는 이들을 삼성현(三聖賢)으로 추앙하며 그 덕을 기리고 있다.원효는 귀족불교를 민중 불교로 바꾸고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불교를 하나의 진리로 두어 조화를 이루고자 했으며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다.충렬왕 때인 1283년 국존(國尊)에 올랐고 승려였음에도 효성이 지극해 어머니가 계신 경산지역과 가까운 곳에 머물렀다 한다.이들은 우리나라의 문화적 역량을 한층 심화시키고 현재까지도 그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조선 시대 유교문화의 흔적은 경산향교와 자인향교, 하양향교, 금호서원과 조곡서원, 관란서원 등에서 찾을 수 있다.경산의 문화 중 가장 시민들과 가까운 것이 경산자인단오제다,신라 또는 고려 시대의 사람이라 전해지는 한 장군이 도천산에 자리 잡고 자인지역의 백성을 괴롭히는 왜인들을 도천산 밑 버들 못에서 여자로 변장해 누이동생과 함께 화관을 쓰고 춤을 추어 유인한 왜인들을 섬멸했다.그 후 자인지역에서는 한 장군을 모시는 사당이 생기고 해마다 단오절에 가장행렬을 벌이고 여원무(女圓舞제)를 추며 제사를 지내는 한장군놀이가 자리 잡았다.한장군놀이는 1969년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받고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고 2007년 경산자인단오제로 명칭이 변경됐다.경산자인단오제는 한때 강릉단오제와 함께 단오제의 양대 산맥을 이루기도 했지만, 세월이 흐르며 명맥을 유지하기에 급급한 현실이다.현재의 경산자인단오제는 한묘제사와 여원무, 자인팔광대, 계정 들소리, 호장굿(가장행렬), 큰 굿 등이 시연되고 있으나 여원무와 계정들 소리는 참가자의 수가 줄어들고 시연자의 나이가 고령화되고 있어 개선책을 찾는 것이 급선무다.경산의 문화예술은 1962년 설립된 경산문화원이 문화조사연구사업과 지역 축제개발과 육성, 전통문화와 현대문화의 접목, 자원봉사단 운영, 생활문화와 지역사회문화발전을 위한 문화 활동 등을 주도하다 2007년 경산시립합창단이, 2017년 경산시립극단, 2020년 경산시교향악단 등을 창단해 시민들의 문화 욕구를 조금이나마 해결하고 있지만, 아직 인근 대도시인 대구의 문화권에 묶인 형상이다.경산시의 문화예술은 2024년 10월에 발족할 문화관광재단과 민간공원 특례사업으로 진행되고 있는 상방근린공원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면 시민들의 숙원사업인 문화예술회관이 문을 열어 괄목할 성장을 이룰 것으로 기대된다. □ 경산의 관광자원과 현실경산은 자연 자원과 문화재, 기타 문화·역사자원 등 다양한 관광자원은 많으나 수익 창출과 지역을 알리는 큰 효과를 기대하지 못하고 있다.지역의 대표적인 관광상품은 팔공산 관봉 석조여래좌상(갓바위, 보물 제431호)과 사진찍기 명소 반곡지,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 경산자인단오제, 경산의 삽살개(천연기념물), 대구가톨릭대 스토로마톨라이트(천연기념물), 삼성현역사문화공원, 용산산성 등 다양한 국가지정문화재와 천연기념물, 국가무형문화재 등이 있으나 관람 위주로 숙박과 함께 즐기는 관광상품으로는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지역을 알리는 관광상품으로 첫 손에 꽂히는 팔공산 관봉 갓바위는 통일 신라 시대 불상으로 정성껏 소원을 빌면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고 알려져 불교의 3대 기도 도량의 하나로 기도 객이 끊이지 않고 있다.특히 그 자리에 있던 바위를 깎아서 환조(丸彫) 기법으로 조성한 특징에 5.48m의 석조여래좌상이 머리 윗부분에 갓 모양의 모자가 얹혀 갓바위 불상이라고도 한다.하지만, 팔공산이 대구의 명소로 알려지며 관봉은 경산의 행정구역임에도 많은 사람이 갓바위를 대구의 명소로 알고 있어 경산시는 이를 타파하고자 갓바위축제를 1998년부터 열고 있으나 큰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1903년에 축조돼 300년 이상의 버드나무가 물에 반영되는 그림자와 어우러져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사진 찍기 좋은 녹색 명소로 선정된 반곡지는 2013년 안전행정부의 ‘우리 마을 향토자원 Best 30선’에 선정되고 이러한 이유로 전국 사진촬영대회, 드라마와 영화 촬영장소가 되기도 했다.‘경산의 삽살개’로 199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경산의 삽살개가 아닌 삽살개로 불리고 지역에서도 경산의 삽살개가 아닌 삽살개로 불리고 있어 관련기관의 주의가 필요하다.삽살개(삽사리)라는 이름은 귀신이나 액운을 쫓는 뜻을 순수한 우리 말로 긴 털로 해학적 면모를 보여 가사와 민담, 그림 가운데 자주 등장하며 주인에게는 충직하나 다른 동물에게는 대담하고 용맹스럽다.서민의 개로 오랜 세월 우리 민족과 더불어 애환을 같이했다.삼국 시대 산성인 용산산성은 삼한 시대에 어깨에 날개가 달린 아기 장사가 동해로부터 침략하는 왜구를 막아내고자 축성한 성이라는 전설이 전해지며 용성면 용산리 용산에 있다.용산산성은 용성면과 자인면, 진량읍, 하양읍까지 관찰할 수 있는 요새로 청도군과 경주시를 잇는 길목으로 현재 남아 있는 성의 총 둘레는 1.4km 정도이며 성벽의 높이는 1.5~2.5m로 국방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산성으로 그 가치가 아주 높다.이 외에도 지역에서는 많은 관광자원으로 지역을 방문하는 관광객의 수는 늘어나지만, 유로 관광지의 방문객보다 무료관광지 방문객 수가 월등하게 높게 나타나며 거쳐 지나가는 관광지의 이미지가 현재로서는 가장 큰 문제점이다.경산시는 이를 해결하려고 관광 웹 드라마를 제작하고 VR 콘텐츠를 시 홈페이지에 업로드 하는 등의 노력과 함께 경산 5경으로 선정된 갓바위와 반곡지, 삼성현역사문화공원, 자인 계정 숲, 남매지 등을 활용할 예정이나 관광산업으로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형편으로 쉬어가는 관광자원의 개발이 절실하게 필요하다./심한식기자 shs1127@kbmaeil.com

2023-07-12

내 꿈을 영글게 한 전쟁고아들

지금은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자원봉사지만 과거에는 아주 낯설었다. 여기에 누군가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낯섦은 자연스러움이 되었다. 권순남(權順南) 선생은 자원봉사활동 초기부터 합류해 갖은 고생 끝에 자원봉사활동의 기틀을 다졌다. 강원도에서 태어난 권 선생은 어떻게 포항에 와서 자원봉사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또 어떤 일을 겪으며 자원봉사의 뿌리를 내렸는지 5회에 걸쳐 이야기를 전한다. 최미경(이하 최) : 광복 후 포항에 오셨다고 들었습니다.권순남(이하 권) : 내가 태어난 곳은 지금은 북한 땅인 강원도 통천이야. 어머니 고향은 울진이고 아버지는 안동이었는데, 통천이 살기에 좋다고 아버지가 그곳에 터를 잡았지. 어린 시절 우리 집 앞은 포항 송도처럼 소나무 숲이 우거졌어. 광복 후에 언니와 나는 큰아버지를 따라 안동에 와서 2년간 살았고, 아버지는 우리보다 늦게 안동으로 왔다가 포항에서 그물 공장을 크게 하는 친구의 권유로 포항에 오게 되었지.최 : 그러면 어머니는 언제 통천에서 나오셨나요?권 : 나오지 못했어. 당시 어머니는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갓난아기를 데리고 나오기가 힘들었어. 어머니는 나와 언니가 걱정돼 아버지를 안동으로 먼저 보냈고, 자신은 막내가 좀 더 크면 같이 나오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막힐 줄 누가 알았겠어. 최 : 그 후로는 어떻게 되었나요?권 : 포항에는 아홉 살 때 왔는데, 가을이었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아는 분 편에 어머니가 쓰신 쪽지를 전해 받았어. “아버지 말씀 잘 듣고 공부 잘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하면 그때 가겠노라”고 적혀 있었지. 그래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 어린 마음에 내가 열심히 해서 이름을 날려야 어머니가 오겠구나 싶어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면 한 장만 써도 될 것을 세 장씩 썼지. 그런데 공책 한 권, 연필 한 자루가 귀한 시절이라 공책을 많이 쓴다고 선생님한테 맞기도 했어.최 : 공부뿐 아니라 뭐든 열심히 하셨을 것 같아요.권 : 어렸을 때는 단순했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게 목표였고. 그게 몸에 밴 것 같아.최 : 초등학교 시절엔 어떤 학생이었나요?권 : 입학 시기를 놓쳐 열 살 때 포항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어. 그때는 1학년에도 나이 든 학생이 더러 있었어. 시골에 사는 아이들은 부모님을 돕느라 더 그랬지. 한번은 교문 앞에서 매번 지각하는 같은 반 아이를 만났어. 땀을 뻘뻘 흘리며 교문에 들어선 그 아이는 다른 친구들이 안 보이는 데서 무명 보자기를 풀어 신고 왔던 짚신 대신 까만 고무신을 갈아 신더군. 내가 그 아이에게 집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신광이라고 했어. 신광이라면 정말 먼 거리였지. 그 아이의 짚신과 내 구두를 번갈아 보니 왠지 미안하고 슬펐어. 지금도 그 친구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최 : 또래에 비해 성숙하고 감수성이 풍부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창 시절의 꿈은 무엇이었나요?권 : 중학생 때였어. 친구가 자기 집에 놀러 가자고 해서 따라갔는데 집이 무척 컸어. 영화에서나 보던 저택이었지. 집에 들어서자 앞치마를 두른 여자들이 있었는데 나는 시녀라고 생각했고, 친구가 대단한 부자구나 싶었어. 넓은 거실에 앉아 있는데 시녀가 따뜻한 우유와 비스킷을 가지고 와서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군. 놀러 왔는데 왜 기다리라고 하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깜짝 놀랐어. 그때는 배급으로 우유를 받았는데 모두 분말이었어. 우리 어머니는 그걸 어떻게 먹는지 몰라 늘 쪄 주셨는데 점심시간이 되면 찐 우유는 딱딱하게 굳어 먹을 수가 없었어. 도시락통을 운동장에 들고 나가 돌멩이로 치다 보면 점심시간이 다 지나갔지. 깨진 우유 조각 몇 개를 입 안에 넣고 녹여 먹곤 했는데 하얀 우유를 유리컵에 담아왔으니 놀랄 수밖에. 비스킷은 아까워 먹지도 못하고 동생에게 줘야겠다고 생각했어. 잠시 후 친구가 와서 “이제 도와주자”라며 나를 뜰로 데리고 나갔어. 그곳에 어린아이 50여 명이 겨울 햇살 아래 쪼그려 앉아 있었어. 나는 “저 아이들 소풍 왔어?”라고 친구에게 물었지. 그러자 친구가 “고아들이야”라고 대답했는데, 나는 그때까지 고아라는 말을 몰랐어. 그래서 고아가 무슨 뜻인지 묻자 친구는 6·25전쟁 때 부모를 잃은 아이라고 설명해주더군. 그제야 그곳이 수녀들이 운영하는 고아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아이들을 유심히 보니 코 흘리는 아이, 손이 하얗게 튼 아이, 양말을 안 신은 아이도 있었어. 그 아이들이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는데, 엄마 잃은 아이들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정말 아팠어. 만약 아버지가 이북에서 오지 않았다면 나도 저 틈에 앉아 있었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졌지. 최 : 어떤 꿈인가요?권 : 돈을 벌고 싶었어. 이 아이들에게 집을 지어주자, 살아갈 수 있게 희망을 주자, 그런 마음이었지. 돈을 가장 빨리 벌 수 있는 게 의대 아니면 약대에 가는 거였어. 그래서 그때부터 죽기 살기로 공부했고 봉사의 가치를 알게 되었지.최 : 봉사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권 : 그 아이들이 나에게 에너지를 주었어. 그들을 위해 뭔가 할 수 있고, 하고싶다는 에너지 말이야. 과자를 사주고 싶은 마음에 몸이 꽁꽁 어는 줄도 모르고 크리스마스 전날 새벽 추위를 뚫고 초롱을 들고 다녔어. 여름방학에는 학교에서 배운 뜨개질로 모자와 목도리를 짜고 양말과 장갑을 짰지. 손가락장갑은 시간도 많이 들고 어려워서 벙어리장갑만 짰어.최 : 장갑을 짜려면 털실이 필요했을 텐데 어디서 구하셨나요?권 : 친구들의 못 입는 스웨터를 받아 실을 풀고, 해병대 군악대에 다니는 오빠에게 해져서 구멍 난 양말을 모아달라고 부탁했지. 그렇게 모은 실로 1년간 틈틈이 짜면 장갑, 목도리, 양말이 50개 정도 되었는데 크리스마스 때 가지고 가서 아이들에게 나눠주었어. 정말 좋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작은 것이지만 뭔가를 나눈다는 게 무척 행복한 일임을 깨닫게 되었어. 1956년 권순남은 헌 스웨터를 수거해 리폼한 뜨개실로 모자, 장갑, 양말 등을 만들어 성모자애원 아이들에게 선물했다. 이 일은 그녀의 자원봉사 생활의 서막이었다.최 : 가정형편이 나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권 : 6·25전쟁으로 포항이 초토화되어 포항 시민 대부분이 집을 다시 지어야 했어.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지. 1955년에 아버지는 강원도 삼척에서 목재를 싣고와 지금의 제일안경 자리에 2층 목조건물을 지어 금은방을 했어. 그해 겨울, 포장마차를 하는 사람이 도와달라고 해서 아버지가 우리 목조건물 옆에 자리를 내주었지. 그런데 포장마차 주인이 포장 텐트 안에서 램프에 기름을 붓다 화재를 냈어. 불은 빠르게 건물로 옮겨붙었고 1년도 안 된 목조건물이 전부 타버렸어. 그때 모든 걸 잃었지.최 : 학교는 어떻게 다니셨나요?권 : 고등학교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갈 수 없게 되자 선생님 두 분이 입학금 4만 5천 원을 대신 내주셨어.최 : 뭐든 열심히 해서 학교에서 사랑을 많이 받는 학생이었을 것 같아요.권 : 운동을 잘해서 운동부 코치들이 서로 데려가려고 했지. 그래서 육상부와 배구부를 동시에 했어. 포항여고 육상부 선수 4명은 경북 대표로 뛸 정도였고 배구부는 경북에 적수가 없었어. 고3 때인 1959년 가을, 서울에서 열린 전국체전에서 군산여상과 붙었지. 서울에 있는 포항여고 졸업생들이 몰려와 응원했지만 포항여고는 3 대 0으로 완패했어. 그때만큼 맥 빠지는 일이 없었지. 포항에 오자마자 운동을 접고 공부만 하겠다고 결심했어.1950~60년대 군산여상 하면 배구, 배구 하면 군산여상이라고 할 정도로 군산여상 배구부는 막강했고, 군산여상 배구부 선수는 대부분 국가대표로 활약했다.최 : 고3 가을이라면 대입 시험이 4~5개월 정도 남았는데 가능했나요?권 : 나는 성공해야 했어. 목표가 있으니까.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는데, 가정형편이 어려워 아버지가 대학에 못 보낸다고 하시더군. 당시 교감 선생님이 우리 집사정을 듣고 전국을 다니며 등록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대학을 찾아보셨지. 효성여대가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 중 우수한 학생을 선발해 등록금을 분납할 수 있도록 한다는 말에 면접을 보고 합격했어.권순남1939년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 포항으로 왔다. 포항초등학교, 포항여중·고를 졸업하고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약학과에 입학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퇴했다. 1957년부터 봉사활동을 시작해 지금까지 자원봉사를 삶의 전부로 여기며 실천했다. 포항JC 부인회를 통해 장애재활사업 후원, 양로원 지원, 소년소녀가장 지원 등을 해왔다. 1996년 포항시자원봉사센터 소장, 2003년 한국자원봉사센터협회 회장을 맡아 지방자치단체별 자원봉사센터 설립과 운영의 효율성, 전문성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자원봉사활동기본법 제정에도 앞장섰다.대담·정리 : 최미경(시인) / 사진촬영 : 김 훈(사진작가) / 사진제공 : 권순남

2023-07-12

인재양성 요람 경북학숙, 내년부터 전원 ‘1인 1실’

경북도가 지역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건립한 대학생 기숙사 (재)경북인재평생교육진흥원 경북학숙(본부장 김만수·정치학 박사)이 화제다. 특히 내년부터는 전국 학숙 최초로 재사생 전원이 1인 1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파격적인 운영방침을 밝혀 큰 관심을 끌고 있다.지난 1998년 3월 경북도가 출연해 경산시 진량읍에 세운 경북학숙은 302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로서 지하 1층, 지상 8층으로 지어졌다. 경북 출신으로서 대구·경북 소재 대학을 다니는 우수한 대학생들에게 교육비 부담을 덜어주고, 안정적인 면학 시설을 제공해 지역사회는 물론, 국가발전의 중추 역할을 할 지역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건립한 대학생 기숙사다. 지금까지 모두 8천540명의 도민 자녀들이 시설을 거쳐 갔다. 재사생들의 규칙적인 생활을 철저히 관리하고 있는 경북학숙은 기존 대학 기숙사들과 달리 체력단련, 자기 계발을 위한 야외 운동장, 실내헬스장, 컴퓨터실, 독서실 등을 두루 갖추고 있다. 학숙 직영으로 운영하는 식당은 학생들의 만족도를 높이고 있다.그 밖에도 경북학숙은 토익, 요가, 컴퓨터 활용 등 재사생이 원하는 강좌를 특강으로 편성해 무료로 운영한다. 나아가 열린정보센터는 재사생뿐만 아니라 경북도민에게도 개방해 전자도서관과 8천여 종의 동영상 강좌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김만수 경북학숙 본부장은 “경북학숙이 2024년부터 1인 1실로 전환키로 하고 10억원의 예산을 들여 글로벌 라운지 설치와 학숙 시설 리모델링에 들어갈 계획으로 그동안 학생들이 사용하던 불용품 침대와 의자 151조 전량을 상생 경영의 일환으로 도내 노인복지시설과 독거노인들에게 기증했다”며 “학숙들 중 처음으로 시도하는 것이어서 처음에는 걱정이 앞섰지만, 어르신들의 반응이 좋아서 보람을 느낀다. 지역사회 어려운 이웃을 도와 이웃의 성장이 우리 사회 나눔 씨앗이 돼 선순환될 수 있는 기회기이기도 한 만큼 앞으로 다양한 활용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의욕을 나타냈다.경북학숙은 지난 4월 26일부터 지난 5일까지 7회에 걸쳐 포항, 김천, 영덕, 고령 경로당과 영덕 영원노인복지센터, 포항 하얀연꽃마을요양원, 고령 대가야요양원, 영덕 농공단지 외국인 노동자 숙소 등에 경북학숙의 불용품 침대 및 의자 151조 전량을 기증했다. 특히 영덕군과 영덕군의회에서는 김성호, 김성철 군의원의 주선으로 사전 신청을 받아 영덕군내 경로당과 어르신들 60여 명에게 침대와 의자를 직접 전달해 훈훈한 미담이 되고 있다. 김만수 경북학숙 본부장학숙을 리모델링하면서 불용품으로 처리되는 침대와 의자 등을 필요로 하는 도내 어르신들에게 기증함으로써 어르신들에게 행복을 안겨줌은 물론, 불용품 폐기에 따른 부대비용을 제로화하는 1석2조의 효과를 기획한 김만수사진 경북인재평생교육진흥원 경북학숙 본부장.그는 지난 2020년 5월 1일부터 (재)경북장학회 사무처장 겸 경북학숙 원장을 맡아 1995년 경북장학회 설립 이래 가장 많은 장학기금(7억8천만원)을 모금해 경북 지역 인재 육성을 위한 장학금 모금 홍보 등에 탁월한 성과를 낸 주인공으로 평가되고 있다.부임 이후 경북학숙 미래를 위한 장학 기금 모금 활동으로 동주산업(회장 나채홍) 2천만원, 경북유치원연합회 1천만원, 국제로타리 3630지구 2천만원, 경북전문건설인협회 2천만원, 경북건축사회 500만원, 경북공공형어린이집연합회 매년 1천200만원 등 다양한 외부 장학금 8천700만원을 모금했다. 특히 동주산업 2천만원, 경북공공형어린이집연합회 1천200만원, 경북전문건설인협회 1천만원은 매년 정기 기부를 약정 받는 성과를 거뒀다.또한 각종 언론 매체와 도내 중·고·대학을 직접 방문, 홍보활동에도 열과 성을 다했다는 평가를 받음과 동시에 그 공로로 내년 5월까지 1년간 연임이 결정됐다. 경북도, 입사생 연중 수시 모집경북도에서 운영하는 경북학숙은 입사생을 연중 수시 모집한다고 12일 밝혔다.수시모집 신청 자격은 경산시·대구시 소재 대학교(전문대 및 대학생 포함) 신입생·재학생으로 경북에 주민등록을 두고 실제 거주하는 보호자(부·모 중 1인)의 자녀다.원서 교부 및 접수는 정시 모집은 1월 중, 중도 입사는 연중 진행한다. 선발 기준은 성적우수자 위주로 모집하고 저소득층 자녀는 10% 이내 우선 선발하며 재사비는 20만원으로 숙식 및 학숙 내 모든 편의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경북학숙 신청 관련 문의는 보호자의 주민등록지 시·군 교육협력업무 부서 및 경북학숙에서 한다. 자세한 사항은 경북학숙 사생지도실(053-850-9728~9)이나 경북학숙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김만수 경북학숙 본부장은 “도내 대학이 밀집된 경산에 위치한 경북학숙은 최신 시설에 저렴한 가격으로 도내 대학생이 이용할 수 있는 곳으로, 학숙에서 제공하는 맞춤형 교육을 통해 개개인의 능력과 역량을 키울 수 있는 경북학숙 입사를 적극적으로 추천한다”며 도민들의 관심과 이용을 당부했다.한편 경북학숙은 2017년 경북학숙 생활관 전면 리모델링 및 매트리스, 책상, 옷장 등 비품 교체를 완료했다. 타 학숙과 차별화된 경북학숙의 자랑인 ‘외국어특성화 교육’은 2007년부터 재사생의 영어회화 구사능력 향상을 위해 꾸준히 진행돼 오고 있다. ‘취업역량강화 교육’을 해 취업 어려움을 겪는 대학생에게 실질적인 도움으로 재학생의 취업률 제고를 위해 노력할 방침이다. 교육에 필요한 수강료, 교재비용 및 외국어회화능력시험 응시료 등 모든 비용은 학숙에서 부담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3-07-12

