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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새마을테마공원, 한국을 넘어 세계인의 정신운동 산실 될 것”

UN과 손잡고 우간다 등 아프리카 방문현지에서 새마을운동 직접 전수해줘`눈으로 볼수 있는 새마을 운동` 절실△ 대한민국새마을박람회를 성공리에 마치고2009년 9월에 구미박정희체육관에서 열렸던 대한민국새마을박람회는 성공적으로 잘 끝났어요.대통령도 와주시고 외국대사들도 정말 많이 와주셨어요. 행사는 정말 거창하게 잘 했는데 다른 곳에서 문제가 생겼어요. 외국에서 오신 대사분들 대부분이 이렇게 전시된 것 말고 새마을운동을 실제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곳에 가보고 싶다고 하시는 거에요. 새마을 운동한지 40년이 지났으니 보여 줄 곳이 없는 거예요. 새마을운동을 제대로 재현할 필요성이 그때 나온거예요.우리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을 재현해 놓은 곳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지금 젊은 사람들은 우리나라 60~70년대가 얼마나 가난한지 모르잖아요. 본 적이 없으니까.당시에는 쌀이 없어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 겨울 추위를 어떻게 견디었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심지어 내 자식도 옛날 밥이 없이 굶고 다닌 이야기를 하면 `라면 끓여 먹으면 되잖아요`라고 하니까…. 우리 세대 모두가 가난만큼은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아야겠다는 그 생각으로 정말 열심히 살았잖아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고생스런 시절을 지금의 젊은이들이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우리 세대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젊은 세대들이 안다면 지금과 같은 세대간의 오해는 좀 덜하지 않을까…그런 생각이 많이 드네요.△ 새마을운동 UN과 손을 잡다대한민국새마을박람회를 마친 뒤 얼마되지 않아 김관용 지사님을 모시고 UN을 갔어요. 2009년도 12월로 기억하고 있어요.당시 반기문 UN 총장의 수석 자문관인 제프리 삭스 교수(콜럼비아대학)가 아프리카 빈곤 극복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나봐요.그런데 그쪽에서 먼저 경상북도의 새마을운동을 프로젝트에 접목시키고 싶다는 제안을 한 거에요. 그래서 UN을 방문하게 된거죠. 새마을운동이 가난을 극복한 성공사례라는 것을 이미 알고 도와달라는 거였죠.그래서 국제원조기구인 코이카와 함께 들어갔어요. 거기서 WTO스텝제단, 경북도, 코이카 등 3개 기관이 돈을 내고 기술이나 현지지도는 UN 산하의 MP(Millennium project)재단이 운영하는 걸로 했죠. 그때 돈을 1년에 경북도가 2억원, WTO스텝제단 2억원, 코이카(KOICA)가 16억원 등 총 20억원을 지원하기로 했어요.MP재단이 운영은 했지만 방식은 우리 경북도가 하라는 방식대로 하기로 했죠. 새마을운동이 세계로 나간 첫번째 사례가 된거에요.이후에 또 지사님과 함께 우간다와 탄자니아를 방문했어요. 우리 경북도가 금전적 지원을 하고 있는 곳이었거든요. 거기서 우간다 총리와 탄자니아 대통령을 만났어요. 가는 곳마다 비포장 도로라 다니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었어요. 거기다 내란이 있는 지역이라 항상 무장을 한 UN군이 우리를 경호해 주고 있었죠. 한번은 첩첩산중 민둥산이 있는 지역에 비가 내려 3시간 동안 꼼짝도 못했던 경우도 있었어요. 도로가 비포장이니 비가 오니까 진흙으로 변한거예요. 비는 금방 그쳤는데 땅이 마를때까지 기다려야 했죠.또 한번은 탄자니아를 갔는데 가이드가 왼쪽은 하루에 1달러로 살고, 오른쪽은 2달러로 산다고 소개를 했는데, 보니까 동네 자체가 달라요. 1달러의 차이가 엄청난 거에요. 사실 그 나라에는 우리 경북도 말고도 여러 선진국에서 원조를 엄청나게 해주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원조가 잘 배분이 안되는게 문제였죠. 속된 말로 위에서 다 빼먹으니까. 그래서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지요.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지사님이 “우리가 새마을운동을 지금처럼 진행하면 코이카에서 하는 국제원조와 다를게 없다. 우리가 직접 가서 새마을운동을 해야하는게 맞을 것 같다. 우리가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전수해 주자”고 강조했어요. 그래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새마을세계화 팀을 만들었어요. 사무관 1명과 직원 3명으로. △ 새마을운동의 세계화새마을운동을 아프리카에 전수하려면 어떻게 하는게 가장 좋은 방법인지를 찾아야 했어요. 새마을운동과 관련된 옛 교수님들을 찾아가고 새마을중앙회에도 가고, 코이카에도 가서 이런저런 이야기와 정보를 많이 수집했어요. 그래서 초기에 새마을운동 지도자들에게 했던 것처럼 아프리카 사람들에게도 교육을 시키기로 했죠. 그런데 교육을 받고 돌아가면 그걸로 끝이에요. 서로의 문화가 달라도 너무 다른 걸 몰랐던 거죠. 그리고 그 사람들은 우리들처럼 간절함이 없었기도 했구요.그래도 여기서 멈출수는 없으니 방법을 바꿨어요. 우리가 그 곳에서 상주하는 걸로. 그 곳에서 우리가 살면서 직접 하는 모습을 그들이 봐야 느끼고 배울거라 생각한거죠. 그런데 사람을 보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말도 안통하고, 기후풍토가 모두 다른데 잘 버틸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죠. 그래도 사전답사를 통해 직원들하고 팀장을 보내기로 하고 첫해 코이카로부터 25억인가를 지원받았어요. 그 사람들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 그래도 성과는 있었죠. 쌀 재배하는 방법도 가르치고 해서 쌀 생산량을 7배나 높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그 동네에서 잔치까지 열어주기도 했으니까.성공적인 새마을운동 보급을 지사님이 직접 UN에 가서 보고도 했어요. 반기문 총장이 새마을운동이 아프리카에서 성공하는 걸 직접 보고는 “당신들(아프리카)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배워라. 그것이 국가발전의 최고의 원동력이다”라고 이야기 했어요.그때부터 에티오피아에서 우리도 새마을운동을 해달라고 요청이 왔어요. 아프리카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지역의 우즈베키스탄에서도 요청하고, 동남아에서도 요청이 오고 했어요. 점점 규모가 커지니까 경북도가 직접하는게 힘들어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새마을세계화 재단이라는 독립된 재단이 만들어 지게 된겁니다.△ 새마을운동의 종주 도시 구미와 경북도새마을운동이 세계로 뻗어 나가고는 있었지만 문제는 국내에 있었어요. 사실 이 새마을운동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들이 점점 없어지고 있었고, 사람들의 인식에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거든요. 정말 웃긴게 새마을운동에 대한 연구논문으로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상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외국인들이에요. 한국인은 없어요. 제가 알기로는. 사실 정말 부끄러운 일이잖아요. 대한민국새마을박람회 당시 우리나라를 찾았던 외국대사들이 이렇게 대단한 새마을운동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곳이 없는게 더 이상하다고 했어요. 그래서 지금의 새마을테마파크 조성사업이 시작된 거에요.이 사업은 처음부터 힘들었어요. 정부도 이 사업의 필요성을 잘 몰랐으니까. 그냥 새마을운동을 하면되지 이게 왜 필요한가라고 오히려 되물어 볼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새마을을 담당할 수 있는 중앙부처가 없어요. 그래서 외교부, 총리실, 행자부. 코이카 등 안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뛰어 다녔어요.그렇게 하루가 멀다하고 죽도록 뛰어다니니까 성과가 조금씩 나타나더라구요. 사실 중앙부처 사람들도 우리들 때문에 지쳤을 정도였으니까요.그런데 어느정도 사업이 구체화되고 예산이 세워지니까 갑자기 성남시에서 자기들이 새마을테마공원을 했으면 한다고 나서는 거예요. 새마을중앙회가 있다는 이유로. 또 서울에서 가까우니 찾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면서요. 그래도 새마을운동에 대한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 구미시이고, 그 정신을 이어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곳 또한 구미시와 경북도이니까, 구미에 새마을테마공원을 건립해야한다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구미로 최종 결정이 된거에요. 지금은 새마을테마공원을 가지고 또 이런저런 말들이 많은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 한마디는 꼭 하고 싶어요. 새마을운동에 대해 말로 해서는 지금의 세대들이 절대 알 수가 없죠. 그 당시에 새마을운동이 왜 필요했으며, 새마을운동이 단순한 사회운동이 아니라 정신운동이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그 정신운동이 세계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제대로 알려야 합니다. 새마을테마공원이 바로 그런 공간이 될 것이고, 그 역할을 하리라 믿습니다./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7-09-08

`유럽의 입구, 아시아의 출구` 이스탄불에서 받은 두가지 선물

터키의 이스탄불은 묘한 도시다. 15분만 배를 타면 유럽에서 아시아로,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가는 게 가능하고, 낚시꾼들로 가득한 갈라타 다리 밑 카페에 앉아 터키 전통주 라키(Rakı)를 마시고 있자면 좌와 우로 유럽과 아시아가 한눈에 들어온다. 몇 해 전 봄. 이 `묘한 매력의 도시` 이스탄불에서 보름쯤을 머물렀다.어느 날은 무료함을 견디기가 힘들어 어디를 가겠다는 계획도 없이 숙소를 나와 배를 타고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외관이 썩 근사한 하이다르파샤역(驛)에 도착했다.그 역은 동서(東西)로 수십 시간을 달리는 국제열차의 출발지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까지 가는 기차도 일주일에 한 번 다니는데 소요 시간은 자그마치 70시간. 연착이라도 할라치면 나흘을 기차 안에서 먹고 자야한다.하지만 그런 장거리 열차만 있는 건 아니고, 한국식으로 말하면 짧은 거리를 왕복하는 `교외선 기차`도 오간다. 어차피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기에 가장 먼저 출발하는 전철에 무작정 올랐다. 그게 기자의 여행스타일이기도 하다.이스탄불에 오는 관광객은 모두 다 세인트 소피아 성당(Hagia Sophia)과 블루 모스크(Blue Mosque), 토카프 궁전을 본다. 하지만, 그것만 보고 도시를 떠난다면 대체 무슨 재미인가? 그곳들은 사진으로 봐도 무방하다. 게다가 기자는 사람 우글거리는 공간을 싫어한다. ▲ 이스탄불 예술고등학교 학생들과 친구가 되다기대 없이 올라탄 기차. 그런데 재밌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기차에 이스탄불 예술고등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하는 열일곱, 열여덟 예쁘장한 여고생들이 40명이나 탔던 것.`달리는 열차 안에서 승객들 모습 크로키 하기` 따위의 특이한 사생대회를 하는 모양인데, 꽤 유명한 학교인지 방송국에서 취재까지 나와 있었다. 녹화용 TV카메라가 여러 대 보였다.기차에 오른 아이들 중 맹랑한 꼬마아가씨 둘(튜바와 제랄드)이 다가와 망설임 없이 물었다.“어디서 왔어요?”“한국에서 왔는데.”“우리랑 함께 앉아서 갈래요?”그 질문에 보통의 40대 아저씨라면 당연히 이렇게 답해야 옳다.“아니야. 나는 여기서 경치를 보며 가는 게 편해. 너희는 가서 그림 그리렴.”그런데, 기자는 보통이나 보편을 거부하는 성정. 해서 이렇게 대답했다.“Sure. Why not?”이런 날이 아니면 언제 친구 딸 또래의 아이들과 이야기를 해볼 것인가. 둘은 복잡한 기차 안에서 완성한 그림들을 보여준다.거기엔 기자의 얼굴도 있었다. 그림의 미적 완성도와 솜씨를 떠나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방인에 대한 따스한 관심이 담겨 있는 그림이니 말이다.`페이스북 친구`가 되자며 이메일 주소를 알려준 튜바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는 제랄드.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해줬다.`오냐, 친구 하자. 뭐 어떠냐. 우정에 국경과 나이가 무슨 상관이라고.`그날 이후 둘은 페이스북 친구가 됐고, 시간이 꽤 흐른 지금도 여전히 기자의 가장 어린 친구들로 남아 있다.10년 후쯤 다시 이스탄불을 찾아 재회할 땐 튜바와 제랄드 모두 렘브란트와 살바도르 달리를 뛰어넘는 멋진 화가가 되어있기를. ▲ 아이들 사이엔 `종교`와 `인종`을 가르는 벽이 없다이스탄불 교외선 기차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터키 친구들을 얻었다면, 이스탄불 바다 위를 떠가는 배 위에선 인종과 종교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았다.해질 무렵. 유럽 지역을 출발해 아시아 지역을 한 바퀴 경유한 후 다시 출발지로 돌아오는 보트 투어를 했다.터키에서만 맛볼 수 있는 드라마틱한 대륙 넘나들기. 승선 요금은 12리라.우리 돈으로 대략 4천원. 소요 시간은 1시간 30분.바다건, 강이건, 호수건 물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배 타는 걸 좋아하는 기자에겐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이스탄불에서 지내는 동안 무려 4번을 같은 배에 올랐다.비행기를 타지 않으면 국경을 넘지 못하는 나라에서 살아온 국민인지라 잠깐 동안에 `대륙을 넘나드는` 생경한 매력에 흠뻑 빠졌던 것 같다.각설하고. 그날 배의 객실. 이스라엘에서 놀러온 여행객들과 마주 보는 좌석에 앉았다. 똘똘해 보이는 여섯 살 사내아이가 귀여웠다. 엄마와 이모도 친절했고, 꼬마를 안고 함께 사진을 찍은 아저씨 역시 서글서글 사람이 좋았다. 그들은 두말 할 것 없이 유대인. 우리 좌석 뒤에는 히잡(Hijab)을 쓴 무슬림 가족이 탔다. 그 가족 중엔 이스라엘 꼬마아이와 동갑인 여섯 살 소녀도 있었다. 그 아이도 너무 귀여웠다. “같이 사진 한 장 찍자”고 하니 부끄러워하면서도 포즈를 잡는다. 역시 어려도 여자는 여자였다.그런데 두 꼬마아이, 그러니까 유대인 소년과 무슬림 소녀 사이엔 종교와 인종이라는 무섭고, 무거운 벽이 존재하지 않았다.빨간색 사탕과 뻥튀기 과자를 서로 건네며 마치 어린 연인들인양 손을 잡고 놀았다. 갑작스런 깨달음이 눈앞으로 휙 지나갔다.우리가 모두 아이였다면 인종과 종교가 불러들인 전쟁과 학살, 탐욕과 엇나간 욕망이 초래한 수많은 비극들이 애초에 없었을 것을.그날, 기자는 인류가 화해와 상호이해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아이들의 크고 맑은 눈동자에서 보았다.불어오는 바닷바람은 시원했고,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며 본 이스탄불의 석양은 아름다웠다.맞다. 우리는 모두 한때 `아이`였다. 인류의 불행은 `아이의 마음`을 잃거나, 잊어버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하니, 탐욕을 버리지 못하는 어른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졌다.터키는…동방~서방 문화 연결 가교관광지선 영어 통용돼국민 절대다수 이슬람교도아시아 대륙 서쪽 끝에 자리한 나라로 “유럽의 입구, 아시아의 출구”로 불린다. 1920년대 술탄(Sultan·이슬람국가의 정치 통치자) 제도가 없어지기 전에는 오스만투르크 제국(1297~1922)으로 존재했다. 1923년 10월 공화국이 됐다. 이와 동시에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는 근대화정책도 속도를 냈다.공식 명칭은 터키공화국(Republic of Turkey). 동쪽으로는 이란과 아르메니아, 조지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남쪽에는 이라크와 시리아가 있다. 북서쪽으로는 불가리아, 그리스와 접한다,북쪽엔 흑해, 남쪽엔 지중해, 서쪽엔 에게해와 마르마라해가 있다. 모두 아름다운 바다지만, 옛날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영유권 다툼이 이어지고 있다.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관문으로 역할 해왔고, 역사적으로도 동방과 서방의 문화를 연결하는 가교였다. 이와 같은 위치적 특성 탓에 정치적인 부침이 극심했다. 이슬람 왕조인 오스만의 후계를 잇는 국가임을 자임한다.많은 수의 주민은 터키인(75%). 1980년대 중반부터 동쪽 지방에 거주하는 쿠르드족(18%)이 분리·독립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여러 차례의 유혈사태로 번졌고 현재도 종족분쟁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터키인과 쿠르드인 외에도 그리스인과 불가리아인 등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면적은 78만3천562㎢. 해안선의 길이는 7천200km에 이른다. 수도는 앙카라(Ankara). 하지만, 매년 수백만 명의 여행자가 몰리는 곳은 인상적인 모스크(mosque·이슬람교의 예배당)와 아름다운 바다를 볼 수 있는 이스탄불이다. 이즈미르, 안탈리아, 카파도키아 지역 등에도 많은 외국인이 방문한다.▲ 이스탄불 유람선에서 만난 꼬마.공용어는 터키어. 하지만 관광지에선 영어가 어렵지 않게 통용된다. 국민의 절대다수가 이슬람교도(99%)다. 1% 정도의 사람들만이 천주교, 기독교, 유대교를 믿는다. 사용되는 화폐는 터키 리라(TL). 1터키 리라는 한국 돈 약 330원이다. 100 터키 리라 정도면 간단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 인구는 8천만 명이고, 평균수명은 73세.내륙지방은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고, 해안은 해양성 기후다. 북동부와 아나톨리아 고원지대는 여름엔 기온이 높고 건조하며,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린다. 가장 추운 시기는 1~2월. 이때 평균기온은 0℃~10℃다. 지중해와 에게해 연안은 지중해성 기후. 여름은 고온·건조하고 겨울은 온화하지만 습기는 높다. 연평균 기온은 18℃~20℃.한국전쟁 당시 많은 수의 군인들을 파병했다. 그런 이유에선지 나이 지긋한 터키인들은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부른다. 여유롭고 친절한 국민성으로 관광객들을 대한다. 또 하나 재밌는 특징은 설탕을 듬뿍 넣은 홍차를 너나없이 즐긴다는 것. 하루 10잔 넘게 홍차를 마시는 할아버지를 만난 적도 있다.글/홍성식기자·사진/류태규

2017-09-08

영일만항 국제여객부두 준공 `한발 앞으로` 포항, 환동해 `크루즈 허브 도시` 현실 된다

해양관광산업의 신성장 동력으로 손꼽히는 크루즈 관광은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분야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지난해 발표한 연구 자료에 따르면 세계 크루즈 시장에서 아시아는 최근 5년간 연평균 9.1% 성장세를 보인 가운데, 2016년 아시아 크루즈 관광객이 310만명을 기록, 2020년에는 크루즈 관광객이 500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포항에서도 다양한 해양관광 분야 육성에 집중하고 있는 가운데 크루즈선 유치 등 크루즈 관광 활성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2011년 국제페리 정기항로 `한일공동선언문` 채택러시아·中 등과 관광 교류 합의서도 잇따라 체결日 후지마루호 등 다양한 크루즈선 다녀가22일에는 유럽 크루즈선 실버디스커버러號 입항 예정2020년엔 최대 5만t 규모 접안 국제여객부두 준공中∼러시아∼日 잇는 환동해권 중심지 역할 기대울릉도·독도 해양관광, 경주·안동 내륙관광 연계 시너지도□ 왜 `크루즈 관광`인가세계적으로 생산 중심의 산업 발전 속도가 더뎌지는 가운데 이에 대한 대안으로 관광산업의 중요성이 더욱 대두하고 있다. 특히 과거에는 내륙 중심형 관광을 위주로 관광산업 분야가 성장해왔다면 해양관광의 비중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세계관광기구(UNWTO)에 따르면 세계 관광시장은 최근 10년간 연평균 4.3%의 성장세를 기록해왔다. 특히 지난 2012년 기준 세계관광객 규모는 10억명, 시장규모는 1조2천억달러를 차지하고 있으며 최근 10년간 권역별 관광객 비중은 미국·유럽시장이 13%p 감소한 반면, 아시아·태평양시장은 11%p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이 중 전체 관광시장에서 해양관광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50%로 추산되고 있으며 세계관광기구가 발표한 미래 `10대 관광트렌드` 중에 크루즈 등 6개 분야가 해양관광과 연관된다.크루즈 산업은 다양한 업종이 연계된 융합적인 산업으로 여러 분야의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선박을 공급하는 크루즈 선사와 항만 당국, 크루즈 인력 시장, 크루즈 선용품 업체, 선박을 건조하는 조선소의 활성화와 관광지 집객 효과 등을 누릴 수 있어 새로운 먹을거리 창출로 각광받고 있다.또한 최근 주목할 점은 아시아에서 관광산업을 주도하고 있는 중국에서의 크루즈 시장 성장세가 두드러지고 있는 부분이다. 중국인들의 소득 수준 향상과 더불어 중국이 전세계 2대 크루즈 여행 시장으로 올라서게 된 것이다.한 언론사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 크루즈 항해 수는 820여회, 시장 규모는 67억위안(한화 1조1천억원 규모)에 달했다. 중국 내 크루즈 시장이 연평균 40% 성장률을 보이며 전 세계에서 두 번째 규모를 차지하고 있다.이와 함께 상하이 국제항운연구센터에서도 오는 2030년까지 상하이의 크루즈 여행객 수가 연간 800만~1천만 명에 달하며 세계 최대 유람선 항구가 될 것으로 전망한 바 있다.이처럼 고성장하는 중국 시장을 겨냥해 글로벌 대형 크루즈 기업들도 경쟁에 가세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역시 이러한 흐름에 맞게 크루즈 시장 육성을 준비, 아시아 크루즈 관광의 성장을 견인하고자 고심하는 추세다.이를 뒷받침하듯 지난달 25일 김영춘 해양수산부 장관이 제주 서귀포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5회 제주국제크루즈포럼 개회식`에서 “올해 한·중 관계의 변화로 어려움에 빠진 크루즈 산업의 활성화를 통해 오는 2020년까지 연 300만명의 크루즈 관광객을 유치하는 등 정부가 적극적으로 뛰겠다”고 밝힌 바 있다.제주항을 포함한 국내 항만을 동북아 크루즈 모항으로 키우기 위해 정부가 적극 나설 계획인 것.해양수산부는 올해 안으로 정부가 한국 기항지를 대표해 `아시아크루즈협의체(ACC)`에 가입하고 국내 항만이 동북아 크루즈 모항으로 정착될 수 있도록 인프라 확충에 적극적으로 지원할 방침이다. □ 포항시의 크루즈 관광 활성화 노력포항시는 세계적인 크루즈 시장 성장에 걸맞은 국제여객항로 개설을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2011년 7월에는 일본 교토부지사 및 마이즈루시와 국제페리 정기항로(영일만항-마이즈루항) 개설을 위한 `한일공동선언문`을 채택, 영일만항 컨테이너부두를 이용해 2014년 3월에는 시범운항도 진행했다.또한 국제여객 정기항로 추가 개설 및 국제여객 수요 확보를 위해 러시아(블라디보스톡, 하산군) 및 중국 등과 관광 교류 합의서를 체결하는 등 다양한 성과를 내고 있다.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지난 2009년 2만3천t 규모의 일본 후지마루호가 승객 603명을 태우고 포항에 입항, 이후 닛폰마루, 퍼스픽비너스, 아수카Ⅱ, 실버디스커버러호 등 다양한 크루즈선이 다녀가며 4천명 이상의 크루즈 관광객이 포항을 방문했다.아울러 대형 국제 크루즈선의 안전한 입항을 위해 부두접안 시설 방충제를 적합한 시스템 펜더로 교체해 10만t 규모의 크루즈선이 안전하게 접안 할 수 있도록 시설 개선도 최근 완료했다.이와 함께 포항시는 지난달 동북아 CEO경제협력포럼을 통해 한·중·러·일 환동해 권역의 거점도시 관광지를 투어 할 수 있는 환동해권 크루즈선 운항과 물류·인력 수송을 위한 정기 페리 항로를 제안했고, 일본 서안,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자루비노 항을 통한 물동량과 인력수송을 위해 정기 페리항로 개발을 준비하고 있다.지난 2일에는 2014년 승객 900여 명을 태우고 포항에 입항했던 아수카Ⅱ호가 올해 역시 800명 이상의 승객을 싣고 영일만항에 입항할 예정이었으나, 당일 기상악화로 인해 안타깝게도 접안하지 못하며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는 22일에는 2015년, 2016년 2년 연속으로 포항을 찾았던 유럽발 크루즈선 실버디스커버러 호가 영국 등 관광객을 태우고 또다시 영일만항을 찾을 예정이다. 이들은 포항에 도착해 얼마 전 확장 준공한 영일만항 국제여객 입출국장을 통해 입국심사를 받는다. 이어 시에서 준비한 취타대의 입항 축하공연을 관람하고 포스코 역사관, 덕동마을, 양동마을 및 죽도시장 투어 등 포항 관광을 하게 된다.포항시 관계자는 “앞으로 건설되는 국제여객부두 등 다양한 인프라 구축을 통해 국제 관광객을 맞기 위한 준비에 최선을 다하겠다”며 “한·중·일·러 등 여러 국가의 도시들과 협력해 여객선 유치에 나서고 선사와 여행사를 대상으로 영일만항과 연계한 맞춤형 관광프로그램을 개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영일만항, 국제여객부두 건설로 재도약오는 2020년 영일만항에 국제여객부두가 준공되면 포항시의 크루즈 관광 인프라가 한층 더 탄탄해질 전망이다.포항지방해양수산청에 따르면 지난 1일 포항 영일만항에 최대 5만t급 국제여객선이 접안 할 수 있는 국제여객부두를 축조 공사가 시작됐다.2020년 8월 준공 예정인 이번 사업은 국제여객부두 310m 축조에 공사비 284억원을 투입해 ㈜한진중공업이 시공할 계획이다.영일만항에 국제여객부두가 준공되면 최대 5만t 규모의 크루즈가 접안할 수 있으며 중국 동북3성~러시아 연해주~일본 서안을 잇는 환동해권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고, 러시아와 일본 및 중국 항로를 운항하는 대형 여객선 유치가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울릉도·독도 해양관광과 경주·안동 내륙관광을 연계한 시너지효과도 기대된다.또한 중국·러시아 등 북방지역과의 경제협력 사업을 진두지휘할 대통령 직속 `북방경제협력위원회`가 빠르면 이달 말 출범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포항 영일만항이 동북아시아, 유라시아 지역 국가와의 교통·물류·에너지 중심지로 성장, 신규 항로 개설 등의 탄력을 받아 이번 국제여객부두 건설과 연계해 물류·관광분야의 동반성장 효과를 거둘 것으로 관측된다.포항지방해양수산청 관계자는 “영일만항은 `중국 동북3성-러시아 연해주-일본 서안`을 잇는 환동해 경제권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 경주와 안동 및 대구 등 다양한 관광자원과 연계한 환동해권 국제여객 기항지로 발전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고세리기자 manutd20@kbmaeil.com

2017-09-07

“새마을운동 정신 지속되어 서로 함께 살아갔으면…”

편창범(62)전 경상북도 새마을봉사과장은 새마을운동 지도자는 아니지만 새마을운동의 정신이 계승되도록 하는 여러 사업들의 밑거름을 만들었다. 1975년 공무원에 첫발을 디딘 그는 2008년 10월부터 2011년 1월까지 새마을봉사과장을 거쳐 성주군 부군수, 경북도 정책기획관을 역임한 뒤 현재는 경북행복재단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편창범 전 과장은 지금 건설 중인 새마을테마공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제1회 새마을박람회를 고안한 인물이다. 편 과장은 1998년 국무총리 표창, 2004년 녹조근정 훈장, 2014년 홍조근조훈장을 수상했다.그에게서 새마을테마공원의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1975년 공무원 첫 발…첫 임무 2가지는새마을운동사업·통일벼 재배 권장 업무농민들 매일 찾아가 식량부족 해결 호소새마을운동 유산·기록물 등 보존하고파구미서 `대한민국 새마을박람회` 첫 개최대통령·국빈·시민 등 참석, 행사 `성공적`△새마을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할 당시 공직에 들어와새마을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가 1970년대 잖아요. 좁은 길을 넓히고, 초가지붕 뜯어내고, 담장 허물어 현대식 주택으로 바꾸기 시작할 당시 첫 공직을 시작했어요. 1975년도에. 공무원이 되니까 첫 출근을 바로 면사무소로 오라고 하더라구요. 가니까 당시 가장 큰 업무가 두 가지가 있더라구요. 그 중 하나가 새마을운동 사업이었고, 다른 하나는 통일벼 재배였어요. 당시에는 식량이 부족해 식량자급자족을 위해 생산량이 많은 통일벼 재배를 권장했었거든요. 그런데 이게 당시에는 여러 문제점이 많았어요. 그러니 아무도 통일벼를 재배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왜냐하면 당시 벼농사를 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었으니 굳이 통일벼를 심을 이유가 없었던 거죠. 통일벼라는게 사실 외국에서 들어온 종자이다보니 우리나라 기후하고 잘 맞지 않아 제대로 정착이 안되었어요. 벼의 품종에 따라 벼가 크게 자라면 바람에 약해 자꾸 넘어져 버리고, 키가 작게 자라면 벼는 많이 달리는데 이삭이 오래 붙어있지 못하고 빨리 떨어지는 현상이 생기고. 이리저리 힘들었어요. 농촌진흥청에서 육종을 개발하고 우리나라 기후에 접목시키는데 시간이 좀 걸렸어요. 그래도 당시 우리나라는 쌀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으니 일단 심어야 했지요. 여유있게 육종을 다 개발할 때를 기다릴만한 여유가 없었어요. 그래서 공무원들이 못자리 철이 되면 하루가 멀다하고 농사짓는 사람들을 찾아가 통일벼를 심도록 설득하고 그랬어요. 그래도 안되면 집에 주저앉아 괴롭히는 방법으로 일단 심어만 달라고 조르곤 했죠. 볍씨를 담아 가지고 가면 다 엎어버리는 일은 허다했어요. 그래도 그 분들 마음도 이해는 하니 어쩌겠어요. 다시 일일이 주워 다시 담아가고. 지금 생각하면 거의 반 강제적으로 통일벼를 심도록 한 것 같아요. 그러다 정부에서 이중곡가제를 하면서 사정이 좀 나아졌죠. 통일벼를 재배하면 비싸게 수매해주고, 일반 시민들에게는 싸게 유통시키고. 그렇게해서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쌀 보급률이 점점 나아지기 시작했어요. △새마을운동의 기본 원칙은 경쟁이다당시에 식량증산과 퇴비증산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어요. 그런데 퇴비는 동네별로 공동으로 만들어 모두가 가져다 쓸 수 있도록 했어요.당시 새마을운동은 동네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움직였어요. 지금 생각해도 참 단합이 잘 되었어요. 그 중에서도 특별히 단합이 잘 되는 곳도 있었구요.경진대회와 품평회 같은게 많았어요. 잘하는 곳에 포상도 많이 주었죠. 잘 못하는 곳은 독려를 해주고. 그래서 더욱 열심히 했었던 것 같아요. 그때 눈으로 봤어요. 새마을운동의 기본 원칙 중 하나가 경쟁이라는 것을. 그것이 새마을운동의 성공요인이라고 생각해요.1971년도 처음 새마을운동을 시작할 당시 8월 말인가 9월인가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나는데 360부대 정도의 시멘트를 전국 마을단위로 다 줬어요. 잘하는 마을은 철근하고 시멘트를 부상으로 더주고. 그걸로 동네 들어가는 길을 다 만들었어요. 그때도 공무원들 고생 많이 했어요. 왜냐하면 공사를 할 수 있는 인력과 재료는 있는데 막상 동네길을 만들 수 있는 땅을 살 돈이 없잖아요. 정부도 없고 주민들도 없고. 그래서 공무원들이 해당 주민들을 찾아가 설득해 기부채납을 받았죠. 공짜로 땅을 내어 놓으라고 설득하는게 결코 쉬운일이 아니에요.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에는 공익이라는 걸, 서로 함께 살아간다는 걸 아는 때였죠. 지금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겠죠.△초창기 관 주도는 어쩔 수 없는 상황새마을운동이 초창기 관 주도로 이뤄졌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이는 정확한 사실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에요. 사실 그런 사람들은 알려고 하지도 않겠지만요. 1970년대 초반까지 경제적 수치를 나타내는 여러 자료를 살펴보면 당시 북한의 경제수준이 우리보다 높았어요. 북한이 우리보다 더 잘 살았던거죠. 새마을운동을 시작하면서 중공업이 확산되고 사람들이 하나로 뭉쳐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해 지금의 한국 경제의 밑거름이 된거죠. 그 사실은 어느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럼 여기서 왜 초창기에 관 주도로 이뤄졌나? 당시 모든 일에 공무원이 주축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도로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서 사실 부역이라는 표현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공공연하게 주민들을 모아 일을 시켰어요. 국도라고 있긴 하지만 비만 오면 움푹움푹 들어가니 그걸 매워야 하잖아요. 그걸 동네별로 할당을 주었어요. 그 할당받은 구역을 책임을 지고 공무원들이 주민들과 했던거죠. 나중에는 새마을운동지도자 분들이 그런 일들을 대신 해주시긴 했죠.새마을운동지도자는 아무나 될 수 있는게 아니었어요. 많은 교육을 받아야 했죠. 그런 교육을 받은 새마을운동지도자가 생기기 전 까진 모든 일을 공무원이 할 수 밖에 없었던 거고. 그리고 새마을운동지도자분들이 있다고 해서 그분들이 모든 걸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공무원들이 뒤에서 행정적인 뒷받침은 다 해주어야 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요.지금 생각해보면 새마을운동의 가장 큰 성공 요인 중 하나가 교육이었던 같아요. 지도자급은 무조건 교육을 받아야만 했어요. 심지어 스님, 신부, 목사 같은 성직자들도 교육을 받았으니까. 저도 처음 공무원 교육을 받으러 가니 새마을운동 교육부터 받았으니까요. 새마을운동의 정신이 지속이 되어야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게 잘 안되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새마을운동의 정신이 지속되었다면 지금의 개인주의는 좀 사라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노인들을 공경하는 사회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요즘들어 많이 하게 되네요. △대한민국 새마을박람회를 개최하다저는 경북도 각 부서 기획파트에서만 16년 근무했어요. 그러다 해양수산부에 파견을 1년 다녀왔죠. 파견을 마치고 돌아오니 김관용 도지사님이 “새마을운동이 중요한데...한번 기획을 잘 짜서 발전시켜보는게 어떻겠나”라고 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새마을봉사과장을 맡게 되었죠. 그때가 2008년 8월이었어요.사실 새마을과라는게 1970년대 만들어져서 아직까지 존속되고 있는 곳이 우리 경북도밖에 없어요. 그만큼 중요한 자리였고 부담이 되는 자리였어요.새마을봉사과장을 맡고 나서 보니까 새마을운동에 대한 기록이나 유산이 점점 사라지고 없어지고 있는 거에요. 거기다가 국민들도 새마을운동에 대한 인식이 점점 줄어들고 있고. 그래서 이대로 둬서는 안되겠다 싶어 새마을박람회를 하자고 제안을 했죠. 전국에 있는 새마을운동에 대한 기록이나 유산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고, 또 우리지역의 기록물도 찾아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대한민국새마을박람회를 2009년 9월에 구미에서 개최했습니다. 당시 새마을운동세계화사업도 진행되고 있을 때여서 당시 그나라 국빈들도 초대했어요. 이명박 대통령도 참석하시고, 외국의 대사들도 많이들 참석하셨어요. 행사는 성공적이었어요.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7-09-07