삼국통일 판을 짠 명군 - 외세에 영토 넘긴 군주

‘신라 왕조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친 탓에 실제로는 삼국 가운데 가장 뒤늦게 후진적 상태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신라는 성립 이후 그와 같은 지리적 불리함에서 비롯된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꾸준히 기울인 결과 선진의 고구려와 백제를 따라잡고 마침내 삼국 통합의 주역으로 부상하여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었다…(후략)’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간행한 ‘통일신라 시기-1’에선 위와 같은 문장이 발견된다.그렇다면, 지리적 여건 등으로 인해 후진적 상태에서 출발한 신라가 먼저 고대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발전하던 백제와 고구려를 누르고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구체적인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효율적인 국민통합에 힘을 보탠 ‘불교’라는 이념, 엘리트 청년들의 애국심을 이끌어낸 ‘화랑’이라는 조직, 그리고 탁월한 두 인물 김유신과 무열왕 김춘추(603~661).이 3가지를 ‘7세기 신라의 핵심 에너지’라고 부르는 것에는 별다른 이론(異論)이 없을 것 같다.거론된 두 인물 중 김춘추에 관한 역사학계의 평가는 엇갈린다. 간단히 요약하면 이런 것이다. ‘나무위키’를 인용한다.“무열왕은 여러모로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능수능란한 외교술과 임기응변을 통해 고립무원이었던 신라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삼국통일의 판을 짠 명군이라는 긍정적인 평가와, 당나라와의 동맹으로 말미암아 대동강 이북의 땅을 외세에 넘긴 군주라는 부정적인 평가로 나뉘는 것.” ◆혼인으로 맺어진 김춘추의 ‘지략’과 김유신의 ‘무력’하지만,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는 이들도 ‘능력’에 있어서만큼은 김춘추 즉, 무열왕에게 야박한 점수를 주지 않는다. 김춘추에 대한 ‘위키백과’의 설명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긍정과 부정의) 평가와는 별개로 김춘추는 신라의 역대 임금들 중에서 그 능력이 출중한 편에 속한 명군이며, 탁월한 외교와 정무 감각을 바탕으로 신라를 양면전선의 늪에서 구해냈다. 전통사회에서는 김춘추를 삼국통일의 초석을 마련한 위인으로 묘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에 대한 호평은 그가 살아있던 당시부터 존재했다…(후략)”고구려와 당나라, 거기에 일본까지 오가며 탁월한 말솜씨와 친화력으로 칼과 창을 동원한 전투 없이도 전투 이상의 성과를 내며 국가적 이익을 얻어온 김춘추. 그는 결혼으로 맺어진 김유신과의 ‘특이한 관계’로도 유명하다.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김춘추의 아내는 문명왕후(문희). 문희는 김유신의 동생이다. 혼인으로 이어진 혈족관계는 나중에 더 확장된다. 김춘추와 문명왕후의 딸인 지소공주가 김유신의 아내가 되는 것.그러니, 김춘추와 김유신은 처남-제부 관계인 동시에 장인-사위 관계다. 문명왕후는 김유신의 동생인 동시에 장모가 된 것.지금의 윤리의식으로 보자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라며 놀라겠지만, 실제로 고대는 물론, 중세까지 ‘혈통의 순수성을 보존한다’는 이유로 근친혼(近親婚·가까운 혈족끼리의 결혼)을 하는 왕족과 귀족은 동양과 서양 모두에서 적지 않았다.의학계는 동유럽의 최고 권력자 가문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전병인 ‘주걱턱’이 바로 이 근친혼이 낳은 비극이라고 말한다.어쨌건, 김춘추는 신라의 무력을 ‘거의 독점한’ 김유신과 끊기 힘든 거미줄 같은 혼맥으로 결속되면서 자신의 지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을 확장시켰음이 분명해 보인다. ◆당나라와 일본 오가며 탁월한 외교력 인정받은 김춘추‘초한지’의 항우가 오추마를 얻은 듯, ‘삼국지’의 관우가 적토마를 얻은 듯, ‘7세기 동아시아의 실력자’ 김유신을 등에 업은 김춘추는 여러 나라를 오가며 자신의 정치력과 외교협상력을 발휘한다. 이른바 추후에 왕이 될 재목으로서 ‘존재 증명’에 성공한 것이다.아래 ‘삼국사기’ ‘일본서기’ ‘자치통감’ 등의 고문헌에 기록된 김춘추의 외교 관련 에피소드를 간략하게 요약한다.“다이카(大化) 3년(647년)에 김춘추가 왜(일본)에 갔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이때 김춘추의 관등은 상신(上臣) 대아찬(大阿湌)으로 표기돼 있다. 신라에서는 상대등 비담이 일으킨 반란이 진압됐고, 선덕여왕의 사망으로 진덕여왕이 옹립됐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진덕여왕을 보위해 정권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이듬해인 648년 12월 김춘추는 당나라에 들어갔고, 당 태종(太宗)의 환대를 받았다. 김춘추는 이곳에서 당의 국학(國學)을 방문해 석전(釋奠)과 강론(講論)을 참관했다. 당 태종은 높은 벼슬을 내렸고, 김춘추는 백제를 공격할 군대의 파병을 요청해 허락받았다. 귀국하는 김춘추에게 당 태종은 성대한 송별연까지 열어줬다.”이처럼 대내외적으로 권력의 정점에 다가서던 김춘추는 654년 진덕여왕에 이어 신라의 스물아홉 번째 왕이 된다. ‘무열왕(武烈王)’이다.무열왕 김춘추의 집권 이후에도 백제·고구려와의 크고 작은 전투는 계속됐다. 백제의 멸망이 6년, 고구려가 신라에 병합되기까지는 14년이 남아있던 때였으니.그렇게 군사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임에도 무열왕의 통치는 백성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은 듯하다. ‘삼국유사’엔 김춘추와 관련된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王膳一日飯米三斗 雄雉九首 自庚申年滅百濟後 除晝膳 但朝暮而已 然計一日米六斗 酒六斗 雉十首”이란 것인데, 이를 풀어 쓰면 “왕은 하루에 쌀 3말과 장끼 9마리를 먹었다. 백제를 멸한 후엔 점심을 거르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하루 식사는 쌀 6말, 술 6말, 꿩 10마리였다”가 된다.인간이 ‘육식 코끼리’가 아닌 이상 24시간 동안 이처럼 많은 음식을 먹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위 문장은 상징이나 은유로 읽어야 이해가 가능할 터.왕의 밥상은 왕 하나만 먹기 위해 차려지지 않는다. 왕이 끼니를 챙겨 먹고 남은 음식을 그를 수발하는 수많은 이들이 나눠 먹는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그러니, ‘삼국유사’의 과장된 서술은 매일 같이 왕의 밥상에 넉넉한 음식을 올려도 아무 문제가 없을 만큼 무열왕 통치 시절 신라엔 물산(物産)이 풍족했다는 것으로 해석하면 될 것 같다.국민의 배를 곯지 않게 만드는 건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의 가장 주요한 책무 중 하나니까. ◆딸과 사위가 같은 날 사망한 가슴 아픈 사건도 겪어젊은 시절엔 총명함을 국가가 공인한 외교협상가였고, 성골(聖骨)이 아닌 진골(眞骨) 출신으론 처음으로 신라의 왕위에 올랐으며, 김유신이란 든든한 후원자를 곁에 두고 각종 전투에서 승리하며, 백성들을 굶기지 않았던 무열왕 김춘추.하지만, 그의 삶 역시 내내 빛나는 시절만 있었던 건 아니다. 생의 우여곡절이란 역사에 뚜렷하게 이름이 기록된 사람에게도 필시 있기 마련. 김춘추의 삶에 드리운 가장 서러운 음영(陰影)은 자신보다 앞선 딸과 사위의 죽음이다.642년 백제의 장군 윤충(允忠)은 김춘추의 ‘금쪽같은 내 새끼’와 그녀의 남편까지 도륙한다. ‘삼국사기’에 그 사건이 언급되고 있다. 다음과 같다.“김춘추의 딸인 고타소(古陁炤) 공주의 남편 김품석은 대야성 군주(大耶城 軍主)였다. 백제 장군 윤충이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했다. 대야성엔 김품석에게 불만을 가진 검일(黔日)이 있었고, 그는 백제군과 내통했다.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김품석이 군사들을 성 밖으로 나가게 했고, 숨어 있던 백제의 복병(伏兵)이 신라군을 전멸시킨다. 윤충은 항복한 김품석과 고타소 공주를 죽인 후 목을 베어 사비성(四沘城·당시 백제의 왕이 있던 곳)으로 보낸다…(후략)”고타소 공주는 김춘추의 딸이며 김유신의 조카였다. 이로써 백제는 신라 최고위 실력자 2명의 ‘사적인 원수’까지 된다.그로부터 18년 후.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로 진격한다. 왕이 된 김춘추와 상대등(上大等·신라의 으뜸 벼슬) 김유신이 선두에 섰다. 660년 신라의 백제 침공 배경엔 ‘삼한일통’이라는 정치적 목적과 함께 ‘딸을 죽인 원수를 갚겠다’는 김춘추의 절치부심(切齒腐心) 또한 분명 있었을 것이다.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3-07-11

“대구 경제 활성화 선두주자로”

민선 8기 1주년을 맞은 배광식 대구 북구청장이 하늘, 물, 땅의 길을 통해 대구의 성장을 견인하는 북구로 거듭날 것을 표방했다.지난해 7월 1일 북구 주민의 기대와 열망 속에 민선 8기 북구청장으로 취임한 배 청장은 민선 6기·7기 동안 행복 북구의 획기적 발전을 가져온 성과를 바탕으로 북구 발전을 위한 크고 작은 과제들의 완성도를 높이고 마무리될 수 있도록 모든 역량과 열정을 결집했다. 민선 8기 취임 후 8∼9월 두 달간 23곳 전 동을 순회하면서 500여 명의 주민과 대화의 장을 열어 다양한 주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SNS 및 유튜브 운영을 통한 사이버공간에서도 각계각층의 주민들과 꾸준히 소통을 이어가고 있다. 배 청장은 기회와 희망이 활기찬 경제도시, 주민들이 안전하고 건강한 북구+자연과 함께 힐링하는 도시, 사계절 문화의 꽃이 활짝 피는 도시, 온 가족이 함께 행복한 북구 등을 목표로 북구가 대구 중심지로 자리 잡도록 구정을 펼칠 계획이다.도시철도 4호선 건설과 금호워터폴리스 등 지역경제 활성화의 초석이 될 굵직굵직한 사업도 순조롭게 추진되고, 도심융합특구의 조성 및 육성에 관한 특별법이 상임위 소위를 통과하면서 사업 추진에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또 그동안 낙후한 산격청사 주변 산격동 일원 도시계획을 조정해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예정이다.지난 임기 동안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청년문화의 장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다져왔다면, 민선 8기는 그 기반 위에서 청년창업과 청년일자리사업 창출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특히 지난해 개소한 청년놀이터와 올 하반기 준공예정인 코워킹공간은 청년창업자 및 창업희망자를 대상으로 다양한 창업지원, 컨설팅, 창업공간 무상제공으로 대구의 창업 메카로 자리매김할 것이 기대된다.또한, 지역의 전통산업인 안경산업을 지원할 아이빌 운영사업의 지원을 한 층 강화할 예정이며, 내년 준공예정인 제3산업단지 재생사업을 기반으로 지역 뿌리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해 경제유발 효과가 우리 지역에 전파될 수 있게 전력을 기울일 방침이다.칠성종합시장은 대한민국 1호 상권르네상스 사업 대상지로 선정돼 노후 시설정비, 시설물 확충, 환경개선 등 다양한 사업을 펼쳐 왔다.올해 마지막 연차를 맞아 상권활성화를 위해 아낌없는 지원을 할 예정이다. 또한, 앞으로도 전통시장 시설 인프라 개선사업, 소상공인 지원사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소상공인 공동체, 관계기관과의 협력을 통해 유통환경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지역 민생경제 발전에 기여할 계획이다.금호강 남측과 북측을 연계한 신규 접근로인 금호워터폴리스∼화담산 보행 교량 설치를 위한 연구용역이 진행 중이고, 금호강 수변 및 인근 산업시설과 연계한 첨단 미래형 친수단지 조성 사업 개발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배 청장은 “대구경북통합신공항의 새로운 하늘길이 열리면 우리 지역은 신공항 프론트도시로서의 첨단·복합물류도시, 관광휴양 비즈니스 등 무한한 발전이 기대된다”며 “이 사업과 함께 팔거천 수변공간과 금호강워터프론트를 적극적으로 개발해 휴양과 문화가 공존하는 명품수변도시를 구축하도록 하겠다”고 언급했다.경관개선사업과 친환경 녹색생태도시 조성사업도 순조롭게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완공한 팔거천 재해예방사업과 내년 12월에 준공 예정인 동화천 재해예방사업 등을 통해 도심 속 힐링과 치유의 공간으로 거듭날 예정이다. 금호강과 화담산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활용한 화담공원(녹색힐링벨트) 조성사업도 29만9천481㎡ 부지에 오는 2025년까지 180억 원을 투입해 본격 시행에 들어간다. 수변생태관찰데크, 강바람피크닉장, 피톤치드숲, 허브치유원, 치유의 숲 등 테마와 다양한 체험활동으로 여가선용은 물론 지역경제에도 이바지할 것으로 보인다.이 밖에도 구수산도서관 리모델링 공사 완료, 침산1동 복합커뮤니티센터 조성사업 등을 통해 주민의 주거만족도 향상에도 힘을 쏟을 예정이다.배광식 북구청장은 “지금 우리 지역에서 일어나는 긍정적인 변화를 잘 활용해서 북구가 대구 경제의 중심지로 다시 한번 도약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심상선기자 antiphs@kbmaeil.com

2023-07-10

“새 희망과 재도약 원년 만든다”

민선 8기 1주년을 맞은 윤석준 대구 동구청장이 “동구의 새 시대를 열어가는 희망의 원년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동구는 1년간 대구경북통합신공항 특별법 통과, 공항후적지 개발 등 지역의 백년대계를 책임질 굵직한 사업을 맞이하며 바쁜 한 해를 보냈다.특히 대구경북통합신공항 특별법 통과는 올해 동구에 가장 큰일이었다. 이번 특별법 통과로 사업의 불확실성이 줄어들어 오는 2025년 착공, 2030년 공항이전이라는 주민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다.동구에서는 주민들이 수십 년의 세월동안 비행기 소음부터 고도제한까지 많은 고통을 받은 부분을 늘 과제로 안고 있었다.동구에 따르면 피해면적은 49.1㎢로 대구시 면적의 5.6%에 해당하고, 피해 규모로 따지면 24만 명에 달했다. 이는 수원공항 14만 명, 광주공항 1만 명과 비교했을 때 엄청난 수치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이뿐만이 아니라 비행기 소음으로 인해 관내 39개 학교가 학습권을 침해당해왔다. 소음 피해 배상액도 커 2010년부터 2022년까지 5천138억 원이나 됐다.또 고도제한에 따른 재산권 침해로는 대구시 면적의 약 13%인 114.32㎢가 침해당해왔기 때문에 이번 특별법 통과는 주민들에게 큰 희망으로 다가왔다.이와 연결돼 공항후적지 개발 방안 역시 지역의 이슈가 됐다.최근 대구시에서 공항후적지 개발에 대한 청사진을 발표했고, 동구는 특히 관심을 갖는 부분인 도심항공교통 ‘UAM’을 주요 사업으로 선택했다.앞서 동구는 지난해 공항후적지 개발 정책토론회를 개최해 공항후적지가 UAM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확인했고, 고도 설정과 회랑 설계 용이 및 충분한 서비스 인프라를 반영할 수 있는 점을 확인했다.이를 통해 향후 드론 택시로 이동하는 시민들, 버티포트라고 불리는 UAM 정류장에서 하늘로 날 준비를 하는 플라잉카를 동구에서 볼 수 있다는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됐다.동구는 후적지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 역시 세심히 신경 쓰고 있다. 공항후적지 인접 지역이 난개발이 되지 않도록 관리하고, 후적지와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을 수립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이 밖에도 주민들의 정주 여건 핵심을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동구는 명품교육도시 조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기존 장학회를 교육재단으로 확대 개편해 동구만의 차별화된 교육 정책을 펼칠 방침이며, 올해 말 출범 예정인 교육재단은 지역 내 학령인구의 안정적인 학습 여건 조성에 주력하게 될 예정이다. 이를 통해 동구의 교육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 주요 골자이다.또한, 국가공모사업에 선제적으로 대응해 지방정부 예산의 한계를 극복하고, 맞춤형 취업지원서비스를 강화해 일자리 미스매치 해소를 위해 노력 중이다.아울러 최근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팔공산과 금호강 등 자연자원과 곳곳에 산재한 역사·문화자원을 활용해 관광 활성화도 이룩할 계획이다. 동화사를 중심으로 호국불교 관광 콘텐츠를 만들 준비를 하는 동구는 사명대사 체험관 및 교육관 건립한다. 이는 팔공산의 문화유적과 연계한 사업으로 국비, 시비, 구비 등 총 100억 원이 투입되는 대형 사업이다.마지막으로 관광과 연계되는 먹거리 역시 활성화해 다양성 있는 관광의 도시 동구를 조성할 방침이며, 지역 내 어르신들이 소외되지 않는 복지정책을 펼치고, 경직된 공직사회 분위기를 탈피한 후 역동적인 문화를 정착하고자 노력 중인 동구는 현재도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윤석준 동구청장은 “1년 동안 많은 동구 주민들을 만나고자 노력했고, 느낀 것은 우리 주민들 모두 동구의 기분 좋은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는 것”이라며 “또한, 동구에 대한 기대가 매우 크다는 것도 알 수 있었기에 남은 시간 동안 주민들의 기대가 실망이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다”고 전했다./김재욱기자 kimjw@kbmaeil.com

2023-07-10

낮은 자세·열린 소통… 군민이 하나 되는 새로운 청송

세상사 무엇이건 다를 바 없다. 지나온 날을 꼼꼼히 돌아보고, 현재를 명확하게 판단해, 앞날을 준비한다면 실수는 적어지는 법이다. 이는 군정도 마찬가지.‘하나 되는 청송, 그 이상의 도약’을 슬로건으로 주민들과 함께 애혼 청송군이 최근 민선 8기 1주년을 맞아 그간의 군정 성과와 향후 군정 운영방향을 발표했다.윤경희 청송군수는 1년 전 취임식에서 “갈등과 반목을 극복하고 낮은 자세로 누구와 언제라도 소통하며 청송을 새롭게 변화시키겠다”고 말한 바 있다.공약 이행은 군민에게 한 약속을 실천 과정에 다름 아니다. 윤 군수는 새롭게 피어나는 미래농촌, 발맞춰 함께하는 나눔복지, 문화로 미소 짓는 상생경제를 군정목표로 내세운 뒤, 각 부서에 공약사업 검토를 지시하고 업무보고를 통해 추진 방향을 설정했다.군민배심원단 회의를 거쳐 최종 확정된 73건의 민선 8기 공약은 △농업 시스템 혁신 △일자리를 창출하는 관광 기반 구축 △청정 도시 환경 조성 △하나 되는 보편적 복지 실현 △소통과 협치의 공감 행정 등에 포커스가 맞춰졌다. 농어촌버스 무료 운행을 비롯한 13개 공약은 이미 완료됐고, 나머지 공약 또한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청송사과의 품질 향상과 농업 시스템 혁신이중 윤경희 군수가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하는 사업은 농업 시스템 혁신이다. 청송사과는 11년 연속 대한민국 대표브랜드에 선정됐다. 소비자들은 청송사과를 모든 면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생각하고 있지만, 청송사과 명성을 이어가려면 품질을 향상하고 새로운 판로를 개척해야 한다.현재 청송군에서 생산되는 사과는 약 6만t 정도이고 전국 생산량은 56만t에 이른다. 사과 소비량 감소와 함께, 청송군 생산량의 3분의 1 수준인 강원도에서 본격적으로 사과가 생산되면 생산량 증가로 사과 가격 폭락이 우려되는 실정.이에 청송군은 늘어나는 사과 생산량 속에서 청송사과 브랜드와 가격 경쟁력 확보를 위해 청송사과 시장을 국내에서만 찾지 않고 해외로 눈을 돌렸다. 청송군이 집중하는 해외 시장은 동남아시아다.경제가 급속히 성장하며 동남아 시장이 갈수록 커지고 있으며, 한류 열풍으로 한국과 관련된 물품에 신뢰와 소비욕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청송군은 2022년 11월 인도네시아에 청송사과 300t 수출 쿼터 승인을 얻어 냈다.사과주스는 5년간 무제한으로 수출한다. 6월 현재까지 인도네시아에 수출된 사과는 30t, 사과주스는 15t에 달하고 수출된 청송사과는 인도네시아 현지 롯데마트, 헤르그룹, GS에서 판매되고 있다. 또한, 지난 5월에 필리핀 현지 대형 유통업체 디존팜과 수출협약을 체결하고 11톤을 수출하기도 했다.향후 청송군은 청송사과 수출량을 1만t 이상으로 늘려갈 계획. 1만 t 수출 목표 달성을 위해 올 3월 청송군 농산물 수출 촉진 지원 조례를 제정해 수출을 촉진하는 법적 기반을 마련했다.한국 문화와 한국 생산품에 관심이 높아진 동남아 소비자의 눈길을 끌기 위해 수출용 청송사과 명칭을 ‘K-애플’로 바꾼 새 포장재를 개발했으, 청송사과 수출 촉진 자금과 글로벌 GAP 인증 농가 출하 지원 장려금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미래형 과원 조성과 주민 복지 향상에 주력청송은 이와 더불어 인건비와 재료비는 절감되고 품질과 생산성은 높은 미래형 과원 조성 사업도 추진 중이다. 미래형 과원 조성 묘목비 지원으로 생산비를 절감하고, 농산물 품질관리 센터 운영을 통한 과학적인 품질검사는 소비자의 신뢰를 높였다.또한, 청송 황금사과 기술혁신관과 우량대목 전문 육성센터를 갖춘 청송 황금사과 연구 단지를 이른 시일 내 완공해 청송사과의 품질 향상 기반을 다져나갈 예정.이런 노력이 있음에도 청송사과는 매년 서리와 냉해 피해를 상습적으로 받아 농가에 치명적인 손실을 불러오고 있다.윤 군수는 “군과 농가가 부담하는 재해 피해를 구조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미세살수장치 보조 비율을 현재보다 높여 농가의 부담을 줄이고, 재해로부터 안전한 과수 생산구조 혁신을 임기 내 완료하겠다”고 약속했다.주민 복지 향상도 빼놓을 수 없는 청송군의 핵심 과제다. 이를 위해 청송군은 무료 버스를 운행하는 대한민국 최초의 지방자치단체로 대중교통 정책을 선도하고 있다.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일을 현실로 만든 청송군을 향해 언론과 다른 지자체가 놀라움과 부러움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게 지금의 상황.여타 지자체들도 요금 무료화 정책을 추진하거나, 추진 예정이지만 무료 혜택이 주민과 특정 계층에 한정돼 있어 청송군처럼 지역민들뿐만 아니라 청송을 방문하는 모든 이를 대상으로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청송군청의 설명이다.요금 무료화로 얻는 효과는 생각보다 크다. 교통사고는 줄어들고, 지역경제는 활기를 띠게 되었다. 군민 누구나 교통비 걱정 없이 즐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장을 보고, 목욕탕을 가고, 병원에 가면서 버스 이용자가 25%까지 늘어나 지역 경제에도 도움을 준다. 버스 요금을 받지 않아도 되는 기사는 승객 안전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무료버스 운행은 환경개선에도 효과가 작지 않다. 1km를 이동할 때 승용차는 210g의 탄소를 배출하지만, 버스는 27g을 배출한다. 보기 드물게 맑고 건강에 좋은 공기로 유명한 청송군의 공기는 지역주민과 관광객이 버스를 이용하면 할수록 더 맑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보편 복지 실현하고, 관광객 찾아오는 청송 만들 것청송군은 노인인구가 40%를 넘는다. 군민을 위한 생계, 주거, 교육 등 다양한 복지 정책을 추진해왔지만 아쉬움은 늘 상존했다.형광등을 갈아야 할 때, 배수구가 막히고 현관문이 고장나면 어르신들이 직접 수리하기 어려워 멀리 떨어져 사는 자식이나 친척이 방문할 때까지 불편을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재는 청송군이 운영하는 ‘8282 민원처리 기동반’이 있다. 주민이 전화만 하면 기동반이 현장을 방문해 형광등을 갈고, 보일러를 점검하고, 막힌 배관을 뚫어 준다. 지금까지 민원처리 기동반은 1천395가구 이상이 이용해 3천534건의 생활민원을 처리해 좋은 호응을 얻고 있다.그간 청송군의 도시 환경도 변했다. 삼자현 터널 개통으로 산남지역과 청송, 진보는 더 가까운 이웃이 되었고 더 많은 관광객이 청송을 찾아올 것으로 기대된다.청송읍 중앙로와 금월로의 전신주와 전선이 없어지면서 도로는 넓어지고 아이들의 등굣길은 안전해졌다. 진보면 전선지중화 사업도 진행되고 있으며, 국비를 더 확보해 부남과 산남지역의 전선과 전신주도 없앨 계획.이외에도 청송군 주민의 생활환경을 바꿀 청송읍 농촌중심지 활성화 사업, 금곡지구 도시재생 인정 사업, 진보 진안지구 도시재생 뉴딜 사업도 차질 없이 진행된다.이중 덕리지구 정비를 위한 사업비 180억 원 확보가 눈에 띈다. 덕리지구에는 주택가 옆에 개 3천 마리, 소와 염소를 키우는 견사와 축사 19동이 있다. 오랫동안 흉물스러운 견사가 도시 미관을 해쳤고 가축의 배변이 하천을 오염시켜 왔으며, 견사 주변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악취와 소음으로 고통 받았다.윤경희 군수는 사업비로 용지를 매입하고 견사와 축사를 조속한 기간 내에 철거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확보된 부지는 공공기관과 교육기관 유치를 위한 공공임대주택을 조성하고 스마트팜을 만들 예정.청송군은 지역 경제 활성화 정책도 빈틈없이 추진하고 있다. 소상공인 재정·금융 지원을 강화하고 지역 경제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청송사랑화폐 유통 규모를 700억 이상으로 확대해 지역 소비를 촉진하고 있는 것.이와 함께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대한민국 대표축제인 청송사과축제에 참여한 인원이 50만 명을 넘기면서 지역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기도 했으며, 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해 주산지 왕버들 복원사업도 진행하고 있다.청송의 명소 가운데 하나인 주산지는 많은 사랑을 받아 왔지만, 안타깝게도 근래 들어 왕버들이 고사하면서 옛 풍광을 많이 잃었다. 이를 알고 있는 청송군은 반변천에 서식하는 왕버들 18주를 11월 중에 이식해 주산지 옛 경관을 회복할 계획이다.윤경희 군수를 포함한 청송군 공무원들은 “청송사과의 명성을 잇고, 보편 복지를 실현하며, 생활환경을 개선한다면 주민의 행복도는 높아질 것이다. 더불어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청송을 만들어 지방소멸의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각오를 새삼 다지고 있다./김종철·홍성식 기자