“퇴계 선생의 참된 선비정신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는 후한 `박기후인(薄己厚人)`과 자신을 끝없이 낮춰 존경을 받는 것이야말로 참된 선비정신입니다.”`조선인재 반다(半多)영남 영남인재 반다안동`이라 할 정도로, 안동은 명현거유(名賢巨儒)를 많이 배출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 조선 최대의 성리학 대학자 퇴계 이황 선생의 선비정신에 반해 10여 년간 퇴계 선생의 선비정신을 확산하는 데 힘을 쏟고 있는 김병일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을 만났다.기획예산처 장관 등 정부 고위직을 지낸 뒤 퇴계 선생의 삶과 참된 선비정신을 좇아 매주 3~4일 안동에 머물며 생활한 지 10년이 지났다.퇴계 선생의 참된 선비정신에 반해 그 정신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퇴계처럼`과 `선비처럼`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薄己厚人정신 실천, 자신을 끝없이 낮춘 퇴계 일화 듣고 부끄러움 느껴자신의 이익보다 사회 위해 노력하는 삶 사는 사람이 시대의 참된 선비`퇴계처럼`·`선비처럼` 책 출판 등서울~안동 오가며 생활 10년째현대사회 리더·선비정신 등 지도·강의선비수련원 올해 방문객 13만명 목표“대구·경북 발전에 훌륭한 정신 바탕선각자 역할 책임질 인재 양성해야”- 어떤 연유로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을 맡았나.△2007년 초에 처음 이야기가 나왔다. 선비문화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할뿐더러 당시 나이도 젊어 5년 뒤에나 이야기하자며 고사했다. 그런데 그해 겨울 새벽길을 걷다 넘어져 다리가 부러져 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그때 정기이사회가 소집됐고 그 자리에서 나를 이사장으로 선임해 버렸다.- 이사회 결정에 따른 이유는?△제가 옛날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했다. 역사에 관심도 많아 대학에서도 사학을 전공했다. 공직생활할 때도 종종 도산서원과 퇴계종택을 찾았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과 일로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래서 그동안 이사장직을 고사했던 것이지만, 운명이라 생각하고 이사회 결정에 따랐다.- 본의 아니게 이사장직을 맡은지 10년이나 됐다. 특별한 소감은.△이사장으로 단순히 1년에 2~3번 정도 이사회를 주재하는 그런 이사장은 나에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후 수시로 서울과 안동을 오가며 수련원에서 강의를 청강하기도 했다. 퇴계종손과 함께 생활하면서 느낀 퇴계 선생의 선비정신이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선비정신과 다르다는 점을 알았다. 신선한 충격이었고 감동이었다. - 퇴계 선생의 선비정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는 후한 `박기후인(薄己厚人)`의 정신을 실천하고 자신을 끝없이 낮춤으로써 존경을 받은 퇴계 선생의 일화를 듣고 부끄러움을 느꼈다. 선비는 자기 인격을 갈고 닦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남에게 낮추고 상대를 배려하는 삶, 자기 자신의 이익보다는 사회의 이익을 위해서 노력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이 시대의 참된 선비다.- 퇴계 선생의 선비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퇴계선생의 삶의 모습을 닮은 사람하면 두 명이 떠오른다. 고 김수환 추기경과 퇴계 16대 이근필(86) 종손이다. 고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하게 엄격하고 남에게 후한 `박기후인`을 실천하는 삶을 사셨다. 그로 인해 종교를 초월해 모든 사람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퇴계 16대 이근필 종손의 모습을 보면 정말 선비다. 선비문화 수련생들이 뽑는 가장 인상 깊고 최고의 시간이 `종손과의 대화의 시간`이다.항상 그는 수련생들에게 큰절을 하며 자세를 낮춰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무릎을 꿇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한다. 퇴계 선생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자칫 집안자랑 조상자랑으로 비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안동지역의 선비정신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미담을 소개한다.`종손과의 대화의 시간` 이근필 종손은 보백당 김계행 선생의 청백정신(우리 집에 보물은 없지만 보물이 있다면 오직 청백이 있을 뿐, 몸가짐을 삼가고 남을 대함에 있어 충직하고 온순하라)과 남을 배려하고 그것을 실천하면서 세상을 밝게 비추는 인재 양성(위세광명)을 위해 여러 사학을 설립한 민송 권영우 박사의 이야기 등을 수련생들에게 들려주고 있다.또 그는 도덕성 회복의 물결이 많은 사람에게 흘러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직접 붓글씨로 쓴 사자성어를 수련생들에게 선물하며 “고맙습니다. 훌륭한 사람 되세요.”라고 수련생 한 명 한 명에게 인사를 한다.- `퇴계처럼`과 `선비처럼`이라는 책을 출판 배경은.△이사장직을 맡고 4~5년이 지난 후 퇴계선생의 훌륭한 일화를 선비문화수련원을 찾은 사람들에게만 들려주기엔 아쉬움이 컸다.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은 젊은 사람들에게 퇴계(선비)처럼 살아갈 수 있도록 선비정신을 전파하기 위해 이 일화들을 책으로 엮어 만들게 됐다. 이를 위해 글항아리 출판사 등록도 했다.- 퇴계 선생의 어떠한 일화들이 있는가?△`퇴계처럼`은 총 3가지 주제로 엮었다. 첫째, 퇴계선생의 부인, 며느리 등 가족들을 어떻게 잘 보살폈는지. 둘째, 그런 퇴계선생에게 어릴 적부터 영향을 준 박씨부인과 할머니 이야기. 셋째, 사회적 약자인 하녀 이야기와 천민출신 대장장이를 제자로 받아들인 이야기이다.`선비처럼`은 퇴계 선생과 선비에 대해, 혼돈스러운 지금 세태에 대해 한 차원 높은 수준에서 짚어보고 참신한 대안을 제시한 치열한 사유의 궤적들을 담았다.- 선비수련원을 다녀가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난 것 같다. 올해 목표는.△이사장을 맡은 첫해인 2008년 3천900여 명이 수련에 참여했다. 그러던 것이 2015년 7만 명을 넘었고, 지난해 10만 명을 넘어섰다. 올해 목표는 13만 명이다.- 주로 이곳을 찾는 수련생들은 누구며, 어떤 내용의 수련을 하나.△주로 초·중·고교 학생들이 많다. 지난해부터는 기업에서도 많이 참가하고 있다. 수련 내용은 먼저 강의를 통해 현대사회 리더와 선비정신 등을 배운다.도산서원과 퇴계 선생의 묘소 등을 찾아 퇴계선생의 삶과 선비정신을 느껴보고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 이어 도산서원 의례체험(알묘례)과 퇴계선생의 건강관리 운동법인 활인심방(活人心方)을 배운다. 마지막으로 수련을 통해 느꼈던 점과 앞으로의 삶을 위해 자신이 실천할 점에 대해 생각해 보고 공유하는 시간을 갖는다. - 선비문화수련원의 교육시간과 신청은 어떻게 하면 되나.△선비문화수련 프로그램은 성인과 학생으로 나눠서 진행하고 있다.성인의 경우 1일, 1박2일, 2박3일 과정 중 선택이 가능하다. 과목은 협의를 통해 조정할 수 있다. 주로 기업체와 교원, 학부모들이 단체로 신청한다.학생의 경우 초·중·고등학생으로 나눠 수련원에 입교해서 하는 프로그램, 수련 지도위원들이 직접 학교를 방문해 교육하는 프로그램, 중학생들의 자유학기제에 대비한 프로그램, 대입·고입 후 중3, 고3 학생들을 위한 수련 프로그램 등이 있다. 수련 신청은 전화나 인터넷(http://www.dosansunbi.kr)을 통해 문의하면 된다.- 최근 이낙연 국무총리가 도산서원을 방문했었다. 그때 무슨 이야기를 나눴나.△한국의 9개 서원이 2018년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신청 대상으로 선정됐다. 이 총리에게 등재가 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도산서원의 경우 선비문화수련원을 운영하면서 17년째 강학기능 역할을 할 수 있다. 이것이 가능토록 교육예산, 1·2원사 준공예산을 국가에서 지원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현 정부가 경북지역에 SOC사업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경제부처 장관 출신으로서 현 정부의 예산 정책을 어떻게 생각하나.△공자의 논어에 `부재기위 불모기정(不在其位 不謀其政)`이라는 말이 있다. `현재 그 직책에 있지 않으면 그곳의 정사에 대해 논하지 말라`했다.현역에서 은퇴한 지 오래돼 조심스럽다. 하지만 수십 년간 이와 관련된 일을 해온 사람으로서 사업의 시기와 적정성 예산 규모에 대해 밖에서 보는 것보다 더욱 디테일한 판단이 필요하다.물론 지역적으로 예산 규모의 분배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사업의 예산은 모두 국민의 세금으로 짜여지기 때문에 예산 지원 금액도 다 의미가 있다. 나는 그 의미를 모르는 상태며 여기에 대해 왈가불가하기에는 가벼운 처신이라 생각한다.- 현 정부가 SOC사업 예산을 대폭 삭감한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나.△현 정부가 국민 일자리 창출과 복지 예산을 늘리기 위해 SOC사업 예산을 줄이는 선진국형 예산 정책을 펴고 있다고 생각한다.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정부의 복지와 국방 예산이 지역 예산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SOC사업 예산만 지역 예산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동네에 있는 노인정과 어린이집 등에 지원되는 복지예산도 지역 예산이다.- 이번 SOC예산 삭감으로 지역 홀대론이 제기되고 있다.△대구·경북 영남지역뿐만 아니라 호남지역, 충청지역, 강원지역 등 모든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상황은 비슷할 것으로 예상한다. 예산 분배에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불만도 공평하게, 불만의 정도를 비슷하게 유지해 국민적인 설득이 필요하다,- 끝으로 앞으로 대구·경북의 발전 청사진은 어디서 찾아야 하나.△현역을 떠나 시골에서 10년째 퇴계 선생의 삶에 반해서 선비정신을 세상에 알리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을 하면서 최근에 정책과 관련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정확하지도 않을 뿐더러 부실한 내용일 수밖에 없다.다만, 경북지역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주인 역할을 가장 많이 해왔고 훌륭한 정신을 가진 조상들이 선각자의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이런 선각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인재가 지역에서 나와야 한다. 저도 작으나마 힘을 보태기 위해 정신의 큰 자산이라고 볼 수 있는 선비정신을 알리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김병일 이사장 프로필△상주 출신(72) △중앙고 △서울대 사학 석사 △통계청장 △조달청장 △기획예산처 차관 △기획예산처 장관 △한국국학진흥원 원장/손병현기자 why@kbmaeil.com

2017-09-04

고생 90%, 영광 10%의 새마을지도자… 열정·봉사정신으로 실천

2001년 북한돕기 통일손수레 전달신의주서 본 북한주민 모습에 충격새마을운동의 힘 새삼 느껴새마을부녀회는 관변단체 아니야`더불어 잘살자` 정신 실천하는 단체더 똑똑한 젊은이들이 잘 계승해주길△ “끝까지 봐주꾸마” 남편 말에 힘 얻어1983년부터 1988년까지 구미시 부녀회장을 나름 열심히 했어요. 그 부녀회장직을 마치고 편안한 마음으로 약국에 매진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도에서 부녀회장을 맡아달라는 거에요.시 부녀회장은 그래도 가까이 계시는 분들도 있으니까 약국을 운영하면서 여러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었는데 도는 범위가 다르잖아요. 너무 넓어요. 늘 약국에서만 대하던 그런 거하고는 천지차이잖아요. 그래서 몇날 며칠을 고민만 하다 거절했어요. 그랬더니 새마을단체에 계시던 분이 매일 약국으로 찾아오시기도 했어요.또 당시 저희 남편이 구미시의회 의장을 맡고 계셨는데 계속 전화가 왔었나봐요. 전화가 와서 “당신 부인이 약국만 하고 새마을을 안하려 하는데 같이 나와서 활동할 수 있도록 좀 설득해 달라”고 그랬나봐요. 그런 전화가 많이 왔었대요.그래서인지 한 날은 남편이 “내 끝까지 봐 주꾸마. 고마 수락하고 한번 해봐라”하더라구요. 남편의 그런 말에도 사실 많이 망설였어요. 왜냐하면 새마을 지도자라는 것이 영광은 한 10%이고 고생은 90%거든요. 이 고생을 감내해야하는데, 그 용기가 쉽게 나지가 않더라구요. 그래도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1997년부터 2003년도까지 경상북도 새마을 부녀회장을 맡았어요.△ 설거지하는 경북도 부녀회장80년대 초반에 중앙본부에서 야시장을 운영했었어요. 새마을운동본부가 있던 서울 강서구 등촌동에서 새마을 야시장을 했었거든요. 야시장이니까 각 지역에서 특산품을 가지고 판매를 했어요.당시 난 구미시 부녀회장이니까 우리 구미를 대표하는게 전자산업이라고 생각해 처음에는 전자계산기를 가지고 갔었어요.근데 서울하고 비교하니까 조금 떨어지는 거에요. 그러니 판매도 잘 안되는 거에요. 그 다음해에는 참기름을 짜서 가지고 갔는데 옆 다른 지역에서 참기름을 바로 짜서 주더라구요.사실 포장도 차이가 많이 나고. 구미 대표 농산물을 잘 몰라 참 망설여 지더라구요. 그러다 내가 도 부녀회장으로 다시 야시장을 갔는데 선산 지역에서 약주를 가지고 가서 판매를 하는 걸 보니 마음이 편하더라구요.일주일 정도 야시장을 했는데 당시 포항은 특산물로 물회를, 안동은 식혜와 안동소주 등을 판매했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릇이 산더미처럼 밀려도 아무도 설거지를 하는 사람이 없는 거에요.전부 다 나서서 판매만 할라고 그러지 설거지는 아무도 안하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설거지를 했어요. 즉흥적으로 설거지를 맡아서 했죠. 하루종일 설거지만 하니 사람들이 `설거지하는 회장`으로 불렀어요.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설거지하는 회장`이라고 하면 경북도 부녀회장이란걸 알 정도였으니까요.△ 북한돕기 통일손수레새마을운동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거라면 바로 2001년 북한돕기 통일손수레 전달이에요.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고조된 남북화해 분위기 속에서 2001년 새마을운동 중앙회가 추진한 북한돕기 운동이었어요. 새마을운동 중앙회가 추진하기는 했지만 그 운동이 전 국민이 함께 동참한 운동이었죠.아마 성금이 당시 10억원이 조금 넘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우리가 새마을운동 당시 농촌지역에 손수레 같은걸 보급했듯이 북한에도 농기구나 생산한 쌀을 운반할 수 있도록 `통일 손수레`를 만든거죠.그걸 만들어 중국 단동을 거쳐 압록강 철교를 통해 신의주로 들어갔어요. 당시 전달하러 간 사람이 전국에서 새마을 지도자 중 남녀 한명씩 두사람하고, 중앙에 있는 국장님 한분. 총 세명이 갔었어요.그걸 신의주에 가서 직접 전한거죠. 거긴 시골이었으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직접 그 손수레를 사용하는건 보지 못했어요. 북한 사람들이 데리고 가지 않았으니까. 우리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니잖아요. 북한 사람들이 항상 옆에 붙어 같이 다녔어요.그런데 통일 손수레를 전달하고 압록강을 건너가려는데 못 건너게 막는거에요. 너무 놀랬죠. “왜 못 가느냐”고 물어보니까 바로는 대답을 안해주고 나중에 다른 사람을 통해 말해주더라구요.그때 미국 뉴욕에 있는 쌍둥이 빌딩이 테러를 당한거에요. 9.11테러. 그러니 경계가 삼엄해 진거죠. 그렇게 몇 시간을 더 기다리다 압록강을 건널 수 있었어요. 시간은 몇 시간이었지만, 당시 나에겐 정말 긴 시간이었어요. 그렇게 시간이 길게 느껴 본적이 없었으니까요.그때 당시 북한 신의주에서 본 북한 사람들의 모습은 정말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헐벗고 남루했어요. 신발도 없이 다니고. 일부러 그렇게 다니지는 않을거 아니에요. 그만큼 생활수준이 힘들다는 거겠지요. 지금도 생각나는게 북한사람이 그랬어요. 우리가 새마을운동을 할 당시 자기들은 천리마 운동을 했다고.천리마 운동이 어떤 운동인지는 모르겠지만, 새마을운동으로 인해 우리나라가 이렇게 부유한 나라가 된 것은 북한하고만 비교해도 누구나 금방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새마을지도자 분들은 모두 인생 스승구미시 새마을 부녀회장과 경상북도 새마을 부녀회장을 하면서 큰 어려움을 없었어요.주위의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기 때문에. 제가 약사여서 그런지 약국도 경영하면서 부녀회장을 하니 힘들어 보여서 그랬는지. 정말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어요. 물론 우리 남편이 가장 많이 도와 주었죠.그렇게 난 좀 수월하게 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다른 지도자분들을 보면 정말 대단한 분들이 많으시더라구요. 다른 새마을지도자분들 성공사례 발표 이런거 들어보면 굉장히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걸 다 극복하고 해내시더라구요. 정말 대단하세요. 그리고 전 구미에 살잖아요.산업도시이기도 하니 도로도 잘 발달이 되어 있고, 대구하고도 가까워 경북의 다른 지역하고 많이 달랐어요. 근데 내가 한번 느낀게 울진이라든지 영덕이라든지 뭐 울릉도는 말 할 것도 없고. 근데 거기서 새마을회의를 한다고 하면 그 멀리 있는 회장들이 한번도 결석도 안하고 지각도 안해요. 난 그래서 별로 멀다고 생각을 안했어요.그러다 한번은 내가 도 부녀회장이 되고 나서 울진이고 영덕이고 이런데를 가보니까 엄청 먼 거리더라구요. 당시에는 길도 안좋았어요.진짜 나중에 알았죠. 그때 교통환경이 더 안좋았을 때 지각 한번 안하고 회의에 참석하는 회장들의 그 열정이 마음이 전해지더라구요.난 정말 그때 마음이 저며 옵디다. 그 먼길을 온 사람들에게 왜 조금 더 따뜻하게 대하지 못했는지…후회도 되고. 이제는 만나는 사람들을 정말 따뜻하게 안아줘야겠다는 생각을 많이해요. 그리고 그걸 가르쳐 준 새마을지도자 분들 모두가 저에게 인생의 스승이죠. △ 혼자가 아닌 더불어 잘 살기 운동새마을부녀회를 관변단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절대 아니에요. 정말 봉사하는 단체에요.봉사 정신으로 단단히 무장이 된 사람들이 모인 곳이지요. 새마을운동은 나 하나 잘 살자고 하는 운동이 아니라 우리 이웃 주민들하고 시민들하고 같이 더불어 잘 살자는 운동이잖아요.그 정신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우리 새마을부녀회입니다. 저는 새마을부녀회 뿐만 아니라 여러 단체에서 활동을 했어요. 그런 일들을 해보니 더 느끼는 건 새마을정신인 근면, 자조, 협동 이걸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거에요. 그래야 나눔이라든지, 배려, 봉사도 된다고 생각해요.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왜 좀 더 열심히 하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항상 남아 있어요. 하지만 지금의 젊은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많이 배우고 똑똑하니 새마을정신을 더 잘 계승·발전 시킬거라 믿어요.비록 지금은 정치적인 이유로 잘못된 오해를 받고 있기도 하지만 새마을운동은 이 시대의 상징적인 정신으로 더 많이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이제 곧 새마을테마공원이 완공된다고 들었는데 새마을 지도자였던 한 사람으로서 자부심도 느끼고 기대도 큽니다.새마을운동 정신이 잘 계승·발전이 되길 진심으로 바래봅니다./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7-09-01

그곳, 코발트블루의 아득한 바다 그저, 무색의 빛으로 스며들다

여름도 끝자락에 이르렀다. 유난히 무더웠던 올 여름. 폭염과 폭우가 지루하게 반복되는 도시에서 삶을 영위하는 우리는 먼 바다로 떠나는 꿈을 꾸었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통유리와 자동차의 소음. 이는 도시를 상징하는 것들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그것들을 몰아내면 어떤 공간이 그려질 수 있을까? 아마도 푸른 파도의 나지막한 노래가 몸과 마음의 피로를 녹여주는 바다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 않을까.기자는 그간 `아름다운 해변`이라 불리는 국내외 여행지를 여러 곳 돌아봤다.적지 않은 사람들이 질문을 던진다. “네가 가본 바다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은 어디야?”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잠시 후에 내놓기로 하고 먼저 기자의 기억 속에 `잊을 수 없는 공간`으로 자리 잡은 몇 개의 해변을 말해볼까 한다.▲ 낭만 가득한 석양… 인도의 베나울림 해변일출이 희망과 다시 시작함의 은유라면, 일몰은 스산한 낭만과 적멸의 메타포다. 낙관적인 인간들은 일출에 감동하고, 비관과 냉소에 익숙한 사람들은 일몰에 더 큰 매력을 느낀다. 기자는 후자에 가깝다.인도를 홀로 여행했던 10여 년 전. 석양의 풍경이 아름답다고 소문난 고아(Goa)에서 보름쯤을 머물렀다. 그 붉은빛이 “사람의 심장을 쪼그라들게 만든다”는 아라비아해의 석양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명불허전(名不虛傳). 과연 그랬다. 거기 머문 보름 동안 해질녘만 되면 석양빛에 감동한 심장이 쪼그라들었다.고아의 해변들 중에서도 유럽 여행객 사이에서 인기 높은 안주나 해변이나 팔롤렘 해변보단 아직 개발의 손길이 덜 미친 베나울림 해변이 가장 좋았다. 거기서 5일을 묵었다.20대를 인도에서 히피로 보냈다는 이탈리아 할머니, 프랑스 여대생 살리나와 함께 베나울림 해변의 모래밭에 앉아 아라비아해의 서쪽으로 까무룩 떨어지는 태양을 바라보던 그날들.그 시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영혼까지 핏빛 붉은색으로 물들어가는 것 같다.▲ 푸른 잉크를 쏟아 부은 듯… 아드리아해동쪽으론 크로아티아,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를 끌어안고, 서쪽으로 이탈리아를 품은 아드리아해. 그곳 물빛은 네이비블루 잉크 수십 만 병을 쏟아 부어 만든 것 같다. 그 역시 투명한 푸른빛으로 유명한 필리핀 비사야 군도(群島) 외딴섬 발리카삭의 바다보다 더 푸르렀다.아드리아 바다의 푸른빛 아름다움을 더욱 도드라지게 해주는 건 고풍스런 붉은색 지붕으로 축조된 동유럽의 집들이다. 야트막한 산에 올라 옅은 붉은색 지붕과 근사한 조화를 이루는 짙은 푸른색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낭만, 놀라움, 아름다움이란 단어가 도트프린터의 소리를 내며 머릿속으로 `촤르륵` 지나간다.동쪽에서 서쪽으로 아드리아해를 바라보는 최고의 `뷰포인트(view point)`는 크로아티아의 고도(古都) 두브로브니크다. 사람이 서넛밖에 없는 매끄러운 자갈 깔린 조그만 해변에서 아드리아해를 바라보면 `행복의 절정`이 뭔지 실감하게 된다. 이 말이 과장이라고 느끼는 사람들도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두브로브니크를 가보고도 그 생각을 바꾸지 않을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아드리아해가 지구 위의 사파이어라면, 두브로브니크의 이름 없는 작은 해변들은 아드리아해가 선물한 보석이다.이탈리아의 남부 해변도시 아말피와 포지타노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아드리아해를 바라보는 최고의 뷰포인트다. 깎아지른 바위 위에 계단식으로 쌓아올린 도시.절벽을 끼고 2차선 좁은 도로를 낡은 버스가 위태롭게 달린다. 그러나, 누구도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엽서 같은 풍경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앞에 두고 터뜨리는 감탄사는 동양인과 서양인, 백인과 흑인, 노인과 아이가 다르지 않다는 걸 그 길에서 알게 됐다.점심을 먹기 위해 들른 포지타노의 한 레스토랑. 웨이터가 아일랜드 배우 콜린 파렐보다 잘 생겼다. 이탈리아는 그런 나라다. 아름다운 해변을 오가는 미남과 미녀들.오른쪽에서 본 착한 사람이 왼쪽에서 본다고 나쁜 사람이 될 리 없다. 아드리아해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보건, 서쪽에 서서 동쪽을 향해 눈을 맞추건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다시 만나고 싶은 바다 아드리아. 그리고, 두브로브니크 붉은색 지붕들.▲ 기자가 만난 최고의 바다… 피피섬이제 앞서의 질문에 답할 시간이 됐다. “당신이 본 가장 아름다운 바다는 어디인가”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별 망설임 없이 답할 수 있다. “태국의 피피섬 물빛을 잊을 수 없다”고.인간의 눈으로 보는 바다의 빛깔은 그 아래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서해와 동해의 바다 색깔이 다른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혹당하는 바다의 빛깔은 청옥색. 이른바 코발트블루 색채다. 바다가 그 빛깔을 띠기 위해서는 아래에 산호가 있어야 한다.그 눈 시린 푸른색은 서로에게 심상한 `아주 오래된 연인들`까지도 낭만적 감상으로 내몰아 바닷가에서 정열적으로 입을 맞추게 할 정도다.태국과 인도 사이의 바다인 안다만(灣). 그곳을 여행한 사람들은 안다만의 백미(白眉)로 피피섬을 지목한다. 피피섬 일대 바다는 왕조시대 청옥을 수만 보따리 빠뜨린 것처럼 맹렬한 코발트블루 색채를 띤다. 무성한 산호숲을 품에 안은 바다.2006년과 2011년에 여행한 피피섬. 첫 번째로 그 섬을 방문했을 땐 태평양 일대를 폐허로 만든 쓰나미의 상처가 채 아물기 전이었다. 수십m의 파도에 휩쓸려 가버린 호텔과 집을 복구하며 땀을 흘리던 까만 얼굴의 태국인들을 기억한다. 그렇다. 피피섬은 바다의 아름다움과 동시에 인간이 이어가야 할 삶의 소중함까지 기자에게 가르쳤다. 푸른 물결이 유혹하는 태국 해변들누가 뭐라 해도 태국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은 사파이어빛 바다와 백옥처럼 빛나는 모래밭에서 누리는 휴양이다. 여기에 각종 해양스포츠도 태국 해변을 찾는 여행자들을 유혹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해안선과 아찔한 절벽으로 가득한 수천 개의 섬이 손짓하는 나라. 물살을 가르며 제트스키를 타거나, 선베드에 누워 책을 읽거나, 싱싱한 새우와 생선으로 만든 요리를 맛보거나….태국의 바다를 즐기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아래 태국의 대표적인 휴양지 세 곳을 소개한다.◆ 태국에서 가장 큰 섬 `푸켓`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푸켓은 태국의 진주다.” 방콕에서 남쪽으로 891km 지점에 위치한 푸켓은 태국에서 가장 큰 섬이기도 하다. 일 년 내내 동서양 관광객이 몰려드는 해변은 에너지로 가득하다.넓은 백사장과 얕고 완만한 경사의 바다는 수영을 즐기기에 최적의 여건을 제공한다. 지척에는 한국인들에게 인기 높은 피피섬이 있고,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국적인 신혼여행지로 인기가 높았다.◆ 130개의 아름다운 섬을 만날 수 있는 `크라비`태국 남부 크라비주(州)의 해양도시다. 푸켓에서 뱃길로 45㎞ 지점에 위치한다. 여행하기 좋은 시기는 건기인 12월에서 3월까지다. 하지만 스콜이 잦은 9~11월에도 나름의 낭만을 즐길 수 있다. 바다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마시는 맥주 맛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13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크라비 군도엔 수백m의 기암괴석이 즐비하다.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정글과 원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석회암 동굴도 멋진 볼거리다.◆ 조용한 휴가를 즐기고 싶다면 `코사멧`잔잔한 물결 일렁이는 바다와 하늘을 물들이는 붉은 석양. 코사멧은 유명 휴양지의 시끌벅적함을 피해 조용한 휴가를 즐기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섬이다. 방콕에서 남동쪽으로 220km 가량 떨어진 코사멧은 `카오 렘 야-무 코사멧 국립공원`에 속해 있다. 19세기 발표된 태국의 서사시 `프라 아파이 마니(Phra Aphai Mani)`의 배경이 된 장소로도 유명하다. 이를 증명하듯 해변엔 서사시의 주인공인 왕자와 인어가 동상으로 서있다.글/홍성식기자사진제공/구창웅

2017-09-01

도심 대형공원 조성·해수욕장 환경 통일·생태복원에 주력

센트럴 그린웨이대규모 문화축제 등 대형공원 활용 기대보행자 인프라 정비 워커블시티 구축도오션 그린웨이빛의 도시 사업과 연계 해안 경관 특화포항여객선터미널 리모델링로 관광지화에코 그린웨이야생동물 다양화 위해 생태통로 조성치유숲 조성, 노년복지 역할 수행도□ 포항 그린웨이(Green Way) 업그레이드 포항시는 시민이 살맛나고 미래가 풍요로운 녹색생태도시 실현을 위한 역점추진사업인 그린웨이(Green Way) 추진전략계획을 보완하기 위해 지난 2월부터 7개월간 사업비 1천800만 원을 들여 용역을 실시했다.이번 보완용역은 기존 형산강상생로드조성, 송도솔밭도시숲, 폐철도부지도시숲, 이천만그루생명나무심기운동 등 35개 사업에 도심지 내 대형공원조성, 해상공원개발 등 24개 신규사업 발굴 및 방향성보완 등으로 성공적인 프로젝트 추진에 기여하기 위해 진행됐다.용역을 맡은 이노조경디자인은 우선 포항시가 갖는 도시이미지에 주목했다.포항은 포스코로 대변되는 산업도시 이미지가 고착화돼 있어 이를 탈피해 새로운 도시이미지 구축이 필요한 상황이다.용역팀은 포항이 문화· 관광과 더불어 기업하기 좋은도시로 변모하고 더 나아가 문화·자연·인간이 어우러진 친환경도시로 거듭나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분석했다.용역보고서에 따르면 포항시는 전체면적 1천129.4㎢중 임야가 791.5㎢로 무려 70.1%달하며 녹지면적도 210.27㎢로 타도시와 비교해 높은 비율을 나타내고 있다.산림은 구암산, 침곡산, 운주산, 내연산, 비학산, 운제산 등이 도심 외곽으로 C자형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해안은 월포, 칠포, 영일대, 송도 등 풍부한 해양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나 연계성 및 경관적 특색을 살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또한 포항을 생활권별로 크게 삼등분할 경우 지역 내 공원 201곳 중 130곳이 중심생활권에 집중돼 있으며 남부생활권 69곳, 북부생활권 2곳으로 중심과 남부에 비해 북부의 공원이 현저히 부족한 것으로 확인됐다.녹지도 전체 67곳 중 중심생활권에 62곳, 남부생활권에 5곳에 불과해 특정생활권 편중현상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이렇다보니 시가지 내 여가공간이 턱없이 부족해 휴식과 여가 뿐만 아니라 교육·놀이 등과 같은 테마공원에 대한 요구가 큰 상황이라고 용역팀은 분석했다.□ 기존 35개 사업에서 신규 24개 사업 추가용역팀은 친환경녹색도시 포항시 만들기를 위해 기존 35개 전략사업을 보완할 24개 신규사업을 제시했다.3대 세부실천전략인 센트럴 그린웨이(Central Greenway), 오션 그린웨이(Ocean Greenway), 에코 그린웨이(Eco Greenway)로 나눠 보면 기존 15개 사업이었던 센트럴 그린웨이에 9개 사업, 9개 사업이었던 오션 그린웨이에 5개 사업을 각각 추가했다.11개 사업이었던 에코 그린웨이에는 10개 사업이 추가됐다.세부과제별로 보면 센트럴 그린웨이에 새롭게 추가된 9개 사업은 △도심지 내 대형공원조성 △종보존식물원 조성 △고가녹지 조성 △도시광장 조성 △워커블시티(The Walkable City)구축 △사이클로시티(Cyclo City)구축 △소규모녹지 벨트화 △트램설치 및 운영 △녹색건축물단지 조성 등이다.오션 그린웨이 5개 사업은 △해수욕장 해안경관 통일화 △해상공원 개발 △포항여객선터미널 관광지화 △빛의도시 조성 △해안연결숲 조성 등이다.에코 그린웨이 10개 사업은 △생태통로조성 △생태연결숲조성 △노년복지를 위한 치유숲조성 △농촌체험휴양마을거점조성 △임도개발 및 활용 △철도~형산강녹지 연결 △공단완충녹지벨트조성 △산림레포츠단지조성 △공기청정림조성 △거버넌스녹지사업확충 등이다.먼저 센트럴 그린웨이에 추가된 사업 중 핵심과제는 도심지 내 대형공원조성이다.용역보고서에 따르면 현대화시대에 대두되고 있는 도심공동화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심 한복판에 대형공원을 만든다면 중·소규모 공원이 수용할 수 없는 대규모 문화축제, 야외축제 등을 무리없이 진행할 수 있다.대형공원은 도심지 곳곳에 분포하고 있는 회색인프라를 완충할 수 있는 그린인프라로서의 역할수행할 것으로 기대된다.포항시 전체에 대한 보행자를 위한 인프라를 정비하는 사업인 워커블시티구축도 눈길을 끈다.용역팀은 이 사업이 추진되면 보행자의 통행 및 자전거통행을 증가시키고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녹색교통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파편화돼있는 소규모녹지들의 유기적연결을 주목적으로 하는 소규모녹지벨트화는 어린이공원과 소로의 가로수식재, 쌈지공원개발 및 완충녹지와 근린공원의 직접적연결 등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했다.연구가 주목적인 종보존식물원은 포항시 전략수종을 연구·개발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이밖에 노후된 고가도로 및 육교 등 회색인프라 자원을 활용한 고가녹지조성사업은 현실화될 경우 새로운형태의 보행자만을 위한 녹지공간으로 각광받을 것으로 내다봤다. □ 도심공동화 극복 위한 효과적인 답안오션 그린웨이에 제시된 5개 보완 사업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해수욕장 해안경관 통일화이다.용역팀은 이 사업을 통해 포항시만의 특색있고 통일성있는 해안경관을 개발해 빛의도시 조성사업과 연계한다면 포항시 특유의 해안경관을 특화할 수 있는 야간조명 및 랜드마크시설을 조성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포항여객선터미널 리모델링을 통한 영일대해수욕장과 연계자원화를 목적으로 하는 포항여객선터미널 관광지화는 영일대해수욕장을 찾는 시민 및 관광객들에게 새로운 관광자원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확신했다.시민과 관광객의 휴식 및 유희를 위한 장소를 제공하는 해상공원 개발은 포항이 지닌 해안가의 지형적특성을 활용한 새로운 테마의 공원으로 조성하는 것이 주 내용이다.끝으로 에코 그린웨이는 생태복원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우선 생태통로조성을 통해 야생동물 종의 다양성을 높이고 개체수를 증가시키고, 생태연결숲을 조성해 도심지역의 단절된 생태계를 연결해주는 동식물 서식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또 노년복지를 위한 치유숲조성으로 고령화사회를 맞아 노인들의 면역력 및 건강을 증진을 통해 노년복지역할을 수행하고 산림레포츠단지조성을 통해 비학산 철인3종경기 개최 등을 통해 산림레크레이션을 관광상품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이노조경디자인은 “민·관협업체계를 구축해 지자체와 민간이 각 부문별 운영, 관리역할을 수행하고 사업지속성을 위해 관리협의체를 구성해 홍보 및 교육을 지속실시할 필요성이 있다”며 “생태문화공간 개발에 대한 실효성있는 체감은 물론 향후 포항시 도시계획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했다.이강덕 시장은 “도시공동화 문제를 극복하고 도시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가 도시녹화를 통한 생태도시조성이 될 수 있다”며 “녹색생태도시 조성이 상위개념이 되도록 비전제시 및 정책방향으로 설정하고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나가겠다”고 강조했다.그린웨이 기본구상 총괄계획도○ 부문은 35개 현재 추진 사업■ 부문은 24개 신규 추진 사업 센트럴 그린웨이 ○형산강상생로드 조성○송도솔밭도시숲○형산강에코생태탐방로○철도부지 도시숲○도심하천 생태복원사업○오천해병대 이전부지 활용○이천만그루생명의나무심기○신부조장터공원 및 뱃길복원○천만송이장미도시 조성○원도심가로경관 개성○포항운하주변개발사업○형산강 상생인도교○주요도로공한지 및 교통섬녹화○도심저수지활용 수변공원조성○공단배후 방재림■도심지내대형공원 조성■종보존식물원 조성■고가녹지(Green Bridge) 조성■도시광장(Urban Square) 조성■The Walkable City 구축■CycloCity 구축■트램설치 및 운영■소규모 녹지벨트화■녹색건축물단지 조성에코 그린웨이 ○형산강상생문화숲길○비학산자연휴양림 조성○운제산산림욕장○오어지둘레길 조성○내연산 진경산수발현지 조성○숲길 및 수변공원○내연산 치유의숲○보경사군립공원내 자연학습장 조성○호미곶 산림레포츠단지 조성○영일만 에코포레관광단지○덕실생태문화공원 주변정비■생태통로 조성■생태연결숲 조성(비오톱 조성)■노년복지를 위한 치유숲 조성■농촌체험휴양마을 거점 조성■임도개발 및 활용■철도~형산강 녹지연결■공단완충녹지벨트 조성■산림레포츠단지 조성■공기청정림 조성(녹색에어컨)■거버넌스녹지사업 확충오션 그린웨이○동해안연안 녹색길○포항구항 해양공원○도심해안변 워터폴리○송도백사장 복구○여남지구 해양문화공간 조성○호미반도권 해안둘레길○주요 해수욕장주변 특화숲○포항구항 재개발사업○호미반도권 관광종합개발■빛의도시 조성■해안연결숲 조성■해수욕장 해안경관 통일화■해상공원개발■포항여객선터미널 관광지화/박동혁기자 phil@kbmaeil.com

2017-08-31

88 서울올림픽 결정되던 해 근면·자조·협동정신 재무장

이화자(76) 전 경북도 새마을부녀회장은 1941년 3월 칠곡군 왜관읍 왜관동에서 1남 8녀 중 4째딸로 태어났다. 왜관초등, 성명여중, 신명여고, 영남대학교 약학과를 졸업한 뒤 23세때 제8114호 약사면허증을 취득했다. 이후 48세때 영남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과학과를 졸업했다.37세때 새마음봉사단 활동을 시작으로 1983년 구미시 새마을부녀회장, 금오새마을 유아원장, 1997년 경상북도 새마을부녀회장, 2006년 경상북도 새마을회 이사를 역임했으며, 새마을운동 도지사상, 새마을운동 국무총리상, 자랑스런구미사람 대상, 새마을훈장 자조장을 수상했다. 2001년 북한돕기 통일손수레 전달사업으로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구미시여성단체협의회 1,2대 회장, 전문직여성클럽 한국연맹 구미클럽 창립, 제12대 경상북도 여성단체협의회장, 제5대 구미시차인연합회장 등을 맡으면서 여성의 사회진출에 큰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농사꾼 아버지의 `정직함` 가장 존경6·25 후 왜관 돌아오니 주변에 시체 널려약국 경영하다 1977년 새마을봉사단 첫발당시 구미시장의 “같이 고생해보자” 말에1983년 구미시 새마을부녀회장 맡아△ 항상 정직하게어릴적 기억으로 당시 우리집은 주로 밭농사를 지었는데, 특수작물을 키웠어요. 아버지는 순수한 농사꾼이셨죠. 당시 특수작물이라고 하면 토마토, 가지, 고추, 오이 뭐 이런 것들이에요. 지금은 흔하지만, 당시에는 귀한 채소들이었죠. 밭을 일구고 겨울에 전부 모종을 길러 봄이되면 걷어 들이고, 가을에 걷어 들이고. 한 만평정도 농사를 지었던 것 같아요.지금은 여건이 좋아 비닐하우스 등에서 특수작물을 키우지만, 당시에는 그런게 없었으니 종이에다가 콩대, 들기름을 발라서 말리고 해서 그걸로 온상을 지어 만들어 그 속에서 작업을 했어요.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죠.우리가 9남매 였는데 오빠 한 분은 공부만 하고 딸 8명만 농사를 거들었어요. 당시 특수작물을 하려면 화분을 만들어 모종을 하나하나 심어야 했는데 그런 작업들에 우리 딸들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 연약한 잎들 하나하나 만져야 하는 섬세한 작업이었으니. 농사를 도우면서 옆에서 배운 것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항상 정직하게`이에요. 그 당시에도 특수작물이기에 생산품을 포장해 대구로 나갔어요. 그런데 보통은 가장 좋은 물건을 위에 두도록 하잖아요. 보기 좋으니까.그런데 우리 부모님은 그러지 않으셨어요. 항상 가장 좋은 물건을 제일 밑에 넣고, 그 다음 차근차근 넣었어요. 그러니 별로 안 좋은게 위로 올라오는 거에요. 그래서 몰래 제일 좋은 걸 위에 놓았다가 꾸중도 많이 들었어요. 그땐 몰랐죠. 왜 꾸중을 들어야하는지. 그래도 부모님이 뭐라고 하시니 따를 수 밖에요. 그리고 포장에 들어가는 개수도 많이 넣으셨어요. 만약에 오이 100개가 들어가는 거면 110개를 넣어야 했어요. 그래야 받아보는 소비자들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시면서. 항상 개수가 많아야 한다고 강조하셨죠.당시 특수작물이라 굉장히 귀한 농산물이었는데도 말이에요. 그래서 그런가 항상 물건이 없어 못 팔 정도로 상품이 잘 나갔었던 것 같아요. 부모님의 정직함이 최고의 신용이 되었던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살면서 부모님의 그런 점을 가장 존경하고 따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지금까지도 말이에요.△ 돈이 생기면 책을 사서 머리에 저축하라부모님은 우리 딸들에게만 농사일을 시키기는 하셨지만, 여자도 배워야 한다는고 생각하셨어요. 9남매 모두 대학까지 보내셨으니까요.당시 여자들이 대학까지 나오는 것 자체가 아주 드문 것이었죠. 6.25사변으로 피난을 갈때가 아마도 제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을 거에요. 피난을 다녀와서도 계속 공부를 하도록 하셨으니까요. 당시 피난을 갔다가 돌아오니까 아무것도 없었어요. 학교도 다 타고. 그래도 없어지진 않았어요. 그래서 3학년으로 다시 다닐 수 있었죠. 그런데 너무 무서웠어요. 당시에는.낙동강이 완전히 격전지였자나요. 집이 왜관이다보니 여기저기 시체가 많았어요. 당시에 옆에 가면 귀신 붙는다고 해서 둘러서 가고 그랬어요. 아무튼 그런 와중에서도 9남매 모두 공부를 시키셨어요. 당시 우리 초등학교에서 중학교에 진학한 여학생은 저 하나 뿐이었어요.딸 8명을 다 공부를 시키니까 주위에서 뭐라고 하시는 분들이 많으셨어요. 주위에서 부모님에게 “쓸데없이 왜 딸들을 공부를 시키느냐? 농사 짓는데 공부가 왜 필요하냐?”등의 핀잔을 많이 주셨어요.그래도 부모님은 전혀 개의치 않으셨어요. 부모님은 항상 우리 자식들에게 “돈이 생기면 은행에 저축하지 말고, 머리에 저축해야 된다. 그 돈이 있으면 적거나 많거나 책을 사보고 공부를 해야 된다”고 말씀하셨죠.부모님의 그런 가르침으로 우리 9남매는 모두 대학을 나올 수 있었어요. 전 신명여고를 졸업하고 영남대 약학과를 갔는데, 약학과에 들어간 특별한 이유는 없었어요. 언니들이 약학과는 아무도 안 들어갔으니깐 약사 공부를 좀 해보면 어떨까 해서 약대를 간 것 같아요.△ 새마음봉사단으로 새마을운동 시작해1964년도에 약사면허증을 받고 지금의 남편(이용원 전 구미시의회 의장)과 1966년도에 결혼을 했어요. 그때부터 약국을 열심히 경영했죠. 그때 시장통에서 약국을 했어요.당시에는 병원에 가기보다 약국에 오는게 수월한 때였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혹시 아픈 사람들이 있을까 싶어 밤 12시까지 약국 문을 열어두기도 했었죠.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봉사일에도 참여하게 되었어요. 그러다 1977년 새마을봉사단으로 처음 사회에 발을 내디뎠죠.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전국 건전가요어머니합창단 대회가 있었어요. 그래서 선산군합창단을 조직해 경상북도 대표로 한 세번 나갔어요. 처음에 입상도 못했어요. 그래서 한번은 입상이라도 해보자는 목표로 다시 도전하게 됐죠. 그래서 동상도 한번 타고, 1979년도에는 금상도 탔어요. 세번만에 탄 금상이죠. 그 다음에는 후배들에게 넘겨줬어요.▲ 이화자 전 경상북도 새마을부녀회장이 받은 훈장과 표창. 이 회장은 약사로, 새마을운동 지도자로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고, 지역발전에 공헌한 공로를 인정받았다.△“같이 고생해보자” 이 말 한마디에봉사활동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저에게는 약국 일이 가장 즐거웠어요. 시장 안에 있다보니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었고, 정말 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살아가는게 즐거웠어요. 또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서로 도울 수 있기도 했구요. 그런 것들이 너무나 소중하고 즐거웠으니까.그러다 1983년에 제가 구미시 새마을 부녀회장을 맡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할 생각이 없었어요. 새마을운동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고, 어떠한 준비도 안되어 있었으니까요. 근데 당시 구미시장님이 신우균 시장님이었어요. 내가 이름도 안 잊어버려요. 내가 부녀회장직을 거절하니까 그 분이 매일 공무원을 우리 약국으로 출근을 시켰어요. 나에게 부담을 주려고.그러다 시장님이 “구미시도 한번 해봅시다. 같이 고생해보자”고 하는 그말에 그만 부녀회장을 맡기로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약간 속은 것 같기도 하고요..호호처음에는 내가 새마을운동 정신 이런거 잘 모르니까 그냥 새마을 자체의 본분만 지켜서 열심히 하면 된다고 했는데, 해보니 그것만 해서는 안되겠더라구요. 특히나 구미는 박정희 대통령 생가가 있으니 특히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엄청났어요.또 새마을운동에 대한 의지도 워낙 확고하니까 다른 지역보다 더 잘해야한다는 그런 의무감이 막 생기더라구요. 그래서 중앙 연수도 많이 다녔어요. 많이 배워야 했으니까.그리고 당시 1988년 서울올림픽이 결정되었거든요. 그러니 새마을지도자들이 “지금 이래서는 안된다. 우리가 지난 날보다 더 잘해보자” 이런 의지들이 강했어요. `근면, 자조, 협동`정신이 초심으로 돌아갔다고 할 수도 있겠죠.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7-08-31

`가야문화권 조사·연구` 현 정부 국정과제 선정 지속가능 발전전략으로 전 국민 관심 일으킬 것

▲ 곽용환 고령군수고령은 대가야의 옛 도읍지로서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최근 산업단지 조성, 농·특산물 홍보와 판로 확대 등에 나서며 도농복합도시로서의 면모도 갖춰가고 있다. 향후 관광정책 개발과 체험관광 활성화 등을 통해 경제 발전을 이루려는 고령군. 가야문화권 시장군수협의회 의장을 맡고 있는 곽용환 고령군수를 만나 향후 고령군이 추진할 각종 정책과 구체적인 문화·관광 발전방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아래는 그 내용을 요약·정리한 것이다.5년간 1인 생산액 등 평균성장률 6.7%… 도내 1위 올라지역특화 품목 딸기·수박·멜론 등 농산물 생산 지원 노력고령군관광협 발족, 일본과 MOU로 관광객 유치 협력대구 인접·교통인프라 좋은 산동지역 신규 산업단지 조성- 올 여름 고령군에선 어떤 일이 있었는지.“지난 2일엔 미국, 중국 등 국제연맹 5개국 2천여 명의 청소년이 방문해 대가야고령 국제 청소년 캠퍼리 행사가 열렸다. 고령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지난 7월엔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에 가야사 연구복원 사업을 비롯해 김천~거제 KTX 조기 착공, 대구~광주 동서내륙철도, 대구산업철도 건설 등 고령의 4개 사업이 선정됐다.앞으로 고령군은 2005년부터 이어온 `가야문화권 지역발전 시장군수협의회` 의장군으로서 가야사 연구·복원에 앞장서고, 국정과제와 세부사업의 빠른 대응을 위해 전략을 수립하며, 중앙정부와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선정된 과제를 차질 없이 추진할 것이다.” - 재선 군수로 7년 동안 군정을 이끌어왔다. 성취감을 느낀 사업은 무엇이고, 아쉬움이 남는 사업은 무엇인가. “그간 추진해온 정책들이 통계청, 정부부처 지표 등의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 좋은 평가를 얻고 있다. 경북도에서 울릉군 다음으로 작은 지자체지만 지속가능성, 행정서비스, 1인당 생산액 등에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5년간 평균 성장률 6.7%를 기록해 도 1위에 올랐으며, 한국CRS연구소는 경제, 사회, 환경 등 다수의 부문에서 고령군에 높은 점수를 줬다.한 가지 아쉬운 점은 고령관광 활성화라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번에 `대가야의 목·금·토-꿈꾸는 시간여행자센터 조성사업`이 지역수요맞춤 지원사업에 선정돼 2018년부터 사업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체험·체류관광 활성화가 이루질 듯하다. 이를 통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 고령은 도농복합도시를 지향하고 있다. 공장 유치와 지역 농특산물을 위한 지원이 필요할 것 같다.“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연중 공장설립·등록 원스톱 행정지원과 온라인 지원시스템을 운영해 중소기업운전자금 등 각종 금융지원과 기업지원 시책 홍보를 진행 중이다.또한 고품질 농산물 생산을 위한 각종 지원으로 지역 특화품목인 딸기, 수박, 멜론, 참외, 감자, 버섯 등을 육성하고 있다. 양파와 마늘 생산에 있어서는 노동력 절감을 위해 정식기와 수확기에 저장용 망사파레트와 망사톤백 등을 지원한다. 지역 자연환경에 맞는 블루베리, 무화과, 아로니아 등도 육성해 새로운 농가소득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 딸기와 멜론, 수박과 감자 등 고령 농산물은 전국적으로 인지도가 높다. 이를 효과적으로 알리고, 판로를 확대·개척할 방안은 무엇인가.“소규모 개별유통과 지역농협의 열악한 경영환경으로 농산물 유통을 전담치 못해 규모화, 규격화 돼가고 있는 농산물 유통환경에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농산물 유통을 전담하는 유통주체로 통합마케팅 조직인 고령군농협조합 공동사업법인을 설립해 농산물산지유통센터(APC)를 운영하고 있다.고령몰 운영 안정화와 농특산물 직거래장터의 적극적 참여로 지역 농산물 홍보와 판매할 촉진할 계획이며, 로컬푸드 매장 등 농산물 직거래 사업 활성화로 6차산업화 모델을 만들어나갈 방침이다. 앞으로도 고령군은 시장의 수요에 따라 변동되는 단순납품 방식이 아닌 계획생산, 계획판매를 통해 효율적인 농산물 유통체계를 확립해 나갈 계획이다.” - 21세기는 `문화와 관광의 시대`다. 고령군은 문화 발전과 관광 진흥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관광 발전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올해 1월 고령군관광협의회를 발족했다. 이는 관 주도의 관광정책을 탈피해 민간 주도의 창의적인 관광정책 개발하기 위해서다. 지난 4월에는 대가야체험축제를 관광협의회 주도로 성공적으로 치러냈다.이밖에도 콫 페스티벌, 캠핑 페스티벌, 관광 아카데미 운영 등 민간의 창의적인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9월에는 일본 미야자키현에 위치한 다카치호정 관광협회와 관광교류 MOU를 통해 선진형 관광활성화 시스템을 공유하고, 외국인 관광객 유치에도 협력할 것이다.” - 한국의 많은 지자체가 감소하는 인구로 고민하고 있다. 고령군의 인구정책과 출산장려정책을 소개한다면.“인구 증가를 위해 고령군 인구증가시책 지원 조례를 제정했고, 2012년 이후 고령군 전입자에게 지원금을 지급하고 있다.지원내용은 자동차 이전 번호판 교체비(대당 3만원), 자동차세(대당 15만원), 주택분 재산세(세대당 10만원), 국적 취득자 축하금(30만원), 전입 초중고생 장학금(10만원)을 1회에 한해 지원한다.출산장려 정책도 펼치고 있다. 출산가정에 기념물품을 증정하고, 출산장려금과 출생아 건강보험료를 지원하고 있다.출산장려금은 첫째 50만원, 둘째 240만원, 셋째 360만원, 넷째 아이 이상은 600만원까지 지원한다. 또 `엄마가 살기 좋은 도시 진료비 지원사업`으로 관내 의료기관과 인근 지역 산부인과 병원 2곳(미즈맘, 여성아이병원)과 협약을 체결해 진료비를 할인해주고 있다.” -도시의 인프라는 지역 발전의 근간이 된다. 도로와 철도, 생산기반시설 건설 등 고령 발전을 위한 계획은 무엇인가.“`희망찬 고령! 행복한 군민!` 이라는 군정 목표 아래 경제와 문화라는 두 가지 전략의 조화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진하고 있다. 경제는 고령군 산동지역(다산면, 성산면, 우곡면, 개진면)이 맡고 있다. 산동지역은 대구와 인접한 동일생활권이다. 교통 인프라도 좋다. 이런 강점을 바탕으로 4곳의 신규 산업단지를 조성하고 있다.문화는 대가야읍을 중심으로 산서지역(대가야읍, 쌍림면, 덕곡면, 운수면)이 맡고 있다. 고령군은 대가야의 도읍지이며 가야금을 창제한 악성 우륵의 출생지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대가야의 차별화된 역사를 바탕으로 지산동 대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재 추진을 비롯해 `2017 올해의 관광도시`에 걸맞은 다양한 관광인프라 조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중이다.” - `가야문화권 시장군수협의회 의장`을 맡고 있다. 협의회는 어떤 일을 하고 있고, 앞으로는 어떤 사업을 추진할 것인지.“가야는 520년의 찬란한 역사를 바탕으로 순장제도, 철기, 토기, 가야금 등의 다양한 문화를 간직한 곳이다. 가야문화권 시장군수협의회는 가야의 역사문화자원을 활용해 영·호남 지역감정 해소, 국민대통합 실현, 동반자적 공동 발전방안 모색을 위해 2005년 구성됐다.현재 전라도, 경상도, 대구광역시를 포함해 5개 광역시·도와 17개 시·군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매년 상하반기 협의 회의와 가야문화권 합동워크숍, 공무원 친선체육대회 등을 개최해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앞으로는 △가야사의 자리매김을 위한 학술적인 연구 지원 △시·군 모두가 참여하는 보존·정비·활용사업 추진 △미래 세대를 위한 가야문화권 대중화와 역사의식 재정립 등을 추진해 나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가야문화권 연구`가 활성화될 것으로 보인다. 대가야 문화의 중심지였던 고령군의 대처 방안은.“문재인 대통령의 국정과제로 선정된 `가야문화권 조사·연구 및 정비`는 통합과 공존을 강조한 사업이다. 고령은 공약 세부사업에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 간부회의를 개최해 대응전략을 수립하고, 가야사 관련 TF팀을 통해 지속가능한 발전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이와 함께 가야문화권 지역발전 시장군수협의회 의장군으로서 가야문화권 전체의 조사·연구·복원을 통한 상생발전을 모색하기 위해 `가야문화권 세미나`를 개최한다. 이를 통해 가야문화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계획이다.가야문화권 조사·연구 및 정비는 대내적으로는 영·호남에 고루 분포한 가야문화권의 조사와 연구를 통해 지역 통합을 이룰 수 있고, 대외적으로는 임나일본부설에 대응하는 가야문화권의 정비로 왜곡된 한일관계를 바로잡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실업`과 `일자리 부족` `희망 상실` 등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한다면.“청년들은 어려운 현실에 처해 있다. 특히 청년실업률이 10%에 육박하니 사회적 문제다. 청년에게 일자리는 미래이자 희망이다. 정부의 청년 일자리 정책이 추진되고 있지만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하지만 어려운 현실이라도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 인생에서 자기만의 비전을 만들고 제대로 된 흔적을 남기고 가야 한다. 실패도 자산이 될 수 있다. 성공이란 단순히 돈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자기만의 삶,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 아닐까.다양한 독서와 여행 등으로 경험을 쌓고 세상을 공부해갔으면 좋겠다. 인생에서 1~2년 늦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청년들이 인생을 크게 바라보고, 넉넉한 마음으로 희망을 향해 걸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전병휴·홍성식기자

2017-08-30

빚더미 도시서 `채무 제로` 클럽 입성, 고지가 보인다

경부선 열차를 타고 오르내리다 보면 왜관이란 도시를 만나게 된다. 왜관이 바로 칠곡군청 소재지이다. 6·25 당시 낙동강 방어선에 위치해 있어 최대의 격전지였던 탓에 호국평화의 도시로 잘 알려져 있다. `갈등과 분열의 도시`였던 칠곡군이 어떻게 `화합과 나눔의 도시`로 바뀌었는지, 빚더미에 앉아있던 처지에서 `부채제로(Zero)에 도전하게 된 것은 또 어떤 노력이 있었는지를 백선기 칠곡군수를 통해 들어봤다.채무비율 1위 불명예 회복 위해행사경비 등 소모성예산 줄이고공모사업·국도비 확보에 `사활``채무 완전상환` 내년 달성 기대6·25전쟁 최대격전지 토대 삼아`호국` 관련 인프라 조성에 박차관광산업 시너지 이끌어낼 것참전국 에티오피아 지원도 힘써-취임 당시 칠곡군은 고소 고발이 난무하는 갈등의 도시로 전해지고 있는데 지역사회 통합은 어떻게 이끄셨는지.△지난 2011년 취임 당시 칠곡은 분열과 갈등의 지역으로 유명했다. 분열된 칠곡을 통합하기 위해 `군민대통합위원회`를 구성했고, 나눔과 인문학을 지역사회에 확산시켰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나눔으로 이념, 세대, 지역 차이를 극복하고, 인문학 공부를 통해 타인에 대한 배려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방법을 배웠다.그 결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나눔과 인문학의 도시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착한가게, 착한일터 등 나눔 관련 최초, 최고의 수식어 및 물질뿐 아니라 재능까지 나누기 위해 자치단체 최초로 `어름사니`(신비한 재주를 부릴 줄 아는 사람이란 뜻의 순우리말로, 지역축제는 물론 지역의 모든 문화행사에도 약방에 감초처럼 등장한다)를 결성했다. 또 나눔의 대상을 해외까지 확대해 에티오피아에 칠곡평화마을을 조성하기도 했다.- 부채더미였던 칠곡군이 어떤 과정을 거쳐 부채제로에 도전하게 되었나요.△취임때 칠곡군의 채무는 715억원으로 전국 82개 군(郡) 단위 지자체 중 예산대비 채무비율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었다. 한해 이자로만 30억원 이상을 지급했다.시중 금리보다 훨씬 높은 6% 이상의 고이율 지방채도 떠안고 있었다. 과도한 지방채로 인해 국가로부터 `재정불건전단체`로 낙인이 찍혀 국·도비 확보는 물론 도비지원에서도 많은 불이익을 받고 있어 대규모사업 추진에 걸림돌이 됐었다. 향후 시 승격시 의회 청사 및 시 청사, 문화예술회관, 실내 체육관 건립 등으로 일시적으로 대규모 재정적 부담이 불가피한 실정이어서 시 승격 준비를 위해서도 채무상환은 반드시 필요했다.- 현재까지 부채율 변화를 봤을 때 부채를 줄이기 위해 실행하신 기획은 어떤게 있는가요.△부채를 줄이기 위해 지역개발에 필수적인 사업 예산을 줄인 것이 아니다. 군수 관사 매각, 고질 체납세액 징수, 경상경비와 행사경비 등 소모성 예산과 불요불급한 예산을 절감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었다. 또 지방채 상환에 따른 부족한 재원은 각종 공모사업과 중앙부처와 도청을 상대로 `세일즈 행정`을 통해 역대 최대 규모의 국·도비를 확보해 현안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그동안 조기 상환으로 이자비용만 80억 원 절감하고 있다. 지방채 상환을 통한 재정 건전성이 급진적으로 향상돼 사업비 전액을 국비로 지원받은 왜관3산단 진입도로(488억)를 비롯해 꿀벌나라 테마공원, 한미 우정의 공원, 박귀희 명창 기념관 등의 대규모 국·도비 지원 사업도 과거보다 더 많이 추진할 수 있었다. 지난 2012년부터 현재까지 전체 채무의 91%인 653억원을 상환했다. 내년이면 나머지 62억원을 갚아서 `채무 제로(ZERO)` 자치단체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리도록 목표를 잡고 있다(경북도내 지자체 가운데 채무제로인 시·군은 김천시와 청도·고령·의성·봉화군 정도다).-정치와 행정은 어떻게 다르다고 보나요.△정치는 어제 A라고 했지만 내일은 B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행정은 어제 A라 했다면 내일도 A가 되어야 한다. 행정의 생명은 연속성과 신뢰성에 있고, 연속성과 신뢰성을 근간으로 합리적 예측과 판단을 해야만 주민들은 행정을 신뢰하게 된다.-최근 칠곡 매원마을이 이낙연 총리의 방문으로 매스컴의 각광을 받았는데 어떻게 보존해 갈 계획인가요.△매원마을은 3대 양반촌이지만 하회마을, 양동마을과는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 달라야 한다. 두 마을은 옛 원형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수를 통해 복원사업을 마칠 수 있었지만, 매원마을은 6.25전쟁 당시 워낙 피폭이 심해서 전체를 새로 지어야 된다. 또 안동처럼 임청각과 같은 보물이 남아있지도 않다. 마을을 형성하는 것은 주민들의 자립심이 가장 중요하다. 현재 마을에 살고 계시는 분들은 새롭게 집을 짓든지 초갓집을 개량해 살고 있고, 어르신들이 대부분이다. 아니면 다른 지역에서 들어와서 사는 사람들만 일부 있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서 복원을 한다 해도 거주할 수 있는 인원이 부족하다. 마을로 최대한 도시인구를 끌어들이고, 매원마을 출신의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 역시 마을을 위해 한옥을 지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함께 노력해 매원마을의 옛 명성을 되찾을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다.-칠곡군의 먹거리사업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듯한데, 군과 상인이 모두 상생할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이 있는가요.△사실 칠곡군이 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음식이 무엇인가 물으면 진짜 할말이 없다.군수로 취임 후 용역을 통해 요식업조합과 함께 연구해서 호이 시리즈 대표 음식을 홍보하고 있지만 더욱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규모가 크지 않은 식당에서는 당장 찾아오는 손님이 있어야 하는데 그만큼의 고객 확보가 안되고 있다. 하지만 왜관중심지 활성화 사업의 하나로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군청 후문거리에 호이음식골목으로 지구를 형성할 계획을 구상중이다. 그 곳을 주민들과 공무원들도 적극적으로 이용해 활성화하고, 칠곡군의 호국 이미지와도 잘 맞는 방안이 될 것 같다. 지역에서 나는 나물들로 호국 비빔밥을 만드는 등 새로운 메뉴도 개발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앞으로 인문학적인 접근을 어떤 식으로 할 건지요.△인문학은 호국과 함께 칠곡을 대표하는 브랜드이자 관광 상품으로 발전하고 있다. 칠곡에서는 `시 쓰는 할매`와 같은 스타도 배출하고, 타 시·군에 전수하는 단계까지 왔다. 우리 군에는 인문학마을이 25개 있다. 인문학 협동조합도 구성되어 있다. 군에서 인문학에 예산을 지원하는 것은 많이 없다. 대부분이 인문학 마을 협동조합이 중심이 되어 자체적으로 행사를 가진다. 최근에는 칠곡 인문학마을협동조합이 `우다닥 캠프`를 진행했는데 군비가 10원도 안들었다. 25개의 마을이 동네별로 갖가지 나물을 가져와 비빔밥을 만들고 협동하며 즐겼다. 우리의 미래에도 이러한 협동과 나눔의 정신이 필요하다. 참가한 분들은 내 고향동네가 이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마을에 어른이 말씀하시면 젊은 사람들이 `예, 예`하고 존중하며 따라주고 단합 및 화합에 앞장선다.일부에서는 단체장들이 사람들을 인문학으로 규합해서 조직을 만들고, 선거 때 이용하려는데 아니냐고 비딱하게 보기도 한다. 내 생각은 다르다. 현재는 시대가 변했다. 온갖 정보가 공유되는 세상이고 사람들이 소신을 가지고 산다. 인문학 정신은 우리 전통을 잘 보존할 수 있고 되살릴 수도 있으며 마을을 단합·화합하는데 이것 이상의 효과가 없다고 생각한다.-오는 10월 29일부터 에티오피아 출장이라고 들었는데 칠곡군이 에티오피아를 돕고 있는 이유는 어떻게 되는가요.△에티오피아는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위해 참전한 피를 나눈 형제의 나라지만 지금은 아프리카 최빈국이다. 그들의 은혜에 결초보은(結草報恩) 하고자 2014년 축전 때부터 `평화의 동전밭`을 만들고 에티오피아 돕기에 나서고 있다. 지난 2015년에는 에티오피아 디겔루나 티조 마을을 직접 방문해 `칠곡평화마을` 현판을 내걸고 지역과 마을의 아동과 결연했다. 또 교육, 식수 및 농업용수 확보와 보건의료를 지원하고 있다. 새마을 운동까지 전수하고 있으며, 현재 461명의 칠곡군민이 칠곡평화마을을 위해 매월 857만원을 모으고 있다. 이번 출장은 추진사항의 확인과 정확한 실태 파악을 통해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호국을 테마로한 관광산업 발전 방향은 어떤게 있나요.△6·25전쟁 최대의 격전지였던 만큼 칠곡군에는 호국과 관련한 다양한 인프라와 스토리가 있다. 칠곡호국평화기념관, 다부전적기념관, 호국의 다리, 관호산성, 가산산성 등 지금까지 조성해 온 호국관련 인프라와 앞으로 들어설 한미우정의 공원, 호국문화체험 테마파크, 역사 너울길 등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계돼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는게 목표다. 또 칠곡스토리텔링, 뮤지컬 55일, 낙동강세계평화 문화대축전등의 문화행사를 통해 호국관련 인프라에 스토리와 생명력을 불어 넣을 계획이다. 호국관련 인프라가 시너지 효과를 내고, 스토리가 구성돼 살아 숨 쉰다면 칠곡군은 명품관광의 도시로 도약할 것이다.백선기 군수 프로필△칠곡 출신(62)△순심고 △경북대 행정대학원 석사 △경북도 사회복지과장 △ 동 자치행정과장 △청도부군수/김재욱기자 kimjw@kbmaeil.com