2023-07-10

“어자원 보호해야 구룡포의 미래도 있어”

1970년대 3만 5천 명이던 구룡포 인구는 현재 7천여 명으로 크게 줄었다. 만선의 풍족함을 선사하던 바다는 어족 자원이 고갈되었다. 강신규 선생과의 인터뷰는 바다에 대한 걱정으로 흘러갔다. 선생과 구룡포 골목을 걸으며 과거의 유산과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선생은 두세 걸음마다 멈춰 주민들과 인사했다. 배 : 골목을 거닐면 과거의 풍경이 겹쳐 보이겠습니다.강 :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까지 구룡포는 전성기였어. 어황도 좋았고 인구 유입도 많았지. 셋방 하나에 두 식구가 살았을 정도였어. 근대역사문화거리에 있는 버스터미널(현재 구룡포길 85-1 인근)에서 대구와 감포, 부산까지 다녔지. 근처에 버스 안내양과 운전기사가 묵었던 여인숙이 아직 남아 있어. 그만큼 경기가 좋았지. 수도가 없을 때라 대구에서 수돗물을 공수해 아이들 분유를 데워 먹였어. 식수는 구룡포교회 뒤쪽 우물에서 길어다 먹었고.배 : 근대문화역사거리에는 누가 살았나요?강 : 근대문화역사거리 입구를 바라보고 오른쪽 도로가에는 배를 수리하는 철공소가 많았어. 근대문화역사관 앞 골목은 부자들이 모여 살았지. 구룡포 근대역사관은 일본인 하시모토 젠기치(橋本善吉, 선박을 운영하며 구룡포어업조합 감사로 활동)가 지은 집인데, 광복 후에 수산업계의 거부(巨富)였던 고치원 씨가 살았어.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웠던 그분은 일찍 망하려면 수산업을 하고 늦게 망하려면 교육을 하라고 했지. 배 : 구룡포에도 빈부의 차가 컸나 봅니다.강 : 구룡포시장과 구룡포초등학교 앞은 모래사장으로 판자촌이 형성되어 있었어. 강원도에서 먹고살려고 온 어부가 많았지. 동부초등학교(현 아라예술촌) 너머 용주리(현 구룡포 6리)는 특히나 가난했어.배 : 선생님은 어릴 때 구룡포에서 눈에 띄는 아이였겠군요.강 : 항상 누구 집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자랐지.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부친 귀에 여과 없이 들어가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아버지는 늘 바빠서 교회나 가야 볼 수 있었어. 내 아들도 강두수 손자라는 말을 듣고 자랐고. 손녀들은 아버지를 왕할배라 부르며 따랐지.배 : 가업을 물려받지 않은 이유가 있나요?강 : 아버지 그늘에 들어가기 싫었어.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서울 구로 3공단(현재 서울디지털산업단지) 완구진흥공단에서 근무했어. 당시 완구 수출이 활발했는데 봉제완구를 솜이 아니라 짚으로 채우는 황당한 불량품이 쏟아졌지. 공단이 품질을 보증한 제품만 수출하는 시스템이 된 거야. 구룡포로 돌아와 수협에 잠깐 근무하다 다시 서울로 가서 장로회신학대학 학생과에서 일했어.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중반이었는데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이 계속되자 그 분위기가 싫어 다시 고향으로 왔지.배 : 수산업 관련 일은 전혀 안 하셨나요?강 : 오징어 조미 가공업과 어선 운영을 잠깐 했어. 꽁치 배는 처가 도움을 받아서 하다가 1년여 만에 접었지. 손발이 맞는 선원을 구하기가 쉽지 않더라고. 뱃일을 천대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요즘은 ‘뱃님’이라 불러야 해. 선원 구하기가 그렇게 힘들어. 결국 1990년대에 아버지 그늘로 들어가 냉동공장 사업을 했지.배 : 강두수 선생은 포경업을 접고 어떤 일을 하셨나요?강 : 포경업은 1980년대 초반에 끝났어. 그즈음 장생포의 백경호 선주가 아버지에게 배로 돈 벌어 하늘에 다 보낸다고 했어. 고기를 잡아도 선박 기름값 대면 남는 게 없었거든. 1986년 법적으로 포경이 중단되면서 일부는 연근해 어업 등으로 업종을 바꿨고, 우리는 폐선을 했어. 다른 허가를 받아봐야 쓸데없다고 본 거야. 고래잡이는 하지 못했지만 쥐치와 꽁치, 명태 등을 잡았어.배 : 1990년대에 포경선 수입을 알아보기도 했다고요?강 : 김대중 정부 시절, 고래 자원 조사가 시작되었어. 고래 자원 실태를 파악하는 시험선 신청을 받았지. 그때 포경 관련 자료가 필요해 찾아봤는데 거의 없더라고. 동네 사진관에 걸린 귀신고래 사진을 찍어서 올렸지. 그때 일본에서 포경선을 수입하려고 실제로 알아보기도 했어.1986년 국제포경위원회의 포경 금지로 중단된 이후 학계 차원의 고래 자원 조사가 이어지다 1999년 대한민국 정부 차원의 첫 고래 자원 조사가 시작되었다.국립수산진흥원은 “그동안 2차례에 걸친 고래 자원 조사를 근거로 한국 연안에 서식하고 있는 고래를 조사한 결과, 긴부리 참돌고래 6만여 마리, 짧은부리 참돌고래 2만 2천여 마리, 밍크고래 2천500여 마리 등 8종 11만여 마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해양부는 이 같은 조사 결과를 내년 6월 호주에서 열리는 국제포경위원회(IWC)에 보고, 상업 포경 재개를 위한 근거 자료로 활용할 방침이다.‘고래 11만 마리 동·남해 서식 추정’, ‘경향신문’ 1999년 7월 13일배 : 냉동공장 사업은 어땠습니까?강 : 정부 지원 대출을 받아 호미곶 강사 2리에 냉동공장을 지었어. 완공이 늦어지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었지. 건축업자를 잘못 만난 데다 완공 직전에 화재까지 났어. 상환일은 다가오는데 이자 갚기도 힘들었어. 그 사업으로 가세가 기울었지.배 : 강두수 선생이 1998년 4월 7일 작고하셨습니다. 그때 상황을 말씀해 주시지요.강 : 심장 질환으로 선린병원에서 6개월간 입원해 계시다가 돌아가셨어. 선린병원 김종원 원장과 친분이 있어서 몸이 불편한 이웃들을 선린병원으로 많이 모셨다고 들었어. 너희 아버지 덕에 살았다는 어르신도 있었고. 결국 당신도 선린병원에서 마지막을 보내셨지.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어. 나도 자동차에서 숙식하면서 병시중을 했고. 아버지는 장로로 기억되기를 원하셨지. 배 : 지금 어선의 사무장을 맡고 계시지요?강 : 어선의 조업을 뭍에서 돕는 역할이야. 출항에 필요한 물품을 챙기고 어획물을 경매시장에 판매하지. 새로 충원된 외국인 선원의 정착을 돕기도 해. 얼마 전 베트남에서 나이 어린 선원이 와서 간단한 세간 장만을 도왔지. 말이 안 통해서 소통하느라 혼났네. 과거에는 중국인이 많았다면 요즘은 베트남이나 우즈베키스탄 등에서 많이 와. 바다 일이 워낙 힘들어서 그런지 오래 견디는 선원들이 많지 않아.배 : 구룡포항에 정박한 배가 많은데 조업 상황은 어떤가요?강 : 조업 나가는 배 가운데 3분의 1 정도가 기름값과 인건비를 감당하는 것 같아. 강풍이나 풍랑주의보가 뜨면 배는 쉬지만 선원들 월급은 지급해야지. 대게 값이 좋을 때는 선주도 돈을 벌지만 나머지는 별로야. 비용을 아끼려고 선주가 선장을 겸하는 ‘자배 자선장’을 하거나 외국인 선원을 고용하고 있어.배 : 어업 종사자로서 관계기관에 건의할 사안이 있으신가요?강 : 당장 눈앞의 이익을 쫓기보다 바다부터 관리해야 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다에 쓰레기를 휘몰고 다니는 조류가 있어. 육지의 쓰레기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온갖 것들이 뒤엉켜서 흘러 다녀. 잘 가던 선박의 속도가 갑자기 떨어지면 대부분이 쓰레기 조류를 만난 거지. 항구에 오래 정박된 폐선도 문제야. FRP(유리섬유강화플라스틱) 어선은 썩지도 않고 화약약품 때문에 바다가 오염되지.배 : 지속 가능한 어업을 위한 고민이 필요하겠습니다.강 : 우리나라 방파제는 너무 높아서 물의 흐름을 막아. 일본처럼 방파제를 낮게 해서 파도가 넘나들 수 있도록 해야 해. 해류가 항만을 돌아야 크릴새우가 모이는데 지금은 방파제가 해류를 막으니 크릴새우도 고래도 없지. 선박도 안전하고 생태계도 살리는 해법을 찾아야 해. 선장들의 말을 들어보면 구룡포는 지금이 IMF야. 오징어나 홍게가 끊임없이 나오는 건 아니잖아. 휴식년을 지정해서 어자원을 보호하고 바다를 청소하는 정책이 마련되어야 해. 이런 식으로 잡기만 하면 안 돼. 구룡포의 다음 세대를 위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봐.강신규1947년 구룡포에서 부친 강두수와 모친 하순분의 1녀 3남 중 셋째로 태어났다. 강두수(姜斗洙, 1919~1998) 선생은 광복 후 포항과 구룡포에서 처음으로 고래잡이를 허가받은 포경선 선주이며 구룡포수협 초대, 3대 조합장을 지냈다. 적산가옥에 살면서 구룡포항을 놀이터 삼아 자란 강신규(姜信圭) 선생은 구룡포 동부초등학교를 나와 대구 계성중·고등학교, 국민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서울 완구진흥공단과 구룡포수협, 장로회신학대학에서 근무하다가 1990년대 부친과 함께 호미곶 강사 2리에서 냉동공장을 운영했다.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사진 제공 : 강신규끝

2023-07-09

바이오·물·관광산업 강력한 드라이브로 1년 성과 ‘괄목’

‘취임 1주년’을 맞은 안동시 민선 8기 권기창 호의 도전과 혁신의 발자취가 주목받고 있다. 열린 소통을 바탕으로 시정혁신을 선도하며 미래 100년 발전의 기틀을 세워가고 있다는 것이다.최근, 국토교통부 신규 국가산단 후보지에 ‘안동바이오생명 국가산업단지’가 선정되며 글로벌 백신·바이오 허브 도시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1991년부터 30여 년간 추진한 국가산단 유치의 실마리를 풀며 지역경제 활성화의 큰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됐다.또한, 안동댐 주변 자연환경보전지역의 용도 변경을 위한 환경부의 환경영향평가 통과로 주민의 생활권과 재산권을 보장하는 데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대구광역시와 안동댐·임하댐 맑은 물 공급과 상생 발전을 위한 MOU를 체결하고 영주시와 상수도 상호 공급 협약을 맺는 등 물산업 육성에도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하회별신굿탈놀이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경상북도 안전체험관 건립 후보지 선정 등 새로운 성장 잠재력을 속속 확보하고 있다. 민선 8기 1년 만에 찾아온 겹경사에 지역경제에도 청신호가 켜지고 있다. □ 민선 8기 1년 성과권 시장은 지난해 취임사에서 기쁨보다는 엄중한 책임감으로 소외된 시민이 없도록 살피고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시민의 삶을 풍요롭게 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지난 1년간 매일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시민들을 만나 고충을 듣고 시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시정을 혁신해왔다. 시장실·읍면동장실을 1층으로 내려 문턱을 낮추고 △같이 걸어요, 안동 △걸어서 시민 속으로 △바퀴 달린 시장실 등으로 시민과 교감의 폭을 넓혔다. 인허가 민원처리 기간은 반으로 줄이고, 시민불편은 즉시 해결하고자 했다.도시 곳곳에 활력 넘치고 기분 좋은 변화를 이끌며 시민의 큰 호응을 이끌었다.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과 노인을 위해 △경로당 운영비 자율권 확대 △경로당 회장 활동비 지급 △중증장애인 돌봄지원사 파견 및 가족 휴가비 지원 등 차별과 경계가 없는 복지 정책을 구축했다.출산 여성과 가정을 위한 정책적 배려도 눈에 띈다. △안동맘 출산꾸러미 제공 △다자녀 및 출산 가정에 상수도요금 감면 △신혼부부 무료 건강검진 등 새로운 시책을 적극 발굴·확대했다. △어린이집 교사 대 영유아 비율을 축소하고 △전국 최초의 경로당 연계 돌봄서비스로 아동 돌봄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농민의 고충을 이해하며 농가 비용은 덜고 편익은 대폭 늘렸다. △외국인 계절제 근로자 도입으로 농촌일손부족 문제의 근본적 해소에 기여하고 △365일 농기계 임대·배송 확대 △농기계·농자재 보조사업 위임제 폐지 및 가격 현실화 △농산물 공판장의 지역 농민 불편 해소 등으로 농가 편의를 향상하고 농업경영비 절감에 힘썼다.청년일자리 확보 및 창업 지원을 위한 정책도 활발히 진행했다. 지역인재 채용 기업에 인센티브를 지급하고 청년전용지식산업센터 개소로 기업의 발전과 청년의 지역 정착에 힘을 보탰다.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과 차전장군 노국공주 축제를 원도심에서 개최해 시민 참여형 거리 축제로 원도심 활성화에 기여하고 국내를 넘어 세계 속으로 독보적인 브랜드 가치를 높여 나가고 있다.3대문화권 사업장을 성공적으로 개장하고 국제교육도시연합 세계총회 등 국제회의를 다수 개최해 국내외 방문객의 참여 속에 세계 인문가치의 전진기지이자 국제 마이스 산업의 중심지로서 국제적 위상을 드높였다.안동·예천 행정구역 통합으로 경북의 성장을 견인하는 균형발전의 거점도시로 나아갈 비전으로 활발한 공론의 장을 열어가고 있다. 최근 예천군과 맞손을 잡고 경북도청 신도시 상생 행정협의회를 구성해 주민의 불편 해소를 위한 상생의 첫 발걸음을 뗐다.민선 8기 안동시는 안동·예천 행정구역통합으로 정주인구 30만, 신산업 성장과 기업투자 확대로 경제인구 50만, 안동 관광자원화로 관광객 1천만 시대를 열어나갈 계획이다. 특히, 109개 공약은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공약실천계획서 평가에서 전국 최고 수준의 실천 가능성을 인정받으며 희망의 청사진을 현실로 바꿔가고 있다.권기창 시장은 “미래 100년을 이끌 성장동력 유치에 더욱 박차를 가해 새로운 희망으로 두근대고 청년들로 들썩거리는 안동을 만들겠다”며, “안동시가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를 주도한다는 큰 비전을 가지고 늘 긍정적인 생각으로 소통하며, 시민이 만족할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전했다.□ 민선 8기 지속적인 도전과 혁신안동시는 지난 민선 8기 1년 동안 시민 숙원을 하나하나 해결하는 값진 성과를 거뒀다고 자평하고, 민선 8기 2년 차를 향한 항해를 시작했다.먼저 안동시는 7월 중 혁신적인 조직개편을 실시해 정부의 정책 방향과 미래역점사업 추진을 위한 행정수요에 탄력적으로 대응한다. 또한, 일하는 공직자가 대우받는 조직으로 바꾸어 업무의 효율성을 극대화해 나간다는 방침아래 △지방소멸에 대응하기 위한 인구정책 부서 신설 △1천만 관광도시로 도약하기 위한 관광분야 개편 △시민 편익 중심 ‘ONE-STOP 서비스’를 위한 종합허가과 신설 △깨끗하고 안정적인 용수공급을 위한 맑은물사업본부 설치 △미래농업 육성을 위한 농정부서와 농업기술센터 통합 등 역점사업 완수를 위해 새로운 포석을 짰다.또한, 민선 8기 2년 차 안동시의 최대 현안을 안동·예천 행정구역 통합 추진으로 정하고, 안동과 예천이 함께 힘을 모아 경북 신도청을 유치했듯, 양 도시가 상생발전하고 경북의 성장을 견인하는 거점도시로 우뚝 서기 위해 다시 한번 역량을 모아나가야 한다고 밝혔다.안동시는 예천군과 행정통합을 위한 주민 공론을 진행해 시·군민의 뜻에 따라 통합을 위한 결론을 이끌 계획이며, 지난 5월 도청 신도시의 문제점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경북도청 신도시 상생 행정협의회 협약식’을 개최하는 등 상생 교류를 시작했다.안동댐 인근 천혜의 자연환경을 관광자원화하는데도 집중한다. 안동시는 안동댐 주변의 수자원 등 천혜의 자연환경에 재미와 감동이 있는 역동적인 콘텐츠를 입혀 새로운 체류형 관광자원으로 활성화해나갈 게획이다. 특히, 안동댐 진입로 빛터널, 월영교 인근 상설 수상공연장, 댐사면 대형미디어파사드 등을 조성해 새로운 야간 볼거리를 제공하고, 마리나 리조트, 유람선, 수상호텔, 경비행기 등으로 관광객들이 머무르며 즐길 수 있는 체류형 관광 기반을 구축한다.중앙선 폐선구간과 구역사부지는 안동의 핫플레이스로 조성한다. 구 역사부지에 키즈테마파크와 술테마파크, 야외물놀이장 등 체류형 복합문화관광타운을 조성하고 남북연결도로를 개설하여 도심관광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추진한다. 중앙선 폐선구간 35.1Km에는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를 개설하고, 간이역마다 지역 특성에 맞는 콘텐츠로 테마역을 만들어 시민과 관광객이 즐겨 찾는 복합문화레포츠 공간으로 탈바꿈한다.경북의 균형발전을 견인하는 성장축으로 지역경제 100년 대도약의 전환점을 만들기 위한 기틀을 세우고, 인구감소와 지방소멸을 극복하기 위해 제2차 공공기관 지방이전에 대응, 국내 유수기업 유치로 산업단지 활성화를 이룰 기회발전특구 유치에 행정역량을 집중한다. 이에 더해, 경북북부지역의 의료복지 향상을 위한 공공의과대학 유치, 지역 인재 육성으로 지역이 주도하는 지방시대를 만들 교육자유특구 유치에도 철저한 준비와 노력을 기울일 방침이다.권기창 시장은 “경북도청 소재지 안동의 잠재력을 깨워 경북의 신성장거점도시는 물론, 글로벌 백신 바이오 허브 도시로 부상해 시 승격 60주년을 원년으로 미래 100년 안동 발전의 대전환점을 만들어 가겠다”고 전했다./피현진기자 phj@kbmaeil.com

2023-07-09

억겁의 세월로 빚은 절경이 가득 ‘영월 무릉도원’