2017-08-29

이차돈 순교와 불교공인 시점, 법흥 또는 진흥왕 代 논란도

경상북도와 경주시가 주최하고 본사가 주관해 27일 국립경주박물관 강당에서 열린`2017 이차돈 성사 학술발표회`는 학계, 종교계 전문가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신라시대 불교 순교자 이차돈(506~527) 순교의 의미와 그에 따른 신라의 변화를 역사적·문화적 관점에서 진단하고 이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된 의미있는 행사로 평가됐다.이날 주제발표에 나선 이도흠 한양대 교수와 이용현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의 발제 내용을 정리했다.▲ 이도흠 한양대 교수`異次頓 記事에서 역사적 반영과 문화적 굴절`▲ 이도흠 한양대 교수현존하는 이차돈 자료 중`반영상`으로 역사적 해석`굴절상`으로 예술적 해석이차돈 관련 기사는 이차돈순교와 법흥왕의 불교 공인, 이후의 신라 정치의 변화에 중요한 기점을 형성하기에 역사적, 불교적,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교공인을 진흥왕대로 보는 주장에서 이차돈의 순교와 법흥왕의 신불(信佛)을 부정하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아직 논쟁점이 많다.현존하는 자료 가운데 서사의 틀을 갖춘 이차돈 관련 기사는 `백률사 석당기` `삼국사기` `해동고승전` `삼국유사` `원종흥법염촉멸신` 등이다.이차돈 관련 기사 가운데 신라 시대에 기록된 유일한 사료는 `백률사 석당기`다. `이차돈 순교비`라고도 한다. 이 비는 이차돈을 추모하기 위하여 818년(헌덕왕10년)에 건립한 것으로 보이며 모두 6면으로 구성되었다.하지만, 결자가 많아 전체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하고 추모비이기에 이차돈에 대해 온정적인 입장에서 기록되었다는 점이 사료로서 한계다.고려 때의 기록으로는 `삼국사기` `해동고승전` `삼국유사` 등이 있다. 이처럼 이차돈 관련기사를 살펴보면, 신라 시대에 기록된 사료는 백률사석당기가 유일하며, 나머지는 고려 시대 때 1차 사료를 참조하여 기술된 2차 사료다.2차 사료는 인용된 기술의 객관적 타당성과 정확성, 곧 1차 자료 자체가 사료로서 객관성을 검증할 수 없는 상황이며 1차 자료가 객관적 타당성과 정확성을 갖는다 하더라도 이를 어느 정도로 인용하고 가필했는지에 대해 확인할 수 없기에 한계를 갖는다.다음으로 풀어야 할 과제는 실제 현실과 텍스트로서 재현 사이의 괴리 문제다. 당대의 실제 현실이 텍스트로 재현되면서 어떻게 반영되고 굴절되었으며, 실제 현실과 이것의 차이는 어느 정도이며 거기에 어떤 요인이 작용하였고 그 원리는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화쟁기호학을 중심으로 방법론을 설정하고 이에 따라 분석하고 해석하기로 한다.현존하는 자료 가운데 서사의 틀을 갖춘 이차돈 관련 기사들을 반영상과 굴절상으로 분절한 후, 전자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해석을 하여 객관적인 사실을 추출하고, 후자에 대해서는 예술적인 해석을 하여 문화적 의미를 추출하고 양자를 종합한 것이 이번 논고다.반영상에서 현실계는 크게 이사부를 수장으로 한 탁부·풍류도·내물왕계 대 법흥왕을 수장으로 하는 사탁부·불교도·지증왕계의 대립이 치열한 가운데 전자에 소속된 자로 후자와 손을 잡은 이차돈이 법흥왕의 왕권불교와 대립하는 모순으로 여러 역동적인 사고와 실천이 잠재된 상황이다.굴절상은 불교를 펴는 이치와 이익을 알리려는 효용소와 이차돈을 영웅화 내지 신격화하려는 표현소가 작용하여 이적과 전고, 비유를 통하여 현실을 굴절시켰다. 여기서 진자계는 종교적 진리와 일상, 불교 교리와 실제, 깨달음과 세속, 거룩함과 비천함,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시계추처럼 진동하는 양상이며, 승화계는 후자에서 전자로 지향하여 흥법의 이익으로 오는 환희, 혹은 원융을 이룬 세계다.▲ 이용현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이차돈 관련 기사에 대한 비교 분석`▲ 이용현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6세기 전반 신라의 불교 승인법흥왕 왕권강화 측면의 역사이차돈 자체 논고는 설화에 치중이차돈은 신라 법흥왕 때 불교 국가공인 과정에서 527년 순교하였다. 그의 이름은 거차돈, 염촉이라고도 한다. 순교 당시 국왕의 근신으로 내사사인의 직책에 있었다. 법흥왕은 불교를 통해 나라를 발전시키고 불교를 국교로 삼고자 했고, 토착신앙을 바탕으로 한 귀족들의 반대에 당면했다.이차돈은 왕과 함께 그 타개책을 강구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방법을 제안하였다. 이에 이차돈은 왕명을 가장하여 천경림에 절을 지었고, 공사가 시작되고 신하들의 반대가 거세지면서 그 책임을 지고 처형당하기에 이르렀다.이차돈은 6세기 전반 신라가 국가 차원에서 불교를 공인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이차돈 연구는 대체로 법흥왕의 신라불교 초전과 관련하여 왕권 강화의 측면에서 주로 주목되어 왔다. 그러한 점에서 이차돈 자체에 주목한 논고는 주로 설화 자체에 주목되어 온 감이 있다.이차돈 관련 주요사료는 다음 네 건이다. (1)삼국사기 (2)삼국유사 (3)해동고승전 (4)이차돈 순교비. 네 가지 사료를 검토해보면, 불사 건립 즉 사찰 건축을 둘러싸고 이를 주장하는 국왕과 이를 반대하는 대신 간에 의견이 대립되었고, 국왕 즉 법흥왕이 거듭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대신들의 강한 반대로 관철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삼국사기`에서는 이차돈을 법흥왕의 “가까운 신하(近臣)”라고 하였다. 이차돈이 법흥왕에 근접하여 거사를 일으키게 된 과정은 사료의 조합을 통해 정리할 수 있다.이차돈과 법흥왕의 거사 모의는 `삼국사기`를 제외하고 나머지 세 자료에서는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먼저 이는 당연하게도 아주 은밀하게 이뤄졌다. 공통적인 것은 모의 혹은 논의의 중심은 이차돈으로 되어 있다. 네 자료는 모두 이차돈이 제안하고 법흥왕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성립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네 개의 자료는 각각의 시점에서 거사 진행을 기술하였다. `이차돈 순교비`에서는 국왕이 정전에서 무장무사들을 사방으로 도열시키고 그 안에서 신하들에게 반역여부를 확인하며 윽박지르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삼국유사`도 이와 유사하게 묘사되어 있다. 형틀을 조정에 늘어놓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으며 신하들이 벌벌 떨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삼국사기`는 그와는 확연히 다르다. 국왕이 신하들과 불법 실행에 대해 토의하는 듯한 장면을 기술하였다.이차돈 사후에 장례는 `이차돈 순교비`에서는 북산에 시신이 안장되었으며 서산에 사당이 세워졌다 하였다. `삼국유사`에서는 북산 즉 금강산에 장사를 지냈으며, 자추사를 세웠다고 하였다. `해동고승전`에서도 금강산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다.이차돈의 머리가 금강산까지 날아간 것은 그를 금강산에 장사지낸 데에서 소급된 창작일 가능성이 짙다. `삼국유사`에서 이르는 자추사는 `이차돈순교비`에서 이르는 사당과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북산을 금강산으로 인정되는 것은 당연한데, 자추사의 위치를 비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뚜렷한 근거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 강석근 경주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새로운 시각에서 의문점 제시△강석근 경주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경주에서는 신라와 관련한 학술발표가 많이 개최된다. 워낙 많은 탓에 발표하는 연구자료들이 중복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이번 이차돈 성사 학술발표회는 새로운 시각에서 새로운 의문점들을 제시하고, 그에 따른 이야기들을 공유할 수 있는 뜻깊은 자리가 됐다.이 자리에서 우리는 역사적 사실인 이차돈의 삶과 순교가 후대, 현재에 이르기까지 문화적으로 어떻게 굴절돼 왔는지에 대한 발제자와 토론자, 청중들의 의견을 공유하고자 한다.▲ 법념스님 (경주 홍륜사 한주)이차돈 순교비, 왜 사라졌는지 궁금△법념스님 (경주 홍륜사 한주)이차돈의 순교에 대한 재해석 과정에서 고려때까지만 해도 있었던 이차돈 순교비가 어떤 역사적 이유 탓에 없어졌는지 궁금하다. 이차돈의 큰아버지가 이사부이며, 이차돈의 오촌 당숙이 법흥왕이다.소지마립간 이후 이사부에게 왕위가 계승될 예정이었으나, 지증왕의 집권으로 그의 아들인 법흥왕이 후대 왕이 됐다.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이해와 연구를 통해 이차돈에 대한 역사적 재해석이 필요해 보인다.▲ 정동락 대가야박물관 학예연구사이차돈 4개 사료 중 우선은?△정동락 대가야박물관 학예연구사삼국유사와 이차돈 순교비는 이차돈의 순교를 영웅화한 반면, 삼국사기와 해동고승전은 나름 객관적으로 쓰려고 한 것 같다.4개의 사료 중 가장 우선되는 자료는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이창식 세명대 미디어문화학부 교수이차돈·이사부 관계 설명 필요△이창식 세명대 미디어문화학부 교수이차돈과 이사부의 가족관계와 당시 정치적 이해관계에 대해서도 충분한 보충설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차돈이 불교 융성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지만 당대에 영웅으로 추대받지 않고 300년이 지난 뒤에서야 순교비가 세워진 이유에 대해서도 연구한 것이 있는지 궁금하다.▲ 석길암 동국대 불교문화학부 교수법흥왕 이전부터 불교는 활용△석길암 동국대 불교문화학부 교수법흥왕 시대 불교가 공인됐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불교는 법흥왕 이전부터 이미 신라사회에 들어와 있었으며, 당시 시민사회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활용되고 있었다.따라서 불교의 공인이라는 말이 아닌 이차돈의 순교로 인한 불교의 국가종교화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4개 사료 모두 변용됐을 가능성▲ 이용현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이용현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우선 4개 자료 모두 변용됐을 가능성이 충분하다.200~300년이 지난 뒤의 것이기 때문에 1차 자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따라서 우열을 가릴 필요는 없으며, 객관과 주관에 따라 2개 정도 사료가 있다는 것으로 정리하고 싶다.이차돈과 법흥왕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연합했지만, 당시 정황상 불교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다만, 이차돈이 신앙심으로 순교한 것인지, 법흥왕의 신하로서 국왕에 충실한 것인지 판단하기에는 아직 자료가 부족하다.정리/홍성식기자hss@kbmaeil.com/이바름기자 bareum90@kbmaeil.com

2017-08-28

달달한 연인들 속삭임에 도망쳤던 그 밤, 쓴 술잔은 강처럼 넘치고

많은 돈을 쓰고 다닌다면 여행은 편해진다. 넓고 안락한 호텔에서 자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신선한 재료로 만든 희귀한 요리를 먹고, 버스나 기차가 아닌 기사가 운전하는 리무진에 올라 경치 좋은 곳을 돌아보는 여행이 나쁠 것은 없다.그러나 이런 호사스런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많지 않다. 보통의 여행자들은 가능한 돈을 아껴가며 새로운 문물과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자 한다. 기자 역시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면서 여행을 좋아하는 터라 `절약하는 여행자`에 가깝다. 태국의 수도 방콕에 갔을 때도 “하루에 1만 원 정도로 이 도시를 즐겨보자`는 마음을 가졌다. 그때 겪은 일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가난한 연인들5시간쯤의 비행 끝에 방콕에 도착한 첫날. 버스를 타고 카오산 로드로 가서 숙소부터 잡았다. 1980년대 한국의 여인숙 같은 허름한 곳이었다. 열대과일 썩는 냄새가 풍겨오는 골목 끝자락에 무너질 것처럼 자리 잡은 싸구려 숙소는 이름까지 작고 초라했다. `미니 게스트하우스`.손님을 맞이하는 주인 할머니의 키도 조그맣고, 방도 조그맣고, 오래된 목조건물이라 계단에서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런 형편없는 숙소를 잡은 것은 단 한 가지 이유였다. 왜냐? 저렴하니까. `미니 게스트하우스`의 하루 숙박비는 200바트(한국 돈 7천원).아직 해가 지지 않았으니 골방에 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숙소 골목을 빠져나와 카오산 로드의 흥겨움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느긋한 표정으로 오가는 세계 각국 여행자들을 구경하며 맥주에 싸구려 위스키를 섞어 마셨다. 그것만으로도 일상의 스트레스가 절반은 풀리는 느낌이었다.밤이 깊어지니 피곤이 몰려왔다. `미니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갈 시간. 숙소 문을 밀고 들어가 낡은 계단을 오르다 젊은 태국인 커플과 마주쳤다. 둘 다 선량한 표정과 순수한 미소를 지니고 있었다.사실 방콕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건 백인 남성과 태국인 여성 커플이다. 방콕을 포함한 태국 대부분의 관광지엔 은퇴하고 태국에서 여생을 즐기는 60대 이상의 유럽인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현지처 역할을 하는 태국인 여성과 함께 생활한다. 보기 좋다고는 말할 수 없는 그런 커플들만 보다가 젊은 태국인 연인을 만나니 참 좋았다. 어디 먼 시골마을에서 방콕으로 놀러온 것인지 짐도 무거워 보였다. 환한 얼굴로 서로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 커플의 방은 2E. 기자의 방은 2D였다. 그런데, `미니 게스트하우스`의 조악한 방음 시스템 탓에 곤란한 일이 생겼다. 방 사이를 아주 얇은 베니어합판 하나로 막아놓은 구조라 옆방의 숨소리까지 들렸던 것이다. 자칫 트림이라도 하면 그 소리가 합판을 넘어갈 게 분명했다.듣고 싶지 않았지만 옆 방 연인들이 소곤거리는 소리, 나지막한 웃음소리, 심지어 입 맞추는 소리까지 모두 들렸다.옛날 한국의 여인숙이 벽의 윗부분을 뚫어 형광등 하나로 2개의 방을 밝혔다던가. 그날 기자의 방 분위기가 딱 그 모양새였다.도무지 민망해서 더 이상은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방을 나와 다시 카오산 로드로 갔다. 카페에 자리를 잡고 칵테일을 마시는데 이상하게 술맛이 썼다.새벽까지 이곳저곳을 하릴없이 쏘다니다가 다시 숙소로 돌아간 건 새벽 무렵이었다. 전날 밤 나의 고통과 고난(?)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찍 일어난 태국인 커플이 마당에서 인사를 건넸다. 환하게 웃는 그들 앞에서 기자 역시 웃을밖에 도리가 없었다.간밤의 해프닝은 `싸구려 숙소가 선물한 색다른 경험이라 생각하면 되겠지`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때 떠오른 게 신경림(81)의 시 한 구절이었다. “가난하다고 사랑을 모르겠는가.” 그렇다. 태국이건 한국이건, 그 연인이 부자건 가난하건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다. ▲저렴한 비용으로 더위 피하는 좋은 방법방콕의 더위는 악명이 높다. 한국의 여름 날씨는 그곳에 비한다면 짜증스러운 것도 아니다.끈적거리는 땀과 갑자기 쏟아지는 스콜(squall·열대지방의 세찬 소나기), 아스팔트를 녹일 것처럼 이글거리는 태양…. 이것들 모두가 방콕을 상징하는 이미지들이다.특히 카오산 로드에선 에어컨이 가동되는 식당이나 카페가 아니라면 해가 져서 어두워지기 전까지 더위를 피할 곳이 마땅찮다. 기자가 몇 차례 태국을 여행하면서 얻은 `더위 피하는 노하우` 하나를 살짝 알려줄까 한다.카오산 로드에서 10분쯤 가면 `차오프라야 보트 선착장`이 있다. 말 그대로 차오프라야강(江)을 오르내리는 배가 승객을 싣는 곳이다. 시원한 강을 따라 1~2시간 정도 천천히 운행되는 배의 승선료는 겨우 15~25바트(500~800원). 그걸 타고 종점까지 쭉 가보는 거다.이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배에 오르면 일단 선수(船首)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앞쪽엔 좌석이 비어 있을 가능성이 높고 전망도 거기가 훨씬 좋다. 게다가 깨끗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강물도 튀지 않는다. 그렇게 앞쪽 좌석만 확보한다면 호화로운 `보트 투어`가 부럽지 않다. 서울 한강 유람선이나 포항운하 유람선에 비하면 가격도 공짜에 가깝다. 그 배를 타고 차오프라야강을 떠가다 보면 태국 동전에 선명하게 새겨진 `왓 아룬(Wat Arun)`의 거대한 석탑이 보이고, 왕궁 지붕도 보인다. 사원과 수상가옥, 높게 솟은 방콕의 마천루도 한눈에 들어온다.그렇게 저렴한 뱃놀이를 마치고 돌아오면 폭염의 오후가 끝나가고 있을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하루 1만원의 적은 비용으로 돌아본 태국이 그립다. 무지막지했던 방콕의 더위까지 그리울 정도다. 태국 여행에서 꼭 맛봐야 할 것들태국 요리는 그 나라 사람들의 느긋한 성품과는 달리 향이 강하고, 자극적인 맛을 낸다. 팟타이, 카오팟, 솜땀, 톰얌쿵 등 이름도 재미있다. 해산물과 육류, 각종 향신료를 사용해 만드는 다양한 요리를 맛보는 건 여행자가 누릴 수 있는 기쁨의 하나다.여기에 망고, 파인애플, 바나나 등의 신선한 과일과 저마다 화려한 색깔을 뽐내는 칵테일도 태국을 여행하는 사람들의 반가운 친구다.◆태국 카페에선 싱그러운 칵테일 `모히토`를영화 `내부자들`에서 배우 이병헌이 “모히토 가서 몰디브 한잔 마셔야겠다”는 대사를 남겨 유명해진 칵테일이 바로 모히토다. 민트와 화이트 럼, 소다수와 설탕 등을 넣어 만드는 모히토는 특유의 초록 빛깔로 여행자를 유혹한다. 화이트 럼의 양을 줄이면 술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도 즐길 수 있다. 특히, 태국에선 신선한 민트가 많이 생산돼 모히토의 향이 뛰어나다. ◆ 거리에서 맛보는 볶음밥과 볶음국수적지 않은 여행자가 말한다. “태국이야말로 길거리 음식의 천국”이라고. 기자 역시 이 의견을 부정할 생각이 없다. 카오산 로드는 물론이고 관광지라고 이름 붙은 곳이라면 어디서건 즉석에서 볶음밥, 볶음국수, 과일 팬케이크를 만들어주는 노점을 볼 수 있다. 싼값으로 한 끼를 해결하려는 젊은 여행자들은 이런 태국 길거리 음식에 환호한다. ◆ 해변에서는 싸고 맛있는 생선과 새우를 푸켓, 코사무이, 코사멧, 크라비, 피피 섬 등 태국에는 아름다운 해변이 지천이다. 새파란 바다에서 수영을 즐기다가 배가 고파지면 바닷가에 줄지어 늘어선 식당에 들어가 큼직한 새우나 바닷가재를 구워달라고 주문해보자. 그 감칠맛을 잊기 힘들 것이다. 한국에선 보기 힘든 열대의 생선들도 독특한 맛을 낸다. 한 번쯤은 먹어볼 만하다.글/홍성식기자사진제공/구창웅

2017-08-25

세계가 아는 새마을운동, 한국 청년들은 몰라… 역사 가치 알아주길

가난해도 희생정신 있었던 시절이웃 위해 국가 위해 조금씩 양보오늘날 이기심은 새마을정신 부재 탓국민 개개인이 `지도자` 의식 가져야△ 뒷받침하는 이들이 있음을 알아줬으면새마을일꾼으로 15년, 새마을문고 지도자로 5년을 하고 나서 진미동 새마을지도자를 시작했죠. 그때가 1990년도였을 거에요. 당시 유학산에 불이 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공무원들이랑 인근 주민들이랑 완전 비상이 걸렸죠. 새벽까지 사람들이 오르락 내리락 했어요. 당시엔 우리 집사람도 동 부녀회장이었어요. 나 만나서 별 걸 다했지.새벽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집사람과 서둘러 가보니까 불 끈다고 정신이 없더라고. 그래서 나도 불을 끄러 산에 올라가려고 준비하려는데 사람들이 배가 고프다면서 뭐 좀 먹을 게 없냐고 하는 거에요. 그런데 먹을만한 게 아무 것도 없고, 준비도 안 되어 있는 거에요.말 그대로 굶으면서 일해야 되는 처지더라구. 산을 오르내리려면 얼마나 배가 고프겠어요. 그래서 일단 식사 준비부터 하기로 했어요.당시 이화자씨가 구미시부녀회장인가 그랬어요. 밥은 거기서 지어온다기에 난 집사람을 다시 차에 태우고 시장에 장을 보러 갔어요. 근데 너무 일찍이라 상가가 문을 안 열었더라구요. 전부 뚜꺼운 천 같은 걸로 다 덮여있고. 그래도 급한데 어떻게 해. 할 수 없이 내가 천을 벗겨내고 그냥 차에 실었어요. 시래기 같은 거. 그거 차에 싣고 와서 집에서 찜통에 두 통이나 끓여 가져갔어요.그리곤 유학산 밑에 백곡지가 있는 곳에 식사를 준비시켰어요. 조금 있으니 얼굴이 시커먼 공무원들이 와서 밥을 먹었어요. 얼마나 배가 고팠겠어요. 있는데로 퍼주었죠. 그때 구미쪽 공무원뿐만 아니라 칠곡쪽 공무원들도 와서 밥을 먹었어요. 그쪽에는 아직 밥이 준비가 안 됐었나봐.밥 실어나른다고 정신이 없었어요. 그리고 나중에 다시 시장에 가서 돈을 지불했지. 주인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미안하다 말하고. 처음엔 도둑맞은 줄 알았다고 하더라고. 주인도 사정을 듣고는 가격도 깎아주고, 시래기도 더 챙겨주더라고. 고생하는 사람들 잘 먹이라면서. 정말 고맙더라구요.새마을운동 하면서 느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뒤에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거에요. 그런 사람들은 무슨 일을 했다고 티도 안 내요. 그냥 그렇게 묵묵히 열심히 남을 돕는 사람들도 있음을 알아 주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에요. △ 지도자는 소통을 잘 해야요즘 들어 이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지도자는 사람들과 소통을 잘 해야된다고. 물론 소통이란 게 지도자만 해서는 안되는 거지. 소통을 한쪽으로만 해서는 안 되니까. 내가 새마을일꾼으로 15년 동안 일하면서 보고 배운 게 있다면 지도자들이 일일이 찾아가서 설득하는 거였어.길을 넓히기 위해서 남의 집 벽을 허물고 집 안쪽으로 다시 벽을 쌓아야 하니까. 그럼 집이 그만큼 줄어들자나요. 그걸 설득하는 거야. 마을을 위해 조금 양보해 달라고.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죠. 다들 좋아하진 않았어요. 누가 자기 집이 줄어드는 걸 좋아했겠어요. 그래도 당시에는 뭐랄까? 희생정신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있었어요. 나를 위한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도 중요하고, 또 나라를 위한 것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내 집이 조금 줄어들더라도 마을 사람들이 편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득이 된다면 다들 조금씩 양보했었어요.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요즘 뉴스를 보면 땅 주인이 길을 막아서 동네 주민들이 길이 없어 벽을 넘어 다닌다는 등의 기사를 보면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래요. 이게 다 새마을정신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고 봐요. 난.그렇게 막다른 길목까지 오도록 아무도 중재를 하지 않았거나 못 한거니까. 즉 지도자가 없어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도자란 소통을 할 수 있도록 중재하는 역할이 가장 중요하거든. 그런 점에서 난 지금의 김관용 지사를 좋아해요.내가 구미시 협의회장을 할 때였으니, 당시에는 구미시장이였어요. 선산에 일이 있어 갔다가 같이 목욕탕에 가게 됐어요. 속된 말로 발가벗고 목욕탕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새마을운동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고, 시의 현안 문제도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참 격의없이 대화를 나누었죠. 편하게 이야기를 들어주고, 또 편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이게 바로 지도자가 소통하는 방법이라고 느꼈어요. 난 도지사든 시장이든, 동장이든, 통장이든 모두가 하나의 지도자라고 생각해요. 새마을운동이 한창이었던 때처럼 말이에요. 그 사람 한 명 한 명이 자신이 지도자라고 생각하고 진심으로 주민을 대하고, 국민을 대하면 소통은 자연스럽게 이뤄질 겁니다. 그게 바로 새마을운동의 기본 정신이기도 하구요. △ 몽골로 간 선물의 반이 사라져내가 구미시 새마을협의회장을 할 때 새마을 세계화사업이 한창이었어요. 구미에서. 그때 세계화사업 한다고 몽골, 콩고 같은 나라에 다녀왔어요. 초창기에는 그들에게 필요한 생필품을 보내는 일을 했어요. 지금은 먹고 사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지만. 당시에는 여러가지 조건이 어려웠어요. 생필품 하나 보내는 것도 힘들 정도였으니. 당시 각 동에서 받은 수건, 비누, 헌옷 등 여러 생필품을 모아 컨테이너에 담아 보냈어요. 근데 이게 보통일이 아니더라구요. 운임 때문에 항상 말썽이 생기는 거야. 대사관으로부터 전화도 여러 번 받았어요.몽골에 생필품을 보낼 때였어요. 그땐 모두 새 물건만 보냈어요. 작은 상자에 선물을 담았죠. 컨테이너 하나 가득 실으니까 상자가 300개 딱 들어가더라구요. 그걸 몽골에 보냈어요. 아니나 다를까 중간에 또 문제가 생긴 거에요. 몽골측에서 수입품으로 간주해 컨테이너에 관세를 붙이려 한거에요. 그것도 우리나라 돈으로 300만원이나. 아니 자기 나라 국민들 돕기 위한 물품에 관세를 붙이는 게 말이나 되요? 그래서 내가 관세를 붙이거든 그 자리에서 컨테이너에 불을 붙여 태워버리라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한참 후에 어떤 사람이 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그리고는 그냥 통과가 되었어요.나중에 보니 우리나라로 따지면 도의원 정도 되는 사람이었나봐요. 아무튼 그 사람 덕에 물건이 잘 통과됐어요. 그리곤 10시간 넘게 비포장 도로를 달려 컨테이너를 열어 보니까 물건의 반 정도가 없는 거에요. 진짜 어이가 없더라구요. 중간에 없어진 거지. 나라가 힘드니까 좋은 거다 싶은 건 중간에서 막 빼먹고 그랬던 것 같아. 세상은 다 똑 같더라구요. 그래도 우리가 처음부터 주려고 했던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 물건을 가지고 간 사람도 결국은 몽골 사람이었을 거고, 힘들게 사는 건 다 똑같은 거였을테니까 그냥 넘어가기로 했어요. 세계화사업을 하면서 그런 일이 종종 있었어요. 그래서 여건이 아무리 어려워도 물품을 가져다 주는 것보다 그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자고 생각했어요. 그게 바로 새마을운동이니까. 그래서 지금의 새마을세계화사업이 있는 거에요.△ 청년들에게 새마을운동을 제대로 알려주길난 새마을일꾼으로 15년, 새마을지도자로 30년 총 45년을 새마을운동에 몸 담은 사람이에요. 새마을운동의 산 역사라고도 할 수 있죠.그런데 요즘 젊은 사람들이 아직도 새마을운동이 있는가라고 물어봐요. 정말 안타까워요. 새마을운동을 모르는 젊은 사람들이 많더라구요. 세계 각국에서 새마을운동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이 시점에 우리나라 청년들은 정작 새마을운동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이 마음 아파요.다들 아시다시피 새마을운동은 정신운동이에요. 지금의 젊은 청년들에게도 꼭 필요하죠. 시대가 바뀌어도 그때나 지금이나 살기 힘들다고 느끼는 건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문제를 헤쳐나가는 건 결국 정신이죠. 어떤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냐의 문제니까. 꼭 말하고 싶어요. 새마을운동은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일이 아니라 계승·발전시켜 나가야 할 우리의 위대한 유산이라고./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7-08-25