4세기 중엽 중국에 있었던 옛날이야기를 하나 하려고 한다. 산속을 헤매던 남자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낙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풍요로운 논밭이 이어져 있고 사람들은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며칠간 머물다가 남자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그곳으로 가려고 하지만 낙원은 두 번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갔던 곳은 무릉도원이었다. 강원도 영월에도 무릉도원이 있다. 원래는 영월군 수주면이었는데 주민들의 요청으로 무릉도원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물론 무릉도원처럼 이상향은 아니지만 자연이 수려하고 사람들은 순후하다. 억겁의 세월이 만든 기묘한 풍경들이 가득하다. 초여름 무릉도원에서 잠시 시름을 잊고 자연 속에 머물러 보면 어떨까. ◇절묘한 너럭바위 요선암에 경탄무릉도원면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주천강이 흐른다. 주천강은 강원 평창과 횡성의 경계에 솟은 태기산(1261m)에서 발원해 남한강까지 물길을 밀어낸다. 영월을 대표하는 동강과 서강 못지않게 풍광이 수려하다. 주천강의 물결은 급하지 않다. 강변 구석구석에서 물놀이를 하거나 천렵을 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강변을 따라 걷다 보면 영겁의 시간이 빚어낸 놀라운 풍경에 도달한다. 요선암(邀仙岩)으로 불리는 묘한 바위덩어리들에 관한 이야기다. 안평대군, 김구, 한호와 함께 조선 전기의 4대 서예가로 불린 봉래 양사언이 평창군수를 지낼 때 이곳의 풍광에 반했다. 양사언은 ‘신선을 맞이하는 바위’라는 뜻으로 ‘요선암(邀仙岩)’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거기서 이름이 유래했다. 세월이 흘러 글자는 찾아볼 수 없지만 양사언을 감탄하게 만든 풍경은 그때 그대로다.강가에 널브러진 너럭바위가 뭐 그리 대단하겠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신묘한 자연의 솜씨에 경탄하게 된다. 바위를 만져 보면 도자기처럼 매끈한 것이 마치 조각가들이 심혈을 기울여 깎아놓은 것 같다. 족히 50m는 돼 보이는 주변의 강바닥이 온통 기묘한 바위로 뒤덮여 있다. 바위는 모두 오목하게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를 돌개구멍 혹은 구혈(穴)이라고 한다. 돌개구멍은 암반의 오목한 곳에 물이 소용돌이칠 때 모래나 자갈이 함께 섞여서 암반을 마모시켜 만들어졌다고 한다. 돌개구멍은 지름이 1m에 달하는 것도 있고 깊이가 3m에 이르는 거대한 것도 있다. 파도처럼 너울너울 곡선을 그리기도 하고, 거대한 이무기가 지나간 것처럼 굵은 원통형의 모습도 보인다. 기묘한 풍경이다 보니 무수한 전설이 담겨 있다. 신선들이 탁족을 했다거나 선녀들의 목욕탕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숙종 어제시 걸려 있는 요선정요선암에서 10분 거리에 요선정(邀仙亭)이 있다. ‘신선을 맞이하는 정자’라는 뜻의 이름과 달리 요선정은 단출하기 이를 데 없다. 요선정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 조선 19대 임금 숙종의 어제시(御製詩)를 봉안하기 위해 건립했다. 정자보다 유명한 것은 현판이다. 숙종이 내린 어제시 현판이기 때문이다.숙종의 어제시는 원래 영월군 주천면 청허루에 걸려 있었는데 화재로 소실됐다. 숙종에 이어 즉위한 영조가 숙종의 어제시를 직접 찾아내 다시 쓴 뒤 편액을 내렸다. 일제강점기에 청허루가 쇠락하고 걸려 있던 편액이 일본인 손에 들어가자 주천의 유지들이 편액을 재구입해 요선정에 봉안했다. 요선정 안에 영조가 쓴 숙종대왕 어제시와 정조 어제시 편액이 같이 걸려 있다.요선정 옆에는 무릉리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크기 3.5m의 석불은 머리와 어깨 부분이 바위에서 빠져나오려는 기묘한 형태로 새겨져 있다. 바위에서 나와 대중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부처의 마음을 담은 것일까. 요선정은 풍광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다. 마애불 뒤편으로 돌아가면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로 주천강과 법흥계곡의 물줄기가 내려다보이고, 온통 푸른 산줄기가 겹겹이 이어진다. 절벽 끝자락에는 잘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주천강의 풍경을 더욱 고즈넉하게 한다.◇평창강 끝머리에 있는 한반도 지형무릉도원에서 10㎞ 정도 떨어진 평창강 끝머리에서도 자연이 만든 또 하나의 걸작을 볼 수 있다. 한반도면 옹정리에 있는 한반도 지형이다.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를 쏙 빼닮아 ‘한반도 지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강이 굽이쳐 흐르는 한천의 침식과 퇴적 현상이 반복돼 만들어진 지형이다. 한반도 지형을 평지에서 보면 전체가 보이지 않는다. 한반도 지형 주차장을 찾아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전망대에 올라야 한반도 지형을 제대로 조망할 수 있다.지붕없는 박물관의 도시 영월영월에는 20여 개의 공·사립 미술관과 박물관이 있어‘지붕 없는 박물관의 도시’라고도 불린다. 이 중에서도 국제현대미술관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70개국의 조각 작품 350여 점과 60여 점의 상설 전시 등 수준 높은 다양한 작품이 마련돼 있다. 폐교한 삼옥초등학교를 활용해 만든 미술관으로 야외조각공원이 잘 꾸며져 있어 영월의 멋진 경치와 함께 작품을 감상하기에 좋은 곳이다. 세계민속악기박물관은 세계의 음악과 악기를 통해 인류애를 나누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경기 파주 헤이리와 영월에 각각 자리 잡고 있으며, 세계민속악기박물관 영월관은 100여 개국 2000여 점의 악기를 소장하고 있다. 동아시아, 인도·서남아시아, 중동·중앙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유럽, 남태평양·대양주 등 문화권별로 악기를 분류해 전시하고 있다. 종교미술박물관은 프랑스, 독일, 로마의 목공방에서 도제 시절부터 평생 이어져온 최바오로 작가의 성화와 그만의 창조적 조각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수장고에 있는 약 600점의 작품을 시기에 따라 교체하면서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입구에 전시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은 부산비엔날레에 출품한 작품으로, 예수상의 크기가 3m가 넘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호야지리박물관은 지리 교육에 평생을 바친 호야 양재룡 선생이 설립한 국내 최초의 지리 테마 사설 박물관이다. 박물관은 우리나라 광물 자원의 천연 표본실이자 카르스트 지형, 석회암 동굴 등 각종 지리 지형 현상이 집약돼 있는 영월군에 있다. 지리학의 역사와 종류, 체험 등 지리와 관련된 다양한 정보, 직접적인 체험과 토론의 기회를 제공하는 호야지리박물관은 단순한 유물의 전시 진열과 관람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하고 학문적 원리를 깨달을 수 있는 사회 교육 현장을 지향하고 있다. 인도미술은 다양한 인종과 종교를 바탕으로 수많은 신화와 의식 속에 인도만의 독특한 전통을 고수해 오고 있다. 인도에는 찬란했던 오랜 역사의 유산으로 가히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수많은 유적들과 미술품들이 남아 있다.인도미술박물관은 1981년부터 인도미술에 매료되어 인도에 살고 여행하며 여러 차례 인도사회와 인도인의 삶을 주제로 한 개인전을 개최한 미술가 박여송 관장과 인도 지역연구를 하는 남편 백좌흠 교수가 그동안 하나씩 모아온 다양한 인도미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인도미술 기법들에 대한 체험과 헤나 바디페인팅, 인도 의상문화 체험, 인도 홍차 체험 등 다양한 인도문화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영월=글·사진 최병일 작가

2023-07-06

문경 태고 신비 간직한 기암괴석·층암절벽 ‘탄성 절로’

여름 무더위가 시작됐다. 35도에 육박하는 폭염이 계속되고, 밤새 25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아 잠 못드는 열대야로 고통스럽다. 도심의 더위를 피해 바다, 산과 계곡으로 ‘피서(避暑) 여행을 떠난다.내리쬐는 태양에 맞서는 이열치열의 바다도 좋지만 맑은 공기를 마시며 조용하게 휴식을 보내는 산과 계곡은 일상에 지친 도시민들의 심신을 달래줄 휴식처로 최상이다.수려한 자연 경관을 품은 문경으로 여름 휴가를 떠나보자. 문경은 예로부터 산세가 뛰어난 곳으로 전국 100대 명산 중 4곳이 포함되어 있다. 신림욕과 계곡 캠핑, 체험 관광으로 보내는 문경 여름 휴가는 올 여름 최고의 선물이다.물 맑고 골 깊어 물놀이 하기 좋은 곳 1위쭉쭉 뻗은 소나무 숲서 솔향 맡으며 힐링□ 쌍용계곡 대정숲문경시 농암면 내서리에 자리 잡은 쌍용계곡은 골이 깊고 물이 맑으며, 청룡 황룡 두 마리가 놀다 간 곳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곳이다.속리산봉 동쪽 골짜기 따라 흐르는 물이 낙동강으로 합류하기 전 농암천 상류쪽 도장산 기슭 4km 구간에 펼쳐놓은 계곡이다. 태백준령에서 내륙 깊숙히 서남쪽을 향해 달려온 소백산맥이 마지막 힘을 모아 빚어 놓은 비경이다.도장산과 불일산의 기암괴석과 층암절벽 등 솜씨를 자랑하는 조물주의 작품들이 천고의 신비를 간직한 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옥계수가 구비구비 휘감아 돌며 부딪혀 깨어지며 수천년 세월속에 거대한 암석을 갈고 쪼아내서 훌륭한 예술품으로 조각한 걸작들을 이곳 저곳에 펼쳐놓아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울리게 한다.문경의 물놀이하기 좋은 계곡하면 1위로 손꼽히는 쌍용계곡은 오랜 시간 동안 물의 흐름에 의해 깎여진 천연암반이 절경이며, 널찍한 곳에 앉아 쉬기도 좋다.수심이 깊은 상류에서 수심이 얕은 하류까지 여름철은 더위를 피하고 물놀이를 즐기러 온 피서객들로 계곡 전체가 붐비고 있으며, 특히 늑천정 주변이 물놀이 포인트로 유명하다.마찬가지로 농암면에 위치한 대정숲은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었으며, 의자와 원두막 등 도란도란 앉아 쉬며 힐링하기 좋은 명소이다.계곡에서 물놀이를 마친 뒤 그냥 돌아가기 아쉽다면 솔향 내음 가득한 대정숲에서 산책도 하고 잠깐의 힐링의 마무리를 해도 좋을 것이라 추천한다. 무료 숲 해설·산림교육프로그램 제공 인기용 승천 때 남긴 화강암 바위 비늘 흔적 장관□ 대야산 자연휴양림 용추계곡대야산자연휴양림은 문경시 가은읍에 위치한 용추계곡, 선유동계곡 등 물놀이 명소와의 용이한 접근성으로 인해 여름철 많은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휴양림이다.대야산자연휴양림에서는 용의 전설을 간직한 용추계곡을 탐방하며 즐기는 무료 숲해설과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숲은 살아있다’는 산림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어 그 인기가 뜨겁다.용추계곡은 문경시가 지정한 문경팔경 중 하나로, 계곡의 화강암 바위에는 용이 승천할 할 때 남겼다는 용비늘 흔적도 찾아 볼 수 있어 장관이다. 폭포 아래로 하트 모양으로 깊게 파인 소는 보기 드문 모양을 하고 있어 많은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명소 중 하나다.바로 아래로는 바위 경사가 있고, 너른 바위가 펼쳐져 있어 천연 워터슬라이드가 형성돼 아이들이 미끄럼틀 타듯이 내려오곤 하지만, 무당소는 최대 수심 3m로 안전에 유의하는 것이 좋다. 문화콘텐츠 테마파크로 충청 이남 최대규모석탄 역사 살펴볼 수 있는 은성갱도 관람 가능□ 에코월드 가은역 꼬마열차문경시 가은읍에 위치한 ‘에코월드’는 가은오픈세트장, 에코타운, 야외체험시설 등을 갖춘 문화 콘텐츠 테마파크로 충첨 이남 최대 규모를 갖추고 있다.석탄의 역사를 살펴 볼 수 있는 거미열차도 체험할 수 있으며, 94년까지 실제로 사용되었던 은성갱도도 관람 가능하도록 개방해 두었다.은성갱 안은 서늘하고 시원해서 에코월드 야외놀이터로 조성된 자이언트 포레스트를 즐기다가 땀을 식히러 들르기 제격이다. 다만, 석탄박물관의 경우 올해 리모델링 관계로 휴관하고 있으므로 방문객들의 유의가 필요하다.가은읍 에코월드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는 ‘가은역 꼬마열차’도 운행하고 있는데 아이와 어른이 함께 탈 수 있어 어린 유아를 동반한 가족 여행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근처에는 폐역을 활용한 ‘가은역’카페도 있고, 카페 뒤편으로는 이제는 사용되지 않는 철길이 위치하고 있어 감성 포토존으로 많이 활용되고 있으니 문경시 가은읍을 여행지로 계획하고 있다면 에코월드. 가은역 꼬마열차, 카페 가은역까지 함께 묶어 여행하면 200% 만족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오미자 와인·오미자 가공식품 홍보 판매장태조 왕건 남진 때 지나간 ‘토끼비리’도 볼만□ 오미자테마터널 토끼비리덥고 후덥지근한 날씨에 시원한 국내 여름 여행지를 찾고 있다면 문경 마성면에 위치한 오미자 테마터널을 추천한다. 진남교반 고모산성 아래에 위치한 오미자테마터널은 입구부터 문경 특산물인 오미자를 만나볼 수 있다.터널 초입은 오미자를 테마로 꾸며놓았으며, 오미자 와인을 맛볼 수 있는 휴게공간은 물론 오미자로 만든 가공식품들을 구매할 수 있는 홍보 판매장도 마련되어 있다.색색의 조명과 각종 포토존이 잘 조성되어 있어 무더운 여름이면 인생샷을 건지기 위한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이기도 하다.오미자테마터널만 방문하기 아쉽다면, 근처에 토끼비리, 고모산성, 진남교 등이 함께 위치하고 있으니 돌아보는 것도 추천한다. 토끼비리는 ‘토끼가 지나간 길’이라는 의미로, 토끼비리에서 ‘비리’란 강이나 바닷가의 위험한 낭떠러지를 말하는 ‘벼루’의 사투리라고 한다.이 이름의 유래는 태조 왕건이 남쪽으로 진군할 때 이곳에 이르러 길이 없어졌는데, 마침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는 것을 보고 따라간 것에 기원한다고 전해진다.‘토끼비리’는 문경 가은에서 내려오는 영강과 문경새재에서 내려오는 조령천이 합류하는 협곡에 있는 길이 500m의 천도로, 데크길로 잘 정비되어 있으며, 그 길의 끝에는 진남교반의 절벽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바로 앞을 흐르는 동강과 고모산성의 모습도 관찰할 수 있다.작은 연못 뒤 배 형상 바위 위에 위치한 정자여름이면 능소화·연꽃 활짝 펴 포토존 핫플□ 주암정 근암서원문경하면 문경새재는 이제 그만, 잘 알려지지 않는 여름 문경 여행지를 찾고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명소, ‘주암정’이다. 문경시 산북면 금천변에 위치한 ‘주암정’은 그 이름 그대로 배의 형상을 한 바위 위에 위치한 정자이다. 주암정은 조선 현종 때의 선비인 주암 채익하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1944년에 세운 정자로. 정자 앞으로는 작은 연못이 있고 여름이면 능소화와 연꽃이 그 분위기를 더하고 있어, 많은 사진작가들이 앞다투어 찾고 있는 명소이다.산북면에 위치한 한 곳을 더 들른다면 ‘근암서원’을 추천한다.근암서원은 조선시대 명현인 칠현을 배현하는 서원으로 고종 때 서원 철폐로 사라졌다가, 2011년 지역 유림과 시민들의 염원을 담아 옛 모습대로 복설되었다.지원루를 지나면 동재와 서재가, 전면에는 강당이 위치하고 있으며, 강당 뒤에는 내삼문과 경현사로 이루어진 사당 공간이 별도로 배치되어 있다. 근암서원에서는 ‘출사동이 선비체험교실’, ‘한자왕 선발대회’, ‘인문학 아카데미’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이 이루어지기도 했다.이번 여름 선비정신을 되새기고 고즈넉한 서원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근암서원을 찾아 힐링의 시간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강남진기자75kangnj@kbmaeil.com

2023-07-06

“새로운 미래를 향한 혁신과 도전으로 변화하는 청도”

김하수 청도군수가 ‘청도를 새롭게! 군민을 힘 나게!’란 군정 슬로건으로 출범한 민선 8기의 1주년을 맞았다.지난 1년 군민과 함께 발로 뛰며 현장의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현장 소통행정으로 변화와 혁신의 군정을 펼쳤다는 평가다. 이를 통해 지난해 총 33건의 공모사업 선정으로 595억 원의 예산을 확보하고 올해도 상반기에만 지역활력타운 조성사업을 포함한 총 21건의 공모사업 선정으로 475억 원의 예산을 확보해 청도의 지속 가능한 성장동력과 안정적인 농가소득 보전, 지역의 미래 인재 육성과 어르신의 건강한 삶을 위해 든든한 기반을 마련했다.2023년 본예산 6천20억 원을 편성해 청도군 역사 이래 처음으로 6천억 원대 예산 시대를 열었다.또 대한민국 자원순환 부문 ‘환경대상’과 농촌 활력 업무평가 ‘대상’, 경북도 새마을종합평가 ‘최우수상’ 등 32개 분야의 수상으로 지역 위상을 높였다.김하수 청도군수는 ‘유지경성(有志竟成,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으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자세로 군민과의 소통, 현장 행정을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 미래농업 육성으로 부자가 많은 고장청도군은 기후변화와 4차산업 혁명 시대에 대응하고자 청년들이 초기 부담 없이 고소득 농업에 진입할 수 있는 임대형 스마트 팜 조성과 농산물 안전분석실 건립, 농축산물 가격 안정 기금 100억 조성(목표 200억 원) 등 미래 지역농업의 성장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 중이다.6차산업 육성과 농업 부가가치 향상을 위한 다양한 농업정책을 추진해 친환경 우렁이 농법으로 재배한 다솜쌀을 캐나다로 수출하고 감 말랭이 해외 수출시장 개척을 위해 일본 (주)팜마인드와 MOU를 체결하기도 했다.지역의 근간인 농가 일손 부족 해소를 위한 농촌 일자리 지원센터 직접 운영과 필리핀 외국인 계절근로자 유치, 미래농업 전문인력 양성, 농어민 수당 지원 등 농업인의 복지와 편의 증진에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다 함께 누리는 행복한 복지어르신을 위한 노인복지기금 조성과 복합시설인 청도 드림생활봉사센터를 11월 준공해 수요자 중심의 노인 복지서비스를 제공한다.경로효친의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100세 이상에게 장수축하금(100만 원)을 지급하고 지역 내 균등한 서비스 제공과 복지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생활민원 바로 처리 서비스를 7월부터 시행한다.여기에 치매 안심센터와 정신건강복지센터의 맞춤형 치매 통합관리 서비스 제공에 각종 감염병에 대응한 보건소 이전 신축도 추진한다. 출산장려금 지원과 외래 산부인과 운영, 다 함께 돌봄 센터 확대, 학교급식 지원 등으로 아이 키우기 좋은 환경을 적극적으로 조성한다.□ 신성장산업 육성지역의 새로운 활력을 위해 2천657억 원이 투자되는 청도 자연드림파크 조성사업으로 700명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지역 유휴시설을 활용한 지역 청년 농부 등 민간 자생조직의 액션그룹을 육성하고 농촌 신활력플러스 사업도 지속으로 진행한다.사람들이 즐겨 찾는 새로운 핫플레이스를 조성하기 위한 반려동물을 위한 콘서트 개최와 반려동물 치유 센터 건립, 140여 개의 전원 카페 축제도 개최한다.전통시장 시설개선과 확충, 공공 일자리 창출, 소상공인과 중소기업 지원, 청도 먹거리촌 조성 등으로 지역경제 활성화 사업에도 총력을 기울인다.□ 더 빠르고 편리한 교통 중심지 역할청도는 영남의 중심지로 인근 대도시와 1시간대 1천300만 명의 유동 인구의 강점을 살려 물류 인프라 확충과 관광객 유치를 위한 빠르고 편리한 교통망을 구축한다.동대구를 20분대로 연결하는 대구권 광역철도 ‘경산~청도’ 구간 연장, 청도 풍각면~창녕 성산면을 잇는 마령재터널 건설, 금천 박곡~울주 언양 간 터널개설 등 현안 사업의 차질 없는 추진으로 교통환경 개선을 개선한다.또 광역도로망 구축과 각종 농어촌도로 확·포장에도 속도를 높인다.□ 상생의 균형개발주거·문화·복지 등이 복합된 주거단지인 지역활력타운조성으로 청년층의 지역 정착을 지원하고 청도읍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2025년 준공해 90세대의 공공임대주택을 지원한다.내년에 공용주차장과 상생협력상가, 활력 쉼터 등을 마무리하고 산복도로 야간조명 경관개선 및 도시계획도로 개설, 청도역 신축으로 청도 중심지에 변화의 새 바람을 불어넣는다.농촌중심지 활성화 사업(화양읍, 각북면)과 기초생활거점 육성사업(운문면, 매전면) 등으로 낙후된 농촌의 균형 발전에도 총력을 기울인다.또 주거지 공영주차장을 확대해 주차난도 해결한다.□ 매력 있는 교육문화 관광도시청도군은 평생학습 교육도시로 발돋움하고자 대구한의대와 MOU를 체결해 전국 최초로 ‘청도인적자원개발학과’를 설치하고 도민행복대학 등 지역특화 평생교육을 지원하고 조성된 142억 원의 인재육성장학기금을 확대 지원해 인재를 육성한다.지역과 깊은 연관이 있는 화랑과 세속오계의 정신·문화·체험활동 등의 다양한 사업을 추진해 청도를 문화·레저 관광명소로 발전시켜 나간다.특히 새마을운동발상지 기념공원 운영 활성화와 해외 새마을 시범 마을 조성, 흙 살리기 운동과 재활용품 경진대회 등을 새마을정신을 지속으로 계승·발전시켜 나간다.환경 변화와 새로운 관광지 개발 등 미래 지향적 관광 트렌드를 반영하고자 선정한 청도관광 9경(景)을 잘 활용해 방문객들이 또다시 찾고 싶은 고장으로 만들어 간다.운영 중인 자연휴양림과 건립될 산림치유힐링센터, 청도읍성, 레일바이크 등 청도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활용한 특색있는 치유와 힐링의 환경을 조성한다.□ 군민이 행복한 공감의 행정도시청도군은 군민 모두의 행복한 삶을 위해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청도 행복 헌장’을 올해 초 제정해 군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다.지난 3월에는 청도군민 아이디어 프리 토크로 제안된 61건의 의견을 수렴하고 5월에는 민간 사회단체장과 함께하는 확대 간부회의를 전국 최초로 개최했다.열린 군수실 운영과 찾아가는 현장민원실 운영, 민원실과 보건소에 민원 안내 AI 로봇 도입, 재활용품 선별 AI 로봇을 작업 현장에 투입해 안전한 환경조성 등 변화된 행정 서비스로 신뢰받는 행정을 추진한다.24시간 통합 관제센터 운영하고 1 마을 1개소 이상의 CCTV 설치, 풍수해 생활권 종합 정비와 자연재해위험지구 정비, 생태하천 조성사업 등 각종 재해 예방사업 추진으로 군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김하수 군수는 “민선 8기 1년 동안 군민이 행복하고 미래가 있는 희망 청도를 위해 열정을 다해 군정을 펼쳐왔다”며 “새로운 미래를 향한 끊임없는 혁신과 도전 정신으로 다시 한번 신발끈을 동여매고 600여 공직자와 합심해 군민들이 새롭게 변화하는 청도의 모습을 체감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성과를 창출하겠다”고 밝혔다.김하수 청도군수의 2년 차 군정의 핵심은 △군민의 의식 선진화로 지속 성장할 수 있는 평생학습 교육도시 △고부가가치의 문화관광사업 육성과 문화예술공간 조성 등으로 문화관광예술 도시 △핵심 농업 인재 양성 등으로 새로운 농정 패러다임 등이다. /심한식기자 shs1127@kbmaeil.com