새마을문고는 `미래를 위한 정신운동` 도서관 없던 시절 배고픈 지식 채워줘

박병군(65)전 구미시 새마을 협의회장은 1952년 6월 구미의 평범한 가정에서 5녀 1남 중 막내로 태어나 어릴적부터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자랐다. 구미 인동초등학교와 인동중학교를 거쳐 왜관 순심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새마을운동에 참여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새마을운동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은 1971년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새마을운동의 지도자가 아닌 일반 참여자로 15년 동안 봉사활동을 묵묵히 해오다 1985년부터 진평새마을문고 회장으로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이후 구미시 진미동 2통 새마을지도자, 새마을지도자 진미동 협의회장, 새마을지도자 구미시 협의회장, 구미시 새마을후원회장, 새마을지도자 경상북도 협의회장 등을 거쳐 지금은 새마을 중앙회 선임이사를 맡고 있다.리어카 다닐수 있게 길 넓히고하수도 교체도 모두 사람 손으로 해정부에서 준 시멘트 포대반죽 방법 몰라 무너지기 일쑤그래도 하다보니 요령이 생겨△ 하나뿐인 아들이라 사랑을 한 몸에우리집은 부유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가난한 집안도 아니었어요.그냥 평범한 집안이라고 하는게 맞을 거에요. 난 6남매 중 막내였는데 아들이 저 하나였으니, 어머니께서 유달리 절 아끼셨죠. 아들이라고 보리밥도 한번 안 먹이고, 쌀밥만 주셨을 정도였으니.아버지는 6.25전쟁 이전부터 동장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동장을 아주 오래하셨다고. 어릴적 기억으론 동네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이 `동장(아버지)하고 같이 있으면 굶지는 않는다`고 그러시더라구요. 그말을 굉장히 많이 들었어요. 나중에 커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당시에 동장들이 배급을 타서 주민들에게 나눠주는 게 있었나봐요. 근데 아버지는 항상 식구 수보다 많은 수를 불러서 배식을 받아 주셨던 모양이에요. 아무래도 정상적으로 배식을 받으면 부족하니까. 한 가정에 5명의 식구가 있으면 7명이 있다고 속여서 7명의 배식을 받아다 주는 식으로. 그런식으로 도와주셨던 모양이에요.그래서인지 동네에서 아버지는 거의 유지셨어요. 동네에서는 사람들로부터 존경도 받고 하셨지만, 사실 집에서는 아무 일도 안하시는 분이셨어요. 어머니가 모든 일을 다 하셨죠. 밭일이며 모든 걸. 생계는 어머니의 몫이었어요. 어머니는 그렇게 고생을 하시면서도 군소리 한번 안 하시는 분이셨어요.저에 대한 교육열도 높으셔서 참 많은 교육을 시키셨어요. 당시에 약목, 칠곡까지 가서 교육을 받았을 정도니까. 근데 내가 워낙 농띠(공부 잘 안하는 학생을 가리키는 경상도 사투리)라서 어머니가 속이 많이 상하셨어요.△무명 지도자로 15년간 새마을운동 하다1970년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농사일을 도왔어요. 그러다 새마을운동이란 게 시작됐어요. 농사일이란 게 농번기가 아니면 시간이 있잖아요.그래서 나도 새마을운동에 동참을 하게 됐어요. 사실 동참이라고 이야기하기도 뭐하지만. 당시 새마을운동이라는게 좁은길 담을 뚫고, 집 뒤로 나오는 하수도를 흄관으로 교체하고, 길을 넓히는 그런 일이었어요.마을 안쪽 길을 보수하고, 학생들이 학교를 편히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주는 그런 일들이었죠. 동네 사람들 모두가 같이 해야하는 일이었어요. 그런데 당시에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흔치 않았어요. 내가 나이가 어리긴 했지만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사람이었으니 여러 일들에 불려다녔어요.요즘 같으면 사진도 찍고, 측량도 하고 해서 금방 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겠지만, 당시에는 모두 사람이 직접 손으로 다 해야했어요. 그러니 조금이라도 배운 사람이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새마을운동 1세대라고 할 수 있죠. 그분들이랑 참 열심히 했어요. 당시 우리 동네 새마을운동 지도자를 맡으셨던 반영복, 추영석 같은 분과 함께 일했죠. 그분들 따라 다니면서 동네 도랑도 만들고, 길을 넓혀 리어카가 다닐 수 있게 하고 했으니까.지금 생각하면 그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싶어요. 사실 너무 힘들었거든. 기술도 없으면서 무조건 밀어붙였으니까. 그러다보니 시행착오도 많았어요. 당시에 정부에서 마을개선사업을 하라고 시멘트를 몇 포씩 줬었어요. 그래서 옥계 한천까지 가서 직접 모래를 퍼 왔죠. 근데 아무도 시멘트 반죽을 할 줄 모르는 거에요.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도 않지.반죽이란 게 질어도 안되고 되도 안되는 거거든. 시멘트 기술이 없으니 반죽이 잘못돼 풀썩 주저앉기도 하고. 실수 투성이었어요. 그런데도 정말 열심히 했어요. 포기할 만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지도자들이 항상 옆에서 격려를 해줘서 그랬던 것 같아요.할 수 있다는 힘을 불어넣어 주었거든. 실패도 여러 번 하면 요령이라는게 생겨요. 진짜에요. 다 하는 방법이 생기더라니까.나중에는 그냥 눈대중으로 해도 반죽이 척척 맞아 들어가더라구. 전문가가 다 된거지.그래도 가장 생각나는 건 일 끝마치고 다 같이 탁주 한잔하던 게 가장 기억에 남아요.당시에는 마을 지도자가 항상 탁주 한사발씩 사주었거든. 같이 땀흘려 일하고 지도자가 사주는 탁주 한잔 마시는 재미도 새마을운동의 묘미였다고 생각해요. 하하 △진평동 새마을문고회장으로 지도자 첫 발1970년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부터 동네 새마을지도자를 따라 다니면서 새마을운동을 해왔죠. 15년을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니까 지역사회에 어느정도 알려지기 시작했었나봐요. 사실 이름 없는 지도자라고 봐도 무관했어요. 사실 나도 지도자 교육을 이미 다 받았었거든요. 그것도 여러 번 받았어요.새마을운동에 대한 교육이 좋아서 내가 찾아가서 받은 것도 있어요. 그만큼 새마을운동이 좋았어요.1985년도에 진평새마을문고 지도자로 임명되었어요. 내가 사는 동네는 아니었지만, 처음 지도자라는 직함을 달았으니 정말 열심히 하고 싶었어요. 그 전에는 문고에는 지도자가 없었거든요. 그러니 더욱 열심히 할 수 밖에요.새마을문고사업은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도서관이 없는 지역에서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책을 쉽게 빌려 볼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사업이었어요.1970년대 후반부터 새마을운동이 정신적 측면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함에 따라 시작된 사업이었죠. 전 새마을문고가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특별한 공간이 되길 바랐어요. 새마을운동이 현재를 위한 정신운동이라면 새마을문고는 미래를 위한 정신운동이라 생각했거든요. 그러기 위해선 우선적으로 새마을문고의 틀을 잘 만들어야 했어요.또 도서비품 구입과 도서 확충 등 독서기반 시설에 대한 부족한 재원 등을 충원할 방법을 찾아야 했죠. 그래서 많은 분들을 찾아 다녔어요.지금도 감사한 게 모두 흔쾌히 성금과 도서를 기부해 주셨어요.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단순한 독서를 하는 새마을문고에서 취미교양교실 등을 운영하면서 시민들에게 찾아가는 새마을문고로 발전할 수 있었어요.그렇게 5년이라는 시간을 새마을문고 지도자로 지냈어요. 이후 진미동 새마을지도자 협의회장, 구미시 새마을지도자 협의회장 등을 하면서도 새마을문고에 대한 애착은 한 번도 버린 적이 없어요.새마을문고는 사실 우리나라 독서문화 보급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어요.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인색하기만 하죠.지금은 아파트마다 작은 도서관 등이 운영되고 있지만, 사실 이런 게 운영되기 시작한 게 얼마나 되었나요? 불과 몇 년 전이에요. 각 지역에 도서관 하나 변변하게 없을 당시 새마을문고에서 책을 빌려 읽으며 꿈을 키워 온 청춘들이 얼마나 많았는지….우리나라가 이만큼 발전하기까지 뭐 하나 그냥 된 게 없어요. 경제든 문화든 모든 방면에서 노력한 사람들이 있지요. 그 사람들이 한 일에 대해 이제는 있는 그대로 평가해 주었으면 합니다. 새마을문고도 이젠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때가 됐다고 생각해요./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7-08-24

“수교 25돌 베트남 특별한 동반자… 경제교류 디딤돌로”

한국 고유의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다양한 문화상품을 들고 베트남을 찾아가는 경주세계문화엑스포는 오는 11월 9일부터 25일간 베트남의 심장부인 호찌민을 찾아간다. `호찌민 경주세계문화엑스포2017`의 실무사령탑을 맡고 있는 이동우사진 사무총장은 “20여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경주세계문화엑스포가 이제 문화를 넘어 경제엑스포로 도약하도록 하겠다”는 다부진 각오를 밝혔다. `호찌민-경주세계문화엑스포2017` 11월 9일 개최신정부 출범 이후 첫 대규모 해외문화행사 `관심`2006 캄보디아·2013 터키 개최25일간 해외서 문화홍보는 처음`경제엑스포` 성장·도약의 기회경주·경북 이색문화 매력 발산베트남 등 동남아 관광객 유치미술교류전·경제행사 등 `다채`다음은 이 사무총장과의 일문일답이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의 연륜이 20년이 넘었다. 그동안의 성과를 요약한다면.△경주세계문화엑스포는 1998년 처음 시작해 지난 2015년 `실크로드 경주 2015`까지 8회의 문화엑스포를 개최하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브랜드로 성장했다. 그동안 298개국에서 5만6천여 명의 문화예술인이 참여했다. 누적관람객만도 1천600만 명을 넘는다.특히 2006년과 2013년에는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터키 이스탄불 현지에서 문화엑스포를 개최했다. 이스탄불-경주엑스포의 경우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는 동서 문화의 교차지이자 세계적인 역사문화도시 이스탄불에서 `경주`라는 브랜드를 내세워 한국문화의 종합전을 치렀다. 이제 올 11월에 세 번째 해외엑스포를 위해 베트남 호찌민시로 가게 된다.- `호찌민 경주세계문화엑스포 2017`의 목표와 비전에 대해 설명한다면.△전 세계적으로도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서 이렇게 장기간 고유 전통문화를 알리는 행사는 경주세계문화엑스포가 유일하다. 특히 이번 행사는 지난 두 차례의 국제행사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와 베트남의 경제교류가 획기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문화행사에 경제를 가미한 경제엑스포로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특히 이번 행사는 중앙과 지방을 통틀어 신정부 출범 이후 첫 해외문화행사가 되었다. 한국과 베트남의 양국관계 중요도 증대와 더불어 같은 시기 베트남에서 열리는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 등으로 사실상의 국가급 행사로 격상되었다. 이에 경북도는 물론이고 새 정부의 브랜드를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최근 동남아시아 시장에 대한 중요성 역시 높아지고 있어서 호찌민-경주엑스포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지고 있다.- 경북도와 경주세계문화엑스포는 이번 `호찌민-경주세계문화엑스포2017`을 경제엑스포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는데, 경제엑스포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올해 우리나라와 베트남은 수교 25주년을 맞이했다. 베트남은 우리나라의 3대 수출국으로 국제교류 인구 5만 명, 국내체류 베트남인이 13만 명에 이르는 등 교류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베트남에 진출한 우리 기업이 4천여 개에 이르며 그 중 2천여 개가 호찌민에 진출해 있다. 그만큼 베트남과의 경제적 관계가 밀접하다.경북도는 행사 기간 동안 한류통상 로드쇼를 개최하고 청년창업제품 판로개척지원, 경북물산업전시회, 경북농식품 K-Food Fair 등 다양한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이를 통해 `경제엑스포`의 신모델을 제시할 것이다.`경제엑스포`는 경제를 행사의 중심에 둔다는 의미는 아니다. 경제적으로 서로 교류하고 발전하는 관계에 문화를 가미하여 더 성숙한 경제교류를 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기업이 베트남에 물건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 문화적 사회적 기여도 하고 베트남 관광객들은 우리나라에 관심을 갖고 방문하는 등 서로 윈-윈(Win-Win)하는 관계로 만들자는 것이다.- 해외 관광객 유치 측면에서 호찌민-경주세계문화엑스포의 기대효과는.△현재 중국인 유커(遊客)들이 떠난 빈자리를 중화권과 동남아 관광객들이 빠르게 채우고 있다.베트남 인구의 10% 정도에 해당하는 1천만 인구는 소득수준이 높고 본격적으로 해외여행을 시작하고 있다. 유교·불교 등에서 유사한 문화를 가진 중국인들은 경북과 경주의 문화에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할 수 있지만 오히려 서로 다른 문화와 풍토에서 살아온 동남아인들에게 경북과 경주는 매력적인 관광지가 될 수 있다.이번 행사를 통해 베트남을 비롯해 태국, 인도네시아 등 이들이 한국으로 올 수 있는 큰 흐름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될 것이다. 경제 일변도로 발전해온 양 국의 관계를 문화로 성숙시키고 이것이 다시 관광 등 경제적 효과를 생산해내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동우 경제세계문화엑스포 사무총장은 오는 11월 베트남 호찌민에서 개막하는 `호찌민 경주세계문화엑스포2017`를 통해 한국과 신라의 전통문화를 알리고 양국 교류를 한 차원 높이는 기폭제가 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황성호기자- 이번 `호찌민-경주세계문화엑스포2017`에서는 어떤 프로그램들을 선보이나. △행사기간은 11월 9일부터 12월 3일까지 25일간이다. 그 전에 사전 붐 조성을 위해 친선체육대회와 실크로드 청년문화교류 대장정, 청년공감로드쇼 등이 열리게 된다. 행사 기간에는 한국과 신라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 미술교류전·영화전·공연 등의 한국과 베트남의 교류 프로그램 등 각종 경제행사가 개최된다. 신라·경북 홍보관과 바자르 등이 열리고 우리 기업들의 기업홍보관도 만들어진다. K-Food와 K-Beauty 등 문화와 경제가 함께하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마련된다.행사의 장소도 매우 중요한데, 주 무대를 호찌민 시청 앞 광장으로 잡고 있다. 호찌민 중심 공원인 9·23공원, 통일궁, 호찌민 시립미술관 등 호찌민시 전체가 무대가 돼 한 달 동안 한국과 경북·경주의 물결로 넘치게 된다.- 베트남 측의 반응도 궁금한데.△지난 5월 경주를 방문한 응우엔 탄 퐁 호찌민시 인민위원장은 호찌민시 역사상 최초로 해외도시와 함께하는 행사로 인력이나 규모면에서 최대 규모라며 기대를 표명했다. 행사의 주무대인 호찌민의 상징 응우엔 후에 거리는 우리나라의 광화문 광장과 같은 곳으로 이번 행사를 위해 장기간, 야간개방까지 허락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베트남 측은 한-베트남 수교 25주년에 열리는 이 행사가 문화·관광·경제 등에서 협력과 공존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울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이 행사를 호찌민 사상 최고의 문화 행사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며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호찌민 현지사무소를 개소하고 현지에 직원을 파견하는 등 본격적인 현장체제에 들어가 양 측의 소통과 협력으로 행사를 잘 준비하고 있다.- 이번 행사의 홍보활동은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가.△`호찌민-경주엑스포`를 범국가적인 행사로 부각시키기 위해 국내 홍보와 현지 홍보를 동시에 실시할 계획이다. 수도권 지역에 대한 홍보를 강화하고 베트남 현지에서 행사 붐 조성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2월 행사 성공 개최를 위한 특별공연을 호찌민에서 진행했다. 5월에는 K-POP 커버댄스 페스티벌 등을 개최해 현지인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앞으로도 한-베트남 친선체육대회, 실크로드 청년문화교류대장정, 청년공감로드쇼 등의 사전붐업을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또한 VTV, HTV, 노동일보, 인민일보 등 현지 언론을 활용하고 Zalo, 페이스북 등 젊은 층을 대상으로 한 SNS도 적극 활용하고 있다.국내 베트남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SNS 서포터즈와 현지 대학생들이 주축이 된 베트남 SNS서포터즈 운영, 베트남 다문화가족 홍보 서포터즈 등 홍보를 위해 다각도로 접근하고 있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가 지역 공헌사업을 많이 하고 있다던데.△경주세계문화엑스포는 아리랑난장, 지역 축제 등을 꾸준히 개최해 지역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리랑난장을 통해 지역 사회적기업과의 연대, 지역민들을 위한 다양한 체험, 지역예술가들의 공연의 장을 여는 등 문화소통의 장을 제공하고 있다.또한 지난 2015년 문을 연 경주 솔거미술관은 소산 박대성 화백 특별전, 박수근 특별전에 이르기까지 지역에서 만나기 힘들었던 높은 수준의 다양한 기획전을 통해 지역민들이 품격있는 문화예술도 즐길 수 있도록 애쓰고 있다. 특히 지난해부터는 공연 `플라잉`의 지역 공연기부를 꾸준하게 실시하는 등 지역의 목소리를 듣고 지역에 기여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경주타워에 위치한 `구름위에 카페`는 82m 높이에서 보는 아름다운 풍경과 차 한잔을 즐길 수 있는 힐링공간으로 시민들의 쉼터가 되어주고 있다. `호찌민-경주세계문화엑스포2017`뿐 아니라 경주세계문화엑스포 공원에도 볼거리가 많은 만큼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주시길 부탁드린다.경주/황성호기자 hsh@kbmaeil.com

2017-08-24

배낭 여행자들의 `꿈의 나라` 바가지와 사기꾼 넘치는 곳 카오산 로드의 `빛과 그림자`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거리,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다양한 인종들이 뿜어내는 색색깔의 에너지, 커다란 배낭을 메고 미지의 땅을 탐험하려는 수백 명의 청년들….장기간의 배낭여행을 꿈꾸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태국 방콕의 카오산 로드(Khaosan Road)는 `꿈의 공간`처럼 인식돼온 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그곳의 독특한 문화를 소개한 책도 여럿이다. 실제로 카오산 로드엔 한국인이 운영하는 숙소와 음식점이 넘쳐난다. 그곳에서 1~2개월을 머물며 태국을 포함해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등의 동남아 국가를 여행하는 이들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태국 왕궁에서 1㎞ 정도 거리에 위치한 방람푸 시장. 카오산 로드는 그 일대에 형성된 `여행자들의 거리`를 지칭한다. 지금으로부터 40~50년 전 유럽의 청년들이 그 주위를 아시아 여행의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유명해졌다.그 명성은 반세기 넘게 이어져 오늘도 카오산 로드엔 `아시아의 문화`와 `매력적인 요리`에 호기심을 가지거나, `뜨겁고 빛나는 태양`을 그리워하는 스웨덴과 독일, 네덜란드와 캐나다의 여행자들이 넘쳐난다.그런 이유로 몇몇 사람들은 카오산 로드를 “배낭여행자의 베이스캠프”라고 부르기도 한다. 약간의 과장이 섞였겠지만 선뜻 나서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는 견해다. ▲ 카오산 로드의 빛… 정보를 교류하고 친구 만드는 공간카오산 로드가 초보 여행자에게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부분은 `풍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곳에선 짧게는 몇 개 월, 길게는 몇 년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길 위에서 생활하는 베테랑 여행자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그들에게 얻어내는 여행 관련 정보는 생생하고 현실적이다. 여행에 있어서 정보는 무엇보다 소중하다. 여행지의 교통 현황과 현지에서의 안전수칙 등은 계절과 정치·사회적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가이드북이나 인터넷에서 구하는 정보는 정확성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곳을 먼저 다녀온 선배 여행자가 제공하는 정보가 유용하고 귀한 이유다.쉽게 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것도 카오산 로드가 주는 선물이다. 같은 입장에 처해있다는 것만으로도 젊은 여행자들은 빠르게 친해진다. `여행`이 공통의 화제로 등장하니 나누는 이야기도 재미있다.0.5㎞ 가량 이어지는 카오산 로드 골목골목엔 숫자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주점과 카페, 클럽과 기념품가게, 마사지숍과 여행사가 머리를 맞대고 있다. 북적대는 거리엔 바나나 팬케이크와 볶음국수, 과일주스를 파는 노점상도 수백 명이다.여기선 국적과 인종을 넘어서는 우정이 맺어지기도 한다. 밤마다 크고 작은 파티가 이어지고, 청년들의 뜨거운 가슴을 얼음 섞은 시원한 맥주가 식혀준다. 거리에서 춤을 추건 노래를 부르건 누구도 상관하지 않는다. 중년의 여행자들은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를 느껴보려고 일부러 카오산 로드를 찾기도 한다. ▲ 카오산 로드의 그림자… 바가지 상혼과 사기꾼들하지만 카오산 로드에 청춘의 낭만과 여행자의 우정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그곳에도 냄새 고약한 어두움이 있다. 기자는 태국을 네 번 여행했다. 몇 해 전엔 카오산 로드에서 1개월 이상 머문 경험도 있다. 다른 여행자들처럼 값싼 숙소와 특유의 분위기에 끌려서다.카오산 로드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즐겁게 보냈지만, 언제나 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니었다. 풍문이 전해준 “여행자들의 천국”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린 적도 여러 번이다.하기야 카오산 로드를 극찬하는 사람들의 반대편엔 이 거리를 “여권을 버리고 남의 나라에 몇 년씩 불법 체류하는 부랑자들이 모이는 곳” 혹은 “매춘부와 사기꾼이 득실대는 고약한 동네”라고 비난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기자 역시 카오산 로드의 `그림자`를 몇 차례 본 적이 있다.한 번은 1천200바트(약 4만 원)를 주고 낡은 호텔을 잡았다. 카오산 로드에서 그 정도면 아주 싼 숙소는 아니다. 그런데 정말이지 불결하고 불친절했다. “차라리 2만 원짜리 한국 시골 여인숙이 낫겠다”는 혼잣말이 나올 정도였다. 좁디좁은 욕실엔 언제 닦았는지 알 수 없는 깨진 거울이 있었고, 바닥 타일은 쥐덫처럼 끈적였다. 수건은 걸레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공짜로 잠을 재우는 것도 아니면서 너무한다 싶어 항의를 했다. 돌아온 종업원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가”란다. 사람들이 몰리는 시기니 객실과 욕실의 상태를 지적하는 손님은 받지 않겠다는 태도가 분명했다. 돈을 주고도 `노숙자 취급`을 받은 그날의 경험을 잊을 수가 없다.카오산 로드엔 관광객을 상대로 크고 작은 사기를 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현지 여행사, 레스토랑, 술집에선 이런 사기꾼을 하루에도 몇 번씩 볼 수 있다.“당신에게만 이 가격으로 저렴하게 판매하는 것”이라는 말을 믿고 캄보디아행 항공권을 샀다. 하지만 그 티켓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여행사의 동일한 항공권보다 20달러가 비쌌다. 그 사실을 확인한 후 황당해하는 기자를 향해 일본인 여행자가 측은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이런 사례 외에도 `카오산 로드의 그림자`라고 불릴만한 건 많다. `레스토랑`이라 이름 붙여놓고 화장실을 1970년대 공동변소 수준으로 관리하는 식당 주인의 배짱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화장실 바로 옆에서 시커먼 기름에 손님이 주문한 새우를 튀기고 있는 장면은 또 어떤가.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카오산 로드의 술집 주인들은 취했다고 생각되는 이들의 계산서엔 마시지도 않은 맥주 2~3병 가격을 더 써놓는다. 그걸 발견한 기자가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항목을 짚어 따지자 슬그머니 “실수했다”며 비굴하게 웃는 얼굴을 봐야하는 심정이라니….그랬다. 세상 어느 곳과 마찬가지로 카오산 로드 역시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거리였다. 국민 90% 불교 신자 느긋하고 조용한 나라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반도 가운데 위치한 국가다. 19세기 유럽 강대국이 진행한 `아시아 식민지화 열풍` 속에서도 프랑스와 영국의 갈등을 정치적으로 잘 이용해 식민지로 전락하는 걸 막았다.비슷한 시기 근대국가로의 발전을 위해 행정과 사법제도의 개혁도 추진했다. 1932년 입헌군주국이 됐고, 1939년엔 나라 이름을 시암(Siam)에서 타이(Thailand)로 바꿨다. 태국(泰國)은 타이의 한문 음차다.면적은 약 51만4천㎡로 한국의 2.3배쯤 된다. 열대몬순 기후를 나타나며 비가 많은 우기는 7월에서 10월, 비교적 건조한 날씨가 계속돼 여행하기 좋은 시기는 11월부터 2월까지다. 수도는 방콕(Bangkok)이고 인구는 6천500만 명. 인종적으론 태국계(75%)가 많고, 중국계(14%)와 말레이계(11%)가 함께 생활하고 있다. 평균수명은 73세.공용어인 태국어가 있지만, 대부분의 관광지에선 영어가 사용된다. 조그만 잡화점을 운영하는 사람도 기본적인 영어는 구사하기에 북미와 유럽 관광객은 어렵지 않게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국민의 절대다수가 소승불교 신자(90%)다. 엄청난 숫자의 사찰이 나라 곳곳에 존재하고, 심지어 술집에서도 부처에게 기도를 올리는 종업원을 볼 수 있다. 적지만 이슬람교도(6%)와 기독교도(2%)도 있다.태국에서 왕은 상징권력 이상의 존경과 신뢰를 받는다. 현실 정치는 총리가 담당한다. 최근 10여 년 사이엔 몇 차례 정치적 혼란이 있기도 했다. 서북쪽으론 미얀마가 자리하고, 북동쪽엔 라오스가 있다. 동쪽 국경은 캄보디아, 남쪽 국경은 말레이시아와 접해 있다. `태국의 보석`은 누가 뭐래도 짙푸른 사파이어 색채로 빛나는 안다만해(Andaman Sea)이다. 해안선의 길이도 자그마치 3천219㎞에 이른다. 그 바다에 산재한 아름다운 섬들은 일 년 내내 전 세계 관광객을 끌어 모은다. 한국인 관광객들도 적지 않다. 국민들은 `동남아시아에서 강대국의 지배를 받지 않은 유일한 나라`라는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 사용되는 화폐 단위는 바트(Baht). 1바트는 2017년 8월 현재 한국 돈 약 34원이다. 유명한 관광지는 한국과 비슷한 수준의 물가지만, 다소 한적한 마을에선 20~30바트 정도에 볶음밥이나 쌀국수를 먹을 수 있다.국민성은 느긋하고 조용한 편이다. 외국인에게 편견을 가진 이들도 드물다. 북부 치앙마이(Chiang Mai)와 치앙라이(Chiang Rai)는 역동적인 트래킹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고, 코사무이(Ko Samui)와 크라비(Krabi) 등 남부의 해변도시는 신혼부부와 젊은 연인들에게 인기 높은 여행지다.사진제공/구창웅/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7-08-18

“모두에게 유익한 일을 자발적으로 하는 것, 그것이 새마을 운동”

가족들의 희생으로 올 수 있었던 새마을지도자의 길 `자부심 가득`가난한 나라에 새마을 교육하며 큰 보람… 중단된 게 너무 안타까워△ 멧돼지 고기로 가난을 모면하다1980년도에 사곡동 7통 새마을지도자로 새마을운동을 시작했는데, 사실 돈이 필요했어요.너무 가난하기도 했지만, 새마을운동이 어디에서 돈을 받고 하는게 아니잖아요. 내 돈을 들여서 하는 거니까.그러던 중 나에게도 기회가 찾아왔어요. 한 친구의 소개로 1983년도에 멧돼지 2마리를 구입해 사육을 시작했어요.당시는 방송 등에서 멧돼지가 좋은 미래사업이라고 선전하고 그럴 때였어요. 멧돼지가 번식력이 얼마나 좋은지 3년정도 키웠더니 200여마리 정도로 불어난 거에요. 이걸 도저히 처리 할 방법이 없는거에요. 팔 방법도 없고. 그래서 멧돼지 고기를 파는 식당을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엄청 고생했어요.식당을 운영해 본적이 없다보니 모든게 힘들었어요. 당시에는 TV수신료를 직접 받으러 다니곤 했는데, 한번은 TV수신료를 받으러 친구에게 가니까 전국노래자랑에 한번 나가보라는 권유를 받았어요.그래서 신청했죠. 본선까지 나갔어요. 본선이 있던 그날 멧돼지 고기를 준비해서 갔어요. 무대에 올라가니 사회자인 송해 분이 무슨 일을 하는 분이냐고 묻더라구요.그래서 새마을지도자로서 지역을 위해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면서 멧돼지를 직접 사육도 하고 고기를 파는 식당을 하고 있다고 했죠. 노래는 `무너진 사랑탑`을 불렀어요. 새마을아카데미에 참석한 외국인 앞에서도 이 노래 많이 불렀어요. 하하.그러곤 몇일 지나고나서 방송이 나오더라구요. 방송이 나온 그날 저녁부터 손님들이 말 그대로 밀어닥치는 거에요. 방송의 힘이 크긴 크더라구요. 정말 손님이 많이 오셨어요. 손님들 중에는 내가 새마을지도자라는 것에 더 많은 호응을 해 주시더라구요. 감사할 따름이죠. △집사람 아니었으면 새마을운동 못했을 거에요멧돼지 고기로 돈을 제법 많이 벌었어요. 그런데 솔직히 그 돈을 평생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거의 다 써버렸어요. 새마을운동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겠지만, 새마을지도자는 명예직이에요.새마을회장이라고하면 국가나 이런 곳에서 돈을 준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아니에요. 내 돈을 내고 하는 거지요. 분담금이라는 걸 내거든요. 새마을회는 오로지 남을 위해 봉사하는 조직이에요.난 평생을 새마을지도자로 살았어요. 정말 열정적으로 했죠. 새마을운동가 중에 최일선 지도자로 시작해 읍면동 지도자, 구미시, 경북도, 중앙회까지 모두 섭렵한 사람은 드물거에요.난 그런 자부심이 있어요.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하지만, 내가 이렇게까지 새마을지도자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에요. 지금도 집사람과 아이들에게는 미안하죠.난 정말 새마을지도자로서는 100점 만점에 100점이라고 자부하지만, 가장으로서는 아니죠. 나는 집에서 돈을 벌어다 주는 사람이 아니었어요.있는 돈을 가져다 쓰는 사람이었지. 집사람이 정말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도 항상 날 이해해주고, 같이 새마을봉사도 해 줬어요. 세상에 그런 사람이 없어요.2000년도에 경상북도 새마을협의회장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사실 고민이 많았어요. 경북도 협의회장의 분담금이 만만치 않았거든요.또 분담금은 매년 내야 하는 거니까. 물론 당시 식당이 잘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말을 못 꺼내겠더라구요.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데 집사람이 먼저 말을 꺼내더라구요.5천만원든 6천만원이든 한번 해보라고. 그래서 도전을 했죠. 집사람의 말에 용기를 얻어서. 정말로 고맙게 생각해요. 죽을때까지 잊지 못 할 일이죠. △새마을운동 전도사가 되다성공사례 발표는 새마을지도자들 사이에서는 가장 큰 행사나 다름없죠. 자신들이 한 활동에 대한 사업을 평가 받는 거니까.1986년도에 새마을운동에 대한 성공사례 발표에 저도 참여했었요. 운이 좋았는지 새마을 중앙본부 경상북도지부 사무실에서 열린 사례발표에서 최우수 발표자로 선발됐어요.그래서 중앙본부에서도 발표를 하게 되고, 우수한 성적으로 선발됐어요. 그래서 다음해인 1987년도 중앙연수원에서 다른 지도자들 앞에서 체험사례 강사로 활약하기 시작했어요. 사실 발표를 여러번 하고나니 나를 알아보는 분들이 많이 생기더라구요. 그래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새마을운동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도 했구요. 그러다 기회가 찾아왔죠.2010년도에 경운대학교에 계셨던 분이 새마을운동에 잘 아시니 외국인들에게 새마을운동에 대해 교육을 좀 해주실 수 있냐고 묻더라구요.그래서 흔쾌히 하겠다고 했죠. 그런데 대답은 막상 했는데 걱정이 되는 거에요.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거니 말도 안통하고 잘못하면 나라망신 시키는 것 같기도 하고. 여러걱정이 되는 거에요. 그러다 한가지 방안을 찾았죠. 초심을 갖기로.그래서 30년 전 새마을운동을 했을 당시 입었던 새마을복을 찾아 입고 강의실을 찾아갔어요. 모두들 놀라더군요. 그런데 난 그 옷을 입으니 이야기가 줄줄 잘 나오는 거에요. 막힘이 없이. 그렇게 첫 수업을 무사히 잘 마쳤어요.그 첫번째 수업의 대상은 베트남 분들이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수업이 끝나자 교실에서 안 나가고 내가 있는 앞쪽으로 몰려 드는 거에요.깜짝 놀랬죠. 왜 그런지 몰랐으니. 근데 통역하시는 분이 그사람들이 절 안다고 그러는 거에요.경북도 협의회장으로 있을 당시 새마을세계화사업으로 베트남을 방문했었는데 그 마을 사람이라는 거에요. 얼마나 반갑던지.날 알아봐주는게 얼마나 고마워요. 그래서 끌어안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했어요.그때 첫 강사료로 5만원을 받았어요. 사실 강사료는 아니죠. 당시에는 강사료 같은거 이야기가 없었으니까. 그냥 수고비나 교통비로 조금 주는거였죠.난 그 돈 5만원을 받아서 그 베트남 사람들에게 줬어요. 한국에 왔으니 맛있는 거라도 사먹으라고. 근데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한푼도 안쓰고 자기 나라로 가지고 갔다고 하더라구요.그 나라에서는 그 돈이 큰 돈이니까. 강의료는 나중에 강의료 정상적으로 받았어요. 하하새마을아카데미를 5년 정도 하면서 정말 기뻤어요. 너무 보람된 일이었으니까요.한번은 우간다에서 온 사람들에게서 기립박수를 받기도 했어요. 우는 사람도 있었어요. 고맙다며 작은 선물을 주는 사람도 있었구요.모두 소중한 인연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이 사업이 중단된게 너무 안타까워요.△새마을운동가를 홀대하지 말아 주길 새마을운동은 구시대 산물이 아니에요. 요즘 많은 사람들이 새마을운동에 대해 너무나도 잘 못 알고 있는 것 같아요.새마을운동은 사람을 키우는 운동이었어요. 지도자라는 이름으로 말이에요. 각 동마다 지도자가 있었죠. 그 것도 경쟁을 붙여서 말이죠.그 지도자는 주민들의 의견을 하나로 모아 모두에게 유익한 일을 했어요. 그러기 위해 그 지도자를 발굴해 교육도 하구요. 그냥 지도자가 되는게 아니었어요. 아무나 되는 것도 아니고. 거기다 혜택은 없었죠. 그래도 하려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왜일까요? 보람된 일이었으니까.지금은 어때요? 아무 혜택이 없는데 보람된 일이라고 사람들이 하려고 할까요?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할거에요. 물론 시대가 다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그래도 새마을운동을 한 사람들, 특히 새마을 지도자들을 홀대 해서는 안되요.난 새마을 지도자에 대해 뭔가를 해 달라고 이야기 하는게 아니에요. 최소한 홀대는 하지 말아달라는 거에요.정권이 바뀌었다고 새마을운동과 새마을운동가를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정말 잘못된 것이에요.그냥 있는 사실 그대로는 봐달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최소한 있는 사실 그대로. 그게 역사이니까.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7-08-18