2023-07-05

1925년 초가 세 칸에서 시작한 구룡포교회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어촌에는 무속신앙이 강하다. 예측 불가능한 바다에서 일하려면 무속의 힘에 기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강신규 선생의 집안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줏단지를 깨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사업을 일으킨 뒤에는 지역 교회를 개척하는 데 앞장섰다. 설립 100주년을 앞둔 구룡포교회(2011년 늘푸른교회로 명칭 변경)와 구룡포의 신앙에 관해 들어보았다.배 : 해안 지역은 무속신앙이 강할 수밖에 없었지요?강 : 바닷가에는 샤머니즘이 강해. 바다 일은 사람의 힘으로 안 되니까. 특히 바람을 다스리는 영등(영두)할머니를 끔찍하게 섬기지. 영등할머니가 딸을 데리고 오면 바람을 일으키고, 며느리와 함께 올 때는 비가 내린다고 해. 다시 태어나도 영등을 통해야 하고, 아들도 점지해준다니 섬길 수밖에. 당시만 해도 배는 남자들만 타는 전유물이었어. 출항 전에 여자가 어선에 오르거나 그물을 밟으면 안 된다고 했지.배 : 지금도 예전 풍습이 남아 있지요?강 : 새해 첫 수산물 거래를 앞두고 초매식(初賣式)을 해. 처음 매매하는 생선으로 제상을 차리고, 수협 조합장과 이사들이 절을 하고 풍어와 무사 안녕을 기원하지. 매년 이어지는 풍습이야. 그리고 풍어제도 있어. 용왕당에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를 지내지. 올해도 어황이 안 좋으니 동네에서 무당을 불러 1박 2일 굿을 했어. 등록된 무속인이 와서 전복과 해삼, 성게도 많이 잡고 어촌계원들의 안전을 빌었지. 예전에는 선박이 나갈 때마다 고사를 지냈어. 무속인이 와서 징을 치고 축수(祝手)를 했지. 부친이 교회 장로여서 굿을 못 하게 했지만 선원들은 가만있지 않았어. 배 : 선주도 굿을 말리지 못했군요?강 : 목사까지 와서 무속을 금했지만 선원들은 듣지 않았어. 바다에 생명을 맡겨야 하는 선원들로서는 오랜 믿음을 깨기가 쉽지 않았던 거지. 고기잡이를 나가는 선원들은 포항이나 발산, 흥안으로 배를 옮겨 무당을 불러서 고사를 지내고 출항했어. 그렇게까지 하는데 별수 있나. 부친이 경비는 보낸 걸로 알아. 교회는 날씨가 좋아도 일요일에는 출항을 금했지만, 선원들은 그럴 수 없었지.배 : 선원들은 생계가 걸린 일이니 물러서지 않았나 봅니다.강 : 그렇지. 생계 때문에 날씨만 좋으면 바다로 나가야 했지. 포경선 선원들은 흥안리와 발산리에서 걸어왔어. 후동리에 있는 하수종말처리장을 지나 산길을 넘었지. 지금이야 등산로라도 있지. 당시엔 빨리 걸어도 두 시간 걸리는 거리를 새벽에 걸어왔어.배 : 교회에 다니는 선원은 없었나요?강 : 한때 동해에서 장어가 엄청나게 잡힌 적이 있는데 발산리에 있는 작은 교회에 교인들의 헌금이 1억 원이 넘었다고 해. 예배를 보고 나가면 사고도 안 나고 고기도 잘 잡힌다는 소문이 돌자 신도가 많아진 거지.배 : 강두수 선생이 교회에 헌신한 이유가 궁금합니다.강 : 대구고등성경학교(1919년 개교 당시는 ‘대구동산 성경학교’라 불림)를 다녔으니 말해 뭐해. 이 학교의 교육 목표가 장래 교회 인도자 양성이라고 하더군. 아버지가 1955년에 장로가 되시고 나서 사업은 나날이 번창했어. 부친은 베풀기를 즐겨 기부를 많이 했어. 상정, 장길리, 석병 등에 교회를 개척하는 데 큰 보탬이 되었지. 아버지를 비롯해 신도들이 흙을 나르며 물심양면으로 도왔어.배 : 구룡포의 교회 역사가 100년이 다 되어 간다고 들었습니다.강 : 1925년에 구룡포교회가 설립되었지. 연혁을 보면 대구 동산기독병원에서 박덕일 목사를 파송해 설립했어. 용주리에 초가 세 칸 예배당으로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제대로 된 건물이 없어서 가마니를 깔고 예배를 봤다고 해. 광복 후에는 구룡포 5리에 있던 일본인 사찰을 인수해 예배를 봤지.구룡포교회는 일제강점기 대구 동산기독병원(동산의료원)에서 조직된 전도회를 통해 개척되었다. 동산의료원 선교사들이 건립한 교회는 대구·경북에 100개가 넘는다고 전한다. 동산기독병원 전도목사였던 박덕일 목사는 구룡포교회의 초대 목사로 파송되었다.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제2대 플레처 원장은 부임 후 전도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쳐 나갔다. 그는 우리말이 서툰 선교사들보다 현지인이 전도하는 것이 훨씬 효과가 크다고 생각하고 박덕일(1930년까지 시무) 목사를 1921년 1월에 동산기독병원 전도목사로 임명했다.전도회 최초 개척교회는 1921년 11월에 박덕일 목사가 개척한 고령군 덕곡면 반성교회이며, 병원 전도회가 147개 교회를 설립하였다고 하나 기록상으로는 127개 교회로 되어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대표적 교회 가운데 대구 시외에 있는 교회는 영천금교회, 구룡포교회, 경주아화교회, 청도신읍교회, 장기교회, 건천제일교회, 칠곡동명교회 등이다.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블로그 “다시 보는 동산 역사 : 1921년 ‘동산 기독병원 전도회’ 설립, 복음의 씨앗을 뿌리다!” 배 : 구룡포교회를 구심으로 인근에 여러 교회가 세워졌다고요?강 : 교회에 큰 종탑이 있었는데 종소리가 온 동네로 퍼져 나갔어. 새벽 4시에 종소리가 울리면 배 나갈 시간으로 알았으니까. 구룡포교회가 ‘어머니 교회’가 되어 인근 지역으로 교세를 확장했어. 1960~70년대 신도는 300명에 가까웠어. 인구가 3만 5천 명 정도 되던 때지. 어려운 시절이지만 십시일반으로 서로 도왔어. 1990년대 이후 교세가 점차 약해졌지.배 : 교인들이 예배당을 짓는 사진이 있군요.강 : 교인들이 모래와 자갈을 옮겨가며 건물을 지었지. 교인들의 인력 봉사로 1949년 상정교회, 1953년 장길리교회, 1961년 석병교회, 1979년 삼정교회가 설립되었어. 교회를 개척하는 일 자체가 포교였고 신앙생활이었던 거지. 부친은 교회 일이라면 두 팔을 걷어붙였어. 전도사들 학비도 대주었다고 해. 사업이 기울던 1990년대는 빚을 내 헌금했을 정도야. 교회에 그렇게 애정을 쏟으니 구룡포교회를 강두수 교회라고 말하는 교인도 있었어.배 : 어린 시절 기억에 남는 교회 풍경이 있나요?강 : 어머니가 교회에 가서 고무신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당부했을 정도로 아이들이 많았어. 그때 사진이 있는데 워낙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새까맣게 모여 있어 내가 나를 못 찾겠어. 1948년에 구룡포교회 부설 유치원이 설립되었는데 나도 거길 다녔지. 아버지가 그 유치원을 설립할 때 자금을 대셨고 초대 원장을 맡은 걸로 알아.배 : 유치원에 다닐 때 추억이 있나요?강 : 당시엔 두세 살 차이가 나는 아이들과 함께 유치원을 다녔어. 홍역이나 천연두가 무서웠던 시절이어서 아이가 태어나도 어느 정도 자라서야 호적에 올렸거든. 찾아보니 내 사진은 남아 있는 게 없는데 친하게 지내는 후배 사진은 있더라고. 원복을 맞춰 입은 모습을 보면 여유 있게 잘살던 시절이다 싶어. 다른 기록은 2011년 교회를 신축하면서 거의 사라졌어. 당회록도 1940~50년대 기록은 소실되었어.배 : 강두수 선생은 교육사업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강 : 구룡포 수산고등학교에 교육용 선박을 기증했어. 연안에서 운항 기술을 가르칠 저인망 실습선이었어. 20~25t 어선이 대부분이던 시대였지만 실습선은 30t 넘는 목선이었어. 구룡포수협조합장을 할 때 기증하셨을 거야. 실습을 안 할 때는 외삼촌이 속초로 몰고 나가 고기를 잡아왔어. 아버지는 나한테 교육자가 되고 싶지 않은지 물어보셨지만 나는 관심이 없었어.배 : 기증한 선박은 실습이 필요한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겠습니다.강 : 그랬을 테지. 구룡포 수산고등학교를 다닌 친구들이 있었는데 실력이 꽤 좋았어. 성적은 뛰어나도 타지로 갈 만큼의 경제적 여유가 없는 친구들이 수산고로 진학했지. 수산고등학교 항해과를 나와서 부산 해양대학을 거쳐 상선을 모는 선장도 배출되었고. 내가 대학 다닐 때 원양어선을 타고 제법 큰돈을 버는 친구도 있었지.강신규1947년 구룡포에서 부친 강두수와 모친 하순분의 1녀 3남 중 셋째로 태어났다. 강두수(姜斗洙, 1919~1998) 선생은 광복 후 포항과 구룡포에서 처음으로 고래잡이를 허가받은 포경선 선주이며 구룡포수협 초대, 3대 조합장을 지냈다. 적산가옥에 살면서 구룡포항을 놀이터 삼아 자란 강신규(姜信圭) 선생은 구룡포 동부초등학교를 나와 대구 계성중·고등학교, 국민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서울 완구진흥공단과 구룡포수협, 장로회신학대학에서 근무하다가 1990년대 부친과 함께 호미곶 강사 2리에서 냉동공장을 운영했다.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사진 제공 : 강신규

2023-07-05

대의와 명분의 이름으로 ‘비극의 굴레’에 갇힌 명장

몰락한 금관가야의 후손으로 신라사회에 편입한 김유신의 가문은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를 갖춘 신라 귀족과는 거리가 멀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그럼에도 열다섯 살에 수백 명의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끄는 화랑이 됐고, 이후 백제·고구려와 수십 년 이어진 전투에서 신라의 다른 어떤 장수도 흉내 내지 못할 전공(戰功)을 세웠다. 뿐인가. 내란이 발생했을 땐 왕의 곁에서 듬직한 보디가드 역할을 했다.다섯 명의 아들과 딸 넷을 뒀으니 자식복도 없지 않았다. 남성의 평균수명이 겨우 마흔 안팎이었을 7세기에 머리는 물론 수염까지 하얗게 센 일흔여덟까지 살았으니 천수(天壽)를 누렸다.죽음 이후에는 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존재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았고, 사후 1천300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도 문맹의 노인들까지 ‘김유신은 신라의 명장’이란 걸 모르지 않는다.논쟁의 여지가 없이 분명하다. 김유신은 삼국통일, 또는 삼한일통((三韓一通)을 이야기할 때 가장 첫머리에 언급되는 인물.그렇다면 입이 아프도록 앞서 열거한 ‘화려한 이력’만이 김유신의 전부일까? 당연지사 아니다. 그럼 무엇이 그의 삶에 드리웠던 어둡고 습한 그림자였을까. ◆ 사랑하는 여인에게 등 돌려야했던 서러운 사연비단 역사 속에 뚜렷한 이름을 남긴 사내만은 아닐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남자들 절대다수는 ‘첫사랑’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이는 ‘감성적 생물’로서의 인간이 가진 특질이니까.김유신이 화랑이 된 후인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 시기로 추정된다. 그에게도 생애 처음인 사랑이 찾아왔다. 천관(天官)이라는 여성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기녀(妓女).김유신의 부모가 그녀를 두 팔 벌려 환영했을 가능성이 있었을까? 없었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가뜩이나 신라 정통귀족이 아닌 것에 콤플렉스를 가졌을 김유신의 집안에서 술 따르고 춤추는 여자를 아들의 배필로 원하지는 않았을 터.고려의 학자 이인로(李仁老·1152~1220)는 ‘파한집(破閑集)’에서 김유신과 천관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관해 쓰고 있다. 요즘의 방식으로 풀어 쓰면 이런 내용이다.“김유신이 젊었을 때 어머니인 만명부인은 엄한 가르침에 더해 교유(交遊)함을 잊지 말도록 했다. 만명부인이 말하기를 ‘나는 이미 늙었다. 밤낮으로 네가 성장하는 모습만을 바라보고 있다. 공을 세워 나라의 영광이 되어야 하거늘, 너는 술 파는 아이와 유희나 즐기고 있구나’라며 울었다. 이에 김유신은 다시는 천관에게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하루. 만취한 김유신을 태운 말이 옛길을 따라 가다 천관의 거처에 이르고 말았다. 김유신은 한편으론 기뻤지만, 눈물을 흘리며 반갑게 맞이하는 천관을 못 본 척했다. 그곳까지 자신을 데려간 말은 목을 잘라버리고, 안장은 그곳에 버렸다. 이에 천관이 크게 절망해 노래 하나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경주의 천관사(天官寺)가 그때 그 집이다.”그렇다면 실연(失戀)한 천관은 어떻게 됐을까.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소설 속 주인공 ‘베르테르’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가 있고, 또 다른 속설에 의하면 “머리 깎고 여승(女僧)이 돼 다시는 환속(還俗)하지 않았다”고 한다.이처럼 김유신에게도 첫사랑에 실패하고 좌절했던 홍안의 소년 시절이 있었다. 몇 주 전 경주를 찾아 천관사지(天官寺址·천관사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절터)를 돌아봤다.슬픔으로 기록된 신라 청춘남녀의 눈물겨운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은 푸른 풀만이 무심하게 바람에 나붓거리고 있었다. ◆ 계백과 맞선 황산벌에서 조카를 죽음으로 내몰다삼국통일의 과정에서 가장 드라마틱하며, 후일담이 많이 떠도는 사건 중 하나가 ‘황산벌전투’다. 백제의 맹장 계백과 김유신이 맞붙었던 싸움. 여기서 만들어진 게 ‘신라 화랑의 전설’로 남은 관창과 반굴의 피비린내 나는 에피소드다.TV드라마와 영화로 수십 차례 재탕된 것이니 황산벌전투에 관해선 긴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660년. 지금의 충남 논산 일대에서 죽음을 각오한 백제의 ‘오천 결사대’에 밀리던 신라군이 화랑 두 명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고는 분노했고, 이에 전의(戰意)를 불태워 백제 군대를 전멸시킨 게 바로 황산벌전투. 백제는 이 전투 이후 몰락한다.바로 여기서 피어보지도 못한 꽃봉오리처럼 사라진 두 화랑 중 한 명이 김유신의 조카 반굴이다.당시 국방부장관 겸 육군참모총장의 역할을 수행하던 김유신에겐 황산벌전투의 양상을 뒤집을 카드가 절실하게 필요했다.‘젊은 지휘관의 희생’이 그가 선택한 ‘히든 카드’였다. 당시 김유신 동생 김흠순의 아들 반굴은 겨우 20대 초반, 좌장군(현재 육군참모차장 정도의 계급에 해당) 김품일의 아들 관창은 만으로 15세에 불과했다.육군사관학교 군사학과 이상훈 교수의 논문 ‘황산벌의 위치와 전투의 재구성’은 반굴과 관창의 죽음을 감정은 배제한 채 드라이하게 서술하고 있다.“황산벌전투 당시에는 백제군이 참호나 목책 등으로 방어시설을 구축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의 반굴은 ‘입진(入陣·맞서 싸우는 상대의 진영으로 들어가는 것)’하여 싸우다가 사망하였고, 관창은 말을 타고 ‘적진(敵陣·상대편 군대가 밀집한 진영)’에 뛰어 들어갔다가 포로가 된 후 되돌아왔다. 관창은 신라군 진영에 돌아온 후, 우물물을 마시고 다시 적진에 뛰어들어 싸우다 사로잡혀 참수됐다. 백제군은 관창을 참수한 후 말안장에 매어 신라군 진영으로 돌려보냈다.”비단 신라만이 아니다. 나라의 명운을 건 전쟁에 최고 권력층의 자제가 참전하거나, 거기서 전사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게 발견된다.중국 국가주석 모택동(毛澤東)의 아들 모안영(毛岸英)은 인민지원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죽는다. 70여 년 전 이야기다.영국 왕위 계승 서열 5위였던 해리 윈저(Henry Windsor·39) 왕자는 10년을 영국군에서 복무했다. 그는 헬기를 조종할 줄 알며,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아프가니스탄에 두 차례나 다녀온 걸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높은 지위에는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 그 책임의 완수를 위해 조카 반굴을 죽음의 길로 보내야했던 김유신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보통의 사람들로선 짐작이 어렵다. 그러나, 그게 흔쾌한 결정이 아니었음은 누구라도 알 수 있을 듯하다.조카 반굴의 전사는 김유신이 예순다섯에 겪은 참혹한 비극이다. 이 또한 김유신의 삶에 드리운 눅눅한 그림자가 분명하다. ◆ 왕에게 전투에 패한 아들을 처형하라고 청하다앞서의 언급처럼 김유신은 일흔여덟에 사망한다. 그가 죽기 1년 전. 당나라와의 전투가 석문에서 벌어진다. 김유신의 차남 원술(元述)이 참전한다. ‘삼국사기-김유신열전’에 이 싸움이 기록돼 있다.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원술은 672년 석문전투에 비장(裨將)으로 참가하였다가 패배했다. 당시 원술은 나아가 죽고자했으나, 그를 보좌하던 담릉이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고 만류해 결국 죽지 못했다. 원술이 살아서 돌아오자, 김유신은 국왕(문무왕)에게 ‘왕명을 욕되게 했을 뿐 아니라 가훈을 저버렸기에 목 베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국왕의 만류로 처형당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 김유신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듬해 원술이 김유신의 사망 소식을 듣고 찾아오자, 이번에는 어머니가 원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원술은 675년 매소성전투에서 공을 세워 상을 받았으나, 부모에게 용납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결국 벼슬을 하지 않고 세상을 마쳤다.”문무왕은 김유신 여동생 문명왕후(文明王后)의 아들이다. 그러니, 문무왕과 원술은 사촌지간. 아무리 큰 실수를 했더라도 사촌을 처형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그 실수는 원술이 의도한 것도 아니었다.물론, 김유신 역시 그런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자식이 듣는 앞에서 “너는 죽어 마땅하다”며, 다시는 얼굴을 마주보지 않았다는 건 21세기의 상식으론 이해가 쉽지 않다.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 중 하나가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 아닐까?대의와 명분을 위해 “내 아들의 목을 베라”고까지 말해야했던 김유신은 그날 무너지던 심정을 가까스로 남들 앞에서 숨겼을 게 분명하다. 바로 그게 그의 삶을 가장 넓고 깊게 그늘지게 했던 그림자였을 것이다.(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3-07-04

“공공기반 활용한 지역 연극계 동반성장이 목표죠”

예술은 특정한 누구의 것이 아니라 모두가 향유하는 권리이다. 이 같은 예술의 공공적 가치는 공립예술단의 존재 근거가 된다. 전국에 산재한 국공립극단이 만나는 ‘대한민국 국공립극단 페스티벌’이 올해로 14회를 맞았다. 내일(오는 5일)부터 한 달여간 전국 8개 극단이 경주를 찾는다. 축제를 주관하며 피날레를 장식하는 경주시립극단의 김한길 예술감독을 만났다. 경주시립극단 출범 이후 가장 젊은 감독으로 주목받았던 그는 지난 7년간 경주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경주말과 지역민의 정서를 담아왔다. 창작인으로서의 꿈과 고뇌, 지역 연극 발전을 위한 공립극단의 역할까지 그의 고민은 깊었다. -경주시립극단 예술감독으로 부임한지 벌써 7년이 됐다.△임기 2년으로 와서 지금까지 있을지 몰랐다. 집주인 할아버지가 좋은 분이어서 몇 년째 같은 집에 산다. 민간에서 공립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면서 책임감과 부담감이 컸고 공립극단으로서 역할을 고심했다. 지역민에게 문화적 향유의 기회를 제공하는 데 우선을 두고 경주의 브랜드가 될만한 소재 발굴을 고민해 왔다.-구체적으로 어떤 작품을 선보였나.△경주말과 경주 사람의 정서를 담으려 했다. 오태석의 연극 ‘자전거’를 경주 사투리로 바꾸고, 경주를 배경으로 손기호 작가가 쓴 ‘송화꽃 지면 송화 날리고’를 연출했다. 경주를 소재로 극을 쓰고 연출한 작품도 꽤 있다. 경주 웃시장(성동시장)과 아랫시장(중앙시장)을 무대로 한 악극 ‘바람아 구름아’, 일제강점기 경주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1915 경주 세금마차사건’,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를 경주 남산과 삼릉을 배경으로 만든 ‘동경이의 마술피리’ 등이다.-경주시립극단을 이끌면서 역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콘텐츠를 다양하게 선보이려고 노력했다. 코미디 작품 다음은 따뜻한 가족사, 그다음은 묵직한 주제 혹은 친근한 소재의 작품을 배치했다. 코로나로 공연이 힘들 때는 웹드라마도 제작했다. 관객 접근성에 중점을 두다 보니 아직까지 과감하고 실험적인 작품을 시도해 본 적은 없다.-경주에 오기 전부터 극단 ‘청국장’을 이끌며 소시민의 일상을 세밀하게 풀어내는 연극을 해왔다. 연극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고교 시절 별생각 없이 들어간 연극반에 깊이 빠졌다. 연극을 가르쳐 줄 교사가 없어 선배들 어깨너머로 배웠다. 첫 무대는 철학과 교수였던 강월도의 ‘알’로 기억한다. 난해한 내용이라 작품 해석이 제대로 됐을 리 없다. 참여 가능한 인원이 정해지면 서점에서 희곡을 뒤져서 공연작을 골랐다. 진로를 일찌감치 연극으로 정하고 신촌이나 명동, 대학로 무대를 찾아다녔다. 공부는 뒷전이니 집에서 좋아할 리 있나. 이근삼의 ‘연극개론’과 성경책을 챙겨서 가출까지 감행했다.-가출하면서 어떻게 책을 챙길 생각을 했나.△기독교인도 아닌데 성경책을 챙긴 건 삐뚤어지진 않겠다는 의지가 아니었을까. 당시 내게는 그 책들이 안전장치였던 것 같다. 이후로 부모님도 크게 말씀을 안 하셨다. 그러다 극단 ‘로얄 씨어터’의 ‘삼일로창고극장’이 건너 골목으로 이사를 왔고,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극단에 들어가 포스터부터 붙였다. 선배의 대타로 첫 무대에 올랐고, 제대 후 창작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마차’로 정식 데뷔했다.-배우로 연극을 시작한 것인가.△그렇다. 연기를 하면서 뭘 자꾸 끄적이는 날 보더니 당시 ‘로얄 씨어터’ 연출이던 류근해 상명대 교수가 희곡을 써보라고 했다. 그해 서울예대 극작과에 진학했다. 쟁쟁한 98학번 동기들과 희곡을 쓰고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뮤지컬 스타 정영주와 극단 ‘여행자’의 김은희 대표, 한윤섭 아동문학가 등이 동기다.-극단 ‘청국장’을 오랫동안 이끌고 있다.△처음에는 대학 친구들과 극단 ‘누에’를 창단했다. 간결하면서도 주제를 압축하는 단막극이 한국에도 필요하다는 대학 은사의 권유로 비롯됐다. 생활전선으로 나가는 단원들이 많아 오래가지 못했다. 극단 ‘청국장’은 내가 쓰고 연출한 ‘장군슈퍼’와 ‘사랑의 피아노’ 스텝들과의 의기투합이었다. 고초균으로 발효되는 청국장과 연극 작업이 비슷하다고 술자리에서 이름을 지어놓고 다음날 진짜 그걸로 할 거냐고 확인하고 그랬다.-소시민의 담백한 삶에 가치를 두는 이유는.△한 작가의 작품은 자신과 주변의 이야기를 지나 세계를 확장하는 과정을 거친다. 무대는 일상과 다른 공간이고 허구의 이야기가 극적인 언어로 펼쳐진다. 무대 언어로 꽉 찬 공간에서 쨍하도록 투명한 일상의 언어를 발견하는 것은 즐겁다. 주변에서 ‘디테일 김’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확실히 섬세한 일상 묘사에 관심이 크다. 현실적인 이유를 들자면 주로 소극장에서 공연했기 때문이다.-대한민국 국공립극단 페스티벌이 14년째 이어온다. 페스티벌에 대한 연극계의 인식이 궁금하다.△공공극단의 유일한 페스티벌로 의의가 크다. 각 지역의 공립극단은 지역의 소재와 사투리의 가치를 담은 작품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만 각 지역에 소속되어 있고 단 1회 공연이라 신작을 선보일 수 없어 아쉽다. 전국의 공립극단이 지역 민간 연극단체와 교류하며 연극의 발전에 힘쓰는 만큼, 국공립극단 페스티벌과 대한민국연극제가 서로의 곁을 내어주며 연극계 전체의 축제로 확장하는 것도 제안하고 싶다.-‘공립’과 ‘극단’은 어떻게 공존해야 할까.△국공립 단체의 예산은 세금이다. 내 또래의 연극인들은 대부분 대리운전을 비롯한 아르바이트를 한다. 안정적이라는 것은 장점이자 동시에 경계해야 하는 부분이다. 월급이 ‘연극쟁이’로서의 기질을 앗아간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있지만 개선 방법을 찾기란 쉽지 않다. 공익성과 공공성 추구라는 공립극단의 역할에 대한 고민은 계속하고 있다. 시민연극교실과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을 찾아가 그림책을 읽어주는 ‘경단(경주시립극단)이와 떠나는 그림책 여행’이 고민의 산물이다. 더불어 공공적 기반을 활용해 지역 연극계를 활성화하는 방안도 고민해야 한다. -경주 지역 연극인들과도 교류를 하나.△경주 연극계는 토양이 훌륭하다. 경주시립극단의 모태가 된 ‘에밀레 극단’이 건재하고, 인형극으로 출발한 ‘극단 깨비’는 장르를 넓히는 등 쟁쟁한 창작진이 모여있다. 이러한 토대 위에 공공 영역이 민간을 포용하면서 지역 연극계가 발전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탄탄하고 안정적이지만 신선함에 목마른 공립극단과 예술혼으로 활활 타오르는 민간 영역이 상호작용을 일으킬 것이다. 다양한 시도를 모색해 볼 가치가 있다.-페스티벌 폐막작으로 ‘1915 경주 세금마차사건’이 다시 무대에 오른다.△일제강점기 실제로 독립자금 확보를 위해 경주에서 일어난 세금마차 탈취사건을 다룬 연극이다. 무대에서 한번 관객을 만난 작품은 연습 과정에서 농축된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거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지나갔던 대사가 다르게 다가올 수도 있다. 그 사이 연극은 숙성된다. 보통은 두 달 연습해서 사흘 공연하니 늘 아쉽다. ‘복사꽃 지면 송화 날리고’를 2주간 공연한 적이 있다. 작품에 자신이 있었기에 그럴 수 있었다. 수요 관객이 그만큼 안될 것이란 우려가 컸지만 입소문이 나면서 갈수록 관객이 늘었다.-올해의 참여작 성향은 어떤가. 주목되는 작품을 소개해준다면.△가족 콘텐츠가 늘었다. 새로운 형식이 기대되는 무대는 경남도립극단의 오브제음악극이다. 수원시립극단은 권호성 예술감독이 부임하고 첫 작품이라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악극을 자주 공연하는 경산시립극단의 무대에서 악극의 노하우를 살펴봐도 좋겠다. 한 인물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조명하는 ‘전명출 평전’을 인천시립극단이 어떻게 녹여낼지도 궁금하다. 옆 동네 포항은 물론이고 어린이극으로는 첫선을 보이는 목포, 작년과 동일한 작품으로 농익은 정도를 살피기 좋은 부산도 기다려진다. 작년 페스티벌에서 전 작품을 모두 관람한 관객이 200여명이었다. 올해도 여덟 작품 모두 놓지지 않길 바란다. 관객과의 대화 시간과 배우와의 포토타임, 내가 뽑은 최고의 배우상도 즐겨주길 바란다.-앞으로 더 해보고 싶은 시도가 있나.△더 이상의 일을 벌이기보다 임기를 잘 마무리하려 한다.(경주시 조례상 예술감독의 임기는 연임 3회로 제한된다.) ‘경주시민 연극교실’과 ‘경단이와 떠나는 그림책 여행’이 안정적으로 정착되길 바란다. 코로나로 인한 거리 두기로 관객의 기운을 온전히 받지 못한 ‘동경이의 마술피리’를 제대로 된 무대에 올리고 싶은 바람도 있다. 국공립극단 페스티벌이 끝나면 바로 다음 공연을 준비한다. 무언극인 ‘안네의 일기’로 호평을 받은 주혜자 연출이 객원으로 참여한다.-김한길 감독에게 ‘연극’이란.△과거이고 현재이며 미래이다. 연극을 시작하면서 꿈꿔왔던 대부분이 이뤄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꿈을 더 크게 꿀 걸 그랬나 싶다. 나를 대학로에서 경주로 데려온 것도 연극이니, 연극이 또 다른 미래로 나를 데려놓지 않을까. /배은정 작가김한길 경주시립극단 예술감독은서울예대 극작과를 졸업하고 대학로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 4기 동인으로 활동했다. 극단 ‘청국장’ 대표이다. 극을 쓰고 연출한 ‘장군 슈퍼’로 한국예술위원회 신진예술지원을 받았고, 2006년에는 ‘춘천 거기’로 올해의 예술상을 수상했다. ‘장군 슈퍼’, ‘슬픔 혹은’, ‘임대 아파트’로 PAF 극작상을 받았다. 2016년 경주시립극단 예술감독으로 부임해 ‘삼도봉 미스터리’, ‘복사꽃 지면 송화 날리고’, ‘유쾌한 하녀 마리사’, ‘지금도 가슴 설렌다’, ‘열두 명의 성난 사람들’, ‘장마’, ‘귀로’, ‘1915 경주 세금마차사건’, ‘동경이의 마술피리’, 악극 ‘바람아 구름아‘ 등 12여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2023-07-03

“역사·미래 공존하는 경주, 중단 없는 지역발전 이끌 것”

민선 8기 1주년을 맞이한 주낙영 경주시장.재선에 성공한 주낙영 시장은 지난 4년간 신라왕경 특별법 및 시행령 제정을 비롯해 문무대왕 과학연구소 착공 등 지방 소도시를 명품 도시로 성장시켜 많은 지자체의 이목을 끌었다.지난 3월에는 소형모듈원자로(SMR) 국가산업단지 유치에 성공했다. 이는 2025년 준공 예정인 문무대왕과학연구소와 함께 국내 소형모듈원자로(SMR) 산업의 한축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경주시는 이제 경주의 미래 백년대계를 앞당길 2025 APEC 정상회의 유치로 화룡점정(畵龍點睛) 찍겠다는 각오다.무엇보다 올해는 코로나19 엔데믹 이후 큰 어려움에 처한 서민생활의 안정과 지역경제를 살리는 일에 역점을 두고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주낙영 경주시장은 “민선 7기에 이어 중단 없는 지역 발전을 위해 지난 1년간 쉼 없이 달려온 결과 최근 SMR 국가산단 유치 등의 굵직한 공모사업 선정의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며 “앞으로 20년 전 태권도 공원의 정치적 무산을 타산지석 삼아 2025 APEC 정상회의를 반드시 유치해 미래 경주 발전을 위한 화룡점정을 찍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 역점사업 가시적 성과 도출로 경제지도 대변화경주시는 지난 1년 동안 각종 공모에 53건 사업이 선정되면서 국비 6462억 원을 확보하는 성과를 냈다. 이는 지난 민선 7기 1주년 국비 700억원(22건) 성과와 비교하면 무려 9배 이상 국비 예산이 증가했다.이 중에서 단연 으뜸은 국내 처음으로 조성되는 소형모듈원자로(SMR) 국가산업단지 유치다. 동경주 일원에 조성되는 SMR 국가산단은 규모만 150만㎡에 달하고 투입되는 예산도 3천966억원에 이른다.경주시는 SMR 관련 기업의 집적으로 ‘서플라이 체인(Supply Chain)’을 구축해 SMR 수출시장 선점을 기대하고 있다. SMR 국가산단이 가동되면 225개 기업이 입주해 경제적 파급효과는 6조7천357억원, 고용유발효과는 2만2천800명에 이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형산강이 지난해 12월 환경부 주관 ‘홍수에 안전한 지역맞춤형 통합하천사업’에 선정됨에 따라 36㎞ 구간에 3천367억원 예산을 투입해 홍수 안전, 하천 환경개선은 물론 친수공간까지 24개 사업을 추진한다.이번 신형산강 프로젝트는 형산강 발전을 골자로 추진된 ‘형산강 에코트레일’과 ‘형산강 프로젝트’에 이은 세 번째 전략 프로젝트다.신경주역세권 해오름 플랫폼 시티가 국토부 주관 공모사업인 투자선도지구로 지난해 12월 선정됨에 따라 신경주역 일원 113만2천529㎡에 총 5천407여억 원의 사업비가 투입돼 2031년까지 광역교통 연계 융복합 자족도시로 추진된다.경상권 광역교통의 중심지 해오름 플랫폼 센터(복합환승센터)를 건립하고 주변 양성자 가속기 확장, SMR 국가산단 조성에 맞추어 연계 클러스터를 구축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살림살이 2조원 시대 개막지난해 2조 1천억원 규모의 2회 추경예산에 이어 올해 1회 추경예산도 2조 10억원으로 편성해 본격적인 예산 2조원 시대를 열었다.이는 국회와 중앙부처를 수시로 찾아 지방재정의 어려움과 현안사업의 필요성을 토로하고, 각종 공모사업 신청 등 지방교부세 확보에 적극적으로 노력해 온 결과로 분석된다.민선 8기 1주년을 맞아 각 분야별 평가에서는 59건의 기관표창을 받는 등 역대 최다 수상기록을 갈아 치우고 있다. 특히 지난 1월 국민권익위의 공공기관 청렴도 평가(2022년)에서는 전국 75개 기초자치단체 시 부문 종합 1등급을 획득했다.2020~2021년 3등급에서 2단계를 오른 결과다. 2017년부터 3년 연속 최하위 5등급을 받았던 것과 비교하면 무려 5단계나 수직으로 상승했다.또 올 4월에는 한국매니페스토 실천본부 주관 공약 평가에서 3년 연속 최우수 등급을 받았다.이는 민선 8기 공약을 10대 분야로 확정한 후 지난해 8월 공약실천계획 점검 주민평가단 구성하고 3차례 회의를 개최하면서 꼼꼼하고 촘촘한 그물망 계획을 완성한 결과이다.더불어 지방물가 안정관리 최우수 및 안전대전환 집중안전점검 최우수 기관으로 선정돼 경주시가 살기 좋고 안전한 도시로도 평가 받았다.□ 역사와 미래가 공존하는 글로컬 문화관광 도시2025년 우리나라에서 20년 만에 APEC 정상회의가 열린다. 미·중·일·러 4강을 비롯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21개국 정상이 한자리에 모이는 만큼, 정상회의 개최 도시가 얻게 될 유무형의 사회경제적 유발 효과는 상상 이상일 전망이다.경주시는 △경호·안전 안심 최적 △풍부한 숙박시설, 회의시설 및 수많은 국제행사를 치른 경험 풍부 △문화유산 최다보유, 가장 한국적인 도시 △다양한 산업시찰 가능 등을 강점으로 내세워 적극적인 홍보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향후 경주시는 ‘경주유치 범시민추진위원회’와 ‘경주시유치지원위원회’를 중심으로 △정상회의 유치 전략 개발 △대정부 활동 및 유치 공감대 확산 △민간주도의 시민의식 선진화 운동 전개 △친절하고 안전한 손님맞이 준비 등 4대 실천과제 중심으로 유치 활동에 전력투구할 방침이다.올 상반기 최고 이벤트는 단연 대릉원 입장료 전면 폐지와 천마총 발굴 50년을 기념해 열린 ‘대릉원 미디어아트’이다.특히 대릉원 미디어아트 운영기간인 한 달 동안 대릉원을 찾은 관광객 수는 31만4천163명으로 지난해 1년간 전체 대릉원 방문객 132만 9천114명과 비교하면 폭발적으로 증가한 수치다.여기에 경주시는 대릉원과 황리단길에 집중된 관광객들을 중심상가로 유인하기 위해 중심상권 르네상스 사업의 일환인 ‘중심상권 동행’ 행사와 골목야시장인 ‘불금예찬’을 준비해 경주 관광 외연을 시내 전역으로 확장하고 있다.옛 경주역은 ‘경주문화관1918’로 개관 후 복합 문화공간으로 활기를 띠고 있다.올해는 △1918 콘서트(정기공연) △아트마켓 1918(문화광장) △유명 미술가 레플리카 전시(미술 전시) △무료 대관 △문화창작소 프로그램 등을 운영해 MZ세대 발길을 사로잡고 있다.□ 경제가 살아나는 첨단 과학·산업도시경주에 지난 4월 처음으로 자동차 소재부품 연구센터인 ‘차량용 첨단소재 성형가공센터’가 경주 e-모빌리티 연구단지에 들어섰다.경주시는 여기에 △탄소 소재부품 리사이클링센터(2023. 12.) △배터리 공유스테이션 통합관제허브센터(2024. 10.)가 차례로 완공되면 자동차 신기술 보급, 기업지원, 전문 인력 양성 등 글로벌 미래형 모빌리티 소재·부품 전진기지로 조성할 계획이다.현재 감포읍 대본리 일원에 국내 최대 원자력 연구단지인 문무대왕과학연구소가 공사가 한창이다. 이는 한국원자력연구원의 지역분원 형태로 설립된다. 연구인력 400명과 지원관리 인력 100명 등을 포함해 규모가 꽤 크다.경주 SMR 국가산단이 관련 기업집적과 지원이 중심이라면, 문무대왕과학연구소는 SMR 혁신기술 개발이다. 이 두 곳이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내면 경주는 SMR산업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더불어 경주엔 월성원전과 한국수력원자력 본사, 한국원자력환경공단, 중저준위방폐장이 있다. 여기에다 ‘중수로 해체기술원’까지 예정대로 들어서면 경주는 완전의 설계~건설~운영~해체~처분까지 이어지는 전 주기 사이클을 보유하게 된다.민선8기 1년 동안 내실 있는 투자유치 업무협약 10건, 투자금액만 5315억 원의 괄목상대한 성과도 거뒀다.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자동차(1천339억원) 5곳 △소재 제조(2천30억원) 3곳 △물류업(946억원) 1곳 △수소 연료전지(1천억원) 1곳 등 다양한 분야에서 투자유치가 이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황성호기자 hsh@kbmaeil.com

2023-07-03

‘혁신’과 ‘변화’의 1년…구미 재창조 기반 다졌다

지난해 ‘새 희망 구미 시대’를 기치로 취임한 김장호 구미시장은 ‘혁신’과 ‘변화’만이 구미의 옛 영광을 다시 찾을 수 있다며 행정시스템을 ‘속도’와‘성과’중심으로 탈바꿈 시켰다. 김 시장이 이끈 이러한 변화는 1년간의 실적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성과로 드러나고 있다. 굵직굵직한 대규모 국책사업을 연이어 유치·구축하고, 현재는 ‘반도체 소재·부품 특화단지’선정에도 높은 기대를 모으고 있다. 또 예산 2조원 시대와 구미를 대표하는 축제를 개발하고, 정부도 하기 힘든 소아과 진료체계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경제성장과 정주여건 개선이 인구회복으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 발품을 팔아 굵직한 국책사업 유치작년 11월 ‘박정희 대통령 탄신 105돌 숭모제’에서 김장호 시장은 “방위산업 클러스터, 반도체 특화단지 등을 유치해 구미시가 지방시대를 선도하겠다”고 약속했다. 김 시장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주말에도 쉬지 않고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서울 대통령실과 국회, 세종 정부청사, 경북도청 등을 38회 방문했다. 이 기간 이동거리는 4만5천600㎞에 달한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57회 왕복할 수 있는 거리다. 기업체도 37회 방문했다. 이러한 노력 등으로 구미시는 ‘방산혁신클러스터’유치에 성공했고, 7월 중순 발표 예정인 ‘반도체 소재·부품 특화단지’선정에도 높은 기대를 모으고 있다. 또 이차전지 474억원(거점센터 280, 하이테크롤 첨단화 194), 로봇 267억원(애자일 제조 실증기반 121, 자율주행로봇 플랫폼 146), 메타버스 200억원(동북권 메타버스 허브) 등 대형 국가 RD사업 유치도 연이어 성사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발품 행정의 결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기업투자에도 이어졌다. LG이노텍 1조 4천억원, SK실트론 1조 2천360억원 등 글로벌 기업의 대규모 투자를 비롯, 모든 제조업의 근간으로 ‘뿌리산업’으로 일컬어지는 소재·부품·장비 기업의 지속적인 투자를 이끌어내며, 민선8기 1년만에 3조 7천900억원(214개사, 2천791명 고용창출)의 투자유치를 이끌어 냈다.□ 예산전문가, 예산 건전성을 확보하다김장호 구미시장은 예산 전문가로도 유명하다. 안전행정부 교부세과장, 행정자치부 재정정책과장, 경북도청 기획조정실장 등을 역임한 경력 때문이다. 김 시장은 취임 직후부터 구미시의 재정건정성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 작년 12월 사상 첫 예산 2조원 시대로 진입한 구미시는 2023년 1조 8천208억원의 예산을 편성했다. 이는 2022년 본예산 1조 5천억원 대비, 1년만에 3천200억원이 증가한 역대 최고 규모로, 지난 12년간(2010∼2022년)의 예산 증가액(3천500억원)과 맞먹는 엄청난 수치다. 지방자치단체의 경우 대부분 예산 규모가 대폭 증가하게 되면 지방채가 늘어나 재정적인 부담이 가중될 수밖에 없는데, 구미시의 경우는 달랐다. 오히려 지방채 365억원(일시 최고액)을 상환해 39억원의 이자를 절감했다. 재정의 양적성장과 건전성,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것이다. 구미시가 지방채를 상환할 수 있었던 것은 전년대비 57%(1천749억원)나 증가한 지방교부세(4천794억원) 확보와 국·도비 사업 선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구미시는 지난 1년간 산업, 문화, 농업 등 시정 전반에 걸쳐 새로운 사업을 발굴하고, 정부사업에 선정됨으로써 총 42건에 8천512억원 규모의 신규 국·도비 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 김 시장은 이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소외받아왔던 농촌지역에 대한 투자를 확대했다. 올해 농업분야에 1천483억원이라는 역대최고 규모의 예산을 편성하고, 상하수도사업소를 선산출장소로 이전하는 등 농촌 활성화에 대해 적극적 의지를 보이고 있다. 농촌분야 공모사업에서도 눈에 띄는 성과를 이끌었다. 총사업비 450억원의 ‘농촌협약’에 선정됐으며, ‘밀산업 밸리화 시범단지(30억원)’조성, ‘경북 디지털 혁신 농업타운(21억5천만원)’등 전년대비 농업관련 국책사업 확보는 총 237억원이 증가했다.□ 살기 좋은, 살기 편한 도시를 만들다민선8기 1년 성과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라면 구미를 대표하는 축제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작년 8월에 열린 ‘제1회 구미라면캠핑 페스티벌’은 3만명이라는 역대 최다 방문객을 기록한 것은 물론, 지역에서 생산된 제품과 축제를 결합해 전국 최초의 행사를 만들었다. 올해 열리는 라면페스티벌은 ‘2023 경북 미색 축제’에 선정됐으며, 개최장소를 낙동강 체육공원에서 구미역사 인근 원도심으로 이전해 구미 문화로, 금리단길, 새마을중앙시장을 연결함으로써 지역 소상공인과 방문객의 참여도를 더욱 높일 수 있게 됐다. 또 작년에 처음 선보인 ‘제1회 구미푸드페스티벌’도 10억원 규모의 경북도 공모사업에 선정된 ‘송정 맛울림 문화거리 조성 사업’과 연계해 그 규모가 더욱 확대될 예정이다. 여기에 아시아권 육상대회 중 가장 큰 규모인 ‘2025 아시아육상경기선수권대회’가 구미에서 개최됨에 따라 글로벌 도시로의 인지도 향상과 도로·체육시설 등 인프라 측면에서도 다양한 국책사업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구미시는 전국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소아응급문제를 해결해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이는 김 시장의 공약인 ‘공백없는 소아의료진료체계’를 충실히 이행해 올해 1월 1일부터 응급실 소아청소년과 전담인력을 배치하는 ‘구미 365 소아청소년 진료센터’가 원활히 운영 중이기 때문이다. 연중 24시간 소아청소년과 전문의가 상주하며 진료하는 ‘구미 365소아청소년 진료센터’는 칠곡, 김천, 상주 등 인접 도시 주민들까지 수요 저변이 확대되며, 현재 경북권 소아응급진료 중심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구미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양한 돌봄보육정책을 선제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전국 최다 규모의 통합형 시간제 보육사업을 시범추진(27개소), 도내 최대 공공형 24시 돌봄센터(정원 70명) 운영과 더불어 2023년까지 총 11개소를 목표로 마을돌봄터(현재 9개소)를 확충하고 있다. □ 도시변화는 공직사회의 혁신으로부터김장호 구미시장은 “시민들이 살기좋은 행복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선 공직사회부터 강력한 혁신을 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김 시장은 행정의 불필요한 절차를 없애 빠른 의사결정으로 시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행정서비스 구축에 힘썼다. 이를 위해 스탠딩 회의, 종이없는 회의(태블릿PC 등 활용), 영상회의, 원스톱 티타임을 도입했다. 특히, 당면현안에 대해서는 시장이 직접 주재 하에, 관련 부서가 모여 한번에 방향성을 결정하는‘원스톱 티타임’을 상시 운영함으로써 의사결정 절차를 간소화했다. 최근에는 읍면동 행정복지센터, 사업소 등 본청을 제외한 시 산하 기관의 당직 근무를 폐지하고 상황관리 및 대응체계를 본청으로 일원화해 예산을 절감하고, 조직운영의 효율성을 향상시켰다. 또 시청직원들에게 최신 트랜드와 전문성을 높일 수 있는 ‘굿모닝 수요 특강’을 매주 수요일 오전 7시30분에 실시하고 있다. 자율참여로 진행되는 수요특장은 현재까지 49회 진행되면서 만족도가 매우 높은 편이다. 김 시장은 또 시민들과의 소통을 위해 직접 현장을 방문하는 현장소통시장실을 25회 운영해 310건의 건의사항을 접수하고 266건을 정책에 반영(반영률 86%)했다. 그 결과 40여 년간 악취로 주민을 괴롭힌 고아읍 돈사를 직접 매입해 농산물유통센터 건립을 추진하고, 오랜기간 방치된 구미역 지하주차장을 구미시에서 직접 리모델링한 후 개방하는 등 장기 반복적으로 지속되어온 민원부터 빠르게 해결해 나가고 있다. 공무원 조직도 새롭게 정비했다. 도시 경쟁력 및 실행력 제고를 위해 인구정책과, 미래도시전략과, 낭만축제과, 공공시설과 등의 부서를 신설했으며, 경북도 내 최초로 중요 직무급제를 도입하고, 전문직위 확대(17개→21개), 우수 성과자에 대한 파격적인 보상제도 마련 등 인사운영 전반에 혁신적인 변화를 꾀했다.김장호 구미시장은 “지난 1년은 도약의 기반을 마련한 시기였다”며 “이제 구미시 전반에 대한 재창조를 본격적으로 가속화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23-07-02

“큰 권한을 누렸던 구룡포수협 조합장…선거도 치열해”