“길도 전기도 없는 웃막골 판자촌, 새마을로 바꾸리라 다짐”

이태봉(71·사진) 전 경상북도 새마을협의회장은 1946년 8월 구미시 사곡동에서 태어났다. 28살 때인 73년도에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제대한 후 동네에서 예비군 소대장을 맡아 일을 하다 1980년 사곡동 7통 새마을 지도자로 새마을운동과 첫 인연을 맺는다. 이후 사곡동 지도자 협의회장, 1995년 구미시 새마을 협의회장, 2000년 경상북도 새마을협의회장, 새마을 중앙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이후 2010년부터 2015년까지 경운대학교에서 새마을아카데미에 참여해 외국인들에게 새마을운동을 전파했다.주민들 모여 풍물놀이로 성금 거둬자동차 배터리 구입해 첫 전깃불 켜구미시 지원으로 현대식 주택 개조△ 모두가 가난했던 그 시절부모님은 남의집 허드렛일을 하셨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넉넉한 분들이셨어요우리 세대 대부분 그렇겠지만, 우리집도 많이 가난했어요. 모두가 가난했으니까. 뭐 특별한 것도 아니지.부모님은 남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해주고 사셨어요. 당시에는 남의 집 머슴살이가 흉이 아니었어요. 먹고 살기위한 하나의 방법일 뿐이죠. 그런 품팔이라도 해야 가족들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난 그런 집에 4남매 중 3째였어요.어릴적 내 기억에도 우리 집은 정말 많이 가난해서 먹을게 항상 부족했어요. 근데도 아버지나 어머니는 먹을게 있으면 항상 주위 사람들과 나눴어요. 진짜 조그마한 것도 주위 이웃들과 나누는 분들이셨어요. 전 어린 마음에 그런 부모님이 원망스러웠어요. 당장 내가 배고프니까.하지만, 그런 부모님 덕분에 주위분들은 항상 절 보면 많이 이뻐해 주셨어요. 제가 살아오면서 그런 부모님의 덕을 많이 봤죠.제가 식당을 했었는데 오시는 손님들 중 대부분이 부모님을 기억하시면서 “정말 좋은 분들이셨다. 그 집 아들이 하는 식당이니 자주 와야지”라고 많이들 이야기 하세요. 그 덕에 돈도 꽤 벌었어요. 내가 장사를 잘 했다기 보다 부모님의 덕을 본 거라 할 수 있죠. △ 하루아침에 살던 집을 잃고…1970년도로 기억하고 있어요. 당시 우리집은 국도변에 살고 있었는데 도로확장 공사를 한다면서 집을 비워달라고 하는 거에요.당시는 선산군이었죠. 그때 군수님이 직접 찾아와서 우리 부모님께 어디든지 집을 지을 수 있으면 옮겨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도로 위쪽 산골짝으로 집을 옮기게 됐어요. 근데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어요. 옷가지와 살림가구만 가지고 옮겨온거에요. 산 중턱에 뭐가 있었겠어요.당시는 지금처럼 보상비 많이 달라 뭐 그런 이야기를 하던 시절도 아니였으니까. 그런걸 아예 몰랐어요.옮기긴 했는데 그 곳은 전기도 안들어오고, 길도 없었어요. 정말 호롱불 켜놓고 살 수 밖에 없었어요. 우리집만 그런게 아니라 같이 옮겨 온 30여 가구가 모두 같은 상황이었어요.그래도 어떻게 하겠어요. 일단 살아야하니, 서로서로 도와주고 해서 흙벽돌로 집을 짓고 살았죠. 집 짓는 기술도 없어 엉성하긴 했지만요. 그때 엉성한 집들이 세워지면서 지금의 웃막골이 만들어 진거에요.그러다 군에 다녀오고나서 동네에서 예비군 소대장을 맡았어요. 동네에서는 그래도 소대장이라고 저의 말을 조금 들어주시더라구요. 그러다 새마을운동을 한번 해보라는 권유를 받았어요. 그래서 1980년도에 주민총회에서 새마을 지도자로 선출됐죠. 사곡동 7통 새마을 지도자로.지도자로 선출되고 5박6일 동안 새마을 지도자 중앙교육을 이수했어요. 그때 여러 선배 지도자들로부터 성공한 사례담을 들으면서 나도 교육을 마치고 돌아가면 우리 동네를 반드시 바꿔 놓겠다고 다짐했어요.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던 날80년도에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얼마나 불편한게 많았겠어요. 그래서 가장 먼저 마을에 전기부터 넣어야 겠다고 생각했지요.하지만, 그보다 더 시급한게 있더라구요. 길이 있어야 전기도 들어올 거 아니겠어요.그래서 주민분들하고 마을정비사업을 하나씩 해 나갔어요. 어린 학생들 등굣길도 만들고, 여러 일을 많이 했어요. 길을 넓히고 해서 자전거나 리어카, 소형 차량 정도는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게 뭐 대단한 일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모두 사람 힘만으로 했으니까 당시에는. 대단한 거에요. 일단 길은 어떻게 만들긴 했는데 전기는 사람 힘으로만 되는게 아니더라구요. 돈이 필요했어요.그래서 고민 끝에 모금운동을 하기로 하고, 풍물놀이를 할 수 있는 분들을 모아 사물놀이패를 만들었어요. 매일 연습을 시켰죠.우리가 살고 있는 곳부터 한집 한집 돌려 풍악을 울리기 시작해 여러 곳을 돌았어요. 지역 유지분들을 초대해서 공연도 하고 취지도 설명했죠.반응이 좋았어요. 약 일주일간 했었는데 백미 2가마니와 현금 150만원이라는 성금을 모았으니까. 아주 큰 돈이었지만, 자가발전기를 살 수 있을 만큼은 안되었어요. 그래서 주민총회를 열었죠. 그 결과 각 가정에 자동차에 들어가는 전기 밧데리 1개씩을 구입해 작은 전구에 불을 켤 수 있도록 했어요.비록 10일정도 사용하고 나면 다시 그 무거운 밧데리를 들고 나와 충전해야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우리들의 힘으로 마을에 전기를 공급한 그날의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죠. 그 조그만 전구에 불이 들어오는 것이 신기하고, 뿌듯해 뜬 눈으로 밤을 지새기도 했으니까요. △ 현대식 주택을 마련하다비록 자동차 밧데리를 이용하는 전기였지만 우린 `해냈다`는 자신감을 얻었어요. 그게 더 큰 거였죠.먹고 살기 힘든 동네가 서로 힘을 합치니 하는 일마다 전부 잘 된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때마침 1986년 아시안 게임을 우리나라에서 개최한다는 발표가 나면서 경부선 철도변 정비사업이 시작됐어요. 이때다 싶었죠. 주택 계량사업을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동사무소와 구미시청, 경북도청을 수십 번 찾아가 호소했어요. 그 결과 주택계량사업입지지구로 선정받게 된거죠.우리 동네 헌집을 뜯는 조건으로 그 자리에 15동의 현대식 주택을 지을 수가 있었어요. 그런데 문제가 있었죠. 공사 자재를 수송할 수 있는 길이 없는 거에요. 기껏해야 리어카 정도가 오갈 수 있는 길이었으니. 그 길도 경부선 철도변을 따라 다니는 길로 확장이 불가능 했어요.근데 구미시 공무원들이 나서서 도와주었어요. 공무원들의 행정적인 도움으로 당시 시유지였던 하천 제방을 따라 석축을 쌓고 해서 시멘트와 골재를 실은 차량이 오갈 수 있는 길을 만들 수 있었죠.우린 공사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합동 작업반을 구성해 함께 공사를 했어요. 그래서 대지 100평에 건평 20평이라는 아담한 현대식 농촌주택 15동이 세워지고, 계량 화장실 15개도 함께 만들어졌어요. 또 상수도와 하수도도 만들어지고, 그렇게 원하던 전기도 들어왔죠.이 사업이 성공하자 다른 동네 주민들도 현대식 집을 원했어요. 그래서 또 다시 건의해 나머지 20동도 현대식 주택으로 바꾸게 되었어요.구미에서 가장 빈민촌으로 꼽히던 웃막골이 새마을운동으로 달라지기 시작한 거에요.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7-08-17

하고싶은 일 찾아 도전… 그것이 바로 새마을 `CAN DO` 정신

△ 새마을세계화사업 위해 처음으로 동티모르 가보니 생각보다 너무 열악한거야당시 김관용 구미시장으로부터 제안을 받아 새마을세계화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아마 2005년쯤 이었을거에요.새마을세계화사업으로 동티모르, 베트남, 몽골, 캄보디아, 세네갈 등 여러 나라를 다녀왔죠. 그 중에서 특히 베트남과 몽골을 자주 갔어요.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처음 갔었던 동티모르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2005년도에 갔었어요.당시 동티모르는 20세기 마지막으로 독립한 국가였어요.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한지 얼마되지 않아 매우 빈곤한 국가였지요.2005년부터 새마을세계화 사업 시작빈곤한 국가에 잘살수 있는 방법 알려해외봉사에 어려운 점 많아도가장 힘든 점은 `한국의 시선`정치에 휩쓸리는 모습 안타까워민간외교이자 정신개조 운동새마을운동 가치 제대로 알아야생각보다 정말 심각했어요. 조금만 집에 보통 3가구가 함께 살고 있고, 한 가구당 식구가 6~7명이나 되었으니까. 당시 우리는 바우카우라는 곳에 부녀아동센터를 건립해 줬었어요. 전 당시 준공식 때문에 갔었죠. 여러가지 선물들을 가지고.난 직업이 의사니까 아무래도 의료시설 같은게 가장 눈에 먼저 들어왔어요. 병원이라는 것이 있긴 했는데 너무 열악한거야. 말도 못하게. 의료활동을 좀 하려고 해도 할 수 있는게 별로 없었어요. 의료장비가 없으니까.그런데 그 뿐이 아니에요. 한쪽 구석에 초음파 기기가 버젓이 있더라구요. 이걸 왜 방치해 두고 있냐고 하니까 다룰 수 있는 의사가 없다는 거에요. 병실 같이 생긴 곳에 들어가니 환자들이 주욱 있는데 그냥 누워만 있는 거에요.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하고. 그 중 한 환자가 눈에 들어왔어요. 상태가 심각해 보였어요. 하반신이 마비가 되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는데 아무런 치료도 못하고 있더라구요. 그쪽 의료진들도 그냥 지켜만 보고 있다고 하는 거에요. 4개월 전에 자기발로 걸어 들어온 환자였다고만 설명했어요. △ 의사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그건 새마을정신에도 어긋나는 거니까하반신이 마비된 환자를 한국으로 데리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곳에서는 장비도 없으니 아떠한 진단도 내릴 수가 없었으니까.의사로서 차마 그냥 넘어갈 수가 없더라구요. 또 그건 새마을정신에도 어긋나는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대통령부인에게 부탁했어요. 환자를 한국으로 데리고 가게 해 달라고. 그때 부녀아동센터 준공식에 구마스대통령과 영부인도 참석했었거든. 내가 한국에 데리고 가서 검사를 해보고 치료를 할 수 있으면 치료를 해보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다음날 연락이 왔어요.나에게 비행기 표값을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 이유는 그쪽 동티모르의 의사 한명도 한 명 같이 갔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구요. 내가 치료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면서. 그리고 만약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국제적인 분쟁이 생기지 않을거라고 이야기 하더군요.그래서 일단 내가 먼저 한국에 들어와 500만원을 대사관을 통해 보내줬어요.그 돈으로 환자가 우리병원으로 오게 됐는데 MRI 등 여러 검사를 해보니 척추에 종양이 생겼더라구요. 종양이 척추 옆 신경들을 누르고 있어 하반신을 쓸 수 없던 거였죠. 신경 98%가 눌려있던 상태였어요. 심각한 상태였죠. 그래도 수술을 하기로 결정하고 수술을 했어요. 수술은 다행히 성공적이었어요. 수술 후 다리가 조금 움직이더니 약 3개월 정도 있으니 걸을 수 있었어요.정말 기뻤어요. 그 사람이 다시 걸어다니는게 고맙게 느껴질 정도로. 그때 이런게 새마을운동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남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좋았어요. 당시 수술을 받은 사람의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잘 지내길 바래요. 지금은 생사를 알 수 없어요.본국으로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전이 생겼다고 하더라구요. 그 소식을 듣고 마음 한켠이 무거워지더라구요. 그래도 새마을세계화운동은 단순한 봉사활동이 아니에요. 내 경험으로 단언컨데 새마을세계화사업은 민간외교입니다.앞으로도 계속돼야 하는 사업이에요. △ 새마을운동은 정신운동이다초창기 새마을세계화사업은 솔직히 가난한 나라에 필요한 물품을 갖다주고 건물을 지어주는 정도였어요.하지만 그건 진정한 새마을운동이 아니었죠. 새마을운동은 어떻게하면 잘 살 수 있을까. 또 어떻게하면 교육을 잘 받을 수 있을까. 그런 방법을 가르쳐 주는 운동이자나요. 단순히 돈을 들여 선물을 주는 것이 아니거든. 사람들을 도와주는 방법에는 두가지 방법이 있어요. 하나는 물고기를 던져주는 식이고, 다른 하나는 낚시법을 가르쳐주는 식이죠.새마을운동은 사람들에게 낚시법을 가르쳐 주는 거에요. 처음에는 공짜로 물고기를 받은 사람들은 배를 채우겠지만 하루만 지나면 또 손을 내밀어야 하는데 낚시법을 배운 사람은 하루는 고생하겠지만 영원히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자나요.그래서 그들에게 농사법을 가르쳐주고, 집을 짓는 법을 가르쳐 주었죠. 그리고 지도자를 교육시키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한국에서 교육도 시켰어요.그 사람들에게 협동심이란걸 가르쳐 주었어요. 모두가 함께 잘살아야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 거죠. 혼자서는 가난을 이겨내지 못하니까. 모두가 함께 가난을 이겨낼 수 있다고 믿고 힘을 모아야 하는 거자나요. 그게 새마을정신이죠.요즘 사람들은 새마을운동을 봉사활동 정도로 생각하던데 그런게 아니에요. 새마을운동은 정신운동이에요. 더 엄연히 말하면 정신개조운동이구요. △새마을운동의 가치를 바로 알아줬으면…전 새마을운동을 그리 오래한 사람은 아니에요. 그래도 정말 새마을운동에 열정을 가지고 했다고 자부할 수 있어요.그렇게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특히 해외에 봉사활동을 나갔을때 그 사람들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요.진심으로 우리를 반겨주거든. 그게 눈에 보여요. 모두가 우리를 환영해주고, 정말 고마워하는 모습이.그런 모습에 정말 힘이 나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하죠. 20년 가까이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한번도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정말 힘든 건 새마을운동을 보는 우리의 시선이죠.특히, 요즘들어 새마을운동이 정치적으로 휩쓸리는 것 같아 새마을회장으로서 마음이 편치않아요. 솔직히 새마을운동에 대한 잘못된 편견은 언제나 있었어요. 군사독재정권이 일으킨 것이니 무조건 나쁜것이다.혹은 늘 정부쪽에 서서 일하는 관변단체이다 등의 선입관으로만 보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죠. 지금도 그럴거에요.그러한 선입견으로 인해 언론이나, 학술단체 등에서 새마을운동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자나요.수해나 대형 화재 등의 큰 사고가 발생했을 때 현장에서 실천적인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이 잠시 비춰지는게 고작이죠. 그것도 너무나 당연히 여기면서. 사실 그런것들을 알아달라고 이야기하는게 아닙니다. 그냥 새마을운동을 제대로 봐달라는 거지.새마을운동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했기 때문이에요. 이 점을 강조하고 싶어요. 역대 어느 정부에서도 새마을운동을 폄하한 적이 없어요. 그들도 잘 알고 있어죠. 새마을운동이 정신운동이라는 것을.새마을운동은 `CAN DO` 정신이에요. 그런데 요즘 젊은세대는 `CAN DO` 정신을 조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요. `CAN DO` 정신은 무조건 하면된다 이런게 아니에요. 거기에 앞서 동기와 목표가 있었야하는 거죠. 우리는 배고픔을 벗어나는게 목표였고, 옆 마을이 잘 되는 모습이 동기가 되었죠.그 당시엔 경쟁을 붙였으니까. 동기와 목표는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거에요. 요즘 젊은세대들도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도전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게 바로 진정한 `CAN DO` 정신이니까.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7-08-11

`영원한 스물일곱` 짐 모리슨을 만나다

20대 초반부터였다. 프랑스 파리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고 싶었던 건. 3만5천 점의 고대와 현대 미술품을 전시하고 있다는 `루브르 박물관`이나 고흐와 모네 등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의 명작이 줄줄이 내걸린 `오르세 미술관`이 궁금해서가 아니었다.파리를 상징하는 불 밝힌 에펠탑 아래서 인증사진을 찍거나, 몽마르트르 언덕 `화가의 거리`에서 싸구려 초상화의 모델이 되고 싶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20년 넘는 시간 동안 기자에게 파리는 `페르 라셰즈` 혹은 `짐 모리슨`(Jim Morrison·1943~1971)과 등호였다.1960년대 활동한 록밴드 도어스(The Doors)의 보컬리스트였던 짐 모리슨은 절망과 희망, 빛과 그림자, 고통과 환희, 삶과 죽음…. 이 모든 심각한 단어의 절정을 살아냈다.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질주하고자 했던 영혼이 지구에서 증발했을 때 그의 나이 겨우 만 스물일곱. 삶의 허리가 가혹하게 부러진, 두말 할 것 없는 요절(夭折)이었다.`플래툰`(베트남전쟁의 비극을 다룬 작품)과 `JFK`(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을 소재로 한 작품) 등의 영화를 통해 1960년대 미국의 역사에 천착해온 올리버 스톤(Oliver Stone) 감독도 젊은 시절부터 짐 모리슨에 매료돼 있었다.“차가운 얼음 속에서 뜨겁게 타고 있던 불꽃”이라 불러도 좋을 짐 모리슨의 굴곡 많았던 일대기를 그려내고자 한 올리버 스톤의 영화가 바로 `도어스`(제작 1991년)다. ▲ 영화에서 만난 `페르 라셰즈`를 찾아 지하철에 오르다우울한 얼굴과 곱슬거리는 긴 머리칼을 가졌던 짐 모리슨의 인생이 독한 위스키와 마리화나, 마구잡이의 난교(交)만으로 이뤄졌을 것이라 착각해온 관객들은 이 영화에 경악한다.사실 짐 모리슨은 10대 때부터 프랑스의 표상주의 시인 랭보와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책을 옆구리에 끼고 살던 조숙한 문학청년이었다.어릴 적 여행에서 본 아메리카 인디언의 죽음을 평생 잊지 못했던 그는 누구도 쉽게 볼 수 없는 삶의 이면(裏面)을 꿰뚫어 본 사람이었다.제 또래 군인들이 베트남전에서 죽어가는 걸 마음 아파했던 짐 모리슨은 `반전(反戰)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그런 짐 모리슨이었으니 `광기`로 가득한 1960년대를 정면에서 마주 보기 힘들었을 터. 자학과 다를 바 없는 폭음과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무대에서의 기행(奇行·짐 모리슨은 수천 명의 관객과 경찰들이 지켜보는 콘서트에서 바지를 벗어버리기도 했다)은 그가 1960년대를 견디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어쨌건, 미국인이었던 짐 모리슨은 프랑스 파리에서 죽는다. 시체 인수를 거부한 아버지 탓에 시신은 파리에 묻힌다. 그곳이 바로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다. 올리버 스톤의 영화 `도어스`의 마지막 장면은 카메라가 짐 모리슨의 무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는 3~4분의 과정을 담고 있다. 배경음악으론 알비노니(Albinoni)의 `아다지오`(Adagio)가 비장하게 흐른다.그 영화를 본 게 스물한 살 때였던가?25년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짐 모리슨의 묘지를 찾아가게 된 기자의 심정은 첫 키스를 앞둔 열일곱 소년처럼 떨리고 있었다. 숙소 인근 브레게 사방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페르 라셰즈역을 향했다. 역에서 10여 분을 걸어가니 묘지의 입구가 보였다. 초여름, 파리의 새파란 하늘에서 갑작스레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밤처럼 어두워진 거리에서 심장은 더욱 세차게 뛰었다.“문학과 영화, 음악이 없다면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던 10대 소년이 자신의 우상을 마흔여섯 살이 돼서야 만나게 된 것이다. 비록 짐 모리슨이 지상의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가슴 떨림은 제어할 길이 없었다. ▲세상 사람들을 하나로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엔 짐 모리슨 외에도 수많은 예술가들이 잠들어 있다.프랑스의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Honore de Balzac)와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극작가인 동시에 배우로도 유명했던 몰리에르(Moliere)도 부침(浮沈)이 거듭됐던 고단한 생애를 그곳에 눕혔다.페르 라셰즈는 규모 또한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하는 소나기를 맞으며 3시간쯤을 헤매 다녔다. 그럼에도 묘지의 10%도 보지 못한 느낌이었다.짙은 초록색 이끼가 낀 오래된 조형물들의 미적 완성도를 보자면 페르 라셰즈는 공동묘지라기보다 조각전시장에 가까웠다. 묘지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사라졌던 태양이 어두운 하늘 구름을 헤치고 다시 모습을 드러낸 순간, 짐 모리슨의 묘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생각보다 작았고 의외로 초라했다.1년이면 수만 명의 숭배자들이 찾아온다는 사실은 무덤 앞에 놓인 수천 장의 낡은 쪽지가 증명하고 있을 뿐이었다. 영어, 스페인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 심지어 크메르어와 스와힐리어까지. 짐의 죽음을 슬퍼하는 메시지는 수십 개의 언어로 적혀 있었다. 같은 대상을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은 쉽게 친해질 수 있다.`도어스`의 음악에 매료된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은 짐 모리슨의 묘지 앞에서 금방 친구가 됐다.이스라엘에서 온 두 명의 청년은 기타를 연주하며 `피플 아 스트레인지`(People are Strange)를 불러 참배객들의 박수를 받았고, 몸 곳곳에 피어싱을 한 네덜란드 여대생은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오는 `웨이팅 포 더 선`(Waiting For The Sun)의 리듬에 맞춰 요정처럼 춤을 췄다.노래와 춤으로 추모할 대상이 있는 그들은 어느새 `우리`로 변해 있었다.기자 역시 페르 라셰즈에서 펼쳐진 `기이한 축제`의 일원이 돼있었다. 청춘의 열기로 뜨거워진 짐의 무덤 앞으로 잠시잠깐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왔다.그 바람에 실려 온 짐 모리슨의 목소리를 우리는 들었다.“열정을 버리지 않는 자에게 청춘은 영원하다. 해서, 나는 늙지도 죽지도 않을 것이다. 너희도 그런 삶을 살아라.” 파리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여행자의 취향에 따라 결정되는 게 여행 패턴이다. 어떤 사람은 박물관을 둘러보고, 미술관을 방문하며, 오래되고 멋진 건축물을 만나는 `낮 관광`에 방점을 찍는다. 또 다른 부류는 `밤 여행`을 즐긴다. 어둠이 내린 거리에서 사람들을 관찰하거나, 안개 낀 낯선 골목의 분위기가 선물하는 이질적인 감정을 만끽하는 것이다.프랑스 파리의 `낮`에 관해선 너무나 많은 정보가 넘쳐난다. 가이드북만 펼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게 `파리의 낮`이다. 해서, 기자는 정보량이 다소 적은 `파리의 밤`에 관해 잠시 이야기해볼까 한다.◇ 파리의 청춘들, 센 강변에서 노상방뇨를파리를 찾은 첫날 밤. 엄청난 시차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불면으로 뒤척이다가 결국은 호텔을 나섰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센 강의 검은 물결이 보고 싶어 강변을 향해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늦은 밤이었음에도 가슴 속 뜨거운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는 파리의 청년들이 센 강 둔치에서 맥주와 포도주를 병째 들이켜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 봐라. 가로등이 비치지 않는 어두운 곳에선 노상방뇨가 줄줄이 이어지고 있었다. 놀라운 건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들도…. 낯이 뜨거워진 건 그들이 아니라 이 광경을 지켜보는 기자였다. 이튿날 파리에 거주하는 지인을 통해 왜 그런 풍경이 반복되는지 들을 수 있었다. “센 강변엔 공중화장실이 적어요. 게다가 모두 유료거든요. 술값을 아끼려고 카페가 아닌 둔치에서 맥주를 마시는 애들이 돈 주고 화장실을 가겠어요?” ◇ 몽마르트르 언덕엔 올빼미가 산다 낮에는 힘없이 드러누워 있다가 밤이 되면 눈동자 번득이며 활동을 시작하는 게 비단 흡혈귀 드라큘라(Dracula) 백작만은 아니다. 밤의 커튼이 드리워져야 활기를 찾는 `올빼미족`은 어느 나라에나 있다. 한국에도 흔하다.프랑스의 수도 파리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가장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 몽마르트르 언덕 사크레쾨르 성당 주변이다. 계단에 앉아 도란도란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들은 새벽 2시가 넘어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상대를 향한 애정 어린 손길과 키스는 누가 보건말건 무시로 오간다. 맞다. 청춘이 사랑을 나누는데 공간이 뭐 중요하며,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덧붙여 중요한 정보 하나 더.밤에 담배가 떨어져 곤란에 빠진 헤비 스모커나 포도주 한 병이 간절해 철문이 굳게 닫힌 슈퍼마켓 앞에서 발을 동동거리는 여행자가 있다면 아랍인이나 중국인이 운영하는 잡화점을 찾으면 된다. 그들의 가게는 새벽까지 술과 담배를 판매한다.사진제공/구창웅/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7-08-11

천혜의 영일만 딛고 해양레저스포츠 관광 새 별이 되다

전 세계적으로 저성장이 고착화되고 있는 가운데 해양레저산업은 세계 곳곳에서 신성장동력의 일환으로 크게 각광받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 걸 맞춰 국내 해양관광에서 스포츠, 레저활동 수요 역시 증가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포항은 각종 해양레포츠 시설 확립 등 인프라 구축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특히 `영일만(迎日灣)`이라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지닌 포항은 경북동해안 최고의 해양관광지로 거듭나고자 해양레저스포츠 분야에 집중, 각종 대회를 유치해 해양레저스포츠의 메카로 도약하고 있다.`미래 10대 관광트렌드` 중해양 스포츠·크루즈 포함세계관광시장 연 4% 성장 속해양 관광객 비중 50% 차지보고 먹는 `단순 관광` 넘어해수욕·서핑·스킨스쿠버 등체험 형태 관광에 주목포항시, 해양스포츠활성화 위해형산강 수상레저타운 등다목적 다기능 복합시설 추진영일만·칠포 등 해수욕장마다딩기요트·제트스키 등 특화 □ 해양레저스포츠의 중요성세계관광기구(UNWTO)에 따르면 세계 관광시장은 최근 10년 간 연평균 4.3%의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다. 지난 2012년 기준 세계관광객 규모는 10억 명, 시장규모는 1조2천억달러를 차지하고 있으며 최근 10년간 권역별 관광객 비중은 미국·유럽시장이 13%p 감소한 반면, 아시아·태평양시장은 11%p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중 전체 관광시장에서 해양관광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50%로 추산되고 있다.아울러 세계관광기구가 발표한 미래의 10대 관광트렌드에도 해양 스포츠, 크루즈 등이 포함돼 있어 최고의 해양관광지를 꿈꾸는 포항에 있어 해양레저스포츠 분야 활성화는 필연적인 숙제다.포항은 그동안 지역 경제를 견인해 온 철강산업의 쇠락으로 새로운 경제견인책을 발굴, 그중의 하나인 `해양관광`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과거에는 단순히 `바다`를 보고 `먹을거리`를 찾아다니는 단순한 관광상품 육성에 주력해왔다면 이제는 관광객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형태의 관광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해양수산부의 자료에 따르면 해양관광은 국내 관광의 50%를 차지하고 있으며 해수욕장과 낚시 등 전통적 인기분야와 함께 도보여행, 서핑과 스킨스쿠버 등의 스포츠 같은 신규 분야의 인기가 뚜렷해지고 있다.포항은 이에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스포츠와 레저활동 등 해양의존형의 스포츠(윈드서핑, 보트, 제트스키, 다이빙 등)·휴양(해수욕, 낚시 등)·유람(해상유람, 크루즈 등) 등 다양한 분야의 발전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최근 수년간 KTX서울 노선 개통 등 교통여건이 개선돼 접근성이 우수해진 만큼, 전국의 관광객이 모여들 수 있도록 활성화에 전력을 다할 방침이다. □ 포항의 해양레저스포츠 활성화 방안포항시는 우선 해양레저스포츠의 활성화를 위해 3대 추진전략 12대 중점추진과제를 설정했다. 먼저 기반시설 확보 및 수용태세를 개선하고자 다목적, 다기능의 복합해양레저스포츠시설을 조성할 예정이다. 이에 현재 추진 중인 형산강 수상레저타운 등 해양레저스포츠 시설은 운동공간이자 커뮤니케이션 공간으로 만들고 주차장과 카페 등 편의시설을 갖춰 휴식 기능을 더하기로 했다.또한 해수욕장별 해양레저스포츠 특화 육성에도 노력을 기울인다. 영일대, 칠포, 용한, 죽천, 송도해수욕장에는 특화된 주제별 해양레저스포츠 종목을 정착시키고, 비지정 해수욕장인 용한, 죽천, 송도해수욕장을 중장기과제로 지정해수욕장으로 전환하는 방안과 이에 맞는 편의시설을 확충하기로 했다.포항시에 따르면 통상적으로 지정 해수욕장인 영일대, 칠포해수욕장에서는 윈드서핑, 딩기요트, 서핑, 제트스키 등이 포항시해양스포츠아카데미 및 동호회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비지정 해수욕장인 송도, 죽천, 용한해수욕장에서는 윈드서핑, 서핑, 카이트보드, 스킨스쿠버 등이 민간 서핑숍, 동호회를 중심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아울러 해양레저스포츠 활동과 관련된 기존 및 신규시설의 편리성 확보와 수준높은 서비스 제공을 위해 동호회 및 관광객이 쉽게 찾아다닐 수 있도록 포항만의 `해양레저스포츠 가이드맵`을 만들어 배포할 예정이다. 여기에 전문가, 동호회 외에도 시민 및 포항을 찾는 관광객 등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개방형 교육·체험 프로그램 개발해 보급하는 방안도 준비하고 있다.이와 함께 포항시는 해양레저스포츠 저변인구 확대를 위해 유·청소년 시기부터 해양레저를 즐길 수 있는 교육프로그램과 이벤트를 기획하고 있다.특히 지난 세월호 참사 등으로 생존수영의 중요성이 대두함에 따라 학교교육 및 방과 후 교육과 연계해 관련 프로그램을 실시하기로 했다.이에 영일대해수욕장 일원에 수상안전교육 센터를 구축해 수상안전교육 및 생존수영 교육을 희망하는 학생 및 일반인을 대상으로 바다에서 선박탈출 및 구명 뗏목 탑승법, 생존수영 등을 가르칠 계획이다. 실제로 최근 대청도 해상에서 수영을 전혀 못하는 10대가 생존수영을 배운 것을 활용해 30분을 수면에 떠있다가 구조되는 등 관련 교육의 중요성이 더욱 대두되고 있다.시는 나아가 포항 해양스포츠 아카데미 운영을 통해 종목별 전문 인력 양성 계획도 마련했다. 이를 위해 향후 해양스포츠 종목을 해수면, 내수면에서 체험할 수 있는 분야로 구분해 영일대, 송도, 죽천해수욕장, 형산강수상레저타운 등에서 운영하며, 아카데미 수료생도 지난 2016년 1천614명(1년당)에서 2026년에는 년당 5천명까지 활성화하는 것으로 목표를 수립했다. □ 하반기 화려한 해양레저스포츠 대회 줄이어포항시에는 올 하반기 많은 종목의 해양스포츠 대회가 바다에서 다채롭게 펼쳐진다. 우선 지난달 7월 29일부터 30일까지 포항 전국 수상오토바이 챔피언십이 치러진 것을 시작으로, 10일부터 오는 13일까지는 LDC2000 전국 대학동아리 요트대회가 열려 푸른 바다 너머로 시원한 요트들이 바다를 가로지르는 장관을 연출할 예정이다.오는 19일과 20일에는 제4회 영일만요트대회가 열린다. 이 대회에는 포항, 울산, 부산 등 전국의 요트동호인들이 참가해 요트를 타고 영일만에서 선의의 경쟁을 펼칠 전망이다. 지난해에는 대회 결과 `울산지역 참가팀 팀처용`이 1위를 포항지역 참가팀인 `아프로블루`와 `스텐다드`가 각각 2, 3위를 차지한 바 있다. 이후 31일부터 내달 4일까지 전국 17개 시도에서 200여 척 이상의 요트가 참가하는 `해양경찰청장배 전국요트대회`가 개최된다.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정상급의 선수들이 그동안 고된 훈련을 통해 갈고닦은 기량을 겨루는 의미 있는 대회여서 매우 치열한 순위경쟁이 따를 것으로 예견된다.이밖에 9월에는 포항시장배 조정대회와 경북동해안 5개 시·군의 상생발전을 향한 화합의 장으로 거듭난 형산강사랑 전국 용선대회도 예정돼 있다. 마스터즈부와 학생부, 다문화외국인근로자부, 공무원부 등 여러 부문으로 나눠 대회가 진행되며 기업체, 고교동문, 직장단체, 고교, 대학팀, 시민 등이 참여해 조직 간의 의지를 다지고 힘을 모아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루며 포항의 `용광로`만큼이나 뜨거운 열정의 장을 선보이게 된다./고세리기자manutd20@kbmaeil.com