어업인들은 그들만의 단단한 조직력을 자랑한다. 수산 단체는 거친 바다에서 서로의 생명을 보호하고 불법 어로와 과잉 조업으로부터 어족 자원을 관리하는 주요한 역할을 한다. 구룡포 지역 어업인들의 구심점인 구룡포수산업협동조합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2년 설립된 구룡포어업조합에서 출발해 1962년 수산업협동조합법이 공포·시행되면서 구룡포어업협동조합이 공식 발족했다. 지금과 같은 협동조합 시대가 열린 것이다. 치열한 선거를 거쳐 강두수 초대 조합장이 취임했다. 배 : 부친께서 구룡포수협 초대 조합장을 지내셨지요?강 : 구룡포수협은 호미곶과 구룡포, 장기 일원을 업무 구역으로 하고 있어. 동해안 최대의 어업 전진기지를 관할하지. 아버지는 구룡포수협 초대, 3대 조합장을 지냈어. 정확한 임기를 몰라서 수협에 확인해보니, 1대 임기는 1962년 4월부터 1965년 3월 9일까지, 3대는 1968년 4월부터 이듬해 8월 20일까지였어.배 : 구룡포수협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요?강 : 구룡포수협의 모태는 일제강점기에 있던 ‘어업조합’이야. 줄여서 ‘어조’라고 했지. 엄격하게 말해 수협은 아니지만 어민들의 자조(自助) 단체 역할을 했고 수협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어.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에서 공원으로 가는 돌계단 끝에 일본인 공덕비가 있잖아. 일제강점기에 신사(神社)가 있던 자리로, 현재는 6·25전쟁 희생자를 추모하는 사당이 있어. 공덕비 주인이 어업조합을 설립했지.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에서 공원으로 가는 가파른 돌계단 끝에 이름이 지워진 비석이 있다. 광복 후 시멘트로 덧입힌 공덕비의 주인인 도가와 야사브로(十河 彌三郞)가 구룡포어업조합의 창립자다. 구룡포수협은 역사를 거슬러 어업조합까지의 연혁을 따진다면 1922년 11월 9일 일본인 도가와 야사브로에 의해 설립되어 구룡포, 병포, 삼정, 석병, 강사, 호미곶 등 현재 지역의 북쪽 6개 마을로 출발했다. 도가와 야사브로는 구룡포어업조합을 주도적으로 설립하고 조합장이 되었는데, 구룡포 근대사를 이야기하면서 그를 빼놓기는 어려울 정도로 구룡포 일본인의 중심인물이다.한편, 일반적으로 수협으로 약칭되는 수산업협동조합 조직은 1962년부터를 말한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착수되면서 정체 상태에 있던 수산업도 일대 전환기를 맞이한 시기다. 구룡포어업조합을 대신해 협동이라는 이름의 구룡포어업협동조합이 공식 발족했고 강두수 초대 조합장이 취임했다.‘구룡포수협사’, 구룡포수산업협동조합, 2016, 132쪽·351쪽배 : 수협 초창기의 조합장 권위는 어느 정도였습니까?강 : 대단했지. 구룡포 읍장보다 높았으면 높았지 못하지는 않았을 거야. 돈을 취급하는 곳이니까 힘이 있었지. 구룡포 전체 수입원의 80%가 구룡포수협에서 나왔어. 수협 직원도 선망의 직업이었고. 수협 판매과장에게 중매인들은 꼼짝 못 했어. 누구에게 물건을 판매할지를 결정했거든. 판매과장의 권한이 그 정도였는데 인사권을 가진 조합장은 어떻겠어? 어족 자원이 풍부할 때니까 권한이 정말 대단했지. 행사장을 가도 단상의 자리 배치부터 달랐어. 행정기관에서 공무원들끼리 치르는 행사보다 조합장이 초청받는 행사가 더 성대했지. 조합장은 인사권뿐 아니라 재정권도 있었으니까.배 : 재정권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권한인가요?강 : 조합장이 수협의 수입과 지출에 관한 결재권을 가졌어. 그때는 어황이 좋아서 선박에서 나오는 수수료가 어마어마했거든. 우뭇가사리(천초)와 해조류, 전복, 해삼이 많았는데, 어촌계에서 나오는 수입도 수협에서 관리했어. 어획물을 잡거나 채취해서 타지로 반출하려면 수협에 수수료를 지불하고 전표를 끊어야 했지.배 : 전표 없이는 본인의 어획물을 팔지 못했다고요?강 : 수협에서 초소를 만들어 관리했어. 당시 구룡포로 오가는 길은 비포장도로 하나뿐이었거든. 구룡포로 들어오고 나가는 양쪽에 초소가 하나씩 있었어. 초소를 통과하려면 전표가 있어야 했지. 원칙적으로 불법 반출이 불가능했지만, 뒷돈을 주고 뒤로 빼돌리는 일이 흔했어.배 : 일본으로 수출도 많이 했다고요?강 : 우뭇가사리와 성게는 전부 일본으로 수출했어. 오퍼상들이 와서 공동구매를 했지. 두원리에서 대동배까지 어촌계에서 나오는 수산물을 모두 쓸어갔어. 그때부터 일본은 기르는 어업으로 갔던 거야. 우리는 어자원 보호라는 개념이 없으니 어린 운단(말똥성게)과 성게까지 돈만 되면 모조리 팔았어.배 : 조합장의 권한이 크니 선거 역시 치열했겠습니다.강 : 1960년대는 고무신 선거, 막걸리 선거가 성했지. 조합장 선거도 마찬가지였어. 초대부터 3대 조합장 선거는 대의원이 했거든. 어촌계원들이 뽑은 대의원들이 투표권을 가지는 방식이야. 대의원이 20여 명이었으니까 대의원을 납치한다고 했을 정도로 대의원 쟁탈전이 치열했어. 조합장 선거에 나가면 기둥뿌리 뽑힌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지. 아버지는 선거와 관련해 가족들과는 상의 한마디 없이 출마 사실만 통보했어. 전국적으로 조합장 선거가 과열되자 조합장 권한을 축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대두되었다.당국이 비공식으로 추산한 매표 자금은 3천만 원선으로 집계되고 있으며 M특수조합에서는 200만 원이 총대(총회 대의원) 매수 자금으로 뿌려졌다고 관계자는 말하고 있다. 당국자들은 이번에 실시했던 조합장 선거가 전례 없이 무질서했으며 매표 행위가 공공연하게 자행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일부 지방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라고 개탄하고 있다. 관계 당국은 조합장 선거가 이처럼 타락한 것은 수산 금융의 대폭 확대에 따라 수산 자금의 배정 등에 조합장의 재량권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 조합장의 권한을 축소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수협조합장 선거 당선 무효 사태’, ‘경향신문’ 1968년 3월 27일 배 : 부친의 상대는 누구였습니까?강 : 2대 조합장이 된 문용화 씨였어. 당시 농촌에서 소달구지가 있으면 부자라고 한 것처럼 어촌에서는 어선이 있으면 부자라고 했지. 6대 조합장까지는 모두 어선을 소유한 선주라고 알고 있어. 꽁치며 오징어며 어족이 풍성하던 시절이었지. 지금은 수산업 수입이 줄고 금융 쪽 수입이 많아. 내가 근무하던 1980년대에 법이 개정되면서 조합장 직선제가 도입되었지.배 : 부친이 조합장을 지낸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가 구룡포의 전성기였지요?강 : 그랬지. 지금 구룡포 인구가 7천 명 정도인데, 당시는 3만 명이 넘었어. 배만 타면 돈이 생기니 술집이며 기생집이 수두룩했지.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시절이었어. 추운 날에도 술에 취해 길바닥에 자는 사람들이 흔했지. 구룡포길 153번길은 ‘산가쿠마치’라고 불리는 술집 거리였어. 가파르고 좁은 골목에 다닥다닥 붙은 낡은 집들이 모두 요정이었지. 구룡포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선원들이 찾는 술집이 많았어. 여자들이 한복을 입고 조명 아래 줄을 서 있었지. 통행금지가 있던 시대지만 불을 켜놓고 술장사를 했어. 그 시절 구룡포에는 극장이 두 개나 있었어.배 : 지금도 없는 극장이 50년 전에 있었다고요?강 : 극장이 두 개 있었는데 부친이 인수해서 외삼촌이 경영했어. 우리 쌍둥이 형제가 돈통을 하나씩 맡아 용돈벌이를 했지. 영화관이었지만 쇼단과 서커스단도 왔는데, 공연을 앞두고 관객 몰이꾼이 북을 치고 돌아다니며 홍보했지. 극장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마트와 호텔이 들어섰어. 마트 자리 규모가 컸는데, 낡은 간판이 아직 남아 있지.배 : 극장에서는 어떤 영화를 상영했나요?강 : 기억이 다 나지 않지만 ‘미워도 다시 한 번’의 인기는 당시에 최고였어. 좌석이 부족해서 통로 계단이나 바닥에도 관객이 빼곡했어. 여름에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다닥다닥 붙어 서서 봤지. 영화를 보려고 호미곶, 양포, 흥안, 발산에서 두세 시간씩 걸어왔어. 통행금지가 있었지만, 영화가 끝나면 또 밤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지.배 : 필름은 어떻게 배급받았나요?강 : 대구의 배급사에서 버스로 필름 통을 받았어. 영사기에 걸어서 2, 3일간 상영하고 다른 걸로 바꿨지. 흑연을 태워서 반사경에 빛을 비추는 ‘카본식 영사기’였는데, 초점이 멀어지면 관객들이 안 보인다며 소리치고 그랬지.배 : 당시 구룡포의 거의 유일한 문화공간이었겠군요.강 : 그런 셈이지. 영화가 히트하면 배우들이 와서 쇼를 하기도 했어. 한창 인기를 누렸던 태현실과 액션 영화 ‘9인의 해병’에 출연했던 황해, 최무룡도 극장에 왔어. 배우들을 보려고 관객이 구름처럼 몰렸지. 배우들이 와서 노래를 불렀는데 요즘으로 치면 아이돌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인기였어.배 : 당대 최고의 배우들을 가까이서 보셨겠어요.강 : 식사도 같이했지. 포항에 왔다가 다른 곳으로 가기 전에 구룡포에서 하루 더 공연하던 식이었어. 숙박 시설이 여의치 않으니 여인숙에서 잠을 잤는데 주연만 방을 따로 주고, 다른 스텝들은 한방에서 묵었어. 바깥에서 아무렇게나 자기도 했으니 비 오는 날을 싫어했지. 수익은 손님 수를 계산해 극장과 기획사가 나눠 가졌어.강신규1947년 구룡포에서 부친 강두수와 모친 하순분의 1녀 3남 중 셋째로 태어났다. 강두수(姜斗洙, 1919~1998) 선생은 광복 후 포항과 구룡포에서 처음으로 고래잡이를 허가받은 포경선 선주이며 구룡포수협 초대, 3대 조합장을 지냈다. 적산가옥에 살면서 구룡포항을 놀이터 삼아 자란 강신규(姜信圭) 선생은 구룡포 동부초등학교를 나와 대구 계성중·고등학교, 국민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서울 완구진흥공단과 구룡포수협, 장로회신학대학에서 근무하다가 1990년대 부친과 함께 호미곶 강사 2리에서 냉동공장을 운영했다.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사진 제공 : 강신규

2023-07-02

“‘노력·성과’ 지렛대 삼아 변화·혁신으로 행복한 영덕 건설”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통해 출범한 민선 8기가 1년을 맞았다. 전국 지방자치단체장들의 취임 1주년 성적표가 나오는 시점이다. 영덕군은 행정경력 40년 이상의 베테랑이 키를 잡으며 지역사회의 기대가 컸던 곳이다. 본지는 23일 창간 33주년을 맞아 김광열 영덕군수의 지난 1년의 성과와 지역사회의 과제들을 짚어본다. -취임한 지 1년이 지났다. 지금까지를 소회한다면.△영덕에서 나고 자라 평생을 지역 발전을 위해 공복으로 살아왔다. 군수가 됐다고 해서 나의 관심과 목표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더욱 막중한 책임이 주어졌고, 좀 더 적극적으로 지역 현안을 추진할 수 있어 나의 경험과 추진력이 지역 사회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감히 여기고 있다.거의 모든 지자체장이 숨 돌릴 틈 없이 바쁘게 1년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항상 무엇을 위해 바쁜지에 대해서는 되돌아봐야 한다. 군민의 실제 생활과 밀접한 삶의 여건들을 살피다가도 한발 물러나 우리 군이 나아가야 할 저 먼 곳을 바라보며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면서 목적의식과 평정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다.-영덕군 민선 8기의 비전은 무엇인가.△비전은 실천에 있고, 실천은 공약에 있다. 공약이라는 것이 주권자들과의 약속이기에 꼭 지켜야 하는 의무이지만 군민의 실질적인 요구와 예산에 맞게 정제될 필요가 있다.하여, 주민배심원들의 심의를 거쳐 군민이 공감하고 신뢰할 수 있도록 공약을 점검했다. 민주적인 과정을 통해 공약의 투명성과 실효성을 높이는 작업이다.이렇게 정제된 46개의 공약은 민선 8기 군정 목표에 잘 반영되어있다. 매력적인 투자환경 조성, 색다름이 있는 문화관광, 같이 하면 행복한 복지, 웃음꽃 피는 농산어촌, 마름 나누는 소통 행정이 그것이다.-영덕군 민선 8기의 군정 목표에 맞춰 소기의 성과는.△임기 1년 된 지자체장이 성과를 언급하는 것은 섣부르다. 목표는 분명하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해선 물적 토대가 선행되어야 한다. 안정적인 성장동력을 마련하기 위해 국비와 도비를 확보해 재정을 건실히 해야 하고, 선순환 경제구조를 구축하기 위해 활발한 민간투자도 이끌어야 한다.희망적인 것은 영덕군의 행정력은 여러 공모사업에 선정될 만큼 경쟁력이 뛰어나다. 취임 후만 하더라도 여러 공모사업에 선정돼 국·도비 포함 2천123억 원의 사업비를 확보했다. 민간투자 또한 적극적인 유치 전략을 수립해 최근 성과를 보이고 있다. MOU를 포함해 민자 6천여억 원이 지역 발전을 견인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지자체마다 지역 발전을 위해 민간투자 유치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노하우가 있다면.△영덕 해상케이블카는 전임 군수께서 2020년 투자양해각서를 체결해 민간 자본 336억 원이 투입되는 사업이지만 안전 문제나 행정 절차로 인해 제대로 진행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해양수산부의 공유수면 매립목적 변경 승인 심의를 통과해 사업 추진이 가시권에 들어갔다.많은 분이 묘수나 특효 같은 것을 좋아하시는데, 저에게 있어 행정이나 정치는 그렇게 신출귀몰한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문제해결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찾고, 경북도 사항을 조율하고, 중앙부처나 국회를 방문해 의사를 개진하고, 다시 이를 바탕으로 행정적인 목표를 설정해 경주해나가는 이 모든 과정을 끈기 있게 지속하는 것이다. 정성과 노력이 필요한 것일 뿐 노하우라고 할 것은 없다. 온돌방 구들목처럼 불을 때면 땐 만큼 온기가 드는 법이다.-지역소멸이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고 지역 경기도 좋지 않다. 지역 활성화를 위한 방안은.△구조적인 인구 감소를 극복하기 위해선 핵심적으로 일자리 창출과 정주여건 개선이 선행되어야 한다.우리 군이 현재 진행하고 있는 일자리 창출 전략은 3가지 방면으로 이뤄진다. 먼저, 공모사업 선정으로 스마트 수산가공 종합단지, 어촌신활력 증진사업, 국립 해양생물 종복원 센터 조성, 해양 심해바이오 뱅크 건립 등 1천700여억 원의 국비를 확보해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할 것이다.다음 민간투자로 진행될 축구트레이닝센터와 호텔, 삼사 바이노소 호텔, 해상케이블카 사업들을 지역의 관광 아이템과 연계해 자유시장 경제에서 파생되는 일자리 창출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함께 이뤄낼 것이다.정주여건 개선을 위해선 이웃사촌마을 확산사업, 농촌 중심지 활성화 사업, 도시재생사업, 어촌뉴딜사업 등 공모에 선정되면서 확보된 2천여억 원이 투입되는 활성화 사업들이 진행되고 있다. 또 강구건강활력센터, 예주행복드림센터, 미래인재양성관, 통합 도서관 등 대규모 생활형 SOC 복합화 사업 등이 진행돼 군민의 복합적인 생활 만족도를 높일 것이다.-군민 소득 증대와 복지수준 향상 등 군민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지역 활성화의 경우 추진되는 방안과 사업들이 많지만 크게 보자면, 우리 군 산업의 60%가 넘는 관광산업의 발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위해 남부권은 어촌신활력 증진사업을 중심으로 삼사 바이소노 호텔이나 해상 케이블카와 같은 민자 관광 아이템을 연계해 다양한 해양 레저관광 서비스 를 제공할계획이다.북부권은 지역의 문화·역사 유산인 상대산 관어대를 ‘이색풍경’ 웰니스 관광지로 개발해 이웃사촌마을 확산사업, 근대문화공간 사업, 괴시리 전통마을 인근의 영덕 블루로드, 고래불·대진 해수욕장과 국민야영장, 인문힐링센터 여명, 영영 에코힐링센터, 등과 연계한 웰니스 관광 프로그램을 개발, 향후 건립되는 대진 물치유호텔, 경상북도수련원, 국립 해양생물 종복원센터와의 확장성을 타진해 체류형 관광객을 유치, 지역경제 활성화와 지역 주민 소득 증대효과를 올린다는 게 목표다.영해면 대진리에 있는 상대산 관어대는 목은이색 선생이 그곳에 올라 고래가 뛰어오르는 것을 보고 이름 붙인 고래불해수욕장의 청정 바다와 명사 20리의 모래사장, 동해안 최대의 충적평야인 영해·병곡 들녘과 송천강, 백두대간 끝자락에 자리 잡은 칠보산 등이 한눈에 들어와 국내에선 유일하게 5경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주요 개발 계획으론 100억 원 규모의 사업비를 투입해 상대산 정상에 있는 관어대까지 오르는 모노레일을 설치하고, 관어대 정자 보수와 야간 등산로 정비 및 경관조명 설치 등의 주변 정비 사업을 추진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마지막으로 영덕군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코로나19라는 악재에서 벗어나 활기찬 영덕을 되찾으려는 마당에 고금리와 고물가로 인한 경기침체로 다시금 가시밭길이 예견되는 안타까운 실정이다.하지만 우리는 수많은 위기와 좌절 앞에서도 절대 굴하지 않고 항상 역경을 이겨내며 스스로를 증명해 왔다.다가올 어려움에 맞서 영덕군민의 곁에서 함께 호흡하며 적극적인 행정과 능동적인 정책으로 현재의 위기에 대응해 나가겠다.지금까지의 노력과 성과를 지렛대 삼아 과감한 변화와 혁신으로 ‘군민이 행복한 영덕’을 반드시 이룩하겠다. 군민들이 보내주신 지지와 응원을 신뢰와 정직으로 답하겠다고 약속드린다.영덕/박윤식기자newsyd@kbmaeil.com

2023-06-29

“크릴새우 따라 영일만에 고래가 몰려왔지”

동해의 다른 이름은 ‘고래 경(鯨)’을 쓴 ‘경해(鯨海)’다. 옛 문헌에는 동해를 ‘경해(鯨海)’로 표기한 사례가 적지 않다. 고래잡이는 조선시대까지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다가 19세기 중반 서구 열강의 포경선이 동해로 진입하면서 거침없이 진행되었고 결국 일본이 독차지했다. 한국인의 본격적인 포경은 광복 이후 시작된다. 포항과 구룡포의 고래잡이는 1951년 구룡포 강두수의 해승호(海勝號)가 제1호 허가를 받으며 시작되었다. 그렇게 구룡포항은 고래잡이 어항으로 변모했고, 장생포와 더불어 우리나라 근대 포경의 원조가 되었다. 배 : 선생이 태어난 1947년에 촬영한 사진인데 한국 포경사에 기록될 만한 자료를 소장하고 계시더군요.강 : 1947년 12월 24일 영어호(永漁號)가 39자나 되는 귀신고래를 포획한 기념사진이야. 39자면 11.8m나 되지. 사진 아래에 ‘강두수 씨 포경선 영어호 귀신고래 포획 기념’이라고 적혀 있어. 구룡포항 남방파제 옆에 있는 수협 탱크 자리일 거야. 몸집이 워낙 큰 고래라 구룡포항에 둘 자리가 없어서 방파제에 올린 거지. 동해에서 포획된 마지막 귀신고래라고 들었어. 사진 속에 아버지는 안 계시고 큰아버지가 계셔.배 : 큰아버지도 포경업에 종사했나요?강 : 큰아버지는 안 하셨고 아버지가 포경선 세 척을 운영했어. 나도 사진처럼 큰 고래를 본 적이 있어. 구룡포항까지 끌어오지 못하고 병포리 조선소에 올려놓은 걸 봤지. 조선소에서 반을 해체하고 나머지는 위판장으로 가져와서 작업했어. 고래 둘레가 어른 키보다 컸으니 어마어마했지. 고래는 힘이 좋아. 한번은 호미곶에 주둔하던 미군이 지나가다 돕겠다고 나선 적이 있는데, 고래가 꼬리를 치니까 군용 지프도 뒤로 밀리더라고.배 : 강두수 선생이 포경업을 시작한 것은 언제였나요?강 : 광복 즈음에 일본인에게 포경선을 넘겨받아 시작했다고 들었어. 정식 허가를 받은 것은 1951년 해승호야. 1935년에 건조된 제9영어호와 1953년에 건조된 제13영어호도 있었는데 모두 목조선이었어. 1972년에 제9영어호와 제13영어호는 퇴출되었지만 해승호는 남아 있었어. 그 밖에도 꽁치 배가 2척 더 있어서 흑산도까지 가서 조기와 꽁치를 잡았어. 아버지는 포경선으로 시작해서 다양한 사업을 일궈내셨지.포항의 포경업이 강두수에서 시작되었음은 ‘포항시사’에서도 확인된다.포항 지역은 울산 방어진과 더불어 포획 고래두수가 많아 고래어장이 성업을 이루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구룡포 근해에 고래 어장이 형성되어 강두수의 해승호가 1951년 12월 20일 허가를 득하여 포경업을 시작한 사실이다. 그 후 주길호, 제9영어호 등을 투입하여 구룡포항을 고래잡이 어항으로 변모시켰다. 포경허가번호 1호, 2호, 3호는 구룡포에 소재하였는데 우리나라 근대 포경의 원조라 할 만큼 이 지역의 포경업이 발달했다.제3장 수산업, 포항시사, 포항시, 2010, 419쪽배 : 목조선으로 그 큰 고래를 잡았다는 얘기인가요?강 : 목선에 망통(고래를 찾기 위한 전망대)과 총을 설치해 포경선으로 썼다고 들었어. 포경선은 모두 구형 동력선이었지. 지금과 같은 디젤 엔진이 아니라 소구기관 엔진(이른바 ‘야키다마’라고 한다)을 사용했어. 먼저 열을 가하는 과정이 필요한 엔진이지. 디젤 엔진으로 교체되기 시작한 건 1990년대 들어서야. 처음에는 운전할 줄 몰라 애를 먹었지.우리나라 포경업은 1960년대 중반부터 포획 두수가 증가해 1970년대 중후반 최고의 어획고를 올렸다. 1976년 8월 28일 자 ‘경향신문’에 당시 50대인 강두수의 인터뷰가 실렸다.구룡포항에서 27년간 고래잡이만 했던 강두수 씨(58)는 지금은 읍내에서 손꼽히는 부자다. 20t급 부경호로 잡은 고래만 수백 마리라고 자랑한다. 길이 5m 정도의 고래 한 마리가 50만 원 정도, 운 좋은 날이면 아침나절 출항하여 어둡기 전에 1마리를 잡는다.‘해풍 따라 마을 따라-구룡포’, ‘경향신문’ 1976년 8월 28일배 : 포경선을 타본 적이 있나요?강 : 학창 시절 포경선을 타고 바다에 나간 적이 있어. 할머니가 배를 타면 안 된다고 야단쳤지만 삼촌에게만 귀띔하고 몰래 탔지. 어린 나이의 호기심이었어. 선박에는 아무나 안 태우거든. 누가 멀미라도 하면 신경이 그리로 쏠리니까. 포경선은 당일 돌아오니 슬쩍 다녀오곤 했지. 어선에서 먹는 밥은 짭조름했어. 식수가 귀한 시절이라 바닷물로 먼저 쌀을 씻고 나서 민물을 넣어 앉혔거든. 목선이지만 장작불을 피워 밥을 지었어. 연기가 얼마나 나는지 조리장 얼굴이 시커멓게 되었지. 파도가 센 날 바다에 나갔다 돌아오면 다리가 뻐근했어.배 : 포경선에는 누가 탔나요?강 : 포수와 선장, 갑판장과 기관장, 조리장 등 대개 예닐곱 명이었어. 선장이 망통에 올라가 고래가 있는지를 살폈어. 체구가 작고 재바른 나도 망통에 올라가서 구경했지. 고래를 잡으려면 선장과 포수의 호흡이 중요해. 고래는 수면 바로 아래로 다니는데 윤슬과 구분이 안 되거든. 고래를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해. 고래를 잘 보는 이들은 시력이 탁해진다고 술도 안 먹었어. 고래를 발견하면 ‘눈값’도 받았지. 포경선은 아무나 못 탔어. 포경선 선원은 고급 인력에 속했지. 그래서 다른 배를 타다가 포경선에 태워달라고 사정하는 선원도 있었어. 새벽에 나갔다가 해가 빠지면 돌아오니 일하는 시간도 좋고. 그때는 주로 대보와 감포까지 나가서 고래를 잡았어. 구룡포 해안선을 따라 귀신고래가 자주 출몰했지.일명 ‘눈값’의 구체적인 액수는 포경선 선원이던 고(故) 김복엽의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다.고래를 잘 찾아내는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명포수만큼이나 대우를 받았다. 선원들의 월급은 육지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비슷했지만 고래를 잡는 성과에 따라 돈을 더 받을 수 있었다. 고래를 처음 발견한 사람에게는 월급의 15%를 얹어줬고, 1마리를 잡을 때마다 월급의 10%에 해당하는 돈을 추가로 더 받았다.‘4장 해방 후의 수산업과 어업조합’, ‘구룡포수협사’, 구룡포수산업협동조합, 2016, 246쪽배 : 고래를 포획하는 장면도 보셨나요?강 : 포경선은 총포 허가가 있어야 해. 대포로 작살을 쏴 고래를 잡았어. 촘촘한 금 저울에 화약을 부어 작살을 쏘았지. 작살 촉이 고래 살에 박히면 자동으로 날개가 펴져 빠지지 않았어. 창끝은 고래의 심장을 향해 있었지. 바다도 땅처럼 딱딱해서 작살을 사선으로 쏘아야 해. 위에서 바로 꽂으면 작살이 구부러지지.배 : 구룡포에서 고래가 많이 잡혔던 이유는 뭘까요?강 : 만(灣) 지형에 크릴새우가 많아서야. 크릴새우가 지나가는 길목에 고래가 몰려들었지. 물을 들이켰다 크릴새우만 남기고 뱉는데, 크릴새우가 풍부하니 고래 살집이 좋았지. 당시는 고래가 해안 가까이에서 잡혔기 때문에 포경선에서 육지가 보였어.배 : 고래를 잡아오면 해체는 어떻게 했나요?강 : 고래 해체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있었어. 작업자의 체온에도 고래 살이 허물어지기 때문에 자루가 긴 칼로 빠르게 해체했지. 고래 해체 작업을 하면 신선한 육회를 먹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어. 소금 한 줌, 소주 한 병 가져와서는 고래 바로 옆에서 먹었어. 그때는 비교적 저렴하게 고래 고기를 배불리 먹을 수 있었어. 고래 고기는 열두 가지 맛이 난다지. 젖먹이 동물이라 그런지 몇 해를 냉동공장에 보관해도 표면만 걷어내면 뒤탈이 없었어.배 : 주로 포획된 고래 종류는 뭔가요?강 : 밍크고래가 주로 잡혔고, 몸집이 큰 나가수(참고래)도 더러 잡혔어. 맛 차이는 크게 없었고. 대형 고래는 기름을 얻기 위해 필요했어. 표피층이 두꺼워서 기름이 많이 나왔지. 겨울에 잡힌 고래는 지방층이 두꺼워 기름이 더 많았어. 고래기름은 드럼통에 담아 팔았지. 정제해서 화장품 원료로 쓴다더군.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영업 중인 고래식당 사장은 칠십 대인데도 피부가 고와.배 : 당시 포경업자들은 큰돈을 벌었겠군요?강 : 밍크고래 몸통이 어른 앉은키 정도 되었지. 당시 밍크고래 한 마리가 30만~50만 원 정도였어. 날씨가 안 좋으면 한 달에 한 마리도 못 잡았지만 운이 좋으면 하루에 두 마리도 잡았어.강신규1947년 구룡포에서 부친 강두수와 모친 하순분의 1녀 3남 중 셋째로 태어났다. 강두수(姜斗洙, 1919~1998) 선생은 광복 후 포항과 구룡포에서 처음으로 고래잡이를 허가받은 포경선 선주이며 구룡포수협 초대, 3대 조합장을 지냈다. 적산가옥에 살면서 구룡포항을 놀이터 삼아 자란 강신규(姜信圭) 선생은 구룡포 동부초등학교를 나와 대구 계성중·고등학교, 국민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서울 완구진흥공단과 구룡포수협, 장로회신학대학에서 근무하다가 1990년대 부친과 함께 호미곶 강사 2리에서 냉동공장을 운영했다.대담·정리 : 배은정(소설가) / 사진 촬영 : 김훈(사진작가) /사진 제공 : 강신규