2017-08-10

“두려워 가지 못한 이북 `새마을` 이름으로 가는 날 꿈 꿔”

▲ 신재학 경상북도새마을회장이 의사복을 입고 새마을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근대사에서 한국은 산업화의 3대 요소인 자본, 기술, 자원을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할 수 밖에 없던 세계 최빈국이었다. 그러던 한국이 농업근대화와 산업화에 성공하면서 세계적인 기적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여러 요인들이 있겠지만, 그 중 새마을운동이 견인차 역할을 해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이러한 새마을운동이 지금은 관 주도로 태동했다는 이유로 정치적 시비의 대상이 되고 있다.사실 이러한 정치적 시비는 한 두번 겪는 시련도 아니다. 짧은 시기에 엄청난 효율성을 올렸음에도 정치적 이유로 온갖 수모를 겪는 새마을운동이지만, 그럴때마다 새마을운동 회원들은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새마을정신을 바탕으로 묵묵히 본연의 자리를 지켜왔다.새마을운동은 `모두 함께 잘 살자`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국민 모두가 참여했던 대국민운동이었다.고(故) 노무현 대통령도 2004년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에서 “새마을운동은 나라의 운명을 바꿔놓은 자랑스런 역사”라고 했다.나라의 운명을 바꾸는 일에 자신들의 삶의 일부를 바친 우리 지역의 새마을운동가들을 만나봤다.이들이 이웃들을 위해 흘린 작은 땀방울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희망의 꽃으로 피어나고 있음을 기억한다.전문의 216번, 경북 최초 전문의김관용 당시 구미시장과의 인연으로2003년 구미시새마을회장 처음 맡아1947년 11월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신재학(69) 회장. 그는 성주군에서 말단 서기를 지내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육남매 중 장남이었다.성주 초전국민학교를 4학년까지 다니다 공직을 그만두고 부산에서 장사를 하는 아버지를 따라 부산 성남국민학교로 전학을 가서 그곳에서 졸업했다. 부산 계성중학교를 거쳐 대구 계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을 거쳐 1979년 국립의료원 신경외과를 수료하고, 같은 해 신경외과 전문의 의학박사를 취득했다.1989년 구미에 고려병원(현 강동병원)을 설립했으며, 2000년 직장·공장 새마을운동 구미시지도자, 김천지방법원 조정위원, 김천검찰청 범죄예방 부회장 겸 의료분과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2003년부터 2008년까지 6년간 구미시 새마을회장을 역임했으며, 2015년부터 현재까지 경북도 새마을회장을 맡고 있다. 2002년 경북도지사 표창, 2007년 새마을훈장 근면장, 2014년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공부 안 한다고 아버지한테 많이 맞았지”어릴적에 대해 이야기할 건 별로 없어요. 6남매 중 내가 장남이었는데 아버지가 매우 엄하셔서 많이 맞은 기억밖에 없어요…하하.아버지는 성주군 말단 서기로 계셨었는데 자신이 무엇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해내는 집념이 강한 분이셨어요. 그런 분이 장남인 내가 공부를 잘 하길 바라는 마음이 오죽하셨겠어요. 공부안하고 놀다가 많이 맞았죠.어릴적엔 딱히 무엇이 돼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던 것 같아요. 한번은 중학교 2학년 때인가, 내가 수학문제가 어려워 아버지께 물어 본 적이 있어요. 아버지는 국민학교밖에 안나오셨거든. 그래서 솔직히 못 풀거라 생각했어요. 근데 단번에 문제를 푸시는거야. 그러면서 나에게 차근차근 가르쳐 주시는 거에요. 정말 놀랐어요. 그때 생각했지. “아버지가 정말 똑똑한 분이시구나”라고. 나중에 알았는데 아버지가 고시를 준비하셨다고 하더라구요. 근데 전쟁으로 시험도 못 보셨다고… 그래서 공부에 있어서는 더 엄격하셨던 것 같아요. 이제 생각해보면. 당시에는 맞기 싫어서 공부했어요. 솔직히 정말 그랬어요. 그런 아버지 덕분에 지금은 의사가 되서 이렇게 병원장까지 하고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죠.△ 한국의 슈바이처가 되고 싶어 도시가 아닌 고향 인근에 병원 개원아버지의 뜻에 따라 의대에 진학해 전문의 자격증까지 따고보니, 이제는 고향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당시 대부분 전문의를 따면 대도시로 가는게 보통이었는데, 난 생각이 좀 달랐어요. 나름의 꿈이 있었거든. 어릴적에도 없던 꿈이 생긴거지.들으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돈보다는 의술을 펼치고 싶었어요. 그래서 한국의 슈바이처가 되는게 내 꿈이었어요.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어요. 처음 병원을 차리려고 보니 당시 성주는 너무 작은 곳이었어요. 그래서 고향과 가까운 김천에 처음 개인병원을 차렸죠. 그때가 1982년 5월이었어요.당시 뇌수술 같은 큰 수술을 할 수있는 의사가 지역에는 없었어요. 내가 신경외과 전문의인데 경북에서는 최초의 전문의 일거에요. 내가 전문의 216번이었으니까. 그러다보니 환자가 많았어요. 한달에 뇌수술만 20번 정도 했으니까.관절수술 같은 것은 수도없이 많았고. 한 7년동안 김천에서 병원을 운영했는데 너무 다양한 환자가 찾아오니 도저히 혼자 할 수가 없었어요.좀 더 큰 병원을 만들어 지역에 더 많은 의료혜택을 줄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에 구미에 종합병원을 만들기로 마음먹었죠. 사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어요.그래도 마음을 먹은 이상 실천했죠. 1989년 3월 고려병원이라는 이름으로 신경외과 전문병원을 개원했어요. 고려병원을 개원하면서 새마을운동과의 인연도 시작됐어요. △ 새마을운동에 참여하는 건 당연한 것1989년 3월 고려병원을 개원하고 그 이듬해인 1990년에 직장새마을협의회에 가입했어요.새마을운동이 잘 되려면 개인적인 새마을운동도 중요하지만, 직장새마을협운동이 더 잘되어야한다는 생각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우리병원도 직장새마을회에 가입하면서 효율적인 병원운영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어요.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 어느날 당시 김관용 구미시장으로부터 하나의 제안을 받았어요.구미시 새마을회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이었죠. 당시 선뜻 하겠다고 대답하지 못했어요. 병원일이 바쁘기도 했고,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어서. 그래서 하루정도 생각할 말미를 달라고 하곤 집에 가서 집사람에게 이야기했죠.그런데 집사람이 하는 말이 “당연히 해야하는 거 아니에요. 하세요”라고 하는거예요. 집사람 말 한마디에 아무 대꾸도 못하고 다음날 구미시새마을회장을 하겠다고 했어요.구미시 새마을회장을 맡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도 회장을 맡지 않으려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도 그럴것이 자기돈을 쓰면서 회장을 하려는 사람이 없었던 거죠.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데 새마을운동은 다른 단체와 달라서 임원들이 돈을 받고 일을 하는게 아니라 자신의 돈을 내고 일을 해야하는 곳이거든. 옛날에는 새마을지도자 정도 되면 기차도 공짜로 타고 하는 그런 혜택이 있었대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게 하나도 없어요. 새마을회장, 협의회장, 부녀회장, 직장회장 등 모두 자비로 분담금을 내고 일을 해야하니 하려는 사람이 많이 없는 것 같아. 그래도 아직 신념을 가지고 하시는 분들이 있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아무튼 그때 2003년부터 6년동안 구미시 새마을회장을 맡았죠.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어요. 그리고 지금 생각해봐도 집사람 말이 백번 옳았어요.△ 가난했던 내 나라 도움받은 것, 되돌려주고파김관용 시장의 권유로 구미시 새마을회장직을 맡아 일을 시작해보니 정말 일이 많더라고요. 구미가 새마을운동의 종주도시이기도 하니 진행되는 사업들이 많았어요. 일을 하면서 시장님도 정말 많이 만났어요. 시장님이 새마을운동에 참 열정이 많으셨거든.그러다 나중에 공무원한테 전해들은 이야기가 있어요. 시장님이 병원을 운영하는 사람이 새마을운동을 하는 것이 낫지않겠냐면서 고려병원장을 한번 찾아가보라고 지시했다는 거에요.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 있지 않아 시장님께 한번 물어봤어요. 그냥 궁금해서…내가 필요한 이유가 있었는가 싶어서 말이죠.그랬더니 시장님이 “새마을운동을 새마을정신을 세계에 전파시키고 싶다”고 하셨어요. 어려운 나라에 도움을 주자면서. 우리가 못살던 시절 도움을 받았으니 이제 돌려주어야 되지 않겠냐고. 그러면서 이북에도 새마을정신을 전파하자고 하시더라구요.새마을정신으로 잘 살 수 있었던 방법을 여러 나라에 가르쳐 주고 다함께 잘 수 있으면 좋지 않겠느냐는 말에 두말 않고 동참하기로 했어요. 그래서 새마을세계화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죠. 하지만 당시엔 이북에 가는것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컸어요. 가려고하면 갈 수도 있었겠지만, 솔직히 그땐 너무 두려워 가지 못했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새마을이란 이름으로 이북에 갈 수 있는 날이 오겠죠.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7-08-10

충절·기개·신의 포은의 정신, 현대성 접목한 교육으로 승화

고운 색깔의 한복을 갖춰 입은 학생들의 몸가짐이 평소와는 달라 보였다. 예절 담당 강사의 조언에 따라 줄지어 손을 씻은 후 쪽마루에 오르는 열일곱 소년·소녀들의 움직임이 의젓하고 단정했다.작년 충효문화수련원 방문 수련생 총 1만5천여명포은정신 계승·전통과 역사 교육의 장으로 `인기``선비아카데미 전문·교양과정` 등 선비정신 계승 열정글 싣는 순서1.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 포은의 생애와 사상2. 빛나는 사액서원(賜額書院)… 영천 임고서원을 찾아3. 포은의 숨결 되살리는 임고서원 충효문화수련원 영천시 임고면 포은로에 위치한 임고서원 충효문화수련원(원장 김명환)은 평소에도 이런 교육생들이 적지 않게 방문하는 곳이다.비단 초중고교 학생들만이 아니다. 전통문화와 왕조시대 역사에 관심을 가진 성인 관광객과 각종 교육을 진행하는 공무원, 한국에 호의적인 눈길을 보내는 외국인들까지 충효문화수련원을 찾는 사람들의 층위는 넓고 다양하다.강의실과 예절실, 식당과 숙박시설을 갖춘 충효관과 수업과 토론을 진행할 수 있는 대강당과 소강당으로 이뤄진 연수관이 충효문화수련관의 주요 시설이다. 지난해 이곳을 찾은 수련생은 모두 1만5천300여 명.포은의 정신을 계승하고 미래세대에게 한국의 전통과 역사를 효과적으로 교육·소개하기 위해 마련된 충효문화수련원은 영천에서 어느 정도의 위상을 가진 것인지 김명환 원장에게 물었다.“어느 때부턴가 영천의 문화관광에서 임고서원과 충효문화수련원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 이전에는 은해사와 거조암부터 찾던 관광객들이 요즘엔 임고서원을 먼저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 충효문화수련원에도 입소의 방법과 교육과정을 묻는 전화가 자주 걸려온다. 그에 발맞춰 현재 50여 명 정도가 수용 가능한 숙박공간을 대폭 늘이기 위해 제2숙박동 건립이 진행 중이다. 내년에 완공되면 수련원을 찾는 사람들이 더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포은 정몽주의 사상을 선양하려는 영천시의 노력영천시청도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문화와 관광의 인프라로 활용하는 21세기적 흐름에 적극 대응하고 있다. 2012년부터 진행된 ▲임고서원 성역화사업 ▲생가 등 포은 유적지 성역화사업 ▲충효문화수련원 교육시설 확충 등이 그간 기울여온 노력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수련원 예절실에 모인 학생들을 잠시 지켜봤다. 스마트폰 게임과 무대에서 춤추는 또래의 연예인들이 평소 이들의 관심사였겠지만 그날은 달랐다. 점잖게 앉아 책을 펼치고 선현들의 행적을 더듬는 아이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또한 믿음직했다.충효문화수련원은 경상북도에서 유일하게 `선비아카데미 전문·교양과정`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이를 위해 수련원과 별빛중학교, 포은초등학교 등이 교육공간으로 사용된다. 영천시 일원이 선비정신을 되살리는 공간으로 활용되는 것이다.전문과정이 유림(儒林)과 시민을 위한 것이라면, 교양과정은 아이들을 위한 `사자소학(四字小學·어린이용 한자 교과서)`과 `명심보감(明心寶鑑·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어린이 인문교양서)` 교육이 프로그램의 주된 내용이다.이는 선현이 축조한 학문과 정신의 탑을 학생들이 다듬어 다시 세우려는 노력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보였다. ◆ 전통에 현대적 요소 가미시켜 교육의 효과 높여김명환 원장은 말했다. “부모의 권위마저 땅에 떨어진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사회적 규범이 무시되고 인명을 경시하는 풍조도 만연해 있다. 이런 때일수록 충효를 실천하고 신의를 지킨 포은의 행적을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수련원의 교육을 포함해 영화와 드라마, 오페라와 음악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포은이 지향했던 숭고한 이념을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한다.”임고서원 충효문화수련원 김 원장과 5명의 직원, 10명의 강사들은 “어떤 방식이 아이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올바로 이해시키는데 도움이 될까”라는 고민을 오늘도 하고 있다. 그 고민은 한국의 미래 청사진과도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지금까지 충효문화수련원은 전통문화를 위주로 한 교육을 진행해왔다. 하지만 앞으로는 수련원을 찾는 아이들에게 `의미`와 함께 `재미`까지 전달해주기 위해 수업에 현대적 요소를 가미하려고 한다. “보다 높은 교육 효과를 얻기 위해서”라는 게 이원석 교학부장의 설명이다.흥미로웠던 취재를 마친 후 임고서원과 충효문화수련원을 한 번 더 천천히 돌아봤다. 사파이어 색채로 빛나는 푸른 하늘과 붉게 핀 배롱나무꽃이 대조를 이루며 여름이 무르익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어디선가 희미하게 달콤한 향기가 밀려오는 듯했다. 역사와 전통을 배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당장은 별 소용이 없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내내 작지만 꼭 필요한 도움을 주는 은은한 향기 같은 것이 아닐까.▲ 포은과 임고서원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김영석 영천시장.인터뷰 김영석 영천시장 영천의 자랑 `임고서원` 성역화 완료충절의 역사 전 국민에 알리고 싶어김영석 영천시장은 포은과 임고서원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고 알려져 있다. 지난 역사에서 선현의 지혜를 배우고, 이를 미래 설계에 적극 반영하려는 김 시장을 만나 `영천의 자랑`이라 할 임고서원과 정몽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이고 주로 외교 관련 업무를 맡아왔다고 들었다. 역사에 관심을 가진 이유나 계기가 있는지.“육사는 확고한 국가관과 안보관을 요구한다. 또한 한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으로 다른 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일을 하다 보니 역사는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부분이라 관심을 가졌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처럼 역사를 통해 현재를 냉정하게 성찰해야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 포은은 충절과 절개, 효행과 학문 모든 방면에서 업적을 이뤘다. 김 시장이 주목하는 분야는 무엇인가?“하나만 꼽으라면 충절을 선택하겠다. 충절은 진실된 마음으로 우리의 법도와 제도를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어느 시대나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올바르게 절의를 지킨 사람들은 추앙받고 후대의 표본이 된다. 충무공 이순신이 그렇고 포은 정몽주가 그렇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인권을 제대로 누리려면 우리를 보호해 줄 나라가 필요하고 그 나라는 우리가 지켜내야 하기 때문이다.”- 임고서원을 효과적으로 홍보할 방안이 있는지.“임고서원의 명성에 걸맞은 기반시설 확보를 위해 성역화사업을 지난 2012년 마무리했다.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연계해 관광객 유치와 홍보에 집중하고 있다. 충효문화수련원을 생활예절, 서예 등을 교육하는 기관으로 자리매김 시키고, 별빛나이트투어 등 관광상품도 개발하고 있다. 최근엔 영천시 SNS 서포터즈가 발족돼 영천의 명소를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날 공직자들은 포은 정몽주의 어떤 측면을 배워야 할까?“국가에 대한 충성, 믿음을 지키는 절개, 문무를 겸비한 당당함, 탁월한 협상력 등 어느 하나 배우지 않을 것이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애민정신을 배워야 한다. 포은은 구휼기관인 의창을 다시 세워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고 오부학당과 향교를 둬 교육 진흥에 노력했다. 이는 백성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고민의 산물이다.”- 취임 이후 포은의 사상을 선양하고, 임고서원을 알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197억원의 예산이 투입된 임고서원 성역화사업으로 전시관, 생활체험관, 선죽교, 소공원 등이 새롭게 설치됐다. 포은의 시를 엮은 문집과 보물 1109호로 지정된 임고서원 전적들을 볼 수 있는 포은유물관을 운영해 누적 관람객이 18만명을 넘고 있다. 지난 2015년에는 우항리에 22억원을 들여 포은의 생가를 중창했다.”- 포은과 임고서원에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다면.“해외 주재 외교관으로 지내다 고향 영천에 돌아와 보니 임고서원 앞 은행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그 크기에 압도돼 연혁을 알아보니 본래 임고서원이 부래산에 있을 당시 그곳에 있던 것을 1600년경 현재 위치에 복원할 때 옮겨 심은 것이라 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임고서원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나무의 생명력 덕이 아닐까 싶었다. 그 그늘에서 땀을 식히다가 나도 영천시민에게 이처럼 시원한 그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은행나무와 같은 생명력을 영천에 불어 넣는데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은?“영천 3선현이 있다. 포은 정몽주와 가사문학의 대가 노계 박인로, 화약을 발명한 최무선 장군이다. 영천시는 이들의 행적을 기억하려 한다. 앞서 말한 임고서원 성역화사업 외에도 노계가사문학관을 건립 중이며, 최무선과학관은 2012년 개관해 관람객들의 좋은 평가를 얻고 있다. 역사의 향기가 가득하고 치산계곡, 강변공원이 있는 영천으로 여름휴가를 오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홍성식기자hss@kbmaeil.com

2017-08-04

불빛·별빛 수놓은 포항의 밤과 셔틀콕의 향연

대한민국 대표 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제14회 포항국제불빛축제`가 여름밤 포항을 찾은 시민·관광객을 매료시켰다. 지난 26일부터 30일까지 형산강체육공원과 영일대해수욕장 일원에서 `포항의 빛, 하늘을 날다`라는 주제로 개최된 이번 축제에는 포항시 추산 203만 명의 관람객이 방문해 역대 최대규모의 행사로 기록됐다. 축제의 대미를 장식한 메인 불꽃쇼는 지난 29일 오후 9시 10분부터 1시간 동안 형산강체육공원에서 진행됐다. 스페인의 `피로테크니아 이구알(Pirotecnia Igual)`, 미국의 `멜로즈 파이로테크닉스(Melrose Pyrotechnics)`, 한국의 `한화`등 3개국 팀이 참가해 포항제철소의 야간 경관조명을 배경으로 준비한 테마음악과 불꽃쇼를 순서대로 펼쳤다.제14회 포항국제불빛축제 `성료`닷새동안 203만명 발길 `역대 최대`음악과 어우러진 한국·미국·스페인팀화려한 불꽃쇼로 여름 밤 무더위 날려`전국 오픈 배드민턴 대회` 성황`본사 주최 포스텍체육관 등 4곳서`1천250여 팀 2천500여 명 참가 스페인 팀은 특유의 강렬하고 열정적인 색채의 불꽃쇼를 선사했다.미국 팀은 흥을 절로 돋우는 로큰롤 음악과 경쾌한 팝송을 준비해 역동적인 불빛쇼를 펼쳤다.한화팀은 53만 포항시민을 축하하는 53발의 불꽃을 시작으로 △볼케이노 △분수 불꽃 △일곱빛깔 무지개 등 화려한 불꽃쇼를 연출했다. 27, 28, 30일 3일간 열린 데일리뮤직불꽃쇼는 액션, 공포, 로맨스 OST의 음악으로 매번 차별화된 불꽃을 연출해 색다른 감동을 선사했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포항의 연오랑 세오녀 설화를 바탕으로 제작한 `일월의 빛`도 화제의 중심이었다. 축제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 개폐막식 주제공연으로 지역의 상징성은 물론 예술성까지 더한 작품을 선보였다. 교통과 안전 등 원활한 축제 진행을 위해 메인 불꽃쇼 당일에만 800여 명의 봉사자들이 활약했다. 대규모 인파가 몰리는 축제의 특성을 감안한 안전과 미아 대책을 마련해 메뉴얼을 만들고 직원 교육을 통해 대비해 온 노력이 현장에서 빛을 발했다.한편, 본사 주관으로 진행된 `2017 포항국제불빛축제 기념 오픈 배드민턴 대회`는 29~30일 포스텍체육관을 비롯한 4곳에서 1천250여 팀 2천5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사진/이용선기자/박동혁기자 phil@kbmaeil.com

2017-07-31

섬유의 무한한 진화… `스마트 헬스케어 시대` 도래

섬유의 변신은 어디까지 가능할까.그동안 탄소섬유, 나노섬유 등으로 대구 섬유산업이 1세대 전환을 시작했다면 이제는 4차산업과 연계한 섬유로의 발전을 준비하고 있다.특히 대구지역 섬유기업과 IT 관련 기업 간의 IoT와 ICT 기반의 스마트 섬유를 통해 새로운 변신과 도약을 위해 섬유와 IT산업 간의 융복합 발전을 통해 상생 동반성장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시제품 출시해 4차 산업혁명 트랜드에 섬유산업을 올려놓고 있다.27일 한국섬유개발연구원에서 발표된 `Human Wellness Textile(Well-Tex) 실용화 기업지원 사업`에서 사회약자용 스마트 기저귀가 선을 보여 대구 섬유산업의 변신을 엿보게 했다.이날 공개된 시제품은 피부 발진을 예방하기 위해 IT융합으로 제작된 사회약자용 스마트 기저귀로 해외 판로 개척도 가능할 것으로 관측되면서 앞으로 대구 섬유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고 섬유가 더 이상 사양산업이 아니라는 사실도 증명한 셈이 됐다.일본보다는 늦었지만 이번에 IT 융복합으로 개발된 스마트 기저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본다.◇ 일본 IT융합 제품 상용화 단계한국 섬유산업은 최근 들어 하이테크소재, 정보기술(IT)·메디컬소재, 특허소재, 슈퍼섬유 융합제품, 코스메틱 섬유제품, 복합재료, 고분자수지 핵심부품소재 등 최첨단 기능을 탑재했다.이들 섬유제품은 기능성을 강조한 것으로 실제 생활에서 대다수의 사람이 사용하는 상용화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일본의 경우 이미 원사에서 봉제, 유통까지 최첨단 기술 접목한 제품 속속 상용화되고 일본 알실크(Al Silk)사는 첨단 염색 기술을 이용해 전도성을 부여해 피부나 생체 염증을 유발하지 않는 천연실크를 개발했다. 또 사물인터넷(IoT)과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과 연계된 스타트업 지원을 강화하면서 원사에서 의류까지 최첨단 IT융복합 섬유패션기업이 출현하며 시장을 선점하고 있어 한국 업계의 분발이 요구된다. 이어 세계 시장에서 혁신을 주도하는 주류로 성장시키는 `HIYAKU(비약) Next Enterprise` 프로젝트를 올해부터 본격 가동하고 최첨단 기술과 뛰어난 아이디어를 갖춘 55개 중소기업을 미국 실리콘 밸리 같은 세계 유수의 혁신 생태계에 파견할 정도다. 이들 기업에 IT·섬유 기업뿐 아니라 2012년 설립된 라이프스타일 액센트(LIFESTYLE ACCENT INC.), 고가 여성복 기업 카이미(Kay me Ltd) 등도 포함돼 수요 맞춤형 시장을 겨냥했다.이들 스타트업 기업은 정부지원을 등에 업고 완전 상용화된 제품으로 자국을 넘어 본격적인 해외 시장 겨냥에 나섰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 월텍스(Well-Tex) 시제품 공개일본의 발 빠른 움직임에 27일 한국섬유개발연구원(원장 문혜강) 3층 대회의실에서 대구시 지원으로 추진 중인 `Human Wellness Textile(Well-Tex) 실용화 기업지원 사업`의 시제품이 공개됐다.이날 공개된 시제품은 한방·섬유·IT·의료 등이 융합된 제품으로 노인이나 환자 등 사회약자들을 위한 스마트 기저귀로 기존의 애기용 기저귀를 확대한 것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의료용 섬유에 기능성 한방물질 및 IT를 적용해 피부, 혈액, 호흡기 질환 개선과 기저귀, 위생용품 등 인체의 질병·질환의 개선, 완화, 예방 및 관리에 효과가 있는 건강 지향형 기능성 섬유제품으로 주목을 받았다. 특히 고부가가치 섬유산업의 활성화를 유도하고 원천기술 및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타산업간 융합 사업으로 각광받을 전망이다.발진예방 IT융합 사회약자용 스마트 기저귀는 가정과 병원, 요양시설에서 치매환자 및 거동이 불편한 환자의 대소변 배설 후 장시간 방치상태로 인한 욕창, 습진 및 알러지와 같은 피부 질환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개발됐다.기존의 기저귀보다 흡수력이나 샘방지 등의 기능이 보강된 것은 물론이고 아래층에 센서가 장착돼 교환할 시기가 되면 보호자 및 요양 보호사에게 메시지를 전송하는 대소변 알림서비스를 제공한다.즉 스마트 기저귀에는 대소변 감지시스템과 게이트웨이 및 스마트폰 앱으로 시스템이 구성돼 있는 상태다. 현재 세 개의 업체가 협업으로 스마트 기저귀 시제품 개발을 진행하고 1차 시제품으로 IT가 접목돼 실시간으로 대소변 상황을 전달해주는 성인용 기저귀 시스템이 개발된 것이다. 올 하반기에는 한방물질이 적용돼 적극적인 발진예방을 갖는 유아용 기저귀 시스템을 개발할 예정으로 있다. ◇ 스마트 기저귀, 일본기업 호평으로 수출 가시화스마트 기저귀 시제품 개발에 참여하고 있는 기저귀 생산 전문업체인 ㈜삼보는 속 기저귀에 IT센서 일체화 기술을 개발하고 대량 생산을 위한 설비라인을 구축하고 있다.또 IT 개발 전문업체인 ㈜아이티헬스는 대소변 감지 센서 및 모듈과 스마트폰 앱을 개발 완료했고 국내외 마케팅을 전담하는 ㈜피라는 스마트 기저귀의 실용화를 위한 해외 판로를 개척하게 된다.이번 성과보고회에는 스마트 기저귀의 해외 마케팅을 위해 일본의 ㈜MS사와 ㈜NKT사 두 업체를 초청해 스마트 기저귀의 성능평가 시연회를 통해 일본 수출에 발판으로 삼았다.㈜피라를 중심으로 ㈜삼보 및 ㈜아이티헬스와 ㈜MS사가 스마트 기저귀 일본 마케팅을 위한 상호업무협력을 체결하는 등 조만간 해외진출이 가시화될 전망이다. ㈜MS사는 의류, 잡화, 화장품 등을 생산 및 판매하고 있으며 일본 내에 160여개의 매장과 10여개 이상의 고유 브렌드를 보유한 중견기업이다. ㈜MS사 대표 사이토 미수루(Saito Misuru)는 스마트 기저귀의 성능에 놀라워하며 1차로 최소 100만장 이상의 스마트 기저귀 일본 수입을 현장에서 약속할 정도로 성능면에서 탁월함을 인정받았다.앞으로 일본, 유럽, 한국의 인구 고령화 속도를 감안한다면 이러한 스마트 기저귀의 세계시장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한국섬유개발연구원 문혜강 원장은 “한방·섬유·IT·의료가 융합된 Well-Tex 실용화 기업지원 사업을 통해 지역 섬유산업 활성화 및 글로벌화라는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며 “앞으로 섬유 신소재 개발 및 상용화를 위한 기업지원과 기업의 매출향상 및 일자리 창출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김영태기자 piuskk@kbmaeil.com

2017-07-28

500년 꼿꼿한 은행나무에 서린, 피고 지고 물드는 포은의 기상

글 싣는 순서1.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 포은의 생애와 사상2. 빛나는 사액서원(賜額書院)… 영천 임고서원을 찾아 3. 포은의 숨결 되살리는 임고서원 충효문화수련원고금(古今)과 동서를 불문한다.지도자에게 바라는 보통 사람들의 요구는 크게 다르지 않다.`경제 발전`과 `문화 진흥`.이 두 가지 숙제를 풀어갈 능력을 가진 권력집단은 백성 또는 국민이라고 불리는 이들에게 외면받지 않는다.그러나 당대의 경제와 문화가 가진 문제점과 그 해결 방안을 고루 살펴 물질적인 측면과 정신적인 차원 모두에서 사람들에게 만족을 줬던 권력자는 많지 않았다.이는 역사책을 뒤져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오늘날까지도 세계인들에게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인정받는 고대 그리스의 문화·경제적 선진성은 `아고라(agora)`에서 꽃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도시국가였던 그리스의 시민들이 모여 “무엇이 우리를 경제적 충족감과 문화적 충일감으로 이끌 것인가”를 토론했던 광장을 뜻하는 아고라.“놀랍고 찬란하다”는 평가를 받는 그리스의 문화예술적 성취는 바로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시대를 뛰어넘어 서양과 동양의 통치권자는 유사한 고민을 했다. 조선의 왕들에게도 문화적 측면에서 `아고라`의 역할을 수행할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서원(書院)이다.조선의 통치이념인 유학(儒學)을 진흥·교육하는 동시에 그 시대 사회를 이끌어가던 지역의 주요 인사들에게 문화와 학문의 거점을 만들어주고자 하는 요구에서 생겨난 서원. ◆ 조선의 왕들, 임고서원에 편액(扁額)을 내리다그렇다면 이 서원들이 필요로 했던 것은 무엇일까?그것은 다름 아닌 `충절을 지킨 동시에 학문적 성취까지 이룬 선현(先賢)`이었다.그러한 상징적 인물을 서원의 중심에 세움으로써 국가에 충성을 다하고 부모에게는 효를 행하며 유교의 경전(經典)을 연구하는 지역의 젊은 인재들을 키우고자 했던 것이다.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포은 정몽주는 서원의 정신적 지주가 되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자신이 섬긴 왕을 배신하지 않았고, 부모에게 지극한 효심을 보였으며, 성리학의 핵심을 꿰뚫고 있던 인물이 바로 포은.정몽주를 추모하고 학문적 업적을 이어가기 위한 목적에서 세워진 것이 바로 영천의 임고서원이다.조선의 13대 왕인 명종은 임고서원에 수많은 책과 함께 편액(扁額·종이나 나무판 위에 글씨를 쓴 액자)을 내렸다.조선의 왕이 직접 쓴 글씨가 걸린 서원은 특별히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 불린다. 당시 임고서원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은 영천 충효문화수련원 김명환 원장이다.“임진왜란 때 임고서원이 불에 타 무너졌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선조(조선 14대 왕)가 지금의 위치로 서원을 옮겨 지었죠. 1603년의 일입니다. 그때 선조는 다시 한 번 편액을 내림으로써 임고서원의 지위를 높여주었다고 합니다.”두 명의 임금이 편액을 하사한 사실만 봐도 임고서원과 정몽주가 지닌 당대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취재를 위해 임고서원을 찾았던 날. 가장 먼저 기자를 반긴 것은 `임고서원 은행나무`였다.경상북도 기념물 63호인 이 나무는 높이가 20m에 이르는 거목이다.수령이 500년이 넘었다는 은행나무의 당당한 기품이 포은의 드높았던 기상을 자연스레 떠오르게 했다.또한, 단풍으로 물든 가을날의 임고서원 풍광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포은문집`과 `지봉유설(芝峯類說)`, 포은 영정 등 만날 수 있어현대에 와서 임고서원이 새롭게 정비된 과정을 영천시청은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2006년부터 임고면 양항리 일원에 198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유물전시관(포은유물관)과 생활체험관(충효관), 개성의 선죽교를 본뜬 다리 등을 만들었습니다. 유물전시관은 성리학의 보급과 생활 속 실천에 힘쓴 포은과 관련된 유물을 전시합니다. 또한, 이곳을 찾는 어린 학생들을 위해 임고서원 연혁과 정몽주 선생의 일대기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 영상실에서 상영하고 있습니다.”자신을 신임해준 왕에 대해서는 충성을, 낳아준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서는 효도를, 선배 학자에게는 신의를, 아랫사람에게는 너그러움을 보여준 포은.임고서원에서 만난 충효문화수련원 이원석 교학부장에게 물었다. “전시된 유물 중 가장 귀한 것은 어떤 것인가요?” 다소 거칠고 우매한 기자의 질문에 이 교학부장의 현명한 대답이 돌아왔다.“포은의 인품과 학식을 생생하게 화폭으로 옮긴 영정 3점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 외에도 `포은문집`과 `포은집`,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지봉유설`도 전시하고 있고요. 더불어 수백 권의 귀한 책들이 있습니다. 어느 하나만을 귀하다고 지목해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웃음)”영천 정신문화의 알짬을 간직한 임고서원 주변에는 포은과 관련된 유적지도 많다.대표적인 것이 ▲포은의 부모 묘소(서른 살이 되기 전 부모를 모두 여읜 포은은 아버지와 어머니 묘소에서 각각 3년을 시묘살이 했다) ▲유허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72호로 포은의 효심이 알려지자 나라에서 `孝子里(효자리)`라고 새겨진 비석을 영천 우항리에 내렸다) ▲조옹대(포은이 낚시하며 시상을 떠올리던 공간) ▲포은 생가(2015년 완공된 목조건물로 임고서원에서 차로 10분 거리) 등이다. 최근 들어서는 임고서원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의 발길도 부쩍 늘었다.파란 눈동자를 빛내며 그 옛날 한국 왕조였던 고려의 역사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이 많아진 것이다.또 한국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 해외동포의 자녀들이 서원을 방문해 잊고 살았던 우리네 전통문화의 향기에 흠뻑 빠지는 경우도 많다는 게 영천시의 설명이다.“어느 순간부터 언론 보도와 입소문을 통해 포은 정몽주와 임고서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인터넷카페, 블로그, 밴드 등을 통한 온라인 홍보도 이곳을 찾는 학생들이 늘어난 이유 중의 하나일 겁니다”라고 임고서원 충효문화수련원측은 부연했다. ◆`영천 선죽교`를 거닐며 개성 선죽교를 떠올리다마지막으로 개인적 체험 하나를 이야기하고 싶다.남북관계가 좋았던 2000년대 중반. 20여 명의 남한 국어학자와 함께 휴전선을 넘어 개성을 찾았다.북한의 국어학자들을 만나 `남북한 통합 국어사전`의 제작을 논의하는 자리에 취재기자로 참석한 것이다.길고 길었던 학자들의 회의가 끝난 후 평양에서 파견된 북한측 안내원이 “고려박물관과 선죽교에 가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학자들과 기자들 모두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개성의 선죽교는 생각보다 작고 초라했다.고려 말 대표적인 충신이자 대학자가 지조와 신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흔적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그 고적한 풍경 속으로 스산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1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날 본 개성 선죽교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하다.그리고 2017년 여름. 다시 선죽교와 만났다.이번엔 개성이 아닌 영천에서였다. 포은의 피살지인 동시에 기울어진 왕조 고려의 멸망을 상징하는 다리가 개성과 똑같은 크기와 모습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조선의 명필 한석봉이 `善竹橋(선죽교)`라고 쓴 글씨를 탁본해 세운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충효와 단심(丹心)이란 단어가 한없이 가벼워진 오늘날. 우리는 포은의 삶과 죽음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임고서원은 어떤 의미로 후대의 가슴 속에 남을까?역사를 연구해온 학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과거에서 교훈을 얻는 민족의 미래는 결코 어두울 수 없다”고. 그렇기에 포은과 임고서원은 우리의 과거인 동시에 미래다.이어지는 여러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쯤, 관복을 갖춰 입은 푸근한 얼굴의 포은이 느린 걸음으로 임고서원을 산책하는 모습이 보였다.그것은 환시(幻視)였을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7-07-28

`오싹오싹` 무더위 싹 날려줄 `호러세계`로의 여행

뮤지컬의 도시, 폭염의 도시 대구의 한여름밤 무더위를 오싹하게 날려줄 호러의 대향연이 시작된다.한여름 밤 무더위를 날려줄 `제14회 대구국제호러축제`가 27일부터 30일까지 나흘간 대구스타디움 시민광장과 야외공연장, 대구시내 소극장 등지에서 펼쳐진다. `핫(HOT)하게 대구, 쿨(COOL)하게 호러!`를 슬로건으로 열리는 이번 축제는 볼거리와 놀거리, 즐길 거리가 풍부한 체험형 축제로 꾸며질 예정이다.2005년부터 개최돼 온 대구호러공연예술제가 지난해부터 `핫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대구국제호러연극제`로 명칭을 바꿔 개최됐다.올해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역 대표 공연예술제 지원사업`에 선정되면서 국비지원을 축제로 업그레이드됐다. 지난해에 비해 행사 규모만 2배 이상 커지면서 국내외 초청공연과 호러IT체험관과 136초 호러영화제, 좀비죤, 호러EDM파티 등 행사내용도 다양해 졌다.기존의 행사들이 무대와 관객이 따로 노는 `일방형 축제`였다면 이번 축제는 시민들이 무대로, 공연장으로, 프로그램 속으로 직접 뛰어드는 쌍방형, 참여형 축제로 진행된다.`지역대표 공연예술제 사업` 선정 국비 지원2배 이상 규모 커지고 참여행사도 다양해져일·중국 등 해외 4개국 호러콘텐츠 감상도공포와 과학이 만나는 `스마트 축제` 기대□ 참여형 축제축제위원회는 `시민 참여형 축제`를 콘셉트로 내세우면서 다양한 체험행사가 준비됐다. `유령의 집`과 `좀비 존`, `호러 코스프레 경연`, `나도 귀신이다` 같은 13가지 관객 참여형 부대행사가 준비된다. 특히 `귀신을 이겨라` 이 프로그램은 트라이애슬론의 일종으로 4가지 게임 중 한 가지를 제비뽑기로 선택해 귀신과 함께 경기를 하는 행사로 눈길을 모은다.시민들의 직접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나도 귀신이다`도 있다. 축제기간 사전접수를 통해 행사에 참여한 시민들은 좀비 분장을 하고 현장 스태프들과 함께 좀비연기를 하게 된다. 29일에 열리는 `호러 코스프레 경연` 역시 의상, 패션에 관심이 있는 관객들의 인기 축제다.□ 호러가 IT와의 만남호러와 현대과학은 완전히 상반된 개념이다. 이번 축제에서 호러가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과 현대과학(IT)와 만난다.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어려운 유령과 상상 속 이야기, 전설 속 스토리가 현실세계로 뛰쳐나온다. 가상을 현실로 가져온다는 특성 때문에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귀신과 유령을 직접 보고 그 스릴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 집행위는 축제기간 동안 호러 IT체험관을 운영한다. 시민들은 VR을 통해 가상의 세계를 그래픽, 동영상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체험관엔 삼성기어 VR 20대, 특수 영상 게임기 HTC 2대를 설치해 관객들은 창작미디어를 영화처럼 볼 수 있다.□ 호러 공연27일 귀신분장을 한 바탈리온(해골군단)이 광장에서 퍼레이드를 시작하면 축제는 본격적으로 막이 오른다. 귀신들이 등장하며 광장은 비명소리로 가득찬다. 이어 투견과 톤 셀프, 배드 큐피트, 노이지 등 전국의 메탈밴드들의 강력한 사운드가 광장을 울린다. 28일 백귀(百鬼)들이 뛰어는 호러 매직쇼와 중국기예쇼, 136초 영화제가 이어진다. 올해 처음으로 열리는 136초 영화제는 핸드폰이나 카메라로 촬영한 동영상을 심사해 금상 100만원, 은상 50만원, 동상 30만원(2명)을 시상할 예정이다. 27일에서 30일까지 일본과 대만, 인도네시아, 중국 등 해외 4개국 호러 초청작 공연이 이어지며 각국의 호러 콘텐츠를 선보인다.대구의 7개 극단이 나서는 `호러연극제`도 관심을 모은다. 극단 기차의 `오! 로라`, 대구무대의 `피아노`, 극단 미르 `쥐잡기`, 극단 엑터스토리 `남겨진 자들`, 극단 온누리 `모기`, 이송희레퍼터리의 `아이스 하우스`, 초이스씨어터의 `병원`이 무대에 오른다.김태석 집행위원장은 “올해 축제는 공포와 과학이 만나는 `스마트 축제`의미가 강하다”며 “호러와 IT를 결합해 다양하고 즐거운 축제, 한 단계 진보한 축제로 이끌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문의:053-424-9426.“호러IT체험관·EDM파티 등 즐거거리 풍성”손경찬 조직위원장 인/터/뷰-대구국제호러페스티벌을 소개해 해준다면.△대구국제호러페스티벌은 폭염의 대구에서 전 연령이 즐길 수 있는 호러를 주제로 한 특화된 공연 축제다. 폭염도시 `대구`라는 이미지를 테마로, 시민 체험형 축제를 만든 것이 좋은 평가를 받아 국비지원 축제로 선정됐다. 명실공히 대구를 국제화시킬 수 있는 독창적이고 재미있는 여름테마축제의 최고라고 하겠다.-`호러`라는 것이 실제 더위를 잊게 한다는 효과가 있는지.△예로부터 더위를 피하는 대표적인 방법의 하나로 바로 `공포`가 꼽혔다. 여름마다 TV프로그램에 `납량특집`이 기획된 것도 이런 이유였다고 본다. 대구국제호러축제가 간담이 서늘할만한 공연물을 모아 `여름더위를 내쫒자`는 독특한 발상의 축제이니 만큼 시민들의 무더위를 싹 날려주는 청량제 역할을 할 것이다.- 예년과 다른 점이 있다면.올해 축제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역 대표 공연예술제 지원사업`에 선정돼 국비지원을 받게 돼 지난해에 비해 행사 규모만 2배 이상 커졌다. 그래서 국내외 초청공연 및 30여단체가 공식적으로 참가하고 호러IT체험관과 136초 호러영화제, 좀비죤, 호러EDM파티 등 새롭고 재미있는 참여형 부대행사가 더해졌다.- 관람 포인트를 알려준다면.△이번 축제는 덥고 습한 대구의 한여름밤 더위를 한방에 날릴 수 있는 대구만의 독창적인 축제라 자부한다. 시민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종합적 프로그램과 유령의집, `귀신을 이겨라` 등 다양한 체험관, 각종 참여마당을 함께 체험해보면 분명 한여름 최고의 축제로 기억될 것이다.-그동안 시행착오도 적지 않았을 거라 생각된다. 대구국제호러페스티벌이 이뤄낸 성과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나.△호러축제는 대구의 여름축제의 시발점이 됐고 이를 계기로 대구의 뜨거운 여름이 애물단지가 아니라 오히려 국제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된 것이라 생각한다. 이를 통해 여름 비성수기인 공연문화가 오히려 바빠지게 된 것도 큰 성과이다. 또 하나의 성과는 호러라는 제한적 소재가 창조적이고 관객친화적인 문화콘텐츠로 개발되고 발전하게 된 것이다. 문화콘텐츠산업이 새로운 산업으로 부상되고 있는 이 때 호러를 소재로 한 이러한 호러콘텐츠의 개발은 대구의 문화산업 발전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축제를 진행하시면서 정부 지원 및 인프라 개선 문제는 없었나.△유사축제가 난무하고 있는 이때에, 독창적인 테마축제들을 선별해서 집중적이고 지속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구국제호러축제는 여타 축제와는 차별화되는 독창적인 테마축제라 할 수 있다. 정부나 지방정부 차원의 지속적 지원이 이뤄지고 해마다 축제를 통해서 축적된 유·무형의 자산에 연속성이 가미된 인프라가 구축돼 가면 축제의 경제성과 효율성, 투자성까지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해외참가팀들이 대구국제호러페스티벌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일본과 대만 두 팀이 왔었는데 아주 재미있게 즐기고 갔다. 호러축제에 무척 흥미를 느꼈는지 올 때 자기 가족들을 자비로 데리고 같이 와서 호러축제를 즐길 정도다.-대구국제호러페스티벌이 발전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가장 먼저 충분한 재정지원과 호러콘텐츠 개발을 위한 전문가 양성, 새로운 콘텐츠의 개발이 선행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장기적인 투자가 필요하다. 특히 호러페스티벌은 장기적 투자가 충족돼 진다면 상업적인 성공까지 가져올 수 있는 문화산업콘텐츠로서 충분한 상업성을 갖춘 축제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대구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대구국제호러페스티벌 정말 열심히 잘 만들었다. 이 축제의 성공은 시민 여러분들의 몫이다. 호러축제와 함께 한여름을 마음껏 즐기시기 바란다.□ 제14회 대구국제호러축제 일정/이곤영기자 lgy1964@kbmaeil.com

2017-07-27

맑은 물, 비옥한 토양이 품은 풍부한 열매의 도시 `달콤한 고령`

1960~70년대 언론사에서 일한 백발의 은퇴 기자들이 기억하는 이름이 하나 있다. 홍승면(1927~1983). 1949년 `합동통신사` 입사로 기자 생활을 시작한 그는 한국일보 편집국장과 동아일보 논설주간으로 필명을 떨친 `전설적 문장가`다.언론계를 떠나 `자유로운 영혼`이 되기 전까지 홍씨는 신문 기사의 새로운 영역을 필마단기(匹馬單騎)로 개척했다.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를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으로 철학과 역사의식이 행간마다 드러나는 명문을 썼던 그가 특히 발군의 재주를 보인 영역이 `먹을거리`에 관한 글이었다.그의 저서 `백미백상`(百味百想·백 가지 맛에서 느낀 백 가지 생각)은 `음식으로 읽어낸 인류의 문화사`라 이름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다.피어난 온갖 꽃들로 아름다운 봄부터 폭염과 폭우가 반복되는 여름에 걸쳐 고령군을 자주 찾았다.고령이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특별한 먹을거리` 취재를 위해서였다.딸기와 감자, 수박과 멜론. 여기에 참외와 비옥한 토양이 만들어낸 고령 옥미(玉米)까지.그것들이 자라는 밭을 둘러보고, 하나하나의 맛을 보면서 기자는 자연스레 홍승면을 떠올렸다.“만약 그가 살아있었다면 얼마나 드라마틱하고 정치(精緻)한 문장으로 고령 특산품의 맛을 소개하고, 그것들에 얽힌 역사적·문화인류학적 이야기를 재밌게 풀어낼 수 있었을까”란 아쉬움 섞인 혼잣말도 했다. 그러나 흘러간 강물을 되돌릴 수 없듯 죽은 자를 살려내는 것은 인간이 가진 능력 밖의 일이다.그렇기에 2017년 여름, 고령 특산물의 소개는 살아남은 오늘날의 기자들이 맡아야 할 몫이다.다가서는 커다란 부담감에 펜을 잡은 손가락이 떨리더라도.우곡 수박·개진 감자·성산 멜론 등현대적 친환경농법으로 재배전국 도시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 ◆ `크고 넉넉한 마음`의 꽃을 피우는 수박고령의 농민들은 노랗게 피어난 수박꽃을 보며 여름이 왔음을 실감한다.수박꽃의 꽃말은 `크고 넉넉한 마음`. 맛은 물론 크기에서도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고령 수박은 군민들의 자랑인 동시에 자부심이다.해마다 여름의 입구로 들어서는 5월 말이 되면 고령의 농가들은 분주해진다.특히 `고령 수박의 주산지`로 불리는 우곡면이 그렇다. 낙동강이 선물한 비옥한 토양과 현대적인 친환경농법을 결합해 재배되는 고령 우곡수박은 `정밀 토양 검사`를 통해 최상의 품질을 지향하고 있다.보통의 수박은 소비자들의 요구에 의해 빨리 수확하는 것에 집중한다.하지만 고령 수박은 1년에 한 번만 심고 한 번만 수확하는 `슬로우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수정을 한 후 45일이면 상품가치를 가지게 되지만, 이를 보름 이상 더 충분히 익혀 당도를 높인 것이 우곡수박이 빼어난 맛을 가지게 되는 비결이다.고령군청 관계자는 “고령 수박이 농산물로는 최초로 KBS 다큐멘터리(`신화창조의 비밀)에 방영된 게 2004년”이라며 “2011년부터는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의 지리적표시제에 등록돼 고령 최고의 농산물 중 하나로 관리되고 있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수박은 칼슘과 비타민A가 풍부해 신장에 좋고, 항암효과가 입증된 시트룰린도 다향 함유하고 있다. ◆ 비타민이 풍부한 감자얼핏 보기에 감자와 비타민C는 관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건 선입견이다.농산물 전문가들은 “감자 두 알만 먹으면 하루에 필요한 비타민C를 충분히 섭취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한국보다 감자를 훨씬 많이 먹는 아일랜드 등의 유럽에선 감자를 “땅 속의 사과”라고 부른다.고령군은 한국에서 손꼽히는 감자 생산지다.고령 감자는 많이 재배되는 지역인 개진면의 이름을 따 `개진 감자`라고도 부른다.주로 생산·수확되는 품종은 `수미`. 식이섬유와 전분 함유량이 높고, 담백한 맛이 특징인 고령 감자는 저장성 또한 뛰어나 장기간 보존이 가능하다.고령농협은 개진면에서 생산되는 감자가 수도권을 포함한 각 지역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품질이 우수한 1기작 감자만 생산하며, 수확 후 벼를 재재하는 답전윤환방식을 통해 연작 장애를 막고 있기에 고품질의 감자가 나올 수 있다.”현재 고령군에서 감자를 재배하는 농가는 약 600여 곳. 314ha의 고령 들판에선 해마다 맛좋은 감자가 생산돼 전국의 대형마트와 각종 가공업체에 공급되고 있다. ◆ 농민들의 땀으로 영글어가는 고령 멜론 우곡면이 수박, 개진면이 감자로 전국에 이름을 알리고 있다면 고령군 성산면은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의 멜론으로 유명하다.전국 파파야 멜론의 60% 이상을 생산하는 성산면은 `하늘의 선물`이라 할 사질토양(砂質土壤·모래가 많이 함유돼 물 빠짐과 통기성이 좋은 흙)이 멜론을 맛있게 익히고 있다.여기에 일조량이 긴 고령의 자연환경도 향기로운 멜론이 자랄 수 있는 좋은 조건이다.고령 멜론의 특징은 껍질에 그물 무늬가 없고 매끄러우며, 타원형의 형태에 얼룩무늬가 있다는 것이다.“비파괴당도 측정기로 공동선별 과정을 거치고, 2kg 단위부터 소포장을 해 신세대 소비자의 취향에 맞추고 있다”는 것이 이와 관련된 고령군청의 설명이다. 멜론은 성인병 예방과 다이어트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은 과일이다. ◆ 누구나 좋아하는 달콤한 맛 딸기세상 대부분의 음식은 호오(好惡)가 갈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딸기는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는 `대중적 인기 과일`임을 부정할 수 없다. 비단 사람들만이 아니다.유럽의 신화에선 여신(女神)도 딸기를 즐기는 것으로 묘사된다. 새콤하고 달콤한 유혹을 떨치기가 어렵기 때문이리라. 가야산 맑은 물이 길러내는 고령 딸기는 벌이 자연수정하는 방식으로 재배된다. 올해 고령군은 400여 농가가 160ha의 땅에 딸기를 키웠다. 그것으로 올린 조수익은 310억 원. 철저한 품질관리를 지속하고 있는 고령군의 딸기는 1990년대부터 일본과 홍콩 등으로 수출됐고, 이제는 그 영역을 태국 등지로 넓혀가고 있다.여기에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농산물을 직접 따서 맛볼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고자 `딸기 수확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어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지난해엔 이 체험 프로그램을 즐기고자 1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고령을 찾았다. “하늘이 내린 땅 고령에서내 손으로 키우는 과실농부들의 가장 큰 행복”“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한 번 먹고나면 자꾸만 찾게 되는 음식이 있다고 하죠? 고령 딸기가 바로 그런 과일입니다.”금천딸기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이철호(54·고령군 개진면 반운리) 씨는 자신이 땀 흘려 길러내는 딸기에 대한 자랑이 대단했다.“우리들의 정성과 더불어 품질관리 등에서 철저하게 규정을 지키는 것이 맛있는 딸기의 생산 비결”이라고 말하는 이철호 이사장의 말에서는 자부심이 묻어났다.그는 “고령의 가장 큰 행사인 대가야체험축제 때면 인근 지역의 가족은 물론 외국인들도 딸기 수확체험장에 넘쳐난다”며 “최근엔 태국으로도 딸기 수출을 시작했는데, 보다 시스템화 된 홍보로 고령 딸기를 널리 알렸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하며 환하게 웃었다.김홍식(63·고령군 우곡면 답곡2리) 씨는 수박농사만 40년을 지어온 자타공인 `수박 박사`다.“올해는 수박 가격이 높아 동네 주민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는 행복한 뉴스를 전한 김씨. “하늘이 내린 좋은 땅 우곡면에서 수박을 키우며 살 수 있다는 게 나의 가장 큰 행복”이라 말하는 김씨는 삶을 달관한 철학자처럼 보였다. 그처럼 한 우물을 파며 생을 살아온 농민이 있는 한 한국의 농촌 현실이 마냥 비관적이지만은 아닐 듯했다.한편 고령군은 수박과 감자, 멜론과 딸기, 참외와 쌀 등 고령을 대표하는 특산물의 판매경로를 확보하기 위해 고령몰(http://www.grmall.co.kr)과 대가야 파머스마켓(054-955-2077)을 운영 중이다.인터넷과 직접 방문을 통해 고령의 진미를 맛볼 수 있으니 참고할만한 유용한 정보다./전병휴·홍성식기자

2017-07-26

포항의 밤이 色 으로 물들다

세계인이 함께하는 대한민국 대표 축제로 거듭나고 있는 제14회 포항국제불빛축제가 7월 26일부터 30일까지 형산강체육공원과 영일대해수욕장 일원에서 열린다.(재)포항문화재단 발족 이후 처음으로 개최되는 이번 축제는 무더운 여름밤을 시원하게 즐길 수 있는 축제로 마련된다. 특히 올해는 지난해보다 하루 늘어난 5일 간 축제가 진행돼 더욱 다양하고 풍성한 축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내일부터 30일까지 5일간 `제14회 포항국제불빛축제` 스페인·미국·한국 참여해 화려한 불꽃쇼 연출연오랑 세오녀 주제 예술불꽃극·거리극 등 볼거리 풍성29~30일 `불빛축제 기념 오픈 배드민턴 대회`도□ 세계유수의 불꽃연출팀 참여포항국제불빛축제는 포항시와 포스코가 시민화합을 목적으로 지난 2004년부터 시작됐다.매회 색다른 볼거리와 세계 각국의 아트불꽃쇼를 국내에서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는 점 등이 호평을 받으며 7년 연속 대한민국 대표 문화관광축제로 선정됐다.지난해에도 약 187만 명이 포항을 방문해 아름다운 불꽃의 향연을 감상했다.이번 축제는 시민이 적극적으로 축제에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됐다.지난 16일부터 모집에 돌입한 시민축제기획단은 단순 자원봉사에 한정됐던 시민의 참여영역을 프로그램 기획에서부터 홍보, 운영까지 전 영역으로 확대해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또 지난 6월 시 승격 68주년 시민의 날 행사에서 첫선을 보이며 관람객들로부터 높은 점수를 얻은 `1천인의 포항시민 대합창`을 전야제 프로그램으로 추가해 축제를 시민참여의 장으로 만들 계획이다.불빛축제의 메인행사인 국제불꽃쇼에는 미국, 스페인, 한국을 대표하는 불꽃연출팀이 참가해 축제의 격을 한층 높인다.`비바! 포항!(Viva! Pohang!) 하늘 꽃 피는 날`이라는 주제로 펼쳐질 메인 불꽃쇼에는, 2014브라질월드컵 개·폐회식 불꽃행사를 공동연출하고 축구팀 FC바르셀로나의 불꽃연출을 담당하는 스페인의 `피로테크니아 이구알(Pirotecnia Igual)`과 2010 하나비 불꽃 월드컵 대상, 2012 슈퍼볼과 시카고 화이트삭스 등 미국 MLB와 NASCAR의 불꽃 연출을 담당하는 100년 전통의 미국 `멜로즈 파이로테크닉스(Melrose Pyrotechnics)`, 국내 유명불꽃축제와 2018 평창동계올림픽 등을 진행하는 한국 최고의 불꽃 연출력을 지닌 `한화`가 참여한다.이들 연출팀은 형산강의 특징을 살린 와이드한 연출과 새롭게 출시한 불꽃제품, 형산강을 일곱빛깔 무지개로 물들일 레인보우 불꽃 등을 활용해 다양한 연출을 보여줄 예정이다.□ 연오랑 세오녀의 감동을 그대로포항문화재단은 이전까지 축제를 주관해왔던 포항시 축제위원회와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번 축제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다.개·폐막 주제공연으로 포항지역의 대표설화인 연오랑 세오녀를 주제로 한 예술 불꽃극 `일월의 빛`을 선보이는 것이다.영일대해수욕장 메인무대에서 열리는 개막 퍼포먼스는 27일 오후 8시 20분부터 40분간, 폐막 퍼포먼스는 30일 오후 8시 20분부터 40분간 개최된다.연오랑과 세오녀가 떠난 후 해와 달이 사라져 칠흑 같은 어둠이 잠식한 신라에 그들이 다시 돌아오며 밝아 오르는 여명의 불꽃을 퍼포먼스로 구성해 선보일 예정이다.포항문화재단은 출범 후 처음으로 포항국제불빛축제를 주관하게 된 만큼 포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관광콘텐츠 제작 준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특히 완성도 높은 공연을 선보이기 위해 `예술불꽃 화랑`팀과 `프로젝트 날다`팀이 협업해 불꽃극을 제작하고 있다.연출을 맡은 예술불꽃 화랑은 2016, 2017 안산거리극페스티벌 개·폐막공연, 하이서울페스티벌 주제공연 등으로 유명한 국내 최정상 공연팀으로 불꽃을 이용해 공연을 창작하는 단체다.불꽃극에서 100t의 대형 크레인을 활용한 대형 공중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프로젝트 날다팀은 건물 외벽을 타는 버티컬 퍼포먼스를 비롯해 공중 퍼포먼스로 유명한 예술 단체로 2018 평창동계올림픽 공연에도 참가할 예정일만큼 명성이 높은 연출팀이다. □ 부대행사도 다양국내 최고의 여름철 휴가지 중 하나로 평가받는 포항을 찾는 피서객들을 위한 다양한 부대행사도 준비돼 있다.우선 26일 전야제에서는 유명 거리극 단체 공식 초청팀과 다양한 장르의 지역 버스킹 동호인 등 총 29개 팀이 함께해 지난해보다 예술적수준이 높아진 포항 불빛버스킹페스티벌 `예술가의 바다`가 열려 성공적인 축제를 기원한다.불빛버스킹페스티벌은 지난 3년간 공모를 통해 시상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했으나 올해는 예술적 수준을 높이고자 공식 초정작을 신설했다.포항문화재단은 부산, 대구 등 버스킹이 활성화 돼 있는 주변 대도시 버스킹팀을 섭외해 축제를 찾는 관람객들에게 수준 높은 거리극을 보여줄 예정이다.27일에는 다양한 특수효과를 감상할 수 있는 EDM파티가 진행된다.최근 20~30대 층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디제잉 파티를 축제 처음과 끝에 넣어 관람객들이 음악으로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 수 있도록 했다.이번 축제에는 물과 빛의 두 가지 컨셉을 각기 다른 DJ와 특수효과로 표현해 파티 분위기를 한 단계 끌어올린다.28일 영일대해수욕장에서는 포항시민 800여 명이 참여하는 불빛퍼레이드 `빛이 그대를 춤추게 하라`가 진행된다.퍼레이드에는 전문 퍼레이드팀을 섭외해 불꽃 수레와 토템을 활용한 아트 퍼레이드를 필두로 공모를 통해 선발된 퍼레이드 광대가 뒤를 이어 LED 빛의 향연이었던 지난해 퍼레이드와 차별화를 두었다.퍼레이드 방식 또한 전통 퍼레이드 방식을 차용하되 2개 구역에서 1분 정도의 퍼포먼스를 펼쳐 흥을 더욱 높인다.이밖에 지역특산물 판매와 20대 파티문화를 접목한 `나이트 피맥(피데기+맥주)파티`, 시민 소망을 LED 풍선에 담아올리는 `소망풍선 띄우기`, 지난해 큰 호응을 얻었던 `퐝퐝! 영일만 물총대전`등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모습으로 관람객들과 만난다. □ 전국 최고 수준 `불빛 스매싱`을 감상해보자 포항국제불빛축제를 기념한 전국 배드민턴 동호인들의 셔틀콕 향연도 함께 펼쳐진다.`2017 포항국제불빛축제 기념 오픈 배드민턴 대회`가 축제기간인 7월 29일부터 30일까지 포스텍체육관 일원에서 개최되는 것이다.포항시가 주최하고 경북매일신문, 국민생활체육 포항시배드민턴연합회가 주관하며 아테미(Atemi)가 협찬하는 이번 대회는 배드민턴의 범국민생활체육 확산을 통한 생활체육 저변확대와 건강하고 명랑한 사회 기풍 조성 등을 위해 매년 포항국제불빛축제기간에 열리고 있다.해마다 배드민턴 동호인들의 참가가 늘고 있으며, 매년 참가 신청이 폭주해 참가자 접수를 조기에 마감하는 등 전국 최고 명품 대회로서의 입지를 확실히 굳히고 있다.이번 대회에는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배드민턴 동호인 1천여개 팀, 2천여 명이 참가해 선의의 경쟁을 펼친다.경기종목은 연령별(20~60대), 급수별(A·B·C·초급·초심) 남·여복식 및 혼합복식로 나눠 진행된다.경기방법은 예선전 리그(25점 랠리포인트)를 통해 본선 진출팀을 가린 후, 토너먼트 방식으로 최종 우승팀을 가린다.개회식은 오는 29일 오전 11시 포스텍체육관에서 열리며, 기념품과 함께 경품추첨을 통해 TV와 배드민턴 라켓 및 가방, 운동복 등 푸짐한 상품도 제공될 예정이다./박동혁기자phil@kbmaeil.com

2017-07-25