2023-06-28

항복한 이는 죽이지 않아… 이순신과 더불어 ‘한국의 장군’

21세기처럼 가까운 약국에만 가도 위장병과 두통, 소화불량을 치료하는 각종 약과 상처에 바르는 연고를 구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또한, ‘내과 수술’이란 단어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다. 신라(기원전57~935)를 통틀어서 그러했다.그럼에도 우리식 셈법으로 여든을 목전에 둔 79세까지 살았다. 그뿐 아니다. 열다섯에 수백수천의 낭도를 이끄는 화랑이 된 그는 사다함, 관창과 더불어 ‘신라 화랑의 트로이카’로 불린다.벼슬? 고대왕국 신라에 존재했던 벼슬 중 그가 해보지 못한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왕 아래 세 번째로 높았던 소판(蘇判)과 두 번째 관등 이찬(伊飡), “일인지하 만인지상”으로 불린 대각간(大角干·오늘날 국무총리), 거기에 클 태(太)자를 하나 더 붙인 태대각간(太大角干)은 오로지 그만을 위한 만든 벼슬이었다. 이른바 위인설관(爲人設官·특정인을 위해 만든 자리)의 직위.그가 죽었을 때 왕을 포함한 정부의 고위관료와 친인척, 지인들이 슬픔을 전하며 보내온 부조(扶助)는 현대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500억 원이 훌쩍 넘었다고 한다.마지막은 더 흥미롭다. 그는 신라 역사에서 유일하게 왕으로 추존(追尊)된 사람이다. 그를 달리 부르는 명칭은 ‘순충장렬 흥무대왕(純忠壯烈 興武大王)’. 사후 1천350년이 흐른 지금도 경주에서 벚꽃이 가장 아름다운 길을 ‘흥무대왕로’라고 부른다. ◆ ‘불멸하는 이름’으로 남은 신라의 장군오래 전 세상을 떠난 한 사람을 설명하는데 위와 같은 긴 문장이 사용됐다. 아니, 겨우 685자의 글로는 그의 굴곡 많고, 영화 같았던 삶과 죽음을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 갓 젖먹이에서 벗어난 아이들까지도 ‘한국의 장군’이라 하면 임진왜란 때의 명장으로 “내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았다”고 일갈한 이순신(1545~1598)과 더불어 가장 먼저 입에 오르는 김유신(595~673).육체는 이미 흙이 돼 사라졌지만, 그의 이름은 길고 긴 세월을 뛰어넘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았다. 이를 ‘불멸(不滅)’ 혹은, ‘사라지지 않은 정신’ 외에 어떤 단어로 부를 수 있을까?‘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가 펴낸 책 ‘통일신라 시기 1-중앙과 지방’ 역시 김유신이 신라 역사에서 차지하는 높은 자리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80여 명의 인물을 다룬 ‘삼국사기’ 열전 10권 가운데 3권을 김유신에게 할애하고 있다.…(중략)”이 책은 김유신이 무열왕과 문무왕을 도와 성공시킨 ‘삼국통일’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에 관해서도 약술하고 있는데,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신라는 백제, 고구려를 멸한 데 이어 한반도 전역을 차지하려던 당군마저 물리치고 676년 삼국통일을 이룩하였다. 비록 불완전한 통일이지만 한반도에 처음 통일국가를 형성하였다는 것은 민족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신라인들은 이를 ‘일통삼한’으로 인식하였고, 신라의 국가적 위상도 고양되었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고문헌에 의하면 김유신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은 아니다. 신라의 정통 귀족이라 보기는 어렵다는 게 정설. 그는 가야 왕족의 후손이다. 신라가 가야를 병합할 때 항복한 왕족 중 하나가 그의 조상이었다.신라의 성골(聖骨) 바로 아래 계급인 진골(眞骨)로 편입됐지만, 왕의 혈족들과 결혼할 수 있는 진성(眞成) 귀족은 되지 못한 것.그가 여동생 문희를 김춘추에게 시집보내기 위해 임신한 문희를 “통정한 사내가 누구냐?”라고 매섭게 추궁하며 불에 태워 죽이려 했다는 건 잘 알려진 설화다. 여기에서 숨겨진 김유신의 ‘정치적 야심’을 읽을 수 있다.이 사건(?)은 누이와 ‘통정한 사내’가 김춘추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벌인 김유신의 드라마틱한 자작극에 가깝다고 이해해도 무방할 듯하다.결과적으로 김춘추는 후에 왕위(태종무열왕)에 올랐고, 김춘추와 김유신은 제부와 처남 사이가 된다. 왕의 손위 처남이 된 김유신의 정치적 위상이 한 단계 더 높아졌음은 불문가지(不問可知).미래를 내다보며 마음속으로 신라 사회의 ‘블루칩’으로 지목한 사내 김춘추를 자신의 여동생과 혼인관계로 맺어준 주도면밀한 연출자의 모습에서 김유신의 내적 명민함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 명민한 정치적 판단력과 함께 ‘일당백 무장’의 모습도김유신은 위와 같은 빠른 정세 판단과 내면적 깊이에 더해 외적인 용맹성도 갖춘 사람이었다.일당백(一當百) 무장(武將)으로서의 김유신이 삼국통일을 위한 각종 전투에서 어떤 모습을 보였고, 어떤 공을 세웠으며, 그 공적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니는 것인지는 영남대학교 군사학과 이영찬 객원교수의 논문 ‘김유신의 군인정신과 리더십 연구’에 잘 드러나 있다. 다소 길지만 그대로 인용한다.“김유신은 신라의 무신으로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의 대업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본관은 김해이며 가야국 김수로왕의 12대손으로 15세가 되던 해 화랑으로 낭도를 이끌고 수련하다가 신라군이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할 때 최초로 전투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압량주 군주로서 백제군을 격퇴하고 통일 전쟁에서 뚜렷한 공적을 세우는 등 신라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했다. 당나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신라까지 침략하려 하자 그는 군사를 지휘하며 지도자적인 임무를 수행했다. 그가 사망한 이후 신라는 당의 군대를 대동강 이북으로 몰아냈다. 이순신이 우리나라를 침략해오는 왜적을 물리쳤다면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하고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당나라를 물리쳐 명실상부 자주독립의 국가를 만드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지략가가 아닌 무정단호(無情斷乎)한 무인(武人)으로서 김유신이 보여줬던 결기는 선덕여왕 때 발생한 ‘비담과 염종의 반란’에서도 드러난다.반란이 일어나자 1만여 명의 군사를 가진 김유신에게 그 곱절인 2만 명의 병력으로 무장한 비담은 “패배할 게 분명한 싸움에 나서지 말고 내 밑으로 들어와”라고 조롱했다.이에 발끈한 김유신은 “너희 반란군 중 항복하는 자는 용서하겠으나, 내 군대에 저항하는 이들은 구족(九族·고조, 증조, 조부, 부, 자기, 아들, 손자, 증손, 현손까지의 동종 친족을 아우르는 단어. 즉, 피붙이 전부)을 멸하겠다”고 응수했다.실제로 김유신은 반란이 진압된 후 항복을 거부한 반란 수뇌부의 구족을 모조리 죽였다. 반란 가문의 목을 베는데 어른과 아이의 구분 따위는 없었다. 반면 항복한 이들은 약속대로 죄를 묻지 않았다고 한다.중국 역사 속에도 유사한 전례가 있다. 서초패왕(西楚覇王)으로 불리는 항우(項羽 ·기원전232~기원전202)는 진나라와 전투를 치를 때 상대편 군사 20만 명을 산 채로 땅에 파묻는다.맞서 싸우던 적군이 항복을 했음에도 지금의 경주 인구보다 조금 적은 숫자의 사람들을 모조리 생매장한 것이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Holocaust) 이상으로 무시무시한 이야기다.이를 보면 김유신은 항장불살(降將不殺·항복한 장군은 죽이지 않는다)을 넘어 항졸불살(항복한 졸병도 죽이지 않는다)까지 실천한 덕장(德將·덕을 갖춘 무장)이었던 모양.◆ 신라의 지배자였던 김유신은 행복하기만 했을까?비단 ‘비담과 염종의 반란’에서만이 아니다. 김유신은 온전한 삼국통일의 방해세력이었던 당나라 군대를 몰아낼 때도 가장 앞자리에 섰다. 앞서 언급한 이영찬 교수의 논문을 다시 인용한다.“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당나라는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고, 고구려 땅에는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군정을 실시했다. 또한, 신라 본토에 계림도독부(鷄林都督府)를 두어 삼국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다. 이러한 당의 침략 행위에 대한 투쟁에서도 김유신은 지도적 역할을 했다.…(중략) 672년 석문(石門·황해도 서흥) 벌판 전투에서 신라의 군대가 당에 밀리고 있을 때는 문무왕에게 전략을 자문하기도 했다. 결국, 신라군은 김유신 죽은 뒤인 676년 당나라 군대를 대동강 이북으로 몰아냈다.”이처럼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큰 공을 세우고, 나라로부터 누구도 부러울 것 없는 최고의 대접을 받았으며, 장수(長壽)의 복까지 누린 김유신.그런데, 과연 그의 삶에는 환한 빛만이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이어질 기사에선 그를 어둡게 뒤덮었던 ‘그림자’에 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3-06-27

유네스코 인정한 ‘기록의 나라’ 종이의 힘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구 2·28 민주운동 당시 보도사진을 포함한 4·19혁명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우리나라가 기록물이 18건이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는 ‘기록의 나라’가 된 데에는 종이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종이는 기록물에서부터 문살을 바르는 창호지나 방바닥을 덮는 장판지로 건축용, 산업용에까지 그 용도를 넓혀가면서 문명과 문화의 바로미터가 되었다. 종이는 인내심이 강하고 그래서 수명이 길다.그 종이에 한평생을 바친 이영걸 안동한지 대표는 지난날의 영광이나 현재의 어려움보다 문화유산으로서의 계승 발전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안동한지 전시관을 찾는 관광객이나 체험객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나면서 일부 체험객들이 다시 찾고 있지만 아직 코로나 이전 수준을 회복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 넓은 주차장에 대형버스가 가득 찼는데 지금은 한가하지 않나. 전시관이 한가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한지와 우리 전통에 대한 관심이 옅어지는 것같아 안타깝다.-한지가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한지의 특성과 자랑을 해 달라.△한지는 부드러우면서도 가볍고 그러면서도 질기다. 보존성이 좋아 수명이 길다. 공기를 잘 통해주고 습기를 빨아들이고 내뿜는 통기성과 방음 보온효과도 뛰어나다. 이건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2015년 전통한지 재현 사업 경연대회에서 안동한지가 선정됐고 현재는 정부 훈포장지로 한지가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우리의 기록문화 유산이나 목판이나 금속활자로 전해지고 있는 유산들을 비롯, 고문서들을 복원하는데 한지가 동원되면서 그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삼국유사 목판사업에서 한지가 이용되고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이니 조선왕조의궤용으로, 또 국립문화재보존센터의 문화재복원용으로 한지가 동원되고 있다.-언제부터 한지와 인연을 맺게 됐나.△가정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대구공고)를 중도에 포기하고 친척의 권유로 안동신시장 옷가게에서 일했다. 그러나 가게가 파산하면서 고교 복학의 꿈도 무산되고 말았다. 그때 충북 제천에서 철도국에 근무하는 조카사위로부터 한지공장이 많은 제천으로 와보라는 권유를 받고 한지와 인연을 맺게 됐다.그때 나는 이미 30살로 세 아이의 아버지였지만 주위의 권유에 용기를 내서 고향을 떠나 제천에서 새 인생을 시작한 셈이다.-한지공장 직공으로 출발했다. 창업은 순조로웠나.△3년 동안 한지공장을 내 집 드나들 듯 열심히 공정을 익혔다. 그러자 내 공장을 갖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 제천시 영천동에 ‘영천한지’ 공장을 설립했다. 처음 10여 명의 종업원을 채용한 한지공장은 조그마한 가내공업 수준이었지만 오늘날 안동한지의 모태가 됐다. 공장이 궤도에 오르니 일감도 늘어나고 종업원들 월급도 올라가면서 번창하기 시작했다.그런데 주변에 한지공장들이 새로 들어서기 시작했고 우리 공장은 신기술 도입이 늦어지면서 판로가 막히고 회사 경영에도 어려움이 닥쳐왔다. 드디어는 종업원 월급을 체불할 지경에 이르렀다. 멋모르고 시작한 한지공장은 대량생산으로 이윤만 추구하다가 신기술 도입과 품질향상에 소홀히 한 탓이었다.-회사는 도산했지만 좋은 경험이 됐을 것 같다.△제천 공장을 팔아 직원 월급과 부채를 해결하고 15년만에 고향 안동 안막동으로 돌아왔다. 늙으신 부모님이 우리 5남매를 키우시던 논밭에 부모님을 설득해서 한지공장을 지었다. 제천에서 일하던 일당백의 직원 5명이 함께 했다. 안동을 비롯, 청송 영양 등지에서부터 멀리 원주까지 가서 닥나무를 수집해서 삶아 피닥을 전국의 한지 공장에 공급해주는 창고형 공장이었다.공장을 설립하고 1년동안 꽤 많은 돈을 모았다. 그런데 연료로 폐타이어를 썼는데 검은 연기가 하늘을 덮고 마을을 덮치니 주민들의 민원이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업은 호황이었지만 갈수록 높아지는 주민들의 민원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공장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안동시가 제안한 지금의 풍산읍 소산동으로 이전하고 풍산한지로 재출발했다.-풍산으로 옮겨와서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지금까지의 경험을 살려 안동한지는 고급화를 지향했다. 인사동에는 전주한지가 주름잡고 있었는데 안동한지를 고급화하자 화선지와 서예지로 각광받았다. 대량생산보다는 고품질 고급제품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 김휘동 당시 안동시장이 더 큰 시장을 내다보고 상호를 바꿀 것을 제안했다. 안동한지로 이름을 바꾸고 시설규모를 확장하면서 안동한지는 전국적인 한지 제조업으로 실력을 인정받게 되었다.-지금 현재 직원들 중에서 제천시대부터 같이 일한 직원이 있다고 들었다.△제천 한지공장 시절부터 오늘날 안동한지 공장으로 옮겨올 때 초지공 이창건 손춘모님과 건조공 김계회님이 같이 왔다. 30여 년 같이 일하다가 손춘모 초지공은 몇 년 전 작고했고 이창건 초지공은 고령으로 더 이상 한지를 뜰 수 없게 됐다. 김계회 건조공은 현재까지 40년 넘게 같이 일하고 있다.-안동한지가 생산하는 한지의 종류는 어떤 것이 있나.△한지는 용도에 따라 전문성, 실용성, 예술성으로 구분해서 생산한다. 전문성은 서예 족자용 족보 서적 전문화가용으로 쓰이고 실용성은 문종이 인테리어 장판 문화재 보수용으로 한지가 쓰인다. 예술성은 한지공예품이나 포장용으로 쓰이는 한지를 말한다.종류로는 순지 창호지에서부터 외발지 화선지 배접지 색한지 대발지 천연염색지 실크지 요철지 등 70종이 넘는다. 특히 최근에는 국보나 보물급 지류 문화재의 보수 복원용으로 안동한지가 활용되고 있으며 2016년부터 정부의 훈포장지로도 한지가 사용되고 있다.또 패션과 의류용 한지로 한복 속옷 양말에서부터 넥타이 손수건을, 공예용으로 핸드백 제기 닥종이 인형 찻상이나 쟁반 지승공예 등 80여 가지를 만들어 상설전시장에서 전시 판매하고 있다.-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의 안동방문이 안동한지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이 하회마을을 방문했다. 하회로 가기 전 입구에 있는 안동한지를 방문하기로 계획했고 우리도 사전에 많은 준비를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공장 앞으로 흐르는 개울에 다리가 없었는데 방문 며칠 전 비가 많이 와서 개울이 넘쳐 여왕의 한지공장 방문이 불발됐다. 그러나 여왕의 안동 방문 전후로 주한영국대사와 관계자들이 여러 차례 안동한지를 방문했고 여왕의 안동 방문을 계기로 가장 한국적인 안동이 언론에 소개되면서 안동한지도 붐을 탔고 그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기회가 됐다.-한지의 또 다른 세계적 히트 사례를 소개해 달라.△서울 G20정상회의때 회의장 실내장식에 안동 한지가 사용되면서 한지의 우수성과 전통성을 세계에 과시하는 기회가 됐다. 2010년 11월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정상회의 본회담장을 비롯한 15개 행사장 전체의 실내장식에 안동한지 2천500여 장이 사용됐다. G20정상회의에 참석한 세계 각국의 1만여 지도자급 인사들에게 전통 한지와 한국의 전통문화를 소개할 수 있었다.지금은 유럽 등 문화선진국에서도 문화재 복원용으로 일본의 화지 대신 우리 한지를 이용하고 있으며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서 한지 제조방식을 시연한 것은 우리 한지의 우수성을 인정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교황 요한23세의 애장품인 지구본을 우리 한지로 복원해 내기도 했다.-그런 한지가 지금 위기라고 했다.△한마디로 수요 부족이다. 소비가 안 되고 있는 것이다. 주거환경이 한옥에서 아파트로 바뀌면서 한지 도배 장판지 수요가 많이 줄어들었고 실내장식도 유리가 한지를 대신하면서 소비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또 사회가 디지털화 될수록 한지 쓰임새도 적어지는 것 같다.-안동으로 와서 기초의원으로 지역발전에 앞장섰던 시절도 있었다.△제천에서 이사와 사업을 벌였을 때 안막동은 안동에서도 상대적으로 낙후지역이었는데 지역 발전을 위해 나서달라는 지역민들의 바람이 있었다. 또 당시 친구였던 김길홍 국회의원의 권유도 있어 출마하게 됐다. 안동시의원으로 당선된 뒤 주민들의 숙원사업인 안막동의 외곽도로를 개통하는 등 기대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한다.-닥종이 명인이기도 하다.△전통한지는 전통기법을 활용한 제조와 신상품 개발을 위해 전통한지 제조기능 보유자 양성과 원료인 닥나무 재배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를 위해 닥나무 명인에 신청해 2015년 종이문화재단으로부터 닥나무 명인으로 선정됐다.종이문화재단은 안동 전주 원주 등 전통한지를 생산하고 있는 전국의 한지 품질을 조사한 결과 안동한지가 가장 우수하다며 명인으로 선정했다는 것이다.-지금 한지의 주 고객은 누구인가.△지금은 한지공예를 비롯한 전통공예 예술가와 전통사찰, 문화재 관계자 등이 주 고객이다. 고문서나 고서화 같은 문화재를 복원 재현하는 박물관이나 동화사 해인사 통도사 불국사 등 사찰들이다. 또 민화 작가나 교육기관도 한지의 주요 고객이 되고 있다. 특히 민화의 전통 안료와 색감이 잘 드러나고 보존성도 좋은 것이 안동한지이다. 민화 그리기에 사용되는 한지는 값이 비싸기는 하지만 그만한 값을 하기 때문에 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품 표구에 쓰이는 배접지로도 한지가 쓰이는데 고품질 고품격의 작품을 담을 그릇으로 한지가 제격이기 때문일 것이다.-한지의 홍보와 보급을 위해서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안동에서 한지 축제를 열고 있다. 2009년 시작해서 해마다 안동에서 한지 축제를 벌이는데 올가을에도 10월 한지축제를 계획하고 있다. 한류문화의 세계화 추진 전략으로 시작됐으며 한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한지 산업의 지역 특화 및 다양화를 모색하는 행사로 한지 관련 업체 및 공예인들이 모두 참여하고 있다.또 안동 국제탈춤페스티벌에서 한지 패션쇼를 벌이기도 했고 서울 운현궁에서 한지 패션쇼를 벌이기도 했다. 또 대한민국 공예문화박람회와 한국 스타일박람회 등에도 참여해 한지의 우수성을 적극 홍보했다.-안동한지가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는 문제는 어떻게 추진되고 있나.△안동한지가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는 것은 안동한지의 우수성을 세계로부터 인정받는 것과 함께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고 보전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등재되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지난 3월 우동기 국가균형발전위원장과 이배용 국가교육위원장, 김형동 국회의원, 이재갑 안동시의원과 김은경 안동시 문화관광국장, 그리고 7개 대학총장 등이 안동한지를 찾아 안동한지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지혜를 모았다.이 자리에서 이남식 인천재능대 총장은 일본 화지는 연간 1조원 가량 유통되는데 비해 우리 한지는 1천억원대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한지 소비량을 늘이기 위해 건설업체와 협약을 맺어 신규 아파트나 주택을 건설할 때 방 한 칸을 한지로 도배해서 입주자의 건강도 위하고 한지 소비도 늘리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안동한지의 기술과 전통의 전승문제는 어떻게 생각하나.△세대를 이어 한지를 만드는 것이다. 세상이 AI시대, 빅데이터의 시대로 발전할수록 우리의 고유한 전통문화는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대를 이어가며 전통문화로 한지를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들(이병섭 사장)은 이미 현장에서 20년 넘게 일을 하면서 한지 문화를 계승하고 있고 손자도 대학교에서 학업을 마치면 한지를 배우고 이어갈 것으로 준비하고 있다. □ 이영걸(李永杰·83)안동한지 대표. 닥종이 명인.안동 출신. 경덕중 졸, 대구공고 중퇴, 대구대학교 사회개발대학원 수료.제2대 안동시의원.제천 영천한지공장 설립(1970), 안동 안막한지공장 설립(1986), 안동한지 설립(1988).화엄사 고려대장경연구소에 화엄석경탁본용 한지 납품(2001).서울국립중앙도서관에 고문서 복원용 한지 납품(2004).국제탈춤페스티벌에서 한지패션쇼(2006), 서울 운현궁에서 한지패션쇼(2008).자랑스러운 안동시민상 수상(2010).삼국유사 목판사업 인출 제책용 한지 납품(국학진흥원, 2015).정부포상 증서의 전통한지 재현 및 행자부 납품 시작(2016)자랑스러운 경북도민상 특별상(2017).영가문화상 수상(2020).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할 것을 생활신조로 삼고 자식들에게는 착하게 잘 살 것을 강조한다./이경우 편집위원끝

2023-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